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권력의 이동 규제와 사회적 영향 고찰 - 부산항을 중심으로 박 수 경 - 목 차 - 1 시작하며 2 식민시기 부산의 이동성 2.1 열린 이동 경로 2.2 이동 제한 제도 3 부산항의 감시 통제와 예외상태 3.1 범죄도시, 부산 3.2 벌거벗은 생명의 장, 부산 4 마무리 1 시작하며 로컬리티는 다양한 시공간의 누적으로 이루어 진다. 본고는 식민도시로서의 부산을 연구하고자 하는데, 이로 인해 부산항은 주요한 연구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제국 일본은 부산이라는 도시를 통하여 각지로 이어지는 이동성을 부여하였는데, 그 결과 중의 하나가 부산항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제는 부산에 이동성을 부여하면서, 한편으로는 일본 내지 상황에 의하여 그 이동성을 제한하였다. 이에, 본고는 제국 일본이 부산에 부여한 이동성을 연구하기 위하여 먼저 부산외곽 으로 이어지는 이동로들을 살펴보고, 또 제국 일본이 부산의 이동성을 어떻게 차단하였는지 도항 증명서제를 통하여 살펴본다. 이러한 과정을 짚어감으로 해서, 도항증명서제가 부산항을 어떠한 장소로 만들어갔는지 논하는데, 이러한 작업은 막힌 길이라는 모순적 상황에 대한 연구가 될 것 이다. 논의는 지배자인 제국 일본의 입장이 아닌 지배를 당하는 입장, 즉 부산항을 통과하여 조 선의 내 외로 이동하는 조선인의 입장에서 논을 풀어나가기로 한다. 이들의 입장에서 부산항을 논함으로써 이들이 생각하는 부산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산항은 단순히 부산 외부로의 출입구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부산항이 있음으로 해서 부산으로 유입되는 인구수도 상당하였 다. 따라서, 이들이 부산에 끼치는 영향 또한 적지 않아, 부산 로컬리티의 한 구성 요인으로 작동 하였고, 지금도 작동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 구체적 발현 양상은 섣불리 논하기 어렵 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본고는 지금의 부산을 이루는 한 구성요소로서 부산항을 둘러싼 당시의 상황, 체현( 體 現 )을 재현, 분석하기로 한다. - 21 -
2 식민시기 부산의 이동성 2.1 열린 이동 경로 식민주체인 일본은 부산을 외부와의 교류, 접근성을 염두에 두고 식민도시의 기능을 맡겼다. 1) 이것은 궁극적으로 부산을 대륙 진출의 교두보이며 관문으로 삼기 위해서이며, 이러한 배경에는 식민 본국인 일본과 가장 가까운 곳이라는 지리적 요인이 작용하였다. 고래로부터 부산은 일본인 의 왕래가 왕성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시설이 왜관이었다. 왜관은 현재 부산진시장에 해당되는 부산포에 1407년 설치된 이후로 장소를 바꾸며, 폐쇄와 설치를 반복하였다. 1607년 두모포로 옮 기고, 1678년 현재 용두산 공원 일대인 초량으로 장소를 옮겨 개항을 맞이하였다. 2) 개항과 함께, 초량왜관이 일본의 전관거류지로 바뀌게 되자, 일본에서의 인구와 물자 이동의 편리성을 중심으 로 부산은 도시로 급속히 성장하였다. 3) 이동의 편리성을 꾀한 결과물이 1905년 1월에 개통된 경부선 철도와 같은 해 9월부터 부산항과 시모노세키항을 취항한 관부연락선이었다. 4) 경부선 철 도는 1908년 기점이 부산역으로 옮겨져, 부산항과의 연결이 더욱 편리했졌다. 5) 조선총독부철도 국 1934년 발행 朝 鮮 旅 行 案 內 記 에 따르면, 부산항과 연결되는 역으로 부산잔교역과 부산본역 이 있었다. 이들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관부연락선 및 부박( 釜 博 )연락선은 제1잔교에 옆으로 붙게 되어 배와 열차와의 사이는 불과 수 십 보로 접속가능하게 하는 시설이 있어 현재 아침, 저녁으로 한 번 씩 부산봉천 및 경성 간 직통 급행열차가 이 잔교에서 착발하고 있다. 잔교에는 여객대합소 매표소 수하물취급소 화폐교 환소 전신취급소 철도안내소 국안내소(ビューロー안내소) 식당에 이르기까지 선차( 船 車 )연락상의 일체가 정비되어 국제연락역으로서 가장 부끄럽지 않은 설비를 갖추고 있다. 6) (이하 인용문 밑줄 필자) 제일잔교에서 선물가게가 들어선 상옥( 上 屋 )을 빠져나가면 부산본역이 있다. 7) 인용으로 관부연락선/부산잔교역/대륙행 직통 급행열차 사이의 접근성이 매우 용이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부산잔교역과 부산본역에 대한 이동동선과 접근성 또한 파악할 수 있다. 일본에서 볼 때, 관부연락선과 경부선의 기점이 함께 존재하는 부산은 세계로의 통로로 일본과 만주/러시아/ 중국을 잇는 동아시아 교통의 중심지라 할 수 있었다. 8) 1) 구모룡(2008) 부산: 식민도시와 근대도시를 넘어서 인천학연구 8 p.10 2) 송정숙(2011) 개항장으로서의 부산항과 기록 한국기록관리학회지 제11권 제1호 pp.275-276 3) 송정숙(2011) 개항장으로서의 부산항과 기록 한국기록관리학회지 제11권 제1호 p.277 4) 홍연진(2007) 부관연락선과 부산부 일본인, 부관연락선과 부산 논형 p.14 5) 부산역 이전 시대에는 부두에서 1.6킬로미터 떨어진 초량까지 경부선을 타기 위하여 이동하여야 했다. 홍연진 (2007) p.21 6) 조선총독부철도국(1934) 朝 鮮 旅 行 案 內 記 p.3 7) 조선총독부철도국(1934) 朝 鮮 旅 行 案 內 記 p.3 8) 安 藤 又 三 郎 (1914) 조선철도외국철도연락 朝 鮮 公 論 2권 2호; 조성운(2008) 1910년대 식민지 조선의 근대 관광의 탄생 한국민족운동사연구 56호 p.124 재인용 - 22 -
큰변동이 없으리라고 보는 개정될 국제렬차의 시간은 열차마다 성질을 달리하야 히까리 같은 특급은 조선을 주로하지않은관게로 경성은 가장 불편하게되엇으며 또 부산 경성간운전하던초특 급 형식의 제칠, 제팔렬차는이것을 봉천까지연장하는동시에경성에 편의를 보게되엇다.(중략) 히까 리(부산/신경간) 이것은 동경으로부터 만주가는객의편의를 주안삼어서 경성여객에는 아주불편하 게될 것은 면키어려웁다고본다. 9) 특급열차 히까리와 같은 경우는 부산에서 출발하되, 경성에서 정차하지 않고, 만주로 막바로 연결되는 경우로, 부산을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삼고 있음이 명확히 나타나는 사례이다. 그런데, 부산항은 일본인의 대륙 진출로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조선인의 도일경로로도 중요하게 사용 되었다. 관부연락선은 부산항과 시모노세키항을 왕래하였는데, 연락선이라는 의미는 철도와 철도, 즉 경부선과 일본의 간선을 연결한다는 의미를 지녔다. 10) 부산항을 출입국하는 경우, 대부분이 관부연락선을 이용한 것으로 보이며, 1905년부터 1945년간의 총 인원 수송 실적은 40년간 약 3,000만 명이었다. 11) 이 숫자는 곧 40년간 부산항을 이용한 숫자였다. 1920년대 최다 승객을 기록한 1929년 승객총수는 729,960명 12) 으로, 1929년 당시 부산부 총인구수는 119,655명 13) 이 었는데, 부산부 총 인구수의 6.1배에 해당하는 사람이 부산항을 이용한 것이다. 그럼, 조금 더 상 세히 관부연락선의 조선인 승객수와 부산부 조선인 인구를 살펴보자. 1920년대 조선인 최대 승 객수는 1925년 234,744명인데, 이 수는 1925년 조선인 인구 63,204명의 3.7배이다. 이러한 수 치는 부산의 이동성(mobility)의 정도가 상당하였음을 말하는데, 그 중 이렇게 많은 조선인 수가 이동하게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조선을 떠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농촌의 피폐이었으나 일본 내지 자체로도 조선인 노동력이 절실하였다. 조선을 지배한 일본은 군사적, 경제적 목적으로 철도, 도로, 항만 등의 인프라 구축, 정비를 하는 과정에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조선인의 해외이동을 촉진하는 기능을 하였으며, 또 식민지 지배 하에서 급속히 진행된 상업경제가 농민을 도시나 해외로 이동 케 하였다. 일본어교육 또한 일본으로의 이동, 이주에 대한 심리적 저항을 낮게 하였다. 14) 이러 한 상황 속에서 부산부의 인구는 지속적 증가율을 보이는데, 특히 조선인 거주지역의 조선인 인 구는 1920년부터 1925년까지는 34.5%이며, 1925년부터 1935년까지는 49.56%로 상당한 증가 율을 보였다. 15) 이러한 현상은 공업의 성장, 대일무역의 확대, 매축공사 노동군, 도일노동자들의 부산부 체류, 경상남도청의 이전, 농촌인구의 유입으로 설명할 수 있다. 16) 그런데, 부산의 조선인 호당 인구수를 조사하면, 가족 구성원 수가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상황은 전국>동래군>경 9) 동아일보 1934.5.5 10) 류교열 (2007) 부관연락선과 도항증명서제도 부관연락선과 부산 논형 p.84 11) 홍연진(2007) 부관연락선과 부산부 일본인 부관연락선과 부산 논형 pp.30-31 12) 홍연진(2007) 부관연락선과 부산부 일본인 부관연락선과 부산 논형 p.31 13) 김대래 외(2005) 일제강점기 부산지역 인구통계의 정비와 분석 한국민족문화 26 부산대한국민족문화연 구소 p.301 14) 水 野 直 樹 (1999) 朝 鮮 人 の 国 外 移 住 と 日 本 帝 国 移 動 と 移 民 : 地 域 を 結 ぶダイナミズム 杉 原 水 野 岩 波 書 店 p.257 15) 양미숙(2006) 1920 1930년대 부산부의 도시빈민층 실태와 그 문제 지역과 역사 부경역사연구소 p.213 16) 양미숙(2006) 1920 1930년대 부산부의 도시빈민층 실태와 그 문제 지역과 역사 부경역사연구소 pp.208-210 - 23 -
남>부산+동래>부산의 순이다. 17) 가족구성원이 적다는 것은 완전한 단위의 가족이주가 아닌 단신이주와 같은 이동이 활발했음 을 의미한다. 한국인의 경우 부산이 호당 인구수가 가장 적게 나타나는 것은 당시로서는 큰 도시 에 속했던 부산으로 한국인들의 단신이주가 상당히 많았음을 말해 준다. 또 일자리를 찾아 부산 으로 오는 한국인과 함께 한국의 관문으로서 일본으로의 출입구였던 부산에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해 체류하는 단신이주자들도 있었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18) 호당 인구수라는 것은 정주성( 定 住 性 )을 파악하는 지표가 되는데, 부산의 정주성은 낮았다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부산의 인구 증가와 낮은 정주성의 한 요인으로 위에서 거론한 도일노동 자의 부산부 체류를 다루고자 하는데, 특히 이들이 도일을 시도 또는 일본에서 귀환하는 과정에 서 다음의 2.2장에서 언급하는 도항증명서제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제 현상에 주목하고 논을 이끌 기로 한다. 2.2 이동 제한 제도 19세기 말까지 조선에서는 외국으로 사신을 보내는 경우 이외에는 일반인의 해외도항을 금지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정부는 인천, 부산의 경우, 선편으로 외국이 나 국내 다른 개항장으로 떠나는 여행객들에게 오늘날의 여권에 해당되는 증명서를 발급하였 다. 19) 한편, 일본은 1907년 보호국이었던 조선을 비롯한 일본제국 전체에 1907년 만들어진 일 본 외무성령 외국여권규칙 과 유사한 여권 규칙을 적용하는데, 조선의 경우 1910년 한일합방 이 후에도 거의 같은 내용의 조선총독부령이 적용되었다. 20) 이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함으로 인해 일본 내지의 노동인력이 부족하여, 조선인을 내지의 노동력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도항을 유도한 결과, 조선인 노동자가 급격히 증가했다. 이 때 조선총독부는 무절제한 노동자모집을 단속하는 형태로 관리하는데, 이는 조선 내의 노무수급 사정을 고려하는 형태로 관리되었다. 21) 그러나, 1919년 3 1운동이 발발하자, 조선총독부치안당 국은 같은 해 4월 1일 警 務 総 監 部 令 第 三 号 朝 鮮 人 ノ 旅 行 取 締 ニ 関 スル 件 22) 를 발포하여, 조선 인의 해외도항을 규제하기 시작하였다. 23) 경무총감부령 제3호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인은 조선 밖으로 여행하고자 할 때, 거주지 경찰관서에 여행목적과 여행지를 신고하고 여 17) 김대래 외(2005) 일제강점기 부산지역 인구통계의 정비와 분석 한국민족문화 26 부산대한국민족문화연 구소 p.310 18) 김대래 외(2005) 일제강점기 부산지역 인구통계의 정비와 분석 한국민족문화 26 부산대한국민족문화연 구소 p.310 19) 서호철(2007) 1890-1930년대 주민등록제도와 근대적 통치성의 형성 : 호적제도의 변용과 '내무행정'을 중 심으로 서울대박사학위논문 p.271 20) 서호철, 2007, p.274 21) 金 廣 烈 (1997) 戦 間 期 における 日 本 の 朝 鮮 人 渡 日 規 制 政 策 朝 鮮 史 研 究 会 論 文 集 35 緑 蔭 書 房 p.176 22) 朝 鮮 総 督 府 官 報 第 三 九 冊 p.232 ; 朴 植 編 (1975) 在 日 朝 鮮 人 関 係 資 料 集 成 第 一 巻 三 一 書 房 p.36 재인용 23) 이와 동시에 조선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在 外 帝 国 公 館 이 발행하는 증명서를 소지하여야 했다. 이는 3.1 독립운동의 해외 네트워크 차단으로 3.1독립운동을 단속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水 野 直 樹 (1999) 杉 原 水 野 編 朝 鮮 人 の 国 外 移 住 と 日 本 帝 国 移 動 と 移 民 : 地 域 を 結 ぶダイナミズム 岩 波 書 店 p.261-24 -
행증명서를 발급받아 조선을 떠나는 항구의 경찰관이나 헌병에게 제시해야 한다.(제1조 1) 조선 밖에서 조선으로 들어오는 자는 위의 여행증명서나 재외제국공관이 발급한 증명서를 조선에 처 음 도착한 곳의 경찰관에게 제시해야한다.(제1조 2) 만약 밖에서 들어오는 자로 여행증명서나 여 권이 없으면 경찰관서에 스스로 출두해서 여행목적과 여행지를 신고하여야 한다.(제1조 3) 24) 이때부터 여행증명서라는 증서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아직 도항규제는 경찰관서가 개입을 하 나, 그것은 여행신고 정도를 위한 것이었다. 1919년 여행증명서 제도는 3.1운동으로 인한 독립운 동의 확산과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의 연락을 저지하고자 하는 목적과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거슬 리는 불령선인( 不 逞 鮮 人 )이라는 조선인들을 단속하고자 실시되었다. 그러나, 1919년 실시되기 시 작한 여행증명서제도는 이후로 조선인의 도일을 규제, 조절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였다. 25) 이 러한 여행증명서제도는 한편으로 국내에서의 비판적 여론이 거세었다. 그것은 같은 제국의 영토 내에서 살면서 국민 간에 교통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은 일본이 말하는 조선통치의 근본지침인 내선융화, 내선일체에 위배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에 1922년 12월 15일 村 令 第 一 五 三 号 로 여행증명서 제도는 폐지되었다. 26) 그러나, 도일자들은 기존의 여행증명서 대신, 신분증명 용 도로 관헌발행의 호적등본을 소지하여야 했다. 27)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으로 조선인이 학살당하자, 정보통제를 위하여 경보국은 조선총독 부에 조선인 도일제한을 요청하였는데, 제한대상은 관공리, 학생, 상인은 제외한 노동자를 대상으 로 한 것이었다. 28) 약 3개월에 걸친 도항 전면금지조치는 같은 해(1923) 12월 19일 경찰의 증 명을 얻은 조선인 45명이 부산항을 출발하면서 비로소 해제되었다. 1924년 5월 도항을 목적으로 부산에 모인 노동자 4,000여명이 부산수상서에서 도항증를 얻지 못하고 발이 묶이자 부산청년회에서 부산시민대회를 1924년 5월 17일 개최하여 이들의 도항을 돕기 위하여 당국과 협상하였다. 부산수상경찰서와의 교섭 결과는 관민상호상서약으로 이루어졌 다. 내용은 4,000여명의 노동자 도항은 본적지 호적등본과 해당 면장의 신원증명을 지닌 자에 한 하여 도항케 하며 수속절차는 비용전부를 부산청년회에서 부담하고 도일노동자의 도항증에 대해 서는 부산청년회 집행위원이 도항증에 연명날인하여 신원보장을 하기로 하였다. 29) 이러한 혼잡한 사회적 문제로 총독부 당국은 내무성경보국과 협의한 끝에 1924년 6월 1일부 터 도일제한을 폐지하고, 거주지 관헌 발행 증명만 있으면 도일이 가능하도록 발표하였다. 30) 그 러나, 1925년 한 해에만 해도 조선인도일자 수가 13만으로 급증하고 일본내 실업문제가 대두되 자, 내무성경보국은 조선총독부에 구직조선인의 도일에 대한 규제를 마련토록 하였다. 31) 새로운 규제로 1925년 10월부터 다음과 같은 일정한 조건을 구비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 도항을 저지하 는 도항제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32) 1. 무허가노동자모집에 의해 도항하는 자 2. 일본에서의 취직 24) 서호철, 2007 p.277 25) 서현주(1991) 1920년대 渡 日 朝 鮮 人 勞 動 者 階 級 의 形 成 韓 國 學 報 Vol.17 No.2 일지사 p.171 26) 金 廣 烈, 1997, p.177 27) 東 亜 日 報 証 明 は 廃 止 するが 警 戒 は 厳 重 に 1922.12.12 28) 東 亜 日 報 1923.10.7 / 金 廣 烈, 1997, p.179 29) 동아일보 1924.5.22 30) 大 阪 朝 日 新 聞 ( 朝 鮮 版 )1924.6.5 / 金 廣 烈, 1997, p.179 31) 金 廣 烈, 1997, p.180 32) 社 狀 1930년도판 p.1203-25 -
자리가 불확실한 자 3. 일본어를 해독할 수 없는 자 4. 필요한 여비 이외의 소지금이 10원 이하 인 자 5. 아편중독자. 이로써, 선별, 관리의 도항제가 시작된 것이다. 33) 1928년 들어, 도일규제는 더욱 엄격해 졌다. 이것은 출발항에서의 경찰관의 허가는 물론하고 거주지 경찰기관으로부터도 심사를 받아야 했다. 그 구체적 방식은 거주지 경찰로부터 호적등본 뒤에 소개장을 기입하여 부산수상경찰서에 제시하여 심사를 받는 것이었다. 34) 그러나, 도항자는 더욱 늘어 1928년 연간 도항자수는 전 년도 보다 늘어난, 16만 명을 넘어섰다. 35) 일본 식민시기 1905년부터 1945년까지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왕복하는 관부연락선의 이용객수를 거론하면, 그 수는 3,000만 명을 넘었다. 36) 가히 부산항은 조선의 이동성의 표상이 됨에 부족하지 않았다. 이러한 도일자 증가상황에서 한편으로는 도항저지가 시작된 1925년부터 1929년 말까지 5년 동안 14만여 명이 조선에서 도항을 저지당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37) 1934년은 이미 10만에 이르 는 재일조선인과 계속되어 이주해 들어오는 조선인 문제(실업, 주거난, 민족 간 마찰)로 내무성사 회국, 경보국, 척무성, 조선총독부 고관 등이 한자리에 모인 회의가 개최되었다. 그 회의 결과는 조선인 이주 대책건 ( 朝 鮮 人 移 住 対 策 要 目 )으로 나타났는데, 항목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조선인을 북선개척철도시설 촉진 등을 통해 조선에 안주시키는 조치 2.인구조절을 위해 만주 및 북선으로 이주시키는 조치 3.내지도항을 한층 감소시키는 조치 4.내지의 조선인을 지도, 내지에 융화토록 하는 조치. 38) 이 대책으로 인해 같은 해 1934년 175,000여 명의 도항자가 다음해 1935년에는 112,000여 명으로 대폭 감소하였다. 무려 63,000여명이 감소한 것이었다. 3 부산항의 감시 통제와 예외상태 3.1 범죄도시, 부산 도일하기 위하여 엄청난 인구가 부산항으로 이동하였으며, 또 도항증명서제로 인하여 엄청난 인구가 도일을 저지당하였다. 부산은 일본으로 향한 열린 길이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 막힌 길 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부산에서는 부산항을 중심으로 각종 범죄행위가 자행되었다. 사기, 위조, 밀항이 대표적이다. 조직적 착취로는 친일폭력단 상애회가 부산에서 도항을 저지당한 조선인을 상대로 도항증명서를 한 장에 20원씩 팔아, 조선인들을 착취하였다. 39) 또, 부산부두를 배회하며 20여명의 사기한들이 도일하거나 귀국하는 노동자의 여비를 뜯어내는 일이 많아 부산 역 앞에 무료숙박소를 정하고 노우회가 잔교에서 도일 또는 귀국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도모하기도 하였다. 40) 그러나, 노우회의 도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배표를 사다주겠다 하고 33) 金 廣 烈, 1997, p.180 34) 金 廣 烈, 1997, p.181 35) 金 廣 烈, 1997, p.181 36) 류교열, 2007, pp.108-109 37) 조선총독부경무국(1933) 조선노동자내지도항보호취재상황 고등경찰보 3호 / 朴 慶 植 編 在 日 朝 鮮 人 関 係 資 料 集 成 第 2 巻 三 一 書 房 1979 38) 朴 慶 植 編 在 日 朝 鮮 人 関 係 資 料 集 成 第 3 巻 三 一 書 房 1979 p.12 / 金 廣 烈, 1997, pp.187-188 39) 류교열, 2007 p.94 40) 동아일보 1925.6.24-26 -
돈을 받고 도주하는 경우도 있었고 41), 부산수상서 인( 印 )과 도일증서를 수 천 매 위조, 인쇄하는 경우도 있었다. 42) 그리하여, 도항저지로 사기범격증 대만원일운 부산수상서 피해자는 농촌우맹 이라는 제명 하에 요사이 부산수상경찰서에는 도항저지를 리용하야 공문서 위조 밋 사긔죄 범 인으로써 류치장은 늘 대만원을 일우고 잇다는데 43) 라는 기사까지 보인다. 위조에 그치지 않고, 밀항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나는데, 경남경찰부의 조사에 따르면 밀항발각건수는 1925년부터 10월부터 1931년 3월말까지 556건 3839명이라 하였다. 44) 또, 관부연락선으로 밀항하던 조선인 들이 야마구치현 경찰관에게 호송되어 조선으로 송환되어 부산수상서로 송치되는 사건도 있었 다. 45) 밀항은 연락선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비행기로 밀항이 도모되기도 하였다. 46) 그리 고, 현직 순사가 도항증명을 위조하여 촌사람에게 팔다 발각되는 일이 있었고, 47) 도항저지로 인 한 범죄가 날로 증가하는 가운데, 밀항이 거듭 실패하자 도항사무를 보는 경찰관에게 뇌물을 주 고 도일을 꾀하는 일이 발각되기도 하였다. 48) 또, 도일코자 부산에 도착한 일가족을 여관으로 유 인하여, 그들의 여비를 탕진케 하고, 심지어 감금시키는 일도 있었다. 49) 밀항브로커 중에는 신사 로 가장하여 부녀자를 농락하는 일도 있었다. 50) 그러면, 일본으로 건너가지 못한 조선인들은 어느 정도였으며, 이들의 이후 상황은 어떻게 전 개되었을까. 1936년 7월의 상황을 살펴보면, 부산에서 내지도항이 저지된 인원을 조사한 바 1년 동안 약 2,400명에 달하며 그 중 본적지로 송환된 수는 약 2,200명이 되는데 현재 부산거주자는 약 6,000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51) 이러한 상황을 정리해 보면, 부산항내에 도항저지로 남겨진 노 동자수는 매년 삼 천 여 명 씩 되는데, 부산부의 세민생활에 중대한 문제라고 판단되어 그들에 대한 구제책을 강구하라고 하는 진정서가 제출되었다. 52) 즉, 도일하지 못한 많은 조선인들은 부 산에서 도시빈민으로 남겨졌던 것이다. 그들의 생활상과 감정은 다음의 짧은 글로 잘 알 수 있 다. 부산! 산인등에 부튼 게딱지 가튼 집, 평지에 삑삑한 상점과 공장, 눈물겨운 대조. 우리를 태 울 연락선은 시위나하는 듯 부두에 서 잇다. 53) 그리고, 이들의 거주지 위생상태와 이를 바라보던 시선, 즉, 전염병의 원상지로 보던 시선은 41) 동아일보 1927.1.27 42) 동아일보 1927.3.27 43) 동아일보 1929.5.12 44) 동아일보 1931.4.4 45) 동아일보 1929.4.2(5-1) 46) 동아일보 1931.5.11 47) 동아일보 1934.5.11 48) 동아일보 1935.8.16 49) 동아일보 1930.3.2 50) 매일신보 1936.7.21 / 추월색(2007:191-194)은 부산항을 배경으로 부녀자 인신매매를 다루는데, 이는 유 동인구 증가로 인해 유흥업이 팽창하는 부산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 (조갑상(2006) 근대 지역문학으로서 부산-소설을 중심으로 국어국문학 144호 국어국문학회 p.69) 51) 매일신보 1936.7.13 52) 동아일보 1936.7.14 53) 동아일보 1930.12.28-27 -
다음의 인용으로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상황은 도항제지에서 비롯되었고, 더불어 각종 범죄가 범 람하였음을 토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대책 수립을 강구하는데, 행 정관료는 세궁민의 집중현상은 부산의 특수함이라고 언급하였다....조선인이 집중한 빈민지대에는 누추한 도로시설에 악취가 충천하는 비위생지대로 부산항 을 전염병의 도시로 하는 직접 원인이 된다고 하야 명랑한 대로의 시설만 힘쓰지 말고 도시의 암 흑가에 위생시설을 함이 어떠할까? (중략) 부산의 특수사정으로 기괴한 현상은 도항노동자 제지 라는 제도가 十 四 年 간 게속되어 여러 가지 범죄급 인정비극을 연출하야 세인의 이목을 집중하는 정비례로 부산항에는 제지된 노동자와 송환된 노동자들이 최소 한도로 매년 三 천명씩은 집중되 어 생활을 하게 되어 부산부의 노동자 생활은 극도로 공황상태에 빠저 잇어 크다란 사회문제로 되어 시급한 대책을 강구하지 아니하면 부빈생활에 크다란 위협이 된다고 지난 廿 三 일 부산부의 석상에서 부당국자의 금후 조처를 질문하고 그 대책을 시급하게 수립하라고 절규하엿는데 부윤 의 답변은 실제에 중대한 사회문제로 세궁민이 만히 집중됨은 부산의 특수상태이니 54) 이러한 상황은 계속 이어졌는데, 이들은 산기슭에 움막사리 주택, 즉 움집을 지어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55) 그리고, 1934년에 들어서는 만주 등지로 이주시키는 일제의 이주정책 실시로 경 찰서의 알선 하에 부산에서 만주로 이동하였다. 다음의 소설 釜 山 의 주인공은 일본으로 건너 가지 못하고 만주로 이동하게 되는데, 부산에서 일본으로 가기위해 왔다가 사기 56) 만 당하고 부 산을 떠난다. 다음은 부산을 떠나는 주인공의 심리상태로 주인공이 부산을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알 수 있다. 기차가떠나서 부산역이차차멀어저갈때에 나는지옥에나 들어갔다가 나온느낌이 생긴다. 그렇다 부산은 양심이없는 마굴이며 썩어져가는 인간지옥이다. 나는노동자의 신세로 안다녀본데가 없지 만 부산같이 더러운곳은 처음이였다. 내게힘만있으면 부산거리를 들석들어다가 바다에쓸어넣고 싶었다. 나는 여러사람에게 들어서 알었지만 부산의거리는 전부속여먹는 거리여서 그속이는방법 은 여러가진데 보통사람으로는 상상치도 못하리만치 교묘하게 속인다고 한다. 내가 속은 그엿장 수 이상엘방법이 많다고한다. 그리하야나는 에익더러운부산아 하고 마즈막으로 부르짖고 부산 쪽을향하야 침을배앝았다. 57) 도일코자 부산에 모인 조선인들은 각종 범죄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부산에서 도항이 저지되어 54) 동아일보 1936.3.25 55) 동아일보 1938.9.12 56) 사기의 내용으로 도항증을 브로커에게 구입하려다 사기를 당하고, 엿에 돈을 붙여 그 돈을 미끼로 엿을 파는 엿장수에게 엿을 샀다가 공돈을 날리기도 하고, 술집에 들어갔다가 고기 한 점 없는 소갈비를 먹게 되고, 청 주를 시켰더니 일본술이 나온다. 또 국수집에 갔더니 국수는 나오지 않고 엉뚱한 장국밥이 나온다. 바스켓을 고치려 가게에 들어갔다가 바가지를 쓰고 나오며, 여관에 들어갔다가 여관주인과 한 패가 된 밀항브로커를 만나 밀항선을 타다, 밀항선 수색 경찰에 잡히는 꼴을 당한다.(주종연 이정연 편(1990)이남원 (1935.4) 釜 山 1920-1930년대 민중문학선. 2부 탑출판사) 실제로 도일코자 부산에 도착한 일가족 8명이 도항저지 로 연락선 부두를 방황하고 있던 차에 여관 인객자( 引 客 者 )가 여관으로 가면 저렴하게 숙박할 수 있고, 또 일본으로 건너가도록 주선해 주겠다고 속여 여비를 탕진케 하고, 심지어는 감금시켜 식비를 빚지게 하는 일 이 있었다.( 동아일보 1930.3.2) 57) 이남원 (1935) 釜 山 주종연 이정연 편(1990) 1920-1930년대 민중문학선. 2부 탑출판사 p.192-28 -
귀향하거나, 부산에 도시빈민으로 남거나, 또는 만주로 이동했을 것이다. 도일과정에 있어, 부산 은 일본의 강력한 지배구도 하에 놓여, 그 폭력성이라는 자장의 가장 핵심지에 위치한다 할 수 있다. 그러면, 부산을 통하여, 일본의 폭력성, 즉 도항증명서제로 인한 각종 범죄의 횡횡이나 빈 민으로의 전락과 같은 부산의 범죄성과 폭력성을 어느 정도의 인원이 당시 겪어야 했을까. 그리 고, 그들의 사회적 신분은 어떠하였을까. 대부분이 도일노동자라고 가정한다면, 그 숫자는 관부연 락선의 이용객수로 파악할 수 있다. 그 숫자는 3,000만 명으로 그 중 조선인은 4,530,627명으 로 58) 부산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었을지언정 어떤 폭력성을 느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각 종 사기를 당한 조선인들은 부산을 더러운 사기치는 의 도시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신문자료나 소설 속에서 도일노동자를 괴롭히는 것은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다. 구조적으로는 일본인이 만든 도항증명서제가 이들을 괴롭히나, 그 구조의 집행자는 조선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열 발자국을 못 떼어놓아서 층계의 맨 끝에는 골똘히 위만 쳐다보고 서 있는 네 눈이 있다. 그것은 육혈포도 차례에 못간 순사보와 헌병 보조원의 눈이다. 그 사람들은 물론 조선 사 람이다. 59) 화가 났지만 최군은 분통을 참고 샤쓰며 책들을 차근차근 도로 챙겨 넣기 시작했다. 그때 형사 가 빨리하지 않고 뭣을 그처럼 꾸물거리느냐. 고 핀잔을 주었다. 최군은 그 형사를 힐끗 쳐다봤 다. 그 눈에 괸 증오의 빛깔을 보았음인지 형사는 너 내게 반항할 셈이냐. 고 호통을 질렀다. 어 떻게 하든 최의 비위를 거슬려 사건을 만들어보자는 속셈이 빤했다. 최종률은 트렁크를 챙겨 들 고 일어서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같은 조선사람끼리 너무 하지 않소. 형사는 이 말에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같은 조선 사람끼리? 그래 조선 사람끼리 어쩌자는 거야. 독립운동이나 하자는 건가? 이런 시비를 되풀이하면서 그 형사는 좀처럼 최종률을 놓아주지 않으려고 했다. 다시 부 산의 수상서 水 上 署 로 데리고 가야겠다고 위협했다. 이렇게 옥신각신하고 있는 것을 일본인 형사 가 사이에 들어 최군이 부산으로 되돌아가야 할 화는 면했지만 이 때의 감정으로 그 형사는 S고 등학교 소재지 경찰에 주의통보를 했다. 60) 부산의 제국 일본의 폭력적 표상은 조선인이 담당하고 있다. 이로써, 부산의 조선인, 즉 부산사 람이 폭력적이라고 외지인들은 느끼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외지인의 부산에 대한 폭력적 이미지는 조금씩 구축되어 갔던 것은 아닐까 추정해 본다. 3.2 벌거벗은 생명의 장, 부산 식민시기 동안 문맹자들의 숫자는 상당하여, 하층민중들은 자기 본적과 이름을 외어 적는 것도 힘들었다. 61) 그렇다면, 근대제도라 할 만한 도항증명서제에 대한 인식과 절차에 대해서는 얼마나 58) 홍연진(2007) 부관연락선과 부산부 일본인 부관연락선과 부산 논형 p.31 59) 염상섭(1922.7~9, 1924 재연재 신생활 묘지, 1948 만세전 개작) 만세전, 염상섭(2007) 한국문 학전집09 만세전 염상섭 중편선 문학과지성사 p.72 (부산에서 관부연락선 하선 시의 감상) 60) 이병주(2006a) 관부연락선 1 한길사 pp.140-141, 부산에서의 감상 61) 서호철, 2007, p.281-29 -
무지하였는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62) 그러면, 이를 숙지하지 못한 조선인들은 도일키 위한 장 소, 부산항에서 어떠한 일을 겪어야 했는가. 그리고 이러한 부산항을 역방향으로 일본에서 관부 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이동하여, 부산항에 내린 조선인들은 어떠한 일을 겪었 고 어떻게 느꼈을까. 1927년 도항규제 상황을 신문기사로 살펴 보건데, 부산잔교에는 각지 사람 들이 보여 복잡하고 혼잡하나, 이들 대다수는 도항증명을 얻지 못하고 또 어떻게 하면 도항증명 을 구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63)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다음의 소설로 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소설 부산 의 등장인물들은 도항증명서제도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나아가 도항증명서(소개장)를 얻기 위하여, 행정기관에서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비굴한 상태를 겪어야 함을 다음의 대화로 겨우 파악한다. 지금도 말햇지만..일본가려면 도항증명서라는 것이 잇서야하네. 그것을 어드랴면 대체는 민적 등본을 면소로 가지고가서 코가땅에 닷토록 굽실굽실해야 열에 하나나 해줄까말까그레. 64) 1928년부터 이중도일규제, 즉, 먼저 거주지의 경찰기관으로부터 심사를 받아, 호적등본 뒷면에 소개장을 받고, 그 후, 부산수상경찰서에서 다시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제도가 실시되었다. 65) 그 러나,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한재와 충재로 일본으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부산항으로 몰려들지 만, 상황은 다음의 신문기사와 같이 여의치 못하였다.... 품팔이나 하여 볼까 하는 생각으로 도일( 渡 日 )하기 위하여 모다 호적( 戶 籍 )등본 한 건씩을 주머니에 너코 당디 경찰의 소개도 엇지 못하고 부산부두에 와서 도항저지로 말미암아 가지도 오 지도 못하고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군중이 요사이 만흔 중 불량배들의 도일시켜 준다는 바람에 속아서 약간의 소지한 려비만 털리고 방황하는 자가 만타더라 66) 다음은 소설 渡 航 勞 動 者 에서, 부산에서 증명서를 얻기 위하여,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 상 황에 대한 묘사이다. 우리는 확조 를 선두로 맨뒤에 붓텃다. 그안에들어갓다가 조회쪼각도 못엇고 쫏겨나오는사람도 잇다. 그럴때마다 불안한눈을서로 처다보고는 가슴이 두군두군하엿다. 압헤잇는사람이줄어 한거 62) 소설 釜 山 에서는 주인공이 현주소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 기술되어 있다. 이남원 (1935) 釜 山 주종연 이정연 편(1990) 1920-1930년대 민중문학선. 2부 탑출판사 p.188 63) 매일신문 1927.3.7 / 차에서 나려 배가 잇는 부두에 가니 수 없이 모이는 동포들이 도항증명서를 얻으 랴고 장사진을 치고 잇더이다. 그들은 웨 정든 고토를 버리고 현해탄을 건느랴 하는지 형이여 우리는 잘 아 지 안습니까. 혹 어떤 사람은 물건너가면 식은 밥뎅이라도 얻어 먹을 수 잇다는 말만 듣고 천신만고하야 노 자를 구해가지고 왔으나 민적등본이 없어 도항증명서를 얻지 못하야 얼골이 흙빛이 되어 헤매는 광경도 보 앗습니다. (한자는 한글로 표기함)( 동아일보 1934.8.2) 그리고, 여름 방학을 이용해 동경 등을 여행하고 자 하는 어떤 학생은 도항증제도에 대해 신문을 통해 문의하기도 하는데( 동아일보 1936.7.11), 이는 도 항제도의 잦은 변경 또는 조선인들이 도항제도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64) 리동구(1933)주종연 이정연 편 渡 航 勞 動 者 1920-1930년대 민중문학선. 2부 (1990) 탑출판사 p.195 65) 社 狀 1930년도판 p.1203 / 金 廣 烈, 1997, p.180. 그리고, 1933년에는 일본가는 노동자의 도항증을 폐지 한다는 사실 무근의 풍설이 돌아, 이를 믿고, 부산까지 왔다가 헛수고한 사람들이 많았다.( 동아일보 1933.4.4) 66) 동아일보 1929.9.12-30 -
름 두거름 압흐로나가면서도 길억 한테 배워둔 순사의 물을말을 물그레미 하날을처다보며 여러번 외여보앗다. 학조 가 엿ㅅ적은표정으로 흰조희쪼각을 손에서 내뵈이며 뒤로빠진다. 벌서 내차레다. 책상을 새히에끼고 순사압헤 섯슬때는 얼골이더워지고 귀가머-ㅇ하여진다.감히 순사의얼골은 처다보지못하고 외여인사의말을 입속에서 중얼거리며 허리를 꾸부렷다. 67) 이들은 부산수상서에서 순서를 기다리는데, 불안하며, 긴장되고, 자기 자신을 콘트롤 할 수 없 는 상태에 빠진다. 염상섭의 만세전 (1922년 연재시작)은 관부연락선을 이용한 시모노세키에 서 부산으로의 여정을 담고 있다. 그리고, 소설의 주인공은 시모노세키에서도 검문을 받으며, 부 산에서도 검문을 받는다. 그러나, 주인공이 검문에 대해 느끼는 심리상태는 등가( 等 價 )가 아니다. 만세전 의 인용에는 후술하는 논고를 알기 쉽게 하기위하여 편의상 번호를 붙여두기로 한다. (1) 에에, 참, 나는 XX서( 署 )에서 왔는데, 잠깐 파출소로 가십시다. / (중략) / 형사가 큰 성 공이 나한 듯이 득의만면하여, / 진작 그러시지요 / 하며 웃는 그 얼굴에는, 달래는 듯 하기도하고 빈정대는 듯한 빛이 보였다. 나는 무심중에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깨달았다. 68) (시모노세키에서의 감상) 시모노세키에서의 심리는 분노의 감정이다. (2) 동경서 하관까지 올 동안은 일부러 일본 사람 행세를 하려는 것은 아니라도 또 애를 써서 조선 사람 행세를 할 필요도 업슨 고로, 그럭저럭 마음을 놓고 지낼 수가 있지만, 연락선에 들어 오기만 하면 웬 셈인지 공기가 험악해지는 것 같고 어떠한 기분이 덜미를 잡는 것 같은 것이 보 통이다. 그러나 이번처럼 휴대품까지 수색을 당하고 나니 불쾌한 기분이 한층 더하지 않을 수 없 었다. 눈을 감고 드러누워서도 분한 생각이 목줄띠까지 치밀어 올라와서 무심코 입술을 악물어보 았다. 69) (시모노세키에서의 감상) 연락선 안에서는 동경에서 시모노세키로 올 때보다 더한 불쾌감, 험악함을 느끼고 그 불편한 감정을 토로하면서, 분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 연락선이 부산에 닿아 여행객들이 하선하는 순 간에는 순사보와 총을 어깨에 늘인 일본 순사를 바라보며 아직 하선하지 못하는 자신을 (3) 포로 로 여긴다. 70) 다음은 소설 관부연락선 의 인용이다. 그러한 관부연락선을 도버 칼레 간의 배, 르아브르와 사우셈프턴 간의 배에 비할 때 영락없는 수인선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연락선이 한국 사람을 수인 취급을 한다는 건 지배자인 일본 인이 피지배자인 한국인을 수인 취급을 하고 있다는 집약적 표현일 따름이다. 71) 67) 리동구(1933) 渡 航 勞 動 者 p.197 68) 염상섭(1922.7~9, 1924) 만세전 pp.58-59 69) 염상섭(1922.7~9, 1924) 만세전 p.67 70) 염상섭(1922.7~9, 1924) 만세전 p.72 71) 이병주(2006a) 관부연락선 p.140-31 -
관부연락선 (2006a)에서는 연락선을 수인선이라 부르며, 배안에 있는 자신들을 수인이라고 칭한다. 다음은 만세전 의 주인공이 부산잔교로 하선하는 순간이다. (4)나는 될 수 있는 대로 태연히 그들에게는 눈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확실한 발자취로 최후의 층게를 내려섰다. 될 수 있으면 일본사람으로 보아달라는 요구인지 기원인지를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되뇌면서 그러나 나의 그 태연한 태도라는 것은 도살장에 들어가는 소의 발자취와 같은 태연이다. (중략) 하니까 이번에는 좌우편에 쭉 늘어섰던 사람 틈에서, 일본에 인버네스를 입은 친구가 우그려 쓴 방한모 밑에서, 이상하게 번쩍이는 눈을 무섭게 뜨고 앞을 탁 막는다. 나 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쭈르륵 흘렀다. 72) (부산에서의 감상) 연락선에서 부산잔교로 하선하는 순간을 도살장에 들어가는 느낌으로 표현하며, 등에서는 식은 땀이 난다. 이것은 공포와 두려움의 감정이다. 다음은 파출소에서 검문받는 장면이다. (5)파출소에 들어선 나는 하관에서 조사를 당할 때와도 다른 일종의 막연한 공포와 불안에 말 이 얼얼해졌다. 더구나 일본서 그런 종류의 사람들에게 대하듯이 다소 산만하게 할 수 없다는 생 각이 머리에 떠올라와서, 제풀에 자기를 위압하는 자기의 비겁을 내심 스스로 웃으면서도, 어쩐 지 말씨도 자연 곱살스러워지고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지는 것을 깨달았다. 73) (부산에서의 감상) 시모노세키와는 또 다른 공포와 불안으로 스스로 가지는 위압감을 토로하며, 심문받는 자기 자 신의 비겁함과 굴복, 굴욕감을 느낀다. 다음의 관부연락선 (2006b)의 인용에서도 시모노세키와 부산의 분위기가 다름을 언급하면서, 부산을 부정적 느낌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도항 증 검사소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그러나 시모노세키의 경우와 부산의 경우는 다르다. 시모노세키의 부두엔 오가는 사람의 기분 과 감정이 자연스럽게 교류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런데 부산의 부두는 항상 체증을 일으키고 있 는 것 같은 느낌이 남는다. 그렇게 되는 이유의 하나는 부두의 한구석에 도항증 검사소 74) 가 있 어서 그곳을 일반 반도인의 승객들은 학생과 특수인을 제외하곤 꼭 거쳐야 하는 데 있다. 75) 위에서 언급한 만세전 주인공의 감정선((1)~(5))을 따라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주인공이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이동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분노에서 시작하여, 연락선에서 험악함을 느 끼며, 부산에서 포로, 도살장, 식은땀을 언급한다. 포로, 도살장은 굴욕과 공포이며, 식은땀은 불 안과 두려움이다. 파출소에서는 결국 이런 감정들에 못 이겨, 스스로 비겁해지고, 굴복하게 되고, 굴욕감을 느끼게 된다. 부산은 제국 일본보다 더 조선인들이 통과, 이동하기 어려운 장소로 두려 72) 염상섭(1922.7~9, 1924) 만세전 p.72 73) 염상섭((1922.7~9, 1924) 만세전 p.73 74) 부산수상경찰서의 당시 위치는 부산시 중구 중앙동5가 93-2 로 지하철 1호선 중앙동역 근처이다. 현재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다층주차장이 들어서 있다. (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2010) 국내항일독립운동사적 지 조사보고서10 부산 울산 경남Ⅰ (디지털문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 http://www.815book.co.kr/sajuk/trea/ (검색일:2012.2.22) 75) 이병주(2006b) 관부연락선 2 한길사 p.10-32 -
우며, 굴욕적인 장소이다. 그러면, 이러한 현상들은 왜 일어나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논( 論 )의 후 반부에서 다시 고찰하기로 한다. 부산항에서 이루어지는 도항증명서제 실시는 위(2.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일본 내지의 노동상 황, 경제상황에 의하여, 인구조절, 정보통제 차원에서 좌지우지되었다. 도항증명서제에 의하여, 부 산항으로 모인 각지의 조선인은 도일을 저지당하였다. 이들이 춘궁기나 농촌생활의 피폐로 일거 리가 있는 중심지, 즉 일본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도일이 저지당하자, 3.1장에서 보 았듯이, 이를 틈탄 각종 범죄행위가 부산항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 그러면, 범죄행위 관련 등으 로 부산에 남을 수밖에 없었던 조선인들은 어떠한 삶을 영위하였을까. 앞서 인용한 다음의 글로 다시 한번 살펴보면, 이들의 삶은 극히 열악했음을 알 수 있다. 부산! 산인등에 부튼 게딱지 가튼 집, 평지에 삑삑한 상점과 공장, 눈물겨운 대조. 우리를 태 울 연락선은 시위나하는 듯 부두에 서 잇다. 76) 도시빈민이 늘어나기 시작한 시기는 1920년대로 구체적 가옥의 형태는 1평 반 정도의 토지를 몇 자 깊이로 파 출입구를 멍석이나 헌가마니로 덮었다. 77) 주거환경으로는 부산항의 관부연락선 이 바라보이는 산비탈로 상/하수도 시설을 비롯하여 오물처리도 원활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비를 탕진하고, 실업상태에 놓인 사람들은 이런 열악한 생활환경에 처하여 도시빈민으로 전락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이들을 바라보는 부산부의 대책은 어떠하였는가. 부산부에서는 당시 부산 의 실업자 및 무직자에게 무료로 직업소개, 주택소개 등을 하는 편의시설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는 노동력의 수급 조정이라는 일제의 노동 통제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으며, 78) 대출사업은 저 당물이 있어야 했다. 79) 도시빈민이 된 이들이 적용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결국 부산부가 내놓은 최종 결과는 조선인 빈민들의 주거 환경이 열악한 것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만, 이것은 조선인 빈민들 스스로가 해결할 문제라고 떠넘겼다. 80) 이러한 행위는 푸코가 말한 근대국가 권력의 근거는 생사관리권(a life-administering power) 에 있다고 설파한 말을 연상시킨다. 전통사회에서는 권력이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 생사여 탈권(power of life and death)에 기반하였음에 반하여, 근대사회에서는 권력이 살게 만들고 죽 게 내버려두는 생사관리권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81) 생명여탈권에서 생명관리권으로 변화하게 된 것은 권력의 목표가 생명을 유지하고, 번식시키며 생명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라면, 사형으로는 76) 동아일보 1930.12.28 77) 양미숙(2006) 1920 1930년대 부산부의 도시빈민층 실태와 그 문제 지역과역사 19 부경역사연구소 p.224 78) 홍순권(1999) 일제시기 직업소개소의 운영과 노동력 동원 실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2 한국민족운동사 연구회 pp.381-384 / 양미숙, 2006, p.228 재인용 79) 양미숙, 2006, p.228 80) 양미숙, 2006, pp.228-229; 1920년대부터 조선인 빈민 문제가 대두되어, 일본은 부산직업소개소, 부산부행 려병인구호소 등을 설치 빈민구제사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부산부는 고용불안이나 저임금에 따른 생활고와 주거문제와 같은 구조적 문제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자국 우선의 행정으로 노동력 수급 조종과 통제를 행하였다. 박철규(2005) 부산지역 일본인 사회단체의 조직과 활동-1910년대를 중심으로- 역사와 경계 96 p.186, p.190 81) 푸코(1997) 박정자 옮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동문선, pp.278-279 / 조주현, 2008, p.38-33 -
그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82) 부산부는 도시빈민으로 전락한 조선인들을 죽게 내버려 두었다 할 수 있다. 이들에 대해서 어떠한 적극적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 생명에 대 하여 그 생명을 살려 내어, 거기에 질서를 부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러한 생명을 아감벤(Agamben)은 벌거벗은 인간(bare life)이라고 칭한다. 벌거벗은 인간의 유래 는 호모 사케르(homo sacer)인데, 이는 신성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다. 그러나, 이들은 죽여도 살인죄에 해당되지 않으나, 제물로서 신에게 바칠 수도 없는 비천한 인간이였다. 83) 그런데, 도항증명서제는 처음부터 노동자라는 특정 집단, 즉 일본사회가 원하지 않는 특정 집 단이 일본으로 유입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실시된 정책이다. 84) 도항증명서제는 학생이나 상인 의 도일에는 관대하였다. 85) 일본 내지가 특수한 노동상황, 경제상황에 처하게 되면, 다름 아닌 조선의 도일노동자가 가장 먼저 도일을 저지당했다. 일본 내지인과 조선인은 구분되며, 조선인 중에서도 학생/상인과 노동자는 다시 구분된다. 도일노동자는 벌거벗은 생명(조에)의 전형적 범주 로, 사회적 생명(비오스)인 일본 내지인, 조선인 학생/상인과 구분되어, 차별화된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후 일시적 전면도항금지는 1923년 12월 19일을 기하여 해제되나, 1924년 5월 에는 부산에 4,000여명의 노동자가 발이 묶였다. 86) 도일자들의 대부분이 도일노동자라고 가정하 고, 도일노동자에 대한 도항저지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살펴보면, 1925년부터 1929년 말까지 5년 동안 14만 여명이 조선에서 도항을 저지당하고, 87) 1935년 63,000명이 저지당하였다. 88) 이 것은 도일노동자에 대한 도일규제가 엄격하게 이루어졌음을 말한다. 그러면, 이 때의 엄격함이란 어떠한 엄격함일까. 그것은 다음의 소설 사상의 월야 로 가늠할 수 있다. 배에 걸친 사닥다리에 올라갈려 할 때다. 옆에서 아까와는 다른 양복쟁이가 소매를 잡아다린다. / 도항 증명? / 도항 증명요? / 송빈이는 놀랄 수밖에 없다./ 도항 증명도 없이 배를 턀랴구 그 래? / 어디서 맡습니까? / 저어기 수상서루 가 맡아 와. / 하고 정거장쪽을 가리킨다. 보니까 그 쪽으로 두리번거리며 뛰어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중략) 배가 떠날 시간은 가까워 오는데 줄지 어 늘어선 것만 해도 오십명은 된다. 게다가 이내 도장을 찍어주는 것이 아니라 원적이 어디냐? 이름이 무어냐? 무엇하러 가느냐? 지지콜콜이 캐인다. (중략) 무엇을 표준으로 가리는 것인지 도장 을 찍어주지 않고 밀어내는 사람도 여럿인데 송빈이도 그만 이 밀어내는 축에 끼어졌다. 89) 무엇이 기준인지 알 수 없이 도항이 금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글은 1924년 하반기 즈음, 82) 조주현, 2008, p.38 83) 아감벤(2008)박진우 옮김 호모사케르 새물결 p.45; 신성함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양가성은 정치적 영역과 종교적인 영역 각각에 대한 세심한 고찰을 전제로 함으로써, 양자의 착종적, 복합적 관계를 포착할 수 있다. (아감벤, (2008), p.170) 이에 대한 구체적 논의의 흐름은 아감벤(2008:141-171)참고 바람. 84) 서호철, 2007, p.279 / 1919년 도항증명서제의 첫 실시는 3.1운동이 국내외로 번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정보통제와 독립운동가의 국내외 이동 저지로 국내외 네트워킹 형성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졌다.( 水 野 直 樹, 1999, p.261) 85) 1927년에는 부산수상경찰서에서 학생까지 도일이 저지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동아일보 1927.4.17 86) 大 阪 朝 日 新 聞 ( 朝 鮮 版 )1924.6.5 / 金 廣 烈, 1997, p.179 87) 조선총독부경무국(1933) 조선노동자내지도항보호취재상황 고등경찰보 3호 / 朴 慶 植 編 在 日 朝 鮮 人 関 係 資 料 集 成 第 2 巻 三 一 書 房 1979 88) 류교열, 2007, pp.100-101 89) 이태준(1988) 사상의 월야 이태준전집6 깊은샘 pp.184-187 - 34 -
즉, 1924년 6월 1일 도일제한폐지로 거주지 관헌 발행 증명만으로도 도일할 수 있었던 시기로, 여행증명서 제도 폐지 기간의 글이다. 90) 원칙대로라면, 거주지 관헌 발행 증명서만 소지하고, 부 산수상경찰서에 이를 제시하고, 그 증명서에 도장만을 받으면 누구라도 도일 가능하였던 시기였 다. 하지만, 어떠한 기준도 없이 단지 수상경찰서 경찰관의 임의적 판단으로 도일이 결정되었다. 1925년 10월에 실시된 도항규제정책은 앞서(2.2장) 언급한 다음의 5가지 항목을 도일의 조건으 로 내세워 도일규제를 기하였다. 1. 무허가노동자모집에 의해 도항하는 자 2. 일본에서의 취직자 리가 불확실한 자 3. 일본어를 해독할 수 없는 자 4. 필요한 여비 이외의 소지금이 10원 이하인 자 5. 아편중독자. 하지만, 이러한 항목조차도 적용하기 나름으로, 예를 들어 3번 항목은 가장 임 의적 판단이 개입할 소지가 크다. 1928년 7월에 실시된 도항규제정책은 더욱 임의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앞의 5항목을 기준으로 거주지 경찰관서에서 1차 심사를 받아야 했고, 다음 으로 부산수상경찰서에서 2차 심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2차례에 걸쳐 임의적 판단이 개입하 여 도일여부는 더욱 불확실해진다. 엄격했다는 말은 임의적인 판단을 배경으로 한 엄격함으로, 이 때의 임의성 91) 이란 상대를 판단하는 경찰의 주관적 잦대가 낮아지기도 하고, 갑자기 높아지 기도 함을 말한다. 잦대의 눈금이 높아질 때는 이를 두고 엄격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눈금은 개인의 판단만으로 높이를 달리하였을까. 결과부터 거론하면 일본 내지 상황이 개인의 잣대의 높 이를 조정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기로 하고, 이러한 임의적 엄격한 판단을 1919년 도항증명서제 실시 후 계속 도맡아온 부산수상경찰서는 한마디로 말해서 도일노동자에게 불안정한 공간으로 미결정지대(zone of indistinction)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결정지대(zone of indistinction)는 아감벤의 예외상태(state of exception)를 설명하는 개념 인데, 우선 예외상태를 살펴보면, 질서의 존립을 보증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효력 정지와 관계되 어 있다. 92) 그리고, 법률과의 관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예외상태에 고유한 것은 지금까지 항상 주장되어온 것과는 달리 권한들을 혼동하는 것보다는 법률-의-힘 을 법률로부터 독립시키는 데 있다. 예외상태는 한편으로 규범이 효력을 갖지만 적 용되지 않고( 힘 을 갖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 법률적 가치를 갖지 않는 결의가 법률의 힘 을 획 득하는 하나의 법률 상태 를 규정하고 있다. (중략) 예외상태란 법률없는 법률-의-힘(따라서 법 률 -의-힘이라고 표기되어야 한다)이 핵심이 되는 아노미적 공간인 셈이다. 93) 이러한 예외상태를 조금 더 구체화하는 개념이 미결정지대로, 이것은 법과 불법, 규칙과 예외, 질서와 무질서, 선과 악, 안과 밖 등의 구분이 결정되지 않는(혹은 불가능한) 지대를 의미한다. 94) 부산수상서는 법/불법, 규칙/예외, 선/악, 안/밖이 구별되지 않는 미결정지대의 정점에 놓여 있었 90) 이태준의 자서전적 소설로, 1924년 6월 13일 동맹휴교의 주모자로 몰려 휘문고보를 퇴학당하고 일본으로 유학가는 내용이 담겨있다. 91) 거주권이 없는 외국인노동자는 사회적으로 장소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사회적 허용은 그들의 주관적 배려와 관용 여부에 의존하는 것으로, 그 사람들의 마음 상태는 언제든 변할 수 있다. 자신 의 권리가 타인의 감정에 달려있다는 설정은 미등록노동자가 포함적 배제의 위치에 있는 벌거벗은 생명이라 는 점을 보여준다. 조주현, 2008, p.49 92) 아감벤(2009)김항 옮김 예외상태 새물결 p.65 93) 아감벤(2009)김항 옮김 예외상태 새물결 p.79 94) 박규택, 2011, p.103-35 -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미결정지대를 초래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도항증명서제 로 이 제도로 도일노동자는 도일에 관한 법규정 안으로 포섭된다. 그러나, 포섭됨과 동시에 경찰 관의 임의적 판단이 개입하여 도일할 수 없는 상태로 배제된다. 포섭적 배제(inclusive exclusion)가 일어나는 순간이다. 95) 포섭적 배제는 생명정치(biopolitics) 96) 와 관련되는 것으로 법의 지배 안에 존재하면서 법적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97) 부산수상경찰서에서 도일노동자들은 도항증명서제에 의하여 경찰관들에게 심사를 받는다. 하지만, 법적 요건을 갖추 었다 하더라도, 경찰관이 도일을 허락하지 않으면 도일할 수 없는 상태, 즉 법적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부산수상경찰서는 가히 미결정지대라 할 만한데, 이러한 지대는 포섭적 배제라는 상태가 유발시킨 것이다. 아감벤을 빌리자면, 부산수상경찰서는 주권자의 결정에 의하 여 인위로 생성된 예외상태(state of seception)에 놓여있었으며, 그 상태에 지배받는 인간은 벌 거벗은 생명(bare life)이라 할만하다. 그러면, 예외상태는 언제 일어났는가. 부산수상경찰서는 경 찰관의 임의적 판단이 개입되어 잠정적인 예외상태에 놓여 있었는데, 그러한 예외상태가 본격적 으로 가동하게 되는 것은 일본 내지 상황여하에 따라서였다. 즉, 일본 내지의 질서 유지를 위하 여, 부산항에 법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고, 법률 없는 법의 힘만이 행사된 것이다. 대표적인 것 이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후 도일이 전면 금지되는데, 이것(도일전면금지)은 표면으로 드 러난 대표적 예외상태이다. 이는 당시 도일노동자라는 존재가 예외상태의 벌거벗은 생명임을 시 사한다. 그러면, 앞서 의문을 가졌던, 부산이 제국 일본보다 더 조선인들이 통과, 이동하기 어려운 두 려우며, 굴욕적인 장소가 된 이유에 대하여 답을 찾아보자. 그것은 도항증명서제가 유발하는 도 일노동자들에 대한 부산수상경찰서의 임의적 판단에 다름 아닐 것이다. 임의적 판단에 의하여, 도항여부가 결정되기에 도일노동자들은 부산수상경찰서에서 벌거벗은 생명으로 경찰관을 대한다. 부산수상경찰서는 포섭적 배제가 초래하는 미결정지대로 도일노동자는 예외상태에 처한다. 그 속 에서 벌거벗은 생명(조에)은 태생적으로 사회적 생명(비오스)이 설정됨으로써 성립하는 개념이듯, 사회적 생명이자 규범적 생명 앞에서 자신을 열등하게 생각하는 수치심과 살해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진다. 98) 벌거벗은 생명인 도일노동자는 사회적 생명, 규범적 생명의 상징이라 할 만 한 경찰관 앞에서 자연스럽게 열등해지며, 도일노동자에게는 살인 이라 할 만한 도항금지를 언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 사회적 인간, 규범적 인간으로 보여 지기를 바라여, 말씨나 태도가 순종적으로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이 부산항에 서 일어나고 있었다. 부산항은 가히 벌거벗은 생명의 장( 場 )이라 칭하여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95) 2008년 수입소고기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안 사먹으면 된다는 논리로 소비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과 그 외의 사람들을 분리하여 소비선택을 할 수 없는 공간을 예외적 공간으로 설정, 이 공간을 배제하려 하였다. 포섭적 배제를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그 예외공간에는 기존의 규범적 인간이라 할 수 있 는 중산층을 포함한 광범위한 시민이 속할 수 밖에 없었다. 예외 공간에 규범적 인간(비오스)과 기존의 국가 폭력의 대상인 벌거벗은 생명(조에)이 섞이면서, 연대가 이루어졌으며, 저항으로 이어져갔다. 그것이 촛불시 위였다.조주현, 2008, p.49 96) 푸코는 국민국가의 통치권력은 인구를 대상으로 하는 생명정치를 특징으로 논하였는데, 아감벤은 푸코의 생 명정치를 수용하면서 여기에서 더 나아가 생명정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작동방식을 논한다. 조주현, 2008, p.35 97) 박규택, 2011, p.103 98) 조주현, 2008, p.35, p.57-36 -
4 마무리와 금후의 과제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일제에 의하여 도항증명서제가 실시된 이후, 도항증명서제의 주요한 기능은 일본 내지의 상황에 따라 조선인 도일노동자의 노동력 수급 조절과 통제의 기능을 맡게 되었다. 도일노동자들의 주요한 출발항은 부산항이었는데, 이에 도항증명서제의 영향력을 가장 많이 받은 곳 또한 부산항이라 할 수 있다. 본고는 도항증명서제가 부산항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 는지 살펴보았는데, 그 결과, 이동할 수 없는 상황에 기인하여, 다양한 범죄, 대표적으로 사기, 위 조, 밀항 등이 자행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이동이 저지된 사람들의 많은 수가 도시 빈민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었다. 본고는 부산 로컬리티의 한 결, 한 누적층으로 서 연구를 추진하여, 일제의 도항저지로 인한 부산항의 부정적, 범죄적 사회 상황 초래를 명확히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부산 로컬리티에 대한 연구는 피해자로서의 부산항 연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제가 쳐놓은 도항증명서제라는 사회적 그물망을 뚫고, 경계를 호쾌히 넘나드는 부산항 의 모습들 또한 연구되어야 부산항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본다. 이에 이러한 과제를 금 후의 과제로 남기고 본고는 여기서 논을 마무리 짓기로 한다. 참고문헌 <자료> 리동구(1933) 渡 航 勞 動 者 주종연 이정연 편 1920-1930년대 민중문학선. 2부 (1990) 탑출판사 염상섭(1922.7~9, 1924 재연재 신생활 묘지, 1948 만세전 개작) 만세전 염상섭 한국문학전집09 만세전 염상섭 중편선 (2007) 문학과지성사 이남원(1935) 釜 山 주종연 이정연 편 1920-1930년대 민중문학선. 2부 (1990) 탑출판사 이병주(2006a) 관부연락선 1 한길사 이병주(2006b) 관부연락선 2 한길사 이태준(1988) 사상의 월야 이태준전집6 깊은샘 최찬식(2007)권영민 편집 추월색 (1912) 한국문학전집30 부산부 편(1921) 釜 山 府 勢 要 覧 pp.4-7 부산상공회의소 편(1912) 釜 山 要 覧 pp.8-14, 부산상공회의소 편(1931) 統 計 年 報 p.1 부산상공회의소 편(1936) 統 計 年 報 p.1 조선총독부경무국(1933) 조선노동자내지도항보호취재상황 고등경찰보 3호 조선총독부철도국(1934) 朝 鮮 旅 行 案 內 記 제1권 p.3 日 本 国 有 鉄 道 広 島 鉄 道 管 理 局 編 (1979) 関 釜 連 絡 船 史 東 亜 日 報 동아일보 大 阪 朝 日 新 聞 매일신보 - 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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