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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학년도 수시 면접 문항

문화재이야기part2

Transcription:

- 12 國史館論叢 第55輯 불가능한 관직이 존재하였다. 雖至達官 不得入臺省 은60) 그러한 한직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H-①及即位 擢直翰林院兼四門助敎 尋轉右拾遺 臺諫駁奏 文外祖系出處仁部曲 不宜諫 官 乃改授殿中內給事知制誥( 高麗史 권95, 列傳, 鄭文). ②以妻派聯國庶 不得拜臺省 政曹學士典誥 奏謂抃曰 公因我系賤 不踐儒林淸要 敢請棄 我 更娶世族(위의 책 권102, 列傳, 孫抃). ③復興又言 古者 外戚不除言官 請授他職(위의 책 권111, 列傳, 慶復興). ④國制 非出身科第 不得爲文翰官 崔怡擅政 自爲監修國史 猶不得兼修文殿 君祥 時爲元 朝集賢大學士 故得拜焉(위의 책 권128, 列傳, 洪福源). ⑤中書省駁奏 忠幸等 無大功能 掩匿世累 冒入流品 不宜與忠孟邊功例論 制曰 除淸要理 民職外一如前制(위의 책 권75, 選擧3 銓注 凡限職, 文宗 27년 정월). H-① ② ③ ④ ⑤는 한직규정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H-⑤에서는 한품의 규정을 적용 받지 않는 경우라 하더라도 한직의 규정 이 적용되는 관직은 淸要理民職 이었음을 알 수 있다. 理民職은 지방수령을 지칭하는 것으로, 예종대부터 例出 로 표현될 정도로 登科士 類가 임명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61) 따라서 등과사류는 수령을 거친 후에 비로소 參職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 만큼,62) 문반의 숭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등 과사류의 수령파견은 지방교육의 부흥이 그 명분으로 표방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流離民 의 발생을 억제하려는 의도가 작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63) 이러한 경우 수령의 등과사류로의 임명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어짐과 동시에 經學敎育으로의 학풍변화가 강 조되어 졌던 점은64) 양자의 밀접한 관련성을 시사하는 중요한 사례라고 하겠다. 淸要職은 H-②에서 처럼 臺省政曹學士典誥 로 官品에 관계없이 한직의 규정이 적용 될 정도로 중요한 관직이었다. 禁內六局으로 지칭되는 翰林 史館 秘書 寶文 同文 留院 등 文翰職도65) H-④에서처럼 과거급제자인 경우에만 취임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한직의 규 60) 高麗史節要 권8, 睿宗 15년 9월, 樞密院使致仕 金漢忠卒 其妻 文宗 幸婢之女 以故 雖至達官 不得入臺省. 61) 張東翼, 高麗時代의 官僚進出(其一) 初仕職 ( 大丘史學 12 13 합, 1977). 62) 高麗史 권110, 列傳, 李齊賢, 請如古制 朝士之未入參者 必經監務縣令 至于四品 例爲牧守. 63) 朱雄英, 앞의 논문(1986). 64) 李秉烋 朱雄英, 麗末鮮初의 興學運動 性理學 受容 및 그 背景과 관련하여 ( 歷史敎育論 集 13 14 합, 1990). 65) 東文選 권70, 禁內應事重興記, 國初 設官置六局禁中 爲文翰職 曰餘林 曰史館 曰秘書 寶文同文 留院 而史翰爲之冠 以文翰官不可一日無其所 禁內古六局 戊申官制 改翰林史館爲藝文春秋館 秘書爲 典校寺 而餘皆罷焉 에서 처럼 禁內六局이 三館으로 통폐합된 후에도 과거급제자는 반드시 三館을 거쳐야 하였으며 ( 高麗史 권137, 列傳, 辛昌 원년 10월 甲子, 舊例登第者 雖參上 皆分三館 ), 高麗史 권109, 列傳, 安軸, 自樂正至監察大夫 皆帶館職 表箋詞命 多出其手 는 문반직 중에서도 과거 급제자만이 겸직할 수 있었던 館職에 대한 당시의 사회적 관념이 투영된 결과일 것이다.

- 14 - 國史館論叢 第55輯 Ⅳ. 限職의 規定要素와 地域共同體 限職의 규정요소는 신분이라고 할 수 있다. 신분제는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투영되어 나타나는 법제이므로 사회구조의 특성에 따라 신분제의 모습도 달리 나타나게 마련이었 다. 따라서 한직의 규정요소는 신분제의 마디로서 기능했을 개연성이 매우 크다고 하겠 다. 다른 반열에 설정된 한직규정보다도 특히 문반직으로의 진출과정에 집중적으로 설정 된 한직규정은 신분제의 윤곽을 파악하려는 노력에 일정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문반직으로의 入仕는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문음의 혜택을 입는 경우와 과거를 통하여 진출하는 경우이다.72) 이 두가지 방법은 다 같이 문반이 되는 통로이지 만, 아주 다른 길로 이해되어졌다.73) 문음의 혜택은 5품 이상 문무관료들의 子나 孫들이 입었기 때문에 신분상의 하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음출신이라는 점은 승진과정에 서 과거출신자보다 불리하거나,74) 三品 이상 관직으로의 진출에 좋지 못한 관념으로 작 용하였던 것 같다.75) 만약 문음출신자가 宰府로의 진출과정에서 과거출신자와 별 차이가 없었다고 가정한다면 굳이 과거로의 入仕를 선택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한직 규정은 과거출신자들의 중앙관료의 진출로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던 점에서도 그 러한 사정은 쉽게 추지될 수 있다고 하겠다. 고려조의 가장 전형적인 관료선발방법은 學校制 科擧制 銓注制로 직결시켜 유기적 인 관련하에서 운영되는 것이었다.76) 仁宗代 式目都監에서 제정한 學式은 학교제에 설정 된 한직규정의 내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자료로 생각된다. I-凡係雜路 及工商樂名等賤事者 大小功親犯嫁者 家道不正者 犯惡逆歸鄕者 賤鄕部曲人 等子孫及身犯私罪者 不許入學( 高麗史 권74, 選擧2 學校, 仁宗. 72) 이들은 高麗朝의 社會性格을 해명하는 주요한 문제들 중의 하나였다. 그에 대해서는 金毅圭 편, 앞의 책(1985) 참조. 73) 陽村集 권20, 送延城君金公輅出鎭平壤詩序, 厥後 予添科目 公繇門蔭 仕雖異途 交義常篤. 74) 高麗史 권75, 選擧 銓注, 明宗 11년 정월, 中書門下郎舍議奏 舊制 文吏散官 外補者 皆有年限 非有功 不得超遷 今有一二年 而超受者 有三十餘年 而不調者 政濫人怨 請限及第登科者 限五年 自 胥吏爲員者 限八年以上 許得施行 餘皆追寢之 詔可. 75) 高麗史節要 권5, 文宗 11년 12월, 中書又奏 禮制 凡老臣 知天地之事者 則賜几杖 今猛 徒藉門 蔭 而不知天地之事 又無矢石之勞 其餘政事 無所諮訪 若念先臣功勞 則賜一年侍朝 可矣 若加之以數 年 又賜之以几杖 恐恩禮太過 請收成命 從之. 76) 朱雄英, 高麗前期 官僚選拔體系와 儒學의 機能 王權과 관련하여 ( 大丘史學 31, 1986).

- 18 國史館論叢 第55輯 점으로 보아 한품의 규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本貫의 州府郡縣으로의 승격이 뒤따라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鄕驛部曲人은 적어도 賤人은 아닐지라도 州府郡 縣人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던 신분층이 아니였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87) N. 然世襲星主王子而已 未有筮仕王國而大顯者 高維始以賓貢 靖王乙酉 首中南省試 明 年丙戌李作挺牓第三人 官至右僕射 子兆基 舊名唐愈 睿王丁亥韓即由牓登科 仁王朝出 入臺閣 好直言敢諫 相毅 王知戊辰擧 位至平章判吏部事 名迹獵獵 有詩集二卷 行于世 ( 東文選 권101, 星主高氏家傳). 高維가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관료가 된 후 右拾遺에 임명되자 中書省에서 耽羅출신의 諫省 임용이 불가능함을 주장하였다.88) 따라서 耽羅라는 지역이 한직의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아들인 高兆基가 臺諫에 임용될 수 있었던 것은89) 父인 高維 가 5품 이상으로 승진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이인 肅宗 10년에 耽羅가 郡으로 승격 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90) 이처럼 한직규정은 그 성격이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운영과정을 살펴보면 이들 3부분의 한직요소는 독립된 等價의 요소가 아니였음이 드러난다. M-②에 나오는 痕咎之人 이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을 지칭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직규정 의 적용 대상자들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O. 閹人黃石良 夤緣用事 陞其鄕合德部曲爲縣 適不肯署案 石良與內竪石天補 金光衍 乘 閒譖之 王怒 即令械囚巡馬所 近內竪微賤者 皆以隨從之勞 許通仕途 雜厠朝班 有乖 朝宗之制 請收成命王怒 欲觀所爲 陽許之( 高麗史 권106, 列傳, 秋適 附 李仁挺). 위의 자료는 직역적 요소가 지역적 요소의 토대 위에서 운용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 다. 즉 痕咎之人 에게 적용되는 한직규정은 지역적 요소를 극복하였을 경우에만 직역적 요소의극복이 가능하였음을 잘 시사해 준다. 元과의 교섭과정에서 신분을 상승시킨 宦者 들이 本貫의 승격을 시도하였던 여러 사례는91)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 준다고 하겠다. 이 87) 高麗史 권84, 刑法 戶婚, 郡縣人 與津驛部曲 交嫁所生 皆屬津驛部曲 津驛部曲 與雜尺人 交嫁 所產 中分之 剩數從母 라는 점에서 도 津驛部曲人은 郡縣人보다는 신분이 낮았으며, 雜尺人과는 동등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88) 高麗史節要 권5, 文宗 11년 春정월, 以高維 爲右拾遺 中書省奏 維系出耽羅 不合諫省 如惜其 才 請授他官 從之. 89) 高麗史 권98, 列傳, 高兆基. 90) 高麗史 권57, 地理3, 耽羅縣, 太祖 二十一年 耽羅國太子末老 來朝 賜星主 王子爵 肅宗 十年 改毛羅 爲耽羅郡 毅宗時 縣令官. 91) 柳淸臣의 경우( 高麗史 권125, 列傳 姦臣, 柳淸臣)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은 鮮初까지도 遺制로 남아 있었지만, 고려조와는 그 성격이 전혀 달랐던 것이다( 太宗實錄 권6,

- 19 처럼 部曲과 같은 지역이 州府郡縣으로 昇格되면 그 後孫은 지역적 요소의 적용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설사 직역적 요소의 한직규정을 극복한 이후에도 子孫들이 직역의 세습에 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本貫의 승격이라는 법제적 조처의 뒷받침이 있어야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직역적 요소는 혈연에 의해 유지되어 갔던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지역적 요소가 규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후기 신분제 혼란의 원인 중에서 本貫의 무 분별한 승격이 주요한 원인의 하나였던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고 하겠다.92) 이상을 종합해 보면 고려조는 지역공동체를 통치기반의 기본단위로 설정하고, 이들을 통 속관계로 구성하여 운영하였다.93) 따라서 지역공동체가 하나의 단위가 되어 籍이 작성되고 그 토대 위에서 직역에 따라 각 직역을 하나의 단위로 하는 직역 단위의 籍이 별도로 작성 되었다.94) 지역공동체를 벗어나 다른 직역으로 이동하면95) 새로운 직역의 적에 성적되어져 혈연에 의해 유지되면서 氏族으로 불려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96) 어떤 瑕疵로 인하여 3년 閏11월 壬戌, 司諫院上疏 請定府州郡縣之號 凡州若郡 或有一相執政 或宦寺入侍天庭 奉使 還鄕 或有僧爲王師國師 必曰 某邑予所生之地 乘勢干請 或以部曲而陞爲監務 或以郡縣而陞爲州 由 是郡縣之號 日就超昇 土地廣狹 人民多少 不稱其名 且州府郡縣 各有定名 或以州而稱府 或以縣而 稱州 名器混浠 今也尙循舊弊 宦寺奉使者 復有干請 ). 선초의 지방제도에 관한 연구에서도 그러한 점은 잘 드러난다. 金東洙, 조선초기의 군현제 개편작업 군현 병합 및 직촌화 작업을 중심으로 ( 全南史學 4, 1990)과 조선초기 군현의 陞 降 및 名號의 개정 ( 全南史學 5, 1991). 李樹健, 朝鮮初期 郡縣制 整備에 대하여 ( 嶺南史學 1, 1971; 韓國中世社會史硏究, 一潮 閣, 1984 所收). 92) 본문 M-② 자료 참조. 93) 蔡雄錫, 앞의 논문(1986) 참조. 94) 고려조에서는 그를 위해 많은 別籍이 작성되었다. 別籍으로는 政籍(政案) 吏籍 蔭籍 內侍籍 軍籍 士籍(士版) 僧籍(緇籍) 百工案牘 賤籍 姿女籍 妓籍(樂籍) 등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許興植, 앞의 논 문(1981) 참조. 95) 왕조 정부가 인정하는 경우가 아니면 本貫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의 移住는 거의 불가능하였던 것 으로 생각된다. 단 成籍되지 않았을 경우 이주는 가능하였겠지만, 왕조정부로부터의 反對給付가 없었던 것 같다( 高麗史 권129, 列傳 叛逆3, 崔忠献, 楊水尺 太祖 攻百濟時 所難制者 遺種也 素無貫籍賦役 好逐水草 遷徒無常 唯事畋獵 編柳器販鬻爲業 ). 고려조의 移住에 대해서는 朴恩卿, 高麗前期 移住硏究 ( 歴史學報 128, 1990) 참조. 96) 高麗史 권8, 世家, 文宗 18년 5월, 兵部奏 軍班氏族 成籍旣久 蠧損朽爛 由此 軍額不明 請依 舊式 改成帳籍 從之 와 高麗史 권73, 選擧1 科目1, 文宗 9년 10월, 內史門下奏 氏族不付者 勿 令赴擧 의 두 사료를 비교해 보면 地域이나 職役의 籍에 成籍되면 氏族으로 불려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며, 위의 책 권81, 兵志1 五軍, 肅宗 9년 12월, 尹瓘奏 始置別武班 自文武散官吏胥 至于商 賈僕隸 及州府郡縣 凡有馬者 爲神騎 無馬者 爲神步 에서 自文武散官吏胥至于商賈僕隸 처럼 職役 的 요소의 부분과 州府郡縣과 같은 지역적 요소의 부분으로 크게 나누어지고, 이들은 위의 책 권 79, 食貨2 戶口, 仁宗 13년 2월, 判 居京大小人員子弟 謀避徭役 各於本貫親戚戶籍類付 以致名實混 浠 自今 京人付外籍者 痛禁 과 高麗史節要 권12, 明宗 8년 3월, 淸州人 與州人係京籍而退居 者 構隙 捕殺幾盡 其黨之在京者 聞之 欲爲報仇 矯旨募死士 向淸州 遺將軍韓慶賴 追止之不及 與州 人戰不勝 死者百餘人 以不能禁制 罷牧副使趙溫舒事審官 大將軍朴純弼 將軍慶大升 에서 처럼 각각 별도로 籍이 작성되었기 때문에 職役이나 地域의 籍에 성적되면 氏族으로 불려졌을 가능성이 높 았다는 앞의 추론을 뒷받침하여 준다고 하겠다.

- 20 國史館論叢 第55輯 職役의 籍에서 削籍될 경우는 本貫의 籍에 다시 編籍되었던 것이다.97) 그러할 경우에도 지 역공동체의 格에 따라 옮겨 갈 수 있는 직역의 종류가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98) 한직체계는 어떤 인물이 직역 뿐만 아니라 지역공동체를 떠나 중앙관료가 되려고 할 때 지역공동체의 격에 따라 관직의 취임을 차등적으로 제한하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고려조의 중앙관료들은 門閥 과 같은 혈연적인 요소보다는 지역공동체라는 지역적 요소 의 규제가 보다 근본적인 것이었다.99) 고려후기 한직규정의 극복을 위해 本貫의 加號를 통하여 지역공동체의 格을 높이려는 경향은 관직체계에 투영된 고려조의 사회구조를 극 명하게 보여주는 주요한 사례로 생각된다. 이러한 고려후기의 무분별한 본관의 가호는 일정한 지역을 하나의 기본단위로 설정한 토대 위에서 체제를 정비하였던 고려조의 사 회구조가 붕괴되면서 새로운 기본단위를 토대로 하는 체제로 재정비될 필요성이 제고되 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100) Ⅴ. 限職의 消滅과 限品으로의 統合 고려조의 독특한 관직체계인 한직규정은 무신란을 계기로 점차 그 기능이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무신란을 계기로 무반들의 문반직 겸대가 일반화되었기 때문이다. 무신란 97) 그러한 현상이 刑罰體系로 나타날 때 歸鄕刑이나 充常戶刑이라고 하였다(蔡雄錫, 앞의 논문, 1983 참조). 고려조에서 鄕 은 高麗史) 권75, 選擧 銓注 事審官, 仁宗 12년에서 처럼 内外鄕 妻鄕 祖 曾祖妻鄕 등 五鄕이었다. 그 가운데 歸鄕罪로 인하여 다시 編籍되었던 地域共同體는 籍鄕 으로 불 려졌던 것 같다( 高麗史節要 권3, 顯宗 2년 정월 己卯, 柳宗奏曰 陽城 臣之籍鄕 去此不遠 請幸 之 ). 柳氏는 陽城의 土姓이었던 점( 世宗實錄 권148, 地理志, 京畿 陽城縣 土姓四 河 柳 李 葛) 에서 보아 籍鄕 은 원래 籍이 있던 本貫이었음을 알 수 있다. 98) 高麗史 권85, 刑法 禁令, 禁鄕部曲津驛兩界州鎭編戸人 爲僧 에 나타나듯이 州府郡縣의 編戶 人들은 승려가 될 수 있었던 반면에 鄕 部曲 津 驛 兩界州鎭編戶人들은 승려가 될 수 없도록 하였 던 조처는 그러한 예들 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李樹健, 高麗時代의 邑司 硏究 ( 國史館論叢 3)에서는 지역공동체가 지녔던 格을 邑格 이라고 하여 지역 공동체의 존재양태에 대한 이해에 많은 시사를 준다. 99) 고려조의 連坐制에 대한 연구가 없는 것은 그러한 점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다. 高麗史 를 비롯한 여타 史書에 종종 나오는 親黨 이라는 의미는 姻戚으로 구성된 黨이 아 니라 黨與 가운데 분류해 보니 인척이었다는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門閥意 識이 매우 희박하였을 개연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朱雄英, 앞의 논문(1987) pp.164 166 참조. 100) 歸鄕刑이나 充常戶刑이 사라지고 在地士族의 존재가 나타나는 현상에서도 유추될 수 있다 (李樹 建, 韓國中世社會史硏究 pp.336 352 참조). 이즈음 지역공동체는 내부구조가 해체되고 그 外 廷이 붕괴되면서 더 이상 사회구조의 기본단위로서 기능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종래 지역 공동체에 내재되어 있던 家戶가 점차 기본단위로서 중요시되고 있었다. 이처럼 기본단위가 지역 공동체에서 家戶로 轉化되는 과정과 戶의 分化에 따른 家의 基本單位化는 여말선초의 사회변화를 이해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로 생각된다. 이에 대한 분석은 차후의 과제로 삼겠다.

- 21 이전 문신 우위의 관료제 운영과정에서 나타난 모순에 대한 반작용의 결과였을 것이다. P-①其餘武夫 超資越序 職兼華要者 不可勝數( 高麗史 권19, 世家, 明宗 즉위년 9월 己卯). ②王 即拜李高 義方 爲鹰揚龍虎軍中郎將 其餘武人 上將軍 例加守司空 僕射 大將軍 加 上將軍 李義方兄俊義 爲承宣( 高麗史節要 권11, 毅宗 24년 8월 丙子). ③制 自三京四都護八牧 以至郡縣館驛之任 並用武人( 高麗史 권19, 世家, 明宗 3년 冬월 壬戌). 武臣亂 후 무신들은 華要職 守司空僕射 郡縣館驛의 任 등을 독차지하였다. 무신란으로 인한 문신들의 대량 살륙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무신들의 문관직 겸대가 보편화되고 있 었음을 알려준다. P-①은 종래 거의 사례가 없던 무신들의 華要職 겸대가 매우 성하였음 을 잘 보여 준다. P-②의 例加守司空 은 무반의 관직이 정3품의 上將軍까지만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관직으로 나아갈 때는 守司空이 가해져야만 가능하였으나 특별 한 경우에 한한 것이었다.101) 원래 P-③에 나오는 외관직은 문신들의 仕路였는데 무신란 후부터 무신도 외관으로 임명될 수 있었으며, 결국에는 文武交差法으로 귀결되었다.102) 그러나 이후 지방통치의 재정비라는 측면에서 과거급제자의 외관파견이 주요한 과제 로 부각되었지만, 개혁조처의 처방을 기다려서만 달성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103) 더구나 무신이 同修國史까지 임명되는 상황에 이르렀던 점으로 보아104) 무신들의 문관 직 兼帶不許라는 한직규정은 적어도 무신란 이후에는 더 이상 관료제의 운영과정에서 의미를 지니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따라서 무신란은 한직의 제 규정이 그 기능을 상실하 기 시작한 가장 중요한 계기로 이해해도 좋을 듯 하다. 한직규정의 적용은 관료제의 운영과정에서 銓注權의 정당한 행사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뿐만 아니라 전주권의 장악은 黨與를 요직에 포진시킬 수 있는 권한의 획득이기 때문에 정치권력의 장악을 위한 제일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105) 원래 吏 101) 邊太燮, 高麗後期의 武班에 대하여 ( 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102) 高麗史節要 권12, 明宗 8년 秋 7월. 103) 위의 책 권33, 辛禑 14년 8월, 復以士人 爲縣令監務 舊制縣令監務 皆用登科士流 近世專以諸司胥 吏爲之 貪汚虐民 階皆七八品秩卑人微 豪强輕之 恣行不法 鄕邑殘亡 恭愍王 因全以道之言 雖以五 六品爲安集 欲革舊弊 然安集 非出於批目 皆用時宰所擧 白牒之任 至禑時 權姦秉政 專用私人 隨其 熹怒 以爲黜陟諸縣 安集 多不識字者 奪人田民 納之權門 求媒進 貪殘之禍甚於胥吏 至是始用士流 秩五六品. 104) 위의 책 권13, 明宗 16년 12월, 以上將軍崔世輔 同修國事 將軍崔連金富幷爲禮部侍郞 三人皆武官 也 武官之兼儒官始此 克謙嘗於史堂戯世輔曰 儒官之爲上將軍 忝自我始 武官之同修國史 亦自公 始 相與一噱. 105) 高麗史 권21, 世家, 熙宗, 史臣贊曰 是時 忠獻 執國命 已有年矣 廣植黨與 專擅威福 熙宗雖 欲有爲 何以哉 爲王之計 當以正自處 任賢使能 王室自强 雖有跋扈之臣 無由肆其惡矣 王 不知此 聽用輕薄之謀 欲快一時之忿 率見放黜 噫.

- 22 國史館論叢 第55輯 兵部에서 관장하던 전주권의 운영은 무신란 후 무신들이 장악하게 되면서 한직체계의 운명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Q-忠献 自兼吏兵部之後 常往來二部銓注 至是 在私第 與吏部員外郞盧琯注擬文武官以 奏 王 頷之 二部判事 但檢閱而已( 高麗史節要 권14, 神宗 5년 3월). 무신정권의 안정기로 평가되고 있는 崔忠獻의 집권기는 전주권의 장악을 토대로 가능 하였다고 생각될 정도이다. 그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시기에는 雖有功者 非賂 終不得職 할 정도로 전주권은 문란되기 시작하였으며,106) 전주권을 장악한 최충헌의 압 력으로 前例가 없었던 南班의 參職도 허용되기 시작하였다.107) 이후 관료제의 운영과정 에서의 문제점은 전주권의 귀속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108) 이후 소위 개혁이 표방될 때마다 전주권의 행방에 대한 언급이 있었던 점도109) 관료제 의 운영과정에서 전주권이 지닌 상대적인 중요성을 시사하는 상징적인 例證들로 보아도 좋을 듯 하다. 전주권행사의 문란은 기존에 형성된 관료제의 유지와 운영을 위한 기본원칙이 무너졌 던 현상을 말한다. 그 원인은 종래 형성된 신분제의 변화에 따른 결과의 산물로 이해해 볼 수도 있지만, 다른 여러가지 요인들이 복합되면서 상승작용을 일으켰을 것이다. 한직 규정의 폐기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였을 것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무신란 이전까지 한직이나 한품의 규정이 관료제의 운영과정에서 잘 지 켜졌던 것은 전주권의 정당한 장악과 집행에서 말미암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110) R-①下制曰 宦者閔世沖 自寡躬幼時 以至今日 再救朕疾 功不可負 宜限六品敍用 宦官 拜參 自此始( 高麗史節要 권18, 元宗 원년 6월). 106) 高麗史節要 권15, 高宗 5년 春정월. 107) 高麗史 권129, 列傳, 崔忠獻, 時 以譯語內轉崇班于光儒 權知閤門祗侯 省郞議 光儒 南班員 今拜參職 非舊例 不署告身數月 忠獻 謂省郞曰 光儒 頃者待北朝使 有專對之能 故授參職 何堅執 常制耶 省郞 即署之. 108) 金潤坤, 麗末鮮初의 尚瑞司 政房에서 尚瑞司로의 變遷過程을 중심으로 ( 歷史學報 25, 1964). 張東翼, 高麗後期 銓注權의 行方 銓注參與官僚들을 中心으로 ( 大丘史學 15 16 합, 1978). 109) 李起男, 忠宣王의 改革과 詞林院의 設置 ( 歷史學報 52, 1971). 閔賢九, 整治都監의 設置經緯 ( 國民大人文科學論文集 11, 1977)., 整治都監의 性格 ( 東方學志 23 24 합, 1980). 110) 毅宗代의 정치현상은 高麗史節要 권11, 毅宗 13년 春정월 丙辰, 鄭誠饗王 獻衣對 崔允儀 李 元鷹 侍宴 樂聲聞外 聞者 莫不嘆息 掩涕曰 權在內豎矣 에서 단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전부터 모순구조가 점차 확대되어 왔겠지만, 의종대의 환관을 비롯한 측근들을 통한 무원칙적인 전주권 행사로 인한 비정상적인 정국운영이 무신란을 촉발하였던 직접적 원인으로 생각된다.

- 23 ②招集公私奴隸 謀曰 國家 自庚癸以來 朱紫多起於賤隸 將相寧有種乎 時來則亦可爲也 吾輩安能勞筋苦骨 困於箠楚之下 諸奴 皆然之(위의 책 권14, 神宗 원년 5월). ③仁宣年六十 官亦極于南班七品 仁俊力請除參職 王亦欲授之 恐後人援以爲例 終不許 (위의 책 권17, 高宗 45년 6월). ④崔竩 以家奴李公柱爲郎將 舊制奴隸 雖有大功 賞以錢帛 不授官爵 崔沆秉政 欲收人心 始除公柱及崔良伯爲別將 聶長壽爲校尉 至是 奴等曰 公柱身事三世 年老有功 請加參 職 奴隸拜參 自此始(위의 책 권17, 高宗 45년 2월). ⑤有人上疏云 御史中丞 安硕貞 私奴之子 不宜置諸臺閣 時崔瑀 私厚硕貞 濫除是職 人 皆憤之(위의 책 권15, 高宗 8년 春정월). R-① ② ③ ④ ⑤는 무신들의 문반직 겸대가 보편화되고 무신의 전주권장악이 이루어 지면서 인사에 뇌물이나111) 私的인 감정의 개입으로 七品에 설치된 參職의 한직규정이 점차 무너져 갔던 사실을 잘 보여준다. 무신란 전에는 毅宗時에 처음으로 鄭諴의 경우가 있었으나, 毅宗의 적극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臺諫의 署經을 얻지 못하여 결국 성취되 지 못했던 점에서 보면112) 엄청난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무신 집권자들의 전주권 장악은 한직규정의 기능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단초를 연 셈이다. 무신란 후의 그 러한 경향은 대원관계가 전개되면서 더욱 가속화되어 갔다. S-①侍從入元臣僚 幷加賞賚 限品者 許通( 高麗史 권28, 世家, 忠宣王 즉위년 9월 壬辰). ②國制 內僚之職 限南班七品 謂之常式七品 如有大功異能 只加賞賜 未有至五六品者 元 宗朝 始通其路 然拜將軍郞將者 不過一二 及忠烈即位 內人無功者 拜豊官高爵 腰鞓帶 黄 至子孫 許通臺省政曹者甚多 若別將散員 不可勝數(위의 책 권75, 選擧3 銓注 凡限 職, 忠烈王 2년 閏3월). ③僉議府上言 近者 內竪微賤者 皆以隨從之勞 許通仕路 混雜朝班 有乖祖宗之制 請收成 命 王 怒欲觀其所爲 陽許之 旣而復取其狀 僉議府不即從 王 囚詔文主事 命右正言李 仁挺勿視事 竟取其狀批曰 勿改成命( 高麗史節要 권19, 忠烈王 2년 閏3월). ④以內竪上將軍金子廷 爲東京副使 公主 爲王曰 予聞 東京 是王之外家然乎 王曰 然 公 主曰 家奴爲邑宰可乎 南班人 停居中外重任 始自何代 王曰 自元廟始 公主曰 王 眞元 王之子也 王 有慚色王 留意音律 嘗使內竪 與伶人 鼓樂 公主 遣人告王曰 以絲竹而理 國家 非所聞也 遂罷之(위의 책 권20, 忠烈王 11년 8월). S-① ② ③ ④는 무신난 후부터 한직규정이 조금씩 그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하여 元 과의 관계가 본격화되는 忠烈王代부터는 한품의 규정 뿐만 아니라 그 자손들에게는 理 111) 高麗史節要 권15, 高宗 5년 春정월, 崔忠献 秉政鬻爵 比因兵禍 人無行貨求官者 故忠獻託賊 遷延 至是 皆以不次 官其赂者曰 有戰功也 雖有功者 非賂 終不得職. 112) 高麗史 권122, 列傳 宦者, 鄭誠.

- 24 國史館論叢 第55輯 民職과 臺省政曹의 취임까지도 가능할 정도로 변화되었던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러한 현상은 이후의 王代에도 계속적으로 지속되면서 親元勢力으로서 賤類들의 중앙관료로의 진출이 가능해지고, 그를 토대로 신분을 상승시켜 權門世族化되었던 것이다.113) 이처럼 元과의 교섭과정에서 한직규정을 극복하고 고위직으로 진출하여 새로이 신분을 상승시 킨 인물들의 경우 대부분 本貫의 昇格을 통하여 성취된 신분의 유지를 시도하였던 것이 다.114) 고려후기 잦은 本貫의 加號는 그러한 사정이 투영된 결과로 나타났던 현상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개혁이 표방될 때마다 전주권의 복원과 함께 그 운영면에서 지역공동체 를 토대로 하는 한직규정의 기능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은115) 개혁에서 표방된 주요한 문제들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116) 이처럼 그들의 중앙관료로서 상승된 신분의 유지를 위한 본관의 가호는 지역공동체들 이 지닌 불평등한 관계의 解消라는 사실의 전제 위에서만 가능하였다.117) 또한 지역공동 체들이 지닌 불평등 관계의 해소현상으로 인해 야기될지도 모를 혼란을 방지하고 향촌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 고려조는 属郡과 屬縣의 郡縣化와 鄕所部曲 등의 主縣化라는 정 책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었고,118) 그 결과 지역공동체의 분해작용은 더욱 가속화되었을 것이다. 결국 지역공동체의 해체는 일정 지역을 하나의 단위로 하는 공동체가 이미 한직 의 규정요소로서 그 기능을 상실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새로이 나타나기 시 작한 기본단위를 토대로 재편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119) 113)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성과가 참조된다. 閔賢九, 高麗後期 權門世族의 成立 ( 湖南文化硏究 6, 1974). 黃雲龍, 高麗賤類顯官考 ( 釜山史學 4, 1980). 洪承基, 元의 干涉期에 있어서의 奴婢出身 人物들의 政治的 進出 ( 韓國史學 4, 1983 高麗貴族社會와 奴婢, 一潮閣, 1983 所收). 114) 주 91) 참조. 115) 위와 같음. 116) 종전에는 보편적으로 忠宣王 忠穆王代에 단행된 일련의 조처를 改苯政治로 그 성격을 규정하였 는데, 최근에 이들 조처들은 그 성격에 있어서 본질적인 改革案이 아니라 소극적인 改善策에 불 과했다는 한국역사연구회공동연구, 14세기 민의 동향과 개혁정치 ( 역사와 현실 제7호, 1992)에서의 지적은 麗末鮮初 전환기 사회구조의 질적변화라는 측면에서 이 부문의 연구에 새로 운 인식시각을 제시한 주목할 만한 견해로 여겨지며, 이들 조처들이 지역 공동체를 토대로 하는 사회 구조로의 復歸를 시도하려는 점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상당히 타당성이 있는 주장으로 평가된다. 117) 地域共同體들이 지닌 各自의 格이 사라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의 단위로서 지역공동 체의 기능이 사라지면서 더 이상 지역공동체는 한직규정의 주요한 요소가 될 수는 없었다. 歸鄕 罪의 해소나 在地士族의 존재는 물론이고 수령의 임무에 增戶口 의 항목이 신설되었던 점도 그 러한 사실을 입증해 준다고 하겠다. 118) 李樹建, 앞의 책(1984). 119) 金東洙, 조선초기 군현제 개편작업 군현병합 및 직촌화 작업을 중심으로 ( 全南史學 4, 1990) pp.68 78에서 고려조의 郡縣不解消政策 에 비해 선초 군현의 직촌화 조치나 병합조치 등 의 시행은 麗代의 지방주민 통제장치인 本貫制的 파악방식 人的支配方式 이 조선초기에는 토

- 25 T-①左司議吳思忠等言 祖宗之制 宦寺無官 文廟之世 宦寺給事 不過十數人 亦未嘗食祿 忠烈王朝 亦不拜參官 至于玄陵 使宦寺 得與兩府八衞之列 卒致萬生之變 今復立內 侍府 階三品 復蹈亡國之轍 願宮中給事者 只給衣食 罷內侍府 判曰 自今 不許朝官 毋革內侍府( 高麗史 권75, 選擧3 銓注, 凡宦寺之職). ②以添設載賞軍士 自奉翊至七八品無算 時有車載斗量之譏( 高麗史節要 권30, 辛禑 2 년 春정월). ③以池奫 爲門下贊成事 尹邦彥 爲密直提學 鄭良生 爲大司憲 是日除官宰樞至五十九 自 仁任奫而下各植其黨 臺諫將帥守令皆其親故 至於市井工匠 無不夤緣除拜 時人謂之烟戶 政(위의 책 권30, 辛禑 2년 12월). ④封姜氏爲安妃 鳳加伊爲肅寧翁主 妓七點仙 爲寧善翁主 以私婢官婢 封翁主者 古所未有 國人驚駭(위의 책 권32, 辛禑 11년 12월). T-① ② ③ ④는 공민왕대부터 對元關係가 단절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銓注權 행사의 문란은 가속화되고 있던 당시의 사정을 잘 보여준다.120) 納粟補官策의 실시나121) 添設職의 濫設122)은 그러한 경향을 가속화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T-①처럼 한직 7품의 대상자들이 宰相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며, T-②의 時有車載斗量之 譏 나 T-③의 時人謂之烟戶政, T-④의 古所未有 國人驚駭 은 그 시기 전주의 문란상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들이다. 이러한 현상은 지역공동체를 기본단위로 하는 사회구조가 투 영된 한직규정이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개혁의 일 환으로 인사권의 원상회복을 비롯한 정당한 인사의 시행에 대한 중요성이 종종 강조되 었지만, 지역공동체라는 지역적 요소가 더 이상 한직규정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이상 새로운 기본단위를 토대로 하는 사회구조로 재편되지 않는 한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전주권 행사의 문란한 현상이 가속화되는 가운데서도 새로운 체제로 재편하려는 노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恭愍王代부터 간간이 있어 왔지만123) 위화도회 지에 바탕을 둔 주민파악방식 지역지배방식 으로 변화하고 있던 사정이 반영되어 이루어진 조 치란 점에 의의가 있다고 하였다. 지방제의 정비라는 측면에서 보면 상당히 설득력 있는 견해이 지만, 그러한 조처의 배경에는 일정 지역을 하나의 단위로 파악하는 사회구조가 변화되어 家戶 가 하나의 기본단위로 부각되고 있던 시대변화를 새로운 방식으로 수습하려는 노력의 결과로 생 각된다. 따라서 기본단위의 전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일정지역을 하나의 단위로 하여 파악하던 本貫制的 파악방식을 지역지배방식이라고 한다면 家戶를 하나의 단위로 하여 家戶數의 多寡에 따라 파악하려는 방식은 家戶 지배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여말선초의 사회변화는 社會 構造의 基本單位가 地域共同體에서 家戶로 轉化되면서 나타났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120) 高麗史 권41, 世家, 恭愍王 15년 夏 4월 辛未, 賀正使判三司事全普門 還自元 帝 授翰林侍講 學士知制誥同修國史 普門 目不知書 國人大駭 元末 官爵之濫 如此. 121) 위의 책 권80, 食貨3, 納粟補官之制. 122) 鄭杜熙, 高麗末期의 添設職 ( 震檀學報 44, 1978). 123) 高麗史 권75, 選擧3 銓注, 恭愍王 원년 3월 典理判書 白文寶 上書.

- 26 國史館論叢 第55輯 군으로 신진사대부들이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인사권 의 귀속문제와124) 더불어 새로운 관료선발체계로의 재편이 그 주요 내용이었다.125) 職役 的 요소에 대한 명분론이 점차 구분기준으로 중요시되면서 登科는 중앙관료의 당연한 入仕과정으로 강조되어지기 시작하였다.126) 그러한 경향은 조선건국을 계기로 더욱 가속 화되면서 관료제도도 횡적인 한직인 한품의 규정만으로 운영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조의 한직요소 중에서 지역적 요소는 사라지고,127) 새로이 규정된 職役的 요소와128) 당시 사회적 준거에 기준을 둔 개인적인 瑕疵에의한 요소만 남아129) 한품규정으로서의 기능을 지니게 되었다.130) Ⅵ. 結 論 전근대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신분제였으며, 당시의 제도나 법제는 신 분제를 토대로 운영되었을 것이다. 특히 고려조의 신분제는 독특한 중앙관료조직의 운영 과정의 하나였던 限職體系에 잘 투영되어 있다. 따라서 身分에 따라 관직의 취임을 차등 적으로 제한하였던 限職體系는 고려조의 사회구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신분제에 투영된 고려조의 사회구조를 잘 보여주는 한직체계를 통하여 고려조의 사회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 限職體系는 限品規定과 限職規定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官品의 授受는 官職의 취임을 전제로 하였기 때문에 限品도 실질적인 면에서는 限職과 같은 기능을 지니고 있었던 셈 이다. 따라서 고려조는 縱的인 성격이 강한 한직과 橫的인 성격이 강한 한품으로 구성된 한직체제를 통하여 관료제를 운영하는 독특한 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限品은 班列과 깊은 관련을 지닌 한직규정이었다. 7品에 설정된 한품은 南班의 文武班 으로의 班列변경을 억제하는 기능을 지녔던 반면에 3品에 설정된 한품은 무반의 문반으 로의 반열변경을 어렵도록 하는 기능을 지녔던 것이다. 5品의 경우는 문무반 모두에게 124) 위의 책, 辛昌 즉위년 8월, 始復銓選法 舊制 府衞則自隊正以上 諸司則自九品以上 與夫府史胥徒 皆 錄歲月功過 每於歲秒 升黜 謂之都目政 自禑時 權奸竊國 官爵 一出私門 都目政 久廢至是 追錄其勞. 125) 高麗史 권137, 列傳, 辛昌 즉위년 8월 左司議大夫李行等 上疏. 126) 위의 책 권120, 列傳, 尹紹宗, 自昔 帝王分天下之民 爲四等曰 士農工商 各世其業 以供上惟士無 所事也 而入學 讀書 修身 正家 事君 治民之道 皆得學焉 而後官之 是以 公卿大夫 未有不盡其職. 127) 金東洙, 앞의 논문(1991) pp.68 69에서 邑格의 陞降과 주민신분과는 관계가 없다고 한 점에서도 그러한 점은 확인될 수 있다. 128) 李成茂, 앞의 책(1980) p.87 참조. 129) 限品敍用 의 내용(李泰鎭, 앞의 논문, 1965 참조)에서 잘 나타난다. 130) 南智大, 朝鮮初期 中央政治制度硏究 (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3) pp.145 224 참조.

- 27 적용되었지만, 문무반의 경우는 家門보다 入仕路의 선택이 班列區分의 기준이었으며, 반 열의 변경은 登科나 准職改班 과 같은 특별한 경우에만 가능하였다. 반면에 限職은 文班職 仕路에 집중적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문반직에 한직이 집중적으 로 설정된 것은 무반이나 남반보다 상대적으로 더 중요한 사로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문반직 가운데서도 文翰職은 두드러진 경우이며, 왕권의 행사와 직접적인 관련을 지닌 臺省政曹가 상피규정이 적용되는 관직이었다는 점은 그것이 권력기구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관료제의 운영과정에서 신분에 따라 관직의 취임을 차등적으로 제한하였던 한직체계 의 구성요소는 세 가지로 대별해 볼 수 있다. 무반직이나 남반직에 비해 문반직의 入仕 路였던 학교의 입학규정이나 과거의 웅시규정, 관직의 취임규정은 그 전형을 보여 준다 고 하겠다. 不忠 不孝 大小功親犯嫁者 身犯私罪者와 같은 개인적인 행위의 瑕疵로 인한 결격사유와 雜類로 통칭되는 職役的 요소, 그리고 鄕 部曲과 같은 地域的 요소였다. 한직의 규정요소로서 세 부문은 等價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그 운영과정은 상당히 달 랐던 것이다. 그 가운데 州府郡縣이나 鄕部曲 등과 같은 일정지역을 하나의 단위로 하는 地域的 要素는 개인적인 결격사유와 雜類로 通稱되었던 職役的 要素까지도 규제할 수 있는 한직체계의 운영과정에 있어서는 보다 중요한 요소였다. 따라서 지역공동체는 사회 구조의 기본단위로 설정되었고 그들을 각각의 단위로 하여 籍이 작성되었던 점도 그러 한 사실이 투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지역공동체는 그 스스로 하나의 단위로서 格을 지니고 있었다. 格이 다른 지역공동체 간의 통합을 가져올 정도로의 지방제도의 개편이나 지역공동체를 떠나 格인 다른 지역 공동체로의 移住는 거의 불가능하였다. 단지 지역공동체를 하나의 단위로 하여 이동하거 나 그 결과로 인한 지역공동체 간의 통속관계의 개편만 가능하였다. 즉, 특별한 이유로 지역공동체의 격이 昇降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지역공동체의 내부구조를 해체하거 나 外延을 붕괴시킬 정도로의 조처는 거의 행해지지 않았던 사실도 그러한 사회구조였 음을 반증한다고 하겠다. 만약 왕조정부로부터 다른 職役이 부여되어 지역공동체인 本貫을 떠날 경우 본관의 격에 따른 직역이 부여되었다. 그리고 동일한 직역을 하나의 단위로 하여 그 직역에 따 른 籍이 다시 작성되며, 각각의 다른 籍들은 氏族을 규정하는 하나의 단위였던 것이다. 이처럼 고려조는 지역공동체를 기본단위로 하는 토대 위에서 姓氏를 매개로 하여 직역 적인 요소들을 운영하였던 것이다. 만약 職役에 編籍된 인물이 어떤 연유로 결격판정을 받으면 지역공동체의 籍에 되돌려졌으며, 그를 歸鄕이나 充常戶刑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한품이나 한직의 규정이 적용되는 인물이 登科나 특별한 경우를 통하여 본인 자신이 이들 규정을 극복하였더라도 그 後孫이 이들 규정의 적용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 28 國史館論叢 第55輯 자신이 속했던 지역공동체가 적어도 州府郡縣으로 승격되지 않으면 성취된 신분의 유지 는 불가능하였다. 이처럼 지역공동체는 나말여초 재편된 이래 고려조 사회의 모든 부문 에서 기본단위로서 기능하였기 때문에 제도나 법제는 물론이고 사상까지도 지역공동체 라는 기본단위의 존재양태와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지 않을 수 없었다. 무신란을 계기로 한직과 한품의 규정은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무신들의 문관직 겸대가 보편화되고, 南班七品의 적용을 받던 인물들에게 參職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러 한 경향은 本貫의 무분별한 加號를 야기하는 원인을 제공하였으며, 對元關係의 전개로 그 러한 경향이 더욱 가속화되면서 지역공동체의 내부구조와 外延 뿐만 아니라 그들간의 統屬 關係도 급속히 붕괴되었다. 따라서 지역공동체는 더 이상 고려조의 기본단위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고, 새로운 기본단위로서 家戶의 존재가 중요시 되게끔 되었다. 종래 지역공동체가 기본단위인 고려전기에 家戶는 地域共同體에 내재되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戶口成籍이 시행되었음을 알려주는 자료 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高麗史 를 비롯한 여러 자료에 戶口變動과 유입된 발해인의 존재가 별로 나타나지 않는 것이나, 計帳이나 總括表가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도 바로 그 점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유민의 발생은 지역공동체를 기본단위로 하였던 고려조의 사회구조가 家戶를 기본단위로 하는 사회구조로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하 는 것이다. 따라서 유민발생의 가속화나 本貫의 無時加號 등은 지역공동체의 내부구조를 해체하거나 외연을 붕괴시키면서 종래 지역공동체에 내재하여 존재하고 있던 家戶가 비 로소 사회구조의 새로운 기본단위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었다. 이처럼 여말선초에 진행된 지역공동체를 기본단위로 하는 사회구조에서 家戶를 기본 단위로 하는 새로운 사회구조로 재편된 결과, 고려조와는 다른 규정을 지닌 限品敍用으 로 바뀌어 갔던 것이다. 따라서 기본단위가 전화되면서 한직체계는 관료제의 운영과정에 서 더 이상 그 기능이 발휘될 수는 없었다. 결국 고려조는 한직을 설정하여 신분에 따라 관직의 취임을 차등적으로 제한함으로써 원만한 관료제의 운영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이 러한 고려조의 한직체계는 신분제에 투영된 불평등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중요한 표징의 하나인 동시에 지역 공동체를 기본단위로 하였던 고려조의 사회구조를 잘 보여 주는 중요한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