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회의와유럽협조체제 19 세기전반기유럽질서의형성 이용재 *1) < 국문초록 > 1814년 9월오스트리아수도빈에서범유럽국제회의가성대하게막을올렸다. 주요현안은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등승전 4대강국에의해주도되었으나, 프랑스대표탈레랑의능란한술수덕에프랑스도강대국의일원으로협상에끼어들었다. 흔히빈협상은정통성과세력균형이라는두원칙을기반으로이루어졌다고말한다. 하지만영토협상과타결과정을살펴보면정통성보다는세력균형이더욱중요한관건으로작용했음을알수있다. 유럽협조 라불리는 19세기유럽의국제질서체제는 1818년부터 1822년까지개최된일련의유럽회의들로구성된 회의체제 로구체화되었다. 유럽협조 는빈회의이후 19세기내내유럽에서관철된세력균형의표현이었다. 최근에역사가들은빈회의이후성립한것은 18세기식의낡은세력균형의재현이아니라새로운형태의안정적인정치적평형이었다고주장한다. 유럽의국제정치는나폴레옹전쟁과빈회의를거치면서 기계적인 평형에서 유기적인 평형으로바뀌었다는것이다. 이렇게볼때, 19세기의유럽질서는강대국들의패권정치의무대이기만했다기보다는일정한규범과질서를가진연대보장체제였다고평가할수있을것이다. 주제어 : 빈회의, 신성동맹, 사국동맹, 유럽협조, 세력균형 * 전북대사학과
88 제 6 권 2 집 ( 통권제 11 호, 2015 년 9 월 ) I. 춤추는회의 II. 빈회의 : 세력균형과영토조정 III. 빈체제와유럽협조 차 례 IV. 유럽협조 시대의 유럽 V. 맺음말 I. 춤추는회의 1814년 4월, 유럽동맹군이파리에입성하자나폴레옹은마침내황제자리에서물러나멀리엘바섬으로망명길에올랐다. 유럽의거의전역을석권했던나폴레옹제국은허무하게무너졌다. 지난 20여년에걸친오랜전쟁동안프랑스혁명과나폴레옹제국의맞서연합전선을형성했던낡은유럽의수호자들이마침내승리했으며, 프랑스에는부르봉왕조가복귀했다. 1814년 5월 30일유럽동맹 7개국은부르봉왕조의프랑스를상대로파리조약 (Traité de Paris) 을맺고, 나폴레옹제국의해체와프랑스국경의원상복귀를확인한후, 유럽각국의영토와판세를재구성하기위해오스트리아의수도빈에서국제회의를개최하기로합의했다. 이로써 1814년 9월빈회의 (Wiener Kongress) 가개최되었다. 빈회의는당시로는그유례를찾아보기힘든유럽최대의국제회의였다. 사실빈회의에는 어느편이든이전쟁에가담했던모든열강 (puissances) 은 사절단을보낼것이며 1) 라는파리조약의다소모호한규정에따라유럽의거의모든군주국의사절들이참가할수있었다. 파리조약에비준한 8개국은물론독일의크고작은약소국들도모두대표단을파견했으며, 각종회의를참관할자격을지닌공식 외교관 만 300여명에이르렀다. 강대국들은물론협상을앞두고위세를과시할요량으로많은대표단을파견했다. 러시아에서는황제알렉산드르를필두로대표단 53명이, 프로이센에서는국왕프리드리히빌헬름을필두로 46명이, 바이에른 1) Article 32 de Traité de Paix de Paris. [http://mjp.univ-perp.fr/traites/1814paris.htm]
빈회의와유럽협조체제 89 왕국에서는 34명이참석했으며, 영국은외상캐슬레이 (Castlereagh) 를포함해대표단 25명을, 프랑스는외상탈레랑 (Ch. Talleyrand-Périgord) 을포함해 15 명을파견했다. 반면에독일지방의군소국들은대개외교사절 2-3명을파견하는데그쳤으나, 일부국가들은로비전을벌일요량으로자국의외교적비중을넘어서까지많은사절단을보내기도했다. 예컨대작센-바이마르공국은 17명을, 올덴부르크공국과헤센-카셀대공국은각각 8명을파견했다. 각국대표단은비서관과수행원은물론때로가족과친지들까지대동했으며여기에뜨내기정치인, 사업가, 모험가들도끼어들었다. 대표단을맞아하느라오스트리아왕실은재정압박에시달려야했고몰려드는인파로빈경찰청은긴장을늦출수없었다. 경찰당국의조사에따르면회의가개최되는동안 10만여외국인이빈을방문했으며, 이중 2만명정도가빈회의와관련된공식 비공식업무로빈을찾은것으로보인다. 2) 각국대표단이하나둘씩도착하는데만한달여를소비한끝에 11월에들어서야공식개회를선포한빈회의는더디고느린진행의틈새마다축제와연회가이어졌다. 매주월요일에는주최국오스트리아의재상메테르니히가주재하는성대한만찬이열렸으며, 각국대표들은매일밤마다파티, 살롱, 무도회장에서여흥을즐겼다. 군주들의휴가 라는따가운눈총을받으며막을올린빈회의는 춤추는회의 라는세간의비아냥으로역사의한페이지를장식할운명이었다. 3) 2) Th. Lentz, Le congrès de Vienne, une refondation de l Europe 1814-1815, Perrin, 2013, p.53. 3) 벨기에출신으로말년에프로이센과러시아의야전사령관을역임한리뉴 (Charles-Joseph de Ligne, 1735-1814) 대공은빈회의의여흥을즐기다노환으로사망했다. 그가탈레랑을비롯한참석자들에게즐겨되뇐말, 회의는춤을출뿐, 나아가지않는다 (Le congrès danse beaucoup, mais il ne marche pas) 라는구절은당시부터빈회의를비꼬는말로널리회자되었다. A. de la Garde-Chambonaz, Souvenirs du Congrès de Vienne(1820), Henri Vivien, 1901, pp.11-12.
90 제 6 권 2 집 ( 통권제 11 호, 2015 년 9 월 ) II. 빈회의 : 세력균형과영토조정 (1) 강대국외교 하지만회의가춤추기만했던것은물론아니었다. 유럽각국에서몰려든고관대작들이주최국의환대속에마음껏여흥과사교를즐기는동안, 막후에서는강대국대표단들사이에긴밀하게물밑교섭이이루어졌다. 사실연회장에감도는축제분위기는때로회의장에서벌어지는거친논박이나밀실에서주고받는노골적인흥정을포장하는겉치레에지나지않았다. 애초에빈회의를주도한것은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등 4대강국이었다. 이러한 4대강국중심체제는 유럽의실질적이고지속적인균형체제는 대불동맹열강 (Puissances Alliées) 사이에결정된토대위에서 [ 빈 ] 대회에서해결될것이다 라고명기한파리조약의비공개별도조항에의거한것이었다. 4) 나폴레옹군을군사적으로타도한 4대동맹국이나폴레옹이후의유럽의재편성에서당연히주도권을쥐어야한다는것이다. 이들 4개국은몇차례사전접촉을갖고빈회의의진행과결의방식등에대해미리의견을조율했다. 오스트리아재상메테르니히 (Metternich) 가대회의장으로회의를주재하는형식을취했지만사실상중요한협상과합의는모두 4개국대표로구성된상임위원회 (commission) 에서이루어질것이었다. 상임위원회산하에는분쟁지역의영토와인구를구획하고협상초안을작성하는업무를떠맡을 11개전문위원회 (comité) 가설치되었다. 하지만뒤늦게빈에도착한프랑스외무장관탈레랑 (Ch. M. Talleyrand-Périgord) 은돌연이러한 4대강국중심체제에반기를들고나섰다. 나폴레옹이몰락한후부르봉복고왕정아래서외교수장으로되돌아온탈레랑의당면목표는빈회의에서반프랑스동맹국들에맞서 패전국 프랑스의이익과명분을지켜내는것이었다. 탈레랑은우선협상과정에서소외 4) Article premier des Articles séparés et secrets de Traité de Paix de Paris.
빈회의와유럽협조체제 91 된모든군소국들의옹호자로자처했다. 그는 4대강국뿐만아니라프랑스, 에스파냐, 포르투갈, 스웨덴등파리조약에서명한 8개국모두가회의의주역이어야한다는명분론을내세웠다. 이로써 1814년말부터비록자문과비준의역할에그치기는했지만 8국위원회가설치되어 4국위원회의결정사항을공유할수있게되었다. 탈레랑은여기서한걸음더나아가프랑스의발언권을강화하고자했다. 당시빈회의의최대현안은폴란드와작센의영유권문제였다. 폴란드병합을노리는러시아와작센영토를차지하려는프로이센이서로전략적제휴를맺은반면, 영국과오스트리아는러시아와프로이센의팽창주의와패권정치를경계했다. 4대강국이두편으로나뉘어다투는틈새를이용해서프랑스는 1815년 1월영국과오스트리아와비밀협약을맺고러시아-프로이센의있음직한도발에공동대처하기로합의했다. 평화협상을시작하지마자분열위기를맞은 4대강국은결국한걸음씩양보해서다시협상테이블에앉을수밖에없었으며여기에프랑스가중재자로끼어들어 4 국위원회는 5국위원회로개편되었다. 탈레랑의 놀라운외교적술수 5) 에힘입어패전국프랑스가승전국들과나란히국제무대에서강국의대오에합류한것이다. 1815년 6월빈회의가폐막을공식선언할때까지 8국위원회는불과 19차례개최된반면, 뒤늦게구성된 5국위원회는 46차례나개최되었다. 모든현안은실질적으로 5국위원회에서검토되고처리된것이다. 따라서협상테이블을이끈것은오스트리아의메테르니히, 프랑스의탈레랑, 영국의캐슬레이 (Castlereagh), 프로이센의하르덴베르크 (Hardenberg), 러시아의네셀로드 (Nesselrode) 등전권을위임받은외무장관들이었다. 하지만오스트리아황제프란시스 2세는물론직접빈에왕림한러시아황제알렉산드르 1세와프로이센국왕프리드리히빌헬름은막후에서대표단에지침을하달했으며, 영국과프랑스의대표단은자국의군주와정부에줄곧보고를올리고훈령을받았다. 결국빈회의는 5대강국이주도하는, 강대국중심국제기구의면모를여실히드러냈다. 6) 5) H. Nicolson, The Congress of Vienna, a Study in Allied Unity 1812-1822, The Viking Press, 1965, p.146.
92 제 6 권 2 집 ( 통권제 11 호, 2015 년 9 월 ) (2) 정통성인가세력균형인가 강대국들사이의불협화음으로머뭇거리던회의는 1815년 3월초나폴레옹이엘바섬을탈출해서파리로향하고있다는소식이전해지자돌연속도를냈다. 다시황제가된나폴레옹은빈회의의결정을거부하고새로운유럽질서를만들어나가겠다고천명했다. 예상치못한나폴레옹의재등장은오히려꼬여만가던열강들의이해관계를타결하는촉매제가되었다. 군주와장군들이나폴레옹대군과의결전을준비하러하나둘씩자리를뜨는어수선한분위기속에서도영토할당과국경설정에관한현안들이속속타결되었다. 빈회의의기본방침은유럽의질서를나폴레옹전쟁이전의상태로되돌리는것이었다. 이러한대전제아래회의를거듭하면서 정통성 (légitimité) 과 세력균형 (équilibre) 이라는두가지기본원칙이다듬어져나왔다. 우선나폴레옹제국에편입되었던유럽의모든영토들에대한통치권은그에대한정통적인권한을지니고있는옛군주들에게되돌아가야한다는것이며, 그렇지않은경우지난수세기동안유럽국제관계의근간을이루어온세력균형의논리에따라승전국들사이에적절히안배되어야한다는것이다. 정통성의원칙에집착한것은프랑스의탈레랑과오스트리아의메테르니히였다. 하지만몰락한엣왕조를고스란히다시세운다는것은애당초가능하지않았으며, 정통성원칙은강대국들의이해관계와부합될경우에만관철될수있었다. 나폴레옹이몰락한후빈회의가열리기이전에이미프랑스에서는부르봉왕조의루이 18세가복귀했으며, 에스파냐에서부르봉왕조의페르난도 7세가복귀한것도나폴레옹에맞서함께싸운데에대한당연한결과였다. 탈레랑과메테르니히는나폴리왕국에서나폴레옹황제의처남으로국왕자리에오른뮈라 (J. Murat) 원수를퇴출하고부르봉왕조의혈통을잇는페르디난트 4세에게왕위를돌려주어야한다는 6) Th. Lentz, Le congrès de Vienne, une refondation de l Europe 1814-1815, Perrin, 2013, pp.93-94.
빈회의와유럽협조체제 93 데합의했다. 니스와사부아까지합병한피에몬테왕국에는혁명이전의사르디니아왕조가복귀했다. 그리고중부이탈리아의군소공국들에합스부르크왕조의대공들이복귀한것도이지역에영향력을확대하려는오스트리아의복안이작용한덕이었다. 반면에작센왕국은강대국들사이의대립의희생물이었다. 끈질기게나폴레옹제국편에가담했던 패전국 작센왕국은정통성원칙과상관없이국왕아우구스투스 1세가계속왕위를유지하기위해서는영토의 2/3 이상을프로이센에게내줘야만했다. 요컨대강대국들은정통성의원칙을자신들의이해관계에부합하는만큼만관철시키고자했던것이다. 7) 세력균형의원칙은특히중동부유럽의영토할당문제에서논의되고관철되었다. 영국과오스트리아의입장에서볼때, 폴란드를차지하려는러시아의야욕은유럽전반의세력균형을위협하는일이었으며작센을차지하려는프로이센의야욕은독일안에서의세력균형을뒤흔드는일이었다. 따라서영국과오스트리아는물론프랑스도 적절한균형 (juste equilibre) 을내세우며러시아와프로이센의연합전선에맞섰다. 이렇게세력균형은이들 5대강국이저마다자국의이익을극대화하려는물밑협상끝에도출된타협책이기도했다. 강대국들사이에힘의균형을이룬다는논리에따라이들강대국이협상과정에서어느한지역에서영토적손실을볼경우다른지역에서영토적보상이이루어졌다. 결국세력균형론은정통성론에앞서는빈회의의협상원칙으로자리를잡았다. 8) (3) 영토조정 유럽의운명을결정지을워털루전투를열흘남짓앞두고긴장이고조되던 6월 9일, 마침내빈회의는지난 8개월동안의합의사항들을집대성한 최종의정서 (Acte final), 이른바 빈조약 (Traité de Vienne) 을공포했다. 7) J. Lowe, The Concert of Europe, International Relations 1840-70, Hodder & Stoughton, 1990, p.22. 8) T. Chapman, The Congress of Vienna, origins, processes and results, Routledge, 1998, p.57.
94 제 6 권 2 집 ( 통권제 11 호, 2015 년 9 월 ) 121개조항과 17개부속규정으로이루어진방대한문서에담긴것은나폴레옹시대이후의 새로운 유럽, 평화와안전과질서의이름으로강대국들사이에함의한유럽이었다. 하지만그것은나폴레옹시대이전으로되돌아간 낡은 유럽의모습이기도했다. 대다수조항은물론유럽의영토조정에관한것이었다. 유럽의영토와국경에관해빈조약으로타결된굵직한내용은다음과같다. 1 러시아는바르샤바대공국 ( 폴란드 ) 의대부분과핀란드영토를차지한다. 2 프로이센은작센의북부와바르샤바대공국의일부, 라인란트-베스트팔렌, 단치히를차지한다. 3 독일지역에는 38개의국가 ( 공국, 자유시 ) 로이루어진독일연방을구성한다. 4 네덜란드와오스트리아령네덜란드 ( 벨기에지역 ) 는단일한네덜란드연합왕국으로통합한다. 5 오스트리아는네덜란드를포기하는대신이탈리아에서롬바르디아와베네치아를, 달마치아지방에서라구사를차지한다. 6 스위스는영세중립국의지위를인정받는다. 7 하노버왕국은라우엔부르크공작령을덴마크에내주는대신뮌스터주교령과프로이센령프리지아를얻는다. 8 바이에른왕국은팔라티나지방, 뷔르츠부르크공작령의일부, 프랑크푸르트대공령을차지하며, 헤센대공국은베스트팔렌을프로이센에내주는대신라인- 헤센지역을차지한다. 9 영국은프랑스로부터토바고, 모리셔스, 세인트루시아등대서양식민지들을차지하며, 네덜란드로부터실론과케이프식민지를얻는다. 10 사르디니아왕국은피에몬테, 니스, 사부아, 제노아를되찾는다. 11 시칠리아왕국에는부르봉왕조가복귀한다. 12 파르마, 모데나, 투스카니아공국에는오스트리아의합스부르크왕조가복귀한다. 서부유럽의경우, 영토조정은전반적으로프랑스를지리적으로고립시키려는동맹국측의복안이작용한결과로볼수있다. 나폴레옹제국이해체된후프랑스의영토는프랑스혁명이전의상태로축소되었으나, 패전국프랑스에게는사실매우관대한처분이었다. 따라서향후프랑스의팽창야욕을저지하기위해서는국경지역에완충국가들 (buffer states) 를설정
빈회의와유럽협조체제 95 하는방안이강구되었다. 북쪽으로는홀란드와벨기에가합병한네덜란드왕국이자리를잡았으며, 동쪽에는라인란트지방을차지한프로이센이프랑스와국경을맞대고영토를확장한바덴과바이에른이방어막을쳤으며, 스위스가중립국으로독립국가의지위를회복했다. 동남쪽변경에는사르디니아왕국이재건되어프랑스가이탈리아로향하는길목을차단했다. 요컨대인접적성국들이프랑스를막아서는일종의 방역선 (cordon sanitaire) 을둘러친셈이다. 독일과이탈리아등중부유럽의경우, 프로이센과오스트리아사이의대립과절충의결과수많은약소국들이병립하는형태로, 요컨대단일민족국가건설이라는시대적과업을고스란히남겨두는형태로결정되었다. 독일지역에는나폴레옹제국의위성국구실을하던 16개군소국으로구상된라인동맹 (Rheinbund) 이해체된대신프로이센과오스트리아를포함해서 38개주권국가들로구성된독일동맹 (Deutscher Bund) 이결성되었다. 대외적으로대등한주권국가들의느슨한연합체는한편으로프로이센과오스트리아라는두강국의충돌을완충하는효과를지녔지만, 다른한편으로중세기이래로계속된독일의분열을공고화하는효과를지녔다. 이탈리아에서는롬바르디아와베네치아를오스트리아가차지한반면, 나폴리, 사르디니아왕국, 파르마, 모데나, 투스카니아공국등이나폴레옹의침략이전의모습을되찾았다. 군소국들로분열되고오스트리아의세력권에편입된이탈리아는독일과마찬가지로단일민족국가의건설이라는숙원을짊어지게될것이었다. 동부유럽의경우, 러시아와프로이센의영토팽창야욕에의해국경선이그어졌다. 러시아는바르샤바대공국, 즉폴란드의대부분을차지했다. 러시아의서방진출을저지하는완충지역으로폴란드국가를결성하기로했지만러시아황제가폴란드국왕을겸한다는타협이이루어짐으로써러시아는유럽깊숙이영향력을뻗칠수있었다. 쳤다. 프로이센은폴란드일부에대한영유권을러시아에넘겨주는대신러시아의지원을얻어라인란트지역을차지하고작센왕국의영토의태반을차지했다. 풍부한인구와자원을지닌라인란트와작센지역은향후프로이센이독일의중추
96 제 6 권 2 집 ( 통권제 11 호, 2015 년 9 월 ) 로발돋움하는발판이될것이었다. III. 빈체제와유럽협조 (1) 빈체제 : 신성동맹과사국동맹 빈회의에서체결한일련의조약들로유럽의지도가완전히뒤바뀌었다. 빈조약으로확정된유럽의새로운질서가그대로자리를잡을수있을것인가? 워털루전투를끝으로나폴레옹시대는완전히막을내렸지만전후의국제관계를어떤원칙으로이끌것인가에대해서는어떤합의도이루어지지않은상태였다. 요컨대빈회의에서타결된조약들을현실정치에서실현할보장책이필요했다. 그것은바로동맹체제의구축이었다. 유럽의구원자로자처하며동맹결성에앞장선것은바로러시아황제였다. 알렉산드르 1세는 굳게맺어진진정한형제애의유대로결합되고, 언제어디서나서로돕고보살펴야하는 군주들사이에 하나님의말씀에따라 신성한동맹 을맺자고제안했다. 9) 그리스도교신앙을바탕으로유럽에평화와박애의기틀을마련하자는제안은사실오랜연원을갖고있었다. 18세기초유럽을전란에빠트린에스파냐계승전쟁 (1701-1714) 을끝맺는유트레히트 (Utrecht) 강화조약에프랑스측협상대표로참여한생피에르 (Saint-Pierre) 신부는 유럽의영구평화를위한비망록 에서유럽기독교군주들사이의화친협정을제의했다. 10) 훗날부르봉왕조편에가담해나폴레옹탄핵에앞장설프랑스작가샤토브리앙 (F. R. Chateaubriand) 도 기독교의정수 (Génie du christianisme) (1802) 에서유럽의공유자산인그리 9) Article 1er de Traité de Sainte Alliance. [http://mjp.univ-perp.fr/traites/1815sainte.htm] 10) 유럽의영구평화를위한비망록 의첫두권 (1712) 은 유럽의영구평화를위한청사진 (Projet pour rendre la paix perpétuelle en Europe) 이라는제목을달고있으며, 마지막셋째권 (1717) 은 기독교군주들사이의영구평화를위한청사진 (Projet de traité pour rendre la paix perpétuelle entre les souverains chrétiens) 이라는제목을달았다.
빈회의와유럽협조체제 97 스도교의복원을통해서만유럽인들이전란의상흔을딛고평화를이룩할수있다고주장했다. 알렉산드르의구상은이러한그리스도교평화사상의오랜전통에서나온것이었다. 따라서신성동맹은유럽각국의정부들사이에맺는현대식조약이라기보다는여전히군주들사이의언약이라는 18세기식외교의틀을크게벗어나지못했다. 1815년 9월 25일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사이에체결된신성동맹 (Sainte-Alliance) 에는유럽의대다수그리스도교군주들이가입했다. 단지터키의술탄마흐무드 2세는무슬림국가라는이유로, 로마교황비오 7세는러시아정교의주도권을거부하는의미로가입을정중히사양했으며, 영국의섭정대공 ( 조지 4세 ) 은대륙의정치사안에개입하려면의회를동의를얻어야만한다는구실로줄곧가입을미루었다. 하지만정의, 박애, 평화라는추상적인원칙을앞세우는, 그것도러시아황제의기독교적신비주의로치장된동맹에어떤현실적인정치적역할을기대하기힘들어보였다. 신성동맹의체약국인오스트리아의외무상메테르니히마저동맹을 아주요란스럽기만하고터무니없는구시대유물 이라고평가절하했으며 11), 영국외상캐슬레이는 장엄한신비주의와난센스의작품 이라며영국의가입을만류했다. 12) 결국신성동맹은유럽국가들사이의평화와공영을도모하는국제기구로서보다는실질적으로유럽각국에서싹트는자유주의와혁명의기운을억압하는집단적감시망구실을할것이었다. 반면에영국이앞장서서추진한유럽동맹은구체적이고뚜렷한목표를지녔다. 1814년 3월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등 4대강국은파리로의진격을앞두고공수동맹을맺는 쇼몽조약 (Traité de Chaumont) 을체결했으며, 1년후엘바섬에서탈출한나폴레옹이다시프랑스황제로돌아왔을때조약을갱신했다. 캐슬레이의복안은쇼몽조약에서확인된 4 대강국의연합을영구화해서나폴레옹이후유럽정치의안전보장을도모 11) Memoirs of Prince Metternich, V.I, edited by Prince Richard Metternich, Richard Bently, 1880, p.262. 12) J.-A. de Sédouy, Le concert européen, aux origines de l Europe 1814-1914, Fayard, 2009, p.40.
98 제 6 권 2 집 ( 통권제 11 호, 2015 년 9 월 ) 하는것이었다. 1815년 11월 20일비공개로체결된 사국동맹 (Quadruple Alliance) 은유럽각국의영토와체제에대한실질적인보장방안을마련한것이었다. 러시아황제는네강대국의영토와체제전반에대한상호보장과각국의국내문제에대한상호감시와연대개입을주장했다. 하지만캐슬레이는이와같은확대방안에반대했다. 그가볼때, 프랑스영토만이상호보장의대상이되어야했으며더구나각국의내부문제에대한개입은혁명적소요가일어나유럽전체의평화를위협할경우로제한되어야했다. 13) 따라서사국동맹의조약은무엇보다프랑스와특히 나폴레옹보나파르트와그의가문 에대항하는규정이되었다. 혁명원리 가 프랑스를분열시키고 다른국가들의평온 을위협하기에이를경우, 체약국들은 각국의안전과유럽의전반적인평온을위해필요하다고판단될조치를 결정하기위해 서로그리고프랑스국왕과함께 협의할것이었다 ( 제2조 ). 요컨대사국동맹조약국들이우선겨냥한것은프랑스였으며, 특히나폴레옹제국의잔재를일소하고혁명의조짐을차단하는일이었다. (2) 유럽협조 하지만유럽의집단안보와국제기구의제도화라는측면에서볼때, 사국동맹조약의의의는전혀다른데에서찾을수있었다. 그것은바로캐슬레이가직접입안한조약제6조였다. 본조약의집행을원활하게하고보장하기위해서, 오늘날만방의지복을위해서네명의군주들을이렇게밀접하게단합시키고있는결속을더욱굳히기위해서, 체약국들은공동이해를협의할목적으로, 그리고국민들 (Nations) 의안녕과번영및유럽의평화유지를위해서가장유익하다고간주되는조치들을고려할목적으로, 군주들의직접적인주최에의해서든관련대신들에의해서든정례적으로만남 (meetings) 을개최하는데합의한다. 14) 13) C. K. Webster, The Congress of Vienna 1814-1815, Oxford University Press, 1918, p.142.
빈회의와유럽협조체제 99 사실제6조는구체적이고명시적인규정을담고있는다른조항들과는대조적으로, 국가들사이의만남을정례화한다는다소막연한구상을담고있을뿐이다. 언제, 어떻게, 어디서회의를개최하겠다는구체적인내용은찾아볼수없다. 캐슬레이는나폴레옹제국의타도에힘을보탠동맹국들과의유대를유지하고자했다. 하지만더이상은대륙의문제에말려들기를원치않는영국국민들의주저와일부정치권의반발을눈치챈캐슬레이는의도적으로구체적인표현을피했던것이다. 15) 하지만그막연한표현에도불구하고강대국들이정기적으로회동해서국제정치현안을논의한다는기획은기왕의외교관례와는완전히다른가히 혁명적인 전환이었다. 16) 국가들사이의 정례적인만남 이라는문구를통해캐슬레이는강대국들사이의외교관계에단일국가에서찾아볼수있는효율성과단순성, 즉 유럽정부 (European governement) 의전망 이라는, 완전히새로운무언가를도입한셈이었다. 17) 강대국들의후견아래유럽을조직하려는시도들은앞으로일련의국제회의로나타날것이었다. 그것은유럽의국제관계를규율할새로운규범체계, 이른바 유럽협조 (Concert of Europe; Concert européen) 정신의제도적착근을의미했다. 유럽협조의첫번째회합은 1818년 9~11월의엑스라샤펠 (Aix-la-Chapelle) 회의였다. 프랑스와 4대강국사이에개최된회의의주요의제는패전국프랑스에대하동맹국의응징조치를마무리하는것이었다. 프랑스가지불해야할배상금을대폭경감하고프랑스영토에주둔하고있는동맹국군대를완전히철수한다는합의가이루어졌다. 는데합의했다. 복고왕정의기반을굳힌프랑스가협상과정에서유럽협조의틀안에동참할의사를밝힘으로써사국동맹은오국동맹으로확대개편되었다. 프랑스는나폴레옹전쟁으로말미암은외교적고립을완전히탈피하고보수왕정의유럽을이끄는강국의일원으로되돌아온것이다. 14) Treaty of Quadruple Alliance, in: J. Lowe, The Congress of Europe, p.39. 15) T. Chapman, The Congress of Vienna, p.62. 16) J.-A. de Sédouy, Le concert européen, p.42. 17) 헨리키신저, 회복된세계, 박용민역, 북앤피플, 2014, p. 416. (H. Kissinger, A World Restored, 1957)
100 제 6 권 2 집 ( 통권제 11 호, 2015 년 9 월 ) 군주들의 동맹 은계속유지될것인가? 1820년에에스파냐와나폴리에서자유주의자들이왕정체제에맞서봉기를일으키자, 강대국들의연대보장체제는실험대에올랐다. 정통성을지닌군주에대항한봉기를막기위해서 유럽협조 의이름으로강대국들이개입해야하는가? 이문제를놓고트로파우 (Troppau, 1820년 11~12월 ), 라이바흐 (Laybach, 1821년 1~5월 ), 베로나 (Verona, 1822년 10~11월 ) 에서세차례회의가개최되었다. 영국은사국동맹이유럽국가들의내정을감독하는기관일수없다는이유로연대개입을반대했다. 프랑스는어중간한입장을취했지만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등신성동맹의주축국들은혁명을막고왕조를지킬사명을내세웠다. 결국오스트리아가나폴리에, 프랑스가에스파냐에개입한다는절충안이마련되었으나동맹체제는금이가기시작했다. 에스파냐문제로사국동맹은사실상와해되었으며, 연이어그리스독립 (1825) 을둘러싼각국의이해관계대립으로인해신성동맹도유명무실해졌다. 이제신성동맹은구체적인실체가없는선전문구, 낡은유럽과반혁명을상징하는정치구호로전락했다. 회의체제 (Congress System) 의짤막한막간극이후다가오는것은전유럽에걸친 1830년혁명의물결이었다. IV. 유럽협조 시대의 유럽 회의체제 는유럽전역을뒤흔든 1830년혁명과뒤이은 1848년혁명의소용돌이에휘말려속절없이무너졌다. 빈회의이후다시등장한 낡은유럽 은 19세기중반에접어들면서지유주의와민족국가의 새유럽 에자리를내줄것이었다. 하지만빈회의이후만들어진유럽의외교질서와국제관계시스템, 즉유럽협조체제는견실하게남았다. 1822년베로나회의이후유럽협조의회합들은군주와장관들의 회의 (congress) 에서장관급또는대사급의 회담 (conference) 으로비중이축소되기도했다. 그리고강대국들의경쟁적인요구가분출되는논의방식과강대국의이익이우선시되는의결구조도그리달라지지않았다. 하지만공통현안에대해해당국가들
빈회의와유럽협조체제 101 끼리정부와정부사이의양자적교섭을이어가는식의종래의외교관행이공통현안이생길때마다당사국들이모두협상테이블에마주앉는식의다자간교섭방식으로대체되었다. 정례적인회합 을통해 공통관심사 를논의하고결정하는국제관계시스템이이때부터완전히자리를잡은것이다. 나폴레옹황제에맞선유럽동맹국들의공동전선에서, 빈회의에서베로나회의로이어진국가정상들사이의연이은연합회의에서탄생한것은바로유럽공통의문제는유럽이함께논의한다는 유럽협조 의정신이었다. 그렇다면빈회의로부터탄생한 19세기상반기의유럽협조체제를어떻게평가해야할것인가? 19세기의유럽협조체제는사실역사가들에게서그리긍정적인평가를받아오지못한듯하다. 대표적으로피에르르누뱅 (P. Renouvin) 은중세이후유럽외교사의발전을개관하면서 19세기의유럽협조체제가 하나의새로운외교방식 에그쳤을뿐 국제관계의새로운개념 으로까지는발전하지못했다며인색한평가를내렸다. 18) 개별국가들의주권을제한하고영토의상호보장을확립하는시스템을갖추지못했으며 따라서 강대국들의우위를재확립하는 데기여했다는점에서 18 세기의국제관계시스템에서크게달라지지않았다는것이다. 장바티스트뒤로젤 (J.-B. Duroselle) 역시유럽협조가 강대국들의개별적이고경쟁적인야망을만족시키고강대국의의지를약소국에게강요하기위한일종의심의기구 (délibération) 로서존속하는데그쳤다고잘라말했다. 19) 나아가그는유럽협조의 모든회합들은강대국들사이의 협조 보다는 알력 과 경쟁 을더잘보여주었다 라고덧붙였다. 20) 요컨대 19세기의유럽협조체제는강대국들의이해관계에따라좌우되는지난세기의전통적인세력균형국제관계의연장선일따름이라는것이다. 18) P. Renouvin, Histoire des relations internationales, t.v(le XIXe siècle), Hachette, 1960, pp.46-47. 19) 장바티스트뒤로젤, 유럽의탄생, 이용재 이규현역, 지식의풍경, 2003, p.217, p.226. (J.-B. Duroselle, L idée d Europe dans l histoire, 1965), 20) J.-B. Duroselle, le Concert européen, Relations internationales, N.39(automne 1984), p.284.
102 제 6 권 2 집 ( 통권제 11 호, 2015 년 9 월 ) 반면에 1990년대이후역사가들은유럽협조에대해사뭇달라진평가를내놓았다. 근현대유럽정치를집대성한대작을내놓은폴슈뢰더 (P. Schroeder) 는유럽협조가단순히 외교방식의쇄신 이라는차원을넘어 완전히새로운국제관계시스템 이었다고평가했다. 21) 그에따르면빈회의이후 19세기의유럽은 구질서의회복, 세력균형의갱신, 안전보장과군주제연대로의복귀, 심지어 반동과압제의시기 등우리에게상례적으로주어진전통적인인식의틀을훌쩍넘어서는거대한 전환 을겪었다. 19세기국제관계에서관찰되는세력균형이 18세기까지의강국중심의전통적인세력균형과는다르다는점을강조하기위해슈뢰더는세력균형개념보다는정치평형 (political equilibrium) 이라는개념을사용한다. 세력균형이국가들사이의세력의균등배분과적대또는반대세력에대한견제와봉쇄를뜻한다면, 정치평형은안정, 평화, 조약체결등에따른국가들사이의상호존중과화합정책에기반을둔국제관계의균형을강조한다. 빈회의에서영토조정을놓고강대국들사이에긴장이고조되었을때, 오스트리아재상메테르니히와영국외상캐슬레이가보여준교섭방식과절충정책, 그리고 1820년대초이른바 회의체제 에서각국대표들이파국을피하기위해줄곧되풀이한양보와타협노력등은개별국가의배타적인패권추구의세력균형논리에따른것이라기보다는관련국가들모두의호혜평등과상호존중의원칙을준수하려고노력하는데서나오는정치평형논리의결과라는것이다. 이렇게 19세기의유럽협조체제는강국의논리가일방적으로관철되는 18세기식의기계적이고패권적인세력균형을넘어서서강국과강국사이에뿐만아니라강국과소국사이에도일종의정치적평형상태가유지되었다는것이슈뢰더의주장이다. 슈뢰더의뒤를이어헨리키신저 (H. Kissinger) 역시 19세기유럽협조의 21) 슈뢰더의 유럽정치의전환 논제에대해서는 P. Schroeder, The Transformation of European Politics 1763-1848, Oxford University Press, 1994; Did the Vienna Settlement Rest on the Balance of Power?, The American History Review, V.97, N.3(June 1992); The Nineteenth Century System: Balance of Power or Political Equilibrium?, Review of International Studies, V.15, N.2(April 1989); The 19th-Century International System: Changes in the Structure, World Politics, V.39, N.1(oct. 1986) 등을참조할수있다.
빈회의와유럽협조체제 103 세력균형이 단순히무력에만의존하지않았으며, 영토의균형뿐만아니라모럴의균형을추구했다 라는긍정적인평가에인색해지않았다. 22) 경쟁국들은패권을추구하면서도 유럽 이라는커다란범주안에서평화, 번영, 유럽문명등등공통의가치들로결합되어있었다는것이다. 이러한유럽협조체제의규범적측면에대한강조는조르주앙리수트 (G.-H. Soutou) 에게서도찾아볼수있다. 최근에 19세기유럽외교사를집대성한대작을내놓은수트는빈회의에서자주화두로등장한 정당한균형 (juste équilibre) 이라는표현이나유럽협조체제의표제어로등장한 유럽의공법 (droit public européen) 이라는개념은단순한무력의상호균형을넘어서유럽국가들, 정부들사이의법적, 도덕적평형을나타낸것이라고평가한다. 23) 요컨대 19세기에유럽협조체제를통해관철된것은 18세기식의 기계적균형 (équilibre mécanique) 논리가아니라나폴레옹전쟁이전에는찾아볼수없었던 유기적균형 (équilibre organique) 이었으며, 이러한강국들사이의유기적세력균형은단순한개별적국가이성을넘어서서 유럽 이라는공통의가치체계를전제로했다는것이다. 24) 이렇게볼때, 19세기의유럽질서체제는강대국들의패권정치의무대이기만했다기보다는일정한규범과질서를가진연대보장기구였다고평가할수있을것이다. 물론유럽협조체제는 20세기에야나타날어떤상설유럽기구의조직에까지는이르지는못했으며, 개별국가주권을일정하게조율하는어떤연방주의적유럽기구를만들어내지도못했다. 이런점에서유럽협조가만들어낸 유럽 은 정치적 유럽이아니었으며 규범적 유럽에그쳤다고할수있다. 하지만그것은 18세기식의파편적이고배타적인세력균형의유럽이아니라공통의가치와규범의틀안에서경쟁하는유럽이었다. 22) H. Kissinger, The Concert of Europe: Great Britain, Austria, and Russia, in: Diplomacy, Simon & Sulster, 1994, p.79. 23) G.-H. Soutou, L Europe de 1815 à nos jours, PUF, 2009, pp.25-26. 24) G.-H. Soutou & M. Steinert, Ordre européen et construction européenne, XIXe-XXe siècles, Relations internationales, N.90(été 1997), pp.129-130.
104 제 6 권 2 집 ( 통권제 11 호, 2015 년 9 월 ) V. 맺음말 1815년나폴레옹제국이몰락한데뒤이어서승전국들은빈회의에서유럽의원상회복을결정했다. 프랑스혁명이전의왕정체제가복귀했으며강대국들의이익과세력균형에맞추어영토와국경이설정되었다. 혁명과전쟁의파고를겪고달라진시대에낡은유럽이되돌아온셈이었다. 빈회의에서탄생한유럽이나폴레옹전쟁을통해유럽전역에뿌려진자유주의와민족주의의열망을도외시한채강대국들의이해관계와협상에따라리모델링된유럽이었다는사실은부정하기힘들것이다. 1830년과 1848 년에유럽전역에번진혁명의물결은이러한낡은유럽에대한거부의표현에다름아니었다. 따라서빈회의체제의유럽국가들은대내적으로압제의타도와민족국가의수립을열망하는인민의거센항거를겪어야만했다. 낡은유럽은새시대의물결에휩쓸려다시사라질운명이었다. 하지만유럽국가들은적어도국제관계에서는비교적견실한안정과균형을오랫동안유지할수있었다. 빈회의를시발점으로유럽국제무대에서구현된 회의체제 는 유럽협조 라불리는 19세기유럽의국제질서로자리를잡았다. 유럽협조 는빈회의이후 19세기에유럽에서관철된세력균형의표현이었다. 유럽협조체제에서구현된국제관계의세력균형은 18 세기의배타적이고패권추구적인강국중심의세력균형과는사뭇달랐다. 19세기의세력균형은강대국이든약소국이든국제무대에서대등한지위를보장받는, 굳이말하자면국가들사이에일종의정치적평형이유지되는세력균형이라고할만하다. 경쟁국들은자국의패권을추구하면서도 유럽협조 라는규범적이상아래서평화, 공영, 문명등공통의가치를지켜내고자했다. 그렇다면 19세기의유럽질서는강대국들의패권정치의무대이기만했다기보다는일정한공통규범과가치를지닌연대보장체제였다고평가할수있을것이다. 빈회의가만들어낸유럽협조체제는국내적으로는혁명에맞서는보수정치의방벽구실을했지만, 국제적으로는국가들사이의알력과마찰을줄이고평화를유지하는보루가될수있었다. 유럽 이라는
빈회의와유럽협조체제 105 공통분모와 협조 라는규범적가치가경쟁과패권이난무하는거친현실정치의파고속에서도면면히이어져온것이다. 나폴레옹전쟁이후 19세기의유럽이크고작은전쟁들을치렀음에도불구하고 20세기와비교할때상대적으로안정과평화를누릴수있었던이유가바로여기에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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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제 6 권 2 집 ( 통권제 11 호, 2015 년 9 월 ) <Abstract> The Congress of Vienna and the Concert of Europe A Formative European Order in the Early Nineteenth Century Yong-Jae Lee*25) The diplomatic negotiations at Vienna from September 1814 to June 1815 took place amidst scenes of glittering splendour. The major territorial issues were decided by the victorious Great Powers, Russia, Prussia, Austria and Britain, who were persuaded by Talleyrand, head of the French delegation to include France among the Five Great Powers. It is commonly stated that the Vienna Settlement was based on the twin principles of legitimacy and balance of power. But the evidence suggests that the allied leaders did not regard legitimacy as very compelling principle, its application being haphazard. It was plain, in the final territorial solution, that the balance of power was more important than legitimacy. The Congress System, which took the form of a series of congresses held between 1818 and 1822, can be regarded as a practical expression of the rather general concept of the Concert of Europe. The Concert of Europe represented the balance of power that existed in Europe from the Congress of Vienna through the mid-nineteenth century. In recent years some historians have argued that the old formulae for balance of power were in fact highly destabilizing and predatory. They said the Congress of Vienna avoided them and instead set up rules that produced a stable and benign equilibrium. In short, it was no more 18th-century style of mechanical equilibrium, but a new type of organic equilibrium that the * Chonbuk National University
빈회의와유럽협조체제 109 Concert of Europe managed to maintain. In this sense, the European Concert System can be regarded as a mutual security institution with some normative values rather than as a stage of political hegemony of Great Powers. key words: Congress of Vienna, Sainte-Alliance, Quadruple Alliance, Concert of Europe, Balance of Power 원고접수일 : 2015. 8. 20. 심사마감일 : 2015. 9. 13. 게재확정일 : 2015. 9.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