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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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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운 체계상의 특징 음운이란 언어를 구조적으로 분석할 때, 가장 작은 언어 단위이다. 즉 의미분화 를 가져오는 최소의 단위인데, 일반적으로 자음, 모음, 반모음 등의 분절음과 음장 (소리의 길이), 성조(소리의 높낮이) 등의 비분절음들이 있다. 금산방언에서는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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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작품들의 열람기록은 로그파일로 남게 됩니다. 단순 열람 목적 외에 작가와 마포구의 허락 없이 이용하거나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시 저작권법의 규정에 의하여 처벌받게 됩니다. 마포 문화관광 스토리텔링 공모전 구 분 내 용 제목 수상내역 작가 공모분야 장르 소재 기획의도 용강동 정구중 한옥과 주변 한옥들에 대한 나의 추억 마포 문화관광 스토리텔링 공모전 최우수상 이형석 창작이야기 수필 정구중 가옥과 재개발 내 한옥들 2011년 10월초부터 2012년 1월 초까지 3개월 동안 용강동 재개발 지구에서 한옥 해체를 하면서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새로운 관심과 함께 마포구의 유서 깊은 문화적 역량을 알게 되어 그것들을 주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스토리 구성 (Plot) 중구 중림동에 있는 친척집에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부터 설과 추석을 비롯해 각 종 집안 행사가 있으면 들르게 된 나는 언젠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따라서 만리 동 고개 넘어 공덕 오거리를 지나 용강동으로 놀러간다. 그때 나는 정구중 가옥을 비롯해서 주변의 많은 한옥들을 보게 되는데 유독 정구중 한옥이 눈에 들어온다. 당시 할아버지는 내게 그 집에 대해서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시는데 내가 아주 어 린 나이인지라 그냥 기억 속에 할아버지와 나들이를 한 즐거운 추억으로만 남는 다. 그러다 내가 성년이 되어 작년에 우연히도 아현동 재개발현장에서 한옥 해체, 철거 일을 하다가 용강동 재개발 현장의 한옥 해체, 철거 일까지 하게 되면서 정 구중 한옥을 본 순간 삼십년도 더 넘는 세월이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따뜻했 던 유년시절이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잠시 옛일에 대한 회상에 잠기면서 나를 그 곳으로 인도해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생각하게 되고 그 인연으로 인해 정구중 가 옥의 건축 년대를 비롯한 소소한 과거를 추적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정구중 가옥 을 지으신 분의 후손을 극적으로 만나게 되어 약간의 소명의식을 갖게 된 나머지 그 집에 얽힌 이야기를 후세에 전하고 싶어서 우리 것의 소중함을 되새기며 글을 쓴다.

- 용강동 정구중 한옥과 주변 한옥들에 대한 나의 추억 - 용강동 재개발 현장에 계신 某 소장님으로부터 전화 연락을 받은 것은 아현동 재개발 구역의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에 들어선 작년 2011년 10월 중순쯤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재개발 지 역으로 묶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시게 된 지인으로부터 새로 마련 한 터에다 당신들이 여태껏 살아온 한옥을 그대로 옮겨 짓고 싶으시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이 전복원을 목적으로 해체 작업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단청과 관련된 일을 하는 동생의 권유로 문화재 보수 기술자 시험을 준비하던 저는 참여의사를 타진 받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현장 으로 과감히 뛰어들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살아있는 공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날 이후 저는 주로 책을 통해서 접하던 우리의 전통 주거 형태인 한옥의 이곳저곳을 직접 보고 만지면서 머릿속의 지식을 하나둘씩 체화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눈으로 보기만 하던 것 에서 노루 발 못 뽑기를 비롯한 쇠메와 곡괭이와 삽을 들고 전부 여섯 명이 함께 사다리를 타 고 지붕에 올라가 순서대로 기와를 걷으면서 평소 궁금해하던 한옥의 구성 원리를 서서히 몸 으로 터득해 나갔습니다. 특별한 기억이 하나 있다면 한옥이 위치한 곳의 주변 건물들이 이미 해체가 된 상태에서 주변 도로가 융기하는 등 변형이 일어나 구조적으로 따로 비계를 설치할 수가 없었던 관계로 별다른 안전장치 없이 경사진 지붕에서 미끄러움과 싸워가며 동작 하나하 나를 무척 조심해야만 했던 점입니다. 그것 외에 작업하면서 어려움이 있었다면 작업 현장 바로 인근에 도로를 경계로 한성고등학 교가 있어서 비산먼지와 소음으로 말미암은 민원이 발생하지 않도록 특히 조심해야 하는 것이 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현장의 작업 여건과 준수해야할 규칙들을 매일 같이 철저하게 점검하 면서 주변의 모든 분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신중하게 작업을 해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노력의 대가로 다행히도 큰 탈 없이 작업 개시 열흘 정도 되었을 때 무사히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고마운 것은 작업 중간에 마포구청에서 관계자분들이 나오셔서 저희에게 어려운 점 이 없느냐고 물어보시고 이것저것 챙겨주시면서 안전에 대한 당부와 함께 격려를 해주신 점입 니다. 전혀 기대해 본 적이 없는 담당 관계자분들의 뜻밖의 작은 배려에 저뿐만 아니라 같이 작업하던 모든 분이 새삼 우리나라의 행정이 선진화 되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 다. 그건 소위 말하는 노가다 세계에서는 흔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흙먼지가 휘날리 는 폐허에서 누군가 저희한테 관심을 가져준다는 것은 아마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 입니다. 어쨌거나 그런 호의에 힘입어 무사히 작업을 마친 어느 날, 저는 오후 늦게 연락을 받고 용강 동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만나본 소장님은 이곳의 한옥은 기존의 다 른 건물, 이를테면 단독 양옥이나 빌라와 같은 건물들처럼 마구잡이로 기계를 이용해서 해체, 철거하기에는 뭔가 걸리는 부분이라고 하시며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없지만 나름대로 원형을 보존할 수 있는 것들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고 고민하던 참에 마침 아현동 소장 - 1 -

님을 통해 저에 관한 얘기를 들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비록 결과를 떠나서 바쁘신 와중에도 배려해 주시고 신경 써주신 것에 대해 감동 받았습니다. 제가 경험한 철거 현장이란 거칠고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기에 불친절하고 무뚝뚝 할 거란 선입견과 달리 그렇게 의외의 인간미가 발현되는 곳이었습니다. 소장님의 말씀을 다 들은 후 저는 곧바로 현장을 둘러보았습니다. 우선 전체적인 분위기와 풍경은 아현동보다는 상 대적으로 한옥들이 많이 밀집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형태는 온전하게 보존된 것이 많지 않은, 흔히 말하는 개량 한옥 혹은 한옥과 현대 건축의 절충형이 월등히 많았습니다. 그 리고 상대적으로 집들이 많이 낡고 퇴락해서 특별히 보존하거나 이전해서 복원할 가치가 있는 것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한옥이 지붕만 한식 기와로 장식된 상태에서 본체는 시멘트 블록이나 적벽돌을 사용했고 출입문은 철 대문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나마 부분적으로 형태 를 드러낸 기둥과 서까래, 부연은 우수( 雨 水 )로 인해 거의 썩은 상태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온전히 멋스러운 옛 정취를 간직한 형태의 한옥은 한 채도 없었습니다. 혹시 나 했던 저의 기대감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실망과 아쉬움으로 변해갔습니다. 동시에 성북구 동소문동의 한옥 지킴이로 유명인사가 된 피터 바톨로뮤 선생님께서 살고 계신, 족히 근 100 년 정도는 된 한옥에서나 엿볼 수 있는 고미다락 방이나 대청마루나 들어 걸개 식의 분합문이 나 사고석에 부분적으로 꽃담이 설치된 벽이나 일각 대문과 같은 것을 기대한 것은 어쩌면 환 상에 가까운 지나친 욕심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0년 전에는 서울에만 한옥이 80만 채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백 분의 1도 안 되는 한옥만이 겨우 남아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저의 아쉬움과 안타까움은 사실 우리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전승의 단절을 못내 에둘러 드러낸 것이라는 게 더 정확할 겁니다. 그나마 서울시 의 한옥 보존대책으로 북촌에 겨우 형성된 한옥들이 우리의 눈길을 잡아끌지만 그것들 대부분 이 근래에 들어 개보수를 거치는 과정에서 주재료인 나무를 비롯한 형태상에서 옛 모습을 많 이 잃어버린 것들이라 솔직히 정서적으로는 크게 와 닿지가 않아서 아쉬움이 더 진하게 남았 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문화재 관련 공부를 하면서 높아진 안목으로 어쩌다 눈에 천연기념물 같 은 존재인 한옥이 띄면 그 구조와 건축 년대부터 음미하는 버릇이 생긴 저로서는 당연하였는 지도 모릅니다. 정구중 가옥이 눈에 들어온 것은 그렇게 현장을 다 둘러본 후였습니다. 뒤편에 삼성 래미안 아파트를 배경으로 좁은 골목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옥이 있어서 의아한 마음에 가 살펴보니 집 앞에 무슨 안내판 같은 것이 하나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안내 판에는 한글과 영어 그리고 일본어 이렇게 3개 언어로 정구중 가옥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 습니다. 그래서 저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켜가며 그것을 천천히 읽어보았습니다. 지정번호: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7호 / 시대: 일제 강점기 소재지: 서울 특별시 마포구 용강동 335번지 - 2 -

이 집은 제한된 땅에서 여러 채의 건물들을 배치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도시형 개량한옥에서 는 보기 드문 배치 형태다. 경사진 곳에 있는 이 집은 단을 달리하여 지형에 맞게 건물들을 배 치하였다. ㄴ자형의 대문간이 있는 행랑채와 ㄱ자형의 안채가 어우러져 ㅁ자형의 안마당을 이 루고 그 뒤로 중문간 행랑채와 별채가 있다. 안채 대청 앞 쪽마루의 고막이 널에는 태극 문양 을 장식하였고 쪽마루 아래에는 섬세한 문양을 장식한 까치발을 대는 등, 전반적으로 세심하게 장식하였다. 안마당에서 보이는 안채의 처마 부분은 겹처마로 하였고 보이지 않는 뒷부분은 홑 처마로 처리하여 경제적인 효과를 높이면서도 화려함을 추구하였다. 안채 뒤로는 중문 간 행랑 채가 있고 여기에 있는 중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높은 곳에 ㄱ자형의 별채가 있다. 중문간 행랑채는 안채와 별채 사이에 놓여 두 건물의 높이가 크게 차이 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연결한 다. 안내문을 다 읽기가 무섭게 1989년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떠오른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본적이 중구 남창동이고 태어난 곳은 충정로로서 집안 대대로 사대 문 안에서 자라고 태어났기에 큰 할아버지 댁이 있는 중림동에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서 설과 추석 그리고 제사 때가 되면 차례를 지내러 가거나 제사를 지내러 가곤 했습니다. 그 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자연스럽게 만리동 고개를 지나 공덕동 오거리에서 용강동의 먹자골목 까지 친척 형제들과 함께 이곳저곳을 탐험하면서 놀러다니곤 했습니다. 연중행사처럼 그렇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어느 해, 할아버지를 따라서 지금의 용강동까지 나들이를 온 적이 있었 습니다. 정확한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할아버지께서 친구분을 만나기 위해 손자인 저를 데리 고 길을 나서신 것 같은데 하여간 저는 어린 마음에 신이 나서 콧노래를 부르며 할아버지 손 을 잡고 따라갔습니다. 저의 할아버님은 일본 강점기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와 함께 만리동에 있는 양정고보를 동문수학하셨는데 그런 친구분을 두셔서 그런지 걷는 것을 무척 즐기셨습니 다. 그래서 그날도 버스나 택시를 타지 않고 중림동 집을 나와 할아버지의 모교인 양정고등학 교에 잠깐 들러 교정을 한 바퀴 돈 후 고개 넘어 공덕동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렇게 얼마인가를 가서 할아버지가 발길을 멈추셨는데 주변이 온통 기와집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어느 집 문을 두들기셨고 안에서 누군가 나와 반갑게 할아버지를 맞이하면서 안으로 모시고 들어갔습 니다. 저는 얼결에 할아버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는데 나중에 기억을 되살려 보니 그곳이 바 로 용강동 반장님 댁이었습니다.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정구중 가옥 앞의 작은 골목 안 끝에 그 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지나도 그곳은 거의 변함이 없었습니다. 정구중 가옥에 관한 안내문을 읽고 나서 30년도 더 된 옛 기억이 갑자기 부활한 것에 대해서 저는 적지 않게 당황한 한편으로 기쁘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당시 어린 저의 눈에도 정 구중 가옥과 주변의 다른 한옥들은 그 품격이나 외형에서 차이가 크게 났었던 것 같습니다. 그 래서 할아버지와 그 집을 나서면서 제가 여쭤봤던 기억이 납니다. 할아버지, 저 집은 왜 저렇게 커요? 그 집은 말이다 옛날 구한말에 이곳에 살던 부자가 딸에게 주기 위해 지은 집이란다. 그런데 다른 집들보다 더 좋아요. 담장도 높고 돌도 달라요. - 3 -

10살도 안 된 손자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집에 대해서 부러워하자 할아버지는 허허하 고 웃으셨습니다. 그건 말이다 그때 저 집을 지을 당시 장안에서 이름난 목수를 불러다 지어서 그렇단다. 그 외에도 무슨 말씀인가를 더 해주셨는데 전부 다 기억하지는 못하고 대충 위에 언급한 정 도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호기심 때문에 제가 이것저것 여쭤보자 나중에 네가 커서 저것보 다 더 큰 집을 짓고 살면 된다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제가 태어난 충정로 집도 한옥이 었는데 너무 어려서 그곳을 떠났기에 사진으로만 옛집의 자취를 더듬을 뿐, 살갑고 아련한 기 억은 없습니다. 그래서 한옥과 정서적 교감이 좀 더 오래 이루어지지 못했던 그 당시가 지금 제게는 안타까운 유년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날 저는 집에 돌아와서 정구중 가옥에 대한 자료를 찾아봤습니다. 대략 241평의 대지 위에 ㅁ자 집으로 안채, 별채, 창고로 구분되어 있으며 안채는 5량 구조라고 나오더군요. 눈을 사로 잡은 건 대들보의 크기였습니다. 전통 건축에서는 보통 높이를 이르는 말을 춤이라고 표현하는 데 그것이 45cm에 폭이 30cm라고 되어 있습니다. 집마다 다 다르겠지만 그 정도 두께의 대들 보를 직재로 구하려면 수령이 최소 150년 정도는 돼야 합니다. 한마디로 지금부터 근 100년 전에 지은 그 집은 그 당시로부터 150년 묵은 나무를 벌채해 쓴 셈이지요. 그러니까 지금으로 부터 250년 정도 된 것입니다.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개척한 영조가 한창 치세를 할 당시에 씨를 내린 나무인 셈이지요. 그리고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당시 장안에서 이름난 목수였다는 안영달이란 대목을 고용해서 지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용한 나무는 전하는 바로는 마포 나루에서 뗏목으로 사용한 홍송이라고 하는데 문화재청에서 조사한 결과 실제로는 春 陽 木, 즉 적송으로 기록되어 있습니 다. 예상과 달리 한수 이남의 내륙이 아닌 압록강 유역의 나무를 뗏목으로 옮겨왔다고 하더군 요. 거기서 대들보의 크기에 대한 작은 비밀이 풀렸습니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전국의 숲에서 목재의 고갈로 곡재( 曲 材 )가 아닌 직재( 直 材 )의 대들보를, 원하는 길이와 크기대로 구하는데 무척 어려움이 많았다고 하는데 그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시야를 백두산림으로 넓혀 압록 강을 이용해 운반해 왔던 것입니다. 덧붙여 전하기로는 그것을 한강에 2년 두었다가 1년 동안 건조하여 사용했다고 한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요즘 짓는 한옥들은 대부분이 북미산 더글러스 를 수입해서 쓰고 있기 때문에 옛날 우리나라에서 자란 소나무, 흔히 말하는 육송과는 그 품질 이 아주 판이하여서 향기도 없고 나뭇결도 조밀하지 않아서 멋과 깊이가 없습니다. 육송과의 비교가 그러하니 그보다 상위의 것인 소위 말하는 춘양목 즉 금강송에는 아예 비할 바가 못 됩니다. 게다가 옛날처럼 몇 년씩 나무를 건조하지도 않고 바로바로 가공해서 집을 짓기에 시간이 지 나면 대부분 갈라지고 뒤틀리는 등의 변형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시각적으로도 안 좋을 뿐만 아니라 구조적으로 문제가 생겨 안전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럼 당연 히 개보수의 시기가 빨라지고 경제적으로 손해를 보게 되겠지요. 이것은 나무를 공부하는 사람 - 4 -

으로서는 매우 치명적인 문제점입니다. 그런데 정구중 가옥은 그런 문제에서 완벽하게 벗어나 있으니 그야말로 우리의 전통한옥이라 부르는 데 있어서 아무런 결격 사유가 없는 셈이지요.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마포구청의 복이며 혜안입니다. 서울특별시 민속자료로 지정된 날짜가 1977년 3월 17일인데 한옥보존지구가 지정된 것이 근래 들어 일이니까 적어도 30년 이상을 행정적으로 앞서 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건 비단 용강동 주민뿐만 아니라 마포구를 넘어 우리 전체를 위해서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과거의 인연 때문에 이곳에 다시 오게 된 것이 아마도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 한 것이라 믿고 고심 끝에 비록 경제성은 없지만 재개발 구역 내의 불완전하나마 한옥 형태를 갖춘 것들에 대해서 우리 것에 대한 문화적 보존의 사명감으로 최대한의 성의를 들여 해체 작 업을 하기로 했습니다. 어떻게든 그나마 손봐서 쓸 수 있는 일부분의 것이나마 여기저기에서 추려내 그 불완전한 것들을 이용해서라도 하나로 모아 조상의 숨결이 담긴 한옥을 복원해 자 라나는 아이들한테 보여주고 싶은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그냥 거대 한 집게 손이 장착된 기계에 의해 무자비하게 무너져 한 줌 쓸모없는 쓰레기로 쓸쓸히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그렇게 내버려 두기에는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물론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만. 용기는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뒷받침이 있 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많으면 결국 아무것도 못 하는 법이라 배운 저는 큰마 음 먹고 바로 그 다음 날부터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었습니 다. 아현동과 달리 작업반경이 넓어서 이동도 불편할 뿐만 아니라 기와를 내리고 해체한 목가 구( 木 家 具 ) 즉 서까래, 부연, 종보, 대보, 대공, 개판, 장여, 도리, 기둥, 인방들을 마땅히 쌓아 둬서 분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좀 더 많은 보상을 노리고 알박기를 하듯이 이사하 지 않고 버틴 주변의 어떤 사람이 부당한 민원을 제기하는 바람에 근 열흘 동안 작업을 할 수 가 없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예상보다 기일이 늘어나면서 인부들한테 지급하는 용역비가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비관적인 생각이 들기까지 했습니다. 나중에는 내가 이 걸 왜 한다고 해서 이런 손해를 보는가 하는 후회가 되기까지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나약하고 어리석은 모습입니다만 그 당시로써는 그랬습니다. 처음 마음과 달리 서서히 지쳐가던 어느 날, 제 게으름과 불성실을 일깨워 주려는 듯 하늘이 제게 귀한 분을 보내 주시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그때 한마디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 를 돕는다는 격언을 실감했습니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추위와 여의치 않은 주머니 사정 탓에 더 인부들을 쓰지 못하고 고독하게 제한된 기간 내에 작업을 마쳐야 하는 상황에서 뜻하지 않 게도 정구중 가옥을 지은 분의 후손을 만난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바로 그분이 정구중 가 옥 바로 앞에 있는 골목길 끝에서 우회전하면 나오는 집의 주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그곳의 주소는 큰우물로 2길 21-7번입니다. 비록 혼자이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작업에 열중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접근 금지를 알리는 작업 경계선 안에서 몇몇 낯선 인부들이 초석과 장대석을 쇠지레를 이용해서 분리하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저는 혹시나 재개발 구역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훔쳐가는 도둑들이 아닌가 싶 어 걱정 반 두려움 반의 마음으로 그리로 갔습니다. 그랬더니 바바리 코트에 정장 차림의 중후 - 5 -

한 신사 한분이 그들을 지도 관리 감독하고 계셨습니다. 이에 제가 먼저 다가가서 인사를 드렸 습니다. 선생님 저는 한옥에 관심이 많아서 문화재 공부를 하는 사람입니다. 실례지만 이곳은 어떻게 오셨는지요? 아 그래요. 난 이 집의 주인입니다. 그동안 이 집을 세를 주고 있었는데 신경 못쓰다가 여기 가 재개발된다고 해서 더 늦기 전에 시간 내서 왔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가 이곳에서 하는 일에 대해 자초지종을 말씀드리자 그분이 묻지도 않았는데 불쑥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 정구중 가옥을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가 지으셨어요. 네? 정말인가요?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한테 직접 들은 얘깁니다. 그럼 저 집이 역사가 어느 정도나 되나요? 1910년대 전후일 거예요.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경술국치 되기 전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분은 연세가 대략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거짓말을 할 분으로는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시기적으로 대략 그분이 태어난 해를 6 25 전후로 보면 그분의 할아버지가 그 집 을 지었다는 계산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에게 궁금한 것들을 여쭈 어 보았습니다. 그 옛날, 제가 할아버지에게 궁금한 나머지 여러 질문을 던졌던 것처럼. 선생님 혹시 저 정구중 가옥에 대해서 알고 계신 것 있으면 좀 말씀해주세요. 저게 원래 우리 집이었는데 나중에 다른 사람한테 넘어간 거에요. 1963년도에 저 집을 매입 한 정구중씨라는 분은 국회의원을 하셨던 분입니다. 국정교과서 사장도 지내시고 그러다 내외 분이 모두 미국으로 가셔서 얼마 전에 돌아가신 걸로 알고 있어요. 지금 저 집은 아마 후손들 이 물려받았을 겁니다. 말하자면 100년을 내려오면서 주인이 바뀐 셈이었습니다. 정확히 중간에 소유주가 몇 번 바 뀌었는가 하는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분명한 건 지금 소유주는 정구중씨의 후손인 것 만은 분명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저 집 지으면서 대들보 얹을 적에 금화를 아무도 몰래 숨겨놓으셨다고 하 더라고요. 귀가 솔깃해지는 얘기였습니다. 왜 그러셨는지 혹시 아세요? 한옥은 시간이 지나면 개보수를 해야 하는데 한번 손대면 돈이 많이 들어가니까 아마 그때 를 위해서 나중에 좀 보태 쓰라는 차원에서 미리 앞을 내다보시고 그렇게 하신 걸로 알고 있 어요. 그게 바로 우리 조상님들 지혜겠죠. 책에서 그 비슷한 예를 본 적이 있어서 이해가 되기는 했으나 실제로 그런 사례를 눈으로 목 격하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럼 그때 할아버지께서 숨겨두신 금화가 어떻게 됐는 지 아시느냐고 조금 속물스런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 6 -

아무도 몰라요. 대들보나 종장여나 종보에 홈을 파고 넣은 게 아니라 기둥 안쪽에 놓고 그 위에다 그대로 대들보를 얹었으니까 집을 해체하지 않는 이상은 그걸 꺼낼 수가 없지요. 중간 에 한번 개보수를 한 적이 있는데 대들보는 건드릴 수가 없으니 그런 내막이 있는 줄은 아무 도 모를 겁니다. 순간 저는 그것이 만에 하나 집이 오랜 세월이 지나 해체될 때를 대비한 건축주의 배려가 아 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그럼 선생님 명의로 되어 있는 이 집도 할아버지께서 지으신 건가요? 저는 응당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대답은 저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이 집은 광해군 때 지은 겁니다. 네? 광해군이요? 인조반정으로 왕좌에서 물러난 그 광해군이요? 이종윤, 점잖게 생긴 그 인텔리 신사분은 묵묵히 그렇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정 말로 세상에 맙소사 나였습니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한옥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전통 건 축물 가운데 궁궐과 사찰 그리고 향교 관련 건물을 제외하고 살림집인 반가( 班 家 )와 민가( 民 家 ) 가운데 그 연대가 아무리 높아도 300년을 넘기는 것이 거의 없는데 무려 400년 전의 집 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에 대해서 전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그건 비단 저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닐 거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단히 애석하게도 그 집은 외형으로 보나 뭐로 보나 집 같지가 않았습니다. 낡고 무너질 대로 무너져 무슨 철거 직전의 무허가 판잣집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 마도 그게 함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허르스름함 때문에 우리나라의 문화재 위원들이 문 화재는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민속자료로라도 지정할 수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알 수 없는 흥분과 설렘으로 저는 그분에게 양해를 얻어 400년 된 집의 사실 여 부를 확인하기 위해 증거가 될 수 있는 상량문을 찾아보려 했으나 오랜 세월 동안 집 이곳저 곳에 구조적인 변화가 일어난 데다 연등천장을 가리기 위해 반자로 천정을 해 둔 곳에 종이가 수십 겹 발라져 있어서 끝내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설령 상량문의 흔적을 발견했 다 해도 묵서( 墨 書 )가 얼마나 온전하게 남아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어서 결국 포기하고 말 았습니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더라면 좀 더 차분하게 조사해볼 수 있을 텐데 철거시한 때문 에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제가 용강동에서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가며 우리 것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한 그 밑 바탕에는 사실 다름 아닌 상량문 가운데 광무( 光 武 )나 융희( 隆 熙 )라고 적혀있는 대들보나 종 장여를 찾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현동에서 제가 해체한 집의 상량문은 < 龍 昭 和 十 六 年 十 月 八 日 辰 時 立 柱 上 樑 龜 >이었습니다. 昭 和 라는 그 글자를 본 순간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 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우리의 전통 건축 양식인 한옥의 상량문에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연 호가 버젓이 자리하고 70년 가까운 세월을 버텨 온 것에 대해서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느낌 이 들었던 것입니다. 우리 고유의 것, 우리의 문화가 상처 입은 역사에 의한 굴레를 뒤집어쓰 고 아직 현재진행형으로 그 잔재가 21세기에도 유효함을 목격한 순간 저는 우리의 것을 우리 손으로 꼭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너무나 당연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용강동에서 한 가닥의 희망을 걸었던 것인데 불행하게도 이곳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상량문이 발견된 것은 불과 2개인데 전부 다 昭 和 였습니다. - 7 -

역사적으로 고종 임금이 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대한제국을 세우신 후 일본에 의해 국권을 빼앗기기 전까지의 기간은 1897년부터 1910년까지 전부 합해야 14년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 기간이 대한제국이 존재했던 시간 전부입니다. 바꿔 말하면 그 이전에 지어진 집 들은 연호가 청나라의 것으로 되어 있고 그 이후에 지은 집들은 일제의 연호인 明 治 나 大 正 혹은 昭 和 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상량문에 광무나 융희를 쓸 수 있었던 집은 시기적 으로 1897년에서 1910년 사이에 지어진 집 이외에는 볼 수가 없는 셈이죠. 제가 어린 시절 할아버지를 따라 용강동으로 나들이 왔다가 우연히 정구중 가옥을 보고 알 수 없는 관심을 두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훗날 그 주변의 한옥들을 해체 철거하는 일을 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때와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 나이 든 제게 있어서의 관심은 아주 구체적이라는 것입니다. 400년 전 광해군 당시에 지어졌다는 집도 설령 상량문이 온전하게 남아있었다 하더라도 그 당시 우리나라가 명나라와 조공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연호가 명나라의 것을 사용했으니 연대만 오래되었을 뿐 우리나라가 자주 독립 국이라는 것을 증명할만한 것은 못 되는 형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하나, 민 속자료로 지정되어 보존 중인 정구중 가옥뿐입니다. 제가 당시 거기에 한 가닥 희망을 가졌던 이유는 바로 다름 아닌 그분을 통해 들은 집의 내력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 정구중 가옥은 관련 자료를 이것저것 찾아보니 두산 백과에 나오기를 구한말에 용강 동의 부농 이 某 씨가 무남독녀에게 주기 위해 당시 장안에서 이름난 목수 안영달을 시켜 지었 다고 나와 있더군요. 그러나 그건 잘못된 기록입니다. 그 후에 아드님이 태어나셨고 이종윤님 이 그분의 손자가 되시기 때문인 거죠. 어쨌거나 이 선생님의 할아버지가 건축주가 되는 셈이 고 안영달은 대목이 되는 것이 맞습니다. 더불어 기록에는 건축 시기가 구한말이라고 되어 있 으니 분명 일제 강점기가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문화재청의 기록에 의하면 1920년대의 개량 한옥으로 되어 있어서 두산 백과의 기술 내용과 다릅니다. 이에 제가 문화재청에 문의해 확인한 결과, 1977년에 문화재 위원들이 조사 하면서 [ 民 家 로서 기둥치수가 밑 일변이 7 寸 각이고 上 일변은 6 寸 각인 것과 기둥 높이가 높은 편이고 私 家 로서 굴도리를 쓴 예와 도로변의 처마 내밀기가 짧게 된 것 등으로 미루어 볼 때 70 年 前 건물로 口 傳 되어온 것과는 달리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 건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제일 중요한 상량문에 관한 어떤 기록도 없습니 다. 아마 상량문이 있었다면 당시 문화재 위원들이 그것을 확인하고 분명히 건축 연대를 확실 하게 기재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저 상량문이 처음부터 없거나 중간에 어떤 이유로 없어져 버 린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만 할 뿐입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참으로 미스테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건축 년대에 대해 과연 어느 것이 진실인가를 끝내 알 수가 없게 돼버리고 만 저는 며칠 후 조촐하나마 술과 약간의 음식을 마련해 현장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자리를 펴고 정구중 가옥을 비롯한 재개발 현장 내의 모든 철거 대상인 한옥과 과거 그곳에서 잠시라도 몸담으며 풍진 세 상의 희로애락을 엮어낸 분들의 소소한 개인사가 남아있는 아름다운 추억을 위해서 고사를 지 - 8 -

냈습니다. 그게 제가, 암울했던 시기를 지나온 우리 역사를 견디며 자신의 품 안에 서민들을 따뜻하게 보호해준, 사라져가는 전통 건축에 대해서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고 예의였습 니다.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 의해서 어쩔 수 그 모든 것을 다 보존하지 못하고 기록하지 못하 고 그대로 떠나보내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 전통 건축에 대해 관심을 두는 한 사람으로서 무척이나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나마 정구중 가옥만이라도 온전하게 남아 있다는 것이 제겐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비록 제가 내심 바라던 광무나 융희의 흔적은 찾지 못했지만 저는 결코 그러한 노력이 헛된 것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형태를 갖춘 물질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형의 정신이기 때문입 니다. 2011년 10월부터 2012년 1월 초까지 약 3개월 동안 그곳을 구석구석 누비면서 제가 얻 은 최대의 수확은 바로 그것입니다. 비록 흔적을 통해서이긴 하나 우리 조상의 지혜와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정구중 가옥이 바로 그 버팀목으로 꿋꿋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에 저는 그것을 전하는 길은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의 기록은 어떻게 보면 작고 보잘것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 나 정구중 가옥에 대한 누군가의 특별하고 의미 있는 기억이 남아있는 한 그것은 미래를 위한 씨앗이 되어 언젠가 때가 되면 정서적으로 더 나아가서는 문화적으로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는 토대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자부심이 바로 우리 문화를 지금까 지 이어온 뿌리가 아닐까 생각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 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