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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국유학사의 형성 397 #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매일신보 1917.4.21. 1917.4.25. 1917.4.26. 1917.4.27. 1917.4.28. 1917.4.29. 1917.5.1. 1917.5.2. 1917.5.3 1917.5.4. 1917.5.5. 1917.5.7. 1917.5.8. 1917.5.9. 1917.5.10. 주제 李滉 <표 3> 이황과 사단칠정론 주요 인물 李滉 李滉 四端七情 李滉 李滉, 奇大升 李滉, 奇大升 李滉, 奇大升 李滉, 奇大升 成渾 李珥 李珥 李珥 李珥 李瀷 李瀷 李瀷 石潭日記 經筵日記 栗谷 澤堂 論思 錄 柳文節日記 安順菴隨筆 退溪天命圖說後敍 奇高峯非四端七情分理氣 辨 退溪答奇明彦書 退溪答奇明彦書 31 1917.5.16 32 1917.5.17 33 1917.5.19. 李珥 34 1917.5.22. 35 1917.5.24. 成渾 키워드 四端七情後說 總論 退溪 成牛溪四七理氣問書 栗谷答成牛溪四七理氣辨 栗谷聖學輯要心性情說 李星湖四七理氣說 星湖辨說 <표 4> 이황 이외의 주요 명현 # 매일신보 주제 주요 인물 29 1917.5.11. 退溪同時儒宗 曺植 30 1917.5.13. 徐敬德 출전 출전 退溪集 漢山錄 石潭日記 李澤堂 李澤堂 栗谷 柳文節日記 奇高峯論事錄 李恒 奇大升 退溪答奇明彦書 栗谷石潭 日記 退溪 金麟厚 (金德秀 柳希 退溪答奇明彦書 牛山襍錄 春 鄭之雲 李仲虎 盧 金沙溪語錄 申象村集 守愼) 宋尤庵集神道碑 李白沙集神道碑 退溪集答 李珥 叔獻書 月沙集諡狀 李珥 牛溪語錄 白沙撰神道碑銘 尹魯西襍著 宋尤庵 浦渚 成渾 趙翼上疏 키워드
398 한국문화 74 # 36 37 38 39 <표 5> 학파의 성립과 전개 매일신보 1917.5.25. 1917.5.29 1917.5.31. 1917.6.1. 주제 退溪門人 南溟門人 退溪門人 南溟門人 花潭門人 주요 인물 鄭逑 趙穆 吳健 崔永慶 黃俊良 南致利 權好文 金宇顒 閔純 李之菡 40 1917.6.2. 退溪學脈 張顯光 41 1917.6.5. 42 43 44 45 46 1917.6.6. 栗牛門人 1917.6.7. 1917.6.13. 1917.6.14. 1917.6.15. 花潭門人 鄭經世 金長生 趙憲 鄭曄 安邦俊 申應矩 姜沆 金集 徐起 朴枝華 출전 牛溪日記 退溪書 涪溪 紀聞 石潭日記 牛溪與松江書 退溪 鶴峯 石潭日記 趙澗松任道就正錄 政院 日記 正廟親撰祭文 許 眉叟祭文 金敬窩烋作畵 像贊 鄭愚伏 宋尤庵答 沈德升 李蒼石埈 趙龍洲集神道 碑 宋同春集行狀 宋尤 庵集答鄭晏叔書 키워드 尤庵集行狀 栗谷 權石 洲 休窩雜纂 月沙集碑 明齋集 尤庵集神道碑 白沙 眉叟 朴守庵 澤堂 牛溪續集 眉叟記言 <표 1>에서 <표 5>까지는 단행본 조선유교연원 의 권1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장지연은 성호학맥의 시각에서 기자와 이황을 존숭하여 기자의 시작과 이황의 완성으로 구성되는 이상적인 조선 유학사 지식을 창출하고자 하였다. 이 부분은 크게 조선시대 이전 유학사, 이황 이전 조선 유학사, 이황과 사단칠정론, 이황 이외의 주요 명현, 학파의 성립과 전개 등 5개의 주제로 구분된다. 먼저 <표 1>에서 그는 箕子부터 李齊賢까지 고전 유학, 삼국 유학, 신라 유학, 고려 유학을 서술하였다. 이아 를 인용하여 동방 사람의 仁을 첫머리에 부각하 였고 이어서 기자의 홍범이 儒敎의 宗祖 이며 따라서 기자의 도가 밝혀진 조선 이 유교종조의 나라 임을 자부하였다. 삼국 유학에서 고려 유학까지 각각 經學 中興 (삼국의 자제들), 儒學之興 (설총), 我東私塾學校之興 (최충), 儒學中興 (안 유), 程朱學始起 (백이정), 易理之學 (우탁), 朱子集註 간행(권부) 등 조선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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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2 한국문화 74 3) 李珥와 成渾 5. 학파의 성립 (1917/5/25~6/15) 1) 退溪學派의 학인들 2) 南溟學派의 학인들 3) 栗牛學派의 학인들 4) 花潭學派의 학인들 # 47 48 49 50 51 매일신보 1917.6.29. 1917.7.4. 1917.7.5. 1917.7.6. 1917.7.7. # 매일신보 52 1917.7.8. 53 1917.7.10. 54 55 56 57 58 59 1917.7.11. 1917.7.12. 1917.7.13. 1917.7.14. 1917.7.15. 1917.7.17. 주제 陽明學 주제 <표 6> 조선의 학술 풍토와 양명학 주요 인물 출전 朝鮮儒敎淵源 중간 정리 王陽明傳習錄辨(上) 王陽明傳習錄辨(上) 谿谷漫筆의 학술관 星湖 張谿谷漫筆 李星湖僿說 僿說의 이단관 鄭齊斗 星湖 <표 7> 당쟁과 조선 유학 주요 인물 寒岡門人 沙溪門人 愼齋門 許穆 宋時烈 人 旅軒門人 許穆 宋時烈 宋浚吉 李惟泰 兪棨 許厚 西人儒學 尹宣擧 趙任道 申悅道 金應祖 李厚 南人儒學 慶 趙翼 尹鑴 尹鑴 尹鑴의 大學, 中庸 문자 尹鑴의 大學, 中庸 문자 西人儒學 權諰 朴世堂 朴世采 丁時翰 南人儒學 李玄逸 李玄逸 尹拯 尹拯 출전 키워드 키워드 南夢囈 宋尤庵答券思誠書 大學解說 中庸序說 尹明齋與李草廬書 權荷塘斗寅撰行狀 懷尼之爭 老少之論
근대 한국유학사의 형성 403 <표 8> 송시열 학맥의 호락분열 # 매일신보 주제 주요 인물 金昌協 李箕洪 李喜朝 60 1917.7.18. 尤菴門人 權尙夏 鄭澔 農巖門人 江門八學 61 1917.7.20. 韓元震 玄石門人 韓元震 62 63 64 65 66 67 68 69 1917.7.21. 湖洛學派 湖洛學派分裂 1917.7.22. 李柬 1917.7.24. 李縡 尹鳳九의 心說 1917.7.25. 尹鳳九의 心說 李縡의 답변 1917.7.26. 尹鳳九 및 尹鳳九의 학설 1917.7.27. 尹鳳九의 학설 1917.7.28. 尹鳳九의 학설 1917.8.4. 近代의 湖洛 비판 韓元震 宋明欽 金元行 兪肅基 70 1917.8.5. 閔遇洙 李陶庵門人 韓南塘門 人 尹屛溪門人 蔡之洪 江門八士 鄭萬陽 鄭葵 71 1917.8.8. 湖洛學派 明齋門人 陽 李光庭 # 72 73 74 75 76 77 매일신보 주제 1917.8.9. 李瀷 1917.8.10. 1917.8.11. 1917.8.21. 嶺南儒學 1917.8.22. 星湖門人 1917.8.23. 老論儒學 78 1917.8.24. 嶺南儒學 星湖學脈 키워드 尤庵之學 湖洛之論 臺山金邁淳闕餘散筆 朱子答徐元聘書 尹屛溪心說問 陶庵答 屛溪問 屛溪曰 陶庵答 答淇章海書 答伯剛書 答伯剛書 華西李恒老 <표 9> 이익의 학문과 학맥 주요 인물 출전 출전 李瀷 蔡樊巖濟恭 李瀷, 洪範說 星湖所著洪範說 李瀷, 後天祖河圖說 後天祖河圖說 李象靖 李光靖 崔興遠 朴遜慶 安順菴橡軒隨筆 安鼎福 愼後聃 金亮行 宋煥箕 宋能相 金履 安 朴胤源 沈定鎭 宋穉圭 李瑀 柳道源 鄭宗魯 南漢朝 南景 沈雲稼道學源流說 羲 黃德吉 黃德壹 키워드
404 한국문화 74 # 79 80 81 82 83 매일신보 주제 1917.8.25. 儒學經濟 1917.8.26. 1917.8.28. 1917.8.29. 1917.8.30. 儒學經濟 開城儒學 <표 10> 조선후기 經濟之學 주요 인물 출전 키워드 以儒學兼經濟之學 柳馨遠 柳馨遠 吳藥山集 洪啓禧作傳 丁若鏞 朴趾源 洪大容 李德懋 吳熙常 漢儒學術 趙有善 金憲基 <표 6>에서 <표 10>까지는 단행본 조선유교연원 의 권2에 해당하는 부분이 다. 장지연은 조선후기 유교계가 주자학 독존과 당파의 정쟁으로 굴절된 가운데 퇴계적파와 율곡적파가 추구한 주자학 및 새롭게 부상한 경제지학으로 구성된 조선 유학사 지식을 창출하고자 하였다. 이 부분은 크게 조선의 학술 풍토와 양 명학, 당쟁과 조선 유학, 송시열 학맥의 호락분열, 이익의 학문과 학맥, 유학과 경제지학의 겸비 등 5개의 주제로 구분된다. <표 6>은 주자학 독존의 학술 풍토와 양명학의 좌절에 대해 서술하였다. 중국 유학은 명대 중엽 이후 주자학에서 양명학으로 대세가 바뀌었지만 조선 유학은 정몽주 이래 줄곧 주자학을 독존하여 명종 선조 연간 주자학의 극성을 목도하 였고 중간에 徐敬德 盧思愼 李恒 등의 獨立之學 도 모두 이황의 배척을 받아 결국 이황이 확립한 주자학 전통이 이후 이이, 성혼, 정구, 장현광, 김장생, 김집 등에 의해 계속되었음을 주장하였다.60) 이어서 조선시대 양명학의 좌절을 보여 주고자 이황의 傳習錄論辨, 장유의 谿谷漫筆, 이익의 儒門禁網 ( 星湖僿說 所收) 등을 차례로 소개하였는데, 장유와 이익의 언설은 양명학에 관한 논평이 아니라 단지 조선 유학에 다양성과 관용성이 부족하다는 조선의 학술 풍토에 대 60) 60) 朝鮮儒敎淵源 매일신보 1917.6.29. 이 글은 단행본 조선유교연원 에 포함되지 않았 기 때문에 지금까지 연구자들 사이에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장지연의 조선유학사 인식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중요한 글이다. 장지연은 조식의 도는 김우옹, 오건 이후 단절 되었다고 인식하였고 서경덕의 도는 사실상 조선 유학 전통에 포함해 인식하지 않았다. 그는 퇴계학파와 율곡학파, 그 중에서도 정구-장현광 중심의 퇴계학파와 김장생-김집 중 심의 율곡학파를 조선유학사의 중심으로 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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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8 한국문화 74 제2부 6. 조선의 학술 풍토와 陽明學 (1917/6/29~7/7) 1) 주자학 독존의 조선 유학 2) 陽明學의 좌절 7. 당쟁과 조선 유학 (1917/7/8~7/17) 1) 許穆과 宋時烈 2) 尹鑴의 경학 3) 李玄逸과 己巳南人 4) 尹拯과 老少分岐 8. 宋時烈 학맥의 湖洛分裂 (1917/7/18~8/8) 1) 宋時烈의 문인들 2) 湖學과 洛學의 대립 3) 湖洛學派의 학인들 9. 李瀷의 학문과 학맥 (1917/8/9~8/24) 1) 이익의 경학 2) 이익의 문인들 3) 동시기 유학자들 10. 조선후기 經濟之學 (1917/8/25~8/30) 1) 柳馨遠 2) 丁若鏞 3) 朴趾源 84 85 86 87 88 89 90 91 92 <표 11> 지방학계의 성장과 기정진의 도전 1917.9.2. 關西儒學 鮮于浹 張世良 黃順承 李載亨 韓夢麟 1917.9.5. 關北儒學 崔愼 李元培 劉汝豪 1917.9.7. 湖南儒學 鄭介淸 및 奇正鎭의 1917.9.8. 奇正鎭 奇正鎭 納凉私議 1917.9.11. 奇正鎭의 納凉私議 1917.9.12. 奇正鎭의 納凉私議 1917.9.13. 奇正鎭의 納凉私議 1917.9.14. 奇正鎭의 納凉私議 1917.9.16. 奇正鎭의 猥筆 納凉私議 奇蘆沙猥筆
근대 한국유학사의 형성 409 93 94 95 96 97 98 99 100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10 111 112 113 114 115 1917.9.19. 1917.9.21. 1917.9.22. 1917.9.23. 1917.9.28. 1917.9.29. 1917.9.30. 1917.10.3. 1917.10.4. 1917.10.17. 1917.10.19. 1917.10.21. 1917.10.26. 1917.10.28. 1917.10.31. 1917.11.2. 1917.11.16. 1917.11.17. 1917.11.18. 1917.11.20. 1917.11.21. 1917.11.22. 1917.11.23. <표 12> 이항로의 굴기와 경가분열 洪直弼 洪直弼 李恒老 李恒老 李恒老 崔益鉉의 辨誣 崔益鉉訟其誣 李恒老의 明德說 明德說 李恒老의 華西雅言 華西雅言 華西門人 金平黙 柳重敎 補李華西心說 兪莘煥 兪莘煥 兪莘煥의 明德說, 讀書記 尹巴江秉鼎所撰行狀 鳳棲集讀書記 鳳棲門人 徐應淳 李峿堂象秀 尹致聃題金洪祭絅 京嘉兩派分裂 京嘉分裂 京嘉分裂 堂文後 京嘉分裂 老論儒學 少論儒學 老論儒學 嶺南儒學 <표 13> 조선후기 기타 유학자 沈定鎭 成近默 李亮淵 姜必孝 朴弼周 柳致明 柳致明 柳致明 柳致明 老論儒學 吳熙常 朴胤源 任靖周 宋穉圭 湖南儒學 魏伯珪 南龍萬 南基萬 黃胤錫 金相 116 1917.11.27. 기타 卨 林宗七 尹大淳 金樂灃 朴命璧 許暖 117 1917.11.28. 老論儒學 金相日 權相一 李萬運 柳尋春 許傳 118 1917.11.29. 기타 宋來熙 李直輔 李鳳秀
410 한국문화 74 <표 14> 경화학계의 문장경술 119 120 121 122 1917.12.1. 1917.12.4. 1917.12.5. 1917.12.7. 123 1917.12.8. 124 1917.12.9. 125 1917.12.11. 正純以來 洪奭周 金邁淳 文章經術 尹宗儀 朴珪壽 關北儒學 朱棐 朱明相 總論 <표 15> 한국유학사 총론 總論(上) 總論(中) 總論(下) <표 11>부터 <표 15>까지는 단행본 조선유교연원 의 권3에 해당하는 부분이 다. 장지연은 奇正鎭과 李恒老를 통해 19세기 지방학계의 성장과 도전을 보여주 고 洪奭周 尹宗儀 朴珪壽를 통해 19세기 경화학계의 경세론을 보여주고자 하 였다. 앞서 당쟁과 조선유학, 송시열 학맥의 호락분열, 조선후기 경제지학 등 의 구성 방식을 취했듯 이번에도 그와 유사하게 지방학계의 성장과 기정진의 도전, 이항로의 굴기와 경가분열, 경화학계의 문장경술 등의 구성 방식을 취 한 것이다. 그러나 <표 13>에서 보듯 경가분열과 경화학계 사이의 연재 기사들 은 공통적인 주제의식을 검출할 수 없는 잡다하고 산만한 인물 정보의 나열로 그치고 있어서 엄밀하게 말해 이 부분의 한국유학사 지식이 근대 역사 지식으로 서 갖는 성격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표 11>은 조선후기 지방학계의 성장과 19세기 호남의 대유 기정진의 독자적 인 성리설에 관하여 서술하였다. 鮮于浹을 필두로 關西儒界의 동향이 소개되고 崔愼을 필두로 關北儒界의 동향이 소개된 것은 실제로 조선후기 서북 지역에 유 학이 널리 확산되었고, 그 결과 대한제국기에는 朴殷植과 같은 관서지식인, 吳相 奎와 같은 관북지식인이 성장하여 서울에서 서북학회의 자강운동을 이끌기까지 했던 사실이 고려된 결과라고 생각된다.65) 지방학계의 성장과 관련하여 관서와 65) 65) 근대전환기 관서지식인 박은식과 관북지식인 오상규에 대한 지성사적 연구로 다음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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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국유학사의 형성 413 한 總論의 관점에 부합하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경화학계 부분을 삭제하고 19세 기 조선 유학의 어지러운 소용돌이를 더욱 확장해서 상술하는 편이 본래의 주제 의식을 극대화하는 일관성 있는 태도였을지 모른다. 제3부의 한국 유학사는 구 성적인 면에서 볼 때 현 상태로는 미완이다. 제3부 11. 지방 학계의 성장과 奇正鎭의 도전 (1917/9/2~9/16) 1) 關西地方의 주자학 2) 關北地方의 주자학 3) 奇正鎭의 문제작, 納凉私議 와 畏筆 12. 李恒老의 굴기와 경가분열 (1917/9/19~10/26) 1) 洛學 전통의 권위 2) 李恒老의 굴기 3) 李恒老 문하의 내부 대립 4) 京嘉分裂의 전개 13. 조선후기 기타 유학자들 (1917/10/28~11/19) 1) 영남 유학 2) 노론 유학 3) 소론 유학 4) 호남 유학 14. 京華學界의 文章經術 (1917/12/1~12/7) 1) 洪奭周와 金邁淳 2) 尹宗儀 3) 朴珪壽 총론 (1917/12/8~12/11) 2) 조선유교연원 과 조선유학사 의 비교 위에서 매일신보 에 연재된 장지연의 조선유교연원 을 내용의 흐름에 따라 목차를 부여하고 조선유학사 지식의 체계화를 시도하였다. 그 결과 총론을 제외 한 본론을 전체 3부 14장으로 편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제 필자가 편성한 시 론적인 목차에 의해 새롭게 의미화된 조선유교연원 의 역사적 성격을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 아래에서는 현상윤의 조선유학사 와 비교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414 한국문화 74 자 한다. 현상윤의 조선유학사 는 사관으로 본다면 민족적 자주의식에 입각해 자국 유학사를 통관한 업적이라69) 조선유교연원 의 유교적 도통론의 사유로부 터는 벗어나 있지만, 내용으로 본다면 조선유교연원 의 아류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70) 조선유교연원 과 조선유학사 의 비교 를 통해 조선유교연원 의 조선유학사 지식의 특성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 으로 기대된다. 이에 양자의 목차를 비교하여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69) 70) <표 16> 張志淵의 朝鮮儒敎淵源 과 玄相允의 朝鮮儒學史 의 비교 張志淵, 朝鮮儒敎淵源 玄相允, 朝鮮儒學史 1. 서론 제1부 1. 조선시대 이전 유학사 1) 고대 유학사 2) 고려 유학사 2. 李滉 이전 조선 유학사 1) 嶺南士林의 도통 2) 國朝儒先의 계보 3. 李滉과 四端七情論 1) 李滉의 학문과 세평 2) 四端七情論의 전개 4. 李滉 이외의 주요 명현 1) 曺植과 徐敬德 2) 李恒과 金麟厚 3) 李珥와 成渾 5. 학파의 성립 1) 退溪學派의 학인들 2) 南溟學派의 학인들 3) 栗牛學派의 학인들 4) 花潭學派의 학인들 1) 朝鮮 儒學의 本質 2) 朝鮮 儒學의 朝鮮 思想史에 미친 影響 3) 朝鮮 儒學의 東洋史上에 占한 位置 제1부 2. 羅麗時代의 儒學 1) 朝鮮 儒學의 起源 2) 羅麗時代 儒學의 學風 3) 羅麗時代의 代表的 儒學者 3. 李朝 初期의 儒學 1) 李朝의 政策과 儒學의 獎勵 2) 李朝 初期 儒學의 學問的 傾向 3) 此期의 著名한 儒學者 4) 節義問題 5) 戊午士禍 4. 至治主義의 儒學 1) 至治主義 儒學의 特色 2) 趙光祖 3) 至治主義 運動의 挫折 4) 至治主義 儒學派의 諸人 5. 性理學 1) 性理學의 朝鮮 儒學史上에 占領한 地位 2) 性理學이 隆盛하게 된 由來 3) 性理學의 學風 4) 朝鮮 性理學의 내용 5)~14) 徐敬德, 李彦迪, 李滉, 曺植, 李恒, 金麟 厚, 奇大升, 李珥, 成渾, 張顯光 69) 오종일, 2008 기당 조선유학사 의 저술 배경과 그 가치 공자학 15, 74면. 70) 최영성, 2009 조선사상사 조선유학사의 선구자, 기당 현상윤 오늘의 동양사상 20, 190면.
근대 한국유학사의 형성 415 6. 退栗 前後의 一般 名儒 제2부 6. 조선의 학술 풍토와 陽明學 1) 주자학 독존의 조선 유학 2) 陽明學의 좌절 7. 당쟁과 조선 유학 1) 許穆과 宋時烈 2) 尹鑴의 경학 3) 李玄逸과 己巳南人 4) 尹拯과 老少分岐 8. 宋時烈 학맥의 湖洛分裂 1) 宋時烈의 문인들 2) 湖學과 洛學의 대립 3) 湖洛學派의 학인들 9. 李瀷의 학문과 학맥 1) 李瀷의 경학 2) 李瀷의 문인들 3) 동시기 유학자들 10. 조선후기 經濟之學 1) 柳馨遠 2) 丁若鏞 3) 朴趾源 제3부 11. 지방 학계의 성장과 奇正鎭의 도전 1) 關西地方의 주자학 2) 關北地方의 주자학 3) 奇正鎭의 문제작, 納凉私議 와 畏筆 12. 李恒老의 굴기와 京嘉分裂 1) 洛學 전통의 권위 2) 李恒老의 굴기 3) 李恒老 문하의 내부 대립 4) 京嘉分裂의 전개 13. 조선후기 기타 유학자들 1) 영남 유학 2) 노론 유학 3) 소론 유학 4) 호남 유학 14. 京華學界의 문장경술 1) 洪奭周와 金邁淳 1) 그 學問的 傾向 2) 그 著名한 儒學者와 學問思想의 大略 제2부 7. 禮學 中心의 儒學 1) 禮學 崇尙의 必然的 趨勢 2) 禮學派의 諸人 8. 慕華思想의 鼓吹 1) 慕華思想 鼓吹의 由來 2) 慕華思想 鼓吹의 代表者 9. 黨爭時代의 儒學 1) 儒學思想과 黨爭의 必然性 2) 黨爭의 影響과 當時 儒學者間에 發生한 諸問題 3) 禮訟 4) 尹白湖의 經傳 註解 5) 懷尼問題 6) 黨爭時代의 著名한 諸儒 10. 陽明學의 流入과 그 排斥 1) 陽明學의 傳來 2) 陽明學의 排斥 3) 陽明學의 不振과 後人의 論評 11. 湖洛學派의 分裂 1) 湖洛 分派의 原因 2) 湖洛 兩論의 代表者 3) 湖洛 兩論의 槪評 12. 經濟學派의 出現과 風動 1) 經濟學派의 擡頭와 그 原因 2) 經濟學派의 學風 3) 經濟學派의 勢力과 그 代表者 제3부 13. 性理學의 再燃 1) 經濟學派 運動의 不振 2) 性理學의 勢力 挽回 3) 主理派의 發達 4) 主氣派의 發達 5) 折衷派의 消長 14. 西學 感染의 騷動 1) 西學의 傳來 2) 士人의 感染 3) 世情紛然 4) 政府의 彈壓 15. 斥邪衛正의 運動 1) 運動 勃發의 情勢 2) 斥邪衛正의 運動과 그 代表者 16. 近世 以降의 一般 儒學界 1) 挽近 一般 儒學界의 學問傾向
416 한국문화 74 2) 尹宗儀 3) 朴珪壽 총론 (상, 중, 하) 2) 그 著名한 儒學者 17. 結論 1) 儒學의 朝鮮 文化에 남겨 놓은 足跡 2) 儒學의 末弊와 李朝의 終局 위 표에서 보듯 조선유교연원 과 조선유학사 는 목차 구성 방식이 대동소이 하다. 즉, 후자의 제1부, 제2부, 제3부는 정도의 차이는 다르지만 전자의 그것에 상응한다. 이는 조선유교연원 의 기본적인 구성 방식을 조선유학사 가 계승했 음을 의미한다. 다만, 각 부 안의 장별 구성에서 차이가 있다. 제1부의 경우 전자는 조선 유학의 근원으로 箕子의 洪範을 강조했으나 후자는 이를 삭제하고 삼국시대의 국학 설립을 부각하였다.71) 또한 전자는 정몽주-길재 -김숙자-김종직-김굉필 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의 도통 관념에 따라 조선 성리학의 중심을 명확하게 이황에 두었고, 이황에서 시작한 사단칠정론을 조선 성리학의 대표적인 학술사로 표장했으며, 이황 이외의 명현들의 주자학을 이황 보다 차등을 두어 평가했다. 반면 후자는 제1부의 중점을 조광조의 至治主義에 두고 전자가 주장한 이황의 특별한 지위는 이황 이외의 명현들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상대화시켰다. 전자가 星湖僿說 을 인용하여 조광조가 학문이 미성숙한 상태에서 함부로 經濟를 자임해 일어난 虛着取敗가 기묘사화였다는 이황의 비판 을 전달했다면,72) 후자는 반대로 조광조와 기묘사림은 시국을 자임하는 열성과 용기가 있었는데 이황의 소극적인 출처관 때문에 이후 다시는 이와 같은 적극성 이 나오지 못했다는 저자의 비평을 전달했다.73) 또한 전자가 이이의 학문 내용 이 무엇이고 저술이 무엇인지조차 서술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음과 달리 후자는 전자에서 이황에 이어 마련한 사단칠정론 항목을 해체시켜 이황의 사단칠정론은 이황 항목으로 이이의 사단칠정론은 이이 항목으로 분속시키는 한편 성학집요 의 心性情論을 추가하고 이이의 신설로 本然之氣 와 心是氣 를 제시하여 이이의 성리학을 보강하였다.74) 또한 후자는 전자의 도통론적 사유에 의해 포착되지 못 71) 72) 73) 74) 71) 조선유학사 제2장 羅麗時代의 儒學 제1절 朝鮮儒學의 起源. 72) 朝鮮儒敎淵源 (10) 매일신보 1917.4.17. 73) 조선유학사 제5장 性理學 제7절 李滉.
근대 한국유학사의 형성 417 했던 정도전, 사육신, 생육신, 月 象 谿 澤 등을 포함시켰는데, 특히 사육신과 생육신의 절의 문제는 조선전기 세조의 왕위 찬탈에 맞서 정의 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수호하고자 했던 조선 유학의 실천으로서 특기되었고,75) 연산군대의 폐 정과 사화를 거친 후 이른바 堯舜君民 을 추구했던 지치주의 역시 이와 같은 실 천에 이어 재차 시도된 중종대 청년 유학자들의 실천유학 으로 특기되었다.76) 이렇게 볼 때 조선유교연원 은 조선유학사 와 달리 제1부에서는 퇴계도통론에 입각한 전통적인 유학사 서술에 가까운 태도로 저자가 생각하는 조선 유학의 이 념형을 구현했다고 볼 수 있겠다. 반면 조선유학사 는 조선유교연원 과는 사 뭇 다른 태도로 민족과 국가를 위한 사상의 실천 이라는 각도에서 조광조의 지 치주의를 중심으로 조선전기 유학사를 재해석했다고 볼 수 있겠다. 다만 기본적 인 구도와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조선유학사 가 조선유교연원 을 재배치하고 보강하는 수준에 머물렀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77)77) 제2부의 경우 조선유교연원 은 조선후기의 주자학이 주자학 독존의 학술 풍 토와 붕당 간의 당쟁 위에서 퇴계학과 율곡학으로 전개되었는데, 율곡적파의 송 시열 학맥에서는 이기심성론의 대립으로 호락분열이 일어났지만 퇴계적파의 이 익은 박학과 개혁을 추구하였고 그것이 조선후기 경제지학의 발흥과 연결되었음 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조선후기 유학사를 거시적으로 주자학에서 실학 으로 라고 하는 구도에 놓고 이해하는 것과 동일한 착상이다. 조선유학사 역시 이와 같은 착상으로 제2부를 구성하고 있지만 설명 방식은 더욱 정치하고 어느 의미에서는 상이하다. 전자에서 제2부의 입론의 대전제가 되는 것이 다양성과 관용성이 없는 조선 주자학의 학술적 전제주의라는 부정적인 에토스였다면, 후 자에서 입론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조선 주자학의 필연적인 자기 전개 과정으로 서 禮學 과 慕華 이다. 즉, 유교적 실천윤리의 확산에 뒤따른 필연적인 추세로서 75) 76) 74) 조선유학사 제5장 性理學 제12절 李珥. 75) 조선유학사 제3장 李朝 初期의 儒學 제4절 節義問題. 76) 조선유학사 제4장 至治主義의 儒學 제1절 至治主義 儒學의 特色. 77) 조선유교연원 과 조선유학사 를 비교하면 전자의 1장은 후자의 2장에 상응하고, 전자 의 2장은 후자의 3장과 4장에, 전자의 3장과 4장은 후자의 5장에, 전자의 5장은 후자의 6 장에 상응함을 알 수 있다.
418 한국문화 74 의 예학,78) 그리고 원명교체기의 反元親明, 임진왜란의 再造之恩, 명청교체기의 反淸崇明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당쟁을 초월해 모든 당파에서 지향한 사상 으로서의 모화라고79) 하는 것은 전자에서는 누락되어 있던 것으로 비록 현대사 회에 미친 유교의 공과라는 맥락에서 평가될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는 조선후기 유학의 역사적 조건 또는 역사적 所與로 간주된다. 당쟁의 경우도 조 선의 특정한 에토스의 문제라기보다 본래 유학사상에 내재한 君子小人論이 자기 수양의 방법이 아니라 시비 해결의 수단으로 분출한 결과 일어나는 논리적 필연 으로 간주된다.80) 문제는 유학이 당쟁으로부터 초월하지 못하고 도리어 당쟁의 와중에 빠져 있게 되었다. 81)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후자는 전자에 없던 새로운 분류 항목으로 예학과 모화를 창출하고 합당한 유학자를 재배치하였을 뿐만 아 니라82) 당쟁 항목 안에도 당쟁시대의 저명한 제유 라는 節을 만들어서 전자에 서 본격적인 기술을 회피했거나 항목으로 선별하지 않은 17세기 조선 유학자들 의 성리설을 적극적으로 조명하였다.83)83) 아울러 후자는 조선 주자학의 필연적인 전개 과정으로서 예학, 모화, 당쟁의 유학을 서술한 데 이어 차례로 양명학, 호락학파, 경제학파를 서술하였다. 전자 와 비교하여 양명학은 그대로 차용하였고 호락학파는 약간의 변화를 주었으며 경제학파는 대폭 수정하였음을 볼 수 있다. 양명학의 경우 전자가 제2부의 도입 78) 79) 80) 81) 82) 78) 조선유학사 제7장 禮學 中心의 儒學 제1절 禮學 崇尙의 必然的 趨勢. 79) 조선유학사 제8장 慕華思想의 鼓吹 제1절 慕華思想 鼓吹의 由來. 80) 조선유학사 제9장 黨爭時代의 儒學 제1절 儒學思想과 黨爭의 必然性. 81) 조선유학사 제9장 黨爭時代의 儒學 제2절 黨爭의 影響과 當時 儒學者間에 發生한 諸問題. 82) 조선유학사 는 禮學派의 諸人 으로 鄭逑, 金長生, 金集, 鄭經世, 宋浚吉, 李惟泰, 兪棨, 朴世采 등의 항목을 마련해 넣었다. 이에 이르러 정구는 장지연이 설정한 퇴계적파 의 맥락이 아니라 예학파의 일원으로 편입되었으며 김장생과 김집 역시 율곡적파 의 맥락 이 아니라 예학파의 일원으로 편입되는 변화를 겪었다. 또 조선유학사 는 慕華思想 鼓 吹의 代表者 로 金尙憲, 鄭蘊, 洪翼漢, 尹集, 吳達濟 등의 항목을 마련하였다. 병자호란 당 시의 척화파를 곧 모화사상 의 대표자로 설정함으로써 모화 의 정서를 국난기 비분강개 의 충정과 등치시켰다. 83) 조선유학사 제9장 黨爭時代의 儒學 제6절 黨爭時代의 著名한 諸儒. 특히 허목, 송 시열, 윤휴, 이현일, 권상하, 김창협, 임영, 조성기 등이 그러하다.
근대 한국유학사의 형성 419 부에 조선의 학술풍토와 양명학 을 배치하여 양명학을 배척한 조선 주자학의 독존적인 학술 풍토를 제2부의 기조적인 지식으로 전면화시키고 이에 이어 당 쟁과 조선유학 을 배치하여 조선후기 유학사의 부정적인 인상을 배가시켰다면, 후자는 예학, 모화, 당쟁 문제를 서술한 후 양명학의 유입과 그 배척 을 배치함 으로써 전자가 양명학의 유입 문제에 부여한 기조적인 성격을 탈색시켜 버렸 다. 호락학파의 경우 전자가 송시열의 주요 문인들과 송시열의 성리학 내용을 소개한 데 이어84) 호락학파분열 을 배치하여 율곡적파 송시열 학맥의 분열적 성격을 부각했다면, 후자는 송시열의 학문과 주요 문인들에 관한 내용은 모두 당 쟁시대의 저명한 제유 로 돌려 버렸고 호락학파를 양명학 다음에 배치시켜 상대 적으로 학술적 이해를 강화시켰다. 경제학파의 경우 전자가 이익의 학문과 학 맥 에 이어 조선후기 경제지학 을 배치함으로써 퇴계적파 이익의 학풍과 조선 후기 경제지학을 직접 연계시키는 입장을 보였다면, 후자는 전자의 이익의 학 문과 학맥 에 해당하는 내용을 삭제하고 대신 이익과 안정복을 경제학파 범주에 흡수하여 金堉-柳馨遠-李瀷-安鼎福-申景濬-丁若鏞-朴趾源-洪大容-李德懋-朴齊家魏伯珪-金正喜 로 구성된 조선후기의 포괄적인 학파로서 經濟學派=實學派 를 창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특히 후자는 이와 같이 경제학파의 범위를 크게 확장 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학파를 조선시대 유학사의 주요 국면으로 통찰하는 일종 의 역사철학을 제시하였다. 즉, 조선시대 유학사의 흐름이 거시적으로 實踐儒學 (至治主義學派) 理論儒學(退栗以來諸儒)-實利儒學(經濟學派) 으로 나타났는데, 지 치주의학파가 도덕과 정신으로 유교적 이상을 추구하는 운동을 펼쳤다면, 경제 학파는 지식과 기술로 經國濟民과 利用厚生을 추구하는 운동을 펼쳤다는 것이 다.85) 이렇게 볼 때 조선유교연원 과 조선유학사 는 제2부의 조선 유학사를 근대 역사 지식으로 만들기 위해 거의 비슷한 세부 주제를 사용하였지만 세부 주제를 배치하는 구성 방식에서는 차이가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양명학 당쟁 호락 이익 경제지학 의 흐름을 보이는 전자의 구성과 예학 모화 84) 85) 84) 조선유교연원 에서 송시열에 관한 소개는 매일신보 1917년 7월 8일 기사에 있지만 정 작 尤庵之學專主氣而未嘗主理 라 하여 그 성리학 내용에 대한 소개는 매일신보 1917 년 7월 18일 기사에 있다. 85) 조선유학사 제12장 經濟學派의 出現과 風動 제1절 經濟學派의 擡頭와 그 原因.
420 한국문화 74 당쟁 양명학 호락 경제학파 의 흐름을 보이는 후자의 구성에서 공통적 으로 주자학에서 실학으로의 흐름을 발견할 수 있지만, 전자는 양명학 문제를 통해 제1부와 제2부의 단절성을 강조한 반면 후자는 예학과 모화 문제를 통해 상대적으로 제1부와 제2부의 연속성을 중시하였다는 차이가 있다. 제3부의 경우 조선후기 실학 이후의 조선 유학사에 대해 조선유교연원 과 조 선유학사 는 접근 경로는 동일하나 평가 관점은 매우 상이하다. 양자의 목차 구 조에서 가장 상이한 부분이 바로 제3부이다. 전자는 제3부의 주요 유학자로 기 정진과 이항로를 선택하고 이들을 통해 19세기 조선 신흥 주자학의 양면성을 제 시하였다. 하나는 학문적 측면에서 기호학계 내부에도 퇴계학과 유사한 理철학 이 생성되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정치적 측면에서 호락분열보다 저급한 경가분 열이 발발했다는 것이다. 理철학의 확장과 율곡학파의 정치적 분열에 관심을 집 중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이상 논지를 끌어가지 못하고 산만하게 잡다한 유학자 나열만 하다가 뚜렷한 맥락 없이 경화학계의 경술문장이라는 주제로 끝마쳤다. 반면 후자는 제3부가 경제학파가 부진한 결과 성리학 세력이 만회된 반동적 국 면임을 전제하는 가운데, 전자와 마찬가지로 기정진과 이항로를 중심으로 조선 주자학을 성찰하되 그저 퇴계와 당쟁 밖에 모르는 전자의 협애한 시각에서 벗어 나 19세기 조선 주자학의 역사적 실천에 적극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먼저 조선 주자학파를 理철학에 한정하지 않고 철학적 스펙트럼에 따 라 主理派, 主氣派, 折衷派의 형태로 제시하였다. 그런데 주리파의 경우 영남과 기호를 구별하여 영남의 주리파(李栽, 李象靖, 柳致明, 李震相, 郭鍾錫)는 퇴계설 의 옹호와 율곡설의 배척이라는 당쟁의 감정에서 주리설을 주장하였고 기호의 주리파(奇正鎭, 李恒老)는 당쟁과 무관한 순전히 학문적 동기에서 주리설을 주 장했다고 평하여 양자를 구별하였다.86) 또한, 이이, 송시열, 한원진 등 율곡학파 의 전통적인 心是氣 론을 넘어서는 주기파로 任聖周-任靖周-任魯-任憲晦 를 꼽 았고,87) 율곡학파 내부에서 퇴계설과 율곡설을 절충한 김창협의 성리설을 계승 하는 절충파로 金昌翕-金元行-吳熙常-鄭宗魯-田愚 를 꼽았다.88) 이 삼파의 주자 86) 87) 88) 86) 조선유학사 제13장 性理學의 再燃 제3절 主理派의 發達. 87) 조선유학사 제13장 性理學의 再燃 제4절 主氣派의 發達.
근대 한국유학사의 형성 421 학은 비록 경제학파 이후의 반동적인 성격은 있었지만 경제학파 이전의 형식적 인 주자학과 비교하면 이론과 체계를 일신한 새로운 주자학이라 평가하였다.89)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론유학이 아닌 실천유학이었다. 조선시대 유학사에서 운동을 중시하는 관점에서 앞서 지치주의학파의 운동과 경제학파의 운동을 강조 했던 조선유학사 는 그 마지막 단계로 斥邪衛正의 運動 을 전면화했다. 척사위 정의 운동 이란 대내적으로 守舊 운동, 대외적으로 사상적인 斥洋 운동, 정치적 인 斥倭 운동을 뜻하는 것으로, 국권 수호를 위한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척왜도 중요하지만 특히 유교문화의 미덕인 인륜도덕을 수호하기 위한 문화적 실천으로 서 수구의 중요함이 역설되었다. 변혁기에 외래 신사상의 수용에 급급한 나머지 전통사상의 미덕을 파괴하는 폐단을 경계하는 의식에서였다.90) 이 운동의 주역 은 春秋大義와 國家安危에 관심을 쏟았던 이항로의 문하에서 주로 나왔다고 특 기되었다.91) 대조적으로 主理主氣의 이론유학도 아니고 斥邪衛正의 실제운동도 아닌 제3의 유형으로 文章의 修練과 學識의 博洽 에 치중하던 一般 儒學界 가 비판적으로 소개되었다. 이들은 유학의 이론이나 실천에는 심각한 문제의식이 없었고 그저 문장과 박학을 자랑하는 文勝의 폐단을 노정하였다고 평가받았 다.92) 조선유교연원 의 맨마지막 京華學界의 文章經術 에 배치된 洪奭周, 金邁 淳, 尹宗儀, 그리고 李恒老의 굴기와 京嘉分裂 에 이항로 문하의 대립항으로 배 치된 洪直弼, 兪莘煥, 徐應淳 등이 모두 이 일반 유학계 에 배치되는 수모를 입 었다.93) 이렇게 경제학파 이후 조선 주자학의 삼대 유파, 곧 이론유학, 실천유학, 89) 90) 91) 92) 93) 88) 조선유학사 제13장 性理學의 再燃 제5절 折衷派의 消長. 鄭宗魯의 절충론에 대해 주리파로 가득한 영남지방의 환경에 비추어 학문과 진리에 공평하고 충실했기 때문이라 높이 평가하였다. 89) 조선유학사 제13장 性理學의 再燃 제2절 性理學의 勢力 挽回. 90) 조선유학사 제15장 斥邪衛正의 運動 제1절 運動 勃發의 情勢. 이와 관련하여 현상 윤이 일제식민지시기에는 서양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조속한 수용이라는 관점에서 조선 주자학을 부정적으로 보았지만 해방 후 서양 민주주의 국가의 안정적 수립이라는 당면 과제를 위해 주자학의 덕치와 수신을 재평가하였다는 연구가 있다(이태훈, 2011 해방 후 현상윤의 儒學인식과 사상적 지향 한국사상사학 38, 240-241면). 91) 조선유학사 제15장 斥邪衛正의 運動 제2절 斥邪衛正의 運動과 그 代表者. 92) 조선유학사 제16장 近世 以降의 一般 儒學界 제1절 挽近 一般 儒學界의 學問傾向. 93) 그 밖에 일반 유학계 에 배치된 유학자는 權相一, 朴胤源, 沈定鎭, 愼後聃, 宋穉圭, 李載
422 한국문화 74 일반유학의 구별은 조선유교연원 에서 상상하지 못한 조선유학사 의 창견이었 다. 국망 직후 조선 유교의 쇠망 을 회억하는 전자의 감성과 해방 직후 조선 유 교의 운동 을 재평가하는 후자의 감성 사이에는 역사적 심연이 자리하였다. 쇠 망 의 맥락에서 이항로 문하가 초래한 경가분열 을 부정적으로 특기한 전자의 관심과 이를 삭제하고 대신 운동 의 맥락에서 이항로 문하가 수행한 척사위정 을 긍정적으로 특기한 후자의 관심은 조선 말기 주자학에 관한 양자의 시각이 얼마나 상이했는지를 알려 주는 적절한 사례이다. 결국 조선유교연원 은 조선유학사 와 비교해서 근대 역사 지식으로서 한국 유학사 지식을 만족스럽게 창출하지는 못했다. 조선유교연원 은 한국 유학사를 세 단락으로 구분하였는데, 제1부는 기자의 유교 문명 개창과 이황의 주자학 집 대성으로 요약되는 성장 번영의 시기, 제2부는 당쟁의 빗장이 풀린 뒤 율곡적 파 송시열 학맥의 주자학과 호락분열, 퇴계적파 이익 학맥의 주자학과 경제지 학이 대조를 이루는 쇠퇴의 시기, 제3부는 신흥학파의 理철학과 경가분열이 발 발한 종말의 시기로 그려졌다. 조선유교연원 은 본질적으로 한국유학사 서술에 서 이황과 당쟁을 최우선시했고, 그랬기에 제1부에서 이황 중심으로 구도를 설 정하여 퇴계도통론에 의한 계보 지식을 제시하였다면, 제2부에서는 당쟁을 중심 으로 구도를 설정하여 율곡학파의 분열성과 퇴계학파의 개혁성을 대비시키는 역 사 지식을 제시하였으며, 제3부에 들어와서는 이를 심화하여 율곡학파의 분열성 을 더욱 강조하는 수법을 사용하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조선유교연원 의 구성 적 지식을 계보 지식에서 역사 지식으로 변화시킨 실질적 動因은 장지연이 혐오 한 당쟁이라는 키워드였다. 그는 조선시대 유학사 서술에서 당쟁의 개입을 축소 하고자 허목과 송시열 같은 당쟁기의 거유들을 극히 간략하게 기술하거나 율곡 학파의 당쟁은 호락분열과 경가분열로 상세히 제시하더라도 퇴계학파의 당쟁만 큼은 은폐해 버리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것은 구성적 관점에서 보면 조선유 교연원 의 실질적인 조선유학사 서술의 동력을 약화시킨 이율배반적인 행위였 다. 결론적으로 조선유교연원 의 한국유학사 지식은 구성적 관점에서 볼 때 역 亨, 李友信, 姜必孝, 朴文一, 朱明相, 金興洛 등이었다. 조선유학사 제16장 近世 以降의 一般 儒學界 제2절 그 著名한 儒學者 참조.
근대한국유학사의형성 423
424 한국문화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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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 한국문화 74 <Abstract> The formation of the modern studies on the history of Korean Confucianism Noh Kwan Bum*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formation of the modern studies on the history of Korean Confucianism, focusing on Jang JiYeon( ) s JoseonYukyoYeonweon( ), the first book of this kind in the modern Korea. This book has been considered as the primary source book rather than research book. Little interest was in the modern achievement of this book in this field. But can we find no modern historical knowledge in it? This paper approaches this book from this question, and reaches following conclusions. First, there was long tradition to compile works on the history of Korean Confucianism in Joseon Korea, but unlike those works to produce only hagiographical knowledge this book has displayed specific views of history of Korean Confucianism. Second, this book took pessimistic view that Korean Confucianism had declined since the reign of the king Jeongjo( ) and Sunjo( ), originating from the work titled AdongDohakWeonlyuseo ( ) by Shim Ki Taek( ). Third, this book take three parts in it, and each part has different level of completeness. The so called Yi Hwang( )-centered geneology is central to the first part, the factional contrast of conservatism in Yi Yi( ) School and reformism in Yi Hwang( ) School is core in the second part. This book offered as key points of Korean Confucianism Yi Hwang-centered geneology and the factionalism between different schools. Last, the basic structure of this book can be found in the book titled JoseonYuhaksa( ) by Hyeon Sang Yun( )
근대한국유학사의형성 427 shortly after the liberation of 1945. Through JoseonYuhaksa the academic influence of this book was strengthened. Key Words : History of Korean Confucianism, Jang JiYeon, JoseonYukyoYeonweon, Koreanology, Chuzi Scho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