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ÃѼ� 3±Çc03ÖÁ¾š



Similar documents
낙랑군


지표조사-김해 진례 산본 685외 2-본문.hwp

<C5F0B0E82D313132C8A328C0DBBEF7BFEB292E687770>

untitled

<근대이전> ⑴ 문명의 형성과 고조선의 성립 역사 학습의 목적, 선사 문화의 발전에서 국가 형성까지를 다룬다. 역사가 현재 우리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었음을 인식하고, 역사적 상상력을 바탕으 로 선사 시대의 삶을 유추해 본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국가가 형성되고 문 명

<BACEBFA920C8ABBBEAB8E920BBF3C3B5B8AE2020C1F6C7A5C1B6BBE720BAB8B0EDBCAD28BCF6C1A4292E687770>

mo200706kor.hwp

e01.PDF

11.indd

정치사적

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실사구시학파의 실증적 학풍이 일어나므로 서구적인 과학사상의 유입을 본 것 등이 인식 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조 봉건사회 최종의 절대적 왕권주의자 대원군에 의하여 그 싹은 잘리고 말았다. 따라서 다단한 전기가 될 근대적 개방에 의하여 재건하려던 서구적 교육 즉

<C5F0B0E8C7D0B0FA20C7D1B1B9B9AEC8AD20C1A63435C8A328C3D6C1BE292E687770>

제1장 마을유래 605 촌, 천방, 큰동네, 건너각단과 같은 자연부락을 합하여 마을명을 북송리(北松里)라 하 였다. 2006년에 천연기념물 468호로 지정되었다. 큰마을 마을에 있던 이득강 군수와 지홍관 군수의 선정비는 1990년대 중반 영일민속박물 관으로 옮겼다. 건

농어촌여름휴가페스티벌(1-112)

<4D F736F F D20BCD5C7D0B1D4B9CEC1D6B4E7C1F6C1F6B5B5B5BFB9DDBBF3BDC25F59544EB3ECC3EBB7CF5FC7FDBFF8>

*세지6문제(306~316)OK

세계 비지니스 정보

<C8ADB7C220C5E4C3EBC0E52E687770>

???? 1

<C1A4B4E4B9D7C7D8BCB32E687770>

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132~173)4단원-ok

새만금세미나-1101-이양재.hwp

<BCF6BFE4B0ADB4DC322E687770>

<C0E5B7C1BBF328BEEEB8B0C0CCB5E9C0C729202D20C3D6C1BE2E687770>

대표이사 K, L 4. 주식회사 동진여객 대표이사 M 피고보조참가인들 소송대리인 법무법인(유한) N 법무법인 O 제 1 심 판 결 부산지방법원 선고 2014구합20224 판결 변 론 종 결 판 결 선 고

PDF


<4D F736F F D B1B9B9AE32C6C7B0E6B7AEC6C7BAA3C5B82E646F63>

untitled

43¹ÚÁ¤µ¿-Çؿܼ¼¹Ì³ª

< BEC7BFECC1F62E687770>

하느님 사용 설명서 의 길잡이 오 헬레나 수녀 안녕하십니까? 잦은 폭우와 폭염이 유난했던 지난여름에 교육원 책임자로 새로 소임을 맡게 된 오 헬레나 수녀입니다. 시청각통신성서교육원 모든 학생들께 큰절 올리는 마음으로 인사드립니다. 유수( 流 水 )와도 같은 시간의 흐름

소, 경찰서, 군 시설이 이스라엘 공습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초토 화됐다. 몇 층짜리인지도 모를 만큼 완전히 파괴된 민간인 거주 주택과 농 장의 비닐하우스도 몰골만 드러내 폭격 당시의 참상을 고스란히 드러냈 다. 주변에는 바리케이드나 폴리스 라인도 없었고,

ÃÖ»óÀ§5³ª-Á¤´ä(01~23)

QYQABILIGOUI.hwp

图 书 在 版 编 目 (CIP) 数 据 韩 国 文 学 作 品 选 读 / 池 水 涌, 裴 圭 范 著. 上 海 : 上 海 外 语 教 育 出 版 社,2015 新 世 纪 高 等 学 校 韩 国 语 专 业 本 科 生 系 列 教 材 ISBN Ⅰ. 1

발간사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하였습니다. 올해는 6 25전쟁 55주년과 광복 60년, 을사늑 약 100주년 등 우리나라로서는 역사적으로 매 우 의미 있는 해입니다. 우리가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지난 역사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에 영향을


ÀϺ»Æí-ÃÖÁ¾

untitled

*금안 도비라및목차1~9

<5BC1F8C7E0C1DF2D32B1C75D2DBCF6C1A4BABB2E687770>

2 (제179회-예결특위 제2차) (10시00분 개의) 위원장 박형덕 의석을 정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성원이 되었으므로 동두천시의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제2차 회의를 개의하겠습니다 년도 일반 및 특별회계 세입세출 제1회 추가경정 예산안(계속) 위원장 박형

질문하실 의원님께서는 발언시간을 지켜 주시고, 집행부에 서는 충실한 답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실 것을 당 부드립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질문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文 化 敎 育 委 員 會 소속 李 康 珍 議 員 의 질문이 있겠습니 다. 나오셔서 질문하여 주

인천 화교의 어제와 오늘 34 정착부흥기 35 정착부흥기: 1884년 ~ 1940년 이 장에서는 인천 차이나타운에 1884년 청국조계지가 설정된 후로 유입 된 인천 화교들의 생활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기별로 정리하였다. 조사팀은 시기를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하였다. 첫 번




2 공제회 7월부터 장기저축 일반대여 이율 3.6% 공제회 급여율 대여이율 조정 급여율 결정체계 도입 일환 매년 시중금리에 따라 조정 6월말까지는 4.32% 적용 7월 1일부터 장기저축급여 퇴직급여율 (이자율)이 4.32%에서 3.6%로 조정된다. 일반대여 이율도 장기

YISO Wireless Co., Ltd 2/68 Proprietary & Confidential

2014년 3월 모의고사(문제 및 정답).hwp

i n i n i n 1

<3036B3E231C7D0B1E220B0ED31B1E2B8BBB0EDBBE7B4EBBAF1C6AFB0AD20B1B9BEEE28BBF32931B0AD2D33B0AD2D5BB1E8C0AFB5BFBCB1BBFDB4D45D2E687770>

제 출 문 보건복지부장 본 보고서를 국민활건강 개선방안 연구 과제의 최종보고서로 제출합니다 책임연구원 : 조 재 국 연 구 원 : 원 종 욱 윤 강 재 김 진 우 한 동 운

행당중학교 감사 7급 ~ 성동구 왕십리로 189-2호선 한양대역 4번출구에서 도보로 3-4분 6721 윤중중학교 감사 7급 ~ 영등포구 여의동로 3길3 용강중학교 일반행정 9급 ~ 1300


Attractive People 크릭앤리버 크리에이터 1 영화감독 장윤현 Director s Concerto 우리가 그 에 대해 알게 된 건 접속, 텔미섬씽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대박영 화들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에는 감독 장윤현이 아닌 역경과 어려움이 혼돈처럼 산재

정답 및 해설 - 비둘기집 원리 쪽 확인 극단적으로 생각하기 0개의 수 중에서 차가 8인 수의 쌍은 (, 9), (2, 0) 이고, 짝을 지을 수 없는 나머지 수는 (3), (4), (5), (6), (7), (8)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6+2+=9(개)의 구슬을 뽑아

Acr tmp.pdf

kg242-1.ps

역사②자(문제)_해설(082~120)OK

<B3EDBCFABDC7B7C2BDD7B1E22E687770>

<38C1D6C2F728C6EDC1FD292E687770>

0 한국사능력검정시험대비(/, 목) 쪽 문. 다음 선언문의 필자와 관련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점][ 회] 내정 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동하는 자 누구이냐? 너희들이 동양 평화, 한국 독립 보전 등을 담보한 맹약이 먹도 마르지 아니하여 삼천리 강토를 집어먹힌

3) 지은이가 4) ᄀ에 5) 위 어져야 하는 것이야. 5 동원 : 항상 성실한 삶의 자세를 지녀야 해. 에는 민중의 소망과 언어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입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가능성은 이처럼 과거를 뛰어넘고, 사회의 벽을 뛰어넘고, 드디어 자기를 뛰어넘 는

2012 한국메세나대회 심포지엄 발표인사 소개 전성률 (서강대학교 경영학부 교수)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 동 대학 석사 미국 시라큐스대 경영학 박사(마케팅전공) 미국 피츠버그대 경영대학원 조교수 한국소비자학회, 한국마케팅학회, 한국광고학회, 한국소비문화학회 상임이사

15강3.hwp

1.기본현황 연 혁 m 본면은 신라시대 ~고려시대 상주목에 속한 장천부곡 지역 m 한말에 이르러 장천면(76개 리동),외동면(18개 리동)으로 관할 m 행정구역 개편으로 상주군 장천면과 외동면이 병합하여 상주군 낙동면 (17개 리,25개

Àü³²Àú³Î 317È£

기획 특집 Ⅱ. 어린이 교통사고 현황 먼저 어린이 교통사고 현황을 살펴보면, 표1은 2008년에서 2012년까지 최근 5년간 전국 어린이 교 통사고 발생현황을 나타내고 있다. 1) 표1 13세미만 전국 어린이 교통사고 발생현황 발생년도 발생건수 사망자 부상자 2008

구절초테마공원 & 산호수마을 단아하고 소담한 구절초의 재발견 이 꽃, 개망초보다는 크고 쑥부쟁이와는 닮은꼴이다. 수수하기는 하나, 볼수록 매력 있다. 시골의 길섶에서 흔히 눈에 띄는 구절초 이야기다. 정읍 구절초테마공원에 만개한 구절초는 어떤 가을꽃보다 매혹적이었다.

역사의 위조(僞造)는 용서할 수 없다.

이동걸 칼럼

1)대한민국의 국시 국책을 위반하는 기사 2)정부를 모략하는 기사 3)공산당과 이북 괴뢰 정권을 인정 내지 비호하는 기사 4)허위의 사실 을 날조 선동하는 기사 5)우방과의 국교를 저해 하고 국위를 손상하는 기사 6)자극적인 논조나 보도로서 민심을 격앙 소란케 하는 외

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초기 도읍은 위례성( 慰 禮 城 )이다. 위례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책에 실려 있는데, 대부분 조선시대에 편 찬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 도 백제가 멸망한지

#6단원(182~215)

< D BBF3B4E3BBE7B7CAC1FD28BCF6C1A E687770>

<5B B3E BFF C0CF5D20C1F6C0FB20B1E2BBE720C7CAB1E220B1E2C3E2B9AEC1A620B9D720C1A4B4E42E687770>

아버지의 이름으로 고 정성철 소방령 자녀 예술경영전공 정비담 씨 소방공무원 국가직 촉구 1인 시위 지난 9월 27일 한 청년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정복을 입고 서울 광화문광 장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 이 청년은 지난 7월 광주에서 헬기 추락 사고로 순직한 고 정성철 소

심히 운동한 친구의 체력훈련은 중반부터 효과가 눈에 띄었다. 2~3일을 계속 걷고 대피소에서 자며 열악한 로 지 생활에 대비했고, 눈 많은 설악산을 찾아 심설산행도 체험하는 등 팀워크를 다져나갔다. 항공권은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직항 대신 한 번 갈 아타는 편으로 일찍

???? 1

내 인생의 도서관 선비정신 지구상에는 민족마다 고유한 역사적 인간상과 삶의 정신을 갖고 있다. 일본의 사무라이나 영국의 신사도 같은 것이 그 예다. 각국의 사람들은 그것을 알게 모르게 저마다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고 또 바꾸어나간다. 그렇게 해서 한 민족이 정신적으로

<5B365DC0B1B5BFBFF82E687770>


제주발전연구원 제주발전연구원 정책이슈브리프 2015년 11월 2일 Vol. 226 발행처 : 제주발전연구원 발행인 : 강기춘 주 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연로 253 TEL FAX 제주발전연구원은 지역사

2015 판례.기출 증보판 테마 형법 추록본.hwp

2~7면

국립중앙도서관 출판시도서목록(CIP) 강원지역 신광역 교통망 구축과 지역 파급효과 분석 = (An) analysis on the regional economic effect and the construction of the new metro-traffic network


2


수리 영역 가 형 5. 다음 그림과 같이 크기가 같은 정육면체 개가 한 모서리씩을 공유하 면서 각 면이 평행 또는 수직 관계를 유지한 채로 한 평면 위에 놓여있 다. 그림의 세 꼭짓점 A, B, C에 대한 두 벡터 BA 와 BC 가 이루는 각 의 크기를 h라 할 때,

제4장 서부신개발지역 12월 건설교통부로부터 지구지정을 받아 2006년에 착공, 2011년 준공하였으며 이후 1단계의 개 발 성과에 따라 2, 3단계 지역도 단계적으로 개발을 추진할 계획이다. 서남부권 개발은 광역중심기능을 갖춘 새로운 자원의 미래형 혁신도시 건설과 전

<4D F736F F D F35315FC0DAB5BFC2F7C0C720C8AFB0E620B4EBC0C0B0FA20C0E7B7E120B1E2BCFA2E646F63>

목 차 1. 공통공시 총괄 1 2. 살림규모 세입결산 세출결산 중기지방재정계획 7 3. 재정여건 재정자립도 재정자주도 재정력지수 통합재정수지 채무 및 부채 지방채무 현황

<C0E7C8B0BFEBBCF6C1FDBBF3BFA120B4EBC7D120B0FCB8AEBFE4B7C E687770>

DBPIA-NURIMEDIA

Transcription:

13 29 36 42 47 52 58 58 76 89 97 101 104 138 138 149 155 181 181 184 188 196 200

205 212 216 218 218 224 227 237 237 254 285 285 298 309 323 323 335 360 366 366 374 393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9

30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20국,6) 동이 5국,7) 동이 29국,8) 동이 11국,9) 동이 2국,10) 동이 7국,11) 동이 11국,12) 멀리 떨어진 동이 30여국,13) 동이 7국14)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제1절 고대국가의 여명 31 으므로 거의 같은 무렵의 상황에 대한 기록일 개연성이 높다. 그런데 위의 三國志 韓傳에는 마한이 50여개의 나라로 구성되었노라고 적혀 있다. 진 晉書 四夷傳에는 동이의 馬韓이 太康 원년 2년 7년 8년 10년, 태 한과 변한에도 따로 나라가 12개씩 있다고 기록하였다.16) 마한에 속한 50 희 원년에 각각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사가 있다. 辰韓도 태강 여개의 작은 나라 중 8번째에 적힌 伯濟國이 점점 커져 百濟라는 고대국가 원년 2년 7년에 각각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고 적혀 있다. 그러므 로 바뀌었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진서 에 적힌 기록들은 3세기 말에도 로 앞서 소개한 武帝紀와 四夷傳의 기록을 맞대어보면 晉書 의 東夷 라 아직 백제국 단계에 머물렀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백제가 집권력을 강화 는 이름에는 마한과 진한이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 한 것은 4세기에 들어선 뒤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추정은 고고학적 해석과도 대체로 일치한다. 지금까지 발견된 韓은 帶方의 남쪽에 있다. 동쪽과 서쪽이 바다로 막혀있으며 남쪽은 倭와 접하는데, 사방 4 천리 정도 된다.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馬韓, 둘째는 辰韓, 셋째는 弁韓이다. 진한은 옛날의 辰國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다. 그 백성들은 토착생활을 하며 곡식을 심고 누에치기와 뽕나무 를 가꿀 줄 알며 무명을 만든다. 각각 우두머리가 있어서 세력이 큰 자는 스스로를 臣智라고 백제유적 중 3세기 무렵에 해당하는 것은 풍납동의 세 겹으로 된 環濠와 석촌동의 고분 일부를 비롯해 서울 인근지역의 몇몇에 불과하다. 그 바깥 지역에서 발견되는 백제유적은 대개 4세기 이후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부르고, 그 다음은 邑借라고 한다. 흩어져서 산과 바다 사이에 살며, 성곽은 없다. 爰襄國 牟 충청남도 서산의 明智里古墳群은 環頭大刀를 비롯해 각종 철제 무기류가 水國 桑外國 小石索國 大石索國 優休牟 國 臣 沽國 伯濟國 速盧不斯國 日華國 古 출토된 土壙墓 무리로서, 발굴단은 4세기 무렵 백제의 중앙 정치세력으로 誕者國 古離國 怒藍國 月支國 咨離牟盧國 素謂乾國 古爰國 莫盧國 卑離國 古卑離 부터 반독립성을 유지하던 토착집단 내 유력자의 무덤으로 추정하였다.17) 國 臣 國 支侵國 狗盧國 卑彌國 監奚卑離國 古蒲國 致利鞠國 路國 兒林國 駟盧 國 內卑離國 感奚國 萬盧國 卑離國 臼斯烏旦國 一離國 不彌國 支半國 狗素國 捷 盧國 牟盧卑離國 臣蘇塗國 莫盧國 古臘國 臨素半國 臣雲新國 如來卑離國 楚山塗卑離 그와 유물 조합이 비슷한 충청남도 보령의 倉巖里土壙墓도 마찬가지 결론 을 냈다.18) 國 一難國 狗奚國 不雲國 不斯 邪國 爰池國 乾馬國 楚離國 등 모두 50여국이 있다. 충청남도 천안의 花城里19)에서도 백제문화에 익숙한 토광묘 무리가 발굴 큰 나라는 만여 家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家이니, 모두 합쳐 십여 만 戶이다. 辰王은 월지국을 조사되었다. 이곳에서는 이미 東晉에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 靑磁가 수습된 다스린다.15) 바 있다.20) 이에 화성리 청자를 청주시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청자 天鷄 壺라든가 강원도 원주시의 法泉里에서 수습된 청자 양 모양 그릇(羊形器) 위의 인용문은 3세기 말엽에 편찬된 三國志 韓傳의 한 대목이다. 이어 지는 기사에 3세기 중 후반경 한반도에서 일어난 사건이 자세히 실려 있 8) 晋書 권3 武帝紀 太康 3년(282) 9월. 9) 晋書 권3 武帝紀 太康 7년(286) 8월. 10) 晋書 권3 武帝紀 太康 8년(287) 8월. 11) 晋書 권3 武帝紀 太康 9년(288) 9월. 12) 晋書 권3 武帝紀 太康 10년(289) 5월. 13) 晋書 권3 武帝紀 太康 10년 是歲. 14) 晋書 권3 武帝紀 太熙 원년(290) 2월. 15) 三國志 권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韓. 16) 辰韓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 弁辰亦十二國 又有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其次有 險側 次有樊濊 次有殺奚 次有邑借 有已 國 不斯國 弁辰彌離彌凍國 弁辰接塗國 勤 耆國 難彌離彌凍國 弁辰古資彌凍國 弁辰古淳是國 奚國 弁辰半路國 弁辰樂奴 國 軍彌國 弁辰彌烏邪馬國 如湛國 弁辰甘路國 戶路國 州鮮國 馬延國 弁辰狗邪 國 弁辰走漕馬國 弁辰安邪國 弁辰瀆盧國 斯盧國 優由國 弁辰韓合二十四國 大國四 五千家 小國六七百家 總四五萬戶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 自立爲王 三國志 권30 (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17) 金永培 韓炳三, 1969,`瑞山 大山面 百濟土壙墓 發掘報告a, 考古學 2. 18) 池健吉, 1977,`忠南海岸地方의 百濟古墳 二例와 出土遺物a, 百濟文化 10. 19) 國立公州博物館, 1991, 天安 花城里 百濟墓. 20) 三上次男, 1976,`漢江地域發見の四世紀越州窯靑磁と初期百濟文化a, 朝鮮學報 81.

32 33

34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1절 고대국가의 여명 35 3세기까지는 마한에 속한 작은 나라로서의 伯濟國이며, 4세기부터는 이른 軍 振武 克虞를 두었다. 6좌평은 모두 1품이고, 달솔은 2품, 은솔은 3품, 바 영역국가로서의 위용이 확연한 百濟이다. 덕솔은 4품, 한솔은 5품, 나솔은 6품, 장덕은 7품, 시덕은 8품, 고덕은 9품, 그러나 국내의 역사서 중 가장 오래된 책인 三國史記 에는 백제 역사가 조금 다르게 그려져 있다. 서기전 18년에 건국한 백제는 10여년만에 이미 서울 경기지역을 장악한 영역국가로 성장했으며, 곧이어 마한마저 병합 계덕은 10품, 대덕은 11품, 문독은 12품, 무독은 13품, 좌군은 14품, 진무는 15품, 극우는 16품이다. 2월에 영을 내려 6품 이상은 자주색 옷을 입고 은꽃으로 冠을 장식하며, 11 품 이상은 다홍색 옷을 입고, 16품 이상은 푸른색 옷을 입게 하였다. 하면서 강대한 고대국가로서 우뚝 섰다. 그리고 3세기 중엽에는 官等과 公 - 28년(261) : 봄 정월 초하루에 왕이 자주색 소매가 큰 두루마기와 푸른색 비단 바지를 입 服을 정하고 법령을 마련하는 등 각종 제도를 정비했다고 한다. 영토 확장 고, 금꽃으로 장식한 검은 비단 관을 쓰고, 흰 가죽띠를 두르고, 검은 가죽신 은 건국시조인 溫祚王 때 이루어졌고, 제도 정비는 古爾王 때 이루어졌다 는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눈에 띄는 대목을 골라내보면 다음과 을 신고 南堂에 앉아서 일을 처리하였다. - 29년(262) : 봄 정월에 관리로서 재물을 받거나 도둑질한 자는 장물의 세배를 징수하고 죽을 때까지 벼슬길에 나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같다. 위의 기사대로라면 백제 온조왕은 나라를 세운지 13년 되던 해에 새 도 온조왕본기 - 13년(B.C.6) : 가을 7월에 漢山아래에다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 주민을 옮겨 살게 하였 다.(천도) 읍을 건설하고 서울 경기 충청 황해도 및 강원도 일부를 영토로 삼았 다. 浿河는 지금의 대동강, 熊川은 금강, 走壤은 춘천으로 비정되기 때문이 8월에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고 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浿河에 이르고, 남 다.29) 그리고 30여년 뒤에는 지방을 4개의 部로 나눠 다스렸으며, 휘하에 쪽은 熊川을 경계로 삼고, 서쪽은 큰 바다에 닿고, 동쪽으로는 走壤에 이르 적어도 5천명 이상의 군사를 거느린 큰 나라로 만들었다고 해야 한다. 너 렀다. 무 비약적인 성장이다. - 26년(A.D.8) : 겨울 10월에 몰래 馬韓을 습격하여 마침내 그 國邑을 병합하고, 이듬해에 는 마한 땅을 모두 흡수하였다. 온조집단은 새로운 철기문화로 무장한 채 북방에서 내려온 騎馬집단이기 - 28년(A.D.10) : 봄 2월에 맏아들 多婁를 태자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군사업무를 맡겼다. 에 빠른 속도로 정복활동을 벌였으며, 그로 인해 국가성장도 빨랐을 것이 - 31년(A.D.13) : 봄 정월에 나라 안의 민가를 나누어 南部와 北部로 삼았다. 라고 긍정적으로 풀이하는 견해도 적지 않다.30) 그러나 그럴 경우에도 서기 - 33년(A.D.15) : 가을 8월에 東部와 西部를 더 두었다. 8년에 마한을 병탄했다는 기사에 대해서는 내용을 대폭 수정해서 이해하 - 34년(A.D.16) : 겨울 10월에 마한의 옛 장군 周勤이 牛谷城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고 있는 실정이다. 직접 군사 5천명을 이끌고 토벌하였다. 고이왕에 대해서는 그 기사가 지니는 상징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많다. 실제로 고이왕 때 6좌평제 16관등제 공복제 법령 정비 등이 이루어졌 고이왕본기 - 7년(240) : 여름 4월에 眞忠을 左將으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군사 업무를 맡겼다. 다기보다 이 무렵에 국가조직이 다소 정비된 사실을 상징적으로 전하는 기 - 27년(260) : 봄 정월에 內臣佐平을 두어 왕의 명령을 알리고 보고하는 일을 맡겼다. 內頭 佐平은 창고와 재정에 관한 일을 맡고, 內法佐平은 예법과 의례에 관한 일을 맡고, 衛士佐平은 왕과 궁궐을 지키는 군사 업무를 맡고, 朝廷佐平은 형벌과 감옥에 관한 일을 맡고, 兵官佐平은 대외 군사 업무를 맡았다. 또, 達率 恩 率 德率 率 奈率 및 將德 施德 固德 季德 對德 文督 武督 佐 29) 김기섭, 2000, 백제와 근초고왕, 학연문화사, 138 182쪽. 30) 千寬宇, 1976,`三韓의 國家形成(下)a, 韓國學報 3, 一志社. 朴燦圭, 1995,`百濟의 馬韓征服過程 硏究a,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金秉南, 2000,`百濟 領土 變遷史 硏究a,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36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사라는 것이다.31) 물론, 삼국사기 의 건국 기년을 그대로 믿으려는 입장에 제1절 고대국가의 여명 37 하자. 서는 관제 정비를 사실로 인정하기도 한다.32) 그러나 3세기 중엽의 관제 정 비는 고구려 신라에 비할 때 너무도 빠른 진전이거니와 삼국사기 의 16 관등 기사 내용이 중국에서 7세기 전반기에 편찬된 周書 異域傳의 기사 와 거의 같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고이왕 때의 6좌평 16관등 설치 기사를 泗 時代의 일을 소급 부회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33) 비류왕본기 仇首王의 둘째아들로서,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남을 사랑하고, 또 힘이 세어 활을 잘 쏘 았다. 오랫동안 민간에 있었는데, 명성이 자자하였다. 汾西王이 죽자, 비록 아들이 있었지만 모 두 어려서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그래서 신하와 백성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것이다. 5년(戊辰, 308) 봄 정월 초하루 丙子날에 일식이 일어났다. 이처럼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사를 고스란히 믿기란 애초 불가능하다. 9년(壬申, 312) 봄 2월에 사신을 보내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질병과 고통을 위문케 하고, 후대에 일어난 사건을 반영하였거나 시기를 소급해서 적어놓은 부분이 있 홀아비 과부 고아, 혼자 사는 늙은이로서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자에게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초기 기사를 무한정 신빙할 수는 없으며, 상대적으로 삼국지 한전을 비롯한 중국사서에 적힌 단편적 이야기와 고고학적 조사 연구 결과에 더 많이 주목해야 한다. 곡식을 한사람 당 3섬씩 주었다. 여름 4월에 동명묘에 배알하였다. 解仇를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10년(癸酉, 313) 봄 정월에 남쪽 교외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지냈는데, 왕이 직접 제물로 쓸 짐승을 베었다. 13년(丙子, 316) 봄에 가물었다. 큰 별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여름 4월에 왕도의 우물물이 넘치고 그 안에서 검은 용이 나타났다. 17년(庚辰, 320) 가을 8월에 궁궐 서쪽에 활 쏘는 돈대를 쌓고 매월 초하루에 활쏘기를 익혔 1. 비류왕의 즉위 다. 18년(辛巳, 321) 봄 정월에 왕의 이복 아우[庶弟]인 優福을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백제가 고대국가로서 우뚝 서기 시작한 것이 정말 4세기라면 우리는 백 제의 제11대 比流王에 주목해야 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304 년에 즉위하여 344년에 죽을 때까지 40년간 백제를 다스렸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4세기 전반기에 백제의 비약적인 국가 성장을 앞장서서 이끌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먼저 그에 관한 기록을 유심히 살펴보도록 가을 7월에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나라 남쪽에서 풀무치가 곡식을 해쳤다. 22년(乙酉, 325) 겨울 10월에 하늘에서 소리가 났는데, 마치 바람과 물결이 서로 부딪치는 듯했다. 11월에 왕이 狗原 북쪽에서 사냥하여 손수 사슴을 쏘아 맞혔다. 24년(丁亥, 327) 가을 7월에 구름이 마치 붉은 까마귀가 해를 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9월에 내신좌평 우복이 北漢城을 근거로 삼아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군사 를 보내 토벌하였다. 28년(辛卯, 331)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풀과 나무가 마르고 강물이 마르더니 가을 7월에 31) 李丙燾, 1936,`三韓問題의 新考察a, 震檀學報 6 ;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李基白, 1959,`百濟王位繼承考a, 歷史學報 11. 金哲埈, 1982,`百濟建國考a, 百濟硏究 특집호,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李基東, 1987,`馬韓領域에서의 百濟의 成長a, 馬韓 百濟文化 10, 원광대학교 마한백 제문화연구소. 32) 李鍾旭, 1977,`百濟王國의 成長a, 大丘史學 12 13 ; 1978,`百濟의 佐平-三國史記 를 중심으로-a, 震檀學報 45 ; 1994,`百濟의 建國과 統治體制의 編成a, 百濟論叢 4, 백제문화개발연구원. 33) 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 일조각, 84쪽. 김기섭, 2000, 백제와 근초고왕, 학연문화사, 219 220쪽.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이 해에 기근이 드니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30년(癸巳, 333) 여름 5월에 별이 떨어졌다. 왕궁에서 불이 나더니 민가까지 잇달아 태웠다. 가을 7월에 궁실을 수리하였다. 眞義를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겨울 12월에 우레가 쳤다. 32년(乙未, 335) 겨울 10월 초하루 乙未날에 일식이 일어났다. 33년(丙申, 336) 봄 정월 辛巳날에 혜성이 奎별자리에 나타났다. 34년(丁酉, 337) 봄 2월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예방하여 왔다. 41년(甲辰, 344)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38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이상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재된 비류왕 관련 기사이다. 백제의 비 제1절 고대국가의 여명 39 (1)온조왕-(2)다루왕-(3)기루왕-(4)개루왕-(5)초고왕-(6)구수왕-(7)사반왕 약적인 발전을 이끈 왕에 관한 이야기라 하기엔 기사의 내용이 너무 밋밋 (8)고이왕-(9)책계왕 (10)분서왕 하고 한가롭다. 온조왕처럼 영토를 넓힌 일도 없고, 고이왕처럼 제도를 정 (11)비류왕-(12)계왕 비한 일도 없다. 순행하며 백성을 위로하고, 하늘과 땅에 제사지내고, 관리 를 임명하고, 사냥하고, 반란을 진압한 것이 40년 통치의 주요 업적이었던 (13)근초고왕-(14)근구수왕-(15)침류왕-(17)아신왕-(18)전지왕-(19)구이신왕 셈이다. 이처럼 삼국사기 의 기록은 고고학 자료와 큰 차이를 보인다. 고고학적 측면에서 볼 때 비류왕은 분명 백제가 城邑國家에서 領域國家로 비약하던 (16)진사왕 (20)비유왕-(21)개로왕-(22)문주왕-(23)삼근왕 무렵의 왕이다. 그런 만큼 비류왕본기에는 주변의 여러 나라를 정복 병합 한 이야기가 적지않이 실렸어야 한다. 그런데 영토확장과 군사력에 관한 -곤지-(24)동성왕-? 이야기는 전혀 없고 어느 시대에나 있었을 법한 평범한 이야기로만 채워진 (25)무령왕-(26)성왕-(27)위덕왕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일까? -(28)혜왕 의심을 품고 삼국사기 의 비류왕에 관한 기록을 찬찬히 살펴보면 몇가 지 불합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즉위 배경에 대한 설명이 그중 하 나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오랫동안 민간에 있다가 신하와 백성의 (29)법왕-(30)무왕-(31)의자왕 x도면 2y백제 왕위계승도( 삼국사기 에 의함)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고 적혀 있다. 분서왕이 죽자 비록 아들이 있 었지만 모두 어려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는 내용도 있다. 왕자들이 여럿 있지만 능력이 부족하므로 백성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는 것인데, 쿠 데타를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 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삼국사기 는 비류왕을 구수왕(214 234)의 둘째아들이라고 하였다. 그 러니까 구수왕의 맏아들로서 왕위를 이어받았다가 어리기 때문에 물러 34) 난 沙伴王과는 형제인 셈이다. 언뜻 보아서는 그럴듯하다. 그래서 비류 왕은 아버지 구수왕이 죽고 형 사반이 고이왕에게 축출될 무렵 궁궐에서 쫓겨났다가 세력을 규합할만한 힘을 얻은 뒤 분서왕이 자객에 의해 살해되 자 왕위에 오른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35) 그러나 비류왕이 구수왕의 둘째아들로 나오는 계보는 사실일 수 없다. 사반왕이 고이왕에게 왕위를 넘겨준 것은 234년이고, 비류왕이 즉위한 것은 304년으로서, 두사람의 활동 시기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x도면 2y 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내용에 따른 왕실계보이다. 여기에 서 비류왕은 구수왕의 아들이므로 최소한 구수왕이 죽은 해인 234년에 는 잉태되었어야 한다. 그렇다면 비류왕이 왕위에 오른 304년 무렵에는 적어도 70세였던 셈이며, 41년간 재위하였으니 죽을 때의 나이는 최소 110세라고 할 수 있다. 당시로서는 매우 부자연스런 수명이다. 물론, 비류왕이 특별히 장수한 인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추정되는 최소 35) 박현숙, 2005, 백제의 중앙과 지방, 주류성, 78 79쪽. 34)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제2 古爾王 즉위년조.

40 41

42 43

44 45

46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1절 고대국가의 여명 47 3. 비류왕 때의 국가성장 백제국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세력을 확장하였고, 언제 百濟로 성장했는 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앞에서 보았듯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실린 비 류왕의 행적이 너무 한가롭기 때문이다. 더욱이 3세기 중엽의 중국 역사를 다룬 三國志 가 3세기 말엽에 쓰여 진 데 반해 3세기말 4세기초의 중국 역사를 다룬 晉書 는 唐나라 때이 던 7세기 중엽에 가서야 비로소 쓰여지는 바람에 馬韓의 백제국이 삼국시 대의 백제로 성장하는 과정이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백제의 국가성장은 3 4세기의 국제정세와 고고학적 조사 연구 결과를 통해 유 추하는 것이 지금으로선 최선의 방법이다. x사진 1y풍납토성에서 출토된 동전무늬도기(錢文陶 x사진 2y몽촌토성에서 출토된 동전무늬도 器) 기 조각 정책을 담당케 하였는데, 백제 한성도읍기의 특징적인 토기로 꼽히는 黑色 磨硏土器 直口短頸壺 直口長頸壺 등은 모두 遼寧지방의 토기문화와 연 관된 것이라고 한다.51) 백제와 진나라의 교섭을 입증하는 유물로는 동전무늬도기(錢文陶器)가 인상적이다. 동전무늬도기란 陶器의 어깨 부위에 五銖錢과 같은 동전 무늬 를 새긴 항아리로서, 중국의 삼국시기부터 東晋 때까지 3 4세기에 주로 揚子江유역에서 만든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이처럼 한정된 시기에만 잠 깐 만들어진 동전무늬도기가 夢村土城 風納土城, 홍성 神衿城 등지에서 조각난 상태로 발견되었다. 특히,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은 당시 백제의 도 성이었기에 백제와 진나라 사이의 교류에 반영된 정치적 의미가 더욱 각별 해진다. 51) 박순발, 1999,`한성백제의 대외관계a, 백제연구 30,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 양기석, 2005, 백제의 경제생활, 주류성, 210쪽. 먼저, 4세기 무렵의 백제문화에 기초한 고분 산성 주거지가 화성 마하 리52) 백곡리53), 이천 설봉산성54), 파주 주월리55), 포천 자작리56) 등 경기도 일원에 널리 분포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 유적을 통해 개략적인 판도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유적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백제토기가 출토되었는데, 풍납토성 몽촌토성에서 수습한 토기들과 기종 형태 재질 등이 대체로 일치한다. 이는 백제의 정치영역 내지 문화영역이 4세기 무렵에는 적어도 경기도 일 원으로 크게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4세기 전반 무렵의 국제정세에 비추어보면, 백제의 팽창이 단순히 주변 소국을 병합하는 데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제는 한군현의 옛 터전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그곳은 각종 기반시설이 잘 갖추어진 데다 외교 무역 에 종사할 인재와 재물이 많았기에 매력적인 공략 목표였다. 그러나 이미 52) 湖巖美術館, 1998, 華城 馬霞里 古墳群. 53) 韓國精神文化硏究院發掘調査團, 1994, 華城白谷里古墳. 54) 단국대학교 중앙박물관, 1999, 이천 설봉산성 1차 발굴조사보고서.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1999, 이천 설봉산성-2차발굴조사 지도위원회의 자료-. 55) 京畿道博物館, 1999, 坡州 舟月里遺蹟. 56) 경기도박물관, 2001, 포천 자작리유적 긴급발굴조사-지도위원회의 자료-.

48 49

50 51

52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1절 고대국가의 여명 53 한번에 군사 3만명을 동원할 수 있는 백제의 가공할만한 국력이 근초고 왕 때 갑자기 생겼을리 없다. 근초고왕 때 발휘된 강력한 힘의 기반은 비류 왕 때 이미 어느 정도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4세기 초엽에 낙랑 군이 멸망하고 대방군이 쇠약해졌으며, 백제 문화권이 경기지역을 벗어날 정도로 확대되었다는 사실은 비류왕의 정치적 활동 범위가 매우 넓어졌음 을 시사한다. 4. 비류왕과 碧骨堤 많은 사람들이 근초고왕을 백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임금으로 여기고, x사진 3y김제의 벽골제(복원) 그때를 백제의 전성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근초고왕은 비류왕의 둘째 아 들이라고 전한다. 그러니 비류왕 때를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지고 경제발전 의 토대가 마련된 시기71)로 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기 록에는 이와 관련한 내용이 전혀 없다. 위의 기록에서 벽골지와 벽골제는 서로 같은 곳임을 알 수 있다. 벽골제 라면 전라북도 김제의 浦橋里에 남아있는 직선 거리 약 3km의 제방이다. 특별한 증거자료가 없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비류왕 때를 경제발전의 토 그리고 흘해왕 21년은 330년에 해당한다. 두 기록이 전하는 바는 4세기 초 대가 마련된 시기로 보는 이유는 순전히 벽골제 때문이다. 삼국사기 와 엽 김제지역에 거대한 규모의 저수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둑을 삼국유사 에는 각각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쌓게 한 사람이 백제의 비류왕이 아닌 신라의 흘해왕으로 되어 있다. 당시 신라는 경상도지역을 다 장악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였으므로, 흘해왕 三國史記 권2 新羅本紀 제2 訖解尼師今 21년 72) 처음으로 碧骨池를 만들었는데, 둑의 길이는 1,800步이다. 三國遺事 권1 王曆 訖解王 기축년에 처음으로 碧骨堤를 쌓았다. 둘레가 만7천26보이며, 이 백66보이고, 논(水 73) 田)은 1만4천70 이다. 이 벽골지를 만들었다는 기록은 명백한 잘못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잘못은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다. 백제에서 비류왕 27년(330)에 대대 적으로 벌인 공사를 후대의 역사가들이 신라의 일인 양 잘못 기록했을 뿐 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1975년에 전라북도 김제 포교리의 碧骨堤를 발굴 조사하였다. 그 결과 제방의 높이 약 4.3m, 상변의 폭 7.5m, 하변의 폭 17.5m, 전체 길이 3km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제방의 맨 아래 炭化層에서 시료를 71) 강종원, 2002, 4세기 백제사 연구, 서경문화사, 119쪽. 72) 二十一年 始開碧骨池 岸長一千八百步. 73) 己丑始築碧骨堤 周 萬七千二十六步 百六十六步 水田一萬四千七十. 채취해 放射性炭素年代法으로 측정한 결과 ①1600±100 B.P. ②1576± 100 B.P. ③1620±110 B.P. 등 4세기 중엽에 해당하는 연대를 얻었다고

54 55

56 57

58 59

60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멈추고 돌을 쌓아 표지를 삼은 다음 그 위에 올라가 좌우를 돌아다 보며 이 다음 날에 누가 다시 이곳까지 이를 수 있을까! 라는 말을 감회 어리게 할 정도였다. 또 백제는 영산강유역과 낙동강유역에도 진출하여 마한 잔여 세력과 가야제국을 제압하였다. 백제의 정지할 줄 모르고 추진되어 온 정복사업의 성과는 근초고왕 당대 의 일이었다. 근초고왕대에 절정을 이룬 백제의 정복 활동은 크게 세 방향 으로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즉, 영산강유역과 낙동강유역 그리고 예성강 유역으로의 진출이었다. 이 가운데 백제가 크게 주력한 것은 마한 지역의 제패였다. 그런 관계로 그 영역은 적어도 금강 이남에서 노령산맥 이북까 지 미쳤다. 이 때 백제의 정치적 영향력은 노령산맥을 넘어 전라남도 해변 지역까지 미칠 정도로 마한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었다.85) 백제 가 이처럼 동남쪽으로는 낙동강유역과 북쪽으로는 예성강선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미칠 영역을 확장하는데 소요된 기간은 369~371년까지의 단 3 년에 지나지 않은 짧은 시일이었다. 이 기간 동안 백제는 남과 동과 북으로 영토를 확대하였거니와 서쪽으로는 중국 동진과의 교섭을 통하여 그 존재 가 국제 무대에 찬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이같은 백제의 흥기와 세력 팽창 특히 그 힘의 東進은 낙동강 東岸 지역에 자리잡은 진한제국 전체의 위기 의식을 초래하여86) 신라를 중심으로 통합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백제의 단기간에 걸친 세력 팽창 배경을 계기적인 발전 과정에서 만 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근초고왕대 백제의 폭발적인 팽창은 계기적으 로 설명할 수 있는 사안만은 결코 아니다. 백제사상 삼국사기 에만 보더 라도 2명의 시조가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複數 시조의 존재는 2개 왕실의 존재를 상정하게 한다. 아울러 근초고왕대와 그 이전 代의 백제 왕실 계보 가 단층이 진다는 지적에 대한 일종의 해명 차원에서라도 왕실교체에 의한 정복국가론이 제기되었다. 영향권 세력 x도면 1y근초고왕대의 백제 영역도 85) 李道學, 1991, 百濟의 交易網과 그 體系의 變遷, 韓國學報 63, 76~78쪽. 86) 末松保和, 1954, 新羅史の諸問題, 138~139쪽. 61

62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2) 정복국가론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63 서 확인되고 있다. 그것도 하나의 사료가 아니라 계통이 서로 다른 3개의 史書에서 각각 그렇게 전한다. 먼저 자치통감 영화 2년(346) 정월조에 지금까지 제기된 백제 정복국가론 관련 논고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李道學, 1988, 百濟의 起源과 國家形成에 관한 再檢討, 韓國古代史硏究 會報 7, 한국고대 사연구회. 보면 다음과 같다. a. 처음에 夫餘는 鹿山에 거처하였는데, 百濟의 침략을 받아 部落이 衰殘해져서 서쪽으로 燕 나라 근처로 옮겼으나 방비를 하지 않았다. 燕王 은 세자 儁을 보내어 慕容軍 慕容 李道學, 1990, 百濟의 起源과 國家形成에 관한 재검토, 한국 고대국가의 형성, 민음사. 恪 慕輿根 3장군을 거느리고 17,000餘 騎로 부여를 습격하게 하였다. 儁은 가운데 거처 李道學, 1991, 百濟의 起源과 國家 發展過程에 관한 檢討, 韓國學論集 19, 한양대학교 한 하면서 지휘를 하고 군사는 모두 恪에게 맡겼다. 드디어 부여를 빼앗고 그 王 玄 및 部落 국학연구소. 李道學, 1993, 百濟 初期史에 관한 文獻資料의 檢討, 韓國學論集 23, 한양대학교 한국학 의 5萬餘 口를 사로잡아 돌아 왔다. 은 玄을 鎭軍將軍으로 삼고 딸을 妻로 삼게 하였 다.88) 연구소. 李道學, 1994, 4세기 정복국가론에 대한 검토, 한국고대사논총 6, 한국고대사회연구소. 李道學, 1995, 백제 고대국가 연구 일지사. 이상의 논고를 토대로 한 정복국가론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부여계인 만주의 백제 세력이 2차례 이동하여 지금의 서울 지역에 정착했다는 것이 다. 1차 이동은 1세기 단계로, 2차 이동은 4세기 중반 단계로 설정하였다. 백제의 국가형성 문제와 관련지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그 기원이라고 하겠다. 기원은 그 국가의 성격을 암시해주는 일종의 좌표 구실을 하기 때 문이다. 그런데 여러 기록을 놓고 볼 때 백제의 기원은 고구려가 아니라 부 여임이 명백하게 드러났다.87) 그런데 일제 官學者들의 주장 이래로 위의 기사에 보이는 百濟 를 고구 려의 誤記로 간주하여 왔다.89) 혹은 民族主義 史學者들에 의해서 백제의 海 上進出과 관련지어 遼西經略說의 근거로도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러한 해석들은 백제의 중심지를 시종 한반도로만 단정했을 때 거리 관계상 나올 수 밖에 없는 발상에 불과하다. 만약 이 기사의 史料 가치를 의심한다 면 晋書 慕容 載記(b)에 등장하는 백제 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 가? 이 곳의 백제도 誤記라고 해야만 하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하다고 보겠 다. 그것도 하나의 사료가 아니라 계통이 서로 다른 사서에서 그렇게 전하 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를 단순히 誤記로만 돌리는 것은 궁색한 해 석에 불과하다. 근자에 중국 학자가 이 백제 를 말갈 7部의 하나인 伯 의 잘못된 기재로 간주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추종하는 이도 나왔다. 그런 (1) 사료에 보이는 만주 백제 데 백돌 은 7세기대인 隋唐代 이후에 등장하는 말갈의 족속 이름일 뿐 4 세기대를 무대로 하여 나타난 바 없다. 물론 이 주장은 백돌 의 음과 글자 3세기 후반에 씌어진 삼국지 동이전 한조에 의하면 마한 54개 국 가운 데 백제국이 보이고 있다. 당시 마한제국의 맹주국은 목지국이었다. 백제 국은 그 예하의 평범한 일개 국으로서 존재하였다. 그런데 동북아시아의 격동기이자 백제가 흥기하기 직전인 4세기 중엽에 그 존재가 만주 지역에 87) 이에 대해서는 李道學, 1995, 백제고대국가연구, 52~72쪽을 참조하기 바란다. 88) 資治通鑑 권97 永和 2년 정월조, 初夫餘居于鹿山 爲百濟所侵 部落衰散 西徙近燕 而不 設備 燕王 遣世子儁 帥慕容軍 慕容恪 慕輿根三將軍 萬七千騎襲夫餘 儁居中指授 軍事 皆以任恪 遂拔夫餘 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 以玄爲鎭軍將軍 妻以女. 89) 日夜開三郞, 1946, 夫餘國考, 史淵 34, 37쪽. 池內宏, 1932, 夫餘考,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13 ; 1951, 滿鮮史硏究 上世篇 第一 冊, 460쪽.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221쪽.

64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65 가 백제와 닮았다는 점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구당서 와 신당서 를 전반에 부여를 직접 공격하는 일은 가능할 수도 없었다. 바꿔 말해 이 사 비롯한 여타 역사서에는 한결같이 伯 部가 汨 部 로 적혀 있으므로 논 실은 a에 보이는 백제 가 고구려 의 오기일 수 없음을 다시금 확인시켜 거로 삼기는 더욱 어렵다. 그 뿐 아니라 백돌부는 부여 중심지인 길림시의 준다. 북쪽에 소재하였다. 만약 부여가 백돌의 공격을 받았다고 하자. 부여는 남 이와 관련해 高麗에 왕실의 연원을 두고 있는 金이 고려를 압박했을 뿐 쪽으로 이동했어야 마땅하지 서쪽으로 이동해야 될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침공하지 않은 사실이93) 상기된다. 이것을 일반화시킬 수야 없겠지만 그 支 백돌 자체가 7세기대 이후에야 등장하므로 논거가 될 수도 없다.90) 派임을 선포한 나라가 그 祖源이 되는 국가를 군사적으로 공격하기는 어렵 그렇더라도 위에 보이는 백제 를 고구려 의 오기로 간주한다고 하면, 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영화 2년 조(a)의 부여를 북부여로 간주하면서, 그 이러한 논리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먼저 이 기사의 下限인 영화 2년인 346 곳을 침공한 백제를 고구려 로 지목한 견해는 설득력이 떨어진다.94) 따라 년은 西遷한 부여가 前燕에게 격파당한 시점이라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서 위에 인용된 백제를 고구려의 오기로만 간주하는 견해는 더욱 신중한 부여가 설령 백제가 아닌 고구려에게 몰려서 서쪽으로 이동했다고 하더라 검토가 필요하다. 도 그 시점은 이 보다 훨씬 이전이 된다. 285년에 부여는 전연의 침공을 받아 破局에 직면했다가 西晋의 지원을 만주 방면에서 백제의 움직임은 345년에 전연의 記室參軍인 封裕가 국 왕인 모용황에게 건의한 상서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도 다시금 포착된다. 받아 復國된 바 있다. 서진과 우호 관계에 있으면서 전연에 공동 대처하고 있던 국가가 고구려였다. 그러니 고구려로서는 3세기 말경에 서진의 보호 아래 있던 부여를 공격할 정황이 되지 못한다. 그런 만큼 世紀를 넘겨 4세 기 전반에 고구려가 송화강유역에 진출하여 길림시 방면에 소재한 부여를 b. 高句麗 百濟 및 宇文 段部의 사람은 모두 兵勢를 옮겼는데, 中國의 義를 사모하여 온 것 같지는 않으니 모두들 돌아갈 생각이 마음에 있습니다. 지금 戶가 10萬이나 좁은 都城 에 몰려들고 있어서 장차 국가에 큰 害가 될까 두렵습니다. 마땅히 그 兄弟宗族을 나누어 서 서쪽 경계의 여러 城으로 옮겨 이들을 恩寵으로 慰撫하고 法으로 단속하면 됩니다.95) 압박한 근거를 제시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헌에 보면 고구려가 4세기 전반에 북상했다는 하등의 기록도 발견하기 어렵다. 고구려와 전연과의 전 위의 기사는 전연의 수도인 龍城(요녕성 조양시)으로 붙잡혀 온 주변국 쟁 기사가 빈출함에도 불구하고 이 무렵 고구려와 부여 관계 기사는 일체 포로들의 처리 문제가 된다. 여기서 백제 라는 국호가 중국 사서에 처음 비치지 않고 있다. 당시 고구려는 전연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 보이는 것이다. 아울러 백제는 전연의 공격 대상 국가들이던 고구려라든지 므로 고구려가 부여를 몰아붙일 객관적인 상황이 되지도 못한다. 게다가 우문부 단부 등과 병칭되고 있다. 그러므로 웅자를 드러낸 백제는 345년 3세기대 부여의 남쪽 경계는 고구려 였지만91) 4세기대에는 선비 와접 하였다.92) 전연의 영향력이 부여에 미친 시기가 285년 이후였다. 따라서 이러한 지리 관계 기사는 285년 이후 4세기대에 접어들어 기존 부여의 남부 영역을 전연이 장악한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 만큼 고구려가 4세기 90) 李道學, 2001, 한국고대사, 그 의문과 진실, 200~202쪽. 91) 三國志 권30 東夷傳 夫餘條, 南與高句麗 東與 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92) 晋書 권97 夫餘條, 南接鮮卑 北有弱水. 93) 金庠基, 1984(改訂版), 金의 始祖에 對하여, 東方史論叢, 286~287쪽. 94) 물론 본글에서 언급한 永和 2년조의 부여는 原夫餘를 가리킨다. 개로왕의 국서에서 백제 역시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출원했다고 한 바 있다. 그런데 국서의 부여는 汎夫餘系 로 표기한 것일 뿐이므로 백제의 북부여 출계를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이다. 그랬기에 백제가 鹿山의 夫餘 를 몰아붙일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백제가 국호를 남부여로 바꾼 것도 그 연원이 되는 북부여를 의식한 것일 수 있다고 본다. 95) 晋書 권109 慕容 載記, 句麗 百濟及于文 段部之人 皆兵勢所徙 非如中國慕義而至 咸有思歸之心 今戶垂十萬 狹湊都城 恐方將爲國家深害 宜分其兄弟宗屬 徙于西境諸城 撫 之以恩 檢之以法 使不得散在居人 知國之虛實.

66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이전에 전연과의 교전 끝에 이미 상당한 숫자의 포로가 발생했음을 짐작하 게 한다. 그러한 백제의 소재지는 고구려 우문부 단부 등과 마찬가지로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67 c. 使者를 나누어 보내어 선비 오환 고구려 백제 및 薛羅 休忍 等 諸國에서 徵兵했는데 모두 따르지 않았다.97) 전연과 인접한 만주 내륙 지역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을 시사해 주는 고고학적 물증이 있다. 백제 지역에서 출토된 이들 諸國은 전진에서 연락 가능한 곳에 소재한 국가들을 가리키고 있 바 있는 선비 계통의 귀고리와 마구류의 존재가 된다. 이 중 귀고리의 경우 다. 백제 역시 고구려와 함께 그 인근에 소재했음을 알려준다. 물론 이 기 東晋을 경유한 모용선비 문물의 접촉 가능성이나 고구려와의 전쟁을 통해 록과 관련한 시점은 380년 경이다. 이 무렵에도 백제가 만주 지역에 소재 모용선비 문물의 접촉 가능성이 상정되었다. 그러나 간접 접촉을 상정하고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더구나 부락이 이들 제국에서 징병을 시도했지 있는 전자나 후자 모두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동진이나 고 만 성과가 없었다. 이로 볼 때 백제의 실체는 만주 방면에서 이미 사라졌었 구려에서 선비계 귀고리가 출토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 지역을 경유 다. 그렇지만 백제는 고구려 인근의 만주 방면에 소재했다는 오랜 관념으 했으리라는 추측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백제가 선비와 직접 접촉했을 로 인해 전진인들의 징병 대상으로 역시 인식 되었던 것 같다. 더욱이 전진 가능성을 설정해야만 타당성이 높은 것이다. 실제 선비계 마구류는 백제 과 한반도의 백제는 전혀 교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같은 상정을 가 중앙권력과 선비와의 직접 교섭에 의한 전래 가능성이 제기되었다.96) 따라 능하게 해준다. 서 이러한 고고물증 역시 백제와 모용선비간 충돌의 산물로 해석하면서, 백제의 존재를 당초 만주 지역으로 설정했을 때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또 그 밖에 백제가 만주 지역에 존재했음을 시사하는 기록이 송서 백제국 조에 보인다. 그 첫머리에 보이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그러한 물증들은 만주 백제 세력의 남하로 인해 한반도 지역에 전파된 것 으로 해석하는 게 자연스러워진다. 백제와 선비의 관련성은 5세기 중반 백제의 직제에 좌현왕과 우현왕제가 d-1. 百濟國은 본래 高驪와 함께 遼東의 동쪽 千餘 里에 있었다. d-2. 그 후 高驪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는 요서를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하는 곳을 晋平 郡 晋平縣이라 했다.98) 확인된데서도 방증이 된다. 주지하듯이 좌 우현왕제는 선비를 비롯한 유 목민족 국가의 직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5세기 중반에 처음으로 백제 관 즉, 백제는 본디 고려 곧 고구려와 함께 요동군의 치소인 요양의 동쪽 천 련 문헌에 보이지만 그것은 문헌에 우연히 포착된 시점일 뿐이다. 좌 우 여 리에 소재했다고 한다.99) 물론 이 기록을 중국인의 지리관에서 비롯된 현왕제는 그 이전으로 소급시켜야 될 사안이 분명하다. 또 이는 말할 나위 없이 백제의 국가적 정체성을 암시해 주는 근거가 된다. 이와 더불어 前秦의 洛이 380년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였다. 그가 使者 를 나누어 보내어 徵兵을 요구한 국가 가운데 백제의 존재가 다음과 같이 보인다. 96) 李勳, 2005, 수촌리 고분군 출토 백제 마구에 대한 검토, 4 5세기 금강유역의 백제 문화와 공주 수촌리유적 충청남도역사문화원 제5기 정기심포지엄, 109쪽. 97) 晋書 권113 堅 上, 分遣使者徵兵於鮮卑 烏丸 高句麗 百濟及 薛羅 休忍等諸國 不從. 98) 宋書 권97 百濟國條,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 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晋平郡晋平縣. 99) 여기서 d-2는 백제 요서경략설의 근거가 되는 구절이다. 그런데 양직공도 에서는 백 제 가 樂浪 으로 적혀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앞의 문구인 d-1의 백제 소재지 문구와 결부지어 해석하기는 어렵다. 논자는 이것을 가리켜 양직공도 를 제작한 蕭繹이 백제 의 왕이 낙랑태수를 겸대하고 있었던 관계로 백제를 대신하여 낙랑이 진출의 주체였던 것 처럼 서술하였다 고 했다. 그러나 기실은 그 반대이다. 근초고왕이 낙랑태수라는 직함을 동진으로부터 부여받은 관계로 요서 지역으로 이동해간 낙랑을 백제로 착각한 것이다. 낙

68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관념적인 내용으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지 고구려 조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69 (2) 만주 백제 세력의 남하와 관계된 증거 에서 그 소재지를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고 한데 반하여 평 양성으로 천도한 장수왕 때의 상황을 기록한 위서 고구려 조에는 요동 4세기 중반 경에 남하한 만주 백제 세력은 어떻게 해서 한반도의 백제와 남쪽 1천여 리 라고 하여 그 중심 거점의 남하를 분명히 읽고 있었다. 따라 합류할 수 있었을까? 비옥한 충적평야 지대로서 인구조밀 지역이기도 하거 서 중국 역대 정사류 가운데 백제전이 최초로 立傳되었거니와 사료 가치가 니와 고구려 세력권 밖의 첫 지역인 한강유역으로 진입한 백제세력(비류 높기로 정평이 난 송서 백제국전100)에서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 계)은 백제국(온조계) 세력권에 진입하게 되었다. 백제국이 자리잡은 서울 쪽 천여 리에 소재했다는 기록은 결코 관념적인 문구로 돌릴 수 없게 한다. 지역은, 원산에서 시작된 추가령구조곡을 타고 내려오는 말갈의 침입 루트 실제 송서 백제국전 첫머리의 본래[本] 字는 그것이 편찬되는 488년의 와, 평안도 황해도를 지나 개성으로 하여 내려오는 루트가 합쳐지는 교통 시점과는 달리 백제가 당초의 거점으로부터 이동했음을 염두에 둔 서술이 의 요충지였다. 요컨대 서울 지역은 한반도 북부의 동 서 루트가 한데 모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는 곳이었다. 때문에 만주 백제세력이 남하하면서 어느 루트를 이용하였 물론 삼국사기 에는 만주에서 백제 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어 의문 든 간에 마한 판도의 북부에 자리잡은 백제국과 맞닥뜨리게 된다는 것은 이 제기될 수 있다. 고구려는 초기 발전 과정에서 주변의 비류국이나 행인 지리형세적인 측면에서 볼 때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한 결과 동 국 갈사국 황룡국 개마국 등 뿐 아니라 원시적 소국을 가리키는 那 집 계인 양 지배층은 군사적 대결보다는 타협을 모색한 결과 백제 건국설화상 단을 정복 혹은 합병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에 보이는 이 兄으로 전해진 데서 유추할 수 있듯이 종가적인 비류계 세력이 주도권을 들 국이나 나 집단은 고구려 정복사업의 편린에 불과할 것이다. 고구려의 장악하였으리라고 믿어진다. 요컨대 비류계가 온조계를 흡수한 것이다. 그 영역 팽창과 관련지어 볼 때 많은 국명들은 기록에서 누락되었으리라 생각 러니 백제사의 상층부는 먼저 한강유역에 정착했던 백제국의 역사적 경험 된다. 실제 만주 백제의 존재는 대무신왕이 비류수 상류를 지나 부여를 공 과 사실이 반영되어 일원적으로 재편집되었을 것이다. 격하기 2년 전인 A.D.19년에 백제 주민 1천여 호가 내투하였다. 라고 한 만주 지역 백제세력의 한강유역 정착은 고고학적으로도 입증된다. 서울 기사를 통해 입증될 수 있다. 요컨대 이 기사는 국내측 문헌에 실로 우연찮 의 석촌동에는 완성된 형태의 적석총인 기단식 석실적석총이 소재하고 있 게 남아있는 만주 지역 백제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된다. 그렇지 않 다. 이러한 고분양식은 동일 지역의 이전 시기에 조영된 토광묘 옹관묘 고서 이들이 한강유역의 백제 주민들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고구려 땅이 즙석봉토분 점토충전식 적석총 등과는 계통이 판이하게 다른 일종의 단 지상낙원 도 아닐진대 다른 이유도 아니고 饑荒 을 이유로 중국 군현 지 층이 진다. 또 현재로서는 서울 지역 석실적석총의 축조 상한은 4세기 후 역을 통과하면서까지 북상한 게 된다. 그러나 이들이 자국 백제보다 열악한 반을 상회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따라서 이같은 석촌동의 백제 최고지배층 풍토의 고구려로 이주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분의 변화를 통하여 왕실교체를 상정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삼국사기 에서 근초고왕을 기점으로 그 이전과는 역사 기술상의 단층이 지고 있다는 랑이 313년에 요서로 이동해 간 것은 千寬宇, 1989, 古朝鮮史 三韓史硏究 132쪽 참 조 바란다. 요컨대 d-2는 양직공도 에서 낙랑이 주체로 적혀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앞 에 적힌 d-1의 백제 소재지 기사와 결부된 내용으로 간주해서는 안될 것 같다. 100) 姜鍾薰, 1993, 百濟 大陸進出說의 諸問題, 韓國古代史論叢 4, 412쪽. 지적도 이와 관련해 참고할 가치는 있다. 또 4세기 중반 이후 만주 지역에 서 백제의 활동이 사라진 것도 이를 반증해 준다. 아울러 석촌동 고분군 B 지역 대형토광묘와 즙석봉토분 사이에 위치한

70 71 Kö Kishi

72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73 왕 근초고왕의 전쟁수행 양식은 親征 掠奪 分配라는 유목형 군주의 그 화를 수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단순히 묘제 채용으로만 설명하기는 것과도 부합된다. 이러한 요소들은 만주 지역에서의 생존 방식이 백제에 어렵다. 그런 만큼 서울 지역 석실적석총의 출현은 앞서 제기한 근초고왕 영향을 미쳤음을 알려준다. 그 밖에 흉노와 오환의 경우 선우 妻族의 위세 대의 폭발적인 정복력의 배경과 관련지어 설명이 가능하다. 게다가 이는 110) 가 강대했다고 한다. 고구려에도 왕비족제가 있었지만 국왕의 姻族이 강 111) 한 곳은 단연 백제였다. 이러한 사회적 전통도 백제가 유목사회에 몸 담 갔던 영향으로 보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계보상의 단층과 2명의 시조의 존재를 해명해 주는 관건이 된다. 혹자는 만주 지역에 백제가 존재하였다면 삼국지 에 입전되어야만 한다 고 주장한다. 그러나 3세기 후반에 편찬된 삼국지 의 서술 단계 이전 만 한편 온조와 비류라는 2명의 시조 설화가 백제 멸망 이후, 그것도 12세 주 지역의 백제는 고구려 주변에 산재하였던 흔히 원시적 소국으로 운위되 기 삼국사기 편찬시까지 전승되었다. 이 자체가 2개 왕실의 존재를 상정 는 那 세력 정도에 머물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백제가 중국 역대 하지 않고는 납득하기 어려운 성질의 것이다. 이는 서울 지역 묘제 교체와 왕조와 외교적 교섭이나 군사적 충돌이 없었다면 입전되기 어려운 것이다. 도 연결되고 있다. 그런데 서울 지역에 4세기 후반에야 기단식 적석총이 이는 고구려의 팽창 과정에서 那 혹은 國으로 운위된 집단을 삼국사기 에 112) 출현했다는 필자의 견해에 동조하면서도 왕실 교체를 뒷받침하는 문헌 서 적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 세력이 중국 사서에는 전혀 적 근거가 삼국사기 에 없으므로 동의하기 어렵다고도 했다. 이러한 논리 기록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삼국지 에의 입전 여부는 그 세력의 규모라 라면 근초고왕대의 마한 정벌도 삼국사기 에 없으므로 취신하지 말았어 든지 중국과의 관계를 알려주는 준거는 된다. 그러나 그 존재 여부까지 결 야만 한다. 게다가 누차 지적했듯이 근초고왕대를 기점으로 한 기년상의 정지어주는 지엄한 잣대로 간주한다면 크나큰 착각이라고 하겠다.113) 단층을 비롯하여,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한반도의 약 1/3을 직접 점 유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폭발적인 힘은 자체 역량의 계기적 (3) 백제 요서경략설의 검토 발전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일종의 외적 輸血에 의한 결과로 보는 게 온 당한 해석으로 여겨진다. 그 외적 수혈은 중장 기병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 백제의 요서경략설에 대해서는 실학자들의 시기부터 연구 성과가 축적되 의 남하에 따른 왕실 교체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와 관련해 어 왔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일일이 거론하지 않겠다. 그런데 본서의 백 무령왕릉이 그러하듯이 석촌동의 석실적석총의 출현 역시 정치세력의 변 제의 중국대륙 진출 에서 다시금 제기된 요서경략설은 기존의 연구 성과를 동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는 될 수 없다. 무령왕릉과 같은 전축분은 단 뛰어넘어 구체적으로 그 시점을 설정하였다. 385년 7~8월부터 침류왕이 2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석촌동의 석실적석총은 묘제 전반의 획기적인 변 사망하는 그해 11월 사이의 4~5개월간 백제가 요서 지역을 점령했다는 논 지이다. 침류왕은 즉위한지 1년 남짓 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몸소 바다를 110) 사와다 이사오 김숙경 譯, 2007, 지금은 사라진 고대 유목국가 이야기, 흉노, 125쪽. 111) 李基白, 1959, 百濟王位繼承考, 歷史學報 11, 44쪽에서 근초고왕에서 아신왕대까지 를 가리켜 王族과 王妃族의 聯合政權時代라고도 부를 수 있는 時期이다. 고 했을 정도 로 근초고왕 이후 국왕의 姻族이 득세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요소는 흉노를 비롯한 유목 민 사회의 전통과 동떨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112) 이도학은 서울 지역에 기단식 적석총이 출현한 시점을 1988년에 정복국가론에 의한 백 제 왕실 교체론을 제기한 이래의 많은 論戰 속에서도 4세기 후반임을 일관되게 주장했었 다. 건너는 대원정을 단행했다가 그곳에서 敗死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 러나 이러한 주장은 지나친 상상에 의존하여 비약에 비약을 거듭한 관계로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면하기는 어렵다. 이와 관련해 그 논지의 일 113) 李道學, 1995, 앞의 책, 113쪽.

74 75

76 77

78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79 로 사회분화를 촉진시켰으리라고 본다.115) 왜냐하면 제염작업은 農閑期에 가단계를 넘어선 초기 왕조시대 이후에야 비로소 나타난다고 한다. 이러한 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므로 자연 그것은 농업에서 분리된 專業의 형태를 맥락에서 볼 때 백제가 관개와 관련된 대규모 토목공사를 단행할 정도라면 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제염업이 농업으로부터 분리된 생산형태였 집권국가로 진입하였음을 의미해 준다. 다음의 삼국사기 기사에서 알 수 던 관계로 그만큼 그들에게 공급할 잉여농산물의 생산을 필요로 하였다. 있듯이 백제는 농업생산력의 증대에 국가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관계로 제염작업은 사회분화와 농업생산력의 발달을 촉진시키는 요 인이 되었다고 한다. 2월에 왕이 부락을 巡撫하고 농사에 힘쓰도록 권장하였다(온조왕 14년). 3월에 사자를 보내어 農桑을 권장하게 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써 백성을 괴롭히는 役事를 모 두 그만 두게 하였다(온조왕 38년). 2) 水利權의 국가적 장악 2월에 國南의 州郡에 令을 내려 처음으로 稻田을 짓게 하였다(다루왕 6년). 6월에 큰 비가 10일 동안이나 내려서 漢江 물이 불어 민가가 떠내려 가거나 훼손되었다. 7 월에 유사에게 명하여 수해를 입은 田地를 복구하게 하였다(기루왕 40년). 국가가 통제하는 자원의 성격에 따라 권력 범위와 질이 달라지게 마련이 다. 특히 기본적 생존자원에 대한 통제는 여타의 것보다 더 큰 힘을 제공하 고 있다. 그러므로 인류학자들은 국가는 지배실체가 기본적 자원의 생산 2월에 有司에게 명하여 제방을 수리하게 하였다. 3월에는 영을 내려 농사를 권장하였다(구수 왕 9년). 2월에 國人에게 명하여 南澤에다 稻田을 개간하게 하였다(고이왕 9년). 과 획득에 통제를 가함으로써 나머지 주민들에게 필연적으로 강압적인 힘 을 행사하는 계층화된 사회이다. 고 정의한다. 국가사회 발전의 요체로써 기본적 생존자원의 생산과 획득에 대한 통제 가 요구된다고 한다. 그렇다고 할 때 백제 또한 이와 무관하지는 않았다. 위와 같이 백제의 농경시책과 관련한 기사가 상당히 확인되었다는 사실 은 대규모 관개시설의 축조를 생각하게 한다. 다음과 같은 벽골제의 축조 기사가 대표적이다. 백제는 소금산지의 확보와 독점적인 분급으로써 남 북한강수계 지역의 세력들을 통제하거나 영향권 내에 묶어 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 어 백제는 여타의 것에 대한 통제보다 더 큰 힘을 제공하는 기본적 생존자 원의 생산수단 을 확보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는 막대한 농업생산력을 비로소 碧骨池를 개착하니 둑의 길이가 1,800보였다(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 2 흘해니사금 21년조). 己丑에 비로소 碧骨堤를 쌓았는데, 둘레가 만 7천 26보 백66 보 水田 1만 4천70 ( 삼 국유사 왕력, 흘해니사금조). 수중에 집중시켜 국가유지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灌漑施設의 축 조로 나타나게 되었다. 관개시설의 축조는 토목공사에 따른 대규모 노동력 의 징발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는 집권화의 수단으로 알려지고 물론 벽골제는 신라 흘해니사금 21년(330)에 축조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다음의 기록을 통하여 검토해 보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대규모 관개는 초기 국 碧骨堤를 增築하는데, 全州 등 7州의 주민을 징발하여 공사를 일으켰다.116) 115) 三國志 권30 東夷傳 韓條에 의하면 낙랑군에 거주하는 漢人 3천 명이 진한에서 伐木 하다가 붙잡혀 노예생활을 하다가 귀환한 기사가 보인다. 이들의 벌목 동기에 관해서는 제철에 필요한 목탄의 원료를 채취하려는 데 있었던 것으로 추리되고 있지만, 소금 생산 을 위한 연료채취에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신라와 백제로부터 백성에게 이익을 주었다. 고려 顯宗 때에 이르러 옛날 모습으로 보수하였 116) 三國史記 권10 신라본기 10 元聖王 6년조.

80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고, 仁宗 21년(계해년)에 와서 또 增修하여 복구하였지만, 끝내 廢棄되니 識者들이 이것을 한탄 117) 하였다. 81 벽골제의 규모는 그것의 축조를 가능하게 한 백제 국가권력의 질적인 수 준과 공간적 범위를 가늠하여 준다. 벽골제의 둘레에 관하여 삼국사기 와 庚申에 무당의 말에 의하여 內侍 奉說을 보내어 金堤郡이 新築한 碧骨池의 제방을 끊게 하였 다.118) 古大堤는 碧骨堤이다(신라 흘해왕 21년에 처음 만들었는데 岸長이 1,800步이다. 本朝 太宗 15년에 다시 쌓았는데 이익은 적고 폐단은 많았으므로 곧 허물어 뜨렸다).119) 삼국유사 의 기록은 적어도 10배 가량의 차이를 보인다. 그 이유로서 아 마 전자는 初築 당시의 것을 후자는 그것이 개축된 통일신라나 고려 때의 둘레를 기록한 것이든지 아니면 誤記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할 때 벽골 제의 둘레에 관한 가장 적은 수치인 1,800步는 일단 4세기 중반 무렵에 해 위의 인용에서 보듯이 벽골제는 분명히 백제 영내인 지금의 전라북도 김 당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그 둘레의 측정 단위인 1步는 6尺이며, 제에 소재하였다. 이는 널리 의견이 모아진 사안이다. 게다가 삼국시대 신라 백제와 고신라에서의 1尺은 약 35 였다.123) 그러므로 1步는 2.1m가 되거 지역에 벽골제가 소재했다는 근거마저도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앞 니와, 1,800步는 3.78 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제방의 둘레는 약 3 정도 서 인용된 신라 흘해왕 21년조의 벽골제 기사를 백제의 그것으로 換置시킬 가 잔존하고 있는데, 후대의 증축된 부분까지 고려한다면 상당한 면적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벽골제는 4세기 중엽에 축조된 것이 된다. 그러나 백 매립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벽골제는 그 이후에 축조 그리고 전체 벽골제 土量은 161,253 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어진 되었거나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정은 벽골제의 인공축토층 下面 다.124) 이러한 벽골제를 조사한 보고자는 1 의 흙을 파고 운반하여 다지는 의 炭化層에서 채취한 試料를 방사선 탄소 연대로 측정한 결과 모두 1600± 작업에는 1일 0.5~0.4인의 인력이 소요된다고 하면서 築堤 공사에는 연인 121) 어느 정도 뒷받침된다. 설령 그렇지 원 322,500명이 동원된 것으로 추산하였다. 이 수치는 기준이 다를 수도 않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백제가 4세기 후반 경에 벽골제 외에도 대대적인 있겠지만 영산강유역의 대형 고분인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과 같은 분 120) 제의 김제 지역 진출은 369년 경이 확실하므로 100 B.P.전후한 수치가 나온 데서도 관개시설의 축조에 매진했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맥락에서라도 벽골제로 상 징되는 수리 관개시설의 축조가 지닌 의미를 상정해 볼 수 있다.122) 117)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3 金堤郡 古蹟條 碧骨堤 項. 118) 高麗史 권17 仁宗 24년조. 119) 世宗實錄地理志 권151 金堤郡條. 120) 李道學, 1991, 百濟의 起源과 國家發展過程에 관한 檢討, 韓國學論集 19, 183~184 쪽. 121) 尹武炳, 1976, 金堤 碧骨堤 發掘報告, 百濟硏究 7, 76~77쪽. 122) 벽골제의 축조 시기를 근초고왕대 이전인 비류왕대가 아닌 그 이후일 가능성이 제기되 었다. 물론 충분히 가능한 주장이라고 보지만 몇 가지 선결되어야 할 문제점이 있다. 우 선 논자가 벽골제의 축조 시기를 구체적으로 통일신라 신문왕대(681~692)나 경덕왕대 (742~765)로 지목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단순히 고려시대의 기록에 의거 하여 4세기 무렵의 제방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해석이다 고 했다. 그러면 단순히 고려시대의 기록에 의거한 삼국사기 에 근거한 한국 古代史像의 복원은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풍납동토성의 방사선탄소 연대 측정의 오 류를 벽골제에도 적용하여 그 연대 수치의 신빙성을 전면 부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단 한 곳의 오류를 30년 전의, 그것도 대상이 다른 유구 측정에까지 소급시켜 일반화시 키는 것은 섣부른 발상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좀 더 광범위한 데이터를 치밀하게 제시했으면 설득력을 얻지 않았을까 싶다. 게다가 생활 유적인 城과 농경유적인 저수 시 설을 단순 비교하여 유물 출토 유무를 대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대상이 서로 맞지 않기 때문에 검토 대상으로서의 형평성이 맞지 않다. 더구나 백제 때 원상을 유지하고 있는 풍납동토성과 백제를 넘어 후대 몇 차례나 증축된 벽골제를 단순 비교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벽골제는 조사 대상도 수문의 돌기둥이 있는 2곳의 경사면에 대한 시굴 조사에 한정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사 면적을 놓고서도 2유구는 당초부터 서로 비교 가 되지 않는다. 또 벽골제 石材의 가공 기술이 4세기 무렵의 것으로 보기에는 수준이 높다고 했다. 그러나 벽골제는 후대에 여러 차례 증축되었으므로, 현재의 유구를 4세기 대로 단정하고서 부정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 아닌가 싶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할 때만이 벽골제의 始築 시기에 대한 재검토가 가능할 것으로 본다. 그러나 백제의 농경 기술과 제방 축조에 관한 빈번한 삼국사기 기사를 놓고 보자. 그럴수록 근초고왕대에 비옥한 농경지인 김제 만경평야 일대에 벽골제와 같은 수리시 설이 구축되었을 가능성은 몹시 높다. 123) 李宇泰, 1984, 韓國古代의 尺度, 泰東古典硏究 1, 29쪽. 124) 尹武炳, 1976, 앞의 글, 11쪽.

82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83 묘의 토목공사에 동원된 연인원 수인 2,400명과는125) 비교가 되지 않는 대 위의 기사에서 보듯이 벽골제는 만경평야의 광범한 지역에 농업용수를 규모 役事이다. 그런데 저수지 축조에 동원된 노동력이, 농한기인 12 1 제공하였다. 동시에 벽골제에 관하여 水源은 셋이 있는데 하나는 금구현 126) 2월의 3개월간에 벽골제를 축조한다고 하자. 그러면 1일 3,600명 정도 가 투입되어진다. 그러나 이때는 冬節期이므로 언땅을 파야하는 등 작업능률이 매우 떨어 진다. 그리고 巨石으로 구축된 水門공사와 하천유출처를 막는 난공사에도 많은 노동력이 투입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벽골제 축조에 동원된 연인원 수는 상기한 수치를 훨씬 상회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모악산의 남쪽에서 나오고, 하나는 모악산의 북쪽에서 나오며, 하나는 태 인현의 상두산에서 나와 벽골제에서 만나 古阜郡의 訥堤水와 東津에서 합 128) 쳐 萬頃縣 남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라는 기록을 통해 볼 때 더욱 그 러한 것이다. 그러면 백제가 벽골제와 같은 저수지를 축조하여 광활한 평야에 농업용 수를 제공하였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백제는 369년에 복속시킨 금강 이같은 저수시설의 축조는 대규모 노동력을 조직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이남으로부터 노령산맥 이북의 신개척지가 비옥한 농경지임을 주목하였 전문화된 관리 위계조직의 발달을 시사해 준다. 동시에 다른 형태의 토목 다. 그 결과 이 지역에 대한 개척을 통하여 물적기반을 확대하고자 한 것이 공사 가령 4세기대에 가장 활발하였을 축성과 고분조영 등과 같은 役事를 었다. 이보다 늦은 시기이기는 하지만 신라가 5세기대에 접어들어 관개사 관장하는 국가 중앙조직과 전국적인 주민 동원망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 업에 대대적으로 힘을 기울인 바 있다. 백제는 역시 주민지배의 수단으로 다. 요컨대 백제 중앙권력에 의한 생존자원의 생산수단인 수리권의 장악 써 수리권을 이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럼에 따라 백제는 4세기 중반 무 은, 지방세력을 중앙으로 흡입하고 통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렵부터 수전농업의 필수적 시설인 저수시설을 벽골제뿐 아니라 지방 각지 중앙권력을 지방에 깊숙이 침투시키는 일종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을 것이 에 대대적으로 축조 정비하였을 것이다. 아울러 이는 백제가 마한 영역의 다. 이와 관련해 1415년에 작성된 벽골제중수비문 을 다음과 같이 옮겨 비옥한 농경사회로 본격 진입하게 된 데 따른 조치라고 본다. 보았다. 磻溪隨錄 에 의하면 벽골제와 더불어 이른바 湖南三大堤 라고 일컬었 던 고부의 눌제와 익산의 황등제에 관해서도 조선 초기에 그 수축에 관한 제방의 길이는 60,843尺이고 제방 안의 둘레는 77,406步이다. 다섯개의 도랑을 파서 논 에 물을 대는데 논은 무릇 9,840結, 95卜이라고 하니 고적에 적혀 있는 바이다. 그 첫째 水門 을 水餘渠라고 하는데 한 줄기 물이 萬頃縣의 남쪽에 이른다. 둘째 수문을 長生渠라고 하는데 두 줄기 물이 만경현의 서쪽 潤富의 근원에 이른다. 셋째 수문을 中心渠라고 하는데 한 줄기의 건의가 잇따라 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129)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앞 서의 제방 또한 벽골제와 거의 비슷한 무렵에 축조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나아가 백제는 수리안전답과 홍수의 피해로부터 만경평야의 전답을 안전 물이 古阜의 북쪽 扶寧의 동쪽에 이른다. 넷째 수문을 經藏渠라고 한다. 다섯째 수문을 流通渠 하게 확보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삼국유사 에서 벽골제의 수전 1만 라고 하는데 둘다 한 줄기의 물이 仁義縣의 서쪽으로 흘러 들어간다. 다섯 수문이 물을 대는 땅 4,070(結)이라는 기록은 벽골제의 축조를 통한 수전의 확대에 따른 토지 은 모두 비옥하였는데, 이 제방은 신라와 백제 때부터 백성에게 이익을 주었다. 127) 이용율의 증대를 짐작하게 한다. 요컨대 이러한 농경 지대는 수리권을 통해 공동사회를 형성한 배타적 사 125) 成洛俊, 1983, 榮山江流域의 甕棺墓硏究, 百濟文化 15, 48쪽. 126) 신라의 力役 동원은 2월을 중심으로 한 春月에 가장 잦았다고 한다(李基白, 1974, 永川 菁堤碑의 丙辰築堤記, 新羅 政治社會史 硏究, 307쪽). 127)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3 金堤郡 古蹟條. 128)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3 金堤郡 古蹟條. 129) 全榮來, 1980, 古沙夫里-古阜地方 古代文化圈 調査報告書, 23쪽. 130) 사와다 이사오 김숙경 譯, 2007, 앞의 책, 39쪽.

84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회였다고 한다.130) 읍락 중심의 배타적 기존 질서를 파괴시키기 위해 백제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85 정월에 영을 내려 제방을 튼튼하게 하고 안팎의 游食者를 몰아다가 歸農시켰다.131) 는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한 국가적 수리시설의 축조를 단행한 것이다. 저 수지라는 수리시설의 축조는, 대규모 노동력에 대한 조직화를 수반하기 때 라고 하여 전국적으로 제방이 완비되었음을 시사해준다. 이러한 상황을 놓 문에 국가권력 주관하에 추진된 사업이었다. 백제가 저수지를 축조하는데 고 볼 때 벽골제가 축조되는 4세기 중반 이후 상당수의 저수지와 제방을 동원한 노동력 가운데는 고구려와의 전쟁이나 마한경략 등에서 확보한 전 축조 정비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결과 농업생산력의 발달을 촉진시 쟁 포로들이 대거 투입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만하지만, 지방민의 동원 켜 왕정의 물적 토대를 확고하게 다질 수 있었다. 왕정의 이같은 물적자산 이 중핵을 이루었을 것이다. 은 백제가 군사 경제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한 지방의 거점에 축성한 그리고 저수지와 같은 수리시설 자체는 주민통제 특히 지방세력에 대한 魯를 통하여 중앙으로 조달되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자연 물량이 늘어나는 통제수단으로서의 효과가 컸기 때문에 국가는 그것의 관리에 각별한 관심 공납 수취물의 원활한 운송을 위한 도로망의 확장을 가져오게 마련이었 을 쏟지 않을 리 없었다. 이러한 선상에서 백제는 인구조밀 지역이기도 한 다. 백제 영역 내의 간선 도로망은 이미 소금공급을 통하여 개척되어 나갔 비옥한 농경지에 축조된 이를테면 국영 저수지의 관리와 收取 등에 필요한 겠지만, 담로체제의 시행에 따라 도로망은 정비되었을 것이며 나아가 郵驛 통치 거점을 모색하였을 것이다. 곧 저수지 인근에 성을 축조하였으리라고 의 설치도 생각하게 한다. 결국 담로는 官道 라고 하는 전국적인 도로망 생각된다. 벽골제의 남단인 김제군 부량면과 정읍군 신태인읍의 경계선상 의 확장 정비와 짝을 이루면서 거점 지역에 축조된 官城 이라고 하겠다. 에 있었던 해발 약 54m의 야산에 축조된 테뫼식 토성이 주목된다. 이 성은 그러므로 백제의 수리권 장악은 담로를 거점으로 하여 중앙 권력의 범위를 벽골제를 방비하고 동진강 하구를 따라 내륙으로 진입하는 적을 차단하는 확대시키는 요체인 동시에 지방세력을 통제하는 관건으로도 유효하게 기 목적의 방어시설인 동시에 통치 거점이기도 하였다. 이곳에 파견된 지방관 능하였다. 의 힘은 일차적으로 관개 농법에 필수적인 수리권의 장악에 연유하였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와 관련해 백제 밖의 자료이기는 하지만 신라의 朴堤上을 毛麻利叱智 라고 일컬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존칭어미인 叱智 를 뺀 毛麻利 는 못뚝의 우두머리 라는 해석이 가능하므로 수리권을 관장한 데서 비롯된 지방 官 에 대한 別稱이나 汎稱일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호칭 은 지방관의 역할 가운데 기본적 생존자원에 대한 생산수단인 수리권에 대 한 지배 비중이 컸던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겠다. 수리권과 관련한 지방 관의 역할은 삼국의 주민들이 일본열도에서 韓人池를 만들었다고 할 정도 로 뛰어난 築堤術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신라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닐 터이 다. 그러므로 백제까지 확대시키는 게 가능해진다. 6세기 전반기의 자료이 기는 하지만 백제에는 3) 대외교역망의 장악 인류학자들의 지적처럼 교역은 상업적인 의미뿐 아니라 정치적인 성격도 강하였다. 그렇듯이 교역은 국가 사회의 초기 성장에 대한 원동력의 하나 로서 부연되고 있다. 서해를 끼고 있는 한반도의 서남해변을 영역으로 하 여 성장한 국가가 백제였다. 백제는 지정학적 조건을 이용해서 광범위한 대외교역을 추진한 결과 고대 동아시아에 있어 교역권의 중심적인 위치에 자리잡았다. 백제는 중국대륙과 일본열도를 잇는 삼각교역의 중개지로 역 할하였다. 이때 백제는 내적으로는 기본적 자원에 대한 자국 영내와 영향 131) 三國史記 권26 백제본기 4 무령왕 10년조.

86 87

88 89

90 91

92 93

94 95

96 97

98 99

100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101 횡악을 지목할 수 있다. 크게 가물어 왕이 漆岳寺에 가서 비를 빌었다(법 분산적인 제의권의 국가적 장악, 이를테면 복속 지역에 대한 이념 기반의 왕 2년조) 라는 기사의 칠악사가 있던 칠악 도 祭儀山岳으로 보아 좋을 국가적 통제와 확대를 시도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것 같다. 물론 이들 산악은 국왕이 직접 제사를 올린 곳인 만큼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제의산악의 존재가 확인된 이상 이러한 산악이 도성 인근에만 몰려 있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백제 중앙 권력의 영향력 확대와 맞물려 계속 늘어만 갔으리라는 것이 자 연스럽다. 이와 관련해 丙子에 사신을 보내어 渤海郡의 信物을 山陵 6개 소에 봉 헌하도록 하였다( 續日本紀 天平 2년 9월조) 庚戌에 사신을 보내어 발 5. 군사권의 장악 근초고왕은 광범위한 정복전쟁의 수행과 승리를 통하여 군사력을 독점함 으로써 권력을 한층 강화시켰다. 이와 관련하여 근초고왕 24년(369)의 다 음과 같은 기사를 주목하고자 한다. 해의 신물을 諸國의 名神社에 바쳤다( 續日本紀 天平 2년 10월조) 라는 기사가 상기되어진다. 즉, 발해 사신이 보내온 신물을 산릉이나 신사 등에 11월 漢水 남쪽에서 크게 사열하였는데, 旗幟는 모두 黃色을 사용하였다.160) 봉헌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에만 국한된 현상이라기 보다는 그 문화의 모태격인 백제에서도 외국으로부터의 珍物을 제의산악에 봉헌하였다고 보 즉, 근초고왕이 몸소 한수 남쪽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면서 모두 황색 여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천안과 원주에서 동진제 청자와 초두가 출 기치를 사용하고 있다. 황색은 음양오행설과 관련지어 살펴 볼 때 방위상 토될 수 있었던 배경은, 이들 지역은 백제가 호남과 영남 방면으로 진출하 중앙을 뜻한다. 또 황색의 기치는 전통적으로 중국의 황제뿐 아니라 국왕 는 루트에 위치하고 있는 만큼 지역적 비중을 헤아린 결과 이들 호족에게 들이 사용하였다. 고구려의 경우도 5部 가운데 왕실이 속한 계루부를 內部 賜與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와 더불어 놓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신 혹은 黃部라고 했다. 그러므로 황색은 왕이나 혹은 왕자가 속한 중부(내부) 라의 예를 원용한다면 이러한 지역에는 鎭護山岳이 설정되고는 하였다고 의 상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백제군이 정복전쟁에 승리하여 왕의 한다. 백제 영역으로서의 천안의 성거산이나 원주의 치악산 역시 제의산악 권위가 한껏 高揚된 시점에서 모두 황색 기치를 사용한 것은 어떠한 의미 으로 설정되었을 법하다. 그와 더불어 국가적 차원에서 祭需로서의 진물 를 지니고 있을까? 봉헌이 뒤따랐음은 의심할 나위 없다. 천안과 원주 지역의 고분에서 출토 전국을 구획한 5부체제하의 백제 군대의 성격은 이와 동일한 발전단계였 된 동진제 물품은,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에서 六朝時代의 중국 청자편이 던 부여에서 적의 침입이 있으면 제가들 스스로 나가 싸운다(有敵諸加自 출토된 바처럼 당초에는 성거산이나 치악산의 사당에 봉헌되었던 것으로 戰)( 삼국지 부여조) 라고 하는 형태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북부의 보인다. 이것이 飮福式으로 그 지역 호족들에게 分與되었고 종국에는 각자 眞果가 1천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말갈과 싸웠다는 기록 역시 진씨족을 중 의 분묘에 부장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심으로 하는 部兵의 동원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듯이 각 部에는 독자적인 요컨대 제의공동체적인 성격에서 만은 맥이 닿고 있는 商 왕조에서, 왕 군대가 있어 그들 생활권에 대한 외침을 각각 막아 나간 것으로 보인다. 반 실 직속의 제사관이 각 지역에 파견되어 그 지역의 전통적인 제의를 대행 하였다. 그렇듯이 집권국가로의 발전을 위한 전단계 작업으로서 백제 또한 160) 三國史記 권24 백제본기 2 근초고왕 24년조.

102 103

104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6. 중앙집권체제의 확립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105 정으로서 公示되었을 것이다. 비록 백제 말기의 인물에 관한 기록이지만 다음과 같은 黑齒常之墓誌銘 이 유의된다. 1) 중앙관부 조직체계의 확립 君의 이름은 常之이고 字는 恒元으로 백제인이다. 그 선조는 扶餘氏로부터 나왔는데 黑齒에 封해졌으므로 자손이 인하여 씨로 삼았다. 그 집안은 세세로 서로 이어서 달솔이 되었다. 증 백제 왕실은 지금까지의 권력 강화책을 통해 강력한 중앙 집권체제를 구 축할 수 있었다. 이러한 토대를 배경으로 백제는 내적 권력을 강화하기 위 한 체제 정비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동계인 舊伯濟國의 왕족과 의제 적 형제관계를 설정하여 힘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왕권 지탱의 배경세력으 로서 왕비족제를 확립한 결과 군사적 비중이 큰 북부의 眞氏를 발탁하였 다. 그러한 배경은 일차적으로 북부의 진씨세력이 백제 발전과정에서 줄기 차게 부딪히는 말갈세력의 침공을 막으면서 성장해 왔던 점에 있었을 것이 다. 백제 왕실로서는 고구려와 대결하는 상황에서 이들의 군사적 경험이 어느 때 보다도 요구되었기 때문이었다. 백제의 왕비족제 확립은 물론 이 러한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 근본적인 목적은 왕권강 화에 있었다. 그런 만큼 그와 성격이 일면 연결되는 흉노의 경우와 관련지 어 생각해 볼 수 있다. 흉노에서는 왕족과 異姓姻族이 國事를 양분하게 함으로써 상호 견제시켜 선우에게만 권력이 집중되도록 하였다. 이같은 사례를 왕비족제가 시행되 었던 백제에 원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자. 그렇다면 백제왕은 이로써 왕권의 후원세력을 얻는 동시에 왕족 자체를 견제할 수 있어 권력 강화가 가능하였다. 이와 관련해 왕비족제의 확립 동기를 좀더 구체적으로 지목한 다면 다음과 같이 추리된다. 즉, 친족구조 내에서 王弟와 같은 왕족세력은 왕위에 대한 잠재적 권리를 보유하고 있는 존재였다. 그런 만큼 직계부자 상속제의 活着을 위해 이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姻族 세력의 역할을 확대시 켜 주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내적 지배질서의 확립은, 관등 규 161) 중앙집권체제 확립의 기반 ~ 군사권의 장악 까지는 李道學, 1995, 앞의 책, 147~207 쪽과 251~254쪽에 근거하였다. 조부의 이름은 文大이고 조부의 이름은 德顯이고 아버지의 이름은 沙次인데 모두 벼슬이 달솔 에 이르렀다. 즉, 위의 묘지명에 의하면 그 증조부에서 흑치상지에 이르기까지 역임한 최고 관등이 모두 달솔에 그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백제는 신라의 頭品制 처럼 승급의 한계가 규정된 관등체계가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관등 승급 에 관한 규정은 신라의 경우 주지하듯이 율령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간주되 고 있다. 백제 역시 그러하였으리라고 짐작된다. 백제는 율령 반포로써 지 배세력간의 신분적 서열을 확립하여 국왕 중심의 일원적인 지배체제를 구 축하여 나가고자 했다. 백제는 이와 병행하여 국왕의 권력행사를 합법화 하기 위한 이념으로서 유교를 주목하였던 것 같다. 백제는 이무렵 阿直岐와 王仁이 논어 와 천 자문 을 왜에 전수하였을 정도로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그리고 대방고지에 진출하여 확보한 중국계 식자층을 통하여 유교적 소양을 지닌 인적자원을 확보하였다. 가령 博士 高興의 경우도 중국계 인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백제의 박사제도에 십분 활용되어 유교적 이념에 입각한 왕권 강화의 후원세력이 되었을 법 하다. 요컨대 근초고왕 때 박사 고흥의 존재가 확인된 이상 후일 왜에 파견되는 五經博士 醫博士 曆博士 등도 이 무렵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고구려가 율령 관료층의 확보를 위 한 국립교육기관인 太學을 설립하였듯이 백제도 율령 반포를 전후하여 국 립교육기관을 설치한 것으로 짐작된다. 박사제도는 大唐六典 에서 박사 는 관인들의 서예 산술 뭇 기예를 敎習하는 것을 관장한다 라고 하였듯 이 교육기관과 분리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백제는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왕권의 행사를 정당화 했으리라고 짐작된다. 또 그러한 내용은 이들에 의

106 107

108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을 지배하는 힘을 얻고자 했다. 그럼에 따라 근초고왕은 무역기반의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109 2) 지방 통치체제 에서 비롯된 대규모의 교역체계를 일원적으로 관리함으로써 권력 기반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1) 5部制의 시행과 城 이로써 얻어진 힘은 주민 지배에도 깊숙이 미치고 있다. 이는 대규모 건 조물인 분묘의 축조를 통해 가늠되어진다. 분묘 축조에는 상당한 규모의 4세기 이후 백제는 도성이 있는 중앙을 중심으로 전국을 동 서 남 노동력이 동원되기 마련이거니와 또 그것을 통하여 집권력의 정도를 유추 북 중으로 구획한 5部 체제였다. 삼국사기 에서 국내의 민호를 나누어 할 수 있다. 집권국가의 위엄과 권력집중을 상징하는 석촌동 3호분과 같은 서 남 북부로 삼았다(온조왕 31년조) 와 동 서 2부를 더 두었다(온조왕 기단식 석실적석총의 조영이 그것을 웅변한다. 석촌동 3호분은 만주 집안 33년조) 라는 기사에 보이는 4부와 국왕의 직할령인 중부를 합하면 부여 의 고구려 광개토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을 능가하는 동서 50.8m, 남북 나 고구려에서와 같은 5부가 된다. 5부는 전국을 단위로 한 백제의 지방편 48.4m에 달하는 대형 건조물이다. 이같은 거대 고분의 조영을 통해 조직 제 방식이었다. 된 대규모의 노동력을 관리할 수 있는 인력관리체계의 존재를 상정하는 게 전국을 구획한 5부의 범위는 삼국사기 온조왕 13년조의 영역 기사와 가능하다. 나아가 기단식 석실적석총은 재산 신분상의 분화가 심화되고 연관되므로, 북쪽은 예성강, 동쪽은 춘천, 남쪽은 금강, 서쪽은 서해를 경 한층 다양한 계층이 출현하였음을 시사해 준다. 계로 하였다. 이들 지역은 동 서 남 북 중의 5부로 편제되어 있었다. 아울러 왕릉의 축조에는 수학과 역학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 토목 건축 삼국사기 에는 이와 같은 방위명 부로 나타나지만 애초 백제의 5部名이 술이 동원되게 마련이거니와 이로써 직업분화까지 짐작하게 한다. 이는 산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고유한 부족명이 존재하다 성축조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광개토왕릉비문 영락 6년조에 의 가 행정적 성격이 강한 방위명 부로 확대 개편된 것으로 생각된다. 부체 하면 고구려에 점령된 백제의 제한된 지역에 58城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제 단계의 지방통치는, 대체적으로 재지 수장층들의 자치에 맡겨져 있었 곧 이는 4세기 말 이전에 지방지배와 관련한 대규모 산성축조가 단행되었 다. 그러나 집권국가체제가 확립되어 감에 따라 백제의 지방에 대한 통치 음을 알려준다. 다시 말해 백제의 입장에서 볼 때 대규모 노동력을 일사불 도, 간접 지배에서 중앙의 직접적인 통치체제로 전환을 보게 된다. 란하게 동원할 수 있는 공적권력을 유지시켜줄 수 있는 공납과 수취가 더 백제는 족제적인 요소의 부체제를 집권국가 형성을 위한 행정적 구역으 욱 철저히 요청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선상에서 지방지배는 한층 강고해져 로 개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근초고왕이 5부의 병권을 장악한 사실과 관 나갔으리라고 믿어진다. 련지어 볼 때 중앙집권적 체제의 강화를 뜻하는 부명의 개편은 근초고왕대 요컨대 백제는 막대한 노동력이 소요되는 토목공사를 집행하고 그 효율 의 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부명의 개칭에서 비롯된 것이라기 성을 높여 나가는 과정에서 권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아울러 그러한 통 보다는 중앙권력의 대행자로서의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직접적 제기구를 중앙에 설치하였다. 백제는 정비된 중앙관부 조직체계를 갖출 수 인 지배를 단행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조치였다. 이와 더불어 통치의 거점 있었기 때문에 집권적 국가체제의 구축이 가능하였던 것이다.163) 으로서 군사 경제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지역에 축성이 단행된 결 과 부 관하에는 통치의 거점으로서 성이 자리잡게 되었다. 성을 중심으로 163) 이상의 서술은 李道學, 1995, 앞의 책, 254~260쪽에 대체로 근거하였다. 다수의 촌락이 산재하여 있는 형태가 되겠다. 광개토왕릉비문 영락 6년

110 111

112 113

114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115 주목되는 것이 472년에 개로왕이 北魏에 파견한 사신인 私署冠軍將軍駙 위의 기록은 梁職貢圖 에 이미 적혀 있는데, 여기의 담로는 大城 을의 馬都尉弗斯侯長 餘禮이다. 왕족인 여례가 관칭한 불사후의 불사 는 지금 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 담로제의 시행 시기와 존속 기간에 관 의 전라북도 전주로 지목되고 있다. 그런데 여례의 관작을 통해 동성왕대 해서는 여러 설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사서로서 양서 에 처음 보이는 담 에 앞서 개로왕대에 왕 후 태수 등의 지방 分封이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 로체제는 웅진성천도로 인하여 5부제가 붕괴되고 정연한 지방지배 방식인 다. 동성왕대의 왕 후 태수 등의 지방 분봉이 지방지배의 강화와 밀접히 방 군 성체제가 성립되기 이전의 상황을 전해 준다고 보겠다. 왜냐하면 관계있는 만큼 개로왕대의 그것 또한 지방지배책의 일환이었음은 분명하 거점성 중심의 지방지배 방식인 담로체제는 이미 4세기 중반 이후에 시행 다. 개로왕의 전라도 지역에 대한 적극적인 경영으로 왕족 출신의 지방관 된 바 있기 때문이다. 근초고왕은 신복속지인 금강이남의 전라도 지역에 이 파견되는 성의 숫자는 증가했을 것이다. 또 그로 인해 지방민에 대한 수 거점성 중심의 통치를 하였다. 이것이 다름아닌 담로체제인 것이다. 개로 취와 노동력 동원이 한층 강화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렇긴 하지만 개로 왕대의 왕족인 여례가 금강이남인 전주 지역의 장관인 불사후로 분봉된 것 왕대의 전라도 경영은 그 후반에 해당되는 짧은 기간에 불과하였다. 그렇 도 왕의 자제와 종족을 파견하는 담로체제의 성격과 일치되고 있다.166) 흑 기 때문에 백제 중앙의 문화가 침투한 고고학적 물증이 영산강유역에서 확 치상지묘지명 에 의하면 그 祖先은 부여씨에서 나와 흑치에 봉해졌으므 인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고구려와의 전쟁과 토목공사에 요구되는 인 로 자손이 인하여 씨를 삼았다. 라고 하였듯이, 왕족(扶餘氏)인 흑치상지의 적 물적 자원의 확보를 위한 전라도 지역에서의 가혹한 백제왕권의 수탈 조선이 흑치 지역에 분봉되고 있는 것이야말로 담로체제의 증좌이다. 따 은 웅진성천도 후 중앙 정정의 혼미를 틈타 영산강유역 세력의 이탈을 가 라서 누차 언급했듯이 4세기 중반 이후 백제의 지방지배 방식은 5부제와 져오게 한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거점성 중심의 이원적인 형태였음을 알게 된다. 이렇듯 담로체제의 기원은 475년에 고구려가 한성을 함락시키고 남진함에 따라 백제는 임진강에서 근초고왕대까지 소급되지만 금강이남에서 전라북도 지역에 걸친 신정복지 아산만 이북의 영토를 상실하였다. 이는 금강이북 지역의 통치방식인 5부 에 국한된 제한된 지방지배 방식이었다. 그런데 웅진성천도로 인해 5부제 제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5부제의 붕괴로 인해 아산만 이남과 가 붕괴됨에 따라 백제 중앙정부로서는 부 관하의 잔여 성들과 전라도 지 금강이북 지역에는 부 관하의 기존 성들이 지방통치의 기능을 개별적으 역의 거점이 되는 성들을 중심으로 지방통치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더 로 담당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애초 5부제로 편제되지 못했던 전라도 욱이 웅진성 초기 政情의 혼미상은 중앙권력의 약화와 지방세력의 이탈을 지역에는 개로왕대에 증가된 거점성들만이 여전히 존재하였으리라고 짐작 가져왔기 때문에 지방관이 파견되는 성의 숫자는 비교적 제한되었을 것이 된다. 이와 관련해 웅진성도읍기 백제의 지방통치 형태에 관한 梁書 의 다. 바로 이같은 특정한 시점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 양서 에 처음 보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22개 담로의 실체라고 하겠다. 따라서 양서 의 기사를 확대 해석하여 한 성도읍기의 지방지배를 담로체제 일변도로만 간주하는 견해는 재고되어야 治所城을 이름하여 固麻라고 한다. 邑을 櫓魯라고 하는데, 중국에서 말하는 郡縣과 같은 것 할 것 같다.167) 165) 이다. 그 나라에는 22담로가 있는데 모두 子弟宗族을 이곳에 나누어 거주시킨다. 165) 梁書 권54 百濟條. 166) 李道學, 1990, 漢城後期의 百濟王權과 支配體制의 整備, 百濟論叢 2 ; 李道學, 1995, 앞의 책, 328쪽. 167) 이상의 서술은 李道學, 1990, 앞의 글, 302~310쪽에 의하였다.

116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3) 석촌동 고분군 출토 금제 귀고리를 통해서 밝혀진 담로제의 일면 117 석촌동 제4호분 주변에서 출토된 귀고리와 동일한 양식은 그밖에 2개 소에 서 출토되었다. 즉, 익산 입점리 1호묘와 곡성 석곡에서 출토된 귀고리가 삼국사기 만 보더라도 백제에는 온조와 비류라는 2명의 시조가 존재한 된다. 익산 입점리 것은 주환에 금실을 걸어 조금 늘어뜨린 다음 그 아랫쪽 것으로 나타난다. 동일한 사서에서 이처럼 2명의 시조가 등장한다는 것은 에 사슬을 연결하고 그 끝에 三翼形 垂下飾을 매달았다. 곡성 것은 매우 가 2개의 왕실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왕실 교체 시기는 문 는 주환에 작은 유환을 걸고 금고리 8개를 연결한 사슬 아래에 둥근 고리 헌상으로 근초고왕대를 분기점으로 해서 앞선 시기와 일종의 단층이 지고 와 큼직한 심엽형판을 매달았다. 심엽형 수하식의 가장 자리에는 각목대를 있으므로 근초고왕 직전으로 상정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4세기 부착하였다. 심엽형 수하식의 금판은 아랫 부분은 둥글게 처리하였고 각목 중 후반경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근초고왕대는 유례없는 정복 사업을 펼 대를 길게 늘어뜨려 뾰족하게 만들었다. 이와 함께 사슬과 심엽형판 사이 쳤다. 369년~371년 사이의 단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넓은 영역을 확 에 유환을 끼우는 것은 석촌동 4호분 주변에서 출토된 귀고리 보다는 발달 보했을 뿐 아니라 동북 아시아의 강국인 고구려를 꺾었을 정도로 가위 정 된 모습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170) 지할 줄 모르는 운동력을 가지고 팽창해 간 바 있었다. 이러한 강대하고도 그렇다면 백제 중앙의 분묘가 소재한 석촌동에서 출토된 귀고리와 익산 폭발적인 힘의 배경을 단순히 계기적인 발전만으로는 설명할 수는 없다. 과 멀리 곡성에서의 출토품이 동일한 계통으로 밝혀졌다면 어떠한 의미를 오히려 새로운 세력의 수혈에 따른 것이라고 본다면 그 급팽창의 요인으로 지닌 것일까? 6개 유형으로 구분되는 한성도읍기의 귀고리 가운데, 그것도 서 절대 부적절한 판단은 아닐 것이다. 백제 중앙과 직접 관련된 유형이라고 할 때 각별한 의미를 상정하지 않을 기본적으로 이러한 맥락과 입장에서 고고학적인 물증을 새롭게 발견하고 수 없다. 귀고리는 신분을 나타내는 위세품으로서의 성격을 지닌 동시에 또 새롭게 해석해 보고자 한다. 이와 관련해 위세품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하사품으로 인식되고 있다. 지방 수장들에게 백제왕이 신분을 보증해주는 있는 귀고리를 주목해 본다. 먼저 석촌동 제4호분 주변에서 출토된 귀고리 신표로서 하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171) 요컨대 이러한 귀고리 의 존재이다. 이 귀고리는 主環 3개와 이것에서부터 분리된 垂飾이 달렸 들이 한성도읍기에 백제 중앙에서의 하사품이라고 할 때 유독 왕도에서의 다. 여기서 주환 3개는 석촌동 제3호분 동쪽 고분군에서 출토된 것으로 소 그것과 연결되는 2곳 지역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일까? 익산과 곡성 지역 168) 개되었다. 그리고 이식은 당초 86-화장유구로 알려져 있었으나 발굴자 은 중앙에서 파견한 담로체제하의 왕족에 비견되는 수장과 관련된 것으로 의 증언에 따라 석촌동 제4호분 주변으로 새롭게 정정되었다. 이 귀고리는 보인다. 반면, 여타 유형의 귀고리는 지방의 토착 수장에게 하사한 것으로 15개의 金環을 오므리고 구부려 고리를 만들고 서로 연결하여 길쭉한 금사 간주되어진다. 슬을 만들었다. 그리고 맨 밑에는 조그마한 心葉形板을 매달아 장식하였 169) 다. 최근 백제 한성도읍기의 고분에서 출토된 귀고리를 분류해 놓은 성과에 이와 관련해 익산 입점리 고분군이 소재한 일대는 일찍부터 담로의 장이 묻힌 곳이 아닌가하는 추측이 있어 왔었다. 이는 전적으로 타당한 추정으 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앞서 언급했듯이 근초고왕대 이후 백제의 담 따르면 한성도읍기 귀고리는 모두 6개 유형으로 구분된다고 한다. 그런데 168) 서울大學校博物館, 1997, 발굴유물도록, 187쪽. 169) 李漢祥, 2000, 百濟 耳飾에 대한 基礎的 硏究, 湖西史學 3, 24쪽. 170) 李漢祥, 2000, 앞의 글, 31쪽. 171) 李漢祥, 2000, 앞의 글, 41쪽 45쪽.

118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119 로 범위 안에 분명히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입점리 제1호분이 七枝刀 1口와 七子鏡 1面 및 각종의 重寶를 바쳤다. 이어 말하기를 臣의 나라 서쪽에 江水 석실분이라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물론 한성도읍기에 지금의 서울 지역에 가 있는데, 근원은 谷那철산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 먼 곳은 7일을 가도 이르지 못합니다. 마 석실분이 조영되었는지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백제 땅히 이 물을 마시면 곧 이 山鐵을 채취할 수 있으므로 길이 聖朝에 바치겠습니다. 라고 말하였 다.173) 중앙의 피장자와 동일한 계통의 위세품으로서의 귀고리를 착용한 자가 익 산과 곡성의 석실분에 묻혔다. 또 이들은 중앙에서 파견된 담로체제 관련 인물이라고 할 때는 의심할 나위없이 백제 중앙에서도 석실분이 조영되었 다고 보아야만 온당하다. 지금까지 논란이 있어 왔던 이 문제에 대해 한 획 을 긋는 중요한 발견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나아가 익산 입점리 1호묘의 편년은 웅진성도읍기가 아니라 한성도읍기로 재조정하는 게 타당할 것이 위에 보이는 谷那철산에 관한 기록은 肅愼의 특산물인 靑石의 산지에 관 한 언급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연상시킨다. 그 나라의 동북쪽에 있는 산에서 산출되는 돌은 쇠를 자를만큼 날카로운데, 채취하려면 반드 시 먼저 神에게 기도하여야 한다.174) 다. 또 그렇게 지목했던 견해가 옳았음이 밝혀졌다.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본다면 곡성에서 출토된 귀고리에 대한 배경 설명 요컨대 名産의 채취 과정을 신비화시켜 놓고 있는데 모두 두려움과 권위 이 뒷따라야만 할 것 같다. 백제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그것도 일반적으로 를 지닌 兵器의 산지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谷那철산의 소재지 백제 영역이 아니었을 것으로 간주되어 왔던 전라남도 곡성에서 백제 중앙 에 관하여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전라남도 谷城으로 비정하는 견해를 따르 과 동일한 계통의 귀고리가 출토된 배경을 구명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관 고자 한다. 곡성은 백제 때 欲乃郡이다. 欲乃는 谷乃를 잘못 적어 놓았을 련해 369년 근초고왕이 南征을 통해 정복한 지역에 대한 환기가 필요할 것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한다면 欲乃는 谷那와 연결이 가능하다. 통일신 같다. 일본서기 신공 49년조에 보이는 백제의 마한경략은 고해진만 전라 라 때 이곳의 행정지명인 谷城郡( 삼국사기 권36 지리 3)이 백제의 欲乃 남도 강진에 비정될 뿐 나머지는 모두 금강이남부터 노령산맥이북 지역에 郡 보다는 谷乃郡에서 비롯되었을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土谷渾 해당된다. 즉, 369년 마한경략 이전 백제의 남쪽 경계는 금강이라고 보 을 토욕혼 으로 읽는 것처럼, 谷 은 욕 으로 발음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겠다. 금강을 남쪽 경계로 하는 백제의 영역은 삼국사기 온조왕 13년조 러므로 谷乃 는 욕내 로 발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곡성군지 건 172) 에서 웅천을 남계로 하는 영역 기사와도 연결되고 있다. 369년에 백제는 당시 고해진이라고 불렸던 전라남도 강진 지역을 장악 치 연혁조에 보면 곡성군을 일명 욕내[浴川]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백제 때 谷那철산의 谷那 역시 욕나 로 읽었을 가능성이다. 그것은 또 욕내군 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 사실은 이 때 백제의 지배력이 전라남도 여타 지 의 욕내 와도 음운상으로도 무리없이 연결되고 있다. 더욱이 谷那 지명은 역에도 미쳤을 가능성을 심어주는 동시에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제기 일본서기 응신 8년조에서 아신왕의 이른바 無禮를 빌미로 왜가 탈환하였 해 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백제 칠지도의 産地였던 谷那鐵山의 소재지 파 다고 주장하는 지역 가운데 전라남도 해남을 가리키는 枕彌多禮 등과 함 악과 관련한 기존의 필자 견해를 확실히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관련 께 보인다. 그러므로 이곳은 현재의 전라남도 일원으로 비정할 수 있다. 한 일본서기 신공 52년조의 기사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즉, 백제인이 來朝하였다(百濟記에 이르기를 阿花王을 세웠으나 貴國에 172) 李道學, 1995, 앞의 책, 139~141쪽. 173) 日本書紀 권9 神功 52년조. 174) 晋書 권97 肅愼氏傳.

120 121

122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123 운 前燕 後燕 北燕의 이른바 三燕 시기의 고분 420기를 발굴한 바 있었 분의 조성 연대를 5세기 전반으로 설정할 수 있다고 한다.181) 그렇다면 시 다. 이 가운데 라마동Ⅱ M71호 고분에서 백제와 연결되는 귀고리가 출토 간상으로 볼 때 400년 이전 백제와 후연과의 교류 가능성을 상정하는 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백제가 모용선비의 문물을 섭취할 수 자연스러워진다. 실제 백제 중앙권력과 선비와의 직접 교섭에 의해 선비계 있었던 것일까? 혹자는 백제와 선비의 관계를 문헌 기록에서 확인할 수 마구류가 백제로 수입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 바 있다. 백제 지역에서 출 없어 백제가 선비의 문물을 받아들인 경로를 추적하는 것은 難題가 아닐 토된 선비계의 귀고리와 마구류는 만주 백제와 후연간의 교류를 입증해 주 수 없다 고 했다. 그러면서 東晋을 경유한 모용선비 문물의 접촉 가능성이 는 물증으로의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이 만주 백제 세력의 남하와 관련해 나 고구려와의 전쟁을 통해 모용선비 문물의 접촉 가능성을 상정했다. 그 한반도 지역으로 전파된 것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요컨대 백제를 경유해서 러나 간접 접촉을 상정하고 있는 전자나 후자 모두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 선비 문물이 대가야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이다. 된다. 동진이나 고구려에서 선비계 귀고리가 출토된 적이 없었으므로, 그 그 전파 경로와 관련해 고구려 광개토왕 군대의 남정과 관련해 백제가 쪽을 경유했으리라는 추측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백제가 선비와 직접 대가야와 손을 잡았다. 또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백제에 들어온 선비 문물이 접촉했을 가능성을 설정해야만 타당성이 높은 것이다. 실제로 양자간에는 고령 지산동에 전해졌을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182) 그러나 선비계 백제 접촉했던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178)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4세기 중후반 비 마구류의 전파 과정은 구체적인 정황에 근거해야 될 것 같다. 이와 관련해 류계 백제세력의 남하와 결부짓는 게 무리가 없다. 아울러 대가야가 소재한 고령 지산동 고분에서 선비 계통의 마구류들이 일본서기 신공 49년조에 보이는 369년 백제의 낙동강유역 진출 기사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출토된 바 있다. 대가야가 선비와 연결될 수 있는 정치 지리적 배경은 확 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지산동 32호분과 유사한 재갈이 천안 두정동Ⅰ-5 호 목관묘에서 출토된 바 있다. 단면 5각형의 장병 등자는 원주 법천리 등 자와 유사한 형태이다. 그리고 지산동 35호분의 타원형 경판비는 천안 용 원리 108호분 경판비와 유사하다고 한다. 현재까지 드러난 자료를 통해 볼 때 대가야의 지산동 집단이 백제와 깊은 관련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백 제 지역인 두정동 고분에서 출토된 재갈의 경우 이른바 삽자루형 인수로 서 2조선으로 된 철봉의 가운데 부분이 오므라들었다가 넓어지면서 끝에 핀을 꽂아 마무리하여, 북방 지역 특히 鮮卑系 마구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 179) 다 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선비 문물이 백제를 경유해서 대가야에 전래 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 바 있다.180) 선비계 마구류가 출토된 지산동 32호 178) 李道學, 2005, 高句麗와 百濟의 對立과 東아시아 世界, 高句麗硏究 21 ; 2006, 고 구려 광개토왕릉비문 연구, 103~108쪽. 179) 成正鏞, 2002, 大伽倻와 百濟, 大加耶와 周邊諸國, 101쪽. 그리고 比自 南加羅 國 安羅 多羅 卓淳 加羅의 7國을 평정하였다. 이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古奚津에 이르러 南蠻의 침미다례를 屠戮하여 백제에 내려주었다. ( 일본 서기 신공 49년조). 위의 기사에 보이는 백제의 낙동강유역 진출은 이 지역 세력들과 본격적 으로 遭遇하면서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게 되는 일종의 큰 轉機가 되었다. 이 때 백제가 낙동강유역에 진출하여 가야제국의 교역권을 장악하였음을 시사하는 물증은 낙동강유역에서 출토된 斗가 된다. 경북 고령에서 출토 된 초두는 손잡이가 들린 채 끝에 용머리가 새겨진 형식과 손잡이가 직선 180) 姜賢淑, 2003, 考古學에서 본 4 5世紀代 高句麗와 加耶의 成長, 加耶와 廣開土大 王 金海市, 90쪽. 이와 관련해 백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을 통해 선비 문물을 접했을 것 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공간적으로 서로 떨어진 백제와 선비가 감 히 접촉할 수 없다고 단정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181) 金世基, 2003, 고분 자료로 본 대가야 연구, 233쪽. 182) 강현숙, 2003, 앞의 글, 90쪽.

124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125 으로 곧게 펴진 채 용머리가 없는 두 종류이다. 이는 백제 풍납동토성에서 축을 이동시켰다. 가을 7월에 왕이 평양 東쪽 黃城으로 移居하였다. 城은 출토된 2기의 초두와 각각 부합되고 있다. 풍납동토성의 초두는 중국 동진 184) 라는 기사가 그것을 말한다. 이처럼 고 지금 西京 동쪽 木覓山 중에 있다 제품으로 밝혀졌으므로, 고령에서 출토된 것 또한 동진제품이 되는 셈이 구려가 국왕의 居所를 평양 방면으로 옮기게 된 배경은 일차적으로 전연의 다. 그렇다면 가야 지역에서 동진제 초두가 출토된 배경을 생각해야만 한 침공을 받아 국내성 일대가 초토화된 데 따른 것이었다. 고구려는 당시 선 다. 그런데 영남 내륙에 위치한 고령세력이 4세기 중반 이후에 동진과 교 왕인 미천왕의 시신과 왕모와 왕비가 전연에 볼모로 잡혀 있는 상황이었 역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가야제국의 교역권까지 장악하여 동진 다.185) 이로 인해 고구려는 전연에게 구속되는 상황이었으므로 서방으로의 과의 교역을 독점한 백제왕이 分與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싶 진출은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고구려의 관심과 진출 방향이 자 다. 이는 백제 중앙세력이 원주와 천안 지역의 호족들에게 분여한 동진제 연 남쪽으로 쏠리게 된 것은 당연할 수 있다. 고구려가 出口를 남쪽으로 열 초두나 청자와 동일한 맥락에서 그 성격이 파악되어진다. 즉, 가야세력의 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해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다음과 같은 국서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한 견제책의 일환이었을 것이다.183) 문구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백제가 369년에 낙동강유역에 진출한 후 대가야에 물품을 하사 한 사실이 물증으로써 포착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선비계 마구류는 백제를 통해 전래된 것으로 간주하는 게 온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 전래 시점도 지산동 32호분의 조성 연대 저희는 근원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先世 때부터 舊款을 독실히 존중하였으나 그 조부 釗가 경솔히 이웃과의 우호를 廢하고 몸소 많은 군대를 이끌고 우리 강토를 짓밟으므 로 저의 할아비인 須는 군사를 정비하여 기회를 따라 달려 가서 쳐서 矢石이 잠시 오가는 사이 에 쇠의 수급을 베어서 걸었습니다. 이로부터 뒤에 그들은 감히 우리를 엿보지 못하다가 馮氏 를 5세기 전반으로 설정한다고 할 때 시간적으로 보더라도 369년 근초고 가 궁할 무렵부터 그 남은 무리가 도망하여 더러운 무리가 점점 성하게 되고 드디어는 빈번히 왕의 남정과 연결짓는 게 타당하다. 침범하여 원한을 만들고 禍가 이어져서 30여년이 되었으며, 재물이 없어지고 힘도 다하여 자연 군색해졌습니다.186) 3) 영역 확장 위의 기사에 의하면 고구려와 백제는 당초 근원의 동질성으로 인해 선세 때부터 구관 즉 舊交를 도탑게 유지했다고 한다. 양국간에 구교를 유지하 (1) 고구려와의 전쟁 게 된 원인을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다는 族源의 동질성에서 찾았다. 그런 데 양국간의 우호관계가 파기된 원인을 쇠 즉 고구려 고국원왕의 백제 침 근초고왕대에 절정을 이룬 백제의 정복활동은 크게 세 방향으로 광범위 공에 두었다. 이러한 개로왕의 발언은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일종의 빌미 하게 전개되었다. 그 첫째는 전라도 지역으로의 진출이요, 둘째는 낙동강 를 찾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다 보니까 모든 책임을 고구려에 전가하려 유역에 대한 진출이며, 셋째는 황해도 방면으로의 진출이었다. 는 백제의 일방적인 주장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개로왕의 언사에 전적 백제가 동태를 예의주시하던 고구려는 343년에 평양성으로 국가의 중심 183) 李道學, 1995, 앞의 책, 193~194쪽. 184) 三國史記 권18 고구려본기 6 고국원왕 13년조. 185) 三國史記 권18 고구려본기 6 고국원왕 12년조. 186) 三國史記 권25 백제본기 3 개로왕 18년조.

126 제1장 백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영역 확대 제2절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영역 확장 127 으로 신빙성을 두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러나 백제측의 일방적인 려는 그간 느슨하게 관리하던 대방고지에 대한 영유권 확보 차원에서 대방 주장만으로 돌릴 수 없는 점도 있다. 고지 전방에 소재한 백제 雉壤을 공격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외형상으로 이와 관련해 백제와 고구려간의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는 369년 이전의 볼 때는 고구려가 백제 영역에 선제 공격을 단행한 것이 된다. 그러나 신라 상황 인식이 필요할 것 같다. 고구려의 상대국인 백제는 366년에 신라에 와 왜를 우군으로 끌어들이고 마한 잔여 세력과 가야제국까지 장악한 백제 187) 사신을 파견해서 수교하였다. 368년에 백제는 良馬를 신라에 선물로 보 의 공격 타깃이 대방고지로 향하게 되었음은 충분히 예견되었다. 이에 대 내는 등188) 적극적으로 양국 관계를 증진시키려고 했다. 백제는 신라와 수 한 대응 차원으로 고구려는 자국이 장악하였지만 자치에 맡겼던 대방고지 교한 해인 366년에는 멀리 경상남도 창원에 소재한 탁순국에 사신을 파견 의 보호를 위해 백제의 치양을 공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고구려로서는 하여 이곳에 와 있던 왜 사신을 자국으로 초치하여 물산의 풍부함을 과시 방어적 공격을 단행한 것이다. 요컨대 백제와 고구려는 각각 대방고지의 189)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을 통해 백제가 신라 및 왜와의 관계를 적극 적으로 강화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366 유지와 장악이라는 차원에서 최초로 서로 격돌하게 되었다. 그 관련 기사 는 다음과 같다. 년에 맺어진 백제와 왜간의 수교가 결실을 맺게 되어 369년 3월에 백제는 왜군과 더불어 낙동강유역의 가야제국에 진출하여 지배권을 확립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 때 백제는 마한 잔여 세력까지 복속시켰다.190) 요컨대 백 제는 신라 및 왜와의 수교를 기반으로 가야제국을 장악하는 일대 전기를 24년(369) 가을 9월에 고구려왕 斯由가 步騎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를 보내 군사가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를 급히 쳐서 깨뜨리고 5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는데, 그 노획들은 장수와 군사들에 게 나누어주었다.191) 마련했던 것이다. 이 처럼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백제의 급속한 영향력 확대는 대방군 고 지를 자치에 맡겼던 고구려를 크게 자극시켰을 것이다. 이 때 백제는 마한 39년(369) 가을 9월에 왕은 군사 2만 명으로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치양에서 싸웠으나 패하였다.192) 잔여 세력에 대한 장악과 가야제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구 축하였다. 그러한 백제의 다음 공격 목표가 대방고지 진출임은 충분히 예 위의 기사에서 고구려왕 사유 즉 고국원왕이 침공한 백제의 치양은 雉嶽 견되는 사태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고구려의 남하를 유발한 직접적인 배경 城이라고 했던 황해도 배천193)으로 비정되고 있다. 그런데 위의 기사 가운 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선제 공격을 시도하게 된 것은 가히 정 데 고구려본기는 백제본기의 내용을 축약한 것이다. 그러므로 치양 전투에 지할 줄 모르는 백제의 운동력에 제동을 걸기 위한 조치라고 하겠다. 고구 대한 원 사료는 백제본기 기사라고 하겠다. 전쟁에서 승리한 백제측 所傳 에만 양국의 군사적 충돌이 전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근구수왕 즉위년조에 적혀 있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그것을 187) 三國史記 권3 신라본기 3 나물니사금 11년조. 三國史記 권24 백제본기 2 근초고왕 21년조. 188) 三國史記 권3 신라본기 3 나물니사금 13년조. 三國史記 권24 백제본기 2 근초고왕 23년조. 189) 日本書紀 권9 神功 46년조. 李道學, 1991, 百濟의 交易網과 그 體系의 變遷, 韓國學報 63, 75쪽. 190) 李道學, 1995, 앞의 책, 186~197쪽. 잘 압축하여 전한다. 191) 三國史記 권24 백제본기 2 근초고왕 24년조. 192) 三國史記 권18 고구려본기 6 고국원왕 39년조. 193)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3 황해도 白川郡條, 白川郡 本高句麗刀臘縣 一云 雉嶽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