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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 47, 2013. 5, 63~91쪽 통신사 사행록에 반영된 히로시마( 廣 島 )* 1)한 태 문** 1. 머리말 2. 통신사행에 있어서 히로시마의 역할 1) 사행의 水 路 노정 경유지 2) 정성을 다한 接 待 와 支 供 3. 사행록에 들어앉은 히로시마의 모습 1) 仙 境 으로 여겨진 빼어난 경치 2) 독특한 생활방식과 특산물로 이름난 공간 3) 통신사와의 문화교류 공간 4) 조선 被 虜 人 의 거주 공간 4. 맺음말 <국문초록> 이 글은 오늘날 일본에서도 가장 활발히 통신사 선양사업을 펼치고 있는 히로시마( 廣 島 )가 사행록에는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 지를 살핀 것이다. 먼저, 통신사행에 있어서 히로시마의 역할을 살폈다. 히로시마는 통신사 가 반드시 들렀던 瀨 戶 內 海 의 대표적인 港 町 인 鎌 刈 와 韜 浦 가 포함된 水 路 노정 경유지였다. 1636년 통신사 이후 江 戶 로 향할 때 客 官 숙박이 정착 되고, 귀로에는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방문형태를 띠었다. 또 히로시마는 통 신사에 대한 접대와 支 供 에 정성을 다한 지역으로, 鎌 刈 는 통신사가 낭비 가 심하다고 여길 정도로 접대에 최선을 다했고, 韜 浦 도 上 關 보다 나은 접 * 이 논문은 2007년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 었음(NRF-2007-361-AL0001). **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hantm@pusan.ac.kr)

2 / 한국민족문화 47 대로 통신사를 감동시켰다. 다음으로 사행록에 들어앉은 히로시마의 모습을 살폈다. 첫째, 히로시마 는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으로, 특히 福 禪 寺 는 빼어난 경치로 詩 興 을 불러 일으켜 통신사로부터 仙 境 으로 칭찬받았다. 둘째, 히로시마는 운행하 는 배로부터 생필품을 공양 받아 생활하는 독특한 생활방식을 지닌 盤 臺 寺 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맛 좋은 술과 좋은 돗자리가 생산되는 지역으로 묘사되었다. 셋째, 히로시마는 통신사와 지역민과의 문화교류가 활성화된 곳으로, 그 양상은 문학, 예능, 기술문화, 서적ㆍ풍속 등에 이르기까지 다 양하게 이루어진 곳으로 묘사된다. 넷째, 히로시마는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 왔던 조선 被 虜 人 들의 삶의 양태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으로 묘 사되고 있었다. * 주요어: 통신사, 히로시마, 사행록, 문화교류, 접대 1. 머리말 최근 조선시대에 일본으로 파견된 通 信 使 를 유네스코 세계유산 으로 등 재하려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한일 양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2012년 10월 19일에는 부산에서 조선통신사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국제 심포 지엄 이, 그리고 올해 2월 24일에는 조선통신사 寄 港 地 의 과거ㆍ현재ㆍ미 래 라는 연구 포럼이 일본 廣 島 縣 (이하 히로시마 로 약칭함)에서 개최되었 다. 1) 특히 히로시마는 港 町 네트워크ㆍ 瀨 戶 內 ㆍ NGOひろしま 등 임의단 체와 히로시마대학 조선통신사연구회 와 같은 학술단체를 비롯하여 최근에 1) 전자는 부산문화재단 주최로 부산시청 국제회의실에서 개최되었는데, 에스토니아 유네스 코 위원회 부총장 Margit Siim의 세계기록유산 등재과정과 내용 및 발트 3국간 국제협 력과 추진체계 를 비롯한 총 6명의 발제와 토론이 이루어졌다. 후자는 히로시마현립역사 박물관에서 1부(연구보고회)와 2부(심포지엄)로 개최되었는데, 필자도 1부의 발표자로 참 여하였다. 특히 2부에서는 부산문화재단 차재근 문예진흥실장의 조선통신사 길의 世 界 遺 産 化 라는 기조발표에 대한 토론자 5명의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통신사 사행록에 반영된 히로시마( 廣 島 ) / 3 는 縣 차원에서 瀨 戶 內 海 の 道 構 想 프로젝트까지 가동하고 있다. 이처럼 히로시마가 일본의 조선통신사 緣 故 지역 중에서 오늘날 가장 적극적으로 선양사업에 나서고 있는 것은 통신사와의 오랜 인연 때문이다. 西 南 일본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오늘날 히로시마는 14 市 9 町 으로 이 루어져 있고, 동쪽으로는 岡 山 縣, 북쪽으로는 島 根 縣 과 鳥 取 縣, 서쪽으로 는 山 口 縣 에 접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瀨 戶 內 海 를 넘어 愛 媛 縣 과 香 川 縣 과 맞서고 있다. 동서 132km, 남북 119km에 이르는 8,479km2의 면적에 인 구 약 286만 명으로, 中 國 ㆍ 四 國 지방 가운데 가장 면적이 넓고 인구가 많 은 지역으로 손꼽힌다. 2) 江 戶 시대(1603~1867)에는 山 陽 道 8주 가운데 備 後 州 와 安 藝 州 를 걸친 방대한 지역이기도 했다. 그 가운데 廣 島 藩 에 속하 던 安 藝 州 의 鎌 刈 와 福 山 藩 에 속하던 備 後 州 의 韜 浦 는 통신사의 바닷길 노정에 포함된 대표적인 港 町 이었다. 본 연구는 이처럼 오늘날 官 民 이 합심하여 통신사 선양사업을 활발히 전 개하고 있는 히로시마가 통신사 사행록에는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 지를 구 체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이는 지금까지 통신사와 관련하여 鎌 刈 와 韜 浦 를 비롯하여 히로시마 지역을 다룬 연구가 주로 답사기의 일부분 또는 통신사 와 관련된 지역 소개 형식의 개략적 서술에 그치고 있는 한계 3) 를 극복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일본 廣 島 縣 홈페이지 http://toukei.pref.hiroshima.lg.jp/folder18/insatuyou.pdf(검색 일: 2013. 3. 10), < 統 計 からいた 廣 島 縣 勢 2012>의 자료 참조, 3) 필자는 일찍이 통신사의 해로노정에 반영된 한일문화교류, 한민족어문학 45집, 한민족 어문학회, 2004에서 鎌 刈 와 韜 浦 를 통신사를 통한 문화교류의 측면에서 藍 島 ㆍ 赤 間 關 ㆍ 上 關 ㆍ 牛 窓 ㆍ 室 津 등과 함께 개략적으로 살핀 바 있다. 본고는 통신사 사행록만을 대상 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 확장한 것임을 밝혀 둔다. 이들 지역을 다룬 기존 연구로는 강 재언, 조선통신사와 鞆 浦, 여행과 체험의 문학, 일본편, 민족문화문고간행회, 1985; 이진희, 江 戶 時 代 の 朝 鮮 通 信 使, 講 談 社, 1992; 辛 基 秀 ㆍ 仲 尾 宏, 圖 說 朝 鮮 通 信 使 の 旅, 明 石 書 店, 2000; (사)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 편, 조선통신사 옛길을 따라서, 한울, 2007; 渡 辺 理 一 郞, 朝 鮮 通 信 使 と 下 蒲 刈 島, 조선통신사연구 15호, 조선통신사학회, 2012; 木 谷 正 道, 囲 碁 で 信 (まこと) 通 - 鞆 の 浦 で 花 開 く 新 たな 日 韓 文 化 交 流, 조선통신 사연구 15호, 조선통신사학회, 2012 등이 있다.

4 / 한국민족문화 47 2. 통신사행에 있어서 히로시마의 역할 1) 사행의 水 路 노정 경유지 통신사의 일본 노정은 크게 對 馬 島 로부터 淀 ( 京 都 市 伏 見 區 )에 이르는 水 路 노정과 淀 에서 江 戶 ( 東 京 )에 이르는 陸 路 노정으로 나누어진다. 수로노 정에 속하는 히로시마의 鎌 刈 와 韜 浦 는 藍 島 ㆍ 赤 間 關 ㆍ 上 關 ㆍ 牛 窓 ㆍ 室 津 등과 함께 일본 海 運 발전과 문물교류의 대동맥으로 일컬어지는 瀨 戶 內 海 의 대표적인 항구도시였다. 4) 오늘날 吳 市 下 蒲 刈 町 下 蒲 刈 島 의 산노세( 三 ノ 瀨 )에 해당하는 鎌 刈 는 사행록에 따라 加 亡 加 里 ㆍ 鍋 懸 ㆍ 蒲 刈 ㆍ 鎌 刈 등으로 달리 기록되는 곳 이다. 5) 예로부터 上 關 에서 韜 浦 로 이어지는 일명 安 藝 地 乘 り 라고 불리는 항로의 중요 지점에 위치해 있어 廣 島 藩 유일의 海 上 驛 으로 지정되었다. 게다가 廣 島 藩 主 福 島 正 則 (1561~1624)이 만든 接 岸 설비로 달리 福 島 雁 木 이라 불리기도 하는 계단식의 넓은 선착장은 물론, 공인 여관인 本 陣 과 행 정관청인 藩 所, 태수의 별장에 해당하는 茶 屋 등이 겸비되어 6) 큰 배가 입 항하기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오늘날 福 山 市 鞆 町 토모노우라( 鞆 ノ 浦 )에 해당하는 韜 浦 도 사행록에 달 리 都 毛 ㆍ 鞱 浦 ㆍ 韜 浦 등으로 기록된 곳으로 7), 조류가 滿 潮 때는 흘러 4) 瀨 戶 內 海 는 四 國 북부와 山 陽 道 를 연결하면서 九 州 동부 바다에 이르는 동서 약 440km, 남북 5~55km, 평균 수심 37.3m, 총 면적 9,500km2, 1,015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일본 열 도 최대의 內 海 이다. 위험한 玄 海 灘 항해와 달리 잔잔한 파도와 아름다운 경관을 즐길 수 있어 예부터 바다의 은하수 로 일컬어졌다. 이에 대해서는 中 國 經 濟 聯 合 會, 瀨 戶 內 海 歷 史 文 化 回 廊 (팜플렛본), 2013; 谷 澤 明, 瀨 戶 の 町 並 み- 港 町 形 成 の 硏 究, 未 來 社, 1991, 29~31쪽; 김의환, 앞의 책, 177쪽 참조. 5) 사행연도에 따른 지명표기는 加 亡 加 里 (1596년), 鍋 懸 (1607ㆍ1624년), 蒲 刈 (1617ㆍ1748 ㆍ1763년), 鎌 刈 (1636ㆍ1643ㆍ1655ㆍ1682ㆍ1711ㆍ1719년) 등으로 나타난다. 처음으로 다른 이름이 등장하는 대표적인 사행록 몇 권만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1 加 亡 加 里 : 黃 愼, 日 本 往 還 日 記, 1596 年 윤8 月 10 日 (이하 연도.월.일 로 표기한다. 또 작가와 작품 의 경우도 처음 등장할 때만 한자로 적고 이후는 한글로 적기로 한다.), 夕 到 倭 所 言 加 亡 加 里 地 方. 2 鍋 縣 : 慶 暹, 海 槎 錄, 1607.3.29, 乘 昏 到 泊 於 鍋 懸. 3 蒲 苅 : 李 景 稷, 扶 桑 錄, 1617.8.13, 三 瀨 之 南 有 蒲 苅 島. 4 鎌 刈 : 任 絖, 丙 子 日 本 日 記, 1636.11.4, 午 初 到 泊 于 鎌 刈. 6) 辛 基 秀, 朝 鮮 通 信 使 の 旅 日 記, PHP연구소, 2002, 80~81쪽.

통신사 사행록에 반영된 히로시마( 廣 島 ) / 5 들어오고 干 潮 때는 흘러 나가는 瀨 戶 內 海 조류의 분기점인 정중앙에 위치 한 良 港 이었다. 그 결과 大 坂 으로 올라가는 배와 九 州 로 내려가는 배가 滿 潮 때는 입항하고 干 潮 때는 출항을 함으로써 韜 浦 는 조류와 바람을 기다 리는 港 町 으로 이름을 날렸다. 8) 오늘날 이들 두 지역은 경남의 창원시 (1999년), 경북의 포항시(1979년)와 각각 자매결연을 맺고 있기도 하다. 조선시대 통신사가 이들 지역에 방문한 사실을 사행록을 통해 살피면 다 음과 같다. 往 路 復 路 사행 鎌 刈 韜 浦 韜 浦 鎌 刈 년도 도착 출발 비고 도착 출발 비고 도착 출발 비고 도착 출발 비고 1596 윤8/11 윤8/12 윤8/13 윤8/13 9/17 9/19 9/19 9/20 1607 3/29 4/1 4/2 4/3 閏 6/14 閏 6/15 閏 6/15 閏 6/15 1617 8/13 8/13 8/14 8/14 9/21 9/21 9/22 9/22 1624 11/6 11/6 11/6 11/7 2/1 2/2 2/2 2/3 1636 11/4 11/5 11/5 11/6 2/6 2/7 2/7 2/8 1643 5/26 5/27 5/27 5/28 9/14 9/14 9/15 9/15 1655 8/18 8/21 8/22 8/23 12/24 12/25 12/25 12/28 1682 7/18 7/19 7/19 7/20 10/10 10/11 10/11 10/12 1711 9/7 9/9 9/9 9/10 12/30 1/1 1/3 1/3 1719 8/27 8/28 8/28 8/29 11/18 11/19 11/22 11/27 1748 4/11 4/14 4/15 4/16 7/10 7/11 7/11 7/12 1763 1/9 1/10 1/11 1/12 5/16 5/17 5/18 5/19 客 館 숙박, 船 上 숙박, 객관+선상 숙박, 불분명한 숙박, 중도 정박, 통과, 사 행년도의 이듬해 7) 사행연도에 따른 지명표기는 都 毛 (1596년), 鞱 浦 (1636ㆍ1711ㆍ1748년), 韜 浦 (1607ㆍ 1643ㆍ1655ㆍ1682ㆍ1719ㆍ1763년) 등으로 나타난다. 1 都 毛 : 황신, 일본왕환일기, 1596.윤8.13, 曉 始 到 都 毛 地 方 泊 船. 2 鞱 浦 : 姜 弘 重, 東 槎 錄, 1624.11.6, 月 落 後 始 泊 鞱 浦. 3 韜 浦 : 경섬, 해사록, 1607.4.2, 又 行 十 里 到 泊 於 韜 浦. 8) 辛 基 秀, 앞의 책, 88쪽. 茶 屋 은 근세에 등장한 일종의 별장건축으로, 幕 府 나 大 名, 조정 관계자가 사용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워졌다. 茶 屋 의 제도에 대해서는 三 宅 理 一, 江 戶 の 外 交 都 市, 鹿 島 出 版 會, 1990, 93~138쪽 참조.

6 / 한국민족문화 47 도표에서 보듯 통신사는 鎌 刈 와 韜 浦 를 거의 정례적으로 방문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1420년 回 禮 使 宋 希 璟 이 < 發 胷 比 向 都 毛 梁 >ㆍ< 泊 可 忘 家 利 >을, 1590년 통신사 金 誠 一 이 < 道 毛 津 > 등의 詩 를 남기고 있는 것을 고 려하면 9) 통신사의 鎌 刈 ㆍ 韜 浦 방문은 훨씬 오래전부터 정례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636년 통신사 이후 江 戶 로 향하는 往 路 때부터 객관 숙 박이 정착되었으며, 復 路 때는 객관숙박, 선상 숙박, 중도 정박 등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방문 형태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객관 숙박의 경우 鎌 刈 는 대체로 太 守 의 茶 屋 에서, 韜 浦 는 福 禪 寺 에서 머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통신사는 이들 지역 외에 역시 히로시마에 속하는 忠 海 와 竹 原 에 서도 머물렀다. 이튿날 내가 모든 아랫사람들과 함께 작은 배를 불러서 타고 육지로 나와 사신이 머무는 절에 나아갔다. 절 이름이 誓 念 인데 좁지만 깨 끗하였고, 작은 뜰에 초목이 모두 기묘하였는데, 늙은 매화나무 한 그루는 이미 꽃이 피어서 사랑스러웠다. - 申 維 翰, 海 游 錄, 1719.11.19. 날이 채 저물지 않았는데 對 馬 島 主 가 전진하지 않고 竹 原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중략) 內 洋 의 항해가 순탄한 듯하지만 거슬리는 조수 와 험한 섬은 피하지 않을 수 없어 이 때문에 여러 날을 허비하게 되니 답답하였다. 닻을 중류에서 내리고 밤을 지냈다. - 趙 曮, 海 槎 日 記, 1764.5.17. 는 1719년 통신사가 뜻밖의 바람과 소나기로 忠 海 의 誓 念 寺 에 묵었음 을, 는 돌아오는 길에 鎌 刈 로 향하던 1763년 통신사가 潮 水 때문에 竹 原 앞바다에서 선상 숙박을 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단 한 번 머문 竹 原 과 달리, 忠 海 는 1617ㆍ1655년 통신사가 강풍으로 선상 숙박한 이래, 1719ㆍ 1748ㆍ1763년 통신사가 연이어 誓 念 寺 10)에서 숙박한 것으로 나타난다. 곧 9) 송희경, 日 本 行 錄, 1420.4.8; 김성일, 鶴 峯 全 集, 鶴 峯 逸 稿 卷 2, 詩, < 次 韻 >. 10) 1582년 誓 念 和 尙 이 세운 誓 念 寺 는 竹 原 市 忠 海 中 町 4 丁 目 7-36에 소재한 淨 土 宗 사

통신사 사행록에 반영된 히로시마( 廣 島 ) / 7 1719년 통신사를 계기로 鎌 刈 - 韜 浦 의 노정이 鎌 刈 - 忠 海 - 韜 浦 의 노정으 로 조정되었음을 보여준다. 2) 정성을 다한 接 待 와 支 供 사행록에는 노정에 포함된 일본 지역에서의 접대와 支 供 에 대한 기록들 이 많이 남아 있다. 그것은 오랜 여행에 지친 사행원에게 편안한 쉼터와 정 성을 다한 접대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통 신사를 맞이하는 藩 으로서도 통신사 접대는 藩 의 위신이 걸린 큰 행사였다. 幕 府 가 통신사가 통과하는 西 日 本 각 藩 主 의 參 勤 마저 중지시키고 藩 으로 돌아가 통신사를 맞이할 준비를 종용했을 정도였다. 따라서 통신사가 머무 는 수로노정 지역의 藩 主 들은 항구와 숙소를 정비하고 음식준비를 하는 등 경쟁적으로 접대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통신사에 대한 일본 노정지역의 접대는 일반적으로 방문 축하잔치인 振 舞 와 5일을 주기로 사행에게 주어지는 공식 지급품목인 下 程 ( 支 供 ) 및 하 정 품목 외에 별도로 바치는 供 饋 의 형식으로 행해졌다. 포구 가에 판잣집 오육십 칸을 새로 지어 振 舞 하는 곳으로 마련하였 다. 臣 들이 茶 屋 에 들었는데 음식 그릇이 모두 금빛이며, 분주히 시중드 는 것이 매우 정성스럽고 공손하였다. (중략) 支 供 하는 왜인이 별도로 下 程 을 올리는데 雜 物 의 가짓수가 지극히 넉넉하였다. 심지어 산 꿩 백 마리를 대나무로 만든 새장에 넣어서 바쳤으며 다른 것도 이에 비길 만 하였다. 일반적으로 잔치를 위해 준비하는 비용이 3천 냥에 이른다 한 다. 일본인들이 모두 말하기를 통신사가 만약 해마다 온다면 온 나라 안 이 절로 탕진할 것이라고 한다. -황호, 東 槎 錄, 1636.11.4. 1636년 통신사에 대한 鎌 刈 의 접대 모습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宴 享 찰이다. 필자는 2004년 6월 이 절을 답사한 적이 있는데, 절 입구 문에 걸린 朝 鮮 國 南 川 이 쓴 < 願 海 山 >이라는 편액 외에 통신사 관련 유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8 / 한국민족문화 47 을 베풀기 위해 새로 지은 판잣집과 도금한 그릇, 거기다 논 한 마지기 에 해당하는 한 마리에 3냥인 산 꿩 백 마리를 下 程 물목으로 바치기까지 한다. 鎌 刈 의 접대는 이후 사행에도 한결 같았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숙소의 경우 1748년 통신사 종사관 趙 命 采 는 칸막이 문에 네덜란드 産 양탄자가 드 리워지고 화장실까지 菱 花 紙 로 도배하고 다다미를 깐 것에 놀란다. 1763년 통신사 정사 조엄도 모든 기구가 지나온 다른 곳보다 나은 데다 침구까지 두 가지씩 준비한 것을 두고 가히 낭비라 할 만하다. 11) 고 혀를 내두른 데 서 접대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음식접대 역시 1636년 통신사 정사 任 絖 이 음식의 풍성함과 사치스러움 은 그 사이 지나온 곳보다 배나 더했다. 고 적거나, 1643년 통신사 종사관 申 濡 가 꽃소반에 차린 진수성찬 / 가는 곳마다 인정이 고마워라 라고 정 성어린 접대에 대한 감회를 읊은 데서 잘 드러난다. 12) 신유가 감탄한 진수 성찬은 환영을 위한 의식용 요리인 七 五 三 の 膳 과 실제 저녁 요리로 나온 3 汁 15 菜 13)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1719년 통신사 제술관 신유한은 주방에서 산 꿩 300마리를 바치는 것을 보고 赤 間 關 에서도 이와 같은 일 이 없었다. 며 놀라고, 1763년 통신사 서기 元 重 擧 는 鎌 刈 에서 三 房 의 日 供 으로 제공한 돼지를 다음 노정인 上 關 에서 잡아먹은 뒤 5달 만에 날고 기를 맛보았다. 며 감격하기까지 한다. 鎌 刈 는 해삼ㆍ도미ㆍ청어ㆍ술은 물 론 꿩과 돼지까지 제공할 정도로 그야말로 통신사 접대에 최선을 다했음을 11) 조명채, 봉사일본시문견록, 1748.4.11, 區 別 間 架 之 門 則 垂 以 青 紅 黃 三 色 交 織 之 帳 其 光 燦 然 卽 是 奇 紋 新 緞 而 自 阿 蘭 陀 所 出 云. ( 中 略 ) 至 如 如 厠 之 所 壁 塗 綾 花 下 鋪 茶 毯. ; 조 엄, 해사일기, 1764.1.9, 凡 諸 器 具 有 裕 於 所 經 各 處 至 於 衾 枕 各 設 二 件 可 謂 浮 費 矣. 12) 임광, 병자일본일기, 1636.11.4, 飮 食 之 豐 侈 倍 過 於 所 經 之 地 ; 신유, 海 槎 錄, < 次 鎌 刈 >, 擁 篲 開 風 榭 懸 燈 燎 火 城 花 盤 與 綺 食 到 處 任 人 情. 13) 3 汁 15 菜 는 달리 3 湯 15 饌 으로 3 湯 은 농어ㆍ대구ㆍ도미 경단이 들어간 국이고, 15 饌 은 도미구이ㆍ꿩구이ㆍ오리구이ㆍ연어구이ㆍ오리조림ㆍ전복간장조림ㆍ대구찜ㆍ오징어말이 ㆍ광어회ㆍ오리꼬치ㆍ카스테라 두부ㆍ유자요리ㆍ무요리ㆍ두부깍뚝썰기ㆍ채소절임에 밥 이 곁들여진 것이다. 통신사에 대한 일본의 접대요리는 道 中 ㆍ 國 書 傳 達 ㆍ 日 常 등에 따 라 달랐다. 이에 대해서는 高 正 晴 子, 朝 鮮 通 信 使 をもてなした 料 理 - 饗 應 と 食 文 化 の 交 流, 明 石 書 店, 2010, 59~102쪽 참조.

통신사 사행록에 반영된 히로시마( 廣 島 ) / 9 알 수 있다. 14) 韜 浦 의 통신사 접대도 鎌 刈 에 못지않았다. 바닷가에서 숙소인 福 禪 寺 까 지 겹자리를 깔고 5 步 마다 장대 위에 등불을 달아 낮처럼 환하게 밝힌 뒤 15) 통신사를 맞이했다. 熟 供 과 함께 振 舞 를 베풀었고, 말린 도미ㆍ대구 ㆍ 昆 布 ㆍ 覆 盆 酒 ㆍ 索 麵 ㆍ 三 ( 杉 ) 原 紙 등의 下 程 物 目 외에 별찬으로 살아 있 는 꿩 300마리가 제공되었다. 특히 설을 앞두고 도착한 1711년 통신사의 경우 歲 饌 으로 切 餠, 술, 돼지, 사슴 등의 물품 외에 700여 마리의 꿩을 대접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1682년 통신사의 역관 金 指 南 은 韜 浦 의 접대를 대접과 문안을 공손히 하여 起 居 와 음식과 호위가 上 關 보다 더 나은 것 같다. 16) 고 평가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鎌 刈 와 韜 浦 로 대표되는 히로시마는 그 어느 지역보다 정성을 다 해 통신사를 접대했음을 알 수 있다. 3. 사행록에 들어앉은 히로시마의 모습 1) 仙 境 으로 여겨진 빼어난 경치 사행록에서 廣 島 는 瀨 戶 內 海 의 港 町 가운데 가장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묘사된다. 14) 鎌 刈 에서의 통신사 숙사배치 그림인 < 正 德 度 蒲 刈 島 御 馳 走 所 繪 圖 >에는 對 島 선착장 왼쪽 에 식재료 보관소와 주방이 있는 下 行 小 屋 이 있고 그 앞에 꿩ㆍ돼지ㆍ개ㆍ새우리가 있 어 통신사 접대를 위해 동물을 계획적으로 사육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통신사 접대 준비의 기본단위인 쌀의 출고량도 1719년 통신사의 경우 42만 6천 석으로 尾 張 州 의 起 (62만 석)와 筑 前 州 의 藍 島 (52만 석) 다음으로 많다. 이에 대해서는 柴 村 敬 次 郞, ふる さと 下 蒲 刈 (その20) 朝 鮮 通 信 使 資 料 館 御 馳 走 一 番 館 收 藏 品 圖 錄 No.1, 下 蒲 刈 町, 1994, 7쪽; 한일공통역사교재 제작팀, 조선통신사, 한길사, 2005, 128쪽; 林 性 哲, 朝 鮮 通 信 使 硏 究, 세종출판사, 1996, 125쪽을 참조. 15) 신유한, 해유록, 1719.8.28, 路 上 悉 鋪 重 席 無 一 點 塵 五 步 一 植 竿 竿 懸 一 大 燈 以 夾 路 視 夜 如 晝. 실제로 1682년 통신사가 도착했을 때 韜 浦 에서는 선착장에서 福 禪 寺 에 이르 는 약 400미터의 길에 돗자리 3,500여 장을 깔고, 길가에는 6,600개의 提 燈 과 함께 불 을 붙일 수 있게 만든 蠟 燭 4만 개를 준비하여 사행단을 맞이한 것으로 나타난다. 江 戶 時 代 人 づくり 風 土 記 34ㆍふるさとの 人 と 知 惠 廣 島, 農 山 漁 村 文 化 協 會, 1991, 42쪽. 16) 김지남, 東 槎 日 錄, 壬 戌.7.19, 支 供 伺 候 誠 心 謹 恪 起 居 飮 食 護 衛 比 諸 上 關 殆 有 加 焉.

10 / 한국민족문화 47 鎌 刈 는 달리 蒲 碕 라 하는데, 땅은 安 藝 州 에 속한다. 민가는 솔밭 대 밭 사이에 비늘처럼 빽빽하여 앞의 바다와 함께 거울같이 서로 비치니, 맑고 깨끗한 것이 또한 바다 가운데 명승지였다. - 신유한, 해유록, 1719.8.27. 1719년 통신사 제술관 신유한이 江 戶 로 향하다 들른 鎌 刈 의 아름다운 경 치를 찬탄하고 있는 대목이다. 鎌 刈 는 이외에도 1711년 통신사 부사 任 守 幹 이 산이 둘러싸고 물이 돌아 경치 또한 絶 勝 이라고 감탄하고, 1748년 통신사 종사관 조명채도 (민가의) 지붕이 소나무와 대나무 사이에 반쯤 가 려져 있어 경치 또한 좋다. 고 감탄할 정도로 17)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묘 사된다. 특히 韜 浦 는 구체적인 명소가 드러나지 않는 鎌 刈 와는 달리, 사행록에 전반적인 풍경과 함께 福 禪 寺 라는 특별한 공간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 는 것이 특징이다. 백 척 같이 포갠 언덕 높기만 하고 / 숲마다 맑은 시내 또렷하니 / 어찌하면 龍 眠 居 士 의 묘한 솜씨 얻어서 / 오랑캐 포구의 그윽한 경 치 그려 올까 高 高 百 尺 疊 堤 歷 歷 千 林 淨 谿 安 得 龍 眠 妙 手 寫 來 蠻 浦 幽 棲 -신유한, 해유록, 1719.8.28, < 韜 浦 寫 景 六 言 絶 句 > 海 吟 山 福 禪 寺 에 숙소를 정하였는데, 높고 탁 트인 것이 비할 데가 없다. 바다를 굽어보는 眼 界 가 천 리뿐이 아니어서, 멀리는 伊 豫 ㆍ 讚 岐 의 여러 州 와 가깝게는 電 戶 ㆍ 尾 路 등의 섬들이 하늘가에 은은하 여 구름 사이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였다. 마침 비가 갠 뒤라, 바다 는 거울처럼 잔잔한데 바람 돛이 왕래하고 모래 위 새들은 서로 날아 오른다. (중략) 이밖에도 구경할 만하고 시를 지을 만한 것을 능히 다 기록할 수 없다. 만약 바닷길의 경치로 논한다면 마땅히 이곳을 제일 이라 할 수 있으니, 가히 洞 庭 湖 와 서로 겨룰 만하겠다. - 南 龍 翼, 扶 桑 錄, 1655.8.22 17) 임수간, 東 槎 日 記, 1711.9.7, 山 回 水 灣 形 勝 亦 絶 佳 ; 조명채, 봉사일본시문견록, 1748.4.12, 而 屋 頭 半 隱 於 松 篁 之 間 景 致 亦 佳

통신사 사행록에 반영된 히로시마( 廣 島 ) / 11 는 신유한이 韜 浦 의 경치를 읊은 < 韜 浦 寫 景 六 言 絶 句 > 8수 가운데 5번 째 시로, 韜 浦 의 浦 口 를 龍 眠 居 士 의 솜씨를 빌어 그리고 싶다고 자신의 감 회를 밝히고 있다. 용면거사는 중국 北 宋 의 문인화가로 만년에 고향의 龍 眠 山 에 은거하면서 당시 최고의 문사인 蘇 軾, 書 畵 家 인 米 芾 과 교류한 李 公 麟 (1049~1106)을 일컫는다. 그는 색을 칠하지 않고 단지 표현력이 뛰어 난 單 線 으로 그림을 그리는 白 描 畵 를 부흥시켰는데, 특히 그의 산수화는 자연주의적이면서도 유교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18) 신 유한에게 있어 韜 浦 는 마치 이공린의 白 描 畵 를 대하는 것처럼 仙 境 과 같은 이미지로 각인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1655년 통신사 종사관 남용익이 숙소인 福 禪 寺 에서 바라본 韜 浦 의 풍경을 기록한 글 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福 禪 寺 는 잔잔한 바닷길이 열린 가운데 仙 醉 島 ㆍ 弁 天 島 ㆍ 躑 躅 島 등이 그림처럼 펼쳐져 일찍부터 시 인 墨 客 의 詩 興 을 불러일으켰던 곳이다. 작은 섬들이 아른거리는 거울처럼 잔잔한 바다 위에 돛 단 배가 지나고 물새가 날아다니는 한 폭의 풍경화가 펼쳐지니 선경이 따로 없다. 남용익은 명승지 찾았으니 徐 市 이 왔음을 알 겠고 / 웅장함을 비교하면 마땅히 洞 庭 湖 와 함께 논할지니 / 이 산에서 불 사약을 캘 수 있다고 / 꿈속 신선이 나에게 말하였네 라고 읊어 福 禪 寺 에 서 바라본 풍경이 바로 仙 境 임을 강조한다. 이밖에 1643년 통신사 종사관 신유도 煙 霞 를 멀리 떠난 곳이라 다락이 둥실 바다에 떠 있는 듯하다. 고 읊고 있을 정도이다. 19) 통신사가 福 禪 寺 에서 바라본 韜 浦 의 풍경은 대체로 선경으로 비쳐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 선승혜, 행복론: 이공린의 <귀거래도( 歸 去 來 圖 )> 감상법, 동아시아 문화와 사상 12 집, 동아시아문화포럼, 2005, 255쪽; 장준석, 李 公 麟 의 白 描 畵 硏 究, 동국대학교 박 사학위논문, 2002, 53~144쪽. 19) 남용익, 부상록, 1655.8.22, < 次 秋 潭 福 禪 寺 韻 >, 探 勝 定 知 徐 巿 到 較 雄 當 與 洞 庭 論 玆 山 可 採 長 生 藥 夢 裡 仙 人 爲 我 言 ; 申 濡, 海 槎 錄, < 宿 福 禪 寺 >, 境 出 煙 霞 元 自 逈 樓 浮 滄 海 若 無 憑.

12 / 한국민족문화 47 2) 독특한 생활방식과 특산물로 이름난 공간 鎌 刈 를 떠나 韜 浦 로 향하던 사행은 盤 臺 寺 라는 절을 마주하게 된다. 盤 臺 寺 는 사행록에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언급될 정도로, 당시 사행원들에 겐 빼어난 경관과 함께 독특한 생활방식으로 주목을 받았던 곳이다. 田 島 를 지나 韜 浦 에 미처 이르기 전 10리 쯤에 층층 난간이 낭떠러지 옆에 높이 솟아 바로 지나가는 배의 위를 누르는 듯하고, 종소리가 은은 하여 하늘 한 복판에 있는 것 같았다. 물었더니 海 潮 山 盤 臺 寺 라 한다. 절의 중들이 창을 열고 앉았으니 바라보매 신선 같았다. 이전부터 사람 들이 이곳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쌀을 덜어 통에 담아 띄워 보내면 중들 이 그것으로 생활한다고 한다. 아랫사람을 시켜 각각 남은 양식을 주라 하니 格 軍 들이 다투어 서로 내놓은 것이 거의 4, 5석이나 되고 소금도 3, 4석이 되었다. 대개 그들이 보시하고 싶은 생각에서 남은 쌀을 다 나 누어 준 때문이었다. 여러 중이 운반해 가며 손을 모아 감사를 표하고 또 德 談 을 아뢰었다. 다시 尾 扇 과 色 扇 각각 한 자루씩을 주었다. - 남용익, 부상록, 1655.8.22. 아래를 지나가는 배로부터 쌀을 비롯한 각종 생필품을 공양 받아 살아가 는 盤 臺 寺 승려들의 모습과 함께 前 例 를 따라 정성껏 공양을 바치는 1655 년 통신사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盤 臺 寺 는 오늘날 福 山 市 沼 隈 町 能 登 原 阿 伏 兎 1427-1에 소재한 臨 済 宗 사찰이다. 사행록에는 阿 日 曇 觀 音 寺 (1636), 愛 渡 觀 音 寺 (1643) 등의 이름도 보이지만, 대체로 觀 音 庵 (1607), 觀 音 寺 (1617ㆍ1624ㆍ1636) 로 불리다가, 1655년 통신사 이후부터 海 潮 山 盤 臺 寺 란 이름으로 정착되어 전한다. 盤 臺 寺 가 觀 音 寺 로도 기록된 것은 992년 花 山 法 皇 이 배의 안전항해를 기원하며 바위 위에 세운 십일면관음보 살을 모신 觀 音 堂 이 있기 때문이다. 이 관음당은 절경으로 유명한 阿 伏 兎 岬 의 벼랑 끝에 놓인 까닭에 阿 伏 兎 觀 音 이라고 불린다. 오늘날에도 이 지 역 사람들로부터 임신ㆍ 安 産 ㆍ안전항해의 기원소로 받들어지고 있다. 20) 20) 이는 필자가 2003년 7월 盤 臺 寺 를 찾았을 때 觀 音 堂 앞에 1993년 沼 隈 町 敎 育 委 員 會 가 세운 < 阿 伏 兎 >란 이름의 안내판에 담긴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절 입구에 걸린 현판도

통신사 사행록에 반영된 히로시마( 廣 島 ) / 13 盤 臺 寺 의 독특한 생활방식에 대한 최초의 관심은 돈이나 쌀을 통속에 담 아 벼랑과 바다 사이에 던지는 것을 보고 마치 湘 水 에서 屈 原 에게 제사지 내듯 한다 21) 고 기록한 1607년 통신사 부사 경섬의 사행록에서부터이다. 1617년 통신사 때는 배가 지날 때 盤 臺 寺 중이 종을 울리며 기다린다는 내 용이 덧붙고, 마침내 1624년 통신사부터는 盤 臺 寺 에 대한 통신사의 공양이 정례화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행록에 반영된 盤 臺 寺 에 대한 공양은 통신사가 탄 배가 盤 臺 寺 아래 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盤 臺 寺 주지가 흰 소반 위에 순항을 기원하는 圓 通 道 場 歸 帆 無 難 之 符 라는 부적과 같은 덕담을 바치면, 사행원들은 나무통 에 땔감ㆍ약과ㆍ종이ㆍ베ㆍ부채ㆍ쌀ㆍ돈ㆍ소금ㆍ양초ㆍ붓ㆍ먹ㆍ과일 등을 담아 주었다. 1763년 통신사 때는 주지가 직전 사행의 공양 물목을 기록한 < 戊 辰 信 行 時 帖 字 記 >까지 보여주면서까지 적극적으로 공양을 구한 것으로 나타난다. 22) 개인적인 공양의 예도 보인다. 바로 1682년 통신사 역관 洪 禹 載 의 경우로, 그는 쌀 3말, 쌍초 1개, 붓 3자루, 먹 2개를 공양으로 바치며 손자 洪 大 治 를 축원했지만 사명을 마치고 귀가했을 때는 손자가 이미 죽어 마음이 비참했다 23) 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盤 臺 寺 의 독특한 생활방식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보 이는 사행 기록도 많다. 1655년 통신사 남용익이 종이에 글을 써서 얼마 나 축원을 하는가 / 돈을 구걸하니 오히려 세속의 정을 면치 못하였네 24) 라고 읊은 것이나, 1719년 통신사 신유한이 (중의) 용모를 보니 추하고 속 되어 글을 모르는 자 같았다 25) 며 비판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 1763 臨 濟 宗 妙 心 派 阿 伏 兎 觀 音 盤 臺 寺 로 적혀 있었다. 盤 臺 寺 는 10세 때 琉 球 人 來 貢 圖 卷 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19세기 浮 世 繪 師 歌 川 廣 重 도 六 十 余 州 名 所 圖 會 에 備 後 阿 武 門 觀 音 堂 이란 이름으로 그림을 남길 정도로 빼어난 경치로 유명하다. 21) 경섬, 해사록, 1607.4.2, 以 錢 米 盛 於 筒 中 投 擲 崖 海 之 間 有 若 湘 水 祀 屈 之 事. 22) 조엄, 해사일기, 1764.1.11, 又 納 戊 辰 信 行 時 帖 字 記 自 前 過 此 時 寺 僧 例 納 祝 願 之 辭 則 輒 皆 帖 給 食 物 故 今 亦 依 戊 辰 例 以 白 米 一 包 藥 果 紙 束 給 之 23) 홍우재, 東 槎 錄, 1682.7.20, 余 以 三 斗 米 一 雙 燭 三 管 二 墨 ( 中 略 ) 還 家 已 夭 尤 切 情 慘. 24) 남용익, 부상록, 1655.8.24, < 秋 潭 疊 步 城 字 韻 至 二 十 首 牽 率 更 答 歷 敍 所 過 景 物 >, 裁 楮 幾 多 供 善 祝 乞 錢 猶 未 絶 塵 情. 25) 신유한, 해유록, 1719.8.28, 見 其 貌 麤 俗 不 解 文 字 者.

14 / 한국민족문화 47 년 통신사 조엄은 盤 臺 寺 중이 바친 몇 구절 되지 않는 덕담의 글도 文 理 가 통하지 않음을 가소로워 한 뒤, 오는 손님을 위해선 서풍을 빌고 가는 손님을 위해선 동풍을 빈다고 하니 하루 동안에 순풍과 역풍을 같이 빌면 하늘이 어떻게 그 소원을 따르겠는가? 라 반문한다. 나아가 말세에 사리사 욕을 위해 좋은 낯으로만 남을 대하는 자들이 꼭 盤 臺 寺 중이 바람을 비는 것 같아 세상 사람들의 경계가 된다 26) 고 일침을 놓기까지 한다. 속세를 등 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덕담과 순풍의 축원을 빌미로 공양을 강요하는 盤 臺 寺 중들의 이중성에 대한 반감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한편, 대부분의 사행록에는 히로시마가 독특한 생활방식으로 연명하는 盤 臺 寺 라는 공간과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맛좋은 술과 질이 좋은 돗자리 가 생산되는 지역으로 묘사된다. 돗자리는 반드시 韜 浦 를 일컫고 차는 반드시 宇 治 를 일컬으며, 좋은 술은 반드시 三 原 을 일컫는다. - 金 世 濂, 海 槎 錄, 聞 見 雜 錄. 鎌 刈 에서 빚은 맛있는 인동주 忍 冬 美 酒 出 鎌 刈 옥잔에 담아오니 호박처럼 짙구나 玉 椀 盛 來 琥 珀 濃 입안에 넣자마자 大 道 로 통하니 頃 刻 入 唇 通 大 道 하필 많이 마셔야 마음이 넓어질까 何 須 呑 石 吐 奇 胸 천일주를 빚었다는 신선의 비법은 거짓 전하는 말 虛 傳 千 日 眞 仙 術 中 山 의 명주쯤은 속국에 지나지 않네 始 覺 中 山 小 附 庸 어찌하면 중국 사신 따라가 포도를 얻어다 安 得 蒲 萄 隨 漢 使 좋은 맛의 술을 빚어 임금께 드릴꼬 - 趙 絅, 東 槎 錄, < 鎌 刈 忍 冬 酒 >. 26) 조엄, 해사일기, 1764.1.11, 寺 僧 來 獻 所 謂 德 談 紙 書 語 不 過 數 句 絶 而 文 理 未 成 良 可 笑 也. ( 中 略 ) 曾 聞 盤 臺 僧 乞 粮 於 往 來 行 人 而 爲 來 客 祝 西 風 爲 去 客 祝 東 風 一 日 之 內 並 祝 順 逆 之 風 天 何 以 從 其 願 乎. ( 中 略 ) 只 爲 一 身 私 利 有 若 四 面 春 風 者 正 是 盤 臺 僧 丐 風 也 可 不 爲 世 人 戒 哉.

통신사 사행록에 반영된 히로시마( 廣 島 ) / 15 는 나라를 대표하는 히로시마의 대표적인 특산물이 韜 浦 의 돗자리 27) 와 三 原 의 술임을, 그리고 는 鎌 刈 의 접대상에 나온 忍 冬 酒 를 마신 소감 을 적은 것이다. 특히 인동과 인삼을 합쳐 빚은 인동주는 三 原 酒 와 함께 통신사 접대상에 가장 많이 놓여 통신사로부터 감미롭고 독한 천하의 좋 은 술 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조경 역시 狄 希 가 만들었다고 알려진 千 日 酒 28)조차도 따라 잡을 수 없는 맛을 지닌 인동주를 임금께 바칠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을 시로 읊고 있다. 이밖에 1748년 통신사부터는 三 ( 杉 ) 原 이 좋은 종이가 생산되는 곳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1763년 통신사 조엄은 일본 종이의 품질이 三 原 에서 생산된 것이 좋다고 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29) 며 부정적인 평가 를 내리기도 한다. 3) 통신사와의 문화교류 공간 사행록에는 통신사와 히로시마 지역민과의 문화교류가 빈번하게 등장한 다. 그것은 통신사가 문화사절의 성격을 지닌 데다, 육로노정에 비해 상대 27) 히로시마의 돗자리, 곧 다다미는 藺 草 를 재료로 히로시마 동부의 沼 隈 半 島 를 중심으로 많이 만들어졌다. 히로시마는 室 町 시대에도 이미 備 後 莚 이라 하여 특산물인 다다미로 유명했고, 이후 일본을 대표하는 다다미인 備 後 表 의 생산지가 되었다. 江 戶 時 代 人 づ くり 風 土 記 34ㆍふるさとの 人 と 知 惠 廣 島, 農 山 漁 村 文 化, 90쪽. 28) 千 日 酒 는 중국 中 山 縣 에 사는 狄 希 가 만들었다는 술로 한 번 마시면 千 日 을 취한다하 여 붙여진 이름이다. 搜 神 記 卷 19, 狄 希 中 山 人 也 能 造 千 日 酒 飮 之 千 日 醉. 사행록 에 일본을 대표하는 술로 기록된 三 原 酒 는 히로시마의 三 原 지역에서 생산된 술로 三 原 은 중세부터 尾 道 와 함께 銘 酒 의 산지로 이름이 나 있었다. 山 口 昭 三, 日 本 の 酒 藏, 九 州 大 學 出 版 會, 2009, 221쪽. 지금도 三 原 에는 脇 酒 造 場 의 心 鏡, 大 藤 酒 造 의 旭 菊 水, (주) 醉 心 의 醉 心 등이 三 原 酒 의 명맥을 잇고 있다. 통신사와 히로시마산 술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후 일본에 전하는 각종 문헌자료에 대한 조사와 히로시마 지역 현장 답사 등을 바탕으로 새로운 논문으로 발표할 예정이다. 29) 조엄, 해사일기, 1764.1.11, 日 本 紙 品 或 以 杉 原 產 爲 好 而 未 必 然 矣. 하지만 鈴 木 幸 夫 가 작성한 < 江 戶 時 代 廣 島 の 物 産 一 覽 表 >, 江 戶 時 代 人 づくり 風 土 記 34ㆍふるさとの 人 と 知 惠 廣 島, 앞의 책, 360~367쪽에는 석영, 무, 수박, 蓮 根, 고추냉이, 매실, 밤, 煙 草, 돼지, 羽 子 板, 破 魔 弓, 상투끈, 김, 도미, 소금, 술, 索 麵, 刀 劍, 鐵 器 등이 三 原 의 특산물로 되어 있고 종이는 보이지 않는다. 종이는 三 次 지역의 특산물로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히로시마의 지명에 익숙치 않은 조엄이 三 次 를 이미 술로 잘 알려진 三 原 으로 誤 記 한 듯하다.

16 / 한국민족문화 47 적으로 선진문화를 접하기 힘든 히로시마 지역민의 열망이 오히려 더 강했 기 때문이다. 30) 비단 장막, 채색 배가 나루에 배열되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거리 골목 을 메우고 배를 타고 오르내려 연락이 끊이지 않았다. 양식을 싸 가지고 오고 솥을 실은 자까지 있으니 멀리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 남용익, 부상록, 1655.8.22. 韜 浦 에 도착한 통신사를 보기 위해 구경꾼들이 모인 장면을 묘사하고 있 는 것으로, 양식과 솥을 준비할 정도로 통신사에 대한 히로시마 지역민의 관심이 대단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鎌 刈 에서 忠 海 로 가는 도 중에 남녀를 가득 태운 작은 배 5, 6척이 通 信 使 船 을 구경하고, 비 내리는 가운데 통신사를 구경하는 일본 여인들의 日 傘 이 좌우 언덕을 가득 메우며, 배를 타기 위해 지나는 좁은 골목에 구경꾼들이 얼굴을 포개고 꿇어앉아 있는 데서도 31) 확인할 수 있다. 사행록에 반영된 히로시마 지역과 통신사의 문화교류는 문학ㆍ서적ㆍ서 화ㆍ음악ㆍ의학ㆍ풍속 등에 걸쳐 다양하게 전개된다. 먼저 문학교류는 크게 히로시마 지역 외 인물과 통신사의 교류, 히로시마 지역민과 통신사의 교류 로 나눌 수 있다. 히로시마 지역 외 인물과 통신사의 문학교류는 시문의 贈 與 와 唱 和 의 형태로 나타난다. 먼저 증여는 1636년 통신사가 鎌 刈 에서 머물 때 對 馬 島 主 가 江 戶 의 여러 장수에게 자랑할 수 있도록 시를 요청하자 부사 김세렴 이 4수의 시를 짓고, 종사관 황호가 김세렴의 시에 차운하여 준 것과 32) 30) 한태문, 通 信 使 의 海 路 路 程 에 반영된 한일문화교류, 한민족어문학 45집, 한민족어 문학회, 2004, 423쪽. 31) 이경직, 부상록, 1617.8.14, 小 艇 五 六 滿 載 男 女 來 觀 ; 조명채, 봉사일본시문견록, 1748.4.14, 倭 人 觀 光 者 撑 舟 上 下 且 左 右 蒼 岸 蠻 娘 之 畫 傘 相 接 亦 添 雨 中 光 景 ; 홍우재, 동사록, 1682.7.20, 挾 路 觀 光 者 層 面 跪 伏 恭 謹 無 聲. 32) 김세렴, 해사록, 1636.11.4, 俺 若 得 一 首 詩 誇 耀 江 戶 諸 將 光 華 倍 百 幸 乞 留 念 遂 口 占 選 體 四 首 令 全 榮 書 贈 島 主 頓 首 稱 謝 從 事 官 亦 次 韵 以 贈.

통신사 사행록에 반영된 히로시마( 廣 島 ) / 17 1719년 통신사 신유한이 鎌 刈 에서 接 伴 僧 月 心 性 湛 의 숙소를 찾아 그의 畵 像 을 보고 五 言 律 詩 한 편을 33) 지어준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창화는 韜 浦 의 福 禪 寺 에 머물 때 1655년 통신사 종사관 남용익 이 接 伴 僧 九 岩 中 達 과 그 제자 中 逸 의 盤 臺 寺 시에 대해 차운하고 34), 1763년 통신사와 豊 後 州 岡 藩 의 記 室 柴 寬 猛 ( 柴 山 七 郞 )이 시문을 주고받 았다. 九 岩 中 達 은 제16대 對 馬 島 以 酊 庵 僧 을 지낸 京 都 建 仁 寺 大 統 院 소속의 승려로, 뒤에 남용익과 함께 가장 격렬하게 시문으로 금강산- 富 士 山 우열논쟁을 펼친 인물로 35) 유명하다. 그리고 자가 季 和 호가 豫 章 인 柴 寬 猛 은 당시 통신사로부터 이단으로 취급받던 物 雙 栢 의 학문에 대해 칭 찬을 늘어놓아서인지, 제술관 南 玉 으로부터 예의의 비루함과 紙 筆 의 조잡 함은 長 門 州 에서 창화한 사람들에게는 크게 미치지 못한다 는 평가를 받았 다. 36) 히로시마 지역민과 통신사의 문학교류는 그리 활성화되지는 않은 듯하 다. 이는 韜 浦 에 머물렀던 1748년 통신사 조명채가 그 풍속이 조금 거칠 어서 시나 글씨를 구걸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고 기록하고, 鎌 刈 에 머문 남옥도 이 땅에서도 마땅히 시를 구하는 자가 있을 법한데 아무도 찾아와 33) 신유한, 해유록, 1719.11.22, 蕭 颯 古 仙 人 一 幅 巖 棲 靜 千 竿 峽 竹 新 無 心 花 暎 日 隨 意 鳥 鳴 春 自 喜 秋 篁 詞 交 情 也 有 神. 34) 남용익, 부상록, 1655.8.22, 七 言 絶 句 2수(< 次 達 師 磬 臺 寺 韻 >ㆍ< 附 元 韻 >), 七 言 律 詩 2수(< 次 中 逸 沙 彌 韻 >ㆍ< 附 元 韻 >)가 전한다. 35) 이혜순, 조선통신사의 문학,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6, 263쪽. 이 우열논쟁은 사행 이 小 田 原 에 머물 때 발생했다. 接 伴 僧 九 岩 中 達 과 茂 源 紹 柏 이 조선에서는 富 士 山 과 같은 높은 산을 구경할 수 없을 것이라는 내용의 < 富 士 山 > 시를 짓자, 남용익이 富 士 山 이 높기는 하나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당할 수 없다면서 차운시를 거듭 지어 그들의 기 를 꺾으려 경쟁한 것이다. 남용익, 부상록, 1655.9.27에 九 岩 中 達 ㆍ 茂 源 紹 柏 의 < 元 韻 >과 남용익의 차운시 < 富 士 山 歌 >ㆍ< 疊 次 達 僧 富 士 韻 >ㆍ< 次 柏 僧 富 士 山 韻 > 등이 수록 되어 있다. 36) 남옥, 日 觀 記, 1764.1.11, 其 禮 數 野 鄙 紙 筆 粗 薄 大 不 及 長 門 唱 和 之 屬. 物 雙 栢 은 일 본 古 文 辭 學 派 를 대표하는 荻 生 徂 徠 (1666~1728)를 일컫는 것으로, 이름은 雙 松, 자는 茂 卿, 호가 徂 徠 ㆍ 蘐 園 이며, 본성은 物 部, 또는 荻 生 氏 이다. 일본 古 義 學 派 를 대표하 는 伊 藤 仁 齋 (1627~1705)와 함께 당시 통신사에겐 이단의 학문을 지향하는 대표적인 위 험인물로 손꼽혀 조엄도 해사일기, 1764.6.18에서 그를 비록 본받아 이을 만한 것은 없지만 그 문장은 모든 사람에게서 뛰어났다. 고 평가하고 있다.

18 / 한국민족문화 47 귀찮게 굴지 않는다 며 오히려 편안해 하는 37) 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나 마 시문의 증여는 이루어졌는데, 1711년 통신사 三 使 가 각각 시 한수씩을 지어 福 禪 寺 중에게 주고, 1748년 통신사의 문사들이 杜 甫 의 < 岳 陽 樓 >에 차운하여 福 禪 寺 의 중 伊 達 에게 준 것이 그것이다. 38) 하지만 주목할 만한 교류도 있었다. 바로 1719년 통신사가 鎌 刈 에 머물 때 제술관 신유한과 70세의 廣 島 藩 儒 味 木 虎 ( 味 木 立 軒 )의 문학교류가 그 것이다. 味 木 虎 는 직전 사행인 1711년 통신사 제술관 李 礥 과도 필담창화를 한 인물이다. 신유한은 그를 편안하고 고요하여 古 氣 가 있고 시도 平 順 하 여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줄 아는 39)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둘의 만남은 귀로에서도 이어져 味 木 虎 는 신유한을 여러 서기와 함께 자신의 館 에 초대 하여 이별시를 주고받기까지 했다. 히로시마에서는 음악ㆍ 書 畵 와 같은 예능의 교류도 이루어졌다. 式 部 등이 역관에게 청하기를, 이곳의 상하 대소 모든 사람들이 귀 국의 음악을 들으면, 누구나 다 귀를 기울이며 듣습니다. 對 馬 島 主 가 와서 뵐 때에 연주하여 영광되게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 김세렴, 해사록, 1636.11.4. 裨 將 이 구경꾼 속에 있는 어린이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 아이가 바로 8살 난 阿 萬 으로, 글씨를 잘 쓴다고 합니다. 하므로, 그 쓰는 것을 보니 붓놀림이 무르녹아 자못 진취성이 있었다. (중략) 때로 저 들의 깃발에 쓴 글씨나 숙소의 병풍에 쓴 글씨나 혹 單 子 물건에 가 늘게 쓴 것이나 문사들의 詩 軸 에 唱 和 한 것을 보면, 필법이 혹은 기 묘함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리나라 사람의 필적만 얻으면 楷 37) 조명채, 봉사일본시문견록, 1748.4.16, 其 俗 差 獷 猂 無 一 人 乞 詩 求 書 ; 남옥, 일관기, 1764.1.9, 此 地 宜 有 求 詩 者 而 一 不 相 逼. 38) 金 顯 門, 東 槎 錄, 1711.12.30, 寺 僧 願 得 一 詩 三 使 各 題 贈 之 ; 조명채, 봉사일본시문 견록, 1748.7.10, 與 一 行 諸 詞 客 各 次 杜 工 部 岳 樓 詩 韻 書 給 寺 僧 伊 達. 특히 福 禪 寺 에 들른 1763년 통신사는 1748년 통신사가 伊 達 에게 준 이 시가 韓 客 筆 畵 라 적힌 상자 안에 비단 두루마리 형태로 보존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조엄, 해사 일기, 1764.1.11과 원중거, 乘 槎 錄, 1764.1.11의 기록을 참조. 39) 신유한, 해유록, 1719.8.27, 爲 人 安 靜 有 古 氣 ( 中 略 ) 詩 亦 平 順 寫 意.

통신사 사행록에 반영된 히로시마( 廣 島 ) / 19 書 건 草 書 건 우열을 막론하고 모두가 기뻐서 날뛰었다. 그리하여 글 씨를 구하는 자가 이어져 끊어지지 않으니 寫 字 官 뿐만 아니라, 일 행 중에 조금만 글씨 쓸 줄 아는 이는 그 간절한 요청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조엄, 해사일기, 1764.1.11. 글 는 1636년 통신사가 鎌 刈 에 머물 때 일본의 접대관들이 지역민들을 위해 음악을 베풀어 줄 것을 청하고 있는 대목이다. 통신사행에 참여한 음 악 관련 인원은 약 50여 명으로,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통신사의 음악연주 는 이처럼 그들의 요청에 의한 것도 있지만, 아예 공연을 목적으로 행해진 경우도 많았다. 40) 따라서 시행 여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鎌 刈 에 서도 지역민을 대상으로 한 음악 공연이 펼쳐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는 阿 萬 이란 아이를 통해 일본의 書 法 에 대한 감상과 함께 통 신사의 글씨를 얻기 위한 히로시마 지역민들의 열망을 적고 있다. 통신사의 글씨에 대한 열망은 1719년 사행 때 味 木 虎 가 태수의 부탁으로 병풍 글씨 를 요구하자 신유한이 여덟 문구를 만든 뒤 成 汝 弼 에게 부탁해서 써주었 고, 1763년 사행 때 忠 海 에서 배에 탄 남녀가 부채를 던져 글씨를 구하자 正 使 伴 人 趙 東 觀 이 杜 甫 의 7언율시 < 秋 興 > 가운데 頸 聯 을 써 주었다는 기록에서 각각 확인된다. 41) 이밖에 1748년 통신사는 鎌 刈 의 숙소에서 무지 개 돌다리와 수백 간의 집으로 구성된 嚴 島 의 풍경을 본뜬 병풍 그림과 다 른 병풍에 새겨진 일본 글씨를 감상하고, 제술관 朴 敬 行 은 長 門 州 에 사는 草 允 文 ( 草 場 允 文 )을 만나 그의 書 法 을 구경하기도 한다. 42) 그리고 1763년 40) 한태문, 通 信 使 왕래를 통한 한일 演 戱 교류, 지역과 역사 23집, 부경역사연구소, 2008, 11~13쪽. 41) 신유한, 해유록, 1719.11.22, 虎 以 太 守 語 乞 得 屛 風 大 字 余 辭 以 筆 拙 作 勸 農 崇 學 省 刑 薄 斂 等 八 條 語 屬 成 汝 弼 而 書 之 ; 남옥, 일관기, 1764.1.10, 男 女 多 從 船 中 投 扇 乞 書 ( 中 略 ) 趙 題 一 女 之 扇 以 杜 律 佳 人 拾 翠 春 相 問 仙 侶 同 舟 晩 更 移 誠 着 題 也. 42) 조명채, 봉사일본시문견록, 1748.4.14, 而 上 架 屋 殆 過 數 百 間. 問 是 嚴 島 之 模 勝. 而 其 橋 樓 之 宏 麗. 見 諸 畫 中 ; 같은 책, 1748.4.15, 長 門 主 人 草 允 文 者 來 見 書 記 自 稱 癖 於 墨 戱 筆 法 稍 可. 嚴 島 는 오늘날 廣 島 縣 卄 日 市 市 에 있는 宮 島 를 일컫는다. 宮 島 는 安 藝 國 第 一 宮 으로 불리며 전국 약 500개의 말사를 거느린 嚴 島 神 社 의 총본산이 있는 곳으 로 옛날에는 해상의 수호신인 市 杵 島 姬 를 제사하는 장소를 정할 때 주위 7 里 의 섬에서 뽑았다고 전해진다. 무지개 같은 돌다리 는 아마도 嚴 島 신사의 反 橋 를 지칭하는 듯한

20 / 한국민족문화 47 통신사는 숙소인 福 禪 寺 의 누각에서 1711년 통신사 종사관 李 邦 彦 이 쓴 日 東 第 一 形 勝 이라는 편액과 1748년 통신사 정사 洪 啓 禧 가 짓고 둘째 아 들 洪 景 海 가 쓴 對 潮 樓 및 작자 불명의 賞 幽 라는 현판을 발견하게 된다. 통신사의 글씨가 숙소를 비롯한 지역 명소의 현판글씨로도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지역민들의 요청에 의한 문화교류의 한 양상을 보 여주고 있다. 43) 鎌 刈 에서는 의학ㆍ조선 등 기술문화의 교류도 이루어졌다. 먼저 의학은 1763년 통신사의 안내역을 맡은 對 馬 島 主 가 목이 아파 바람 쐬기가 힘들다 고 호소하면서 조선의 薄 荷 煎 을 구하자, 龍 腦 膏 와 安 神 丸 등과 함께 그 藥 方 文 까지 베껴 보낸 것으로 나타난다. 44) 薄 荷 煎 은 東 醫 寶 鑑 에 上 淸 元, 龍 腦 膏, 荊 黃 湯, 必 用 方 甘 桔 湯, 金 消 丸, 淸 火 補 陰 湯, 降 雪 散 등과 함께 咽 喉 痛 치료에 효과적인 약재로 소개되어 있다. 對 馬 島 主 가 스스로 조선의 薄 荷 煎 을 요청했다는 사실은 조선 약재에 대한 신뢰는 물론, 東 醫 寶 鑑 을 비롯한 조선 醫 書 의 광범위한 유포와 적용을 가늠하게 한다. 그리고 1636 년 사행의 부사 김세렴은 鎌 刈 의 선착장에 놓인 일본의 戰 船 수십 척을 보 고 그 배의 제도를 보니 경쾌하며 정교하였고 좌우에 25개의 노를 설치하 거나 또는 30개의 노를 설치했는데, 우리나라의 戰 船 에 비하면 매우 뒤떨 어진다 45) 는 평가를 내린다. 데, 反 橋 는 칙사가 건넜다 하여 달리 勅 使 橋 라 불리기도 한다. 德 山 靜 子 ㆍ 甲 斐 康 夫, 船 の 旅 瀨 戶 內 海, 保 育 社, 1967, 141~142쪽. 43) 2006년 필자가 福 禪 寺 를 방문했을 때는 賞 幽 현판은 볼 수 없었지만, 인근의 圓 福 寺 에서 1711년 통신사 寫 字 官 李 爾 芳 이 쓴 南 林 山 편액은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鞆 ノ 浦 에는 福 禪 寺 외에도 약 20여 개의 사찰이 있다. 당시 통신사가 여러 곳에 나누어 숙박했음을 고려할 때 기타 사찰에도 통신사의 遺 墨 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앞으 로 필자는 문헌자료 조사와 현장답사를 통해 그 존재를 확인할 생각이다. 통신사가 현판 글씨를 쓰는 모습은 淸 見 寺 의 승려가 먹을 갈고 일본 무사 두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통신사가 淸 見 寺 란 글씨를 쓰고 있는 葛 飾 北 齋 의 < 東 海 道 五 十 三 次 > 중 17 次 由 井 에 잘 나타난다. 辛 基 秀, 新 版 朝 鮮 通 信 使 往 來, 明 石 書 店, 2002, 57쪽. 44) 조엄, 해사일기, 1764.1.9, 更 以 喉 痛 方 極 有 難 觸 風 云 因 求 薄 荷 煎 以 薄 荷 煎 及 龍 腦 膏 安 神 丸 三 種 封 送 謄 書 三 藥 方 文 而 付 之. 45) 김세렴, 해사록, 1636.11.4, 觀 其 船 制 輕 快 精 巧 左 右 設 二 十 五 櫓 或 設 三 十 櫓 而 比 我 國 戰 船 不 及 遠 矣.

통신사 사행록에 반영된 히로시마( 廣 島 ) / 21 한편, 서적과 풍속의 교류도 이루어졌다. 비에 막혀 蒲 刈 에서 묵었다. 일찍이 들으니, 우리나라 서적 중에서 懲 毖 錄 ㆍ 攷 事 撮 要 ㆍ 輿 地 勝 覽 등은 전에 이미 들어왔다 하는데, 이 제 들으니 兵 學 指 南 ㆍ 通 文 館 志 가 새로 이 땅에 들어왔다고 한다. -조명채, 봉사일본시문견록, 1748.4.13. 동쪽 집 울타리 밑엔 옛 무덤이요 / 서쪽 집 문 앞엔 쓸쓸한 비석 있 네 / 백골이 골목에 널려 있는데 / 젊은이가 처마를 마주하여 앉았네 東 家 籬 底 古 塚 西 舍 門 前 冷 碑 白 骨 交 輸 閭 巷 朱 顔 坐 對 軒 楣 - 신유한, 해유록, 1719.8.28, < 韜 浦 寫 景 六 言 絶 句 >. 는 鎌 刈 에 도착한 조명채가 국가의 기밀을 담은 서적이라 할 수 있는 징비록 과 여지승람 등이 들어와 있는 데다, 우리나라의 兵 書 인 병 학지남 과 외교기록문서인 통문관지 까지 들어온 것을 두고 역관들의 弄 奸 을 통분해 하고 있는 대목이다. 일찍이 1719년 사행의 신유한도 김성 일의 해사록, 유성룡의 징비록, 강항의 看 羊 錄 이 大 坂 에서 출판된 것을 보고 적을 정탐한 것을 적에게 알린 것과 무엇이 다른가? 반문하며 역관들의 밀무역을 한탄한 바 있다. 46) 사리사욕에 물든 역관의 弄 奸 을 비 판한 것이지만 당시 우리나라 서적의 광범위한 유포 상황를 확인할 수 있 다는 점에서 귀중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는 신유한이 무덤과 비석이 거주공간에서 분리되지 않고 함께 공존하는 일본인의 생활공간을 살피고 있는 대목이다. 일본의 兩 墓 制 47)를 알 리 없는 그에겐 충분히 이상한 풍속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이 46) 신유한, 해유록, 1719.11.4, 最 可 痛 者 金 鶴 峰 海 槎 柳 西 厓 懲 毖 錄 姜 睡 隱 看 羊 錄 等 書 多 載 兩 國 隱 情 而 今 皆 梓 行 于 大 坂 是 何 異 於 覘 賊 而 告 賊 者 乎. 國 綱 不 嚴 館 譯 之 私 貨 如 此 使 人 寒 心. 47) 일본의 전통적인 양묘제는 死 體 를 매장하는 묘와 死 靈 을 공양하는 空 墓 를 함께 운영하 는 것으로, 전자는 마을 경계나 계곡의 특정 장소에 거의 방치하는 대신, 후자는 자택이 나 절 뒤에 꾸며 忌 日 때마다 공양을 한다. 이에 대해서는 堀 一 郞, 불안과 희망, 柳 田 國 男 편ㆍ이용덕 역, 日 本 人, 을유문화사, 1991, 240~241쪽 참조.

22 / 한국민족문화 47 질적인 일본 풍속에 대한 관찰은 1748년 통신사의 기록에서도 보인다. 곧 사자관 金 天 秀 의 하인이 鎌 刈 에서 죽자 우리측은 널에 넣어 草 葬 한 뒤 돌 아올 때 飛 船 으로 옮기려 했지만, 일본측은 아예 땅에 묻거나 장독 속에 鹽 藏 할 것을 권한 것이다. 결국 시신을 널에 거두어 산골짜기로 옮기고 3 칸 집을 지은 뒤 깊이 묻고 사람을 세워 지키게 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지 만, 그렇게 한 이유를 일본의 법이 한 번 땅속에 묻으면 꺼내는 것을 꺼리 고, 풍속이 남의 시신을 훔쳐 칼날 시험하기를 즐기기 때문 48) 이라고 적고 있다. 4) 조선 被 虜 人 의 거주 공간 사행록에서 히로시마는 壬 辰 倭 亂 때 끌려 왔던 朝 鮮 被 虜 人 들의 삶의 양태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곳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특히 回 答 兼 刷 還 使 로 일컬어지는 1607ㆍ1617ㆍ1624년 통신사의 사행록에서 두드러지는데, 이 는 아마도 임란 이후 피로인 쇄환을 주임무로 파견된 사행이었기에 피로인 의 삶에 더 주목한 결과로 보인다. 피로인 한 사람이 와서 뵙고 스스로 말하기를, 熊 川 座 首 의 아들로 서 임진년에 포로되어 安 藝 州 廣 島 에 와서 살고 있습니다. 체 만드 는 것으로 생업을 삼고 우리나라 사람과 혼인하였는데 利 川 에 살던 嚴 渭 라는 이의 딸입니다. 하였다. - 이경직, 부상록, 1617.8.13. 피로인 넷이 와서 뵙는데, 한 명은 스스로 전 繕 工 監 判 官 朴 佑 라 일 컫는 이로 일본 이름은 休 菴 이며 중이 되어 의술을 업으로 하여 岩 島 에 있고 岩 國 太 守 吉 川 廣 家 에게 의탁하고 있는데, 전라도 나주 사 람이다. 한 명은 대구 사람으로 別 侍 衛 安 夢 祥 의 아들 景 宇 인데, 僧 名 은 卓 菴 이고 의술을 업으로 하면서 太 輔 의 조카 右 衛 門 에게 의탁 하여 廣 島 에 살고 있다. 한 명은 전라도 金 溝 에 사는 金 承 守 의 아들 48) 조명채, 봉사일본시문견록, 1748.4.13, 日 本 法 則 一 埋 土 中 以 復 出 爲 忌 且 風 俗 好 竊 人 屍 體 以 試 劍 鋩.

통신사 사행록에 반영된 히로시마( 廣 島 ) / 23 이자 玄 鶴 의 손자로서 이름이 應 福 인데, 일본 이름은 正 三 郞 으로서 廣 島 紙 屋 町 에 살고 있는 사람이고, 한 명은 함평 廣 橋 에 사는 夢 傑 의 아들 木 漢 이라 하였다. - 이경직, 부상록, 1617.9.22. 모두 1617년 통신사 종사관 이경직이 鎌 刈 와 韜 浦 에서 조선 피로인을 만 난 내용을 담고 있다. 웅천좌수의 아들 李 弘 濟, 나주 출신으로 선공감판관 을 지낸 박우, 대구 출신의 안경우, 금구 출신의 김응복, 함평 출신의 목한 등이 같은 피로인 여자를 만나 결혼하여 체를 만들어 살아가거나 또는 중 이 되어 의술로 생업을 이어나가는 모습들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들 의 고향과 본명, 일본의 거주지와 일본 이름, 생업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49) 이밖에도 역관 강우성에게 편지를 보내 고국의 안부를 물었던 韜 浦 의 어 떤 여인은 할아버지가 和 陽 君 인 宗 室 의 딸이었지만, 일본에서는 安 藝 州 태 수 누이의 시녀로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50) 韜 浦 에서 만난 또다 른 피로인 金 開 金 은 12, 13세에 일본에 잡혀와 우리말을 완전히 잊어버린 데다, 20년간 돌보아준 일본 주인의 은혜를 저버릴 수 없다고 버틴 인물이 다. 보다 못한 사신이 새는 옛 둥지로 돌아오고 마소도 제 집을 아는데 사 람으로서 금수만 못하여서야 되겠느냐 고 타이르지만 끝내 귀국을 거부하 고 만다. 이경직은 이를 두고 귀국하려는 이는 식견이 있는 士 族 이나 고 생하고 있는 이들 뿐, 처자나 재산이 있어서 이미 그 생활이 안정된 이는 돌아갈 뜻이 전혀 없어 가증스럽기 한이 없다 51) 고 개탄한다. 49) 이를 두고 池 田 一 彦 은 朝 鮮 通 信 使 と 鞆 の 浦 - 日 朝 文 化 交 流 の 潮 待 ち 港, 江 戶 時 代 人 づくり 風 土 記 34ㆍふるさとの 人 と 知 惠 廣 島, 앞의 책, 37쪽에서 조선의 포로들이 의사 ㆍ학자ㆍ기술자 등 히로시마 지역에서 우대되어 생활문화에 공헌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 았음을 입증하는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 이밖에 히로시마를 대상으로 살핀 것은 아니지 만 포로로 잡혀 와 무사가 되고 專 門 職 人 이나 町 人 이 된 조선인들을 다룬 大 石 學 의 연 구인 江 戶 の 外 交 戰 略, 角 川 選 書 446, 2009, 148~172쪽에서도 池 田 一 彦 과 비슷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50) 이경직, 부상록, 1617.8.13, 俄 而 有 一 被 擄 人 來 謁 自 言 熊 川 座 首 之 子 壬 辰 被 擄 來 居 安 藝 州 廣 島 以 篩 爲 業 交 嫁 我 國 人 利 川 居 嚴 渭 稱 名 人 之 女 云 ; 김세렴, 해사록, 1637. 2.6, 有 女 人 送 書 于 康 遇 聖 自 稱 宗 室 女 其 祖 和 陽 君 今 爲 太 守 妹 侍 女 問 故 國 安 否. 51) 이경직, 부상록, 1617.9.20, 大 槪 思 歸 者 稍 有 知 識 之 士 族 及 在 此 喫 苦 之 人 也 其 餘 有 妻

24 / 한국민족문화 47 이처럼 통신사 사행록에서 히로시마는 조선 피로인들이 다양한 삶의 양 태를 보이며 살아가는 거주공간으로 그려지고 있다. 4. 맺음말 이상으로 오늘날 일본에서도 가장 활발히 통신사 선양사업을 펼치고 있 는 히로시마가 통신사의 사행록에는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 지를 살펴보았 다. 논의된 결과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통신사행에 있어서 히로시마의 역할이다. 첫째, 히로시마는 통신사가 반드시 들렀던 瀨 戶 內 海 의 대표적인 港 町 인 鎌 刈 와 韜 浦 가 포함된 水 路 노정 경유지로, 鎌 刈 에서는 太 守 의 茶 屋 이, 韜 浦 에서는 福 禪 寺 가 숙소로 활용되었다. 1636년 통신사 이후 江 戶 로 향할 때 객관 숙박이 정착되고, 귀로에는 객관 숙박, 선상 숙박, 중도 정박 등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방문형태를 띠고 있었다. 또 히로시마는 통신사에 대한 접대와 支 供 에 정성을 다한 지역으로, 鎌 刈 는 통신사가 낭비가 심하다고 여길 정도로 접대에 최선을 다했고, 韜 浦 도 上 關 보다 나은 접대로 통신사 를 감동시켰다. 다음으로 사행록에 들어앉은 히로시마의 모습을 살폈다. 첫째, 사행록에서 히로시마는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으로 나타난다. 특히 福 禪 寺 는 잔잔한 바닷길이 열린 가운데 仙 醉 島 등 작은 섬들이 펼쳐 져 시인의 詩 興 을 불러 일으켜 통신사로부터 仙 境 으로 칭찬받았다. 둘째, 히로시마는 운행하는 배로부터 생필품을 공양 받아 생활하는 독특한 생활 방식을 지닌 盤 臺 寺 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맛 좋은 술과 좋은 돗자리가 생산되는 지역으로 묘사되었다. 셋째, 히로시마는 통신사와 지역민과의 문 화교류가 활성화된 곳으로, 그 양상은 문학, 음악ㆍ 書 畵 와 같은 예능, 의학 ㆍ조선과 같은 기술문화, 서적ㆍ풍속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이루어진 곳으로 묘사된다. 넷째, 히로시마는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 왔던 조선 被 子 有 財 產 已 定 其 居 頓 無 歸 意 可 惡 可 惡.

통신사 사행록에 반영된 히로시마( 廣 島 ) / 25 虜 人 들의 삶의 양태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거주공간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이처럼 통신사 사행록에는 히로시마가 통신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 한 관련을 지닌 지역으로 반영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오늘날 히로시마가 통신사 선양사업에 적극적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는 히로시마 지 역에 산재한 통신사 관련 문헌자료의 조사와 현장답사 등을 통해 히로시마 와 통신사의 문화교류 양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조명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다음 작업으로 돌리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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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 사행록에 반영된 히로시마( 廣 島 ) / 27 木 谷 正 道, 囲 碁 で 信 (まこと) 通 - 鞆 の 浦 で 花 開 く 新 たな 日 韓 文 化 交 流, 조 선통신사연구 15호, 조선통신사학회, 2012. 山 口 昭 三, 日 本 の 酒 藏, 九 州 大 學 出 版 會, 2009. 三 宅 理 一, 江 戶 の 外 交 都 市, 鹿 島 出 版 會, 1990. 柴 村 敬 次 郞, ふるさと 下 蒲 刈 (その20) 朝 鮮 通 信 使 資 料 館 御 馳 走 一 番 館 收 藏 品 圖 錄 No.1, 下 蒲 刈 町, 1994. 辛 基 秀, 新 版 朝 鮮 通 信 使 往 來, 明 石 書 店, 2002., 朝 鮮 通 信 使 の 旅 日 記, PHP연구소, 2002. 辛 基 秀 ㆍ 仲 尾 宏, 圖 說 朝 鮮 通 信 使 の 旅, 明 石 書 店, 2000. 이진희, 江 戶 時 代 の 朝 鮮 通 信 使, 講 談 社, 1992. 中 國 經 濟 聯 合 會, 瀨 戶 內 海 歷 史 文 化 回 廊 (팜플렛본), 2013.

28 / 한국민족문화 47 <Abstract> Hiroshima( 廣 島 ) Reflected on Tongshinsa's Sahaegrok in the Chosun Dynasty Han, Tai-Moon This study is to find out how Hiroshima, where Tongshinsa enhancement work has extensively performed in Japan, was reflected in Sahaengrok of Tongshinsa. Firstly, role of Hiroshima, in the point of view of Tongshinsa trip, was identified. Hiroshima was the stop over of distance of water path which includes Seto Naikai's two most representative port villages; Kamagari and Tomonoura where Tongshinsa definitely dropped by in their journey. Hiroshima was also in great favor of serving Tongshinsa so that they can be impressed. Next, scene of Hiroshima in the Sahaengrok was identified. First, Hiroshima has great view. Especially, Hukugenji was greatly praised by Tongshinsa as a place where Taoist hermit lives. Second, Hiroshima was described as a famous area for decent alcohol and good mat which represents Japan along with Bandaiji which is renowned for unique way of living(carry on their life by getting supplies from ships that passing by). Third, Hiroshima was described as a place of cultural exchange between the locals and Tongshinsa and its aspects were also various from literature, arts, tachnoculture, books to custom. Fourth, Hiroshima was also described as a place where life of prisoners, who were captured from Chosun during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is closely revealed.

통신사 사행록에 반영된 히로시마( 廣 島 ) / 29 * Key Words: Tongshinsa, Hiroshima, Sahaengrok, Cultural Exchange, Hospitality ㆍ논문투고일: 2013년 4월 4일 ㆍ심사완료일: 2013년 5월 3일 ㆍ게재결정일: 2013년 5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