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양주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6. 조선시대 태조 2년(1393)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호가 정해 지고 신왕조의 기틀이 잡혀지자 국도의 천도가 제기 되었다. 천도론은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지덕이 쇠한 개경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 제기되었지만, 실질적 으로는 고려의 전통적인 세력기반을 떠나서 조선왕조 의 새로운 정치기반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태조는 왕위에 오른 지 1개월도 못되는 8월 임술에 도평의사사에 下 敎 하여 한양(옛 양주) 천도를 협의할 것을 명하였다. 이틀 후에는 三 司 右 僕 射 恬 을 한 양에 보내어 궁실을 수즙하는 등 천도를 서둘렀지만 裵 克 廉 ㆍ 趙 浚 등의 계청으로 한양천도 계획은 일시 중단되었다. 그 후 제2의 천도 후보지로 거론된 곳이 계룡산이었 지만 경기좌우도관찰사 河 崙 이 도읍은 나라의 중앙에 위치해야 하는데 계룡산은 남쪽에 치우쳐 있고 풍수지 리적으로도 좋지 않다는 주장에 따라 계룡산의 신도 건설도 무산되었다. 계룡산 다음으로 제기된 후보지는 하륜 등이 거론 한 母 岳 (연희ㆍ신촌일대)이었다. 그러나 鄭 道 傳 ㆍ 成 石 璘 등은 모악 역시 땅이 협소하고 풍수도참면에서 도 적지가 아니라고 주장하므로써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으나, 결국 신도 후보지를 둘러싼 중신들의 논 란 끝에 정도전 등의 의견과 王 師 無 學 의 자문을 받아 결정된 곳이 바로 한양이었다. 신도 건설을 위해 태조 3년(1395) 9월 新 都 宮 闕 造 成 都 監 이란 기관이 설치되어 공역을 서두르는 한 편, 35) 신도가 채 완성되기 전인 다음달 10월에 마침내 태조는 서둘러 한양으로 천도하였던 것이다. 태조 4년(1395) 6월에는 한양부를 한성부라 개칭 하고, 36) 태조 5년(1396) 9월에 이르러 여러 궁전을 위시하여 종묘와 사직ㆍ관아ㆍ도성 등이 축조되어 그 공역이 완료되었다. 그리하여 한성이 조선왕조의 국도 로서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중심지가 됨에 따라 양주지방은 대부분의 땅을 한성부에 이관하여 축소하 는 동시에 그 치소 및 邑 格 조차 변화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일대 변화를 본 양주의 건치연혁을 살펴 보면, 태조 3년(1394)에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부(옛 양주)로 옮김에 따라 그 이듬해에 주민들을 옛 견주지 역으로 이주시킨 후 양주군으로 삼았다. 37) 그 후 태조 6년(1397)에는 양주부로 승격되었다가 태조 13년(1413) 도호부가 되었고, 세조 12년 (1466) 관제개혁에서 양주목으로 다시 승격되었다. 견주의 연혁을 살펴보면, 견주는 본래 고구려의 매초 현인데 신라 때 내소군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견주로 바꿔 현종 9년(1018) 양주 임내에 붙였다가 뒤에 監 務 를 두었는데 별호로 昌 化 라고 불렀던 기록도 찾아 볼수있다. 반면에 신증동국여지승람 에서 견주는 양주의 동 쪽으로 15리 지점에 있는데, 본래는 백제 매초군으로 마홀이라고도 했다. 重 城 ㆍ 坡 平 은 견주에 예속되었 다. 고려 정종 2년(947)에 다시 견주군으로 하였는데 35) 태조실록 권6, 태조 3년 9월 기사ㆍ병오ㆍ경신조. 36) 태조실록 권7, 태조 4년 6월 무진조. 37) 태조실록 권7, 태조 4년 6월 무진조. 改 漢 陽 府 爲 漢 城 府 移 其 吏 民 于 見 州 爲 楊 州 郡
역사 51 창화현이라고도 한다. 현종 9년(1018) 양주에 예속시 키고 후에 감무를 두었는데, 본조(조선) 태조 6년 (1397)에 양주에서 치소를 이곳 견주로 옮겼다가 뒤 에 지금의 치소로 옮겼다. 지금의 古 州 內 이다. 라고 하여 두 기사간에 다소의 차이점이 있다. 양주 지방의 하부행정구역인 각 면리의 명칭 및 경 계를 신증동국여지승람 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 과같다. 古 州 內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마지막이 25리이다. 州 內 읍내이다. 於 等 山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마지막이 30리이다. 別 非 谷 동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50리이다. 榛 伐 동쪽으로 처음이 50리, 마지막이 70리이다. 眞 官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瓦 谷 동남쪽으로 처음이 60리, 마지막이 80리이다. 上 道 동남쪽으로 처음이 70리, 마지막이 100리이다. 下 道 동남쪽으로 처음이 80리, 마지막이 100리이다. 芚 夜 처음이 15리, 마지막이 30리이다. 旨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마지막이 70리이다. 忘 憂 里 동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海 等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50리이다. 廣 石 처음이 25리, 마지막이 10리이다. 泉 川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마지막이 20리이다. 縣 內 남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45리이다. 山 內 동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嶺 斤 북쪽으로 처음이 60리, 마지막이 80리이다. 檜 岩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마지막이 30리이다. 接 洞 동쪽으로 처음이 40리, 마지막이 50리이다. 乾 川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村 동남쪽으로 처음이 60리, 마지막이 70리이다. 柴 北 谷 동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마지막이 30리이다. 美 音 동남쪽으로 처음이 50리, 마지막이 70리이다. 古 楊 州 동남쪽으로 처음이 60리, 마지막이 80리이다. 原 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마지막이 50리이다. 白 石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마지막이 40리이다. 石 積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40리이다. 新 穴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60리이다. 陳 畓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마지막이 40리이다. 伊 淡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마지막이 50리이다. 靑 松 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마지막이 80리이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양주군 영역에는 지금의 양주군지역 외에도 서울의 노원지역을 비롯하여 망우 리지역과 은평구 일대까지 다수가 포함되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조선 초기부터 양주군은 한성에 인접한 배 후도시로서 정치ㆍ경제적으로는 물론 국방과 교통에 서도 중요한 몫을 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군제에 있어서 중앙군에 못지 않게 중요 한 것은 지방군제의 편성이었다. 지방군제 역시 세조 대에 정비되었다. 세조 1년(1455)에는 북방(평안ㆍ영 안도)의 翼 軍 과 남방의 營 鎭 軍 으로 이원화되어 있던 군사조직을 북방의 익군과 같이 軍 翼 道 體 制 로 통일하 였다. 즉 전국의 각 도는 몇 개의 군익도로 나뉘고 각 군익도는 중ㆍ좌ㆍ우의 3익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경기도의 군익도 편성은 廣 州 道 ㆍ 楊 州 道 ㆍ 富 平 道 등 3개의 巨 鎭 과 喬 桐 ㆍ 江 華 ㆍ 開 城 府 등 3개의 독 진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양주도의 중익 에는 양주ㆍ원평ㆍ포천ㆍ적성ㆍ가평이, 좌익에는 삭 령ㆍ마전ㆍ영평ㆍ연천이, 우익에는 풍덕ㆍ장단ㆍ임 진ㆍ임강 등이 속해 있어 조선시대 양주목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군익도 체제는 세조 3년(1457) 다시 鎭 管 體 制 로 변경되어 지방군제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진 관체제하의 경기도는 水 原 鎭 ㆍ 廣 州 鎭 ㆍ 楊 州 鎭 ㆍ 江 華 鎭 ㆍ 開 城 鎭 등 5개의 巨 鎭 을 중심으로 편성되었 다. 이 당시 양주진은 대표적 거진으로 연천ㆍ마전ㆍ 적성ㆍ원평ㆍ교하ㆍ고양ㆍ영평ㆍ포천ㆍ가평 등이 이에 속해 있었다. 38) 진관체제에 있어서 兵 使 가 있는 곳을 主 鎭 이라 하 38) 세종실록 권9, 세조 3년 10월 경술조.
52 양주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였고, 그 아래에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거진 등 대소의 진이 있었다. 이때 거진은 목사와 府 尹 이 각기 僉 節 制 使 와 절제사를 예겸하였고, 그 아래의 여러 진은 군수 ㆍ현감 이하의 지방관이 同 僉 節 制 使 의 직함을 겸하 면서 군사를 지휘하였다. 따라서 양주지방은 양주목사 가 첨절제사를 예겸하였음을 알수있다. 다. 40) 영조 36년(1760)에 편찬된 興 地 圖 書 는 양주의 토지 가운데 한전이 7,963결 89부 2속, 수전이 2,199 결 51부 9속으로 총 1만 163결 41부 1속이라고 기록 되어 있고, 고종 8년(1871)에 간행된 京 畿 邑 誌 에 도 여지도서 와 같은 결수를 적고 있어 조선 전기 이 후 왜란과 호란을 거치는 동안 토지결수가 격감되었음 을알수있다. 1) 토지결수 고려 말 전제개혁으로 실시된 과전법은 조선 전기 토지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과전법은 고려 말에 확대 되었던 私 田 을 국가에서 몰수하여 신흥 관료들에게 재분배하는 동시에, 전주와 전호와의 관계를 규제하고 조세액을 1/10로 정하므로써 국가의 수입을 확보하여 녹봉과 군자에 충당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리고 과전 의 지급을 경기도에 한정하므로써 지방에서의 토호화 를 방지하는 동시에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구 축하려는 것이었다. 과전법이 실시되기 직전인 공양왕 2년(1390) 평안 ㆍ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의 토지는 경기도의 實 田 이 13만 1,755결ㆍ 荒 遠 田 이 8,387결이고, 6 道 의 실전 이 49만 1,342결ㆍ황원전이 16만 6,643결로 도합 79만 8,127결이었다. 그러던 것이 태조 4년(1404)에 이르면 전국의 토지 결수가 93만 1,695결에 이르고, 세종실록지리지 에 의하면 163만 2,006결로 증가하였다. 39) 경기도의 토 지결수도 공양왕 2년(1390) 14만 142결, 태종 2년 (1402) 14만 9,300결, 세종실록지리지 에는 19만 4,270결로 증가되었다. 경기도의 군현별 墾 田 결수를 보면, 양주의 토지결 수는 간전이 1만 5,190결이었다. 그 중 水 田 이 3/10 을 조금 넘는 정도였고, 대부분의 토지가 旱 田 이었 2) 호구 조선시대의 호적은 3년마다 작성되는 것이 원칙이 었고 호적을 근거로 군적이 작성되었다. 군적이 처음 으로 작성된 것은 태조 2년(1393)이며, 戶 口 의 이름 으로 전국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태종 4년(1404) 이었지만 口 가 아닌 男 丁 의 통계였다. 役 을 부담하는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녀 口 의 총계는 세종실록지리지 에 최초로 나타난다. 이에 의 하면 전국의 호구수 중 戶 數 는 22만 375호, 口 數 가 80만 1,847구 였다. 경기도는 호수가 2만 892호, 구 수가 5만 352구였다. 그 가운데 양주는 호수가 1,481호, 구수가 2,726구 였다. 총 41개의 경기도 북부 군현 가운데 양주는 호 수로는 강화도호부, 수원도호부에 이어 3위의 위치에 있었고 구수로는 광주목 다음인 5위에 있었다. 이 당시 경기도에서 인구 2,000명이 넘는 곳은 5개 처에 불과하였다. 특히 양주는 이들 5개처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호수( 戶 數 )에 비해 구수( 口 數 )가 적은 것이 큰 특징이기도 하다. 한편 조선 전기 양주의 하부 행정구역인 각 읍면별 호구수는 알 수 없지만, 영조 때의 호구를 조사, 기록 한 여지도서 에 의하면, 양주지방의 34개 읍면 호구 39)이재룡, 전제, 한국사 10, 국사편찬위원회, 1981, 277 278쪽. 40) 세종실록지리지 권148, 양주도호부조.
역사 53 경기도의 호구총수 郡 縣 戶 口 郡 縣 戶 口 廣 州 牧 1,436 3,110 振 威 縣 221 535 驪 興 都 護 府 538 1,144 仁 縣 457 1,168 楊 根 郡 388 1,686 陽 城 縣 425 1,210 陰 竹 縣 390 1,088 陽 智 縣 346 609 川 縣 1,026 3,898 鐵 原 都 護 府 351 770 果 川 縣 244 743 朔 郡 233 722 川 寧 縣 413 1,234 永 平 縣 138 419 砥 平 縣 267 515 長 湍 縣 170 467 衿 川 縣 327 937 安 峽 縣 140 410 楊 州 都 護 府 1,481 2,726 江 縣 364 878 原 平 都 護 府, 瑞 原 郡 494 1,316 麻 田 縣 146 484 高 陽 縣 679 1,314 川 縣 186 360 交 河 縣 590 1,629 富 平 都 護 府 429 954 津 縣 274 613 江 華 都 護 府 2,445 3,283 積 城 縣 212 380 仁 川 郡 357 1,412 抱 川 縣 371 1,222 海 豊 郡 792 1,381 加 平 縣 288 987 金 浦 縣 318 651 水 原 都 護 府 1,842 4,926 陽 川 縣 222 509 南 陽 都 護 府 487 778 喬 桐 縣 221 562 安 山 郡 302 588 通 津 縣 458 971 安 城 郡 424 1,763 計 20,892 50,352 수는 다음의 표에서 보듯이 전체 호수가 1만 1,231호, 구수가 5만 3,497구(남자 2만 3,775명, 여자 2만 9,722명)였다. 이러한 영조대의 호구수를 세종대의 호구수와 비교 하여 보면 호수는 8배가 증가된 1만 1,245호이고 구 수는 근 20배가 늘어난 5만 3,497구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격증하고 있다. 효종 8년(1657)과 현종 10년(1669)의 12년 사이 에 호구수가 3배 이상 증가되고 있는 것을 보면, 조선 후기 양주지역에서는 농업발전에 따른 인구와 호구증 가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사실을알수있다. 시기별 경기도의 호구총수 41) 시기 1406년(태종 6) 세 종 대 1648년(인조 26) 1657년(효종 8) 1669년(현종 10) 戶 20,727 20,892 26,043 42,050 120,058 口 38,238 50,352 81,244 132,947 546,237 시기 1717년(숙종 43) 1753년(영조 29) 1807년(순조 7) 1852년(철종 3) 1904년(광무 8) 戶 126,668 157,236 164,351 158,000 170,424 口 566,120 642,012 674,627 672,603 672,636 41)이상백, 한국사 근세전기편, 진단학회, 1962, 426-428쪽.
54 양주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양주의 호구총수 邑 面 戶 數 男 ( 口 ) ( 口 ) 計 ( 口 ) 邑 內 450 924 998 1,922 古 州 內 面 304 623 964 1,587 檜 岩 面 205 446 589 1,035 於 等 山 面 160 355 648 1,003 泉 川 面 127 236 399 635 陳 畓 面 256 759 795 1,554 縣 內 面 226 541 688 1,229 伊 淡 面 427 1,046 1,215 2,261 山 內 面 135 211 401 612 靑 松 面 375 782 1,035 1,817 嶺 斤 面 246 555 544 1,099 石 積 面 395 762 1,285 2,047 廣 石 面 204 402 660 1,062 白 石 面 591 1,461 2,702 4,163 長 興 面 349 672 733 1,405 神 穴 面 321 614 588 1,202 柴 北 谷 面 417 849 1,062 1,911 芚 夜 面 224 458 748 1,206 비고:계의 ( )안은 興 地 圖 書 의 합계란에 표기된 숫자임. 邑 面 內 洞 面 別 非 谷 面 接 洞 面 榛 伐 面 乾 川 面 眞 官 面 金 村 面 上 道 面 下 道 面 瓦 孔 面 禿 音 面 旨 面 古 楊 州 面 忘 憂 里 面 蘆 原 面 海 等 村 面 計 戶 數 154 490 259 216 374 274 343 415 388 431 332 488 732 233 311 379 11,231 男 ( 口 ) 314 857 859 472 735 672 768 878 755 904 655 672 1,754 359 683 742 23,775 ( 口 ) 354 1,028 657 693 877 754 1,041 864 922 1,233 922 886 1,394 529 704 810 29,722 計 ( 口 ) 668 1,885 1,516 1,165 1,612 1,426 1,809 1,742 1,677 2,137 1,577 1,558 3,148 888 1,387 1,552 53,497 (11,363) (23,624) (28,927) (52,551) 3) 특산물 조선시대 貢 物 의 종류에는 각 지방의 특산물 및 각 종 수공업 제품이 망라되어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 에 의하면 경기도의 공물품목은 공물 50종ㆍ약재 120종ㆍ약재종양 21종 등 총 191종에 이르고 있다. 그 당시 양주지방의 주민에게 부과되었던 공물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각종 지리지에 실린 토산물들이 공물의 품목과 대체로 일치하였을 것 으로 생각된다. 양주의 토산물은 세종실록지리지 에 의하면 오곡 외에 조ㆍ메밀ㆍ뽕나무ㆍ느타리버섯ㆍ송이버섯ㆍ잣 등의 6개의 특산물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는 명주실ㆍ삼베ㆍ옥돌ㆍ은어 등이 산출된다고 하여 앞의 것에 4가지는 더 보태고 있어 총 10여 종이 출산 되어 공납의 대상이 되었거나 아니면, 신증동국여지 승람 의 내용과 같이 16세기 이후에는 명주실 등 6종 이 공납의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한편 공납물에는 공물 이외에 進 上 과 供 上 이 있었 다. 그 당시 양주지방의 진공물과 수량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지만, 조선 후기에 간행된 경기읍지 에의하 면 양주의 진상물로는 매년 입춘에 진상하는 파가 있 었던것을알수있다. 4) 상업과 수공업 조선시대의 상업 형태는 서울의 市 廛 과 각 지방의 場 市 를 중심으로 육로행상을 하는 褓 負 商 과 수로행상 을 하는 船 商 등으로 이루어졌다. 15세기 후반부터 대두되기 시작한 장시는 점차 5일 장으로 정착하여 갔는데 주로 보부상에 의해서 각종 물품이 유통되었다. 또한 수로를 통한 선상들의 상업 활동도 있었지만 활발하지는 못하였다. 조선 후기인 순조대에는 전국의 장시가 1,060여 곳
역사 55 이었고, 경기도에만 102곳이 있었는데 양주에는 加 羅 非 ㆍ 東 道 川 ㆍ 莘 川 ㆍ 古 州 內 ㆍ 大 灘 ㆍ 北 道 川 ㆍ 仇 谷 등 7개 처에 장시가 이루어졌다. 42) 한편 조선시대의 수공업은 관장제수공업과 민간수 공업으로 구분되는데 그중에서도 관장제수공업은 생 산규모가 크고 기술면에 있어서 조선 전기의 수공업을 대표하였다. 工 匠 은 京 工 匠 과 外 工 匠 으로 구분되며, 경공장은 30개의 관아에 예속된 2,800여 명이 130종 의 물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반면 지방의 외공장수는 3,800여 명으로 27종의 수공업 제품을 생산하였다. 43) 양주의 경우 9개 분야에 10인의 공장이 있어 12명 을 배치한 광주 다음으로 많은 인원을 갖고 있었다. 따 라서 이 시기 양주는 광주와 함께 관장제수공업의 중 심도시의 하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 전기의 광업은 금ㆍ은을 비롯한 철ㆍ동 ㆍ유황 등의 광종이 주로 채굴되었다. 당시 양주에는 은ㆍ옥ㆍ자수정 등의 광종이 산출되었다. 그리고 조 선 후기의 기록인 萬 機 要 覽 에 의하면 숙종 전후에 설치된 전국 68곳의 銀 店 가운데는 양주와 인근의 파 주ㆍ교하ㆍ삭령 등 3곳이 포함되어 있었다. 44) 세종조에 양주에서 생산되는 옥의 품질이 매우 좋 으니 상의원에 명하여 御 帶 를 만들게 하였다. 라고 한 기록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 의 土 産 條 에 葛 立 山 에서 옥석이 나온다. 고 한 것을 통해 볼 때 양주지방 에서 양질의 옥이 채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연산 군 8년(1502) 왕이 양주목사에게 듣건대 양주땅에 있는 회암사에서 남쪽으로 50 60리 거리의 산등성 이에서 자수정이 난다기에 前 書 房 色 安 仲 男 을 보내 어 조사하고자 하니 너는 수정을 캐는 인부를 뽑아주 고 또 사사로이 채굴하지 못하게 하라. 45) 는 기록을 볼 때 자수정도 채굴되었음을 알 수 있다. 5) 교통과 통신 조선시대의 교통과 통신은 사회ㆍ경제적인 의미보 다는 행정ㆍ군사상의 의미가 컸는데, 교통수단으로는 육상 교통수단인 驛 站 과 수상 교통수단인 漕 運 이 있 었다. 運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이었는데, 주요 도 로상에 30리 간격으로 역을 두고 馬 匹 과 役 丁 을 갖추 어 공문을 전달하는 한편, 공무로 여행하는 사람들에 게 마필을 제공하고 그 숙식을 알선해 주며, 진상 등 관물의 수송도 담당하였다. 조선 전기 양주지방의 역에 대해서 세종실록지리 지 에는 靑 坡 驛 ㆍ 原 驛 ㆍ 迎 曙 驛 ㆍ 平 丘 驛 ㆍ 仇 谷 驛 ㆍ 雙 樹 譯 등 6개의 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迎 曙 驛 ㆍ 平 丘 譯 ㆍ 綠 楊 譯 ㆍ 雙 樹 驛 등 4개의 역을 열거하고 있다. 각 역의 위치 및 관할을 살펴보면 영서역은 주의 서 쪽 60리 지점에 위치해 있고, 종6품의 察 訪 이 파견되 어 고양의 벽제역, 파주의 마산역, 장단의 동파역, 개 성의 청교역, 산예역, 풍덕의 중연역 등의 역을 관할하 였다. 또한 평구역은 주 동쪽 70리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 고, 이 역시 종6품의 찰방이 파견되었다. 양주의 녹양 역, 포천의 安 奇 驛, 영평의 文 驛, 양주의 奉 安 驛, 양근의 娛 賓 驛, 양주의 쌍수역, 砥 平 의 백종역, 砥 平 의 田 谷 驛, 양주의 구곡역, 가평의 甘 泉 驛 등 11개의 역을 총괄하였다. 이중 녹양역은 주 남쪽 30리 지점에, 쌍수역은 풍양현 남쪽 2리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46) 그리고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 에 의하면 양주지방 에는 녹양역ㆍ구곡역ㆍ쌍수역ㆍ평구역ㆍ연서역 등 5 개의 역이 있었다. 여지도서 에는각역에속한 馬 ㆍ 吏 ㆍ 奴 ㆍ 婢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보면 녹양역 42)경기도, 경기도사 제1권, 1979, 420 425쪽. 43)강만길, 수공업, 한국사 10, 국사편찬위원회, 1981, 363 367쪽. 44) 만기요람 재용편, 금ㆍ은ㆍ동ㆍ연 채은조. 45) 연산군일기 권45, 연산군 8년 7월조. 46)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1, 양주목조.
56 양주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은말이10필ㆍ이와노가도합44명ㆍ비가28명이, 구곡역은 말이 5필ㆍ이와 노가 도합 17명ㆍ비가 1명 이, 쌍수역은 말이 8필ㆍ이와 노가 도합 48명ㆍ비가 3명이, 평구역은 말이 9필ㆍ이가 24명ㆍ노가 44명ㆍ 비가 9명이, 그리고 연서역은 말이 10필ㆍ이와 노가 도합 45명ㆍ비가 20명이 각각 있었다. 한편 각 역의 중간 지점에 숙식을 제공하는 院 이 있 었는데, 전국에 걸쳐 모두 1,220개의 원이 설치되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의하면 양주에는 廣 濟 院 ㆍ 廣 仁 院 ㆍ 相 知 院 ㆍ 陶 孔 院 ㆍ 德 海 院 ㆍ 道 濟 院 등 6개의 원이 있었다. 조선 후기인 1871년에 간행된 경기읍지 에는 위의 6개의 원에 평구원이 하나 더 첨 가되어7개로되어있다. 각 원의 위치를 살펴보면 광제원은 주 남쪽 35리 지 점에, 광인원은 주 남쪽 30리 지점에, 상지원은 주 서 쪽 45리 지점에, 도공원은 주 동쪽 74리 지점에, 덕해 원은 서울에서 30리 지점에, 도제원은 免 院 이라고도 하였는데 풍양현 남쪽 15리 지점에, 그리고 평구원은 주 동쪽 70리 지점에 있었다. 47) 그 당시 육로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필요한 것이 橋 이었다. 여지도서 에 의하면 양주에는 乘 鶴 橋 ㆍ 弘 濟 橋 ㆍ 松 溪 橋 ㆍ 箭 橋 ㆍ 獨 豆 川 橋 ㆍ 加 業 橋 등이 있었다. 이들 교량의 위치를 살펴보면, 승학교는 官 門 앞에, 홍제교는 주의 서쪽으로 10리 지점에, 송계교는 망우리면에, 전곶교는 고양주면(현재의 성동구 행당동 한양대학교 부근)에, 독두천교는 芚 夜 面 에, 그리고 가 업교는 廣 石 面 에 있었다. 당시의 교량은 대부분 나무로 축조되었으나 전곶교 (살곶이다리)와 송계교는 돌로 건설되었다. 전곶교는 濟 盤 橋 로도 불리었는데 조선시대에 축조된 석교중 가 장 긴 다리였다. 齋 叢 話 에 의하면 성종조에 승려 가 萬 石 을 伐 하여 다리를 만들었으니 그 橋 邊 이 300 여 보나 되어 屋 宇 와 같이 평평하였기 때문에 행인이 마치 평지를 걷는 것 같았으므로 왕이 제반교라 이름 하였다. 고한다. 이 살곶이다리는 서울에서 송파ㆍ광주ㆍ이주ㆍ충 주로 이어지는 주요한 통로의 구실을 하였지만 대원군 이 경복궁 중건을 추진하므로써 다리의 전반이 뜯기어 경복궁 짓는 석재로 이송되었다. 또한 송계교는 강원 도로 통하는 다리로 지금의 중랑천 상류에 해당하는 지역에 있었다. 이러한 육로 교통수단과는 달리 육운보다 중시되었 던 水 運 을 이용한 조운이 있었다. 경기도의 경우는 서 울과 인접하고 있어 일부 해안 지역을 제외하고는 하 천과 해안에 설치된 水 站 과 漕 倉 등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에 수상 교통로에 津 과 渡 만을 설치하였다. 양주에는 渼 湖 津 ( 渼 音 津 )ㆍ 廣 津 ㆍ 大 灘 津 등이 있었다. 여지도서 에 의하면 미호진은 주의 남쪽 60 리 지점의 禿 音 面 에 위치해 있고 私 舡 1척이 있었다 고한다. 대동지지 에는 미음진이라고 하며, 동남쪽 으로 70리 거리에 있는데 광주로 통한다고 하였다. 광진은 곧 광나루로 주 남쪽 67리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여지도서 에 의하면 고양주면에 있으며 주 남 쪽 80리 지점에 위치해 있는데 津 舡 이 1척 있었으며, 연천으로 통하는 길목이라고 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통신수단으로 전국 620여 개의 높은 산 봉우리에 봉수대를 설치하고 서울의 木 覓 山 (남산)으 로 집결시켰다. 전국의 5대 노선의 하나인 제1선이 경 흥에서 시작하여 영평ㆍ포천을 지나고 양주의 峨 嵯 山 을 거쳐 목멱산으로 연결됨으로써 양주는 그 주요간선 의 하나가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 를 보면 양주에는 大 伊 山 과 加 仇 山 (아차산)에 봉수가 설치되어 있었던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대이산 봉수는 府 의 동남쪽에 위치하여 북쪽으 로는 포천의 仍 邑 岾 봉수에 연결되고 남쪽으로는 가 구산 봉수에 이어졌으며, 가구산 봉수는 부의 남쪽에 위치하여 북쪽으로는 대이산 봉수에 이어지고 남쪽으 로는 서울의 목멱산에 연결되었던 것이다. 47) 경기읍지, 양주목조.
역사 57 6) 사회변화 조선사회는 16세기 이래 이앙법의 보급, 시비법의 발달, 품종의 개량 등 농법이 개량됨에 따라 농업생산 력이 발전하였다. 17세기에 들어와 농업기술이 크게 발전하였는데 특 히 이앙법의 발달은 농촌경제의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 다. 이앙법이 직파법에 비해 노동력이 훨씬 적게 들면 서도 수확량이 많았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 오면 농민 들은 수리시설의 확보에 힘써 이앙법을 적극적으로 도 입하여 확산시켰다. 이에 따라 堤 堰 ㆍ 洑 등의 저수지가 새로 만들어지 고 현종 3년(1662)에는 提 堰 司 가 설치되었으며, 정 조 2년(1778)에는 提 堰 節 目 을 발표하여 수리시설의 개발에 힘쓰는 등 국가의 지원하에 제언의 축조와 수 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수리시설의 정비ㆍ확대로 18세기 말에는 전 국적으로 제언을 비롯한 수리시설이 약 6,000여 基 에 달하였다. 양주의 경우도 비교적 큰 제언이 6기나 되 었다. 양주읍지 에 수록된 1840 1870년대 양주의 제언 현황은 다음의 표와 같다. 조선 후기에는 비 시전상인의 성장이 활발해짐에 따라 비교적 규모가 큰 자본으로 조직적이고 매점적 인 상업을 영위하는 私 商 都 賈 가 등장하여 시전의 특 권상업에 대항하였다. 서울의 경우 사상도고의 근거 지는 주로 峴 (지금의 동대문 안)ㆍ 七 牌 (지금의 청 파동) 등지였다. 칠패나 이현의 사상도고들은 지방에서 상품이 올라 오는 길목인 광주ㆍ양주ㆍ포천 등지에 일종의 지점을 차려놓고, 곡물ㆍ어물ㆍ소금 등을 매점하였다. 이는 서울 일원에 한정되어 있는 금난전권을 피하여 상품을 확보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시전상인들과의 대립이 불가피하였다. 48) 한강을 끼고 있던 양주는 경기ㆍ충청의 내륙과 강 원에서 水 上 으로 내려오는 물화가 거쳐가는 곳으로 한강경제권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양주의 상인 중 그 활동이 주목되는 것은 어물을 독점하여 부를 축 적하였던 樓 院 店 商 人 의 활동이었다. 누원점은 서울 북쪽의 道 逢 山 麓 (당시에는 양주에 속하였음)에 있었는데, 서울 중심부와 가까우면서도 북도 지방에서 오는 어물과 포물이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이어서 일찍부터 서울 주변의 상업중심지로 발달 하였다. 영조 22년(1746) 各 廛 記 事 에 의하면 이 무렵 소 위 무뢰배가 칠패에 난전을 차려놓고 동쪽으로는 院 酒 幕 과 남쪽으로는 銅 雀 津 에 사람을 보내서 서울로 들어오는 어물 몇 천 몇 백 바리를 모두 매점해서 칠패 에다 쌓아 두고 중도위들을 통하여 시내 각처로 판매 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서울의 水 閣 橋 ㆍ 會 賢 洞 ㆍ 竹 箭 洞 ㆍ 鑄 字 洞 ㆍ 於 淸 洞 ㆍ 於 義 洞 ㆍ 峴 ㆍ 屛 門 등지에는 각 종 건어물이 산과 같이 쌓여 있었는데, 이것이 모두 칠 제언명 池 池 馬 乙 池 都 月 池 助 乙 池 王 池 양주의 제언현황 위치 둘레 邑 內 面 西 5 里 1,430 邑 內 面 西 5 里 814 泉 川 面 北 10 里 660 泉 川 面 北 5 里 560 芚 野 面 南 15 里 910 海 等 村 面 南 45 里 665 규 모 길이 420 220 130 220 265 155 (단위 : 尺 ) 넓이 350 210 125 105 105 130 48) 姜 萬 吉, 朝 鮮 後 期 商 業 資 本 의 發 達, 高 大 出 版 部, 1973.
58 양주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1840년대 양주의 장시상황 장시명 위 치 加 業 場 주서쪽10리 廣 石 面 東 道 川 場 주 북쪽 40리 伊 淡 面 華 川 場 주 북쪽 20리 於 等 山 面 大 灘 場 주북쪽60리 靑 松 面 仇 谷 場 주동쪽100리 上 道 面 漢 湖 場 주남쪽60리 禿 音 面 德 沼 場 주남쪽80리 瓦 孔 面 光 陵 川 場 주 동쪽 50리 榛 伐 面 패의 난전에서 흘러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49) 또 정조 5년(1781) 矣 廛 의 하나인 內 漁 物 廛 人 의 고발에 의하면, 양주 누원점 상인들이 동북지방에 서 서울로 올라가는 각종 어물을 중간에서 매점하였다 가 서서히 칠패와 이현 근처의 廛 人 들에게 보내자, 이에 난전인들도 수시로 값을 올려 판매하여 시내의 어물가격이 올랐을 뿐만 아니라 어물전인들도 실업상 태에 빠졌을 정도로 누원점상인의 활동이 활발했던 사 실을알수있다. 16세기 경부터 발생하기 시작한 장시는 정부의 억 압정책에도 불구하고 계속 증가하여 純 組 代 에 이르면 전국의 장시는 1,060여 개소로 늘었고, 경기도에만도 102개소나 되었다. 이러한 대세속에서 양주의 장시도 발달하였다. 양주읍지 에 의하면 1840년대 양주지역 각 곳에 대두된 장시만도 8개소에 달했던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곳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1870년대에 오면 30년 전의 대탄ㆍ구곡ㆍ 미호장은 쇠퇴하고 대신 덕소ㆍ광능천장이 새로이 생 겨났다. 49) 各 廛 記 事 地 卷 建 隆 11년(영조 22, 1746) 11월 일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