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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셋째 이응인의 사실진술서인 초사, 넷째 증인인 이희무의 초사, 다섯째 경주 부 공증문서인 사급입안으로 구성되어 있다. 점련된 순서대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 번째 소지에서 이전인이 자신의 동생인 이응인과 노비를 교환한 사실에 대해 사 급입안을 발급해줄 것을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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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고려대학교 학문소통연구회 제48차 워크숍 정도전의 문학 세계와 정치 리더십 일시 : 2014 년 3월 21 일( 금) 오후 3시 30 분~6 시 장소 : 신법학관 401 호 주최 : 고려대학교 학문소통연구회 주관 : 고려대학교 연구처 후원 : 고려대학교 연구처

목 차 워크숍 일정 5 주제발표 1 : 삼봉 정도전의 시문과 삶 / 심경호 교수( 한문학과 ) 7 주제발표 2 : 새틀 짜기와 정치적 리더십 : 정도전과 안철수 / 박홍규 교수( 정치외교학과 )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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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숍 일정 일시: 3월 21 일( 금) 15:30~18:00 장소: 신법학관 401호 시 간 행 사 내 용 15:30~15:40 개회사 최인찬 교수 ( 학문소통연구회 부회장 ) 사 회: 선경 교수 ( 의과대학, 학문소통연구회 부회장 ) 15:40~16:20 주제 1 삼봉 정도전의 시문과 삶 발표자 : 심경호 교수 ( 한문학과 ) 16:20~16:40 토 론 어도선 교수 ( 영어교육과 ) 이철진 교수 ( 전기전자전파공학부 ) 16:40~17:00 휴 식 17:00~17:40 주제 2 새틀 짜기와 정치적 리더십 : 정도전과 안철수 발표자 : 박홍규 교수 ( 정치외교학과 ) 17:40~18:00 토 론 조윤정 교수 ( 의과대학 ) 이재학 교수 ( 서어서문학과 ) 18:00~ 자유토론 및 폐회 -5-

주제발표 Ⅰ 삼봉 정도전의 시문과 삶 - 심경호 교수 ( 한문학과 ) -7-

삼봉 정도전의 시문과 삶 ( ) 1. 2. 3. 4. 정도전의 문집 삼봉집( 三 峰 集 ) 에, 정도전이 1394 년( 태조 3, 갑술) 음력 6월 7 일( 을 해) 에 지은 명나라 서울로 가는 정안군( 이방원 ) 을 전송한 시의 서( 送 靖 安 君 赴 京 師 詩 序 ) 가 있다. 恭 惟 殿 下 畏 天 事 大, 克 謹 侯 度, 罔 或 有 違, 天 子 嘉 之, 命 親 男 以 朝, 而 靖 安 君 寔 行, 乃 以 六 月 乙 亥, 殿 下 率 群 臣 拜 表 于 壽 昌 宮, 儀 仗 分 左 右, 樂 部 導 前, 送 至 于 宣 義 門 外. 都 人 父 老 塡 溢 街 巷, 瞻 望 咨 嗟, 皆 曰 : 吾 君 一 遣 子 而 萬 民 賴 以 安, 盍 歌 之, 俾 後 子 孫 無 忘 也. 相 與 歌 曰 : 天 子 之 明 兮, 吾 君 之 誠 兮. 之 子 之 行 兮, 爲 斯 民 開 太 平 兮. 門 下 侍 郞 成 石 璘 繼 其 歌 而 賦 之, 侍 中 平 壤 伯 已 下 諸 大 夫 皆 和 焉. 分 韻 成 詩, 凡 二 十 八 篇, 以 序 文 屬 道 傳. 당시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조선의 표전문을 트집 잡아 요동에 조선 사절을 들이지 못 하게 하고, 1394 년에는 태조의 친아들을 보내라 하였다. 그러자 태조는 이방원을 적임자 라 여겨, 표( 表 ) 를 지참한 조반과 전( 箋 ) 을 지참한 남재와 함께 명나라에 가게 하였다. 정 안군을 개경의 선의문 밖까지 전송 나온 부로들이 노래를 짓자 성석린 ( 成 石 璘 ) 이 그것에 이어 시를 지은 후, 조준( 趙 浚 ) 이하 당대의 고관이 모두 분운하여 시를 지었다. 성석린의 시는 칠언절구로 모두 28 자였기에, 28 명의 사대부가 분운하였다. 동각잡기 에 실려 전 하는 성석린의 시는 다음과 같다. 아들 알아주고 신하 알아주신 성상의 감식이 밝으신데 사대하는 정성은 우리 백성 생성키 위함이로다. 사람들이 말하길 일만 리 밖 조선의 경사가 더위 장마 무릅쓰는 이번 걸음에 있다 하네. 知 子 知 臣 睿 鑑 明 畏 天 誠 意 爲 生 成 皆 言 萬 里 朝 鮮 慶 在 此 炎 霖 跋 涉 行 -9-

문신들은 이 시의 28 자를 가지고 제비 뽑아 각각 한 수씩 지었다. 첫 글자 知 를 가지 고 지은 시는 이무방의 知 자 운을 얻어 정안군을 전송하는 시[ 靖 安 君 餞 詩 得 知 字 ] 로, 동 문선 에 전한다. 상평성 支 韻 의 장편 오언고시이다. 또 정총은 睿 를 뽑아 정안군이 명나 라 서울로 가는 것을 전송하다 ( 送 靖 安 君 赴 京 師 ) 라는 제목의 장편 오언고시를 지었다. 복 재집( 復 齋 集 ) 에 실려 있다. 성석린도 당시에 분운하여 시를 지었다. 하평성 陽 韻 의 칠언 절구이다. 조선 후기의 홍직필( 洪 直 弼 ) 은 태종이 잠저 때 동경( 同 庚 ) 의 20인과 정미갑계 도( 丁 未 甲 禊 圖 ) 를 제작한 것을 보고 글을 남겼는데, 정미갑계의 인물들도 정안군을 위한 분운 연장( 聯 章 ) 에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방원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 를 두세 차례 만나 현안을 해결하였다. 용비어천가 에 그 사실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당시 이방원은 부왕 태조의 명을 받아서이기는 하였지 만 명나라의 국왕 친아들 입조 요구에 자당( 自 當 ) 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계기를 잡게 되었다. 1398 년( 태조 7, 무인) 윤5월 29 일( 갑진) 에 정도전은 자신이 작성한 진도( 陣 圖 ) 를 여러 도의 절도사와 군사들로 하여금 약속을 정하여 갑자기 연습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 명 태조가 죽고 황태손이 즉위하였고, 정도전이 제1차 왕자의 난 때 죽음으로써 조선의 요동정벌계획은 무산되었다. 근대 이전의 문학은 서구 근대의 문학 개념과는 달리, 경국( 經 國 ) 과 화국( 華 國 ) 의 문학 을 정점에 두고 개인의 서정과 사상을 토로한 문학을 그 아래에 위치시키는 것이 보통이 다. 또한 문학의 여러 양식들은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 장) 이 더 큰 의미를 지녔다. 정 도전의 문학 이라고 할 때 그 문학의 개념은 근대 이전의 그것을 말한다. 정도전(1342?~1398) 의 본관은 봉화, 호는 삼봉( 三 峰 ) 이다. 정도전은 아버지 정운경 ( 鄭 云 敬, 1305-1366) 과 어머니 영천 우씨( 禹 氏 )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 시기에 관한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1342 년 무렵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26세 때 진사시에 급제 하여 충주사록, 전교시주부, 성균관박사, 예조의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젊어서 성리학을 공부하여 그 이념에 따라 현실을 개혁하고 정치 경제 제도를 뒤바꾸려고 하였다. 하지만 구세력과의 갈등으로 오랫동안 관직 생활조차 안정되지 못하였다. 비주류로 떠돌던 정도 전은 1383 년에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의 막료가 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었다. 이듬 해에는 정몽주의 사행에 서장관으로 참가하여 명나라 금릉( 남경) 에 가서 동아시아의 질서 가 변모한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고려의 정치 사회의 체제를 혁신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 혔다. 1389 년 밀직부사로 승진한 후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앞장섰다. 그리고 조민수 등 구세력을 몰아내고, 조준과 함께 전제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듬해 이성 -10-

계가 군사권을 장악하여 삼군도총제부를 설치하자 그 우군총제사가 되었다. 이성계는 함 경도 함흥 지방의 무장 출신으로 홍건적, 왜구, 나하추의 토벌에 무공을 세우면서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정권을 잡았다. 정도전은 정당문학의 지위에 있으면 서 구세력을 일소하려고 애쓰다가 거꾸로 탄핵을 받아 관직을 빼앗기고 유배되었다. 특히 정몽주와 대립하였는데, 1392 년에 정몽주가 살해된 뒤 풀려나와 조준 남은 등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정도전은 생전에 스스로의 시문을 自 編 하여 知 人 으로부터 序 文 을 받았다. 또한 중국의 명사에게 서문을 청함으로써 자신의 문집을 粉 飾 하였다. 서문을 작성한 周 倬, 張 溥, 高 遜 志 는 명나라 문인이다. 高 遜 志 는 직접적인 교류가 없이, 圃 隱 鄭 夢 周 와 陶 隱 李 崇 仁 을 통해 서문을 청하였다. 이후 삼봉집 의 목판 간행은 다음 단계를 거쳤다. 自 編 稿 를 저본으로 초간 - 저술가의 夸 耀 洪 武 初 本 - 아들 鄭 津 에 의한 시문 정리, 명망 있는 執 友 의 批 첨부. 重 刊 本, 續 刊 本, 重 刊 續 刊 合 本 - 증손 鄭 文 炯 의 신원 운동과 명망 회복의 기도. 批 삭제 再 刊 本 - 복권의 국가적 확인. 시문 추가 수습, 事 實 보완, 오류 교정. 비점 添 刻. (1) 禑 王 11년에서 13년 사이의 初 刊 삼봉집 은 禑 王 11~3 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권근의 서문이 현행 대구본의 卷 首 에 실 려 있는데, 초간본에는 시문과 함께 學 者 指 南 圖 ㆍ 八 陣 三 十 六 變 圖 譜 ㆍ 太 乙 [ 一 ] 七 十 二 局 圖 등이 수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권근의 三 峯 集 序 는 정도전의 위상을 權 溥, 李 齊 賢, 李 穀 ㆍ李 仁 復, 白 文 寶, 李 穡, 鄭 夢 周 ㆍ李 崇 仁 ㆍ鄭 道 傳 ㆍ朴 尙 衷 ㆍ尹 紹 宗 에 이르는 道 統 속에 위치시키고 정도전의 闢 異 端 에 앞장섰으며, 정도전의 시문이 衆 體 를 구비하고 經 國 과 華 國 의 도구임을 역설하였다. 우리 집안 文 正 公 ( 權 溥 ) 이 처음으로 朱 子 가 集 註 한 四 書 를 간행하여 후학을 권장하기를 建 白 하였는데, 그의 사위 益 齋 李 文 忠 公 ( 李 齊 賢 ) 이 스승으로 섬기며 친히 배워 의리의 학문을 주창함으 로 세상의 儒 宗 이 되었고, 稼 亭 ( 李 穀 ) ㆍ樵 隱 ( 李 仁 復 ) 등 諸 公 이 이어서 일어났으며, 澹 庵 白 公 ( 白 文 寶 ) 은 이단 물리치기를 더욱 힘썼다. 우리 座 主 牧 隱 先 生 ( 李 穡 ) 이 일찍이 가정의 훈육을 받아, 辟 雍 에 입학하여 正 大 精 微 한 학문에 정통하였다. 중국에서 돌아오자 儒 士 들이 모두 宗 主 로 삼으니, 圃 隱 鄭 公 ( 鄭 夢 周 ) ㆍ陶 隱 李 公 ( 李 崇 仁 ) ㆍ三 峯 鄭 公 ( 鄭 道 傳 ) ㆍ潘 陽 朴 公 ( 朴 尙 衷 ) ㆍ茂 松 尹 公 ( 尹 紹 宗 ) 이는 모두 그 升 堂 한 분들이었다. 삼봉은 그 중에서도 포은ㆍ도은과 제일 서로 가까워, 강론하고 연마하여 더욱 얻은 바가 있었다. 항상 후진들을 訓 導 하고 이단을 물리치는 일을 자신의 임무를 삼았는데, 시경 ㆍ 서경 을 강론할 적에 비근한 말로 지극한 이치를 형용하니 배우는 사람들이 한 번 들으면 바로 그 뜻을 깨달았으며, 이단을 물리칠 적에 능히 그 글에 정통하여 먼저 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서 그 그른 점을 배척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복종하였다. 그리하여 경서를 들고 從 遊 하는 사람이 마 을을 가득 메웠으며, 일찍이 공에게 배워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이 어깨를 비비며 서게 되었다. 같은 -11-

비록 武 夫 나 俗 士 일지라도 그 講 說 을 들으면 재미를 붙여 싫증내지 않았고, 승려의 무리들 또한 공과 종유하여 교화된 자가 있었다. 禮 樂 ㆍ制 度 ㆍ陰 陽 ㆍ兵 法 ㆍ曆 法 에 이르기까지 정밀하게 알지 않은 것이 없어, 八 陣 에 의거하 여 三 十 六 變 圖 譜 를 만들고, 太 一 을 요약하여 七 十 二 局 圖 를 만들되, 간단하면서도 곡진하게 해놓으 니 세상의 名 將 이나 術 士 들이 모두 잘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모두 선생의 餘 事 이다. 선 생은 節 義 가 매우 높고 학술이 가장 정밀하였다. 일찍이 바른 말 때문에 재상과 거슬리어 남방에 10 년 동안 유배 되었으나 그 지조가 변하지 않았으며, 功 利 를 좇고 異 端 을 말하는 무리들이 떼 지어 기만하고 무리지어 헐뜯었으나 지킴이 더욱 견고하였으니, 선생은 과연 도를 신봉함이 독실 하여 현혹되지 않는 분이라 하겠다. 아! 선생의 글은 모두 名 敎 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서 空 言 에 비할 바가 아니니, 道 와 더불어 후세에 전해져 썩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비록 小 國 에 나서 그 문장을 중국 盛 代 의 典 章 에 쓰지는 못하였으나, 일찍이 사신으로 京 師 에 조회 갈 적에 遼 海 를 건너고 齊 ㆍ魯 를 지나면서 지은 詩 文 이 모두 중국 文 士 들에게 상찬을 받았다. 이는 능히 문장으로써 한 지방을 울리어 東 漸 의 敎 化 를 찬 양하여 동방 사람들로 하여금 만세토록 노래하게 한 것이니, 聖 代 의 훌륭한 治 道 와 함께 한없이 전해질 것도 역시 틀림없는 일이다. (2) 洪 武 初 本 1397 년( 조선 태조 6, 明 洪 武 39) 8 월, 정도전의 아들 鄭 津 이 부친의 시문 가운데서 錦 南 雜 詠 과 錦 南 雜 題 ㆍ 奉 使 錄 등을 합하여 2 권의 삼봉집 을 改 刊 하였다. 정진의 跋 에 의하면, 부친은 시문을 기초하지 않고 입으로 읊은 것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베끼게 하였는데 원고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받아놓지 않았다고 한다. [ 발문의 말미에 홍무 30 년(1397) 9 월 일, 男 資 憲 大 夫 領 原 州 牧 使 事 兼 管 內 勸 農 管 學 兵 馬 節 制 使 津 은 삼가 발문 을 쓴다. 라고 밝혔다.] 정진은 타인이 소장한 원고를 모아서 삼봉집 을 내게 되었다고 밝혔다. 洪 武 初 本 은 成 石 璘 이 정선하고 권근이 批 를 붙였다. 문집 간행에 앞서 감식안을 지닌 인물이 시문을 선별하고 批 를 첨부하는 관례가 당시 이미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가 있다. 권근의 批 는 중각본에서는 제외되지만 정조 때의 개간본에서는 다시 각입되었다. (3) 重 刊 1465 년( 세조 11)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정도전의 증손 정문형이 홍무초본에다가 經 濟 文 鑑 ㆍ 朝 鮮 經 國 典 ㆍ 佛 氏 雜 辯 ( 佛 氏 辯 說 ) ㆍ 心 氣 理 ㆍ 心 問 天 答 을 합하여 6책으로 편성하고 안동부에서 간행하였다. 경제문감 ㆍ 조선경국전 을 합각한 것은 정도전의 經 國 文 章 과 經 世 之 志 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고, 心 氣 理 ㆍ 心 問 天 答 을 합하여 간행한 것 은 성리학의 학맥에서 차지하는 정도전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정도전의 초기작인 경제문감 과 조선경국전 의 서문은 鄭 摠 이 지었으나, 초간의 삼 봉집 서문은 물론 불씨잡변, 심기리편, 심문, 천답, 경제문감별집 등의 서문도 권근이 지은 것이 있었다. 중간본 삼봉집 에는 申 叔 舟 의 後 序 가 있다. 이 후서 는 현 -12-

행 대구본의 卷 首 에 그대로 실려 있는데, 신숙주는 이 글에서 정도전이 保 終 하지 못한 사 실을 애석해 하면서도 그가 王 佐 之 才 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사실을 칭송하였다. 申 叔 舟, 三 峰 集 後 序, 三 峰 集. 嘗 觀 古 之 英 雄 豪 傑 有 建 功 於 世 者, 多 不 能 保 其 終, 是 或 滿 損 盈 虧, 有 以 自 招, 亦 或 關 於 運 數, 有 不 能 自 脫 者. 然 建 大 功 者, 必 享 大 福, 苟 不 及 其 身, 必 於 其 後, 有 施 必 獲, 固 天 道 也. 三 峯 先 生, 天 資 磊 落 魁 偉, 實 王 佐 之 才. 前 朝 之 季, 國 祚 將 終, 東 方 糜 沸, 民 墜 塗 炭, 我 太 祖 悶 時 之 艱, 東 征 西 討, 芟 夷 大 難, 先 生 手 搏 日 轂, 廓 淸 區 宇, 以 拯 我 東 方 億 兆 蒼 生. 及 開 國 之 初, 凡 大 規 模, 皆 先 生 所 贊 定, 當 時 英 雄 豪 傑, 竝 起 雲 從, 而 無 與 先 生 比 者. 雖 終 有 蹉 跌, 功 過 亦 足 相 掩 矣. 其 亦 關 於 運 數 如 古 豪 傑 之 不 能 脫 者 歟? [ ] 三 峯 先 生 佛 氏 雜 辯 은 1456 년( 세조 2) 경북 예천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되었으나, 1465 년( 세조 11) 중간본에 佛 氏 雜 辯 이란 제목으로 합편되었다. 불씨잡변 초간 단행본인 삼봉선생불씨잡변 은 버클리대학교 淺 見 文 庫 에 전한다. 이 불씨잡변 은 정도전의 증손 정 문형이 1465 년 삼봉집 ( 삼봉선생집 ) 을 간행할 때는 그 발문에서 佛 氏 辯 說 이라고 언급 하였다. 하지만 이 중간본에는 佛 氏 雜 辯 이란 제목으로 합편되었다. 본래 정도전은 1398 년( 태조 7) 여름의 휴가 동안 佛 氏 雜 辯 을 완성하고 권근의 서문까지 받아두었다. 그러 나 수개월 후 정도전이 살해되면서 원고는 세간에서 잊히고 말았다. 그런데 1438 년( 세종 20) 정도전의 족손 韓 奕 이 성균관 동료 尹 起 畎 에게 그 원고를 넘겨주었고, 윤기견은 1456 년 5 월 경북 醴 泉 ( 古 號 襄 陽 ) 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30 여 자를 교정해서 간행하였다. 윤기 견은 관직이 知 醴 泉 郡 事 이고, 조력자의 한 사람인 李 煥 도 醴 泉 儒 學 敎 導 이다. 윤기견은 연 산군의 외조이자 廢 妃 尹 氏 의 아버지인데, 당시 그는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잇고 있다고 간주되는 지역에서 불씨잡변 을 간행함으로써 정도전의 道 統 내 위상을 현양하려고 한 듯하다. (4) 續 刊 과 重 刊 續 刊 合 本 1486 년( 성종 17) 겨울 강원도 관찰사 정문형은 지방 주군과 동료들로부터 누락된 시문 과 서책을 다시 수집하여 詩 賦 1 백여 수와 경제문감별집 을 續 刊 하였다. 이후 1487 년( 성 종 18) 강원도 추각 판목을 앞서의 안동부 중간본 판목과 합쳐 전부 8 책으로 만들었다. 경제문감별집 과 더 모은 시문을 이때 追 刻 하였다. 1487년 3 월 하한( 下 澣 ) 작성의 정문 형 서문은 권근의 삼봉집서 를 이어, 정도전의 학문이 고려 말 성리학의 도통을 잇고 있 다는 점을 강조하고, 시문의 호한함과 경세문장으로서의 가치를 재차 확인하였다. 鄭 文 炯, 重 刊 三 峯 集 跋, 三 峰 集 附 錄. 三 峯 詩 文 集, 經 濟 文 鑑, 經 國 典, 佛 氏 辨, 說 心 氣 理 三 篇, 我 曾 祖 奉 化 伯 公 所 著 也. 公 高 麗 壬 寅 科 進 士, 少 有 大 志, 力 學 自 强. 早 遊 牧 隱 李 先 生 之 門, 一 時 豪 傑 如 圃 隱 鄭 先 生 ㆍ陶 隱 李 先 生 ㆍ桐 軒 尹 先 生 ㆍ貞 齋 朴 先 生 ㆍ浩 亭 河 先 生 ㆍ陽 村 權 先 生 ㆍ 惕 若 齋 金 先 生, 師 友 講 論, 所 聞 益 廣, 所 見 益 正. 發 而 爲 言 語 文 章 者, 汪 洋 渾 厚, 博 大 奇 偉, 有 古 作 者 之 風, 諸 先 生 咸 推 讓 之. 麗 運 旣 衰, -13-

天 命 有 歸, 推 戴 我 太 祖, 翊 運 開 國, 經 綸 贊 襄, 立 經 陳 紀, 制 禮 作 樂, 皆 出 公 之 手, 經 國 典 乃 其 大 略 也. 如 詩 文 雜 著, 特 緖 餘 耳. 若 夫 佛 氏 辨 說 ㆍ 心 氣 理, 則 發 揮 性 情, 擯 斥 虛 誕, 以 明 吾 道 異 端 之 偏 正, 眞 聖 門 之 藩 籬, 而 其 有 功 於 名 敎 大 矣. 經 濟 文 鑑 則 上 自 唐 虞 下 至 宋 元, 逮 及 高 麗, 編 列 其 相 業 君 道 之 得 失 可 法 可 戒 者, 又 採 聖 賢 之 格 言, 以 附 其 後, 實 可 謂 爲 君 爲 臣 之 龜 鑑, 而 有 關 於 治 道 者 至 矣, 非 如 諸 家 集 只 詩 文 工 拙 之 如 何 耳. 諸 篇 舊 有 板 本, 散 落 不 完. [ ] (5) 改 刊 1791 년( 정조 15) 奎 章 閣 은 왕명을 받아 三 峰 集 을 再 編 하였다. 정조가 삼봉집 에 주 목한 것은 우선은 정도전의 문장 과 經 義 에 주목해서였다. 日 得 錄 에 보면 다음 기록이 있다. 정도전의 삼봉집 은 간행본이 아주 드물어 지난번에 경상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베껴 오게 하 였는데 그 후손의 집에 오랫동안 소장되어 있던 것이었다. 문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經 義 에 논 란을 제기한 곳에도 볼만한 곳이 많다. - 원임 직각 李 秉 模 가 을사년 (1785 년) 에 기록함 - 이 필사 명령은 곧, 후손들이나 조정 관료들로 하여금 삼봉집 의 재간을 서두르게 하 는 계기를 제공하였을 것이다. 정조는 1791 년에 이르러 삼봉집 의 재편을 규장각에 명하 였다. 실제로 재간본은 대구에서 개간하여 일명 대구본이라고도 한다. 五 臺 山 ㆍ鼎 足 山 ㆍ太 白 山 ㆍ 弘 文 館 등에 수장되어 있다. 이 책의 범례에는 當 宁 辛 亥 [ 정조 15, 1791 년] 命 內 閣 購 公 奎 遺 集 將 梓 行 운운의 구절이 있어, 규장각이 그 편집과 간행에 간여하였으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徐 有 榘 의 鏤 板 考 에 보면 그 권6에 三 峯 集 14권의 책판에 대한 서술 이 있다. 洪 命 憙 교정본에 따르면 當 宁 壬 子, 奉 敎 重 刊. 大 丘 龍 淵 寺 藏. 印 紙 十 三 牒 六 張. 이라 하였다. 삼봉집 의 개간은 신해년 (1791 년) 다음의 임자년 (1792 년) 에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재간본은 정문형 중판본의 抄 本 을 저본으로 하고, 구본에 누락된 陣 法 과 시문들을 수록 하고, 정도전의 事 實 을 보완하였으며, 구본의 누락된 글자나 자귀의 訛 謬 를 보충 또는 교 정하였다. 또한 기사의 중첩된 부분을 깎아내고, 批 와 註 를 첨가하고, 편차를 다시 분류하 여 모두 14권 7 책으로 만들었다. 재간본의 간행은 이후 정도전의 정치적 복권 운동에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고종 2 년(1865) 9월 10 일( 임신) 에 이르러 경복궁의 전각들이 차례로 완성되자 大 王 大 妃 는 정 도전이 전각의 이름을 정하고 송축한 문구를 생각하고 느낌이 있어서 정도전의 勳 封 을 특 별히 회복시키고 시호를 내리게 하였으며, 奉 祀 孫 을 健 元 陵 參 奉 으로 의망하여 들이도록 하 였다. 마침내 고종 8 년(1871) 3월 16 일( 병오), 정도전은 文 憲 의 시호를 추증 받았 다. -14-

삼봉집 은 시와 문을 따로 수록하고 각각 문체별로 구분하여 두었다. 따라서 연차별 로 정도전이 어떤 시와 문을 지었는지 잘 알 수 없고, 어떤 시문은 지은 해를 전혀 알 수 가 없다. 본인은 삼봉집 의 시문을 선별해서 역해하면서 편년 구성을 시도하였다. 제1 장 출세( 出 世 ) 제2 장 유랑( 流 浪 ) 제3 장 혁명( 革 命 ) 제4 장 조국( 肇 國 ) 제5 장 사상( 思 想 ) 제6 장 경복( 景 福 ) 제7장 평가와 논쟁 연보 천수문 앞 버들 빛이 푸르기에 옛 도성을 놀라 바라보네 어린 종은 중흥의 일을 알지 못하고 지난 피난 때 일을 말하누나 天 水 門 前 柳 色 靑 眼 明 驚 見 舊 都 城 僕 童 不 識 中 興 事 猶 說 年 前 喪 亂 行 1362년 10월 정도전은 동진사에 올랐으므로 이 시는 난리가 끝난 해 봄에 송경으로 돌아와 지었을 것이다. 당시 정도전의 나이는 열아홉이었다. 정도전은 열다섯 살인 1357 년 공민왕 6 강릉의 수령으로 나갔던 아버지를 따라 그곳에 가서 지방의 현실을 어느 정 도 알게 되었다. 그즈음 정몽주가 이존오와 함께 삼각산 절집에서 대학 과 중용 을 강 의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책을 구해 읽는다. 1360년 공민왕 9 정몽주는 빈흥과 ( 賓 興 科 ) 의 삼장( 三 場 ) 모두에서 장원을 하며 유명세를 탔다. 정도전은 정몽주를 찾아가 공부 하고, 그해 성균관시에 합격하였다. 1361년 10 월 홍건적이 침입하자 왕이 복주 ( 안동) 로 피신하였다. 정도전도 송경을 벗 어나 피신하였다. 이미 최습의 딸과 혼인한 뒤였다. 이듬해 정월 송경이 수복되었으나 한 달 후 조소생이 나하추를 이끌고 동북면을 침략해 다시 위기에 처하였다. 이때 부친의 뒤 를 이어 동북면병마사를 지내던 이성계가 함흥평야에서 나하추를 격퇴하였다. 정도전은 국가 안팎의 형세를 불안하게 여기는 한편, 이성계의 무공에 감명을 받았을 것이다. 1371년 공민왕 20 7월에 신돈이 처형당하였다는 기별을 듣고 정도전은 개경으로 달려 갔다. 정도전은 태상시 박사가 되었으며, 이후 5 년 간 관리 선발을 주도하였다. 정도전은 1371년 7 월의 가을밤[ 秋 夜 ] 이라는 장편 5 언고시에서 선비의 모습을 달, 눈, 맑은 바람 등에 비유하였다. 그리고 논어 헌문 편에 실린 공자의 말을 인용하였다. 공자는 갈아도 얇아지지 않고 검게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는 덕이 군자의 이상 이라고 하였다. -15-

정도전은 선비의 실천 정신을 자각하고 있었다. 이인임 등은 1375년 열 살의 우왕을 즉위시키고 북원에 알려 그 지위를 굳히려 하였 다. 이해 8 월 북원의 사신이 조칙을 반포한다는 명목으로 고려에 오자, 정도전은 김구 용 이숭인 권근과 더불어 도당( 도평의사사 ) 에 글을 올려 북원 사신을 맞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인임과 경복흥은 정도전에게 북원의 사절을 맞아오라고 강 요하였다. 이에 반대하던 정도전은 전라도 나주 회진현 거평 부곡의 소재동 ( 전남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백동마을 ) 으로 유배를 가야 하였다. 1375 년( 우왕 원년) 여름의 감흥( 感 興 ) 시에서 정도전은 미치광이 를 자처하였다. 맹자 에 보면 뜻은 크지만 일에 서툰 사람을 狂 士 라고 하였다. 수레 타고 길을 떠나 태항산을 오르니 황하 물이 아래를 내달리기에 삼박 膏 車 邁 行 役 登 彼 太 行 山 黃 流 奔 其 下 三 亳 * 을 멀리 보았다만 顧 瞻 三 亳 間 옛 나라 간데없고 두 무덤만 우뚝하다 어느 시대 사람인가 茫 茫 皆 異 國 雙 墳 對 巍 然 且 問 何 代 人 하나라의 용방과 비간* 이라네 龍 逄 與 比 干 조국의 멸망을 차마 볼 수 없어 충의의 심장이 찢어져 不 忍 宗 國 墜 忠 義 裂 心 肝 궐문을 밀치고 들어가 手 排 閶 闔 門 대놓고 폭군에게 간언을 하였네 사람은 언젠가 죽는 것을 구차한 삶을 바라랴 아득한 천년 후 가을 하늘에 매운 기운 가득하다 抗 辭 犯 主 顔 自 古 有 一 死 偸 生 非 所 安 寥 寥 千 載 下 英 烈 橫 秋 天 魑 나주 회진에는 큰 산과 무성한 숲이 있고 외져서 바다에 가까우며, 인가가 드문드문하고 이내 가 끼고 장기가 피어나고 음습해서 비가 자주 내린다. 산과 바다와 음( 陰 ) 과 허( 虛 ) 의 기운, 그리 고 풀과 나무와 흙과 바위의 정기는 뒤섞이고 어우러져 도깨비와 두억시니로 변화한다. 이들은 사람도 아니요 귀신도 아니며 저승의 것도 아니고 이승의 것도 아니되, 역시 하나의 품물이다. 정 선생이 방에 홀로 앉아 있자니 하루가 길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다. 잠깐 지팡이 짚고 문을 나서 뒷짐 지고 멀리 바라보면, 산과 강이 얼키설키하고 풀과 나무가 서로 이어져 있으며 하늘은 음산하고 들은 어둑어둑하고 스산하여, 음습한 기운이 스며 몸이 찌뿌드드해진다. 다시 방으로 들 어왔지만 갑갑하고 답답하고 흐릿하고 어지럽다. 너무 피곤하여 잠을 청하려고 드러누워 눈을 감 았다. 잠이 들 듯 말 듯한 참에, 앞서 말한 도깨비와 두억시니 무리가 야유하고 탄식을 하며 왔다 갔다 하면서 바람을 일으켰다. 그 가운데에는 기뻐하는 듯한 놈도 있고 슬퍼하는 듯한 놈도 있으 -16-

며 웃는 듯한 놈도 있어, 펄쩍펄쩍 뛰면서 부딪쳐 오고 쓰러지면서 기대어 왔다. 정 선생은 놈들 이 시끄럽게 구는 것이 성가시고 또 상서롭지 못한 것이 싫어서, 손을 휘저어 내쫓았으나 갔다가 는 다시 왔다. 분을 못 이겨 크게 소리를 지르다가 문득 잠이 깨고 보니, 형체가 사라지고 자취가 없어져 휑하니 아무것도 없었다. 선생은 정신이 떨리고 기운이 없어 마치 혼이 나간 듯이 하다가 한참 뒤에야 안정을 찾았다. 정신을 집중하고 생각을 고요하게 하며 기운을 엄숙하게 하고 호흡 을 가늘게 하여 가수면 상태로 앉아 있으려니, 다시 그놈이 친구들을 데리고 나타나서 전에 그랬 던 것처럼 구물구물 떼를 지어 몰려왔다. 선생이 말하였다. 너희는 음물( 陰 物 ) 이라서 나와는 부류가 다르거늘, 무엇 때문에 왔느냐? 또 너희는 무엇 때문에 슬퍼하고, 무엇 때문에 즐거워하고 웃느냐 말이 끝나자 어떤 놈이 앞으로 나와 말하였다. 사통팔달의 도성과 번화한 고을은 저택이 서로 이어지고 갓 쓴 높은 양반들이 날마다 노니니, 곧 사람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어둑어둑 음산한 터와 황량 하고 인적이 끊긴 들판은 도깨비가 극성한 곳이다. 그대가 우리에게 와서 우리에게 붙은 것이지, 우리가 그대에게 붙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 보고 떠나라 하느냐. 그대는 능력을 헤아 리지 못하고 나라의 금기에 저촉해서 밝은 시절에 쫓겨났으니, 이것은 우스운 일이 아니냐? 공부 에 힘을 쓰고 뜻을 독실하게 가지며 올바르게 행동하고 제대로 실천하였다가 마침내 벼슬을 빼앗 기고 귀양을 와 자신의 본심을 밝힐 길이 없게 되었으니, 이는 슬퍼할 만하다. 우리는 음산하고 으슥한 곳에 거처하여 세상이 알아주지 않지만, 그대는 깊은 이치를 파내고 심오한 뜻을 찾아서 어떤 미세한 것이든 끝까지 탐구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런데 지금 거칠고 후미진 땅에서 그대와 상종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기뻐할 만하다. 그대는 사람들 축에 끼지 못하고 먼 곳으로 쫓겨 났으므로, 그대를 만나는 사람은 눈동자가 흔들리고 그대와 말하는 사람은 마음이 두려워 모두 손사래를 쳐 거절하고 발걸음을 뒤로 물리며 등을 돌려서 간다. 오직 우리들만이 그대가 오는 것 을 반겨서 그대와 함께 놀아 준다. 그렇거늘 지금 우리가 그대의 부류가 아니라고 우리를 배척한 다면, 우리 말고 어느 누가 그대와 벗이 되어 준단 말인가 정 선생은 그의 말에 부끄러워하고, 또 그들의 뜻을 고맙게 여겨 글을 지어 사례하였다. 산의 기슭이자 바다의 구석이라 천기가 음산하여 초목이 그 때문에 그윽하도다 인가가 드문 곳에 홀로 거처하니 너희를 두고 누구와 놀 것인가 아침에 같이 나서고 저녁에도 함께 지내니 노래하면 화답하며 봄도 가을도 그러하노라 세상과 맞지 않아 세상이 버렸거늘 어찌 또 무엇을 구하랴 풀숲에서 덩실덩실 너희들과 한바탕 놀자꾸나 정도전은 위의 글에서 당나라 한유( 韓 愈 ) 의 송궁문 ( 送 窮 文 ) 형식을 빌려, 인간도 아 니고 귀신도 아닌 상태로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를 가련해 하였다. 하지만 정도전은 민중 을 발견하였다. 마을의 하층민들과 어울려 살면서 자신의 내면을 가다듬었고, 고려 사회 가 안고 있는 모순을 잘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정도전은 사대부가 아닌 일반 백성에게서 -17-

충의의 본성을 재확인하였다. 제주도 앞 해상에서 왜구와 싸우다가 자결한 호장 정침이 그 인물이다. 정도전은 정침의 행적을 후대에 알리기 위해 붓을 들었다. 그리고 선비란 의리상 죽어야 할 일을 당하였을 때 한번 죽어야 하며,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려고 해서 는 안 된다고 단언하였다. 유배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삼봉의 서재에서 강의를 하였다. 이때 그 고장 사람으로서 재상이 된 이가 시기하여 서재를 철거하였다. 정도전은 부평 부사 정의( 鄭 義 ) 의 도움을 받아 부평의 남촌으로 이사하였다. 그러자 전임 재상 왕 아무개가 그 땅을 별장으로 만들 려고 또 서재를 철거하였다. 이번에는 김포 원당사 부근으로 옮겨야 하였다. 1383 년 가을, 정도전은 동북면 도지휘사 이성계를 따라 북동면 함경도 함주( 咸 州 ) 의 군막으로 갔다. 철원에서 [ 過 古 東 州 ] 라는 제목의 시 등을 이 때 지었다. 이듬해 10년 만 에 정도전의 이성계의 후원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 이 글은 요동의 도독과 지휘 등 명나라의 지방 관료들에게 사행의 목적을 밝힌 공식 문서이다. 명나라가 강성해지자 고려는 김유 홍상재 김구용 등을 사신으로 보냈는데, 명나라에서는 이들을 모두 억류하였다. 당시 고려는 명나라와 국교를 맺지 않은 상태였 고, 명나라는 고려에 군대를 출동시키겠다며 위협하고 해마다 조공을 엄청나게 요구하였 다. 1384년 7 월 정몽주가 성절사로서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천추절을 축하하러 갈 때, 정 도전은 전교 부령으로서 서장관이 되어 동행하였다. 정몽주와 정도전 일행이 제때에 금릉 ( 남경) 에 도착하자, 명나라는 처음으로 우호의 뜻을 보이고 억류해 왔던 김유와 홍상재를 돌려보냈다. 이후 공양왕은 도평의사사 청사를 새로 건립하고 기념의 글을 정도전에게 짓게 하였다. 정도전은 모든 정무를 집행하는 권한을 지녔던 도평의사사를 장악해야 정치 이념을 실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을 것이다. 당시 정권을 장악한 신흥 사대부들은 정치 개혁의 관 점에 따라 두 그룹으로 갈렸다. 온건 개혁파는 제도 운영의 문제점만 고치자고 하였고, 급진 개혁파는 왕도와 패도를 조화시켜 지배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1389년 명나라 예부에서 발송한 외교 문서인 자문을 이색이 조작한 사건이 일어 났다. 이색은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급진 개혁파세력을 약화시키려고 이 사건을 일으켰 다. 정도전은 황해도 우봉으로 유배되었다. 1391년 4 월 객성이 자미성 자리를 범하고 화요성이 여귀성 자리에 들어가는 변고 가 있자 공양왕은 구언( 求 言 ) 교서를 내렸다. 그 교서는 고려사 에 실려 있다. 정도전은 공양왕의 교서를 계기로 구세력을 억압할 계책을 세웠다. 정도전은 공양왕이 김저 사건에 연루된 자들을 처리한 것이 공정성을 잃었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김종연이 1390 년 윤 -18-

이 이초의 옥사 이후 이성계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가 발각되었을 때 그와 공모한 우현 보 등을 처벌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았다. 정도전은 우현보의 당을 무삼사에 비유하였는 데, 우현보의 손자 우성범이 부마였으므로 국왕이 달가워하지 않았다. 1391 년( 공양왕 3) 4 월 정도전은 도당, 곧 도평의사사에 올린 1391 년( 공양왕 3) 의 서 한에서 재상의 직분에 대한 자기 견해를 명확히 밝혔다. 특히 북송 때 학자 석수도의 말 을 인용한 것은 구세력의 작위와 공훈을 재심사해 기득권을 빼앗아야 한다고 촉구하기 위 한 것이었다. 비판의 칼끝은 유학자의 태두 이색과 구세력의 중심 인물 우현보를 겨냥하 였다. 결국 정도전은 우군총제사를 사직하고 9 월에 평양 부윤으로 나갔다. 겨울에는 직첩 과 공신 녹권을 환수당하고 봉화로 귀양을 갔다가 나주로 이배되었다. 이후 다시 봉화로 옮겨졌다. 두 아들 정진( 鄭 津 ) 과 정영( 鄭 泳 ) 은 서인으로 쫓겨났다. 그해 7 월 조준이 토지 개혁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을 필두로 간관 이행, 전법판 서 조인옥 등이 잇달아 사전 개혁을 주장하고 나섰다. 위화도 회군의 또 다른 주역 조민 수는 사전 개혁을 방해하였으나 대사헌 조준이 탄핵하여 내쫓았다. 그 배후에는 정도전이 있었다. 1392년 7 월, 이성계가 즉위하였다. 이성계가 새 왕조를 개창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한 해 전에 반포한 과전법이었다. 과전법으로 혜택을 입은 신흥 관료들이 새 왕조 개창을 지 지하였기에 역성 혁명의 기운이 조성되었다. 그 토대는 실상 정도전이 마련한 것이었다. 정도전은 분의좌명 개국 공신 1등에 책훈되면서 문하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를 제수받 았다. 8 월에는 의흥친군위 절제사가 되었다. 그리고 10 월에 태조의 명으로 표덕설 을 지 어 올렸다. 표덕이란 자( 字 ) 를 말한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표덕을 군진( 君 晉 ) 으로 정하였 다. 당초 이성계의 자는 중결( 仲 潔 ) 이었다. 역성 혁명 후에 이성계는 고려의 국호와 제도 를 유지하다가 새 왕조의 기틀이 갖추어지자 명나라의 추인 아래 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 하였다. 그리고 이름도 단( 旦 ) 으로 바꾸었다. 1392년 10월 정도전은 문하시랑찬성사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 금릉에 가서 말 60 필을 선사하였다. 10월 22일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지중추원사 조반이 가지고 온 예부 의 차자에 답하는 뜻을 표한 것이다. 명나라 예부는 주원장의 칙지를 받아 조선의 건국을 승인하였다. 정도전이 명나라 태조를 칭송하기 위해 지참한 표문이 태조실록 의 1392 년 10월 25 일자에 실려 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낯간지러운 표현이 많다. 조선은 명 나라를 한껏 추어주고 사대의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다. 정도전은 1392년 사은사로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로에 올라 3월 20일 압록강을 건넜다. 그리고 대동강에 동지중추원사 노숭, 중추원부사 조인옥, 개성 부윤 이공, 평양 부윤 조준과 함께 뱃놀이를 하였다. 술이 거나해지자 정도전은 노랫가락 형식으로 시를 -19-

지었다. 강물이 유유하여라 난주를 띄워 중류에 비끼었네 江 之 水 兮 悠 悠 泛 蘭 舟 兮 橫 中 流 젓대 가락 요란하고 노랫소리 퍼져 가니 高 管 激 噪 兮 歌 聲 發 손님들은 흥에 겨워 술잔 주고받는다 賓 宴 譽 兮 獻 酬 이따금 튀어 오르누나, 비단 잉어 或 躍 兮 錦 鯉 가까이 날아오누나, 흰 갈매기 飛 來 兮 白 鷗 안개는 잔뜩 끼어 갯가를 덮고 煙 沈 沈 兮 極 浦 풀은 무성하여라, 고운 모래톱에 草 萋 萋 兮 芳 洲 계절의 경치를 구경하며 스스로 즐겨 돌아갈 줄 모르고 서성이는 사이 해는 홀홀 서쪽으로 달려가고 覽 時 物 以 自 娛 兮 蹇 忘 歸 兮 夷 猶 景 忽 忽 乎 西 馳 兮 물은 콸콸 흘러 멈추지 않네 水 沄 沄 兮 逝 不 留 인생의 환락이 며칠이더냐 이 마음 아파 근심을 품는다 曾 歡 樂 之 未 幾 兮 隱 予 心 兮 懷 憂 아! 성대한 시절은 다시 오지 않고 嗟 哉 盛 年 不 再 至 兮 늙음이 닥쳐오리니 무엇을 구하랴 老 將 及 兮 夫 焉 求 수레 관모의 벼슬은 우연한 것 軒 冕 兮 儻 來 부귀란 뜬구름 군자는 의리를 존중하기에 이름이 천추만고에 전하는 법 잔 들어 권하노니 옛 사람의 자취를 따르세 富 貴 兮 雲 浮 惟 君 子 所 重 者 義 兮 名 萬 古 與 千 秋 擧 一 杯 以 相 屬 兮 庶 有 企 兮 前 修 조선 초에 북악산 밑을 궁궐 터로 잡은 것은 정도전이었다. 처음에 무학은 인왕산으로 진산을 삼고 백악과 남산을 좌우의 용호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으나, 정도전은 제왕이라면 남면하는 법이라 하여, 북악( 백악) 을 주산으로 삼고 인왕과 낙산을 좌우 용호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성계는 결국 정도전의 의견을 따라 궁궐 터를 정하였다. 즉위 3년 째인 1394 년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세워 궁궐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완성하였다. 1395년 10 월 이성계는 종묘에 나아가 신궁 입궐을 보고하고, 정도전에게 궁궐의 이름을 짓도록 명하였다. 정도전은 새 궁궐을 경복궁이라 하고, 연침( 燕 寢 ) 을 강녕전, 동쪽에 있는 소침 ( 小 寢 ) 을 연생전, 서쪽에 있는 소침을 경성전, 연침의 남쪽 전각을 사정전, 그 남쪽의 전 각을 근정전이라 이름 지었다. 경복 의 이름에 대하여 정도전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 다. 신은 명을 받들어 삼가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시경 에서 술대접 받아 실컷 취 하고 또 많은 은덕을 입었으니 군자( 왕) 께서 만년의 수를 누리시고, 하늘로부터 커다란 복을 받으 시길 비옵니다. 라는 시구를 인용하여, 새 궁의 이름을 경복( 景 福 ) 이라 짓고자 합니다. 여기에서 -20-

전하와 자손들께서 만년토록 태평한 왕업을 누리실 것이고 사방의 신민들도 영구히 감동하는 바 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춘추 에서는 백성에게 부역시키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토목 공사 일으키는 것을 무겁게 여겼으니, 임금 된 이가 그저 백성을 부려 자기를 받들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한가로이 넓은 집에 있을 때는 가난한 선비를 덮어 줄 것을 생각하고, 전각에 서늘한 기운이 들 때에는 맑은 그늘을 나누어 줄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만민의 받듦을 저버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아울러 언급합니다. 한편 정도전은 1396 년 시관( 試 官 ) 이 되어 두 개의 책문을 작성하였다. 하나는 회시책 ( 會 試 策 ) 이고 다른 하나는 전시책( 殿 試 策 ) 이다. 첫 번째 책문은 예치( 禮 治 ) 와 법치( 法 治 ) 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법치보다는 예치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이념을 제시하고, 예치를 위 해 예제( 禮 制 ) 를 어떻게 제정하는 것이 옳은지 물었다. 1396 년( 태조 5) 4월 두 번째 책 문에서 정도전은 형옥( 刑 獄 ) 을 공정하게 판결하고, 명령을 공리( 公 理 ) 에 합당하게 내리는 일을 군주의 역할로 규정하였다. 1397년 12월 22 일 태조는 정도전을 동북면 도선무찰리사 ( 도선무순찰사 ) 로 삼았다. 정 도전은 동북면의 주 부 군 현의 조직을 정비하고 1398년 2월 3 일, 종사관을 보내어 성과를 아뢰었다. 다음날 태조는 중추원 부사를 보내 정도전에게 서찰과 함께 솜옷과 술 을 내렸다. 서찰 겉면에는 삼봉 행차 개탁( 三 峯 行 次 開 坼 ) 이라 적고 서찰의 끝에는 송헌 거사( 松 軒 居 士 ) 라는 호를 썼다. 1398 년( 태조 7) 2월 29일 정도전은 임금의 은덕에 감사하며 올리는 글( 謝 恩 箋 ) 을 올려 감사의 뜻을 전하였다. 이 글은 동문선 권91 과 양촌집 에 따르면 권근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김휴( 金 烋 ) 의 해동문헌총록 은 향약제생집성방 을 해제하면서 정도전이 이 서문을 썼다 고 밝혔다. 아마도 이 책은 1398년 1차로 편집되어 6월 하순에 정도전이 서문을 썼으나 간행되지 못하다가, 이듬해 간행이 추진되어 그해 5 월에 권근이 발문을 썼을 것이다. 태 조는 제생원을 두는 한편, 향약제생집성방 을 편찬하였다. 이후 세종도 1431년 집현전 학사들에게 향약집성방 을 편찬하게 한다. 정도전은 여말선초의 변혁기에 역성혁명, 전제개혁 및 배불 정책 등을 주도하였다. 북 악산 밑을 궁궐 터로 잡은 것도 그였으며, 한양 49 방의 이름을 정한 것도 그였다. 또한 -21-

조선경국전 과 경제문감 등을 저술해서 통치 질서를 규정하고, 심기리편 과 불씨잡변 을 저술해서 성리학을 통치 사상으로 천명하였다. 정도전은 국가 정책에 관련된 글과 저 술, 그리고 개인적 소회를 밝힌 시문을 통해 맹자 등에 위민( 爲 民 ) 사상과 왕도 정치를 주장하였고, 주례 등 고전에 근거하여 새로운 국가 이상을 제시하였으며, 주역 의 정 중( 正 中 ) 의 도를 참고하여 군주의 덕성론을 설파하였다. 하나의 이념이 보편적인 가치를 지닐 때, 본인은 비록 현실에서 대우를 받지 못하더라 도 그 이념은 살아남아 현실을 개선하는 큰 힘을 발휘한다. 정도전의 삶과 이상은 그 사 실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정도전은 왕실 분쟁의 와중에 무참하게 살해되었고, 조선 왕조 기간 내내 그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는 인색하였다. 하지만 조선의 지식인들은 그의 열렬 한 삶의 궤적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또한 그가 구상한 현실 개혁의 이상은 오늘날에도 많은 지침을 제공한다. 정도전은 천도( 天 道 ) 와 인도( 人 道 ) 의 뒷받침이 없으면 정권이 성 립할 수 없다는 것을 반복하여 강조하였으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인도를 중시하였다. 그 는 권력의 올바른 행사, 민생을 살피는 정책, 형벌의 정당한 시행 등에서 인도를 구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민본주의 ( 民 本 主 義 ) 의 높은 이상을 그는 갈구하였다. 정도전의 경국( 經 國 ) 과 화국( 華 國 ) 문학은 그의 개혁적, 정치적 이념을 실현하는 도구 였다. 그리고 그가 구축하였던 사상의 깊이는 현실체험의 깊이, 내면사유의 진실성에 의 해 형성되고 발전되었다. 그 인할 수 있다. 사실을 우리는 그가 남긴 협의의 문학적 시문을 통해서 확 심경호 역, 삼봉집, 한국고전번역원, 2013. 심경호 저, 국왕의 선물, 책문, 2012. -22-

주제발표 Ⅱ 새틀 짜기와 정치적 리더십 : 정도전과 안철수 - 박홍규 교수 ( 정치외교학과 ) -23-

학문소통연구회 3월 워크숍 정도전의 문학 세계와 정치 리더십 3월 21일(금) 오후 3시30분-6시. 신법학관 401호 새틀 짜기와 정치적 리더십 박홍규(정치외교학과) 변화에 관한 용어들 큰 변화 혁명, 창업, making, revolution, creation 중간 변화 중흥, 경장, 재건, 재조, 재생, 재활, remaking, re form, reframe, reconstruction, rehabilitation 작은 변화 개선, 개정-repair, revision -25-

드라마의 첫 장면 1383 함주막 결의 1398 비장한 최후 내가 작가라면? 1392년 6월 출사의 결심 -26-

정도전 출사의 경위 1391.09 정도전 2차 유배 떠남 1392.03 이성계 사냥도중 낙마 1392.04 정몽주 세력의 반격 1392.04 이방원의 정몽주 격살 1392.06 정도전 개경 소환 유배의 나날들 유배시1 세상일은 때를 좇아 변해 만 가고 인정도 물정에 따라 움직 이는걸 만나는 이가 혹시 나에 대해 묻거든 병이 많아 시 읊기도 폐 했다 전해주오 유배시 2 경도( 京 都 )는 아스라이 흰 구름 떠가는 북쪽인데 성곽은 아득하니 높다랗 게 바다 끝에 있구나 유배온 나그네( 謫 客 ) 누 樓 에 오르니 생각은 한이 없고 맑고 깨끗한 피리소리 저 누에서 들려오네 -27-

맹자의 길과 자기부정 한 가지 일이라도 불의를 행하고, 한 사람이라도 죄 없는 사람을 죽이어 천하를 얻는 것은 모두 ( 伯 夷 伊 尹 孔 子 )가 하지 않을 것이다. 孟 子, 公 孫 丑 上 이윤은 유신 有 莘 의 들에서 밭을 갈면서 요순지도 堯 舜 之 道 를 즐겼다. 그 의 義 가 아니고 그 도 道 가 아니면, 천하로써 녹 祿 을 주더라도 돌아보지 않았다. 孟 子, 萬 章 上 생 生 도 내가 원하는 바요, 의 義 도 내가 원하는 바 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생 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 孟 子, 告 子 上 주자주의 인간관 理 의 세계 天 理 聖 善 義 氣 의 세계 人 欲 愚 惡 利 -28-

도통과 정통 도통 집주 이념의 세계 理 ( 善 )의 불 멸성 정통 강목 현실의 세계 氣 ( 惡 )의 강 력함 강목 의 정통론 단지 천하가 하나가 된다면 정통을 얻은 것이다. 찬적 簒 賊 은 찬위 簒 位 하고나서 세 世 를 전하지 못한 자 세를 전하면 곧 정통왕조가 된다: 결과주의 -29-

주자주의 정치학 집주 정통론 강목 도통론 진정한 의미의 실학 출사의 辨 民 을 위해, 상생지락( 相 生 之 樂 )을 위해 찬위행위가 찬적으로 악순환에 빠지지 않도록 독락( 獨 樂 ) 대신에, 후락( 後 樂 ) 의 길로 -30-

맹자의 경고 나는 자기를 굽히고서 남의 잘못을 바 로잡았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하 물며 자신을 욕되게 하고서 천하를 바 로잡을 수 있겠는가. 孟 子, 萬 章 上 새정치의 포지셔닝 구조, 제도 면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님 물론 제도에 대한 부정적 수정 주장 중점은 정치 행위, 정치 운영의 방식에 있음 정치과정 상의 변화 추구, 즉 정치 공간의 변화 의미 -31-

안철수의 결정적 순간 2012.11 대선후보 사퇴 2013.4 노원병 출마 및 2014.2 새정치연 합 발족 2014.3 신당통합 기자회견 당선 상반되는 시각 긍정적 시각 트로이목마 정치적 상상력 새정치 진화 부정적 시각 백기투항 정치공학 새정치 종말 -32-

안철수 2막의 예고 안철수에게 유일한 준거인 민중은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다. 민중 은 수시로 유동할 뿐이다. 게다가 민중의 마음은 모순될 때가 얼마든 지 있다. 그러한 민중의 마음을 잡으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 가? 안철수가 다른 정치가들과 다른 것은 그가 유교적 정치가로서 갖고 있는 동기주의에 있다. 그러한 그가 만약 결과주의에 기웃거린다 면 그의 존재의미는 사라질 것이다. 안철수의 딜레마이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돌파해갈 것인가? 정치가 안철수 2막의 과제이다. 전국시대 의 민중은 맹자의 주장에 공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맹자는 자신의 뜻 을 실현하지 못했다. 그것은 민중에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민중은 민본주의에 공감하고 있고, 그들은 선택할 수 있는 민주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민중은 믿을 수 있는가? 민중 을 믿게 만드는 것은 정치가의 몫인가? ( 유교적 정치가와 성숙한 민 주주의:안철수 민란 (한국정치학회보 47-4, 2013) 안철수 신당의 여정 대선 이후 20~25% 지지율 2월 17일 발기인 대회 인재영입 부진 3월 2일 신당통합 기자회견 12월 20일 32% 지지 율 1월21일 신당 창당 선언 2월 28일 지지율 감소 김한길 대 표의 통합 제의 -33-

안철수의 기로 동기주의 독자노선 장렬한 전사 결과주의 신당통합 희망적 결과 안철수의 딜레마 안철수가 의지할 곳은 오직 민중 민중은 유동적이며 모순된 요구를 함 민중은 새정치를 염원하는 동시에 야권분열로 인한 패배를 원하지 않았다 -34-

맹자의 조언: 동기주의 사수 등문공이 물었다. 등나라는 작은 나라입니다. 제나 라와 초나라 사이에 끼어 있으니, 제나라를 섬겨야 합니까? 초나라를 섬겨야 합니까? 그러나 맹자에겐 맹자가 대답했다. 이 계획은 내가 언급할 수 없는 답이 없다. 것입니다. 어쩔 수 없다면 한 가지가 있으니, 성벽 아래 못(해자)를 깊이 파고, 성을 쌓아서 백성과 더 불어 지키는데, 백성이 죽음에 이르러도 떠나지 않 으면 이는 가히 할 만합니다. 孟 子, 梁 惠 王 上 안철수의 자기부정 한때 구정치의 한 축이었던 민주당 야권연대 없다. 새정치연대 혼자 간다 100년 가는 정당을 만들겠다 자기부정, 동기주의의 좌절 -35-

자기부정의 두 유형 爲 己 之 政 자기가 살기 위해 편안한 정치를 위해 책임 회피를 위해 爲 人 之 政 새정치를 위해 민중의 염원을 위해 책임을 지기 위해 안철수의 辨 6.4선거 단독 강행시 안철수는 살아남는다 그러나 민중은 패배하고 죽어갈 것이다 민중의 염원도, 민주세력도, 한국 정치도 살린다 민주당을 변화시키는 것도 새정치다 -36-

民 本 에서 爲 民 으로 民 本 민중에 의지 의존, 의거 단순 동기주의 爲 民 모순적인 민의 염원 파악 민심을 만들어감 새정치의 미래 새정치를 버림으로써 새정치를 살린다 맹자를 넘어 맹자의 길을 간다 주체적 정치가의 탄생 새정치란 실천이고 과정이다 -37-

이후의 과제 새정치의 가치 견지 민주당 내 소국 형성 대국화의 시점 결정 마치며: 2014의 고려대학교 리더 정도전 안철수 X 공동체 조선왕조 대한민국 고려대학교 현상 왕조의 쇠락 구정치 현상 초권력주의 2류 전락 이념, 가치 목표, 비전 주자주의 새국가건설 근대 자유민주주의 국가 세계적 수준의 대학 구조 제도 근본 변화 making creation 재건, 재조 remaking reform 혁명, 창업 구조변화, 제도변화 학교 지배 구조 부분 수정 repair 운영 공간 행위 방식 정치과정 기초공천폐지 헌법, 선거법 개정 성숙한 민주주의 정치방식, 정치공간 총장선출제도 개선 -38-

모델 탕, 무 세종 주체세력 신진사대부 혁명파, 급진파 새정치연합 통합신당 유배, 유랑 1막: 민란 존립 이성계 2막: 노원병 새정치연합 통합신 혁명파 당 권력투쟁 중흥파, 정몽주 이방원의 폭력, 功 利 당내투쟁, 소국 형성 대여선거투쟁(6.4, 총선, 대선) 리더십과정 자기부정 소환 출사의 변 經 權 론 신당 통합 통합의 변 민주당 변화 과정 업적 정통왕조의 건설 새누리당 변화 국민의 변화 최종 업적 새조선 정통왕조의 확립 새한국 민주진보세력 확립 성숙한 민주주의 새고대 총괄 평가 성공적?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