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학 술 심 포 지 움 자 료 집 최 용 신
최용신의 농촌운동론 - 농촌계몽론자에서 브나로드운동론가로 김인식(중앙대학교 교양학부대학 교수) Ⅰ. 머리말 Ⅱ. 최용신 관계 자료 검토 Ⅲ. 최용신의 농촌운동론 1) 농촌계몽론의 형성 2) 브나로드운동론으로 발전 Ⅳ. 맺음말 Ⅰ. 머리말 최용신은 수원군 반월면 샘골과 인근의 마을에서 농촌운동에 헌신하다 가 26세로 삶을 마감한 농촌운동가였다. 아직까지는 沈 熏 의 소설 常 綠 樹 의 여주인공 蔡 永 信 의 모델로 더 알려져 있지만, 대한민국정부는 그 를 "식민지 수탈에 의해 피폐된 농촌사회의 부흥을 위해 농촌계몽운동으 로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이다." 1) 고 평가하며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최 용신은 소설 상록수 에서 채영신으로 형상화됨으로써 샘골의 영역을 넘어 한국민 전체에게 역사 속의 인물로 다시 태어났고, 농촌운동가로서 그의 활동이 민족운동가로서도 공훈이 인정받는 단계에 이르렀다. 최용신에 대한 연구는 그의 삶의 본령과 연관시켜 농촌계몽운동가로 평 1) 國 家 報 勳 處, 최용신, 獨 立 有 功 者 功 勳 錄 -1995 年 度 褒 賞 者 第 13 卷 ( 國 家 報 勳 處, 1996. 12), 657쪽. 최용신 학술심포지움 자료집 25
가하는 데에서 출발하였다. 그에 대한 최초의 傳 記 인 유달영의 農 村 啓 蒙 의 先 驅 女 性 崔 容 信 小 傳 2) 을 시작으로, 좀더 심도 있게 그의 생애를 다룬 홍석창 3) 의 연구에서도 '농촌계몽운동의 선구'라는 용어는 '최용신' 에 접근하는 전제어였다. 이후 학계에서는 김호일 4) 을 비롯하여 최용신의 농촌계몽운동의 이론과 실태를 해명하였고, 5) 여성(해방)운동가로서의 면 모 6) 에 주목하였으며, 그의 내면 세계인 기독교 신앙과 농촌운동의 상관 성 7) 에도 관심을 높였고, 최근에는 '리더십'의 측면까지 조명하였다. 8) 짧은 생애를 오로지 농촌운동에 挺 身 한 최용신 삶의 '단순성'이야말로 그가 후세에 기억되는 단순한 비밀이다. 그의 농촌(계몽)운동이 항일무력 2) 柳 達 永, 農 村 啓 蒙 의 先 驅 女 性 崔 容 信 小 傳 ( 聖 書 朝 鮮 社, 1939. 12). 유달영은 8 15해방 후 이 책의 개정판을 내면서도 '농촌계몽의 선구'라는 말을 副 題 로 삼았다. 유달영, 崔 容 信 孃 의 生 涯 -농촌계몽의 선구 (아테네 社, 1956. 3) ; 柳 達 永, 崔 容 信 孃 의 生 涯 - 農 村 啓 蒙 의 先 驅 (새글집, 1961. 4). 3) 洪 錫 昌, 農 村 啓 蒙 運 動 의 先 驅 者 최용신양의 신앙과 사업 (세헌, 1984. 11) ; 홍석창, (농촌계몽운동의 선구자 최용신의 생애) 상록수 농촌사랑 기독교문사, 1991. 3). 4) 김호일, 일제하 농촌계몽운동과 최용신, 人 文 學 硏 究 第 三 十 二 輯 ( 中 央 大 學 校 人 文 科 學 硏 究 所, 2001. 8). 5) 김형목, 최용신 현실인식과 농촌계몽운동, 史 學 硏 究 第 88 號 ( 韓 國 史 學 會, 2007. 12) ; 김형목, 최용신 농촌계몽운동과 연구 동향, 경기도향토사연구협 의회, (최용신탄생100주년기념 국제학술회의 논문집) 최용신 기억속에서 아시 아로 걸어나오다 (안산시, 2009. 12). 6) 이은선, 일제하 여성민족운동과 최용신, 앞의 人 文 學 硏 究 第 三 十 二 輯 : 박용옥, 일제식민지하 신여성운동과 최용신 : 신여성 최용신의 농촌운동과 그 정신, 白 山 學 報 第 70 號 ( 白 山 學 會, 2004. 12). 7) 홍석창, 일제하 기독교 사상과 최용신, 앞의 人 文 學 硏 究 第 三 十 二 輯 : 이덕주, 기독교 여성 민족운동 맥락에서 본 최용신의 농촌운동, 神 學 과 世 界 통권47호(2003 가을)( 監 理 敎 神 學 大 學 校 出 版 部, 2003. 9). 8) 차혜영, 약자를 돌보는 여성적 리더십 상록수 와 최용신 돌봄의 리더를 키워내는 오적 기반과 내적 지도력, 경기도향토사연구협의회, 앞의 책. 26 최용신의 농촌운동론
투쟁과 동일화할 만큼의 민족운동이었다고 강조함 9) 은 견강부회의 감이 있지만, '구국의지'와 '항일투쟁의식'을 동반한 '민족주의적 여성교육운 동'의 성격을 지녔음 10) 은 분명하다. 유달영이 "최양의 생애는 참으로 간단 하거든. 간추리면 4~5페이지 정도만 쓰면 생애를 전부 수록할 수 있을거 야. 그때 최양은 참, 목숨 내걸고 일했어요. 진짜 애국자이지." 11) 라고 힘주 어 말한 데에는, 최용신 생애의 분량과 실질을 평가하는 전후반의 맥락에 서 논리상의 비약이 다소 보이지만, 나름 適 實 한 통찰이 담겨 있다. 식민지시기 그의 농촌(계몽)운동이 독립운동(민족운동)의 영역 12) 으로 인정받은 까닭은, 동일 영역의 다른 운동자들과도 구별되는 일관성과 헌 신성 때문이었다. 식민지시기 다수의 농촌운동가들이 계몽성에 머물고 때로는 일제에 타협성을 보인 점과 달리, 최용신의 농촌운동은 농민과 일 체가 되는 진정성에서 다른 예를 찾기 어렵다. 아마 이 점이 예외라 할 만 큼, 농촌운동가를 독립유공자로 추서한 근본 이유였다. 9) 洪 仁 愛, 民 族 獨 立 運 動 家 崔 容 信 의 生 涯 와 思 想 硏 究,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9(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1998. 9). 10) 박용옥, 여성운동, 경기도사편찬위원회 편,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경기도, 1995. 12), 805쪽. 11) 저자와의 대담 (장소 : 성천문화재단 이사장실, 날짜 : 1997년 1월 8일, 질문 : 최용신기념사업회 김명옥 회장) 류달영, (성천아카데미문고 8) 최용신의 생애 (성천문화재단, 1998. 11), 158 182쪽 12) 조동걸은 식민지시기의 농민운동과 농촌운동을 구별하였다. 그는 "농민운동은 농민의 주체적 운동인 동시에 농민의 조직적인 운동이다."고 정의하고, 한국농 민운동사에서 조직성을 보인 전형으로 1920년 이후의 소작쟁의를 들었다. 또 " 농촌계몽운동은 민족 역량을 성장시키기 위한 민족교육적 요구에 의해 추진된 농촌운동인 것이다."고 전제한 뒤, 농촌계몽운동은 농민계몽을 목표로 삼아 농 민을 대상으로 한 교육운동으로 파악하였다. 운동의 주체에서도 농민이 아닌 지 식층의 경우가 많아, "대체로 도시인 등의 지식계층이 농민을 계도하려고 농촌 으로 들어가 전개하는 계몽주의적 농촌개량 운동이었던 것"이라고 성격지었다. 조동걸은 "이러한 운동을 농민이 주체가 되어 전개한 농민운동과 구별하여 농 촌운동이라고도 한다."고 결론 내렸다. 趙 東 杰, 머리말 (제3장) 農 村 啓 蒙 運 動 과 농민운동의 새 양상, 日 帝 下 韓 國 農 民 運 動 史 (한길사, 1979. 3), 12, 196~198쪽. 최용신 학술심포지움 자료집 27
최용신에 대한 연구자의 주관은 물론, 국가기관에서 평가받은 객관성까 지 반영할 때, 그를 농촌운동가, 더욱이 농촌계몽운동가로 규정하는 시각 은 적절하지 못하다. 그의 삶의 '단순성'을 '농촌운동'의 영역으로 분류함 은 식민지시기 민족운동 사회운동의 분야별 평가일 뿐이지, 그의 내면 과 외연의 세계를 함께 반영한 정확한 성격규정은 아니다. 농촌운동가에 서 독립운동가에 이르는 모든 범주를 포괄하여, 최용신을 한마디로 규정 한다면 '크리스천 브나로드운동가'가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 논문은 최용신이 크리스천 농촌계몽론자에서 출발하여 크리스천 브 나로드운동가로 발전하였다는 시각에서 서술하였다. 지금까지 모든 연구 에서 최용신의 기독교신앙을 언급하였고, 이를 더욱 강조하는 시각도 있 었지만, 그에게 '크리스천'이라는 내면성이 '브나로드운동'이라는 외연으 로 外 化 하는 논리와 과정은 좀더 해명해야 한다. 여기서 '크리스천'은 그 의 농촌운동의 출발점이자 끝점으로서 전제이며, 의의이자 한계를 동시 에 내포하는 본질이다. 그가 민중을 지도하려는 '농촌계몽론자'에서 민중 속으로 녹아들어 민중과 일체가 된 '브나로드운동가'로 발전하였지만, '크 리스천'이라는 전제는 러시아의 농민운동인 브나로드운동 13) 과는 질을 달 리하는 농촌운동에 머물렀다는 한계선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이광수 의 흙 에서 보이는 '시혜적 의식' 14) 따위는 애당초 없이 민중과 하나가 13) 브나로드운동은 1870년대 초 러시아의 젊은 지식인 남녀들에게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농촌으로 들어가 농민을 깨우치고 농민공동체를 활용해 자본주의 단계 를 뛰어넘어 곧장 사회주의 평등사회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당국의 탄압과 농민 반응의 소극성이 겹쳐 4~5년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유용태 박진우 박태균,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 1(창 비, 2010. 12), 337쪽 14) 소설 흙 에서 허숭은 이렇게 말한다. "농민 속으로 가자. 돈이 없으면 없는 대 로 몸만 가지고 가자. 가서 가장 가난한 농민이 먹는 것을 먹고, 가장 가난한 농 민이 입는 것을 입고, 그리고 가장 가난한 농민이 사는 집에서 살면서 가장 가난 한 농민의 심부름을 하여주자. 편지도 대신 써주고, 주재소, 면소에도 대신 다녀 주고, 그러면서 글도 가르쳐주고 소비조합도 만들어주고 뒷간 부엌 소제도 하여 주고 이렇게 내 일생을 바치자." 이광수, 흙 (1932) (한국문학전 집17) 이 28 최용신의 농촌운동론
되었다는 점에서 진정한 '브나로드'를 실천하였다는 의의를 갖는다. 크리스천 농촌계몽론자에서 크리스천 브나로드운동가로 실천력을 확대 하는 최용신의 농촌운동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남긴 몇 편의 글들 을 정밀하게 분석하는 데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지금까지 최용신을 다룬 연구들에서도 이를 활용하였지만, 재인용하거나 오독하는 경우가 많았 다. 제Ⅱ장에서는 최용신이 남긴 글들을 포함하여 연구에 참고되는 자료 들을 소개하였다. 이를 근거로 하여, 최용신의 농촌운동이 기독교신앙에 입각한 기독교복음화운동의 일환이었음을 설명하면서, 그를 크리스천 브 나로드운동가로 규정한 논리를 제시하였다. 제Ⅲ장에서는 완전사회를 목 표로 설정한 최용신의 농촌운동론이 남녀양성론 신인물론에 입각한 농 촌계몽론에서 출발하여 점차 브나로드운동가 발전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Ⅱ. 최용신 관계 자료 검토 최용신은 26세의 짧은 삶을 살았다. 이 생애 동안 1931년 10월 샘골에 파견된 이래 1935년 1월 23일 영면하기까지, 그의 '농촌사업'은 샘골을 중심으로 해서 인근 마을에 확장될 정도의 규모로 오로지 '샘골'에 헌신 하였으며, 자신의 시신도 샘골에 안장하기를 유언하였다. 짧은 생애, 샘 골에 한정된 활동 영역을 기록한 최용신의 일기 등이 그나마 있었지만, 그의 사후 가족들은 만주전쟁 이후의 불안한 시국 상황에서 발생할 불상 광수 장편소설 : 흙 (문학과 지성사, 2005. 6), 48쪽. 김현은 흙 의 이 대 목을 가리켜 " 여하튼 그는 이 심부름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주는 것이 다. 施 惠 的 意 識, 貴 族 主 義 的 인 생각이 뿌리깊이 그의 속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고 지적하면서, 농촌 출신의 허숭(아니 사실은 이광수에 대한 비판이겠지만)이 " 이미 농촌에서 벗어나 완전히 施 惠 的 意 識 의 都 市 인테리가 되어 있는" 한계를 비 판하였다. 김현, 僞 善 과 敗 北 의 人 間 像 : <흙>과 < 常 綠 樹 >를 中 心 으로, 世 代 通 卷 第 十 七 號 ( 世 代 社, 一 九 六 四 年 十 月 ), 149~150쪽. 최용신 학술심포지움 자료집 29
사를 우려하여 부득이 이것들을 소각하였으므로, 15) 그의 삶과 생각을 증 거하는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최용신이 남긴 네 편의 글을 직접 자료로 삼아, 관련된 신문 기사 몇 편을 참조하고, 유달영의 崔 容 信 小 傳 을 금과옥조로 의존하여 최용신을 복원하는 실정이다. 짧지만 '단순한 진정성'으로 살았던 최용신 삶의 웅변력을 이해하기 위 해서는, 무엇보다도 그가 남긴 직접 자료, 또 그와 관계된 간접 자료들을 심층성 있게 분석하고 새로운 사실들을 발굴해 내야 한다. 우선 현존하는 자료를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해석해야만 견강부회로써 그의 사상을 '창 작'하는 오류를 피하는 길이라 보인다. 최용신이 남긴 글은 현재까지 네 편과 유언이 전한다. 이 장에서는 그가 남긴 자료(1차 자료)들을 정확하 게 原 文 을 복원하여 전재하였다. 그와 관계된 신문 기사(2차 자료)는 간 단한 설명으로 그치고, 본문에서 서술할 때 필요한 부분을 인용하여 언급 하기로 한다. (자료 1) 校 門 에서 農 村 에 (1928. 3. 5) 16) 數 日 이 不 過 하야 中 等 의 學 業 을 마치게되니깁붐도잇스려니와 反 面 에는 애연한생각도업지아니하다 因 緣 깁고 情 싸인 樓 氏 園 을 나게되니 形 便 과 處 地 가다가튼우리들은이자리를 當 하야 回 顧 의늣김과 새로운 希 望 과 抱 負 를 가젓슬줄안다 이제우리는 校 門 을 나 社 會 에발을 드려놋케되엇다. 果 然 우리의 前 途 는 平 坦 하다고는 到 底 히 밋들수업다그는 卽 이 社 會 에 不 足 함이잇고 업는것이 만흔 닭이다 그럼으로이 社 會 는무엇을 要 求 하며누 구를찻는가? 그는 무엇보다도 누구보다도 新 敎 育 을 밧고나아 오는 新 人 物 을 要 求 한다 其 中 에서도 더욱이 現 代 中 等 敎 育 을밧 고나아가는 女 性 들을 가장 要 求 하는줄안다 그는 女 性 이 男 性 보 다 出 衆 하야그런것이 아니라 朝 鮮 의 在 來 를보면 男 性 들의 多 少 15) 柳 達 永, 앞의 책 (1939. 12), 88쪽 ; 유달영, 앞의 책 (1956. 3), 126쪽. 16) 朝 鮮 日 報 第 二 千 七 百 二 十 一 號 (1928. 4. 1). 30 최용신의 농촌운동론
의 勞 力 과 活 動 이잇섯스나 그 勞 力 과그 活 動 으로써 그만한 成 果 를엇지못하엿다 그는 男 性 의 勞 力 이 不 足 하며 活 動 이적은 닭 이아니다 元 來 이 社 會 의 組 織 은 男 女 兩 性 으로된것이다 在 來 로 우리 朝 鮮 女 性 이 半 萬 年 동안 暗 黑 中 에뭇치어 社 會 에 大 勢 는 姑 捨 하고 自 己 個 性 조차 忘 却 하고말앗다 그럼으로 男 女 兩 性 을 標 準 한이 社 會 에서 男 性 偏 重 에 活 動 과 努 力 만으로써는 圓 滑 한 發 達 을밧을수업슬것이다 이 點 에잇서 우리 敎 育 을밧은 女 性 이 自 覺 하고 責 任 의 分 을지고 奮 鬪 한다고하면비로서 完 全 한 社 會 를 建 設 할줄로밋는다 이 意 味 에서 中 等 에 敎 育 을맛춘우리들은 自 己 에 理 想 하는바에 依 하야 自 己 힘자라는데 지 努 力 하지아니하면은안될것이다. 이제그 活 動 의첫거름은무엇보다 農 村 女 性 의 指 導 라고생각한 다나는 農 村 에서자라난고로 現 實 農 村 에 狀 態 를잘안다 그럼으 로내가 切 實 히늣기는바는 農 村 의 發 展 도 女 性 의 奮 鬪 함에잇슬 줄안다 참으로 現 代 敎 育 바든 女 性 으로써 북덕이싸인 農 村 을 爲 하야 獻 身 하는이가드문것은 事 實 인 同 時 에 遺 憾 이다 文 化 에눈이 어두운 舊 女 性 만모힌 農 村 에 暗 黑 에서 進 步 되지못한다하면이 社 會 는언제던지 完 全 한 發 展 을일우지못한것이다 이 農 村 女 性 의 向 上 은 中 等 敎 育 을밧는우리들의 責 任 으로알아야할것이다 그 러면 中 等 敎 育 을밧고나아가는우리로 華 麗 한 都 市 의 生 活 만 憧 憬 하고 安 樂 한 處 地 만 겟는가?그러치안흐면 農 村 으로돌아가 文 盲 退 治 에 努 力 하려는가? 거듭말하나니 우리 農 村 으로달녀가자! 손을잡고달려가자! 一 九 二 八, 年 三 月 五 日 위의 (자료 1)은 17) 뒤에 볼 (자료 5)와도 관계 있다. 이 글은 문학에 소질 17) 유달영은 한자를 한글로 바꾸기도 하고, 1939년 당시의 표기법대로 (자료 1)을 農 村 啓 蒙 의 先 驅 女 性 崔 容 信 小 傳 (1939. 12), 1819쪽에 全 載 하였다. 대의를 파악하는 데 지장은 없지만, 原 文 과 다른 부분이 다소 있다. 이를테면 ' 新 敎 育 ' ' 新 人 物 ' 등의 단어가 '새교육' '새일꾼' 등으로 바뀐 곳을 비롯하여 단어와 문장 이 누락된 경우도 보인다. " 文 化 에눈이어두운 舊 女 性 만모힌 農 村 에 暗 黑 에서 進 步 되지못한다하면"이라는 구절은 " 文 化 의눈이 구 女 性 만모인 농촌으로하여금 어둠 속에서 걸어나오게 못한다면"으로 의미가 변질되었다. 발표 날짜도 '( 一 九 三 八 - 三, 五 )'로 잘못되었다. 이러한 오류는 개정판들에도 계속되었다. 原 文 을 그대로 최용신 학술심포지움 자료집 31
있는 '장래문장가'답게 18) 감성과 논리성 19) 을 적절하게 섞어 20세 청년의 이상과 포부를 짜임새 있게 드러내었다. 최용신은 농촌으로 돌아가 농촌 여성을 향상시키는 '농촌여성의 지도자'로 살겠다는 자기 아이덴티티를 이미 분명하게 정립하였다. 교문을 나서 사회로 나아가는 최용신의 다짐 속에는, 현대중등교육(=신교육)을 받은 신인물(=교육받은 여성)로서 사 명감과 책임감이 진하게 깔려 있다. 조선일보 가 우등 졸업생 가운데 최용신의 글만을 전제한 이유는 그의 문장력을 평가한 때문이기도 하겠 지만, 20세 청년이 삶의 지향점과 헌신성을 확신으로 표현한 감동도 반 영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자료 2) 새벽종 소리에 따라 올리는 祈 禱 (1929. 4. 2)20) 이 거룩한 종소리 몹시도 신비롭고 처량이 울릴때 침상에 의지하였던 이몸은 무한한감흥의 충동을 받어 방문을 열고 나와 한거름 한거름 발길을 옮겨 층층대까지 나오게 되었다. 아직도 어둠의 검은막이 그대로 남었고 종소리 또다시 울린 다. 온 우주는 침묵에 깊이 잠들었고 창공에 수없는 별만 반짝 이는 그아래 혼자서 기쁨을 이기지못하는나는 고요히 머리를 수기고 무릎을 꿇어 대주재 여호와께 감사를 올리게 되었다. 전능하신 여호와의 능력이 아니면 어찌 이 아름다운 새 벽이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들 어찌 나로 하여금 이 기 쁨의 동산을 보게 하였으리오. 하나님은 홀로 하나이시니 전능하시도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용하지 않고, 위의 崔 容 信 小 傳 을 활용한 일부 연구자들에게도 동일한 오 류가 반복되었다. 18) (자료 5)에서는 최용신을 '장래문장가'로 "문학에 성공할 소질"이 있다고 소개하 였는데, 이 글은 이러한 자질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19) 본문에 '그럼으로'라는 단어가 3차례 나온다. 접속어로 논리성을 보이려는 설정 이 눈에 띄나, 전체를 보면 짧은 지면에 압축된 표현으로 짜임새 있게 글을 펼쳤다. 20) 柳 達 永, 앞의 책 (1939. 12), 88~91쪽에 所 收 된 바를 그대로 옮겼음. 인용문 안의 쪽 번호는 위의 책 의 쪽수를 말하며, 줄임표( )도 그대로 옮겼다. 32 최용신의 농촌운동론
무한하시니 내 감사하는 바로다. 여호와의 이름을 만세에 높 이고 여호와의 성호를 영원토록 찬양하리로다. 오! 하나님이 계신 이동산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이새벽에 이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89쪽) 나로하여금 뛰놀게 하시고 노래 하게 하였으니 주여 그 은혜 감사하는바로소이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이 고요하고 맑은 새벽같이 이 마음도 맑고 고요하게하여주소서. 이 아침 공기가 새로움같이 이 정 신도 더욱 새롭게 하여주소서. 아버지 하나님 이 들리는 거룩 한 종소리같이 이몸을 강하게 해주시며 이 입으로 나오는 말 이 모든 듣는자의 정신을 일 깨우게 하여 주소서. 저 종소리는 거룩합니다. 그속에는 아무 시기와 질투와 거즛 이 없습니다. 오- 주여 이마음속에 모든 불의한 생각을 내여버리게 도아 주소서, 주여 내가 저 종소리를 들음같이 이 죄인의 기도소리 를 들어주소서. 거룩하신 주여호와여 이몸은 주님을 위하여 바치나이다. 여호와여 이몸은 남을 위하여 형제를 위하여 일하겠나이다. 여호와여 살어도 주를 위하여 살고 일하여도 의를 위하여 일 하옵고 죽어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게 하소서. 여호와여 이몸을 주께 바치오니 이 아침 공기가 신성하고 깨 끗함같이 내 마음을 새롭게 하여 주소서. 오- 주여 오늘 하루를 기뿌게 하여주소서 이와같이 자연의 침묵중에서 맛보는 신성하고도 결백한 이맛은 홀로 나 에게만 (90쪽) 있는듯 싶었다. 울리는 종소래는 넘어가는 달빛을 따라 은 은히 사라질려할 때 건너편 동리의 개 짖는 소리 고요한 새벽을 깨치고 말었다. 얼마안되여 다시 신성스러운 生 의 무대는 열리기 시작하였다. 단 잠을 깨인 동무들의 발자취에 이발거름도 다시 침방으로 돌리었다. ( 己 巳, 四, 二 ) (91쪽) 이 기도문은 유달영의 崔 容 信 小 傳 에만 실려 있다. 앞서도 보았듯 최용신 학술심포지움 자료집 33
이, 최용신이 사망하자 유족들은 만주전쟁 이후의 험악한 시국을 염려하 여 그의 많은 일기를 모두 불태웠다. 유달영이 최용신의 小 傳 을 쓰려 하 자, 최용신의 동생 崔 容 璟 이 몇 장 되지 않는 용신의 학창시절의 노트를 전하였다. 유달영은 여기서 '문득' 이 ' 一 文 '을 발견하고, 이 기도문에서 발견한 새벽기도 생활에서 '믿음의 사람' 최용신의 "생활의 열쇠를 찾은 것이었다"고 감격하였다. 그는 " 容 信 양의 새벽기도 이것은 확실히 이 상한 힘으로 활동한 그 아름다운 생활의 원동력이었든것이다."고 단언하 였다. 21) 루씨여고보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진학한 지 1년여 지나서 쓴 위 의 기도문을 읽으면, 최용신에게 이제 신학도다운 영성과 관념론이 형성 되어 가고 있으며, 문장가다운 수사도 늘어감을 확인하게 된다. (자료 3) Y. S, 私 の 所 感 (1934. 7. 20), 靑 空 ( 神 戶 女 子 神 學 校 自 治 會 文 藝 部, 昭 和 九 年 初 夏 ) 22) 현해탄(겐카이나다)을 건너서 시모노세키에 도착했을 때는 얼마나 기뻤던지. 그 기쁨은 그 어떤 것에도 비교할 수 없을 정 도였습니다. 그것은 외국에 간다는 쓸쓸함보다도 친숙한 고향 으로 돌아간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는 올해 처음으로 이곳에 왔습니다만 이 신학교는 이미 나에게 깊은 관 계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고, 늘 이 학교를 동경하고 있었기 21) 柳 達 永, 앞의 책 (1939. 12), 92쪽. 22) 이 자료를 수집한 경위에 대해 홍석창은 "이 글은 1934년( 昭 和 9년) 최용신이고 베여자신학교에 입학하였을 때 당시 학생들의 글 모음집인 <<푸른 하늘>>(あお ぞら)에 실었던 소감문이다. 1994년 8월 31일 고영우 전도사가 고베여자신학의 후신인 세화대학에 방문하여 수집한 것이며 또한 번역도 한 것이다."고 밝혔다. 홍석창, 감리교회와 독립운동 (에이멘, 1998. 8), 233쪽. 이 글의 번역문은 홍석창, 위의 책, 233~234쪽 : 홍석창, 최용신과 샘골마을 사람들 (한국 감리교사학회, 2010. 6), 237~238쪽에 실려 있으나 일부분에서 오역과 누락된 곳이 보인다. (자료 3)은 이를 바로 잡아 새로 번역하였다. 私 の 所 感 은 현재 최용신 기념관에서 복사본을 소장하고 있어 이를 활용하였다. 귀중한 자료를 제 공해 주신 최용신기념관의 정은란 이상화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귀찮음을 마 다하지 않으시고 소장 자료를 기꺼이 내주신 홍석창 목사님께도 감사드린다. 34 최용신의 농촌운동론
때문에, 그렇게 동경했던 이 학교를 볼 수 있고, 또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뻤던 것입니다. 마침내 4월 10일이 되어 학교에 입학한 그 날부터 모든 선생 님들의 친절함과 학생들의 애정에 감탄했습니다. 하루하루 학생생활을 하는 중에 나는 한 사람의 이방인이라는 적적함도 없이 즐거움과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이 안에는 다른 사 회에서 볼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빛나고 있기 때문입니 다. 이 세상은 어디를 가 보아도 계급차별이나 민족차별이나 빈부 차별 때문에 비극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학교 안에서는 이러한 계급민족빈부귀천의 사상을 초 월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빛나고 있는 것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기쁘고 또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따라서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널리 전파되어서 이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개인도 가정 도 사회도 그리스도 예수의 진실한 사랑을 갖지 못하였다면 진 정한 행복은 없습니다. 어떠한 위대한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갖지 못한 사람은 결함이 있으며, 또한 아무리 행복한 가정이라도 참된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는 가정에는 언젠가는 불행을 초래하게 되고, 아무리 강한 힘을 갖고 있는 민족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는 민족은 멸망하게 되고, 또한 어떠한 문 명사회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는 사회는 부패되어가고, 또 아무리 국제 평화를 외쳐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는 평화는 성 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학교 안에서 수양하고 있 는 우리들은 이러한 진실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으로써 개인 의 행복을 위하여, 사회 안정을 위하여, 세계평화를 위하여 가 는 곳마다 예수의 사랑을 실현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휘하 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우주에 임하는 것을 기원하는 바입니다. 느낀 바는 많지만 말로는 다 할 수가 없습니다. 7월 20일 봄이 지나자 / 어린 잎 사귀가 / 고요해지는구나. 이러한 고요 함이 / 애석하지 않은가. 23) - 나카무라 겐키치( 中 村 憲 吉 )- 23) 위 短 歌 의 제목은 靑 臭 로 中 村 憲 吉 이 1916년 5월 アララギ 에 발표한 최용신 학술심포지움 자료집 35
위의 글을 보면, 최용신이 고베여자신학교에 입학한 날은 1934년 4월 10일이었다. 그는 입학한 지 100일만에 이 글을 썼다. 일본에 도착하는 순간의 기쁨을 강렬하게 표현함은, 그가 신학교에서 추구할 꿈과 의욕이 컸음을 뜻한다. 조선을 식민지로 부리는 제국주의국가 일본에 도착함을 고향에 돌아감으로 비유함도, 그가 고베신학교에 느끼는 다감함을 포함 하여 배우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글 안에서도 확인하듯이, 제국주 의 대 식민지라는 민족모순을 뛰어넘어, 신앙이라는 동질성에서 일본을 인식하였음을 말해준다. 최용신은 일찍이 한국에 있을 때부터 이 학교를 동경해 왔다. 현재 진행 중인 짧은 유학생활의 체험을 기술하면서, 그는 이방인인 자신이 기독교 학교 안에서 느끼는 평안함을 표현하는 데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해야 하는 과제를 찾아내었다. (자료 4) 농민의 하소연 농민의 하소연 ( 女 論 第 二 卷 第 十 一 號 에 發 表 되었든 것) 24) 9수 중 6번째이다. 初 出 은 " 春 すぎて 若 葉 靜 かになりにけり 此 の 靜 けさの 惜 しか らめやも"이었다. 林 泉 集 (アララギ 叢 書 第 六 編, 1916년 11월 アララギ 發 行 所 發 行 )에서는 結 句 를 " 此 の 靜 けさの 過 ぎざらめやも"(이러한 고요함이 지나 가지 않겠는가)로 고쳤다가, 1925년 6월의 改 版 林 泉 集 ( 春 陽 堂 )에서는 결 구가 다시 初 出 의 형태로 돌아갔다. 靑 臭 는 어린잎이 가지런한 모습을 갖추 었을 때의 차분한 고요함과 이 고요함의 애석함을 읊었으며, 上 句 의 간결한 파악 이 一 首 를 살리고 있다. 中 村 憲 吉 集, 日 本 近 代 文 學 大 系 : 近 代 短 歌 集 第 55 卷 ( 角 川 書 店, 1973. 9), 367 489쪽. 林 泉 集 은 歌 人 中 村 憲 吉 의 第 二 歌 集 으로 싱싱한 감성과 통절하면서도 차분한 서정으로 가득 찬 歌 集 이라 평가받 고 있다. 中 村 憲 吉 과 林 泉 集 에 대해서는 島 田 修 二, 中 村 憲 吉, 淺 井 淸 等 編 著, 硏 究 資 料 現 代 日 本 文 學 : 短 歌 第 5 卷 ( 明 治 書 院, 1981. 3), 172~176쪽 : 吉 田 潄, 大 正 の 歌 集 : 林 泉 集, 日 本 文 藝 鑑 賞 事 典 : 近 代 名 作 1017 選 への 招 待 ( 大 正 元 年 ~5 年 ) 第 5 卷 (ぎょうせい, 1987. 8), 419~426쪽을 참조. 최용신 이 靑 臭 를 인용하여 글을 끝맺음은, 자신이 성숙하여 가는 모습을 自 樂 自 足 하는 평안함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24) 女 論 第 二 卷 第 十 一 號 (1934. 10. 30) 柳 達 永, 앞의 책 (1939. 12), 36 최용신의 농촌운동론
그리고 나는 내가사는 동리의 현상을 여러분 앞에 내어놓고 싶습니다. (61쪽) 내가사는 이촌은 우리조선에 있어서 두메라고 부를만한 벽 촌은 아니외다. 서울서도 멀지않은 西 해안의 적은 山 골자기랍 니다. 이촌을 가르쳐 근방에서는 敎 村 이라고 부르니 이까닭은 이곳에 기독교가 들어온지 二 十 餘 年 이 되었고 그영향으로 인 하여 학술강습소가 마을 가운대 제일 높은곳에 있으므로 이촌 을 가르쳐 文 化 村 이라고까지 부릅니다. 이강습소에는 근방 十 餘 洞 里 의 아동이 모여오니 그 수가 百 餘 名 이나 됩니다. 이많은 아동의 가정 정도를 말슴하면 本 面 은 戶 數 가 一 千 四 百 이나 되 나 그중에 一 年 수입 一 百 五 十 圓 以 下 의 戶 數 가 九 百 十 戶 나되 는 극히 빈한한 지방임으로 이 강습소는 그 대중을 가르치는데 사명을 다하고 있읍니다. 이렇듯 이 지방의 중요한 기관인 이 강습소이나 이것도 우리 농민들의 손으로 독립경영을 하지 못 하고 사업가들의 후원을 받어왔읍니다. 이것은 우리 농민의 여유없는 생활이 이만한 기관 하나를 경 영하지 못한다는것을 증명하고 있읍니다. 이런 현상 가운대서 도 우리들은 좀더 向 上 하고 좀더 진보할려고 분투 노력하고 있 61~64쪽에 所 收 된 바를 그대로 옮겼음. 인용문 안의 쪽 번호는 崔 容 信 小 傳 의 쪽수를 말하며, 줄임표( )도 그대로 옮겼다. 이 글의 원문을 찾아보려 고 노력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崔 容 信 小 傳 에서는 글의 제목 바로 뒤에 작 은 괄호로 묶어 "( 女 論 第 二 卷 第 十 一 號 에 發 表 되었든 것)"이라 밝혔고, 글의 끝 에 "( 昭 和 九 年 - 一 九 三 四 - 一, 三 )"이라고 날짜를 밝혔다. 女 論 은 1932년 3월에 창간되었다. 金 活 蘭 趙 賢 景 朴 恩 惠 朴 謙 淑 朱 壽 元 등은 조선 신여 성들에게 자아인식 사회의식을 고취시키고, 시대와 조선의 현실을 생각케 하 며, 상품화에 몰두하지 않는 여성 잡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어, 同 人 들이 책 임자가 되어 1932년 3월부터 월간 녀론 을 발행키로 하였다. 女 論 創 刊, 中 央 日 報 第 一 千 五 百 七 十 九 號 (1932. 2. 21) : 女 性 雜 誌 女 論 創 刊 / 三 月 부터 發 行, 東 亞 日 報 第 四 千 十 二 號 (1932. 2. 22). 女 論 社 에서 3 월 발행한 창간호는 " 新 女 性 의 定 義, 家 庭 改 造 의첫거름, 女 高 普 敎 員 의 責 任 論, 世 界 女 傑 巡 禮 等 "이 실렸고, 경성 종로 2정목 9번지에 사무실을 두고 정가 5 錢 으 로 발행하였다. 新 刊 紹 介, 東 亞 日 報 第 四 千 二 十 九 號 (1932. 3. 10). 필 자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1936년 3월에 여론 의 2월호 광고가 신문 지상에 게재된 바가 마지막 광고였는데, 이때 정가는 10전이었다. 新 刊 紹 介, 東 亞 日 報 第 五 千 四 百 八 十 號 (1936. 3. 1) ; 新 刊 紹 介, 朝 鮮 中 央 日 報 第 二 千 八 百 八 十 五 號 (1936. 3. 15). 최용신 학술심포지움 자료집 37
읍니다. 그러나 文 化 村 이라고 이름을 듣고 敎 村 이라고 칭호를 받는 이촌중에 비통한 우름소리가 하늘에 사무치고 따에 울리 오니 木 石 이 아니고야 어찌 볼수있사오리까. 이 비통한 우름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의 불상한 어린이들이 배우고 가르치는 (62쪽) 강습 소가 페쇄된다는 원통한 우름이 었읍니다. 사업가의 열성도 경제도 제한이있어 이제 부터는 후 원의 손을 끊는다는 소식이 들림에 우리들은 낙망의눈물 비통 한 울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가르칠줄도 알고 배울줄도 알건마 는 우리에게는 여유가 없읍니다. 배움에 굶주린 우리 농촌어린 이들은 장차 어디로 가며 가르쳐주고 싶은 우리의 마음을 어디 다 하소하오리까. 조선의 復 興 은 農 村 에있고 민족의 발전은 農 民 에있다 하거든 배우지못하고 가르치지못한 우리에게 무슨 발전이 있으며 늘 어감이 있겠읍니까. 오호, 우리 농민의 하소를 어찌 다 기필 하 오리까. 이 앞으로 긴긴밤에 잠못이루고 나오는 한숨과 흐르는 눈물에 따이 꺼지지 마사이다. 도시의 여러분이여! 당신들의 생활은 얼마나 행복스럽고 얼 마나 안락하십니까. 여러분중에는 하루저녁 오락비와 한 벌 옷값으로 몇 百 圓 을 쓰신다 하옵거든 우리 농촌의 어린이들은 자라기에 배가 고프고 배움에 목이 마릅니다. 여러분이시여! 곡식을 심으면 一 年 의 計 가되고 사람을 기르 면 百 年 의 計 가 된다고 하였거든 이 강산을 개척하고 이겨레를 발전시킬 농촌의 어린이를 길러주소서 뜻 있는이여 우리 농촌의 아들과 딸의 눈물을 씻쳐주소서. ( 昭 和 九 年 - 一 九 三 四 - 一, 三 ) (63쪽) 최용신이 이 글을 쓴 직접 계기는, 1934년 샘골강습소에 대한 YWCA의 지원이 중단되는 위기에 있었다. 개인 후원자들의 손길도 없었으므로 강 습소가 폐쇄될 상황에서, 그는 '농민'을 주체로 삼아 막연한 '도시민' 가운 데 '뜻 있는 이'들의 감성 25) 을 상대로 강습소가 유지될 수 있도록 '후원'의 25) '비통(원통)한 우름'(4회), '낙망의 눈물' '흐르는 눈물' 등을 비롯하여 '한숨' 등의 38 최용신의 농촌운동론
손길을 '하소' 26) 하였다. 이 외에 최용신을 보도한 신문 기사와 잡지의 인물평 등이 있다. 소소한 기사는 각주에서 인용하겠거니와, 뒤에 인용할 (자료 5)가 최용신 사상의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인데, 이는 본문을 서술하는 과정에 설 명하겠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최용신은 1935년 1월 23일 0시 20분 사망하였고, 이 소식은 동월 27일자 조선중앙일보 에 보도되었다. 27) 최용신의 영 면을 보도한 이 기사는, 세간의 언론이 최용신의 생애를 간단하지만 처음 평가하였다는 의미에서 주목해야 한다. 이어 同 紙 에 3월 2일부터 4일까 지 최용신의 ' 一 生 '을 다룬 기사가 필자의 이름 없이 3회 연재되었다. 28) 이 기사는 잡지 中 央 에 실린 盧 天 命 의 글 속에 대부분 포함되어 겹치 는데, 문장까지 그대로 반복되는 대목이 많다. 이를 보면, 3회 연재된 기 사는 이 당시 조선중앙일보사의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던 노천명 29) 이 작 단어가 글 전체에 깔려 있다. "이촌중에 비통한 우름소리가 하늘에 사무치고 따 에 울리오니 木 石 이 아니고야 어찌 볼수있사오리까."는 표현은 목석 이 아닌 자들을 향한 절규였다. 26) 글의 제목까지 포함하여 '하소'라는 말이 3회 나오며, 글도 '길러주소서' '씻쳐주소서'의 하소연하는 어구로 끝맺었다. 27) 水 原 郡 下 의 先 覺 者, 無 産 兒 童 의 慈 母 二 十 三 歲 의 一 期 로 崔 容 信 孃 別 世, 事 業 에 살든 女 性, 朝 鮮 中 央 日 報 第 二 千 四 百 七 十 三 號 (1935. 1. 27). 여기서 ' 二 十 三 歲 '는 오기인데, 이후 신문 잡지들이 이 오자를 사실 그대로 믿 어 기술하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발간되던 조선일보 동아일보 기사 에서는 최용신의 사망 소식을 찾지 못하였다. 28) 썩은한개의밀알 브나로드의 先 驅 者 故 崔 容 信 孃 의 一 生 - (1) 인테리 女 性 들아 여기에한번눈을던지라, 朝 鮮 中 央 日 報 第 二 千 五 百 七 號 (1935. 3. 2) ; 썩 은한개의밀알 브나로드의 先 驅 者 故 崔 容 信 孃 의 一 生 - (2) 인테리 女 性 들아 여기 에한번눈을던지라, 朝 鮮 中 央 日 報 第 二 千 五 百 八 號 (1935. 3. 3) ; 썩은한 개의밀알 브나로드의 先 驅 者 故 崔 容 信 孃 의 一 生 - ( 完 ) 인테리 女 性 들아 여기에 한번눈을던지라, 朝 鮮 中 央 日 報 第 二 千 五 百 九 號 (1935. 3. 4). 29) 노천명은 1934년 3월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하고 곧바로 조선중앙일보사의 최용신 학술심포지움 자료집 39
성하였음이 분명하다. 이후 동년 新 家 庭 30) 과 中 央 31) 의 5월호에 최용신의 업적을 칭송 한 글이 동시에 실렸다. 두 잡지는 판권에 적힌 발행 날짜가 모두 1935년 5월 1일이었다. 노천명은 앞서 작성한 조선중앙일보 의 기사를 기초 로 이를 보완 확대하여 중앙 에 기명으로 발표하였다. 新 家 庭 의 기사는 글의 말미에 ' 三 月 二 十 六 日 記 '라 하여 원고의 탈고일을 밝혔다. 이 글은 ' 一 記 者 '가 하루 동안 샘골을 현지답사하여 작성한 르포인데, 마 을에 들어서기 전에 만난 우편배달부와 나물캐는 아이들을 제외한다면, 세 번째 만난 '천곡예배당의 전도부인 장양'의 증언에 전적으로 의존하였 다. '장양'은 張 明 德 전도사를 가리켰다. 위의 (자료 2)는 최용신의 기독교 신앙이 그대로 표출된 내면 세계의 글이고, (자료 3)에는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그의 세계관을 담겨 있다. (자료 1 4)는 기독교 신앙을 전혀 드러내지 않은 채 그의 농촌운동론을 표현하였다. (자료 2 3)에 보이는 최용신의 심층 세계를 전제로, (자료 1 4)에서는 그의 기독 교신앙이 외화된 농촌운동론을 이해해야 한다. (자료 1)을 전재한 조선일보 는, 이보다 앞 자리에 최용신과 관계된 중요 한 기사를 실었다. 이는 조선일보 의 연재 기사 가운데 하나로, 새봄마 저 교문나스는재원들-원산루씨학교의 특출한 네규수 / 樓 氏 음악의텬재 외장래문장가 - 각녀학교졸업생을차저서 ( 卄 四 ) 32) 라고 표제를 걸었고, 이어 학예부 기자로 입사한 뒤 1937년에 사직하였다. 이숭원, 노천명 : 고독과 자의 식 그리고 절제의 미학 (건국대학교 출판부, 2005. 4), 26 37 158쪽. 30) 一 記 者, 永 遠 不 滅 의 明 珠, 故 崔 容 信 孃 의밟아온 業 績 의길, 泉 谷 學 院 을찾아서, 新 家 庭 第 二 十 九 號 第 三 卷 第 五 號 ( 東 亞 日 報 社, 一 九 三 五 年 五 月 ). 31) 盧 天 命, 샘골의 天 使 崔 容 信 孃 의 半 生, 中 央 第 十 九 號 第 三 卷 第 五 號 ( 中 央 日 報 社, 一 九 三 五 年 5 月 號 ). 32) 朝 鮮 日 報 第 二 千 七 百 二 十 一 號 (1928. 4. 1). 40 최용신의 농촌운동론
서 ' 崔 容 信 '이란 이름을 기명하여 校 門 에서 農 村 에 를 특별히 실었다. 위 의 새봄마저 교문나스는재원들 에서는 원산부에 소재한 樓 氏 女 子 高 等 普 通 學 校 의 졸업생을 취재했는데, 최용신과 관계된 다음 구절에 이 시기 그의 생각과 진로가 그대로 드러난다. (자료 5) 그들가운데는 장차음악과문학에 성공할 소질를가졋고 한 이방면에 노력하는 두규수가 잇스니 즉전자는 박현숙( 朴 賢 淑 ) 양이요후자는 최용신( 崔 容 信 )양이다 그들은각과를통하야 우 등으로 졸업을하엿고 령리하고 덕성이잇서 동반에게 고임을 바덧다 최양은농촌녀성 교육문뎨에만흔연구를하는중이니 그가언제든지 글을쓰면 조선일으녀성운동은 농촌에서부터 일으키자, 먼저문맹퇴치 운동에노력하자 이것이내용 의중심이된다한다 그럼으로 그는농촌문뎨에대한 서적을 탐독 하기에 가장 만흔 시간을사용 하엿다한다 그는 한독실한 신 앙가로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본밧아 자선의길을 밟고저 위선경성협성녀자 신학교에입학하야 수양에 노력할 이라하 며 위의 기사는 20여 명의 졸업생 가운데 4명의 실명을 거론하였는데, 이 중에서도 박현숙과 최용신에 집중하였으며 더욱이 최용신에게는 그의 글 을 게재한 데에서 보듯이 아주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33) (자료 5)에 따르 면, 최용신은 식민지조선 현단계의 가장 큰 문제를 농촌문제와 여성문제 로 파악하였으며, 이를 다시 한마디로 압축하면 농촌여성의 교육문제였 고, 이의 출발점을 문맹퇴치운동으로 삼았다. 그는 이러한 삶의 지표를 "조선일은 여성운동은 농촌에서부터 일으키 33) 굳이 보도량을 비교하면, 박현숙에게 10단, 최용신에게는 14단을 할애하였으며, 더욱이 최용신의 글까지 게재하는 등 보도의 관심이 최용신에게 집중된 느낌을 줄 정도이다. 최용신 학술심포지움 자료집 41
자", 34) "먼저 문맹퇴치운동에 노력하자"는 실천구호로 自 己 化 하였다. 무 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조선일보 가 최용신을 '독실한 신앙가'로 표현 하면서, 그의 인생의 근본진로는 예수를 본받은 '자선의 길'에 있으며, 이 를 위한 현재의 진로로 협성여자신학교에 진학한다고 보도한 사실이다. 35) 위의 기사는 20세의 신여성 지식인 최용신의 현재와 미래를 아주 단적 으로 보여주었다. 위에서 보듯이, 최용신의 농촌운동 + 여성운동 = 농촌여성운동은 바로 기독신앙인으로서 '자선' 행위를 뜻하였다. 이미 이때부터 그에게 기독교 신앙 농촌운동 여성운동의 3자는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며, 농촌여성 운동은 신앙의 실천인 '자선'이었고, 이를 위한 '수양'으로 다시 신학교에 진학하여 농촌사회사업을 공부하였다. 최용신의 농촌운동 여성운동을 지탱한 토대가 기독교신앙이었고, 이것이 그의 실천력 안에 내재화된 동 인이었음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최용신은 농촌운동을 통하여 예수의 십자가 수난을 자신도 실천 행동 하려 하였고, 이를 기독교복음화를 위한 전도활동으로 인식하였다. 이는 그의 고베 유학 시절에 더욱 확고하였다. 최용신이 고베여자신학교에 청 강생으로 입학한 뒤, 동교의 전도부 운동부가 주최한 제3회 집회에서 전도부가 주최한 1부 행사로 4명의 신입생의 感 話 發 表 會 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조선에서 신학교에서 배웠고, 사명을 느껴 농촌전도의 실 제에서 활동하여 왔으며, 이 사명을 온전히 하기 위하여 다시 학교생활에 34) 이 부분의 原 文 이 분명하게 판독되지 않는다. "조선일으녀성운동은 "으로 보이 는데, "조선일은 녀성운동은 "으로 이해하였다. 35) 다른 졸업생 朴 賢 淑 朴 在 烈 朴 斗 星 에게는 진학할 학교명과 분야만을 보도하 였는데, 최용신의 경우에는 그가 신학교에 진학하려는 동기까지 설명하는 등 각 별한 관심을 보였다. 42 최용신의 농촌운동론
들어왔고, 일찍부터 희망하였던 현재를 기뻐한다고 말하였다. 36) 최용신의 농촌운동의 출발점이 기독교신앙에 있음은 20세의 나이로 중 등학교를 졸업하는 시점에 이미 강하게 형성되었지만, 그가 '수양'을 목 표로 진학한 신학대학교의 학창 시절에 더욱 강화되었다. (자료 2)의 기 도문과 (자료 3)의 소감은 이를 잘 보여준다. (자료 2)는 최용신의 내면 세 계의 절실함을, (자료 3)은 기독교신앙 안에서 그의 사회운동의 지향점이 안정감 있게 표현되었다. (자료 2)에서 새벽종 소리를 듣는 최용신의 마음 상태는 신비함 처량 무한한 감흥 기쁨 감사의 기도로 진전하면서 자신의 사명을 다 짐하였다. 감사 기도는 여호와 =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며, 새벽과 연관 시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내용이다. 최용신은 새벽을 고요함과 맑음으로 느끼며, 자신의 마음도 맑고 고요 하게, 정신도 아침공기처럼 더욱 새롭게 해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거룩한 종소리를 강함으로 인식하였는지, 종소리와 자신의 몸을 일치시켜 강하 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이 강함을 자신의 사명과 활동에 대한 자각으 로 이어나갔다. 그는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타인의 정신을 일깨우고 자 하였다. 지향점을 구체화시켜 표현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목회자 또는 계몽자로 분명하게 의식하였다. 최용신에게 강하고자 하는 發 願 은 자신을 여호와께 바치겠다는 의지였 36) 第 三 回 集 會 ( 傳 道 部 及 び 運 動 部 主 催 ), 神 戶 女 子 神 學 校 自 治 會 記 錄 附 (1934. 4. 27일자) 洪 錫 昌, 앞의 책 (1984. 11), 23 129쪽 所 收. 이 자 료는 홍석창 목사가 1984년 5월 5일 고베 여자신학의 후신인 세화대학을 방문 하여 확인하였는데, 위의 책, 23쪽에는 原 文 사진을 실었고, 129쪽에는 이 를 의역하여 번역하였는데, 다소 오해할 부분이 있다. 위의 자치회의기록부는 최 용신이 직접 쓴 글이 아니라, 1시간 동안의 간담회에서 최용신이 입학소감을 말 한 내용을 간접화법으로 간단하게 정리한 글이기 때문에, 최용신이 사용한 단어 를 그대로 옮겼는지 확인할 수 없어 조심스럽다. 어쨌든 위의 기록부에 따르면, 최용신은 샘골에서 자신의 활동을 농촌전도 로 인식하였다. 최용신 학술심포지움 자료집 43
으며, 이것의 구체화는 '남' 즉 자신의 형제인 민족과 동포를 위하여 일하 겠다는 선택과 결단이었다. 그에게는 여호와=주를 위해 삶이 의를 위하여 일함이며, 이의 구체화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는 일이었다. 최용신이 중 병 중에도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분투할 수 있었던 동 인은 바로 이러한 願 力 이었다. 최용신은 새벽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신과 함께 하는 기쁨을 누렸으며, 이러한 기도 생활을 통하여 삶 자체를 신성스 러운 무대로 인식하였다. 그에게는 "자연의 침묵중에서 맛보는 신성하고 도 결백한 이맛"이 '신성스러운 生 의 무대'를 사는 원동력이었다. (자료 3)을 보면, 최용신의 사회의식이 꽤나 확장되었음을 본다. (자료 1)의 완전사회론에서는 대립구도가 無 智 와 指 導, 또는 남성과 여성이었 다. 여성의 편에서 문맹으로 상징되는 무지와 싸움으로써, 즉 깨어있는 신여성이 무지한 농촌여성(=구여성)을 '계몽'=지도하는 구도로 완전사회 를 실현하는 도식이었다, 그러나 (자료 3)은 1928년 3월 이후 6년간의 세 상살이 속에서 계급 민족 빈부 귀천 등 수많은 대립구도를 경험 인 식한 사실을 동반하면서, 일본 유학 시절의 체험을 통하여 사회의식의 영 역을 확대하였다. 그러면서 기독교 신앙의 차원에서 궁극의 해결책을 찾 으려 하였다. (자료 3)에 보이는 최용신의 신앙은 깊이와 안정감을 높여갔다. 한두 편 의 글로 그의 사상의 발전 과정을 추적함은 무리이겠지만, 5 6년 정도 의 시차를 두고 그의 생각이 얼마나 진전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있다. (자 료 3)에서 최용신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 계급 민족 빈부 귀천의 문제 를 해결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자기확신을 표현하였다. 달리 말하면 계급 문제 민족문제도 그에게는 신앙의 차원에서 해결할 영역이었다. 이러 한 인식의 타당성과 정합성의 여부를 떠나, 그는 6개월여의 짧은 유학 생 활이었지만, 신학교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나 44 최용신의 농촌운동론
라'를 실현함이 궁극의 사명임을 다시 확신하였다. (자료 3)을 보면, 최용신은 계급 민족 빈부 귀천 등 모든 대립과 차 별을 동시에 지양할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는 일관된 신앙의 삶으로써 이를 민족 안에서 실천 실현하고자 하였 다. '이 학교 안에는'이라는 어구에는 무엇보다도 기독교 학교라는 의미 가 담겨 있다. 또 한편으로 일본의 학교이지만, 식민지 본국인 제국주의 국가 일본 안에서 식민지 민족구성원인 자신을 차별하지 않는 평안함을 발견하였다는 뜻으로, 이것이 예수의 사랑으로 가능하였다는 간증이었 다. 일본인 학생들은 물론, 조선인 학생인 자신이 민족 사이의 차별을 극 복할 수 근원의 힘은 바로 신앙이었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자료 3)은 신학대학교의 교지에 발표한 신앙고백문일 수도 있지만, 최 용신의 심화된 생각은 자신의 진로를 확실하게 예시하였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전제로 인생관과 세계관을 그대로 압축하여 담아내면서, 내면의 신앙을 바깥 세상에 실현하려는 실천론으로 성숙하게 표현하였다. 이는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사랑'에 입각한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 즉 '예수사 랑의 실현'에 근거한 '하나님 나라 간구(간망)'이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영역은 개인 가정 사회의 영역으로 확대되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넓고 깊어졌다. 여기 '강한 민족' = '문명사회' = '국제평화'라는 용어 등에서, 제국주의 국가들이 위장하여 외치는 구호들의 허구성을 기 독교신앙에 입각하여 비판하려는 의식도 찾을 수 있다. 그의 신앙이 反 계 급주의는 물론, 反 제국주의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민족의식의 지 점이다. 달리 말하면, 최용신에게는 이들 계급주의 제국주의의 논리에 동화되지 않는 자기 확신이 기독교신앙 안에서 이미 확고하였다. 최용신 학술심포지움 자료집 45
Ⅲ. 최용신의 농촌운동론 1) 농촌계몽론의 형성 이상에서 보았듯이, 최용신의 내면 세계인 기독교신앙을 전제하지 않고 서는 그의 활동상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최용신의 신앙=내면세계만 을 다루는 작업이 아니라면, 그의 신앙이 어떻게 이론화 실천화되어 바 깥세상에 외화되었는가를 밝혀야 한다. 최용신 삶의 '열쇠'만을 강조하다 보면, 이에 뿌리를 두어 표출된 사고와 실천력을 자칫 놓쳐 보게 된다. (자료 1)은 현존하는 최용신의 자료 가운데, 그의 사고가 형성되는 출발 점을 보여주므로 꼼꼼하게 분석해야 한다. 글의 전반부는 이 시기 자신의 생각을 압축해서 응축된 논리로 표현하는 완결성을 보였다. 이를 한마디 로 말하면, 완전사회건설을 위한 남녀양성론 신인물론이었고, 달리 표 현하면 '완전사회론'과 '남녀양성론'을 기조로 한 '신인물론'이라고도 하 겠다. 여기에는 '남녀양성' '신인물' '완전사회' 등의 주요 개념어들을 기반으로 삼아, 남녀양성론 신인물론 완전사회론으로 체계화할 젊은 사상이 녹녹하게 녹아 있다. 최용신의 이상이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데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의 외화가 '완전사회'이고, 이의 주체 론 방법론이 남녀양성론 신인물론이었다. 완전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서는 남녀양성의 노력이 필요한데, 농촌여성 전체는 암흑 속에 있으므로, 신인물(중등교육받은 여성)이 농촌여성부터 향상=계몽시켜야 한다는 논 지였다. (자료 1)의 이상을 이루는 핵심 단어는 '완전한 사회'이다. 37) 최용신은 궁극의 이상을 '완전한 사회'를 건설하는 데 두었고, 이를 실현함이 조선 37) 이 글에는 ' 完 全 한 社 會 ', '완전한 이 社 會 는언제던지 完 全 한 發 展 ' 등 '완전한 사회' 에 해당하는 의미의 어구가 2차례 나온다. 46 최용신의 농촌운동론
사회의 목표라고 인식하였다. "부족함이 있고 없는 것이 많은" 불완전한 현 조선사회는 '완전한 사회'를 건설하는 데 '신인물'을 요구한다. 이때 조 선사회의 부족함을 해결할 신인물은 신교육을 받은 인물이며, '무엇보다 도' 중등교육을 받은 여성을 가리켰다. 그의 신인물론은 완전사회를 건설 하는 주체로 중등교육을 받은 여성을 내세웠다. 최용신이 '무엇보다도' '누구보다도' 여성의 사명을 강조한 이유는, 본 디 사회라는 구조가 남녀양성으로 구성되었다는 남녀양성론의 사회관에 서 말미암았다. 그는 조선의 전통사회를 반성 비판하면서 남녀양성론을 적극 주장하였고, 다시 이에 의거하여 여성의 사회의무를 강조하는 남녀 양성의무론으로 발전시켰다. " 元 來 이 社 會 의 組 織 은 男 女 兩 性 으로된 것이 다", " 男 女 兩 性 을 標 準 한이 社 會 " 38) 라는 매우 단순한 명제는 여성도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이라는 근원의 자각이었다. 이는 여성해방론 여성우월론 보다도 더욱 철저하면서도 진보한 인간관이자 사회관이었다. 최용신은 과거 조선의 역사를 남녀양성론의 측면에서 반성하면서도, 남 성의 활동상을 전혀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긍정하였다. 이는 여성을 강 조하면서 남성을 대립점에 놓는 시각보다 훨씬 성숙하고 진전된 사고였 다. 그러면서도 여성의 몫을 더욱 강조하는 논법과 논지를 전개하는 탁월 함도 보였다. 최용신은 조선의 역사에서 남성의 노력 활동이 부족하지 않았는데도, 그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 데에는 여성의 노력과 활동이 없었 기 때문임을 지적하였다. 그는 조선 반만년 역사에서 여성의 지위가 사회 의 대세를 차지하기는커녕 자기 개성조차 망각한 암흑에 있었음을 비판 하면서, 반성의 근저와 분투의 근거를 여성 자신에게서 찾았다. 최용신은 남녀양성을 표준으로 하는 사회구조에서 '남성편중'의 활동과 노력만으 로 원만한 사회발전을 이룰 수 없음을 다시 상기시키면서, 자신의 결론을 38) 이 글에는 ' 男 女 兩 性 '이라는 말이 2회 나온다. 최용신 학술심포지움 자료집 47
함축성 있게 논리화하였다. 그는 교육받은 여성이 자각하여 자기의 책임 을 다하여만 완전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중등교육을 받 은 여성이 자기 이상하는 바를 힘껏 노력하자는 호소로 글을 끝맺었다. 20세 무렵 최용신의 농촌운동론은 바로 농촌여성지도론이었다. 그는 왜 농촌여성을 지도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현재의 농촌은 문화에 눈이 어두운 구여성들'만' 모여있는 암흑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가 '활동의 첫걸음'으로 구체화한 '농촌여성의 지도'의 대상은 '문화에 눈 에 어두운 구여성'이었으므로, 지도의 목표는 논리상 이들을 '문화에 눈 이 밝은 신여성'으로 개조하는 데 있다. 그가 말하는 '지도'란 바로 문화에 눈을 떠 밝게 함이다. 말 그대로 '계몽'이다. '지도'는 바로 '계몽'과 동일한 뜻이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글눈부터 떠야 하므로 '문맹퇴치'가 급 선무였다. 최용신의 농촌운동론은 지도 계몽의 대상이 농촌여성이었으 므로 농촌여성지도론 농촌여성계몽운동에서 출발하였다. (자료 1)에는 '중등교육을 받은 자'라는 의미의 표현이 5차례나 나오며, '무엇보다도', '누구보다도', '더욱이', '가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이들 의 사명을 부각시켰다. 최용신은 글의 전반부에서 주요 개념어를 연결지 어 논지를 전개하면서도, '신교육을 받은 신인물' 가운데 '현대중등교육을 받은 여성'을 '가장' 강조한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후반부를 다 읽고 나서 이를 유추해야 한다. 신교육을 받은 남성보다도,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보 다도, 중등교육을 받은 여성이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이유는 조선사회의 시급한 과제 즉 급선무 때문이었다. 최용신의 현실인식은 현하 조선문제를 농촌문제와 여성문제로, 다시 이 를 하나로 묶어 농촌여성의 문제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현실인식은 당시 많은 농촌운동가들이 공유한 바였겠지만, 그의 논리는 이를 현장실천론 과 결부시켰다는 데 특징이 있다. 고등교육 전문교육을 받은 남성 여 48 최용신의 농촌운동론
성이 아닌, 중등교육을 받은 여성의 책임을 더욱 역설한 이유는, 이들이 바로 농촌현장에 들어가 여성 아동의 문맹타파와 같은 긴급한 사항을 실천할 적합자이자 적임자로서 주체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최용신이 '농촌여성의 향상'이 여성중등교육수료자의 책임이라 고 지적하면서 중등교육을 받은 여성의 사명을 유독 강조하는 논지의 심 층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물론 자신이 중등교육을 막 마쳤고, 스스로의 진로를 다짐하는 글의 성격상 여성 중등교육이수자의 사명을 내세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좀더 본질의 이유로 운동 주체의 적합성 측면을 보아 야 한다. 중등교육을 수료한 자가 대부분 화려한 도시의 안락한 생활을 추 구한다고 비판하면서, 그는 단박에 " 農 村 으로 돌아가 文 盲 退 治 에 努 力 "하 자는 감정에 호소하였다. 이러한 비약에 그의 논지가 그대로 담겨 있다. 최용신에게 수많은 농촌문제 가운데 농촌현장의 최급선무는 문맹퇴치였 고, 이를 실천 해결할 주체로는 중등교육을 받은 여성이 바로 적임자였 다. 문맹퇴치 등의 계몽운동 수준은 중등교육 이수자의 수준에서 적합한 때문이다. 이는 이후 동아일보사가 브나로드운동을 전개하면서, 活 動 隊 員 을 학생계몽대 학생강연대 학생기자대로 삼분하고, 中 學 4 5학년 학생에게 한글과 산술을 가르치게 하고, 전문학교 이상의 학생들은 강연 대로 편성한 사실 39) 에서도 실효성과 일치점의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자료 1)의 핵심은 "참으로 現 代 敎 育 바든 女 性 으로써 북덕이싸인 農 村 을 爲 하야 獻 身 "하자는 데에 있다. 최용신에게는 농촌운동-농촌여성계몽운 동은 자기희생을 동반한 '헌신'이었다. 이러한 자의식에 따른 20세 청년 39) 第 一 回 學 生 夏 期 브나로드 運 動 / 男 女 學 生 總 動 員 休 暇 는 奉 仕 的 으로 東 亞 日 報 第 三 千 七 百 九 十 一 號 (1931. 7. 26)에는 第 一 學 生 啓 蒙 隊 中 學 四, 五 年 生 에 限 함, 第 二 學 生 講 演 隊 專 門 學 校 學 生 에 限 함 이라 규정하 였다. 第 二 回 學 生 夏 期 브나로드 運 動 學 生 界 에 總 動 員 令!!, 東 亞 日 報 第 四 千 一 百 四 十 二 號 (1931. 7. 1)에는 第 一 學 生 啓 蒙 隊 男 女 中 學 以 上 學 生 에 限 함 이라 하여 범위를 중학생 전체로 넓혔고, 학생강연대는 없앴다. 최용신 학술심포지움 자료집 49
의 감성이 비논리성과 비약으로 흐르기도 하였다. 농촌을 '암흑'(아마 가 난과 무지로 말미암은), 도시를 '화려'함으로 표현하는 대조법은 자신의 주장을 강조 설득하려는 비유법이겠지만, 사명감에 몰입해 조선사회를 都 農 또는 都 村 의 이분법으로 양단하는 관념론으로 흐르고 말았다. 이러한 도식화는 1934년에 쓴 (자료 4)에도 그대로 반복되었며, 최용신 의 농촌운동론이 넘지 못한 한계였다. 어쨌든 현대중등교육으로 문화에 눈이 뜬 최용신이 화려함과 안락함을 거부하고 눈여겨본 바는, 도시안의 노동자 빈민 무산아동들이 아니라 조선농촌의 전체 여성이었다. 그에 게는 이들이 눈뜨지 못한 '암흑' 속의 계몽 대상이었다. 20세의 최용신이 파악한 조선사회의 기본모순은 농촌여성의 암흑상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글은 한마디로 농촌여성지도(계몽)론이었다. 좀더 부연하면 완전사회론과 남녀양성론에 입각한 농촌여성계몽론=농촌여성 향상론이다. 문맹퇴치(문맹퇴치운동론) 농촌여성의 향상(농촌여성지 도론) 농촌의 발전(농촌운동론) 완전사회의 건설(완전사회론)이라 는 순차가 최용신이 구상한 조선사회의 발전구도였다. 그럼 최용신의 이러한 농촌운동론=농촌여성계몽론은 어떻게 형성되었 을까. 부친과 두 오빠가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가정 분위기에서, 최 용신이 식민지조선의 현실과 농촌문제에 관심을 지님은 지극히 자연스러 운 일이었다. 40) 당시 기독교 사회운동의 추세도 그에게 반영되었다고 보인다. 식민지시 기 남녀 기독교 청년조직이 농촌에 적극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는 대체로 1925년을 전후한 무렵이었는데, 41) 농촌문제를 보는 청년 크리츠천 최용 40) 김형목, 앞의 논문 (2007. 12), 951 959쪽. 41) 장규식, 1920~30년대 YMCA 농촌사업의 전개와 그 성격, 한국기독교와 역사 4(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5. 12), 209 212쪽 : 千 和 淑, 한국 여성 기독교사회운동사 (혜안, 2000. 5), 189~190쪽. YMCA가 종래의 도시 중심, 50 최용신의 농촌운동론
신의 시대의식도 이에 비례하여 높아갔다. 앞에서 보았듯이, 최용신은 루씨여고보에 재학할 무렵부터 식민지조선 과 농촌문제를 연결시켜 인식하였는데, 이러한 이면에는 시대사조를 선 두에서 체험한 고모 崔 直 順 42) 이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최용신보다 2살 위로 알려진 43) 최직순은 최용신이 (자료 1)을 쓸 무렵 논설 하나를 誌 上 에 발표하였는데 (자료 6)임, (자료 1)의 논지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44) (자료 1)과 (자료 6)을 비교하기 앞서, 최직순 최용신 두 사람의 관계와 최직순의 활동상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우선 최직순의 학력을 살펴 본 다. 최직순은 최용신의 모교인 루씨여학교의 제1회 졸업생이었다. 최용 신보다 3년 앞선 1925년 3월, 최직순은 4명의 졸업생 가운데 우등의 성 적으로 졸업하였다. 45) 그런데 최직순은 루씨여고보를 졸업하기 전에 이 미 조선 YWCA연합회 46)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조선YWCA연합회 제2 중산층 중심의 성격에서 탈피하여, 농촌사회의 기층 대중 속에 뿌리를 내리고자 농촌사업에 착수한 해는 1925년이었다. 장규식, 일제하 한국 기독교민족주의 연구 (혜안, 2001. 6), 330쪽. 42) 김형목은 "최직순은 고모로서 이후 한국YWCA에서 같이 활동하는 등 최용신 사회 활동을 이끌어 준 인물 중 하나였다. 그녀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서 학 생맹휴 독서회 등에 대한 지도와 아울러 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 참여하는 등 사 회운동에 매우 적극적이었다."고 평가하였다. 김형목, 앞의 논문 (2007. 12), 960쪽. 43) 南 圭 媛 (동창회장), ( 老 益 壯 동창생 21) 望 鄕 의 情 달래는 元 山 樓 氏 女 高 딸들, 東 亞 日 報 제18700호(1982. 7. 14)에는, "오늘 노익장으로 우리를 정답게 맞 이해준 崔 直 順 선배(76 1회)는 梨 專 英 文 科 를 졸업하고 美 國 유학 후 中 央 全 北 大 교수로 다년간 교육계에 봉직했으며 "고 기술했다. 이에 따르면, 최직순은 1907년생으로 추정되며, 최용신보다 2살 위였다. 44) (자료 1)과 (자료 6)을 비교하면, 잡지의 지면이 신문보다 허락된 원고량이 많은 측면도 있겠지만, 논리 체계나 지식의 수준을 보더라도 최직순의 글이 최용신을 앞섰음은 분명하다. 45) 樓 氏 女 校 卒 業, 東 亞 日 報 第 一 千 六 百 六 十 九 號 (1925. 3. 24). 46)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기성회'가 발족된 지 거의 1년이 지나서, 1923년 8월 20일부터 28일까지 9일 동안 협성여자성경학원에서 제2회 하령회 겸 연합 최용신 학술심포지움 자료집 51
회 정기총회는 1924년 8월 20일 37명의 회원이 참석하여 서울 이화학교 에서 열렸다. 뒤에 최용신의 은사가 되는 黃 愛 德 (= 黃 愛 施 德 황에스터) 이 회장으로 선임되는 이 대회에서 최직순은 선거위원으로 선출되었다. 47) 이때 최직순은 18세였는데, 그의 활동력이 돋보였음을 짐작케 한다. 최직순은 루씨여고보를 졸업한 뒤 서울과 원산을 오가며 주로 기독교 계통에서 활동하였다. 48) 그는 1927년 11월 10일 경성에서 시행한 전문 학교 입학시험에서 여자과목합격자로 이름이 신문지상에 보도되었는 데, 49) 이는 그가 1928년 이화여전 영문과에 입학하였음을 가리킨다. 최 직순은 이화여전에 입학한 뒤 기독교 학생대표로서 더욱 두각을 나타냈 다. 1928년 8월 23일부터 일주일 동안 제2회 남녀학생기독교청년회연합 夏 令 會 가 모두 109명의 인원이 참석하여 열렸다. 尹 致 昊 申 興 雨 洪 秉 璇 曺 晩 植 徐 椿 등의 저명인사와 洪 愛 施 德 兪 珏 卿 이 각각 조선여자 기독교청년회연합회의 회장 부회장의 자격으로 참여한 이 모임에, 최직 순은 金 修 仁 朴 謙 淑 李 聖 淑 등과 함께 梨 花 專 門 대표로 참석하였다. 50) 기성회 제2회 총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개회 4일째인 8월 23일 '기성회'란 이름 을 떼고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를 창립하였는데, 이것이 조선YWCA연 합회 제1회 정기총회였다. 이 회합에서 황애덕은 4명의 헌장 제정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고, 초대 회장 兪 珏 卿 과 함께 12명의 연합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YWCA연합회 회록 千 和 淑, 앞의 책, 38~39쪽 에서 다시 인용. 47) YWCA연합회 회록 (1924년 8월 20~27일) 千 和 淑, 앞의 책, 43~44쪽 에서 다시 인용. 48) 1926년 11월 10일 서울 정동의 제일예배당에서 특별전도회가 열렸는데, 최직순은 朝 鮮 基 督 敎 學 生 의 責 任 이란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모임, 每 日 申 報 第 六 千 七 百 九 十 二 號 (1926.11. 10). 49) 專 校 入 學 試 驗 合 格 者 發 表, 東 亞 日 報 第 二 千 五 百 八 十 七 號 (1927. 11. 12). 50) ( 京 東 警 高 秘 第 一 三 五 七 號 一 ) 第 二 回 男 女 學 生 基 督 敎 靑 年 會 聯 合 夏 令 會 開 催 件 報 告 ( 週 報 ) ( 昭 和 三 年 八 月 三 十 一 日 京 城 東 大 門 警 察 署 長 ), 學 生 盟 休 에 關 한 情 報 綴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에서 다시 인용. 52 최용신의 농촌운동론
이러한 회의에 참석하면서, 최직순은 기독교신앙과 사회운동의 상관성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고, 특히 농촌문제를 보는 시각과 관심도 구체화하였 다. 제2회 하령회는 기독신앙을 바탕으로 개인의 수양을 쌓고, 나아가 사 회 민족문제에 기독교의 정신을 확대시킨다는 목표를 지니고 개최되었 다. 이 대회에서 주목된 바는, 덴마크 농촌을 시찰하고 돌아온 신흥우 홍병선 김활란 등이 강연회를 개최하여 농촌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인 점이었다. 이들은 당시 민족의 불행한 현실을 농촌의 피폐한 사정에서 찾 았으며, 기독교정신에 의거하여 농촌의 부활을 꾀하고자 하였다. 51) 이후 최직순은 이화여전에서 2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1930년 3월 졸업 하면서 바로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취직한 듯하다. 52) 교편을 잡 으면서 역시 기독교 계통에서 활동하다가, 53) 1935년 8월 종교교육을 전 공할 목적으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54) 그는 미국 오리건(Oregon)주의 州 都 세일럼(Salem)에 소재한 윌래멋(Willamette) 대학에서 약 2년간 수학 하고 1937년 6월 귀국하였다. 55) 기독교 신앙을 바탕에 둔 최직순의 현실인식과 실천력은 같은 서울 공 51) 제2회 하령회는 千 和 淑, 앞의 책, 146~150쪽을 참조 52) 螢 雪 功 成 果 各 校 卒 業 生, 東 亞 日 報 第 三 千 四 百 四 十 五 號 (1930. 3. 19). 53) 1933년 2월 4일 경성여자기독교청년회와 職 業 女 性 俱 樂 部 가 연합 주최하여 女 性 의 經 濟 權 은 家 庭 에서 찻겟느냐? 職 業 에서 찻겟느냐? 라는 演 題 로 여성 토론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최직순은 朴 仁 浩 張 金 山 毛 允 淑 등과 함께 4명의 演 士 로 참여하였다. 심판은 金 活 蘭 金 誠 實 黃 愛 德 이었다. 女 子 基 督 靑 年 會 와 職 業 女 性 俱 樂 部 主 催 / 女 性 討 論 大 會, 每 日 申 報 第 九 千 百 十 一 號 (1933. 1. 31) : 職 業 女 性 俱 樂 部 女 性 討 論 大 會 / 四 日 밤 七 時 靑 年 會, 東 亞 日 報 第 四 千 三 百 五 十 八 號 (1933. 2. 2). 최직순은 이 무렵 교편을 잡으면서 경 성여자기독교청년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54) 米 國 留 學 하는 梨 花 의 兩 女 敎 員 / 崔 直 順 孃 은 宗 敎 敎 育 崔 次 順 孃 은 家 事 專 攻, 東 亞 日 報 第 五 千 二 百 九 十 二 號 (1935. 8. 25). 55) 학 일람표, 新 韓 民 報 第 一 千 五 百 十 六 號 (1936. 12. 31) : 國 民 報 제 一 千 四 百 十 六 호(1937. 6. 30) : 최직순양귀국, 新 韓 民 報 第 一 千 五 百 四 十 一 號 (1937. 7.1). 최용신 학술심포지움 자료집 53
간에서 재학 활동하는 최용신에게 正 的 轉 移 되었다. 이는 최용신의 부 단한 信 力 과 精 進 力 의 근저에 동반함으로써 그의 의식세계와 활동력을 심화 확대시켰다. 두 사람은 청년기에 고향 덕원과 조선YWCA연합회 라는 공간에서 이미 함께 활동한 바 있었다. 1927년 8월 16일 德 源 郡 縣 面 斗 南 里 의 斗 湖 俱 樂 部 에서 주최하여 現 代 文 化 向 上 에는 舌 이냐? 筆 이냐? 를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可 便 과 否 便 의 演 士 로 각 각 4명이 지정되었는데, 최용신과 최직순은 부편의 연사로 참여하였 다. 56) 최용신이 루씨여고보의 졸업반이고 최직순이 아직 이화여전에 입 학하기 직전에, 그들은 같은 논리를 펼치는 편에 서서 의견을 조율하였을 터이다. 1929년 3월 23일부터 25일까지 조선남녀학생기독교청년회 하령회 준 비와 회장협의회 개최를 위한 준비 모임이 열렸다. 閔 泳 讚 尹 致 昊 申 興 雨 曺 晩 植 金 活 蘭 등 저명 인사들을 비롯하여 모두 39명이 참가하 였는데, 최직순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최용신은 협성여자신학교의 대표 로 함께 참석하였다. 조선기독교청년학생회의 활성화 방안을 주요 의제 로 한 이 모임은 학생청년회 사업방침 7개조 결의안을 의결하였는데, 농 촌 봉사활동도 주요 의제의 하나였으며 구체화된 행동방침까지 채택하 였다. 57) 이어 조선YWCA연합회 제7회 정기총회와 하령회가 1929년 7월 56) 男 女 留 學 生 討 論 大 會 開 催, 中 外 日 報 第 二 百 七 十 二 號 (1927. 8. 13) ; 德 源 留 學 生 討 論 會 盛 況, 中 外 日 報 第 二 百 八 十 號 (1927. 8. 21). 이 토 론회는 500여 명의 청중이 참석하는 성황을 보였다. 토론회가 종료된 후 보도된 기사는 演 題 를 文 化 向 上 에는 舌 乎 筆 乎 라고 달았다. 일부 연구자들이 위의 연제를 ' 舌 이냐 錢 이냐'로 오독하였는데, 뒤의 보도 기사를 보면 ' 錢 '이 아니라 ' 筆 '이 확실하다. 57) ( 京 東 警 高 秘 第 八 三 號 ) 朝 鮮 男 女 學 生 基 督 敎 靑 年 會 夏 令 會 準 備 及 會 長 協 議 會 開 催 ニ 關 スル 件 ( 昭 和 四 年 三 月 二 十 六 日 京 城 東 大 門 警 察 署 長 ), 사상문제 에 관한 조사서류(6)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 db.history.go.kr에서 재인용. 54 최용신의 농촌운동론
23일 이화전문 대강당에서 열렸는데, 최직순 최용신은 議 案 檢 査 委 員 으 로 口 頭 呼 薦 되었다. 58) 이렇게 두 사람은 기독교의 지도자로 함께 발전하 여 갔다. 그럼 최용신과 최직순의 글을 비교 검토해 본다. (자료 6)은 최직순이 이화여전 문과에 합격한 뒤 입학을 기다리는 도중 게재되었다. (자료 1) 과 (자료 6)의 첫머리에서, 최용신은 '희망과 포부'를, 최직순은 '이상과 포부'를 밝혔다. 단어 하나의 차이가 있지만,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자 신의 이상 희망과 포부를 피력하였다. (자료 6) 朝 鮮 女 子 의 理 想 과 抱 負 59) 個 人 이나 社 會 나 家 庭 이나 國 家 를 勿 論 하고 그 個 人 그 社 會 그 家 庭 그 國 家 를 支 配 하야가는 그무슨 理 想 과 抱 負 를 가지지안으면 그 個 人 그 團 體 는 進 步 가업슬것이오 라서 敗 亡 을 豫 期 하엿다고 볼수잇다. 故 로 朝 鮮 女 子 의 一 人 으로써의 나는 朝 鮮 女 子 社 會 를 革 新 식히며 그 永 遠 한 發 展 을 爲 하야 一 千 餘 萬 의 女 子 는 어 한 理 想 과 抱 負 를 統 一 的 으로 가저야하겟느냐하는것을 나의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저한다. 여긔에잇서 우리는먼저 배곱하 우는 者 의 눈물을씻기며 치워 는 者 에게 옷을주며 苦 痛 에쓰린 者 에게 깃븜을줄것이 우리의 急 先 의 急 先 務 이다. 곳 個 人 의 安 樂 을 버서나서 民 衆 의 安 樂 을 理 想 할 것이 다. (7쪽) 나는 생각하건대 그 理 想 實 現 의 出 發 點 은 家 庭 이라고 한다. 다음에 社 會 的 方 面 으로보아 우리 女 子 의 眞 實 한 活 動 을 要 하는것이만토다. 그첫재로는 知 識 을밧은 者 는 知 識 에눈이어두운 우리 社 會 의 文 盲 을 打 破 식혀야할것이다. 58) 29. 7. 23 第 七 回 定 期 大 會 及 夏 令 會 59) 崔 直 順, 朝 鮮 女 子 의 理 想 과 抱 負, 靑 年 第 76 號 第 8 卷 第 1 號 1 月 號 ( 靑 年 雜 誌 社, 1928년 1월 15 日 刊 ), 7~10쪽. (자료 6)은 최용신의 생각과 공통점 을 보이는 구절만을 인용하였다. 최용신 학술심포지움 자료집 55
特 히 朝 鮮 女 子 는 그의 敎 育 의 根 據 가 이제야비로소 始 作 함으로 우리 中 에는 (8쪽) 얼마나만흔 數 가 아직도 敎 育 을 밧지못하는지몰으겟다. 實 로 먼저 敎 育 을 밧고잇는 우리는 朝 鮮 女 子 의 知 識 普 及 이 우리의 맛당히할 義 務 이 다. 한 우리의 頹 廢 한 藝 術 을 復 興 식히며 朝 鮮 的 藝 術 을 지음이 우리 朝 鮮 人 으로써의 할 것이다. 이모든 問 題 에 對 하야 女 子 로써는 無 責 任 하다고 생각하 는 者 가 或 잇슬넌지 모르겟다 或 잇다면 오날우리 社 會 가 이러케남에 뒤젓스며 이러한 자리에잇게된 原 因 을모르 는 사람이라하겟다. 나는 그 原 因 을 여러가지에 求 치안 코 우리의 社 會 가 男 子 의손으로만 이와갓치 길게나려옴 에서 찻겟다. 二 性 으로 成 立 된 人 間 이 어 하야 한편은 全 然 히 度 外 에 置 之 하고 다만한편만의 中 心 으로 完 全 한 人 間 의 生 活 을 할수가잇겟느냐? 男 子 獨 裁 의 社 會 는 一 翼 업는 鳥 이며 一 輪 업는 車 이라 그 飛 翔 과 運 轉 이 圓 滑 치 못하게됨은 當 然 의 結 果 이다. 오날의 우리 社 會 現 象 은 可 히 當 然 한 結 果 이다. 故 로 朝 鮮 社 會 를 니르키어 참다 운 人 間 의 生 活 을 할수잇겟한다면 男 女 의손이 合 하지안 코는 不 可 能 하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이제다시 말함 은 너무나 時 代 에 뒤진 思 想 갓트며 新 進 女 子 에 對 하야는 새삼스러운것이라하겟다. 그러나 나의 보는바에 依 하면 明 瞭 한 道 理 가 아즉 充 分 히 實 行 되지 아니한듯십허서그 리함이다. 故 로 우리는 사람으로써의 完 全 한 人 格 者 가 되려고하며 女 子 로써의 徹 底 한 覺 醒 을 가젓다. (9쪽) 위의 글에서 최직순은 개인 사회 가정 국가를 물론하고 이상과 포 부가 없다면 진보가 없으므로 패망을 예기할 수밖에 없다고 전제하고, 오 늘날 조선여자사회를 '혁신'시킬 '통일적 이상'과 이를 실현시킬 '통일적 포부'가 무엇이냐고 묻는 데에서 출발하였다. 이때 '통일적'이란 '공통적' 을 뜻한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표준은 개인의 안락을 벗어나서 민 56 최용신의 농촌운동론
중의 안락을 이상함이다. 즉 배고파 우는 자에게서 눈물을 씻어 주고, 추 워 떠는 자에게 옷을 주며, 고통에 쓰린 자에게 기쁨을 주는 일이 '급선의 급선무'이다. 최직순은 '사회적 방면'의 '통일적 이상'을 언급하는 대목에 이르러, 지 식을 받은 자가 우리 사회의 문맹을 타파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교육 받은 여성이 조선여자에게 지식을 보급함이 의무라고 지적하였다. 나아 가 종교 산업 정치 제도 등에서 우리의 손을 기대하고 있음을 설명한 뒤, 이러한 문제에 조선여자의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는 우리 사회가 후진된 원인을 모르는 자라고 비판하면서, 이른바 완전한 인간생활의 조 건으로서 二 性 人 間 論 二 性 社 會 論 을 주장하였다. 최직순은 조선사회가 후진 상태에 빠진 이유로, 여러 가지가 아닌 단 하 나의 원인을 찔러 짚었다. 그것은 조선사회가 남자의 손으로만 길게 내려 왔기 때문이다. 본래 인간은 二 性 으로 성립되었는데, 여성이 완전히 置 之 度 外 된 채 남자 중심으로만 내려왔으므로 완전한 인간의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고 통찰하였다. 그는 二 性 社 會 가 아닌 남자독재의 사회를 가리켜 날개 한 짝이 없는 새, 바퀴 하나가 없는 차에 비유하여 비상과 운전이 원 활치 못함은 당연한 결과라고 꼬집었다. 그런 끝에 조선사회를 일으켜 참 다운 인간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남녀의 손이 합쳐야 함을 강조하였다. (자료 6)에서 최직순은 조선여성의 문맹타파와 지식보급을 먼저 강조하 고, 모든 방면에서 여성의 책임을 자각치 못하여 조선이 후진사회가 되었 음을 二 性 人 間 論 으로써 주장하였다. 이는 최용신이 男 女 兩 性 論 을 주장한 뒤 여성교육과 문맹타파를 외치는 점에서 순서는 다르지만, 논지는 동일 하다. 최용신과 최직순이 각각 말하는 ' 兩 性 '과 ' 二 性 '은 완전히 동의어이 다. '남성편중'과 '남성독재'에서 '독재'라는 말이 어감이 강하지만, '편중' 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 최직순의 성숙한 사상이 최용신에게 일정한 영향 최용신 학술심포지움 자료집 57
으로 學 習 轉 移 되어 두 사람 사이의 교감대가 형성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2) 브나로드운동론으로 발전 靑 年 잡지 60) 가 기독교 계통의 잡지였므로 루씨학교에서도 구독하 였을 터이고, 1928년 초의 시점이나 이후에도 최용신이 어떠한 형태로 든 이를 정독하였음은 분명하다. 앞서 본 조선YMCA YWCA의 정기 총회나 하령회 등의 회합들은 당시 신문 잡지에도 보도되었다. 특히 YMCA YWCA의 기관지라 할 수 있는 靑 年 은 집회 일시 장소나 참가원의 실명 등 표면 사항은 물론, 상세한 토의 내용까지 심층성 있게 보도하면서 쟁점 사항은 독자들의 誌 上 토론까지 게재하기도 하였다. 신 학교에 재학 중인 최용신이 이를 정독하면서, 기독교신앙에 입각하여 농 촌문제를 심도 있게 탐구하였음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조선YWCA의 동향도 최용신에게는 일정한 영향을 끼쳤으리라 본다. 앞 서 1924년 최직순이 YWCA 활동에 참여하였음을 언급하였지만, 1926 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1주일 동안 하령회를 겸하여 제4회 정기총회 가 열렸고, 이때부터 원산 루씨YWCA가 참여한 61) 사실도 중요하다. 최용 신은 루씨여고보에 재학하면서 이러한 YWCA의 모임에 지속하여 관심을 60) 靑 年 은 같은 誌 名 으로 1917년 9월 10일 창간하여 계속 발행하다가 중단하였 는데, 1921년 3월 12일 재일본 동경의 朝 鮮 基 督 敎 靑 年 會 의 기관지였던 現 代 (1920. 1. 31 창간)와 합하여 다시 허가를 얻어 1921년 3월 12일 재창간하 였고, 1937년 3월 1일 통권 185호로써 종간하였다. 청년 은 조선청년연합회 의 기관지로서 알려졌지만, 집필자와 원고 내용을 보면 기독교 중심의 종합잡지 로서 기독교와 청년의 잡지 구실을 하였다. 金 根 洙 編 著, 韓 國 雜 誌 槪 觀 및 號 別 目 次 集, 永 信 아카데미 韓 國 學 硏 究 所, 1973, 182 187쪽. 청년 은 당초 YMCA의 기관지로 출발하였지만, 1926년부터 YWCA도 함께 참여함으로써 이 후 시기에는 사실상 두 단체의 공동기관지로서 기능했다. 청년 에는 신앙과 현실생활을 관련시켜 이해함으로써 사고의 전환을 보여주는 글들이 다수 실렸 다. 千 和 淑, 앞의 책, 20 193쪽. 61) YWCA연합회 회록 千 和 淑, 앞의 책, 47~48쪽에서 다시 인용. 58 최용신의 농촌운동론
가졌으리라 본다. 1927년 8월 24일 40명이 참석하여 개최된 제5회 정기 총회에도 원산 루씨YWCA가 참여하였는데, 농촌사업에 대한 문제가 처 음으로 제기되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市 部 청년회는 주요 토의사항 3개 항 가운데 첫 번째로 "1. 조선여자계에 보통 상식을 보급시키기 위하여 농촌사업을 할 일"을 제기하였다. '여성의 보통 상식의 보급' 즉 문맹퇴치 나 계몽과 같은 방법론을 농촌사업의 방향으로 제시한 이 의제는 YWCA 운동의 새로운 방향이었다. 이는 이제까지 도시와 학생을 중심으로 조직 하고 운영하였던 방법론을 바꾸어, 운동의 중심을 농촌으로 전환하는 의 미를 지녔다. 이러한 총회의 방침은 이후 YWCA의 농촌운동으로 구체화 되었다. 62) 그리고 이러한 방향성이 (자료 1)에 보이는 최용신의 농촌여성 계몽론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최용신이 협성여자신학교에 입학한 뒤 황애덕의 지도를 받았음은 다 아 는 사실이다. 최용신이 협성여자신학교에 입학한 다음해인 1929년 4월 황애덕이 동교의 농촌사업지도교육과 교수로 부임했다. 63) 최용신은 황애 덕의 지도로 농촌실습과 브나로드운동에 참여하면서, 또 조선YWCA운 동에 참여하면서, 이전부터 이상하였던 농촌운동을 이론과 실천의 양면 에서 구체화시켰고 브나로드운동자로 발전하여 나갔다. 그는 기독교의 62) YWCA연합회 회록 千 和 淑, 앞의 책, 48~49쪽에서 다시 인용. 63) 비밀결사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주도자이자 여성기독교지도자 농촌운동가 등 으로 유명한 황애덕은 이미 일정한 연구가 이루어졌으므로, 본문에서는 필요한 사항만 언급하기로 한다. 식민지시기 황애덕의 독립운동과 농촌운동은 다음 연 구들을 참조할 수 있다. 신영숙, 일제 시기 여성운동가의 생활과 활동양상 황애 덕 신덕 자매를 중심으로, 한국여성학 제13권 1호(한국여성학회, 1997. 6) : 윤혜영, 청솔의 푸른 절개, 황애덕, 세계의 신학 38(한국기독교연 구소, 1998. 3) : 윤정란, (제4장)1930년대 기독교 여성들의 농촌계몽운동과 절제운동, 한국 기독교 여성운동의 역사 ( 國 學 資 料 院, 2003. 4) : 윤정란, 황애덕과 대한민국애국부인회, 崇 實 史 學 第 22 輯 (숭실사학회, 2009. 6) : 김성은, 1930년대 황애덕의 농촌사업과 여성운동,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35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1. 9). 최용신 학술심포지움 자료집 59
여성지도자로서 돋보이는 실천력을 인정받았고, 이것이 自 他 의 의지에 따라 YWCA의 농촌사업가로 샘골에 파견된 배경이었다. 앞서 보았듯이, 황애덕은 1923년 조선YWCA연합회를 창립하는 데 관 계하였지만,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도 이곳에서 왕성하게 활동하였 다. 1929년 7월 23일 열린 조선YWCA연합회 제7회 정기총회에서 토의 한 5개의 사항 중 하나는 "4. 農 村 部 를 施 設 하야 勵 할 일"이었다. 64) 조선 YWCA는 지금까지 농촌문제에 관심을 가졌되 뚜렷한 계획 아래 지원한 바는 없었지만, 이제 농촌부를 시설함으로써 농촌운동에 본격 착수하게 되었다. 농촌부의 간사로는 미국 유학에서 농촌연구로 학위를 받고 돌아 온 황애덕이었다. 농촌사업과 관련하여 연합회의 임무는, 총회에서 지도 방침을 정하고 농촌부 간사를 중심으로 하는 지도 활동에 역점을 두었으 며, 실행은 지부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65) 최용신은 7회 정기총회와 하령 회에서 의안검사위원으로 呼 薦 되었고, 협성여자신학교 학생기독교청년 회 대표로 보고하였다. 66) 이때 YWCA에 농촌부가 설치되면서 최용신은 농촌사업과 인연을 맺었고, 이후 최용신이 샘골에 파견됨도 이 농촌부 사 업의 일환이었다. 67) 1932년 7월 20일 경성중앙기독교청년회관 대강당에서 개최된 제9회 정기총회는 20명이 출석하여 개최되었다. 黃 愛 德 은 李 恩 卿 과 농촌부 위 원으로 선임되어 계속하여 농촌사업을 주관하였다. 제2일자 회의록에 따 르면, " 水 原 샘골서 農 村 兒 童 을 爲 하야 啓 蒙 運 動 에 勞 力 하시는 崔 容 信 先 生 64) "29. 7. 23" 第 七 回 定 期 大 會 及 夏 令 會 65) YWCA연합회 회록 (1929년 7월 28일) 千 和 淑, 앞의 책, 50~52쪽에서 다시 인용. 66) "29. 7. 23" 第 七 回 定 期 大 會 及 夏 令 會 67) 千 和 淑, 앞의 책, 202 207쪽. 60 최용신의 농촌운동론
께서그곳 文 盲 退 治 事 業 發 展 과 農 村 事 業 增 進 하는 狀 況 을 報 告 "하였다. 68) 최용신의 농촌사업과 YWCA사업의 이 같은 연계성은 그의 농촌운동이 YWCA의 관심도-지원에 의존하는 구도를 반영하기도 한다. (자료 7)에 보듯이, 1930년을 맞으며 황애덕은 자신의 희망과 포부를 밝혔는데, 이는 최용신에게도 압축된 사상으로 중요하다. (자료 7) 조선의농촌운동( 農 村 運 動 )도다른나라의그것과갓지안코조선 특수의사정이잇슴으로이특수한사정에 긔준하야나아가야할것 은두말을요할배아니외다. 평일부터 나의생각으로는 조선의문 제를 해결하기에는 조선이천만민족의 팔할을점령한 농촌문제 를갓고 좌우되리리라고 밋는 닭에 류학시대로부터 다소의 연구를하야 보앗고 귀국하야서는 미미하나마 이문제에 착수 하얏스나 아즉 지조선의 농촌운동이 구체화하지못하고 사상 적영역에서 버서나지 못한 늣김이잇슴으로 이 운동만을구분 하야 마틀만한 긔관이잇기를 바라고 이것을 준비중이외다. 어 한긔관에 부속할운동만으로는 그임무를 더하기어려운 닭 이외다. 구체적 운동방법으로는농촌의계몽운동( 啓 蒙 運 動 ) 다 시말하면농촌부녀자의문맹퇴치( 文 盲 退 治 )를하기위하야농민 야학, 농촌강좌, 농민의단결할유긔적긔관의 실현과 농촌운동 지도자( 農 村 運 動 指 導 者 )가부족함으로 이들의양성긔관도 긔어 코 실현하야보려합니다. 69) 황애덕은 조선문제는 농촌문제라는 현실인식을 갖고, 조선농촌운동의 특수성을 전제하면서, 사상적 영역에서 벗어나 농촌운동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여타 단체에 부속되지 않는 독립된 농촌운동기관을 추진하려 하 68) 第 九 回 定 期 總 會 會 錄 ( 一 九 三 二 年 七 月 二 十 日 로 二 十 一 日 ). 69) 農 村 啓 蒙 女 子 基 靑 聯 合 會 黃 愛 施 德 氏 談, 東 亞 日 報 第 三 千 三 百 六 十 八 號 (1930. 1. 1). 동아일보 는 一 九 三 年 展 望 =우리는어 케할가 를 주제로 一 이십세긔도어느듯중턱을넘엇다 희망에타는새해를어 케마질가 / 各 團 體 主 要 幹 部 抱 負 를 실었는데, (자료 7)은 황애덕이 대답한 내용이다. 최용신 학술심포지움 자료집 61
였다. 그는 농촌운동의 구체안 방법론을 세 가지로 제시하였다. 첫째는 농촌계몽운동인데, 무엇보다도 농촌부녀의 문맹퇴치를 급선무 로 삼아 농민야학 농촌강좌를 중시하였다, 둘째는 농민이 단결할 유기 적 기관과, 셋째는 농촌운동지도자 양성 기관의 실현을 목표로 하였다. 이는 (자료 4)에 보듯이, 최용신의 농촌운동론에도 응축되어 있다. 최용신은 YWCA활동에 이어 동아일보사가 추진한 브나로드운동에 참 여하면서 농촌운동의 실천력을 확장하였다, 그는 동료인 김노득과 함께 동아일보사가 1931년 주최한 제1회 학생브나로드운동에 참여하였다. 두 사람은 동년 7월 3일부터 8월 14일까지 약 41일간 遂 安 郡 泉 谷 面 龍 峴 里 에서 38명의 학생을 상대로, 주간에는 한글공부 算 術 唱 歌 手 工 體 操 를, 야학에서는 한글 算 術 地 理 歷 史 를 가르쳤다. 70) 이어 최용신은 江 原 道 通 川 郡 踏 錢 面 浦 項 里 에서, 설립된 지 10여 년 동안 기독교 선교 회의 도움을 받아온 옥명학원에서 교사로 봉사활동을 하였다. 71) 이를 보면, 최용신은 YWCA의 농촌운동과 1931년 브나로드운동 등에 참여함으로써 풍부한 경험을 쌓은 뒤, 72) 수원군 반월면 샘골마을에 유급 70) 第 一 回 學 生 브나로드 運 動 / 啓 蒙 隊 消 息 - 朝 鮮 文 日 用 計 數 法 講 習, 東 亞 日 報 第 三 千 八 百 二 十 四 號 71) 최용신은 봉사활동을 마친 뒤, 시가 100원 상당의 풍금을 동 학원에 기증하고 떠 났으므로 마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고, 당시 신문은 이를 美 擧 로 보도 하였다. 崔 容 信 孃 美 擧, 朝 鮮 日 報 第 三 千 九 百 一 號 (1931. 11. 6). 대개의 연구자들이 昭 和 六 年 ( 一 九 三 一 ) 十 月 十 一 日 양은 예배당을 빌어 농촌게몽의 첫광이를 나려직었다. 柳 達 永, 앞의 책 (1939. 12), 32쪽 에 근거하여, 최용신이 샘골에 도착하여 활동한 날을 1931년 10월 11일로 못박아 서술하였 다. 그러나 위의 신문 기사 등을 참작한다면, 최용신이 포항리를 떠나 샘골로 파 견된 때는 10월 말이나 11월 초쯤으로 추정된다. 72) 앞의 獨 立 有 功 者 功 勳 錄, 658쪽에서는, 최용신이 이러한 YWCA의 농촌사 업에 적극 참여하여 1929년에는 황해도 수안( 遂 安 )과 경북 포항에 파견되어 농 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고 기술하였는데, 두 가지 오류가 보인다. 연도는 1929년이 아니라 1931년이었다. 포항은 경상북도에 소재한 곳이 아니라, 강원 도 통천군에 소재한 포항리였다. 일부 연구 또는 인물평들에서 반복되는 오류들 이다. 62 최용신의 농촌운동론
으로 파견되었다. 앞서 보았듯이, 조선YWCA 9회 정기총회에서 최용신 이 사업보고를 할 만큼, 샘골 활동은 YWCA에서도 큰 비중을 둔 사업이 었다. 샘골강습소는 황해도 수안의 강습소와 함께 YWCA의 본부에서 직 접 관할하는 농촌사업의 일환으로 벽촌에 설치한 교육기관이었다. 이들 강습소는 보통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동들에게 주야로 글을 가르치고, 圖 書 俱 樂 部 를 두어서 책 없는 사람들에게 책을 읽게 하는 등의 활동을 주 임무로 하였다. 최용신은 샘골에 파견된 뒤에도 YWCA 본부와 긴밀한 관 계를 맺고 73) 샘골에서 농촌사업을 추진하였으며, 김노득 역시 수안에서 활동에 전념하였다. 74) (자료 4)를 보면, 최용신이 농촌운동에 정진한 근본 이유, 이 시기 농촌 운동의 무게 중심을 '농촌여성의 지도'에서 '농촌어린이'(=농촌의 무산아 동)의 교육으로 옮긴 동기를 알 수 있다. "조선의 復 興 은 農 村 에 있고 민 족의 발전은 農 民 에 있다", "사람을 기르면 百 年 의 計 가 된다"는 명제는 그에게 뗄 수 없는 상관성을 지녔으므로, 이 시기 그는 '농촌 어린이'의 교 육을 농촌운동의 제1목표로 설정하고 분투하였다. 73) 婦 人 記 者, 前 衛 女 性 團 體 의 陣 容 (3), 朝 鮮 女 子 基 督 聯 合 會, 三 千 里 總 二 十 二 號 第 四 卷 第 一 號 ( 三 千 里 社, 1932년 1월호), 99쪽. 위의 기사는 朝 鮮 女 子 基 督 靑 年 會 聯 合 會 를 방문하여 총무(당시는 金 誠 實 )와 대담한 취재담이다. 위의 기사에는 총무가 부인기자에게 최용신을 소개하는 대목이 다음과 같이 나 온다. "마즘편에 안저 잇는 얌전하고 수집어 보이돈 먼저붓터 와서 기다리든 식 골선생 비슷한 이를 소개하면서 이 최선생이 지금 수원 가셔서 농촌사업 하시 는 선생임니다! 라고 하신다." 위의 三 千 里 의 발간 일자가 1932년 1월 1 일이었는데, 그렇다면 최용신은 샘골로 파견된 지 두어 달 정도 있다가 상경하여 YWCA본부와 사업 내용을 교류하고 있었다. 74) 一 生 을 農 村 開 發 에 / 女 丈 夫 金 路 得 孃 / 學 校 세우고 敎 化 에 盡 力, 朝 鮮 日 報 第 號 四 千 六 百 三 十 八 (1934. 05. 01)에는 김노득의 활동을 소개하면서, "협신회 ( 協 信 會 )라는것도두어도서관도가젓고 공동경직( 共 同 耕 作 )의긔구도가젓다고한 다."고 기술하였다. 이를 보면, 삼천리 기사에서 김성실의 말이 사실임을 보 여주는데, 수안에서는 도서관이 시설되었으나, 샘골강습소에는 도서관 시설 이 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최용신 학술심포지움 자료집 63
그러나 1934년 10월경 최용신의 농촌사업은 YWCA의 지원금이 중단 됨으로써 난관에 부딪혔다. 이에 그는 대중 매체에 후원의 손길을 하소연 하는 방법으로 돌파구를 찾으려 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농촌 운동 전반의 한계상황을 반영하기도 하는 (자료 4)에는, 최용신의 농촌운 동론의 진정성과 한계가 동시에 드러난다. (자료 4)의 글은 처음에는 차분한 어조로 나름 객관성 있게 전개되었 다. 75) 샘골강습소가 위치한 반월면 76) 은 벽촌도 아니고 '교촌' '문화촌'이 라 불릴 만큼 나름 깨인 동리인데도, 마을 주민 65%에 해당하는 대다수 의 경제상태가 연수입 150원을 넘지 못하는 '빈한한 지방'임을 담담하게 설명하는 대목에는, 샘골강습소를 비롯한 이 시기 모든 강습소의 목적과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샘골강습소는 여타 강습소와 마찬가지로 "자라기에 배가 고프고 배움에 목이 마른" '농촌어린이'(아동) 77) 을 비롯한 빈한한 '대중' 78) 을 가르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샘골강습소는 다른 강습소의 규모보다 크고 마을의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였으므로, 마을에서 '중요한 기관'의 지위를 점하는 특 징이 돋보였지만, 운영상의 곤란은 일반 강습소와 매한가지였다. 모든 강 습소의 이상은 '농민들의 손으로 독립경영'을 하는 데 있지만, '농민의 여 유없는 생활'은 '이만한 기관 하나'도 경영할 형편이 못되었으므로 샘골강 75) 그런데 (자료 4)는 글의 중반부터 강습소 '폐쇄'의 위기를 호소할 때 '비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감정이 격해지기 시작하였고, 끝부분에서는 '하소'에서 벗어 나 도시민 일반을 향한 비분강개가 분노로 비약하고 말았다. 이 시기 최용신의 절 망감과 육체 심리 상태의 곤궁함을 감안하더라더도, 都 農 또는 都 村 이라는 이분법에 근거한 현실인식과 감정 상태는 오히려 논지를 이탈하게 만들었다. 76) 글에는 반월면이라는 행정면을 밝히지는 않았다. 77) 이 글에는 '아동'이라는 말이 2회, '불상한 어린이' 1회, '농촌의 아들과 딸' 1회를 포함하여 '농촌어린이'가 4회 나오는데, 강습소의 주 목적이 농촌의 무산아동을 교육하는 데 있었음을 보여준다. 78) 여기에는 농촌여성을 포함한 청년 문맹자들도 포함된다. 64 최용신의 농촌운동론
습소도 "사업가들의 후원을 받어왔"던 실정이었다. 79) 이제 "사업가의 열 성도 경제도 제한이있어" '후원의 손'을 끊으려 하자 강습소가 '폐쇄'될 위 기에 맞닥뜨렸다. '문화촌' '교촌' 소리를 듣는 마을이 이러한 상황이라 면, 그야말로 산간벽촌의 현상은 어떠하겠느냐는 반문이 나올 만큼, 최용 신의 '하소'는 절실하였다. 이 절규조차 좌절된 한계상황에서, 그의 실천 력은 자신을 희생하는 더 큰 '헌신'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Ⅳ. 맺는말 최용신의 사망 소식을 전한 신문기사는 그를 '수원군의 선각자' '무산 아동의 자모'로 칭송하면서, 조선의 농촌개발을 목적으로 헌신하였던 그 의 '사업'을 '농촌부녀들의 문맹퇴치와 무산아동 교육'으로 집약하였다. 이어 동 신문은 최용신이 '비저논 사업'을 계승하자는 차원에서, 썩은 한개의밀알 브나로드의 先 驅 者 故 崔 容 信 孃 의 一 生 -인테리 女 性 들아 여기 에한번눈을던지라 는 제목으로 3회에 걸쳐 그의 '빗나는 행적'을 소개 하였다. 여기서 최용신을 '썩은 한 개의 밀알 브나로드의 先 驅 者 '로 평가 함은 시인의 감성과 통찰력이 담긴 참으로 적실한 평이었다. "한 알의 밀 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 느니라."(요한 12 : 24)는 성경 구절은 실로 최용신의 브나로드운동의 본 질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동아일보사가 실시한 브나로드운동을 통하여 이미 많은 브나로드운동 가가 세상에 나왔는데, 최용신을 '브나로드운동의 선구자'로 내세움은 논 리상의 모순이지만, 그를 '밀알'로 비유한 데에서 타당성을 갖는다. 東 亞 日 報 社 史 에서 自 社 가 추진한 브나로드운동을 가리켜, 19세기 러시 79) 본문에 '후원'이라는 말을 2회 사용하여, 이러한 실정을 두 차례 강조하였다. 최용신 학술심포지움 자료집 65
아 지식층이 벌였던 계몽운동에서 '민중 속으로'라는 語 義 만을 따왔음을 이미 지적하였듯이, 최용신의 브나로드운동도 19세기 러시아의 브나로 드운동과는 전혀 궤를 달리 하였다. 그렇다고 東 亞 日 報 社 史 가 브나 로드운동을 "1600 萬 의 文 盲 者 를 對 象 으로 文 盲 打 破 와 國 文 普 及 을 主 軸 으로 하고, 이와 아울러 衛 生 知 識 을 널리 普 及 시키는 데 그 目 的 을 둔 一 大 民 衆 運 動 이었다."고 평가한 바 80) 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어찌보면 1923년 동아일보사가 처음으로 브나로드를 외친 이래, 81) 최 용신에 이르러 진정한 의미의 브나로드운동이 이론과 실천의 면에서 정 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광수 류의 '시혜적 의식'을 가지고 지식을 '보 급'하는 데 그치는 브나로드운동이 아니라, 말 그대로 민중 속으로 들어 가 민중과 일체가 되었으며 끝내는 민중 속에 녹아든 브나로드운동은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했던 크리스천 최용신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점에서 그는 크리스천 브나로드운동가였다. '크리스천'이라는 전제와 수식어는 최용신의 농촌운동의 의의와 한계 를 그대로 드러내는 본질이다. 19세기 러시아의 브나로드운동이 농민운 동 계급운동의 성격을 지니면서도 구호와 달리 민중과 괴리되고 말았 다. 반면 최용신의 브나로드운동은 민중과 일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말과 그대로 일치한다. 그러나 최용신의 브나로드운동은 농민의 자각을 촉구 하는 측면에 머물렀을 뿐 농민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농민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82) 그는 자신의 농촌운동의 한계를 자각하고 유학 80) 東 亞 日 報 社 史 (1920~1945 年 ) 卷 一 ( 東 亞 日 報 社, 1975. 4), 336쪽. 81) 東 亞 日 報 社 는 1923년 10월 26일자 사설 貧 民 에게로 가라 에서, 각계각층의 인사들에게 19세기 러시아의 '브 나로드( 人 民 에게로)의 신성한 운동'을 본받기 를 촉구하였다. 盧 榮 澤, 日 帝 下 의 農 村 啓 蒙 運 動 의 硏 究 : 東 亞 日 報 社 의 브 나 로드 運 動 을 중심으로, 歷 史 敎 育 第 二 十 六 輯 ( 歷 史 敎 育 硏 究 會, 1979. 11), 71~72쪽. 82) 기독교 농촌계몽운동의 긍정성과 한계는 충분히 지적되었다. 이 운동이 문맹퇴치와 농민의 의식향상, 특히 여성계몽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66 최용신의 농촌운동론
으로써 이를 극복하려 하였으나, 뜻하지 않은 발병으로 다시 문맹퇴치에 주력하는 농촌운동으로 복귀하고 말았다. 최용신이 영면한 지 몇 개월 뒤 상록수 가 출간 83) 되는 繼 起 性 이야말 로, 최용신이 당대인에게 기억 기념할 인물로 이미 평가받았음을 말해 주며, 崔 容 信 像 이 형성되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민중 속에서 민중과 일체 가 된 브나로드운동가로서 최용신 농촌운동의 의의를 통찰하면서, 이것 이 농민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농민운동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을 가지고, 소설의 감수성을 빌려 최용신을 재조명한 최초의 시도가 심훈 의 상록수 였다. 상록수 의 브나로드운동론은 최용신의 브나로드 정신을 살리면서, 이의 한계를 넘어 브나로드운동론을 새롭게 제기하였 다. 사실에 근거하여 진실을 추구하는 역사학이 심훈의 문제의식을 계승 한다면, 차후 최용신의 생애와 브나로드운동의 실태를 밝히는 데에서 유 용한 제언을 얻으리라 생각한다. [ 참고문헌 ] 김성은, 1930년대 황애덕의 농촌사업과 여성운동,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35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1. 9). 김형목, 최용신 현실인식과 농촌계몽운동, 史 學 硏 究 第 88 號 ( 韓 國 史 學 會, 2007. 12). 그러나 전체로 볼 때, 식민지 상황의 구조화된 모순과 일제의 침략성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려는 노력은 부족하였으며, 분배개선보다는 생산증가에 역점을 두었으므로 토지와 소작 문제 같은 농업문제의 근본핵심은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기독교 농촌운동이 합법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 결과였으나 한계임도 분명하였다. 바로 이 러한 면이 사회주의자들에게 거센 비판을 받았음도 당시의 객관 정황이었다. 김용 달, 농민운동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7), 240~241쪽. 83) 심훈은 1935년 5월 4일부터 상록수 를 쓰기 시작하여 동년 6월 26일 탈고하 였고, 동년 9월 10일부터 1936년 2월 15일까지 127회에 걸쳐 동아일보 에 연재하였다. 최용신 학술심포지움 자료집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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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최용신의 농촌운동 - 농촌계몽론자에서 브나로드 운동가로 김동선(숭실대) 이 논문은 최용신의 농촌운동에 대한 이론적 기반에 대해 고찰하고, 새 로운 자료를 발굴하였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한 기존에 오역된 자료의 내용을 바로 잡고, 소개하였다는 점에서도 참신 한 논문이라 할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에 대한 내용을 전공한 바 없고, 또 한 농촌계몽운동에 대해서도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최 용신의 일대기를 정리한 유달영에 관련된 글을 쓴 이유로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때문에 몇가지 궁금증을 여쭙는 것으로 토론을 대 신할까 합니다. 김인식 선생님께서는 최용신의 사업을 농촌부녀자들의 문맹퇴치와 무 산아동의 교육으로 집약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논문에서 농촌 부녀자들을 위한 문맹퇴치에 관련된 최용신의 활동은 보이지 않습니다. 최용신의 글로 최용신의 이상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농촌부녀자들 에 대한 계몽의 의지가 충분히 드러나지만, 최용신의 실제 활동을 서술하 신 대목에서는 최용신이 농촌부녀자들의 문맹퇴치를 위해서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는 잘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이 논문에 기재된 것처럼 최용신의 활동이 주로 무산아동들의 교 육에 치우쳤다면, 이것은 현실적인 여건의 문제였는지 그렇지 않으면 최 용신에게 어떤 생각의 전환이 있었던 것인지 궁금합니다. 물론 자료 4의 70 최용신의 농촌운동 <토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