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랑 하 는 만큼 꿈 꾸 는 만 큼 꿈을 실현합니다. 미래를 열어갑니다. 2008 교육현장체험수기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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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번 동명 유형별 식당명 주소1 주소2 대표자 전화번호 2.6 (토) 연휴기간 운영여부 (O.X로 표기) 2.7 (일) 2.8 (월) 2.9 (화) 2.10 (수) 12 건국동 분식 피자가기가막혀 광주광역시 북구 용두동 (영암마트 맞은편 농협 건물 1 층)

EBS 보고서 EBS 수능 연구(시범)학교 운영 현황과 과제 종 수업용 콘텐츠는 사교육 의존 심리와 매체를 통한 학습 효과에 대한 인 식 부족, 현장 교사들의 활용 인식 부족, 우수한 강사진에 대한 홍보 부족, 체계적인 방송 시청지도 미흡 등으로 인해 학교현장에서 효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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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무연수 일정표 기 간 : (금) ~ (토) 장 소 : 고성청소년수련원, 가평고등학교 참석대상 : 교육과정 담당 교원 및 전문직 (교무부장, 컨설팅지원단, 장학사) 일 정 표 일 자 시 간 내 용 비 고 13:40~14:00 등록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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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ro의 프로야구 이야기

KOREAN NATIONAL POLICE AGENCY 2011 제6장 안정된 사회를 위한 경찰활동 제1절 선진 집회 시위문화 조성 제2절 경찰의 각종 경비활동 제3절 테러 등 국가위기관리 역량 강화 제4절 국가안보 확립을 위한 경찰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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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부산연주문화\(김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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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뉴스종합 소상공인방송 2년 연속 공익채널에 뽑혔다 방통위, 사회복지 채널로 선정 300만 가시청 가구 추가 확보 소상공인방송이 2년 연속으로 공익채 널에 선정됐다. 소상공인방송은 소상공인 지원과 활성화를 목표로 지난 2009년 개 국한 소상공인 전문 방송이다. 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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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2014인천~중국 문화관광 페스티벌 10.3.~10.5.개최 43 [인천광역시]주한미국인 및 미군무원대상 인천-강화 의료관광 상품 선보여 44 [울산광역시] 구석 구석 그 가을 추억 속으로 46 [경기도]평화누리길 걷기 및 자전거 투어 행사 성료 47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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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이야기

2 _ 한국방송기자클럽회보 개표방송 2006년 6월 7일 수요일 _ 제82호 유비쿼터스 출구조사를 캐치프레이즈로 -개표방송 정밀분석- 이상열 세종대 신문방송학과 석좌교수, MBC 보도본부장, 방송기자클럽 부회장 지난 5월 31일 치러진 제4회 전국 동시지방선거는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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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하였습니다. 올해는 6 25전쟁 55주년과 광복 60년, 을사늑 약 100주년 등 우리나라로서는 역사적으로 매 우 의미 있는 해입니다. 우리가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지난 역사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에 영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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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전반 기 5 시간 이상 경기 8 9 회 최장 시간 경기 9 2 시간 이하 경기 회 이상 연장전 경기 11 연속경기 연장전 12 무득점 무승부 (0-0) 경기 13 최다 득점 무승부 경기 14 동일대진 연속 무승부 경기 경기 15 몰수 경기

지난 2월 현직 부장판사가 네이버, 다음 등에서 기사에 악성 댓글 1만여 건을 단 사실이 드러났다. (출처 : JTBC, 상습적 악성 댓글 알고 보니 현직 부장 판사가, 2015년 2월 11일자) 헌법재판소는 인터넷을 가장 참여적인 시장 이자 표현촉진적인 매체 라고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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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종 합 2015년 5월 13일 수요일 경북도 룕SOC예산 5조7천억원 목표룖 학교 밖 청소년 종합관리 나선다 정부, 학업 중단 예방 지원대책 만여명으로 추산된다굨 진로상담굛의료 등 촘촘히 지원 예방 강화 학교 밖 청소년 발굴 강화 지원 대책은 크게 학업 중단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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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종 합 2015년 5월 11일 월요일 룕소득대체율 인상땐 1천702조 세금폭탄룖 靑 룕인물 찾기 어렵고 청문회 큰 부담룖 박근혜 정부, 총리공백 2주째 할 덕목으로 도덕성이 부각된데다굚 박 대통령이 최근 강조하는 정치굛사회 개 을 통해 룕정치권 일부에서 일방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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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제31차 통신심의소위원회 회의록(심의의결서,공개, 비공개).hwp

임내현 룕安 신당과 함께 낡은 진보 청산룖 정치 새정연 탈당 선언 광주 2호 보수까지 외연을 넓힘으로써 정권교체 의 희망의 싹을 틔우겠다룖며 탈당을 선 2 임 의원은 이날 국회 정론관 기자회 김동철 의원에 이어 광주 의원의 두 번 견에서 룕호남과 중도세력을 모두 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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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종 합 2015년 4월 20일 월요일 朴대통령, 李총리 룏문창극식룑 정리할 듯 경북도, 룏시장창출형 로봇룑 활기 수중청소로봇굛웨이러블 슈트 출을 기대하고 있다굨 산업부 로봇보급사업에 선정 고층건물 화재굚 산불 등과 같은 재난현 소방용 웨어러블 첨단구난 슈트는 룕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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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각 실 본부 국별 주요업무 및 행사계획 대 변 인 1 시 민 소 통 기 획 관 서 울 혁 신 기 획 관 2 3 비 상 기 획 관 4 정 보 기 획 관 4 평 생 교 육 정 책 관 여 성 가 족 정 책 실 경 제 진 흥 본 부 복 지 본 부 16

사회공헌 활동비용 2005 KT 사회공헌활동백서 기부협찬 44억원 KT Community Relations White Book 3.04% 1.16% 자원봉사 16억원 공익사업 1,381억원 95.84% 합계 1,441억원 분야별 활동비용 1323억원 37억원 36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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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종 합 2015년 8월 11일 화요일 朴대통령 룏中 전승절룑 행사 참석 검토 박기춘 의원 체포동의안, 국회 접수 오늘 본회의 보고 예정 청와대는 내달 3일 베이징에서 열리 靑 룕제반사항 고려, 신중 결정룖 는 중국의 항일승전 70주년(전승절) 기 념행사에 박근혜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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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랑 하 는 만큼 꿈 꾸 는 만 큼

사 랑 하 는 만큼 꿈 꾸 는 만 큼 꿈을 실현합니다. 미래를 열어갑니다. 2008 교육현장체험수기 수상작품집

축사 이 책에 담긴 이웃들의 소박한 일상과 열정을 통해 더욱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의 꿈을 이루고, 밝은 미래를 향한 용기와 희망을 갖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교육과학기술부장관 안병만 이에 따라 교육과학기술부와 EBS는 우리 사회 교육현장 곳곳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이를 전 국민들과 공유하고자 교육현장체험수기를 공모하여 왔으며, 올해로 열두 번째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금년에도 교단, 자녀교육, 자기능력개발의 세 분 야에 걸쳐 일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꿈을 향한 열정과 도전, 그리고 성취의 기쁨을 맛 본 사례 중 함께 나누면 감동이 배가 되는 사례 총 25건을 엄선하였습니다. 2008 교육현장체험수기 수상작품집 은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이웃의 소박한 교육은 과정이다, 결코 끝이 없는 과정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태어 나서 죽을 때까지 멈출 수 없는 필수적인 행위 중 하나가 바로 교육입니다. 어렸을 적 부모님으로부터 받는 교육에서부터 학령기의 학교 교육, 사회 속의 다양한 위치 와 관계 속에서 받게 되는 교육에 이르기까지 교육을 떠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특히 최근에는 평생교육 의 개념이 확산되면서 직업과 연령을 막론하고 끊임없 이 자기개발에 힘쓰고 새로운 것을 학습하는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 다. 교육에 대한 열정이 유난히 높은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많은 이들이 평생교육원, 사이버대학, 학점은행제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교육을 몸소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교육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참여도가 점점 더 높아지는 가운데, 교육의 목표나 수단이 과정에 앞서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름 있는 교 육기관, 뛰어난 교수법 또는 훌륭한 성취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배우고 몰두하는 과정 자체입니다. 일상 속의 교육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책 속의 뛰어난 지식이 삶 속에 녹아들어 일상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일상이자 열정적인 꿈의 실현 과정입니다. 아무쪼록 본 작품집을 통해 더욱 많은 이들이 자신의 꿈을 이루고, 미래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갖게 되길 기대합니다. 오늘도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힘을 얻는 선생님, 소중한 자녀의 교육을 위해 헌신하시는 부모님, 그리고 바쁜 시간을 쪼개어 학업에 몰두하고 계신 직장인과 주부, 여러분 모두의 꿈과 희망을 향한 살아있는 목소리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2008년 11월 28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안병만 4 축사 5

발간사 교육은 대한민국의 감동이며 미래입니다. 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우리 교육의 내일을 다져 나가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한국교육방송공사 사장 구관서 교육은 대한민국의 미래입니다. 교육은 대한민국의 감동입니다. 교육 현장의 소중한 체험과 감동적인 모습들은 우리나라 교육의 미래를 슬기롭 게 다져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올해 교육현장체험수기 공모전에 보여준 여러분들의 뜨거운 열정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그 열정을 이 작품집에 담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이 수상작 EBS와 교육과학기술부가 공동 주최한 2008 교육현장체험수기 공모 를통해모아 진 교단, 자녀교육, 자기능력개발 부문의 진솔하고 소중한 현장 체험들을 이 작품 집 속에 소중하게 담았습니다. 품집의 발간과 보급을 통해 우리나라 교육 현장이 더욱 더 건강해지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전 현직 교원으로서 교육현장에서의 생생한 체험을 그린 교단 부문, 부모의 입 장에서 헌신하며 효율적으로 자녀들을 교육의 장으로 이끈 사연이 그려진 자녀교 육 부문, 그리고 자신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끝에 이루어낸 성 과를 담은 자기능력개발 부문, 이 세 분야는 모두 이번 공모전 홈페이지 조회 수에 서도 볼 수 있듯이 처음부터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2008년 11월 28일 한국교육방송공사 사장 구관서 특히 미국, 스페인,아르헨티나,일본, 중국, 홍콩 등 해외에 거주하고 계신 분들이 참여한 것도 눈에 띄는 부분입니다. 응모 작품 수가 늘어난 만큼 내용 역시 해를 거 듭할수록 더욱 솔직 담백하고 건강해지고 있습니다. 6 발간사 7

심사평 교단 부문에서는 한국 교육 현장의 어려움들이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의욕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도 선생님들은 눈부신 노력과 사랑으 로 교육 현장의 희망을 보여주었다. 자녀교육 부문에서는 부모의 힘을 모으면 나라 도 바로 세울 수 있을 것 같은 인간의 힘을 보았으며 자기능력개발 부문에서는 한 국의 미래를 밝히는 긍정의 힘을 볼 수 있었다. 다만 글에 대한 욕심을 조금 줄이고 성심을 다하는 자세가 조금은 아쉬웠다. 소설가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신달자 2008 교육현장체험수기 공모전 에 응모한 작품들을 정성껏 읽었다. 교육애와 열 정이 넘치는 작품이 많아서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었다. 교단 부문은 예년에 비해 우수한 작품이 많았던 데 비해 자기능력개발 부문과 자녀교육 부문은 상대적으로 부진했다. 예년과 변함없는 지도 대상 및 방법의 나열로 새로운 시도가 적었던 점 이 특히 아쉬웠다. 자기만의 노하우를 좀더 부각시켜 일반화시키는 노력이 요구된 다. 이번 공모에서 두드러진 점은 해외에서 보내온 교육활동 수기가 여러 편이었 고, 운동부, 특수아, 유아 등 다양한 대상을 소재로 한 실천 수기가 많았다는 점이 다. 한결같이 교육애를 발휘하고, 또한 자기개발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아름다웠 다. 다음 공모에는 더욱 훌륭한 작품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작품이 많았습니다. 공교육 내실화, 자녀 교육, 학벌 타파 의지 와 비전 제시, 참신하고 실용적이며 교육적인 내용, 사실적인 문장 표현, 구성의 세 련미, 대중의 공감대 확보 및 유사 작품 존재 여부 등에 기준을 두고 심사하였습니 다. 교단 부문에서는 공교육 활성화를 위한 노력으로 많은 학생들에게 희망과 꿈을 심어주고 새로운 변화와 개선을 이룬 내용의 작품에, 자기능력개발과 자녀교육 부 문에서는 어렵고 힘든 상황을 극복하여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진리를 경험으로 보여준 작품이 수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한 편 한 편의 수기가 모두 상을 받아 마땅했지만 심사 기준에 따라 한정된 작품 만을 선정하다 보니 더 많은 작품에 상을 주지 못해 심사위원으로서 미안한 마음을 감출 길 없습니다. 수기를 보내주신 모든 분께 존경과 감사를 보내며 이 수상집에 실린 작품들이 교 사, 학부모, 학생 모두에게 꿈을 주고 희망을 주는 메시지가 되었으면 합니다. EBS 시사교양팀장 심효무 대구 학남초등학교 교장 심후섭 8 심사평 9

심사평 2008년도 교육현장체험수기 공모에 모인 글들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특수한 사례 나 뜨거운 열정이 넘치는 작품이 많았습니다. 수기 공모의 궁극적인 목표가 우리 교육을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볼 때, 교육에 대한 적절한 관점 혹은 교육적인 이론 이 뒷받침된다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어떤 교육이든 그 목표 를 분명히 인식한다면 피교육자에 대한 이해가 빨라지고, 갈등도 최소화할 것이 며, 불필요한 정신적 물질적 소모가 줄어들 터이니 더욱 세련되고 역동적인 교육 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수기를 보내오신 많은 분 중에서는 특수한 아이를 키우다 보니 저절로 그 분야 의 전문가가 된 어머니도 있고, 교육자가 아님에도 훌륭한 관점으로 감동적인 교 육 사례를 만들어낸 분도 있었습니다. 교사들의 경우 뜨거운 열정이나 노력으로 현장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모습이 많았습니다. 반면에 학생 지도를 위한 연수나 체계적인 연구의 성과물을 통해 전문성을 확보하는 과정의 노력은 다소 미흡한 점 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제 경험으로 보아도 체계적인 시스템의 뒷받침 없이 스스 로 노하우를 습득하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고 시행착오도 발생하기 마련인지라 오늘날 같은 정보지식 사회에서는 그리 바람직한 방법은 아닐 것입니다. 이번 심 사를 하면서 현장 교육의 체계화와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사회적인 관심과 노력이 절실하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습니다. 서울 동덕여자고등학교 교장 전상룡 글은 곧 그 사람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에는 지은이의 전인격이 내재할 수밖 에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수기는 지은이가 경험한 삶의 체험이기에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특히 이번 공모 당선작들은 책으로 출판되어 전국의 교육 관계자, 선생 님, 학부모, 학생들에게 널리 읽힐 것이므로 그 영향력이 클 것입니다. 많은 응모작들을 심사하면서 교육 현장에서 선생님들이 이토록 치열하게 사랑 을 실천하고 있다는 것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더불어 아직도 특별하게 따스한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이 도처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들은 선생님들의 지도와 동행이 필요하며, 가슴으로 다가가는 방법이 무엇보다 효과적임을 이번 수기 심사를 통해 다시 알게 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맹 목적 사랑이 아니라 문제점을 관찰하고 분석하여 대안을 꾸준히 실천하는 전인격 적 노력이 많은 결실을 거둘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모두가 당선작이지만, 그 중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고 훈훈한 가슴을 함께 나 누고 싶어지는 작품, 산만하게 나열된 업적형보다는 하나의 사례일지라도 전 과정 에 걸쳐 감동을 전달해주는 작품, 모범이 되어 함께 도전해 보고 싶도록 동기 부여 를 해주는 작품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내용은 좋으나 자기 자랑 위주여서 저항감 이 생기는 글, 수기가 아닌 보고서형, 가슴보다는 머리로 실천한 사례형 등은 감점 을 주었습니다. 우리 교육 현장에 더 많은 사랑의 마음이 퍼지고 실천되는 아름다운 교실이 늘 어나고 있음을 믿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서울 대치중학교 교감 함정식 10 심사평 11

목차 대상( 大 賞 ) 자녀교육 수범사례 맛있는 수업, 이것이 살 길이다! 노영남 017 교단 수범사례 걸음이 빠르다고 빨리 가는 것은 아니다 신은선 자녀교육을 가족 모두의 화목한 시간으로 허동규 하루 15분의 투자가 가져온 수백 배의 행복 이향선 멋진 아들의 비밀 통장 김정희 157 171 183 196 얘들아, 대왕고래가 되어라 한숙자 039 희망을 찾아가는 우리 가족 황현숙 209 꿈꾸는 외인구단 유상용 053 꿈은 이루어졌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신진규 221 오늘을 넘어서 내일로 정현주 067 우리집에 도서관이 생겼어요 백승철 237 무조건적 수용으로 분리불안 장애를 극복하다 허만영 083 미안하다 김정례 247 마음으로 함께 안는 6학년, 네가 참 좋다 이명숙 101 학급문집 활동으로 피워낸 금란지교( 蘭 之 交 )의 꽃 정해균 방학에도 신나는 우리 학교 신서영 115 129 자기능력개발 수범사례 큰 동그라미의 의미를 가르쳐준 아이들 조을혜 141 자기능력 개발의 실천 모델이 되리라 김임태 265 테마가 있는 시내버스 최병윤 275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서상문 288 나는 알비니즘(albinism)인이다 이동일 297 知 天 命, 새로운 시작이다 허종구 309 꿈을 찾는 자율적인 인간이 되자 박형옥 323 비전이 이끌어준 삶 김지환 335 인생은 짧고 배울 것은 많다 박준수 353 12 목차 13

대상( 大 賞 ) 맛있는 수업, 이것이 살 길이다! 노영남 017 14 맛있는 수업, 이것이 살 길이다! 15

대상 맛있는 수업, 이것이 살 길이다! 노영남 충청북도 청주시 동주초등학교 교사 XXXXXXXXXXXX 작은 불씨 떨어져 저마다 불붙은 나뭇가지는 차마 참지 못하여 불덩이만 뚝뚝 떨어지고, 높디 높은 감나무 끝자락 까치밥 서너알이 새색시 볼마냥 하루가 다르게 가을 햇살에 타 오르는 계절! 수줍게 내어놓은 한 편의 글에 날아온 너무나도 커다란 답장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푸 르고 깊은 가을 하늘을 채우고도 남아 저의 작은 몸을 전율로 타오르게 합니다. 넘치는 감 사함을 서성이는 가을 바람에 살포시 띄워 보내 봅니다. 수업의 맛을 찾아 교육의 본질을 회복하고 질을 높이고자 부단히 애쓰시는 모든 선생님 들과 이 영광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한 시간 한 시간이 더욱 소중한 꿈으로 영글어 가도록 정성으로 수업을 가꾸는 순박한 교사가 되렵니다.

2005년. 흙내 가득한 논과 텃밭 사이에 오붓이 들어 앉아 문을 연 새 학교. 학교 담 장 옆 고추밭고랑을 연신 뛰어다니는 닭들의 분주한 몸놀림이 정겹다. 그동안의 타성과 교직의 습성에 젖어 있는 나를 다시금 일깨워보리란 다짐으로 오게 된 사 천초등학교. 아담하고 정갈하기 그지없는 이 학교에 환경을 하나하나 만들어 채워 가듯 아이들과 만들어갈 세상에 대한 설레임은 그동안의 교직생활에 대한 점검이 자 자신에 대한 도전, 새로운 환경에 대한 모험심과 더해져 의욕을 불태우기에 충 분했다. 히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내 목소리만 공허한 메아리처럼 온 교실 안을 떠돌 줄 이야! 수업이 끝나면 마치 중노동에 시달리다 온 사람처럼 젖은 솜이 되어 축 쳐지 기 일쑤였다. 그러나 육체적인 힘듦보다 만족 없이 반복되는 좌절감에 헤어날 길 없는 마음은 천근만근 더욱 무겁기만 했다. 힘빠진 아이들, 의욕을 잃다 김빠진 사이다? 수업, 맛을 잃다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시작된 수업. 그래도 명색이 예전에 두 번이나 수업연구대회 에 나가서 상을 받았고 매년 대표수업은 도맡아 하는 터라 다른 학급활동보다 아 이들과 수업에서 톱니바퀴처럼 잘 맞아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교사로서 가 장 뿌듯하고 보람을 느낄 때는 역시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이 보여 주는 흥미로움 과 즐거운 수업이었음을 인정하는 환하고 생기 있는 눈빛, 내 깊은 맘 속에서 울려 주는 찡한 전율이 있을 때다. 이 시를 듣고 어떤 장면을 신체로 표현해 볼까요?, 누가 자신의 경험을 실감 나게 이야기해 줄까?, 자신에게 맞는 역할을 시연해 볼까요?, 나라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해서 이야기해 줄 친구?, 사회자가 되어 진행을 해 볼 사람 있나 요?, 우리 다함께 일어나서 이 상황을 춤으로 표현해 봐요. 묵묵부답. 쭈삣쭈 삣. 단답형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에는 몇 녀석이 대답을 하긴 한다. 자신의 생각을 묻는 질문이나 친구들 앞에서 활동을 해 주길 바랄 때는 도리도리를 치거나 아예 고개를 떨구어 버린다. 눈이라도 마주칠까 눈빛들을 애써 다른 곳으로 옮기느라 분주하다. 며칠동안 이런 주문들이 지속되자 몇몇 숫기없고 내성적인 녀석들은 수 업시간만 되면 한숨을 내쉬며 이미 눈빛으로 하얀 백기를 흔들어 보이고 있는 것 이 아닌가! 재미있고 신나는 수업의 맛을 보여주리란 하늘을 찌르던 의욕이 무참 아이들은 참 말을 잘 한다. 또 할 말도 많은 듯하다. 우스개 소리의 달인이요, 상대를 가리지 않고 참견하고,받아치기도 잘한다. 달변가도 그런 달변가들이 없다. 말 잘하 고 말 많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아이들인데 수업시간만 되면 몸은 그야말로 꽈 배기처럼 배배 꼬인다. 이런 헛똑똑이들! 그래서 미래의 리더로서 우뚝 서겠니? 학업과 관련된 학원도 적게는 1~2개, 많게는 일주일에 5개 이상을 다니는 아이 들이다. 그렇게 공부에 들이는 시간이 많은 아이들임에도 불구하고 학업성취는 중 하위 수준. 들인 노력이나 시간, 비용에 비해 수익도 볼품 없고, 결과도 터무니 없 는 비효율의 극치다. 수업시간에 듣는 내용은 이전에 몇 번씩이나 들었던 내용들 이기에 당연히 따분하고 지루할 수밖에! 흥미가 있을 리 만무하다. 참 바쁜 아이들이다. 아침 등교하자마자 시작되는 컴퓨터 시간에 수업시간이 끝 나고 나면 특기적성에, 학원 두 서너 개 쯤 돌고, 해가 뉘엿뉘엿 질 녘 부모님이 퇴 근하고 들어오실 시간에 맞추어 귀가한다. 그러면 식사하고 가족과 대화할 시간도 없이 학교 숙제와 학원숙제와 씨름! 이런저런 이유로 늦게 잠들고 또 하루가 시작 되면 딱딱한 책상에서 하루를 견디어낸다. 선생님! 그냥 컴퓨터로 수업해요. 그게 편해요. 선생님은 왜 컴퓨터로 수업 안 하세요? 특별한 때 이외에 거의 컴퓨터를 이용하지 않는 내가 순간적으로 이상하 게 여겨질 만큼 의아함과 부당함을 한껏 담은 아이의 눈은 당돌하게 반짝였다. 아 이에게 컴퓨터로 수업하는 게 좋은 건 아니라고, 너희가 컴퓨터에 길들여져 있는 거라고 대답은 했지만 전혀 납득할 수 없다는 듯한 아이의 표정은 내 자신이 옹색 18 맛있는 수업, 이것이 살 길이다! 19

한 변명을 하고 있는 것처럼 당혹스러웠다. 그랬구나! 시각적인 영상, 바라보기만 하면 진행되는 수업에 너희들이 길들여져 있었구나! 한 가지 방법밖에 모르는 중 병에 걸려 있었어! 바로, 수업 편식증. 세상, 변화를 요구하다 불과 2~3년 전만해도 상당한 인기를 누렸던 관심집중의 노하우, 게임과 손유희를 경험하고 아이들은 구식이라고, 재미없다고 내 가슴에 비수를 꼽는다. 아이들이 접하는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고 있다. 초임시절 아이들과 함 께 같은 가요를 부르고,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책을 읽고 공감할 만큼 마음의 거 리가 가까웠었는데, 해가 갈수록 접하는 아이들의 세상과 문화는 낯설기만 하다. 아이들의 성향도 달라져서 외적으로는 자극적인 것에 반응하고, 빠른 것을 즐기 며, 다감각적인 것을 선호할 뿐 아니라 집중하는 시간이 굉장히 짧다. 반면 내적으 로는 자신감이 없고, 도전정신이 부족하며, 인내심이 적고 애정에 대한 갈급함이 깊다. 모든 게 변해간다. 가장 변하지 않는 것이 나를 비롯한 교사들인 것 같다. 나 자 신만 해도 아이들과 세상에 발맞추어 연구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새로운 수업기 술을 확보해서 업그레이드시켜도 아이들의 요구수준을 따라가기 힘들텐데 익숙한 활동들과 몇 개의 아이템으로 몇 년씩 우려 먹고 있으니 말이다. 정말 부끄럽기 그 지없다. 그래도 초임 때는 학습자료 만들기에 열심이라 만든 자료가 어림잡아 한 리어카 정도는 되었었다. 그것으로 자료전에서 1등급도 했었는데, 지금은 학습안 내가 잘 되어있는 사이트를 찾기에 바쁘지 흥미롭고 재미있을 자료를 찾거나 만들 기에 소홀한 면이 적지 않다.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면 도태되고 만다. 세상은 지금 변화하라고 함성을 질러대고 있다. 예전의 틀을 깨라고, 창의적이고 톡톡 튀는 지 금의 아이들에게 눈높이를 맞추라고. 구태의연한 수업방식을 탈피하라고 말 이다. 교사가 변하고, 수업이 변해야 교육이 산다고 말이다. 수업, 달라져야 한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고 하고, 교사의 수준은 수업에 의해 판 단된다. 그렇다면 수업을 잘하는 교사가 교육의 질을 높이는 교사라 할 수 있다. 요 즘 공교육의 정상화에 대해서 언론에서는 물론, 교육계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높 다. 지나친 사교육의 팽창으로 인해 붕괴되어 가는 공교육을 다시 돌이키자는 것인 데,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교사의 능력을 신장시키고, 학교의 교육력을 높여서 학 교에서 공부하더라도 좋은 학습 효과를 낼 수 있음을 보이면 되는 것이다. 학습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교사는 최적의 학습자료와 방법으로 아이들의 수준 에 적합한 교육내용을 흥미롭게 이끌고, 학생들은 즐겁게 학습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도달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학습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뭐니뭐니해도 수업이 즐겁고 재미있어야 한다. 수업 목표에 부합한 흥미있고 재 미있는 수업이어야 학생들의 참여를 이끌 수 있고 학습효율을 높일 수 있기 때문 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재미있는 수업이 좋은 수업이고 재미있게 수업하는 교사가 잘 가르치는 교사는 아니다. 수업을 설계하고 진행하는 수업 전문가로서의 교사는 수 업에 관한 제반 이론들을 종합하여 수업에 적용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교사 의 수준에서 이끌어가고 제시되는 활동을 통한 수업이 아니라 아이들의 수준을 파 20 맛있는 수업, 이것이 살 길이다! 21

악해서 그 수준에 맞는 활동을 하나하나 해 나아가되 아이들이 주도할 수 있는 요 소들을 통해 수업목표에 도달하도록 말이다. 흔히 말을 물가에는 데려갈 수 있어도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 란말을한다. 교사는 아이들을 물가에 데려가서 물을 마시는 방법, 마실 물, 마시지 말아야 할 물을 구별할 수 있게 가르쳐 주면 된다. 억지로 마시게 할 수는 없지만 맛깔나는 홍 보와 안내로 마시고 싶어 안달나게 그래서 꼭 마시도록 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인 것 이다. 실낱같은 희망의 서광이 비춰오는 듯 가슴은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기다려 라! 우리 행복한 수업이 훨훨 날개를 펼칠 날이 오리라. 시간마다 다른 맛을 만들어요 재미있는 수업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재미있는 수업을 위해 가장 먼저 변화된 것은 바로 교사인 나였다. 해가 거듭될수록 교재 연구 없이 즉흥적으로 수 업에 임하거나 그 수업에 쓸 학습지나 동영상 정도만 찾아놓고 진행하던 안일하고 나태한 나를 버려야했다. 교과와 수업의 내용에 맞는 학습모형에 대한 탐색과 연 구를 부지런히 했고, 하나의 수업에 하나의 모형을 적용하기도 하고, 두개의 모형 을 필요한 부분만 삽입하여 새롭게 모형을 구상하기도 했다. 이전에 사용했던 자 료와는 다른 새로운 동기유발 자료를 찾아야 했고, 수업에 대한 다양한 테크닉을 익히기 위해 수업기술에 관한 연수를 받고 책을 읽고, 인터넷 정보를 찾으며 다양 하게 진행되는 공개수업을 참관하였다. 아무리 바쁜 일들이 있어도 1시간씩은 꼭 교재 연구를 하여, 그 수업목표에 가장 적합한 활동이 무엇일지 선정하되 그 활동들도 아이들의 흥미와 수준을 충분히 고 려했다. 한 차시 수업에 신선함과 참여를 유도하는 즐거운 활동 하나씩은 꼭 넣도 록 하였다. 또 각 시간마다 맛과 색깔이 시간으로 확실히 느껴지도록 구상하고자 했다. 이렇게 하니 미리 준비된 자료와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지는 수업에 대한 그림들로 출근길 발걸음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저마다의 색깔을 찾아요 하루하루 자라나는 내 마음. 아이들은 아침에 등교하면 아침활동으로 독서를 하 되 매주 금요일에는 자신이 선택한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고 발표하는 시간을 가 졌다. 이런 활동을 통해서 잠재되어 있는 아이들의 창의성을 드러내고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줄 뿐 아니라 발표하고, 자신감을 심어주고자 했다. 내 마음의 일기예보 라는 교사와 아동간의 비밀 교환일기도 사용했다. 오늘 이 런저런 일로 마음이 안 좋다거나 가정에 무슨 일이 있다거나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선생님에게만 살짝 이야기 해주는 것이다. 아무리 즐겁고 신나는 일들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마음이 어둡고 힘들면 그것이 들어올 리 없다. 마음이 슬프고 괴로운 아이에게 왜 수업에 참여하지 않냐고, 왜 공부하지 않냐고 독촉하지 않고 배려하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 아이들이 적어놓은 마음의 상태를 읽고, 아이의 마음상태를 공감하고 어루만지는 스쿨맘(교사의 애칭)의 답장을 통 해 아이가 조금은 힘을 얻고 자신을 이해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에 위로받길 바 랬다. 교사는 공부만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까지 이해하고 헤아리고 보듬는 사람으로 여기길 바랬다. 22 맛있는 수업, 이것이 살 길이다! 23

오늘의 상황표. 하교할 때 아이들의 알림장에는 오늘의 상황표라는 딱지가 하 나씩 붙었다. 하루 동안의 아이들의 발표도, 학습태도, 교우관계, 과제수행에 관해 짤막하게 써 넣도록 되어있고, 맨 아래 칸에는 교사가 가정에 보내는 메시지를 넣 었다. 아이들의 수업과 학교생활 전반에 대해서 가정과 함께 하고 싶었고, 학부모 들이 학교생활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고 싶었다. 학부모들도 아이들의 학교생활 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게 되어 기뻐했고, 아이들도 학교와 관련해서 가정에서도 다시 한번 칭찬받고 격려받고 위로받을 수 있어서 좋아했다. 내가 발표왕. 21세기를 주도해나갈 글로벌 리더는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의견 을 당당하고 명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학습활동 가운데 발표를 3 번이상 한 친구들에게 스티커를 주었고, 한달에 한번 스티커 수에 따라 큰 선물과 함께 시상을 하였다. 발표하는 방법을 모르거나 친구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조차 부끄러워하고 수줍어서 못하는 친구들이 많았기에 수업 시간을 통해서 반복적으 로 아이들에게 발표훈련을 해야만 했다. 또 다른 나를 찾아라!. 아이들은 저마다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개성과 능력이 다르고 표현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것을 수업에 활용하기로 했고 걸맞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특유의 재치와 익살 넘치는 재민이와 성규는 우리반 영화배우, 웃기 는 행동을 많이 하는 승희와 무강이는 우리반 개그맨, 늘 논리적이고 진지하게 말 을 잘하는 예림이와 승원이는 우리반 변호사 등등. 알록달록 발표회. 한 달의 끝자락 즈음 교실에서 우리반 만의 발표회가 열렸다. 악기를 연주하는 친구들도 있고, 노래를 부르는 친구, 동시를 낭송하는 친구, 사회 시간에 배운 주제에 대해서 자신이 조사한 내용들을 더 발표하는 친구, 자신이 읽 은 책에 대한 감동을 전하는 친구까지. 처음에는 장기자랑 정도로만 여겨서 익살 꾸러기들만 참여하던 발표회 횟수가 거듭될수록 정착되어 대부분의 아이들이 참 가하게 되었다. 열려라 쿠폰잔치. 매일매일 상황표에 발표도 잘하고 수업에 재미있게 참여한 친구들에게 참 잘했어요 쿠폰이 발행되었다. 이것은 학급을 위해 스스로 봉사활 동을 하였거나 희생정신을 발휘한 멋진 일이 있을 때와 수업활동 중 남다르게 적 극성을 보였다거나 참여를 잘했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도 주어졌다. 이렇게 한 장, 두 장 모아진 쿠폰을 가지고 매월 마지막 날을 학급에 차려진 각종 문구와 학용품 류, 과자류, 장난감 등을 구입할 수 있는 우리 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잔칫날이 었다. 수업, 이런 맛 처음이야! 우리 반 아이들이 수업 맛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사회 단원 첫 시간에 단원학습에 대한 개요와 진행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전문가 학습을 해보자, 이것 은 조별로 조사학습을 해서 발표하자, 이 주제는 다시 소주제로 나누어서 분단 끼리 발표하자, 단원 마지막에서는 골든벨을 하자 는둥 나름대로 학습방법을 구 상하기까지 했다. 국어 수업에서도 글의 종류만 접하면 역할극을 하자, 인터뷰해 보자, 동영상을 찍어보자고 먼저 자신들이 흥미있어 하는 수업활동을 제시했다. 교사로서의 무색함도 잠시, 학습에 대해 스스로 구상하고 의욕을 갖는다는 큰 변 화가 기특하고 대견하기 이를 데 없었다. 24 맛있는 수업, 이것이 살 길이다! 25

역할극 수업. 아이들이 좋아하는 활동이다. 처음에는 다들 고개를 도리질 쳤지 만 나중에는 얌전이 민경이까지 부끄럽지만 용기를 내어 함께했다. 잘하는 아이들 은 잘하는 대로 능청스러워서 웃음을 선사하고, 못하는 아이들은 못하는 아이들대 로 흥미있고 나름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짧지만 앞에서 내가 누군가 다른 인물이 되어 역할을 소화해 낸다는 것이 자신감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볼 기회를 주는 것 같아 좋았다. 인터뷰활동과 동영상 만들기, 프리젠테이션. 도덕 수업을 위해 뉴스형식으로 앵 커와 기자를 만들어 올바로 지켜지지 못하는 사례나 잘되는 사례에 대해 인터뷰해 서 소개하는 활동을 많이 했다. 아이들의 흥미도 유발할 뿐 아니라 앵커와 기자, 사례자로서 즉흥적으로 말을 주고 받아야 하므로 말하는 훈련과 어휘사용의 폭도 넓혀주고 자신의 판단력을 담아야 하기 때문에 가치 판단에 대한 분별력을 심어줄 수 있으리라 여겨졌다. 아이들은 동영상을 파일로 만들어 수업에 활용하거나, 학 교 선생님들 또는 친구들의 UCC를 수업자료로 활용하면서 아이들의 흥미는 더해 졌고, 직접 제작하였거나 참여하였기에 더 즐거운 수업이 될 수 있었다. 또 재량시 간을 활용한 파워포인트 수업을 통해 아이들이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만들 수 있는 기능을 습득했고, 이것은 사회 과학 수업에서 조사학습 결과를 발표하거나 과학 실험 준비물이나 과정을 설명할 때, 결과를 발표할 때 이용되었다. 아이들은 스스 로 자료를 만들어서 발표하는 데 굉장한 자부심을 느꼈다. 다감각적 수업활동. 독창적인 우리만의 수업방식이고 아이들이 가장 흥미로워 했던 활동이다. 교과서에 우리나라의 음식에 대해 나오면 조사발표나 신문, 큰 책 을 이용하여 다양하게 알아보기도 하지만 직접 만들어 보기도 하고, 먹어보기도 하면서 배우는 것이다. 비눗방울이 나오는 동시를 배울 때는 교실 한가득 비눗방 울을 띄워놓고 배우고, 은행잎 편지를 배울 땐 노란 은행잎에 직접 편지를 써서 냇 가에 띄워 보냈다. 학교 내에서 여건이 허락하는 한, 아이들이 체험하면서 배울 수 있도록 배려했다. 아이들이 훨씬 흥미로워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뿐 아니라 학습 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추억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이외에 흔히 사용하는 전문가 학습활동과 물레방아 학습활동, 긴장감을 늦추지 않기 위해 협동과 경쟁심 유발을 위한 요소들도 많이 가미했다. 학습 정리 단계에 서는 골든벨이나 OX퀴즈, 함께하는 낱말퍼즐, 꼬마박사 선발대회 등을 통해 자칫 흥미위주로 지나쳐서 학습의 목표나 중요한 사항을 빠뜨리지 않도록 매시간 반복 학습시켰다. 수업분위기 조성과 정리를 위해서는 레크레이션 강사 자격증 소지자 로서의 자질도 마음껏 발휘했다. 우리 반 수업, 짱 재미있어요! Open mind. 마음이 서로 통하는 기분이 이럴까? 처음에는 마음의 벽과 경계심으 로 교실이라는 한 공간에 있지만 서로를 잘 알지 못했던 아이들과 나는 점차 서로 눈빛만 보아도 무얼 원하는지 아는 사이가 되었다. 얼마나 나를 좋아하는지, 얼마 나 내 말에 귀 기울이고 있는지, 나를 얼마나 신뢰하고 따라주는지, 나를 좇는 까 만 눈동자들에서 확연히 읽을 수 있어 참 행복했다. 아이들도 자신들과 즐겁게 수 업하는 선생님, 자신들을 함께 수업을 이끌어가는 인격체로 존중하는 선생님이 자 신의 마음 하나하나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보듬어 준다는 것을 느끼고 강한 친밀감 과 존경의 마음 그리고 사랑을 적은 작은 쪽지나 편지, 일기로 나를 늘 행복감에 젖 게 해 주었다. 교사로서의 보람이 이런 데 있었구나! 가슴부터 소용돌이 쳐 온몸을 감싸는 찡한 전율에 가슴이 벅차는 경험이었다. 신나고 재미있는 수업으로 활기찬 교실분위기는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에 충분했다. 5월에 열리는 운동회에서의 이어달리기, 줄다리기, 남녀 단체경기 모두 동학년 학급에서 최하위였었는데, 2학기에 개최된 동학년 체육대회에서는 2 위를 한 이어달리기를 제외하고 모두 우승을 하였다. 특히 반 대항 줄다리기에서 우승하였을 때 서로 부등켜 안고 좋아라 운동장을 펄쩍펄쩍 뛰며 아이들과 하나가 되었을 때의 기쁨과 환희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늘 알림장에 붙여 가던 상황표에도 매미 울음소리와 함께 시작된 더위가 시작 될 무렵부터는 부모님들의 답장이 한 줄, 두 줄 기록되기 시작했다. 아이가 학교 26 맛있는 수업, 이것이 살 길이다! 27

가길 너무 좋아한다고, 수업이 재미있다는 말을 많이 한다고, 우리 선생님이 짱이 라고 한다고. 그리고 독특하고 섬세한 교육활동과 학급운영에 대해서도 감사하다 는 말들이 가득했다. 부모님께도 아이들을 통해 신뢰받고 만족을 주었다는 생각 에 기뻤다. 골라골라, 생동감 넘치는 학부모 공개수업 일찌감치 뜨겁게 달아오른 햇살에 달궈진 운동장 모래 알알이 반짝거리던 6월, 교 실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노력한 결과를 중간 점검하듯 드러내 보일 생각을 하 니 불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이들과 만들어 온 학급과 수업에 대해 받게 될 평가가 두렵기까지 했다. 처음이라는 부담감과 함께 과연 아이들이 잘 해낼 수 있 을까 하는 걱정에 수업 참관자들인 학부모들 앞에서 수업공개를 한다는 것이 부담 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부모들이 와 있다는 새로운 환경에 답답함과 침묵이 맴돌 던 그 때로 아이들이 다시 돌아가는 건 아닐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시장의 종류와 하는 일에 대해서 알아 보는 사회 수업이었다. 시장에서 집을 제대로 찾아가지 못하는 똘이의 시장탐험 애니메이션을 시작으로 수업은 시작되었다. 어느새 우리반은 다양한 시장을 옮겨 놓은 것처럼 활기와 생 기가 가득했다. 재래시장에 대해 알아보았다는 성규네 모둠은 다리까지 떨며 골라골라 를외 쳐대는 성규와 몸빼바지 안에 손을 넣어 거스름돈을 주던 나물장사 무강이 할머니, 값을 깎아 달라는 지현아줌마와 덤을 더 주겠다는 홍상이의 실랑이, 수업을 보러온 경은엄마에게 수박 맛보고 사라며 수박을 커다랗게 잘라주던 재민이 때문에 온통 배꼽을 부여잡고 웃어대느라 온 학교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재래시장이 하는 일을 또박또박 전해주어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요즘 새롭게 형성된 시장인 홈쇼핑에 관심을 가졌다는 유민이네 모둠은 말 잘하 는 쇼호스트 다정이와 보기만해도 군침돌게 먹어대던 현우와 송하 때문에 동해바 다에서 갓 잡아 올려 신선하게 건조시킨 오징어를 모두 판매해서 감탄을 자아냈고, 홈쇼핑의 하는 일과 장단점까지 친구들과 토의해보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백화점 직원으로 우아하게 핸드백을 팔고 백화점의 하는 일을 알려준 주희네 모 둠, 대형 할인매장의 시식코너로 불고기와 참외 한 조각을 맛보게 해 준 수정이네 모둠까지 자신의 경험과 견학, 사전 조사학습으로 인해 얻은 정보를 토대로 잘 발 표하였다. 몸으로 행동했기에 자신의 모둠에서 발표한 내용은 확실히 알 수 있었 고, 다른 모둠에서 발표한 내용은 이런 시장, 저런 시장 학습지에 기록하며 다시 정리할 시간을 갖도록 하였다. 아이들은 자신의 모둠보다 다른 모둠의 내용에 더욱 흥미로워했으며, 학부모들 은 이런 수업도 있느냐고, 너무 재미있다고, 수업 같지 않다며 아이들의 수업준비 와 능청스러움, 발표력과 학습태도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칭찬했다. 우리 모 두 처음으로 어깨가 으쓱한 날이었다. 감동이 물결치는 장학 공개수업 푸르던 들녘이 노란 풍요로움에 고개를 숙인 가을, 개교하고 처음 맞는 장학지도 가 있었다. 주제는 알맞은 말을 사용하여 내 마음이 드러나는 편지쓰기 로정했 다. 동기유발을 위해 우리 반을 방문한 짱구에 넋을 빼앗기며 아이들은 그렇게 수 업에 빠져 들어갔다. 뿡뿡 금방이라도 달려나갈 것 같은 기차모양에 적힌 학습안 내에 와~! 하는 감탄사로 교실이 술렁였다. 알맞지 않은 말을 사용하는 모습을 역할극으로 시연한 친구들의 넉살좋은 입담과 연기력에 모두 배꼽을 잡았고, 눈 동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바라본 결과 알맞은 말이 어떤 것인지도 다 찾을 수 있었 다. 그리고 알맞은 말을 사용하여 내 마음이 드러나는 편지쓰기를 했고 발표도 했 다. 이런 마음도 있었구나 싶을 정도로 아이들의 어른스러움이 묻어나는 시간 이었다. 공개 수업을 보러 오신 학부모들을 위해 미리 찍어 두었던 부모님께 드리는 내 28 맛있는 수업, 이것이 살 길이다! 29

마음. 그동안 부모님께 하지 못했던 마음 속 말들을 간단하게 영상으로 담았다. 조용한 음악과 함께 흘러나오는 영상을 보시며 어떤 학부모님은 눈물을 훔치셨다. 즉흥적으로 아이들의 편지를 듣고 몇 분 어머니의 소감을 듣는 시간도 가졌다. 그렇게 감탄과 웃음과 감동이 있는 우리의 공개 수업은 막을 내렸다. 스스로들 뿌듯했는지 아이들은 연신 싱글 벙글이었다. 늘 철부지인줄 알았지 부모님을 저렇 게 생각하고 있는 줄 몰랐다며 눈물을 훔치시던 어머님들도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수업이었다고, 아이들이 어쩜 그렇게 말을 잘하느냐고, 아역 탤런트가 온 줄 알았 다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 주셨다. 그 어떤 것보다 내 스스로 마음속에서 느껴지 는 희열, 아이들과 하나가 되어 신나고 즐거운 수업을 하고 비로소 느껴지는 감동 의 용솟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맛있는 수업, 그 빛을 발하다 ICT 국제교류 협력 연구학교 대표 공개수업을 하고 2006년 11월. APEC에서 베트남과 on-line 협력 프로젝트를 통한 ICT 국제 교류 학습 방안에 관한 교육부지정 연구발표에서 대표 공개수업을 맡았다. APEC이 ICT 분야의 후진국을 이끌기 위해 ICT 강국인 우리 나라와 베트남을 교류 협력할 수 있도록 연결한 것으로, 우리 학교는 베트남의 영재고등학교와 결연을 맺고, 다 양한 프로젝트를 가지고 온라인 학습을 추진해갔다. 우리 반이 맡게 된 프로젝트는 음식이었다. on -line 프로젝트 학습인 만큼 상호 협력하는 협동 학습의 장점과 하이퍼미디어 및 상호 작용을 특징으로 하는 인터넷 의 특징을 결합하여 보다 높은 학습 효과를 꾀할 필요가 있었다. 아이들과 의논 끝 에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음식과 베트남의 대표적인 음식들에 대하여 on-line을통 해 상호작용하며 학습해 보기로 했다. 새로운 수업에 대한 도전이자 모험이었다. 아이들의 경험과 지식, 우리 나라 대표적인 음식과 베트남의 대표적인 음식이라 는 주제망을 토대로 우리 나라의 떡과 베트남의 떡(반쯩), 우리나라의 국수와 베 트남의 쌀국수, 우리나라의 쌈과 베트남의 쌈이라는 소주제를 가지고 탐구, 협의 해 나갔다. 드디어 공개 수업. 흰색의 천으로 덮혀 식탁으로 변신한 책상 위에는 향 짙은 국 화꽃 병이 놓여졌다. 근사한 식당이 되어 있는 교실에서 우리의 국제적인 수업은 시작되었다. 화상카메라가 연결된 컴퓨터를 설치하여 서로의 모습을 실시간 지켜 볼 수 있게 하였으며 그때 그때 채팅을 통해 대화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즉 우리 교실과 베트남 학급에서 동시에 진행하는 수업이었다. 우리 교실에서는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승원이와 경은이가 나와서 영어로 우리반 소개와 인사를 했고, 베트남에서는 아오자이를 입은 학생이 뜻깊은 수업을 하게 된 것에 대한 기 쁨과 함께 한국 아이들에게 인사의 말을 전했다. 아이들은 신기함에 눈이 반짝였 고, 수업을 보러오신 모든 분들이 색다른 수업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수업은 필요 에 의해 영어와 한국어를 사용하였다. 며칠 전 게시판과 메일로 주고받은 반쯩과 인절미 만드는 법을 토대로 우리 반 에서는 반쯩과 쌀국수, 월남쌈을, 베트남에서는 인절미와 잔치국수, 보쌈을 만드 는 활동이 시작되었다. 우리반 재림이 모둠은 찐 찹쌀덩이 속에 야채와 고기를 볶 아 넣어 사각형 모양으로 빚고 호박잎으로 싸서 다시 찜통에 쪄서 반쯩을 만들었 다. 다정이네 모둠은 쌀국수를 만들어서 따뜻한 국물과 함께 모두 맛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쌈을 주제로 다룬 현우네 모둠은 요리의 어려움으로 인해 인근 식당에서 주문한 월남쌈을 들고 와서 아주 구슬프고 애처로운 표정으로 sorry 를외쳐모든 사람에게 한바탕 웃음을 선사했다. 베트남 친구들은 쪄낸 찹쌀을 커다란 그릇에 넣고 뭉툭한 나뭇대기로 쳐서 인절 미를 만들고, 국수를 삶아 고명을 얹어 잔치국수를, 김치와 무절임등 구하기 어려 운 재료들로 인해 보쌈은 직접 할 수 없어서 몹시 미안하고 아쉬워했다. 음식이 완성되고 우리는 서로의 음식을 시식하며 직접 외국의 음식을 만들어 먹 어 보았다는 감격스러움과 문화사절단이라도 된듯한 의기양양함으로 서로 고마움 을 채팅방 가득 나누었다. 레스토랑 분위기의 교실분위기도 그랬지만 음식이라는 자료덕분에 분위기가 딱딱하지 않을 수 있었고, 이전에 접해 보지 못한 색다른 수 30 맛있는 수업, 이것이 살 길이다! 31

업으로 호기심과 흥미가 고조되었으며, 영어가 두 나라 학생들 모두 능통하지 않 다는 점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임할 수 있었던 수업이었다. 온라인상이긴 하지만 교실을 넘어 다른 나라의 친구들과 소통하고 정보를 교환하며 상대 나라의 문화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알아가려고 노력했다는 것에 가슴 뿌듯했다. 아이들도 직접 같은 시간에 실시간으로 대화하고 직접 상대 문화를 체험하면서 공유해갔다는 것 을 자랑스럽게 여긴 맛있고 배부른 수업 그 자체였다. 이런 수업 처음이야 수업 스타 으뜸 수업 공개를 하고 2007년 11월. 동주초등학교로 옮겨왔다. 수업에 대한 열정만으로 달려온 내게 2001년 이후로 줄곧 수업 스타 라는 이름이 따라다녔는데, 이번에는 시에 근무 하는 저경력 교사들과 학부모들을 위한 으뜸 수업을 공개하라는 막중한 책임이 맡 겨졌다. 주제는 옛날의 결혼식과 오늘날 결혼식의 공통점과 차이점 알기. 교사를 상대로 하는 만큼 활동도 활동이지만, 아이들에게 인상적이고 특이할 만한 경험과 추억을 만들어 주는 특별한 수업을 위한 자료준비의 열정도 보여 주고 싶었다. 하나의 퍼 포먼스처럼 전통혼례식과 현대 결혼식을 거행하되 신랑의 관복, 사모, 관대, 목화 와 신부의 옷인 활옷과 족두리를 손수 천을 끊어다가 바느질을 하여 아이들의 신 체 사이즈에 맞게 만들었다. 동기유발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커다란 비치 볼에 수 십 겹의 신문지를 잘라 붙이고 말려서 은빛 스프레이를 뿌려 만든 타임캡슐에 신 부가 타고 가던 가마, 족두리, 홍청색 보자기로 싼 기러기, 청사초롱을 미니어쳐로 만들어서 넣어 두었다. 수업의 클라이막스. 대추, 밤, 떡, 고기, 암탉과 수탉 등으로 직접 차린 혼례상을 놓고, 은은한 국악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전통혼례식을 거행하였다. 교배례, 근배 례. 전통혼례식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하는 우리 반 아이들은 연신 신기한 듯 눈을 떼지 못했고, 꽃으로 화사하게 만들어진 활옷은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냈 다. 폐백도 드리고, 신랑이 신부를 업고 신방으로 들어가기까지 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참관하는 교사들, 학부모들 모두들 진짜 혼례식에라도 온 듯이 펼쳐지는 전통혼례식에 푹 빠져들고 말았다. 씩씩한 신랑입장에 이어 음악에 맞춰 입장하는 신부. 멋진 나비 넥타이의 영준 이와 하얀 드레스를 입은 수줍은 다인이가 윤중이의 사회와 카리스마 있는 지영이 의 주례로 현대식 결혼식을 올렸다. 짓궂은 사회자의 장난이며 근엄한 주례사까지 많이 보았던 결혼식이었는데도 굉장히 다르게 느껴졌다. 마지막 신랑과 신부의 함 께 퇴장할 때는 친구들이 행복할 것을 다함께 폭죽으로 축하해 주었고, 멋진 기념 촬영도 이어졌다. 아들과 딸이 부모님 승낙도 없이 결혼을 해버린 어머님들은 얼 떨결에 사돈이 되어 기념촬영도 하고, 폐백도 받아야 해서 더욱 감칠맛 나는 시간 이었다. 전통혼례식과 결혼식을 직접 거행하여, 바로 앞에서 본 친구들은 전통혼례 식과 결혼식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활기차게 찾아내며 수업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 32 맛있는 수업, 이것이 살 길이다! 33

이 수업으로 으뜸 수업 공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교육청으로부터 기념패를 받 았다. 많은 선생님들로부터 그런 수업을 어떻게 할 수 있느냐고 질문을 받았다. 나 는 한 것이 없으니 부끄럽다고 말은 했지만 내 마음은 말한다. 아이들은 다이너마 이트와 같다고. 불만 당겨주면 저절로 터진다. 조금의 자극만 주면 스스로 탐색하 고 발견하고 터득해간다. 난 단지 작은 불씨 하나 당겨주었을 뿐이고 나머지는 아 이들이 스스로 일구어 가는 것이라고! 끝없는 도전, 나는 찾아가리라 수업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내가 쏟아 내는 열정과 의욕, 함께 하는 사랑과 배 려가 단지 한 차시의 수업이 아닌 장래의 아이들 꿈과 미래를 그려 내게 하고, 도전 하게 하는 에너지를 충전시켜 준다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오늘도 꿈꾸는 학생들 과 신나는 교실, 즐거운 학교를 만들기 위해 수업에 대한 끝없는 도전을 하고 있 다. 더불어 수업은 공교육을 바로 세우고 신뢰를 회복시킬 수 있는 첫째 관문이 될 것임을 알기에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다. 두 꽃봉오리 기지개 켠 화분에 살포시 코를 갖다 댄다. 아직 작은 꽃봉오리에서 새어 나온 여린 국화 향을 한껏 가슴 속 깊숙이 숨겨놓는다. 아이들아! 오늘도 국 화 향 묻어나는 맛있는 수업 한번 해볼까? 9월 중순 작은 화분 하나에 국화 묘종을 심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노란 꽃수술에 하얀 꽃잎을 소박하게 가지고, 작게 피어나서 화분 가득 탐스럽게 채워줄 하얀 마 가렛 소국이다. 변함없이 봄에는 나팔꽃을, 가을에는 소국을 심지만 햇빛 하나, 물 한 모금, 잠깐의 망각이 같은 식물을 전혀 다른 느낌, 전혀 다른 외형의 식물체로 자라있게 한다. 며칠 바쁘다는 핑계로 돌보지 못했더니 잎사귀도 힘없이 쳐져있고 줄기에도 생기가 없어 보기 흉하게 벌어져 있다. 생명을 다룬다는 건 한 순간도 관 심을 놓을 수 없는 일임을 새삼 느낀다. 물을 흠뻑 주어 햇살 가득한 창가에 고이 두고 눈길을 자주 준다. 그랬더니 하루 만에 잎사귀에 물이 오르고 줄기도 다시 탱 탱하게 힘을 실었다. 34 맛있는 수업, 이것이 살 길이다! 35

교단 수범사례 얘들아, 대왕고래가 되어라 한숙자 039 꿈꾸는 외인구단 유상용 053 오늘을 넘어서 내일로 정현주 067 무조건적 수용으로 분리불안 장애를 극복하다 허만영 083 마음으로 함께 안는 6학년, 네가 참 좋다 이명숙 101 학급문집 활동으로 피워낸 금란지교( 蘭 之 交 )의 꽃 정해균 115 방학에도 신나는 우리 학교 신서영 129 큰 동그라미의 의미를 가르쳐준 아이들 조을혜 141

교단 수범사례 얘들아, 대왕고래가 되어라 한숙자 울산광역시 장생포초등학교 교장 XXXXXXXXXXXXXX 장생포초등학교에 초임 교장으로 부임하였을 때는 승진의 기쁨보다 황량한 학교 분위기 에 막막함이 더 컸습니다. 하지만 울산교육청에서 슬로건으로 내건 기업사랑 학교사 랑 에 힘입어 지역 기업인들과 자연스럽게 만나면서 저의 소박한 교육철학을 학교에 실 현할 수 있었고, 변화된 학생들의 모습에서 하루하루의 보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후원해 주신 기업 기관들과 울산교육청, 장생포초등학교 교직원, 학생, 학부 모님들과 이 영광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대왕고래가 태어나기를 바라며, 부족한 글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님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던 날 3월 2일, 결혼식을 앞둔 그 날 아침처럼 선잠을 깨었다. 오늘은 교장 승진 발령을 받고 장생포초등학교로 부임하는 날이다. 전임지 교장선생님과 함께 출발하였다. 부푼 가슴과는 달리 가도 가도 보이는 것은 석유화학단지, Mobis, SK, S-Oil, 효성 기업 등 길가에 즐비한 공장들 뿐 고래잡이로 유명한 장생포의 그림 같은 풍경은 어디에도 없었다. 울산공업단지에서 흘러나온 폐수로 황폐화되고 있는 장생포의 현실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1시간쯤 달렸을까? 처녀림을 밟듯 장생포초등학교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한숙자 교장선생님의 부임을 축하드립니다. 라는 현수막을 보며, 다사다난했던 38년간의 교직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제 새로운 시작이다. 한 번 멋지게 해보자 는 생각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폐가처럼 풀이 자라난 운 동장과 별관의 텅 빈 교실들 그리고 퇴색된 놀이 기구를 보곤 마음이 무거워졌다. 호황 시절엔 2,300여명이나 되던 전교 학생 수가 지금은 71명으로 겨우 명맥만 유 지하고 있다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존폐 위기에 시달리는 소규모 의 학교, 학교 주변에는 학원도 문방구도 없고, 버스도 30분에한대씩오는도심 속의 오지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도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맑은 눈을 읽는 순간, 이내 마음이 밝아지기 시작 하였다. 케네디의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 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문( 自 問 )해 보십시오. 라는 말처럼 학 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지 말고 내가 학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문 해보기 시작하였다. 꿈과 희망이 샘솟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 학교장으로서 어떻 게 하면 좋을까? 라는 생각으로 하루를 바쁘게 보냈다. 그날 밤 장생포 바다에 무 시로 드나들던 대왕고래의 꿈을 꾸었다. 3월 4일 입학식. 수요자 중심의 교육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학부모들과의 대화 채널을 항상 열어 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왔다. 그래서 1학년 학부모들을 모시고 차를 대접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밝은 분위기를 위한 몇 마디의 농담이 오고 간 후 건의사항을 이야기하라는 말에 학부모들은 한숨을 쉬면 서 자녀 교육에 대한 걱정거리들을 하나 둘씩 털어 놓았다. 교장선생님, 다른 학교의 학부모들은 아이들의 영어공부를 시키기 위해 학원에 보내는 등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는데, 우리 학교 근처에는 학원도 없고, 또 보낼 돈도 없어 답답합니다. 이러다가는 우리 아이들의 영어공부가 뒤떨어지는 것은 아 닐까? 하는 걱정에 잠이 잘 오지 않습니다. 운동장 놀이터에 잡초가 너무 많아 뱀이 나올까 봐 아이들이 무서워합니다. 뿐 만 아니라 놀이기구는 녹이 슬어 아이들이 놀이기구 이용을 꺼려합니다. 우리가 공해 지역에 산다고 아이들까지 환경이 좋지 않은 학교에 다녀야 한다 는 생각 때문에 부모로서 속이 많이 상하고, 형편이 나아지면 여건이 좋은 야음동 으로 곧 이사를 하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하소연의 대부분은 학교 교육환경이 부실하다는 점, 대도 시에서 살면서도 교육 문화적인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 등으로 요약되 었다. 마음 아픈 일이었다. 그래서 나 자신에 대한 다짐을 겸해 다음과 같이 굳게 약속하였다. 학생들을 위해 영어 공부뿐만 아니라 학력향상을 위해서도 최선의 노력을 기울 이겠습니다. 시내 중심 학교에 못지 않은 쾌적한 학교 교육환경을 만들어 아이들의 꿈의 요람으로서 그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학교를 믿어주시 고, 지켜 보아 주시길 바랍니다. 40 얘들아, 대왕고래가 되어라 41

학교 환경을 정비하다 3월둘째주. 1학년 학부모와의 면담 시 제기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고심 을 하였다. 먼저 학교 교육환경을 정비하여 학력향상을 위한 면학분위기를 조성하 는 데 중점을 두기로 하였다. 그러나 사용하지 않는 별관 건물 및 넓은 운동장을 관 리하는 일은 6학급 규모의 적은 교직원과 학생, 그리고 학교 자체의 적은 예산으로 는 해결이 어려운 과제였다. 생각다 못해 본교 주위에 있는 기업과 기관을 방문하 여 협조를 요청하기로 하였다. 영남화력발전소와 해양경찰서, 해양수산청, 재331 편대를 방문하여, 학교 현장의 문제점을 말씀드리고 협조를 구하기로 하였다. 처 음에는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어촌의 소규모학교이긴 하지만 울산에서 제일가는 학교로 만들겠다. 소외 계층의 학생들이 올바르게 자라 날 수 있도록 지 역사회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아이들의 부적응 행동과 청소년비행 등은 사전 예방교육이 중요한데, 이것은 지역사회와 학교가 공동 노력을 기울일 때 큰 성과 를 거둘 수 있다. 기업의 이윤을 사회로 환원함으로써 기업의 이미지가 개선되고, 그로 인해 생기는 이익은 상상을 초월한다. 등 평소에 갖고 있는 나의 경영철학과 방침을 토대로 꾸준히 설득하였다. 그 결과 소장님과 서장님, 청장님과 편대장님 의 호의적인 반응을 얻게 되었으며, 지역사회와 학교의 공조 체제를 위해 협의회 를 결성하여 문제점을 공동으로 토의 해결해 나가기로 의견을 모으게 되었다. 협 조해주신 기관장, 기업 책임자들이 고마웠다. 그 후 지역사회와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학교가 가시적인 성과를 이룰 때마다 기관장과 자매 기업에 홍보를 하는 등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3월 셋째 주. 지역사회의 자랑거리를 본교 학생들에게 알려줌으로써 학생들의 자긍심과 애향심을 고취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본교 주위에 있는 고래박물관 과 고래연구소를 방문했다. 고래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지금 멸종 위기에 있는 대왕고래의 처지가 자칫 폐교로 이어질 수도 있는 본교의 처지와 흡사하다는 생각 이 들었다. 방문한 취지를 들은 관장님과 소장님은 고맙게도 아이들을 위해 고래 에 대한 각종 정보와 자료를 본교에 제공해주겠다고 하셨다. 지역사회와 학교의 유기적인 공조체제를 잘 활용하다면 낙후된 본교를 선진학교로 변화시킬 수 있겠 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3월 넷째 주. 장생포 기관장 협의회 멤버 중 한 분이신 해양경찰서장님의 주선으 로 협의회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지역 기업가들과 모임을 갖게 되었다. 학교와 지 역사회의 공통관심사를 나누다가 내가 사교육의 경감과 아이들의 특기 능력 신장 과 학력 향상을 위해 알찬 방과후학교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실천하고 싶은데, 어 촌의 조그만 학교라서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더니, (주)해성개발대표 손효태이사, 금호석유화학 울산합성고무 노상득 공장장, 이규 호사장, 도선사협회 백명수회장이 적극적인 후원을 약속하였다. 또, 효성그룹에서 는 학교 조경을 자기 회사처럼 관리해 줄 것을 약속하였고, 방과후학교 운영비도 지원해 주었다. 지역공동체와 주변 기업들의 학교 사랑에 감동을 받은 3월이었지만 본의 아니 게 장생포에 있는 회사 사장들, 기관장들과 어울리며 밤늦게 다닌다는 일부 관리 자들의 오해와 비난의 소리를 전해 들었을 때는 가슴이 아팠고, 전후사정을 알지 못하고 떠도는 이야기에 힘들고 외롭기도 했다. 4월 첫째 주. 본교를 울산에서 제일가는 학교로 만들기 위한 첫걸음은 이렇게 시 작되었지만 학생들의 정서 순화와 면학분위기는 개선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 의 정서 순화와 학습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학교 환경 개선 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로 하였다. 먼저 공장과 바다만 보고 자란 아이들이라 예쁜 꽃을 심고 화단 을 정비하여 아름다운 학교를 만들면 학생들의 심성도 부드러워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4H에서 계절마다 다양하게 꽃 피울 수 있는 꽃모종을 얻어 와 본 교 교사와 학부모, 학생이 모두 참여하여 화단에 심고 가꾸게 하였다. 또 비만 오 면 운동장이 질퍽하여 무거운 장화를 신고 학생들이 등교하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운동장을 고르는 작업을 울산중장비 직업전문학교장에게 부탁하여 그 불편 함을 해소하였으며, 331 해군편대장님께 학교 놀이기구 도색과 하수도 정비를 부 탁하여 해군들이 바쁜 일과 생활에도 불구하고 한 달 동안 틈틈이 도색 작업과 하 수도 정비를 하여 말끔한 환경으로 새 단장을 하게 되었다. 예술을 알면 학생들의 42 얘들아, 대왕고래가 되어라 43

정서가 더욱 안정되고, 아름다운 심성도 자연스럽게 길러질 것 같아 30여년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배워온 문인화를 학생들에게 직접 가르치기 시작했다.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마음의 눈이 길러지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1학년 학부모들과 약속한 영어 학력 향상을 위해, 나와 영어 전담교사가 장시간 에걸쳐 English Time 프로그램 을 개발하여 아침자습 시간을 통해 운영하기로 하였다. 또 2004년 이전에는 해양경찰서에서 운영을 해 왔고, 2004년부터 본교에 서 운영해왔지만, 학부모의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해 학원으로 갈 수 없는 소수의 학생들만 남아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있는 방과후학교의 내실화를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 개설과 학부모님들을 대상으로 한 홍보, 해양경찰서와 1서 1교 학습도우 미 자매결연 등 다각적인 방법을 모색하여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4월 둘째 주~마지막 주. 오전 8시 20분부터 시작되는 English Time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운영했다. 그러나 교과서 중심으로 급수자료를 제작했음에도 불구하 고, 학부모들은 학생들의 쓰기 점수가 낮아 성취감을 느낄 수 없고 부담만 주니 다 시 학원에 보내야겠다는 분위기로 술렁댔다. 나는 학부모들께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며 좀 더 지켜보자고 설득했다. 보육교사와 내가 직접 조손 결손 가정 아 이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English Time프로그램에 학생들의 참여도를 높이기 위해 참여만 하면 가지고 있는 영어 공책에 도장을 찍어 주고, 학생은 그 개수를 모 아 자기들이 좋아하는 피자와 아이스크림, 도서상품권을 선물로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 결과 English Time에 학생들의 참여도가 높아지고 아이들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아이들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니 이렇게 바쁜 날을 보내는 와중, 방과후학교 해경 공부시간에, 공부는 하지 않고 물 총을 쏘고, 인체 모형을 들고 다니며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1학년생들을 보았다. 관리하는 교사도 없고, 잘 운영된다는 보고만 들었기 때문에 화도 났다. 그래서 고 심을 하다가 교장인 내가 전적으로 해경 수업을 맡기로 했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 과 집안 형편이 조금 나은 학생들은 다 학원으로 가고, 결손 가정과 생활 형편이 어 려운 가정의 학생들뿐이라서 그런지 학생들은 아예 공부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문제 해결은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으로 출장도 삼가고, 방과후학교 관리 및 지도 를 철저히 했다. 학습도우미인 해경에게는 학습지도 방법에 대한 연수를 지속적으 로 병행해 나갔다. 방과후학교의 출석률을 높이고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방안을 찾 던 중 성공한 선배와의 만남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학력향상에 대한 동기를 부여 해 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한 교사가 제안을 해 왔다. 참 좋은 의견이었다. 성공한 본교 출신의 선배를 찾았다. 본교 학교 운영 위원회 지역 위원이자 위캔주식회사 김복열사장이 본교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시 학생들의 학력향상을 위 한성취동기부여를해줄수있는자랑스러운 선배 역할을 해달라고 정중한 부탁 을 드렸다. 쾌히 수락해 주셨다. 김복열사장이 주선하여 본교에서 치룬 중간고사 에서 학업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롯데호텔 뷔페에 초대하여 만남의 시간을 가지 게 되었다. 학생들은 특별한 음식을 먹으면서 행복해했고, 김복열사장은 우리 학 생들에게 가수 윤수일, 야구선수 김학길, 육군대장 김인태, 약사 이종진선배 등에 관해 들려주었다. 참석하지 못한 학생들은 친구들의 자랑을 들으면서 다음에는 꼭 내가 그 자리에 가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5월~6월. 학생들의 영어 학력이 점차 향상 되어가자 원어민교사 채용과 어학실 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어학실의 경우는 학교 여건상 외부 협조 없이 추 진하기에는 애로 사항이 많아 한국 남부 발전(주) 소장님께 협조를 부탁하기로 하 였다. 다행스럽게도 최성균소장님은 학교 교육에 관심이 많고, 나의 교육 철학에 44 얘들아, 대왕고래가 되어라 45

도 동조하는 바가 많아 대화가 잘 되었다. 그러나 워낙 비용이 많이 드는 공사인지 라 망설이는 눈치여서 방문할 때마다 어학실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다섯 번 방문 끝에 확답을 받게 되었고 5,000만원의 경비를 들여 어학실을 만들어 주었다. 완공된 어학실에서 아이들이 즐겁게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보람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그 동안 학교 교육에 적극적인 도움을 주던 (주)효성과도 1교 1사 자매결 연을 맺게 되었다. 이처럼 학교를 후원해 주는 분들 덕분에 학교 외관도 점점 아름 답게 변했다. 방과후학교 해경 수업도 점점 안정을 찾아 가고 있었다. 7월첫째주~7월 셋째 주. 좋은 소식이 왔다. 전에부터 1교 1사 자매결연을 맺 은 글로벌 마린(주) 노종호 대표이사가 본교의 수학여행 경비 일체를 책임진다고 하였다. 나는 이 기회를 영어 공부에 대한 강화물로 활용했다. 즉 영어 급수 32급 까지 통과한 학생만 수학여행에 데리고 간다고 엄포를 놓았다. 학생들은 쉬는 시 간, 점심시간 할 것 없이 나와 영어 전담 교사를 찾아와 제발 평가해 달라고 애원하 였다. 학생들은 기대 이상으로 영어 급수를 금방 통과했고, 우리는 English Time이 성공했음을 알았다. 이제는 학부모들도 자녀들이 가정에서 스스로 영어 공부를 한 다고 기뻐했다. 자기주도적인 학습 능력이 길러진 것 같아 더욱 큰 보람을 느꼈다. 7월넷째주~8월 말. 혼자서 여름방학 방과후학교 관리와 영어 노래와 영어 급 수, 수묵화 지도를 겸해서 하니 현기증도 나고, 무척 피로했다. 교사들에게는 방학 때 직무 연수를 충실히 하여 2학기 수업 시간에 더 이상 부진 요인을 발생시키지 말라고 당부했기 때문에 방과후학교에 대한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왕복 1시간의 거리와 후덥지근한 날씨, 맞벌이 직장생활로 낮에 부모들이 없는 가정이 많아 아이들의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았고, 학생들의 게으름도 한 몫 하 여 개설된 강좌 수에 비해 그 성과는 미미했다. 그렇지만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최 선의 노력을 경주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일까? 끝내 과로로 인해 생긴 병으로 1주 일간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지만, 울산광역신문에 학교운영위원회와 지역 인근 기업체, 사회봉사단체, 졸업생 등 학교존속을 위하는 마음으로 뭉친 장생포 에서 다시 학교가 살아나고 있었다. 는 기사를 읽고 얼마나 가슴 뭉클하고 보람을 느꼈는지. 즐거운 소식들이 날아들고 9월~12월 셋째 주. English Time프로그램으로 영어 공교육에 대한 신뢰도는 다 소 높아졌으나 아직도 썩 만족할만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방과후학교 해경 수 업 또한 학생들의 참여율이 낮아 그 목표 달성이 미미하였다. 그러나 이 고비만 넘 기면 진일보한 선진 학교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과 확신으로 그 운영에 더욱 박차 를 가하였다. 학교가 조금씩 바람직한 방향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즐거운 소식 도 잇달았다. 6학년 박수현이가 방과후학교 수기 공모 대회에서 I can t speak English well, but I like English. 로 금상을 받아, 장생포초등학교의 영어프로그램 의 타당성을 확인 할 수 있었고, 대외적으로도 본교가 100대교육과정우수학교 로 선정되었으며, 그 외 시교육청에서 주관한 방과후학교 프로그램 공모전 입선, 울산 방과후학교 우수사례 경진대회 금상 수상, 1사 1교 자매결연 우수학교에 선 정되는 등 괄목할만한 성장을 하게 되었음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다. 12월넷째주~2008년 2월. 6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중학교 배치고사를 대비 한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 동안 해경도우미를 대상으로 한 연수 결과로 해경 도우 미들이 그 역할을 다 하게 되었고, 나도 함께 4명의 학생들을 지도했다. 방학 중에 는 박수현이라는 학생만 남아서 공부를 했다. 수학은 잘하지만 국어와 사회가 떨 어지는 수현이를 위해 다양한 교수학습방법으로 지도했다. 역사 연대표를 만들고, 역사적 사건을 하향식으로 정리하여 지도했으며, 인터넷을 검색하여 요약이 잘 되 어 있는 내용을 발췌하여 이해를 도왔다. 배경 지식을 든든하게 하기 위해 도서실 에 있는 역사에 관한 책을 선사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읽게 했 다. 자기주도적 학습능력은 물론 국어공부에도 많이 도움이 되었다. 다양한 문제 집 풀기와 강화물인 도서상품권 제공 등 학습 성취의욕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 학교에도 대왕고래가 있다는 것을 다른 학교에도 알리고 싶었고, 그로인해 우리학생들이 자신감을 갖고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모두가 노력할 수 있게 되었으 면 했다. 결국 수현이가 중학교 배치고사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게 되었고, 학교 교 육을 불신하던 학부모들도 학교 교육에 대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게 된 46 얘들아, 대왕고래가 되어라 47

계기가 되었다. 여태까지 쌓였던 피로와 속상함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방과후학교 운영 최우수학교로 선정되어 겨울방학 때는 교육청에 서 전폭적인 재정지원을 해주었다. 학생들이 좋아하는 축구와 점핑 클레이, 학부 모들이 좋아하는 논술, 원어민 영어강좌를 개설했고, 학교에서 점심도 제공했다. 방과후학교에 열심히 참여하는 학생이 학원에 다니는 학생보다 성적도 우수하여 공교육을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2007년 12월 27일자 조선일보에 실 린 활기 넘치는 학교로 되살아나다 는 기사는 이런 믿음을 갖는 데 힘이 되었다. 대왕고래가 나타나다 2008년 3월, 새로운 교사 5명이 부임을 했다. 신임교사들과 오리엔테이션을 통한 대화를 나누다가 학교 근처에 문구점이 없으니 본교 평생학습실에 드림샵이란 문 구점을 개장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건의를 받았다. 바로 실천에 옮겼다. 드림샵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재원이 부족하여 고민하고 있던 차 강남교육청에 서 준비물 지원센터 설치 희망조사 라는 공문이 왔다. 희망 신청을 한 후 3월중 순이 되어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일단 학생들을 위해 일부터 시작해 놓고 보자는 생각으로 3월말에 필요한 가구를 외상으로 들여놓았다. 문제는 드림샵에 진열해 두어야 할 문구들이 없다는 점이었다. 평소 친분이 두텁고 나의 교육철학에 아낌 없는 지지를 보내주었던 구암문구사 박봉준사장님께 부탁을 하기로 하였다. 3차 례에 걸쳐 드립샵 설치의 필요성을 설명하며 도와달라는 나의 요청에 감복한 탓인 지 적극적으로 도와 주셨다. 드림샵을 개장하는 날, 멋지게 자라날 대왕고래들을 생각하며 가슴이 벅차 올랐다. 드림샵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강화 기재로써 돌고래 멘토링북을 제작하 했다. 이 돌고래 멘토링북에 받은 포인트로 드림샵에서 자기가 원하는 학습 준비 물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하였고, 드림샵에는 학생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다양 한 상품을 진열하였다. 학생들은 필기도구와 준비물이 없으면 즉시 자기가 갖고 있는 포인트로 구입할 수 있기 때문에, 준비물 구매로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없어 졌고, 필기구를 항상 가지고 다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드림샵을 영어존으로 설 정하여 영어로만 물건을 사도록 정해 학생들의 영어 실력 향상에도 도움이 되게 하였다. 이것은 2008년 4월 1일자 연합뉴스에서 울산 장생포초등학교에 학습준 비물센터 설치 로 기사화가 되었다. 타 학교에서도 벤치마킹하기 위해 다녀갔다. 2008년 3월 말, 국가 수준의 평가에서 본교는 중하위권의 성적에 머물러, 학부 모의 불신을 샀다. 학력향상을 위해 전 교사가 노력을 했다고 믿었었는데, 결과를 보니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짧은 시간 내에 그 동안 누적된 극심한 학습 결손을 극 복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008학년도의 최우선과제로 서 학력 향상을 위한 방과후학교가 되도록 해야겠다는 기본 방침을 정해 실천하기 로 하였다. 교사들의 의식개혁을 위한 적극적인 장학활동을 시도하면서 학생에게 맞는 맞춤형 교육을 하도록 지시했고 교사들도 적극 동참해 주었다. 4월 초, 즐거운 소식이 전해졌다. 4학년 이인희와 박소담학생이 365영어 문장을 불과 이틀 만에 책보다 더 예쁜 글씨로 공책에 써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1년전만 하더라도 영어 단어 하나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학생들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꼭 안아 주었다. 가르침이 보람으로 돌아온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여전히 학원으로 간 학생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학부모들은 이사를 간다, 전학 을 간다 하면서 여전히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 었다. 부진 학생은 1교사와 자매결연을 맺어 집중적으로 부진요인을 제거하게 했 다. 부진 학생이 많은 학년은 전담 교사와 특수 교사가 도와 정상교육이 가능하게 48 얘들아, 대왕고래가 되어라 49

했다. 나도 6학년 2명, 2학년 1명을 맡았다. 그리고 담임교사에게 부진요인이 발 생하지 않도록 예방교육에 힘써 달라고 부탁하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요청 하라고 했다. 학생들의 심성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 내가 직접 지도한 문인화에서 좋은 성과 가 나타났다. 본교 63명중39명이 수묵화 공모전에 입상하였고, 각종 그림그리기 대회에서도 다수의 아동이 입상을 하였다. 성취감으로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며 우리나라의 미래를 볼 수 있어 기뻤다. 이것은 울산 뉴시스 2008. 5. 27 폐교위기 학교 참살이학교 만든 한숙자교장 이라는 제목으로 기사화 되었다. 대왕고래의 출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즐거운 소식으로 인해 학교 교육에 대한 학부모들의 신뢰도가 높아졌다. 학생들의 학력향상에 더욱 박차를 가 하기로 하였다. 부수적인 효과로 사교육을 공교육으로 흡수하려는 전략도 염두에 두었다. 우선 학업이 우수한 학생과 부진한 학생을 서로 도와준다는 취지로 으뜸 두레반 강좌를 개설하여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저학년과 고학년으로 나누어 운 영하였다. 학생들은 선의의 경쟁 속에서 학력이 향상되었고, 학습 태도도 점점 정 착되어 갔다. 객관성과 신뢰성 및 타당성을 인정받은 평가지를 가져와 학생들의 학력을 진단하여 공개한 것도 학부모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학원으로 자녀를 보낸 학부모들이 교장실로 찾아와 면담을 요청해 교육철학과 학교방침을 설명하여 학 력향상에 대한 확신을 갖게 했다. 교장선생님 우리아이들 책임지셔야 합니다 하 고 신신당부를 했다. 결국 이런 전략이 성공하여 공교육이 사교육을 흡수하게 되 어 우리 학교는 사교육 - zero 가 되었다. 이 학교에 부임한 지 1년 4개월 만에 기 적이 일어난 것이다. 기말고사에서 학부모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공휴일도 없이 신나게 으뜸 두 레반을 운영하였다. 으뜸 두레반 학생들이 학년별로 1등을 차지하여, 여기저기서 대왕고래가 나타나는 쾌거를 보여주었다. 이사를 가겠다던 학부모들도 이제는 학 교의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교육청에서도 본교를 모범 방과후학교로 지정하 여 180여 명의 학교장과 학교운영위원장을 대상으로 우수사례도 발표하였다. 많 은 격려와 부러움 속에서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또 다른 곳에서 태어날 대왕고래를 위하여 본교는 시교육청이 주최하는 2008, 학력향상 선도학교 선정을 위한 계획서 제출 에 공모하여, 학력향상 선도학교 모델 구현 이라는 제목으로 1등의 영예도 안았 다. 투입의 양과 산출의 결과를 수치로 볼 수 있어, 교육의 틈을 쉽게 찾고 예방할 수 있도록 구현하였다. 본교의 성공 요인을 벤치마킹하기 위하여 울산 북구 상안 초등학교에서 본교를 방문했다. 학생들의 활동과 본교 교사들의 노력을 보면서 공 교육의 성공은 정말 힘든 길인데 대단하다고 하였다. 수업 준비를 해놓고 먼저 와 서 학생을 기다리는 것과 학생의 정확한 진단으로 개개인의 특성에 맞는 맞춤형교 육과 학생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교육에 그 비결이 있다고 말해 주었다. 2008년 8월 6일, 울산교육청홈페이지 교육청에 바란다 에 실린 우리 장생포 초등학교는 한숙자교장선생님이 꼭 필요합니다. 간절히 원합니다. 라는 김향미 어머니회장의 글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과로에 지친 몸에 큰 활력소가 되었다. 교육은 한 번 변화하면 그 속도는 엄청나다. 교사와 학생, 관리자, 지역 사회가 늘 한마음이 되어 참교육을 위해 움직일 때 기적은 일어난다. 혼자의 힘으로 모두 를 변화시키려고 했을 때는 참 힘들었다. 그러나 교육을 위해 학교 가정 지역사 회 모두가 함께 고민했을 때, 우리 자신도 변화하고, 학교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 화할 수 있었다. 가정환경이 좋지 않은 학생들은 따뜻한 손길을 더 필요로 했고, 그 학생들이 소 외감을 느끼지 않고 긍정적인 사고로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교 육자로서의 내 사명과 의무요 철학이었다. 나의 소박한 철학이 장생포초등학교에 도 구현되어 흐뭇하다. 대왕고래가 오대양 육대주를 마음껏 활기차게 헤엄쳐 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찬 기대로 오늘도 내 맡은 일에 열심히 매진하고자 한다. 영원 한 대왕고래를 위해, 축배를! 50 얘들아, 대왕고래가 되어라 51

교단 수범사례 꿈꾸는 외인구단 유상용 서울특별시 문백초등학교 교사 XXXXXXXXXXXXXX 아이들이 성장기에 스포츠를 꾸준히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하다는 의미입니다. 많은 어려움과 편견이 있었지만 기꺼이 동참해 준 제자들과 학부모님께 진심 으로 감사 드립니다. 앞으로 6학년을 21년더맡아 큰빛 30기 제자를 만들 때까지 초심 을 잃지 않고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007년 1월! 한 학부형님으로부터 핸드폰 메시지를 여섯 차례 받았다. 시간이 지 날수록 메시지의 내용은 다급하였고 길이도 길어지고 있었다. 나는 메시지가 도 착할 때마다 먼 산을 보며 기도를 하였고 떨리는 손과 마음으로 핸드폰 폴더를 열 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매주 한 두 차례 보내던 메시지는 더 이상 오지 않았고 이 내 나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왜 메시지가 더 이상 오지 않는 걸 까? 결국 올 때가 오고 만 걸까? 윤정이 아버님의 유언 2006년 10월 7일! 우리 반은 장충동 국제 리틀야구장에서 제18회 BMC컵 어린이 야구대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는 서울학동초등학교 야구부와 결승전을 치르고 있었다. 클럽 팀에 지나지 않던 우리 학급 야구부가 선수로 등록된 학동초 야구부를 6회까지 앞서고 있었다. 스코어는 16대15. 모두가 숨죽이는 가운데 학 동의 마지막 공격이 펼쳐졌다. 6회말 투아웃에 주자는 1루와 2루. 딱! 하는 순간 공이 우중간 펜스로 굴러갔고 16대17, 아쉬운 한 점차 역전패였다. 관중석에 앉아 목이 터져라 응원하시던 많은 학부형님들 중에 윤정이 아버님이 계셨다. 2006년 10월 26일. 2년 만에 한 번 열리는 우리 학교 대운동회 날이었다. 여느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윤정이 아버님도 스탠드에 앉아 운동회를 즐기고 계셨다. 운 동장이 정리가 다된 후 아버님께서 조용히 다가와 몇 가지를 물어오셨다. 운동회 를 통해 상처를 받는 아이는 없나요? 굳이 보여주기 위한 일제식 프로그램을 넣 을 필요가 있나요? 그리 길게 나누지 않은 대화였지만 적당히 타협해 가며 가르 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되돌아 보게 되었다. 그 분은 그 이후로도 우리 학급의 발전 을 위해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올곧고 자식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윤정 이 아버님께서 하늘나라에 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은 운동회가 치러진 3개월 후였다.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가며 최악의 상황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얼마나 많 이 기도를 하였던가! 유족을 만나고서야 그동안 윤정이 아버님께서 보내신 여섯 개의 메시지에 대한 사연을 듣게 되었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폐암으로 숨지기 전 날,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아버님은 마지막 메시지 보내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마 지막 유언의 말씀을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부족한 나에게 남기셨던 것이다. 앞으 로 선생님의 넓은 마음으로 윤정이와 아이들을 보듬어 주세요. 하늘나라에 가서도 항상 선생님과 아이들을 위해 힘쓰겠습니다. 염치 없는 부탁하나 더 드리겠습니 다. 우리 윤정이를 부탁드립니다. 행복한 학교를 꿈꾸며 2000년 초임 발령이후 나는 제자를 만드는 교육 을하고싶어줄곧6학년을 맡아 지도해 왔다. 지금까지 여섯 기수를 졸업시켰고 올해도 변함없이 6학년을 맡아 지 도하고 있다. 우리 반은 앞에 큰빛 9기 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선후배 기수를 구 분하기 위한 뜻도 있지만 세상에 나가 커다란 빛 이 되라는 의미에서 큰빛 이라 는 명칭을 써왔고 이제는 졸업생들이나 재학생들 모두 친숙하게 사용하고 있다. 나의 교육에 대한 가장 꿈은 제자 만드는 교육을 큰빛 30기 까지 하는 것이다. 앞 으로 21년을 더 6학년을 맡아 지도해야 한다. 해가 가면 갈수록 교육에 대한 나의 꿈은 다양해지고 구체화되는 것 같다. 초임 때는 제자 만드는 교육 이 유일한 목 적이었지만 지금은 큰빛 30기 까지 제자 교육하는 것 이외에도 초등학교 티볼 야구 클럽 활성화, 초등 봉사활동 지원 시스템 구축, 학부형님들과 함께 꾸려 나가는 화목한 가정과 같은 학급 등 앞으로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이루어 나가고 싶은 부분이 너무나 많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열정을 쏟아 지도해 왔던 분야는 티볼 야구 다. 티볼 야 구는 서양에서 초등학교 클럽스포츠로 정착된 운동으로 기존의 야구보다는 빠르 게 진행이 되며 장비도 비교적 안전한 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야구와 가장 큰 차 이는 투수가 공을 타자에게 던지면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타격대에 공을 올려 54 꿈꾸는 외인구단 55

놓고 시작한다는 점이다.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정부가 학생들에게 가장 중점적으로 지도 한 것이 스포츠 활동이다. 스포츠 활동을 통해 건전한 정신과 체력, 협동심을 키워 주기 위함이다. 지금 대부분의 교육 선진국들은 방과 후 활동으로 스포츠를 즐길 수 있도록 지역사회에서 협조를 아끼지 않는다. 한국에서 체육수업이라 함은 다양 한 분야에 대해 한 번 경험해 보고 평가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협동심을 키워주기 보다는 개인의 능력차에서 오는 심리적인 불안을 계속 가중시키는 불평등한 수업 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사회체육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데 어려움이 많다. 현재 우리 학급은 전체가 하나의 팀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자 선수가 16명이고, 여자 선수는 12명이다. 학기 초 공을 주고 받는 것조차 힘들어했지만 매일 2시간 이상씩 연습하다 보니 실력이 작년 선배들 못지않게 늘었다. 이렇게 큰빛 9기 야 구부는 지난 시간 선배들이 해왔던 것처럼 방과 후 학원에 가지 않고 학교 운동장 에서 화이팅 을 외쳐가며 오후 5까지 1학기 내내 즐겁게 연습을 해왔다. 요즘은 얼굴이 검게 그을려 진짜 운동선수처럼 보이지만 누구하나 불평하는 아이들은 없 다. 지금은 편하게 야구를 즐기고 있지만 티볼 야구 가 알려지기 전까지는 힘든 시간이 많았다. 위험한 운동이라고 하여 교장선생님의 반대가 무척 심했었고 연습 을 하다가 부상을 당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게 나와 마음고생이 많았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그 속에서 많은 지혜를 얻을 수 있었고 교육적인 효과가 매우 크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오히려 티볼 야구 활성화를 위해 앞장 서고 있다. 내가 현장에서 야구를 지도하게 된 계기는 어렸을 적 추억 때문이다. 가난한 시 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나는 학교에서나 집에서 적응을 잘 하지 못하는 아 이였다. 한글을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깨우친 탓에 학교생활은 늘 재미가 없었고 심지어 교실을 제대로 찾지 못해 선생님께 많은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 생하다. 집에서는 항상 나에게 주어지는 그날의 농사일이 있었다. 논과 밭에 풀매 기, 산에서 나무해오기, 동물 밥 주기 등 하루 일과 중 재미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 던 것 같다. 아울러 농사일과 가난에 찌든 부모님의 얼굴은 항상 근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잦은 싸움과 빚 독촉은 정말 참기 힘든 상황들이었다. 이런 나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부모님의 눈을 피해 논이나 들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함께 했던 야구였 다. 당시 장비가 없어 방망이 대신 참나무를 깎아서 사용했고, 글러브 대신 비료푸 대를 접어서 이용했다. 여러모로 부족한 상황이었지만 친구들과 선후배가 어울려 마음을 나누고 함께 즐겁게 놀았던 기억은 어렸을 적 가장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순수했지만 불안했던 어린 시절 훌륭한 야구선수를 꿈꾸며 미래를 희망적으 로 볼 수 있도록 해준 것 역시 야구였다. 2000년 초임발령 후 학교 현장에서 야구를 지도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 었다. 장비도 위험했지만 주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야구 라는 운동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배우는 아이들은 너무나 즐거워하는데 여러 가지 여건이 허락되지 않았다. 오랜 고민 끝에 그해 겨울 초등학교 스포츠 교육이 활성화 된 호주와 뉴질 랜드를 방문하였고 그곳에서 티볼 야구 라는 종목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주 말이면 이웃학교와 넓은 잔디밭에서 아이들이 친선 게임을 하고 있는 모습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다. 스탠드에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찾아와 열렬히 응원을 하였고 경기가 끝난 후에 승패와는 관계없이 모두 모여 앉아 음식을 나눠 먹으며 이야기 꽃을 피우는 모습이 너무나 가족 같아 보였고 행복해 보였다. 56 꿈꾸는 외인구단 57

우리나라에서는 초등학교 아이들이 부모님과 친구들의 격려를 받으며 즐겁게 운동하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없다. 실컷 뛰어놀아야 하는 나이에 학업에 찌들 어 학교다 학원이다 좀처럼 편하게 놀 시간이 없는 우리 아이들과는 대조적이었 다. 삶은 정말 살만한 가치가 있고 행복한 것이라는 믿음을 아이들에게 심어 주어 야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수단만을 강요하 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우리 아이들도 저들과 같이 즐겁게 운동하고 부모님들 과 친구들에게 격려를 받으면서 공부를 할 수는 없는 걸까? 견학하는 한 달여 동안 은 삶을 즐기는 그들의 문화와 가족을 가장 우선시 하는 삶의 태도에 대해 깊이 배 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티볼 야구부를 만들다 2002년 봄, 같은 고민을 하는 친구와 함께 학교 오는 것이 즐거움이 될 수 있도록 학급에 티볼 야구부 를 만드는 것에 합의를 하였다. 그러나 한 가지 커다란 걸림 돌이 있었다. 야구장비와 유니폼은 학부형님들의 동의를 얻어서 구입할 수 있지만 함께 모여서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 가장 큰 문제였다. 수업시간 중에 연습할 수도 없고, 결국은 방과 후에 연습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과연 학원에 보내지 않고 학교에 남아 아이들이 즐겁게 야구를 즐길 수 있도록 학부형님들께서 허락을 해주실까? 어렵게 가정통신문을 만들어 학부형님들의 의사를 물어 보았다. 하지만 의외로 학부형님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90% 이상의 학부형님들께 서 찬성해주셨다. 그러면서도 학원에 가지 않으면 학업성적이 크게 떨어지는 것이 아니냐며 불안해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나 역시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지도하겠다 는 말씀 이외에 드릴 말씀이 없었다. 이렇게 하여 초등학교 클럽 야구팀이 우리나 라에서 최초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당시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고 후에 엄청난 교육적인 효과가 나올 거라고는 나조차 확신하지 못했었다. 2시 30분! 운동장에는 아이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학원에 가지 않는 몇 명의 아이들만이 운동장 구석에서 축구를 하며 놀고 있었다. 이때 우리 아이들은 야구 복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에 모여 오늘 배울 부분에 대하여 논의를 하고 있다. 이제 부터 나는 여러분의 담임선생님이자 큰빛 야구부 의 감독입니다. 앞으로 여러분 이 야구를 하면서 3가지를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첫째, 야구를 즐겁게 즐기면서 할 것. 둘째, 전에 배웠던 기술들을 실전에 이용할 것. 셋째, 열심히 할 것! 아이들 의 우렁찬 함성 소리와 함께 하루의 훈련이 시작된다. 여학생들이 잘 참여하지 못하 면 어떨까? 잠시 걱정을 했지만 오히려 남학생보다도 성실하게 훈련에 참여했다. 매일 매일 반복되는 훈련 속에 아이들은 야구에 대해 자신감을 키워갔고 이제는 야구를 하지 않고서는 집에 가려하지 않았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에도 연습 은 계속되었고 최초의 티볼 야구팀 이라는 자부심은 정말 대단했다. 하나의 훌륭 한 팀이 되기 위해서 아이들은 이기심을 버리고 서로 도와가면서 훈련을 하였고 금녀의 벽처럼 여겨졌던 야구가 어느새 남녀 간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매개 체 역할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너무나 가까워져 갔고 협동심은 날로 발전 하였다. 아이들은 혼자 하는 것보다 함께 하는 것을 더 즐거워했고 얼굴은 항상 자 신감이 넘쳐 보였다. 2002년 5월! 그렇게도 갈망했던 교류전이 추진되었다. 서울문백초 대 경기장자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삼삼오오 가족들과 친구들이 모여 들고 있었다. 경기가 시 작된 후 스탠드에서는 시합을 하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100여명이 힘차게 응원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작은 실수에도 격려를 하고 상대편이지만 멋진 경기를 펼 치면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 주었다. 경기가 끝난 후 부모님들께서 준비해 오신 김 밥을 먹으며 서로의 우정을 다지는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다. 그날의 그 기억은 내 가 야구를 지도하며 힘들 때마다 가장 의지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하나 됨! 사랑 과 격려! 이것이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했음을 나뿐만 아니라 그곳에 모였던 학부 형님들은 크게 공감하였다. 58 꿈꾸는 외인구단 59

함께 하는 것에 익숙해지며 점점 아이들은 학교 오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었다. 자연적으로 등교시간도 빨라지 게 되었고 수업시작 전 40분을 독서를 하며 보낼 수 있었다. 독서를 통해 아이들은 마음을 차분하게 하여 수업의 효과를 높이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동안 공부를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하는 것을 편하게 생각했던 아이들이 이제는 함께 하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고 결과도 더 좋게 나왔다. 학업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은 수학문 제를 풀더라도 친구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에 쉬는 시간도 아끼지 않고 도움 주기를 즐거워하였다. 학업 성적이 부족한 아이들도 물어보며 익히는 것을 너무나 당연히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새 아이들은 수업시간은 열심히 배우고 쉬는 시간은 모르는 것을 서로가 도 움을 주고 받는 시간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수업시간 중에도 자기의 학습 분량이 끝나면 너나할 것 없이 일어나 부족한 아이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러면서 자연적 으로 우리 반은 쉬는 시간이 사라졌다. 화장실은 자율적으로 다녔고, 아침 8시 30 분에 시작한 수업은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끝났지만 어느 하나 쉬는 시간이 없다고 불평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성적이 서서히 오르고 있었다. 나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아 점수를 여러 번 확인하고서야 인정하게 되었다. 무엇이 아이들을 변하게 하 였을까? 학원교육을 맹신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이들이 이뤄 낸 결과들은 작은 기 적에 가까운 것이었다. 내 자신이 가장 행복해 할 때가 언제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여행을 할 때, 돈을 많이 벌 때 등은 진정한 행복을 주지는 못했다. 그 욕망이 채워지고 나면 항상 공허함과 허전함이 마음속에 자리 잡곤 했다. 내가 가장 행복 할 때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풍성함을 누릴 때였던 것 같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친 구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며 사랑하는 아내와 즐거운 시간을 함께 할 때 진정한 행 복감을 느꼈던 것 같다. 이런 관계가 깨지게 되면 다른 모든 것이 채워진다 하더라 도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 역시 야구를 통해 풍성한 교우관계를 쌓을 수 있었던 것이 성적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함께 운동하는 즐거 움 못지않게 함께 공부하는 즐거움을 아이들도 깨달아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 들이 혼자 공부하면 하나를 배우지만, 10명이 함께 힘을 합쳐 공부하면 하나가 열 을 배운다. 라는 평범한 진리를 나 역시도 깨달을 수 있었다. 야구를 통해 가족이 된 아이들 야구를 통한 협동심과 배려하는 마음은 학업 성적 뿐만 아니라 인성교육에도 커다 란 영향을 주었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적극적이며 도전적인 자세로 어려움을 극 복하려는 아이들이 많이 나왔다. 2003년 큰빛 4기 때 강선영이라는 학생이 있었다. 선영이는 다른 아이들과는 많이 달랐다. 딱딱한 야구공을 글러브로 주고 받는 아이들과는 달리 선영이는 자 주 가슴으로 공을 받았다. 볼 때마다 아찔한 순간이한두번이아니었다. 그래서 선영이의 포지션은 비교적 공이 적게 가는 우익수로 정했다. 한 학기가 지나가도 록 선영이가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담임인 나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교정 시력이 0.2! 지나가는 버스의 번호도 식별하기 곤란한 눈을 가지고 선영이는 빠른 야구공을 자신의 몸으로 잡고 있었다. 그동안 친구들로부터 보이지 않게 핀잔을 많이 받았던 터라 선영이에 대한 미안한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 반은 가끔씩 교실을 어둡게 하고 촛불을 켜놓고 진실게임을 한다. 이 자리 에서 선영이가 그동안 숨겼던 비밀을 처음으로 친구들에게 공개했고 장애를 가지 고 있으면서도 팀에 보탬이 되기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습했던 모습을 생각 하며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반성하였다. 그날 이후 남학생들은 선영이의 마음에 감사하며 서로가 도움을 주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선영이의 학교생활도 몰 라보게 변해가고 있었다. 친구들과의 관계가 좋아지면서 학업성적이 올라가고 있 었고 학급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학기에는 학업성적이 하위권이었는데 졸업할 때는 수석을 차지했다. 믿겨지지 않는 선영이의 변화에 많은 사람들이 놀 라움을 표했다. 졸업을 이틀 앞두고 선영이가 밤늦게 우리 집에 찾아와 편지와 꽃 60 꿈꾸는 외인구단 61

다발을 주며 수줍게 몇 마디를 건넸다. 선생님 지난 1년 동안 열심히 꿈을 찾아 노력하다 보니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앞으로 공부도 열심히 할 께요. 선영아! 장애는 단지 조금 불편할 뿐이란다. 야구할 때처럼 삶을 도전적으 로 산다면 아마 15년쯤 뒤에는 훌륭한 드라마 작가가 될거야. 나는 우리 학급을 부를 때면 큰빛 가족 이라고 부른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 누며 수업에도 학부형님들이 참여하여 더욱 풍성하게 꾸려 가고 있다. 순수한 열 정을 가진 학부형님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아이들은 안정감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우리 학급은 봉사활동과 각종 대회 참가와 교류전, 체험학습 등 1년에 80여차례 행사를 치르게 된다. 그 과정에서 학부형님들은 도우미의 역할 뿐만 아니라 교육 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으신다. 함께 하는 시간이 많 은 만큼 아이들에 대해 상담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아졌다. 1년에 정해진 상담은 두 차례이지만 봉사활동을 나가면서, 야구대회 등 각종 행사 틈틈이 이루어지는 대화 가 더욱 효과적일 때가 많다. 함께 진행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많은 만큼 더욱더 가 족과 같은 분위기다. 지난 7월 15일 학급 연극제 때 학부형님들과 졸업생 150여명 이 모여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비록 피가 섞이지 않은 사이지만 서로의 마음을 이해해 주고 나누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즐기는 법을 배우다 그 이후에도 자폐아, 학습장애, 정서장애 등 학교생활 부적응아들이 우리 반에 많이 배속이 되었고, 야구라는 운동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가꿔갈 수 있고 새 출발 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그들은 얻게 되었다.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며 변화해가 는 모습을 볼 때면 교사로 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할 따름이다. 그동안 아이들의 삶이 티볼 야구 를 통해 성장해 나가는 만큼 티볼 야구 의발 전도 눈부셨다. 프로야구 선수 협의회 에서는 매년 두 차례씩 대회를 후원해 주 시고,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는 매년 3억의 예산지원으로 대회와 장비지원, 공개강습회를 통해 도움을 주시고 있다. 9년 전 처음 시작할 때는 불과 5년만에 100여개 학교에서 티볼 야구 를 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앞으로 우리 학급에서 티볼 야구 를 통해 얻은 교육적인 효과를 함께 공유해 나가고 클럽스포 츠 활성화를 위해 도움을 드리는 것이 나의 작은 바램이다. 학부형님들의 참여가 아이들이 안정감 있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면, 졸업선배들의 역할은 보다 실질적인 효고를 준다. 3월 초가 되면 졸업생들은 운동장에 찾아와 후배들에게 기술을 개별적으로 전수해 준다. 내가 지도할 때보다 도 더 긴장하는 것을 보면 선배들이 다소 무서운가보다. 연습이 끝나갈 무렵 어머 님들께서 찐 고구마와 미숫가루를 타가지고 오시기도 한다. 해가 서산 넘어 갈 때 쯤 선후배와 더불어 학부형님들이 어우러져 함박 웃음꽃이 핀다. 2006년 5월 5일! 장충동 리틀 야구장에서는 제 19회 BMC컵 어린이 야구대회 가 열렸다. 우리 학급에서는 두개 팀이 출전하였다. 첫 경기는 이수초등학교 야구 부와의 경기였다. 45 대 3! 4회 콜드게임으로 졌다. 선수로 등록된 아이들이라 실 력이 역시 대단했다. 아이들 역시 실망하는 눈빛이다. 졸업선배들이 살며시 다가 와 후배들을 다독이며 여러 가지 조언을 주는 것 같았다. 다음은 우리의 교류전 파 62 꿈꾸는 외인구단 63

트너인 서울금동초등학교 야구부다. 3월과 4월 두 차례 교류전에서 1승 1패!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경기였다. 양 팀의 학부형님들과 졸업선배들은 목이 터 져라 응원을 하고 있었고 수준에 맞는 팀을 만나서 그런지 아이들의 발걸음은 매 우 가벼워 보였다. 결과는 37 대 36! 1점차 승리였다. 아이들의 환호성으로 야구장 은 떠나갈 듯 했다. 남녀 혼성팀인 우리와 금동초등학교 야구부는 다른 팀에게는 적수가 되지 못한 다. 대회에 나가면 여자 아이들이 야구한다며 놀림을 자주 받지만 우리 여자 선수 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경기가 모두 끝난 후 우리 모두는 마운드 정상에 올라서서 아이들과 다짐을 해본다. 얘들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큰빛 7기 야구부는 역대 최고의 야구부다. 아이들의 눈빛이 오늘 따라 초롱초롱 빛이 난다. 스탠드에 앉아 있던 학부형님들과 졸업생들도 일어서서 아이들에게 기립박 수를 보내 주셨다. 경기결과보다는 아이들의 도전이 대견스러웠는지 평소 같지 않 게 아이들을 안아 주고 쓰다듬어 주셨다. 일상으로 돌아온 아이들의 학교생활은 다소 상기된 표정이었다. 아마도 어떻게 해야만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는지 아이들은 깨달은 바가 큰 것 같다. 야 구를 통해 협동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학교생활 또한 즐거워질 것 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고, 나는 놈 위에 즐기는 놈이 있다. 는 말이 있다. 우 리 아이들은 야구를 즐기는 것처럼 공부도 즐기면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야 구에서 훌륭한 팀이 되기 위해서 협동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재미있는 것인지 를 아이들은 배웠을 것이다. 공부 역시 혼자서 점수 잘 받겠다고 외롭게 하는 것보 다 친구들과 함께 모르는 것을 물어가며 격이 없이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하 고 즐거운지 아이들은 서서히 느껴가고 있을 것이다. 요즘 우리 아이들은 방과 후 학원에 가지 않고 야구 연습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아울러 스스로 공부하는 것에도 익숙해져가는 것 같다. 무조건 학원에 의지하는 것보다 내 자신이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싶다. 아울러 어느 곳에 있든지 삶을 자생( 自 生 )적으로 살아가도록 지도하고 싶 다. 더 나아가 주변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커다란 빛으로 자랄 수 있도록 좋은 영 향을 아이들에게 주고 싶다. 윤정이 아버님 편하게 하늘나라에서 잠드세요. 제가 교직에 있는 한 순수한 열 정을 가지고 아이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물론 윤정이도 훌륭한 교사로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끝까지 지켜보겠습니다. 64 꿈꾸는 외인구단 65

교단 수범사례 오늘을 넘어서 내일로 뇌성마비 1급인 제자 홍성훈과 함께 한 5년 정현주 서울특별시 연가초등학교 교사 XXXXXXXXXXXXXXX 당선 소식을 들으니 하늘을 나는 기분입니다. 그동안 수고하신 심사위원님들과 여러 가지 로 후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 드립니다. 몸이 불편한 제자 성훈이와 넉넉하지 못한 가정 형편에 4남매를 키우느라 힘들어하는 성훈이 부모님께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 것 같아 매우 기쁩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배려하면서 넉넉한 마음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건강한 사 회를 꿈꾸며 통합교육이 제대로 뿌리 내리는 데 한 몫을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홍성훈과 만나다 새로운 제자들을 만난다는 설렘으로 가득했던 2003년 2월, 봄방학 중 소집일에 새 학년 명단을 받았다. 내가 맡은 학급은 서울성원초등학교 5학년 화목반이었고 그 중에 홍성훈 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성훈이는 뇌성마비 1급으로 지체장애와 언 어장애가 있는 아동이다. 성훈이 엄마가 늘 업거나 안고 다녀서 교내에서 성훈이 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전학년도에 연세재활학교에 다니던 문 를 지도 해 봐서 지체부자유아에 대한 약간의 경험은 갖고 있었다. 은 자주 넘어지기 는 했지만 혼자서 걷기도 하고 말도 했으며 밥도 스스로 먹을 수 있었는데 성훈이 는 이 모든 것을 타인의 손을 빌려야 하는 상태였다. 남은 봄방학 기간 동안 줄곧 성훈이를 어떻게 지도해야 할까? 하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특수교육이나 통 합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나는 우선 성훈이가 학급의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 리도록 해 주는데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드디어 3월 2일, 귀여운 제자들을 만난다는 기대감으로 일찍 출근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교실에서 성훈이 엄마와 성훈이가 벌써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걱정 이 좀 되어서인지 안타까운 표정으로 손을 잡고 인사를 건네는 나에게 성훈이는 오히려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 학급 회장이 된 성훈이 첫 날 일기 제목은 자기소개 였다. 다음 날 한 사람씩 나와서 일기장을 보기도 하 고 그냥 자연스럽게 자기를 소개하기도 했다. 성훈이 차례가 되었을 때, 성훈이 엄 마가 주고 간 일기장을 보고 성훈이 소개를 내가 대신해줬다. 성훈이는 손에 힘이 부족해서 보조기구 없이는 연필을 쥘 수가 없다. 그래서 불편한 손으로 어렵게 키 보드를 눌러 컴퓨터로 친 글을 인쇄해서 일기장에 붙여 오곤 했다. 성훈이의 일기 는 나의 상상과는 달리 5학년 아이답지 않게 깊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나는 읽어 주는 내내 가슴이 찡했다. 나는 글쓰기에 관심이 많아서 아이들의 일기지도를 꼼꼼하게 하는 편이다. 지금 도 일기지도를 통해서 글쓰기와 맞춤법, 생활지도를 병행하고 있다. 우리 반 아이 들에게 부연 설명을 해 가면서 성훈이의 일기를 매일 읽어 주었다. 그리고 성훈이 와는 말로 대화를 나눌 수 없었으므로 다른 아이들에게 써 주는 양의 두 세배 정도 로 소감을 길게 써 주었다. 성훈이는 신이 났는지 일기를 더 열심히 써왔다. 아이 들은 말도 못하고 침을 흘리며 자기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성훈이의 보배같은 생각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넉넉한 마음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건강한 사회라는 나의 훈화에 조금씩 감동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 다. 그 때만 해도 학급 홈페이지가 활성화 되지 않아서 이메일을 이용하여 서로 소 식을 주고 받도록 하였다. 특히, 성훈이 메일로 우리 반 아이들의 생각을 전하도록 해서 서로 화합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명랑한 성격의 성훈이와 하얀 도화지 같이 순수한 아이들은 무척 잘 어울렸고 서로를 배려할 줄 아는 성숙한 아이들로 변해가고 있었다. 일주일 후, 학급 회장 선거가 있었다. 어떤 아이가 학급 임원으로 홍성훈을 추천 했다. 투표 결과, 예상을 깨고 성훈이가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그 당시에는 성원초 등학교와 마포구 성산동 전체가 술렁거릴 만큼 화제가 되었다. 그 때 쓴 성훈이의 일기를 소개해 보겠다. 68 오늘을 넘어서 내일로 69

2003년 3월 11일 (화) 축하 인사 학급 회장이 된 것이 무척 신기하다. 사람들이 만나기만 하면 축하를 한다. 내가 입 어서는 안 되는 옷을 입고 있는 기분이 든다. 우리 엄마는 인사 받느라고 전화통에 불이 난다. 비록 내가 몸은 불편하지만 열심히 공부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 여줄 것이다. 느리지만 앞으로 천천히 나아갈 것이다. 학급 회장 역할에 열심인 성훈이 성원초등학교 2학년 이인규 어머니가 눈물나게 멋진 정현주 선생님께 라는 글을 나에게 보내면서 성훈이에 관한 내용을 소년한국일보에 미담사례로 추천했다. 그 일로 뇌성마비 친구를 학급 회장으로 선출, 5학년 화목반의 편견없는 우정에 감 동 이라는 제목의 톱기사로 2003년 3월 31일자 신문 1면을 크게 장식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장애를 가진 친구가 어떻게 회장을 할 수 있다고 뽑았나요? 라는 기자의 질문에 아이들은 너무도 멋지게 대답을 했다. 성훈이도 힘들게 말하는데 우리도 생각하면서 들으면 알아들을 수 있어요. 성훈이가 칭찬카드 같은 걸 전해줄 때 천천히 줘도 된다고 하면서 좀 기다리면 되고요. 성훈이는 우리처럼 빨리 말하고 행동을 신속하게 하지는 못해도 생각이 멋 져요. 소년한국일보 기사를 본 KBS 방송국에서는 TV에 출연해 달라고 연락이 왔다. 학급 어린이들이 한 마음이 되어서 다양한 활동을 보여 주며 즐겁게 촬영을 했다. 그것은 2003년 4월 15일 KBS 1 TV 모여라 5시 에 방영되었고 성훈이와 우리 반 아이들은 무척 신나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주변에서 자기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데 어떻게 학급의 리더인 회장직을 제대 로 할 수 있겠는가? 라는 염려의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리더십은 신체적 인 능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우리 반 아이들은 성훈이의 서 툰 동작에 조급해 하지도 다그치지도 않았다. 오히려 끈기있게 시도하는 그의 노 력에 갈채를 보내며 안일한 자신들의 한 부분을 반성하기도 했다. 이동수업을 시작한 성훈이 성훈이는 4학년 까지 이동수업이 있을 때에 항상 교실에 혼자 있었다고 했다. 나는 학습 능력이 충분한 성훈이를 그냥 교실에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성훈이 엄마는 그 해 1월에 막내 성태를 낳아서 갓 백일이 지난 애기를 업고 성훈이를 안고 4층으로 힘들게 등 하교를 시키곤 했다. 또 점심시간에는 내가 밥을 빨리 먹고 성태를 안 고 있으면 성훈이 엄마는 성훈이 밥을 먹이고 바쁘게 화장실을 다녀왔다. 그러니 성훈이 엄마한테 이동수업 때마다 오라고 할 수가 없어서 여러모로 궁리를 하다가 내가 업고 다니기로 했다. 2003년 3월 14일(금) 전교 회장 선거 학교에서 전교회장 선거를 했다. 나는 참여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 생님이 투표하러 가자며 나를 업으셨다. 우리 선생님 등이 무척 아프셨을 것이다. 선생님등에업혀서투표를하고나는참행운의어린이다. 누가그럴수있을까? 엄마 아닌 선생님이 나를 업어 주다니. 우리 가족 중에 엄마, 아빠 말고 나를 업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언제나 기억할게요. 이동수업을 해야 하는 때는 1층에 있는 과학실, 컴퓨터실, 체육시간이었다. 내 가 성훈이를 업고 앞장서서 가면 아이들은 줄을 서서 내 뒤를 잘 따라왔다. 뛰지 말 70 오늘을 넘어서 내일로 71

라고 하지 않아도 알아서 천천히, 그리고 더 조심조심 걸었다. 아마 내가 넘어질까 봐 그런 것 같았다. 우리 반 아이들이 매우 고맙고 대견스러웠다. 성훈이는 실험을 할 때는 호기심 어린 눈망울로 쳐다봤고, 컴퓨터 시간에는 모처럼 자신의 생각을 맘대로 표현하였으며 체육 시간엔 휠체어에 앉아서 눈으로 마음으로 힘차게 뛰고 달렸다. 를 목에 걸어 주었다. 그러면 카드를 반납할 때 까지 한 마디도 해서는 안 되는 것 으로 학급규칙을 정했다. 그 규칙을 어기면 카드를 갖고 있는 시간을 연장하기로 했다. 조용하던 성훈이가 시끄럽게 떠들기에 다른 아이와 똑같이 묵언카드를 주었 다. 그 다음 날 일기를 보니 자기도 친구들처럼 떠들다가 걸려 보고 싶어서 일부러 그랬다는 것이었다. 제대로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지만 성훈이가 자신감을 갖고 소 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 기특했다. 점심시간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신청 받아서 틀어 주었다. 성훈이는 입 을 크게 벌리고 고개를 흔들어 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나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 연스럽게 언어치료에 접근하게 해 주었다. 성훈이에게 보조교사가 생기다 서울서부교육청에 특수교육 보조원 6명이 배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러 학 교에서 신청을 했는데 심사를 거쳐서 선정한다고 했다. 나는 그 동안 모은 신문 수다쟁이가 된 성훈이 성훈이는 말을 하지 못해서 그 동안 조용히 지냈다고 했다. 그러나 차츰 수다쟁이 가 되어가고 있었다. 사실 나는 성훈이가 내는 소리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용하게도 아이들은 의사소통이 꽤 된다는 것이었다. 또래끼리는 뭔가 통하 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성훈이를 내 앞에 앉혀놓고 공부하다가 침을 흘리면 닦아 주고 책장을 넘겨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성훈이가 우리 반 아이들과 어느 정 도 친해졌다고 생각되었을 때 나는 아이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한달 동안 성 훈이와 짝을 하면서 도와주면 다음 달에 편의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너 도나도 짝을 하겠다고 나서서 순번을 정해 주어야만 했다. 우리 반에는 묵언카드 라는 것이 있었다. 아이들이 너무 떠든다 싶으면 그 카드 방송 자료와 성훈이의 일기 그리고 추천서를 써서 서류 봉투가 두툼해지도록 심혈 을 기울였다. 서류를 제출하는 날에 교감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다. 이 자료를 기사 님 편에 보내지 말고 교감 선생님께서 담당 장학사님께 직접 전달해 달라고 하였 다. 빙그레 웃으시며 그렇게 하겠다고 해주셨다. 우리의 정성이 통했는지 심사 결과 성훈이에게 보조교사가 오기로 했다는 연락 을 받았다. 아이들과 나는 보조교사가 하루 종일 수업을 참관하는 것이 좀 불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트럭을 운전하던 성훈이 아빠가 교통사고로 중환자실에 있던 때라 성훈이 엄마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를 정도로 힘든 상황이었다. 불편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다행히도 차분한 성격의 최미환 보조교사는 수업의 흐름을 잘 따 라 주었고 아이들과도 무난하게 지냈다. 72 오늘을 넘어서 내일로 73

성원동산을 떠나며 특수학급이 따로 지정되지 않은 학교에서는 장애아동에 대한 배려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성훈이가 배정된 우리 반은 그대로 4층이었다. 점점 체격이 커지는 성훈이 를 데리고 4층을 오르내리는 것이 모두에게 힘들어졌다. 나는 성훈이가 6학년이 되기 전에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야 했다. 그래서 미리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서 성 훈이가 겪고 있는 어려움 점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는 성훈이가 6학년이 되면 교실 을꼭2층으로 배정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성원초등학교는 1층은 모두 특별실 이고, 2층은 1 2학년만 사용하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성훈이가 배정된 6 학년의 한 반만 2층으로 하는 문제는 학교 운영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고 하 셨다. 성훈이의 힘든 처지를 잘 알고 있었던 운영위원들은 그 일을 흔쾌히 받아들 여 주었고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성원동산을 떠났다. 성훈이의 일기를 들고 출판사를 찾아가다 서울 연가초등학교로 전근을 가면서 1학년부터 5학년까지 쓴 성훈이의 일기장을 가지고 왔다. 그 이유는 성훈이의 일기를 책으로 엮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장 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아이들보다 밝고 명랑하며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최 선을 다해 노력하는 모습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장애가 있는 친구들에게는 자신감과 용기를 주고 다른 친구들에게는 따뜻한 감동을 주고 싶었다. 아는 출판사도 없고 책을 낸 적도 없었던 나는, 오랫동안 친분이 있는 전은숙 선 생님의 소개로 작은 출판사 한 곳을 소개받았다. 3,000부 이상 팔려야 그 다음부터 인세를 주겠다고 했는데 우선 책이라도 내야겠다는 판단을 하고 그 쪽에서 원하는 대로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형편이 어려운 성훈이네 가정에 경제적으로 별로 도 움을 주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다음에 책을 낼 때에는 조 건이 좀더 나은 출판사와 계약을 맺어, 고등학생이 되어 체격이 커진 성훈이가 넓 은 집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 주고 싶다. 특수교육 연수를 받다 특수교육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한 나는 가끔 성훈이를 지도하는데 어려움 을 느꼈다. 그래서 성훈이의 생활을 나와 함께 지켜보며 어려움을 공감하던 이종 임 선생님과 방학을 이용해서 특수교육 연수를 받기로 했다. 여름방학에는 지체부 자유아인 성훈이를 위해 우진학교에서 지체부자유학교의 효과적인 교수-학습방 법 모색 에 대한 연수를 받았고 연세재활학교에서 주최하는 장애 아동과의 의사 소통법 에 대한 강의도 들었다. 겨울방학에는 이종임 선생님 반에 있는 발달장애 아동을 위해 정진학교에서 발달장애 학생의 재미있는 수업을 위한 교수-학습방법 모색 연수를 받았다. 그랬더니 장애아지도에 대한 감이 조금 잡히는 것 같았다. 우진학교에서 연수가 끝나던 날, 그 학교 교감 선생님의 양해를 얻어서 몇 달 후 에 출간될 예정이었던 성훈이의 책을 홍보하였다. 대부분이 특수학교 선생님들이 어서 무척 진지하게 경청해 주셨다. 특히, 서울지체부자유교육연구회 회장이셨던 삼육학교 정창곤 교장 선생님께서 격려를 해 주시며 도와줄 일이 있으면 부탁하라 고 하셨다. 얼마 후에 성훈이 책에 추천사를 써 달라는 청을 드렸더니 선뜻 허락해 주시며 다음과 같이 써주셨다. 홍성훈처럼 뇌성마비 1급으로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며 자기신변처리를 할 수 없는 중증장애아가 일반학급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는 경우는 흔치 않은 일이 다. 한 선생님의 지극한 사랑과 교육자적 소명감으로 중증인 뇌성마비 학생을 통 합교육을 통해 훌륭히 학교생활을 잘 해 나갈 수 있도록 지도하여 많은 사람들에 게 감명과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74 오늘을 넘어서 내일로 75

드디어 책으로 나온 성훈이의 일기 2004년 11월 20일, 성훈이의 일기가 드디어 책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 제목은 세 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 였다. 성훈이의 책이 나온 날 성훈이네 집으로 책을 갖 고 갔더니 성훈이 엄마가 감격해서 막 우셨다. 나도 함께 울었다. 책이 나오기 전에 소년한국일보(2004. 11. 6)와 조선일보(2004. 11. 10)에서 적극 적으로 홍보해 주었다. 그 덕분에 여러 곳에서 격려도 해 주고 책도 많이 사 주었다. 성훈이의 책은 EBS TV 어린이 프로 보니 하니 (2004. 11. 10)와 월간여성잡지 Queen 2004년 12월호에 소개되었다. 스카이 라이프 사랑의 안테나 (2004. 11. 29)에 출연했을 때, 내가 성훈이의 일기를 읽는 부분에서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나서 여러 번 NG를 냈다. 그래도 눈물이 그치질 않아서 스태프들도 함께 눈시울 을 붉히면서 녹화를 마쳤던 기억이 난다. 내가 울면서 읽었던 성훈이의 일기를 소 개해 보겠다. 지 열린지평 2005년 가을호에 나와 성훈이의 글이 실렸다. 성훈이의 책은 1년간 각종 언론 매체에 소개되어 잔잔한 화제가 되었다. 연가초등학교 우리 반 아이들과 편지쓰기부 어린이들이 성훈이의 책을 읽고 해 마다 감동의 편지를 보내고 있다. 성훈이는 이런 독자들의 따뜻한 후원덕분에 지 칠 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새 힘을 얻는다고 했다. 2004년 2월 6일(금) 내가 처음으로 산 엄마 선물 오늘은 내 생일날이다. 치료가 끝나고 엄마는 성훈아, 생일 선물을 사렴. 하시면서 내 주머니에 만 원을 넣어 주셨다. 나는 까르푸에 가서 엄마 구두 5,800원짜리를 사 고4,200원을 영수증과 같이 받았다. 안내하는 아저씨들이 계산도 해 주셨다. 엄마는 구두를 신어보고 우셨다. 죽을 때도 가져가신다고 했다. 아빠한테도 자랑하 고 선생님들한테도 자랑했다. 내가 엄마한테 처음 사 준 선물이다. 우리 엄마는 낡은 신발을 못 신을 때까지 신는다. 다른 아줌마들은 좋은 신발을 신 는데 우리 엄마는 우리들 때문에 늘 고생만 하신다. 엄마! 공부 열심히 해서 내가 엄마 호강시켜 드릴게요. 그 이후로 EBS TV 희망풍경 (2005. 1. 16)과 KBS 1 TV 성장다큐 꿈 (2005. 2. 1)에도 출연했다. 또 내가 평생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는 장애인과 함께 하는 잡 통합교육의 중요성 장애학생이 비장애학생들과 함께 일반학교에서 교육 받는 것을 통합교육 이라고 한다. 솟대문학의 발행인이자 방송작가인 방귀희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 운미소 를읽고 통합교육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준 학급 이라고 칭찬하며 라디오 프로에 초대해 주셨다. KBS 제3라디오 내일은 푸른 하늘 (2005. 1. 7)에 서 몇 번의 특수교육 연수와 성훈이를 지도한 경험으로 25분간 통합교육 을주제 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행을 맡으신 분은 마지막 멘트에서 통합교육이 얼마나 아름다운 교육인지를 알 수 있었고, 정현주 선생님과 홍성훈 학생처럼 스승과 제자가 아름다울 수 있다 면 우리나라 교육이 바로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주셨다. 76 오늘을 넘어서 내일로 77

다음 글은 열린지평 에 실렸던 것으로, 중학교 선생님들이 통합교육에 더욱 관 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성훈아, 왜 울어. 울지 마. 수련회 못 간다고 그렇게 슬프니? 너는 몸이 불편해서 못가지만 몸이 건강해도 못가는 친구들도 있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설움이 복받쳤다. 그래서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엉엉엉 엉엉엉. 나의 모습을 보시던 엄마도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속은 더 아프고 가슴이 찢어지 는 것 같다고 하시면서 큰 소리로 우시는 것이었다. 성훈아, 미안하다. 널 이렇게 낳아서 미안하다. 엄마는 나를 안고 많이많이 우셨다. 그 때 나는 눈물을 보인 것이 후회가 되었다. 스승의 날 특집으로 TV에 나오다 상암고등학교 1학년인 성훈이와 내가 5년간 꾸준히 학교생활과 진로문제를 상담 하며 사제의 정을 나눠 온 것이 2008년 5월 15일 YTN에서 스승의날특집 으로 방영되었다. 앵커는 신체장애가 있는 학생을 5년 동안 따뜻하게 돌봐주고 있는 교 사가 있어 스승의 날 에 훈훈함을 전해주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담임 이신 양명석 선생님은 성훈이가 몸은 불편해도 항상 긍정적으로 생활하고 학교행 사도 빼놓지 않고 참석하려고 한다고 했다. 성훈이 엄마는 나를 또 한 분의 어머 니 라고 했고, 나는 성훈이를 많이 도와주고 격려해주면 사회에 나가서 건강한 시민으로 지역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 고 했다. 이 자리를 빌려 성훈 이가 고등학교 생활을 잘할수있게의욕을북돋아준 YTN 박기현 기자님께 감사 의 말을 전하고 싶다. 성훈이가 수련회에 가지 못한 아쉬운 마음을 담은 작품이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 을 했다. 이 글을 읽으신 선생님들이 노력한 결과, 다음 해부터는 장애 학생들도 봉사자를 동반해서 수련회에 모두 참가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서울 마포 지역의 유명인이 된 성훈이가 중암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고맙 게도 성훈이 하나를 위해서 엘리베이터와 장애인 화장실을 설치해 주었다. 지금은 그 학교가 장애인을 위한 명문학교로 소문이 나서 휠체어를 탄 성훈이의 후배 4명 이 입학을 했다. 성훈이는 중학교 졸업식에서 서울시 교육감상을 수상했고, 휠체 어를 탄 신입생 후배가 전교 1등으로 입학식에서 선서를 하였다. 통합교육의 작은 씨앗이 뿌려져서 장애를 가진 여러 아이들이 많은 혜택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 었을 때 나는 무척 흐믓했다. 오늘을 넘어서 내일로 성훈이는 지금 학교 공부와 글쓰기 공부, 두 가지 모두를 열심히 하고 있다. 오랫 동안 의자에 앉아 있으면 엉덩이가 무척 아플 텐데 보충수업도 빠지지 않고 교외 백일장에도 여러 번 나가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올해 성훈이의 가장 멋진 추억 은 제5회 고정희문학상 예선을 통과하여 강진수련관과 해남 미황사에서 열린 본 선대회와 시상식에 참가했던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50여명의 참가자들은 2박 3일(2008. 6. 6~8)동안 조별로 활동하며 고정희 시인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 를 나누었다. 성훈이는 유일한 장애인으로 참가했으며 본선에서 장려상을 수상했 다.작가로서의 꿈을 키워가는 성훈이는 꾸준히 글을 쓰고 있다. 그 글을 나한테 메 일로 보내면, 나는 성훈이의 글과 여러 자료를 모아 정리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기 도 하며 수상작은 잡지에 투고해서 실어주기도 한다. 78 오늘을 넘어서 내일로 79

선생님의 그 책상에서 제가 회장으로서 친구들에게 칭찬카드를 나눠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5학년 화목반의 아이가 아닌 홍성훈으로 당당히 거듭 나게 해 주셨던 선생님! 비록 지금 힘들고 눈물을 흘리는 일이 많지만 선생님의 편지를 볼 때면 잠시 동안이 나마 미소를 띠게 됩니다. 저의 멘토이자 또 한 분의 어머니이신 선생님, 따스한 햇살같이 어루만져주시는 그 손길, 잊지 않겠습니다. 선생님, 사랑합니다!!! 2008년 여름 방학에 선생님의 영원한 제자 성훈 올림 내년 이맘때쯤 성훈이의 두 번째 책을 엮어서 세상에 선을 보이려고 한다. 아마 미소천사 성훈이 에서 의지의 문학소년으로 성장한 성훈이 를만날수있을것 이다. 아낌없는 격려와 따뜻한 박수의 힘으로 성훈이가 원하는 대학의 국문과에 입학해서 활짝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리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서 꿋꿋 하게 역경을 극복해 나가는 더 많은 성훈이가 나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여름방학 중에 보낸 성훈이의 편지글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사랑하는 정현주 선생님께 찌는 듯한 무더위가 몸부림을 치는 계절입니다. 건강하게 지내시는지요? 저는 요 즘 들어 부쩍 외출을 하는 횟수가 많아졌습니다. 하자센터 의 창의적 글쓰기 라 는 강의를 들으러 지하철을 타고 영등포로 갑니다. 어제도 심윤경 작가님과 만남을 가졌는데 아주 유쾌하고 재밌었습니다. 작가님을 뵙고 지하철 2호선을 탔는데 문득 선생님 생각이 났습니다. 선생님께서 는 한창 늪에 빠졌던 저에게 문학 이라는 나뭇가지를 내밀어 주셨습니다. 저는 그 것을 붙잡고 더 큰 나무로 오르기 위해서 계속 노력해 왔습니다. 갑자기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 생각납니다. 성원초등학교 5학년 화목반으로 올라갔 더니 제일 눈에 띄는 건 교실 앞 쪽에 놓여 있던 선생님의 책상이었습니다. 80 오늘을 넘어서 내일로 81

교단 수범사례 무조건적 수용으로 분리불안 장애를 극복하다 허만영 경상북도 김천시 대룡초등학교교사 XXXXXXXXXXXXXXX 2008 교육현장체험수기 공모에서 입상하게 되어 매우 영광스럽습니다. 그동안의 제 노력 에 대하여 진심으로 칭찬해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 교육 현장에서 묵묵히 본분을 다하는 많 은 선생님들이 계십니다. 이 수기가 현장에 계시는 동료 선생님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그보다 더한 보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번 수상으로 더욱 열과 성을 다하여 학생들 을 지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전교생이 55명에 불과한 본교는 김천시 중심지로부터 약 7km 떨어진 전형적인 농 촌의 소규모 학교이기에 만약 새로운 학생이 전학을 오게 되면 그 소식은 학교 전 체의 큰 뉴스거리가 된다. 이런 학교에 전교생이 800명이 넘는 본교의 이웃학교인 김천다수초등학교에서 분리불안 장애 증상을 가진 김경미 학생이 전학을 왔다. 이 학생이 분리 불안 장애를 극복하고 정상적인 학교생활로 변하기까지의 과정을 그 날그날 실천한 내용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본 교사는 분리 불안 장애를 치 료하는 전문가가 아닐뿐더러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실천하지는 않았다. 그 러나 장애 아동의 행동과 말을 무조건적인 수용의 과정을 거친 결과 하루하루가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꾸준히 지도한 결과 김경 미 학생은 마침내 장애를 극복하고 지금은 반 아이들과 아주 자연스럽게 학교생활 을 하고 있다. 장애를 극복하기까지의 실천한 주요 사례를 아래와 같이 일기 형식 으로 나타내었다. 서있다. 우리 학교는 일년 내내 전학 오는 아이들이 거의 없어서 전학 온 경미와 서 로 앉겠다고 경쟁이 치열하였다. 우리반 여학생 중에서 가장 활발한 박소희가 짝 궁이 되었다. 둘은 교실 가운데에 앉게 되었는데 첫날은 소희, 경미, 경미 옆에는 걸상만 놓고 경미 어머니께서 함께 앉게 하였다. 그래서 우리반은 오늘부터 13명 (경미 어머니 포함)이 공부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루 수업이 끝나고 하교할 때 경 미와 친근감을 갖으려고 현관까지 가서 배웅하면서 악수를 청해 보았지만 보기 좋 게 거절당했다. 정말로 진땀나는 하루였다. 엄마와 함께 학교 다니는 아이 2006년 5월 17일 수요일 시험대에 오른 나의 인내심 나의 교직생활 35년을 시험하는 아주 뜻 깊은 하루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 르고 평소와 같이 출근했다. 김천다수초등학교에서 우리학교로 전학 오는 김경미 를 만나는 날이었다. 오늘도 평소와 같이 아침 8시 30분경 운동장에 들어섰다. 들 어서는 순간 어린 여학생이 어머니 치맛자락에 묻혀 울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직 관적으로 저 학생이 우리 2학년에 전학 오는 학생임을 알았다. 그 학생이 운동장에 서 2학년 교실까지 들어오는데 약 30분이 걸렸다. 아침부터 진땀이 났다. 어머니 곁을 조금만 떨어져도 자지러지게 우는 경미는 이렇게 우리학교 2학년 학교생활 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이들 앞에서 경미를 소개하자 경미는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지도 못하고 그냥 2006년 5월 18일 목요일 아이의 마음 빼앗기 궁금한 마음으로 여느 때와 같이 학교에 출근해보니 경미가 어머니와 함께 등교해 있었다. 경미 어머니가 교실 중간에 앉아 계시니 뒤에 있는 어린이가 앞이 잘 보이 지 않아서 오늘은 소희, 경미와 경미어머니 이렇게 세 사람을 교실 맨 뒷자리(아동 수가 적어서 앞에서 세 번째 자리)에 앉으시게 했다. 첫 시간에 본 교사가 약 10년 전부터 모은 예화 자료 모음집 중에서 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 죽은 사 람이 살아나서 진진이를 세 번 부르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제목이 조금 긴 이야기 를 했다. 우리 반 아이들은 벌써 한 번 들은 이야기이지만 경미를 위해 우리 반 아 84 무조건적 수용으로 분리불안 장애를 극복하다 85

이들이 한 번 더 듣기로 하였다. 사실 이 이야기는 한 번 더 들어도 너무 너무 재미 있어서 반 아이들이 한 번 더 읽어 달라고 조르곤 했다. 이 이야기를 읽어 준 이유는 간단하다. 아! 학교에 오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 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또 내일은 우리 선생님께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 주실까? 기대하며 학교에 등교하도록 하기 위한 유도 전략인 셈이다. 사실 우리 어른들도 재미있는 TV연속극은 연속극 하는 시간이 기다려지듯이 아이들도 마찬 가지 일거라 생각해서다. 본 교사가 애지 중지 아끼는 예화 자료 모음집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너무 너 무 많다. 이 이야기를 듣고 경미도 학교 오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라 생각했다. 왜 냐하면 다른 아이들도(본교의 상급학년 아이들) 모두 재미있다고 했으니까 나는 경미 어머니께서 얼마나 심심할까 걱정이 되어서 예화자료집을 읽도록 드렸다. 공 부를 하면서 보니까 그 책에 푹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시는 것 같았다. 수업 시 간 중에는 될 수 있는 데로 쉬운 문제는 경미가 발표 할 기회를 많이 주는 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2006년 5월 19일 금요일 삼중고에 시달림 나는 요즈음 삼중고에 시달리면서도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학교에 출근한다. 삼 중고란 경미가 학교에 혼자 등교하도록 해야 하고, 큰 학생(윤상탁 교장선생님은 경미 엄마를 이렇게 불렀다)이 심심하지 않게 해야 하고, 우리반의 다른 아이들도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도록 묘안을 짜내는 일이다. 왜냐하면 경미의 상태가 상당 히 장기화 될 것 같은 조짐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미 어머니는 경미와 나 란히 앉아있다. 내가 그 동안 정성들여 모아둔 제 2의 보물단지 신문 스크랩철 6권 을 경미 어머니께서 읽도록 드렸다. 경미 어머니께서는 미술시간에는 반 아이들과 함께 분단을 만들어서 활동을 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경미가 부모로부터 떨어져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전략을 세웠다. 맨 뒷자리에 있는 경미를 앞쪽으로 옮기고 어머니는 맨 뒷자리에 앉아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오 늘은 키 순서대로 자리를 다시 배치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아이들을 이리 저 리 세우다가 경미와 소희를 앞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오도록 배열해서 경미는 앞 줄 맨 왼쪽에, 어머니는 맨 뒷줄 오른쪽에 앉도록 하였다. 경미야, 어머니가 옆에 앉아있지 않아도 우리 교실에 함께 있는 것과 같지? 이렇게 말하니까 고개를 끄 덕끄덕했다. 이렇게 해서 교실 안에서 만이라도 어머니와 경미가 떨어져 있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체육시간에도 어머니는 경미가 틈틈이 볼 수 있도록 운동장 나 무 그늘에서 책을 읽고 있어야 했고, 컴퓨터 시간에도 컴퓨터실에 아이들과 함께 갔다. 심지어 화장실에도 함께 가야하는 극도의 분리불안 증세를 보였다. 2006년 5월 20일 토요일 반 아이들의 불만 토로 오늘도 경미는 어김없이 학교에 어머니와 함께 등교했다. 첫째 시간에 약속 한 것 처럼 재미있는 예화 자료집에서 동화를 읽어 주었다. 경미는 틀림없이 이 시간을 기다린 것으로 생각한다.(다른 아이들도 다 그렇게 했으니까) 경미가 없는 틈을 타서 우리 반 아이들과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여러분이 보기에 선생님이 경미만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나요? 그렇게 질문을 하니 이구동성으로 불만이 터져 나온다. 여러분 정말 관찰력이 대단해요. 경미가 여러분들처럼 혼자 등교해서 공부할 수 있을 때까지 선생님은 경미를 여러분 보다 더 많이 사랑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선생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지난 3월 신학기부터 지금 까지 선생님은 여러분을 매우 사랑해 왔습니다. 경미가 정상으로 되돌아 올 때까 지 경미를 위해 여러분이 협조 해 주기 바랍니다. 이렇게 당부를 했다. 그 때부터 경미는 내 심부름, 프린트물, 숙제장, 일기장 나누어 주는 것을 도맡 아 놓고 했다. 경미는 반장도 부반장도 아닌데 그런 것들을 하고 싶어했다. 경미야 체육시간에 어머니가 교실에서 책을 읽으면 안 될까? 너희들은 재미있 게 체육을 하는데 어머니께서 심심하지 않을까? 86 무조건적 수용으로 분리불안 장애를 극복하다 87

이렇게 달래보았다. 처음에는 안 된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고개를 끄덕 끄덕했 다. 어떤 새로운 시도를 할 때는 경미한테 사전에 이야기를 해서 좋다고 하면 실시 했다. 한 번은 경미가 어머니와 조금 떨어지도록 하기 위해 음악 시간에 경미가 노 래하는데 정신이 없을 때 경미어머니께서 운동장 나무 그늘에서 책을 읽도록 교실 뒷문을 통해서 운동장으로 나가시게 했다. 잠시 후 경미가 뒤로 돌아다 보고는 어 머니가 자리에 계시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선생님 우리 어머니 어디 가셨어요? 이렇게 물어왔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아마 변소에 가셨을 거다. 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경미가 안절부절 못하고 계속 교실 뒤쪽만 살피다가 변소에 가겠다고 해 서 겁이 덜컥났다. 할 수 없이 엄마가 변소에 계시지 않으면 시원한 나무 그늘에 계 실지도 모르니 그리로 가 보라고 이야기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경미는 변소에 가 서 용변을 본후 운동장 나무그늘에 가서 어머니와 함께 교실로 들어왔다. 한발한발천천히 2006년 5월 22일 월요일 희망이 엿보임 경미가 자전거를 타고 어머니도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등교했다. 경미가 내 속을 많이 태워도 경미를 보면 항상 반갑다. 왜냐하면 조금씩 경과가 나아지는 것 같은 조짐이 보였기 때문이다. 선생님과 전보다 더 가까이에서 활동하는 일이 자주 일 어난다. 오늘은 큰 학생에게 연탄길 1,2,3권을 읽으시라고 권했다. 예화자료집 보다는 재미가 없지만, 예화자료집은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깃거리고, 연탄길은 어른이 읽어도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는 글들이 실화처럼 잘 쓰여 있어서 시간 보 내기에 아주 적절한 책인 것 같다. 사실 경미는 학교를 잘 다니고 있지만(어머니와 함께 등하교도 하고 교실에서 공부도 함께 하고) 경미 어머니가 큰일이다. 경미 때문에 아무런 일도 못하고 항상 함께 등하교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본 교사는 학교 사무가 교무인 관계로 경미가 우리 학교에 전학 오기 전에는 아이들 스스로 할 수 있는 문제를 제시하고 나서 급 한 공문서를 작성해서 발송하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경미가 전학을 오고 난 후에 는 한 번도 공부 시간에 공문서를 작성한 일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학부모 한 사람이 계속 교실에서 지켜보고 있으니까 조금이라 도 수업을 소흘하게 할 수가 없었다. 수업도 매일 공개 수업하는 것과 같이 힘들고 때론 피곤했다. 그러나 나는 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타 학교에 근무할 때 여러 교원을 모시고 수업 선도교사로 수업 공개를 약 5년간 실시한 관계로 어느 정도 면 역이 생겨 있었다. 그것이 요즈음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 같다. 2006년 5월 23일 화요일 심경의 변화 유도 경미야 언제까지 어머니와 함께 등하교를 하고 공부를 해야겠니? 네가 엄마라 고 생각해 봐라. 얼마나 심심하시겠어, 그러니까 혼자 학교에 올 수 없겠니? 다른 친구들은 모두 혼자 등하교를 하는데 너 혼자만 어머니하고 등하교를 하니 부끄럽 지도 않니, 네가 1학년도 유치원생도 아닌데 부끄럽지도 않아? 라고 압박해 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때마다 경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이 없다. 오늘도 경미를 유혹하기 위해 예화자료집에서 재미있는 동화를 골라 한 편 읽어 주었다. 나는 동화를 읽어 주면서 경미 몰래 자주 경미의 눈치를 살펴본다. 경미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가 매우 궁금하기 때문이다. 경미는 겉으로는 아무런 표정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읽을 때 책에는 없는 내용도 조금씩 살을 붙여 가면서 읽어준다. 왜냐하면 더욱 실감 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면 아이들 이 재미있다고 야단이다. 오늘도 하루 해가 서산으로 느릿느릿 넘어가고 있었다. 88 무조건적 수용으로 분리불안 장애를 극복하다 89

2006년 5월 24일 수요일 향상된 경미의 행동 오늘은 큰 학생에게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1,2,3권을 드렸다. 두 번째로 재미 있는 책이라고 말씀 드렸다. 이제 경미는 친구들하고 잘 논다. 컴퓨터 수업시간에 는 어머니께서 동행하지 않아도 될 정도이다. 체육시간에도 경미 어머니는 교실에 서 책을 읽을 수 있다. 나는 힘든 가운데 보람을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어떤 전략 을 짤 때마다 경미어머니께 미리 말씀 드리고 협력을 구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 는 경미의 상태가 어느 날 갑자기 악화되어 물거품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경미의 행동은 점차 향상되어가고 뒤로 후퇴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아 마음 한 구석에서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2006년 5월 25일 목요일 우리학교 전 교직원의 관심 오늘도 경미는 어김없이 어머니와 함께 등교해 있었다. 이제 친구들하고 잘도 지 낸다. 요즈음 우리학교 교직원들은 교장선생님을 비롯해서 경미 안부를 묻는 것으 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그러면서 모두 신기하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신다, 우리 학교는 전교생이 65명이라 전교직원이 전교생을(유치원생부터에서 6학년까지)다 파악하고 있다. 사실 경미 같은 아이가 처음부터 우리학교 같은 소규모의 학교에 입학했더라면 모두 경미에게 관심을 가지고 배려를 해주어서 부적응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으리 라 생각해 본다. 어떻든 현재로 봐서는 경미가 우리 학교에 전학온 것은 다행이라 생각한다. 교장선생님의 배려로 경미 어머니도 학교 급식소에서 우리와 함께 점심 식사를 하였다. 경미가 하루라도 빨리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되도 록 윤상탁 교장선생님께서 배려를 해주신 것이다.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의 큰 마 음 씀씀이가 보이는 대목이다.. 2006년 5월 26일 금요일 칭찬하기 오늘부터 큰 학생의 공부거리로 일출봉 1, 2, 3, 4, 5, 6권을 권했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본인 생각에 성인들이 읽을 수 있는 책 중에서) 이라고 소개를 덧붙였다. 이 책은 유인촌이 출연한 연속극으로 TV에방영된내용 과 줄거리가 같다. 그러나 나는 그 연속극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원래 나는 연속 극은 잘 보지 않았다. 오늘로서 경미가 우리학교에 전학 온지 10일째 되는 날이다. 이제 평소에는 보통 학생과 똑같이 활동한다. 단지 등하교 시와 교실에 있을 때 어 머니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만 다르고 일반 아동들과 똑같이 적응을 잘 하고 있 다. 무척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경미가 조금만 잘 해도 칭찬을 엄청나게 크게 해주었다. 그랬더니 경미는 너무 기뻐한다. 하루하루 지나면서 경미가 나의 생활지도 방법에 잘 적응하고 있다. 이제는 가 끔 혼도 내고, 별명을 불러도 별로 화를 내거나 토라지지 않는다. 아마 선생님을 믿는가 보다. 그리고 뒤에 든든한 어머니가 계시니까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나는 눈만 뜨면 경미가 혼자 등교할 수 있는 전략을 짜느라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 새로 운 방법을 적용할 때는 항상 경미 어머니한테 먼저 말씀드리고 협력을 구했다. 90 무조건적 수용으로 분리불안 장애를 극복하다 91

2006년 5월 29일 월요일 어머니와 1시간 떨어져서 공부하기 경미야 오늘은 어머니와 1시간 떨어져서 공부해 보자. 어머니가 뒤에 앉아 계시 든 운동장에 계시든 점심시간에는 함께 식사할 수 있잖니? 라고 묻자 경미는 의외로 쉽게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한다. 그래서 넷째 시간에 경미 어머니께서는 운동장 나무그늘 아래에서 책을 읽고 경미는 교실에서 아이들 과 함께 수학 공부를 했다. 넷째 시간이 끝나자마자 경미는 운동장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어머니 손을 잡고 급식소로 점심식사를 하러 온다. 이 장면은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그려 보던 장면이었다. 이제는 경미가 어머니와 떨어져서 공부하는 연습 을 할 때가 된 것 같다. 나도 너무 힘들고 아이들도 경미 위주로 학급 운영이 되는 것에 짜증을 내고 있었다. 그래서 경미야 우리 반 친구들이 너를 위해서 많이 도와주니까 너도 그 고마움을 잊으 면 안 된다. 나중에 다 갚아야 해, 알았지? 라고 했더니 고개를 숙인 채 그냥 끄덕일 뿐 경미는 말이 없다. 경미가 하교 할 때 악수를 하며 내일은 경미가 나아지겠지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2006년 5월 30일 화요일 일일 반장 김경미 경미는 반장은 아니지만 평소에도 반장노릇을 하고 싶어해서 자잘한 심부름을 도 맡아왔다. 그러나 오늘은 정식으로 일일 반장 이라는 호칭을 붙여 주었다. 경미 가 그렇게 좋아하는 것은 처음 봤다. 그래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경미야 우리 학교에 처음 와서 공부하고 집으로 가던날(5월 17일), 선생님이 악 수하자고 손을 내밀었을 때 왜 악수 안 했지? 라고 물었다. 경미가 엄마가 있어서 악수 안했어요. 라고 답하길래 지금은 악수 할 수 있냐고 했더니 할 수 있단다. 그럼 이 악수는 내일부터 경미는 어머니가 아닌 친구들과 함께 등하교 한다는 약속의 악수야. 라고 말하며 손을 내밀자 경미는 조금 시큰둥해졌다. 대신 경미가 비밀 한 가지를 털어 놓았다. 선생님 저 김천다수초등학교 2학년때 담임선생님이 무서워서 학교에 가기 싫 었어요. 그럼 나는 뭔가? 나는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별명이 호랑이 선생님 이 아니었던가? 아, 나는 이제 종이 호랑이가 되었구나!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 하며 그럼 나는 안 무섭니? 라고 물으니 하나도 안 무섭단다. 정말 내가 이제는 종이호랑이가 다 되었나 보 다. 경미가 즐겁게 학교생활을 끝내고 하교하였다. 나의 노력이 헛되진 않았는지 경미의 태도는 내 눈을 의심할 만큼 향상되어 가고 있다. 나보다도 경미 어머니와 가족들이 더 좋아하시리라 생각된다. 학교생활에 적응한 경미 2006년 6월 1일 목요일 공든 탑이 무너지다 아침에 출근해 보니 경미가 아버지와 함께 운동장에서 첫날처럼 교실에도 들어가 지 않고 울고 있었다. 옆에는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께서 서 있었다. 아이는 아무리 달래어도 막무가내로 울기만 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이 아닌지 너무나 허탈했다. 경미는 교실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 고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교문까지 가서 내일은 학교에 꼭 와야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아버지께도 내일은 꼭 등교는 시켜달라고 부탁드렸다. 또 학교에 오지않는날에는집에서학교에온날보다더잘해주지는 마시라고도 했다. 나의 마음은 매우 허탈했다. 그동안의 고생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것은 아닌지! 잘못하 92 무조건적 수용으로 분리불안 장애를 극복하다 93

면 경미가 영원히 학교에 다니지 못할 것만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니 그동안 경미를 제외한 우리반의 나머지 아이들 12명에 대해 소홀했던 것 같아 매우 미안했다. 교실에 들어온 나는 경미가 없어서 허전했지만 아이들 앞에서 나의 속내를 다 말할 수는 없어서 하루 종일 교실 뒷문을 바라보며 하루를 보냈다. 일 과가 끝날 때까지도 꼭 경미가 어머니와 함께 손잡고 교실로 들어 올 것만 같았다. 2006년 6월 2일 금요일 경미가 부모님(아버지, 어머니)과 함께 등교하다. 다른 날과 똑같이 학교 교문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경미가 부모님과 등교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할아버지가 계시는 경북 울진에 꼭 가야 할 일이 생겨서 경미가 학교 수업을 못하고 조퇴를 해야겠다고 아버지께서 말씀하 셨다. 나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잘 다녀오라는 말을 하고 교실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왜냐하면 오늘 경미가 학교에 등교하지 않으면 그동안의 노력 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까 봐 무척 걱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6년 6월 3일 토요일 케이크 파티 오늘은 경미가 우리 학교에 전학 온지 벌써 18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래서 경미가 앞으로는 혼자 등하교를 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케이크 파티를 열었다. 실제로 토 요일은 학교에서 급식을 하지 않는 날이라 반 아이들 모두 배가 고픈 날이기도 하 다. 2교시 후 교실에 둘러 앉아 맛있게 케이크를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아이들에 게 이야기했다. 2학년 1반 우리반 어린이 여러분들이 협조를 잘 해주어서 경미가 학교생활에 작 적응하는 것을 보니 선생님은 기분이 매우 좋습니다. 그리고 경미 가 하루라도 빨리 혼자 등교하는 날이 오기를 목마르게 기다립니다. 그리고 하교 할 때 현관에서 안녕! 잘가 경미야. 라고 인사하며 월요일은 경미가 혼자 등교하 면 더욱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전했다. 2006년 6월 5일 월요일 경미는 예화자료집 이야기가 재미있을까? 경미는 항상 나보다 먼저 등교해 있었다. 그런 경미의 모습이 무척이나 보기 좋았 다. 오늘은 월요일 첫째 시간 바른생활 시간이다. 재미있는 동화(예화 자료 모음 집)를 들려주어 경미 마음을 사로잡는 날이구나! 나는 조금 긴장했다. 감정을 넣 어 읽으면서 곁눈으로 몰래 경미의 모습을 훔쳐 본다. 수업 시간 중에 경미는 나를 잘 쳐다보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렇다고 번번이 물어 볼 수도 없다. 경미어머니에게는 전 12권으로 되어있는 아리랑 1,2권을 먼 저 권했다. 경미어머니께서는 흔쾌히 받아서 읽겠다고 하셨다. 나의 제의에 응해 주시는 경미어머니가 무척 고맙다. 2006년 6월 7일 수요일 정상적인 학교생활 경미가 우리 학교에 전학 온지도 벌써 22일째가 된다. 이제 경미가 충분히 혼자 등 하교를 할 만큼 학교생활에 적응이 되어가는 것이 눈에 보인다. 그 동안 본 교사의 적극적인 수용과 반 아이들의 희생과 봉사정신이 발휘되어 좋은 결과가 드디어 서 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오늘도 경미를 위해 재미있는 동화를 한 편 골라 읽어 주었 다.(사실은 전 학급의 아동을 위해서 읽어 주지만 말은 경미를 위해서 읽어 주는 것처럼 말을 하고 나서 읽어 준다.) 경미가 점점 재미있는 동화 속에 빠져 드는 것 이 눈에 보였다. 2006년 6월 8일 목요일 드디어 결심 경미가 할머니와 함께 등교를 했다. 경미가 이제는 어머니가 아닌 할머니와 함께 등교할 정도로 분리불안 증세가 많이 완화된 것 같이 보였다. 퍽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경미에게 혼자 등하교하겠다는 다짐을 받기로 마음먹었다. 오후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갈 무렵 경미를 부른 다음 말을 건넸다. 94 무조건적 수용으로 분리불안 장애를 극복하다 95

경미야, 어머니는 책이라도 읽으시지만 할머니께서는 책도 못 읽으시고 하루 종일 저렇게 기다리시면 얼마나 지루하실지, 한 번 생각해 본적이 있니? 그리고 언제까지 이렇게 어머니와 함께 등교할 거니, 언제부터 혼자 등교할지 오늘은 선 생님과 날짜를 정하고 약속을 하자. 그러자 경미가 달력 앞에서 한 참 머뭇거리더니 6월 12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 다. 나는 얼른 12일에 동그라미를 치고는 경미와 손가락을 걸었다. 경미는 아이들 앞에서도 약속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하교했다. 나는 그 때부터 6월 12일이 무척이나 기다려졌다. 2006년 6월 9일 금요일 앞당겨 약속 실천하는 예쁜 경미 아침 출근시간에 기분 좋은 모습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내 눈을 의심할만한 사건 이 펼쳐지고 있었다. 자동차의 앞 유리창을 통해서 경미가 혼자 자전거를 타고 학 교 근처 동사무소 앞을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무척 흥분이 되고 기뻤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경미 바로 옆에 가서 경미가 혼자서 등교를 하는 것을 보니 기 분이 좋다고 칭찬을 했다. 차에서 내려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다시 차를 몰 아 먼저 학교에 도착했다. 우리 2학년 1반 어린이 12명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 만 경미가 등교 하는 시간에 자전거 보관소 근처에서 기다렸다가 경미를 반갑게 맞이한다. 반 아이들도 나의 마음과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것 같다. 나는 우리반 여학생들과 함께 경미가 등교하는 길로 마중을 나갔다. 한참을 기 다려도 경미가 보이지 않는다. 마음속으로 나는 무척 당황했다. 급히 학교 교무실 에 와서 경미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경미 어머니께서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경미 가 자전거 열쇠를 갖고 가지 않아서 열쇠 가지러 집에 왔다가 다시 혼자 학교로 갔 다고 했다. 나는 다시 한 번 가슴을 쓸어 내렸다. 우리 반 아이들과 나는 자전거 보 관소 앞에서 경미가 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경미가 자전거를 타고 혼자 교문에 들어섰다. 나와 우리 반 아이들이 얼마나 오래 도록 기다리던 날이었던가. 우리 모 두는 경미가 학교에 도착할 때 크게 박수로 환영해 주었다. 이렇게 경미의 정상적인 학교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날 오후에 경미 알림장 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 주었다. 그리고 경미가 오래 오래 다음의 글을 읽고 보관 했으면 한다. 예쁜 경미에게 선생님과 반 친구들은 경미가 오늘부터 혼자 등교해서 매우 기쁩니다. 경미를 칭찬 합니다. 평소보다 더 예쁜 경미! 부모님,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어린이로 자라길 바랍니다. 반 친구들의 사랑을 잊지 않는, 마음씨 착한 경미가 되었으면 합니다. 2006년 6월 9일 경미를 끔찍히 사랑하는 담임 씀 96 무조건적 수용으로 분리불안 장애를 극복하다 97

밝은 빛이 비치다 본 교사는 평소에 성격이 급하고 아이들에게 엄하며(아이들이 호랑이 선생이라는 별명을 붙였음) 원리 원칙을 강조해왔다. 그리고 어떤 도덕적 기준을 정해 놓고 그 기준에 맞게 상벌을 적용해 왔다. 그런 내가 변해도 너무나 많이 변해 있었다. 아 마 2005학년도 여름방학 20일과 겨울방학 20일 동안 대구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상담교사 1급 전문연수를 받은 영향이 매우 컸을 것으로 짐작해 본다. 그리고 지난 겨울학기 연수를 수료할 때 대구대학교 최웅용교수께서 우리나라 사람이 선진 외 국 사람에 비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서 한상복씨가 지은 배려 라는 책을 사서 읽었다. 책에서 감동을 받아 경미를 위해 많은 배려를 하고 눈높이를 낮출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엄격하기로 소문난 내가 어떻게 경미의 말과 행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끈기 있게 기다려 경미가 정상적인 아동들과 함께 학교생활 을 할 수 있도록 했을까를 다시 생각해 봐도 내 자신이 이상할 만큼 변해 있었다. 처음 경미를 만났을 때 나의 각오처럼 나는 한 학생이 학교생활에 정상적으로 다 니도록 열심히 이끌었다. 그런 내 자신을 뒤돌아보니 매우 만족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웠다. 지금도 선물로 받은 오징어 한 축은 두고두고 나의 마음 속에 소중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마지막으로 경미 어머니와 주고 받은 편지를 함께 싣는다. 경미 어머니께 요즈음 경미가 학교생활에 매우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특히 선생님과 아주 사이좋게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보내드린책다읽으셨나요? 다른책을읽고싶으시면경미편에계속보내드리겠 습니다. 경미 어머니, 그동안 경미 때문에 사생활도 포기하시고 경미 뒷바라지 하 시느라 정말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2006년 6월 15일경미담임허만영드림. 선생님께 경미의 전학 문제로 대룡초등학교를 처음 학교를 방문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선생 님께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과 아이들이 선생님을 아버지처럼 따르는 모습을 보고 선생님께 맡기면 경미를 위해 애써주시리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경미를 위해 해결책을 생각해주실 것 같았어요. 지금은 경미도 학교생활에 적응 잘 해서 대룡초등학교로 전학 온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경미가 매일 해 맑은 모습으로 등하교할 때마다 저 역시 전학시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귀한 선물 경미가 혼자 등하교도 잘 하고 친구들과도 즐겁게 지낼 무렵, 경미 아버지와 어 선생님께 매우 감사드리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선생님께서 빌려 주신 책 잘 읽 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빌려 주신 책과 많이 가까워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음 책도 부탁드립니다. 2006년 6월경미엄마드림. 머니, 외할머니 이렇게 세분이 함께 학교에 오셨다. 경미가 학교생활도 잘하고 집 에서 동생과도 사이좋게 잘 지낸다며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하러 오셨다는 것이었 다. 그리고 선물로 마른 오징어 한 축을 주셨다. 그분들과 이야기 하면서 그동안 나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처음의 각오대로 경미의 분 리불안 장애를 잘 극복하고 치료하게 도운 내 마음속의 용기와 끈기에 새삼 고마 98 무조건적 수용으로 분리불안 장애를 극복하다 99

교단 수범사례 마음으로 함께 안는 6학년, 네가참좋다 이명숙 서울특별시 신남초등학교 교사 XXXXXXXXXXXXX 오늘 아침 신문에서 교육의 의인을 찾습니다 라는 칼럼을 읽었습니다. 진보다 보수다 하 며 잇속 챙기기에 바쁜 저들을 꾸짖으며 소신있는 교육자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교직 평생 저의 유일한 욕심은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바르게 잘 가꾸어갈 수 있도록 그 들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잘못되면 바로 잡아주고자 했던 마음 뿐이었습니다. 교직자의 천 성 같은 것이었지요. 요즘은 그런 마음조차도 형편없이 폄하되고 또 다른 빛깔의 욕심으 로 왜곡되곤 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조 금의 부끄럼 없이 아이들을 진정 사랑하노라 말할 수 있습니다. 가끔은 너무나 영악한 아이들을 볼 때도 있습니다. 순수한 동심이 어디론가 내다 버려 지고 있는 것 같아 슬프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단 하나의 동심이라도 건져낼 수만 있다면 저는 변함없이 소신을 지킬 것입니다.

어린이 교육은 지식을 잘 가르치기보다 건강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스 스로 삶의 지혜를 깨우치게 하고 긍정적 자아정체성을 갖추게 돕는 것이다. 또한 훌륭한 교사란 머리가 좋거나 학식이나 연구 실적이 높은 박사, 재주가 뛰어난 사 람이 아니라 먼저 어린 아이들과 한 마음처럼 잘 통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아이들 이 자신과 타인과 삶을 바르게 사랑하도록 돕고, 부모가 진실과 책임과 열정으로 아이를 감싸 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다. 그래서 진정한 교육이란 부모, 어린이, 교사가 삼인사각 뛰기를 하는 자세로 어굳은 의지와 인내심을 발휘 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10년 만에 도전하는 6학년 담임 죄송합니다. 선배님 고백할게 있습니다. 겨울 방학을 앞두고 전 직원이 한 자리에 모였다. 아들과 동갑네인 후배가 공손 히 술잔을 내밀며 한참 먼 저쪽 자리에 앉았다 다가왔다. 오! 아니예요. 능력도 없이 많이 부족한 내가 아직까지 젊은이들과 이 자리에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황송하지요. 정말 그랬다. 이제 교실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내 또래 교사가 희귀하게 되었 기에 젊은 교사들과 함께 있어도 되는지 걱정도 되고, 그들이 아는 체 해주는 것만 으로도 정말 반가웠다. 늘 당당하고 신명나는 교직이었지만 나는 언제부터인가 황 혼기의 열등감을 감추려고 전전긍긍 애쓰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선배는 우리 신남 초등학교의 전설이예요. 이것은 또 무슨 일인가 가슴이 쿵 소리를 냈다. 3월에 선배가 6학년 담임을 희망했다는 데에 대해서 제가 좀 건방지게 생각했 었어요. 웬 오기일까, 오만은 아닐까 우려도 했구요. 사실 걱정할 만 했다. 요즈음 6학년 담임은 모든 교사가 절대적으로 피해가는 상 황이어서 일간지에서까지 6학년 담임 기피현상 이 큰 머리기사로 다루어지는 사 회문제가 되기도 했고, 상부 기관에서는 오죽하면 6학년 담임할 경우 승진을 위한 가산점 부여에 대한 입안을 생각하기까지도 했다. 6학년 담임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몸집은 거의 어른을 능가하지만 판단력이나 조 절력은 아직 여물지 못한 혼돈의 시기인 그 아이들은 인터넷, TV, 핸드폰 등을 통 한 각종 영상물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노골적이면서도 은밀하게 자극시 키고 부추기는 성적 장면과 성상품으로 인해 매우 충동적이고 거칠며 스스로의 갈 등, 터질듯 한 성적 에너지의 소용돌이에 빠져 몹시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다. 사춘 기에는 대개 기성세대에 대한 무조건적 저항을 특성으로 하지만 그 중 특히 저들 이 좋아하는 일은 한사코 말리고 죽기보다 싫은 일을 끝없이 요구하며 잔소리를 일삼는 교사에 대한 무조건적 저항은 그야말로 밖에서는 짐작할 수도 없이 크다. 대놓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하거나 눈이라도 부릅뜨려면 인터넷에 올린다고 거품을 내며 협박하는 사례도 있고 좀 엄한 규율로 지도하려면 담임이 싫다고 전 학 보내달라고 부모를 조르기도 한다. 소용돌이 6학년 집단, 언제 폭발할지 모르 는 위험한 시한폭탄 같은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 시도해보려 해도 학부모도 사회도 당국도 그 누구 하나 담임교사 편이 아니기에 모두가 6학년 담임은 피해 가려고만 한다. 그래서 학년말이면 교사들이 6학년 담임을 희망할 수 있도록 학교에서 온갖 방안을 마련하지만 누구도 선뜻 지원하지 않는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어찌 함 부로 불구덩이로 뛰어들겠는가. 그런 때에 교직 38년 경력에 나이 육십을 바라보 는 대 선배인 내가 6학년을 혼자 선뜻 희망 했었다. 학교는 문득 소음이 일어나 술 렁대고 교장은 그러지 말라고 오히려 나를 설득했다. 정말 오기였을까? 10년만에6학년 담임을 하겠다고 하자 주변에서는 그 때 아 이들과 요즈음 아이들은 많이 달라져서 너무 어려우니 다른 학년을 맡으라고 말렸 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의 교육에 대한 내 소신과 열정의 진실을 믿고 싶었다. 더욱이 초등학교 평교사로 교육자 대상, 제일 큰 상을 수상한 그 값을 해내고 싶었 고 교육에 대한 진실한 방법을 다시 확인하고도 싶었다. 지성이면 감천이고 내가 발휘하는 사랑과 열정만큼 이뤄지는 것에 대한 믿음이 내게는 있으니. 38년동 안일곱번을6학년 담임을 맡았고 그 때마다 그 어느 학년 담임보다 가장 아름다 102 마음으로 함께 안는 6학년, 네가 참 좋다 103

운 성공이었다. 사실 늘 열정으로 내 몸을 태워 목이 갈라져 가끔은 피가 맺히기도 하고, 진이 빠지도록 가르쳐 내면 학교엔 소문이 나곤 한다. 엄격하지만 제대로 아이들을 가르쳐서 그 선생님 담임한번하면애들공부걱정은덜고, 두해를거 듭 담임해 주면 참 좋을 텐데. 하거나 또는 다음 자녀를 담임해주기 를 바란다는 학부모간의 뒷소문을 전해 듣는 경우도 종종 있다. 서른아홉 해, 언제고 싫증 한 번 나본 적 없이 늘 신이 나서 아이들을 만나러 달려가곤 했다. 하지만 서로 이해하 며 진정 가슴이 통하여 마음을 나누고 함께 삶을 가꿀 수 있는 6학년 담임이야말로 진정 내 교사 생애의 참으로 멋진 일이었다. 가끔은 인생의 아픔이나 교사로서의 고뇌도 털어 놓아 위안이 되기도 하고 그들의 사춘기에 전염이 되어 함께 설레고 꿈을다시꿀수있는기회가되기도하여그애들을만나러가는길엔늘감수성이 예민해 지곤 한다. 가슴이 모자랄 만큼 벅찬 감동이나 결코 잊을 수 없는 이야기는 진정 6학년 담임이었던 해에 거의 이뤄졌다. 일일이 풀어내려면 수백 쪽의 책이 될 수도 있다. 교직에서 물러나면 앞으로 그 감동 이야기를 책으로 쓰려고 꿈을 꾸기 도한다. 그래, 이번에도 멋진 동화 한 편을 쓰는 거야. 갈등이 깊고 문제가 커야 그 결말 이 더욱 감동적인 법이지. 어린이의 그 아름다운 순수와 무한한 가능성이 어찌 변 하겠는가? 괜찮아, 잘 될 거야. 나는 스스로를 격려하며 다시 한 번 온몸을 부풀려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 아이들은 지금 마음을 많이 다친 거야. 아직 너무 이른 시기에 감당하기 어려 운 상처를 입고 그 누구에게도 이해 받을 수 없을 만큼 혼란에 빠져 자신을 사랑 할 줄 모르며 다른 이에게 적대감을 갖는 거야. 그네들을 많이 이해해보며 한 편으로는 스스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는 힘이 길러지도록 단호하게 하여 자신과 타인을 사랑 하는 법을 알게 하고 미래의 꿈과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하자. 드디어 6학년이다 드디어 6학년 담임을 받고 나는 영등포 문구 도매 시장에 가서 매우 두꺼운 일기장 을사십권을샀다. 어차피 금년 일 년, 그 힘들다는 이 녀석들과 한 판 승부를 가 리려면 이제 이쯤은 문제도 아니야.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무게여서 이를 악물고 비지땀을 흘리며 열 걸음도 못 떼놓고 쉬며 가며 생각 했다. 학급 담임 준비 첫 단계로 해마다 일부러 그렇게 직접 일기장을 사러 나간다. 한 푼이라도 절약하는 모습, 그리고 그네들을 위해 선생인 내가 먼저 준비하였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교육은, 더욱이 사람을 가꾸는 일은 가르치기보다는 몸소 보 여 주어 스스로 깨우치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 평소 소신이기에 나는 2월 말이면 학 급아이들이 일년 동안 쓸 두꺼운 일기장을 사다가 개학 첫날 선물로 주곤 한다. 그리고 2007년 3월 2일, 5층까지 그 무거운 일기장을 끙끙대며 들고 올라가 드 디어 만나게 된 6학년 3반 아이들은 정말 예전 아이들이 아니었다. 문을 들어서니 이리저리 앉은 몇몇이 보였다. 나는 저들을 깊게깊게 바라보는데 저들은 내게 별 관심 없이 저희들끼리 계속 이야기만 나누고 있었다. 노란 머리로 인기 연예인 흉내를 낸 아이 둘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빨간 뿔 테 안경에 제 귀보다 큰 빨간 용수철 모양의 귀걸이를 찰랑대며 연신 껌을 씹고 호 들갑을 떨며 웃으며 씨팔년 을 입에 달고 있는 여자 아이는 얼굴이 참 예뻤다. 그 파랗게 추운 꽃샘추위 날씨에 그애는 한 쪽 어깨를 완전 드러낸 채 뱀피 무늬 목도 리를 목에 감고 있었다. 쟤를 어쩌나 하며 가슴이 철렁했다. 그리고 남자 아이는 머리를 묶을 정도로 길러 노랗게 물들이고 목걸이와 한쪽만 귀걸이를 하고 쇠 체인이 철그렁대는 힙합바지를 질질 끌고 있었다. 9시를 넘기고 앞머리가 눈을 덮는 여자 어린이가 도살장 가는 소처럼 느릿느릿 들어오는 것을 보며 이명숙, 교직 38년. 칠판에 크게 쓴 다음 교탁 앞에 꼿꼿이 서서 기다렸다. 10분쯤 지나자 소음이 서서히 가라앉고 문득 조용해졌다. 나는 조용히 일기에 대 해 말을 시작했다. 선물이다. 받고 안 받고는 스스로 선택한다. 일 년 동안 계속해서쓸수있는일 104 마음으로 함께 안는 6학년, 네가 참 좋다 105

기장이다. 일기장은 선생님과 비밀스런 마음의 통로가 될 것이고 먼 훗날 어른이 되어 삶이 고단하고 힘들어질 때 써놓은 지금의 이 작은 이야기들이 때로는 따스 하게 때로는 잔잔하게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나도 6학년이었던 적이 있었기에 틀 림없는 사실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내 학생들의 인생에 필요한 진정한 선물을 마련해 주고 싶어 이 일기장을 먼 시장까지 가서 직접 사왔다. 나와 진실한 마음으로 소통하며 아름다운 한 해를 만들어 가고, 멋진 어른이 되고 싶은 사람은 선물을 받아가고 그까짓 것 필요 없어. 정말 일기 따위는 쓰고 싶지 않아 라고 생 각하면 선물을 받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이렇게 만났고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인연이니 되도록 모두 받아주길 바란다. 6가지 약속으로 시작하다 진심으로 우리 모두 함께 멋지게 잘 지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준비했으니. 안 가 져가는 녀석이 남자 아이들은 여섯, 여자 아이는 두 명이었다. 속으로 덜컹대는 마 음을 지긋이 누르고 모른 척 하며 자신을 사랑하기 를 이야기 했다. 자신 사랑하 기의 우선은 약속 지키기임을 말하고 눈에 보이는 선생님이 매일 지킬 약속 여섯 가지 를 칠판에 쓰자 눈이 동그래지며 그 안에 호기심, 신기함, 별일이야, 웃겨, 하 는 저마다 다른 빛깔이 가득 차올랐다. 첫째, 매일 8시 10분 이전 출근 으로 그들을 맞이할 것을 약속했다. 눈에 보이 는 가장 확실한 약속 실천의 방법이며 등교하는 아이들을 맞이하는 것이 인성지도 및 생활지도의 가장 기본이기 때문이다. 둘째, 매일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기 이다. 하루의 절반을 마주하고 있는 교사 가 늘 똑같으면 아이들과의 관계에 설렘이 없어진다. 더욱이 영상매체를 통해 늘 화려한 연예인에게 익숙해진 눈을 지닌 그네들에게 매일 같은 모습은 그들을 질리 게 한다. 그들과 잘 통하려면 우선 그 시선이 나를 향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늘 어 제와는 달리 악세사리나 바지, 티셔츠라도 매일 바뀐 모습으로 그들 호기심을 자 극하며 출근한다. 어제와 다른 모습으로 8시 10분까지 교실에 들어서려면 정말 바 쁜 아침이지만 준비함에 대한 것을 눈으로 보여줄 수 있고, 교사에 대한 아이들의 관심을 자극할 수 있는 확실한 확인 방법이다. 셋째, 그날 학습 결과와 과제, 알림장 꼭 확인하기 다. 아이들을 알아야 필요한 것을 주며, 잘하는 것을 발견하여야 칭찬해줄수있고아이들과 일대 일로 직접적 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되는 약속이다. 교육과정내용을 계획대로 확인하며 쏟 아지는 다급한 업무와 행사 속에서 매일 점검하기란 쉽지는 않지만 매일 확인은 아이들이 건성으로 활동 하거나 마무리를 안 하거나 과제 해결을 하지 않는 어린 이 예방 교육 및 가르치기의 중요한 준비과정인 것이다. 넷째, 일기장 빨간 편지 답장 약속 이다. 아이들과 일대일만남의 확실한 기회 가 되며 감성적으로 가장 잘 통할 수 있는 방법이다. 다섯 째, 일주일에 책 한 권 읽기와 매일 신문 읽기다. 이것은 나 자신을 위한 약 속이기도 하다. 도움되는 기사는 스크랩하여 감성, 인성, 글쓰기, 창의력 교육의 생생한 학습 자료로 활용한다. 아침에 읽은 감동적인 기사나 사진, 역경을 이겨낸 사람의 기사, 세상을 움직이는 훌륭한 사람들 이야기며 역사, 문화, 과학, 사회에 관한 것까지 중요한 내용을 복사해서 같이 읽고 소감, 기사 붙이기 등을 통해 자료 를 만든다. 흥미 높은 학습활동을 전개하는 중에 책과 신문 읽기에 대한 보여주기 교육활동이 되며 아이들의 현실감각에도 도움이 되고 미래에 대한 설계, 분석력 기르기에도 매우 효과적이며 교사 자신의 연수 기회도 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매일 퇴근 전 교사 책상과 그 주변 말끔히 치우고 칠판 앞에 분필 어 지르지 않기 다. 그 것은 아이들이 눈으로 확인하는 약속 중에서 정리정돈과 물자 절약교육의 좋은 방법이다. 이렇게 첫날 일 년 동안 선생님이 먼저 지킬 약속을 제시 하고 어린이들에게 매 일 관심 있게 확인하라고 하며 내가 안 지키면 너희가 약속을 안 지켜도 벌을 가하 지 않을 것이라고 말 해준다. 같은 학급의 구성원으로 교사도 학생도 평등한 위치 에서 출발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저마다의 약속을 잘 지키고 각자 할 일에 대 한 책임을 다 할 때 진정한 사랑의 교육이 이뤄 질 수 있는 것이다. 106 마음으로 함께 안는 6학년, 네가 참 좋다 107

교육은 삼인사각 걷기 그리고 그 첫날부터 일기쓰기 숙제를 내 주었다. 학급 이동으로 매우 어수선한 교실 정리정돈은 일기장 안 받은 여덟명에게 부탁 했다. 함께 정리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키가 크네. 얼굴이 하얗구나. 눈이 참 예쁘네. 음성이 차분 하네. 좋은 점을 칭찬하 며 살짝 아부를 하고 빵을 사다 나누어 먹었다. 조금 가까워진 틈새를 이용하여 일 기장 선물을 받도록 정성을 다해 부탁했다. 마침내 전원이 일기장을 받아갔다. 다음날은 8시에 제일 먼저 교실에 도착하여 문을 열었다. 오는 대로 일기장을 받 아 읽으며 아이들에게 자기 점검에 대한 설문지를 작성하게 했다. 아이들의 일기 는 내용 형식 문장이 아주 유치했다. 감성이나 생각의 부재인 일기, 정말 답답한 시작이었다. 괜한 시작이었나? 후회가 밀려오며 언제쯤 전쟁은 끝나 있을까? 끝 은 있을까? 마음도 몸도 무겁기만 했다. 그러나 열정보다 강한 것이 오기라 하지 않던가? 오기라도 부리기로 했다. 날이 갈수록 소위 논다는 녀석은 더욱 늘어 가고, 정신 지체아와 자폐기 있는 아 이, 그리고 성대 이상으로 발음이 새는 아이, 계속 왕따에 시달리던 아이와 인터넷 과 사이버 환타지류에 빠져 어른 앞에서 불손하기가 참으로 심각한 아이, 그리고 친구 협박과 싸움쟁이로 일학년 때부터 전교적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아이 등 학급 아이들이 거의 모두가 심각했다. 그리고 한 부모 가정 아이와 조손 가정 아이까지 정말 괜한 오기를 부렸나 싶어 잠자리를 뒤척이기까지 했다. 우리 학급에는 바로 외인구단 이라는 별명이 나붙기 시작했고 체육, 영어를 지도 하시는 교과 전담 선생님들은 우리 학급이 들어가는 시간표만 있으면 골머리가 아프다고 말씀하신 다 했다. 전 해에 5학년을 담임하셨던 선생님들은 학급 편성을 해두시고 3반에 대 한 걱정이 태산 같았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이를 어째? 그러나 결코 포기할 수는 없다. 받아든 고난이 클수록 힘도 더욱 강 하게 주어지는 것. 이번도 멋지게 다시 전투태세에 들어가기로 했다. 삼일 째 되는 날 운동장 스무 바퀴 달리기를 시합을 하기로 했다. 안 되는 사람은 적당한 때에 기 권하기로 했다. 다섯 바퀴에 이미 절반이 멈추고 마지막 스무 바퀴에는 싸움쟁이 태권도 선수와 나만 남았고 승부도 비슷했다. 우리 둘은 하이파이브를 했다. 아이 들이 나에 대해 신기함을 느끼는 듯 했다. 어쩌면 교육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 큼의 인내심, 지구력일지도 모른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 어떤 경우라도 참으며 제시한 모든 내 약속을 끝까지 이행하고 그들의 약속 이행 사항을 매일 원 칙대로 점검해갔다. 매일 모든 교육 과정을 손실 없이 이수 하면서 그 여섯 가지 약속 이행을 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서른 네 명의 것을 꼬박 확인하기란 정말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거기에 또 한 가지 알림장의 징검다리 기능 도 쉽지는 않았다. 교육은 한 어린 이와 교사, 그리고 한 어머니가 삼인 사각 걷기를 하는 것이다. 나는 혼자서 그들 각자에게 맞는 상담자가 되어야 했고 각 가정과의 연계가 또한 신경써야 했다. 어 린이들, 더욱이 6학년은 학교에서, 교사 앞에서 친구 앞에서 그리고 부모 앞에서 그 모습이나 행동이 너무나 달라지기에 모든 것에 가정과 연결이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알림장 맨 마지막 줄에 매일 한줄편지쓰기 를한다. 바르고 고운 말 을 씁니까? 형제들과 사이좋게 지냅니까?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린 일은? 오늘 부 모님 속상하게 해 드린 일은? 편식을 하지 않나요? 신발을 바르게 벗어 두나요? 게임이나 TV시청을 너무 오래 하지 않나요? 등을 비롯해 내 아이 좋은 점 10가지 쓰기, 고칠 점 10가지 쓰기 등 생활지도, 인성교육 등과 관련된 내용을 알림장 마 지막 순서에 기록하게 하여 부모님이 자녀 상황에 대한 답을 쓰게 하는 것이다. 그 108 마음으로 함께 안는 6학년, 네가 참 좋다 109

밖에도 학교생활에 산만함 과제 및 준비물 이행 상황 등을 가정에서 매일 꼭 확인 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여 어린이에 대한 교사와 가정과의 소통 기회를 마련하 였다. 정말 그것은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고 거의 어머님들이 동참해 주신다. 새 학 기첫날 알림장 한 줄 편지 내용을 편지로 보내고 학부모 총회 날 부탁드리면 그 것은 100%로 이뤄지고 처음은 부모님이 귀찮아하시고 반감을 가지시기도 하지만 삼 개월 정도만 지나면 너무도 훌륭한 방법임에 적극 동참하시고 학년이 바뀌시면 자녀의 학교생활을 알 수 없어 너무 답답하다고 하신다. 그렇다 어찌 부모가 제 자 녀를 모르고 잘 기를 수 있으며 어찌 교사가 아이를 잘 모르고 제대로 가르칠 수 있 는가? 아이들과 그 가정은 저마다 다르고 교육은 저마다 다른 그들을 조금이라도 알아내어 그에 알맞은 방법을 찾아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적응기간 동안 어려움도 컸다. 철저하고 엄격하며 하나하나 파고들어 확 인하는 나를 거부하여 어떤 녀석이 내 욕을 사납게 한 것이다. 씨발 담탱이 존나 재수 없어. 확 밟아 버릴 거야. 인터넷이나 홈페이지에 올릴 거야. 노란 장발의 목걸이 소년 그 아이가 바로 노란 장발의 목걸이 소년이었다. 머리를 자르고 장식품을 빼고 옷을 단정하게 입으라는 계속적인 지도에 대한 반발이었다. 꿈이 주근깨 박피 수 술이라 저축을 열심히 한다는 그 애를 방과 후 남기려 했지만 어느새 도망가곤 했 다. 체육시간에 담당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교실에 남겼다. 그리고 조금의 성냄 없이 무심한 척 말해서 그 애가 한 내 욕을 거짓없이 적나라하게 모두 쓰게 했다. 그리고 그 것을 큰 소리로 30번을 읽게 했다. 나는 그냥 창밖을 바라보며 그 애가 읽는 소리가 아주 크게 교실이 울리도록 조절만 해주었다. 열 번을 넘어가며 녀석 의 목소리가 조금씩 갈라졌다. 스무 번을 넘어서며 울기 시작했다. 읽는 것을 멈추 게 하고 울게 된 이유를 쓰게 했다. 모른다고 했다. 대화를 했다. 자랑스럽냐고, 신이 나느냐고, 스스로 멋지냐고, 잘한 것 같으냐고. 아이는 계속 머리를 저었다. 다시 물었다. 속상하냐고, 창피하냐고, 후회하느냐고. 아이는 고개 를 끄덕였다. 내가 그렇게 싫었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싫은 이유를 쓰라고 했다. 머리 옷차림에 대한 간섭, 억지로 일기 쓰게 하는 것, 매일 검사하는 것, 책 읽으라는 것이 싫고 부모님께 확인받고 연락하는 것이 싫다고 했다. 나도 그 일이 많이 힘들어 싫다. 매일 서른네 명을 하나하나 챙기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핏줄이 일어선 내 손을 내보이며 이야기했다. 그렇게 힘들어도 하는 이유는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며 약속이라서 하는 것임을 말했다. 그리고 모든 세 포가 왕성하게 성장하는 시기에 염색하고 귀를 뚫고 하는 것은 세포의 성장을 망 치는 것이라 이야기하며 소년으로서의 그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 기했다. 성장이 멈춘 세포가 죽어 가는 것을 감추기 위해 어른들이 하는 행동을 성장기 소년이 흉내내는 것은 어울릴까? 그리고 사람들은 생김새가 다 다른 데 무조건 인 기 연예인 흉내를 내면 어울리겠니? 내가 이효리나 원더걸스를 모방하면 멋지겠 는가 상상해봐라. 했더니 녀석이 머리를 숙이며 피식 웃어버렸다. 그렇게 해서 그 아이는 머리를 자르고 장신구를 빼고 왔고 옷도 소년차림으로 변했다. 그 뒤로 아이와 늘 일기에 대화를 하듯 편지를 써나갔고 어느 날은 내게로 오더니 슬쩍 그랬다. 자기는 처음 일기를 써보는 것이라고 그랬다. 아이들은 정말 다 착하고 순수하며 아름답고 누구나 다 가능성이 무한하다. 녀석은 나중에 쉬는 시간만 되면 내 옆으로 와서 펀치를 날리며 장난치느라고 괴로울 정도였다. 그리 고 육학년 어린이들 세계에 대한 모든 것을 그 애를 통해 이해할 수 있었고 가장 잘 통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 아이는 오히려 나의 힘든 점들을 이해하고 도와주기 시 작했다. 110 마음으로 함께 안는 6학년, 네가 참 좋다 111

더 없이 감동적인 6학년 그 밖에도 자폐기가 있는 D, 5학년까지 왕따를 당해 학습의욕이 전혀 없는 J, 폭력 적이었던 B,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더 반항하는 M. 그애 들 모두들 몇 번의 갈등과 힘든 과정을 겪고 나중엔 완전히 내 편이 되었다. 결국 그 애들은 모두 이해 받지 못하여 사랑 결핍증에 걸려 무지 외롭고 아팠던 것이다. 사랑은 모든 아이들에게 같은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그들과 만날 때는 그 들 각자에게 알맞은 방식으로 대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애들과 사랑을 나누려면 신 뢰를 주어야 한다. 그 다음은 진실과 인내심이다. 진실과 인내심도 구체적으로 그 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그네들이 인정할 때까지 묵묵히 그 약속을 지키면 아이 들은 결국 교사의 진실과 인내심을 보고 만다. 사랑은 각자의 방식이지만 약속을 안 지키면 평등하고 엄격하게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서로의 버팀목이 되는 것이 다. 그들은 내게 나는 그들에게 서로의 키다리 아저씨가 되는 것이다. 드디어 유월을 넘기며 녀석들은 맑은 눈빛과 유순한 모습으로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하여 학력은 점점 올라가서 각종 경시대회에서가장 우수한 성적이 나왔고 점 점 교과 선생님들께서 외인구단 3반 이 전설의 3반 으로 바뀌었다고 아이들의 변화에 대한 경이로움을 표현해주셨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이면 내 주변으로 우르 르 몰려들었으며 어느 날부터는 몇몇 녀석들씩 상담을 하고 가겠다고 종종 부탁을 해왔다. 그리곤 선생님이랑 이야기하고 나면 속이 시원하고 좋다며 어른 흉내를 내는 다른 날나리 아이들이 우습다 고 웃었다. 어느새 아이들의 머리도 제 빛깔로 되돌라왔고 귀와 목에서 장신구가 사라졌다. 그리고 책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저 희들이 잘 읽는 순정 소설과 환타지류를 나보고 읽으라고 가져오기까지 했다. 졸업식 날 알퐁스 도테의 마지막 수업에 나오는 아멜 선생님처럼 이제 다 끝났어. 집으로 돌아가도 돼. 하며 내 목이 먼저 메는 바람에 아이들이 흠뻑 울었다. 그렇게 아이들이 중학교 로 갔다. 그래도 내 맘엔 항상 그 녀석들이 있다. 5월 어느 날 한 학부모가 메일을 보내왔다. 우리 반이었던 친구들이 4명이나 중학교 교내 백일장에서 큰 상을 받았 다고 명단까지 보내왔다. 주제는 잊지 못할 스승 이었다고 했다. 그리고또한번 나를 울린 녀석들. 나도 종종 잊거나 못 챙기고 지나가기 쉬운 음력 내 생일날 밤 10시 무렵이었다. 갑자기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기에 문을 열고 보니 사내 녀석 세 명이 케익에 촛불을 켜들고 서 있었다. 그 반항아와 연예인과 침묵의 녀석 세 놈이 촛불을 들고 씩 웃고 있었다. 전에 졸업시킨 녀석에게선 주례 의뢰도 온 적 있고 첫딸 낳았다고 문자도 온다. 지금은 사회인이 된 졸업생들과 1박2일 여행을 떠나 함께 묵으며 가난한 삶을 서 로 털어 놓고 함께 취하기도 했다. 그렇게 난 6학년이 참 좋았다. 몸으로 안아 주어 야 하는 일학년도 마냥 예쁘지만 마음으로 함께 안을 수 있는 6학년이 참 좋았다. 누가 뭐라 해도 이보다 더 감동적일 순 없다, 6학년은. 112 마음으로 함께 안는 6학년, 네가 참 좋다 113

교단 수범사례 학급문집 활동으로 피워낸 금란지교( 金 蘭 之 交 )의 꽃 정해균 부산광역시 부산고등학교 교사 XXXXXXXXXXXXXXX 담임교사로서 평소 학급의 교실 폭력과 집단 따돌림 문제를 고민하다가 이를 해결하기 위 해 활동한 내용으로 수기를 써 보냈는데 뜻밖의 입상 소식을 들었습니다. 부족한 수기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립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조각글 한 편을 쓰면서 자신감을 찾고 생활의 의미를 발견해 가는 우 리 반 학생들의 모습을 하나 하나 그려봅니다. 이후에도 글짓기 활동이 우리 학생들의 생 활에 큰 기쁨이 될 수 있도록 쉼없이 노력하겠습니다. 그동안 격려와 편달을 해 주신 교장 선생님과 교감선생님, 여러 동료 선생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다시 담임선생님으로 2003년 3월 신학기, 인문계 B고교의 1학년 담임을 맡고 며칠되지 않아서였다. 그 즈음에 교육청은 전국 초 중등학교에서 교실폭력과 이지메 라고 부르는 집단따 돌림 사건이 많이 일어나니 이를 예방하고 생활지도도 힘쓰라는 공문을 자주 보냈 다. 매스컴에는 여러 학교에서 교실 왕따와 폭력 사건이 일어나 육체적, 심적 고통 을 입은 학생이 발생했다는 기사가 수시로 나왔고, 이를 견디지 못한 학생들이 목 숨을 끊는다는 보도도 많았다. 그것은 큰 사회적 이슈가 되었고 학부형들은 혹여 내 자식이 피해자가 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모습들이었다. 나는 유행병처럼 번져 나가는 이 현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집단따돌림 같은 일은 이웃 일본의 이야기 라고만 생각했는데 어느새 우리나라 교육 현장에도 독버섯처럼 퍼져나간 것이다. 선생님들이 모르는 가운데 학교 라는 배움터가 상당수 학생들이 무서움을 안고 생활하는 공간이 되어간다면 이처럼 기막힌 일이 있을까. 피해자는 한 명도 나와 선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 이런 불행이 초래되기 전에 누구보다 담임선생 님이 앞장설 수밖에 없다고 결론짓고, 그렇지 못하면 직무유기라며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사실 나는 한 해 전까지 승진을 위해 부지런히 부장교사 경력을 쌓고 연구점수 와 연수 수강도 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교감선생님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이 삶의 전환기가 된 셈이다. 올해 본교에 서른여섯 분의 담임이 있어야 하는데 담임 희망자는 열 셋에 불과 해 애를 먹었지요. 생활지도가 해마다 힘들어간다 해도 이렇게까지 담임기피 현상이 심할 줄은 몰 랐다. 학생 지도를 은근히 멀리하려는 풍조 앞에서 승진은 자꾸만 속 보이는 행동 처럼 느껴지면서 조금씩 시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나는 고민한 끝에 다음 해에도 담임을 맡는 것이 남은 내 삶의 길이라고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6년째인 올해도 즐거운 학급 만들기 를 하면서 학생들의 인성지도의 손길을 지금도 거두지 않고 있다. 그 열정의 대부분은 글짓기 교육을 통한 학급문집 만들기라고 할 수 있다. 즐거운 교실 만들기 요즘 학생들은 인사를 잘 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침에 담임이 들어가도 멀뚱히 쳐 다 보고 있기 일쑤다. 그러나 선생님들의 표정이 먼저 밝아야 된다고 본다. 이럴 때 나는 설득과 호소를 한다. 내가 실수를 했다. 아침에 서로 반가운 마음을 담아 인사를 나누어야 행복해 진다. 그러면서 내가 먼저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 훈련을 반복시켜 바른 습관이 몸 에 붙도록 했다. 언제라도 학생을 보면 오, 김 안녕! 하며 내가 먼저 아는 체 를 했다. 인사는 노소 구별 없이 먼저 의식한 사람이 싱긋 하며 목례를 하는 것이 좋은 인사라고 가르쳤다. 짝지와 주변 친구끼리도 아침에 싱긋 웃기 를 연습시키 면서 마음속에 숨어있는 편안한 미소도 자신의 큰 재산임을 일깨워갔다.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가며 급우를 괴롭히고 따돌리는 행위를 예사로 즐기고 있 는 학생들이 물밑에 숨어 있는 학급에서 담임을 한다는 것은 맥이 빠지는 일이다. 어둡고 칙칙한 곳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먼저 잦아들 수 있다. 각자의 마음에서 불 순한 싹이 자라지 않도록 밝은 빛을 비추는 일이 내가 할 일이었다. 이들이 어떻게 하면 형제처럼 지내게 할 수 있을까. 출신중학교가 다른 학생들이 고1 학급에서 서먹한 감정을 씻어내고 날마다 반가운 눈빛으로 만나도록 해야 한다. 머릿속에 는 이 생각뿐이었다. 신학기가 시작된 3월, 거칠고 안정되지 않은 이 학생들을 밝고 차분하게 이끌어 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최우선 과제를 즐거운 학급 만들기로 정하고, 곰 곰 생각한 끝에 몇 가지 방안으로 떠올렸는데 그것은 주말에 일기쓰기, 친구에게 편지 쓰기, 보은편지 쓰기, 자기 분석해 보기, 효도일기, 가치관 정립하기 등이었 다. 그 중에 가장 신경을 쓴 것이 친구에게 우정을 담은 편지 쓰기다. 얼핏 생각하면, 학생들이 글짓기를 즐거워할 리가 없을 것이라는 선입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친구에게 편지쓰기 는 다르다. 처음 두세 번은 어색하여 힘들어 했지만 우정의 편지를 받은 학생들끼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마음을 털어놓은 116 학급문집 활동으로 피워낸 금란지교( 金 蘭 之 交 )의 꽃 117

친구들은 마주보는 표정부터 달라져 이를 지켜보는 내가 흐뭇한 느낌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와 병행하여 주말일기는 3월 첫 주부터 매주 한 편씩 쓰게 하여 담임 메일에 보내도록 하였다. 주말일기를 쓰는 핑계로 컴퓨터 게임에 장시간을 빠지지 않도록 학부모들에게 사전 홍보를 해 두었다. 친구에게 편지쓰기와 기타 글짓기는 주로 학급회 시간을 이용하였는데, 불평을 하는 학생이 나왔지만 그 숫자는 갈수록 적 어졌고 글쓰기 솜씨는 나날이 늘어갔다. 매주 쉬지 않고 습관을 몸에 붙이게 하였 는데, 한글날기념 교내백일장에서는 고동현, 김동형 등 무려 7명이 최우수상과 우 수상을 받는 기쁨을 누렸다. 나는 1년 동안 모은 글을 묶어 학기말에 친구들아, 고맙다! 란 두툼한 학급문집을 펴내었다. 학급문집을 받은 학생들은 주말일기와 편지글 속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다시 비춰보며 글짓기 실력에도 자신감을 얻은 모습이었다. 반장 지훈이가 선생님, 문집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한 마디 하여 나는 담임으로서 더없이 흐뭇한 감정을 맛보았다. 두번째해는3학년 담임을 맡았다. 알다시피 인문계 고3 학생은 수능고사에서 좋은 점수를 얻는 것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수학능력고사에 관련된 교과목의 문제를 숨 가쁘게 풀어보는 일이 전부라고 여기고 있는 학생들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학급문집을 만들자는 내 제안에 대부분 고3생에게 웬 일기? 우 리가 그런 글짓기 할 시간이 있습니까? 이런 반응들을 보였지만 이들을 설득하여 주말일기와 우정의 편지쓰기, 기타 논술문 쓰기를 1년간 실천하여 졸업선물로 학 급문집을 만들고 보니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었다. 친구들아, 꿈을 가꾸고 키 우자 란 제목을 붙였다. 졸업 후 한상욱 군이 글짓기 할 때는 입을 삐죽거렸는데 대학생이 되어 리포트 작성을 능숙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시간이 그립습니다. 하는 감사 메일을 보내왔을 때는 1년간의 노고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3년째는 2학년 담임을 맡아 주말일기를 쓰게 하고 비슷한 내용의 글들을 짓게 하였는데, 일요일에 부담이 된다고 싫어하는 학생들이 많았지만 조금씩 향상되는 글짓기 실력을 느끼면서 부지런히 써 내었다. 이 중에 이승준, 김민석, 강기원 군 의 글은 다른 학생들의 부러움과 의욕을 자극하였다. 나는 이것도 묶어 학기말에 깊은 생각 바른 행동 이란 제목을 붙이고 한 권씩 나누어 주었다. 자신의 글들이 인쇄된 것을 처음 받아본 학생들은 스스로도 놀라는 눈치였다. 4년째는 다시 1학년 담임이 되었는데 3년 전의 거칠고 분잡한 학생들이 나의 손 길을 기다린다는 느낌이어서 웃음이 나왔다. 나는 이제 학급문집 만들기 를통해 반 학생들을 형제처럼 만들어 가는 것이 일과처럼 된 느낌이 들었다. 친구에게 편 지쓰기를 한 다음날 강동주 군은 나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선생님께 이편지글을 친구에게 보내기 전에 다시 한번선생님께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드 리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이 편지를 써서 친구랑 더욱 더 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 다. 이 편지를 앞으로도 많이 써서 친구들과 더욱 친한 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선생 님 정말 감사합니다. 강동주 드림 118 학급문집 활동으로 피워낸 금란지교( 金 蘭 之 交 )의 꽃 119

우정의 편지쓰기 시간에 친구 한 명에게 관심을 집중하여 편지를 쓰는 것을 보 면 순수성과 진심이 느껴져 고마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나는 다 쓴 편지를 전해 주는 배달부 역할에 충실하고 교실은 우정의 악수 교환을 하는 축제의 장이 된다. 이 해 가을에도 교내한글백일장에서 권현준 외 4명이 최우수상과 우수상 등을 수상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이 학생들의 글들도 묶어 늘 처음처럼 의 제목을 붙 인 학급문집을 제작해 나누어 주었는데 김상지, 정한혁 군 어머니가 이 책을 받고 는 밤을 새워 숙독했다는 말을 전해왔다. 그러면서 이 문집을 읽고 우리 아들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었지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라고 했는데, 기뻐하는 그 모습은 나에게 주는 가장 고마운 선물이었다. 금란지교( 金 蘭 之 交 )의 꽃을 피우다 4년 동안의 글짓기 교육으로 학급에는 교실폭력과 집단따돌림이 자리 잡을 틈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나날의 학교생활도 즐거워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2007 학년도에 P고등학교로 전근을 하였다. 다시 담임 신청을 하니 학교장은 흔쾌히 2 학년 담임을 맡겨주었다. 대면식 첫날 나는 반 학생들에게 심우( 心 友 )와 면우( 面 友 ) 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우리는 마음을 털어 놓고 서로 격려하고 기댈 수 있는 심우가 있어야 하 고, 1년 후 한 교실에서 생활하고 난 뒤에도 이름과 얼굴 정도 아는 수준의 면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새로 급우가 된 30명의 친구들 모두 심우를 만들면 그들이 자신의 인적 재산이라고 했더니 수긍하는 표정이 뚜렷했다. 전원이 어려우 면 최소한 10명 이상의 심우를 만들자고 역설했다. Best Friend 를 만들기 위해서 피차 노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 방법의 하나가 우정의 편지쓰기라고 소개한 뒤 내 계획을 밝혔다. 사람은 다 장단점이 있다, 장점을 발견하는 안목을 키우면 그게 훌륭한 인품이 되며 단점만 눈에 들어오면 내 마음도 꼬여간다. 내가 먼저 상대를 인정하고 받아 들이면 상대방도 손을 내미는 것이 세상 이치다, 우선 내 마음을 바로 세우자. 여 러분이 금란지교( 金 蘭 之 交 ) 같은 우정을 가꾸도록 하는 것이 내 목표다 이런 요지로 설득해 나갔다. 친근감이 가는 친구뿐 아니라 껄끄럽고 부담이 가 는 친구에게도 먼저 손을 내밀게 했다. 행동과 말씨가 거친 학생들도 모범생에게 편지를 써서 가깝게 지내면서 학교생활에 의욕을 보였다. 결국 이 편지쓰기는 친 구의 마음 열기에 해당된다. 겉으로는 거친 학생도 안을 들여다보면 외로운 법이 다. 편지쓰기가 거듭될수록 이들의 가슴은 더 평온하고 정( 情 )의 샘물로 가득 채 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편지를 쓰기 며칠 전에 Best Friend가 될 친구에게 쓸 말을 생각해 두자고 했다. 편지에는 첫인사, 발견한 장점(또는 부러운 점), 미안한 점, 내 고민, 당부할 내용 등을 가급적 길게 적도록 하였다. 이 활동을 시킬 때 나는 가급적 고풍스런 말 투를 유도하였다. 학생들이 쓰는 일상용어는 비속어와 듣기 거북한 생활어가 많아 서 이것을 순화해 보고 싶었다. 작가 염상섭이 쓴 소설 삼대 의예를들며지금부 터불과70년 전에는 여러분 또래의 사람들이 친구에게 ~하게 형의 말씨를 사 용했음을 상기시키고, 이것은 친구를 심우로서 대하는 시작이니 노력해 보자고 유 도하였다. 편지쓰기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면 다시 일상어로 대화하지만 그 시 간만이라도 고상한 말씨로 친구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게 했다. 120 학급문집 활동으로 피워낸 금란지교( 金 蘭 之 交 )의 꽃 121

학생들은 처음에 ~하게 형 말씨에 어색한 반응을 보였지만 곧 익숙하게 되었 고 자신에게 써 준 편지를 읽는 순간이 행복한 것을 느꼈다고 하는 학생들이 늘어 갔다. 이것은 친구가 써 준 정성과 마음이 고스란히 자신에게 전해지는 느낌 때문 일 것이다. 편지를 다 읽은 순간 포옹을 하거나 악수를 나누며 새로운 세계를 맛보 게 되었다. 편지는 아무리 친구라도 함부로 장난스럽게 쓰는 일이 없게 하였다. 그런데 한 시간에 한 명만 쓰게 하니 편지 전달식 후에 여러 통 받는 학생과 한 통도 받지 못 하는 일이 반드시 발생한다. 섭섭한 마음이 들겠지만 다음에는 답장이 올 것이라 고 미리 위로해 주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편지를 못 받은 학생은 스스로의 평소 태 도를 돌아보는 계기도 되어 그것대로 의미가 있었다. 내친구성환보게 성환이, 안녕하신가? 자네 친구 봉준일세. 저번부터 계속 자네에게 쓸 거라고 벼르 고 있었는데, 이제야 이렇게 쓰네. 처음에 직접적으로 나와 친해지고 싶다고 말하 던 모습을 생각하면.. 하하^^ 적잖이 당황하기도 했지만, 티는 안 냈어도 참 고마웠 다네. 원래 누구한테 먼저 친해지자고 말을 못하는 나는, 그런 자네가 부럽기도 했 었고... 처음 알게 된 사람들한테는 말도 잘 못하고 마음도 잘 못 여는데, 자네가 먼 저 그렇게 다가와 줘서 다른 친구들보다 더 빨리, 더 쉽게 친해질 수 있었던 것 같 네. 나도 이제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는 법을 배워야겠어. <중략> 지난 시험기간 때 같이 도서관 다녔던 거 기억하는가? 사실, 그때가 친구랑 그렇게 도서관 다니면서 공부한 게 처음이었다네. 난 나름 괜찮았는데, 자넨 어땠을지 모 르겠네. 아 참, 자넨 보기보다 몸이 너무 자주 아파. 그렇게 약해서야...! 나도 신경 안 쓰는 척 하지만, 은근히 그럴 때마다 신경 쓰이거든. 표현 안 한다고 그게 전부는 아닐세. 오늘은 여기까지. 앞으로 할 말이 더 많아지는 사이가 되어 보세. 2007. 8. 31 벗 봉준이가.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와 같은 글을 쓰면서 자신의 마음이 친구에게 집중되는 것 을 느낀다. 편지쓰기로 이리 저리 얽히는 정( 情 )의 고리를 느끼면서 모두 형제 같 은 끈끈함을 다져갔다. 이들은 청소할 때도 협동이 잘 되었고 오해가 발생하면 양 보와 이해가 앞섰다. 5년 동안 내가 맡은 교실에서 급우를 괴롭히고 여럿이 따돌리 는 일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기에 나는 현재도 이 우정의 편지쓰기 운동을 실천하 고있다. 편지에 마음을 담아내는 것에 자신감을 얻은 학생들은 다른 글도 곧잘 쓰게 되 었다. 이에 용기를 얻어 반 학생들에게 나는 주말일기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내용 과 길이에 신경 쓰지 않고 써서 담임의 메일로 송부하도록 했다. 나의 경우 중 고교 졸업 후에 고작 앨범과 몇 장의 스냅 사진뿐이고 기억할 것이 별로 없다. 나날 의 느낌과 과정은 여러분의 소중한 삶이다. 청소년 시절의 다양한 체험에 의미를 담아 놓아야 한다. 이런 요지로 격려하며 주말일기 쓰기를 이끌어 갔다. 매년 학생들은 인문계 고등학생에게 일기쓰기를 시키는 것은 매우 생뚱맞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우리 주변의 사물에 관심을 주고 거기에 조금씩 의미를 붙이는 연습을 하는 것의 귀중함을 시간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그 러면서 짧은 조각글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본보기 글들을 숙독시켰다. 이 조각글 을 주말묘사 라고 이름 붙이고 쓰는 방법에 흥미와 자신감을 느끼도록 했다. 나는 새 담임을 맡은 지 일주일 안에 학생 이름을 모두 암기한다. 이를 자랑하여 혹 미심쩍어 하면 누구라도 가리키게 하여 학생들의 검증을 받았다. 그러면 학생 들은 자신들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좋아하는데 사실은 주말일기를 확인하는 중에 이름들이 금방 암기되어 생활지도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주말일기는 혹 개인의 프라이버시 침해 문제를 염려하여 가정 문제까지 기록하는 것을 피하고 가급적 학 교를 중심으로 글감을 찾도록 했다. 수년 전 한 시민단체의 대표가 일기지도는 개 인의 프라이버시 침해다. 라고 교육부에 항의하여 일기지도가 중지된 것을 의식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기는 지도방법을 달리 하여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는 분량과 내용에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 써 내기만 해도 등을 두드려 주었다. 122 학급문집 활동으로 피워낸 금란지교( 金 蘭 之 交 )의 꽃 123

4월이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사실의 나열을 보이던 학생들이 차츰 수업 중 공부 한 내용, 친구들과의 갈등, 학생들의 풍속도, 학교 정책이나 선생님 언행 비판, 주 변의 자연환경에 관심을 보이면서 자신의 의견이나 느낌을 붙이는 학생들이 나오 기 시작했다. 김봉준, 김두혁, 김상훈, 김성진, 심민국, 장은빈, 정 준, 조성환 군의 주말일기를 읽을 때 나는 혼자서 가만히 흥분한다. 이들 중 잘 쓴 글을 공개하면 서, 다만 체험의 서술에 그친 것은 가치가 적고, 체험에다 자신의 느낌과 인생의 발견과 찾아낸 의미를 부여한 글이 더 가치가 있는 글임을 지적해 주었다. 체험이 많고 느낌이 적을 땐 정서감이 부족하여 딱딱하게 느껴지고, 체험이 적고 느낌이 많은 경우엔 추상적이고 현실감의 결여를 느끼게 한다는 원리를 알고 난 학생들은 글쓰기의 묘미를 터득한 듯 갈수록 내용에 깊이를 더해 갔다. 나는 그 잠재력을 확 인하며 월요일마다 기분 좋은 시간을 맛보는 교사였다. 시멘트 옹벽에 핀 민들레 - 정한혁 세상에는 정말 성장 환경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아니 오히려 부유한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욱 노력하고, 포기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으며 목표를 위해 달려가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집안 사정이 힘들어도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까지 공부하며 골든벨을 울린 학생. 하지만 더 놀라운 것 은 이 사람들은 지금 행복하다고 한다. 내가 이번에 놀란 것은 하교하면서 본 민들레꽃 한 송이다. 학교 뒤편의 시멘트 옹 벽에 피어난 민들레꽃. 등교길의 오르막길을 올라가다 보면 절벽 같은 시멘트 옹벽 이 있다. 그런데 그 옹벽의 그 작고 아주 작은 틈 사이에 민들레씨가 날아오면서 그 곳에 자기 살터를 잡고 거기서 살아남은 것이다. 그 민들레는 혼자 크면서 외로웠 을 것이다. 주위에 있는 것은 아무 생명 없는 시멘트벽뿐이니까. 그러나 그 꽃도 다 른 꽃 못지않게 아주 이쁘게 꽃이 피어있었다. 그 꽃은 주위환경을 탓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런 꽃이 더욱 더 아름다워 보일지도 모른다. 위와 같은 글이 메일에 들어와 있는 날은 나 혼자 종일 기분이 좋다. 글짓기 교육 은 선생님과 학생이 정서를 교감하고 삶의 가치를 보석처럼 발굴해 가는 일이었 다. 하지만 사실만 서술해 주어도 그것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다. 그래서 나는 학생 들에게 의미를 담아야 한다고 너무 부담을 주지 않았다. 4월에는 나를 분석하기 란 제목으로 삶의 목적을 명시적으로 깨닫게 하였다. 이 것은 자신의 성장 환경, 성격, 좌우명, 가치관과 꿈의 항목을 주고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는 일이다. 이 글짓기는 이런 내용을 내면화시키는 중요한 작업이었다. 5월이 되어 일부 학생들이 게으름을 피우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에게 다시 글짓 기의 중요성을 일러주고 지속적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5월에는 옛 선생님과 부 모님께 보은편지 쓰기를 시켰는데 이제는 부담을 갖지 않고 써 나갔다. 여름 방학 중에는 부모님의 발 씻겨드리기 효도를 실천하고 그 과정과 의미를 생각한 일기 한 편을 과제로 내게 했다. 종주는 부모님의 발을 씻겨드리는 중에 아버지의 이상 한 발모양과 거친 피부를 만지면서 울컥하여 울 뻔 했다. 고 적었다. 봉준이는 발 씻겨드리기에서 나아가 설거지, 청소활동까지 더 하다가 평소 짜증을 부린 일이 떠올라 울음 이 나왔다는 글을 A4 한 장에 써 냈다. 6월에는 제주도 수학여행기, 9월부터는 주변 사물 예찬하기, 독서감상문 등 다 양한 글들을 쓰게 했는데 부쩍 자신감이 붙은 모습들이었다. 작품마다 자신의 체 험에 사물의 의미와 감동한 내용을 담아낸 학생들이 많이 나와 그 동안 지도해 온 보람을 듬뿍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김시론, 김믿음, 김봉준 군은 A4 네장이넘는 여행기를 거뜬히 써 내기도 했다. 나는 메일에 학생들의 곤란한 신상 문제도 보내게 하여 상담의 장으로도 활용했 다. 학생들은 스트레스를 받은 일이나 친구 간에 얽힌 문제를 털어놓고 상담을 하 다가 스스로 해답을 찾아낸다. 직접 말하기 힘든 왕따나 도벽 같은 문제를 알리고 손을 내밀면, 반 학생들에게 그 아픔을 알려주고 호소하여 해결을 도왔다. 피해자 의 상처가 깊어지기 전에 가해자의 잘못을 조속히 바른 길로 인도하기가 쉬웠다. 주말일기는 한글 워드에 입력하였는데 그 사이에 띄어쓰기와 맞춤법 공부가 저절 로 되었다. 이것은 1년 동안 부지불식간에 붙어오는 일종의 덤이었다. 124 학급문집 활동으로 피워낸 금란지교( 金 蘭 之 交 )의 꽃 125

11월 학예회 때는 이제 정말 형제가 된 것처럼 친해진 이무훈, 윤수득 외 5명이 원더걸스의 댄스를 선보여 열광적인 박수와 함께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들은 처음 에는 다 뻣뻣한 사이였다. 나는 너희들이 부럽다. 그 우정이 평생 지속되기 바란 다. 며 칭찬했다. 5년째 맡은 교실은 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연말에 1년동 안의 글들을 묶어 이번에는 금란지교 라고 명명하고 학예회 때 전시했더니 여러 동료들이 선생님의 학급문집을 보고 감동을 받았어요. 하며 격려와 지지를 보내 주었다. 상훈의 어머니도 이 학급문집을 보고 정말 감동적입니다. 며 치하를 해 주었다. 로애락을 솔직하게 표현해 보고, 부딪친 과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외면할 수 없다. 이것은 금란지교의 꽃을 피우는 일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싫 다고 하다가 어느새 글짓기의 매력에 빠져들어 곧잘 쓰고 철이 들어가는 학생들 모 두에게 이제는 내가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동안 학급문집 만들기에 격려와 도움을 아끼지 않은 동료선생님과 교장, 교감선생님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꿈을 키워주는 글짓기 교육 갈수록 학생들의 생활지도가 어렵다고 한다. 자기중심적이고 인내력이 부족한 학 생들도 늘어만 간다. 거기다 입시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다. 이런 때일 수록 학생들에 대한 선생님들의 사랑과 인간성에 대한 신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 나침이 없을 것이다. 지난 9월에 동료 S선생님이 나를 보고 뜻밖의 말을 하였다. 선생님 반 학생들에 게 아이스크림을 사 주었어요. 내 반 학생들이 유독 차분하고 수업하는 것도 재미 있어서 그리 했다는 것이다. 자기 반의 학생들에게 격려차 사 주는 일은 많아도 이 런 일은 흔하지 않은데 S선생님은 지난 3월부터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글짓 기교육이 다양한 사고활동을 하게 되고 그 효과를 보는 것 같아요. 하며 긍정적 해석까지 붙여주었다. 학생들이 글짓기 활동을 하면서 사물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편지쓰기를 통 해 친구들과 우정의 꽃을 피우는 것을 보는 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다. 이 활동이 평소 지속적으로 될 때 논술지도도 가능하다고 본다. 일시적인 논술강 의 몇 번 듣고 자신의 생각을 술술 써 내기는 무리가 따른다고 본다. 학생들은 글짓기를 통해 알찬 꿈을 저마다 키워간다. 이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희 126 학급문집 활동으로 피워낸 금란지교( 金 蘭 之 交 )의 꽃 127

교단 수범사례 방학에도 신나는 우리 학교 신서영 부산광역시 부산혜원학교 교사 XXXXXXXXXXXXXX 12년 전 어느 날, 깊은 가을 햇살이 발등을 기어오르는 것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절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선택한 길이 특수교육이었다. 후회 없이 달려왔고, 지금의 내 삶을 선물이라 생각하며 감사한다. 이 수기를 쓸 수 있도록 날마다 내 가슴을 두드리는 이 땅의 아이들, 특히 장애아들, 그 들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사랑하는 선생님들, 나를 믿고 일을 맡겨주신 교장선생님, 가족, 사랑하는 하나님과 기쁨을 나누고 싶다.

언니, 오늘 공문 봤어. 우리반 애 한 명, 언니네 학교 방학중 프로그램에 신청하려 구, 자폐성향이 있는 정신지체인데 신변자립기능은 우수해. 그런데 어머니 말씀이 낯선 환경에 가면 소변을 잘 못가린다네. 화장실에 갔다와라~ 말해주면 괜찮다 는데. 신경 써주는 사람만 있으면 신청해도 괜찮을까? 선생 한 명당 아이가 몇 명 이야? 준비물은 뭐가 필요해? 엄마가 아침마다 태워다 줘야하나? 애들 주로 뭐하 고 지내? 나도 궁금하고 엄마도 궁금해 해서. 내가 너무 한꺼번에 물어봤지? 미 안. 천천히 하나씩~! 지난 6월 출산휴가를 받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인근학교 특수학급에 근무하는 대학 동기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드디어 우리학교에 다니지 않더 라도 우리학교 방학중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방학기간 중에 방치되기 쉬운 장애아 를 도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버리고 실수해도 좋으니까 언제나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자세로 교육현장을 변화 시켜나가는 여러 선생님들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패기어린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왠지 내 가슴을 두드리더니, 그게 내 일이 될 줄이야. 대학을 다닐 때 교사 는 방학 때 놀고 돈 받는 직업이라는 말이 싫어서 방학 때 더욱 열심히 일하리라 고 결심했던 것이 순간 섬광처럼 뇌리를 스쳤다. 150명 아이들을 데리고 방학중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것은 오선생이 말했던 것처럼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고, 대학시절 두 주먹을 불끈 쥔 호기만으로 해치울 만큼 만만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 만 교장선생님은 내게 신선생님. 방학중 프로그램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방학 때 갈 데 없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학교는 전국 최초로 방학없는 우리학교 를 만들어야겠습니다. 라고 주문하셨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방과후 샘이 되었다(요즘은 방학중 활동을 방과후 활동과 별 도의 개념으로 보지만 그 당시만 해도 방학중은 방학중 방과후 활동이라는 개념으 신나는 여름학교 우리학교(우리학교는 부산광역시에 위치한 전교생 178명, 교사 41명인 정신지체 특수학교이다)는 올해로 방학중 프로그램을 운영한지 3년째다. 2006학년도가 시 작되기 전인 2006년 2월, 각 부서별 업무발표를 하였다. 나는 방과후, 방학중, 평 생교육 이었다. 교무회의를마치고, 각 실로 돌아간지 얼마 후 오선생이 민망함을 겨우 면할 정도로 헐빈한 황화일을 하나 달랑 들고 왔다. 신서영샘, 나한테 밥 한 번 사라, 이거 아무 할 것도 없고 그냥 이 파일 하나 잘 보관만 하고 있으면 된다. 내가 창의적으로 인터넷에서 자료 뽑아서 철해 놓은 거 다. 샘은 그냥 잃어먹지만 않으면 된다. 라고 말하기에 나는 그저 그런 줄만 알았 다. 방과후, 방학중이라. 해오던 대로 방과후는 한 3학급 운영되려나, 방학중은 가정학습 프로그램 안내 정도 해주면 되겠지 라고 턱없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교직원 협의회 때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 다. 특수학교도 변해야 합니다. 구태의연하게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이제 벗어 130 방학에도 신나는 우리 학교 131

로 취급되었다).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갈 때도 잠을 잘 때도, 짬만 나면 오직 어떻 게 하면 방학학교를 할 것인가 하는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들을 데 리고 방학동안 내내 학교를 나올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밥을 먹이고 차를 태워 오고갈 것인가? 어떻게 재밌게 공부할 수 있을 것인가? 반편성은 어떻게 하지? 누 가 아이들을 가르치지? 무엇을 가지고? 돈은? 뭔가 학기 중과 다르게 특색있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온통 내 머릿속은 방학중, 방학중으로 가득 찼다. 가장 큰 문제는 예산과 지원인력이었다. 지원금이 있는 공모 공문이면 무조건 응시를 했다. 모조리 낙방, 낙방. 우리가 청구한 예산은 천만원이 넘었고 주최측에 서 제공하는 예산은 기껏해야 1, 2백인데 규모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렇게 발을 동동 구르며 프로그램만 짜 놓고 예산은 확보되지 않은 채 3월이 넘어갔 다. 4월, 장애인이 날이 되었다. 부산시내 모든 특수학교 교직원이 함께 모여 체육 대회를 하는 그 자리에서 교장선생님은 격려사를 하러 오신 교육감님에게 우리학 교의 사정을 얘기했고, 교육감님은 흔쾌히 식비 지원을 허락하셨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우리의 방학프로그램은 아이들 밥값문제가 해결되자 날개 를 단 듯 계획이 진행되었다. 학교 선생님들이 자진해서 강사로 뛰기로 결의했고, 인근 대학교 특수교육과 및 관련학과에 자원봉사자 모집 공고를 냈다. 이름하여 신나는 여름학교. 4주기간, 아침9시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스쿨버스 운행, 중식제공, 학교선생님 전원 무보수 강사 참여, 46명의 자원봉사자, 30여개의 프로 그램... 이것이 2006년 처음 시작했던 우리의 방학학교의 쾌거였다. 매스컴을 타며 시작된 변화 학부모들과 아이들을 위해 우리가 무엇이라도 해 보자는 성의가 하늘을 감동시켜 서였을까? 전국 최초로 시작되었던 우리학교의 방학중 프로그램 신나는 여름학 교 는 매스컴을 타기 시작했다. 교육청에서 식비를 지원받게 됨에 따라 자연스럽 게 만들어 보냈던 공문 맨 뒷장의 보도자료를 보고 부산일보에 처음 소개된 이후, 계속해서 다른 신문, 라디오, 지역사회 회보 등에 소개되었고 급기야는 EBS에서 연락이 왔다. 현장속으로 라는 프로그램에 우리학교의 방학중 프로그램을 소개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비지땀을 흘려가며 방송작가가 준 대본을 들고 우리 가 하고 있는 프로그램을 최선을 다해 안내해 주었다. 이 땀은 결코 헛되지 않을 거야. 우리 아이들이 방학 중에 갈 곳이 생기기만 한다면, TV에 방영되면 갈 곳 없 는 우리 아이들의 방학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고, 분명히 정부에서도 무언 가 변화가 생길거야. 이건 비단 우리학교 뿐 아니라 다른 학교에 다니는 모든 장애 아, 장애아 부모의 문제야. 나는 대한민국의 특수교사다. 결코 방학을 반납한 것이 헛되지 않아. 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였다. 정말 변화는 일어났다. 여름이 지나자 이후 매스컴의 파급효과에 학부모들 간의 입소문이 퍼져 우리 학교도 해 달라 는 요청이 각 학교에 쇄도한다는 소문이 들려 왔다. 또, 전국 각지의 학교에서 방학중 프로그램 기안 및 활동 내용을 이메일로 보내달라는 부탁도 심심치 않게 들어왔다. 급기야는 교육청의 예산이 추가로 편성 되어 겨울방학에는 우리 학교 말고도 다른 학교에서도 방학중 프로그램을 운영하 게 되었다. 더욱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2007년도에는 국립특수교육원에서 이효 자 원장님이 전국의 특수학교 교장선생님들을 대상으로 국내 세미나를 개최(이원 장님의 말로는 처음 시도된 전국의 특수학교 교장선생님들을 모아놓고 세미나를 개최하기는 처음이라 하였다)하여 우리 학교의 방학중 프로그램을 소개하게 되었 다. 질문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어떻게 지원인력을 구할 수 있었는지, 선생님들의 반발은 없었는지, 전교생이 참여하였다고 하는데 모든 학부모들이 정말 원했는지, 프로그램 운영은 어떤 식으로 했는지, 소요비용은 어떻게 충당했는지 등. 어려움 속에 이룬 성공 물론 우리에게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몇 몇 학부모들의 간곡한 부탁. 제발 방 학 때 학교 문을 열어주세요. 우리 아이가 갈 곳이 없어요., 하루 종일 집에서 귀 132 방학에도 신나는 우리 학교 133

를 막고 웅웅 소리를 내고 답답하면 어떤 사고를 칠 줄 모르는 아이를 데리고 잠시 도 눈을 돌릴 수 없어요. 샤워도 욕실문을 열어놓고 할 지경이에요., 아이가 작을 땐 아직 어리다며 눈을 속일 수 있었지만 이제 저보다 더 큰 아이를 데리고 다닐 때 호주머니에 넣을 수도 없고, 은행 업무도 보기 어려워요. 등. 방학 때 금반지를 삼켜버린 덕규, 벽지를 다 뜯어 자동차를 만들어버린 동현이, 창밖으로 신문지를 모조리 찢어 날려버렸다가 민원이 들어온 현석이, 시골 친척접 갔다가 박카스병에 든 농약을 먹고 하늘나라로 먼저 간 동근이까지. 일반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의 방 학을 걱정하는 부모들과는 차원이 다른 장애아 부모들의 한 숨이 우리들의 마음에 갖혀 내내 맴돌다가 드디어 2006년 교장선생님은 결단을 내리신 것이었다. 학부 모들을 대상으로 희망자 설문조사 결과 그 당시 150명 전교생 가운데 138명이 신 청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아이들 가운데 5명이 방학이 시작된 다음에 참여의사를 밝혔으며, 우리 학교에 장기결석자가 6명이었고, 1명은 병원치료를 받아야하는 아이였으니, 과연 전교생 참여다. 하지만 이런 좋은 의도로 시작했다한들 어찌 어 려움이 없었겠는가? 일단 밥값이 해결되자 인력수급과 인건비가 문제였다.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다. 사전약속이 있는 선생님들, 연수가 잡혀있는 선생님들, 계절제 대학원에 다니는 선생님들. 모두들 계획되어 있는 스케줄을 접고 방학중 프로그램에 참여하라는 말 을 할 수는 없었다. 교장선생님은 선생님들에게 방학을 앞뒤로 하루이틀씩 늘려 전체 방학일수를 늘이고 선생님들이 돌아가면서 1주일씩 참여하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선생님들은 교장선생님의 열정에 항복하였고, 그래서 전교사 40명이 10명씩 조를 짜서 한 주 동안 조별로 활동하기로 하였다. 물론 무보수였다. 학생들 은 15개 반으로 편성하였다. 아이들은 개인스케줄에 따라 친척집에 다녀오기도 하 고, 방학이라 좀 더 느슨하게 생활하여서인지 결석도 가끔하여, 한 반에 7~8명정 도가 출석하였다. 자원봉사자들의 노력도 우리 방학학교에 한 몫 하였다. 7~8명이 편성되어 있는 학급을 두 학급씩 교사 한 명이 맡아서 운영하려면 자원봉사자의 지원이 절대적으 로 필요했다. 부산과 인근 김해, 창원지역의 대학교에 자원봉사자 모집 공문을 보 냈다. 대형 포스터를 부착하고, 우리 학교의 여름학교에서 봉사하면 교생실습기간 감면 혜택이나 사회봉사학점 인정 혜택 등의 특전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처음에는 시험기간이 겹치면서 학생들의 신청이 별로 없는 것이었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 며 틈만 나면 기도를 하였고, 각 학교의 학회장을 학교로 초청하여 방학학교의 취 지를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하였다. 이윽고 학생들의 문의가 빗발쳤고, 하루에 100 건 이상의 문자메시지에 답해야하는 등 전화기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 되었다. 그결과첫해여름46명의 자원봉사자를 모집하여 한 학급에 2~3명의 자원봉사 자를 배치하여 학생들의 관리, 지도에 만전을 기할 수 있게 되었다. 프로그램도 꽤 다양하게 운영되었다. 나는 현장학습, 체험학습, 운동, 치료교육, 교과심화 등의 큰 틀을 제시했다. 다른 선생님들은 그에 맞게 각 반의 특색을 살려 아이들이 학기 중에는 하기 힘들었던 활동들을 계획해 내었고, 가능하면 그 활동 을 해 보려고 애썼다. 물 풍선 던지기, 화단꾸미기, 공룡박물관 현장학습, 창원, 울 산, 김해, 진해 등의 여러 박물관 견학, 부침개 부치기, 팥빙수 만들기 등 아이들이 까르르 거리며 행복해하던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134 방학에도 신나는 우리 학교 135

4주가 모두 끝나고 우리는 더 나은 겨울학교를 위하여 협의회를 가졌다. 프로그 램 예산지원이나 학생인계문제가 많이 거론되었고, 프로그램의 단계별 적용을 통 해 학습의 누적효과를 꾀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물론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설문지 도 배포하였다. 학부모들은 대대적인 호응을 보였다. 그날 한 내용을 일일이 적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요구도 많았다. 진화하는 방학학교 그 해 겨울학교부터는 교육청의 예산지원이 시작되었다. 적으나마 우리는 소정의 강사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외부강사를 유보수로 고용하여 프로그램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었으며, 풍부한 학습자료로 아이들이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볼거 리, 먹을거리, 만들거리를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협의회 시간에 거론되었던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도록 학생인계카드를 작성하였고, 학습의 누적효과를 얻기 위해 일회적 수업을 지양하였다. 학부모들에게 통신을 통해 그 날의 학습내용을 안내해 준 것도 물론이었다. 자원봉사자들에게 소정의 교통비를 지급할 수 있었던 것도 큰 기쁨이었다. 2007학년도에는 넉넉한 예산으로 양질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게 되 었다. 외양도 달라졌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반짝이 테잎을 사서 인쇄한 종이에 테 두리를 붙여 코팅을 해 교실마다 팻말을 붙였지만 2007학년도에는 멋진 아크릴 팻 말을 사 붙였고, 각 교실 출석부도 처음에는 황화일로 했었지만, 2007학년도에는 포켓파일로 멋지게 아이들 특성까지 기입하여 제시하였다. 한 층 업그레이드된 프 로그램은 아이들의 입가에 미소를, 눈가에 총기를 더해주었다. 중증 장애아일수록 가정형편이 어려운데, 그런 아이들이 무료로 여러 가지 특기적성활동을 전문가로 부터 교육받는 것도 가슴 뿌듯했고, 학교 내에만 갇혀 있던 아이들이 인근 학원에 통합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 것도 너무도 감사했다. 우리 아이들이 일반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컴퓨터를 배우고 태권도로 발차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감격이란! 넉넉한 지원에 걸맞게 우리학교는 작년 겨울 방과후 학교(학기중 방과후 학교, 방학중 방과후 학교) 성과물 전시회를 인근 지하철 역사에서 개최하였다. 커다란 판넬에 황금갈색 천을 사다가 붙여 세우고, 그 위로 조명을 쏘고, 아이들의 활동 작품과 활동사진을 붙이고, 음향장비를 설치하여 아이들이 그간 배운 댄스를 선보 이고, 선생님들은 같이 협연을 했다. 교육청 장학사는 무척이나 큰 충격을 받은 듯 한 얼굴이었다. 지나가던 시민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방학중 프로그램 으로 변신하다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집에 가서도 태어난지 몇 개월 되지 않은 아이를 얼러 가며 밤늦게까지 상금이 있는 공문마다 기안을 짜 보던 일, 학교 에 출근하면 수업과 아이들 치다꺼리하는 짬짬이 교장선생님과 상의하며 프로그 램을 짜던 일, 너무 일이 많아 부장님한테 화풀이를 하던 일, 신발장의 이름표를 일일이 갈아 붙이던 일, 교실마다 낚시줄로 팻말을 달아걸던 일, 현수막 디자인을 구상하던 일, 자원봉사자들의 오리엔테이션, 하루에도 수십건씩 답하던 전화와 문 자, 교실이 바뀐 아이들을 찾으러 다니던 일, 결석한 자원봉사자를 보충하기 위해 뛰어다니던 일까지 모두가 그 당시에는 정신을 쏙 빼놓는 일이었지만 돌아보니 아 름답기만 했다. 물론 내가 그 모든 것을 한 것도 아니고 할 수도 없었지만 나는 너 무도 자랑스러워 연신 눈물이 나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이 학교 선생님이에 요, 내가 담당자에요 라고 소리를 지르고만 싶었다. 올해는 2008년. 어느덧 우리학교가 방학학교를 시작한 지 햇수로 3년이 되었다. 그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국가적으로는 장애아들을 위한 방학중 프로그램이 절실 함을 공감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어 제 3차 특수교육 5개년 계획에 전국의 특수학교 149개교와 180개 특수교육센터를 중심으로 방학중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방침을 발표했으며, 학기중 방과후 프로그램의 일부로 묻어가던 방학중 프로그램이 공식 적으로 방학중 프로그램 이라는 이름을 얻어 예산을 따로 편성받게 되었다. 136 방학에도 신나는 우리 학교 137

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 일반학교 선생님들은 전혀 경험해 보지 못 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우리 아이들이 가진 가슴 아픈 장애, 그러나 성장하고 있는 생명력, 순수함, 너무나도 세밀하고 꼼꼼한 눈으로만 정확히 제시할 수 있는 학습 수준과 자료까지. 이번 겨울도 변함없이 올 터이고 신나는 겨울학교가 운영될 것이다. 더 많이 사 랑하리라 더 열심히 연구하리라 더 잘 가르치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해본다. 애들 아, 이번 방학에도 신나는 겨울학교에서 행복하게 지내렴~! 학교로서는 올해부터 방학중 프로그램을 타학교 장애아동에게도 열어 놓았다. 그만큼 노하우도 생겼고, 양질의 프로그램을 실시하면서 독식할 수 없다는 선한 다짐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위험부담이 있다. 안전사고가 그것이다. 물 론 타학교 장애아들도 우리학교의 방학중 프로그램의 혜택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그간의 바람이 실현되어서 기쁘기는 하지만 사고는 예고가 없기 때문이다. 이 부 분에 대한 고민이 충분히 공감대가 형성되어 장애아 부모나 선한 동기를 가진 실 시 주체학교에서 사고 결과 처리를 떠맡아서 당황스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함께 대책을 마련해야하는 것이 지금 과제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안타깝게도 올해는 여름방학에 둘째를 출산하게 되면서 방학중 프로그램 담당자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아직 간혹 방학중 프로그램 신청 문 자메시지가 대학생에게 오기도 하고, 다른 학교에서 방학중 프로그램 희망 상담의 뢰를 받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의 얼굴이 한 명 한 명 떠오르며 가슴이 뻑뻑 하게 차오름을 느낀다. 애들 특성을 파악해가며 학반배치를 하고 시간표를 짜다보 니 전교생 이름을 다 외게 되었고, 심지어는 누가 몇 학년 몇 반이고, 담임선생님 은 누구며, 어떤 약을 먹고 있고, 대소변을 가릴 수 있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까 138 방학에도 신나는 우리 학교 139

교단 수범사례 큰 동그라미의 의미를 가르쳐준 아이들 조을혜 부산광역시 부산혜원학교 교사 XXXXXXXXXXXXXXX 정신지체를 앓고 있는 현주, 글을 모르는 아이들, 아이들의 거친 행동 등으로 매일 애태우 며 지낸 날들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한 번도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하지 만 저도 부족함이 많은 사람인지라 우리 반 아이들에게 특별한 애정이 쌓여 갔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내가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부끄러움으로 일깨워 주었 습니다. 상을 받고 보니 더 잘해 줄걸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격려해주신 박영옥 교장선생님과 동료 선생님들께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 이 앞으로 개성을 살리면서 큰 동그라미로 자라 주기를 기도합니다. 나의 작은 수고가 이 렇듯 큰 행운으로 돌아오다니 오히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운동장 저쪽에서 작년에 우리반이었던 수희가 엄마와 함께 뛰어 와서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말한다. 선생님, 우리 수희 소원은 내년 3학년에 다시 선생님을 만나 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너무 잘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들 뿐만은 아닙 니다. 정민이 할머니도 현주도. 순간, 내 품에 안겨 있는 수희를 더욱 힘껏 안으 며 토닥여 주었다.지난 한해의 아름다운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우리 학교는요 꼬불꼬불한 골목을 비집고 딱딱딱 붙어 있는 집들, 층층이 벼랑 끝에 곡예 하듯 올 려져 있는 집들, 6 25때 피난민이 형성한 동네이다. 처음 우리 학교를 방문하시 는 손님들은 바로 찾아오시는 경우가 드물다. 학교 옆에 붙은 집들은 옛날 내가 어 릴때놀던40여년 전 동네 모습 같다고나 할까? 부산과 같은 광역시에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다. 먼저 계셨던 선생님들에 의하면 학생들의 성적이 부진하 고, 공부시간에 발표력도 부족하고, 이해력도 느려 수업이 힘들다고 하셨다. 생각 도 풍부하지 못하여 일기나 글짓기 실력도 뒤쳐지고 특히 예 체능의 기능은 많이 부족하여 대외 입상 경력이 거의 없다고 하셨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환경이다 보 니까 학부모는 거의 맞벌이를 하여 학생 교육에는 관심이 적으며, 집이 좁아 아이 들이 밖에 나가 놀기를 기대하는 건지 운동장이나 골목골목으로 돌아다니는 학생 들이 많았다. 1학년 담임 지난해 1학년 담임을 맡았다. 여러가지 어렵고 힘든 우리 학교 학생들이지만 1학 년은 처음이니까 바르게 잘 가르치면 발표도 잘하게 될 거고 열심히 하면 부진아 도 없어 학력도 떨어지지 않을거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림은 하얗고 평평한 도화지에 그려야 훨씬 예쁘게 잘 그려지니까 오히려 1학년이 더 잘 되었다고 생각 했다. 입학식 날부터 예사롭지는 않았다. 정민이는 거의 끝날 무렵에 왔고, 다른 아이들도 주의가 산만하여 전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 했다. 게다가 어머니보다 할머니 손을 잡고 온 아이가 더 많아 보였다. 11명이 함께 사는 우리 반 우리반은 모두 11명이다. 인원이 적어 좋겠다고 부러워하겠지만 나는 26년의 교 직 경력 중에서 가장 힘든 3월을 시작했었다. 비교적 학생지도를 잘한다고 하는 나 였는데 학교에서 지칠대로 지친 나는 집에 오면 말도 못하고 누워야 할 때가 많아 남편은 신규교사 같다면서 안타까워했다. 정민이는 어릴 때 엄마가 재혼을 하면서 외할머니가 맡아 기르고 있다. 외할머 니가 그날 그날 일을 하여 생활을 이끌어 가시고 계신다. 어릴 때부터 사랑과 관심 으로 자라지 못한 탓에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있으며,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는 종종 욕설이 나오고 상급생과도 싸울 정도로 거칠었다. 정글짐 꼭대기에서 소 변을 누어 아래쪽에 있는 아이들에게 소변 세례를 주었고, 나무를 부러뜨리기도 했으며 입학식부터 시작된 지각은 거의 매일 계속되었다. 복도에서는 늘 뛰어 다 니며 싸움을 잘하여 우리반은 물론 2학년 형들까지 괴롭히는 우리반 골목대장이 었다. 이렇게 용감하고 씩씩한 것 같은데 정작 발표시간에는 몸을 흔들며 얼굴만 빨갛게 상기되어 한 마디도 못하는 것이다. 과격한 성격 탓에 유치원에 다닐 때에 는 정민이만 혼자 다른 방에서 놀게 했다는 이야기에 내 가슴까지 저려 왔다. 민수도 할머니가 키우신다. 남을 잘 괴롭히고 학교 규칙을 함부로 어기며 심한 욕설을 해대며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한번 울기 시작하면 좀처럼 그치질 않 는다. 고은이도 글을 모르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 전달사항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다. 고은이는 집중력이 없고 생각하기를 정말 싫어하 고 늘 혼자 행동하고 놀기를 좋아한다. 재학이는 게임중독에 걸려 있는 엄마로 인 142 큰 동그라미의 의미를 가르쳐준 아이들 143

해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해야 한다. 청결문제로 친구들이 냄새를 호소해 오고 준 비물은 거의 챙기지 못하였다. 집 밖을 떠돌아다니며 놀이에만 열중하는 생활하는 탓에 산만하고 불안이 가득찼다. 수희는 부모님께서 맞벌이를 하셔서 할머니에게 서 자라다가 1학년 입학하면서 엄마와 같이 생활하게 되었는데 잘 놀라고 늘 불안 해하며 하루종일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성민이는 자기의 성기를 책상모서리에 문지르고 손톱을 뜯고 손을 가만히 있지 못하는 극도의 불안함을 보이고, 학교 규 칙을 잘 어기며 발표할 때에도 늘 과장시켜 말하는 습관이 있었다. 할머니와 함께 자라고 있는 예진이와 민경이도 내가 보살펴야만 제대로 학업을 할 수 있을 정도 로 여러가지가 결핍되어 있었다. 그 중 무엇보다도 나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보조교사 없이 맡은 정신지체장 애아인 우리 현주다. 전년도에 보조교사를 신청해야 하는데, 1학년이다 보니 미리 신청할 수 없어 1년을 고스란히 나 혼자 감당해야 했다. 현주는 친구들의 행동에 대해 이해를 못하였다. 친구들이 즐거워할 때도 규칙을 어길 때도, 고함을 지르거 나 친구들을 때리고 발로 차기도 하는 등 극도의 흥분상태에 이른다. 그리고 자해 행동을 보이며 자신의 머리를 벽에 부딪는 걸 볼 때면 아수라장 이 떠올랐다. 교직생활 26년동안내가맡은학급에1~2명의 어려운 아이들은 늘 있었다. 과 연 그들을 따뜻이 보살펴 주었을까? 라고 생각하니 때론 얼굴이 붉어질 일도 있 다. 늘 감싸주고 따뜻이 해주려고 노력하지만 진정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었을까 라는 물음에는 큰소리로 대답 할 수 없는데 우리반은 11명 거의 전부가 다 어려우 니 처음부터 불안하고 긴장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이 어쩌면 나에게 주어진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나의 손을 정말로 간절히 필요로 하는 이 어렵고 힘든 아 이들한테 더 없는 사랑으로 감싸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하루 정말 가슴으로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자 결심하였다. 아들 딸들아, 엄마다!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빠져있는 엄마자리에 내가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 했다.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으로 무럭무럭 자라게 하려고 엄마가 되기로 결심하고 한 명 한 명 더욱 어루만지며 교감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려 했다. 선생님, 정민이와 봉조가 거시기를 가지고 바닥과 벽에 마구 뿌리면서 소변을 봐요. 화장실에 갔을 때 나와 눈이 마주친 정민이는 눈을 아래로 내리고 얼굴을 이리저리 실룩거리면서 거만한 표정으로 있었고 봉조는 실죽실죽 웃고 있었다. 내 가 맡았던 예전의 아이들은 대체로 나를 좋아하였는데 학년 말에 그 이유를 물어 보면 때리지 않아서라는 대답이 제일 많았다. 감동을 줄 수 있는 야단 난 그것을 철학으로 삼았기에 이번에도 말 없이 화장실 벽이며 바닥을 물로 깨끗이 씻었다. 우리 두 아들은 점점 미안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얘들아, 서서 보지 말고 물통에 물 좀 담아와. 정말 힘들다. 화장실 청소를 하 면서 화가 나기보다는 옷이 젖어버린 정민이를 보며 눈물이 났다. 그래서 안아 주 려고 손을 내밀자 야단을 칠 줄 알았던지 움찔하며 방어하는 시늉을 취했다. 선생 님이 때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이상하였는지 정민이는 연신 눈을 굴리며 어리둥 절하였다. 나는 이 차가운 정민이의 가슴에 따스함을 심어 주고 싶었다. 정민아, 선생님은 아들이 없는데 너 선생님 아들 되어줘. 응? 엄마라고 불러 주면 좋겠어. 선생님이 아들 하고 말하면 엄마 라고 해줘? 응? 몇 번의 요구 끝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상기된 얼굴로 엄마! 라고 하는 순 간 나는 정민이를 안았었다. 그때 정민이도 가슴이 쿵쿵 거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옆에서 있던 수희도 선생님, 저도 엄마라고 부르고 싶어요. 학교에 는 엄마가 계시지 않으니까 학교에서 선생님이 우리 엄마 해주시면 되잖아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도 하고 싶다., 나도 할래요. 하는 아이들. 엄마 없는 6명에게만 엄마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나보다 훨씬 멋진 생각을 한 우리 아들, 딸에게 박수를 보냈다. 운동장으로 달리기를 하러가고 있는 우리들의 발길은 너무 나 가벼웠다. 결승선에 선 나를 향해 달려오는 11명의 우리 아이들이 일제히 엄 144 큰 동그라미의 의미를 가르쳐준 아이들 145

마! 라고 하면서 온다. 운동장 구석구석, 학교 여기저기, 모래알 한알 한알에서까 지 엄마라는 도장을 콕콕 찍으며 뛰어 오고 있었다. 감격이었다. 결승선에 온 우리 아들과 딸을 힘껏 안아 주었다. 내가 먼저 눈시울을 적시자 우리 아들, 딸들도 눈 물을 흘렸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가 하나가 되는 감동을 느꼈다. 실망 시키지 않네. 정말 반성하고 있구나. 고마워. 그런 재학이가 정말 좋아. 다음 에는 알지? 하면서 인정을 해주고 한 명 한 명 안아주었다. 이런 부드러움으로 대 하면서 현주을 비롯한 아이들은 흥분을 차츰 가라앉히고 차분해져 가고 있었다. 엄마가 들려주는 모락모락 따끈한 이야기 글을 아는 아이는 수희와 봉조 둘 뿐이었다. 그래서 아침 자습 시간에 글을 모르는 우리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동화책을 읽어 주기로 하였다. 책을 읽으며 글의 내용 을 물어보기, 등장인물의 흉내를 내어보기, 등장 인물의 입장이 되어 칭찬이나 충 고해주기, 역할극 해보기 등 최대한 재미있게, 다양하게 지도하고 감정을 많이 넣 어서 실감나게 읽어 주었다. 지각하던 아이들은 점점 빨리 오기 시작하였다. 엄 사랑의 벌은 이런 방법으로 수업시간에 아이들과 복도를 뛰지 않기로 굳게 약속을 한 날이었다. 그런데 아이 들은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신발까지 벗고 맨발로 복도를 뛰어다니며 손잡이 난간 의 미끄럼틀을 탔다. 그것을 본 현주는 큰소리로 고함을 치며 친구들을 잡으러 가 고 아이들은 현주를 놀리며 도망을 갔다. 약속하고 돌아서자마자 이런 일이 있다 니! 하얗고 예쁜 새끼 손가락으로 결심을 하는 것 같았는데. 내가 주는 다정 한 사랑이 무용지물인양 싶었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주는 벌은 별처럼 아름 다운 사랑이 되어 가슴에 남아 있기를 희망하였다. 복도를 뛴 아이들은 모두 앞에 섰다. 현주는 먼저 겁을 먹고 울면서 집에 간다고 고함을 친다. 잘못을 한 사람은 손을 내라고 했다. 그리고 잘못했다고 생각한 사람은 눈을 감으라고 했다. 많이 잘 못하였으면 세게 감으라고 했다. 손을 내밀고 모두들 세게 감은 눈 때문에 쪼글쪼 글해진 얼굴로 서 있다. 그것을 본 현주는 금새 따라한다. 쪼글해진 눈가의 모습이 얼마나 고맙고 예쁜지. 나는 매대신 머리를 쓰다듬으며 우리 재학이가 엄마 마, 책 읽어 주세요. 라며 보채었다. 아이들이 글을 알기 시작하자 나는 일부러 가 장 재미있는 부분에서 읽기를 멈췄다. 그러면 서로 그 책을 읽으려고 줄을 섰다. 스스로 책을 찾도록 유도하는 나의 지도방법에 아이들이 딱 걸린 것이다. 처음부 터 동화 구연식으로 읽어 주던 나의 소리를 흉내내던 우리 아이들은 귀엽고 앙증 스럽게 책을 읽어 학교 방송의 학급자랑시간과 학예회 때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 을 받았다. 146 큰 동그라미의 의미를 가르쳐준 아이들 147

이제 글을 알아요 선생님, 우리 현주가 집에서도 받아쓰기 공부를 하자고 조르네요. 신기해서 오늘 학교에 와 보았어요. 복도에서 선생님과 받아쓰기를 하고 있는 소리를 듣고 정말 많이 울었어요. 감사합니다. 하며 현주 어머니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현주는 처음 에 받아쓰자고 하는 권유의 말조차 거부하는 아이였다. 무슨 말이든지 자기에게 말하는 것은 다 자신을 꾸짖고 놀린다고 생각하는 극도의 열등감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빨리 받아 적지 못하면 선생님, 4번 다시 불러 주세요. 라며 애살 을 부린다. 글자를 익히는 첫 날은 현주를 위해서 또 글을 모르는 9명을 위해 한 낱 말만 공부하고 한 문제 시험을 쳤다. 모두가 100점을 맞아 100점 공책을 들고 오 르간 노래 소리에 맞춰 행진을 하고 나는 한명씩 끌어안아 주었다. 이것은 성공이었다. 매일매일 받아쓰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이렇게 시작한 받 아쓰기는 내가 집에서 돌보는 엄마 역할과 학교 선생님 역할을 번갈아 하며 우리 가 헤어지는 2월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100점 맞은 것에 대한 성취감을 최대 한 높여 주었고 현주를 비롯하여 거의 100점을 맞지만 간혹 100점을 맡지 못한 친 구가 있으면 위로하는 시간을 가지며 내일은 꼭 나오라고 약속을 한다. 일기로 아름다운 세상을 보았어요 글을 익혀 조금 쓸 수 있을 무렵인 5월부터는 같이 일기를 썼다. 일기 쓰는 방법을 모르는 우리 아이들에게 언제나 새로운 학습지도를 할 때면 쉽고 재미있게 한 것 처럼 일기 쓰는 방법 지도도 그렇게 했다. 자신에 대한 자긍심과 친구에 대한 배 려, 즐거운 학교 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하는 등 다양한 목표를 두고 한가지의 주제 를 주었다. 즐거운 시간 즐거운 시간에 우리 학교를 그렸다. 나는 친구들과 축구하는 모습을 그렸다. 슛 골 인하는 모습을 흰색과 검은 색으로 색칠을 했다.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다. 잘 그린 그림은뒤에붙인다고하셨다. 내그림이붙었다. 기분이좋다. 다음에도잘그려서 선생님께 칭찬을 받고 싶다. 민수의 일기 사진 사진을 찍었다. 운동장에서 선생님과 같이 찍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는 한 가족이 니까 한 장의 사진에 담아두자고 하셨다. 집에도 가족이 있어 좋고 학교도 가족이 있어 좋다. 가족은 서로 많이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다. 선생님, 사랑해요, 친구들 아, 사랑해. 수희의 일기 일기 쓰기를 지도하면서 일기를 통하여 아름다운 마음,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있는 듯하였다. 그리고 예쁘고 바른 글씨인 경필도 같이 가르쳤다. 열심히 한 덕분 에 정민이는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학교 저학년 경필대표가 되어 교외 대회 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노는 것보다 학교 공부시간이 좋아요 공부시간에는 역동적인 우리 아이들의 특성에 맞춰 공부하려고 했다. 실제 체험적 이고 활동적인 방법으로 지도하였다. 수학시간에 수( 數 )를 이해할 수 있는 친구들 과의 게임 방법을 정하고 넓은 교실공간을 활용하여 공부를 하였다. 세모, 네모, 동그라미의 평면도형의 모양을 공부할 때면 우리 교실에 있는 것을 찾아서 발표하 는 것이 아니라 세모, 네모, 동그라미를 찾아 여행을 떠나요 라는 재미있는 동기 148 큰 동그라미의 의미를 가르쳐준 아이들 149

유발 구호와 함께 직접 찾아다니며 역동적으로 수업을 했다. 활달한 것 같으면서 도 막상 무엇이든지 하려면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우리 아이들에게 움직이면서 하 는 수업은 한층 재미를 주었고 아이들을 자연스럽게 공부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형성평가나 진단 평가시에도 교실 가장자리에 동서남북을 정하여하는 동서남북 게임이라든가 나의 정해진 오르간 소리에 맞추어 교실 뒤, 앞, 공간으로 나오게 유 도하여 발표도 하고 춤도 추면서 수업을 하였다. 나의 이런 수업 방법은 아이들하 고의 약속이 없으면 교실은 아수라장이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다양한 손신호에 하나같이 움직이는 우리 아이들, 또 오르간의 정해진 가락에 자기 자리 나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모습, 행진하는 모습들 수많은 약속을 정하여 놓고 일 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공부하였다. 정말 내가 보고만 있어도 흐뭇하였다. 우리학 교는 3차례의 공개수업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정말 많은 칭찬을 들었다.이제 우리 아이들은 학교가 너무 재미있단다. 아침 등교 하는 우리 아이들의 얼굴은 늘 피어 있는 것 같았다. 토요 휴업일이 제일 싫다고 하였다. 여름방학 하는 날은 선생님, 나는 여름방학이 싫어요. 하면서 방학이 싫다고 했다. 즐겁게 1학년 생활을 보내 고 있는 우리 아이들이 정말 대견스러웠다. 앉아 손을 잡고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노래를 불렀다. 쥐잡기 게임, 369게임, 이거리 저거리 게임 등 여러 가지를 놀이를 하면서 웃음꽃을 피웠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기로 하였다. 정민이 차례에서 머뭇거리더니 나의 얼굴을 보았다. 3월의 과격해보이던 얼굴은 어디도 없다. 많이 컸구나. 우리 정민 이 라고 생각하며 정민이에게 말했다. 정민아, 하고 싶은 이야기 있으면 무엇이 든지 해보렴. 그러자 저는 엄마 얼굴을 몰랐는데 얼마 전 추석에 엄마가 다녀가 셨어요. 청바지를 사주시고 가셨어요. 그런데 옛날에는 몰랐는데 한번보고 나니까 계속 많이 보고 싶어요. 하면서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나는 눈물 을 참을 수가 없어서 정민이 곁에 가서 등을 토닥이며 안아 주었다. 그리고 수희도 울면서 저는 처음에 정민이가 저를 너무 괴롭혀서 미워했는데 이제 착해져서 제 일 좋아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 불쌍해요. 제가 안아주고 싶어요. 라고 하였다. 서 로를 위로할 줄 아는 우리 아이들이 너무 대견스러웠다. 그리고 점점 우리 아이들은 나도 엄마가 어떻게 생겼을까? 보고 싶어요. 하면 우리 아이들과 더 가까워진 수련회 벌써 10월, 과학 탐구 교실에 당선되어 우리 학교 전교생이 함께 과학탐구수련을 계획하였다. 1박2일을 함께하는 수련회는 평소와는 다른 학습이므로 아이들은 가 기 전부터 많은 기대와 설레임으로 손꼽아 기다렸다. 낮에는 호주 퀘스테논 탐구 학습과 합류하여 유익한 시간을 보내었다. 신기해하는 우리 아이들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장기자랑대회에서는 우리 아이들도 상급생이 뒤질세라 그동안 익혀왔던 춤솜씨를 발휘하였다. 교장선생님이하 전교생들의 마음을 한순간 모두 사로잡아 많은 박수를 받으며 의기양양해 하는 모습은 정말 자랑스러웠다. 기다리던 우리 들의 밤 시간이다. 교실이 아닌 낯선 방에서 11명의 우리 아이들은 작은 원으로 모여 150 큰 동그라미의 의미를 가르쳐준 아이들 151

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아픔을 토해 내었다. 작고 여린 가슴에 묻힌 아픔은 내가 생 각했던 것보다 휠씬 컸었다.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는데 이렇게 큰 상처 가 마음속에 있었다니 세상이 정말 원망스러웠다. 울음 바다가 된 우리아이들은 나에게 더 깊속히 파고 들었다. 엄마냄새가 맡고 싶어인 것 같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가 되어 울었다. 11명이 모두 울고 난 뒤 자는 얼굴을 보니까 얼마나 가여운 지. 우리 아이들의 얼굴에 환한 웃음만 있기를 기도했다. 우리는 가족이 된 기분 으로 한밤을 그렇게 보냈다. 실컷 울고 나니 한층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야했던애태움이이책속에들어있다. 나는 늘 네모의 아이를 받아 동그라미를 만 드는 목표로 지도했다. 오랜 습관에 의해서 네 모서리의 뾰족이 튀어나온 부분을 쳐서 작은 동그라미를 만드는 데만 노력했다. 나에게 배웠던 작게 만들어버린 작은 동그라미들의 아이들을 생각해 본다. 인격도, 개성도 모두 없애 버린 것은 아닌가 라는 자책감으로 얼굴이 붉어진다. 나는 작년 우리반이었던 1학년 아이들에게 엄마같은 선생님이 되면서 모서리와 모서리 사이를 채워주는 선생님이 되었다. 채워져서 만든 동그라미는 부수어 만든 동그라미보다도 표면적이 훨씬 큰 동그라미가 되었다. 큰 동그라미의 교훈을 준 우리 아이들에게 감사한다. 사랑한다. 나는 지금 고사리같은 손으로 직접 써서 만든 문집을 보고 있다. 가나다라를 배 우던 우리 아이들이 쓴 문집이다. 1년 동안 캐비넷 제일 윗 칸에 자리를 잡고 한 장 한 장 모아 만든 우리 아이들의 책이다. 어느 값비싼 책보다 귀중한 우리의 보물이 다. 앞서 내가 맡았던 아이들과 같이 만든 문집도 소중하지만 이것은 더 의미가 크 다. 문집을 갖고 오던 날 아침, 우리 아이들은 큰소리로 환호하였다. 이 문집은 세 월이 갈수록 얼마나 값진 것이 될까? 이 책 속에는 겨우내 움츠렸던 새싹들의 기지 개가 있다. 아름다운 노래가 살아있다. 서로를 위로하고 위로받던 따뜻함이 있다. 우리 아이들은 나에게 오랜 습관에 의해서 가르치던 내 모습을 바꾸었다. 더 재 미있는 것을 생각하게 했고, 더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했고, 교육적인 의미를 찾아 152 큰 동그라미의 의미를 가르쳐준 아이들 153

자녀교육 수범사례 걸음이 빠르다고 빨리 가는 것은 아니다 신은선 자녀교육을 가족 모두의 화목한 시간으로 허동규 하루 15분의 투자가 가져온 수백 배의 행복 이향선 멋진 아들의 비밀 통장 김정희 희망을 찾아가는 우리 가족 황현숙 꿈은 이루어졌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신진규 우리집에 도서관이 생겼어요 백승철 미안하다 김정례 157 171 183 195 209 221 237 247

자녀교육 수범사례 걸음이 빠르다고 빨리 가는 것은 아니다 신은선 경상남도 밀양시 삼문동 XXXXXXXXXXX 아들이 중학생이 되던 해, 나는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한 시간도 넘는 길을 오가며 어린 학생들과 함께 한 대학생활은 힘들면서도 달콤했습니다. 언젠가 아이는 내게 말했습니다. 힘든 내색 없이, 지각 한번 안 하고 학교에 다니는 엄마 모습에서 큰 감동을 받았어요. 내가 늦깎이 대학생이 된 것처럼, 아이는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학교 공부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공부보단 건강이 먼저인 아이였기에 크게 기대를 하지는 않았습니 다. 그런데 오히려 저의 그런 느긋한 태도가 아이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 같습니다. 조기교육 열풍이 거센 요즘 세태에 자식 교육을 우리처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한번쯤 말하고 싶었습니다. 공부는 결코 단거리 경주가 아니기에 무조건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천천히 한 걸음씩 더 멀리 갈 수도 있지 않을까요?

견딜 수 없는 슬픔은 없다 혈우병. 생후 5개월 무렵 밝혀진 아이의 병명이었다. 중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한번 피가 나면 멈추지 않는 병 이라고 배웠던 그 병에 내 아이가 걸릴 줄이야. 넘 어설 수 없는 고난과 맞닥뜨렸을 때 사람들이 제일 먼저 보이는 반응은 하필이면 왜내게 라고 한다. 우리 부부도 그랬다. 아이가 5만명 중에 한 명꼴로 발생한다는 희귀병을 안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맨 먼저 든 생각이 하필이면 왜 우 리 아이가 였다. 병에 대해 알아갈수록 절망감은 더해갔다. 우리는 언제나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에 시신경을 고정시키고 살았다. 조그만 충격에도 혈관이 파열되어 피하( 皮 下 ) 출혈이 일어나고, 출혈 부위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면서 극심한 통증 이 따랐다. 특히 관절 부위의 잦은 출혈은 연골 손상을 일으켜 장애를 초래하기 때 문에 출혈 증상이 있을 때는 즉각 지혈제( 止 血 劑 )를 투여해 주어야 했다. 우리는 병원을 이웃집처럼 끼고 살았다. 삶에서 견딜 수 없는 슬픔이란 없다. 어떤 슬픔도 겪다 보면 몸 한 구석 오래 된 흉터처럼 익숙해진다. 살다 보면 슬픔에도 적응이 되는 것이다. 그렇듯, 아이의 병 도 시간의 흐름에 씻기고 바래져 우리 가족의 일상 속으로 들어와 안겼다. 밑그림부터 차근차근 퍼즐과 레고로 길러진 집중력과 끈기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우리는 아이의 지각능력을 최대한 개발시키는 쪽으로 방향 을 잡았다. 취학 전에 흔히 시키는 한글이나 숫자 공부는 접어두기로 했다. 대신 문방구를 찾았다. 아이들이 가지고 놀면서 자연스럽게 지각능력을 싹 틔울 수 있는 도구가 없을까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진열대 벽에 걸린 퍼즐놀이판이 눈에 들어왔다. 두꺼운 마분지에 그린 하나의 그림을 여러 개의 조각으로 나누어 놓은 모자이크 그림판이었다. 수박, 참외, 토끼, 오리 같은 비교적 간단한 그림을 10여 개 조각으로 구성한 것이 있는가 하면, 놀이공원의 복잡한 풍경을 100여개의 작은 조각들로 구성한 것도 있었다. 추리력과 집중력, 구성력, 공간 지각력 등을 키워주 기에 안성맞춤일 것 같았다. 나는 우선 아이의 관심도를 알아보기 위해 제일 간단 한 그림판을 하나 샀다. 찬얼아, 우리 이거 맞추기 해 볼래? 그림 조각들을 방바닥에 쏟아 놓고 아이와 함께 하나하나 맞춰 나갔다. 가능한 한 아이가 주동자가 되게 했다. 곁에서 보기에 답답한 경우가 많았지만 참았다. 서 로 맞지도 않은 조각을 억지로 꿰맞추려고 애를 쓰기도 하고, 소 뒷걸음치다 쥐 잡 는 격으로 이것저것 갖다 대보다 겨우 맞는 걸 찾아 내었다. 그래도 우리는 잠자코 지켜 보기만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는 퍼즐놀이에 흥미를 더해갔다. 같은 그 아이는 중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어떤 종류의 학원도 다닌 적이 없으며 과외 또한 받은 적이 없다. 남들은 아이가 특별한 질병을 가지고 있으니까 공부는 뒷전인줄 알았다고 했다. 요즘 세상에 한글도 채 못 깨우치고 초등학교 입학을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조기교육 열풍에 휩싸여 아이를 무작정 학원과 과외의 홍수 속 에 내던지고 싶지 않았을 뿐, 우리도 관심은 남들 못지않았다. 아이 교육에 대한 큰 그림을 가지고 있었기에 우리는 주변의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밑그림부 터 차근차근 그려 나갈 수 있었다. 158 걸음이 빠르다고 빨리 가는 것은 아니다 159

림을 두어 번만 맞추어 보고 나면 거의 틀리지 않고 완성해 내었다. 방바닥에 널브 러진 그림 조각들이 순식간에 본래 형상을 드러내는 순간, 아이 얼굴에는 희열의 빛이 피어올랐다. 아이의 흥미도가 높아가는 것과 비례하여 우리는 그림판의 난이도를 높여갔다. 1년가량 지났을까? 유아용 퍼즐을 정복하고 난 아이는 시중에 나와 있는 것 중에 서 가장 복잡한 그림판에 도전했다. 아이의 인내심과 끈기, 그리고 집중력은 실로 대단했다. 한번 붙잡았다 하면 끝 까지 물고 늘어졌다. 그림을 완성시킬 때까지 몇 시간이고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서 꼼짝하지 않았다. 저러다 다리에 쥐가 나면 어쩌나 싶을 정도였다. 겨우 1cm가 될까 말까 한 수백 개의 작은 조각들을 하나의 온전한 형상으로 조합해 내는 작업 은 쳐다만 보아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아이는 진지하기만 했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할 시점이었다. 퍼즐놀이를 통해 발견한 아이의 집중 력과 인내심을 십분 활용하면서 창의력을 기를 수 있는 놀이가 없을까? 그때 마침 아이의 고모가 생일선물로 블록쌓기 레고 장난감을 사 주었다. 퍼즐놀이로 단련 되 어서인지 아이는 설명서에 나와 있는 보기 모형들을 별 어려움 없이 만들어 내었 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제 나름대로 이런저런 모형들을 만들어 가지고 놀았다. 엄마, 이게 머게? 음~, 기린? 아니야. 코끼리. 코가 길잖아. 아이가 레고놀이를 할 때면 우리는 가능한 한 함께하려고 노력했다. 우리도 뭔 가를 만들어 보거나 옆에서 거드는 시늉이라도 했다. 퍼즐과 레고 놀이, 학습으로 연결되다 커갈수록 아이는 혼자서도 잘 놀았다. 온종일 레고 삼매경에 빠져 지내기가 일쑤 였다. 레고의 단계도 점차 올라갔다. 아이는 점점 복잡하고 섬세함이 필요한 종류 를 원했다. 명절이나 제삿날 같이 집안 행사 때문에 큰집이 있는 부산에 내려갈 때 는 어김없이 장난감 가게에 들렀다. 갖가지 레고세트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아이 는 행복해 했다. 퍼즐과 레고로 길러진 집중력과 끈기는 학습 태도로 연결되어 그 진가를 발휘했 다. 중학교 3년 내내 시험 기간 말고 집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못 봤는데도 성적은 상위 20%를 벗어나지 않았다. 특히 국어와 영어는 상위 5%안에서 맴돌았다. 하 도 신기해서 한번은 학교 선생님들께 물어보았다. 찬얼이 수업 태도가 어때요? 아주 좋죠. 한 눈 파는 적이 없어요. 한 마디로 수업 집중력이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학교 수업에는 충실하지 않으면 서 학원 과외만 열심히 쫓아 다니는 아이들의 허무한 결과를 나는 주변에서 숱하 게 보아왔다. 설령 숙제를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잠은 잘 만큼 자야 한다는 걸 강조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새벽 2~3시까지 공부하고 학교 가서 꾸벅꾸벅 졸 바에야 차라리안하는편이낫다. 밤늦게 공부하는 걸 막은 것은 건강에 대한 염려 때문이기도 했다. 혈우병의 특 성상 피곤은 금물이다. 몸이 피곤하면 출혈이 잦아지기 때문이다. 공부도 좋지만, 출혈로 인해 지혈제( 止 血 劑 )를 주사하는 엄마의 심정은 가슴에 소금을 뿌린 듯 쓰 라렸다. 160 걸음이 빠르다고 빨리 가는 것은 아니다 161

이야기 들려주기로 시작한 독서교육 초등학교 3~4학년 무렵부터 장난감 가게 다음으로 우리가 빼놓지 않고 들른 곳은 서점이다. 우리는 우리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사고 싶은 책을 서너 권씩 샀다. 나 는 아이가 고르는 책의 종류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남편은 가능하면 아이의 취향 을 존중해 주었다. 책이 텔레비전이나 놀이 못지않게 재미있는 물건이라는 생각을 먼저 심어주어야 한다는 게 남편의 지론이었다. 나는 아이가 명작류 내지는 학습 에 도움이 될만한 책을 고르기 바랐지만, 그 바람은 번번이 빗나갔다. 아이의 손길 은 주로 추리물이나 괴기 공포물로 기울었다. 아이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나를 남편은 눈짓으로 만류했다. 그리고는 내심 내가 읽어주기를 바라는 책 1권을 슬쩍 끼워 넣음으로써 모자의 불화를 진화했다. 믿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독서의 폭이 확장될 것이라는 남편의 말에 나는 위안을 얻었다. 과연 그랬다. 적어도 인생길에선 걸음이 빠르다고 빨리 가는 것은 아니었다. 온 갖 괴담 시리즈를 섭렵하고 셜록홈즈 시리즈까지 독파하고 난 아이는 점차 독서의 폭을 넓혀갔다. 국내외 전래동화를 비롯해서 국내 유명 출판사에서 나온 아동문고 시리즈를 스스로 골라서 읽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읽어보라고 건네주는 책도 거 부감 없이 받아 읽었다. 우리는 아이에게만은 소설가였고 유일한 이야기꾼이었다. 우리가 저녁마다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이는 꿈의 나래를 펼치며 밤의 장막 속으로 빠져 들었다. 우리는 아이에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책이었다. 그 비할 데 없는 아이와의 밀착감을 떠올려 보라. 얼마 전 읽은 책에서 이 구절을 발견하고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오래 전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실천했던 방식이 옳았다는 것을 저 멀리 프랑스 국어교사가 입증해 주었다고나 할까. 책의 저자가 권하고 있는 것처럼, 나의 독서교육은 이야 기 들려주기 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이는 언제나 내 품에 안겨 이야기를 들으면 서 잠들었다. 하도 여러 번 해 주는 바람에 닳고 닳은 이야기도 아이는 재미있어 했 다. 때로는 내가 지어내기도 했다. 그러다 동화책 읽어주기로 넘어갔다. 아이가 한창 이야기 듣기에 재미를 붙일 무렵, 우연히 고모 집에 굴러다니던 구 연동화 테잎이 손에 들어왔다. 아이는 금세 동화 테잎에 빠져 들었다. 음향을 곁들 인, 성우들이 녹음한 테잎이어서 엄마 아빠가 들려주는 것보다 훨씬 사실감과 생 동감이 있는 모양이었다. 여러 이야기 가운데 아이가 특히 좋아한 것은 파랑새 였다. 치르치르와 미치르는 할머니가 주신 다이아몬드 박힌 모자를 쓰고 파랑새를 찾 아 떠났습니다. 듣는 우리가 지겨울 정도로 아이는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야기를 외워 버렸다. 단순히 줄거리만 외운 것이 아니라 성우의 억양까지 정확 히 흉내 내었다. 글자도 모르는 아이가 테잎과 함께 나온 그림동화책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이야기를 따라 하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옆에서 지켜보던 내가 성우의 목소리를 따라 글자를 짚어나가자 나중에는 그것까지 외워서는 이야기 흐 름과 문장을 대충 맞춰 짚어내었다. 이쯤 해서 글자를 가르쳐 볼까 싶은 마음도 있 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글자는 어디까지나 기호에 불과한 것,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글자를 빨리 익힌다고 해서 사고력이 발달하는 것도, 어휘력과 표현력이 느는 것도 아니다. 중학생이 되자 3~5권짜리 국내 장편소설도 술술 읽어냈다. 고등학교 1학년 무 렵에는 쳐다보기만 해도 질려버릴 만한 도스또예프스키 작품들을 감명 깊게 읽어 냈고, 문학교과서에서 언급된 세계명작들을 차례로 읽어 나갔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별로 없었다. 때때로 아이가 인터넷 서점에서 골라 놓은 도서 에 대해 결재를 해주는 일뿐이었다. 구입 목록 가운데는 일본 만화들이 적잖게 들 어 있었다. 만화를 읽는 것까지야 좋은데 굳이 살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나는 못 본 척했다. 내 잣대로 아이가 좋아하는 걸 막아버리면 소통 자체가 막혀버릴 것 같았 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아이의 중학교 국어 성적은 늘 상위 3%를 유지했고, 고 등학교에 가서는 대부분의 모의고사에서 언어영역 1등급을 받았다. 162 걸음이 빠르다고 빨리 가는 것은 아니다 163

영어의 매력에 빠져들다 중학생이 되면서 아이는 컴퓨터 게임에 빠져 지냈다. 가만히 놔두면 진종일 마우 스를 끼고 살았다. 보다 못해 CD와 잡지를 집 밖으로 내팽개치는 극약처방을 취해 보았지만, 약발은 오래 가지 않았다. 게임 중독에 빠진 아이들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독서가 바탕이 되어 있으니 국어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고, 영어와 수학 중 하나라도 웬만큼 해 놔야 고등학교 가서 영 헤매지는 않을 것 같았다. 2학년 들면서 영어회화 학원을 찾았다. 안 간다고 버티는 녀석의 손을 잡고 집에 서 제일 가까운 학원을 직접 찾아갔다. 아이는 내향성이 강한 성격이어서 낯선 환 경에 대한 두려움이 많고 사람 사귀는 걸 어려워하는 편이었다. 딱 일주일만 다녀봐. 그 다음엔 다니든 안 다니든 니 마음대로 해. 아이와 나란히 앉아 들어본 수업은 마음에 쏙 들었다. 학교 수업과는 완전히 판 이했다. 놀이를 가미한 회화 중심의 흥겹고 동적인 수업이어서 한 시간이 언제 갔 는지 모르게 후딱 지나갔다. 당장 학교 성적은 안 올라도 좋습니다. 영어에 흥미만 붙일 수 있으면 좋겠습 니다. 아이를 학원에 데려온 이유를 묻길래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다행히 학원수업이 재미 있는 모양이었다. 일주일이 지나고도 안 다니겠다는 말은커녕 싫은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회화학원과의 인연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 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진학하고 싶은 학과 1위가 영문과였을 정도로 아이는 영어 자체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덕분에 아이의 고등학교 영어 성적은 사교육의 힘을 전혀 빌리지 않고도 상위권을 유지했고, 수능에서 1등급을 받을 수 있었다. 수학,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다 초등학교 때부터 유난히 고전을 면치 못했던 수학은 고등학교에 가서도 여전히 취 약 과목으로 남아 있었다. 언어와 외국어가 2~3등급인 반면, 수리는 4~5등급이 었다. 하는 수없이 아는 분의 소개로 생전 처음 과외란 걸 시켜보았다. 남편은 과 외 알레르기 반응 같은 게 있는 사람이어서 완강히 반대했다. 정 안 되면 수학 성적 반영 안 하는 대학에 진학시키면 될 거 아니냐고 했다. 하지만, 그만둘 때 그만두 더라도 한번은 시켜보고 그만두어야지 시도조차 해 보지 않고 포기하는 건 방치라 는 내 말에 남편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일주일에 두 번 수업을 받는 개인과외를 1년가량 계속했다. 6개월쯤 하다가 3개 월쯤 쉬었다 다시 6개월쯤 받았다. 2학년 2학기 들면서 아이가 그만 받겠다고 해 서 과외는 영영 중단되었다. 그동안 수학 성적은 많이 향상되었다. 모의고사 성적 이 2~3등급에서 오락가락했다. 나는 그게 순전히 과외효과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핵심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대학 합격자 발표가 있고 난 어느 날,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수학 공부를 어떻게 해 왔는지 털어놓았는데, 아이의 이 야기를 듣고 나는 코끝이 찡한 감동을 받았다.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수학공부를 좀 본격적으로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참고서를 사려고 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학교 친구를 만났단다. 수학을 잘하는 친구였다. 문제집을 이것저것 살피고 있는데 그 친구가 이거 한번 해 보지? 라면 서 책 한권을 골라주었단다. 아이들 사이에 제법 수준이 높은 책으로 알려진 유형 별 문제집이었다. 이때부터 죽자사자 문제집을 파고들었는데 어떤 때는 한 문제를 잡고 사나흘씩 물고 늘어졌다. 책 한 권을 갖고 그렇듯 바닥까지 파고드는 고행을 치르고 나자 수학의 원리가 보였고, 과외가 필요 없다는 자신감이 생겼단다. 아이의 놀라운 집중력과 끈기는 그저 타고난 것일까? 아니다. 나는, 사교육에 의지한 눈앞의 학습효과에 매달리지 않고, 공부의 평생 기초가 될 능력을 키워주 는 데 치중한 결과라고 믿는다. 사교육은 양념에 불과할 뿐이다. 양념만으로 음식 맛을 낼 순 없지 않는가. 164 걸음이 빠르다고 빨리 가는 것은 아니다 165

호사다마( 好 事 多 魔 ) 아이가 본격적으로 공부에 매진하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입학과 함께였다. 성적 도 자연히 올라갔다. 중학교 내신성적 16.7%로 고등학교에 진학했던 아이의 성적 이 갈수록 상승곡선을 그리더니 고3에 이르러서는 3% 안에 진입하였다. EBS 수능방송은 아이와 고등학교 생활을 함께한 벗이었다. 아이는 방송의 전 과 정을 시청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먼저 풀어보고 정답까지 맞춰 보고나서 틀렸 거나 이해가 안되는 부분만 골라 들었다. 반복해서 듣고, 말의 속도를 빨리 하여 들을 수도 있는 인터넷 강의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수능방송 의존도는 3학년 들어 한층 높아졌다. 과목별 특강시리즈는 물론이고, 인터넷 수능, 10주 완성, 파이널 실전모의고사에 이르기까지 EBS가 출간한 교재 란 교재는 죄다 섭렵했다. 3학년 4월에 전교 10위를 차지했던 모의고사 성적은 마치 계단을 밟아 오르듯 상승해 갔다. 그리고 수능, 아이는 그동안 성적의 최고점을 찍는 기염을 토했다. 기대 이상의 성적이었다. 수능 성적이 잘 나와서인지 아이는 굳이 서울을 고집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서울행을 원하지 않았다. 학비도 학비지만, 건강 문제가 무엇보다 걱정이었다. 언 제든 쉽게 달려가서 응급처치를 해 줄 수 있는 곳에 있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호사다마( 好 事 多 魔 )라고 했던가. 수능 성적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화려한 꽃다발을 기대한 우리에게 지원한 대학 모두에서 낙방하는 쓰디 쓴 잔이 돌아온 것 이었다. 서울의 상위권 대학만을 고집하던 아이의 무모한 선택이 빚어낸 결과 앞에 우리는 망연자실했다. 한군데쯤은 인근의 국립대나 교대에 지원하기를 그토록 권 했건만 끝내 제 고집을 꺾지 않은 아이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한 마디도 원망투 의 말을 내던지지는 않았다. 보나마나 우리보다 제 마음이 훨씬 더 아릴 테니까. 집에서 버텨낸 재수 생활 재수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는 밤잠을 설쳐가며 아이의 재수를 놓고 고민했다. 어떤 이는 서울의 기숙형 학원을 권했고, 또 어떤 이는 고시텔이나 원룸 같은 데 기거하면서 종합반을 다니라고 했다. 어떻게 하든 주사가 제일 문제였다. 보통 1주일에 한 두 번은 혈관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누구한테 어떻게 부탁을 할 것이며, 출혈이 발생하면 또 어쩔 것인지. 생 각하면 생각할수록 칠흙 같은 어둠이 앞을 막았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아무런 의 사 표시가 없었다. 사흘 안에 의사를 분명히 해. 어떻게 하든 네 결정에 따를게. 사흘 째 되는 날, 아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집에서 할래요. 재수를 집에서 한다고? 주위 사람들은 한결같이 집에 둬선 안 된다고 말렸다. 솔 직히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인터넷이 좋다고 해도 스스로를 채찍질해 가며 공부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나 우리는 이번에도 아이의 결정에 따 르기로 마음먹었다. 별달리 채근하지 않아도 지금껏 잘해 왔으니 재수라고 해서 166 걸음이 빠르다고 빨리 가는 것은 아니다 167

못해 낼 거 없다는 믿음이 있었다. 다만, 언제 어디서 발생할지 모르는 출혈에 대 한 불안이 아이의 발목을 잡은 건 아닐까 싶어 우리는 마음이 아렸다. 겉으로 보기에 아이의 재수는 한가롭기 짝이 없었다. 3월한달은학교일과에 맞춰 생활하는 것 같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게으름의 늪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10시가 넘어서야 겨우 일어나 밥을 먹고 책상 앞에 앉으면 어느새 정오. 그런데다 가, 보통 두 세 시간쯤은 온라인 게임을 즐겼다. 하루 학습 시간은 어림잡아 대여섯 시간에 불과했다. 사람들이 집에 둬선 안 된다고 한 까닭이 이해되었다. 공부에서 중요한 건 양이 아니라 집중력이란 사실을 떠올리며 우리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논술 준비를 위해서다. 밀양에서도 상위권 아이들 대부분은 그 행렬에 합류한다. 우 리에게도 많은 이들이 논술만큼은 서울로 보내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남편은 완강 했다. 제 아무리 우수한 강사라 해도 고작 일주일 남짓한 기간에 가르치면 얼마나 가르치겠느냐는 것이 남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아이도 전혀 갈 생각이 없었다. 수능 사흘 뒤에 치러진 논술시험에는 겨우 모의고사 문제만 써보고 갔고, 그 일 주일 뒤에 치러진 시험은 모의고사와 유사문제를 합쳐 4~5편을 써 본 뒤 응시했 다. 연습이 턱없이 부족하긴 했지만, 지난해부터 쌓아온 내공이 있어서인지 아이 의 논술 실력은 일말의 기대감을 갖게 했다. EBS 수능방송, 재수 생활의 길잡이 기적처럼 찾아온 수시모집 합격 재수 생활 내내 아이가 길잡이로 삼은 것은 EBS 수능방송이었다. 사설 유명 온라 인 학습매체를 권해 보기도 했지만 수능방송 말고는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모의고사도 집에서 치렀다. 시험지는 아이의 모교에서 얻어왔다. 성적은 지난해 수준에서 맴돌았다. 우리는 더도 말고 지난해 정도만 나와 주기를 바랐다. 설령 점 수가 좀 떨어진다 해도 가까운 국립대 정도는 갈 테니 크게 걱정할 건 없었다. 오히 려 그렇게 되면 돈 적게 들고, 집 드나들기 편하고, 주사 걱정 덜고, 여러모로 전화 위복일 것 같기도 했다. 서울의 상위권 3개 대학 수시모집에 응시원서를 냈다. 셋 다 논술전형이었다. 한곳은10월 중순에 시험이 있었고, 두 곳은 수능 직후에 있었다. 내신성적이 반 영되긴 하지만 사실상 논술이 당락을 좌우한다 할 만큼 반영비중이 높았다. 중학교 국어교사인 남편은 기출문제와 해당 대학이 실시한 모의고사 문제를 구 해와 아이를 지도했다. 국어교사라고 해도 논술은 따로 공부가 필요한 분야였다. 남편은 작년부터 꾸준히 각 대학 논술고사의 경향을 살피고 EBS 강의를 시청하는 등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수능시험이 끝나기 무섭게 지방 학생들은 기러기떼처럼 서울을 향해 몰려간다. 수능시험 발표일부터 수시모집 발표일까지 일주일 남짓한 기간에 우리 가족은 천 당과 지옥을 오가는 경험을 했다. 지난해 1등급이던 외국어영역이 3등급으로 추락 하는 바람에 서울의 상위권 대학은 아예 꿈도 못 꿀 지경이 되었다. 이제 남은 건 수시모집. 하지만 그것도 기대를 크게걸수있는상황이아니었다. 40대1에가까 운 경쟁률에다 모집 인원의 절반을 수능 성적 우수자로 우선 선발해 버리니 웬만 한 논술 실력으론 꿈도 못 꿀 처지였다. 그런데 정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지 원한 세 곳 중 두 군데에 동시 합격하는 축복이 내린 것이었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 고 소신을 지켜온 우리 부부, 외로운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일궈낸 아이. 우리 는 얼싸안고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지금 아이는 서울 모 대학 앞에서 원룸을 얻어 혼자 생활하고 있다. 수시로 정맥 주사를 통해 지혈제를 투입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지난 학기를 무사히 마쳤 다. 학점이 기대에 못 미치기는 했지만, 고등학교 시절 성적이 그랬듯이, 점차 상 승곡선을 그려 나가리라 확신한다. 더딘 걸음이 빨리 간다는 걸 경험한 우리니까. 168 걸음이 빠르다고 빨리 가는 것은 아니다 169

자녀교육 수범사례 자녀교육을 가족 모두의 화목한 시간으로 허동규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분편동 XXXXXXXXXXX EBS 학습을 선택함으로써 사교육비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라나는 아이 들이 밤 12시 이전에 잠자리에 들 수 있어 수면권을 보장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EBS 시청 후에는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심화학습을 통해 예습과 복습 효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 다. 이렇듯 아이를 키우며 제가 직접 느낀 EBS 학습의 장점을 알리고자 수기를 작성하였 는데 수상의 영광까지 안게 되어 더욱 기쁩니다. 아들 무형이의 중학교 입학 이후 우리 가족은 TV를 보지 않습니다. 대신 가족끼리 더 많은 대화를 나누며 일체감을 경험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EBS를 통한 효과적인 학습과 가족 간의 화합을 통한 정서적 안정은 무형이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의 교육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들의 중학교 과정에 대한 수기를 쓰며 난생 처음 수기를 쓰자니 쑥스럽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것도 수능시험이라도 마친 아이가 아니고 아직은 배워야할 것이 더 많은 중학교 3학년 아들을 소개한다 는 것이 수많은 학부형과 선생님들 앞에 민망스러운 한편, 두려운 마음도 든다. 원 래 수기라는 것이 어느 정도 성공한 사람이 전해주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사실 주변에서 우리 아이만큼 사교육 없이 공부 잘하는 아이도 드물다면서 힘을 더해주기에 그냥 학습 방법론이라도 수기로 소개하면 중 고등학생을 둔 학부형 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나하는 생각에서 글을 쓰기로 결심을 했다. 글을 접하시 는 분들께서는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 주셨으면 하는 생각이며 아들의 중학교 입학에서 최근까지 3년간의 생활을 두서없이 적어 내려한다. 초등학교는 지 덕 체를 골고루 사는 것이 바쁜 나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아내와 연년생인 아들과 그 아래 딸은 청주에서 중학교 3학년과 2학년에 다니고 있다. 요즘 그리 드물지 않 은 주말 부부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이 많지 않은 것은 당연 지사가 아니겠는가? 요즘처럼 수많은 학원에서 재능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시절 에 자라난 터라 내 자신이 변변한 재주를 지니고 있지 못하여 남매는 초등학교 시 절부터 지 덕 체를 골고루 갖춰 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한문과 바둑 그리고 검 도와 현악기를 배우게 하였다. 그래도 아이들 적성에 맞아서인지 커다란 반항 없 이 초등학교 6년을 꾸준하게 한 결과 한문은 소학을 익힌 수준이 되었으며, 성장기 버릇 없고 짓궂은 아들놈에게 남들에 대한 예의와 배려를 알게 해주려 시작한 검 도와 바둑은 아마 초단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고, 요즘은 제법 남들에 대한 배려를 할 수 있는 아이로 성장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내심 흐뭇할 때가 많다. 그리고 초등 학교 시절, 학예발표회가 있는 날 연주할 수 있는 실력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시작한 아들의 첼로 연주는 이제 소나타를 제법 연주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고 아 들이 가장 좋아하는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맞닥뜨린 시험 그런 가운데 2006년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들 무형이가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 다. 맞벌이 부부인지라 아이들을 세세하게 챙겨줄 여력이 없기에 집에서 가장 가 까운 중학교에 지원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바라던 중학교에 배정을 받은 아들은 삼십여 년 전 내가 중학교에 입학 할 때와 다름없이 입학식도 하기 전 반배치를 위 한 시험을 본다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영어나 수학 같은 과목의 선행학습 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질 못하고 보습학원 같은 곳은 아예 관심도 두지 않았던 나와 아내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중학교 교문에 들어서 면서 처음 치른 시험에서 아들이 거둔 성적은 평균 80점에 500여 명 중에서 150등 정도의 수준이었다. 이제부터 우리아이도 시험이라는 제도권에 들어가야 하는 가? 라는 생각에 우리 부부는 걱정이 앞섰다. 도대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나 자신이 중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도 30년이 훌쩍 넘었고 이제 40대후반나이 이니 학교의 교육과정이나 특목고 등에 대한 제도를 제대로 알리는 만무하였다. 학원을 경영하는 친구나 교직에 있는 친구들과 만날 기회가 되는 날이면 중학생이 된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보면서 조언을 구해보기도 했다. 그때 친구들의 대 답은 이 사람아! 최근 서점가에서 열풍을 일으키는 책 한 번 사다가 읽어봐! 요즘 애들에 대한 교육열이 얼마나 대단한데. 소위 공부 방법론 말이야! 구구절절 옳은 이야기이지! 하고 책을 소개해 주는 친구도 있었고, 전국적으로 유명한 oo 172 자녀교육을 가족 모두의 화목한 시간으로 173

학원을 보내. 그거 다 괜히 나온 것 아니고 교재도 좋고 강사진이 좋으니까 입소문 이 난 거야! 라고 친절하게 학원을 소개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런 대비도 없 이 중학교에 간 아들에게 무슨 얘기를 해줘야하는 것인지, 도대체 무엇부터 해야 되는 건지 생각이 정리되질 않았다. 아이들에게 10%의 관심을 갖자 주말 밖에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이 없었던 나였는데도 청주 집에 내려오면 TV시청 이나 밀린 낮잠 자기, 그리고 친지들을 만나는 것이 생활의 대부분이었다. 새로 장 만한 교복을 입고 아들이 입학식을 하던 날, 우리 부부는 우선 이전의 습관을 버리 고 각자의 관심사를 줄이기로 다짐을 했다. 주말 밖에 없는 시간이 없지만 아이들 에게 관심을 더 갖기로 한 것이다. 그 첫 번째 약속은 가족 간의 대화를 늘리고 서 로에게 관심을 갖자! 였다. 그 약속을 실행하기 위해서 우선 시간을 빼앗아 가는 주범격인 TV를 치우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그러면 TV시청시간 대신 애들과 최 소한 하루 1시간 이상의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주어진 시간의 10%는 더 관심을 가 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TV를치운이후TV중독에 대한 금단 현상이 나를 비롯한 가족 모두에게서 나오 기도 하였고, 그로 인해 아이들과 다툼이 몇 차례 벌어지기도 하였지만 비교적 가 족 모두가 잘 견디어 냈다. 그리고 TV대신 서로 간의 대화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계획은 어른부터, 아이들에겐 노는 시간부터 배려를 아무래도 TV에 빼앗겼던 시간을 되찾으니 우리 부부는 책과 신문 등을 접할 시간 이 자연히 많아지고 그만큼 이야기의 소재도 다양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이들과의 대화시간도 충중해졌으며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 등 소재가 다양해 져 대화의 수준도 올라가기 시작했다. 중학교 입학 후 아들 무형이가 중간고사 일 정을 받아 온 어느 날 가족 모두 생활 시간표를 한 번 짜 볼까? 시간표는 하루 기 준이 아니고 주간표로 작성하는 것이 어때? 라는 아내의 제안으로 가족 모두가 1 장씩의 주간 생활 계획표를 작성해서 서로에게 보여주기로 하였다. 그런데 시험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서일까 아들 무형이의 시간표는 학교 귀가 후 부터 밤 12시까지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부 시간으로 빽빽이 채워져 있었 다. 무형이의 학업에 대한 열의와 습관, 그리고 체력으로 미루어 보아 이미 지킬 수 없는 주간 시간표란 것을 감지한 나는 최소 주 당 10시간은 우선 노는 시간부터 배려를 해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이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계획을 지킬 수 있 는 길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무형아! 공부도 좋지만 노는 시간도 넣어야지. 네가 놀고 싶은 시간이 몇 시간인지, 또 무엇을 하고 놀 건지, 영화도 가끔 친구들과 보 아야 되고. 제일 먼저 노는 시간부터 생각해서 주 당 최소 10시간은 우선 계획표에 넣도록 해라. 그 다음에 시험 준비가 오래 걸릴 과목부터 시간을 배정하기로 하 자! 이렇게 하여 다시 작성한 아들의 주간 계획표는 제법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계획표 지키기 누구나 학창시절 계획표를 작성하고 못 지키고, 또 작성하고 못 지킨 경험은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처음부터 무리한 계획을 세우는 것은 금물이라는 생각을 가진 나로서는 온가족의 계획표가 다소 느슨하게 세워지기를 기대했고 특히 무형이의 174 자녀교육을 가족 모두의 화목한 시간으로 175

계획표에는 많은 공을 들였다. 우선 중간고사 과목인 국어, 수학, 과학, 영어, 사회 등 학업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과목은 주 당 5시간을, 기술가정, 음악, 미술, 도덕 등의 과목은 주당 2시간을 골고루 넣어 배치를 하였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건 강이기에 주말이면 온가족이 즐길 수 있는 배드민턴이나 농구 그리고 걷기 같은 운동도 포함시켰다. 이렇게 되니 온 가족의 계획표에는 일치성이 생겨 자연스럽게 가족이 함께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할 수가 있었다. 과연 이렇게 공을 들인 계 획표를 무형이를 포함한 온 가족이 지킬 수가 있을까? 특히 자신이 없는 것은 아이 들보다 오히려 불규칙한 모임이 많은 나였다. 그러나 마음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계획표에 대해서 조금씩 오차가 나는 시간을 조정하며 며칠 지키다 보니 가족 사 이에도 이해도가 높아지게 되고 벌써 몸에 익숙해져 계획표를 지키기가 훨씬 수월 해지기 시작했다. 의 간단한 질문에도 막혀서 답답해하던 우리 부부는 방법을 찾다가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보습학원을 택하기로 결심을 했다. 보습학원이라고는 한 번도 가보지 못 한 아이들이기에 우리 부부는 이웃의 이사람 저 사람에게 국어, 영어, 수학은 어느 학원이 좋은지 물어보기도 하고, 다리품을 팔면서 이 학원, 저 학원의 교실을 슬쩍 들여다보며 여러 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교에 다니는 조카가 교육 방송이 좋다고 하는 말을 하기에 온 가족이 컴퓨터 앞에 둘러앉아 EBS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다. 처음으로 들른 교육방송 사이트는 바로 놀라움 그 자체였다. 이런 정보화 시대의 혜택을 받 아보지 못하고 교육을 마친 우리 세대로서는 과목별로, 수준별로 잘 정리되고 다 양하게 갖춰져 있는 콘텐츠에 감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놀라움과 설렘 속에 교재가 다 팔릴까봐 온 식구가 서점으로 달려갔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TV여안녕! 그 자리엔 컴퓨터가 TV에 정보 획득의 유익성과 중독성의 해악적 이중성이 있다면 컴퓨터의 해악도 TV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TV를 버린 거실 자리는 무형이 방에 있던 컴퓨터가 대신했다. 인터넷을 이용한 공부에는 꼭 이겨내야만 하는 유 혹이 도사리고 있는데 바로 요즘 아이들의 유일한 놀이이자 탈출구인 게임인 것이 다. 무형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계획표상 휴식시간에 시작한 게임이 서너 시간을 훌쩍 넘기는 것은 기본이었다. 아이들에게 게임도 유해하지만 부모의 잔소리도 반 가장 훌륭한 교과 선생님 찾기 계획표에 따라 학습을 시작한 아이들에게 닥친 첫 번째 난관은 초등학교와는 달리 학습의 수준이 높아지다 보니 학습서에 의존한 독학 방식은 아이들을 싫증나게 한 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막히는 부분에 대해 물어볼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들 작용이 날 것을 우려한 우리 부부는 우선 아내와 나의 주간 계획표를 컴퓨터 앞 벽 에 붙여놓고 지킨 시간은 색연필로 표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형이가 컴퓨터로 학습을 할 때는 옆에서 같이 독서를 하였다. 그렇게 시작한 EBS 교육은 점차 무형 이의 몸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EBS 교재의 경우 강의와 문제가 같이 책안에 들 어있기 때문에 강의를 다 듣고 문제를 스스로 풀어보는 것으로 과목을 매일 매일 정리해 나갔다. 그러다 모르는 부분이 나오면 다시 한 번 강의를 듣는 것으로 학습 176 자녀교육을 가족 모두의 화목한 시간으로 177

이 진행되어 가면서 아들은 자신감을 갖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EBS 수강이라는 시험적인 정착기를 가지면서 1학년 중간고사가 지나갔 고 1학기말 시험을 볼 때가 다가왔다. 오빠! 이 번 시험에서 몇 등 할 것 같아? 라는 6학년인 동생 혜린이의 엉뚱한 질문에 1등 하고 짤막하게 무형이가 대답했 다. 하지만 아이들을 가까이서 지켜본 우리 부부로서는 선행학습이나 학원에도 다 니질 않는 무형이의 실력이 1등 수준이 될 거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 고 해서 무작정 그래 너 1등 해봐 라고 부담감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 대신 나 는 반대로 무형아 너 1등하지 말아라! 점수도 나오는 대로 받고 억지로 올리려고 하지 마! 라고 답을 하였다. 가족 모두는 내가 남들 아빠하고 틀리고 웃기다며 웃 었지만 내 마음 속에는 아이한테 시험에 대한 부담감을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사교육 없이 90점을 넘기다, 기초과목은 방학 때 다행히도 무형이의 성적은 우려한 만큼 내려가지 않았고 1학기 말에는 오히려 80 점대 후반 가까운 점수로 입학 시보다 100등이나 상승한 성적을 거두었다. 성적표 를 받던 날 아들은 자기 자신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고 곧이어 여름방학이 시작됐 다. EBS 강의의 특징은 자료화면 등이 충실해 학교수업이나 학원수업보다 기초를 튼튼히 하고 기억에 오래 남는 장점을 지녔다고 무형이는 말했다. 점점 무형이는 EBS 선생님들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시작했고 여름방학에 들어서자 2학기 예비 학 습 과정을 자기 스스로 시작하기 시작했다. 한 번은 먼 곳으로 장기간 가족 여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서도 EBS 학습을 거르지 않을 수 있어 좋다고 말할 지경 이 된 것이다.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가르침을 주는 곳, 이 얼마나 좋은 전 과목 만 능 개인 가정교사란 말인가! 또한 몇 번이고 반복 학습이 가능하여 영어나 수학과 같은 기초과목의 경우는 완전학습이 가능하였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다시 2학기가 시작되었다. 봄에 처음 시도하였던 주간 계획표도 아들의 리듬에 맞춰 수정이 되었고, 남는 시간에는 문 제집을 풀기로 하였다. 여름방학 때 기초 과목을 충실히 해서 그런지 학업 성적은 놀라울 정도로 성장하여 2학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성적 모두 90점을 상회했고 전교 석차가 25위권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2학년 때는 영어 문법을 마무리해야 중학교 1학년 때와는 다르게 2학년 수준의 영어는 꽤나 긴 중 장문이 등장하게 되고 어휘 또한 긴 음절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때이다. 학교 교과서와 EBS 중학 영 어에 충실한 아들이지만 해석을 못하여 절절 매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하였다. 영 어에 있어서는 워낙 교육열이 심하고 조기유학 바람이 거센지라 웬만큼 해서는 안 될 거라는 생각이 아내와 나뿐만 아니라 주변 모든 사람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래도 우리 가족에게는 아예 EBS 학습법이 만능 과외 공부로 인식된지라 무형 이의 영어 문법 역시 EBS에서 인기가 높은 영어 특강을 유료로 신청해서 해보겠다 는 것이었고 우리 부부도 몇 만원의 수강료를 승인해 주었다. 아들은 초등학교 시 절 독서와 한문을 좋아한 덕분인지 영문법에 대한 이해도가 참으로 높았다. 인터 넷 강의는 스스로 수강기간을 정해 놓고 출석을 체크하게 되어있어 수업을 거를 수가 없게 되어 있었으며, 오히려 결강을 하게 되면 내 메일로 연락이 오곤 하였 다. 무형이는 EBS에서 유료특강 시리즈를 마무리한 후 다시 수준을 높여가며 다른 영문법 책과 EBS에서 제공하는 어휘 공부에 열중하였다. 이제는 어느 정도 고급 영어를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으니 만능 가정교사가 틀림이 없 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학생들이 어렵게 생각하고 학업에 부담을 가지는 영어에 자신을 가지다 보니 2학년 성적은 이제 90점대 중반인 95점을 바라보게 되 었고 석차도 교내 10위권 안으로 서서히 진입하고 있었다. 178 자녀교육을 가족 모두의 화목한 시간으로 179

2학년 겨울방학, 무엇보다 중요한 인생의 꿈을 설계할 시간으로 중학생들에게 방학만큼 학습능력을 높이기 좋은 시간은 없는 것 같다. 기말고사로 2학년을 마무리하면서 긴 겨울 방학에 들어 선 아이들은 무엇보다 고등학교 진학 문제와 장래 희망에 대해 많이 고민한다. 무턱대고 좋다고 해서 꿈꾸었던 장래의 희망이 고교 진학이라는 현실 앞에 무너지기도 하고, 또한 새로운 꿈을 가지게 되 는 변화의 시기인 것이다. 이때 우리 가족은 무형이의 장래 희망에 대해 구체적인 토론을 벌였다. 너는 앞 으로 무엇을 하고 싶으니? 나의 짧지만 긴 질문에 무형이는 숙고를 하였고 정형 외과 의사가 되고 싶다고 하였다. 무엇보다 할머니의 병으로 인해 병원을 자주 드 나들며 본 난치병과 불치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을 위해 한 명이라도 새 삶을 찾게 해주는 것이 꿈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의과대학에 진학을 해야 할 것이고 대학 등록금도 꽤나 비쌀 테니 나와 너희 엄마도 학비 준비를 지금부터 해야겠구나. 너 도 그쪽으로 진로를 결정했으면 수학과 과학에 보다 열중해야 될 것 같구나. 대화 는 이런 식이었던 것 같다. 뜻 깊은 것은 부모의 강요가 아니라 아이 스스로가 무엇보다 중요한 인생의 꿈 과 직업을 자기 스스로 그것도 직업을 인지할 수 있는 나이에 결정을 하였다는 것 이다. 2학년 겨울 방학은 이과 학문에 열중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고, 아울러 무형 이에게 있어서는 신체성장과 정신적 성장이 급격히 일어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키가 급격히 자라고 정신 연령도 높아지면서 이에 따른 운동과 독서도 게을리 하 지 않았던 기간이었다. 1학년 150등으로 입학하여 3학년 전체 1등으로 서다 중학교 마지막 학년인 3학년 새 학기까지 긴 겨울 방학을 지내고 무형이는 한층 성 장한 모습을 보였다. 공부에 있어서는 나와 아내의 체크와 충고가 없어도 스스로 할 일을 알아서 한다는 것이다. 벌써 전년도 헌책을 사다가 3학년 전 과정에 대해 예습을 하고 학교 수업에 맞추어 EBS로 복습을 생활화하고 있었다. 주요 과목에 대한 시험인 중간고사에는 전체 문제에서 서너 문제 정도만 틀리더니 전 과목을 치루는 기말시험에서도 포기하는 과목 없이 평균점수가 97점 이상을 상회하는 점 수를 내니 당연히 교내 1등으로 서게 되었다. 무형이의 친구들은 진화를 주제로 한 만화 영화의 주인공을 따서 몬스터 라는 재미있는 별명을 무형이에게 붙여 주었다고 한다. 내가 왜 몬 씨냐? 허 씨지! 이 제서야 공부라는 높은 산의 고개 한 개를 넘었을 따름이야! 무형이의 썰렁한 대답 이다. 너는 무슨 학원에 다니냐는 질문도 많이 듣는 모양인데 그때마다 집에 와서 전 과목 가르쳐주는 곳! EBS학원! 이라고 답변을 한다니 이제는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공부가 두렵지 않고 자신감이 생긴 모양이다. 후기 아들 무형이는 아직 중학생이고 자기가 목표로 한 장래희망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도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성장하는 아이를 대상으로 수기를 쓴다는 것이 참 으로 쑥스럽고 다른 부형들에게 미안하게 생각되지만 무형이의 학습 과정을 통하 여 일궈낸 가족 간의 일체감 형성, 그리고 교육비에 대한 부담을 없앨 수 있는 계기 가 되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졸속한 수기를 작성해보았다. 하지만 무형이가 했던 학습방법은 특별한 사교육 없이, 그것도 밤 12시취침, 아침7시 기상 원칙을 지키 면서 충분한 학습효과를 얻을 수 있었으니 권할만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180 자녀교육을 가족 모두의 화목한 시간으로 181

자녀교육 수범사례 하루 15분의 투자가 가져온 수백 배의 행복 이향선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동 XXXXXXXXXXXX 부모에게 있어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또 다른 세상과 만나는 일이 아닐까요? 그 소중한 만남에 소통 이 빠진다면 결국 아이와 부모는 함께 하기 힘들어질 것입니다. 작은 물방울이 오랜 시간을 거쳐 바위를 뚫듯이 저와 아들은 꾸준히 일기를 쓰며 서로 의 세계를 관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행복은 사소한 일상에서 시작된 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힘겨울 때마다 버팀목이 되어주신 어머님과 바쁜 엄마를 이해해주고 엄마와 오랜 기간 마음의 대화를 나눠 준 아들의 성실함과 열린 마음에 수상의 영광을 바칩니다.

14년의 사회생활을 접어야 했던 이유 올바른 자녀 교육을 위해서는 아이와 부모가 소통하는 시간이 많아야 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돌이 되기 전에 아빠를 잃은 아들과 생활을 하기 위해 나는 직장을 계속 다녀야 했다. 다행히 친정어머니께서 아들을 돌보아주셔서 사회생활을 당당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매일 일정하게 끝나는 일이 아니었기에 아이와 함께 하는 시 간이 많지 않았다. 일 년에 서너 번의 해외출장, 한 달에 3일 정도의 철야, 약 10일 정도의 야근으로 인해 아들이 자는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5일제 근무가 시작 되기 전이라 아들을 위해서는 간혹 일요일에 야외로 나가거나 전시회 혹은 백화점 의 장난감 코너에서 엄마와의 허기졌던 시간을 채워 주려고 했다. 일주일 이상 걸 린 출장에서는 다양한 장난감과 선물 공세로 그간의 부재에 대한 용서를 구하곤 했다. 그러나 아들의 세세한 생활 태도며, 습관 등을 일일이 관찰하지는 못했다. 그저 어머니께서 잘 봐주시고, 아들이 큰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기에 문제가 없다 고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유치원의 발표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평소 아들에 대해서는 어 머니와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얌전하고 착하다는 칭찬을 들었기에 유치원 생활도 잘 할 것이라는 은근한 기대감으로 갔다. 그러나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쟤 는 뉘 집 아들이야 라는 수군거림의 대상이 바로 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발표회가 끝나고 만나 뵌 유치원 담임선생님께서도 아들이 식사시간과 수 업시간에 산만하고 고집도 세다며 어렵게 말을 꺼내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 은 무거웠고, 아이를 위해 직장 생활을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14년이라는 오랜 사회생활, 좀 더 노력하면 더 높은 위치로 갈 수 있던 시기라 주변에서도 만류를 해 많은 아쉬움이 있었지만 아들의 안정이 더 절실하게 다가왔 기에 과감히 사표를 냈다. 다행히 회사에서는 그간의 실적을 인정해주어서 프리랜 서로서 집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기에 집에서 아이의 교육에 매진하 면서 일에서도 손을 놓지 않아도 됐다. 아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자 아들의 습관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을 자 세하게 살펴볼 수 있었고, 아들에게 더 많은 책을 읽어 주고 대화도 많이할수있 었다. 다양한 방법으로 아들의 눈높이에 맞추도록 애쓴 결과 조금씩 나와 아들도 달라져갔다. 산만했던 아들의 태도는 차츰 안정되어 집중력이 높아졌고, 패스트푸 드 등을 즐겨했던 식습관도 개선이 되어갔고, 된장국이며 김치찌개와 같은 우리 음식의 참맛을 알아갔으며, 가족 여행도 전보다 자주 갈 수 있었다. 그렇게 엄마와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아들은 유치원을 즐겁게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입 학하였다. 아침마다 받아보는 러브레터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첫 아이를 둔 엄마로서 조금은 설레고, 긴장도 되 었던 것은 나만의 느낌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유치원과는 다른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고, 뭔가 도움을 주고 싶었다. 이런 저런 궁리 끝 에 아들에게 쪽지편지로 러브레터를 보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엄마 가 보낸 러브레터를 받아 보면 아들이 기뻐할 것 같았다. 입학하기 전날 밤에, 색종이에 성철아! 초등학교 입학을 축하해. 세상에서 엄 마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성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엄마도 성철이가 엄마 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아. 오늘은 성철이가 처음으로 학교 에서 공부하는 날이야. 엄마는 착하고 씩씩한 성철이가 훌륭한 학생이 될 거라 믿 어. 성철이 파이팅! 이라는 메시지를 적었다. 그리고 매미 모양으로 접어서 아들 의 책상에 놓아 두었다. 등교하는 첫 날, 아들은 조금 긴장했는지 일찍 일어났다. 책상에 놓인 초록 매미 를 보고 휘둥그레진 채 쪽지편지를 펼쳐보고는 이내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 고 내게 다가와 꼭 안더니 나도 엄마 사랑해. 공부 잘하고 올게요! 라고 하며 가 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184 하루 15분의 투자가 가져온 수백 배의 행복 185

그 때 계속 쪽지편지를 써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매일 색종이 접기를 하니까 번거롭고 편지가 구겨져서 펼치면 글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색종이 접기 대신 색종이로 작은 봉투를 만들고, 다른 색종이를 반으로 접어서 편지를 썼 다. 작은 미니 편지 봉투였기에 만들기도 수월하고 보기도 편했다. 쪽지편지는 매일 저녁, 아들이 잠들면 썼다. 편지쓰기에서 편지봉투 만들기까지 15분 정도가 걸렸다. 처음에는 익숙지 않아 어색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이 쌓여 갔다. 그렇게 매일 아침마다 알록달록한 색종이 편지가 책상에 놓였고, 아들은 아침이면 일어나 가장 먼저 책상 위를 살피곤 했다. 쪽지편지는 아들에게 행복한 아침의 전령사였나보다. 아이는 매일아침 엄마가 오늘은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한 마음으로 편지를 본다고 했다. 그렇게 쪽지편지, 러브레터는 아들과 나의 마음을 이어주는 끈이 되었다. 이 높다는 칭찬을 받았다고 자랑하곤 했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을 칭찬할 줄 알았 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어 토요일이면 집에 초청하여 함께 놀고, 떡볶이 등 간식을 먹곤 했다. 매일 학교에 가는 아침 시간이 기다려진다는 아들에게 학교생활은 참 으로 즐거운 놀이 같아 보였다. 아들은 매일 엄마에게 받았던 쪽지편지를 그대로 흘려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모 아두었다. 그리고 종이 박스를 구해 예쁜 포장지로 싼 후, 거기에 편지들을 정리해 놓고 자신의 보물 1호로 삼았다. 알록달록한 색종이 편지가 가득한 예쁜 박스를 열 면 엄마의 사랑이 피어나는 것 같다는 아들의 생각이 고맙고 대견하기만 하다.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지만 그렇게 잔잔하고 행복했던 2년의 시간이 흘러 아들은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그 무렵 외국인 회사에서 함께 일해보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조건도 좋았고, 평소 에 선망했던 회사라 마음이 흔들렸지만 아들 때문에 선뜻 결정할 수 없었다. 우선 아들의 의견을 들어보아야 할 것 같아 나의 상황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러 자 아들은 2년 동안 계속된 엄마의 24시간 관리체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해방감과 엄마가 전처럼 회사를 다니면 자신이 사고 싶은 것들을 마음대로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앞서서인지 엄마가 회사에 나가면 좋겠다며 적극 찬성했다. 그리고 엄마가 걱정하지 않도록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자신했다. 칭찬이라는 묘약의 효과 자라는 아이에게 가장 좋은 약은 칭찬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나는 쪽지편지를 통해 말보다 글이 가슴을 더 벅차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일 칭찬과 격려의 러브레터를 받은 아들은 학교생활에도 자신감을 가졌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조 금 엉뚱하긴 하지만 발표도 잘하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놓아 선생님께는 창의력 아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못 다 이룬 사회생활에 대한 미련으로 나는 실무에서 벗어났던 2년의 공백을 깨고 다시 일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다시 시작한 일 또한 규칙적인 업무가 아니었고 아들이 일어나기 전에 출근하고, 잠든 시간에 퇴근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대적으로 아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일을 다시 시작하기 전까지 아들은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는 자신을 맞아주는 엄 마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며 친구들, 자기의 생각에 대해 재잘재잘 이야기하기 바빴고, 엄마가 해주는 간식의 맛을 즐길 줄 알았다. 그러나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186 하루 15분의 투자가 가져온 수백 배의 행복 187

아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주거나 그때그때의 궁금증이나 학교에서 있었던 사소한 갈등들을 풀어 줄 수 없었다. 대화의 시간이 줄면서 그만큼 아들과의 교감이나 이 해의 폭도 줄어 갈등하는 일이 잦아졌고, 아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커져만 갔다. 전과 달라지고 있는 엄마의 모습에서 아들도 조금씩 불안해하고, 자신감도 잃어가 는 것 같았다. 참다운 소통이 필요하다 여전히 엄마가 사랑하고 있고, 언제든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고, 보이지 않아도 아들의 든든한 울타리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 데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이 되었다. 2년이라는 시간을 공들여 겨우 안정시킨 아들의 생활태도들이 다 시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쪽지편지로는 앞으로 변화될 상황들을 아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는 데 는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리고 잦은 전화통화로 존재감을 알리고 마음을 달래주는 것도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 같았다. 아들과 진실하게 소통하며, 보다 신뢰 있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절실하게 필요 했다. 그 때 아들 의 일기장이 눈에 들어왔고 아들과 함께 일기를 써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함께 일기를 써보자고 제안했다. 아들의 2학년 담임 선생님께서는 일기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아이들이 일기 를잘쓸수있도록글감이며, 표현 등을 일일이 지도해주셨다. 덕분에 아들도 매 일 일기를 꼬박꼬박 썼고 나는 아들이 쓴 뒷장에 칭찬이나 하고 싶은 말, 그날 있 었던 내 생활의 일부, 아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나 소중한 것들에 대해 썼다. 글을 잘 쓰기 위해 미사여구를 사용하기 보다는 대화하듯 솔직하고 편하게 썼다. 처음에는 엄마가 자신의 일기장에 일기를 쓰는 것에 아들은 의아해했지만 계속 꾸준히 쓰는 공동일기 덕에 선생님께 칭찬도 받고 친구들이 부러워하자 엄마의 일 기를 자랑스러워하고 다음 일기가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했다. 선생님이나 친구 엄 마들에게는 나는 우리 엄마가 자랑스러워요. 우리 엄마는 저랑 일기를 같이 써 요 라며 자랑을 하기도 했다. 간혹 학교 어머니 모임에 참석할 경우가 있었는데 그 때 다른 엄마들이 내게 애들이 일기를 써달라고 조른다고 하며 성철이 엄마 때문 에 우리만 귀찮아졌지 뭐야 라고 핀잔을 주긴 했지만 그 엄마들도 차츰 아이들과 일기 대화를 해갔다는 사실을 아이들을 통해서 전해 들었다. 아들의 4학년 담임 선생님께서도 아이들의 일기에 일일이 글을 써주셨는데 일 이 바빠지자 포기하려고 하셨단다. 그런데 나와 아들이 일기를 통해 대화하는 모 습을 보고 계속 아이들에게 글을 써주시겠다고 하셨다. 덕분에 아들의 4학년때일 기는 아들과 나, 그리고 선생님까지 함께 한 속삭임이었다. 일기는 상상력 연습장 공동일기를 쓰면서 자연스럽게 일기쓰기 지도도 할 수 있었다. 아들에게 일기는 상상력 연습장 이라고 말해주었다. 대체로 일기는 그날 있었던 일을 정리하는 정 도인데 아들에게는 다양한 방법으로 일기를 써보라고 권했다. 글로 서술하는 형식만이 아닌 아들이 좋아하는 만화 형식의 일기, 때로는 텔레 비전이나 연극의 대본처럼, 여행을 다녀오면 화보집처럼, 영어로도 도전해보고, 188 하루 15분의 투자가 가져온 수백 배의 행복 189

엄마의 흰머리 같은 구체적인 글감의 동시 일기나 책을 읽고 난 후에 감상문을 쓰는 독서일기, 뉴스의 기사처럼 써보거나 책 속의 주인공이나 사용하고 있는 책 가방에게 편지를 보내거나 현실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상상의 세계에 대해서 일기 를 써보라고 했다. 매번 같은 형식이 아니라 자신이 쓰고 싶은 대로 쓰면서 아들은 일기쓰기에 재 미를 붙였다. 아들의 일기는 실로 다양한 문체들로 구성된 한권의 잡지 같다. 아들 의 일기를 읽고 있노라면 어른들은 절대로 생각할 수 없는 다양한 상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아마도 꾸미지 않는 동심의 세계가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쓰기에 자신감을 얻다 다양한 일기 쓰기를 시도하기 전에는 글쓰기 숙제나 서술형의 문제를 만나면 한 참을 고민했던 아들은 이제는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써내려간다. 그리고 맞춤법 이나 띄어쓰기, 글씨체에 신경 쓰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써보라고 했더니 다양하 고 재미난 표현과 상상들이 일기를 장식했다. 만약 맞춤법이나 글씨체 등을 일일 이 지적했다면 그것만 신경 쓰느라 일기의 내용에 충실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저 평범한 일기에 그쳤을 것이다. 일기쓰기에서 가장 고민이 되는 부분이 글감 찾기인데 이것이 아이들에게는 일 기쓰기를 어렵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아들도 일기 쓰는 시간의 반 이상을 글감 찾기에 고민하곤 했다. 일기쓰기에 걸림돌인 글감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아들과 함께 글감을 찾았다. 인터넷이나 신문 잡지, 그리고 학교생활에서 있었던 일을 나열해 놓고 그 중에서 아들의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정리하였다. 정리된 목 록은 일기장 앞 쪽에 붙여 두고 사용한 글감은 체크하도록 해서 글감에 대한 고민 을 해결하도록 했다. 아들도 자신이 좋아하는 글감을 정리해놓아서 인지 만족해하 며 일기쓰기에 시간을 줄여갔다. 2학년부터 시작한 일기쓰기에 다양한 형식이 추가되면서 아들은 시간이 갈수록 글쓰기에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학교에서 일기왕 이라는 상도 받고, 교내외 글짓기 대회나 자기주장 발표대회에도 출전해 상을 받아오곤 했다. 공동일기가 가져온 선물 아들에 대한 미안함을 덜어 보고자 시작했던 공동일기였지만 아들에게만 쓰라고 강요하기보다 본보기가 되어 자발적으로 글을 썼다. 그 결과 엄마의 존재감까지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내게는 학창 시절 한 때의 추억이었던 일기쓰기를 다시 시작하게 되어 좋았고, 아들을 이해하는 새로운 소통 의 도구와 일상에 대한 정리와 반성을 할 수 있는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되어 좋았다. 일기를 함께 쓰면서 아들도 엄마가 언제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고 일기를 함께 쓸 만큼 자신을 믿어주고 있으며, 엄마도 힘든 때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자 신이 궁금한 게 있으면 일기에 엄마의 생각을 묻기도 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잘 몰 랐지만 엄마의 일기를 읽어보면서 새로운 표현의 방식이나 글을 정리하는 방법,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등을 익히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책 나와 함께 쓴 아들의 일기장은 1년에 5~7권 정도로 다른 아이들보다 많았다. 다 쓴 일기장을 책장 한 쪽에 꽂아 두었는데 책장을 정리할 때 알지 못하는 사이 없어 질 수도 있고, 매일 매일 소중했던 순간들이 그대로 묻혀 질 것 같았다. 그래서 아들과 나의 소중한 추억이 있는 기록을 가치 있게 더 오래 보존할 수 있 도록 일기장을 모아 제본을 해서 책으로 만들었다. 2학년 때 처음으로 만들어 준 일기문집은 아들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쓴 책이자,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책이었 다. 세상에서 유일한 자신만의 책이라는 것에 대해 아들도 뿌듯해했다. 아들과의 190 하루 15분의 투자가 가져온 수백 배의 행복 191

공동일기는 6학년 까지 계속되었고, 학년이 바뀔 때마다 아들은 세상에서 하나 밖 에 없는 자신만의 책을 갖게 되었다. 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열려진 엄마가 되기 위한 내 스타일의 교육법이었다. 그 리고 그 시도는 나와 아들 모두에 기쁨을 주는 결과로 나타났다. 아이들은 엄마가 관심을 가지는 만큼 성장하기에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부 족한 일하는 엄마들은 늘 미안함과 고민을 안고 산다. 다른 엄마들은 아이의 모든 교과 과정을 꿰고 부족함을 바로바로 해결해 줄 수 있는데 일하는 엄마는 그럴 수 없어 혹 내 아이만 뒤처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함도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 고민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하루 15분, 그러나 꾸준히 지속해갔던 쪽지편 지와 공동일기를 썼던 시간들이 나와 아들을 변하게 했다. 공동일기와 쪽지편지 속에 녹아든 솔직함과 서로를 향한 사랑은 멀었던 우리 가족을 가까이 끌어주는 자석이 되었고, 아들에게는 자신감과 글쓰기 실력까지 덤으로 얻게 했다. 무심코 지나쳐 보낼 수 있는 하루 15분, 그러나 그 짧고도 꾸준한 투자가 우리 가족에게는 수백 배의 행복으로 다가왔다. 하루 15분의 힘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쓰기 시작했던 색종이 쪽지편지와 다시 일을 시작 할 때 썼던 공동일기는 나와 아들이 서로의 생활을 살피고, 격려하며, 갈등을 극복 해가는 소통의 장이었다. 엄마에게 받은 쪽지편지와 자신만이 간직한 세상에 유일 한 일기책을 가장 귀한 보물로 여기고 있는 아들은 나중에 자신의 아이에게도 쪽 지편지와 일기를 써주고 싶다고 했다. 참으로 보람 있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또, 세대를 넘어서서 교육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여 기뻤다. 혹자들은 일기가 개인의 비밀스러운 기록이라 비록 선생님이나 엄마라도 아이 의 일기를 읽는 것은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도 비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가 시도했던 공동일기는 아이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알아내려는 것이 아니라 아 이와 엄마가 서로의 생각을 맞추어가는 소통의 장을 마련해보려는 것이었다. 아이 를 위해서 희생만 하는 엄마가 아닌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한 엄마, 그럼에도 아들 192 하루 15분의 투자가 가져온 수백 배의 행복 193

자녀교육 수범사례 멋진 아들의 비밀 통장 김정희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신봉동 XXXXXXXXXXXXXXXXX 그저 매일매일 살아가는 모습을 저축하는 마음으로 적어본 것 뿐인데 이렇게 상을 받고 소감까지 덧붙이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이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 로 살아갈 아이의 미래를 한층 희망적으로 그려보게 되었습니다. 아이에게 보다 당당한 엄마가 되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생활하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만남 사람들마다 살아온 각자의 자취들은 의미있고 존중받을 만한 것이겠지요. 수기 모 집 공고를 보면서 지금의 내 삶이 누군가 고통 받고 있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위 안이 되고 길잡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작은 염원을 담아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흔히들 어떤 고통이 있을 때 사람들은 신은 고통을 이길 수 있는 만큼만 준다 거나, 신은 나를 선택하여 이런 고통을 겪게 한다 거나 하는 말들로 위로를 합니 다. 하지만 한 가정에 장애아가 태어난다는 것은 내가 고통을 견딜 준비도 하지 않 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내 손에 나도 모르게 받아 쥐게 된 뜨거운 감자처럼, 아니 쥐고 있으면 언젠가 식어서 맛난 음식으로 내게 돌아올 감자가 아닌, 영원한 숙제 한보따리를 덥석 가슴에 안게 되는 것이라고 표현해도 될지. 그렇게 내 아이는 해결되지 않을 숙제같이 내게로 왔습니다. 내 아이의 어디가 예쁘다거나 무엇을 잘한다거나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서 두를 꺼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평범하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받은 삶인지 말하 고 싶어서 그러지요. 지금은 자폐아, 자폐스펙트럼 등으로 불리는 내 아들이 태어났을 때 저는 그저 내 자식이 별난 놈이거니, 또 아이들 마다 개인차가 있어 좀 늦을 수도 있으리 라고 생각했습니다. 긍정적인 눈으로 시간을 두고 기다리면 될 것이니 너무 서두 르지 말자 는 마음으로 단순히 좀 늦으려니 했건만, 전문서적을 뒤적이는 가운데 하나씩 둘씩 자폐 체크리스트를 채워 나가던 그 순간순간들이 얼마나 끔찍한지 경 험하지 않은 부모들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자식의 장애를 인정해야 하는 순간까지, 아니 인정을 해야만 하지만 인정하면 나의 알지 못하는 잘못을 인정하는 것 같기에, 어디서 매듭을 풀기만 하면 해결될 것 같이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시간을 보내면서 많은 생각을 했고 결론을 내렸습 니다. 내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노력하면 적어도 오 늘 보다 나은 내일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끝나지 않을 숙제를 하기 위해 마주 앉았습니다. 하루하루를 저축하는 마음으로. 장애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의 하루하루는 아침에 눈떠서 자는 순간까지, 아니 잠 들어 있는 순간까지 매 순간 아이의 장애가 나의 장애처럼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그리고 가족의 생활에 미치는 여러 가지 문제들 때문에 많이 힘이 듭니다. 나 역시 그런 순간들을 보냈고 지금도 풀리지 않는 실타래처럼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지 만 그런 어렵고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여기에 풀지는 않으렵니다. 잘못하면 넋두리 같이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떻게 아이와 함께 산적한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 나갔는지 이 제는 조금은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발달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 닙니다. 설혹 눈에 보일 정도로 확연히 달라졌다 생각되더라도 그 기간동안 발전 한 모습처럼 그 후에도 그렇게 쑥쑥 자라 정상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루하루 눈 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저축하는 마음으로 언젠가는 아이에게 큰 자산이 되리라 생각하고 교육을 하였습니다. 말[ 言 ]에 두께가 있다면 아마도 하늘까지 닿았을 것입니다. 다른 아이들은 한두 번 가르치면, 아니 그냥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들도 학습 이라는 틀을 거치지 않 으면 안 되는 현실을 거쳐 지금은 다른 정상인들과 어울려 그들을 지도하고 그들 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모습으로 성장한 것을 보면서 지난날 저축하는 심정 으로 다가섰던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싶습니다. 196 멋진 아들의 비밀 통장 197

거듭되는 좌절 속에 희망을 보다 힘든 산고를 겪으며 태어난 아이가 호흡곤란을 겪고 있는데, 병원에서는 인큐베이 터의 산소가 준비되지 않았다며 방치를 했고 한참 후 큰 병원에 이송해 치료를 했 습니다. 저는 퇴원하면서 아이를 품에 안고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이 아이가 가지 게 될 후유증은 없느냐고, 황달 수치가 높았는데 괜찮은 거냐고. 의사는 괜찮다고 했습니다. 검증되지 않는 의사의 실수가 평생을 감당키 어려운 일들을 낳으리라고 는 그때는, 어린 엄마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한시도 자지 않는 아이, 화장실도 업고 가야 하는 아이, 엄마 눈을 한번도 바라 보지 않는 아이. 말을 배우면서는 테이프를 거꾸로 작동시키듯 엄마의 말을 거꾸 로 따라 내뱉는 아이, 걸으면서는 목적도 없이 안전을 가리지 않고 어디론가 모터 가 달린 아이처럼 사라지는 아이. 엄마라는 이름으로 감당하기에는 내게는 너무 벅찬 아들이었고 그때의 내 모습 은 지금보다 더 나이든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아이가 왜 이러냐는 주변의 시 선을 감당하기 어려워 집에서만 지내는 시간도 많았습니다. 동네에서는 동생이 마 음에 들지 않는다고 큰 아이 조차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지 못하는 일까지 생겼습 니다. 사소한 부탁이 있어 이웃집 문을 두들겼다가 문앞에서 거절 당한 일도 있었 구요. 그런 일들을 어떻게 다 적겠습니까? 다른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평범한 모습 으로 어울려 노는데 내 아이만 거지꼴이 되어 아파트 계단을 기어 올라 꼭대기에 올라가 있어 눈깜짝할 시간에 아이를 놓치면 입구 하나 하나 다 걸어서 확인해야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올바른 사회성, 대인관계를 위하여 가족 관계가 우선인데 이 아이는 엄마를 보 고도 엄마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정말 자연스럽게 가르치지 않아도 나오는 엄마라 는 말을 간절한 소원으로 애원하듯 말해봅니다. 내 눈을 바라보며 엄마라고 불러 달라고. 내 품에 안겨있지 않고 그저 어디론가 달려가려 가만있지 못하고 이리 저 리 목적 없이 과잉 행동하는 아이를 누가 힘이 센지 힘겨루기 하는 모습으로 있는 힘을 다해 붙잡으며 내가 엄마라고 외쳐봅니다. 단 한번만 엄마 라는 소리 들어 보고 싶은 소원에 그 한마디를 듣기 위해 많은 교육과 아이디어를 짜내어야 했고 엄마라는 단어로 가족을 부르고 다른 사람을 인식하고 많은 단어를 알게 되는 계 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상대를 인식하니 모든 게 다 된거 같아 유치원에 보내니 며칠만에 다른 곳 을 알아 보라는 전화를 받는 일이 계속되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멀쩡한 내 아이를 장애아로 만든다고 계속되는 부부싸움을 해 가면서 한번만 병원 진단을 받아 보자 고 남편을 설득하여 서울대 병원에서 자폐성향을 가진 ADHD로 진단을 받아 가 족의 지원을 얻어 내었습니다. 남자라 표현하지 않았지만 남편의 마음도 아마 무 너져 내렸을겁니다. 그렇게 조기 교육실을 일년 동안 다니다가 다시 통합교육을 해 보자는 생각에 일반 유치원에 다시 입학시켰다가 한달도 못되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내가 이 아이의 선생이 되지 않으면 이 아이는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 는 절박함으로 특수교육을 선택했고 한편으로는 입학시기가 지난 시점이지만 특 수학교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청강이라도 받아 달라고 사정사정하여 지금은 제 근 무지가 된 특수학교 유치부에 보내게 되었습니다. 오전에는 특수교육을 받고 오후 에는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는 생활을 일년 하고 통합교육을 위해 오후에 다니던 어린이집에 입학을 시켰다가 다시 쫓겨나고 다른곳에 입학하는 생활을 무수히 반 복했습니다. 198 멋진 아들의 비밀 통장 199

지나가던 초등학생들이 저더러 아저씨라고 부를 정도로 저는 몰골이 말이 아니 었습니다. 하루는 이렇게 뒷바라지를 했는데 어떻게 너는 이렇게 말썽을 부려 또 쫓겨 나냐 며 다리를 뻗고 울었습니다. 내 서러움에 목놓아 울고 있는데 아이가 다 가왔습니다. 아이를 붙잡고 기도 하는 마음으로 혼잣말을 했습니다. 모든 곳에서 쫓겨 나고 어디에서도 못가르치겠다 하는데 이번에 여기도 너 안되겠다고 한다. 이제 너는 어디에 다닐거며 왜 이렇게 엄마를 힘들게 하니? 전문용어로 감정이입이라고 하지요. 내 마음이 아이에게 전해졌는지 정말 기적 과 같이 아이가 말했습니다. 이제 선생님 말 잘 들을께요. 울지마. 어디다 그런 말을 저축하고 있었던지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그래, 다시 한번 일어서자. 이제 시작이야. 라며 각오를 새롭게 할 수 있었고 어려운 상황의 연속이었지만 아이한 테 맞는 유치원을 찾아 졸업을 시키고 초등학교에 입학도 시켰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는 의무교육 이라며 편하게 다닐 수는 없었습니다. 매일같이 바늘 방석에 앉아서 전화벨이 울리면 놀라는 그런 생활이었습니다. 남 다른 아이 를 배려하시는 담임선생님을 너무도 힘들게 해서 기진맥진시키는 일들이 비일비 재 했습니다. 죄인심정으로 선생님과 면담하는 일이 잦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1학 년 담임 선생님께서 참 수고 많으셨겠다 싶습니다. 그 고비를 잘 넘겨 부정적인 측 면보다 긍정적인 면이 담임들에게 인식되면서 아이의 나머지 학년 동안은 어려운 상황이 점차 줄어 들었으니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 드립니다. 아이의 그런 행 동이 왜 나오는지에 대한 설명과 집에서의 생활을 그때 그때마다 편지와 알림장을 통해서 의견을 나누었던것이 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를 대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고 생각합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는 봉사상을 받았습니다. 선생님들이 추천하는 봉사상이 아닌 급우들이 학급회의를 거쳐 수상자를 결정하는 상이라 더 의미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식에서는 일반 아이들도 단상에 올라가 상을 받는 일은 어려운 일인 데 석일이는 단상에 올라가 상을 받았습니다. 그것만 해도 지난 어려운 시절에 대 한 보상이라 할 수 있었는데 교장선생님께서다른 졸업식에서는 볼 수 없는 잊지 못할 졸업식장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식순의 중간에, 식순에도 없는데 걸어 나오 셔서 석일이를 일으켜 세우시고 격려의 말씀과 덕담을 해 주시며 이렇게까지 키워 주신 부모님께 박수를 보내달라고 말씀하셔셔 그 많은 학생과 학부모에게 뜨거운 박수를 받은 것입니다. 감사의 인사를 하러 들어간 교무실에서의 선생님들의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축 하와 격려의 말씀들. 거듭되는 좌절과 절망속에서 매번 희망을 찾으려 애쓰지만 학교가 아닌 사회로 발을 내딛는 시점에서 불안한 엄마 마음에 또 한번 희망의 불 이 일어 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학교 현장에서 많은 아이들을 지도하면서 미꾸라지 한 마리가 교실을 흐린다 천덕꾸러기로 여기지 않고 아이들에게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손수 보여 주신 선생님들.. 학교와 가정에서의 교육이 일관성 있도록 부탁 드린 것을 선생님들께서 간섭이라 생각지 않고 잘 받아 주신 것이 오늘날의 석일 이를 만든 것입니다. 이런 분들을 만난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고 석일이가 복 많은 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기를 사회성이 좋다, 혹은 사회성이 있다 라고 표현할 때의 사회성은 사회적으로 인 정받을 수 있는 사회성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조건 사람을 따르고 무조건 상대에게 안기는 사회성이 아니라 사회의 통념상 한 사람의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성 말입니다. 그래서 위험한 것, 안전한 것, 상대에 맞는 적절한 언어, 장 소에 알맞은 예절.. 어느 것 하나도 소홀 할 수 없어 하나하나 경우의 수에 따라 계 획을 세우고 프로그램화 하여 지도하였습니다. 그 많은 것들을 지도할 장소로 에버랜드를 택하였습니다. 아마 에버랜드에서 우 수고객 상을 준다면 우리가 받아야 한다고 우스개 소리도 했습니다. 연간회원권을 구입하여 그곳에서 지도하고 싶은 사회성은 대부분 지도 할 수 있었다 해도 과언 이 아닐 것입니다. 그곳에서 떼를 쓰고 뒹군다고 줄서지 않고 먼저 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먹어야 되는 장소에서 먹어야 하고 대소변도 화장실 아니면 볼 일을 못 보 200 멋진 아들의 비밀 통장 201

게 하며 손을 놓고 다니면 부모를 잃어 버린다는 것도 그곳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집에서 가르칠 수 있는 사회성을 온전히 지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학습 시킨다는 것이 말로서 표현하면 간단한 일이겠지만 실상 나들이 한번 하려면 전쟁 을 치루는 기분이었습니다. 목적도 없이 도망가듯 사라지는 아이를 두고 더불어 살아가야 함을 가르치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지만 여기 저기 아이의 사회성에 도움 이 될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다니면서 하나라도 더 얻게 해주려고 하는 것이 부모 의 심정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걸음 더 사회 속으로 소위 인지학습 이란 것을 하기 위하여 밤새도록 자료를 만들어 그 다음날 졸린 눈 을 비비며 아이에게 제시합니다. 나는 밤새 고민 해가며 알록달록 주의 집중에 필 요하다 생각하고 만든 자료를 내 아이는 쳐다보지도 않고 흥미 없어 합니다. 지금 은 인터넷에서 온갖 학습자료를 다운받고 예쁜 그림과 장애 관련 도움사이트도 많 지만 그때만 해도 인터넷은 물론 컴퓨터가 있는 집이 귀한 시절이었습니다. 스케치 북에 그림을 그리고 줄긋기 자료를 만들어 제시하기도 하고 같은 그림 찾기도 하 고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보며 기초 학습이란 것을 지도 하려 해도 내 재주가 부족 한지 아이는 딴 짓만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센터나 학습 도우미를 찾아 학습을 시키기도 했지만 저는 아이와 함께 있는 사람은 나이니까 내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교육대학원 특수교육과 에 등록을 했습니다. 다른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도 아이에게는 공부다 라고 생각 하고 부산 외할머니께 낮에는 맡기고 대구에 첫차를 타고 가서 저녁에는 부산으로 다시 통학을 하는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특수교육에 대한 많은 이해와 도움을 받 고 내 아이에 대한 확신으로 다시 시작했습니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그 시 행착오들이 밑거름이 되어 대학원을 마치면서 특수교사 자격과 오늘의 직업도 가 지게 되었습니다. 장애아동을 가진 부모들이 학교를 선택하는 일도 참 어렵습니다. 어떤 곳이 내 아이가 소외받지 않고 지낼 수 있는 곳인지 판단하기 어려워 주변의 학교를 탐색 하다가 결국 형이 다니는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항상 어떤 선택을 할 때는 많이 고 민이 되지만 형이 받을 심리적 부담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저는 큰 아이를 믿기에 그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믿는 만큼 자라주리라는 생각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형제가 같이 다니게 했습니다. 그만큼 큰 아이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 습니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형제 사이에 한 아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나머지 아 이에게 피해를 준다는 인식이 생긴다면 그 둘이 부적절한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부끄러운 동생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알 리고도 싶었습니다. 학교 폭력이나 왕따도 걱정되었습니다. 뭔가 다른 친구들 보다 잘 하는 것이 하 나쯤은 있어야 아이들도 무시하지 않겠다 라는 생각과 무엇이든 집중해서 할 수 있는 활동이 있어야겠다싶어서 중학교 때는 칼라믹스를 가르쳤습니다. 조물조물 이것저것 만들어서 작품을 하나씩 만들어 가면서 성취감도 느끼고 학교 축제 때 그런 작품도 내면서 자신도 뭔가 잘 하는 게 있다는 자신감을 느끼는 발판이 되게 하였고 중학교 끝날 무렵부터 인라인과 유화를 시작했습니다. 예술가들이 보면 작품성이 떨어진다 생각될 지라도 그림은 아이특성상 결과가 빨리 완성되는 기법을 택했습니다. 진행되는 과정을 느끼고 그 결과를 인지 할 수 있는방법의 기법을 사용하여 풍경을 그려내는 방식을 택하였고 지금은 나름대로 창의 성을 살리고 다양한 색을 사용하여 그리고 싶은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 가지 운동 중에서 인라인을 시작했는데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운동은 상대적이어서 실력이 받쳐 주지 않으면 그 그룹에 들어가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번번이 잘못 받아 낸다면 누가 맞은편에서 공을 던져 주겠습니까. 그 리고 생각해 보니 이 아이는 운전면허로 차를 운전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아이에 게 차 대신 바퀴를 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인라인은 다른 운동에 비해 균형 감각 이나 속도감과 순간적인 판단이 아주 중요한 운동입니다. 또한 수영 등의 스포츠 202 멋진 아들의 비밀 통장 203

는 레인을 끝까지 혼자서 달려야 하지만 인라인은 다른 사람과 함께 서서히 어우 러질 수 있는 스포츠라 생각했고, 세상을 혼자 살아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스 스로 상황 판단을 해서 움직여야 하는 운동 중에서는 인라인이 적당하다고 판단했 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여가활동까지도 지도해주지 않으면 스스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제일 어려운 부분이 여가활동이라는 말도 있듯이 뭔가 이 아이에게 맞는 여가활동을 찾기 위해서 그렇게 인라인을 시작하였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처음 맞는 방학동안 인라인을 타고 전국 일주를 했습니다. 뭔가 해낼 수 있다, 끝까지 해냈다라는 자신감을 심어 주고 싶기도 했지만 많은 분 들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어떻게 시작했겠습니까? 더운 여름 힘든 일정을 소화 해 내면서 일정의 끝에는 예기치 못한 도로의 사정으로 석일이가 다쳐 모두가 포기해 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시작했는데 끝까지 해야죠 라는 말로서 오히려 대원들을 일으켜 세운 아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KBS 사랑의 가족 에도 출연을 하여 석일이에게는 힘든 일정에 대한 보상과 좋은 추억이 되었습니다. 또한 인라인 마라톤이 열리는 곳에는 전국 어디든 다녔습니다. 기록의 단축도 있지만 인라인을 타면서 다른 사람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해서 즐길 수 있다는 것 을 느꼈으면 했습니다. 기록이 조금씩 당겨지기도 하고 또 생각지 못한 일로 부상 을 입기도 하지만 그 또한 자신을 지켜 가기 위한 학습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전국 의 경치를 즐기면서 인라인이라는 스포츠를 즐길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뭐든 쉽게 배우는 것이 없는 아이라 인라인을 지금처럼 타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과 노 력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여가생활의 하나로 시작한 인라인으로 지금의 대학에 가고 지난 5월에는 대한 롤러 연맹의 강사 자격을 땄습니다. 일반인들도 어렵다는 자격증을 쥐기 위해서 졸린 눈을 비비며 예상문제를 뽑고 외우고 시험문제를 만들 어 예상답안을 적어보고 실기도 다리가 부을 정도로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지금은 열심히 강습을 위한 강습 을 받으면서 어린이나 다른 어른들에게 인라 인을 지도하고 있고, 대학생활 중에서 장애인이나 가정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 한 수영, 에어로빅 등의 체육수업을 자원봉사로 참여하여 지도하기도 합니다. 또 이런 아이의 운동신경으로는 동계스포츠 중에서 보드를 배우기 어렵다고 처 음부터 고개를 흔드는 분들의 염려를 안은채 시작한 보드로 한국 스페셜올림픽 위 원회에서 주관하는 대회에 참가하여 2009년 미국 아이다호에서 열리는 세계 스페 셜 올림픽 동계대회에 한국 보드 대표로 참가 하게 되었습니다. 인라인으로도 며 칠전 선발전을 거쳤습니다. 1,000미터와 계주에서 1등을 했으니 인라인으로도 2011년 스페셜 올림픽 하계대회에 참가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해 봅니다. 지적 장애인으로써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고 더 나아가 다른 일반인을 지도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을 터인데 즐거운 표정으로 사회 속에 더불어 지내는 모습을 보 면 부모가 어떤 마음자세로 임하느냐에 따라 아이의 미래가 많이 좌우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은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은 스스로 생활을 위해 자립해간다는 뜻이 아닐까요. 많은 장애아 부모들은 자녀가 성인기를 맞이하는 시점에서야 무엇을 준비 해 주 어야하는지 걱정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즈음은 자녀의 권리를 대신 찾아 주 기 위해서 동분서주 하는 부모님들도 많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자신의 권리나 인 권을 스스로 주장할 능력이 부족한 아이들이라 우리 부모들이 해야 할 일, 준비해 야 할 일도 많습니다만 또 하나 부모들이 생각을 미리 해 두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자녀가 어릴때 어떤 사람이 되어 있으면 좋을지 미리 그림을 그려 보는 것입니다. 물론 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밑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자녀가 성인으로 전환하는 시점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생각해 두어야 좀 더 그 그림에 근접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단순히 음악에 천재적이라거나 수영을 잘하고, 마라톤을 잘 한다고 해서 우리가 영원히 아이들과 함께 달릴 수는 없기에 저는 아이가 스스로 자립하는 모습을 그 려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 다. 스스로 목적지를 향하여 판단하고 이동할 수 있는 능력, 경제와 관련하여 돈을 204 멋진 아들의 비밀 통장 205

적절하게 배분하여 쓰고 저축, 인출할 수 있는 능력, 깨끗한 몸차림을 위한 능력, 타인을 배려할 수 있는 마음, 공공질서를 지킬 수 있는 능력, 여가생활을 적절히 유지할 수 있는 능력, 예절을 지킬 수 있는 능력 등등 너무나 많은 것들이 산재 해 있고 아직도 배우고 가르쳐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이 모든 것들이 직업생활과도 연계되어 있기에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고 그 직업을 유지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 함을 이 자리 를 빌어 다시 한 번 다짐해 봅니다. 찬가지겠죠. 하지만 이 아이를 통해 내 자신을 계발하여 특수교사가 되어 내 아이 에게 못해주었던 것들을 전문가로서 다른 아이에게 적용할 수 있게 되었고, 내 아 이 역시 한 사회인으로 성장해 가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게 했으니 그 얼마나 멋 진 아들입니까? 아직도 내 아들의 비밀 통장에 저는 매일 매일 저축하고 있습니 다. 그래서 내 아들은 부자이고 그런 멋진 아들을 둔 저 역시 행복한 사람입니다. 신께서 해결되기 어려운 숙제 하나를 내게 안겨 주었다는 말로 글의 서두를 시 작하였지만 아무리 많은 숙제라도 하나씩 해결해 나가다 보면, 어제 보다는 나은 내일이 모여서 다른 아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석일이만의 A+짜리 리포트가 완 성되리라 믿습니다. 내가 긍정적인 사고로 믿음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면 내 눈앞에 바로 결과가 나타나진 않지만 멋진 내 아들의 비밀통장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저축만큼 언젠가 는 내게 소중한 작품으로 남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는 내게 힘들고 풀기 어려운 가슴 앓이를 많이도 하게 하였고 앞으로도 마 206 멋진 아들의 비밀 통장 207

자녀교육 수범사례 희망을 찾아가는 우리 가족 황현숙 경상남도고성시 서외동 XXXXXXXXXXXXXXXX 매년 가을 바람이 불면 마음은 이미 한겨울이 되어 얼어붙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가을은, 이 자리를 빌려 가슴 속 빙하 같은 이야기들을 펼쳐 놓게 해주고 수상의 기쁨까지 맛보게 해주신 여러분들 덕분에 단풍잎을 보며 아름답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지극한 사랑으로 보살펴 주신 교무부장 선생님 께 이 영광을 드립니다.

엄마! 고통도 그다지 나쁜 것 같지는 않아! 스스로 이렇게 이루고 보니 내가 뿌듯 하고 대견스러워. 이제 우리에겐 올라가는 일만 남았겠지? 휴대폰 너머로 들려 오는 큰딸의 목소리에 눈물이 묻어 있었지만 스스로의 대견 스러움에 기뻐하는 함박 웃음도 느껴진다.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온지 6년만에 맛보는 기쁨이 가슴을 벅차게 한다. 멋모르고 했던 결혼의 함정 부농의 가정에 맏딸로 태어나 부러울 것 없이 자라다 대학시절에 남편을 만나 결 혼을 했다.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가 있었지만 결혼이 뭔지, 가정이 뭔지도 모른 채 가까이서 나를 챙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감행한 결혼에는 깊은 함 정이 숨어 있었다. 아편중독이던 시아버지와 떠돌이 생활을 하던 남편은 거지라 놀림 받는 것이 싫어 싸움을 배웠고, 머무르는 동네에 정착하기 위해 크고 작은 싸 움을 일삼았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시자 못된 일만 일삼던 남편을 누군가 교회로 인도했고 나중엔 신학교까지 가게 되었다. 신학교 졸업반 때 남편을 만나 세심하게 신경을 써주는 면이 마음에 들어 부모 님의 완강한 반대도 불구하고 눈물의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날 남편은 자기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친정부모님에 대한 반발로 웨딩드레스를 입지 말라고 했는데 무시하고 입었다가 식장에서 빰을 여러차례 맞은 것을 시작으로 끝없는 폭력이 시 작되었다. 그러면서 큰아이가 태어났고 아이가 엉금엉금 기어다닐 때쯤 아무거나 함부로 주워먹지 않게끔 교육을 시킨다며 저만치 음식물을 놓아 두고 기어가면 때 리는 것을 반복했다. 대 여섯살때는 스스로 문제 푸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며 초등 학교 수학교과서를 가져다 놓고 풀지 못하면 사정없이 때렸다. 그래도 풀지 못하 면 물이 가득한 물통 속에 머리를 빠뜨렸다가 꺼내고 다시 때려 온 몸이 시꺼멓게 변할 정도가 되기를 반복했다. 초등학교 입학 통지서가 나오자 학교를 가게 되면 아빠 말을 거역하기 때문에 갈 필요가 없다며 보내지 않았고 그 사이에 동생들이 태어나며 집안 분위기는 더 험악해져 갔다. 기다리던 아들이 아니라고 갓 태어난 막내를 장롱에 넣고 문을 닫 았다가 울다가 지친 아기가 잠들어서야 꺼내 오곤 했다. 그 무렵 남편은 집에서 교 회를 한다면서 아이들을 종교생활에 매이게 했는데 오후 4시부터 자정까지 기도 와 찬송을 시키고 새벽 4시에 다시 기상을 해 새벽기도를 시작하여 아침 여덟시가 되어서야 마쳤다. 큰딸은 학교를 보내주지 않자 졸린 눈을 비비며 낮에 주어진 몇 시간 동안 검정 고시 준비를 했는데 책 한권 사지 않고 학원에 가보지도 못한 채 혼자서 공부를 해 야 했다. 모르는 것은 기도하면 알게 된다면서 엄마인 내가 옆에 가지도 못하게 했 다. 주워온 헌책으로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어찌어찌 합격을 했지만 고등학교 과정 은 혼자 하기에는 정말 어렵다며 너무 힘들어 했다. 결국, 한 번 응시 할 때마다 한 과목씩 합격을 하여 삼년에 걸쳐 무사히 통과를 하였다. 시험을 잘 치루지 못할 때 마다 끔찍한 폭력은 이어졌는데 너무 많이 맞은 날은 자기 몸이 공중에 붕 떠서 맞 고 있는 또 다른 자기를 보고 있다고 했다. 누구 하나가 잘못을 하면 모두가 아빠의 폭력에 시달려야 했으며 그럴수록 종교 의식은 한층 더 심해졌다. 210 희망을 찾아가는 우리 가족 211

힘겹게 얻은 자유였건만 이십년이 넘은 남편의 만성적인 폭력에 시달려 살 소망이 없던 어느 날 나는, 병원 에서 암이란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하게 되었다. 워낙 몸이 약한 상태에서 대 수술을 받았고 경과도 좋지 않아 죽을 날만 기다릴 때 이대로 죽는다면 아이들이 너무 불 쌍했고 미안했다. 학교에 한 번 가보지도 못하고 사람들과 왕래가 전혀 없었으며 집에는 TV나 컴퓨터도 없어 사회생활은 전무한데, 엄마가 죽고 나면 아이들은 세 상을 살아 갈 힘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죽기 전에 세상에서 더불어 살아가게 할려고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 날, 수술 부위에 진물이 나는 몸으로 세 딸의 손을 잡고 집을 나왔다. 아이들은 어 리고 돈은 없고, 아픈 몸을 이끌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무데도 없어 여기저기 헤매이 다 정착한 곳이 어느 시골이었다. 큰아이 열 여덟살, 둘째 아홉 살, 셋째 일곱 살을 데리고 돼지우리를 개조한 허름한 방을한칸얻은후, 사람들이 잠든 깊은 밤에야 남이 버린 식기들을 주워와 살림을 시작했다. 신문지로 밥상을 삼고 라면을 끓어 옹기종기 둘러 앉아 한 젓가락씩 먹는 맛은 자유의 기쁨과 어우러져 일품이었다. 며칠 후 둘째와 셋째 학교 입학을 알아보기 위해 학교를 찾아 갔으나 입학을 시 켜 줄 수 없다고 했다. 이전에 학교에 다닌 적이 없고 주소지 이전도 되지 않아 불 가능하다고 했는데 남편이 찾아 올 수도 있어 주소지 이전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 이다. 수술을 하여 걷지도 못해 엉금엉금 기다시피 한 상태로 찾아 갔는데 입학이 불가능하다니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이대로 둘 수가 없어 고아원에 보내서라도 학교 교육을 받게 하고 싶어 문의를 했더니 부모가 살아 있어 안 된다는 답변이었 다. 다시 학교에 가서 사정을 하여 청강생으로 입학 허가를 받고 아이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책임을 지겠노라고 각서를 쓰고서야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분 홍 가방을 어깨에 매고 학교에 다녀 오겠습니다, 유치원에 다녀 오겠습니다 하 던 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소리로 들렸다. 우여곡절 끝에 둘째와 셋째가 학교 문턱을 넘었으니 이젠 큰딸이 해야 할 일을 찾아 주어야 했다. 하지만 시골에서 마땅히 할 일도 없고 돈도 없으니 무엇을 배우 러 도시까지 갈수가 없어 시간만 흘러갔다. 대 여섯달이 지나자 큰아이는 말이 없 어지고 우울해 하는 날이 많아지더니 엄마를 따라 나오면 미래를 위해서 뭔가 할 것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 소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자니 미칠 만큼 힘들다 면서 골방에 들어가 매일 울기 시작했다. 처음엔 작은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황소 같은 울음으로 서럽게 울면서 불도 켜지 않고 삼개월 정도를 울음으로 보냈 다. 아빠한테 맞았던 지나간 날들이 너무 억울하고, 대항하지 못했던 자신이 밉고, 자식들을 폭력에 방치한 엄마가 원망스럽다 했다. 나중엔 엄마가 아빠한테 쫓겨나 집을 나갔을 때 우리가 얼마나 많이 맞았고 얼마나 많이 굶었는 줄 아느냐며 악을 쓰며 울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이었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 었다. 그래. 울고 싶으면 실컷 울어라. 우린 울지도 못했잖아! 마음속으로 그 말 만 되뇌일 뿐이었다. 큰딸이 울음으로 과거를 정리하는 동안 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는 동생들은 날마 다 문제를 물고 왔다. 아빠집에서는 말보다 주먹이 먼저였기에 친구들이 저만치 서 다가오면 때리려는 줄 알고 맞지 않기 위해 먼저 때려 학교에서는 문제아였다. 한편으로 또래 생활을 해본 경험이 없어 학교에 적응할려니 힘들어서인지 입술을 계속 뜯고 있어 언제나 피가 고여 있었다. 그렇게 날이 지나 초여름이 되어가자 문 제가 생겼다. 계절이 바뀌니 아이들에게 입힐 옷이 없었다. 궁리 끝에 사람들이 잠 212 희망을 찾아가는 우리 가족 213

든 시간에 헌옷 수거함을 뒤져 옷을 가져와 손바느질로 큰 것은 줄어서, 작은 것은 넓힌 후 깨끗이 씻어 입혀 보냈다. 외향이라도 깨끗하면 놀림을 덜 받겠지 하는 생 각에서 그랬는데 그게 화근이 되었다. 어느 날 헌옷수거함을 뒤지는 것을 반 아이 들이 보고서 거지라 놀렸고, 우리 아이가 그날 입은 옷이 옆 짝이 입었다 버린 옷이 었다. 한 학년이 삼십 명이 채 안되는 시골 마을에 우리 아이에게 맞는 옷은 모두 같은 학교 친구들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거지가 아니고 열심히 살아가는 가족이라며 다독였지만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을려고 반항하기 시작했다. 생활 도 힘든데 아이들의 문제는 날마다 생겨 혼자 감당할 수 없기에 주위에 도움을 요 청했지만 시골이라 그것마져 여의치 않았다. 반복되는 희망과 절망 이러다 내가 먼저 지쳐 아이들을 포기할 것 같아 상담학 공부를 시작했다. 가정폭 력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위한 적절한 대화법, 분노처리하기, 자존 감 높이기 등을 배워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선생님들을 찾 아 다니며 의논을 드렸더니 둘째 담임선생님이 여러모로 도움을 주셔서 학적도 찾 을 수 있었고 사랑의 손으로 아이들을 어루만져 주셨다. 그리고는 커다란 분노와 슬픔 속에 있던 큰딸에게 간호학원을 가라고 했다. 노동부에서 일자리 지원 사업 으로 무료로 학원을 갈 수 있고 자격증만 취득하면 취업이 빨라 우리에게는 안성 맞춤이었다. 네 시간동안 차를 타고 학원을 오가며 열심히 다니던 큰 딸이 어느 날 아침에 일 어나질 못해 보니 몸에 땀이 범벅이였고 고통을 참느라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 몸 전체가 너무 아프고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며 해안가에 떠내려온 미역줄기 처럼 구부러져서 신음 소리만 내어 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으로 가라 했다. 대학병 원에서 MRI 검사 결과 돌발성 난청으로 시작된 것이 신경이 녹으면서 고통을 수 반했고 청력이 돌아올 확률이 낮다고 하였다. 집에 돌아와 큰 딸이 하는 말이 엄 마, 내 인생에는 왜 이리 되는 일이 없어요? 정말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 었는데 그래도 자격증은 취득해야 한다며 아픈 몸으로 학원을 다녀 마침내 간호조 무사 자격증을 취득을 하였다. 그런데 취업을 앞두고 걱정이 생겼다. 직장에 들어가면 의로보험에 가입하게 되 고 그러면 남편이 딸의 직장을 알고 찾아 올 수 있어 할 수 없이 의료보험이 없는 임시직으로 밖에 들어 갈 수가 없는데 이력서를 들고 병원마다 쫓아 다녀도 받아 주는 곳이 없었다. 스무 살의 짧은 삶을 살았지만 매순간 마다 절망뿐이던 큰딸이 또 다시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 들어 갔다. 그러나 어미란 이름은 용감했다. 무턱대고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병원에 찾아가 서 가정폭력피해자라 밝히고 주소지를 옮길 수 없는 것은 엄마의 잘못이지 아이의 잘못이 아니니 임시직으로 받아 달라고 사정하여 병원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그 병원은 노인병원이라 어르신들을 수시로 혈압을 체크해야 하는데 한쪽 귀가 들리 지 않으니 제대로 할 수가 없어 매일 꾸중을 듣고 왔다. 네가 비록 간호조무사이 지만 엄마는 의사가 된 것 보다 더 자랑스럽다. 집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엄마를 원 망하며 평생을 산다고 할지라도 엄마는 아무 할 말이 없는데 최선을 다하여 직장 까지 다니고 있잖니 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매일 되풀이 하였다. 병원 생활도 조금씩 익숙해질 무렵, 이젠 걸음을 걷지 못하고 앓아 누웠다. 전부 터 아빠한테 맞았던 엉덩이 부분이 아팠는데 지금은 허리까지 통증이 밀려 왔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디스크가 심해져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스무 살 여자 아이 가허리수술을하는것은안될것같아좀더기다려보자고했더니아예한쪽다 리를 질질 끌면서 다녔다. 아무리 하나님이라지만 여기서 더 고통을 주는 것은 양심도 없는 신이라며 울부 짖는 딸에게 현실을 이길 힘을 주는 것은 오매불망 고대하던 학교에 가는 것이라 여겨 00전문대학 야간 분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을 하게 했다.캠퍼스도 없이 보 건소 한 칸을 얻어 엄마또래 아줌마들과 같이 공부하는 곳이지만 처음 학교라는 곳에 가게 되었다. 평생 소원이던 학교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얼마 지나자 예기치 않 은 복병이 생겼다. 다른 사람에게 한 번도 배워 본적이 없어 교수님이 무슨 말을 하 214 희망을 찾아가는 우리 가족 215

는건지, 어떤 내용이 중요한지 레포트가 뭔지 전혀 모르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수업 마치고 오는 열두시까지 기다렸다가 레포트 쓰는 방법, 요점정리, 자기생각 표현하기 등을 가르쳐 주다 보면 딸은 새벽이 되어 새우잠을 잠깐 자고 병원에 출 근 하는 것을 반복하였다. 직장과 학업으로 너무 피곤해 입안이 헐어 음식을 먹지 못하면서도 오뚜기 처럼 다시 일어나 책과 씨름 하더니 차츰 레포트도 혼자 쓰고 2 학년이 되자 학점도 좋게 받아왔다. 큰딸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는 것 같아 정신을 차리고 동생들을 보니 심각할 정도로 문제아가 되어 있었다. 둘째는 그때가 4학년이었는데 학교에서 왕따였고 문방구에서 물건을 훔치고 있었으며 친구들의 생일잔치에도 우리 딸만 초대 받지 못하였다. 학교 선생님은 친구들과 너무 싸우고 다른 친구들이 없는 물건을 가져 와서 수업시간에도 만지작거려 수업을 할 수가 없으며 냄새가 나서 같이 앉을려고 하는 친구가 없다고 했다. 교문을 나서는데 걸음이 옮겨 지지 않았다. 무슨 삶이 이리도 고달플까? 우리 에게 끝은 있을까?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돌아왔지만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도 없 었다. 생각해 보니 생활이 너무 가난해 둘째에게 4학년이 되도록 용돈을 한 번도 주지 못 했던 것을 기억하고 그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면서 씻는 것을 일일이 챙겼 다. 아침마다 안아주며 학교에 잘 갔다 오라고 하고 저녁에는 둘째의 이야기를 들 어 주는 시간을 가졌다. 잘 하는 것이 있을 때 마다 갖고 싶어 하는 것을 하나씩 사 주며 관심을 기울이자 차츰 나아지기 시작했다. 학교 선생님도 적극적으로 도와주 셔서 5학년이 되어서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체육행사때에는 달리기 대표로도 나 가고 백일장에서 상도 받아오는 등 적극적인 학생으로 변해갔다. 한고개넘어또한고개 살아가는 것이 고개를 넘는 것 같다. 올망졸망한 세 딸의 손을 잡고 눈물의 고개를 수없이 넘으며 걸어 왔는데 쉴만한 내리막은 잠시였던 것 같다. 큰 딸이 사회복지과 졸업을 앞두고 반항을 시작했다. 병원일이 녹녹치 않아서 그런지 업무로 스트레스를 받더니 술을 먹기 시작했다. 인사불성이 되어 집앞에 널부러져 있기도 하고 어떤 날은 흙투성이 옷에 피가 엉겨 처참한 모습으로 들어 오기도 했다. 협박도 해 보고 애원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자기 자신도 마음을 주 체할 수 없어 술을 먹는 것이니 내버려 두라고 했다.방황하는 딸을 보며 그를 도와 줄 수 있는 길은 스스로가 존재 가치를 찾는 길이라 생각하고 간호대학을 보내기 로했다. 그런데 간호대학은 비율도 높은데다 딸은 검정고시 출신에 스스로 독학을 해서 점수가 낮아 그 점수로는 간호대학에 갈수가 없었다. 다시 수능을 보기에는 기본 바탕도 없지만 경제적인 문제도 만만치 않아 이리 저리 고민을 하던 중 어떤 대학 에서 대학졸업자 중 특채로 한명을 뽑는다고 했다. 그 학교는 우리 지방에서 간호 학과로는 가장 좋은 학교라 경쟁도 높은데 단 한명을 뽑는 곳에 큰딸이 합격한다 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 달 뒤 사십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합격 이 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사회복지사와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가지고 간호학과에 까지 갈 수 있으니 큰딸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라며 기뻐했다. 기쁨도 잠시 사백만원이나 되는 등록금에 기숙사 비용, 교재비와 잡비까지 계산 을 하니 우리로서는 천문학적인 숫자가 나왔다. 고심을 하다가 더 큰 장애물도 이 겨냈는데 반드시 길은 있으리라 믿고 하나씩 태산을 옮기기 시작했다. 기숙사와 식대를 해결하기 위해 학교 근처에 야간에만 근무 할 수 있는 병원이 있는지 알아 보기로 한 것이다. 하루 종일 공부만 하여도 다니기 어렵다는 간호학과를 우리는 야간 직장까지 다니기로 하고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다행히 지인의 도움으로 야간 응급실에 일할 수 있게 되었고 첫 학기 등록금은 주위의 분들이 십시일반으로 모 금을 해 주신 것에 부족한 부분은 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 호소해서 채워 넣었다. 엄마! 학교 건물이 엄청 좋아, 또래 친구들도 있고, 그렇게 하고 싶은 공부를 하 게 되어서 너무 좋고, 학교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되어서 좋은데 이게 꿈은 아니지? 살을 꼬집어 봐, 꿈인지 수업 마치고 정신없이 병원으로 달려가 자정까지 근무하고 매일 있는 쪽지 시험 216 희망을 찾아가는 우리 가족 217

에 레포트 작성하느라 세 시간 이상 자 본적이 없다며 힘들어 하지만 미래가 있다 는 것을 생각하면 힘이 난다고 했다.일학기를 마치고 성적이 나왔는데 260명중 68 등으로 30%안에 들었다면 뿌듯하다고 했다. 이제는 남은 숙제를 시작하려 한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폭력을 당한 막내가 불 안장애에 시달려 3학년 때까지 손가락을 빨고 유분증을 보이더니 4학년 된 지금은 다행히 학습장애만 남아 있다. 우리 앞에 있는 장애물을 하나씩 옮기다 보면 언젠 가는 평탄한 길이 나올 것을 믿으며 오늘도 최선을 다한다. 내일의 희망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선택하다 돌이켜 보면 우린 폭력의 휴유증과 지독한 가난, 질병, 그리고 사회관계장애를 가 지고 너무나 슬프고도 힘든 날들을 살아 왔다. 그러나 그 아픔에서 벗어나는 길은 열심히 배우고 익혀 멈추었던 성장을 진행시키는 것 밖에 없었다. 살아 있는 자만 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그 길을 우린 걷고 또 걸었다. 큰아이가 간호대학에 합격을 하고 낮에는 학교에 다면서 야간에 근무할 수 있는 병원을 찾을 때 모두가 무모한 짓이라 하였지만 내일의 희망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또 선택했다. 문제아로 인식 되던 둘째가 아슬한 줄타기를 지나 이젠 여느 아이들처럼 밝고 명랑하게 자랄 수 있는 것도 그 힘때문이 아니었을까? 아이들이 제 자리를 찾으면서 건강도 많이 좋 아져 직장인 상담실에서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나누어 주고 있다. 218 희망을 찾아가는 우리 가족 219

자녀교육 수범사례 꿈은 이루어졌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신진규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 XXXXXXXXXXXXXXXX 지난 해 2007교육현장체험수기 공모 자기능력개발 부문에서 입상한 고3 아들에게 약 속했습니다. 다음엔 이 아버지가 수기를 써서 응모하겠노라고. 전문계 고등학교에서 자 기주도적인 학습능력을 발휘하여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아들 덕분에 저는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직 교사이지만 이 글은 교사가 아닌 아버지의 입장에서 썼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대한민국의 학부모님들께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자 녀의 진로를 선택하시기 전에 꼭 한번쯤 읽어 보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공모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작년 아들의 수상에 이어 다시 한번 수상의 기쁨을 누리게 해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드 립니다. 그리고 아들을 잘 지도해주신 담임선생님들과 교과 담임선생님들 모두에게 영광 을 돌립니다.

전문계 고등학교의 입시철 이리공업고등학교 교무부장시절의 일이다. 입시철을 앞두고 익산지역 중학교 3학 년 담임선생님들에게 우리 학교를 홍보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전문계 고등학교 선생님 이란 이유로 상담조차도 꺼리는 모습에서 화가 치밀었다. 그 자리에서 뒤 돌아 가고 싶었지만 공직에 있는 신분이기 때문에 끝까지 감수해야 했다. 석차 연 명부의 끝에서부터 몇 명씩 묶어 형광펜으로 이리공고 접수 라고 쓰인 문구를 곁 눈질로 보면서 전문계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는 실력 없는 사람 취급을 받으 면서 돌아왔던 그 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절대로.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진학지도 를 하는 중학교 선생님들도 문제가 있었지만 사회 전반적인 인식 전환이 더 큰 문 제인 듯 하다. 아들의 고등학교 진로 선택 전북대학교 성형외과 교수님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고등 학교 선배님으로 내가 평소 존경하는 분이었고, 한국의 슈바이처 란 이름으로 언 론에 여러 차례 소개된 분이었다. 나의 아들을 전주공업고등학교에 입학시키자는 제안을 하였다. 일선 학교 교사는 아니었지만, 직접 중학교를 방문하여 우수한 인 재를 영입하려는 선배님의 모습에서 현직 교사로서 초라해지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공계 기피 현상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모교를 다시 살리기 위하여 동 문들 중 교수님이 최일선에 앞장 선 것이었다. 쉽게 결정할 수도 없었고, 내 맘대로 할 수도 없었다. 일주일 정도 가족에게 말 도 못하고 있을 때 또 전화가 왔다. 생각해 보았는가? 라는 질문에 아직 말도 못 꺼내 봤다는 말은 할 수 없어서 지금 아들과 상담 중이라고 하였다. 그날 밤 아들과 상담한 내용을 회상해 본다. 아빠 : 학교에서 담임선생님과 진학 상담 했니? 아들 : 아니요. 자립형 사립 고등학교는 안 간다고 했으니까 인문계 원서 써야지요. 아빠 : 전주공고에 갈 아이들 원서 썼어? 주로 어떤 아이들이 썼는데? 아들 : 지난주에 쓰는 것 같던데요. 관심 없어서 자세히는 모르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이 힘든 아이들이 주로 원서 쓴 것으로 알고 있어요. 아빠 : 아빠가 내년에 다시 전주공고로 전근 가는데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지원 했으면 좋겠다. 혹시 전주공고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니? 아들 : 아니요? 그런데 왜요 아빠? 아빠 : 우리나라가 발전하려면 우수한 인재들이 이공계로 발길을 돌려야 하는데 언 제 까지 추락할 것인지 걱정돼서 안타깝다. 선배의 말은 꺼내 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3일 후 아들에게서 전주공고에 한번 가 보고 싶다는 제안을 받았다. 나는 하교 후 아내와 아들 둘을 데리고 전주공고에 들 렸다. 마침 기숙사 학생들이 저녁 식사를 하려는 중이었다. 당시 사감선생님이 친 절하게 안내하여 맛있는 저녁을 얻어 먹고 야간 자습하는 학습실을 보여주었다. 생각보다 열심히 자습하는 모습을 보더니 아들은 3학년 학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였다. 30분정도 진지한 대화를 나눌 때 나는 아내와 둘째를 데리고 예전 에 내가 다니던 모교를 안내하면서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음날 아침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아들의 선언 이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저 전주공고에 진학하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이공계 발전을 위하고 저도 열심히 하여 우리나라 최고의 공학도가 되겠습니다. 중학교에서 공부를 제법 잘 했던 아들이 막상 공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캄캄하였다. 하지만 평상시 자기 주도적인 학습능력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잘할수있을것이라 판단되어 허락하였다. 또한 중학교 선생님들이 내게 준 편견을 없애게 해 주기 위 해 최선을 다해 지도하리라는 다짐을 하게 하였다. 아내는 처음에 많이 반대하였 지만 아들의 의사를 존중했다. 선배님! 아들이 전주공고에 원서를 쓰기로 했습니 다. 선배는 그날 전라북도 교육청의 출입기자들에게 그 사실을 말했다고 한다. 222 꿈은 이루어졌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223

원서 접수한 다음날 아침에 지방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인터넷 중앙 신문에까지 빠른 속도로 알려지면서 우리 가족은 힘든 나날을 보내야했다. 기자들 의 추측 기사가 힘들게 하는 데에 한 몫을 단단히 하였다.( 신경택군의 어머니는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웠다. 는 등.) 언론에서 앞 다투어 기사를 내는 것을 보고 한 심하다는 생각을 했다. 언론에서 공개된 내용의 제목은 학급에서 1, 2등을 다투 는 전북 전주 풍남중학교 3년 신경택 군이 인문고 대신 전주공업고교에 지원, 주위 의 관심을 끌고 있다. 당시 어느 사이트의 인기검색어 1위 를 1주일동안 차지했 을 정도로 이효리의 인기를 능가할 만한 화제가 되었다. 아들이 겪을 고통을 생각 해서 모든 인터뷰를 사양하고 3년 뒤 다시 찾아 와 달라고 부탁하였을 정도였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큰 화제가 될 줄 상상도 못했고 우리나라의 잘못된 편견을 느 낄 수 있었다. 60~70년대 우리나라가 잘 살게 한 밑거름이 바로 공업입국의 초석 이었던 것을 사람들은 다 있고 있었다. 내 아들의 순수한 마음 보다는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나는 다짐 또 다짐하면서 아들과 굳게 약속하였다. 인내하자. 말로 하지 말자. 3년 후 결과로 말하자. 입시 지옥이라는 인문계 보다는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율적으로 공부시키고 싶은 것이 나 의 마음이었다. 아들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순환 전보에 의해 이리공고에서 전주공 고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건축이 전공이었고, 아들은 부안의 새만금을 꼭 성공적 인 사업으로 이루어 보겠다며 토목과에 다녔기에 학교의 특성상 다른 학교 소속이 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서론이 길었다. 1년은 이리공고에서 원격으로 지켜봤고, 전주공고에서 같이 지 냈던 아들과의 2개 학년을 돌이켜 본다. 원한다는 장학 증서를 받았다고 첫 날 밤 기숙사에서 전화가 왔다. 일주일 후 아들 이 집에 와서 한 첫 말에서 나는 강한 자신감을 확인 할 수가 있었다.아들이 말한 내용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인문계 다니는 친구들 : 전주공고에 가서 일주일동안 몇 대 맞고 지냈냐? - 아들 : 전주공고는 깡패 학교가 아니다. 너희들이 몰라서 그런다. 공부는 나보다 못 하지만 다른 것은 다 잘한다. 착하고, 성실하고, 운동 잘하고, 의리 있고 공부 한 가지만 빼고 나보다 다 잘한다. 이에 나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 자만하지 마라. 네가 스스로 선택한 길인만큼 큰 뜻을 가지고 입학한 사실을 꼭 기억 해라. - 친구들의 장점만을 보도록 노력해라. - 기숙사에서 솔선수범해라. - 우물 안의 개구리는 절대 안 된다. - 인문계 학생들이 누릴 수 없는 것을 마음껏 누리면서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혀라. - 공부를 즐겨라. - 네가 학교에서 보내는 하루하루는 21세기를빛낼공학도의공적서가될것이다. 아들의 첫 말 입학식 때 신입생을 대표하여 입학 선서를 했다고 하였다. 장학 증서에 동창회장 과 교장선생님의 이름으로 3년간 기숙사비, 인터넷 수강비, 교재 구입비 등을 지 224 꿈은 이루어졌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225

달려가고 싶은 마음 나는 스스로 병을 얻고 있었다. 고등학교 교직생활 20년. 그 중 14년을 공업고등학 교에서만 근무했던 터라 얼마나 잘 알겠는가? 내 수업시간에 전주공고의 토목과 학생들의 수업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제일 키 큰 학생이 앞자리에 앉아있다. 다른 학생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월등히 앞서 있는 수학 능력과 기초 학력 수준 등을 생 각 할 때 교과 담임이 겪어야 할 어려움과 학생이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마음이 답답하였다. 학교 현장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칫 큰 병을 얻을 것 같아서 첫 번째로 내가 취한 행동은 토목과 선생님들과 1학년 교과 담임 선생님 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아들이 공업고등학교에 입학 하게 된 배경과 자만하지 않도록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대해 달라고 당부의 글을 올렸다. 특히, 국어 선생님 께는 1, 2 학년 때 각종 글짓기 및 논술대회에 참가 시켜 줄 것을 부탁하기도 하였 다. 한 학생을 위한 특별한 교육과정을 운영할 수는 없기 때문에 교육과정 외에 할 수 있는 모든 활동에 참여시키고 싶었다. 전체적인 성적을 비교해 볼 기회가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때맞추어 사설기관 모의고사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의 내용이 상급 기관으로부터 여러 차례 공문이 왔 었기 때문에 인터넷을 통한 간접적인 비교 평가만을 할 수 있었다. 솔직히 입학 당 시 비난의 소리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3년 후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게 하기 위 한 조바심이 있었다. 자유스런 분위기에서 공부를 즐기도록 하였지만 1학년 때의 성적으로는 30%정도만 만족할 수 있는 상태였다. 하루 빨리 전주공고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절반의 성공이라고 생각 할 수 있었던 것은 수학경시대 회와 각종 글짓기 대회에 참가하여 여러 차례 수상했던 것이다. 자신감을 잃지 않 게 하는 것 중 하나가 수상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요즘은 학교 현장에서 전자문서로 대부분의 공문이 접수되고 열람하도록 되어 있다. 자칫 사장되는 공문들이 너무 많은 것은 현실적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초임시절부터 철저하게 지켰던 것은 모든 공문을 열람하는 것이었다. 1학년때환 경과 양성평등과 관련된 백일장대회가 있다는 정보를 이메일로 보내주었다. 대부 분 온라인으로 예선을 거치고, 본선은 직접 현장에서 대회가 열리는데, 수업 결손 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한다는 측면에서 참여토록 하였다. 대학총장상과 교육감상 을 두 번 씩 수상하면서 학교생활에 대한 만족감을 더했다. 제자와 사감으로 만난 아들과 아버지 4년 만에 이리공고에서 다시 전주공고로 학교를 옮겼다. 모교에 돌아온 나에게 많 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 번째로 주어진 일은 기숙사 사감이었다. 기숙사에 는 80여명의 학생들이 기숙하고 있었다. 음악을 전문으로 학생, 기능을 연마하는 특기생들, 장거리에 거주하는 학생들, 공부를 하려는 학생들 등 아침에 등교하면 늦은 밤 11시가 되어야 기숙사에 돌아 온다. 대부분 각자 다른 분야에서 연습 혹은 공부를 하고 돌아온다. 내 아들은 수리 탐구 반이었다. 동창회 사무실에 역대 동창회장님들의 사진이 걸려 있는 곳에서 방과 후 자기 주도적인 학습을 하고 돌아왔다. 2학년 때는 각종 논술 대회에 많이 참여 시켰다. 별도로 논술 준비를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하였다. 하루하루가 이공계 발전을 위한 공적( 功 績 )임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주도적인 학습 능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2학년 때부터였다. 모 226 꿈은 이루어졌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227

의고사에서 중학교 때 성적이 비슷했던 인문계 아이들과 견줄만한 성적이 나온 것 이었다. 다양한 체험을 경험했던 것들은 덤으로 찾아온 기쁨이었다. 주말이면 기 숙사 학생들 모두 가정으로 돌아간다. 일주일에 한 번 기숙사의 문을 닫고 아들과 나란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귀가길이 색다르게 느껴졌다. 선생님, 토요 휴무일이 싫어요! 2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면서 기숙사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들 중 동창회의 지 원을 받아 무료 보충학습과 교육방송을 통한 학습 활동을 계획했다. 일주일 정도 만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게 했고 나머지 기간은 기숙사 일정대로 진행되었다. 방 학도 반납한 상태였다. 방학 기간 중에는 금요일 오후에 귀가 시키는데 나의 아들 을 포함한 2학년 6명이 토요일과 휴일에도 기숙사에서 공부하게 해 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돌이켜 보면 어떤 준비도 없이 수락을 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식사였다. 기숙사 식당 종사자들도 휴일에는 퇴근하고 없기 때문에 밥은 내가 책임져야 할 과제였 다. 휴일과 주말마다 식사를 해결하는 데는 대학 때 자취했던 것이 큰 힘이 되었 다. 기숙사 주변에 일군 텃밭의 채소들도 많은 도움을 주었고, 기본적인 반찬은 식 당 아줌마가 미리 준비해 주었다. 2학년 2학기부터 모든 휴일을 반납했다. 나도 책을 많이 볼 수 있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대학 입시 정보를 수집 하는데 할애하였다. 복도에서 만난 아들의 손에 엄 지손가락을 치세우며 사랑한다는 하트 모양의 手 話 모습에서 한없는 기쁨과 자신 감에 찬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공부와 담을 쌓았던 전문계 고등학생들이지만 그들은 고등학교에 입학 한 후 두 뇌의 폭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선봉에 선 아이가 나의 큰 아들 이었고, 뒤 따르는 학생들이 하나 둘 늘기 시작했다. 그들 중 이성민이라는 학생이 있었는 데 과는 다르지만 경택이와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있었다. (이성민 학생은 나의 아들 과 중학교 성적이 180점중20점이나 뒤쳐진 학생이었지만 서울대학교에 최종합 격한 학생임) 전주공고에서 바라는 교육 효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방학을 반납한 아들과 3학년 학생들은 나와 기숙사에서 꿈은 이루어진다. 힘들어도 조금만 참 자! 슬로건을 내걸고 수능 준비에 전념하였다. 자발적인 참여였기에 학습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었다. 여섯 명의 학생들로 구성된 스터디 그룹의 학생들은 각종 백일장대회에 참가하 여 좋은 성적들을 거두었다. 그들 중 경택이는 여섯 번이나 수상하는 기쁨을 누렸 다. 3학년을 앞두고 교육 정책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나는 인터넷을 통해 아이들 의 모의고사 성적을 토대로 철저히 분석하여 휴일마다 진학 상담을 해 주었다. 대부분 학생들의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립 대학교 위주로 탐색 을 하였다. 여섯 명의 학생들 중 내신 성적과 모의고사 성적을 토대로 세 명의 학생 은수시2학기 서울대학교 지역 균형 선발 전형자로 분류하고 나머지 3명은 타 국 립 대학교 정시 전형에 도전하기로 하였다. 나의 아들도 서울대학교의 지원자 중 한명이었다. 시련이 닥쳐와도 3학년 시작과 함께 시련이 왔다. 전문계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상 3학년 때는 전공 과목 위주로 편성하여 기능사 실기 수업이 대부분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수능과 병행하여 공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1학기 중간고사 후 우리 가족은 봉 사활동을 다녀왔다. 극기 훈련도 다녀왔다. 수능 공부에 지친 아들에게 가족의 힘 을 보여주었고, 가족의 사랑을 느끼고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했던 것이다. 며칠 후 아들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왔다. 아빠! 오늘은 세상을 다 얻은 기분입니 다. 수학에서 미적분을 완전 마스터했습니다. 미적분의 원리를 깨달은 날 득도( 得 道 )한 기분입니다. 미적분을 마스터 했다는 것은 수학을 마스터 한 것이나 다름없 228 꿈은 이루어졌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229

기 때문에 나 또한 세상을 다 얻은 기분, 지금도 가슴 뛰는 순간을 잊지 못한다. 큰 변화 없이 전년도와 같은 방법으로 입학전형이 이루어지는 것이 서울대학교 지역균형 선발이었다. 수학 과목은 초등 시절부터 아주 잘하는 과목이었지만 득도 했다는 표현이 얼마나 큰 자신감을 갖게 했나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사교 육과 철저히 단절된 기숙사에서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해서 얻은 결과였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서울대학교의 지역균형 선발 요강에 1 단계 전형이 학교 생활기록부 내신 성적이었고, 수학능력시험 최저 등급 기준을 통 과하면 2단계가 서류 심사와 면접이었다. 최저 등급 기준에 수리탐구영역은 자신 있었고 나머지 영역도 자신감을 갖고 있었기때문에 전문계 고등학교에서 부족했 던 과학 분야의 영역도 인터넷을 통한 주도적인 학습을 하도록 하였다. (서울대학 교 지역균형 선발제도를 아들이 중학교 때 이미 알고 있었다.) 휴일은 기숙사에서 공부 보다는 체력관리에 힘썼다. 기숙사 앞에 족구 장을 만 들어 놓고 나와 학생들이 직접 경기를 하였다. 아들과는 항상 반대편으로 편성하 였다. 그리고 구술시험 준비를 위해 대화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일요일 저녁에 는 아내와 둘째 아이가 외식을 하러 우리학교 기숙사를 찾곤 했었다. 큰 아이와 나 의 옷가지 등을 챙겨 오면서 아빠가 해주는 밥을 먹기 위해 고급 레스토랑이 아닌 기숙사로 외식을 온다는 것 상상만 해도 색다른 이벤트임에 틀림없었고 가족의 활 력소가 되었던 것 같다. 2학기가 시작 될 무렵 수학능력시험 90여일을 앞두고 마지막 상담을 하였다. 아 버지가 아닌 선생님의 입장에서 철저한 분석 데이터를 가지고 상담을 하였다. - 내신 성적 100%만족(예체능 과목은 부족했지만, 서울대학교 입시요강에는 만족) 서울대학교 지역균형 1단계 전형에 합격하였다. 2단계 서류 전형을 위한 준비를 하면서 아들에게 해준 이야기는 네가 학교에서 보내는 하루하루는 21세기를 빛 낼 공학도의 공적서가 될 것이다. 이었다. 대학 합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나라의 이공계를 위한 큰 결심이었던 만큼 우리나라의 모든 전문계 고등학교에서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대학 에 입학해서도 전문계 고등학생이기 때문에 그럼 그렇지 소리를 듣지 않도록 사 전 준비를 병행하게 하였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들이었다. 내신 성적관리와 수학능력 준비도 벅찬 일인데, 대학에 가서 할 공부를 병행 하라 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우리 부자는 그런 준비를 철저히 하였다. 더 큰 욕심 을내어2007학년도에 아들과 함께 소망하는 것을 이루자고 약속을 하였다.아들 에게는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1. 지금 까지 공부했던 방법과 전략을 다른 전문계 고등학생들에게 노하우(Know How)를공개할수있도록준비하자. 2. 서울대학교에 최종 합격하여 우리 학교의 입학 전형에서 돌풍을 일으키게 하자. 3. 21세기를 빛낼 인재 상에 도전하여 전문계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자. 그리고 나 스스로도 다짐을 했다. 1. 사교육과 단절된 기숙사에서 자기 주도적인 학습 능력의 효과를 검증한다. EBS 방송 활용사례를 발표하여 사교육비 절감의 모범사례를 남긴다. 2. 평교사로서 수업을 인정받기 위해 수석교사제에 응모한다. - 수학능력 모의고사 점수 유지토록 마무리 철저 - 영어 듣기 방송은 매일 아침 20~30분간씩 계속 청취할 것 (3년간 계속 이어짐) - EBS 수학능력 FINAL과 4주 완성 교재를 적극 권장 - 자기소개서 준비 (대학에서 요구하는 양식에 맞추어) - 추천서는 담임선생님에게 부탁 (사전 자료는 아빠가 제공) 서울대학교 1단계에 합격한 후 나는 서울대학교 건설 환경공학과 학과장님께 메일을 보냈다. 귀교에 입학을 준비하는 학생이 전주공업고등학교에 있습니다. 전문계 고등학교라는 편견만 갖지 말아 주세요. 열심히 지도하여 보내겠습니다. 라는 내용의 글을 여러 차례 보냈었다. 230 꿈은 이루어졌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231

눈물의 아침밥, 수험생에게 빨간 숫자 5일은 긴 시간이었다 수학능력시험을 40여일 앞둔 작년 추석연휴 전날. 모든 기숙사 학생들은 고향으로 갈 마음에 들떠 있었다. 그런데 3학년 학생들이 찾아와서 추석 때도 기숙사에 남아 서 공부를 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추석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 면서 추석 날 만큼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 하자고 했다. 마치 선생님이 쉬고 싶어서 그렇게 결정하는가 싶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집요하게 부탁하는 아이들의 청을 거절 할 수 없었다. 추석날 새벽에 밥을 해 놓고 경택이 방에 쪽지를 남겼다. 아빠 는 시골 할머니 댁에 차례 지내러 간다. 식당에 준비해 놓은 밥 아이들과 맛있게 먹 어라. 할머니가 해주시는 맛있는 추석 특식 저녁에 먹자. 라는 내용을 남기고 부 안으로 향했다. 그 후 추석날 아침에 아빠가 해준 밥을 먹으면서 쓴 글이 눈물의 아침밥 이었 고, 그 글은 2007 교육체험수기 공모 에서 자기능력개발 부문 장려상을 수상한 바 있다. 수기의 내용은 자신이 전문계 고등학교에서 어떻게 공부했는지 소상히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하고 한 약속 중 첫 번째를 이행한 셈이었다. 언론을 통 해 소개되기도 하였다. 기억에 남을 만한 내용은 아빠가 중요한 핵심단어 및 숙어 등을 코팅해서 욕조 벽면에 붙인 내용은 땀구멍이 이완되어 암기력이 뛰어났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박태환 선수처럼 화려한 공적은 아니지만 다양한 분야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21세기를 빛낼 인물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교육 부총리상과 대통령 메달을 마 린보이 박태환 선수와 함께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두 번째 약속을 지킨 셈이었 고, 장학금 3백만 원 중 일부는 우리 학교 축구부 발전기금으로 기부하였다. 평소 경택이에 대한 모든 것들을 파일화 했던 것이 공적서( 功 績 書 )를 작성하는데 큰 도 움이 되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마린보이 박태환 선수와 함께 21세기를 빛낼 인재로 인정받다 아들이 수능 준비에 올인하고 있을 때 나는 21세기를 빛낼 공학도의 공적( 功 績 )을 작성하고 있었다. 입학 당시부터의 파일을 열고 구슬을 꿰매는 심정으로 하나하나 정리하다 보니 손색없는 공적서가 되었다. 수학능력시험 하루 전 날 나는 박사 마을로 유명한 임실 삼계 마을에 가서 드림 쌀 이라는 쌀을 구입하여 기숙사 식당 아줌마에게 아침밥과 수능 당일 도시락을 준비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기숙사에서 아침을 먹고 도시락까지 준비해서 수학능 력 시험장으로 갔다. 수학능력 시험에서 자신이 주력했던 영역은 거의 만점을 맞 았고, 모든 영역에서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왔다. 최종 면접만 남았다. 서울대학교 2단계 면접 때 나는 관악산의 찬바람을 맞으며 3시간 동안 아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단순한 합격이 아니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큰 인물이 되어 232 꿈은 이루어졌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233

주기를 바란다고. 같이 동행했던 동료교사가 3시간 동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지독 한 사람이라고 한 마디 거들었다. 수학능력 시험 이후 전주공고 기숙사에서 일어난 일들을 요약해본다. - 신경택(건설환경과), 이성민(전기컴퓨터공학부) 서울대학교 최종 합격 - 신경택, 21세기를 빛낼 우수인재상 수상(도내 고3학생 중 남냐 학생 1명씩) - 기숙사 학생들 수도권 대학 6명을 포함하여 국립대학교 20명전원합격 - 신진규, EBS 교육방송 활용사례 우수상 수상 : EBS뉴스에 6분정도 소개됨 - 신진규, 수석교사제 공모 합격(2008 수석교사 시범 운영) 숙사에서 형이 공부하던 자리에 미리 자리를 잡았다. 교육방송과 인터넷을 통한 선 행 학습을 스스로 하는 둘째도 분명 전주공고에 입학해서 잘 해 내리라 확신한다. 2009년 수학능력시험을 100일 앞둔 시점에서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 주기 위해 오늘도 경택이는 모교를 찾았다. 수학능력시험 마무리를 위해 스스로 자청하여 특 강을 하는 모습을 보며 금년에도 또한번우리학교에겹경사가 생길 것을 기대해 본다. 대한민국의 모든 수험생 부모님들과 지도하시는 선생님들에게 한마디 남기 고 싶다. 학생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주면 덤으로 찾아오는 기쁨은 부모와 교사의 몫입니다. - 신진규, 수석교사 연수 중 교육인적자원부 연수원장 표창 - 신경택, 이성민, 정한나, 전라북도 인재 장학숙 합격 (서울 방배동 ) - 2008학년도 전주공고 신입생 입학전형 경쟁률 2대 1 넘다 (1980년이후처음) 3학년 학생들이 기숙사에서 퇴소하는 날, 나는 교사로서의 긍지를 다시 한 번 되 새기며 재학생들에게 약속하였다. 나의 아들 때문에 휴일을 반납한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원한다면 휴일 반납은 계속될 것이다. 지금도 여름방학 중 선배들의 뒤 를 잇겠다고 방학을 반납한 아이들이 50여 명 불을 밝히고 있다. 대한민국의 미래 가 밝은 이유는 전주공고의 기숙사가 있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아들이 방학을 맞아 돌아왔다. 1학기 성적표도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우리 가 족은 아들을 따뜻하게 맞으면서 이렇게 말해주었다. 꿈은 이루어졌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다. 네가 뿌린 씨앗은 세상의 등불 이 될 것이다. 대학교 1학년 첫 여름방학. 얼마나 놀고 싶겠는가? 수험생의 신분을 탈피한 홀 가분한 마음이겠지만 봉사활동을 자청하였다. 2008년인천청소년 물사랑환경 사랑 이라는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중고등학생들을 지도하고 돌아왔다. 자신의 학 과와도 관련이 있었고, 세상에 대한 배려하는 마음을 이어가고 있다. 중3인 둘째 아들도 형처럼 공부하고 싶다고 한다. 방학을 이용하여 우리 학교 기 234 꿈은 이루어졌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235

자녀교육 수범사례 우리집에 도서관이 생겼어요 백승철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 XXXXXXXXXXXXXXX 가장 먼저 저희 부부에게 사랑하는 두 딸 진영이와 미영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 을 드립니다. 어린 아이들은 스폰지와 같다는 생각으로 기독교 신앙교육과 좋은 책읽기에 중점을 두고 두 아이를 교육시키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이 아이들의 내일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교육을 통해 아이들은 바르고 참된 인성을 갖게 될 것이고, 좋은 책을 통해 큰 꿈과 비전을 품게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지금 탁자에 앉아 열심히 책을 읽는 두 딸을 보며 아이들의 미래의 모습을 떠올리노라 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마지막으로 책은 어린이의 미래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름이 소리도 없이 가 버린 듯 싶습니다. 며칠 전까지 앉아있기만 해도 이마에 땀 이 맺히곤 했는데 이젠 피부를 스치는 시원한 바람결이 느껴집니다. 지나가 버린 계절 만큼이나 아이들의 어린 시절도 소리 없이 빨리 지나가 버리겠죠. 한 여름 내 내 기타 치며 놀던 베짱이가 추운 겨울 어려움을 당하듯 저는 아이들의 교육도 이 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와 기회가 주어졌을 때 부모로서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교육에 관심을 갖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부모님들 중에는 아이 때는 무조건 뛰놀며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시는 부 모님들이 계시기도 하지만 저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 해 주는 것과 대책 없이 방치하는 것은 전혀 틀린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하며 아 이들의 문화까지도 교육의 한 부분으로 여겨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에 수많은 부모님들이 아이들의 미래를 염려하며 교육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이때에 저 역시 두 딸아이의 아빠로서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을 두고 두 아이 를 양육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좋은 교육방법론을 가지고 아이들을 양육하고 계신 부모님들이 많으시기에 교육 수기를 쓰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제가 확신을 가 지고 교육하는 부분에 대해서 몇자 적어 보겠습니다. 책은 미래를 만드는 원동력 저는 초등학교 1학년과 2학년 두 딸을 가진 아빠입니다. 저의 큰아이는 태어날 때 부터 구순구개열을 가지고 태어난 탓에 돌을 지나기 전 몇 번의 수술을 하며 집보 다는병원이 더 친근한 아이가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 이 많았고 이 때 엄마가 아이를 위해 읽어 준 책읽기는 큰아이의 책읽기의 시작되 었습니다. 아이 엄마는 아이 곁에 있는 동안 아이가 눈을 뜨고 있을 때면 항상 책을 읽어 주 었습니다. 다행이 아이가 엄마가 책을 읽어 주고 그림책을 보여 주면 방긋방긋 웃 으니까 아내가 아이를 간호하며 여러 가지로 힘들지만 마음은 즐거웠다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희 집은 남현동이고, 그 때 아이는 혜화동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 원해 있었는데 밤마다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 거리를 오가며 제가했던 일은 아내 가 먹을 도시락과 아이가 볼 책을 나르는 일이었죠. 이 때 부터 아이의 책읽기는 시 작되었고, 병원에서 퇴원한 후로도 아이 는 글씨를 아는지 모르는지 책과 함께 하 루를 보내는 아이가 되었답니다. 그 동안에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를 바르고 훌륭 하게 키울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서점에서 수많은 교육서들을 사 읽기 시작했습니 다. 교육서를 읽으며 깨달은 것은 아이들은 스펀지와 같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접하는 것을 순식간에 빨아들인다는 것이죠. 이는 곧 무엇을 접하느냐, 곧 교육이 아이의 미래를 결정한다 는 말이었죠. 수 많은 교육서를 통해 얻어 확신내린 결론 하나는 책 잘 읽는 아이로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스펀지와 같다. 무엇이든 접하면 순식간에 빨아 들인다. 그래!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읽히는 거야. 책에는 세상의 모든 지식과 이 야기가 담겨져 있잖아. 오늘 읽은 책들 속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은 훗날 미래를 만 들어 가는 원동력이 된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책에는 차고 넘치는 지식과 내가 겪어 보지 않은 경험이 담겨 있으니 아이에게 책을 읽게 하는 것보다 좋은 교육은 없다는 확신을 갖고 책을 읽혀야겠다고 생각 을 했습니다.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저는 아내와 함께 아이의 독서교육에 몰입하 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책이 우리 아이의 연령대에 맞는 책일까? 이 책은 어느 분 야에 좋고 이 책은 아이의 무엇을 발달시킬까? 이러한 고민을 하며 사다 본 책에 관한 교육서만 해도 몇 십권은 될 것입니다. 매월 저의 월급날은 아이의 책장이 채 워지는 날입니다. 이렇게 하여 쌓인 책이 이제는 안방 전체를 가득 채울 만큼이 되 었죠. 언제부터인가 지출 내역의 일순위는 도서구입이 되었습니다. 옛날 왕안석 이라는 사람이 했던 책에 대한 명언이 기억이 납니다. 책을 사느 라고 돈을 들이는 일은 결코 손해가 아니다. 오히려 훗날 만 배의 이익을 얻을 것 이다. 그런데 책을 사는데 지출이 매월 이렇듯 많다 보니 아이 엄마와 저는 고민 에 빠졌습니다. 매번 보고 싶은 책을 다 사다 볼 수도 없는 일이고, 그래서 여기 저 기 알아봐서 알게 된 것이 무료도서관이었습니다. 때 마침 집 앞 동사무소에서 운 238 우리집에 도서관이 생겼어요 239

영하는 무료도서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운영 된지도 꽤 됐 고 이용하는 주민도 많은 곳이었습니다. 책 부류도 유아부터 시작해서 성인들이 볼 수 있는 것까지 다양했고 일반서적부터 전문서적까지 종류도 많았습니다. 작은 규모였지만 매월 새책도 정기적으로 들어오며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마을무 료도서관이었죠. 가서 자세히 알아보니 하루에 다섯 권씩 빌려 준다고 하더군요. 물론 집으로 대 여도 되고 대여 기간은 일주일이었습니다. 다 보면 하루에 몇 번도 가능했습니다.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운영하는데 우리 큰아이와 작은 아이는 무료도서관 운영시 간만 되면 어김없이 마을 도서관에 가서 책을 봅니다. 시설도 깨끗하고 에어컨 시 설도 잘 되 있어 올 여름엔 보고 싶은 책도 마음껏 읽으며 시원한 동네 무료도서관 덕을 톡톡히 봤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어제 빌린 다섯 권을 반납하고 새책 다섯 권을 빌려 왔습니다. 아이들이 다 읽은 책을 꼽을 때와 새 책을 고를 때의 기분은 너무나 뿌듯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료도서관이 책에 대한 갈증을 모두 해소해 준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보고 싶은 책을 빌리 수 있다고 해도 며칠 간격으로 반납해야 하는 책과 늘 집에 두고 어느 때든 볼 수 있는 책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죠. 그래서 예전보다는 책에 대한 지출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수입의 상당부분을 아이들 책을 사는데 지출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책을 사면서 한 번도 아깝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책을 산다는 것은 돈을 주고 살수 없는 지식을 얻는 길이라는 생각과 책이 아이들 의 미래를 설계한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책에 욕심이 나다 보니 예전에 읽었던 김진홍 목사님의 자서전에서 읽은 이야기 가 생각났습니다. 김진홍 목사님은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너무 좋아했는데 가난한 탓에 책 살 돈이 없을 때면 그 어머니께서 머리를 잘라 아들이 읽을 책을 사 주었다 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생각을 했죠. 머리를 잘라 책장을 채우자. 그 날로 인터넷에 가정용 바리깡과 가위 셋트를 주문했습니다. 저렴한 제품으로 4만원 정 도의 이발 셋트를 구입했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머리를 집에서 자릅니다. 벌써 1 년 반 정도 됐으니 본전을 뽑고도 책 한 질은 산 것 같습니다. 아내가 머리를 잘라 줄 때면 저는 아이들에게 보고 읽고 싶은 책 있으면 말하라고 합니다. 그럴 때면 아 이들은 아빠가 머리 잘라 책 사 주신다며 너무나 좋아라 합니다. 그 때부터 아이들 은 책을 사줄 때마다 아빠가 머리 잘라 산 책이라며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며 애착 을 갖고 읽습니다. 책꿈방 을 만들다 얼마 전 집 근처 대형서점에 갔더니 거실을 도서관으로 꾸며 주는 이벤트 행사를 하 고 있었습니다. 참신한 발상이면서 아이들 교육에 참 좋을 거라 생각을 했습니 다. 순간 우리 집을 생각하니 전혀 답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이벤트에 참여해서 설 령 뽑힌다 해도 우리 집 거실은 식탁 하나 겨우 놓는 공간뿐인데 도서관은 무슨 이렇게 생각하며 아이들 방이나 책으로 가득 채워 주면 족하다는 생각만하고 있었 습니다. 그러다 며칠 뒤 갑자기 거실이 안 되면 안방을 도서관으로 꾸며 볼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스쳤습니다. 이 생각을 아이들 엄마에게 이야기했더니 머리를 절래 절래 흔들며 생각만 해도 머리 복잡해지니까 그냥 놔두라는 것이었습니다. 몇 번 설득 끝에 안방을 도서관 으로 꾸미기로 결정을 보고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방에 있는 짐을 거의 다 들어 내 고 옮겼으니 이사 수준이었죠. 며칠을 정리한 끝에 드디어 안방이 도서관으로 변 240 우리집에 도서관이 생겼어요 241

신 했습니다. 정말 그럴 듯 해 보였습니다. 아이들이 집에 생긴 도서관을 보며 좋 아하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현재 우리 안방 도서관은 여느 도서관 의 분위기와 비슷합니다. 전에 쓰던 아이들 책상대신 6인용 큰 탁자를 4만원을 주 고 중고로 구입했습니다. 모두 정리하여 놓고 보니 제법 분위기 있는 멋진 도서관 이 되었습니다. 물론 장농이 있는 도서관이긴 하지만요. 큰 딸 진영이가 도서관에 이름을 짓자고 했습니다. 진영아 도서관 이름으로 뭐 가 좋을까? 라고 묻자 진영이는 우리집 도서관 이라고 하면 좋을 것 같아요. 라 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빠는 말이지 책꿈방 이라고 하면 어떨까? 라고 전에 생 각해 놓은 의견을 냈습니다. 그게 뭔데요? 라고 큰 딸 진영이가 묻습니다. 책을 읽고 꿈을 키우는 방이란 뜻인데 진영아 책꿈방 어떠니? 라고 물으니 진영 이도 밝게 웃으며 좋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집엔 도서관이 생기게 되 었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우리집 도서관의 효과는 너무나 좋았습니다. 아이들은 집에서 있는 시간중 잠자고 밥 먹는 시간만 빼고는 거의 책만 보는 책벌레가 되었 습니다. 요즘 같아서는 책보는 시간을 통제할 정도입니다. 우리 집에는 규칙이 하나 있습니다. 나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고 어질러 놓는 건 질색하며 싫어 하지만 아이들이 책보고 어질러 놓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잔소리 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림잡아 아이들이 하루에 손에 잡았다 놓는 책은 20 권이 넘습니다. 덕분에 방마다 거실마다 화장실까지 책이 안 널려 있는 곳이 없이 만 아이들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 있습니다. 책을 어질러도 잔소리를 하지 않는 것 은 널려 있는책을 책장에 꼽는 일은 몇 분이면 할 수 있지만 아이들의 책 읽는 습관 은 몇 분으로 만들어 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아내와 나는 널려 있는 책을 기분 좋게 치워 줍니다. 아이들도 너무하다 싶으면 누가 이렇게 어질러 놨느냐고 시치미를 떼며 스스로 치우기도 합니다. 사교육 없이 좋은 교육 시키기 요즘 입시 정책으로 논술 붐이 불었습니다. 읽기도 중요하지만 쓰기를 간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나는 아이가 취학하기 전에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물 론 경제인 이유도 있었지만, 사교육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있는 상황을 최대한 활 용하여 아이들을 교육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동네에도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학원이 몇 개가 있지만 일단 중학교엘 가면 중간고사, 기말고사 때면 학원에 서최소밤11시 전에는 집에 보내질 않습니다. 일요일도 학원에 가야하는 것은 기 본이죠. 학원비는 아이 하나 보내 놓고 나면 가계가 휘청일 정도의 금액입니다. 그 렇다고 투자한 시간이나 돈에 비해 결과가 나오느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부모가 할 일은 공부하고 싶은 환경과 공부에 대한 의지를 만들어주는 것이 라고 생각합 니다. 그렇지 않고 공부에 대한 의지가 없는 아이를 책상 앞에 끌어다 앉혀 놓고 시 간과 돈을 투자했다고 해서 결과가 좋게 나오진 않기 때문입니다. 일단 안방을 도서관으로 꾸미는 일로 두 딸아이가 책 읽는 습관을 가진 것에 대 해서는 성공했다고 생각을 합니다.다음으로 저희는 아이들 글쓰기를 위해 동사무 소에서 운영하는 글짓기 교실에 보내기로 했습니다. 일주일에 1시간씩 3개월 수강 료가 1만5천 원 입니다. 한 달에 수십 만 원씩 하는 학원에 비하면 거의 무료인 셈 이죠. 그런데도 벌써 큰아이는 학교에서 열린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금상과 동상 두 개나 받아 왔습니다. 물론 학교 대회이고 큰 대회는 아니지만 주민자치센터에 위탁하여 교육시킨 결과라 생각을 합니다. 주민자체센터 어린이 글짓기 지도하시 는 선생님께서도 사명을 갖고 지도하시고 계시는 듯 하여 너무 감사하고 아이의 글 쓰기 실력을 세밀하게 파악, 지적하여 주는 것을 보니 저렴한 가격로 좋은 교육을 242 우리집에 도서관이 생겼어요 243

받고 있다는 생각에 꼭 많은 돈을 들여 고액학원을 다녀야만 좋은 교육을 시키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들의 영어친구, EBS 저와 아내가 교육비 절감을 위해 생각해낸 또 다른 방법은 EBS 교육방송을 활용하 는 것이었습니다. 큰 딸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인데 제법 영어책을 줄줄 읽습니다. 모르는 단어는 전자사전으로 찾아보기도 하고 아주 쉬운 수준이지만 읽으며 의 미를 파악하는 책이 꽤 여러 권 됩니다. 아이에게는 어릴 적부터 영어동화 CD를 항상 틀어 주었습니다. 직접 읽어주는 것이 좋겠지만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했고, 잠 잘 때도 영어동화 CD를 틀어 주는 노력은 했습니다. 아이들은 영어동화 CD를 들려 주어야 잠을 잤고 혹 깜빡 잊을 때면 아이들이 직접 듣고 싶은 CD를찾아플 레이를 시키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EBS 무료영어교육채널은 두 딸 아이에게 영어에 대한 재미를 더해주었습니다. 특히 Sesame English 는 등장인물 이 AFKN의 Sesame Street 의 인물과 연결되어 아침 8시부터 방영하는 Sesame Street를 재미있게 보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EBS 무료영어교육채널이 너무나 유익한 것은 우리 아이들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영어를 즐겁게 공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I love reading, Story land 는 인터넷을 통해 보는데 안방 도서관 탁자 에 앉아서 가족이 함께 볼 때면 TV연속극을 볼 때보다 더 재미있는 시간이 됩니 다. TV는 Sesame Street 를 볼 때만 시청을 합니다. 물론 TV보는데 많은 시간을 빼 앗기지 않기 위해 가족이 정한 규칙이죠. 아이들이 늦장을 부릴 때면 녹화한 뒤 한 가한 시간에 틀어 주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는 아이들과 지하철매표소에서 표를 끊다가 외국인 여자를 만나게 되 었는데 글쎄 큰아이가 아무렇지 않게, Hello! How do you do? Nice to meet you 라 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놀라고 외국인 여자분도 놀란 것 같은데 정작 큰딸 진영이만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외국 여자를 쳐다보며 자기가 알고 있는 영 어로 계속 말을 하더군요. 서슴 없이 외국인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아이 모습에대 견함을 느꼈습니다. 아이가 돌아와 그 여자는 캐나다 여자인데 이름이 나니 라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다른 얘들은 외국인이 지나갈 때 엄마들이 등떠밀며 헬로 라고 말하고 오라고 해도 쑥스러워서 못하는데 이 아이의 이런 저력은 어디서 온 걸까? 아마 AFKN Sesame Street에서 늘 아침마다 외국인들을 만나고, EBS 무료영 어채널에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접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모든 교육의 근본은 독서 두 아이가 아직 초등학교 1학년, 2학년이라 짧은 시간 동안의 저의 교육이 그 어떤 결과로, 구체적인 열매로 나타난 것은 없지만 역사를 보아서도 모든 교육의 밑 바 탕은 독서가 되어야 함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앞으로도 우 리 아이들이 양질의 책을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도록 더욱 힘쓸 것이며, 아이 들에게 의지만 있다면 고액의 학원공부가 아니더라도 EBS 교육채널을 통해서나 공공기관의 저렴한 교육을 통해서도 충분한 보충 교육이 이루어 질 수 있음을 확 신합니다. 대한민국의 더욱 발전된 교육환경을 위해 오늘도 학부모의 한 사람으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44 우리집에 도서관이 생겼어요 245

자녀교육 수범사례 미안하다 김정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 XXXXXXXXXXXXXX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지도 못했기에 수기를 쓰면서도 많이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약하면 약한 대로, 기운이 넘치면 넘치는 대로 아이들이 바르게 커주었기에 오늘 과 같은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 같습니다. 부족한 글로 수상까지 하게 되었다니 새삼 부끄러우면서도 참 많이 행복합니다. 심사 위원 여러분과 이 글을 읽으실 모든 분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며칠째 흐린 날씨에 변덕스럽게도 비가 오락가락 한다. 나는 대충 책상을 정리한 후 민희(가명)를 돌아보았다. 오늘따라 엄마가 사무실에 일이 많아 늦으신다고 연 락이 왔다. 세상일에 관심이 없는 민희가 친구들이 모두 다 돌아가고 없는 텅 빈 방 과 후 교실에서 닥치는 대로 집어 던지거나 자신의 팔을 물며 놀려고 하기에 말렸 더니 할머니 미움보 하면서 나를 꼬집더니 결국에는 의자에 앉아 자울거리고 있 다. 무심히 바라보는 내 눈에 비친 민희는 착하고 예쁘고 노래 잘하고, 가끔은 친 구 물건을 빼앗아 안주려고 고집 부리기도 하고 이렇게 날씨가 흐린 날이면 자해 도 하는. 자기만의 세계에서 행복한 자폐아였다. 허나 민희네 부모는 항상 피곤했다. 민희 엄마의 하소연이 생각났다. 업보죠. 그렇게 알고 민희만 잘 기르려고 했는데 동생이 생겨 버렸어요. 고민하다가 사내 아이를 낳았는데 8살이나 된 민희가 아기 기저귀를 들고 와 아기처럼 채워 달라고 떼를 써요. 막무가내로 소리 지르고 울고 기저귀 펼쳐 놓고 똥 싸고. 민희는 특수학교에서 공부가 끝나면 이곳 복지관으로 와서 엄마 일이 끝날 때 까지 방과 후 교실에 맡겨지는 자폐아고, 나는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가진 자원 봉사자다. 민 희 엄마의 하소연과 함께 내 젊은 시절이 생각나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하얀 피부의 내 아이 세상 사람들이 흔히 백새 라고 부르는 하얀 피부의 아이가 내 안에서 태어난 것 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다만 어린 시절 남녀공학 이었던 학교에 내 아이와 똑같은 후배가 있었고, 그 후배는 친구들에게 항상 따돌 림을 받았고, 걸핏하면 발길질을 당하는 것을 더러 목격했는데, 그 당시는 어쩌 다 했을 뿐 더 이상 관심도 없었던 하얀 사람이 내 아이로 왔다는 것에 대해 경 악을 금치 못했다. 나는 착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나 잘 살자고 남을 해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직 장에서는 인정받는 유능한 여성 공무원이었고 가정에서는 절약해가며 집 마련에 전력투구하는 전형적인 짠순이었다. 그런 내가 하늘을 향해 소금뿌릴 일이 있을 리 없건만 생소한 병명의 아이가 내 자식으로 왔으니 참으로 암담하고 창피했다. 17,000중에 1명꼴로 태어난다는 하얀 아이가 왜 하필 내게서. 하고 잠든 아 이를 내려다 보며 수 백 번을 생각하다 이대로는 살 수 없다고 생각 했다. 나는 어떠한 역경도 참을 수 있고 내가 받는 고통쯤은 어미로서 충분히 인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허나 병아리 같이 여리기만 한 내 하얀 아이가 한 세상을 살 기엔 너무 힘들고, 불행의 연속일 것이란 생각에 내가 준 목숨이니 내가 거두자. 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펑펑 울었다. 태어날 때 본능적으로 으앙 하고 운 것을 제외하고, 철 든 후에 처음으로 살아 있는 동안 평생 흘릴 눈물을 한 꺼번에 쏟아 부으며 짐승처럼 소리 내어 울었던 듯싶다. 내 맘을 알 리 없는 어머니 나도 젊은 시절 맞벌이 부부였고, 그리고 아이를 갖게 되었고, 오랜 진통 끝에 출 산을 했는데 끔찍한 진통이 끝나기도 전에 간호사의 놀라움 섞인 외마디가 내 귀 에 들려왔다. 어머나! 양키 새끼네요!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 당시는 몰랐다. 너무 진통이 길어 거의 질식사 할 뻔한 아이를 의사가 거꾸로 들고 무던히도 두들겨 패서 울음소리가 터지게 했고 그렇게 내 아이는 세상 속으로 나왔다. 남편은 고생했다는 말 외엔 더 이상 말이 없 었고, 눈도 맞추려 하지 않았다. 나 역시 양키새끼란 말의 뜻을 금새 알 수 있었다. 248 미안하다 249

는 한숨을 쉬면서 퇴원한 딸을 위해 방을 뜨겁게 덥혀 주셨고, 미역국도 한 사발 퍼 서 쟁반에 올려서 방에 들여 놓으셨다. 나는 말없이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젖 이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아이 얼굴 위로 뚝뚝 떨어지면 나는 얼굴 위의 눈물을 닦아주며 미안하다고만 했다. 이윽고 아이가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우유 빛깔 보다 더 하얀 아이가 내 팔 안에서 고개를 떨어뜨린 채 잠들어 있었다. 나는 아이를 요 위에다 엎었다. 그리고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 버렸다. 언제였 던가. 신문에서 읽은 기사가 생각났다. 짱구머리통을 만들기 위해 엄마가 아기를 엎어 재우다가 아기가 질식사 했다고. 심장이 방망이질을 해댔고, 머릿속엔 뿌옇게 안개로 가득 채워진 듯 했고, 구토도 났다. 나는 그 상태로 꼼짝 않고 벽에 기댄 체 내 아이가 고통 없이 생이 끝나기를 바라면서 내 고집만큼이나 버티고 앉 아 무던히도 떨고 있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언제 방문을 열었는지 빠꼼히 고개를 들이 민 어머니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씀 하셨다 국이 다 식었겠다. 거의 동시였다고 생각된다. 나도 모르게 이불을 제치고 엎어져 있는 아이를 뒤 집었다. 그 하얗던 피부의 아이는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채, 빨갛게 피부가 변 해 있었으며 눈을 감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미안해 를 연발하며 쏜살같이 부엌으로 달려가 찬 물을 가지고 와서 아이 얼굴과 온 몸에 뿌려 주었다. 그렇게 내 아이는 엄마를 죄인으로 만들지 않고 살아 주었다. 내가살아있을때네생이끝나길 지금 와 생각해보면 아이의 불행한 삶보다도 잘난 내 자존심이 걱정되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하얀 아이가 내 몸에서 나왔다고 친구들의 은근 한 수근댐이 싫었고, 위로한답시고 아는 체 하는 주위의 뜨거운 시선도 싫었다. 어 쩌다 지적장애인과 마주칠 때면 처음 보는 나를 올려다보며 히죽 웃는 그의 바보 스런 얼굴에서 나는 몇 번이고 어차피 지능이 낮아 생각이 없는데 저 아이의 검은 색소를 내 아이에게 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물론 그 아이 엄마의 심정도 나와 같을진데 그 심정을 헤아릴 만큼 나는 성숙되지 않은 나는 불행한 엄마였다. 멜라닌 색소 부족으로 하얀 피부는 햇빛에 취약하여 자외선으로 인해 금새 화상 을 입는데 그 당시에는 그저 내 아이가 검어질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람에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 아이와 함께 바닷가에 갔고, 아이를 햇볕에 검게 그을리게 하겠다 는 일념으로 모래사장에 묻고 찜질을 해주었다. 정말 나는 나쁜 엄마였다. 허나 맹 세코 이번만은 고의가 아니라 진심으로 내 아이를 검은 피부로 만들겠다는 생각뿐 이었다. 30분도 못돼 아이 입술과 온 몸이 벌겋게 변하고 물집이 생기기 시작하자 화상이라는 것을 알았고, 피서고 뭐고 모두 팽개친 채 병원으로 데려간 아이를 보 고 의사는 너무 무식한 엄마라고 나를 호되게 나무랐다. 참으로 가슴이 아팠다. 고 통스러워하는 아이 얼굴을 들여다보며 미안하다고만 되뇌었다. 아무것도 아는 것 이 없는 엄마 그늘 속에서 살아야했던 내 아이는 어려서부터 무던히도 자주 아팠 다. 창백하게 쓰러진 아이를 들쳐 업고 가까운 의원으로 가면 하얀 피부에 놀란 의 사가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할 때도 있었다. 병약한 아이를 돌보며 오직 내게 소원이 있다면 단 하루라도 먼저 내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매일이 불행한 나에게 어느 날 친구가 안양에 있는 성 나자로 마을에 가자고 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간곡하게 부탁을 하길래떡한말을만들어서 방문했다. 친 구는 성 나자로 마을의 후원자로써 그들과 친분이 있는 듯 아주 반갑게 만났고 그들이 만들어준 커피도 스스럼없이 마셨다. 허나 나는 정말로 불안했다. 그들의 일그러진 얼굴과 제대로 붙어있지 않은 손발을 보면서 행여 나한테 닿을까봐 노심 초사 했다. 하얀 아이 한명도 버거운데 거기다가 나환자까지 생긴다면 나는 살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날 집에 도착 즉시 바로 화장실에서 흐르는 물에 몇 번이고 손을 닦았다. 마음 같아서는 펄펄 끓는 물에 손을 넣어 깨끗하게 삶아버리고 싶었 다. 더 이상의 불행은 용납될 수 없었다. 내가 살아있을 때 내 아이의 생이 끝난다 면 나도 맘 편히 눈 감을 수 있다는 일념뿐이었다. 250 미안하다 251

너무 다른 두 아들 세월은 흘러 둘째 아이가 생겼을 때 임신한 열 달 내내 근심이었다. 또 하얀 아이가 내게 오는 것은 아닌가? 내색은 안 해도 마음은 온통 태중의 아이가 제발 온전하기 만을 바랐다. 아이 아버지도 종종 집에서 사라지곤 했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근 처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오곤 했다. 때론 교회에 가서 고개를 숙이고도 있었다. 큰 아이 때보다 훨씬 수월한 진통 속에 두 번째 아이가 태어났다. 그때 시어머니 의 첫마디에 전신이 녹아 내렸다. 어쩜 머리카락이 이렇게 검노! 물론 나에 대한 시어머니의 배려였다. 그도 역시 어머니였다. 나는 팔에 안긴 검 은 머리 아이를 들여다보며 감격했고, 또 아이의 형 생각을 하니 미안했다. 문득 오래전에 방문했던 성 나자로 마을이 생각났고 세상에 치이지 않게 외부와 단절 한 채 집단을 이루고 사는 천형의 흔적 있는 그들 보다는 큰아이가 훨씬 복 받았다 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이 바뀌자 그동안 세상에서 가장 큰 아픔이 내 안에 있어 끝없이 마음에 풍랑이 일었는데 그랬던 내 자신이 한없이 작고 초라 하게 느껴졌다. 내 목소리가 들리는 내 쪽을 바라보며 티 없이 웃는 큰 아이를 어느 사이 내 걸작으로 지인들에게 스스럼없이 소개하기에 이르렀고, 삶이란 사랑하기 위해 주어진 시간임을 알게 되었다. 큰 아이와 작은 아이는 성격도, 건강도 정 반대였다. 큰 아이는 피부만 하얀 것 이 아니라 시력마저 약해 길에 내 놓기가 불안했다. 어쩌다 또래 아이들이라도 마 주칠 때면 그 아이들은 외계인이라도 만난 듯 소리 지르며 돌을 던졌다. 그러다 보 니 큰 아이는 주로 집안에서만 있었고, 작은 아이는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 없어져 밝은 눈으로 온 동네를 노루마냥 뛰어 다녀 나는 목이 터지도록 이름 부르며 찾아 다녀야만 했다. 그래도 천방지축인 작은 아이보다 집안에만 얌전히 있는 큰 아이가 내겐 아픔이 었다. 시각장애 때문에 서울 맹학교로 입학을 하기로 결정한 날, 가슴이 너무 아파 차라리 도려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성남에서 서울 종로구 신교 동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없어서 출근긺마다 나는 평상시 보다 훨씬 빠른 시간 에 아이를 데리고 화양동까지 가서 신교동 가는 버스를 태워 주었다. 물론 가슴에 는 신교동 맹학교 앞에서 내려주세요. 라는 명찰이 있었고, 바로 운전석 뒤에 앉 게 한 후, 기사에게도 몇 번이고 당부를 했다. 내 큰 아이는 학교에는 선생님 보다 먼저 도착 했고, 한참을 혼자서 교실에 있어야만 했다. 방과 후에는 담임선생님이 성남시청 앞에서 내려주세요. 라고 쓰인 쪽으로 명찰을 바꿔 달아 주셨고 택시 를 태워 보내주시면서 택시 넘버를 기록해 두셨다. 하지만 8살 아이가 왕복 4시간을 길에서 시달리다보니 아이는 지쳐 갔고, 급기 야는하루가멀다하고쉴새없이덩어리코피를쏟았다. 피부가희게태어났으면 나머지라도 건강하면 좋으련만. 큰 아이가 한 번 코피가 터지면 피가 멈추질 않 아 응급실 단골환자가 될 즈음 나는 아이를 기숙사에 넣기로 결정했다. 토요일 날 근무를 마치고 아이를 데리러 가서 월요일 아침 일찍 학교로 데려다 주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물론 주중 틈틈이 학교에 들려 아이가 공부하는 모습도 지켜 보고, 건 강 상태도 확인했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자식인양 돌보는 특수학교 특수교사의 사명감을 보며 안심이 되었다. 이런 나의 마음이 훗날 내 큰아이를 특수교사로 만 드는 동기가 되지 않았나 하고 나름 생각한다. 252 미안하다 253

자식은 내 뜻대로 되지 않건만 맹학교 초등부를 졸업할 즈음 새로운 문제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비록 내 아이가 맹학교를 다녔지만 결코 맹인은 아니라는 오만한 나의 무지가 서울 여 의도 중 고등학교 저시력 학급을 선택하게 했고, 재학 중에는 친구들에게 내 아 이가 유명한 여의도중 고등학교를 다닌다고 운운하며 허세를 부렸다. 하지만 정 작 내 아이는 맹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안인도 아니다보니 시력 나쁜 아이들끼 리 반을 이루어 공부를 했고, 정상적인 급우들에 비해 꼭 대학에 가야한다는 절박 감도 적어 공부보다는 오락실 게임에 몰두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나는 내 아이가 대학에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 아이는 신체적인 조건만 불리할 뿐 못한다, 라는 생각은 결코 않는다 고 믿고 있었다. 허나 자식은 부모의 뜻대로 자라주지는 않았다. 한번,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대학교 시험에 떨어졌고 둘째 아 이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렇다고 내가 지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큰아이는 학원 칠판 글씨가 안보이 니까, 작은아이는 공부에 뜻이 없는데 학원비만 없앤다고 극구 사양하여 학원 한 번 안 보내고 오직 스스로 공부 할 수 있도록 집안을 조용하게만 관리 할 뿐 이었 다. 부모란 한 생명이 성인이 되어 바르게 살 수 있도록 앎을 깨우쳐주면서 건전하 게 양육하는 것인데 성적부진은 내 탓만 같아 미안했다 둘째 아이는 공부보다는 운동으로, 친구와 어울려서 패싸움을 하느라 하루가 바빴다. 언제였던가, 혼자 집으로 오던 중에 상대방 학생들로부터 집단 구타를 당 해 이가 부러지고 안경이 깨지고 머리가 찢어졌다. 나는 학교로 뛰어갔고 담임선 생님께 가해 학생을 잡아내라고 소리를 질렀다. 문제는 내 둘째 아이였다. 끝까지 가해자는 모르는 아이들이라고 둘러댔고 그리고는 귓속말로 나지막이 말했다. 창피한데 이러지 마세요. 8명 중에 두 놈은 갈비뼈가 나갔을 거예요. 둘째 아들은 아프다는 내색도 못한 채 혼자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았다. 잠시 였지만 며칠은 집에 일찍 들어오곤 했는데 대신 새벽에 안 보이는 날이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운동하러 나갔다 왔어요. 라는 대답이었는데 이웃에게서 들은 말은 가락시장에서 새벽부터 리어카 끌던데 였다. 리어카로 짐을 실어 옮겨주면 1번 에 3000원을 받는다고 했다. 또 어떤 날은 남한산성 올라가는 고갯길에서 오징어 를 팔고 있는 것을 보기도 했다고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낚시터에서 커피를 파는 데 가격을 묻지 않고 커피부터 달라고 하면, 마신 것을 확인 후에 1000원을 받고, 주문하기 전에 커피 값을 먼저 물으면 500원을 받는다고도 했다. 그렇게 모은 돈 으로 여름이면 동해안에 가서 방학 내내 신나게 놀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큰 아이는 너무 병약해서, 작은아이는 너무 혈기왕성해서 두 아이 모두 걱정거 리였다. 나는 참으로 아둔한 엄마였다. 두 아이의 실력이 앞에서 등수를 찾는 것 보다는 뒤에서 찾음이 훨씬 빠른데도 대학의 문턱이 얼마나 높은지를 모르고 있었 다. 세월이 쌓이면서 큰 아이에 대해서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맹학교 중 고등부를 졸업했다면 안마사 자격증은 가질 수 있었을 텐데, 그러면 어려운 이웃 에게 도움도 주면서 필요로 하는 사람임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다시 맹학교 고등부에 다님이 정석 아니겠는가? 이 렇게 생각이 미치자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큰아이도 내 뜻대로 순순히 따 라와 주었다. 이제는 그도 공부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몸으로 느끼는 듯 했다. 허나 작은 아이는 여전히 공부보다는 돈 벌기가 더 쉽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놀랍게 도 오랫동안 책상 앞에 있는 작은 아이를 보며 내심 만족했는데 그가 외출하고 없 을 때 무슨 공부를 했나하고 확인해보니 선배에게 쓴 편지 가 있었다. 형이 군대를 간 이후 나는 성남을 지키느라고 밤잠을 못 잡니다. 그날 저녁 늦게 들어 온 작은 아이에게 한마디 했다. 네가 성남을 지키지 않으면 성남시를 누가 훔쳐 간대니? 그랬던 작은 아이도 군대를 갔다. 원래 그 아이 취미는 트럼펫을 부는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취미였을 뿐 특기는 아니었다. 그러던 그 아이가 군악대를 지원하여 254 미안하다 255

트럼펫을 다룬다는 말을 듣고 나는 기가 막혔다. 전문적으로 악기를 다룬 대원들 틈새에서, 더군다나 군기가 엄청나게 세다는 군악대에서 잘 견뎌줄지 걱정이 되었 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일요일 면회를 갔더니 몇 번이고 면회 왔다고 방송하던 면회실의 사병이 누군가와 오랜 통화 끝에 행사장에 갔는데 언제 돌아올지 모른 다고 합니다. 고 들려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 아이의 엄마이다. 직감이라는 것이 있었다. 어느 행사장이냐? 누가 인솔 했느냐? 꼬치꼬치 물어도 더 이상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수소문 끝에 인근에 살고 있는 군악장 집을 찾아갔다. 만 약 사병 말대로 행사장에 갔다면 당연히 그 역시 집엔 없어야한다 하는 맘으로, 아 니 사실 제발 없기를 바라며 찾아 갔는데 그는 집에 있었다. 그는 몸이아파행사 장에 못 갔습니다. 라고 내게 말했다. 나는 말없이 돌아선 후 일주일이 빨리 지나가기를 학수고대 했다. 일주일 후, 나 는 새벽부터 남편을 깨워 큰 아이까지 데리고 면회를 갔다. 들통 가득 돼지갈비와 찰밥, 통닭과 초코파이 등 야외 캠핑 가듯이 음식과 과자를 챙겼다. 면회를 신청 했 더니 바람처럼 빠르게 달려왔다. 아이가 의자에 앉기도 전에 질문부터 했다. 지난 일요일은 어느 행사장에 갔었니?. 몇 시에 돌아왔니? 오후 6시가 넘도록 부대 근처에 있었는데. 말해봐라. 일주일이나 기다렸다. 이윽고 아이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내 팔을 끌더니 남편 안 듣게 낮게 말했다 영창에 갔다 왔어요. 한, 두 달 먼저 입대한 선임병 둘이 트럼펫 못 분다고 허구 한 날 기압을 줘서 더 이상 못 참고 두 놈을 패 버렸거든요 나는 말없이 작은 아이를 앞세우고 다시 면회실로 갔다. 얻어 맞고도 같이 영창 에 간 선임병 둘과 악장, 군악대장까지 면회 신청을 했다. 얼마 후에 악장이 선임 병 둘과 나왔다. 선임병들은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안절부절 했으나 나는 손을 잡아끌며 음식을 많이 준비 해 왔으니 같이 먹으라는 말만 했다. 그리고 악장과 얘 기했다. 아직도 구타가 있습니까? 그는 손사레를 치며 극구 부인했으나 작은 아이와 눈이 마주치니까 체념한 듯 지난 번에 오셨을 때 바로 알려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부터 했다. 그런 후 상황을 듣고 있는데 군악대장이 도착했다. 대장은 부대 내의 구타와 하극상을 놓고 고민 끝에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색소폰, 나팔, 트럼펫 대원이었지만 위계질서 상 헌병대에 넘겨 일주일간 혹독한 시련을 겪게 했노라고 하면서 이번 조치는 교통신호를 위반하여 빨간딱지 끊은 정 도의 영창 생활일 뿐 호적에 범법자로 기록 되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불가피한 처 벌이었다고 애써 안심 시켰다. 나는 이해했다. 행여 탈영이나 하지 않을까 조바심하던 작은 아이였다. 자유분 방하던 아이가 절제된 생활 속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곳에 서 그 답답함이 오죽 했으면 손을 철조망사이 밖으로 내 놓고 아! 행복해 라고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을까! 나는 대장에게 부탁을 드렸다. 다른 부대로 전출시켜 달라고는 하지 않겠다. 그 부대인들 문제 아이를 그냥 방관하지는 않을 테고 하니 내 아이는 트럼펫을 자유자재로 불어대는 정도의 실력이 결코 아니니까 군악대에 누가 되지 않는다면 힘쓰는 일을 맡겨 달라고 했다. 그날 이후 작은아이는 부대원 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취사병이 되었다. 결국 제대하는 날까지 병과는 군악대지만 행사장에는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한 채 주방에서 칼질만 해댔다고 했다. 매일매일이 감사한 하루 그랬던 둘째 아이가 제대 후 많이 달라졌다. 웬일인가 싶을 정도로 공부를 하더니 서경대학교 법학과에 합격을 해 버렸다. 공부 하는 것 외엔 길이 없었던 큰아이 역 시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6년 만에 우석대학교 특수교육과에 합격한 순간 코끝이 시 리며 회한이 봄눈 녹듯 흘러 내렸다. 한 고비를 무사히 넘겼다는 안도에 매일이 감 사했다. 256 미안하다 257

세월이 흘러 큰 아이는 특수교사로, 작은 아이는 대학원 재학 중까지만 사시 응 시를 했고 곧 포기시켰다. 계속해서 대학교 입시에 떨어질 때 이미 그 아이의 수준 을 알았고, 내가 물려준 능력이 결코 법조인이 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기에 신체 건강하니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했다. 지금은 우리나라 제1의 로펌인 태평양 에 서 의뢰인들이 승리할 수 있도록 변호사들의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다 어느 날 큰 아이가 작은아이에게 그 날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우리 아이들이 고등학생인데 진로가 걱정이야. 성남시에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남한산과 학교 건너편에는 영장 산이 있다고 누누이 강조한 후 무슨 산 이 있다고 했지? 하고 질문했더니 한 학생이 번쩍 손을 드는 거야. 지명했더니 의 기양양하게 등산 하고 대답하더라. 작은 아이는 배를 잡고 웃었지만 큰아이는 심각하게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더니 아이들을 어떻게 세상 속으로 들여보내야 할지, 어머니의 심정을 이제야 이해할 것같아 하고 중얼거렸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모자라는 어미의 둥지에서도 곱게 자란 심성에 고마웠고 하마터면 굴곡진 삶을살뻔했던나를겸손한사람으로 거듭 나게한큰아이의생 명이 새삼 나를 숙연케 했다. 그때 차 멈추는 소리가 들렸고 민희 엄마가 들어 왔다. 너무 늦어서 죄송해요. 정말 감사 드려요 잠든 민희를 힘들게 안고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제 내 아이들 은 각자의 위치에서 원하는 삶을 살고 있고 오히려 내 건강을 염려하는 지라 나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는데 이렇게 임대아파트단지 내에 위치한 사회종합복지관의 방 과 후 교실에 서 숙제를 돌 봐 주는 일을 자원하니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항상 기 쁘구나. 자식은 내 인생의 거울이라는 말이 생각난다.내 아이들이 건강하게 살면서 주는 기쁨을 누리는 삶이될 것으로 믿고 싶다.내일은 민희를 위해서 날씨가 맑기를 바 란다. 258 미안하다 259

자기능력개발 수범사례 자기능력 개발의 실천모델이 되리라 김임태 테마가 있는 시내버스 최병윤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서상문 나는 알비니즘(albinism)인이다 이동일 知 天 命, 새로운 시작이다 허종구 꿈을 찾는 자율적인 인간이 되자 박형옥 비전이 이끌어준 삶 김지환 인생은 짧고 배울 것은 많다 박준수 263 275 287 297 309 323 335 353

자기능력개발 수범사례 자기능력 개발의 실천모델이 되리라 김임태 경기도 시흥시 목감동 XXXXXXXXXXXXXX 아름다운 빛깔의 단풍이 결실의 가을을 알립니다. 자기능력개발 부문 최우수상 수상은 다 른 사람들에게도 그 노하우를 전달하라는 메시지인 것 같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실천하는 미래 희망 코치로서 자기능력개발 바이러스를 퍼뜨 리겠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고자 할 때 저의 이야기를 다운로드 할 수 있도록, 그리고 거기서 한 단계씩 새롭게 업그레이드할 수 있도록. 부족한 저의 수기를 뽑아 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과 이 글을 읽고 계신 모든 분들께 감사 합니다.

이건 내 길이 아니야 너 복덕방 할 거야? 대학 시절 공인중개사 자격시험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친구들이 한 말이다. 사실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해 놓으면 괜찮을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를 했고, 시험에 합격했다. 공인중개사 자격시험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지만 내 적성과는 잘 맞지 않 았다. 왜 맞지 않았을까? 전남 진도에서 중학교 졸업 후 양복기술을 배우려 서울로 상경해 양복점에서 기 술을 배웠다. 그러나 바느질을 잘못해 다시 뜯다가 새 옷의 천을 찢어 먹고, 다리미 로 옷을 태워 먹다 보니 거의 날마다 야단을 맞으며 생각했다. 이 길은 내가 가야 할 길이 아닌가 보다. 다음에는 출판사에서 책 만드는 제본 일을 했다. 책 만드는 종이가 너무 무거워 19살 나이에 감당하기에는 힘들었다. 그러나 그 일은 매일매 일 책을 가까이 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날마다 책을 만들면서 나도 책을 한번 써보고 싶다 는 생각도 들었다. 영어의 알파벳도 잘 모르는 실력이었다.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진학을 목표로 정했다.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에 합격하 고, 경원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사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선택한 것도 뚜렷한 목표 없이 막연히 돈을 벌어 보고 싶어서였다. 내 진로에 대하여 이처럼 몇 번의 시 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 사람들이 진로를 선택할 때 시행착오를 겪지 않도록 도와주는 일을 해야 겠다. 막연한 생각보다 자신의 적성과 소질에 맞춰 진로를 결정하도록 도와준다면 좋을 것이다. 우선 직업과 노동에 대하여 공부해야 했다. 그래서 건국대학교 행정대학원 노사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노무관리를 전공하였다. 그리고 진로 지도를 위한 상담지식 을 배우기 위해 산업카운슬러 과정에 등록하여 공부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자기능력개발을 위해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내게 필요한 것이라면 장소가 어디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다음에 배워야지 라는 생각을 버리고 당장 실천했다. 1988년부터 현재까지 한국생산성본부의 인력관리사, 한국산업카운슬러협회의 산업카운슬러, 한국경영기술지도사회의 경영지도사, 한국여가레크리에이션협회 의 레크리에이션지도자, 한국심성교육개발원의 심리상담사, 한국청소년상담원의 품성계발지도자, 한국기술교육대학교의 집단진로지도 프로그램 진행자, 한국표준 협회의 교육훈련실무자, 대한적십자사의 간병인 교육, 공무원사이버교육센터의 창 의력개발, 자료수집 및 분석기법, 리더십향상, 기획력개발, 인사실무 등 사이버교 육과정과 행정자치부 정보화교육센터의 프레젠테이션과정, 엑셀 야간과정, 중앙사 이버교육원의 교수요원능력발전과정, 퍼실리테이터역할과 스킬과정 등 41여개의 과정을 다양한 기관에서 집합교육과 온라인 사이버 학습방법으로 공부했다. 이렇 듯 다양한 교육기관에서 내게 필요한 과정이라면 주 야간, 집합 온라인 등을 가 리지 않았다. 자기능력개발을 할 때는 나는 건국대학교 행정대학원에 다닌다, 난 경영지도 사 자격을 공부하고 있다 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알렸다. 그 이유는 공부가 힘들더 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미 알렸기 때문에 쉽게 포기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또한 주위 사람들에게 권하여 함께 능력개발을 했다. 주위 사람과 같이 자기능력개 발을 하는 경우 많은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어 효과적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노동부 재직 시 직장동료에게 레크리에이션 지도자 과정을 권하여 함께 교육 받았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면 한 마디도 못하는 성격이었지만 지금은 대중 앞에서 강의도 잘한다. 그 후 그 동료는 대학원에 진학하여 졸업했다. 그는 지금도 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곤 한다. 통일부 공무원으로서 새터민의 진로지도를 담당하며 사 회복지학적인 접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통일부 직장 동료와 함께 중부대학교 원 격대학원에 입학하고 졸업해 사회복지사 자격을 함께 취득했다. 지금은 직장 동료 이자 대학원 동기동창으로 지내고 있다. 264 자기능력개발의 실천모델이 되리라 265

평일 근무가 끝난 저녁시간은 물론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자기능력개발을 하였 다. 당신은 아내보다 공부가 더 좋냐 고 핀잔을 주는 아내에게 오히려 함께 공부 하자 고 했다. 결국 아내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유아교육학과를 졸업했다. 옆에서 컴퓨터로 인터넷 학습을 하는 내 모습을 보고 당시 고등학교에 다니던 큰 아들도 영어와 수학 등의 과목을 EBS 인터넷 강의로 수강해 원하던 서울대학교 사회복지 학과에 합격했다. 이렇듯 자기능력개발은 가족과 이웃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 단지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전공했다는 것만으로는 진로 직업지도 전문가로 인 정해주지 않는다. 진로 직업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직접 경험하는 방법이 좋다. 하지만 수많은 직업을 직접 다 경험해 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에 대한 좋 은 방법이 자격증을 취득함으로서 그 직업에 대하여 간접 경험을 하는 것이다. 30개 자격증 취득과 25권 저술에 의한 자기능력 개발 자기능력개발을 하더라도 효과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막연히 공부해야지 라는 생각만 가지고는 학습이 잘 되지 않는다. 대신 자격증을 취득하여 활용하겠다 는 목표를 가지고 공부할 때 학습효과가 좋았다. 자격증을 내것으로 만들기 위해 더 집중해서 공부를 하기 때문이다. 워드프로세서 자격취득을 위해 내 나이 35세 때 타자연습만 하루에 3~5시간씩 했다. 주위 사람들은 무슨 고시공부라고 저렇게 열심히 하는지 라며 이상한 사 람 취급을 했다. 하기야 주로 초등학생이나 중학생들이 따는 자격증이니 이런 말을 듣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처음에 한글 타자 속도가 1분당 5타 ~10타였다. 아무리 연습을 해도 1분당 40타~50타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독수리 타법의 결과였다. 그래서 ㄱ ㄴ ㄷ ㄹ 기본부터 다시 시작 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차츰 속도가 붙었다. 6개월 정도 연습하니 200타, 250 타가 넘어갔다. 워드프로세서 자격시험에 응시하여 자격을 취득했다. 자기능력 개 발에는 기본이 중요함을 이 때 알았다. 주로 어린 학생들이 따는 워드프로세서 자 격을 나는 35살에 취득했다. 그 워드프로세서 자격증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25권의 책을 저술했다. 만약 워드프로세서 자격을 취득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결과다. 1985년 공인중개사를 시작으로 사회복지사, 경영지도사, 직업능력개발훈련교 사, 교통안전관리자, 경영학사, 인력관리사, 행정학석사, 사회복지학석사, 산업카 운슬러, 방화관리자, 청소년지도사, 워드프로세서, 판매사, 노무관리 직업훈련교 사, 택시운전자격, 한자능력 3급, 레크리에이션지도자, 심리상담사, 품성계발지도 자, 지게차 건설조종사 면허, 굴삭기 건설조종사 면허, 로우더 건설조종사 면허, 자 동차진단평가사, 노무관리 직업훈련교사 면허, 경영일반 직업훈련교사 면허, 아마 추어무선기사 등 30개의 자격과 면허를 취득하여 진로지도 전문성을 객관적으로 검증받았다. 특정 자격증에 대하여 별 볼일 없는 자격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자격증도 쉽게, 저절로 취득할 수는 없다. 어떤 자격증이든지 나는 그 자격 증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했다. 저 자격증은 나에게 평생 도움을 줄 대단한 자격증 이다 라고 말이다. 한자 급수시험은 두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같이 준비했다. 몇 개월 동안 새 벽 5시에 일어나서 한자 공부를 했다. 어느 날 작은 아들 수담이가 아빠 왜 그렇게 한자 공부를 열심히 해? 아빠는 한자도 다 알면서 라고 물었다. 난 아들에게 호랑 이는 작은 토끼를 사냥하더라도 온 힘을 다 한단다 라고 대답했다. 결국 토끼를 잡 기위해온힘을다한나는한자3급 급수 자격을 취득했고, 두 아들은 불합격했다. 두 아들은 호랑이가 왜 온 힘을 다해야 하는지를 그 때는 몰랐으리라. 266 자기능력개발의 실천모델이 되리라 267

나는 주위 사람은 물론 가족에게도 능력개발 바이러스를 전염(?)시키는 사람이 다. 우리 가족이 가지고 있는 자격증은 총 55개다. 아내가 취득한 자격증은 유치원 교사, 직업훈련교사, 컴퓨터활용능력, 워드프로세서, 자동차운전면허 등 5개이다. 그리고 오는 9월 29일에 발표하는 축산기능사 자격증도 취득할 것이다. 현재 축산 기능사 1차는 합격하고 2차 실기시험을 무난히 잘 보았다. 아내는 또 하나의 자격 증을 취득하게 된다. 큰 아들은 정보처리기능사, 워드프로세서, 자동차운전면허, 굴삭기건설조종사면허 등 4개, 작은 아들은 워드프로세서, 컴퓨터활용능력, 검도1 단, 자동차운전면허, 굴삭기건설조종사면허, 지게차건설조종사면허 등 6개를 취 득하였다. 우리 가족은 가족 모두 컴퓨터 관련 자격증이 있어서 메신저, 이메일, 블 로그 등 컴퓨터를 통한 대화를 자주 한다. 민 취업지원프로그램 개발 (한국고용정보원), 진로선택 (무지개청소년센터), 기초직업적응훈련 (한국폴리텍 1대학), 새터민 청소년의 진로의식 및 진로현황 실태 조사,(교육과학기술부) 등 25권의 책을 저술하여 다른 사람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나는 지금도 진로지도 할 때 책읽기 싫으면 책을 써라 는말을종 종 한다. 책을 쓴다는 것은 가장 효과가 좋은 자기능력 개발 방법이다. 공부하기 싫으면 책을 써라 큰 아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 수학 성적이 다른 과목보다 낮았다. 그래서 수학 공부 가 잘 되지 않으면 책을 써 보아라 고 말하면서 내가 공부할 때 정리했던 책 같은 노 트를 보여 주었다. 후에 수학 성적이 좋게 나왔다. 어떻게 했냐고 물었더니 아빠 말 씀대로 책을 썼어요 라면서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되어 있는 노트를 보여 주었다. 지금까지 책을 25권 썼다. 책을 쓴 이유가 있다. 첫째는 공부하기 위해 책을 썼 다. 책을 쓰기 위해서는 그 내용을 잘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공부하지 않을 수 없 다. 책을 쓰면 저절로 공부가 되는 것이다. 둘째는 내가 취득한 자격과 공부한 노하 우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어서였다. 그동안 습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1995년부 터 청소년지도 (한국청소년지도사협회), 직업상담원 직무분석 (한국직업능력 개발원), 노동관계법규 (가산출판사), 취업지원업무편람 (노동부), 직업의 종 류 (하나원), 북한이탈주민 직업지도프로그램 개발 (중앙고용정보원), 북한이 탈주민의 취업능력 향상을 위한 제도 개선 방안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새터민 청소년 교육의 현황과 과제 (남북문화통합교육원), 진로와 직업 (하나원), 새터 강의는 레크리에이션이다 좋은 책이 있고 지식을 갖춘 강사가 있더라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 다. 나는 원래 부끄럼 많이 타고 남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는 성격이었다. 땀 뻘뻘 흘리며 목소리 터지도록 강의하고, 많은 자료를 프린트해서 교육생에게 제공해도 교육효과는 별로였다. 생각을 바꾸어 보았다. 전문지식을 레크리에이션화 해 보자. 그래서 레크리에이 션 자격을 취득하여 강의에 접목했다. 많은 사람들의 학습태도와 반응이 달라졌다. 1999부터 한국산업카운슬러협회에서 직업지도론 및 노동관계법, 노동부에서 고 용안정센터직원을 대상으로 구인관리와 취업알선, 한국여성민우회 일하는 여성의 집에서 직업정보론, 한국생산성본부 직업상담현장실무, 실업극복지원센터에서 상 담원 및 직원을 대상으로 취업처 개발의 전략과 노하우, 한국노동교육원에서 고용 안정센터 직원을 대상으로 고용보험 및 직업능력개발, 안양YWCA 여성인력개발 268 자기능력개발의 실천모델이 되리라 269

센터에서 경력개발관리, 통일부 통일교육원에서 북한이탈주민의 사회적응 직업지 도, 통일부 하나원에서 진로와 직업,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대전직업능력개발 센터에서 21세기의 직업세계와 성공적인 직장생활, 대구대학교에서 여성과 직 업, 서울특별시립 중랑청소년수련관에서 남북청소년하나되기, 육군 정보사령부 에서 전역자 취업보도관련 경력개발, 대명직업전문학교에서 직업진로, 공릉종합 사회복지관에서 취업활성화 방안, 자유북한후원회에서 새터민 취업현황과 활성화 방안, 대우자동차판매주식회사에서 신입직원 적응 및 이해, 현대호텔관광직업전 문학교에서 취업활성화 방안,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서 새터민 남한사회의 정착현 황과 과제, 열매나눔재단에서 신나는 직장생활, 서울 신월청소년문화센터에서 수 급권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로지도 등 약 1,000회 이상 강의했다. 강의를 철저히 준비한 만큼 교육효과는 좋았다. 결국 강의는 저절로 자기능력개 발로 이어졌다. 이처럼 자기능력개발에 의한 자격증을 취득하여 그 지식을 바탕으 로 재미있게 강의하여 지식을 공유하고, 배워서 남 주는 기쁨을 얻게 된 것이다. 자기능력 개발에 날개 달기 끊임 없는 학습과 자격취득으로 진로 및 경력개발전문가가 되자 워크숍, 세미나, 심포지엄 등에서 주제발표 요청을 받았다. 그러던 중 개성공단 노무관리 대책 워크 숍에서 발표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20분 발표를 위해 남한 기업의 노무관리는 기본이고, 북한의 직업, 북한사람의 행동특성, 직업관, 북한의 산업재해 등에 대해 서 1개월여 동안 새터민을 대상으로 연구했다. 북한에서는 1일 노동시간은 480 분 이라고 한다. 이는 1분도 헛되이 보내지 마라는 의미라고 했다. 이러한 내용을 워크숍에서 발표했다. 참석한 청중들의 시선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각종 전문가 회의 및 워크숍, 세미나에서 발표하는 것은 자기능력개발을 하기 위 한 절호의 기회다. 전문가들이 많이 참석하기 때문에 기존 지식을 업그레이드해서 발표하게 된다. 저절로 능력이 한 단계 향상되는 것이다. 1999년 한국직업능력개 발원의 성인용과 실업계고등학생용 진로지도프로그램개발 전문가협의회 에 참 석한 것을 시작으로, 통일부 워크숍에서 진로직업지도 프로그램 개선방안 발표, 통 일연구원의 북한이탈주민의 성공적인 경제생활을 위한 교육 방안 워크숍 참석, 태 화기독교사회복지관의 북한이탈주민의 사회적응세미나에서 주제발표, 부산대학 교 사회복지연구소의 남한거주 북한이탈주민의 경제적 자립 심포지엄에서 토론자 발표, 북한이탈주민후원회의 북한이탈청소년 교육제도의 현황과 과제 세미나에서 발표,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정책토론회의 새터민 취업촉진을 위한 직업능력개발 방안에 대하여 토론자로 참석했다. 통일부 개성공단 대책 워크삽에서 북한이탈주민을 통해 본 개성공단 노무관리 대책주제를 발표한 후, 한국산업인력공단 중앙고용정보원의 북한이탈주민 직업지 도 프로그램 효과성 검증 자문회의 참석, 한국기술교육훈련학회의 북한주민 직업 능력개발 방안 세미나에서 주제발표, 서울YWCA의 직업적응 능력향상을 위한 세 미나에서 지정토론, 북한이탈주민연구학회의 창립세미나에서 북한이탈주민의 취 업현황과 과제에 대하여 주제발표, 평택대학교 대학원의 학술세미나에서 외부전 문가로서 주제발표,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직업훈련프로그램개발 전문가회의 참 석,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연구원의 새터민 관련 전문가협의회 참석, 북한이탈 주민지원 민간단체 연대 워크숍에서 새터민 취업문제점과 활성화 방안 주제 발표, 자유북한후원회의 새터민 취업현황과 활성화 방안 정책토론회에서 주제 발표, 한 국직업능력개발원의 새터민청소년 진로실태 조사 연구 및 정책 토론회에서 토론 자 로 참석하는 등 30여회의 주제발표 등을 하여 자기능력개발에 날개를 달았다. 270 자기능력개발의 실천모델이 되리라 271

자기능력 개발 바이러스 퍼뜨리기 지식은 퍼뜨리면 커진다. 넌, 주위사람을 가만 놔두지 않는다 라는 말을 들으며 사회활동을 통해 그동안 습득한 지식을 퍼뜨렸다. 1991년 법무부 서울보호관찰소의 보호위원, 서울특별시청소년사업관의 시민자 원봉사단원, 서울시 중랑구의 청소년아동복지위원, 서울특별시의 시정모니터, 법 무부의 범죄예방자원봉사위원, (주)월드리서치의 국정모니터, 한국산업인력공단 의 국가기술자격시험 직업상담사 출제위원 검토위원 자문위원, 한국산업인력 공단의 직업상담직종 전문위원, 안양여성인력개발센터의 운영위원, 한빛종합사회 복지관의 자문위원, 한국산업인력공단 인적자원개발 진단평가위원, 한국고용정보 원, 고용지원서비스 우수기관 인증평가위원,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직업능력개발 훈련기관 평가위원 등으로 위촉되어 내가 습득한 지식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 전달, 지도하며 자기능력개발바이러스를 퍼뜨린다는 사실에 신이 나고 보람을 느낀다. 1988년 한국생산성본부 회장상, 건국대학교 행정대학원장 공로상, 체육청소년 부장관상, 법무부 서울보호관찰소 표창, 서울특별시 중랑구청 중랑구민제안 최우 상 2회 표창, 서울특별시장 2회 표창, 노동부장관 실업대책 제안 금상, 통일부장관 2회 표창, 중부대학교 총장상을 수상했다. 2006년에는 직업능력개발유공 국무총리 표창을 받음과 동시에 교육인적자원부 주최 제3회 평생교육대상 개인학습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2007년엔 제10회대 한민국 신지식인(교육부문)으로 선정되었고, 2008년 2월에는 한국HRD협회의 제6회한국HRD대상 명강사대상을 수상하였다. 이런 상들을 수상한 것은 미래 진 로희망코치로서 더 열심히 노력하라는 메시지로 알고 자기능력개발 바이러스를 퍼뜨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김임태 블로그(http://blog.daum.net/mire22)를 운영한지 570여일 되었다. 블로그에 직업능력개발, 자격증 취득코치, 경력개발, 진로지도, 자녀교육, 직업 및 노동, 교육, 북한 및 새터민 등의 내용을 600개 이상 올렸다. 현재까지 13 만명 이상이 내 블로그를 방문했고, 질문 및 댓글을 달고 있다. 나는 블로그를 통해 서도 자기능력개발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있다. 선생님 답변 감사합니다. 항상 바쁘시면서 블로그를 만들어가지고 우리들에게 도움을 주시는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 (2008. 9. 9. 112님). 내 블로그에서 이런 댓글을 보면 미래 희망코치로서 난 너무 행복하다. 평생 자기능력 개발의 실천모델이 되리라 정규교육만으로 평생 생활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이제 할아버지 장래 희망 이 무엇이예요? 라는 질문이 결코 이상하지 않다. 그만큼 평균수명이 연장되어 정 년퇴직을 하고도 수십년을 더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 따라서 평생자기능력개발이 필요하다. 요람에서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자기능력개발을 해야 한다. 나는 능력개발에 대하여 늘 생각했다. 100번이고 1,000번이고 생각했다. 비록 그것이 당장 실현하기 힘든 것이라도 이루어질 때까지 늘 생각했다. 그리고 계획을 세우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구체화시켰다. 어릴 적에 책을 써야 겠다 는 허무맹 랑한 생각을 했고,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실천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책을 25권 썼고, 자격증 30개를 취득했다. 앞으로 책 25권의 더 쓰고, 자격증 20개 더 취득할 계획이다. 이러한 자기능력개발 노하우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할 것이다. 당신 공무원 맞느냐?, 무슨 공무원이 그렇게 많은 책을 쓰고, 그렇게 많은 자 격증을 따느냐?, 공무원이 그렇게 강의를 재미있게 하느냐? 라는 질문을 받는 다. 공무원이지만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능력개발을 실천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계속 놀라게 하고 싶다. 그리고 자기능력개 발 바이러스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전염(?)시키고 싶다. 나, 김임태는 미래희망 코치로서 평생자기능력개발의 실천 모델이 되리라. 272 자기능력개발의 실천모델이 되리라 273

자기능력개발 수범사례 테마가 있는 시내버스 최병윤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전미동 XXXXXXXXXXXXXXXX 제가 수상을 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모두에게 귀감이 될 수 있도록 분발하라고 격려해 주시는 의미의 상으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운전하는 시내버스 가득 배움의 열정으로 차있다는 것을 승객들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저로 인하여 할 수 있다 는 자신감을 갖고 새롭게 평생교육의 장으로 들어오는 분들이 많아지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영어 방송만 듣는 버스기사 유치원이거나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아이가 엄마와 버스 자리에 앉아서 의자에 걸려있는 책 표지를 보더니 엄마 여기 아이작 선생님이다! 할리 선생님도 있네? 하면서 책장을 넘기는 모습이 정겹다. 한 고등학생이 버스에 오르기도 전에 친구에 게 이야기한다. 영어 방송만 나오는 차다 20곡에 이르는 유리창에 붙어있는 팝송 가사를 읽으면서 버스 안에 울려나는 모닝 스페셜 영어 방송을 듣고 있는 운전자를 이상하다는 듯 눈길을 보내는 대학생인듯한 승객의 뜨거운 시선이 버스 운전석으 로 향한다. 나는 시내버스를 운전하는 버스기사다. 격일제로 근무하면서 벌써 만 8년여를 시민들의 이동을 책임지며 운전석에 앉아 있다. 새벽 5시 정도에 집을 나와서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 오면 언제나 밤 11시가 넘는다. 운행 준비를 하여 버스에 6시정 도에 오르면 거의 밤 11시까지는 버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셈이다. 버스에 오르자 마자 나는 라디오를 켜고 EBS에 채널을 맞춘다. 그러면 귀가 트 이는 영어 를 시작으로 9시까지 영어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모두가 너무 훌륭한 프 로그램이어서 한 프로그램도 놓치기가 싫을 정도다. 가끔 일찍 출근하면 바삭바 삭 영국영어 도 들을 수가 있지만 사실 거의 듣지 못하여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아 침 9시가 되어 영어 방송이 없을 땐 쉬는날 녹음해둔 모닝 스페셜 테입을 듣는다. 물론 승객들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영어 방송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다. 12 시가 되면 또 폰폰 잉글리시 그리고 오후 5시가 되면 레이 한의 팝스 잉글리시 를 시작으로 저녁 9시까지 영어 교육방송이 계속된다. 자연스럽게 나는 중, 고교 영어부터 고급 영어까지 접하게 된다. 물론 영어 교육방송이 없는 시간엔 녹음 테 입을 틀고 다닌다. 그래서 내 버스 안의 라디오 카세트는 수명을 오래하지 못한다. 거의 1년을 넘기지 못한다. 그동안 몇 개의 카세트 라디오를 교환했는지 잘 기억 이 나지 않는다. 스트레스와 고통을 이겨내는 비법 오래 전 심야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었다. 조금 특별한 학생들의 생활을 조명하 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인라인 스포츠를 처음으로 접하고 연습하는 학생들의 일상이 담긴 프로그램으로 기억된다. 공부는 도외시하고 온통 인라인 스 포츠에 빠져 있어 일반인들의 눈엔 문제아로 보여지는 아이들이 집에 가서 인터넷 으로 영어공부를 하는 모습에 취재하던 기자가 의아해 하며 왜 공부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우리나라 인라인 스포츠 선두주자인데 어디서 기술을 배 울 수 가 없어 인터넷을 통하여 외국에서 기술을 배워야 하는데 모두 영어로 되어 있어 영어를 공부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선진 기술을 배우고 앞서 가지요. 내가 왜 그 프로그램의 학생을 연상하고 영어공부 를 시작했는지 스스로도 의아 스럽다. 시내버스 운전은 일반 승객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훨씬 힘든 직업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때론 감내하기 힘들 정도로 고통이 함께 한다. 특히 스트레 스는 그 도가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내가 승객으로 버스를 이용할 적에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버스기사는 스트레스를 기준으로 직업군을 분류한 자료에 도 초고도의 직업군에 분류되어 있다. 전에 어르신들이 하는 뼈가 끊어지게 아프 276 테마가 있는 시내버스 277

다 라는 표현을 종종 들어본 적이 있다. 난 그 고통을 시내버스 운전하고 직접 경 험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목과 어깨 근육이 끊어지게 아프다. 난 그 스트레스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운전석에서 운전만 멍청하게 하면 서 고통스러워하지 말고 무언가를 또 할 수는 없는지, 또 다른 무언가를 하면서 스 트레스와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중 그 프로그램이 떠올랐고 동시 에 영어가 떠올랐다. 그래 영어공부 를 하자! 적어도 운전하면서 들을 수는 있지 않은가? 그렇게 결심하자 오래전 출근하면서 채널을 돌리던 중 우연히 들었던 교 육방송 영어프로그램이 생각났다. 이렇게 좋은 프로그램을 교육방송에서 해주는 구나. 라고 생각했던 모닝 스페셜 을 들으면서 그냥 무조건 영어 프로그램 전부 를 듣기 시작했다. 지금 고백컨대 약 1년 정도를 의미도 모른 채 그냥 소리로만 들었다. 그 소리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영어 사전을 찾기 시작했고 의미를 알기 위해 녹음을 하기 시 작했다. 무한 반복 청취를 한 것이다. 약 6개월이 지나면서 아주 조금씩 단어가 들 리고 문장이 들리기 시작했던 거 같다. 내 아들과 딸의 중 고교 영어 교과서와 참고 서는 버리지 못하게 하고 내가 보기 시작했다. 120분용 녹음 테입을 사서 쉬는 날 에 방송 녹음을 한 테입을 운전 중 무조건 들었다. 테입이 망가지고 카세트가 망가 지고. 온통 집안을 어지럽힐 정도로 테입이 집안을 장식했다. 어디 지나가다 영어책을 버려 놓은 것이 있으면 집에 가지고 와 책장에 꼽아놓고 보기 시작했다. 나의 일상이 영어공부 와 연결되면서 처음엔 집사람이 짜증을 냈지만 곧 아이들 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나의 설득에 이해해 주었고 또 내 딸 아이는 나 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매일 인터넷에 올라온 스크립트를 프린터로 출력 하여 출근하는 나에게 들려주었다. 그래서 종점에 가면 그 스크립트를 읽어보고 운 행 중에 녹음 테입을 들으면 이해도가 훨씬 빨라졌다. 물론 영어 듣기에 직업의 특 성상 집중할 수 없었지만 1%를 들을 지언정 그렇게 8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꾸준히 이어왔다. 그러다 보니 이젠 대학에 다니는 나의 딸아이에게 모르는 지문을 설명해 주고 방법도 지도해 주며 아빠의 위상도 찾아가는 자부심도 느끼게 된다. 어울리고 참여하며 한 걸음 더 어느 순간 이제 영어로 말이 하고 싶어졌다. 직접 영어로 대화를 하고 상대방과 영 어로 교감을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외국인이 지나가면 먼저 다가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관광가이드 북인 듯한 책자를 손에 들고 있 는 외국인 노부부가 한 쪽에 서 있으면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채서있는모습 을 보고 시내버스 운전 중 손님을 다 태우고 앞으로 나아가 외국인 부부 앞에 차를 바짝 세우고 앞문을 열었다. Hi! May I help you? 라고 내가 말하자 그 부부의 동공이 엄청나게 확대 되는 것 을 나는 보았다. Where are you headed for? Where do you want to go. Sir? 그 부부는 놀람을 감추고 어색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금산사... I want to go 금산사. 나는 얼른 종이를 찢어 버스 넘버를 적었다. Take the bus No.79 It'll be here every 20 minutes. Please be waiting, It won't be long to come. Have a nice trip in Korea! 나는 쪽지를 건네고 뒷 차의 경적 소리에 서둘러 출발을 했다. 떠나는 나를 향해 두 손을 흔들던 그 부부의 행복한 표정을 나는 잊을 수 없다. 한 시골의 마을 종점에 도착했다. 그런데 두 여학생인듯한 손님이 내리지 않고 당황스런 눈망울만 돌리면서 나를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여기 종점인데요. 그러 자 한 여학생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 전주역 갑니다. 하고 말한다. 말투로 보아 외국인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왔다고 한다. 우리말을 잘 못했지만 다행히 방학을 맞아 배낭여행을 온 대학생들이라 우리말과 영어를 조금씩 할 수 있 어서 대화에 전혀 지장이 없었다. 광주에 가려면 기차 편은 갈아타기 복잡하니 고 속버스를 이용하라 알려 주고 정류장도 아닌 곳에서 터미널 근처에 다시 내려 주고 위치를 설명해 주는데 배낭 깊숙한 곳에서 조그만 드링크제를 내게 건네주던 그 여 학생들의 따뜻한 미소를 정말 잊지 못한다. 278 테마가 있는 시내버스 279

내 버스에 올라온 외국인 선교사가 유리창에 붙어 있는 팝송가사를 의자 사이로 아이들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읽으면서 Oh! Good! Really great! 하면서 나를 향해 놀라움을 표현하던 표정을 기억한다. 그 후 그분들의 교회에 여러 번 방문하 여 대화를 하기도 했으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만남을 보류하고 있다. 또한 영어로 대화를 하기 위해 대학생들의 동호회에 참가했던 기억은 내게 있어 엄청난 변화였다. 인터넷을 통하여 내가 좋아하는 모닝 스페셜 동아리가 전주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참여 신청을 했다. 다른 회원들도 흔쾌히 허락하여 대학에 서 영어를 공부하는 학생들과 영어로 대화하고 공부하면서 젊은 친구들과 야유회 도 다녀오고, 크리스마스에는 Surprise Party도 함께 하며 우정을 쌓는 흔치 않은 기 회도 가질 수 있었다. 이 보영 선생님께서 모닝 스페셜 진행하고 있을 때 학생들과 함께 야간열차로 서울에 올라가 교육방송 모닝 스페셜 Open Studio에 참여하여 선 생님들과 인사를 나눈 경험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기도 하다.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영어에 뒤지지 않고 싶었고, 그들이 치르는 TOEIC 에 자연스레 관심이 갔고 나도 도전해 보고 싶은 욕망이 차올랐다. 그래서 시험을 3번 치렀는데 그 시험 속도는 나의 영어공부 에 또 다른 자극이 되었다. 정식으로 공부하지 않고 EBS TOEIC강의를 교재도 없이 흘려들은 실력이라 좋은 성적은 거 두지 못했지만 나도 990점에 도전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도 갖게 되었고, 또한 토 익 시험장에서 대한민국 학생의 1%를 발견하는 신선한 충격을 발견하기도 했다. 일반인과 대학생이 주로 치르는 TOEIC 시험장에서 초등생과 중학생을 발견한 것 이 그것이었다. 시험을 기다리며 공부하는 모습과 시험장에서의 진지함을 처음 보 는 나로서는 그들이야말로 진정 대한민국 1%의 학생의 경이로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어울리고 참여하는 것은 때때로 내게 커다란 동기 부여를 새롭게 해 준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인터넷에 들어가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서 마음을 새롭게 하기 도 하며, 운 좋게 내 글이 소개되어 방송에 나오면 너무나 기분이 좋다. 게다가 상 품에라도 당첨이 되면 그야말로 영어공부로 인하여 찾아오는 작은 행복감에 젖어 들곤 한다. 배움을 통해 알게 된 주는 기쁨 처음에 영어방송을 버스 안에 켜고 운행하면 시끄럽다고 방송을 돌리라고, 방송 을 끄라고 하는 어르신들이 종종 있었다. 물론 난 게의치 않고 계속 영어 방송만 고집했다. 어르신 죄송합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 틀어 놓았으니 시끄럽더라도 양 해해 주세요. 라고 정중하게 불만을 잠재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대부분 양해해 주었지 만 폭언을 하는 승객분도 있었다. 어느 날, 바랑을 맨 스님께서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내게 꾸짖는 말로 한마디 던 졌다. 아니 당신은 우리말도 전부 다 모를 진데 무슨 영어를 공부한다고 못 알아듣는 영어방송을 켜고 다닙니까? 그리고 기사님이 뭐 하러 영어공부 를 해요? 처음엔 기분이 상했지만 난 그냥 웃어주었다. 그리고 금산사에 간다던 외국인 노 부부가 생각이 났다. 스님!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는 말이 있지요. 그게 문맹이지요. 주변에 온통 영 어이고 외국인도 많아졌는데 영어를 모르면 이 또한 문맹이 아닙니까? 저는 주기 위해서 공부합니다. 주고자 원하나 몰라서 주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리고 난 경험했던 그 노부부의 이야기로 자연스레 이어 나갔다. 스님! 언젠가 정류장에서 외따로 서서 관광 가이드북을 쳐다보며 버스를 타지 못해 곤란을 격고 있는 외국인이 있었지요. 주변엔 사람들이 많았는데 누구하나 다 가가서 도움을 주는 분이 없더이다. 만일 누군가 영어에 자신감이 있는 분이 있었 다면 도와달라 요청하기 전에 분명 다가가서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그게 한국인의 정서니까요. 그런데 모두들 마음은 있으되 영어를 모르니까 다가서지 못했을 겁니 다. 그래서 제가 도와주었지요. 금산사 간다고 하더이다. 스님은 내 말을 묵묵히 듣고 나서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로 답을 대신했습니다. 송학사 라는 팻말이 서 있는 모악산 자락으로 향하며 다시 한 번 뒤돌아보던 스님 280 테마가 있는 시내버스 281

의 뒷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지금도 스님처럼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의 대답은 한결 같다. 주기 위해 공부한다. 고.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주는 것이 받는 것 이라는 사실을. 나는 자선을 베풀만 한 능력도 자질도 없는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에 언제나 슬퍼했다. 내 아들 딸아이 에게 고등학교 3년 동안 언제나 등록금을 제일 늦게 내왔다는 경제적 무능력에 미 안했다. 항상 학교 행정실에서 귀댁 자녀만 등록금이 미납되어 있네요. 라는 통보 를 받고 나서야 등록금을 부랴부랴 준비해 오던 지루한 날들이 서글펐다. 항상 불 행하다고 좌절하던 내가 영어를 공부한 후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끊어지는 듯한 어 깨 근육의 통증도 말끔히 가시는 기적을 경험했다. 영어를 배움으로써, 그 영어로 인하여 어려움에 처해 있는 외국인과의 소통이 이루어져 그들의 얼굴에 묻어나는 미소가 얼마나 큰 행복을 내게 가져다주는지 나는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씩 영어를 통하여 주는 기쁨을 알게 되었고 행복의 의미도 찾아가고 있다. 1526번, 영어실은시내버스 얼마 전에 EBS 모닝 스페셜 게시판에 내가 운전하는 시내버스 의자에 손님들이 읽어볼 수 있도록 의자에 걸어놓을 영어 책자가 필요하다고 부탁했더니 30여권의 책자를 보내 주었다. 그래서 내가 운전하는 버스에 올라 오면 손님들은 자연스레 의자에 걸려 있는 책자를 보게 된다. 서 있는 승객은 눈높이의 유리창에 붙어 있는 우리말 해석이 함께하는 팝송에 자연스레 눈이 가게 된다. 물론 모든 승객 분들이 당신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지만 버스 안에 울려나오는 EBS의 영어 방송을 듣고 간다. 때론 어떤 이는 시끄럽게 느껴지고 듣기 싫어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영어에 대한 사회의 뜨거운 관심과 열기 속에 예전처럼 시비를 걸어오 는 승객은 거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자신 있게 영어방송을 즐기며 공부 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분명히 누군가는 영어공부 하는 시내버스 운전자에 자극 되어 새롭게 공부를 시작하고, 모르던 프로그램을 새롭게 알게 되어 EBS를통해공 부하는 학생들과 일반인이 생겨나리라고 확신하고 있다. 왜냐하면 종종 내게 물어 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게 무슨 방송, 무슨 프로그램이에요? 그러 면 나는 덩달아 신이 나서 프로그램 설명에 열을 올리고 꼭 오늘부터 집에 가면 라 디오 채널을 맞추어 놓고 들어 보라고 당부한다. 의자에 걸려 있는 책자를 몰래 떼 어가는 손님이 있지만 그래도 나는 괜찮다. 조금 양심이 없어 보인다고 생각하기는 하면서도 말이다. 때론 운전석으로 와 책자를 달라고 하는 승객도 있다. 나는 흔쾌 히 떼어 준다. 관심 그 자체가 기분이 좋다. 그러다보니 이제 책자의 여분이 없어 걱정이 된다. 또 다시 부탁하면 들어 줄까? 1526번. 전주에서 내가 운행하는 시내버스다. 지금도 사람들에게 영어 방송 나 오는 시내버스로 인식되어 있지만 진정으로 테마가 있는 시내버스로 가꾸어 가고 싶다. 영어로 된 지역 관광 책자도 비치해 학생들도 지역을 알리는 영어 표현을 알 게 하고 외국인도 내 버스에서 정보를 얻어갈 수 있는 영어 테마 버스를 만들고 싶 다. 얼마 전, 시에서 지시가 있었는지 모르는 사람이 올라와 유리창에 붙어 있는 모 든 부착물들을 제거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나는 정성껏 코팅해서 보기 좋게 가지 282 테마가 있는 시내버스 283

런히 붙여놓은 팝송을 떼어내지 못하게 하였다. 지저분하지도 않고 많은 학생들이 버스에 올라 영어문장 한 줄이라도 얻어가기를 소망하는 나의 배려와 정성이 깃들 어 있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등교하는 학생들이 내 버스에서 내리며 인사하는 모습 에 얼마나 학생들에게 영어 방송과 의자에 걸려 있는 책자가 정겨운 등교 길을 선 향할 것이다. 이제 50줄에 접어든 나이에 아직도 변함없는 바람이 있다. 건강한 몸으로 계속 영어공부 를 하여 TOEIC 990점에 도전하고, 언젠가 영어전문 교육 프로그램에 초대 손님으로 참여하여 학생들에게 꿈과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인의 정과 사랑을 주고자하는 작은 소망이 있기에 내게 영어공부는 사랑과 행복을 찾아가는 즐거운 여정이다. 힘든 시내버스 운전에서 은퇴하게 되면 영어를 통한 자원 봉사자의 길을 찾고자 소망한다. 아직은 너무나 미미한 영어 실력이지만 그 꿈을 향해 오늘도 나는 공부 한다. 그 길에 항상 EBS의 모든 프로그램이 있다. 모든 영어 프로그램의 모든 분들 이 저에게 있어 눈물이 나도록 감사한 선생님들이다. 너무 오랫동안 같이 하다 보 니 원어민 선생님들을 포함해 모든 선생님 한 분 한 분이 같이 생활하고 있는 친구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운전석 옆엔 언제나 영영사전과 영어책이 있고, 방송에선 언제나 EBS 영어 프로그램이 들려오는 나의 운전석엔 꿈과 행복이 같이 자리하고 있다고 믿는다. 사고의 위험과 스트레스, 육체적 고통이 함께 하는 힘든 일터로 출 근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공부하러 가자. 꿈과 행복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사했는지 느낄 수 있다. 내가 공부하는 모습에서 그들도 자극받고 있다고 생각한 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영어의 테마가 있는 시내버스가 바로 1526번, 내가 운전 하는 시내버스다. 앞으로 그것을 외국인을 비롯한 모든 분들이 밖에서도 알 수 있 도록 하게하고, 무엇보다도 나의 영어 실력을 그에 걸맞도록 향상시키기 위해오늘 도 발버둥치고 있다. 행복을 찾아가는 즐거운 여정 오늘 아침 또 나는 모닝 스페셜을 녹음하고 스크립트를 출력했다. 내일또그테 입은 하루 종일 내 버스 안에서 방송되고 승객 분들도 들으면서 각자의 목적지로 284 테마가 있는 시내버스 285

자기능력개발 수범사례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서상문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XXXXXXXXXXXXXXXX 제가 이렇게 큰 상을 받을 만큼 큰 일을 했는지, 스스로 돌아보니 조심스럽고 송구스러운 마음입니다. 하지만 제가 감내해야만 했었던 그 아픔과 시련의 시간을 여전히 반복하고 있을 수많은 청소년들에게, 암담한 현실 속에서 좌절하고 있을 그 누군가에게, 저의 이야 기가 새로운 용기와 희망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제가 살아온 길은 우리 교육의 서글픈 한계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포기했던 것을 가능하게 한 새로 운 시도였으며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의 실현이었기 때문입니다.

잠충이 나와! 키도 콩 만한 게, 아침부터 제일 뒤에 엎어져서 자고 있어? 너, 고3 맞니? 대학을 못 가도, 그렇게 한심하게 살아서야 되겠냐? 어떻게 넌 아침부터 저 녁까지 잠밖에 안자니? 1992년 경원고등학교 3학년 1년을 버티면서 자주 들었던 꾸중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무력감은 일상화되어 있었고, 그저 고등학교 졸업장은 받아야 한다는 알 수 없는 의무감에 새벽부터 야간자습을 마칠 때까지 약에 취한 듯 멍하 게 앉아 있어야 했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인문계 고등학교 생활의 전부이다. 한 반에 40여명 남짓한데, 서열화된 나의 등수는 38등, 39등을 넘지 못하였다. 10등 급 내신체제에서 나는 겨우 9등급을 간신히 받고 졸업했다. 그나마 졸업한 것도 다 행이라고 여기면서. 결코 대학에 입학하지 못할 것이라는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어렵사리 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대구에서 청도 가는 길목에 있는 아담한 대구신학교. 당시 후기대학 입시일정에 편승되어 있었지만, 정식대학은 아니다. 정식 명칭은 4년제 학력인정 각종학교, 교육부(당시 문교부) 문서에는 그렇게 적 혀있다고 들었다. 대부분 목회자를 꿈꾸며 들어 오는, 세상의 경쟁체제로부터 한 걸음 물러선 사람들이었고, 그나마 학교소속 교단 목사님의 추천서와 세례증명서 를 첨부해야 입학할 수 있는 까다로운 절차 때문에 나에게까지 기회가 돌아오지 않 았나 생각해 본다. 이처럼 내 삶의 전경은 너무나도 초라한 전형적인 패배자의 그 림이었다. 나조차 나 자신에게서 어떤 가치와 가능성도 찾지 못했으니까. 희망은 모든 절망을 굴복시킨다 대구신학교를 다니면서 교육전도사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작고 가난한 개척교회 에서 중고등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아이들의 생활지도 등 다양한 교육활동 을 기획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학비에 작으나마 약간의 보탬이 된다 는 계산보다는 처음으로 다른 사람 앞에 지도자로 선다는 그 묘한 감정의 교차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항상 어리석고 한심하고 못난 인간으로 무시당했던 내 게 누군가를 가르쳐야 하는 위치와 직무는 한편으로 엄청나게 두려웠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감에 대한 끝없는 물음과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내 앞에는 지금 누군가를 필요로 하고 있는 나와 같이 부족하고 연약한 아이들이 있었고, 나는 그들의 필요에 반응하여 열심히 움직여야만 했다. 아이들을 대할 때마다 항상 눈물이 났다. 어쩌면 그것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연민 이었고 불쌍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대하면서 나는 비로소 내 모 습을 볼 수 있었고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시작하였다. 대구신학교 졸업이 다가올 무렵, 나는 내 인생을 새롭게 설계할 한 가지 큰 결정 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게 정말로 적합한 일에 대한 각성이 었다. 고통과 절망은 그것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무릇 가르치는 교사가 배우는 학생의 어려움과 절망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부족한 학생들을 사랑하고 학생들의 상처를 감싸안을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런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결심만 섰을 뿐, 그 일을할수있기위해내가가진것은아무것도없었다. 나는그옛날그저허망하 게 바라만 보다 포기하고 되돌아선 학력과 공부 라는 불가능의 산을 다시 주목해 야만 했다. 영어고 수학이고 기초가 하나도 없었던 내게 교사가 되고자 하는 결심 은무( 無 )에서 유( 有 )를 창조해야 하는 산통의 시작이었다. 그간 모아 둔 100만원 남짓의 돈을 가지고 두문불출( 杜 門 不 出 ), 창문 하나 없는 자취방 책상 앞에 앉았다. 아침 6시에 기상, 밤 12시까지 공부에 전념했는데, 시간 이 아까워 식사는 하루에 두끼만 하였다. 네 끼니 분량 밥을 위해서 전기밥솥에 쌀 을 앉혀 밥을 하는 것도 이틀에 한 번만 하면 되었고, 그나마 고픈 배를 움켜쥐고 기 다렸던 식사시간도 설거지까지 30분이면 끝났다. 1997년 여름 얼마나 더웠던지, 보온을 위해 두꺼운 스티로폼 단열재로 벽을 바른 창문하나 없는 단칸 자취방은 새 벽 1시가 넘어서도 섭씨 30도 아래로 내려갈 줄 몰랐다. 깨끗이 쓸고 닦아 아무리 청결을 유지하여도 오래된 집 천장의 구멍 사이로 손가락 두개 굵기의 바퀴벌레가 288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289

기어 나왔고, 그렇게 지옥 같은 1년을 버텨야 했다. 오로지 나와 같이 불쌍한 아이 들 편에 머물러 줄 수 있는 그런 교사가 되는 꿈을 꾸면서. 돌이켜 보면, 고등학교 3년 동안 무엇을 배웠는지 거의 기억에 나지 않지만, 단 한 가지 나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 내 인생 전체를 새롭게 방향 지운 가치관이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던가, 윤리책에서 읽은 롤즈(J. Rawls)의 정의론 은 나의 인 생관과 세계관, 그리고 삶의 열정과 동기를 불러일으킨 내 인생의 목적을 굳건히 정착시켜 주었다. 미국의 명문 하버드대 총장을 역임했다는 이 유명한 석학( 碩 學 )은 정의( 正 義 ) 에 대하여 다음이 같이 규정하고 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정의( 正 義 ) 는 2가지의 원리로 구성되는데, 제1원리는 완전한 자유의 원 리 로서 인간 개인이 가진 근본적인 자유를 절대적으로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것 이다. 이에 대해서는 현대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라는 누구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롤즈 정의론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제2원리인 차등 의원리 이다. 사회적 재화의 정당한 몫 에 대한 권리로 명명되는 이 원리는, 만약 평등보다 불평등이 최하층의 사람들을 더 잘 살게 해준다면 불평등을 허용하는 것 이 또한 합리적이라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롤즈의 정의론에 따르면, 모든 사람에 게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되 사회의 최소수혜자, 가장 열악하고 부족하고 가난한 이 들에게 최대한의 사회적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정의 라는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한계 지워진 사회구조 속에서 불가항력적으로 사회적 불평등에 상처 입은 사회적 약자들의 상처. 어린 마음에 이 무미건조한 이론진술을 읽으면 서 얼마나 울었었는지. 문학적 진술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 딱딱한 이론이 그 때 내게는 어떤 감성적 시구보다도 더 따듯한 위로였고 격려였다. 정의( 正 義 )의 부재( 在 ), 재화의 부익부 빈익빈은 비단 경제상황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 내가 느끼기로 그것은 오히려 교육현장에서 소외된 많은 아 이들의 상처 속에서 더 생생하다. 아픔이 큰 만큼 부재( 在 )한 것에 대한 열망, 상 처를 감싸 줄 따듯한 선생님에 대한 나의 소망도 더욱 커지고 강해졌다. 그 어렵고 암울한 시절을 나는 그렇게 이겨내었다. 희망은 모든 절망을 굴복시킨다. 다시 시작한 학업의 길 1998년, IMF 구제금융 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슬픈 해,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그해3월 당당하게 수학능력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얻고 대구교육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우려하던 내신등급의 족쇄도 졸업 후 5년이라는 시효기준에 의거, 수 학능력시험에 의한 전국비율 내신으로 재산정받을 수 있었다. 꿈은 이루어졌고 모 든 것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내게 다가왔다. 하지만 기대 반, 두려움 반, 나의 예비 교사의 길은 그렇게 떨림으로 시작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다시 시작된 나의 학업은 식을 줄 모르는 열정으로 지탱되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하루에 잠을 5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 4년 평균 아르바이트 를 2가지 이상 지속하였으며, 자투리 시간까지 쪼개어가며 공부를 하였다. 그 결 과, 1998년부터 2002년 2월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8학기 모두 전체 수 석을 석권하는 영예를 안았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학비는 전액 장학금으로 충당하 였으며, 생활비 및 잡비는 아르바이트를 통해 충당하였다. 나의 새로운 대학 생활 은 이렇듯 학업과 생계를 동시에 충족시켜야 하는 힘든 투쟁의 나날이었다. 하지만 돌이켜볼 때,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에서 이 때만큼 즐겁고 행복한 시절도 없었 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타인에 대한 사랑,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기대와 자존감, 이러한 것들은 고된 하루 일과 후의 피로와 부족한 잠을 채워주는 무한한 에너지였다. 290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291

하지만 대구교육대학교 시절, 학업에만 매달려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기간 동 안, 나는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가능성에 도전하였다. 합창단과 관현악 연주 활동, 기독교 동아리의 봉사활동, 교내 과대항 합창경연대회에서는 내가 소속된 초등교 육과를 지휘하여 13개팀중2위로 만들었다. 대외적으로는 교육용 소프트웨어 공 모전에 작품을 출품하여 교육부장관상을 받았고, 전국 대학생 학술연구대회에 입 선하여 서울대학교에서 연구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2002년 졸업하면서 수석 졸업생으로 대구교육대학교 총장상을 수상하였고, 그 해 청와대에서 주관하고 교 육인적자원부가 시행한 21세기를 주도할 우수인재 에 뽑혀 청와대 만찬에 참석 하고 대통령과의 악수,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맛보았다. 그리고 2002년 3 월, 꿈에도 그리던 교단에 첫 발을 내디뎠다. 드디어 내가 선생이 되었다. 교단에 첫 발을 내딛으며 올망졸망 책상에 앉아 있는 녀석들은 지금도 내 가슴을 설레게 하는 존재들이다. 처음으로 내가 만났던 그 아이들에 대한 내 설레임은 어땠으랴. 지금도 그 때의 추 억이 아련하게 전해오는 듯하다. 내가 처음으로 교단에 선 곳은 대구동인초등학교 이다. 그 곳에서 나는 첫 해에 6학년 담임을 맡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대구 시내에 있는 학교에는 남자 교사가 적다. 더욱이 젊은 남자 교사는 드물다 못해 없다시피 하다. 내가 첫 부임한 대구동인초등학교도 그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교사 인 원총27명에, 교장과 교감 선생님을 합해서 남선생이 모두 4명. 교장 교감 선생 님, 그리고 연세가 쉰 다 되신 교무부장님, 그리고 29살의 새내기 교사인 내가 있었 다. 6학년이 되기까지 젊은 남자 선생님을 한 번도 담임으로 만나보지 못했다고 이 야기하는 우리 반 아이들. 처음 들어간 날, 아이들의 눈이 똘망똘망했다. 생각해 온 것은 많았는데,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허둥지둥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그렇게 첫 날이 지나 간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그 아이들의 잊지 못할 담임 선생님이 되어갔다. 며칠이 지나 안 사실이지만, 우리 반에는 특수반 소속의 아동이 하나 있었다. 예 쁘게 생긴 여자아이, 호숙이. 내가 담임을 맡은 우리 반에 원적을 두고, 주지 교과 (국어, 수학, 과학) 시간은 자기 수준에 맞는 수업을 받기 위해 특수반 학습도움실 (resource room)로 간다. 지능지수 80 정도의 교육 가능 수준(EMR)의 정신지체아 동이었다. 처음에 가장 힘든 것은 다른 아이들로부터 호숙이를 보호하는 일이었다. 발달 수준에 맞게 논리적으로 말을 잘 못하였기에 말다툼을 하다 다른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기 일쑤였고, 그러면 금새 의기소침해져 울상이 되곤 했다. 더 큰 문제는 5학년 때까지 일상적으로 반복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몇몇 아이들의 상습적인 괴롭 힘이었다. 그것도 대부분 교사의 눈을 피해 발생하는 것이었기에 그 정도와 수준을 파악하는 데조차 상당한 어려움이 따랐다. 사건의 내막과 관련 당사자들을 파악하고 난 연후, 끈질기고도 지루한 설득작업 이 시작되었다. 직접적인 가해 아동들은 교사가 문제를 지적하고 꾸중하면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빈다. 교사에게 용서를 비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진 정한 의미에서 어떠한 문제해결도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 진정 필요한 것은 호숙 이를 이해하고 우리반의 동등한 친구로서 받아들이고 감싸 안는 것이다. 이것은 비 단 상습적인 가해 아동 당사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학급 아동 전체가 모두 이러한 하나됨에 주도적이고도 자발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그것은 교사가 논리적으로 잘 못을 지적하고 윽박지른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고 못 살게 하며, 대부분의 주변인들은 방관자가 되어 이러한 억압에 간접적 암묵적으 로 동참하는 잘못된 사회구조와 인습에 이 아이들 모두가 다 희생자들인 것이다. 292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293

이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상처의 치료였다. 교육은 폭력 가해자에 대한 처벌과 희생자를 위한 대처방안의 기술적(technical) 처방이 아니라, 약자를 대하는 학급 전체 아동들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진실한 가르침과 간절한 호소여야 했다. 아이들 이 고민하고 진지하게 생각할 많은 자료들을 제공해 주었고 그리고 지속적으로 대 화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담임교사의 지대한 관심과 간절한 바램에 성실하게 응답 해 주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해맑게 웃어준 우리 반 아이 호숙이에게도 고맙지만, 호숙이를 자기와 동등한 우리 반 친구로 받아들이고 그 부족한 부분을 기꺼이 채워 주기로 작정해주었던 2002년 대구동인초등학교 6학년 3반 친구들이 정말 고맙다. 나는 이 일을 계기로 특수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다음해 바로 대구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특수교육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2003년 음악교과전담 교사를 한 해 하고 난 후, 재미있게도 2004년또다시6학년 3반을 맡게 되었는데, 그 반에 서 나는 호숙이의 동생 광수를 담임하게 되었다. 그 해 다시 비슷한 사건을 몇 차례 치러야 했으며, 이 남매는 지금 중학교, 고등학교에 잘 다니고 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매년 특수아동을 원적반으로 하는 통합학급을 담임 하고 있으며, 올해도 상당히 중증의 ADHD 발달장애 아동을 맡고 있다. 때로는 포 기하고 싶은 만큼 힘들지만,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이해해 줄 수 있는 내가 담임이 라서 조금이라도 다행이라는 생각에 힘을 얻는다. 그 아이도 나와 동일하게 소중한 한 인간이며 행복해야할 가치로운 존재라는 생각에, 주위의 매몰찬 시선과 이야기 들로 삭막한 현실 속에 매몰되어가다가도, 내가 배웠던 교육이라는 나침반의 바늘 을 따라 시시때때로 내 삶의 방향을 다시금 바로잡는다.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학교와 아이들 그리고 행복한 삶을 위한 열정, 이것은 비단 호숙이나 광수, 혹은 지 금 담임하고 있는 장애아동인 창헌이에게만 해당되는 특수한 영역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더 많은 학생들이 똑같은 문제들로 고민하면서, 놀이에, 공부에, 학 교에, 그리고 삶의 행복에 충실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았지만 불행의 길로 계속 밀쳐진다. 왜곡된 구조 속에서 본의 아니게 이미 피해자나 가해 자가 되어 있으며, 학교의 강제된 서열화는 이러한 폭력을 합법화시키고 부추긴다. 오늘날 각박한 사회의 현실은 작동 가능한 모든 교육적 제동장치를 망가뜨려 놓 았으며 자본주의 사회의 혹독한 경쟁체제로 우리 아이들을 몰아 넣는다. 이러한 상 황에서는 교사인 나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에 익숙해지고 길들여져 간다. 하지만 여기서도 마지막 끈을 놓치지 않고 숨죽여 실낱같은 희망을 바라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대적인 개혁이나 대안적인 제도가 아니라 작은 배려이 고 희생이며 서로를 향한 작은 안타까움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공존시키며 상 생할 수 있게끔 한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우리로부터 항상 외면되어 온 약하고 가 난한 이웃이 있다. 그들의 작은 필요를 채워 주고 함께 있어 주는 마음과 실천이야 말로,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아이들이 왜 공부를 못하는 지를 안다. 그 리고 그 무력감과 좌절이 어떤 것인지도 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수업내용을 무의 미한 영상으로 흘려 보내며, 결코 끝날 것 같지 않는 그런 절망의 시간을 보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심정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한다. 세상은 패배자에게 말할 수 없이 냉혹하며, 어느 누구도 그들을 용납해 주지 않는 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투입할 특별한 학습자료와 수업기술 이전에, 가장 먼저, 절 실하게 필요한 것은 그들 존재에 대한 인정이고 배려이며 감싸안음이다. 나는 경북대학교에서 교육학 박사를 취득한 후, 철학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지난 학기부터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철학 및 교육사 강의도 하고 있다. 내가 가진 학위만 해도 5개, 자격증도 5개나 된다.(초등학교 2급 정교사 자격, 초등학교 1급 정교사 자격, 평생교육사 자격, 특수학교 2급 정교사 자격, 1급 전문상담교사 자격) 고등학교를 내신 9등급으로 졸업하고 제대로 된 대학도 가지 못했던 학습부 진아가 적성과 잠재력을 각성하고 새롭게 시작하여 폐쇄된 학력구조 사회에서 새 로운 가능성을 열고자 한다. 내가 가는 이 길이, 나의 자아실현뿐만 아니라,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특히 뒤쳐진 많은 아이들에게 희망이기를 바란다. 294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295

자기능력개발 수범사례 나는 알비니즘(albinism)인이다 이동일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동 XXXXXXXXXXXXXX 알비니즘과 시각장애가 있는 아들을 여느 아이들처럼 키워주시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 록 반 평생을 바치신 어머니께 영광을 돌립니다. 아울러 부족한 글을 입선시켜 주신 심사 위원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장애인을 향한 사람들이 인식이 바뀌고 나와 너는 다를 수 있다 는 공감의 울타리가 만 들어져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아름다운 사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방황 속에 보낸 시간들 아이가 탄생하는 순간은 어느 부모에게나 신비롭다. 아니 경이롭고 눈물과 감사가 충만한 시간이리라. 그러나 나의 부모님에게도 그러했을까? 알비니즘, 난 알비니즘인이다. 세상 사람들에겐 생소한 병명, 피부가 희고, 피부 에 나는 털이라면 이 또한 모두 하얀 사람, 뿐만 아니라 눈 속 동공에도 검은색은 없 다. 다시 말해 알비니즘(Albinism)인 이란 멜라닌(Melanin) 색소 부족으로 인해 하얀 피부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을 일컫는다. 거기에 시각장애(저시력)까지 동반 하고 있다. 난 그렇게 세상에 태어났다. 지금이야 장애인 복지법,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 교육법,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 등이 시행되고 있어 과거 어 느 때보다 장애인들의 인권과 권리가 강화되고 그들을 위한 다양한 사회적 제도들 이 뒷받침되고 있지만 내 어린 시절만 해도 상황은 열악함 그 자체였다. 알비니즘 인들은 멜라닌 색소가 부족하기 때문에 햇빛에 오래 노출이 되면 쉽게 화상을 입는 특징이 있다. 또한 시각장애(저시력)를 동반하기 때문에 특수교육적 지원(교실환 경구성변화, 활자가 큰 책, 보조공학도구 등)이 요구된다. 어느 장애인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나 또한 어린 시절 많은 놀림을 받으며 눈물을 흘렸던 하루하루를 지금도 기억한다. 때로는 동네 철없는 아이들로부터 돌을 맞기 도 했고 잘 보이지 않는 시력 때문에 전신주에 부딪히거나 길거리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일도 자주 있었다. 당시 내가 살던 성남은 울퉁불퉁 비포장 길에 복개 공 사가 안 된 하천들이 너저분하게 있는 그런 곳이었다. 거기다 롤러코스터를 방불케 하는 언덕과 언덕으로 이어진 길들까지.(사실 이는 지금도 그렇지만) 난 이런 곳에 서편도2시간이나 떨어진 서울시 종로구 신교동에 위치한 서울맹학교 초등부를 1 학년 때부터 다녔다. 몸이 유난히도 약했던 난 하루 왕복 4시간의 등하교가 고단해 코피를 쏟기 일쑤였고, 코피를 쏟았다 하면 지혈이 안 되어 응급실에서 콧구멍을 공기가 통하지 않게 막은 채 며칠간을 지내야 하는 그런 힘든 생활을 하였다. 이런 나의 모습이 안타까워서였을까? 어느 날 밤 내 옆에 누우신 어머님께서 내 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일아, 엄마와 떨어져 지낼 수 있니? 철없던 난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한 채 쉽게 네 라고 대답을 했고 그 이후 난 8살의 나이로 주말에만 집에 오는 기숙사생이 되었다. 서울맹학교 초등부 6년을 마치고 여의도 중학교 저시력 특수학급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어머니께서는 서울맹학교 의네임벨류(name value)가 미래 내 생활에 좋지 않은 영향이 있을까봐 서울맹학교 중학부로 진학을 시키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셨지만 내가 여의도고등학교 저시력 특수학급을 졸업한 후 계속 대학에 떨어지자 당시를 회고하시며 그냥 서울맹학교를 다니게 둘 걸 하 고 후회 하셨던 모습이 생각난다. 차라리 그랬더라면 안마사 자격증이라도 받아 내 앞가림이라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던 것 같다. 초등학교 6년간 내 성적은 어머니의 스파르타식(?) 교육 덕분으로 늘 상위권이 었지만 친구들과 놀기에만 열중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의 평균 점수는 40점이 채 못 되었다. 철없는 시절 난 그런 내 모습을 반성할 생각조차 못한 채 대학 시험 에 응시했었고 보기 좋게 전 후기와 전문대 시험 모두를 떨어지고 말았다. 당장 298 나는 알비니즘(albinism)인이다 299

갈 곳이 없어진 날 이끈 건 역시 어머니셨다. 서울시 강동구 상일동에 위치한 한국 시각장애인연합회에서 2년간 피아노조율 기술을 배웠고 이 기간 동안 국가공인 피 아노조율 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하지만 피아노조율을 배우는 2년 동안에도 난 매 년 대학 시험에 응시를 했었다. 물론 노력하지 않는 내게 분에 넘치는 대가가 올리 는 없었다. 부끄럽지만 난 6수생이다. 내가 6수를 할 동안 시험 친 대학을 손으로 꼽으면 아 무리 못해도 족히 20개교는 넘을 것이다. 난 어머니를 따라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 며 만만해 보이는(?) 대학들에 원서를 냈었지만 늘 내게는 쌓여만 가는 응시 수험 표만 남아있었다. 새로운 희망을 찾아 그러던 중 동생이 대학에 입학을 하면서 내게 새로운 욕구가 생기게 되었다. 어려 서부터 경쟁심이 있었던 난 그 날 이후 공부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기초부터 다시 공부하기 위해 서울맹학교 고등부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 한 자가 어떻게 다시 고등부로 들어갈 수 있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시각장애 특수학교 고등부는 중도실명한 사람들의 직업재활을 위해 그 문호를 열어 놓고 있 어 가능했다. 1995년, 난 나보다 7살 어린 친구들과 같은 교실에서 공부를 다시 시 작했고 수업이 끝나면 학교 도서관에 올라가 그동안 변화된 대입 제도에 적응하기 위해 저녁 8시까지 수능 공부에 몰두하였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10시, 그때부터는 EBS 수능대비 특강이 날 기다리고 있 었다. EBS 수능 방송을 들으며 다시 12시까지 공부하기를 꼬박 1년, 난 처음으로 내 목표를 향해 밤을 잊어가며 공부를 했다. 거기에 매일 늦은 저녁식사 준비와 부 침개를 해주시며 내 공부를 뒷받침해 주신 어머니의 정성이 더해져 몹시 어렵게 출 제되었다고 언론에서 떠든 그 해 수능시험에서 경희대학교 신문방송학과와 우석 대학교 특수교육과에 이중 합격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6수를 할 동안 합격이라는 감격 한번 느껴보지 못한 내게 일순간에 기쁜 선택(?) 을 해야 하는 시점이 찾아왔다. 과연 어느 대학에 진학을 하는 것이 나은 것인지 수 없이 고민을 하던 내게 어머니께서는 내가 나와 같은 아픔이 있는 장애인들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는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시며 특수교육과 진학을 권유 하셨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당시 어머니의 판단은 너무 정확하셨던 것 같다. 대 학에 들어와 특수교육을 공부하면서 시각장애를 이론적으로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시각장애 외에 다른 장애 영역들도 많이 있으며 각각의 장애 특성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는 좋은 기회도 누릴 수 있었다. 어느 사범대생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나도 3학년 2학기 때부터 콩나물시루와 같 은 노량진 학원가 비좁은 교실에서 임용고시 준비를 하였다. 보이지 않는 흑판을 쌍 안경을 이용하여 쳐다 보고 하나의 판서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쉬지 않던 내 손과 등줄기를 흐르던 땀은 지금은 아득한 내 기억 저편의 세상 속에 온전히 남아 있다. 대학 4학년 1학기, 모든 사대생들처럼 나도 교생실습을 나가야만 했다. 당시만 해 도 시각장애인들은 시각장애인 특수학교로 교생실습을 나가는 것이 보통이었지 만 나는 이런 편견의 틀을 깨고 싶었다. 정말 내가 시각장애 영역이 아닌 다른 장애 영역에서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을지 스스로를 교생실습을 통해 점검해 보고 싶었 고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시각장애인도 그 한계를 극복하고 타 장애 영역의 학생 들을 지도할 수 있음을 세상에 보여 주고 싶었다. 이런 생각으로 성남에 있는 정신 지체 특수학교인 성은학교에서 교생실습을 하며 스스로를 냉정히 평가하기 시작 했다. 교사로서의 첫 걸음, 그리고 시행착오 37년 째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난 참 운이 좋고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선천적으로 알비니즘과 시각장애를 동시에 가지고 태어났 지만 그 장애에 굴하지 않도록 날 바르게 길러주신 존경하는 부모님을 만났고 초, 300 나는 알비니즘(albinism)인이다 301

중, 고, 대학을 거치면서 좋은 스승들과 친구들을 만났으며 장애인 남편을 부끄러 워하지 않는 아름다운 사람과 한평생을 동행하게 되었다. 교생실습 기간에도 훌륭한 지도교사를 만나 장애인 학생들과 교사와의 관계에 대해서 새롭게 눈을 뜰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코스모스 졸업을 한 나는 교생 실습 을 했떤 성은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특수교사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코 앞으 로 다가온 임용시험이 많이 부담스러웠지만 학생들과의 학교 수업이 끝나면 근처 도서관에서 부족한 공부를 메우며 최선을 다했다. 임용고사일, 내가 시험을 보는 동안 아내는 고사장 인근 교회에서 날 위해 기도했다고 한다. 아내의 기도 덕분이 었는지 그 해 7명을 뽑는 경기도에서 최종 합격을 하였다. 그리고 성남혜은학교에 첫 발령을 받아 3년간 근무를 한 후 기간제 교사로 몸담았던 성은학교로 옮겨 역시 3년간 근무를 했다. 난 사실 내가 장애인이기에 나만큼 장애인을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공공연 히 떠들고 다녔었고 또한 그들의 편에 서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 만 두 번째 임지에서 계단에서 다른 학생들을 떠미는 문제 행동을 한 학생을 지도 하는 과정에서 첫 번째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당시 나의 지나친 체벌로 인해 담임 교사에서 중도에 물러나야 했다. 그러면서 나보다 더 우리 장애인 학생들을 위해 고민하는 학부모가 있고, 장애인 학생을 지도하는 내 방법과 생각이 늘 옳은 것만 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학교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몹시 간절했지 만 새로 부임하신 훌륭한 교장 선생님과 동료 선 후배 교사들의 위로와 격려에 힘 입어 다시금 일어설 수 있었다. 건강장애 등 다양한 유형의 장애인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6년간 특수학교에 서만 근무하다 일반학교 내 특수학급을 맡고 보니 6년간 내가 뭘 배우고 일 했었는 지 많이 반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는 없는 일, 난 부임하자마자 용인 수지 지역을 돌아다니며 우리 장애인 학생들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들을 찾기 시작했고 그 중 용인시 여성회관을 찾아 우리 장애인 학생들의 현실 을 설명하고 장애인 학생들의 직업교육과 전환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 십사 하고 간곡히 부탁을 드렸다. 며칠 뒤 용인시 여성회관에서 무척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우리 학생들을 위 해 장애인 제과 제빵 교실을 무료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내용이었다. 1주일에 한 번벌써2년째 매 주 금요일이면 우리 반 학생들은 용인시 여성회관에서 즐겁게 제 과 제빵 실습을 하고 있다. 매주 만든 빵과 과자의 일부를 학교 선생님들께 선을 보이면 뭘 이런 걸 가져오느냐고 학생들 주라며 웃으시던 교장선생님과 금요일을 기다리시는(?) 교무실 선생님들로 인해 우리 학생들의 인기가 날로 치솟고 있다. 용인시 여성회관을 두드린 자신감을 가지고 난 또 다른 노력들을 시도했다. 장애 인과 관계된 곳이라면 어디든지 우리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제안서를 만들어 응 모를 했으며 그 결과 생활보호대상자인 고1 N군이 신체장애인협회의 장학금 사업 생각의 변화가 삶의 변화로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수지고등학교는 역사는 그리 길지 않지만 용인 지역에서는 명문으로 통하는 인문계 고등학교로 학생 수도 1,500명이 넘고 교직원도 110여명 에 이르는 큰 규모의 학교이다. 그런데 이 곳에도 시각, 청각, 정신지체, 발달장애, 302 나는 알비니즘(albinism)인이다 303

의 수혜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외에도 특수교육총연합회 장학금 수혜와 경 기도장애인재활협회의 두드림 사업에도 응모하여 편모 가정에서 자라다 어머니 마저 돌아가신 졸업생 S양의 치료교육과 의료적 지원 및 건강증진을 위한 헬스, 수 영장 이용, 컴퓨터 지원 등도 받아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요즘 공중파에서 자주 광고하는 KT의 IT 써포터즈와도 연계하여 1주일 에 2시간씩 우리 학생들이 컴퓨터 교육을 무료로 받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 결 과 ITQ 파워포인트 국가공인기술 자격시험에 고3 K군과 L군이 합격하는 기쁨을 누리게도 되었다. 이 외에도 미술치료, 음악치료, 성교육, 도예수업 등 우리 장애인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가능한 모든 것을 연계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이런 나의 노력들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스스로 성격을 변화시키기 위 해 노력해왔기 때문인 것 같다. 평소 내성적이던 난 내 성격이 교직생활을 하는데 큰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하였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한 어려움이 내게 돌아오고 있었고 이는 더 나아가 내가 지도하는 학생들에게까지 그 영향이 미칠 수 있기 때 문이었다. 그래서 날 바꾸기로 하였다. 우선 긍정적인 생각을 갖기 위해 노력하였 고 늘 즐겁게 이야기 하고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 말하기 전 몇 번이고 생각한 후 이 를 정리하여 말하는 습관을 들였다. 그리고 직장에서 조금은 꺼려하는 일이 생기면 어차피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그 일은 내가 맡아 하자 라는 생각을 하였다. 이 런 생각의 변화가 지금의 밝은 내 모습을 만들었고 이는 내가 옮기는 학교마다 상 조회장을 맡아 선생님들이 즐거운 학교생활을 돕는 역할을 감당하게 했다. 일반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아니 특수학교에서도 그랬지만 어려웠던 점이 몇 가 지 있다. 그 중 하나가 인사를 하는 것인데 시각장애인이다 보니 상대가 앞에 있어 도 잘 보이지 않아 자주 인사를 못하는 경우가 빈번이 생겨 한번은 예전 학교 관리 자 선생님으로부터 당신 지금 내게 도전하는 겁니까? 라는 웃지 못할 말씀도 들 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이런 내 장애를 일반 교과 선생님들께 바르게 알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를 실행에 옮겨 교직원 연수 시간을 통해 시각장애 인인 나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했다. 며칠 뒤 한 선생님이 날 찾아오셔서 교직원 연 수 시간에 한 이야기가 많이 마음에 와 닿았다는 말씀과 함께 자신의 딸도 나와 같 은 저시력 시각장애인이라며 눈물을 흘리셨다. 그뿐만 아니라 수지고에 부임하던 첫 해 중간고사는 시험 감독을 들어갔었는데 교직원 연수를 한 이후 기말고사는 시 험 감독에서 내 이름을 빼 주시는 배려도 얻어 낼 수 있었다. 아이들의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난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 많다. 특수교사로서도 그렇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도 그 렇다. 교사란 사대를 졸업함과 동시에 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고 공부하면서 완성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기에 지금도 우리 학생들의 고 교 졸업 후 지역사회 내 자립생활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올해 내가 맡고 있는 학생은 아홉 명이다. 부임한 첫 해, 인문계 고교엔 낯선 지 원고용(중증 장애인의 고용을 촉진하기 위해 만들어진 현장실습 제도) 을 하려하 자 인문계 고교엔 이런 규정이 없다며 관련 규정을 찾아 오라던 교무부장 선생님 말씀에 교육인적자원부(지금은 교육과학기술부) 특수교육지원과에 문의도 하고 경기도교육청과 용인교육청에 질의도 하면서 어떻게든 어렵게 만들어 낸 실습 자 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 그 결과 작년엔 피자헛 수지점에 당시 고3이던 K군을 정식 직원으로 일할 수 있 도록 만들었다. 현재 K군은 평택에 있는 한국재활복지대학에 합격하여 대학생으 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고3 L군과 K군을 빕스 죽전점에 취업시켰다. 이 학생들은 방과 후에 시간제로 예비 직업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또한 9월에는 고3 C양, K군, L군이 씨푸드 오션 구성점에서 지원고용을 시작했다. 하루 4시간씩 복 지관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나도 우리 학생들과 같이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식 기를 닦아 음식이 있는 홀에 가지런히 내어 놓는다. 학생들이 설거지를 하고 그릇 정리를 하는 것이 뭐 그리 자랑할 일이냐 하겠지만 결국 정신지체 학생들의 최종 304 나는 알비니즘(albinism)인이다 305

목표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사회 내에서 스스로 독립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만들 어 주는 것이며 이를 위해선 거기에 맞는 다양한 기술들을 학교와 지역사회 내에서 가르쳐 주어야만 한다. 하지만 학교 교과 수업과 직업교육, 진로지도교육, 잦은 출장과 하루가 멀다하고 밀려드는 수많은 공문들을 다 처리하기엔 특수교사한두명의힘만으로는 여간 힘 든 일이 아니다. 거기에 때때로 교내 외 활동을 하다 내 부주의로 또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학생들이 다치는 것을 보았을 때 교사로서 한없이 부족한 자신을 발견하 고 뒤늦은 후회로 힘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 학생들의 더 나은 내 일을 생각하고 내가 힘들면 힘들수록 그리고 지치면 지칠수록 우리 학생들이 더 나 은 미래를 살 수 있다고 믿기에 난 오늘도 뛰고 있다. 때론 학교 내외의 편견이 나의 적이 될 때도 있고 나의 장애가 날 가로막게도 만 든다. 내 병명 알비니즘은 앞서 언급했듯이 야외에서 햇빛을 받으며 활동을 하면 바로 화상을 입는 병이어서 여름철 진행되는 현장체험학습이나 운동장 활동이 때 때로 날 힘들게 만들지만 그래도 난 즐겁다. 또 학교 밖 활동시 내가 가진 시각장애 로 인해 학생들의 안전이 영향을 받을까 늘 노심초사 하면서 사전에 여러 차례 현 장학습계획을 치밀하게 검토하고 가능하면 미리 사전 답사하여 즐겁고 안전한 현 장학습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진리는 우리 학생들과 함께 하는 이 시간이 즐겁게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장애는 있다. 다만 차이는 그 장애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이 어떠 한가에 달려 있다. 장애는 부끄러운 것도 숨겨야 할 일도 아닌 그냥 우리 일상의 여 러 가지 모습 중 한 가지일 뿐이다. 비록 장애가 있더라도 그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의 나처럼 당신도 노력하고 있다면 결과와 상관없이 당신을 향해 일어 서 박수쳐 주고 싶다. 나는 오늘도 우리 장애인 학생들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도와 줄 것인가? 하고 생각을 한다. 이 사회에서 우리 학생들을 꼭 필요로 하는 그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장애도 삶의 한 모습일뿐 남들과 다른 하얀 피부와 흰색과 연노랑이 섞인 머리카락, 저시력과 떨리는 회색 눈동자 이 모습이 지금의 나이다. 하지만 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가톨릭대학교 교 육대학원에서 직업특수교육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이 지식은 다시 우리 장애인 학생들의 진로지도를 하는데 아주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다. 어느덧 8년차가 되었다. 돌아보면 숨 가쁘게 달려만 왔던 내 교직생활, 사실 이 제는 조금은 편하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변치 않는 306 나는 알비니즘(albinism)인이다 307

자기능력개발 수범사례 知 天 命, 새로운 시작이다 허종구 경상북도 구미시 원평동 XXXXXXXXXXX 먼저 교육사업을 통해 아름다운 사회 만들기에 노력하고 계시는 EBS 관계자 여러분의 노 고에 감사드립니다. 세간에 몰입 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기나긴 여정 속에서 자신의 목표를 세웠다면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집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 사회는 고생하고 노력한 만큼 보상을 주는 정직한 사회임을 믿고 지금부터 자신의 목표를 향해 몰입하시기 바랍니다. 행복이란 언제나 여러분 주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 라는 말을 기억하시고 여러분 주위의 행복을 잡으십시오.

2008년 8월 22일은 석사학위를 받는 날이었다. 나를 축복을 해주는 것일까? 가을 을 재촉하는 비는 아침부터 내리고 있다. 이역만리 먼 곳에서 온갖 고난과 어려움 을 무릅쓰고 달려 와서, 이곳 메마른 대지에 생명수를 선사하는 저 단비를 물끄러 미 바라보고 있노라니, 때마침 지나온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졸업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고 하지 않던가? 석달 전 석사학위를 끝으 로 학업에서 손을 뗄지 아니면 평생토록 공부를 더 할 것인지, 좀처럼 결론을 내지 못해 여러 날을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정년을 눈앞에 둔 직장인으로서 쉽사리 결정을 하지 못하고, 번민에 번민을 거듭하던 중 박사과정 원서접수 마지막 날에서야 평생토록 배우기로 마음을 먹었다. 오늘이 있기까지 아 내의 내조가 매우 큰 역할을 했다. 평생 배우기로 한 결정도 그 덕분이다. 돌이켜 보면 이것이 평생교육이고 내가 이 평생교육을 몸소 실천하는 꼴이 아닌가. 또한 이러한 배움을 통하여 지금은 현저하게 변화되어 있는 나 자신을 조명해 보고, 꿈 인가 생시인가 반문해 보기도 한다. 우연히 시작한 일이 천직으로 나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4월 8일 논 몇 떼기 부치는 전형적인 산간 농촌 의 소농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보릿고개를 배급되는 옥수수가루로 근근이 연 명하며 유년시절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나마 다행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였으 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를 졸업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생활형편이 더 나 아지지 않으니 고등학교 진학은 아예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다. 그 당시의 농촌실정 은 인력에 의존하여 농사를 지어야 했으므로 나도 자연스럽게 부모님을 따라서 농 사일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더 이상의 공부는 거추장스러운 것이었다. 군대를 제대하자 우연히 생에 전환기가 찾아왔다. 앞으로 살아가는 데 농사일보 다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 장래에 희망이 있다는 지인을 통하여 당시 대한지적협회 김천출장소에 들어가 보조자(일용직 측부)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측량보조 자의 생활이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무거운 측량 기구를 메고 하루 종일 걷는 게 일상사였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사무실 청소와, 출장준비며, 자질구레한 심부름 등 어떤 일이든 마다않고 해야만 했다. 정규직도 아니고 그저 하루하루 고용된 일 용직이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공부 도 변변하지 못한 터에 장래를 위해서 이만한 직장도 마땅히 구할 수 없었던 터라 더더욱 노력을 하였다. 온 종일 현장에서 측량을 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 오면, 선배 고참들은 심 부름 등 자질구레한 일들만 시킬 뿐, 좀처럼 측량기술을 배울 기회를 주지 않았다. 어쩌다 기회가 있어서 구적기 등을 사용하려고 하면 느닷없이 불호령이 떨어지곤 하였다. 자격도 없다느니, 측량원도를 더럽히고 구적기를 고장낸다면서 갖은 방해 를 하였다.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하는 수없이 직원들이 퇴근을 한 다음 아무도 몰래 들어와 연습에 연습을 거듭 해야 했다. 그 당시에는 기능사 자격을 가지고 있는 선배들이 한없이 부럽고 대단한 존재로 여겨졌다. 나도 안정된 직장을 가지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기능사 자격을 취득해야 한다는 간절함이 머릿속에 하나 가득했다.중졸 학력이 전부인 나는 지적기능사 2 급부터 시작해야만 하였다. 갖은 고생과 눈치를 보면서, 선배들이 하는 일들을 어 깨 너머로 열심히 보고 익히어 1977년 지적기능사 2급 자격을 손에 쥐게 된 것이,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는 대한지적공사 라는 평생직장의 길로 들어서게 된 동기가 된 것이다.기능사 자격도 취득하고 충실한 근무 덕분에 그해 정규직으로 특채되 는 행운까지 얻었다. 직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태어난 보람을 맛보았다. 생전 처 음 가져보는 자격의 소중함도 느꼈다. 그리고 직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꼭 상 위자격을 취득하고야 말겠다는 꿈 과 희망이 가슴속에 가득차 올랐다. 그후1978년에 지적기능사 1급 자격을 취득함으로써 지적측량을 직접 행할 수 있는 지적기사2급 자격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으나, 선배 및 동료 들은 기술지도는 커녕 조소와 냉대로서 일관했다. 공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우리들도 여러 번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있는데, 어 림도 없지. 기능사 자격만 있어도 감지덕지한데 올라갈 수 없는 나무는 쳐다보지도 310 知 天 命, 새로운 시작이다 311

마 라며 비꼬기도 하였다. 그 당시만 해도 지적측량에 관한 기술서적을 구하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도제식으로 그 자격을 취득한 선배들한테 사사( 私 事 )를 받아야 만 자격취득이 가능하였던 시대이고, 독학으로 자격을 취득하기란 무척이나 어려 웠기 때문이다. 지적기사가 되다 지적기사 2급은 지적측량을 직접 집행할 수 있는 첫번째 관문이다.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영원히 측량기사가 될 수 없고, 다른 측량기사 밑에서 보조만 하 는 기능자로서 영원히 생활하게 될 것이다.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기술서적과 측량 자료를 구하여, 혼자서 문제를 풀고 또 익히고 하면서 드디어 1979년 지적기사 2급 자격을 취득하여 그 선배들 앞에 자랑스럽게 자격증을 내보였다. 조소와 냉대로 일관했던 그 선배들과 나란히 지적측량을 직접 행할 수 있는 측량 기사가 된 것이다. 지적측량 기술자격은 정밀한 측량기기 조작과 더불어 공학적인 고도의 계산을 병행하여야 하며, 국토개발관련분야, 지역개발관련분야, 도시계획 분야, 건축 및 토목분야, 부동산등기분야 등 방대한 관련분야의 지식을 습득하여야 만 기술자격도 취득할 수 있고 지적측량업무를 원활히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지 적측량사가 된 이후에는 직장과 가정생활에 보람과 안정을 가지게 되었다. 앞으로 꿈과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면은 어떤 어려운 일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으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지적측량기술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기술 자격도 갖고 싶은 새로운 꿈 을 꾸게 되었다. 꿈 은 꾸는 자만이 가질 수 있으며,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가지고 오로지 한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며, 다른 분야의 자격취득을 위한 공부에 몰입했다. 그 결 과 1980년 측지기사 2급, 1982년 지적기사 1급, 1982년 지역및도시계획기사 1급, 1983년 측지기사 1급 자격까지, 어렵고 힘들다던 측량분야의 모든 자격을 취득했 다. 그리고 누구도 감히 따라올 수 없는 정도의 측량기술자로서 우뚝 서게 되었다. 그이후나는1985년도에 시행한 제1회 공인중개사 자격시험에도 합격하여 공인 중개사자격 도 취득하였다. 측량분야의 모든 자격을 취득함으로서 직장에서는 시 가지구획정리확정측량,경지정리확정측량, 공업단지조성확정측량,지적기준점 측량등 고난이도의 지적측량을 도맡아 수행하였다.그동안의 기술경력을 인정받 아 2000년 한국건설인협회장이 발행하는 기술등급(토목분야 특급기술자, 측량및 지형공간정보분야 특급기술자, 국토개발분야 초급기술자)을 부여 받았다.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친 학력으로 지적측량분야의 직장에 입사하여 모진 고난 과 역경을 헤치고 오로지 독학으로 측량 분야의 모든 기술자격등을 취득하고 남부 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직장이나 사회에서 학교나 학력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대화에 끼지도 못하고 뒤처졌다. 더구나 남들이 조소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 볼 땐, 부끄러움에 자신감 마저 떨어지곤 하였다. 이러한 비애와 굴욕감은 직접 체 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헤아리지 못하는 크나큰 고통이었다. 하지만 공부를 더하여 나 자신의 학력을 업그레이드시키겠다는 용기조차도 나지 않았다. 중졸의 학력이 전부인 나로서는 직원들이 전문대학이다 대학교에 가는 것을 부 러운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만 볼뿐 학력이 무슨 소용이 있다고, 우리직장에서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자격만으로도 충분해 라며 스스로 자위하곤 하였다. 312 知 天 命, 새로운 시작이다 313

아내와 함께 시작한 도전 바쁜 생활 속에 세월은 빠르게 지나갔다. 새천년이 시작되어 어느덧 대학에 입학한 자식을 기숙사로 보내고 아내와 둘만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제법 여유로운 시간이 주어져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회상해보니 여러 가지 이루지 못한 일들이 많으나, 유독 남들처럼 대학공부를 하지 못한 것이 가슴속에 멍울져 있었다. 이런 내 마음을 헤아려나 준 것처럼 아내가 넌지시 권한다. 지금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으니, 자격증만 가지고도 살아가기가 힘들어진대요. 당신은 직장생활과 사회적 으로 뒤처지지 않으려면 공부를 해야만 돼요. 정부에서도 평생교육 이란 개념을 가지고 국민들에게 다양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도 가만히 앉아 있지만 말고 조금 더 공부를 하여서 남들처럼 대학에 갑시다. 라고 말하면 서,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에 공부할 책이라며 방안에 한보따리를 풀어 놓 는다. 나에게는 한마디 상의도 없었기에 한편으론 서운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방바닥에 널려있는 책들을 한권 한권 살펴보니 국어, 수학, 과학, 영어, 미술, 음악,국사, 가정 등 무려 아홉 가지나 된다. 눈앞이 캄캄해온다. 이 많은 과목을 다해야 한다니, 중학교를 졸업을 끝으로 3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지금 저 많은 과목 의 공부를 정말로 할 수 있을까? 도무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나는 퉁명스럽게 당신이나 열심히 하구려 라고 말했다. 이내 아내가 조용히 설득을 한다. 당신 때 문에 이 책을 사왔는데, 나하고 둘이서 열심히 하면 꼭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다음 에는 대학에 갈수가 있으니까 지금부터 TV도 끄고, 술도 줄이고. 우리 한번 도 전해 봅시다. 의기투합한 우리는 오로지 공부를 하기위한 생활패턴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직 장생활 이외의 일체의 다른 일들을 제쳐두고 두문불출한 채, 오직 검정고시 공부에 만 매달렸다. 어떤 때에는 조석 먹는 것도 잊고, 잠은 책속에 엎어진 체로 자는 것 이 다반사였다. 잘 외워지지 않으므로 방안의 여백이 있는 벽면이나 냉장고며 심지 어 텔레비전 앞까지 중요한 내용을 메모한 용지를 덕지덕지 붙여 두고 각종 문제지 며 책들이 가득한 방안에 파묻혀 생활하였다. 국어와 영어, 가정 등은 아내가 선생님이 되어서 나를 가르치고,나 또한 수학, 과학 등을 아내에게 가르치면서 반년정도를 꼬박 노력한 결과 2001년 아내와 나란 히 대학입학자격 검정고시 합격증을 받았다. 너무나 기뻐서 아내를 부둥켜안은 체 로 이제 대학을 갈수 있는 자격을 부여 받았다. 며 아내의 등을 두드리면서 마치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였다. 나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는 일을 인 생의 반려자인 아내와 더불어서 이루어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너지 효과가 아니 겠는가? 이러한 계기를 마련해준 아내가 자랑스럽다.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으니 우린 대학에 가자. 그래서 떳떳하게 어깨를 겨루며 살자. 가장으로, 직장인으로. 앞으로 실무와 학식을 겸비한 진정한 지적측량 기술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적학 문을 배우자. 이렇게 마음을 굳게 다지며 우리지역에서 지적학문을 배울 수 있는 경일대학교에 원서를 내었다. 그 나이에 무슨 4년제 대학교에 가느냐? 정년도 얼 마 남지 않았는데 편안하게 직장생활이나 하고 여가나 즐기는 편이 인생을 잘사는 길이야. 라고 하면서 걱정을 하는 주변 사람들의 말들은 아랑곳없이, 평생을 일 해 온 지적측량의 학문적 이론을 배우기 위해서 경북 경산시 하양읍에 있는 경일대학 교 건설공학부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을 개최하는 해인 2002 년도 만 50세, 지천명( 知 天 命 )에 학부생이 된 것이다. 314 知 天 命, 새로운 시작이다 315

새로운 학교생활은 고난과 인내의 연속이었다. 호사다마( 好 事 多 魔 )라했던가? 집이 있는 경주지사에서 포항지사로 갑자기 발령이 났다. 출근시간이 한 시간이나 더 소요되고, 포항에서 학교까지는 무려 두 시간이 걸린다. 매일같이 학교에 가는 것이 이만 저만한 고통이 아니었다. 원서를 내기 전에 주위 사람들이 만류하던 생 각이 매일같이 머리를 스친다. 야간수업이 오후 6시부터 시작되었기에 직장에서 차장으로서 여러 가지 하는 일들이 많았지만, 오후 4시 이전에는 모든 일들을 끝 마쳐야 학교에 갈수가 있었다. 여유와 쉴 틈은 조금도 없었고 정말로 타이트한 생 활이 시작되었다. 매일같이 자정이 다되어서 집에 돌아오곤 했지만 아프지 않은 것 만이 천만다행이었다. 너무 바쁜 내 몸속에 감기나 몸살등 바이러스가 둥지를 틀 자리가 없었나 보다. 이렇듯이 어렵고 힘든 생활도 나에게는 가장 즐겁고 행복한 나날이었다. 왜냐하 면 아내는 아들과 더불어 동국대학교 학부생으로 다니게 되어 온가족이 자랑스러 운 대학생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말에는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각자의 대학생활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나는 지적학을 전공하는 공학도로서, 아내는 국문학을 전공하는 문학도로서, 아들은 수학교육을 전공하는 사범학도로서 자기분야에 대 한 자랑으로 가득차곤 하였다. 사랑스런 가족들과 모여앉아 학교와 학문에 대한 토 론은 꿀맛보다 더 달콤하고 행복하였다. 27년만에 이룬 쾌거 이제 지적학문을 공부하는 대학생이 되었으니 그동안의 실무경험을 토대로 하여 지적측량기술의 최고봉인 기술사에 도전을 하자! 평소에는 시간이 없으니 방학을 이용하여 지적기술사 공부에 몰입하자. 기회는 자주 오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지적기술사 자격을 취득해지, 그 어렵다던 측량기 술 자격시험들과 대학입학자격 검정고시 시험도 당당하게 합격을 했는데.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며 또다시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나의 좌우명이 된 꿈 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를 매일 주문처럼 외우며 종전에 공부하던 방법 대 로 열심히 노력을 하였지만, 두 번씩이나 쓰디쓴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주위의 사 람들은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기술사 시험이 고시보다도 더 어렵다고 하던데, 대 학원을 졸업한 사람도 수차례 떨어지고 포기를 한다는데,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 하 편이 지적기술사 시험에 합격하기보다 더 쉽지 않을까?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 다 오히려 내 마음을 더욱 굳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히딩크 감독이 우리나라 축구를 월드컵 4강으로 이끌며 온 국민들에게 꿈 과 희망과 감동을 준 것처럼, 나도 지적기술사 시험에 합격하여서 우리 지적계에 꿈 과 희망과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자. 는 생각을 가지고 더욱 혹독하게 나를 다그치 며, 세 번째 도전한 끝에 2003년도 제69회 지적기술사 시험에 합격하는 영광을 안 았다. 지적기술을 배운지 무려 27년만의 일이다. 정말로 하늘을 훨훨 날아오르는 기쁨이었다. 이런 기쁨은 도전하는자 만이 누릴 수 있는 선택된 행복이었다. 태산 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조선 시대 양사언의 시조처럼 도전하는자는 꼭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경일대학교에서도 학부 2학년생으로 지적기술사 시험에 합격한 공로를 인정하 여 장학금도 지급하여주고, 특히 경일대학교 총동창회장은 공로패와 더불어 장학 금도 주었다. 학교와 직장 그리고 가정에는 더한 즐거움과 행복한 생활이 이어졌 다. 이제 명실공히 최고의 지적측량사가 된 것이다. 그해 대한지적공사에서 실시 한제3회 지적문예작품공모 체험수기부문에서 `히딩크라 부르고 싶은 아내 라는 316 知 天 命, 새로운 시작이다 317

제목의 기술사 합격수기를 응모하여 영예의 동상 을 수상하였으며, 2003년 12월 호 사보에 우리가족이 표지모델로 선정되는 큰 영광을 얻었다. 그리고 제5회지적 문예작품 공모전에서 ` 밤에도 소나기는 오는가? 라는 제목의 현장체험수기를 응 모하여 최고상인 금상까지 수상 하였다. 파란만장했던 4년간의여정 스타들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뒷면에는 언제나 피나는 연습과 수많은 역경을 있 듯이, 지금 돌이켜 보면 나의 대학교4년 동안은 정말로 머나먼 고행과 난관의 길 이었다. 직장 근무지의 이동으로 1 2학년은 포항에서 승용차로 편도 두 시간을 달려가서 강의를 받아야 하였으며, 학생들 중에는 50대는 나 혼자 뿐이니 자식 같 은 학생들과 학교생활에 적응하기란 정말로 힘들었다. 속담에 시집살이는 벙어리3년, 귀머거리3년, 장님3년 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이 역경을 헤쳐 나가지 않는다면 가족에게 가장으로서 무슨 면목이 서겠는 가? 다짐에 다짐을 하면서 꼬박 꼬박 강의를 들으려 학교에 다니던 중, 2004년청 송군지사로 발령이 났다. 청송 가는 길 이란 영화로 널리 알려진 청송은 경북에서 도 오지 중의 오지에 속한다. 고갯길이 험하기로 이름난 노귀재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고개 다섯을 넘어야만 학교에 갈수가 있었다. 야간에 강의를 받으러 학교에 가는 일이 더더욱 힘들어 졌다. 당분간 휴학을 할까 아니면 아예 자퇴를 해버릴까? 기술사 자격도 취득하고 2학년까지 마쳤는데 이제 그만 두어도 후회는 없다. 어려운 내 심정을 아내한테 토로하니까, 아내는 조용히 이른다. 지금까지 고생 한 보람도 없이 그만두다니요? 조금만 더 고생을 하면 고대하던 학사모를 쓰게 될 것인데? 하면서 너무 먼 길이라 혼자 다니기가 적적하다며 아내와 나는 동행이 되 어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청송에서 학교 다니는 일 년 동안에는, 춘하추동 변화하 는 사계절을 아내와 더불어 감상도 하면서, 자연의 이치를 깨달으고 인생을 배우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학교에서 강의가 늦게 끝나면 험준한 노귀재를 넘어 청송으 로 가는 길이 무섭고 두려워서 구미에 있는 집으로 와서 다음날 새벽에 청송으로 출근하기도 하였다. 대학3학년을 청송에서 가장 힘들게 다녔다. 일 년이란 세월이 정말로 머나먼 길이었다. 2005년 또다시 김천시지사로 이동이 되었다. 김천에서 학교까지는 고속도로를 이용해서 한 시간 반 정도 소요된다. 먼 거리이지만 고개가 없으니까 다니는데 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대학 4년을 통 털어 김천에서 학교에 가장 수월하게 다닌 기 간이었다. 세상 모든 일들이 수월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더니, 나의 대학교4년동안 은 정말로 파란만장한 여정이었다. 입학은 경주에서, 1학년과 2학년은 포항에서, 3 학년은 청송에서, 4학년은 김천에서 학교에 다녔다. 특히 야간에 하는 수업이라 더 어려움이 많았다. 가는 세월은 붙잡아 둘 수 없다고, 어느덧 4년의 세월이 흘러 2006년꿈에그리 던 학사학위증을 받았다. 꿈 은 이루어 진다 는 희망의 메시지가 나에게 도착 되어, 드디어 내 꿈은 이루어 졌다. 이제는 좀 쉬고 싶어졌다. 하지만 쉴 수가 없다. 수많은 고난을 헤치고 여기까지 왔는데 멈출 수가 없다. 계속해야만 한다. 옆에 있는 가족들이 용기를 주었다. 다시 경일대학교 산업대학원에 입학을 하였다. 이 제부터 진정한 지적 분야 학문을 연구하리라. 끝없는 배움을 실천하며 지금은 평생교육 운동이 전국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학교는 물론이고 정 부와 지자체에서도 적극적이다. 정년퇴직을 한 대학총장님이 다시 학부생으로 들 어가 공부를 하고 있다는 기사를 본적도 있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 시가 돋친다. 라는 말은 평생교육의 이치를 잘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나는 이제 막 뛰기 시작하는 단계에 와있다. 새로운 도약을 하기 위한 학교생활이 시작 되었다. 대학원의 공부는 또 다른 매력을 안겨 주었다.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는 마 318 知 天 命, 새로운 시작이다 319

음과 몸을 즐겁게 한다. 공부를 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우리 가족들은 아무런 탈도 없이 건강하게 생활을 하고 있다. 정신건강이 육체건강의 첫 걸음 이라더니 아 마, 공부가 건강에 가장 좋은 보약이 되었나 보다! 정말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대학원에서의 연구 활동은 계속 되었다. 2006년도에는 학술지인 한국지적학회 지에 공동연구논문인 우리나라 지적조사사제도의 신설방향 연구 가 등재되어 많 은 호평을 받았으며, 그 후 2008 국지적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임야경계분쟁의 원인과 해결방향에 관한 연구 논문도 발표 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임야분쟁 에 관한 원인과 해결방향을 지금까지의 대법원의 판례를 분석하여 제시한 논문으 로 2008년 8월 22일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천명( 知 天 命 )에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여 6년여 만에 석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이 모든 과정에 묵묵히 뒷바라지를 해준 아내와 가족들에게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 다. 지금은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세월이 참 빠르기도 하다. 뒤돌아보면 손에 잡 힐 듯 한데, 벌써 박사과정에 있다니. 시작이 반. 이라는 속담처럼 용기를 내 어 시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오로지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서, 원하는 모든 사람 에게 기술과 이론을 전수하여 봉사할 수 있는 길이 평생교육을 완성하는 보람이 아 닐까 생각한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또는 교육을 통해서 얻은 지식과 이론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돌아가기 마련이며, 이러한 과정이 되풀이 됨으로서 새로운 기술이 나오고 이론이 정립되어 생활이 풍요로워 지고 사회가 발전되어 가는 것으 로 생각한다. 평생교육은 학교나 사회와 더불어 직장을 통해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오로지 한 직장에서 한 분야의 최고의 전문가로서 생활을 함으로써 여러 차례의 사장 표창을 비롯하여 장관, 도지사, 기초자치단체장표창 다수를 수상할 수가 있었다. 현재는 직장의 일선 책임자로서, 지역사회의 단위기관장으로서 책임과 봉사를 하고자 가일층 노력을 하고 있다. 따라서 직장의 지적측량자문기구인 지적측량실 사위원회위원과 지역사회의 자문기구인 과세표준심의위원회위원,전국체육대회 자문위원,민원조정위원회위원,지적민원도우미등에 위촉되어서 활발한 활동을 하 고 있으며, 한국지적학회이사로 선임되어 학술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또한 구미를 사랑하는 공공기관장 모임인 구사모 회원으로서 지역의 발전과 어려운 이웃돕기 에도 적극 나서고 있고, 독거노인 전문요양원을 찾아 정기적인 후원과 노력봉사도 하고 있으며, 지적관련 전문가로서 지적민원해소를 위해 상담과 기술지원도 하고 있다. 그리고 직장과 지역사회가 발전하는데 작은 밀알이 되고자, 오늘도 평생교육 생 이라는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평생교육장으로 달려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배움 에 목말라 있지만 나이 때문에, 환경 때문에 주저하고 있는 이들에게 짧은 메세지 를 전하고 싶다. 꿈 이 있다면 용기 있게 도전 하십시오. 꿈 은 반드시 이루어 집니다 하는 일들이 너무 많고 바빠서, 시간이 없고 나이가 많아서, 건강을 생각해야지 공부는 무슨? 이러한 안일한 생각은 아예 버리 십시요.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 라는 속담과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라는 양사언 시조를 항상 상 기하고, 용기를 내어서 꼭 도전 하십시요. 우리가 살고 있는 아름다운 사회는, 도전 하는 여러분들에게 반드시 스포트라이트를 비쳐줄 것입니다. 320 知 天 命, 새로운 시작이다 321

자기능력개발 수범사례 꿈을 찾는 자율적인 인간이 되자 박형옥 서울특별시 마포구 염리동 XXXXXXXXXXXXXXX 이번 수기공모전은 대학 시절부터 마흔의 나이가 되어버린 지금까지의 시간을 정리하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새해가 시작되면 한 해의 목표를 세우고 새로운 달이 시작되면 한 달의 목표를,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면 다시 한 주의 목표를 세워 책상 앞에 붙여둡니다. 이루고자 하는 일들을 적어놓고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 목표에 가까이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저하지 말고 여러분이 이루고자 하는 꿈을 적어 보십시오. 그리고 그 꿈을 향해 쉬지 않 고 열심히 달려가는 자율적인 여러분이 되십시오. 저 역시 이번 공모전 수상을 계기로 더 욱 열심히 정진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저의 글이 여러분께 조금이라도 힘이 되길 바라며 부족한 글을 당선시켜 주신 심사위원 님들, 그리고 언제나 제게 용기와 힘이 되어준 사랑하는 남편,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자라 준 진섭이와 하림이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나는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 둘의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이다. 마트에서 고객 사은 행사를 하면 주저 없이 물건을 집어 들고 아이들의 특기적성 신청을 위해서는 이른 새벽부터 줄을 서는 평범한 대한민국의 아줌마이다. 하지만 정신없이 집안 일 을 끝내고 난 후 새벽 늦은 시간까지 컴퓨터 앞에서 꼼짝 않고 앉아 공부를 하고 있 을 때 나의 눈에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고자 하는 오기와 열정이 가득 차오르 는 느낌이다. 2008년 봄, 나는 한양대학교 안산캠퍼스 국제문화대학 문화콘텐츠학과 에서 프 레젠테이션 스킬과 피칭전략에 관한 강의를 하였으며 요즈음은 틈틈이 대학과 공 공기관에 특강을 나가고 있다. 또한 공모전에도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는 도전하여 작은 성과라도 거두는 이른바 자칭 프리랜서 아줌마 이다.지난 9월 26일에도 문화 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 실시한 문화원형 창작콘텐츠 공모전에 서 대학특별상을 수상 하였다. 어머! 학부형이세요? 라는 말을 들을 만큼 참가자 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났지만 나의 열정 앞에서 그것은 그야말로 숫자에 불과했 다. 오늘날 이런 나의 모습은 처음부터 좋은 환경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완전 히 나의 피나는 노력과 들끓는 열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먼저 말하고 싶다. 자격증이 열어준 새로운 인생 대학교 4학년 어느 봄날 서울에서 통역학원을 다니고 있는 대학 선배언니를 만나 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문득 나도 관광통역안내원 이라는 자격증에 도전 해봐 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자격증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아무래도 취업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한 모양 이었다. 그 길로 나는 서점으로 가서 시험 관련된 책을 모두 구입하여 그날부터 죽어라 하고 공부를 하였다. 첫 번째 시험을 치렀을 땐 2차에서 떨어 졌다. 그러나 나는 다시 부족했던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여 마침내 독학으 로 관광통역안내원 영어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그 이후로 내가 취득한 자격증과 관 련이 있는 직종에 관심을 가지며 취업준비를 해나갔다. 마침내 1991년 10월 (주)모두투어 여행사(당시 (주)국일 여행사)에 취업을 하 게 되었다. 입사 시험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관광통역안내원 영어 자격증 덕에 관광분야의 비전공자인 내가 공채로 입사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약 6년남짓 여행상품 기획업무를 하며 전문적인 업무능력을 키웠고 1994년 월간 트래블 트 레이드 저널(TTJ) 이라는 관광전문잡지에 신세대관광인으로 기사에 소개될 만큼 여행 업계에서 촉망받던 직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들처럼 나는 결혼도 하였고 아이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첫아이를 가지고 유산 기가 있어 어쩔 수 없이 직장을 관두어야만 했다. 나는 첫 직장을 관둔 후 아이를 돌 보며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나의 커리어우먼 으로의 모습은 평범한 가정주 부의 모습으로 변해 갔다. 아이가 놀이방에 갈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무렵 나는 무 언가 일을 하겠다는 생각에 신문의 구인구직란을 꼼꼼히 뒤지며 하루하루를 보냈 다. 하지만 30대 기혼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고 있다고 해도 아이 때문에 시간이 허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모 신문하단 공고란의 실업자 대상 노동부 무료국비과정 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교육기관은 서울디지털디자인 전문학교 였고,과정명은 실업자 재취직훈련 인터넷정보검색사 6개월 과정 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인터넷 이 널리 보급되지 않아 정부에서는 사이버코리아 라는 슬로건아래 인터넷교육을 장려하는 시기였다. 서울디지털디자인 전문학교의 6개월 교육과정은 인터넷과 정 보통신 분야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들을 배울 수 있는 과정이었고 얼마 안 되는 적 은 돈이었지만 교통수당 까지도 받을 수 있었다.하루 전일을 할애해서 일할 수 없 는 나에게 교육은 새로운 분야의 신기술도 배우고 자기능력도 개발 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서둘러 필요한 서류를 챙겨 원서 접수를 하였다. 교육 수강 증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선 대학 합격통지서를 받았을 때 보다 더 기쁜 마음 이었다.초등학교에 입학 하는 설렘으로 공책과 필기도구 등을 챙기며 교 육이 시작 되는 첫 수업일 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1999년 9월 드디어 첫 수업이 있는 날이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컴퓨터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문외한 이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인터넷과 정보통신 관련 용어 324 꿈을 찾는 자율적인 인간이 되자 325

들은 나로서는 따라 가기가 아니 이해하기 조차 힘든 내용들이었다. 더욱이 수강생 들과의 나이차 에서 오는 미묘한 어색함 까지 존재 하였다. 하지만 인생에서 이렇 게 공부할 기회는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각오로 공 부를 하였다. 집에 와서도 틈만 나면 책을 보고 또 보고 정리하였다. 그러던 중 시아버님이 돌아가셔서 며칠 동안 시골에 내려가야만 하는 일이 생겼 다. 설상가상 나의 자격증 시험일이 시아버님의 발인 날과 겹쳤고 나는 몇 달을 준 비한 시험을 포기할 수 없는 마음에 시골에서 새벽 첫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시 험을 보고 오후에 다시 시골로 내려가야만 했다. 맏며느리로서 상상 할 수조차 없 는 일 이었지만 남편과 시어머님의 이해로 무사히 시험을 치를 수가 있었다. 드디 어 2000년 3월 힘들었던 6개월의 교육 기간을 마쳤다. 그동안 나는 한국능률협회 정보검색사 1급과 웹페이지전문가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비록 국가기술자 격증은 아니었지만 내 생애에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의미 있는 결실과도 같은 자격 증이었다. 얼마 후 옛 직장의 상사가 (주)서울항공여행사의 전산실에서 사람을 구한다며 내게 지원할 것을 권유하셨다. 그 당시 서울디지털디자인 전문학교에서 배웠던 지 식으로 웹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용기를 내어 이력서를 제출하고 면 접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2000년 10월 나는 인생에 있어 두 번째 직장생활을 시작 하였다. 나의 업무는 회사의 웹사이트를 업데이트 시키는 일이었고 회사의 컴퓨터에 대 한 전반적인 관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배운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모르는 것은 공부 해가며 전산실장으로서 열심히 일하였다. 하지만 인생지사 새옹지마라 고 그 자리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관두게 되는 일이 생겼다. 남편이 사고로 고관 절 부위를 다치어 병원에 입원을 한 것이다. 나는 오후에는 남편 병간호를 하여야 했기 때문에 회사에 부탁을 하여 근무시간을 파트 타임제로 조정하였다. 더불어 큰 아이는 시골 친정에 맡기고 둘째는 아는 언니 집에 맡겼다. 엄마 손이 절실히 필요 한 시기에 어린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며 남편의 병원을 왔다 갔다 했어야 했던 그 시간들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컴퓨터그래픽스운용기능사 국가기술자격증 시험을 접수 해놓 았기 때문에 병원을 오가는 전철에서도 퇴근 후 집에 돌아와서도 죽어라하고 공부 했다. 내게 닥친 시련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극복할 수 없는 시련은 신께서 아 예 주시지 않는다고 스스로 위안 삼으며 말이다. 회사를 계속해서 파트타임으로 다닌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이었다. 나 는 회사를 관둘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얻은 자리인데. 눈물을 머금고 나는 이를 악물며 다짐했다. 또 다른 기회가 반드시 올 거야! 힘내자! 스스로에게 강 해지자고 다짐하며 나는 묵묵히 컴퓨터그래픽 분야를 독학 하며 미래의 나의 모습 을 꿈꿨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남편도 병상에서 회복이 되고 아이들도 모두 집으로 데리고 와 우리 가족은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 2001년 9월 나는 한국정보문화진흥원의 강사지원단에 지원을 하여 운이 좋게도 강사로 뽑혔다. 사회적으로 정보화교육에 소외된 청소년, 노인, 주부 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는 일이었다. 두 시간 넘게 걸 리는 외진 지역까지도 전철과 버스를 몇 번씩 갈아타며 소외된 사람들과 나 자신을 위해 열심히 뛰었다. 열정과 이력만큼 꿈도 커지고 나는 또 다른 교육의 기회를 얻기 위해 인터넷과 신문의 실직자 무료교육과정 기사 를 매일 찾아보았다. 마침내 WORK-NET 이라는 고용정보 사이트를 통해 서울우 양직업전문학교(현재 벽산직업전문학교) 의 그래픽디자인 6개월 실직자과정을 찾 을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게 행운과도 같은 교육 과정이었다. 하루 6 시간을 수업 받는 과정이었으므로 아이들은 어렵사리 동네의 아주머니께 맡기고 열심히 공부를 하러 다녔다. 한 푼 벌지도 못하면서 아이들을 돈을 주며 남에게 맡 겼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보다도 몇 배 더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남편에겐 늘 미안 했고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남편은 지금 힘들어도 열심히 노력하고 326 꿈을 찾는 자율적인 인간이 되자 327

투자를 하면 먼 훗날 분명 좋은 결과가 나올 거야 라고 말해주며 나를 격려해 주었 다. 그런 남편이 한없이 고맙기만 했다. 대부분의 주부들이 그렇듯이 가족의 도움 특히 남편의 이해와 도움 없이 사회에 나가 직장일 또는 공부를 한다는 것은 현실 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동안 시간은 흘러 2002년 5월 드디어 6개월의 교육과정을 마쳤고 중간에는 한국산업인력공단 에서 시행하는 컴 퓨터그래픽스운용기능사 국가기술자격증도 취득하게 되었다. 나는 잠시 중단했었던 한국정보문화진흥원의 정보화교육 강사지원단 일을 다시 시작 하였고 2003년도에는 내가 교육을 받았던 우양직업전문학교에서 실직자들 을 대상으로 포토샵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디자인정글 아카데 미 라는 그래픽학원의 시간강사 자리에 온라인 이력서 등록을 하였다. 6개월이 지 난 어느 날 학원으로부터 면접을 보러 오라는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동안 의 이력과 함께 열정 그리고 미래에의 포부를 밝혔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 는다! 고 2004년 4월 드디어 디자인정글 아카데미 에서 포토샵강좌를 강의하게 되었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내가 이곳에서 그래픽 강의를 하다니! 나는 언제나 처음 시작하는 마음의 자세로 열심히 강의를 하였다. 그 결과 경기 도여성능력개발센터의 컴퓨터그래픽스운용기능사 자격증 반에서 강의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집에서 왕복 4시간이 넘게 걸리는 먼 거리 이었지만 자기개발을 위 해 열심히 노력하는 주부들에게 나의 용기와 열정을 심어 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힘든 줄도 모르고 열심히 강의를 하러 다녔다. 새로운 분야를 향한 도전 쉴 틈도 없이 나는 또 컬러리스트기사 국가기술자격증 공부를 하였다. 혼자 공부 하기에는 어려운 자격증 시험이라 학원을 다닐까도 생각했지만 학원비는 엄두도 못 낼 만큼 비쌌다. 결국에 나는 인터넷카페를 통해 시험관련 정보를 얻고 6개월간 의 지독한 노력으로 자격증 시험에 합격하였다. 그 당시 나는 디자인분야에 비전공 자이었으므로 강의와 관련된 자격증을 될 수 있으면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자신감이 없거나 힘들 때면 그때의 자격증을 꺼내 그 시절의 모 습을 회상하고 자신감을 얻곤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부에 대한 나의 열정은 점점 더해갔고 나의 이력도 조금씩 쌓 여져 갔다. 2004년의 끝자락인 어느 날에 디자인정글 아카데미에서 강사들의 모임 이 있었다. 디자인이나 컴퓨터관련 전공자가 아닌 평범한 아줌마 강사이었기 때문 에 타 강사들과 어울리기는 어떤 강의보다도 내게 힘든 일이었다. 나는 그 모임에서 또 다른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되었다. 그래 좋아! 디자인에 대하여 좀 더 전문적으로 공부를 해보자! 그러면 강사로서 자신감도 생 기고 수강생들 에게도 지금보다 더 쉽게 강의할 수 있을 거야! 하며 말이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한 내가 디자인 관련 대학원을 들어간다는 것은 정 말 어려운 일이었다. 몇몇 학교에 찾아가서 망신을 당하고 온 적도 많았다. 우리 대학원은 프로젝트가 많아 밤을 많이 새워야 합니다. 결혼하셨다면 더욱 힘들겠군 요! 하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 서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곳의 학교는 모두 문을 두드렸다. 그러던 2005년3월 이화여자대학교 디자인대학원 디자인매니지먼트 석사과정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 동안의 강의 경력과 비전공자로서 열심히 공부 하겠다는 의지와 포부가 합격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의 만학의 길은 다시 시작되었다.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에 같은 과 학생들과 거의 10년 넘게 나이차이가 났기 때문 328 꿈을 찾는 자율적인 인간이 되자 329

에 수업을 따라 가기가 물론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2년반동안정말열심히공부 하였다. 가사와 학업을 병행 하는 것이 벅차서 중간에 휴학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 당시 주저앉으면 다신 공부할 수 없다는 생각에 계속 학업을 이어 나갔다. 사실 공부하는 동안 가정이 늘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나의 대학원 공부로 인 하여 육아의 몫이 남편에게로 돌아갔고 시댁의 경조사를 잘 못 챙기는 경우가 많았 기 때문에 남편은 나를 이해하고 도와주면서도 나의 대학원 공부를 불만스러워 했 다. 그럴 때면 나는 무척 고민스러웠고 내가 무모하게 공부를 하는 건 아닌가 하 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남편의 이해를 구해가며 아이들과 집안일에 몇 배 더 신경을 썼다. 성공의 씨앗이 되는 작은 경험들 2005년 6월 이화여자대학교 에서 주관하는 세계여성학대회의 진행요원을 할 기 회가 생겼다. 국내외 참가자들의 등록을 도와주는 아르바이트였다. 1999년 11월 한국일반여행업협회 관광통역안내원으로서 제68차 서울 인터폴총회의 공항영접 일을 한 이후로 두 번째 국제회의 관련 일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국 제회의 관련 인터넷 카페에 가입을 하고 그 분야에 관심을 가지며 틈틈이 아르바 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국제회의장 업무, 등록업무, 관광 안내 및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지원하여 관련된 업무의 지식들과 경험들을 차곡차곡 쌓았다. 분명 언젠가는 또 다른 성공의 씨앗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나는 국 제회의 관련 아르바이트 일을 하면서 나의 대학원 전공인 디자인과도 연관지어 나 름대로 모니터링을 하고 공부를 해나갔다. 그런 나의 노력을 지도교수님께서 아시 고는 교내에 국제회의센터 연구원 자리를 추천해 주셨다. 나는 그곳에서 2006년 6 월부터 일 년 남짓 동안 대학원에서 배운 디자인공부를 적용시켜가며 열심히 일했 고 경험도 쌓았다. 인생을 살며 사소하게 겪게 되는 모든 일들은 언젠가는 쓸모 있 는 것이 되어 우리를 성공에 가깝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 시간들이었다. 국제회의센터에서의 계약기간도 끝나고 대학원에서의 공부도 끝나갈 무렵 우연 찮게 대학신문에서 (사)서울컨벤션뷰로(지금은 서울관광마케팅 주식회사) 주최 전국 대학(원)생 컨벤션유치제안서 공모전이 열린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공모 전에 참가 한다는 것은 그동안 국제회의센터에서 일한 경력과 국제회의관련 아르 바이트로 일했던 경험으로는 내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공모전 웹사이트를 보며 몇 날 며칠을 고민 하였다. 결국 나는 그래 해보는 거야! 해보지 않는 이상 아 무도 결과는 모르는 거고 나중에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더 클지도 몰라 하 면서 공모전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아이 둘을 기르는 나는 여느 대학생이나 대학 원생들처럼 공모전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더욱이 컨벤션 분야에 도 비전공자였다. 공모전을 하기로 마음먹은 날부터 나는 분 단위의 시간 계획표를 세웠다. 밤새워 지난 개최지의 관련 자료를 인터넷검색을 통하여 정리 분석하고 낮 에는 주위의 조언을 구해가며 현장을 발로 뛰어 다녔다. 국제회의를 서울로 유치하 기 위해 회의참가자와 실사단의 시각에서 모든 기획을 했어야 하므로 나는 날마다 버스를 타고 서울 시내를 다니며 직접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발로 뛰는 기획을 하 였다. 나이 많은 아줌마 학생이었기 때문에 몇몇 관련기관과 업체에서는 아예 만나 주지 조차 않아서 그때마다 몇 번이고 찾아가서 부탁을 하며 자료를 구하였다. 그렇게 두 달 정도를 밤을 새워가며 공모전을 준비했다. 2007년 2월 예선을 통과 하고 마지막 프레젠테이션 면접에서 네 팀과 결선을 겨뤄 뜻밖에도 최우수상 이라 는 결과를 얻었다. 다른 팀들은 모두 4명이상의 팀으로 구성되어 참가하였는데 나는 홀로 나가 승전보를 울린 것이었다. 그것도 비전공자인 아줌마가 말이다. 나는 너무 행복해 시상식이 끝나고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 가서 몇 번이고 상장을 부둥켜 안고 울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그래 이렇게 하는 거야! 하는 자신감을 가졌다. 시상 과 더불어 2007년8월에는 주최 측인 (사)서울컨벤션뷰로의 후원으로 일본의 동경, 요코하마, 지바 지역의 컨벤션관련 시설들의 해외연수를 갈 수 있는 기회도 얻게 되 었다. 나는 디자인 전공자였기 때문에 컨벤션시설들 뿐만 아니라 컨벤션 시설의 디 자인에 대해서도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내 생애의 첫 번째 해외연수를 다녀왔다. 2007년 8월에는 그동안 컨벤션 행사를 통하여 얻은 경험과 지식에 대학원에서 330 꿈을 찾는 자율적인 인간이 되자 331

공부한 디자인 관련 지식을 접목시킨 주제의 졸업 논문이 당당히 통과되고 꿈에도 그리던 대학원을 졸업하게 되었다. 대학원을 졸업한 후 운이 좋게도 대학에서 공모 전 관련 특강을 할 수 있었다. 공모전 심사에는 프레젠테이션 심사도 포함되어 있 었기 때문에 공모전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나의 경험담은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 었다. 컨벤션유치제안서 공모전 수상의 여세를 몰아 같은 해 8월 외교통상부와 문 화관광부 주최로 실시된 여권디자인 국민 아이디어 온라인공모전에 도전을 하여 입선 의 영광을 차지했다. 관광과 컨벤션 그리고 디자인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생 활하고 있었던 터라 공모전에서 그동안의 경험과 지식을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었 기에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난생 처음 나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진 행된 시상식에서 상도 받고 전시회에 나의 수상작을 전시 하는 행운을 얻었다. 공부는 내 인생에 주어진 커다란 행운 나는 이렇게 만학의 기쁨에 흠뻑 빠져 매일매일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였다. 주말엔 서점에 가서 신간 서적들을 읽었다. 덕분에 우리 집 아이들의 나들이 장소는 늘 서 점이 되어 버렸다. 인터넷으로는 관심기사들을 스크랩 하고 없는 시간을 쪼개어 다 양한 분야의 세미나와 워크숍을 들으러 다녔다. 디자인을 보는 안목도 높이고 행사 의 기획,무대 상황, 발표자의 자세 등 관심분야의 트렌드를 예측하고 변화를 따라 가기 위해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때문이었다. 나의 생활 철칙 중의 하나가 언제 어디서 어떤 기회가 오더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꾸준하게 항상 공 부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2007년 겨울 어느 날 평소 친분이 있었던 선생님께 오랜만에 안부를 전하게 되었 다. 그런데 나보고 프레젠테이션 강의를 할 수 있냐고 물어보시는 것이었다. 기회는 준비하는 자에게만 온다고 했던가. 나는 무조건 할 수 있다는 대답을 하였다. 5개월 남짓 기간을 도서관과 서점을 오가며 이론적 지식을 쌓고 실제 강연장을 다니며 산 지식을 쌓았다. 가족 모두가 잠든 밤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 낮동안 모았던 지식들을 정리하였고 삼성경제연구소의 커뮤니티를 통하여 최신 정보와 트렌드를 배웠다. 그렇게 긴 겨울이 지나고 2008년 3월, 약간은 쌀쌀 했지만 봄이 찾아왔다. 내가 강의할 곳인 한양대 안산캠퍼스는 집에서 버스와 전철을 네 번이나 갈아타고 가야 하는 먼 곳이었다. 하지만 첫 수업이 있던 날 아침에 내가 느낀 행복감은 그 무엇으 로도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가슴 벅찬 느낌 이었다.수년전 시아버님 발인 날 자격증 시험을 치르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다 내려간 일, 남편의 사고로 아이들과 떨어져 지 내며 회사를 다녔던 일, 실직자 교육과정을 들을 때 배식 받는 순서문제로 다투어 울었던 일 등 그동안의 모든 기억들이 입가에 미소로 맺히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아이들도 키워야 했고 친정과 시댁에서 맡은 역할도 잘하고 남편 내조도 신경써야 했다. 물론 새로운 공부와 일을 시작한 것은 내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지 만 지금 돌아보건대 내 인생에 있어 그리 쉬운 여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내 인생에 주어진 커다란 행운 이었던 것 같다. 물론 나의 자기 개발과 일에 대한 열정은 평생을 통해 진행해야 하는 숙제가 될 것이지만 말이다. 이렇게 나의 이야기를 마치며 마지막으로 자기개발에 혼신을 쏟는 분들께 전해 주고 싶은 말은 꿈을 찾는 자율적인 인간이 되라 는 것이다. 현재의 삶이 고되고 힘들지라도 10년 후의 미래모습을 꿈꾸며 비전을 가지고 준비한다면 분명 우리들 각자의 꿈은 이루어 질 것으로 생각한다. 자, 우리 모두 꿈을 찾는 자율적인 인간이 되자! 332 꿈을 찾는 자율적인 인간이 되자 333

자기능력개발 수범사례 비전이 이끌어준 삶 김지환 서울특별시 동작구 신대방동 XXXXXXXXXXXXX 기술사 라는 목표만을 보고 달려온지 어언 5년이 되었습니다. 꿈을 좇는 동안 자격 취득, 병역 특례, 대학 편입 등 제가 간절히 원했던 것들이 하나 둘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와서 뒤돌아 보니 청년시절에 꿈을 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자유하고 싶으면 자유를 제한하라 는 말이 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황금기 를 공부에 투자하며 국가 주요시설에서 병역 특례를 받아 남들이 누리지 못한 경험과 자유 를 누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앞으로 조금만 더 노력을 하면 30대 이후에는 시간적, 경제적 으로 자유로운 가운데 인생을 누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감히 해봅니다. 앞으로 더욱 노력하여 대한민국이 선진국 반열에 들어서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싶 습니다. 끝으로 저를 위해 고생하신 부모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무엇보다 항상 제 기도에 귀 기울이시며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일등을 꿈꾸는 꼴찌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 항상 전교에서 꼴찌를 하는 학생이었 다. 중학교 때 역시 공부를 무척 못했지만 좋아하는 친구를 쫓아 인문계로 갔다. 인 문계에 가서는 더 심각했다. 중학교 때까진 공부를 안했으니 성적이 뒤쳐지는 것이 당연했지만 고등학교 때는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는 정말 공부를 열심히 했음에도 성적은 항상 엉망이었다. 나와 함께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친구들은 모두 공부를 잘 했다. 하지만 난 친구들과 공부하는 시간만은 그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성적은 여전히 바닥에 머물렀다. 고3이 되어서는 삭발을 하고 반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친구 옆에 앉아서 하루 종 일 공부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균점수가 60점을 넘기 힘들었다. 스스로에 게 많은 한계를 느꼈다. 시간이 지나 어느새 수능을 보게 되었고, 결과는 400점만 점에 원 점수 185점. 서울에 있는 2년제 전문대학도 들어가기 힘든 점수였다. 정말 웃기지만 고2때부터 나의 목표는 의대였다. 동기는 간단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 시 나의 할머니가 다리가 많이 아프셨다. 수술을 하려 했지만 의사들은 치료할 수 없다 했다. 그래서 내가 직접 의사가 되어 어떻게든 치료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 의 대를 목표로 삼았다. 내가 생각해도 당시 난 정말 단순했던 것 같다. 어쨌든 재수를 하고 싶었다. 재수로 안 된다면 삼수, 사수, 오수 아니 십 수까지라도 해서 의대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재수는 포기하게 됐다. 당시 가정형편이 상당히 어려웠기 때문이다. 공부 로는 싹수가 안보였으니 부모님께서는 내가 하루빨리 학업을 마치고 돈을 벌길 원 하신 것 같다.당시 나의 담임선생님 역시 나의 재수를 결사반대 했다. 그래서 당시 나는 많이 방황을 했다. 친구들과 연락도 다 끊고, 혼자 이리 저리 생각만 많았던 것 같다. 그러던 중 편입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2년제 대학에 들어가도 4년제 대학 에 입학할 수 있는 것이다. 더 좋은 건 의대도 편입생을 받는다고 한다! 갑자기 힘 이 솟는다. 그래, 2년제 가서 정말 목숨 걸고 열심히 한번 해보자! 난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라는 마음가짐으로 전문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2년제 대학 중 에 가장 등록금이 싸고 집에서 가까운 대학을 알아봤는데, 지금의 한국 폴리텍 1대 학이다. 이 곳 전기과에 입학을 하기로 결정을 하고, 원서를 접수했다. 물론 이 곳 외에도 다른 전문대학에 접수를 많이 했다. 합격자 발표일에 놀랍게도 모든 학교에 예비를 받았다. 200위를 넘긴 학교도 있었다. 지방 전문대인데도 말이다. 굉장한 충격을 먹었다. 내가 이정도 밖에 안 되는 거구나. 재수를 하기엔 늦었다. 그간 공 부를 너무 안했고 벌써 2월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이 2월이 되어 예 비합격자 발표일 날 2~3곳 정도의 대학으로부터 합격 소식을 통보 받았다. 그리 고 그 중 한국 폴리텍 1대학이 있었고 난 기쁜 마음에 한국 폴리텍 1대학을 선택했 다. 당시 대학 등록금은 84만원이었다. 전국에서 가장 쌌다. 나의 부모님도 매우 기 뻐하셨다. 들어갈 땐 꼴등으로 들어갔지만, 나올 땐 반드시 일등으로 나올 거다. 대학에 입학할 때 나의 다짐이었다. Made in Twenty, 비전과 목표의 수립 20살. 대학 전기과로 진학하게 된 난 개강을 하자마자 교수님을 찾아가 면담을 했 다. 교수님. 저 4년제 대학교로 편입하고 싶어요. 어떻게 해야 편입을 할 수 있을 까요? 1학년 3월 2일. 교수님을 처음 대면해서 한다는 얘기가 편입한다는 얘기. 지금 생각하면 정말 철이 없고, 외골수에 단순 무식. 그게 바로 나였던 것 같다. 교 336 비전이 이끌어 준 삶 337

수님께서 자존심이 많이 상하셔서 기분나빠하셔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하게 내 얘기를 들어 주시고 공부에 대한 방향을 잡아주셨다. 편입 영어만 공부하면, 할 수 있는 것이 편입 밖에 없다. 하지만 지환이 네가 대학을 다 니면서 산업기사 자격과 병행하여 진짜 영어를 틈틈이 공부한다면, 2학년이 되어 자격증을 취득했을 때 첫째, 편입도 쉽게할수있을것이고둘째, 병역특례 혜택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셋째, 좋은 직장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처음 내 길을 지 도 해 주셨다. 난 편입과 더불어 병역특례를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더욱 매력을 느 껴, 편입영어 공부가 아닌 나의 전공분야의 전기산업기사, 전기공사산업기사 취 득을 목표로 하게 됐다. 그래서 그날 바로 서점에 가서 자격증 필기책을 사서 공부 를 시작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난 후 난 독학을 포기했다. 전압, 전류, 전력, 저항 등의 단위도 모르는 내가 대학 4학년들도 힘들게 공부해서 붙을까 말까한 자격증 을 공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머리가 남들보다 특출 나게 나쁜 김지환 이 말이다. 그래서 교수님께 가서 상담을 했다. 교수님께서는 내게 노량진 에 있는 전기 학원을 추천해 주셨다. 그래 학원과 병행해서 공부를 하면, 이해도 쉽 고, 진도도 빨리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날로 바로 학원에 찾아갔다. 학원 원장님 과 교수님이 친분이 있으셔서 내게 매우 친절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열심히 하면 나 도 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도 생겼다. 그래서 당일로 바로 학원에 등록했다. 간인데 학원 앞 포장마차 집에서 1000원짜리 닭 꼬치와 콜라로 끼니를 때웠던 기 억이 새록새록하다. 수업이 끝나면 독서실로 간다. 10시부터 12시까지 학교와 학 원수업을 간단하게 복습하고 잤다. 학원 수업을 듣는 것은 정말 만만치 안았다. 지금도 정확히 기억하는데 첫날 수 업은 전기법규였다. 전주가 어떻고, 접지는 어떻고 알지 못할 전기 용어가 태반이 었다. 마치 영어로 수업을 듣는 것 같았다. 앉아 있는 게 고역이었고, 수업을 이해 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이렇게 노력하는데 또 꼴등하는 것 아닌가. 하 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내가 학원을 나가고 나서 대학동기 10명 정도가 나를 쫓 아 학원에 나오게 되었다. 동기들 중 8명은 1~2주 정도 수업을 듣다 극도로 스트레 스를 받아 학원을 그만두게 됐고, 나와 당시 27살이었던 동기 형만 남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형도 학원을 그만 다니게 됐고, 결국엔 나만 다니게 되었다. 아! 당시 회원제로 50만원을내고2년 수업을 들을 수 있게 약속을 했기 때문에 돈 은 문제가 아니었다. 어쨌든 그렇게 힘든 시간이 지나고 2달 정도가 지나자 전공에 대한 용어에 귀가 트이기 시작했다. 전공 수업이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공부가 재밌어 자신감 속에 기술사를 꿈꾸다 하지만 대학과 학원생활을 병행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폴리텍 대학은 2년동안 119학점을 이수해야 한다. 해서 1학년 1학기 때 32학점을 신청을 했는데, 공강 없 이 수업시간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였다. 학교 수업만 들어도 진이 쭉 빠진 다. 지친 몸을 이끌고 바로 학원으로 간다. 학원 수업시간은 오후 7시부터 9시30분 까지다. 학교에서 학원까지의 거리는 정말 딱 50분이 걸린다. 그래서 저녁 먹을 시 간도 없이 바로 수업을 듣곤 했다. 1시간 30분 수업하고 8시30분부터 10분 휴식시 338 비전이 이끌어 준 삶 339

졌다. 탄력을 받게 됐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여름방학이 왔다. 당시 나의 학업 계획은 아침 8시부터 12시까지 독서실에서 전공 공부, 점심 2시부터 5시까지 학원 수업, 오후 6시부터 11시까지 예습 및 복습 이었다. 어느날빈학원강의실맨뒤쪽에서 자격증 응시 자격 안내도가 붙어있었 다. 제일 위를 봤다. 기술사 란 것이 있었다. 기술사를 응시하기 위해선 기사자격 을 취득하고 현장의 4년 경력을 쌓아야 한다. 내가 공부하는 산업기사를 취득하게 되면 자격취득 후 현장에서 6년 경력을 쌓아야 한다. 그래서 그 때 자격증을 취득 하고 경력을 쌓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에는 차이가 있단 것을 알게 되었다. 기술사가 궁금해졌다. 학원 선생님께 기술사에 대해 여쭤봤다. 학원 선생님은 기술사는 대한민국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자격 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알아 보니 실제로도 그랬다. 일단은 기술사 자격을 취득하게 되면 첫 번째로 법에 의해 자격을 보호받게 되어 고용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되고, 1인 기업이 가능하게 되어 기술사무소를 설립할 수 있다. 기술사무소는 의사 혹은 변호사와 같은 면허의 성격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대학교에서 강연을 할 수 있고, 신문이나 전문잡지 등 에 글을 기고 할 수 있는 등의 많은 혜택이 주어졌다. 난 그 때부터 내 꿈을 대한민국 최연소 기술사가 되는 것으로 잡았다. 대학은 꼴 등으로 들어 갔으니,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기술사 자격만큼은 최 연소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취득하고픈 강렬한 열정이 생겨났다. 공부에 미쳤던 시절 길은 학점은행제도를 통해서 106학점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학점을 인정받고 나 면 기사 자격시험에 응시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106학점을 인정받기 위해 선2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산업기사 자격을 2개 취득해야 한다. 그래서 재학 중 산 업기사 자격을 취득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그 후에는 학점은행제를 통해 106학점을 인정받은 후 기사시험에 응시하는 것을 계획으로 삼았다. 기술사가 되고 싶은 꿈이 생긴 이후에는 정말 남들에게 미친 놈 이란 소리를 들 을 정도로 공부를 했다. 대학에서는 50분 수업하고 난 후 쉬는 10분조차도 아까워 공부를 했다. 그리고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학원으로, 학원에서 독서실로, 독서 실에서 집으로 가는 이동하는 자투리 시간을 아껴 하루 종일 책을 들고 다니며 공 부를 했다. 2학년이 되면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가 3번 주어지는데 거기서 한 번이라도 떨어지면 졸업 전 산업기사 2개 취득은 물 건너 갈 것이 뻔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1학년 때 미친 듯이 공부했다. 무엇보다 스스로에 대한 신 뢰 문제였다. 고등학교 시절 3년 역시 열심히 노력했지만, 결실은 좋지 않았다. 하 지만 대학에 와서도 그렇게 된다면, 스스로를 미워하게 될 것 같았다. 떨어지더라 도 후회는 일점도 남기지 않기 위해 내게 허락되는 모든 시간을 공부에 쏟았다. 친구들은 미팅이다 소개팅이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나를 보고 불 쌍하다고 혀를 차면서 안타까워 해주는 친구도 있었고, 아주 노골적으로 놀리는 친 구들도 있었다. 그렇게 안 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걸.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 라 며 비아냥거리는 친구도 있었다. 남들이 뭐라하든 신경 안 썼다. 왜냐하면 나에겐 대한민국 최연소 27살 기술사 취득 이라는 원대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슬럼프로 힘든 시간도 겪었지만 나의 꿈을 생각하며 이겨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학업 계획을 짜봤다. 그리고 전기기사 자격이 있으면 산업기 사 자격이 있을 때보다 2년이나빨리시험에응시를할수있기때문에난전기기 사를 최연소로 취득하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기사자격을 취득한 후에 현장의 경 력 4년은 교수님께서 말씀해주신 방위산업체에서 군복무를 대체 하는 것으로 계획 을 짰다. 응시하기 위한 자격요건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당시 내 여건상 가장 빠른 노력에 대한 보상 그렇게 1년의 시간이 지나고 2학년이 되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겨울 방학 때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학과 대표가 내게 연락을 해왔다. 지환이 너 1 340 비전이 이끌어 준 삶 341

등 했더라. 일등이라니! 정말 머리털 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일등이었다. 아무리 해도, 해도 해도 해도 안 되는 내가 여기에 와서 일등이라는 걸 해보는 구 나. 이 후로는 대학 등록금을 내 돈으로 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쨌든 산업기사 취득을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던 중 이렇게 좋은 결과가 생기니 힘이 났다. 지 난 시간동안 친구들이 미팅하고, 소개팅하고 놀 때 독서실에서 혼자 공부했던 시절 들이 모두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슬슬 힘들어 질 때쯤 과수석 소식을 듣고 나자 다 시 공부가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나도 하면 되는 놈이라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생각 하게 되었다. 2학년이 되었다. 중간고사와 함께 산업기사 자격을 응시해야 한다. 산업기사 시 험은 1차필기2차 주관식 서술형. 이렇게 2단계 전형인데, 중간고사가 사이에 끼 어 있어서 시험 준비하랴 산업기사 자격시험 준비하랴 정말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 던 것 같다. 하지만 중간고사는 내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1학년 때 미친 듯이 공부 해 놓으니 2학년 돼서 전공시험이 너무 쉬웠다. 모든 문제를 10분만에풀고나왔 다. 그리고 학원에 바로 가서 얼마 남지 않은 산업기사 자격시험을 공부했다. 이런 모진 노력 끝에 난 대학 재학 중에 전기산업기사, 전기공사 산업기사 자격 을 취득 할 수 있었다. 덤으로 학과에서 수석 장학금을 받아 공짜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교수님께서는 나의 노력을 격려해주기 위해 1년에 한번 있는 대학 해외연 수단에 추천해 주셨다. 그래서 방학 중에는 전액을 지원받아 해외연수를 다녀 올 수 있었다. 2학년 2학기 때 나의 학점은 4.5 만점에 4.5였다. 또한 대학 졸업 작품 경진대회에선 장려상으로 입상을 하게 되었다. 뒤돌아보니 당시 가장 힘든 시간이 었던 1학년 시절은 아주 잠시였다. 남들이 놀 때 공부한 그 1년이 밑거름이 되어 2 학년 때 남들보다 갑절의 성취를 일궈낼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두 눈에 흘러내리 는 뜨거운 눈물과 가슴 깊숙한 곳에서 북받쳐 오르는 감동은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다. 졸업 후 동기들은 군대에 가거나 취업이나 편입을 했지만, 난 기사자격을 취득하 기 위해 학점은행을 통해 학점을 등록하고 기사 자격을 준비하기로 결정을 했다. 2년제 대학 졸업 전기기사 취득 방산 입사하여 경력 4년 기술사 자격 취득. 주변에서도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만류를 심하게 했다. 남자는 군대를 다 녀와야 한다. 기사 자격증 취득해 봤자 별 볼일 없다. 그냥 편입영어 공부해서 4년 제 대학교로 편입이나 해라. 등등. 그래도 난 남의 의견은 참고만 하고 나의 계획 을 믿고 추진하기로 했다. 일단 기사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면 편입도 취업도 쉽게 될 것이란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전기기사 자격 취득 졸업 후, 오전 8시 30분에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일하고 오후에는 독서실에서 공부를 했다. 학점은행 에 상당히 돈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에 공부만 하면서는 독 서실 값, 책 값, 밥 값 등의 기회비용을 감당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졸업한 상태라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것이 너무 죄송스러웠다. 어찌됐든 일과 공부는 계속해서 병행하였다. 드디어 2005년 5월 29일, 전기기사 1차 필기시험에 응시를 했고 합격을 했다. 그 후 7월 20일, 2차 주관식 서술형 시험 에 응시를 했다. 2차 시험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너무나도 문제가 어렵게 출제됐 342 비전이 이끌어 준 삶 343

다. 문제를 풀면서 이번 시험 떨이지면 완전 죽도 밥도 안 되는데, 1년을 그냥 날 리는 건데 등등의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지난 3년간 공부했던 내공을 바탕으로 답안을 작성해 나갔다. 정확하게 2시간 30분의 시간을 모두 다 썼다. 시 험장엔 나 혼자만 남아 있었다. 답안을 다 작성하고 10번도 넘게 수정 보완 작업을 계속 했었다. 문제지를 보니 그래도 빈칸은 하나도 없다. 나름 그냥 거기에 의의를 두기로 하고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왔다. 그리고 8월 합격자 발표 일까지, 계속 좌 절에 빠져 있었다. 곧 2차 합격자 발표일이 다가 왔다. 떨어졌단 생각을 하고 다시 2차를 준비하고 있었던지라, 별 긴장 없이 주민번호와 수험번호를 입력하고 합격자 확인버튼을 눌 렀다. 정말 믿을 수 없는 결과가 나왔다. 회사에서 확인을 했는데 나도 모르게 악! 소리가 나왔다. 60점 넘으면 합격인 시험에. 정확히 61점으로 합격을 한 것 이다. 정말 기적이었다. 분명 내가 정확하게 쓴 답안은 40점정도 밖에 안됐는데 합 격이라니. 사람들이 모두 날 이상하게 쳐다봤다. 하지만 너무 기뻤기 때문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합격자 인원을 확인해보니 300명이 약간 넘었다. 보통 한회 시험 합격자 수는 1000명을 기준으로 살짝 넘거나 적은데, 이것에 비교해보 니 어려움을 느낀 건 나 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산업체에서 군복무를 수행하기로 마음먹은 이유가 있었다. 기술사 시험에 응시하 여 답안을 작성할 때 현장의 상황을 고려한 답안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도 내가 그간 공부했던 내용들을 현장에서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나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크게 작용했다. 또한 군 복무 중에도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당시 어려웠던 가정형편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것이란 생 각도 들었다. 그리고 근무 외의 시간을 활용하면 나 스스로가 무궁무진하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난 산업기능요원으로 군복무를 대체하기로 결정을 했고 업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나이 22살에 전기기사를 비롯한 전기 분야 산업기사 2종을 취득한 사람이 흔치 않 았기에 스스로 경쟁력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병무청에서 특례로 지정된 명 부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취업을 위한 전쟁이 시작 됐다. 모집공고가 뜨진 않았지만, 방위산업체로 지정된 모든 회사에 하나하나 전화를 해가며 상대방이 원 하든 원치 안던 Fax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송부했다.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정 말 이력서를 송부한 그 주는 하루에도 수십 통씩 면접을 보러 오라고 연락이 왔다. 난 산업기능요원이 될 수 있다는 꿈을 품고 업체를 선별하여 하루 2~3군대의 방위산업체 취업 도전기 이젠 들뜬 마음을 다시 잡았다. 가장 중요한 군복무 문제가 남았기 때문이다. 난 군 복무를 기술사 자격시험을 보기 위한 경력에 보탬이 되도록 계획을 세웠었다. 계획 한 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었다. 이제는 기술사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 기위한경력4년 중 일부를 산업기능요원으로 군복무를 하면서 쌓을 수만 있다면 2년이란 시간을 버는 것이기 때문에 이보다 좋을 순 없었다. 이경력4년을 군복무로 대체하는 방법은 방위산업체이외에도 공군 전기 기술 병, 기술 장교, 기술 부사관등 너무나도 많다. 하지만 다양한 군 복무 중 내가 방위 344 비전이 이끌어 준 삶 345

업체에 면접을 보러 다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스스로에 대한 신뢰와 자 신감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면접관들이 나에게 던진 질문에 제대로 답변 하 지 못했다. 심지어는 기사자격증 있는 사람이 이것도 몰라, 여태껏 뭘 공부했 냐 라며 비아냥거리는 말도 들었다. 2시간도 넘게 걸리는 곳에 힘들게 면접을 보 러 갔더니만 기초가 없어 라는 말과 함께 그 자리에서 거절을 당하기도 했다. 이 런 일들을 연달아 일어나니 정신적 공황에 빠지게 되었다. 솔직히 지난 3년간 정말 열심히 공부해 왔는데, 기초가 너무 없다는 말을 들으니까 가슴이 너무 아팠다. 예상외로 방위산업체에 취업을 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10월까지 두드려서 안 되면 11월에 군대에 입대를 해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렇게 10월이 되었고 공군 전기 기술 병으로 입대 원서를 넣었다. 이 이상 군 입대를 미루면 좋을 것이 없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10월 셋째 주 정도 돼서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 는 연락을 받았다. 정말 마지막 이라는 생각을 갖고 지금까지의 경험을 살려 나의 강점은 무엇인지, 또 약점은 무엇인지 철저하게 분석을 했다. 그리고 친한 친구를 앞에 두고 예상 질문 리스트를 만들어 면접 리허설을 수십 번 했다. 드디어 면접날이다. 마지막 면접인 만큼 만반의 준비를 다 했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봤다. 최악의 경우는 그냥 군대에 가면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것도 그 리 나쁘지는 않았다. 한국 산업인력공단에 알아보니 군대에 입대를 해도 기술사 자 격시험에 응시하기 위한 자격요건인 기사취득 후 경력 4년중2년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최악의 경우를 스스로 받아들이니 마음이 편해졌 다. 회사 정문에 도착하자 지금까지 면접을 봐왔던 허름한 외관의 회사와는 차원이 달랐다. 일단 회사부지가 내가 졸업한 대학 캠퍼스 보다 넓었다. 전형은 1차서류. 2차일반면접3차 임원면접. 4차 적성검사의 순서로 진행이 됐다. 면접은 여태껏 본 면접 중에 가장 훌륭하게 본 면접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봤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후 정확히 입대 2주전에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에서 11월 9일부터 출근 하라는 합격 통보를 받았다. 정말 기분이 좋았다. 내가 일궈낸 것들, 그리고 앞으로의 과제 입사한지 이제 어느덧 2년 10개월의 시간이 지나, 10월 14일인 어제 날짜로 군복 무가 끝이 났다. 내가 제일 잘한 일이다 싶은 것은, 첫 번째로 퇴근 후 개인 여가 시 간을 쪼개 공부를 한 것이고, 두 번째는 월급의 70%를 매달 꼬박 저축한 것이다. 정말 회사를 다니면서는 알바를 했을 시절보다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 기간이 길어 지다 보니, 적은 돈을 가치 있게 그리고 풍족하게 사용 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운 것 이다. 돈은 관리하지 않으면 지출이 늘어 날수 밖에 없는 것. 그리고 계획하지 않 은 것은 절대로 구매하지 않는 것. 내가 세운 돈을 다루는 원칙들 중 일부이다. 그 리고 특례가 끝나는 이번 달에 드디어 길고도 길었던 2년짜리 적금이 만기가 된다. 내가 삼년동안 모은 자금은 삼천이다. 이것은 모두 그간 나를 위해 고생하신 부모 님께 선물로 드릴 것이다. 아직 내 나이 25살이고, 재테크를 공부해서 돈굴리는 방 법을 연구하기엔 조금은 이른 시기인 것 같다. 지금은 꿈을 쫓을 때라는 생각을 하 고 있다. 내가 내 꿈을 이루게 될 때, 그 때 난 돈은 걱정하지 않고 살게 될 위치에 오를 것이란 확신도 갖고 있다. 어쨌든 직장을 다니다 보니 학업에 대한 욕심이 났다. 일을 하다 보니 대학교를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진 제도를 비롯한 급여 등을 따져봤을 때 2년제 졸 업장을 갖고 취업하는 것과 4년제 졸업장을 갖고 취업하는 것은 확연하게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정에 없던 편입을 계획하게 된다. 당시 나의 나이는 22살 이었다. 학점 4.42에 최연소로 취득한 전기기사 자격을 비롯해 산업기사 자격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지원자들보다 경쟁력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과감하 게 편입 입시에 뛰어 들었다. 하지만 직장을 다니면서 공부하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투리 시간을 200% 활용할 필요가 있다. 난 평일과 주말로 나누어 계획을 수립했 다. 회사를 다니는 평일에는 집에서 지하철까지 가는 시간. 지하철 타고 출근하는 시간. 지하철역에서 회사까지 가는 시간. 회사 점심시간. 퇴근 후 지하철까지 가는 시간. 지하철에서 집까지 가는 시간. 집에서 공부하는 시간. 이렇게 나의 시간을 쪼 346 비전이 이끌어 준 삶 347

개서 계획을 수립하고 공부에 전념했다. 주말에는 물론 독서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회사의 업무량도 많았기 때문에 이것과 병행하여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학교 다니면서 공부할 때보다 수배는 더 힘들었다. 어른들이 학생일 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한 뜻이 무언인지를 깨달았다. 그렇게 편입 공부를 했고, 2006년 1월편입 입시를 치렀다. 최종적으로 세 곳의 대학에 붙었다. 내가 선택한 학교는 서울산업 대학교 전기공학과 이다. 내가 서울산업대학교를 선택한 이유는 국립 대학교라 학 비가 상당히 저렴하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기술사 스터디가 운영되고 있는 학교이 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학교를 합격을 하고 바로 군 휴학을 했다. 직장을 다니면서 대학교를 다닐 순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난 특례였기에. 같은 해 8월에는 전기공사기사 자격을 취득했다. 그럼으로써 순수 전기 분야의 기사와 산업기사 자격은 모두 취득하게 되었다. 또한 올 해는 소방 전기 설비 기사 시험에 1차를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이와 더불어 지난 9월에 는 한국 트리즈 협회에서 트리즈 공인 자격을 취득했다. 그리고 12월에는 국제 프 로젝트 관리사(Project Management Professional)자격 시험에 응시를 할 것이다. PMP는미국PMI에서 시행하고 있는 시험으로서 국제 프로젝트 공인 인증 자격시 험이다. 이 자격시험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4년제 대학교 졸업 후 현장의 3년경력 을 갖춰야한다. 이것을 위해 학점은행제를 통해 학사학위를 수여받아 시험을 접수 했다. 지금은 샘플링 오딧(Audit Sampling)을 통과해서 스스로 시험일을 정해 응시 하면 된다. 아마 취득하게 된다면 전 세계 최연소가 될 것이다. 내가 PMP를 취득하 려 하는 이유는 현재 한미 FTA, APEC 국제 기술사 상호인정 제도 등 국제화 바람 이 거세지고 있는 상황에서 향후에는 PMP 자격이 국내 기술사 자격을 능가하리란 전망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기회가 왔을 때 이 자격을 취득하려 하는 것이다. 또한 근래에는 이 자격 취득을 권장하는 기업들이 국내에서 늘고 있는 추세이다. 내년에는 한국 폴리텍 대학 기능장 과정에 지원하여 기능인 최고의 영예인 기능 장 자격을 취득할 계획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술과 기능을 구분지어 기능을 현 장에서 하는 노가다로 천박하게 여기는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술을 시각 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기능이기 때문이다. 현재 기능장은 법에 의한 자격보호가 약 하지만 우리나라가 앞으로 선진국화 되어감에 따라 이러한 법과 제도가 좋은 방향 으로 바뀔 것이란 확신을 갖고 있다. 또한 그 후년인 2010년에는 기술사에 응시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나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을 계획이다. 비전이 이끌어준 삶 물론 기술사 자격이 성공적인 인생의 보증 수표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 다. 하지만 피 튀기는 레드오션 시장 가운데서 미래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풀릴 거야 라는 식의 대책 없는 막연한 긍정은 싫다. 난 나만의 블루 오션을 창조하여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나만의 영역을 키울 것이다. 그러한 목 표를 이루는 수단으로서 기술사 자격을 선택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 기술사 자격 은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진 이때에 김 지 환 이라는 이름의 브랜드 가치를 높 여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또한 내가 50대 60대가 되었을 때, 타인에 의해 끌려 다니는 삶이 아닌, 지금처럼 주도적으로 모든 일들을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삶 을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348 비전이 이끌어 준 삶 349

25살인 지금. 난 기술사 자격을 취득한 후에는 5급 기술 사무관이 될 계획을 갖 고 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기술 사무소를 설립하여 정부정책을 담당하는 행정공 무원과 현장의 엔지니어 사이의 의사소통 역할을 하는 컨설팅 업무를 수행하고 싶 다. 지금 세상은 정부정책을 추진하는 행정공무원과 현장 최전선에서 종사하는 엔 지니어 사이에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현재 정부가 추진 중인 경부대운하를 들을 수 있는데, 여기서 난 둘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어떠한 프로젝트든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게 하는 전문 프로젝트 관리자가 되고 싶다. 그리고 먼 훗날에는 내가 쌓아온 인맥과 자본 과 기술력을 기반으로 20살 때부터 숙원 해 왔던 제 3세계 전력공급의 대 프로젝트 사업을 성공적으로 일궈낼 것이다. 지금까지 난 대한민국 최연소 기술사 취득 이라는 꿈만을 바라보고 달려 왔다. 앞으로도 많은 도전이 남아 있지만 20살때2008년을 바라보고 세운 목표는 모두 달성했다. 하지만 실패와 뼈를 깎는 고통 없이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산업기사 자격을 공부할 때도, 기사 자격을 공부할 때도, 대학교 편입 입시를 치를 때도, 방 위 산업체에 취업을 할 때도 단번에 성취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모든 도전들 가운 데 적어도 한 번 이상의 실패를 경험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매번 힘든 시간을 보냈 다. 하지만 난 다시 일어났고, 지금 와서 돌아 봤을 때 그러한 실패의 경험은 내가 인 격적으로 성숙하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 또한 결과적으로 봤을 때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리거나 조금은 돌아가긴 했어도 결국에는 계획 했던 모든 것을 다 성취 했다. 그 래서 모든 과정 가운데 순간의 실패와 좌절은 있을 수 있지만은, 포기하지 않는다면 실패는 과정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되지 않는 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도전과 어려움들이 날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사 람이 극복하지 못할 어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또한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모든 일을 시작하기 전에 철저하게 검토하고 시작한 후에는 이미 그것을 성 취한 기분으로 최선을 다해 몰입한다면 과정도 즐겁고 결과 또한 좋게 나오지 않을 까 생각을 한다. 끝으로 나를 지금까지 이끌어 주셨고 앞으로도 이끌어 주실 나의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350 비전이 이끌어 준 삶 351

자기능력개발 수범사례 인생은 짧고 배울 것은 많다 박준수 광주광역시 남구 진월동 XXXXXXXXXXXXXX 초등학교 졸업 후 친구들이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닐 때 작업복 차림으로 가구공장에서 힘 든 노동을 하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가난해서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가 없는 환경 속에서 배움에 대한 열망은 또 얼마나 컸던지요. 이제껏 살아오면서 학습과 교육이야말로 인간의 정신세계를 고양시키고 잠재적 능력을 발현시켜 질 높은 삶을 영위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계속해서 그 길을 걷고 있습니 다. 특히 지식정보화 시대에 자기능력 개발 활동은 웰빙의 기본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16년 전 불의의 사고로 별나라로 가신 어머니께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습니다.

지난 8월 토익시험을 보면서 새삼 내 나이를 되뇌어 보았다. 고사실 책상에 앉아있 는 수험생 대부분이 20대 대학생들인지라 내 스스로 생뚱맞은 느낌이 들어서다. 더구나 바로 앞에 앉은 여학생은 내 딸 또래의 10대 중학생이 아닌가. 내나이 어느 새 마흔여덟살. 그 아이들과 나와는 무려 32년 차이가 난다. 이날 토익시험은 나로써는 벌써 8번째 시험이었다. 영어를 좋아해 대학졸업 후 에도 틈틈이 영어잡지를 읽어온 터라 나의 영어실력을 테스트해보고 싶어 지난해 처음 시험을 보았는데 생각보다 점수가 잘 나오지 않아 계속 도전하고 있다. 그런 데 이날 교실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다 거울에 비친 내모습을 보곤 나도 모르게 깜 짝 놀랐다. 엉거주춤한 자세, 윤기잃은 얼굴피부, 여러겹의 목주름, 게다가 불룩나 온 뱃살하며 영락없는 초로의 아저씨다. 생기발랄한 20대 대학생들 틈바구니라 그 런지 몰라도 마흔여덟의 내모습이 왠지 후줄근해 보이는게 사실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나이에 이렇게까지 공부에 매달려야 하나 하는 회의감이 밀려왔다. 소년이로학난성( 少 年 學 難 成 ) 이 글귀는 송나라 학자 주희( 朱 熹 )가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오동잎을 바라보면 서, 이미 백발이 된 자신을 슬퍼하며 학문을 처음 접하는 청소년들에게 시간을 아끼 고 학업에 전념할 것을 당부한 메시지이다. 이말처럼 배움의 소중함을 명쾌하게 정 의한 표현이 또 있을까? 나이가 들면서 이 말의 울림이 더욱 크게 귓전에 와닿는다. 장에 다닌 적이 있다. 그 당시엔 나처럼 상급학교에 가지 못하고 일찌감치 기술을 배워 가계에 보탬을 주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초등학교 졸업 후 처음엔 아무하는 일도 없이 동네에서 놀았으나 아주머니들이 다 큰 애가 동생들과 논다며 눈총도 하 고 흉도 보길래 부모님에게 말도 않고 혼자서 자전거포에 들어 갔다. 동네 형이 그 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틈틈이 자전거를 타고 노는 모습이 부러웠기 때문이다. 며칠을 다니던중 매일 옷에 기름을 묻혀오니까 어머니가 보시곤 혼내시다가 자전 거포에 다닌 사실을 알고 다니지 말라고 하셔서 그만두게 됐다. 그렇게 집에 눌러있다가 이듬해 친구가 자개공장에 다니는 걸 보고 함께 데려가 달라고 부탁을 해서 자개공장에 취직을 했다. 그 당시는 포마이카(Formica)가구가 유행이었는데 기계(프레스)로 찍어낸 자개를 붙여서 만든 문양을 도안으로 사용했 다. 나는 하루 종일 프레스기계를 돌리며 자개를 찍어내는 일을 했다.어느날은 기 계를 돌리다 손가락을 너무 깊숙이 밀어넣어 손가락이 찍히는 사고를 당한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젊은 사장의 성질이 불같아 작업속도가 늦으면 뒤통수를 때리고 모 욕을 주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곳에서 일년 정도 일하다가 월급도 별로 오르지 않고 사장의 무시무시한 얼굴도 보기 싫어 뛰쳐 나오고 말았다. 꿈이 있는 한 나는 청춘이다 간혹 신문지상에서 만학도 들의 눈물겨운 인생 스토리를 읽고 감동한 적이 있는 데, 어느새 내가 만학도가 되어 지천명에 이른 나이에 아직 배움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나는 마음 속으로 꿈꾸는 청년 이라고 자부하며 결코 책을 놓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나의 인생은 늘 공부와 함께였다. 그리고 그 길은 멀고 외로웠지만 결 국엔 희망의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나는 1973년 광주에서 초등학교 졸업후 가정 형편상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공 354 인생은 짧고 배울 것은 많다 355

그러다 집근처에 있는 포마이카 가구공장엘 들어갔다. 그곳은 평소 아는 집인데 다가 자개공장보다 월급도 많고 기술을 배워 장차 공장을 차릴 수 있는 희망이 있 었다. 나는 처음에 그곳에서 칠방일 을 배웠다. 칠방일이란, 목공소에서 목수들이 배니어합판과 각목으로 짜만든 골조가구를 포마이카칠을 칠해 도장을 하고 사포 로 다듬어 윤기를 낸후 장식을 붙여 완성된 가구로 만드는 과정이다. 사포작업이 순전히 육체노동이라 힘들기는 했지만 기술이 늘어 다달이 월급이 오르자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그렇게 약 2~3년정도 시간이 흐르자 어느새 초등학교 친구들이 고등학생이 되었다. 아침마다 교복을 차려입고 학교가는 친구들 모습을 볼때마다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나의 장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공원생활 청산하고 공부의 길로 졸업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해 꿈에 그리던 전남대 상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기초실 력이 부족해 경제학을 공부하는데 어려움이 따랐지만 대학생이 됐다는 자부심은 내 인생에서 가장 가슴벅찬 시간이었다. 지금도 공부는 나와 뗄 수 없는 동반자이다. 아마도 젊은시절 어렵사리 공부한 게 일생토록 끈끈한 인연으로 맺어진 것같다.나는 취업해서도 공부에 갈증을 느껴 야간에 전남대 경영대학원엘 다녔다. 함께 입사한 동기들은 퇴근후 당구를 치거나 술을 마시면서 여가를 즐기는 편이었지만, 나는 공부를 조금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아마도 중 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라는 징검다리를 건너온 까 닭에 남보다 기초가 부실하다는 강박관념이 작용한 때문일 것이다. 수업시간에 맞 춰 도착하느라 조바심을 치기도 하고, 시험준비를 제대로 못해 낮은 학점을 받을 땐 낭패감을 맛보기도 했지만 공부하는 순간은 정말 행복했던 것같다. 이러다가 나는 영원히 공돌이 로 썩는 게 아닌가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가슴 한 구 석에서 솟구쳐 올랐다. 7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학생은 특혜를 받는 신분이었다. 특히 극장이나 기차, 시내버스 이용시 중 고등학생에게는 할인혜택이 있었지만 나같은 공돌이, 공순이들은 성인요금을 내면서도 찬밥신세인 게 당시의 세태였다. 한번은 공장쉬는 날을 맞아 공장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러 극장엘 갔다가 학생표를 끊어 들어가려 하자 표 받는 아저씨가 너희가 무슨 학생이냐 며 성인표를 사오라 고 호통치는 바람에 당황한 적도 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신문에 실린 검정고시 통 신교재 광고를 보게되었다. 통신교재를 가지고 혼자서 공부해 검정고시에 합격했 다는 합격생들의 수기를 읽고 솔깃하는 마음이 들었다. 곧바로 통신교재를 주문해 공부를 시작했다. 말 그대로 주경야독을 한 셈이다. 그렇게 몇 개월을 혼자서 공부 하는데 진도가 도통 나가지 않고 무엇보다도 수학과 영어는 어려워서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이대론 안되겠다 싶어서 부모님께 공장을 그만두고 공부를 하겠다고 말씀 드리 고 본격적으로 학원엘 다니면서 공부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2년만에 중 고등학교 356 인생은 짧고 배울 것은 많다 357

영어회화, 멀고도 험한 길 나는 또한 영어에 흥미를 느껴 타임지나 이코노미스트, 비지니스위크, 하버드 비지 니스위크 등 영어잡지를 구독해서 꾸준히 읽고 있다. 지금도 영어실력이 완벽하게 다져진 게 아니어서 한 페이지를 읽는데도 애를 먹고 있지만, 처음엔 영어실력이 짧아 몇 페이지 읽지 못하고 다음호가 배달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입사동기 들과 그룹스터디를 조직해 점심시간을 이용해 같이 공부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몇 번 하다가 그쳤고 그 후론 나 혼자서 틈나는 대로 사전을 뒤적거리며 해석을 해 보지만 매번 영어는 난해한 문장으로 다가온다. 어려운 문장을 만나면 도저히 해석 이 안돼 절망감을 느껴본적도 여러번 있다. 그렇지만 20년째 꾸준히 하다보니 이 제는 몸에 배 영어문장을 접하지 않은 날은 왠지 허전해진다. 그래도 이나마 공부한 덕에 외국에 나가서도 생활영어 회화는 별 어려움없이 주 고받을 정도는 된다. 3년전 뉴질랜드 출장을 갔을 때는 가이드를 쓰지 않고도 무난 하게 업무를 처리하고 돌아왔다. 오클랜드 공항에 도착해서 입국수속을 밟는데 공 항직원이 꼬치꼬치 묻는 통에 진땀을 흘리긴 했지만 그동안 배운 것을 총동원해 대 답을 하니까 별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신감이 붙어 이제는 외국사람을 만나면 먼저 다가가 말을 거는 여유까지 생겼다. 최근 몇 년 새 광주에도 외국인들이 부쩍 많아져 영어를 사용할 기회가 늘고 있 다. 얼마전 광주비엔날레 개막식을 전후해 프랑스 작가를 만난 적이 있다. 내가 아 는 파리 유학생을 통해 알게돼 저녁식사에 그분들을 초대하게 됐는데 영어가 서로 유창하지는 못하지만 두 세시간 동안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국제화시대를 피부로 느끼는 요즘, 영어회화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고 있 다. 그래서 영어공부도 회화위주로 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서 영어회화를 공부하기 란 여간 고통스러운게 아니다. 오랜기간 언어습관이 모국어에 굳어져 있기때문에 한국어의 문법과 발성에 갇혀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는데 커다란 장애요인이 된다. 따라서 그 관성을 깨기 위한 부단한 노력과 반복적인 학습이 요구된다. 그러나 다 행스럽게도 인터넷과 미디어의 발달로 매체를 이용한 영어학습 컨텐츠들이 다양 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어 이를 잘 활용하면 효과적으로 영어와 친숙해질 수 있다. 나의 경우 종전에는 대학외국어교육센터에 등록해 원어민으로부터 회화를 배 웠지만, 최근에는 인터넷 사이트와 IPTV(인터넷TV)를 이용해 혼자서 공부한다. 특히 국제방송인 아리랑 TV와영국BBC 사이트는 권할만 하다. 그리고 EBS 교육 방송과 방송대학 강좌도 영어회화 실력을 키우는데 매우 유용한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부단한 자기개발은 인생을 값지게 한다 나의 공부에 대한 지독한 중독은 올해 3월, 나를 박사과정으로 이끌었다. 현재 전 남대 경영대학 마케팅전공 2학기째인데 비록 늦은 나이이긴 하지만 공부에 대한 새로운 흥미를 일깨워주고 있어 생활에 활력이 넘친다. 박사과정 수업은 대부분 프리젠테이션으로 진행된다. 하나의 토픽마다 영어논 문 2~3개를 읽고 설명을 하고 자신의 견해를 발표하는 식이다. 매주 수십페이지 의 영어논문을 읽어내야 하므로 영어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수업을 소화하기 가 불가능하다. 같은 전공의 어떤 교수님은 한 학기에 108편의 영어논문을 읽도록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직장업무에 쫓겨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면 다음날 발표를 위해 밤을 지새우는 날도 있다. 그래도 막상 교수님과 학생들 앞에 나서서 358 인생은 짧고 배울 것은 많다 359

프리젠테이션을 할 때는 공부한 내용이 뒤죽박죽 뒤엉켜 머리가 멍멍해지며 버벅 대다가 결국엔 교수님의 따가운 지적을 당하기 일쑤다. 학문의 길이 결코 쉽지 않 음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그렇게 한 학기를 넘기고 나니 2학기는 다소 수월하다는 느낌이 든다. 특히 이번 학기에는 외국인 유학생이 2명이나 들어와 영어회화 실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두 명 모두 주부학생인데 한 사람은 인도에서 왔고, 또 한 사람은 필리핀 출신이라 영어를 자유롭게 말한다. 나는 첫 수업시간에 이들 을 보자마자 먼저 인사를 건네며 간단한 대화를 나누었다. 수업은 영어와 한국어를 병행한다. 교수님이 미국에서 학위를 한 분이라 외국인학생들은 불편없이 수업에 참석할 수 있다. 이중 필리핀학생은 남편과 두딸(다섯살, 한살)을 고국에 두고 혼자서 유학온 지 3주밖에 되지않아 무척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다행히 영어학원에 취업해 생활비는 벌고 있으나 아직 낯선 한국생활에 적응하기가 쉽지않은 듯 싶었다. 그래 서 나는 이메일도 보내고 간혹 학교에서 만나 그의 애로사항을 들어주고 있다. 나 역시 그로부터 영어를 배울 수 있으니 서로 돕는 클래스메이트 관계가 되고 있다. 이렇듯 나의 공부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나이가 들어도 식지않고 있다. 공부는 나의 영혼을 부패하지 않게 하고 창조적이고 활력을 샘솟게 하는 원천이라는 것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청소년기에 학업의 길로 나아가지않고 직장생활을 계속했더라면 어떠했을까? 상상컨대 아마도 지금쯤 괜찮은 중소기업 사장이 되었 을게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처럼 지적능력을 개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길이 잘한 선택인지 모르지만 나는 공부를 통해 한발 한발 지적 능력을 키 워온 게 결코 후회되지 않는다. 인생은 여행과 같은 것이다. 주어진 여정을 걸어가 면서 경이롭고 아름다운 세상의 진리를 발견하는 노력이야말로 인생을 풍요롭고 하고 영혼을 살찌우는 가장 순결한 고해성사라고 믿는다. 나아가 자신뿐 아니라 이 웃과 사회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빛과 소금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공부하는 순간은 가장 확실한 인생의 투자이자 금자탑을 쌓아올리는 시 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3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