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화교의 어제와 오늘 34 정착부흥기 35 정착부흥기: 1884년 ~ 1940년 이 장에서는 인천 차이나타운에 1884년 청국조계지가 설정된 후로 유입 된 인천 화교들의 생활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기별로 정리하였다. 조사팀은 시기를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하였다. 첫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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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시험지 출제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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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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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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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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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제1장 마을유래 605 촌, 천방, 큰동네, 건너각단과 같은 자연부락을 합하여 마을명을 북송리(北松里)라 하 였다. 2006년에 천연기념물 468호로 지정되었다. 큰마을 마을에 있던 이득강 군수와 지홍관 군수의 선정비는 1990년대 중반 영일민속박물 관으로 옮겼다.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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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서부신개발지역 12월 건설교통부로부터 지구지정을 받아 2006년에 착공, 2011년 준공하였으며 이후 1단계의 개 발 성과에 따라 2, 3단계 지역도 단계적으로 개발을 추진할 계획이다. 서남부권 개발은 광역중심기능을 갖춘 새로운 자원의 미래형 혁신도시 건설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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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민락초신문4호


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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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부산연주문화\(김창욱\)

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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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은이가 4) ᄀ에 5) 위 어져야 하는 것이야. 5 동원 : 항상 성실한 삶의 자세를 지녀야 해. 에는 민중의 소망과 언어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입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가능성은 이처럼 과거를 뛰어넘고, 사회의 벽을 뛰어넘고, 드디어 자기를 뛰어넘 는

참고 금융분야 개인정보보호 가이드라인 1. 개인정보보호 관계 법령 개인정보 보호법 시행령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령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전자금융거래법 시행령 은행법 시행령 보험업법 시행령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시행령 자본시장과

행당중학교 감사 7급 ~ 성동구 왕십리로 189-2호선 한양대역 4번출구에서 도보로 3-4분 6721 윤중중학교 감사 7급 ~ 영등포구 여의동로 3길3 용강중학교 일반행정 9급 ~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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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 인물 강순( 康 純 1390(공양왕 2) 1468(예종 즉위년 ) 조선 초기의 명장.본관은 신천( 信 川 ).자는 태초( 太 初 ).시호는 장민( 莊 愍 ).보령현 지내리( 保 寧 縣 池 內 里,지금의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에서 출생하였다.아버지는 통훈대부 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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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은하 1 우리 은하 위 : 나선형 옆 : 볼록한 원반형 태양은 은하핵으로부터 3만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 2 은하의 분류 규칙적인 모양의 유무 타원은하, 나선은하와 타원은하 나선팔의 유무 타원은하와 나선 은하 막대 모양 구조의 유무 정상나선은하와 막대나선은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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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 환경정책 형산강살리기 수중정화활동 지원 10,000,000원*90%<절감> 형산강살리기 환경정화 및 감시활동 5,000,000원*90%<절감> 9,000 4, 민간행사보조 9,000 10,000 1,000 자연보호기념식 및 백일장(사생,서예)대회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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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오스본을 중심으로 한 작은 정부, 시장 개혁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에 대응 하여 노동당은 보수당과 극명히 반대되는 정강 정책을 내세웠다. 영국의 정치 상황은 새누리당과 더불어 민주당, 국민의당이 서로 경제 민주화 와 무차별적 복지공약을 앞세우며 표를 구걸하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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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운 체계상의 특징 음운이란 언어를 구조적으로 분석할 때, 가장 작은 언어 단위이다. 즉 의미분화 를 가져오는 최소의 단위인데, 일반적으로 자음, 모음, 반모음 등의 분절음과 음장 (소리의 길이), 성조(소리의 높낮이) 등의 비분절음들이 있다. 금산방언에서는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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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스님의 이 달의 법문 성철 큰스님 기념관 불사를 회향하면서 20여 년 전 성철 큰스님 사리탑을 건립하려고 중국 석굴답사 연구팀을 따라 중국 불교성지를 탐방하였습 니다. 대동의 운강석굴, 용문석굴, 공의석굴, 맥적산석 굴, 대족석굴, 티벳 라싸의 포탈라궁과 주변의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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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초기 도읍은 위례성( 慰 禮 城 )이다. 위례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책에 실려 있는데, 대부분 조선시대에 편 찬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 도 백제가 멸망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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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화교의 어제와 오늘

인천 화교의 어제와 오늘 34 정착부흥기 35 정착부흥기: 1884년 ~ 1940년 이 장에서는 인천 차이나타운에 1884년 청국조계지가 설정된 후로 유입 된 인천 화교들의 생활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기별로 정리하였다. 조사팀은 시기를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하였다. 첫 번째 시기는 1884년부터 1940년 까 지를 구분하여 정착 부흥기 라 하였다. 이 시기 내에서도 중흥과 쇠퇴를 반 복하였지만, 130년을 전체로 보고 현재를 살아가는 화교들의 생활사에 중 점을 둔 관점에서 구분하였다. 두 번째 시기는 광복 이후부터 1990년대까지 를 구분하였다. 이는 세 번째 시기와도 그 기간이 같다. 똑같은 시기를 두고 두 가지로 분류하여 다루었다. 하나는 쇠퇴기이며, 다른 하나는 적응기이다.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주어진 조건이 열악하여 제도적으로 불이익을 받았 던 기간이기에 쇠퇴기 라 하였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주어진 조건 내에서 좌절하지 않고 해외로의 이주 및 취업을 통해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왔기에 적응기 로도 구분하였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시기는 1990년도부터 현재까 지로서 재정착기 로 구분하였다. 이 시기에는 여러 규제가 풀렸고 영주권도 생기는 등의 많은 변화가 있었다. 또한 다문화특구 조성 사업 등의 영향으로 해택을 받고 있기도 하다.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시기인 것이다. 1883 1884 1885 1886 1891 1892 재한화교의 수 209 354 700 468 1,489 1,805 수 54 136 50 205 563 637 인천화교 비율 25.8 38.4 7.1 43.8 37.8 35.3 (표1) 1883~1909년 在 韓 華 僑, 仁 川 華 僑 의 증가 1 일본조계지역 청일조계 경계지역(인천 중구청 사진제공) 1893 1906 1907 1908 1909 2,182 3,661 7,902 9,978 6,568 711 1,254 1,654 2,255 2,069 32.6 34.3 20.9 22.6 31.5 1) 상공화교의 정착 부흥 1882년 임오군란 때에, 조선정부의 참전 요 청에 의해 이홍장( 李 鴻 章 )의 청나라 군대가 인 천에 주둔하였는데, 이때 함께 따라온 상공화 교 40명이 한국의 첫 화교이다. 이후 조청상민 수륙무역장정( 朝 淸 商 民 水 陸 貿 易 章 程 ) 2 이 체 결되고, 1884년 4월, 현재의 차이나타운에 청 국조계지를 설정하였다. 현재의 인천 북성동 일대 5천평 토지에 중국 조계지가 세워졌으며, 중국의 조계지가 생긴 후 중국의 건축 방식을 본뜬 건물이 많이 세워졌다. 이곳이 오늘날 우 1890년대 제물포(인천 중구청 사진제공) 리가 말하는 차이나타운 의 최초 형태이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서는 치외법권과 내지통상권, 연안어업권 그리고 청군함의 연안항해권을 보장하 였다. 사실상 조선 땅 내에 청나라의 무역 전진기지를 마련한 셈이다. 인천에 조계 지역이 설립되면서, 인천과 뱃길이 트인 산동성에서 인천 은 돈벌이가 잘되는 곳으로 소문이 퍼져 많은 산동인들이 서해를 건너왔다. 화교의 수는 급증하여 1883년 48명이던 화교가 1년 후에는 5배에 가까운 235명으로 늘어났고 1890년에는 약 1천명에 이르렀다. 이들 대부분은 인 천을 상업 활동의 중심으로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중국에서 수입한 비단, 광목, 농수산품 및 경공업품 등 식료 잡화를 팔고 다시 조선의 사금 등을 중 국에 보내는 방식으로 무역을 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장의 전반적인 상 권을 장악하였다. 장기 거주를 목적으로 인천에 상가 건물이나 주거할 집 을 지을 필요가 생겨 중국식 건축에 필요한 목수, 기와공, 미장공들도 인천 에 들어오게 되었다. 1. 김승욱, 20세기 초(1910~1931) 인천화교의 이 주 네트워크와 사회적 공간, 중국근현대사연구 47집, 중국근현대사학회, 2010, 24쪽 재인용. 2. 이는 평등한 두 나라간의 대등한 조약이 아니라 청이 일방적으로 공포하는 장정 형식으로 조선 정부의 비준조차 생략한 것이었다. 장정은 종속 관계의 증거가 되어 청이 조선문제에 적극적으 로 간섭하는 계기가 되었고 내용이나 성격에 있 어서 서방열강이 당시 중국이나 일본에 강요했 던 불평등조약이나 한 일간의 강화도조약과 유 사한 것이었다.

인천 화교의 어제와 오늘 36 정착부흥기 37 2) 청일전쟁과 상공화교의 후퇴 1885년 청일전쟁의 패전은 조선에서 청나라의 위상을 위축시켰다. 정 치적 지위와 더불어 여러 면에서 일본에게 우위를 빼앗겼으며 청국에서 온 화교들은 패전 국민으로 전락하였다. 청국 상인들도 청일전쟁 이후 인천을 떠났으며 청국조계지는 점차 쇠락해 갔다. 이 시기에 일본 정부의 요청으로 조선 정부는 조청통상무역조약의 폐기 성명을 발표했고, 청국조계지는 법 적 근거를 상실했다. 그러나 양국 간의 전통적인 우호관계로 말미암아 전쟁 후에도 사실상 이전과 같은 조계지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3 3) 생계형 농공화교의 이주 청일전쟁 패전 후 무역업을 하던 상공화교들이 청국으로 돌아가면서 청 국조계지는 전처럼 많은 재화가 유통되는 곳이 아니었다. 무역업을 중심으 로 형성되었던 이른바 신도시 는 쇄락의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조계지 내에 서 무역업의 활성화에 기대어 살아가던 3차 산업 종사자들 역시 인천을 떠 났다. 4 이후 1887년에 산동 연태지방에 살던 왕씨와 강씨가 채소 종자를 들여 와 채소 농사를 시작하였다. 배추, 파, 오이, 고추, 중국 미나리, 시금치와 당 시 조선에서 보기 힘들었던 양파, 당근, 토마토 등을 재배하였다. 이후 1920 년대에는 일본에 의해 산둥지역의 농부들이 한국으로 이주하였다. 채소농 사 기술이 없던 조선에 이주시킨 농사 용병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 시기 산둥지역의 대홍수는 많은 중국인들의 조선이주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 었다. 이렇게하여 조선드림을 안고 인천을 찾은 이들이 생계형 농공화교들 이다. 현재 인천 차이나타운에 살고 있는 대다수 화교들의 선조들 역시 이 시기 1920년대 제물포항 전경(인천 중구청 사진제공) 3. 인천 화교 사회의 형성과 전개, 인천문화재단, 2008, 90쪽. 4. 그러나 모든 무역상들이 떠난 것은 아니고, 남아 있던 화교 무역상들은 1940년대까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며 호황을 누렸다. 에 조선으로 이주하였다. 농사를 기반으로 생업을 이어갔기에 경제력에 있 어 1880년대 초중반 무역업을 했던 상공화교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4) 만보산 사건( 萬 寶 山 事 件 ) 만보산 사건은 1931년 7월 2일 중국 길림성 장춘 만보산지역에서 한 중 두 나라 농민 사이에 수로공사 문제로 일어난 분쟁이다. 이 사건은 국내 에 과장 보도되어 한국내 반중 감정을 북돋았고 급기야 유혈사태로 번졌 다. 한국인들은 화교촌으로 몰려가 음식점과 집, 이발소, 호떡집 등을 습격 하여 유리창을 깨는 등 소란을 피웠고 중국인 집 68호와 각종 기물을 파괴 하였다. 각종 유언비어 등으로 사건에 대한 소문은 일파만파 커져갔고 급기 야 부평에서는 중국인 2명이 피살되고, 한국인이 부상을 입는 사건도 일어 났다. 사태가 이처럼 악화되자 인천경찰서는 중국인 거리를 통행하거나 중 국인을 습격하는 행동을 취할 때는 용서 없이 발포하겠다고 인천시민들을 위협하기도 했다. 이 만보산 사건의 충격은 화교들에게 여전히 각인되어 있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차이나타운에 한국 사람이 오는 것을, 화교 노인들은 썩 좋아하지 않았다. 실제로 만보산사건을 직접 겪은 세대는 아니라 할지라도, 만보산 사건은 화교들에게 많은 상처를 남겼다. 일본 영사관(인천 중구청 사진제공) 인천 제물포 각국 조계지도(인천 중구청 사진제공)

인천 화교의 어제와 오늘 38 정착부흥기 39 만보산 사건때 군산으로 피신을 간 화교들(인천 중구청 사진제공) 만보산 사건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을 계기로 일본인 대지주가 증가한 반면, 조선 의 많은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생활은 극도로 비참해졌다. 이 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만주나 일본으로 이주하는 사람들도 증가하 기 시작했다. 1927년 56만 명 정도이던 만주의 이민수는 1936년 89만 명으로 급속히 증가했다. 만주로 간 농민들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했 지만 궁핍한 생활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만보산 사건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일어났다. 완바오 산은 지린 성 창춘[ 長 春 ]에서 서북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1931년 4월 창춘 와세다 공사[ 早 稻 田 公 司 ]의 경리 하오융더[ 郝 永 德 ]가 이퉁허[ 伊 通 河 ]기슭에 있는 완바오 산 지역의 미개간지 약 3ha를 차지( 借 地 )한 것을 다시 조선농민 이승훈 ( 李 昇 薰 ) 등 8명이 10년 기한으로 조차계약을 맺어 개간했다. 이때 조 선농민 180여 명을 동원해 수로공사를 진행하자 부근에 거주하고 있던 토착 중국농민들이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로 양국 농민간에 감정적 대립이 생기기는 했으나, 그다지 심각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 에 능히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간섭으로 사건은 더욱 악화되 었다. 일본 영사관은 중국 농민측의 불만을 무시한 채 순박한 우리 농민 들을 교활하게 조종하면서 일본 관헌들을 믿고 그대로 공사를 강행하 라고 부추겼다. 중국측은 5월 31일 200명의 보안대를 파견해 공사를 곧 중지하라고 권고하다가 한인 9명을 체포했다. 이에 대해 일본의 다다이 [ 田 代 ] 영사는 체포한 농민을 즉시 석방할 것을 요구하면서, 6월 2일 영 사관 경찰관을 직접 파견했다. 이리하여 우리 농민들은 이들의 보호하 에 공사를 계속하도록 조종되었다. 이 조치는 중국측을 자극해서 중 일 쌍방의 무장경관이 대치하는 상태까지 되었으며, 6월 8일 임시협정 으로 쌍방의 경관이 철수한 후 공동조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같은 달 12일 일본측은 협정을 어기고 다시 경관을 파견해 그 보호 아래 공사를 강행하게 했다. 이리하여 6월 하순에 이퉁허 제방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는데, 이것을 본 완바우 산 일대의 중국농민 약 500여 명은 7월 1일 농기구를 가지고 모여 용수로를 막은 제방을 파괴 했다. 다음날 중국인 농민과 중국 경관 300명이 다시 모였으나 우리 농 민들은 일본의 무력만 믿고 수로복구와 제방공사를 계속 진행시켜 7월 11일 물길이 통하게 되었다. 일본 관헌의 이러한 행위는 진심으로 우리 농민을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었으며, 음흉한 속셈을 지닌 계획적 행동 이었다. 7월 1일과 2일의 충돌에서 조선농민은 사상자가 없었으며, 중 국농민에게서만 약간의 부상자가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특무기관에 조작기사를 제공해 경성일보 에 사건을 대대적으로 확대 보도하게 했 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 반( 反 )중국적 감정이 유발되었으며, 인천 평 양 서울 등지에서 수천 명의 한국인이 중국인을 습격하는 사태가 발 생했다. 일본 영사관은 신문기자를 매수해 특무기관에서 만든 만보산 사건에 관한 기사를 그대로 국내신문에 게재하게 해 일부 조선인으로 하여금 중국인에 대한 분별없는 폭력행위를 일으키도록 했다. 더 나아 가 국내의 일제경찰은 일부 조선인 불량배를 금품으로 매수해 범죄행 위를 조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곧 국내 동아일보 에 만보산 사건이라 는 것이 별로 대단하지 않은 것이라고 보도되면서 수습되었으며, 일제 의 음모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때 국민당 정부의 장제스[ 蔣 介 石 ]는 동 아일보사에 한 중 우호를 다짐하는 감사패를 전달하기까지 했다. 한때 이 사건은 조선농민 대 중국농민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일본 대 중국의 국제문제로까지 확대되었다. 이에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신문사에서 진상조사에 나선 결과, 이 사건의 배후에 중국의 주권 을 무시하는 일본의 침략음모가 숨어 있다는 점, 이 사건이 일본의 모략 과 과장선전으로 인해 확대되었다는 점이 밝혀졌다. 이 보도과정에서 동아일보의 장덕준( 張 德 俊 ) 특파원이 일본 관헌에게 피살, 행방불명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실제로 국제연맹의 조사보고서도 만보산 사 건이 사실보다 너무 과장되었다고 발표했다. 즉 아무런 사상자도 내지 청국 영사관(인천 중구청 사진제공)

인천 화교의 어제와 오늘 40 쇠퇴기 41 않은 이 사건을 과장 보도함으로써 한 중 양국민 사이에 강렬한 반감 이 생겼으며, 조선에서는 한인에 의한 화교습격 사건이 일어났고, 중국 에서는 배일운동을 재발시키게 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으로 한국인의 항일의식을 반( 反 )중국인 감정으로 쏠리게 했으며, 한 중 양국민의 공 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연대의식을 약화시키려고 했다. 또한 한 중 사이의 민족감정을 자극해 두 민족을 분열시키고, 만주사변을 일으키는 데 이용하고자 했다. 5 쇠퇴기: 광복이후 ~ 1990년대 5. 만보산 사건, 한국브리테니커 온라인 1) 광복과 화교 견제정책 1948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정책의 모든 방향이 한국의 기틀을 세우는 것 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해 바로 외국인 출입을 규제하였다. 이로 인해 화교들은 무역의 기반이었던 중국과의 교역 이 끊겼으며, 고향집에도 갈 수 없게 되었다. 출입규제에 이어 같은 해에 외 국인 외환규제도 실시되었다. 이는 자국의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돈을 관리하기 위함이었지만, 화교 무역상들에게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이로 인해 화교들은 은행에서 환전이 불가능해졌다. 어쩔 수 없 이 공식 환율보다 세 네배 비싼 암시장에서 외환거래를 해야만 했다. 한국 기업보다 2배의 실적을 올렸다고 할지라도 외환거래에서 입는 손실을 따져 보면 실제적인 수입은 한국기업보다 적을 수 밖에 없었다. 6 이후 1950년 자 유당 정부가 6.25 직전, 전국에 외래상품 불법 수입을 금한다는 명목으로 외 국인에 대한 창고 봉쇄 조치를 내렸다. 물건을 대량으로 사두었다가 적절한 시기에 매매하는 방식으로 이득을 취하는 화교 무역상들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조치였다. 수색대원으로 활동한 화교들(인천 중구청 사진제공) 2) 한국전쟁과 화교 수색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당시 인천항과 차이나타운이 위치한 지역은 미군 함대의 표적이었다. 실제로 전쟁 기간 동안 인천 일대 는 격전지였으며, 총알과 포탄이 날아다녔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공군들 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종전 후, 화교들은 이웃들로부터 따가운 시 선을 받아야만 했다. 화교들은 전쟁 기간에 부산, 성남, 수원 등지로 피난을 갔지만 참전하여 척후병( 斥 候 兵 )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인천항(인천 중구청 사진제공) 6. 화교이야기. 2009. 인천대학교출판부. 71쪽.

인천 화교의 어제와 오늘 42 쇠퇴기 43 를 몰수당하지 않고 지켜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사기와 배신 등으로 경작지의 소유권을 잃어버리는 사건이 빈번하였다. 이 시기에 사실 상 화교들의 채소농사는 막을 내렸다. 이후, 1968년에는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법이 변경되어, 1가구에 1주택 1점포만 허용되었고, 주택 면적은 200 평 이하, 점포는 50평 이하 내에서 사전신고로만 취득이 가능했다. 또한 취 득한 토지의 건물은 자신만 사용하고 타인에게 임대할 수 없었다. 논밭이나 임야의 취득도 불가능하였다. 또한 자유당 정권과 박정희 정권 아래 두 번(1953년, 1962년)의 화폐 개 혁이 있었다. 이는 재산을 주로 현금으로 가지고 있던 화교들에게는 타격이 폐허가 된 답동성당(인천 중구청 사진제공) 화교수색대 인천 상륙작전(인천 중구청 사진제공) 컸다. 교환 한도를 제한하여 손해를 보는 화교들이 많았다. 땀 흘려 번 돈이 하루 아침에 휴지조각이 되고 만 것이다. 그 외에도 중국음식점에 대하여 음식 값을 통제하기도 하였다. 1970년 짜장면 값을 동결시켰으며, 절미운동을 이유로 중식당에서만 쌀밥을 판매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거센 항의로 3개월 만에 해제되긴 하였지만, 이 시기 중공군과 싸우려면 중국말을 하는 병사가 필요하다면서, 한국에 사 는 중국 화교들을 끌어 모아 약 50명으로 구성된 수색대를 편성했다. 그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그들은 적진에 들어가 중공군과 관련된 정 보를 수집했다. 수색작전 중 포로를 붙잡아 오기도 했다. 작전 중 전사한 수색대 용사들 중에는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힌 사람도 있다. 용인에서 붙잡혀 온 중공군 포로를 신문하다가 나는 귀에 익은 이 름을 듣고 놀랐다. 중공군 38군 113사단 소속 포로 한 사람은 자기 부 대 사단장이 왕가선이고, 연대장은 부연화라고 진술했다. 만군대령 출 신인 왕 은 전술가로 유명했고, 부 는 나의 만주군관학교 시절 구대장 이었다. 만군 출신들이 일본 패망 후 소련군 또는 국부군에 투항했다 가 중공군으로 편입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포로들이 말하는 중공군의 실상은 처참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추위 와 허기를 호소했다. 사흘을 싸우고 사흘을 굶었다고 했다. 무명으로 된 군복은 땀에 젖었다가, 얼기를 되풀이해 모두가 동상에 걸려 있었다. 장 티푸스 같은 전염병에 걸린 병사도 많았다. 중공군의 그런 몰골은 우리 병사들에게 자신감을 회복시켜 줬다. 신출귀몰한다는 중공군도 별것 아니구나 싶었던 것이다. 7 3) 토지소유 금지와 화폐 개혁 1961년에는 외국인에 대한 토지 소유를 금지시켰다. 채소농사를 짓던 경작지를 소유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한국인의 명의를 빌려 토지 7. 국방일보 기획시리즈, 그때 그 이야기- 노병 이 걸어온 길 - 65 중동부 전선의 불행-, 2008. 8. 27. 인천 상륙작전 당시의 해안(인천 중구청 사진제공)

인천 화교의 어제와 오늘 44 적응기 45 에 중국음식점에서는 볶음밥을 팔지 못하였다. 일부 화교들 중에는 이 기간 에 밥을 판매하여 영업정지를 당하기도 하였다. 적응기: 광복 이후 ~ 1990년대 4) 국제 난민 인천의 화교 어르신들은 그 시기 우리는 국제적 난민이었다. 라고 회상 한다. 한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출입국 시 비자가 필요했다. 심지어는 국적 이 대만이었지만 대만 입국에도 비자가 필요했다. 화교 어르신들은 그 시기 를 떠올리며 30년 이상을 한국에서 살아왔지만, 바로 어제 공항에 내린 외 국인과 똑같은 신세 라며 한탄했다. 당시 한국에는 영주권 제도가 없었기에 화교들은 외국인 출입관리법 을 따라야 했다. 외국인은 거주자와 비거주 자로 분류되고, 거주자는 2년에 한번 비자를 받아야 했다. 1997년부터 그것 이 5년에 한번으로 바뀌어 다소 사정이 나아졌다. 재입국제도도 현재는 복수로 되어있어 1년에 여러번 출입국이 가능하 나 당시에는 단수이며, 기한 내에 반드시 돌아와야 거주자 자격을 유지하게 끔 되어 있었다. 그래서 화교들이 이른바 보따리장사로 해외에 다니다가 기 한 내에 재입국을 하지 못해 거주권을 포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대만 으로 유학간 화교학생이 재입국 기간을 넘겨 거주권을 상실하는 경우도 드 물지 않았다. 수십 년을 살아도, 어제 방금 공항에 내린 외국인과 똑같은 신세라고. 여행이라도 갈라 면 미리 재입국허가를 받아야 하는 거야. 완전 웃긴 거지. 나는 약재 구하러 자주 나가야 되는 데 이건 뭐 그때마다 다시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야 되는거라고. 출입국 대에서도 다 나만 쳐다보는 것 같고 그래서 창피하고. 하여튼 외국에 나갈때마다 들어올때마다 기분이 안 좋지.(김보운, 남, 1958년 생) 1) 꽌시[ 關 係 ]와 후이[ 會 ] 토지소유가 제한되고, 은행거래를 원활하게 할 수 없었던 화교들은 당 장 목돈을 마련할 방법이 없었기에 창업을 하는 것도 힘들었다. 이러한 조 건 하에서 화교들을 본인들끼리 네트워크를 동원하여 이 시기를 극복하려 애썼다. 창업을 해야 하는 데 창업자금이 필요하잖아요. 어디서 나요? 은행거래가 안 되니까. 그 래서 후이( 會 )라는 게 나온거에요. 돈이 필요하면 원로를 찾아가요. 거기서는 어떤 식이냐. 사부와 제자 식으로. 대부같은거지. 내 제자라고 데리고 사부를 찾아가요. 사부는 거의 다 원 로에요. 사부가 원로가 아니면 사부의 사부가 여기 원로에요. 아 그래. 그놈 어떠냐? 됨됨 이가 괜찮다. 착실하다. 열심히 할 거다. 일종의 신용보증을 서는 거에요. 얼마 필요하냐? 아 그래서 1억이라 그러면, 너 한 달에 얼마 갚을 수 있을 것 같애? 어. 한 달에 500 갚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이 원로가 스무 명을 찾아요. 너희들 500씩 내라. 빌려줘. 이자 없어요. 기껏해야 술 한자리 밥 한 끼 감사합니다. 하고 사는 거에요. 사업설명회식으로 다 짐 하는거에요. 빌려주는 거야. 아무 이자 없이.(서학보, 남, 1959년 생) 우리 중국 계가 있어요. 그 계모임이 낙찰계란 말이야. 내가 장사를 해야 되는데 돈이 없 다. 자금이 모자라다 그러면 친구들한테 다 빌려. 천만 원짜리. 지금 하는거는 거의 오백 있고 삼백 있고 천만 원짜리 있어요. 한 명에 그만큼씩 출자해주는 거지. 회원들이 다 그 돈을 주 는거야. 삼백을 다. 10명이면 10명 20명이면 20명. 5백짜리면 20명이면 1억 아니야. 1억을 갖다가 도와주는데 거기서 이자를 띠어줘. 옛날에는 한턱을 냈어. 음식점에서 잔치상을 채려 주고 한턱 맥여. 근데 나중에 인제 시간없으까는 에이 거기서 3부이자 띠어주자 2부이자 띠 어주자 해가지고 천만 원에서 2부이자 띠어주는거야. 액수가 많을수록 이자가 작게 2부로. 액수가 적으면 3부로. 이렇게. (유천해, 남, 1954년 생) 친구끼리니까 다 아는사이니까. 하나 들어줘 부탁하면. 하는 거지. 어쩌다 장사안되가지 고 망한사람도 있어. 그럴 경우에는 선언을 해. 내가 이거 먹고 도망가지 않고 내가 천천히 갚 겠다. 생기는데로 내가 갚겠다. 그때는 스톱되는거야. 그런 경우도 있고. 친구끼리니까는 야

인천 화교의 어제와 오늘 46 적응기 47 그래 너 안됐다. 천천히 갚아라 하지. 그래도 대부분 갚아요 또. 재산 있으면 집 있으면 집 팔 고서라도 갚고 그래. 어느 놈은 나쁜 놈들도 있어. 그런 놈도 몇 명 있었는데 그런 놈은 잘 살 지도 못해. (유천해, 남, 1954년 생) 그렇게 한번 하면은. 더 이상 이 동네에서 더 이상 걔 쳐다볼 사람 없어. 신용이 없어졌으 니까는. 지역에서 걔는 못살아. 저새끼 저거 사기꾼 새끼라고 그러면 짐 싸서 떠나야 돼. 지역 이 작잖어. 명예회복하려면 너무 힘들어. 한번 비틀어지면 걔는 이 동네에서 몰살당하는 거 야. (유천해, 남, 1954년 생) 지금도 해요. 공동출자 우리 지금 하는거 많아요. 며칠 전에 누가 했냐면 감사장. 저번에 계하나 묶었어. 중국집 다시 오픈할라고. 옛날부터 융자 같은거 못 받았으니까는 중국사람들 끼리 뭉쳐가지고 서로 도우면서 살아온 그런 의미가 있어요. 금융기관하고 접촉하기 힘들었 으니까. 지금도 그래요. 왠만한 담보 없으면 안 해줘. (유천해, 남, 1954년 생) 금 수준 역시 한국보다 높았다. 이 시기에 대만에 진출한 화교들은 중국어와 한국어가 모두 가능하였기 에 관광가이드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1980년대 대만을 찾는 한국인 관광 객 수가 급속도로 늘어나 가이드의 수가 부족하였고, 한국어와 중국어가 가 능한 한국의 화교들은 가이드를 하기에 적합하였다. 대만으로의 진출 못지않게 일본으로의 진출도 줄을 이었다. 1980년대부 터 1990년대까지 인천의 화교들은 일본의 요코하마, 동경, 오사카 등으로 진출해 중식당에서 일을 하기도 하였고, 빠칭코, 술집 등에서 일을 하였다. 1980년대 당시 일본의 임금은 한국의 6배 수준에 달하였다. 1980년대 한국 인 평균 월급이 20만원 안팎이었는데, 이때 당시 일본에서의 한 달 수입은 120만원에 달하였다. 내가 1986에 일본에 갔는데 그때 가와사키에서 화교가 하는 중식당에서 일했어. 시간 당 800엔을 받았는데, 일 많이 해서 한 달에 한국 돈으로 120만원 정도 벌었어. 그때 한국에 2) 외국으로 진출 한국에서 취업 등의 생업을 이어나가는데에 제도적인 제약에 부딪힌 화 교들은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화교 3세대들은 제도적 제약에 직접 적으로 부딪히는 부모를 보며 성장하였다. 음식점에 와서 횡포를 부리거나 무전취식을 하는 한국 사람들과 다투는 아버지를 보고 살았고, 무너지는 자 존심을 삭히며 조용히 눈물을 닦는 어머니를 보며 살아왔다. 또한 배달 길 에서는 한국 아저씨들로부터 짱깨, 짱꼴라 등의 말을 들으며 사춘기 청소 년의 마음에는 상처가 생겼다. 그래서 중국음식점을 개업하여 살아갈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화교 3세 대들은 왠만하면 돈을 벌기 위해 일본, 대만에 한 번씩은 다 다녀왔던 이력 을 가지고 있다. 2세대까지는 당장 생업의 현장에서 살아가며 변화하는 제도들과 맞닥 뜨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세대이다. 선택이 아닌 변화의 물결에 쓸려 흐르는 대로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화교 3세대는 다르다. 그 들이 장성하였을 즈음엔 더 이상 제도적 불이익이 악화되진 않았고, 본인의 미래에 대한 선택의 기회가 아버지 세대보다는 많았다. 이러한 이유로 화교 3세대들은 해외로 이주를 꿈꾸는 경우가 많았다. 대 만에 나가 있는 친척을 통해 일자리를 알아보기도 했으며, 자리를 잡은 친 구 선배를 따라 대만으로 나가기도 하였다. 위축되고 반항심이 익숙했던 한국에서와는 달리 반갑게 맞아주는 조국의 느낌은 편안하였다고 말하는 화교들이 많다. 인천의 화교들은 대만에 가서 식당, 공장, 일반기업, 시장 등 에서 일을 하였다. 한국보다 발전해 있던 대만은 살아가기에도 좋았으며 임 서 일하면 20만원 정도 벌었으니까, 6배 번거지. 그때만해도 일본에는 동전 넣어서 건조까지 되는 세탁기도 있었고, 자판기도 있어서 맥주도 언제든지 사먹을 수 있어서 편리하고 좋았는 데, 고향이 그립더라고. 그래서 2년 일하고 인천으로 다시 간거야. 인천 집에와서 있는데 답답하더라고. 그때만해도 여기는 9시 10시만 되도 다 문 닫고 편 의점 같은 것도 없고 그랬거든. 일본에서 편리하고 재밌게 살아봐가지고 더 답답했던 거지. 그래서 1991년에 대만으로 갔어. 가서 여기저기서 일했는데, 그때 월급이 60만원 정도 됐 어. 근데 나는 KTV노래방 같은데서 또 일해가지고 3백만원 까지 벌었어. 그때 한국에서는 40만원, 50만원 정도 벌었던 땐데. (노영, 남, 1968년 생) 이 시기 인천의 화교들은 대만, 일본 등을 오가며 국제경제 감각을 익혀, 이른바 돈 이 되는 일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소규모 무역업, 보따리상이 그것이다. 한국에서 버섯, 이불, 인삼 등을 가지고 가서 대만에서 팔았으며 대만의 옷, 소형 가전제품 등을 한국에 가져와 팔며 큰 이익을 남겼다. 1980년대 90년대에 한국에 소니, 아이와, 닌텐도 이런 제품들 있잖아. 원래 비싼데 싸게 나와서 워크맨 같은거 많이 일반화되고 그랬던 거 알지? 그게 다 화교들이 지어 나른거라고. 일제가 홍콩을 통해서 대만으로 온거를 우리가 가져 오는거야. 그게 하나당 2만원에서 3만원 남았다고. 한번에 3백개 씩만 가져와도 800만원은 되는거잖아. 그걸 한 달에 두 번만 해도 수 입이 괜찮은 거지. 그걸 한동안 꾸준히 했었어. (원소흠, 남, 1959년 생) 1950년대부터 화교들이 한국 내에서 사업이나 취업을 하기가 어려운 상 황이 지속적으로 이어지자, 인천의 화교들은 미국, 일본, 대만 등지로 아주 이주를 하는 경우도 있었고 짧게는 1년 길게는 5년 이상 취업을 나가는 경

인천 화교의 어제와 오늘 48 적응기 49 <사례 1> 우도 많았다. 제한적으로 기회가 주어진 본인들의 고향인 한국 인천에서의 상황에 적응하며 새로운 살 길을 모색한 것이다. 1986년 1988년 1991년 그때 당시 우리 화교들이 중국집 주방이나 뭐별로 할 것이 없었는데 대만하고 또 중국하 고 가까우니깐 무역, 아니 보따리지. 보따리 장사로 돈을 그때 많이 벌었다고. 그때 많이 벌 었어. (노영, 남, 1968년 생) 인천 화교중산화교 고등부 졸업 일본행 중국식당 취업 월 수입 120만(한국의 6배) 한국 귀국 백수 생활 답답한 느낌 대만행 ( 行 ) 술집, KTV 웨이터 - 변기본월급 월 60만, 팁 합산 300만 고향에 대한 향수, 귀국 결심 (당시 한국 임금은 40~50만원) 고향에 대한 향수 귀국 결심 1993년 1994년 노영(1968년 생, 주방장) 일본에서 번 돈으로 차이나타운 내 주방일 배움 5,700만원 집 구입 - 현재 송도에 있는 중화요리집 주방장 <사례 2> 1974년 1993년 인천 화교중산화교 고등부 졸업 한 대 외교 단절 보따리 무역 대만행 ( 行 ) 2년 한국 관광객 줄어듬 (T셔츠판매등)으로 큰 돈을 벌었음 좌판, 김치판매 중국 출입 일본행 ( 行 ) 4년 보따리 장사 시작 한달 20만엔 대만 行 7년 (한국 원단이 좋아서 중국의 여행사 가이드 중산층에서 많이 구입함) 2002년 2003년 원소흠(1959년 생, 잡화점) 중국으로 유학 다도교육 한국 귀국 (1년만에 졸업함) 찻집 및, 실내장식 소품 판매 (서학보와 함께 문화발전위원회 중추 역활)

인천 화교의 어제와 오늘 50 재정착기 51 재정착기: 1990년 ~ 현재 확실히 달러. 커보면 지들도 알거야. (곡창신, 남, 1955년 생) 2) 한국화교의 경쟁자, 조선족 1) 보따리무역 1992년 8월, 한국정부는 대만과 단교를 하고 중국과 수교를 맺었다. 이 사건은 당시 화교들에게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아울러 진정화 국면 으로 접어든 대 화교정책에 어떠한 영향이 미칠지에 대해 불안해하였다. 한 국에 살면서 대만식 교육을 받으며 자라온 이들이기에 반공교육에 대해서 도 철저하게 각인이 돼 있던 터라 여러모로 신경이 쓰였다. 감정적으로 너무한다. 세련되지 못하게 단교를 했다. 일방적인 통보 를 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등의 반응을 보였지만, 실질적으로 인천의 화교 들에게 닥친 직접적인 시련은 없었다. 오히려 이 시기에 중국으로의 무역 활로가 열려서 사업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만들어 졌다. 동 대문과 남대문 등에서 T셔츠 등의 생활용품을 가져다가 중국에 팔아 큰 돈 을 벌 수 있었다. 대 중국 보따리 상들은 보통 일주일에 2회, 2천만원 가량 의 품목을 가지고 중국에서 판매하였다. 기본 2배의 수익을 거두었다. 단순 계산하면 월 1억 6천의 이익을 거둔 셈이 된다. 한중 수교 이후 빠른 속도로 조선족들이 유입 되었는데, 이들은 한국화 교의 경쟁자가 되었다. 값싼 인건비와 저돌적인 적응력으로 한국 화교들의 일자리와 사업 영역을 잠식해 오기 시작했다. 화교들은 한국에서 나고 자랐 기 때문에 식당에서 일을 할 때, 한국 사람과 같은 임금을 받는 반면에, 노동 을 위해 한국을 찾은 조선족들은 인건비가 저렴하였다. 문제를 일으킨다는 이유로, 절대 조선족을 고용하지 않는 차이나타운 내 중식당도 많이 있지만, 저렴한 인건비 때문에 그들을 고용하는 식당 역시 적지 않다. 여행사를 운영하는 화교들도 조선족들의 유입으로 손해를 많이 본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정해져 있는 기본 단가라는 것이 있는데, 여행업에 뒤늦게 뛰어든 조선족들이 자리를 잡기 위해 그 최소 기본단가를 깨트린다는 것이 다. 여행상품 비용을 책정할 때, 항공비와 숙박비에서는 기존에도 거의 수익 없이 진행하였는데 조선족들은 오히려 이 부분에서 마이너스 상품을 내 놓 는다는 것이다. 조선족들은 상대적으로 덜 좋은 숙소, 덜 화려한 음식을 제 공하고 단가를 낮추는 방식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화교 여행사 사장들은, 이 단가에 맞추기 위해 마이너스 상품을 내 놓기 도 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항공과 숙박에서 마이너스를 감수하고, 쇼핑에서 나오는 돈으로 적자를 매우는 방법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여행상품 단가를 낮춘다고 해서 숙박과 음식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은, 그동안 공고히 쌓아 온 화교여행사들의 자부심과 신뢰에 상처를 내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 방법 을 택하지는 않는다. 수교(한중수교) 이후에는 중국으로 갔지. 남대문에서 티(셔츠) 가져다 팔고, 양복 원단 팔고 그쪽에서 약재 가져다가 팔고 그랬어. 밀수도 많이 했지. 비싸니까 세금이.(원소흠, 남, 1959년 생) 또한 화교 3세대들은 이 시기에 본인들의 국적국이 아닌, 본적국을 간 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곡창신의 경우, 한국수교 이후 처음 찾은 중국 공항에 들어서면서 아, 여기가 내 진짜 고향이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 었다고 한다. 우리는 마이너스 감수하고 조선족 단가에 맞추는거야. 그러니까 힘들지. 걔네들은 뒤늦 게 들어왔으니까 어떻게 해서든 고객유치하려고 그렇게 하는 건데, 이게 좋은 것이 아니라 고. 우리는 기존에 쌓아온 신뢰관계라는 것이 있고 자부심이 있는데, 싸게 내 놓는다고 안 좋 은데 모시고 맛 없는거 드리고 그렇게 못하거든. 쇼핑에서라도 조금 남겨서 적자 메워야지. 그러니까 요즘 화교 여행사들이 다 힘들어.(왕조용, 남, 1966년 생) 3) 영주권과 지방선거권 중국 공항에 처음 딱 들어갔는데, 아, 여기가 내 진짜 고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쓰는 말이 들리는거지. 눈물이 핑도는 거야. 공기도 내가 생각했던 대로고, 어머니 아버지한테 듣던 그 기억들이 하나씩 생각나면서 참 좋더라고. (조사자: 지난번에 아 이들 대만으로 수학여행 갈 때, 우리나라 간다고 좋아하던데요.)걔들은 아직 어려서 그렇지. 2002년 5월 이전까지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들은 거류비자인 F2비자를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데, 주기적으로 비자를 연장하며 거주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는 것은 자기정체성에 괴리감을 주고, 건전

인천 화교의 어제와 오늘 52 재정착기 53 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2002년 5월부터 영주비자 즉, F5 비자가 신설되어 F2 비자를 받은 뒤 5년 후에 F5비자를 발급 받을 수 있게 되면서 원하는 동안 언제까 지 살아도 좋다는 영주권을 부여 받은 것이다. 법 규정은 바뀌었지만 여전 히 사회시스템과 인식은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새롭게 부여받은 외국인 등 록번호를 처리해주는 인터넷 가입 시스템이 거의 없는 상황이며, 여전히 핸 드폰 개통이나, 신용카드 발급 시 실랑이를 하며 거류비자와 영주비자의 차 이를 설명해야 한다. 조사팀도 인천 화교촌을 찾은 첫 조사에서 당신들 F5 가 뭔 줄 알아? 라는 갑작스러운 질문을 듣고, 제대로 대답하지 못해 발길 을 돌려야 했던 경험이 있다. 차차 나아지고 있지만, 인천의 화교들은 이러 한 불편함을 평생 몸으로 겪으며 살아오고 있기에 비자에 대해 매우 예민 한 반응을 보인다. 2005년 8월, 선거법이 개정되며 한국의 화교들에게 지방선거권이 생겼 다. 2006년 5.31 지방선거부터 화교들은 지방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인천의 화교들은 매우 고무적으로 생각한다. 세상을 바꿔 보겠다는 정도의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화교학교의 교육을 정규교 육으로 인정해 달라든지, 화교노인정을 지어달라든지 하는 화교사회 공통 의 요구사항은 있다. 하지만 그 보다는 단지 이제 우리도 보이는 구나. 이제 우리도 인정해주는 구나. 하는 사회구성원으로 인정받는 만족감이다. 인천에서 만난 화교들은, 학교 행사나 쌍십절 등의 행사에 지역의 정치 인들이 참여할 때면 방긋 웃으며 귓속말을 한다. 저렇게 오는 것이 다 우리 한테도 선거권이 생겨서 그래요. 세상 참 좋아졌어요. 이제 우리도 신경을 쓴다는 거니까 좋죠. 우리도 보는 거니까.. 춤과 용춤, 그리고 한국화교의 생활사 등에 대해서 떠올리며 소통을 할 수 있는 창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른바 중국과 대만의 문화를 이해하 는 한국의 창구 역할을 차이나타운 이 해냈으면 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후손을 위해서라도, 과거 섭섭했던 한국정부와 한국인들에 대 한 마음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알리고 살아 온 모습을 보여주어,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4) 차이나타운 조성과 미래에 대한 고민 인천시의 다문화특구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인천 북성동 일대에서 단계 적으로 문화가 살아 숨쉬는 차이나타운 조성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3개소 에 패루를 설치하고 한중문화관을 건립하였으며, 도로를 정비하고 건축물 리모델링을 지원하여 중국의 색채가 묻어나는 짜장면거리 [ 中 華 街 ]를 조성 하였다. 짜장면 박물관 등을 개관하고, 홍보 활동도 활발히하여 2011년 차 이나타운은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아쉬운 목소리도 있다. 지금의 사업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다. 지금은 먹거리 이외의 콘텐츠가 없 다. 화교들 스스로 차이나타운을 찾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문화를 제대로 보여주고 싶은 욕구가 있다. 차이나타운 하면 짜장면, 만두, 공갈빵, 양꼬 치, 쟈스민 차 등의 먹는 것만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중국전통 결혼식, 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