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논집제 38 집 2014 년 8 월 Sogang Journal of Philosophy Vol.38, Aug. 2014, pp 한나아렌트의인간관 * 1) - 인간의조건 에대한철학적인간학적탐구 - 박병준 ( 서강대 ) 주제분류 철학적인간학 주제어 인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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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논집제 38 집 2014 년 8 월 Sogang Journal of Philosophy Vol.38, Aug. 2014, pp. 9-38 9 한나아렌트의인간관 * 1) - 인간의조건 에대한철학적인간학적탐구 - 박병준 ( 서강대 ) 주제분류 철학적인간학 주제어 인간의조건, 활동적삶, 인격, 행위, 복수성, 탄생성 요약문 이논문은아렌트의 인간의조건 을중심으로정치철학적접근방식이아닌철학적인간학적접근방식을통해오늘날바람직한인간상이무엇인지제시하고있다. 아렌트는 인간의조건 에서인간을 노동 (labor) 과 작업 (work) 과 행위 (action) 라는실존적조건에처한존재임을주장한다. 인간은노동과작업의제약에도불구하고기본적으로자유로운행위를통해보다 의미있는것 을추구하는존재이다. 여기서의미있는행위는 정치적행위 를뜻하며, 이행위를통해고유한인격체로서의인간은 사적영역 의존재를넘어서로함께존재하며살아가는 공적영역 의존재가된다. 인간이정치적존재 라는아렌트의사상은정치철학적통찰이기에앞서인간이고유한인격체로서말과행위를통해타자와관계하고타자곁에있다는보다근원적인철학적인간학적통찰을담고있다. 이를뒷받침하는아렌트의고유개념이인간의 복수성 (plurality) 이다. 인간의고유성은동물과비교되는특수성에있기보다오히려인간으로서모두가동등하면서도마땅히존중받아야할인격체로서개개인이차이를드러내고있다는사실에있다. 이는인간이공공의영역을형성하는정치적존재일수밖에없는근본이유가된다. 반면에고유한인격체가아닌비인격적인존재로만나는세계가소위전체주의사회이다. 이전체주의사회는 절대악 (the absolute evil) 을용인하게만들며, 그주요원인이 정치의부재 이다. 정치의부재는 인간성의상실 로이어진다. 인간성의회복을위해인간은오히려정치적이될필요가있다. 한편올바른행위의필요조건으로정신적삶에해당하는사고 (thinking) 와판단 (judging) 과의지 (willing) 가요구된다. 활동적삶 과 정신적삶 은배타적관계개념이아니라상보적관계개념이다. 이론적관점에서보자면활동적삶보다정신적삶이선행하겠지만, 실천적관점에서는정신적삶보다활동적삶이우위에있다. 그만큼오늘을사는인간에게던져진보다긴박한실존적물음은 무엇-물음 이아닌 어떻게-물음 이다. 투고일 : 7 월 28 일, 심사완료일 : 8 월 14 일, 게재확정일 : 8 월 15 일 * 이연구는 2014 년도서강대학교교내연구비지원에의한연구임 (201410016.01).

10 철학논집 ( 제 38 집 ) I. 들어가기 인간에대한통일된이념을상실한시대, 보편적인인간상이해체되어버린시대에살고있는오늘날우리가시급히던져야할물음은무엇인가? 과학기술의발전과고도경제성장의현대문명속에서인간은때때로자기가가고있는길이어떤길인지이해하지못하거나혹은자기가진정가야할길이무엇인지몰라당혹스러워하곤한다. 물질적풍요와기술문명의발달이반드시정신적풍요로이어지지않는다는사실은최근우리사회에서벌어지고있는여러불미스러운사건들에서여실히드러나고있다. 얼마전 세월호 라는예기치못한사건을겪게되면서많은국민들이슬픔의도를넘어분노와한탄그리고집단적무기력증을앓고있다. 잊을만하면반복하여발생하는인재에가까운재앙앞에서우리는그직접적인원인을묻기에앞서보다본질적인자기이해의물음앞에놓이게된다. 과연바람직한인간의모습은무엇이며어떤것이어야하는가? 세월호사건을바라보면서우리는이문제가단순히한개인이나일부몇몇사람의잘못이나책임으로돌리기에는그사안이너무나무겁고심각하다는사실을직감한다. 우리는세월호사건을무책임한선장과승무원들, 부도덕하고타락한기업주와이를묵인하고이와결탁하기까지한일부관료들과정치인들, 그리고미숙한해경재난구조팀등이함께빚어낸인재로최종결론을낼수도있겠지만그근본원인을찾아문제의본질에보다더가까이다가서는일은결코간단하지않다. 우리는이사건에서한개인혹은집단이극복하기힘든 거대한악 과일상에깊이뿌리내린 악의평범성, 그리고우리내면에짙게드리운죄스러움의실체와대면하게된다. 익명의대중성에숨어삶깊숙이뿌리내린채우리를압도해오는이와같은악의세력은우리모두가책임지고감당해야할엄연한실존적몫이다. 우리는살면서무심코악을방관하고용납하며, 의식없이악과타협하곤한다. 세월호사건도이와결코무관하지않다. 세월호사건의원인을단지일부사람들의잘못이나사회의부조리한구조탓만으로돌리는것은문제의핵심을보지못하는것일수있다. 이런잘못때문인지우리사회는세월호사건과같은엄청난인재가거듭발생

한나아렌트의인간관 11 되고있다. 이런불미스러운악순환의고리를끝을수있는방도는없는것일까? 우리모두에게쇄신을위한놀라운변화가요구될때다. 이놀라운변화는아렌트 (H. Arendt) 의표현을빌리자면 새로운시작을알리는탄생 을의미한다. 오늘날우리사회가당면한문제들을해결하는데는다양한방법이있을수있다. 그러나문제해결의근원적단초는다른무엇이아닌인간자신이되어야할듯싶다. 왜냐하면문제의대부분은바로우리자신들로부터기원하기때문이다. 인간사회의문제의근본적인해결은인간의자기자신에대한올바른통찰과이해로부터시작되어야한다. 그리고이런이해를돕는것이바로철학적인간학이다. 따라서인간에대한올바른이해와통찰에근거하여오늘날시대에부응하는바람직한인간상을제시하는일역시철학적인간학의주요과제중하나이다. 이는특히인간의활동적삶을위해매우의미있는일이기도하다. 물론인간의활동적삶을기초하는것은근본적으로정신적삶일것이다. 왜냐하면사유없는행위란생각할수도없기때문이다. 현대철학적인간학을정초한셸러 (M. Scheler) 는인간의근본특성을 정신 이라했고, 이에대한탐구를특별히 형이상학적 이라명명했다. 인간의본질에대한형이상학적탐구는아리스토텔레스가인간을 이성적동물 로규정한이래로이미오래전부터인간이해의고유한전통적방법이되어왔다. 영혼과육체, 자유의지, 이성, 정신, 의식, 주체, 자아등은철학적인간학의핵심주제이면서도동시에형이상학의주제이기도하다. 그런데인간에대한형이상학적본질탐구는자칫인간을지나치게정형화시키는위험을안고있다. 사변학문이예외없이보여주는단점가운데하나가실천적삶과의괴리현상이다. 강단철학으로서의철학적인간학역시사변학문이일반적으로갖고있는이런부정적인면을보여주곤하는데, 여기서문제는무엇보다도인간의삶의고유성과개별성그리고다양성이간과되고있다는사실이다. 사실인간은그깊이를들여다볼수없을만큼 심연 (Abgrund) 과도같은신비스러운존재이다. 그래서애초부터하이데거 (M. Heidegger) 나야스퍼스 (K. Jaspers) 처럼인간이해의불가해성을주장하는철학자들도상당수있다. 그러나이런관점을십분이해한다하더라도인간에대한이해와성찰없이철학적사유를한다는것은어찌보면자기

12 철학논집 ( 제 38 집 ) 모순이아닐수없다. 철학이근본적으로문제삼는것은인간이몸을담고있는세계요그런세계안에있는자기자신과삶일텐데, 인간과인간의삶에대한이해없이철학을한다는것은무의미한일이다. 철학은 - 소우주인인간이우주를자기자신에담듯이 - 인간의관점에서세계를이해하고세계를정립하는고유한학문이다. 인간의정신에매개되지않는것은이세상에아무것도없다 는헤겔 (G. W. F. Hegel) 의통찰을빌리지않더라도인간은이미세계를매개하는존재임이분명하다. 오늘날철학은시대적요청에따라인간의삶에활력을주는본연의모습으로돌아가실제로삶에도움을주는실천학문으로탈바꿈할필요가있다. 20세기초반강단철학으로자리잡은철학적인간학역시여기서예외일수없다. 따라서본고는인간에대한물음과관련하여 인간이란무엇인지 의본질주의적 무엇-물음 을탈피하고보다실천적차원에서 인간이어떻게살아야하며, 어떤존재가되어야하는지 의 어떻게-물음 을통해오늘날우리사회가요청하는바람직한인간상을제시해보고자한다. 이와관련하여본고에서특히주목하고자하는철학자는평생전체주의와맞서싸우면서인간성회복을위해고군분투했던현대의대표적인여성철학자인아렌트 (H. Arendt 1906 1975) 이다. 아렌트는정치철학자로서일반에널리알려져있다. 그러나본고는이런기존의인식을벗어나조금은생소할수있지만아렌트의사상을정치철학적관점이아닌철학적인간학적관점에서 - 특히여기서는앞서언급했듯이 무엇-물음 을지양하고 어떻게-물음 을통해 - 검토해보고자한다. 아렌트자신이야스퍼스에게보낸편지에서기존의철학적인간학이정치의조건이자의미인인간의 복수성 의문제를간과하고 인간본성 에대한논의에만천착했다고비판한것처럼 1), 그녀는인간의본성및본질을규정하는것에는전혀관심을갖고있지않았다. 아렌트는그녀의정치철학을기초놓는대표적저서인 인간의조건 (The Human Condition 1958) 2) 에서자신이말하는 인간의조건 이인간의 1) H. Arendt/K. Jaspers, Briefwechsel 1926~1969, Hrsg., L. Köhler/H. Saner, München, 2. Auflage, 2001, 203 참조. 2) H. 아렌트, 인간의조건, 이진우 / 태정호옮김, 한길사, 1996. 이하 HC로인용함. 독일어본은 H. Arendt, Vita activa oder Vom tätigen Leben, München/Zürich,

한나아렌트의인간관 13 본성자체나혹은인간본성을구성하는것과무관하다고강조하며 (HC 58), 나아가인간의본질물음을불가해한신의본질물음에비유함으로써우회적으로인간의본질탐구로서의철학적인간학의가능성을부정하고있다.(HC 59~60) 그러나아렌트의이런주장에도불구하고우리는그녀의사유에서여전히인간의본성및본질과무관하지않은인간이해의철학적인간학적통찰을발견하게된다. 특히인간의행위를성격짓는아렌트의대표적인개념중하나인인간의 복수성 (Pluralität) 안에내포된 차이성 (Verschiedenheit) 및 동등성 (Gleichheit) 은그자체로이미철학적인간학적통찰을내포하고있다. 이미오래전부터국내에서여러학자들이아렌트의정치철학에지대한관심을갖고풍성한연구결과를맺어왔다. 아렌트의사유에대한국내학자들의각별한관심은특히정치적으로불안정한한국사회의실태를반영한결과로보인다. 그러나아렌트의인간의조건에대한통찰은정치적관점에서뿐만아니라철학적인간학적관점에서도매우흥미롭다. 더욱이인간의근원적변화가 - 만약그것이가능하다면 - 절실히요구되는오늘날우리사회에바람직한인간상이무엇인지를생각하게하는아렌트의 활동적삶 에대한연구는그자체로의미있는일이아닐수없다. 본고는아렌트의 인간의조건 에나타난그녀의사유를통해현대의바람직한인간상이무엇인지를조명해보고자한다. 7. Auflage, 2008; 영어본은 H. Arendt, The Human Condition, Chicaco/London, 8. Impression, 1973 참조. 본문의인용쪽수는한글역본을따랐으며, 특별히의미전달을위해독일어본을참조했을경우한글쪽옆에 / 로구분하여독일어쪽수도함께표기했다. 인간의조건 은아렌트의정치철학적사유의기초가되는주요저서로꼽히고있다. 최근전체적인조망에서 인간의조건 을새롭게이해하는연구가진행되고있는데, 이연구들역시일차적으로정치철학적관점에서재조망하는연구작업들에국한되어있다. 아렌트의 인간의조건 에대한최근연구동향에대해서김주만, 행위 의재조명 - 인간의조건 에대한최근연구동향, 현상과인식, 제106호, 2008, 38-63 참조.

14 철학논집 ( 제 38 집 ) II. 아렌트의 인간의조건 에나타난활동적삶 아렌트는 인간의조건 서문에서그녀의관심사가다름아닌 우리가활동적일때행하는것 (HC 54/14), 즉인간의 활동적삶 (vita activa)(hc 55/16) 에있음을분명히밝히고있다. 그렇다면아렌트가말하는인간의활동적삶이란무엇이며, 이물음은어떻게본고의주제인인간의자기이해와관련된것인가? 우리는이물음을아렌트의인간관의구명을위한출발점으로삼고자한다. 아렌트는 활동적삶 의개념이이제껏과도하게전통의짐을지고있다고지적한다.(HC 60) 이는이중적의미를지니고있는데, 즉한편에서는활동적삶의개념적단초가기본적으로는고대그리스의전통적사유에근거하면서도다른한편에서는이를극복할필요가있다는의미로받아들여진다. 아렌트가활동적삶을통해제시하고자하는바는기본적으로인간의행위자체가본래정치적이라는것이다. 이와관련하여아렌트는고대그리스당대의유명한스캔들이었던소크라테스의재판에주목한다. 이소크라테스의재판이야말로활동적삶과정치적삶이통섭하는훌륭한사례가운데하나이다. 소크라테스의재판은아렌트의지적대로일차적으로 철학자와폴리스간의갈등 (HC 61) 이증폭되어나타난정치적사건이다. 그러나이는일면에불과하며, 이사건이제시하는보다근본적인문제의식은소크라테스가보여준 철학함으로서의삶의태도 에있다. 폴리스의정치적권력앞에서소크라테스가보여준태도는자신의신념에따라행동하는삶이었다. 사형을선고받고친구인크리톤의도움으로죽음을피할수도있었던소크라테스는오히려의연하게죽음을선택한다. 이는통속적인정치관념에서보자면결코상식적인태도가아니다. 스캔들처럼보이는소크라테스의이런태도가함축하고있는바는무엇인가? 소크라테스의재판이단지정치적사건으로만이해될수없는이유가바로여기에있다. 사실소크라테스가죽음을선택한이유는통속적인의미의정치적신념때문이아니라철학적신념때문이다. 이것이의미하는바는철학함의태도와관련되는데, 즉철학의본질은단지이론적이며사변적인진리추구를넘어서삶에로투신하는실천적행위 (praxis) 에있다는사실을보여준다. 자신의철학적신념에맞추어행동함이곧정치적인행위이기도하다.

한나아렌트의인간관 15 고대그리스의 활동적삶 의중세의 정치적삶 에로의어원적의미전이가암시하듯 (HC 61) 정치철학의본질은현실에적극적으로참여하는 활동적삶 에있다. 그런데본래 활동 3) 은정신적활동중하나인 관조 까지도포함하는매우포괄적인의미를지닌개념이다.(HC 64) 활동은철학적인간학적통찰에따르면영혼과육체의합성체인유한한인간존재의고유한속성에해당한다. 이활동을통해인간은가장기본적인생명을유지할뿐만아니라동물과달리인간으로서고상하다할자기실현과자기완성을추구한다. 인간의활동은순수육체운동뿐만아니라정신운동까지도포괄한다는점에서 활동적삶 (vita activa) 과 관조적삶 (vita contemplativa) 은 - 비록우리가이를일반적으로구분하여이해하지만 - 인간의삶에있어서불가분의관계에놓여있다하겠다. 그런데전통적으로육체적제약이따르는활동적삶에반하여무제약적인관조적삶은그특성때문에궁극적완성을추구하는인간의이상적삶으로이해되어왔으며, 인간본성의기능적측면과관련하여서도 - 중세에는보다신학적인관점에서 - 그우위성이강조되어왔다. 전통적인관점에따르면인간은이성적영혼을통해비로소인간으로서의자기본성을획득하며, 인간의인간다움과그완성은이성적영혼의 관조적삶 에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윤리학 에서인간의궁극적행복을인간의본질기능을활짝꽃피우는관조적활 3) 여기서 활동 (activity, Tätigkeit) 은아렌트가가장포괄적의미를갖고사용하는단어이다. 이와관련하여활동보다좁은의미로사용하는 행위혹은행동 (action, Handeln) 개념이있다. 가장포괄적인활동개념에는신체활동과같은유기체적활동뿐만아니라노동이나제작과같은작업그리고행위등이모두포함되어있다. 물론활동에는사유하고 (thinking, Denken), 의지하고 (willing, Wollen), 판단하는 (judging, Urteilen) 정신적활동도포함된다. 아렌트가일반적으로행위를언급할때그의미는정신적인사유활동이아닌그에상응한육체적활동으로서의행위를말한다. 물론그렇다해도인간이근본적으로정신적존재인한정신적활동을전적으로배제한육체적활동은불가하다. 따라서여기서아렌트가언급한행위개념은엄밀하게말하자면형이상학적차원이아닌정신적삶과구분되는활동적삶의일환으로서의실천적행위를의미한다하겠다.

16 철학논집 ( 제 38 집 ) 동으로보았다. 따라서전통적으로활동적삶은항상관조적삶에서그의미를부여받아왔다는아렌트의통찰은정당하다하겠다.(HC 65) 즉지금까지 활동적삶은인간이관조를원하고필요로하게끔하는데이바지해 (HC 65) 온셈이다. 관조적삶의우위성은오랫동안서구사상의근간이되어왔으며, 인간이해의단초를제공해왔다. 그러나아렌트는활동과관조사이의이런위계질서를근본적으로부인한다. 그녀는이들사이의차이와구별을인정하면서현상학적이며실존론적관점에서오히려관조적삶보다활동적삶에보다힘을실어준다. 4) 이는무엇보다사변적인이론학문을지양하고실천적행위를중시하는실천학문으로서의아렌트철학의성격을잘대변해준다. 물론그렇다고아렌트가전적으로 사유중심 의오랜서구철학적전통과결별하였다는것은아니다. 비록아렌트가 인간의조건 에서행위중심의활동적삶을전면에내세우기는하지만, 예루살렘의아이히만 에서 악의평범성 (banality of evil) 5) 을언급할때나 전체주의의기원 에서자유를억압하는 절대악 (the absolute evil) 6) 을언급할때, 그녀가강하게비판하는것은일상사에함몰되어생활하는인간의 사유의부재 (LMT 18) 7) 현상이기때문이다. 물론이 4) 아렌트는활동적삶과관조적삶의구별은존재하나이런구별이우월과열등의위계질서를함의하는것은아니라고강조한다. 즉아렌트가활동적삶에관심을갖고거기에중심을싣는것은전적으로이런위계질서차원의관심이아니다.(HC 66-67 참조 ) 5) H. 아렌트, 예루살렘의아이히만 : 악의평범성에대한보고서, 김선욱옮김, 2006, 391. 아렌트의 악의평범성 은자기가무슨일을하는지정확하게파악하지못하면서악한행동을하는상황, 즉악을악으로깨닫지못하고행동하는역설적인상황을의미한다. 6) H. 아렌트, 전체주의의기원 I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 이진우 / 박미애옮김, 2006, 35. 아렌트는 절대악 의개념을인간적으로도저히이해할수없는불가해한차원에서사용하고있다. 이것은결코형이상학적의미가아니며, 다만 인간적 으로전혀납득이가지않는다는의미를담고있다. 결국 절대악 은 악의평범성 에노출된인간의죄스러움의극대치를의미하는것이기도하다. 7) H. 아렌트, 정신의삶 1 - 사유, 홍원표옮김, 푸른숲, 2004. 이하 LMT로표기함.

한나아렌트의인간관 17 때 사유 (thinking) 는활동적삶의차원에서소극적이며수동적인 성찰 (meditation) 이나 관조 (contemplation) 가아닌보다적극적이며능동적인정신의기본작용을의미한다.(LMT 21) 아렌트는관조를 정신활동이거기서쉬는곳 으로이해한다.(LMT 21) 실천적삶의관점에서보면정신적으로 완전히고요함을유지 (LMT 21) 하는 관조적삶 과 몸으로애써노력하는 (LMT 21) 활동적삶 사이에는분명상당한간격이놓여있다. 물론이런간격은옳고그름과무관한정신의자기밝힘의방식의문제일뿐이다. 그러나여기서중요한사실은모든것이정지된듯고요한관조상태에서는실천적삶에로투신해들어가는활동적삶이불가능하다는점이다. 이는인간이정치적존재인한관조적삶을통해서는결코본래의자기를실현할수없다는것을의미하는것이기도하다. 따라서아렌트의경우인간의조건과관련하여 사유 의본래적의미는사변적성찰이나관조적활동자체에있기보다는활동적삶을이끄는그것의능동적계기와원동력에있다. 인간의사유는결코이론적이며사변적인성찰이나반성, 혹은종교적진리를직관하는관조의전유물이아니며, 오히려그보다는전반적으로인간의활동적삶의배후에서인간을실천적행위에로이끌어주는원천으로작용한다. 진정한활동적삶이란무사유적행동이아닌철저히 사유와더불어행위하는삶 을의미한다. 따라서아렌트가 인간의조건 에서인간의활동적삶으로제시하는 노동 (labor) 과 작업 (work) 과 행위 (action) 역시기본적으로는인간의정신적삶에상응하여이해될때올바로해명될수있다. III. 인간의조건으로서노동, 작업그리고행위 도대체인간이란무엇인가? 이런철학적인간학적물음이여전히아렌트에서유효하게물어질수있는것일까? 8) 우리는앞서아렌트의관심사가 8) 박혁에따르면아렌트의사상은 반철학적인간학적 성향을띠고있다. 그이유는철학적인간학이지금껏아렌트가문제삼는인간의 다원성 ( 복수성 )

18 철학논집 ( 제 38 집 ) 규정적인인간의본질보다인간의조건으로서의활동적삶에있음을, 그리고그런활동적삶이무엇을의미하는지를간략히살펴보았다. 아렌트는인간의조건으로서의활동적삶을세유형으로범주화시킨다. 즉노동, 작업그리고행위가바로그것이다. 이렇게유형화된인간의활동적삶의범주들은인간의본성이나본질과는무관하지만분명인간의실존을해명하는규정적성격을지니고있다. 비록그것이인간의본질해명에로이어지는것은아니라할지라도인간을이해하는단초임은확실하다. 즉인간의조건인인간의활동적삶에대한해명이결과적으로인간의자기규정적성격을지닌 인간성 에대한해명에로이어지며, 이런해명을통해본고가목적하는바인 인간다움 을발현하는바람직한인간상을제시하는일과직접으로관련이있다는것이다. 물론이는직접적으로인간의본질및본성을규정하는전통적인의미의철학적인간학적탐구와구별되지만그렇다하더라도이와전혀무관하다볼수없다. 영-브릴 (E. Young-Bruehl) 에따르면아렌트의철학적관심역시 인간본성의변경 과 인간조건의변화 에있었기때문이다. 9) 아렌트가 인간의조건 에서인간의활동적삶으로서의노동과작업그리고행위에대한철학적분석을시도한목적은순수한지적호기심이라기보다는인간본성의변경의가능성을타진하고이를토대로바람직한인간성을회복하고자하는데있었다. 그러나이런아렌트의작업은결과적으로인간의활동적삶에대한보다면밀한분석을통해인간이해의폭을넓혀주고있는것도사실이다. 이에따르면인간은활동적삶을통해 노동하는동물 에서 제작하는존재 로, 그리고최종적으로 사회적이며정치적인존재 로자기자신의존재의미와존재가치를실현하는유일한존재이다. 을전혀고려하지않기때문이라고한다. 이는이미아렌트가야스퍼스와주고받은서신에서밝힌바있다. 그러나필자는그중층적의미를고려할때오히려 복수성 이야말로아렌트철학에서철학적인간학적규정을이끌어낼수있는개념으로본다. 박혁, 철학적인간학에대한비판, 글로벌정치연구, 제6권, 제2호, 한국외국어대학교글로벌정치연구소, 2013, 5~29 참조. 9) E. 영-브릴, 한나아렌트전기 - 세계사랑을위하여, 홍원표옮김, 인간사랑, 2007, 427 참조.

한나아렌트의인간관 19 1. 노동 (labor, Arbeit): 노동하는동물 (animal laborans) 인간을노동하는존재 (homo labor) 로규정한것은그역사가오래되었다. 성경은인간이 흙에서나왔으니흙으로돌아갈때까지얼굴에땀을흘려야양식을먹을수있으리라 ( 창세기 3, 19) 10) 고말한다. 넓은의미에서노동은사실자연에속한모든생명체에나타나는공통된현상으로인간역시여기서예외일수없다. 인간이노동하는존재라는사실은한편으로인간이살아가기위해일정부분노동이라는필연적조건에예속되어있다는것을의미한다. 따라서인간의기본조건으로서의노동은그자체가하나의구속이요제약이요필연이다. 그런데오늘날우리가쉽게발견하는노동의왜곡현상은역설적이지만바로이엄연한사실에서부터출발한다. 왜냐하면인간은끊임없이자유를갈망하는존재이기도하기때문이다. 아렌트는여기에덧붙여고대그리스인들이 노동 (ponein) 과 작업 (ergazesthai) 을구분하지않고혼동함으로써노동의본래의미가왜곡되었다고주장한다.(HC 134) 노동이생명선상에서오롯이신체활동을의미한다면, 작업은그이상의특정한생산을목적으로하는제작활동을의미한다. 조금은낯설어보이는이런구분에따르면노동은 노동하는신체 로서그리고작업은 작업하는손 으로특징되는데 (HC 134), 전자가노동이라는신체활동그자체를지시한다면후자는노동의결과물인생산품의제작활동을지시한다.(HC 135) 이런관점에서보자면노동의의미를가장극명하게왜곡시킨철학자가맑스 (K. Marx) 이다.(HC 133) 왜냐하면맑스야말로노동의가치를그결과물인생산품에로철저히환원시킨대표적인철학자이기때문이다. 사실맑스에의해생명활동인 노동 과거기로부터얻어진생산물이동등한가치를갖게되었고, 그결과순수한노동의의미가해체되어버렸다. 11) 10) 성경은인간의노동을죄의결과로이해하지만, 여기에는노동이인간의실존적인기본조건이라는보다근원적인인간학적인통찰이자리잡고있다. 성경은한국천주교회가톨릭주교회의에서출간된새번역성경을따랐다. 11) 노동이곧작업을의미하는것이아닌한 제작하는인간 (homo faber) 이 노

20 철학논집 ( 제 38 집 ) 노동은그자체가생명유지차원에서구속이면서도동시에필연이기도하다. 인간은오래전부터이필연적조건을구속으로이해하고여기서해방되고자부단히노력해왔다. 고대그리스인들은특히폴리스의구현을통해노동으로부터근본적인해방을추구했다. 아렌트에따르면이폴리스의구현이노동이작업에의해왜곡되기시작한첫출발점이다. 고대그리스인들은노동의의미를작업활동으로대체함으로써노예제도안에서자유를실현하고자노력하였다.(HC 138) 12) 이는 노동 과 작업 의의미를엄밀하게구분하지못함에기인한것인데, 고대그리스인들은작업의일환인생활수단을위한생산활동을노동그자체로이해했다.(HC 138) 폴리스에서노예들은자유인을대신해서이런생산활동을담당했다. 반면에자유인들은노동에서해방되어여가를즐기고정치활동에전념할수있었다. 따라서여기서자유인 (eleutheros) 은일차적으로정치적구속으로부터해방된존재를의미하기보다는오히려인간의기본조건인노동으로부터해방된존재를의미한다. 13) 그러나아렌트에따르면인간은 이성적동물 에앞서 노동하는동물 (animal laborans)(hc 139) 14) 이다. 노동은확실하게 자연이 [ 인간에게 ] 부 동하는인간 (homo labor) 의필연적결과라말할수없을것이다. 이둘은철학적인간학적관점에서독립적으로검토되어야할개념들이다. 12) 아렌트는 노예제도는노동을삶의조건으로부터배제하기위한시도 (HC 139) 라고주장한다. 즉노예와자유인의구분은인간학적통찰과는전혀무관하다. 13) 고대그리스인들에게자유는일차적으로인간의본질을규정하는형이상학적이념이기에앞서실천적의미를지닌정치적이념이었다. 코레트는 자유 가그리스단어 eleutheron, eleutheria 에서유래하고있음에주목하는데, 이들단어는본래 polis 와어원적으로매우밀접한관계가있다. E. Coreth, Vom Sinn der Freiheit, Innsbruck/Wien, 1985, 11 참조. 14) 아렌트는인간을 이성적동물 (animal rationale) 보다 노동하는동물 (animal laborans) 로정의하는것이보다합리적이라고주장한다. 그이유는노동이일차적으로육체의유기적생명활동에관여한다는점에서이성적동물보다는노동하는동물이보다적합한표현이기때문이다. 물론인간의노동은동물의활동과분명차이가있다. 이는인간의노동이본능적인것이아니라이

한나아렌트의인간관 21 과한영원한필연성 (HC 158) 이다. 그런데이처럼인간을기본적으로노동하는동물로규정한다면이때인간의노동은단순히동물이생명유지를위해본능적으로반응하는것과는분명다른의미일것이다. 그렇다면인간의고유한활동으로서의노동의의미는무엇인가? 이는철학적인간학적통찰이요구되는물음이다. 인간에있어서노동은단순히생명유지의차원을넘어있다. 또한어떤목적을갖고작업하는것과도구별된다. 인간은생명유지와무관하게노동할때도있으며, 어떤특정한목적없이도노동하기도한다. 즉실제로인간의삶안에서노동그자체가인간에게의미있게다가올때가자주있다. 오늘날우리사회가지나치게성과중심의 피로사회 로가고있는것은노동의진정한의미를깨닫기에앞서무엇인가끊임없이만들어내려는과도한작업과밀접한관계가있다. 이런현상은분명바람직한인간상과는거리감이있는인간의부정적인단면이아닐수없다. 아렌트는오늘날인간은더이상 노동하는동물 로규정될수없다고까지주장한다.(HC 192 참조 ) 아렌트의이런주장이의미하는바가무엇인지음미해볼필요가있다. 2. 작업 (work, Herstellen): 제작하는인간 (homo faber) 인간에대한오랜정의에따르면인간은 노동하는동물 임과동시에 공작인 (homo faber) 이기도하다. 아렌트는 제작 을 노동 이아닌 작업 의특성으로규정한다. 작업은이미오래전부터 제작인 혹은 도구인 의개념을통해인간의고유한활동으로규정되어왔다. 아렌트역시이런전통속에서작업을특히 손 을통해무엇인가제작하는인간의고유활동으로이해한다. 작업을손과관련시키는것은우리에게매우익숙한일인데, 이와는성격이다르지만하이데거역시존재의미를밝히는데있어 Vor-handen-sein 과 Zu-handen-sein 개념을이용한다. 존재의의미는현존재 성적활동에수반한노동이기때문이다. 그래서아렌트는 노동하는동물은오로지한종뿐이요, 지구에거주하는동물의종들중에단지최고의종뿐 이라고주장한다.(HC 139)

22 철학논집 ( 제 38 집 ) 가그것과손을통해맺는관계에있다는하이데거와는달리아렌트는인간자신이손을통해규정되어있는존재임을주장한다. 인간이손을도구화하고손을통해무엇인가제작하는존재라는사실은인간이오늘날이룬놀라운성과, 즉현대문명의발전과결코무관할수없다. 15) 인간이도구적존재라는사실은내용적으로보면인간이정신적존재로서 세계개방적존재 16) 라는것과직접적으로관련이있다. 인간은정신을통해주변환경에얽매지않고일정한거리감을유지함으로써자연을대상화하고사물화하는능력을갖는다. 이로써인간은직접적으로소여되어있는폐쇄된환경에서벗어나이를자기에로끊임없이매개가능한개방된세계로만든다. 이것이야말로인간의가장고유한특성중하나인데아렌트는인간의세계성을오히려부정적으로해석한다. 즉인간의세계란인간이노동을작업으로대체함으로써자신이지닌근본적한계를넘어서고자하는욕망의기재와도같다. 17) 아렌트는인간의세계를끊임없는제작활동을통해생산품을만들어내는 사물화 (HC 196) 의세계, 즉사물들로구성된 인공세계 (HC 194) 로규정한다. 이런인공세계에서인간은지속적인생산활동을통해소멸하지않는영속성과자유를꿈꾼다. 본래자연에속한인간은필연적으로생성과소멸로이어지는자연의굴레에속박된존재일수밖에없다. 그럼에도불구하고인간은오래전부터자연의속박으로부터해방되고자부단히노력해왔으며, 그계기를자기자신의제작하는손에서발견했다. 인간은제작하는손을이용해인위적인인공세계, 자연을거슬러인위적인문명세계를건설했다. 그러나아렌트가보기에이 15) 셸러 (M. Scheler) 는 제작인 (homo faber) 의이념이자연주의적, 실증주의적, 실용주의적이념을대변하는인간의자기규정으로이해한다.(M. 셸러, 철학적세계관, 허재윤옮김, 박영사, 1988, 43) 아렌트는바로이런이념들이인간의제작활동을부추기고있다고본다. 아렌트에의하면인간의제작활동의동기는실용적유용성에있다.(HC 234 참조 ) 16) 인간의 세계개방성 은셸러의대표적개념이다. M. 셸러, 우주에서인간의지위, 진교훈옮김, 아카넷, 2001, 67. 17) 아렌트는 노동에의해유지되는삶을구제하는것은세계성 이며, 이세계성은 제작에의해유지 된다고주장한다.(HC 300)

한나아렌트의인간관 23 세계는인간의자유를보증하는진정한의미의인간을위한세계가아니다. 왜냐하면노동이작업으로대체된이세계는 제작인 으로규정된인간의삶을무의미하게만듦으로써모든가치를평가절하 (HC 301) 시켜버리기때문이다. 이렇게인공적으로만들어진세계에서인간이자유롭게자신에게합당하고타당한삶의척도를발견하고선택하기란사실상불가능하다. 아렌트는제작중심의인공세계가오히려노동의세계에서맛볼수있었던진정한행복과기쁨을인간에게서빼앗아갔다고본다.(HC 198 참조 ) 이런제작중심의인공세계는 - 한병철이예리하게지적하였듯이 - 여유를갖는노동이일중심의작업으로대체됨으로써무엇인가끊임없이얻으려고스스로를착취하는인간의과잉활동이지배하는 성과사회 와다를바없다. 18) 제작인 으로서의인간은동물과달리자연을거슬러자기고유의세계를건설하는 인공세계의창조자 이지만, 이로써역설적이게도 자연의파괴자 (HC 197) 가된다. 아렌트는인간에게주어진제작활동의이런부정적인모습이고대그리스신화에나오는 프로메테우스의반란 19) 에이미예고되어있다고보고, 이를통해애초부터인간의제작활동안에내포된끊임없는욕망의실체를고발하고자한다. 즉인간은결코무에서유를창조하는신이아니며, 그래서인간은자기세계를건설하기위한제작활동을위해결국자연을이용할수밖에없다. 이는곧인간의제작활동이 - 긍정적이든부정적이든 - 자연의파괴로이어진다는것을의미한다. 바로이런이유에서인간은자신의제작활동에앞서그필요성과긴박성을항상사 18) 이와관련하여한병철은아렌트보다더철저히성과중심의현대사회를비판한다. 한병철은아렌트가여전히행위중심의사고를함으로써성과중심의사고를벗어나지못하고있다고비판한다. 한병철, 피로사회, 김태환옮김, 문학과지성사, 2010, 37 이하참조. 19) 제작활동에있어서신과인간의근본적차이는신이무에서창조한다면인간은유에서창조한다는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제우스의금지에도불구하고인간에게불을건네줌으로서인간이이를도구삼아자연을지배할수있게하였다. 이는인간에게축복의사건이었지만, 결과적으로자연에는재앙의사건이기도했다.

24 철학논집 ( 제 38 집 ) 려깊게숙고할필요가있다. 왜냐하면작업과제작과정은견고하게조직화되고, 또스스로작동하는거대한유기체적세계가되어인간을압도해오기때문이다. 사물화된세계내에서인간은오로지사물들과관계를맺고, 그럼으로써인간은스스로인격적으로고립된자기세계를형성한다. 따라서아렌트에게 세계성 은전통철학에서처럼인간을동물과구분시키는인간의특성을드러내는고유개념이지만오히려구체적인삶에서는인간을긍정이아닌부정에로이끄는인간의한계를드러내는조건에불과하다. 결과적으로제작으로특징되는인간의세계성은인간이자기를완성하고실현하는긍정의장이기보다오히려극복해야할대상으로다가온다. 아렌트는여기서 말 과 행위 라는새로운대안으로서의인간의조건을제시하는데, 인간은이를통해비로소오로지사물과관계하는비인격적세계에서벗어나인격상호간의진정한소통이형성되는인격적세계의가능성을열게된다. 3. 행위 (action, Handeln): 정치적인간 (homo politicus) 아렌트에있어서행위는활동적삶안에서인간이인간다움을보여주는매우중요한계기이다. 아렌트는생명활동으로서의노동도, 사물과의관계에로고립된작업도엄밀히말해아직은인간다운활동이라말할수없다고본다. 사실노동과는달리작업의제작활동은동물과구분되는인간만의고유한세계를형성해준다는점에서인간적삶의척도가될법도하지만아렌트는그렇지않다고주장한다. 그이유는노동과작업에서는아직인간의고유한인격이현현되어나오지않기에이를진정한의미에서인간적삶의척도라할수없기때문이다. 20) 아렌트는인간적삶의척도를 말과행위, 특히말이위력을발휘하는정치적행위에서찾고자한다. 21) 정 20) 아렌트는행위가짐승이나신이가질수없는인간만의배타적특권이요, 행위만이타인의지속적인현존을자신의전제조건으로삼는다고주장한다.(HC 74) 21) 말과행위는상호밀접한관계를갖고있다. 인간의사고가언어와함께실행

한나아렌트의인간관 25 치적행위를통해비로소인격상호간의자유로운만남이가능해지며, 그런만남을통해개방된공공영역이우리모두에게열린다. 인간이기본적으로말과행위를통해자기를세계에중재한다는것은굳이철학적인간학적통찰을빌리지않더라도부인하기힘든자명한사실이다. 아렌트는말과행위가진정한의미에서 인간이물리적대상으로서가아니라인간으로서서로에게자신을드러내는인간의 [ 고유한 ] 양식 (HC 236) 이라고주장한다. 사실인간이말을하고행위를하는것은정신의작용이다. 그러나아렌트는인간의정신적본질보다는말과행위에수반되어나오는인간의독특한현상에주목한다. 인간은말을하고행위를통해타자에게자기자신을전달하고, 타자와구별되는 자신의고유한인격적정체성 (HC 239) 을드러낸다. 그런데이것의근거는아렌트에따르면소위인간의 복수성 (Pluralität)(HC 235/213) 22) 이다. 인간의복수성은 동등성 (Gleichheit) 과 차이성 (Verschiedenheit) 이라는중층적의미를지니고있 되듯인간의행위는말과함께실행된다. 아렌트가여기서 말 과함께 행위 를논하는것은사실역사적으로보면오래된전통에해당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일찍이 언어 (lexis) 와 행위 (praxis) 를인간의 정치적삶 (bios politikos) 의핵심요소로본바있다. 이와관련하여아렌트는정치적행위란폭력이아닌 말의실행 이요, 적절한순간에적절한말을발견하는행위 라고주장한다.(HC 78) 22) 아렌트는인간의복수성과관련하여다음과같이말한다. 인간의복수성은그구성원각자가자기방식으로유일무이하다는역설적인특성을지닌다양성이다. (HC 236/214 독일본참조 ) 복수성 을뜻하는 Pluralität (plurality) 은다원성으로도번역되는데, 이개념이의미하는바가인간이종적차원에서동등하지만또한고유한인격차원에서차이성을드러낸다는것이기에여기서는복수성으로옮겼다. 특히복수성의의미가단순히인간이인격적차원에서평등하다는의미가아니라종적으로동등하다는의미로이해될수있다면, 아렌트의복수성의개념은인격의고유하고개별적특성뿐만아니라인간을인간으로서규정하는특성, 특히동물과구별되는인간의 특수성 (Besonderheit) (HC 235~236/213~214) 을규정하는개념으로이해될수있을것이다. 이런관점에서본다면인간의복수성은한편으로인간의자기규정적개념으로서의철학적인간학적개념으로이해해볼수도있을것이다.

26 철학논집 ( 제 38 집 ) 다. 인간은동등성에근거하여과거, 현재, 미래사이에서인간상호간의예견적소통이가능하게되지만동시에고유한인격으로서개개인의차이성이엄연히상존하는한말과행위를통해자기를타자에게이해시킬필요가있다. 이런의미에서아렌트의복수성의개념은인간이동물과구별되어자기자신을도드라지게만드는 특수성 의개념보다개별적인인격의고유성을강조하는 차이성 을함축하는개념이다.(HC 236) 이런복수성은현상적으로인간의삶의기저를이루며, 인간이정치적존재로서타자와더불어공적영역의세계를형상하는근거가된다. 인간이말과행위를통해자기의고유한인격을드러낸다는아렌트의생각은인간이정신의반성작용을통해타자와맞서자아를설정하고인식한다는전통적견해와내용적으로크게다르지않다. 사실말과행위는정신적존재인인간이육체를통해자기를매개하는가장기본적인표현수단이다. 그런데아렌트에게중요한것은말과행위를통해밝혀지는인간의실체적 자아 그자체에있기보다오히려그런자아가고유한인격으로서자기를실현하는모습, 즉새로운시작을뜻하는 창발성 (emergence, Initiative)(HC 57/18, 236/214) 23) 과 탄생성 (natality, Natalität)(HC 57/18, 237/215) 의역동적사건에있다. 인간의새로운시작을함축하는이런탄생성이갖는의미는무엇보다복잡하게얽히고설켜있는 인간관계망 (human relationships)(hc 244~245) 24) 안에로책임있게자기를투신하는인간의행위에있다. 이는곧다양성안에서차이성을통해인간개개인이자기의고유한인격을밝히는지극히인간다운행위이다. 아렌트에따르면인간은이런행위를통해비로소 능동적으로자신의고유한인격적정체성을드러내며, 인간세계에자신의모습을나타낸다. (HC 239) 물론시작을알리는탄생성은결코일회적사건이아니며, 중단없는행위를통해예고없이재 23) 여기서창발성은 시작의정립 (ein initium setzen) 을의미한다. 이는한인간이탄생함으로써비로소어떤행위가처음시작되는것과유사하다. 24) 아렌트는인간의삶이인간이서로얽혀있는 인간관계망 으로이루어져있다고주장한다. 이인간관계망은구체적인대상성을갖고있지는않지만 실천행위 와 언어행위 로구성된엄연한현실이요실재인데 (HC 243~245), 바로이들의공유가소위정치적행위인것이다.(HC 260)

한나아렌트의인간관 27 차새로운시작을알리게되는그런개방된창발적인사건이다. 이렇게행위안에내포된새로운시작의예고성은아렌트에의하면이미행위의그리스어원에나타나있다. 행위를뜻하는그리스어 archein 동사나라틴어 agere 동사는어원적으로 시작하다, 이끌다, 무엇을움직이게하다 등의의미를가지고있다.(HC 237) 25) 어원적으로보면행위개념에는일반적으로무엇인가 개시 의의미가함축되어있다. 아렌트는행위개념안에내포된이개시성을 공공영역 이열리는 공공성 으로이해한다.(HC 260) 행위라는기본조건속에놓여있는인간에게이는시사해주는바가큰데, 즉인간은타인과함께있는존재요, 타인과 공존재 로서협력을이루어야만할존재라는것이다. 그런데인간이공공의영역에서자기를밝히는방식은결코획일적이지않으며, 정형화되어있지않다. 그것은인격의불가해성만큼이나오히려불확실하며 계시적 이다.(HC 242) 따라서이는어떤본질주의적탐구방법으로는이해되지않으며, 다만사람들사이에회자되는 삶의이야기 (BC 255) 형식으로포착될뿐이다. 한편아렌트는말과행위사이에놓인불가분의관계에주목하는데, 즉인간의행위는반드시말이수반되어야하며, 말이수반되지않는행위는불가하다고본다. 아렌트는 인간의활동중에행위만큼말을필요로하는것도없다. (HC 239) 고주장한다. 결국인간은말과행위를통해 타인과함께존재 26) 하면서자기를계시하는과감한 모험의감행 (HC 240) 을하게된다. 그런데아렌트가주장하는모험의감행은실존주의에서말하는결단 25) archein 이나 agere 에상응하여 행위를하다 를뜻하는또다른단어로서그리스어 prattein 과라틴어 gerere 가있는데, 이들단어는 무엇인가를이루거나달성하거나완성하는것 혹은 무엇인가를낳는것 을뜻한다. 아렌트는이들단어가갖는의미에주목하는데, 전자가 한사람에의한시작 을지시하고있다면, 후자는 다수가참여하여일을수행하고완성하며완전히이루어낸업적 을지시한다. 또한전자가 행위의시작 을가리킨다면후자는 행위의성취 를가리킨다.(HC 250~251) 26) 아렌트는행위자체는결코어떤목적을위한수단이되어서는안된다고강조한다. 즉행위는 누구를위한행위 도혹은 누구와대항하기위한행위 도아니며, 오롯이 타인과함께하기위한 행위인것이다.(HC 240)

28 철학논집 ( 제 38 집 ) 과책임이따르는실존론적투신과유사해보인다. 즉새로운시작과탄생은타자에게로자기를알리는것에서출발하는것이요, 이는마치대중의익명성에숨지않고자기실존에책임을다하는행위와다를바없기때문이다. 사실아렌트가일생경계한 전체주의 는 악의평범성 이보여주듯적극적인행위를수반하는실존적투신없이는결코극복불가능한절대악과같다. 물론복잡하게얽히고설킨그물망의인간세계안에서 타인의현존과결합 (HC 237) 하는자기설정은쉬운일이아니다. 권력을쟁취하고자이전투구 ( 泥田鬪狗 ) 하는정치인이나이에쉽게편승하는일반인의행위를보면더욱그런생각이든다. 그러나아렌트는인간세계의부조리한모습에도불구하고희망을포기하지않는다. 이희망은다름아닌인간의행위안에내재된근본적인 탄생성 때문이다. 탄생은곧새로운시작을의미한다. 아렌트는 인간은죽기위해서태어난것이아니라시작하기위해서태어났다. (HC 311) 고힘주어강조한다. 죽음만이현존재의본래성을입증한다는하이데거와는달리아렌트는오히려탄생에서인간의본래성을획득하려한다. 그리고그희망은인류역사상예수의탄생에서가장뚜렷이입증된바있다. 즉 한아이가 [ 인류의희망을안고 ] 우리에게태어났도다. (HC 312) 27) IV. 새로운 시작 과 탄생 의철학적인간학적의미 아렌트의인간이해의핵심은인간이노동과작업그리고행위라는일정한조건에놓인존재이면서도궁극적으로행위를통해새로운시작과탄생 27) 이경구는헨델의 메시아 에나오는구절이다. 아렌트는기적을일으키는희망의전달자로예수그리스도를제시하는데, 예수그리스도야말로인간의근본이신앙을통해기적을행하는데있다는사실을삶으로보여준새로운탄생의가장모범적사례이다. 아렌트는예수그리스도의기적을신적능력의결과로보지않고, 오롯이인간적인믿음의결과로해석한다.(HC 312 각주참조 )

한나아렌트의인간관 29 을예고하는존재라는사실에있다. 사실탄생은죽음과함께지극히평범하고자연스러운인간의삶의한과정인데, 아렌트는이인간의 탄생 (Geburt) 에주목하여 28) 여기로부터그의독특한개념인 탄생성 을이끌어낸다. 아렌트가말하는인간의탄생성은인간의모든활동, 특히 행위 안에이미내재된것으로 새로오는자가무엇인가를새롭게시작할능력 을의미한다.(HC 57/18) 그렇다고인간안에이미내재된이런능력이형이상학적차원의본성이나본질을의미하는것은결코아니다.(HC 57 참조 ) 그것은전적으로인간이자유로운의사로분명한목적이나동기를갖고책임있게행위를하는중에나타나는인간의기본조건에상응한능력그이상도이하도아니다. 인간의탄생성은어떤형이상학적통찰이기보다는인간의실존론적성격을지시하는인간의현사실적인 실존조건 29) 이다. 아렌트는 탄생성 을정치철학적관점에서실존론적범주를구성하는실재로이해한다.(HC 57/18) 행위와정치사이에놓인이런실존론적인불가분의관계에의해인간은기본적으로정치적존재가된다. 그런데여기서주목할점은아렌트가이해하는 정치적인것 의개념이통속적인정치개념과사뭇다르다는것이다. 여기서 정치적 이란단어가의미하는것은어떤힘을갖고세력을형성하는행위와전혀무관하며, 그보다는인간의실존적인조건과관련하여인간이다양한인간관계망을형성하고확장함으로써 인간다운삶 을영위하는행위와밀접한관련이있다. 아렌트는정치권력을공공영역을가능하게하고, 그안에서인간이말과행위를통해자신의잠재성을무한히확장가능하도록돕는힘으로이해한다.(HC 262~263 참조 ) 정치적삶이란근본적으로권력게임이기보다는삶의의미를충만하게하는활동적삶을의미한다. 그것은인간으로하여금목적, 수단, 가치가전도된도구적이며사물화된세계에서벗어나진정타자곁에존재할수있도록이끌어준다. 그래서인간은정치적삶안에서비로소단순한사회구성원으로서생활하는 사회 28) 아렌트가인간의 탄생 에주목한다면키르케고르, 야스퍼스, 하이데거, 샤르트르등실존주의경향의철학자들은인간의 죽음 에주목한다. 29) 아렌트는이런인간의실존 조건 (Bedingung) 이인간 본성 (Natur) 과근본적으로다르다는것을거듭강조한다.(HC 58/19)

30 철학논집 ( 제 38 집 ) 적동물 (animal socialis) 의위상을뛰어넘어공동의목표를설정하고공동선을추구하는진정한의미의인간, 즉정치적존재로서의 정치적인간 (homo politicus) 이된다. 인간의정치적삶은그성격상사적영역이아닌공적영역에서이루어지는데, 아렌트는이런공적영역을 가능한한가장폭넓은공공성 (die größtmögliche Öffentlichkeit)(HC 102/62), 우리에게공공의것 (das uns Gemeinsame)(HC 105/65) 일체로규정하고, 이를인간다운삶의준거로받아들인다. 아렌트에게있어서사적영역이란 타인의부재 (HC 112/73) 30), 즉타인과의단절이나인격적관계의부재처럼전혀인간다움이 결여된 (privativ)(hc 112/73) 부정적인모습을띤다. 31) 결국아렌트의정치적삶과정치적행위의요체는단절에서관계로, 고립에서소통에로나가는새로운탄생, 새로운시작을의미한다. 인간이정치적존재라는것은전혀새로운사실이아님에도아렌트는이를행위안에내재된인간의탄생성이라는자신의고유한개념으로재해석해냄으로써무엇보다도인간은사적영역에서나와공적영역을만들어가야하는주체라는사실을우리모두에게각인시켜준다. 물론아렌트의이런사유의배경에는독일나치정권시절유대인으로서겪어야했던고뇌가고스란히담겨있다하겠다. 인간이절대악인전체주의에대항하는유일한길은가능한한최대로모든것에서공공성을확보함으로써악이일상안에뿌리를내리지못하도록미연에방지하는일이다. 사적영역의확대는곧개인주의를극대화를시키고타인에대한무관심을불러옴으로써결국악의평범성에로우리를타락시킨다. 빛이어둠을이기듯개방된공공의영역에서악이발붙일기회는그만큼줄어든다. 한편아렌트는탄생성이인간의모든행위안에내재되어있다고주장하는데, 그렇다면인간은평소에어떻게행위를통해정치적함의를가진 시 30) 행위가고유한인격의드러남과매우밀접한관계가있는한 타인의부재 를전제하는사적인영역에서정치행위가이루어질수없는것은자명하다. 31) 아렌트에따르면사적영역에서는 타인이보고들음으로써생기는현실성의결여, 공동의사물세계의중재를통해타인과관계를맺거나분리됨으로써형성되는타인과의객관적관계의결여, 삶그자체보다더영속적인어떤것을성취할수있는가능성의결여 (HC 112/73) 가나타난다.

한나아렌트의인간관 31 작을위한탄생 혹은 탄생을위한시작 을감행할수있는가? 아렌트는이를 모험의감행 이라명명하지만, 그러나이것이어떻게실현가능한지는구체적으로명확히밝히지는않는다. 우리는다만이와관련하여그힘의원천을정신적삶에서찾아볼수있다. 정신적존재인인간에게행위의원동력은정신그자체로서인간을실제로올바른행위에로이끄는것은다름아닌사유하고판단하고의지하는정신적삶이다. 사유없는행위는불가능하며, 행위없는사유는그저공허할뿐이다. 평생실천적삶으로서의철학하기를중시하였던아렌트가죽기직전몇년동안 정신의삶 에대해천착하였던이유도결코이와무관하지않을것이다. 32) 사실아렌트는이미 인간의조건 에서공공영역에서의공동선추구와관련하여정신적삶이갖는의미를긍정적으로표현한바있다. 아렌트는사유활동자체를전적인타자로부터의자기고립의행위로만보지않는다. 이는특히사유를 자기와자기자신과의대화 로이해한고대그리스적사유의관점에서보더라도그렇다.(HC 130/93) 33) 아렌트는사유활동안에이미공공성에로나가는단초가발견되고있다고보는데, 그것은 내가나를앞에세워말하는자기자신과의대화 가사유활동안에서이미실행되고있기때문이다. 실천적행위에서반드시전제되어야할것은이렇게자기 32) 아렌트가말년에 정신의삶 에대한연구를구상했을때는사유, 판단, 의지의 3부작으로였다. 그러나그가구상한 정신의삶 은 1부사유편과 2부의지편만출간되고 3부판단편은그녀의갑작스러운죽음으로출간되지못했다. 이와관련하여 E. 영-브릴, 한나아렌트전기 - 세계사랑을위하여, 705~762 참조. H. 아렌트, 정신의삶 1 - 사유, 홍원표옮김, 푸른숲, 2004; 독일어본은 Vom Leben des Geistes: Das Denken. Das Wollen, Herg. M. McCarthy, München/Zürich, 4. Auflage, 2008; 영어본은 The Lif of the Mind: vol. 1 Thinking, vol. 2 Willing, New York/London, 1978. 33) 선을사랑하는자는결코고독한삶을영위할수없다. (HC 130) 아렌트는사유가외형상고독한활동처럼보여도그안에자기를설정하는행위라는사실로부터결코고립된행위일수없다고강조한다. 아렌트의활동적삶과정신적삶의중재가능성에대해서홍원표, 정신의삶과정치적삶의원형을찾아서 - 다원성, 정체성, 도덕성의긴장적공존, 정신의삶 1 - 사유, H. 아렌트, 홍원표옮김, 푸른숲, 2004, 351~411 참조.

32 철학논집 ( 제 38 집 ) 안에서자기와대화하는사유활동이다. 만약그렇지못하다면우리는결코확고한믿음과신념을갖고자기가원하는바를실행에옮길수없을것이다. 그런의미에서정신적삶은엄밀히말하자면활동적삶의조건이다. 따라서아렌트가말과행위를통해근본적으로제시하고자하였던바람직한인간상으로서의새로운시작과탄생역시이런정신적삶을배제하고서는실현불가능하다고말할수있다. 우리는여기서비로소아렌트가 인간의조건 말미에고대로마정치가인카토 (M. P. Cato 기원전 234~149) 의말을인용한이유를짐작해볼수있다. 인간은자신이아무것도하고있지않을때그어느때보다활동적이며, 혼자있을때가장덜외롭다. (HC 394/414) 34) 즉사유는외적으로고독한활동처럼보여도결코자기안에만머무는배타적인활동이아니라는것이다. 인간은정치적으로행위를하는존재요, 동시에정치적으로사유하는존재이다. V. 나가는말 아렌트의사상을정치철학적관점이아닌철학적인간학적관점에서주제화하는일은결코간단한일이아니다. 그이유는일차적으로아렌트가인간의본질을규정하는전통적인의미의철학적인간학을형식적으로나내용적으로전혀하고있지않기때문이다. 그럼에도우리는 인간의조건 에나타난아렌트의사유를통해최소한철학적인간학적관점에서인간이어떤존재인지이해해보려고노력하였고, 이로써오늘날바람직한인간상이무엇인지도함께제시해보고자했다. 아렌트에따르면인간은육체적노동과작업의실존적조건과제약속에서도이를넘어서는자유로운행위를통해보다의미있는것을추구하는정치적존재이다. 이때인간이정치적 34) Numquam se plus agere quam nihilcum ageret, numquam minus solum esse quam cum solus esset. 카토의이경구는아렌트가후에 정신의삶 을집필하게되는동기가된다. 그녀는 정신의삶 서론에서이를언급하고있다.(LMT 23 참조 )

한나아렌트의인간관 33 존재라는것은결코권력추구라는통속적인의미보다인간이정치적행위를통해 타인의부재 로특징되는개별적이며폐쇄적인사적영역에서나와고유한인격들이서로함께공존하는공적영역의존재가된다는것을의미한다. 인간이정치적이라는통찰은이런관점에서보자면정치철학적통찰이기보다는오히려철학적인간학적통찰에가깝다. 이통찰이의미하는바는인간은본래말과행위로써자기고유성을드러내는존재요또한그럼으로써 타인곁에있는존재 라는것이다. 바로이사실로인해인간은정치적존재가된다. 그러나인간이정치적존재인보다직접적인근거는인간의 복수성 에있다. 아렌트에따르면인간은동물과비교하여특수한존재이지만이특수성보다더중요한것은동등성과차이성이다. 중요한사실은인간은인간인한모두가동등하며, 그러나그럼에도개별적인인격으로서인간개개인은차이를드러낸다는것이다. 인간은말과행위를통해타자에게자기를밝힘과동시에상호이해에로나간다. 바로이것이인간의정치행위의본질인것이다. 인간은자연안에서유일하게자기고유의세계를갖는존재이다. 아렌트는인간의고유성으로서의세계성의본질을정신의형이상학적본질에서찾기보다는작업이라는인간의현상적인제작활동에서찾는다. 노동과구별되는작업의긍정성에도불구하고아렌트는이를궁극적으로극복해야할조건으로본다. 현대사회의고도한작업활동이인간을비인격화하고인간을인간으로부터고립시키기때문이다. 오늘날우리는작업을통해인공세계를건설하고거기서영원성을꿈꾼다. 그러나그런세계는인간이서로진정으로소통하지못하는 정치의부재, 인간성의상실 만이있을뿐이다. 우리가과거경험했던전체주의나오늘날일상의삶에서쉽게발견하는악의평범성은정치가상실된이런고립된세계와밀접한관련이있다. 결국인간은정치적일때가장인간다울수있다. 아렌트는세계를스스로움직이는하나의거대한과정으로이해한다. 이과정을거슬러행동하기란개인의경우거의불가능한것처럼보인다. 그만큼우리는믿음과희망을갖고새로운시작인탄생을할필요가있다. 물론새로운탄생의시작은말과행위를통해서요, 이말과행위는그에합당한사고와판단과의지가전제될때가능하다. 그렇기때문에아렌트의활동적

34 철학논집 ( 제 38 집 ) 삶과정신적삶의통섭은가능할뿐만아니라가능해야한다. 물론행위를위해사유가앞서전제되어야하지만실천적삶의관점에서보자면정신적삶보다활동적삶이우선된다. 즉오늘날바람직한인간상과관련하여보다긴박한철학적인간학적물음은인간의본질물음 ( 무엇-물음 ) 이아닌우리가어떻게행위할것인가의실존론적물음 ( 어떻게-물음 ) 이다. 그런데아렌트의사유에서여전히쉽게해결되지않는문제가있다. 그것은말과행위에있어서인간상호간의소통과이해의문제이다. 아렌트에따르면인간이의미충만한세계에로나가는근거는말과행위가자유로이이루어지는공적영역에있는데, 그안에서인간이실제로상호소통하는일은실로어려운과제가아닐수없다. 단순한말과행위그자체가매우고유한인격들이만나상호소통하는것을전적으로보장해주지는못하기때문이다. 특히다양한인격적관계망으로서로얽혀있는무수한공공의영역에서인간이함께한다는것은그자체로어려운일이아닐수없다. 과연여기서인간이기본적으로취해야할태도는무엇인가? 아렌트가말한것처럼궁극적으로화해를위한용서인가혹은끊임없는타자에대한사랑인가? 아니면오롯이새로운시작을알리는탄생에유일한희망을걸것인가? 왜냐하면전체를움직이는힘은사실실체가잡히지않는전체가아니라전체를구성하고있는개개인이기때문이다.

한나아렌트의인간관 35 참고문헌 김주만, 행위 의재조명 - 인간의조건 에대한최근연구동향, 현상과인식, 제106호, 2008, 38-63. 박혁, 철학적인간학에대한비판, 글로벌정치연구, 제6권, 제2호, 한국외국어대학교글로벌정치연구소, 2013, 5~29. 홍원표, 정신의삶과정치적삶의원형을찾아서 - 다원성, 정체성, 도덕성의긴장적공존, 정신의삶 1 - 사유, H. 아렌트, 홍원표옮김, 푸른숲, 2004, 351~411. 한병철, 피로사회, 김태환옮김, 문학과지성사, 2010. Arendt, H., 과거와미래사이, 서유경옮김, 푸른숲, 2005., 사랑개념과성아우구스티누스, 서유경옮김, 텍스트, 2013., 예루살렘의아이히만 : 악의평범성에대한보고서, 김선욱옮김, 2006., 인간의조건, 이진우 / 태정호옮김, 한길사, 1996; Vita activa oder Vom tätigen Leben, München/Zürich, 7. Auflage, 2008; The Human Condition, Chicaco/London, 8. Impression, 1973., 전체주의의기원 I, II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 이진우 / 박미애옮김, 2006., 정신의삶 1 - 사유, 홍원표옮김, 푸른숲, 2004., 폭력의세기, 김정한옮김, 이후, 2000., Vom Leben des Geistes: Das Denken. Das Wollen, Herg. M. McCarthy, München/Zürich, 4. Auflage, 2008; The Lif of the Mind: vol. 1 Thinking, vol. 2 Willing, New York/London, 1978. Arendt, H./Jaspers, K., Briefwechsel 1926~1969, Hrsg., L. Köhler/H. Saner, München, 12. Auflage, 2001. Coreth, E., Vom Sinn der Freiheit, Innsbruck/Wien, 1985. Scheler, M., 우주에서인간의지위, 진교훈옮김, 아카넷, 2001., 철학적세계관, 허재윤옮김, 박영사, 1988. Young-Bruehl, E., 아렌트읽기, 서유경옮김, 산책자, 2011.

36 철학논집 ( 제 38 집 ) 인간사랑, 2007., 한나아렌트전기 - 세계사랑을위하여, 홍원표옮김,

한나아렌트의인간관 37 <Abstract> Hannah Arendt s View on Human Beings - Research on Philosophical Anthropology in The Human Condition - Park Byoung-Jun (Sogang Univ.) Using Hannah Arendt s The Human Condition as a focal point, this paper discusses the desired nature of the human character in modern times from the approach, not of apolitical-philosophical method, but of a philosophical-anthropological method. In The Human Condition, Hannah Arendt claims that human beings have their presence in the world under the existential conditions of labor, work, and action. They seek meaningful existence through basically liberated actions that they perform despite the restrictions of labor and work. For her, such meaningful actions imply political action. Through political activity, human beings typically live their common existence together in public territory, thus reaching a higher level of human existence than that which can be achieved in private territory. For Arendt, the word political differs from the established concept of politics. It is rather a concept laden with anthropological meaning and signifies that the intrinsic nature of human beings moves them to go out of themselves into light through mutual interaction with others in the formation of relationships. Human plurality explains this concept well. In contrast with brute animals, the plurality of human beings signifies that each human person is special and that humans are as a whole equal, but morally distinct entities. The reason why the existence of human beings is political is shown in this way. Nonetheless, totalitarian society forms a world in which humans are made into impersonal beings rather than beings that maintain their inherent human characteristics. If political activity is lacking, a totalitarian society can lead to

38 철학논집 ( 제 38 집 ) the creation of absolute evil in the form of the loss of humanity. Therefore, human beings must be political beings in order to maintain their inherent human nature. Arendt argues that acts of thinking, judging, and willing that are appropriate for oneself are essential for humans to act properly. She speaks of active life and contemplative life. From an epistemic perspective, contemplative life has precedence over active life; but Arendt holds that the active life is more dominant, with the question of why being more important than what as a pressing existential task of human beings. Key words: The Human Condition, Active Life(vita activa), Person, Action, Plurality, Natal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