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Not for Citation 자유민주주의의 공간: 1960년대 <사상계>의 민주주의론 검토 마상윤 (가톨릭대 국제학부) 1. 들어가며 1960년대의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가 현실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 했나? 만약 그렇다면 그 크기는 얼마나 되었나? 이 질문과 관련해서 대체로 부정적 견해가 지배적이며, 두 가지 지적이 존재한다. 첫째, 한국 자유민주주 의의 실질적 작동 부재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은 자유민주주의가 서양으로부터 외래 이념으로 전파되었으나 한국사회 내에는 정작 그 이념의 실질적 작동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전통과 물적 기반이 결여되어있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냉 전의 맥락에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곧 반공주의의 다른 이름에 불과했다는 지적이다. 즉 자유민주주의는 허울에 불과했으며 실질적 차원에서 있어서는 권 위주의가 작동했다. 그리고 이러한 허울과 실질의 괴리는 냉전이라는 환경적 조건이 규정한 것이었다는 의견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즉 냉전이라는 국제정치의 구조, 그 리고 남북대결이라는 한반도 분단의 구조 아래에서도, 자유민주주의의 진정한 실현을 꿈꾸고 설계했던 일단의 지식인 그룹이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1960 년대의 한국은 정치적으로 4.19에서 5.16으로의 극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던 시 기였다. 또한 2년 반의 군정을 거쳐 제3공화국이 성립된 이후, 박정희 권위주 의 체제가 6 3 사태와 같은 위기를 겪으면서도 비교적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그러면서도 1960년대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외양이 유지되던 시기였다. 제한적 으로나마 언론의 자유가 주어져있었고, <사상계> 같은 잡지를 중심으로 지식 인들의 활동 공간이 유지되었다. <사상계>는 당시 지식사회를 대표하는 저널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 특히 자유민주주의 표방하는 지식인들의 주도했던 바, 이들은 권위주의 정부에 대한 비판의 거리를 두면서 동시에 혁신계 라고 불린 보다 진보적 지식인 그룹과도 차별성을 유지했다. 이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면서도 강력한 반공주의 입 장을 견지하였고, 동시에 후진성의 탈피를 위한 근대화 과제에도 열정을 나타 - 1 -
냈다. <사상계>로 대표되는 자유민주주의자들은 무엇을 꿈꿨는가? 이들의 꿈은 애당 초 실현될 수 없는 헛된 것이었나? 이들의 한계는 무엇이었는가? 1960년대 자유민주주의자들의 좌절이 21세기 한국에 던지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본 논 문은 이상의 질문에 답하며 1960년대 한국의 자유민주주의가 지녔던 가능성과 한계, 그리고 특징에 대해 검토해보고자 한다. 2. 구성 및 연구방법 1960년대 한국정치의 흐름과 맥락은 아래와 같이 대별해볼 수 있을 것이다. - 4 19와 5 16 - 민정이양의 진통과 1963년 대통령선거 - 6 3사태와 민족적 민주주의 논란 - 경제성장의 시동과 1967년 대통령선거 - 안보위기와 삼선개헌을 향한 움직임 본 논문은 이상의 정치사적 흐름에 유의하면서 민주주의에 관한 담론 분석을 시도한다.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텍스트는 주로 <사상계> 및 기타 언론의 민 주주의에 관한 기사이며, 1) 박정희 저작과 연설문 및 기타 정부간행 홍보물도 참조하였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최근 일부 선행연구가 이루어졌다. - 강정인 교수와 서강대 그룹의 논저 2) - 이상록 3) - 황병주 4) 그러나 외래 이념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가 한국의 현실적 조건과 빚어내는 괴 리감 속에서 아래의 두 가지 대응이 나타났다는 노재봉(1978)의 지적이 이상 1) 신문기사는 네이버 옛날 신문 서비스를 활용함. 2) 강정인, 박정희 대통령의 민주주의 담론 분석: 행정적 민족적 한국적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철 학논집 제27집 (2011년 11월). 3) 이상록, 4 19민주항쟁 직후 한국 지식인들의 민주주의 인식: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적 사회주의를 중심 으로, 사총 71 (2010년 9월); 1960~70년대 민주화운동 세력의 민주주의 담론, 역사와 현실 제77호 (2010년 9월). 4) 황병주, 유신체제의 대중인식과 동원담론, 상허학보 32집 (2011년 6월); 1950년대 엘리트 지식 인의 민주주의 인식: 조병옥과 유진오를 중심으로, 사학연구 제89호 (2008). - 2 -
의 선행연구에서는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 서양에서 수 입된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면서 이를 토착적 이념으로 대체해야한다고 주장 하는 입장이고, 둘째는 자유민주주의의 추상적 기준을 이상화 내지 절대화하면 서 이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의 정치를 부정하는 입장이다. 5) 3. 박정희 체제의 성립, 1961-1963 1961년 5월 16일 새벽 한국에서 군사쿠데타가 발생했다. 박정희 소장을 중심 으로 하는 일단의 장교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쿠데타로서 동원된 병력은 3,600여명 수준이었다. 쿠데타 군은 큰 저항 없이 한강을 건너 서울로 진입했 으며, 주요 기관과 시설을 점령했다. 그리고 군사혁명위원회를 세워 입법, 사 법, 행정의 정부기능을 접수했으며, 그 의장에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을 추대했 다. 이어 서울중앙방송을 통해 이 사실을 6개항으로 이루어진 혁명공약과 함 께 발표하였다. 군사 혁명 위원회는 첫째, 반공을 국시( 國 是 )의 제일의( 第 一 義 )로 삼고, 지금 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둘째,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 한 자유우방과의 우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입니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 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할 것입니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 民 生 苦 )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 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 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 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 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 니다. 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한국 현지와 워싱턴이 엇갈렸다. 주한미국대사관 과 주한미군사령부는 즉각 쿠데타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냈다. 하지만 워싱턴의 반응은 좀 더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주한미국대사관의 공개적인 쿠데타 반대 입장 표명에 반대하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을 5) 노재봉,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주주의: 한국의 경우, 사상과 실천 (서울: 녹두, 1986). - 3 -
가지고 있었다. 워싱턴은 쿠데타 발생 후 3일간 주한미국대사관으로 하여금 한국의 내정에 개입하는 언급을 자제시킨 것 이외에는 어떠한 정책적 지침도 내리지 않고 있었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캐나다 오타와를 방문 중이었다. 한국에서의 쿠데타 발생에 대해서는 체스터 보울즈 국무부 부장관을 통해 보 고받았으나, 구체적인 정책지침은 하달되지 않았다. 미국이 조심스런 대응을 모색하고 있던 3일 동안 쿠데타는 점차로 기정사실화 되어갔다. 즉 제2공화국 정부가 붕괴하고 군사쿠데타 세력의 군사정부가 사실 상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쿠데타 발생 당일 새벽 장면총 리는 미 대사관으로 피신하려했으나 실패하고 혜화동의 가르멜 수녀원에 은신 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미국 대사관측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쿠데타에 대한 대 응을 도모하였다. 그의 기본적인 생각과 요청은 미국 정부가 나서서 쿠데타를 반대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성급한 행동을 자제한 채 상황의 전개를 조심스럽게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으므로 장면 총리의 요청이 받아들여 질 수는 없었다. 결국 5월 18일 장면 총리는 은신처에서 나와 쿠데타 세력의 요구에 따라 내각을 해산하였다. 이로써 쿠데타는 발생 3일 만에 정부전복 및 정부기능접수라는 일차적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쿠데타가 비교적 쉽게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 가 있었겠지만 그중에서도 쿠데타를 진압하려는 노력이 적극적으로 기울여지 지 않았던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쿠데타에 동원된 병력이 3,600여명에 불과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일차적으로는 장면 내각의 소극적 대응이 문제 였다. 장면 총리는 쿠데타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대응책을 모색하기에 앞서 은신처부터 찾았다. 물론 군 내부에서 쿠데타에 가담했거나 동조하는 세 력의 범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실제로 서울 인근에서 긴급히 동 원할 수 있는 병력이 그리 많지 않았던 상황에서 군 병력 동원을 통한 쿠데타 진압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장면총리는 이미 장안에 파 다하게 떠돌던 쿠데타설과 관련하여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에게 내사를 지시했 었던 바 있으나 장도영 참모총장은 걱정할 것 없다고만 답했었다. 6) 이런 상황 에서 장도영 총장의 이름이 군사혁명위원회의 위원장으로 발표되었으니 장면 총리로서는 누구를 믿고 쿠데타 진압을 시도해야할 것인지 실로 난감하지 않 을 수 없었다. 또한 윤보선 대통령이 일선 군부대의 지휘관들에게 무력충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친서를 전달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결국 장면 총 6) 조갑제, 한강의 새벽: 박정희 소장은 왜 일어났는가? (서울: 조갑제닷컴, 2011), pp. 219-230. - 4 -
리는 미국의 지원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당시 은신해있던 장면과 주 로 의견을 나누었던 주한미국대사관의 마샬 그린 공사는 미국이 돕기 전에 해 당국 정부의 노력이 우선적으로 경주되어야한다며 장면 총리가 은신처에서 나 와 사태수습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할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그린 공사의 말 처럼 장면총리가 사태수습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하더라도 과연 미국이 장면 정부를 지원하는 차원에서의 개입을 시도했을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다. 전술하였듯이 미국정부는 한국의 상황을 좀 더 두고 지켜보자는 입장이었 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의 케네디행정부가 한국의 쿠데타 상황에 조심스럽게 대응했던 데에 는 한국의 정치경제적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부정적 인식이 배경으로 작용하 고 있었다. 7) 여기에는 서울에서 USOM 부단장으로 한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 원조 활동을 담당하던 휴 팔리(Hugh Farley)라는 전직 관료의 개인적 역할이 컸다. 1961년 2월 사직 후 서울에서 워싱턴으로 돌아온 팔리는 자신의 한국에 서의 경험을 보고서로 작성하여 워싱턴 관계에 배포하였다. 팔리의 보고서는 한국에 지원되는 미국의 경제원조가 한국정부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비효율 때문에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미국의 원조정책 뿐 아니라 한국의 대내적 개혁을 위한 압력을 가하는 등 대한정책 전반을 시급히 전격적 으로 개선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한국은 그리고 미국의 대한정책은 심각한 파국을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8) 팔리의 개인적 캠페인은 꽤 효과가 있었다. 특히 케네디 대통령의 국가안보부 보좌관으로 새로운 제3세계정책을 세우고자 했던 로스토우(Rostow) 등 백악관 참모들의 관심을 끌었고, 케네디 대통령에게도 보고되었다. 결국 5월 5일 NSC 회의에 참석한 케네디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한국대책반(Korea Task Force)이 구성되었다. 한국대책반은 5월까지 대한정책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되었다. 대책반의 보고서 제1차 초안은 5월 15일자로 작성되었다. 워싱턴과 서울의 시차를 감안하면 한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하기 직전에 보고서 초안이 작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보고서 초안을 통해 쿠테타 직전의 한국 상황에 대한 미국정부의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잘 들여다볼 수 있다. 그것은 요 컨대 한국 사회의 정치적 불안정성이 남아있으며 이러한 불안정성은 장기적 사회경제발전을 통해서만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보고서는 미 7) Komer to Rostow, March 15, 1961, FRUS, 1961-1963, vol.22, p.426. 8) Farley to Rostow, March 15, 1961, Korea: General, Box 127, National Security Files, John F. Kennedy Library. - 5 -
국의 원조 정책도 이러한 방향에 맞추어 조정되어야하며, 한국 정부도 경제개 발을 위한 장기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아울러 경제개발계 획을 실행에 옮기려면 강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고 또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 는 정부가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 9) 케네디행정부가 장면 정부 당시의 한국 상황을 이렇게 판단하고 있었던 가운 데 쿠데타가 발생했던 것이었으며, 따라서 케네티 행정부의 쿠데타에 대한 반 응은 이와 같은 인식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근대화에 필요 한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을 강조하면서 장면 정부의 약한 리더십을 수정 및 보완해야할 일종의 문제점으로 인식하고 있었던바, 이러한 인식은 케네디 행정 부가 전복 위기에 처한 장면정부를 적극적으로 돕지 않은 이유를 제공하고 있 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쿠데타 성공 이후의 미국의 정책은 한국대책반 보고서 최종본이 6월 5일 제출 되면서 윤곽이 잡혔다. 그 기본 내용은 초안과 비교했을 때 큰 차이는 없었다. 장기적 차원에서 사회경제적 발전을 촉진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쿠데타로 인한 정치적 상황변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경제적 저발전이 라는 데 변함이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다만 새로운 대한정책의 입 안자들은 쿠데타로 인해 상대해야할 한국의 정권이 약한 민주적 민간정부에서 강한 권위주의적 임시군사정부로 달라졌으므로 전술적 차원에서의 변화가 필 요할 뿐이라고 인식했다. 10) 미국의 정책은 군사정부를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고 이들이 한국의 사회경제적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개혁에 나서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 새로운 세력들의 거친 권위주의와 민족주의적 성격을 점차적으로 완화시켜 길 들여가고자 했다. 이러한 내용의 정책을 직접 담당할 사람은 6월 22일 주한미 국대사로 부임한 사뮤엘 버거(Berger)였다. 버거 대사는 부임 2달 후인 8월 23일 본국에 군사정부의 최고지도자인 박정희 를 워싱턴에 초청할 것을 제안하였다. 버거 대사는 군사정부가 진정한 위로부 터의 혁명 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며 한국의 새로운 정권담당세력에 대해 매우 9) Report of the Korea Task Force, First Draft, May 15, 1961, Box 9, Entry 5234, Record Group 59, NARA. 10) Presidential Task Force on Korea, Report to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 June 5, 1961, Korea: General, Box 127, National Security Files, John F. Kennedy Library. - 6 -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물론 방미 초청은 미국이 군사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상징성이 큰 정치적 행위였다. 동시에 박정희가 미국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보다 잘 이해하고 수용하도록 만들려는 의도도 숨어있었다. 보다 구 체적으로 말하자면, 미국은 한국의 경제개발 및 조속한 민정이양에 대한 중요 성을 강조하고 박정희가 이를 잘 따르도록 압력을 가하고자 했던 것이다. 11) 버거 대사의 제안은 받아들여져서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11월 14일부터 16일까지 미국을 방문하여 케네디 대통령 및 미국 행정부의 여 러 고위 인사들을 만났다. 14일 박정희와의 만남에서 케네디는 비록 구체적인 지원의 규모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한국의 장기적 경제발전을 위해 가능한 한 최대의 지원을 계속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약속은 회담 직후 발표된 공동성 명에 포함되었다. 공동성명에는 또한 1963년 여름까지 민정이양을 실시할 것 이라는 박정희의 약속을 확인하는 내용도 담겼다. 하지만 케네디 대통령의 직접적인 관심과 압력행사에도 불구하고 민정이양에 이르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것은 주로 소위 혁명주체세력 의 내 분에 기인한 것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박정희는 민정이양 계획에 대한 번복을 반복했다. 민정이양은 1963년 말에 선거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계획되었 다. 하지만 그 이외의 모든 것은 결정된 바가 없었다. 누가 어떤 방식으로 선 거에 출마할 것인지 등의 중요한 문제들이 남아있었다. 이 문제를 놓고 군사정 부 내부의 경쟁과 다툼이 치열해졌다. 특히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중심으로 한 육사 8기 영관장교들과 장성들 간의 갈등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와중에서 박정희는 1963년 2월 18일 선거 불출마를 결심하고 이를 공표하였다. 미국도 박정희의 계획을 지지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마음을 바꾸고 3월 16일 군정 연장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는 계획을 공표했다. 사회안정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케네디행정부는 박정희가 군정연장안을 포기하고 원래 계획대로 민정이양을 추진하도록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국무부의 지시 하에 버거 대사는 3월 21일 박정희 의장을 만나 군정연장에 대한 미국의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혔 다. 12) 같은 날 워싱턴에서 케네디 대통령도 오후 기자회견 도중에 한국과 관 련하여 남한에서의 민주주의적 정부의 회복에 대한 최근의 토의를 계속해서 11) Telegram 370 from Amembassy Seoul, August 23, 1961, Korea: Park Visit, Box 128, NSF, JFKL. 12) Telegram 682 from Amembassy Seoul, March 21, 1963, POL 15 S-KOR, RG 59, NARA. - 7 -
주시하고 있다 고 간략히 언급하였다. 원래 이 기자회견은 라틴아메리카 관련 문제를 다루기 위한 것이었으나 한국에 대한 언급이 특별히 추가된 것이었 다. 13) 3월 25일 국무부 대변인의 정오기자회견에서는 미국의 입장이 다시 한 번 다음과 같이 공개적으로 표명되었다. 군정을 4년 더 지속하려는 군사정부의 노력은 한국에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 다. 우리는 군정연장이 안정적이고 효과적인 정부에 대한 위협이 될 것이라 고 믿는다. [중략] 우리는 군사정부와 한국의 주요정치그룹들이 나라 전체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민정이양 절차를 함께 만들어내기를 희망한다. 14) 3월 29일에는 케네디 대통령이 정일권 주미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다시금 민정 이양에 대한 압력을 가하였다. 이 점에 대해 미국외교문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 하고 있다. 대통령은 자신이 한국 상황을 매우 자세히 관찰하고 있으며, 버거 대사가 한 국 지도자들과 대화를 나눔에 있어서 자신의 지시에 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미국이 한국의 자유와 운명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 고, 한국정부와 정치지도자들이 대화를 통해 합의를 이루어 책임 있는 조건 하에서 민주주의로의 이양이 가능하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15) 미국은 이와 같이 케네디 대통령까지 나서서 이례적으로 강력한 외교적 압력 을 가했으며, 이에 더하여 경제적 압력도 가했다. 미국은 군사정부가 만약 군 정연장안 국민투표를 강행할 경우 대한경제원조를 축소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 하고, 이러한 위협을 뒷받침하기 위해 실제로 최소한의 분량을 제외한 대한경 제원조건에 대한 승인을 중단하였다. 이로써 PL-480에 따른 식량지원프로그램 도 중단되었다. 미국의 전 방위적 압박 하에 결국 박정희는 군정연장안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 를 연기하는 선으로 물러섰다. 그리고 7월 27일, 각각 10월 중순과 11월 말에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를 실시할 것임을 발표하였다. 이어 8월 30일 박정 희가 군에서 퇴역하고, 선거를 위해 조직된 정당인 민주공화당의 대통령후보가 되었다. 10월 15일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는 46.64%를 득표하여 13) Record of the meeting, March 21, 1963, FRUS, 1961-1963, Vol. 22, p. 634. 14) Telegram 579 to Amembassy Seoul, March 25, 1963, POL 15 S-KOR, RG 59, NARA. 15) Telegram 596 to Amembassy Seoul, March 30, 1963, DDRS. - 8 -
45.1%를 얻은 단독야당후보 윤보선을 가까스로 따돌리고 대통령에 당선되었 다. 이어 11월 26일 열린 국회의원선거에서는 공화당이 175석 중 110석을 차 지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12월 17일 제3공화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출범하 였다. 비교적 공정한 선거를 통해 출범한 민간정부였지만 쿠데타를 일으켜 정 권을 잡았던 군부세력이 그대로 정치 일선에 남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군사정 부의 연장으로 볼 수 있는 측면도 있었다. 4. 개발과 독재, 1964-1968 선거를 통해 새롭게 출범한 제3공화국 정부는 이제 그동안 안고 있던 민정이 양이라는 부담을 당분간 벗어놓은 채 경제개발과 같은 과제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주변 여건이 좋지만은 않았다.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자금이 필 요했는데 필요자금의 조달이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박정희는 국가와 혁명과 나 라는 저서에서 정권을 잡고 나서 들여다보니 마치 도둑맞은 폐가( 廢 家 )를 인수한 것 같았다 고 적고 있다. 그만큼 정부의 재정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뜻 이다. 그리고 미국이 한국의 실정을 잘 이해해서 정치적으로 자꾸 민주주의를 따르라는 조건을 달지 말고 안보와 경제를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 력하였다. 16) 그만큼 박정희의 입장에서는 미국의 경제적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원조정책은 거꾸로 가고 있었다. 미국은 케네디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대 외원조에 있어서의 효율성을 강조하며 그 절대액수를 줄이고 수원국의 부정부 패를 개선할 개혁조치들을 도입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또 원조의 형태 에 있어서도 무상원조를 줄이고 대신 차관의 비중을 늘리고 있었다. 한국은 원 조규모에 있어서 미국의 전체 경제원조 대상국들 중 3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조정책을 전반적으로 재조정하던 미국 정부로서는 상당한 관심을 두 지 않을 수 없는 대상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물론 미국으로부터의 원조액을 조금이라도 더 받고자했으나 자 금조달을 위해 다른 방법 또한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1962년에 시도 된 화폐개혁의 실패로 내자동원의 가능성은 없다는 점이 확인된 상태였다. 박 정희는 군사정부 시절인 1962년에 화폐단위를 환에서 원으로 바꾸는 화폐개혁 16) 박정희, 국가와 혁명과 나 (서울: 지구촌, 1997), pp. 91, 232. 이 책은 본래 1963년 9월 초판이 간행되었다. - 9 -
을 통해 축재된 지하자금을 끌어내고자 시도한 바 있지만 실패를 거둔 일이 있었다. 경제적 예측가능성을 흐림으로써 오히려 경제적 부작용만 초래하였고, 정치적으로는 미국에 철저히 비밀리에 화폐개혁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군사정부에 대한 불신을 가중시켰다. 더욱 중요한 점은 화폐개혁을 통해 나라 안에는 숨어있는 자본조차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 정부가 적극 추진한 것은 일본과의 관계정상화를 위 한 한일회담이었다. 민정이양 문제가 해결된 후 박정희는 한일회담에 더욱 박 차를 가했다. 일본과 외교관계가 다시 맺어져야 일본으로부터 경제개발에 필요 한 자본을 들여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도 막후에서 한일회담을 적극 후원 하였다. 김종필이 협상대표로 나선 협상에는 일정한 진전이 이루어져서 1964 년 3월 24일 김종필은 일본 측 협상대표인 오히라 외무상과 함께 5월까지 한 일조약 서명이 가능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한일회담에 대한 국내의 반대는 거셌다. 김종필과 오히라의 발언은 한일회담 반대세력을 더욱 자극하고 결집시켰다. 한일 시위는 점차 격화되어갔다. 시위의 구호도 굴욕적 외교 에 대한 반대에서 박정희의 퇴진으로 옮겨갔다. 시위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 로 확대된 데에는 김종필이 회담에 관여한 것도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김종필은 한일회담 반대의 직접적인 표적이 되었다. 또한 그에 대한 정치적 반 대세력은 정권 내에도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민간정부로 갓 출범하자마자 한 일회담반대를 외치는 학생데모에 일차적으로 흔들렸고, 김종필에 반대하는 내 부의 세력으로 인해 또다시 흔들렸다. 6월 3일 시위사태는 더 이상 경찰력으 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였 다. 6.3 사태를 두고 제3세계 정책을 담당하던 한 백악관 관리는 다음과 같이 푸념하였다. 이 나라는 아직 민주주의를 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 50년대의 이승만식 독재 때보다도 더 그렇다. 17) 미국은 단기적 차원에서 볼 때 한국의 정치적 불안정의 핵심 원인은 김종필의 존재라고 보았다. 18) 민정이양의 과정에서 김종필은 군사정부의 내분의 원인으 로 지목되어 중앙정보부장직을 사직하고 이미 한 차례 외유를 떠났던 적이 있 었다. 6.3 사태의 와중에서 미국은 박정희에게 김종필의 제거를 다시 한 번 강 력히 요구했고, 6월 18일 다시 자의반타의반의 미국행에 올랐다. 김종필이 정 계에서 사라진 후 박정희의 리더십은 강화되었다. 정치적 내분과 갈등의 주된 17) Komer to Bundy, June 3, 1964, DDRS. 18) Telegram 1620 from Amembassy Seoul, June 6, 1964, POL 23-8 KOR S, Record Group 59, NARA. - 10 -
원인을 제공해오던 김종필이 제거됨으로써 정치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갔다. 또한 그동안 김종필과 그의 반대 세력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던 박정희는 보다 자신감을 가지고 통치에 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민주주의적 제도가 깊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 한국정치에서 대통령의 자신감과 권위주의적 태도 사이의 간극은 좁았다. 그리고 자신감 있는 리더십이 자칫 권위주의적 통치로 선을 넘어갔을 때 그것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는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한편 케네디 행정부는 한국에 대한 경제 원조를 축소하는 것뿐만 아니라 군사 적 차원에서 한국에서의 부담을 경감하는 데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당 시 베트남에서의 정세가 악화되어가면서 미국의 아시아 정책의 주된 관심도 따라서 옮겨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국에 대한 군사 지원이 과도하다는 인식 하에 한국군을 감축하고 동시에 주한미군의 규모를 줄이고자 하는 정책 검토 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 이러한 검토는 1963년 11월 케네디가 암살로 생을 마친 후 린든 존슨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한 이후에도 지속되 었다.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이러한 움직임을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주한미군철수를 막기 위한 방안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한국군을 베트남전에 파 병하는 것이었다. 한국군이 베트남에 갈 테니 한국에서 주둔하고 있는 미군 병 력은 그대로 두면 되지 않겠냐는 계산이었다. 한국정부는 1964년 봄부터 베트 남 파병 의사를 기회가 닿는 대로 적극적으로 미국 정부에 표명하였다. 사실 비슷한 제안은 이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케네디 행정부는 이러한 방안에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베트남 정세가 악화되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미국의 베트남 군사개입이 본격화된 단계는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군은 별로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케네디 암살 후 존슨이 대통령직에 오르면서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 은 크게 확대되고 심화되기 시작했다. 1965년 3월에 북베트남에 대한 대규모 공습작전이 개시되었고, 1965년 4월에는 미 지상군 병력을 본격적으로 베트남 에 투입한다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존슨은 미국의 베트남 군사개입이 아시 아에서 반공을 위한 것이라고 내세웠고 이러한 명분이 그럴듯해 보이기 위해 서는 다른 아시아 반공국가들이 미국과 함께 베트남에서 공산주의에 맞서 싸 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요 19) 마상윤, 미완의 계획 참고. - 11 -
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파병의사를 밝혀두었던 박정희는 파병요청에 적극 대응했다. 1964년 9월 의료단과 태권도 교관요원으로 구성된 소규모 한국군 군사지원단이 베트남에 파병되었다. 1965년 3월에는 2차로 공병부대가 파병되었다. 1965년 10월에는 최초로 육군 1개 사단과 해병 1개 여단의 전투병력이 파견되었다. 그리고 1966년 9월에는 육군 1개 사단이 증파되었다. 20) 존슨행정부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거듭해서 요청해오기 시작함에 따라 한 미관계의 성격이 본질적으로까지는 아니더라도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까지의 한미관계는 언제나 일방적으로 한국이 미국에 요청을 하고 미국은 이 를 들어주거나 거부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제 미국이 한국군 파병을 절실 히 요청해옴에 따라 한국도 미국에 대해 일정한 레버리지를 갖게 된 셈이었다. 다시 말해서 여전히 한미 간의 국력 격차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켰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관계에 유래 없는 역전 이 일어나 미 행정부가 한 국정부에 뭔가를 부탁해야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파병의 전제조건을 달아 미국으로부터 여러 경제적 실익을 챙겼다. 파병장병에 대한 월급을 미국이 제공하기도 했고, 베트남전쟁을 위한 군수조달 시장에서 한국 업체가 상대적으로 혜택을 입기도 했다. 베트남 현지에 한국 기업이 진출하는 등 월남특수를 누릴 수 있게 된 것 이다. 물론 이렇게 해서 벌어들인 돈은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베트남 파병의 효과는 경제적 차원에 그치지 않았다. 정치적 차원의 효 과도 컸다. 미국은 박정희정권의 성격을 미국의 정책방향에 부합하고 또한 미 국의 국익에도 도움이 되는 온건한 권위주의(benign authoritarianism)로 인 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정희에 대한 전면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물론 이 당시 한국은 빠른 경제성장을 시작하였고, 국제적으로도 베트남에서 미국을 돕고 있었으니 미국이 그와 같은 인식을 갖게 된 것이 그리 이상하지만은 않 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에 대한 미국의 긍정적 인식과 적극적 지원은 때로는 과도한 측면이 있었다. 예컨대 1967년 맥켄지 주한영국대사는 런던의 외무성 에 보고한 전문에서 당시 한국의 선거와 관련된 미국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20) 마상윤, 한국군 베트남 파병결정과 국회의 역할 국제 지역연구 제22권 제2호, 2013년 여름호. - 12 -
베트남에 보낼 병력을 더 얻어내려는 다급한 마음에 미국인들은 이런저런 식으로 한국 상황에 개입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정부쪽으로 기울고 있다. 이는 이해할만 한 태도이기는하지만 장래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신민당은 지금은 과도하게 반 미적이지 않다. [중략] 하지만 그렇게 될 수 있다. 21)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1964년 6.3 사태의 여파로 김종필이 권력의 핵심으로부 터 제거되면서 박정희는 더 이상 다른 누구에게 의지하거나 견제를 받지 않게 되었다. 박정희의 권력 독점은 이후 점점 더 심화되었는데, 이는 경제개발의 성공적 추진에 따른 국정운영에 대한 자신감, 정치적 견제 세력 부재 및 견제 장치 무력화, 그리고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 축소 등에 기 인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박정희 중심의 일인지배체제가 구축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또 일면 개 입하면서도 박정희 체제의 긍정적 측면에만 주로 관심을 둘 뿐이었다. 하지만 1968년 초 한반도에서의 안보위기를 겪으면서 박정희로의 권력집중이 갖는 대 내외적 부정적 효과에 대해서도 인식하기 시작했다. 안보위기는 1968년 1월 12일 북한의 청와대습격기도사건과 함께 발생했다. 북 한이 박정희를 암살하기 위해 남파한 특수 훈련된 무장병력이 청와대 바로 뒤 까지 남하하였다가 1월 12일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사살 및 생포된 사건 이었다. 이 사건이 발생한지 불과 이틀 뒤에 북한은 원산 앞바다 공해상에서 작전 중이던 미 해군의 정보수집선 푸에블로호를 강제 나포하였다. 북한의 잇 단 도발행위에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은 일촉즉발의 상태로까지 높아졌다. 미국은 푸에블로호 나포 직후 항공모함을 이동시켜 군사적 충돌에 대비하는 한편 북한에 대한 무력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이러한 가운데 미국이 또한 걱정 한 것은 북한의 도발에 대한 한국의 무력대응이었다. 한국이 북한의 도발에 군 사적으로 대응할 경우 자칫 한반도에서의 전면전으로 확산될 위험이 있다고 본 것이다. 이 당시 미국은 박정희를 심리적으로 대단히 불안정한 상태의 지도자로 인식 했다. 서울 한복판까지 침투한 북한 무장 게릴라에 의해 목숨을 위협 받은 상 21) Mackenzie to Bolland, August 2, 1967, FCO 21/303, British National Archive. - 13 -
태에서 박정희가 사실상 심리적 패닉상태에 빠졌다고 본 것이다. 박정희를 권 위주의적이지만 온건하고 합리적인 지도자라고 보았던 미국의 과거 인식에 비 하면 상당히 극적인 변화였다. 존슨대통령은 밴스(Cyrus Vance)를 특사로 한 국에 파견하여 박정희를 만나도록 했다. 박정희를 진정시키고 위기를 관리하고 자하는 목적이었다. 전술하였듯이 한국에는 이미 사실상의 일인지배체제가 구축되어 더 이상 박정 희를 견제할 내적인 장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동안 미국이 사실상의 정치적 견제세력의 역할을 해왔지만 미국은 더 이상 그런 역할을 맡고자 하지 않았다. 존슨행정부는 1968년 3월 국무부 내에 한국연구그룹(Korea Study Group)을 두어 한국에 대한 정책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정책검토가 즉각적인 정책변경 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방향은 분명했다. 미국의 한국국내정치에 대한 영향력이 축소되는 추세 속에서 한국에 대한 불간섭(non-interference) 및 불 개입(disengagement) 정책으로의 전환해야한다는 것이었다. 5. 맺음말 자유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었던 공간의 크기는 어느 정도였나? 사상계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는 어떤 것이었나? (1) 냉전이 부과하는 제약 - 반공민주주의와 안보국가로서의 성격 -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어있는 환경 아래에서 이미 민주주의의 범위는 협소화 (2) 근대화의 압력 - 빠른 발전을 통해 후진성을 탈피해야한다는 강박관념 - 자유민주주의가 그 자체로서의 목적이자 가치였기 보다는 근대화 달성을 위 한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강하게 지님. 이러한 경향은 비단 한국지식인에 해 당되는 것은 아니며 중국의 사례에도 비슷하게 드러남. 22) - 그러나 이러한 특징은 근대화를 모토로 내걸고 추진한 박정희 권위주의와도 친화성을 갖는 것으로서 권위주의적 근대화에 포섭될 위험을 내포한 것이기 도 함. 22) Christopher Hughes, China and Liveralism Globalised, Millennium: Journal of International Studies, Vol. 24, No.3 (1995). - 14 -
- 서구사회에 대한 강한 동경: 오리엔탈리즘적 자기인식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자유니 민주주의니 시민사회니 시민적 인간이니 하는 개념은 우리에게 있어서 모두 서투른 수입개념이었다. 8 15의 해방으로 우리 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단번에 배급받았다. 그것은 우리의 피의 투쟁의 산물 도 아니요, 혁명으로 전취한 권리도 아니었다. 그러기에 자유니 민주주의니 시민사회니 시민적 인간이니 하는 개념은 우리 것이 아니고 남의 것이었다. ( )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4 19혁명에서 비로소 자유와 민주주의를 찾았고 시민사회와 시민적 인간을 몸소 체험했다. 4 19의 피의 혁명과 더불어 우리 는 세계를 향하여 자유를 논할 자격이 생겼고 민주주의에 참여할 권리를 가 졌다고 할 수 있다. 후세의 우리 사가가 민주주의의 역사를 기록할 때, 4 19 를 빛나는 역사적 시민혁명의 날로 규정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근 대 서구사회가 200년 전에 치른 혁명을 이제 치른 것이다. 23) (3) 지식인 주도성 - 대중권력(popular power)으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공포 - 대중에 대한 계몽주의적 태도 학원마다 분규요, 또 거기에는 폭력사태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니 우리의 교 사와 학생은 모두 지성을 잃었단 말인가? 물론 학원분규의 원인을 이루는 불평과 불만 가운데는 정당한 것도 있고 정당치 아니한 것도 있음을 부인치 못하지만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는데 반드시 폭력적 불법에 호소해야 한다는 것은 어디서 배운 버릇인가? 기업체마다 소동이요 노조가 자본가나 경영자 를 쫓고 자신이 관리하겠다고 하는 것이 일수이니 우리의 생산활동은 모두 마비되고 중단돼도 좋다는 뜻인가? ( ) 자유의 확장이 곧 방종과 무질서와 혼란을 자나내고 있는 것이니 자유에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모르는 국민은 기실 자류를 누릴만한 자격이 없는 국민인 것이요, 무질서와 혼란을 이유로 또 다시 독재자가 등장해도 그 앞에 굴복할 가능성이 큰 국민인 것이다. 24) - 민주주의를 기본적으로 동의에 의한 지배로 이해 -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박정희가 대중에 대해 취한 자세와도 일맥상통함. 더 욱이 박정희의 대중정치가 성공적으로 수행됨에 따라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동의에 의한 지배가 이루어졌음. 이로써 박정희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이 상 당 정도 무력화. 23) 안병욱, 利 의 세대와 義 의 세대, 사상계 83호, 1960년 6월, pp.100-101. 24) 권두언: 4 26 이후의 사회상을 보고, 사상계 84호, 1960년 7월, p.29. - 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