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경상도의 유교전통과 민족종교 동학 - 동학 내의 유교 재평가를 겸해서 - 최재목(영남대) 1. 머리말 이 논문은 19세기 경상도의 유교전통과 민족종교 동학의 관련성을 논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관련성 이란 동학의 형성에 유교전통이 어떻게 관여하는가, 그리고 동학의 흥기 이 후 전개되는 과정에 유교전통 혹은 유교사회라는 제도권력이 얼마만큼 장애요인으로 작용하 는가의 문제를 말한다. 1894년 여름 오스트리안인 헤세-바르텍이 부산 동래에 도착하여 중국인 통역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 중의 하나는 동학혁명 세력의 확장이었다: 피로 물든 혁명이 조선을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동래 주변도 안전한 지역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동학혁명 세력이 조선 전 역을 장악하게 될 것이며, 조선 정부는 현재 무능력한 상태이기 때문에 동래 역시 이미 동 학 세력이 장악했을 지도 모른다고 했다. 1) 아울러 그는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나라, 조선...경상도 지방은 조선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방에 속한다. 경상( 慶 尙 ) 은 경사스런 축 복 이란 뜻인데, 혹시 탐관오리들에게 그처럼 착취당한다는 사실 때문은 아닐까 2) 라고 시 니컬하게 말한다. 물론 1901년 조선에 온 독일인 겐터는 잠시 후면 신선한 아침을 뜻하는 신비의 나라로 들어간다는 희망에 부푼 3) 경우도 있긴 하다. 카와이 아사오( 河 井 朝 雄 )가 쓴 大 邱 物 語 (대구이야기) (1930년)에 따르면 1904-5년 당 시(구한말경) 대구(아마도 경상도 지역)에서 유행하고 있던 아리랑 이 있었다: 노자 노자 젊어서 노자/늙어지면 못노나니//문경새재 박달나무/홍두께 방망이로 다 나간다. 그런데 이 노래의 숨은 의미는 문경새재처럼 깊고 험한 산에 있는 박달나무조차 모두가 베어져 방 망이로 나가지 않는가. 우리가 피땀 흘려 일해도 가렴주구 당할 뿐이니 젊어서 놀지 않고 무엇하랴는 뜻이니 한국의 북국강병은 백년하청을 기다림과 같아서 어찌할 도리가 없다 4) 는 것이었다. 동학이 태동하는 19세기 조선은 서세동점( 西 勢 東 漸 )으로 인해 화이론에 철저했던 조선시 대유교 지식인들을 번민에 시달리게 했다. 원래 유교가 내외합일( 內 外 合 一 ) 내성외왕( 內 聖 外 王 ) 성기성물( 成 己 成 物 )의 긴장 5) 이나 번민 우환의식 안빈낙도( 安 貧 樂 道 ) 불온( 不 慍 )의 마음 등의 르상티망 6) 에서 출발하여 현실을 이겨내는 스킬과 매뉴얼을 확보하려했듯 이, 조선의 유교지식인들은 일단 존왕양이적( 尊 王 攘 夷 的 ) 척사위정운동( 斥 邪 衛 正 運 動 )을 일 으키는 방식으로 마음의 평온을 지켜가려고 한다. 19세기 중반 이후 서양세력의 침투에 대 응하여 조선에서는 대내적으로 매우 수구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대외적으로는 서양과 일본 1) 에렌스트폰헤세-바르텍, 조선, 1894년 여름: 오스트리아인 헤세-바르텍의 여행기, (책과 함께, 2012), 33쪽. 2) 에렌스트폰헤세-바르텍, 조선, 1894년 여름: 오스트리아인 헤세-바르텍의 여행기, (책과 함께, 2012), 13, 35쪽. 3) 지그프리트 겐터, 신선한 나라, 조선, 권영경 옮김, (책과 함께, 2007), 10쪽. 4) 카와이 아사오, 대구이야기, 손필헌 옮김, (대구중구문화원,?),21-22쪽. 5) 이에 대한 분석은 토마스 메츠거, 곤경의 탈피, 나성 옮김, (민음사, 2014) 참조. 6) 애당초 공자에게 이런 관념이 있었다는 분석은 浅 野 裕 一, 儒 教 ルサンチマンの 宗 教, ( 平 凡 社, 1999) 참조. - 1 -
의 정치적 경제적 침략을 규탄한다. 이 가운데 특히 배일사상( 排 日 思 想 )이 고취가 두드러진 다. 19세기 중반 이후 조선에서 일어나는, 외세에 대한 주요 반응은 대개 다음 네 가지라고 할 수 있다: 1척사위정사상, 2개화사상, 3동도서기론, 4동학사상. 이 가운데 동학은 유불 도의 전통사상을 바탕으로 하면서 밖으로는 천주교를 극복하고, 안으로는 봉건사회를 벗어 나 자주 평등의식을 고취하고 전개하였다. 7) 이 논문에서는 먼저, <동학에서 유교 란 무엇이었는가>를, 이어서 <수운의 섬김 전통과 퇴계의 경 사상의 진보적 흐름의 연관성>문제를, 마지막으로 <19세기 경상도의 유교전통 과 대응 방식>을 논의할 것이다. 2. 동학에서 유교 란 무엇인가? 유교가 동학에 관여한 방식은 다각도로 논의할 수 있다. 동학에서 유교가 차지하는 위치 를, 혹자는 융합의 밑거름 으로 혼합되었다 하고, 혹자는 온존하나, 주체적인 내면화 자각 화 실천화의 기법으로 응용 되었다 하고, 혹자는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나 제3의 입장에 서 자유자재로 취사선택하고 활용하였다 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들 수 있는 것 은 풍류도통론( 風 流 道 統 論 )에 근거한 동학 이해로서 이미 신라 및 고대시기부터 유불도가 이미 융합되어 있는( 包 含 三 敎 ) 풍류도가 동학의 형태로 재생한 것(이것을 神 道 盛 時 精 神 의 奇 蹟 的 復 活 國 風 의 再 生 등으로 표현) 뿐이라고 보기도 한다. 요약하자면 <1 융합 의 한 요소, 2 경정 을 통한 변용(내면화 실천화), 3 새로운 디자인(제3의 길)을 위한 주요 레퍼런스로 활용, 4 포함삼교인 풍류도의 재생>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1박종홍은 동학의 기본정신은 우리의 전통적인 모든 사상의 진수가 하나로 엉기어 이루어진 결정체라고 하겠다. 과연 동학에는 한국의 황토 흙냄새가 풍긴다. 한국인 의 체취가 속속들이 배어있는 것이다. 8) 라고 말하여 여러 사상의 융합 을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유교전통은 동학을 형성하는 하나의 요인이 된다. 그리고 2 신일철은 최수운의 수덕문( 修 德 文 ) 가운데 인의예지( 仁 義 禮 智 )는 선성지소교( 先 聖 之 所 敎 )요, 수심정기( 修 心 正 氣 )는 유아지경정( 惟 我 之 更 定 )이니 라는데 착안하여 유교적 교양을 수운 자신이 그대 로 온존하고 있다... 수심정기는 유아지경정 의 경정 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의예지를 내 면화하기 위해서는 수심정기 를 첨가해서 경정 할 필요를 느꼈다는 말이다. 유교를 전면 부 정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개인적으로 내면화하고 자각적으로 주체화하는 길을 열었다. 9) 고 보아, 단순히 융합이란 차원을 넘어서 주체적으로 내면화 자각화 실천화하는데 응용하 였다고 보았다. 3윤사순은 동학에는 유학사상의 성격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나 수운이 유학사상을 적극 원용하였지만 유학을 벗어난 입장에서 자유자재로 취사선택하고 심지어 변 용하는 형식으로 원용하면서, 그 시대의 요구에 맞도록 체계화하였다. 이것이 동학의 정체 성이다. 10) 라고 하여 제3의 입장에서 자유자재로 취사선택하고 활용하였다고 보았다. 아울 러 마지막으로 들 수 있는 것은 4풍류도로서 동학을 이해한 범부( 凡 父 ) 11) 김정설( 金 鼎 卨. 7) 최영성, 한국유학사상사V 근현대편, (아세아문화사, 1997), 13-14쪽 참조. 8) 朴 鍾 鴻, 發 刊 辭, 韓 國 思 想 제12집 - 崔 水 雲 誕 生 150 周 年 紀 念 論 集 : 崔 水 雲 硏 究 -, ( 韓 國 思 想 硏 究 會, 1974.11), 7쪽. 9) 申 一 澈, 崔 水 雲 의 歷 史 意 識, 韓 國 思 想 제12집 - 崔 水 雲 誕 生 150 周 年 紀 念 論 集 : 崔 水 雲 硏 究 -, ( 韓 國 思 想 硏 究 會, 1974.11), 21-22쪽.(인용문은 인용자가 일부 축약하고 수정함) 10) 尹 絲 淳, 東 學 의 儒 學 的 性 格, 동학사상의 새로운 조명,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 출판부, 1997), 106-107쪽.(인용문은 인용자가 일부 수정함) 11) 원래 범보라 읽어야 하나 관습적으로 읽어온 대로 적어둔다. - 2 -
1897-1966)(이하 범부)의 최제우론( 崔 濟 愚 論 ) 에서 보여준 이해이다. 12) 마치 화이트헤 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가 서양의 학문(철학사)을 플라톤에 대한 각주의 축적(a series of footnotes to Plato)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 바 있듯이 한국사상사는 풍류도라는 아키타이프의 주석사(풍류도통사)로 보는 경우이다. 그런데 동학에서 유교의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수운 및 그 이후 전개 되는 敬 사상, 섬김의 전통은 퇴계 이황의 경 사상이 대중적, 여성적, 생명적, 평등적, 진 보적으로 펼쳐지는 한 노선으로 이해할 수 있다. 13) 더욱이 동학은 한국 사상사 내지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보이는 영성의 부활이라는 측면에서 더 논의해 갈 필요가 있다. 마치 왕양명이 주자가 이뤄놓은 공자에 대한 천( 天 )의 해석의 주석을 재해석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넓히고 다져간 것처럼 말이다. 야마시타 류지( 山 下 龍 二 )가 陽 明 學 의 宗 敎 性 이라는 논문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한 대로, 왕양명은 공자 이래 전승되어오던 종교성을 합리성이란 명분으로 배제시킨 주자학과 달리 宗 敎 性 을 다시 부활 한 측면이 있다. 주자학은 공자의 가르침에다 철학적인 이론을 덧붙인 것으로 기독교 신학과 유사하다. 기독교 신학이 성서의 가르침을 전제로 그 올바름을 증명하기 위해서 머리를 짜내어 철 12) 범부와 동학의 연관은 풍류정신 의 최제우론 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연보적으 로 소급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일련의 흐름을 짚어낼 수 있다.(이 부분은 최재목, 凡 父 金 鼎 卨 의 < 崔 濟 愚 論 >에 보이는 東 學 이해의 특징, 동학학보 21호, (동학학회, 2011.4.30.)을 참 고하여 정리한 것임) 첫째로, 범부의 동학에 대한 관심은 1920년대부터 나타난다. 즉, 범부가 28세 되던 1924년, 그 의 조부 金 東 範 이 수운 보다 한 살 아래로 두 사람은 고향 친구였는데 범부는 자신의 조부(와 동 네 노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라며 小 春 金 起 田 (1894-1948)에게 수운-동학에 대한 내용을 구술 하고 그것이 大 神 師 생각 이란 제목으로 기록되어 天 道 敎 會 月 報 ( 金 起 田, 大 神 師 생각, 天 道 敎 會 月 報 제162호, 1924.3, 16-17쪽.)에 실린 바 있다. 둘째로, 김정근교수의 구술 증언에 따르면, 범부는 1950년대 중후반(58세-63세)에 이 나라의 역사에서 최복술( 崔 福 述 )(=수운의 兒 名 )이 큰 인물이다 라는 표현을 자주 하였다고 생생하게 술 회한다. 셋째로, 범부 서거 6년 전인 1960년(범부 64세) 韓 國 日 報 1월 1일-8일자 지면에 겨울 여행기 雲 水 千 里 10회분을 발표한다. 즉, 제1회: 아리내( 閼 川 ) 行, 제2회: 昌 林 寺 址, 제3회: 北 川 椿 事, 제4회: 求 忠 堂 李 義 立, 제5회: 龍 潭 을 바라보고서, 제6회: 降 仙 臺, 제7회: 五 陵 巡 參, 제8 회: 溫 達 城 을 물어서, 제9회: 懷 墓 를 보고, 제10회: 壯 義 寺 옛터를 찾으니 가 그것인데, 이 가 운데 제5회: 龍 潭 을 바라보며 가 수운-동학 관련 글이다. 이 글들은 재미있게도 대부분 < 花 郞 - 護 國 - 建 國 - 風 流 >라는 주제로 되어 있어 어떤 의도를 갖고 기획 된 것으로 생각되며, 수운의 東 學 도 그 범주 속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범부는 자신의 어렸을 적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신 문사 일행과 함께 실제로 경주 금장 나룻터에 서서 바라보이는 수운의 고향 마을을 묘사했다. 그는 글에서 예로부터 경주 지방에서 부르던 대로 매룽골( 馬 龍 洞 ), 현실( 見 谷 面 ) 이라고 했다. 이 글에서 범부는, 동학이 啓 示 宗 敎 와 같다고 보고, 또한 그것이 우리 巫 俗 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는 여기서 내 비록 병들어서도 (중략) 푸른 무지개 같은 패기가 일어난다 (최재목 정다운 엮음, 龍 潭 을 바라보고서, 범부김정설단편선, (선인출판사, 2009), 202쪽)고 술회한 다. 넷째로, 앞서서 소개한 대로, 雲 水 千 里 가 소개되던 해(1960) 5월, 世 界 誌 에 崔 濟 愚 論 이 실 린다. 위의 네 가지 사항을 연결하면 하나의 일관된 線 (=맥락)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즉, 아 래 표와 같이 범부의 동학에 대한 관심은 風 流 花 郞 建 國 理 念 國 民 倫 理 등의 중요한 문제의식 과 상관성을 가지면서 단계적으로 제시되어 갔고, 범부의 만년의 관심이 수운-동학으로 귀착되어 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마침 김정근이 최근 연구에서 수운과 동학 관련은 범부 생애의 마지막까 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김정근, 凡 父 와 東 學, 앞의 책, 141쪽.)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매 우 타당한 지적으로 보인다. - 3 -
학적으로 논리를 도입한 것과 같이 주자학은 禪 宗 의 脫 洒, 解 脫 이나 傳 燈 의 사상으로부 터 脫 然 貫 通, 道 統 의 이론을 도출하고 또 理 事 의 사상을 흉내내어 理 氣 의 이론을 형성하 였다. 道 統, 理 氣 의 이론은 물론 經 書 의 가르침을 전제로 하여 그것을 정당화 한 것으로 유교신학이라고 해도 좋다. 양명학은 주자학과 다른 이론을 제공한 것이었는데, 역시 유교의 경서를 전제로 하고 理 事 無 碍, 理 事 不 二 와 같은 사상을 도입하여 그것을 致 良 知 라는 개념에다 집약하였다. 왕 양명이 도교나 불교쪽에 경사해가는 것을 벗어나 유교로 회귀했다고 하는 경우, 그것을 일반적으로 종교의 부정으로 보는 것은 정당하지 않을 것이다. 양명은 그 생애를 통해서 종교적인 심정을 계속 유지해왔고, 그것은 구체적인 행위로써 드러났다. 종교적인 문제는 생사, 영혼, 신, 하늘 등이었는데 이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가 양명의 생애를 건 과제 였다. (공자가) 怪 力 亂 神 을 피하고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을 종교적 관심의 결여로 해석 하고 유교를 倫 理 敎 의 圈 內 에 가두어두려는 이론은 주자학에서 시작된다. 공자는 천을 믿고 조상신을 받드는 사람이었다. 유교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종교성을 부활한 것이 양 명학이다. 良 知 는 內 在 하는 神 의 관념에 가깝다. 14) 왕양명이 천지령( 天 之 靈 ) 이 인지령( 人 之 靈 ) 에 부여되어 내재한 것을 양지( 良 知 )=영명 도표1 범부의 동학에 대한 관심의 변천 1924년(28세) 小 春 金 起 田 에 게 수운-동학에 대한 내용 구술 金 起 田, 大 神 師 생각, 天 道 敎 會 月 報 제162호 (1924.3) 1950년대 중후반경(58세-63 세) 이 나라의 역사에서 최복 술( 崔 福 述 )(=수운의 兒 名 )이 큰 인물이다 라는 표현을 자 주 함 김정근 교수의 구술 증언(김 정근, 凡 父 와 東 學, 金 凡 父 의 삶을 찾아서, (서울: 도 서출판 선인, 2010) 1948년(52세): 經 世 學 會 조 직, 建 國 理 念 연구 강의/ 花 郞 外 史 구술(멋- 風 流 포 함) 1952년(56세): 花 郞 外 史 초 판 간행 1950년대 초반 경: 國 民 倫 理 特 講 강의 1955년(59세): 경주 계림대학 장에 취임 1958년(62세): 건국대학 부설 동방사상연구소장 취임 1960년 1월-5월경(64세) 龍 潭 을 바라 보고서 를 발표 韓 國 日 報 1 월 1일-8일자 지면에 겨울 여 행기 雲 水 千 里 10회분 중 제5 회 째 崔 濟 愚 論 발표 김범부, 世 界 2, (국제문화연구소, 1960.5)( 東 學 創 道 百 週 年 紀 念 特 輯 중 하 나) 1960년4월: 風 流 精 神 과 新 羅 文 化 발표 1961년(65세): 邦 人 의 國 家 觀 과 花 郞 精 神 발표. 1962년(66세): 建 國 政 治 의 理 念 저술 범부는 단순히 수운을 평가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추구했던 평생의 작 업, 즉 풍류도의 발견과 그 근대적 재생의 생생한 모습, 그리고 그 실현의 구체적 인물을 최종적으 로 수운으로 여겼다고 판단된다. 수운은 범부 만년의 사상을 이론적, 실천적으로 모형화한 하나의 範 例 였던 것이다. 그래서 범부는 수운의 내림( 降 靈 ) 東 學 성립을 결론적으로 風 流 道 의 부활로 보고, 이 사건을 歷 史 的 大 降 靈 神 道 盛 時 精 神 의 奇 蹟 的 復 活 國 風 의 再 生 史 態 의 驚 異 정말 어마어마 한 역사적 대사건 (김범부, 崔 濟 愚 論, 위의 책, 124쪽.)으로 평가하고, 수운을 기적적 존재 불세출의 천재 로, 동학의 교설을 동방의 자연사상+유교의 懿 德 精 神 + 玄 妙 한 仙 道 를 혼연 융 합한 것 으로 보고 있다.(김범부, 崔 濟 愚 論, 앞의 책, 144-145쪽.) 13) 이에 대한 일부 즉 여성주의, 평등주의의 논의는 최재목, 聖 人 을 꿈꾼 조선시대 여성철학자 張 桂 香 -한국 ' 敬 ' 사상의 여 성적 실천에 대한 한 試 論 -, 陽 明 學 37, (한국양명학회, 2014.4.25) 을 참조 바람. 14) 山 下 龍 二, 陽 明 學 の 宗 敎 性, 陽 明 學 第 7 號, ( 二 松 學 舍 大 學 陽 明 學 硏 究 所, 1995), 2-3쪽. - 4 -
( 靈 明 )으로 본 것은, 사람이 천지령( 天 之 靈 ) 을 대신하여 천지ㆍ우주 속에서 주된 역할을 해갈 수 있음을 뜻함과 동시에 인간 속에 하늘의 주재성이 위임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천지의 마음( 人 是 天 地 的 心 ), 사람이 곧 하늘이다 라는 영적인 선언이다. 수운이 仙 語 (= 天 語, 한울님( 上 帝 = 天 主 )의 말씀)가 귀에 들려서( 有 何 仙 語, 忽 入 耳 中 ) 15) 이것을 듣고 득도했다고 하는 것이나 왕양명이 37세 되던 해 그가 좌천되어 거주하였던 중국의 서 북단 귀주성( 貴 州 省 ) 용장( 龍 場 )에서 체험하는 대오( 大 悟 )의 꿈( 夢 ) 이야기는 동학과 동일 한 체험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홀연히 한밤중에 格 物 致 知 의 본지를 大 悟 하였다. 꿈에서 누군가가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치며 펄쩍 뛸 지경이었다. 성인의 도는 자신의 본성( 性 ) 속에 자 족한 것이다, 이전에 마음 밖의 사물에서 이치를 구한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 게 되었다. 이에 묵묵히 五 經 의 말을 기록하여 증명해보니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래 서 五 經 臆 說 을 지었다. 忽 中 夜 大 悟 格 物 致 知 之 旨, 夢 寐 中 若 有 人 語 之 者, 不 覺 呼 躍, 從 者 皆 驚, 始 知 聖 人 之 道, 吾 性 自 足, 向 之 求 理 於 事 物 者 誤 也, 乃 黙 記 五 經 之 言 證 之, 莫 不 脗 合, 因 著 五 經 臆 說. 16) 이 부분은 왕양명 사상의 주된 특징으로 꿈[ 夢 ] 깨달음[ 覺 悟 ]의 구조를 보여준다. <도표2: 양명학의 꿈[ 夢 ]과 良 知 와의 관련> 사실 왕양명의 독창적인 철학이 탄생하는 광경은 수운의 동학이 탄생하는 장면과 유사하 다. 정신이 혼미하여 미친 것 같기도 하고, 술에 취한 것 같기도 하여, 엎어지고 넘어지고, 마룻바닥을 치며 몸이 저절로 뛰어오르고 기( 氣 )가 뛰놀아 병의 증상을 알 수 없으며, 말로 형용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공중으로부터 완연한 소리가 있어 자주 귀 근처로 들려 오는데, 그 단서를 알 수 없었다. 공중을 향해 묻기를 공중에서 들리는 소리는 누구입니까? 하니, 상제( 上 帝 )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바로 상제이다. 너는 상제를 모르느냐? 너는 곧 백지( 白 紙 )를 펴고 나의 부도( 符 圖 )를 받아라. 15) 布 德 文, 東 經 大 全 16) 陽 明 集 卷 32, 年 譜 37 歲 條. - 5 -
곧 백지를 펴니, 종이 위에 완연하게 비추어 실려 있었다. 17) 왕양명도 깨달음이 온 뒤에 그런 자각에 기초하여 심즉리 의 학설을 제창하고 오경억설 ( 五 經 臆 說 ) 을 짓는다. 이처럼 수운과 양명에서 보이는 오디오적-듣기-여성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것은 파스칼이 팡세 에서 말하는 기하의 정신이 아니라 섬세의 정신 18) 에 해당하는 것이 라 할 수 있다. 19) 이 섬세의 정신은 수운에게도 양명에게도 무( 巫 ) 와 무( 武 ) 의 두 요소로서 드러나며 두 사상가의 르상티망을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수운의 용담유사 뒷편에 붙은 검결( 劍 訣 ) 20) (1861년에 지은 검무( 劍 舞 )를 추기 위한 가사. 이 노래가 문제가 되어 최제우는 처 형당하게 되었다. 검결은 원래 검객이 갖고 있는 秘 訣 을 말한다.)은 선교( 仙 敎 )의 전통에서 보여지는 무( 武 ) 와 무( 巫 ) 의 합체적 요소를 볼 수 있다. 21) 검결 은 예컨대 범부 김정설 이 화랑( 花 郞 ) 에는 종교적 요소( 巫 )+예술적요소( 風 流 )+군사적요소( 武 ) 22) 가 합체 되어 있다고 보는 것과 맥락이 통한다. 수운은 단순히 선도( 仙 道 )의 대가일 뿐 아니라 무도( 武 道 )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화랑세기 ( 花 郞 世 紀 ) 에 보면 선도는 무도와 짝을 이루면서 우리의 고유한 사유체계인 선교( 仙 敎 )의 삼대영역 중 상층의 두 영역을 구성한다(아래 그림 23) 참조). 이때 하층에는 무교( 巫 敎 ) 즉 샤머니즘이 놓인다. 仙 敎 武 道 ( 國 仙 ) 仙 道 ( 神 仙 ) 巫 敎 (샤머니즘): 巫 [ 巫 覡 ] [도표 3] 仙 敎 와 武 道 의 관련성 무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은 무( 巫 )나 무격( 巫 覡 )이라면, 상층에 있는 무도의 이상적인 인간 상은 국선( 國 仙 )으로서 무예수련(주로 검도)에 의하여 충분한 의기( 義 氣 )를 배양한 인물이 다. 국선은 지극히 입세간적( 入 世 間 的 )인 인간상으로 호국입공( 護 國 立 功 )을 통해서 불의( 不 義 )의 무리를 박멸하고 국가가 지향해야할 목표를 명확히 설정, 그것을 달성함으로써 나라 를 이상적으로 바꾸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인간상이 바로 15세 풍월주 김유신( 金 庾 信 )이 다. 24) 17) 尹 錫 山 역주, 道 源 記 書, (문덕사, 1991), 25쪽. 18) 블레즈 파스칼, 팡세, 현미애 옮김, (을유문화사, 2013), 313-7쪽 참조. 19) 이에 대해서는 최재목, 동아시아 陽 明 學 者 들에게 있어 꿈[ 夢 ]과 철학적 깨달음[ 覺 悟 ]의 문제 과 王 陽 明 良 知 論 에서 靈 明 의 意 味, 咸 錫 憲 과 陽 明 學 - 한 사람: 王 陽 明, 大 學 問 을 중 심으로 - 를 참조. 20) 天 道 敎 經 典, 237-238쪽. 21) 이에 대해서는 윤석산, 검무 복원을 위한 시론(상) (http://www.chondogyo.or.kr/shiningan/oldsite/n2005/n06/n0623.htm)(검색일자: 2010.8.1)을 참 고하기 바람. 22) 金 凡 父, 國 民 倫 理 特 講, 花 郞 外 史 ( 三 版 ), (대구: 以 文 出 版 社, 1981), 218쪽 참고. 23) 손병욱, 동학의 삼칠자 주문 과 다시 개벽 의 함의, 동학학보 제18호, (서울: 동학학회, 2009), 215쪽의 그림이 내용을 축약하여 만든 것임. - 6 -
어쨌든 동학 내에서 작동하는 오디오적-듣기-여성적 특성은 멀리는 유교-양명학, 가까이 는 한국의 풍류도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며, 이것이 여성적-서민대중적-평등적-혁명적-진 보적 흐름으로 작동해가기도 한다는 점은 주목해볼 대목이다. 3. 수운의 섬김 전통과 퇴계의 경 사상의 진보적 전개 수운은 몽중노소문답가( 夢 中 老 少 問 答 歌 ) 에서 자신이 어릴 때 많은 책을 읽었음을 시사한 다.... 아들아기 탄생하니 기남자 아닐런가 얼굴은 관옥이오 풍채는 두목지라 그러그러 지내나니 오륙세 되었더라 팔세에 입학( 入 學 )해서 허다한 만권시서( 萬 卷 詩 書 ) 무불통지( 無 不 通 知 ) 하여내니 생이지지( 生 而 知 之 ) 방불하다 십세를 지내나니 총명은 사광( 師 曠 ) 25) 이오... 수운이 공부를 배운 것은 부친 근암( 近 菴 ) 최옥( 崔 鋈. 자는 子 成. 1762-1840)에게서 였 다. 근암은 당시 최치원의 후손으로, 그 부친의 이름은 종하( 宗 夏 )이다. 1762년( 英 祖 38년, 壬 年 )에 경주 가정리( 稼 亭 里 )에서 태어났는데, 13세 때부터 기와( 畸 窩 ) 이상원( 李 象 遠 )의 문하에서 배웠다. 기와는 바로 퇴계 영남학파의 선봉인 갈암( 葛 庵 ) 이현일( 李 玄 逸 )의 현손 ( 玄 孫. 5세손)이다. 근암은 畸 窩 先 生 文 集 序 ( 近 庵 集 卷 五 )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직 퇴계 선생이 우리나라 유학을 깊이 분석하고 널리 종합하여 매우 뜻 깊은 학설을 이루었다. 그래서 위로는 주자의 참된 전통을 이어받았고 밑으로는 鶴 峯 金 誠 一, 敬 堂 張 興 孝, 存 齋 李 徽 逸, 葛 庵 李 玄 逸, 密 庵 李 栽 같은 여러 어진 학자들의 원천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大 山, 李 象 靖 선생이 우리나라 성리학을 일으켜 떨치게 하였다. 나를 가르친 기와 선생은 바로 갈암의 玄 孫 (5세손)이며 밀암의 외손인 대산의 문하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 았다. 그러므로 선생의 도와 문장은 그 뿌리가 있어서 순수하다. 26) 근암은 뒤에 역시 부친의 뜻에 따라 잠시 과거의 준비를 위한 공부에 온 힘을 기울였지만 과거 공부에 너무 많은 시간과 정력을 빼앗기고 그 뜻도 이루지 못했다. 악몽 같은 지난날 을 뉘우치고 일찍이 기와 문하에서 깨달았던 참된 자기를 위한 학문( 爲 己 之 學 ) 곧 퇴계 성 리학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나이는 60을 지났다. 그는 절망을 딛고 오로지 퇴계의 성리학에 몰두하여, 기와의 문하에서 깨달은 것은 퇴계학이었다. 27) 이러한 근암의 유학은 수운의 득 도와 계시라는 독창적 사상을 여는데 매우 중요한 기반이 된다. 28) 24) 손병욱, 동학의 삼칠자 주문 과 다시 개벽 의 함의, 동학학보 제18호, (서울: 동학학회, 2009), 213-214쪽을 참조. 25) 師 曠 之 聰 을 말한다. 師 曠 은 晉 의 平 公 (재위: B.C. 558~532) 때의 악사로서 맹인이었으나 음악에 출중하였다. 26) 惟 退 陶 夫 子, 集 東 儒 之 大 成, 紹 朱 子 之 嫡 統, 下 以 啓 鶴 敬 存 葛 密 諸 賢 之 淵 流 大 山 先 生 得 密 翁 正 傳, 扶 植 吾 道 興 起 斯 文, 先 生 以 葛 密 玄 孫, 受 學 於 大 山 門 下, 則 先 生 之 道 之 文, 其 眞 有 所 本 矣.( 崔 鋈, 近 庵 集, 최 동희 옮김, (창커뮤니케이션, 2005), 587쪽) 27) 최동희, ( 近 庵 集 ) 머리말, 近 庵 集, 19쪽. 28) 위의 내용은 최재목, 凡 父 金 鼎 卨 의 < 崔 濟 愚 論 >에 보이는 東 學 이해의 특징, 동학학보 21 호 (동학학회, 2011.4) 참조. - 7 -
퇴계학 특히 그의 경 사상은 장계향과 존재 갈암을 거쳐, 대산으로 이어져 근암 수운 해월로 저류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는 이 점을 좀 더 언급해두기로 한다. 갈암은 부친 석계( 石 溪 ) 이시명( 李 時 明. 1590-1674)과 모친 장계향( 張 桂 香. 1598-1680)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기서 동학과 관련하여 주목할 사람은 장계향이다. 장계향은 퇴계( 退 溪 ) 이황 李 滉 (1501-1570)의 학통을 이어받은 경당( 敬 堂 ) 장흥효( 張 興 孝. 1564-1634)의 무남독녀(외동딸)로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장계향은, 퇴 계의 학풍과 맥을 잇는 학봉( 鶴 峰 ) 김성일( 金 誠 一. 1538-1593)의 수제자인 아버지 경당 밑에서 자랐기에 어려서 부터 총명하였다. 경당은 그의 2남 존재( 存 齋 ) 이휘일( 李 徽 逸 )의 경당행장( 敬 堂 行 狀 ) 에서 기술하였듯이, 학봉( 鶴 峯 ) 김성일( 金 誠 一 )에게 배웠고, 학봉이 죽자 다시 서애( 西 厓 ) 류성용( 柳 成 龍. 1542-1607)과 한강( 寒 岡 ) 정구( 鄭 逑. 1543-1620) 에게 배웠다. 29) 장계향은 조선사상사에 사상적 족적을 남긴 2남 존재( 存 齋 ) 이휘일( 李 徽 逸. 1619-1672)과 3남 갈암( 葛 庵 ) 이현일( 李 玄 逸. 1627-1704) 같은 학자를 배출하는데, 이 두 형제는 서경( 書 經 ) 의 홍범편( 洪 範 篇 ) 을 상세히 해설한 홍범연의( 洪 範 衍 義 ) (1688년) 30) 를 남긴다. 이후 존재와 갈암의 학풍은 밀암( 密 菴 ) 이재( 李 栽. 1657-1730)를 거쳐서, 밀암의 외손자인 대산( 大 山 ) 이상정( 李 象 靖. 1711-1781)과 대산의 동생 소산( 小 山 ) 이광정( 李 光 靖. 1714-1789)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학통은 퇴계 학봉/서애/한강 경 당 장계향 존재/갈암 대산/소산 의 계보를 보인다. 장계향은 19세에 아버지 경당의 제자인 석계( 石 溪 ) 이시명( 李 時 明. 1590-1674)의 계실 ( 繼 室 )로 혼인하였다. 그녀는 영덕을 거쳐 영양에서 살면서, 전부인(광산 김씨) 소생 1남 (상일 尙 逸 ) 1녀, 그리고 자신이 낳은 6남(휘일 徽 逸, 현일 玄 逸, 숭일 嵩 逸, 정일 靖 逸, 융일 隆 逸, 운일 雲 逸 )과 2녀, 합 10남매(7남 3녀)를 훌륭히 키웠다. 전부인의 아들을 어루만져 주 고 사랑하기를 자기의 낳은 아들과 차별이 없었으며, 그들이 시집 장가를 갈 때에는 자기의 낳은 자녀들보다 더 많은 혼수와 물건을 주었다 31) 고 전한다. 장계향은 조선시대에 보기 드문, 성인( 聖 人 )을 꿈꾼 여성 유학자였다. 이것은 동아시아 유 교사, 지성사에서 흔치 않은 일이었다. 마치 <나는 여성의 몸으로 붓다(Buddha) 가 되리 라!> 32) 는 선언과 같은 중대한 사건이다. 물론 이러한 유학적 전통은 송학의 대전제인 인 간은 배움에 의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는 대담한 선언의 실천선상에 놓이는데, 여성 유학자인 임윤지당 任 允 摯 堂 (1721-1793) 33) 은 여자도 성인이 될 수 있다! 34) 고 당당히 29) 李 徽 逸, 敬 堂 行 狀, 장계향학 문헌자료( 上 ), (경상북도 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12), 283-284쪽 참조. 30) 이휘일이 편찬 간행에 착수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중도에 세상을 떠나자, 동생 이현일이 그 뜻을 받들어 1688년(숙종 14)에 완성하였다. 洪 範 衍 義 의 衍 義 란 뜻을 넓혀서 자세히 설명함 또는 그렇게 설명한 것. 31) 李 玄 逸, 行 實 記, 장계향학 문헌자료( 上 ), (경상북도 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12), 110-111쪽. 32) 비키 매킨지 지음, 나는 여성의 몸으로 붓다가 되리라, 세등 옮김, (김영사, 2003). 서구 여성 최초로 티베트 승려가 돼 외진 동굴에서 12년간 은거 수행한 텐진 빠모 의 수행기록을 적은 책이 다. 33)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로, 본관은 풍천, 호는 윤지당( 允 摯 堂 ), 강원도 원주 출신이다. 34) 윤지당이 말했다. 나는 비록 부인이지만, 하늘에서 받은 성품은 애당초 나면서의 차이가 없다 하 였다. 또 부인으로 태어나 태임( 太 任 )과 태사( 太 姒 )와 같은 성녀가 되기를 스스로 기약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자포자기한 사람들이다. 고 하였다. 그렇다면 비록 부인들이라도 능히 큰 실천과 업 적이 있으면 또한 가히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모르겠지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 까?( 允 摯 堂 曰, 我 雖 婦 人, 而 所 受 之 性, 初 無 男 女 之 殊, 又 曰, 婦 人 而 不 以 任 姒 自 期 者, 皆 自 棄 也, 然 則 雖 婦 人 而 能 有 爲, 則 亦 可 至 於 聖 人, 未 審, 夫 子 以 爲 如 何 )( 允 摯 堂 遺 稿 附 錄, 靜 一 堂 遺 稿 중에서)[임윤 - 8 -
선언한다. 장계향은 나아가서 자신뿐만 아니라 자식들, 손자들에게도 모두 성인을 지향하도 록 권한다. 35) 장계향의 아들 갈암은 모친의 행실기( 行 實 記 ) 에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모친은) 선군자(돌아가신 갈암의 부친=석계 이시명)를 받들어 섬기면서 근 60년 동안 을 서로가 손님을 대접하듯이 공경하였으며( 相 敬 如 賓 ), 모든 일을 반드시 남편에게 먼저 말하여 답을 받아서 실행하였다. 36) 어린 여종을 돌보아 주기를 마치 자기의 딸처럼 하여, 그들에게 질병이 생기게 되면 반드시 그들을 위하여 음식을 먹여 주고 간호하여 온전히 편안함을 얻도록 하였으며, 그 들이 과실과 나쁜 일을 저지르게 되면 조용히 가르치고 타일러서 그들로 하여금 모두가 감화하여 복종하도록 했으므로, 남의 집 종들도 이런 일을 듣고서는 모두가 부인 집의 종이 되어 심부름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부인께서 가는 곳마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아이와 늘어서 자녀가 없는 사람과 늘어서 아내가 없는 사람과 늙어서 남편이 없는 사람과 늙어서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이 있으면, 불쌍히 여겨 구휼하고 도와주기를, 마치 남이 알지 못하는 자신의 근심처럼 여기고는 자신의 가난하고 곤궁한 이유로써 게을리하 는 일이 없었다. 혹시 몰래 남에게 음식물을 보내주고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니, 이웃의 늙 은이와 마을의 할미들이 모두가 그녀의 은덕에 감동하여 오래 살고 복받기를 빌고서, 죽 어서도 반드시 은덕에 보답하겠다고 축원하는 사람까지 있게 되었다. 37) 자신의 몸을 공경하는 심성은 결국 타자 존중과 공경으로 실현될 수 있다. 경신 敬 身 은 곧 경인 敬 人 이고 경물 敬 物 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나의 몸(=내 속)에서 남(타자의 몸)을 발 견하는 것은 成 己 (= 修 己 )에서 成 物 (= 治 人 )로 나아가는 일이다. 장계향은 빈민들을 구휼하 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지당, 국역 윤지당 유고, 조선시대사학회 역주, (원주시, 2001), 264쪽]. 35) 갈암 이현일이 쓴 어머니 장계향의 실기( 행실기 行 實 記 )에 보면 장계향의 평소 생각은 성현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 행동하는 것이었다. 부인(=장계향)께서는 옛날의 성인과 현인의 말씀 은 반드시 존중하여 본받아야만 될 것이다 고 여기고 있었는데, 매양 글은 글대로 읽고 사람은 사람대로 행동하는 폐단을 탄식하고 있었다. (이현일, 行 實 記, 장계향학 문헌 자료( 上 ), (경상북도 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12), 111쪽. 번역문은 인용자가 일부 수정하였음.)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성인은 누구나 보통 사람도 노력만 하면 누구나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 다. 聖 人 이 된 사람은 과연 세상에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고 보통 사람보다 지나치고 보 통 사람보다 아주 뛰어난 일이 있다면 진실로 따라갈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성인의 容 貌 와 言 語 가 처음부터 보통사람과 다른 데가 없다. 성인의 행동 또한 모두 인륜의 날 마다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성인을 배우지 않는 것을 근심해야할 따름이다. 진 실로 성인을 배우게 된다면 또한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이현일, 行 實 記, 장계향 학 문헌자료( 上 ), (경상북도 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12), 113쪽. 번역문은 인용자가 일부 수정 하였음.) 장계향의 성인음 聖 人 吟 에는 성인에 대한 todr가이 잘 드러나 있고 아울러 손자 신급 新 及 (이온 李 穩 의 아명)에게 준 증손신급 贈 孫 新 及, 손자 성급 聖 及 (이재 李 栽 의 아명)에게 지어 준 증손성 급 贈 孫 聖 及 에게 모두 학문을 닦아 성인의 경지에 오를 것을 희구하는 그녀의 바람이 들어있다. (이에 대해서는 최재목, 聖 人 을 꿈꾼 조선시대 여성철학자 張 桂 香 -한국 ' 敬 ' 사상의 여 성적 실 천에 대한 한 試 論 -, 陽 明 學 37, (한국양명학회, 2014.4.25)을 참조) 36) 이현일, 行 實 記, 장계향학 문헌자료( 上 ), (경상북도 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12), 110쪽. 일부 인용자 보완. 37) 이현일, 行 實 記, 장계향학 문헌자료( 上 ), (경상북도 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12), 111쪽. 번역문은 인용자가 일부 수정하였음. - 9 -
영해지방과 영양지방에 전해져 오는 도토리 죽을 통한 빈민구휼은 장계향의 애민실천을 그대로 보여준다. 지금도 (시아버지: 석계 이시명의 부친) 이함 李 菡 의 묘소 부근과 두들 마을 석계고택 부근에 고목이 된 많은 도토리나무는 장계향이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을 위해 도토리를 이용하여 죽을 만들어 나누어 먹였다는 일화를 입증하는 것이다. 38) 장계향의 사람과 사물 공경의 정신은 궁극적으로 하늘 섬김/모심 ( 敬 天, 侍 天 )의 사상으로 도 이어질 수 있다. 마치 부친 경당이 나도 또한 남이고, 남 또한 나이다. (중략) 내가 또 한 하늘이고, 하늘 또한 나이다( 己 亦 人, 人 亦 己, 己 亦 天, 天 亦 己 ) 39) 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람이 곧 하늘( 人 乃 天 ) 이라는 사상에 가 닿는다. 장계향의 경 사상은 거시적으로 보면 한국사상사에 저류하는 경 사상의 흐름 위에 있다. 다시 말하면 온 생명의 섬김 = 경물, 하늘섬김/모심 = 경천 의 사상이다. 이것은 한국 사상사의 경 사상이 유교적으로, 그리고 여 성적으로 재해석될 때 각각의 차이 를 보이면서 반복 되고 있다. 유교적 측면에서 본다면 장계향의 경 사상은 퇴계의 철학이 그녀에게서 여성적으로 실천되고, 이 정신은 수운, 해월 을 거쳐 전승되는 것이다. 요컨대, 퇴계의 경 사상은 장계향-존재 갈암을 거쳐, 대산으로 이어져서, 근암 수운 해월로 저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서애 석계 존재 대산 퇴계 학봉 경당 정부인 장계향 밀암 근암 수운 한강 갈암 소산 [도표4: 장계향 경 사상의 연원과 전승] 동학의 온 생명의 섬김 = 敬 物, 하늘섬김/모심 = 敬 天 사상은 한국고대에서 조선시대로 줄곧 이어져 오는 것이다. 이 전통은 단군신화의 하늘 섬김 사상, 앞서 언급한 원효의 歸 命 사상, 龍 飛 御 天 歌 의 천명= 하 하 사상 40), 東 學, 심지어는 근대기 윤동주의 序 詩 같은 데서도 그 맥이 면면히 이어진다고 본다. 덧붙인다면 최근에 필자가 발견한 사실이지만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 는 국내에서만 영향 을 미친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에 이미 일본에서도 선별적으로 읽혔음을 알 수 있다. 예컨 대 제10 夙 興 夜 寐 箴 圖 는 일본 양명학의 시조인 나카에 토쥬( 中 江 藤 樹. 1608-1648) 및 그 문하생들에게 읽혔던 증거가 발견된다. 이것은 1940년에 일본서 간행된 中 江 藤 樹 先 生 全 集 에 中 江 藤 樹 의 문인 岩 佐 太 郞 右 衛 門 ( 近 江 의 岩 佐 定 一 氏 소장)의 후손에게 소장되어 있다고 밝힌다. 주자하다시피 숙흥야매잠 은 陳 茂 卿 ( 名 은 栢 )이 만들어 잠언( 箴 言 )으로 삼은 것인데, 이황은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고 보완 설명을 붙였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38) 김춘희, 장계향의 여중군자상과 군자교육관에 관한 연구, 장계향학 문헌자료( 中 ), (경상북 도 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12), 55쪽 및 박희택, 국난 속에서 여성리더십이 더 빛난다, 데 일리안 (2010.12.25) (http://www.dailian.co.kr/news/view/231856)(검색: 2013.11.1) 참조. 39) 이에 대해서는 김춘희, 장계향의 여군자상과 군자교육관에 관한 연구, 장계향학 문헌자료 ( 中 ), (경상북도 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12), 28-29쪽 참조. 40) 龍 飛 御 天 歌 에서는 천, 천명을 하 하 으로 번역하고 있다(정대위, 용비어천가에 보이는 천명사상의 종교사적 의의, 그리스도교와 동양인의 세계, (신학연구소, 1986), 135쪽 참조). - 10 -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일상에서 성학을 익히고 실천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바로 경 의 실천방법을 제시한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성학이 바로 경을 핵심원리로 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며, 이 점이 敬 을 부정하고 誠 을 강조하는 나카에 토쥬에게도 일상적 행위의 실천 매뉴얼로 참고하기에 충분했을 것으로 보인다. 中 江 藤 樹 先 生 全 集 에 있는 夙 興 夜 寐 箴 圖 를 살펴보면, 그림 제일 위에는 ( 陳 茂 卿 ) 夙 興 夜 寐 箴 圖 筆 者 未 詳 으로 되어 있고, 그림의 밑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이 붙어있다: 이 도는 토쥬( 藤 樹 )선생의 문인 이와사타로우에몽( 岩 佐 太 郞 右 衛 門 ) 직계 후손[ 嫡 流 ]의 자 ( 字 )로 남아있는 것으로, 혹시 선생이 문인에게 교시( 敎 示 )한 자료로 삼았던 것은 아닐까 (오우미( 近 江 ) 岩 佐 定 一 氏 소장)[ 中 江 藤 樹, 中 江 藤 樹 先 生 全 集 第 5 冊, ( 岩 波 書 店, 1940), 69쪽]라고 적고 있다. 그림의 내용은 같은 것이지만 형식은 약간 변형하여 보다 간편하게 만들었다. ( 陳 茂 卿 ) 夙 興 夜 寐 箴 圖 筆 者 未 詳 이라 한 것은 1940년대가 일제의 통치기간이므로 의도적으로 퇴계 의 영향 을 지우기 위한 작업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당시에 일본에서 이런 초보적인 정보를 분별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夙 興 夜 寐 箴 圖 가 이황의 작품인 것을 알면서 도 ( 陳 茂 卿 ) 夙 興 夜 寐 箴 圖 라고 하고, 더욱이 筆 者 未 詳 이라 해 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에도( 江 戶 ) 시대에 이황의 성학십도 가 양명학자들에게도 읽혔다는 점이 흥미로운 점이다. 성학십도 의 일본 유포 건은 앞으로 구체적인 조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도표5: 이황의 성학십도 중 제 10도인 夙 興 夜 寐 箴 圖 도표6: 中 江 藤 樹 先 生 全 集 에 실려 있는 ( 陳 茂 卿 ) 夙 興 夜 寐 箴 圖 筆 者 未 詳 (실제는 이황의 夙 興 夜 寐 箴 圖 임) 4. 19세기 경상도의 유교전통과 대응 방식: 결어를 겸해서 우선 동학의 흥기와 전개 의 맥락을 이해하는데 19세기 경상도의 유교전통 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1860년 경상도 경주에서 창도된 동학은 초창기에는 경북의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전파되 - 11 -
었다. 하지만 1874년 대원군이 실각하고 민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동학은 삼남 지방으로 교 세가 확장되었고, 교문의 조직망도 강화되었다. 1894년 동학은 농민세력을 동원한 반봉건, 반침략의 농민전쟁을 통한 민족운동으로 승화되었다. 41) 19세기 후반 경상도 지방을 기반으로 한 영남학파 는 경북 동북지역에서 활동한 정제( 定 齋 ) 유치명( 柳 致 明. 1777-1861)의 정제학파( 定 齋 學 派 ), 경북 서남지역과 경남 서부지역에 서 활동한 한주( 寒 洲 ) 이진상( 李 震 相. 1818-1885)의 한주학파( 寒 洲 學 派 ), 경부 동남지역 에서 활동한 사미헌( 四 未 軒 ) 장복추( 張 福 樞. 1815-1900)의 사미헌학파( 四 未 軒 學 派 ), 경남 지역과 경북 동남지역에서 활동한 성재( 性 齋 ) 허전( 許 傳. 1797-1886)에 연원하는 성재학 파( 性 齋 學 派 ) 등으로 분파되어 외세 침략과 유교사회 내부의 변동이라는 위기에 직면해 있 었다. 42) 물론 동학도 마찬가지의 과제를 가지고 있었으나, 19세기 후반 경상도 지방의 영남학파 와 차이가 있었다. 이 연속 불연속을 좀 더 살펴보자. 이것은 수운 재세 시 동학에 입교한 인 물들이 바라본 동학의 특징에서 살필 수 있다. 즉 수운 재세 시 동학 입교 인물들이 이해한 동학의 키워드는 1치병, 2 유무상자( 有 無 相 資 ) 평등 사상, 3외세로부터의 불안 모면, 4조선왕조 모순에의 대항이었다. 43)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첫째, 수운이 동학을 포교할 당시 입교한 인물들의 상당수는 치병( 治 病 ) 이 목적이었다. 이것은 수운 자신이 그 말씀에 느끼어 그 영부를 받아써서 물에 타서 마셔 본 즉 몸이 윤택 해지고 병이 낫는지라, 바야흐 로 선약인줄 알았더니... 라는 영부탄복( 靈 符 呑 服 ) 의 효험 소식 44) 과도 관련이 있다. 둘째, 당시 동학교도들은 양이( 洋 夷 : 서양오랑캐)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위기의식 하에 전쟁( 兵 火 ) 극복을 위한 것이었다. 셋째, 동학 제창 직후부터 내걸었던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가 서로 돕는 유무상자( 有 無 相 資 ) 와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평등사상 ( 班 常 貴 賤 男 女 차별 철폐)에 공감한 것이다. 수운은 득도 후 가장 먼저 부인에게 동학을 전파하였으며, 거 느리고 있던 두 명의 여자 종을 해방하여 한 명은 며느리로, 다른 한 명은 수양딸로 삼았 다. 예컨대 이런 소식은 머슴놈 으로 천대받으며 젊은 시절을 보내야 했던 해월 최시형에게 구원의 복음 으로 들렸을 것처럼 45) 말이다. 넷째, 동학에 가탁하여 조선왕조=체제질서의 병폐와 모순을 변혁하고 거기에 대항하려 하거나 자신들의 불우한 사회경제적 처지를 개선 하려는 비판세력들도 입교하였다. 이것은 동학 측으로서도 문제가 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수운도 이미 이들을 난도난법( 亂 道 亂 法 )하는 사람 46) 등으로 비난 41) 권대웅, 경상도 유교지식인의 동학농민군 인식과 대응, 한국근현대사연구 제51집, (2009 겨울호), 72쪽. 42) 권대웅, 경상도 유교지식인의 동학농민군 인식과 대응, 한국근현대사연구 제51집, (2009 겨울호), 73쪽 및 琴 章 泰 高 光 稙 편, 儒 學 近 百 年, ( 博 英 社, 1984), 5-6쪽 참고. 43) 이하의 내용은 朴 孟 洙, 東 學 과 傳 統 宗 敎 와의 交 涉, 동학사상의 새로운 조명, 영남대 민족 문화연구소 편, (영남대출판부, 1997), 142-3쪽을 요약하였음. 44) 나도 또한 그 말씀에 느끼어 그 영부를 받아써서 물에 타서 마셔 본 즉 몸이 윤택 해지고 병이 낫는지라, 바야흐로 선약인줄 알았더니 이것을 병에 써봄에 이르른 즉 혹 낫기도 하고 낫지 않기도 하므로 그 까닭을 알 수 없어 그러한 이유를 살펴본 즉 정성드리고 또 정성을 드리어 지극히 한울 님을 위하는 사람은 매번 들어맞고 도덕을 순종치 않는 사람은 하나도 효험이 없었으니 이것은 받 는 사람의 정성과 공경이 아니 겠는가( 吾 亦 感 其 言 受 其 符 書 以 呑 服 則 潤 身 差 病 方 乃 知 仙 藥 矣 到 此 用 病 則 或 有 差 不 差 故 莫 知 其 端 察 其 所 然 則 誠 之 又 誠 至 爲 天 主 者 每 每 有 中 不 順 道 德 者 一 一 無 驗 此 非 受 人 之 誠 敬 耶 ) ( 布 德 文, 東 經 大 全 ) 45) 朴 孟 洙, 東 學 과 傳 統 宗 敎 와의 交 涉, 동학사상의 새로운 조명,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편, (영남대출판부, 1997), 144쪽. 46) 도수사, 용담유사 에는 이렇게 있다 :...우습다 저사람은 - 12 -
하고 있었다. 아울러 수운 재세시 동학배척여론을 일으켰던 보수유생들의 동학배척통문( 東 學 排 斥 通 文 ) 에서도 이들을 지식이 얕고 재주가 경박하여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괴이한 행동을 하는 부류( 知 平 淺 才 薄, 好 新 行 怪 之 流 ) 라고 표현하였다. 위의 내용으로 볼 때, 주자학 이외의 사상을 이단으로 배척하던 기득권 세력=양반지배층 의 입장에서 볼 때 동학은 이미 척사( 斥 邪 )의 주요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이단시하던 서학을 이적금수( 夷 狄 禽 獸 ) 로 보고, 동학을 이매망량( 魑 魅 魍 魎 ) 47) 즉 도깨비 로 보고 있 었다. 그렇게 적대시하는 이면에는 동학의 전도력과 조직력이 조선의 유자들, 지배계층에게 가히 위협적이라는 위기위식이 있었다 48) 그만큼 동학에 대해서, 창도기에서 발전기에 이르 기까지 매우 부정적인 인식이 팽배해 있었음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요사이 이른바 동학이라 하는 것은 무당이 鬼 神 呪 文 을 외는 것과 같은 것이 저들이다. 무지한 賤 流 가 많이 물들고 옛 사람들은 이단이 사람을 夷 狄 禽 獸 에 떨어지게 한다고 말 하는 것은 이를 배척하는 극단의 말이지만, 오늘날 이른바 동학은 사람을 魑 魅 魍 魎 49)(도 깨비)로 떨어지게 하는데 불과한 것이다. 50) 저들이 天 主 의 주문을 외우는 법은 서양에 따른 것이고, 부적 태운 물로 병을 치료한다는 말은 黃 巾 51)을 답습한 것이다. 貴 賤 이 같고 等 威 52)에 구별이 없으니 천한 자들이 모이고, 남녀를 섞어 밀 실을 만드니 홀어미와 홀아비가 모이고, 재화를 좋아하는데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도우니 욕심 많은 자와 빈군한 자가 기뻐하는 것이다. 저들 적들이 스스로 같은 무리를 만들어 은밀히 서로 전하며, 그 본부를 산 속에 숨기고 두루 마을에 전파하니 한번 그 중심에 들어가면 工 商 은 그 직업 을 전폐하고 農 夫 는 다시 일하지 않는다. 53) 이러한 위기위식에서 경상도의 유교지식인들은 다각도로 대응책을 내놓게 된다. 즉 동학 에 대한 최초의 사료인 1863년 9월 상주 우산서원( 愚 山 書 院 )과 도남서원( 陶 南 書 院 )이 발한 통문( 通 文 ) 과 재경 관료인, 성주 유림 응와( 凝 窩 ) 이원조( 李 源 祚. 1792-1872)의 응 지소( 應 旨 疏 ) 54) 를 통해서 볼 때, 봉건정부와 보수적 유생들은 동학을 전통적인 예교질서 를 파괴하는 저급한 이단 내지 사교( 邪 敎 )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전통 적인 유교의 진흥을 모색하여 향약( 鄕 約 )과 오가작통제( 五 家 作 統 制 )를 시행하고자 하였다. 자포자기 모르고서 모몰염치 장난하니 이는역시 난도자요 사장못한 차제도법 제혼자 알았으니 이는역시 난법자라 난법난도 하는사람 날볼낯이 무엇인고 이같이 아니말면 제신수 가련하고 이내도 더럽히니 주소간 하는걱정 이밖에 다시없다... 47) 이매망량( 魑 魅 魍 魎 )의 이매 는 산도깨비, 망량 은 물도깨비로 온갖 도깨비를 말한다. 허무맹랑한 사람들을 가리킬 때 쓴다. 48) 이 부분은 권대웅, 경상도 유교지식인의 동학농민군 인식과 대응, 한국근현대사연구 제51 집, (2009 겨울호), 75-76쪽을 참조. 인용문은 모두 여기서 재인용함(번역은 일부 인용자 수정). 49) 이매망량( 魑 魅 魍 魎 )의 이매 는 산도깨비, 망량 은 물도깨비로 온갖 도깨비를 말한다. 허무맹랑한 사람들을 가리킬 때 쓴다. 50) 崔 承 熙, 韓 國 古 文 書 硏 究, ( 韓 國 精 神 文 化 硏 究 院, 1981). 51) 도둑 즉 후한 말의 도둑떼인 황건적에 비유한 것임. 52) 등금과 권위. 즉 身 分 等 位 에 따라 규정된 각 등급별 존엄과 권위를 말하는 것으로 儀 節 이나 服 色 등에 등급별로 차등을 두어 그 질과 성격을 밝혀서 질서를 잡음. 53) 崔 承 熙, 韓 國 古 文 書 硏 究, ( 韓 國 精 神 文 化 硏 究 院, 1981). 54) 임금의 명령이나 유지( 諭 旨 )에 응하는 소. 보통 국가가 재난에 처했을 때 임금의 구언( 求 言 )에 따라 전국적으로 진언( 進 言 )하는 글. - 13 -
문제는 동학 농민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이 사뭇 달라지게 된다. 경상도 지방의 영남학파 유생들의 상소와 격문에서 동학을 전통유학의 가치를 교란하고 허물어버리는 좌도( 左 道 )로 규정하고 동학농민군을 집권체제, 양반지배층에 대한 심각한 반역의 무리로 이해하였다. 이 에 대한 유생들의 대응책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것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서원의 복설( 復 設 ), 2정치적 개혁, 3오가작통제( 五 家 作 統 制 ) 55) 실시. 그러나 대부분의 양 반 유생들은 1서원의 복설( 復 設 ) 이라는 소극적 대응책으로 일관하였다. 반면에 동학농민 군에 대한 경상도 각 지역의 진압 사례(안의, 거창, 예천, 상주, 김천, 성주, 안동, 의성 지 역)를 보면, 재지적 기반이 공고한 보수적 유생들의 탄압과 보복은 적극적이고 철저하였음 이 밝혀진다. 56) 동학교도들은 관군에게만이 아니라 일본군으로부터도 온갖 박해와 고통을 겪는다. 카와이 아사오( 河 井 朝 雄 )의 大 邱 物 語 (대구이야기) 에도 그 참상이 일부 드러나 있고 57), 1904-5 년 당시에 조선을 여행했던 스웨덴 기자 아손의 눈에 포착된 산적 처형 방법은 외국인의 눈 에 너무 잔혹하여, 어째서 아직도 이런 가장 야비한 고문이 계속 행해지고 있는 것일까? 라고 할 정도였으니 58) 동학도들에 대한 보복 또한 유사한 것이라 여겨진다. * 이 논문은 발표를 위한 시론으로 작성된 미완 초고본임. 2015.5.5 오전. 55) 다섯 집을 한 통( 統 )으로 묶은 인보조직( 隣 保 組 織 )으로 언제부터 실시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經 國 大 典 에 실리면서 법제화되었다. 56) 아래 내용은 권대웅, 경상도 유교지식인의 동학농민군 인식과 대응, 한국근현대사연구 제 51집, (2009 겨울호), 104-105쪽 참조. 57) 카와이 아사오, 대구이야기, 손필헌 옮김, (대구중구문화원,?),21-22쪽. 58) 아손 그렙스트,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김상열 옮김, (책과 함께, 2010), 284-6쪽 참조. - 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