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사대부가의 喪 祭 禮 와 廬 墓 生 活 이문건의 黙 齋 日 記 를 중심으로 김 경 숙 * Ⅰ. 머 리 말 2. 家 事 運 營 과 奴 婢 管 理 Ⅱ. 15 16세기 儒 敎 式 喪 祭 禮 의 3. 학문과 자녀교육 보급과 확산 4. 交 遊 와 接 賓 客 Ⅲ. 16세기 이문건가의 모친상과 여묘살이 Ⅳ. 기타 家 族 親 知 喪 과 服 喪 1. 喪 祭 禮 와 爲 先 事 業 Ⅴ. 맺 음 말 Ⅰ. 머 리 말 조선사회는 유교 이념을 국가이념으로 표방하고 이에 근거하여 고려의 불교식 의례 의식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유교식으로 개편하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조선전기를 거치며 유교이념과 유교식 의례는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점차 보급 확산되어 갔다. 유교 식 의례 의식의 확산 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상당한 연구가 축적되었고 1) 상제례에 대해 서도 다양한 측면에서 연구가 이루어졌다. 2) * 서울대 국사학과 강사. 1) 황원구 李 朝 禮 學 의 형성과정 ( 東 方 學 志 6 1963). 고영진 15 16세기 朱 子 家 禮 의 施 行 과 그 意 義 ( 한국사론 21 1989). 고영진 16세기말 四 書 禮 의 성립과 예학의 발달 ( 한국문화 12 1991). 고영진 朝 鮮 中 期 禮 說 과 禮 書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2). 정경희 朝 鮮 前 期 禮 制 禮 學 硏 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0). 2) 지두환 朝 鮮 初 期 朱 子 家 禮 의 理 解 過 程 國 喪 儀 禮 를 중심으로 ( 한국사론 8 1982). 최재석 朝 鮮 初 期 의 喪 祭 ( 奎 章 閣 7 1983). 정긍식 朝 鮮 初 期 朱 子 家 禮 規 範 의 受 容 에 관한 考 察 喪 禮 를 중심으로 (서울대법대석사학 위논문 1988). 안호룡 朝 鮮 初 期 喪 制 의 佛 敎 的 要 素 ( 한국 고중세 사회의 구조와 변동 한국사회사논문 집 11 1988). 고영진 16세기 후반 喪 祭 禮 書 의 발전과 그 의의 ( 奎 章 閣 14 1991). 정종수 朝 鮮 初 期 喪 葬 儀 禮 硏 究 (중앙대 박사학위논문 1994).
116 國 史 館 論 叢 第 97 輯 이러한 일련의 연구성과를 통하여 조선전기 유교식 의례의 정착과정과 시대적인 흐름 이 어느정도 체계적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禮 論 禮 書 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론적이고 당위적인 측면이 강하였다고 하겠다. 이론이나 예법들이 당대의 실제 생활에 어느정도 적용되었고 실행되었는지 그 실상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의례 의식이 구체적으로 거행된 모습을 밝혀줄 자료가 뒷받침되지 못하 였기 때문이다. 여묘살이 또한 조선시대 사대부들이라면 누구나 거행하고 중시한 예법이었다. 여묘살 이는 자식이 태어나서 3년이 지나야 부모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 부모 를 위하여 3년상은 지켜야한다 는 관념에 근거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회와 단절하 고 분묘 곁에서 3년동안 여묘살이를 해야 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따라서 여 묘살이는 효를 실현하는 매우 적극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여묘살이는 고려말 유교식 의례의 하나로 거행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작 유교식 의례의 모범이라 하는 주자가례 에는 보이지 않는 예법이었다. 그러나 예법은 厚 하게 하는 것을 위주로 한다는 원칙에 따라 여묘살이는 조선의 사대부계층을 중심 으로 보급 확산되었고 조선시대 喪 祭 禮 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는 중요한 문 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모습은 전혀 밝혀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며 최근 에야 생활사의 한 부분으로서 여묘살이가 부분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하는 단계이다. 3)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16세기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하다 성주로 유배를 간 李 文 楗 의 묵재일기 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일기는 자료의 특성상 개인의 생활상이 구체적 으로 기록되는데 상장례나 제사 등 의례는 개인의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 문에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는 경향이 있다. 묵재일기 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상제례에 대 한 기록이 매우 풍부하다. 4) 특히 일기의 처음부분은 그가 여묘살이를 하고 있던 동안에 작성하여 여묘생활의 모습이 매우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는 묵재일기 를 중심으로 이문건의 여묘살이를 집중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조선전기 사대 부가에서 거행한 여묘살이의 구체적인 모습에 접근해 보려한다. 3) 김문택 상례와 시묘살이 ( 조선시대 생활사2 역사비평사 2000) 참조. 4) 이문건가의 祭 祀 設 行 에 대해서는 김경숙 16세기 사대부집안의 祭 祀 設 行 과 그 성격 李 文 楗 의 黙 齋 日 記 를 중심으로 韓 國 學 報 98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喪 葬 禮 와 여묘 살이를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16세기 사대부가의 喪 祭 禮 와 廬 墓 生 活 117 Ⅱ. 15 16세기 儒 敎 式 喪 祭 禮 의 보급과 확산 여묘살이는 분묘 옆에 작은 집( 廬 幕 廬 墓 廬 次 廬 所 )을 짓고 脫 喪 할 때까지 분묘를 보살피며 산다는 의미이며 분묘( 亡 者 )를 모시고 산다는 뜻으로 侍 墓 살이라고도 하였다. 여묘살이의 유래는 중국의 孔 子 이전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論 語 陽 貨 章 에서 宰 我 가 3년상은 너무 길다면서 1년상으로 하면 어떻겠냐고 문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공 자는 자식이 태어나서 3년이 지나야 부모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 부모 를 위하여 3년상은 지켜야한다 고 하였다. 공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제자들이 3년 상을 마치고 돌갔는데 子 貢 은 그 뒤로도 3년동안 공자의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추모하 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우리나라는 고려말 주자 성리학의 도입과 함께 유교식 상제례로서 여묘살이가 간혹 거 행되었다. 실제로 주자가례 에는 여묘살이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상제례는 후한 것을 따른다는 원칙에 근거하여 신진유학자들을 중심으로 3년동안의 여묘살이가 수용 확산되 었다. 특히 정몽주 등이 부모상에 3년동안 여묘살이를 함으로써 이들 사이에 모범이 되 었다. 조선건국 직전 태종 이방원 또한 모친상을 당하여 3년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건국이후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사대부들에게 유교식 喪 葬 禮 를 보급해 나갔다. 이 는 조선건국이념에 따라 모든 의례 의식을 유교식으로 교화해가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 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조오례의 에 여묘살이를 명문화함으로써 왕실의 법도로 삼았고 사대부들도 본받도록 하였다. 유교식 상장례를 법제화하는 한편으로 3년상을 치 루고 여묘살이를 행할 경우 정려문을 세우고 표창하는 정표정책을 울러 시행하였다. 그 결과 삼년상과 여묘살이는 사대부가를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어 갔다. 세종 14년 예조판 서 申 商 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이러한 상황을 잘 반영한다. 前 朝 의 사민은 부모상에 있어 달을 날로 바꾸어 3년을 행하지 않는자가 많 만일 무덤 에 여막을 짓고 3년을 지키는 자가 있으면 세상에서 모두 름답다 일컬어 旌 表 하였다. 그 러나 오늘날에는 모두 3년상을 행하고 廬 墓 살이하는 자도 많으며 손가락을 끊어서 病 親 에 게 약으로 드리기도 하며 혹은 佛 事 를 행하지 니하고 가례 에 따른다. 5) 위의 신상의 언급에서 삼년상과 여묘살이가 상당히 보급되어 가고있는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직도 불교식으로 상을 치르는 자가 사대부 10명중 67명이고 유교식 5) 세종실록 권 58 14년 11 28일 계미조.
118 國 史 館 論 叢 第 97 輯 으로 상을 치르는 자는 10명중 겨우 34명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6) 는 기록으로 보 여전 히 불교식으로 상을 치루는 경향이 강하여 양자가 혼용되고 있음을 알 수있다. 성종대까지도 사대부들사이에 여묘살이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상중에 우스갯소리 하기를 평소와 다름없이 하고 더러는 소소한 일을 다투느라 喪 服 차림으로 송사하는 곳에 나가 사람들과 서로 욕설을 하는 폐단이 지적되었다. 7) 그러나 국가의 정려정책에 힘입어 삼년상과 여묘살이는 지속적으로 보급 확산되어 연 산군 대에는 매우 일반화된 모습을 보인다. 즉 삼년상은 비록 권장하는 도리이기는 하 나 자식이 어버이에게나 내가 지비에게는 다 떳떳한 도리가 있으므로 삼년상을 입어 서 마땅히 그 예절을 다해야 할 것이요 특이한 일은 니다 면서 정려의 대상에서 제외하 였다. 이제는 삼년 여묘살이는 喪 葬 禮 로 정착되어 누구나 거행하는 당연한 절차였기 때문 에 더이상 포상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8) 연산군대에 이르면 삼년상과 여묘살이 는 사대부가에서 일반적으로 행하는 喪 葬 禮 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연산군은 상제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는 연산군 11년(1505) 신료 들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며 국상은 달을 날로 바꾸는 중국의 제도에 따라 27일 만에 除 喪 하고 사대부의 상제 또한 중국의 제도를 참작하여 다시 제정할 것을 명하였다. 9) 영 의정 柳 洵 좌의정 朴 崇 質 예조 판서 金 勘 참판 安 允 良 등이 기년복으로 절충안을 제시 하였으나 연산군은 개인적인 효보다는 국정의 운영을 위한 인재확보를 명분으로 내세우 며 27일복을 주장하였다. 10) 起 復 의 경우에 있어서 국가의 입장에서도 奪 情 하여 개운치 못하고 개인의 입장에서도 喪 中 이라 편치 않기 때문에 법으로 短 喪 을 규정해 두면 개 인의 입장에서도 법에 의거하여 억지로라도 복을 벗고 상제에 구애됨이 없이 정사에 나 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연산군은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켜 결국 예조에서 喪 制 를 다음과 같이 議 定 하였다. 1. 士 大 夫 는 27일로 길복하되 장사지내지 못하였으면 행소하고 장사지냈으면 길복하며 그 뒤로는 왕래하는 날짜를 빼고 말미 15일을 주고 練 祭 祥 祭 示 覃 祭 에는 모두 말미 7일을 주고 매 朔 望 에는 말미 2일을 주며 장사 때 및 모든 제사에는 모두 淺 淡 服 을 입는다. 1. 庶 人 은 12일로 길복하며 행소하는 것은 사대부와 같다. 1. 喪 을 들은 것이 다른 지방에서라면 상을 들은 날부터 계산한다. 11) 6) 세종실록 권 55 14년 3 갑자조. 7) 성종실록 권 234 20년 11 12일 병인조. 8) 연산군일기 권 57 11년 1 4일 경인조. 9) 연산군일기 권 58 11년 6 30일 계미조. 10) 연산군일기 권 59 11년 9 25일 병오조. 11) 연산군일기 권 59 11년 9 27일 무신조.
16세기 사대부가의 喪 祭 禮 와 廬 墓 生 活 119 이에 따르면 사대부의 親 喪 은 달을 날로 계산하여 27일 喪 制 였다. 연산군은 이후에도 왕명은 중한 것이니 私 를 따르고 公 을 폐하여서는 안된다 면서 왕명을 엄중히 준수할 것을 전교하였다. 12) 연산군대에 일시적으로 親 喪 이 27일복으로 단축되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대의 대부분의 정사들이 폐지되면서 상제 또한 3년상으로 회복되었다. 이에 따라 중종대 이후로는 사대부가의 삼년상과 여묘살이는 당연하게 받들였고 연산군 대 의 短 喪 은 후대의 사대부들에 의하여 두고두고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 사대부가의 삼년상과 여묘살이는 실제 거행 과정에서 타의에 의하여 중단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였다. 여묘살이 동안 국가의 부름을 받으면 여묘살이를 중단하고 관직 에 나가야 하였는데 이를 起 復 이라 하였다. 기복은 당대인들에게 權 道 로 받들여졌다. 즉 삼년상은 만세의 떳떳한 법이며 기복은 한 때의 變 例 였다. 국가가 위태롭고 어지러 울 때에는 將 相 으로서 국가 安 危 에 관계되는 자가 있으면 奪 情 起 復 하여 일을 맡기는 것 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정되었다. 13) 起 復 은 국왕의 特 旨 로 奪 情 할 경우 가능하였는데 국초부터 服 喪 중에 起 復 하는 사례 는 빈번하게 나타난다. 定 宗 대의 全 伯 英 세종대의 金 宗 瑞 李 邊 李 純 之 朴 彭 年 金 孝 誠 李 仁 和 金 滉 문종대의 李 澄 玉 金 承 珪 등이 모두 起 復 하였다. 그런데 시대가 내려 옴에 따라 起 復 은 너무 빈번하게 적용되는 폐단을 낳았다. 또한 起 復 은 국왕의 特 旨 로 奪 情 하기 때문에 일단 기복의 명을 받으면 국왕의 총애와 국정상의 중요인물임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기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폐단까지 발생하였다. 起 復 의 폐단이 지적됨에 따라 정종 2년에는 臺 諫 의 기복이 금지되었다. 간관은 임금 을 바르게 하고 憲 司 는 백료의 잘못을 고치는 직책으로 자신을 먼저 바르게 한 후에야 임금에게 어려운 일을 책망할 수 있고 풍속을 규찰하여 다스릴 수 있다는 특수한 관직이 라는 점 때문에 대간의 기복을 금하였던 것이다. 선조대에도 사간원에서 임진왜란 중에 기복이 지나치게 성행함을 지적하며 宰 臣 과 武 士 외에는 기복을 허용하지 말 것을 청하 였다. 14) 한편 조선초기에는 삼년상과 여묘살이의 보급과 확산이 어디까지나 사대부계층에 국한 되는 문제였으며 중인 일반 양인 비 등 하층민들은 적극적인 교화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오히려 하층민들에게 3년상을 허용하였을 경우 國 役 에 차질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12) 연산군일기 권 62 12년 5 2일 신사조. 13) 정종실록 권 2 1년 8 19일 병진조. 14) 선조실록 권 37 26년 4 21일 을사조.
120 國 史 館 論 叢 第 97 輯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고 자원하였을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인정하였다. 군인 서인 등 하층민의 喪 制 에 대해서는 속육전 에 시위군사로서 삼년상을 자원하는 자가 있으면 들어준다 는 규정이 실렸다. 이후 세종 13년에 강원감사 高 若 海 가 전들의 삼년상을 허락하여 풍속을 후히 하자고 계청한 것을 발단으로 하층민의 상제에 대한 논 의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 15) 일부에서는 전 시위군사들에게 삼년상을 허용하면 사 역하거나 從 軍 할 사람이 부족하여 侍 衛 가 虛 疎 한 지경에 이를 염려하고 또한 천한 사람 들이 여묘를 살게 되면 처자식의 부양을 돌볼 겨를이 없지 않을까 염려하여 반대하였다. 결국 세종의 의지에 따라 5 5일 상정소에서 水 陸 軍 丁 및 역이 있는 모든 사람과 공사 천인이라도 효성이 지극하여 侍 墓 하기를 자원하는 자에게는 상제를 마치도록 허락한다 고 詳 定 하기에 이르렀다. 16) 이에 따라 군인들의 상은 법제적으로는 100일상으로 규정되었 으나 본인이 自 願 할 경우에는 3년상을 거행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경국대전 에도 이 규정은 그대로 실려서 군사와 서인은 100일복을 입도록 하였으나 삼년상을 행하기를 원하는 자는 허락 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런데 軍 人 의 경우에는 국가의 방위 안위와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계속 논란이 되었다. 특히 법전의 규정과 달리 실제적인 시행과정에서 본인이 3년상을 행하기를 원하 는 자가 있어도 국방상의 이유로 수령이 억지로 從 軍 하도록 강요하였기 때문에 군인들의 3년상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다음의 기사는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예조에서 正 兵 裵 孝 孫 의 上 言 에 의거하여 뢰기를 경국대전 에 3년상 행하기를 원하 는 자는 들어주게 하였는데 수령들이 억지로 從 軍 하게 하는 것은 법의에 어긋남이 있다. 청 컨대 3년상 마치기를 원하는 자는 모두 원하는대로 따르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7) 朱 溪 副 正 深 源 이 上 書 하여 근래 고을에서 군사를 징발하는데 비록 親 喪 을 당하여 3년상 을 행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어도 모두 奪 情 起 復 한다고 하니 심히 름다운 일이 닙니다. 18) 이와같이 군인들의 3년상이 잘 시행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 문제가 되자 군인들의 喪 制 가 다시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성종 14년 1 16일 경연에서 헌납 李 從 允 이 군사의 喪 制 를 100일로 한정한 것을 大 典 에 싣지 말자고 함으로써 논의를 제기하였다. 이에 대 하여 領 事 尹 弼 商 은 이는 이미 오래되었는데 만약 상제를 3년으로 하게 되면 방어하는 것이 허술해질 것입니다 면서 국방상의 이유를 들어 현실적으로 시행되기 어렵다고 주장 하였다. 19) 15) 세종실록 권 52 13년 3 12일 병자조. 16) 세종실록 권 52 13년 5 5일 무진조. 17) 성종실록 권 14 3년 1 24일 신유조. 18) 성종실록 권 91 9년 4 8일 기해조.
16세기 사대부가의 喪 祭 禮 와 廬 墓 生 活 121 중종대에도 군사의 삼년상이 폐지되어 자원하여도 거행되지 않는 상황이 계속 문제가 되면서 중종 11년에 서인의 3년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교를 내렸다. 삼년상은 누구나 모두 거행하는 매우 름다운 일이다. 다만 대신들의 의논이 한결같지 못하여 더러는 폐단이 생겨 거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기 때문에 지금 모두 거행하도록 하지 못하나 대전 에 삼년상 거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들어주는 법이 있으니 비록 서민이라 하더라도 거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법에 구애받지 말고 들어주도록 하라. 결국 서인 군인의 삼년상은 國 役 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법으로 규정하지 못하고 다만 自 願 할 경우에는 허락하는 데서 합의가 되었다. 이는 경국대전 의 규정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법전의 규정을 엄격히 준수할 것을 다시한번 확인하는 정도였다. 향리 전들의 경우에도 3년상은 허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親 喪 을 핑계삼 한가히 놀게되어 奸 僞 한 짓을 막기 어려울 것임을 염려하여 각 고을 수령들이 효성의 사실과 喪 期 를 지키며 슬퍼하는지의 여부를 분간하여 성의가 없이 향리의 役 事 만 피하기를 꾀하는 자는 100일 뒤에 향리역으로 돌려보내고 엄히 推 考 할 것을 명하였다. 20) 향리의 3년상은 수령의 엄격한 통제하에 있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일반 하층민들의 삼년상은 법제적으로 보장된 것이 니라 본인이 自 願 할 경 우에 한해서 허락하는 정도였고 군인이나 향리같은 國 役 담당자들의 경우에는 國 益 의 명 분 래 실제적으로 많은 제약이 따랐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중종대 이후로 삼 년상과 여묘살이는 사대부계층에서는 매우 일반화된 현상이었으며 일반 하층민들에까지 점차 확산되는 단계라고 하겠다. 다음 장에서는 중종~명종대를 살았던 李 文 楗 의 黙 齋 日 記 를 중심으로 16세기 사대부가의 실제적인 여묘살이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Ⅲ. 16세기 이문건가의 모친상과 여묘살이 이문건은 1535년(중종 30) 1 5일 모친상을 당하였다. 모친 高 靈 申 氏 는 漢 城 府 判 官 을 지낸 申 澮 의 딸로 外 祖 는 監 司 金 自 行 이다. 형제관계는 2남 3녀로 남자형제는 承 濬 承 澡 이고 여자형제는 언니가 안동김씨 金 克 銛 의 妻 여동생은 안동권씨 參 奉 權 振 의 妻 이다. 그녀는 1463년(세조 9) 3 서울에서 태어나서 16세 때인 1478년(성종 9)에 한 살 위인 李 允 濯 과 혼인하여 2녀 3남을 두었는데 문건은 막내들이었다. 모친은 39세 때인 1501년에 남편을 여의고 홀로 자식들을 키웠고 1535년 1 5일 73세로 세상을 19) 성종실록 권 150 14년 1 16일 기유조. 20) 중종실록 권 15 7년 3 1일 병오조.
122 國 史 館 論 叢 第 97 輯 떠나 楊 州 盧 原 栗 伊 岾 에 안장되었다. 21) 모친이 세상을 떠날 당시 형들과 둘째누나는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고 생존한 자식 은 문건과 청파에 사는 큰딸 뿐이었다. 따라서 문건은 모친상을 주관하여 처리하였고 長 孫 인 조카 輝 들 熅 과 함께 원(지금의 서울시 원구 중계동)의 분묘 곁에서 3년동 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묵재일기 는 이문건이 모친상으로 여묘살이를 하던 도중인 1535 년 11 1일부터 시작하고 있기 때문에 모친을 安 葬 하기까지의 상장례에 관한 의례절차 는 파악할 수 없지만 이문건의 여묘생활은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여묘살이를 하는 동안 관직자는 현직에서 물러나 부모 묘소 옆에 기거하면서 술 고 기 오락 등을 멀리하고 근신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집안일과 사회생활에서 완전 히 단절된 생활을 한 것은 니었다. 이문건 또한 여묘살이 동안 家 事 운영은 물론 교유 관계와 접빈객을 유지하면서 비교적 여유있고 자유로운 생활을 하였다. 다음에서는 일기 를 중심으로 이문건의 여묘살이를 喪 祭 禮 家 事 運 營 학문 및 자녀교육 교류 등의 몇가 지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겠다. 1. 喪 祭 禮 와 爲 先 事 業 여묘살이 동안 그는 喪 中 人 으로서 매일 침저녁의 哭 上 食 과 매 1일과 15일의 朔 望 祭 그리고 설날 한식 단오 유두 칠석 추석 중양절 동지 등의 절일제를 거행하였 다. 이와 함께 여묘살이 동안 素 食 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다. 그는 朔 望 祭 와 節 日 祭 등의 중요한 제사는 빠짐없이 정성껏 거행하였지만 일상적인 침저녁의 哭 과 上 食 에는 건강 을 이유로 불참하는 일이 잦았다. 小 祥 (1536년 1 5일)을 거행하기 전의 상황을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 <표 1>과 같다. <표 1>은 묵재일기 에서 上 食 이나 哭 을 거행하지 않았다고 밝힌 기록에 의거하여 작 성하였다. 시기는 小 祥 을 치루기 전으로 여묘살이의 전반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소상이 후보다는 상대적으로 여묘생활에 충실하였다고 할 수 있는 기간이다. 그런데 표에 의하면 이문건이 매일의 朝 夕 奠 哭 禮 를 성실하게 거행하였다고 보기 어 렵다. 1535년 11에는 그가 조석 상식과 곡을 모두 거행한 날이 4일에 불과하였다. 그 중에서도 11 21일과 22일은 輝 가 入 京 하고 혼자서 守 廬 하였던 사실을 고려한다면 상 황은 더욱 악화된다. 12에는 조석상식과 곡을 모두 거행한 날이 9일 하루에 불과하다. 더욱이 대부분의 날을 여묘를 떠나 서울의 집에서 지냈다. 21) 이에 대해서는 김경숙 16세기 사대부 집안의 제사설행과 그 성격 李 文 楗 의 黙 齋 日 記 를 중심으로 를 참조.
16세기 사대부가의 喪 祭 禮 와 廬 墓 生 活 123 <표 1> 이문건의 奠 哭 禮 거행 상황 날짜 침 저녁 날짜 1535.11 上 食 哭 上 食 哭 1535.12 上 食 哭 1 入 京 1 朔 祭 2 2 저녁 3 3 4 4 5 5 6 還 廬 6 7 7 8 8 9 9 10 10 入 京 11 11 12 12 13 13 還 廬 14 14 15 望 祭 15 望 祭 16 16 17 17 침 入 京 18 18 19 19 20 輝 入 京 20 21 21 22 22 23 輝 還 廬 23 24 24 25 25 26 26 27 27 28 28 29 29 還 廬 30 침 그는 奠 哭 에 불참하는 이유를 氣 不 平 이라고 기록하여 건강상의 문제를 이유로 들었 다. 그가 건강을 해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당시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젊지 않은 나이로 시설이 미비한 여묘에서 생활한다는 것이 여러가지 점에서 불편하였을 것이 다. 더욱이 추운 겨울에 접어들면서 여막 생활을 견뎌내기가 더욱 힘들었고 잦은 감기로 인하여 건강을 해치게 되었다. 결국 고령의 나이로 불편한 여묘에서 겨울을 지낸 것이 건 강을 해치게된 중요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여묘생활을 지속하기 위한 최소한의 체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상중임에도 불구 하여 여러 약물들을 복용하였다. 11에는 海 松 子 人 蔘 湯 治 中 湯 守 中 金 丸 등을 복
124 國 史 館 論 叢 第 97 輯 용하였고 12 5일에는 本 宅 에서 人 蔘 順 氣 散 5 服 을 보내와 복용하였다. 그러나 여묘살 이의 후반기로 갈수록 이문건의 건강은 더욱더 악화되어 여묘를 떠나 서울의 집에서 調 攝 을 하는 일이 잦졌다. 이듬해 겨울은 대부분의 기간을 여막을 떠나 서울에서 지 냈다. 그는 여묘생활 동안에도 가끔씩 여묘를 떠나 서울에 출입하였다. 서울에 가는 이유는 주로 건강이 악화되어 調 攝 하기 위해서 그리고 喪 祭 禮 에 관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였 다. 함께 여묘를 지키고 있던 조카 李 輝 또한 喪 祭 禮 家 內 事 등을 이유로 여묘를 떠나 서울에 출입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문건과 이휘가 여묘살이 동안 서울에 출입한 기 록을 모 <표 2>로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표 2> 이문건과 이휘의 離 幕 상황 回 次 이문건의 離 幕 휘의 離 幕 날짜 및 기간 사 유 날짜 및 기간 사 유 1 1535.11.1~6(6) 貿 遷 葬 棺 次 1535.1.20~23(4) 擇 板 事 (천장용 棺 板 ) 2 12.10~13(4) 見 遷 朴 墉 墓 次 往 檜 庵 1536.2.8~10(3) 告 改 葬 事 于 家 祠 次 3 12.17~29(13) 遷 葬 事 調 攝 次 2.10(1) 祖 父 墓 遷 葬 次 往 塋 洞 4 1536.1.10~22(13) 遷 葬 外 槨 製 作 次 2.19(1) 舊 墓 掘 土 處 整 理 次 5 2.10~11(2) 父 親 墓 遷 葬 次 往 塋 洞 2.24~27(4) 父 親 忌 祭 擧 行 次 6 2.20~24(5) 行 告 事 畢 祭 于 中 堂 次 3.5(1) 行 朴 宅 ( 朴 壅 妻?) 祭 次 往 塋 洞 7 3.1~4(4) 議 決 嫁 娶 石 物 等 事 次 3.9~11(3) 探 推 碣 石 次 往 檜 庵 8 3.28~29(2) 爓 의 法 司 囚 禁 事 3.12~14(3) 呈 刑 曺 推 碣 次 9 5.10~10(1) 崔 都 事 返 魂 事 3.24~27(4) 父 의 外 祖 妣 忌 祭 擧 行 次 10 6.11~14(4) 誌 文 請 託 次 4.1(1) 謁 城 主 次 入 州 11 7.28~30(3) 婦 人 病 患 看 護 次 4.7~9(3) 因 事 12 8.16~19(4) 祖 妣 忌 祭 擧 行 次 5.16~18(3) 母 親 忌 祭 擧 行 次 13 9.27~10.19(23) 건강악화로 調 攝 次 6.17~20(4) 推 槨 板 次 14 11.3~13(11) 調 攝 次. 7.6~11(6) 修 補 本 家 謀 嫁 妹 等 事 次 15 12.2~윤12.13(41) 病 不 差 調 攝 次 7.15~26(12) 看 護 叔 母 (이문건처) 病 次 16 1537.1.5: 大 祥 서울로 돌감. 8.1(1) 推 失 物 事 17 8.12~14(3) 父 의 養 曾 祖 忌 祭 擧 行 次 18 8.21(1) 挾 率 箕 星 次 이문건이 보냄 19 9.23~30(8) 看 穫 次 往 通 津. 서울 경유 20 10.7~8(2) 欲 勸 肉 汁 于 李 文 楗 次 21 11.19~25(7) 作 松 葉 酒 次 往 檜 庵 22 1537.1.1~.3(3) 改 題 神 主 祭 擧 行 次 1537.1.5: 大 祥 서울로 돌감 * ( )는 離 幕 한 기간을 나타냄. * 入 京 인 경우에는 행선지를 표시하지 않았음.
16세기 사대부가의 喪 祭 禮 와 廬 墓 生 活 125 위의 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1535년 11부터 1537년 1까지 14개 동안 이문건 은 15회 이휘는 22회로 평균 한달에 한 두차례 정도 여묘를 떠났다. 여묘를 비운 기간 을 모두 합하면 이문건이 136일로 4개여 휘는 88일로 3개에 달하였다. 이는 전체 14개의 1/3~1/5에 해당하는 기간이었다. 여묘를 떠난 사유는 주로 부친묘 遷 葬 에 관 한 일을 처리하거나 祭 祀 를 거행하는 등의 상제례와 관련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 밖 에도 건강문제 家 內 事 등이 확인된다. 여막을 비우는 날이 잦았다는 것은 그들이 비교적 여유있고 융통성있고 자유롭게 여 묘생활을 운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두 사람의 마음자세가 안일하였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여묘를 떠난 이유가 상제례 건강문제에 집중되는 현상은 오히려 두사람이 매우 정성스럽고 성실하게 여묘생활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특히 위의 표에 의하면 여묘살이가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이문건은 매우 빈번하고 장 기적으로 여묘를 비우고 있다. 이는 오랜 여묘생활 때문에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기 때문 이었다. 그는 1536년 9 27일 건강이 매우 좋지 않서 調 攝 을 위하여 서울로 올라갔 다. 그가 서울의 집에서 약물을 복용하며 調 治 하고 있던 동안에 이휘는 일부러 다른 사 람의 말을 빌려타고 새벽같이 상경하여 肉 汁 을 권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거절하고 받들 이지 않았다. 22) 그는 理 中 湯 蟠 葱 散 守 中 金 丸 등의 약물을 복용하면서 어느정도 몸을 추스린 후 다음달 19일에 蘆 原 의 여묘로 돌갔다. 그러나 그의 병세는 나지지 않고 계속 악화되어 11 3일에 다시 서울로 올라가 10여일 동안 자신의 집에 머물며 병조리를 하였다. 그는 자신이 서울에 올라와 있는 것 이 못내 마음이 불편하여 대신 들 箕 星 을 원으로 보내 휘와 함께 여묘를 지키게 하 였다. 11 13일에 여묘로 내려간 이문건은 한달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12 2일에 다 시 서울로 올라올 수 밖에 없었다. 이문건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는 상황에서 이휘는 숙부의 건강을 염려하여 몸에 좋 다는 松 葉 酒 를 만들기 위하여 11 19일에는 檜 庵 寺 에 까지 다녀왔고 다음달 4일에 비 守 孫 夜 叉 를 시켜 松 葉 汁 을 구해와서 松 葉 酒 를 빚어 12 8일에 有 山 을 통하여 서 울로 올려보냈다. 이문건은 술이 익기를 기다렸다가 12 12일부터 송엽주를 복용할 수 있었다. 23) 그는 다음달 13일까지 한달이 넘도록 서울에 머물고 있었는데 당시의 민망하 고 애절한 마음을 산소에 나가지 못하니 포한이 될 뿐 24) 이라고 일기에 토로하였다. 22) 1536년 10 7일 煇 欲 勸 我 肉 汁 凌 晨 入 京 借 着 命 同 馬 率 其 人 以 來 勤 喩 食 治 之 理 姑 以 不 至 於 極 故 不 許 焉 ;연일은 묵재일기 에 기록된 날짜로 이후로도 이에 준함. 23) 1536년 12 4일 輝 令 守 孫 夜 叉 等 負 輸 松 葉 汁 早 到 遂 釀 松 葉 酒 ;8일 有 山 持 松 葉 酒 入 還 ;11일 松 酒 已 熟 明 日 上 槽 ;12일 始 服 松 葉 酒. 24) 묵재일기 권 1 1536년 12 15일 留 京 調 疾 不 得 出 山 所 抱 恨 而 已.
126 國 史 館 論 叢 第 97 輯 한편 이문건은 여묘살이 중에 楊 州 塋 洞 의 부친묘를 遷 葬 하는 사업을 추진하였다. 塋 洞 이 왕실의 墓 域 에 수용되어 國 用 으로 쓰이게 된 관계로 1536년 2에 이장하여 盧 原 栗 伊 岾 의 모친 분묘와 합장하였다. 25) 이를 위하여 그는 목재를 구하고 목수를 물색하는 한편 목재의 수송 건조 송진 칠하기 등의 작업에 이르기까지 직접 철저하게 관리하였 다. 또한 묘역의 관리와 석회 잡석 등의 수급과 수송 등의 작업을 오랜 기간에 걸쳐 수 행하였다. 먼저 그는 1535년 11 1일 遷 葬 시기를 결정하고 棺 을 마련하기 위하여 入 京 하였다. 그는 歸 厚 村 에서 棺 板 을 구입하여 제작하였는데 실질적인 일은 安 繼 孫 에게 맡겼다. 그는 12 17일 다시 서울에 올라가 작업의 진척상황을 점검하였다. 26) 이후 10여일 뒤에 다 시 직접 貴 厚 所 에 가보니 內 棺 은 거의 완성단계였고 圍 板 과 뚜껑은 완성되었으나 本 板 으로 사용할 목재를 직 구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27) 안계손은 다음해 1 10일에 內 棺 을 완성하여 가져왔다. 그러나 이문건은 이틀 후에 내관의 本 板 이 좋지 않다고 교체할 것 을 요구하였다. 28) 內 棺 이 대강 완성된 후 外 槨 을 제작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작업은 서울의 苧 洞 家 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는 外 槨 제작을 위하여 1536년 1 10일에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중도에 楊 州 牧 使 에게 잠시 들러 천장할 때 軍 丁 雜 事 를 도와 줄 것을 청탁하였다. 槨 板 은 안계손이 지난 10일 내관과 함께 가져왔는데 승정원 사령이 데려온 木 手 2사람이 판자 를 보고는 쓸만한 것이 전혀 없다고 하였다. 결국 李 世 明 家 에서 판자 2 葉 을 빌리고 13일 부터 외곽 제작 작업에 들어갔다. 29) 15일에 외곽이 대강 완성되어 목수들은 돌갔다. 그런데 薄 板 을 제작하고 작업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木 手 를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 다. 1 17일에 參 判 權 景 信 에게 木 手 를 청하였고 18일에는 別 坐 趙 瑾 에게 목수를 청하 여 牌 字 를 받왔다. 19일 牌 字 에 근거하여 목수를 불렀으나 목수가 즉시 오지 않 작 업이 며칠 지체되었고 결국 21일에야 薄 板 이 완성되었다. 이문건은 內 棺 外 槨 薄 板 제 작을 모두 마친 후 다음날 22일 여묘로 다시 내려갔다. 한편 그는 관곽 제작과 동시에 천장례를 잘 치루기 위하여 다른 집의 遷 葬 事 를 직접 25) 黙 齋 集 권 6 啓 功 郞 權 知 承 文 院 副 正 字 公 ( 李 允 濯 :필자주) 墓 碣 誌. 26) 묵재일기 권 1 1535년 12 18일 簡 問 安 繼 孫 處 棺 板 事 則 時 不 整 齊 云 云. 27) 묵재일기 권 1 1535년 12 27일 投 貴 厚 所 則 安 繼 孫 亦 來 訪 我 寧 越 板 主 張 萬 千 亦 來 現 乃 投 見 所 造 遷 葬 所 用 內 棺 則 圍 板 已 鍊 而 合 之 盖 亦 備 在 本 板 時 無 云 云. 28) 묵재일기 권 1 1536년 1 10일 安 繼 孫 輸 送 內 棺 一 槨 板 二 葉 來 置 之 12일 安 繼 孫 處 通 內 棺 本 板 不 好 事 則 明 日 換 以 他 板 送 人 輸 去 云 云. 29) 묵재일기 권 1 1536년 1 11일 當 午 政 院 使 令 率 木 手 二 人 而 至 盡 出 板 子 以 看 無 可 用 者 卽 率 木 手 馳 往 李 世 明 家 請 貸 之 擇 好 以 許 二 葉 哀 感 罔 極 也 着 表 而 還 木 手 等 饋 酒 送 之 令 明 日 早 來 始 事 焉 ;13일 留 苧 洞 家 看 槨 事 木 手 等 始 役 焉.
16세기 사대부가의 喪祭禮와 廬墓生活 127 람 험 檜庵 豆乙彦家 朴墉 遷葬 람 돌왔 곽 무 본 천 준 楊州목 움 車夫 저 棺板 薄板 隅板 塋洞 옮겼 梁且 맡 輝 槨板 송 칠 改斂 필 복 衆伊 내왔 런 복 버 띠 맘 흡족 돌 내 천 임 휘 祠堂 改葬事 移葬 啓壙 밤 터 낮무렵 속눈 내 운 돌 신 魂魄 쩔 없 暴露 애 신 막 돌 祭廳 成殯 터 墓域 穿壙 壙 物 寸 께 깔 송 텁 바른 外槨 설 物 채워넣 窆禮 平土 中堂 事畢祭 든천 무 천 운겨 씨 왕 스럽 밀 천 떠 천 명 드 런 朴墉墓 천 申珽 家禮儀節 빌 천 抄錄 내 볼 천 家禮儀 節 각 합 墓碣 웠 글씨 신 새겼 갈 새 천 터 관 함으로써 경 을 축적하였다. 그는 12 10일 에 가서 에서 자고 다 음날 의 을 직접 관 하고 여묘로 다.30) 관 제작이 마 리 된 후 격적인 장 비에 들어갔다. 2 2일 사의 도 을 받 를 동원하여 서울 동가에서 을 으로 다. 이 때 비 가 일을 처리하였고 는 에 진을 하였다. 그리고 이문건의 처는 할 때 요한 의 을 마련하여 편에 보 다. 그 데 의 선 등이 그의 에 하지 않 마음이 상하였으며 이들을 려보 다시 마련하게 하였다.31) 장 일에 박해서는 가 서울에 올라가 에 를 고하였다.32) 을 위한 은 1536년 2 11일에 이루어졌다. 그날은 전날 부 까지 계 이 려 매우 추 날이었다. 이문건은 그날의 상황을 일기에 매우 상세하게 기록 하면서 가 부친의 이 형편상 어 수 이 다시 세상에 된 것을 극히 통해 하였다.33) 그날 부친의 시 을 모시고 원의 여 으로 와 에 하였다. 12일부 15일까지는 원의 에서 작업을 하였다. 래에는 3 을 2 3 정도 두 로 고 그 위에 진을 두 게 을 치하고 3 을 었다. 그 리고 2 17일에 를 거행하고 19일까지 작업을 마친 후 이문건은 20일에 서울 에 올라가 서소문가의 에서 를 거행함으로써 모 장 절차를 마 리하였다. 이문건은 부친 묘를 장하는 과정에서 매우 추 울 날 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수 시로 래하면서 매우 정성 고 치 하게 장일을 처리하였다. 그가 어 한 예법에 의거하여 장의 절차를 진행하였는지는 분 하게 러나지 않는다. 그 데 를 장할 때 그는 의 집에서 을 려와 장에 관련된 부분을 하여 보 었음이 확인된다.34) 그 사실로 미루어 때 그는 부친의 경우에도 장절차를 에 근거하지 않았을까 생 된다. 이문건은 부모묘를 장하고 분묘에 을 제작하여 세 는데 비석의 를자 이 직접 다. 묘 을 기는 작업은 부친묘를 장하기 이전부 미리 진행되었다. 묵재 권 1 1535년 1210일 曉服正氣散 朝上食後 哭辭之 遂行投長水院權哲同家 炊 食食之 秣馬往檜庵豆彦家止宿 以明日見遷墓事也 與朴諫同宿. 31) 묵재일기 권 1 1536년 2 3일 婦以改棺衣服等物 付以衆伊出送 甚麤 且不具其緣粧者多 布襪亦不整 帶亦不長而短 卽令年孫 付襪及帶入送 使改之 且備送衣服緣粧事 通曉 又令送吾貼裏 一領事 心甚動傷 食不下咽 夕不敢食焉. 32) 묵재일기 권 1 1536년 2 8일 煇午入京 以告改葬事于家祠也. 33) 묵재일기 권 1 1536년 2 11일 但先人體魄暴露 極傷痛 只以勢不得 仍存水濕 故忍而爲 此焉. 34) 묵재일기 권 1 1535년 12 18일 借申珽家禮儀節 抄錄遷葬禮文 19일 曉送遷葬禮抄 記于本宅 俾傳山所. 30) 묵재일기
128 國史館論叢 第97輯 墓碣面 몇글 새겼 왼쪽 무릎 난 갈 새 離幕 몸 스 갈 새 완 靈碑 새 글 글 銘文 일기 에는 1535년 11 27일 분묘에 올라가 에 자를 다. 이 시리다 고 하여 처음으로 기록이 나타 다. 묘 을 기는 작업은 하루에 두세자 정도로 매우 고되고 은 기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그는 하거나 이 불편한 때를 제 하면 매일 하게 작업을 하였다. 그는 부모를 추모하고 효를 다한다는 정성 러 마음가 으로 작업에 전념하여 그 기간동안 그의 여묘생활은 묘 문 기는 일이 대 부분을 차지하였다. 그 결과 1536년 17일 절반정도를 성하고 한달 후인 4 16일에 작업을 성할 수 있었다.35) 특히 의 옆면에는 라고 기고 그 래에는 한 로 비라 거 사 화 리라 이 모 사 려 알위 라 라는 을 비석의 을 경계하였다. 기는 작업이 나자 그는 비석을 이 고매 게 다 은 다음에 을 다. 주위의 사 들도 와서 을 갔다. 4 21일에는 과 이 25일에는 과 등이 27일에는 가 와서 을 하여갔다. 그 비석은 현재까지 원구 중 계동에 라는 이름으로 전하고 있다. 한편 이문건은 장과정에서 를 비 하여 인근지역 지방관들에게 도 을 요 하였고 실제로 은 도 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의 도 은 절대적이어서 1536년 1 26일에는 100 2 1일에는 5 를 보 주었고 2 9일에는 27 2 10일에는 40 을 보 다. 이 에도 에 서 을 지원하고 에서 을 지원하였다.36) 이문건이 성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에도 성주 사나 관이 제사 거행을 위하여 제수 제기 등 여러 품과 요한 인 을 지원하였다. 이문건 측에서 미리 요 하는 경우도 있었다.37) 당시 지방관에서 관직자 사 가의 상제례를 지원하는 일은 어느정도 되어 있었 다. 경우에 따라서는 관의 지원이 지나 서 를 야기하기도 하였다. 종대 이경 기 사로서 모친상을 당하여 에 와 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고을 성들에게 역을 지 매우 심하게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조정에서 그 단을 할 방법을 논 38) 의하기에 이 다. 이와 이 관에서 관직자 사 가의 상제례를 지원하는 일은 일차 적으로는 개인적인 친분관계가 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에서 나라의 근간이 되는 사대부들의 안정과 유지를 위하여 관례적으로 지원하고 배려하는 측면도 고려하여 야 할 것이다. 더욱 외 운 짐 꾸준 많 완 墓碣 녕 운 니브 새겨 훼손 새 끝 깨끗 씻 끄럽 듬 탁본 떴 람 탁본 떠 慶應 壽應 天綠 文 應 趙興祖 碣文 탁본 靈碑 천 楊州牧使 롯 움 청 많 움 楊州牧使 움 空石 番 軍糧米 斗 내 造墓軍 명 延番軍 명 냈 밖 利川 水原 陽根 抱川 軍糧 廣州 造墓軍 목 판 물 필 력 청 족 常例化 쳐 민폐 명 沈銓 감 金浦 墳墓 廬幕 백 워 독촉 폐 혁파 르렀 같 족 크 35) 36) 37) 38) 권 1 1536년 3 17일 與煇共守廬 刻碣 始得刻到一半 4 16일 畢刻碣. 권 1 1536년 2 4일 金應卿答簡 軍糧則利川水原楊根抱川 造墓軍則楊廣州云云. 이에 대해서는 김경숙 16세기 사대부 집안의 제사설행과 그 성격 참조. 명종실록 권 31 20년 2 30일. 묵재일기 묵재일기
16세기 사대부가의 2. 喪祭禮와 廬墓生活 129 家事運營과 奴婢管理 떠 막 일반적으로 여묘살이를 하는 동안에는 집을 나 여 에서 거처하기 때문에 사회적인 활동과 대부분의 일상적인 생활이 단절된다. 그러나 최소한의 영까지 하게 단 절되는 것은 어서 전 의 등을 점 하고 비들을 관리하고 을 받 들이는 등의 일은 계 되었다. (1542 1612) 또한 1578년 모친상을 당하여 여 묘살이를 하던 중에도 비들이 전 에 김매는 일이라 지 보리타작하는 일 등 사일 을 보고 기록한 것을 간일기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문건은 장에서 살펴보았 이 여묘살이 기간동안 서울의 집을 자주 래하며 가 사를 처리하였다. 여묘에서 요한 생 품들은 대부분 서울의 집에서 조달하였고 의 까지 서울에서 수 하여 다. 이때 서울과 원의 여묘를 래하며 소식을 전하고 품을 반하는 등의 제반 사 들은 모두 동 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한편 이문건이 여 에서 서울의 를 위하여 가장 세심하게 살 부분은 나 를 급하는 일이었다. 분묘 옆에 거주하였던 관계로 하고 있는 에서 나 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과 원을 래하면서 나 를 수 하는 는 대부분 ( ) 이 당하였다. 급하는 나 의 양이나 시간적인 간격 도는 확하게 러나지는 않지만 비교적 기록이 실한 1536년 여름에서 울까지의 기간을 정리하 면 다음과 다. 家事 운 니 완벽 身貢 답 播種 收穫 검 속 李庭檜 답 든 농 돌 송 앞 듯 왕 필 필 朔望 祭 祭需 송 왔 왕 물 운 항 奴婢 력 막 苧洞家 핀 땔 무 공 守護 松楸 땔 무 採取 왕 땔 무 송 임무 奴守水孫 담 공 땔 무 빈 명 드 충 늦 겨 같 <표 3> 횟수 땔나무 수송상황 짜 날 1 2 3 4 총횟수 7 8 9 10 5일 11일 24일 4일 9일 16일 29일 4회 6일 11일 26일 28일 17일 28일 2회 1회 1회 2회 3회 횟 각 墳山 겨 철 른 11 6 12 6일 9일 14일 30일 4회 없 땔 위의 표에 의하면 수와 시간적인 간격이 일정하지 않 단정할 수 지만 7 과 12 의 상황이 실제 모습에 가장 가 지 않을까 생 된다. 에서 서울의 집에 나 를 수 하는 작업은 매달 45차례 정도로 57일의 간격으로 수 하지 않았을까 추 정해 다. 이 경우에도 나 가 이 소요되는 울 과 다 계절에는 차이가 있었을 무 본 송 땔 무 많 깝 송
130 國史館論叢 第97輯 것이다. 이 에도 서울의 집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나 를 당하였다. 비들이 으로 나 를 하기도 하였는데 1536년 11 12일 이 을 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에 을 위해 나 를 가져 는 경우가 있다. 특히 이문건이 양주에서 여묘살이를 하고 있었고 양주 사와 친분이 두 기 때문에 양주 사에게 하는 편 지를 부 하는 경우가 았다. 예를 들면 이문건이 건강 화로 서울에 올라와 하고 있던 중인 1536년 10 14일 원에 사는 이 나 1 를 가지고 와서 양주 사에 게 편지 한장 써줄 것을 하였다. 을 하였는지는 확하지 않지만 나중에 산소에 39) 나가서 써주겠다고 일러서 보 다. 그 12 27일에는 에 사는 이 나 1 를 가지고 와서 마찬가지로 에게 편지 한장 써줄 것을 하였다. 그의 의도 는 의 역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문건은 나 는 받았으나 편지는 써주지 않았 다.40) 이처 의 대부분은 이나 와 관련된 일이 았으며 이문건은 상황에 따라 자 이 해결해줄 수 있는 경우에는 거절하지 않고 도 을 주었다. 의 선 또는 등의 방법으로 나 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라는 사 이 1535년 12 29일 를 보 고 다음해 2 2일에도 나 1 를 보 다. 그가 어 한 사 인지 확하게 러나지는 않지만 이문건의 (평생의 을 기록 41) 한 ) 을 고 이문건 부친묘를 이장할 때에도 를 거행한 사실로 미 루어 때 과 관련된 사 으로 추정된다. 그는 나 만 라 가 소 식 등의 여러 건들을 보 다. 이와 이 이문건은 여묘살이동안 분산 곁에 살면서 서울의 집에서 사용할 나 를 급하는 일을 세심하게 살 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당시 사대부가에서 나 를 당하 는 주요 통로는 선조의 분묘가 있는 에서 비 동 을 이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 다. 그 에도 부분적으로는 의 선 이나 등의 방법으로 나 를 급받았으 며 전적인 대가를 치루고 매 하는 경우가 보이지 않는 점이 주 된다. 한편 상중이라 하 라도 리고 수확하는 등의 사와 관련된 사 들은 소 히 할 수 었다. 지에서의 소 이 주된 수 원인 경사회에서 전 과 경작자를 관리하고 사의 진행 상황과 수확을 점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이문건가의 전 은 등지에 소재한 것들이 확인되며 분산 근처에서는 로 전 밖 땔 무 納付 외 청탁 땔 무 충 身貢 奴 林同 薪貢 바 땔 무 오 목 터웠 목 청탁 탁 많 악 調攝 莫山 땔 무 駄 목 청 무엇 청 명 냈 뒤 盧原 石萬 땔 무 駄 楊州牧使 청 立馬 감 땔 무 럼 청탁 賦役 國稅 많 신 움 他家 물 貸用 땔 무 충 鄭興祖 람 柴駄 냈 땔 무 駄 내왔 떠 람 명 드 編年錄 운명 책 쓰 后土祭 土地神祭 볼 占術쪽 람 땔 무 뿐 니 끔씩 채 곡 물 내왔 같 땔 무 공 폈 땔 무 충 墳山 력 밖 他家 물 貸用 땔 무 공 금 입 목 더 씨뿌 농 항 홀 없 토 출 입 농 답 농 검 답 盧 原 通津 礪山 忠州 槐山 새 운 39) 묵재일기. 40) 묵재일기. 41) 묵재일기 敎送 納之 권 1 1536년 10 14일 盧原人莫山 以一駄薪來納 求楊州了狀 許出山所爲之事 권 1 1536년 12 27일 盧原石萬納薪一駄 欲得楊州簡減立馬云云 不許焉 薪卽 권 1 1535년 12 13일 鄭興祖所爲編年錄來在 限以七十歲也.
16세기 사대부가의 喪祭禮와 廬墓生活 131 답을 개간하고 확보하는 등 소유전답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盧原의 분산 근처 전답으로 前田 이 등장한다. 이문건은 본래 원에 논을 소유하고 있 었는데 1535년 겨울 밭으로 교체하기 위하여 여러 방면으로 시도를 하였다. 11 29일 일차적으로 安無作只의 밭과 바꾸기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42) 12에는 朴莫金伊 金龜漬에게 시도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43) 다음해 2에 다시 換田을 시도하여 결국 安 無作의 밭과 환전하는데 성공하였다.44) 밭을 확보한 그는 비를 동원하여 경작하였다. 3 8일에 밭을 갈서 早粟을 파종하여 7 10일에 수확하고 수확한 후에는 곧바로(7 12일) 尹山 守永 등을 시켜 木麥을 파종하였다. 이와함께 그는 한편으로 陳田을 개 간하여 새로운 전답을 확보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그는 1536년 3 13일 비 尹山 君 萬 등을 동원하고 石萬 石年 등의 소를 이용하여 棠池邊에서 陳田 半日耕 정도를 개간하 였다.45) 의 전 또한 비들이 경작하였다. 통진의 비들은 2 3 사이에 이문건가에 와서 를 받 갔는데 받 간 종자가 1 에 달하였다.46) 가을 수확할 때에는 이 문건에게 보고를 하고 수확한 다음에는 수확 과 를 실어 다.47) 1536년 가 을에는 와 등이 와서 할 시기가 되었음을 보고하여 이문건은 직접 작황을 점 하기 위하여 조 이 를 으로 보 다. 일은 매우 중요하였기 때문 에 작황을 점 하기 위하여 여묘를 나 직접 현지에 가는 경우는 이 에서 여묘살이를 하고 있던 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다.48) 은 의 근거지이며 이문건가 또한 장이 있던 지역으로 그 과 인근 근방에 전 을 소유하였다. 1536년 5 14일 의 이 에서 소 된 13 를 서울의 집에 부하였고 다음해 4 22일에는 산 이 62 를 강을 통하여 수 하여 다.49) 通津 답 種租 全 石 철 먼저 물 黃草 왔 奴 銀守 令守 찾 打作 검 카 휘 通津 냈 打作 검 떠 웃 文應 槐山 妻家 先代 농 곳 忠 州 답 槐山 奴 順山 忠州 출 米 斗 납 괴 奴 拾成 米 斗 송 왔 권 1 1535년 11 29일 安無作只來去 欲以畓換前田 則不肯焉. 권 1 1535년 12 5일 延孝緩復來言 朴莫金伊不肯換田 欲造家云云 乃去 6 延復來見 吾說金龜漬田相換事 則勢不易云云. 권 1 1536년 2 3일 令尹山 往問朴莫金伊換田事 則似難云云 5일 安無作 來言換田事許之 但未知金龜漬之計如何. 45) 묵재일기 권 1 1536년 3 13일 奴尹山及君萬等 以石萬石年等牛 墾陳田于棠池邊 僅半 日耕云云. 46) 묵재일기 권 1 1536년 3 7일 通津哲孫來求種租 令付全一石事 通京家 1537년 2 14일 通津奴今守來受種租去. 47) 묵재일기 권 1 1535년 11 6일 通津奴今水夕致租石黃草云云 1536년 9 22일 通 津奴銀守令守等來到 時可打作云云 姑令取柴. 48) 묵재일기 권 1 1536년 9 8일 文應以打作 借馬去 昏乃還. 49) 묵재일기 권 1 1536년 5 14일 午後 槐山奴順山 載忠州所出米十三斗 而納于京家云來 見 1537년 4 22일 槐山奴拾成持米六十二斗 泊江輸入焉. 42) 묵재일기 43) 묵재일기 일 44) 묵재일기
132 國史館論叢 第97輯 각 답 존 그는 처에 산재한 전 을 관리하고 경작하는 일을 소유 비에게 의 하는 측면이 다. 따라서 처의 비를 관리하고 통제하여 을 확보하고 수확 을 거두어들이는 데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다. 비 은 50) 51) 52) 등 에서 올라 다. 비들이 지역 로 수 하여 상 하였으나 주인의 마음에 하지 않는 경우가 았다. 1536년 1 와 등이 주지역의 을 수 하여 을 때도 그는 을 하면서 의 이 어지고 그나마 하지 못한 부분이 은 사실에 비 53) 들을 매우 가 러 하였다. 이 비들이 을 피하여 도 가 리는 일도 심심 게 발생하였다. 가 1535년 에 도 하였다가 11 10일 하여 도 로 의 을 받았다. 수는 환현한 로 주인가의 에 동원되고 통진과 서울을 래하며 소식을 전하고 사일을 보고하는 등 주인가와 접 이 았다. 그러나 이후로도 간 주인가의 을 어 을 받는 경우가 있는 등54) 성 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에 거주한 또한 도 가 다. 이문건은 있는 편 에게 의 을 하였으나 는 을 거부하였다. 이문건은 을 받기 위하여 를 직접 으로 보 고 그 과정에서 수 에게 편지를 보 도 을 하였다. 관의 위세까지 동원하였지만 는 결국 을 받지 못하고 7일만에 다. 그후 한달 에 실은 도 갔던 처 을 데리고 나타 으나 은 부하지 않았다. 이문 건은 매우 가 러 하면서 상중 에도 불구하고 그를 매 하여 치하였다.55) 위에서 나타나는 것처 이문건은 여묘살이를 하던 중 에도 불구하고 비들의 과 을 확보하기 위하여 다양한 조치를 하며 심지어는 매 까지 하면서 적극적으로 대 하였다. 그것은 비를 통제하고 관리하여야만 수 도 유지되고 사일도 컸 각 身貢 물 身貢 光州 永平 安州 砥平 廣州 槐山 通津 各處 왔 별 합 납 흡족 많 奴 衆伊 今孫 광 貢膳 합 왔 貢 物 考納 貢木 질 떨 推尋 많 증스 워 더욱 役 망 버 찮 通津 奴 今守 봄 망 還現 망죄 笞臀五十 벌 금 뒤 役事 왕 농 촉 잦 혹 명 겨벌 충 스럽 永平 婢 禿德 망 버렸 남 남 尹莫失 妻 身貢 독촉 婢夫 納貢 신공 梁且 永平 냈 抱川 령 내 움 청 梁且 신공 돌왔 쯤 뒤 윤막 망 禿德 났 신공 납 증스 워 임 질 징 럼 임 身貢 役 취 질 응 잘 身貢 입 농 권 1 1536년 11 5일 應雲亦送安州奴金孫貢紬一匹及牧使金景錫所送紬一匹 等 권 1 1536년 11 10일 奴梁且自砥平還 婢延今貧不備炭 故取其雌牛一頭來云 云 留而飼之. 52) 묵재일기 권 1 1536년 윤12 22일 廣州孝文來現受答去 其貢不納事簡於州 牧督之故也. 53) 묵재일기 권 1 1536년 1 20일 奴衆伊及光州今孫等 持收貢膳入來 多有未推云云 21 일 考納奴婢貢膳 貢木甚惡 又多未收未推等事 可憎可憎. 54) 묵재일기 권 1 1535년 11 10일 奴今守出現 所送小甑 又破持來 以去春逃走避役罪 笞 臀五十焉 午令取塋洞斫柴 1546년 1 28일 以雨不得役奴 通津奴今守始到 以不聽令 罰之 沃三器水于其鼻. 55) 묵재일기 권 1 1535년 12 13일 逃婢禿德夫來言 欲不爲貢云 不順如此責送 1536년 1 8일 梁且曉出來 仍送永平 推禿德收貢事也 抱川官亦付狀以送 15일 奴梁且自永平空還 不收禿德貢來 其夫欲納柏子云云 2 23일 逃婢禿德夫尹莫失 率婢來置 不納貢膳 甚憎甚憎 不計喪中 令奴笞足掌懲之. 50) 묵재일기. 51) 묵재일기
喪祭禮와 廬墓生活 16세기 사대부가의 될 원만히 진행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의 중심축이었던 것이다. 133 비는 토지와 함께 이문건가의 경제력을 지탱하는 3. 학문과 자녀교육 농 검 본 본 家 이문건은 여묘살이 중에도 사일을 점 하고 비를 통제 관리하는 등 기 적인 를 영하고 한편으로는 서울을 래하면서 기 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는 을 매일 유지하여 과 고기를 리하고 이나 이를 하는 등 상당한 제 을 당하였다. 특히 조선사회에서 사회적 활동은 중앙관직과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관직에 나 수 다는 점은 매우 치 적이었다. 그러나 사회와 격리된 기간동안 히려 학문에 전념하거나 에 두하여 자 의 인격을 수양하고 학문 발전의 기회로 는 경우가 았다. 대체로 관직에 들어가면 개 인적인 수양이나 학문에 전념하기가 들기 때문에 여묘살이를 계기로 자 을 한 되 보고 실을 다지는 것도 이후의 관직생활과 사회생활을 유지해나가는데 도 이되 었을 것이다. 특히 여묘살이 동안에는 상중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와 관련된 서적을 하여 정 리하거나 하는 등 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조상의 행적 을 정리하고 행장을 만들거나 들을 모 문집을 제작하는 등 을 추진하는데 도 은 기회가 되었다. 유성룡은 60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지 는데 그 기간 중에 을 찬 하였고 김성일의 경우에도 43세 때 부친상 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면서 부친의 행장 묘지문을 작성하였으며 1년이 지 에는 을 편찬하였다. 이문건의 경우에는 40대에 여묘살이를 하였기 때문에 자 의 수양과 학문보다는 자녀 교육에 관심을 았고 특히 들 ( 1518 1557)의 교육에 을 기울였다. 그에게 은 매우 특 한 들이었다. 그는 안동김 김언묵의 과 인하 여 자녀 여 을 두었는데 모두 일 사 하고 들 과 만 성장하였 다.56) 그러나 (1525 1544) 또한 풍으로 불구가 되고 간 세를 보이다가 살에 사 하고 말았다. 결국 6 매 중에서 들 만이 장성하여 하고 후 을 이었다. 따라서 그는 들 에게 은 기대를 하였으나 의 성장과정 또한 하지 않았다. 事 운 약 왕 素食 갈 없 오 힘 내 저술 좋 술 멀 명 삼 禮書 禮說 저술 스무 섯명 順貞 망 많 신 신 번 돌 큰 움 탐독 爲先事業 내 술 난뒤 신 외 李箕星 李熅 온갖 력 별 씨 딸 혼 찍 망 熅 막내딸 順貞 왼손 질증 남 熅 成家 손 온 온 금 저술 몰 喪禮考證 쏟 놀 禮 愼終錄 永慕錄 喪禮考證 더 오락 곧 많 온 설 56) 김경숙 16세기 사대부 집안의 제사 행과 그 성격 참조. 순탄
134 國史館論叢 第97輯 온은 6 7세 되던 해에 괴산 외가에서 열병에 걸렸다가 겨우 소생하였고 후에 다시 풍 에 걸려 경기를 심하게 앓 결국 저능가 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들의 상태가 못내 원망스럽고 답답하였던지 그는 들에 대해 가여워하는 마음을 가지면서도 매우 심하게 다루기도 하였다.57) 이문건은 여묘살이를 하는 동안 들을 데리고 있으면서 교육을 시 다. 여묘살이 당 시 의 나이는 18 19세였다. 일기가 시작되는 1535년 11 에 은 여묘에서 부친으로 부 을 수학하고 있었다. 그 데 기성은 배 것을 서면 어 리는 데다가 부에 미가 었던 습하는데도 전념하지 않았다. 때문에 전날 배 것을 문하 면 전혀 대 을 못하기 일 여서 이문건은 이 들에게 화를 고 매 을 하였다. 1535년 12 3일에는 기성이 전날 었던 것을 하지 못한다하여 등에 매 을 하였 고58) 8일 침에는 는 것에 시 대 하지 않는다고 들의 을 짓 고 머리 한 을 당기는 등59) 차마 지로서 하기 어려 체 을 가하였다. 부친에게 이 매 을 당한 기성은 부에 미를 고 만 나면 부친의 을 피하여 부하지 않고 져나가 았고 이문건은 들을 심하게 다루었다. 기성은 부친에게 심하게 급을 당하면서도 반에는 여묘에서 었으나 점차 서울로 도 치는 일이 졌다. 그는 1535년 11 12 동안은 여묘에서 생활하였으 나 다음해 1 이문건이 서울에서 불러 상경한 이후로는 여묘에 려가지 않으려 하였 다. 그는 부친이 1 22일 여묘로 려간 에도 계 서울에 머 러 있다가 2 7일에 야 여묘로 갔지만 19일에 다시 서울로 도 가 다. 이문건은 장일이 로는 특 히 중요한 일도 었기 때문에 들을 옆에 두고 교육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성은 부보다는 이에만 전념하여 이를 거나 동 이들과 우는 등60) 말 피우는데 중하였다. 이에 따라 이문건의 들에 대한 구박은 수록 심해졌던 것 다. 1536년 여름에 기성이 살구를 고 이 나서 두통과 통을 일으켜 서울로 올라갔다. 그 때 기성 모친이 이문건이 들 을 심하게 학대한 때문이라며 편에게 은 소리를 할 정도61)인 것을 보면 들 에 대한 구박이 매우 심하였음을 작할 수 있다. 켰 온 온 터 詩經 런 운 돌 잊 버 공 취 없 듯 복 운 질 답 쑤 번번 내 질 읽 解說 질 묻 즉 답 뺨 밟 카락 웅큼 잡 버 운 벌 번 번 질 더욱더 공 흥 잃 틈 눈 공 빠 놀 더욱더 취 초 잘 견디 망 잦 내 내 뒤 속 물 돌 망 버렸 천 끝난 뒤 별 없 더욱 공 바깥놀 송충 잡 네 싸 썽 열 갈 같 먹 탈 복 調病次 너무 남 싫 짐 p 令箕星 解說前讀 則全不全不 怒極撻其背 遂改習前讀 早朝 踏箕星腮 且抽髮一握 甚怒 不卽答所問故也. 午散聞 箕星罵天祿 至於洪吉同之子之奇手撻其臀與脚 婦以箕星得病 由於我虐坐日中之故也 又多雜言 可怒也. 57) 김소은 사대부의 가정생활 ( 조선시대 생활사2 역사비평사 2000).141. 58) 묵재일기 1 1535년 12 3일. 59) 묵재일기 1 1535년 12 8일 60) 묵재일기 1 1536년 5 29일 6 9일. 61) 묵재일기 1 1536년 6 16일 권 焉 권 권 無算乃已 권 箕星打松蟲
16세기 사대부가의 喪祭禮와 廬墓生活 135 돌왔 돌온 터 곧바 實錄 敎習 풀 망 버렸 守孫 내 잡왔 저녁 망 버렸 돌왔 묶 놓 걸쳐 망 버 렸 망갈 잡 질 망 버 복 망 잡오 잡오 망 버 6 17일 서울에 올라간 기성은 20여일 후인 7 6일에 다시 여묘로 다. 이문 건은 들이 다음날부 로 을 하였다. 그러나 이전과 마찬가지 상황이 다시 되 이되었고 기성은 7 19일에 서울로 도 가 다. 이문건은 을 서울로 보 기성을 으나 그날 으로 다시 도 가 다가 25일에야 여묘로 다. 그 때 이문건은 들을 어 고 심한 학대를 하였다.62) 이후로도 기성은 7 28일 8 13일 8 20일 9 15일 19일 등 수차례에 서울로 도 을 가 다. 기성이 도 때마다 이문건은 비를 시켜 와서 매 을 하는 등 심하게 다루 었고 이를 참지못하고 기성은 다시 도 가 리는 일을 반 하였다. 서울로 도 가는 것 을 중도에 는 경우도 있었고 서울에서 는 도중에 도 가 리는 경우도 발생 하였다.63) 여러달 동안 도 과 는 일을 반 하다가 결국 이문건은 들을 기할 수 에 었다. 9 19일 기성이 서울로 도 가자 그는 들을 이 라고 기하고 시 그의 이부자리를 거하여 서울로 보 고 다시는 여묘에 나 지 말라고 하였 고64) 그의 처도 들이 한 것을 슬 하며 울었다.65) 그 에도 불구하고 기성은 이 후로도 간 여묘에 려갔다. 이문건의 건강이 시 화되어 1536년 가을이후로는 대 부분을 서울에서 지 기 때문에 조 가 자서 하는 것을 안타 게 여 기성 을 여묘로 려보 것이었다. 그러나 9 의 사건 이후로는 이문건이 들을 때리거나 심하게 학대하는 일이 하게 발생하지 않았다. 위와 이 이문건은 여묘살이동안 들을 데리고 생활하면서 이나 등의 서적을 하였으나 기성은 부에 다 미를 보이지 않 부친과의 사이에 등과 마 이 심하였다. 기성이 부에 미를 가지지 못한 것은 어 을 때 을 지 이 해졌기 때문이었다. 기성은 부친의 매 을 지 못하고 자주 서울로 도 갔고 이문 건은 들을 와 심하게 학대하였다. 이러한 환이 여러달 계 되다가 결국 그는 들에 대한 기대를 접어두기에 이 것으로 보인다. 없 망 잡오 혹 철 愚癡 내 냈 내 낸 빈번 찰 둔 같 敎習 잡 더욱 망 복 내 퍼 몹 악 카 李輝 혼 守廬 공 별 른흥 공 흥 질 견디 른 포 밖 人性 니 포 즉 오 엄명 럼 깝 렸 악순 詩經 겨 實錄 갈 병 앓 능 망 속 권 1 1536년 7 25일 箕星復出來 縛而辱 以溝泥充其口. 권 1 1536년 8 20일 令水孫持馬率箕星 箕星到中道跳躍逃去云云 空還 21 曉令煇委入京 挾率箕星 午後率到 俟夕上食後 撻其脛八十 灌其鼻三鉢水焉 盖欲痛懲故也 夕復叱責移時焉 23일 箕星着頭巾 復走 令行者追之 及於大川邊 率來 不可以言喩 故剪其頭 髮過半 盡收笠與頭巾 表衣與帶 不置于鶴今家. 64) 묵재일기 권 1 1536년 9 19일 箕星朝復脫笠 走還京 謂是非人性 卽撤送其褥被等物 勿 復使出來. 65) 묵재일기 권 1 1536년 10 3일 婦戀箕星愚癡以泣. 62) 묵재일기 63) 묵재일기 일
136 國史館論叢 第97輯 4. 交遊와 接賓客 터 넓 이문건은 모친상을 당하기 전부 상당히 은 교유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교 유대상은 주로 여러대에 친 인을 통하여 형성된 친인 과 관직생활 사회생활을 통하 여 개인적으로 맺어진 들이 함되었다. 그들과의 관계는 여묘살이 동안에도 계 유 지되었다. 이는 이문건이 서울에서 가까 지역에서 여묘살이를 하면서 간 서울의 집 에도 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 하였다. 이문건이 원의 여묘에서 자주 접 한 인 로는 ( ) ( ) ( ) 3형제 4형제 등이 일기상으로 확인된다. 이들 가 데 ( ) ( )은 이문건의 의 들로 이문건과 는 사 형제 사이이다. 일기에 의하면 의 가 1534년 2 6일에 사 하여 1536 년 를 치루었다. 은 들 가 하였고 이 과 그의 동생 이 추가 원에 자주 래하였다. 처의 대상이 지나고 마되지 않 서 서울에서는 이 의 이 추진되어 원에 살고 있던 가 그 일 때문에 서울에 올라가기 위하여 이문건에 게 와서 말을 려갔다.66) 형제는 이문건의 의 들들로 이문건과는 사 형제 사이이며 4형제는 의 들로 이문건에게는 5 조 가 된다. 이 집의 (1482 1535)가 1535년 7 21일에 사 하여 4형제가 원에서 여묘살이를 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이 집과 그의 형제 이 도 이 장이 원의 여묘에 자주 래하였으 며 1536년 7 21일에는 이어서 3형제가 모두 여 에 와서 제사를 거행하였다. 이 집의 부친 이 식의 분묘 또한 원에 위치하였는데 1536년 8 10일 부친의 에 3형제가 모두 산소에 나와 를 지 다. 이처 은 서울에서 가까 지역으로 이문건 일가의 분묘가 집중적으로 분 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이문건의 친인 들 가 데는 비 한 시기에 여묘살이를 하는 경우가 았다. 이문건이 하는 이 에도 위의 경우처 의 여 이 있어서 사 형제와 조 들이 여묘살이를 하거나 여묘에 자주 래하였다. 이문건과 이들의 친 관계를 보다 확하게 하기 위하여 도표로 작성하면 다음과 다. 걸 혼 知人 포 왕 濟叟 능 촉 文應 慶應 壽應 德應 척 운 혹 물 속 李公楫 濟翁 李公棹 濟夫 李公檣 相甫兄 機仲兄 崔都事 李謹之氏 李型 운 李公檢 相甫 李公樞 機仲 伯父 李允浣 촌 李公檢 妻 망 大祥 廬幕 李廷老 守護 공검 공 왕 얼 공검 再婚 庶姑母 빌 李公楫 삼 仲父 李允湜 촌 文 應 李公楫 촌 카 공 妻 坡平尹氏 망 文應 공 공 공 왕 小祥日 막 공 윤 生忌 日 墓祭 냈 럼 楊州 盧原 운 포 척 운 슷 많 守護 廬幕 웃 럼 濟翁兄 妻 相甫氏 妻 막 촌 카 왕 속 명 파악 같 66) 묵재일기 권 1 1536년 9 10일 庶姑以相甫兄取婦事入京 借吾馬去.
16세기 사대부가의 <表 4> 喪祭禮와 廬墓生活 137 이문건가의 가계도 叔生 允浣 =慶州金氏 =江陵崔氏 允湜 ( 1529) =光州金氏 公柱 公檢(相甫) (1535.2 妻大祥) 公樞(機仲) 公楣(大庇) 公楫(濟翁) =坡平尹氏 (14821535) ( 1553) 公棹(濟夫) =靑松沈氏 公檣(濟叟) (1486 ) 允濯 =高靈申氏 女 宋檜 女 韓修(執義) 弘楗(子靜) =高靈申氏 =安東權氏 14621501 ( 1535) (14881521) 忠楗 子安 訥齋 ( ) (14911521) =龍仁李氏 文楗 子發 ( ) (14941567) =安東金氏 (14971566) 女 李瀣 女 朴壅 女(雍姬) 崔秀英 濬哲 濬文 濬明 外孫 廷老(副護軍) 思謙 女 黃敏中 德祿 元老(主簿) 女 宋枸 無后 文應(別坐僉知) 慶應 壽應(生員司馬) 德應(注書)=尹任 女 2子 女 南世健 女 李嶙 外孫 永爀 英煥(校尉) 煇(正言典籍) 壽祺(15341606) (15111545) =南陽洪氏 慶州金氏 =安東金氏 女 柳欽 女 金善慶 爓(景晦)奉敎翰林 天海(大成) (15181553) 天澤(老成玄培)(15411595) =光州金氏 =延日鄭氏 (金憲胤 女) 深培 德培 長培 女 金孝誠 女 柳春發 女 崔士恭 熅(箕聖) (15181557) 女(淑禧 1547 ) 鄭涉 =務安朴氏 女(淑福 夭歿) =金海金氏 元培(淑吉 守封 15511594) (梧根居 金增壽女) =文化柳氏 1546.8.29혼인 女(淑女) 宋象賢 仁及 孝及 원에는 이문건의 庶姑母가 살고 있었다. 서고모는 여막에 야채 과일 米 豆 곡물 기타 여러 雜物 등을 수시로 보내주어 그의 여묘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편 등의
138 國史館論叢 第97輯 왕 길 폈 이문건 또한 서울에 래하는 에 종종 고모의 집에 들러 안부를 살 고 고모가 서울에 올라 때에는 이문건에게 와서 말을 려가기도 하였다. 이 에도 가 이 에서 여묘살이를 하면서 이문건과 하게 래하였다. 그가 1536년 5 이문건가의 을 려 를 시로 한 것으로 보 친인 관계가 있는 하지만 확하지는 않다.67) 그리고 등도 이문건과 하게 래하고 있는데 이 에서 여묘살이를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다. 이와 이 은 시기에 이 에서 여묘살이를 하고 있는 들이 이문건의 여묘 살이에 은 이 되었다. 이문건과 이 는 이 의 여 에 자주 래하였고 상대편에서 도 수시로 방문하였다. 그들은 가 상을 마련하여 서로 여묘생활을 격려하고 위로하 거나 이나 장기를 소일거리로 적적함을 달래 하였다. 그리고 이 여묘에서 이나 등 제사를 거행할 때에는 인근에서 여묘살이하는 사 들이 모두 함 모여 제사에 참석하고 서로 위로를 하였다. 만 라 한 여름 에는 인근에 도의 가 을 마련해두고 서로 어울려 를 가기도 하였다.68) 그는 와도 친분이 두 다. 사는 장일에 등의 도 을 이 주 었고 그가 원 사 들의 을 중간에서 전달하여 성사시켜주는 일도 있었다. 는 1536년 5 되고 다음달 가 로 부 해와서 이문건에게 사 을 보 어 69) 하였다. 그 데 그 해 8 에 다시 양주 사가 교체되어 사 이 로부 하 였다.70) 제수형은 부 한 후 원의 여러 선조묘에 성묘하였는데 그 때 이문건을 비 하여 형등을 비 하여 은 사 들이 모여 하였다.71) 제수형은 양 주 사에 부 한 이후 이문건의 여 에 등의 과 등의 을 하게 보 주는 등 그의 여묘살이를 세심하게 보살펴주었다. 한편 이문건은 부친묘의 로 또는 건강이 지 않 을 위하여 서울에 래 갈 밖 崔繼祖 빌 웃 빈번 왕 舍廊 빌 神主 임 安置 척 듯 명 李謹之氏 李型 빈번 왕 웃 없 같 같 웃 親知 많 많 힘 휘 웃 막 왕 벼운 술 바둑 삼 곤 웃 生忌日 小祥 람 께 뿐 니 창 더운 철 별 옥 避暑 楊州牧使 洪公 터웠 목 천 役軍 움 많 람 청탁 洪牧使 罷官 金瑚 새 임 람 내 存 問 런 목 촌 濟叟兄 새 임 임 롯 濟夫 濟翁 相甫 롯 많 람 設酌 목 임 막 米 太 곡물 炭 麴 雜物 빈번 내 遷葬事 좋 調病 왕 권 1 1536년 5 9일 暮文應四人來此 轉崔都事廬 吾與煇亦隨往 則蔡氏憚神主 禁不許入之令 今纔出來 諸事已具 奈何 繼祖借吾家舍廊 姑置神主甚切 遂許之 昏乃罷還 10일 吾朝入京家 則婦已舍廊 以待都事返魂矣留之 未時許 神主來到 妾及養子奴婢等會哭久甚 吾以壺 果奠之 乃罷 親客皆罷去 到夕 繼祖祭飯奉去. 68) 묵재일기 권 1 1536년 6 25일 與煇共守廬 與文應投避暑于撿山空家 復着碁 相甫謹之 亦會 午後罷散 暮往池邊 會慶應等卽還 7 10일 文應來 終日爲碁 午後避署于撿山家 相甫 兄主亦來見 仍入京去 吾輩夕罷還 11일 李型氏來見 文應等共來見 吾與碁着 午後投撿山家避 暑 夕還. 69) 묵재일기 권 1 1536년 6 8일 楊州牧使金瑚令公送人存聞 修答以謝. 70) 묵재일기 권 1 1536년 8 19일 歷見濟叟兄 則楊州牧赴任 欲於九月爲之云 9 14일 機仲兄朝去 見濟叟 濟叟今日出官云朝發行. 71) 묵재일기 권 1 1536년 윤12 15일 牧使越行塋洞祭 還行考墓祭 又來奠于吾考墓 子等上 哭奠而罷 牧使卽去 吾亦往見越家樓上 濟夫相甫濟翁兄等 延司議品官等 多集設酌 吾向夕先辭 退還 困極臥調. 67) 묵재일기
16세기 사대부가의 잦 喪祭禮와 廬墓生活 139 무르는 동안에도 가까운 친인척 知人들과 지속적으로 하는 일이 았다. 그는 서울에 머 접 하면서 교유관계를 유지하였다. 촉 Ⅳ. 기타 家族親知喪과 服喪 외 질병 족 죽 찍 망 많 많 외 妻 남 손 밖 많 죽 이문건은 모친상으로 여묘살이를 한 것 에도 평생동안 가 친지들의 음을 수차례 경 하였다. 전근대사회에서는 년이나 등의 이유로 일 사 하는 경우가 고 평 수 이 날보다 았기 때문에 한 사 이 평생을 살 가는 동안 주위에서 은 음을 경 하였고 이문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부모 에도 자녀 6 매 녀 형 3인과 누나 2인 등 가 들의 음을 경 하였고 그 에도 은 친지 지인들의 음 을 당해야 하였다. 그 가 데 안동김 는 1566년 11 12일 유배지 성주에서 사 하였다. 당시 처 는 70세 이문건은 72세로 평생을 해로 다고 할 수 있다. 는 이문건이 성주로 유배 된 다음해 1546년 가을 성주에 려 이후로 평생을 유배지에서 살다가 그 에서 세 상을 다. 때로는 편이 연회에 자주 하며 고을 기생을 접하는 것에 마음이 상 하여 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두 사 은 서로를 위로하고 다 거리며 유배생 활을 지 해 나갔다. 일기에는 의 상장례가 간단하게 모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사 한 다음해 2 15일 하여 다음날 산의 에 하고 하여 를 거행하였다. 일 기는 그날로 중단되었고 처의 사 에 격이 던 다음달 이문건 또한 성주에서 사 하였다. 이문건은 부인 안동김 와의 사이에서 6 매를 두었는데 장에서 언급하였 이 들 하나만 장성하고 나머지 5 매는 모두 하였다. 는 로 1517년 8 만에 하였고 는 들 으로 1518년에 태어 고 는 로 1521년 에서 태어 으나 마마로 었고 는 로 1524년 9 동이로 태어나서 하루만에 72) 었고 다 는 이다. 이상 다 자녀가 확인되고 한사 은 알 수 다. 험 균 명 오늘 죽 험 감 운 妻 떠났 妬忌 탱 發靷 망 熅 落胎 家 죽 짧 족 죽 씨 내 온 남 妻 흉 람 험 했 망 妻 곳 출입 람 독 괴 메 黑水釜洞 永奠 返魂 망 충 컸 듯 망 씨 남 夭沒 앞 남 첫째 男兒 둘째 熅 났 셋째 女兒 貞中 났 죽 넷째 男兒 삭 섯째 女兒 順貞 섯 람 듯 朔 槐山 初虞祭 딸 順貞의 상장례 다 인 은 1525년 서울 주자동에서 태어 다. 이문건은 섯째 딸 順貞 養兒錄 김현영 앞의논문 p.111. 72) 이문건 났 없 순정에게 本文六甲을
140 國史館論叢 第97輯 죽신 막내딸 忌祭祀 낼 귀 워 끔씩 병 앓 애 순 婢 億今 저녁 苧洞 써주기도 하고 가 을 사주기도 하는 등 을 매우 여 하였다.73) 정은 1535년 12 이문건이 서소문가에서 부친 를 지 때 모친을 따라 의등 에 업혀 동가에서 서소문가로 와서 지를 만나고74) 제사 다음날 에 다시 로 가기도 하였다. 그 데 정은 가 을 부친을 타게 하였다.75) 그 러다 1544년에 20세로 세상을 나고 말았다. 이문건은 을 에 안장하고 다음해까지 매 하루와 보름에 집이나 에서 와 를 지 다. 을 언제까지 거행하였는지는 일기의 기록이 단절되어 확 하게 되지 않는다. 다음은 일기에 보이는 전 거행 기사이다. 저 家 돌 런 순 끝내 順貞 盧原 朔祭 望祭 냈 朔望奠 파악 버 떠 초 墳墓 명 삭망 29일 婢 猪非가 盧原에 나갔다. 딸의 墓에 朔奠하기 위해서이다. 1일 딸의 神主에 朔祭를 거행하였다. 어미가 정성껏 준비하고 三月이 奠하였다. 婢 禿德이 어제 원에 나가 祭需를 갖추어 오늘 침에 딸의 墓에 奠하고 돌 왔다. 4 14일 禿德이 원에 나갔다. 15일 부인이 제수를 갖추어 딸에게 제사하고 비 禿德이 墓祭를 지내고 저녁에 돌왔다.76) 1 4 런 준 목 딸 삭망 盧原 婢 그 데 여기에서 한가지 주 되는 점은 의 제를 가 거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수 비는 모친이 주관하여 마련하였지만 의 분묘에서 거행하는 는 모두 가 거행하였고 4 1일 집안 에서 에게 올리는 제를 실제로 한 사 은 이었다. 이문건 또한 제사에는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이는 정이 하기 전에 하여 이 었기 때문이 까 생 해 다. 三月 夭折 내 神主 子孫 없 닐 삭망 각 본 墓祭 婢 行祭 람 婢 순 成婚 들 熅의 상제례 6 매 중 유일하게 인하여 를 이은 들 은 1557년 6 25일 40세의 나이로 부모보다 사 하였다. 그는 평소에도 건강이 지 않 서 이문건은 들 때문에 상 정을 하였다. 들이 한 때에는 미리 산에 가서 를 알 보기도 할 정 도였다. 의 상을 당하여 이문건과 모 가 들이 하고 을 하였고 매 하루 남 먼저 망 걱 온 혼 後嗣 熅 좋 창 플 괴 葬地 든 족 守服 素食 항 초 권 1 1536년 1 19일 書本文六甲 付順貞 10 2일 買順貞鞋子. 권 1 1535년 12 24일 昏婦乘馬而來 順貞亦隨來 億今負至 27일 婦昏還苧 洞家 順貞隨去. 75) 묵재일기 권 1 1536년 12 9일 順貞去四日警畏 今日復如此 윤12 5일 順貞得疾頭 痛 脈數項有癧子作疼 6일 順貞疾不差 不喜食. 76) 묵재일기 권 2 1545년 1 29일 婢猪非出盧原 以女墓朔奠也 4 1일 女神主行朔祭 母勤備而三月奠之 婢禿德昨出盧原 備需 今朝奠女墓而還 4 14일 禿德出盧原 15일 婦備需祭女 婢禿德祭墓 夕還. 73) 묵재일기 74) 묵재일기
16세기 사대부가의 삭 망 喪祭禮와 廬墓生活 내 哭 141 째 봉 七七齋 복 布冠 帶布 素食 난 쇠 힘 素食 食味 걸 번갈 터 걸 食味 魚類 素食 亡子 下棺 속 터 素食 멈 터 朔望日 會哭 素食 葬地 쏟 槐山 黑水山 곳 물색 봉 僧 普明 山勢 踏査 뢰 승 명 답 끔씩 山圖 공 槐山 답 같 와 15일에는 제와 제를 지 고 을 하였다. 49일 에는 안 사에서 를 행하 였고 이문건은 100일만인 8 15일에 100일 을 마치고 과 를 착용하였다. 이문건은 들상을 당하여 매일 을 행하였는데 2달 정도 지 후에는 하여 소식을 유지하기가 들었기 때문에 부인과 과 를 하루 러 하기로 정하 였다.77) 실제로 이후부 는 하루 러 소식한 것이 일기에서 확인되며 는 주로 를 이용하였다. 은 를 할 때까지 계 되었다. 하관 다음날부 을 추 78) 었고 그 때부 는 에만 하고 하였다. 한편 이문건은 들을 매장하기 위한 선정에 정성을 았다. 그는 택산을 위해 등 여러 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안 사 에게 를의 하였다. 보 은 산지를 사하며 산세를 보고 후보지를 정하여 가 이문건에게 들러 진행상황을 보고하고 후보지의 를 제 하였다. 8 5일 그는 근처의 여 러 산들을 사하고 다음과 이 보고하였다. 명 밤 11시 사이)에 돌와서 자다가 일어나 등을 밝히고 대담하였다. 송 壬坐 未破未穩하여 산의 形勢가 기이하다고 한다. 괴산의 전사산은 山家에 흉함이 없 쓸 니 드시 쉽게 發興하고 후대 또한 오래오래 부유할 것이다고 한다. 豆叱化 山 앞 案山 깝지 않고 水勢가 느려서 발흥이 더딜 듯 하지만 後世 枝派가 번성할 곳 보 이 2경(9시 면산의 는 어서 만하 반 은 의 이 가 이라고 한다.79) 같 설명 람 운 위와 이 여러 산들의 산세를 상세히 하고 그는 그 가 데서 전사산에 대하여 가장 은 평을 하였다. 다음날 침 두사 은 다시 를 보면서 의 을 교환하였는 데 이 때에도 보 은 전사산을 추 하면서 다시 의 또한 만하다고 하였 다. 이에 따라 이문건은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결국 두 을 고 을 치고80) 관에게 하여 에 밝은 의 에게 를 보여주며 조언을 구하는 등81) 다 양한 방법들을 동원하였다. 좋 청 명 천 風水 金孟賢 妾子 山圖 견 針若亥山 丙破 쓸 곳 놓 周易占 山圖 판 권 8 8 3일 與婦始喫魚味 擬以一日食味以扶老 一日行素以哀化者. 권 8 1557년 11 8일 下見朝食 食肉 自此不爲素食 擬於朔望日會哭而素耳. 권 8 1557년 8 5일 普明夜二更來還 睡起明燈對談 松面山壬坐 未破未穩 山 形奇秀云云 槐山錢寺山山家无凶可用 必易發 後代亦綿遠而富云云 豆叱禾山前案不近水勢慢 似遲 發 然後世枝派蕃多處云云. 80) 묵재일기 권 8 8 6일 朝與普明 話山水略圖而見之 所言與夜无異 其意定欲用錢寺隴矣. 普明又云 槐山針若亥山丙破 似好 可用云云 7일 當午折艾枝 代蓍草 占 錢寺等二處 得觀大有小畜等卦 上二卦似吉 而大有不吉於秋占云. 81) 묵재일기 권 8 1557년 8 9일 二道前 請致金孟賢妾子 欲問風水 11일 金孟賢妾子來 謁 二道仍到 我示以山家圖 則亥山巽破 可用 壬山坎山 不合云云 饋水飯 又論亥山丙破 无凶 可 用云云. 77) 묵재일기 78) 묵재일기 79) 묵재일기
142 國史館論叢 第97輯 승 普明 괴 뒤쪽 點穴 런 번 잘 걸쳐 답 槐山 豆禾原 莫同 너무 깝 禁葬 섰 결국에는 이 산에 수차례에 사를 한 결과 의 의 집 에 하였다. 그 데 이 에는 동측에서 자기집과 가 다고 하고 나 다. 다음은 이러한 상황이 나타나있다. 막 승 보명이 槐山에 들렀다가 돌왔다. 莫同의 집 뒤쪽에 點穴하였는데 막동의 들들이 人家의 步數 內로 入葬할 수 없다. 관에 소송하겠다 고 하여 부득이 인근 위쪽의 荒處를 쓰 겠다고 한다.82) 禮典 喪葬條에 의하면 人家에서 100보 이내에는 입장하지 못하도록 규정 되어 있었기 때문에83) 막동측에서는 경국대전 에 의거하여 금장하였던 것이다. 승 보 명은 막동측과의 분쟁을 피하여 그곳에서 약간 위쪽에다 點穴하였다. 만약 승 보명이 처 음의 穴處를 견지하였다면 막동측과의 소송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법전에 규정된 步數를 확보하기 위하여 禁葬함으로써 발생한 조선시대 산송의 한 형태를 경국대전 확인할 수 있다. 보 이 점 한 은 그후 한달여 동안 확정되지 못하고 지연되었다. 10 3일 가 산에 도착한 이후까지도 확정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산의 가 10 16일에 편지를 보 어 과 등의 일을 급히 택일하고 려를 보 점 해 줄 것 을 재 하였다. 이문건은 편지가 도착한 다음날인 21일에 보 을 불러 산으로 가줄 것 을 부 하였고 그는 과 함 22일에 산으로 나 택산일을 마 리 지었다.84) 이 마 리 에 따라 분묘조성과 장례 비가 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구체적인 작 업은 산에 사는 가 주관하였고 이문건은 산과 성주사이에 비를 계 래시 며 일의 진행상황을 보고받고 지시를 할 수 있었다. 이문건은 발인에 서 며느리를 산으로 보 다. 며느리 행차를 하기 위하 여 8 25일 가 산에서 성주로 는데 이 때 6 10 ( )를 거느리고 다. 며느리는 를 데리고 8 27일 산으로 발하였다. 행차가 에 발하려는데 시어머 가 며느리를 고 통 하며 차마 어 지지 못하였다. 해가 이 은 후에야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문건이 만 하여 행 차는 산으로 날 수있었다. 행차는 가 하고 비 등이 85) 수행하고 등이 모두 갔다. 승 명 괴 혈 곳 내 點穴 穿壙 촉 탁 孝元 擇山 무 됨 괴 壽祺 앞 壽祺 괴 同 后生 尙伊 欣世 새벽 출 높 솟 괴 떠 貴孫 萬守 西同 께 괴 떠 준 본 괴 喪次 괴 從孫 壽祺 승 내 혈 명 괴 무 속왕 키 먼저 괴 왔 왔 냈 隨行 馬 필 從人 口 老婢 禿德 延 淑女 괴 출 니 붙잡 곡 떨 류 壽祺 陪行 劉德 禿德 注叱德 권 8 1557년 9 8일. 禮典 喪葬 京城底十里及人家百步內 勿葬. 권 8 1557년 10 20일 奴孝元與必伊 朝入來 夜宿扶桑云 十六日發于槐山云云 祺簡內 點穴穿壙等 不卜日 須卽擇日 兼送僧點穴云云 神主亦無奈何云云 21일 普明因二道之 招 入州云 夕來見 喩令速往槐山 則明日可行云 22일 普明偕孝元往槐山 點穴改表事也. 82) 묵재일기 83) 경국대전 84) 묵재일기
16세기 사대부가의 괴 돌왔 喪祭禮와 廬墓生活 143 喪次 護行 낸 喪次 護 며느리 행차는 9 1일에 산에 도착하였다. 행차를 수행한 비들은 를 하 기 위하여 다시 성주로 다.86) 이문건 또한 며느리를 산으로 보 후 를 할 비를 확보하는 등 발인을 비하였다.87) 발인은 9 26일에 거행하였는데 그 당 시의 상황을 일기에서는 다음과 이 기록하였다. 行 준 같 괴 昧爽에 발인하였다.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빗고 殯所에 내려가 上食을 재촉해 거행하였다. 숙길이 잔 을 올리고 곡하고 혼백을 철거하여 腰 에 옮기고 관을 내어 수레에 싣고 묶었다. 遣奠 禮를 행하였다. 숙길이 잔을 올리고 李得荃이 告辭하고 나는 서서 곡하였다. 州軍이 많 이 왔기 때문에 처음에는 관을 짊어지고 갔다. 喪次가 멀리 보이지 않게 되자 돌왔다. 李得荃이 護行하였다. 路祭는 州人 李舍人宅에서 제물을 올렸고 주인집 자식들도 제물을 排設하였다 한다. 州軍이 짊어졌고 億今 后生 貴孫 등 비들도 상복을 입고 從行하였다. 상차 가 多也院에 도착하여 擔軍을 교체하였는데 開寧員이 役軍 30명을 거느리고 와서 수레 에 싣지 않고 계속 메고 가서 開寧에서 숙박하였다.88) 27일에는 安谷 28에는 尙州 29 에는 咸昌 10 1일에는 聞慶에서 숙박하고 2일에 鳥嶺을 넘었다. 玄培(성)는 도중 에 이문건에게 편지를 보내서 상차의 진행상황을 보고하였다. 그의 편지에 의하면 가는 곳마다 수령들이 壯丁 牛隻 등을 후하게 마련해주었고 善山에서는 소는 마련하지 않고 軍人 56인만 지급하였다 고 하였다. 27일에는 비가 와서 旌翣이 모두 젖었음을 알게된 이문건이 비들의 不良함을 한탄하기도 하였다.89) 10 2일 鳥嶺을 넘을 때에는 妻조카 金忠甲이 미리 문경에 마중을 나와 護行하였고 金友甲 또한 비들을 거느리고 龍湫에 나와 迎護하였다. 뿐만니라 延同 등 4인이 소 3마리를 끌고 와서 도왔다. 성은 소가 남서 婢夫 從年에게 大牛를 딸려 성주로 되돌 려 보내면서 특히 咸昌 幽谷察訪이 소와 역군을 후하게 내주었고 尙州 判官이 人牛와 쌀 1석을 내주었음을 보고하였다.90) 10 5일에는 李得荃이 조령에서 되돌와 발인행 상차는 권 8 1557년 8 27일 昧爽下見行次 子婦上食于靈座 後乃辭行 婦姑相牽而哭 不能離 日高不已 吾親止之 使出騎行 淑女隨母而行 壽祺陪行 劉德禿德注叱德等隨行 貴孫萬守西 同皆行 老成借馬隨到 扶桑別送云 乃去. 86) 9 5일일 行次從人 西同이 먼저 돌왔고 8일에는 萬守 貴孫이 괴산에서 돌왔다. 87) 9 8일에 神堂里의 德孫에게 隨行을 명하였고 23일에 李元 后生 등이 괴산에서 도착하였 다. 24일에 槐山人十餘馬匹이 도착하였고 頑奴 石斤이 와서 매를 칠려다 참았다. 25일에 神 堂里 奴 德孫과 一人 劫孫 雇工 1口 末叱孫弟 1口 崔文 등이 從行事로 왔다. 88) 묵재일기 권 8 1557년 9 26일. 89) 묵재일기 권 8 1557년 10 2일. 90) 묵재일기 권 8 10 4일. 85) 묵재일기
144 國史館論叢 第97輯 별 延豐 괴 곧바 末叱孫 億万 德孫等 돌 都色 鄭祥 喪次 무 괴 렸 喪次 金忠甲 壽祺 老成 괴 내 괴 成殯 렸 喪次 發靷 저녁 괴 괴 령 낌없 役軍 레 끌 갈 牛隻 공 웃 군 담 星州役軍 開寧 安谷 尙州 咸昌 聞慶 延豐 쳐 괴 괴 군 켰 런 혹 순 롭 괴 壽祺 頑惡 論罪 役事 내 穿壙 外槨 설 망 괴 豆禾原 下棺 槐山 淸安 淸州 役 軍 造墓軍 喪葬禮 많 물 공 족 번 차의 기 을 알려주면서 2일에는 에 도착하고 3일에는 예정대로 산에 도착할 것 이라고 하였다. 로 이 와 이 를 호행하여 사히 산에 도착하였음을 알 다.91) 이후 10 8일에는 를 호행해간 등이 산에서 편지를 보 3일 산집에 도착하여 하였음을 알 다. 는 9 26일 성주에서 하여 6일만인 10 3일 산에 도착하였다. 성주 에서 산까지의 6일동안 지나간 고을의 수 들은 상차가 자기 경계를 지날 때에 는 지원을 하였다. 대체로 상차를 호행할 과 수 를 고 을 제 하여 이 고을의 역 소와 교체하고 다음 고을까지 당하여 호행하였다. 에서 시작하여 을거 산에 도착하였다. 상차가 산에 도착한 이후 분묘조성작업이 거행되었다. 분묘은 대체로 비들과 역 들을 동원하여 작업을 진행시 다. 그 데 간 작업이 조 지 못하여 산의 는 비들이 매우 하여 하고 해야 한다 는 편지를 보 기도 하였다.92) 작업 일 정을 보면 10 30일에 하고 11 5일에 을 치하고 11 7일에 자를 산 에 하였다.93) 이 과정에서도 해당 고을인 과 인근 에서 94) 과 을 동원하였고 분묘조성과 에 소용되는 은 품들을 제 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방관들이 사 가의 상제례에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모습을 다시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산으로 간 며느리는 가 에 시 으로 로 지 않고 에 머 다. 며느리는 에 거주하는 의 로 친정이 인데 그가 보은에 머 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며느리는 2년만인 1559년 2 에야 의 주를 모시고 숙녀와 함 성주로 다. 며느리가 올 때 이문건은 행차를 마련 하여 산으로 보 며느리를 하여 다.95) 신 괴 물렀 왜 괴 물렀 내 永葬禮 끝난 뒤 댁 곧바 돌오 淸州 梧根 金海金氏 金增壽 딸 께 돌왔 護行 왔 돌 報恩 淸州 熅 권 8 10 5일 李得荃夕到 詳聞發引奇 金忠甲到聞慶護之 友甲率奴衆到龍湫迎 護 護輸上嶺 自嶺落後而還 初二日必到延豊 但似日暮云云 初三日不違入槐庄云云. 末叱孫 億 万 德孫等 皆隨來 都色鄭祥 護行入槐山云云. 共食之 留與共宿 玄培留槐數日 當還云云 尙州通 判李公 無紀綱 下不從令云云.. 92) 묵재일기 권 8 10 23일. 93) 1557년 11 7일 今日葬子柩于槐山豆禾原 備三物爲之 분묘의 크기는 穴深 13尺 둘레는 중심으로부터 11尺이고 소용된 물건은 石灰 447斗 黃土 149斗 細沙 149斗가 들어갔다. 그리고 槨은 下 2寸 四方 2寸 蓋上 1尺에 3物을 채우고 틈에는 篩土로 메꾸고 숯은 쓰지 않았다( 묵재일기 권 8 1557년 11 16일). 94) 묵재일기 권 8 1557년 11 15일 普明自槐山還來 問知初七日永葬之奇 穿壙處土好無石 穴深二丈 石灰全二十石云 淸安淸州送役造墓軍云 本郡亦出軍助之云. 95) 묵재일기 권 8 1559년 1 27일 1559년 2 2일. 91) 묵재일기
16세기 사대부가의 喪祭禮와 廬墓生活 145 孫女 淑福의 喪葬禮 이문건의 들 은 처음에 안박 와 인하여 을 았는데 가 함 세상을 다. 그 후 은 부친이 성주 유배생활을 하던 중인 1546년 8 29일에 에서 의 주관으로 에 거주하는 김해김 의 와 다시 인을 하였다. 그는 후처와의 사이에서 (1547년) (1549년) (1551년) (1555년) 등 모두 1 3녀를 두었다. 이 중 은 1551년 6 12일에 사를 시작한 이후 이 지 않다가 8 9일에 사 하였다. 숙 이 사를 시작한 후 계 이 지 않자 이문건은 사 자 등의 을 용시 다. 세는 화되어 지도 못하고 사도 그치지 않다가 7 17일에는 도 지 못하여 가 는 것을 보고 이문건은 매우 슬 하였다. 위 한 상황은 20일까지 계 되다가 21일부 숙 은 일어나 을 것을 구하는 등 회 의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이 차고 가 은 상태였다.96) 이에 따라 29일에는 숙 의 을 하기 위하여 를 불 다. 그러나 숙 은 8 4일부 가 을 며 도 지 않는 등 세가 다시 위 해 지자 를 정지시 고 안정을 하게 하였다. 세는 수록 위 해져 8 9일 에 숙 을 97) 로 는데 ( 후 9시경)에 세상을 나고 말았다. 마침 그날 침에 조모 가 으로 을 는데 다음날 이문건에게 서간을 보 어제는 리서 슬 생 이 들었으 를 보라 98)고 부 하여 슬 을 가중시 다. 사 다음날 가 와서 을 제작하였다. 이문건은 직접 관에 을 하 고 마 기를 기다 다가 직접 관을 가지고 에 가서 을 하였다. 이는 집안사 들 대부분이 처의 산 행차를 호 하여 갔고 집안에 일을 대 할 사 이 었기 때문이었 다. 그는 에 을 치하고 장 을 리고 로 다.99) 이문건은 숙 의 조부였기 때문에 녀를 위하여 하지는 않았다. 부친이 되는 熅 무 씨 혼 딸 낳 母女 께 떠났 온 槐山 母 親 淸州 梧根 씨 金增壽 女 혼 長女 淑禧 次女 淑福 三男 淑吉 四女 淑女 남 淑福 설 병 낫 망 복 설 속병 낫 군 탕 白朮散 약 복 켰 병 더욱 악 먹 설 눈 뜨 生意 없 퍼 독 속 터 복 앉 먹 복 手足 遺屎 잦 복 병 救明 巫女 렀 복 터 윗니 랫입술 깨물 젖 먹 병 독 巫事 키 취 병 갈 독 저녁 복 北 家 옮겼 初更末 오 떠 槐山 길 떠났 내 멀 픈 각 니 病兒 잘 돌 탁 픔 더욱 켰 망 木手 金伊加未 小棺 칠 칠 르 렸 北家 殮 람 괴 송 신 람 없 樓上 殯 설 막 내 下家 돌왔 복 손 守服 熅 권 5 1551년 6 12일 淑禧淑福皆下注 22일 淑福久患水痢 困臥不能起 亦 不能食食 爲合四君子湯 煎之 合四君子湯 煎之 令與淑福 27일 淑福下利不止云 7 12일 下見妻孥 淑疲困不能食飮 强與白朮散加呵子豆久者 泣不肯服 入咽不多 亦不效也 17 일 下見妻孥 淑福今日則不食不開目 極疲澌盡 可哀 18일 下見妻孥 淑福元氣澌盡 無生意 可惜可惜 氣脈蕭然矣 19일 下見妻孥 則病兒比昨之危不加 而開目索乳 時時蹄怒 亦時飮湯 脈亦不稀 無乃幸回生氣乎 20일 下見妻孥 淑福開目見人 時時啼侵 亦得飮乳湯粥 但痛項骨 不能正頭云. 97) 묵재일기 권 5 1551년 8 9일 夕下見淑福 脈數數氣奄奄 不可支矣 昏轉危急 移置北家 房 初更末許化云 可悼也. 98) 묵재일기 권 5 8 9일 家人書陳行日遠有悲思 善護病兒云. 99) 묵재일기 권 5 8 10일 手治兒棺 漆黑待乾 持往北家中堂斂兒 手下盖木釘 無人可代也 殯于樓上 下帷而還. 96) 묵재일기
146 國史館論叢 第97輯 亡女를 위하여 素食하였는데 3일 후인 12일에 改素하였다. 그런데 마침 이틀후가 養 曾祖妣 忌日이었기 때문에 이문건은 忌日이 지난 뒤에 改素할 것을 지시하고 비에게 명하여 그 날은 魚肉을 올리지 못하게 하였다.100) 한편 다음날의 양증조비 기제사는 喪을 당하여 家內가 不淨하였기 때문에 行祭하지 못 하고 安峯寺에서 施食을 設行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 士族家에서는 집 안에 상이 있거나 전염병이 들어오는 등 우환이 발생하였을 때에는 家內에서 제사를 거 행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 거행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1708년(肅宗 34) 충청도 洪州지역에 거주한 金斗璧家에서도 家廟가 맏형댁에 있었지만 마침 그 마을에 染患이 치 성하여 제사를 거행하지 못하고 鴻山으로 옮겨 거행하였다.101) 이문건가에서는 집안에 우환이 있을 경우에는 대체로 안봉사에서 거행하였다. 안봉사에는 이문건가의 조상들의 影幀이 모셔진 影堂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거행하였던 것이다. 망손녀의 葬禮는 달을 넘겨 9달에 거행되어 槐山에 安葬하였다. 9 14일 처가 괴 산에서 이문건에게 편지를 보내어 겨울이 오기 전에 장례일을 속히 결정하라고 재촉하였 다. 이문건은 처의 편지를 받은 즉시 曆書를 살펴 그 달 21일을 擇日하였다. 그 날을 놓 치게되면 그 후부터 겨울이 되기 전인 10까지는 葬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葬日에 맞추기 위하여 부득이 다음날 바로 兒棺을 괴산으로 移輸하기로 결정하고 밤동안에 길떠날 차비를 갖추었다.102) 다음날 兒棺이 槐山으로 떠났는데 술 과일 면 떡을 排設하여 哭送하고 조부와 부 친이 잔을 올려 망자를 배웅하였다. 관을 짊어지고 간 役軍은 이문건가의 비 尙孫 也札 方實 등이었다.103) 9 15일 성주를 떠난 망손녀의 棺은 21일 槐山의 水眞域中 에 안장되었다. 그 때 괴산에서 살고 있던 처남의 長子 金孝甲이 葬事를 주관하여 감독 은 하였다.104) 숙 의 장례는 이상에서 살펴보았 이 예법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매우 간 하고 어 복 듯 략 권 5 8 12일 熅改素 吾過忌後改素事 敎婢今日勿供魚肉. 金斗璧 咫聞日記 (규장각 古425420) 1708년 1 9일 仲三來見云 上村染患漸熾 十 六日祀事 勢難行於家廟 當於他處 設紙榜行祭云云 故吾答 以此祭乃鴻山家次例 若欲行於他處 則送人於鴻山 行於其處 似好矣 仲三然之 10일 曉頭 送次男於鴻山 十六日祀事 使之行於 鴻衙. 102) 일기 권 5 9 13일 妻氏送尙孫探問 且議埋葬亡兒不可犯冬 須速擇日以示 當送員來人 云云 卽考歷書 則今月卄一日丙午安葬 其後至十月無復葬日 不得已明日幷定奴人共輸 然後可及 卄一日埋之矣 乃喩下家措辦行粮. 103) 일기 권 5 9 15일 奴尙孫 也札 方實等持兒棺往槐山 巳時出棺 用草席結裹 設酒果 糆餠 香火哭送 吾與子執盞酹之. 104) 묵재일기 권 5 1551년 9 27일 妻氏風腫膿出 已久 猶不差愈云 眼暗日甚云云 奴也札 尙孫 方實等還來 聞卄一日葬兒于水眞域中云 金孝甲監事云. 100) 묵재일기 101)
16세기 사대부가의 喪祭禮와 廬墓生活 147 떻게 보면 매우 소홀하게 거행되었다. 뿐만 니라 이문건의 일기에는 손녀를 위한 朔望 祭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1544년 막내딸상에는 처가 제수를 마련하여 매 초하 루와 15일에 女婢를 시켜 神主와 墳墓에서 삭망제를 거행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마도 이문건은 조부였기 때문에 行祭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고 숙복의 모친이 下家에서 삭망제를 주관하여 거행하였던 것이 닐까 생각된다. 그렇지만 그의 일기에는 가정내 세 세한 일까지 모두 기록되어 비가 배우자를 위해 巫事를 행한 일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쉽게 납득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숙복이 출생한지 2년밖에 되지 않는 嬰兒였다는 점도 어느정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당시에는 영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고 어린이의 사망을 경험하는 것이 드문 일은 니었다. 이문건 자신도 모두 5 6남매를 생산하였지만 순정과 온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한두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뿐만니라 일기에는 비들의 어린이 가 사망하는 기록이 상당수 실려있는 점도 이러한 상황을 뒷받침한다. 숙복 또한 세 살이 라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장례절차도 예법에 따르지 않고 매우 단촐하게 거행되었고 朔望祭 또한 거행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Ⅴ. 맺 음 말 이상에서 묵재일기 를 중심으로 16세기 이문건가의 여묘살이와 상장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대체적인 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다. 여묘살이는 분묘 옆에 작은 집( )을 짓고 할 때까지 분묘를 보살피며 산다는 의미이며 분묘( )를 모시고 산다는 뜻으로 살이라고도 하였다. 우리나라는 고려 말 주자 성리학의 도 과 함 유교식 상제례로서 여묘살이가 간 거행되었다. 실제로 주자가례 에는 여묘살이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상제례는 후한 것을 따 다는 원칙에 근거하여 진유학자들을 중심으로 3년동안의 여묘살이가 수용 확산되었다. 조선 건국이 후 국가적인 차원에서 유교식 의례 의식을 보급하는 과정에서 년상과 여묘살이 또한 정표정 등을 통하여 적극 보급하였다. 그 결과 16 에 이 면 년상이 이제는 이상 정려의 대상이 되지 못할 정도로 리 보급되고 일반화되었다. 중종대에 모친상을 당한 이문건은 양주 원에서 조 들과 함 여묘살이를 하였 다. 그는 여묘살이 동안 관직에서 러나 고기 등을 리하고 을 지 적 으로 유지하면서 와 등의 중요한 제사는 이 정성 거행하였다. 그 러나 일상적인 침 의 과 에는 건강을 이유로 불참하는 일이 았고 여묘를 내 亡者 입 같 脫喪 侍墓 廬幕 께 신 책 널 물 朔望祭 節日祭 저녁 哭 上食 C 술 혹 른 삼 르 삼 카 께 오락 멀 素食 빠짐없 껏 잦 더 속
148 國史館論叢 第97輯 떠나 서울에 출입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그가 서울에 가는 이유는 주로 건강이 악화되어 調攝하거나 喪祭禮에 관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여묘살이가 후반기로 접어들 면서 그는 매우 빈번하고 장기적으로 여묘를 비웠다. 오랜 여묘생활 때문에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여막을 떠나 서울 출입이 빈번한 것으로 보 그는 비교적 여유있고 융통성있게 그 리고 자유로운 여묘생활을 운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마음자세가 안일 하였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여묘를 떠난 이유가 상제례 건강문제였다는 것은 오히 려 그가 매우 정성스럽고 성실하게 여묘생활을 하였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는 여묘살이 중에 楊州 塋洞의 부친묘를 遷葬하는 사업을 추진하였다. 塋洞이 왕실 의 墓域으로 수용되어 國用으로 쓰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천장을 위하여 목재를 직접 구하고 목수를 물색하는 한편 목재의 수송과 건조 송진 칠하기 등의 작업에 이르기 까지 철저하게 관리하였다. 또한 묘역의 관리와 석회 잡석 등의 수급과 수송 등의 작업 을 오랜 기간에 걸쳐 수행하였다. 그는 천장과정에서 楊州牧使를 비롯하여 인근지역 지방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실제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楊州牧使의 도움은 절대적이어서 軍糧米 造墓 軍 등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당시 지방관이 관직자 사족가의 상제례를 지원하는 일 은 어느정도 常例化되어 있었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개인적인 친분관계에서 연유하겠지 만 한편으로는 국가에서 나라의 근간이 되는 사대부들의 안정과 유지를 위하여 관례적으 로 지원하고 배려하는 측면도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한편 일반적으로 여묘살이를 하는 동안에는 집을 나 여 에서 거처하기 때문에 사 회적인 활동과 대부분의 일상적인 생활이 단절된다. 그러나 최소한의 영까지 하게 단절되는 것은 었다. 이문건이 여묘살이 동안 분산 곁에 살면서 서울의 를 위하여 가장 세심하게 살 부분은 나 를 급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상중이라 하 라도 리고 수확하는 등의 사와 관련된 사 들은 소 히 할 수 었다. 지에서 의 소 이 주된 수 원인 경사회에서 전 과 경작자를 관리하고 사의 진행 상황과 수확을 점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문건가의 전 은 등지에 소재한 것들이 확인되며 분산 근처에서는 로 전 을 개간 하고 확보하는 등 소유전 을 확장시 는 사업을 추진하였다. 또한 그는 처의 비를 관리하고 통제하여 을 확보하고 수확 을 거두어들이는 데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다. 비 은 등 에서 올라 다. 비들이 지역 로 수 하여 상 하였으나 주인의 마음에 하지 않는 경우가 았다. 그는 상중 에도 불구하고 비들의 과 을 확보하기 떠 니 씨뿌 출 입 검 礪山 忠州 槐山 핀 땔 무 공 농 항 농 답 더 각 各處 답 왔 많 키 막 홀 家事 운 농 없 완벽 苧洞家 토 답 盧原 通津 새 운 답 身貢 물 身貢 光州 永平 安州 砥平 廣州 槐山 通津 별 합 납 흡족 임 身貢 役
16세기 사대부가의 취 喪祭禮와 廬墓生活 질 149 응 家事 운 위하여 다양한 조치를 하며 심지어는 매 까지 하면서 적극적으로 대 하였다. 그는 사일을 점 하고 비를 통제 관리하는 등 기 적인 를 영하는 한편으 로 들 의 교육에도 을 기울였다. 그는 여묘살이를 하는 동안 들 을 데리고 생활하면서 이나 등의 서적을 하였으나 기성은 부에 다 미를 보이지 않 부친과의 사이에 등과 마 이 심하였다. 기성이 부에 미 를 가지지 못한 것은 어 을 때 을 지 이 해졌기 때문이었다. 기성은 부친의 매 을 지 못하고 자주 서울로 도 갔고 이문건은 들을 와 심하게 학 대하였다. 이러한 환이 여러달 계 되다가 결국 그는 들에 대한 기대를 접어두기 에이 다. 이문건은 모친상을 당하기 전부 상당히 은 교유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교 유대상은 주로 여러대에 친 인을 통하여 형성된 친인 과 관직생활 사회생활을 통하 여 개인적으로 맺어진 들이 함되었다. 그들과의 관계는 여묘살이 동안에도 계 유 지되었다. 이는 이문건이 서울에서 가까 지역에서 여묘살이를 하면서 간 서울의 집 에도 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 하였다. 특히 은 서울에서 가까 지역으로 이문건 일가의 분산이 집중적으 로 분 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이문건의 친인 들 가 데는 비 한 시기에 여묘살이를 하는 경우가 았다. 이 에서 여묘살이를 하는 친지들은 이문건의 여묘살이에 은 이 되었다. 이문건과 이 는 이 의 여 에 자주 래하였고 상대편에서도 수시로 방문하였 다. 그들은 가 상을 마련하여 서로 여묘생활을 격려하고 위로하거나 이나 장 기를 소일거리로 적적함을 달래 하였다. 그리고 이 여묘에서 이나 등 제사를 거행할 때에는 인근에서 여묘살이하는 사 들이 모두 함 모여 제사에 참석 하고 서로 위로를 하였다. 이문건은 모친상으로 여묘살이를 한 것 에도 평생동안 가 친지들의 음을 수차례 경 하였다. 전근대사회에서는 년이나 등의 이유로 일 사 하는 경우가 고 평 수 이 날보다 았기 때문에 한 사 이 평생을 살 가는 동안 주위에서 은 음을 경 하였고 이문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부모 에도 자녀 6 매 녀 형 3인과 누나 2인 등 가 들의 음을 경 하였고 그 에도 은 친지 지인들의 음 을 당해야 하였다. 농 검 외 李箕星 온갖 력 詩經 實錄 敎習 공 별 갈 찰 공 흥 렸 병 앓 능 둔 망 잡 더욱 악순 속 른흥 질 견디 르렀 터 넓 걸 혼 知人 포 왕 포 많 험 균 명 오늘 죽 험 웃 웃 혹 星州李氏 척 운 막 짧 족 죽 슷 람 외 질병 험 람 웃 속 많 힘 왕 곤 흉 척 운 능 운 楊州 盧原 휘 벼운 술 삼 감 본 께 바둑 生忌日 小祥 족 죽 찍 망 많 많 외 妻 남 손 밖 많 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