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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오스본을 중심으로 한 작은 정부, 시장 개혁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에 대응 하여 노동당은 보수당과 극명히 반대되는 정강 정책을 내세웠다. 영국의 정치 상황은 새누리당과 더불어 민주당, 국민의당이 서로 경제 민주화 와 무차별적 복지공약을 앞세우며 표를 구걸하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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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꼬부랑 이라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5같은 말이 반복이 되어서 지루합니다. 4 꼬부랑 은 굽은 모양을 재미있게 흉내 낸 말입니다. 꼬부랑 을 빼고 읽는 것보다 넣어서 읽 으면 할머니와 엿가락, 강아지의 느낌이 좀 더 실감 나서 재미가 있습니다. 국어2(예습)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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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요리사와 뮤지컬배우를 꿈꾸는 30명, 8주간의 문학수업,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30가지 관점의 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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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France? To Frank! 나, 너, 그리고 우리 08 14 18 21 26 30 In New York, America R = VD 김수정 In Bordeaux, France Enttone 경규민 In Sicilia, Italy Grazia Amico 이은애 In Tokyo, Japan 偶 然 (우연) 윤보경 In New York, America Even now It s not too late 백진안 Journey Where am I? 김대권 78 88 92 95 어느 한 남자를 본 이야기 김동훈 인간미 박태민 그와 마주 앉았다. 이종현 나는... 나야! 이승민 34 37 40 45 49 내가 사는 세상은 희로애락( 喜 怒 愛 樂 ) 유성은 화단 이윤성 맥금동 이규선 ㅌㅡㄹㅏㅇㅜㅁㅏ 박주영 이곳은 어디인가 허정훈 100 104 108 111 114 서른여섯 살 김민수 씨 내 이름은 김민수 강우정 남성적인 차재원 부끄럼타는 채영은 분노하는 박수현 걱정하는 이규호 시간의 기억 Seoul, Seoul, Seoul 54 57 63 69 73 내 삶 속의 시간 김종욱 빨간 미소 김도희 7시 5분, 시간의 방을 찾아서 황성화 그녀와 그의 시간 국현호 이별일기 송보람 120 124 128 131 135 레알 서울-소설 쓰고 있네 정지호 다리이야기 양준석 火 (불화) 박진주 서울열차-어느 짧은 여행의 기록 김예슬 편지 김무늬

To France? In New York, America To Frank! R = VD 김수정 In Bordeaux, France Enttone 경규민 In Sicilia, Italy Grazia Amico 이은애 In Tokyo, Japan 偶 然 (우연) 윤보경 In New York, America Even now It s not too late 백진안 Journey Where am I? 김대권

In New York, America R = VD 김수정 크리스마스 날이면 나는 매번 세상에서 제일 큰 케이크 앞에 선 어린 아이처럼 설렌다. 11살 때 옆집에 살고 있던 할머니께서 크리스 마스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신 기억이 있다.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을 간절하게 바라면 크리스마스 때 반드 시 그 사람이 자신을 만나러 온다고 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을까. 하지만 할머니의 표정만은 행복 그 자체였다. 할머니의 크리스마스 가 창밖의 눈처럼 환하게 빛났다. 그 후 난 11살 때 크리스마스에 대 한 어떤 느낌 이 처음 만들어진 것 같다. 크리스마스라는 단어가 나 에게 주는 하얗고 설레는 느낌. 너무나 보고 싶은 사람을 크리스마 스 날 꿈에서라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 20 살이 된 지금도 그 느낌 은 여전하다. 내가 뉴욕대학교에 입학하고 벌써 두 달 하고 보름이나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뮤지컬 배우를 꿈꿔 오던 나는 어느 날 불현 듯 그림에 대한 관심이 생겨, 뉴욕대학교 디자인과에 진학을 결심했 다. 여름날 갑작스레 퍼붓는 소나기처럼 충동적이던 사건이라 하겠 다. 학교 정문을 지나 학관까지 이어진 큰 길. 5월의 붉은 장미가 화 려하게 곳곳에 피어있었다. 뉴욕이라는 큰 도시에 대한 환상 속에서 5월의 장미는 붉은 힘, 표현의 제약이 없던 나만의 작은 세계, 영감 을 주는 것들 중 하나였다. 내가 꿈꿨던 대학은 더 많은 지식과 흥미 로움을 주는 곳, 내가 갈 길의 중요한 징검다리였다. 며칠 전 회의가 들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새로움이 주는 느낌이 다 했기 때문일까. 고민하던 나는 스스로 그 안에서 다시 새로움을 찾기로 했다. 대학생이라면 한 번쯤은 해 보는 동아리활동. 게시판에 동아리 모집 공고가 난 날. 게시판을 쭉 훑어보다가 오른쪽 위 쯤, 오렌지색 포스터에서 시선이 멈췄다. 어 쿠스틱 기타동아리였다. 포스터 색깔은 맘에 썩 들지 않았지만 포근 한 느낌의 기타사진이 내 마음을 끌었다. 나는 그날 이후 어쿠스틱 기타 동아리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첫째 날. 여자 선배에게 기타에 구조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들 었다. 그리고 다음번엔 C코드를 쳤고, 그 다음번엔 D코드를 익혔다. 그렇게 하나씩. 내가 짚은 C코드와 G코드의 소리는 명확하지 않 았지만, 나는 기타의 몸통에서 울리는 진동이 좋았다. 나는 종종 동 아리 실에서 혼자 연습을 했다. 고작 4개의 코드밖에 칠 줄 몰랐지 만 나는 기타가 주는 편안함에 한창 취해 있었고, 물집 잡힌 손가락 마저 마음에 들었다. 철컥ㅡ 갑자기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손끝을 보고 있던 시선은 동그 란 눈이 되어 문 쪽으로 향했다. 웬 남자가 서있었다. 어, 미안. 이 시간에 누가 있을 거란 생각은 못했어. 그 남자는 사과후에 자연스럽게 등에 지고 있던 기타 가방을 문 옆에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왔다. 이번에 들어왔지?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난 프랭크야. 여행을 다녀오느라 그동안 동아리활동을 못했지, 신입생이 들어온 건 엊그제 알았어. 아! 난 에이미야. 프랭크는 나에게 무슨 학과인지, 코드를 몇 개나 칠 줄 아는지, 그 08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09

리고 무슨 노래를 좋아하는지를 물었다. 나는 Hey Jude 를 좋아한 다고 대답했다. 프랭크는 자기도 비틀즈를 정말 좋아한다며 비틀즈 노래는 한 번씩 다 연주해봤다고 했다. 네가 알고 있는 코드로도 그 노래를 연주할 수 있어! 지금까지 코드 연습만 할 뿐 내가 알고 있는 코드로 노래를 연주 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곡을 연주하고 싶었 다. 그럼 나한테 알려줄 수 있어? 프랭크는 흔쾌히 그러겠다며 문 옆에 세워둔 기타가방을 가져와 그 자리에서 Hey Jude 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후 난 Hey Jude 를 노래까지 부르면서 연주할 수 있게 되 었다. 노래는 잘 못했지만 나는 내 첫 연주곡이 마음에 들었다. 그 사이 친절한 프랭크에게 몇 차례 고맙다는 인사를 할 기회가 있었지 만, 부끄러움 비슷한 감정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친 적이 많았다. 나 는 더운 여름을 기타와 보냈고. 가끔 큰 나무 그늘 아래서 프랭크와 같이 기타를 치기도 했고 서로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주곤 했다. 대 학에 들어와 많은 기대와 희망에 치이던 나는 어쿠스틱 기타 동아리 덕에 다시 대학생활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프랭크와의 시간도 매번 새롭고 설랬다. 한여름에 만나는 크리스마스처럼. 1976년 12월 19일.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벌써 크리스마스 파티 가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학교 안에서 제일 오래되고 큰 나무는 반짝거리는 전등 장식으로 치장되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있다. 학교 전체는 크리스마스파 티를 알리는 포스터로 가득했다. 낮에는 예술학과의 전시회와 공연 등이 있고 8시부터는 체육관에서 파티가 있을 거라는 내용이었다. 이번엔 제대로 크리스마스파티 하려나 보네! 프랭크였다. 깜짝이야-. 그러게 학교가 크리스마스 준비로 정신없는 것 같아. 프랭크, 어디 가? 수업 가고 있지. 너 파티 파트너 없으면 나랑 가자! 어어, 나 늦어 서 먼저 갈게! 프랭크는 시계를 보면서 점점 멀리 사라졌다. 나는 얼어붙은 것처 럼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프랭크와 크리스마스파티 라니! 그 날 나는 수업을 마치고 곧바로 집으로 와 옷장을 열었다. 한참을 찾았지만 파티에 입고 갈 옷이 마땅하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 입던 촌스러운 드레스 한 벌 뿐. 나는 엄마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 에 없었다. 엄마는 기다리셨다는 듯 큰 종이가방을 내 침대에 올려 놓으셨다. 20살 어린이,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어서 입고 나와 봐. 종이가방엔 하얀 탑 원피스가 있었고 난 당장 옷을 입고 나와 엄 마 옆에 있는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프랭크와 파티에 갈 생각에 젖어 하루하루 남은 날들을 보냈다. 그리고 바로 오늘. 드디어 디데이다. 학교까지 걸리는 시간은 40분 정도. 이제 옷을 입고 준비를 끝내야 한다. 방에 올라가 서둘러 문을 연 순간 나는 울고 싶어졌다. 남동생이다. 아직 어린 남동생이 빨간 립스틱을 얼굴에 바르고 있었다. 내 하얀 탑 원피스까지 걸치고. 소 리를 지르며 달려들 뻔했지만 동생을 달래 옷부터 벗겨야 했다. 조 심스럽게 동생을 안아 올리려는 순간 동생은 품에서 쏙 빠져나와 도 망을 쳤다. 그러다가 원피스의 옷자락이 그만 기타에서 날카롭게 삐 져나와있던 기타 줄에 걸렸다. 그리고 천이 찢어지는 소리. 나는 멍하니 서 있다가 울음을 터트렸다. 뒤늦게 방에 올라와 상 황을 파악한 엄마는 동생을 혼내기 전 나부터 달래 주셨다. 우선 약 속 시간이 다 되가니 고등학교 때 입었던 드레스라도 입고 일단 프 10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11

랭크를 만나러 가라고 했다. 그저 울고 싶었지만 프랭크와의 약속 시간은 점점 다가왔고 나는 촌스러운 그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하 지만 집 밖에 나온 내 발 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도저히 이 꼴로 프 랭크 앞에 설 수는 없다. 하지만 날 기다릴 텐데. 약속 시간은 점 점 다가오고, 크리스마스파티가 열리는 체육관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약속시간 5분전. 정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프랭크가 보였다. 순간 나는 방향을 틀어 작은 정원에 숨었다. 눈물을 흘려 퉁퉁 부은 얼굴로, 촌스러운 노란색 드레스까지 입은 나는 정말 꼴이 말이 아 니었다. 작은 정원의 나무 뒤에 숨은 채 나는 프랭크를 훔쳐볼 수밖 에 없었다. 그때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눈을 맞으며 한참을 기다리 다 체육관 안으로 들어가는 프랭크의 모습을 본 뒤에야 나는 몸을 움직여 작은 정원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최악의 크리스마스 였다. 그 사건 이후 나는 어쿠스틱 기타동아리에 며칠간 나가지 못했다. 프랭크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야 했는데, 그저 숨어버리고만 싶 었다. 생각 끝에 편지를 썼다. 그리고 프랭크에게 직접 전할 용기가 나지 않아 집으로 보냈다. 답장을 바라지는 않지만 프랭크가 내 미 안한 마음과 그곳에 갈수 없었던 이유를 알고 오해가 풀렸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편지가 프랭크 집에 도착할 무렵 나는 어쿠스틱 기타동아리에 다 시 나갔다. 그런데 프랭크가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에 도 프랭크는 안 보였다. 물론 내가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도 오지 않 았다. 나는 동아리 여자선배에게 프랭크에 대해 물어봤다. 그런데 이게 뭐람. 프랭크가 휴학을 하고 프랑스로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나는 또 한 번 멍해졌다. 거짓말이 아닐까. 소식 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니 편지 한 통이 와 있었다. 내가 프랭크에게 보냈던 편지. 반송이 된 것이다. 나는 다음 날 다시 그 여자선배에게서 프랭크가 머물러 있는 주소 를 알게 되었다. 그리곤 편지를 다시 써서 프랭크가 홈스테이로 머 물고 있다는 프랑스의 어느 집으로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보낸 후 내가 할 수 있는 건 프랭크가 그 편지를 읽고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뿐. 11살 때 옆집 할머니가 들려주신 크리스마스의 이야기 처럼 간절하게 바라고 또 간절하게 바라면 이루어질 수도 있지 않을 까. 12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13

In Bordeaux, France Enttone 경규민 나는 어둠이 태양을 삼키고 칠흑 같은 하늘이 쏟는 비를 보는 것 이 좋다. 그 속에서 나는 기묘한 감정을 느꼈고 그런 날이면 어김없 이 혼자 있기를 청했다. 보르도 지방은 아름다운 곳이다. 가론 강을 중심으로 번성한 농작물들의 흙내음이 일고 아침이면 기분 좋은 바 람이 부는 자연과 가까운 곳이다. 나는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포도농 장에서 일을 돕고 있는데 언젠가는 내가 맡아서 하게 될 것이다. 우리 가족은 하늘이 내려준 축복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아버 지는 대범함과 유연함을 갖고 계시고 어머니는 태양의 미소 같은 따 스함을 지니신 분이다. 그 밑에서 나는 자연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 은 삶을 살아 왔다. 나는 젊고 즐기는 법을 알며 호탕하게 웃을 줄 안다. 그날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태양이 탄생의 빛을 쏘는 아침, 기분 좋게 잠에서 깨어나니 고소한 향기가 코를 자극 했다. 그 향을 따라 부엌으로 들어가자 어머니가 환하게 웃으셨다. 잠은 잘 잤니? 네, 상쾌한 아침이네요. 어머니. 나는 밝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고소한 냄새의 정체는 크루아상과 버터였다. 아침식사는 이미 차려져 있었고 나는 살며시 의자를 빼서 식탁 앞에 앉았다. 오늘 기분이 참 좋아요. 아버지는 아직 주무시나요? 그이는 벌써 일어나서 농장에 나가 계셔. 네가 가서 아침 식사 하 시라고 모셔 오겠니? 알겠어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에 자리에 일어났다. 아버지는 아침이면 포도 농장에 가셔서 상태를 확인하시곤 하셨다. 3대째 내려오는 이 포도 농장은 아버지의 정성으로 더욱 번창하였다. 우리는 이 포도를 가지고 와인을 만들었고 그 와인들은 세계로 수출될 정도로 좋은 와 인으로 이름나 있다. 기분 좋은 바람을 맞으며 걸어 포도농장에 도 착하자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 식사 준비가 되었어요. 같이 가요. 그렇게 말하고 옆에 서서 아버지의 행동을 지켜봤다. 아들아, 나는 이 포도가 주는 향긋한 내음이 정말 좋다. 이 농장 이 가진 이 풍경 또한 일품이 아닐 수 없구나. 아버지는 감상에 젖어 말씀하셨다. 그는 이 농장을 사랑했고 포도나무 역시 사랑에 보답하듯 풍성하 게 열렸다. 작물이 자라는 데는 풍토가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사람의 정성이란다. 우리 사는 것 또한 다를 것이 없지. 어떻게 하느 냐가 중요한 거란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버지 말씀은 항상 옳았고 나는 그 말씀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말은 깊이가 있고 진중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버지. 어머니가 기다리세요. 빨리 가요. 그래, 서둘러 가자꾸나. 그러고도 우리는 그리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주위를 즐기며 걸었 다. 프랭크가 내일 돌아온다는 구나. 빵을 한 덩이 집어 내 접시에 주시면서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프 14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15

랭크는 지난달부터 우리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는 청년이다. 그의 부 모님과 우리 부모님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알던 사이다. 그의 부모 님이 프랑스에 왔을 때 우연히 이 집에 머물게 된 것을 계기로 어른 들끼리 현재까지 편지를 주고 받아왔다. 잘 됐네요. 그가 있다가 없으니 심심했거든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지난달에 처음 봤지만 그가 왠지 마음에 들었다. 훤칠한 외모를 가진 멋진 사내였고 생각이 깊었다. 가끔 수 심에 잠길 때도 있지만, 남들과는 다른 비범함이 보였다. 그는 새로 운 것을 받아들이는 걸 좋아했고 지금은 다른 지방을 여행중이었다. 학교에 가기 위해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막 밖으로 나가려 할 때,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편지 왔는데 프랭크 씨 계십니까? 우편배달부였다. 프랭크는 내일 올 겁니다. 편지는 제가 받아 두죠. 편지를 받아 봉투를 보니 에이미라는 사람에게서 온 편지였다. 에이미?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어차피 그는 내일 올 터였다. 나는 궁금증 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편지 봉투를 뜯었다. 편지 내용은 나를 웃음 짓게 하는데 충분했다. 프랭크 그 친구를 어떻게 놀려줄까, 궁리를 해봐야겠어. 편지를 가방에 넣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학교로 향했다. 부족한 듯 어김없이 자신이 사랑하는 와인을 마시기 위해 와인 창고 로 갔다. 와인을 마시면서 감상에 빠지는 것, 그것이 그가 현실을 잊 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왼손엔 와인 병이 오른손엔 언제 꺼 냈는지 모르지만, 프랭크에게 건네줄 편지 봉투가 들려있었다. 프랭크, 참 부러운 친구로구나. 그는 참 멋진 친구지. 한숨을 쉬고 그는 말을 이었다. 나도 결정을 해야겠어. 마음을 다 잡기 위해서 이 여자가 고민하 고 결정내린 것처럼. 호탕하게 한번 웃어버리고, 앙또네는 흐느적거리며 와인 창고를 빠져나왔다. 그때 이미 그의 손엔 편지 봉투는 없었다. 편지 봉투는 내일 이탈리아로 떠나게 되는 와인 박스에 빠져버렸다는 것을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앙또네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정신이 반 쯤 나가 있었다. 시내 어느 술집에서나 그를 반겼고 그 역시 마다 하지 않았다. 행복 한 삶임에도 그에겐 결여된 부분이 있었다. 그의 호기심은 방대했지 만 그것을 채우기에 이곳은 너무나도 작았다. 하지만 포도 농장을 이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그런 생각을 마음에서 밀어내고 있었다. 하 지만 취한 날이면 감춰진 속마음이 드러났다. 그는 아직도 취기가 16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17

In Sicilia, Italy Grazia Amico 이은애 내 이름은 실바나이다. 나는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 Grazia Amico 라는 와인 바를 운영한다. 나는 와인을 사랑하며 친구라고 생 각한다. 그래서 바 이름을 Grazia Amico, 우아한 친구로 정했다. 평생 함께 할 친구이기에. AM 10:00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이 찾아왔다. 눈 뜨자마자 내 발 은 와인부스로 향한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늘 하루를 열어줄 와 인을 고른다. 하루 중 이 시간이 나에게 있어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오늘은 달콤한 사과 맛이 나는 큐피드 모스카토 한잔. 음악을 틀어 놓고 출근준비를 시작했다.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조금 서둘렀다. 프랑스에서 새로운 와인이 오는 날. 출근길에는 꽃집에 들렀다. 본조르노, 소피! 본조르노, 실바나! 무슨 일이야? 꽃을 사러왔어. 오늘 나에게 어울리는 꽃을 추천해줘. 음. 오늘 기분이 어때? 설레. 오늘은 프랑스에서 와인이 오기로 했거든! 그럼 이 주황빛 장미는 어때? 꽃말이 설렘, 첫사랑의 고백이거 든. 좋아. 그럼 한 다발 포장해줘. 서둘러야 해. 빨리 가봐야 하거든. 새로 오는 와인과 함께 진열할 생각에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PM 4:30 짤랑 하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와인이 도착했다. 받자 마자 들뜬 마음으로 포장을 뜯었다. 와인 병들을 꺼내 와인부스로 가서 주황빛 장미와 함께 진열을 한다.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 해 와인 한잔을 따르고 Carpenters의 Yesterday once more을 틀고 와인상자 정리를 위해 다시 돌아왔다. 빈 상자를 옮기려다 보니 안 에 웬 봉투 하나가 들어있다. 와인 설명서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 니 누군가의 편지다. 갑자기 호기심이 생겼다. 연애편지일까? 와인 을 기다리던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나뿐인데도 괜히 주위를 둘러보고는 조심스럽게 편지봉투를 뜯어 수줍게 한 문장 한 문장 읽어 내려갔다. 풋풋한 연애편지였다. 나도 15년 전 첫사랑에 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는데. 그때 그 시절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 는데. PM 5:30 짤랑 두 번째 문소리가 들렸다. 오늘의 첫 손님이다. 키가 180cm 정도로 아주 큰, 누가 봐도 미국계의 서양인이다. 쇄골 옆에는 타투 하나가 있는데 굉장히 매력적인 인상이다. Buonasera Benvenuto (좋은 저녁입니다. 어서 오세요.) Buonasera (좋은 저녁입니다.) 어떤 와인을 가져다 드릴까요? 잘 몰라서 그러는데 하나 추천 받을 수 있을까요? 스칼라토 브라케토 다퀴가 좋을 거 같네요. 달콤하고 부드러우면 서 뒷맛은 포도향이 남아 좋을 거예요. 좋아요. 그럼 그걸로 한잔 주세요. 어디서 왔어요? 여행 중인가요? 미국에서 왔어요. 프랑스 여행 중 여기 와인이 맛있다는 소문을 듣고 여기까지 온 거죠. 기분 좋은데요? 오늘 첫 손님이고 기분까지 좋게 해주셨으니 와 인 한잔 선물할게요. 오늘 프랑스에서 새로 들어온 샤토 베르나도트 어때요? 달콤한 과일향이 있어 좋을 거 같네요. 잠시만 기다려요. 와인을 따라 그에게 가져가는 길에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에게 18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19

도 이 풋풋한 연애이야기를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 순간, 와인 한 방울이 떨어지면서 편지 봉투 위에 쓰인 주소가 번지고 말았다. 급한 마음에 손으로 문지르자 더 번져 어쩔 수 없이 제자리에 그냥 놓는다. 이 와인이에요. 스칼라토보다는 드라이하죠. 베리 류의 과일 향과 오크향이 강하게 올라옵니다. 스파이시한 향신료 향, 뒤이어 은은한 바닐라향이 이어질 거예요. 아, 재미있는 얘기 하나 들려줄까요? 그는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새로 들어온 와인 상자에 편지 한 통이 있었는데 뜯어보니 글쎄 연애편지인 거예요, 한 소녀가 한 소년에게 쓴 편지였죠. 소녀가 소년에게라. 그는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무슨 생각해요? 저도 좋아하던 소녀가 있었는데 여행 오는 바람에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와서 문득 그녀가 떠올랐어요. 나도 이 편지를 읽으면서 첫사랑을 떠올렸는데... 나는 화려한 불빛으로 물든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이 편지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싶은데 와인 때문에 봉투의 글자가 번져서 주소가 지워졌어요. 어떡하면 좋을까요? 주소를 찾아서 보내야죠! 함께 찾아봐요! 나는 편지를 가져와 지워진 프랑스의 F 를 J 라고 생각해 J 로 다 시 적은 뒤 보여주었다. J? 제이로 시작하는 나라는 japan? japan! 오, japan! 내일 아침 바로 우체국으로 가야겠어요! 고마워요 덕 분에 이 편지를 주인에게 전해 줄 수 있게 됐네요! 우리는 전해 줄 수 있다는 기쁨에 와인 잔을 부딪쳤다. Japan이 아닌 France일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 추측대로 수취인 의 주소를 일본으로 적어 우체통에 넣었다. In Tokyo, Japan 偶 然 (우연) 윤보경 1979년 12월 29일 목요일 りんりん りんりん (따르릉 따르르릉) もしもし(여보세요)? 긴자스시입니다. 안녕하세요. 마츠모토 씨 10분 뒤에 갈게요. 네, 항상 드시던 것 맞죠? 준비해 놓겠습니다. 친절하시네요. 좀 이따 뵐게요! 그녀는 매주 화요일 점심시간이면 마끼를 먹으러 온다. 메뉴는 항 상 새우튀김 마끼. 다이어트 중인지 마요네즈를 빼고 먹기 때문에 이렇게 미리 전화 로 주문을 한다. 하얀 피부와 수줍은 미소, 그녀는 정말 아름답다. 여기는 일본 도쿄에 있는 스시 집. 내 이름은 마츠모토 료타다. 올해 스물네 살의 주방 막내로 가업을 잇기 위해 훈련 중이다. 어서 오세요, 리에 씨. 새우튀김 마끼 맞으시죠? 그녀가 왔다. 네, 맞아요. 포장해주세요. 계산을 한 그녀는 순식간에 떠나버렸다. 아쉽다. 언제쯤 그녀와 편히 대화라도 해볼까? 아니다, 얼굴이라도 본 게 어딘가! 벌써부터 다음 주 화요일이 기다려진다. 나의 하루는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다. 새벽 5시, 제일 먼저 주방 에 나와 밥을 안치고 주방을 간단히 정리한 후 신문과 함께 우편물 20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21

을 챙긴다. 얼마 전에 도로 명이 개정된 탓인지 요즘엔 잘못 오는 우 편물들이 많다. 우체국으로 반송하는 것도 일이다. 그러던 어느 이 른 아침, 우편함을 연 나는 어김없이 잘못 배달된 편지를 발견했다. 주소가 쓰인 부분에 얼룩이 생겨 잘 알아볼 수 없으니 그럴 만하다. 그런데다 누군가 뜯어본 흔적이 있다. 호기심이 일어 나도 편지봉투 를 열어봤다. 그런데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쓰인 편지였다. 이게 뭐지? 나는 편지를 카운터에 그냥 던져놓았다. 이 편지는 뭐냐, 마츠모토야. 며칠 뒤 아버지께서 물으셨다. 잘못 온 편지라고 말씀 드리려는 찰나 아버지께서 지나가시며 말씀하셨다. 리에 양이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한다고 하지 않았나? 바로 이거야! 이 편지를 이용해 그녀에게 말을 걸어볼 수 있겠구 나! 나의 가슴속에 설렘이 가득했다. 화요일이 더욱 기다려졌다. 오늘도 새우튀김 마끼 맞으시죠? 그리고 다음 화요일, 그녀가 왔다. 네, 오늘은 먹고 갈게요. 그녀가 말했다. 편하신 곳에 앉으세요. 지금이 기회다 싶어 나는 바로 말을 건넸 다. 리에 씨는 영어를 공부하신다고요? 네 지금 1학년이에요. 편지를 보이며 내가 말했다. 혹시 괜찮으시면 이 편지 좀 읽어봐 주시겠어요? 편지가 잘못 왔는데 제가 영어를 잘 못해서요.하하 머쓱한 웃음을 짓자 리에 씨도 귀엽게 웃어 보였다. 저도 잘 못해요. 그리고, 오늘은 제가 수업이 있어서요. 그녀는 식사를 마친 후 서둘러 나갔다. 그리고 그녀가 남긴 종이 에는 그녀의 이름과 집 전화번호가 남겨져 있었다. 오늘 시간 괜찮으세요? 목요일 아침,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승 낙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나는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낮 1시, 그녀의 집 근처 다방에서 우리 둘은 마주하고 있다. 이 편지인가요? 그녀가 말했다. 리에는 편지봉투를 보고는 잠시 갸우뚱하더니 바로 편지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저도 아직 서툴러서요. 같이 천천히 해석해 봐요. 그녀는 정말 상냥했다. 그때 파티에 나가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프랭크 상 그렇게 말없 이 떠날 줄 몰랐어. 우리는 점점 편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편지 속 소녀를 불쌍해했다. 남자가 말도 없이 떠나버린 걸까요? 어떡해. 여자가 너무 안쓰러 워요. 저는 절대 여자를 두고 떠나진 않을 겁니다. 내가 말했다. 내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 멘트다. 순간, 정적이 흐르 고 잠시 후 리에 씨가 웃어 보였다. 그럼 토요일에 다시 뵈요. 편지를 읽다 보니 어느덧 저녁이 되었고 우린 자연스럽게 다음 약 속을 잡았다. 편지로 인해 그녀와 둘이 만나 이렇게 대화까지 하다 니 너무나 행복하다. 우리의 만남은 계속되었고 편지도 순조롭게 해 석되고 있었다. 그러던 세 번째 만남. 크리스마스 파티에 가지 못한 이유는... 22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23

아, 해석이 잘 안 되네요. 다음 목요일에 다시 뵈요. 제가 더 해석 해 볼게요. 아쉽게도 오늘은 지난번보다 빨리 헤어졌다. 해석이 잘 안되어 속 상한지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아 걱정이다. 목요일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어느 오후, 저 멀리서 그녀의 목소리 가 들려왔다. 료타 씨, 저 알아냈어요! 이게 꿈인가? 아니다. 진짜 그녀다. 오늘이 목요일인가? 아니다, 오늘은 월요일. 천사 같은 그녀가 나에게 달려왔다. 황홀함에 잠시 아찔했지만 나는 바로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네? 뭐라고요, 리에 씨? 해석했어요! 파티에 못 간 이유는 드레스 때문이었대요! 편지를 해석하기 위해 일부러 교수님까지 찾아가 여쭤보고는 바 로 나에게 달려온 것이었다. 사랑스런 그녀의 미소 덕에 온몸으로 행복감에 번져갔다. 나는 점점 그녀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어느덧 다섯 번째 만남, 편지의 막바지에 다다랐다. 그녀를 계속 볼 순 없을까? 마음이 조급해졌다가도 그저 지금의 행복에 만족해 야 하는 게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그녀는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20살이 되어 대학에 들어갔을 때에도 나는 설렘을 느끼지 못했어. 그런데 프랭크 너를 본 순간, 내 마음 속에 꽃이 피는 느낌이 들었 어. 너를 좋아해 너를 좋아해.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되뇌었다. 네? 그녀가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프랭크는 너무 바보 같아요, 누군가에게 이렇게 사랑 받고 있으 면서 알지 못하다니. 리에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도 바보 같아요. 오래 전부터 제 가슴 속에도 꽃이 가 득 피어 있었어요. 리에 상. 그녀의 얼굴이 사과처럼 붉게 달아오르더니 이내 행복한 미소를 내보이며 수줍게 대답했다. 저도요, 료타 군 나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기념으로 그 편지를 리에에게 주었고 그렇게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게 되었다. 료타 군, 저 오늘 남성용 유카타를 사려고 하는데 같이 골라줄래 요? 저한테 선물해주려고요?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유카 타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다. 잠시 내 눈빛이 흔들린 것을 눈치 챘는 지 리에는 함께 쇼핑을 한 후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겠다며 나를 초대했다. 리에의 집에 도착해 그녀가 마실 것을 준비하는 동안 나 는 그녀의 방을 구경했다. 어, 이 편지. 나는 책상 위,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놓인 편지를 집어 들었다. 곧 방으로 들어온 리에는 밤마다 그 편지를 읽으며 나를 생각한다 고 했다. 내가 간절히 바라던 그녀를 내게 데려와 준, 행운의 편지 임이 분명한 편지 한 통. 그녀는 펜팔 친구에게 보낼 거라며 유카타 를 박스에 포장했고, 나는 배고프다며 리에를 재촉했다. 서둘러 상 자에 옷을 포장한 리에가 수신 란에 큰 글씨로 이름을 적었다. TO FRANK 24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25

In New York, America Even now It s not too late 백진안 December 19th, 1976 at 7pm 간만에 어머니와 단둘이 저녁시간을 가졌다. 창밖에는 눈이 소소 하게 내리고 있다. 거리는 다가올 크리스마스 준비로 꽤 환하게 빛 나고 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던 중 어머니는 불쑥 봉투 하나를 건네었다. 크리스마스에 주고 싶었는데 그러면 준 비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 미리 주는 것이라 했다. 뭐지? 뭐기에 준 비할 시간이 필요한 거지? 호기심과 약간의 기대감을 가지고 봉투를 열었다. 12월26일 15시25분 뉴욕JFK공항 파리 샤를드골국제공항 받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악 하고 소리를 질러버렸다. 평소에 그렇 게 프랑스, 프랑스 노래를 불렀는데... 내 인생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될 것 같다. 너무 흥분된다. 벌써부터 두근거린다! 학교에서는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렸다. 너나 할 것 없이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쫙 빼입고 파트너와 함께 파티를 즐기고 있다. 며칠 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에이미에게 파트너 신청을 했는데 흔쾌히 승낙해 주어 깜짝 놀랐다. 뭐...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니 좋았다! 파 티가 열리는 체육관 한 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 오지 않는다. 약속시간이 꽤나 지났는데. 나는 아직 프랑스로 간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오늘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아니면, 나의 데이트 신청을 건성으로 들은 걸까. 에이미 에게는 꼭 알리고 떠나고 싶었는데. 파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지 만 결국 나는 쓸쓸히 혼자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프랑스에 도착했다. 보르도 지역의 한 포도농장을 운영하는 집에 서 홈스테이를 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직접 와인도 만드는데, 프 랑스뿐 아니라 이탈리아나 다른 유럽지방으로 수출도 한다. 룸메이 트, 그러니까, 집주인의 아들은 말이 정말 많다. 거기다 목소리도 크 고 시끄럽기까지 하다. 옛날부터 부모님들끼리는 아는 사이라지만 나는 이런 관계가 꽤나 어색하고 불편하다. 며칠이 지나서 룸메이트 는 껄껄대며 나에게 와서 등을 툭툭 치더니 짜식, 부럽다 임마! 라 며 뭔가 알고 있다는 웃음을 지었다. 내가 잠깐 나간 사이 편지 한 통이 왔는데, 그것을 자기가 받았다며 저녁을 먹은 후에 주겠다고 했다. 저런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것을 보니 내용을 읽어본 모양이 다.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편지를 받으러 룸메이트를 따라갔더니 편지가 없어졌단다. 가족이 아니면 내게 편지 쓸 사람도 없을 텐데, 누굴까?, 궁금했지만 지금은 눈에 띄지 않는다니 나중에라도 찾으 면 전해달라는 부탁을 남겼다. 1년간의 홈스테이를 끝낸 뒤에는 이탈리아로 자유여행을 갔다. 바 로 뉴욕으로 돌아갈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이왕 온 유럽인데, 아 직 집으로 가기엔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여행 중 시칠리아의 어 느 한적한 와인 바에 들렀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이 아 무도 없었다. 서른 중반쯤으로 보이는 바텐더는 내가 첫 손님이라며 프랑스에서 들어왔다고 하는 특별한 와인을 내주었다. 내준 진한 검 붉은 색의 와인은 단맛이 꽤 강했고, 입안에서 향이 오래 남았다. 그 와인을 맛보게 된 건 예상치 못한 행운이었다. 이어 바텐더는 특별 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가게를 열기 전 오늘 들어온 와인박스를 열 어보았는데, 그 박스 안에 어떤 편지 하나가 껴들어 있었다고 했다. 신기해서 그 편지를 읽었는데, 어떤 소녀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자신 의 사랑을 담아서 보낸 내용이라 했다. 일반적인 사랑고백이 담긴 26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27

편지였는데 왠지 편지를 읽으면서 그 소녀의 간절함과 용기가 느껴 진다고, 자신의 뜨거웠던 첫 사랑이 떠오른다며 꼭 편지의 주인공에 게 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투나 눈빛은 이미 편지의 주 인공이 된 듯 했다. 기나긴 유럽여행을 마치고 다시 뉴욕에 돌아왔다. 겨울의 뉴욕은 항상 춥다. 뉴욕에 도착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살던 집에서 멀리 떨 어진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사를 한 것 말고는 특별한 일 없 이 평범한 날이 지나갔다. 아, 굳이 특별한 일을 들자면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일본인과 펜팔이 되어 편지를 주고받고 있다. 간간이 주고 받는 편지는 평범한 하루에 소소한 재미거리다. 오늘도 그 친구에게 서 편지가 왔다. 그런데 오늘은 편지가 아니라 소포가 왔다. 포장을 뜯어보니 파자마로 보이는 옷 한 벌이 들어있었다. 벚꽃이 그려진 파자마는 넉넉해서 잘 때 입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지도 있 었다. 편지에서 이 옷이 유카타 라는 일본의 전통의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맘에 들었으면 좋겠다고, 꽤나 좋은 선물을 받아 기분이 좋 다. 그런데 이번에는 편지가 두 통이다. 이건 뭐지? 하고 편지를 보 았다. To Frank, 라고 적힌 것을 보면 나에게 보낸 것은 맞는데. From. Amy. 에이미?! 내가 알고 있는 그 에이미? 편지는 눅눅하고 꼬깃꼬깃하여 오래 된 것 같아 보였다. 마음을 가다듬고 의자에 앉아 편지를 천천히 내 려 읽어갔다. 말투, 글씨체 모두 에이미였다. 그리고 크리스마스파 티. 이게 왜 이 상자에 들어 있던 건지, 왜 일본에서 온 건지, 왜 이제야 받게 된 건지, 수많은 의문이 끓어오르는 거품처럼 머릿속을 채워가고 있다. 그러던 중 번뜩 든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 거품을 잠 식시켰다. 에이미를 만나야해! 편지를 꽉 쥐고 즉시 문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택시는 아무리 노 력을 해도 잡히지 않았다. 아무 생각이 없다. 일단은 빨리 뛰는 것밖 엔, 정신없이 기억이 이끄는 곳으로 달리고 있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길은 익숙하지 않다. 그저 기억만을 믿을 뿐이다. 가로수 들이 시야 뒤로 빠르게 넘어가고, 내 몸도, 심장마저 빨리 뛴다. 내 모든 것들이 빨리 뛰고 있다. 오래전 지나쳐버린, 잡을 수 있었는데 놓쳐버린 시간들을 따라잡으려면 더욱더 빨리 뛰어야 한다. 옛날의 그 감정들이 숨과 함께 차오른다. 따라잡아야 한다. 이윽고 기억속의 그 집에 다다랐다. 뛰어와서인지 떨려서인지 모 르겠지만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다. 숨을 죽이고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딩동. 고요 속에서 초인종 소리만이 길게 울려 퍼졌다 문은 열리지 않는다. 그 때, 누구세요?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놀란 마음에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있 다. 그녀도 꽤 놀란 것 같다. 머릿속이 하얗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 는다. 순간 손에 쥔 편지가 보였다. 아무 말 없이 편지를 그녀에게 건네었다.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꼬 옥 안는다. 28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29

Journey Where am I? 김대권 기나긴 여행이었다. 에이미의 손에서 나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내게 우표를 붙여줄 때의 그 온기가 다시 한 번 전해졌다. 눈빛은 기다림에 지친 듯 했지만 그녀의 마음속 외침은 여전했다. 에이미! 프랭크를 붙잡아! 프랭크의 손끝은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혹시 나를 잊어버린 건 아닐까? 남자 친구가 생긴 건 아닐까? 하는 불안 때문일 것이다. 그 순간, 에이미는 아무 말 없이 프랭크를 꼭 안았다. 그 후 두 심장은 가파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비록 길고도 험한 여정을 겪어야 했지만 이 순간을 지켜보니 행복 할 수밖에 없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에이미에 의해 태어났으 니 그녀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이 나의 최종 임무이자 편지로서의 운 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랬다. 처음 프랭크 집에서 반송되기 전까지만 해도 몰랐다. 연 애편지 인생이 이렇게 기구한 것인지. 첫 행선지인 프랑스로 가는 길에는 함께 비행하던 각종 수화물과 편지들의 사연 때문에 시끄러 워서 잠 한숨 자질 못했다. 피곤을 무릅쓰고 도착한 곳은 포도농장. 까무잡잡한 한 사내가 아침부터 거칠게 나를 펼치더니 히죽히죽 웃 는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였기에. 시차를 극복하지 못해 한숨 자고 났더니 벌써 저녁이다. 밖에선 고양이가 암탉을 쫓는 소리가 들리고,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술 냄새를 풍기는 그 사내가 들어왔다. 진득한 손으로 나를 집더니 어 디론가 움직인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향긋한 냄새. 그 냄새에 취해 다시 한 번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고 보니 난 어느 포도주 상자 틈 에 끼어 있었다. 곧이어 트럭 소리가 들려왔다. 프랭크 이 자식은 어 디서 무얼 하기에 모습을 안 비추는 건가? 나는 한탄했다. 건장한 사 내들이 포도주 상자를 트럭 위로 옮겼고, 나는 세찬 바람을 맞으며 보르도 지방의 벌판을 달렸다. 보르도 와인 병들이 나를 잡아주지 않았다면 이 시골 촌구석에서 연애편지의 인생은 흙과 함께 묻혀 버 렸을 것이다. 참으로 다행이고 다행이다. 그 다음은 이탈리아였다. 로마공항, 레드와인들이 덥다고 난리다. 자칫 잘못하면 코르크 틈 사이로 끓어 넘치고 심하면 곰팡이까지 피 어 맛이 변한다고 성화다. 생각해 보면 와인은 마시는 이에게 최상 의 상태로 전해지는 게 역할이고, 연애편지란 기다리는 이에게 신속 하게 전달되는 게 임무다. 그런데 지금 난 여전히 이역만리에 있다.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섬에까지 갈 모양이다. 팔레르모 공항에 도 착했다. 화물칸 검사대를 지나고 하루가 지난 오후 즈음에야 공항을 나선다. 그 이유인 즉은 배송원들이 시에스타(siesta)라는 낮잠을 자 기 때문이다. 한참 일할 시간에 낮잠이라니 별의 별 놈들이다. 그리 곤 또 어딘가에 도착했다. 박스 뚜껑이 열리고 누군가 나를 집어 들 었다. 조용한 재즈음악이 들리는 것 같았다. 여긴 어디지? 와인 바 같은데... 내 겉옷이 뜯겨나가는 소리에, 어떤 놈일까? 하고 올려다 봤더니 검은머리에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아가씨다. 그녀는 나를 조 용히 들여 보다가 와인 한 방울을 떨군다. 맙소사! 검붉은 액체가 내 몸에 스며든다. 그녀는 당황한 듯 손으로 문질러 보더니 잠시 후 나 에게 새 옷을 입혔다. Japan? Japanese? 미쳤군! 일본이라니! 머리 가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그렇게 다시 한 번의 비행을 거쳐 일본의 축축하고 나무향이 번 지는 우편함에 이르렀다. 한 젊은 남자의 거친 손이 나를 끌어 당겼 30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31

다. 옆으로 보이는 수족관에선 물고기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모르는 지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조금만 눈을 돌려도 시퍼렇게 날이 선 칼 들이 줄지어 진열되어 있는 데 말이다. 몸이 떨려오려던 순간, 그는 나를 던져 버렸다. 다행히 책상 위다. 며칠 뒤 그는 아리따운 여성에 게 나를 보이며 뻔히 보이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수업 이 있다며 급히 나가 버렸다. 한 순간에 차인 것일까. 하지만 이틀 후 나는 그에게 품었던 연민을 거두었다. 그가 갑자기 나에게 달려 와 뽀뽀를 하며 탄성을 내질렀다. 그녀라면 모를까, 기분이 좋지 않 다.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들은 내가 품고 있는 내용을 해 석한다는 핑계로 잦은 만남을 가졌고, 둘이 만날 때면 꼭 나를 데리 고 다니며 귀찮게 했다. 결국 그는 오래 전부터 제 가슴 속에도 꽃 이 가득 피어 있었어요. 라는 오글오글 거리는 멘트로 그녀의 마음 을 빼앗았다.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 내게도 기쁜 일이었지만 정작 프랭크에게 에이미의 마음을 전달하지 못해 아쉽고 허탈했다. 하지만 내게 기회는 남아 있었다. 나는 그녀의 집에서 유카타 라 는 얇은 일본 전통복과 함께 포장되었다. 그리고 왠지 익숙한 이름 이 그들 사이에 오고가는 소리를 들었다. 상자 속 어둠에서 나는 생각했다. 프랭크의 집, 다시 에이미의 집, 그리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즐겼던 와인의 취기, 이어진 일본으 로의 여행, 그리고 다시 떠나게 된 희망의 여정. 이제는 프랭크가, 그리고 에이미가 나를 반겨주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결코 놓을 수 없다. 내가 사는 세상은 희로애락( 喜 怒 愛 樂 ) 유성은 화단 이윤성 맥금동 이규선 ㅌㅡㄹㅏㅇㅜㅁㅏ 박주영 이곳은 어디인가 허정훈 32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희로애락( 喜 怒 愛 樂 ) 유성은 1 내 삶에 있어 가장 큰 행복을 느꼈던 곳과 가장 슬피 울었던 곳은 같다. 그곳에서 나는 짙은 어둠속의 작은 씨앗이었고, 그곳에서 가 장 치열하게 생명을 이어가고자 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곳이며, 그렇게 아프도록 사랑했던 사람과 이별했던 곳.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다른 사랑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그를 아 주 많이 사랑한다. 그는 나와 그녀를 이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 의 입은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더욱 모질게 우리를 공격했고, 나의 어둠은 더욱 짙어졌다. 그녀가 너무 아파했다. 완성되지 않은 내 마음이 짙은 어둠속에서 크게 요동쳤다. 내 가슴께 있는 따듯한 무엇이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나의 존재가 그와 그녀에게 큰 두려 움이 된 것일까. 그는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진심을 말하 고 있었다. 그는 나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다만, 두려움에 떨고 있을 뿐 이다. 그와 그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의 목소리를 듣고자했다. 차 가운 무언가가 나를 쓸었고, 나는 말하고 싶었다. 그들과 함께하고 싶다고. 있는 힘껏 발버둥 쳤다. 2 나는 빛을 알지 못했다. 항상 어둠속에 있었고, 어쩌면 그것이 어 둠인지 빛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행복으로 빛과 어둠을 구분했 다. 대부분의 나날들이 어둠이었지만, 그 날은 따스한 햇볕이 느껴 지는 날이었다.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그 남자도 환하게 웃었다. 그의 눈에서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는 세상에서 가 장 사랑하는 그녀를 보던 눈빛으로 나를 보며 웃음 지었고, 눈물을 흘렸다. 그의 눈에는 미안함과 사랑이 들어있었다. 그 날 이후로 그와 그녀는 언제나 함께했고, 나도 언제나 그들과 함께했다. 그는 나에게 노래 불러주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때는 내 가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행복으로 그의 사랑 을 느낄 뿐이었다. 어서 나에게도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 력이 생기길 바라며 성장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사랑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 다. 그의 목소리는 굉장히 달콤했고, 나는 그의 노랫소리가 항상 흥 겨워 손발을 꼬물꼬물 움직였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그녀는 깜짝 깜짝 놀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녀의 미소가 보기 좋았 다. 그녀가 계속 웃기를 바랐고, 시도 때도 없이 손발을 꼬물거렸 다. 밝고 활동적이었던 그녀는 나와 함께한 후로 피로를 자주 느꼈 고, 게으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에게 거짓말도 했다. 내가 딸기 를 먹고 싶어 한다며 늦은 밤에 그를 고생시키기도 했다. 날이 갈수 록 그녀의 어리광은 늘어갔다. 나는 그런 그녀와 많은 시간을 보내 며 그녀의 어리광을 닮아갔다. 3 그녀를 통해 세상을 보고 느꼈던 나는, 점점 욕심이 생기기 시작 했다. 이제는 내 눈으로 세상을 보고, 내 손으로 만져보고 싶어졌다. 그들의 두 눈을 마주보고 싶었다. 이제 이 어둠속에서 나가고 싶어 졌다. 나는 탈출을 시도했다. 출구를 향해 단단해진 내 머리를 내밀 어 나갈 생각이었다. 출구를 찾아 몸을 뒤척였고, 깜깜한 어둠속에 34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35

서 오직 내 감각에 의존한 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의 격렬 한 움직임에 크게 놀란 듯 보였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많이 고통 스러워했지만,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녀를 너무나 보 고 싶었고, 그녀에게 나를 보이고 싶었다. 사랑하는 그가 그녀의 손 을 꽉 잡아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어서 나오라고 힘을 보태주었다. 그녀는 아파하면서도 나의 탈출을 응원했다. 내가 사랑하는 두 사람 이 나의 탈출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그들을 만날 생각에 나는 너 무 설레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 벅찬 감동을 그들과 나누기위 해 나는 좀 더 힘을 냈다. 그리고 드디어 감당할 수 없게 빛나는 세 상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에필로그 모든 사람은 부모의 사랑으로 잉태되어 여자의 뱃속에서 생을 시 작한다. 태아가 된 생명은 약 10개월을 여자의 뱃속에서 자라난다. 이때 여자의 뱃속에서 보내는 10개월은 한 사람이 인생에서 느낄 수 있는 한 평생의 감정을 축약해서 느끼게 된다. 곧 자궁이란 공간은 인생을 PREVIEW 할 수 있는 공간인데, 우리는 누구나 이곳에서 인 생의 희로( 喜 怒 )애락( 哀 樂 )을 경험해 볼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수 십 년의 인생을 살아야할 우리에게 주는 신의 선물이 아닐까? 이 공 간에서의 경험을 출생 시 기억할 수 없게 된다고 해도. 화단 이윤성 주위보다 높게 올라간 빌라의 주차장 한 구석엔 1평 남짓한 화단 이 외로이 방치되어 있다. 콘크리트 건물에 가려 햇빛도 잘 들지 않 는 그곳은 고물상 아저씨의 쉼터이자, 중 고등학생들의 비밀 장소 이기도 하다. 누구 하나 돌보지도, 관심 가져주지도 않는 그 화단에 핀 꽃 한 송이. 그곳이 버려진 공터가 아니라 화단임을 증명하듯 수 줍게 피어난 꽃 한 송이가 자칫 무채색으로 지워질 뻔한 누군가의 아름다운 추억을 선명하게 되살려내는 듯하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대문이 따로 있는데도 괜히 할아버지가 앉아있는 복덕방을 통해 서 집으로 들어간다. 한 번이라도 더 할아버지 얼굴을 보기 위해서 다. 집에 들어서면 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곧장 달려가는 곳은 대문 옆 계단. 내가 올라가기엔 너무 높지만 그 계단을 힘겹게 오르면 숨 겨진 보물처럼 옥상 위 빨간 앵두나무가 나를 반기고 토마토, 호박, 고추, 상추가 널려있다. 따 먹을까, 말까. 아까운 마음에 고민하다 결국 앵두를 한주먹 따먹는다. 마당 끝에서 나를 반기는 강아지와 토끼에게 눈도장 찍듯 사료와 당근을 던져주고 나서야 비로소 방으 로 들어간다. 할아버지! 나 할아버지 옆에서 숙제해도 돼? 그래봐야 가방만 내려놓았을 뿐 나는 바로 복덕방으로 향한다. 그 36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37

안에는 푹신푹신한 소파에 빵빵한 에어컨까지 더운 여름 날 숙제하 기 가장 좋은 장소다. 딸랑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사람 들이 들어온다. 전세, 월세, 복비 어린 나이로는 알 수 없던 이야 기들을 나눈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모시고 나가서는 한참을 돌아오 지 않는다. 숙제를 옆에 펼쳐 놓은 채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소파 위를 뒹굴면서 할아버지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밤이 되면 김 사장님, 최 사장님, 전 의원님. 내 눈엔 그냥 다 아 저씨처럼 보이는 수많은 사장님들이 할아버지 복덕방으로 모여들고 술자리가 시작된다. 그 틈에 끼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고 멀뚱멀뚱 쳐다보다 심부름을 하는 게 고작이지만 하루 중 할아버지 가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거기다 내가 좋 아하는 자장면과 음식들이 한 두 개가 아니다. 벌건 얼굴로 어린 내 게도 술잔을 권하는 아저씨, 용돈을 쥐어주며 노래시키는 할아버지 들 사이에서 나는 어느덧 주인공이 된 듯 자리를 끝까지 지키고 있 다. 자던 내 침대가 있던 자리가 저 화단쯤이 되려나. 24년 동안 같은 동 네에 살았지만 오늘은 왠지 낯설게만 느껴진다. 무작정 길을 걷는 다. 허름했던 집들은 모두 허물어지고 커다란 아파트, 빌라들만 가 득하다. 어릴 적 뛰어 다니던 골목길은 건물들에 둘러싸여 사라지 고, 아이들마저 보이지 않는다. 화단에 핀 꽃 한 송이만이 내게 공감 하듯 활짝 웃는다. 분명 그때 그 자리인데 모든 형태는 사라지고 남 은 건 기억뿐이다. 할아버지 가서 자자! 온몸이 붉게 물든 할아버지를 모시고 방으로 들어간다. 숙제는 다했니?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셔요, 그래. 나는 엄마에게, 할아버지는 할머니로부터 잔소리를 듣는다. 꼼짝 못하는 건 나나 할아버지나 똑같다. 침대에 누워 할아버지의 팔베개 에 머리를 대고 만지작만지작 할아버지 팔을 만지면 하지 말라고 하 시면서도 절대 팔을 빼지 않으신다. 할아버지 품에 안겨서 잠드는 이 시간. 할아버지의 술 냄새까지 포근하게 느껴지는 그 시간이 너 무 좋았다.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그 집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그 자리 엔 빌라가, 할아버지의 복덕방은 주차장이 됐다. 할아버지와 누워 38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39

맥금동 이규선 이곳은 맥금동 종점이다. 맥금동이란 이름은 중간에 매흙이 많은 후미진 곳이어서 맥금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렇게 이 길은 더 이 상 차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막다른 지역이고, 왼쪽에는 시냇물이, 길 오른쪽에는 무슨 일이라도 다 감추어 줄 듯 갈대가 무성하고, 그 뒤로는 산이 있다. 이 길은 가로등이 없어 별빛과 달빛에 의지해 걸 어야 하는 깜깜한 길. 부부가 유모차를 밀며 앞에서 걸어가고 있다. 나는 그 뒤를 따라 걷는다. 10분 정도 걸었을까. 갑자기 전화벨이 울 린다. 통화하는 목소리, 그 여자다. 여보세요? 아 진짜요? 금방 갈게요!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검은 그림자가 내 옆을 급히 지나간다. 남은 어둠 속에서 반짝 작은 불이 일더니 붉은 불꽃이 허공에 떠 서 움직인다. 그 뒤로 코끝에 전해지는 담배 냄새. 아기의 울음소리 에 이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래 그래, 알았어. 이놈, 담배가 몸에 안 좋은지는 어떻게 알고 우는 거야. 너까지 길에서 담배 핀다고 아빠 쫓아내면 흡연자들이 설 자리가 없다고. 남자의 희미한 그림자가 시냇가 쪽으로 내려가서 쪼그려 앉는다. 아마도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과 함께 담배를 피우고 있 겠지. 내가 저 기분 잘 알지. 물을 바라보면서 피는 담배. 캬~ 나 도 가서 한 대 피우고 싶네. 라는 생각과 함께 조금 전에 일어난 일들 이 머릿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토요일 저녁, 아울렛에는 손님이 많았다. 나는 한 의류매장에서 일하고 있다. 한 부부가 유모차를 끌고 매장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OOO입니다. 저기, 학생! 저 마네킹이 입은 바지 좀 줘 봐. 아무렇지도 않게 반말이다. 사이즈가 어떻게 되세요? 30. 손님 죄송합니다. 저희 매장은 바지 사이즈가 28까지만 나와서 요. 손님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러고는 그럼 28로 줘 봐. 쉽게 포기 하지 않을 기세다. 옆 매장의 주영이 오빠가 다가온다. 눈짓으로 오늘은 또 어떤 진 상이야? 한다. 몰라요. 허리 30인데 자꾸 28 입어본다고 갖고 들어갔어요. 주영이 오빠는 진심으로 짜증나는 표정으로 아, 오늘 왜 이렇게 진상이 많냐? 한다. 그러게요. 대화가 이어지지 못한 것은, 바지를 입는 데 실패한 여자가 오히 려 내게 화를 냈기 때문이다. 아우! 옷을 왜 이리 작게 만들어. 돈 벌기 싫은가? 학생 저 티셔 츠도 좀 줘 봐. 나는 기분 나쁜 표정을 애써 참으며 손님 저기 앞쪽으로 가시면 있구요, 티셔츠는 착용이 불가능 합니다. 그러자 손님이 화가 난 표 정으로 뒤돌아 말한다. 왜 안 돼? 참, 어이없네. 내가 훔쳐가기라도 할까 봐? 지금 나 도 둑 취급하는 거야? 표정은 왜 그래? 똑바로 해! 짜증나게 하지 말 고! 나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으며 죄송합니다. 라고 말했다. 이윽고 잠시 자릴 비웠던 여자의 남편이 나타나 무슨 일이야? 40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41

라며 여자에게 묻는다. 여자는 억울하다는 듯, 아니 쟤가 나를 도둑놈 취급하잖아.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지만 오늘도 잘못 걸렸구나! 라고 생각하 며 말했다. 아니, 그게요. 규칙상 착용이 불가능해요. 제가 손님을 도둑으로 취 그녀는 내 말을 끊더니 나의 왼쪽 뼘을 힘껏 때렸다. 그 소리에 매 장 사람들의 눈은 내게 집중이 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이번엔 욕을 하기 시작했다. 옷 파는 일 따위 하는 주제에 어디 나한테 기어올라? 손님은 왕 이다. 이런 서비스 정신도 몰라? 서비스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건 지, 원.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그런지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매니저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손님 무슨 일이세요? 여자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아니 지금 이 학 생이 저를 도둑 취급을 하네요. 참 어이가 없어서. 죄송합니다, 손님. 저희 직원이 실수를 한 것 같네요. 다시 교육 을 시키겠습니다. 매니저는 고개를 90도로 숙이며 사과를 한다. 매니저님 그게 아니 매니저는 억울한 마음에 상황을 설명하려는 내 말을 끊으며, 그 만 하고. 어서 다시 사과 드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여자에게 머리를 숙였다. 흐르는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여자 앞을 벗어나서야 고개를 들 고 원망하듯 여자를 한 번 더 바라본 뒤 창고로 들어갔다. 옷을 갈 아입고 유니폼을 집어 던지다시피 한 뒤 매장을 나와 직원 휴게소로 향했다. 담배를 한 대를 태우면 나아질까 했는데 전혀 마음이 가라 앉지 않는다. 혹시 남자가 눈치 챈 건 아니겠지? 오른쪽 갈대밭쪽으로 바짝 붙 어 갈대와 하나가 된 듯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다 왔다, 싶은 순간 아기가 울음을 터트린다. 나의 신경세포는 주위의 모든 소리를 감지 하듯 일어났다. 나도 모르게 손으로 아기의 입을 틀어막았다. 혹시 나 남자가 듣지는 않았을까 하는 조바심에 귀를 기울인다. 때마침 멀리 차 한 대가 지나간 덕분에 남자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듯하 다. 똑딱 라이터를 켜는 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다. 안도의 숨을 내 쉬며 살그머니 아기의 입을 막은 손을 뗐다. 아기는 더 이상 울지 않 았다. 갑자기 이상한 느낌과 함께 온 몸에 소름이 돋고 나는 무의식 적으로 아기 코에 손을 대보았다. 제발 울어줘 순간, 남자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어 혼자 구시렁대는 소리가 들린다. 여편네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무슨 일이 생겼나? 내 머리 속은 하얘졌고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재 빨리 아기를 가방 속에 넣고 갈대밭으로 몸을 숨겼다. 직원 휴게소를 막 나서는데 아까 그 부부가 깔깔대며 내 앞을 지 나간다. 나는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그 뒤를 따랐다. 부부는 쇼 핑을 마친 듯 택시를 잡더니 유모차를 접어 싣는다. 나도 바로 뒤의 택시를 잡아탔다. 아저씨, 저 앞의 택시를 따라가 주세요. 갑자기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린다. 매니저의 문자다. 미안해. 그런 손님은 그렇게 하는 게 제일 빨라. 이제 그만 나와 도 될 거 같은데. 갑자기 속에서 무언가 올라오면서 또 한 번 울음이 터졌다. 택시 42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43

기사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나를 달랜다. 아저씨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고!!! 내가 피해자거든요? 욕도 먹고 맞기까지 했는데 서러움에 말을 잇지 못하자 택시기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스스 로에게 하는 말인지, 내게 하는 말인지 모를 넋두리를 한다. 원래 세상이란 게 다 이 모양이지. 죽을 수도 죽일 수도 없으니 이렇게 살아야지 그때 앞의 택시가 멈췄다. 아가씨 차 세울까? 네. 감사했어요. 나는 더 이상 울지 않는 아이가 든 가방을 메고 온 몸이 땀에 젖은 상태로 숨 가쁘게 맥금동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 저만치 앞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난다. 그 여자다. 나는 재빠르게 몸을 숨기고 입을 틀 어막았다. 그녀가 내 앞을 지날 때쯤 갑자기 가방 무게가 느껴지면 서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이 쏟아졌다. 내 손을 입에 물고 간신히 울음 을 참으며 여자의 검은 그림자가 깊은 어둠 속에 파묻혔을 때 나는 길 위로 올라와 다시 향해서 걸었다. ㅌㅡㄹㅏㅇㅜㅁㅏ 박주영 번쩍 번쩍! 시끌벅적! 갈 때 마다 놀이공원의 이미지는 항상 같다. 누구와 함께 가든 나는 항상 긴장되고 무서웠다. 그런데 가족도 아 닌 남자와 단둘이 놀이공원이라니. 어색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다. 그가 나에게 청룡열차를 타자고 한다. 순간 나는 옛날 기억이 떠올 랐다. 내 나이 7살. 처음으로 아빠 엄마 손을 잡고 놀러 갔던 놀이공원은 아찔할 정도로 새로운 풍경이었다. 말들이 히히힝 소리를 낼 것처럼 허공을 떠다니고, 뱀인지 지렁이인지 기다란 물체가 빠르게 돌아다 니는가 하면 풍선과 그네들이 공중에서 뺑그르르 돌고 있었기에 가 슴이 두근거렸다. 마냥 놀러 다니기 좋아할 나이. 신기하고 놀라운 광경이었다. 나는 말들이 가장 마음에 들어서 엄마 아빠 손을 이끌었다. 멀리 서 봐도 예뻤지만 가까이서는 더 예뻤다. 신데렐라가 무도회에 가고 싶어 할 때 요정할머니가 나타나 옷과 구두, 마차를 만들어준 것처 럼 내 눈 앞에도 호박마차가 있었다. 너무 신기해 한참을 만져보다 자리에 앉았다. 앉아서 너무도 해맑게 웃고 있었는지 아빠가 내 머 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잠시 후 아빠는 나에게 건너편의 뱀처럼 기다란 놀이기구를 가리 키며 타자고 하셨고 난 멋도 모르고 네! 하고 웃으며 달려갔다.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청룡 열차였다. 뱀이라고 하 44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45

기엔 너무 큰 뱀이다.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열두 개의 칸에서는 알싸 한 쇠 냄새가 났고 차가웠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그 높이가 하늘 에 닿아있는 듯 높이 솟아있었다. 자리가 넉넉해 아빠 무릎에 앉았 는데 아빠는 날 꼭 끌어안았고 옆에는 엄마가 앉았다. 고개를 빼고 뒤를 돌아보니 혼자 탄 사람도 있었다. 열차가 출발하고 사람들은 소리를 크게 질렀다. 그 소리는 나에게 긴장감을 더 주었다. 덜컹덜컹 열차 레일 소리도 흥미로운 것 같으 면서 무서웠다. 열차가 갑자기 빨라졌다. 나는 겁을 먹고 손잡이를 꽉 쥐었다. 내가 무서워하는 걸 알았는지 아빠가 나를 더 꽉 안아주 셨고 엄마도 내 손을 잡아주셨다. 처음에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속 도가 빨라지는 순간 어느새 눈을 감았고, 끝까지 눈을 뜰 수가 없었 다. 급기야 눈물도 났는데 속도가 느려지면서 처음 출발할 때 들었 던 레일 소리가 들려 와 끝났구나,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속이 메스 꺼웠다. 열차에서 내리자 아빠는 나를 업었다. 출구 쪽에 가서는 아 빠 등에서 내려 구토를 한 기억도 난다. 나는 그 이후로 놀이공원의 열차들을 타지 못 한다. 내 안에 트라우마로 자리 잡은 것이다. 야! 너, 너무 우울해 보여. 내가 진짜 친한 오빠 있거든. 진짜 괜 찮은 사람이야, 한번이라도 만나봐. 너 그러다 진짜 우울증 걸리겠 다. 사랑에 상처받은 뒤 사람을 피하던 내게 친구는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새로운 사랑이 무섭고 두려웠지만 친구의 말대로 계속 이렇게 지내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 알겠다고 대답을 했고 지금 내 옆에는 그 사람이 서 있다. 그 오빠, 완전 숙맥이야, 너보다 더 심할지도 모르니까 너무 그러 지 말고 알았지? 친구의 말대로 그는 긴장한 듯 보였고 말수가 적었다. 나는 이 정 적을 깨고 싶고 해서 말을 건넸다. 뭐 불편한 거라도 있으세요? 편하게 말하셔도 되는데,,,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떨려서요, 그리고 또 정적,,, 그렇게 조용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조심스럽게 번호 교환을 하였다. 집 방향이 비슷해 걸으면서 그를 힐끔힐끔 보 았다. 우리 집 앞까지 바래다 준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첫 느낌은 좋았다. 무언가 나의 마음을 잘 이해해 줄 것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었다. 휴대폰 이 울려 메시지를 보았다. -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다음에 놀이공원 어 떠세요? 놀이공원. 나는 어릴 적 트라우마가 생각났다. 그래도 이제는 깨 야겠다는 생각에 승낙하고 그날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만나기 직전 까지도 마음에 갈등이 일었다.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싶지만 또 두려 움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놀이공원에, 그리고 청룡열차 앞에 서 있다. 그의 제안에 갈등하고 있다. 청룡열차 이야기 나오기 전까지만 해 도 놀이공원의 떠들썩함으로 잊을 수 있었는데. 사실 놀이공원에 서 이렇게 기분이 좋아질 줄은 몰랐다. 나의 이런 환한 모습을 그는 처음 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어색함도 사그라지고, 웃으면서 대화도 하고 전보다는 활기찬 점심식사로 그에게 점점 더 가까워지는 느낌 을 받았다. 과연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하는 생각과 함께. 나는 방금 전까지의 그 기억들이 떠올라 더욱 표정이 굳어지고 경 직되었다. 그때 친구의 말이 또 생각났다. 오빠는 먼저 막 제안하고 그러는 거 진짜 못하거든? 만약에 제안 하고 먼저 말 걸고 하면 무조건 잘 반응해주고 알았지? 그를 보았다. 역시 상처받은 얼굴로 내 눈을 피하고 있었다. 생각 해보면 그가 나에게 제안했던 적은 놀이공원 가자는 것 하나 뿐이었 46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47

다. 청룡열차를 보았다. 전에도 지금도 마찬가지로 나에겐 너무나 크 고 무섭다. 청룡열차의 얼굴이 비웃는 듯 나를 보는 것만 같다. 청룡 열차가 달리는 모습을 밑에서 바라보는데 레일소리까지 더해져 나 를 압도해왔다. 아, 싫으시면 괜찮습니다, 그럼 저쪽으로 가볼까요? 그는 분명 상처 받았다. 그의 모습을 보니 알 수 없는 감정에 휩 싸였다. 이 트라우마를 깨고 싶다. 새로운 사랑을 하고 싶다. 입 밖 으로 내뱉지도 못하고 한 마디의 말을 잡고 있다. 어떡하지? 커다란 트라우마가 나를 옥죄었지만 나는 드디어 용기를 내었다. 아, 아니요! 탈게요! 같이 타요, 우리! 그가 웃었다. 그의 웃음에 나도 미소 지었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가까운 스킨십은 처음이다. 그의 손이 따뜻 하다. 줄을 서는 동안 내 가슴은 빠르게 뛰었다. 이게 나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그의 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떨림이 참 좋았다. 드디어 우리 차례. 눈을 질끈 감고 열차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손잡이를 꽉 쥐고 있는데 그가 내손을 또 잡아주었다. 열차의 의자 는 차가웠지만 그의 온기로 인해 따뜻해져갔다. 심호흡을 하고 그를 보았다. 무언가 편안해지는 느낌이다. 열차가 서서히 움직인다. 출 발이다. 나의 새로운 사랑도 함께. 이곳은 어디인가 허정훈 세상은 좁고 또 넓다.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는지는 모르지만 나에 겐 좁게 느껴진 것 같다.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건지 내가 스스로 자초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 잘못이 잘못인지 모르고 살다보니 어느 덧 나는 사람들과 단절되어 있는 곳으로 보내졌다. 내가 있는 이곳 은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누울 수 있는 공간 인 듯하다. 좁고 캄캄한 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얼음 잔처럼 차가운 공기 뿐이다. 소리 또한 들리는 것 하나 없으며 귓가에 들리는 것은 옷과 몸이 스치는 소리뿐이었다. 나에게 삶의 기회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으며 끝도 머지않았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내가 이 어두운 공간 속에서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달콤한 꿈을 꾸는 것이다. 이곳에선 시간의 흐름은 알 수 없으나 창틀 사이 로 보이는 작은 빛의 색깔로 가늠 해본다. 지금 보이는 것은 시뻘 건 붉은 빛이다. 이것이 저물어가는 태양의 빛인지, 떠오르는 태양 의 빛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내게는 저물어가는 태양의 빛으로 보 일 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게슴츠레 한 눈이 감긴다. 코는 먼지만 들이 마시고 가슴속은 답답하다. 저무는 태양의 빛이 나를 몽롱하게 만들었다. 빛 속에 이끌린 채 또 다른 세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금 서 있는 이 공간은 마치 동화 속 같다. 아니 어쩌면 동화 속 일지도 모른다. 이곳에 풍경을 보니 어렸을 적 잠결에 어머니가 들 려주신 전래 동화 이야기가 떠오른다. 넓고 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 쳐져 있고 뒤편에는 싱그러운 풀밭과 나무들이 마음속 깊이 정화시 48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49

켜 주는듯 한 느낌이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들뜬 나는 숨이 찰 때 까지 뛰었다. 깊숙이 들이 마시는 숨은 시원한 박하사탕이 코와 목 을 매워주는 느낌이다. 나는 그 자리에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에 뜬 구름 역시 달콤 한 솜사탕처럼 보인다. 그렇게 한참을 누웠을까? 저 멀리서 다급하 게 날 찾는 목소리가 들린다. 도와주세요. 제발 저와 함께 가주세 요. 나는 꿈속 인지도 모른 채 그를 보고는 흔쾌히 허락했다. 누군 가 나에게 도움을 청한 것은 처음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멀리 하려고만 했고, 나는 누구와도 어울릴 수 없는 쓸모없는 사람이었 다. 동화 속의 사람들은 나를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그는 고마운지 나를 붙잡고는 어디론가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을까 외 진 곳에 마을이 있었다. 그는 나를 방으로 안내해준 뒤 인사를 하며 밖으로 나갔다. 그 방안에는 다 죽어가는 병든 노인이 누워 있었다. 노인은 입을 열어 내게 말하기를 그대에게 간곡히 부탁할 것이 있어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내가 말했다. 부탁이 뭔가요? 노인이 말하기를 초식동물의 간이 필요 합니다. 도와주세요. 나는 곰곰이 생각한 뒤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녀온다는 인사 를 하고 나왔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니 주위에는 동물들이 하 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동물들은 작은 것부터 큰 것 까지 초식동물, 육식동물 할 것 없이 눈앞에서 뛰어다녔다. 그중 나는 가장 앞에 있 던 토끼를 잽싸게 잡았다. 토끼를 잡는 순간 내 귓가에 살려 주세 요. 저를 죽이지 말아주세요. 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보였다. 문득 별 주부전 이 떠올랐지만 이런 생각도 잠시 그 자리에 토끼를 있는 힘 껏 던졌다. 그 자리에서 토끼는 죽었고 나는 죽은 토끼의 간을 빼낸 뒤 마을로 돌아갔다. 방문을 열었을 땐 아무것도 없었으며 나무 책 상위에는 편지 한 장 뿐 이였다. 두 번 다신 자신을 미워하지 말고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가라. 책상 위에 있던 글을 읽고 마침표를 읽 을 쯤에 등가에 식은 땀 이 나며 감았던 눈이 떠졌다. 꿈은 너무나 생생했으며 어머니가 해주셨던 말 같았다. 이런 생각 도 잠시 칠흑 같은 어두운 공간속에 새하얀 빛이 들어왔고 그사이로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내게 하얀 포대를 씌워주었다. 쉬고 있던 숨은 점점 더 조여 왔으며 눈앞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렇게 어디론가 또 다른 어디론가 가고 있었나 보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커다란 돌을 옮기는 것 같았다. 그렇게 길을 갔던 나는 더 이상 걷지 않아도 되었다. 멈춰선 곳은 어디인지도 몰랐으며 내 앞을 가리는 포대는 숨통을 더더욱 조여 왔다. 나는 손발 하나 움직 일 힘이 없었으며 무릎이 땅에 닿을 쯤에 떠 있던 눈이 또다시 감겨 왔다. 꿈인지 진짜인지는 모르겠다. 감긴 눈앞에 맴도는 것은 나무 책상위에 있던 글귀 뿐 그 이외 것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꿈 속에 갇힌 채 두 번 다시 깨어날 수 없었다. 50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51

시간의 기억 내 삶 속의 시간 김종욱 빨간 미소 김도희 7시 5분, 시간의 방을 찾아서 황성화 그녀와 그의 시간 국현호 이별일기 송보람

내 삶 속의 시간 김종욱 사람은 음식을 섭취하여 인체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고, 건강한 신체를 유지 할 수 있다. 건강한 음식을 위해서는 신선한 재 료들을 사용하고 균형 잡힌 영양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 면 시간과 음식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최근 실습의 기억을 떠올리 며 고민해 본다. 요리를 배우는 학생이다 보니 실습수업을 위해서 항상 주방 가까 이에 있게 된다. 하지만 이론적인 내용을 배울 때면 우리는 저 멀리 떠나 있었다. 세월을 뛰어넘어 대륙을 횡단하며 시간과 공간을 넘나 들었다. 식재료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오늘은 유럽으로 향했다. 사 이프러스 방풍림 사이의 좁은 토지에서 불어오는 북서풍은 과일과 채소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고 로마시대 때부터 생산되어온 와인 과 치즈는 숙성되어 향과 풍미가 더욱 깊고 진하게 만들어지고 보존 되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재료와 우리의 재료를 적절히 조합하여 오늘 실습이 진행 된다. 이제 재료 분배하고 실습 시작하겠습니다. 쉐프님의 말씀과 함께 우리는 고대로마 시대에서 다시 한국의 주 0 방으로 돌아왔고 다들 서둘러 Pissaladiere와 baked potato실습에 필요한 재료와 도구들을 준비한다. 금일 만들게 되는 피살라디에르 0 (Pissaladiere)는 프랑스 남부 지방의 가정 식 피자로 이태리의 영향 을 받아 만들어졌고, Baked potato는 감자를 껍질째 씻어 오븐에 구운 서양 감자요리이다. 어떻게 보면 패스트푸드와 비슷하지만 재 료와 조리, 그리고 영양학적인 측면에서 구분된다. 프렌치 음식의 특징인 재료 본연의 맛을 최대한 살려내는 것은 자극적이고 건강에 해로운 패스트푸드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다. 피자, 햄버거, 치킨과 같은 간단히 조리되는 패스트푸드는 바쁘고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식사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생겨났다. 조리시간 또한 줄이기 위해서 재료를 미리 익혀두고 살짝 볶거나 튀 기는 방법을 이용한다. 패스트푸드에 사용 되는 정제된 소금, 설탕, 버터, 화학조미료, 오일 등은 음식의 칼로리를 높이고 건강한 영양 소 흡수를 방해한다. 뿐만 아니라 고지혈증, 고혈압, 뇌졸중 등의 각 종 성인병의 원인으로 건강을 위협한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만 들어진 패스트푸드가 건강과 함께 다시 시간을 빼앗아 가는 부적절 한 결과를 낳고 있다. 하지만 내가 준비한 피살라디에르의 레시피는 건강, 영양, 그리고 맛을 고려하였다. 무엇보다 정직한 요리를 하고자 하는 목표를 이루 기 위해 건강한 조리법과 신선한 식재료에 대한 고민을 했다. 영양 이 듬뿍 들어가 있는 재료를 이용하고 기름과 나트륨 사용을 줄이고 부드럽고 담백한 맛을 내는 것이 포인트이다. 조리법을 살펴보면 도 우와 양파 잼은 기본적인 방법을 이용하고, 파프리카와, 올리브를 그 위에 흩뿌린다. 고단백의 닭 가슴살은 두들겨 펴고 우유에 재워 질감을 부드럽게 만든 후 담아낸다. 엔초비 필레는 소금 간을 대신 하고 신선한 모짜렐라 치즈를 마지막에 얹어서 오븐에 굽는다. 요리가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을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은 음식이 가장 맛있을 때의 온도를 유지하여 제공하는 것이다. 맛있게 조리된 음식이라도 식으면 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음식 에 마음과 정성을 담아 전달하기 위해서 따뜻한 음식의 온기는 가장 기본적으로 유지 되어 있어야 한다. 피살라디에르와 베이크 포테이 토 모두 따뜻하게 준비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조절해야 한다. 또, 그 릇을 데워두고 오븐에서 나오자마자 빠르게 프리젠테이션을 끝내면 54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55

충분히 따뜻하게 유지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시간 조절만으로는 날씨 가 추운 러시아에서 음식의 온기를 유지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19 세기 중반 프랑스 요리사 유르반 듀보아는 러시아에서 음식을 따뜻 하게 유지하는 것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당시의 왕들의 요리 사 마리 앙투와 카렘의 영향으로 당시 프랑스 전통음식은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려져 있었고 완성된 요리는 한 번에 테이블에 올려서 준비되었다. 하지만 날씨가 추워서 음식을 뜨겁게 내놓아도 짧은 시 간 내에 금방 식었다. 유르반 듀보아는 대안으로 러시아식의 한 접 시씩 음식을 내놓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고 이후 프랑스에도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코스요리는 음식의 온도조절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맛의 상승작용을 이루어 낸다. 전채요리, 수프, 식전 빵은 메인 음식 에 앞서 입맛을 돋워 요리를 맛있게 즐길 수 있도록 돕고 디저트와 음료는 요리의 무거운 느낌을 덜어주고 코스의 마무리를 해준다. 그 래서 메뉴 간 맛의 미묘한 조화나 상성도 조리에 고려가 된다. 쉐프가 계획하는 것에 따라 요리가 변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요리 는 즐겁다. 이렇게 음식을 만듦에 있어서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갑 지 않게 적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것은 우리 삶 속에서 시간을 계획 하는 것도 닮아있다. 하나의 요리를 마치면서 테이스팅을 하고 또 한 단계 나아가기 위한 계획을 하는 것, 그것이 내 삶 속의 시간 계 획이자 내 요리 속의 시간 계획이다. 요리에 대해서 고민하고 만드 는 과정의 시간처럼, 삶에 대해 고민하고 배우며 만들어 가는 과정 이 내가 살아가는 즐거움이다. 빨간 미소 김도희 피곤에 절은 몸은 움직일 줄 모르고, 왼쪽 귀 바짝 놓아 둔 핸드폰 에선 알람이 울려댄다. 잔뜩 구긴 표정으로 몸마저 바짝 구긴다. 추 적추적 비가 오는 지 여느 때 보다 밖이 어둡다. 대충 알람을 끈 뒤 다시 선잠에 든다. 얼마 쯤 지났을까.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오금 이 저려 벌떡 일어났다. 헉 하고 시간을 보니 6시 51분. 서두르지 않 으면 늦는다. 찬물이 뒤통수를 아리게 때린다. 15분엔 나가야 해. 덜 마른 머리, 구겨진 블라우스, 묵직한 가방을 들쳐 매고 뛴다. 도로 건너에서 버스가 오고, 눈앞에서 한 대를 보낸다. 터벅터벅 걸 어 정류장에 다다라서야 비가 오고 있음을 느꼈다. 습한 공기에 구 불구불 말려가는 머리, 축축하게 젖어가는 블라우스, 지친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 최악이다. 야속한 택시는 오지 않고 겨우 탄 버스는 이미 만원이다. 비를 머금은 우산들이 다리를 적신다. 기다렸다가 택시를 탈 걸... 머릿속엔 온통 후회와 짜증이다. 역에 내려 막 들어오는 열차를 타려 뛴다. 다행히 열차는 탔지만, 여기저기 들려오는 소음에 두통 이 밀려온다. 찬물로 씻어서 그런가. 기분 나쁘게 아파오는 두통에 인상을 잔뜩 찌푸린다. 출근해서도 두통은 계속됐다. 자료들은 눈앞에서만 맴돌 뿐 머릿속에 입력되지 않았다. 오늘따라 상사는 갈구고, 어린것들은 싸가지가 없다. 결국 56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57

한바탕 화를 내고 말았다. 저녁 반찬거리로 날 씹겠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서둘러 퇴근한다. 열차는 발 디딜 곳 없이 꽉 차있다. 멍하니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다보니 내릴 역이다. 엄청난 인파에 밀려 내리다 휴대폰을 떨어뜨린다. 바꾼 지 얼마 안됐는데! 휴대폰을 주워준 남자에게 괜히 짜증을 낸다. 빼앗듯 받아들고는 깨져버린 액정에 대고 욕지기를 한다. 집 앞에서 맥주 한 캔을 샀다. 아침에 급히 나오느라 현관문이 열려있었다. 아무렇게나 가방을 던 져두고 맥주를 단숨에 들이킨다. 진짜 개 같은 하루였다.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어제 보던 드 라마를 틀었다. 10분 쯤 보았을까. 투박한 손이 내 숨통을 조인다. 무언가에 목이 깊게 찔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다. 머리채를 잡혀 맥없이 던져졌다. 이 새끼. 그 미친놈 아니야... 바닥엔 피가 흥건했다. 나는 놈의 얼굴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재수 없어... 그 표정... 내 얼굴에 날카로운 무엇을 대더니 히죽 웃는다. 예쁘게 해줄게... 이 개자식. 스토커 짓을 하고 있을 줄 알았어. 정신이 흐려진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리다니... 개 같은 하루.. 끝까지 개 같네... 그렇게 내 시간은 멈추었다. 6시 25분. 벽 너머 들리는 알람소리에 신경이 곤두섰다. 8개월 하 고도 23일 째 같은 시간에 같은 알람이다. 이젠 길거리에서도 그 알 람소리가 들리면 신경이 곤두선다. 알람이 길게 이어지더니 끊겼다. 기척이 없다. 새벽까지 잠도 안자더니 지각이군. 옆집여자는 드라마를 좋아한다. 퇴근 후 저녁 7시부터 새벽 2시까 지 드라마를 본다. 요새는 미국 드라마를 보는 모양이다. 재잘대는 소리에 잠을 못자 새벽 4시까지 글을 쓰다 겨우 잠들었다. 글이나 마저 쓰자. 마른세수를 하고 몸을 일으켜 간이 책상을 잡아끈다. 6시 33분. 노트북을 켜 어제 쓰다 만 글을 쓰기 시작한다. 6시 51분. 늦었네. 다급한 발소리, 곧이어 물소리가 들린다. 7시 18분. 여자가 집을 나선다. 이제야 고요하다. 나는 글을 쓴다. 소설가였지만 지금은 프리랜서다. 쓰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한다. 소설, 광고, 시나리오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 보니 마감을 맞추는 것에 도가 텄다. 이것저것 엉킨 일들 때문에 하루를 분단위로 쪼개 썼고 시간에 집착하게 되었다. 지금은 A사 신제품 휴 대폰 광고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쓰다 오후 3시 5분, 늦은 점심을 먹 으려 집을 나섰다. 어? 그 미친놈이네. 앞 건물에 사는, 옆집여자가 미친놈이라 부르는 남자가 1층을 서 성이고 있었다. 저 남자와 옆집여자는 이틀에 하루 꼴로 싸운다. 아 니, 싸웠다기보다 남자가 일방적으로 욕을 얻어먹었다. 여자는 항상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앞 건물에 소리쳤다. 이 미친놈아! 그만 엿보랬지! 개 같은 놈! 너 신고했어. 이 개자식 아! 더러운 새끼! 칵 퉤! 그렇게 소리를 지를 때면 커튼을 살짝 걷어 구경하곤 했는데, 그 때마다 앞집 남자는 기분 나쁘게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정신이 이 상한 게 틀림없다. 3시 33분. 근처 서점에서 책 한 권을 사 들고 집으로 향했다. 6시 58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59

45분. 옆집 여자가 퇴근했는지 인기척이 들린다. 6시 54분. 다시 시 작된 소음. 책에 집중 할 수 없다. 7시 6분. 우당탕 하는 엎어지는 소 리가 난다. 졸다가 의자에서 떨어졌나보다. 중얼중얼. 남자목소리가 들린다. 애인은 없던 것 같았는데. 7시 12분. 낄낄낄. 남자 웃음소리 가 들린다. 왠지 모를 소름이 끼쳤다. 그 후 누군가 나갔다. 뭔가 심 상치 않았다. 드라마의 소음은 계속됐지만 평소였으면 자지러지게 웃던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무엇보다 아까 마주친 앞집 남자의 웃음이 계속 떠올랐다. 기분 탓이겠지. 일찍 자자. 억지로 눈을 감았지만 신경은 온통 저 벽 너머에 있었다. 뭔가에 이끌리듯 문을 나섰다. 뭐하고 있는 거지? 어느새 옆집 문 앞이다. 내 오지랖이 이렇게 넓었나? 신고를 먼저 할까? 아냐. 아무 일 없 을 수도 있어. 확인만 하자. 볼륨 좀 줄여달라고 부탁하는 척 해보 자. 똑똑. 노크를 했지만 대답이 없다. 두어 번 더 노크해 봤지만 대답 은 여전히 없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커튼을 젖혀 그 놈의 집을 바라보았다. 그 놈 은 창문에 바짝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히죽 웃으며 말하는 시늉을 한다. - 내가 죽였어. 미친놈! 당장에 뛰어가 옆집 문을 열었다. 코를 찌르는 피 냄새. 바닥에 널브러진 여자. 살았을까?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얼굴 을 보자마자 헛구역질을 해댔다. 여자의 얼굴은 피 범벅으로 붉었고 양쪽 입 꼬리는 귀까지 찢어져 있었다. 우당탕 하고 엎어지는 소리에 이상함을 느꼈고, 남자 웃음소리 에 아, 무슨 일이 있구나. 하고 나가서 확인해 봤다고 하셨죠? 예. 몇 시였죠? 7시 22분. 저희 집 현관문 앞 시계를 확인하고 나섰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땐 이미 여자는 죽어있었고. 그 다음에 신고 를 하셨고요. 예 놈은 출동한 경찰에 의해 붙잡혔고, 순순히 범행을 인정했다. 나 는 중요 참고인으로서 며칠을 진술에 응해야했다. 갓난쟁이일 때 버려졌는데, 길에서 자랐다나봐. 어릴 때부터 구 걸하러 다니면서 많이 맞았대. 생긴 게 험하다고. 트라우마가 생겼겠지. 정신적으로도 병들어가고. 한마디로 미쳐 갔던 거지. 그러던 차에 이 여자가 재수 없게 먹잇감이 된 거고. 놈은 정신병 진단을 받아 감형되었지만, 출소 후 정신병원에 입원 되어 평생을 보호관찰 받게 되었다. 보도된 뉴스에 의해 세상은 떠 들썩해졌고, 일명 빨간 미소 살인 사건 으로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되었다. 나는 그 끔찍했던 여자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옆집은 살인사건의 여파로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고, 고요했다. 하지만 매일 새벽 6시 25분. 내 귀에는 옆집여자의 알람소리가 맴돈다. 에필로그 시간에 집착하는 사람에 대해 써보고 싶었다. 결국은 추리소설이 되었지만 옆집여자를 분단위로 꿰뚫고 있는 남자가 부각되기를 바 랐다. 이 소설 속에 시간의 집착, 이웃 간의 소통, 외모 지상주의의 폐해, 부정적 사고방식 등을 표현하고자 했다. 지독히도 운이 없던 여자는 사실 운이 없던 것이 아니라 그저 보통의 일상을 부정적인 60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61

사고방식으로 대하다 보니, 운이 없게 된 것이다. 늦잠을 자거나 만 원 버스를 타는 일은 흔하다. 그런 일을 하나하나 투덜대고 부정적 으로 생각하다 보면 끝없이 운이 나쁘다 생각 될 뿐이다. 여자의 하 루를 읽으면서 더럽게 운이 없는 여자군. 보다는 좀 더 마음에 여유 를 가지고 생활해야겠구나. 하고 느꼈으면 한다. 여자가 죽고 난 후로 알람은 울리지 않았지만 남자의 귀에는 알람 소리가 맴돈다. 유난히 시간에 집착했던 남자는 어느새 옆집여자의 삶에 녹아들지 않았을까. 여자로 인해 아침을 시작하던 그 소리를 쉽게 잊지 못 할 것이다. 또 새벽 6시 25분의 옆집 여자 역시 잊지 못 할 것이다. 7시 5분, 시간의 방을 찾아서 황성화 미안하구나, 이 방은 네가 찾는 방이 아닌 것 같구나. 이 말을 들은 지 이번으로 13번째다. 나는 내 앞에 닫힌 문을 바 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 복도에서 계속 찾아다니던 13개의 방은 내가 찾는 방이 아니었다. 아마 이 복도엔 13개보다 더 많은 방 이 있겠지. 각양각색의 색깔과 무늬가 다른 문들 앞에서 이 방이 내 가 찾는 방이 맞는지는 들어가 보지 않고는 모른다. 13번째라니... 어쩌면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발끝에서부터 밀려왔다. 아 냐.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직 방이 많이 남았잖아. 찾을 수 있을 거야. 이제 어디부터 갈까? 라는 생각과 함께 다시 고개를 들어 끝 이 보이지 않는 복도를 바라보았다. 설마 이 많은 방 중에 내가 찾는 방 하나 없을까. 다시 마음을 다잡는 그 순간이었다. 얘-------! 누가 나의 팔을 툭툭 치며 말한다. 옆을 돌아보니 노란색 가방을 맨 소녀가 나를 호기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쳐다보고 있다. 나는 소녀가 입은 초록색 옷이 꼭 키 작은 소나무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 고 서로를 얼마나 쳐다봤을까. 소녀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건다. 너... 어떤 방을 찾고 있지?! 어떻게 알아? 나, 네가 찾는 방을 알고 있다!? 어...저...정말? 정말이야? 나 따라와. 62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63

소녀는 내 질문에 대답을 해주지도 않은 채 복도 끝으로 달린다. 정말 소녀는 내가 찾고 있는 방이 무슨 방인지 어디 있는지 알고 있 는 걸까? 고민할 틈도 없이 내 몸은 소녀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길 게 늘어진 방들을 지나, 몇 번이나 계단을 오르고 내려가기를 반복 한 끝에 도착한 곳은 회오리 문양에 금색의 반짝거리는 것들로 이루 어진 아주 멋진 문이었다. 문 밖에서도 시끌시끌한 아이들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이 방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게 분명하다. 내 옆에 있는 소녀는 내가 문 앞에서 주춤거리고 서성이자 참지 못하겠다는 눈치다. 왜 안 들어가? 여기가 맞아? 응! 들어가자! 얼른. 문을 열어 방에 들어가니 보이는 건 나와 같은 또래인 아이들과 몇몇 어른들이 전부다. 이 아이들도 나와 같은 방을 찾고 있었던 거 구나. 왠지 모를 기대감과 설렘이 생긴다. 일단, 이 방이 7시 5분이 맞는지 물어봐야 한다. 나에게 이 방을 알려준 소나무 소녀를 찾아 봤지만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그때, 한 아 이가 물었다. 너도 뽀로로 좋아해? 나는 에디가 제일 좋아!!! 너는? 뽀로로? 뽀로로라고? 여기 몇 시야? 여기 6시 45분! 뽀로로 시작할 시간이잖아! 아 이걸로 14번째. 뽀로로라니. 난 지금 뽀로로보다 더 중요한 걸 만 나야 한단 말이야. 원망스런 눈빛으로 이 아이를 쳐다봐도 소용없는 일이다. 나는 말없이 6시 45분을 닫고 나왔다. 아까 나를 괴롭게 했 던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닫힌 6시 45분 앞에 앉아 가방 에서 지도를 꺼내 지금까지 갔던 방을 엑스자로 표시했다. 지금 몇 개가 열려있는 문인지. 알 턱이 없었다. 무작정 내 앞을 지나가 는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저씨! 혹시 지금 열려있는 문이 몇 개인지 아시나요? 그건. 아마 3층에 이머아저씨가 알고 계실거야. 3층으로 가 보렴 3층에는 [시간의 문 안내데스크]가 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신문 이 눈에 닿을 정도로 가깝게 신문을 읽고 있는 아저씨가 이머 아저 씨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어디선가 이머 아저씨는 눈이 잘 안 보인다고 했던 말을 들은 것도 같았다. 신문읽기에 집중하고 있는 아저씨의 옆으로 가서 계속해서 서있었다. 내가 옆에 서있는데도 나 는 보이지도 않으신지 신문을 이리저리 눈앞에서 올렸다 내렸다 반 복하고 계셨다. 아저씨!!!...누...누구여? 제가 지금 찾는 시간이 있는데 지금 열려져있는 방이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지금? 잠시만 기다려봐라 네. 아저씨는 자신의 시간이 방해된 것 같은 표정을 지으셨다. 하지만 내 목소리가 간절하게 보였는지 안 보이는 눈을 신문에서 지도로 바 꾸셨다. 열려있는 방을 찾는 데에는 아주 오랜 기다림이 필요했다. 나는 옆에서 내가 대신 지도를 보면 안 되냐는 말이 턱 끝까지 나왔 지만 괜히 이머아저씨의 기분을 안 좋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아 주 오랜 기다림 끝에 아저씨는 지금 열려있는 시간의 문은 3개라고 하시며 각각의 위치를 쪽지에 적어 주셨다. 그리고 나에게 물어보셨 다. 근데 꼬마야 몇 시를 찾고 있니? 64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65

7시 5분이요. 어... 그 시간은 아마 없을 거다. 네? 왜요? 그 시간은 찾는 사람이 없어. 아무도 없을 거다. 누구 만날 사람 이 있는 거니? 네... 어. 그냥... 그렇다는 거지 뭐... 사실 열려있는 방이 몇 시 인지는 나도 몰라. 허허. 아저씨는 나의 침울한 얼굴에 미안하셨는지 금세 말을 바꾸며 말 하셨다. 아저씨! 꼭 있을 거예요. 꼭 만날 거예요. 만나야 돼요. 그래. 행운을 빌마. 나는 아저씨를 바라보며 웃는다. 아마 그건 아저씨 생각이 달라 요. 전 찾을 거예요. 라는 확신의 웃음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저씨 가 써 주신 3개의 쪽지를 손에 꼭 쥐며 그려본다. 보고 싶은 얼굴 을 사실 내가 지금까지 찾아다닌 14개의 방에는 정말 재미있고 행복 한 시간이 있었다. 오전 8시 30분 방. 아침에 일어나 누군가와 함께 아침을 먹으려 준비하는 시간. 이 시간의 방에는 따사로운 햇살의 따스함과 편안함이 있다. 오전 9시 30분 방. 같이 유치원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꽃과 나무들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시간. 이 방에서 나 는 꽃향기를 맡으면 기분이 아주 좋아진다. 오후 2시 40분 방. 집 앞 놀이터에서 시소를 태워주고 그네를 밀어주던 시간. 여긴 기쁨과 즐 거움이 있었다. 이렇게나 좋은 방들을 내가 어찌 선택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 어느 방도 내가 그토록 찾아다니는 7시 5분 방 만큼은 분명 아닐 거다. 확신 한다. 7시 5분이 되면 항상 내 귓가에 들려오 던 너를 사랑해 란 한마디. 나는 그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낀다. 다시 느끼고 싶어. 다시 만나고 싶어. 그리고 한 발자국 그 곳을 향 해 나아간다. 나에게 특별한 시간. 7시 5분 시간의 방을 향해. 나는 지금 마지막 문 앞이다. 결국 3개의 쪽지 중에 한 개만 남았 다. 마지막 시간의 방 문 앞에서 이젠 어떤 핑계도 댈 수 없다는 걸 나도 잘 안다. 이 문을 살펴본다. 이 문은 지금까지의 문과는 다르 다. 화려한 문양도 시선을 끄는 색채도 없이 오랜 세월을 품고 있는 허름한 나무로 이루어진 문이다. 그래. 문이 어떻게 생겼든 나에게 는 큰 의미가 없다. 이 문을 열었을 때 이 안에 내가 그토록 기다렸 던 사람만 있어주면 된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고요한 기운이 나를 감싼다. 희미한 불빛 속 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한 사람이 있다. 내가 기억하고 있었던 한 사람. 내가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사람. 7시 5분이 되면 나에게 사 랑한다고 말해주었던, 항상 그 시간에 날 기다리겠다고 약속한 엄 마. 엄마? 그래.... 사랑해. 우리 아들 엄마를 꽉 안아본다. 내가 조금 힘이 셌다면 좋았을 텐데 더 가 득 엄마를 안고 싶다. 내 등을 토닥거려주시는 엄마의 품에서 잠이 든다. 그래. 이 체온이다. 나는 지금 살아있는 거야. 14개의 화려하 고 즐겁고 행복했던 방보다 오랜 세월을 품고 있는 작지만 살아있음 을 느낄 수 있는 이 방이 좋다. 계속해서 눈꺼풀이 감긴다. 이머 아 저씨를 떠올린다. 마음속으로 얘기 해본다. 아저씨. 제가 말했죠. 제 말이 맞죠? 감기는 눈꺼풀위로 어머니의 웃는 얼굴이 영화필름 처럼 왔다 갔다 한다. 66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67

남자는 지금 막 잠에서 깼다. 내가 꿈을 꾼 건가. 라고 작은 소리 로 읊조린다. 잠에서 일어난 자리 옆엔 남자의 엄마처럼 보이는 여 자의 사진이 있다. 남자는 사진을 들어 손으로 쓱쓱 문지른다. 그리 고 말한다. 엄마. 내 꿈속에 엄마가 나왔다. 나는 어린아이 모습으로 엄마를 찾았어. 내가 만난 엄마는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꼭 안아 주더라. 보고 싶어. 왜 살아계실 때 얘기하지 못했을까. 어머니... 사 랑해요. 사진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그의 시간은 7시 5분에 멈춰있었다. 그녀와 그의 시간 국현호 2AM. 한밤중에 정적을 깨고 남자의 방에서 요란한 전화벨이 울 린다. 뒤척이던 그는 침대에 누운 채로 휴대폰을 귀에 가져간다. 수 신자를 확인하지 못한 그는 잠결에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는다. 누구..야. 상대방은 말이 없다. 뭐야, 이 시간에 그는 더 이상 대꾸하기도 귀찮다. 그는 전화기에 귀를 댄 채로 잠 에 빠진다. 2AM. 그녀는 한참을 망설였다. 휴대폰을 들고 거실 벽에 기댄 채 몇 시간째 서 있다. 머릿속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어지러웠 다. 입술은 말랐다. 서성이던 그녀는 결국 그에게 전화를 건다. 그의 옛 연인이었던 그가 전화를 받았다. 잠결이었던지 남자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누구...야. 자는구나. 여자는 혼자 마음 속으로 말할 뿐이었다. 새벽 2시, 그를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던 이 시간이 그녀에게는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녀는 도저히 그가 잊힐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통화를 하고 나니 그를 지워야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68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69

5개월 전, 그녀는 달콤한 꿈의 기억 속에 젖어 있었다. 어둠이 짙 은 새벽이 되면 여자는 설레는 마음으로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김없 이 2시가 되었고, 카페에는 분위기있는 재즈 음악이 울렸다. 그녀는 미소를 머금고 전화를 기다렸다. 그와 그녀는 3년 전 HCS라는 조그마한 라이브 카페에서 처음 만 났다. 까페는 한때 많은 사람들로 붐빈 곳이었지만 이제는 세월의 흔적을 남기고 잊혀져 가는 곳이 되었다. 그녀는 이 카페에서 노래 를 부른다. 갈색 빛이 연하게 도는 긴 헤어스타일에 옅은 화장을 한 그녀는 큰 눈을 가졌다. 커다란 눈이 얼굴 가장자리로 이어져 슬며 시 웃을 때, 그 매력적인 모습을 본다면 누구든 그녀와 사랑에 빠질 것이다. 하얀 피부는 어둠 짙은 밤에 그녀를 더욱 빛나게 해 주었다. 그녀는 낮고 허스키한 음성으로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할 때면 카 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부르는 것 같지만 그녀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공허한 눈빛에는 지친 새벽의 초연함이 묻어 있 다. 기쁨도 슬픔도 노래에 흘려 보냈다. 눈을 감고 음악에 취했다. 그녀가 음악과 함께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는 위스키 한 잔을 홀짝 거렸다. 술을 몇 잔을 더 시키고 취기가 올라올 무렵 그는 문득 그녀 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고 그는 그녀를 보기 위해 카페를 찾았다. 두 사람의 눈 맞춤이 둘의 만남으 로 이어졌다. 서로를 더욱 가까이서 마주보는 사이가 되었다. 사랑 에 빠진 이후로도 그녀는 항상 그를 위해 노래하고 그는 그녀를 바 라보았다. 남자와 여자의 활동시간은 달랐다. 남자는 낮에 일을 하지만 여자 는 밤에 일을 했다. 둘은 휴식시간을 쪼개서 데이트를 지속하였다. 그녀는 낮에 잠을 줄이고 그와 점심식사를 했다. 그는 그녀를 만나 기 위해 잔업을 순식간에 끝내 버리곤 했다. 육체적으로 힘은 들었 지만 서로를 생각하면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녀의 노래는 이제 그를 위한 노래가 되고 그는 그런 그녀가 더 없이 사랑스러웠다. 둘의 만 남이 영원할 것 같았지만 점점 금이 가게 되었다. 남자는 끝없는 잔 업에 시달리게 되었고 그녀의 사랑 노래는 시들어만 갔다. 서로 사 랑을 이어나갈 힘도 의지도 없었다. 그러던 차에 그는 회사에 다른 여성에게 관심이 돌아갔다. 헤어짐은 자연스럽게 진행 되었다. 어떤 불안한 예감이 그녀를 감싸고 있음을 여자는 직감했다. 몇 달이 지났다. 오래된 카페는 사람들에게 잊혀 갔고 그녀를 찾 는 사람들도 점점 줄었다. 더 이상 손님이 없어지자 가게는 문을 닫았 다. 그는 일을 하고 돌아올 때면 어김없이 카페를 찾았는데 갈 곳을 잃었다. 그의 지친 마음을 달래주던 새벽 두 시에 흘러나오던 그녀의 노래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를 잊기 시 작했다. 어쩌면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카페가 문을 닫아서라 기보다 이미 서로에게 지쳐있었는지 모른다. 새벽에 눈을 감을 수 없 는 사람들의 삶은 금세 피로했고, 사랑 역시 피로를 안고 시작했다. 2AM. 그의 하루의 마지막은 더 이상 카페가 아니다. 그는 이제 집으로 향한다. 그녀가 노래를 시작했던 시간, 이제 그에게는 그녀 도 노래도 없었다. 그녀 역시 새벽 두 시에 찾아오던 그가 없다. 그 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를 추억하는 것뿐이다. 그녀는 전화를 걸어 그와 사랑을 이야기하고 노래를 부르던 시간을 기억한다. 그녀와 헤어지고 몇 달이 지났다. 더 이상 새벽에 울리는 의문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2AM. 남자는 거리를 배회한다. 심신이 지친 그는 집에 들어가기 전에 한 잔 걸치고 싶었다. 마땅한 곳을 찾았다. 집에 가기는 싫다. 그에게 집은 무덤과 같다. 하루의 끝을 고하고 죽어 지내는 곳. 길을 걷다 보니 빨간 바탕에 흰색 글씨로 <써니>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 왔다. 그는 빨리 카페에 들어가 한 잔 걸치고 싶다. 발걸음을 재촉했 70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71

다. 문 밖으로 노래가 흘러나온다. 감미로운 여자의 목소리, 언젠가 들어봤던 익숙한 음성. 그는 그녀가 이곳에서 노래하고 있음을 곧 깨달았다. 그는 자리에 앉기 전에 술잔을 들고 노래를 들이켰다. 노 래가 중반에 이르고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는 현재 만 나고 있는 여자는 게 눈 감추듯 잊었다. 그녀도 그를 보았다. 하지만 이내 눈을 돌렸다. 추억에 잠겨 있던 그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때를 후회하며 그녀의 시선을 애타게 찾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그녀의 차가운 눈빛이었다. 그는 그녀가 모든 노래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가 무대에서 내려오자 그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야. 노래 잘 들었어. 여전하네? 그래,,, 난 가봐야겠어. 피곤해서 말이야. 시간되면 나중에 밥 같이 먹을래? 그래, 나중에. 그녀가 헤어지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그가 자신을 쉽게 잊었 다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또 모든 것이 지쳐있었다. 매일 같이 부르는 노래도 그를 다시 받아들일 여력도 그녀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고 그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을 추억하며 그 자리에 서 있다. 새벽 2시의 기 억이 되살아났고 시간은 멈추었다. 남자는 추억에 젖어 있다. 그녀 는 그와 함께한 순간을 생각했다. 아주 잠깐의 사랑은 이미 온 데 간 데 없고 미련조차 식었다. 추억은 기억이 되어 사라졌고 새벽 2시는 더 이상 그녀에게 어떤 의미도 되지 못했다. 그녀와 그의 기억은 2시에 머물렀다 사라지고 멍한 기억만이 남았다. 그 둘에게 흘러가던 시간은 이제 서로 다른 속도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지친 몸은 시간을 따라 가기에 바빴고 멈춰설 순간을 주지 않았다. 2AM, 새벽은 사랑을 서서히 부식시켰 고, 결국 녹이 쓸어 버렸다. 새벽 2시, 그와 그녀의 주변에는 녹빛만 이 감돈다. 이별일기 송보람 우리가 만난 지 1826일째 되는 날. 그를 만나러 가는 길. 부드럽게 내리쬐는 딱 적당한 햇살과 살랑 살랑 불어와 내 몸을 휘감는 적당한 바람, 거리를 거닐고 있는 사람 들, 길가의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마저 적당한, 내가 좋아하 는 모든 것이 딱 적당한 날이었다. 왠지 좋은 일이 일어 날 것만 같 은 느낌에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내 시야에 그 이가 들 어오기 시작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도 나의 마음과 같았는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이른 저녁을 먹은 뒤, 연애 초반을 떠올리며 한강으로 가 자전거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오랜만 에 느끼는 평화로운 기분이다. 최근에 들어 사소한 것에도 자주 다 투던 우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보았다면 분명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사랑스러운 연인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혼 자 흐뭇한 생각에 빠져있는 나에게 다가와 그는 손바닥만한 상자하 나를 내밀었다. 나는 그 상자를 받아들고 뚜껑을 천천히 열었다. 그 안에는 노을이 번진 눈부신 한강처럼 반짝거리는 목걸이가 주인을 보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해질 무렵의 한강은 너무 로맨틱했다. 마 치 우리처럼. 역시 오늘 같은 날에는 싸울 리가 없었다. 우리는 대학시절 자주 가던 학교 앞의 조그만 선술집을 마지막 데 이트 코스로 정했다. 그와 나는 마주 앉아 술을 홀짝홀짝 마셨다. 여 기까진 좋았다. 분명히.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쯤, 그의 폰이 울렸 72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73

다. 그는 전화를 받지 않고 폰을 엎어 놓았다. 왜 전화를 받지 않냐 는 나의 질문에 그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전화라고 둘러댔다. 여자 의 촉이란 참 무서운 것이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무 언가 찝찝한 기분이 들어 그의 폰을 뺏어 들었다. 내가 그의 폰을 보 는 순간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리고 조그만 화면에 뜨는 한 문장. 자기야 왜 전화 안 받아?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2년 전과 같은 데자뷰 현상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설마 했는데 역시나였다. 그는 오해라며 절대 아 니라고 되려 나에게 화를 냈다. 나는 애써 침착하려 노력했지만 그 상황에서 어떤 여자가 이성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그 여자가 누구며 언제부터였으며 이따위 것들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냥 이 제는 끝이라는 말을 내뱉고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도 나를 따라 나왔지만 나는 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달리는 택시 안에서 나 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바람이라니. 어떻게 또 다시 바람이라니. 요즘 들어 자주 다투게 되면서 이제는 그만해야하나 라고 생각도 했 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운수 좋은 날도 아니고 왠지 오늘따 라 모든 것이 잘 풀리는 듯하더라니, 5년째 기념일에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게 기대어 TV를 켰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별 흥미가 없어 TV를 껐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몇 분쯤 지났을까. 다시 눈을 뜨고 일어나 창고로 갔다. 빈 박스를 꺼내와 침대 옆 책상으로 향했다. 난 그와의 기억들이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책상 위 그에게 선물 받은 시계, 내가 좋아한다고 사준 가수의 앨범, 자기가 감명 깊게 읽었다고 선물해준 책, 그와 찍은 사진, 그가 준 편지, 그 와 함께 보았던 영화표들. 너무 많아 다 정리할 수가 없었다. 온통 그와의 추억들이 깃든 물건들이었다. 새삼스레 5년 동안 그와 함께 공유한 것들이 많다고 느껴져 괜히 슬퍼졌다. 나는 정리하는 것을 그만두고 침대에 그냥 누워버렸다. 5일째. 마치 내 마음처럼 흐트러진 내 방을 보며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정리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역시나 힘들었다. 그의 기억들이 가득한 물건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집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앞이 뿌 옇게 번졌다. 어떻게 우리가 함께한 그 오랜 시간들을 한 번에 망쳐 버리는 짓을 할 수 있었는지 화가 났다. 내 손에 잡힌 그와 내가 환 히 웃고 있는 사진이 담긴 액자를 던져버렸다. 헤어진 다음 날. 늦은 아침, 내 얼굴을 어루만지는 따사로운 햇살에 눈을 떴다. 부 스스한 모습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더듬더듬 휴대폰을 찾았다. 전원 을 켜고 액정을 바라보았다. 부재중 전화 4통, 메시지 3건. 모두 그에게서 온 것들이었다. 나는 아주 홀가분한 이 기분을 망 치고 싶지 않았기에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휴대폰을 놓아 두었다. 오랜만에 홀로 맞는 주말이다. 간단하게 밥을 먹을까 생각 했는데 배는 그닥 고프지 않았다. 나는 거실로 나가 쇼파에 늘어지 7일째. 일주일째다. 아주 홀가분하다. 오늘 그와의 추억들을 모두 다 정 리했다. 5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듯하다. 그동안 그에게서 연 락도 왔다. 하지만 두 번 다시 그의 말에 속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제 새출발을 다짐했다. 15일째.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다들 나에게 잘했다고 난리들이다. 2 년 전에 알아봤어야 했다느니, 그럴 줄 알았다느니, 내가 훨씬 아까 74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75

웠다느니, 친구들의 위로 아닌 말들을 들으며 괜찮다 마음을 다졌지 만 괜시리 기분이 씁쓸해졌다. 헤어진 지 한 달째. 괜찮을 줄 알았다. 괜찮다고 느꼈다. 하지만 문득 불쑥 튀어나오 는 그의 생각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을 하루 종일 들은 날도 있었고, 무거운 마음을 털어버리기 위해 끝없이 걷 기도 했다. 기분을 전환하려 친구들도 자주 만났고, 일부러 바쁘게 움직이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노래들이 왜 이렇게 슬픈 건지, 모두 다 내 이야기 같은 건지. 왜 온통 그와 함께한 곳들뿐인지 헤어지고 나니 새삼스레 느껴졌다. 5년이란 시간을 한 달 안에 정리하기는 힘 들다. 그냥 이 슬픔을 즐겨보기로 했다. 헤어진 지 두 달째. 마음을 다스리려 애쓰다보니 몸이 말썽이다. 밤만 되면 열이 나고 몸이 으스러질 것처럼 아픈 날이 늘어갔다. 이럴 때면 그가 더욱 더 생각났다. 어떡하면 좋을까. 헤어진 지 세 달째. 그를 보았다. 저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를 마주 한 그 짧은 순간에도 많은 생각이 들었다. 눈을 마주치면 어쩌지. 혹 시나 날 보고 다가오면 어쩌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냥 지나칠 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질 때쯤 한 여자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팔짱을 꼈다. 난 바로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걸었다. 걷고 또 걸었 다. 오른쪽 눈에서 눈물이 한줄기 흘러 내린다. 날씨가 많이 쌀쌀해 졌다. 집에 가서 두터운 옷을 꺼내야겠다. 나, 너, 그리고 우리 어느 한 남자를 본 이야기 김동훈 인간미 박태민 그와 마주 앉았다. 이종현 나는... 나야! 이승민 76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어느 한 남자를 본 이야기 김동훈 2012년 5월 25일 경기도에 살던 나는 전주의 친척집에 가게 되었 다. 전라도에서 14년을 살다가 경기도로 올라왔는데 자주 보던 친척 들과 멀어져 내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모처럼 쉬는 날인 토요일에 영등포 역에서 전주 역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 올랐다. 가는 김에 학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곳에 살고 있는 친구도 만나 기로 했다. 낯선 전주에서 혼자 외롭고 힘들어 하는 것을 안쓰러워 하며, 얼굴 한번 보자고, 놀러가겠다고 했는데 마침 기회가 되었다. 객사에서 만나기로 한 하영이는 나를 너무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 랜만에 만난 우리는 돌아다니며 여유를 만끽했다. 세 시간 동안 기 차를 타고 와 출출했고 마침 하영이도 아무 것도 먹지 못한 터라 근 처의 치킨 집에 들어가 닭다리 살 치킨과 맥주 400cc, 700cc 두 잔 을 주문하고 그동안 못다 했던 수다로 시간을 보냈다. 얼마나 오래 있었던지 날이 밝을 때 들어왔는데, 나와 보니 어두웠다. 10시까지 기숙사에 들어가야 했던 하영이는 아쉬워했다. 고민 끝 에 내가 또 언제 오겠냐며 큰맘 먹고 외박 신청을 했다. 뭐하고 놀까 얘기하다가 영화를 봤다. 보는 내내 둘 다 피곤했는지 졸았다. 결국 숙면을 취하고 나와 보니 12시 20분이었다. 내가 시간을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는 비몽사몽으로 찍은 사진에 시간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도 기숙사 입 실 시간이 아직 6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하영이는 외롭고 쓸쓸할 때마다 혼자 전주 한옥마을을 간다고 했 다. 그곳의 거리와 풍경이 너무 좋다며 같이 가고 싶어 했다. 나는 뭔가 의미 있을 것 같아서 좋다고 했다. 우리는 객사부터 그곳까지 가며 여러 얘기를 나누었다. 걸어가기에는 먼 거리였지만 시간을 때 울 수 있어 좋았다. 한참을 걸어 겨우 도착했을 때 내 눈 앞에 나타난 전동성당은 참 으로 아름다웠다. 옛날 유럽에 온 듯한 기분이 들고 건축 장인이 벽 돌 한 장 한 장 쌓아 올렸을 법한 섬세함이 보였다. 이 성당을 시작 으로 한옥 마을이 펼쳐졌다. 마치 과거에 온 듯한 한옥들로 가득했 다. 모든 건물들이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였고, 신비로웠다. 새벽이 라 그런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어 조용히 감상에 빠져들 수 있었다. 한 바퀴를 돌았을 때쯤 하영이는 오목대 라는 곳에 가자고 했다. 그곳은 한옥 마을 정상에 있는 것으로 가려면 새벽의 어두운 산길을 올라가야만 했다. 솔직히 캄캄함을 두른 산은 위험해 보였다. 하영 이는 저곳에 올라가면 전주 시내의 풍경이 한 눈에 보인다고 꼬드겼 다. 너무 가고 싶어 하는 하영이를 데리고 근처 편의점에서 청하와 종이컵, 그리고 김밥 두 줄을 사서 올라갔다. 눈앞에 아무 것도 보이 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 불안하고 무서웠다. 5분 쯤 걸었을 때 불빛이 보이더니 큰 정자가 나타났다. 오목대에 도착했을 땐 새벽 3시 29분이었다. 산 정상의 공기와 분위기를 즐기 며 우린 사진을 찍었다. 하영이는 풍경이 한 눈에 보이는 곳이 있다 며 오목대 뒤편에 있는 또 다른 출입구 쪽으로 나를 데려갔다. 이 산 은 출입구가 많아 보였다. 10계단 쯤 내려가니 왼쪽 낭떠러지로 된 절벽에 벤치가 있었다. 이곳에 앉아 전주를 바라보니 가슴이 뻥 뚫 리는 기분이었다. 하영이가 얼마나 힘들고 답답했으면 이곳까지 올 라왔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짠했다. 우리는 멀리 보이는 풍경을 마주한 채 청하 한 잔을 기울이며 많 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 때 고양이 한 마리가 보여서 아까 산 김밥을 하나씩 던져주었다. 고양이는 우리를 경계하면서도 김밥을 받아 물 78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79

고 어딘가에서 먹고 또 왔다. 몇 번을 그렇게 놀고 있는데 갑자기 차 소리가 들렸다. 어? 이 새벽에 웬 차지? 연인인가 보지, 조용히 놀자. 다시 얘기를 시작하는데 나무 문 같은 것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끼익, 끼익! 주위에 화장실이 있나, 하는 생각과 함께 누군지 궁금해졌다. 그 래서 벤치에 일어나 살금살금 계단 쪽으로 가서 위를 쳐다봤다. 경 찰차였다. 경찰차야. 이 시간에 왜 저게 여기 있지? 응? 그게 왜 여기 있어? 몰라. 일단 술 숨기고, 오면 연인인 척 하자 우리 둘은 저 차가 왜 왔을까 궁금해 하며 한참을 얘기하는데 하 영이가 갑자기 어? 근데 이거 땅 파는 소리 아니야? 한다. - 순간 정적 - 어? 잠깐만, 쉿! 이 시간에 땅을 왜 파지? 땅 파는 소리였다. 분명 삽으로 땅을 파는 소리였다. 이 소리 나기 전엔 낙엽 치우는 소리 들렸잖아. 낙엽을 치우고 땅을 판다? 한참 땅을 파더니 소리가 멈췄다. 이제 소리 안 난다. 갔나? 모르겠어. 일단 조용히 있자. 조용히 우리 둘은 추리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 사람 하나 없는 산 속에 차를 끌고 와서 왜 땅을 팔 까? 지이익, 지이익. 이건 뭐 끄는 소리 아니야? 응? 이 소리, 끄는 소리인 걸로 봐서 엄청 무거운 같은데. 쇠사슬 질 질 끌리는 소리. 간격이 긴 거 보니까 끌다가 쉬고, 끌다가 쉬고, 뭔 가 엄청 무거운 물건을 쇠사슬로 칭칭 감아서 끄는 소리 같아, 뭘 까? 혹시 사람 아냐?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돈이나 무슨 비밀문서? 무슨 비밀문서가 저렇게 무거운 소리가 나? 아니면 막 시체 숨기는 거 아니야? 야! 그러지마, 무서워. 뭐지? 아, 미치겠네. 도망갈 데도 없는데. 여기 입구 하나잖아. 저기 막으면 끝나. 여긴 낭떠러지고. 아, 뭐지? 무서워. 우리 여기 있는 거 들키면 그냥 연인인 척 하면서 아무 것도 못 들은 듯이 하자. 그런데 진짜 뭘까? 모르겠어. 대화하는 소리가 안 들리는 거 봐서는 혼자인 거 같은 데, 완전 명탐정 코난 인 듯. 아, 이런 일은 왜 나한테만 많이 일어 나. 아, 진짜? 나, 우리 집 터는 도둑이랑 마주친 적도 있고, 뻑치기 당할 뻔한 적도 있어 우와! 진짜 스펙터클하다. 나 진짜 스펙터클한 일 많았어. 고 2때는 중요한 물건을 놓고 와 서 점심시간에 친구랑 자전거 타고 집에 간 적이 있어. 친구는 우리 집 바로 옆집이라서 걔는 자기 집 갔다 온대서 갔고. 우리 집은 우 유주머니에 열쇠를 넣어놓는데, 열쇠가 없는 거야. 없으면 가족 중 80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81

에 누가 집에 있는 거거든. 근데, 문도 안 잠겨 있더라? 우리 아빠 가 집에 혼자 있을 때는 문을 안 잠가 놔서 아빠 있는 줄 알고 집에 들어갔지. 집 들어가자마자 바로 옆에 우리 누나 방이 있거든. 그런 데 거기서 키 180 넘어 보이고 덩치도 좀 있는 남자가 나를 쳐다보 면서 옆으로 서 있더라? 그래서 나는 누나 남자친구인 줄 알고 아, 누나가 푼수 없게 지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왔네. 하고 인사했어. 안 녕하 까지 했나? 갑자기 머리를 팍 맞은 거야. 난 깜짝 놀라서 뭐 지? 했는데 내 두 손을 잡더니 이 새끼, 드디어 잡았다 이러는 거 야. 갑자기? 응. 그래서 뭐가 뭔지 몰라서 네? 네? 이러는데 이 새끼, 드디어 잡았다 고, 빨리 경찰서 가자 고, 너 잡으러 왔다 고 막 이러는 거야. 그래서 뭐지? 뭐지? 나는 내가 아니라고 나 아니라고 막 이러고. 그 남자는 나한테 나가자고, 경찰서 가자고 그러는 거야. 근데 하필 나 도 바로 전날에 진짜 잘못한 일이 있어서 그 일 때문에 우리 집을 찾 아온 건가? 이런 생각에 도둑이라는 생각도 못했지. 아무튼 그러고 먼저 나가는 거야. 그래서 나도 나가려고 신발 신는데 내 방 쪽 보 니까 완전 어질러져 있고 난리 나 있는 거야. 그래서 바로 도둑이구 나! 하고 야구 배트를 들고 나갔는데 없어. 한 5, 6초도 안 지났는 데. 우와, 근데 이건 또 무슨 아니야? 응? 흙으로 땅 덮는 소리 같은데? 뭐지? 다 묻었나? 흙으로 덮나 본데? 응, 응. 아무튼 그래서? 아, 그래서 어디까지 얘기했지? 야구 배트 들고 나갔다고. 아, 맞다. 그래서 이렇게 빨리 도망갈 리가 없다, 옥상으로 도망 갔을 거라 확신하고 소리 지르면서 친구를 불렀지. 그러고 친구랑 둘이 완전 긴장하고 올라갔는데 아무도 없는 거야. 뭐, 도망쳐버렸 지, 벌써. 우와! 안 다친 게 다행이다. 응. 그러고 경찰 불렀더니 국과수에서도 사람 오고 우리 집 지문 이랑 족흔 채취하고 그 사람 발자국이 혹시 남았나 보려고 불 끄고 랜턴으로 바닥 비추고 그랬어. 대박이다! 응. 국과수에서 사람 왔는데 그 사람 양말이 발가락 양말이었어. 아, 대박! 그건 또 뭐야? 몰라. 막 되게 웃겼어. 낙엽으로 덮는 소리 들린다. 그러네. 이제 가려나? 낙엽 치우고, 땅 파는 소리 들리고, 쇠사슬 로 된 물건 질질 끌고, 그거 묻고 다시 흙으로 덮는 소리 들리고, 다 시 낙엽으로 덮고. 어? 그러네! 완전 딱 맞네. 하! 완전 대박이다. 난 왜 이런 일만 생기지? 진짜 너랑 있으면 완전 스펙터클한 일만 겪는 거 같아. 대박이지? 완전 스펙터클하지? 어? 트렁크 닫는 소리 들린다. 이 제 가려나? 저 차 가면 우리 파볼래? 그럴까? 막 돈 나오는 거 아니야? 파보자. 파보자! 어? 차 시동 건다. 이제 내려가나 보네. 하영이는 계속 파보자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솔직히 너무 무서워 서 그런지 온 몸이 파르르 떨렸다. 추워서 그렇다고 말은 했지만 춥 기도 하고 무서웠다. 시간이 몇 시인지는 몰랐다. 그 시각 그날의 오목대는 눈앞에 아 82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83

무 것도 보이지 않고 한기만 가득했다. 왠지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파다가 뭐라도 나오거나 그 차가 다시 올라오거나 한다면 진짜 큰일 날 것만 같았다. 하영아, 근데 지금 파보는 건 너무 위험한 거 같아. 아직 너무 어 두워서 아무 것도 안 보이고 그 차가 다시 올라오거나 공범이 있어 서 아직 안 내려갔으면 어떡해. 지금 파보는 건 너무 위험한 거 같 아. 그러니까 우리 날 밝고 아침 되면 사람들 많을 때 파보자 흠, 그래! 미안해. 솔직히 너무 무섭고 만약 무슨 일 있으면 내가 못 지켜줄 꺼 같아. 한 명이면 어떻게 잡고, 너 도망가면 되는데 만약 두 명이 면 솔직히 답 없잖아. 차는 내려갔고 우리는 다시 평소 소리 크기로 얘기하며 아까의 긴 장감을 지워가고 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쓰으윽... 쓰으윽 쉿! 이거 아까 그 낙엽 치우는 소리 아니야? 응! 맞아. 다시 올라온 거 아니야? 뭐지? 차 올라오는 소리도 안 들렸는데? 다시 올라온 거 같은데? 차 소리 안 들렸잖아. 아! 뭐야, 또. 불안하게! 공범 아니야? 공범이 와서 다시 땅 파는 거 아니야? 파서 다시 가 져갈 수도 있잖아. 아니면 공범에게 뭔가 전해주려고? 뭘까? 왜 다시 팔까? 누구지? 이 시간에 어두워서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누가 일부러 올라오지는 않을 거 아냐. 아침 운동하는 사람도 아무 것도 안 보이 는데 올라올 일 없고. 한옥 마을은 밤 되면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아, 누굴까? 왜 왔을까? 우리는 그렇게 또 추리하기 시작했다. 아직 어두웠다. 소리만 들 릴 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때, 잠깐만, 쉿! 발자국 소리 우리 쪽으로 오는데? 발자국 소리. 우 리 쪽으로 오잖아! 하영이와 나는 서로 쳐다보기만 할뿐 어찌할 방법을 몰랐다. 발자 국 소리는 점점 우리 쪽으로 오더니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나는 계 단 쪽을 쳐다봤다. 한 남자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 남자는 모 자를 푹 눌러쓰고, 가방을 매고,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고, 머리는 등 판까지 올 정도로 길었다. 남자였다. 분명히 남자지만 머리는 마치 명탐정 코난에 나오는 연쇄 살인마의 실루엣과 너무도 흡사했다. 누 가 봐도 범죄자다! 할 정도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무서웠다. 미친 듯이 무서웠다. 저 남자가 우릴 발견하기라도 한 다면 당장이라도 죽일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스 쳐지나갔다. 저 남자가 우릴 보고 여기로 오면 어떡하지?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못들은 척해야 하나? 그냥 놀러온 연인인 척할까? 입구 는 하나뿐인데 저 남자가 오면 도망갈 데도 없는데. 그때 내 눈앞 에 빈 청하 병이 보였다. 아! 저 남자가 오면 바로 이걸 쥐고 위협해 서 어떻게 해보자! 라는 생각 밖에 안 들었다. 그냥 제발 우리를 못보 고 내려갔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초조하게 그 남자가 내려오는 것 만 보며 마음 졸이고 있을 때 갑자기 그 남자는 멈춰 섰다. 하필 딱 우리 쪽으로 오는 길목에서 멈춰 섰다. 그 남자는 갑자기 앉더니 뭔 가를 살며시 주워들었다. 김밥이었다. 우리가 아까 고양이에게 던져 준. 김밥을 본 그 남자는 갑자기 우리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을 마주쳤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내 생각은 온통 술병을 언제 잡아야할까 뿐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우리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김밥을 던지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헐레벌떡 뛰어 내려갔다. 기회는 이때다 싶었다. 하영아, 빨리 내려가자! 84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85

응? 왜? 저 남자 놀라서 내려간 거 같은데 다시 올라오면 어떡해! 다시 정 신 차리고 올라올 수도 있잖아, 빨리! 여기로 내려가자! 왜? 그 남자가 여기로 내려갔는데 왜 여기로 내려가? 나는 하영이 손을 꼭 붙잡고 한 손에는 청하 한 병을 꽉 쥐고서 계 단을 올라가 그 남자가 내려간 반대편으로 뛰었다. 이야! 대박이다. 진짜 너랑 다니니까 완전 스펙터클한 일만 겪는 거 같아. 하영아 오면서 봤어? 소리 들리던 쪽 그 어디에도 낙엽은 없었 어. 근데 딱 우리 있던 곳, 바로 위에 나무랑 풀 심어져 있는 데에만 낙엽이 있더라. 헐, 대박! 그럼 우리 바로 위에서 막 땅 파고 한 거야? 응. 그런 거 같아. 오목대 뒤편 그 어디에도 낙엽은 없었다. 시멘트가 덮인 평탄한 길 뿐이었다. 그런데 딱 한 곳에 낙엽이 있었다. 우리가 앉아있던 벤 치 바로 위였다. 낙엽을 치운 곳도, 땅을 판 곳도 우리가 있던 데 바 로 위였다는 것을 알아채고서는 섬뜩해졌다. 저 남자가 아차, 하고 다시 우리한테 뛰어오면 어떡해? 그러니까 빨리 뛰어야지. 한참을 내려간 기분이었다. 찻길이 보였다. 택시를 타고 싶었다. 그런데 택시는 한 대도 없고 큰 공사장 차들만 지나다녔다. 한참을 뛰었더니 숨이 찼다. 걸으면서 우리 둘은 계속 의문을 품었다. 점점 날이 밝아 왔다. 드디어 하영이가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하영이를 데려다주고 나는 택시로 친척집으로 가서 자고 있는 사촌 형을 깨워 집에 들어갔다. 형을 만나자 마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형은 웃으며 믿지 않는 눈치였고, 그냥 내가 이 새 벽에 들어오기 민망해서 지어낸 얘기라고 했다. 믿어주지 않아서 몇 번이고 얘기했더니 알았다며 내일 파보러 가자고, 일단 일찍 자라고 했다. 나도 그때서야 긴장이 풀려 정신을 가다듬고 휴대폰을 보고는 다시 한 번 섬뜩했다. 내 휴대폰은 매너모드가 아닌 벨소리였기 때 문이다. 그 때 산에서 무언가를 묻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면 나 는 이 자리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 몸이 떨렸다. 이 이야기는 2012년 5월 26일 새벽 전주 한옥마을 오목대 에서 미심쩍은 사건을 목격한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땅에 묻고 떠난 경찰차. 왜 그 새벽 아무도 없는 산에 경찰차가 올라와 땅을 파고 정체모를 쇠사슬로 묶인 무거운 물 건을 묻은 걸까요? 또, 그 남자 일행이 본 장발의 남자는 누구이며, 왜 하필 그 시간에 산에 올라와 경찰차를 타고 온 사람이 묻은 곳을 어떻게 알고 다시 파헤쳤으며, 그 남자 일행을 보고 도망간 걸까요? 장발의 남자와 땅을 판 사람은 어떤 관계이고, 그들이 묻은 것은 무 엇일까요? 그 남자는 그때 왜 신고하지 않았느냐고 주변의 질타를 받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도저히 신고할 용기를 낼 수 없었다고 고백 했습니다. 86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87

인간미 박태민 눈을 떠보니 북극해를 지나가는 헬기 안이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다른 죄수복을 입은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헬기가 멈추고 우리는 끌려 내려갔다. 북극은 손발이 감각을 못 느낄 정도로 추웠다. 잠시 후 대령계급장을 단 남자가 나타났다. 너희는 전국에 있는 교도소에서 데려온 사회의 악의 무리다! 앞 으로 한 달간 너희들은 서로 협동하면서 버텨내야 한다. 물론 기본 장비들은 지원을 해주겠다. 그리고 한 달 동안 살아남는 자에게는 10억의 현금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석방에 특권을 주겠 다. 서로 협동하면 아무 탈 없이 무사히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 고 우리 군은 이 시간 이후로 철수하고 한 달 후 에 다시 올 것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리는 군인들이 위협하는 총을 피해서 근처 에 있는 동굴로 들어왔다. 총인원은 15명이다. 각자 아까 받은 A배 낭과 B배낭을 열어봤다. A배낭에는 공통적으로 추위를 피할 옷들 이 들어있고, B배낭에는 서로 다른 다양한 물건이 들어있었다. 서로 다른 물건이지만 협동해서 사용한다면 한 달 정도는 거뜬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한 남자가 말을 꺼냈다. 내 배낭에는 쌀이 들어있다. 이 정도의 양이면 성인 3~4명이서 도 한 달 충분히 먹을 수 있지. 하지만 다 같이 먹는다면 얼마 버티 지 못한다. 거기 라면과 담배를 가진 놈들 나와 함께 가자! 그러자 라면과 담배를 가진 사람들은 함께 동굴을 나갔다. 생각보 다 분열이 빨리 일어난 것이다. 남은 인원들은 서로의 장비들을 이 용해 각자 역할을 맡아 하루하루를 지냈다. 그러다 점점 배도 고프 고 지치게 되자 갈등이 시작됐다. 아, 난 매일 추워죽겠는데 낚시 해오고 누구는 나뭇가지 몇 개 주 워 불만 피우고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야? 뭐 인마? 이게 얼마나 힘든데 너야 말로 낚시 하는 게 뭐가 힘들 다고! 점점 내부 분열이 생기는 가운데 날이 밝았다. 다들 일어나봐! 큰일이야! 한 밤중에 보초를 서고 있던 사람은 죽어 있고 라이터와 코펠이 없어져 있었다. 젠장! 이게 무슨 일이야. 분명 그놈들 짓이 분명해 당장 찾아 죽이고 되찾아 오자고! 그렇게 3명은 기지에 남고 4명씩 두 팀으로 나눠서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반드시 찾아서 빼앗아야 돼! 이 악마 같은 놈들! 저기 그런데 말이야. 우리가 살아남으면 10억을 가지고 나가는 거잖아. 그런데 이 돈을 나누면 새 출발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저기 두 놈을 없애고 몫을 좀 줄이는 게 어때? 이제 버틸 날도 얼마 안 남 았잖아. 남은 사람들한테는 뭐라고 하려고 그래? 괜찮아. 그놈들과 싸우다 죽었다고 하면 괜찮을 거야. 그렇게 두 명은 같은 조였던 두 명을 없애고 다시 동굴로 돌아왔 다. 이봐, 빨리 와봐! 좀 도와줘! 무슨 일들이야? 나머지 두 명은 어디 갔어? 젠장 그놈들과 싸우다가 그만. 그러자 한 명이 말했다. 88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89

무슨 소리지? 그놈들은 우리가 얼어 죽어있는 걸 확인하고 돌아 오는 길이다! 이놈들, 두 명을 어떻게 한 거야? 결국 그들은 맨몸으로 동굴에서 쫓겨났다. 이제 남은 인원은 7명입니다.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으니 우리 모두 협동해서 이곳을 나갑시다! 그렇게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서로 의지하나 했다. 남은 사람들 은 다시 역할을 나눴다. 낚시 조에 두 명, 땔감 조에 세 명, 두 명은 보초 역할을 맡았다. 오늘도 월척이구먼. 그동안 몰래 모아둔 생선도 많아. 저놈들은 여태까지 잘 못 먹어서 기운이 없을 거야. 그때 우리가 저놈들을 처리하고 10억을 나눠 갖자고, 친구! 그들은 약간의 생선만 가지고 동굴로 돌아갔다. 뭐야? 오늘도 이것 밖에 못 잡은 거야? 너네 숨겨둔 생선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동굴에 있던 사람들은 의심하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야? 우리도 못 먹어서 잘 못 잡는 거라고! 그래. 이럴 때일수록 서로 믿어야 돼. 다음날이 되자 땔감 조는 의심스러워 낚시 조를 따라 갔다. 생선 을 숨기는 모습을 보고 낚시 조가 동굴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땔감 조는 생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일부만 가지고 동굴로 돌아갔 다. 이 녀석들이 생선을 숨겨놓고 있었어. 그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낚시 조를 죽였다. 앞으로 남은 기간은 3일. 남은 인원은 5명. 낚시 조와 싸우면서 보 초 조 한 명이 다친 상황이었다. 이를 보고 땔감 조는 계획을 세웠 다. 우리는 따로 숨겨둔 생선도 있고 저쪽은 한명이나 다름없잖아. 저놈들을 없애고 돈을 나눠 갖자. 3일 정도면 이 생선으로도 충분히 버틸 수 있잖아? 그렇게 몸 다툼을 하는 가운데 보초 조들은 모두 죽고 낚시 조도 한명을 잃었다. 친구! 드디어 우리 둘밖에 안 남았어. 우린 부자라고! 윽, 다리를 다친 거 같아. 좀 도와줘. 저기, 그런데 말이야. 혼자 남으면 10억이나 챙길 수 있는 거지? 한 달 후 군인들이 돌아왔다. 후, 드디어 오셨군. 빨리 나를 여기서 내보내줘! 생존자는 한 명 뿐인가? 그래. 빨리 약속한 돈과 여기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안타깝지만 넌 여기서 나갈 수 없다. 무슨 소리야? 처음과 약속한 게 다르잖아! 너희들은 애초에 윗분들의 장난감이이였다. 위에서 너희들에게 돈을 걸고 마지막까지 누가 살아남는지 맞추는 일종의 도박을 펼쳤 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고마웠다. 편히 쉬어라. 인간은 지구상의 생명체와는 다르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생명체들은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순환의 일부분이 되는데 인간은 아니다. 인간은 정복과 파괴를 일삼으며 끊임없이 번식한다. 인간은 지구의 일부분이 아닌 곰팡이 같은 존재 일수도 있다. 90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91

그와 마주 앉았다. 이종현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거리 끝, 잠들지 않은 어느 카페에서 그와 내가 마주 앉았다. 지금은 신 새벽이다. 새벽이라 하기에는 창밖은 한 없이 밝았고, 또 한 없이 어두웠다. 우리는 이 십 삼 년을 함께 살 아온 사이였고, 그는 나와 모든 밤을 함께 보낸 유일한 사람이었다. 평생을 약속한 사이지만 우리의 헤어짐은 여기에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 어 떠한 것도 알지 못하는 단 한 사람이었다. 그와 내가 바람마저 잠든 이 새벽에 마주 앉은 것에는 사실 그리 큰 의미는 없다. 무작정 그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십 삼년을 함께 보내며, 시간은 쉼 없이 흘러갔고 흐르고 있다. 그 동안 뭘 했느냐는 그의 질문에 나는 대답해야 할 것이다. 그의 물 음이 반드시 흘러간 시간의 결과를 말하라고 다그치는 것은 아닐 것 이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고 그가 한 모금 들이키며 입을 열었다. 짧 은 침묵을 쓴 커피로 쓸어내리는 동안. 밖은 여전히 밝은 듯 어두운 새벽이었다. 그가 입을 열고 꺼낸 첫 마디는 잘 산다는 거...뭘까? 였다. 쉬 는 날 없이 열 두 시간의 노동을 끝내고 온 그의 얼굴은 피곤해 보였 으나 삶에 대한 어떤 기대와 희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잘 산다는 것 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 없는 사람은 결코 이 짧은 물음에 쉽 게 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이 사회가 규정해버린 잘 사는 사람 의 조건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싫어했다. 연봉은 얼마 이상을 받아야 하며, 어떤 차를 타고, 얼마나 큰 집에 살며, 배우자의 직업 은 무엇인지. 숫자가 규정지어 버리는 삶을 그는 싫어했고 원하지도 않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 구석에 어떤 불안감이 존재한다 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주문을 걸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잘 산다는 것은 결코 숫자로 말할 수 없다고. 아직 스스로에게 정의하 지 못한 그 질문에, 세상이 이미 숫자 로 정의를 내려버린 것을 보 며 그는 가끔 불안했을 것이다. 시간과 함께 늙어버린 자신이 더 많 이, 더 높이만을 외치며 세상이 정해놓은 그 어느 지점으로 쉼 없이 달려가고 있는 모습을 그는 경계했다. 그리고 경계선 안쪽에는 그가 꼭 지켜내고 싶은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민들레 홀씨를 보고 기 뻐하며 살며시 꺾어 바람에 후, 하고 불어보는 것이었으며, 사월에 핀 제비꽃의 아름다움에 전율하는 것, 그리고 발밑을 지나는 개미를 쫓아가보는 일이었다. 숫자의 그늘에 가려 제비꽃이 무슨 색인지, 가을바람에는 무슨 냄새가 나는지 까마득히 잊고 사는 삶을 그는 원 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답다 말할 줄 알고 싶어 했고, 열목어가 사는 깨끗한 물과 같은 어린아이의 동심을 잃지 않기 바랐 다. 그렇다고 그에게 아무런 욕심도, 욕망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는 거짓말 하지 않는 정당하고 순수한 욕망을 가진 사람, 그리고 그 런 삶을 원했다. 그가 꿈꾸는 직업 職 業 도 그랬다. 음식을 만드는 일은 결코 거짓 말을 하지 않는다고 그는 굳게 믿고 있었다. 정직한 노력과 깨끗한 노동의 대가로 만들어지는 가장 순수한 직업. 그는 때 묻은 것을 싫 어했다. 그가 피곤이 가신, 한층 밝은 모습으로 말했다. 어린아이 와 같은 마음이 살아 있고, 거짓 없이 정직한 꿈이 있는 사람, 그래 서 오늘로 내가 살아온 과거를 돌아봤을 때 가슴 벅차고 내가 살아 갈 내일을 떠올렸을 때 설레는 것, 긴 대화 끝에 그가 내린 잘 산다 92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93

는 것의 정의 였다. 그가 희망에 차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을 지 도 모른다. 반 지하, 비가 오면 물이 뚝뚝 새는 월셋방에 살아도, 통 장 잔액이 120원을 찍어 댈 때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는 어 떤 우울한 힘이 웃음을 집어 삼키려 할 때 마다 습관적으로 어느 시 의 한 구절을 되뇌었다. 아직 오지 않은 좋은 세상에 절망할 때, 우 리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삶들을 보아 저 아득하고 머언 아직 과 이미 사이를 하루하루 성실하게 몸으로 생활로 내가 먼저 좋은 세 상을 살아내는 정말 닮고 싶은 좋은 사람 푸른 희망의 사람이어야 해, 라고. 진지한 대화를 마친 우리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좀 더 주고받았다. 이인성의 그림과 박노해의 시에 대해 이야기했고, 봄에 피는 들꽃에 관하여 이야기했으며 포크송을 즐겨 듣노라고 말했다. 우리의 웃음 소리는 경박했고 유행가에 맞춰 리듬을 타며 더 경박한 춤추기를 즐 긴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새벽같이 길고도 짧았던 대화를 끝내고 내 가 말했다. 사실 이야기 하는 내내 나의 얄팍한 지식과 교양 있는 척이 들킬까 조마조마했다고, 그러자 그가 경박스럽게 웃으며 대답 했다. 자기가 들킬까 더 가슴 졸였다고. 우리는 상쾌하게 자리를 떴 다. 2013년 9월 14일 새벽 12시부터 3시까지 이종현이 이종 현과 마주 앉아 의식만을 탐구하는 듯한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이야기들은 뜬 구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뜬 구름이든, 가라앉 은 구름이든 그대, 오늘 모두가 잠든 새벽에 자신과 마주 앉아 어떠 한 이야기라도 해보라. 내가 만난 사람_인터뷰 나는... 나야! 이승민 스쿨에 입학하고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내 친구 한 명이 생각이 났다. 그 친구는 사람들에게 항상 먼저 말을 걸며, 처음 만난 어색한 자리에서도 특유의 활기참으로 분위기를 살려주는 아이였다. 그 친 구와 함께 있을 때 느끼던 그 기분을 나는 그녀에게서도 느꼈다. 그 친구와 묘하게 느낌이 닮은 그녀. 그녀에게 나는 나도 모르게 끌렸 다. SK 해피쿠킹스쿨 7기 동기인 나와 그녀. 우리는 행복나눔재단 실습교육장에서 수줍고 조금은 어색한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녀는 22살, 요리를 배우고 있는 강우정이다. 스쿨에 입학하기 전에는 4년제 대학 조경학과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환경 쪽을 공부하고 싶어서 갔는데 관련된 공부 말고도 너무 많은 것을 배우더 라고. 앉아서 하는 작업도 많고. 그녀의 전공이었던 조경 설계는 요 리와는 사뭇 멀어 보인다. 활발한 성격의 그녀에게 작업실에 앉아서 해야 하는 조경 설계는 답답한 일이었다. 2월부터 함께 생활하면서 얼핏 듣기로 우정이는 스쿨에 오기 전 에 경험해본 일이 많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해봤는지 물 었다. 청소년 영화제작, 라디오DJ, 방송작가, 영화제 사회, 청소년 캠프 인솔 등등 그녀는 경험한 것이 상당히 많았다. 강아지 시츄처 럼 큰 눈으로 그녀는 더 많은 것과 새로운 사람을 보고 싶어 하는 것 94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95

같았다. 역시나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는 그녀는 대외활동에 관 심이 많았다. 마지막으로 외국으로 가는 애기들 영어캠프 인솔하러 갔었어. 나는 외국 어디로 갔었는지 물었다. 필리핀에 한 달 동안 애기들 인솔하는 거였어.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배려하는 마음 과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다. 지인이 아무도 없는 외 국에서 그녀는 충분히 표현하고 자유로워 질 수 있었다. 그녀에게 필리핀 영어캠프인솔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학생 때 어떻게 그런 많은 일을 했는지 궁금해졌다. 공부를 안했 어(웃음). 그녀는 변명처럼 그래도 좋아하는 과목만큼은 선생님의 말씀을 다 받아 적으며 열심히 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지금도 스 쿨에서 좋아하는 요리를 배울 때는 가장 열심히 필기를 하고 집중한 다. 그녀는 자신이 집중하고 있는 것을 학창시절부터 하나씩 경험해 보기 시작했다. 자신의 관심분야를 하나씩 경험한 것들이 모여 강우 정이라는 나무를 성장시킨 것 같다. 이제 그녀는 요리사라는 열매를 맺어 숙성시키고 있다. 칼질을 하거나 음식을 하면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왜 요리사라는 열매를 맺게 되었을까? 방송시간, 스탭들 시간, 돈에 관련 부분을 통제하고 관리하다 보면 사람들과의 마찰을 보는 게 힘들었어. 통제하고 강하게 이야기 하고 나면 미안하고, 싫은 소 리하고 나면 밤에 잠도 잘 못자고 그랬거든. 하고 싶은 말은 다하고 쿨해 보이는 그녀였지만 사실 천 번은 더 고민한 후 말 하고, 말투 하나까지도 신경 쓰고 조심하면서 말한다. 그리고 말하고 나서도 걱 정하는 그녀였다. 생각해보니 목소리가 커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 는 거 같아 보이지만 스쿨 생활을 할 때에도 감사합니다. 고맙습니 다. 죄송합니다. 이 세 마디를 입에 달고 사는 그녀다. 도마를 건네 주거나 행주를 가져다주는 등의 약간의 성의에도 감사를 표했다. 방송 영화 일이 더 재미있어 보이지만 그녀는 스트레스를 받았 다. 하지만 요리는 달랐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스트레스 까지 모두 잊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칼질을 하거나 음식을 할 때는 모든 스트레스를 잊어버리게 돼. 그 전에 했던 일들은 스트레스를 잊게 해주지는 못했거든. 이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었다. 내가 요리 를 선택하게 된 이유였기 때문이다. 칼, 불, 기름은 위험한 만큼 집 중해야하고, 집중을 하면 잡생각이 나지 않아서 평온해지는 기분이 든다. 우정이도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가 요리를 선택한 또 다른 이유는 터닝 포인트였던 필리핀의 영향도 있다. 그녀는 외국 경험을 통해 한국을 벗어나 자유로운 해 외로 나가고 싶어 졌다. 요리는 외국 어딜 가든 자리 잡고 일하고 먹고 살 수 있어. 해외로 나가서 여행도 하고 사람들도 만나고 돈도 벌고 싶다는 그녀다. 그녀는 결국 많은 경험을 통해 요리사라는 열 매를 맺었고 탐스럽고 맛있게 익히고 있다. 음식은 마음을 어루만진다. 된장찌개! 엄마가 끓여준 강원도식 된장찌개가 내 소울 푸드야. 가지나 감자, 특히 감자를 많이 넣고 만든 강원도식 된장찌개가 그 녀의 마을을 위로해주는 음식이다. 아픈 오빠와 오빠를 챙기시는 어 머니 때문에 그녀는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도 어머니 께서는 밥은 꼭 챙겨먹어야 한다면서 그녀를 위해 된장찌개와 밥을 시간 맞춰 준비해 주시고 나가셨다. 어릴 때부터 혼자 먹은 감자가 많이 들어간 된장찌개는 언제나 마음을 달래주는 그녀의 소울 푸드 이다.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와 나는 군침을 삼켰다. 언제나 밥은 먹 96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97

어야한다는 어머니의 철학과 그 철학 속의 어머니의 사랑으로 위안 을 받았던 그녀다. 그때부터 이미 자신도 모르게 음식으로써 위안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없어?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사니까 (웃음). 그럼 강우정이란 뭐다 정의해봐. 나는... 나야!(웃음) 친구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고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는 강우정. 그녀는 부 끄럽게 웃으며 이 말을 덧붙였다. 인터뷰를 마친 그녀와 나는 함께 걸었다. 이제는 옛 친구가 아닌 강우정과 있는 느낌이다. 서른여섯 살 김민수 씨 내 이름은 김민수 강우정 남성적인 차재원 부끄럼타는 채영은 분노하는 박수현 걱정하는 이규호 98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내 이름은 김민수 강우정 여기다. 이 집이다. 싱글싱글 불어오는 봄바람을 타고 온 머스크 향을 따라서 도착한 큰 나무 집. 이 동네에서 가장 큰 나무를 가지고 있는 집이다. 달콤한 향기가 위쪽에서 은은하게 풍겨온다. 2층 저 조금 열린 방에서 나는 향인가 보다. 나는 큰 느티나무를 타고 2층 방과 가까이 뻗어있는 가지로 올라갔다. 톡톡 떨어지는 눈과 같은 하얀 방이다. 창가에 바로 붙어있는 갈색의 체크무늬 침구가 봄볕을 가득 받고 있다. 참 탐나는 자리다. 나무에서 풀쩍 뛰어 창틀에 내려 앉았다. 하얗게 먼지가 피어오를 것을 예상했지만 깨끗이 닦여있다. 여자 방인가?. 점점 이 방에 호기심이 생긴다. 침대로 발을 옮겼다. 발을 폭 감싸 는 이불의 촉감은 엄마의 품과 같다. 부드럽다. 침대를 지나본다. 침 대 옆에 바로 탁상이 붙어있다. 탁상 위엔 이상한 네모난 박스와 끝 이 닳은 책이 있다. 모두 다 줄을 서고 있는 듯 하나같이 같은 방향 을 보고 있다. 뭐야. 책을 툭 떨어뜨렸다. 네모난 박스에는 이상한 것들이 나와 있다. 한 개를 툭 눌러 보았다.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나와 깜짝 놀라 침대로 뛰어올랐다. 지독히도 끈적거리는 노래다. 그때 마침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뭐지. 뭘까. 발걸음 소리가 가 까워 온다. 넌 뭐냐. 피곤하게 됐다. 이 집에서 사는 아인가 보다. 천천히 느릿느릿 가 까이 걸어온다. 어떻게 하지 도망갈까. 가까이 다가와 책을 제자리 에 물어 올려놓고 탁상위로 발을 내민다. 올라오려나. 한껏 털을 세 우는데, 툭 하고 끈적거리는 노래가 끊겼다. 탁상을 딛고 침대로 올 라온다. 도망가야하나. 구경 할 거라면 조용히 하고 가. 아무거나 만지지 말고, 주인은 흐트러진 것 정말 싫어해. 말을 마치고 다 귀찮다는 듯이 팔을 베고 눕는 녀석. 뭐지. 이상한 강아지다. 나를 보면 짖어대는 시끄러운 녀석과는 다른 특이한 녀석 이다. 갈색 털 사이사이에 희끗희끗한 털이 꽤 보인다. 뭘 봐. 구경 할 거 있으면 구경하고 빨리 나가. 봄볕을 느끼는 듯 두 눈을 꼭 감는다. 이상한 녀석이다. 하지만 편 안하다. 날 공격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이상한 안도감이 든다. 저 녀 석이 공격하더라도 내가 더 빠르게 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바닥으로 살짝 내려온다. 역시 바닥에도 먼지는 한 톨도 없이 깨끗이 닦여있다. 이 방의 주인은 저 녀석이 아닌 것 같다. 저 녀석 과는 다른 향이다. 주인은 누굴까. 책상 위를 올려보니 사람들이 흔 히 액자라 부르는 것이 있고, 저걸 보면 주인이 누군지 알겠지. 멋지 게 놓여있는 각이 진 갈색의 가죽 의자를 딛고 책상 위로 올라가 본 다. 뭐지. 남자친구인가?. 액자 속 있는 사람은 남자다. 주인이야. 침대 위에 녀석이 날 바라보고 있다. 주인? 응 주인 다시 한 번 액자 속을 본다. 남자다. 여자 방 같지? 기지개를 한번 펴고 녀석이 침대 밑으로 내려오며 말을 한다. 정리 병이야. 하루에 한번씩 쓸고, 닦고, 줄 세우고, 정리해. 100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101

정리 병? 그제야 나는 책상을 다시 한 번 둘러본다. 책상 위에 네 모난 박스에 놓인 다양한 동글 한 통들은 각기 다를 향을 내며 높이 별로 군기가 바짝 들려있고, 벽장에 책들은 크기와 높이 별로 분류 되어 각을 잡고 서있다. 심지어 노트북의 선조차도 깔끔하게 책상 테두리를 타고 깔끔하게 정리되어있는 모습이다. 그렇네. 참 재미없는 방이다. 그때 마침 눈에 뜨이는 것이 있다. 책상을 빠 르게 내려와 사진이 가득 붙은 벽으로 다가간다. 벽 밑에는 늘어진 채 달랑거리는 줄넘기가 있다. 툭 건드려 본다. 흔들린다. 다시 손을 뻗으려는 순간 하지 마. 주인이 아끼는 거야. 깜짝이야. 얌전하던 녀석이 갑자기 크게 짖는다. 으르렁거린다. 아끼는 것? 응 하루에도 한 번씩 나 산책시킬 때 매번 들고나가서 재랑만 놀 아. 저번에 너무 질투가 나서 없애보려고도 했는데, 걸려서 정말 많 이 혼났어. 그니깐 만지지마. 알았어. 미안. 당장은 저 녀석의 시선을 돌려야겠다. 줄넘기가 걸린 벽을 올려다 보니 다양한 사진들이 걸려있다. 사진들 한번 참 칙칙하네. 주인은 여자 친구 하나 없어? 다 남자 놈들끼리의 사진이다. 몇 년 전에 있는 것 같더니 잘 차려 입고 나갔다 들어와선 며칠을 나를 붙들고 눈물 콧물 묻히며 나쁜 여자지? 나쁜 여자지? 하더니 이후부터는 없어. 그 녀석은 마치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이 시큰둥하게 대답하고 뒤 돌아 다시 느릿느릿 걸어간다. 뭐야. 저 녀석은 또, 참 이상한 집이 다. 그때 갑자기 봄바람이 불어오더니 줄넘기가 흔들린다. 갑자기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인다. 눈 깜짝할 새도 없이 나는 줄을 물고 당 겼다. 와장창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다. 뭐 하는 짓이야!!! 그 녀석이 나를 향해. 사납게 달려온다. 도망가야 한다. 녀석을 살 짝 피해서 침대로 뛰어간다. 창밖으로 몸을 던진다. 봄볕이 좋았는 데, 당장은 이 집을 재빨리 도망쳐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나는 머스 크 향을 타고 봄내음이 가득한 창밖으로 몸을 던진다. 봄볕이 가득한 하얀 방에서 늙은 강아지 한 마리가 창밖을 향해 몇 번을 무섭게 짖더니 뒤를 돌아 깨진 액자가 늘어진 방바닥을 망 연자실 내려다보고 있다. 주인은 알까. 고양이 짓이라는 것. 주인은 아마 집에 들어와서 강아지를 혼낼 것이다. 떨어진 지 얼마 안된 줄 넘기는 아직 흔들거리고 있다. 102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103

남성적인 차재원 내가 처음 민수의 어깨에 이사 온 건 민수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학창시절 체구도 작고 키도 작았던 민수는 같은 반 친구에게 괴롭힘 을 당하기 일쑤였다. 어느 날 반에서 일명 짱이라 불리는 덩치 크고 성격까지 고약한 아이가 이유 없이 민수를 툭툭 건들기 시작했다. 그때 민수가 나를 급하게 불렀다. 드디어! 13년간 갇혀있던 내가 드 디어! 드디어! 나간다! 그것도 잠시, 갑자기 민수가 다시 들어가란 다. 볼에 살고 있는 어떤 녀석이 갑자기 새치기를 한다. 이놈은 민수 가 가장 즐겨 찾는 아이다. 하지만 민수가 가장 싫어하는 아이이기 도 한데 어쩔 수가 없단다. 마약 같은 자식. 하여튼 이날 덩치 큰 놈한테 찍소리도 못하고 흠씬 두들겨 맞은 민수는 나한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되느냐 고. 난 당장 복싱 장에 다니라 고 조언했고 민수 는 다음날부터 곧장 복싱 장에 다니게 됐다. 나는 이제 민수 곁에 항상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다. 그러나 복싱 장 관장은 민수에게 한 달 동안 줄넘기만 시킨다. 젠장! 더 짜 증났던 건 민수가 샌드백을 치는 것보다 줄넘기에 더 흥미를 가진 다는 사실이다. 이 답답한 놈은 매번 이런 식이다. 세 달째 복싱 장 을 다니던 날 관장은 드디어 스파링 상대를 붙여주었다. 비로소 나 의 진가를 발휘할 시간이 왔다. 상대는 나와 체구가 비슷한 초등학 생! 이 정도 상대는 가볍게 이길 수 있다. 시작은 민수가 압도적이었 다. 처음으로 민수가 맘에 들었던 순간이다. 그 순간을 즐기고 있던 찰나 이번엔 정수리에 사는 놈이 치고 들어왔다. 그 놈이 민수를 현 혹시키는 바람에 상대의 주먹을 쳐다보지 못하고 계속 웅크린 채 맞 기만 한다. 무서워하지 말라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정수리에 사는 놈의 얘기만 들리나 보다. 결국 상대에게 신나게 얻어맞은 민수는 복싱이 체질에 맞지 않는다며 그 놈의 줄넘기나 하겠다고 나를 내친 다. 그렇게 또 한동안 나는 민수의 더 좁아진 어깨에 갇혀 3년 동안 참고 지냈다. 이렇게 평생을 살아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는데, 날 발 끈하게 만든 사건이 생겼다. 모태솔로 민수에게 찾아온 첫사랑의 그녀 등장. 고등학교 1학년 때 논술학원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누가 봐도 귀여운 외모의 그 녀를 민수는 역시나 답답하게 바라만 보고 앉아있다. 민수에게 알려 줬다. 여자들은 박력 있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고민 같은 건 집어치 우고 바로 고백하라고 일러줬다. 역시나 이 멍청한 놈은 정수리에 사는 녀석과 볼에 사는 녀석 꼬임에 넘어가 말 한마디 못 붙인다. 예 전부터 느꼈지만 민수한테 이 녀석들 말 들어서 좋을 것 하나 없다 고 화도 내봤지만 도저히 말을 들어 먹지 않는다. 답답하고 미련한 녀석! 그렇게 흐지부지 지내던 중 그녀가 말했다. 민수야 너한테서 땀 냄새 너무 나! 그깟 땀 냄새가 뭐 대수라고 남자라면 땀 냄새 쯤 은 풍기는 게 당연한 거다. 하지만 민수는 그 말에 또 상처 받아 고 백은커녕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다. 더 찌질한 건 사내 녀석이 그 한 마디에 결벽증까지 생겨 샤워를 하루에 세 번이나 한다. 있을 수 없 는 일이다. 하루 한 번도 많은데 세 번이라니, 피부 벗겨지겠다, 자 식아! 이때부터 이놈은 결벽증은 물론 여자 기피 현상까지 계집애 같은 행동은 죄다 갖게 됐다. 찌질한 놈! 첫사랑의 아픔은 그렇게 잊히고 고3때 다시 한 번 그에게 사랑이 찾아왔다. 이번엔 꼭 내가 도와주리라 굳게 다짐하고 추진력 있게 민수를 설득했다. 슬슬 입질이 오더니 민수는 고백을 하기로 마음먹 었다. 멋지게 단도직입적으로 말부터 걸어보라 고 하니 그 사이에 볼에 사는 녀석이 또 껴들었다. 난 그 녀석과 티격태격 하다가, 바나 104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105

나 우유를 조심스레 책상에 두고 차차 고백하기로 합의를 봤다. 말 은 그렇게 하기로 했지만 도통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자는 자신감 있는 남자를 더 좋아하는데 무슨 시답잖은 바나나 우유란 말 인가! 인정하긴 싫지만 어쨌든 그 결과, 둘은 사귀게 되었다. 그 일 때문에 내 입지는 더 좁아졌고 사귀는 내내 민수는 볼에 사는 그 놈 의 말을 더 신뢰하며 따르게 됐다. 역시 그의 사랑은 3개월도 채 지 나지 않아 남자로 안 느껴져! 라는 그녀의 말과 함께 떠나갔다. 그 럴 줄 알았다, 자식아! 내 말을 듣지도 않더니 쌤통이다. 남자는 적 극적으로 리드해야 한다 고 스킨십도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라 고 했 는데 내 말은 무시하더니 마침내 이 꼴을 만들어 놨다. 한편으론 다 행이다. 고3 중요한 시기에 민수가 여자 따위에 한 눈 팔지 않을 수 있으니까. 민수는 또 한 번 시련을 겪고 뒤늦게 자신의 꿈을 향해 공부를 열 심히 했다. 어릴 적부터 아나운서가 꿈이던 민수는 말보다는 글을 굉장히 잘 썼다.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진 않았지만 글솜씨 덕에 대 학까지 합격할 정도였으니까. 대학을 마치고 아나운서 시험을 치렀 는데 3년간 매번 낙방했다. 정수리에 사는 녀석의 교란 때문에 민수 는 최종 카메라 테스트에서 대본을 버벅거리며 읽고, 너무 긴장해 서 벌벌 떠는 바람에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 답답하다. 그게 뭐가 떨 린다고. 그냥 쓰여 있는 거 읽으면 되는데, 그러게 날 좀 부르라니까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놈이다. 민수는 27세 나이에 아나운서가 되는 꿈을 포기하고 누구나 알만 한 대기업의 마케팅부로 입사하게 되었다. 이것도 기가 막히게 쓴 자기소개서 덕에 대기업 입사를 하게 된 거다. 역시 글 쓰는 재주는 굉장히 뛰어난 녀석이다. 그 기쁨도 얼마 안가 더딘 업무 능력 때문 에 고객지원팀으로 발령 나 온라인 상담 업무를 맡게 됐다. 난 그에 게 이딴 더러운 회사 당장 때려치우라 고 말했다. 그 때 정수리에 있 던 놈이 또다시 나타나 가족이 어쩌고 생계가 어쩌고 하더니 민수를 다시 붙잡아 놓는다. 계집애 같은 놈! 남자 망신은 혼자 다 시킨다. 고객지원 팀에서 깨작거리는 일을 하는 것도 짜증나는데 웬 이상 한 여자가 자신이 구매한 제품이 이상하다고 계속 컴플레인을 건다. 하자가 있는 제품은 교환해준다고 민수가 아무리 잘 설명을 해줘도 이 여자는 막무가내다. 내가 나가지 않으려 해도 너무 공격적인 이 여자는 민수 혼자 감당할 수가 없다. 민수가 좋게 잘 해결하려고 애 썼지만 그 여자는 회사에 직접 찾아와 상사에게 따지겠다고 협박까 지 한다. 정수리에 있던 놈이 저 여자가 찾아오면 또 쫓겨날지도 모 른다고 걱정한다. 또 시작이다. 난 얼굴 언저리에 살고 있는 이 녀석 들이 정말 맘에 들지 않는다. 이놈들 때문에 우리 집이 이렇게 좁아 터진다. 얼마 뒤 그 여자는 회사로 찾아와 민수에게 요목조목 따진 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민수. 그런데 이 여자 굉장히 아리따운 외모 를 가졌다. 아담한 키 때문에 올려다보며 다다다 따지는 모습이 귀 엽기까지 하다. 볼에 사는 녀석이 나에게 말했다. 이 여자 너무 매력 적이라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의 생각이 통한 건 처음 있 는 일이다. 난 볼에 사는 녀석과 정수리에 사는 녀석에게 먼저 얘기 했다. 이번엔 기필코 우리가 합심해서 민수가 솔로 탈출 할 수 있게 하자고! 느낌이 좋다.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 106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107

부끄럼타는 채영은 오늘도 발자국을 남겼다. 벌써 36년째다. 이놈의 발자국은 자꾸만 남아 나를 숨지 못하게 한다. 이 넓은 땅에 발자국 한두 개 남는 것 쯤이야 그 누가 신경 쓸까 싶지만은, 민수에게 나의 발자국은 그 무 엇보다도 쓸어내 버리고 싶은 어떤 것이다. 발바닥을 아무리 문지르 고 닦아 봐도 내가 발을 딛는 곳마다, 내 발이 닿는 곳마다 항상 붉 은 발자국이 남아버린다. 최대한 움직이지 않고 숨죽인 채 가만히 있는 것이 민수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렇다. 사실 뛰어 다닌다는 것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 나란 놈은 조용하고, 얌전하고, 스스로를 내 보이지 않는 것이 어울린다고. 나도 알고 있다. 내가 커지면 커질수 록 민수는 더 작아진다는 사실을. 하지만 아무리 침착해지려 해도 자기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은가. 민수 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도 내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당황하거나 놀 랄 때에는 민수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내 의지와는 다르게 발이 마 구 움직여버린다. 그렇게 이 언덕을 가로지르다 보면, 어느새 민수 의 넓은 언덕은 붉은 빛으로 물들어버린다. 한 번은 이 언덕을 넘어 더 먼 곳까지 간 적도 있다. 민수가 고1 때 였나. 처음으로 날 뛰게 만든 여자아이가 있었다. 민수의 눈이 그 아 이를 향할 때마다 나는 이 언덕을 뛰곤 했다. 그 아이가 민수를 바라 볼 때면 나는 더 빨리, 더 멀리 뛰었다. 마구 새겨진 발자국이 점점 더 짙어지면 민수는 두 손으로 나의 흔적을 가리곤 했지만, 그럴수 록 나의 발자국은 더 짙어지고 더 많아졌다. 그녀를 향한 민수의 마 음이 내 발자국 색깔처럼 점점 더 짙어져 가고 있을 때 쯤, 내 생애 가장 멀리까지 달리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고야 만다. 당시 나를 너무나 싫어했던 민수-물론 지금 날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다-는 어깨 절벽에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아저씨에게 온 신 경을 집중한 상태였고, 그래서인지 전과는 다르게 운동에 매진하곤 했다. 고작 줄넘기뿐이었지만, 운동 후 흘리는 땀을 볼 때마다 민수 는 어깨를 으쓱거렸고 그럴 때마다 어깨에 사는 아저씨는 탐탁지 않 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날도 온 언덕은 땀으로 질척거렸고, 나는 한 걸음도 떼지 않고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민수가 그 아이 가 있는 교실로 들어선 순간, 땀 냄새 나! 하는 소리가 민수의 귀를 울렸다. 그 소리가 그 아이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나의 다리는 또 다시 뛰기 시작했다. 내 다리가 그렇게 빨리, 그렇게 멀리까지 뛰어본 적은 없었다. 평소보다도 더 붉고 짙은 발자국들이 언덕 위에 새겨졌고, 그 붉은 빛은 발자국 바깥으로 흘러내렸다. 발 자국 바깥까지 붉은 빛이 퍼져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때 처음으 로 알게 되었다. 정신없이 마구 달리다보니 어느새 귀 동굴까지 왔 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보니 붉은 발자국들은 볼 언덕은 물론이고 코 산, 그리고 내가 서있는 귀 동굴 까지 빽빽하게 찍혀있었다. 동굴에서는 그 아이의 말이 계속해서 울 렸고, 나는 그 곳에 서서 붉어진 민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 날 이후, 난 웬만한 일에는 뛰지 않게 되었다. 가끔 발표를 하 다가 목소리가 작다는 소리를 듣는다거나, 논술 상을 받기 위해 아 침 조회시간에 구령대에 올라가야 했을 때 빼곤 말이다. 아, 햄버거 에서 파리가 나와 바꿔달라고 하고 싶었을 때도 빼고. 결국 그냥 먹 긴 했다. 어쨌든, 그 후 날 다시 뛰게 만든 여자 는 독서실에서 만 난 아이였다. 떨리는 손으로 바나나 우유를 건네는 민수의 볼 위에 108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109

서 나는 2년 전 그 때처럼 마구 뛰어야했다. 너무 달리다가 목을 타 고 어깨까지 내려가 아저씨에게 혼이 나 돌아오기도 했다. 어깨 아 저씨는 단지 내가 뛰는 것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남기는 발자국 때문 에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았다. 어릴 때에는 어깨 절벽까지도 가끔 뛰 어가곤 했는데, 민수가 중1이었을 때 무서운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순간 아저씨가 나타나려 했을 때 내가 먼저 어깨까지 내려 가 자리를 차지해버렸던 그 날 이후, 내가 조금이라도 그 곳에 발자 국을 남기려 하면 아저씨는 자기 집이 좁아진다며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민수 역시 아저씨의 목소리에 점점 더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 고, 그럴수록 나는 더 뛰어선 안 되는 존재가 되어갔다. 하지만 평생 을 민수와 함께 뛰어온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멈춰버리는 것은 너무 나 어려운 일이었고,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것 또한 바꾸기 힘든 일 이었다. 그런데 오늘, 또 다른 여자 로 인해 발자국을 남기게 되는 일이 생 겼다. 얼마 전부터 민수가 담당하게 된 고객인 그녀는 지속적인 컴플 레인으로 회사의 모든 직원을 포기하게 만든 여자였다. 계속된 민수 의 상담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회사를 찾아온 그녀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여자들과는 다른 감정을 민수에게 불어넣어주었다. 그녀와 눈 을 마주치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나는 또 다시 이 언덕을 붉은 빛으로 물들였다. 어깨 아저씨는 오랜만에 활기를 찾으셨고 이 번만큼은 절대 뛰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윗동네에 사는, 나와 항상 붙어 다니는 걱정 많은 친구는 오늘도 나와 함께 해주었다. 우리가 잘 숨어있어야 민수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또 다시 내 발자국 때문에 꿈을 포기해야 할 일도, 남자로 안 느껴진다. 는 말을 들을 일도 없도록 말이다. 이번만큼은 아저씨 의 말대로, 그리고 민수가 원하는 대로 더 숨죽여야겠다. 그게 부끄 러움 이란 나의 이름에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까치발을 하고 살짝 발을 내디뎌본다. 작은 발자국 위로 옅은 붉은 빛이 차오른다. 분노하는 박수현 나는 1978년 9월 9일 처음 세상에 눈떴다. 나는 그의 눈에 살게 되었다. 그가 눈을 뜨자마자 나는 세상으로 솟구쳐 나왔다. 찝찝하 고 속이 아리다. 울부짖어도 누구도 나의 눈을 바라봐 주지 않았다. 그 이후로 나는 그의 눈으로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의 근육들과 머리가 날 가로 막았다. 한동안 민수는 나를 찾지도 부르지도 않았다. 단지 눈 안에 그림 자처럼 살면서 세상의 불만과 원망스러움을 가슴속에 담아두어야 했다. 내가 태어난 이후 집에서 나를 찾는 일은 드물었다. 민수의 부 모님은 가정적이었고 집이 가난하지도 않아 평탄한 생활을 했다. 갖 고 싶은 건 가질 수 있었고 나를 숨긴 채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도 하 고 배려하기도 했다. 나의 존재를 잊었나 싶었다. 그의 눈을 통해 세 상을 바라보며 억눌린 채 잠들어 있었다. 그가 날 처음 찾은 순간은 중학생 때였다. 싸움이 일어나 어깨와 얼굴이 일그러지고 지쳐 쓰러졌다. 그 동안 숨어 있던 나는 그의 눈 빛에 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고등학생 때 민수는 사랑에 눈을 떴 다. 하지만 첫 사랑은 실패했다. 사랑을 시작할 때 발그레한 친구가 영역을 넓혀가고 상처 받았을 때는 머리꼭대기에 사는 녀석이 간섭 했다. 나는 민수에게 눈으로만 말하지 말고 입으로 말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는 나를 숨김으로써 나를 키워나갔 다. 그의 눈빛은 달라졌고 나는 그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고3, 대학시험을 준비하면서 민수는 극도의 스트레스로 나에게 110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111

말을 걸었다. 매번 그랬듯 다른 녀석들이 비집고 들어오려고 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민수는 고통과 괴로움을 호소했고 점차 나와 가까워 졌다. 그와 동시에 나도 그의 머리에 사는 녀석과 친해지기 시작했 다. 그 녀석은 나와 함께 민수에게 다가가 말했다. 불공평하고 치사 한 사회를 불평하고 그를 마구 흔들었다. 학생들을 상품화시키려 한 다. 어떤 게 명품이고 짝퉁인지 잘 구분해야 한다 고 말이다. 민수 는 내가 자리를 넓힐 때마다 쌀쌀한 눈빛으로 주변 사람들을 대했 다.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민수는 지겨워했다. 나와 머리 위에 사는 친구는 그런 그의 모습에 방심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틈타 아래에 사 는 친구들이 민수에게 다가가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민수는 나 를 외면하고 열심히 공부했다. 한 동안 나는 내 삶의 가장 자리에서 방황했다. 민수의 고독한 친구는 나와 가장 가깝기도 하면서 먼 친구이다. 내가 원망스러워 하고 죄책감이 들 때면 그 녀석은 함께 슬퍼해주고 측은하게 나왔다. 그러나 내가 분노하고 차갑게 눈을 뜰 때는 언짢 아하고 불편해하면서 나를 서운하게 했다. 나와 그 친구가 감정놀이 에 치우치면 아래 녀석들은 우리를 경계하거나 자신들만의 방식으 로 우리에게, 민수에게 다가왔다. 민수는 대학생이 되었다. 성숙해진 만큼 나에게도 변화가 필요했 다. 민수가 언제 나를 찾는지, 나는 어느 순간에 나와야 하는지를 잘 알아야 했다. 그는 어김없이 사랑을 했다. 나는 싫었다. 민수가 행복 해하고 설레어 할 때마다 눈앞에서 방해했지만 온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마법의 눈이 앞을 가리고 있었다. 그의 사랑에 보태거나 언급 하기 싫었다. 민수가 싫었다. 사랑에 빠지면 민수는 더 이상 나를 보 려 하지 않았다. 때로 그런 사랑에 찬바람이 매섭게 부는 때도 있었 다. 나는 위로했다. 민수의 얼굴에 깊은 근심의 그늘이 드리웠다. 그 의 사랑에 관심은 없었지만 아랫동네 친구들 말로는 그가 사랑했던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있었단다. 그럴 줄 알았다. 왠지 그녀가 미웠 다. 그날은 쌀쌀하고 황량했다. 연애에 실패하면서 맛본 좌절은 큰 상처로 남았다. 나는 민수를 보호하기 위해 장벽을 쌓고 노골적인 눈빛으로 다른 녀석들을 경계했다. 그리고 그가 슬픔에 잠길 수 있 도록 조용히 자리를 피해주기도 했다. 민수는 긴 침묵 끝에 대기업에 취직했다. 귀찮고 부담스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는 신입사원으로 금세 팀장 자리에 올랐다. 그 무렵 민 수에게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우리에게도 큰일이었다. 여느 때 와 같이 상담을 하던 중 한 여자가 제품에 대해 불만을 나타냈다. 직 원들은 민수에게 부탁했고 민수는 거절하지 못했다. 그 고객은 민수 를 찾아 왔다. 당연히 나를 부를 줄 알았지만 민수는 나를 감추고 다 른 녀석들을 불러 일으켰다. 지난 시간의 아픔을 기억해내고 그 때 그 감정들을 회상했다.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김민수는 몸서리치도 록 괴로워했던 나를 잊고 또 다른 녀석들에게 틈을 보인 것이다. 나 는 야속해하며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다음날 친구들은 나를 불렀다. 우리는 처음으로 다 같이 이야기했 다. 그들은 민수의 사랑을 맺어주고 싶어 했다. 나를 설득했다. 오랜 이야기 끝에 서서히 분별력을 가질 수 있었고,나도 민수의 사랑을 도와주는 일에 동의했다. 민수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끼 리 위치와 영역과 관심을 통제했다. 사랑 앞에서 나는 설 자리가 없 다. 그는 벌써 30대가 되었다. 나도 그를 만난 지 30년이 넘었다. 그 가 성숙해졌고 나를 자유롭게 제어하는 능력도 갖게 됐다. 나도 그 의 의견을 존중한다. 당분간은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될 것이다. 112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113

걱정하는 이규호 월요일 아침, 나와 민수는 어제 저녁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려고 누웠지만 민수는 자꾸 나를 깨웠다. 밖에서 들리는 사이렌 소리 때 문이었다.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리는 걸 보니 이 근처에 사고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민수를 덮쳤던 것이다. 뉴스에 나오는 인신매매와 다양한 강도사건들 때문에 나는 민수의 머릿속 을 벗어날 수가 없다. 언제 누가 예상치 못한 괴한들이 문을 부숴버 리고 들어올지 모르는 공포감에 민수는 오른 손에는 몽둥이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휴대폰을 꼭 쥐고 잠을 잤다. 나는 그런 민수를 지켜 보며 불멸의 밤을 지새워야했다. 아침이 밝아오자 민수는 부랴부랴 알람을 끄고 옷을 입고 회사로 출발하였다. 가파른 언덕을 지나 신호를 건너야 하는데 신호가 간 당간당해 보인다. 사람들은 뛰지만 나는 민수에게 뛰는 것을 권하 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침은 저녁보다 더 위험 한 것 같다. 졸음운전이 있을 불안감에 혹시 몰라 민수에게 내 생각을 전달한다. 그래서 민수는 다음 신호가 올 때까지 계속 기다린다. 그리고 그는 회사에 무사히 도착을 하였다. 민수는 내가 곁에 있어서 불평을 하 지만 때로는 그를 안전하게 지켜준다는 사실을 그도 잘 알고 있다. 민수는 현재 고객지원팀에 팀장이다. 회사 사람들과 간단히 인사 를 건네고, 고객의 제품 신고를 받고 문제가 들어온 것을 상대한다. 그런데 오늘은 큰 사건이 터졌다. 어제부터 한 여성이 제품 신고를 계속 걸어오는 것이다. 이유는 회사 신제품인 냉장고가 문제이다. 우리는 바로 수리공을 보냈지만 수리공이 별 고장 없다며 여자의 집 에서 그냥 나왔다고 한다. 여자는 성의 없는 서비스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는 것이다. 여자의 전화를 받은 민수의 표정이 좋지 않다. 이 번 달만 잘 버티면 민수가 처음 입사할 때 있었던 마케팅부서의 팀 장으로 갈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의 전화와 같은 컴플레인이 계속되면 분명 민수가 승진을 하는데 문제가 생길 것이다. 문제를 수습해야한다. 나는 민수의 뒷덜미를 타고 등줄기로 내려간다. 허리 를 감싸 안는다. 민수는 식은땀이 나며 답답함을 느낀다. 우리는 마 치 링 위에서 시합을 하듯 서로 팽팽한 긴장감을 겨누고 있었다. 민 수는 계속된 항의 전화에 호흡을 한 번 쉬익 내뱉고는 여자와 전화 통화를 시도한다. 여자는 매우 흥분된 목소리로 민수에게 공격적으 로 대한다. 내가 듣기에 그녀의 말에는 엄청난 분노가 차 있었다. 한 편으로 이성을 되찾으려 하는 그녀는 다시 한 번 목소리를 가다듬고 냉장고 교체를 요구하였다. 그녀는 냉장고에서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민수는 잠시 헛갈려한다. 자신의 싸움상대가 나인 지, 그녀인지. 민수는 한 번 더 호흡을 하고, 여자에게 대답을 한다. 냉장고 교체 는 불가능합니다. 민수가 제품을 바꿔줄 순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민수는 조금 찝찝했지만 그녀의 전화와 나의 싸움에 이미 지쳐있었기에 귀가를 서둘렀다. 곧 겨울이 오려고 하는지 해가 많이 짧아졌다. 퇴근길에 바라본 하늘은 어두웠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들어서자 민수는 나의 손 을 꼭 잡았다. 민수는 쓸데없는 생각으로 자신을 괴롭히곤 한다. 뒤 에서 누군가가 나를 위협하면 어쩌지?? 일단 급소를 차고 냅다 달리 면서 한손으로 112에 전화하면서 계속 뛰자. 그러면 붙잡혀도 경찰 들이 위치추적으로 도와주겠지? 등 그의 상상은 민수를 움츠러들게 했고, 나는 민수의 그림자보다도 더 커져버렸다. 빠른 걸음을 재촉 하는 민수의 걸음이 오히려 느린 것은 바로 나 때문인 것이다. 114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115

피곤한 하루를 뒤로하고 잠을 자려는데 민수가 자꾸 나를 부른다. 오늘 통화했던 그 여자가 계속 마음에 걸린다는 것이다. 여자의 목 소리를 보아선 정상인 것 같은데 이렇게 화내는 걸 보면 정말 냉장 고에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 하지? 나는 민수에게 속삭인다. 민수 야, 냉장고에 문제가 생겨서 사고가 나면, 모든 잘못이 너에게 올지 도 몰라. 책임은 단순한 선에서 끝나지 않을 거야, 보통여자가 아니 라구. 민수는 오늘도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그녀가 엄청 화난 목소리로 회사에 찾아왔다. 회사 사람들과 민수는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전화통화를 할 때의 거 친 목소리와는 달리 그녀의 외모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기 때문이 다. 민수는 어젯밤 나의 말이 떠올랐다. 여자는 괜히 화내는 것이 아니야, 수리공들이 잘못 본 거라고, 여자의 냉장고가 고장 났을 수 도 있어. 민수는 생각했다. 그래, 정말 냉장고에 문제가 있을 수 있 어. 민수는 자세히 알아보겠다며 그녀를 달랬다. 민수는 본사에 가서 제품 교환이 가능한지를 알아보았다. 다행히 회사 규정상 1주일 전 에 산 비싼 제품은 1주일 안에 교환이 가능하다는걸 알아내고 그녀 에게 교체를 해주겠다고 말하였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알겠다 고 하였고, 잘 마무리가 되었다. 1주일 후 수요일 점심, 나와 민수는 깜짝 놀랐다. 부장님이 환하게 웃으시면서 민수에게 일 처리를 잘했 다며 칭찬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부장님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교체된 냉장고를 정밀 검사를 해 보니, 정말 냉장고 안에 부품이 손 상되어 가끔 이상한 소리를 냈던 것이다. 민수는 회사에서 1주일 특 별휴가와 보너스 까지 받고 쉴 수 있게 되었다. 아마 승진도 곧 하게 될 것이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이번 일은 모두 나의 덕이라며 민수가 고맙 다고 말해줬기 때문이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나는 언제나 민 수를 힘들게 했던 존재라고 생각했었다. 민수 안에 살면서 처음으로 나의 조언이 처음으로 통한 것이다. 언제나 나의 말은 쓸모없는 것 들이었다. 우려가 많고 일어나지 않는 일에 대한 상상들로 민수를 괴롭혀왔던 것이다. 나는 언제나 천덕꾸러기였는데, 이번에는 민수 에게 처음으로 도움이 된 것 같아서 너무나 좋았다. 민수가 그녀를 궁금해 하는 것만큼 나 또한 그녀가 보고 싶었다. 뭐랄까? 운명 같은 느낌이 들어서인가? 아니면 단순하게 얼굴이 아 름다워서 반한 것일까? 민수는 그녀가 자꾸 생각이 났다. 손뼉을 치 며 좋아했던 순간도 잠시, 나와 민수는 금세 또 조금 복잡해지고 말 았다. 민수는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녀의 연락처를 받긴 했지만 당장 전화해서 뭐라고 말해야할지 몰랐다. <냉장고 교체를 해드렸는데 불 편한 점은 없었나요?><그 냉장고에는 약간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 았어요. 죄송합니다.> 민수는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당황스러웠 다. 항상 나 때문에 소심하던 민수가 먼저 문자를 보낸 것이다. 보내 자마자 20분 뒤에 바로 답장이 왔다. <불편한 점은 없습니다. 교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수는 답장을 보자마자 <식사를 대접하고 싶습니다. 시간이 되시나요?> 라고 보내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없 어서 휴대폰을 꺼 버렸다. 그날 저녁 나와 민수는 집에서 휴대폰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3시 간 동안 계속 전화기만 쳐다보았다. 민수는 아직 9시니까 보내도 민폐는 아니겠지? 거절하면 어떤 식으로 대처하지? 혼자 궁리를 하 더니 갑자기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문자를 보내고 침대에 누워 버리는 것이다. 평소 민수답지 않은 행동에 나는 깜짝 놀랐다. 휴대 폰의 진동이 다시 울릴 때까지 나는 1시간 동안 민수 옆에서 쪽잠을 잤다. 민수는 자는 척 했지만 분명 깨어있었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휴대폰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10분 뒤 진동이 울리자 헐레벌떡 일어 나 문자를 확인하였다. 문자를 보면서 민수는 갑자기 휴대폰을 떨어 116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117

뜨리고 환하게 웃는 것이다. 그녀가 민수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민수는 베개 속에다 머리를 처박고 소리를 질렀다. 어느새 나는 민수에게 어떤 의미와 존재가 되지 않는 것 같아 의기소침해졌 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민수는 나를 조용히 불러냈다. 그녀가 무 슨 음식을 좋아할까?, 밥만 먹고 들어와야 할까?, 어떤 옷을 입 고 가야하지?, 여자들은 도대체 어떤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 첫 마디는 뭐라고 해야 하지? 반갑습니다? 또 만났네요? 냉장고는 잘 있나요? 하지만 이미 점점 작아지는 나는 더 이상 민수에게 방해가 되지 않았다. 무엇이 민수를 바꿔 놓은 것일까? 민수는 바로 그녀에게 문 자를 보냈다. <다음 주 목요일 저녁 7시에 만나시죠.> 그녀의 답장 을 받고 민수와 나는 오랜만에 기쁜 마음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잠들 었다. 처음이었다. 민수가 행복할수록 나는 점점 작아졌지만 슬프지 않 았다. 민수와 한 몸처럼, 그의 머리에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항상 커 져만 가는 내 자신이 싫었지만 이제는 민수가 점점 나를 작게 만들 어 가고 있다. 민수가 드디어 나를 컨트롤하는 것 같아서 너무나 자 랑스러웠다. 오늘밤 모처럼 나는 아주 아주 조그마하게 민수와 같이 잠을 자게 될 것이다. 나는 저 캄캄한 밤하늘에서 아스라이 잊히는 작은 별빛이 될 것이다. 불멸의 밤이여 안녕! 굿나잇 나의 민수! Seoul, Seoul, Seoul 레알 서울-소설 쓰고 있네 정지호 다리이야기 양준석 火 (불화) 박진주 서울열차-어느 짧은 여행의 기록 김예슬 편지 김무늬 118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레알 서울-소설 쓰고 있네 의 서울이 되었다. 한 발짝 뒤에서 바라본 이건구는 이렇게 생각했 다. 서 럽게 목 놓아 울 수 있던 곳이 서울이 아닐까 하고. 정지호 한양에서 서울까지 14세기경 서울은 한양이라 불렸다. 후 에 한성부로 불리기도 했고 1910년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부라 불렀다. 그때 우리 민족은 그 당시 나라를 잃은 슬픔과 분노 에 피 흘리며 싸웠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독립운동에 힘쓰고 있었지만 한편 으로는 두려움에 떠는 이도 있었다. 이건 구( 李 件 求 1926~) 이 청년은 일제강점기 에 태어나 부모님의 각별한 보호아래 숨어 지내기 바빴고 그 끔찍한 공기를 방관한 채 자랐다. 독립투사들과 뜻을 함께 하지 못한 이건 구는 같은 대한제국 국민으로서 저들에게는 도대체 어디서 저런 용 기와 애국심이 생기는지 궁금해 어느 날 부턴가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는 그들이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고 마치 자신들의 현실 과 어두운 미래인 것처럼 울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독립투 사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일본의 통 치에서 벗어났다. 억압되었던 생활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새로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우선 경성부라는 수도의 명칭을 바꾸고 싶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광복된 이후라도 절대 일본에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자고, 강점기 당시 일본을 등지고 해가 저무는 서 쪽을 보며 울 던 마음을 잊지 않겠다는 뜻의 서울 로 바꾸자는데 의견이 모아져 지금 가로수길 신하는 물론이고 백성 한명이라도 가벼이 보지 않았던 15세기 조 선의 임금 세종대왕.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신하와 백성들은 또다시 임금의 은혜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보답하고픈 신하들은 세종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기로 한다. 백성만 생각하는 바보 세종에 게 영의정이 다가가 말한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가 되지 아니하다면 전하를 위해 소원을 하나 들어드리고 싶은 것이 소인의 마음입니다. 여기서 세종은 고민했다. 사실 세종은 푸르른 나무 주위를 걷는걸 참 좋아했다. 훈민정음의 대부분도 나무의 형상을 보고 따 온 것이 다. 하지만 백성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나무껍질을 벗겨먹고 나무를 해가는 탓에 세종도 어찌할 수 없었다. 우선 대답은 해야겠기에 영의정, 그대들의 뜻은 감사히 받겠소이다. 허나 아직도 굶주리 고 땀 흘리는 백성들이 너무나도 많소. 그 힘을 백성들에게 쏟아주 었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이오. 이렇게 뱉어놓고 속으로는 한 번 더 물어보길 바랐다. 옳거니! 한 번 더 청하는 영의정. 전하, 허나 저희가 받은 은혜가 차고 넘치기에 이리 어렵게 말 씀드립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한 톨의 쌀알조차도 바라지 않으십니 까? 도저히 성은을 가늠할 수 없습니다. 하고 영의정은 엎드려 통곡하였다. 한 번 튕길 생각이었는데 영 의정이 통곡을 하니 갑자기 미안해진 세종은 놀라 본심을 여과 없이 말해버렸다. 나무가 좋다! 120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121

나무... 라고 하셨습니까 전하? 나무라면 창고에 얼마든지 있습 니다. 죽은 나무가 아니라 살아있는, 땅에 심어져 있는 뿌리가 깊은 푸 르른 나무를 보고 싶다 나는. 당황한 마음에 위엄이라곤 내팽개치고 두서없이 말을 쏟아낸 세 종은 금방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렇게 된 이상 세종은 처음으로 욕 심을 낸다. 나무가 무성한 장소를 만들어 몸과 마음을 다스릴 수 있 는 곳이면 좋겠다고 말을 내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하들과 백 성들은 한마음 한 뜻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지나치게 나무를 베어낸 탓에 심을 나무도 없고 땅도 비옥하지 못했다. 백성들은 뗏목을 타 고 강을 건너 아랫마을까지 내려가서 땅을 찾기 시작했고 곧이어 알 맞은 곳을 찾아내었다. 길이 길게 쭉 나있고 길의 양 옆으로는 물이 흐르고 있어 나무를 심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소식을 들은 세 종에게 직접 행차하여 보니 이만한 땅이 없더라. 세종이 보고 길의 바깥쪽에 물이 흐르는 길이라 하여 그 길을 가에로 수( 水 ) 길이라 하 자 해서 가에로수길 이라 이름 붙였고, 그 곳이 지금의 강남구 신사 동에 있는 가로수길이다. 사대문 14세기말 서울을 둘러싼 도성과 함께 사대문이 지어지기 시작했 다. 동쪽으로는 흥인문( 興 仁 門 ), 서쪽으로는 돈의문( 敦 義 門 ), 남쪽 으로는 숭례문( 崇 禮 門 ), 북쪽으로는 숙청문( 肅 淸 門 )이 그것이다. 수 도를 방위할 목적으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처음 만들어진 목 적은 사실 방위가 아니었다. 철없는 한 왕의 명령 때문이었다. 조선 을 건국한 제1대 왕 태조 이성계( 李 成 桂, 1335~1408). 그 당시 환갑 을 넘긴 태조는 몇 년 전부터 노인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증상인 허 얼( 噓 孼 )이라는 병마와 싸우느라 몸과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나랏일에 힘썼다. 정신이 오락가락한 태조는 정신 이 돌아왔을 때 조선의 제1대 왕인 자신을 역사에 남기기 위해 건축 물을 세우기로 한다. 태조는 남쪽을 향해 커다란 문을 세우기를 원 했고 신하들에게 그 뜻을 전했다. 작업이 한창이고 보름이 지났을 무렵 태조의 병이 도지기 시작했다. 보름 전 명했던 내용을 또 다시 신하들에게 반복하는 것이었다. 왕의 명을 거역할 수 없는 신하들은 남쪽에 문을 또 지을 수 없기에 그 반대쪽인 북쪽에 짓기 시작했다. 그렇다. 태조의 병인 허얼( 噓 孼 )은 지금으로 말하면 치매이다. 치매 에 걸린 태조는 그 후 두 번이나 같은 명을 더 내렸고 신하들은 왕 에 대한 마지막 예우를 갖추며 받들었다. 이것이 사대문의 탄생 배 경이다. 후에 조선 제3대 왕인 태종 이방원( 太 宗, 1367~1422, 재위 1400~1418)에 의해 사대문은 지금 알고 있는 방위의 목적으로 사용 하기 시작했다. 해명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서울은 어쩌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과 거는 책으로 혹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왔기 때문에 충분히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난 놀라운 추리로 서울을 재해석해본 것 뿐이다. 앞의 내용은 모두 2013년 9월 어느 여름과 가을 사이 반팔을 입을지 긴팔 을 입을지 고민하게 되는 애매한 시기에 생각한 글쓴이의 추리일 뿐 이다. 한양에서 서울까지 편에 나온 이건구 라는 인물은 이건 구라 에서 따온 이름이다. 사대문 편에 허얼( 噓 孼 )이라는 병은 헐 이라는 의성어에서 따온 가칭 병명이다. 가로수길 편과 사대문 편에 조선 제1, 3, 4대 왕이 나오는데 모두 존경한다. 122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123

다리이야기 나는 낮이나 밤이나 동생의 그림자에 가려질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세상에게 잊혀 진 어둠의 다리입니다. 양준석 누구도 나의 고통을 알지 못합니다. 모두들 그저 나를 즈려 밟고 지나갈 뿐입니다. 내가 태어난 1976년 7월에도 그랬고,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렇습니다. 길이 795m에 너비 18m. 나는 키가 작고 마른 다리입니다. 나의 이름은 잠수 입니다. 나에게는 6살 터울의 반포 라는 동생이 있습니다. 길이 1430m에 너비 23m. 나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 동생입니다. 동생은 다른 다 리들 사이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났습니다. 수백 개의 빛나는 조명과 화려한 분수. 매일 밤 사람들은 그의 빛나는 조명과 화려한 움직임 을 보러 이곳을 찾아옵니다. 반면, 나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습 니다. 나에게는 빛나는 조명도 화려한 움직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가 오면 물에 잠겼다 그치면 다시 올라오기를 반복해야 했고 그것 은 나에게 곰보 같은 피부를 남겼습니다. 나는 차를 오가게 하는 다 리였지만 이런 피부 때문에 차들은 나를 지나길 꺼려했습니다. 잠수교로 가면 차가 너무 덜컹거려 뭣 하러 잠수교로 가 반포대교로 가면 되지 나는 다리로 태어났지만 다리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빛나 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외로운 다리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나 를 잊었습니다. 빛나고 화려한 동생만을 기억하고 찾아올 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빛나는 조명과 화려한 분수를 보기 위해 반포 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함께 온 사람과의 그 아름다운 기억을 오 래도록 기억하고자 했습니다. 반면, 누군가에게 잊혀 지기 위해 내 동생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이유로 나를 찾아왔습니다. 사업의 실패 연애의 실패 그들의 행동이 누구에 게 잊히기 위함인지 나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내 동생의 머리 위에서 나의 발밑으로 사라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나의 발밑에서 사라져갔습니다. 한번은 어떤 남녀가 함께 손을 맞잡고 내 동생을 찾아왔었습니다. 그들의 표정은 결연했습니다. 둘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한번 끄 덕이더니 곧 뛰어내렸고, 그들 역시 나의 발밑으로 사라져 버렸습니 다. 남녀는 결혼 한지 3년째 되는 20대 중반의 부부였습니다. 둘은 대학교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건축을 전공하던 남학생과 미술 전 공의 여학생은 우연히 같은 교양수업을 듣게 되었고,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조금씩 가까워졌고 사랑에 빠졌습 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전부였습니다. 서로가 없인 살 수가 없었고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옳 지 않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의 사랑이 여자의 뱃속에서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되었고, 결국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녀는 학교를 포기해 야했고 남자는 돈을 벌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행 복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렇게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그것만 으로 충분했습니다. 더 이상 그들을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은 없었습 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남자의 오똑한 코와 여 124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125

자의 빛나는 눈을 꼭 닮은 예쁜 아이였습니다. 그때까지 그들은 행 복했습니다. 나와 똑 닮은 아이. 나의 분신 같은 아이. 이 보석 같은 아이가 그들을 나의 발밑까지 내몰 줄은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아이는 커갔고 남녀는 지쳐갔으며 그들은 사회의 파도에 휩쓸려 가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25살의 고졸 남자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여자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온기만으로 견뎌내기엔 세상은 너무도 차가웠습니다. 결국 그들은 차가운 세상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아이를 보육원에 맡겼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온기만 으로 견뎌낼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났습니다. 잊히기 위한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 그렇게 그들은 제 동생 반포 에게로 왔습니다. 남아있을까 숨을 한껏 들이마시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빛나는 조명과 화려한 분수를 보기 위해 반포 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함께 온 사람과의 그 아름다운 기억을 오래 도록 기억하고자 합니다. 몇몇의 사람들은 빛나지도 화려하지도 않 은 나를 찾아옵니다. 그들은 나로써 누군가를 기억하고자 합니다. 나의 발밑에서 내 동생의 머리 위까지를 훑어보며 기억하려 애를 썼 습니다. 잊히고자 하는 사람들은 내 동생에게, 기억하고자 하는 사 람들은 나에게 찾아왔습니다. 비록 나는 잊혔지만 사람들은 누군가 를 기억하기 위해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내 발밑으로 사라진지 10여년이 지난 어느 날, 한 아이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아이는 내 발밑에서부터 내 동생의 머리 위까지 를 훑어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습니다. 여기가 내 부모님이 마지막으로 있었던 곳 이라고? 소년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습니다. 마치 제 부모의 냄새를 맡으려 는 듯이. 그리고 곧 끅끅거리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의 어깨가 들썩거렸습니다. 오똑한 코와 빛나는 눈. 소년은 10년 전 그 남녀가 보육원에 맡긴 아이였습니다. 아이가 몇 살인가요? 3살입니다 예쁜 아이네요. 두 분은 어디로 가시나요? 저흰 반포대교로 갑니다. 반포대교요? 네. 그것이 보육원에서 알려준 소년의 부모님에 대한 유일한 이야기 이였습니다. 소년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부모를 기억해내려고 애 를 쓰는 듯 보였습니다. 10년 전 그날 부모님의 냄새가 조금이라도 30년이 넘는 세월을 시기와 질투, 외로움 속에 살아왔습니다. 비 가 오면 물속으로 사라져야했고 곰보 같은 피부 때문에 차들도 찾아 오길 꺼리는 다리. 누구도 나를 달가이 생각하지 않는 그런 다리였 습니다. 사람들이 화려하게 빛나는 동생만을 사랑할 것이라고 단념 하고 나조차 나를 사랑하지 못한 채 그 긴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나는 누군가를 기억하고자하는 이들을 위해 존재했습니다. 비록 나의 존재는 잊혀 졌지만 그들에 의해 가치를 가졌습니다. 나는 세상에게 잊힌 어둠의 다리입니다. 기억하고자하는 사람들의 다리입니다. 나는 잠수 입니다. 126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127

火 (불화) 박진주 어김없이 새날은 밝아왔고, 달라질 일도 굳이 다를 일도 없는 하 루가 끝날 거 같았다. 그날의 기억은 악몽이었다. 불길은 작은 씨에 서 시작하여 그 무엇이든 집어 삼킬듯이 달려왔다. 모든 걸 감싸듯 이 순식간에 타올랐다. 그 불길은 모든 아픔, 탄식, 허망함을 잠재운 채, 모든 이의 걱정 또한 뒤로 한 채 자신의 일인 치솟는 일에 열중 했다. 밤하늘의 별빛은 슬퍼하기라도 하듯 하나씩 떨어지고 있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600년의 세월은 5시간 17분 만에 저물었다. 소방관의 이야기 사람들은 우리들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왜 더 빨리 진압할 수 없 었냐고, 불길을 더 빨리 막을 수 없었냐고... 우리들의 마음도 저 불 길 속에 같이 타들어갔다는 것을 누가 알고 있었을까. 그날은 유난히 별빛이 슬펐다. 안국동의 한 아파트에서 작은 화재 가 나 출동해서 진압을 한 후 본부로 향하는 길이었다. 본부에 도착 하기도 전에 문화재가 타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2월 10일 8시 48 분 현장 도착. 우리들의 얼굴은 순간 굳어버렸다. 찬란한 별빛아래 숭고함을 뽐내던 600년의 역사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불길은 무 서운 기세로 치솟고 있었고 광장은 사람들의 탄식과 뜨거운 불길이 내뿜는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2월 10일 8시 57분 더 많은 지원이 도착하며 진압이 수월해 질 거 라고 생각했다. 9시 8분. 2층의 우측 처마에서 불길이 멈추지 않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있는 걸 확인했다. 팀장님은 문화재청에 연 락해 지붕을 파괴해야 되는 지 허락을 받아야했다. 그러나 나는 바 로 파괴해서라도 더 이상의 불길을 막아야한다고 생각했고 팀장님 도 동의했다. 진압은 수월하지 않았고 부숴진 처마는 순식간에 추락 하고 말았다. 남은 건 앙상한 재뿐이었다. 600년의 숭고함은 5시간 17분 만에 앙상한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우리들의 얼굴도 연기로 새 까맣게 변했고 이미 우리들의 마음 또한 까맣게 타버렸다. 허망함, 허탈감... 새까만 연기 속에서 우리들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방화범의 이야기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은 나를 무시했다. 수차례 정부와 관련된 기 관에 민원을 보내도 소용없었다. 나에게 돌아온 답은 없었다. 그들 은 이미 나에게 불씨를 던졌고, 내 마음의 불씨는 이렇게 커져가고 있었다. 세상이 미웠다.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써, 가장으로써, 노동자로써 묵묵히 일했고 그에 대한 보상을 바랬을 뿐이었다. 세상 은 나를 늙은 노인이라고 괴롭히고 무시했다. 내가 받은 아픔과 괴 로움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랬다. 그렇게 내 분노는 점점 커졌고, 그것은 곧 불씨가 되었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나 의 이야기를 알리자고... 불길은 점점 더 커져갔고 그것은 내 분노, 아픔을 모두 치유해주는 듯 했다. 유난히 찬란한 밤이었다. 집에 들어가니 아들이 켜놓은 티비에는 그 사건이 연일 보도되고 있었다. 나의 몰골을 본 아들의 얼굴이 순간 굳어지며 저 불길이 나 와 관련 된 것이냐며 물었다. 나는 아들에게 오늘 내가 만든 찬란한 밤에 대해 말했다. 행인의 이야기 왜 그냥 지나쳤을까. 그날의 퇴근길도 어느 때와 같이 100번 버스 128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129

에 올랐다. 광화문 광장을 지나는 이 버스는 늘 그래왔듯 창 밖 시내 풍경을 보여주었다. 그날의 풍경은 뭔가 달랐다. 숭례문에 한 노인 이 사다리를 들고 올라가는 걸 보았다. 그 노인은 굉장히 화가나 있 었다. 이상했지만, 남의 일에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경험들이 날 귀찮게 했고 항상 후회했다. 그것이 이 차가운 도시에서 살아가 는 규칙이었다. 그곳을 지나자마자 피로가 몰려왔다. 나는 버스에 서 내려 집으로 향했다. 유난히 발걸음이 무거웠다. 넥타이를 풀지 도 않은 채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따 소파에 앉아 티비를 켜니 아 까 내가 지나쳤던 그곳의 현장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뉴스 속의 숭례문 모습은 방금 전까지 내 두 눈으로 확인했던 모습과는 확연히 달라보였다. 처참했다. 나는 그곳의 마지막 모습을 본 것이었다. 순 간 등골이 오싹해지며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보았다. 화가 난 노인이 사다리를 가지고 올라가는 모습을. 내가 그때 그 사람에 게 다가갔다면 막을 수 있었을까. 나는 왜 그냥 지나쳤을까. 순간 많 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말자는 이 차가운 도시의 법칙이 심하게 요동쳤다. 서울열차-어느 짧은 여행의 기록 김예슬 12시 4분, 배가 고파오기 시작할 시간. 밥 먹기를 뒤로 미룬 채 연 신내에서 무작정 열차에 올라탄다. 주말치곤 이른 시간인데 열차는 제각기 바쁜 사람들로 북적인다. 열차엔 젊은 사람들보다 어르신들 이 많다. 그래서 자리에 앉지 못했다. 나는 생각한다. 이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누군가를 뒤따라 가볼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사이 열차는 응암에 멈춰 섰다. 친구가 탄다. 같이 떠나 볼 생각이다. 친구는 내가 떠나자고 했을 때 아무 말 없이 알았다고 했다. 일일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마음이 통하는 친구. 역에 멈춰 설 때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탄다. 가지각색 불쾌한 냄 새들이 코를 찌른다. 땀 냄새, 향수냄새, 덜 마른 옷 냄새. 친구는 앉고 싶어 하는 눈치다. 그러나 여전히 자리는 어르신들의 차지다. 새절과 증산을 지나 디지털미디어시티에서 열차의 오른쪽 문이 열린다. 공항철도로 연결되어 있는 이곳에선 많은 사람들이 내린다. 예전엔 나도 이곳에서 매번 내렸다. 대학 등록금에 보태기 위해 아 르바이트를 가던 시절. 그 때는 정말 힘든 것도 모르고 열심히 했다. 한 중년의 남성이 큰 짐을 가지고 탄다. 모두가 예상하는 그 사람 이다. 오늘은 CD를 파는 사람이다. 노랫소리가 지하철 안에 크게 울 린다. 나오는 노래는 옛날 우리 부모님 세대의 노래다. 열차의 사람 들은 하나 둘씩 인상을 찌푸리며 그 사람을 본다. 나도 다른 사람과 같이 그 사람을 본다. 그래도 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할머니 한 분이 그를 불러 CD를 산다. 누군가 열차 끝에서 걸어온다. 열차 130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131

관리원 두 명이다. 그 사람에게 조용히 말을 건다. 그 사람은 순간 음악을 끈다. 벌써 합정이다. 우리는 그 사람과 함께 내렸다. 2호선으로 연결되 어 있는 합정에선 더 많은 사람이 내린다. 다리가 아파 계단 대신 에 스컬레이터를 탄다. 당산으로 가는 열차를 탄다. 한강을 지나간다. 오랜만에 한강을 보는 듯하다. 친구와 다리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 눈다. 마포대교에는 생명의 다리가 있다. 한강에서 자살시도가 많 아 만들어졌다. 다리난간에 글귀가 적혀 있다. 밥은 먹었니? 사랑 해주세요! 등등. 또한 중간엔 생명의 전화기가 있다. 우린 궁금해서 검색해봤다. 작년엔 163명의 사람들이 글귀로 인해, 전화 통화를 한 뒤 자살을 포기했다. 작은 말과 문구 하나하나가 163명을 살렸다. 사소한 글 한 문장, 짧은 말 한마디가. 합정에서 당산을 지나 신도림을 향해 가고 있다. 계속 깜깜한 터 널을 지나고 있다. 친구와 나는 드디어 자리에 앉았다. 친구가 나에 게 말을 건다. 2호선은 사람이 너무 많다고 내리자고 보챈다. 우린 신도림에서 내리기로 한다. 신도림이다. 이곳도 합정처럼 사람들로 북적북적 댄다. 1호선으 로 갈아타는 사람들이다. 카드를 찍고 출구를 향해 걸었다. 출구 쪽 에서 무언가 발견했다. 헌혈의 집이다. 우린 뜬금없이 헌혈을 한다. 친구에게 물었다. 여긴 왜 왔어? 우리 아까 그 생명의 다리처럼은 아니지만 한 생명정도는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친구의 대답에 나는 친구를 다시 보게 됐다. 우린 헌혈을 끝내고 허기진 배를 달래러 디큐브 씨티로 들어간다. 뭘 먹을지 고민하다가 아무 곳이나 들어갔다. 쇼군이다. 닭다리 바 비큐 스테이크와 해물 볶음면을 시켰다. 사실은 인터넷 검색을 해보 고 찾아간 것이었다. 생각보다 수준 이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배고 픔을 이길 수 없었다. 우린 서로 말도 없이 허겁지겁 먹었다. 친구가 묻는다. 다음은 어디로 갈 거야?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무작정 갈 생각이다. 갈 길이 멀다. 우린 나 와 다시 열차에 올랐다. 대림 쪽으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2호선을 이렇게 오래 탄 것은 둘 다 처음이다. 지겨웠다. 내가 모르는 냄새를 맡고 내가 모르는 사람들을 보고, 힘들고 지친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더 많이 탄다. 서울대 입구이다. 친구가 내리자고 한다. 서울대를 구경하자고 한 다. 나는 내리지 않았다. 네가 갈 수 있는 곳 아니야. 그냥 가자. 친구는 눈을 흘기며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다음은 낙성대이다. 친 구가 말한다. 너 낙성대가 뭔 줄 알아? 내가 말했다. 낙성대가 낙 성대지, 뭐야. 친구는 나를 무시하는 듯한 웃음을 보인다. 나는 급 하게 휴대폰을 두드린다. 낙성대는 고려시대 거란족을 물리친 강감 찬 장군이 큰 별이 떨어지던 밤 태어났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었 다. 지하철이 개통되며 역 이름으로 불렸다 한다. 사당과 방배를 지나 교대에 왔다. 내리자고 친구를 끌고 내렸다. 누군가 우리를 불렀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저씨이다. 아저씨가 무언가를 준다. 친구는 약간 겁먹은 모습이다. 그것은 친구의 카드 였다. 친구가 나한테 끌려나오는 길에 떨어트린 것이다. 감사인사를 드리고 우린 빠른 걸음으로 3호선을 향해 걸었다. 거의 달리다시피 걸어 사람들은 우릴 신기하다는 듯한 눈으로 바라본다. 민망한 우리 는 그냥 웃기만 했다. 구파발행 열차가 왔다. 열차에 올랐다. 이제 다시 출발했던 곳으 로 갈 생각이다. 고속터미널을 지나 잠원, 신사, 압구정이다. 이곳 에선 젊은 사람들이 많이 탄다. 남자보다 여자가 많다. 친구는 나를 콕콕 찌른다. 말을 한다. 야, 다 똑같이 생겼어. 나는 웃었다. 근 데 정말 비슷하다. 이상하긴 하지만 친구와 나는 둘 다 은근 부러워 하고 있는 중이다. 정말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단하다. 예전이었다면 상상도 못했을 일인데. 지금 시각은 4시, 열차만 탔는데도 벌써 4시이다. 한강을 지나고 132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133

있다. 열차 옆으로 도로가 있다. 차들이 달린다. 강을 건너 벌써 충 무로이다. 사람들이 내린다. 우리 자리에 앉았다. 너무 피곤하다. 잠 시 눈을 감았다. 잠이 들었던 거 같다. 눈을 떠보니 불광, 다음이 연 신내이다. 오늘 열차에서 하루의 반을 보냈다. 별거 한 건 없지만 몸 은 지친다. 지친 몸으로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서울열차에 이렇게 다양한 것이 있는지 처음 알았다. 지금 시각은 5시 17분이 다. 편지 김무늬 Lasa, 서울로 가는 운하의 창밖에는 소나기가 내리고 있어. 아마 내가 도착할 때 즈음이면 이 비가 그치겠지? 있잖아, 어젯밤에는 잠을 한 숨도 잘 수 없었어. 꿈에만 그리던 서울에 가게 될 줄이야. 이제 더 이상 나는 고향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줘, Lasa. 우리 동네사람 들은 정말 바보 같아. 어째서 시도해보지 않고 나더러 쓸데없는 꿈 을 접으라고만 하는지, 비굴하게 살아봐야 얻는 건 하나도 없는데. 하루 벌어 하루 살기에도 빠듯한 우리 동네! 너도 속히 하루 빨리 그 동네를 떠야한다고 당부하고 싶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 동네에선 모든 꿈들이 한 손에 쥐고 있는 모래처럼 새어 나가고 있어. 우리 동 네에는 모든 것들이 너무 빨리 변화하지. 모든 걸 너무 빨리 지나치 고 있어. 조금 더 천천히 걸을 수도 있잖아? 길가에 핀 꽃들을 보며 꽃 냄새를 킁킁 맡는 귀여운 고양이도 보면서 말이야. 내 고향의 가 족들과 친구들에겐 미안하지만 그런 동네에서 버티는 바보짓을 이 젠 그만두겠어. 아마 너는 내가 왜 서울에 가야만 하는지 이해해 줄 거라 믿어. 내 평생을 함께 할 좋은 친구 Lasa, 내가 서울에 가기 위해 반드시 벌어야 했던 돈, 네가 알아봐준 직장을 다니면서 그나마 모을 수 있 었어. 어떻게 너에게 고마움을 다 전할까. 서울에 가면 네가 먹고 싶 어 하던 붕어빵을 꼭 내가 먹어 볼게. 정말 붕어가 들어 있는지 없는 지 꼭 확인 해 볼게. 134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135

사실은 나도 너와 끝까지 학교를 다녀 졸업을 하고 싶었어. 하지 만 너무 비싼 대학등록금이 내 숨통을 조여와 죽고 싶은 심정이었 지. 그러던 중에 서울은 대학 등록금이 반값이란 사실을 알게 된 거 야. 그리고 장학생에게는 2년 치의 학비를 지원해 준다는 놀라운 이 야기까지. 서울은 기회의 땅, 평등의 땅일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 었지. 과감히 내 나라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서울로 가는 지금 이 순 간, 난 절대 후회를 하지 않을 거야. 서울은 전 세계의 심장부야. 그 서울로 내가 가고 있다니 믿어지니? 지금의 내 심장소리를 듣는다면 아마 넌 내가 당장이라도 심장마비에 걸릴까봐 호들갑을 떨겠지. 서울에 도착하면 난 제일 먼저 내 낡고 더러운 신발부터 벗어 던 질 거야. 서울 거리는 너무 깨끗해서 신발이 필요 없대. 대기에 있는 먼지며 땅의 쓰레기들은 모두 잡식성 비둘기가 처리한다는 거야. 진 짜 신기하지 않니? 모든 나라에서 성가시게만 여기는 비둘기가, 서 울에서는 환경미화원인 셈이지. 간혹 가다 엄청 거대한 자이언트 비 둘기도 있대. 언젠가 내가 해외 유명 기사에 실린 서울의 비둘기 사 진을 보여준 적이 있지? 비둘기를 타고 도로를 주행하던 10대가 차 량과 추돌한 사건을 보고 네가 엄청 신기해했었잖아. 그렇게 옛날 에는 비둘기를 탈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천연 기념물로 지정이 돼서 함부로 비둘기를 다룰 수 없대. 네가 나에게 나도 비둘기 한번 타보 고 싶다 했던 게 생각이 나네. 아쉽다. 나도 타고 싶었는데. 재밌는 사실 하나 알려줄게. 너 서울이 원래 서울이라는 명칭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아? 원래 서울은 전국이 8도인 대한민국이라 는 나라였대. 그때는 서울이 한국의 수도였는데 서울 안에는 강남이 라는 동네가 있었어. 근데 그 강남에서도 8학군이라고 해서 8학군 에 드는 학교에 다니면 대학은 보장된, 그런 잘사는 동네가 있었던 거야. 그 때문에 강남과 지방, 강남 외의 지역 간에 분쟁이 일어나고 말았대. 그 분쟁에 이어 8도 전쟁까지 터졌지. 하지만 그런 내란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8도는 하나가 돼서 지금의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거야. 분쟁 속에서 스스로 평화를 찾아낸 서울 사람들의 의지가 참 대단하지 않니? 그런 서울사람들은 인간관계도 정말 좋다고 들었어. 서울에서 생 활하는 어느 외국인이 그러는데 그들은 분명히 욕이 난무하는 대화 를 하고 있었대, 그런데도 얼굴은 활짝 웃고 있더라는 거야. 그들은 상처 주는 말을 해도 웃음으로 화답하는 사람들인 거지. 나도 어서 서울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어! 게다가 서울은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해가 지기까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대. 야근은 절대 없고 10시간 이 상 근무를 절대 안하도록 한다니, 얼마나 천국 같니. 지금 서울에서 가장 유행하는 게 뭔지 알아? 바로 착한 이에게만 보이는 옷이래. 옛날 한국의 임금 중에 옷에 굉장히 관심이 많은 임 금이 있었대. 그 임금에게 한 디자이너가 착한사람들에게만 보이는 옷이라며 선물한 옷이 지금의 유행을 초래했다나. 그 옷을 한 한국 인 디자이너가 엄선한 유명 연예인들에게 입혀서 처음으로 뉴욕컬 렉션, 서울컬렉션에 선보였대.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착한사람 들이었는지 다들 그 옷을 극찬하면서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는 거 야. 아마 가격도 엄청나겠지. 그래도 한 번 그 옷을 입어보고 싶다. 너라면 아마 그 옷을 볼 수 있을 거야! Lasa, 곧 있으면 열차가 서울에 도착해. 이 편지를 서울에 있는 초속 우체통에 넣으면 불과 10초 만에 너에게 도착하겠지. 앞으로 내 앞에 펼쳐질 꿈들을 너에게도 계속 전해 줄게. 또 편지하자. 너의 친구, Tabula 역에 도착한 Tablula는 기차표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모든 기회 와 명예를 한 손에 다 쥔 기분이었다. Tablula는 짐차를 기다리며 의 자에 앉았다. 옆에는 작은 캐리어가방을 가진 서울사람이 있었다. 안, 녀엉 하, 세요 만나 숴 반갑 스.. 습니다. 서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아직 Tabula는 136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 SK 해피스쿨 인문예술과정 137

서울말을 잘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웬만한 서울말은 다 알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서울사람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Tabula 는 그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비행기 기다리고 있어. 저녁 8시면 도착할거 같아. 응. 걱정하지 마. 어딜 가든 여기보단 낫겠지. 이제 정말 사람다운 사람이 있는 곳 으로 가고 싶어. Tabula는 그 서울사람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그 사람의 통화내 용에 대해 묻고 싶었다. 저.기..요 서울사람은 캐리어를 끌고 황급히 일어나 멀어져갔다. 서울의 역 안은 여전히 분주했다. 138 세상을 탐험하는 30가지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