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의 수양론에서 敬과 靜의 상관적 의미 朱熹와 李滉을 중심으로 嚴 連 錫* 1) 目 次 1. 서론 2. 북송대 성리학적 수양론의 배경 3. 주희의 수양론에서 敬과 靜의 상관관계 4. 이황의 수양론에서 靜에 우선하는 敬 5. 결론 1. 서론 본 논문은 성리학의 핵심적 수양 방법으로서 경(敬)과 정(靜)(또는 정좌(靜坐))이 어떤 상관적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하여 주희(朱熹, 1130~1200)와 이황(李滉, 1501~1570)의 수양론적 관점을 비교시각적 견지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北宋 시대 정이(程頤, 1033~1107)와 주희는 敬을 중심으 로 수양론을 제시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이황 및 그 이후의 많은 성리학자들까지 대부분 程頤와 朱熹의 敬 사상을 받아들여 수양론을 언급하고 있다. 물론 학자에 따라서는 誠 또는 義와 같은 개념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靜을 성리학적 수양의 하나로 강조하는 학자는 많지 않다 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북송 시대 주돈이(周敦頤, 1017~1073)가 主靜 을 강조하면서 정[靜:정좌]을 수양의 방 법으로 수용했던 것이 어떻게 성리학의 수양방법에서 잊혀졌는가? 주지하듯이 이것은 기본적으 로 정이가 수양의 방법론을 제시하면서 靜 대신 敬을 마음을 함양하는 방법으로 받아들인 데 연 유한다. 정이는 마음을 보존하여 기를 때에는 모름지기 경건함을 통해서 해야 하며, 학문을 진 1) 전시키는 것은 앎을 극진하게 하는 데 달려 있다 고1)강조하였다. 이 이후 성리학의 수양론에서 靜은 중심적인 자리를 내 준 반면, 敬은 수양의 표준적인 방법이자 목표가 되었다. *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연구교수 1) 二程集 권18, 河南程氏遺書, 涵養須用敬, 進學則在致知 -3 -
4 한국문화 43 그러나 성리학의 수양론에서 敬이 절대적으로 강조됨에도 불구하고, 靜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 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 필자는 그동안 연구자들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주목받 지 못하고 있는 靜을 敬과 연결하여 살펴봄으로써 성리학적 수양론에서 敬과 靜의 상관적 의미 를 주희와 이황의 수양론을 통하여 비교 분석하고자 한다. 실제로 주희는 敬을 수양의 방법으로 강조하기는 하지만, 靜을 배제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주희는 敬이 의미 있게 기능하기 위하 여 靜이 필수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희의 수양론에서 居敬은 주로 格物窮理 와 상관적 관계를 가지면서 병행하는 것으로서 이해 된다.2)2)그러나 주희에서 格物窮理를 행하는 것은 여전히 사물의 이치를 인식하는 주체로서 마음 이다. 따라서 주희에서 敬은 마음의 動靜 곧 未發과 已發의 시각에서도 검토할 수 있다. 하지만 주희에서 格物窮理와 居敬이라는 마음의 수양과정은 한 순간의 마음의 작용에 따른 일회적인 사 건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쌓아가는 점진적인 과정이다. 여기에서 마음이 경건함을 위주로 하여 사물의 이치를 한 단계 한 단계 탐구하여 어느 순간 에 하나로 관통하는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사물의 이치를 비추어 주고 여기에 주의를 집중케 하는 지속적인 토대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사물의 이치를 비추어 주는 주체는 다름 아닌 마음의 고요함[靜] 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 마음의 고요함 은 움직임 에 상대적인 의미에 서의 고요함 이 아니다. 이것은 靜이 사물의 이치를 밝게 인식할 수 있는 절대적인 주체로서 마 음의 고요함 과 이발에 대립하는 미발로서의 마음의 고요함 으로 구분되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 서 본 논문은 靜을 절대적 의미와 상대적 의미로 구분함으로써, 이런 의미의 차이가 주희와 이 황이 말하는 敬과 靜의 의미에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분석하고자 한다. 그러면 이러한 목표에 따라 다음 제2장에서는 먼저 성리학의 수양론에서 敬과 靜의 상관적 관계에 대한 조망을 얻기 위하여 북송대에 성리학의 수양론이 형성되는 과정과 배경에 대하여 개관하고자 한다. 다음 제3장에서는 주희의 수양론에서 敬과 靜 사이의 상관적 의미를 고찰하고, 제4장에서 이황의 수양론에서 靜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는 敬의 의미에 대하여 고찰할 예정 이다. 마지막 결론에서는 성리학적 수양방법에서 敬과 함께 수양론적 근본 토대로서 靜이 가지 는 의미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2) 吾妻重二는 정이와 주희의 철학에서 居敬에 관한 연구는 대체로 세 방면에서 이루어져 온 것으로 보았 다. 그는 첫째는 道學의 사상구조에 나아가 해명하는 것으로, 사상사적인 넓이를 결여하는 한계가 있다. 둘째는 비판적인 입장에서 異敎인 불교와 도교의 수양법을 표절한 것으로 보는 설이 있는데, 이런 시각 은 청대 고증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은 도학에 대한 반감에서 나왔기 때문에 피상적이고 곡해하는 면이 있다. 셋째는 불교 도교와의 연관성을 역사적인 문맥에서 객관적으로 위치지우고자 하는 연구가 있 다 고 보았다.(吾妻重二, 2004 朱子學の新硏究, 東京 : 創文社, 399면)
성리학의 수양론에서 敬과 靜의 상관적 의미 5 2. 북송대 성리학적 수양론의 배경 일반적으로 성리학의 수양론은 주돈이, 정이를 중심으로 한 북송대 성리학의 선구자들과 주희 의 종합을 거치는 과정에서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점차로 형성되었다. 초기에 靜을 중심으로 하 는 主靜說이 주돈이를 중심으로 논의되다가, 정이 이후 敬과 致知를 강조하는 居敬致知說, 그리 고 이를 계승하면서도 敬을 窮理와 결합하면서 존양, 성찰을 언급한 주희의 居敬窮理說로 전개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성리학의 수양 이론은 북송대에 성리학이 형성되기 시작할 때 도교와 불교의 수양론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언급된다. 특히 정(靜)(또는 정좌(靜坐))은 선진시대 도가적 연원을 가 3) 지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3)주돈이는 북송대 성리학의 선구자 가운데 靜을 수양의 문제로 가장 먼저 주목했던 학자였다. 그는 마음을 수양하는 방법으로 고요함을 위주로 함[主靜] 을 두 드러지게 주장하였다. 그는 태극도설 에서 오직 사람만이 그(二氣) 빼어난 것을 얻어 가장 영 명하다. 형체가 생기면서, 정신은 지각을 드러내는데, 다섯 가지 본성이 사물에 감응하여 선과 악이 나뉘면서 온갖 일이 출현한다. 聖人은 이것을 中正仁義로 안정시키되 고요함을 위주로 하 4) 여[主靜] 인륜의 표준[人極]을 세운다 라고4)하여 主靜을 분명히 하고 있다. 대체로 靜을 도가적 연원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할 때 학자들은 靜을 일상사의 윤리적 실천의 문제와 분리된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주돈이는 태극도설 에서 仁義禮智를 본질로 하는 본성이 사물에 이끌리지 않도록 하는 관점에서 主靜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언급하 는 靜이 성리학자들의 시각으로서 일상사의 도덕적 문제와 유리된 도가와 불교의 虛靜, 또는 寂 滅의 의미가 아님을 보여 주는 것이다. 3) 노자 와 장자 에는 정에 관한 언급이 여러 군데 나오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은 대표적인 예이다. 곧 虛의 궁극을 다하고 靜의 독실함을 지키면 만물이 동시에 생기더라도 나는 그것이 돌아가는 곳을 볼 것 이다. 대개 사물들이 생성되면서 각각 다시 그 근본으로 돌아가는 데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靜이라고 하며, 이것을 명으로 돌아간다 고 말한다.(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復. 夫物芸芸, 各復歸其根. 歸 根曰靜, 是謂復命)( 老子 16장)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가 되고, 고요함은 조급함의 군주가 된다. 그래서 성인은 종일토록 다니면서도 가지고 다니는 물건들을 벗어나지 않는다.(重爲輕根, 靜爲躁君, 是以 聖人終日行不離輜重)( 老子 26장). 성인은 내가 무위하면 백성들은 저절로 교화되고, 내가 고요함을 좋 아하면 백성들은 저절로 바르게 된다. 내가 의도적으로 일삼지 않으면 백성들은 저절로 부유하게 되고, 내가 욕심을 가지지 않으면 백성들은 저절로 소박해진다. 고 말하였다. (聖人云, 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 而民自正, 我無事而民自富, 我無欲而民自樸.)( 老子 57장). 옛날 천하를 길렀던 자는 무욕하여 천하가 풍 족하였고, 무위하여 만물이 조화되었으며, 그윽하고 고요하여 백성들이 안정되었다. (古之畜天下者, 无欲 而天下足, 无爲而萬物化, 淵靜而百姓定.)( 莊子 天地 ) 물이 고요하면 가는 터럭을 밝게 비추고, 저울 이 고르고 척도에 맞으면 장인이 그것을 법으로 취한다. 물이 고요해도 밝은데 하물며 정신에 있어서이 겠는가! 성인의 마음이 고요한 것은 천지를 비추는 거울이고, 만물을 비추는 거울이다. (水靜則明燭鬚眉, 平中準, 大匠取法焉. 水靜猶明,而況精神! 聖人之心靜乎! 天地之鑑也, 萬物之鏡也..)( 莊子 天道 ) 4) 주돈이, 太極圖說, 惟人也, 得其秀而最靈, 形旣生矣, 神發知矣. 五性感動而善惡分, 萬事出矣. 聖人定之 以中正仁義, 而主靜立人極焉.
6 한국문화 43 본래 靜은 선진 유학 경전인 예기 악기 에 본성과 관련하여 그 의미가 잘 드러나 있다. 곧 사람이 타고난 고요함 은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이다. 사물에 자극받고 느껴져 움직이는 것은 본성에서 나오는 욕망이다. 사람이 끊임없이 사물에 자극받는데, 사람의 호오의 감정을 조절 하지 못하면 이것은 사물이 이를 때 사람이 그 사물에 이끌리는 것이다. 사람이 사물에 이끌리 면 천리를 없애고 인욕을 다할 것이다 5)고5)하였다. 여기에서 고요함 은 본성의 본질적인 상태로 서 하늘로부터 받은 본연의 것이라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나아가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희로애 락의 욕망을 조절하지 못하면 天理가 소멸되고 人欲이 극심할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외 물의 자극에 의하여 본성으로부터 생기는 희로애락의 욕망은 본연의 고요함 을 어지럽게 하는 요소로 간주되고 있다. 이 악기 편에서는 또한 天理와 人欲을 구분하면서 고요함 을 본성의 본 질적인 특성으로서 천리가 내재되어 있는 상태로 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주돈이에 있어서 이러한 본성의 고요함 은 욕망으로부터 어지럽혀지지 않는 한 寂滅의 상태와 달리 천리를 밝게 인식하여 인륜을 행할 수 있는 밝은 지각[明覺] 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다. 주돈이는 성인의 경지를 언급하면서 이처럼 고요함 이 사물의 이치를 밝게 관통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 주목하고 있다. 성인은 배울 수 있습니까? 배울 수 있다. 요점이 있습니까? 있다. 어떤 것입니까? (마음을) 전일하게 하는 것이 요점이 된다. 전일하게 하는 것은 욕심이 없는 것이다. 욕심이 없으면 고요할 때는 텅 비고, 움직일 때는 곧다. 고요하여 텅 비면 밝으며, 밝으면 사리에 통한다. 움직여서 곧으 6)6) 면 공정하고, 공정하면 널리 보편적이다. 밝게 통하고 공정하고 넓으면 (성인에) 가까울 것이다. 요컨대, 주돈이가 본성의 고요함이 욕망에 의해 움직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고요함을 길러 주는 수양의 방법으로 靜坐를 말했을 때 이 고요함 은 밝게 사리에 통하며, 마음의 움직임을 공 정하고 보편적이게 할 수 있는 밝은 지각능력을 지닌 고요함인 것이다.7)7)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이는 靜坐 를 일상의 동적 사태와 교섭이 없는 불교나 도교적인 靜으로 비판하면서 居敬을 수양 5) 禮記 권19, 樂記, 人生而靜, 天之性也. 感於物而動, 性之欲也. 夫物之感人不窮而人之好惡無節, 則 是物至而人化物也. 人化物也者, 滅天理而窮人欲者也. 6) 주돈이, 通書 聖學 20장, 聖可學乎? 曰可, 曰有要乎? 曰有. 請問焉. 曰一爲要. 一者, 無欲也. 無欲則 靜虛動直. 靜虛則明, 明則通. 動直則公, 公則溥. 明通公溥, 庶矣乎! 주돈이가 본성으로부터 발생한 욕망 [欲] 에 대하여 본성의 고요함을 강조한 것은 李翶의 復性說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오는 사 람이 성인이 될 수 있는 까닭은 본성 때문이고, 본성을 미혹시키는 것은 감정인데, 喜怒哀懼愛惡欲의 일 곱 가지는 모두 감정이 짓는 것이다. 여기에서 감정이 혼미하면 본성도 혼미하게 된다고 하였다.( 復性 書 2, 人之所以爲聖人者, 性也. 人之所以惑其性者, 情也. 喜怒哀懼愛惡欲七者, 皆情之所爲也. 情旣昏, 性 斯匿矣 ) 7) 周易 繫辭傳 상-10에서 변화 는 의도하거나 작위함이 없어서, 움직임이 없이 고요하다가, 감응해서는 세상의 일에 마침내 통한다(易無思也, 無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 고 한 것은 역 이 인위적이지 않고 의도하지 않지만 이러한 동정의 이치를 가지고 사물과 교섭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성리학의 수양론에서 敬과 靜의 상관적 의미 7 의 주요 방법론으로 받아들였다. 반면 주희는 기본적으로 주돈이의 이러한 靜坐의 수양법을 수 용하였다. 이것은 주돈이가 언급했던 靜 속에 마음으로 하여금 (사물을) 공정하고 보편적으로 판 단하게 하는 밝은 지각 능력이 있음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후 정이는 靜(또는 靜坐)이 사물과 교감하지 않고 한 쪽으로 치우치는 이단의 학설 로 오해될 염려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비판하면서, 敬을 수양의 핵심적 방법으로 수용하였다. 그는 靜만 말하면 바로 이단의 학설에 빠지는 것이다. 靜자를 쓰지 않고 靜자를 말하기만 해도 8) 이것은 (행해야 할 일을) 망각하는 것이다 고8)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텅 빈 고요함을 말하더라 도 이것을 敬과의 연관성 속에서만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경건함을 유지 9) 하면 저절로 텅 비고 고요하게 되므로, 허정 을 가지고 敬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고9)하였다. 이것은 곧 靜은 敬을 하게 되면 저절로 얻어지는 상태인데, 굳이 靜을 따로 얻으려고 할 필요가 없으며, 이것을 敬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이 이후 그의 문인들은 대부분 스승의 입장을 받아들여 敬을 항상 각성상태를 유지함[常惺 惺], 그 마음을 수렴함[其心收斂] 등으로 해석하여 각각 특성 있는 견해들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주희는 정이와 그 문인들의 견해뿐만 아니라 주돈이의 主靜論까지 수용하면서 오랜 기간에 걸쳐 자신의 수양론을 확립하였다. 또한 주희의 수양론은 연평(延平) 이동(李侗, 1093~1135) 선생으로 부터 배운 것과 학문적 도반이었던 남헌(南軒) 장식(張栻, 1133~1180)과의 심성론에 관한 토론 결과, 그리고 이후 중화신설의 확립과도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未發氣象體認, 已發察識說, 心統性情論에 근거한 存養省察論 등은 주희가 스승 이동으로부터 배우기 시작하여 중화신설을 확립하기까지의 수양방법론의 핵심을 가리키는 말들이다. 주희는 24세에 처음 이동을 뵌 이후 34세에 스승이 돌아가실 때까지 黙坐澄心, 體認天理를 목표로 고요 한 가운데 未發 시의 氣象을 체인함으로써 사물을 접하는데 저절로 절도에 맞기를 구하였다. 하 지만 주희는 이제 하루 종일 엄숙히 앉아서 단지 수렴하는데, 마음이 달리는 말처럼 도망가는 데도 한결같이 이와 같이 한다면 이것은 坐禪入定과 같은 것이다 10)고 의심하였다. 그러나 이동 10) 으로부터 배운 이런 수양법은 주돈이의 주정설과 함께 주희가 靜坐 를 居敬의 조건이 되는 것으 로 생각하는 데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주희는 바로 장식을 만나 학문적 토론을 하는 과정에서 그의 학설에 영향을 받아 已發 한 양심의 싹을 察識하고 操存하면 大本達道 전체를 관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시기에 주희는 察識端倪說을 진리로 주장하였는데 이때의 주희의 학설을 中和舊說이라고 한다. 이 설에 서 주희는 性體心用으로서 마음을 已發로 보아, 이발만을 살피면 근원적인 미발의 본체를 기를 8) 河南程氏遺書 권18, 才說靜便入於釋氏之說也. 不用靜字, 才說著靜字, 便是忘也. 9) 위의 책, 권15, 敬則自虛靜, 不可把虛靜喚做敬 10) 朱子語類 권103-7, 今終日危坐, 只是且收斂在此, 勝如奔馳, 若一向如此, 又似坐禪入定.
8 한국문화 43 수 없다는 한계를 느꼈다. 이런 이유로 주희는 이후 다시 한 번 사상적 改悟를 겪고 나서 心統 性情의 관점으로 存養과 省察을 병행하는 이론 체계를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中和新說이다. 주희는 중화구설에서의 先察識, 後涵養으로는 마음의 본체를 함양할 수 없음을 자각하여 마음 이 已發 뿐만 아니라 未發까지 통할한다고 봄으로써 이러한 수양방법론의 한계점을 해소하려고 하였다. 곧 心統性情 의 관점에 따라 주희는 未發 시에 莊敬涵養을 통하여 본령 공부를 행하고 자 하였다. 이것은 性을 心의 體로 情을 心의 用으로 보아 마음이 성정을 포괄하여 통섭하는 것 을 뜻한다. 여기에서 주희는 마음이 미발 시에는 본성의 中을 함양하고, 이발 시에는 감정의 和 를 성찰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주희는 마음의 주재를 통하여 존양과 성찰로 性情의 통일 을 기하면서 미발과 이발은 단지 같은 공부로서 함양하지 않는 때가 없고, 성찰하지 않는 때가 11) 없다 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미발과 이발을 관통하는 마음의 동정에 걸친 수양방법론이 정립 11) 되었으며, 이렇게 마음을 기르는 방법의 중심에 주희의 居敬窮理論이 자리하고 있다. 요컨대, 북송 시기부터 남송의 주희에 이르는 성리학의 형성 발전 과정에서 靜과 敬을 중심으 로 하는 수양론은 이렇게 학자 간, 또는 한 학자 안에서 사상사적 또는 사상적 변화를 거치면서 형성되었다. 여기에서 靜坐가 초기 학자들이 주된 방법론으로 삼은 것이라면, 居敬說은 主靜說 이후로 성리학의 주된 수양방법으로 정립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방법론은 주희에게 있어서 상 호연관성을 가지면서도 수양의 입지점에 있어서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주돈이에서 주희에 이르러 정립되어 있는 敬과 靜의 수양론의 내용을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居敬과 靜坐의 상관관계 修養方法 未發 統 已發 居敬 性 - 中 - 存養 心 情 - 和 - 察識 靜坐 靜 - 無欲 - 虛 性 動 - 欲 - 明 3. 주희의 수양론에서 敬과 靜의 상관관계 주희의 철학은 북송오자의 철학적 관점을 종합하면서도 주로 정이의 이기론과 심성수양론을 계승하고 있으며, 특히 수양론에 있어서는 정이와 그의 문인들의 학설을 이어 格物窮理와 居敬 11) 위의 책, 권62-53, 未發已發, 只是一項工夫, 無時不存養, 無事不省察.
성리학의 수양론에서 敬과 靜의 상관적 의미 9 을 수양의 중심문제로 삼고 있다. 하지만 정이 계통의 철학적 관점을 주로 계승한 것으로 보아 格物窮理와 居敬만을 중심으로 주희의 수양론을 이해하는 것은 그의 수양론을 협의로 해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주희의 수양론은 그의 심성론에서 마음의 미발과 이발, 중화구설에서 중화 신설로의 사상적 전화, 그리고 靜 또는 靜坐 등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요컨대, 주희의 수양 론이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고 전환되면서 悠長하게 완성된 것이다. 이처럼 오랜 기간 이전학자들의 여러 수양의 요소를 받아들인 만큼 주희의 수양론은 생각보 다 복합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가운데서 특히 주희는 학문을 시작하던 초기에 延平에 게 배울 때 미발기상을 체험하는 단계에 靜坐 를 수양의 방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후 장식 과의 토론과정에서 已發 시의 察識 을 마음을 닦는 방법으로 보아 마음이 움직일 때의 수양방법 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中和新說로의 사상적 전환을 겪으면서 주희는 마음의 미발과 이발을 일관하여 마음을 닦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에서 주희는 敬을 미발과 이발을 관통하여 마음을 단속하고 점검하여 주의를 집중하는 원리로 삼았다. 그러나 주희에 있어서 敬이 중요한 것으로 강조되는 만큼, 그의 수양론에서 靜 또는 靜坐가 차지하는 의미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주희의 수양론에서 敬이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靜이 전제되어야만 이 敬이 의미 있게 작동할 수 있기 때문 이다. 이것은 敬을 유지하는 것과 靜坐를 하는 것이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제 본 절에서는 주희가 靜보다 경을 절대적으로 강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희철학에서 靜이 차 지하는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수양론의 특징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주희의 수양론에서 靜의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敬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검 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주희는 정이와 그의 문인들의 敬에 관한 학설을 계승하면서 敬을 몇 가 지 의미로 이해하였다. 정이로부터 배운 하나에 집중하여 벗어나지 않음[主一無適] 은 주희가 언 12)12) 급한 敬 가운데 가장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마음이 흐트러지거나 산란하지 않 도록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몸과 마음을 내면으로 수렴하여 밖으로 멋 대로 달아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주희에서 이처럼 마음을 하나로 집중하는 것으로서 敬은 일 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일관하여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12) 주희의 敬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敬은 한 마음의 주재이며 온갖 일의 근본이다.(敬 者, 一心之主宰, 萬事之根本: 大學或問 經); 敬 공부는 성인의 학문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의리이고, 처음 과 끝을 관통하여 잠시도 중단할 수 없는 것이다. (敬字工夫, 乃聖門第一義, 徹頭徹尾, 不可頃刻間斷: 주 자어류 12-18) 또 程頤의 主一無適 이외에 가지런히 하고 엄숙하게 함(整齊嚴肅), 謝良佐의 항상 각성 상태를 유지함(常惺惺), 그리고 尹惇의 마음을 수렴하여 하나의 사물도 받아들이지 않음(其心收斂, 不 容一物) 을 敬 공부의 주요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五妻重二는 주희의 敬齋箴 ( 朱文公文集 권85)에 서 마음을 침잠하여 머물며 상제를 대한다(潛心以居, 對越上帝) 고 하는 것으로부터 敬은 본래 상제에 대한 畏敬과 같은 것이었는데, 이것으로부터 天命이나 天理에의 외경의 의미를 포함하게 되었다고 보여 진다고 말하고 있다.(吾妻重二, 앞의 책, 403면)
10 한국문화 43 주희는 정호 정이 선생이 언급했던 敬 이라는 글자는 반드시 마음의 움직임[動]과 고요함[靜] 을 아우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대개 일이 없을 때 태만하지 않게 마음의 주재를 유지하는 것 13) 도 敬이고, 사물에 대응하여 어지럽지 않게 처리하는 것 또한 敬이다 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13) 주희는 일이 있을 때나 없을 때를 관통하여 마음을 한결같게 유지하는 것을 敬으로 보고 있다. 주희가 敬을 이처럼 미발과 이발을 아울러서 마음의 주재를 유지하는 것으로 본 것은 중화신설 을 확립하고 나서였다. 하지만 그는 敬을 불교에서처럼 사물을 끊어 버려두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하나에 집중하고 두려워하여 방만하지 않는 것이라 14)고 보았다. 주희는 앎을 14) 극진히 하면서 敬을 유지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고 하는 정이의 말을 인용하여 敬이 성현의 학 문에 요체가 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敬이 마음의 움직임과 고요함에 관통해 있지만, 사물 의 이치를 궁구하면서 주의력을 집중하는 데 敬의 본질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만약 敬을 유지하면서 사물의 이치를 구하면 천리는 저절로 밝아지고, 인욕은 저절로 소멸되므 15) 로 저 사특하고 거짓된 것이 공격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뜨려진다 고 말하고 있다. 15) 그런데 정이와 주희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 사회의 구체적인 일에서 사 람이 따라야 할 도덕적 당위로서 義를 밝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곧 格物窮理는 인간관계에 서 발생하는 일에서 의롭고 의롭지 않은 일을 헤아려 마땅히 따라야 할 도리를 궁구하는 것이 다.16) 이렇게 볼 때 궁리를 행하면서 敬을 유지한다는 말은 바로 인간의 도덕적 실천 상황에서 16) 義에 주의를 집중하여 벗어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주희는 구체적인 일에 나아가 의리에 따라 처리하도록 마음의 주의를 집중하는 데 敬의 생생 한 있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아, 경을 살아있는 경[活敬] 과 죽은 경[死敬] 으로 구별하였다. 주 희는 이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敬에는 죽은 敬과 살아 있는 敬이 있다. 만약 하나에 집중하는 敬 만을 고수하여 일을 만나 그 것을 의리에 따라 다스리면서 그 시비를 판단하지 않으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이 익숙 하게 된 이후에는 敬에는 곧 의리가 있고, 의에는 곧 敬이 있다. 고요한 때는 그 敬과 敬 아닌 것 13) 주희집 답료자회(廖子晦, 二先生所論敬者, 須該貫動靜看方得. 夫方其無事而存主不懈者, 固敬也. 及其應事而酬酢不亂者, 亦敬也. 14) 朱子語類 권12, 211, 敬不是萬事休置之謂, 只是隨事專一謹畏, 不放逸耳. 15) 주희집 답정윤부(程允夫, 若能持敬以窮理, 則天理自明, 人欲自消, 而彼之邪妄將不攻而自破矣義. 16) 정상봉, 1999, 주희의 格物致知와 敬공부, 철학 61, 12~13면. 정상봉은 格物窮理 를 인지적 정황과 도덕적 정황 두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첫째, 인지적 格物은 외부의 개별적 사물을 접하여 그 본질과 속성, 그리고 자연운행 현상 속에서 규칙을 궁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때의 格物은 전 적으로 존재와 사실에 관한 인식의 차원이다. 둘째, 도덕적 格物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만남 속에 서 자신의 위치에 따라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궁구하는 것이다. 이때의 格物은 자신의 덕성의 자각을 안으로 확인하고 궁극적으로 내외 합일의 인식을 하는 것이다.(13~14면)
성리학의 수양론에서 敬과 靜의 상관적 의미 11 17)17) 을 살피고, 움직일 때는 그 의와 의 아닌 것을 살핀다. 주희에 의하면 구체적인 일을 의리에 따라 처리하는 마음가짐이 아니라 어떤 일이 있기 이전 에 하나에 집중하는[主一] 것으로 마음의 주재성을 유지하는 敬만으로는 이것을 살아 있는 敬이 라고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주희는 경건[敬]과 의로움[義]은 서로 포함하는 관계에 있는 것으 로 주장하고 있다. 이 때 敬은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고요한 부분에서 살피고, 義는 마음이 움 직이는 부분에서 살핀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敬과 義는 체용관계에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敬과 義를 체용관계로 보는 사고의 연장선에서 주희는 敬과 義는 단지 한 가지 일로서 예컨 대, 두 발로 서 있는 것이 敬이라면, 막 내딛는 것이 의이고, 눈을 감은 상태가 敬이라면 눈을 뜨고 사물을 보는 것이 의이다 18)고 말하였다. 요컨대, 주희에 의하면 구체적인 일의 의로움 이라 18) 는 내용을 담지 않은 상태에서 마음을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주희에서 敬은 구체적인 일과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생동하는 작용을 한다고 할 수 있 다. 그러면 敬이 이렇게 의로움 에 주의를 집중하고 마음을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보다 근원적 인 요인은 무엇인가? 주희에 있어서 이것은 바로 靜 또는 靜坐이다. 그러면 주희는 敬과 관련하여 靜을 어떤 지위를 가지는 것으로 말하는가? 주희는 장경부에 게 답하는 서신 에서 敬 공부는 마음의 움직임[動]과 고요함[靜]을 일관하면서도 반드시 고요함 19) [靜]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고 언급하였다. 주희의 이러한 견해는 敬이 마음의 주재성을 유지 19) 하는 주체가 되는 데에는 움직이는 마음과 상대적인 의미로서 고요한 마음 이상 보다 근원적인 뿌리 또는 본체로서 고요함이 마음의 본질로 내재해 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우리가 靜과 敬 사이의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보다 의미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용문에서 움직임 에 상대되는 마음의 고요함 과 敬의 뿌리가 되는 본성의 고요함 을 구별하여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곧, 마음에서 움직이는 마음과 상대되는 고요함 이 움직임을 낳기 이전의 미발(未發)의 의미 로서 고요함이라면, 敬의 뿌리가 되는 고요함 은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 이상 마음의 본체 인 本性의 고요함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전자를 현상으로 발한 마음과 대립하는 상대적인 고요함 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발현한 마음의 근저에 있는 절대적인 고요함 이라 할 수 있다. 이 상대적인 고요함 바로 희로애락이 아직 발하지 않은 마음의 중(中)이 이른바 상대적인 고요함이 라면, 악기 에서 사람이 타고난 고요함은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이다 고 하였을 때 고요함은 바 로 절대적인 고요함이다.20) 여기에서 상대적인 고요함은 움직임으로서의 마음과 대립해 있지만, 20) 17) 朱子語類 권12-27b, 敬有死敬有活敬. 若只守著主一之敬, 遇事不濟之以義, 때其是非, 則不活. 若熟後敬 便有義. 義便有敬. 靜則察其敬與不敬, 動則察其義與不義. 18) 위의 책, 권12-28a, 敬義只是一事, 如兩脚立定是敬, 才行是義, 合目是敬, 開眼見物便是義. 19) 주희집 답장경부 然敬字工夫, 貫動靜而必以靜爲本.
12 한국문화 43 절대적인 고요함은 움직이는 마음의 근저에 있다. 이것은 기질지성 속에 본연의 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나, 兩儀 四象 속에 태극이 내재 되어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요컨대, 敬이 動靜을 관통한다고 할 때는 마음의 상대적인 움직임과 고요함을 일관한다는 의 미라고 할 수 있는 만큼, 마음의 주의력을 집중하여 敬을 유지할 수 있는 영역은 바로 마음의 미발과 이발을 일관하는 영역에 제한된다고 할 것이다. 반면 敬이 근본으로 하고 있는 본체로서 의 고요함은 사물에 접하기 이전 본성의 상태로서 이것은 敬이 아닌 靜坐의 영역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주희의 성리학에서는 마음이 본성과 감정을 통괄하는[心統性情] 만큼 이 본성의 절대적 고요함은 마음의 미발과 이발을 통하여 상대적인 고요함 및 움직임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性의 고요함과 미발의 마음 사이에서 마음의 안정을 유지시켜 주는 것이 靜坐 의 역할이라면, 마음의 고요함과 움직임 사이에서 마음의 평형[균형:中;equlibrium]과 조화[和;harmony] 를 유지시켜 주는 것은 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미발의 中은 바로 본성의 고요함에 근거하여 中 을 유지할 수 있는 만큼, 性 의 절대적인 고요함을 가능케 하는 靜坐 를 전제로 할 때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은 곧 미발 을 관통하는 敬이 中을 유지하기 시작할 때에는 이미 靜坐가 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21) 이와 관련하여 주희는 모름지기 靜坐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收斂할 수 있다 고 언급하였다. 21) 다시 말하면, 이것은 靜坐를 한 후에 敬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이것은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요동하는 마음을 먼저 고요하게 하는 데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주희는 이와 같이 움직 22)22) 임과 고요함이 서로 뿌리와 지엽의 관계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주희는 사람의 몸에는 단지 움직임과 고요함이 있는데, 고요함은 움직임을 기르는 근본이 되 고, 움직임은 고요함을 실행하는 계기이다 23)고 말하였다. 이처럼 본성의 고요함을 근본으로 하 23) 여 마음의 고요함 과 움직임 이 서로 일관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움직임 속에서 고요함을 기를 수 있고, 고요함 속에서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다. 이것은 곧 靜坐와 敬이 상호적으로 이 루어지면서 본성의 靜과 마음의 動靜이 상호적으로 길러지고 제어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긴밀한 상관성을 가지는 가운데서 공부를 하거나 하지 않음으로써 드러나는 결과에 대하여 주희 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20) 중용 1장,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 예기 악기, 人生而靜, 天之性也, 感於物而動, 性之欲也. 21) 주자어류 권12-28b, 須是靜坐, 方能收斂. 22) 주희는 일상사와 단절된 마음에만 집중하는 불교적인 靜坐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면서, 靜坐 는 禪定에 들어가 사려를 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수렴하여 달아나지 않게 하고 사려를 편안히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고요한 마음은 일이 없을 때는 저절로 한결같지만, 일이 있으면 일에 따 라 응한다 고 언급하였다.(靜坐非是要如坐禪入定, 斷絶思慮. 只收斂此心, 莫令走作, 閒思慮, 則此心湛然 無事, 自然專一, 及其有事, 則隨事而應, 事已則復湛然矣. : 주자어류 권12-29a,) 23) 위의 책, 권12-32b, 人身只有[動靜. 靜者, 養動之根, 動者所以行其靜.,
성리학의 수양론에서 敬과 靜의 상관적 의미 13 만약 (공부에) 단절이 없다면 고요할 때는 본래 고요하지만, 움직일 때도 마음은 움직이지 않으 므로, 움직이면서도 고요하다. 그러나 공부가 없다면 움직일 때는 본디 움직이겠지만, 고요할 때는 24)24) 비록 고요함을 구하려고 해도 고요할 수 없으니, 고요하면서도 움직인다. 이러한 시각은 결국 주희에게 있어서 敬과 靜坐가 일상사에 대한 格物窮理, 그리고 義를 구하는 마음에 각각 근본과 작용의 측면으로 일관하는 것이며, 이 때 靜坐는 敬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곧 敬과 靜坐 공부가 바르게 행해지면 마음이 움직이는 사이에도 이 움직임은 움직이 지 않는 마음의 근본에 주재를 받아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敬과 靜坐가 유 기적으로 통합될 때 가능한 것이라 하겠다. 반대로 공부가 되어 있지 않으면 마음의 움직임과 본성의 고요함이 분리되어 아무 일이 없이 고요해야 할 때도 마음은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25) 25) 주희의 수양론에 대하여 기존 대부분의 학자들은 居敬과 格物窮理를 중심적인 마음 수양 방 법으로 간주하는 반면, 靜坐에 대하여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수양론의 이면에는 연평 선생으로부터 배운 靜坐 법이 수양의 중요한 계기로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주희의 수양론을 居 敬 窮理의 상호작용이라는 이원적 관점이 아니라, 靜坐 居敬 窮理(義)라는 입체적 관점에서 이해할 때 그의 수양론의 특색이 보다 잘 드러날 것이다. 靜坐 가 기질지성에 내재된 본성의 고 요함을 확고하게 하는 것이라면, 敬은 마음의 미발과 이발을 일관하여 마음의 흐트러짐 없이 집 중하는 것이고, 窮理는 사물에 내재한 이치를 파악하면서 義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렇게 볼 때 靜坐와 居敬이 본체와 작용의 관계를 가지고, 다시 居敬과 窮理가 본체와 작용의 관 계를 가지는 것으로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靜坐, 居敬, 窮理가 상호간 연쇄적인 體用 관계를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주희의 수양론에서 敬이 차지하는 위치가 중요해지면 질수 록 여기에 배후에서 敬의 바탕이 되는 靜과 靜坐의 의미 또한 중요해진다고 할 수 있다. 4. 이황의 수양론에서 敬의 우선성과 靜 퇴계 이황은 송대 성리학 가운데 정이와 주희의 이기심성론에 관한 학설을 주로 받아들이면 24) 위의 책, 권12-31b, 若無間斷, 靜時固靜, 動時心亦不動, 動亦靜也. 若無工夫, 則動時固動, 靜時雖欲求靜, 亦不可得而靜, 靜亦動也. 25) 주희는 일이 없어 마음이 고요할 때에는 敬이 (마음의) 이면에 있고, 일이 있을 때는 일에 있어서 끊어 진 적이 없다고 하였다.(無事時敬在裏面, 有事時敬在事上, 有事無事, 吾之敬, 未嘗間斷也.: 주자어류 권 12-22b,) 아무 일이 없을 때 敬이 마음의 이면에 있다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이 때 고 요한 마음을 밖에서 근본이 되는 고요한 본성으로 제어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靜坐 의 기능이라 할 수 있다.
14 한국문화 43 서도 자신의 독자적인 철학을 체계화하였다. 이황은 정이와 주희로부터 理 개념을 받아들였지만, 理 를 특별히 강조하여 극히 존귀하여 상대되는 것이 없음[極尊無對], 지극히 텅 빈 것이면서도 지극히 알찬 것[至虛而至實], 지극히 없는 것이면서도 지극이 있는 것[至無而至有] 등으로 규정하 고 있다. 이황은 리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없으며, 리를 인간의 도덕에 국한된 문제를 넘어서 현상적인 모든 것과 구별되는 형이상자로서 모든 존재의 뿌리 26)로 간주하였다. 26) 따라서 이황에서 理는 자연사물의 본원적인 뿌리가 될 뿐만 아니라, 인간이 실현해가야 하는 도덕법칙과 규범을 규정하는 근원적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황이 언급하는 理 는 구체적 삶을 통해 체득되는 것이며 개념적으로만 인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황 은 참되게 쌓고 오랫동안 힘쓰는 노력[眞積力久], 그리고 반복하고 익숙하게 하는 것[習熟] 등 理 를 온몸으로 체험하는 것[體認 體得]을 강조하고 있다. 이황의 철학은 이처럼 우주의 근원적 본체이면서 도덕적 실체로서의 理를 실제 삶의 체험을 통하여 체득하고 몸소 실현해 가는 방법론을 주로 정립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이 이황에 있어 서 수양론이 되며, 이황의 수양론의 핵심 개념은 바로 敬이다. 물론 이황은 程朱로부터 格物致 知, 窮理, 存養, 省察 등과 같은 수양의 방법적 관점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황에 있어서 敬은 이러한 여러 수양방법을 포괄하는 핵심적 원리이다. 이황은 敬에 관한 이론 또한 많은 부분을 정이와 주희의 학설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정주학파의 敬 사상을 계승하고 있는 이황 의 敬의 철학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을 분석하고, 이를 주희의 경우와 대비해 보 기로 한다. 이황의 敬에 관한 학설은 聖學十圖 와 도설, 그리고 이황의 주석에 가장 잘 요약되어 있다. 이 밖에 自省錄, 言行錄, 그리고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에게 답한 서신에서도 그의 敬 에 관한 내용을 볼 수 있다. 이황이 敬에 관한 견해 는 기본적으로 하나에 집중하여 벗어나지 않음[主一無適], 몸가짐을 단정하고 엄숙히 함 [整齊嚴肅], 늘 자각된 상태를 유지함[常惺惺], 마 음을 단속하여 외물을 용납하지 않음[其心收斂, 不容一物] 등 정이와 윤돈(尹焞), 사량좌(謝良佐), 그리고 주희가 주장했던 의미를 기본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의 敬 사상의 핵심을 모아 담 고 있는 저작이라면 무엇보다도 聖學十圖 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대학도 에서는 지금 이 열 가지 도표는 모두 敬을 목표로 삼았다 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聖學十圖 에서 언급되는 敬에 관한 학설로부터 이황의 敬 사상의 특징을 살펴보자. 먼저 이황은 심학도 에서 程朱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여 마음은 한 몸의 주재가 되고, 敬은 다시 한 마음의 주재이다 고 하였다. 이황은 바로 敬이 마음을 주재하는 핵심 방법임을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이황은 진성학십도차자 에서 敬이 지니는 보다 구체적인 기능을 다음과 같이 지 26) 이광호, 1990 리의 자발성과 인간의 수양문제-이퇴계의 철학에 있어서 대동문화연구 25, 성균관대대 동문화연구원, 198면.
성리학의 수양론에서 敬과 靜의 상관적 의미 15 적하고 있다. 敬을 유지하는 것은 다시 사색[思]과 학문[學]을 아우르고, 움직임[動]과 고요함[靜]을 관통하는 것 27)27) 이며, 안과 밖을 통합하고 현상과 원리를 하나로 통일시켜 주는 것이다. 이황에 있어서 敬은 곧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서 중용 에서 말하는 학습 의문 사색 변별의 과정을 거치면서 일관하여 취해야 할 태도로 간주하는 것이다. 또한 마음이 움직일 때와 고요할 때나 또는 마음과 태도를 일치시키며, 구체적인 일과 그 일에 대한 소이연 의 원리를 일관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敬이라고 보는 것이다. 敬의 이와 같은 기능은 바로 인 간의 마음을 마음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전체적인 자기동일성을 28)28) 유지하도록 하는 실천적 방법이다. 정이는 처음으로 敬을 학문과 수양의 방법론으로 채택하면서 敬이 앎을 극진히 하는 것[致知] 29)29) 에 불가결한 조건이 되는 것으로 결합하여 이해하였다. 반면에 주희는 敬을 언급하면서 사물 의 이치를 궁구함[窮理] 와 결합하여 居敬窮理를 말하였다. 이처럼 정이와 주희는 敬을 각각 나 자신의 앎과 사물에 내재한 객관적인 理 가운데 한 측면을 강조하여 이해하고 있다. 물론 주희 에 있어서 窮理를 통하여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게 되면 그 이치가 탐구되면서 마음속의 이치 또 한 사물의 이치와 합일하여 인식이 열리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이황은 敬이 사색[思]과 학문[學]을 아우르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사색으로 致知가 가능하고 학문으로 窮理가 가능하다는 의미로서 敬이 心과 理 곧 致知와 窮理를 아우르 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서 이황은 致知와 窮理 사이에 居敬을 두고 존양과 성찰을 동시에 반복 하는 양면적인 과정을 통하여 (마음의) 안과 밖, 현상과 원리를 합일하고 있는 것이다.30) 이렇게 30) 이치를 밝히는 조건으로서 敬의 역할에 대하여 이황은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대개 敬은 처음과 끝을 꿰뚫고 있다. 실로 敬을 유지하는 방법을 알 수 있다면 이치는 밝아지고 27) 퇴계전서 진성학십도차자, 持敬者, 又以兼思學, 觀動靜, 合內外, 一顯微之道也. 28) 이광호 역, 2001, 성학십도, 홍익출판사, 151면. 29) 시마다 겐지에 의하면 정이는 생각(思, 致知)라는 것을 강조한다. 예를 들면, 사람의 욕망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서도 생각 을 강조하고, 배움은 생각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오직 생각만 하면 욕 망을 막을 수 있다 고 한다.(시마다 겐지(김석근 외 역), 2001 주자학과 양명학, 까치, 73면) 정이는 학문은 사려에 근원을 둔다(學原於思: 二程遺書 권6-8) 고 말하고 있다. 30) 佐藤 貢悅은 思와 學, 心과 理 사이의 통일은 한결같이 敬의 토대 위에서 수행되는 것이며, 이러한 학 설은 송대 유학자들에 있어서는 아직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서 여기에서 이른바 사상사에 있어서의 퇴계 선생의 심학의 의의가 고양되었다. 고 하는 다카하시 스스무(高橋進)의 이퇴계와 敬의 철학 의 말을 인용하여 이황의 心學에서 敬의 의의를 강조하고 있다.(2003, 世界化 時代 떤溪心學의 意義와 그 展望, 제18회퇴계학국제학술회의, 112면)
16 한국문화 43 마음은 안정될 것이다. 이를 가지고 사물을 탐구하면 사물이 나의 인식을 피할 수 없으며, 이것으 로 사물에 대응하면 일이 마음에 장애가 될 수 없을 것이니, 사물을 탐구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 31)31) 겠는가? 여기에서 이황은 敬이 이치를 밝게 하고, 동시에 마음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 하였다. 이황의 이러한 견해는 이치가 밝아지는 것과 마음이 안정되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때 마음을 안정시킨다 거나 마음이 안정된다 는 것은 다시 말하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또는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 는 의미를 가진다. 여기에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 는 것은 바로 이치를 밝히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마음을 고요하게 하면서 이치를 밝힌다는 것은 바로 마음의 未發의 中을 유지하는 것 을 넘어서 마음의 본체로서 본성을 고요하게 함으로써 본성의 이치를 밝히는 것을 뜻하는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주희에서는 靜坐 가 행하는 기능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이황에 있어서 靜坐 는 居敬 을 전제조건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된다. 이황은 敬을 유지함으로써 고요한 마음 과 움직이는 마음 의 경지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이 학문을 할 때 일이 있거나 없거나 사려가 작용하거나 않거나 간에 오로지 敬으로 마음을 주재하여 잃지 않으면, 사려가 싹트지 않았을 때[靜]는 마음의 본체[心體] 가 텅 비고 밝으며 본래 터전[本領] 이 깊고 순수하다. 사려가 싹트면서는[動] 의리가 밝게 드러나면서 물욕이 물러나며, (마음 은) 어지럽게 움직이는 걱정이 점차 소멸하고 분한과 이수가 쌓여 이루는 것이 있으니, 이것이 요 32)32) 체가 되는 방법이다. 여기에서 사려가 싹트지 않았을 때 마음의 본체를 텅 비고 밝게 하는 敬은 바로 마음을 고요 하게 유지하는 靜坐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주희가 居敬의 근본으로 삼았던 靜 坐를 이황은 그대로 居敬의 영역에 포함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이황은 특별한 일이 없을 때 본원이 되는 곳을 함양하는 것을 항상 마음을 자각 상태 로 두는 것 으로서의 居敬에 의존하는 것으로 보면서도, 동시에 아무런 일이 없을 때는 당연히 고요함[靜]으로 보존하고 길러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居敬과 靜坐를 거의 동일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황에서 靜坐는 마음의 본체[性]을 涵養하고, 格物致知, 學問 과 思索, 그리고 窮理를 아우르는 居敬의 범위 안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31) 퇴계전서 권17-12, 盖敬者, 徹頭徹尾, 苟能知持敬之方, 則理明而心定. 以之格物, 則物不能逃于吾之鑑. 以之應事, 則事不能爲心之累, 何難于格物. 32) 자성록 권1, 답이숙헌, 大抵人之爲學, 勿論有事無事有意無意, 惟當敬以爲主而不失, 則當思慮未萌也. 心體虛明, 本領深純, 及其思慮已發也. 義利昭著, 物欲떤聽, 紛擾之患漸滅, 分數積而至於有成, 此爲要法.
성리학의 수양론에서 敬과 靜의 상관적 의미 17 이처럼 이황에 있어서 고요함을 유지하여 본체를 함양하는 靜坐는 넓은 범위에서 居敬에 포 함된다. 하지만 이황 또한 주희와 마찬가지로 고요함이 움직임과의 일관된 연결고리를 잃고 분 리되는 상태를 이단 학설에 빠지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만약 마음의 생각을 성실히 한 후에 움직임 을 싫어하면서 고요함 을 구하고 보고 듣는 것을 내면으로 거두어들이면서 이것을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正心] 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異端이 행하는 수양방법이지, 우리 儒家가 33) 수양하는 일이 아니다 고 말하였다. 33) 이황은 이처럼 움직임과 분리된 고요함만을 구하는 것이 敬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곧 마음의 未發 시에 본성과 마음을 存養할 때에도 敬은 언제나 사물 가운데 있거나 사물과의 연관성이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居敬은 格物窮理가 致知를 가능케 하고, 致知가 格物窮理를 가능케 하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황은 敬에 머 무는 것은 언제나 사물 가운데 보존되어 있으며, 이 敬과 사물이 모두 서로 어긋나지 않게 해야 34) 한다 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볼 때 말할 때도 반드시 敬을 행하고, 행 34) 35) 동할 때도 반드시 敬을 행하며, 앉아 있을 때도 敬을 행하여 잠시라도 그것을 벗어날 수 없다 35) 고 하는 것은 敬이 일상사와 불가분의 것임을 잘 말해 주고 있다. 한걸음 나아가 이황에서 敬은 마음이 자기 주재성을 유지하면서 앎을 확대함으로써 사물의 이치를 적극적으로 이해하면서 점차로 쌓고 익숙하게 하여 만물의 이치와 나의 마음의 이치가 융회하고 관통하게 하는 데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사물과의 조화와 합일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황의 수양론에서 敬은 우주론적으로는 자연 사물의 생성과 조화의 이치에 대한 각성과 의식적인 합일의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이황은 이러한 敬의 주재에 따라 자신의 앎이 사물의 이치에 융회관통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을 眞知 라고 다음과 같 이 언급하고 있다. 敬을 마음의 주재로 삼아 사물마다 그 소당연과 함께 그렇게 되는 소이연을 궁구하고 반복하여 마음을 기울이며 음미하면서 체험적으로 인식하여 그 궁극을 다한다. 이렇게 하여 오랜 동안 노력 하여 그 효과가 깊어지게 되면서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시원하게 녹고 풀리며[融釋] 확 트이고 통하게 되면[豁然貫通] 체용일원(體用一源)과 현미무간(顯微無間)이 참으로 그렇게 여겨져서 위태로 운 것[人心]과 은미한 것[道心]을 헷갈리지 않고 정밀하고 한결같이 하는 것에 현혹되지 않아 중용을 36)36) 지킬 수 있다. 이것을 참된 앎[眞知] 이라고 말한다. 33) 34) 35) 36) 퇴계전서 잡저, 若當誠意之後, 厭動而求靜, 收視而反聽曰將以正心, 此乃異端之事, 非吾儒事也. 위의 책, 권17-12, 居敬則常存于事物之中, 令此敬與事物皆不相違. 퇴계서절요 563면, 言也須敬, 動也須敬, 坐也須敬, 頃刻去他不得. 此說最緊切, 于學者受用, 宜深體之 퇴계전서 무진육조소, 敬以爲主, 而事事物物, 莫不窮其所當然與所以然之故, 沈潛反覆, 玩索體認, 而 極其至, 至於用力之久, 功力之深, 而一朝不覺, 其洒然融釋, 豁然貫通處, 則體用一源, 顯微無間者, 眞是其 然而不迷於危微, 不眩於精一, 而中可執, 此謂眞知也.
18 한국문화 43 이것은 곧 敬이 모든 일에 있어서 소당연의 행위와 이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궁극적인 소이연을 합일시키려는 의식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적인 노력을 지속하 다 보면 어느 순간 사물의 현상과 이치가 근원이 같으며 틈이 없음[體用一源, 顯微無間]을 확연 히 알게 되어, 결국 人心과 道心을 혼동하지 않고 의리를 정밀히 하고 한결같이 하여 中庸의 도 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황의 敬사상은 理를 우주의 본체이며 도덕적 규범이나 행동을 규제하는 도덕형이상 학적 실체로 간주하는 그의 이기론 체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황에 있어 서 理는 자연 사물의 객관적 법칙[分殊理]의 측면보다는, 사물법칙의 근원적 일리(一理)와 인간의 마음에 내재한 도덕적 실체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그런데 이황에서 마음에 내재해 있는 도덕적 본체를 확립하는 것과 사물에 내재한 分殊理의 반복된 탐구를 통하여 보편적인 一理에 통하는 것은 동일한 일이다. 여기에서 이황이 강조하는 敬은 내면적인 앎의 확장과 사색 및 학문, 그리고 格物窮理를 통하 여 내면적인 앎을 확장시킴으로써 보편적인 一理에 통하고, 도덕적 본체를 마음에 확립하는 수 양의 방법이다. 뿐만 아니라 敬은 사물의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知와 行, 마음의 안과 밖에 일관하여 사물을 바르게 처리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이다. 따라서 이황에 있어서 敬은 존양과 성 찰, 致知와 窮理를 아우르는 것으로 주희에서 居敬의 전제가 되었던 靜坐 또한 그 범위 안에서 언급될 수 있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제 주희와 이황의 수양론에서 靜坐와 居敬의 상관관계 를 그림으로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이 도표의 요점은 주희의 수양론에서 靜坐가 居敬의 전제조 건이 되는 반면, 이황의 수양론에서 居敬은 靜坐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靜坐(性) 居敬(心) 無欲, 虛 已發: 省察, 窮理 未發: 存養 居敬(心) 未發: 存養 已發: 省察 朱熹에서 靜坐와 居敬의 관계 靜坐(性) 無欲, 虛 李滉에서 居敬과 靜坐의 관계
성리학의 수양론에서 敬과 靜의 상관적 의미 19 5. 결론 본 논문은 성리학적 수양론의 핵심 방법으로서 敬과 靜이 주희와 이황의 수양론에서 각각 어 떻게 이해되며 상호간에 어떤 특징을 가지는가 하는 점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이제 본 결론에서 는 주희와 이황의 敬과 靜을 중심으로 하는 수양론의 핵심을 요약하고 나서 이들 사이의 학설의 차이를 비교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렇게 구별되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을 고려해 보기 로 한다. 먼저 주희의 수양론은 주로 주돈이와 정이의 靜坐와 居敬으로 대립되는 수양론을 종합하여 靜坐를 居敬을 행하는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 것으로 보았다. 주희의 수양론은 中和新說의 心統 性情論에 근거하여 마음의 미발과 이발을 관통하여 존양과 성찰을 병행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 하였다. 여기에서 敬은 마음의 미발의 때에 함양 또는 존양을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서 마음을 하나에 집중하여[主一] 주의력을 모으는 것인 반면, 이발의 때에는 마음을 성찰하면서 格物致知 와 窮理를 행하도록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태도이다. 그런데 이러한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 주희는 욕망을 줄여 마음을 텅 비워 밝은 지각능력을 가지게 하는 靜坐 의 노력이 필요한 것으 로 주장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이황의 수양론은 주희보다는 오히려 정이에 가까운 시각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황은 주희의 敬 사상의 관점을 기본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靜坐가 居敬에 전제가 되는 것으 로 보지는 않았다. 이황은 오히려 居敬을 잘 하게 되면 마음이 밝아지고 고요해질 것이라고 하 여 마음의 고요함[靜]이 居敬의 결과로 이해하는 측면이 있다. 이렇게 볼 때 이황은 靜坐와 居敬 사이의 상호관계를 居敬이 주도적인 지위에서 靜坐를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면 주희와 이황의 수양론에서 居敬과 靜坐 사이의 관계가 이렇게 달리 이해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아마도 그들의 이기론의 관점이 지니는 차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주희철학에서의 리 가 한편으로 無造作, 無計度, 無情意의 특성을 가지는 객관사물의 보 편적 법칙과 그 근거이기도 한 반면, 때로는 인간의 도덕법칙의 실체로서 인간에 내재한 이성으 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로 주희에서는 객관 사물의 보편적인 이치에 대한 窮理와 이것 에 따르는 致知가 요구될 것이다. 따라서 외물에 내재한 객관적 법칙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외물 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靜坐의 노력이 무엇보다 요구될 것이다. 반면 이황의 철학에서 理는 자연사물의 법칙보다는 인간사회의 도덕법칙의 근원으로서의 의 미가 일차적이다. 따라서 敬은 외물과의 교섭에서 나의 마음속에 내재한 주관적인 이치를 밝혀 객관적인 외물과 융회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내 마음의 이치 를 반성하는 과정은 바로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靜坐인 동시에 居敬이기도 한 것이다. 곧 주희 가 居敬의 전제로 강조했던 靜坐가 외물의 객관적 이치를 그대로 드러내도록 마음을 비우는 과
20 한국문화 43 정으로서 외물에 대한 인지적 파악을 위한 것이라면, 居敬은 내면의 도덕적 이치를 특정한 상황 에 드러내어 의리로 실행하도록 하기 위한 실천적 의식집중 상태라고 하겠다. 결국 주희와 이황 의 수양론에서 居敬과 靜坐의 의미와 그 상관관계에서 드러나는 차이는 두 학자 사이의 우주론 과 심성론, 도덕실천론 상의 관점의 차이에서 말미암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제어 : 朱熹, 李滉, 程頤, 敬, 靜, 居敬, 靜坐, 窮理, 涵養, 致知, 格物, 修養論 접수일(2008. 7. 30), 심사시작일(2008. 8. 25), 게재확정일(2008. 9. 10)
성리학의 수양론에서 敬과 靜의 상관적 의미 21 <Abstract> The Correlative Meaning of Reverence[敬] and Tranquility[靜] in the Neo-Confucian Cultivating Theory With Zhuhsi and LeeHwang in the Center Eom, Yeon-seok * 37) This thesis tried to elucidate how the reverence and tranquillity as crucial methods in Neo-confucian cultivating theory are understood within Zhuhsi and LeeHwang s philosophy respectively, and which characteristic they have in each other. First, Zhuhsi s cultivating theory synthesized that of Chou Tun-i and Ch eng I being respectively contrasted with sitting in tranquillity and abiding in reverence and regarded sitting in tranquillity as an inevitable condition exercising one s seriousness. Reverence in Zhuhsi is what lies in state of single-mindedness and freedom from distraction as a condition making it possible to abiding and cultivating in the state of psychic equilibrium prior to the rise of emotion(wei-fa未發), and in the state posterior to the rise of emotion is an attitude not disturbing the mind so that one might exercises the investigation of things and extension of knowledge and exhaustive investigation of principles. Then, for the purpose of the accomplishment of this aim Zhuhsi suggested that it is necessary for one to exert to sitting in tranquillity making it possible to lessen the desire of mind and have an its bright ability of perception. In comparison to this, it can be said that Leehwang s cultivating theory shows the point of view gaining access to Cheng I s one. Leehwang partly understands the calm of mind as the result of awareness of reverence in that he suggests that if one could maintain awareness of reverence well, his mind becomes light and calm. From this point of view, in case of Leehwang awareness of reverence is considered as that which encompasses sitting in tranquillity in commanding position. Then, in Zhuhsi and Leehwang s cultivating theory what is the reason why the relation of awareness of reverence with sitting in tranquillity is understood as different * Research Professor, The center for Eastern Classics Hallym University
22 한국문화 43 as this? This is due to a difference which is contained in their theory of principle and material forces. That is to say, in Zhuhsi s philosophy, the principle in one hand is the objective rule of things which has a characteristic of non-operation, non-calculation and non-emotion, in other hand is also regarded as the reason being implied in man as the substance of moral rule. For this reason, in Zhuhsi an exertion to calm the mind is required so that one might view outer things as they are while practicing exhaustive investigation of principles and extension of knowledge. In contrast, in Leehwang s philosophy the principle means more the moral rule of human society than the rule of natural things. Accordingly, the best important role of awareness of reverence is what fused it by illuminating a subjective principle which is contained in one s mind in its relation with outer things. Here, the process through which one reflects a principle in one s mind is just also sitting in tranquillity which calms the mind, and at the same time awareness of reverence. In conclusion, in Zhuhsi and LeeHwang s cultivation theory the difference derived from meaning and their relationship of awareness of reverence and sitting in tranquillity is due to relative deviation of the point of view in cosmology, theory of mind and human nature, and theory of moral practice between two scholars Key Words : Zhuhsi, Leehwang, Ch eng I, reverence, tranquillity, awareness of reverence, sitting in tranquillity, exhaustive investigation of principles, self-cultivation, extension of knowledge, The investigation of things, cultivating the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