2013국제학술대회-내지-최종.cdr

Size: px
Start display at page:

Download "2013국제학술대회-내지-최종.cdr"

Transcription

1

2

3

4

5 목 기조강연 : 중세 동아시아에서의 해양 방어시설 -방어시설의 축조 배경과 성격Backgrounds and characteristics of building the marine defense fortresses of East Asia in the Middle Ages 차 윤용혁 肖彩雅 Coastal Defenses and Japanese Pirates in Qunzhou During Xiao Caiya 일본 중세의 해양방어유적 - 원구방루(元寇防塁)와 해성(海城) 小野正敏 류큐국[琉球国]의 해양방어체제와 시설 The marine defense fortresses of Okinawa s Ryukyu Dynasty 특별발표 : 베트남 19세기 초 대표 해안 방어시설 - 후에 요새를 중심으로 09 Yoon, Yong-hyuk 천주(泉州) 가정시기(嘉靖時期 1522~1566)의 왜환(倭患)과 해양방어 The marine defense fortresses against mongol troops in the Middle Ages Contents Ono Masatoshi 池田榮史 113 Ikeda Yoshifumi Nguyen Tuan Lam 147 이 169 The marine defense fortress of Hue Vietnam in early 19C 여말-선초 해양방어시설 구축의 역사적 배경 영 The historical background of the marine defense fortresses built in the Late Goryeo to Early Joseon Dynasty(麗末鮮初) Yi, Young 전라좌수영 관내 진성의 배치 -사정지적도를 중심으로- 박학순 The space arrangement of the marine defense fortresses in the southern coast of the Joseon Dynasty 부록 : 조선시대 전라수영(朝鮮時代 全羅水營) 191 Park, Hak-sun 223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6 우려가 있었으므로 방어시설 구축은 필수적이었다. 내성, 중성, 외성이라는 대략 3중의 성곽 구축이 이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이는 개경의 방어 체계를 옮긴 것인데, 동시에 해안을 둘러 외부로부터의 상륙과 침입을 방어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1270년 고려정부는 강화도에서의 항전을 포기하고 개경으로 환도하였지만, 잔여 항몽세 력인 삼별초는 이 같은 정부의 결정에 반발하여 서남단의 진도(珍島)로 거점을 옮기면서 고려 에 맞서는 새 정부를 구성하였다.14 이때 해변을 포함하여 성을 구축한 용장산성이 진도의 거 점이다. 진도에 들어온 이들은 다시 제주도를 후방기지로 확보하고 1271년 진도에 이은 새 거점으로서 제주도를 활용하였다. 이에 의하여 내외 토축으로 지은 항파두성과, 돌로 해안을 둘러친 환해장성 이 제주도에 이루어졌다 년 몽골의 공격으로 제주도가 함락되고, 바로 이어 1274년 몽골은 고려군을 앞세워 일본에 침입하였다. 문영의 역(文永의 役), 혹 은 갑술의 역 이라는 사건이다. 전투는 짧았지만, 대륙 세력의 내습이라는 이 미증유의 사건 이 가마쿠라 막부의 일본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가마쿠라 막부는 몽골의 재침 위협을 대비하였다. 상륙하는 적을 저지하기 위하여 해변에 구축한 차단성(遮斷城)이 원구방루[石築地] 이다. 원구방루(元寇防壘) 는 1276년 3월부터 8월까지 약 반 년 간 이마즈[今津]에서 카시이[香椎]에 이르는 하카타만[博多灣] 연안 약 20km에 걸쳐 구축한 방어시설이다. 고고학적 연구에 있어서는 일찍부터 이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진행되었고 7지구(10지점)에 걸치는 잔존 유적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16 그 리고 이 방루 는 1281년에 2차 침입 여몽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석축지의 방어선 때문에 연합군은 연안에 직접 상륙하는 데 실패하였고, 뒤늦게 도착한 구 남 송군과 다카시마[鷹島]로 일단 후퇴하여 있던 상태에서 태풍을 만나 궤멸되고 말았던 것이 다.17 이점에서 원구방루(元寇防壘) 의 구축은 대륙세력의 침입을 막아 내는 데 크게 기여하 였던 방어시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해안을 따라 석축 방어시설을 길게 구축한 것은, 제주도에서의 전례가 있다. 제주도의 환해장성(環海長城) 이 그것이다. 1270년 경 시공되 14) 동아시아 해양사의 관점에서 삼별초에 대하여 접근한 근년의 연구로서 강봉룡의 논고(2011, 몽골의 침략과 고려 무인정권 및 삼 별초의 도서해양전략, 동양사학연구 115, 동양사학회)가 유의된다. 15) 근년 삼별초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괄목할 만한 점이 있다. 이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尹龍爀, 韓國における最近三別抄遺 跡の調査と硏究, 韓國硏究センター年報, 九州大學 韓國硏究センター참고. 16) 일본에 있어서 근년 원구방루 의 연구 현황에 대한 소개는 윤용혁, 2013, 일본에 있어서 元寇 연구의 현황( ), 도서문화 41,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참고. 17) 근년 다카시마[鷹島] 해저 유적의 조사에 대한 개요는 池田榮史, 2012, 長崎縣松浦市鷹島海底遺跡の發掘調査, 戰跡からみ たモンゴル襲來, 九州史學會, 36-41쪽 참고.

17 17 어 1273년까지 기능하였다. 1273년 제주도를 함락하였던 여몽군은 1274년 큐슈 후쿠오카 상륙전의 주력이 되어 있었다. 이 같은 상응점 때문에, 석축의 방루를 구축하여 적을 저지한 다는 원구방루의 착상(着想)이 제주도의 환해장성과 관련성이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필자는 피력한 바 있다.18 아이디어의 공유에 대한 다양한 루트의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해안 거점 도시의 방어와 군사적 필요에 의하여 건설한 방어시설의 역사는 훨씬 오랜 역 사를 가지고 있다. 중국 산동(山東)의 봉래(蓬萊, 登州) 수성(水城)이 그 예가 된다. 산동반도 (山東半島)는 고대 이래 동아시아의 주요 통로로서, 한반도 혹은 일본과의 대외교류 및 군사 적 필요의 주요 관문이 되었던 곳이다. 신라의 고승과 학자들이 당을 출입한 것도 모두 이 산 동 반도를 통해서의 일이었다 년(당 정관 8) 봉래진(蓬萊鎭)을 처음 설치하고, 707년(당 神龍 3) 등주(登州)의 치소가 된다. 1042년(북송 慶歷 2) 해로를 이용한 거란의 남침을 막기 위하여 해구(海口)에 말발굽[馬蹄] 형태의 토축을 쌓고 도어수채(刀魚水寨, 刀魚寨) 20라는 방어 요새를 구축하였다. 이 시기 요(遼) 금(金)의 침입 위협으로 경제적 교류보다는 군사적 성격으로 전환되었다. 1376년 등주(登州)는 1주 7현의 영현(領縣)이 딸린 부(府)로 승격되었 는데, 이 무렵 방어 시설을 강화하여 성곽을 수축하고 뒤이어 그 시설을 보강함으로써 해항 (海港)과 육지를 묶어, 진가공(進可攻) 퇴가수(退可守) 의 군사적 거점으로 발전하였다.21 봉래(蓬萊) 수성(水城)이 근년 특히 한국에서 주목된 것은 2005년 수성(水城) 안에서 발견 된 2척의 고려 고선(古船, 봉래 3 4호선) 때문이었다. 명(明)초기의 선박(봉래 2호)과 함께 발견된 이 배는 특히 3호선의 선상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고려시대 도자기류가 출토함으 로써 해외에서 발견된 고려 선박 으로 주목을 끌었다. 발굴보고서에서는 이들 선박의 국적 에 대한 문제는 논의되어 있지 않으나, 그 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열린 신안선 발굴 30주년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봉래 3 4호선을 고려고선(高麗古船) 으로 지칭하여 발표하 였다.22 편년에 대해서는 김성범이 고려 말 조선 초 로 규정하였는데, 출토유물 중 청자 접시 의 편년을 감안한 것이었다.23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에 걸치는 이 시기는 왜구의 피해가 18) 윤용혁, 2009, 삼별초와 여일관계, 몽골의 고려.일본침공과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187쪽 19) 신형식 외, 2004, 중국 동남연해지역의 신라유적 조사,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53-76쪽. 20) 도어채(刀魚寨) 라는 것은 당시 송 수군의 전선(戰船) 모양이 도어(刀魚)와 같은 형태라는 것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山東省文 物考古硏究所 外, 2006, 蓬萊古船, 文物出版社, 8쪽) 21) 山東省文物考古硏究所 外, 2006, 蓬萊古船, 文物出版社, 3-9쪽. 22) 袁曉春, 2006, 中國蓬萊水城古船發掘與成果, 14세기 아시아의 해상교역과 신안해저유물 (신안선발굴 30주년 기념 국제학술 회의 자료집)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쪽 참조. 봉래 3 4호선이 고려 선박으로 규정된 것은 김성범과 김병근의 견해(2006, 韓國安佐島船和中國蓬萊第3號船的比較硏究, 文集 )가 반영된 것이었다. 23) 김성범, 2009, 중국 봉래수성 출토 고려선, 한국중세사연구 27, 쪽.

18

19

20

21

22

23

24 24 의 조건에 대한 문제이다. 이 시기 타이완은 국가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서 침입할 만 한 이유가 불분명하고, 더욱이 몽골군을 맞아 싸울만한 조직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48 이에 비 하여 류큐왕국의 오키나와는 해양의 교류 거점의 확보 및 일본을 압박하는 효과도 있었기 때 문에 원정을 검토할 만한 대상으로서 보다 적합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보는 것이다. 오키나와는 13세기 이후 대형 구스크[城]가 조영되기 시작하는데, 포첨구스크[浦添城]에 근거한 영조왕권(英祖王權, )의 성립이 그 시초로 인식되고 있다.49 14세기에는 오키나와 각지에 지역에 거점을 둔 정치세력이 대두하면서 중산, 남산, 북산의 삼산시대(三山 時代)가 전개된다. 중산왕국(中山王國)은 찰도왕(察都王, ) 때인 1389년(창왕 1) 고려에 사신을 보내 공식적 교류의 시초를 열었다. 고려도 이에 대해 답사(答使)를 파견함으 로써 류큐왕국과 조선왕조는 본격적 교류의 시대를 맞게 된다. 이 시기 창궐한 왜구는 오키나 와에도 영향을 미쳤고, 이에 의하여 발생한 피로인(被虜人) 문제는 조선왕조와 류큐왕국의 관 계를 보다 밀접하게 만드는 한 가지 요인이 되었다 년 남산(南山)의 쇼하시[尙巴志]에 의하여 중산 왕통은 무너졌고, 이로부터 이른바 상씨(尙氏) 왕조가 개시된다. 우라소에[浦添] 시대는 종식되고 슈리성(首里城)이 개발되어 슈 리성은 1429년부터 1879년까지 450년 간 류큐왕국의 왕성이 되었다.51 왕궁이 있는 슈리성 의 외항인 나하[那覇]항에는 오모노구스크[御物城]라는 해변성이 구축되어 있었다. 무역과 관 련한 저장용 창고 및 방어 요새의 성격을 갖는 것인데, 주변 해저에서는 이미 1908년에 조선 의 도자기 유물이 다수 수습된 바 있다 세기 오키나와 역사 및 방어시설 관련의 중요한 문제는 대형 구스크 의 출현에 대 한 문제이다. 오키나와 구스크[城]의 실수(實數)는 250개소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그 본질에 대해서는 성역(聖域, 拜所)설과 방어집락 설로 나누어져 있다.53 오키나와에 있어서 대형 구스 크의 출현이 13 4세기에서 비롯되고 그 변화가 매우 급격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구스크시대 로의 돌입 계기는 외부로부터의 충격 혹은 도래(渡來)의 가능성이 역시 크다고 생각한다. 이 48) 타이완은 16세기 유럽인에 의하여 발견되기 전까지도 이렇다 할 정치체나 문명이 존재하지 않았다. 周婉窈, 2007, 圖說 臺灣の 歷史, 平凡社, 27-41쪽 참조. 49) 安里 進, 2006, 琉球の王權とグスク, 山川出版社. 50) 이훈, 2002, 인적 교류를 통해서 본 조선 유구관계, 조선과 유구, 아르케. 51) 슈리(首里) 의 지명 어원에 대해서는 조선의 수도 서울(한양) 에서 옮겨온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多和田眞淳, 1980, 古都首 里と古圖, 古稀記念 多和田眞淳選集, 古稀記念選集刊行會, 222쪽. 52) 東恩納寬淳, 1941, 黎明期의 海外交通史, 83쪽. 53) 安里 進, 1998, 考古學におけるグスク論爭の整理と問題點, グスク 共同體 村, 榕樹書林.

25 25 러한 점을 고려하면 13세기 후반 동아시아에 있어서 몽골세계의 전반적 확대와 같은 외부로 부터의 충격이 오키나와에 있어서의 대형구스크의 출현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구스크의 발굴 조사 보고에 의하면 중국의 자기류가 보편적으로 확인(確認)된다. 수준 높 은 기술이 동원된 축성 기술의 원류에 대해서는 중국과 한반도 기원설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 지고 있지만, 구체적 결론에 이르고 있지 못하다.54 이와 관련, 최근 국내에서는 삼별초와 같 은 고려로부터의 집단 이동을 지목하는 논의가 제기된 바 있다 년 고려에서의 삼별초 항몽세력의 붕괴, 1276년 몽골에 의한 남송의 수도 임안(臨安, 현 항주)의 함락과 같은 대륙 의 정세 변화가 오키나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구명해 보아야 할 과 제이다. 그러나 이 같은 몽골 세계의 확대가 오키나와 제도(諸島)에서의 정치 세력 혹은 국가 발생의 기폭제가 되고, 국가 간의 상쟁이 다시 대형 방어시설의 성립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즉 13 4세기의 대형구스크 출현에는 오키나와 내부의 정치적 여건만이 아니라 이 시기 동아 시아 대외 정세의 변화가 한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56 Ⅵ. 맺는말 동아시아에 있어서 13 14세기는 전란의 시대였다. 13세기는 몽골 세계의 확대에 의하여 전란은 대륙을 넘어 해양으로 확산되었으며, 14세기 이후에는 일본 열도에서 발생한 왜구가 동아시아 해역 일대를 다시 소요와 혼돈에 몰아넣었다. 이러한 침략의 파도를 막기 위하여 각 지역에서 15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많은 해안 방어시설들이 축성되었다. 마침 이 시기(14세기 후반)에 원과 명, 고려와 조선, 가마쿠라와 무로마치 등 동아시아 각국의 정 권 교체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짐으로써 혼돈의 폭과 파장은 적지 않았다. 몽골의 군사적 압박으로 고려에서는 지금까지 주목되지 않았던 연안 도서의 중요성이 부각 되었으며, 특히 고려는 몽골에 저항하는 주요 방편이 국가의 중심을 섬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54) 嵩元政秀, 1980, 中 近世考古學의 動向 - グスク(城), 考古學ジャーナル 182, 39-41쪽. 55) 임영진, 2012, 오키나와 구스쿠의 축조 배경 - 삼별초 세력의 이주 관련성, 호남문화연구 52, 전남대 호남문화연구원. 그러나 이것이 구체화되기 위해서는 앞으로 보다 적극적인 자료의 뒷받침이 필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56) 오키나와가 포함된 것은 아니지만 중세 동남아시아와 고려, 조선왕조의 교류에 대하여는 조흥국의 논고(1999, 근대 이전 한국과 동남아시아간 접촉에 대한 역사적 고찰, 국제 지역연구 8-1, 서울대 국제학연구소.)가 있다.

26

27

28

29

30

31

32 32

33 33 천주(泉州) 가정시기(嘉靖時期 1522~1566)의 왜환(倭患)과 해양방어 肖 彩 雅 泉州海外交通史博物馆 Ⅰ. 명나라 천주 해양방어시설의 기본구도 Ⅱ. 가정시기 천주(泉州)의 왜환(倭患) Ⅲ. 천주의 해양방어체제의 보완과 재건 Ⅳ. 결어 명나라의 해양방어체제는 하나의 위소(衛所)를 중심으로 보(堡), 채(寨), 돈후(墩堠), 봉수 (烽燧), 순검사(巡檢司) 등이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연동 방어체제로 구성되어 완벽하고 체계 적이고 층차가 분명하였다. 그 이념과 초반의 구조는 상대적으로 완벽했지만 결국 운영과정 에서 결함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정시기(嘉靖時期) 왜의 끊임없는 도발로 인해 명나라 의 해양방어체제는 점차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당국은 왜환을 막는 동시에 해안방어 구조를 재정비하여 천주[泉州]의 해양방어체제를 보완, 재건하였다. 명나라 해양방어체제의 축소판 으로 일컬어지는 천주의 해양방어체제의 정비 과정을 통해 명나라 전체의 해양방어 전략이 외양(外洋)공격형에서 연안 수비형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34 34 Ⅰ. 명나라 천주 해양방어시설의 기본구도 위(衛), 소(所), 보(堡), 채(寨), 돈후(墩堠), 봉수(烽燧), 순검사(巡檢司)로 이루어진 연동 체제는 완벽하고 체계적이고 층차가 분명하였다. 진강현지 도광판(晉江縣志 道光版) 의 해방지(海防志)에 따르면 홍무 20년, 강하[江 下]의 제후 주덕흥(周德興)을 복건으로 보냈다. 3정1호(三丁一戶)1 로 해안을 지키는 술병(戌 兵)을 뽑아 왜를 막았으며 군사 요충지에 위소(衛所)를 이전하였다. 당시 천주에 위(衛) 하나 를 설치하고 영녕(永寧)이라 불렀고 수어소(守禦所) 다섯개를 설치하고 각각 복전(福田), 숭무 (崇武), 중좌(中左), 금문(金門), 고포(高浦)라 불렀다. 순검사(巡檢司)는 19개였고, 같은 해에 오서(浯嶼) 수채(水寨)를 설치하였다. 홍무 21년에는 탕화(湯和)에게 명하여 복건성과 광동성 해안가를 순시하고 성을 쌓고 군사를 늘리도록 하였다. 영녕지휘사(永寧指揮使)와 숭무, 복 전, 금문, 고포 천호소를 신설하였다. 2 (<표 1> 명나라 천주 해양방어표, <표 2> 천주 순검사표, <표 3> 명나라 천주 군사 주둔표 및 첨부 이미지1, 2 참조) <표 1> 천주(泉州) 해양방어표 유형 명칭 설치시기 위치 부연위 (府沿卫) 천주위 (泉州卫) 홍무원년 (1368) 천주부 성내 연해위 (沿海衛) 영녕위 (永寧衛) 홍무 20년 (1387) 또는 홍무 27년 30도(都)에 설치 개 요 개수 한채 (悍寨)21 성곽은 둘레 875장(丈)(만력부지에는 895장으로 기록됨), 터의 넓이 1장 5척, 높이 2장 1척이었다. 와포(窩鋪)는 32개(만력부 지에는 31개로 기록됨)이며 성문은 다섯 개로 남쪽은 금오(金鰲), 북쪽은 옥천(玉泉), 동쪽은 해녕(海寧)과 동영(東瀛), 서쪽은 영청 (永淸)이라 불렀고 그 위에 누(樓)를 지었다. 성 밖에는 호(濠)를 팠는데 넓이는 1장 6척으로 중간중간에 큰 돌을 끼워 넣었으며 어떤 곳은 깊고 어떤 곳은 얕았다. 영락(永樂) 15년 성 둘레를 세 척 넓히고 대문에는 월성(月城)을 신축했다. 정통(正統) 8년 에는 각 대문마다 적대(敵臺)를 증설했다. 한채152 * 지명은 [ ]로, 한문 설명은 ( )로 표기함-역자 주 1) 가문에 성인 남자 세 명이 있으면 그 중 한 명을 현역 군인으로 입역시키는 제도-역자 주 2) 천주부지 권 24 군제(軍制)의 기록에 의하면 홍무 21년에 강하의 후 주덕흥을 해안가로 파견하여 순검사 18개를 설치하고 또 대 단 무태산 밖에 수채 하나를 만들었다가 경태(景泰) 3년에 하문 중좌소(廈門 中左所)로 이전하였다. 가경 말에 왜의 침략으로 군사 가 유명무실해지자 마을의 향용(鄕勇)들을 병사로 훈련시켰다.

35 35 유형 명칭 설치시기 위치 개 요 천호소 수어 (千戶所 守禦) 숭무소 [崇武所] 홍무 20년 (1387) 혜안[惠安]현 동쪽 27도 성곽은 둘레 737장, 터의 넓이 1장 3척, 높이 2장 1척, 와포 16개(만력부지에는 36개)이며 성문 제개 위에 누를 지었다. 영락 15년에 성곽을 4척 높이고 동과 서에 월대를 증축했다. 한채1 봉수 223 천호소 수어 (千戶所 守禦) 복전소 [福全所] 홍무 20년 (1387) 진강[晉江] 15 도 성곽은 둘레 650장, 터의 넓이 1장 3척, 높이 2장 1척이었다. 와 포는 16개이고 성문 네 개 위에 누를 지었다. 영락 15년에 성곽 을 4척 높이고 동, 서, 북 세 방향으로 월성을 증설했다. 정통 8년 에 적루 4개를 증축했다. 채1, 봉수104 천호소 수어 (千戶所 守禦) 고포소 (高浦所) 성곽은 둘레 432장 여장(女檣) 1장 7척 만력부지-둘레 450장, 높이 1장 7척), 터의 넓이 1장, 와포 16개, 성문 4개였다. 영락 15년에 성의 높의를 3척 더 쌓았고 월성을 신축했으며 정통 8년 에는 적대를 신설하였다. 한채3, 봉수55 홍무 20년 성곽은 둘레 630장, 터의 넓이 1장, 여장(女檣)2장 5척(부지에는 높이 1장 7척으로 기록돼있다), 와포 36개였다. 성곽 밖은 호로 둘러싸있는데 호의 넓이와 깊이는 모두 1장 남짓하였다. 동, 서, 동안 오주서 남, 북 네 개의 성문 위에 누를 지었다. 영락 15년에 성의 곽의 [同安浯洲嶼] 높이를 3척 증축했고 서, 북, 남쪽에 월성 3개를 신축하였다. 정통 8년에는 적루 4개를 증축하였다. 가정 37년에 화재로 타버렸다. 강희 동안현지에는 27년으로 기록돼 있다. 한채8, 봉수66 홍무 27년 동안 가화서 [同安嘉禾嶼] 둘레 425장 9척 여장 1장 9척, 넓이 8척 5촌(만력부지에는 둘 레 425장, 넓이 9척, 높이 1장 9척이라고 기록돼 있다), 와포 22개, 타자(垜子) 496개가 있었다. 성문은 네 개로 남문은 흡덕 (洽德), 동 문은 계명(啓明), 서문은 회음(懷音)이라 불렀으며 그 위에 누를 지었다. 영락 15년에 3척 증축했고 월성을 신축하였으 며 정통 8년에 적대 4개를 증설하였다. 한채2, 봉수87 21년 본래는 대단[大 担] 남쪽의 태 무산[太武山]에 설치하였으나 나중에 가화서 [嘉禾嶼]로 옮 기었다. 바다와 70리 떨어져있 었다. 천호소 수어 (千戶所 守禦) 천호소 수어 (千戶所 守禦) 水寨 금문소 (金门所) 중좌소 [中左所] 오서 [浯嶼] 동안[同安]현 홍무 24년 서남 14도 홍무 23년 안인리 (만력부지) [安仁里] 대단[大担] 남쪽의 태무산[太武山]에 수채(水寨) 하나를 축조했다. 태경(泰景) 3년에 하문 중좌소[中左所]로 옮겼다.(천주부지 기록) 정통 초에 시랑(侍郞) 초굉(焦宏)이 바다에 홀로 떠있는 것을 안타 까이 여기어 봉화 수채를 송산(松山)으로, 남일(南日) 수채를 길료 (吉了)로, 오서 수채를 가화(嘉禾)로 옮겼지만 이름은 옛 명칭을 써왔다. 만력 30년에 수채를 진강[晉江] 석호[石湖]로 옮겼다. 개수 매년 영녕[永 寧]과 장주[漳 州]의 군사가 번갈아가며 이 곳을 지켰다.영 녕위: 관(官)26, 기군(旗 軍) 2242, 장주위: 관(官)12, 기군 (旗軍) 656 주: 위의 표는 천주부지(泉州府志) 만력(萬曆), 건륭판, 진강현지(晉江縣志) 도광판(道光版), 남안현지(南安縣志) 민국 판, 동안현지(同安縣志) (민국판, 안계현지(安溪縣志) 가정, 건륭판), 금문현지(金門縣志) 광서판, 하문지(厦門 志) 도광판, 영춘현지(永春縣志) 건륭판, 노강지(鷺江志), 팔민통지(八閩通志), 숭무소성지(崇武所城志), 가정 동남평왜통록(嘉靖東南平倭通錄), 주해도편(籌海圖編) 등 문헌을 통해 교정 후 작성함. 1. 혜안[惠安]현 북쪽 12도에 설치. 백수채(白水寨)와 동갱채(東坑寨)이다. 2. 진강 동남쪽 20도, 21도에 설치. 오산채(吳山寨), 중채(中寨), 갱미채(坑尾寨), 사제채(沙堤寨), 신채(新寨), 미채(尾寨), 고운채(古雲寨), 사포채(沙浦 寨), 창후채(倉後寨), 동점채(東店寨), 용파채(龍婆寨), 호변채(湖邊寨), 동포채(東浦寨), 심노채(深蘆寨), 용미채(龍尾寨) 3. 한채는 진강[晉江]현 동남쪽 26도 청산[靑山]에 설치하고 봉수는 모두 혜안[惠安]에 설치. 해두(海頭), 하두(下頭), 후황(後黃), 봉미(峯尾), 대산(大 山), 고산(高山), 소산(蕭山), 노두(爐頭), 하주(下朱), 후임(後任), 백사(白沙), 백기(白崎), 가산(柯山), 랄굴(獭窟), 대작(大岞), 고뢰(古雷), 적산(赤 山), 정태(程埭), 소작(小岞), 첨산(尖山), 청산(靑山), 마두(馬頭). 4. 한채는 진강 남쪽 10도 반경(潘徑)에 설치하고, 봉수는 전부 진강[晉江]에 설치하였다. 안평(安平), 갱산(坑山), 동문외(東門外), 양하(洋下), 진갱(陳 坑), 석곤(石悃), 반경(潘徑), 애포(隘鋪), 석두(石頭), 소하(蕭下) 5. 한채는 홍무 23년에 동안[同安]현에 설치하였는데 고포채(高浦寨), 대원당채(大員堂寨), 마란채(馬銮寨)등이 있었다. 봉수도 모두 동안에 설치하 였는데 각각 하기(下崎), 동관심(東關潯), 정니(亭泥), 유산(劉山), 소하(蕭下)등이 있다. 6. 한채는 동안[同安]현에 설치, 유오점채(劉五店寨), 오두채(澳頭寨), 우령채(牛嶺寨), 예림채(穢林寨), 구산채(甌山寨), 홍산채(洪山寨), 서산채(西 山寨), 천보채(天寶寨) 등이 있었고 봉수 6개는 석정(石井), 계동(溪東), 가내(街內), 하오(下吳)등 남안[南安] 4곳과 백엽두(白䈎頭), 엽료(䈎了) 등 동안[同安] 2곳이었다. 7. 한채는 동안[同安]현 서남쪽 22도에 설치, 동오채(東澳寨)와 오통채(伍通寨)였으며 봉수는 모두 동안[同安]현 서남쪽에 설치하였고 하문(廈門), 고 포(高浦), 경산(徑山), 동도(東渡), 하미(下尾), 유초(劉礁), 정상(井上), 용연(龍淵) 등이 있었다.

36

37

38

39

40 40 <그림 2-1> 출처: 주해도편(籌海圖編), 권 14, 명 정약증(鄭若曾) 저 <그림 2-2> 출처: 주해도편(籌海圖編), 권 14, 명 정약증(鄭若曾) 저 <그림 2-3> 출처: 주해도편(籌海圖編), 권 14, 명 정약증(鄭若曾) 저

41 41 다시 말해 명나라 때 천주에는 위(衛) 2개, 수어 천호소(守禦千戶所) 5개, 순검사(巡檢司) 19개, 한채(悍寨) 32개, 봉후(烽堠) 45개가 있었으며 기병(旗兵) 18, 911명, 궁병 1,650명, 수채병 2,500명으로 병력이 상당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천주 위소의 구축 연혁은 천주 해양 방어체제의 형성과 발전을 잘 보여주는 이정표이다. 이로써 위소가 주가 되어, 수채, 순검사, 돈대(墩臺) 등이 보조적 역할을 하는 해양방어 체제가 만들어졌다. 위소와 순사 (巡司)는 육로 에서, 수채(水寨)는 바다에서 적을 막았으며 해안의 봉수와 돈대는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어 완벽하고 체계적이며 층차가 분명한 수륙(水陸)방어체제를 구성하였다. 만약 이러한 시설이 제 역할을 충분히 발휘하였다면 왜를 제어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방어시설의 운영과 정에서 후방보급이 보장이 되지 못하여 군향(軍餉)이 늘 부족했고 위소(衛所) 관리의 부패와 병사가 도망가는 일 등이 빈번히 발생하여 노후된 위소 (衛所), 돈후(墩堠), 봉수(烽燧) 시설 이 파괴되어도 보수공사가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천주의 해양방어시스템에 허 점이 생기고 연동시스템이 본연의 역할을 발휘할 수 없어 결국은 유명무실해지게 되었다. <표 3>의 병사 수량의 급격한 감소가 바로 천주의 방어시스템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예이다. 또한 왜가 천주로의 대량 유입됨으로 하여 해양방어체제는 거의 와해되었다. 그 렇다면 가경시기 천주의 왜환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아래 부분에서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Ⅱ. 가정시기 천주(泉州)의 왜환(倭患) 천군[泉郡]의 왜변(倭變)은 홍무(洪武)3년(1370년)에 시작되어 가정 42년(1563년) 척계 광(戚繼光)이 선유[仙遊]에서, 유대유(俞大猷)가 조주[潮州]에서 왜를 격파하고 장기봉(張奇 峰)이 몇 해에 거쳐 잔여세력을 숙청하면서 전멸되었다. 3 가정 시기의 왜환에 대해 천주부 지(泉州府志), 진강현지(晋江縣志), 남안현지(南安縣志), 영춘현지(永春縣志), 덕화 현지(德化縣志), 안계현지(安溪縣志), 동안현지(同安縣志) 등 천주 각 현의 현지와 지방 문집, 필기에는 관련 기록이 남아있다.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표 4> 가정 시기 천주 [泉州] 왜환 현황 참조) 3) 남안현지(南安縣志) 권 49, 잡지 3, 기병(紀兵), 민국판, 대희주(戴喜朱) 편찬

42

43

44

45

46 46 위의 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가정 33년에서 45년까지 십여 년 동안 덕화현[德化縣] 한 곳 을 제외하고 천주부의 모든 지역은 왜의 침략을 당했다. 특히 해안지역인 진강[晉江], 동안[同 安], 혜안[惠安], 남안[南安] 등 네개 현은 왜가 침범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가정 37년부 터 41년, 5년 사이 천주 각 지역에서는 한 달에 한번 꼴로 병력을 동원하여 왜를 막는 등 왜와 싸우는 일에 목숨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짧은 십여 년 동안 천주 한 곳만 봐도 왜가 그토록 창궐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토록 큰 중국이 어찌하여 한개 현에도 못 미치는 왜에게 그토록 시달렸을까? 가장 큰 이유는 우리 백성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에는 돈 을 받고 왜를 도와준 자, 왜가 두려워 왜에게 타협한 자, 나라에서 기아와 역병에서 백성을 구 휼하지 못하자 왜의 돈을 받고 심지어 끄나풀 노릇을 한 자들이 있었다. 당시 왜의 수는 30만이 나 되었고 그 횡포가 4~5년간 이어졌다. 따지고 보면 그 중 2~3할이 왜였고 6~7할은 왜에게 굴복한 자들이었다. 4 명나라 조항(趙恒)이 이미 우리에게 답을 제시해 주었다. <표 4> 가정 시기 천주[泉州] 왜환 현황에서 보이듯 천주의 해양방어시설은 가정 시기 왜 의 침략이 창궐하던 때에 와서는 이미 유명무실해졌다. 1. 왜가 천주를 침략할 때 상륙지로 주로 이용했던 지점이 바로 방어시설이나 위소(衛 所)의 소재지 혹은 돈대(墩臺), 봉수(烽燧), 한채(悍寨)가 설치되어있는 곳이었다. 이는 당시 해양방어시설이 제역할을 하지 못하였고 위소와 봉후(烽堠) 등 시설이 유명무실 하였음을 보 여준다. 천주[泉州]의 해양방어시설은 새로운 구축이 필요했다. 2. 오서 수채(浯嶼 水寨)의 중좌소(中左所, 지금의 하문[廈門]항)로의 이전은 해양방어체 계가 외적의 침입을 막는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잃게 하였다. 오서 수채는 원래 대단(大担) 태 무산(太武山) 밖에 설치되어 대단섬과 소단섬 두 섬의 요충지에 있어 해문(海門)과 월항(月 港) 두 지역의 첩자를 제거하고 복주[福州]의 봉화[烽火] 수채, 소정[小埕] 수채, 흥화[興化]의 남일(南日)수채, 장주[漳州]의 동산(銅山) 수채와 어우러져 적을 막았었다. 하지만 이러한 역 할은 이미 유명무실해졌다. 오서[浯嶼]에서 수채를 철수함으로써 오히려 이 섬의 지리적 환경 이 적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원래의 군사요충지가 왜의 집결지로 전락되어 왜의 끊임없는 침 략을 받게 되었다.이는 천주 해양방어체계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시기에 다른 곳 의 수채도 대부분 내륙지역으로 이전하였다. 수채의 내륙으로의 이동은 명나라 해양방어 이 4) 천주부지(泉州府志) (건륭판), 권 73, 기병(紀兵), 조항평왜기략(趙恒平倭記略)

47 47 념의 변화를 말해준다. 이때로부터 명나라는 외양에서 적을 막던 적극적인 전략에서 해안에 서 적을 방어하는 전략으로 바뀌어 전반적인 해양방어체제가 보수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3. 위소(衛所)제도와 더불어 군사 둔전제를 실시하였다. 군인 가족은 나라로부터 땅, 종 자, 소 등을 받아 자급자족을 하도록 하였다. 나라로서는 막대한 군사비용과 물자를 아낄 수 있었다. 명태조 주원장은 경사(京師)에 군사 100만 명이 있어도 백성의 쌀 한 톨 먹지 않는 다 고 자랑스러워하였다. 둔전제의 실시와 더불어 황무지가 개간되었다. 군사 둔전제는 명나 라 위소제도의 전형적인 특징이었으며 위소제도가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위 소제도는 인력과 물자를 최대한 동원하였지만 그 폐단이 날이 갈수록 드러나기 시작하여 군 사 식량부족 문제, 군관이 토지를 대량으로 소유하거나 병사가 도망가는 등 일련의 문제를 야 기시켰다. 이로 말미암아 위소(衛所)의 병력이 현저히 줄어들고 전투력이 약해졌다. 백성이 왜의 앞잡이가 되어 왜가 천주 변경에서 노략질하는 것은 식은죽 먹기와 같았다. 4. 돈후(墩堠), 봉수(烽燧)와 같은 전방 관측시설에 대한 보수가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았 다. 돈대에서 떨어진 돌을 가져다 다른 용도로 사용하였다. 라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 다시피 법이 엄격하지 못하여 해양방어시설이 늘 파괴의 위험에 직면해있었다. 전망대로 사 용한다. 적의 배가 쳐들어오기 전에 백성들이 먼저 감지하고 경계하고 피함으로써 태연 하게 적을 막고 힘을 합쳐 적과 싸운다. 는 역할을 못하게 된 것이다. 가정 시기 천주의 왜환이 가장 심각했던 상황에서 천주의 지방관리와 정부는 해양방어시 설의 구축에 대해 다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Ⅲ. 천주의 해양방어체제의 보완과 재건 가정시기, 명나라의 전반적인 해양방어시스템에 허점이 드러나 왜의 침략에 직면하였다. 명나라 정부는 해양방어에 대한 연구의 일환으로 주해도편(籌海圖編), 주해중편(籌海重 編), 가정동남평왜통록(嘉靖東南平倭通錄), 비왜기(備倭記) 와 같은 책을 집대성하였다. 책에는 왜를 막기 위해서는 왜의 근원지를 파악하고 역적을 제거하고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 고 향병(鄕兵) 훈련을 강화하며 징병을 신중히 하고 바다를 막고 해안을 공고히 하며 정찰을 자주 하고 성을 쌓고 보갑제를 실시하는 등 전략이 자세히 나와있다. 이러한 전략은 그 후 복 건 도어사(都御使), 순무와 천주의 지방관리들의 해양방어 지침이 되었으며 그들은 이 내용에 근거하여 해양방어체제를 보완 재건하였다. 위로는 중앙정부의 계획이 있었고 아래로는 지

48 48 방 관리들의 집행과 백성들의 지원이 있어 천주의 해양방어체제는 새롭게 조정되었다. 1. 민병과 객병(客兵)을 뽑고, 향병과 어병(漁兵)을 연합, 참장(參將) 및 파총(把摠)을 충원하고 돈대(봉수), 수채를 복구하였다. 가정 37년 도어사(都御使) 왕순(王詢)이 명을 내려 민병을 증원하여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 천주의 민병 수는 846명으로 기병(機兵)과 함께 훈련을 받았다. 그 해 왕순은 또 복건(福建)의 수군(水軍)을 3갈래로 나누어 조안[詔安], 남일[南日], 오서[浯嶼], 동산[銅山], 현종[玄鐘]등 지에 주둔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41년, 총병 유대유가 돈대를 정비하여 적을 관측하는 용도 로 사용할 것을 청하였다. 가정 42년, 각 수채의 지휘를 흠이파총(欽伊把摠)으로 명하고 위마 다 지휘 한 명을 두고 병사를 지휘하게 하였다. 흠이파총은 도지휘의 명을 받아 움직이게 하 였다. 2. 성(城)과 보(堡)을 쌓아 왜를 막았다. 천주 각 현은 이 기간 동안 잇따라 성과 보를 쌓아 왜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표 5>가정 시기 천주 축성(築城) 현황표 참고) <표 5> 가정시기 천주의 축성 현황 시간 지역 현 황 혜안[惠安]현 청 초 고조우(顧祖禹)의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권 99 복건[福建] 5 천주[泉州]부 혜안[惠安]현 에 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명 가정 연간에 왜를 막기 위해 성곽을 축조하고 호(濠)를 팠다. 명 가정 31년(1552)년 총독 왕여(王忬)가 왜의 공격으로부터 절강[浙江]을 지키기 위하여 성을 설치할 것을 주청 하였다. 혜안[惠安] 지현 유문진(兪文進)이 성을 지었는데 둘레는 986장 5척, 터의 넓이는 1장 2척, 높이는 1장 9척이었으며 성가퀴는 1700여 개, 돌로 쌓았다. 문은 네 개로 남문은 통혜(通惠), 북문은 조천(朝天), 동문은 계명(啓明), 서문은 영안(永安)이라 불렀고 아래 위로 수관(水關)을 설치하였다 서쪽은 옥련관 (玉蓮關)이라 부르고 수문 두 개를 동쪽은 용진관(龍津關)이라 부르고 수문 세 개를 설치하였으며 각각 갑 (閘)이 있었다. 38년 월성을 쌓고 높이 3척을 증축했으며 성곽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적루(敵樓)2개와 적대 (敵臺) 3개를 설치하였다. 39년 호(濠) 주위에 깊이 1020장, 넓이 3장을 더 파고 41년에는 와포 망루를 설 치하였다. 가정 36년 (1557) 덕화[德化]현 가정 36년(1557년) 지현 등경무(鄧景武)가 처음으로 둘레 837장, 높이 1장 5척의 성원(城垣)을 쌓을 것을 주청하였다. 39년(1557년) 왜가 영춘[永春]을 침략하였다. 덕화[德化] 지현 장대강(張大綱)은 성곽 둘레가 너무 커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성벽의 둘레를 668장으로 줄이고 동과 서로 문 두 개만 설치할 것 을 요구하였다. 44년, 성 북쪽의 용심산(龍潯山)에 북진루(北鎭樓)와 와포를 설치하고 군사가 순찰하도록 하였다. 가정 37년 (1558) 천주[泉州]성 월성을 쌓았으며 성곽 북쪽의 호(壕)에는 큰 바위가 가로막고 있어서 물이 흐르지 않았다. 작은 성루(城 樓)를 짓고 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어 방어하였다. 남안[南安]현 남안[南安]현에는 원래 성곽이 없었다. 가정 37년 왜가 쳐들어와 관가와 민가 전부 훼손되었다. 지현 하여 려(廈汝砺)가 처음으로 성곽을 쌓을 것을 청하였다. 성곽은 돌로 쌓았는데 문 네 개, 누(樓)와 월성이 설치 되어 있었으며 남쪽 월성은 병영을 지키는 역할을 하였다. 성곽의 둘레는 774장이 넘고 성가퀴는 2024개, 적루 7개, 와포 36개가 있었다. 43년 돌로 700여 장이 넘는 길을 깔았으며 호 200여 장을 파고 만석파[萬 石坡]의 물을 끌어다 성곽 주변을 에워싸고 흐르게 하였다. 가정 31년 (1552) 가정 37년 (1558)

49 49 시간 지역 가정 37년 1558년 동안[同安]현 왜가 쳐들어오자 지현 서종석(徐宗奭)은 성곽의 높이를 3척 증축하였다. 둘레는 846장 8척, 서쪽과 남쪽 문은 겹문이었고 와포 59개를 설치하였다. 38년 비가 많이 내려 성곽 절반이 훼손되었다 도 지휘 백 진(白震)과 장인 동지(掌印 同知) 이시방(李時芳)이 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었다. 가정 37년 1558년 안평[安平] 보(堡) 37년 왜가 쳐들어오자 지현 노중전(盧仲佃)이 성곽을 쌓을 것을 주청하여 절반을 쌓았다. 적이 쳐들어와 백성들을 노략질하고 가자 진(鎭)의 지부(知府) 가실경(柯實卿)이 동안교를 부수고 돌로 나머지 부분을 쌓음 으로써 성곽이 완성되었다. 성곽의 둘레는 1027장 남짓하고 높이 1장 2척이었다. 문은 4개로 누(樓)가 설 치되어있고 와사(窩舍)와 수관(水關) 8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가정 37년 1558년 망천[輞川]진 읍내 37년 왜가 혜안[惠安]으로 쳐들어오자 41년 지현 진옥성(陳玉成)와 초계미(肖繼美) 등이 성곽을 쌓을 것을 주청하였다. 성곽은 둘레 700여 장, 높이 1장 8척이었으며 동과 서로 문이 하나씩 있었고 북쪽과 동쪽으로 또 작은 문이 하나씩 있었다. 영춘[永春]현 지명(至明) 가정( ) 연간에 왜를 막기 위해 성곽을 쌓기 시작했다. 청 초 고조우(顧祖禹)의 독사 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권 99 복건[福建] 5 천주[泉州]부 영춘[永春]현 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가정 연간에 왜를 막기 위해 성곽을 쌓았다. 성곽의 둘레는 삼리도 안 되었다. 지금은 편호(編戶) 14리이 다. 가정 39년(1560년) 왜가 영춘[永春]현을 침략하고 3문과 민가를 훼손하였다. 지현 만이충(萬以忠)이 적을 막지 못하고 성을 내주자 그때 처음으로 성곽을 쌓는 것이 논의되었다. 가정 40년(1561년) 덕화[德 化] 지현 장대강(張大綱)을 파견하여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성곽은 돌로 쌓았으며 높이가 꽤 높았다. 40년에는 둘레 518장 2척, 넓이 8척, 높이 1장 9척으로 증축하기 시작했으며 41년에는 성문 4개를 설치 하여 동문은 영휘[迎暉], 서문은 내덕[來德], 남문은 문명[文明], 북문은 공극[拱極]이라 불렀으며 돌로 쌓아 연방(連房)을 지키도록 하였다. 성곽 밖의 동쪽, 서쪽, 북쪽 호(壕)는 성곽 둘레만큼 팠으며 서남쪽 안계[安溪]현 청 초 고조우(顧祖禹)의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권 99 복건[福建] 5 천주[泉州]부 안계[安溪]현 에 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처음에는 성곽이 없었다. 가정 39년 왜가 선유[仙遊], 영춘[永春]을 갑작스레 들이치는 바람에 41년에 성곽을 쌓을 것을 의논하고 44년에 성이 완공되었다. 가정 39년 7월, 왜가 읍내로 쳐들어 와 성이 함락되자 41년에 처음으로 성곽을 쌓을 것을 의논하였다. 서 남쪽과 동쪽 긴 시내를 따라 돌을 쌓아 터를 만들면서 지현이 성곽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성곽의 둘레는 620장, 터의 넓이는 1장 8척이었고 성문 4개와 동서로 수문 각 하나씩 설치하였다. 44년, 성 밖에 돌로 쌓 아 연방(連房)을 보호하였다. 가정 39년 1560년 가정 41년 1562년 현 황 주: 위의 표는 천주부지(泉州府志) (만력(萬曆), 건륭판), 진강현지(晉江縣志) (도광판(道光版)), 남안현지(南安縣志) (민국판), 동안현지(同安縣志) (민국판), 안계현지(安溪縣志) (가정, 건륭판), 금문현지(金門縣志) (광서판), 하문지(厦門志) (도광 판), 영춘주지(永春州志) (건륭판), 팔민통지(八閩通志), 등 문헌을 참고하여 교정 후 작성하였다 천주 부(府)와 현에 성을 쌓았고 특히 백성들이 왜환을 두려워했으므로 지리적 요충지에 채보(寨堡)를 구축하였다. 채보는 주로 산간지대의 고을에 많이 세웠는데 동안[同安]지역에 그 수가 가장 많았다. 또한 진강[晉江]의 안평보(安平堡)는 길이가 십 여리나 되어 규모가 한 개 현 못지 않았다. 채보를 구축함으로써 천주의 해양방어는 한층 강화되었다. 3. 보갑법(保甲法)을 실시하여 방어를 강화하고 첩자를 몰아냈다. 보갑법은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한 법안이었지만, 비상시기에는 끄나풀을 경계하고 왜를 따르고자 하는 생각을 차단하는데 효과가 있었다. 천주 지역의 해양방어체제의 수정과 개선은 여전히 위소 중심으로, 수채, 순검사, 봉후,

50 50 돈대, 성곽 등이 함께 방어하는 기존의 구도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위소에 한해서만 행정소 속을 변경하거나 지휘를 담당하는 관리를 교체하고 시설을 개선하고 군사를 늘이는 등 일련 의 개혁을 진행하였다. 천주의 해양방어체제는 점차 공고해져 가경 후반기에 상대적으로 안 정적은 방어체제를 운영하는 기반이 되었다. Ⅳ. 결어 한마디로 명나라의 천주해양방어체제의 이론은 비교적 완벽하였다. 위소를 중심으로, 보 (堡), 채(寨), 돈후(墩堠), 봉수(烽燧), 순검사(巡檢司) 등이 보조적 역할을 하는 연동 해양방어 체제는 완벽하고 체계적이고 층차가 분명하였다. 위소(衛所) 또한 배치가 치밀하고 지리적 우 위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군사 요충지에 설치해 성을 지키고 공격을 막는데 유리하였다. 다만, 위소제의 운영과 함께 여러가지 문제점이 나타나 방어체제를 수시로 보완해야 했다. 왜의 침략은 당국으로 하여금 해양방어에 힘쓰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왜환이 가장 창궐할 때가 바로 해양방어체제를 수정, 보완하는 시점이었다. 전반적인 배치 구도는 그대로 두고 군 사 공급원과 지휘관에 대한 조정, 방어의 하드웨어적인 부분에 대해 개선한 것은 해양방어체 제를 공고히 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수채를 내륙으로 옮기고 해안에 채와 보를 증설한 것은 방어전략의 변화를 의미한 다. 기존의 방어전략이 적극적인 공격을 통해 방어했던 것이라면 이 시기에는 더 이상 출격하 지 않고 해안에서 적의 공격을 막는 보수적인 전략으로 바뀌었다. 명나라 전반적인 해안방어 체제의 한 부분으로서의 천주 지역의 해안방어체제의 조정을 통해 명나라의 해양방어전략이 보수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1 51 嘉靖时期泉州的倭患与海防 肖 彩 雅 泉州海外交通史博物馆 一 明朝泉州海防基本布局 二 嘉靖时期的泉州倭患 三 泉州海防体系的修正与重建 四 結語 明朝的海防体系由一个个以卫所为中心 辅以堡 寨 墩堠 烽燧 巡检司等的联动机 制构成的 它具有整体性 系统性 层次性 其理念及初期的建构都是相对完备 但是随着该 体系的运行 其缺陷随之显现 至嘉靖时期 在倭患炙热外在因素的影响下 作为整个海防体 系一环的泉州海防已如同虚设 当局在抵制倭寇的同时对海防布局进行调整 对泉州整个海 防体系进行修正与重建 作为明朝海防体系的缩影 从泉州海防体系调整中可一窥整个明朝 海防由主动出击御外洋趋向于固守沿岸的战略

52 52 一 明朝泉州海防基本布局 卫 所 堡 寨 墩堠 烽燧 巡检司等构成具有整体性 系统性 层次性的联动机制 据 晋江县志道光版 海防志载 洪武二十年 命江夏侯周德兴入福建 抽三丁之一为沿海 戌兵防倭 移置卫所当要害处 时泉设卫一 曰永宁 守御所五 曰福全 曰崇武 曰中左 曰金门 曰高浦 又设巡检司一十九 是年设浯屿水寨 洪武二十一年 命汤和行视闽粤濒 海地 筑城增兵 置永宁指挥使及崇武 福全 金门 高浦千户所 1(见表一 明朝泉州海防表 表二 明朝泉州巡检司表 表三 明朝泉州府驻军情况表 附图一 附图二) 综上 明代泉州有卫2 守御千户所5 水寨1 巡检司19 悍寨32 烽堠245 拥有旗军18 911名 弓兵1 650 水寨兵2 500 其兵力配比雄厚 泉州卫所的建置沿革正标示着泉州海 防体系的形成与发展 这就形成一种以卫所为主要承载体以及与所辖水寨 巡检 峰堠 墩 台等共同构成的海防布局体系 卫所 巡司可以控贼于陆 水寨可防之以海 沿海的烽燧墩 台可备瞭望 这种具有整体性 系统性 层次性的水陆结合的抗倭防御体系 这种守望相助 建制相对完备的体系 若能充分发挥 是足以抵御外敌 但是随着这个体系的运行 后勤保障 跟不上 兵饷缺乏扣银之事时时发生 卫所官员贪污事件屡发 卫所兵员逃亡事故渐次 卫 所 寨 墩堠 烽燧等设施没能及时修整 逐渐遭受破坏 倭寇炙热的加压下 使得整个明 朝的海防体系出现纰漏或者说这个体系的整体联动机制不能充分发挥 表三嘉靖时期泉州驻 军数量的急剧下降 是泉州驻防薄弱的表现之一 而倭大举入寇泉州使得其海防体系几近瓦 解 那么 嘉靖时期泉州的倭患之情况如何 详见下分解 1) 据 泉州府志 卷二十四 军制中载 洪武二十一年 遣江夏侯周德兴于沿海要害处置巡检司十八 复于大担南太武山外建浯屿 置水寨一 景泰三年 移厦门中左所 嘉靖末 倭奴为寇在籍之兵 徒有虚名 延复练乡勇为士兵 名外营为客兵 2) 要皆使民得以知寇至而为之备也

53 53 <表一> 泉州海防表 类别 名称 建置时间 地址 府沿卫 泉州卫 洪武元年 1368 泉州府城 永宁卫 或洪武 二十七年 寨 烽燧 1 悍寨2 在三十都 城周八百七十五丈 万历府志曰八百九十五丈 基广一 丈五尺 高二丈一尺 窝铺三十有二 万历府志曰三十有 一 为门五 南曰金鳌 北曰玉泉 东曰海宁 曰东瀛 西曰永清 各建楼其上 城外濠广一丈六尺 间凝大 石 深浅不同 永乐十五年 增广城垣三尺 门各增筑月 城 正统八年各门增置敌台 悍寨15 洪武二十年 1387 沿海卫 概况 2 守御千户所 崇武所 洪武二十年 1387 惠安县东 二十七都 城周长七百三十七丈 基一丈三尺 高二丈一尺 窝铺二 十六 万历府志三十六 门四建楼其上 永乐十五年 城增高四尺 筑东西月台 悍寨1 3 烽燧22 守御千户所 福全所 洪武二十年 1387 在晋江 十五都 城周长六百五十丈 基广一丈三尺 高二丈一尺 窝铺十 六 为门四 建楼其上 永乐十五年 增高城垣四尺 并 筑东西北三月城 正统八年 增筑四门敌楼 寨1 4 烽燧10 城周四百三十二丈 高建女樯一丈七尺 万历府志周围 四百五十丈 高一丈七尺 基广一丈 窝铺十六 门四 永 乐十五年 城增高三尺 筑月城 正统八年 增筑敌台 悍寨3 5 烽燧5 同安 浯洲屿 城周六百三十丈 基广一丈 高连女樯二丈五 府志注高 一丈七尺 窝铺三十六 外环以濠深广丈余 东西南北四 门各建楼其上 永乐十五年增高三尺并砌西北南三月城 正统八年增筑四门敌楼 嘉靖三十七年所署毁于火 康熙同安县志作万历二十七 悍寨8 6 烽燧6 同安 嘉禾屿 周四百二十五丈九尺 高连女樯一丈九尺 阔八尺五寸 万历府志作周围四百二十五丈 广九尺 高一丈九尺 窝铺二十二 垛子四百九十六 门四 南曰洽德 东曰启 明 西曰怀音 上个建楼 永乐十五年 增高三尺 筑月 城 正统八年 添增四门敌台 悍寨2 7 烽燧8 于大担南太武山外建置水寨一 景泰三年 移厦门中左所 泉州府志载 正统初年 侍郎焦宏 以其孤悬海中 乃徙烽火于松山 南 日于吉了 浯屿于嘉禾 各仍其旧称 备寇记 万历三十年 水寨移至晋江石湖 每岁分永宁 漳州二卫 军士更番备 倭于此 永 宁 卫 官 26 旗 2242名 漳州卫官 12名 旗 军 656名 洪武二十四年 同安县西 守御千户所 高浦所 洪武二十三年 南十四都 万历府志 安仁里 守御千户所 金门所 洪武二十年 守御千户所 中左所 洪武二十七年 水寨 浯屿 原设大担 南太武山 洪武二十一年 后迁嘉禾 屿 隔海七 十里 主: 本表根据 泉州府志 万历 乾隆版 晋江县志 道光版 南安县志 民国版 同安县志 民国版 安溪县志 嘉靖 乾隆版 金门县志 光绪版 厦门志 道光版 永春州志 乾隆版 八闽通志 筹海图编 等典籍进行校 正而成 1. 在惠安县北十二都 白水寨 东坑寨 2. 在晋江县东南二十 二十一都 吴山寨 中寨 坑尾寨 沙堤寨 新寨 尾寨 古云寨 沙浦寨 仓后寨 东店寨 龙婆寨 湖 边寨 东浦寨 深芦寨 龙尾寨 3. 悍寨在县东南二十六都青山 烽燧俱在惠安 海头 下头 后黄 峰尾 大山 高山 萧山 炉头 下朱 后任 白沙 白崎 柯 山 獭窟 大岞 古雷 赤山 程埭 小岞 尖山 青山 马头 4. 悍寨在晋江南十都 潘径 烽燧俱在晋江 安平 坑山 东门外 洋下 陈坑 石悃 潘径 隘铺 石头 萧下 5. 悍寨在同安县 洪武二十三建 高浦寨 大员堂寨 马銮寨 烽燧俱在同安 下崎 东关浔 亭泥 刘山 西卢 6. 悍寨在同安县 刘五店寨 澳头寨 牛岭寨 秽林寨 瓯山寨 洪山寨 西山寨 天宝寨 烽燧6 南安4处 石井 溪东 街内 下吴 同安2处 白叶头 叶了 7. 悍寨在同安县西南二十二都 东澳寨 伍通寨 烽燧俱在同安县西南 厦门 高浦 径山 东渡 下尾 流礁 井上 龙渊

54

55

56

57

58

59

60

61

62

63

64 64 时间 嘉靖三十九年 1560年 嘉靖四十一年 1562年 县城 情况 永春县 至明 嘉靖 年 间 为防倭寇 始筑城 清初 顾祖禹 读史方舆纪要 卷99 福建5 泉州府 永春县 嘉靖间 因倭寇筑城 周不及三里 今编户十四里 嘉靖卅九年 1560 年 倭寇攻永春县 捣毁三门 破坏民房 知县万以忠失守 始议筑城 嘉靖四十年 1561年 委德化知县张大纲督之 砌以石 周围高丈许 四十年 始增筑长五百一十八丈二尺 广八尺 高一丈九尺 四十一年 成四门 东曰迎晖西曰来德南曰文明北曰拱极砌以石覆以连房城外 东西北浚壕壕周围如城数西南隅 安溪县 清初 顾祖禹 读史方舆纪要 卷99 福建5 泉州府 安溪县 旧无城 嘉靖三十九年倭自仙 游 永春突犯 四十一年始议筑城 四十四年城始完固 嘉靖三十九年七月 倭寇突至县 不能守 四十一年始议筑城 西南及东畔倚长溪一带砌石为 基 知县筑之 周围六百二六丈 高二丈一尺 基广一丈八尺 置四门 设东西二水门 四十四 年 砌城外以石覆以连房 主: 本表根据 泉州府志 万历 乾隆版 晋江县志 道光版 南安县志 民国版 同安县志 民国版 安溪县志 嘉 靖 乾隆版 金门县志 光绪版 厦门志 道光版 永春州志 乾隆版 八闽通志 等典籍进行校正而成 三 行保甲之法 修举而力行之 则处处有备 人人皆兵 奸究无所容 尤寓兵于农之法 保甲之法 虽说是控制老百姓 但是在非常时期 却对从倭之人有警戒作用 同时也断绝了 从倭之心 综上 泉州海防的修正与改进依旧是在以卫所为承载体 以水寨 巡检 峰堠 墩台 城 堡等共同构成的基本布局中进行的 这种体系保持建制以来的基本格局 只在卫所行政隶属 指挥官员的更换 防驻设施的提升及兵源等进行新一轮的调整 泉州海防体系得以巩固 这 样也使是泉州的驻防在嘉靖后半个世纪都相对平静 整个海防体系运行得相对顺畅 四 結語 总之 明代泉州海防体系建构理念相对完备 以卫所为中心 辅以堡 寨 墩堠 烽燧 巡检司等构成的联动防御体系 它具有整体性 系统性 层次性 算是较为完备 每个卫所 的选址都充分发挥天然地理条件 地处要冲 易守难攻 卫所的布局都较为严密 但因卫所制 运行后 出现种种的缺陷使得这种防御体系需要及时进行修正与改进 在面对倭患时 逼迫 当局重视海防 倭患的炙热之际即是海防体系调整之时 在整个海防基本格局不变的情况下 政府通过兵源及军队指挥官的调整及驻防硬件的提升等方面对海防体系进行修正和改进 使 得海防体系得以巩固 但是水寨的内移及沿海寨堡等陆续增筑印证了整个海防战略思维已由 主动出击 御敌于外洋转为固守沿岸的保守思维 作为整个明朝海防体系的一环 泉州地方 的海防体系所进行的调整 即窥见出整个明朝海防体系趋于保守

65 65 천주(泉州) 가정시기(嘉靖時期 1522~1566)의 왜환(倭患)과 해양방어 에 대한 토론문 한 지 선 전남대학교 본고는 천주부의 왜란의 입침의 형태를 분석하고 이로 인해 가정연간 해방체제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논문이다. 이 논문의 의의를 두 가지 정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명대사 연구에 있어서 가 정왜환는 민족문제로서 일찍부터 논의되기 시작했으며, 정치 사회적으로는 체제 붕괴의 기 점으로 명의 쇠퇴를 초래했다고 지적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가정 왜환은 17세기 세계체제 의 성립과 함께 새로운 국제환경의 조성되는 시작점으로써 검토하는 경향이 있다. 즉, 가정왜 환은 포르투갈의 중국 접촉, 인구이동과 상공업의 발전 대내외적 여건과 사회 경제적 변화와 함께 발생한 것으로 명초 조공을 중심으로 한 해양질서는 변화를 모색할 수 밖에 없었고 마 카오체제, 월항의 개방이 가능했던 계기라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대내외 질서변화를 가져 온 것은 근본적으로 해방체제에서의 변화와 명조의 해양에 대한 지배가 관철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으며 본고를 통해 해양 방어 시설의 변화를 통해 이를 읽을 수 있으리라 는 점이 기대된다. 첫째, 본 연구는 명조의 해방 전반을 다루는 기존 연구들의 접근과는 달리 천주부의 해방 체제 변화를 천착한 사례연구로써 주목된다. 또한 사료 찾기의 번거로움을 감안할 때 필자가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보인다. 명 후기 장주부의 월항(月港)이나 澳門(마카오)이 해외무 역의 중심점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다른 복건지역에 대한 강력한 통제와 해방 가능했기 때문

66

67

68

69

70

71

72 72

73 73 일본 중세의 해양방어유적 - 원구방루(元寇防塁)와 해성(海城)- 小野正敏 人間文化硏究機構 *번역 : 최연식(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Ⅰ. 머리말 Ⅱ. 원구방루(元寇防塁) Ⅲ. 해성(海城) : 에도 만[江戸湾]과 세토 내해[瀬戸內海]의 게이요 제도[芸予諸島] Ⅰ. 머리말 일본은 주변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지만 중세의 경우 바다로 부터의 커다란 위협을 대비한 방어시설의 건설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원칙적으로 바다는 교역이나 사람, 문화의 교류 공간으로서 열려 있는 곳이라는 의식이 우선시되었고, 이를 위한 기능이 중시되 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오랜 역사 속에서 몇 차례의 커다란 사건들이 있었다. 고대에는 백촌강(白村江) 전 투에 패한 다음 해인 664년에 텐치[天智] 천황이 국방을 위해 쓰시마[対馬], 잇키[壱岐], 치쿠 시[筑紫]에 방인(防人, 사키모리)과 봉수를 두어 다자이후[太宰府]를 방어하고, 나아가 쓰시마 의 가네다죠[金田城], 세토[瀬戸] 내해의 나가토[長門], 사누키야시마죠[讃岐屋島城], 다카야 스죠[大和高安城] 등의 산성이 축조되었다. 또한 막부 말기인 18세기 이후 유럽세력의 동아 시아 진출이 활발해지자 에도[江戸] 막부는 그 침공에 대비하여 다이바[台場]와 포대[砲台]를 일본 열도 각지의 해안에 설치하였다. 또한 에도성의 입구인 에도만[江戸湾; 도쿄만]에는 만

74 74 의 주위 해안선에 포대를 두었을 뿐 아니라 만을 횡단할 수 있도록 만(灣) 안에도 인공섬의 다 이바[台場]를 건설하였다. 거기에는 해외로부터 구체적인 위협이 있을 때에 그것에 대응하려 한 모습이 보이고 있다. 이번 학술회의의 테마인 중세 바다로 부터의 위협에 대비한 방어시설로서는 첫 번째로 가 장 두드러진 사례로서 가마쿠라[鎌倉] 막부가 몽골의 두 번째 침략에 대비하여 건설한 원구방 루(元寇防塁, 겐코보루이)를 들 수 있다. 이것은 목적과 축조연대 모두 대단히 명확한 사례이 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해적성(海賊城, 가이조쿠시로) 혹은 해성(海城, 우미시로)이라고 불리 고 있는 바다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성을 들 수 있다. 최근 이 분야에 관한 연구가 진 전되면서 그 특징적 모습들이 보고되고 있다. 그러나 우미시로[海城] 그 자체의 정의와 기능 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어 아직 많은 과제가 남겨져 있다. Ⅱ. 원구방루(元寇防塁) 1. 원구방루는 무엇인가? 1274년(文永 11年) 10월에 원나라 군대는 쓰시마, 잇키에 상륙하여 섬을 정복한 후 다시 마쓰라[松浦]를 경유하여 하카타[博多]로 향하였다. 하카타 만에 도달한 원군이 이마즈[今津], 모모치바루[百道原]를 통해 상륙한 후 하카타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는 원군이 우 세한 상황이었지만 무슨 일인지 하룻밤 사이에 그들이 물러나면서 끝나고 말았다. 가마쿠라 막부는 원의 또 다른 침입에 대비하여 하카타 주변의 방어를 강화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것 이 이국경고번역(異国警固番役, 이코쿠케이고반야쿠) 이다. 나아가 구체적인 방어시설로서 방루(防壘)도 축조하였다. 당시의 사료에는 요해석축지(要害石築地, 요가이이시츠이지) 라 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와 병행하여 고려를 공격하는 이국정벌(異国征伐)도 계획 되었지만, 이것은 도중에 중단되었다. 석축지는 하카타 만을 따라서 서쪽의 이마즈에서 동쪽의 가시이[香椎]까지의 해안선 약 20km에 이르는 것이었다. 서쪽의 고지다케[柑子岳]와 비샤몬야마[毘沙門山], 이마즈 항에서 나가타레야마[長垂山], 나가타레야마에서 오도미사키[小戸岬], 오도미사키에서 아타고야마 [愛宕山], 다시 해구(海口)를 건너서 고즈사키[荒津崎]까지, 하카타의 서쪽으로 펼쳐진 소데노 미타토[袖の湊]의 해구, 하카타의 끝부분인 오키노하마[息の浜], 하코자키[箱崎] 해변, 하코

75 75 자키의 해구를 건너서 가시이의 해변에 이르기까지 산의 끝자락에서 끝자락을 연결하여 모래 해변을 완전하게 막는 형태로 축조되었다.<그림 1> 정말로 1274년의 전투의 교훈을 살린 계 획이었다. <그림 1> 하카타만 원구방루 분포도 또한 같은 시기에 하코자키 항구가 있던 다다라가와(多々良川)의 하구(河口) 지역에도 원 나라 배의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말뚝들을 어지럽게 박아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다 다라가와 하구뿐 아니라 다른 작은 강의 하구들에도 같은 공사가 행해졌다고 추정된다. 이것 은 한국의 경상남도 제포만(薺浦灣) 내부의 말뚝 유구와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 구 자체는 발굴되지 않아서 실제 모습은 확실하지 않다. 석축지 축조 명령은 1276년 3월에 내려졌으며, 규슈 각 구니[國]의 고케닌[御家人]1들에 게 각자의 영지 규모에 따라 담당 거리를 분배하는 형태로 축조를 분담시켰다. 구체적으로는 영지 1단(段, 약 99 ) 당 1촌(寸, 약 3cm)의 길이가 원칙이었다. 나아가 축조에 필요한 인부 들도 담당자가 자신의 영지에서 데리고 가도록 정해졌다. 1) 고케닌[御家人]은 가마쿠라막부 시기 막부장군에 직접 예속되어 지방에 영지를 가지고 있던 무사들을 가리킨다. - 역자 주

76 76 또한 문헌사료 연구를 통해 구니[國]별로 담당 지역이 정해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마즈는 오오스미[大隅] 휴가(日向)[가고시마鹿児島県], 이마쥬쿠[今宿]는 후젠(豊前)[오이 타大分県], 이키노마츠바라[生の松原]는 히고(肥後)[구마모토熊本県], 메이노하마[姪浜]는 히 젠(肥前)[사가佐賀県], 하카타는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후쿠오카福岡県], 하코자키는 사 츠마(薩摩)[가고시마鹿児島県], 가시이는 후고(豊後)[오이타大分県]가 담당하였다. 지역별로 각 구니의 고케닌들에게 다시 세분화하여 할당하는 방법[割普請, 와리부신]을 채용하여 단기 간에 공사가 진행되어 8월에는 대부분이 완성되었다. 2. 원구방루의 규모와 구조 이 방루는 높이 2~3m, 바닥 부분의 폭 약 3m의 석루(石塁)로, 원나라 군대의 상륙을 저 지하기 위해 백사장 가장자리 끝 부분의 모래 위에 축조되었다. 발굴된 원구방루를 보면 각 지구에 따라 구조나 사용된 돌의 재질이 다른 것이 특징이다. 하카타의 오키노하마(제111차 <그림 2> 오키노하마지구(제111차 조사지구) 원구방루 A B

77 77 <그림 3> 오키노하마 원구방루(제68차 조사지구) <그림 4> 니시하마 지구 원구방루 <그림 5> 이미즈 나가하마 지구 원구방루의 동 서 조사)에서는 밑 부분의 폭이 약 3.8m이고 바다 쪽과 육지 쪽에 수직으로 70cm 정도의 돌을 쌓고, 내부에 40~50cm의 돌을 채우고 있다. 높이 1.3m 까지 남아 있다. 석재는 비교적 가 까운 해안에서 채취한 역암(礫岩)과 사암(砂岩)이 사용되었다.<그림 2, 3> 이마즈에서는 밑 부분의 폭이 약 3m, 윗면이 약 2m, 높이 약 3m의 사다리꼴로 쌓았다. 석재는 현무암 부분과 화감암 부분이 있는데, 전자는 모두 돌로 쌓았지만 후자는 바다 쪽은 윗부분까지 돌로 쌓은 반 면 육지 쪽은 내부 1m 정도를 모래로 채운 후 그 위를 작은 돌로 쌓았다. 현무암은 비샤몬야 마[毘沙門山], 화감암은 고지다케[柑子岳] 지역이다.<그림 5> 이키노마츠바라[生の松原]에서는 폭이 1.2m로 좁고, 바다 쪽에는 커다란 돌을 쌓은 반면 육지 쪽은 작은 돌로 쌓고서 점토로 보강하고 있다. 높이 1.8m 정도까지 남아 있다. 석재는

78 78 <그림 6> 이키노 마츠바라 지구 원구방루 나가타레야마[長垂山]와 해안의 화강암, 오도미사키[小戸岬]의 사암이다.<그림 6> 메이노하마[姪浜]에서는 밑 부분이 약 1m이고 높이 약 1m 정도가 남아 있다. 석재는 아 타고야마[愛宕山]에서 온 사암이 사용되고 있다. 니시하마[西浜]의 니시진[西新]에서는 폭이 3.4m로 넓고 사구(砂丘) 위에 점토로 밑 부분을 만들고, 석축 내부도 점토와 모래를 번갈아 쌓아 견고하게 하였다. 석재는 노코노시마[能古島]에서 가져왔다고 분석되고 있다. 이와 같은 지구별 구조와 규모의 차이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구니[國]별로 할당하여 급하게 축조한 것을 반영한다고 생각되고 있다. 석재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 에서 조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원구방루의 효과 1281년 5월 다시 원[江南軍]과 고려[東路軍]의 연합군에 의한 일본 원정이 시작되었다. 6월, 쓰시마와 잇키를 제압한 동로군이 하카타만의 시카노시마[志賀島]에 도착한 후 하카타

79 79 만에서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앞서와는 달리 이때의 전투에서는 석축지가 축조되었고, 그것 을 이용한 방어체제가 갖추어졌다. 몽고습래회사 ( 蒙古襲来絵詞, 모오코슈라이에코토 바)에는 완성된 석축지의 상황과 그 윗부분에 경비를 분담한 갑옷을 입은 많은 무장들의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회화 자료를 통해 볼 때 석축지는 윗부분이 평탄하게 만들어졌 고, 책(柵) 등의 방어시설은 덧붙여지지 않았던 것 같다. 석축지의 높이는 발굴조사에서 가장 높게 남아 있는 이마즈 지역이 3m로 보고되어 있는데, 이 자료를 통해서도 그 수치가 아마도 본래의 상한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나라 군대는 그 효과 때문인지 상륙이 저지되어 해상에서의 전투가 중심이 되고 있다. 또한 일본군이 있는 우미노나카미치[海の中道]2를 경유 한 육상의 전투도 있다. 예정보다 늦은 7월에 동로군(東路軍)은 강남군(江南軍)과 다카시마 [鷹島]에서 합류하였는데, 그 직후 폭풍우를 만나 괴멸상태가 되면서 2차에 걸친 일본 원정은 끝나게 되었다. 이 방루는 14세기 이후 점차 모래에 묻혀갔고, 또한 하카타 시가지가 확대됨에 따라 석재 도 대부분 시가지 조성을 위해 전용되었다. 그러나 1563년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확인되는 성복사지회도(聖福寺之絵図, 쇼후쿠지노에즈)에는 사찰과 접하고 있는 해안에 오키노하마(息 の浜; 博多前浜)의 석축지가 그려져 있어 15세기 경까지는 하카타의 여러 곳에 석축지가 남 아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카타의 별칭인 석성부(石城府, 세키죠후) 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오키노하마의 서쪽 끝 스자키[須崎]에 있던 묘라쿠지[妙楽寺]의 산호(山号)에도 석성산(石城山, 세키죠산)으로 남아 있다. 이 방루의 2차적 효과로서 후세에 백사장을 보호하는 호안(護岸)이 되어 하카타 만의 침식을 방호하였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4. 그 기술 계보 석축지는 1276년에 축조된 사실이 문헌사료에서 확인되고 있지만, 그 기술 계보 등에는 명확하지 않은 점이 많다. 북일본을 제외하면 간토[関東] 서쪽에서 중세 다테(館, 소규모 성) 등의 방어시설로서 본격적인 해자[堀]와 토루(土塁)가 도입된 것은 13세기 후반이다. 물론 그 시기의 다테[館]에는 석벽과 석루는 갖추어지지 않았다. 돌을 쌓는 기술은 사찰과 신사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석축지(石築地)로서 해안 방어를 위해 축조한다는 발상과 함 2) 시카노시마[志賀島]와 규슈 본토를 연결하는 좁은 모래섬. 길이 약 8km, 최대 폭 2.5km의 거대한 모래섬으로 북쪽이 현해탄, 남쪽은 하카타만이다. - 역자 주

80 80 께 실제로 그것을 쌓는데 있어 각각의 부분을 분담한 고케닌[御家人]들의 영지에서 인부들을 데려와 쌓았다는 것, 또한 근처의 석재를 사용하여 모래밭 위에 높이가 3m나 되는 석루를 쌓 고, 그 석루가 적어도 1~2세기에 걸쳐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끼게 된다. 그 기술 계보 및 왜 이 석루가 다테[館] 등의 방어시설 혹은 권위 표현에 사용되지 않았는지 등의 문제 가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 있다. Ⅲ. 해성(海城) : 에도 만[江戸湾]과 세토 내해[瀬戸內海]의 게이요 제도[芸予諸島] 1. 해성(海城), 해적성(海賊城)이란 종래 해안부에 위치한 성곽들을 막연히 해성(海城) 이라고 불렀지만 보소반도(房総半 島)의 성곽을 연구해 온 다키가와 쓰네아키[滝川恒昭]는 최근의 성곽연구자 및 중세사연구자 들의 지적을 총괄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① 해상세력(영주)의 거점, ② 항만(港湾)과 바다에 돌출한 곶[岬]이나 산 위에 축조된 것, ③ 바다에 대해 감시 지휘 통신하는 등 해관 (海関), 해상경계[海上警固]의 기능을 갖는 것 등. 특히 항만과 깊은 일체적 관계를 가진 것에 주목하여 항구성[湊城, 미나토죠] 이라는 호칭도 제안하고 있다. 한편 세토 내해의 중세사를 연구하는 야마우치 유즈루[山内譲]는 일반적으로 해성(海 城)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구조적으로는 각지에 있는 산성(山城)과 다르지 않은 것들이 많음을 지적하고, 세토 내해 등에서 두드러진 작은 섬 전체를 성곽화한 것을 해성(海城)이라고 부르 고 있다. 그리고 세토 내해의 성곽연구에서 이제까지 해적성(海賊城)이라고 불린 것들과 정의 가 중복되는 것을 인정한 위에 육지부의 산성(山城)과 대비하는 의미를 담아서 해성(海城)이 라는 용어를 채용하고 있다. 또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중세의 해적 은 현재 연상되는 항해 하는 선박을 습격하여 도적 행위를 할 뿐 아니라 일정의 해역(海域)을 지배하는 바다의 영주 로서, 통행세[関銭]를 거두는 대신 다른 해적들로부터 보호하고 물길을 안내해 줌으로써 배와 사람, 상품 항해의 안전을 보장하는 기능, 그리고 해상유통을 담당하는 상업적 기능 등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나아가 그들은 커다란 수군력(水軍力)을 가지고 있어서, 종종 센고쿠[戦国] 다이묘[大名]의 휘하에서 직속 혹은 계약 수군으로 편성되는 일이 많이 알려져 있다.

81 81 2. 에도만[江戸湾]의 해성(海城) 다키가와 쓰네아키[滝川恒昭]는 앞에서와 같이 해성을 정의한 후 구체적 사례를 소개하면 서 그 입지 등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① 대부분의 해성이 시나가와항[品川 湊]과 같이 항만도시로 발달하는 장소<그림 11>는 물론 크고 작은 항구와 세트를 이루고 있으 며, ② 그 분포도<그림 7>를 보면 에도 만 중에서도 우라가수도[浦賀水道]이라고 불리는 입구 의 좁은 물길 부분에 해성이 집중하고 있다. 나아가 문헌사료를 통해 이들 해석에 관하여 그 기능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를 소개 하고 있다. 바다에 대한 감시소, 지휘소로서 수군의 거점으로 확인되는 사례는 오카모토죠[岡 本城], 가나야죠[金谷城]<그림 8, 9>이다. 이 두 성은 아와노구니[安房国]의 사토미[里見] 씨 의 본거지로서, 사가미노구니[相模国]의 호죠[北条] 씨의 수군 야마모토[山本] 씨가 본거지 미우라[三浦] 반도에서 아와노구니에 침공했을 때에, 오카모토 가나야 신지(新地)의 3성에 서 수군이 출동하고 있다. 또한 해관(海関)에 대해서도 햐쿠슈죠[百首城]가 보소[房総]에서 무사시[武蔵]나 시모우사[下総]를 왕래하는 배를 검문할 권리를 가지고 있던 것과 사토미 씨 가 가나자와항[金沢湊]<그림 7>의 상인 야마구치[山口]] 씨에게 (자기 영지의) 어느 항구에서 <그림 7> 에도만의 해성 분포도 <그림 8> 오카모도죠[岡本城]

82 82 <그림 9>가쓰야마죠[勝山城] <그림 10> 우라가죠[浦賀城] 도 통행료[関料]를 면제해주는 문서를 소 개하고 있다. 그리고 호죠 씨 측의 미사키 항[三崎湊]에서는 배가 귀항할 때에 호죠 씨의 수군 책임자 무장의 허가가 필요했음 을 지적하고, 선박에 대해 검문(사람과 화 물에 대해)이 실시되었음과 그것에 관여한 것이 호죠 씨의 미우라 반도 지배 거점이 었던 미사키죠[三崎城], 우라가죠[浦賀 城]<그림 10>였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림 11> 고텐야마죠[御殿山城] 3. 게이요 제도[芸予諸島]와 해적(海賊) 무라카미[村上] 씨의 해성(海城) 게이요 제도[芸予諸島]는 세토 내해를 동과 서로 나누는 것처럼 섬들이 이어지고 있는 곳 으로, 항해하는 배는 세토[瀬戸]3라고 불리는 좁은 수로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는 항해하기 3) 세토[瀬戸]는 급류의 입구라는 뜻이다. - 역자 주

83 83 <그림 12> 게이요제도의 해성과 항로(1来島, 12 能島, 34 甘崎城 어려운 곳이다. 또한 주요한 항로가 집중하는 해역이기도 하다. 현재 이 섬들을 세토 내해를 횡단하는 다리들이 연결하고 있는 것처럼 남과 북쪽의 히로시마[広島]현과 에히메[愛媛]현(시 코쿠四国 지방)을 연결하는 최단 루트이기도 하다. 중세에 이 중요한 해역의 권익을 장악하고 있던 것은 해적 혹은 수군이라고 불리던 바다 의 영주들로,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라카미[村上]씨 일족이었다. 그들은 본거지 로 삼는 섬의 이름을 따라 노시마 무라카미[能島村上]씨, 쿠루시마 무라카미[来島村上]씨, 인 노시마 무라카미[因島村上]씨로도 불렸다. 그들의 활동은 14세기경부터 확인되며, 전국시대 라고 불린 15~16세기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다른 곳에 비해 이 해역에 해성들이 매우 밀도 높게 분포하고 있는 것도 이 해성들이 가지 고 있는 지리적 위치와 함께 그것들을 배경으로 활약한 무라카미 씨들의 본거지가 이곳에 집 중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 본거지가 된 해성에는 그 기능을 특징짓는 공통된 유적들이 보이

84 84 고 있다. 해안의 암초지대에 보이는 기둥구멍 유적[柱穴群]으로서, 그 기능이 중요하다. 발굴 조사된 두 사례를 소개한다. 1) 아마사키죠[甘崎城]의 구조와 유구<그림 13, 14> 아마사키죠가 있는 곳은 게이요 제도의 중심에 있는 오오미시마[大三島]의 동쪽, 하나구 리세토[鼻繰瀬戸]이다. 성이 문헌에서 처음 확인되는 것은 1541년으로, 중세의 성주로는 이 마오카[今岡] 씨와 무라카미 요시츠구[村上吉継]가 알려져 있다. 전자는 노시마 무라카미 씨 계열, 후자는 쿠루시마 무라카미 씨의 일족이다. 이 성은 게이요 제도의 해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돌담(石垣)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것은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 이후 에 도오도[藤堂] 씨가 들어와 쇼쿠호오[織豊]계 성곽4의 특징인 높은 돌담과 기와 건물을 지닌 <그림 13> 아마샤키죠[甘崎城] 전체도 <그림 14> 서부의 암초지구 유구도 4) 쇼쿠호 계열 성곽[織豊系城郭]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및 그 휘하 영주들에 의해 완성된 성곽들 을 가리킨다. - 역자 주

85 85 성으로 개수하였기 때문이다. 1608년 경에는 폐성이 되었다. 아마사키죠는 산정부를 평평하게 깎아서 조성한 북곽(北郭), 남곽(南郭)의 주요 성곽과 산 자락의 테라스, 해안부의 기둥구멍 유적[柱穴群]과 돌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곽, 남곽의 발 굴에서는 두 시기의 초석 건물과 거기에 사영되었던 기와, 도자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들 유 물은 크게 15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 및 그 이후로 구분되고 있다. 유물량으로 볼 때에는 16세기가 전성기였다. 암초지대에는 기둥구멍 유적이 먼저 존재하였고, 17세기 초가 되어 돌 담이 축조되었다. 그 때에는 기둥구멍 유적은 기능하지 않았다고 보고되고 있다. 아마사키죠를 특징짓는 것은 동해안의 암초지대에 남아 있는, 구조물의 흔적인 기둥구멍 유적들이다. 이것들은 해안선과 나란히 가는 횡렬과 직각으로 교차하는 종렬이 있다. 암초 남 부의 Ⅱ구의 사례에서는 종렬 기둥구멍들이 두 개 있는데, 9m의 간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양 자가 세트로서 잔교(桟橋)와 같은 구조였다고 추정하기는 힘들고, 각기 배를 계류하기 위한 시설이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만조 때에 기둥구멍 유적은 물에 잠기고 있는데 반해 기둥구멍 이 산기슭 부근에 접속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테라스는 물에 잠기지 않고 있는데, 이곳이 배에서 내린 사람과 화물의 이동을 위한 연락통로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2) 노시마죠[能島城]의 구조와 유구<그림 15, 16, 17> 노시마죠[能島城]는 무라카미 수군의 중심 일족인 노시마 무라카미 씨의 본거지이다. 이 곳은 최단의 주요 항로 중 하나인 게이요 제도를 통과하는 미야쿠보세토[宮窪瀬戸]라고 불리 는 지점으로, 하카타지마[伯方島]와 오오시마[大島] 사이의 매우 좁은 수로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발굴된 도자기들로 볼 때 14세기 중엽에서 16세기에 사용되었고, 특히 전성기는 15세 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이었다. 노시마는 주위 약 900m의 작은 섬이다. 섬 전체는 평평하게 깎아낸 3단의 곡륜(曲輪, 쿠 루와)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남쪽과 동쪽으로 돌출한 곶[岬]에도 작은 평탄지가 있다. 또한 섬의 남서부에는 해안을 매립한 남부 평탄지가 있고, 북측에도 모래 해안이 있다. 남부 평탄 지의 발굴에서는 중세에 3시기에 걸쳐 매립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이 해안에는 이 매립 때의 해안 방호 시설로 생각되는 기둥 열과 어지럽게 박은 말뚝들이 있다.<그림 16> 이 성의 특징 은 이 해안 매립과 함께 동쪽의 암초에 존재하는 다수의 기둥구멍 유적과 산기슭에 있는 통로 형태의 테라스이다. B지점의 기둥구멍 유적은 해안의 산기슭에 병행하는 횡렬과 그것과 직각 으로 교차하는 종렬이 확인된다.<그림 17> 발굴자는 이들은 기둥이 서로 연결되어 コ 자 형 태를 이루어 도크와 같은 배를 계류하기 위한 시설이었다고 보고 있다. 또한 D지점의 기둥들

86 86 <그림 15> 노시마죠[能島城] 전체도 <그림 16> 노시마죠[能島城] 남부평탄지 유구도 <그림 17> B지점 암초 유구도

87 87 도 배를 정박하기 위한 잔교로 추정되고 있다. 그림에 있는 물결선은 바다 쪽이 간조선, 산 쪽 이 만조선이다. 게이요 제도에서는 간만의 수위차가 약 4m로 큰 것이 특징인데, 이 기둥들로 만들어진 구조물을 방어시설로 생각하지 않고 간만의 창에 따른 배의 접안, 정박 시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들 유구에서 방어 기능성이 두드러지지 않는 것은, 나와바리[縄張 り]에도 성의 방어적 특성이 보이지 않는 등 노시마죠 전체의 구조에도 공통되고 있다. 이 섬 의 기능이 해상의 요해로서 방어시설을 지닌 전쟁용의 성이 아니라 세토 내해 항로의 중요 지 점에 위치하면서 배를 중심으로 한 해상활동의 거점으로서의 기능을 중시하는 것에 있었다고 이해된다. 4. 해성(海城)의 기능과 해방(海防) 이상 검토한 바와 같이 넓은 의미에서의 해역(海域)의 권익 및 사람 물자 정보가 집중하 는 정치 경제의 중심지인 항만 도시의 권익을 안정적으로 권력의 지배하에 두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해성(海城)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성(城)과 경제 권익의 관계를 살펴보면 - 바 다만이 아니라 육지도 마찬가지인데 - 중세의 권력은 생각과 같이 커다란 것이 아니었다. 전 국시대의 다이묘[大名]을 포함하여 독자적 힘으로 도시를 만드는 것 보다 기존의 경제 권익이 존재하는 곳에 가서 그곳에 기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 후 점차 힘을 길러서 그 공간 을 자신이 지배하는 곳으로 바꾸는 방식을 취하였다. 15세기까지는 그러한 공간에 다테[館]가 만들어졌고, 그 이후에는 성(城)이 축조되었다. 따라서 중세에는 해성(海城)에서 협의의 의미 에서의 해방(海防) 시설 및 그러한 기능이 현저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해역의 권리에 대한 보전 및 지배라고 하는 관점에서는 해성(海城)이 단독적으로 존 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되는 해역 네트워크를 구성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특히 육상의 가도(街道)라는 한정된 선(線)을 지배하는 것과는 달리, 넓은 바다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성격이 더욱 필요하였다. 해관(海関)의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도 네트워크는 효과적 이었다. 게이요 제도 및 에도 만의 거점이 되는 해성의 분포는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바다만이 아니라 비와코[琵琶湖]나 동일본 지역의 가스미가우라[霞ヶ浦]를 비롯한 내륙의 넓 은 수면세계(水面世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1576년에 비와코[琵琶湖]의 곶 모양으로 돌출된 지 역에 아즈치죠[安土城]를 축성하고, 이어서 일족 및 휘하의 장수들에게 나가하마죠[長浜城], 사카모토죠[坂本城], 오오미조죠[大溝城] 등의 호상교통(湖上交通)의 요지에 호숫가의 성들을

88 88 만들게 하여 비와코에 아즈치죠를 중심으로 하는 호수의 네트워크를 완성시켰다. 세토 내해 나 비와코에서 안전하게 항행할 권리를 인정받은 배는 무라카미 씨 등이 발급한 과소기(過所 旗)나 기치[幟]를 배에 게양하여 항행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감시에 의한 정보전달은 봉화나 깃발에 의해 성에서 성으로 전해졌다. 이러한 네트워크야말로 해성(海城)이 지닌 해방(海防) 기능을 최대한으로 살린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89 89 참고 인용문헌 본문 중에는 직접 인용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이 발표문은 다음과 같은 연구성과들을 활용하여 발표자가 정리한 것이다. 井上繭子, 2008, 博多の元寇防塁, 中世都市博多を掘る 愛媛県教育委員會, 2002, しまなみ水軍浪漫のみち文化財調査報告書 埋蔵文化財編 大庭泰時, 2008, 考古学から見た博多の展開 中世都市博多を掘る 大庭泰時, 2009, 中世日本最大の貿易都市博多遺跡群 佐伯弘治, 2003, モンゴルの襲来の衝撃 日本の中世 9 柴田圭子, 2003, 瀬戸内海における海賊の世界 戦国時代の考古学 柴田龍司, 2008, 海城の様相と変遷 中世城郭研究 22号 滝川恒昭, 1994, 戦国期江戸湾岸における 海城 の存在形態 千葉城郭研究 3. 田中 謙, 2012, 能島城における海岸遺構の構造と機能 西国城館論集Ⅱ 中国 四国地区城館調査検討会 中井 均, 1997, 近江の城 城が語る湖国の戦国史 福岡市教育委員會, 1992, 博多 32 博多遺跡群第68次発掘調査報告 福岡市教育委員會, 2002, 博多 85 博多小学校建設に伴う埋蔵文化財発掘調査報告書 柳田純孝, 1988, 元寇防塁と中世の海岸線 東アジアの国際都市博多 よみがえる中世1 山内 譲, 1997, 海賊と海城 瀬戸内の戦国史 平凡社選書168 도판 인용문헌 원구 방루(元寇防塁) 관련 도판 중 <그림 1>은 참고 인용문헌 1과 13을 참고하여 작성하였고, <그림 2>는 참고 인용문헌 12, <그림 4~6>은 참고 인용문헌 11에서 인용하였다. 해성(海城) 관련 도판 중 에도 만(江戸湾) 지역의 <그림 7~11>은 참고 인용 문헌 8에서 인용하였고, 게이요 제도(芸予諸島) 지역의 <그림 12~14>는 참고 인용문헌 2, <그림 15~17>은 참고 인용문헌 9에 서 인용한 것이다. 여기에 밝혀 감사를 표한다.

90 90 日本 中世の海洋防御遺跡 元寇防塁と海城 小野正敏 人間文化硏究機構 Ⅰ. はじめに Ⅱ. 元寇防塁 Ⅲ. 海城-江戸湾と瀬戸内海芸予諸島 Ⅰ. はじめに 日本は周囲を海に囲まれていながら 中世においては 海からの大きな脅威に備 えた防御施設の建設はあまり顕著ではなかった それは原則的に海は交易や人 文化 の交流の世界として開かれた場であるという意識が優先され そのための機能が重視 されていたからと思われる しかし 長い歴史の中では 何回かの大きな出来事があった 古代においては 白村江の戦いに破れた翌年664年に天智天皇が国防のために対馬 壱岐 筑紫に防 人と烽を置き 太宰府を固め さらに対馬の金田城 瀬戸内海の長門 讃岐屋島城 大和高安城に山城が造られた また 幕末 18世紀以降に欧米の東アジア進出が盛 んになると 江戸幕府はその侵攻に備えた 台場 や 砲台 を日本列島各地の海岸に造 り また 江戸城の入り口である江戸湾 東京湾 では湾の周囲の海岸線に砲台を建造 しただけではなく 湾を横断するように湾内にも人工島の台場を建設した そこには

91 91 海外からの具体的な脅威がある時に それに対応する姿がある 今回のテーマである中世における海からの脅威に備えた防御施設としては 第一に もっとも顕著な例として鎌倉幕府が2回目の蒙古襲来に備えて建設した元寇防塁があ る これは目的も築造年代も非常に明確なものである また 第2に 海賊城 とか 海城 と呼ばれている海と密接な関係をもって造られた城がある 近年 この各分野 の研究が進展しつつあり その特徴的な姿が報告されている しかし 海城そのもの の定義やその機能についてさまざまな見解があり まだ多くの課題が残されている Ⅱ. 元寇防塁 1.元寇防塁とは何か 1274年 文永11年 10月に 元軍は対馬 壱岐に上陸し 島を征服 さら に松浦を経由して博多へ向かった 博多湾に到達した元軍は 今津 百道原から上陸 し 博多では激しい戦闘となり 元軍が優勢のまま進むが なぜか一夜のうちに撤退 して終了した 鎌倉幕府は 元の再度の襲来に備え 博多周辺の守りを固める政策を <図 1> 博多元寇防塁分布図

92

93

94

95

96

97

98

99

100

101

102

103

104 104 参考引用文献 本文中には 直接引用を注記してないが この報告は 下記の文献による成果を使いながら報告者 がまとめたものである 井上繭子, 2008, 博多の元寇防塁, 中世都市博多を掘る 愛媛県教育委員會, 2002, しまなみ水軍浪漫のみち文化財調査報告書 埋蔵文化財編 大庭泰時, 2008, 考古学から見た博多の展開 中世都市博多を掘る 大庭泰時, 2009, 中世日本最大の貿易都市博多遺跡群 佐伯弘治, 2003, モンゴルの襲来の衝撃 日本の中世 9 柴田圭子, 2003, 瀬戸内海における海賊の世界 戦国時代の考古学 柴田龍司, 2008, 海城の様相と変遷 中世城郭研究 22号 滝川恒昭, 1994, 戦国期江戸湾岸における 海城 の存在形態 千葉城郭研究 3. 田中 謙, 2012, 能島城における海岸遺構の構造と機能 西国城館論集Ⅱ 中国 四国地区城館調査検討会 中井 均, 1997, 近江の城 城が語る湖国の戦国史 福岡市教育委員會, 1992, 博多 32 博多遺跡群第68次発掘調査報告 福岡市教育委員會, 2002, 博多 85 博多小学校建設に伴う埋蔵文化財発掘調査報告書 柳田純孝, 1988, 元寇防塁と中世の海岸線 東アジアの国際都市博多 よみがえる中世1 山内 譲, 1997, 海賊と海城 瀬戸内の戦国史 平凡社選書168 図版引用文献 元寇防塁に関するは 図1は文献1 13を参考に作成し 図2は文献12より 図4 6は文献1 1からの引用である 江戸湾の海城関係の図7 11は 文献8よりの引用である 芸予諸島に関する 図は 図12 14は文献2より 図15 17は文献9より引用したものである 記して感謝します

105 105 일본 중세의 해양방어유적 - 원구방루(元寇防塁)와 해성(海城) 에 대한 토론문 나 동 욱 부산근대역사관 1. 현재까지 일본 전국에 존재하고 있는 성의 총 수는 3~4만여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 부분은 일본의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1334~1573)부터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에 걸쳐 축 조된 중세성곽으로 근세 초두에 대부분 폐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성곽의 발달사에서 볼 때 성곽에 석축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은 16세기 후반으로서 그 이전에는 거의 토축이나 해자, 목책으로 방비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고대의 경우 일본의 성곽 건축은 7세기 중반 백제기술자의 지도로 시작됐다는 것이 통설 이다. 당시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해 쌓은 것으로 알려진 조선식산성(朝鮮式山 城)과 신롱석식 산성(神籠石式山城)은 외래의 석축기술을 이용한 성곽으로 국제적 긴장관계 가 해소되자 더 이상 축조되지 않았다. 중세에 들어와서 성곽은 방어성이 높은 산성이 구축되 었으나 여전히 토루와 해자[空堀: 隍], 목책(木柵) 등이 주요 방어시설이었고 성의 입지도 산 성(山城)과 산록의 거관(居館) 형태로 변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1274년과 1281년에 몽고군의 내습을 방어하기 위하여 하카타만 서쪽 이마즈에서 동쪽 가시이 해안에 이르기까지 구축한 석축의 원구방루(元寇防塁)는 성벽의 높 이와 너비가 3m 전후인 길이 20km의 장성(長城)으로 일본에서는 그 유례가 없는 것이다. 일본 중세 최대의 대외전쟁의 산물인 원구방루는 고대 대륙계의 축성기술과는 달리 규슈

106

107

108

109

110

111

112 112

113 113 류큐국[琉球国]의 해양방어체제와 시설 池田榮史 日本 琉球大學 *번역 : 최연식(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Ⅰ. 머리말 Ⅱ. 류큐열도의 지리적 구분과 간략한 역사 Ⅲ. 류큐국의 등장과 초기의 해양방어체제 Ⅳ. 류큐국의 해양방어체제와 시설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일본 열도는 동아시아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남북으로 길게 연결되어 있는 섬들이다. 이 때문에 일본 열도의 주변에는 여러 개의 내해(内海)라고 부를 수 있는 해역들이 존재한다. 즉, 일본열도와 아시아 대륙 연해주 및 한반도와의 사이에는 동해가 있고, 한반도 및 아시아 대륙과 일본 열도의 큐슈 섬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류큐 열도, 대만 섬 사이에는 중국해가 있다. 아시아 대륙에서 일본열도를 거쳐 동쪽으로 향하면 멀리 남북아메리카 대륙이 있는데, 그 사이에는 태평양이 펼쳐져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일본 열도의 주변은 모두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바다는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섬들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 통행을 가로막는 장벽인 동시에 통로의 역할을 하였 다. 이것은 일본열도 안에 사는 사람들만의 관계만이 아니라, 동해나 동중국해, 나아가 대만 섬의 남쪽에 위치하는 남지나해를 포함하여, 바다는 일본 열도의 사람들과 동아시아, 나아가 남아시아까지를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바다를 매개로 한 사람들의 교류의 역사와 그것이

114 114 각각의 지역에 미친 다양한 영향들을 연구의 주제로 삼기 위한 시도로서 일본에서는 아시아 사람들을 때로는 가로막고, 때로는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였다고 하는 아시아 해역사 라는 연구 분야가 제창되고 있다.1 일본에서의 아시아 해역사 연구 주제들은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최근 많은 연구자들이 주목하고 있는 주제가 일본 열도의 남쪽에 위치하면서 한반도, 아시아 대륙, 대만 섬 등과 함 께 동중국해를 둘러싸고 있는 류큐 열도의 역사적 위치에 대한 것이다. Ⅱ. 류큐열도의 지리적 구분과 간략한 역사 류큐 열도는 일본의 큐슈 섬에서 중화민국의 대만 섬 사이의 약 1,200km의 바다에 점재 하고 있다. 약 2백 여 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 큐슈 섬에 가까운 요론섬 [与論島]까지 약 40개 섬은 가고시마현[鹿児島県]에 나머지 약 160개의 섬은 오키나와현[沖 縄県]에 소속되어 있다. 류큐 열도는 기후나 동식물의 분포, 혹은 역사 및 문화적 차이 등에 따라 북 중 남의 3분설과 남북으로 구분하는 2분설이 제시되고 있다.2 이 중에서 3분설은 오쿠마제도[大隅諸島]를 북부권, 아마미제도[奄美諸島]에서 오키나와 제도[沖縄諸島]까지를 중부권, 미야코제도[宮古諸島]에서 야에야마제도[八重山諸島]까지를 남부권으로 구분하고 있다. 한편 2분설에서는 오쿠마제도에서 오키나와제도까지를 북류큐, 미야코제도에서 야에야마 제도까지를 남류큐로 구분하고 있다. 3분설과 2분설의 차이는 2분설에서 북류큐로 보는 지역 을 3분설에서 다시 둘로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2분설은 일본 열도의 죠몽문화[縄文文 化]의 영향이 미친 북류큐와 미치지 않은 남류큐의 문화 내용을 설명할 때에 유효하다. 이에 대해서, 3분설은 야요이문화[弥生文化] 이후 기본적으로는 큐슈섬의 영향하에 들어 있던 오쿠마제도와 큐슈를 통하여 일본 문화와 관계를 가지면서도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마침 1) 1980년대 이후 일본에서는 동아시아사 연구 방법으로서 2국간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대외교섭사나 대외교류사뿐 아니라 동해나 동중국해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제국, 나아가 그들을 넘어 확대되는 국제관계를 다루려는 시각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무라이 쇼 스케[村井章介], 1988, アジアの中の中世日本, 校倉書房.). 이에 기초하여 환일본해해역 이나 환동지나해해역 등을 설정하 여 바다를 매개로 한 사람, 물건, 현상 등의 움직임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2) 류큐 열도를 역사 문화적 차이에 의해 셋으로 구분하는 설은 고쿠부 나오이치(国分直一, 1966, 南島の先史土器, 考古学研究 12-2)등, 한편 2분설은 아자토 아사토 시쥰(安里嗣淳, 2011, 先史時代の沖縄, 第一書房.) 등에 의해 제시되고 있다.

115 115 내 류큐국을 성립하였던 아마미제도에서 오키나와 제도까지의 섬들의 문화 내용을 설명할 때 에 유효하다. 이와 같은 복수의 지역 구분설이 제시되고, 또한 그 유효성을 둘러싸고 활발하 게 논의되는 배경에는 류큐열도의 섬들 대부분이 일본 중세시대에 오키나와섬에 왕도(王 都)를 두었던 류큐국의 판도에 포함되는 등 일본의 다른 지역과는 구분되는 독자적 역사를 가 졌던 사실이 있다. 이제 지리적 구분설 중의 3분설에 기초하여 각각의 지역의 역사를 개관해 보면, 북부권은 기본적으로 일본사의 틀에 위치 짓는 것이 가능하다. 이와 달리 중부권은 죠몽문화 단계에서 는 죠몽문화의 분포 범위에 포함되지만 야요이문화 단계에 들어와서도 야요이문화로 이행하 지 않고 계속하여 죠몽문화와 같은 수렵 어로 채집 경제에 의존하는 문화가 유지된다. 이 문 화는 오키나와 패총 후기문화로 불리며, 10세기경까지 계속된다. 오키나와 패총 문화 단계에 는 야요이문화를 비롯한 일본 문화의 영향을 산발적으로 받으면서도 일본 문화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11세기에 들어오면 중부권 전역에 농경생산이 정착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점차 사회적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추측되고 있다. 이후 14세기 후반 명(明) 왕조의 성립 이후 중부 권 중의 오키나와 섬에 명 왕조의 책봉을 받는 복수의 정치세력이 출현하게 된다. 15세기 전 반이 되면 오키나와 섬의 정치세력이 하나로 통합되고, 이 세력이 점차 주변 섬들의 정치세력 을 지배하에 두면서 류큐 열도 전역의 통합을 추진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한편 남부권에서는 11세기까지도 중부권이나 북부권과는 전혀 다른 수렵 어로 채집에 의존하는 문화가 단속적(斷續的)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단계에는 남부권과 류큐 열도 북 중 부권 사이에 전혀 교류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중부권이 농경사회로 이행하는 11세기 단계에 들어와서는 중부권의 영향 하에 남부권도 농경사회로 이행하게 된다. 이 단계부터 류 큐 열도 중부권과 남부권 사이에 교류가 생겨나 같은 문화권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나아가 16세기에 들어와 오키나와 섬을 통합한 정치세력이 남부권의 섬들을 지배하에 두면서 중부권 과 남부권은 류큐문화권으로 통합되게 된다. 14세기 후반에 명 왕조의 책봉을 받아 조공국이 된 오키나와 섬 세력과 그 지배 영역을 명 왕조에서는 류큐국이라고 불렀는데, 그 판도가 류 큐 열도의 중부권과 남부권을 포함하는 범위로 확대된 것은 류큐 열도의 남부권이 중부권에 성립된 정치세력의 지배하에 들어간 16세기였다. 명 왕조와의 사이에서 시작된 류큐국의 책봉은 명 왕조의 뒤를 이은 청(清) 왕조와의 사이 에서도 지속되었다. 류큐국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명 청 왕조에 의한 책봉을 받는 조공관 계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초에 일본의 군사적 지배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막부[徳川幕 府]의 인가 하에 1609년 시마즈씨[島津氏]가 류큐국에 무력 침공을 감행한다. 시마즈씨는 류

116 116 큐국 제압 이후 류큐국의 지배하에 있던 중북권 북쪽의 아마미 제도를 직할영지로 빼앗고, 오 키나와 섬 및 서쪽의 중부권과 남부권의 섬들만을 류큐국의 판도로 남겨 두었다. 또한 시마즈 정복 이후의 류큐국은 이전과 같이 독립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고 명 청 왕조에 조공관계를 유지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시마즈 씨를 통하여 일본의 막번체제(幕藩体制)에 포함되었다. 이 양속관계(両属関係)는 도쿠가와 막부가 망할 때까지 지속되는데,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 정부는 1879년 류큐국을 없애고 오키나와 현을 설치하여 류큐국의 판도를 강제적으로 일본 국가에 편입시켰다. 일본의 메이지 정부에 의한 류큐국 병합에 대하여 류큐국에서는 여러 차례 저항 운동이 일어났지만 1895년 일본이 청일전쟁에 승리하면서 저항 운동은 점차 사라지게 되고, 오키나 와현으로서 일본화가 진행되어 간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일본 본토 방위의 전초전 으로 위치 지어진 오키나와 섬을 중심으로 하는 지상전(=오키나와 전투)이 일어나 주민들에 게 크고 많은 피해를 주었다. 오키나와 전투 이후의 오키나와 현은 일본의 행정에서 분리되어 27년간 미군의 지배를 경험하였다. 이것은 현지 사람들의 의향과 관계없이 국제적 정치 관계 의 요구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과 오키나와 전투 및 미군 지배의 경험은 오늘날에도 류큐 열도의 사람들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국가로서의 일본의 존재 방식에 대해 강한 의문을 갖게 하는 동시에 일찍이 류큐 열도에 존재하였던 류큐국에 대하여 동경을 포함한 강한 관심을 갖고서 류큐국 및 류큐 문화에 대한 연구에 주목하게 하는 토대가 되고 있다.3 Ⅲ. 류큐국의 등장과 초기의 해양방어체제 14세기에 성립한 명 왕조의 초유에 응하여 조공사절을 파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류큐국은 아시아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아시아 각지에 남아 있는 문헌기록에는 그 이전의 류큐 열도에 국가조직이라고 인정될 수 있는 정치세력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수서(隋書), 유구 전(流求傳) 에 기록되어 있는 지지(地誌)적 기록이나 일본의 육국사(六国史) 에 보이는 남도 인(南島人)에 대한 기록 등이 확인되는 정도에 불과하다. 3) 류큐, 오키나와 역사에 대해 개설한 근래의 책으로는 도미야마 가즈유키[豊見山和行](豊見山2003)와 아사토 스스무[安里進] 다카라 구라요시[高良倉吉]외(2004, 沖縄の歴史 (県史47), 山川出版社.) 등이 있다.

117 117 류큐국에 관한 명 왕조의 기록은 명사(明史) 나 명실록(明実録) 을 비롯한 문헌에서 확 인된다. 류큐국 내부의 기록으로는 명 청 왕조를 비롯한 동 동남아시아 나라들과의 외교 관 계 문서를 기록한 역대보안(歴代宝案) (1424~1867년 사이의 외교문서집성)이 존재 한다. 또한 류큐국에서는 17세기에 들어와 국사 관계 사료의 편찬사업이 시작되어 중산세감(中山 世鑑) (1650년 편집)이나 중산세보(中山世譜) (蔡鐸本 1701년 간행, 蔡温本 1725년 간 행), 내정 기록으로서의 구양(球陽) (1743~45년 편집, 이후 1877년까지 추기됨) 등이 정리 되었다. 류큐국과 함께 명 청 왕조와 책봉관계를 맺고 있던 조선 왕조에 남아 있는 역사자료 로서는 조선왕조실록 및 신숙주(申叔舟)가 지은 해동제국기(海東諸国紀) (1471년 간 행)에 류큐국에 관한 기록이 보이고 있다.4 13세기 말에서 14세기에의 류큐 열도에서는 각지에 구스크(グスク)라고 불리는 시설이 출현하고 있다. 오키나와현 교육위원회가 실시한 구스크 분포조사에 의하면 각각의 구스크에 관한 규모나 구조를 포함한 정보에 상당한 격차가 있기는 하지만 오키나와현 내에 약 3백 개 소가 존재하고 있다. 이 중에서 고고학적인 조사가 행해진 구스크에는 주위를 책열(柵列)이나 석루(石壘, 城壁) 등으로 둘러싼 방어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구스크는 류큐 열도 의 섬들이 군사적 긴장관계에 덮이게 된 것을 계기로 출현하였다고 생각되고 있다(오키나와 현 교육위원회[沖縄県教育委員会] ). 류큐사 연구에 의한 이제까지의 이해는 11세기에 시작된 농경사회가 발전한 결과, 농경지 나 수확물(부)의 소유와 분배를 둘러싼 사회적 긴장의 발생을 계기로 하여 집락을 단위로 하 는 방어를 목적으로 한 간단한 시설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13세기말부터 14세기에 걸쳐서 구 조화되면서 구스크가 성립되었다고 한다. 그 후 지역 수장에 의한 구스크의 점유(占有) 및 거 성화(居城化)가 진전되고, 15세기에는 류큐 열도 각지에 대형화된 거점적 구스크가 등장한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서는 오키나와 섬에 성립된 세력에 의해 류큐 열도의 정치적 통합이 도모된 결과 구스크의 사용과 새로운 축조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된다. 최종적으로는 왕성 (王城)으로서의 슈리성[首里城]을 정점으로 하는 구스크군(群)만이 류큐국의 행정시설 및 군 사시설, 혹은 제사시설로서 지속적으로 사용되게 된다.5 4)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国紀) 에 대해서는 다나카 다케오(田中健夫, 1991, 海東諸国紀ー朝鮮人の見た中世の日 本と琉球ー (岩波文庫 ) 岩波書店.) 역주본을 참조하였다. 5) 구스크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아사토 스스무(安里進, 1987, 琉球 沖縄の考古学的時代区分をめぐる諸問題(上), 考古学研究 34-3) 등에 의해 역사적 평가가 행해져 왔다.

118 118 일반적으로 구스크는 해안 및 저평지를 굽어보는 얕으막한 구릉 및 단구의 끝부분에 축조 되고 있다. 100~1000 전후의 평지를 조성하고, 그것을 책열 및 석루(성벽)로 둘러싸는데, 성립 단계부터 방어를 의도한 군사적 기능이 확인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하였다. 이제까지의 류큐사 연구에서는 13세기 말부터 14세기의 구스크 성립 요인을 류큐 열도사회 내부의 군사 적 긴장에서 찾았다. 하지만 13세기 말의 아시아 세계를 살펴보면 1279년에는 원(元)이 남송 (南宋)을 멸망시켰고, 이어서 원은 일본과 베트남에 대한 침공을 도모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 들을 감안하면 구스크의 축조에는 이와 같은 원의 군사 행동이 야기한 아시아 각 지역의 긴장 관계의 영향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이케다 요시후미[池田榮史] 2007). 또한 구스크 성립기와 겹치는 14세기에는 한반도에서 산동반도를 포함한 동중국해 북부 해역에서 전기(前期) 왜구의 활동이 격화되고 있다. 왜구는 일본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멸망(1333년)과 그 후의 남북조(南北朝)의 내란(內亂)에 의하여 정치적 혼란 상태에 빠진 서 일본, 특히 큐슈 연안 지역에서 도당(徒堂)을 결성하여 해적 행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출현 한 결과라고 여겨지고 있다.6 왜구는 한반도 연안부를 중심으로 하여 산동반도를 포함한 중국 대륙연안부 지역 등에서 준동하면서 고려와 원의 국력을 피폐하게 하였다. 왜구들의 활동이 격화되는 가운데 1368년에 원을 멸망시키고 건국한 명 왕조는 주변 나라들에 대하여 조공을 요구하는 초유사(招諭使)를 파견하는데, 이때 일본에 대해서는 왜구의 통제를 요구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일본은 남북조 쟁란이 한창이어서 이 쟁란이 종식되는 14세기 말까지 왜구 의 준동은 중단되지 않았다. 이와 달리 류큐국은 명 왕조의 초유에 응하여 1372년부터 조공 을 시작하였고, 명 왕조는 해선(海船)을 제공하는 등의 우대책으로 류큐국을 상대하였다. 이 것은 류큐국이 일본을 대신하여 왜국 대책을 추진하는 담당 세력이 되기를 기대하는 동시에 류큐 열도가 왜구의 거점으로 되는 것을 두려워한 대응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점들을 고 려하면 류큐 열도에는 명 왕조로부터 책봉을 받은 이후에 왜구에 대한 방어시설로서 축조된 구스크, 혹은 책봉 전후의 단계에 왜구가 류큐 열도를 거점으로 삼기 위해 축조한 구스크가 존재할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년에 명 왕조에 대한 조공을 개시한 류큐 열도의 정치세력은 류큐중산왕(琉球中山 6) 왜구(倭寇)에 관한 연구는 다나카 다케오(田中健夫, 2012, 倭冦ー海の歴史ー 講談社学術文庫版 (初版 教育社歴史新書 日本 史66)의 저작을 참고하였다. 7) 종래의 구스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류큐 열도의 內的 발전론 으로 일관되었다. 하지만 구스크 축조의 배경에는 對外關係 를 포함한 다양한 요인들을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119 119 王)이었다. 이에 이어서 1380년에 류큐산남왕(琉球山南王), 1383년에 산북왕(山北王)이 명 왕조의 책봉을 받아 조공을 개시한다. 류큐 중산왕은 오키나와 섬 우라조에시[浦添市] 우라조 에 구스크(浦添グスク), 산남왕은 오키나와섬 이토만시[糸満市] 난잔구스크(南山グスク), 산 북왕은 오키나와섬 나키진촌[今帰仁村] 나키진구스크(今帰仁グスク)에 각기 왕성을 두고 있 었다. 이 단계에는 아직 류큐 열도를 통일한 정치세력은 성립되지 않았다. 중산왕의 왕성인 우라조에성[浦添城]은 표고(標高, 해발) 130~140m의 석회암 구릉 위에 있으며, 동서 약 300m, 남북 약 100m의 범위를 석루로 둘러싸고, 내부에 복수의 구획을 만들었다. 석루의 외 측 완만한 경사면에는 산지를 깎아 만든 낭떠러지(일본의 성곽 용어로는 기리기시[切岸]라고 함)와 해자를 둘러 중층적인 방어기능을 갖추고 있다. 또한 우라조에 구스크의 주변에는 여러 개의 집락 유적이 둘러싸고 있는데, 죠카마치[城下町]적 기능을 담당하였다고 생각된다. 산남 왕의 왕성으로 여겨지는 난잔성[南山城]은 표고(標高, 해발) 약 50m의 석회암 단구산에 있으 며, 동서 약 250m, 남북 약 150m의 범위를 석루(성벽)으로 둘러싸고 있다. 현재 초등학교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에 상세한 구조는 알 수 없다. 산북왕의 왕성이었던 나키진성[今帰仁城]은 표고(標高, 해발) 90~100m의 석회암 구릉상에 축조되었으며, 남북 약 400m, 동서 약 200m의 범위에 석루(성벽)으로 둘러싼 네 개의 성곽(郭)이 만들어져 있다. 석루는 10m 이상 의 비고차(比高差)가 있는 부분이 있으며, 가장 높은 부분에 설치된 하나의 성곽(郭)을 중심으 로 하여 엄중한 방어 구조를 갖추고 있다. 구스크에서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면에는 집락 유적 이 확인되고 있으며, 구릉의 끝부분에는 나키진 구스크의 지성(支城)이라는 전승을 가진 유적 도 존재하고 있다.8 이와 같은 14세기 후반 오키나와 섬에 할거하였던 정치세력들의 왕성 구스크를 보면 각기 야트막한 구릉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를 석루(성벽)으로 둘러싼 구조를 하고 있다. 이것은 구 스크가 군사적으로 유리한 지역을 장악한 후 그에 방어기능을 부가하여 축조된 시설임을 명 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우라조에 구스크나 나키진 구스크는 석루로 둘러싼 왕성의 주 변부에 죠카마치[城下町]로 비정되는 집락 유적들이 확인되고 있는데, 구스크는 석루(성벽)으 로 둘러싸인 단독의 건조물이 아니라 주변의 집락 유적을 포함한 복합적인 유적군의 중심적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왕성이 된 구스크의 방어시설은 이들 주변 유적을 포 8) 각 구스크의 입지 및 규모, 구조 등에 대해서는 각각의 구스크 발굴보고서를 비롯하여 오키나와 현 교육위원회[沖縄県教育委員 会]에 의한 구스크 분포조사보고서(1983, ぐすくーグスク分布調査報告(Ⅰ)ー沖縄本島および周辺離島ー, 沖縄県文化財 調査報告 53)를 참고하였다.

120 120 함하는 일대를 대상으로 하여 계획적으로 배치되었다고 생각되며, 그 중에서 가장 중요시된 시설이 구스크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구스크에 대한 조사 연구는 기본적으로 석루(성벽)과 그 내부의 유구 및 유물 구성을 파악하고, 그 연대적 추이를 해명하는 것에 중점이 두어져 있었다. 이 때문에 각각의 구스크를 주변 유적을 포함하는 유적군으로서 파악하고 유적군 전체의 배치 상황 및 각각의 기능을 상세하게 복원하는 이해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 전반에 걸쳐서 명 왕조로부터 책봉을 받은 정치세력이 거점으로 삼았던 왕성(구스 크)과 그 방어시설의 실태 해명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조사 연구의 진전을 기다려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Ⅳ. 류큐국의 해양방어체제와 시설 15세기에 들어와 류큐국 내부에서는 명 왕조와 책봉 관계를 맺은 정치세력들의 흥망이 일 어났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류큐 중산왕은 1406년에 왕권이 교체되고, 이에 수반하여 왕성도 우라조에 구스크에서 슈리구스크(首里グスク)로 이동하였다. 새로운 중산왕 왕통을 류큐사에 서는 제1상씨(尚氏) 왕통이라고 부른다. 제1 상씨 왕통이 왕성으로 삼은 슈리 구스크는 표고 (標高, 해발) 약 130m의 석회암 구릉상에 축조된 동서 약 400m, 남북 약 270m, 면적 약 47,000 의 석루(성벽)으로 둘러싸인 성곽이다. 축성 당시는 한 겹의 성벽이었지만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중엽에 걸쳐 두 차례에 걸쳐 증축되어 2중의 성벽을 가진 류큐 최대의 왕성 이 되었다. 제1상시 왕통은 1416년에 산북왕, 이어서 1427년에 산남왕을 멸망시키고 오키나와 섬 내부의 통일을 이루었다. 그 후 제1상씨 왕통은 1460년까지는 아마미 제도를 지배하에 넣었 지만 1469년에 다시 왕위 찬탈이 일어나 새로운 왕통으로 바뀌었다. 이 새로운 왕통을 류큐 사에서는 제2상씨 왕통이라고 부른다. 제2상씨 왕통은 오키나와 제도와 대만 섬 사이에 위치 하는 미야코, 야에야마 제도에의 압력을 강화하여, 16세기초 경에는 이 지역을 지배하에 두 었다. 그 결과 제2상씨 왕통 시대의 류큐국은 아마미 제도에서 미야코, 야에야마 제도까지를 포함하는 류큐 열도의 중 남부권 전 지역을 판도로 하는 도서해역국가(島嶼海域国家)로 성장 하였다. 이후 이 제2상씨 왕통은 메이지 정부에 의한 류큐국 병탄 때까지 존속하였다. 제1 상씨 왕통 및 제2상씨 왕통 지배하의 류큐국에서는 명 청 왕조와 맺은 책봉관계에 기

121 121 초하여 행해진 조공무역이 국가 운영의 커다란 기둥이었다. 즉 조공무역에 의해 입수한 다양 한 중국 산물을 일본 및 섬라(暹羅, 태국), 조와(爪哇, 자바), 삼불제(三仏斉, 슈리비자야) 등 의 동남아시아 제국에 가지고 가 각 지역의 특산물과 교역하고, 그것을 다시 다른 나라와의 교역 물자로 삼는 중계무역을 활발히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성공을 거둔 배경에는 명 왕 조가 건국할 때 사무역(私貿易)을 금지한 해금령(海禁令)의 반포가 있었다. 해금(海禁)정책 아 래에서 주변 여러 나라들이 명 왕조에서 생산된 중국 산물을 입수하기 위해서는 조공무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류큐국은 이러한 명 왕조의 대외정책과 지리적 환경을 활용하여, 명 왕조와의 조공무역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많은 산물을 입수하고서 그것들을 주변 나라들 과의 교역에 이용하였다.9 명 왕조는 류큐국으로부터의 조공선에 대하여 당초는 천주(泉州, 현재의 복건성 천주 시)로 들어올 것을 요구하였지만, 1472년 이후에는 복주(福州, 현재의 복건성 복주시)로 바꾸 었다. 또한 조공을 개시할 때에는 류큐국에 해선(海船)을 지급하였고, 해선의 운항을 담당하 는 사람들도 대부분 복건계 중국인들이 관여하였다. 왕성을 슈리 구스크로 옮긴 제1 상씨 왕 통은 슈리의 눈앞에 위치하는 나하[那覇]의 섬에 항만을 정비하고, 여기에 대외교역의 거점을 마련하였다. 당시 이 섬은 우키지마[浮島]라고 불렸으며, 14세기 이래 중국계 사람들이 거주 하는 거류지인 당영(唐栄)=구메무라(久米村) 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1452년에 는 우키지마와 슈리를 연결하는 석교(石橋)인 장홍제(長虹堤)가 만들어졌으며, 같은 시기에 우키지마 남쪽에 위치하는 작은 섬의 주변부를 석루(성벽)으로 둘러싼 오모노구스크(御物グ スク)를 축조하여 이곳에 대외무역품의 공적 수장고를 두었다. 오모노구스크는 표고 약 10m, 직경 약 20m의 크기로, 현재는 미군이 사용하는 나하항 시설 가운데 있어 일반인이 출 입할 수 없다. 오모노구스크에 대하여는 조선왕조실록 세조(世祖) 8년조(1463)에 관련 기사가 보이는 데, 성벽 안에 철갑과 창검, 활과 화살 등의 무기와 술이 담긴 큰 항아리들이 놓여 있는 무기 고, 술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해동제국기 에는 오모노 구스크를 보고(寶庫), 우키지 마에 설치된 항구를 나파개진(那波皆津), 중국계 사람들의 거류지를 구면리(九面里), 장 홍제(長虹堤)를 석교(石橋) 라고 기록하는 동시에 슈리 구스크를 유구국도(琉球國都) 라고 적고 3중의 성벽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들 역사자료를 통해 15세기 당시 류큐국에서는 왕성 9) 류큐국의 대외교역 내용에 대하여는 본문(주 3)에 소개한 개설서를 비롯한 다수의 연구서들이 있다.

122 122 인 슈리 구스크와 대외무역 거점인 나하항에 다양한 시설들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하항은 해동제국기 에 기록된 것과 같이 중국계 사람들과 일본계 사람들이 섞여 사는 국 제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국제 관계를 가지고 있던 것에 비하 여는 류큐국의 해양방어시설에 관한 정보는 많지 않다. 문헌기록에는 겨우 슈리구스크의 성 벽과 나하항 내부의 작은 섬에 설치되었던 오모노구스크에 갖추어져 있던 무기 정도를 알 수 있을 뿐이다.10 이 점과 관련하여 조공을 위해 명 왕조에서 류큐에 하사한 해선(海船)이 본래는 명의 연안 부에 배치되어 있던 정규 군선(軍船)으로, 선명(船名)과 군적번호(軍籍番号)가 붙어 있던 점 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락년간(永楽年間, 1403~1424) 류큐에 약 30척이 지급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들 군선들이 나하항을 비롯한 류큐국의 해양방어를 담당하였을 가능 성도 추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거의 밝혀져 있지 않다.11 16세기 중엽에 들어오면 후기 왜구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과 관련하여 나하항의 해양방 어 시설이 확충되고 있다. 나하항의 출입구를 통제하는 위치에 야라자무이구스크[屋良座森グ スク]와 미에구스크[三重グスク]가 축조되어, 나하항을 출입할 때에는 두 구스크사이의 약 200m 정도의 수로(水路)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야라자무이구스크는 1553년에 축조되었는데, 태평양전쟁 이후의 나하항 확장공사로 인해 파괴되어 현존하지 않고 있다. 1930년대의 조사 자료에 의하면 바다 가운데에 돌출한 자연 안벽(岸壁)을 이용하여 그 위에 높이 약 5척(약 1.5m), 두께 5척 9촌(약 1.8m)의 장방형으로 성벽을 두르고, 성곽 내부는 동 서 57척(약 17.3m), 남북 96척(약 29m)이다. 그리고 사방 모두 각각 안에서 성벽 위로 올라 갈 수 있는 돌계단 2곳을 두었다. 고 한다. 미에 구스크는 야라이무이 구스크에 이어서 축조 되었다. 이 때문에 훗날 나하항 남안에 설치된 야라자무이 구스크를 남포대(南砲台), 북안에 설치된 미에 구스크를 북포대(北砲台)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미에 구스크는 바다 가운데에 돌 출한 류큐 석회암의 작은 섬을 석루(성벽)으로 둘러 만들었으며, 구스크에서 나하항 북안의 육지까지의 약 300m 사이에는 다리를 포함한 통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통로의 중간 정도에 는 나카구스크[中グスク]라고 불리는 작은 요새가 있었고, 육지의 물가에는 임해사(臨海 10) 해동제국기(海東諸国紀) 에는 일본과 류큐에 관한 15세기 전반 단계의 정보들이 정리되어 있으며, 류큐국에 대해서는 왕통(王 統)과 왕도(王都), 풍속(風俗) 등에 관한 간단한 설명과 류구국지도(琉球國之圖) 및 류구어음역(琉球語音訳) 이 붙어 있다. 11) 명(明) 왕조의 해선(海船) 하사(下賜)에 대해서는 도미야마 가즈유키(豊見山和行, 2010, 明朝の成立と朝貢開始期の諸問題, 沖 縄県史 各論編第3巻, 古琉球)의 논고를 참조하였다.

123 123 寺)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모두 석루로 둘러싸여 있었다. 현재 미에 구스크의 북쪽은 매립으 로 육지가 되었고, 남쪽만이 바다에 면해 있다. 표고 약 5m, 동서 약 20m, 남북 약 10m의 구 스크 끝 부분에 석루(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으며, 내부에는 등대가 있다. 미에 구스크에서 임 해사에 이르는 통로는 완전히 매립되어 현재는 나하항의 북안벽(北岸壁)이 되어 있다. 야라자무이 구스크에는 1554년(가정 33)의 명문을 가진 야라사모리구스크비(やらさも りくすくの碑) 가 세워져 있다. 여기에는 긴급시에는 사(士) 계층으로 구성된 3개 부대와 각 지방에서 징발된 혼성 부대가 동원되어, 슈리 구스크와 나하 시가지에는 사(士) 계층의 1개 부대씩, 야라자무이 구스크에는 사(士) 계층의 1개 부대와 오키나와 섬 남부의 각 지방에서 징발된 혼성 부대가 경호 방비를 담당하도록 계획되어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류큐국의 군사체제는 죠카마치[城下町]인 슈리에 모여 사는 사(士) 계층으로 구성된 3개의 부 대와 각 지방에서 징발된 혼성 부대가 있었으며, 각 지방에서 징발된 혼성 부대는 각각의 지 역에서 지방 관리의 감독하에 징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류큐사 연구 성과에 의하면 이들 군 사체제는 명 청 왕조와의 조공무역에 종사한 해선(海船)의 선원 조직을 모델로 하여 설정된 편제라고 한다. 류큐 왕국에서는 일상시에는 이 군사체제에 기초하여 사(士) 계급을 편성하 고, 그에 따라 3교대제의 격일 근무가 행해졌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시마즈 씨에 의한 류큐 침공 이후 류큐 국내에서는 병구개(兵具改)가 행해져 무기의 관리와 철포의 금지가 철저 히 행해졌고, 군사조직은 해체되었다. 이 때문에 시마즈 씨 침공 이전 류큐국의 군사체제에 대하여는 자세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많다.12 시마즈씨 침공 이후 류큐국의 군사 문제에 관하여는 시마즈시를 통한 에도막부[江戸幕 府]의 의향이 반영되었다. 17세기 전반의 아시아 지역에는 영국, 네덜란드에 이어 스페인이 진출하기 시작하였는데, 1630년대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총독으로부터 에도막부의 나가 사키대관[長崎代官] 앞으로 스페인에 의한 류큐 침공 계획이 통고되었다. 실제로 스페인은 1640년에 필리핀에서 류큐 침공선을 파견하였지만 폭풍을 만나 조난되어 실패하였다. 이 일 을 계기로 1641년에 시마즈 씨는 류큐에 대하여 철포 100정을 갖춘 경비병을 파견하여 1648년까지 나하와 야에야마제도 중의 이리오모테지마[西表島]의 소나이[祖納]에 주둔시켰 다. 이 때 소나이에서는 대포를 갖춘 돌 발사대(石火矢台)를 설치했다고 한다. 또한 구양(球 陽) 의 1644년(尚賢王 4)의 기사에는 처음으로 봉화를 각처에 설치하였다 고 하여, 오키나 12) 류큐국의 군사편제에 대해서는 다카라 구라요시(高良倉吉, 1987, ヒキをめぐる諸相, 琉球王国の構造, 吉川弘文館.)의 논고 가 있다.

124

125

126 126 琉球国の海洋防御体制と施設 池田榮史 Professor, Cheongju University Ⅰ はじめに Ⅱ 琉球列島の地理的区分と概略史 Ⅲ 琉球国の登場と初期の海防体制 Ⅳ 琉球国の海防体制と施設 Ⅴ まとめ I. はじめに 日本列島は東アジアの東縁に位置し 南北に長く連なる島々である このため 日本列島の周辺にはいくつかの内海とも呼ぶべき海域が存在する すなはち 日本列 島とアジア大陸沿海州 韓半島との間には日本海 韓国では東海 があり 韓半島とア ジア大陸 そして日本列島の九州島から南に連なる琉球列島 台湾島の間には東シナ 海 韓国では東中国海 が存在する アジア大陸から日本列島を経て東へ向かえば 遠 く離れた先に南北アメリカ大陸があり その間には太平洋が広がっている このようにしてみると 日本列島の周辺はすべて海に囲まれており 海は日本列 島を形成する島々の人々にとって通行を隔てる障壁であり また時には通路としての 役割を果たしてきた このことは日本列島内に住む人々のみの関係ではなく 日本海 や東シナ海 さらには台湾島の南に位置する南シナ海を含めて 海は日本列島の人々 と東アジア さらには南アジアの人々との間を時には隔て 時には結ぶ役割を果たし

127 127 てきたと言える このような海を媒介とした人々の交流の歩みと それがそれぞれの 地域にもたらしたさまざまな影響を研究の俎上に載せる試みとして 日本ではアジア 海域史という研究の枠組みが提唱されている 1 日本におけるアジア海域史研究の課題は多岐にわたる なかでも 近年 多くの 研究者に着目されているのが 日本列島の南に位置し 韓半島 アジア大陸 台湾島 とともに東シナ海を取り巻く関係にある琉球列島の歴史的位置づけである II. 琉球列島の地理的区分と概略史 琉球列島は日本の九州島から中華民国台湾島までの間 約1,200kmの海洋中に点在 する 大小約200の島々からなり 現在 九州島に近い与論島までの約40島は鹿児島 県 残りの約160島が沖縄県に属する 琉球列島については 気候や動植物の分布 相 あるいは歴史的文化的相違から北 中 南に三分する考え方と 南北に二分する 2 考え方が提示されている この中の三分案では大隅諸島を北部圏 奄美諸島から沖縄 諸島までを中部圏 宮古諸島から八重山諸島までを南部圏とする また 二分案では 大隅諸島から沖縄諸島までを北琉球 宮古諸島から八重山諸島までを南琉球とする 三分案と二分案の違いは 二分案で北琉球とした範囲について 三分案ではさらに二 分する点にある 二分案は日本列島の縄文文化の影響が及ぶ北琉球と 及ばない南琉 球の文化内容を説明する際に有効である これに対し 三分案では弥生文化以降 基本的には九州島の影響下に含まれる大 隅諸島と 九州島を通して日本文化との関係を持ちながらも独自の展開を遂げ つい には琉球国の成立を見る奄美諸島から沖縄諸島までの島々の文化内容を説明するのに 有効である なお このような複数の地域区分案が提起され またその有効性をめぐ る議論が活発に行なわれる背景には 琉球列島の島々の大半が日本の中世の段階にお 1) 1980年代以降 日本では東アジア史の研究手法として 二国間の関係を前提とする対外交渉史や対外交流史に止まら ず 日本海や東シナ海を取り巻く周辺諸国 さらにはこれを越えて広がる国際関係を取り扱う視点の必要性が提起され た 村井章介1988など これに基づき 環日本海海域 や 環東シナ海海域 などの設定が行なわれ 海を介在したヒ ト モノ コトの動きを対象とする研究が進められつつある 2) 琉球列島について 歴史的文化的に三分する考え方は国分直一 国分1966 らによって また二分する考え方は安里嗣 淳 安里2011 らによって示されている

128

129

130

131

132

133

134

135

136

137

138 138 参考文献 安里嗣淳, 2011, 先史時代の沖縄, 第一書房. 安里進, 1987, 琉球 沖縄の考古学的時代区分をめぐる諸問題 上, 考古学研究 34-3 安里進 高良倉吉 田名真之 豊見山和行 西里喜行 真栄平房昭, 2004, 沖縄の歴史 県史47, 山川 出版社. 池田榮史, 2007, 古代 中世の日本と琉球列島, 東アジアの古代文化 130, 大和書房. 沖縄県教育委員会, 1983, ぐすくーグスク分布調査報告(Ⅰ)ー沖縄本島および周辺離島ー, 沖縄県文化 財調査報告 53., 1990, ぐすくーグスク分布調査報告(Ⅱ)ー宮古諸島ー, 沖縄県文化財調査報告 94., 1993, ぐすくーグスク分布調査報告(Ⅲ)ー八重山諸島ー, 沖縄県文化財調査報告 113 国分直一, 1966, 南島の先史土器, 考古学研究 高良倉吉, 1987, ヒキをめぐる諸相, 琉球王国の構造, 吉川弘文館. 田中健夫, 1991, 海東諸国紀ー朝鮮人の見た中世の日本と琉球ー 岩波文庫 岩波書店., 2012, 倭冦ー海の歴史ー 講談社学術文庫版 初版 教育社歴史新書 日本史 豊見山和行, 2010, 明朝の成立と朝貢開始期の諸問題, 沖縄県史 各論編第3巻 古琉球. 村井章介, 1988, アジアの中の中世日本, 校倉書房.

139 139 류큐국(琉球国)의 해양방어체제와 시설 에 대한 토론문 변 남 주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발표자가 소개하는 유구국은 지금 우리가 있는 현재의 위치에서 직선으로 약 1,000km 남 쪽에 있다. 유구는 현재 우리의 의식에서 거리보다 더 멀리 느껴진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발표자는 유구국이 1368년 건국된 명나라의 책봉국으로 되는 것을 계기로 여 러 나라와 대외관계가 발전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와 일치한다. 고려 말 에 이어 조선에 들어와 매우 긴밀한 관계가 지속적으로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에만 유구국(琉球國) 관련 기사는 370여 건 등장한다. 그 내용의 대부분은 중국이나 일본과 는 다르게 매우 우호적이다. 이런 관계 덕분에 양국에서는 상호간 표류민을 후대하고, 그 대 부분은 일본이나 중국을 거쳐 송환되었다. 전라도에 속했던 제주도와 유구국간 많은 표류사 건이 발생했다. 목포 인근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선조 22년(1589) 유구국 상인 30여 명이 진도에 표류하여 왔다가 중국을 통하여 돌아갔고, 숙종 40년(1714)에는 진도 사람 9명이 유 구국으로 표류되었다 돌아왔으며, 현종 3년(1662)에는 무안 사람 18명이 폭풍을 만나 유구국 까지 표류하였다가 일본(살마주, 대마도)을 통하여 귀국한 사실이 있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사람들에 의하여 유구국의 사정이 우리나라에 알려졌다는 점이다. 그 내용 대부분은 조선왕 조실록 에 전한다. 토론자는 죄송하게도 유구국의 일부였던, 아마미에 한 번 다녀왔을 뿐 유 구국의 해양방어체제나 시설을 거의 알지 못한다. 따라서 본 토론은 부족한 점이 많으리라 생 각되며 양해 바란다.

140

141

142

143

144

145

146

147

148 148 트남의 19세기 대표 방어요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사실은 1819년에 베트남을 방문했던 프랑스 선장 Le.Rey의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후에 성곽은 인도차이나에 서 참으로 가장 아름답고 견고한 요새입니다. 심지어 영국인에 의해 축조된 Calcutta에 있는 Wiliam요새나 Madras에 있는 Saint George요새와 비교할 때도 말이죠. II. 지리적 위치 및 역사 1. 지리적 위치 후에는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지형이 험한 지역으로 수도인 하노이에서 남쪽으로 약 750km 떨어진 트어-티엔후에성(Thua-Thien Hue)에 속한 도시다. 북쪽은 응앙(Ngang)령 (嶺)이 있고 남쪽은 하이번(Hai Van)령이 있으며 서쪽은 장산(Truong Son)산맥으로 둘러싸 이고 동쪽으로는 8km떨어진 해변이 있다. 후에의 대표 강이 흐엉(Huong)강이다. 흐엉강 유 역은 부채모양을 띤 2,830k 의 면적으로 트어트엔후에성의 3/5정도의 크기다. 이 강은 따 짜익(Ta Trach)강, 흐우짜익 (Huu Trach)강 그리고 보(Bo)강 3개의 지류가 합류된 강이다. 흐엉강은 후에성곽에서 바우빙(Bao Vinh)으로 꼬불꼬불 흐르다 두개의 강문인 퉌안(Thuan An)과 뜨히엔(Tu Hien)을 통과해 바다로 흐른다. 후에로부터 바다로 흐르는 구간 중간중간에 는 떠있는 작은 섬들이 많아 감시하는 시설물을 배치하기가 매우 유리하다. 또한 육지속으로 깊이 들어가 있는 부분이 많아 타잉하 (Thanh Ha), 바우빙(Bao Vinh)을 비롯한 상업항구가 형성하기에 아주 좋은 입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 외에 후에는 규모가 크고 작은 호수가 100개 넘게 있는데, 후에 요새 축성과 함께 이루어진 하천계(河川系) 공사가 시작되면서 이 지역에 있는 호수들이 개조, 성 절토 작업을 거쳐 교통 및 군사적 방어 기능이 탁월한 순환시 스템으로 조성되었다. 2. 역사와 명칭 1) 퉌화(Thuan Hoa) 1306년 전까지 이 땅은 짬바(Cham Pa)왕국의 영토에 속해 있었는데 1306년에 짬바 국 왕 쩨먼(Che Man)이 후엔쩐(Huyen Tran)공주와의 혼인 선물로 따이비엣(Dai Viet)1 쩐아잉 동 (Tran Anh Tong)왕에게 퉌화를 주었다. 인수받은 쩐아잉동이 이 땅을 퉌화부라는 이름

149 149 으로 지었다. 1604년에 응웬황(Nguyen Hoang)이 퉌화진에 속해 있던 띠엔빤(Dien Ban)현 을 한 단계 위인 부 로 승격시켜 광남(Quang Nam)진에 귀속시켰다.2 응웬(Nguyen)왕조 시대(17~18세기)에는 퉌화가 응앙(Ngang)령 남쪽으로부터 하이번(Hai Van)령까지 이어진 땅이였다. 2) 푸쒄(Phu Xuan) 1626년에 찡(Trinh)씨와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싸이(Sai)왕 응웬푹응웬 (Nguyen Phuc Nguyen)이 트어티엔후에성 광띠엔(Quang Dien)현 프억이엔(Phuoc Yen/Phuc An)마 을로 저택을 옮긴 뒤 궁(宮)으로 바꿨다. 1636년에 트엉(Thuong)왕 응웬푹란(Nguyen Phuc Lan)이 트어티엔후에성 흐엉짜(Huong Tra)현 김롱(Kim Long)마을에 궁(宮)을 위치 시켰다. 1687년에 응아이(Ngai)왕 응웬푹짠(Nguyen Phuc Tran)이 흐엉짜현 푸쒄(Phu Xuan)마을 로 옮겼고, 이어서 1712년에 밍(Minh)왕 응웬푹쭈(Nguyen Phuc Chu)가 트어티엔후에성 광띠엔현 빡봉(Bac Vong)마을로 궁을 옮겼다. 보(Vo)왕 응웬푹쾃(Nguyen Phuc Khoat)이 왕위에 오른 뒤(1738년)에 비로소 왕궁이 다시 푸쒄으로 복귀하게 되면서 이 지역이 땅쫑 (Dang Trong-塘中)3의 경제 정치 군사 중심지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802년에 베트남영 토를 통일시킨 자롱(Gia Long)왕 역시 푸쒄에 수도를 두고 후에 요새를 축성한 바가 있었다. 그 뒤로부터 1945년까지 이르러 후에는 베트남의 경제 정치 군사 중심지로 발전을 거듭했 다. 1945년 이래 프랑스 미국통치기, 베트남제도를 거치면서 후에는 늘 경제 정치 국방 요 지로 그 역할을 해왔다. 오늘날, 후에는 베트남의 페스티벌도시로 선정되었다. 한편으로 후에 의 다양하고 중요한 문화유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의해 지정된 바가 있다. III. 후에 요새 떼이썬 응웬후에(Tay Son Nguyen Hue)로부터 정권을 장악한 초창기에, 자롱왕은 내적 (內賊)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으면서 외적(外敵)인 프랑스가 쳐들어오려는 야심을 드러내고 있 1) Dai Viet (大越)은 1054~1400년, 그리고 1428~1804년까지 베트남의 국호이다. 2) 진, 부, 현은 베트남 군주시대에 존재했던 행정단위다. 3) 세기 Trinh-Nguyen분쟁기부터 생긴 명칭, 광빙(Quang Binh)성에서 남쪽까지의 영토를 가리킨다.

150

151

152 152 고 있다. 사주(砂洲) 등 자연적인 요인을 활용해 그 사주들을 연결한 흙 성벽을 만들어 순환시 스템을 조성했다. 이 성에서 밤낮으로 쉬지 아니하고 항상 위병 500명이 지키고 있었다. 실 제로 프랑스군이 후에를 점령할 때도 전함을 몰고 후에경성까지 파고들기 위해 제일 먼처 공 략했던 곳은 다름이 아닌 퉌안이었다. 진해성 외에 퉌안에서 후에까지 이어진 흐엉강의 14km 구간에는 높이가 상당한 흙더미 (섬)가 많아서 응웬왕조는 이곳에 돈대(墩臺) 건설 및 군인배치에 많은 할애를 했다. 후에경성 에서 가까운 자이(Dai)섬, 헨(Hen)섬을 비롯한 돈대가 그 대표다. 2) 전핑대(Tran Binh Dai) - 망까(Mang Ca)돈대 전핑대는 보조 요새로서 후에요새 뒷면 및 후에의 중요한 상업항구인 타잉하(Thanh Ha), 바우빙(Bao Vinh)항구를 보호하기 위해 축조되었다. 전핑대는 1805년에 태평대(Thai Binh Dai)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다. 태평대는 흙으로 쌓은 성에 대포, 총알 창고, 군인 숙소, 기타 군사시설 등이 설치되었다. 1836년에 밍망(Minh Mang)왕이 기존 성벽을 폐쇄하여 벽돌성 벽으로 새로 짓고 현재 이름인 전핑대로 바꾸었으나, 성 안에 아가미처럼 생긴 V자모양 호수 2개가 있는 까닭에 흔히 망까(mang ca: 아가미)라고 부르기도 한다. 진핑대의 중요함을 알아 챈 프랑스군이 후에경성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기에게 진핑대를 넘기라고 끊임없이 후 에왕조를 압박했다. 프랑스의 무리한 요구가 갈수록 심해져 1885년에 마침내 똔텃후엣(Ton That Huyet)의 지휘 하에 중앙군은 진핑대를 되찾으려고 항전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 나버렸다. 패배를 안긴 채 똔텃흐엣이 왕실을 데리고 광찌(Quang Tri)로 이전하여 프랑스에 장기항전계획을 세우기 위한 시간을 끌었다. 그 뒤로 진핑대는 프랑스의 중요한 군사 요지로 편입되었다가 미군의 통치를 거친 후 현재 베트남군대의 주요 군사거점으로 역할을 하고 있 다. 오늘날 진핑대는 수백년 동안 벌어진 전쟁으로 인해 심하게 파손되어 외관과 일부 성벽만 남아있다. 3) 수로시스템 후에요새의 튼튼한 방어시설 중에 수로시스템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요새를 직접 보호하는 방어시설이자 후에요새의 주요 수로 교통시설이다. 이 수로시스템이 길이 10km에 성외와 성내 2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 성외 : 후에경성의 동 서 남 북을 둘러싼 4개의 강(흐엉강, 깨반(Ke Van)강, 안화(An

153 153 Hoa)강, 동바(Dong Ba)강을 말하며 후에경성의 호성하 (护城河)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호 성하 안쪽에는 또 다른 수로인 해자가 있다. 호성하와 해자 사이에 지면위 방어벽 하나를 구 축했다. 이 3개의 시설은 후에경성의 4면에 따라 길쭉하게 뻗어있어 요새보호기능을 수행한 다. 후에경성 내부 및 경성과 부근 구역을 연결하는 육로로 활용하기 위해 호성하와 해자를 건너는 다리를 건설했다. 그 예로 청룡(Thanh Long)교, 백호(Bach Ho)교, 자호이(Gia Hoi)교, 동바(Dong Ba)교 등이 있다. - 성내 : 후에경성을 가로질러 흐르는 응으하(Ngu Ha)강을 중심으로 성내 곳곳에 분포되 어 있는 크고 작은 40개의 호수와 연결해, 후에경성 내의 수로교통 및 성곽의 배수를 위한 배 수구 역할을 하는 순환 수로시스템을 조성했다. - 이 외에, 호성하 해자 성내수로를 연결한 하수관(지면과 지하)시스템을 더해서 후에경 성 전체로 뻗어나가는 순환수로시스템으로 완성하였다. 이러한 섬세하고 견고한 후에요새는 베트남 군인이 용감하게 싸우면서 많은 희생을 치뤘 는데도 불구하고 서양군대보다 후진적인 무기를 비롯한 19세기 응웬왕조의 열악한 군대로 인 해 결국 얼마 못 견디고 프랑스군에게 뺏기고 말았다. 이 사건은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로 전락돼어 아프고 슬픈 역사의 시기로 접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1975년이 되어야 비로소 후에 는 베트남 국민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IV. 맺음말 후에경성은 베트남의 19세기초 가장 위대한 수로방어시설라고 할 수 있다. 후에요새의 독 특함은 가장 긴 공사기간이나 섬세함이 아닌 축성술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후에요새 는 동양의 전통 성곽 축성술과 서양의 방어요새 건설법을 조화롭게 배합시키며 자연적인 요 소를 시대적 상황에 반영시켜서 축성되었던 것이다. 후에가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지 못하고 어려 가지 객관 주관적인 요인으로 인해 프랑스에 의해 패배했지만, 후에경성-후에요새는 언제나 베트남 국민의 자랑이었다. 당대학자들이 기획부터 완공에 걸친 전 과정에 실제 역사적 상황과 지리적 조건을 토대로

154

155

156 156 PHÁO ĐÀI HUẾ- MỘT CÔNG TRÌNH PHÒNG THỦ VEN BIỂN TIÊU BIỂU CỦA VIỆT NAM ĐẦU THẾ KỶ XIX. Nguyen Tuan Lam Vietnam National Museum of History Ⅰ. Mở đầu. Ⅱ. VỊ TRÍ ĐỊA LÝ VÀ LỊCH SỬ TỒN TẠI. Ⅲ. PHÁO ĐÀI HUẾ Ⅳ. KẾT LUẬN. Ⅰ. Mở đầu. Trong hàng loạt các pháo đài phòng thủ bờ biển của Việt nam giai đoạn cuối thế kỷ 18 đầu thế kỷ 19 thì Pháo đài Huế được coi là vững chắc nhất, hoàn chỉnh nhất. Pháo đài Huế là sự kết hợp tài tình giữa tinh hoa về kỹ thuật thành quách truyền thống của Việt nam và nghệ thuật pháo đài phòng thủ của Phương Tây. Sau khi lên ngôi, vua Gia Long-Nguyễn Ánh đã chọn vùng đất này để xây dựng kinh đô cho triều đại của mình. Pháo đài Huế được đích thân vua Gia Long chọn vị trí và cắm mốc, tiến hành khảo sát từ năm 1803, khởi công xây dựng từ 1805 và hoàn chình vào năm 1832 dưới triều vua Minh Mạng. Pháo đài Huế được xây dựng theo kiểu Vauban, có hình gần vuông, diện tích 520ha, chu vi trên m gồm có ba lớp thành bao bọc lẫn nhau: Kinh thành ( thành ngoài), Hoàng thành và Tử Cấm thành

157 157 ( thành trong), tất cả đều quay mặt hướng Nam- Đông nam. Chung quanh thành có 24 pháo đài cùng một thành phụ là Trấn bình đài. Vòng đai Hộ thành Hà bảo vệ bên ngoài và hệ thống đường thủy dày đặc trong kinh thành đã tạo nên một hệ thống bố phòng vững chắc. Có thể nói Kinh thành Huế là một pháo đài phòng thủ tiêu biểu của Việt nam thế kỷ 19 đúng như Le. Rey- một thuyền trưởng người Pháp đã từng đến Việt Nam năm 1819 đã nói: Kinh thành Huế thực sự là pháo đài đẹp nhất và kiên cố nhất ở Đông Dương, thậm chí so với cả pháo đài Wiliam ở Calcutta và Saint George ở Madras do người Anh Xây dựng. II. VỊ TRÍ ĐỊA LÝ VÀ LỊCH SỬ TỒN TẠI. 1. Vị trí địa lý Huế là một vùng đất hiểm trở nằm ở Miền trung Việt nam, cách thủ đô Hà nội khoảng 750km về phía nam nay thuộc tỉnh Thừa-Thiên Huế. Phía bắc có đ è o Ngang, phía nam có đèo Hải Vân, phía Tây có hệ thống núi Trường Sơn bao bọc, phía đông cách biển 8km theo đường chim bay. Sông chính của Huế là sông Hương. Hệ thống sông Hương có lưu vực hình nan quạt với diện tích lưu vực k, chiếm gần 3/5 diện tích tự nhiên của tỉnh. Sông Hương là hợp lưu của ba nhánh chính : sông Tả Trạch, sông Hữu Trạch và sông Bồ. Sông Hương chảy uốn lượn quanh có qua Kinh thành Huế đến Bao Vinh rồi đổ ra biển qua hai của chính là Thuận An và Tư Hiền. Trên sông Hương đoạn chảy từ Huế ra biển có nhiều cồn đất nổi lên rất thuận lợi cho việc bố phòng canh giữ, đồng thời cũng có nhiều đoạn sông ăn sâu vào đất liền thuận lợi cho việc hình thành cảng thị buôn bán mà tiêu biểu là cảng thị Thanh Hà, Bao Vinh. Ngoài ra xung quanh Huế còn có hệ thống hơn 100 ao hồ lớn nhỏ khác nhau khi pháo đài Huế được xây dựng hệ thống sông ngòi, ao hồ trong khu vực này đã được cải tạo lại và đào đắp thêm rất nhiều để trở thành một hệ thống liên hoàn thuận lợi cho việc giao thông và phòng thủ về mặt quân sự.

158

159

160 Cấu trúc của pháo đài Huế Thành Huế với mục đích phòng thủ là chính nên được xây dựng như một pháo đà i vững chắc bao gồm ba vòng thành bao bọc lẫn nhau gồm Kinh Thành, Hoàng Thành và Tử Cấm Thành, phía ngoài có một hệ thống hào sâu bao bọc. 1) Kinh thành: Chu vi của vòng thành xây bó bằng gạch là m. Bề dày trung bình của thân thành là 21,50 m, bao gồm bề dày của phần mô thành đắp bằng đất ở giữa là 18,50 m và lớp gạch xây bó ở mặt ngoài là 2 m và lớp gạch xây bó ở mặt trong là 1 m. Trên thành (thường đ ược gọi là trên thượng thành) không phải là một mặt phẳng, mà được đắp giật cấp, tạo thành 3 dải đất thấp dần kể từ ngoài vào phía Thành Nội. Mặt thành ngoài cao 6,60 m, mặt thành trong chỉ cao 2,10 m. diện tích của địa bàn Thành Nội là 520 ha (tức là 5,20 k ). Xung quanh và ngay trên thành được thiết lập 24 pháo đài để phòng thủ, ngoài ra có một cửa phụ thông với Trấn Bình Đài gọi là Thái Bình môn và hai cửa bằng đường thủy thông Kinh Thành với bên ngoài qua hệ thống Ngự Hà là Đông Thành Thủy Quan và Tây Thành Thủy Quan. 2) Hoàng Thành: Nằm ở khoảng giữa kinh thành là nơi đặt các cơ quan cao nhất của chế độ quân chủ và là nơi thờ tự các vua chúa đã quá cố. Hoàng Thành có mặt bằng gần vuông, mỗi bề khoảng 600m, xây bằng gạch, cao 4m, dày 1m xung quanh có hào sâu bảo vệ, có 4 cửa ra vào riêng Ngọ Môn chỉ dành cho vua đi. Hoàng thành có hơn 100 công trình kiến trúc đẹp và được chia thành nhiều khu vực khác nhau, mỗi khu vực có chức năng, nhiệm vụ riêng. 3) Tử Cấm Thành: là vòng thành nằm ngay trong Hoàng Thành là nơi dành riêng cho vua và gia dình vua. Tử Cấm Thành được xây dựng từ năm 1804, tường bằng gạch cao 3.72m,

161 161 dày 0.72m, chu vi khoảng 1230m. Trong Tử Cấm thành có 50 công trình kiến trúc to nhỏ và 7 cửa ra vào. Trong lịch sử Việt Nam thời cận đại, công trình xây dựng Kinh Thành Huế có lẽ là công trình đồ sộ, quy mô nhất với hàng vạn lượt người tham gia thi công, hàng triệu mét khối đất đá, với một khối lượng công việc khổng lồ đào hào, lấp sông, di dân, dời mộ, đắp thành... kéo dài trong suốt 30 năm dưới hai triều vua. Với phong cách kiến trúc và cách bố phòng khiến Kinh thành Huế thực sự là một pháo đài vĩ đ ại và kiên cố nhất từ trước đến nay ở Việt nam. 2. Hệ thống phòng ngự đường thủy ở kinh thành Huế. Ngoài việc xây dựng công trình phòng ngự chủ yếu là pháo đài Huế, triều đình Nguyễn còn chú trọng xây dựng một hệ thống phòng thủ khác bên trong và bên ngoài pháo đài nhằm bảo vệ pháo đài một cách hiệu quả nhất. 1) Trấn Hải Thành. Trấn Hải thành được xây dựng ở cảng Thuận An là vị trí cuối cùng của sông Hương đổ ra biển và vị trí then chốt để đi từ biển vào kinh thành Huế. Trấn Hải thành cách Huế khỏang 8 km theo đường thẳng và 14 km theo đường sông là vị trí phòng ngự xa nhất của Huế. Nhận rõ vai trò quan trọng của Thuận An nên triều đ ình Nguyễn đã chú trọng xây dựng ở Thuận An một pháo đài để án ngữ và đây cũng là công trình phòng thủ đầu tiên từ biển vào của Kinh thành Huế. Hiện nay pháo đài này đã bị phá hủy hoàn toàn không còn dấu tích nhưng theo một số tài liệu lịch sử thì pháo đài này được xây dựng khá công phu, vững chắc. Lợi dụng các yếu tố tự nhiên như các các cồn cát thì người ta đã xây các bức tường thành bằng đất nối liền các cồn cát đó với nhau tạo thành một hệ thống liên hoàn và có 500 quân lính ngày đêm canh gác. Thực tế khi người Pháp đánh chiếm kinh thành Huế thì cũng bắt đầu từ việc đánh chiếm Thuận An để mở thông con đường đưa tàu chiến áp sát kinh thành. Ngoài Trấn Hải thành thì trên dòng sông Hương dài 14 km từ Thuận An đến

162

163

164

165

166

167

168

169

170 170 해민>설3과 <마지날맨(MAGINAL MAN), 경계인(境界人)>설이라 할 수 있다.4 그런데 이러한 일본 측 학설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목은시고(牧 隱詩稿) 등과 같은 정사류(正史類)는 물론 문집류(文集類)에서도 이를 입증할 수 있는 문헌 사 료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그 뿐 아니라 이러한 주장들은 조선이 대규모 수군을 조직하고 유지해 온 이유나 전국 각지에 수많은 해양방어시설을 구축한 사실과도 부합되지 않는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여말-선초에 대규모 수군을 조직, 유지하고 해양방어시설을 구축해야 했던 역사적 배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왜구의 무장 및 전술과 침구 목적, 침구의 시대 적 배경 및 왜구의 사회적 출자 등에 관하여 검토하기로 한다. Ⅱ. 왜구의 무장과 전술 고려 말-조선 초는 일본의 남북조(南北朝) 내란기(1336~1392)에서 무로마치[室町]시대 초기에 해당한다.5 이 시기 왜구의 실체에 관해 일본 학계에서 정설(定說)의 지위를 점하고 있 는 것이 소위 <왜구=삼도해민설>이다. 이 설은 삼도 를 쓰시마 이키 마쓰우라 지방으로 이해하고 있다.6 또 일본사사전(日本史事典) 에서는 해민(海民) 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어업 제염(製鹽) 회선(回船) 상업 등을 생업으로 삼으면서 바다를 무대로 활동하는 사람들에 관한 총칭이다. 고대 중세에 천황 섭관가 신사 등은 해산물을 확보하기 위해 각지의 해민을 구고닌[供御人] 구사이닌[供祭人] 지닌[神人]으로 조직해 특권적인 어업권(漁業權)과 해상을 자유로이 항행할 수 있는 권 3) <삼도해민>설과 <마지날 맨>설에 관해서는 필자가 이미 그 문제점에 관해 구체적으로 검토한 바 있다. 이영(2011), <고려 말 조선 초 왜구=삼도(쓰시마 이키 마쓰우라) 지역 해민>설의 비판적 검토, 일본문화연구 38, 동아시아 일본학회)을 참조. 4) <마지날 맨>설이 최초로 제기된 것은 무라이쇼스케(村井章介, 1993, 中世倭人傳, 岩波新書)으로, 1998년에 (이영 역, 1998, 한 림신서 일본학 총서 37 - 중세 왜인의 세계, 소화)로 번역 출판되었다. 5) 넓은 의미(廣義)의 무로마치 시대는 무로마치 막부가 존재했던 시대 에 해당한다. 따라서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1336년 에 건무식목(建武式目)을 제정한 이후부터 15대 쇼군[将軍] 요시아키[義昭]가 1573년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 교토에서 추방당하기까지의 약 237년 동안을 가리킨다. 그러나 건무신정(建武新政)을 포함하는 최초의 약 60년 동안을 남북조 시대, 오닌의 난(応仁の乱, 1467년)이후의 시대를 센코쿠시대[戦国時代]로 구분하고 남북조의 합일(合一, 1392년)부터 오닌의 난이 발발했을 때 까지의 약 100년 동안을 좁은 의미의 무로마치 시대로 구분하는 경우도 많다. 6) 예를 들어, 일본의 대표적인 역사관련 서적 출판사 중 하나인 야마카와출판사[山川出版社]에서 간행한 講說 日本史 는 다음과 같 이 서술하고 있다. 남북조 동란이 진행되던 시기, 쓰시마, 이키[壱岐], 히젠마쓰우라[肥前松浦] 지방 주민을 중심으로 하는 해적집 단이 한반도와 중국 대륙 연안을 습격해, 왜구라고 불리면서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171 171 리를 부여하는 대신에 해산물을 바치게 하였다. 앞선 어업 및 제염기술을 지닌 사람이나 선박을 조종하여 넓은 해역에 걸쳐서 교역을 행하거나 해적 수군(水軍) 전업상인(專業商人)으로 발전한 사람들도 있었다.7 이상과 같은 해민의 정의를 통해 일본의 왜구 연구는 여말-선초 왜구의 실체가, 직업적이 며 전문적인 무사(武士)라기보다 변경지역의 도서연해민(島嶼淵海民)이었다고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삼도해민>설은 왜구의 실체를 아마추어적인 무장집단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왜구의 실체에 관한 일본의 또 다른 견해로 비교적 근년에 등장한 소위 <마지날 맨 (MAGINAL MAN), 경계인(境界人)>설을 들 수 있다. 그 요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반(半)은 일본, 반은 조선, 반은 중국이라고 하는 경계성을 띤 인간유형을 <마지날 맨>이라고 부른다. 그들의 활동이 국가적 내지 민족적인 귀속이 애매모호한 경계 영역을 일체화시켜 국경에 걸친 지역 을 만들어냈다.8 이상의 서술을 통하여 <마지날 맨> 설은 일본인이 아니라, 오늘날의 국적이나 민족 관념 으로는 확연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애매한 사람들 을 왜구의 실체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이상의 <삼도해민설>에 따르면, 고려는 일본 변경지역의 도서연해민들의 아마추어적인 해적 행위조차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멸망할 정도로 쇠약하고 무능한 국가였던 셈이 된다.9 또 <마지날 맨>설에 따르자면 고려 조선의 국가권력은 1세기 이상이나 자국을 괴롭혀온 왜 구의 실체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한심한 존재가 된다. 그런데 왜구의 무장(武裝)이나 전술에 관한 일차사료(一次史料)를 보면 이상의 주장에 대 하여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고려 말 고관(高官) 설 장수는 왜구의 전술 행동에 대하여 다 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사료 1> 왜적들은 많으면 천, 백 명이 무리를 짓고 적으면 5명, 10명으로 대오를 지어 음모 술책은 형언하기 7) 1996, 新版角川日本史事典, 角川出版社. 8) 무라이 쇼스케, 2013, 倭寇ほはだれか, 日本中世境界史論, 岩波書店, 126쪽. 9) 이러한 주장은 일본의 고대 이래로 이어져 온 뿌리깊은 한반도 멸시관 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이영, 2013, 민중사관을 가장한 식민사관 - 일본 왜구 연구의 허구와 실체, 일본문화연구 45, 동아시아 일본학회. 참조.

172 172 곤란합니다. (중략) 허장성세(虛張聲勢)하여 서쪽으로 가는 척하면서 동쪽으로 향하고 우리 병력이 분산 된 다음에 슬며시 습격해옵니다. 때로는 수비처를 그냥 지나 주민들을 공격하기도 하고, 또는 주민은 그 냥 두고 먼저 수비처를 습격하기도 합니다. 적으면 미리 간첩을 파견하여 부유한 집을 알아 두었다가 슬 며시 들어가 약탈합니다.10 왜구의 이러한 행동은 모택동과 20세기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는 베트남의 보 구엔 지압 장군이 즐겨 활용하던 전형적인 게릴라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11 왜구는 산악전에도 뛰어났 다. 전세가 불리해지면 산악의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목책을 설치하고 농성하는 전술을 사용 하였다.12 그런데 이러한 산악전 농성전 게릴라 전술은 남북조 내란기 무사들의 전형적인 전 술이었다.13 또 왜구들은 집단 창술을 활용하기도 했다. 다음의 사료를 살펴보자. <사료 2> 적들은 낭패하여 (지리)산으로 올라가서 절벽에 임하였는데, 칼을 내밀고 창을 뻗친 것이 마치 고슴 도치 털 같아서 관군이 올라 갈 수 없었다. 태조가 비장(裨將)을 보내서 군사를 거느려 치게 하였다. 비장 이 돌아와 말하기를, 바위가 높고 깎은 듯 하여 말이 올라가지 못 합니다 하였다.14 이 사료는 우왕3년(1377) 5월에 침구해 온 왜구를 지리산에서 태조(=이성계)가 토벌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15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당시 왜구들이 칼과 창을 고려군이 공격 10) 고려사 권112, 열전 25, 설손. 11) 왜구와 게릴라 전술의 관련에 관해서는 이영, 2011, 게릴라 전 이론을 통해서 본 왜구 - 조선 왕조의 대마도 영유권 주장을 중심 으로, 일본연구 31, 중앙대학교 일본연구소. 참조. 12)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사료가 확인된다. 왜적의 보병과 기병 천 여 명이 행안산으로 올라갔다. 아군 병사가 사방을 포위하고 공 격했다. 왜적들은 붕괴하여 도주했다. 아군이 이를 크게 격파했다. ( 고려사 114권. 열전27, 나세전) 왜적들이 영산(靈山)에 이르 러 험준한 지형을 활용하여 방어했다. (중략) 왜적들이 낭패하여 지리산으로 올라가 절벽에 임하여 칼과 창을 마치 고슴도치처럼 내밀었다. 관군이 올라갈 수 없었다. (중략) 왜적들이 또 반성현을 침구해 대산(碓山) 정상에 올라 목책을 세우고 방어했다.( 고려 사 114권, 열전27, 우인열) 왜가 지리산에서부터 무등산으로 도주해 규봉사 바위 사이에 목책을 세웠다. 삼면이 깎아 지르듯한 절벽이었고 단지 좁은 오솔길이 절벽을 따라 나있어 겨우 한 사람만 지나갈 수 있었다. ( 고려사 134권, 열전 47, 우왕 7년 4월) 남질이 지리산에 남아있던 왜적을 격파해 4명을 베고 말 46필을 획득했다. ( 고려사 134권, 열전47, 우왕 7년 9월) 그 때 왜적 천 여명이 옥주와 보령 등의 현을 함락시키고 개태사에 들어왔고 이어서 계룡산으로 들어갔다. ( 고려사 114권, 열전27, 문달 한.) 태조가 명하여 말하기를 왜적이 궁하여 불쌍히 여길만 하니 죽이지 말고 생포하라 고 했다. 왜적들이 천불산으로 들어갔 다. ( 고려사 116권, 열전 29, 심덕부) 13) 이에 관해서는 사토 신이치(佐藤進一), 1974, 南北朝の内乱, 中公文庫, 참조. 14) 고려사절요 권30, 우왕 3년 5월. 한편, 고려사 권133, 열전46, 우왕 3년 5월 계미일. 에도 거의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는데 이는 고려사절요 보다 더 구 체적이다. 15) 아직까지 전투 현장이 정확히 지리산의 어느 지점인지 확정할 수 없다.

173 173 해오는 방향을 향해 마치 고슴도치 털[蝟毛] 처럼 집중해서 내뻗었다고 하는 부분이다.16 이국(異國)땅에서 공격을 받고 궁지에 처한 왜구들이 고슴도치 털 전술을 사용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 전술을 사용한 장소가 산 위의 절벽 이었고 또 그곳은 왜구들 스스로가 선택한 장소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 요가 있다. 즉 왜구들은 절벽 에 자리 잡고 고려군의 접근을 어렵게 한 다음, 자기들의 창을 고려군이 접근해오는 방향으로 집중시킴으로써 적의 접근을 저지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강력한 적과 대치한 무장집단이 최후 수단으로 선택한 집단전술은 평소 잦은 훈련을 통해 숙련된 행동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집단전술은 각 구성원이 주어진 역할을 다해야 하고 또 동시에 다른 동료들과의 신뢰관계 속에서 유기적인 협력이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각 구성원이 일심동체(一心同體)가 되어 통일된 행동을 취해야 하기 때문에 사전에 특별한 훈련이 없으면 성공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남북조 내 란기에 이러한 집단창술을 주요 전술로 사용한 무사단으로 규슈의 기쿠치씨[菊池氏]를 들 수 있다.17 왜구들이 활용한 것으로 교량파괴전술 이 있다. 다음의 <사료 3>을 보자. <사료 3> 왜적이 전주를 함락시키니 유실(柳實)이 적과 싸워 패했다. 적이 물러가 귀신사(歸信寺)에 주둔하니 유실이 다시 쳐서 물리쳤다. (중략) 이 때에 왜적이 임피현(臨陂縣)을 함락시키고 다리를 끊어서 스스로 고수(固守)하였다. 유실이 가만히 군사를 시켜 다리를 만드니 변안열이 군사를 이끌고 건너서 안렴사 이 사영(李士穎)을 시켜 다리 가에 군사를 매복하였다. 적이 바라보고 반격하여 우리 군사가 패하였다.18 우왕 2년(1376) 9월에 왜구들이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모악산(母岳山)에 있는 귀신사를 침구한 뒤, 유실에 의해 쫓기다가 임피현에 들어가 다리를 끊고 방어했다고 한다. 16) 여기서 왜구들이 창 만이 아니라 칼 도 활용하고 있으므로 집단창술 로 간주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조 시대는 당시 전장에서 사용되던 칼은 대개 이전의 가마쿠라 시대와 달리 칼의 길이가 아주긴 장검[大太刀] 이었다. 즉 도 신(刀身)의 장촌화(長寸化)가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곤도 요시가즈, 2005, 騎兵と歩兵の中世史 - 歷史文化ライブラリ 184, 吉川弘文館, 126쪽. 참조) 또한 <사료 2>에서 보이는 칼의 역할 또한 창과 동일하게 앞으로 내뻗는 것이었다. 17) 이에 관해서는 다음의 연구를 참고. 시부에 기미마사(1794) 기쿠치 풍토기(菊池風土記) 今坂正哉 校訂. ボス コーポレーショ ン 출판(1996). 아소시나 야스오(1990) 기쿠치 일족(菊池一族) 新人物往來社. 동 (1982) 戦野を駆ける千本槍の銳鋒-菊池武 重の新戦術 日本史の舞台4, 吉野の嵐 動乱の炎 南北朝時代, 集英社. 가와조에 쇼지(1966) 菊池武光 日本の武将 18, 人物 往來社. 스기모토 히사오(1966) 菊池氏三代, 吉川弘文館. 히라이즈미 기요시(1941) 菊池勤王史, 菊池氏勤王顯彰会. 우에다 히토시(1929) 純忠菊池史乗, 菊地史談會. 동 (1918 ) 肥後の菊池氏, 嵩山房. 18) 고려사절요 권30, 우왕 2년(1376) 9월조.

174 174 이와 유사한 사료 1건이 추가로 확인된다. <사료 4> (나세는) 우왕 초기에 전라도 상원수(上元帥) 겸 도안무사(都按撫使)가 되었다. 왜선 50여 척이 침입 하여 웅연(熊淵)에 정박하고 적현(狄峴)을 넘어 부녕현(扶寧縣)을 침범하고 동진교(東津橋)를 파괴하여 아 군이 진공하지 못하게 하였다.19 이러한 교량파괴전술 역시 일본 문사들의 전형적인 전술이었다. 예를 들면 겐페이갓센[源 平合戦, 1180~1185] 당시의 우지[宇治]에서 미나모토 요리마사[源頼政] 군이 추격대인 헤 이씨[平氏] 일족을 맞이하여 우지바시[宇治橋]에서 전개한 전투를 들 수 있다. 이처럼 여말 왜구가 전문적이고 숙련된 무장 집단이었음은 그들의 무장 수준에서도 확인 된다. 경신년(庚申年, 1380) 진포구(鎭浦口) 전투에서 고려 수군의 화포 공격으로 인해 타고 온 선박이 불타버린 왜구들은 충청남도와 경상도, 그리고 전라도 내륙 지방을 전전하면서 침 구를 반복한다(이를 경신년 왜구라 하자).20 그 때 고려군의 젊은 장수 배검이 스스로 자원하 여 왜구의 적정(敵情)을 정찰한다. 그 때 당시 왜구들은 배검에게 술을 먹인 후 철기(鐵騎)로 호송하였다. 21고 한다. 철기란 쇠로 만든 갑옷을 입힌 말 또는 그러한 철기를 타고 싸우는 기 병을 의미한다. 왜구 부대 안에 철기라는 중장갑 기병이 존재한 사실은 당시 왜구의 무력이 단순한 도적의 수준이 아니라 전문적인 전투 집단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경신년 왜구의 소 년 대장 아지발도는 용맹하고 뛰어난 무예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사료 5> 나이는 겨우 15~16세 정도 되고 외모가 단아하며 용감무쌍한 적장 한 명이 나타나서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며 돌격하니, 가는 곳마다 삼대처럼 쓰러지며 감히 대적할 자가 없었다. 아군은 그를 아지발 도라고 부르며 모두 패해 달아났다.22 19) 고려사 권114, 열전27, 나세. 20) 경신년 왜구 에 관해서는 이영, 2007, 잊혀진 전쟁, 왜구-그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에페스테메 중 진포구 전투의 역사지리학 적 고찰, 경신년 왜구의 이동과 전투 참조. 21) 고려사 권126. 열전 제39. 변안열 전. 22) 위의 주(21).

175 175 창을 휘두르며 고려군의 진영을 향해 돌진하는 소년 대장 아지발도의 무예 실력 앞에 고 려군은 모두 패해 도주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또 아지발도의 부하들 역시 용맹한 무사 들이었다. 다음의 <사료 6>을 보자. <사료 6> 태조가 하늘에 맹세하고 좌우의 부하들을 둘러보고 말하기를 비겁한 자들은 물러나라. 나는 죽을 각오로 적과 싸울 것이다 고 하였다. 그러자 장병과 병사들은 감동하여 용기백배하여 결사적으로 싸웠으 나 적들 또한 마치 땅에 심은 듯이 물러나지 않았다.23 고려군의 결사적인 공격에 조금도 후퇴하지 않을 정도로 정예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음 을 알 수 있다. 또 왜구의 무장에 관해 다음과 같은 서술도 보인다. <사료 7> 이두란이 말하기를 (아지발도를)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사람을 상하게 할 것이오. 그리고 그는 견고 한 갑옷을 입었고 얼굴에는 구리로 만든 가면을 쓰고 있어서 화살을 쏠 틈이 조금도 없습니다. 24 이두란이 묘사한 아지발도의 무장은 남북조 내란기 당시의 일본 무사의 그것과 완전히 일 치한다. 이와 같은 무장 상태는 다른 곳에서도 확인된다. <사료 8> 그때 강주 원수인 배극렴이 또 왜구와 싸웠는데 적의 괴수인 패가대만호(覇家臺萬戶)가 큰 쇠로 만 든 투구를 쓰고 손과 발에 이르기까지 갑옷으로 두르고 보졸들을 좌우에 거느리고 말을 타고 전진하였다. 말이 흙탕에 빠져서 멈추자 아군이 이를 맞아 공격을 가하여 베었다.25 패가대만호라는 왜구의 대장은 쇠로 만든 투구와 큰 갑옷을 전신에 걸치고 무장을 하였음 이 확인된다. 그리고 말에 타서 보졸들을 좌우에 거느리고 있는 모습은 남북조 내란기 당시 23) 앞의 주(21). 24) 앞의 주(21). 25) 고려사 권116. 열전29. 박위.

176 176 무장(武將)의 모습과 일치한다. 이처럼 왜구의 무장 수준 및 전술이, <삼도해민>설과 <마지날 맨>설이 주장 하는 바 아마추어적인 무장집단과 부합된다고 할 수 있을까? Ⅲ. 여말 왜구의 침구 지역과 규슈 지역의 군사 정세 고려 말 왜구의 실체가 남북조 내란 당시의 전문적인 무장집단이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 인 사례를 검토해보자. 고려 우왕3년(1377)은 왜구의 침구가 최고조에 도달한 해였다 <표 1> 절정기(絶頂期)의 침구 연도 지역 회수 집단수 경인년(1350)에 왜구가 다시 침구해오기 시작한 이래 1391년까지 가장 많이 침구해왔던 시기가 1376~1380년인데, 그 중에서도 1377년은 침구한 <지역 회수 집단 수>에서 모두 최고 피크에 이른 해였다. 이러한 상황은 다음 <사료 9>에서도 확인된다. <사료 9> 경상도 원수 우 인열이 보고하기를, 왜적이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뒤덮을 정도이고 돛과 돛대가 서 26) 이에 관해서는 이영, 2006, 경인년 이후의 왜구와 마쓰라토-우왕 2년(1376)의 왜구를 중심으로, 일본역사연구 24. 일본사학회. 참조. 27) 위의 주(26) 논문 참조.

177 177 로 이어질 정도입니다. 이미 군사를 보내어 요해처를 나누어 지켰으나, 적이 형세가 성대하고 방어할 곳 이 많아서 한 도의 군사로써 나누어 지키기에는 형세가 심히 위태롭고 약하니 조전원수(助戰元帥)를 보 내어 요해처를 방비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때에 강화에 있는 왜적이 서울에 아주 가까이 밀어닥쳐서 국 가에서 방비하기에 겨를 이 없었는데 또 이 보고를 받자 어찌 할 바를 몰랐다.28 우왕3년(1377) 3월에 경상도원수 우인열는 당시 이미 수도 개경 근방인 강화도 일대에 왜 구들이 대거 몰려와 있는 상황에, 대마도 쪽에서는 또 다른 왜구의 무리들이 바다를 뒤덮을 정도의 대규모의 선단을 이루어 고려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를 해온 것이다. 그러면 왜 이 해에 이렇게 많은 왜구들이 침구해왔을까? 당시 규슈의 군사 상황을 살펴보 자. 1377년 1월 13일, 규슈 사가현[佐賀県] 사가시[佐賀市] 교외의 치후[千布] 니나우치[蜷 打]에서 규슈의 남조세력인 정서부(征西府)와 규슈탄다이[九州探題] 이마가와 료슌[今川了 俊]이 이끄는 북조의 대부대가 결전(決戰)을 벌렸다.29 즉 1377년 1월13일, 료슌은 혼슈[本 洲]의 야마구치현[山口県]의 오우치 요시히로[大内義弘]를 비롯한 츄고쿠[中国] 지방의 호족 들까지 동원해 남조의 정서부와 일대 결전을 전개한다. 이 전투에서 료슌은 기쿠치씨[菊池 氏]가 주축을 이루었던 정서부를 대파(大破)했다.30 그 결과, 기쿠치씨(정서부)는 최대의 후원 자 겸 동맹자였던 아소대궁사[阿蘇大宮司] 아소 고레다케[阿蘇惟武]와 기쿠치 다케야스[菊池 武安], 기쿠치 다케미쓰[菊池武光]의 동생 다케요시[武義]가 전사하는 참담한 피해를 입었 다.31 그런데 1376년 11월에서 77년 1월까지의 치후, 니나우치 전투가 같은 시기의 왜구의 침 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일본의 사료가 있다. 천수(天壽3년; 永和3년; 1377) 정 월의 이마가와 료슌 서장 사본[今川了俊書狀寫] 32이다. <사료 10>을 보자. 28) 고려사절요 30권, 우왕 3년(1377) 3월. 29) 료슌이 규슈탄다이(1371년 임명-1395년 해임)에 임명되어 규슈에 부임하게 된 경위에 관해서는 이영, 2007, 14세기의 동아시 아 국제 정세와 왜구-공민왕 15년(1366)의 금왜 사절의 파견을 중심으로, 한일관계사연구 26, 한일관계사학회. 참조. 30) (永和三年) 今川了歳書状 ( 薩摩入来院文書 南北朝文書 九州編. 5384호) 등. 31) 菊池市史編纂委員会, 昭和57년(1982), 菊池市史 上, 669쪽. 32) 永和三年正月十六日 今川了俊書狀寫 ( 肥前斑島文書寫 南北朝遺文 5364호).

178 178 <사료 10> 今川了俊書狀寫 新春吉事最前申籠候了, (武) (懷良親王) 抑波多三郞事, 多分現形之由聞候, 宮方舟等事出入之由承及 候, まつ舟路事并路口々等事 急々可有御沙汰候哉 とても 又於地下 御一家人々皆以無二之御沙汰ともにて候なる間 目出候 然者為公私候上者 御方深重の人々相共ニ まつ波 多分所に被馳寄候て 此方の勢到来を御待候へく候 近日大 将を可差遣候 郡内躰 連々一家御方々可有注進候哉 相共 に承候者悦入候 恐々謹言 (永和三年) 正月十六日 (今川了俊) 了俊(花押影) (祝) 有浦殿 이 사료는 이해(1377년) 1월 13일, 이마가와[今川] 오오우치[大內] 연합군과 남조의 군대 가 치후[千布] 니나우치[蜷打]에서 벌인 전투가 끝난 지 3일 뒤인 1월 16일에 가미마쓰라토 [上松浦党] 내부에서 발생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즉 규슈탄다이 이마가와 료슌이 규슈 서 북부를 근거지로 하는 마쓰라토[松浦党] 무사단의 일원으로, 일관되게 북조 측에서 행동한 하 타 아리우라 이와우[波多有浦祝]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이다. 그 내용 중에 밑줄 친 부분, 즉 미야가타(宮方=남조)측의 선박 등이 출입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 에 주목해보자. 위 사료 가 작성된 것이 1월 16일인데, 이미 그 때에 료슌은 남조 측의 선박이 출입하고 있다는 사실 을 보고 받았다, 고 언급하고 있다. 즉, 1월 13일의 전투 이전에 남조 측의 선박이 이마리만 (伊万里湾)을 출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전선(戰線)은 이마리(伊万里)에서부터 동쪽으 로 직선거리로 40킬로 이상 떨어진 현재의 사가시[佐賀市]의 치후[千布] 니나우치[蜷打]에 있었는데, 왜 남조의 선박들이 이마리를 드나들고 있었을까? 그런데 이 전투를 전후한 1376년 말 무렵부터 77년 5월 사이에 고려사 에는 다음과 같 은 왜구의 침구 기사가 대거 나타나고 있다. 바로 1376년 11월부터 77년 5월까지의 왜구 침 구 기사이다.

179 179 (십일월 신사일) 왜구가 진주 명진현을 침구하고 또 함안 동래 양주 언양 기장 고성 영선 등지를 불 지 르고 약탈했다.33 (십일월 병술일) (전략) 왜구가 진주 반성현을 침구하고 또 울주 회원 의창 등의 현에 불 지르고 모두 다 약탈해갔다.34 (십일월 기해일) (전략) 왜구가 밀성군과 동래현을 침구했다.35 (십이월) 왜구가 합포영에 방화하고 양주와 울주의 두 주를 불 지르고 살해했다. 그리고 의창 회원 함 안 진해 고성 반성 동평 동래 기장 등의 현을 침구했다.36 (우왕 3년 정월), 왜구가 회원창을 도둑질 했다.37 이월, 왜구가 신평현을 침구했다. 양광도도순문사 홍인계가 이를 격퇴했다.38 (이월) 왜구가 경양현을 침구하고 마침내 평택현에 들어갔다. 양광도부원수 인해가 왜구와 싸웠지만 이기지 못했다.39 (삼월) 왜구가 서쪽 교외에 침구했다.40 (삼월) 왜구가 착량에 침구하고 강화도에 침구했다.41 사월, 왜구가 울주와 계림을 침구했다.42 (사월), 왜구가 울주 양주 밀성 등지를 침구해 불태우고 거의 다 약탈했다.43 (사월) 왜구가 언양현에 방화했다. 계림부윤 윤승순이 왜구 4명을 베었다.44 (사월) 왜적이 서강에 들어왔다. 최영과 변안렬이 군대를 이끌고 나와 이를 물리쳤다.45 (오월) 왜구가 밀성에 침구해 촌락을 침략하고 보리를 베어서 배에 실었다. 마치 무인지경을 가듯했다. 안동조전원수 왕빈이 이를 격퇴했다.46 33) (十一月 辛巳)倭寇晋州溟珍縣, 又焚掠咸安 東萊 梁州 彦陽 機張 固城 永善等處 ( 고려사 권133, 열전46, 우왕2년 11월) 영선현은 경남 고성의 옛 지명으로 진주와 고성, 사천과 진해를 연결하는 선의 교차점에 위치. 34) (十一月 丙戌日)(前略)倭寇晋州班城縣, 又寇蔚州 會原 義昌等縣焚掠殆盡 ( 고려사 권133, 열전46, 우왕2년 11월) 의창은 현 창원시 의창구. 35) (十一月 己亥日)(前略)倭寇密城郡, 及東萊縣 ( 고려사 권133, 열전46, 우왕2년 11월) 36) (十二月)倭焚合浦營,屠燒梁?蔚二州, 及義昌 會原 咸安 鎭海 固城 班城 東平 東萊 機張等縣 ( 고려사 권133, 열전 46, 우왕 2년 12월) 37) 三年正月, 倭盜會原倉 ( 고려사 권133, 열전46, 우왕3년 정월) 38) 二月, 倭寇新平縣, 楊廣道都巡問使洪仁桂擊之 ( 고려사 권133, 열전46, 우왕3년 2월) 신평은 충남 당진군 신평면. 39) (二月)倭寇慶陽, 遂入平澤縣, 楊廣道副元帥印海與戰不克 ( 고려사 권133, 열전46, 우왕3년 2월) 경양은 충남 천원군 직산면. 40) (三月)倭寇西鄙 ( 고려사 권133, 열전46, 우왕3년 3월) 41) (三月)倭寇窄梁, 又寇江華 ( 고려사 권133, 열전46, 우왕3년 3월). 42) (四月)倭寇蔚州 鷄林 ( 고려사 권133, 열전46, 우왕3년 4월). 43) (四月)倭寇蔚州 梁州 密城等處, 焚掠殆盡 ( 고려사 권133, 열전46, 우왕3년 4월) 44) (四月)倭焚彦陽縣, 鷄林府尹尹承順斬倭四級, ( 고려사 권133, 열전46, 우왕3년 4월) 45) (四月)倭賊入西江, 崔瑩 邊安烈出師却之 ( 고려사 권133, 열전46, 우왕3년 4월) 46) (五月)倭寇密城侵掠村落, 取麥載船, 若蹈無人之境, 安東助戰元帥王賓擊却之, ( 고려사 권133, 열전46, 우왕3년 5월)

180 180 (오월) 태조가 지리산에서 왜구를 쳐서 크게 격파했다.47 (오월) 왜적 100기가 남양 안성 종덕 등의 현을 침구했다.48 (오월) 왜구가 또 강화도에 들어와 대규모 살육과 약탈을 했다.49 이상의 <사료 >-<사료 >를 지도 위에 표시하면 모두 대마도의 대안 지역, 현재 부산 과 그 인근 지역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지도 참조> <지도 1> 왜구 침구 지역 47) (五月)太祖擊倭于智異山, 大敗之, ( 고려사 권133, 열전46, 우왕3년 5월) 48) (五月)倭賊百餘騎寇南陽 安城 宗德等縣, ( 고려사 권133, 열전46, 우왕3년 5월) 종덕은 평택시 고덕면 일대. 49) (五月)倭又寇江華大肆殺掠, ( 고려사 권133, 열전46, 우왕3년 5월)

181 181 즉 1376년 11월부터 77년 1월 당시까지 왜구의 침구지역은 모두 대마도의 대안(對岸)지 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방법도 단 기간 내에 인접 지역을 신속하게 이동하면서 침 구하고 있으며 정월에는 마산에 있었던 회원창(會原倉)을 공격, 약탈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치후 니나우치 전투가 끝난 정월 13일 이후 3월까지의 침구 양상 을 보면 이전과 전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사료 >-<사료 >). 즉 <사료 >를 보면 1377년 2월에 왜구는 신평현을 침구하고 있는데 이곳은 현재의 충남 당진군 신평면에 해당 하는 지역이다.50 그리고 같은 해 2월에 경양 평택을, 3월에는 (개성의) 서쪽 교외, 4월에는 착량(강화도와 김포군 사이에 위치)과 강화도를 침구하는 식으로, 시간이 경과됨에 따라서 서 해를 북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치후 니나우치 전투가 끝난 뒤에는 대마도의 대안 지방이 아니라 침구 대상지역을 중부 서해안 지역 일대로 바꿔 비교적 장기간에 걸쳐 이동하면서 침 구하는 것이다. 우왕2년 말에서 3년 초에 걸쳐 이처럼 왜구의 침구시기에 따라 침구 지역이 변화하는 것 은 1376년 11월~12월의 침구가 치후 니나우치 전투에 대비해 병량미를 확보하기 위한 것 이었음을 보여준다. 즉 결전을 앞둔 시점에서는 병량미의 확보가 시급하기 때문에 전장에서 최단거리(最短距離)에 있는 경남 남해안 일대를, 전투가 끝난 직후에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고 약탈의 효율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51 중부 서해안 지역을 침구하였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왜구의 침구 지역과 규슈 지역의 정치 군사 정세는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규슈 지역에서 대규모 군사 충돌(결전)이 발생하기 직전에는 왜구가 대마도의 대안(対岸) 지역인 경상남도 남해안 일대에 집중적으로 침구하고 결전이 종식된 뒤 일시적인 소강상태에 들어가면 왜구의 침구는 고려의 조운선이 집결하는 중부 서해안 지역 일대에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Ⅳ. 여말-선초 왜구의 실체 지금까지 검토한 것처럼, 고려 말 왜구는 전투에 숙련된 전문적인 무장 집단이었다. 그러 50) 본래 백제의 사평현(沙平縣)으로 통일신라 때 신평현으로 고쳐 혜성군(槥城郡:汚川郡)의 영현(領縣)이 되었고, 고려시대 홍주(洪 州:洪城)에 속하였다가 조선 후기에 당진군에 속하였다. 51) 왜구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전국에서 조세를 운반하는 조운선이 집결하는 강화도와 교동도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중부 서해안 지 역 일대가 약탈의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

182 182 면 그 지역적 및 사회적 출자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고려 말 왜구의 실체를 문헌 사료에 입각 해 도식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52 <표 2> 경인(1350)년 이후의 왜구의 구성 쇼니씨 세력 ① 쓰시마(対馬島) ② 북 규슈의 쇼니씨 일족 정서부 세력 기쿠치씨(菊池氏) 주축의 남조 수군 규슈지역 해민 혼슈 서부 해민 시코쿠의 해민 ① 마쓰라토(松浦党) ② 오스미노구니(大隅国, 현재의 鹿児島県) 지역의 아쿠토(悪党) 등. 서해 일로(西海一路) 규슈(九州)의 난신(亂臣) 서변 해도(西邊海道)의 완고한 백성(頑民) 그런데 고려사 에는 왜구의 실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규슈의 난신 과 서변 해도의 완민 이외에도 포도(逋逃) 라는 용어가 보인다. 이하, 포도 의 의미, 그리고 포도 와 난신 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우왕3년(1377) 6월에 고려가 안 길상을 일본에 파견해 왜구의 침구에 항의하자,53 그 해 8월에 일본은 서신을 고려에 보내와 당시 침구해온 왜구들을 가리켜 체포를 피해 도주한 무 리 즉 포도(逋逃) 라고 했다. 다음의 <사료 11>을 보자. <사료 11> 일본국이 승려 신홍을 파견해 서신을 통해 전하기를, 좀도둑(草賊)들은 체포를 피해 도주한 무리들 로 우리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니 아직 이를 금할 수가 없다 고 했다.54 여기서 일본국이 파견한 승려 신홍(信弘)은 규슈탄다이[九州探題] 이마가와 료슌[今川了 俊]의 부하이다.55 그러므로 여기서의 일본국 이란 북조(北朝,=무로마치 막부)의 규슈탄다 52) 앞의 주(26) 논문 참조. 53) 고려사 권133, 열전46, 우왕 3년(1377) 6월. 54) 日本國遣僧信弘來報聘書云, 草竊之賊, 是逋逃輩, 不遵我令, 未易禁焉 ( 고려사 권133, 열전46, 우왕3년(1377) 8월). 55) 일본구주절도사 원료준이 중 신홍에게 그의 군사 69명을 인솔하게 해 고려에 와서 왜적을 체포하게 하였다 ( 고려사 권133, 열 전46, 우왕 4년(1378) 6월)

183 183 이 를 지칭한다. 따라서 우리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니 에서 우리 는 규슈탄다이(막부)를 의미한다. 따라서 여기서의 포도 란 앞 장에서 본 것처럼 치후 니나우치 전투에 참가한 정 서부의 군세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용어는 남북조 내란이 끝난 뒤, 즉 15세기 조선시대에 들 어와서도 사용되고 있으며 또 중국과 일본의 외교 문서에서도 보인다. <표 3> 문헌 사료에 보이는 15세기 초 왜구의 실체에 관한 표현 내 용 출 전 1 요즈음 규슈의 명령을 어긴 소추는 이미 그 죄를 받았다. 이어서 이제 편사(偏師, 군대)를 보내어 해도의 남은 도적들을 섬멸해 왕래하는 배들을 통하게 해 양국의 환심을 연결하 도록 해야 한다. (九州違命小醜, 旣伏其罪, 次當遣偏師, 殄殲海島殘寇, 以通往來舟船, 而結兩國歡心也) 足利義満書 大内義弘充 56 2 형벌을 피해 숨은 간사한 도둑들을 용서하지 말라 (毋容逋逃姦宄) 明建文帝詔書 源道義(足利義 滿)充 57 3 이키, 쓰시마, 여러 섬(諸島) 사람들을 금지하여 해변에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하는 데 노력해왔다. (禁止壹岐對馬諸島之人, 不爲海濱之害) 永樂帝勅書 日本國王源道義 充 58 4 만약 쓰시마, 이키 등 멀리 있는 섬(遠島)의 해구(海寇)들이 출몰해 해안 지방을 겁략(劫掠) 하면, 짐은 왕에게 명령에 이를 토벌하도록 했다. (若對馬壹岐等遠島, 海寇出沒劫掠海濱, 朕命王除之) 永樂帝勅書 日本國王源道義 (足利義滿)充 59 5 왕은 곧바로 군대를 파견하여 그들을 붙잡아 그 선박을 파괴하고 그 무리들을 살육하고 도적의 두목을 붙잡아 사자를 파견해 경사(京師)로 압송했다. 그러나 수괴(渠魁)는 먼 바다 섬으로 도주해 숨으니, 해적(魚蝦)이 출몰해 그 지방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 배를 동원해 급습할 수도 없고 무기도 또한 갑자기 사용할 수 없다. (而渠魁遠竄海島, 偸息鯨波, 魚蝦出沒, 莫適其鄕. 舟楫猝不能及, 鋒鏑猝不能加) 永樂帝勅書 日本國王源道義 (足利義滿)充 60 6 구도(寇盜)를 해도(海島)에서 토벌하고 백성들을 변경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하여... (殄寇盜於海島, 安黎庶於邊隅) 永樂帝勅書 足利義持充 61 7 이보다 앞서 서쪽 변경의 도민(島民)과 무뢰한 무리들이 바다에 떠다니며 도적질을 행함 으로써 귀국의 변경을 어지럽히는 자들이 있었다. 지금 이미 여러 번 지방관에게 명령하 여 이를 못하도록 하였다. 만약 그래도 범하는 자가 있으면 일족을 멸할 것이니 염려하지 마시라. 대저 귀국의 백성들이 고향을 떠나 우리 땅에서 타향살이를 하면서 돌아가지 못 하고, 또 잡혀와 노비가 된 자가 있다면 이후로는 반드시 잘 검시(檢視)하여 호송할 것이다. (先是西鄙島夷, 無賴之徒, 泛海爲賊, 以有擾貴國之邊者, 今已申命州牧, 固制之, 若有犯者, 罪當族誅, 勿爲慮焉, 抑亦其方之民, 流落吾土, 而不能歸, 被虜略, 而爲奴婢者, 自今以後, 必能檢視而護送之) 源道将(斯波義将)書 朝鮮議 政府左右政丞兩相充 62 56) 善隣國寶記 卷中 応永 5年(1398) 8月日付. 57) 善隣國寶記 卷中 建文 4年(1402) 2月 初六日付. 58) 善隣國寶記 卷中 永樂 2年(1404) 12月 2日付. 59) 善隣國寶記 卷中 永樂 4年(1406) 1月 16日付. 60) 善隣國寶記 卷中 永樂 5年(1407) 5月 26日付. 61) 善隣國寶記 卷中 永樂 6年(1408) 12月 11日付. 62) 善隣國寶記 卷中 永樂 7年(1409) 6月 18日付.

184 184 내 출 전 용 8 또한 해도(海島)의 소민(小民)들이 여러 차례 변경을 침범했다고 책하지만, 이는 내가 알지 못하는 일이다. 지금 만약 내가 변경을 노략질 하는 것을 못하도록 하는 명령을 내린다고 한다면, 이는 곧 마치 이전에 노략질하도록 지시한 셈이 된다. 백성의 임금이란 자가 어찌 백성들에게 악행을 하도록 지시할 리가 있겠는가? (又責以海島小民數侵邊圉, 是實我所不知也, 今倘云止之, 則前亦知而令之也, 豈有人主而 敎民爲不善者乎,) 足利義持書 元容周頌充 63 9 형벌을 피하여 숨은 자들이 망명해 때로는 몸을 먼 바다의 섬에 숨기고 때때로 나와서 변 경의 백성들을 해치는 자가 있을 것이다 (雖然逋逃亡命, 或竄身於夐絶之海島, 時時出害邊民者,) 상동(上同) 10 (귀국의) 변경을 약탈하는 것은 곧 (우리나라에서) 도주한 무리들(逋逃之徒)이 바다 섬(海 島)에 숨어서 하는 짓이다. 이를 토벌하려고 하면 번개처럼 재빠르게 몸을 숨기고 토벌대 가 귀환하면 곧바로 또 다시 모여서 나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 그들을 붙잡아서 죽여도 좋다. 일본으로 데려올 필요가 없다. (至夫寇掠邊圉, 則逋逃之徒, 竄於海島之間者之所爲也, 欲土電滅颷逝, 師還則烏合蟻聚, 而不受吾命者也, 捕而戮之可也, 奚必帶而來哉) 足利義持書 元容周頌充 삼도왜구(三島倭寇)가 우리나라의 변환(邊患)이 된 지 거의 50년이 되었다. 정종실록 대마도 등 삼도(三島)의 완악한 백성들이 흉도(兇徒)를 불러 모아 우리 강토를 침노하여 어 지럽히고 인민들을 노략질하여.. 정종실록 가미 시모마쓰우라(上 下松浦) 이키노시마(一岐島) 쓰시마(對馬島) 사람들 해동제국기 67 앞에서 검토한 것처럼, 고려사 우왕3년(1377)조에 최초로 포도 라는 용어가 보인다.68 그런데 그로부터 20여년 뒤에 해당하는 1402년에 명(明)나라가 일본에 보내온 외교 문서에 서도 포도 가 확인된다(2).69 이 사료에서 형벌을 피하여 숨은 간사한 도둑[逋逃姦宄] 라는 표현이 보인다. 해도(海島)의 소민(小民) 과 형벌을 피하여 숨은 자들이 망명해[逋逃亡命] 가 있다. (8)과 (9). 이것은 일본 측이 작성한 문서이다.70 (귀국의) 변경을 약탈하는 것은 곧 (우리나라 63) 善隣國寶記 卷中 応永 26年(1419) 7月 20日付. 64) 善隣國寶記 卷中 応永 26年(1419) 7月 23日付. 65) 三島倭寇爲我國患, 幾五十年矣. ( 정종실록 권1, 정종원년(1399) 5월 16일) 66) 정종실록 권2, 정종원년(1399), 7월 10일.. 67) 서해도 구주(西海道九州) 비전주(肥前州) 68) 앞의 주(55) 사료 참조. 69) 이것은 명(明)의 제2대 황제인 건문제(建文帝)가 1402년(建文4, 応永9) 2월 초(初) 6일에 명나라 사신 천륜도이[天倫道彝] 등을 통 해 源道義(=아시카가 요시미쓰, 足利義滿)에게 보낸 조서(詔書)이다. 그 주요 내용은 아시카가 요시미쓰를 일본 국왕에 책봉한다는 것이었다. 70) 오에이[応永] 26년(永樂17, 1419) 7월 20일에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가 효고[兵庫]의 복엄사(福厳寺)에 있던 명나라 사신과의 절충을 앞둔 접반사 역할을 하던 원용주송(元容周頌)에게 준 서신이다.

185 185 에서) 도주한 무리들[逋逃之徒]이 바다 섬(海島)에 숨어서 하는 짓이다 (10)라고 표기한 것도 있다.71 여기서 귀국의 변경을 약탈하는 자 와 체포될 것을 피하여 도주한 무리[逋逃之輩] 는 동일한 집단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5)는 영락(永樂) 5년(応永14, 1407) 5월 26일에 명에 파견한 사신 견중규밀(堅中圭 密)등이 일본국왕 源道義(아시카가 요시미쓰)에게 전달한 영락제(永樂帝)의 칙서(勅書)이다.72 여기서 진짜 수괴가 먼 바다 섬으로 도주해 숨었다[渠魁遠竄海島] 의 찬(竄) 은 숨다, 달 아나다 의 뜻이므로 포도(逋逃) 와 같은 의미라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포도 라는 용어가 5건 확인된다. (9)의 몸을 먼 바다의 섬에 숨기고 와 해도 소민 에서 해도 는 (3)과 (4)의 사례로 볼 때, 이키[壱岐], 쓰시마[対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명나라의 외교문서에서도 고려사 와 같이,73 쓰시마, 이키 등 멀리 있는 섬 을 왜구의 근거지로 가리키고 있는 것이 다. 또 명의 건문제 조서 (2)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의 서신 (9)에서는 왜구의 실체를 (일본에서) 형벌을 피해 도주한 자(逋逃) 들이 해도(海島)에 숨어서 행하는 것 이라고 했는 데, 이는 고려사 의 포도 와 일치하며, 해도 역시 쓰시마와 이키 섬을 지칭하는 점에서 동일하다. 남북조 내란이 끝난 15세기가 되어도 규슈 지방에는 전란이 그치지 않았다. 쇼니씨와 기 쿠치씨 등 규슈의 토착 호족들과 무로마치 막부의 지원을 등에 입은 규슈탄다이 시부카와씨 [渋川氏]와 그 후원자인 오우치씨[大内氏]의 대립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고려 사 에서처럼74 포도 [逋逃姦宄 逋逃亡命 逋逃之徒]라는 표현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지금까지 고려(조선) 명 일본 삼국의 문헌사료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왜구의 실체 를 포도(逋逃) 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포도 가 왜구 처럼 고려(조 선)이나 명나라가 지어낸 표현이 아니라,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가 만들어낸 조어(造語)였기 71) 이것은 오에이[応永] 26년(永樂17, 1419) 7月 23일에 효고의 복엄사에서 명나라 사신과 만난 원용주송(元容周頌)이 베껴 쓴 영락 제의 칙서를 본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가, 대명외교(対明外交)를 단절할 의지를 명나라 사신에게 전할 것을 지시한 서 신이다. 72) 오에이[応永] 13년(1406)에 명나라 사신 반사(潘賜) 등의 귀국 길에 동행한 견명사 견중규밀(堅中圭密) 등은 다음 해인 14년에 명 나라 수도에 도착해 방물을 바치고 붙잡아 온 왜구 道金 등을 바쳤다. ( 明實錄 永樂 5년 5월 기묘). 다나카 다케오(田中健夫) 編 善隣國寶記 을 참조. 73) 왜적으로 말하면 온 나라가 모두 도적인 것이 아니고 그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이 대마(對馬) 일기(一岐) 등 여러 섬에 근거지를 둠으로써 나라 동쪽 변방에 접근해 무시(無時)로 침범해 옵니다. 앞의 주(80) 사료. 74) 일본국이 승려 신홍을 파견해 서신을 통해 전하기를, 좀도둑(草賊)들은 체포를 피해 도주한 무리들로 우리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 으니 아직 이를 금할 수가 없다 고 했다. 앞의 주(55) 사료.

186 186 때문이다. 즉 무로마치 막부는 고려와 명(明)에 대하여 왜구의 실체를 포도 라고 해명한 것 이었고 그것은 고려(조선)와 명에서 왜구 라고 불리던 존재가, 일본 국내에서는 포도 로 표현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Ⅴ. 결 론 고려 말 왜구는 산악전, 농성전, 게릴라 전술을 활용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무장 수준을 볼 때, 그들은 숙련된 전투 집단으로 남북조 시대의 무사들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침구 지역 과 규슈 지역의 군사 정세의 상관관계에서도 확인된다. 즉, 규슈 지역에서 대규모 군사 충돌 (결전)이 발생하기 직전에는 왜구가 대마도의 대안[対 岸] 지역인 경상남도 남해안 일대에 집 중적으로 침구하지만, 결전이 종식된 뒤 일시적인 소강상태에 들어가면 왜구의 침구는 고려 의 조운선이 집결하는 중부 서해안 지역 일대에 집중되고 있다. 이러한 고려 말 왜구의 실체는 15세기의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고려사 에 보이는 포도 가 15세기의 조선왕조실록 은 물론 중국과 일본 간의 외교문서에 서도 보인다. 왜구가 피해자라 할 수 있는 고려(조선)와 중국의 사료 용어인데 반해, 포도 는 일본의 공권력인 막부가 사용한 것이다. 그 것은 쇼군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며 그 지배에 반 항하던 쇼니씨와 기쿠치씨 등 규슈의 토착 호족 세력들 중 일부가 규슈 본토에서의 전투에서 패하면 이키 섬과 쓰시마로 도주해 거기를 근거로 하여 한반도를 침구해온 무리를 의미했다. 이처럼 한반도의 도서 연해지역에 많은 해양방어시설을 구축하게 한 왜구는 어업과 해상 운송에 종사하던 쓰시마[対馬] 이키[壱岐] 등의 도서연해민이나 고려(조선)인이 일본인과 연 합한 해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규슈 본토에서 내전의 주체로 활동했던 토착 호족 세력의 휘하 에 있었던 전투에 숙련된 전문적인 무장 집단이었다.

187 187 여말-선초 해양방어시설 구축의 역사적 배경 에 대한 토론문 김 인 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고려 말 왜구의 활동은 고려 의 운명을 바꾸는 원인의 하나로 작용할 정도로 중요한 역 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중요성에 비해 이를 전적으로 연구하는 우리나 라 연구자는 그다지 많지 않다. 발표자는 오래 전부터 이런 왜구 문제에 대해 폭 넓게 사료 를 활용하면서 전적으로 연구하는 드문 연구자이며, 그 결과 우리가 잘 몰랐던 왜구의 실체와 성격 등에 여러 연구 성과를 축적하고 있다. 이번에 발표자는 그 동안 본인이 진행했던 왜구의 실체에 대한 연구 내용을 정리하여 발 표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고려 말기에 침입한 왜구는 규슈 본토에서 전투 에 패하여 이키 섬, 쓰시마 섬 등으로 도주한 숙련된 전투 집단으로 남북조 시대의 무사들이 며, 이들이 1377년을 전후하여 고려를 침략하는 양상은 당시 일본 규슈의 정치 상황과 관련 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사실 이 분야를 잘 모르는 토론자가 발표자에게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한다. 첫 번째는 고려 말에 우리나라에 침입했던 왜구가 모두 남북조 시대의 무사들과 관련이 있는가라는 점이다. 발표자가 이번 발표의 본문 제3장의 <표 1>에서 제시한 경인년 이후 왜 구의 구성 에서 보듯이 왜구는 다양한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에는 서변(西邊)

188

189

190

191

192

193

194

195

196

197

198

199

200

201

202

203

204

205

206

207

208

209

210

211

212

213

214

215

216

217

218

219

220

221

222

223

224 224 후 16세기 초인 1522년(중종 17)에는 서남해안지역과 서해안지역까지 성곽(城郭)을 축조함 으로서 체계적인 방어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이처럼 조선 전기 왜구방어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던 수군진들은 16세기 초 반인 중종대의 혼란을 틈탄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수군진의 진관체제에도 한 차례 변화가 있 었지만,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뚜렷한 변화상을 보인다. 전라도지역의 경우 임진왜란 이전 시기의 수군진들이 진도 남도포진(南桃浦鎭)과 금갑도진(金甲島鎭), 강진 (康津) 가리포진(加里浦鎭), 순천 방답진(防踏鎭)을 제외하고는 바다를 끼고 있는 연해지역의 해안가 포구를 중심으로 설치되어 운용되었던 반면에, 17~18세기에 이르러서는 사면이 바 다로 둘러싸인 섬 지역까지 그 외연(外緣)이 확대된다. 또한 이 당시의 수군진들은 자체 방어 시설인 수군진성을 쌓지 않은 점도 이전 시기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따라서 17~18세기 의 수군진들은 성곽이 없이 관아시설과 병선(兵船)의 정박기지로서의 포구만을 갖춘 채 운용 되었다. 그 동안 수군진에 대한 연구는 군제사(軍制史)1와 관방시설의 일부2로서 주로 다루어져 왔 다. 그 마저도 임진왜란 이전의 수군진에 대한 연구에 편중된 까닭에 임란이후 조선 후기의 수군진에 대한 연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형편이다.3 또한 우리나라 전체 특히 경상 전라 충청 등 하삼도지역(下三道地域)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큰 틀을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그 범위를 전남지역으로 한정할 경우에는 그 이해의 폭은 매우 제한적이다. 관아건물 의 배치와 가로망의 공간구조에 대한 연구는 건축학계에 의해 연구가 주도되었다.4 그러나 주 1) 陸軍士官學校韓國軍事硏究室編, 1968, 韓國軍制史-近世朝鮮前期篇, 陸軍本部. 車文燮, 1973, 朝鮮時代軍制硏究, 檀國大學校出版部. 陸軍士官學校韓國軍事硏究室編,1979, 韓國軍制史-近世朝鮮後期篇, 陸軍本部. 方相鉉, 1991, 朝鮮初期 水軍制度, 민족문화사. 오봉근, 1998, 조선수군사, 사회과학출판사. 2) 車勇杰, 1977, 朝鮮 成宗代 海防築造論議와 그 樣相, 白山學報 23, 白山學會., 1980, 朝鮮前期 關防施設의 整備過程, 韓國史論 7, 國史編纂委員會., 1988, 高麗末 朝鮮前期 對倭關防史 硏究, 忠南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沈奉謹, 1995, 韓國南海沿岸城地의 考古學的 硏究, 學硏文化社. 李日甲, 2000, 남해안지역 朝鮮時代 鎭 堡에 관한 연구, 東亞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고용규, 2005, 朝鮮時代 全羅道 水軍鎭의 考察-沿革을 중심으로, 全南文化財 12, 全羅南道. 金相龍, 2005, 朝鮮時代 慶尙道水軍 營鎭 의 變遷過程과 그 原因에 관한 硏究, 慶南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3) 張學根, 1986, 朝鮮時代 海防史 硏究, 檀國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87, 韓國 海洋活動史, 海軍士官學校., 1988, 朝鮮時代 海洋防衛史, 創美社. 오봉근, 1998, 조선수군사, 사회과학출판사. 金京玉, 2000, 朝鮮後期 西南海 島嶼의 社會經濟的인 變化와 島嶼政策 硏究, 全南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金京玉, 2007, 朝鮮後期 古群山鎭의 設置와 運營, 역사문화학회. 4) 朱南哲, 1988, 官衙建築에 관한 硏究, 大韓建築學會誌 , 大韓建築學會. 柳泳秀, 1989, 朝鮮時代 客舍建築에 관한 硏究, 高麗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金鍾永, 1988, 朝鮮時代 官衙建築에 관한 硏究, 檀國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宋制龍, 1988, 全州古都 官衙配置의 外部空間構成에 관한 硏究, 全北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225 225 로 도시형성과 관련하여 읍성 내 외부의 공간구조를 고찰5하거나 읍성분석을 통해 도시공간 구성의 원리와 변천과정에 대한 규명6에 치우친 나머지 수군진의 공간구조에 대한 연구는 거 의 찾아지지 않는다.7 이 글에서는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먼저 전남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수군진을 대상으 로 설치과정과 진관체제의 개편 및 수군진성의 축조시기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이어서 1872년 지방지도 의 전라도지역 지도를 이용하여 전남지역 수군진보(성)의 관아배치와 가 로망의 비교를 통해 수군진의 공간구조에 대해 분석하였다. 그리고 고금도진의 관아건물의 정비복원과 관련하여 문헌기록에 나타나는 건물의 규모를 제시하였다. 李炯圭, 1993, 朝鮮時代 東軒建築의 構成形式에 관한 硏究, 弘益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文泳植, 1995, 朝鮮時代 邑城 配置計劃에 관한 硏究-珍島邑城, 長興邑城, 務安邑城을 中心으로, 明知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林東日, 1996, 朝鮮時代 官衙의 立地와 坐向을 통해 본 都 邑의 造營原理 硏究, 漢陽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安駿鎬 李達勳, 1997, 朝鮮時代 東軒建築의 樣式學的 考察-忠南地方을 中心으로, 대전대학교 산업기술연구소 논문집 8-1, 대전대학교 산업기술연구소. 金東植 金泰永, 1999, 淸州邑城 官衙公廨考, 建築歷史硏究 8-1, 韓國建築歷史學會. 姜圭敃, 2000, 邑城의 公共施設 配置規範에 關한 硏究-忠南地方의 14개 邑城을 中心으로-, 大田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강규민 이달훈, 1999, 朝鮮時代 邑城, 官衙, 鄕校간의 配置規範에 關한 硏究-忠南地方의 16개 邑城주변을 中心으로, 大韓建 築學論文集 18-2, 大韓建築學會. 金起德 李在憲, 2001, 朝鮮後期 忠淸道 全義縣 官衙建築의 配置構成에 관한 硏究, 건축역사연구 10-4, 韓國建築歷史學會. 李在憲, 2002, 朝鮮後期 忠淸道 官衙建築의 配置體系, 淸州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吳定勳, 2002, 全羅左水營城의 배치특성에 관한 연구, 順天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金興燮, 2003, 韓國傳統 倉庫의 建築特性에 關한 硏究-官營 및 宗敎建築의 倉庫를 中心으로, 弘益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金允鏡, 2004, 蔚山客舍의 解體過程과 原形推定에 關한 硏究, 蔚山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洪性浩, 2005, 江原監營의 建築的 特性에 관한 硏究, 三陟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이수진, 2007, 조선시대 지방객사의 구조변화에 대한 일고찰, 목포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5) 김철수, 1983, 韓國 都 邑城都市의 城郭이 都市形成發展에 미친 影響-東 西洋都市 比較를 중심으로, 논문보고집 3, 계명대 학교 산업기술연구소. 김선범, 1999, 城郭의 都市原形的 解釋-조선시대 邑城을 중심으로, 한국도시지리학회지, 2-2, 한국도시지리학회. 金源永, 1993, 華城 城郭建設에 따른 邑城 形成 內容에 關한 硏究, 成均館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6) 李相梂, 1983, 朝鮮中期 邑城에 關한 硏究-輿地圖書의 分析을 中心으로, 서울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李昶武, 1988, 朝鮮後期 城邑空間構造에 關한 硏究-中小城郭都市事例를 中心으로, 서울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沈秀輔, 1990, 우리나라 城郭都市(都城 邑城)의 空間構成에 關한 硏究, 暻園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姜賢, 1995, 邑城의 空間構造 및 建築物 變遷에 關한 硏究-朝鮮中期 社會變動에 따른 都市化 過程을 中心으로, 서울大學校 大 學院 碩士學位論文. 김한기, 1999, 조선시대 지방도읍의 공간구성과 기능-성주목 밀양도호부 청도군 고령현의 경우, 경북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우현승, 2001, 경북 상주시의 도시공간구조의 변천과정에 관한 연구, 연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李在煥, 2001, 朝鮮時代 邑治의 空間構成에 關한 硏究-경상북도지역(漆谷 淸道)을 중심으로, 大邱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房右源, 2001, 順天市 都市空間構造의 變遷特性에 關한 硏究, 順天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신행우, 2002, 도시공간구조의 성장과 변화에 관한 연구-수원시 수원성을 중심으로-, 세종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梁善娥, 2003, 남원의 토지이용 및 가로변천 연구-조선후기 남원읍성을 기준으로-, 全北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金起德 李在憲, 2003, 朝鮮後期 忠淸道 地方 邑治의 空簡構造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 12-1, 韓國建築歷史學會. 이재환 예명해, 2004, 朝鮮時代 軍威邑治의 空簡構造에 관한 연구, 大韓建築學會論文集 20-2, 大韓建築學會. 최재권, 2004, 우리나라 읍성의 공간구조 특성에 관한 연구-정의읍성과 낙안읍성을 중심으로, 제주관광대학 논문집 10, 제주관광대학. 成昌煥, 2005, 慶北 永川市 都市空間構造의 變遷에 關한 硏究, 大邱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論文. 李在煥, 2006, 朝鮮時代後期 慶尙道邑治의 空間構成에 關한 硏究-경상북도지역을 중심으로, 大邱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한삼건, 2006, 일제강점기 邑城과 邑治의 변용, 건축역사연구 16-5, 한국건축역사학회. 7) 탁형수, 2002, 옛지도를 통하여 본 성곽시설물에 관한 연구, 전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5, 전라남도 진성에 관한 연 구, 호남문화연구 36,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

226

227

228

229

230

231

232

233

234

235

236 236 4) 4기 - 중종대 중종대의 1522년(중종 17)에 전라도의 수군진은 또 다시 변화를 겪게 되는데 같은 해 6월 추자도 침입 및 삼포왜란 등 계속된 왜변으로 인하여 전라 좌 우수영관하의 수군진들도 약간 의 변동을 거쳐 재정비된다. 그 내용은 전라좌도의 방답진의 신설과 돌산진의 폐지, 전라우도 의 가리포진 및 이진진의 신설과 달량진의 폐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이로써 전라도 수군진은 전라우수영의 임치진진관과 가리포진관, 전라좌수영의 방답진관으로 새롭게 개편된다.91 그 변화과정을 살펴보면 <표 3>과 같다. <표 3> 중종대 수군진의 변화과정 구분 편 제 소속군현 소 재 지 우 수 영 우도수군절제사영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일대 임치첨사진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 임치 목포만호진 목포시 만호동 다경만호진 무안군 운남면 성내리 법성포만호진 영광군 법성면 진내리 검모포만호진 전북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 임치진관 우 군산만호진 도 가리포진관 좌 수 영 좌 방답진관 도 91) 중종실록 권44, 17년 5월 임자. 전북 군산시 금동 가리포첨사진 완도군 완도읍 군내리 회령포만호진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 마도만호진 강진군 대구면 마량리 이진만호진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 어란포만호진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금갑도만호진 진도군 의신면 금갑리 남도포만호진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좌도수군절제사영 비 고 1526년 신설 여수시 중앙동 국동일대 방답첨사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 사도만호진 고흥군 영남면 금사리 여도만호진 고흥군 점암면 여호리 발포만호진 고흥군 도화면 내발리 녹도만호진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1528년 신설

237 237 5) 5기 - 숙종대 조선 후기의 수군 진관체제에서 나타난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가 고금도진처럼 동첨절사진 의 등장과 고돌산진처럼 권관(權官)이나 별장(別將) 등 최하급의 무관이 주둔하는 진의 설치이다. 동첨절제사는 만호와 동급인 종4품으로서, 종3품의 첨절제사 아래에 위치하는 지휘관이었다. 임 진왜란과 같은 전란을 치르는 과정에서 전공을 세운 만호(종4품)에게는 그 지위를 높여 첨사로서 대우를 해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이 조선 후기에 동첨절제사(진)의 등장으로 연결되고 있다. 아울러 최하관품인 권관(종9품)이나 별장(종9품)이 주재하는 소모진(召募鎭)은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초반부터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만호를 파견하기에는 너무 규모가 작은 진에 보다 하위의 지휘관을 파견하기 시작한데서 그와 같은 소모진을 설치하는 단서가 마련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임진왜란 무렵 비용의 부족으로 지휘관과 병졸들을 장기간 주둔시 키는데 어려움이 있는 요충지에 민간으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선박과 장정(壯丁)들을 모아 방 어하게 하였던 진들로부터 그 기원을 찾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러던 것이 후에 정식으로 진관 체제에 편입됨으로서 제진의 하나로서 존립하기에 이른 것이 아닌가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92 고금도진이 이러한 예에 속한다. 전라도 수군진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17세기 후반에 섬[島嶼] 지역을 중심으로 집중 설 치되고, 이로 인해 진관체제의 개편이 이루어진다. 전라도지역의 경우 1674~1683년 까지 9년 동안 고금도진을 포함하여 5개소나 되는 수군진이 새롭게 설치되고 있다. 1674년(숙종 원년) 고군산진(전북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리 진말마을), 년(숙종 7) 고금도진(전남 완 도군 고금면 덕동리 덕동마을)과 신지도진(전남 완도군 신지면 송곡리 송곡마을)94, 1682년 (숙종 8) 지도진(전남 신안군 지도읍 읍내리), 년(숙종 9) 위도진전북 부안군 위도면 진 리)이 새롭게 신설되었다.96 이로 인해 1683년(숙종 9) 6월에는 임치진관을 폐지하는 대신 위도진관, 가리포진관, 방 답진관으로 개편된다.97 이때 위도진관은 서해안지역의 군산진(전북 군산시 금동)을 비롯하여 92) 변동명 2007, 돌산도와 방답진, 麗水 防踏鎭城, (재)남도문화재연구원, 36~37쪽. 93) 1675년(인조 2) 소모별장을 설치하여 방패선 1척만을 배치하였으나, 1637년(인조 15) 전선(戰船)으로 바꾸었고, 1675년(숙종 원 년)에 첨사진(僉使鎭)으로 승격시켰다. 다시 1781년(정조 5) 독진(獨鎭)으로 승격시켜 영장(營長)을 두었다가, 1790년(정조 14) 다 시 독진(獨鎭)으로 환원하였다.( 古群山鎭誌 ). 94) 康津薪智島鎭地圖 (奎10456). 95) 지사(知事) 민유중(閔維重)이 위도(蝟島)와 지도(智島)에 진(鎭)을 설치하는 편의(便宜)를 진달하자,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빨 리 품지(禀旨)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 숙종실록 권12, 7년 7월 26일 정축. 智島鎭鎭誌, 羅州智島鎭地圖 (奎10491)]. 96) 숙종실록 권11, 7년 3월 17일 경오. 97) 위도(蝟島)와 가리포(加里浦)에 수군진관(水軍鎭管)을 설치하여, 임치(臨淄) 고군산(古群山) 목포(木浦) 다경포(多慶浦) 법성포(法 聖浦) 검모포(黔毛浦) 군산포(群山浦) 신도(新島:지도(智島)의 여덟 보(堡)를 위도(蝟島)에 소속시키고, 고금도(古今島) 남도포(南 桃浦) 금갑도(金甲島) 어란포(於蘭浦) 이진(梨津) 신지도(薪智島) 마도(馬島) 회령포(會寧浦)의 여덟 보(堡)를 가리포(加里浦)에 소 속시켰다. 두 진(鎭)은 양남(兩南:영남과 호남) 수로(水路)의 인후(咽喉)였으므로 본도(本道)의 감사(監司)와 수사(水使)에게 순의(詢 議)하여 진관(鎭管)을 설치한 것이다.( 숙종실록 권14, 9년 6월 10일 경술).

238

239

240

241

242

243

244

245

246

247

248 248 었으리라 본다. 이러한 주도로 주변을 중심으로 시설물들이 배치, 형성되고 간선도로가 만들 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지도에 보이는 것과 같이 간선도로망 주변에 시설물들이 산재하여 위 치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성문이 동ㆍ서 양측에 존재하는 경우는 성문을 잇는 도로망 위쪽으 로 시설물들이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로 보인다. 전남지역 수군진(성)에서는 흥양 녹도 진성을 제외한 다른 수군진(성)에서는 지형 및 풍수적인 영향과 군사적 필요에 의해 3개의 성 문을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남지역의 다른 수군진(성)의 도로망은 <표 11>과 같다.126 <표 10> 지도를 통해서본 성문의 위치 및 형태 연번 진 보 성 성문위치 및 형태 연번 성문위치 및 형태 진 보 성 1 강진현 마량진 북, 남(평거식육축,1층루각) 11 영암군 어란진 북, 남, 동 2 장흥부 회령진 북, 남, 동 12 영광군 다경포진 동, 서 3 흥양현 녹도진 북, 남, 동, 서 13 흥양현 여도진 북, 남 4 흥양현 발포진 남, 동, 서 14 함평현 임치진 북, 동, 서 5 흥양현 사도진 남(1층누각), 서(1층루각) 15 강진현 고금도진 성곽 無 6 순천부 고돌산진 북, 남(중층누각),서 16 강진현 신지도진 성곽 無 7 순천부 방답진 남(1층누각), 동, 서(1층누각) 17 강진현 청산진 남, 동, 서 (평거식육축,1층누각) 8 진도군 남도포진 남, 동, 서(3곳 모두 문지만 존재) 18 나주목 지도진 성곽 無 9 진도군 금갑진 동(1층누각), 서(1층누각) 19 영광군 임자진 성곽 無 10 영암군 이진진 남, 동, 서 읍성과 수군진(성)의 도로망은 성문이 4개인 경우는 十자형, 성문이 3개인 경우는 T자형, 성문이 2개인 경우 一자형으로 성문의 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전남지역의 수군진(성) 도로 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탁형수, 2002, 옛지도를 통하여 본 성곽시설물에 관한 연구, 전남대석사학위논문, 69~73쪽., 2005, 전라남도 진성에 관한 연구, 호남문화연구 36,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 265~ 267쪽. 127) 탁형수, 2002, 옛지도를 통하여 본 성곽시설물에 관한 연구, 전남대석사학위논문, 69~73쪽., 2005, 전라남도 진성에 관한 연구, 호남문화연구 36,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 265~ 267쪽.

249 249 <표 11> 1872년 고지도에 나타난 전남지역 수군진(성)의 도로망 진성명 1872년 진지도 도 로 망 진성명 순천부 방답진 영암군 이진진 순천부 고돌산진 영암군 어란진 흥양현 여도진 진도군 금갑진 흥양현 사도진 진도군 남도포진 흥양현 발포진 무안현 목포진 흥양현 녹도진 영광군 다경포진 장흥부 회령포진 함평현 임치진 강진현 마도진 *나주목 지도진 *강진현 고금도진 *영광군 임자진 *강진현 신지도진 영광군 법성포진 강진현 청산진 범례 1872년 진지도 성곽 도 로 망 성문 도로

250

251

252

253

254

255

256

새만금세미나-1101-이양재.hwp

새만금세미나-1101-이양재.hwp 새만금지역의 합리적인 행정구역 결정방안 이 양 재 원광대학교 교수 Ⅰ. 시작하면서 행정경계의 획정 원칙은 국민 누가 보아도 공감할 수 있는 기준으로 결정 되어야 관련 지방자치단체와 시민들의 분쟁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모 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신생매립지의 관할에 대한 지방자치단체 간 분쟁(경기도 평택시와 충청남도 당진군, 전라남도 순천시와 전라남도 광양시

More information

???? 1

???? 1 제 124 호 9 3 와 신시가지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나면 제일 먼저 이 도시에서 언제나 활기가 넘 쳐나는 신시가지로 가게 된다. 그 중심에 는 티무르 공원이 있다. 이 공원을 중심으 로 티무르 박물관과 쇼핑 거리가 밀집돼 있다. 공원 중심에는 우즈베키스탄의 영 웅, 티무르 대제의 동상이 서 있다. 우즈베 키스탄을 여행하다 보면 어느 도시에서나 티무르의 동상이나

More information

사진 24 _ 종루지 전경(서북에서) 사진 25 _ 종루지 남측기단(동에서) 사진 26 _ 종루지 북측기단(서에서) 사진 27 _ 종루지 1차 건물지 초석 적심석 사진 28 _ 종루지 중심 방형적심 유 사진 29 _ 종루지 동측 계단석 <경루지> 위 치 탑지의 남북중심

사진 24 _ 종루지 전경(서북에서) 사진 25 _ 종루지 남측기단(동에서) 사진 26 _ 종루지 북측기단(서에서) 사진 27 _ 종루지 1차 건물지 초석 적심석 사진 28 _ 종루지 중심 방형적심 유 사진 29 _ 종루지 동측 계단석 <경루지> 위 치 탑지의 남북중심 하 출 입 시 설 형태 및 특징 제2차 시기 : 건물 4면 중앙에 각각 1개소씩 존재 - 남, 서, 북면의 기단 중앙에서는 계단지의 흔적이 뚜렷이 나타났으며 전면과 측면의 중앙칸에 위치 - 동서 기단 중앙에서는 계단 유인 계단우석( 階 段 隅 石 ) 받침지대석이 발견 - 계단너비는 동측면에서 발견된 계단우석 지대석의 크기와 위치를 근거로 약 2.06m - 면석과

More information

이용자를 위하여 1. 본 보고서의 각종 지표는 강원도, 정부 각부처, 기타 국내 주요 기관에서 생산 한 통계를 이용하여 작성한 것으로서 각 통계표마다 그 출처를 주기하였음. 2. 일부 자료수치는 세목과 합계가 각각 반올림되었으므로 세목의 합이 합계와 일 치되지 않는 경우도 있음. 3. 통계표 및 도표의 내용 중에서 전년도판 수치와 일치되지 않는 것은 최근판에서

More information

??

?? 한국공항공사와 어린이재단이 함께하는 제2회 다문화가정 생활수기 공모전 수기집 대한민국 다문화가정의 행복과 사랑을 함께 만들어 갑니다. Contents 02 04 06 07 08 10 14 16 20 22 25 28 29 30 31 4 5 6 7 8 9 10 11 12 13 15 14 17 16 19 18 21 20 23 22 24 25 26 27 29 28

More information

............

............ 제2장 1. 모월곶, 석곶, 서곶, 개건너 검단지역이 편입되기 전, 인천의 서구 전체는 지난날 서곶으로 불리던 지역이었다. 1914년 4월 1일 부평군 모월곶면과 석곶면을 통합되어 서곶 면이 되었다. 서곶이라는 지명은 군 소재지인 부평에서 서쪽 해안에 길 게 뻗어있으므로 그렇게 지어졌다. 이 지명은 반세기 이상 사용되었다. 그래서 인천시가 구제( 區 制 )를

More information

<B9E9B3E2C5CDBFEFB4F5B5EBBEEE20B0A1C1A4B8AE20B1E6C0BB20B0C8B4C2B4D92E687770>

<B9E9B3E2C5CDBFEFB4F5B5EBBEEE20B0A1C1A4B8AE20B1E6C0BB20B0C8B4C2B4D92E687770> 2011 어르신 생활문화전승프로그램 柯 亭 里 義 兵 마을 백년터울 더듬어 가정리 길을 걷는다 주관 춘천문화원 후원 한국문화원 연합회 문화체육관광부 -차 례- 제1장 구술 자료의 가치 1. 역사적 측면 2. 문화적 측면 3. 미래 삶의 터전 제2장 지명으로 전하는 생활문화전승 제3장 구술로 전하는 생활문화전승 1. 의암제를 준비하는 사람 류연창 2. 고흥 류

More information

주지스님의 이 달의 법문 성철 큰스님 기념관 불사를 회향하면서 20여 년 전 성철 큰스님 사리탑을 건립하려고 중국 석굴답사 연구팀을 따라 중국 불교성지를 탐방하였습 니다. 대동의 운강석굴, 용문석굴, 공의석굴, 맥적산석 굴, 대족석굴, 티벳 라싸의 포탈라궁과 주변의 큰

주지스님의 이 달의 법문 성철 큰스님 기념관 불사를 회향하면서 20여 년 전 성철 큰스님 사리탑을 건립하려고 중국 석굴답사 연구팀을 따라 중국 불교성지를 탐방하였습 니다. 대동의 운강석굴, 용문석굴, 공의석굴, 맥적산석 굴, 대족석굴, 티벳 라싸의 포탈라궁과 주변의 큰 불교학과반(1년 과정) 기초교리반(6개월 과정) 매주 화요일 저녁 7시 매주 목요일 오후 2시 / 저녁 7시 5월 5일 5월 12일 5월 19일 5월 26일 어린이날 휴강 인도불교사 2 / 이거룡 교수님 인도불교사 3 / 이거룡 교수님 중국불교사 1 / 이덕진 교수님 5월 7일 5월 14일 5월 21일 5월 28일 백련암 예불의식 및 기도법 / 총무스님 성철

More information

38--18--최우석.hwp

38--18--최우석.hwp 古 詩 源 < 顔 延 之 > 篇 譯 註 * 崔 宇 錫 1) 1. 序 文 2. 古 詩 源 < 顔 延 之 > 篇 譯 註 3. 結 語 1. 序 文 沈 德 潛 (1673-1769)의 字 는 確 士 이고 號 는 歸 愚 이다. 江 南 長 洲 (현재의 江 蘇 省 蘇 州 ) 사람으로 淸 代 聖 祖, 世 宗, 高 宗 삼대를 모두 거쳤다. 특히 시를 몹 시 좋아한

More information

조선왕조 능 원 묘 기본 사료집 -부록 : 능 원 묘의 현대적 명칭표기 기준안 차 례 서 장 : 조선왕실의 능 원 묘 제도 11 제 1부 능 원 묘 기본 사료 Ⅰ. 능호( 陵 號 ) 및 묘호( 廟 號 )를 결정한 유래 1. 건원릉( 健 元 陵 ) 21 2. 정릉( 貞 陵 ) 22 3. 헌릉( 獻 陵 )

More information

<C0CEBCE2BABB2D33C2F7BCF6C1A420B1B9BFAAC3D1BCAD203130B1C72E687770>

<C0CEBCE2BABB2D33C2F7BCF6C1A420B1B9BFAAC3D1BCAD203130B1C72E687770> 해제 면양행견일기 沔 陽 行 遣 日 記 이 자료는 한말의 개화파 관료, 김윤식 金 允 植 (1835~1922)이 충청도 면천 沔 川 에 유배하면서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전문 傳 聞 한 것을 일일이 기록한 일기책 이다. 수록한 부분은 속음청사 續 陰 晴 史 의 권 7로 내제 內 題 가 면양행견일기 沔 陽 行 遣 日 記 로 되어 있는 부분 가운데 계사년 癸 巳 年

More information

<32303132BDC3BAB8C1A4B1D4C6C75BC8A3BFDC303530395D2E687770>

<32303132BDC3BAB8C1A4B1D4C6C75BC8A3BFDC303530395D2E687770> 조 례 익산시 조례 제1220호 익산시 주민감사 청구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 1 익산시 조례 제1221호 익산시 제안제도 운영조례 일부개정조례 3 익산시 조례 제1222호 익산시 시채에 관한 조례 폐지조례 12 익산시 조례 제1223호 익산시 시세 감면 조례 전부개정조례 13 익산시 조례 제1224호 익산시 행정기구설치조례 19 익산시 조례 제1225호 익산시

More information

cls46-06(심우영).hwp

cls46-06(심우영).hwp 蘇 州 원림의 景 名 연구 * 用 典 한 경명을 중심으로 1)심우영 ** 목 차 Ⅰ. 서론 Ⅱ. 기존의 경명 命 名 法 Ⅲ. 귀납적 결과에 따른 경명 분류 1. 신화전설 역사고사 2. 文 辭, 詩 句 Ⅳ. 결론 Ⅰ. 서론 景 名 이란 景 觀 題 名 (경관에 붙인 이름) 의 준말로, 볼만한 경치 지구와 경치 지 점 그리고 경치 지구 내 세워진 인공물에 붙여진

More information

민주장정-노동운동(분권).indd

민주장정-노동운동(분권).indd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노동운동사 정 호 기 농민운동 1 목 차 제1장 연구 배경과 방법 07 1. 문제제기 2. 기존 연구의 검토 3. 연구 대상의 특성과 변화 4. 연구 자료와 연구 방법 07 10 12 16 제2장 이승만 정부 시대의 노동조합운동 19 1. 이승만 정부의 노동정책과 대한노총 1) 노동 관련 법률들의 제정과 광주

More information

0429bodo.hwp

0429bodo.hwp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명단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이 명단은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의 후손 또는 연고자로부터 이의신청을 받기 위해 작성 되었습니다. 이 인물정보를 무단 복사하여 유포하거나 인터넷을 통해 전 파하는일체의행위는법에저촉될수있습니다. 주요 훈포상 약어 1. 병합기념장 2. 대정대례기념장 3. 소화대례기념장

More information

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동경잡기東京雜記 권1 진한기辰韓紀 경상도는 본래 진한(辰韓)의 땅인데, 뒤에 신라(新羅)의 소유가 되었다. 여지승 람(輿地勝覽) 에 나온다. 진한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다. 스스로 말하기를, 망 명한 진(秦)나라 사람이 난리를 피하여 한(韓)으로 들어오니 한이 동쪽 경계를 분할 하여 주었으므로 성책(城栅)을 세웠다. 하였다. 그 언어가 진나라 사람과 비슷하다.

More information

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 음운 [ㄱ] [국], [박], [부억], [안팍] 받침의 발음 [ㄷ] [곧], [믿], [낟], [빋], [옫], [갇따], [히읃] [ㅂ] [숩], [입], [무릅] [ㄴ],[ㄹ],[ㅁ],[ㅇ] [간], [말], [섬], [공] 찾아보기. 음절 끝소리 규칙 (p. 6) [ㄱ] [넉], [목], [삭] [ㄴ] [안따], [안꼬] [ㄹ] [외골], [할꼬]

More information

E1-정답및풀이(1~24)ok

E1-정답및풀이(1~24)ok 초등 2 학년 1주 2 2주 7 3주 12 4주 17 부록` 국어 능력 인증 시험 22 1주 1. 느낌을 말해요 1 ⑴ ᄂ ⑵ ᄀ 1 8~13쪽 듣기 말하기/쓰기 1 ` 2 ` 3 참고 ` 4 5 5 5 ` 6 4 ` 7 참고 ` 8 일기 ` 9 5 10 1 11, 3 [1~3] 들려줄 내용 옛날 옛날, 깊은 산골짜기에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 이

More information

교사용지도서_쓰기.hwp

교사용지도서_쓰기.hwp 1. 재미있는 글자 단원의 구성 의도 이 단원은 도비와 깨비가 길을 잃고 헤매다 글자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고 글자 공부를 하게 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자칫 지겨울 수 있는 쓰기 공부를 다양한 놀이 위주의 활동으로 구성하였고, 학습자 주변의 다양한 자료들을 활용함으로써 학습에 대한 흥미를 갖고 활동할 수 있게 하였다. 각 단계의 학습을 마칠 때마다 도깨비 연필을

More information

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과 임제 신해진(전남대) 1. 머리말 세조의 왕위찬탈과 단종복위 과정에서의 사육신을 소재로 한 작품은 남효온( 南 孝 溫 )의 (1492년 직전?), 임제( 林 悌 )의 (1576?), 김수민( 金 壽 民 )의 (1757) 등이 있다. 1) 첫 작품은 집전( 集

More information

<C1B6BCB1B4EBBCBCBDC3B1E2342DC3D6C1BE2E687770>

<C1B6BCB1B4EBBCBCBDC3B1E2342DC3D6C1BE2E687770> 권2 동경잡기 東京雜記 동경잡기 173 권2 불우 佛宇 영묘사(靈妙寺) 부(府)의 서쪽 5리(里)에 있다. 당 나라 정관(貞觀) 6년(632) 에 신라의 선덕왕(善德王)이 창건하였다. 불전(佛殿)은 3층인데 체제가 특이하다. 속설에 절터는 본래 큰 연못이었는데, 두두리(豆豆里) 사람들이 하룻밤 만에 메 우고 드디어 이 불전을 세웠다. 고 전한다. 지금은

More information

6±Ç¸ñÂ÷

6±Ç¸ñÂ÷ 6 6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과천심상소학교 졸업증서(문헌번호 03-004) 일제강점기 과천초등학교의 유일한 한국인 교장이었던 맹준섭임을 알 수 있다.

More information

<C3D6C1BE5FBBF5B1B9BEEEBBFDC8B0B0DCBFEFC8A32831333031323120C3D6C1BEBABB292E687770>

<C3D6C1BE5FBBF5B1B9BEEEBBFDC8B0B0DCBFEFC8A32831333031323120C3D6C1BEBABB292E687770> 우리 시의 향기 사랑하는 일과 닭고기를 씹는 일 최승자, 유 준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강사/문학평론가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More information

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80 < 관용 표현 인지도> 남 여 70 60 50 40 30 20 10 0 1 2 3 4 5 6 70 < 관용 표현 사용 정도> 남 여 60 50 40 30 20 10 0 4학년 가끔쓴다 써본적있다 전혀안쓴다 5학년 가끔쓴다 써본적있다 전혀안쓴다 6학년 가끔쓴다 써본적있다 전혀안쓴다 70 < 속담 인지도> 남 여 60 50 40 30 20 10 0 1 2

More information

¸é¸ñ¼Ò½ÄÁö 63È£_³»Áö ÃÖÁ¾

¸é¸ñ¼Ò½ÄÁö 63È£_³»Áö ÃÖÁ¾ 정보나눔 섭이와 함께하는 여행 임강섭 복지과 과장 여름이다. 휴가철이다. 다 들 어디론가 떠날 준비에 마음 이 들떠 있는 시기가 아닌가 싶다. 여행 매니아까지는 아니 지만, 나름 여행을 즐기는 사 람으로서 가족들과 신나는 휴 가를 보낼 계획에 살짝 들떠 있는 나에게 혼자만 신나지 말 고 같이 좀 신났으면 좋겠다며 가족들과 같이 가면 좋은 여행 눈이 시리도록

More information

177

177 176 177 178 179 180 181 182 183 184 185 186 187 188 (2) 양주조씨 사마방목에는 서천의 양주조씨가 1789년부터 1891년까지 5명이 합격하였다. 한산에서도 1777년부터 1864년까지 5명이 등재되었고, 비인에서도 1735년부터 1801년까지 4명이 올라있다. 서천지역 일대에 넓게 세거지를 마련하고 있었 던 것으로

More information

제주어 교육자료(중등)-작업.hwp

제주어 교육자료(중등)-작업.hwp 여는말 풀꽃, 제주어 제주어는 제주인의 향기입니다. 제주인의 삶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삶의 향기이고, 꿈의 내음입니다. 그분들이 어루만졌던 삶이 거칠었던 까닭에 더욱 향기롭고, 그 꿈이 애틋했기에 더욱 은은합니다. 제주어는 제주가 피워낸 풀잎입니다. 제주의 거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비바람 맞고 자랐기에 더욱 질박합니다. 사철 싱그러운 들풀과 들꽃향기가

More information

01Report_210-4.hwp

01Report_210-4.hwp 연구보고서 210-4 해방 후 한국여성의 정치참여 현황과 향후 과제 한국여성개발원 목 차 Ⅰ 서 론 Ⅱ 국회 및 지방의회에서의 여성참여 Ⅲ 정당조직내 여성참여 및 정당의 여성정책 Ⅳ 여성유권자의 투표율 및 투표행태 Ⅴ 여성단체의 여성정치참여 확대를 위한 운동 Ⅵ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를 위한 향후 과제 참고문헌 부 록 표 목 차 Ⅰ 서 론 . 서론 1.

More information

<C3D1BCB15FC0CCC8C45FBFECB8AE5FB1B3C0B0C0C75FB9E6C7E228323031362D352D32315FC5E4292E687770>

<C3D1BCB15FC0CCC8C45FBFECB8AE5FB1B3C0B0C0C75FB9E6C7E228323031362D352D32315FC5E4292E687770> 총선 이후 우리 교육의 방향 당 체제에서 우리 교육의 전망과 교육행정가들의 역할 박 호 근 서울시의회 의원 교육위원회 위원 서론 년 월 일 제 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는 바로 민의 의 반영이기 때문에 총선결과를 살펴보고 왜 이러한 결과가 나왔는가를 분석해 본 후 년 월 일을 기점으로 제 대 국회의원들의 임기가 시 작되는 상황에서 우리 교육이 어떻게

More information

목 차 營 下 面 5 前 所 面 71 後 所 面 153 三 木 面 263 龍 流 面 285 都 已 上 條 367 同 治 六 年 (1867) 正 月 日 永 宗 防 營 今 丁 卯 式 帳 籍 범례 1. 훼손 등의 이유로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는 로 표기함. 단, 비정 이 가능한 경우는 ( ) 안에 표기함. 2. 원본에서 누락된 글자는 [ ] 안에 표기함. 단, 누락된

More information

639..-1

639..-1 제639호 [주간] 2014년 12월 15일(월요일) http://gurotoday.com http://cafe.daum.net/gorotoday 문의 02-830-0905 대입 준비에 지친 수험생 여러분 힘내세요 신도림테크노마트서 수험생과 학부모 600명 대상 대입설명회 구로아트밸리서는 수험생 1,000명 초대 해피 콘서트 열려 구로구가 대입 준비로 지친

More information

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20 11-36 1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20 11-36 1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교육과학기술부 고시 제 2011 361호 [별책 3] 중학교 교육과정 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20 11-36 1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2 와 같습니다. 3.

More information

시험지 출제 양식

시험지 출제 양식 2013학년도 제2학기 제1차 세계사 지필평가 계 부장 교감 교장 2013년 8월 30일 2, 3교시 제 3학년 인문 (2, 3, 4, 5)반 출제교사 : 백종원 이 시험 문제의 저작권은 풍암고등학교에 있습니다. 저 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전재와 복제는 금지 되며, 이를 어길 시 저작권법에 의거 처벌될 수 있습니다. 3. 전근대 시기 (가)~(라)

More information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통합 우리나라 ⑵ 조상님들이 살던 집에 대 해 아는 어린이 있나요? 저요. 온돌로 난방과 취사를 같이 했어요! 네, 맞아요. 그리고 조상님들은 기와집과 초가집에서 살았어요. 주무르거나 말아서 만들 수 있는 전통 그릇도 우리의 전통문화예요. 그리고 우리 옷인 한복은 참 아름 답죠? 여자는 저고리와 치마, 남자는 바지와 조끼를 입어요. 명절에 한복을 입고 절을

More information

상품 전단지

상품 전단지 2013 2013 추석맞이 추석맞이 지역우수상품 안내 안내 지역우수상품 지역 우수상품을 안내하여 드리오니 명절 및 행사용 선물로 많이 활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지역우수상품을 구입하시면 지역경제가 살아납니다. 즐거운 한가위 보내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 경기동부상공회의소 임직원 일동 - 지역우수상품을 구입하시면 지역경제가 살아납니다.

More information

:::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시 민 참 여 고 려 사 항 이 해 당 사 자 : 유 ( ) 무 전 문 가 : 유 ( ) 무 옴 브 즈 만 : 유 ( ) 무 법 령 규 정 : 교통 환경 재

:::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시 민 참 여 고 려 사 항 이 해 당 사 자 : 유 ( ) 무 전 문 가 : 유 ( ) 무 옴 브 즈 만 : 유 ( ) 무 법 령 규 정 : 교통 환경 재 시 민 문서번호 어르신복지과-1198 주무관 재가복지팀장 어르신복지과장 복지정책관 복지건강실장 결재일자 2013.1.18. 공개여부 방침번호 대시민공개 협 조 2013년 재가노인지원센터 운영 지원 계획 2013. 01. 복지건강실 (어르신복지과) :::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More information

2

2 1 2 3 4 5 6 또한 같은 탈북자가 소유하고 있던 이라고 할수 있는 또 한장의 사진도 테루꼬양이라고 보고있다. 二宮喜一 (니노미야 요시가즈). 1938 년 1 월 15 일생. 신장 156~7 센치. 체중 52 키로. 몸은 여윈형이고 얼굴은 긴형. 1962 년 9 월경 도꾜도 시나가와구에서 실종. 당시 24 세. 직업 회사원. 밤에는 전문학교에

More information

화이련(華以戀) 141001.hwp

화이련(華以戀) 141001.hwp 年 花 下 理 芳 盟 段 流 無 限 情 惜 別 沈 頭 兒 膝 夜 深 雲 約 三 십년을 꽃 아래서 아름다운 맹세 지키니 한 가닥 풍류는 끝없는 정이어라. 그대의 무릎에 누워 애틋하게 이별하니 밤은 깊어 구름과 빗속에서 삼생을 기약하네. * 들어가는 글 파르라니 머리를 깎은 아이가 시린 손을 호호 불며 불 옆에 앉아 있다. 얼음장 같은 날씨에 허연 입김이 연기처럼

More information

ÆòÈ�´©¸® 94È£ ³»Áö_ÃÖÁ¾

ÆòÈ�´©¸® 94È£ ³»Áö_ÃÖÁ¾ 사람 안간힘을 다해 행복해지고 싶었던 사람, 허세욱을 그리다 - 허세욱 평전 작가 송기역 - 서울 평통사 노동분회원 허세욱. 효순이 미선이의 억울한 죽음에 대 해 미국은 사죄하라는 투쟁의 현장에 서 그 분을 처음 만났다. 평택 대추리 의 넓은 들판을 두 소녀의 목숨을 앗 아간 미군들에게 또 빼앗길 순 없다며 만들어 온 현수막을 대추초교에 같이 걸었다. 2007년

More information

歯1##01.PDF

歯1##01.PDF 1.? 1.?,..,.,. 19 1.,,..,. 20 1.?.,.,,...,.,..,. 21 1,.,.,. ( ),. 10 1? 2.5%. 1 40. 22 1.? 40 1 (40 2.5% 1 ). 10 40 4., 4..,... 1997 ( ) 12. 4.6% (26.6%), (19.8%), (11.8%) 23 1. (?).. < >..,..!!! 24 2.

More information

<5BC1F8C7E0C1DF2D31B1C75D2DBCF6C1A4BABB2E687770>

<5BC1F8C7E0C1DF2D31B1C75D2DBCF6C1A4BABB2E687770> 제3편 정 치 제3편 정치 제1장 의회 제1절 의회 기구 제2절 의회기구 및 직원 현황 자치행정전문위원회 자치행정전문위원 산업건설위원회 산업건설전문위원 제1장 의회 321 제3절 의회 현황 1. 제1대 고창군의회 제1대 고창군의회 의원 현황 직 위 성 명 생년월일 주 소 비 고 322 제3편 정치 2. 제2대 고창군의회 제2대 고창군의회 의원 현황 직 위

More information

120229(00)(1~3).indd

120229(00)(1~3).indd 법 률 국회에서 의결된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을 이에 공포한다. 대 통 령 이 명 박 2012년 2월 29일 국 무 총 리 김 황 식 국 무 위 원 행정안전부 맹 형 규 장 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소관) 법률 제11374호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 공직선거법 일부를 다음과 같이 개정한다. 제21조제1항에 단서를 다음과 같이 신설한다. 다만,세종특별자치시의 지역구국회의원

More information

<C3D6BFECBCF6BBF328BFEBB0ADB5BF29202D20C3D6C1BE2E687770>

<C3D6BFECBCF6BBF328BFEBB0ADB5BF29202D20C3D6C1BE2E687770> 본 작품들의 열람기록은 로그파일로 남게 됩니다. 단순 열람 목적 외에 작가와 마포구의 허락 없이 이용하거나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시 저작권법의 규정에 의하여 처벌받게 됩니다. 마포 문화관광 스토리텔링 공모전 구 분 내 용 제목 수상내역 작가 공모분야 장르 소재 기획의도 용강동 정구중 한옥과 주변 한옥들에 대한 나의 추억 마포 문화관광 스토리텔링 공모전 최우수상

More information

-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진행과정 후쿠시마 제1원전(후쿠시마 후타바군에 소재)의 사고는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 지방 을 강타한 규모 9.0의 대지진으로 인해 원자로 1~3호기의 전원이 멈추게 되면서 촉발되었다. 당시에 후쿠시마 제1원전의 총 6기의 원자로 가

-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진행과정 후쿠시마 제1원전(후쿠시마 후타바군에 소재)의 사고는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 지방 을 강타한 규모 9.0의 대지진으로 인해 원자로 1~3호기의 전원이 멈추게 되면서 촉발되었다. 당시에 후쿠시마 제1원전의 총 6기의 원자로 가 한국 원자력발전소의 위험성 201211307 임형주 다니엘 1. 들어가는 글 - 원자력발전소의 위험성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일본은 물론 주변의 많은 국가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원전피해의 영향은 고농도 오염지역으로부터 시작해서 점 점 가시화되어 직접적으로 나타나고, 그 범위 또한 점차적으로 넓어질

More information

e01.PDF

e01.PDF 2119, -., 4.25-40 4 km -.. km,, -,.,,,,,,,,,,,..... . 90%..,.., 20 1 - -.,.. 2172,. - 3 - < > 1.! 6 2.. 10 3.? 18 4. 22 5. 26 6.. 32 7. 36 8.. 44 9.. 49 10.. 61 11. 65 12. 76 13.. 80 14. 85 15.. 90 16..

More information

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초기 도읍은 위례성( 慰 禮 城 )이다. 위례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책에 실려 있는데, 대부분 조선시대에 편 찬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 도 백제가 멸망한지

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초기 도읍은 위례성( 慰 禮 城 )이다. 위례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책에 실려 있는데, 대부분 조선시대에 편 찬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 도 백제가 멸망한지 고대 동아시아의 왕성과 풍납토성 - 풍납토성의 성격 규명을 위한 학술세미나 - pp. 46-67 한국의 고대 왕성과 풍납토성 김기섭(한성백제박물관) 목차 Ⅰ. 머리말 Ⅱ. 한국 고대의 왕성 1. 평양 낙랑토성 2. 집안 국내성 3. 경주 월성 4. 한국 고대 왕성의 특징 Ⅲ. 풍납토성과 백제의 한성 1. 풍납토성의 현황 2. 한성의 풍경 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More information

진단, 표시・광고법 시행 1년

진단, 표시・광고법 시행 1년 진단, 표시 광고법 시행 1년 표시 광고규제 법규는 통합되어야 한다! 정은종 호텔롯데 경영지원실/지적재산권법 석사 표시광고법 시행 1년 입법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던 표시광고법이 제정되어 시행( 99년 7월)된지 벌써 1년이 지났다. 공정거래법 23조1항6호의 부 당표시광고 규정이 분가하여 탄생한 표시광고법은 기존 공정거래법이 부당표시광고(허위 과장, 기만,

More information

<5BC1F8C7E0C1DF2D32B1C75D2DBCF6C1A4BABB2E687770>

<5BC1F8C7E0C1DF2D32B1C75D2DBCF6C1A4BABB2E687770> 제8편 사 회 제8편 사회 제1장 사회단체 제1절 개관(사회조직의 기능) 제2절 고창군의 사회단체 제1장 사회단체 619 고창군의 사회단체 내역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창군의 사회단체 현황 (2009년 7월 현재) 연번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More information

인천 화교의 어제와 오늘 34 정착부흥기 35 정착부흥기: 1884년 ~ 1940년 이 장에서는 인천 차이나타운에 1884년 청국조계지가 설정된 후로 유입 된 인천 화교들의 생활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기별로 정리하였다. 조사팀은 시기를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하였다. 첫 번

인천 화교의 어제와 오늘 34 정착부흥기 35 정착부흥기: 1884년 ~ 1940년 이 장에서는 인천 차이나타운에 1884년 청국조계지가 설정된 후로 유입 된 인천 화교들의 생활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기별로 정리하였다. 조사팀은 시기를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하였다. 첫 번 인천 화교의 어제와 오늘 인천 화교의 어제와 오늘 34 정착부흥기 35 정착부흥기: 1884년 ~ 1940년 이 장에서는 인천 차이나타운에 1884년 청국조계지가 설정된 후로 유입 된 인천 화교들의 생활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기별로 정리하였다. 조사팀은 시기를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하였다. 첫 번째 시기는 1884년부터 1940년 까 지를 구분하여 정착 부흥기

More information

제주발전연구원 제주발전연구원 정책이슈브리프 2015년 11월 2일 Vol. 226 발행처 : 제주발전연구원 발행인 : 강기춘 주 소 : 63147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연로 253 TEL. 064-726-0500 FAX. 064-751-2168 제주발전연구원은 지역사

제주발전연구원 제주발전연구원 정책이슈브리프 2015년 11월 2일 Vol. 226 발행처 : 제주발전연구원 발행인 : 강기춘 주 소 : 63147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연로 253 TEL. 064-726-0500 FAX. 064-751-2168 제주발전연구원은 지역사 226 2015. 11. 2 사려니숲길 셔틀버스 시범운영 성과 및 향후과제 제주발전연구원 손 상 훈 책임연구원 제주발전연구원 제주발전연구원 정책이슈브리프 2015년 11월 2일 Vol. 226 발행처 : 제주발전연구원 발행인 : 강기춘 주 소 : 63147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연로 253 TEL. 064-726-0500 FAX. 064-751-2168 제주발전연구원은

More information

레이아웃 1

레이아웃 1 공익신고 처리 및 신고자 보호 - 공공단체 업무매뉴얼 - 나도 공익신고기관이다 Contents 005 Ⅰ. 의 필요성 011 012 026 039 056 072 Ⅱ. 주요 내용 1. 공익신고에 대한 이해 2. 공익신고의 접수 3. 공익신고의 처리 4. 공익신고자 보호 5. 공익신고자 보상 및 구조 083 090 106 107 Ⅲ. 공익신고 처리 유의사항 (붙임)

More information

<3230313320B5BFBEC6BDC3BEC6BBE74542532E687770>

<3230313320B5BFBEC6BDC3BEC6BBE74542532E687770> 58 59 북로남왜 16세기 중반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흔든 계기는 북로남 왜였다. 북로는 북쪽 몽골의 타타르와 오이라트, 남왜는 남쪽의 왜구를 말한다. 나가시노 전투 1. 16세기 동아시아 정세(임진전쟁 전) (1) 명 1 북로남왜( 北 虜 南 倭 ) : 16세기 북방 몽골족(만리장성 구축)과 남쪽 왜구의 침입 2 장거정의 개혁 : 토지 장량(토지 조사)와

More information

<3130BAB9BDC428BCF6C1A4292E687770>

<3130BAB9BDC428BCF6C1A4292E687770> 檀 國 大 學 校 第 二 十 八 回 학 술 발 표 第 二 十 九 回 특 별 전 경기도 파주 出 土 성주이씨( 星 州 李 氏 ) 형보( 衡 輔 )의 부인 해평윤씨( 海 平 尹 氏 1660~1701) 服 飾 학술발표:2010. 11. 5(금) 13:00 ~ 17:30 단국대학교 인문관 소극장(210호) 특 별 전:2010. 11. 5(금) ~ 2010. 11.

More information

11민락초신문4호

11민락초신문4호 꿈을 키우는 민락 어린이 제2011-2호 민락초등학교 2011년 12월 21일 수요일 1 펴낸곳 : 민락초등학교 펴낸이 : 교 장 심상학 교 감 강옥성 교 감 김두환 교 사 김혜영 성실 근면 정직 4 8 0-8 6 1 경기도 의정부시 용현로 159번길 26 Tel. 031) 851-3813 Fax. 031) 851-3815 http://www.minrak.es.kr

More information

3232 편집본(5.15).hwp

3232 편집본(5.15).hwp 정태제 묘 출토 사초 사진 정태제 묘 출토 사초 상권 정태제 묘 출토 사초 상권 45 정태제 묘 출토 사초 하권(표지) 정태제 묘 출토 사초 하권 46 2 중기( 重 記 ) 중기( 重 記 )란 호조에서 각 관청의 회계를 감독하거나 경외( 京 外 )의 각 관청이 보유하고 있 는 국가 재산의 누수를 막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작성하도록 규정한 회계장부나 물품조사서

More information

2015 판례.기출 증보판 테마 형법 추록본.hwp

2015 판례.기출 증보판 테마 형법 추록본.hwp 2015 판례 기출 증보판 테마 형법 추록본 편저자 조충환 양건 p.27 첫째줄 유사판례 교체 유사판례 1동일한 형벌조항이 과거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의하여 합헌으로 선언된 바 있으나 그 후의 사정변경 때문에 새로 위헌으로 결정된 경우에도 위헌결정의 소급효를 종전의 합헌결정시점까지로 제한하는 것은 허용되지 아니한다(대판 2011.4.14, 2010도5606).

More information

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제1절 우리 교육 약사 제2장 사천교육의 발자취 제1절 우리 교육 약사 1. 근대 이전의 교육 가. 고대의 교육 인류( 人 類 )가 이 지구상에 살면서부터 역사와 함께 교육( 敎 育 )은 어떠한 형태로든 지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언제부터 이곳에서 삶을 꾸려왔는지는 여 러 가지 유적과 유물로 나타나고 있다. 그 당시 우리조상들의 생활을 미루어

More information

13백점맞는세트부록2년(49~57)

13백점맞는세트부록2년(49~57) 0 0 0 0 < > 0 0 0 0 0 0 00 0 0 000 00 00 00 00 0 00 00 00 00 00 00 0 00 00 0 00-0-00-0-00-0-00 00 0 00 < 0 0 0 ---- -0--- 0 00 0 0 < 0 0< 0-------- - ---- 0 0 00 > =0 0 0 0--0-0 0 =0 = =

More information

652

652 축 사 2003년 11월 5일 수요일 제 652 호 대구대신문 창간 39주년을 축하합니다! 알차고 당찬 대구대신문으로 지로자(指걟者)의 역할 우리 대학교의 대표적 언론매체인 대구대 신문이 오늘로 창간 서른 아홉 돌을 맞았습 니다. 정론직필을 사시로 삼고 꾸준히 언로 의 개척을 위해 땀흘려온 그 동안의 노고에 전 비호가족을 대표하여 축하의 뜻을 전하 는 바입니다.

More information

歯20010629-001-1-조선일보.PDF

歯20010629-001-1-조선일보.PDF 6. 29 () 11:00 ( ) 20 0 1. 6. 29 11( ).(397-1941) 1. 2. 3. 4. 5. 1. 28, 60() (,, ) 30 619(, 6. 29) () 6 (,,,,, ),,, - 1 - < > (, ), () < > - 2 - 2.,,, 620,, - 3 - 3. ( ) 1,614,, 864 ( ) 1,6 14 864 () 734

More information

<33B1C7C3D6C1BEBABB28BCF6C1A42D31313135292E687770>

<33B1C7C3D6C1BEBABB28BCF6C1A42D31313135292E687770> 제 1 부 제1소위원회 (2) 충남지역(1) 부역혐의 민간인 희생 -당진군ㆍ홍성군ㆍ서산군(2)ㆍ예산군- 결정사안 1950. 9ㆍ28수복 후~1951. 1ㆍ4후퇴경 충청남도 당진 홍성 서산(2) 예산군에서 군 경에 의해 발생한 불법적인 민간인 희생으로 진실규명대상자 33명과 조사과정에서 인지된 자 151명이 희생된 사실을 또는 추정하여 진실규명으로 결정한 사례.

More information

<C1DFB1DE2842C7FC292E687770>

<C1DFB1DE2842C7FC292E687770> 무 단 전 재 금 함 2011년 3월 5일 시행 형별 제한 시간 다음 문제를 읽고 알맞은 답을 골라 답안카드의 답란 (1, 2, 3, 4)에 표기하시오. 수험번호 성 명 17. 信 : 1 面 ❷ 武 3 革 4 授 18. 下 : ❶ 三 2 羊 3 東 4 婦 19. 米 : 1 改 2 林 ❸ 貝 4 結 20. 料 : 1 銀 2 火 3 上 ❹ 見 [1 5] 다음 한자(

More information

96부산연주문화\(김창욱\)

96부산연주문화\(김창욱\) 96 1 96 3 4 1 5 2 ( ),, TV,,,,, 96 5,,,, 3, ), ( :,1991) ), ), 13 1 3 96 23, 41, 4 68 (1) 11, 1223, (3/18 ) ( ) 6, 1 (4/2 ) 16, ( ), 1 (5/3 ), ( ) ( ) 1 (2) 96 8 33 41 (4/25 ), (9/24 ), ( ) 961 (5/27 )

More information

<3038323020C1A633B1C75FC3D6C1BE5FBCF6C1A4BABB2E687770>

<3038323020C1A633B1C75FC3D6C1BE5FBCF6C1A4BABB2E687770> 목 차 Contents 제3권 기술이전 관련 법령 제6장 법령/시행령 / 1 [법령/시행령1] 지식재산기본법(안) 3 [법령/시행령2] 기술의 이전 및 사업화 촉진에 관한 법률 19 [법령/시행령3] 기술의 이전 및 사업화 촉진에 관한 법률 시행령 47 [법령/시행령4] 발명진흥법 67 [법령/시행령5] 산업교육진흥 및 산학협력촉진에 관한 법률 91 [법령/시행령6]

More information

ÀϺ»Æí-ÃÖÁ¾

ÀϺ»Æí-ÃÖÁ¾ 古事記 古 事 13 記 신화 전설 가요 계보 등을 소재로 하여 일본 건국의 유래와 제1대 神武천황부터 제33대 推 古천황까지의 事蹟을 기록한 일본 현존 最古의 典籍이며, 전체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天武천황 대에 천황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던 역사 저술사업을 元明천황이 계승하여, 太安萬侶에게 稗田 阿禮가 암송하고 있던 천무천황대의 역사 저술 내용을 필록하도록

More information

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도시권 광역교통관리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 일부개정 3 5. 영유아보육법 시행령 일부개정 4

More information

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2014 7 18.hwp

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2014 7 18.hwp 차례 1~3쪽 머리말 4 1. 계대 연구자료 7 가. 증 문하시랑동평장사 하공진공 사적기 7 나. 족보 변천사항 9 1) 1416년 진양부원군 신도비 음기(陰記)상의 자손록 9 2) 1605년 을사보 9 3) 1698년 무인 중수보 9 4) 1719년 기해보 10 5) 1999년 판윤공 파보 10 - 계대 10 - 근거 사서 11 (1) 고려사 척록(高麗史摭錄)

More information

정 답 과 해 설 1 (1)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어생활 주요 지문 한 번 더 본문 10~12쪽 01 2 02 5 03 [예시 답]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한 사 람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으며,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해쳐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04 5

정 답 과 해 설 1 (1)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어생활 주요 지문 한 번 더 본문 10~12쪽 01 2 02 5 03 [예시 답]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한 사 람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으며,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해쳐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04 5 S I N S A G O 정답과 해설 채움 1. 마음을 나누는 삶 02 2. 효과적인 자료, 적절한 단어 11 3. 문학을 보는 눈 19 4. 보다 쉽게, 보다 분명하게 29 5. 생각 모으기, 단어 만들기 38 정 답 과 해 설 1 (1)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어생활 주요 지문 한 번 더 본문 10~12쪽 01 2 02 5 03 [예시 답] 상대에게 상처를

More information

<34B1C720C0CEB1C7C4A7C7D828C3D6C1BEC6EDC1FD30323138292D28BCF6C1A4292E687770>

<34B1C720C0CEB1C7C4A7C7D828C3D6C1BEC6EDC1FD30323138292D28BCF6C1A4292E687770> 이 조사보고서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제32조제1항 규정에 따라 2008년 7월 9일부터 2009년 1월 5일까지의 진실 화해를위 한과거사정리위원회 활동을 대통령과 국회에 보고하기 위해 작성되었습 니다. 차례 제 3 부 인권침해규명위원회 사건 김세태 등에 대한 보안대의 불법구금 등 인권침해사건 11 오주석 간첩조작 의혹 사건 25 보안대의 가혹행위로

More information

3) 지은이가 4) ᄀ에 5) 위 어져야 하는 것이야. 5 동원 : 항상 성실한 삶의 자세를 지녀야 해. 에는 민중의 소망과 언어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입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가능성은 이처럼 과거를 뛰어넘고, 사회의 벽을 뛰어넘고, 드디어 자기를 뛰어넘 는

3) 지은이가 4) ᄀ에 5) 위 어져야 하는 것이야. 5 동원 : 항상 성실한 삶의 자세를 지녀야 해. 에는 민중의 소망과 언어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입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가능성은 이처럼 과거를 뛰어넘고, 사회의 벽을 뛰어넘고, 드디어 자기를 뛰어넘 는 (가) 2) (가) 학년 고사종류 과목 과목코드번호 성명 3 2009 2학기 기말고사 대비 국어 101 ( ) 염창중 말할 수 있게 되어 어머니가 다시 주시거든 나에게 갚 아라. ꋯ먼저 답안지에 성명,학년,계열,과목코드를 기입하십시오. ꋯ문항을 읽고 맞는 답을 답란에 표시하십시오. ꋯ문항배점은 문항위에 표시된 배점표를 참고하십시오. (가) 우리 중에는 전쟁으로

More information

160215

160215 [ 진경준, 대한민국 검사의 민낯! ] 진경준 검사 정봉주 : 진경준 검사장 사건이 충격적인가 봐요. 고위공직자 비리수사처 얘기도 나오는 걸 보니까. 왜 그래요, 느닷 없이? 김태규 : 공수처는 여러 검찰개혁안 중의 하나였죠. 검찰의 기 소독점주의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공수처를 도입해야 한다 는 얘기가 오래 전부터 나왔고. 그런데 지금 정권이 레임 덕에 막 빠지려고

More information

참고 금융분야 개인정보보호 가이드라인 1. 개인정보보호 관계 법령 개인정보 보호법 시행령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령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전자금융거래법 시행령 은행법 시행령 보험업법 시행령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시행령 자본시장과

참고 금융분야 개인정보보호 가이드라인 1. 개인정보보호 관계 법령 개인정보 보호법 시행령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령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전자금융거래법 시행령 은행법 시행령 보험업법 시행령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시행령 자본시장과 Ⅰ 가이드라인 개요 >> 금융분야 개인정보보호 가이드라인 참고 금융분야 개인정보보호 가이드라인 1. 개인정보보호 관계 법령 개인정보 보호법 시행령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령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전자금융거래법 시행령 은행법 시행령 보험업법 시행령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시행령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시행령 금융지주회사법

More information

행당중학교 감사 7급 12000001 ~ 12000616 성동구 왕십리로 189-2호선 한양대역 4번출구에서 도보로 3-4분 6721 윤중중학교 감사 7급 12000617 ~ 12000619 영등포구 여의동로 3길3 용강중학교 일반행정 9급 13000001 ~ 1300

행당중학교 감사 7급 12000001 ~ 12000616 성동구 왕십리로 189-2호선 한양대역 4번출구에서 도보로 3-4분 6721 윤중중학교 감사 7급 12000617 ~ 12000619 영등포구 여의동로 3길3 용강중학교 일반행정 9급 13000001 ~ 1300 2016년도 서울특별시 지방공무원 임용 필기시험 장소 시험장 교통편, 소요시간 등은 반드시 응시자 본인이 해당학교 인터넷 홈페이지 등을 통해 미리 꼭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 장애편의지원 대상자는 별도로 첨부된 엑셀파일에서 본인의 최종 편의지원 내역을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장애편의지원 시험장 : 윤중중학교, 서울맹학교) 경신중학교 일반행정 7급 10001741

More information

000000038348.hwp

000000038348.hwp 규범 폐쇄성 신뢰 호혜 < 그림1> 사회자본의 구조 D E B C B C A A 비폐쇄성 네트워크(a)와 폐쇄성 네트워크(b) 출처: Coleman, 1988. p. 106. 信 用 人 情 關 係 面 子 報 答 꽌시의 구조 지방정부 동향 공장장 공장장 청부책임제 향진기업 연변 백운(

More information

0 한국사능력검정시험대비(/, 목) 쪽 문. 다음 선언문의 필자와 관련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점][ 회] 내정 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동하는 자 누구이냐? 너희들이 동양 평화, 한국 독립 보전 등을 담보한 맹약이 먹도 마르지 아니하여 삼천리 강토를 집어먹힌

0 한국사능력검정시험대비(/, 목) 쪽 문. 다음 선언문의 필자와 관련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점][ 회] 내정 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동하는 자 누구이냐? 너희들이 동양 평화, 한국 독립 보전 등을 담보한 맹약이 먹도 마르지 아니하여 삼천리 강토를 집어먹힌 0 한국사능력검정시험대비(/, 목) 쪽 고급 0년도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대비 (/, 목) 한림법학원 성명 수험 번호 본 문제의 소유권 및 판권은 ( 주) 윌비스 한림법학원 에 있습니다. 무단복사 판매시 저작권법에 의거 경고조치 없이 고발하여 민형사상 책임을 지게 됩니다. 자신이 선택한 등급의 문제지인지 확인하시오. 문제지에 성명과 수험 번호를 정확히 써넣으시오.

More information

580 인물 강순( 康 純 1390(공양왕 2) 1468(예종 즉위년 ) 조선 초기의 명장.본관은 신천( 信 川 ).자는 태초( 太 初 ).시호는 장민( 莊 愍 ).보령현 지내리( 保 寧 縣 池 內 里,지금의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에서 출생하였다.아버지는 통훈대부 판무

580 인물 강순( 康 純 1390(공양왕 2) 1468(예종 즉위년 ) 조선 초기의 명장.본관은 신천( 信 川 ).자는 태초( 太 初 ).시호는 장민( 莊 愍 ).보령현 지내리( 保 寧 縣 池 內 里,지금의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에서 출생하였다.아버지는 통훈대부 판무 제11편 성씨 인물 579 제3장 인 물 1. 고려ㆍ조선시대 인물 강순 강열황 구계우 구상은 김감 김경상 김계백 김계환 김규 김광오 김광원 김극성 김극신 김근행 김낙항 김남호 김노기 김노영 김맹권 김명현 김문서 김백간 김상현 김생려 김선지 김성국 김성우 김수정 김수현 김숙 김시걸 김신행 김억 김여남 김영석 김영수 김영제 김용제 김우식 김위 김응순 김응의 김응정

More information

<C1DFB0B3BBE7B9FD3128B9FDB7C92C20B0B3C1A4B9DDBFB5292E687770>

<C1DFB0B3BBE7B9FD3128B9FDB7C92C20B0B3C1A4B9DDBFB5292E687770> 공인중개사의 업무 및 부동산 거래신고에 관한 법령 제1장 공인중개사제도 제2장 총칙 제3장 중개사무소의 개설등록 제4장 중개업무 제5장 중개계약 및 부동산거래정보망 제6장 중개업자 등의 의무 제7장 중개보수 제8장 교육 및 업무위탁, 포상금 제9장 공인중개사협회 제10장 지도ㆍ감독 및 벌칙 제23회 완벽대비 제1장 공인중개사제도 1. 시험시행기관 (1) 원칙

More information

<B3EDBCFABDC7B7C2BDD7B1E22E687770>

<B3EDBCFABDC7B7C2BDD7B1E22E687770> 독서 훈련과 함께하는 논술 실력 쌓기 목 차 Ⅰ부 1. 문단 만들기 연습 5 가. 중심 문장과 뒷받침 문장 구별하기 7 나. 통일성을 적용하여 문단 쓰기 13 다. 일관성을 적용하여 문단 쓰기 19 2. 요약하기 연습 29 가. 중심 문장이 드러난 글 요약하기 30 나. 중심 문장이 드러나 있지 않은 글 요약하기 47 다. 재진술을 통한 요약문 쓰기 64

More information

ad-200100008.hwp

ad-200100008.hwp 성매매방지대책 연구 성매매방지대책 연구 성매매방지대책 연구 여 성 부 한국여성개발원 목 차 Ⅰ. 서론 Ⅱ. 성매매에 대한 시각과 성매매 유형 분류 Ⅲ. 성매매 관련 법 정책 및 사건처리 Ⅳ. 성매매 관련 법의 주요내용과 문제점 Ⅴ. 성매매 관련 법의 적용현황과 문제점 Ⅵ. 성매매 관련 의식조사 결과 Ⅶ. 외국의 입법례 Ⅷ. 개정법(안) 제안 Ⅸ. 정책제언 참고문헌

More information

포천시시설관리공단 내규 제 24호 포천시시설관리공단 인사규정 시행내규 일부개정(안) 포천시시설관리공단 인사규정 시행내규 일부를 다음과 같이 개정 한다. 제17조(기간제근로자의 무기계약직 임용) 1 기간제근로자 관리규정 제16조 를 제19조 로 한다. 제20조(인사기록)

포천시시설관리공단 내규 제 24호 포천시시설관리공단 인사규정 시행내규 일부개정(안) 포천시시설관리공단 인사규정 시행내규 일부를 다음과 같이 개정 한다. 제17조(기간제근로자의 무기계약직 임용) 1 기간제근로자 관리규정 제16조 를 제19조 로 한다. 제20조(인사기록) 포천시시설관리공단 인사규정 시행내규 개정이유 및 주요내용 개정구분 :일부개정 개정이유 조항에 대한 오류 수정 및 근무성적평정 작성 기준 변경사항을 적용하여 인사관리 업무에 만전을 기하고자함 주요내용 신 구조문 대비표 참조 개정 규정안 :덧붙임 신 구조문 대비표 :덧붙임 그 밖에 참고사항 :덧붙임 포천시시설관리공단 인사규정시행내규(전문) 포천시시설관리공단 내규

More information

3. 은하 1 우리 은하 위 : 나선형 옆 : 볼록한 원반형 태양은 은하핵으로부터 3만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 2 은하의 분류 규칙적인 모양의 유무 타원은하, 나선은하와 타원은하 나선팔의 유무 타원은하와 나선 은하 막대 모양 구조의 유무 정상나선은하와 막대나선은하 4.

3. 은하 1 우리 은하 위 : 나선형 옆 : 볼록한 원반형 태양은 은하핵으로부터 3만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 2 은하의 분류 규칙적인 모양의 유무 타원은하, 나선은하와 타원은하 나선팔의 유무 타원은하와 나선 은하 막대 모양 구조의 유무 정상나선은하와 막대나선은하 4. 4탄 지학 정복하기 1. 빅뱅 우주론 빅뱅과 동시에 시공간 및 물질 생성 물질 : 쿼크와 경입자 양성자와 중성자 헬륨원자핵 원자 생성[38 만년 이후] 자연계의 존재하는 힘 : 중력, 강한핵력, 전자기력, 약한핵력 빅뱅우주론의 증거 1 수소와 헬륨의 질량비가 3:1 2 우주 배경 복사 발견 2. 별의 탄생과 진화 1 별의 탄생과정 성간운 형성 원시별과 원반

More information

근대문화재분과 제4차 회의록(공개)

근대문화재분과 제4차 회의록(공개) 문화재위원회(근대문화재분과) 제4차 회의록 문 화 재 위 원 회 - 2 - - 3 - 안건번호 근대2012-04-001-4 - - 5 - - 6 - - 7 - - 8 - 안건번호 근대2012-04-002-9 - - 10 - - 11 - - 12 - - 13 - - 14 - - 15 - - 16 - - 17 - - 18 - - 19 - - 20 - - 21 -

More information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의안 번호 179 제안연월일 : 2007. 4. 제 안 자 :조례정비특별위원회위원장 제안이유 공무상재해인정기준 (총무처훈령 제153호)이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 (행정자치부령 제89호)으로 흡수 전면 개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의안 번호 179 제안연월일 : 2007. 4. 제 안 자 :조례정비특별위원회위원장 제안이유 공무상재해인정기준 (총무처훈령 제153호)이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 (행정자치부령 제89호)으로 흡수 전면 개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인 천 광 역 시 의 회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의안 번호 179 제안연월일 : 2007. 4. 제 안 자 :조례정비특별위원회위원장 제안이유 공무상재해인정기준 (총무처훈령 제153호)이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 (행정자치부령 제89호)으로 흡수 전면

More information

교육실습 소감문

교육실습 소감문 컴퓨터교육과 2008312140 김경근 Ⅰ. 처음... 이번에 교육실습을 다녀온 곳은 서울에 위치한 노원고등학교, 나의 모교이다. 실 습 학교로 굳이 이 학교를 선택 지원한 이유는, 모교이기 때문 이 아니라 집에서 가까워서 라는 이유가 컸다. 물론 내가 졸업한 모교가 어떻게 변했을지도 궁금하기 도 했다. 실습을 시작하기 전만 해도 오로지

More information

1

1 정의당 당규 2012.11.09. 제1차 전국위원회 제정 2013.02.28. 제4차 전국위원회 개정 2013.06.16. 당대회 개정 2013.08.31. 2기 제1차 전국위원회 개정 2013.10.20. 2기 제2차 전국위원회 개정 2013.12.14. 2기 제3차 전국위원회 개정 2013.12.31. 2기 제4차 전국위원회 개정 2014.02.22. 2기

More information

<C8ADB7C220C5E4C3EBC0E52E687770>

<C8ADB7C220C5E4C3EBC0E52E687770> 하동 화력 7 8호기 건설부지 문화재 지표조사 결과보고서 2005. 01. ( 재) 우리문화재연구원 하동 화력 7 8호기 건설부지 문화재지표조사 결과보고서 Ⅰ. 조사개요 1. 조 사 명 : 하동 화력 78 호기 건설부지 문화재지표조사 2. 조사지역 : 경남 하동군 금성면 가덕리 1336답 일원 3. 조사 면적 : 134,204m2 4. 조사 목적 한국남부발전(

More information

레이아웃 1

레이아웃 1 2013 울산학연구논총 ISSN 1979-9355 제 8호 Part.1 Part.2 Part.3 Part.4 울산의 공단 인접지역 자연마을의 변화상 - 울주군 청량면 화창마을을 중심으로 - 울산의 민속놀이 실태조사 울산광역시 지하보도, 문화창작공간으로서의 활용방안 연구 - 지하보도 문화와 예술을 입고 소통의 길을 찾다 - 울주 사찰 문헌자료의 조사연구 2013

More information

¼þ·Ê¹®-5Àå¼öÁ¤

¼þ·Ê¹®-5Àå¼öÁ¤ Ⅴ. 육축 1. 개설 2. 1961년 수리 전의 육축 3. 육축의 구조 4. 지하유구 조사 5. 실측조사 6. 석축부재의 현황 127 128 129 130 131 132 133 134 135 崇禮門 精密實測調査報告書 사진 5-3. 태조 때의 축성형식 사진 5-4. 세종 때의 축성형식 사진 5-7. 성벽 철거 전(1880년대) 사진 5-5. 개축된 축성형식

More information

109

109 109 110 111 112 113 114 115 116 117 118 119 120 121 122 123 124 125 126 127 128 김한용 구술 녹취문 129 III. 광고사진가로서의 활동 김: 아아 최: 그리고 신진자동차 퍼브리카도 선생님이 찍으셨대요? 김: 예? 최: 신진자동차에서 나왔던 퍼브리카 김: 퍼브리카. 예, 맞습니다. 최: 요렇게,

More information

kg242-1.ps

kg242-1.ps 미래, 그리고 사람중심의 제242호 릲우리 구에 전통과 문화의 향 기를 한 데 아우르는 관광벨트가 생깁니다.릳 금정구는 국내 최장 금정산성 과 역사와 전통이 있는 범어사를 중심축으로 스포원과 회동수원 지를 연계하여 관광벨트로 구축 하는 야심찬 계획을 실행에 옮기 고 있다. 오는 2014년까지 모두 156억 2100만원의 예산을 들여 금정산 성과 범어사 구간은

More information

30년 선배의 직장생활 개념노트

30년 선배의 직장생활 개념노트 저자소개 정서아 초등학교 때 언니의 연극 연습을 보고 극본을 썼고, 중학교 때 세계 고전에 빠져 소설을 썼다. 하지만 정작 품은 꿈은 달라 글과는 무관 한 삶을 살았고, 그에 대한 미련은 블로그에 에세이와 짧은 소설을 담 는 것으로 풀었다. 초기 우리집에는 천사가 산다 는 판타지적 성격이 무척 강했다. 그 러던 것이 극본으로 작업하며 변형 됐고, 현재의 소설로

More information

단위: 환경정책 형산강살리기 수중정화활동 지원 10,000,000원*90%<절감> 형산강살리기 환경정화 및 감시활동 5,000,000원*90%<절감> 9,000 4,500 04 민간행사보조 9,000 10,000 1,000 자연보호기념식 및 백일장(사생,서예)대회 10

단위: 환경정책 형산강살리기 수중정화활동 지원 10,000,000원*90%<절감> 형산강살리기 환경정화 및 감시활동 5,000,000원*90%<절감> 9,000 4,500 04 민간행사보조 9,000 10,000 1,000 자연보호기념식 및 백일장(사생,서예)대회 10 2013년도 본예산 일반회계 환경위생과 ~ 환경위생과 세 출 예 산 사 업 명 세 서 부서: 환경위생과 단위: 환경정책 환경위생과 8,231,353 3,622,660 4,608,693 국 2,472,543 기 144,000 도 976,102 시 4,638,708 자연환경보호(환경보호/환경보호일반) 5,910,247 1,462,545 4,447,702 국 1,817,800

More information

歯20010629-003-1-동아일보(2-1).PDF

歯20010629-003-1-동아일보(2-1).PDF 6. 29 ( ) 11:00 20 0 1. 6. 29 2 3 ( ).( 397-0781) 1. 2. 3. 4. 5. 1. ( : 2 ) 2 8607, 306 19, 7 6 28, 95 3 - (5 ) (,,,,,, ) - 1 - 2. -, - -, - 2 - 3.,, 1,700, 827 ( ) 1,700 8 27 803 469 560 227 289 117 48

More information

며 오스본을 중심으로 한 작은 정부, 시장 개혁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에 대응 하여 노동당은 보수당과 극명히 반대되는 정강 정책을 내세웠다. 영국의 정치 상황은 새누리당과 더불어 민주당, 국민의당이 서로 경제 민주화 와 무차별적 복지공약을 앞세우며 표를 구걸하기 위한

며 오스본을 중심으로 한 작은 정부, 시장 개혁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에 대응 하여 노동당은 보수당과 극명히 반대되는 정강 정책을 내세웠다. 영국의 정치 상황은 새누리당과 더불어 민주당, 국민의당이 서로 경제 민주화 와 무차별적 복지공약을 앞세우며 표를 구걸하기 위한 4.13 총선, 캐머런과 오스본, 영국 보수당을 생각하다 정 영 동 중앙대 경제학과 자유경제원 인턴 우물 안 개구리인 한국 정치권의 4.13 총선이 한 달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정당 간 정책 선거는 실종되고 오로지 표를 얻기 위한 이전투구식 경쟁이 심 화되고 있다. 정말 한심한 상황이다. 정당들은 각 당이 추구하는 이념과 정강 정책, 목표를 명확히 하고,

More information

<33352D2D31342DC0CCB0E6C0DA2E687770>

<33352D2D31342DC0CCB0E6C0DA2E687770> 중국 명문가의 가정교육 * - 先 秦 에서 淸 末 까지- ** 1) 李 庚 子 1. 머리말 2. 孝 悌 를 통한 질서의 확립 3. 德 을 통한 품성 수양 4. 立 志 를 통한 자아 확립 5. 맺음말 1. 머리말 교육의 일차기관은 가정이다. 가정에서 자녀들은 가정의 문화를 배우고 사 물의 바른 질서를 배우며 그 사회와 시대의 문화 양식을 먼저 익힌다.

More information

1면~24면

1면~24면 남양주뉴스비전 www.nnv.kr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묵현리 573-2 2011년 3월 22일 화요일 주간 제 10 호 남양주뉴스비전 www.nnv.kr www.nnv.kr 발행인 : 김양호, 편집인 : 김영렬 070-8716-6885 남양주기독교총연합회 총회장 취임 총회장 이정근목사 Contents 02 정부는 전월세 상한제 즉각 수용해야 박기춘 의원

More information

1) 음운 체계상의 특징 음운이란 언어를 구조적으로 분석할 때, 가장 작은 언어 단위이다. 즉 의미분화 를 가져오는 최소의 단위인데, 일반적으로 자음, 모음, 반모음 등의 분절음과 음장 (소리의 길이), 성조(소리의 높낮이) 등의 비분절음들이 있다. 금산방언에서는 중앙

1) 음운 체계상의 특징 음운이란 언어를 구조적으로 분석할 때, 가장 작은 언어 단위이다. 즉 의미분화 를 가져오는 최소의 단위인데, 일반적으로 자음, 모음, 반모음 등의 분절음과 음장 (소리의 길이), 성조(소리의 높낮이) 등의 비분절음들이 있다. 금산방언에서는 중앙 금산 은 상위의 중부방언에 속한다. 충청남도의 핵방언권 중 (A)지역, 즉 충청 남도의 남부이며 전라북도와 주로 접경을 이루는 방언권이다. 그중 충청남도의 최 남단에서 전라북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역이 금산 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 다. 금산 지역이 전라북도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어 문화 등 제반 교류의 가능성 을 엿볼 수 있고, 이는 곧 금산과 전북방언과의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