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고천문 워크숍 논문집 하늘이 열린 날, 天 文 을 얘기하다 발표일 : 2008년 10월 1일 / 장소 : 한국천문연구원 차 례 개천절 일자( 日 子 ) 문제 고찰과 제언 1 박 창 범 (소남천문학사연구소 / 고등과학원) 고조선의 천문과 북두칠성 13 이 용 복 (서울교육대학교 / 소남천문학사연구소) 太 白 山 天 祭 의 歷 史 와 祭 儀 樣 相 32 김 도 현 (태백산 천제위원회 / 장성여고) 개천절에 남아있는 천문요소와 태백산 깃발 별자리 68 양 홍 진 (한국천문연구원) 조선의 하늘을 살폈던 서운관에 대하여 83 이 기 원 (한국천문연구원) 종합토론 : '하늘이 열린 날, 天 文 을 얘기하다' 발표 요약 100 이 용 삼 (충북대학교 / 소남천문학사연구소)
개천절 일자( 日 字 ) 문제 고찰과 제언 1 개천절 일자( 日 字 ) 문제 고찰과 제언 박 창 범 소남천문학사연구소 / 고등과학원 I. 개천절 일자 문제 재론의 필요성 양력 시월 삼일은 대한민국의 국경일로서 단군의 개국을 경축하는 날이다. 국경 일로서의 개천절은 1949년 당시 국회에서 국경일에 관한 법률 을 제정하면서 개 천절을 국경일로 삼기로 하고, 그 기념일을 양력 10월 3일로 정한 데에 기인한다. 민간과 종교집단에서는 적어도 구한 말 때 이미 음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삼고 기념행사나 제천의식을 하여 왔었다. 또한 적어도 대략 2000년 전부터 우리나라에 는 10월에 추수감사제와 같은 축제가 대규모로 열리고 제천의식이 행사되어 왔었 다. 나라를 되찾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에 국회가 민족 최초의 국가 성립을 기 념하고, 이 땅의 각지에서 출몰하여 왔던 여러 나라들의 공통의 시원을 밝혀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법률로서 공인하려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국회에 서는 개천절을 국경일로 정하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그 날짜를 정하는 데에는 상당한 진통이 있었다. 먼저 국경일에 관한 법률 을 제안한 당시 정부는 개천절을 양력 10월 3일에 기념하는 안을 내었고, 이를 회부 받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개 천절의 일자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지 못하여, 음력 10월 3일을 양력으로 변환하여 개천절로 정하자는 안을 수정안으로 내어 국회 본회의에 상정하였다. 국회 본회의 에서도 정부 안과 법사위 수정안 사이에 서로 타협을 찾지 못하고 논란 끝에 결국 투표로써 양력 10월 3일 안이 가결되었던 것이다. 비록 이 법률이 제정된 지 59년이나 지났지만 그간 학계에서나 정부에서 개천 절의 일자 문제를 학문적 논의를 거쳐 다시 고민해보려는 시도가 얼마나 있었는지
2 박창범 의구심이 든다 1). 그런데 당시 국회의 결정 이유를 살펴보면 지금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당시 국회 회의기록을 보면 개천절의 일자를 정하는 방 향에 대해 국회의원들 사이에 표 1과 같은 견해들이 있었다. 표 1. 1949년 9월 21일 제5회 국회임시회의 기록에 나온 개천절 제정 관련 안과 의원 발언 내용. 가. 양력 10월 3일 안(정부 안) 나. 단군조선 개국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일자 안(법사위 수정안) 동의 사항 동의 사항 이유 양력일이어야 함 전 세계가 양력을 씀 문명국가에서 음력과 양력을 병행 하기 어려움 이견 이유 1. 단군 개국일에 대해 학설이 구 구함. 2. 단군의 개국은 음력이 있기 전 의 일이고 歲 首 의 불확실 등으로 인해 양력 변환이 불가능함. 3. 전문가에 의뢰하여 그 날을 양 력으로 환산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려 건국 초에 할 일이 아님. 4. 양력 10월 3일이 개국일이 아 니라 하더라도 날씨가 좋고 오곡 이 풍성하여 계절적으로 개국을 기념하기에 편리함. 단군이 하필 추운 때에 건국을 하지 않았을 것. 1. 음력 10월 3일은 古 來 로 지켜 오던 성스러운 날로서 輕 히 변경 할 수 없음. 국민의 의사를 무시하 고 강요해서는 안 됨. 2. 음양력 변환은 대략 2천 수백 년 간의 것이 알려져 있지만 曆 家 에 부탁하여 그 이전의 시기를 수 학적으로 소급하여 계산할 수 있 음. 이 기록에 나타난 양측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삼자는 정부 안을 지지하는 의원들은 현실성과 편의성에 사고의 기 본을 두고 있다. 국가 운영을 위해 많은 법률을 제정 반포해야하는 시기에 가능해 1) 1996년 11월에 총무처에서 장관 명의의 공문을 통해 본인에게 단군개국일자의 양력 환산문제를 의뢰하여 온 일이 있음을 보아 그러한 논의를 정부가 직접 시도한 적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요 청은 역사 연구의 집적 및 계산기의 발달에 따라 국경일 제정 당시와는 달라진 상황 변화에 의한 것이다.
개천절 일자( 日 字 ) 문제 고찰과 제언 3 보이지도 않는 날짜 변환을 한가로이 하고 있을 시간이 없으며, 양력 10월 3일이 우리나라에서 계절적으로 가장 날씨가 좋고 먹을 것이 풍요한 때이어서 이날이 실 제 날이 아니더라 하더라도 개국을 자축하기에 안성맞춤인 날이라는 주장이다. 반 면에 단군 개국일을 찾고 음양력 변환을 하자는 의원들의 생각은 개국의 상징성과 전통의 존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양력 10월 3일 개천절 결정은 역사와 역법에 대한 지식에 한계가 있었던 국회 의원들 간의 불과 하루 사이의 짧은 논의에 의해, 그리고 다수결이라는 비학문적 방식으로 결정된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늦기 전에 학문적 재조명과 새 로운 합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며, 본 발표가 이러한 논의를 진지하게 시작하는 계 기가 되기를 바란다. 단군조선에 대해서는 나라의 존속기간, 강역, 신화내용 등 여 러 연구주제가 있지만 본고에서는 단군조선의 개국년과 일자 문제만을 다루고자 한 다. II. 단군조선 개국년 본인은 이 발표를 통해 음력 10월 3일을 새로운 개천절로 정하기를 제언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제언을 하기에 앞서 다른 가능성을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먼 저 현행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삼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 방식을 채택 하게 되었던 원래의 이유 (표1 참조)의 대부분은 이제 정당화될 수 없는 것들이다. 우선 계절이 좋아서 개국일로 적합하다는 발상은 자의적 주장이어서 논의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또한 시간이 많이 걸려서 전문가에게 양력환산을 맡길 수 없다는 것 도 이제 유효한 상황이 아니다. 다만 과연 단군개국일이 정확히 알려져 있느냐는 문제는 여전히 유효한 문제인데, 이는 실제로는 이 안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안 에 있어서 공통의 문제인 것이다. 오늘날 컴퓨터 계산을 통해 음력 초하루( 朔 日 )를 양력으로 환산하는 것은 아무리 먼 과거까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음력 으로 한 해의 시작( 歲 首 )을 정하는 하나의 방식을 채택하면 과거 어느 시점이던 간 에 음력일을 양력일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다 2). 따라서 단군개국일이 양력으로 환 2) 물론 과거의 음력일을 정확히 양력일로 바꾸기 위해서는 당시의 역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러나 단군조선의 건국시대와 같이 역이 알려져 있지 않은 시대에 대해서는 이러한 시각을 떠나 생각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서기전 2333년에 있었던 초생일을 모두 천체역학적 계산에 의해 양력으로 구하면, 이 중에 시월에 해당하는 초생일은 2-3 가지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4 박창범 산 가능하냐의 문제는 이제 환산 자체에 어려움이 있지 않고, 단국개국일의 규명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결국 현행 양력 10월 3일 개천절 은 본시 정당성을 갖추지 못했던 방식이었는데, 이제 이 안을 주장하며 내세웠던 본래의 설득력마저 잃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당시 수정안으로서 제시되었던 안, 즉 단국 개국일을 양력일로 환산하 여 이를 개천절로 삼는 방식을 생각해 보자. 단군 개국일을 양력으로 환산하기 위 해서는 단군 개국일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개국년과 그 해의 일자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단군 개국년은 중국 堯 의 즉위년에 대해 상대적으로 밝혀져 있기 때문에 단군 개국년을 알기 위해서는 요의 원년을 알아야 한다. 결국 단군 개 국일 규명 문제는 1. 요 원년, 2. 요의 원년으로부터 단군조선의 개국년까지의 해 수, 3. 단군조선 개국 월일, 이렇게 세 가지로 귀결된다. 표 2. 중국 堯 의 원년에 대한 설. 한국 중국 요원년 辛 丑 戊 辰 BC2333 甲 辰 BC2357 戊 辰 BC2333 甲 辰 BC2357 丙 子 丁 未 辛 卯 요25년 戊 辰 BC2333 戊 辰 BC2333 요50년 庚 寅 丁 巳 丁 巳 비고 삼국사기 가 인용한 古 記 삼국사기 一 然.북송 유서의설 東 國 通 鑑. 서진 황보 밀의설 北 宋 劉 恕 西 晉 皇 甫 謐, 宋 邵 雍 그런데 요의 원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들이 존재한다. 표 2는 우리나라와 중 국에서 받아들여져 사용되었던 요 원년에 대한 설들을 요약한 것이다. 고려시대 일 연이 찬한 삼국사기에는 고기( 古 記 )를 인용하며 단군의 개국년을 요 50년 경인년이 라고 하였는데, 이는 요의 원년이 신축년임을 뜻한다. 일연은 요 50년이 실제로는 정사년이기 때문에 이 기록은 그릇되었다고 주를 달았는데, 이는 요의 원년을 무진 년으로 잡은 것이고, 요 원년 무진년 설은 북송 유서의 설을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요의 원년을 갑진년으로 잡는 서진 황보밀의 설을 따르기 시
개천절 일자( 日 字 ) 문제 고찰과 제언 5 작하였고, 이것이 현재 우리가 채택하고 있는 설이다. 중국에서는 이 외에도 병자 설, 정미설, 신묘설 등이 제기되어 있다. 따라서 요의 원년은 정확히 밝혀지거나 한 가지로 합의된 사항이 아니고, 몇 가지의 설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문제인 것이 다. 표 3. 단군조선 건국년 관련 기사 일부. 출전 저자/발간연도 인용서/원기록문(건국년) 三 國 遺 事 一 然 (1206 - 魏 書 / 與 高 同 時 3), 古 記 / 唐 高 卽 位 五 十 年 庚 寅 ( 唐 高 卽 位 1289)/1281? 元 年 戊 辰 則 五 十 年 丁 巳 非 庚 寅 也 )-권1 帝 王 韻 紀 李 承 休 /1287 並 與 帝 高 興 戊 辰 4)-하권 牧 隱 集 李 穡 (1328-1396) 我 東 方 國 於 唐 堯 戊 辰 歲 - 文 藁 권9 高 麗 史 金 宗 瑞, 鄭 麟 趾, 李 先 齊 등/1454 本 國 與 堯 並 立 - 권114 朝 鮮 王 朝 實 錄 本 國 與 堯 並 立 - 태조실록 권1 1452-1454 唐 堯 戊 辰 歲... (세종실록 지리지) 檀 君 古 記 / 檀 君 與 唐 堯 同 日 而 立 - 세종실록 권154 지리지 日 省 錄 조선 檀 君 之 與 帝 堯 並 立 - 정조3년 陽 村 集 權 近 (1352-1409)/1396 始 古 開 闢 東 夷 主 ( 時 唐 堯 元 年 戊 辰 也 ) - 권1 應 製 詩 龍 飛 御 天 歌 정인지, 안지, 권 唐 堯 戊 辰 歲 - 권1 제9장 제/1445 本 國 與 堯 並 立 ( 檀 君 開 國 實 唐 堯 戊 辰 歲 也 ) - 권6 제41장 歷 代 世 年 歌 權 踶 5)/1436 始 開 東 國 號 朝 鮮 並 與 帝 堯 興 戊 辰 應 制 詩 註 權 擥 6)/1462 古 記 / 檀 君 與 唐 堯 同 日 而 立 三 國 史 節 要 盧 思 愼, 徐 居 正 등/1476 時 唐 堯 戊 辰 歲 也 - 권1 東 國 通 鑑 徐 居 正 등/1484 是 唐 堯 戊 辰 歲 也 古 紀 / 檀 君 與 堯 並 立 於 戊 辰... 此 說 可 疑 今 按 堯 之 立 在 上 元 甲 子 甲 辰 之 歲 而 檀 君 之 立 在 後 二 十 五 年 戊 辰 則 曰 與 堯 並 立 者 非 也 - 外 紀 筆 苑 雜 記 徐 居 正 (1420-1488) 古 記 / 檀 君 與 堯 同 日 而 立 東 國 輿 地 勝 覽 1530 唐 堯 戊 辰 歲 - 권51 평양부 東 國 史 略 朴 祥 (1474-1530) 唐 堯 二 十 五 年 戊 辰 海 東 異 蹟 洪 萬 宗 /1666 時 唐 堯 二 十 五 年 戊 辰 歲 也 3) 高 또는 唐 高, 唐 堯 란 堯 를 뜻한다. 요의 성은 이기( 伊 耆 ), 이름은 방훈( 放 勳 ), 호는 도당씨( 陶 唐 氏 ) 이다. 4) 제왕운기는 本 紀 와 檀 君 本 紀 를 인용하여 단군의 건국에 대한 내용을 전달하고 있지만 건국년도에 대해서는 인용서를 밝히지 않았다. 5) 권제(1387-1445)는 응제시를 지은 권근의 아들 6) 권람(1416-1465)은 응제시를 지은 권근의 손자
6 박창범 둘째로는 단군조선의 개국년에 대해서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고문헌 중에서 단 군조선과 관련된 기사가 처음 나오는 곳은 1145년에 김부식이 찬한 삼국사기 고구 려본기인데 東 川 王 24년 조의 平 壤 者 本 仙 人 王 儉 之 宅 也 (평양은 본시 선인 왕검이 살던 곳이다) 라는 것이 그 내용이어서 개국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개국년 을 처음 언급한 문헌은 삼국유사인데, 이 때부터 단군조선 건국년에 관련된 고문헌 기록들의 일부를 표 3에 실었다. 삼국유사에는 두 가지 설이 제시되어 있다. 일연 은 먼저 < 魏 書 >를 인용하여 단군이 堯 와 같은 때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고 7), 두 번째로 요50년 경인년에 세웠다고 하고서 요 원년은 무진년이었기 때문에 이 해는 실제로는 정사년이었다는 주석을 달았다. 그러나 요 원년에는 여러 설들이 존재하 기 때문에 특별히 신빙성이 더 한 내용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일연은 요 원년 무진 설을 따른 것뿐이다. 그런데 삼국유사 이후 13세기 말에 출간된 제왕운기부터 동국 통감이 출간된 15세기 후반까지 약 200년 동안 삼국유사가 인용한 古 記 이외의 모 든 고문헌들은 일관되게 단군조선의 건국년이 요의 원년과 같다고 언급하고 있다. 세종실록은 심지어 건국일까지 요의 즉위일과 같다고 하고 있다. 이 기록들은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는데 하나는 단군조선 개국년이 요 원년이 라는 것이고, 둘째는 요 원년이 무진년이라는 것이다. 일연의 주를 통해서도 당시 에 요 원년 무진설이 우리나라에 사실로서 받아들여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단군 의 개국이 무진년이라는 기록이 처음 나오는 제왕운기는 단군조선 개국년이 요의 원년과 같기 때문에 무진년이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484년에 서거정 등에 의해 간행된 동국통감에 처음으로 단군조선의 건 국년이 요25년이라는 설이 제시되기 시작한다. 이는 단군조선 개국년을 무진년으로 잡은 뒤, 요 원년 갑진설을 따랐기 때문이다. 요의 원년이 갑진년이라면 무진년은 요25년이 되기 때문이다. 이 논리에는 앞뒤가 안 맞는 면이 존재한다. 즉 13세기에 서 15세기 후반까지의 기록들은 삼국사기의 고기 인용 부분 이외에는 예외 없이 단군조선이 요나라와 같은 해(또는 때)에 세워졌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이 해가 무 진년이라고 밝기도 한다. 즉 이 시대에 단군조선의 개국년 기사의 주 내용은 요의 원년이라는 것이고, 무진년이라는 것은 부수적 내용이다 (표 3 참조). 단군 원년이 무진년이라는 것은 요 원년 무진설을 따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국통 7) 이 기록은 단군조선이 요 원년과 같은 해라는 정확한 표현은 아니고, 비슷한 시기 또는 그만큼 오 래되었다는 정도로도 볼 수 있다 (김정배 2003).
개천절 일자( 日 字 ) 문제 고찰과 제언 7 감은 이를 망각하고 干 支 만을 중요시하여 단군 건국년을 무진년으로 받아들인 뒤, 요 원년 갑진년설을 채택하여 단군 건국년이 요 25년이라는 결과를 얻고 있다. 그 러나 요 원년을 갑진년으로 고쳐 잡는다면 단군조선의 개국년도 갑진년(BC2357)이 되어야 할 것이다. 중국에서도 간지의 사용이 서기전 24세기까지 거슬러 간다는 증 거는 없기 때문에 8) 단군조선의 개국년이 애초에 간지로 알려져 있었을 리가 없으 며, 주요 주변국의 개국년과 상대적인 해수로 나타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단군조선 개국년에 대한 고문헌의 기록에서 요의 원년과의 비교 부분이 더 중요한 내용이고 간지는 부차적인 것이다. 그러나 동국통감의 발간 이후로 요 원년 갑진설과 단군조선의 개국년 요25년 (BC2333) 설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구한말과 대한민국에까지 그 설이 정설로 사용되고 있다. 종합해보면 단군조선의 개국년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총 세 가지 설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지하여야 할 사실은 본래 단군조선의 개국년은 요 원년과 같은 해라는 내용이 핵심이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단군의 개국 년을 요 25년(BC2333)으로 잡는 것은 15세기 말에 요 원년을 새로이 갑진년으로 채택하면서 생긴 착오로 보인다. 즉 단군조선 개국년에 대한 혼선은 요 원년의 불 확실성에 기인하고 있다. 15세기 말에 채택한 요 원년 갑진설을 받아들인다면 단군 조선 개국년은 요 원년과 같은 해인 BC2357로 정하는 것이 옳다. 반면에 그 이전 에 채택하였던 요 원년 무진년 설을 받아들이면 단군조선의 개국년은 역시 요 원년 인 BC2333년 무진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본인은 단군조선 건국 기사가 처음 나왔 던 13-15세기의 기록에 따라 단군조선의 개국년을 요의 원년으로 보는 것이 합당 하다고 생각한다. III. 단군조선 개국일 이상에서 단군조선의 개국년에 대해 여러 문헌의 내용을 비교하여 살펴보았다. 그런데 개천절 날짜를 정하려면 단군조선의 개국일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불 행히고 단군조선의 개국일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문헌은 없다. 8) 중국에서 간지 기록이 처음 나오는 것은 商 (BC1600 - BC1046)대의 갑골문에서부터이다. 商 의 수도는 은허( 殷 墟 )이다.
8 박창범 표 4. 10월 제천의식과 개천절에 대한 문헌 기록 일부. 출전 저자/발간연도 원기록문(제천의식) 三 國 志 夫 餘 以 殷 正 月 祭 天 國 中 大 會 連 日 飮 酒 歌 舞 名 曰 迎 鼓 三 國 志 高 句 麗 陳 壽 /3세기말 以 十 月 祭 天 大 會 名 曰 東 盟. 其 國 東 有 大 穴 號 隧 穴 亦 以 十 月 迎 以 祭 之 三 國 志 韓 十 月 農 功 畢 亦 復 如 之 後 漢 書 濊 常 用 十 月 祭 天 晝 夜 飮 酒 歌 舞 名 之 爲 舞 天 范 曄 (398-445) 後 漢 書 韓 馬 韓... 十 月 農 功 畢 亦 復 如 之 魏 書 高 句 麗 魏 收 /554, 559 常 以 十 月 祭 天, 國 中 大 會 晉 書 馬 韓 房 玄 齡 /644 至 十 月 農 事 畢, 亦 如 之. 國 邑 各 立 一 人 主 祭 天 神, 謂 爲 天 君 南 史 高 句 麗 李 延 壽 /7세기중엽 以 十 月 祭 天 大 會 北 史 高 句 麗 李 延 壽 /7세기중엽 常 以 十 月 祭 天 三 國 史 記 新 羅 金 富 軾 /1145 眞 興 王 三 十 三 年 冬 十 月 二 十 日, 爲 戰 死 士 卒, 設 八 關 筵 會 於 外 寺, 七 日 罷 三 國 史 記 雜 志 金 富 軾 /1145 後 漢 書 云 < 高 句 麗 > 好 祀 鬼 神 社 稷 零 星, 以 十 月 祭 天 大 會, 名 曰 東 盟, 其 國 東 有 大 穴, 號 襚 { 隧 } 神, 亦 以 十 月 迎 而 祭 之 北 史 云 < 高 句 麗 > 常 以 十 月 祭 天, 多 淫 祠. 有 神 廟 二 所, 一 曰 夫 餘 神 唐 書 云 < 高 句 麗... 祀 靈 星 及 日... 每 十 月 王 皆 自 祭 古 記 云 < 溫 祚 王 > 二 十 年 春 二 月, 設 壇 祠 天 地. 三 十 八 年 冬 十 月 < 多 婁 王 > 二 年 春 二 月, < 古 尒 王 > 五 年 春 正 月 十 年 春 正 月 十 四 年 春 正 月, < 近 肖 古 王 > 二 年 春 正 月, < 阿 莘 王 > 二 年 春 正 月, < 腆 支 王 > 二 年 春 正 月, < 牟 大 王 > 十 一 年 冬 十 月, 並 如 上 行 三 國 史 記 列 傳 金 富 軾 /1145 眞 興 大 王 十 二 年 辛 未... 始 置 百 座 講 會 及 八 關 之 法 弓 裔 光 化 元 年 冬 十 月 始 作 八 關 會 高 麗 史 金 宗 瑞, 鄭 麟 趾, 李 有 摩 利 山 ( 在 府 南 山 頂 有 塹 星 壇 世 傳 檀 君 祭 天 壇 )-권 先 齊 등/1454 56 지리지 朝 鮮 王 朝 實 錄 1452-1454(세종 실록 지리지) 摩 利 山 ( 傳 朝 鮮 檀 君 祭 天 石 壇 )-권148 지리지 1909.1.15 羅 喆 등의 檀 君 敎 창립(훗날 대종교) 동아일보 1921.11.2(음10.3) 開 天 節 慶 賀 式 官 報 제6호 1948.9.8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단군기원으로 한다 官 報 號 外 1949.10.1 국경일에 관한 법률 -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정함. 官 報 제3014호 1961.12.1 공화당 군사정부. 연호에 관한 법률 - 단기연호사용 폐지. 대한민국 공용연호는 서력기원으로 한다 구한 말에 음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정한 것은 시월에 추수감사제, 종교의식
개천절 일자( 日 字 ) 문제 고찰과 제언 9 ( 始 祖 神 ), 호국의식 등의 성격을 띤 천신제를 열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우리민족 의 오랜 전통을 고려하여 이때를 단군조선의 개국일이 있는 달로 삼은 것에 기인한 다. 또 3일을 채택한 것은 그것이 예로부터 신성한 수로 여겨져 왔으며 9), 달이 생기 충만한 초생 상태를 보이는 날이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10). 실제로 삼국유사에 소개 된 단군신화에는 환인 환웅 단군, 천부인 세 개, 무리 3천 명, 풍백 우사 운 사, 삼칠일 등 수치 3이 여러 번 등장한다. 비록 음력 10월 3일이 단군조선의 개국일자라는 직접적 근거는 없지만, 적어도 2천년 동안 시월에 제천행사를 하며 하늘에 제사를 드려왔던 것은 국내외 여러 문 헌에 나타난 주지의 사실이다. <삼국지>와 <후한서>에 따르면 부여에는 영고( 迎 鼓 ), 예에는 무천( 舞 天 ), 고구려에는 동맹( 同 盟 )이라고 불리는 제천행사가 시월에 거 행되었다 (표 3 참조). 또한 황해도 구월산( 三 聖 祠 ), 강화도 마니산 등지에 제천단 이 있어 단군에 제사를 지내왔음이 기록되어 왔다 11). 국가적 제천의식 때 국조에 대한 제사가 이루어지는 것은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이를 묶어 10월에 단국조선의 개국을 기념하였고 보는 것은 크게 무리라고 할 수는 없을 것 이다. IV. 토의 및 제언 위의 검토를 종합하면 단군조선의 건국년은 요 원년과 같은 해이고, 양력으로는 BC2357년(요 원년이 갑진년인 경우) 또는 BC2333(요 원년이 무진년 경우) 등이라 할 수 있다. 요 원년에 대한 설들이 더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받아들여졌던 무진년 설과 갑진년설 만 고려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충분해 보인다 12). 또한 개국일은 음 9) 우실하(2004)는 북방 샤머니즘의 3수 분화의 세계관 의 기원에 대해서 북방 샤머니즘의 중요한 관념 체계인 三 界 九 天 說, 宇 宙 數 관념, 三 魂 一 體 說 등과 연결되어 있으며, 최초의 태극관념인 三 太 極 / 三 元 太 極 관념과도 이어진다.... 북방샤머니즘의 사유체계에서 성수 3이나 3의 배수들은 특별 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수 3의 기원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우주의 구조를 상 중 하 삼계 혹은 天 界 人 界 地 界 의 삼계로 나누는 사유 체계에서 기원한다고 알려져 있다. 고 말하고 있다. 10) 동아일보 1928년 11월 23일자 개천절 기사 11)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표 3 참조. 12) BC2333년을 택하는 경우는 언뜻 현행과 같은 해로 보이지만 현행 서기전 2333년은 단국개국년 을 요 25년으로 잡아 양력으로 변환한 것이다. 현행과 같이 요 원년을 BC2357년 (갑진년)으로 잡 는다면 단국개국년 역시 BC2357년이 된다. 요 원년 갑진설을 고수하자면 단군조선 개국년을 고쳐 잡으면 되는 것이다.
10 박창범 력 10월 3일로 삼는 것은 오랜 전통을 이어받는 가장 자연스런 선택이 될 것이다. 따라서 단군조선의 건국년월일 지정에 대한 본고의 결론은 요 원년인 BC2333년 무진년 또는 BC2357년 갑진년으로, 건국일은 이 해 음력 10월 3일로 잡는 것으로 요약된다. 1949년 국회에서 제안된, 그러나 채택되지 못했던 안을 따르자면 단군조선의 개 국일 BC2333년 음력 10월 3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이를 개천절로 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를 반대하였던 의원들의 지적과 같이 이 시대는 아직 음력 이 사용되고 있지 않던 때이므로 BC2333년까지 거슬러 음양력 변환을 하기 위해 서는 임의로 적당한 역법( 歲 首 결정법)을 선택해야 할 것이고, 이는 개천일을 찾는 의의를 상당히 떨어뜨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13). 또한 앞서 강조한대로 단군조선의 개국년은 요 즉위 원년이라는 것에는 상당한 문헌적 뒷받침이 있지만, 요 원년 자 체가 확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양력 환산이 유일하지 않다는 문제가 존재한다. 따라서 본인이 본 발표에서 제안하고 싶은 것은 단군조선의 건국년을 요 원년으 로 잡자는 것과 함께 개천절을 앞으로는 양력이 아닌 음력 10월 3일로 정하자는 것이다. 태음력은 달의 위상을 따라 날 수를 세어나가는 방법이다. 태양력은 계절의 주기적 변화를 날 수로 세어나간다. 그런데 일년의 길이는 달의 위상주기의 정수배 가 아니기 때문에 태음력이 해의 변화도 반영해주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1년의 길 이를 어느 정도 맞춰줘야 하는 문제를 갖게 되고, 그 길이를 맞추는 방법이 바로 역법인 것이다. 한해에 달을 어떻게 집어넣느냐가 바로 고대에 음력을 사용한 나라 들의 역법이었던 것이다 14).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 양력을 우선적으로 사용하지 만 사실 태음력은 달이 차고 이질어짐에 따른 날의 변화를 그대로 반영해주고, 조 수간만의 정도를 바로 알려주는 등 현실 생활에 밀접한 정보를 알려주는 달력이다. 즉 태양력은 태양의 운동에 따른 계절의 변화는 충실히 알려주지만 달의 운동에 따 른 지구상의 변화는 전혀 알려주지 못하는 것이다. 동양의 고대사를 살펴볼 때 단 군조선시대에도 달의 위상을 따라, 즉 음력으로 날을 세어나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개천일을 기념하려면 음력을 따라야 할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13) 그러나 이 변환이 크게 불확실한 것은 아니다. 1년의 변화는 분명하기 때문에 수 천년이 지나도 음력이 1-2달 이상 양력과 달라지지는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계절변화를 따르기 위해 보정을 해나가는 역법을 태음태양력(음양력)이라고 한다. 편의상 본고에서는 이 역시 음력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개천절 일자( 日 字 ) 문제 고찰과 제언 11 1949년 10월 1일자 관보에 공고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은 국가의 경사스러운 날 을 기념하기 위해 삼일절(3.1), 제헌절(7.17), 광복절(8.15), 개천절(10.3)의 네 날을 양력 일자로 국경일을 삼았다. 이 날들을 태양력으로 정한 이유는 당시 국회 기록 에 나타난 김봉조 의원의 발언에 표현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개천절의 시월 삼일 이것은 분명히 작년까지 음력 시월 삼일로 이렇게 거 행해왔는데 음력과 양력을 병행하는 것이 도저히 문명국가에서 잘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니까 이것은 역사가에 부탁을 해서 단군이 등극하던 그 개천절 을 시방 양력으로 고쳐서... 즉 개천절을 음력일로 삼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음력에 대한 열등의식 때문이었 다. 위의 4대 국경일 중에서 개천절 이외의 세 날들은 모두 근세의 일들이므로 태 양력으로 정확한 날을 알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음력으로 기념하던 전통이 없던 날들이다. 따라서 오래 동안 음력을 따라 기념하던 개천절을 이 날들과 똑같이 취 급하여 양력으로 기념일을 정한다는 것은 국경일로서의 그 상징성을 크게 훼손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음력일로써 개천절을 정하면 양력 환산에 따르는 불확실성과 논란을 모두 피할 수 있다. 앞서 단군조선의 개국년 문제는 요의 즉위년에 대한 이설들 때문에 불확 실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개국년은 단군조선의 개국일자를 양력으로 환산할 때에는 중요한 문제이지만 개천절을 음력으로 정하자는 본고의 제언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 지 않는다. 비록 개천절이 음력으로 고정되면 양력 날짜로는 매년 변동이 있겠지만, 이 정도 불편함은 음력을 따름으로 인해 생기는 개천절의 상징성을 드높이는 소득 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미 대한민국의 법정 공휴일에는 민족의 축제인 설날과 추석, 그리고 석가탄신일과 같이 음력으로 기념일을 삼는 날들이 공 인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민족의 오랜 전통을 이어받은 결과인데, 오로지 개천절만 이 그 역사성에도 불구하고 그간의 무관심으로 인해 기념일을 바로 잡지 못하고 있 는 것이다. 비록 개천절이 국초에 우리의 것(음력)을 경시하는 시각과 국제화에 대 한 맹목적인 의욕으로 인해 성급히 양력으로 정해졌지만, 이제라도 개천절 본래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음력을 따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12 박창범 참고문헌 김정배, 고조선 연구의 현황과 과제, 단군학 연구, 제9호, 17쪽, 2003 동아일보, 1921년 11월 2일(음10. 3)자 개천절 기사 서영대, 단군관계 문헌자료 연구, 단군, 서울대학교 출판부, 47-81 송호수, 단군사상과 민족주의, 단군, 서울대학교 출판부, 353-382 우실하, 동북아 샤머니즘의 성수( 聖 數 : 3.7.9.81)의 기원에 대하여, 단군학 연구, 제 10호, 207쪽, 2004 이은봉, 단군신앙의 역사와 의미, 단군, 서울대학교 출판부, 299-331 제5회 국회임시회의기록집 제3호, 1949. 9. 21 최병헌, 단군인식의 역사적 변천, 단군, 서울대학교 출판부, 139-157
고조선의 천문과 북두칠성 13 고조선의 천문과 북두칠성 이 용 복 서울교육대학교 / 소남천문학사연구소 I. 서론 고조선에 대한 것은 고대사를 전공하고 있는 역사학자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하 여 평소에 별로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이라도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 조선에 대한 연구는 학자들 간 많은 이견이 있고 학문적 논쟁의 중심에 있다. 고조 선( 古 朝 鮮 )이라는 명칭은 고대 조선이라는 의미로 태조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분 하기 위기 사용된다. 조선이라는 명칭은 태조에 의한 조선이 창건되기 이전부터 단 편적이지만 중국의 여러 고서에 나타난다. 고조선이 역사서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시기는 기원전 7세기 초이다. 이 시기에 저술된 것으로 알고 있는 관자( 管 子 ) 에 발조선( 發 朝 鮮 ) 이 제( 齊 )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 산해경( 山 海 經 ) 에는 조선이 발해만( 渤 海 灣 ) 북쪽에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요하( 遼 河 ) 유역 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집단을 통칭한 것이다. 이외에도 전국책( 戰 國 策 ), 염철론( 鹽 鐵 論 ) 등과 같은 고서적에 나타나고, 특히 중국 정사( 正 史 )인 사기( 史 記 ), 한서( 漢 書 ) 등에도 보인다. 그러나 고조선에 대한 기록으로 현재에 남아 있는 고대 기록으로는 삼국유사 ( 三 國 遺 事 ) 나 제왕운기( 帝 王 韻 紀 ) 와 같이 극히 제한된 부분에만 있다. 물론 더 많은 기록이 있었겠지만, 불행하게도 전승되어 현재에 남아있는 것이 극히 적은 것이 아쉬운 점이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고조선 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본 연구에서는 우선 고조선의 역사와 그 강역에 대하여 그동안 연구한 내용을
14 이용복 간단히 알아본다. 이어 고조선 강역에서 발견된 다양한 유적과 발굴된 당시의 청동 기 유물을 통하여 천문학적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다. 특히 청동기 유물에 나타난 문양을 통하여 천문학적 요소나 흔적을 알아보고자 한다. II. 고조선의 역사 고려( 高 麗 ) 시대에 일연( 一 然 )이 지은 삼국유사( 三 國 遺 事 ) 나 이승휴( 李 承 休 ) 가 지은 제왕운기( 帝 王 韻 紀 ) 에는 신화의 형태로 단군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단 군의 건국 사실을 전하는 기록은 고려시기에 들어와 처음 보인다. 그러나 이때 들 어서 우리 민족의 건국 신화가 처음이 아니다. 삼국유사 와 제왕운기 에는 각각 '고기운( 古 記 云 )', '본기왈( 本 紀 曰 )'이라면서 신화 형태의 단군에 관한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이로보아 그 이전에 이미 단군신화를 기록한 사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단군의 조선 건국 사실은 일찍이 중국에도 알려져 위( 魏 )나라의 역사 책인 위서( 魏 書 ) 에 기록되기까지 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환인( 桓 因 )의 아들인 환웅( 桓 雄 )이 홍익인간( 弘 益 人 間 )의 큰 뜻 을 품고 권위의 상징인 천부인( 天 符 印 ) 세 개를 지니고 태백산( 太 伯 山 ) 마루의 신단 수( 神 檀 樹 ) 밑에 내려왔다. 이곳에 신시( 神 市 )라는 사회를 건설하여 풍백( 風 伯 )과 우 사( 雨 師 ) 및 운사( 雲 師 )를 거느리고 이곳을 다스렸다고 한다. 그 아들 단군왕검( 檀 君 王 儉 )은 다시 아사달( 阿 斯 達 )에 도읍하여 조선을 개국하였는데 때는 중국의 요 ( 堯 ) 임금 시절이라 하였다. 또한 훗날의 고구려, 백제, 신라와 남북 옥저( 沃 沮 ), 동 북 부여( 夫 餘 ), 예( 濊 )와 맥( 貊 ) 등이 모두 이 단군의 자손이라 하였다. 특히 천부인 ( 天 符 印 )은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 桓 雄 )이 천제( 天 帝 )인 환인( 桓 因 )으로부터 받아 가 지고 내려왔다는 것으로, 삼국유사( 三 國 遺 事 ) 에 의거하면 청동검, 청동거울, 및 청동방울의 3가지로 추측된다. 중국의 산동성 가상현( 嘉 祥 縣 ) 자운산( 紫 雲 山 ) 아래에서 발견된 무씨사당( 武 氏 祠 堂 ) 석실( 石 室 )의 화상석( 畵 像 石 )에 그려진 그림도 삼부인( 三 符 印 )이 나타난다. 그리 고 풍백, 운사, 우사가 보이고 곰과 호랑이가 등장하는 등 단군신화의 내용을 그대 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이 화상석에는 구름을 타고 있으면서 어깨에 날개를 단 천 상의 인물과 말들, 그렇지 않은 지상의 인물과 말들이 보인다. 오른쪽 상단에 앞으 로 앉은 천상 인물이 들고 있는 세 개의 구슬은 삼부인( 三 符 印 )을 그린 것으로 보
고조선의 천문과 북두칠성 15 인다. 두 번째 층 그림에는 무슨 나팔 같은 것을 입에 대고 부는 풍백과, 두 손에 망치를 쥐고 양 쪽에 있는 북을 치는 운사, 물병을 쥐고 있는 우사가 보인다. 세 번 째 층 오른편에는 곰과 호랑이가 보인다. 이 무씨사당은 서기 147년에 만들어진 것 으로 알려져 있어, 아무리 늦어도 이 무렵까지는 단군 신화의 골격을 이루는 이야 기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고 보인다. 이것은 이러한 신화를 가진 민족이 아시아 동북지역 전반에 널리 퍼져 있었음 알 수 있는 유적이다. 고조선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단군조선( 檀 君 朝 鮮 ), 기자조선( 箕 子 朝 鮮 ), 위만조선 ( 衛 滿 朝 鮮 ) 등의 세 단계로 나누고 있다. 이와 같은 시대로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에 들어서 시작되었다. 삼국유사( 三 國 遺 事 ) 에서는 고조선을 왕검조선과 위만조선으로 나누어 보고 있다. 그리고 제왕운기( 帝 王 韻 紀 ) 에서는 전조선기, 후조선기 및 위만조선기로 나누고 있다(이형구 1999). 전기조선의 시작은 단군이고 후기조선의 시작은 기자( 箕 子 )로 정하고 있다. 고조선에 관한 연구는 조선 후기에 실학자들이 고조선의 강역에 대하여 문헌 고증 을 바탕으로 연구했다(박광용 1980). 당시 실학자들은 역사 인식의 기본으로 화이 사상( 華 夷 思 想 )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고증학적 입장에서 사료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고 강역의 고증을 통하여 역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세웠다(김영호 1984). 이러 한 입장을 가진 실학자의 대표적 인물이 정약용( 丁 若 鏞 1762-1836)과 한치윤( 韓 致 奫 1765 ~ 1814) 등이었다. 이러한 실학자들의 연구는 고조선 역사에 대하여 새 로운 인식을 갖고 연구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일제 침략기 시대에는 고조선의 역사를 부정하고 말살하려는 시도를 한 시기이 다. 고조선의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한국의 고대사 전반을 왜곡시키 는 연구를 하였다. 예를 들어 단군사적( 檀 君 史 蹟 )은 불교 설화에 근거를 둔 가공스 런 이야기라고 폄하시키고, 고조선의 역사 전체에 대하여 철저하게 그 역사성을 부 정하였다.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된 이후 남과 북은 고조선 역사에 대한 연구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였다. 남한의 학자들은 고조선의 존재를 역사가 아닌 신화라는 입 장에서 접근했다. 특히 고조선의 국가 특징을 연구하면서 이와 관련한 사회와 경제 적인 관점에서 접근한 전반적인 연구는 수행하지 않았다. 다만 단군조선은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관념적이고 신화적 측면에서 연구를 하였다. 이 때 민족적
16 이용복 문제 때문에 기자조선( 箕 子 朝 鮮 )은 부정되었다. 반면에 북한의 경우는 해방 이후 고조선 역사에 대하여 집중적 연구를 진행했 다. 기자조선에 대한 부정은 남한과 같다. 남한의 경우는 일본학자들이 연구한 부정 적인 입장의 역사관에 영향을 받았으나, 북한은 민족주의적인 역사 인식이 강해 다 른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했다(김정배 1991). 북한에서 본격적인 고조선 역사의 전 환점이 된 것은 1960년대 초에 출간된 이지린( 李 址 麟 )의 고조선연구 였다. 이지 린은 고고학적 발굴과 자료들을 이용하여 내용을 보완하여 국가적 체계로서 사회적 경제적 입장에서 고조선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1980년대에 이르러 북한의 고조선 역사 연구와 역사 인식이 남한에 소개되었다. 이 후로 고조선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고조선 역사를 어떻게 볼 것 인가에 대한 논쟁이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논쟁의 실마리를 준 것이 발해 연안에 서 발굴된 발해연안식( 渤 海 沿 岸 式 ) 청동단검( 靑 銅 短 劍 ) 등과 같은 다양한 청동기 유 물이다. III. 고조선의 강역과 청동기 유물 우리는 고조선의 강역에서 발굴된 대표적 유물이라면 흔히 비파형동검을 든다. 이 비파형동검( 琵 琶 形 銅 劍 ) 중에서 중국 요령( 遼 寧 )에서 발굴된 전형적인 모습을 한 것이 요령식동검( 遼 寧 式 銅 劍 )이다. 이는 요동( 遼 東 ) 지역의 고고학적 성과에서 얻어 진 결과이다. 이를 바탕으로 고조선 문화가 북한 학계에서는 요동을 중심으로 발전 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자극을 받아 우리 학계도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 등 고고학적 유물의 분포와 문헌 사료의 전면적인 재검토를 하게 되었다. 이를 통하여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는 요동에 있었으나 기원전 4~3세기경에 대동강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이른 바 이동설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을 간단히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대동강 중심설을 주장하는 대표적 학자는 이병도이다. 그의 연구로 삼국유사는 단군이 평양에 도읍 하여 조선을 건국하고, 평양은 서경이라는 주를 달고 있다. 정 약용과 한치윤 등 실학자들도 패수를 압록강으로 보고 고조선의 중심을 한반도로 고증하였다.
고조선의 천문과 북두칠성 17 다음은 요동 중심설이다. 조선시대 권람( 權 擥 1416 ~ 1465)은 그의 저서 응 제시주( 應 制 詩 註 ) 에서 낙랑을 압록강 북쪽으로 보고, 기자 조선을 요동과 요서 지 방으로 비정하였다. 17-18세기의 남인 학자들이 계승한 이 설은 신채호 정인보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주장이고 윤내현이 가세하였다. 고조선은 북경 근처 난하( 灤 河 ) 유역과 갈석산( 碣 石 山 ) 지역을 중국과의 경계로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다음은 이동설로서 고조선 초기 중심지는 요동이었으나 후기에 대동강 유역으로 옮겨왔다 는 절충설이다. 종래에 부정하던 기자 조선을 동이족의 이동이라는 측면에서 재해 석한 것이다. 이러한 여러 설이 주장되고 있으나 남한 학계의 정리된 견해는 다음과 같다. 고 조선은 초기에는 요하 동쪽 해평 개성현에 중심을 두었으나, 후에 와서 왕검성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면서 발전하였다고 보고 있다. 기원전 3세기경에 는 부왕 준왕과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하였다고 본다. 왕의 밑에 상 대부 장군 등의 관직도 두었다. 또 요하를 경계선으로 하여 중국의 연나라와 서 로 대립할 만큼 강성하였다고 본다. 북한 학계는 단군릉 조성을 계기로 그동안 요 동 중심설을 포기하고 대동강 중심설로 견해를 바꾸고 있다. 당시 이 일대에는 비파형동검( 琵 琶 形 銅 劍 )과 관련된 문명을 공유하고 있던 여러 집단이 지역적으로 분산되어 있다가 성장하면서 큰 세력으로 통합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단군 신화는 고조선을 세운 중심 집단의 시조설화( 始 祖 說 話 ) 형식으로 만들 어졌다가, 뒤에 공통의 문화를 가진 고조선 국가 전체의 건국 설화로 확대된 것으 로 여겨진다.
18 이용복 그림 1. 요령식 동검의 모습. 이 요령식동검은 청동기 유물 중에서 가장 많은 수가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우 리나라에 발견된 것만 54점이나 된다. 이 동검은 검심( 劍 身 )과 검파( 劍 把 )를 조합하 도록 주조한 것이다(이건무 1992). 그림 1은 우리나라 중서부와 남부지방에서 발굴 된 동검들의 모습이다(국립중앙박물관 1992). 모든 동검들의 공통적 특징은 아래쪽 으로 갈수록 폭이 넓고 둥글게 되어 있어 마치 비파( 琵 琶 )의 모습을 하고 있다. 중 앙 부분보다 약간 위에 위치한 곳 좌우에 뾰죽하게 튀어나온 돌기( 突 起 )를 가진 특 이한 형태이다. 돌기에서 위로 갈수록 동검의 폭이 서서히 좁아지고 끝은 뾰죽한 형태를 보인다. 이 동검의 중앙에는 길게 둥근 형태로 튀어나온 경부( 莖 部 )가 상하 방향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경부에 가는 홈이 길게 파져있는데 이 형태는 요령지 방의 동검에는 나타나지 않고 우리나라의 중서부와 남부지역에서 발굴된 것만 나타 난다.
고조선의 천문과 북두칠성 19 그림 2. 충청남도 아산 남성리( 南 城 里 )에서 출토된 조문경( 粗 文 鏡 ). 고조선 시대의 유물 중에서 많이 출토된 청동기 유물은 청동거울이다. 이 청동 거울은 표면에는 다양한 무늬를 새겨 넣고 있다. 대부분 가는 선을 그어서 만든 기 하학적 무늬가 대부분이다. 선을 그린 방법 중에서 굵은 선으로 거칠게 그린 거울 은 조문경( 粗 文 鏡 )이라 하고, 가늘고 정교하고 세밀한 선으로 그린 것을 정문경( 精 文 鏡 )이라 하여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그림 2는 충청남도 아산 남성리( 南 城 里 ) 에서 발굴한 조문경의 모습이다(국립중앙박물관 1992). 충청남도 논산 훈련소 부근 야산에서 청동거울과 팔주령( 八 珠 鈴 ), 쌍두령( 雙 頭 鈴 ), 간두령( 竿 頭 鈴 ), 청동거울 등이 한꺼번에 발굴되었다(국립중앙박물관 1992). 이 중에서 그림 3에 있는 구리거울은 대단히 정교한 문양을 새겨 넣어 놓았다. 수없이 많은 가는 선들을 연결하여 삼각형이나 동심원 무늬를 새겨 넣었다. 특이하게도 동 심원은 네 방향에 2개씩 짝을 지어 총 8개를 배치했는데 대단히 정교하게 동심원 을 그린 무늬는 현대 기술로도 재현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이 구리거울은 우리나 라에서 발굴된 구리거울 중에서 정문경( 精 文 鏡 )으로 가장 뛰어난 유물 중 하나이다.
20 이용복 그림 3. 논산에서 출토된 국보 제141호의 청동거울. 이와 유사한 구리거울이 충청남도 당진( 唐 津 ) 소소리( 素 素 里 )에서 출토된 정문경 파편은 논산에서 출토되어 국보로 지정된 정문경과 대단히 유사한 형태와 무늬를 보이고 있다. 그림 4에서 보듯이 기하학적 문양의 배치와 세밀하고 가는 선으로 그린 동심원의 모습은 너무도 정교하다. 이 그림은 파편에 나타난 문양을 모사해 놓은 것이다. 그림 4. 당진 소소리에서 출토된 정문경의 파편.
고조선의 천문과 북두칠성 21 다음으로 많이 출토되는 청동기 유물은 청동기로 제작한 다양한 형태의 방울이 다. 그림 5는 충청남도 논산( 論 山 )에서 일괄 유물로 출토된 청동기 유물이다. 출토 된 유물의 명칭은 모서리에 방울이 8개 부착된 팔주령( 八 珠 鈴 ), 손에 쥐고 흔들 수 있는 자루에 두 개의 방울이 부착된 쌍두령( 雙 頭 鈴 ), 손목에 낄 수 있도록 고안된 조합식쌍두령( 組 合 式 雙 頭 鈴 ), 나무 막대 끝에 꽂아서 흔들어 소리를 낼 수 있는 간 두령( 竿 頭 鈴 ) 등이다. 그림 5. 논산에서 일괄 유물로 출토된 팔주령, 쌍두령, 조합식 쌍두령 및 간두령.
22 이용복 위의 팔주령( 八 珠 鈴 )은 모서리를 길게 연장한 팔각으로 된 청동판 끝에 각각 1 개씩 방울을 단 의기( 儀 器 )의 일종이다. 이 표면에는 움푹한 부분에 짧은 선을 조밀 하게 음각하여 십자( 十 字 ) 문양을 새겨 놓거나, 또는 방사선 형태의 일광( 日 光 ) 무 늬를 가운데에 위치시키고 짧은 방사선 모양의 선을 음각( 陰 刻 )하였다. 뒷면에는 아 예 문양이 없거나 표면과 같은 모양이 새겨져 있고 중심에는 고리가 붙어 있다. 방 울은 약간 이글어진 구형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형태의 청동기 유물이 우리나라 전국에서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 물은 전시 또는 생활에 직접 활용한 것이라기보다는 대부분 특별한 제례 의식을 거 행할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청동기 유물의 공통적 특징은 표면에 섬세 한 문양을 새겼다는 점이다. IV. 청동기 유물에 나타난 천문학 우리 조상은 예부터 다양한 형태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별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삼국시대 이전 부여( 夫 餘 )는 영고( 迎 鼓 )라 하 여 12월 추수를 끝낸 뒤 섣달에 하늘에 제사 지내고 추수를 감사하면서 노래와 춤 을 즐기던 제의( 祭 儀 )를 거행했다. 동예( 東 濊 )는 무천( 舞 天 )이라 하여 10월에 농사 를 마치고 10월에 택일하여 높은 산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즐기던 행사를 했다. 이 러한 행사는 일종의 추수감사제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고구려의 경우 중국의 문헌인 삼국지 의 위지편 동이전( 東 夷 傳 )에 따르면 고 구려 모든 마을의 남녀노소가 밤에 모여 서로 노래와 놀이를 즐기며 10월에 제사 를 지내면서 대회를 여는데 그 이름을 동맹이라 한다 고 하였다. 후한서 의 동이 전에도 10월에 제사를 지내는데 밤에 남녀가 모여 춤과 노래를 즐기고 귀신, 영 성, 사직에 제사하기를 즐겼는데, 그 이름을 동맹이라 하더라. 라는 기록이 보인다. 신라시대에도 영성제( 靈 星 祭 )라 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영성제 이외도 일월제 와 오성제를 지내면서 하늘에 나라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다. 이렇게 제천의식은 주로 별과 관련이 깊다. 이러한 제천의식은 삼국시대 전후에 행해졌다고 보기보다는 이미 그 전 상고시대부터 행해온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발견 된 청동기 유물을 사용하던 고조선 시대에도 당연히 이와 유사한 제천의식이 있었
고조선의 천문과 북두칠성 23 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제천의식 중 중요한 대상은 북두칠성이었다고 보인다. 북두칠성은 천구 의 북극을 일주운동 하면서 밤 동안 시각을 알려준다. 이뿐만 아니라 초저녁이나 새벽에 북두칠성이 놓인 모습을 보고 계절을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역법에 적용한 내용이 전한( 前 漢 ) 시대 회남왕( 淮 南 王 )이었던 유안( 劉 安 )이 저술한 회남자 ( 淮 南 子 ) 의 시칙훈( 時 則 訓 )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孟 春 之 月 招 搖 指 寅 昏 參 中 旦 尾 中 仲 春 之 月 招 搖 指 卯 昏 弧 中 旦 建 星 中 季 春 之 月 招 搖 指 辰 昏 七 星 旦 牽 牛 中 孟 夏 之 月 招 搖 指 巳 昏 翼 中 旦 婺 女 中 仲 夏 之 月 招 搖 指 午 昏 亢 中 旦 危 中 季 夏 之 月 招 搖 指 未 昏 心 中 旦 奎 中... 위의 내용은 계절에 따라 해가 진 후 초저녁인 혼각( 昏 刻 )에 북두칠성의 자루 끝에 위치한 초요성( 招 搖 星 )이 향한 방향에 따라 달의 명칭을 정한 것이다. 예를 들 어 혼각에 초요성이 인방( 寅 方 )을 향하는 달이 인월( 寅 月 )이라 하여 정월로 정한 것 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자월( 子 月 )부터 해월( 亥 月 )까지 1년 12달의 계절과 관련된 시기를 북두칠성의 손잡이 끝에 위치한 초요성이 향한 방위를 이용하여 정했다. 따 라서 선사시대 이전부터 북두칠성은 달력의 역할 뿐만 아니라 시계의 역할을 동시 에 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북두칠성은 단순히 생활에 필요한 별일뿐만 아니라 신앙의 대상으로까지 여기게 되었다. 能 田 忠 亮 (1989)은 중국 고대 서적인 예기( 禮 記 ) 의 월령( 月 令 ) 편에 나오는 내용을 분석하여 예기 의 기록이 언제 완성되었 는지에 대한 연구도 수행했다.
24 이용복 그림 5. 태을구궁점반의 평면과 측면의 모습. 이는 일년의 길이를 8등분한 것으로 24기 중에서 팔정( 八 正 )에 해당한다. 팔정 이란 이분이지( 二 分 二 至 )인 춘분, 추분, 하지 및 동지이고, 사립( 四 立 )인 입춘, 입하, 입추 및 입동을 뜻한다. 이렇게 1년의 기간을 8등분 하는 방법은 이미 회남자( 淮 南 子 ) 에 나타난다. 1997년 7월 중국 안휘성( 安 徽 省 ) 부양현( 阜 陽 縣 )에서 한나라시 대 조성된 묘 속에서 발견된 태을구궁점반( 太 乙 九 宮 占 盤 )은 이를 잘 말해준다(그림 6). 이외에도 이와 관련하여 중국에는 다양한 유물과 서적이 존재한다. 특히 평양 낙랑 고분에서 발견된 육임식반( 六 壬 式 盤 )은 그림 6에서 보듯이 중심 원 안에 북두칠성을 그리고 가장자리에는 28수를 그려 넣고, 그 안쪽에 12 방위와 8방위를 표시하고 있다. 8방위에는 8괘를 표시하여 이분이지와 사립인 팔정( 八 正 ) 을 표시하고 있다. 이것은 확실하게 북두칠성이 가리키는 방위와 계절을 밝히고 있 다.
고조선의 천문과 북두칠성 25 그림 6. 낙랑시대 왕 간( 盰 )의 묘에서 발굴한 육임식반( 馮 時 2005). 고조선 시대의 청동기 유물의 형태와 무늬를 분석해 보면 천문과 관련된 내용이 확연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청동기 유물이 제천의식에 사용되었다면 당연히 천상의 운행 현상을 유물 제작할 때 반영이 되었으리라 믿어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천문 현상과 관련된 몇 가지 특징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7. 청동거울과 팔방위( 八 方 位 )에 따른 북두칠성의 위치 변화. 청동검의 경우는 특별한 문양이 없지만, 청동거울의 경우 선으로 연결해서 만든 무늬는 별이나 태양을 상징하고 있다. 앞의 그림 2에 나타난 무늬를 보면 중심에 원이 그려져 있고 그 원에서 방사선 형태의 삼각형 무늬를 배열하고 있다. 이것으
26 이용복 로 보아 중심에 태양이 위치하고 태양의 빛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모양을 하고 있 다. 이는 강렬한 빛과 에너지를 방출하는 있는 태양을 상징한다고 보인다. 그림 3 과 그림 4의 청동거울을 보면 중심에 태양인 듯한 원형의 천체가 있고 그 주위 사 방위에 2개씩 동심원으로 8개의 원을 그려 놓았다. 이는 8방위를 뜻하기도 하지만 태양이 황도( 黃 道 ) 위에 있는 별자리 사이를 운행할 때 지나는 8개 지점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는 별의 모습을 강조해서 그려 넣었을 수도 있다. 그림 7의 왼쪽의 유물은 대구 지산동에서 출토된 유물들(국립중앙박물관 1992) 중 구리거울과 유사한 형태를 가진 동환( 銅 環 )과 북두칠성을 배열해서 그린 것이다. 이는 혼각에 북두칠성의 배치 모양이 계절과 관계될 수 있음을 설명한 것이다. 특 별히 이 동환의 가장자리에는 용도와 의미를 알 수 없는 상징적 기호도 보인다. 그 림 7의 오른편에 청동 거울은 북한 지역에서 출토된 정문경( 精 文 鏡 )의 모습을 묘사 한 그림이다. 이 거울의 중심에는 태양으로 보이는 중심원이 있고 주위에 강한 태 양 광선이 방사선으로 뻗어나가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청동거울은 단순히 사용자의 모습을 비추어 보던 거울의 기능이 아니라 제천의 식을 거행하기 위한 의기( 儀 器 )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청동거울의 이 면에 새긴 무늬는 주로 하늘의 중심적인 천체인 태양을 표시하고, 천체 운행 원리 를 포함하고 담고 있다. 태양이 황도를 따라 운행하는 경로와 태양이 계절에 따라 운행하는 위치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림 8. 충청남도 논산( 論 山 )과 덕산( 德 山 )에서 발굴된 팔주령( 八 珠 鈴 ).
고조선의 천문과 북두칠성 27 다음 청동기 유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8개의 방울이 달려있는 팔주 령( 八 珠 鈴 )이다. 위의 그림 8에서 보듯이 팔주령의 모습은 마치 원주 위를 운행하는 태양이나 또는 8개의 별들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팔주령의 중심부에는 태양으로 보 이는 원형의 원이 그려져 있고 방사선 모양의 선이 그려져 있다. 또는 태양 모양 대신 십자( 十 字 ) 문양이 그려져 있다. 팔주령의 중심에 십자( 十 字 ) 문양은 지상 또 는 하늘의 방위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림 9. 팔주령 주위에 북두칠성을 배치한 모습. 팔주령은 제천의식 때 사용하던 청동방울이다. 이 방울에는 중심에서 방사선 모 양으로 8방위를 따라 뻗어나가는 모양으로 표현했다. 그림 9에서 왼쪽의 팔주령은 경상북도 상주에서 발굴된 것으로 중심에 천구북극 또는 태양으로 보이는 작은 원 을 중심으로 방사선으로 선을 연결해 놓고 그 위를 다시 작은 원으로 둘러싸고 있 다. 그 두 번째 원에서는 팔주령의 방울이 있는 방향으로 방사선 지선이 8개가 뻗 어나가고 있다. 이는 마치 하늘의 특정 방위를 지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림 9의 오른쪽 팔주령은 전라남도 화순 대곡리에서 발굴된 것이다. 이것은 중 심부분과 방울 위에 대단히 특이한 문양을 새겨 놓았다. 중심은 한 점에서 방사선 형태로 뻗어나가는 모습은 뚜렷하게 특정 방위를 향하고 있다. 마치 나선형으로 회
28 이용복 전하고 있는 모습이다. 특히 8개의 방울에는 서로 같은 방향으로 말려들어가는 아 령 을 서로 마주 붙여 놓은 모습이다. 따라서 8개의 방울 각각에 4개의 와상 문양 을 정교하게 새겨 놓았다. 이는 천국북극을 중심으로 하여 하늘의 특정한 8방위를 명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는 천구북극을 중심으로 하여 천구의 8방위에 있는 특 정한 별을 지칭하는 것같이 보이기도 한다. 위의 그림 9에서 보면 외형적인 형태뿐만 아니라 방울과 표면에 새겨진 문양은 천체 운행을 알려주는 방위 또는 천체 모습을 띠고 있다. 따라서 이 팔주령의 팔각 형을 띠고 있는 외형적 모습은 천구북극을 중심으로 8방위와 우주의 모습을 상징화 한 모습으로 보인다. 또한 표면에 새겨 놓은 다양한 문양은 천체들의 운행 현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상징화된 우주의 운행 체계는 천구북극을 중심으로 운행하는 북두칠성을 연상하게 된다. 즉, 일몰 후 혼각에 보이는 북두칠성의 위치를 계절에 따라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혼각에 보이는 북두칠성의 놓인 위치를 이용하여 계절의 흐름 을 알고 또한 하루 시간의 경과를 알려주는 상징물로 보인다. 즉, 이 유물에서 계절 과 시간이 변하는 우주의 운행 원리를 표시한 것이다. 고대 중국의 회남자 시칙훈에 기록된 것 같이 계절에 따라 혼각에 북두칠성 의 자루 부분이 향하는 방위가 계절이고, 하루 동안 이 자루가 향하는 방위가 변하 는 것이 시간의 흐름인 것이다. 역법을 바탕으로 보면 계절에 따라 8개의 방위를 향하는 시기는 팔정( 八 正 )을 의미하고, 하룻동안 8방위를 시간에 따라 움직이는 것 은 시간이 3시간씩 경과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V. 결론 이미 앞서 알아본 바와 같이 고조선 시대의 유물로 알려진 다양한 청동기 유물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특징적인 것이 비파형동검, 청동거울, 팔주령 등이다. 이것들 의 용도는 당시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했던 것이 아니고 종교적 행사를 할 때 사용되던 의기로 여겨진다. 당시 종교적 행사는 하늘이나 별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 의식( 祭 天 儀 式 )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삼국유사 에 단군 신화와 관련된 내용 중 에서 환웅이 하늘에서 가지고 내려왔다는 삼부인( 三 符 印 )이 비파형동검, 구리거울,
고조선의 천문과 북두칠성 29 및 팔주령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하늘과 통하는 상징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권위의 상징물이기도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청동기 유물은 고조선 시대 전 지역에서 제천의식을 거행할 때 꼭 필요한 필수적인 의기라고 볼 수 있다. 제정일치 시대였던 당시의 최고 지도자 는 이러한 유물을 가지고 의식에 사용했다. 이러한 의기에는 당연히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우주관과 천체 운행에 대한 사상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고조선 당 시의 가장 중요한 산업은 농업이었다. 당시의 우주관의 핵심은 농사활동과 밀접한 계절변화와 하루의 시간을 어떻게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알 수 있는 가장 손 쉬운 방법은 북두칠성 관측이다. 많은 문화권에서 북두칠성을 대단히 중요한 별자리일 뿐만 아니라 신앙의 대상 으로 여겨왔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북두칠성에 대한 신앙이 중요하게 나타난 다. 이러한 신앙의 하나로 고조선 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고인돌 중에서 덮 개돌에 북두칠성을 새겨 놓거나 또는 바위를 지면에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열해 놓 고 칠성방위라 하여 제천의식의 장소로도 사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전통이 고구려 시대 까지도 전해져 고구려 고분 벽화 중 별자리가 그려진 것 중 가장 많이 등장하 는 별자리가 북두칠성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앞서 알아본 바와 같이 청동기 유물 3가지 중에서 동검은 하늘에 인간의 뜻을 알리고 받아들이는 역할을 하는 상징물이고, 청동거울은 하늘의 뜻을 보고 읽어내 는 의기였고, 팔주령과 같은 방울은 인간의 염원을 하늘에 외치는 역할을 했을 것 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청동기 유물에는 하늘의 운행과 관련된 우주관을 담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 이러한 우주관의 핵심은 북두칠성의 운행에 따른 계절과 시간의 흐름이다. 그러 므로 고조선시대 청동기 유물 중에서 동검, 청동거울, 팔주령 등에 북두칠성과 관련 된 우주관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유물들은 모두 제천의식에 사용한 의기라는 점이다. 제천의식은 당연히 천 체나 별이 대상이고, 그 천체들의 운행 원리에 대한 신비감이다. 둘째, 유물들의 외형적인 모습이 당시의 우주관을 반영하고 있다. 청동거울의 원 형인 점은 하늘의 모습을 그대로 본뜬 모습이다. 또한 팔주령의 8방위는 계절의 구
30 이용복 분, 시간의 구분, 하늘의 영역 등을 나눈 것이다. 특히 계절에 따라 북두칠성의 자 루의 방향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셋째, 유물에 나타난 다양한 문양은 태양이나 별이 강한 빛을 방사선 형태로 방 출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청동 유물의 표면에 새긴 다양한 문양은 대부분 천체의 모습을 표현하고, 천체의 운행 원리를 보여주고 있다.
고조선의 천문과 북두칠성 31 참고문헌 국립중앙박물관 1992, 한국의 청동기 문화, 범우사 김영호 1984, 정다산의 역사사상, 한국의 역사사상, 한국사상전집 5, 삼성출판사 김정배 1991, 북한의 우리 고대사 인식, 대륙연구소출판사 能 田 忠 亮 1989, 東 洋 天 文 學 史 論 叢, 月 令 の 觀 測 年 代 算 定, 恒 星 史 박광용 1980, 기자조선에 대한 인식의 변천, 한국사론, 6, 1980 이건무 1992, 한국의 요령식동검 문화, 한국의 청동기 문화, 범우사 이형구 1999, 고조선( 古 朝 鮮 )에 대한 제인식( 諸 認 識 )- 단군과 고조선, 살림터 馮 時 2005, 中 國 古 代 的 天 文 與 人 文, 中 國 社 會 科 學 出 版 社
32 김도현 太 白 山 天 祭 의 歷 史 와 祭 儀 樣 相 김 도 현 태백산 천제위원회 / 장성여고 / 강원대 강사 Ⅰ. 太 白 山 天 祭 의 역사 1. 天 祭 의 의미와 역사 국가 차원이나 마을신앙의 대상으로 믿어지는 天 神 에 대한 의례는 고대사회에 서 주재 집단을 기준으로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부여의 迎 鼓, 고구려의 東 盟, 백제의 祭 天 地, 신라의 祭 天 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주재자가 국왕으로 대표되는 최고 지배세력에 의해 행해짐으로서 왕의 통치권을 강화하고, 공동체 성원들 간의 통합을 강화하려고 행한 유형이 있다. 둘째 는 濊 의 舞 天 에서 보이는 읍락 단위의 공동체 의례로 지속되어 읍락민들의 일체감 조성이라는 긍정적인 역할과 다른 읍락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의례로 작용한 유형이 있다. 1) 셋째는 馬 韓 에서 天 君 이라 불리운 별도의 사제자가 주재하는 天 神 祭 가 행해 진 유형이 있다. 이후 제천 의례는 고대 국가의 발전 과정에서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왕권 강화 에 대한 이념적 표출로서의 제천의례보다는 건국시조와의 연관성을 통해 정당한 왕 권 계승자라는 의식의 확립과 왕권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하는 유교ㆍ불교와 같은 외 래사상의 수용이 더해져 제천의례는 쇠퇴하였다. 2)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하늘에 대한 제사가 다시 중시되었다. 도교 의례의 일환 1) 박호원, 한국 공동체 신앙의 역사적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1997, 33쪽. 2) 최광식, 고대 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1994. 박호원, 한국 공동체 신앙의 역사적 연 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1997, 47쪽.
太 白 山 天 祭 의 歷 史 와 祭 儀 樣 相 33 으로 행해진 醮 祭 는 왕이 직접 주관한 親 醮 ㆍ 大 醮 가 있었고, 祭 天 壇 에서 天 地 제사 를 지냈다. 당시 고려에서는 고려 왕실의 권위를 확보하고, 왕실의 무병장수와 祈 讓, 圜 丘 祭 를 통해 祈 穀 과 祈 雨 를 기원하며, 天 祥 祭 를 통해 하늘에서 오는 나쁜 것 을 막아 달라는 염원으로 하늘에 대한 제사를 중시하였다. 3) 조선시대에는 祈 穀 과 祈 雨 를 위해 圜 丘 祭 를 행하였으나, 세종 31년에 폐지되었 다. 이후 세조대에 부활하였으나, 세조 10년까지 圜 丘 祭 를 행하였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이와 함께 국가 祀 典 에 등재된 風 雲 雷 雨 神 도 천신의 범주로 인식할 수 있고, 대한제국시대에 圜 丘 祭 를 지냄으로서 조선시대에도 천신 신앙의 전통은 계속 이어 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굿거리 중 천왕굿ㆍ제석거리ㆍ세존굿 등에서도 천신 신앙의 전통을 확인할 수 있으며, 가정신앙과 관련하여 세존주머니 를 모시는 경기도 화성 사례, 제석 을 안방에 모시는 충청도 사례, 남쪽지방의 제석단지ㆍ세존단지ㆍ천왕독 등 은 천신신앙 확산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4) 2. 太 白 山 天 祭 의 역사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태백산에서 제사를 지낸 기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자료 1] 三 國 史 記 新 羅 逸 聖 尼 師 今 5 年 (138) 겨울 10월에 북쪽으로 순행( 巡 行 )하여 몸소 太 白 山 에 제사지냈다. [자료 2] 三 國 史 記 新 羅 基 臨 尼 師 今 3 年 (300) 3월에 牛 頭 州 에 이르러 태백산에 望 祭 를 지냈다.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와서 항복하였다. 3) 김철웅, 고려 국가제사의 체제와 그 특징, 한국사연구 118집, 한국사연구회, 2002, 136~160쪽. 4) 조흥윤, 天 神 에 관하여, 동방학지, 77 78 79합집, 연세대 국학연구원, 1993, 13~39쪽.
34 김도현 [자료 3] 三 國 史 記 祭 祀 志 中 祀 五 岳 은, 동쪽은 吐 含 山 大 城 郡, 남쪽은 地 理 山 菁 州, 서쪽은 鷄 龍 山 熊 川 州, 북쪽 은 太 伯 山 奈 已 郡, 중앙은 父 岳 또는 公 山 이라고도 하였다. 押 督 郡 이었다. [자료 4] 高 麗 史 地 理 誌 東 界 三 陟 縣 본래 悉 直 郡 인데 신라 婆 娑 王 때에 항복하여 왔으며 智 證 王 6년에 州 로 삼고 軍 主 를 두었으며 景 德 王 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郡 으로 만들었다. 成 宗 14년에 陟 州 團 練 使 로 고쳤고 顯 宗 9년에 내려서 縣 令 으로 하였으며 辛 禑 3년에 知 郡 事 로 올렸다. 別 號 는 眞 珠 이다. 太 白 山 신라 때에 五 岳 에 비교하여 北 岳 으로 삼았다. [자료 5] 高 麗 史 列 傳 金 方 慶 5) 忠 烈 王 9년에 또 글을 올려 물러가기를 비니 어느 날 先 山 에 省 墓 하기를 빌 거늘 왕이 아들 金 恂 을 太 白 山 祭 告 使 를 삼아 보내어 이를 따라가게 하니 고향에 이 르러 친구를 위하여 수일 동안 머물고 아들에게 말하기를, [자료 6] 高 麗 史 列 傳 李 淑 李 淑 의 어릴 때 이름은 福 壽 요 平 章 郡 사람이다. 어머니는 太 白 山 의 巫 女 이다. 이숙 은 忠 烈 王 의 寵 愛 를 받았으므로 壁 上 三 韓 正 匡 平 章 君 에 봉해졌고 그 후 뽑혀 元 나 라에 가서 太 監 이 되었다. 왕이 원 나라 조정에 주청할 때는 이숙의 공로가 있었으 므로 왕의 대우가 매우 두터웠다. [자료 7] 世 宗 實 錄 世 宗 8 年 4 月 12 日 강원도와 함길도의 神 稅 布 는, 처음에 무당들이 백성의 이익을 빼앗기 위하여 함 부로 誑 誕 한 說 을 가지고 民 俗 을 유혹시켜, 太 白 山 의 神 에게 제사하고, 혹은 한 자 나 되는 베를 사용하여 神 의 폐백으로 하여 무당이 취하여 썼는데, 所 在 한 수령들 5) 다음 자료를 보았을 때 김방경이 다녀간 곳은 태백산임을 알 수 있다.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제24 권 慶 尙 道 安 東 大 都 護 府 名 宦 條. ' 金 方 慶 孝 印 의 아들이다. 예전에 방경의 어머니가 임신하였을 때에 ', ' 金 恂 方 慶 의 아들이다. 忠 烈 王 朝 에 급제하였다.'
太 白 山 天 祭 의 歷 史 와 祭 儀 樣 相 35 은 무당들이 이익을 독차지하는 것을 미워하여, 드디어 그 베를 취하여 관용으로 쓰게 되니, 監 司 는 이로 인하여 일정한 공물로 인정하고 수량을 정하여 징수하게 되고, 국가에서도 이에 따라 그 베를 징수하여 歲 貢 으로 정하되, 모두 베를 쓰도록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그 뒤로는 감사와 수령이 戶 數 를 계산하여 징수하기를 태연 히 꺼리지 않았으며, 그곳의 백성은 제사지낼 때를 당하면, 또 다른 베까지 준비하 여 무당에게 주게 되므로, 폐단이 진실로 적지 않으니, 이것은 다른 도에 없는 폐단 입니다. 대저 서민이 산천에 함부로 제사 지내면서 베를 폐백으로 사용하는 것도 진실로 禮 에 어긋나는 일인데, 국가에서 또한 그 베를 징수하여 국가의 용도에 충 당하게 되니, 폐해가 민생에게 미칠 뿐만 아니라, 선왕께서 일정한 수량의 供 만 받 던 일에도 어긋납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그 베를 사용하여 신을 섬기는 습속을 엄격히 금지하고, 그 베를 징수하지 말게 하여, 부당하게 징수하여 백성을 시끄럽게 하는 폐단을 막을 것. [자료 8] 世 宗 實 錄 地 理 志 三 陟 都 護 府 太 伯 山 府 의 서남쪽에 있다. 신라에서 五 嶽 을 정할 때, 北 岳 으로 하였다. 사당이 있 는데, 이름을 太 伯 天 王 堂 이라 하였다. 여러 고을 사람들이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낸 다. [자료 9] 世 祖 實 錄 世 祖 2 年 3 月 28 日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의 춘추 대사 오경 문묘 종사 과거 기인 등에 관한 상소 本 朝 의 嶽 鎭 海 瀆, 名 山 大 川 의 제사는 모두 삼국과 전조의 구제를 의방해서 한 것이므로 의논할 만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龍 興 江 은 우리 太 祖 께서 興 運 하신 땅이 고, 妙 香 山 에 이르러서는 檀 君 이 일어난 곳이며, 九 月 山 에는 檀 君 祠 가 있고, 太 白 山 은 神 祠 가 있는 곳이며, 金 剛 山 은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고, 長 白 山 은 先 春 嶺 의 남쪽 甲 山 의 북쪽에 있어 실로 나라의 北 岳 이 됩니다. 빌건대 禮 官 에게 명하여 考 定 을 상세히 더하게 하고, 三 角 山 을 中 岳 으로 삼고, 금강 산 을 東 岳 으로 삼고, 九 月 山 을 西 岳 으로 삼고, 智 異 山 을 南 岳 으로 삼고, 長 白 山 을 北 岳 으로 삼고, 白 岳 山 을 中 鎭 으로 삼고, 太 白 山 을 東 鎭 으로 삼고, 松 嶽 山 을 西 鎭
36 김도현 으로 삼고, [자료 10] 成 宗 實 錄 成 宗 21 年 1 月 9 日 권주가 말하기를, 신이 보건대 江 原 道 는 그 풍속이 귀신과 淫 祀 를 숭상하여 太 白 山 에 모든 백성들이 가족을 데리고 가서 재계하고 유숙하며 혹은 寡 婦 가 여러 날 유숙하는 것도 있으 니, 풍속을 손상하고 허물어뜨림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청컨대 엄금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같은 일은 본도 觀 察 使 가 마땅히 검찰할 것이니, 글을 내려 諭 示 하라. 하였다. [자료 11] 成 宗 實 錄 成 宗 24 年 5 月 21 日 이덕숭 이 또 아뢰기를, 濟 川 亭 을 수리하는 데에 드는 것을 위하여 국가에서 이미 魚 箭 을 주었는데, 또 歸 厚 署 에서 받아들이는 神 堂 의 退 米 를 주므로, 이 때문에 棺 槨 의 재목이 모자라니, 도 로 귀후서에 주소서. 하니, 임금이 좌우에게 顧 問 하였다. 領 事 尹 弼 商 이 대답하기를, 국가에서 歸 厚 署 를 설치하고 太 白 山 鷄 龍 山 등지의 신( 神 )에게 바쳤다가 물린 물 건을 주어 재목을 사는 데에 쓰게 한 것은 위로 大 夫 에서 아래로 士 庶 人 까지 다 棺 槨 을 얻어서 喪 用 에 이바지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이제 제천정을 重 修 하는 중들에 게 옮겨 주었으니, 귀후에서는 관곽의 재목을 사지 못하므로 引 鉅 軍 30명이 다 일 이 없게 되었습니다. [자료 12] 成 俔 6)의 虛 白 堂 集 神 堂 退 牛 說 태백산신이란 무엇인가? 그 산은 동쪽으로 뻗어 大 海 에 임하여 삼척부가 되었 고, 서쪽으로는 영춘, 남쪽으로는 죽계 등 두 고을을 이루었다. 산이 높아도 祀 典 에 6) 成 俔 (1439~1504) : 조선 전기의 학자.
太 白 山 天 祭 의 歷 史 와 祭 儀 樣 相 37 올리지 않는 것은 백성에게 施 功 이 없었기 때문이다. 三 道 의 사람들이 山 頂 에 堂 을 지어 神 像 을 모셔 놓고 제사를 올렸다. 歲 時 에는 왕래하는 사람이 줄을 이었고, 제 사를 마치게 되면 각각 神 座 前 에 소를 매어 놓고 돌아가는데, 소를 신좌 전에 매어 놓고 돌아갈 때는 조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만약 뒤를 돌아보면 신이 벌을 준 다고 한다. 3일 후에 府 에서 이것을 가져다가 사용하는데, 이를 退 牛 라 한다. 해마 다 사월 초파일이 되면, 그 신이 邑 의 城 隍 에 내려온다고 하여 邑 人 들은 깃대를 만들어 북과 피리를 성대히 갖추어 그 신을 맞아서 邑 吏 의 집에 둔다. 그리고 읍인 들은 이곳에 몰려들어 기도를 드린다. 이렇게 계속하여 虛 日 이 없을 정도로 기도하 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5월 5일이 되면 還 山 시킨다. 이 신에게 제사드릴 때는 조그마한 鮮 味 라도 먼저 祭 床 에 올려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禍 를 입는 다고 한다. [자료 13]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江 原 道 三 陟 都 護 府 祠 廟 太 白 山 祠 산꼭대기에 있는데, 세간에서 天 王 堂 이라 한다. 이 산 곁의 본도 및 경상 도 고을 사람이 봄가을에 제사하는데, 神 座 앞에 소를 매어 두고는 갑자기 뒤도 돌 아보지 않고 달아난다. 만약에 돌아볼 것 같으면 불공한 것을 신이 알고 죄준다 한 다. 사흘이 지난 다음 부에서 그 소를 거두어 이용하는데, 退 牛 라 한다. 신증 近 山 祠 부 남쪽 10리에 있다. 세간에서 大 天 王 祠 라 부르며, 고을 사람이 봄가을에 제사한다. [자료 14]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慶 尙 道 奉 化 縣 驛 院 道 深 驛 현 남쪽 5리에 있다. 전에는 현 북쪽 30리에 있었는데, 太 白 山 祭 를 폐지한 뒤로 이곳에 옮겼다. [자료 15] 丁 若 鏞 의 牧 民 心 書 慶 尙 道 觀 察 使 金 緻 7)가 太 白 神 社 를 헐어버렸다고 기록 7) 金 緻 : 1577년(선조 10년)에 태어나서 1625년(인조 3년)에 돌아간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士 精 이며, 호는 南 峰 深 谷 이다. 1597년(선조 30년)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說 書 를 거쳐 1608년 賜 暇 讀 書 했다. 광해군 때 사 司 僕 寺 正 이조참의 동부승지 대사간을 거쳐 각종
38 김도현 [자료 16] 許 穆 의 眉 叟 記 言 退 牛 條 원근에서 서로 다투어 가면서 태백신에게 災 厄 을 기도한다. 또 기도할 때에는 반드시 소를 神 祠 밑에 매어 놓고, 祝 言 을 마치면 소를 그냥 두고 가면서 뒤돌아보 지 않는다. 만약 돌아보면 신에게 바치는 소를 아낀다 하여 신이 歆 饗 하지 않는다 고 한다. 사당 아래 있는 소를 산 밑의 사람들이 잡아먹어도 아무런 재액이 없었다. 이것을 退 牛 라 했는데, 官 府 에서 이 말을 듣고 監 考 를 정하여 날마다 관청에 드리 게 했다. 그러다 冲 學 이란 山 僧 이 그 사당을 불지르자 夭 祠 가 없어졌고, 소를 바치 는 일도 없어졌으므로 감고도 폐지하게 되었다. [자료 17] 許 穆 의 眉 叟 記 言 무지한 백성들이 백두옹( 白 頭 翁 )을 가리켜 태백산 신령이라 하는데, 태백사( 太 白 祠 )의 기도로 길흉을 점친다고 한다. 전에 태수( 太 守 )로 죽은 몇 사람이 모두 백두 옹인데, 인심이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다. 혹은 꿈에 백두옹만 보이면 모두 죽었다 하나 이것에는 까닭이 없다. [자료 18] 許 穆 의 陟 州 誌 太 白 山 과 관련하여 정상부에 天 王 祠 가 있어 봄 가을로 제사 지내고, 소를 바친다 [자료 19] 崔 先 生 文 集 道 源 記 書 8) 수운 사후에도 설단제천이 거행되었는데, 李 弼 濟 는 관의 추격으로 쫒겨다니다가 태백산간에서 설단제천 후 인근 관아를 습격하였다. 벼슬을 하였으나, 광해군의 학정이 날로 심해짐을 깨닫고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 하였다. 인조반정이 있을 무렵 沈 器 遠 과 사전에 내통하여 벼슬길에 다시 올랐으나, 大 北 派 로 몰려 유배당하였다. 그 뒤 풀려나 동래부사를 거쳐 1625년(인조 3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어릴 적 부터 학문에 정진하고 經 書 에 통달했고, 특히, 점술을 연구하여 天 文 에 밝았다. 저서로는 深 谷 秘 訣 이 있다. 8) 한국학문헌연구소편, 동학사상자료집 1, 아세아문화사, 1979, 220쪽.(최종성, 숨은 天 祭 -조선 후기 산간제천 자료를 중심으로-, 연구발표자료집 (제 149차 연구발표회), 한국역사민속학회, 2008, 14쪽에서 재인용).
太 白 山 天 祭 의 歷 史 와 祭 儀 樣 相 39 [자료 20] 昭 和 十 六 年 刑 公 第 310 號 / 事 件 番 號 昭 和 16 年 刑 第 936 號 재판 기록 9) 1937년에는 태극교도[천지중앙 명류도]들이 조선의 독립을 기원하기 위해 태백산 정상에 구령탑을 쌓은 후, 소화 12년(1938) 6월 15일(음력 5월 7일) 윤상명, 최익 한, 유형호, 유형남, 이창순, 이금손, 주인섭, 고병월 외 18명의 교도들이 다음 날 독립 기원제를 지냈다. 이 때 구령탑 주위에 태극기ㆍ28수기ㆍ팔만기ㆍ오행기ㆍ일 월성신기ㆍ구령기 등을 세웠으며, 6월 16일[음력 5월 8일] 오전 0 ~ 3시 사이에 지냈다고 한다. 위에서 소개한 기록을 종합해 보면 신라 때부터 태백산에서 국가 제사를 지냈음 을 알 수 있다. 실제 운영 사례는 국가 주도와 지방 관아가 관여하여 주로 민간인 들이 致 祭 한 형태로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다. 첫째, 국가가 주도하는 예는 [자료 1~5]를 보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三 國 史 記 新 羅 逸 聖 尼 師 今 5 年 ㆍ 三 國 史 記 新 羅 基 臨 尼 師 今 3 年 ㆍ 三 國 史 記 祭 祀 志 中 祀 ㆍ 高 麗 史 地 理 誌 三 陟 縣 條 와 함께 高 麗 史 列 傳 金 方 慶 條 에는 忠 烈 王 9년에 또 글을 올려 물러가기를 비니 어느 날 先 山 에 省 墓 하기를 빌거늘 왕이 아들 金 恂 을 太 白 山 祭 告 使 를 삼아 보내어 이를 따라가게 하니 고향에 이르러 친구를 위하여 수일 동안 머물고 아들에게 말하기를, 이라는 기사가 보인다. 이 는 신라대에 이어 고려시대에도 국가 차원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태백산에 대한 제 사를 중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와 같이 태백산에 대한 국가 차원의 致 祭 는 世 祖 實 錄 世 祖 2 年 3 月 28 日 기사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가 九 月 山 에 있는 檀 君 祠 와 함께 太 白 山 에 神 祠 가 있다고 언급하면서, 長 白 山 을 北 岳 으로 삼고, 白 岳 山 을 中 鎭 으로 삼고, 太 白 山 을 東 鎭 으로 삼고, 松 嶽 山 을 西 鎭 으로 삼고 라고 한 것으 로 보아 조선시대에도 祀 典 에 태백산을 포함시키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국조오례의 를 비롯한 각종 기록에서 태백산이 국가 제사 체계 내에 편제되었다 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祀 典 에서 탈락한 것으로 보인다. 9) 일제 강점기 때의 태극교도 관련 재판 기록과 태백산 천제와 관련한 각종 자료를 태백문화원 사무 국장인 안호진님이 제공해 주셨다. 지면으로나마 감사를 드린다.
40 김도현 둘째는 지방 관아가 관여하여 주로 민간인들이 致 祭 한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기록은 高 麗 史 列 傳 李 淑 條 에 이숙( 李 淑 )의 어릴 때 이름은 福 壽 요 平 章 郡 사람이다. 어머니는 太 白 山 의 巫 女 이다. 라는 기록을 통하여 고려 후기에 이미 태백산에서 巫 俗 신앙이 매우 번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世 宗 實 錄 世 宗 8 年 4 月 12 日, 成 宗 實 錄 成 宗 24 年 5 月 21 日, 成 俔 의 虛 白 堂 集 神 堂 退 牛 說,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江 原 道 三 陟 都 護 府 祠 廟, 許 穆 의 眉 叟 記 言 退 牛 條, 許 穆 의 陟 州 誌 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지방 관청과 무녀들이 태백산에서 제사를 지낸 후 두고 오는 베ㆍ소 등을 관 청이나 무녀가 거두어 사용하였는데, 너무 과하여 민폐가 많이 발생하고 있음을 지 적하고 있다. 이와 함께 成 宗 實 錄 成 宗 21 年 1 月 9 日, 許 穆 의 眉 叟 記 言 에 서는 백성들이 태백산에서의 제사에 너무 몰두하고 있음을 지적하였으며, 이로 인 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 관에서 太 白 神 社 를 헐고, 太 白 山 祭 를 폐지하는 조치를 취하 였음은 成 宗 實 錄 成 宗 21 年 1 月 9 日,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慶 尙 道 奉 化 縣 驛 院 道 深 驛, 丁 若 鏞 의 牧 民 心 書 (경상도 관찰사 金 緻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한편, 태백산에 설치되었던 제당 명칭인 太 伯 天 王 堂 ㆍ 天 王 堂 ㆍ 天 王 祠 ㆍ구령탑 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태백산에서 天 神 을 모시고 天 祭 를 지냈음을 알 수 있 다. 이와 함께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江 原 道 三 陟 都 護 府 祠 廟, 許 穆 의 眉 叟 記 言 과 陟 州 誌 를 보면 太 白 山 祠 = 天 王 堂 이고, 太 白 祠 = 天 王 祠 임을 알 수 있 다. 이것은 기록에 나타나는 太 白 山 祠 나 太 白 祠 등으로 불리우는 제당에서도 天 神 을 모시고 天 祭 를 지냈음을 알 수 있으며, 태백산제가 곧 천제였다고 볼 수 있다. [자료 19]에서 동학의 활동 내용을 분석해 보면 수운 최제우 死 後 에도 設 壇 祭 天 이 거행되었는데, 李 弼 濟 는 관의 추격으로 쫓겨 다니다가 태백산간에서 제단을 만들어 天 祭 를 지낸 후 인근 관아를 습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함께 일제 강점기인 1937년에는 태극교도[천지중앙 명류도]들이 조선의 독립을 기원하기 위해 태백산 정상에 구령탑을 쌓은 후, 소화 12년(1938) 6월 15 일(음력 5월 7일) 윤상명, 최익한, 유형호, 유형남, 이창순, 이금손, 주인섭, 고병월 외 18명의 교도들이 다음 날 독립 기원제를 지냈다. 이 때 구령탑 주위에 태극기ㆍ 28수기ㆍ팔만기ㆍ오행기ㆍ일월성신기ㆍ구령기 등을 세웠으며, 6월 16일[음력 5월 8일] 오전 0 ~ 3시 사이에 지냈다고 한다.
太 白 山 天 祭 의 歷 史 와 祭 儀 樣 相 41 즉, [자료 19, 20]은 태백산에서의 천제가 태백산 주위에 있는 주민들뿐만 아니 라 하늘에 대한 제사를 중시하는 종교 집단에서도 태백산에서의 天 祭 를 중시하였음 을 알 수 있다. 다. 10) 광복 이후 태백산 천제단과 그 제의 주체 등의 변화상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 1. 1949년 자료에 의하면 태백산제는 10월 3일 子 時 를 기해서 태백산 정상에 있는 천왕당에서 거행되었다. 2. 한국전쟁 중에 헬기 착륙장 조성으로 천제단이 헐렸다. 3. 1967년 봉화군 물야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우성조 씨가 강원도ㆍ경상도인의 지원 을 받아 천제를 지냈다. 4. 1977년 경 우성조씨가 대종교로 입문하자 강원도와 경상도 사람들이 하늘에 대 한 제사를 둘러싸고 분열하여 강원도 사람들은 소도 당골에 단군성전을 짓고 별 도의 제사를 올렸다. 5. 1987년에 태백산천제위원회가 태백시에서 결성되어 태백문화원장이 위원장을 겸임하여 매년 개천절에 天 祭 를 지내왔다. 6. 2008년 태백산천제위원회를 천제 보존회 로 명칭을 바꾸어 태백문화원장이 보 존회장을 겸임하여 매년 개천절 午 時 (낮 11~01시)에 天 祭 를 지낸다. 10) 태백산 천제에 대한 기존의 조사 및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으며, 광복 이후의 운영 양상에 대하 여는 이들 연구 성과를 참고하였다. 장정룡, 태백산 천제 -민족 永 生 을 위한 聖 祭 -, 太 白 文 化 제 4집, 태백문화원, 1990. 장정룡, 민족 영생을 위한 성스런 제의 태백산 천제, 강원도 민 간신앙, 월간 태백 1월호, 강원일보사, 1991. 임동권, 太 白 山 天 祭 壇 의 歷 史 性 과 文 化 財 的 位 相, 太 白 文 化 제 7집, 태백문화원, 1993. 김선풍, 太 白 山 天 祭 와 檀 君 神 話 의 構 造, 太 白 文 化 제 7집, 태백문화원, 1993. 최승순, 崇 山 意 識 과 太 白 山 天 祭, 太 白 文 化 제 7집, 태 백문화원, 1993. 장정룡, 태백산 천제와 향토축제, 太 白 文 化 제 7집, 태백문화원, 1993. 장 정룡, 한밝음의 성스런 제전 -태백산 天 祭 -, 중등 우리교육 11월호, 월간 우리교육, 1996. 임동권ㆍ민제ㆍ김선풍, 태백산 민속지, 민속원, 1997. 琴 昌 憲 外, 太 白 市 의 民 俗 資 料, 太 白 市 의 歷 史 와 文 化 遺 蹟, 關 東 大 學 校 博 物 館, 1997, 201 202쪽. 太 白 市, 太 白 市 誌, 1998, 628 629쪽. 김강산, 태백산 천제( 天 祭 ), 江 原 民 俗 學 第 15 輯, 江 原 道 民 俗 學 會, 2001, 271 293쪽. 이필영, 태백산 천제단, 文 化 財 大 觀 (중요민속자료 1 :신앙 생활자료), 文 化 財 廳, 2005.
42 김도현 Ⅱ. 太 白 山 天 祭 壇 [ 天 王 壇 ]과 관련 유적 1. 개황 태백산 천제단[천왕단]은 태백산 정상에 있으며, 소재지는 강원도 태백시 소도 동 산 80 및 혈동 산87-2이다.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228호로 1991년 10월 23일 지정되었으며, 천왕단과 함께 지정된 자료는 천왕단 뒤쪽 북방으로 약 300m 지점 에 있는 장군단과 천왕단 남쪽 언덕 아래에 위치한 하단이다. 그림 1. 태백산 천왕단 전경. 그리고 정상에서 500m쯤 아래에 望 鏡 寺 라는 사찰이 있고, 여기에는 龍 井 이 있어 옛날부터 천제 모실 祭 需 준비에 사용하였다고 한다. 또한 망경사 부근에는 朝 鮮 國 太 白 山 端 宗 大 王 碑 라는 명문이 새겨진 端 宗 碑 閣 이 세워져 있는데, 그 계기는 1950 년대 중반에 한 무녀의 꿈에 단종이 태백산신으로 현몽하여 세웠다고 한다. 이는 18세기부터 단종이 死 後 태백산신으로 좌정하였다는 믿음이 태백산 주변ㆍ영월 지 역 주민들과 무당들 사이에 뿌리 내렸다는 사실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 이다. 11) 태백산 내의 현재 신앙 공간을 크게 정리해 보면 제당골에 있는 서낭당에서 시 작하여 장승거리, 반재, 당골을 거쳐, 망경사 입구에 있는 서낭당을 지나, 망경사와 용정, 단종비각, 천왕단, 장군단, 하단을 거쳐 문수봉에 이르는 넓은 영역이 신성 공 11) 김효경, 단종의 신격화 과정과 그 의미, 민속학연구 5, 국립민속박물관, 1998.
太 白 山 天 祭 의 歷 史 와 祭 儀 樣 相 43 간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천제를 위한 실제 종교 공간은 망경사 입구에 있는 서낭당 터부터라고 하며, 여기서부터는 근신하여야 한다. 그림 2. 태백산 망경사 옆 용정. 그리고 대종교 종단은 1987년 지역유지들과 제휴하여 당골에 단군성전을 건립 하면서 태백지역 주민들과 함께한 天 祭 에서 분리되어 자체 건립한 단군성전에서 의 식을 거행하고 있다. 2. 天 祭 壇 [ 天 王 壇 ] 태백산 정상에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3기의 제단 중 하나로, 장군단과 하단의 중간에 있는 해발 1,560m의 봉우리에 위치한 중심 제단이다. 천왕단은 그 규모 면에 있어 다른 단과 달리 월등히 크며, 다음 [표 1]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조선시대에 太 伯 天 王 堂 ㆍ 神 祠 ㆍ 太 白 山 祠 ㆍ 天 王 堂 ㆍ 太 白 神 社 ㆍ 太 白 祠 ㆍ 天 王 祠 ㆍ구령탑 등으로 일컫기도 하였다.
44 김도현 표 1. 역대 기록에 나타난 太 白 山 관련 제당, 제의, 제관 명칭. 기록 (시기) 제당/제의/제관 명칭 제사 일시 북쪽으로 순행( 巡 行 )하 三 國 史 記 新 羅 逸 聖 尼 師 今 여 몸소 太 白 山 에 제사지냈 5 年 (138) 다. 10월 三 國 史 記 新 羅 基 臨 尼 師 今 3월에 牛 頭 州 에 이르러 3 年 (300) 태백산에 望 祭 를 지냈다. 3월 三 國 史 記 祭 祀 志 中 祀 [ 中 祀 ] 북쪽은 太 伯 山 奈 已 郡, 高 麗 史 列 傳 金 方 慶 太 白 山 祭 告 使 1283년 世 宗 實 錄 地 理 志 三 陟 都 護 府 太 伯 天 王 堂 봄ㆍ가을 世 祖 實 錄 世 祖 2 年 3 月 28 日 神 祠 1456년 成 俔 의 虛 白 堂 集 神 堂 退 牛 說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江 原 道 三 陟 都 護 府 祠 廟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慶 尙 道 奉 化 縣 驛 院 丁 若 鏞 의 牧 民 心 書 태백산에 당이 있다. 太 白 山 祠 [ 天 王 堂 ] 太 白 山 祭 太 白 神 社 4월 8일 강림 / 5월 5일 태백산으로 돌아감. 봄ㆍ가을 1625년 (경상도 관찰사 金 緻 在 位 시기) 許 穆 의 眉 叟 記 言 太 白 祠 許 穆 (1595 1682) 許 穆 의 陟 州 誌 天 王 祠 許 穆 (1595 1682) 事 件 番 號 昭 和 16 年 刑 第 936 號 구령탑 1938년 太 伯 天 王 堂 ㆍ 天 王 堂 ㆍ 天 王 祠 ㆍ구령탑 이라는 명칭은 태백산의 神 格 을 모두 天 神 ㆍ 天 王 으로 보는 호칭이며, 구령탑은 天 의 9개 分 野 인 九 天 에서 유래한다. 神 祠 ㆍ 太 白 山 祠 ㆍ 太 白 神 社 ㆍ 太 白 祠 라고 불리우기도 하는데, 후대에 일부에서 부르는 마고 탑은 太 初 에 천지를 이룩한 거인 할머니가 쌓은 탑이라는 의미로서, 천지가 시작된 공간임을 암시한다. 12) 12) 이필영, 태백산 천제단, 文 化 財 大 觀 (중요민속자료 1 :신앙 생활자료), 文 化 財 廳, 2005, 126쪽.
太 白 山 天 祭 의 歷 史 와 祭 儀 樣 相 45 그림 3. 태백산 천왕단 내 제단 및 위패. 1953년 사진 자료에 의하면 제단의 돌이 흐트러져 방추형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13) 이후 정비하여 현재의 형태를 갖추었다. 현재 제단은 자연석 편마암으로 쌓았으며, 전체적인 규모와 형태는 둘레 27.5m, 높이 2.4m, 폭은 좌우 7.4m, 전 후 8.4m의 약간 타원형을 이룬 원형제단이다. 남쪽으로만 계단이 설치되었고 석단 상부에는 제단이 설치되었다. 제단의 앞면 축대에는 天 祭 壇 / 大 倧 敎 太 白 支 司 謹 製 라 새긴 글이 남아 있다. 天 祭 壇 [ 天 王 壇 ] 내부에는 장방형으로 축조한 제단이 있으 며, 제단 위에는 높이 76cm, 폭 40cm, 두께 30cm 정도의 한배검 이란 비가 있 다. 제관들이 제사를 지내는 공간은 원형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형태는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과 같은 형태로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다 라는 전통 의식을 반영 하여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태백산 천왕단과 장군단 일원에서 2000년 4월 9일 신인수씨에 의하여 쇠마 4점이 수습되어, 2000년 11월 30일 국가에 귀속된 후, 국립춘천박물관에 소 장되어 있다(유물번호:국립춘천박물관 152 155). 4점 모두 말의 등에 안장이 놓여 지고 유물번호 154번을 제외하고 꼬리 쪽에 말띠꾸미개가 간략하게 표현되었다. 14) 유물번호 154번은 등과 목이 수평을 유지하고, 나머지 3점은 고개를 약간 들고 13) 이준구 제공 사진, 1953년 천제단, 사진으로 보는 태백의 어제와 오늘 (김강산 편), 태백 문화원, 1994. 14) 이와 같은 형태의 쇠마는 태백시 도릉, 삼척시 하장면 장전리, 미로면 내미로리, 원덕읍 이천리, 정선군 남면 낙동리 등 인근의 많은 서낭당에서 발견할 수 있다.
46 김도현 있는 형태이다. 유물번호 152번은 높이 7.2cm, 길이 16.9cm이고, 153번은 높이 10.5cm, 길이 17cm이다. 154번은 높이 9.2cm, 길이 16.6cm이며, 155번은 높이 10.2 cm, 길이 14.9cm이다. 15) 3. 將 軍 壇 태백산 정상에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3기의 제단 중 하나로 중앙에 위치한 천왕 단에서 북쪽으로 약 300m 지점에 있는데, 지도상에서 해발 1,566m의 태백산 이라 표기되어 있는 봉우리가 장군단이 있는 지점이다. 유일사 방향에서 등산하면 3개의 제단 중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단이다. 제단의 높이는 약 2.9m이고, 둘레는 약 20m로 장방형이며 편마암으로 축조하였다. 남쪽으로만 계단을 설치하였고, 내 부의 중앙에 70cm 정도의 제단을 쌓았다. 제단 내에는 자연석을 세워 놓았다. 장군 단의 神 格 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16) 그림 4. 태백산 장군단 전경. 15) 홍성익, 태백시 문화유적 분포지도, 태백시ㆍ예맥문화재연구원, 2007. 16) 홍성익, 태백시 문화유적 분포지도, 태백시ㆍ예맥문화재연구원, 2007. 이필영, 태백산 천제 단, 文 化 財 大 觀 (중요민속자료 1 :신앙 생활자료), 文 化 財 廳, 2005, 127쪽.
太 白 山 天 祭 의 歷 史 와 祭 儀 樣 相 47 그림 5. 태백산 장군단 내 제단. 4. 下 壇 태백산 정상에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3기의 제단 중 하나로, 천왕단 남쪽 언덕 아래로 0.2km 지점에 있다. 夫 蘇 壇 또는 丘 乙 壇 으로도 불리운다. 별도로 지내는 제 는 없으며, 북쪽으로만 계단이 없고 나머지 세 방향에는 모두 계단이 설치되어 있 다. 제단 꼭대기의 북쪽면에 45cm 가량의 자연석을 세워 놓았다. 현재의 모습은 최 근에 정비한 것으로 단의 총 높이는 약 190cm 정도이고 폭은 약 510 410cm이 다. 17) 그림 6. 태백산 하단 전경. 17) 홍성익, 태백시 문화유적 분포지도, 태백시ㆍ예맥문화재연구원, 2007.
48 김도현 Ⅲ. 太 白 山 天 祭 의 祭 儀 樣 相 1. 광복 이전 일제 강점기인 1937년에는 태극교도[천지중앙 명류도]들이 조선의 독립을 기원 하기 위해 태백산 정상에 구령탑을 쌓은 후, 소화 12년(1938) 6월 15일(음력 5월 7일) 윤상명, 최익한, 유형호, 유형남, 이창순, 이금손, 주인섭, 고병월 외 18명의 교도들이 다음 날 독립 기원제를 지냈다. 이 때 구령탑 주위에 태극기ㆍ28 宿 旗 ㆍ팔 만기ㆍ오행기ㆍ일월성신기ㆍ구령기 등을 세웠으며, 6월 16일[음력 5월 8일] 오전 0 ~ 3시 사이에 지냈다고 한다. 18) 2. 광복 이후 가. 1949년 1949년에 촬영한 사진에 의하면, 시멘트 단과 한배검의 비석은 없었다. 그리고 제단은 구단탑( 九 段 塔 )이라 하여 아홉 段 으로 쌓아 올렸다. 그 주위에는 33 天 旗 와 28 宿 旗 를 꽂고, 단의 중앙에는 태극기와 九 星 旗 또는 七 星 旗 를 세웠고, 제물도 아 홉 종류였다. 19) 崔 翼 漢 氏 의 手 記 (1949년)에 의하면 당시 태백산제는 10월 3일 子 時 를 기해서 태백산 정상에 있는 천왕당에서 거행하였는데, 중앙에는 태극기를, 중간에는 七 星 旗 와 玄 武 旗 를 꽂고 주변에는 33 天 旗 와 28 宿 旗 를 배치하였다. 祭 器 는 봉화군 춘양의 鍮 器 店 에서 81개를 맞추어 1회만 사용했다. 모든 참제자는 저녁에 登 頂 하여 천제를 모시고 아침에야 하산했다. 제관은 모두 白 衣 도포를 입었다. 參 祭 할 사람은 1년 전부터 일체의 부정을 가 리고 心 身 을 깨끗하게 유지하도록 했다. 제물은 모두 날것으로 했는데, 아홉 종류의 제물을 아홉 벌 장만했다. 곧 81개의 제물을 올린 셈이다. 靑 玉, 靑 松 葉, 金, 銀, 珍 珠, 白 米 외에도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은 2종류가 더 있었다. 20) 18) 昭 和 十 六 年 刑 公 第 310 號 / 事 件 番 號 昭 和 16 年 刑 第 936 號 19) 임동권, 太 白 山 天 祭 壇 의 歷 史 性 과 文 化 財 的 位 相, 太 白 文 化 제 7집, 태백문화원, 1993, 40쪽. 20) 임동권, 太 白 山 天 祭 壇 의 歷 史 性 과 文 化 財 的 位 相, 太 白 文 化 제 7집, 태백문화원, 1993, 43쪽.
太 白 山 天 祭 의 歷 史 와 祭 儀 樣 相 49 이러한 제사는 강화도 塹 星 壇 에서도 베풀어졌는데, 참성단의 제사가 도교식 醮 祭 의 형식이었음을 고려할 때 위의 제사 형식도 초제의 일부로 볼 수 있으며, 33천 기와 28수기의 존재나 9종 9벌의 81가지의 제물 등은 유교식 제사와는 무관한 것 이다. 21) 나. 현존 양상 태백산 천제는 1987년 태백산 천제 위원회 가 결성되어 각종 준비와 의례를 주 관하여 지내다가, 2008년에는 그 명칭을 천제 보존회 로 변경하여 대한민국을 대 표하는 천제로 발전시키려 하고 있다. 2008년 天 祭 를 주재하는 인사는 제주(태백시장 박종기), 헌관(태백시의회의장 김 천수ㆍ태백문화원장 권영한), 번시관(정창교), 집례(안석호), 축관(김영복), 집사(이 창복)이다. 실무 준비는 태백문화원에서 주관하며, 매년 10월 3일 천제단에서 午 時 (오전 11~ 오후 1시)에 天 祭 를 지낸다. 준비하는 제수는 천주[가양곡왕주]ㆍ소머리 ㆍ오곡[쌀ㆍ보리ㆍ콩ㆍ조ㆍ기장]ㆍ고사리ㆍ미역ㆍ대구포ㆍ밤ㆍ대추ㆍ곶감ㆍ백설기 [1시루]ㆍ삼베ㆍ물이며, 이와 함께 한라산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 산에서 가져온 흙 을 각각의 주머니에 담아 올린다. 물은 태백산 정상 아래에 있는 龍 井 의 물을 이용 한다. 메는 준비하지 않으며, 소머리와 떡을 제외하고 다른 제수는 조리하지 않고 그대로 올린다. 천제단 내부에는 해와 달, 북두칠성을 그린 기를 세웠는데, 동쪽에 세운 해 깃발 안에는 三 足 烏 를, 서쪽에 세운 달 깃발 안에는 토끼 그림을 그렸다. 이와 같이 해와 달을 그린 것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圖 像 이다. 그리고 예 로부터 북두칠성이 각 절기의 기준 별자리여서 이를 그린 깃발을 제단 북쪽에 세운 것으로 볼 수 있다. 제단 외곽에는 28수기와 각종 염원을 쓴 깃발을 세웠다. 28수기는 天 文 類 抄 ㆍ 步 天 歌 ㆍ 星 鏡 ㆍ 天 象 列 次 分 野 地 圖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늘을 28개의 주요 별자리를 이용하여 동ㆍ서ㆍ남ㆍ북으로 구분한 후 이를 각각 청룡ㆍ백호ㆍ주작ㆍ현무라는 사신에 대비시켜 만든 별자리 깃발이다. 22) 구체적으로 21) 이필영, 태백산 천제단, 文 化 財 大 觀 (중요민속자료 1 :신앙 생활자료), 文 化 財 廳, 2005, 128쪽.
50 김도현 동쪽에 배치한 깃발은 角 星 旗, 亢 星 旗, 氐 星 旗, 房 星 旗, 心 星 旗, 尾 星 旗, 箕 星 旗 를 상징하는 별자리를 각각의 깃발에 그렸으며, 서쪽에 배치한 깃발에는 奎 星 旗, 婁 星 旗, 胃 星 旗, 昴 星 旗, 畢 星 旗, 觜 星 旗, 參 星 旗 를 상징하는 별자리를 각각의 깃발에 그 렸다. 북쪽에 배치한 깃발에는 斗 星 旗, 牛 星 旗, 女 星 旗, 虛 星 旗, 危 星 旗, 室 星 旗, 壁 星 旗 를 상징하는 깃발을 그렸으며, 남쪽에는 井 星 旗, 鬼 星 旗, 柳 星 旗, 星 星 旗, 張 星 旗, 翼 星 旗, 軫 星 旗 를 상징하는 깃발을 그려 세웠다. 23) 이들 깃발 중 제단 내에 배 치한 깃발은 노란색 테두리, 동쪽에 배치한 깃발은 청색[초록색] 테두리, 서쪽에 배 치한 깃발은 흰색 테두리, 남쪽에 배치한 깃발은 붉은 색 테두리, 북쪽에 배치한 깃 발은 남색 테두리로 마감하였다. 24) 이와 같이 제단 내에 해ㆍ달ㆍ북두칠성을 그린 깃발을 세우고, 제단 외곽에 28 宿 旗 를 동서남북으로 각각 구분하여 세운 것은 태백산에서 天 祭, 즉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에 하늘을 상징하는 주요 요소들을 깃발로 만들어 배치하였다고 볼 수 있다. 28수기와 함께 世 界 平 和 ㆍ 民 族 統 一 ㆍ 國 泰 民 安 ㆍ 雨 順 風 調 ㆍ 民 族 의 靈 山 太 白 山 ㆍ 太 白 山 天 祭 [ 大 韓 民 國 天 祭 ] 라고 각각 쓴 깃발을 만들어 배치하였는데, 이 깃발 은 天 祭 에서 기원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1938년 이전에 태백산에서 천제를 거행할 때 28수기를 비롯한 별자리 깃발을 세웠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는 없다. 공식적인 기록은 위에서 소개한 태극교도[천지 중앙 명류도]들이 조선의 독립을 기원하기 위해 태백산 정상에 구령탑을 쌓은 후, 소화 12년(1938) 6월 16일(음력5월 8일) 윤상명을 비롯한 교도들이 독립 기원제를 22) 박창범, 천상열차분야지도( 天 象 列 次 分 野 之 圖 )의 별그림 분석, 한국과학사학회지 20집, 한 국과학사학회, 1998, 113~149쪽. 양홍진ㆍ박명구, 천문유초( 天 文 類 抄 )에 기록된 사신동물천문도 ( 四 神 動 物 天 文 圖 ) 연구, 한국우주과학학회지 20집, 한국우주과학학회, 2003, 83~94쪽. 23) 28수기와 그 유사한 것을 사용하는 예는 다음과 같이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 1) 1897년(광무 1)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에 오르면서 별자리 28 宿 의 별을 상징한 28개 旗 를 의장에 사용하였다. (예 2) 28개의 깃발을 사용하는 예는 무녀가 기도를 하기 위한 壇 을 설치 할 때 오방기와 28 將 軍 旗 를 설치하기도 한다. (예 3) 전라남도 장흥군 부산면 호계리에서 지내는 별신제를 마을에서 천제라 부른다. 전해지는 문적들에서는 천제라는 말을 찾을 수 없지만 마을사 람들은 하느님에게 제사를 모시는 것으로 간주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마을에서 가장 깨끗한 곳을 고르다보니까 냇가에서 제사를 모시는 것이라 한다. 매년 여름철에 큰물이 지면 바닥 청소가 되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은 그곳을 가장 깨끗한 곳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별신제에서 모시 는 신은 모두 3 位 로서 天 地 人 을 신격으로 하여 모신다. 별신제를 지낼 때 대나무를 28개 잘라 제 당 주변에 두른다. 마을에서 대나무 28개는 하늘의 28 宿 를 뜻한다고 한다.(나경수, 전남 장흥군 부산면 호계리 별신제 조사 연구, 민속학연구 10집, 국립민속박물관, 2002, 5~28쪽.). 24) 2008년 10월 1일 한국천문연구원에서 열린 開 天 節 고천문 워크숍 에서 현재 태백산 천제를 지낼 때 세운 28수기의 별자리와 세운 방향이 고천문 관련 기록과 비교하였을 때 몇 가지 문제가 있음이 양홍진 박사에 의해 제기되었다. 향후 이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와 수정이 필요하다.
太 白 山 天 祭 의 歷 史 와 祭 儀 樣 相 51 지내면서 구령탑 주위에 태극기ㆍ팔만기ㆍ오행기ㆍ구령기와 함께 일월성신기와 28 宿 旗 를 세웠다는 기록, 1949년 사진과 최익한씨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현재 태백산 천제를 지낼 때 제단 주위에 별자리 깃발을 세운 전통은 1987 년 태백산 천제위원회가 결성되어 천제를 주관하기 이전부터 내려온 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천제단 주변 둘레돌에 금줄을 3겹으로 둘러서 참제원들이 각자 소원을 적은 한지를 끼운 후 천제가 끝나고 소지를 올릴 때 함께 태워 참제원들의 염원이 모두 이루어지길 기원해 준다. 그림 7. 천제단 입구에 금줄을 친 광경.
52 김도현 그림 8. 2008년 태백산 천제에서 천제단 주위의 28수기, 만장기와 참제원들. 그림 9. 2008년 천제 거행 전의 전통제례악 연주. 그림 10. 2008년 천제 거행 전의 천무 공연.
太 白 山 天 祭 의 歷 史 와 祭 儀 樣 相 53 그림 11. 소원을 적은 한지를 금줄에 거는 모습. 1987년부터 태백산 천제 위원회가 주관하여 개천절에 지낸 天 祭 순서는 다음과 같다. 25) ㆍ 영신굿 : 풍물패가 영신을 위해 풍물을 울리며 천제단 앞에서 영신 맞이굿을 한다. ㆍ 천황굿 사설 구송 : 박용문 外 10명으로 구성된 태백문화원 문화학교 동문들이 천황굿 사설을 구송한다. ㆍ 開 儀 : 집례가 천제의 개의를 알린다. 25) 김강산, 태백산 천제( 天 祭 ), 江 原 民 俗 學 第 15 輯, 江 原 道 民 俗 學 會, 2001, 271 293쪽. 대한민국천제 보존회, 대한민국 천제 안내문, 2008.
54 김도현 그림 12. 2008년 태백산 천제에서 집례인 안석호씨가 홀기를 읽으며 진행한다. 그림 13. 제단에 오르기 전에 제관들이 손을 씻는 관세위. ㆍ 燔 柴 禮 : 草 衣 를 입은 燔 柴 官 이 쑥을 들고 등단하여 火 爐 에 쑥을 태워 잡귀를 쫒고 天 祭 를 하늘에 알린다.
太 白 山 天 祭 의 歷 史 와 祭 儀 樣 相 55 그림 14. 2008년 태백산 천제 중 번시례. ㆍ 降 神 禮 : 집사의 인도를 받은 제주는 관세위에서 손을 씻고 닦고 등단하여 천제 단 앞에 꿇어앉는다. 향을 사르고 천잔에 술을 따라 제단 앞에 부어 신을 내리게 하는 의식으로, 제주는 9번 절한다. 그림 15. 2008년 태백산 천제에서 제주가 향을 사름.
56 김도현 그림 16. 2008년 태백산 천제 중 강신례에서 제관이 절을 함. ㆍ 參 神 禮 : 제주는 봉작에게 받은 천잔에 술을 부어 천단에 올리고 제주이하 모든 참제원들은 9번 절을 한다. ㆍ 奠 幣 禮 : 제주는 봉지들로부터 받은 폐백[삼종천ㆍ오곡ㆍ천수]을 천단에 바친다. 그림 17. 2008년 태백산 천제 중 전폐례에서 봉지들이 제수를 천단에 올림. ㆍ 進 饌 禮 : 제주는 봉찬들로부터 받은 제례 음식물[천채ㆍ천소ㆍ천과ㆍ희생 등]을 천단에 올린다.
太 白 山 天 祭 의 歷 史 와 祭 儀 樣 相 57 그림 18. 2008년 태백산 천제에 따른 제수 진설. ㆍ 告 天 禮 : 축관이 제주 옆에 꿇어앉아 고천문을 봉독한다. 이때 제주이하 모든 참 제원들은 꿇어 엎드린다. ㆍ 獻 酌 禮 : 아헌관이 인도되어 관세위에서 손을 씻고 등단하여 천향을 피우고 천 잔을 올린 다음 9번 절하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후 종헌관이 인도되 어 관세위에서 손을 씻고 등단하여 천향을 피우고 천잔을 올린 다음 9 번 절하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림 19. 2008년 태백산 천제 중 고천례.
58 김도현 그림 20. 2008년 태백산 천제에서 헌관이 헌작례를 행함. ㆍ 送 神 禮 : 제례의식이 끝나고 신을 배웅하는 의식으로 제주가 다시 등단하여 천 향을 피우고 초자로 모든 천잔에 천주를 세 번씩 첨작을 한다. 그리고 제주이하 봉향봉작들은 천단에서 내려와 제자리로 가서 서고 이어서 제주이하 모든 참제원들은 9번 절한다. ㆍ 飮 福 禮 : 천단에 바친 제물을 내려 골고루 나누어 먹는다. 그림 21. 2008년 태백산 천제에서 제관들이 음복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