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1999 11 크래쉬 Crash 12 아브라함 계곡 Vale Abraao 감독 데이빗 크로넨버그 촬영 피터 서취스키 음악 하워드 쇼어 주연 제임스 스페이더, 홀리 헌터, 엘리아스 코테아스, 데보라 웅거, 로 잔나 아퀘트 96년, 캐나다 영화 컬러, 1시간 40분 96년 깐느영화 제 심사위원특별상 만드는 영화마다 마지막 극점에 도달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점점 대 담해지는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정말 신기한 시네아스트이다. 그 중에서도 기계-신체의 접합에 관한 불경한 상상을 훌쩍 넘어선 <크래쉬>는 사유하면 서 탈주하는 자의 극한을 밀고 나간다. 사람들은 그럴 리 없다고 말했다.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기어이 그렇게 되고야 말았다! (<크래쉬>를 향한 사이트 앤 사운드 의 비명에 가까운 찬 사). 이것은 정말 우리 세기를 탐구하는 사탄 같은 걸작이다. 이데올로기의 끝장이며, 멀티미디어이며, 완전한 버추얼이며, 독약의 복귀이며, 탈구이 며, 섹슈얼리티의 변형이다. 그와 동시에 아방가르드 영화이다. 어쩌면 이 영화를 완전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크로넨버그 는 현대 예술가들 사이에서 마치 앤디 워홀 같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기 때 문이다. 아마도 <크래쉬>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중요한 영화가 될 것이 다. 믿고 싶지 않겠지만 사람과 자동차의 테크노 섹스를 다룬 <크래쉬>는 미래적인 시뮬라크라의 괴담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사회의 속도를 알레고 리화한 도로 위를 질주하는 디스토피아적 현실의 기록영화이다. 이미지가 현실을 닮아가는 대신 현실이 이미지를 흉내내는 우리 시대 속에서 <크래 쉬>는 진실을 담보하는 유언비어이며, 일상 속에 이미 잠복해 있는 본질의 메타포인 것이다. 오르가즘과 죽음이 하나로 뒤엉키는 이 무시무시한 사유 속에는 확실한 의도가 있고 어떤 학파의 이론만으로 규정할 수 없는 예지 적인 시선이 있다. 삶과 합체된 자동차가 제공하는 기묘한 프라이버시의 공 간, 이것이 시간과 거리, 섹슈얼리티를 지배한 지는 이미 오래이며 자동차 의 진화는 그 이상을 원할 것이다. 헐리우드적인 공상과학 이야기를 헐리 우드가 절대 다룰 수 없는 방식으로 그려내는 크로넨버그의 영화는 예술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언제나 지배적인 통사론의 내적인 뒤집힘으 로 다루어진다. <크래쉬>는 그 심각한 질문에 대한 위기의 답변이다. 그리 고 그 위기는 크로넨버그 자신과 관객 모두에게 피할 수 없는 협박임이 분 명하다. ( ) 감독 마누엘 데 올리베이라 촬영 마리오 바롯소 주연 레오노르 실베이라, 세실 산츠 드 알바 93년 포르투갈 영화 컬러, 3시간 7분 현대영화 속에서 무성영화의 화법으로 불가능한 이야기 구조를 끌어들여 영화 안에서 종횡무진하게 새로운 이미지의 영역을 창조한 마누엘 데 올리 베이라는 신기한 영화를 만들어낸다. 그의 60년간에 걸친 기나긴 작품의 창작 경력은 그가 일백세의 생일을 눈앞에 두고 유럽 작가영화의 (포에틱 리얼리즘과 네오 리얼리즘, 60년대 모더니즘, 정치적 아방가르드, 브레히 트적 유산, 종교적 성찰과 아이러니, 구조영화, 포스트 바로크주의와 매너 리즘, 그리고 90년대 영화의 거짓/진짜의 탈경계화) 거의 모든 계보를 자 유자재로 넘나들면서 기적처럼 자기 영화 안에서 하나의 거대한 양탄자처 럼 직조해내게 했다. 매번 올리베이라의 영화는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져서 아직도 그의 진정한 예술적 면모는 어느 것인지 가늠하기 힘들다(그의 열 혈 지지자들조차 올리베이라의 최고 걸작으로 <아니오, 또는 지휘자의 헛 된 욕망>과 <편지>, <운명>, <아브라함 계곡> 사이에서 의견이 나뉘고 있 다). 플로베르의 소설 보바리부인 을 자유로이 각색하여 (거의 원작의 흔 적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고친) <아브라함 계곡>은 세살에 고아가 되어 입양 되었다가 소녀시절을 통과하고 어른이 되어 두 번 결혼에 실패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거의 정지된 듯한 속도 속에서 바라본 다. 물의 이미지는 영화에서 홀린 듯이 쫓아오고, 결국 그녀는 물에 몸을 내 맡긴다. 영화의 전반부는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처럼 간결하고 차갑지만 인 간의 내면에 대한 투명성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성에 눈을 뜨고 파 멸에 이끌리는 후반부에서는 부뉴엘의 영화를 방불케하는 아이러니와 풍자 속에서 부르주아들의 세계를 위협하는 듯한 위기를 불러온다. 하지만 그것 은 그들을 파괴시키지 못하고 대신 그녀의 죽음으로 종지부지어진다. 멜로 드라마의 구조 안에 담긴 인간에 대한 성찰과 사회의 은밀한 폭력, 그리고 그것을 감싸안는 세상의 질서 사이의 사중주. ( ) 13 계절 4부작 감독 에릭 로메 프랑스 영화 40 KINO December 1999
봄 이야기 Conte d'printemps 촬영 뤽 빠쥬 음악 베토벤, 슈만 주연 안느 떼이세드르, 위귀에 뀌에스떼, 플로랑스 다렐 90년, 컬러, 1시간 52분 겨울 이야기 Conte d'hiver 촬영 뤽 빠쥬 음악 세바스띠앙 에름 주연 샤를롯뜨 베리, 프레데릭 반 덴 드리에스쉐, 미셀 볼레띠 92년, 컬러, 1시간 54분 여름 이야기 Conte d'ete 촬영 디안 바라띠에르 음악 필립 에델 주연 멜빌 뿌뽀, 오렐리아 놀랭, 아만다 앙글레 96년, 컬러, 1시간 54분 가을 이야기 Conte d'automne 촬영 디안 바라띠에르 음악 끌로 드 마르띠, 제라르 팡사네, 삐에르 뻬이라, 앙또넬로 살리 주연 마리 리 비에르, 베아트리스 로망, 알랭 리볼, 디디에 상드르 98년, 컬러, 1시간 51분 98년 베니스영화제 시나리오상 에릭 로메는 현존하는 시네아스트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오즈의 경지에 다 가간 작가처럼 보인다. 60년대에서 70년대 초반에 걸쳐 있는 여섯 개의 도덕극 이 섹스를 할까 말까 를 두고 주저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도덕적 선택을 하게 되는 인물들의 망설임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80년대의 희극 과 격언에 관한 7부작 은 (섹스를 하고 난 뒤) 망설임의 자리에 대신 들어 선 후회와 실망에 관한 영화이다. 모럴리스트인 에릭 로메는 주인공들을 난처하게 만들어 놓고는 그 속에서 파생되는 유머와 아이러니를 통해 모더 니티의 일상생활 속에서의 행복과 결혼, 관계를 그려나갔다. 90년에 새로 이 시작한 계절 4부작 은 그때까지 그려온 필모그래피에 대한 총화이자 합일점을 찾아나가는 연작 시리즈이다. 남자친구가 떠나 있는 동안 새로 사귄 친구의 별장에서 지내게 된 잔느는 아버지의 젊은 여자친구를 못마땅 해하는 친구에 의해 의도적으로 친구의 아버지와 맺어지도록 단둘이 놓여 지고(<봄 이야기>), 여름 휴가철에 만난 남자와 사랑에 빠진 펠리시는 실수 로 잘못된 연락처를 적어주고는 하염없이 남자의 연락을 기다리다가 4년 이 지난 뒤 우연한 기회에 재회하게 된다(<겨울 이야기>). 가스빠르는 사랑 하는 두 명의 여인과 우정으로 맺어진 한 명의 여자친구 사이에서 누구와 함께 웨쌍 섬에 갈지를 두고 끊임없이 흔들리며(<여름 이야기>), 딸을 시집 보내는 과부는 결혼식에서 만난 남자로 인해 흔들린다(<가을 이야기>). 마 치 계절을 무대삼아(유난히 계절이 반영된 제목이 많은) 실내에서만 극을 진행하였던 오즈가 일본의 생활양식과 가족들에 관한 일상의 시학을 보여 준 것처럼, 에릭 로메는 휴양지의(또는 별장과 포도농장) 공기 속에서 뜻밖 의 기회(또는 유혹의 이름으로)와 마주친 사람들의 망설임과 주저, 후회의 정서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계절 4부작 의 마침표격인 <가을 이야기>는 오 즈의 < >와 맞닿아 있다). 마치 카메라를 일기를 쓰듯이 다루는 에릭 로메는 일터(도시)와 휴양지(여가)라는 근대적인 생활양식 속에서 인물들 이 윤리적인 선택을 하기까지의 여정에서 빚어내는 정서를 포착한다. 에릭 로메의 영화는 단 한 편만으로는 알 수 없다. 언제나 같은 구조의 가족극을 동일한 카메라 구도 속에 담아냈던 오즈처럼 에릭 로메의 필모그래피를 채 우는 모든 영화들은 하나의 소우주를 형성하는 단 한 편의 영화이다. 그런 의미에서 누벨 바그 가운데 진정 작가주의를 실천한 자는 에릭 로메이 다. ( ) 14 내 어머니의 모든 것 Todo Sobre Mi Madre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촬영 아폰소 비아토 음악 알베르토 이 글레시아스 주연 세실리아 로스, 마리사 파레데스, 칸델라 페나 99 년, 스페인 영화 컬러, 1시간 40분 99년 깐느영화제 감독상 파스빈더가 사라진 이후 멜로 드라마가 가장 감사해야 할 은인은 단연 페드 로 알모도바르이다. 그는 정말 눈부신 멜로의 제왕이다. 이것은 결코 빈정 거림이 아니다. 오히려 여자와 남자, 탄생과 죽음, 인간사의 설명할 수 없는 모순과 비합리, 그 지지부진한 욕망의 실타래를 눈물과 웃음의 필터로 걸러 내는 알모도바르의 솜씨는 거의 조물주의 경지에 올랐다는 뜻이다. <내 어 머니의 모든 것>은 알모도바르의 모든 것이며, 그와 동시에 여성성의 모든 것이다. 알모도바르는 여기서 게이로서의 성적 정체성을 떠 나 신인류적인 제안을 건넨다. 그것은 분만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낳을 수 있는 모성의 유토피아적 비전으로 표현된 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은 한 마디로 부성애가 되는 모성 애와 모성애가 되는 부성애를 이야기한다. 알모도바르가 꾸 는 현실개조의 꿈은 젠더의 갈등을 지우고 소멸과 부활을 하나로 묶는다. 졸지에 아들 에스테반을 잃은 간호사 마누 엘라는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로 향한다. 이것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어머니의 참담한 여행이다. 그러나 동시에 무에서 유를 찾아가는 이 여행은 비정상의 모든 형태를 지 극히 자연스럽게 포용한다. 에스테반의 아버지는 성전환하 여 여자가 된 상태이고, 그의 아이를 임신한 수녀는 에이즈 로 죽어간다. 심지어 마누엘라는 아들을 죽게 만든 연극배 우의 비서로 들어가 그녀를 구원한다. 대체 말도 안 되는 이 야기 같지만 놀랍게도 알모도바르는 여기서 무한한 감동을 끌어낸다. 그것은 에스테반의 장기가 이식되어 다른 환자의 KINO December 1999 41
1990~1999 삶을 구하고, 수녀가 낳은 아들에게 에스테반이라는 이름이 붙여지는 것처 럼 나눔과 겹쳐짐을 통해 계속 순환된다. 여전히 떠들썩하고 원색적이지만 그 활기 속에 숭고함을 겹쳐놓은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은 미스터리한 텍스 트이다. 인공적인 것, 작위적인 것, 위협적인 것, 전복적인 것, 위악적인 것 이 어느 순간 그 반대편의 장점들을 모두 흡수해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마 치 하나의 이 다른 으로 흡수되고 흡수하는 것처럼). 그런 점에서 알모 도바르는 정반합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도 합일의 경지에 이르른 경이로 운 시네아스트이다. ( ) 15 스톤 Stone 감독 알렉산더 소쿠로프 촬영 알렉산드르 브로프 음악 표트르 차 이코프스키 에브게니 오네긴, 볼프강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3번, 구스 타프 말러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주연 레오니드모즈 고보이, 표트 르 알렌산드로프 92년, 러시아 영화 흑백, 1시간 28분 92년 베를린 영화제 포룸 이미지는 순결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것이 원래대로 온 세상의 창조의 순 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만이 소쿠로프가 바라는 것 이다. 그래서 그는 영화가 이미지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부터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쿠로프는 타르코프스 키가 자신의 고향을 떠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자기가 태어 난 러시아를 벗어나지 못한다. 또는 파라자노프가 거듭해서 원래의 장소로 돠돌아가 상상하는 것처럼 그 장소가 어디인지를 모색한다. 추운 겨울날 밤 그 어느 하루를 보내야 하는 한 청년의 밤샘을 뒤따 라가는 <스톤>은 묘비명에 관한 영화이자 그의 아버지에게 바치는 영 화이며 (소쿠로프는 <어머니와 아들>에서는 그의 어머니에게 바치는 영화를 만들었다), 동시에 러시아의 영혼의 순결성을 묻는 영화이다. 체홉 박물관에서 유품을 관리하며 보내는 한 청년은 그날 밤 자기의 집에 찾아온 유령 체홉과 만난다(또는 그의 아버지일 수도 있다. 아 니면 그저 유령이기도 하다). 그 두 사람은 같이 저녁 식사를 하고 헤 어진다. 아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그들은 새벽을 맞이한다. 그 어떤 대사도 이미지를 방해하지 못하고, 그 어떤 이미지도 영화에 담 기는 세상의 질서를 방해하지 못한다. 바람소리는 계속해서 흐느끼 는 것처럼 느껴지고, 유령들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복도 끝의 메아리 처럼 들려오며, 세상 끝에 있는 것과 같은 이 집은 저승의 경계에 서 있는 우주의 공간처럼 보인다. 소쿠로프가 그의 나이 42살에 이 영화를 만든 것 은 이제 비로소 (체홉이 죽은 나이와 같은 나이에 이르름으로써) 그에 관한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동시에 소쿠로프가 이끌어내는 러시아의 예술의 영혼에 관한 목소리의 엘레지이기도 할 것이 다. ( ) 16 지그재그 3부작 감독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이란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촬영 파라드 사바 주연 바벡 아마드푸르, 아마드 아마드푸르 컬러, 1시간 25분 89년 로카르노영화제 동표범상 <그리고 삶은 계속되고> 촬영 호메이용 파이바르 주연 파흐드 케라 드만트, 푸야 파이바르 컬러, 1시간 31분, 92년 깐느 주목할 만한 시선 <올리브 나무 사이로> 촬영 호세인 자파리안, 파하드 사바, 주연 호 세인 레자이, 테헤레 라다니아, 모하메드 알리 케사바르즈 컬러, 1시간 43분 94년 깐느 경쟁부문 뤼미에르 이후 또는 르노와르와 로셀리니 이후 영화는 종종 현실과 카메라 의 관계를 원점으로 돌려놓고 근심에 잠기는 순간을 요구해왔다. 세계 내 의 존재 로서의 영화(를 만드는 작가)는 세계 를 어떻게 포착할 것인가. 재현장치로서의 카메라는 어떻게 진실에 다가갈 것인가? 영화 일백년을 관 통하는 90년대에 그 질문을 다시 제기하며, 기적적인 방식으로 답변을 마 련한 시네아스트는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이다. 이른바 삶의 오솔길로 우리 를 인도하는 지그재그 3부작 (한 소년이 친구의 노트를 돌려주기 위해 달 려가고 달려오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그 두 친구와 영화를 찍었던 감독이 그들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지진 이후의 같은 길을 달려가고 멈 추고 다시 달려가는 <그리고 삶은 계속되고>, 그 영화에 잠깐 출연했던 노 총각의 뒷이야기를 따라서 다시 걸어가는 <올리브 나무 사이로>)은 픽션과 현실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가면서 하나의 구심력으로 향해간다. 여기 서 키아로스타미의 출발점은 픽션이다. 그러나 그는 이란의 오지인 코케 마 을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어가 그들로부터 이야기를 끌어내려는 다큐멘터리 스트들과는 다르다. 그는 자신의 출발점을 잊지 않으면서도 영화를 만들어 가는 동안 점점 자신의 의지로부터, 픽션의 속박으로부터, 언어로서의 영화 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의 인물들은 계속 이동하면서 어떤 목적을 이루려 고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같은 공간을 빙빙 도는 것은 그만큼 지연되는 요 소가 많다는 뜻이다. 그러나 키아로스타미는 자신의 의도를 향해서 영화를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무수히 많은 세상의 이야기들과 풍경 속에서 유일 42 KINO December 1999
한 이야기를 선택하지 않으며 원하는 풍경만을 배열하지 않는다. 단지 있는 그대로를 포착하여 세계 의 무수한 성격을 향해서 영화를 해방시키고 개 방해간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우연히 쉼표를 찍게 되든가, 영원히 계속되 든가 둘 중의 하나이다. 키아로스타미에게 영화란 무엇보다도 도착점이 아 니라 운동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현실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지그재 그 3부작 은 영화가 세계를 반영하거나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와 세계 가 나란히 공존하는 경지로 들어선 순간이다. ( ) 17 소나티네 ソナチネ Sonatine 감독 기타노 다케시 촬영 야나기시마 가츠미 음악 히사이시 조 주연 비트 다케시, 고쿠마이 아야, 와타나베 테츠, 오수기 렌 93년, 일본 영화 컬러, 1시간 33분 93년 깐느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어-이미지와 수다의 수사학과 왜곡과 과장의 이미지로 점철된 영화의 위기 를 넘어서는 것이다. 기타노 다케시의 이름은 말 그대로 우리 시대의 영화 이미지에 대한 기습이다. ( ) 18 저 멀리 구름은 걷히고 Kauas Pilvet Karkaavat 그는 거의 웃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우는 것 또한 거의 보지 못했 다. 이 얼굴은 표정이 지워진 얼굴이다. 그것은 가면과 같은 것인지 모른 다. 그는 매우 말을 아낀다. 이 과묵한 남자가 가끔씩 내뱉는 말은 아주 짧 지만 간결함으로 매번 정확한 장소에 꽂힌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한 남 자의 얼굴과 그 얼굴의 표정과 단단한 신체와 그 신체가 이루어내는 제스 처들(이 의외의 시간에 맞이하는 버스터 키튼의 몸짓)과 마주하고 있는 것 이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는 그러니까 그 얼굴, 그 신체와 같은 것이다. 혹은 그가 등장하지 않는 영화들조차 일종의 확대처럼 보인다(이 지극한 나르시시즘, 그러나 전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기타노 다케 시의 영화는 비트 다케시와의 싸움이다. 소비되고 침탈당한 이미지, 그리 고 그 자체로 끊임없이 소모되고 고갈되는 낭비의 이미지와의 싸움. 다시 말해 그것은 일상적이고 전면적인 텔레비전 이미지와의 싸움이다(왜 그의 영화는 자신에 대해서, 그 주변에 대해서 그토록 가학적인가). 그래서 생략 과 비약의 리듬 속에서 이 일렬로 늘어선 야쿠자들이 일순, 피도 눈물도 없 이 기습처럼 펼치는 폭력은, 그 폭력의 서늘함은 그를 둘러싼 이 모든 것들 에 대한 싸움의 방식이다. 흉폭한 남자 3부작 의 완결편이자 뒤늦게 서방 세계에 기타노 다케시의 이름을 알린 <소나티네>는 말 그대로 기타노 스타 일의 완성이며, 이 싸움의 메커니즘의 완성이다. 그 순간 관자놀이에 겨누 는 총구는 발사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이미지(비트 다케시, 그리고 기타 노 다케시)는 자폭으로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침묵과 무표정의 남자는 텔레비전의 이미지와 싸우고 그것을 죽이고 그럼으로써 스스로 자 멸의 길을 택한다. 기타노 다케시는 우리 시대의 속악한 이미지의 정체를 아는 자이다. 이 완고한 얼굴은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 그것은 90년대 미디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 촬영 티모 살미넨 주연 카티 아우티넨, 카리 바나넨, 엘리나 살로, 사카리 쿠오스마넨 96년, 핀란드-독일-프랑스 영화 컬러, 1시간 37분 96년 깐느영화제 경쟁부문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언제나 무성영화에 매혹되어 왔다(그리하여 그는 심 지어 무성영화 <유하>를 만들었다). 처연한 슬픔과 섬뜩한 유머 사이를 통 과하며, 포복절도의 고통(!)의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들을 한번 보 라. 세상의 모순 속에서 싸우는 그들의 방법은 말하지 않는 것, 그리고 무표 정이다(그 순간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들의 제스 처들이다. 그러니까 그 심화된 아이러니의 제스처). 그들은 침묵을 최상의 미덕으로 알고 있으며, 종종 끔찍함 속으로 내몰린 무감한 표정은 심장을 후벼파는 서늘한 칼날과 같은 것이다(때로 이 순간들 속에서 튀어나오는 발작적인 웃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세상으로 부터 계급의식을 쟁취하는가? 이곳은 헬싱키, 쥐약을 풀어 세상을 끝장낸 <성냥공장 소녀>의 그녀(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페르소나 카티 아우티넨)가 중년의 여인이 되어 다시 돌아왔다. 그녀의 이름은 일로나이다. 현재 그녀 는 직장에서 잘렸다. 무능한 남편, 지지리 운 없는 사내 로리는 이미 직장을 잃은 지 오래다. 악전고투의 세월. 가난한 부부는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 부부는 가까스로 레스토랑을 차리는 친구와 동업할 기회를 잡는다. 아마도 이것은 그들의 삶에 찾아온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오늘 아침 식당은 처 음 문을 열었다. 하루 종일 기다림의 시간은 하염없이 길다. 해가 기울고, 이제 문을 닫아야 한다. 그때, 문이 열리고 드디어 첫번째 손님이 들어온다. <아리엘> 이후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두번째 해피엔딩을 맞이하였다. 그러 나 이것은 희망 없는 해피엔딩이다. 혹은 아무런 에너지도, 그 어떤 것도 없 는, 그저 차갑게 응고된 결말. 말하자면 이 긍정은 한없이 역설적이며 부정 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간 부정이다. 비토리오 데 시카와 프랭크 카프라를 동시에 아우르며 자끄 따띠의 유머로 파스빈더에 다가가는 영화. 이것은 차 KINO December 1999 43
1990~1999 가운 비극이며 잔인한 희극이고 아주 멜랑콜리한 이야기인 동시에 사려 깊 은 슬픔으로 가득찬 영화이다. 이보다 더 참혹하고 이보다 더 비관적이며 이보다 더 우스운 자본주의 묵시록을 보지 못했다. ( ) 19 운명 Al Massir 감독 유세프 샤힌 촬영 모센 나스르 음악 예히아 엘 무기, 카말 엘타윌 주연 누에 엘 셰리프, 라이라 엘루이, 마모드 헤메이다 97년, 이집트 영화 컬러, 2시간 15분 97년 깐느영화제 50주년 특별상 네오 리얼리즘이 시작되던 49년에 데뷔작을 찍은 이후 반세기 동안 영화를 스는 이슬람 원전주의자들의 박해를 받게 되고 그의 저서들은 불태워졌다. 그러나 그는 이후의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의 초석이 된다. 유세프 샤힌은 아베로에스에 빗대어 지금의 이집트의 모순을 환기시킨다. 모든 사회적인 계급과 지위, 종교적 도그마들을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개척할 수 있는 것이고 바꿀 수 있는 것이니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의 투쟁을 통해 완성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유세프 샤힌은 타인의 시선으로 그들의 모순을 되비추게 하고 자신을 탄압하는 폭력을 해방의 힘으로 역이 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97년 깐느영화제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깨달음에 도달한 이 변방의 거장에게 50주년 특별상으로 경의를 표했다. ( ) 20 좋은 친구들 Good fellas 감독 마틴 스콜세지 촬영 마이클 발하우스 주연 로버트 드 니로, 레이 리오타, 조 페시, 폴 소비노 1990년, 미국 영화 컬러, 2시간 25분 90년 베니스영화제 감독상 만들어온 유세프 샤힌은 변방의 고집스러운 투사이다. 탄압과 검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이집트의 현실 속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곧바로 투쟁 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네오 리얼리즘과 루이스 부뉴엘적인 초현실주의 적 상징들 그리고 페데리코 펠리니적인 축제의 향연을 한꺼번에 뒤섞으며 그 안에서 아직까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현실의 모순과 진 실에 접근해나간다. 멜로 드라마와 뮤지컬이 주류를 이루는 이집트의 영화 전통을 끌어안으면서 자신만의 은유와 상징, 비유와 메타포를 사용하는 유 세프 샤힌은 완전히 새로운 영화를 창조하였다. 여기서 지배계급 의 이데올로기적이고 교조적인 수단으로 사용되던 장르인 멜로 드 라마와 뮤지컬은 종교적 윈리주의자들에 대항하는 휴머니즘의 성 가이자 정치적 기득권자들의 횡포에 맞서 민중들이 벌이는 해방의 춤판으로 뒤바뀐다. 이것이 바로 도망치거나 타협하지 않고 현실 의 대지 위에 발을 내리고 영화의 안과 밖에서 동시에 투쟁을 수행 해나가는 유세프 샤힌의 전략인 것이다. 그의 서른일곱번째 영화 인 <운명>은 12세기 안달루시아 지방 출신의 철학자인 아베로에스 의 삶을 추적한다. 철학자이자 의사였고 물리와 화학에도 능통하 였던 아베로에스는 칼리프 아들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그는 코란 해석의 여지는 그 읽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코란은 분명 신의 말씀이지만 그 글귀를 고지식하게 맹목 적으로 따르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다. 신은 우리에게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이성을 주었다.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 아베로에 헨리 힐의 인생유전. 아일랜드계와 이태리계 이주민들이 한데 모여 사 는 뉴욕의 헬스키친에서 자란 꼬마 헨리는 13세의 나이로 마피아 세계 에 입문한다. 이후 30년간 공항 창고에서 수입품을 빼돌리고 가게 주 인들을 등쳐먹고 불복하는 자들을 손쉽게 처리하면서 헨리는 두 개의 전쟁(2차 대전과 베트남전), 여섯 번의 대통령 선거, 네 번의 살인과 배신을 경험한다. 그러고 나서 비로소 그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 을 던지게 된다. 마틴 스콜세지는 이것이야말로 이민의 역사를 통해 건설된 미국의 정체라고 냉혹하게 풍자한다. 내가 이 영화에서 그리 고 싶은 것은 마피아가 아니다. 오히려 마피아의 눈으로 미국의 역사 를 보고 싶었다. 그야말로 돈에 미쳐있는 이 역사는 마피아건, 또는 그 들의 적이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이민 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아메리카의 진짜 아이덴티티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제목은 의도적인 패러디이다. ( 필름 코멘트 ) 실존인물인 헨리 힐의 50년대에서 70년대에 관한 마피아 연대기 <좋은 친구들>은 피비린내나는 웃음과 모골이 송연해지는 패러디 정신으로 (갱스터) 장르와 미국, 그리고 자본주의가 이루는 삼위일체의 역사를 기술한다. 이것은 동일한 주제를 둘 러싸고 코폴라가 마피아 패밀리에 대한 향수 어린 시선 속에서 제국의 역사 와 신화의 시간으로 바라본 70년대의 <대부>, 그리고 좌파이자 포스트 모더 니스트인 이탈리아인 셀지오 레오네가 주변에서 탈 장르, 탈 역사화시키며 자멸극으로 결론지은 80년대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 대한 44 KINO December 1999
90년대적 대답이다. 90년대 벽두에 찾아온 마틴 스콜세지의 <좋은 친구들> 은 냉혹한 유희 정신과 장르에 대한 자기반영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미 90년 대 포스트 아메리칸 시네마를 앞서가고 있었다. ( ) 21 안티고네 Antigone 감독 장 마리-쉬트라우프, 다니엘 유이레 촬영 윌리엄 뤼브찬스키 주연 베르네 램, 알베르트 헤테르테, 쉬테판 폰 쇤베르크 92년, 독일 영화 컬러, 1시간 25분 안티고네는 비극의 주인공 외디푸스와 그의 어머니이자 아내였던 요카스 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그러니까 안티고네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 비극과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힘을 빌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유물론적 영화를 만들어온 쉬트라우프-유이레 부부는 이 영화를 전 대미문의 방식으로 다시 구성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영화에서 쇤베르크 와 브레히트를 하나로 만드는 작업이다. 그것은 (구조주의와는 아무 관계 없이 말 그대로 상부구조에 대응하는 동시에 토대를 다시 구성하는) 구조 의 변증법에 관한 것이며, 동시에 영화의 모든 (미학적/기술적) 장치에 관 한 유물론적인 재해석이다. 쉬트라우프-유이레는 배우들을 이끌고 야외극장으로 나가서 (그리스 시 대에 무대에 올려진 것과 같은 방식으로 연출하 여) 우리들로 하여금 정교하게 재현된 무대에 집 중하게 만든다. 그러나 동시에 쉬트라우프-유이레 의 <안티고네>는 그 안에 있는 서로 다른 세 개의 울림, 그러니까 소포클레스(의 원작)과 횔덜린(의 서정적인 시)와 브레히트(의 서사적인 소외극 양 식)을 자유로이 교차시킨다. (안티고네를 다룬 서 로 다른 시대와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세 명의 작가) 이 위대하지만 서로 전혀 다른 시대를 배경 으로 한 작가들이 그려낸 안티고네를 불러와서 극 중 인물들 사이에서 세 명의 작가를 대결시킨다. 그것은 <안티고네>라는 영화로 하여금 역사의 유 물론적인 위치에 세우는 것이며, 동시에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미 사이의 모순을 찾아내는 것 관객과의 변증법이다. 또는 영화는 말 그대로 무대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영화를 무대장치로 하여 연극과 시, 음악 사이에서 이 루어지는 미학이라는 가면을 쓴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장을 제공하는 것이 며, 더 나아가 그 안에서 영화의 미학이라는 허구를 벗기는 것이다. 쉬트라 우프-유이레에게서 영화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는 그 모든 모순의 총체적 재현이다. ( ) 22 달콤한 내세 The Sweet Hereafter 감독 아톰 에고이앙 촬영 폴 사로씨 음악 마이클 다나 주 연 이안 홀름, 사라 폴리, 톰 맥카머스 97년, 캐나다 영화 컬러, 1시 간52분 97년 깐느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아톰 에고이앙은 치유자이다(?). 에고이앙은 매번 영화의 도입부에 호기심 을 자극할 만한 요소들을 흩뿌려놓고는 퍼즐을 풀어보라고 제 안하는 것처럼 보인다. 근친상간과 동성애, 유아탐닉증, 그리 고 뒤따르는 훔쳐보기의 시선들과 미디어에 이르기까지 영화 속 화면은 욕망들로 넘쳐난다. 그러나 에고이앙의 영화는 안 티 에로틱 하다. 왜냐하면 에고이앙은 궁극적으로 상처와 애 도의 과정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에고이앙의 인물들이 슬픔을 해결하기 위해 애도의 의식을 실행하는데 있 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인물들은 기묘한 반복 행위를 하고 엉뚱한 사람에게 자신의 문제를 투사한다. 그래서 그야말로 잘못된 애도 의 과정에 관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에고이앙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상실감을 더욱 강조, 왜곡시킨다. 뉴햄프셔 주의 작은 동네에서 스쿨버스가 전복하 는 사고가 일어나고, 동네의 거의 모든 집이 아이들을 잃는 비 극을 겪는다. 남부러울게 없는 변호사인 미첼 스티븐슨은 하 나밖에 없는 딸이 거의 10년에 이르도록 어디에 있는지 모르 며, 그저 돈이 필요해서 간혹 전화가 걸려올 뿐이다. 마약 중 독자인 딸은 결국 에이즈에 걸려 죽어간다는 사실을 전화로 이야기한다. 변 호사 미첼은 자식을 잃은 것에 대한 고통 속에 침묵을 지키고 있는 침통한 마을에 우연히 들어가, 그들에게 소송할 것을 권하고 마치 자신의 일처럼 소송관계 서류를 마련하느라 분주하다. <엑조티카>는 크리스티나가 집으 로 걸어들어가는 것으로 끝난다. 거기서 일어나는 일은 그녀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쳐왔다. 그녀는 집안에서 보호받지 못했다. 그리고 <달콤한 내세> 는 우리를 그 집안으로 데려간다. 러셀 뱅크스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로버 트 브라우닝의 시 피리 부는 마술사 (쥐떼를 내쫓아 줬음에도 불구하고 약 속한 상금을 내놓지 않자 마술사가 피리 를불어마을아이들 을 모두 데려가 버린 이야기)로 파악한 에고이앙은 <달콤한 내세>에서 자신의 말대로 문제의 핵심 안으로 들어선다. 그 래서 여전히 문제가 명확히 해결되지는 않지만 명징화되는 상태를 이끌어낸다. 아톰 에고이앙의 필 모그래피에서 <달콤한 내세>는 욕망의 퍼즐로만 보이던 영화가 어느 순간 사람들의 가슴 속으로 들어서는 순간이다. ( ) KINO December 1999 45
1990~1999 24 우나기 うなぎ The Eel 감독 이마무라 쇼헤이 촬영 코마츠바라 시게루 음악 시니치로 이케베 주연 야쿠쇼 코지, 시미즈 미사, 츠네타 후지오 97년, 일본 영화 컬러, 1시간 56분 97년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 19 부부일기 Husbands and Wives 감독 우디 알렌 촬영 카를로 디 팔마 주연 우디 알렌, 미아 패로 우, 주디 데이비스, 줄리엣 루이스, 리암 니슨 92년, 미국 영화 컬러, 1 시간 47분 스캔들. 92년, 우디 알렌은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신문의 문화면이 아닌 사회면과 재판정에서였다. 미아 패 로우와의 불화설, 뒤이은 패륜 혐의, <안개와 그림자>의 참담한 실패, 배급사인 오라이언의 도산 그리고 친구인 진 도메이어와의 협력 관계의 종말. 스캔들에 휩싸인 예술가는 세간의 이목과 언론 의 도마 위에서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우디 알렌은 살아오면서 인 생에서 그때그때 일어나는 사건들에 관하여 이야기하기 위해 영 화를 이용하는 시네아스트이다. 그래서 우디 알렌의 영화에서 영 화와 삶의 경계는 딱히 구분지을 수 없으며, 우디 알렌은 영화에 서 스스로를 관객이자 주인공의 자리에 동시에 위치시킨다. 영화 속에 자기자신에 대한 주객의 관점이 혼재하는 그의 영화는 스스 로의 성찰을 통해 지속적으로 깊이를 이끌어낸다. 주디와 게이브 부부(그 당시만 하더라도 아직 부부였던 우디 알렌과 미아 패로 가 연기하는)와 잭과 샐리 부부가 만난다. 잭과 샐리는 각기 게이 브와 주디를 만나 눈앞에 닥친 이혼에 대해 털어 놓는다. 그러자 게이브와 주디는 기나긴 설득의 과정에 돌입한다. 그러나 주디와 게이브 부부는 헤어지고 잭과 샐리 부부는 재결합한다! 지금껏 우디 알렌은 개인적인 반영과 내적 성찰로 이루어진 영화와 폭소 를 자아내는 오락적 코미디를 번갈아 만들어 왔는데, 특히 오락성 을 다른 것과 연관시키는 모습을 보여왔다(영화에 관한 영화 <카 이로의 붉은 장미>, 라디오에 관한 영화 <라디오 데이즈>). 특히 후자는 매체의 변화(영화, 라디오, 텔레비전 하물며 그리스 고전 극에 이르기까지)와 연관된 표현의 변주로서의 영화들이었다. 우디 알렌의 자기 성찰이 무르익은 단계를 보여주는 <애니 홀>에서 <범죄의 요소>에 이 르는 시기와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가 강화되는 90년대의 경계에서 <부부 일기>는 핸드헬드의 카메라에 잡힌 흔들리는 쇼트들을 통해 리얼리티 쇼 텔레비전의 관습들을 끌어들인다. 그 속에서 우디 알렌은 자신의 스캔들에 관해 풍자하고 비틀고 웃음거리로 만들면서 자아를 드러내는 스펙터클 이 라 부를 만한 것을 만들어낸다. <부부일기>는 철저히 부서져가는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작품과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 ) 부정을 저지른 아내를 참혹하게 살해한 남자는 곧바로 자전거를 타고 푸 르른 새벽 도로를 내려간다. 그리고는 파출소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무표 정하게 들어가 자신이 아내를 죽였다고 말하며 자수한다. 90년대 가장 충 격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단아하고 시적이며 (심지어!) 아름다운 오프닝 장 면! <우나기>는 욕망과 번식, 섹스와 욕망을 통해 일본 모더니티에 대한 탐 구에 몰입했던 이마무라 쇼헤이가 89년 <검은 비> 이후 침묵으로 맞았던 90년대 귀환작이다. 완전히 침체되어 버린 90년대에 일본 영화 거장 세대 의몇안되는마지막생존자인 이마무라 쇼헤이는 마치 적도로 수천킬로의 여행을 하고 귀환한 뱀장어처럼 돌아와 그 기나긴 시간에 걸친 여행의 경 험담을 보다 원숙하고 절제된 어조로 우리에게 들려준다. <우나기> 이전 이 마무라 쇼헤이의 영화들이 자연의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힘 속에서 생존과 번식이라는 본연적인 힘에 매달렸다면, 그래서 곤충기나 동물도감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도 불러일으키는 그런 원시성의 섬뜩함이 담겨있었다 면, <우나기>는 자연의 순리를 이해하며 그 속에서 인생과 자연의 법칙 사 이의 화해의 방식을 알게 된 나 이든 자의 깨달음이 녹아 들어 있다. 그러니까 <우나기>는 미 친 듯이 자신을 지워가는 세기 말의 속도를 역류하여 60년대 이마무라 쇼헤이의 초기영화로 거슬러 올라가며 거기에 스스 로가 붙잡은 인생의 지혜를 함 께 담고 있다. 총탄과 피와 살 점이 뒤범벅으로 엉켜든 포스 트모던한 텍스트들 사이에서 조용하게 그렇지만 또한 흥겹 고 경쾌하게 이마무라 쇼헤이 가 말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지 혜는 무엇보다도 용서하고 스 스로에 대한 강박관념을 평안 함의 강물 위로 방류시키는 것 이다. 그것이 저 멀리 영화의 대서양에서 자신의 스승이었던 오즈를 만나고 돌아온 한 거장 이 들려주는 우화이다. ( ) 25 증오 La Haine 감독 마티유 카소비츠 촬영 피에르 아임 주연 뱅상 카셀, 위베 르 쿤드, 사이드 탁마우이 95년, 프랑스 영화 흑백, 1시간 36분 95 년 깐느영화제 감독상 46 KINO December 1999
영화의 첫장면에서 던져진 화염병에 불바다가 되고 난 이후의 지구의 모습 일까? 파리의 변두리 방리유는 마치 한 번의 종말 이후 폐허가 되어 버린 다음 세기의 거리처럼 느껴진다. 그 황량한 거리를 가득 메우는 것은 에디 뜨 피아프의 장미빛 인생 의 멜로디에 맞추어 반복하여 내뱉는 경찰들은 엿먹어라(Fuck the police!) 라는 증오에 찬 중얼거림이다. 경찰에게 집단 린치를 당하고 병원에 입원한 방리유의 친구 압델은 죽어가고 있고, 거리는 폭동 전야처럼 불안한 기운이 감돈다. 꾸부정하게 몸을 구부린 채 흐느적거 리며 걸어오는 세 명의 청년 빈쯔, 위뻬르, 사이드. 빈쯔는 통제가 불가능한 다혈질로 말썽만 일삼고, 위뻬르는 희망 없는 아마추어 권투선수이며, 사이 드는 항상 투덜거리기만 하는 불평꾼이다. 만일 압델이 죽기라도 한다면 피로 갚아준다! 경찰이 흘리고 간 권총을 주운 빈쯔는 <택시 드라이버>의 트레비스라도 된 것처럼 설쳐댄다. 바보 같은 짓 할 생각 말아! 위뻬르는 그를 충고하며 진정시키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사이드는 불안해 죽을 지경이다. 방리유에서의 삶은 경찰을 피해 그 좁다란 골목의 사이사이를 내달려야 하는 일종의 추격전이다. 달리 는 거리의 청년들에게 묶여진, 언제로 맞추어져 있는지 알 수 없는 시한 폭탄의 초침 소리는 계속해서 귓전을 파고들며 영화 속에서 시 종일관 지속되는 긴장감은 결국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장전된 권 총의 방아쇠에 걸친 집게손가락을 팽팽하게 당겨온다. 탕!! 한발 의 총성으로 빈쯔는 쓰러지고, 위뻬르는 경찰의 면전에 총을 뽑아들 고, 사이드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암전. 그들의 추락 앞에서 LSD 의 환각에 문드러져 나가는 데니 보일의 <트레인스포팅>은 정키들의 사기극임이 분명해졌다. 인종차별과 소외계층의 불만, 범죄와 폭력 이 포화상태로 존재하는 파리 근교에서 마티유 카소비츠는 영화를 통해 90년대 청년문화를 담아내며 프랑스 사회의 아킬레스건을 정 면으로 공격하였고 <증오>의 이 검은 이미지는 90년대를 절반으로 가르며 새로운 영화 일백년의 시작을 알렸다. ( ) 26 하층민 Riff-Raff 감독 켄 로치 촬영 배리 액크로이드 음악 스튜어트 코플랜드 주연 로버트 칼라일, 에머 맥코트, 지미 콜레만 90년, 영국 영화 컬러, 1시간 35분 더 이상 공적( 公 )이 없다고 말해지는 90년대. 그러나 60년대부터 분노의 영화를 만들어온 켄 로치는 90년대 내내 더 크게 분노하고 눈물을 쏟게 만 들었다.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이다. 은폐된 진실들(<숨겨진 계략 >), 실직이 가져온 부성애의 위기(<레이닝 스톤>), 가난한 어머니의 양육권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 스페인 내전의 인터내셔널(<랜드 앤 프리덤 >), 니카라과 내전의 국제적 음모(<칼라 송>), 실직과 마약의 이중고(<내 이 름은 죠>)를 관통하는 켄 로치의 90년대 필모그래피 앞에서 그 누가 면책 특권을 누릴 수 있겠는가? 그 중에서도 <하층민>은 켄 로치의 모든 영화에 바치는 우리들의 채무감이자 안도감을 촉구하는 진정한 걸작이다. 그 자신 노동자 계급 출신인 켄 로치에게는 지식인의 제스처 따위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매너리즘의 미학을 고수하는 것도 형식보다 내용이 앞선다는 그의 원칙에 충실한 것이다. 영화는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며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은 그의 신념이다. <하층민>에서 글래스고우 출신의 전과자가 런 던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막노동뿐이다. 구체적인 도시를 설정하는 켄 로 치의 지리학은 스스로 계급을 천명하는 것이며 정치적 노선을 결정하는 것 이다(그래서 90년대의 글래스고우 또는 리버풀은 실직의 공포에 잠식당하 는 후기 자본주의의 중층모순에 대한 전지구적 축도가 된다). 건설현장에 취직한 주인공은 비슷한 처지의 인부들을 만나고 삼류가수와 살림을 차리 기도 한다. 고달프지만 즐거운 일도 있다. 능청스러운 노동자 계급의 신랄 한 유머는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러나 십장과의 갈등, 안전장치가 전무한 현장 조건, 노조가 없는 일일노동자들의 불이익은 체험적으로 구조를 인식 해낸다. 문제는 시스템이다. 켄 로치는 그것을 스스로 각성해가는 노동자들 의 삶을 다큐멘터리처럼 기록한다. 분노와 연대는 동시에 이루어진다. 그리 고 사고로 동료를 잃고 마약을 다시 시작한 애인과 결별한 주인공은 건설중 이던 건물에 다이나마이트를 터뜨린다. 그것은 바위를 치는 계란일지라도 시스템을 향한 전복의 꿈이다. 80년대의 보수반동적인 대처리즘을 노골적 으로 비판한 <하층민>이 오히려 지금 여기서 유효한 까닭은, 그 무엇보다 분노와 신념이 중요하다는 것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 ) 27 어떻게 내 성생활은 토론되어졌던가 Comment je me suis disput e ma vie sexuelle 감독 아르노 데스쁠레셍 촬영 에릭 고티에 음악 크리슈나 레비 주연 마티유 아말릭, 엠마뉴엘 드보, 엠마뉴엘 샐린제, 마리안느 드니꾸 르, 잔느 발리바 96년, 프랑스 영화 컬러, 2시간 58분 96년 깐느영 화제 경쟁부문 KINO December 1999 47
1990~1999 29세의 폴, 아직 논문을 끝내지 못한 철학과 조 교, 에스테르와의 10년 간의 동거생활을 접으 려는 결심의 문턱(그렇 다. 이것은 문턱이다. 문 이야 그저 열고 들어갈 수 있지만, 문턱은 디디 고 올라서야 한다. 그러 니 그 지연의 순간 결심 은 매번 흔들릴 수밖에 없다)에 선 남자, 그러 면서 가장 친한 친구의 애인과 사랑에 빠진 진 퇴양난의 처지. 그리하 여 이 여행은 언덕에서 굴러떨어지는 남자, 추락의 속도를 안다고 자만하 는 자, 그러나 결코 그 깊이를 알지 못하는 자, 그러면서 추락해가고 있는 자를 따라간다. 이것은 한없이 익살맞고 우울한 일기(또는 2인칭의 편지), 좌절과 포기에 이르는 연애활극(어쩌면 3인칭의 돈키호테 모험극)이다. 어떻게 내 성생활은 토론되어졌던가? 남자들과 그들의 여자친구들이 하나 둘 테이블에 모여든다. 그들은 토론을 시작한다. 토론? 이것은 남자들과 여 자들의 이야기이다. 남자들은 거기에 있고, 바라보고, 추론한다. 여자들에 관하여. 에스테르, 실비아, 발레리 여자들의 이름은 하나씩 추가되는 새 로운 수수께끼의 제목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타로 카드를 접으며 운명과 고독에 대한 직감을 가진 자들은 바로 그녀들이다. 말? 말은 폴을 유혹자로 만든다. 혹은 유혹을 결코 이길 수 없는 자로. 말은 폴을 유약하게 만들지만 또한 존재하게 만든다. 말은 표현이며, 세상을 탐험하는 방법이며, 감정의 분석이며, 무의식의 노출이며, 이 모든 방법의 중심이다. 그러나 언어는 또한 외설이다(이 끊임 없는 드러냄). 감정은 아주 노골적이고 성욕은 거의 소멸 되어 있는 것 같다(감정과 성욕의 도치). 아르노 데스쁠 레셍의 두번째 장편영화 <어떻게 내 성생활은 토론되어 졌던가>는 마치 90년대에 도착한 에릭 로메의 현신 같다. 또는 이 두뇌의 시네아스트가 여행하는 유약한 존재의 일기는 카프카의 영감을 받은 장 르노와르 이후의 자연 주의이며 우디 알렌을 경유해서 베르히만에게 다가가는 끝나지 않을 책과 같은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망설임과 상처와 웃음으로 가득 찬 이 담론 의 영화는 90년대 이 곳에서 거의 믿을 수 없게 다가온 세상에 관한 성찰이다. 남자와 여자, 거짓과 진실, 계급과 관계, 사랑과 성욕, 그 리고 존재의 소멸에 관한. 세상의 존재 위에서 익살은 비 극과 하나가 되었다. ( ) 공산주의 국가 소련이 맹위을 떨치던 60년대에 소비에트 모 더니즘 영화의 3인방이 있었으 니, 이름하여 안드레이 타르코 프스키와 세르게이 파라자노 프, 그리고 오따르 요셀리아니 였다. 그 중에서도 오따르 요셀 리아니는 타르코프스키나 파라 자노프 같은 대가들의 기꺼운 고백을 통해서만이 그 명성을 짐작할수있는전설속의이름 이었다. 그야말로 베일에 가려 져 있었던 이 시네아스트는 페 레스트로이카와 함께 80년대 이후 서방세계에 알려졌고, 단 숨에 대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루지아 태생인 오따르 요셀리아니는 풍속 민담과 동화로 넘쳐나는 웃음 속에서 역사를 뒤섞고, 상상 속의 지도 를 그리는 영화의 보르헤스와 같은 존재이다(1천년 역사를 불한당들의 것 으로 파악한 <불한당들>은 그야말로 보르헤스의 불한당들의 세계사 의 영화적 재현이지 않은가). 영화가 시작되면 얼어붙은 벌판이 펼쳐지고 그 한가운데에 안개에 싸인 성이 서있다. 그곳에는 백러시아를 떠나 머나먼 프 랑스에 자리를 잡은 바이요네뜨 가가 있다. 조용한 외관과 달리 성안에서는 화난 흑인 며느리가 고모님의 초상화에 달걀을 던지고, 인도 왕자는 온종일 자신의 다이아몬드를 세는 데 골몰해 있으며, 흰 제복을 빼입은 러시아 장 교들은 서재에서 당구를 즐기고, 주민들은 크리슈나를 믿는데다가, 심지어 성을 사려고 방문하는 이들은 일본인이다. <나비사냥>의 요지경 세계 안에 28 나비사냥 La Chasse aux Papillons 감독 오따르 요셀리아니 촬영 윌리암 루브챈스키 주연 나르다 블랑쉐, 알렉산드르 체르카소프, 비에르뜨 퐁퐁 92년, 프랑스 영화 컬 러, 1시간 55분 96년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서 인물들은 마치 주인없는 성을 차지한 허깨비들 마냥 꿈결처럼 떠다닌다. 데뷔 이래 당국과 마찰이 끊이지 않았던 오따르 요셀리아니는 80년대부터 프랑스를 주무대로 삼아왔다는 점에서 타르코프스키와 망명자의 정서를 공 유한다. 그런 점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세계에 관한 코미디인 <나비사냥>에 는 유배자 특유의 비스듬한 시선 속에서 러시아적인 요소와 프랑스적인 것들이 한데 들어 있다(<나비사냥>은 많은 점에서 자끄 따띠의 <윌로씨의 하루>와 <플레이타임>과 닮아 있다). 그래서 경쾌한 율동감과 달리 영화는 극단적인 비관주의와 고립의 정서가 근간을 이룬다. <나비사냥>은 떠나온 48 KINO December 1999
자의 그리움, 그리고 사라져가는 시대를 지켜보는 노인의 시선 속에 그려진 보르헤스판 <노스탤지어>이다. ( ) 흡연/금연 29 30 Smoking/No Smoking 저수지의 개들 Reservoir Dogs 감독 알랭 레네 촬영 르나토 베르타 음악 존 패티슨 주연 사빈느 아제마, 삐에르 아르디티 93년, 프랑스 영화 컬러, 2시간 26분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 촬영 안드레이 세쿨라 주연 하비 케이틀, (<흡연>) + 2시간 27분(<금연>) 팀 로스, 마이클 매드슨, 스티브 부쉐미, 크리스 펜 91년, 미국 영화 컬 러, 1시간 39분 92년 깐느영화제 감독주간 시간의 미로 안에서 기억과 추억 (<히로시마 내 사랑>), 플래시 백과 오해 다이아몬드를 가로채기 위해 범죄집단 두목인 조 카보트와 그의 아들 나이 (<지난해 마리엘바드에서>), 역사와 정치 사이에 중재하는 개인(<뮈리엘> 스 가이 에디는 여섯 명의 범죄자를 소집한다. 미스터 화이트, 블루, 블론 드, 핑크, 브라운, 오렌지, 그렇게 모여든 총천연색의 사나이들은 드디 어 거사를 치르기 위해 나서지만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왜 실패한 것일까? 밀고자는 누구일까? 각각의 주장은 엇갈리고 갈등은 팽팽해 진다. 쿠엔틴 타란티노! 위트와 냉소를 양념으로 토핑한 온갖 범죄영 화와 서브컬처의 콤비네이션 피자와도 같은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을 찍기 전까지 단 한편의 단편영화도, 비디오 작품도 만들어본 적이 없던 이 비디오 점원 출신 영화광은 단숨에 90년대 영화의 이정표가 되었다. <저수지의 개들> 이후 90년대 영화는 피범벅이 되었고, 지독한 수다로 가득찬 라디오 채널 혹은 저속한 음담패설이나 늘어놓는 텔레비전 토 크쇼을 닮아갔으며 온갖 장르영화의 파편들과 이미지들이 뒤섞인 비디 오숍의 판매대가 되었다. 말하자면 <저수지의 개들>은 조셉 서전트의 < 지하의 하이재킹>, 줄스 다신의 <리피피>, 장 피에르 멜빌의 하드보일드 영화들, 래리 코헨의 <Q;날개달린 뱀>, 샘 페킨파의 <와일드 번치>, 그 리고 무엇보다도 스탠리 큐브릭의 <킬링>이 나란히 꽂혀 있는 비디오 진열장이며, 타란티노는 가게를 찾은 손님에게 이런 저런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영화에 관한 심심풀이 퀴즈나 건네보는 점원이다. 도입부, 식 과 <전쟁은 끝났다>), 미래 시제(<사랑해, 사랑해>), 노스탤지어(<스타비스 당에 둘러앉아 마돈나의 Like a Virgin 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해석 기준을 키>), 시간의 무게(<프로비당스>), 연극적 시간(<죽음에 이르는 사랑>과 <멜 가져다대던 검은 양복의 사나이들은 창고로 자리를 옮겨서 이제 몸소 장황 로>), 만화적 이미지로서의 시간(<집에 가고 싶어>)을 담아온 알랭 레네가 하게 B급 영화들을 열거하며 나름대로 이리저리 가져다 붙이기 시작한다. 동일한 순간에 대한 선택과 의지를 통하여 운명으로 전화하는 두 개의 다른 그리고 그 모든 해석은 관객에게 맡겨진다. 그렇지만 타란티노는 영화적 완 시간여행에로 초대한다. 또는 그 안에서 시간의 나선형이 만들어낸 두 개의 성도에는 흥미조차 없고 관객들과의 두뇌게임 따위도 안중에 없다. 그렇다 내러티브에 대한 거울-이미지로서의 시간에 대한 유머를 발명한다. 그럼으 고 그럴듯한 영화적 리얼리티로 관객들을 속여넘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로써 알랭 레네는 그 자신의 출발점으로부터 완전히 반대에 서본다. 여기에 다. 한마디로 <저수지의 개들>은 오만불손하고, 법도 질서도 없으며, 무의 는 더 이상 내면의 시선이란 것은 없다. 그 대신 외부적인 인과관계들이 시 미함과 잡담에 진지하게 집착하며, 영화의 쓰레기장과 미디어의 하수구를 간의 틀 안에서 선택이라는 계열체의 조합이 전체 통사적 구조를 어떻게 바 어슬렁거리며 그 찌꺼기들에 대해 유난스러운 애정으로 가득 찬 영화다. 물 꾸어 놓는가에 주목한다(어떤 의미에서 알랭 레네는 내부로부터 시작하여 론 <저수지의 개들>을 만나기 전에는 그런 건 영화가 아니었다. 타란티노는 끈질기게 외부로 나오는 길을 찾기 위하여 미학적 시행착오를 계속하는 타 90년대식 영화를 발명한 것이다. ( ) 임 머신의 조종자이다). 어느 순간 담배를 피운 것과 피우지 않은 것은 이야기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알랭 레네는 동일한 이야기로 부터 출발하여 단 하나의 순간에 서로 엇갈리는 이야기가 나선형으로 전개되면서 점점 멀어지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또는 동일한 이야기에 서 구조의 장치를 발견하고 서로 다르게 배치하면서 미장센 효과에서 담론 선택이 가져 온 이야기의 반복과 차이를 통해 두 개의 이야기가 포개지면서 서로 아귀가 맞지않는 퍼즐을 만들어낸다. 그 안에서 보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기억을 환기해야 하며, 동시에 그 호출-효과는 일 종의 유머이다. 영화 안에서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로부터 출발 하여 계속해서 이동하는 윈도우형 내러티브 구조를 발명한 알랭 레네 는 의도적으로 거의 아무런 사건도 없는 단순한 이야기를 선택하고, 동 시에 그 안에서 미세한 사건들의 차이를 통해 시간의 전개에 관한 외연 적 구조에 주목한다. 플래시백의 의미를 새롭게 창조하여 시간의 모더 니즘적인 사유에서 출발한 알랭 레네의 포스트 모던한 시간의 표면에 로의 전이. ( ) KINO December 1999 49
1990~1999 31 가든 The Garden 감독 데릭 자만 촬영 크리스토퍼 휴즈 음악 막스 스타이너 주연 틸다 스윈튼, 조니 마일즈, 케빈 콜린스 90년, 영국 영화 컬러, 1시간 32분 자만의 사유를 집대성한다. <가든>은 죽어가면서도 예술가의 존엄성과 비 극적 달성에 이르고자 했던 게이 시네아스트의 신들린 듯한 열정으로 화상 을 입히는 영화이다. ( ) 32 클로즈업 Close-up 감독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촬영 알리 레자 자린다스트 주연 알 리 사브지안, 하산 파라즈만트, 모센 마흐말바프 90년, 이란 영화 컬 러, 1시간 30분 데릭 자만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피할 수 없는 것은 에이즈라는 시대정신이 다(그는 94년 에이즈로 사망했다). 전염성과 치명성은 얼마나 반커뮤니케 이션적인가. 이 속수무책의 질병 앞에서 과학과 문명, 진보와 전복의 꿈은 한순간 발이 묶였으며 보수반동적인 호모포비아의 전령들이 날뛰었다. 그 러나 데릭 자만은 퀴어 영화라는 말이 등장하기 전에 40년 동안 시종일관 퀴어한 예술영화를 만든 아티스트였다. 언제나 아방가르드하며 실험적인 그의 영화는 장 꼭도와 앤디 워홀, 파스빈더와 케네스 앵거에 뿌리를 둔 퀴 어 시네마의 계보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었다. 신화와 성서를 통과하는 그의 수정주의적 마르크시즘은 빠졸리니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동시대 게 이 커뮤니티와 연대한 그의 후기는 토드 헤인즈로부터 시작되는 90년대 퀴 어 작가들에게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면 자신의 역할을 완수한 데릭 자만의 죽음은 장렬한 전사와도 같은 것이며 에이즈 라는 십자가를 진 고행의 길로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 <가든>은 죽어가는 자가 자신의 육신 의 악취를 쥐어짜며 20세기적 고행의 심연으 로 초대하는 영화이다. 에이즈가 깊어진 상태 에서 영화를 찍었던 데릭 자만은 죽음에 직면 한 게이 주인공과 고난받는 예수를 겹쳐놓는 다. 그들은 똑같이 시험에 빠져들고 유혹을 받고 고난을 자처하면서 세상을 근심하고 죽 음을 받아들인다. 그의 모든 영화가 그렇듯이 90분 동안 연금술적인 이미지와 상징만으로 끌고가는 데릭 자만은 여기서 에로스와 타나 토스를 합친다. 감독의 저택인 피닉스 하우스 의 정원에서 촬영된(그래서 제목이 <가든>이며 같은 공간에서 촬영된 전작 <대영제국의 몰락>의 정서적 후편으로 부를 수 있다) 꿈을 꾸는 듯한 이미 지들은 소름끼치도록 간절하고 가혹하리만큼 아름답다. 8미리와 16미리와 비디오, 모노크롬과 컬러의 자유로운 결합 속에서 거의 완전하게 붕괴된 심 리적 미장센은 자기 성찰과 나르시시즘과 세계의 에피스테메에 관한 데릭 키아로스타미에게 개별 텍스트의 평가는 커다란 의미가 없다(마치 고다르 가 그러한 것처럼). 그는 영화를 만드는 과정 자체로 자신의 신세계를 창조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그저 키아로스타미 영화라는 이름만으 로도 진실을 담보하는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로즈업>은 키아 로스타미의 보석 같은 걸작이다. 지그재그 3부작 의 아름다움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이 영화의 비주얼은 거칠고 소박하고 앙상하며, 소음처럼 잡다한 음향은 때때로 덜컹거리다 멈추기도 한다. 그보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서방 세계에서 발명하고 진화시켜 온 영화 수사학에 대한 전면적인 무시이다. 일 백년 동안 영화의 역사는 몽타쥬와 미장센의 변증법적 긴장관계 속에서 진 화해 왔으며 텍스트와 세계 사이의 대립을 전제해왔다. 그러나 키아로스타 미는 영화와 세계 사이의 경계는 마음 을 담아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 래서 영화를 만드는 과정 이 스스로 영화 속에 들어간 <클로즈업>은 영화 와 세계, 픽션과 다큐멘터리, 가짜와 진짜 사이의 경계를 지워버린다. 영화 속의 등장인물은 영화 바깥의 스탭들에게 말을 걸고, 키아로스타미는 영화 속에 들어가 등장인물들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개입이 아니라 중재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클로즈업>은 정말 감동적으로 영화와 세계 를 중재하는데, 여기서의 세계는 또한 오로지 영화에 대한 사랑으로 채워져 있다. 주인공은 이란의 스타 감독 모센 마흐말바프를 사칭하다가 사기죄로 고소당한 실직자 사브지안. 그에 관한 기사를 보고 유치장으로 찾아간 키아 로스타미에게 그는 내 고통을 영화로 표현해줄 수 있으면 촬영을 허락하 겠다 고 말한다. 영 화는 이 약속을 지켜 나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며, 키아로스타 미와 사브지안은 이 만남을 통해 서로 변 해간다. 진짜 감독 키아로스타미는 가 짜 감독 사브지안을 통해 영화에 대한 사 랑을 다시 배우고, 사브지안은 키아로 스타미를 통해 자신 의 죄를 뉘우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진 짜 감독 마흐말바프는 출감하는 사브지안을 맞이하여 그의 영혼을 구원한 다. 이 장면을 몰래 숨어서 찍는 키아로스타미는 진짜와 가짜 마흐말바프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음향 사고처럼 지워버린다. 영화가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가 영화를 반성하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자기반영의 영화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 ) 50 KINO December 1999
악질 경찰 33 34 Bad Lieutenant 감독 아벨 페라라 촬영 켄 켈쉬 음악 조 델리아 주연 하비 케이틀, 빅터 아르고, 안소니 루지에로, 로빈 버로우즈, 조 룬드 92년, 미 국영화 컬러, 1시간 36분 92년 깐느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 유의 끝에서 점핑한 새로운 영토로의 도약으로 보인다). 단언컨대 <악질 경 찰>은 90년대 아벨 페라라의 최고 걸작이다. ( ) 해상화 The Flowers of Shanghai 감독 후 샤오시엔 촬영 마크 리 핑빈 음악 하노 요시히로 주 연 양조위, 하다 미치코, 이가흔, 유가령, 잭 카오 98년, 대만-일본 영화 컬러, 2시간 10분 98년 깐느영화제 경쟁부문 아벨 페라라는 <킹 뉴욕>과 함께 90년대를 시작하였다. 그것은 B급 영화 와 뉴욕 언더그라운드 문화에 세례받은 그가 장르의 리얼리티로부터 세계 안의 존재의 문제로 옮겨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 안에서 그의 주인공들은 점점 말이 없어져 갔으며 침묵의 순간은 계속 늘어갔다. 그리 고 그때 그 차갑고 어두운 시간, 뉴욕의 왕은 맨해튼의 러시 아워, 꼼짝없이 정체된 차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킹 뉴욕>). 절멸. 그것은 아마도 90 년대 내내 지속된 아벨 페라라의 영화 이미지일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 도착한 <악질 경찰>은 <킹 뉴욕>의 절반의 짝이다(또는 스스로의 죽음을 선 언하는 <스네이크 아이즈>에 그 자신의 페르소나로서 하비 케이틀이 계속 해서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며 <어딕션>의 중독 의 징후는 고스란히 여기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뉴욕 의 부패한 형사(하비 케이틀의 거 의 믿을 수 없는 메소드 연기!). 부 정한 자, 그는 중독자이다. 크랙과 코카인과 알코올의. 어느 날 수녀 가 두 명의 소년들에게 강간당하 는 사건이 일어난다. 순결한 옷은 피로 물들고, 성상은 깨어졌다. 형 사는 소년들을 뒤쫓기 시작한다. 아벨 페라라는 우리 시대의 율법 학자이다. 이 주어진 세계, 전재하 는 악의 세계, 들끓는 환영의 세 계. 이 세상 어디에도 구원은 없 다. 신이 떠난 지 오래인 이곳은 카인의 후예들의 세상이다. 그 속 에서 복수의 순환이 자멸로 끝맺는 것이야말로 아벨 페라라적 윤리학의 귀 결이다(그런 점에서 이에는 이 의 계율로 자멸에 이르는 <퓨너럴>이 이 모 든 것의 결산과 같은 것이라면, 소멸하는 존재 이후는 타자와의 경계가 문 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되돌아오는 순환과도 같은 존재에 대한 질문 속 에서 그의 최신작 <뉴 로즈 호텔>이 사이버펑크적 개념과 만난 것은 이 사 후 샤오시엔의 초기 걸작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당혹스럽겠지만 그의 90년대 걸작들은 아시아의 경계를 넘어선 발명의 영화 들이다. 그는 더 이상 본토로부터 떨어진 타이완, 그 중에서도 타이페이의 지리학만으로 는 읽혀지지 않는다. 후 샤오시엔은 점점 혁신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세계 를 넓혀나간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호남호녀>에서의 그 기이한 변화 는 <남국재견>과 <해상화>를 예견하는 것이었다. 이제 후 샤오시엔을 사 로잡고 있는 관심사는 새로운 화법을 찾아내는 것임이 분명하다(어떤 의 미에서 이 대가에게 스타일의 문제는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다. 그의 고정 된 카메라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가 찾고자 하는 화법의 내적 필연성 의 귀결이기 때문이다). <호남호녀>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알 수 없는 곳 으로부터 팩스가 도착하고(주인공의 잃어버린 일기장을 뜯어보내는) 전 화가 걸려오는데 결국 그것이 유령 또는 과거로부터 온 것이라는 깨달음 을 제공하는 순간이다. 이것은 역사가 죽은 자와 산 자의 소통이라는 것을 드러냄과 동시에 테크놀로지에 저당 잡힌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를 환기시 킨다. 대만의 역사에 의식적인 결별을 선언하는 <남국재견>에서는 아예 드 라마의 고리를 핸드폰 속으로 몰아넣는다. 여기서 각각의 인물들의 행위를 보완하고 결정하는 것은 그들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통해서이다. <호남호 녀>에서의 발신인 불명 과 <남국재견>에서의 내용 불명 의 의사 소통은 < 해상화>의 밀폐된 공간에서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나아간다. 1백년 전 상하 이의 고급 유곽에서 보석의 이름을 가진 여인들이 남자를 만나고 헤어지면 서 만들어내는 규방문학적 치정극의 이야기. 그러나 보이는 것은 한숨처럼 떠도는 이곳의 기류일 뿐이고, 여인들의 드라마는 언제나 제3자들의 한담 을 통해서 전달된다. 일 종의 스캔들이나 가십처 럼 전해지는 이 간접화 법은 아주 느리게 움직 이는 쁠랑 세캉스의 리 듬 속에서 세상의 변화 를 풍문의 호흡으로 담 아낸다. 그 속에서 유곽 을 드나들던 세 가문의 남자가 시대적 전환기를 맞이하여 추락했다는 이 야기가 후일담처럼 전해 진다. 그 순간 대만으로 부터 너무 멀어진 듯했 던 세기초의 상하이, 즉 사회주의 이전의 중국은 국민당의 태동기로서 지금 이곳의 대만과 고리 를 맺는다. <해상화>는 후일담으로 전락하고 있는 역사에 대한 근심의 알레 고리인 것이다. 그와 동시에 행위하는 주체와 설명하는 객체가 분리된 이 화법은 결코 내레이션 같은 주관적 장치를 선택하지 않는 후 샤오시엔의 매 우 창조적인 실험이다. ( ) KINO December 1999 51
1990~1999 35 고스트 독 Ghost Dog; The Way of the Samurai 감독 짐 자무쉬 촬영 로비 뮬러 음악 RZA 주연 포레스트 휘태커 99년, 미국 영화 컬러, 1시간 56분 99년 깐느영화제 경쟁 부문 닳고 닳은 감각을 낯 설게 그려내며 소외 에 관해 읊조리던 짐 자무쉬는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돌연 침 묵에 빠져들었다. 끝 간데 없는 침묵은 80 년대 미국 인디가 지 닌 한계점의 노출이 자 새로운 시대에 대 한 부적응으로 여겨 졌다. 젊은 천재의 재능이 (언제나 그렇 듯이) 찰나로 끝난 것에 대해 다들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짐 자무쉬는 돌아왔다. 그리고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4년 간의 수행 을 마치고 <데드맨>으로 복귀한 자무쉬는 장르 를 통해 세상과 소 통 하는 것이 아닌가! <데드맨>에서 존경하는 닐 영을 영혼의 안내자 삼아 미국의 개척사인 웨스턴의 세계로 서천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더니, 뒤이은 <고스트 독>으로 자신의 변모를 확인시켜 주었다. 고스트 독은 빌딩의 옥상 위에 얼기설기 지어진 판자집에서 비둘기들을 벗 삼아 살아가는 외로운 건맨이자 사무라이의 마지막 후예이다. 고대 일본의 사무라이 경전의 계율에 따라 살아가는 고스트 독. 그를 지칭할 수 있는 이 름이란 그 어디에도 없다. 말 그대로 노바디인 그는 소년 시절 자신을 구해 준 이탈리아 마피아를 주인으로 삼고는 12건의 사건을 흔적 없이 해결한 프로페셔널 킬러이다. 자무쉬는 이탈리안 패밀리가 등장하는 갱스터와 현 대 문명과 동떨어져 자신만의 방식을 고수하는 킬러라는 익숙한 클리쉐에 세월의 흐름이란 시간성을 부여한다. 그래서 한껏 폼을 잡지만 아지트의 집 세 조차도 못 내 건물주라도 방문하면 노상 시선을 피하기에 바쁘 고, 하나같이 하얗게 센 머리와 불룩 튀어 나온 배를 가진 갱들은 영락없이 노쇠한 장르와 역사에 대한 메타포가 된다. 무엇보다 <고 스트 독>은 경계를 뛰어넘는 소통에 관한 이야기이다. 고립된 섬으 로만 보이던 킬러의 가장 친한 친구는 프랑스어밖에 할 줄 모르는 아이스크림 장수이지만 언어는 둘간의 이심전심을 이끌어내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기 않는다. 사무라이와 급진적인 흑인 이슬람 교도 사이에는 인사( 좀더 수양하시길 와 정진하길 을 주고받는)가 오 가고, 킬러와 어린 소녀는 일본의 경전을 교환하며 읽는다. <고스트 독>에서 사람들간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로막는 언어와 나이, 사상,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훌쩍 뛰어넘는 짐 자무쉬의 솜씨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소외와 단절(그것 역시 소통에 대한 갈구이지만)의 시네아스트에서 교감의 작가로 변모한 짐 자무쉬는 분명 성숙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온 사무라이 경전에 흠뻑 빠져 있는 어린 흑인 소녀를 비추는 마지막 장면은 희망의 여 지를 찾아낸 시네아스트의 전언이다. ( ) 36 밀러스 크로싱 Miller's Crossing 감독 조엘 코엔 촬영 배리 소넨필드 음악 카터 부르웰 주 연 가브리엘 번, 알버트 피니, 마르시아 가이 하덴, 존 터투로 90년, 미 국영화 컬러, 2시간 2분 90년 깐느영화제 경쟁부문 요절한 비평가 이아니스 카차니아스는 이렇게 말했다. <밀러스 크로싱>은 헐리우드를 재발명했으며 미국영화 는 코엔 형제와 함께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 그만큼 재 능과 지능의 완벽한 싱크로율을 보여주는 코엔 형제의 세번째 영화 <밀러스 크로싱>은 영화광들을 흥분시키는 장르와 두뇌게임의 교차로이다. 세리(심야총서) 느와르 의 결정판 또는 불꽃과 피의 심포니. 그와 동시에 신기루 로 이루어진 영화의 꿈. 여기서 미국의 갱스터는 10년 단위의 미학을 완수해낸다. 70년대의 <대부>(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리얼리즘의 고전이 되었다면, 80년대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셀지오 레오네)는 모 더니즘을 결산했으며, 90년대의 <밀러스 크로싱>은 포 스트모더니즘을 독파한 것이다. 코엔 형제는 의리에 살 고 배신에 죽는 갱스터들의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아주 미묘한 방식으로 새롭게 만든다. 그 첫번째 단서. 이 영화는 우정과 에티켓 에 관한 우화이다. 모든 인물들은 윤리를 잃는 순간 마피아 전쟁에서 패자 가 된다. 예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갱스터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두번째 단서. 이 영화는 마치 권투시합처럼 상대를 바꾸며 나아가기 때문에 이야기 를 쫓아가다 보면 주인공을 잃어버리게 되어 있다. 또한 누구를 쫓느냐에 따라서 속고 속이는 자도 완전히 바뀐다. 그러나 퍼즐의 함정 속에서 이야 기의 끈을 놓칠 때마다 그것을 이어주는 것은 모자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 의 진짜 주인공은 모자인 것이다(그와 동시에 이 모자는 아주 빈번하게 언 급되는 머리, 두뇌, 꼴통, 생각, 묘책, 음모 등을 지시하는 기표이자 코엔 형 제적 맥거핀이다). 그래서 내 모자가 어디로 갔을까? 라는 대사가 나오는 순간은 코엔 형제가 이야기를 놓치지 말라 고 힌트를 주는 것과 다르지 않 다. 완벽한 두뇌의 영화. 폭력을 일삼는 인물들이 셰익스피어적인 대사를 읊어대고, 장르의 규칙과 패러디의 전략 사이로 시적인 성찰이 끼어드는 < 밀러스 크로싱>은 90년대의 시네아스트들 중 코엔 형제야말로 일백년의 영 52 KINO December 1999
화 유산을 수리탐구의 대상으로 완전정복한 예를 보여준다. 이것은 영화 유 산을 강탈하거나 재구성하는 것에 그치는 대부분의 영화광 출신들과는 전 혀 다른 차원이다. ( ) 37 칼리토 Carlito's Way 감독 브라이언 드 팔마 촬영 스티븐 H 브룸 음악 패트릭 도일 주연 알 파치노, 숀 펜, 페넬로페 앤 밀러, 비고 모텐슨 93년, 미국 영 화 컬러, 2시간 25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용서받지 못한 자>를 완성한 그해 브라이언 드 팔마 는 <칼리토>를 완성하였다. 이것은 참 이상한 우연이다. 영화에 있어서 그 둘은 모두 고전주의자이며 아날로그 시대의 장인이자 장르 영화의 대가들 이다(그들의 세계를 이루는 이 장르야말로 얼마나 고전주의적 개념인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브라이언 드 팔마는 각각 존 포드와 하워드 혹스에 기 대었으며, 모두 장르 안의 리얼리즘의 세계를 이루어냈다. 장르는 세상의 틀이다. 그 속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웨스턴이 자신의 이미지의 역사를 끌어들여왔다면 브라이언 드 팔마는 짜깁기의 역사를 끌어들여온다. 어떤 면에서 <칼리토>는 하워드 혹스의 원전을 그대로 옮겨온 <스카페이스>의 속편이자, 그 자체를 (원전과 베끼기의 역사) 내부로 끌고 들어와 사유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 순간 알 파치노의 칼리토는 <대부>의 흔적이며 (그러니까 알 파치노의 영화 페르소나), 83년의 <스카페이스>로부터 지나 간 10년이며, 브라이언 드 팔마 자신의 영화 역사를 투명하게 실체화시킨 대상이다. <칼리토>는 죽음을 앞둔 자의 긴 플래쉬백이다(아니 그것 은 마치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순간의 회상인지 모른다). 칼리토 브리갠트, 한때 신화였던 자. 가출옥한 현재 그와 함께 한 세대를 풍 미했던 친구들은 모두 떠나가 버렸고, 세상은 이미 바뀐 후이다. 적 응은 쉽지 않고, 유일하게 남아 있는 친구는 그를 배신하며, 마지막 꿈은 깨진다. 브라이언 드 팔마는 정말로 이 이야기를 진심을 다해 연민에 가득 차서 들려준다. 이 이야기에는 단절이 있으며, 상처가 있고,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덧없는 꿈처럼 가슴 아픈지 보여준다. 그렇게 브라이언 드 팔마는 지나간 자들을 추억하면서, 죽은 자를 통하여 현재를 맞이하였다. 이것이야말로 파산의 대가 브라이언 드 팔마가 90년대를 맞이하는 방식이었다면, 이보다 더 가슴 아픈 시작 이 또 있겠는가? ( ) 38 살롬 시네마 Nasserddin shan 감독 모센 마흐말바프 촬영 네마트 하기기, 파라지 헤이다리 주 연 에자드라 엔데자미, 메헤디 하세미 92년, 이란 영화 흑백/컬러, 1 시간 38분 페르시아의 이야기 전통 안에서 영화는 천일야화 가 될 수 있을까? <살롬 시네마>에서는 정말 말 그대로 시간을 거슬러올라간다. 그래서 그 안에서 뤼미에르 형제와 마법사 멜리에스가 영화를 만들던 시대의 순진 무구한 감정을 그대로 재현해낸다. 시대는 1900년(그런데 이 시 절에 영화는 아직 이란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다). 왕궁을 몰래 촬 영하던 촬영 기사가 스파이 죄로 체포당한다. 괴씸죄로 촬영 기 사는 단두대에서 목을 잘릴 운명에 처해졌다. 그런데 영화를 본 왕이 화면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한눈에 사랑 에 빠진다. 그러나 어찌하랴. 그것은 그저 커다란 화면에서 보여 지는 빛과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을. 이제 왕은 그녀를 영원히 자기곁에둘수있는묘안을생각해낸다. 촬영 기사가 매일 밤 왕이 잠들 때까지 그 필름을 돌리고 또 돌리는 것이다. 마치 왕이 잠들 때까지 일천일 동안 매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 소 녀의 운명처럼. 더군다나 이 영화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의도적으 로 영화의 형식에서도 초기 무성영화처럼 거친 입자와 빠른 프레 임 속도, 그리고 자막을 활용한다. 아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우화 를 만든다면, 모센 마흐말바프는 동화를 만들어 나간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이란에 대한 정치적 알레고리와 매우 우회하고 있는 비판정신이 있으며, 그 안에서 영화에서 감싸안아야 하는 운명과의 타협과 예술가의 슬 픔이 담긴다. ( ) 39 사랑의 탄생 La Naissance de l'amore 감독 필립 갸렐 촬영 라울 꾸따르 음악 존 케일 주연 루 카 스텔, 장-삐에르 레오, 조한나 테어 스티지, 도미니끄 레이몽 93년, 프랑스-스위스 영화 흑백, 1시간 34분 필립 갸렐의 영화는 결코 쉽지 않다. 지극히 자폐적인 독백과도 같은 영화. 그래서 극한 영화 또는 난파 영화로 불리는 불가해성. 그러나 갸렐의
1990~1999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영화는 예술을 위한 예술, 삶과 신 사이의 긴장으로 비상한다. 필립 갸렐은 우리 시대에 마 지막으로 남은 헤르메스(전언의 신이자 지식을 전달하는 사 람)일 것이다. <구원의 입맞춤>, <더 이상 기타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와 함께 필립 갸렐의 자서전 3부작을 이루는 <사 랑의 탄생>은 인생의 목소리이자 늙어가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잔혹하게 발가벗겨진 가족의 삶과 투명하게 쓰 여진 사랑의 탄생 사이에서 라울 꾸따르의 흑백 이미지는 주 어진 사물들을 재발견하게 만든다. 필립 갸렐을 사로잡는 누 벨 바그의 기억들. 그것은 이제는 늙어버린 (트뤼포와 고다 르의) 페르소나 장-삐에르 레오를 통하여 부활한 세대의 내 적 필연성으로 이끌린다. 진화하는 사랑과 도망중인 사랑. 어쩌면 필립 갸렐은 여기서 무덤 같은 질문을 통과하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가족의 삶과 사랑의 의미와 인간다움, 그리고 45살이 된 성 숙의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존재론적인가. 그와 동시에 <사랑의 탄생>은 연기와 담론 사이의 일치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필립 갸렐 은 남자 주인공들의 (영화 바깥의) 물리적 성숙함과 (영화 안에서의) 심리 적 완숙함이 상호교차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이제 타인의 욕망에 대항하지 않고서도 내적 자유를 구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는 실종되 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시간의 공기이다. 언제나 가족과 함께 사적 리얼 리즘을 찍어온 필립 갸렐은 일상의 흔적들 속에서 영화가 그 자체로 실존임 을 드러낸다. 그의 자서전 3부작을 관통하는 동일한 읊조림 니코는 죽었 다. 진 세버그는 죽었다. 장 외스타슈는 죽었다. 그리고 나는 항상 살아 있 다. 나는 지쳤다 (니코는 그의 연인이었으며 진 세버그는 누벨 바그의 여배 우였으며 장 외스타슈는 그의 친구였다)는 여전히 무한한 울림을 남긴다. < 사랑의 탄생>은 창조하는 자아의 투명함으로 영화의 순수 의지를 지켜낸 예이다. ( ) 40 사탄탱고 Satantango 감독 벨라 타르 촬영 가보르 메드비기 음악 미할리 비기 주 연 미할리 비그, 푸티 호르바스 94년, 헝가리 영화 흑백, 7시간 29분 영화 자체가 괴물 같은 영화들이 있다. 쉬트로하임의 전설적인 9시간 상 영의 <탐욕>, 자끄 리베 뜨의 12시간 40분의 <아 웃 원>, 지버베르크의 7 시간 40분의 <히틀러, 독일영화>, 라이너 베르 너 파스빈더의 15시간 40분의 <베를린-알렉산 더 광장>, 에드라 라이츠 의 15시간 20분의 <하이 마트>는 영화관에서 벌 이는 관객과의 전쟁이 다. 점점 영화관들은 괴 물 같은 영화들을 기피 하였고, 마조히즘의 관객들을 기쁘게 만들 만한 영화들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그런데 90년대에 벨라 타르의 영화는 정말로 마조히스트 영화광들을 기절할 만큼 기쁘게(!) 만드는 영화이다. 벨라 타르는 미지의 시네아스트 이다. 그는 77년부터 영화작업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광들의 도시 파리에서조차 97년에야 발견 되었을 정도로 은둔하면서 작업하였다. 그 러나 그가 들고 나타난 <사탄탱고>는 정말 무시무시한 영화이다. 다섯 명의 등장인물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유령들이 찾아오는 시간에 관한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온통 불길하고 음산한 이미지로 가득찬이영화 는 휴식 시간 없이 단번에 보아야 하는 영화이다(그러니까 영화관에 들어 가기 전에 단단히 각오를 하고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그 안의 이미지들은 쉴 사이 없이 이동하는 트랙킹 롱 테이크로 이루어져 있으며, 거의 모든 이 야기들이 형이상학적이지만 동시에 여기에는 세상에 대한 음울한 시선이 있다. 미클로스 얀초의 전통을 뒤 이은 헝가리에서 온 이 시네아스트는 그 스스로 만들어낸 트랙킹 화면으로 단번에 오손 웰즈, 막스 오필스, 스탠리 큐브릭에 버금가는 율동을 보여준다(또는 기꺼이 그 전통에 선다). 동구의 몰락, 자본주의와 페레스트로이카, 그리고 야만적인 살육의 시간, 그 안에 서 외로이 작업하는 벨라 타르는 기꺼이 그의 영혼을 악마에게 바친다. 이 것은 90년대의 가장 상상력이 풍요로운 시네아스트의 세상에 대한 잔혹한 복수담이다. ( ) 41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La Double Vie de V eronique 감독 크지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촬영 슬라보미르 이즈악 음 악 즈비그뉴 프라이즈너 주연 이렌느 야곱, 핼리나 그리글라스제브스 카, 칼리나 제드루식 91년, 폴란드 영화 컬러, 1시간 38분 91년 깐 느영화제 여우주연상 90년대 가장 가슴아팠던 일은 96년 3월 13일 키에슬로프스키의 사망 소식 일 것이다. 도덕적 계율과 운명을 통해 인간에 대한 근심의 서정을 음유하 듯 그려냈던 일상생활의 율법사 크지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는 타르코프스 키와 반대의 시점에서 시작해서 인류가 맞이한 묵시록이라는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또한 80년대의 타르코프스키가 그러했던 것처럼 키에슬로프스 키는 90년대를 자신의 르네상스로 열었지만 곧 운명의 부름을 따라갔다). <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일상생활 속에서 모세의 십계명의 행간을 읽어내 려고 하였던 <십계> 이후 키에슬로프스키가 유럽통합을 앞둔 90년대와 마 54 KINO December 1999
주하며 질문을 새롭게 하는 그 시작이었다. 프랑스와 폴란드의 두 도시 사 이에서 영혼의 교감은 생과 사의 엇갈린 운명 속에서도 계속되며(<베로니 카의 이중생활>) 자유, 평화, 박애라는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은 재난과도 같은 현실 위에서 죽음과 구원의 이미지를 통해 목격된다(삼색 연 작). 불안한 감정의 전조들, 알 수 없는 인연의 끈으로 연결되어 어 느 순간 자신의 운명을 뒤흔드는 매일매일의 존재자들, 그리고 그 존재자들을 희미하게 만드는 공간 과 공기들 우연과 필연이 물리 고 물리는 이 싸움의 과정에서 나 누어진 운명은 이미지와 소리를 통해서 계속해서 교감한다. 이것 은 나선형의 궤도를 그리며 마치 소리의 파장이 공명을 이루며 퍼 져가듯이 그렇게 울림에 울림을 거듭하면서 영혼의 합일로 나아가 기를 바라는 키에슬로프스키의 근 심이다. 베로니카가 또 다른 자아 인 베로니크의 존재를 알게 된 뒤 죽음의 필연적인 운명과 마주한 것처럼 키에슬로프스키도 생과 사의 엇갈린 운명을 뛰어넘어서 그 사이를 연결해주는 또 다른 자아의 존재를 목격하고 그렇게 (심장병으로) 사의 세 계로 떠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의 그 인형극처 럼) 그는 자신과 자신의 분신으로 남은 영화 사이를 연결하고 있는 그 가느 다란 끈의 움직임을 통해서 끊임없이 이곳에 침묵의 방식으로 도덕의 말씀 과 율법의 계명을 전한다. ( ) 42 반고호 Van Goch 감독 모리스 삐알라 촬영 엠마뉘엘 마쉬엘, 질 헨리 주연 자크 뒤트롱, 알렉산드라 론돈 91년, 프랑스 영화 컬러, 2시간 38분 91 년 깐느영화제 경쟁부문 화가였다가 그 자신이 그린 모든 작품을 폐기처분하고 영화감독이 된 모리 스 삐알라는 사실 여전히 화가처럼 작업하고 있다. 그는 영화를 아름답게 찍으려고 하지 않는다(그것은 화가였던 모든 영화감독들의 특징이다. 그들 은 이미지가 아름답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알고 있는 사람들이 다). 그 대신 삐알라는 화가들이 자신들의 피사체를 다루 는 방식으로 대상에게 접근한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 상의 삶 앞에 캔버스 대신 카메라를 세우고 그 삶의 공간 전체를 아트리에로 삼아서 작품에 관한 영감이 불리워져 올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니까 삐알라의 대상은 형상이 아니라 정서이며, 감각이 아니라 태도이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화가를 포기하게 만든 것이며, 동시에 화가의 태 도를 유지시키는 비밀이다. 모리스 삐알라가 반 고호가 오베르뉴에서 보낸 마지막 3개월을 영화로 만들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반 고호의 예술적 삶과 창작의 태도에 대해 서 공감했기 때문이 아니라(이 영화에는 반 고호에 대한 이무런 예찬이나 존경의 뜻이 없다), 오히려 그 광기와 비 타협으로 인해 사회로부터 점점 벗어나서 완전히 고립됨 으로써 보여지는 대상으로서의 개별성과 그로 인해 자아 내는 내부의 붕괴를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비로소 모리스 삐알라는 자연주의 적인 태도라는 점에서는 장 르노와르의 연출에 기대어 서 면서 동시에 인간에 대한 투명한 초월성의 표면적 응시의 시선이라는 점에서는 로베르 브레송의 기술( 記 )에 가 까이 다가간다. 이 영화 전체의 마지막 삼분의 일은 죽어가는 반 고호에게 바쳐졌으며, 그 죽음의 순간을 연장하면서 만들어지는 비극의 모습은 부서 져 나가는 육신 안에서 영혼이 어떻게 소멸되어가는가에 관한 참혹한 정경 이다. 이것은 반 고호가 살아 생전 그렇게 싫어했던 실내화의 태도로 반 고 호를 대상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잔혹영화라고 불리울 만하다. 그러 나 그 잔혹함은 동시에 숭고하다. 단 한마디로 (가장 보편적 의미에서의) 위대한 예술가의 초상화. ( ) 43 아기 도둑 Il Ladro di Bambini 감독 지아니 아멜리오 촬영 토니노 나르디 레나토 타푸리 음악 프랑코 피에르산티 주연 엔리코 로 베르소, 발렌티나 스칼리키, 쥬세페 라에르키타노 92년, 이탈리아 영화 컬러, 1시간 50분 92년 깐느영 화제 경쟁부문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다들 초읽기에 돌입한 21세기에 대한 조감도를 작성하느라 바쁘거나, 세기말의 암울한 정서를 폭력과 육체의 언어로 그려내고 있는 이 시점에서 반대 로 거리로 나서는 시네아스트들이 하나 둘 늘어나는 이유는 무 엇일까? 한 해 영화제의 시작과 마감이라 할 수 있는 베를린과 베니스 두 영화제가 98년 한 해 동안 시네마 노보와 네오 리얼 리즘의 후예들에게 트로피를 안겨준 것은 분명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브라질에서 온 월터 살레스의 <중앙역>과 이베리아 반도의 작가 지아니 아멜리오의 <우리는 이렇게 웃었다>가 98 년 영화의 테제가 리얼리즘임을 증명했다면 올해 깐느에서 황 금종려상과 황금 카메라상이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와 인도의 좌파 감독인 무랄리 나이르의 <사좌>에 돌아간 것은 확실한 선 언이다. 그럼으로써 우리 시대의 자화상은 화려한 사이버의 신 천지나 비 내리는 느와르의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춘을 강 요당하는 소녀들과 구걸하도록 내몰리는 아이들이 득실거리는 거리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네오 리얼리즘의 계승자인 지아니 KINO December 1999 55
1990~1999 아멜리오는 선배들의 정신을 그대로 고수한다. 네오 리얼리즘이 전후의 폐 허 위에 카메라를 세웠다면 50여 년이 지난 지금 아멜리오는 현대 유럽이 안고 있는 후기 자본주의의 그늘에 시선을 위치시킨다는 차이가 있을 따름 이다. 경찰인 안토니오는 12살 먹은 딸에게 매춘을 강요해 체포된 여인의 자식인 두 남매를 로마의 보호 기관까지 수송하는 일을 맡게 된다. 길의 여 정에 선 이들을 어디에서도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북부 공업지대인 밀라노에서 근대화에서 소외된 시실리로 향하는 여정에서 로제타(다르덴 형제의 영화 <로제타>의 주인공과 이름이 같은 것은 우연일까)와 안토니오 사이에는 애정과 유대의 감정이 생겨난다. 갈가리 찢긴 발칸의 풍경을 잡아 냈던 테오 앙겔로플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과 접점을 지니기도 한 <아기도 둑>은 90년대 리얼리즘의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다. ( ) 44 구름 저편에 Par-del a les Nuages 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촬영 알피오 콘티티, 로비 뮬러 음 악 루치아 달라, 로랑 쁘띠강, 반 모리슨, U2 주연 소피 마르소, 뱅상 페레, 이렌느 야곱,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존 말코비치, 피터 웰러 95 년, 프랑스-이태리-독일 영화 컬러, 1시간 49분 95년 베니스영화제 국제언론비평가상 심장 발작으로 10년 이상을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못하던 안토니오니가 빔 벤더스의 도움을 받아 여든세 살의 나이에 제스추어와 표정, 그리고 몇 개 의 속삭이는 단어만으로 완성한 <구름 저편에>는 90년대 영화 속에서 일종 의 기적이며 다시는 그의 영화를 볼 수 없을 것이라 낙담하고 있던 우리에 겐 축복과도 같은 영화이다. 모더니즘의 거장인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와 포스트모더니스트인 빔 벤더스의 슈퍼 세션(네 개의 에피소드는 안토니오 니가, 그 에피소드를 연결하는 프레임워크는 빔 벤더스가 연출하였다. 그 리고 그 모든 것을 편집하고 관장한 것은 안토니오니다)! 또는이두예술 가의 서로에 대한 애정과 신뢰 그리고 끊임없는 싸움의 과정 속에서 완성 된 <구름 저편에>는 모더니즘적인 네 편의 에피소드와 그 사이에 영화감독 의 시퀀스가 시멘트처럼 포스트모던하게 스며들어 있다. 이것은 영화를 모 호하고 불친절하며 때로는 불완전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화가 전 혀 다른 지평이 만들어내는 긴장감의 자장 위에 놓여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고 그로 인해 우리로 하여금 놀라운 순간들과 마주하게 만든다. <구름 저편 에>는 바라봄에 관한 영화이다. 네 개의 에피소드에 나오는 여인들은 그들 을 바라보는 남자들의 시선에 의해 드러나고 그 에피소드는 다시 그것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에 의해 기술되며 그 뒤에는 그것을 연출하는 안토니 오니라는 시네아스트를 바라보는 빔 벤더스라는 또 다른 시네아스트의 충 성과 존경의 시선이 드리워져 있다. 이렇게 시선들은 크로와상의 그것처럼 중층적으로 겹치고 포개져 살포시 얹혀지며, 관계의 순간 또는 사랑이 기습 적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그 순간들을 길게 연장시키며 변주한다. 마치 인상 주의 화가가 자신의 기억에 남겨진 이미지의 인상을 화폭에 옮겨놓듯이 그 동안 차곡히 쌓아왔던 사념들을 카메라로 포착하면서 안토니오니는 순간을 통해 영원에 다다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을 지속시키려는 영화적인 욕망은 부질없다는 것을 안토니오니는 이미 알고 있기에 영화는 한없이 아름다우면서도 가슴저리도록 슬프다. ( ) 45 벨 느와제즈 La Belle Noiseuse 감독 자끄 리베뜨 촬영 윌리엄 뤼브찬스키 주연 미셀 삐콜리, 제 인 버킨, 엠마누엘 베아르 92년, 프랑스 영화 컬러, 4시간 (편집판 2시 간 11분) 92년 깐느영화제 창조대상 자끄 리베뜨는 누벨 바그 감독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으며, 그의 동료 들과 거의 교류를 갖지 않았다. 그래서 은자처럼 작업해온 리베뜨의 영화는 비밀에 싸인 채 신비주의에 가까운 방식으로 창작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벨 느와제즈>는 그 자신의 작업에 대한 자신의 초상화와도 같은 진정성을 갖고 있다. 화가 프렌호펠은 아름다운 여인 이라는 제목의 그림 을 그리다가 중간에 포기하고 10년 동안 붓을 잡지 않는다. 그리고 별장에 서 은자처럼 사람들을 피해서 살고 있다. 그런데 여기 젊은 부부가 찾아온 다. 그리고 그들 부부의 젊은 아내를 보고 갑자기 영감이 떠올라 다시 그림 을 그리기 시작한다. 영화는 화가와 모델 사이의 그림을 매개로 한 창조의 순간을 온통 긴장과 이완이 가득 찬 무대로 만든다. 마지막 날 그림은 완성 되지만, 그는 그것을 아트리에 구석에 내버려둔다. 완성된 그림을 우리는 보지 못한다. 자끄 리베뜨는 발작의 단편소설 알려지지 않은 걸작 을( 데 카드라쥬;영화와 회화 로 알려진 영화평론가이자 영화감독) 파스칼 보니체 와 크리스틴느 롤랑의 공동 시나리오와 콘티의 도움을 빌려 영화와 연극, 그리고 회화의 삼각형의 무대로 만든다. 엠마누엘 베아르는 (헤어 누드라 는 모험을 각오하고) 카메라 앞에서 화가 앞에 선 모델의 투쟁과 예술에 대 한 창조의 순간에의 일부가 되어가는 마티에르 사이의 형상을 끌어내고, 그 앞에서 (손만 출연한 화가) 베르나르 뒤포르의 클로즈업된 손과 (화가를 연 기하는) 미셀 피콜리의 신체 사이의 관계는 연극적 재현을 이룬다. 이것은 예술사에서 창조의 순간을 기록한 가장 신비하고도 아름다운 예가 될 것이 다. ( ) 56 KINO December 1999
PS: 우리나라에는 미국에서 재편집한 2시간 11분판이 개봉되었다. 미국판 의 제목은 <디베르티멘토>. 이 편집판을 다시 대폭 수정하여 <누드 모델>이 라는 제목으로 일주일 동안 개봉하였다. 9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개봉된 영 화 중에서 가장 능지처참당한 작품. 46 달의 목소리 La voce della luna 달로 가는 비밀을 알려줄 사람을 찾아서 이곳 저곳을 다닌다. 그리고 그는 자신 앞에 나타난 사람들과 끊임없이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이것 은 펠리니의 여행의 코다이며, 동시에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가 세상에 대 한 경이로 가득 차 있던 어린 시절에의 회상에 다름 아닐 것이다. 또는 정 해진 이야기 없이 상상이 이끄는 대로 창조하는 세계의 무한정한 산책이 다. 그러나달에가기위한그의여행은언제끝날지알수없는것이다. 영 화의 첫 장면은 마치 무르나우의 <선 라이즈>를 연상케하며, 거의 대부분의 장면을 촬영소에서 작업한 세트장은 더할 나위 없는 펠리니의 우주이다. 언제나 가족처럼 영화를 만들던 펠리니가 그 대부분의 동료들을 세상에서 떠나 보내고 그네들을 그리워하면서 만든 이 영화는 쓸쓸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그 매혹적인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영화 전편에 넘쳐나는 화려함에는 달빛과도 같은 쓸쓸함이 사방으로 번져나간다. ( ) 47 동사서독 Ashes of Time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 촬영 토니노 데리 코리 음악 니콜라 피 오바니 주연 로베르토 베니니, 파올로 비랏치오, 나디아 오타비아니 90년, 이탈리아 영화 컬러, 2시간 1분 위대한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의 백조의 노래. 네오 리얼리즘으로 시작하여 (<건달들>), 그 스스로 배신하면서(<길>), 상징주의에 이끌리고(<달콤한 생 활>), 모더니즘의 심연에로 뛰어들고(<8 1/2>), 바로크에 심취하고(<사티 리콘>),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스스로를 풍자하며(<인터비스타>) 그 스스로 의 영화 우주를 끊임없이 팽창시켜 온 펠리니의 마지막 영화는 이탈리아 영화의 무성영화 초창기의 치네치타 촬영소를 호화찬란하게 찬양하는 스 펙터클의 표현주의이다. 여기에는 세상에 대한 아름다움에의 찬사와 그것 의 부질없음에 대한 탄식으로 가득 차 있다. 카바지오니의 미친 이들의 시 에서 영감을 얻어 영화로 옮긴 <달의 목소리>는 한 편의 시와도 같은 이 미지들로 가득 차 넘쳐난다. 주인공 사르비니는 자신의 귀에 달에서 목소리 가 들려온다고 생각한다(어쩌면 정말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목소리 를 찾아 그는 이상한 모험을 떠난다. 우물에 달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 사르 비니의 우스꽝스러운 실패로 시작하여(로베르토 베니니의 명연!), 그에게 감독 왕가위 촬영 크리스토퍼 도일 음악 진훈기 주연 장국 영, 양가휘, 장만옥, 양조위, 장학우, 유가령 94년, 홍콩 영화 컬러, 1 시간 31분 <동사서독>은 여덟 개의 다른 이야기로 환기되는 하나의 시간, 또는 여덟 개의 다른 방식으로 말해지는 하나의 이야기이다. 아니면 구부러진 기억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여덟 개의 시간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여기에 놓 여져 있는 것은 다만, 정서이며 시간 속에서 정서는 기억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시간이 이미지와 접촉 하는 순간). 따라서 시간은 재배치되고, 내러티브는 그저 그 감정의 여진들이 거하는 장소이다. 왕가위는 매우 이 상한 시간대로 이동하였다. 그것은 대과거의 시제이며, 그곳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것은 상상적 이미지 속에서 재현된 풍경이거나, 부재하는 풍경으 로서의 얼굴들, 그리하여 집적된 기억의 풍경화이다. 홍콩을 떠나 중국에 서, 김용의 원작은 떠나온 자들이 중국을 기억했던 방식이다(그러니까 장 철과 호금전의 그것). 그러나 이 원작은 거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왕가위는 그 틀만을 끌어와 그 위에 상상 속의 상상을 세운다. 이것은 풍경 없는 파노라마이며 말 그대로 기억의 공간화이다(그런데 중국의 사막, 그 곳에 세워진 그 사상누각의 오두막이란 사라지는 땅 홍콩과 중국의 관계 에 대한 얼마나 적절한 비유인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어긋난 인연, 떠 KINO December 1999 57
1990~1999 나간 연인을 향한 하염없는 기다림, 저버린 약속, 회환의 눈물, 아물지 않 는 상처 이 모든 것들을 잊기 위해 취생몽사, 이름 붙여진 술한잔기울 였으니 이것은 왕가위식 유머이다. 인간이 번뇌가 많은 까닭은 기억 때문 이지만 그러나, 잊으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기억난다. 한번 어긋 난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기억은 상처를 길어올리는 우물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얼마나 운명론적인 이야기인가. ( ) 48 신곡 La Comedia de Deus 감독 호아오 세자르 몬테이로 촬영 마리오 바로소 주연 호아오 세자르 몬테이로, 끌로디아 테이제이라, 라센 아센사오 96년, 포르투갈 영화 컬러, 2시간 43분 95년 베니스영화제 특별심사위원대상 호아오 세자르 몬테이로는 불경한 이름이다. 서방세계 영화의 변방인 포르 투갈에서 활동하는 이 미지의 시네아스트는 언제나 악과 불멸, 에로티시즘 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자신이 직접 연출은 물론이고 각본과 주연까지 겸하는 완전 작가인 그는 자신의 모든 영화를 스스로의 관장 아래 두며 영화 밖의 창조주와 영화 안의 인물을 하나로 만들어 버린다. 아이스 크림가게주인인장드뒤( 신의 장 ). 그는 일체의 욕구가 증발해버린 듯 한 외양와 달리 은밀한 욕망에 시달린다. 그는 여인들의 음모( )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치기를 원했으니, 그의 앨범에 차곡차곡 수많 은 여인들의 그것이 모인다. 어린 소녀의 향기는 그를 사로잡지만, 그는 감 히 그녀들을 만질 수 없다. 젊은 소녀들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꿈꾸면서도 그녀들과 관계 맺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는 상징적인 환타지가 펼쳐지는 한도 내에서만 그녀들을 통제한다. 메피스토텔레스와 거래한 파 우스트와 닮아 있는장드뒤는불멸에들어선것처럼보인다. 그러나 바싹 메마른 외모에서 연상되 듯이 그에게 죽음이란 한 없이 연기되고 그 속에서 그가 얻은 것은 끝없는 노쇠뿐이다. 그는 지친 육체를 끌고 다니는 뱀파 이어이다. 그래서 삶과 죽음, 불멸의 화신인 그 는 운명의 고민을 짊어진 자이다. 그는 이것을 몬 테이로식 롱테이크라 할 만한 새로운 영화적 형식 속에서 마치 제의식을 치 르듯이 미니멀리즘의 영 화로 찍어나간다. 호아오 세자르 몬테이로의 영화와 만난다는 것은 금기의 역사와 마주하는 것이며, 쁘띠 부르주아적 통합성을 전복하는 것이다. ( ) 49 내책상위의천사 An Angel at My Table 감독 제인 캠피온 촬영 스튜어트 드라이버그 음악 돈 맥글라샨 주연 케리 폭스, 알렉시아 케오그, 카렌 페르거슨 90년, 뉴질랜드 영 화 컬러, 2시간 40분 90년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깐느영화제 단편영화 그랑프리 수상작인 <필>로 출발하여 소수의 영화광들 에 의해서 걸작 단편의 반열에 올려진 <열정 없는 순간>과 <소녀 이야기>를 거쳐 16미리적 감수성과 기괴한 컬트 정신에 기댄 독특한 분위기의 장편 데뷔작 <스위티>에 이르러 제인 캠피온은 뉴질랜드에서 온 여성 데이빗 린 치 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제인 캠피온에 대한 완전한 오해 (!)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상심리학과 문화인류학적인 접근을 통해 인물의 심층을 분석하는 영화의 레비 스트로스 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도 그녀의 영화를 절반밖에 설명하지 못한다. 적어도 자넷 프레임의 삼부 작 자서전에 기반한 <내 책상 위의 천사>에 있어서는 그러하다. <내 책상 위 의 천사>는 남성적인 시선으로는 (그 실체를 감지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좀처럼 끌어안기 힘든 어떤 감성의 잔잔한 격동이 담겨 있다. <내 책상 위의 천사>는 결코 보는 영화가 아니다(그러니까 이 영화는 꿈이 넘치던 어린 시 절, 짧은 사랑, 정신질환이라는 오진으로 받았던 격심한 고통의 시절 그리 고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발견하 는 과정을 좇아가는 한 편의 휴먼 드라마 이 상이다). <내 책상 위의 천사>를 본다는 것은 자넷을 따라 그녀만의 방 안으로 들어가 굽 이굽이 이끼처럼 돋아 있는 그 모든 격정과, 마치 광기처럼 복받쳐오는 감정의 굴곡들 과, 존재 자체의 버거움에 견디지 못하고 산 산조각나는 육체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리 는 그 과정을 함께 체험하는 것이다. 자넷 프 레임의 여성적인 글쓰기를 그대로 체현하고 있는 <내 책상 위의 천사>는 제인 캠피온 영 화 중에서 유독 수줍게 멀리 떨어져 있는 영 화이지만 그 낮은 목소리는 가장 솔직하고 진지하다. ( ) 50 고령가 소년살인사건 枯 街 件 A Brighter Summer Days 감독 양덕창 촬영 장 후이공 음악 장 혼다 주연 장진, 리자 양, 장 구오주 91년, 대만 영화 컬러, 3시간 8분(감독판 4시간) 92년 동 58 KINO December 1999
경영화제 심사위원툭별상 중학생 소년들은 밤이면 몰려 다니면서 패싸움을 벌인다. 소녀들은 첫사랑 을 발견하지만 곧 싫증을 낸다. 소년들의 형은 아무런 희망이 없다. 어머니 들은 늘 집을 비운다. 그네들의 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 러나 아무도 그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솔직히 그렇게 말하면 빨갱이가 되기 때문이다. 시대는 1959년 여름. 장소는 대만 타이페이의 고령가. 장개석 국민당 정부는 경제개혁을 단행하고,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독재정부가 되 어 모든 이들을 침묵시킨다. 대만은 아시아에서 점점 고립되고, 본토에서 온 사람들과 섬에서 살던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점점 더 증폭된다. 미군 부 대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그해 히트곡은 당신, 오 늘밤 외로우세요 이다. 이제 주간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야간학교로 옮겨간 어린 소년 샤오스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1961년 여름. 샤오스는 자신이 사랑했던 소녀 밍을 야시장 한복판에서 칼로 찔러 죽인다. 거의 스스로의 자살처럼. 그해 여름은 더할 나위 없이 우울한 장마가 끝을 모르고 이어지 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폭우가 내릴 것 같은 몬순 기후의 지루한 습도. 대만 의 근대의 시간 안으로 들어가서 양덕창은 이 모든 것의 실패와 좌절, 초조 와 무기력, 그리고 슬픔을 하나의 거대한 분위기로 담아낸다. 실제 살인사 건을 다시 구성하여 만들어낸 이 영화의 이야기는 샤오스를 중심으로 점점 더 넓혀나간다. 그러나 이 안에서는 누구에게도 출구가 없다. 그래서 그들 은 계속해서 같은 동네를 빙빙 돌지만, 그 안에서조차 점점 더 추락하기 시 작한다. 그것은 대만의 근대화에 대한 운명이다. 또는 결코 누구도 행복하 지 않았던 아시아의 60년대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회고일 것이다. 우리들 의 근대는 이렇게 시작하였다. ( ) 51 하류 The River 감독 차이 밍량 촬영 라오 펭정 주연 이강생, 미아오 티엔, 루 시아오링, 안 후이 97년, 대만 영화 컬러, 1시간 55분 97년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수상 차이 밍량과 함께 아시아의 모더니티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는 정체성 위기로 몸살을 앓는 90년대의 아시아가 배출한 (국제적 명성면에서는) 유일한 시네아스트이기 때문이다. 92년의 데뷔작 <청소년 나타>부터 차이 밍량은 아시아적 모더니티의 기형화와 그 체현으 로서의 섹슈얼리티와 타자의 담론을 끌어들였다. 지금, 여기 타이페이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입된 서구문화와 아시아의 전통적 가치 관 사이에서 차이 밍량의 인물들은 근대화의 모순이 중층적으로 만나는 시 간, 가족의 해체가 이미 끝난 공간으로서의 타이페이에 놓인다. 더 이상 이 곳에는 후 샤오시엔의 역사와 에드워드 양의 일상에 드리워진 집단적이며 억압적인 무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차이 밍량이 사로잡히는 것 은 기능장애에 빠진 동시대적인 위기이며, 가족 내부로 은밀하게 스며든 단절과 결핍의 징후들이다. <하류>는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발가벗겨지면 서 그 뒤틀리고 숨겨진 욕망의 바닥을 드러낸 가족 묵시록이다. 아들은 원 인 모를 목의 통증으로 죽어가고, 아버지는 게이 사우나를 오가며 수음하 고, 어머니는 포르노 비디오를 보며 불륜에 빠진다. 아시아의 가족과 섹슈 얼리티의 혼란이 한 지붕 아래 동거하는 이 불온한 구도는 끝내 어둠 속에 서 아들과 아버지가 관계를 맺는 파행을 불러들인다. 그러나 차이 밍량의 영화가 성숙한 것은, 스스로 위기를 받아들이고 탈출구를 차단하면서도 해 답을 구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하류>는 위기의 영화이지만 그와 동시에 해 소의 영화이다. 소통부재에 빠져 있던 가족들은 아들의 질병으로 한 자리 에 모이고, 아들과 아버지의 정신적 단절은 육체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치유의 희망을 불어넣는다(또한 위층에서 새는 물을 아버지는 해결하지 못 하지만 어머니는 해결한다). 여기서의 근친상간은 신체소통의 알레고리이 다. 결국 차이 밍량의 영화를 가로지르는 신체는 아시아적인 질곡이 강제 된 가장 명징한 환부인 것이다. ( ) 52 시간 Waati 감독 술레이마네 시세 촬영 빈센조 마라노, 장-자끄 뷔옹, 알렉시 로 디오노프, 게오르기 레베르그 음악 꿀라이, D 폴레커트 주연 리네 오 케푸오에 촐로, 시디 야야 시세, 아이카 아메루 모하메드 디코 말리-프 랑스 영화, 1994년 컬러, 2시간 20분 95년 깐느영화제 경쟁부문 술레이마네 시세는 아프리카 대륙의 영화를 일깨웠다. 아프리카 말리에서 태어나 60년대 러시아의 VGIK에서 공부한 그는 대지의 영화를 만든다. 비 참함과 억압, 학살의 대륙, 창조 이전의 대륙. 그의 영화는 그곳의 바람(<바 람>)을, 그곳의 빛(<빛>, 이 영화는 87년 깐느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였다)을, 프레임 안으로 옮겨오는 것이다(그곳의 공기를, 스며든 역 사를, 대지를 카메라 안에 붙들어 매려는 그 불가능한 도전). 술레이마네 시세는 그 안에서 그 어떤 것에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빛으로 서 있는 시 네아스트다. 그리고 이윽고 우리는 그곳의 시간으로 안내될 것이다. 굴욕과 KINO December 1999 59
1990~1999 억압의 시간, 인식의 시간, 세상이 열리는 시간. <시간>은 한 소녀로부터 시 작한다. 그녀의 이름은 난디. 아프리카 대륙에서 여자는 가족에게 속해 있 는 것이다. 어린 소녀의 존재는 어머니와 어머니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어 머니의 어머니와 함께 한다. 소녀의 여정. 할머니와 흑인 비밀 조직의 도움 으로, 또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자 격리 거주지 게토를 이탈한 어린 아 이들을 도와주는 남아프리카인들의 도움으로, 난디는 공부를 할 수 있다. 그녀는 대학을 떠나 사막을 횡단하고, 수많은 부족들을 만나고, 그래서 복 수의 문화와 조우하고, 대륙의 검은 심장을 통과해간다. 탐색의 과정이면 서 또한 슬픔이 지배하는 여행. 이것은 마치 모자이크와도 같은 영화이다. 혹은 수많은 단절과 상처들을 지나치는 여행. 그 단절들을 이어주는 것은, 상처를 치료하고 하나로 이어주는 것은 소녀의 내부에 살아 있는 구술의 목소리이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난디에게서 되살아난다. 이것은 전혀 다른 세계, 그 자신의 오리지날리티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도출되는 휴머니즘이 다. 90년대 포스트 식민주의의 격전지에서 온전히 제 힘으로 버티어 선 아 프리카 대륙의 발견. ( ) 53 죽음의 가시 の 棘 The Sting of Death 감독 오구리 고헤이 촬영 마츠이 히로시 음악 호소가와 토시오 주연 마츠자카 케이코, 가시베 이토쿠 90년, 일본 영화 흑백, 1시 간 54분 91년 깐느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오구리 고헤이는 느리게 작업한다. 그것은 그가 그만큼 오랫동안 생각한다 는 의미이다. 지난 20년 동안 네 편의 영화(<진흙의 강>, <가야코를 위하 여>, <죽음의 가시>, <잠자는 남자>)를 만든 오구리 고헤이는 일본영화 안 에서 아시아의 좌표를 설정하고 그 안에서 함께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 를 지니는지를 묻는다. 그는 일본영화의 아웃사이더이며, 동시에 아시아 영화의 친구이다. 그것이 오구리 고헤이가 닫힌 내부에 대해서 계속해서 자리를 옮겨가면서 희생양을 찾는 이유이다. 그것은 언제나 가해자였던 일 본에 대해서 이제 그 반대의 입장에 서서 반성하는 것이며, 무기력한 희생 의 복수는 함께 사는 세상의 영혼이 함께 타락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구리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함 께 서로 산다 는 문제에 마주하여 우리 모두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그 안 에서 미메시스의 행복을 복권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다(원폭 아래서 부서 져가는 세상, 고도 경제성장 속에서 망가져가는 육신, 그런데 어떻게 해서 든지 보존하려는 순결한 영혼). 그러나 산다 는 것은 영혼이 상처받고, 육 신이 부서져 나가는 것이다. 그의 영화 안에 있는 정서는 그것을 마음과 살 안에 어떻게 보관할 수 있을 것인가의 조건이다. 미호와 도시오 부부는 결 혼 10주년을 맞는다. 그러나 미호는 남편 도시오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의부증에 시달린다. 아내를 사랑하는 도시오는 아내를 위해서 아무도 없는 섬에 가서 그들 가정을 새로이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어린 남매를 데리고 그들 가정은 모두로부터 떨어져 있는 장소로 옮긴다. 그러나 아내 의 의심은 점점 더 심해지고, 그들만을 위한 장소라고 여겨진 곳은 점점 정 신분열증과 히스테리로만 가득 찬 황폐한 지옥이 되어간다. 처음에는 조용 하게 시작된 영화는 점점 더 음영 짙은 공간 안에서 이들 가족의 내부적 붕 괴를 바라본다. 그것은 영혼의 파멸에 대한 더 할 나위 없는 사실주의적인 기록이며, 동시에 그 안에서 함께 살지 못하는 일본의 공허한 외로움과 강박관념에 가까운 의심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 ) 54 로제타 Rosetta 감독 장-삐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촬영 알랭 마르꼬엥 주연 에 밀리 드껜느, 파블리치오 론지오네, 앤 예나우 99년, 벨기에 영화 컬 러, 1시간 30분 99년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 75년 프로덕션을 설립한 이래 노동현장에서 60여 편 이상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온 벨기에 출신의 다르덴 형제. 이들은 속임수와 화려한 수사만이 난무하는 90년대에도 여전히 영화가 추락해가는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 될 60 KINO December 1999
수 있다고 믿는 실천의 영화를 만드는 투사들이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데 뷔작인 <거짓 속임수>와 <약속> 그리고 <로제타>까지 다르덴 형제가 천착하 고 있는 것은 여전히 노동과 실업문제이며 전 지구화된 자본주의 시스템 속 에서 어느 틈엔가 그 안으로 들어와 서방세계의 번영과 풍요의 언저리에서 쓰러져가는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그러나 다르덴 형제는 결코 웅변적이거 나 도식적이지 않다. 그들은 맨몸으로 현실과 부딪치면서 그 모순을 보여주 려고 한다. 그들의 영화에서 이 과정은 투쟁이라기보다는 우리가 함께 나누 는 사랑이자 화해의 몸짓이다. <로제타>에서 어린 소녀는 가혹한 세상에 떠 밀리듯이 들어가 굶어죽을 것인가 또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양 자택일을 강요당한다. 이 무서운 현실 앞에서 그 모든 감정과 도덕과 배려 는 사치일 뿐이기에 로제타는 생존을 위해 그것들을 자신의 깊은 곳으로 꾸 역꾸역 쑤셔넣는다. 그녀의 무표정하게 굳은 얼굴은 세상에 대한 거울이다. 다르덴 형제는 로제타의 클로즈업과 침묵을 통해 빈곤과 실업, 부정한 사회 를 드러내며 황량한 겨울 도시 풍경만큼이나 스산하게 말라버린 로제타의 마음속으로 우리를 불러들이고, 그 단단한 표정 사이에 벌어지기 시작하는 균열을 보여준다.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던 예수의 모 습처럼 자살을 위해 가스통을 질질 끌고 걸어가던 그녀가 마침내 꺼어꺽 토 해내는 그 감정의 폭발 드디어 무너지는 육체 속에 고집스럽게 채워두었던 감정의 수문이 부서져내린다. 그 사이로 드러나는 것은 상처받은 그녀의 영 혼이다. 자신들의 방식을 고집스럽게 고수하는 다르덴 형제는 전혀 다른 길 을 통과하여 존재론적인 질문에 도달하였고 칼 드레이어가 <잔 다르크의 수난>에서, 로베르 브레송이 <무쉐뜨>에서 보여주었던 것 같은 영혼의 초상 화를 완성하였다. ( ) 일 가량 진행된 시점에서 여주인공은 죽고 남자주인공은 화면에서 사라진 다! 카프카의 변신 을 필생의 프로젝트로 간직해온 린치는 <로스트 하이 웨이>와 <스트레이트 스토리>를 통해 본격적으로 변신 이라는 모티브를 변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긴 트윈픽스 의 마지막 장면에서 거울을 바라보는 카일 맥라클란의 얼굴이 이제 막 연옥에서 당도한 밥을 감지할 수 있게 한 데서부터 이미 변신의 전조는 제시된 셈이지만. 스스로 '21세기 느 와르 호러'를 만들겠다고 공언하였던 데이빗 린치는 <로스트 하이웨이>에 서 레이먼드 챈들러의 표현대로 밤 이상의 무엇 인 그림자들로 둘러싸인 영화를 만들어냈다. 어둠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획득하며 사막 한가운데 뻗 어있는 고속도로는 미로 속에 갇힌 것 같다. <로스트 하이웨이>는 포스트 모던의 재래요, 21세기적 대응이며, <스트레이트 스토리>로 새로운 세기를 시작한 린치랜드로 가는 길목이다. 그러니까 어둠 속에 펼쳐진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이 이미지는 정확히 린치 영화 스스로에 대한 비유가 되는 셈이 다. 기계음의 고동 속에서 화면을 꽝꽝 울려대는 트렌트 레즈너의 노래 제 목마냥 <로스트 하이웨이>는 아직 20세기 안에 머물러 있는 당신을 (그러 므로 필히 다른 것의 도움을 빌어야만 하는) 다음 세기로 안내할 퍼펙트 드럭 이다. ( ) 56 씬레드라인 Thin Red Line 감독 테렌스 맬릭 원작 제임스 존스 촬영 존 톨 음악 한스 짐머 주연 숀 펜, 애드리안 브로디, 제임스 카비젤, 닉 놀테, 벤 채플린 98년, 미국 영화 컬러, 2시간 51분 99년 베를린영화제 금곰상 55 로스트 하이웨이 Lost Highway 우리 시대 영화의 현자들이 있다면 아마도 그 맨 첫머리에 오를 이름은 테 렌스 맬릭일 것이다. 황무지 의 시인, 천국에서 추방된 자들의 감각에 사 로잡혀 있는 자. 영화는 풍경의 배면으로 스며나오는 소멸하는 존재의 기 록에 다름 아니다(대체 이 즉물적인 이미지들 속에서 소멸의 터를 마련한 다는것은얼마나지난한일인가). 테렌스맬릭은70년대단두편의영화 <황무지>와 <천국의 나날들>을 완성하고 오랜 시간 침묵하였다. 그의 이름 은 점점 신화가 되어갔다. 그리고 그는 제임스 존스의 동명소설을 거의 임 의로 개작한 전쟁영화로 20년 만에 돌아왔다. 43년 과달카날 섬. 일본군에 대해 미군이 최초로 승리를 거둔 곳이자, 그 어떤 전투보다 많은 피를 흘린 전장. 그 한가운데에서, 이 압도적인 물적 이미지들 속에서, 테렌스 맬릭은 존재의 심연으로 다가간다. 이것은 항명과 복종, 희생과 의무의 이야기이 다. 피범벅의 절망. 테렌스 맬릭은 2차 대전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2차 대전은 단지 쇼크와 히스테리에 사로잡힌 광기의 무대로 불려져 온 것이 다. 혹은 시지프스의 후예들이 오르는 죽음과 공포의 언덕, 계속해서 총에 맞고 굴러떨어져도 멈출 수 없이 오르고 또 오르는 가파른 길은 신화의 무 대에 다름 아니다. 이 거대한 영화는 전쟁영화가 아니라 전쟁에 관한 영화 감독 데이빗 린치 촬영 피터 데밍 음악 마르크 보커너 주 연 빌 풀만, 패트리샤 아퀘트, 발타자 게티 97년, 미국 영화 컬러, 2 시간 14분 <로스트 하이웨이>는 거의 완벽에 가까우리만치 무의미 한, 혹은 철저하 게 무의식 적인 영화이다. 만약 당신이 영화를 보면서 줄거리 비슷한 거 라도 정리해보려 한다면 부질없는 짓이다. 필름 느와르의 플롯이 촘촘히 짜여지고 (상대적으로) 많은 것들이 설명되었던 <블루 벨벳>이나 트윈픽 스 의 경우와 달리 영화는 매번 상호모순적이고 불가해한 사건들로 내러 티브의 논리를 무너뜨린다. 심지어 히치콕의 <사이코>마냥 영화가 삼분의 KINO December 1999 61
1990~1999 이다. 그래서 테렌스 맬릭이 호주의 작은 섬으로 배우들을 이끌고 들어가 마치 전쟁과 같이 완성한(그러면서 제작사와 배우들을 속여가면서까지 황 혼의 빛으로 프레임을 채워 절멸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며) 이것은 전쟁의 이미지를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이미지를 통하여 그 본질로 들어가 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전쟁 영화의 이미지-스펙터클에 대항하는 것이다. 테렌스 맬릭은 기꺼이 여기에서 이 모두를 관장한 프로스페로의 지위에 오 른 것이다. ( ) 만나고, 그 순간 동유럽의 역사적 상처와 일종의 정화작용이 들어선다. 핀 틸리는 피카레스크적인 구조 속에서 이야기의 힘이 스스로 주제를 발전시 키고 문제를 제기하도록 이끈다. 여기에는 철벽 같은 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있다. 1988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루마니아는 어떤 나라 였으며 그것은 유고슬라비아의 야만적인 도발과 어떻게 소통하는가. <떡갈 나무>는 인간과 역사에 대한 비극적인 이야기이지만 그 속에 침잠한 멘탈 리티는 동구 블럭이 어떤 방식으로 구조화되었는가를 드러낸다. 슬픔과 웃 음, 성숙과 신랄함이 공존하는 상처투성이 시네아스트의 저력. ( ) 58 매드니스 In the Mouth of Madness 감독 존 카펜터 촬영 게리 B 키페 음악 존 카렌터, 짐 랭 주 연 샘 닐, 줄리 카르멘, 위르겐 프로크노프 94년, 미국 영화 컬러, 1 시간 35분 57 떡갈나무 Le Chene 감독 루치안 핀틸리 촬영 도루 미트란 주연 마이야 모르겐스테 른, 도렐 비산, 마리안나 미후트 92년, 루마니아-프랑스 영화 컬러, 1 시간 45분 92년 깐느영화제 감독주간 영화는 어떻게 세상과 맞서 싸우는가? 과거에는 동구 사회주의, 현재에는 민족분쟁의 화약고인 발칸 반도에 속해 있는 루마니아가 낳은 거장 루치안 핀틸리는 그 자신의 생존 자체가 역사의 질곡이다. 한 편의 영화를 만들 때마다 논쟁을 일으키고 금지당하고 추방 당하는 전철을 되풀이해온 핀틸리는 서방세계를 유랑하는 망명 객의 몸으로 자신의 조국을 향한 사랑을 역설적인 비판으로 완 성해왔다. 그의 영화가 몰락한 사회주의 비판이라는 유행의 물 결과는 무관한 까닭은, 오히려 세상의 유행과 망각에는 아랑곳 없이 자신의 양심이 이끄는 대로 초지일관하게 지켜온 영혼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루치안 핀틸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청산 의 문제이며 역사의 기억상실증에 항거하는 것이다. 공산당의 관료주의를 비판하다가 무려 20여 년간이나 조국에서 추방되 었던 그의 전력은 상징과 암시, 은유와 알레고리가 없는 그의 세계를 열어젖히는 창문과도 같다. 그렇다고 그의 영화가 건조 한 리얼리즘에 사로잡힌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적 여백과 다이 렉트 시네마의 중간쯤에 위치한 그의 영화언어는 감정과 각성 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떡갈나무>는 한 편의 잔혹한 시편처 럼 곪아 터져가는 과거의 환부를 아름답고도 처연하게 수술한 다. 88년 차우체스쿠 독재 정권의 막바지. 정보국 대령이었던 아버지의 뼈가루를 네스카페 병에 넣고 돌아다니는 딸 넬라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기록한다. 협잡과 강간의 카니발적인 징후 속에서 그녀는 이상한 의사 미티카를 <매드니스>? 존 카펜터?? 지금쯤 어떤 이는 몇 년 전 한여름 밤에 보았던 기억도 가물가물한 공포물의 한 자락을 떠올리느라 애쓰고 있을 지도 모르 겠다. 그러나 우리는 한낱 B급 공포영화를 만드는 존 카펜터를 90년대 영화의 만신전에 올려놓게 되어 정말 자랑스럽다! 거기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다. 정말이지 존 카펜터는 영화 기술을 다루는 데 있어 마틴 스콜세지와 자웅을 겨루는 작가이다. 너무나 영화를 잘 알고 있는 그는 자신의 영화를 완전히 통제하고 능수능란하게 미장센을 구축하는 말하자면 가내수공업계 의 일인자요, 장인 중의 장인이다. 그러나 자신의 근간을 흔드는 상상력을 지닌 작가의 숙명이란 얼마나 슬픈가. 말하자면 헐리우드 안에서 무정부주 의적인 상상력을 꿈꾸는 존 카펜터는 팀 버튼과 함께 이단으로 내몰려 겉돌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녔다. 전복적인 기운을 내포하는 공포영화 장르 안에 서도 존 카펜터는 필드의 그 어떤 선수보다 아메리카니즘의 근원적인 폐부 를 찌르는 무정부주의자로 묵 시록적인 비전에 사로잡혀 있 다. 그에게 악이란 나치 동조 자들이나 원리적 기독교들과 같이 철저히 조직화되어 그들 이 정한 테제를 강요하는 무리 들이다. <LA 2013>의 라스트 에서 문명의 퇴보를 예고하는 위협에도 아랑곳 않고 전세계 의 전원을 차단해버리고는 아 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이는 커트 러셀의 모습이야말로 내추럴 본 아나키스트 존 카펜터 그 자신에 다름 아니다. 소설이 현실이 되는 <매드니스>의 묵 시록적인 결말은 그 끝간데 없 는 암울함으로 인해 진정 두려 움을 느끼게 만든다. 거두절미 하고, <매드니스>는 90년대에 가장 무서운 영화이다. ( ) 62 KINO December 1999
59 의식 La C er emonie 감독 끌로드 샤브롤 촬영 버나드 지처만 음악 마티유 샤브롤 주연 아자벨 위뻬르, 상드린 보네르, 재클린 비세트 95년, 프랑스 영 화 컬러, 1시간 52분 95년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 끌로드 샤브롤은 누벨 바그 세대 중에서 가장 먼저 영화를 시작했지만 아마 도 가장 늦게 발견된, 누벨 바그 최후의 거장일 것이다. 동료들 중 가장 철 저한 히치콕 숭배자였던 그는 언제나 히치콕적인 퀼트로 사회면 귀퉁이에 나 실릴 법한 치졸하고 졸렬한 살인사건들을 영화의 바탕에 걸어놓았다. 그 리고 그 위에 프리츠 랑의 터치로 지방 중산층의 감추어진 욕망과 가식적이 고 위선적인 표정들을 담아왔다. 베니스영화제가 경의를 표한 <의식>은 바 로 초기영화에서부터 일관되게 계속되어온 그리고 (99년 베를린영화제 경 쟁부문에 진출한) <거짓말의 빛깔>과 같은 이후의 영화들로 나아가는 샤브 롤의 문제의식의 현재진행형이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라이브 플래 쉬>의 원작자이기도 한) 루트 렌델의 소설 스톤 가의 심판 을 끌로드 샤 브롤 자신이 직접 각색한 <의식>은 (그가 <미남 세르주>로 데뷔한 이래 1년 에한편꼴로 공백기 없이 영화를 만들어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 한 의미에서 90년대 귀환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의 가냘픈 멜로디를 깐 저음의 배경 음악이나 으스스한 겨울 날씨, 그리고 무언가 감춘 듯한 하녀 소피(90년대 샤브롤의 페르소나인 상드린 보네르)의 표정 등에서 불안한 전조들은 쌓여간다. 그리고 마침내 너무나 엄숙하지만 경쾌한 리듬으로 부르주아 일가에 대한 장례식이 거행된다(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지오반 니 의 아리아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마치 의식을 치르듯이 근엄하게 죽음 을 맞이하는 부르주아 가족들!). 한 외진 시골의 거대한 부르주아 가정의 저택에 고용된 하녀가 그 지역 우체국에서 일하는 여자를 만나 주인과 그 의 가족들을 몰살시키는, 부뉴엘적인 유머로 가득 찬 잔혹극 <의식>을 통 해 샤브롤은 신경쇠약 직전에 몰린 유럽 부르주아 사회의 보수적인 허례와 그 위기의식을 전면에 드러낸다. 그 속에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의 문제는 인간성, 잔인함, 범죄와 처벌이라는 샤브롤적인 단어들을 통 해 재배치되어진다. 우체국에서 일하는 잔느와 하녀 소피에게 있어서 르 리에브르 가족은 그녀들이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의 표상이다. 그것이 그녀들 을 범죄로 이끌어가는 원인이다. 르리에브르 가의 사람들은 그들의 실제 존 재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표현하는 계급 때문에 처벌받는 것이다. (끌 로드 샤브롤) 샤브롤이야말로 한결같음으로 자신만의 스타일과 문제의식 의 깊이를 더해 나가는 우리 시대의 영화 장인이다. ( ) 60 짙은 선홍색 Profundo Carmesi 감독 아르뜨로 립스테인 촬영 길레르모 그라니로 음악 데이빗 맨스필드 주연 레지나 오로즈코, 다니엘 지메네즈 96년, 멕시코 영 화 컬러, 1시간 55분 96년 베니스영화제 각본상, 촬영상, 음악상 아이러니와 풍자, 냉소주의, 불경스러움, 우상파괴가 판을 치는 90년대에 누가 루이스 부뉴엘의 적자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은 경기장 안의 혼전이 되 었다. 그러나 이제 거의 승자가 가려진 것 같다. 아르뜨로 립스테인은 루이 스 부뉴엘이 멕시코에 망명을 떠나서 영화를 만들던 불우한 시절 그의 연 출 조수로 영화에 입문하였다. 그리고 마치 부뉴엘 스타일을 복원하는 것이 평생의 목표인 것처럼 영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아르뜨로 립스테인은 마침 내 여기 부뉴엘의 걸작에도 비견할 만한 영화를 만들었다. 미국 알라바카 주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뚱보 간호사와 라틴계 청년의 연쇄살인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와서 황량한 멕시코를 무대로 완전히 새로운 피카레스풍 영 화로 만들어낸다. 니콜라스는 가발로 대머리를 숨기고 샤를르 브와이에와 비슷한 용모를 이용하여 사기 결혼으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뚱보 간호사 카라를 만난다. 그녀는 니콜라스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완전히 반해서 그녀의 아이들마저 고아원에 맡기고 그를 따라 나선다. 그리고 질투에 불타는 그녀는 니콜라스가 사기 치는 여자마 다 살인을 저지른다. 이 기이한 사랑과 질투, 살인과 광기로 얼룩진 멜로 드라마는 위험한 유혹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마지막 살인 현장에서 니콜 라스가 유혹한 과부의 아이를 임신중절시킨다는 이유로 카라가 목욕탕을 피범벅으로 만들면서 벌이는 난자극은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다. 그 안에는 종교에 대한 풍자가 있으며,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복지제도가 갖는 허구가 통렬하게 고발당하고 있으며, 점점 더 날카롭게 대립하는 계급들 사이의 증 오와 의심이 무의식으로 파고들어간다. 립스테인은 아무도 정당화될 수 없 는 세계에서 고통과 쾌락을 동시에 본다. 그것을 세상을 지옥으로 받아들이 는 것이며, 또한 지옥이란 그저 신의 유머에 지나지 않는다는 초현실주의 자들의 태도를 재현하는 것이다. ( ) 61 JFK JFK 감독 올리버 스톤 촬영 로버트 리차드슨 음악 존 윌리엄스 KINO December 1999 63
1990~1999 주연 케빈 코스트너, 개리 올드맨, 시씨 스패섹, 토미 리 존스 91년, 미 국영화 컬러/흑백, 3시간 10분 92년 베를린영화제 감독상 논쟁이 없는 영화란 얼마나 심심한가. 비판적 작가주의와 선정적 소재주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온 올리버 스톤의 장점은 역시 그가 영 원한 60년대의 아이 라는 점이다. 체험적인 리얼리티와 죄의식을 결합한 베트남 3부작 (<플래툰>, <7월 4일생>, <하늘과 땅>)과 60년대의 청년문화 를 지배했던 록 음악과 마약의 여정(<도어즈>)을 통과한 그의 필모그래피 가 케네디 암살(그리고 그 후일담과도 같은 닉슨)에 도달한 것은 마침내 올것이온 순간이었다. <JFK>는 새로운 정치영화의 모델을 정립한 올리 버 스톤의 최고작이다. 여기서 케네디의 암살이 미국 현대사의 방향을 바꾸 었다고 믿는 이 열혈 논객은 논리적 추리와 이미지의 힘으로 강력한 설득력 을 확보한다. 1963년 11월 22일 달라스에서 케네디는 암살당했다. 이것이 정신병자 오스왈드의 천재적인 사격솜씨인가? 아니면 미국 내 보 수주의자들의 정교한 음모 이론인가? 뉴올리언스의 검사 짐 개리슨 의 마법의 탄환론 은 이전투구의 정글과 다를 바 없는 미 정치계의 내막에 가하는 한 방의 유머이다. 그러나 사생결단의 자세로 달려드 는 올리버 스톤 앞에서 웃을 틈은 없다. 놀라운 속도와 슬로우 모션, 다큐멘터리적 요소와 흑백 필름, 그 유명한 케네디 암살 현장을 기록 한 자푸루더 필름과 뉴스릴, 그리고 물증과 심증을 이어주는 정교한 허구의 지능적인 결합은 이 영화를 매우 정확한 정치 기소장으로 만 든다(아마도 공화당을 비롯한 보수파 진영은 이 영화의 너무도 그럴 듯한 추론에 간담이 서늘해졌을 것이다). 다큐멘터리처럼 만들어져 MTV처럼 편집된 <JFK>는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역사의 우연들을 콜라주하여 질서를 세우고 필연적 귀결에 도달한다. 문제는 영화의 이후이다. (60년대의 전문가 올리버 스톤의 확신을 경유한) 우리들 의 판단으로 군산복합체의 음모와 보수당의 결속이 케네디를 제거했 다는 가설은 진실하다. 그런데 왜 논쟁만 가열될 뿐 사건의 전모는 밝혀지 지 않는가. 어쩌면 <JFK>의 진정한 가치는 정치와 영화가 맞설 때 정치가 이긴다는 것, 그러나 정치는 허구로 이루어진 영화보다 더 유기적인 거짓으 로 이루어졌음을 폭로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JFK>는 큰 성 공을 거두었다. ( ) 62 퍼니 게임 Funny Games 감독 미카엘 하네케 촬영 위르겐 위르게스 주연 수잔느 로타르, 울리히 뮈헤, 프랭크 기어링, 아르노 프리쉬 97년, 오스트리아 영화 컬 러, 1시간 48분 97년 깐느영화제 경쟁부문 이것은 게임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 게임을 헤쳐나가라고 말한다. 주어 진 시간 안에 풀 수 없다면 게임의 규칙에 따라야 한다. 이 게임은 후방이 없다. 물론 마음대로 끝낼 수도 없다. 이 게임은 매우 악랄해서 기어이 끝장 을 봐야한다. 그렇다면 이길 수 있는 확률은? 미안하지만 거의 제로라 해 야 할 것이다. 미카엘 하네케의 <퍼니 게임>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인 게임이 다. 어느 날 휴가를 떠난 가족에게 두 명의 낯선 청년이 다가온다. 꽤 사려 깊고 온순하며 예의 바르게 보이는 그들은 12시간의 게임을 제안한다. 첫 번째 죽음. 정원의 개는 골프채로 정수리를 얻어맞고 죽는다. 두번째 죽음. 텔레비전은 아이의 피를 뒤집어쓴다(아이가 죽다니?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세번째 죽음. 남편은 아내 앞에서 살해당한다. 네번째 죽음. 12시 간이 끝나는 순간 아내는 강물로 떨어진다. 반전 따위는 없다. 그들은 새로 운 게임을 위해 자리를 옮겨갈 뿐이다. 이 게임은 아주 악랄하다. 그러나 이미 말했다시피, 도망갈 곳은 없다. 이 게임은 관객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부여된 것은 목격자의 역할이다. 우리는 원컨 원치 않컨 이 게임 의 공모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보는 자의 운명이다. 그야말로 이건 막다 른골목 이다. 미카엘 하네케는 이미지를 믿지 않는다. 그는 심지어 이미지 는 파시즘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의 즉자성, 그것의 집단성은 분명 파시즘의 그것과 아주 가깝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미디어와 공모하고 파시 즘의 유령은 실체가 되어 유럽을 배회한다(그러니까 <퍼니 게임>의 지정학 적 알레고리들, 그 안에서 상기되는 유럽의 역사). 이 이미지의 파시즘과 싸 워나가는 방식은 선연한 폭력을 불러와 그것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 뿐이 다. 그 순간 배우의 육체 위에 가해지는 폭력은 보는 이의 육체에 함께 작동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쾌락도 거절당한 마조히즘이다. 어떻게 폭력은 이미지 속으로 들어는가? <퍼니 게임>은 유럽이 하나가 되고자 하는 그 순 간 유럽 공동체에 보내진 끔찍한 경고이다. ( ) 63 프로스페로의 서재 Prospero's Book 감독 피터 그리너웨이 촬영 사샤 비어니 음악 마이클 니만 주 연 존 길거드, 마이클 클락, 마이클 블랑, 에를란드 요셉슨 91년, 네덜란 드-프랑스-이탈리아 영화 컬러, 2시간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한 92가지의 방법(<몰락>), 12장의 도면(<영국식 정 원 살인사건>), 10개의 코스와 7개의 방(<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 3명의 시씨는 차례로 3명의 남편을 죽이고(<차례로 익사시 키기>), 7개의 시대는 7개의 이야기(<건축가의 배>)로 나누어진다. 피터 그 64 KINO December 1999
리너웨이는 영화의 구조주의자이자 수학자이다. 1부터 100까지의 숫자를 찾는 것은 이 온전한 세상 안의 비의를 찾아내는 것이다(<차례로 익사시키 기>). 전적으로 표상적인 질서의 세계, 이 세계는 그 자체로 서로 다른 존 재론의 단자들로 공존되는 완전한 우주이다. 그런 점에서 피터 그리너웨이 는 라이프니츠적 우주론자이다. 또한 이 목록과 분류 시스템의 작가의 바 로크적 장식 과잉과 푸셍 에 대한 매혹은 그를 계속 해서 17세기(그러니까 르 네상스 이후와 바로크 사이 의 그 지점)로 소환시켰다. 피터 그리너웨이가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으로부터 < 프로스페로의 서재>, <베이 비 오브 메이콘>에 이르는 17세기 3부작 에 이르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셰익스 피어를 경유한 <프로스페로 의 서재>는 그리너웨이의 형식과 주제의 거의 백과전 서적 소집이라 할만하다. 24권의 책, 불가사의한 지식의 영역. <프로스페로 의 서재>는 지식의 상상적 테마 위에 놓여진다. 이것은 마치 보르헤스의 도 서관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그 안에서 피터 그리너웨이는 템페스트 위에 텍스트들을 겹쳐놓고 목소리를 지운다. 단지 프로스페로(존 길거드)의 목 소리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모든 목소리를 대신하는 것은 마이클 니만 에 의해 창조된 포스트 미니멀리즘의 음의 세계이다. 니만의 음악은 매우 이상한 복화술이다. 또는 사포르타의 안무는 이 복화술의 제스처와 같은 것 이다. 피터 그리너웨이는 그 한가운데 HDTV와 컴퓨터 테크놀로지를 끌어 당겼다. 17세기 템페스트 가 쓰여진 그 당시, 구텐베르크의 혁명처럼 이 것을 거의 등가의 테크놀로지 혁명의 예라 할 수 있을까? <프로스페로의 서 재>는 프레임의 의미를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는가의 실험이며 그 자체로 이미지의 과잉이다. 과잉이야말로 얼마나 우리 시대적인가? ( ) 64 귀주 이야기 菊 官 The Story of Qiu Ju 감독 장 이모우 촬영 취 샤오닝, 유 샤오쿤, 루 홍이 음악 쟈오 지핑 주연 공리, 류 페이퀴, 양 리우춘 92년, 중국-홍콩영화 컬러, 1시간 40분 92년 베니스영화제 금사자상, 여우주연상 80년대의 발견은 확실히 중국의 제5세대 영 화였다. 그러나 90년대로 넘어오면서 과도한 형식미와 도식화된 알레고리로 인해 그들의 영화는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자발적으로 끌어안으면서 영화 속에 자신들의 문화를 엑 조티즘의 감정으로 채워넣었다는 내부의 비 판과 바깥의 의심 어린 시선 속에서 자기 모 순에 빠져들었다. 그들 중 가장 먼저(그리고 유일하게) 이러한 매너리즘을 극복하고 90년 대에 진입한 것은 장 이모우였다. <귀주 이야 기>는 자신의 전작들의 틀을 깨고 반성과 성 찰을 통해 다시 시작하는 영화다. 자신의 트 레이드 마크처럼 되어버린 꽉 짜여진 닫힌 미 장센과 붉은 색채의 바로크적 유미주의를 버 리고 다큐멘터리적인 리얼리즘의 미학으로 재무장한 장 이모우. 그는 가부 장적 봉건제에서의 여인 수난사와 문화혁명의 상흔에서 벗어나 지금 이곳 에서 살아가고 있는 민중들의 현실 속에서 함께 싸 우려는 제스처를 보여준다. 또한 장 이모우는 소박 하고 민중적인 웃음 속에서 관료화하고 경직화된 사회주의 혁명의 실상을 고발하고 자신의 얼터 에 고인 공리를 (이전 영화들에서와는 반대로) 시골 촌부로 등장시켜 자신의 영화에 대한 스스로의 반 성을 담아냄으로써 사회와 자신에 대한 이중의 비 판을 동시에 수행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귀주 이 야기> 이후 그는 첸 카이거의 <패왕별희>와는 다른 전략으로 중국 근대사를 정리한 블랙코미디 <인생 >과 노스탤지어로 가득 찬 장르 영화 <상하이 마피 아>를 발표하면서 다시 주저하듯 후퇴하였다. 용감 하게 포스트 천안문 세대들의 일상의 최전선으로 들어온 <유화호호설>은 <귀주 이야기>에서 더 나아 간 듯 보였지만 중국 정부에 의해 완전히 봉인되었 다. 그리고 99년 그는 다시 7년 전 베니스영화제에서 <귀주 이야기>로 얻었 던 영광을 <책상서랍 속의 동화>로 거머쥐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검열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장 이모우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고백으로 들렸다. 그러니까 5세대와 6세대를 잇는 리얼 리즘의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90년대 중국영화의 가장 중요한 영화 중 하 나일 <귀주 이야기>는 장 이모우의 영화 중에서도 여전히 주저 없는 최고 걸작이다. ( ) 65 카지노 Casino 감독 마틴 스콜세지 촬영 로버트 리차드슨 선곡 마틴 스콜세지 (바흐의 마태수난곡, 롤링 스톤즈 외 55곡) 주연 로버트 드 니로, 조 페시, 샤론 스톤, 제임스 우즈 95년, 미국 영화 컬러, 2시간 58분 마틴 스콜세지는 점점 비교할 수 없는 경지로 나아간다. 아마도 지금 이 순 간 그와 겨룰 수 있는 자는 스콜세지 그 자신뿐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카 지노>는 매우 억울한 영화이다. 다른 작가의 영화였다면 보다 놀라운 평가 를 받았을 것이 틀림없지만, 이 영화는 탄생의 순간부터 스콜세지의 걸작들 과 겨루게 되었기 때문이다. <카지노>의 오프닝 장면은 스스로의 운명을 풍 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섬광과 불기둥 속에서 공 중으로 비상했다가 천천히 떨어지는 스콜세지의 페 르소나 로버트 드니로. 그것은 왠지 자신의 궤도에 서 기록 경쟁을 요구받는 스콜세지의 강박관념처럼 찬란하면서 또 쓸쓸해 보인다. <카지노>는 스콜세지 영화 중에서 가장 현란하다. 거의 모든 영화적 기법 이 동원되었으며 원형적인 캐릭터들과 복잡한 내러 티브 구조, 스콜세지적 종교/윤리의 테마, 그 속에 서 사막의 신기루와도 같은 라스베가스는 자본주의 의 바빌론처럼 묘사된다. 스콜세지는 동전과 지폐 들이 쌓여서 순환되는 과정을 거의 공장의 기록영 화처럼 보여준다. 이것은 브레송의 마지막 근심이 었던 <돈>이 스펙터클로 화답받는 순간이며, 무엇보 다 <카지노>는 황금을 거둬들이는 헐리우드 영화의 KINO December 1999 65
1990~1999 위험천만한 매혹에 대한 은 유이다(헐리우드와 라스베 가스는 똑같이 사막에 세워 진 환타지가 아닌가). 왕국 은 붕괴를 전제로 하기 때문 에 찬란하다. 스콜세지의 끊 임없는 자기파멸의 페르소 나들은 속죄하지 못하고 세 상의 진창 속으로 걸어들어 간다. 도박의 명수인 마권업 자샘 에이스 (로버트 드니 로)와 그의 얼터 에고 니키 (조 페시), 그 사이에 잘못 끼어든 진저(샤론 스톤). 그 들은 냉정하고 무자비한 신 (또는 자본주의)의 계율 아 래 패배라는 대가를 치르고 윤리적 자아를 돌아본다. 언제나 그렇듯 스콜세지의 파멸은 내부로부터 오는 것이다. <카지노>는 탐 욕과 자만으로 손에 쥔 지상낙원을 잃어버리는 구약성서적 이야기이다. 그 와 동시에 탐욕을 엔진 삼아 돌아가는 라스베가스란 영토 위에 도박과 사 기, 도둑질로 점철된 마피아의 메커니즘과 미국의 역사를 겹쳐놓은 이야기 이다. 시스템 안에서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어가는 인간의 비극적 숙명을 이토록 황홀하게 그리는 감독은 스콜세지 말고는 달리 없을 것이다. ( ) 훔치고, 그걸로 형사를 위협하여 차를 몰고 그 마을까지 간다. 그리고 누나 를 만나서 그들은 아주 짧지만 기이한 행복을 함께 맛본다. 그것은 이제는 사라진 세계의 복원이다. 자끄 드와이용은 십대 청소년들의 선택을 통하여 부서져가는 가정에 대한 그들의 간절한 복원의 소망 의지를 담는다. 부서지 기 쉬운 유리 그릇처럼 섬세하고 조용하게 전개되지만, 동시에 그 안에 담 겨있는 상처는 더할 나위 없이 우울하고 예리하다. 90년대의 <400번의 구 타>라는 평가를 받은 작품, 또는 세상을 떠난 그의 스승 프랑소와 트뤼포에 게 바치는 오마쥬. ( ) 67 네이키드 Naked 감독 마이크 리 촬영 딕 포프 음악 앤드류 딕슨 주연 데이 빗 듈리스, 레슬리 샤프, 캐트린 캐틀리지, 그렉 커트웰 93년, 영국 영화 컬러, 2시간 11분 깐느영화제 감독상, 남우주연상 수상 66 꼬마 범죄자 Le Petit Criminel 감독 자끄 드와이용 촬영 윌리엄 뤼브찬스키 음악 필립 살드 주연 제랄 로마생, 리샤르 앙코니나, 클로디드 쿠로 90년, 프랑스영 화 컬러, 1시간 41분 91년 베를린영화제 국제비평가상 자끄 드와이용에게는 일상생활의 기이함을 바라보는 직관과 그것을 이끌어 내는 신비주의에 대한 성찰에서 가져온 투명함이 있다. 처음 자끄 드와이용 은 프랑소와 트뤼포의 절대적인 지지를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하였으며, 그를 부르는 예명은 작은 트뤼포였다. 그러나 자끄 드와이용은 스스로의 힘으로 성숙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차츰 브레송에 가까워지면서 결코 장 르 노와르에 대한 예찬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지속적으로 가정에 대한 귀환을 자기의 주제로 삼았다. 그의 주인공들은 어떤 방식으로건 마지막 순간 원하 는 곳에 가 닿지만 그러나 모 든 것은 그들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확인한 다. 11살 소년 마르끄는 술 취한 주정뱅이 어머니와 함 께 살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죽은 줄 알았던 그의 15살 누나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게다가 그녀는 마 을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 에 있다. 마르끄는 이상한 방 법을 선택한다. 그는 권총을 마이크 리는 오랫동안 영국 블랙 코미디의 계승자로 이해되어 왔다. 그는 첫번째 영화 <우울한 순간들> 이후 거의 20년 동안 텔레비전과 연극무대에 서 활동하였으며 88년 <커다란 희망>으로 영화에 복귀하기까지 15편의 텔 레비전 드라마를 만들었다. 그러면서 그의 드라마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진 영을 이루었고 전형이 되었으며, 90년대의 후예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 은 (켄 로치와) 마이크 리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하였다. 그 순간 <네이키드> 는 매우 예외적으로 도착하였다. 맨체스터의 실업자 조니는 한 여자를 강간 하고 그곳을 떠나 런던으로 향한다. 그는 옛 애인 루이스를 찾아간다. 그러 나 집에 루이스는 없고 동거인 소피만이 있다. 한편 이 도시의 다른 곳, 여 피 제레미는 마사지걸에게 데이트를 청한다. 그 는 그녀에게 여자들이 강간을 즐기는지 묻는다. 루이스는 집으로 돌아온다. 남자는 여자를 불안 하게 만들고, 조니와 소피는 섹스를 나눈다. 조 니는 런던의 밤거리를 배회한다. 조니는 여자들 의 집에 들어가 그녀들을 모욕하고, 그 밤의 끝 에서 뒷골목 불량배들에게 몹쓸 정도로 얻어맞 는다. 루이스와 소피의 집에 침입한 제레미는 소 피를 강간하고 그녀들을 위협하고, 그곳에서 잠 이 든다. 조니는 루이스를 찾아온다. 루이스는 그에게 함께 고향으로 떠나자고 말한다. 이야기 는 거의 해피엔딩에 이를 것 같지만 결코 그러지 66 KINO December 1999
못한다. 조니는 홀로 그곳을 떠난다. 강간의 이미지로 얼룩진 이것은 한판 자해극과도 같은 영화이다. 그들은 그들을 둘러싼 세계를, 그리고 그들 스 스로를 증오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여기에 남는 것은 온통 자기모멸의 감각 뿐이다. 흉터로 가득 찬 영화, 분노의 독으로 부식되어 가는 영화, 결코 다 하지 않는 무시무시한 쓰라림에 가득 찬 영화, 잔인함과 불안으로 뒤범벅된 영화. 여기, 런던은 최후의 밤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다. <네이키드>는 결코 그 어떤 것으로도 위장하지 않은 사변의 영화이다. 부르주아는 아비규환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그 속에서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몸으로 찾아온 예언자 는 스스로를 범하듯 누이들을 강간한다. 이것은 그 얼마나 끔찍하고 비극적 인 세기말 계급투쟁의 이야기인가? ( ) 68 줄리앙; 동키-보이 Julien; Donkey-boy 를 임신했고, 형은 맨날 레슬링 연습을 하고, 아버지는 포르노에 심취하여 화장을 하고(뉴 저먼 시네마의 전설 베르너 헤어조그의 괴연), 귀가 어두운 할머니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맹인 학교에서 아이들을 보살피는 줄리 앙은 누이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울고 음담패설을 지껄인다. 피겨 스케이트 를 잘 타는 눈 먼 소녀에게 애정을 느낀 줄리앙은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신 하여 십자가에 매달렸다는 목사의 설교에 눈물을 펑펑 흘린다. 그리고 누 이가 사산한 아기의 시체를 안고 깊은 잠에 빠진다. 그는 죽은 아기의 아버 지였던 것이다. 하모니 코린은 감정을 다치기 쉬운 하이퍼 리얼리즘 속에서 이상한 슬픔을 건져낸다. 고통과 희열을 동시에 주는 악마의 속삭임 <줄리 앙; 동키-보이>는 매우 위험한 재능이지만, 이미 다음 세기로 넘어간 영화 이다. ( ) 69 공각기동대 空 殼 機 Ghost in the Shell 감독 하모니 코린 촬영 안소니 도드 맨틀 현장 음악 푸치니, 조 지 부크너 외 주연 이웬 브렘너, 클로에 세비니, 베르너 헤어조그, 이반 뉴만 99년, 미국 영화 컬러, 1시간 34분 부르주아 낭만주의와 데카당스로 포위된 영화로부터 액션을 구하라. 95 년 코페하겐에서 시작된 도그마는 악명 높은 십계명 대신 최근에는 몇 개 의 금지조항을 더 강조하고 있다. 절대 안 되는 것 ; 프로덕션 디자인, 사운 드트랙 스코어, 옵티칼 작업, 장르적인 스토리라인. 그러니까 도그마를 미 국에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거의 자멸극이나 다름없다. <키즈>의 사악한 시 나리오와 데뷔작 <검모>의 무차별한 공격으로 퍽큐 시네마의 본떼 를보 여준 하모니 코린이 도그마를 수용한 첫번째 미국 감독이 된 것은 웰 메이 드 의 이데올로기를 박살내겠다는 신호탄이다. 게다가 하모니 코린은 도 그마의 원조인 라스 폰 트리에와 토마스 빈터베르그보다 더 나아갔다. 막 가파 라는 말로도 그 강도를 설명할 수 없는 <줄리앙; 동키-보이>는 거칠다 못해 포터블 DV 카메라의 주사선이 그대로 살아 있는 영화이다. 그런데도 매우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마치 드가의 그림을 보는 듯한 뭉개진 윤곽과 입자들의 텍스처. 그 이미지들은 손으로 문지르면 번져버릴 것만 같다. 하모니 코린은 여기서 영화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내적인 존 재 이유가 없는 스타일이란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그는 형상을 망가트림 으로써 오히려 그 안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대상과 카메라간의 처음 보는 듯한 밀착감. 하모니 코린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돌아이 줄리앙을 오 히려 가슴으로 품게 만든다. 그는 대담하게도 겨울 들판에서 줄리앙이 한 소년을 때려 죽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비밀을 아는 자는 황금색 보철 기를 낀 줄리앙뿐이다. 기이한 그의 가족들, 누이는 아버지를 모르는 아기 감독 오시이 마모루 촬영 시라이 히사오 음악 카와이 겐지 목소리 연기 타나카 아츠코, 야마데라 코이치, 겐다 테쇼, 카유미 이에마 사, 오키 타미오 95년, 일본-영국 영화 컬러, 1시간 23분 <제5원소>에서 밀라 요보비치가 양팔을 벌리고 건물에서 다이빙하는 장면 을 보았을 때 이미 뤽 베송이 <공각기동대>에 중독된 정도가 심각했음을 눈 치챘어야 했다. 자기 영화의 상상력은 <공각기동대>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고백하며 자신의 베스트 컬렉션으로 뽑는 데 주저하지 않은 미장-카툰의 악동 얀 쿠넹은 또 어떠한가! 그래도 이들은 캐릭터, 비주얼, 컨셉트를 두 루 필사하듯 가지고 온 <매트릭스>의 노골적인 워쇼스키 형제에 비한다면 양호한 편이다. 세계가 초고속 통신망으로 연결된 서기 2029년, 네트워크 와 사이버네틱스 공학을 이용한 신종범죄가 늘어가자 정부는 이것에 대처 하기 위해 초법적인 기구 공각기동대 를 운영한다. 어느 날 타인의 정신 속으로 해킹해 들어가 기억을 위조하고 조종하는 인형사가 나타나고 공각 기동대의 쿠사나키가 수사에 나선다. 중추신경계와 광통신망으로 이루어 진 정보 네트워크의 직접적인 접속에서부터 데이터 프로그램으로서의 영 혼, 정신의 물질성, 해킹을 통해 조작된 기억, 그 속에서 뒤엉켜버린 진실 과 허구를 가르는 기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 등등에 이르 기까지, 시로 마사무네의 컬트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오시이 마모루의 포스 트 사이버 펑크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는 (감히 말하건대!) <블레이드 러너> 이후 사이버 펑크 영화 패러다임의 질적 전환을 이루면서 실사영화 의 운영체계 위에 게임 서사양식을 다운로드시켰다. 90년대 후반 <다크시 티>, <오픈 유어 아이즈>, <너바나>, <엑시스텐즈>, <매트릭스>, <13층> 등 게임 서사양식이라는 마이크로칩을 부착한 영화의 새로운 진화종은 주저 없이 <공각기동대>의 코드명을 되뇌인다. 네트는 광대해 ( ) KINO December 1999 67
1990~1999 70 로망스 Romance 감독 까뜨린느 브레일라 촬영 요 르고스 아르바니티스 음악 DJ 발렌 틴, 라파엘 티다스 주연 캐롤린 듀세 이, 사가모르 스테베닌, 프랑소와 베를랑 98년, 프랑스 영화 컬러, 1시간 35분 먼저 까이에 뒤 시네마 의 표현은 아주 적절하다. <로망스>는 고양이를 고양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만드는 영화이 다. 우하하. 고정관념을 뒤집으려면 이쯤은 되어야 명함이라도 내밀지. 아 주 드물게 뻔뻔한 영화 <로망스>는 세기말의 화두로 부상한 포르노그래피 논쟁을 단번에 남성 감독들의 가부장적인 탁상공론쯤으로 몰아붙인다. 인 정사정 보지 않는 하드 코어, 그러나 이유가 있고 고찰이 있으며 판단이 있 는 미니멀한 미장센은 오히려 숭고미의 절정이다. 육체관계를 거부하는 약 혼자 곁에서 다른 남자의 성기를 탐하고 강간을 유도하고 사도마조히즘의 교습을 받는 한 여교사의 섹슈얼한 오딧세이. 이 주인공을 이끄는 호메로스 는 그녀의 육체이며, 여행의 규칙은 사회가 정해준 금기의 문턱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감독 까뜨린느 브레일라는 프르노그래피의 전제와도 같은 구조를 치밀한 논리로 뒤집는다. 섹스에 관한 환타지? 그것은 굳어진 남성신화와 의심하는 여성신체의 어긋남에 의해 체위의 계급학으로 바뀐 다. 여성의 육체에 관한 패티쉬? 그것은 젠더의 고정관념을 공격하는 페미 니즘 앞에서 욕망의 사회학으로 바뀐다. <로망스>는 전적으로 (남자에게) 몸을 대주고 (산부인과에서) 다리를 벌려야 하는 여성의 자기모멸과 그로 부터 파생되는 반란의 상상력으로 이끌려진다. 그 중에서도 산부인과 미장 센의 도발은 충격적이다. 수많은 레지던트들에게 차례로 몸을 맡긴 채 출 산의 고통을 겪는 여주인공의 일그러진 얼굴을 따라가던 카메라가 그녀의 다리 뒤편으로 돌아서면 수술중인 의사 대신 줄을 서서 위안부를 찾는 중 세 복장의 군인들로 가득하다. 스스로를 가미가제 시네아스트라고 부르 는 여성감독 까뜨린느 브레일라는 아직도 중세봉건제에 머물고 있는 남성 들의 통념을 과격하게 부순다. 그것은 부정의 부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세상의 생각과 사랑에 대한 생각은 여지없이 수정당한다. 지극히 섹슈얼한 성정치학의 텍스트. <로망스>는 감정과 모럴을 불러일으키며 사랑의 순수 함과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관객들의 새로운 경험을 요구한다. 여성 의 섹슈얼리티 탐험에 관한 가장 지적이며 도전적인 영화. ( ) 71 셀레브레이션 Festen 감독 토마스 빈터베르그 촬영 안토니 로드 맨틀 주연 울리히 톰 슨, 헤닝 모리첸, 토마스 보 라센, 파프리카 스틴 98년, 덴마크 영화 컬 러, 1시간 45분 98년 깐느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도그마는 영화의 순결 맹세서이다. 도그마는 세기말 영화의 마지막 선언이 며 부정으로부터 거듭나는 새로운 미학이며 타협의 여지없는 윤리학이다. 이 마틴 루터의 후예들은 스스로의 팔다리를 묶고자 한다. 그래서 그 처음 으로 돌아간 도그마는 영화 1백년 이후 테크놀로지-영화와의 싸움이 되었 다. 그럼으로써 도그마는 이 방만한 영화, 파편화되어 가는 이미지, 장식과 환상 뒤로 숨은 영화, 부르주아 예술 개념의 그 기만적인 절대성 을 폐기처분시킨다(여전히 논의 는 분분하다. 토마스 빈터베르그 자신의 말처럼 이것은 그저 고도 의 마케팅 전략인지도 모른다. 그 러나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 다. 여기에 쏟아지는 찬반양론의 논쟁은 거꾸로 이 선언의 파급력 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선언의 첫번째 답변은 98년에 도착하였 다. 도그마 95의 첫번째 영화, 그 리고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두번째 영화(그러나 공동감독이었던 첫번째 영 화 <영웅들>에 이은 진정한 데뷔작) <셀레브레이션>은 그해 깐느에 마치 폭 탄처럼 투척되었다. 순결의 맹세의 첫번째 작품은 부정과 위반과 폭로와 추 방의 이야기이다. 아버지의 생일 잔치, 도시에서 아들 딸들이 도착하고 부 르주아의 사려 깊은 식탁은 친지들과 친구들에 둘러싸여졌다. 죽은 누이의 유령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다. 유령과 마주하며, 아들은 근친상간과 아동 학대의 그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거의 원죄에 가까운 기억을 폭로한다. 고 전적 기제의 작동. 부르주아의 저택은 그리스 비극의 무대로 치환된다. 혹 은 그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것은 스트린드베리의 실내극이며 부뉴엘 의 그림자이다(또는 베르히만의 <화니와 알렉산더>에 대한 사려깊은 반 전). 그 순간 선언은 온전한 실체를 얻었다. 순수의 서약 안에서, 고전주의 를 끌고 들어와 사악한 아버지, 강간과 살인과 폭력의 아버지는 추방되었 다. 이윽고 긴 밤이 지나고 태양이 솟아 오르는 순간 우리는 이제 이렇게 말 할 것이다. 아버지, 우리가 먹을 수 있도록 떠나주세요. ( ) 72 믿어주세요 Trust 감독 할 하틀리 촬영 마이클 스필러 음악 필 리드 주연 에 드리안 세리, 마틴 도노반 91년, 미국 영화 컬러, 1시간 46분 할 하틀리는 90년대의 존 카사베츠이다. 그는 자기 친구들을 이끌고 소규 모 게릴라처럼 빠르게 이동하면서, 인디 영화의 신념을 버리지 않고 자기가 68 KINO December 1999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든다. 그래서 그의 동세대들이 모두 희망을 잃고 냉 소주의에 빠져들어도 할 하틀리는 해피엔딩을 진심으로 믿는다. 16살 소 녀 마리아는 고등학교 미식축구부 쿼터 백 소년에게 순결을 잃고 임신한 다. 그리고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쿼터 백 소년은 그녀를 높은 곳에 서 밀어 떨어뜨린다. 소녀 마리아의 아버지는 심장발작으로 죽는다. 그리 고 그녀는 학교를 중퇴하고 거리로 나와 여행을 시작한다. 지식인 청년 매 튜는 자본주의에 불타는 적개심을 안고 수류탄을 들고 적의 심장부를 날려 보낼 결심을 한다. 그리고 소녀 마리아와 청년 매튜가 길에서 만난다. 보이 미츠 걸! 하지만 그들은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할 하틀리는 즉흥연 출에 가까운 방식으로 소년 소녀의 연애풍속도를 그리는 것 같지만, 여기 에는 90년대의 좌파들의 고뇌가 고스란히 담긴다. 여기에는 실패한 혁명과 조롱의 대상이 된 전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혁의 의지를 잃지 않는 것, 그 안에서 다시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를 물어보는 신념의 회복, 그리고 다시 전선을 가다듬는 자신의 동지들에게 보내는 연대에의 희망의 메시지가 있 다. 그런 의미에서 할 하틀리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반대말이다. (아직 승부 는 끝나지 않았고, 그들의 대결은 다음 밀레니엄으로 이어질 것이다. 또는 이것은 세대를 전승하여 영원히 계속될 전투이다!) 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 결코 걸작을 만드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영화적 믿음은 오히 려 이 영화의 존재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게 만든다. 이 영화의 마지막 순간. 소녀 마리아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서 매튜에게 트러스트! 라고 말하는 순간은 의심할 바 없이 90년대의 가장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명장면이다. 또는 90년대 노동계급을 위한 더없이 맑고 투명한 발라드. ( ) 73 틸라이 Tilai 감독 이드리사 우에드라오고 촬영 장 몽시니, 삐에르 로랑 쉐니웨 주연 라스마네 우에드라오고, 이나 시쎄 90년, 부르키나 파소-스위 스-프랑스 영화 컬러, 1시간 21분 90년 깐느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이드리사 우에드라오고는 서구의 영화 비평가들이 자신을 아프리카 영화 감독이라고 부를 때마다 나는 영화를 만드는 아프리카 사람이다 이라고 정정해준다. 자신의 영화를 오리엔탈리즘과 엑조티즘의 틀 안에 가두려는 태도에 맞서 우에드라오고는 어떻게 영화를 만들 것인가 라는 서구 중심 주의의 수사학을 누가 영화를 만드는가 라는 정체성의 문제로 바꾸어 버 린다. 전사의 이미지를 간직한 이 시네아스트는 서구의 비평가들을 무시하 고, (지식인의 계몽주의와 과도한 미학의 함정에 빠진) 우스만 셈벤이나 술 레이마네 시세 같은 선배 감독들을 공격하며, 방약무인할 정도로 자신의 영 화를 변호하며 싸워나간다.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있다가 돌아온 사가는 연 인인 노그마가 자신의 아버지와 결혼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직면한다. 사 가와 노그마의 관계는 곧 마을 사람들에게 발각되고 주민들은 사가의 형에 게 동생을 처단하도록 종용한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형은 동생을 놓아주 고, 두 연인은 다른 마을에서 만남을 계속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환 소식 을 접한 사가는 무작정 마을로 돌아오고, 이에 배신감을 느낀 형은 이제 동 생을 죽이려 한다. 파리에서 크리스토프왕의 비극 을 무대에 올리기도 한 경력이 말해주듯 우에드라오고의 <틸라이>는 라신느와 꼬르네이유적인 근 친상간의 모티브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버전과도 같은 작품이다. 무엇보다 이드리사 우에드라오고가 놀라운 것은 그가 영화의 테 크닉과 이야기에 정통해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때로는 필 름 느와르이거나 웨스턴, 또는 스릴러이거나 그 결합처럼 보인다. 우에드 라오고는 고전적인 헐리우드 영화의 시스템을 서부 아프리카 낯선 오지의 부르키나 파소에서 탈 중심화시켜 다시 그려나간다. <틸라이>의 예정된 운 명에 사로잡힌 고전적 영웅들 또는 근대적 신경증 환자 같은 인물들은 자 신의 숙명을 감내하지만 여기서 고통은 웃음으로 치환되고, 비장성이나 서 사적인 요소는 제거된다. 오로지 적확하고 자연스러운 화면을 통해 심리적 인 미니멀리즘만이 드러날 따름이다. 아프리카에서 시간이라는 것은 공간 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영화 속의 공간은 각각의 화면 안에 담긴 시 간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우에드라오고는 부동의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일종의 강요된 위반 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드리사 우에드라오고는 <틸라 이>에서 마치 장 르노와르가 <게임의 법칙>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회와 인 생을 영화 속에 온전하게 융합해 하나의 우주를 창조해낸다. ( ) 74 첩혈가두 街 Bullet in the Head 감독 오우삼 촬영 황영항 음악 황뢰 주연 양조위, 장학우, 이자웅 90년, 홍콩 영화 컬러, 2시간 42분 80년대의 오우삼이 중흥기 홍콩 느와르의 진두에 서 있었다면 90년대 오 우삼은 홍콩영화의 패러다임을 넘어서서 세계영화의 계보 위에 액션장르 영화의 시네아스트 반열에 올라선다. 67년으로 거슬러올라가 시작하는 홍 콩 느와르의 역사 서사극 <첩혈가두>는 홍콩에서의 흥행에는 참패했지만, 미국 제작자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헐리우드 진출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서 바로 오우삼의 필모그래피에서 그 확장의 순간에 선 영화다(물론 최고 작은 80년대를 마감하는 오우삼 미학의 정점에 선 <첩혈쌍웅>임이 분명하 지만). 오우삼 자신의 청년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97년 반환을 향해 소 KINO December 1999 69
1990~1999 잔해가는 홍콩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찬 <첩혈가두>는 문화혁명과 베트남전 그리고 홍콩의 좌익시위를 배경에 드리우면서 홍콩 느와르의 신화적 세계 (또한 자신의 영웅적 세계관)에 역사와 현실의 리얼리즘을 부여하였다. 홍 콩 뒷골목의 세 친구는 시비 끝에 살인을 저지르고 베트남으로 도망친다. 그들은 전쟁을 이용해 큰 돈을 벌지만 한 명은 배신하고 또 한 명은 미치고 또 마지막 한 명은 복 수한다. 춤을 추는 듯 한 총격전 장면은 화 면 전체를 피로 적시 고, 복수와 배반의 슬 로우 모션은 유미주의 적인 폭력의 순간들을 한없이 연장시키며, 사나이들의 우정과 의 리는 장엄한 죽음 위 에서 진혼곡처럼 낮게 깔린다. 고대 무인들 의 영웅신화를 느와르 의 장르 위에서 재현 하고 있는 탐미적 이 상주의자 오우삼의 <첩혈가두>는 포스트 아메리칸 시네마에 허무주의적 미 학을 전파하였으며(그 중에서도 오우삼에게 경배를 를 외치는 타란티노는 그에게서 영화의 모든 것을 배웠노라고 고백한다) 헐리우드에서 발표하는 그의 작품들 속에서 원형처럼 계속 변주되고 있다. ( ) 75 어머니 Mat 들인다. 그러나 이것은 풍자나 패러디가 아니다. 오히려 이제 정말로 러시 아의 어머니 에 대해서 돌아보자고 말한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살을 에는 듯한 추운 겨울날 차가운 물 웅덩이에 쳐박혀 있는 아들의 모습으로 시작한 다. 진흙덩이 속에서 그는 분노와 결연한 의지로 눈을 불을 일으킨다. 거기 에는 가난의 고통과 배고픔의 공포가 맺혀 있다. 글렙 판피로프는 정말로 막심 고리끼의 소설을 충실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시대를 가로 질러 다시 한 번 진정성을 회복한다. 여기에는 여전히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은 러시아 민중들의 가난과 배고픔에 대한 싸 움의 의지가 담긴다. 모든 아들들은 다시 한 번 좋은 세상을 맞이하기 위하여 일어설 것이며, 모든 어머니들은 여전히 그의 아들들을 위해 깃 발을 세울 것이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며, 믿 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푸도푸킨의 <어머 니>가 봉건제 러시아에 보내는 분노라면, 판피 로프의 <어머니>는 자본주의 러시아에 보내는 슬픔이다. 슬프다고? 그렇다. 러시아에는 지금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역설적으로 판피로프의 <어머니>는 90년대 전 지구 노동자 들의 어머니에게 바치는 영화가 되었다. ( ) 76 소무 Xiao Wo 감독 글렙 판피로프 촬영 미하일 아그라노비치, 알렉산드르 일코비 스키 음악 바딤 비베르간 주연 인나 츄리코바, 빅토르 라코프 90년, 러시아 영화 컬러, 2시간 45분 (편집판 2시간 2분) 90년 깐느 영화제 경쟁부문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 는 볼셰비키 혁명을 위한 소설처럼 읽혔다. 그래서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인민들도 무성 영화로 만들어진 푸세보르도 푸도푸 킨의 <어머니>를 보고 감명을 받아 볼셰비키들의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 아 독재를 지지하였다. 푸도프킨은 벽돌쌓기의 몽타쥬를 정서의 차원 으로 끌어올렸으며, 더 나아가 영화는 혁명의 메시지가 되었다. 그리 고 65년이 흘렀다. 지구 상의 최초의 노동자 국 가 소비에트는 관료제로 변신하였으며, 천국은 괴물이 되었다. 모든 것 은 실패한 것일까? 글렙 판피로프는 페레스트로 이카 시대에서 다시 한 번 막심 고리끼를 끌어 감독 지아 장커 촬영 유 릭와이 주연 왕 홍 웨이, 주 바이 타오 97년, 중국 영화 컬러, 1시간 48분 98년 베를린영화제 포룸 아마도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오해되고 있는 영화는 90년대의 중국영화일 것이다. 텍스트주의를 적용하면 사회주의 국가라는 점을 배제하게 되고, 작 가주의를 적용하면 강제된 변화를 이해할 수 없고, 형식주의를 적용하면 매 너리즘의 미학으로 간주하게 된다. 파죽지세와도 같았던 제5세대의 등장 이후 중국 본토 영화들이 현실의 공간인 북경을 떠나 변방으로 돌면서 알 레고리에 빠져든 것도 이런 혐의를 가중시켰다. 그러나 지아 장커는 그 어 떤 잣대도 단숨에 뛰어넘은 중국영화의 희망이다. 비로소 비공식 지하영 화 로서의 정체성을 극명하게 드러낸 그의 데뷔작 <소무>는 그 동안 중국영 화에서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바로 지금 이곳의 중국 70 KINO December 1999
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모택동의 초상화 앞에서 남의 돈을 훔치는 소매치기 샤오우(소무)는 지금까지 그 어떤 중국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주인공이다. 그는 도덕적 딜레마를 가지고 있으나 배반당한 우정에 분개하고, 돈맛을 알게 된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히려 고립된다. 정교한 아 이러니의 배치 속에서 지아 장커는 무엇보다 스스로의 동력으로 흘러가는 도시의 숨결을 생생하게 포착한다.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정부의 가두방 송과 서로 다른 기호로 부유하는 소음들은 이 도시를 채우는 히스테리가 정 책의 산물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자본주의의 가속도와 그것을 따라잡지 못 하는 샤오우의 현기증. 그것은 마지막 순간 거리 한가운데서 한쪽 팔을 오 토바이에 수갑으로 묶인 채 주저앉은 샤오우의 어깨 위에 실존의 무게를 얹 는다. 현실의 조각들에서 시작하여 존재에 대한 공허와 소멸에 대한 질문으 로 확장되어가는 <소무>는 지아 장커의 사유의 깊이를 증명한다. 여기에는 첸 카이거의 데뷔작 <황토지> 이후 처음 만나는 직관력이 엿보인다. 흔들 리는 카메라와 아마추어 배우들, 소수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게릴라처럼 찍 은 <소무>는 아마도 중국영화에서 가장 아름답지 않은 영화일 것이다. 그 러나 이 영화의 진짜 아름다움은 세상을 미장센으로 선택하거나 조절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 ) 의 좌표가 되었다. 아르노 데스쁠레셍의 IDEHC 동기이자 <파수병>의 시 나리오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던 파스칼 페랑은 <죽음에 관한 작은 협상>에 서 모래성을 쌓고 있는 한 중년 남자를 바라보는 어린 소년, 30대 남자, 50 대 여자의 시선을 통해 영화를 구성한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가까운 사람 들의 죽음이라는 상흔을 지니고 있다. 세 인물의 과거는 독립적으로 나열되 고 아무런 인과관계 없이 토막토막 따온 에피소드들이 이어진다. 흔한 가 족의 일상과 마주하면서 정신적인 물음을 이끌어내는 영화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정신적인 것과 마주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파스칼 페랑은 마치 임 상보고서처럼 인물들을 관찰하면서 표면으로부터 이면과 맞닿고자 한다. 타란티노가 서사를 조각조각 낸뒤한번뒤틀어 내러티브를 재구축함으로 써 꽉 짜인 원형구조를 만들어낸다면, 파스칼 페랑은 산산이 나누어진 에피 소드의 파편들이 확산된 상태 그대로 방치하면서 인상주의적인 방법을 이 룩한다. <죽음과의 작은 협상>에서 파스칼 페랑은 단절된 정보의 연대기를 통해 아무것도 아닌 듯한 단편들 속에서 집합적이며 공동체적인 언어를 찾 아가는 담론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 ) 77 죽음과의 작은 협상 Petits Arrangements avec les Morts 감독 파스칼 페랑 촬영 장 끌로드 라라유 주연 디디에 상드르, 까뜨린느 페랑, 샤를르 베를링 94년, 프랑스 영화 컬러, 1시간 48분 94년 깐느영화제 황금카메라상 돌이켜보건대 94년 깐느영화제는 새로운 영화의 테제가 만천하에 공표된 자리였다. 그해 황금종려상과 황금카메라상은 각기 포스트 아메리칸 시네 마의 막가파 인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과 프랑스의 IDEHC 출신인 파스 칼 페랑의 <죽음에 관한 작은 협상>에 돌아갔다. 피칠갑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시덕거리는 악동의 영화와 영화학교 출신 여성 의 영화 사이에 언뜻 공통점이란 있을 법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펄프 픽션>과 <죽음에 관한 작은 협상>은 서사구조를 낱낱이 나누어 흩뜨려 놓 고는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표면에 대한 집착과 우연성의 구조화라는 공통 분모를 드러낸다. 이제, 균질적인 서사구조에 대한 거부와 변화는 동시대성 78 스크림 Scream 감독 웨스 크레이븐 촬영 마크 어윈 음악 마르코 벨트래미 주연 니브 캠벨, 스킷 울리히, 커트니 콕스, 데이빗 아퀘트, 드류 배리모어, 로즈 맥고완, 매튜 릴러드 96년, 미국 영화 컬러, 1시간 51분 따르릉. 헬로우, 시드니? 90년대 호러영화의 재래를 몰고 온 웨스 크레이 븐은 괴전화의 목소리처럼 우리에게 영화 퀴즈를 하자고 제안한다. 장르 는 호러영화. 못 맞힐 시에는 죽음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하고 싶지 않 다고? 그럴 수야 없지! 전화가 걸려온 이상 당신은 이 게임에 무조건 참 여해야만 한다. 90년대 들어 더 이상 걸작 공포영화가 나오지 않는 데 대 해 다들 이 장르의 사이클이 다한 것이라고 사망진단을 내렸다. 그런데 언제나 속편의 여지를 남겨놓는 장르의 속성마냥 돌아온 것이다. 심지어 속편도 그냥 속편이 아니라 자기반영과 시대에 대한 소고로 가득 차서 말 이다. 90년대 들어 가장 진지한 성찰을 내놓고 있는 장르는 바로 호러영 화일 것이다. 사이트 앤 사운드 의 킴 뉴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웨스 크레이븐은 <웨스 크레이븐의 뉴 나이트메어>로 호러영화 장르를 단순한 패러디가 아닌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발전시켰다. 지금까지 나온 슬래셔 무비 중 가장 자기 성찰적이고 자기 의식이 강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 것은 <스크림>이 나오기 전까지다. <웨스 크레이븐의 뉴 나이트메어>로 자신이 시작한 시리즈에 종지부를 찍은 웨스 크레이븐은 공포영화광이자 비디오 점원이었던(타란티노로 인해 정립된 데뷔 방식?) 케빈 윌리엄슨 KINO December 1999 71
1990~1999 의 시나리오로 새로운 사이클를 열었다. 패러디와 조크로 무장하고는 슬래 셔 장르의 요소와 공식들을 해부하고 토론하는 데 관심을 쏟으면서 그 속에 현실과 영화의 상호 모방성에 대한 사색을 빼곡이 들이민다. 십대들을 파티 가 벌어지는 집에 가두고는 대학살을 벌이는 영화의 절반 가량을 차지 하는 후반부는 진정 90년대 영화에서 보기 드문 난도질의 쾌감과 역 전의 순간으로 가득 차 있다. 비디오광인 랜디가 논스톱으로 쏟아놓은 슬래셔 무비의 규칙들은 잘 암기해 뒀겠지? 자, 빨리 전화를 받으라 구. ( ) 가고 싶어하는 자가 교차되며 시작과 끝도 없이 추락하는 것을 보여준다. 끌레르 드니는 길고 늘리게 진행되는 내레이션을 통해 엿듣는 방식의 기괴 한 느와르 영화를 만들었다. ( ) 79 잠이 안 와 J'ai Pas Sommeil 감독 끌레르 드니 촬영 아그네스 고다르 음악 장-루이 뮈 래, 존 패티슨 주연 까뜨리나 글로베바, 리샤르 꾸세, 뱅상 뒤퐁, 베 아트리체 달, 알렉스 데스까 94년, 프랑스영화 컬러, 1시간 50분 94년 깐느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아프리카에서 자신의 유년시절을 회고하는 달콤쌉쌀한 영상의 <초코렛 >(88)이 깐느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되면서 끌레르 드니는 파스칼 페랑, 노에미 르보브스키와 함께 포스트 누벨 이마쥬 세대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는 여성감독군의 한 명으로 90년대를 시작하였다. 극영화와 기 록영화 작업을 병행하는 끌레르 드니는 다큐멘터리적 관심의 연장으로 투 계를 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공포도 없고 죽음도 없다>)나 중동의 프랑스 외인부대(<멋진 직업>)와 같은 독특한 소재들을 영화의 질료로 삼아왔다. 94년 깐느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부문에 초대되었던 <잠이 안 와>도 87년 파리에서 실제로 있었던 스무 명의 노파 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그러나 끌레르 드니는 이러한 소재들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영화 속 에 끌어들인다. 최신작 <멋진 직업>에서 외인부대를 허먼 멜빌의 세계와 결 합시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잠이 안 와>에서는 연쇄살인사건이라는 표피만 을 가지고 와 그 사이를 자신들의 인물들로 채워넣으며 우연성의 구조화를 실험한다. 리투아니아에서 파리로 건너온 한 여인과, 형은 음악가고 동생은 게이 댄서인 형제의 이야기가 따로따로 진행된다. 이 세 명의 삶이 교차되 는 과정 위에서 이야기는 하나로 짜여지기보다는 방사형으로 퍼져나간다. 인물들은 영화 속에 그냥 던져져 있으며 그 사이에서 그들이 얽혀지는 도시 공간만이 부상한다. 이것은 인물들을 위한 느와르가 아니라 도시가 주인공 인 필름 느와르이다. 영화는 고향으로부터 멀리 떠나온 자와 고향으로 돌아 80 포이즌 Poison 감독 토드 헤인즈 촬영 매리스 알버티 음악 제임스 베네트 주연 에디스 믹스, 스코트 렌더러, 제임스 라이언스, 존 R 롬바디 90년, 미국 영화 컬러, 1시간 25분 91년은 퀴어 시네마에 있어 새로운 선포의 해였다. 그해 레즈비언 작가 제 니 리빙스톤은 <파리는 불타고 있다>를 선보였으며 흑인 게이 작가 말론 릭 스는 <풀어헤쳐진 말들>을, 그리고 토드 헤인즈는 <포이즌>을 극장 개봉하 였다. 아마도 그 중에서 가장 야심적이며 전면적이었던 것은 <포이즌>일 것 이다. 이것은 환기를 넘어 명명을 재도입하려는 것이며, 역사를 다시 쓰고 자 하는 것인 동시에 이 모든 것의 한가운데 놓여져 있는 것은 시작하는 언 어의 존재론적 영역에 관한 탐사이다. 호러 는 명백히 에이즈에 대한 것이 다. 50년대 SF 장르의 묵시록적 스타일의 차용, 빈센트 프라이스의 위협, 빛의 클로즈업, 느와르의 흔적, 미친 과학자의 이야기, 그리고 <신체강탈자 >의 영토로의 착륙. 히어로 이것은 명명(naming)에 관계된 문제이다. 1869년 비엔나의 작가 캐롤리 마리아 벤케르트에 의해 만들어진 호모섹 슈얼리티 라는 신조어는 하나의 형용사구가 되었다. 1895년 오스카 와일 드의 호모섹슈얼 스캔들로 법적 명명이 완성되기까지. 그리고 장 쥬네로 귀결되는 이 일련의 도취와 모욕의 역사 호모. 세상은 두려움로 죽어가 고 있다 상실, 고통, 편집증, 자기 모멸, 닫혀진 세상에 스며든 모든 감각을 끌어당기며, 이것은 추적 ( 호러 의 닥터 그레이브>과 탐사 ( 히어로 의소 년 리치 베이컨)와 정의 ( 호모 의 존 블룸)에 얽힌 문제인 동시에 새로운 선언이자 공포이다. 그래서 퀴어적 문제틀이 시작된 50년대부터 에이즈의 전제에서 거꾸로 그들 자신의 존재방식을 이끌어낸 퀴어한 시대 80년대 까지를 아우르는 토드 헤인즈의 거대한 야심은 영화의 역사를 차용함으로 써 그 속에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명명도 받지 못한 자들, 실체의 언저리만을 맴돌아야 했던 자들의 현존 을 확인하는 것이다. 장 쥬네와 오 스카 와일드, 장 꼭도와 파스빈더, 앤디 워홀과 케네스 앵거의 미학으로. 그 런 의미에서 <포이즌>은 90년, 뉴 퀴어 시네마 원년의 시간에 맞이한 기념 비와도 같은 영화이다. ( ) 72 KINO December 1999
81 리스본 이야기 Lisbon Story 감독 빔 벤더스 촬영 리사 린즐러 음악 마드리데우스 주연 루디게르 보글러, 패트릭 보쇼우, 바스코 세퀘이라, 테레사 살게이로 95 년, 프랑스-포르투컬 영화 컬러, 1시간 40분 길의 왕 빔 벤더스는 81년쯤 <사물의 상태>를 찍기 위해 포르투갈에 있 었다. 유럽의 변방,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조락 사이에서 사물들은 나쁜 지 점에 놓여 있었고 헝클어져 있었다. 그로부터 13년 후 벤더스는 리스본으 로 돌아왔다. 포르투갈의 감독 파올로 브랑코의 초대를 받은 이 여행은 또 하나의 지리학적 발견으로 이어지는 로드 무비를 낳았다. <리스본 이야기> 는 벤더스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이다. 길의 감각, 거리의 공기, 낯선 사람 들 사이의 데자뷔적 감정 그리고 세상은 막 영화의 일백년 생일을 통과 하고 있었다. 그 시간은 무엇보다 영화광 소년 벤더스에게는 중요한 것이 며, 그는 길 위에서 이미지의 백년을 재현해낸다. 그런 점에서 <리스본 이 야기>는 벤더스에게는 매우 상징적인 귀환이다. 주인공 빈터는 새 영화를 찍고 있는 감독이다. 그러나 늦게 합류한 녹음기사 프리드리히가 갑자기 사 라진다. 빈터는 프리드리히를 찾기 위하여 그의 흔적을 쫓는다. 빈터는 도 시를 만나고 사람들을 만나고 여가수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가 간절하게 붙 들려고 하는 것은 사운드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성영화가 사운드를 만나 기까지의 이야기이다. 벤더스는 영화가 처음 가졌던 순결을 되찾으려고 하 며 리스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들려준다. 샹숑과 포르투갈의 노래들, 거리의 소음들, 바람 소리와 발걸음 소리들. 하나의 소리가 음악이 되고 사 운드가 되고 그러면서 스스로 존재가 되는 과정은 정말 아름답고 신비하다. <리스본 이야기>는 영화가 영화를 새롭게 발견하는 과정으로서의 영화이 다. 바캉스의 영화로 다시 돌아온 벤더스는 그 자신의 텅 빈 이미지 속에서 영화의 기원과 관련된 전설적 요소를 찾아낸다. 결국 빈터는 프리드리히를 만난다. 또 포르투갈의 신선 같은 시네아스트 마누엘 데 올리베이라를 만난 다. 올리베이라는 이렇게 말한다. 유일한 진실이 있다. 그것은 기억이다. 기억은 발명이다. 벤더스의 이번 여행은 무르나우의 무성영화, 버스터 키 튼적인 카메라, 올리베이라의 제스처에 녹아든 채플린, 또는 루이스 캐롤을 경유하면서 영화가 스스로의 가장 순수했던 기억을 반추하는 순간이다. 그 것은 또한 비디오 시대의 불결한 이미지들에 대한 우회적인 근심이기도 하 다. ( ) 82 아이다호 My Own Private Idaho 감독 구스 반 산트 촬영 에릭 알란 에드워즈, 존 캠벨 음악 빌 스태포드 주연 리버 피닉스, 키아누 리브스, 제임스 루소 91년, 미국 영화 컬러, 1시간 44분 그 때 길의 감식가를 자처하는 소년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언제나 길 의 생김새를 보고 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어. 도로 위에서 꾸는 꿈은 하 염없다. 포틀랜드로부터 아이다호로, 그리고 로마까지. 집을 찾아가는 길은 너무 멀다. 아마 그곳에 그들은 끝내 도착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혹은 그들 이 도착하는 곳 그 어디에도 집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처음 부터 돌아갈 집이 없기 때문이다. 있는 것은 다만 한 줌의 기억, 빠르게 지 나가는 구름처럼 잡히지 않는 기억뿐이다. 기억이란 아마도 쉽게 허물어지 지 않을 유일한 것, 그러나 환영처럼, 인상처럼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 그 러기에 그들은 길 위에 놓여 있는 자들이다. 하늘을 날기도 하고 땅에 떨 어져 부서지기도 하는 집으로 이어지는 길 <아이다호>는 90년대 내내 영 화광들의 안식처였으며 마음의 고향(My Own Private!)이었다. 그래, 그 것은 마이크의 기억 속의 집처럼 우리의 기억 속의 풍경이 되었으며, 잊혀 지지 않는 인상이 되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그 순간 신화가 된 것이다. 상 처 입은 자들의, 버림받은 자들의, 집 없는 자들의. 90년대의 로드 무비. 공 간은 그 자체로 인물이 되고, 정서가 되었으며, 그 속에서 이야기는 직관이 되었다. 포틀랜드의 뒷골목 부랑자들과 남창의 세계 속으로 옮겨온 셰익스 피어 속에서 이 길의 이야기는 운명론적이다. 거리의 철학자 아이들의 대 장 밥과 친애하는 아들 마이크와 배신하는 아들 스코트가 들려주는 경계 바깥, 아버지와 그 아들들의 이야기. 이 몽환적인 작가는 명백히 파스빈더 의 적자이며 앤디 워홀의 후예이다. 거리를 떠도는 자들은 길을 발견할 것 이고 길을 아는 자들은 세상으로 떠날 것이다. 아니면 이것은 그저 길의 영화였다고 해두자. 혹은 영원한 길 위로 떠나 보낸 우리 시대의 상처 입은 영혼의 이름 리버 피닉스에 대한 잊을 수 없는 기억이라고. ( ) 83 위마니떼 L'humanit e 감독 브뤼노 뒤몽 촬영 이브 까뻬 음악 리샤르 뀌비에 주 연 엠마누엘 쇼떼, 세브린느 까닐로 99년, 프랑스 영화 컬러, 2시간 28분 99년 깐느영화제 심사위원대상, 남녀주연상 KINO December 1999 73
1990~1999 올해 깐느영화제의 쇼크! 시상 결과가 발표되자 일순간 빨레는 수긍할 수 없어하는 청중들의 야유와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브뤼노 뒤몽의 < 위마니떼>는 마치 40년 전 안토니오니의 <정사>가 같은 상을 수상했을 때 연출했던 풍경을 또다시 깐느에 재연했다. 영화를 접하는 순간 필연 적으로 긍정과 부정의 갈림길에서 놓이게 되리라는 점에서 당신도 예외 는 아니다. 한 소녀의 살해사건을 추적하는 형사의 내면을 담은 <위마니 떼>의 위악적인 손길에 당신은 거부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강간당한 뒤 살해당해 풀섶에 버려진 소녀의 시체가 발견되고, 형사 파라옹은 자신의 직업으로 인해 악과 대면하게 된다. 90년대 프랑스 영화에 난데없이 등 장한 브뤼노 뒤몽의 <위마니떼>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로베르 브레송에 기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법의 집행자이면서도 인간에 대한 동정심으로 괴로워하는 파라옹은 브레송의 <시골 사제의 일기>의 젊은 사제에 해당된다. 그러나 브레송이 종교적 초월주의에 이끌리는 것과 달 리 뒤몽의 <위마니떼>는 시종일관 육체와 악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그래 서 영화 속에서 종종 스킨십으로 표현되는 파라옹의 인간애의 끝이란 지극 히 단호하고 냉정하다. 브뤼노 뒤몽은 이것을, 일상에 보조를 맞춘 영화의 속도에도 불구하고 시네마스코프의 화면 속에 담긴 바이유의 풍경과 파라 옹의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민 듯한 갑작스런 클로즈업의 대비가 빚어내는 격렬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세상과 개인의 대면을 표상하는 롱 쇼트와 클로 즈업 속에서 성과 죽음은 가감없는 제 모습을 드러내고 이것을 직시해야만 하는 인간은 흔들리고 부숴진다. ( ) 84 양들의 침묵 The Silence of the Lambs 감독 조나단 드미 촬영 태그 후지모토 음악 하워드 쇼어 주 연 조디 포스터, 안소니 홉킨스, 스코트 글렌, 케시 레몬스 91년, 미국 영화 컬러, 1시간 58분 91년 아카데미 작품상, 베를린영화제 감독상 그 녀석의 간을 콩에 곁들여 맛있게 해치웠지 라며 입맛을 다시던 한니발 렉터 박사의 모습을 기억하는가? 예의와 지성, 유모를 갖추었고 신출귀몰 한데다가 근사한 말솜씨까지 갖춘 이 연쇄살인범은 90년대 가장 매력적인 범죄자 중 하나일 것이다(이 끔찍한 살인범에게 어느새 끌려 들어가고 있 는 스스로를 발견했을 때의 그 당혹감이란!). 예술가와 천재 그리고 광기에 빠진 살인범 사이의 경계를 이동하며 연쇄살인에 있어서 소름 끼칠 정도의 순수함을 강조하는 <양들의 침묵>은 비평과 흥행에서의 놀라운 성공을 거 두었다. 그리하여 이것은 <칼리포니아>, <내추럴 본 킬러>, <쎄븐>으로 이어 지며 90년대를 연쇄살인범의 시대로 만들었으며, 공포영화의 연쇄살인마 와 낭자하는 사지절단의 하드고어를 필름 느와르의 퍼즐구조와 결합시켜 90년대 네오 느와르에 새로운 모티브를 제공하였다. <양들의 침묵>은 살해 의 이유 없음과 동기부재로 인하여 살인범의 체포나 최후의 대결이라는 식 의 스펙타클 자체에는 관심이 없으며 그 위에서 이미 정체를 드러낸 살인 범과 형사의 심리전을 영화의 중심에 배치시킨다(지성과 교양을 겸비한 범 인이 살인의 의도를 논리적으로 강의하는 <쎄븐>과 <유주얼 서스펙트>는 철저하게 이러한 전략을 따른다). 조그만 신문의 영화평으로 시작하여 록 음악평, 시나리오, 16미리 영화를 거쳐 로저 코만 스튜디오에서 B급 영화 로 지지자들을 만들어왔던 조나단 드미는 도살당하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도망가지 못하는 양떼들이라는 비유를 통해서 현대 미국의 일상생활 속의 중산층의 불안 심리를 그려냈다. 그는 이 영화로 헐리우드 메인스트림으로 무사히 안착하였고 <필라델피아>의 연달은 성공으로 아카데미 모범생이 되었다. ( ) 85 부기 나이트 Boogie Nights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 촬영 로버트 엘스위트 음악 마이클 펜 주연 마크 왈버그, 헤더 그레이엄, 버트 레이놀즈, 줄리안 무어 97년, 미국 영화 컬러, 2시간 35분 타고난 물건 인 에디 아담스, 포르노 영화의 작가주의 감독 잭 호너와 오 럴 섹스의 명수 롤러걸을 만나 불세출의 포르노 스타 덕 더글러 되다. 두 번째 영화 <부기 나이트>로 도박의 세계(<리노의 도박사>)에서 포르노 영화 산업으로 옮겨간 폴 토마스 앤더슨은 단연코 타란티노에 이은 90년대 미국 인디영화의 두번째 발견이다. 70년대 포르노 산업의 흥망성쇠에 관한 유쾌 한 음담패설이자 유사가족에 관한 암울한 우화인 <부기 나이트>에서 그는 저물어가는 70년대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80년대에 대한 암울한 비전이 교 차하는 순간을 바라본다. 비지스의 디스코 뮤직이 나이트 레인저의 뉴 웨이 브 록으로 옮겨가면서 에디와 그의 포르노 사단, 혹은 서로의 상처를 감싸 안은 가족들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지만 추락의 현기증에 아찔해하며 위 협당하고 겁에 질리며 부서져간다. 그러니까 <부기 나이트>을 보는 것은 포 74 KINO December 1999
르노 산업의 요지경에 신기해하고 키득거리며 즐거워하다가 갑자기 허전 하게 비어버린 가슴 한구석을 달래며 눈물 흘려야 하는 경험이다. 과연 (보 수반동의 시대이며 또한 에이즈의 시대인!) 80년대에 희망이라는 게 있을 까? 결국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릴지라도, 결코 잘 되지 않더라도 살아야한 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사그라든 33센티의 영광을 바라보며 스스로 에게 다짐하는 에디의 모습을 통해 폴 토마스 앤더슨은 세상을 살아가는 냉 엄한 진실과 그 속에서 상처받는 사람들의 아픈 영혼을 불러 세운다. 스물 일곱살의 나이에 그는 마틴 스콜세지가 <성난 황소>에서 보여주었던 그 비 전에 도달한 것이다. ( ) 86 그렘린2 Gremlins 2: The New Batch 90년대 가장 기괴한 속편이다(이에 비견할 수 있는 것은 유일하게 팀 버 튼의 <배트맨 2>뿐이다). 법도 질서도 없으며 소란스럽고 무례하기 짝이 없 는 그렘린들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증식하는 조 단테의 별동부대다. 돌이켜 보건대 그 놀라운 모방학습능력으로 원본과 융합하고 변종을 만들어내며 그것 때문에 자신의 몸이 부서져가는 순간조차도 마다하지 않는 이 조그만 호기심 괴물 이야말로 생명을 부여받은 패러디의 돌연변이이며 조 단테 식 무정부주의 그 자체다. <그렘린 2>에서 <그렘린>을, 그리고 미국사회를 패러디하는 그렘린들의 피에 흐르는 그 패러디에의 갈망은 미치도록 강렬 한 것이어서 급기야 그들(과 조 단테)은 그 광기에 이성을 잃고 만다. 그리 하여 필름 아카이브 속으로 뛰어들어 미국영화사 전체를 엉망으로 만드는 영화사상 일찍이 유래가 없던 소동극이 벌어진다. 그게 끝일까? 천만에! 조 단테는 <그렘린 2>를 상영하고 있는 극장을 보여줌으로써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과 패러디에 빠져 있는 자기 자신의 현재형을 곧바로 패러디하 기에 이른다(패러디의 세계는 끝이 없어라!). 메인스트림에서 버젓이 이 천 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조 단테는 그 뒤 7년간 침묵을 강요당한 채 떠돌아 야만 했다. 그래서 돌아온 그가 뉘우치고 착한 아이가 됐느냐고? <스몰 솔 저>를 아직 안 본 모양이군! ( ) 87 싸베지 나이트 Les Nuits Fauves 감독 조 단테 촬영 존 호라 음악 제리 골드스미스, 알렉산더 커 리지 주연 자크 갤리건, 피비 케이츠, 존 글로버, 로버트 프로스키, 하빌 랜드 모리스 90년, 미국 영화 컬러, 1시간 46분 영화광의 패러디 정신과 B급 영화의 무정부주의로 무장한 타자들의 프랑 켄슈타인 박사 조 단테는 확실히 저주받은 작가이다. 그는 언제나 메인스 트림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그곳에서 아웃사이더이며 안전한 신호등을 무시하는 히트 앤드 런 의 게릴라이고 로저 코만 아카데미의 계승자이자 팀 버튼의 유일한 선배이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이너스페이스>와 함 께) 거의 유일하게 환영받았던 <그렘린>의 두번째 이야기인 <그렘린 2>는 감독 씨릴 꼴라르 촬영 마뉴엘 테랑 음악 르네-마끄 비니, 씨 릴 꼴라르 주연 씨릴 꼴라르, 로만느 보렝제, 카를로스 로페즈 92 년, 프랑스 영화 컬러, 2시간 6분 1인칭 주어의 영화, 사랑과 사랑의 폭력과 바이러스와 죽음에 대항하는 영화, 클리쉐와 나르시시즘, 이미지 클립 사이를 유영하는 영화, 까이에 뒤 시네마 의 세르쥬 뚜비아나에 의하면 경험의 영화이며 동시에 위기의 영화이자 의심의 여지 없이 프랑스 영화의 오랜 전통에 대한 강력한 도전 인 영화. 씨릴 꼴라르의 첫번째 장편영화이자 마지막 영화인 <싸베지 나 이트>는 무엇보다 육신의 영화이다. 노래하는 육체, 글을 쓰는 육체, 사랑 하는 육체, 싸우는 육체, 죽어가는 육체, 저항하는 육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영화 속으로 끌고 들어와 영화를 만드는 육체. 그래서 이 영화를 보 는것은보는것이아니며 경험 하는 것이다. 이 1인칭 주어인 남자의 육 신을 따라. 그는 모리스 삐알라의 조감독이었으며(모리스 삐알라의 83년 영화 <우리들의 사랑>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사진작가였고, 샹송 가수였 KINO December 1999 75
1990~1999 으며, 에이즈에 감염된 이후 88년 첫번째 소설을 썼다. 씨릴 꼴라르, 그리 고 영화 속의 장. 모로코에서 돌아온 장은 에이즈에 감염됐다는 통보를 받 는다. 그는 18세의 소녀 로라를 만나고 그녀와 사랑을 나눈다. 로라는 장의 남자 애인 새미의 존재를 안다. 무시무시한 질투가 시작된다. 장은 로라에 게 자신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알린다. 질투를 올라타는 배신. 욕망은 심연이다. 한없이 어둡고 깊은. 배우들은 비배우들과 섞이며 카메라 앞의 그들은 어떤 씌여진 요소도 없이 그들 스스로 미장센이 된다. 그러니 까 이것은 육신을 탐색하며 그 제스처들 속에서 살아나는 운동의 영화이 다. 장은 바이러스가 사랑의 방식에 대해 그를 가르치고 있다고 고백한 다. 어떻게 이 시들어가는 육신을 안고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죽음을 받 아들일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이 야수와도 같은 밤, 핏빛의 시 대정신 속을 통과해갈 것인가? <싸베지 나이트>는 스스로의 존재와 정 면으로 맞선 자의 고백이며, 소멸하는 자가 부르는 삶의 찬가이며, 그럼 으로써 점점 유령들의 시간에 되어가고 있는 우리 시대에 대한 선언이 다. ( ) 를 가리켜 극동 아시아의 한 도시가 스크린과 관객의 눈 사이에 끼운 필터 처럼 놓인 트란 안 홍의 마음속에 바깥에 있는 현실 속의 일상적인 무엇인 가 아주 강한 것이 내리누르고 있다 고 말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영화 속에 경계 선 자로서의 트란 안 홍의 아이덴티티의 문제가 개입한다. 그리고 실 제하는 공간에서 이방인과 내부인의 시선 사이의 가중되는 혼란 속으로 빠 져든다. <씨클로>는 바깥에서 안을 다시 바라보려는 시도이며 서방세계에 서 시작된 영화를 다시 사고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 ) 88 씨클로 Cyclo 감독 트란 안 홍 촬영 브노와 델옴므 음악 톤 다 티에 주 연 르 반 록, 양조위, 트란 누 옌 케 95년, 프랑스/베트남 영화 컬 러, 2시간 9분 95년 베니스영화제 금사자상 아시아로부터 떠나기, 또는 반대로 돌아오기. 그러니까 이것은 먼 길을 돌 아 온 근원 찾기이다. 베트남에서 태어났지만 라오스에서 12살까지 지낸 이후 줄곧 프랑스에서 살아온 트란 안 홍의 영화를 지배하는 것은 어디까지 나 떠나온 자의 시선이다. 트란 안 홍은 외부로서의 내부인이며 내부로서의 외부인이라는 경계의 정체성에 사로잡혀 있으며 코스모폴리탄으로서의 베 트남이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이것은 고스란히 그가 영화를 구축하고 스타 일을 형성하는 근간을 이루게 된다. 데뷔작인 <그린파파야의 향기>에서 스 튜디오 안에서 베트남전 이전의 베트남이라는 시간으로부터 출발한 그는 < 씨클로>로 현재의 베트남이라는 그 실제의 공간과 맞대면한다. 트란 안 홍 은 가짜 이미지를 버리고 네오 리얼리즘으로 돌아갔으며, <씨클로>는 베트 남의 모순과 맞닿아 있다.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 마틴 스콜세 지의 <택시 드라이버>, 그리고 로베르 브레송의 <소매치기>에서 자양분을 얻었다는 트란 안 홍의 고백대로 <씨클로>는 호치민 시의 택시 드라이버이 자 베트남의 자전거 도둑이다. 포지티프 의 장 삐에르 장꼴라는 <씨클로> 89 삶이 두렵지 않아 La vie ne me fait pas peur 감독 노에미 르보브스키 촬영 아니에스 고다르, 베르트랑 샤트리 음악 프레드릭 울만, 프랑소와 뮈지 99년, 프링스 영화 컬러, 1시 간51분 99년 로카르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90년대 영화는 이란과 뉴질랜드영화로 시작해서 중국영화와 프랑스영화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새로운 프랑스영화의 진원지는 페미스이다. 아르노 데 스쁠레셍, 파스칼 페랑과 함께 노에미 르보브스키는 영화에 관한 거의 모든 전통을 끌어들인다. 그들은 서로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수학 문제를 풀어내 는 것처럼 영화를 만든다. 그래서 영화에서 모든 것은 공식과 집합이다. 그 렇다고 그들은 영화의 감정을 놓치지 않는다. 노에미 르보브스키는 소녀들 의 이야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면서 새로운 영화의 공기를 담는다. <나를 잊어주세요>로 데뷔하여 모두를 놀라게 한 노에미 르보브스키는 쉬는 기분 으로 텔레비전 드라마 <꼬마 계집들>을 만들었다. 네 명의 중학교 2학년 소 녀들의 한바탕 유희정신으로 가득 찬 이 작품은 그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예민한 감수성, 모든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상력, 그리고 그 안에서 마음껏 불러 일으키는 액션-이미지들이 엄청난 충돌을 불러일으킨다. 그 리고 4년 후 노에미 르보브스키는 다시한번이주력부대를이끌고그후 일담을 만든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이 텔레비전 드라마를 모두 영화 안 으로 끌어들이고 그 안에서 다시 4년이라는 시간의 두께를 담는다. 그럼으 로써 여기에는 영화사상 보기 드물게 영화와 텔레비전의 화해가 있으며, 소녀들은 영화 안에서조차 성숙한다. (당신에게서 중학교 2학년과 고등학 교 2학년이란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된다는 의미인가?) 그러나 네 명의 소녀 76 KINO December 1999
중 아무도 해피 엔드를 맞지는 못한다. 그녀들은 차례로 좌절하고, 실패하 고, 싸우고, 망가지고, 미워하고, 그러면서 어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부모들은 그녀들에게 미래의 절망적인 초상화이며, 소년들은 그녀들의 미 래를 끊임없이 방해한다. 하지만 그녀들은 다짐한다. 인생 따위가 나를 두 렵게 만들진 못 할 거야. ( ) 90 해피니스 Happiness 감독 토드 솔론즈 촬영 마리세 알베르티 음악 로비 콘도 르 주연 제인 아담스, 딜런 베이커, 라라 플린 보일, 벤 가자라, 자레드 해리스 98년, 미국 영화 컬러, 2시간 14분 98년 깐 느영화제 감독주간 선댄스가 배출한 토드 솔론즈를 사로잡는 것은 고아 의식이다. 그러 나 그는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 부모를 거부한 아이이다. 그래서 그에겐 피해의식보다는 공격본능이, 콤플렉스보다는 프라이 드가 넘친다. 무엇보다 90년대 헐리우드 영화의 이데올로기는 가족 주의이다. 미국의 인디 시네아스트가 스위트 홈의 신화에 흠집을 낸 다는 것은 말 그대로 고난의 길을 가겠다는 선언과 다를 바 없다. 두 편의 뉴저지 가족 붕괴극 중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가 가혹한 사 춘기적 미열 속에서 그래도 부드럽게 동요한다면 <해피니스>는 성인 들의 세계에 가차없이 침을 뱉는다. 토드 솔론즈는 그 침이 자신에 게로 도로 떨어진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해피니스>가 놀라운 것은 공격의 화살이 바깥으로 번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으로, 스스 로에게로 스며든다는 사실이다. 나의 행복이라는 것은 종종 남에게 불관용적인 태도를 요구하는 것이다. 다양한 가족 구성원이 드러내 는 행복에의 갈망들. 그러나 평온 속에 숨어 있는 모욕의 형태들은 시종일 관 낯 뜨거운 순간을 만들어낸다. 사랑의 환상을 믿는 노처녀는 사기꾼 유 부남에게 속고, 점잖은 형부는 어린 아들의 남자 친구를 강간하고, 늙은 어 머니는 섹스를 갈망하고, 무기력한 아버지는 자살을 시도한다. 점점 패닉 상태로 치닫는 재난 구조. 그러나 토드 솔론즈는 돌파구를 마련하지 않으며 심판의 잣대를 휘두르지 않는다. 어차피 삶이란 덕지덕지 묻은 때처럼 남루 한 것이며, 환멸과 동시에 체념도 찾아오기 때문이다. <해피니스>는 한편으 로는 우디 알렌의 <한나와 세 자매들>을 연상시키는 세 자매를 축으로 한 가족관계와 집단적인 신경증,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커플들의 단편들 을 축적하는 로버트 알트만의 <숏컷>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토드 솔론즈의 시선은 그 누구보다 신랄하며 노골적이다. 세상을 성찰하거나 관 조하는 것은 그의 몫이 아니다. 그는 양보의 여유를 부리기에는 지나치게 혈기충천한 나이다. <해피니스>는 미국 중산층의 지리멸렬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일상적인 대사만으로도 R등급의 위협을 받은 세기말의 가족 초상 화이다. 또는 시침 뚝 떼고 홈드라마의 틀을 빌린 퍽큐 시네마. ( ) 91 클락커즈 Clockers 감독 스파이크 리 촬영 말릭 세이드 음악 테렌스 블랜 주 연 하비 케이틀, 메키 파이퍼, 델로이 린도, 존 터투로, 이사야 워싱턴 95년, 미국 영화 컬러, 2시간 8분 때론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화염병을 날리는 영화보다 자근자근한 목 소리로 풀어내는 영화가 주는 감동이 더 뜨거울 때가 있는 법이다. 스파 이크 리의 <클락커즈>는 바로 그런 영화이다. <똑 바로 살아라>로 80년대 미국영화계에 블랙파워 의 기운을 몰고 왔던 스 파이크 리는 <말콤 X> 이후갈길을잃은것처 럼 보였다. <말콤 X>에 서 비관주의와 음모론이 라는 덫에 발목을 잡힌 그는 뒤이은 <브룩크린 의 아이들>에서는 양비론이라는 함정에 빠졌다. 더군다나 뒤를 잇는 후배 들의 보다 과격해진 영화들에 쫓기기까지 하면서 꼼짝없이 진퇴양난에 빠 졌다. 열혈청년 스파이크 리는 좀더 교활해진 현실에 맞서 자신의 관점을 추스르지 못하고 헤매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스파이크 리는 클 락커인 흑인 소년과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백인 형사를 주인공으로 한 시나 리오 한편을 받게 된다. 원래 마틴 스콜세지와 로버트 드니로를 염두에 두 고 쓰여진 시나리오를 사들인 유니버설 사가 대타로 스파이크 리를 택했던 것(스파이크 리의 NYU 시절 스승인 마틴 스콜세지는 연출을 거절한 대신 제작을 맡아주었다). 그러나 영화사의 뜻을 저버리고 스파이크 리는 아카 데미를 노릴 만한 백인들의 성찬을 받아들이는 대신 메이저 갱스터 무비를 흑인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 마약과 10대 문제를 논하는 영화로 바꿔 버렸다. 공원 벤치나 골목에서 곧잘 눈에 띄는 소규모 마약 상인 10대 소년 클락커와 미스터리 살인사건을 다룬 <클락커즈>는 흑백 갈등이 아닌 시대 와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과연 마약 밀매와 관계된 대럴을 살해한 것은 누구인가? 그러나 여기서 진범의 정체는 그다지 중요 하지 않다. 생생하고 역동적인 카메라 스타일은 여전하지만 그의 시각과 접근법에는 선명한 변화가 깃들어 있다. 성숙한 스파이크 리는 선동가가 아닌 작가로서 새로이 시작했다. ( ) 92 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 감독 리차드 링클레이터 촬영 리 다니엘 주연 에단 호크, 줄리 델피 95년, 미국 영화 컬러, 1시간 41분 95년 베를린영화제 감 독상 KINO December 1999 77
1990~1999 유럽을 여행중인 미국 청년 제시와 프랑스 여대생 셀린느는 열차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다음날 아침이면 미국으로 돌아갈 제시는 비엔나에 서 내리며 셀린느에게 자기와 함께 도시를 거닐면서 이야기를 계속하자고 말한다. <비포 선라이즈>의 주인공인 제시와 셀린느가 하루 동안 비엔나를 거닐며 나누는 마라톤 대화는 하나 로 요약된다. 섹스를 할 것 인가 말 것인가. 이를 두고 장황하게 의논하는 두 젊은 이 제시와 셀린느는 분명 에릭 로메의 영화 속 인물 들이다. 셀린느와 제시라는 이름은 두말할 나위 없이 자끄 리베뜨를 의식한 것이 다. 이처럼 <비포 선라이즈> 는 포스트 아메리칸 시네마 의 연원이 어디로부터 유래 한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례 가운데 하나이다(고다르로부터 영향받 았음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타란티노도 예외는 아니다). 링클레이터는 전작 들인 <슬래커>와 <멍하고 혼란스러운>에서처럼 서정성과 일상을 조화시키 면서 특정 사고 방식을 표현할 수단으로서가 아닌 진짜 인물을 창조해낸다. 젊은이들은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으며, 68혁명 세대인 부모를 두었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현실에 대해 우려한다. 그리고 시간이 다하고 동이 트자 이들은 약속과 달리 훗날을 기약하고는 각자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떠 난다. 셀린느와 제시는 과연 6개월 뒤 눈 내리는 비엔나 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 속에서 이 질문은 유럽과 아메리카의 관계와 맞닿게 된다(로 빈 우드는 <비포 선라이즈>를 셀린느가 레즈비언으로서의 성 정체성을 알 아가는 이야기로 읽어내기도 하였다). <비포 선라이즈>는 미묘하고 감각적 이게, 그리고 여러 가지의 긴장을 아름답게 분석하면서 그 곳에 있는 가능 한 문제들을 의문문과 함께 끝을 맺는다. 우리는 여전히 두 연인이 6개월 후에 다시 만나 데이트를 할 것인지 아닌지 모른다. ( ) 93 델마와 루이스 Thelma & Louise 감독 리들리 스코트 촬영 애드리안 비들 음악 한스 짐머 수 잔 서랜든, 지나 데이비스, 하비 케이틀 91년, 미국 영화 컬러, 2시간 9분, 92년 오스카/골든 글로브 각본상, 91년 깐느영화제 오프닝 리들리 스코트는 스타일리스트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놀라울 만큼 영화적 함의들로 풍부한 작품을 내놓곤 했다. 79년 에 나온 <에이리언>은 인간 집단의 갈등이 노동관계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좌파적 사고 의 구체화로 당시 사회와 조응하였다(전쟁 영화로 탈바꿈시킨 2편은 우파적 코드로, 4 편은 페미니즘과 에이즈 시대에 대한 알레 고리로 읽혀졌다). 필립 K 딕의 형이상학적 소설을 SF영화와 필름 느와르로 재구성한 < 블레이드 러너>는 표현주의의 전성기를 환 기시키며 포스트모더니즘이라 정의 내려진 시대를 더없이 시의적절하게 반영하였다. < 에이리언>과 <블레이드 러너>, 두 편의 영화 가 신보수주의 시대인 80년대에 불러일으 켰던 논쟁과 텍스트 읽기의 파장은 90년대 에 <델마와 루이스>로 이어졌다. 웨이트리스 인 독신 여성과 남편에게 학대받던 여인이 잠시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기 위 해 떠났던 주말여행은 각성의 과정을 거치면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여 정으로 돌변한다. 길 위에서 점차 자신의 정체성과 사회모순을 자각하면서 변화하는 그녀들은 마치 여성판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 처럼 보인다. <델마와 루이스>는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어떻게 의미가 침투하고, 교란시키고, 상호 영향을 미치는가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 <델마와 루이스> 가 페미니즘 텍스트로 읽히는 과정은 작품 자체의 완성된 메시지를 통해서 라기보다는 관객들 사이의 비판과 옹호의 과정, 심지어 페미니스트 사이에 서도 설전이 오고간 양상 그 자체를 일컫는 것이다. <델마와 루이스>의 수 용자 독해 과정은 90년대 가장 논쟁적인 영화를 탄생시켰다. <델마와 루이 스>는 90년대 페미니즘의 역설적인 반영의 텍스트이다. ( ) 94 리빙 엔드 The Living End 감독 그렉 아라키 촬영 그렉 아라키 음악 콜 쿤스 주연 크 레이그 길모어, 마이크 디트리 92년, 미국 영화 컬러, 1시간 32분 일본계 미국인 3세인 그렉 아라키가 혼자서 각본, 감독, 촬영, 편집을 도맡 아 완성한 초저예산의 HIV 로드 무비 <리빙 엔드>는 토드 헤인즈의 <포이 즌>, 톰 칼린의 <졸도>와 함께 92년 선댄스를 퀴어 시네마의 격전장으로 만 들었다. 스프레이로 쓰여진 슬로건 빌어먹을 세상 으로 시작한 영화는 미 친 공화당 놈들로 가득 찬 거대한 백악관 때문에 저 세상에 갔거나 아니면 앞으로 죽을 수백만 명에게 바침 이란 엔딩으로 끝날 때까지 LA 도심에서 캘리포니아 해변로 향하는 HIV 양성 판정을 받은 두 명의 게이 연인들을 쫓는다. 고다르의 <삐에로 미치광이>와 샘 페킨파의 <백주의 결투>, 아서 펜 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테렌스 멜릭의 <황무지>와 같은 도주 커플 영 화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면서 이들 영화에서 보이는 낭만주의와 멜로 드라 마적 요소를 게이 커플을 통해 정치적으로 재편성한다. <리빙 엔드>로부터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벌이는 섹스 아나키 로드 무비 <둠 제너레 이션>에 이르기까지 그렉 아라키에게 세상의 질서 밖으로 도주하는 것은 그 일탈의 속도로 안의 질서를 뒤흔들고자 하는 혁명의 전략이다(그가 USC 대학원에서 MA를 받은 논문의 주제도 로드 무비였다). 그렉 아라키 78 KINO December 1999
는 <리빙 엔드>에서 90년대의 시대정신으로서의 에이즈와 그로부터 발생 된 하위문화인 게이 컬처로 세상을 재편하여 진보와 저항에 대한 테제를 확 립하였고 곧이어 불순한 틴에이저 무비 3부작인 <완전히 엿먹은>, <둠 제 너레이션>, <아무 데도 아니다>를 통해서 이러한 무정부주의적 저항정신을 90년대 미국 유스컬처의 풍경 속에서 드러내고자 한다(90년대 말 범람하 는 착한 모범생 들의 틴스플로이트 무비들은 그의 영화 앞에서 얼마나 기 만적인가!). ( ) 95 완령옥 The Actress 그것을 게이 영화감독인 관금붕이 슬픈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러니까 관금붕은 퀴어 시네마를 의도하지는 않지만, 스캔들에 몰린 두 명 의 여배우 완령옥과 장만옥 사이를 오가면서 위로하기 위해 그 모든 것을 다시 배치한다. <완령옥>은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두 개의 서로 다른 방식 으로 만들어졌지만, 동시에 그 둘 사이의 경계가 분명하게 세워진 것은 아 니다. 관금붕은 심지어 그 둘 사이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고민과 불행, 절 망, 좌절, 불안, 슬픔을 고백하는 자매와도 같은 상대가 된다(유령의 퀴어- 레즈비언 시네마!). 그래서 이제 완령옥과 장만옥은 과거이자 현재이며, 상 해이자 홍콩이며, 동시에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완령옥>은 상해 영화의 사라져버린 전통과 1997년 홍콩 반환을 바라보면서 사라져가 는 홍콩영화의 지금-여기를 서로 접어서 포개어 보려는 시도이며, 동시에 그 안에 담긴 근심 자체를 추억에 잠겨서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영화의 마 지막 장면은 완령옥의 자살을 연기하는 장만옥이다. 관금붕은 몇번이고 그 녀의 연기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장만옥은 깊은 숨을 몰아쉬고, 그 다 음에는 정말 죽은 듯이 숨을 멈춘다. 그 순간 우리들은 숨이 멎는 경험을 하 게 된다. 화면에는 자살한 완령옥의 마지막 사진이 떠오른다. 이것은 죽음 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추억이다. 관금붕의 영화가 대부분 죽음을 다루는 것 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기억에 남는다는 의미이다. <완령 옥>은 영화배우의 몸을 빌려 이미 자살해버린 여배우를 불러내고, 그녀의 몸 안에 다시 그녀를 세워놓으려는 추억의 정서이다. 이것은 영화에 관한 가장 슬픈 고백이며, 기억이자 사라져가는 시간에 관한 멜로 드라마일 것 이다. ( ) 감독 관금붕 촬영 푼 황상 음악 첸 황진 주연 장만옥, 양가 휘, 진홍 92년, 홍콩 영화 컬러, 2시간 47분 92년 베를린영화제 여 우주연상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했던 영화제국들. 헐리우드와 1920년대 독일의 우파 스튜디오와 이탈리아 치네치타 촬영소, 그리고 1930년대 상해전영편창이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이 모든 것을 파괴하고, 이제 과거의 영광은 사라졌 다. 오직 헐리우드만이 남은 셈이다. 그것을 변방의 영국 식민지 홍콩에서 관금붕이 무한한 애정을 갖고 그 시대 안으로 잠입하여, 상해영화 시대의 호화찬란한 영광과 오욕의 역사를 훔쳐본다. 관금붕이 초대한 유령은 상해 영화 시대의 비운의 스타 완령옥이다. 그러나 이 만남은 재현이 아니다. 관 금붕은 영화에 관한 영화에 관한 (이중적인) 영화를 만든다. 그래서 영화가 만들어지는 동안, 영화는 계속해서 영화에 대하여 묻는다. <완령옥>에서 장 만옥은 (정상의 자리에 올라서지만 결국 스캔들에 몰려서 자살을 선택한) 완령옥이자, 동시에 (이 영화를 촬영할 당시에 스캔들에 몰려서 온갖 옐로 저널리즘으로부터 가쉽기사 커버 스토리로 위기에 몰린) 장만옥 자신이다. 96 심장박동측정기 Kardiogramma 감독 다레얀 오미르바예프 촬영 보리스 트로체프 주연 자수란 아소 프, 구르나라 두스마토프 96년, 카자흐스탄 영화 컬러, 1시간 15분 점점 더 장식 과잉이 되어가는 90년대 이미지의 영화 속에서 다레얀 오미 르바예프는 더할 나위 없이 간결하다. 그의 영화에는 아무런 수사학이 없 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놀라움을 주지 않는다. 그 대신 영화 속 에서 점점 조여 들어가는 고립감과 운명의 무게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 다. 오미르바예프는 삶 안에서 고독의 의미를 물어보는 시네아스트이다. 그 자신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만들어낸 <심장박동측정기>는 어린 소년 야슐란의 기억이다. 말은 탄 아버지와 펌프질을 해야만 전기를 KINO December 1999 79
1990~1999 일으켜 텔레비전을볼수있는오지에서 살고 있는 야슐란은 몸이 아파서 커다란 도시인 알마니타로 가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의사의 진단에 따라 심장이 좋지 않은 소년 야슐란은 병원에 남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고립의 시작이다. 아이들은 그를 괴롭히고 따돌린다. 고통 속에서 야슐란은 세상에서 힘을 가진 자들의 폭력을 배우고, 그저 그런 것들을 바라보기만 하는 자신을 슬퍼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을 보지 만, 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무기력함을 깨달아야 한다. 소년은 사 춘기를 맞이하면서 사랑을 배우지만, 그것이 부질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어느 추운 겨울날 야슐란은 병원을 탈출하여 트럭에 몸을 싣는다. 그 트럭 이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기억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 고독 한 이 영화는 오랜 동안 누구에게라도 지나쳐온 어린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 가게 만든다. 침묵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그 안에 아무런 과장 없이 소년의 마음에 이르는 이 영화는 영혼의 정화와 그 순결의 타락에 관한 이미지이 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 와서 세상의 제스처를 통해 이제 가족과 자연을 떠나 그 무자비하고 잔인한 질서 안으로 들어서야 하는 소년 야슐란의 얼굴 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오미르바예프는 피할 수 없는 법칙을 다룬다. 그 것은 변방에서 다시 불려 들어온 네오 리얼리즘의 신기한 귀환이기도 할 것이다. ( ) 전적인 이미지(와 사운드)의 과장으로 이루어진 세계. (말 그대로) 피가 펑 펑 솟구쳐오르고, 카메라는 휘청거리고, 사운드는 가청 영역의 최대치로 끌 어올려진다. 사이버 펑크 망가 키드의 세계로 들어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츠카모토 신야는 프레임-이미지의 한계를 탐험한다(심지어 <동경의 주먹> 에서 화면은 폭발 해 버린다). 그러면서 이 계속되는 고철의 침입을 받는 (그것으로 화하는) 신체의 경계는 희미해지고(나날이 그 지표를 확대시키 고 있는 오늘날 사이버펑크의 전제) J C 발라드의 세계와 아주 가까운 그것 은(그러니까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크래쉬>가 나오기 5년 전에 이미 발라 드를 인용하고 있는) 경계 끝에서 시작하는 존재의 새로운 규정과 관계한 다. 그 스스로 각본을 쓰고 연기를 하고 조명을 설치하고 조악하기 이를 데 없으나 샘솟는 아이디어로 극복한 특수효과를 짜내고 무대를 설치하고 이 모든 것을 카메라에 담아내며 편집까지 담당한 무려 1인 7역(감독, 각 본, 촬영, 조명, 편집, 미술, 연기)의 올라운드 원맨 밴드 시스템으로 완성한 열혈영화청년의 반테크놀로지 승리. 여기, 거의 폭력적인 이미지의 굴곡과 왜곡으로 점철된 90년대 영화 이미지의 방식에 대한 가장 과격한 선포식이 이루어지다. ( ) 97 철남 男 Tetsuo 감독 츠카모토 신야 촬영 츠카모토 신야, 후지와라 케이 음악 이시카와 추 주연 토모로 타구치, 후지와라 케이, 카나오쿠 노부, 츠카 모토 신야 91년, 일본 영화 흑백, 1시간 7분 시체스공포영화제 그 랑프리 황홀한 폭력, 파열하는 살갗, 튀어나오는, 녹아드는, 결국 스며들어 하나가 되고자 하는 금속, 분자변이의 쾌락. 신체 기관은 전이되고 고통은 매혹의 변주가 된다. 아마도 영화사상 그 어떤 영화도 이런 방식으로, 이렇게 완전 히 파열의 쾌락에 사로잡혀 몸서리쳐지는 매혹으로 우리 육체의 한계를 돌 파하고자 한 영화는 없을 것이다. 차가운 금속과 부서지기 쉬운 신체의 그 아슬한 마조히즘의 이중주. 이미지는 발작적이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 다. 이것은 이미지의 세기말 선포이다. 머릿 속에는 고철의 파편들이 자리 잡고 금속은 살갗을 뚫고 나오며 성교의 순간에 페니스는 드릴로 변한다. 98 쎄븐 se7en 감독 데이빗 핀처 촬영 다리우스 콘쥐 음악 하워드 쇼어 주연 브 래드 피트, 모건 프리만, 기네스 팰트로, 케빈 스페이시 95년, 미국 영화 컬러, 2시간 7분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 로드리게즈의 <엘 마리아치>, 제임스 그레이 의 <리틀 오뎃사>, 탐라 데이비스의 <건 크레이지>. 포스트 아메리칸 시네 마의 시네아스트들은 필름 느와르를 선택하였고, 그것은 시대정신으로까 지 보였다. 그야말로 세기말을 표방하면서 예술가적인 영감으로 충만한 연 쇄 살인범은 시대의 복화술사가 되었다. <유주얼 서스펙트>의 감독인 브라 이언 싱어가 명명한 네오 느와르는 70년대 공포영화에 오염된 필름 느와르 에 다름 아니다. 인디영화들을 위시하여 <카피캣>, <유주얼 서스펙트> 같은 메이저 영화에 이르기까지 90년대 감독들이 그리는 네오 느와르는 분명 그 들이 보고 자란 70년대 공포영화로부터 비롯된 감수성이 필름 느와르로 유 입되는 과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 <엑소시스 트>, <캐리> 같은 70년대 공포영화들(80년대에 나온 <마견>까지 포함하여) 80 KINO December 1999
의 세례를 받은 필름 느와르인 네오 느와르는 순수 악에 경도되는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말하자면 40년대 필름 느와르가 2차 세계 대전 당시 아메리칸 드림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면, 70년대 공포영화들은 베트남전 이후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프랭크 카프라의 세계에 대한 이지러지고 굴곡된 동화였다. 이러한 두 줄기의 흐름이 만난 90년대 네오 느와르는 더 이상 사 회악으로 환원되지 않는 문제들에 대한 깨달음 속에서 그 자체로서의 악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그리고 95년에 메이저에서 만들어진 데이빗 핀처의 <쎄븐>은 악마주의와 MTV적 양식의 결합 속에서 네오 느와르의 스타일을 집대성하였다. 네오 느와르는 빛과 그림자로 제한된 공간이 불러일으키는 폐쇄공포증에 가까운 불안의식들의 발로이며 불안에 대한 공감대이자 스 타일리스트들의 동시대성이다. ( ) 와 브라이언 유즈나까지 그리고 <살아난 시체들에 밤>에서 <좀비오>까지 단숨에 호러영화사를 요약정리한다. 90년대 메인스트림을 뒤흔든 호러 영 화는 웨스 크레이븐과 케빈 윌리암슨의 <스크림>이지만 진정한 호러광들에 게 이 영화는 따분한 입문서에 지나지 않았다. 진짜 음지에서 고통의 환희 에 몸을 떨고 진정한 공포에 목말라하는 창백한 숭배자들은 피터 잭슨의 피 의 유머로 90년대를 연명하였다. ( ) 10 타이타닉 Titanic 감독 제임스 카메론 촬영 러셀 카펜터 음악 제임스 호너 주 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케이트 윈슬렛, 빌리 제인, 캐시 베이츠 97 년, 미국 영화 컬러, 3시간 14분 98년 아카데미 작품상 99 데드 얼라이브 Dead Alive 감독 피터 잭슨 촬영 머레이 밀네 음악 피터 다센트 주연 티모시 발메, 엘리자베스 페날버, 이안 왓킨 92년, 뉴질랜드 영화 컬 러, 1시간 44분 <홀로코스트>식의 잔혹 다큐멘터리로 시작해서 단번에 손목이 숭덩 잘려 나가고 화면 전체에 양동이로 쏟아부은 듯 붉은 피가 거침없이 흘러내리며 Dead Alive 라는 단어가 선연하게 드러나는 오프닝 시퀀스까지. 정상적인 집안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자란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이쯤에서 아무 런 미련 없이 극장 좌석에서 일어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는 것이 당연할 터이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지는 보다 거칠고 강도 높은 피의 향연까지 참고 견뎌낸다면 예상치 못했던 포복절도의 버라이어티 쇼를 즐기게 된다. 수프 접시 안에 잠겨버린 귓바퀴를 질겅질겅 씹는 역겨운 장면에 자꾸만 눈이 가고, 사지 절단되어 멋대로 움직이는 좀비들이 왠 지 모르게 정감있게 보이고, 이소룡의 쿵푸로 좀비들을 응징하던 신부 님이 그만 헛발질로 비참한 최후를 맞는 모습에서는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고, 살아 움직이는 내장 좀비가 너무나 깜찍해서 마스코트로 갖고 싶어지고, 피범벅의 마루에서 잔디 깎는 기계로 좀비들의 사지를 절단 내는 장면이 마치 왈츠를 추는 장면처럼 우아하게 느껴지는 괴상한 경 험을 하게 만드는 <데드 얼라이브>는 샘 레이미의 <이블 데드 3> 이후 가장 웃기게 잔인하고 황당하게 무서운 영화이다. 스플레터 무비의 악 동이자 컬트 무비의 마지막 파수꾼 피터 잭슨은 마치 천진스러운 아이 가 장난감을 만지듯 신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레리 코헨에서 샘 레이미 <타이타닉>은 그 존재 자체가 모순 위에 올라서 있는 영화이다. 아마도 시간이 지나갈수록 이 영화의 개념은 점점 더 아이러니에 빠져들 것이 다. 제임스 카메론은 이 영화를 마치 헐리우드 고전주의 시대의 대가 들처럼 만들고자 했다(넓은 차양 밑으로 드러나는 케이트 윈슬렛의 그 깊은 속눈썹의 그림자는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고전 영화 스타의 아우 라이며, 도박판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또 얼마나 제임스 캐그니 적인가!). 거대한 배의 유려한 선, 우아하고 기품 있는 부인들, 정교하 게 고증된 의상, 사방으로 빛을 뿜어내는 샹들리에. 아래로 내려가면 선들은 투박해진다. 천박한 농담과 벌거벗은 몸들. 배의 바닥은 마치 노예선을 연상시킨다. 타이타닉, 19세기의 거울, 그것은 신에게 도전 한 오만방자한 인간들의 배이다. 혹은 인간의 교만에 대한 신의 징벌 의 예. 천국으로부터 지옥으로의 추락은 급작스럽지만 예고된 것이다. 타이타닉의 침몰은 계급의 난파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60년대 헐리우드가 사상 유래없는 크기의 노이로제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 최후의 만찬의 시간을 불러오는 것이며, 그 안에서 완성된 묵시록적 비전의 계승이 며(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어비스>의 공간에서 시간을 되돌린 <터미네이터 >이다), 제임스 카메론 스스로가 도달한 SFX 미학의 총화이다. 분명 제임 스 카메론은 예술에 있어서 고전적인 미메시스의 개념 안에 놓여 있는 작가 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세기의 초로 돌아가 20세기 신의 경고를 재현 하면서, 그 재현의 수단으로 SFX 테크놀로지를 끌어오는 것은 명백히 이 영화의 내재적인 역설을 의미하는 것이다(그러면서 사상 최대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이 영화가 계급투쟁의 관점 안에 놓여진다는 것은 또 얼마나 모순 된 이야기인가). 19세기의 이미지를 불러오는 영화, 헐리우드 황금 시대의 영화, 그리고 미래의 테크놀로지로 만들어지는 영화. <타이타닉>의 역설이 야말로 세기말 우리 시대의 모순과 얼마나 닮아있는가. ( ) KINO December 1999 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