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지역연구 제13권 제1호 [2011. 2] : 89~119 알제리전쟁 기간 알제리 여성 지위의 변화 요인 -외재성과 내재성- 변 기 찬 * BYEON, Ki Chan Les facteurs de la transformation du statut des femmes algériennes pendant la guerre d Algérie -l'extériorité et l immanence- Les femmes algériennes se sont imposées ou posées, au fil des années à partir du début de XXe siècle, en un enjeu politique entre le pouvoir colonial et les nationalistes algériens. Elles représentaient une force sociale susceptible de faire basculer le devenir de l Algérie. Dans ce cadre, cet article a pour but de clarifier les facteurs de la transformation du statut des femmes algériennes pendant la guerre d Algérie aux points doubles : l extériorité et l immanence. L extériorité, c était la politique d émancipation du gouvernement français à l égard des femmes algériennes. L immanence s était présentée par le corps féminin dans résistance. L émancipation des femmes algériennes pendant la guerre, a introduit des brèches dans l ordre établi et suscité des espoirs. Elle a également, sans doute, * 부산외국어대학교 역사관광학과 교수, 프랑스 여성사 및 사회사, Université de Paris VII, 051-640-3528, kcbyeon@pufs.ac.kr
90 지중해지역연구 제13권 제1호 [2011. 2] contribué, par opposition au colonialisme, à concevoir leur évolution dans l observance stricte de la loi musulmane et de la tradition. Grâce à ces facteurs, il était possible de créer un autre monde que celui dans lequel les femmes ont vécu, un monde où les relations entre les deux sexes seraient différentes, un monde où elles seraient les égales des hommes. [Key Words: Guerre d Algérie, Femmes algériennes, Statut juridique, Droit de vote, Corps féminin, FLN(Front de Libération Nationale)] 1. 머리말 1954년 11월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 Front de Libération Nationale)의 전쟁 선언으로 시작된 알제리전쟁은 알제리와 프랑스 모두에게 심각한 고통과 상처 를 가져다준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1962년 7월 알제리의 독립으로 전쟁은 종결되었지만, 그 전쟁은 혹독한 기억들, 후회 및 아마도 양심의 가책들이 비 극적으로 뒤섞여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Harbi 2004: 9) 더욱이 알제리전쟁은 프랑스가 알제리의 무슬림들과 대립하였던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인 들까지도 서로 대립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병행적으로 전개되는 두 가지의 역사가 있는데, 때로 그 역사는 상호 개별적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Julliard 1990: 153) 알제리전쟁은 여전히 두 국가 모두를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좌충우돌하게 만들고 있지만, 망각을 강요하는 세력보다 기억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집단이 보다 확실한 힘을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알제리전쟁에 직ㆍ 간접적으로 참여하였던 프랑스 지식인들은 전쟁과 관련된 체계적이고 전문적 인 연구들을 발표하고 있다. 특히 2000년 6월 프랑스의 일간지 르몽드 (Le
변 기 찬 알제리전쟁 기간 알제리 여성 지위의 변화 요인 91 Monde)가 전쟁 기간 프랑스 군대에 의하여 고문을 받았던 경험이 있는 FLN 출 신 알제리 여성의 기억을 보도한 이후 프랑스의 도덕성과 폭력성에 대한 새로 운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은폐와 망각이 요 구되었던 알제리전쟁은 확실히 사회적 담론의 공간에 포함되었다. 전쟁은 알제리에게도 치유하기 어려운 혹은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안 겨 주었다. 프랑스는 식민지의 억압을 깨기 위해 가장 굉장한 일 을 단행한 알제리인들에게 어떤 휴식도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Fanon 2001: 11) 더 욱이 1999년까지 프랑스에서 치안유지 작전 으로 규정되었던 알제리전쟁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새롭게 만듦으로써 새로운 인류를 만들어내고 자 유롭게 하는 산소 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깊이 있고 진정한 혁명 으로서의 성격을 드러냈기 때문이다(Fanon 2001: 243). 전쟁 기간 중 알제리인들이 다양 한 성격의 집단들로 분열되었다는 사실은 알제리가 받은 가장 심각한 상처라 할 수 있다. 더욱이 그러한 분열은 독립 이후의 알제리 상황에도 엄청난 영향 을 미치고 있다. 알제리전쟁이 알제리와 프랑스에게 가져다준 상처를 치유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그 전쟁에 관한 기억들이 사람들에 따라 매우 부분적이며, 개인적 혹은 차별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공통된 기억의 경계를 설정하 는 일은 어려운, 혹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매우 주관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 전쟁의 기억들은 특정한 상황들 및 사건들에 대하여 정당 성을 부여하기 위한 담론으로서 작용한다. 기억들이 오히려 진실을 왜곡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알제리전쟁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그러한 기억들을 소홀히 할 수 없으며 동시에 그 기억들에 종속될 수도 없다. 기억의 본래 의미는 과거의 체험뿐만 아니라 그 기억이 형성된 시대에 살았 던 사람들에 대한 담론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모든 사회적 집단은 도덕적 황폐 함 혹은 그 집단이 위치하고 있는 현재의 위대함을 언급하기 위하여 과거의 기 억들을 하나의 소설처럼 각색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상호 다른 방식으로 환기 되는 기억들은 모든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체계적으로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92 지중해지역연구 제13권 제1호 [2011. 2] 희생자들의 하소연을 담고 있는 음유 서사시처럼 나타난다. 그것은 과거에 대 한 향수에 젖은 사람들과 현재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의 침울한 노랫소리이다. 역사학적 비판의 역할은 바로 그것들 모두에 귀를 기울이는 것 이며, 그러한 기억들을 형성시켰던 실제적 상황들을 분석하는 것이다. (Harbi 2004: 10) 알제리전쟁에 관한 알제리 여성의 기억 역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며, 남성 의 그것과도 분명하게 구분된다. 식민지 알제리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 정책과 가부장적 알제리 사회로부터 이중적인 억압의 경험이 그러한 기억을 형성시켰 기 때문이다. 즉 여성에게는 식민주의의 기억과 함께 남성으로부터의 억압이라 는 기억이 혼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알제리 여성의 기억은 단순한 자기반성이 나 회고와 같은 정태적인 행위가 아니다. 이중적 고통으로 인하여 초래된 현재 의 외상을 이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각난 과거를 맞추어 보는 고통의 재현인 것이다. 이는 압도적이고 지속적으로 진행된 식민주의 및 남성의 폭력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 망각에 저항하는 적극적인 행위이다. 그러한 점에서 알제리 여 성의 기억은 궁극적으로 그 여성의 정체성에 관련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만 든다. 알제리 여성으로 하여금 이중적인 고통으로 가득 찬 과거를 기억하게 만 드는 것은 그 과거를 인정하고, 동시에 그 과거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 을 의미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 연구에서는 알제리전쟁 직전부터 전쟁 기간 중에 걸쳐 이루어진 알제리 여성 지위의 변화 요인을 살펴보려 한다. 1830년 프랑스가 군 대를 앞세워 알제리를 정복한 이래 알제리전쟁 시기까지 여성의 지위는 거의 변화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알제리전쟁 직전부터 공적 혹은 사적 영역에서의 여성의 지위는 점차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는 물론 알 제리 민족주의자들이 알제리 사회 내에서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중요성을 거의 동시에 인정하였던 결과이다. 여성들은 알제리전쟁 기간 중 전쟁의 흐름 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알제리의 미래를 동요시킬 수 있 는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중요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변 기 찬 알제리전쟁 기간 알제리 여성 지위의 변화 요인 93 그러한 변화는 두 가지 측면에서 초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변화의 외재적 측면인데, 이는 프랑스 정부가 알제리의 반식민 민족주의 운동을 무력 화시키는 하나의 방법으로 전쟁 이전부터 이미 추진하고 있었던 여성해방 정책 이었다. 군사력을 동원한 반식민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이 직접적인 수단 이었다면, 여성해방 정책은 간접적인 수단이었다. 한편으로는 알제리 여성들을 프랑스 사회에 동화시켜 프랑스의 식민주의 정책에 대한 잠재적 지지자로 삼으 려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 정책은 FLN에 대한 여성들의 지지와 협조를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킴으로써 FLN을 강력한 여성적 토대로부터 단절시킬 것 을 목적으로 하였다. 만일 구조와 저항 능력 면에서 알제리 사회를 강타하려 한다면 우선 여성들을 정복해야 한다. 그녀들이 숨어 있는 히잡 뒤에서, 그리고 남성들이 그녀들을 숨겨놓은 집안으로 그녀들을 찾아나서야 한다 는 프랑스의 식민 지배 전략이 구체화된 것이다(Fanon 2001: 35). 프랑스에 의한 알제리 여성해방 정책은 군사 당국 및 민간 차원에서 다양한 형태로 시행되었다. 기본적인 원칙은 전통적으로 평가 절하되었던 여성의 사적 인 지위, 즉 가족공동체 내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동시에 알제리 여 성들이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비중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알제리 여 성의 법률적 지위의 향상으로 이어졌으며, 후자는 여성에 대한 투표권 부여와 같은 정책으로 가시화되었다. 동시에 여성들에 대한 학교 교육의 기회가 확대 되었다는 점을 첨가할 수 있다. 여성해방 정책의 시행은 알제리전쟁의 시작과 함께 그 필요성 및 중요성이 증가되었다. 더욱이 그러한 정책은 아랍 세계 및 프랑스 사회 내의 페미니즘 사고와 결합되면서 알제리 여성들의 상황을 실질적 으로 변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Sambron 2003: 226-227). 그렇다면 알제리 여성의 지위가 변화된 것은 절대적으로 외부적 요인에만 기인하고 있는가? 이와 관련하여 본 연구에서는 그러한 외재적 측면 외에 내재 적인 측면이 있음을 규명하려 한다. 이는 알제리전쟁 기간 여성의 몸에 대한 전통적 의미와 가치가 상실 혹은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파악될 수 있을 것 이다. 뤼스 이리가라이(Luce Irigaray)의 지적처럼 여성의 기억은 머리를 통하여
94 지중해지역연구 제13권 제1호 [2011. 2] 이루어지는 작용이 아니다. 여성의 육체는 스스로 기억하고 있으며, 그 결과 시 간의 흐름 속에서 여성에게 전혀 다른 확실성을 부여하게 된다(Irigaray 1977: 271-285). 그러므로 알제리전쟁 기간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어떻게 이용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초래된 결과는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작업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외재적이든 혹은 내재적이든 알제리 여성의 지위 변화는 점령자의 두려움 으로 쉽게 설명되는 여성의 강렬한 위상을 반영하는 동시에 알제리 사회가 지금껏 알려져 왔던 것과 같은 여성 없는 사회가 아님 이 드러나게 만드는 것 이었다(Fanon 2001: 77). 하지만 알제리의 독립 이후, 특히 1990년대 이후 알제 리를 새롭게 여성 없는 사회 로 만들려는 시도들을 고려할 경우 알제리전쟁 기 간에 확대된 여성의 지위는 단순히 외부적인 시혜의 결과물이 아닐 것이라 추 정할 수 있다. 오히려 이중적인 억압의 경험을 갖고 있던 알제리 여성이 그러 한 이중적 억압 기제를 자발적으로 활용하는 과정에서 지위의 변화라는 중요한 결과가 초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2. 알제리 여성의 법률적 지위의 변화 오랜 식민 지배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알제리의 전통적 문화와 관습에 대 하여 간섭하는 태도를 거의 보여주지 않았다. 이는 알제리 여성의 지위가 전통 적으로 이슬람법과 지역에 따른 관습법의 지배 속에서 거의 변화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알제리는 이미 9세기부터 말리키(Maliki) 학파의 영향을 받았던 까닭 에 하디스(hadith)에 규정된 내용들과 세속군주들의 통치 철학을 존중하는 경향 을 가지고 있었다(황의갑 1996: 70). 그 결과 알제리 여성의 지위는 시대의 변 천에 따라 이문화적 요소와 혼합되면서 변질되어 이슬람의 경전 꾸란이나 예언 자의 관행에서 규정하는 것과는 다르게 현실적으로 귀착 될 가능성이 열려 있 었던 것이다(조희선(b) 2001: 27-28). 일례로 알제리의 산악 지방인 카빌리아
변 기 찬 알제리전쟁 기간 알제리 여성 지위의 변화 요인 95 (Kabylie) 여성들의 지위는 샤리아(charia)보다는 오히려 부족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제마(djemaa)에 의하여 법제화된 관습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서도 알제리 사회는 가족 내에서의 여성의 사적 지위와 관련 된 규범들이 여전히 준수되었다. 도시에서의 임금 노동자의 증가 및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주의 증대는 전통적인 가족적 규범들에 대한 종속으로부터 젊은이 들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혼 및 일부다처제는 거의 후퇴 되지 않았으며, 가족구조 내에서의 여성들의 삶의 방식도 변화를 겪지 않았다 (Thénault 2005: 34). 알제리전쟁이 시작된 이후에도 여성들은 매일 우물가에 나가고 싶기 때문 에 수도를 부숴 버릴 정도로 가정 내에서 유폐된 상태로 살 고 있었다(Djebar 1979: 35). 여성들은 절대적 권력을 보유하고 있는 자신의 후 견인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부다처제 관행에 대하여 불쾌감도 표시하 지 않고 그저 달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Djebar 1979: 112). 여성들은 알제리에서 가장 일반적인 결혼 해소 방식이었던 남편의 일방적인 이혼 요구라는 전횡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여성들은 극도로 제한된 경우에만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는데, 카빌리아 여성은 이혼을 위해서 일정 금액을 남편 에게 지불해야만 하였다. 남편이 일방적으로 정하는 그 금액은 부인의 육체에 대한 남편의 사용권을 보상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남편은 그 금액의 수령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성의 이혼 요구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사망한 남편의 재산을 상속받을 경우에도 성적 불평등은 존재하 였는데, 특히 카빌리아 여성들은 제마에서 규정된 관습법에 의거하여 모든 상 속으로부터 배제되었다. 알제리 여성들은 종교적인 직무를 담당할 수 없었으 며, 정치를 비롯한 모든 공적 영역에서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도 불가능하였다 (Sambron 2003: 227-228). 흰색 혹은 검은 베일은 쓰고 얼굴을 내민 여자들 이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위해서 울고 있는 상황이었다(Djebar 1979: 22). 이처럼 알제리 여성들의 법률적 지위는 지역 및 사회적 소속에 따라 다소 차 이를 보여주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여성의 법률적ㆍ사회적 하위성과 종속성은
96 지중해지역연구 제13권 제1호 [2011. 2] 거의 동일하게 나타났다. 심지어 여성에 대한 차별적 대우는 여성의 높은 사망 률로 연결되기도 하였다. 1)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의 식민 지배 당국은 1930년 대부터 진보주의적인 관점에서 이즈티하드(ijtihad)를 시도하였다. 즉 이슬람법 을 근대성에 맞추어 재해석함으로써 알제리 여성들의 법률적 지위를 개선하려 는 것이었다. 이처럼 프랑스가 무슬림의 전통을 일정 부분 존중하는 것 같은 태도를 보여주었던 이유는 알제리가 다양한 변화를 겪는 과정에서도 종교의 권 위는 전혀 후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교는 지속적으로 사회적 혹은 가족적 연대성을 보장하는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종교는 여전히 문화적 정체성의 중 요한 요소였다. 종교는 또한 희망을 가져다주는 강력한 요소였다. (Frémeaux 2002: 67). 그러한 이즈티하드의 결과 카빌리아 여성의 지위가 가장 차별적인 동시에 이슬람법에도 부합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1930년 식민 지배 당국은 카빌 리아에서 결혼 적령기에 이르지 않은 소녀들의 강제적인 결혼을 금지하였으며, 합법적인 결혼 연령을 15세로 규정하였다. 여성의 후견인이라 하더라도 결혼 당사자인 여성의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는 결혼을 강요할 수 없다는 꾸란의 내 용이 근대적인 방식으로 적용된 결과였다. 무슬림 법정은 이미 1922년 여성들 의 이혼 요구 권리를 인정하였는데, 식민 지배 당국은 1931년 5월 19일 법령을 제정하여 그러한 권리를 재확인하였다(Charnay 1992: 41). 그 법령은 남편의 일 방적인 요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이혼의 경우 여성은 남편에게 손해 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또한 카빌리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여성이 무슬림이 아닌 남성과 결혼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2) 1) 그러한 높은 사망률의 주된 원인은 출산이나 가사노동으로 인한 심신의 쇠약함이었다. 그래서 어린 나이보다는 성인이 되었을 때 여성의 사망률이 남성의 그것보다 훨씬 더 높게 나타났다. 특히 1954년에 알제리 여성의 절반 정도는 아무런 의료적 검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출산을 하였는데, 이는 그러한 경우에 해당되는 유럽 여성들은 7.8%에 불과하였다는 사실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Thénault 2005: 34-35). 2) 이러한 결정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알제리전쟁 이전 무슬림 남성이 다른 종교를 가진 여성과 결혼하였던 경우는 단지 수백 건에 불과하며, 반대의 경우는 보다 작은 숫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알제리에 거주하고 있던 프랑스 여성들이 무슬림 남성과 결혼하는 경우는 매우
변 기 찬 알제리전쟁 기간 알제리 여성 지위의 변화 요인 97 1949년부터 프랑스는 알제리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후견인 제도의 개선이라는 문제에 주목하였다. 사실상 후견인 제도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엄격한 구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남편은 자신의 부인 의 덕행을 조심스럽게 감시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으며, 소년들은 자신들의 누 이들에 대해 마찬가지의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Frémeaux 2002: 32) 프랑스 는 알제리의 후견인 제도가 여성들이 공적 영역은 물론 사적 영역에서 독자적 인 활동을 전개하는 데 결정적인 방해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후 견인은 법관인 동시에 사형집행관 이었기 때문이다(조희선(a) 2000: 154). 따라 서 후견인 제도의 개혁은 알제리 여성의 공적 활동을 보장하는 초석일 뿐만 아 니라 사적 영역에서 여성의 불평등한 지위를 규정하는 모든 관습법을 무력화시 킬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관습법의 약화는 알제리인들의 세속화로 연결 되어 알제리의 전통적인 무슬림 공동체와 반식민 민족주의 운동과의 연대성을 해체시킬 수 있었다. 후견인 제도를 개혁할 책임을 맡은 위원회가 1949년 식민 지배 기구 내에 조 직되었다. 그 위원회는 후견인 제도를 이슬람법에 근거하지 않은 것으로 규정 하면서 후견인의 역할이 전제되지 않은 알제리 여성의 법률적 지위를 설정하는 1957년 7월 11일 법령을 채택하였다. 그 법령은 사망한 남편을 대신하여 여성이 자식들에 대한 법정 후견인이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여성이 재혼할 경우 새 로운 남편과 함께 공동으로 후견인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변화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즉 남편의 유언에 의해서만 자식의 법 정 후견인이 될 수 있었던 기존의 관행을 부인하는 동시에 여성도 법률적으로 성인이 될 수 있음을 규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위원회는 한 발 더 나아가 새로운 법률 초안을 마련하였는데, 이는 프랑 희귀했던 반면 프랑스 내에서는 보다 많이 이루어졌다(Goinard 1984: 343). 알제리의 프랑스 여 성들은 무슬림 남성과 결혼할 경우 관습법에 순종해야만 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제리전쟁 초기 알제 시장이었던 자크 슈발리에(Jacques Chevalier)는 이미 알제리 에는 무슬림 조상을 두고 있는 결코 덜 과격하지 않은 수많은 프랑스인 가족들이 있는데, 그들 은 전혀 그러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고 밝히고 있다(Frémeaux 2002: 32).
98 지중해지역연구 제13권 제1호 [2011. 2] 스의 민법과 1956년 8월 제정된 튀니지의 가족법을 그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일 부다처제의 폐지를 비롯하여 가족 내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종속에서 평등의 관 계로 변화시킨 튀니지의 가족법 역시 이즈티하드의 결과물이라는 인식이었다. 그 법률 초안은 카빌리아에서 시행되고 있는 결혼 적령기에 이르지 않은 소녀 들에 대한 결혼 금지를 알제리 전역으로 확대시키는 동시에 일부다처제 및 남 편에 의한 일방적인 이혼 요구 등의 폐지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더욱 이 그 초안은 알제리의 무슬림 법정 및 종교 지도자들과 관련된 전반적인 제도 를 개혁할 것을 요구하는 조항들을 포함하고 있었다(Sambron 2003: 229). 그러한 법률 초안은 광범위한 지지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특히 청년, 여성, 도시민 및 지식인들은 그 초안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종 교 지도자들조차 소수의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그 법률 초안을 통한 개혁을 지 지하였다. 하지만 프랑스는 그 법률 초안이 오히려 반( 反 ) 프랑스 선전 활동의 핵심으로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걱정하였다. 수많은 논란 속에 그 초안은 1959년 2월 4일 알제리, 오아시스 및 사우라(Saoura) 지방들에서 시민으 로서의 지위를 지닌 사람들에 의하여 체결된 결혼과 관련된 행정 명령의 형태 로 공포되었다. 그 행정 명령은 일부다처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법상의 결혼 형식을 의무화하였다. 무슬림 알제리인들의 결혼과 이혼은 프랑스 호적 대장에 의하여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사법적 이혼이 결혼을 해소 할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인 양식이 되었으며, 여성도 이혼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주체가 되었다. 남성의 간통은 확실한 유책 이혼 사유들 중의 하나가 되 었다. 동시에 이혼 재판을 주재하는 법관들은 유책 사유를 저지른 남편에게 자 식들의 양육을 위한 비용의 지불, 아내에 대한 위자료의 지급과 관련된 판결을 내려야만 하였다. 여성들은 재산분할에서 득을 보게 되었고, 이혼 혹은 별거 를 얻어낼 수 있게 되었다. 별거하는 과정과 애원으로 자신의 남편을 동네에 서 평판이 나빠 지게 만들 수도 있었다. 또한 사망한 남편의 유산이 분산되는 일을 미리 막는 데 성공 할 수 있었다(Djebar 1979: 117).
변 기 찬 알제리전쟁 기간 알제리 여성 지위의 변화 요인 99 드골(De Gaulle) 장군이 1960년 2월 5일에 기자회견에서 밝힌 것처럼 그 행정 명령으로 인하여 가정생활 내에서의 여성의 안전과 그 생활 본연의 존엄성과 관련된 법률적인 권리를 여성에게 부여하는 결혼의 개혁이 시작 된 것이다. 동 시에 이는 무슬림 여성으로 하여금 공동의 활동에 참여하게 만드는 과정을 통하여 알제리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Sambron 2003: 230). 프랑스 민법에 규정된 형식에 순응하면서 알제리의 전통 적 관습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측면에서 알제리를 변 화시키는 출발점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행정 명령의 시행은 프랑스의 군사 당국에 위임되었다. 그 당국은 각종 매체 를 동원하여 그 행정 명령의 의미와 중요성을 알제리인들에게 전파하려는 노력 을 기울였다. 그러한 노력을 통하여 이전의 법률 초안에 대한 지지자들로부터 행정 명령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FLN은 그 행정 명령 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이는 여성의 법률적 지위의 향상에 대한 반대인 동 시에 알제리인들로 하여금 프랑스에 대하여 호의적인 태도를 갖게 만들려는 프 랑스의 의도를 간파한 결과였다. 이와 관련하여 FLN은 프랑스인들, 더군다나 기독교인들 혹은 유대교 교파는 확고부동한 정수를 지닌 꾸란을 고의적으로 침 해하였으며, 또한 알제리의 무슬림들에게 프랑스의 세속적인 법률들을 무력으 로 강요하였다 고 밝히고 있다(El Moudjahid, n 45, 1959.7.6). 그와는 반대로 알제리의 국회의원인 아흐메드 제부르(Ahmed Djebbour)는 1959년 2월 중순 알제의 메아리 (L Écho d Alger)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표명하고 있다 : 최근 드골 대통령이 서명한 행정 명령에 의하여 규정된 조치 들은 그 분야와 관련된 무슬림의 법률과 부합하는 것이며, 이슬람의 도덕적 규 범들을 전혀 위반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국가를 하나의 가족 집 단으로 규정할 경우, 또한 가족은 사회의 기초라고 규정할 경우 알제리가 당면 하고 있는 문제의 해결이 여성 문제와 상호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생각할 수 없다. [ ] 예를 들어 여성이 정치적 대표자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인 투표권 을 갖고 있는 반면 자신의 남편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
100 지중해지역연구 제13권 제1호 [2011. 2] 은 있을 수 없다. 종교의 범위 내에서 남성과 여성의 지위를 결정하려는 관심보 다는 반 프랑스적인 정책에 보다 관심을 보이고 있는 FLN측과 특히 이슬람 법학 자 협회들이 그러한 행정 명령에 반대하는 비판들을 전개할 것이라고 예상해야 만 한다. [ ] 알제리 여성에게 화해의 손을 뻗어야만 한다. (Sambron 2003: 231) 이처럼 프랑스에 의하여 단행된 여성해방 정책에 대하여 알제리인들은 극명 하게 엇갈린 태도를 보여주었다. FLN은 물론 알제리 민족주의자들은 여성의 법 률적 지위의 향상이 이미 진행되고 있던 전통적인 가족주의적 규범들의 와해를 가속화시킬 것을 우려하였다. 실제로 알제리전쟁이 시작되면서 대부분의 가정 들에서 남성들은 투옥되었거나, 전투원으로 참여하였거나 혹은 사망하였기 때 문에 그들의 존재는 결여된 상태였다. 여성들은 혼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을 배웠으며, 일을 하였고, 가족의 생계와 자식들의 양육을 책임졌다. [ ] 관 습들 역시 변화되었다. 처녀들이 자신들의 선택에 따라 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 아졌으며, 그러한 상황은 이전에 비하여 훨씬 쉽게 용인되었다. (El Moudjahid, n 55, 1959.11.16) 또한 파농의 언급처럼 산악 은신처에서의 결혼은 더 이상 가족끼리의 조정 이 아니다. 모든 결혼은 자의에 의한 것 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버지가 산 악 은신처에 있는 딸의 결혼소식을 듣게 될 때 거기에 대해 반박하거나 저항하 지 않는다. 반대로 사진을 요청하고 은신처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집에서 키우 며 예의바르게 감싸준다. 이같은 혁신은 나라의 나머지 부분에서 지속되는 전 통적인 결합방식에까지 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Fanon 2001: 144). 이러한 상황에서 FLN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었다. 자신들의 사회적ㆍ도덕적 무의미함으로 인하여 정신을 잃은 여성들, 오래 종속으로 인하여 몹시 피로한 상태에 있는 여성들, 여전히 자신들을 명령의 대상으로 만들며 또한 언제나 모 든 힘을 다해 유린해야할 대상으로 만드는 전통적인 규범들에 어쩔 수 없이 복 종하는 여성들 의 위상이 변화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Imaksen 1995: 115). 사적인 영역에서 알제리 여성의 지위 변화는 엄청난 영향력과 파괴력을 지닌 것 으로 등장하였다. 더욱이 그러한 변화가 공적인 영역에서의 여성의 지위 변화와
변 기 찬 알제리전쟁 기간 알제리 여성 지위의 변화 요인 101 결합될 경우 그 파괴력이 한층 더 강력하게 변화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3. 여성의 투표권과 공적인 지위의 변화 1946년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의 경제적 부흥과 정치적 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계획안을 마련하였다. 그 계획안에 대한 논의가 보류된 상태에서 알제리 의회의 무슬림 의원들이 알제리의 독립을 명시적으로 겨냥하지는 않았지만 알제리의 자치권을 강조하는 계획안을 제출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무슬림 의원들의 묵시 적인 독립 요구를 봉쇄하기 위하여 이미 마련된 정부 계획안을 통과시켰으며, 1947년 9월 20일 그 계획안을 공표하였다(Droz 1982: 34). 그 계획안은 1947년 법 령 (Statut de 1947)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그 법령은 알제리를 시민의 성격, 재정적 자치권 및 본 법령의 조항들에 의하여 규정되는 특별한 기구 등을 갖춘 지방들이 있는 하나의 집단 으로서 정의하였다(Montagnon 1984: 102). 알제리 여성은 그 법령의 제3항을 통하여 이론적으로는 투표권을 획득하였 다. 그 조항에서는 본래 이슬람교도인 알제리 여성들은 투표권을 향유한다. 알제리 의회는 향후 그 권리를 실행하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정할 것이다 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제리 의회는 그 조항의 실행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토론을 벌였으며, 그 과정에서 알제리 여성에 대한 투표권 부여를 지지하는 입 장이 표출되었다. 하지만 이후 10년 동안 실질적인 시행 방안 수립은 유보되었 는데, 알제리 남성을 중심으로 구성된 전통적인 무슬림 공동체는 여성에 대한 투표권 부여를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알제리 내부의 일부 유럽인 공동체 들은 무슬림의 투표권 확대를 알제리 의회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 약화로 간 주하는 우려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8년 12월 알제리 의회가 여 성의 투표권 시행과 관련된 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부한 이후 1952년부터는 그 문제에 대한 토론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1947년 법령은 환상에
102 지중해지역연구 제13권 제1호 [2011. 2] 불과하며 알제리에서 전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였다 라는 평가를 얻고 있다 (Montagnon 1984: 104). 1953년 3월 알제리 총독인 로제 레오나르(Roger Léonard)가 프랑스 내무장관 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여성의 투표권 문제가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음이 드러 난다. 그에 의하면 알제리 여성의 정치적 지위는 꾸란에 규정된 원칙들에서 기 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지위의 개선이 입법부의 의결 혹은 국제협약들의 적용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알제리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한다는 것의 의미는 그 여성으로 하여금 프랑스적 요소 를 갖게 하는 것으로 이는 전체 무슬림 공동체로부터의 동의를 얻기 힘들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프랑스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악화될 가능성이 있 기 때문에 알제리 여성에 대한 투표권 부여를 프랑스 정부가 솔선하여 제안할 필요가 없음을 역설하고 있다(Sambron 2003: 232). 알제리전쟁의 시작은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문제에 대한 관심을 증폭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는 식민 지배의 기본적 이념인 프랑스의 알제 리 (l Algérie française)에 대한 여성들의 지지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으며, 동시 에 FLN을 지지하는 여성들로 하여금 그녀들의 사고를 전환시키게 만드는 계기 를 제공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1956년 2월에 실시된 여론 조사 결과는 그러한 필요성을 새롭게 각인시켰다. 알제리인들의 10%가 자발적으로 FLN을 지지하고 있는 반면 20%는 분명하게 반대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더욱이 알제리인들의 80%는 프랑스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상태에서 독립을 지지 하고 있는 반면 단지 10%만이 프랑스와의 완전한 단절을 희망하는 것으로 조사 되었기 때문이다(Frémeaux 2002: 287). 이러한 상황은 여자들을 끌어들이자. 그러면 그 나머지는 따라올 것이 다 (Fanon 2001: 77)라는 공식이 여성의 투표권 문제에 적용되는 배경으로 작용 하였다. 프랑스는 여성의 투표권 행사가 초래할 영향력과 그 결과를 미리 검증 할 목적으로 1956년 베르베르 지방의 케이라네(Kheirane) 산악지대에서 여성들 이 투표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 결과는 프랑스를 충분히 만족시켰다.
변 기 찬 알제리전쟁 기간 알제리 여성 지위의 변화 요인 103 투표에 참여한 여성들의 숫자가 기대 이상으로 많았을 뿐만 아니라 그 여성들 은 프랑스가 기대하였던 진보적 인사들이 당선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 으로 분석되었기 때문이다(Sambron 2003: 232-233). 결국 프랑스는 1958년 2월 5일 알제리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령을 공포하였으며, 여성들로 하여금 거주 지역의 선거인 명부에 등록하도록 명령하 였다. 여성들이 공식적으로 승인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첫 번째의 무대는 1958년 9월 28일로 예정된 국민투표였다. 그 국민투표는 정계로의 복귀를 선언 한 드골이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이 포함된 헌법 개정에 대한 지지 여 부를 묻는 것이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헌법 개정이 출신 및 정치적 성향에 상 관없이 모든 프랑스인들에 의하여 압도적 다수로 결정되는 것이 필요하였 다. (Droz 1982: 194) 이를 위해서는 알제리 여성의 참여가 중요한 변수로 대두 될 수밖에 없었다. 2월 5일 법령의 시행 책임을 맡은 프랑스 군대는 8월 8일부터 국민투표를 감 시ㆍ홍보하는 조직을 만들었으며, 특히 여성들이 참여하는 특별 투표사무소를 설치하여 모든 여성들로 하여금 투표권을 행사하도록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투표권의 행사를 통하여 알제리 여성들을 구속하였던 전통적인 가부장적 질서 로부터 해방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알제리의 모든 언론은 통제를 받았으며, 단지 국민투표에 찬성하는 발언만 용인되었다. FLN은 국민투표를 거부하는 일은 바로 조국인 알제리에 대한 동의의 표시 라고 역설하면서 모든 알제리인들로 하여금 국민투표에 참여하지 말 것을 요구 하였다(Droz 1982: 195). 알제리인들은 프랑스 군대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선전 활동과 FLN의 투표 거부 요구라는 이중적인 위협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그러한 위협은 여성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FLN은 알제리 여성들이 투표권을 행 사할 경우 그러한 투표를 통하여 알제리 여성인 당신은 프랑스 여성이 되는 것이고, 당신의 종교와 조국을 버리는 데 가담하는 것이다. 당신은 알제리를 프 랑스의 땅으로 만드는 데 가담하게 될 것이다 라고 격렬하게 비판하였다(El Moudjahid, n 27, 1958.7.22). 알제리 여성의 투표권 행사를 이슬람 및 알제리에
104 지중해지역연구 제13권 제1호 [2011. 2] 대한 배신행위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3명의 여성들이 선거인 명부에 등록하 였다는 이유로 참수를 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였다(Le Monde, 1958.9.5). 국민투표를 저지하려는 FLN 및 알제리 민족해방군(ALN, Armée de libération nationale)의 테러 행위들이 지속되는 가운데 프랑스 군대는 투표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 체포하는 것은 물론 가족 수당이나 사회보장 수당을 지급하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을 유포하였다. 국민투표를 위한 프랑스의 선전 활동은 성공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투표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의 96.5%가 찬성표를 던졌는데, 이 는 등록된 유권자의 76.1%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알제리 여성의 투표권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는 가운데 200만 명 정도의 여성들이 투표에 참여한 것으로 조사 되었다. 국민투표에 이어 11월 30일에는 총 67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의회 선거 가 실시되었으며, 46명의 무슬림과 21명의 유럽인이 당선되었다(Droz 1982: 196, 201-202). 그 46명 중에는 바트나(Batna)에서 당선된 알리 말렘(Ali Mallem)을 비 롯한 3명의 여성도 포함되어 있었다(Montagnon 1984: 281). 알제리 여성들이 공 적 영역에서 새롭게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프랑스는 그러한 투표 결과를 대부분의 알제리인들이 FLN의 이념에 동조하 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분석하였다. 동시에 알제리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 할 수 있는 적임자로 선전되었던 드골에 대한 신임 혹은 프랑스의 알제리 에 대한 지지로 해석되었다. 그러한 해석은 알제리 여성들이 각종 위협에도 불구 하고 투표권을 행사하였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알제리전쟁 말기에 이르러 프랑스의 그러한 해석은 오류였음이 증명되었다. 1962년 7월 1 일 알제리에서는 1962년 3월 19일 선언에 의하여 규정된 상황 하에서 알제리 가 프랑스와 상호 협력하는 독립 국가가 되는 것에 동의 하는지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6백만 명의 유권자들이 그 질문에 찬성하였던 반면 반 대는 16,534명에 불과하였다. 등록된 유권자의 91.23%, 투표에 참여한 알제리인 들의 99.72%가 찬성하였다는 의미이다(Stora 2006: 83). 프랑스에 대한 알제리 여성들의 태도가 변화된 이유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 을까? 알제리 남성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려는 정책이 알제리를 프랑스로부
변 기 찬 알제리전쟁 기간 알제리 여성 지위의 변화 요인 105 터 해방시키려는 시도로 연결될 수 있음을 프랑스가 간과한 것이라고 해석할 경우, 이는 지나치게 일반론적인 설명일 것이다. 여성들의 태도가 변화된 이유 는 알제리전쟁에 대한 여성의 기억을 통하여 분석되어야만 한다. 알제리전쟁에 참여하였던 전투원들과 관련하여 알제리 정부가 1974년에 출판한 보고서를 보 면, FLN과 ALN에 공식적으로 가담하였던 전투원들은 총 336,748명으로 파악되 고 있다. 그 중 여성은 10,949명으로 3.25%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러한 여성의 16%인 1,755명은 전투원의 신분으로 참여하였으며 전투를 수행하던 중에 306명 이 사망하였다. 3) 민간인의 신분으로 저항 운동에 참여하였던 9,194명 중 6.8% 인 626명이 행방불명되었다.(Amrane 2000: 23; Bennoune 1999: 4). 그러한 숫자와 관련하여 알제리 여성들이 전쟁에 소극적으로 참여하였거나 무관심하였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정신적으로 혹은 단순한 행동들을 통하여 무자히딘(moudjahids)을 지지하였던 여성들의 숫자는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Jurquet-Bouhoune 2007: 113). 여성들은 프랑스 군대의 이동에 관한 첩보의 수 집과 보고, FLN 전투원들에 대한 숙식 제공, 전쟁에 필요한 자금의 모금, 전투 원들의 은신처 사이의 연락, 민간인들에 대한 FLN의 이념 혹은 알제리전쟁의 목적에 대한 선전 활동 등을 담당하였다. 그러한 여성들의 숫자는 전쟁이 지속 될수록 점차 증가하였다. 여성들의 활동은 알제리 민족주의의 하부구조를 차지 하는 것으로, 프랑스의 군사 작전을 위협하는 강력한 혹은 새로운 장애물로 등 장하게 되었다(Sambron 2003: 240). 프랑스 군대가 프랑스의 알제리 를 위한 여 성들의 지지를 획득할 목적으로 여성들에 대한 심리전을 전개한 까닭도 바로 그러한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알제리 여성들로 하여금 직ㆍ간접적인 저항 활동에 참여하도록 유도 한 것은 전쟁 기간 프랑스 군대에 의하여 저질러진 각종 권력 남용 및 범죄들 에 대한 기억이었다. FLN 및 ALN에 공식적으로 참여하였던 여성들 중 48.1%가 30세 미만이었다. 그 여성들을 출신 지역별로 구분할 경우 절대 다수인 77.9% 3) 다른 자료에는 사망한 여성 전투원의 숫자는 314명이며, 전투원 혹은 민간인의 신분으로 사망 한 여성들의 숫자는 948명으로 되어 있다(Jurquet-Bouhoune 2007: 113).
106 지중해지역연구 제13권 제1호 [2011. 2] 가 농촌 지역 출신이었던 반면 도시 출신은 20.1%에 불과하였다. 이는 후자가 전자에 비해 알제리전쟁에 관심이 없었던 것을 뜻하지는 않으며, 당시의 알제 리 인구 분포에 상응하는 것이다(Bennoune 1999: 4). 뿐만 아니라 하층민 출신 의 20세 미만 소녀들 역시 전투원 혹은 간호사로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남성들 과 마찬가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Jurquet-Bouhoune 2007: 121). 그러한 여성들 은 전투 중에 전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체포된 여성들의 경우 남성과 차별 없는 고문 및 폭력을 경험하였다. 여성의 몸을 남성의 그것과 동일시하는 프랑스 군대의 행위는 알제리 여성 들의 참여를 요구하면서도 여성해방 정책에는 반대하였던 FLN보다 훨씬 더 고 통스러운 기억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더욱이 그러한 여성의 기억은 남성의 그것과 동일시되거나 혹은 남성의 그것에 종속될 수 없는 것이었다. 4. 알제리전쟁과 여성의 몸 알제리전쟁을 통하여 여성은 수많은 변화를 경험하였다. 알제리의 독립을 위 하여 투쟁하였던 알제리 여성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역 사의 연대기 속에서 그 유례가 없는 것 이었다(El Moudjahid, n 3, 1956.5.). 그러 한 비약적인 발전들 중에는 여성의 몸이 갖는 전통적인 의미와 가치가 변화되었 다는 사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한 변화는 여성의 외적인 형태와 관련된 것으 로, 특히 복장에서 나타났다. 무장 전투원으로서 전쟁에 참여한 여성들은 제복을 입었으며, 히잡 대신 모 자를 착용하였다. 본래 FLN은 여성의 히잡에 대하여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FLN은 1958년 5월 13일 알제 광장에서 여성들이 히잡을 벗어던졌던 사건을 프랑스 군대의 선전 활동 책략에서 비롯된 실패한 선언 으 로 규정하였다. 여성들은 단지 프랑스의 강요를 받아 히잡을 벗었을 뿐 이라는
변 기 찬 알제리전쟁 기간 알제리 여성 지위의 변화 요인 107 것이다. 더욱이 여성들은 혁명 첫날부터 남성 전투원들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 도 자신들의 충분한 자존심을 획득 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여성들에게는 해방 이 필요하지 않다 는 것이다(El Moudjahid, n 26, 1958.7.4). FLN은 여성을 부차 적인 존재로 간주하면서, 히잡을 거부하는 행동을 비롯한 전통적 규범들로부터 의 여성해방은 필요하지 않다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알제리전쟁이 지속되면서 FLN은 히잡에 대한 인식을 일정 부분 전환 해야만 하였다. 무장 전투원으로서 전쟁에 참여하는 여성들의 숫자가 증대되면 서 효율적인 군사작전은 물론 남성 전투원들과의 동지적 단합을 위하여 히잡을 벗는 것에 동의하였다. 또한 도시와 농촌 지역에서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을 군 사작전에 이용하기 위해서는 히잡의 전통적 의미를 수정해야만 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여성의 몸은 군사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거나 혹은 도심지에서 저항 활동을 전개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민간인 차원의 저항 운동에서 몸은 확실히 일정한 표준을 갖고 있는 것은 아 니다. 허약하거나 혹은 육체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는 남성들과 여성들조차도 자신들에 알맞은 활동 공간을 찾을 수 있다. 그 경우 몸을 숨겨야 할 필요성과 가능성은 단지 드물게 요구된다. 그와는 반대로 많은 경우에 몸은 전면에 노출 되며, 그것에 따라 평가되어야만 한다. 이따금 몸의 영향력이 일제히 확대되면 서 상대방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몸은 개인적인 이미지 로서 등장한다. 그러므로 그 이미지가 여성의 그것이라면 아주 잘된 일이다. 확 실히 여성들의 몸은 공격적이 아닌 방어적이고 아름다우며 교묘하게 장애물을 피할 수 있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무기를 연상시키는 인공적인 철제 도구 없이 도 몸은 심리학적인 무기로 변할 수 있다. 몸은 사회적인 예측에 따라 작용될 수 있으며, 남성의 몸과는 달리 시대의 요구들에 따라 훨씬 더 신뢰감을 주는 모습을 가질 수 있다(Ibrahimi 2004: 213). 실제로 전쟁에 참여하였던 알제리 여성들은 상황에 따라 히잡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였다. 그 여성들은 유럽 여성과 같은 복장과 화장을 하고 프랑스 군대가
108 지중해지역연구 제13권 제1호 [2011. 2] 도시 주변에 설치하였던 바리케이드를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었으며, 이를 통 해 각종 정보들과 무기들을 전달하였다. 정도의 차이는 확실히 있지만 대부분 의 알제리인들과 프랑스인들을 그들의 피부색 혹은 다른 신체적 특징에 따라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 하였기 때문이다(Katzenellenbogen 1999: 158). 또한 프랑 스가 알제리 여성의 히잡 착용에 대하여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에 가능한 일이었다. 즉 이미 1954년 이전부터 알제리 민중의 독창성 파괴와 국가적인 실존 형태 해체 임무를 받은 알제리의 프랑스 행정 책임자들은 알제 리 여성 위상의 상징인 히잡 착용 에 관심을 보였다(Fanon 2001: 34). 히잡을 벗 기를 독려한 것이다. 그러한 프랑스의 정책이 초래한 결과에 대하여 파농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 다 : 얼굴을 드러내고 육체적으로 자유로운 이 실험적 여성들은 이제 알제리 의 유럽 사회에서 강세통화로서 거리를 활보한다. 이 여성들 주변에는 주도적 인 분위기가 군림한다. 일종의 불안감에 사로잡혀 극도의 흥분상태에서 승리를 다짐하는 유럽인들은 개심의 심리적 현상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사실 유럽 사 회에서 이렇게 개심한 사람들은 존경받는다. 그들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행 정당국의 호감을 얻는다. (Fanon 2001: 41) 히잡을 벗은 알제리 여성의 몸에 대 한 프랑스인의 관심을 역으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히잡의 착용 역시 저항 활동의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히잡을 착용한 상태에 서는 프랑스를 지지하는 알제리인들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무슬림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각종 임무들을 수행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알제리 여성들 은 히잡을 비롯한 자신의 의복을 이용하여 각종 무기들을 은닉하거나 운반하였 다. 전쟁에 참여하였던 한 여성은 그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 프랑스 군대는 카스바(Casbah)의 전 지역에 배치되어 있었다. 만약 우리가 없 었다면 형제들은 꼼짝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전과 마찬가지의 삶을 살 고 있었지만, 활동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우리는 형제들에 비하여 훨씬 더 대단 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히잡을 착용한 채 움직일 수 있었기 때 문이다. 은거지에 격리된 채 있었던 것은 오히려 형제들이다. 한 번은 그 형제
변 기 찬 알제리전쟁 기간 알제리 여성 지위의 변화 요인 109 들이 외출을 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하여 그들에게 히잡을 씌웠다. 그들은 코를 내놓게 해달라고 우리에게 사정해야만 하였다(Amrane 2000: 147-151). 더욱이 여성들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몸의 모습을 수시로 변화시켰으며, 심지 어 남자로 변장하기도 하였다. 자신들의 몸을 이용한 모든 가능성들을 활용하 였던 것이다. 이처럼 알제리 여성들은 히잡을 이용하여 알제리 여성에서 프랑스 여성으로 혹은 그 반대로의 전환을 반복적으로 실행하였다. 여성의 몸과 의복은 전통적 인 기능을 초월하여 저항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되었으며, 그 효율적인 가치 역 시 확실하게 증명되었다. 하지만 그로 인한 대가는 혹독하였다. 여성이 체포될 경우 명예와 처녀성은 더럽혀졌으며, 이방인들의 시선에 나신의 몸이 노출되었 다. 이는 남성 집단이 지니고 있었던 의지에 종속된 결과였다. 그러한 의지는 여성이 좋아한다 라는 표현으로 정당화되었다(Branche(a) 2001: 464).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신들의 몸에 가해지는 잔악한 범죄행위들을 받아들여야 하였다. 그 러한 치욕으로부터 살아남은 여성들은 침묵 속에서 지속되는 후유증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였다(Ibrahimi 2004: 2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제리 여성의 활동, 즉 남성 전투원과 함께 뒤섞이면서 전개하였던 활동들과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이용하여 군사 작전에 가담하였던 활동들은 알제리 사회의 전통적 질서를 동요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러한 활동 들은 미약한 수준이기는 하였지만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결과들을 초래하였 다. 먼저 알제리 여성들은 자신의 몸을 이용하여 내적인 의지와 사고를 표현하 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예로 알제리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금기시되 었던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표출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전쟁에 참여하였던 젊은이들에게 성행위는 예정되어 있었는데, 전쟁이 단련시켰다고 여겨지는 성 욕의 여정에서 모든 전투원들에게 의무적인 통과 의례와 같은 것이었다. 어떤 여성 전투원들은 알제리를 위한 출정에 나서기 전에 서둘러 자신의 처녀성을 포기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죽음에 임박하였을 때 마지막으로 성행위를 하거나 혹은 성행위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죽지 않게 되기를 희망하였다. 사랑과 죽음
110 지중해지역연구 제13권 제1호 [2011. 2] 이 그런 것처럼 성과 전쟁은 이전에 비해 훨씬 더 많은 공통의 영역을 갖게 되 었다. (Branche(b) 2003: 402) 여성 전투원들의 성행위가 자발적이었든 혹은 강 압에 의한 것이었든 그것은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몸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 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여성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이용하여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자신의 독자적인 의지를 표현하였던 것이다. 또 다른 예로서 1957년 FLN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던 6명의 여성들이 체포되 어 사형선고를 받는 사건을 들 수 있다. 그 여성들 중 자밀라 부이레드(Djamila Bouhired)는 사형선고가 내려지는 순간 웃음을 보였다는 이유로 광범위한 칭송 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대해 FLN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 아무도 잘못 보지 않은 자밀라 부이레드의 웃음은 헛된 허세도 아니며 경솔한 행동도 아니 다. 오히려 그 웃음은 확고하게 유지되고 있던 내적인 확신을 조용히 표명한 것이다. 대부분의 프랑스 민주주의자들의 특징은 눈물을 이끌어 내거나 혹은 사소한 의식의 위기들을 유발할 수 있을 훌륭한 개인적인 경우들에서만 깜짝 놀란다는 점이다. [ ] 자밀라 부이레드의 품위, 그녀의 비범한 끈기, 굴복하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으려는 그녀의 완고한 고집, 죽음을 앞에 두고 웃음을 보이 는 그녀의 배려 등은 알제리인이 갖고 있는 민족적 태도의 중요한 특징들이다 (El Moudjahid, n 12, 1957.11.15). FLN은 자밀라 부이레드의 웃음을 알제리 남 성으로 대표되는 알제리 민족의 주요한 특징이며, 여성의 지위 향상의 결과물 이 아닌 전통적인 가족주의적 규범 속에서 성장한 결과라 강조하고 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 웃음이 확고하게 유지되고 있던 내적인 확신을 조용히 표명 한 것 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몸을 통한 여성들의 활동의 두 번째 결과는 남성의 전유물로 간주되었던 공 적 영역에 여성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알제리 여성들은 사 적 영역을 벗어나 남성들의 세계에 과감히 맞서 싸우게 되었으며, 성별에 따 라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엄격하게 구분하였던 규범에 도전하게 되었다 (Ibrahimi 2004: 198). 이러한 상황을 아씨아 제바르(Assia Djebar)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변 기 찬 알제리전쟁 기간 알제리 여성 지위의 변화 요인 111 온 몸과 팔 다리를 완전히 가릴 수 있게 되자 이번에는 그런 베일을 입은 여 자들이 자신을 감춘 채로 밖을 돌아다니며 남성들만의 공간을 도둑질하여 훔쳐 보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여성들은 특히 베일 밖으로 한쪽 눈만 내놓은 일시 적인 애꾸눈의 모습이 된다. 상황과 장소에 따라 자유주의 적 관용은 또 다른 눈을 볼 수 있게 해줌으로써 온전한 시선을 갖게 해준다. 눈을 덮는 작은 베일 이 두 눈을 외부로 향해 활짝 열게 해 주는 것이다. 또 하나의 눈, 즉 여성의 시선이 드러난다. 해방된 그 눈은 감금상태 밖으로 타인들의 빛을 향한 정복의 징표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위협으로 받아들여진다. 악순환이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전에는 공간의 주인이 남들의 시선이란 존재하지 않는, 외로운 자신의 시 선만으로 여성이 밀폐된 장소에 대하여 권위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여인들의 이동이 가능해지면서, 비현실적이고 신비스러운 유령과 같은 차림으 로 한 눈만으로 두리번거릴 때, [ ] 남자들이 이번에는 그 시선을 두려워하게 되었다(Djebar 1979: 155-156). 세 번째로 언급할 수 있는 결과는 전통적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사적 영역의 의미를 변화시켰으며, 그 영역에 대한 여성들의 참여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는 사실이다. 알제리 여성들은 거주의 장소인 동시에 저항의 중심 지가 되었던 집의 내부에서 글을 쓰고, 그 글을 전달하였다. 그녀들은 부모들과 이웃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공적인 장소들에서 개인적인 관계들을 맺었 으며 또한 정치적으로 필요한 접촉들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사적인 장소들을 이 용하였다. 그녀들은 우호적인 만남들을 회합으로 변환시켰으며, 층계참을 선전 활동을 위한 작은 공간으로 전환시켰고, 모르는 남성을 아들, 남편, 연인으로 바꾸었으며, 책을 권총을 숨기는 도구로 변화시켰고, 자신들의 몸을 각종 문서 들이나 폭발물들을 숨기는 장소로 전환시켰다. 만약 그러한 일이 성공을 거두 었다면, 그것은 바로 사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여성들의 모임이 전쟁을 통 하여 강화된 것으로 나타나는 상징적 차원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였기 때문이 다. (Ibrahimi 2004: 215)
112 지중해지역연구 제13권 제1호 [2011. 2] 마지막으로 알제리 여성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체계적으로 혼합시키려 는 노력을 통하여 두 영역 모두에 대한 지배력을 증대시켰다는 점을 언급할 수 있다. 히잡을 벗은 상태에서 발가벗은 느낌으로 유럽풍 도시로 들어가는 알제 리 여성은 자신의 육체를 다시 알게 되고, 아주 혁신적으로 다시 자리 잡게 한 다. 여성의 경우 육체와 세계의 새로운 변증법은 중요하다. (Fanon 2001: 66) 그 러한 변증법을 통하여 알제리 여성들은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구별하는 동시에 그 두 영역들을 상호 겹쳐지게 만드는 하나의 경계 구역을 창조하였다. 그 구역은 자체적으로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 알제리전쟁은 그 구역이 인습적인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더욱이 알제리전쟁 기간 여성들은 자신의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은 상태에 서 전투원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음식을 준비하며, 필요한 경우에 그들을 돌보았 다. 그러한 도움은 결코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희미하지만 매우 중요한 도 움을 제공하였으며, 또한 운동의 대중성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Frémeaux 2002: 131) 특히 알제리 여성들이 공적인 무기의 영역에 사적이며 개인적인 무 기, 즉 자신의 몸을 포함시켰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평가되어야만 한다. 그 여성 들은 자신의 몸을 이용하여 자신의 집으로 한정되었던 활동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그 자체로 이미 전통적인 규범들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점은 외부라는 공간에서 그 여성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 방법은 전통적으로 여성들 의 영역이었던 가정의 경계들에서 스스로 습득한 것이었다. 또한 여성들은 자 신들의 영역 속으로 외부 혹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들을 도입하였다. 전적으로 공적인 영역도 아니며 완전한 사적인 영역도 아닌 그 경계에 위치한 제3의 공 간을 창조하였던 것이다.
변 기 찬 알제리전쟁 기간 알제리 여성 지위의 변화 요인 113 5. 맺음말 지금까지 본고에서는 알제리전쟁 직전부터 이루어진 알제리 여성 지위의 변 화 요인을 외재성과 내재성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알제리전쟁은 프랑스가 알제리를 정복한 이래 지속적으로 전개시켰던 식민 지배 정책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갖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식민 지배를 보 다 용이하고 확고하게 만들기 위하여 프랑스는 알제리 여성에 대한 해방정책을 추진하였다. 알제리 여성을 프랑스의 알제리 정책에 대한 적극적 혹은 잠재적 지지자로 만들 뿐만 아니라 알제리 사회를 내부적으로 분열시켜 반식민 저항 운동의 응집력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알제리전쟁은 프랑스에 의하여 강요되는 문화변용에 대한 반대라는 이념과 결합될 수밖에 없었다. 문화변용에 대한 저항은 한 문화가 가 장 심오한 가치나 가장 안정적인 모델을 재고하지 못한 채 존재형태의 일면을 바꿀 수 없음으로 이해 될 수 있다(Fanon 2001: 40). 사실상 알제리 민족주의는 알제리가 전통적인 아랍-무슬림 정체성을 유지할 것을 강조하면서 여성 지위의 개선 요구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여성의 지위는 그러한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상징들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FLN의 기관지인 엘 무 자히드 가 1956년부터 1962년까지 총 91호가 발간되는 동안 알제리 여성들과 관 련된 기사들은 단지 17개호에만 게재되었으며, 전체 기사의 5.35%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알제리 민족주의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게 만든다(Jurquet-Bouhoune 2007: 123). 그러므로 알제리 여성의 해방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질 경우 알제 리인의 저항과 관련된 모든 문제들은 자동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 판단 하였던 프랑스의 정책은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알제리의 정체성을 근본 적으로 뒤흔들 수 있는 각종 법령과 명령들을 공포하면서 알제리 여성의 지위 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알제리 여성은 전쟁 기간 여성의 지위와 관련된 수많은 소득을 얻을 수 있었
114 지중해지역연구 제13권 제1호 [2011. 2] 다. 꾸란이나 샤리아 같은 이슬람 경전이 아닌 부족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를 통하여 법제화된 관습이 여성의 지위에 적용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여성의 법 률적 지위가 향상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여성의 사적 지위가 개선될 수 있는 출발점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또한 여성의 투표권을 인정함으로써 알제리 여성이 진정한 의미의 성인 혹은 시민으로서 위치할 수 있는 가능성도 확보되 었다. 그러한 공적 지위의 향상과 함께 본고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여성에 대한 교육 기회 역시 확대되었다. 알제리의 모든 여성들은 확실히 새로운 지위 를 획득하였다. 그러한 지위 덕분에 알제리 여성은 자신의 전통적인 역할로부터 일정 부분 벗어날 수 있었다. 한편의 여성들은 프랑스가 시행하는 여성해방 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면서 프랑스의 알제리 를 유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에 가담 하였다. 다른 한편의 여성들은 알제리전쟁에 전투원 혹은 보조적 역할을 담당 하는 일반인으로서 참여하면서 알제리 민족주의에 동조하였다. 만약 여성의 지 위가 문화적, 종교적, 법률적, 나아가 정치적 규범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면 프랑스에 의하여 시행된 여성해방 정책은 두 공동체들 사이의 사회적 간격을 측정할 수 있게 만든다. 프랑스의 여성해방 정책은 젊은이, 여성, 지식인 등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지 지를 확보하였다. 하지만 그 정책은 알제리 민족주의를 고조시켰으며, 민족주 의자들은 그 정책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프랑스의 정책에 대 한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알제리 여성은 공통의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즉 자신 의 몸을 공적 영역에 포함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프랑스의 정책 을 지지하였던 여성들이 외래의 문화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급진적인 여성 해방을 원하였다면, 그 정책에 반대하면서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하였던 여성들 은 자발적 저항 활동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킬 것을 구상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알제리 여성들은 약간의 정도 차이는 있지만 여성 해방에 대한 의지와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있었다. 알제리전쟁 기간 여성들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서의 경험들을 혼합시켰
변 기 찬 알제리전쟁 기간 알제리 여성 지위의 변화 요인 115 으며, 그 결과 자신들만의 고유한 경계 영역을 창조할 수 있었다. 그 여성들은 자신의 딸들에게 자신들이 살았던 세계와는 확실히 구별되는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즉 양성 사이의 관계들이 이전과는 분명 히 다른 세계, 여성이 남성과 평등해질 수 있는 세계를 가르칠 수 있었다. FLN 은 1962년 트리폴리(Tripoli) 계획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 우리 사회 내에는 여성의 역할과 관련된 부정적 사고방식이 존 재하고 있다. [ ]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여성들의 마음속에 책임감을 심 어주는 것과 같은 행동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여성의 지위 향상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 ] 남성과 여성의 평등은 그러한 행동들 속에 포 함되어야만 한다. (Sambron 2003: 242) 결국 알제리전쟁 기간 중 공적 영역 및 사적 영역에서 이루어진 여성의 지위 변화를 프랑스에 의한 목적론적 시혜의 결과물로 돌리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관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알제리 여성의 직접적인 경험이 가장 중 요한 요인이다. 알제리전쟁 기간 프랑스 군대는 여성들을 작살냈지만, 망가 뜨리지는 못했 다. 여성들은 다시 입을 찾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입술이, 혀가 생겼 으며, 모든 것을 치유하기 위하여 어제를 오늘을 끊임없이 이야 기 하고 있다. 여성들은 자신들끼리 이야기하면서 외부 세계, 담장 밖, 감옥 밖 을 보고 있다(Djebar 1979: 63, 56). 알제리 여성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시선 과 목소리를 찾은 것이다. 그러므로 말 그대로 여성은 혼자 힘으로 자기 위상 을 얻어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Fanon 2001: 134). 확실히 알제리전쟁은 여성들로 하여금 남성들이 세운 질서를 근본적으로 동 요시키게 만들었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동시 에 그 전쟁은 여성들로 하여금 저항은 전혀 그 경계가 없으며, 그 저항은 자신 들의 공동체의 경계들을 초월하였고 나아가 그 저항은 자유, 해방 및 정의의 사 고들을 자신들과 함께 공유하였던 다른 여성들과도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만들었다(Ibrahimi 2004: 216).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 이후, 특히 1990년대 이후 알제리 사회 내에서 여성의 지위와 관련된 정책은 답보와 회귀
116 지중해지역연구 제13권 제1호 [2011. 2] 를 반복하는 모순적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베일을 벗 어버리고 밖을 돌아다니지만,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으로 또 다른 베일을 몸에 두르고 있다(Djebar 1979: 53). 하지만 여성들의 기억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은 낙관적으로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된다. 기억은 과거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현재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며, 미래의 세대들에 대한 교육의 자료이기 때문이다. 즉 알제리 여성들은 가르침을 제공하기 위하여, 여성의 지위와 관련된 허위의 주 장에 대항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1994년 부터 여성들의 기억이 알제리의 비극적 현실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글쓰기를 통 하여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기억을 통하 여 알제리에서 나타나는 모순의 기원을 파악하려고 시도한다. 알제리에서 발생 하고 있는 상황은 문명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처럼 보이고 있지만, 여성들은 그 문명을 형성시켰던 과거로부터 그 문명이 비롯된다는 사실을 논증하면서 그 상 황에 대응하고 있다. 자신들의 기억을 통하여 모든 혼돈을 종식시키는 것, 즉 과거 사회의 소멸과 새로운 사회의 탄생에 대한 희망을 표출하고 있다. 그렇 게 상반되는 욕망들이 포함된 여성들의 기억은 세계를 향해 보내는 고뇌의 호소인 것이다. (Ammar Khodja 1999: 152) [주제어 : 알제리전쟁, 알제리 여성, 법률적 지위, 투표권, 여성의 몸, 알 제리 민족해방전선]
변 기 찬 알제리전쟁 기간 알제리 여성 지위의 변화 요인 117 참고문헌 조희선(a). 2000. 압둘 하미드 이븐 후두까의 «남풍»에 나타난 알제리 사회의 변화와 갈등. 아랍어와 아랍문학. 제4집. pp. 145-162. 조희선(b). 2001. 아랍ㆍ이슬람 여성에 관한 고찰 -종교적 당위성과 현실, 그 리고 세속과 종교 사이-. 여성ㆍ가족생활논총. 제6집. 명지대학교 여성ㆍ가족생활연구소. pp. 23-45. 황의갑. 1996. 말리키 학파의 북서아프리카로의 전파. 한국이슬람학회 논총. 제6집. 한국이슬람학회. pp. 63-73. Djebar, Assis. 1979. Femmes d Alger dans leur appartement. 여승구ㆍ김정숙 공역. 2006. 알제의 여인들. 대전: 배재대학교 출판부. Fanon, Frantz. 2001. L an V de la révolution algérienne. 홍지화 옮김. 2008. 알제 리 혁명 5년. 서울: 인간사랑. Irigaray, Luce. 1977. Ce sexe qui n en est pas un. 이은민 옮김. 2000. 하나이지 않은 성. 서울: 동문선. El Moudjahid. Ammar Khodja, Soumya. 1999. Écritures d urgence de femmes algériennes. Clio. Histoire, Femmes et Sociétés. n 9. pp. 141-156. Amrane, Djamila. 2000. Des femmes algériennes dans la guerre. Paris: Karthala. Bennoune, Mahfoud. 1999. Les Algériennes victimes d une société néopatriarcale. Alger: Marinoor. Branche, Raphaëlle(a). 2001. La torture et l armée pendant la guerre d Algérie. Paris: Gallimard. Branche, Raphaëlle(b). 2003. La sexualité des appelés en Algérie. Jean-Charles Jauffret. Des hommes et des femmes en guerre d Algérie. Paris: Éditions Autr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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