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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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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꼬부랑 이라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5같은 말이 반복이 되어서 지루합니다. 4 꼬부랑 은 굽은 모양을 재미있게 흉내 낸 말입니다. 꼬부랑 을 빼고 읽는 것보다 넣어서 읽 으면 할머니와 엿가락, 강아지의 느낌이 좀 더 실감 나서 재미가 있습니다. 국어2(예습)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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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 畿 鄕 土 史 學 第 16 輯 韓 國 文 化 院 聯 合 會 京 畿 道 支 會

2힉년미술

Transcription:

古事記 古 事 13 記 신화 전설 가요 계보 등을 소재로 하여 일본 건국의 유래와 제1대 神武천황부터 제33대 推 古천황까지의 事蹟을 기록한 일본 현존 最古의 典籍이며, 전체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天武천황 대에 천황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던 역사 저술사업을 元明천황이 계승하여, 太安萬侶에게 稗田 阿禮가 암송하고 있던 천무천황대의 역사 저술 내용을 필록하도록 명하였다. 712년 太安萬侶가 和漢混用體의 문장으로 기록하여 이를 원명천황에게 奏上하였다. 일본 최초의 사서로 일본고대 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일본고전문학대계 등에 수록되었다. 仲哀天皇(츄우아이텐노)1) 그 大后(오오키사키)2) 息長帶日賣命(오키나가타라시히메노미코토)3)은 당시 神이 지피 셨다. 天皇4)이 축자의 訶志比宮(카시히노미야)5)에 납시셔서 熊曾國(쿠마소노쿠니)6)을 치 려 하였을 때에 천황이 琴을 치시고,7) 제사지내는 정원에서 建內宿 8) (타케시우치노스쿠 1) 仲哀天皇 : 古事記 日本書紀 의 제14대 천황. 和風諡號는 足仲彦尊(타라시나카츠미코노미코 토). 景行천황의 황자 日本武尊과 垂仁천황의 딸 兩道入姬皇女 사이에서 태어났다. 숙부 成務天皇 에게 후사가 없어서 성무천황의 사후 1년 뒤에 즉위하였다. 九州 남부의 熊襲을 치려고 하던 중 神 功皇后에게 서쪽의 신라국을 치라는 신탁이 내렸는데, 이를 믿지 않았으므로 筑紫에서 사망하였다 고 한다. 仲哀천황은 日本武尊과 神功皇后의 설화를 황실계보 속에 넣기 위해 뒤에 추가된 존재라 는 주장이 있다(井上光貞, 1960, 日本國家の起源, 岩波書店, 178쪽). 2) 大后 : 일본 상고시대에 천황의 처를 키사키라고 부르고 그 중에서 최상위자를 오오키사키라고 불 렀다. 오오키사키를 日本書紀 에서는 皇后로 표기하였는데, 古事記 에서는 大后로 표기하였다. 3) 息長帶日賣命 : 日本書紀 에서는 神功皇后로 표기하고 있다. 神功皇后에 대해서는 21쪽의 주 1) 참조. 4) 天皇 : 仲哀天皇. 주 1) 참조. 5) 訶志比宮 : 日本書紀 에서는 日宮(카시이구)이라고 적고 있다. 仲哀천황의 궁이 있었던 곳인데, 이곳은 奈良, 平安시대 전기에는 香椎廟, 香椎宮으로 표기되었다. 현재 福岡市 東區 大字 香椎에 香椎宮이 있다(1982, 國史大辭典 3, 吉川弘文館, 264쪽). 6) 熊曾國 : 古事記 日本書紀 의 전승기사에서 남구주지방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 日本書紀 에서 는 熊襲이라고 표기하였다). 7) 천황이 치시고 : 신의 신탁을 받을 때에는 신이 강림하도록 和琴을 연주하였다. 8) 建內宿 : 日本書紀 에서는 武內宿 로 표기하고 있다. 景行 成務 仲哀 神功 應神 仁德代 에 걸쳐 천황을 보필하였다고 하는 忠臣.

14 古事記 15 네)가 神의 명령을 여쭤보았다. 그러자 大后가 神이 지펴서 서쪽에 나라9)가 있다. 金銀 大 (오오하라에)19)하여 이를 깨끗하게 하고 또 建內宿 가 祭場에서 신이 명령하시길 청 을 비롯해 눈이 부신 많은 보물이 그 나라에 많이 있다. 내가 지금 그 나라를 복속시켜 주 하였습니다. 그러자 신이 가르쳐 주신 것은 모두 먼저와 마찬가지로 모든 이 나라는 그대 겠다. 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천황이 대답하시기를 높은 곳에 올라가 서쪽을 보아도 나 의 뱃속에 계시는 자식께서 다스릴 나라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建內宿 가 神이시 라가 보이지 않고 단지 큰 바다 뿐이다. 고 말씀하시고 거짓말하는 신이라고 하시면서 琴 여 황송하지만 그 神의 뱃속에 계시는 자식께서는 어떤 자식이십니까? 라고 여쭙자, 아 을 밀어놓고 연주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셨다. 그러자 그 神께서 매우 화가 나 드님이시다. 라고 말씀하셨다. 답하시기를 이것은 天照大神(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20)의 서 무릇 천하는 당신이 다스릴 나라는 아니다. 당신은 저승길로 가시오. 라고 말씀하셨 마음이시다. 또 底筒男(소코츠츠노오) 中筒男(나카츠츠노오) 上筒男(카미츠츠노오) 세 다. 그러자 建內宿 가 말하기를 황송한 일입니다. 폐하, 그 琴을 계속 연주하십시오. 신21)이다. 지금 진실로 그 나라를 갖고자 한다면 천지신들, 또 산의 신, 바다와 강의 신들에 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조금 그 琴을 끌어당겨 마지못해 치시게 되었는데, 곧 琴 소리가 게 모두 폐백을 바치고 내 靈22)을 배 위에서 제사 지내고, 나무의 재를 표주박에 넣고 또 젓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불을 키고 보았더니 이미 돌아가셨다.10) 고 말씀하셨다. 가락과 접시를 많이 만들어 모두 바다에 띄우고23) 건너는 것이 좋다. 그러자 놀라고 두려워서 殯宮(아라키노미야)11)에 옮기고 나아가 국내에서 폐백을 모으 12) 13) 14) 15) 16) 17) 18) 고, 生剝 逆剝 阿離 溝埋 屎戶 上通下通婚 馬婚 牛婚 鷄婚 의 죄 등을 그래서 모두 신의 가르침대로 하고 군대를 정비하고 많은 배를 나란히 하여 바다를 건 너가실 때에 바다 속의 물고기들도 크고 작은 놈 할 것 없이 나와서 배를 지고 건너갔다. 순풍이 잘 불어 배는 파도를 따라 갔다. 그 배의 파도가 新羅國에 몰려들어 나라의 반 정 9) 나라 : 日本書紀 仲哀 8년 추9월 을해삭 기묘조에서는 衾新羅國이라고 나와 있다. 10) 그래서 조금 이미 돌아가셨다 : 日本書紀 仲哀 8년 추9월 기묘조와 9년 춘2월 계묘삭 정 미조에서는 중애천황의 사망에 대해 다르게 적고 있다. 즉 중애 8년 9월 5일에 중애천황이 신의 말을 믿지 않자 신이 다시 신공황후에게 지펴 중애왕을 비난하면서 중애천황이 자신을 못 믿는다 면 끝내 그 나라를 얻지 못하고 황후가 임신한 아들이 그 나라를 얻을 것이라고 신탁하였다. 그런 데도 천황은 믿지 않고 무리하게 熊襲을 쳐서 이기지 못하고 돌아와 仲哀 9년 2월 5일에 천황이 갑자기 몸이 아프더니 다음날 사망하였다고 한다. 日本書紀 편찬자는 사망 기사 뒤에 신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일찍 사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적는 한편 分註의 형태로 천황이 친히 熊襲을 쳤는데 화살에 맞아 사망하였다는 설도 제시하고 있다. 11) 殯宮 : 시신을 매장하기 전에 안치한 곳. 日本書紀 仲哀 9년 春2月 계묘삭 정미조에서는 중애의 사망 사실을 숨기고 武內宿 가 해로로 穴門으로 가서 豊浦宮에 중애의 시신을 안치하고 불을 밝 히지는 않았다고 하면서 이해에 新羅役 때문에 중애를 장사지낼 수 없었다고 적고 있다. 현재 山 口縣 下關市 豊浦村의 忌宮神社에 豊浦宮趾였다는 곳이 있다(1967, 日本古典文學大系日本書紀 上, 岩波書店, 324쪽). 12) 生剝 : 산 짐승의 가죽을 벗기는 것. 13) 逆剝 : 살아있는 짐승의 가죽을 꼬리쪽부터 벗기는 것. 14) 阿離 : 밭의 두둑을 무너뜨리는 것. 15) 溝埋 : 관개를 위한 도랑을 막는 것. 16) 屎戶 : 오줌을 누어 신성한 장소를 더럽히는 것. 17) 上通下通婚 : 부모 자식간에 결혼하는 것. 18) 馬婚 牛婚 鷄婚 : 말 소 닭 등의 가축과 수간하는 것. 도까지 덥쳤다. 그래서 그 국왕이 두려워서 지금부터 천황의 명령대로 御馬甘(미마카 이)24)으로서 매년 한결같이 배 안이 마르지 않고 노가 마르지 않도록 천지가 있는 한 그치 지 않고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신공황후는] 신라국을 御馬甘으로 19) 大 : 사람들이 범한 죄와 부정한 것을 깨끗하게 하는 일본 神道의 종교의식. 20) 天照大神 : 하늘에 있으면서 비추는 신이라는 뜻으로 日神을 가리킴. 21) 底筒男 中筒男 上筒男 세신 : 古事記 日本書紀 에 의하면 伊 諾尊이 黃泉國에서 돌아와 筑 紫 日向 橘小戶 檍原에서 목욕재계하여 不淨한 것을 씻을 때에 바다의 밑 가운데 표면에서 童 子神과 함께 나타난 세 신이다. 日本書紀 에서는 住吉大神이라고 하였는데, 항해의 신이다 (1967, 日本古典文學大系 日本書紀 上, 岩波書店, 96쪽). 住吉三神(스미요시노산진)이라고 한 다. 延喜式 神名帳에는 攝津國 住吉郡의 住吉坐神社(현재 大阪市 住吉區 住吉의 住吉大社)와 長 門國 豊浦郡의 住吉坐荒御魂神社(현재 山口縣 下關市 一の宮 東町의 住吉神社), 筑前國 那珂郡 住 吉神社(현재 福岡市 博多區 住吉의 住吉神社), 壹岐嶋 壹岐郡(현재 長崎縣 壹岐郡 芦邊町 住吉의 住吉神社), 對馬嶋 下縣郡 住吉神社, 播磨國 賀茂郡 住吉神社, 陸奧國 磐城郡 住吉神社가 보인다. 그러나 이후 住吉神社는 일본열도 전국에 퍼져 현재 이들 세 신을 모시거나 이들 신 중에서 한 두 신을 모시는 신사는 모두 2천 수백사가 된다. 22) 내 靈 : 住吉神社의 세 신의 신령. 23) 나무의 재를 바다에 띄우고 : 어떤 주술적인 의식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海神에게 음식을 바 치는 의식일 가능성이 있다(1958, 日本古典文學大系古事記祝詞, 岩波書店, 324쪽). 24) 御馬甘 : 왕실의 말을 사육하는 部曲.

16 古事記 17 삼고 백제국을 바다 건너의 屯家25)로 삼으시고, 지팡이를 新羅國主의 문에 꽂고 墨江大神 이다.> 또 橫刀(타치)34)와 大鏡을 바쳤다. 또 백제에 현인이 있으면 바치도록 명령하셨으 (스미노에노오오카미)26)의 荒御魂(아라미타마)27)을 그 나라를 지키는 신28)으로 모셔놓고 므로 명을 받고 바친 사람은 和邇吉師(와니키시)35)라고 하여 論語 10권과 千字文 1권 합 돌아오셨다. 쳐서 11권을 이 사람 편에 바쳤다. <*이 和邇吉師는 文首 등의 조상이다.36)> 또 수공업자 로 韓鍛(카라카누치)37) 卓素(타쿠소)38)와 또 吳服(쿠레하토리)39) 西素(사이소)40) 두 사람을 應神天皇 이 천황의 치세에 海部 山部 山守部 伊勢部를 정하셨다. 劍池(츠루기노이케)29)를 만 들었다. 또 신라인이 도래했으므로 建內宿 가 이들을 이끌고 저수지를 만들어 百濟池 (쿠다라노이케)를 만들었다.30) 또 백제국주 照古王31)이 암말 한 마리와 수말 한 마리를 阿 바쳤다. 또 秦造(하타노이야츠코)의 조상,41) 漢直(아야노아타이)의 조상42) 및 술을 양조하 는 사람으로 이름이 仁番(니호), 또는 須須許理(스스코리)43)라고 하는 사람들도 건너왔다. 이 須須許理는 술을 만들어 바쳤다. 천황이 이 바친 술에 기분이 좋아 부른 노래는 須須 許理가 빚은 술에 나는 취했어요. 평화로운 술 웃게 만드는 술에 나는 취했어요. 이렇게 知吉師(아치키시)32) 편에 바쳤다. <*이 阿知吉師는 阿直史(아치키노후비토)33) 등의 조상 25) 屯家 : 日本書紀 에서는 官家로 나와 있다. 한반도 남부의 백제 임나 제국을 일본조정에 공납 하는 나라로 보아 官家라는 표기를 하였다. 26) 墨江大神 : 住吉大神. 주 21)의 底筒男 中筒男 上筒男 세신를 가리킨다. 27) 荒御魂 : 용맹한 신령(1983, 古語大辭典, 小學館, 81쪽), 神靈의 작용을 크게 둘로 나누어, 거칠 게 動的으로 작용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 荒御魂, 온화하고 靜的으로 작용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 和御魂(니키미타마)이다(尾畑喜一郞편, 1978, 古事記辭典 櫻楓社, 58쪽). 여기에서는 住吉三神 이 작용하는 두 측면을 표현한 것이다. 日本書紀 神功攝政前紀 춘3월 경오삭 기묘조에서는 荒 魂은 앞장서서 軍船을 이끄는 신으로 나오는데, 同 12월 무술삭신해조에서는 神功皇后가 개선한 후에 荒魂은 穴門의 山田邑(현재 下關市 住吉神社)에 모셨다. 神功攝政 원년 춘2월에 和魂을 大 津 渟中倉 長峽 (攝津國 住吉郡, 현재 大阪市의 住吉區 住吉大社)에 모셨다. 28) 그 나라를 지키는 신 : 日本書紀 神功攝政前紀 12월 무술삭 신해조에서는 신공황후의 원정군을 따라 갔던 住吉의 세신이 神功皇后에게 나의 荒魂을 穴門의 山田邑에 제사지내라. 고 명하여 신 공황후는 신사를 山田邑에 세웠다고 한다. 29) 劍池 : 日本書紀 應神 11년조에서는 劍池 輕池 鹿垣池 廐坂池를 세웠다고 한다. 30) 신라인이 百濟池를 만들었다 : 일본서기 應神 7년조에서는 高麗人 百濟人 任那人 新 羅人이 함께 내조하였으므로 武內宿 에게 명하여 여러 韓人들을 이끌고 저수지를 만들도록 하 였다. 따라서 저수지 이름을 韓人池라고 불렀다. 고 적혀 있다. 31) 照古王 : 백제 제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5년). 32) 阿知吉師 : 日本書紀 應神 15년 추8월 임술삭 정묘조에서는 阿直伎 阿直岐로 나온다. 33) 阿直史 : 日本書紀 應神 15년 추8월 임술삭 정묘조에서는 阿直岐史로 나온다. 史는 大和政權에 서 글을 담당한 씨족에게 준 姓(카바네)인데, 阿直史는 阿直岐(阿知吉師)의 후손들이 大和政權에 서 글을 담당하였음을 말해준다. 34) 橫刀 : 大刀. 35) 和邇吉師 : 日本書紀 應神 15년조에서는 이 때에 천황이 阿直岐에게 너보다 더 뛰어난 박사가 있는지 묻자 (아직기가) 王仁이라는 사람이 뛰어나다고 대답하였으므로 상모야군의 조상 황전별 과 무별을 백제에 파견하여 王仁을 불러들였다. 고 적고 있다. 36) 和邇吉師는 조상이다 : 日本書紀 應神 16년 춘2월조에서는 王仁이 書首 등의 조상이라고 적고 있다. 37) 韓鍛 : 倭鍛에 대한 말로 한반도식의 冶匠을 가리킴. 38) 卓素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39) 吳服 : 吳의 직공. 日本書紀 應神 14년 춘2월조에서는 백제왕이 의복을 바느질하는 여자를 바 쳤는데 眞毛津이라고 하며 지금 來木衣縫의 시조다. 라고 적고 있다. 40) 西素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41) 秦造의 조상 : 新撰姓氏錄 左京 諸蕃 漢조에 의하면 秦造의 조상은 融通王이다. 融通王은 일명 弓月君이라고 하는데, 日本書紀 應神 14년 시세조에 의하면 弓月君은 백제에서 來歸하였다고 한다. 그는 왜국의 應神천황에게 자신의 나라의 120縣의 사람들을 이끌고 歸化 하고자 하였으나 신라인이 이를 방해하여 모두 加羅國에 머물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應神천황은 葛城襲津彦을 파견하여 가라에서 데려오도록 하였으나, 3년이 지나도 襲津彦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日本 書紀 應神 16년 8월조에서는 신라가 방해하여 襲津彦이 돌아오지 못 하고 있다고 생각한 應神천 황이 平群木 宿 와 的戶田宿 에게 정예병사를 주어 加羅에 파견하였더니 신라왕이 두려워서 그 죄를 자복하였으므로 平群木 宿 와 的戶田宿 가 弓月君의 백성들을 이끌고 葛城襲津彦과 함께 왜국으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42) 漢直의 조상 : 日本書紀 應神 20년 秋9월조에 倭漢直의 조상 阿知使主와 그 아들 都加使主가 자신의 무리 17縣의 사람을 이끌고 來歸하였다. 고 적혀있어 漢直의 조상은 阿知使主임을 알 수 있다. 43) 須須許理 : 新撰姓氏錄 右京 皇別 下 酒部公조에 大 천황대에 韓國에서 온 兄曾曾保利와

18 노래하시고 외출하셨을 때에 지팡이로 大坂(오오사카)44)의 길의 큰 돌을 치시자, 그 돌이 도망쳤다. 그래서 속담에 단단한 돌이라도 술 취한 사람을 만나면 도망간다. 라고 한다. 김은숙(한국교원대학교) 日本書紀 弟曾曾保利 두 사람이 있었는데, 천황이 어떤 재주가 있는지 묻자 술을 만드는 재주가 있다고 말 하였으므로 술을 만들도록 하였다. 고 적혀있다. 大 천황은 仁德천황이다. 44) 大坂 : 大和에서 河內쪽으로 넘어가는 고개.

日本書紀 21 日 本 書 紀 神代부터 持統天皇 11년(697)까지를 서술한 편년체 사서이다. 天武천황대부터 역사서 편찬사 업이 시작되어 持統 文武 元明천황을 거치며 계속 추진되어 元正천황대인 720년에 최종적으 로 완성되었다. 720년의 책임자는 舍人親王으로 역사서가 완성된 후 元正천황에게 奏上하였다. 전체 30권, 系圖 1권이지만, 系圖는 전해지지 않는다. 권1 2는 神代卷이며, 권3~권30은 神武 천황부터 持統천황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하였다. 일본고대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사서이 며, 한국에 관한 많은 기사가 수록되어 있어 한국 고대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新訂增補) 國史大系에 수록되었다. 권9 氣長足姬尊 神功皇后1) 攝政前紀 仲哀天皇2) 9년(200) 동10월 己亥朔 辛丑 겨울 10월 己亥朔 辛丑(3일). 和珥津(와니노츠)3)에서 출발하였다. 이 때 風神이 바람을 1) 神功皇后 : 日本書紀 에 의하면 仲哀天皇의 황후로서 이름은 氣長足姬尊(오키나가타라시히메노미 코토)라고 한다. 아버지는 開化天皇의 증손 氣長宿 王(오키나가노스쿠네노오오키미), 어머니는 葛 城高 姬(카즈라기노타카누카히메)이라고 전한다( 古事記 에는 아버지가 開化天皇의 현손이며, 어 머니는 신라의 왕자 天之日矛의 5세손이라고 한다). 仲哀天皇과 함께 큐슈 남부의 熊襲(쿠마소) 원 정을 나갔지만, 仲哀는 원정 도중에 갑자기 죽는다. 신공황후는 神託에 따라 新羅征討軍를 일으켜 만삭의 몸으로 몸소 바다를 건너 신라를 복속시키고 돌아오는 도중에 筑紫(츠쿠시)에서 應神天皇을 낳았다고 한다. 이후 신공황후는 69년간 재위하지 않으면서 섭정하는데, 그의 일대기인 神功紀에 는 설화적인 요소가 매우 많다. 그러나 日本書紀 神功紀의 한반도 관계 기사의 경우 백제왕력을 기준으로 120년을 하향 조정해서(那珂通世, 1958,`上世年紀考a, 外交繹史, 岩波書店) 보면 역사 적 사실로 볼 수 있는 내용도 있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리고 神功紀에는 38 40 43 년조 세 곳에 걸쳐 분주의 형태로 三國志 卷30 魏書東夷傳 倭人條의 卑彌呼 기사와 66년조에 `晉起居注a의 기년기사 등 중국측 사서를 인용하고 있다. 3세기에 비미호가 魏에 사신을 보내어 조 공했다는 倭人條의 기사를 神功紀에 분주로서 인용하였다는 것은 日本書紀 편찬자가 신공황후라 는 전설적 인물을 卑彌呼로 간주하였다는 증거이다. 2) 仲哀天皇 : 古事記 日本書紀 의 계보상 14대 천황. 日本書紀 에 의하면 전설상의 영웅인 日 本武尊(야마토타케루노미코토)의 둘째 아들로서 이름은 足仲彦(타라시나카츠히코)이고, 어머니는 兩道入姬命(후타치노이리노미코토)이다. 熊襲을 정토하기 위해 神功皇后와 筑紫까지 갔지만, 神託 을 무시했기 때문에 급사했다고 한다. 3) 和珥津 : 對馬島의 북단에 있는 上縣(카미아가타)郡 上對馬(카미츠시마)町의 鰐浦(우니우라)를 가리킨다.

22 日本書紀 23 일으키고, 海神은 파도를 일으켰다. 바다 속의 큰 물고기가 모두 떠올라 배를 떠받쳤다.4) 하였다. 즉시 백기를 들어 스스로 항복하고 흰 줄로 손을 뒤로 하여 묶었다. 圖籍7)을 봉 큰 바람이 순풍이 되어 불고 범선이 파도를 타니 노를 젓는 수고로움도 없이 곧 신라에 하고 王船 앞에서 항복하였다. 그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지금 이후부터 길이 天地와 더불 이르렀다. 그 때 배를 따르던 파도가 멀리 나라 안에까지 밀려들어갔다. 이 일로 인해서 어 飼部(미마카이)8)가 되겠습니다. 배의 키가 마를 사이 없이 해마다 말빗과 채찍을 바치 天神地祇가 모두 도와준 것을 알았다. 이에 신라왕은 전전긍긍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겠습니다. 또 바다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꺼리지 않고 해마다 남녀의 여러 사람을 불러 모아서 신라의 건국 이래 일찍이 바닷물이 나라를 침범했다는 것은 듣 라고 말하였다. 거듭 맹세하여 동쪽에서 떠오른 해가 다시 서쪽에 調9)를 바치겠습니다. 지 못했다. 혹시 천운이 다하여 나라가 바다로 되는 것은 아닌가? 라고 말하였다. 그 말 서 떠오르는 일이 없는 한, 또 阿利那禮河(아리나레가와)10)가 역류하고 강의 돌이 하늘로 이 끝나기도 전에 軍船이 바다에 가득하여 깃발이 햇빛에 빛나고 북과 피리의 소리가 산 올라가 별이 되는 일이 없는 한, 春秋의 調를 거르거나 게을리 하여 빗과 채찍의 공물을 천에 울렸다. 이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던 신라왕은 뜻밖의 군사들이 나타나 장차 신라를 바치지 않는다면 天神地祇와 함께 벌을 주십시오. 라고 말하였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신 멸망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라 여기고 두려워 전의를 상실하였다.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라왕을 죽이십시오. 라고 말했다. 이에 황후는 처음에 신의 가르침대로 장차 金銀의 나 내가 듣자하니 동쪽에 神國이 있는데 日本5)이라고 한다. 또한 聖王인 天皇6)이 있다고 한 라를 얻을 것이다. 또한 전군에 호령하여 스스로 항복하여 오는 자는 죽이지 말라. 라고 다. 틀림없이 그 나라의 神兵일 것이다. 어찌 군사를 일으켜 막을 수 있겠는가? 라고 말 말한 바 있다. 지금 이미 財國을 얻었다. 또 사람들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죽이는 것은 좋 지 않다. 라고 말하였다. 이에 신라왕의 결박을 풀고 飼部로 삼았다. 마침내 그 나라 안 4) 이 때 도왔다 : 古事記 仲哀段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5) 日本 : 倭 또는 倭國에서 바뀐 국호. 日本書紀 에는 倭와 日本이 혼용되어 나온다. 일본 국내 사료 에서 대외적으로 日本이라는 국호을 정식으로 사용한 것이 확실한 기사는 續日本紀 卷2 大寶 2 年(702) 乙酉條이다. 이 기사에 의하면 당에 파견된 粟田朝臣眞人이 자신이 일본국의 사신이라고 주장하자, 당 황제는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 질문하였다고 한다. 중국측 사료의 경우는 舊唐書 의 卷6 本紀 則天皇后 大足 2年(702)條, 同 卷199 上 列傳 倭國條에서부터 나오고, 三國史記 에는 卷6 新羅本紀 文武王 10年(670) 12月條에 日本이란 국호가 처음 보인다. 이러한 日本이란 국호의 성립시기에 대해서는 일찍이 推古天皇이 隋의 황제에게 보낸 國書에 日出處天子 隋書 卷81 ( 列 傳 倭國條)라는 기사를 근거로 日本이라는 것은 중국의 동방에 있다는 의미로 推古朝에 성립되었 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최근에는 天武末에서 持統初에 걸쳐(7세기 말에서 8세기 초) 성립하여 持統 3年(689) 淨御原令에 제도화된 후, 신라나 당나라에도 전해졌다고 하는 견해(岩橋 小彌太, 1970, 日本の國號, 吉川弘文館 ; 大和岩雄, 1996, `日本a國はいつできたか, 大和書 房)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6) 天皇 : 倭王 倭國王, 또는 大王(熊本縣 江田船山古墳出土 大刀銘에 보인다)에서 바뀐 고대 일본 군주의 칭호. 그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일찌기 推古朝의 法隆寺 樂師象光背銘과 孝德朝의`元興 寺塔露盤銘a에 天皇 이 새겨진 것을 근거로 推古朝 즈음에 성립되었다는 견해(津田左右吉, 1963,`天皇考a, 津田左右吉全集 3, 岩波書店)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 동향에 의하면 天武紀 이전의 日本書紀 의 기록은 물론 금석문 등에 보이는 천황호는 천무 지통 이전으로 보 기는 어렵다는 것이 대세이다. 현재는 1983년 飛鳥京유적에서 출토된 皇子 大津皇 목간과 1997년 天皇聚 弘寅 이라고 적힌 飛鳥池출토 목간을 근거로 日本 국호와 함께 7세기말 천무 조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東野治之, 1980,` 大王 號の成立と 天皇 號a, 으로 들어가 귀중한 보물 창고를 봉인하고 圖籍과 문서를 거두었다. 그리고 황후가 가지 ゼミナ一ル日本古代史 下, 光文社 ; 森公章, 1983,`天皇號の成立と意義a, 古代史硏究の最前 線 1, 雄山閣出版 ; 增尾伸一郞, 2001,`日本書紀の編纂と天皇號の成立a, 東アジアの古代文 化 106, 大和書房). 7) 圖籍 : 지도와 호적. 신라왕이 이것을 봉하였다는 것은 토지와 인민을 자유롭게 부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결국 자국의 토지와 인민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겠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8) 飼部 : 율령제하에서 말의 사육을 담당하는 곳을 말한다. 令集解 職員令 左馬寮條에 頭一人. 掌 左閑馬調習. 養飼. 供御乘具. 配給穀草. 及飼部戶口名籍事 라고 나온다. 신라가 왜국의 飼部가 되 겠다는 것은 古事記 仲哀段에 신라왕이 御馬甘 이 되겠다는 표현 및 日本書紀 雄略 8年 2月 條에 신라인을 典馬 로 삼았다는 표현과 함께 앞으로 일본에 복종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러한 내용은 한반도제국에서 말과 마구, 그리고 말의 사육법 등이 왜국에 전래된 사실과 신공황후 의 신라정벌이라는 전설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허구로 볼 수 있다. 9) 男女의 調 : 日本書紀 崇神 12年 9월조에 보이는 此謂男之 調. 女子手末調也 를 가리킨다. 남 자가 수렵을 통해서 얻는 고기와 피혁, 그리고 여자가 손수 짜내는 명주와 무명 등의 조세를 일컫 는다. 여기서 調라는 용어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이 외교 교섭시에 보낸 선물을 나타내는 일본 서기 의 일본 중심적인 독특한 표현이다. 주변의 국가들을 蕃國 으로 놓고 그 번국의 공물의 의미 로서 율령시대 일본국내의 세제용어인 調로 표기한 것이다. 10) 阿利那禮河 : 신라 경주의 북부를 흐르는 北川(閼川:ar-nari) (三品彰英, 1962, 日本書紀朝鮮關 係記事考證 上, 吉川弘文館, 63쪽).

24 日本書紀 25 고 있던 矛를 신라의 王門 앞에 세우고 후세의 표시로 삼았다.11) 그 창은 지금도 신라의 고 했다. 이로써 內官家17)로 정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三韓18)이다. 황후는 신라에서 돌아 王門 앞에 세워져 있다. 신라왕 婆沙寐錦12)은 즉시 微叱己知波珍干岐13)를 인질로 삼아 金 왔다. 銀彩色 및 綾羅 絹을 가지고 80척의 배에 실어 官軍을 따라가게 하였다. 이로써 신라왕 은 항상 80척의 調를 日本國에 바치게 되었는데14) 이것이 그 연유이다. 이에 高麗15)와 百 濟 두 나라의 왕은 신라가 圖籍을 거두어 日本國에 항복하였다는 말을 듣고 몰래 그 군세 를 엿보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營外로 나와서 머리를 神功皇后 46년(246)19) 춘3월 乙亥朔 봄 3월 乙亥朔(1일). 斯摩宿 (시마노스쿠네)20)를 卓淳國21)에 파견하였다. <*斯摩宿 는 라 조아리며 지금 이후부터는 오래도록 西蕃16)이라 칭하고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 11) 그리고 삼았다 : 杖을 세운다는 것은 토지 점거를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신공황후가 신라 의 왕문 앞에 자신의 杖을 세웠다는 것은 신라를 정복했다는 의미이다. 12) 婆沙寐錦 : 三國史記 卷1 신라본기에 의하면 婆沙는 제5대 婆娑尼師今으로서 A.D.80년에서 122년까지 재위한 왕이다. 그런데 寐錦이란 용어는 한국측 사료에서 三國史記 와 三國遺事 등 에는 보이지 않으며`廣開土王陵碑a `中原高句麗碑a `蔚珍鳳坪碑a `智證大師寂照塔碑a등의 금석문에만 보인다. 이에 대해서 寐錦은 尼師今과 동의어라는 설(鮎貝房之進, 1931,`日本書紀朝 鮮地名攷a, 雜攷 7)과 麻立干의 異表記란 설(이병도, 1979,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이 제기 되었는데,`中原高句麗碑a `蔚珍鳳坪碑a가 신라 마립간 시기에 세워진 것임이 판명됨으로써 현 재 寐錦을 麻立干으로 보는 데는 거의 이견이 없다. 이렇게 볼 때 婆沙寐錦이란 표현은 日本書 紀 의 오기로 보아야 한다. 13) 微叱己知波珍干岐 : 日本書紀 神功 5年 春3月條에는 微叱許智伐旱으로 나온다. 三國史記 에 의하면 微叱己知波珍干岐는 신라 15대 奈勿王의 아들 未斯欣을 가리킨다. 三國遺事 에는 美海 未叱喜라고도 한다. 波珍干岐는 신라 17관등 중 제4위에 해당하는 波珍飡이고, 知 혹은 智는 신 라의 인명어미에 붙는 존칭적 의미이다. 微叱己는 未斯欣과 음이 통하는 동일인물이다. 이 未斯欣 은 三國史記 에는 402년, 三國遺事 에는 391년에 왜국에 파견되었다고 나온다. 본조에서는 波 沙尼師今과 동시대의 인물로 기술되어 있는데 양자의 생존 시기가 무려 300여 년 정도가 차이가 난다. 동시대인이 될 수 없는 이 인물들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日本書紀 에 채록되었는지는 명 확히 알 수 없지만, 日本書紀 편찬자의 손에는 이들에 관한 기록, 즉 신라측 전승기록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두개의 다른 전승 중에서 婆沙寐錦에 관한 전승은 실제 왜국에 체재를 경험 했던 微叱己知波珍干岐 기록으로 흡수된 다음, 신공황후의 신라정벌의 이야기에 부회되어 나타난 것으로 추측된다(연민수, 1996,`일본서기 신공기(神功紀)의 사료비판a, 日本學 15). 14) 이로써 되었는데 : 日本書紀 仁德 17年 9월조에 於是新羅人懼之乃貢獻. 調絹一千四百六 十疋及種種雜物. 幷八十 과 允恭 42年 正月條에 於是新羅王聞天皇旣崩. 驚愁之. 貢上調船八 十 及種種樂人八十 라는 비슷한 기사가 보인다. 15) 高麗 : 日本書紀 에 보이는 高麗는 모두 고구려를 일컫는다. 雄略 20年條에는 으로 나오기 도 한다. 16) 西蕃 : 서쪽의 蕃國 이라는 의미. 日本書紀 에는 新羅를 高句麗 百濟 任那와 함께 일본에 조 공해 오는 蕃國 이며, 천황의 內官家 로 취급하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唐의 율령을 모방한 결과로 日本書紀 편찬시의 율령국가 지배층의 대외인식에 의해 규정된 표현이다. 令集解 公 式令 詔書式條에 인용된 古記의 御宇日本天皇詔旨. 對隣國及諸蕃國而詔之辭. 問隣國與蕃國何其 別. 答隣國者大唐. 蕃國者新羅也 라는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은 율령제하에서 唐을 隣 國, 신라를 蕃國으로 규정하고 있다. 17) 內官家 : 古事記 와 日本書紀 에서 백제 신라 임나 등의 한반도 제국을 일본의 朝貢國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표현이다. 古事記 仲哀段에는 백제를 渡屯家, 日本書紀 欽明紀에는 신라를 內 官家屯倉, 繼體 欽明紀에는 任那를 任那官家로 표현하기도 한다. 官家는 미야케(みやけ) 로 읽 으며 屯倉(또는 屯家御宅 三宅) 이라는 다른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屯倉 이란 원래 大王 또 는 야마토정권이 왜국내의 諸國을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건물(官舍)을 의미한다. 18) 三韓 : 원래 三國志 卷30 魏書 東夷傳에 보이는 馬韓 辰韓 弁韓의 호칭이다. 그러나 日本 書紀 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위의 三韓과 관련된 기사는 신공황 후가 신라를 정벌하자 고구려와 백제도 스스로 일본에 복속하게 되었다는 이른바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기사이다. 이 기사에 대해서는 津田左右吉에 의해 사건의 허구성 및 문제점이 지적된 이래(1924, 古事記及び日本書紀の硏究, 岩波書店), 신화학적으로 해석하거나(黃浿江, 1996, 日本神話의 硏究, 지식산업사), 推古 齊明(皇極) 持統 3명의 女帝를 모델로 하여 꾸민 이야 기로 보기도 한다(直木孝次郞, 1988,`神功皇后傳說の成立a, 古代日本と朝鮮 中國, 講談社 學術文庫). 19) 神功 46년 : 日本書紀 기년으로 246년에 해당되지만, 백제 왕력 기사에 기초해 2干支로 내려 연대를 수정하면 366년으로 근초고왕 21년에 해당된다. 20) 斯摩宿 : 같은 기사 중에 志摩宿 라고도 나오는데 어떤 인물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宿 는 舊姓이 連(무라지)으로 天武 13년(684) 10월에 제정된 8色의 姓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서기 에 의하면 이 해에 大伴(오오토모) 佐伯(사에키) 등 50氏에게 사여되었는데 대부분이 神別出自 씨 족들이다. 8세기 말 이후에는 도래인에게도 사여되었다. 종래 일본학계에서는 斯摩를 일본 和歌 山(와카야마)縣 橋本(하시모토)市 隅田八幡(스다하치만)宮에 소장되어 있는 人物畵像鏡의 명문에

26 어떤 姓22)을 가진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이때 卓淳王 末錦旱岐23)가 斯摩宿 에게 甲子 日本書紀 27 年24) 7月中25)에 백제인 久 彌州流26) 莫古27) 세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백제왕은 東 方에 일본이라는 貴國28)이 있다는 말을 듣고 臣들을 보내 그 貴國에 조공하도록 하였습니 보이는 斯麻 에 비정하기도 했으나, 同 鏡名의 冒頭에 나와 있는 癸未年은 443년 혹은 503년으 로 추정되어 神功紀의 366년(246+120)과는 커다란 연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에 斯摩를 출신 지명으로 이해하고 宿 를 姓名이 아닌 氏名일 것으로 추정한 연구(李基東, 1990,`百濟의 勃興 과 對倭國關係의 成立a, 古代韓日文化交流硏究 )가 있다. 日本書紀 에는 斯摩가 志摩 로도 표 기되고 있는데 이것을 三國志 倭人傳에 보이는 伊都國의 한 영역(현 큐슈 福岡市 서쪽 지역)으 로 비정하고 斯摩宿 를 이 伊都國 출신인물로 추정하였다. 북큐슈의 伊都國은 366년 가야 지방 에 斯摩宿 를 파견하여 백제와의 통교를 시도하였다고 한다. 21) 卓淳國 : 가야제국의 하나. 日本書紀 에는 卓淳國에 대한 전반적인 기록은 보이지 않고 대외관계 나 멸망 등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만 보인다. 神功 46年 春3月條에 백제와 왜의 통교를 중개한 것 으로 기술되면서 처음 등장한다. 이어 신공 49년 춘3월조에는 왜의 소위 加羅 7國 평정 의 거점 이 되고 있다. 이후 탁순국은 290여 년간 일본서기 에 등장하지 않다가 繼體 欽明紀의 남부가 야 3국 멸망 기사에서 다시 보인다. 三國史記 나 三國遺事 에는 그 국명조차 확인할 수 없다. 卓淳國의 위치에 대해서는 漆原(津田左右吉, 1913,`任那疆域考a, 朝鮮史地理硏究 1), 昌原(今 西龍, 1919,`加羅疆域考a, 史林 4~34 ; 김정학, 1983,`加耶史의 연구a, 史學硏究 37 ; 김 태식, 1988,`6세기 전반 加耶南部諸國의 소멸 과정 고찰a, 韓國古代史硏究 1), 大邱(鮎貝房之 進, 1931, 앞의 글 ; 千寬宇, 1977,`復元加耶史a上, 文學과 知性 28 ; 주보돈, 1982,`加耶滅 亡問題에 대한 일고찰-新羅의 膨脹과 관련하여a, 慶北史學 4 ; 白承玉, 1995,` 卓淳 의 位置 와 性格- 日本書紀 관계기사 검토를 중심으로-a, 釜大史學 19 ; 盧重國, 2006,`4세기 加耶 諸國과 百濟의 관계a, 釜大史學 30) 등으로 비정되고 있다. 22) 姓(카바네) : 고대 일본에서 氏族의 직업과 등급을 표시한 칭호. 신공 46년 춘3월조에서는 姓이 氏(우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고대 일본의 氏는 정치적 사회적 지위에 따라 대왕 천황이 하 사하는 혈연 또는 擬制的 혈연집단으로서의 동족집단에 대한 칭호이다. 각각의 씨에는 氏上이 있 어서 씨집단의 재산 및 구성원을 관리하고 氏神에 대한 재산을 담당한다. 각 씨족이 어느 계통에 속하는가를 결정하는 근거는 각 씨족의 선조전승을 기록한 家記類이었다. 한편, 姓에는 臣(오 미) 君(키미) 連(무라지) 直(아타이) 造(미야츠코) 史(후히토) 首(오비토) 등이 있었는데 각각의 씨에 따라 다르게 사여되었다. 황실 계통의 皇別씨족에게는 臣 君, 天神 계통인 神別씨 족에게는 連, 도래계 씨족의 경우에는 吉士(키시) 史(후히토)의 姓이 사여되었다. 天武 13년 (684)에는 8色姓의 제정에 의해 眞人(마히토) 朝臣(아손) 宿 (스쿠네) 忌寸(이미키) 道師 (미치노시) 臣 連 稻置(이나기) 8종류의 姓으로 정리 통합하고자 하였으나 실제로 사여된 것 은 忌寸까지의 상위 4성에 그쳤고 그 이외에는 舊姓이 그대로 존속되었다. 이러한 고대일본의 氏 姓제도는 6세기 전반에 성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3) 末錦旱岐 : 末錦은 탁순왕의 이름인지, 아니면 신라왕에 대한 호칭 중의 하나인 寐錦과 같은 어원 을 갖는 것인지 단정하기 어렵다. 旱岐는 日本書紀 신공 62년조의 加羅國王己本旱岐 라는 표 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加耶諸國 수장의 호칭이다. 末錦이 신라왕에 대한 호칭이라면 末錦 다. 그래서 길을 찾다가 이 땅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臣들에게 길을 가르쳐 통할 수 있게 해 준다면 우리 왕은 반드시 군왕에게 깊이 감사할 것입니다. 라고 고하였다. 그 때 久 등에게 본디 동쪽에 貴國이 있다는 것을 들은 바 있지만, 아직 왕래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길을 알지 못한다. 다만 바닷길이 멀고 파도가 거칠어서 큰 배를 타고서야 겨우 왕래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路津이 있다고 해도 어찌 능히 도달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였 다. 이에 久 등이 그러면 지금 당장은 건너갈 수 없겠습니다. 다시 돌아가 선박을 준 비한 다음에 왕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 말하였다. 또한 만약 貴國의 사신이 오면 반 旱岐는 호칭만 두개 나열한 것이 되어 부자연스럽지만, 신라의 경우에도 寐錦王의 용례(牟卽智寐 錦王`蔚珍鳳坪碑a)가 있으므로 일단 末錦은 寐錦과 같은 뜻을 가진 호칭으로 볼 수도 있다. 24) 甲子年 : 神功 46年이 丙寅年이므로 甲子年은 神功 44年이 된다. 日本書紀 기년으로는 244년 이지만, 백제 왕력 기사와 비교를 통해 2간지를 내리면 364년이 된다. 25) 7月中 : 中 은 중순의 의미가 아니라 시간을 나타내는 조사로서 7월에 라는 의미. 이는 蔚州川 前里書石이나`中原高句麗碑a `丹陽赤城碑a등 한국 금석문에도 자주 사용된 표현이다. 26) 久 彌州流 : 두 인물의 생몰연대 등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久 는 日本書紀 神功 46年부터 52年까지 일관된 활동을 보여주는 인물로서 당시 백제와 왜의 통교과정에서 왜측의 千 熊長彦과 함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久 의 久 는 日本書紀 에서 久爾辛 久禮波 久禮志 久遲布禮 久禮斯己母 久禮牟羅城 久麻那利 久嵯旱岐 久貴 등과 같이 모 두 한반도의 인명 지명을 표기하는 데 사용되었다. 彌州流의 彌도 日本書紀 에서 枕彌多禮 布 彌支 彌麻沙 印支彌 彌至己知奈末 등과 같이 그 용례가 모두 한반도계 인명 지명에서 주로 나타난다(木下禮仁, 1993, 日本書紀と古代朝鮮, 書房, 34~50쪽). 27) 莫古 : 莫古解. 三國史記 卷24 百濟本紀에 의하면 莫古解는 근초고왕 24년(369)에 태자 近仇 首가 고구려와 싸울 당시 헌책한 인물로 나온다. 28) 貴國 : 日本을 가리킨다. 津田左右吉은 貴國을 日本書紀 편찬자가 윤색한 말로 보았으나(1921, `百濟に關する日本書紀の記載a, 滿鮮地理歷史硏究 8), 이후`百濟記a에서 왜를 貴國이라고 적 은 것에 주목한 三品彰英은 귀국을 2인칭적 호칭으로 보고 이런 호칭이 사용된 것은`百濟記a가 왜를 의식하여 편찬된 사서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하였다(1962, 앞의 책, 121쪽). 한편 이러 한 주장에 대해 貴國은 상대국을 부르는 존칭이 아니라 비천한 나라에 대한 존귀한 나라라는 의 미, 즉 蕃國에 대한 貴國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貴國은 蕃國관념이 나타나는 7세기 말 이후 일본 에서 쓰인 말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栗原朋信, 1978,` 書紀 神功 應神紀の貴國の分析から みた日本と百濟の關係a, 古代東アジア史論集 下 ; 山尾幸久, 1978, 日本古代王權形成史論, 岩波書店, 189~191쪽).

28 日本書紀 29 드시 우리나라에 알려주십시오. 라고 당부하고 이내 돌아갔다. 고 하였다. 斯摩宿 은 다. 그러나 이제 사자에게 부탁하고 공물을 계속해서 바치겠다. 라고 말하였다. 이에 爾 人인 爾波移(니하야)29와 卓淳人 過古 두 명을 백제국에 파견하여 그 왕을 위로 波移는 그 일을 받들고 돌아가서 志摩宿 에 보고하였다. 그리고 志摩宿 은 卓淳으로부 곧바로 30) 하였다. 그 때 백제의 肖古王 은 매우 기뻐하며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에 五色綵絹 각 31) 터 돌아왔다. 32) 한 필과 角弓箭, 그리고 鐵鋌 40매를 爾波移에게 선물하였다. 게다가 다시 보물 창고 를 열어서 각종 진귀한 보물들을 보여주며,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진귀한 보물들이 많 다. 貴國에 조공하고자 하여도 길을 알지 못하여 뜻은 있는데 생각대로 되지 않고 있었 神功皇后 47년(247) 춘4월 봄 4월. 백제왕은 久 彌州流 莫古를 보내어 조공하도록 하였다. 그 때 신라국의 調 29) 爾波移 : 이곳에만 보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30) 肖古王 : 백제의 제13대왕 近肖古王(재위 346~375). 三國史記 卷23 百濟本紀에는 제5대 肖古 王(166~214)도 보이나 日本書紀 의 초고왕은 제13대왕인 근초고왕을 가리킨다. 日本書紀 에 는 肖古王 이외에 速古王으로, 古事記 應神段에는 照古王으로 나오기도 한다. 續日本紀 卷40 延曆 9年(790) 百濟王仁貞의 상표문에는 近肖古王으로 나타나고, 新撰姓氏錄 에는 肖古王 速 古王 速古大王 近速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31) 角弓箭 : 쇠뿔 혹은 양뿔 따위로 꾸민 활과 화살. 32) 鐵鋌 : 무기나 주술구의 원료로 사용한 철판 또는 철편. 三國志 卷30 魏書 東夷傳 弁辰條에 의 하면 3세기에서 4세기에 걸쳐 왜는 가야제국의 철을 수입하였다(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고 한 다. 이와 관련하여 4~5세기대에 이르면 한반도 남부에서 鐵鋌의 생산이 크게 늘어나면서 철 소 재 보급이 본격화한다. 鐵鋌의 용도에 대해서는 철 소재 이외에 화폐로서의 기능이 강조되기도 하지만(林孝澤, 1985,`副葬鐵鋌考a, 東義史學 2 ; 宋桂鉉, 1995,`洛東江 下流流域의 古代 鐵 生産a, 加耶諸國의 鐵, 인제대 가야문화연구소), 이 시기 新羅 加耶 지역 고분에서 널리 출토 되는 다량의 철정과 망치 집게 등의 철 鍛冶具는 바로 철정의 보급이 철소재 보급의 보편적인 형태로 정착되었음을 말해준다. 특히 백제 근초고왕이 鐵鋌 40매를 왜의 사신에게 주었다는 위의 기록은 4세기 즈음에는 백제지역에서도 철 자원개발과 철 생산이 독자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뜻한다(李賢惠, 1995,`鐵器普及과 政治勢力의 성장a, 加耶諸國의 鐵, 인제대 가야문화연구 소). 충북 진천 石帳里 철 생산유적의 발굴 조사에 의해 늦어도 4세기 초에는 백제지역에서도 대 량의 철(小形鐵鋌)이 생산되었음이 밝혀졌다(國立淸州博物館, 1994, 鎭川石帳里 鐵生産遺跡發 掘調査 ). 5세기 이후가 되면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철정의 크기와 무게가 일정한 범위 내에서 규 격화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安在晧, 1990,`鐵鋌에 대하여a, 東萊福泉洞古墳群 Ⅱ). 한편 일본열도 내에서 철정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쳐 큐슈에서 關東지방까지 넓은 지역에서 출 토되고 있다. 특히 近畿지방에 집중되고 있는데 大和(야마토) 河內(카우치)를 중심으로 5세기대 의 고분에서 길이 15~40cm의 鐵鋌이 다수 출토되었다는 보고가 있다(東潮, 1999, 古代東アジ アの鐵と倭, 溪水社, 207~212쪽). 일본열도에서 철의 생산과 제철이 시작되는 시기는 6세기 이 후의 일로서 그 이전까지는 한반도의 철정과 같은 수입 원료에 의존하고 있었다(大澤正己, 1984, `冶金學的見地からみた古代製鐵a, 古代を考える 36). 使도 久 와 함께 왔다. 이에 皇太后(神功皇后)와 태자 譽田別尊(호무타와케노미코토)33) 는 크게 기뻐하며, 先王(仲哀天皇)이 바라고 계셨던 나라 사람이 지금 來朝하였다. 천황 을 만나지 못한 것이 참으로 슬픈 일이다. 라고 말하자 군신은 모두 슬퍼서 눈물을 흘리 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리고는 두 나라의 공물을 檢校34)하였다. 이에 신라의 공물은 진 귀한 것이 실로 많았지만 백제의 공물은 적고 값싼 것으로 좋지 않았다. 그래서 久 등 에게 묻기를, 백제의 공물이 신라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라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신들은 길을 잃어 沙比新羅35)에 이르렀는데, 신라인이 저희들을 붙잡아 囹 圄36)에 감금하였습니다. 석 달이 지나자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久 등은 하늘을 향 해 저주를 하였습니다. 신라인은 그 저주를 두려워하여 죽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공물을 빼앗아 자기 나라의 공물로 대신하고 신라의 천한 물건으로 신의 나라의 공물과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신들에게 만약 이 사건을 누설하면 돌아오는 날에 너희들 을 죽이겠다. 고 하였습니다. 久 등은 두려워서 이를 따랐을 뿐입니다. 그래서 가까스 37) 로 天朝 에 올 수 있었습니다. 그 때 皇太后 譽田別尊는 신라의 사자를 꾸짖고, 이에 33) 譽田別尊 : 應神天皇. 日本書紀 神功 3年 正月條에는 譽田別皇子로 나온다. 여기서 別(와케)은 獲居 和氣라고도 하며, 5세기 중반 이전에 왜국의 大王 및 유력수장의 이름에 붙는 존칭으로 사 용되었다. 5세기 후반 이후는 君(키미) 臣(오미) 등의 姓으로 바뀌었다. 34) 檢校 : 공물의 목록과 실물의 수가 맞는지 점검하는 일. 35) 沙比新羅 : 沙比(사히)를 거점으로 하는 신라라는 의미. 沙比는 일본서기 신공 5년 춘3월조에 海 의 와 같은 음으로 良(현재 경남 梁山) 지역을 가리킨다(三品彰英, 1962, 앞의 책, 111~112 쪽). 良 즉 양산은 신라의 가야진출의 거점이었고, 고대 일본과 신라가 자주 접촉하던 지역이었다. 36) 囹圄 : 감옥. 禮記 月令 仲春의 令有司省囹圄 의 疏에 囹牢也. 圄止也, 出入止所以. 皆罪人舍 所也 라고 나온다. 37) 天朝 : 倭國을 가리킨다. 日本書紀 편찬단계에서 윤색된 표현이다.

30 日本書紀 31 天神에게 누구를 백제에 파견하여 장차 사건의 진위를 검사하도록 할 것이며, 또한 누구 那那加比 (치쿠마나나카히쿠)43)라고 하였는데 무릇 이 사람인가?> 이에 千熊長彦을 신 를 신라에 보내어 그 죄를 물으면 좋겠습니까? 라고 빌었다. 이에 천신이 武內宿 (타케 라에 파견하여 백제의 헌상물을 함부로 바꾸어간 것을 꾸짖었다. 38) 우치노스쿠네) 로 하여금 그 일을 의논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千熊長彦(치쿠마나가히 라고 말하였다. <*千熊長彦은 코)39)을 사자로 삼으면 마땅히 원하는 바대로 될 것이다. 명확히 그 성을 모르는 사람이다. 一云에 武藏國(무사시노쿠니)40)의 사람이며 지금은 額 42) 에는 職麻 田部槻本首(누카타베노츠키노모토노오비토)41) 등의 시조라고 한다.`百濟記a 38) 武內宿 : 建內宿 라고도 하며 전승상의 인물. 古事記 에서는 제8대 孝元天皇의 孫, 日本書 紀 에서는 孝元天皇의 증손으로 나온다. 孝元天皇은 缺史八代에 해당되는 천황으로 7세기 후반 에 일본의 역사를 늘이기 위해 조작하여 삽입된 8명의 천황 가운데 한 사람으로 실존하지 않았다 (直木孝次郞, 1964,`應神王朝論序說a, 日本古代の氏族と天皇 ). 이러한 孝元天皇의 자손이라고 하는 武內宿 는 古事記 에서는 제13대 成務부터 제16대 仁德까지, 日本書紀 에서는 제13대 景行부터 仁德까지 장기간에 걸쳐 大臣으로서 천황을 보좌하면서 한반도제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新撰姓氏錄 에 의하면 武內宿 의 후예씨족으로 葛城(카즈라 기) 平群(헤구리) 巨勢(코세) 蘇我(소가)氏 등이 나오는데 모두 皇別씨족이다. 이 가운데 蘇我 氏가 推古朝에 武內宿 전승을 작성하는데 깊이 관여하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塚口義信, 1980,`武內宿 傳說の形成a, 神功皇后傳說の硏究 ; 金恩淑, 1988-a,`倭漢氏의 歸化 傳承 의 基礎的 考察a, 歷史敎育 40). 39) 千熊長彦 : 日本書紀 에 의하면 神功 47年에서 51年에 걸쳐 백제와 왜국의 교섭활동에서 주요 인물로 활약하고 同 49年에는 백제의 支山 古沙山 맹서에 입회하는 왜측의 사자로 나온다. 일본서기 편찬자는 분주에서 千熊長彦의 姓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 하였으나, 一云 을 인용하 여 千熊長彦이 武藏國 사람으로 額田部 槻本首 등의 시조라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百濟記a에서 말하는 職麻那那加比 라는 인물과 같은 인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명확히 알 수 없는 인물이 다. 釋日本紀 권17 秘訓에서 職麻那那加比 의 職의 上古音이 치쿠(千) 이며 比 는 히코 (彦)로 읽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百濟記a의 職麻那那加比 와 일본서기 의 千熊長彦은 동일인 물일 가능성이 크다. 이에 대해서 일본서기 의 편찬자가`百濟記a의 職麻那那加比 라는 인명 을 일본식으로 고쳐 千熊長彦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라는 견해(池內宏, 1970, 日本上代史の一 硏究, 中央公論美術出版, 87~93쪽)와 일본서기 편찬자에게는`百濟記a와는 별로도 千熊長彦 이라는 인명 자료가 있었으며,`百濟記a에는 職麻那那加比, 일본에는 千熊長彦으로 각각 전해 지고 있던 것이 일본서기 편찬자에 의해 서로 연결되었다는 견해(三品彰英, 1962, 앞의 책, 112~114쪽)가 있다. 40) 武藏國 : 현재의 東京都와 埼玉(사이타마)縣 및 神奈川(가나카와)縣의 동부 지역의 옛 국명이다. 41) 額田部槻本首 : 額田部氏의 複姓의 하나. 額田部氏는 額田部(왕궁 운영 담당)를 관장한 伴造(토모 노미야츠코)씨족이다. 新撰姓氏錄 左京神別 下에 額田部湯坐連, 大和國神別에 額田部河田 運 이라는 額田部氏 관련 씨족이 보이는데 모두 天津彦根命의 자손을 칭하고 있다. 允恭天皇에게 이마에 田자형의 털이 나있는 말을 바친 것을 계기로 額田部氏를 사성받았다고 전한다. 槻本氏에 관해서는 日本書紀 天武 朱鳥 원년(686) 6월조에 槻本村主인 勝麻呂에게 連姓을 주었다는 기사 가 보인다. 續日本後紀 에는 近江國에 거주하던 槻本連良棟 등이 後漢 獻帝의 자손임을 칭하는 데 이를 근거로 渡來系 씨족으로 보기도 한다. 42) 百濟記 : 日本書紀 가 한반도 관계 기사를 기술하는데 기본사료로 이용했던 이른바 百濟三書 가 운데 하나. 日本書紀 에는`百濟記a(神功 應神 雄略紀에 5곳) 이외에`百濟新撰a(雄略 武 烈紀에 3곳) `百濟本記a(繼 欽明紀에 18곳)도 인용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일본서기 의 분 주에 그 서명을 명기한 경우만 든 것이고,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기사에서 백제삼서가 인용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문헌으로부터 인용된 기사는 일본의 율령제적인 관념에 의하여 윤색되어 있기는 하지만(일본을 貴國, 조정을 天朝 라고 표현한 것이 단적인 예이다), 4세기에서 6세기 사이의 삼국 및 가야 관계 사실 등을 밝히는데 중요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百 濟記a에 나오는 백제왕으로는 肖古王 阿花王 直支王 蓋鹵王이 있다. 지금까지 연구 성과를 정리하며 보면, 크게 百濟三書가 백제에서 편찬되어 일본에 전해진 사서라는 견해와 백제 사료를 기초로 일본에서 만들어진 사서라는 견해로 나뉘어져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백제에서 편찬되었 다는 설은 다시 일본 반입설(津田左右吉, 1921,`百濟に關する日本書紀の記載a, 滿鮮地理歷史硏 究報告 8 ; 池內宏, 1947, 앞의 글 ; 千寬宇, 1977, 앞의 글)과 백제 헌상설(今西龍, 1936,`百濟 史講話a, 百濟史硏究, 近澤書店 ; 三品彰英, 1962,`百濟記 百濟新撰 百濟本紀についてa, 朝鮮學報 24)로 나눌 수 있다. 일본에서 만들어졌다는 설에는 백제망명인 편찬설(坂本太郞, 1964,`繼體紀の史料批判a, 日本古代史の基礎的硏究 上, 東京大學出版會 ; 丁仲煥, 1973,` 日 本書紀 에 인용된`百濟三書a에 대하여a, 아세아학보 10 ; 山尾幸久, 1978,`百濟三書と日本書 紀a,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5)과 수사국 편찬설(高寬敏, 1993,` 日本書紀 所引`百濟本記aに 關する硏究a, 高句麗 渤海と古代日本, 雄山閣)이 있다. 현재 백제삼서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 은 편찬시기나 편찬주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그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면서 일본서 기 편찬단계에서 윤색 또는 개변되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최근 연구경향은 일본서기 편찬 단계에서 백제삼서를 편집한 주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백제기a는 木羅氏 관 련씨족(山尾幸久, 1978, 앞의 글 ; 李根雨, 1990,`百濟記の主役a, 古代日本と東アジア, 小學 館),`백제신찬a은 琨支관련 씨족 (山尾幸久, 1978, 앞의 글 ; 李根雨, 1994,` 日本書紀 에 인용 된 百濟三書에 관한 연구a,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백제본기는 百濟王氏(山尾幸久, 1983, 日本古代王權形成史論, 岩波書店, 199~200쪽)가 편찬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43) 職麻那那加比 : 주 39) 참조.

32 神功皇后 49년(249) 춘3월44) 봄 3월. 荒田別(아라타와케) 鹿我別(카가와케)45)을 장군으로 임명했다. 그리하여 久 등과 함께 군사를 정돈하여 바다를 건너가 卓淳國에 이르러 신라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그때 누군가가 군사의 수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다시 沙白蓋盧 44) 神功 49年 春3月 : 이 기사는 神功皇后의 한반도 제국에 대한 정토 기사가 실려 있는 만큼 任那 日本府 논의의 출발점이 되는 사료라고 할 수 있다. 근래에는 이 기사의 내용대로 신공황후가 한 반도 제국을 정토하고 그 일부를 백제에게 하사했다는 내용을 사실로 인정하는 연구자는 거의 없 다. 그러나 이 기사를 4세기 후반에 진행된 백제의 활동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 가 제시되고 있다. 神功 49年 春3月條의 소위 가야 7국 평정 기사 에 대한 연구 동향을 살펴보 면 다음과 같다. 먼저 백제 近肖古王대의 백제를 정토의 주체로 보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다시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백제가 근초고왕대 가야제국을 군사적으로 지배했다는 견해(이병 도, 1970,`近肖古王拓境考a, 百濟硏究 1,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 千寬宇, 1977,`復元加耶 史a中, 文學과 知性 29 ; 金鉉球, 1991,` 神功紀 加羅七國 平定記事에 관한 一考察a, 高大 史學會 )와 백제가 남부가야에 대한 교역권을 장악했거나 혹은 공납관계를 형성했다고 보는 견해 (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 一潮閣 ; 이현혜, 1988,`4세기 가야사회의 교역체계의 변 천a, 한국고대사연구 1 ; 이도학, 1995, 百濟古代國家硏究, 一志社 ; 김태식, 1996,`백제의 가야지역 관계사 시고a, 백제의 중앙과 지방, 충남대 백제연구소)이다. 둘째 근초고왕의 일시적 인 군사활동은 인정하지만 영역화한 것은 아니며, 실제로는 5세기 중엽 이후(山尾幸久, 1983, 앞 의 책 ; 이영식, 1995,`百濟의 加耶進出過程a, 韓國古代史論叢 7) 또는 6세기 이후의 사실이 소급 반영되었다는 입장(이근우, 2005,` 日本書紀 神功紀 加羅 7국 정벌 기사에 대한 기초적 검토a, 한국고대사연구 39)이 있다. 이상의 신공 49년조 춘3월조에 대한 다양한 논의는 이기동 `4세기 ( 한일관계사연구의 문제점a, 韓國上古史, 民音社)과 주보돈(1995,`서설-가야사의 새 로운 정립을 위하여a, 가야사연구, 경상북도) 등의 논고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45) 荒田別 鹿我別 : 두 사람은 應神 15年 秋8月條에 王仁을 데리러 백제로 갔다는 上毛野君의 선조 인 荒田別 巫別과 동일한 인물로서 新撰姓氏錄 河內國止美連條에 豊城入彦命之後也. 四世孫 荒田別命男. 田道公被遣百濟國. 娶止美邑吳女. 生男之君 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續日本 紀 卷50 延曆 9년(790) 秋7月 辛巳條의 百濟王仁貞의 상표문에는 上毛野氏遠祖荒田別 이 백제 에 파견되어 有識者를 구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들은 河內(카와치) 지방을 중심으로 백제와 교섭에 관여한 上毛野氏의 조상으로서 日本書紀 편찬자가 그들의 계보 또는 家記에서 인용한 인명으로 여겨진다( 史朗, 1983,`上毛野氏關係氏族の基礎的考察-朝鮮とかかわる上毛野氏關 係氏族-a(下), 東アジアの古代文化 37). 上毛野氏는 持統 5年(691)의`墓記a제출 18씨족 중에 포함되어 있다. 日本書紀 33 (사하쿠카후로)46)를 보내 군사를 증원해달라고 요청하십시오. 라고 말하였다. 곧 木羅斤 資(모쿠라콘시)47) 沙沙奴 (사사나쿠)48) <*이 두 사람의 姓은 알 수 없다. 다만 本羅斤資 는 백제의 장군이다.>에게 명령하여 정병을 이끌고 沙白蓋盧와 함께 가도록 하였다. 모 두 卓淳에 집결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깨뜨리고 比自본49) 南加羅50) 國51) 安羅52) 多 羅53) 卓淳 加羅54) 7國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서 古奚津55)에 이르러 南蠻56) 彌多禮57)를 무찌르고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肖古와 왕자 貴須58) 46) 沙白蓋盧 :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문맥상 卓淳人으로 추정된다. 47) 木羅斤資 : 일본서기 에 의하면 韓地를 경략한 인물로 나오는데 신공 49년조 출전미상의 분주에 의하면 百濟將軍이라고 한다. 또 神功 62年條에 인용된`百濟記a에는 壬午年에 신라를 치기 위해 보낸 沙至比 가 신라의 미인계에 빠져 도리어 加羅를 친 데 노한 천황이 가라에 파견하여 그 사 직을 구하게 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應神 25年條에는 木羅斤資의 아들로 木滿致가 나온다. 木 羅氏는 백제 대성 8족 가운데 하나인 木氏의 복성이다. 48) 沙沙奴 : 이곳에만 보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주 162) 참조). 49) 比自본 : 현 경남 昌寧. 三國史記 卷34 地理志 1에 火王郡. 本比自火郡[一云比斯伐]. 今昌寧 郡 이라고 나온다. 또한 三國史記 卷1 新羅本紀 婆娑尼師今 29年(108)條에 比只國이 나오는데 같은 지명일 것이다. 50) 南加羅 : 현 경남 金海. 三國史記 卷34 地理志 1에 金海小京. 古金官國 <*一云伽落國. 一云伽 耶> 라고 나온다. 三國志 卷30 魏書 東夷傳에 보이는 狗邪韓國이 김해지역으로 비정된다. 日 本書紀 欽明紀에는 下加羅로 나온다. 51) 國 : 현 경북 慶山. 日本書紀 繼體 21年(537) 6월조에 신라에 의해 멸망한 가야제국 己呑國 이 보인다. 현재 경북 경산지역(鮎貝房之進, 1931, 앞의 글 ; 千寬宇, 1977, 앞의 글) 또는 영산 밀양 지역(金泰植, 1993, 加耶聯盟史, 一潮閣, 188쪽)으로 비정되고 있다. 52) 安羅 : 현 경남 咸安. 三國史記 卷34 地理志 1에 咸安郡. 法興王以大兵滅阿尸良國. <*一云阿 那加耶> 라고 나오며, 三國志 卷30 魏書 東夷傳 弁辰條에 安邪國을 가리킨다.`광개토왕비a에 도 安羅人 기록이 보인다. 일본서기 계체 흠명기에 자주 보인다. 53) 多羅 : 현 경남 陝川. 三國史記 卷34 地理志 1에 江陽郡. 本大良州郡, 景德王改名. 今陝州 라 고 나온다. 54) 加羅 : 현 경북 高靈. 三國史記 卷34 地理志 1에 高靈郡. 本大伽倻國 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55) 古奚津 : 현 전남 강진. 三國志 卷30 魏書 東夷傳 馬韓條에 보이는 狗奚國. 56) 南蠻 : 백제를 중심으로 볼 때 남쪽의 오랑캐란 의미. 57) 彌多禮 : 日本書紀 繼 2年(508) 12月條에 보이는 南海의 耽羅 와 彌多禮 가 음이 비슷 하고, 南海 라는 방위도 백제에서 彌多禮를 볼 때의 南蠻 이라는 표현과 유사하다는 것을 근 거로 彌多禮를 제주도로 비정한 견해(鮎貝房之進, 1931, 앞의 글)가 있다. 이에 彌多禮를 古

34 또한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그 때 比利 中 布彌支 半古 四邑59)이 스스로 항복 日本書紀 35 하였다. 이에 백제왕 부자와 荒田別 鹿我別 등은 함께 意流村60)에 모였다.<*지금은 州 流須祇(츠르스키)라고 한다.> 서로 보며 기뻐하며, 예를 두텁게 하여 보냈다. 다만 千熊 奚津의 요충지인 강진으로 보거나(李丙燾, 1959, 韓國史-古代編-, 震檀學會, 360쪽), 三國 志 卷30 魏書 東夷傳 馬韓條에 보이는 新彌國으로 보고 영산강 유역으로 비정한 견해(盧重國, 1988, 앞의 책, 119~120쪽)도 있다. 그런데 왜가 백제에게 토지를 주었다는 기사는 日本書紀 에 종종 언급되고 있다. 神功 49年 春3月條를 비롯해서 神功 50年 5月條의 多沙城 사여, 應神 8 年 春3月條의 枕彌多禮 峴南 支侵 谷那 등 東韓之地의 奪取, 雄略 21年 春3月條의 久麻那利 사여, 繼體 6年 12月條의 任那4縣 사여, 繼體 7~10年 己汶 帶沙 사여, 繼體 23年條 多沙津 사 여 등의 예가 그렇다. 日本書紀 의 영토 하사와 같은 표현은 율령제하의 일본의 국가관에 기초 한 역사 서술로 백제왕은 천황의 外臣으로 백제왕의 통치지역과 백성은 모두 천황에 의해 하사된 것으로 규정한 관념에 근거한 것이다 58) 貴須 : 백제 제14대왕 近仇首王(재위 375~383). 三國史記 卷24 百濟本紀 近仇首王 즉위조에 一 云諱須 라고 나온다. 日本書紀 에는 貴首王으로 나오기도 하며, 續日本紀 延曆 10年(791) 夏四月 戊戌條에는 久素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新撰姓氏錄 左京諸蕃 下에는 近貴須王으로 나온다. 59) 四邑 : 比利 中 布彌支 半古 등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여러 곳으로 비정되어 왔는데 크게 현 재 전라남도 일원으로 보는 견해(李丙燾, 1979,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512~514쪽)와 충남 및 전북 일원으로 보는 견해(鮎貝房之進, 1931, 앞의 글 ; 末松保和, 1949, 任那興亡史, 吉川弘 文館)로 나눌 수 있다. 한편 이 4邑을 比利 中 布彌 支半 古四의 5읍으로 끊어 읽어 이를 각각 保安 金堤 井邑 扶安 古阜로 비정하는 견해(千寬宇, 1979,`馬韓諸國의 位置試論a, 東洋學 9 ; 全榮來, 1985,`百濟南方境域의 變遷a, 千寬宇先生還曆記念 韓國史學論叢, 正音 文化史)도 있다. 각 지명의 구체적인 위치에 대해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比利 : 三國史記 卷37 地理志 4의 完山<*一云比斯伐, 一云比自火> 라는 기사를 근거로 완산 (현 전북 전주)으로 보거나 三國史記 卷36 地理志 3에 發羅郡 (현 전남 나주)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三國志 卷30 魏書 東夷傳 馬韓條에 보이는 卑離國을 비롯하여 卑離라는 명칭이 붙은 여 러 마한소국과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광개토왕비a에는 永樂 6年(396)條와 守墓 人條에 고구려군이 공파한 58城의 하나이며 광개토왕릉의 수묘를 담당케 하였던 新來韓濊의 출 신지로 比利城이 보인다. 中 : 三國史記 卷36 地理志 3에 金堤郡 本百濟碧骨縣 이라는 기사를 참고하면 현 전북 김제 로 볼 수 있다. 三國史記 의 骨 城縣 碧骨郡 碧骨縣 등은 모두 中과 관련된 지명으로 추정된다. 후문에서 백제와 왜가 맹약하였다는 支山이 中과 관련이 있는 곳으로 이해되고 있 다. 이 밖에 일본서기 天智 元年(662) 12월조에는 避城이란 지명이 보인다. 布彌支 : 현 전남 나주 일대. 그런데 三國史記 卷37 地理志 4에는 淸音縣, 本百濟伐音支縣, 今 新豊縣 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이 伐音支가 布彌支를 가리키는 것으로 현 공주시 維鳩(新豊) 지역 으로 비정되기도 한다(末松保和, 1949, 앞의 글). 三國志 卷30 魏書 東夷傳 馬韓條의 不彌國이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半古 : 三國史記 卷36 地理志 3의 潘南郡 本百濟 半奈夫里縣 이라는 기사를 근거로 현 전남 長彦과 백제왕은 백제국에 가서 支山61)에 올라 맹약하였다. 다시 古沙山62)에 올라서 함 께 磐石 위에 앉았다. 그때 백제왕이 맹세하기를 만일 풀을 깔아서 자리를 만들면 불에 탈까 두렵고, 또한 나무를 가지고 자리를 만들면 물에 떠내려 갈 것 같아 두렵다. 따라서 磐石에 앉아서 맹약하는 것은 영원히 썩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써 지금부 터는 千秋萬歲에 끊임없이 항상 西蕃이라 칭하며 해마다 조공할 것이다. 라고 말하였 다.63) 그리고는 千熊長彦를 데리고 백제의 도읍에 이르러 더욱 두터이 예우하고 久 등 을 딸려서 보냈다. 나주군 반남면으로 비정되고 있다. 여기서 半奈와 潘南은 서로 音이 통한다. 한편 千寬宇는 布彌 支와 半古를 布彌와 支半으로 끊어 읽고 支半은 三國志 卷30 魏書 東夷傳에 나오는 支半國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 전북의 부안 태인 방면으로 비정하였다(1979). 이상의 지명 비정을 기초로 신공 49년 춘3월조의 4읍 항복 기사를 백제의 근초고왕이 전라도 남 해안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이병도, 1985, 앞의 글 ; 전영래, 1985, 앞의 글 ; 이기동, 1987,`馬韓領域에서의 百濟의 成長a, 馬韓百濟文化 10 ; 노중국, 1988, 앞의 글 ; 김 현구, 1993, 任那日本府硏究, 일조각, 39~40쪽)와 신공 49년 춘3월조의 기사는 근초고왕대의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5세기 중엽 즉 웅진시대 이후의 사실을 각색한 것에 불과하다는 견해(김기섭, 1995,`近肖古王代 南海岸進出說에 대한 재검토a, 백제문화 24 ; 이영식, 1995, 앞의 글)가 제기되었다. 60) 意流村 : 백제의 초기 왕성인 尉禮城. 日本書紀 雄略 20年(476)조에 분주로 인용된`百濟記a에 도 尉禮로 나온다. 意流村을 전라북도 茂朱 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鮎貝房之進, 1931, 앞의 글) 도 있다. 본조의 분주에 意流村을 달리 州流須祇이라 하였는데 이 州流須祇의 古音이 日本書紀 天智紀의 疏留城 州桑城이나 三國史記 의 周留城 豆率城과 비슷한 점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61) 支山 : 현 전북 金堤(주 59) 참조). 62) 古沙山 : 현 전북 古阜. 三國史記 卷23 백제본기 溫祚王 36年條에 築古沙夫里 라는 기사와 同 卷36 地理志 3에 古阜郡, 本百濟古 夫里郡 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63) 그때 말하였다 : 신공 49년 춘3월조의 磐石 위에서의 맹약기사는 일반적으로 7세기 후반 나 당군에 의해 백제가 패망한 뒤 백제에서 행해진 就利山 會盟을 모방하여 지어낸 이야기로 간주되 고 있다(池內宏, 1970, 앞의 글, 59~61쪽 ; 연민수, 1996, 앞의 글). 한편 磐石 위에서 이루어지 는 맹약 의식을 백제의 전통 의식으로 이해하여 신공 49년조의 맹약 기사는 원래 근초고왕 부자 가 맹주로서 맹약한 기사였는데 야마토 정권을 맹주로 한 기사로 바뀌었다는 설(徐甫京, 2002, ` 日本書紀 神功 49年條에 대한 검토a, 百濟硏究 35 및 2004,` 日本書紀 한반도 관계 기사 검토a, 고려대 박사학위논문)도 있다.

36 日本書紀 神功皇后 50년(250) 이 은혜를 베풀도록 하라. 고 하였다. 그 해에 千熊長彦을 久 하5월 여름 5월. 千熊長彦 久 등이 백제로부터 도착했다. 이에 황태후는 기쁘게 맞이하며 久 에게 바다 서쪽에 여러 韓을 이미 너희 나라에게 주었다. 지금은 무슨 일로 빈번히 또 오느냐? 라고 물었다. 久 37 64) 등이 天朝의 큰 은택은 멀리 弊邑 까지 미치니 우리 왕 (근초고왕)이 매우 기뻐하여 춤을 추면서 마음에만 담아둘 수가 없어서 돌아가는 사신 편 에 다시 정성을 다하도록 하였습니다. 비록 萬世에 이를지라도 어느 해인들 조공하지 않 겠습니까. 라고 아뢰었다. 황태후는 勅을 내려 너의 말이 훌륭하도다.65) 이것은 짐도 생 각하고 있던 바이다. 라고 말하였다. 多沙城66)을 더해주고 왕래하는 길의 驛으로 삼도록 하였다. 神功皇后 51년(251) 춘3월 봄 3월. 백제왕은 다시 久 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이에 황태후는 太子67)와 武內宿 에 게 짐이 친히 교류하는 백제국은 하늘이 내려주신 것이지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니다. 玩 好68)珍物은 우리나라에 일찍이 없었던 것인데 해를 거르지 않고 항상 와서 공물로 바치고 있다. 짐은 그 정성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기쁘다. 짐이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두터 64) 弊邑 : 자국을 낮춰 일컫는 말. 65) 너의 말이 훌륭하도다 : 원문은 善哉汝言. 法華經 등에 자주 보이는 표현이다.`譬喩品a에 善 哉. 善哉. 如汝所言 라는 표현이 그 한 예이다. 66) 多沙城 : 현 경남과 전남의 경계인 섬진강 하구 부근(河東 지방). 三國史記 卷34 地理志 1에 河東郡. 本韓多沙郡 岳陽縣. 本小多沙縣 라고 나온다. 日本書紀 繼 紀에 보이는 帶沙 江 多沙津은 모두 같은 지역이다. 신공 50년 하5월조는 왜가 백제에 多沙城을 준 것으로 서술하 고 있는데, 계체 23년(529) 3월조에도 백제가 왜에 加羅의 多沙津을 요구하자 왜가 이를 허락하 였다고 하는 내용과 비슷하다. 백제가 多沙津을 확보한 것은 6세기경의 사실로 보는 것에는 이론 이 없다. 따라서 왜가 백제에게 多沙城을 하사하였다는 신공 50년 하5월조의 기사는 6세기 백제 가 多沙津을 확보한 역사적 사실이 4세기 중엽의 사실처럼 윤색 및 소급되어 삽입되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김현구, 1993, 앞의 글, 43~44쪽). 67) 太子 : 譽田別尊(주 33) 참조). 68) 玩好 : 진귀한 노리갯감(玩具). 등에게 딸려서 백제국에 보냈다. 그리하여 큰 은혜를 내리며 짐은 신의 가르침에 따라 처음으로 길을 열고 바다의 서쪽을 평정하여 백제국에게 하사 하였다. 이제 다시 두텁게 우호를 맺고 영원히 총애하여 상을 내린다. 고 말하였다. 이 때 백제왕 父子69)는 함께 이마를 땅에 대고 貴國의 큰 은혜는 天地보다 무겁습니다. 언 제 어디서건 어찌 잊을 수 있으리오. 聖王이 위에 있어서 해와 달처럼 밝고, 지금 臣이 그 아래에서 산악과 같이 견고합니다. 영원히 西蕃으로서 결코 두 마음을 품는 일은 없을 것 입니다. 라고 아뢰었다. 神功皇后 52년(252) 추9월 丁卯朔 丙子 가을 9월 丁卯朔 丙子(10일). 久 등이 千熊長彦을 따라왔다. 이 때에 七支刀70) 한 자 루와 七子鏡71) 한 면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의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그리고 臣國의 서 69) 백제왕 父子 : 近肖古王과 近仇首王. 70) 七支刀 : 일본 奈良(나라)縣 天理(텐리)市에 있는 石上(이소노카미)神宮에 봉안되어 있는 七支刀 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길이는 74.9 로서 鍛鐵로 만 든 양날 칼이다. 칼의 몸 좌우로 각각 가지 칼이 3개씩 뻗어 모두 7개의 칼날을 이루고 있기 때문 에 七支刀라는 이름이 붙었다. 칼몸의 앞과 뒤에는 61자(앞 34, 뒤 27)가 金象嵌되어 있고 그 외 곽을 가는 금선으로 둘렀다. 앞면은 紀年, 日付干支, 刀名, 사여의 대상, 제작자의 순이고, 뒷면은 칠지도의 제작 연유가 새겨져 있다. 이 칠지도의 명문은 石上神宮의 大宮司로 있었던 菅政友가 1870년대에 처음으로 확인한 이래 지금까지 그 명문해석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오고 있다. 칠지도 연구의 커다란 제약의 하나는 현재 명확히 판독하기 어려운 자가 많다는 것이다. 칠 지도의 제작 연대를 해명하는 데에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첫머리 연호 문제도 미해결 상태이 고, 백제와 왜국의 정치사적 관계를 구명할 수 있는 개개의 문구나 문서의 형식을 둘러싸고 아직 도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칼의 제작연대를 비롯해 백제왕이 왜왕에게 헌상한 것인가 하사 한 것인가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제기되어 왔다.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1 에 실린 명문은 다음 과 같다. (앞)-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鐵七支刀生 百兵宜供供侯王 作 (뒤)-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71) 七子鏡 : 둘레에 7개의 小鏡을 붙인 거울. 芸文類聚 天部에 梁나라 簡文帝가 지은 望月의 詩에 서 形同七子鏡. 影類九秋霜 라는 표현에 의하면, 七子鏡은 滿月처럼 둥근 거울이다. 무령왕릉과 일본에서 출토된 圓形鏡 등인 七獸鏡이 七子鏡이다( 口隆康, 1972,`武寧王陵出土鏡と七子鏡a, 史林 54~2).

38 日本書紀 39 쪽에 강이 있는데, 그 水源은 谷那鐵山72)입니다. 너무 멀어서 7일 동안 가도 이를 수가 없 다. <* `百濟記a 에서 말하기를, 壬午年77)에 신라가 貴國을 받들지 않으므로 귀국이 沙至 습니다. 그 물을 마시다가 문득 그 산의 철을 얻으니 영원토록 聖朝에 바치고자 합니다. 比 (사치히코)78)를 보내어 이를 치도록 하였다. 신라인은 미녀 두 명을 단장시켜서 津에 고 아뢰었다. 이에 손자인 枕流王73)에게 지금 내가 교류하고 있는 바다 동쪽의 貴國은 서 沙至比 를 맞이하여 유혹하였다. 沙至比 는 그 미녀를 받고는 도리어 加羅國79)을 쳤 하늘이 이끄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天恩을 베풀어 바다 서쪽을 나누어 나에게 주니, 나라 다. 가라국의 왕 己本旱岐80)와 아들 百久 阿首至 國沙利 伊羅麻酒 爾汶至81) 등은 의 기틀이 영원히 견고해졌다. 너도 마땅히 우호를 잘 닦아 土物을 모아 공물을 끊임없이 그 인민을 데리고 백제로 도망해 왔다. 백제는 이들을 두터이 대우하였다. 가라국 왕의 바친다면 죽어도 무슨 한이 남겠느냐? 라고 일러두었다. 이 이후로 매년 끊임없이 조공 누이인 旣殿至가 大倭82)에 天皇83)은 沙至比 을 보내어 신라를 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 하였다. 데 沙至比 를 신라의 미녀를 받아들이고 신라를 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나라를 멸 神功皇后 55년(255) 백제 肖古王이 薨하였다.74) 神功皇后 56년(256) 망시키어 형제 인민 모두가 떠도는 신세가 되니 걱정스러운 마음에 견딜 수가 없어 이렇 게 와서 아룁니다. 라고 하였다. 천황은 매우 노하여 木羅斤資를 보내 병사를 이끌고 가 서 加羅에 모여 그 나라의 社稷을 복구시키도록 하였다. 고 하였다. 一云84)에 沙至比 는 천황이 노하였음을 알고 감히 공공연히 귀국할 수 없어 몰래 잠입하였다. 그 누이동생85)은 皇宮에서 일하고 있었다. 比 는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천황의 노여움이 풀렸는지 어떤 백제 왕자 貴須가 왕위에 올랐다.75) 神功皇后 62년(262) 신라가 조공하지 않았다. 그 해에 襲津彦(소츠비코)76)을 파견하여 신라를 치도록 하였 72) 谷那鐵山 : 谷那는 현 黃海道 谷山郡(臨津江이나 禮成江의 상류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鮎貝房 之進, 1931, 앞의 글)와 전남 谷城으로 보는 견해(김현구, 1993, 앞의 글)가 있다. 73) 枕流王 : 백제 제15대왕 枕流王(재위 384~385). 近仇首王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阿爾夫人이다. 384년 7월에 사신을 東晉에 보내 조공하였다. 그해 백제에 공식적으로 불교가 수용되었다. 74) 肖古王의 사망 : 肖古王은 近肖古王이며 肖古王이 사망한 신공 55년은 2간지 내리면 375년이 된 다. 三國史記 卷24 百濟本紀의 近肖古王 30年 冬11月條의 薨年기사와 그 시기가 일치한다. 75) 貴須의 즉위 : 貴須는 近仇首王이다(주 58). 三國史記 卷24 백제본기 近仇首王 즉위년(375)조 에는 近仇首王<*諱須云>. 近肖古王子 近肖古在位三十年薨, 位卽 이라고 나오듯이 근구수 왕의 즉위년은 日本書紀 와 1년의 차이가 난다. 이것은 일본서기 의 경우는 越年 元法, 삼국 사기 는 當年 元法에 의해 즉위년을 기록한 데서 비롯된 차이다. 76) 襲津彦 : 氏는 葛城(카츠라기)이다. 葛城襲津彦은 武內宿 (타케우치노스쿠네)의 자손으로 葛城 氏의 祖이다. 여기서 彦(히코 : 日子라고도 한다)은 別(와케)과 함께 단순한 존칭이다. 日本書紀 에 의하면 襲津彦은 신공 5년부터 웅략 7년에 이르는 긴 기간동안 활약한 인물로 나오며 고사 기 에 의하면 그의 계보가 缺史八代에 속하는 孝元天皇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실존한 인물로 보기 에는 의문점이 많다. 그런데 신공 62년조에 인용된`百濟記a에는 襲津彦이 沙至比 로 나온다. 이에 대해서 일본서기 의 편찬자가`百濟記a의 沙至比 라는 인명을 일본식으로 고쳐 襲津彦이 라는 문자를 끌어 온 것이라는 견해(池內宏, 1970, 앞의 글)와 일본서기 편찬자에게는`百濟記a 와는 별로도 襲津彦이라는 인명 자료가 있었으며,`百濟記a에는 沙至比, 일본에는 襲津彦으로 각각 전해지고 있던 것이 편자에 의해 서로 연결되었다는 견해(三品彰英, 1962, 앞의 글)가 있다. 葛城氏는 4세기에서 5세기 전반에 大和國 葛城지방(현 奈良縣 御所市 서남부)을 중심으로 강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대두한 씨족으로 大王家의 외척씨족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5세기 말 웅략즉위 전기에 葛城円이 安康천황을 살해한 眉輪王(마요와노미코)과 함께 제거되는 것을 계기로 葛城氏 는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葛城氏의 몰락 후에는 蘇我氏가 그 기반을 계승한다. 77) 壬午年 : 382년. 신공 62년의 수정기년. 78) 沙至比 : 주 76) 참조. 79) 加羅國 : 현 경북 고령. 大加耶라고도 한다. 80) 己本旱岐 : 己本은 왕의 이름이다. 旱岐는 加羅諸國의 왕호이다. 81) 百久 爾汶至 : 자세히 알 수 없는 인물들이다. 82) 大倭 :`百濟記a의 大倭는 왜국을 가리키며, 보통 일본서기 본문에 보이는 大倭는 大和國(현 奈 良縣 지역)을 가리킨다.`百濟新撰a에도 大倭라는 표현이 보이는데`百濟記a와 함께`百濟新撰a 에 원래부터 大倭라고 표기되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83) 天皇 :`百濟記a가 편찬되는 과정이나 日本書紀 에 인용되는 과정에서 윤색된 표현. 주 6) 참조. 84) 一云 :`百濟記a의 내용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인용문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85) 누이동생(妹) : 일본서기 에 의하면 襲津彦의 딸인 磐之媛(이와노히메)은 仁德天皇의 황후가 되 어 履中 反正 允恭 세 천황을 낳았다. 여기서 妹 라고 하였기 때문에 磐之媛은 아니다.

40 지를 알아보게 하였다. 누이동생은 꿈을 핑계 삼아 어젯밤86) 꿈에서 沙至比 를 보았습 니다. 라고 아뢰자 천황은 몹시 분노하여 어떻게 감히 比 가 돌아올 수 있는가? 하였 다. 누이동생이 이 말을 전하자 比 는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고 石窟에 들어가 죽었다. 日本書紀 41 是歲92) 이 해에 백제 辰斯王이 즉위하여 貴國 천황에게 無禮하였다.93) 그래서 紀角宿 (키노츠 노노스쿠네)94) 羽田矢代宿 (하타노야시로노스쿠네)95) 石川宿 (이시카와노스쿠네)96) 고 한다.> 神功皇后 64년(264) 백제국 貴須王이 薨하였다.87) 왕자 枕流王이 왕위에 올랐다. 神功皇后 65년(265) 백제 枕流王이 薨하였다.88) 왕자 阿花89)는 나이가 어렸다. 숙부 辰斯가 찬탈하여 왕이 되었다.90) 권10 譽田天皇 應神天皇 應神天皇91) 3년(272) 86) 어젯밤(今夜) : 하루가 밤부터 시작된다는 의미에서 今夜라는 표현을 쓴 듯하다. 여기서는 오늘날 의 昨夜라는 의미로 번역하였다. 87) 백제국 貴須王이 薨하였다 : 神功 64年은 日本書紀 紀年으로는 264년이다. 백제왕력을 참고로 2간지 내리면 384년이 된다. 近仇首王의 사망 시기는 三國史記 卷24 백제본기와 일치한다(近 仇首王 10년 하4월조). 88) 백제 枕流王이 薨하였다 : 神功 65년의 수정기년은 385년이다. 枕流王의 사망 시기는 三國史 記 卷24 百濟本紀와 일치한다(침류왕 2년 동12월조). 89) 阿花 : 침류왕의 아들로 백제의 제17대 왕인 阿莘王(재위 392~405). 三國史記 와 三國遺事 에 서는 阿莘王의 異稱으로 阿芳王이라고 하는데 莘은 원래 芳 또는 花이었던 것이 와전되었을 가능 성이 크다. 90) 숙부 되었다 : 숙부 辰斯는 백제 제16대 왕인 辰斯王(재위 385~392)을 가리킨다. 辰斯王의 즉 위 시기는 三國史記 卷25 백제본기와 일치한다. 그러나 삼국사기 에서는 태자가 어렸기 때문에 진사가 즉위하였다고 기록하였으나, 일본서기 에서는 진사가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91) 應神天皇 : 古事記 日本書紀 의 계보상 15대 천황. 이름은 譽田別尊(호무타와케노미코토)라 고 하고 아버지는 仲哀天皇이다. 어머니인 神功皇后가 신라원정 후 돌아오는 길에 筑紫에서 낳았 다. 宋書 卷97 列傳 倭國條의 倭王讚으로 비정되기도 한다(前田直典, 1948,`應神天皇朝という 時代a, オリエンタカ 創刊號). 日本書紀 應神紀에는 王仁을 비롯한 많은 한반도인의 도래기사 와 기술의 도입, 경지개간 등의 기록이 자주 보인다. 한편 응신 이후에 궁(輕島明宮)이나 왕릉(羽 曳市의 譽田御廟山으로 추정)이 大和(야마토)에서 河內(카와치)로 옮겨가는 특징이 나타난다. 이 에 大和의 三輪(미와)지방에 거점을 두고 있었던 이전의 崇神系인 三輪王朝 와는 다른 河內王 朝 라는 새로운 왕조를 상정하고 應神이 그 시조가 되었다는 견해(直木孝次郞, 1964,`應神王朝 論序說a, 日本古代の氏族と天皇, 書房)가 제기되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92) 是歲 : 日本書紀 紀年은 272년이다. 2간지 내리면 392년이 된다. 三國史記 卷25 백제본기에 의하면 이 해는 辰斯王이 죽고 阿莘王이 즉위한 해이다. 93) 이 해에 無禮하였다 : 백제왕이 천황에게 無禮를 범하였다는 식의 표현은 應神 3년 시세조 이외에도 일본서기 의 여러 곳에 보인다. 94) 紀角宿 : 紀角宿 (木角宿 ) 이하 네 명 모두 武內宿 (建內宿 )의 자식이다. 古事記 孝元段 에 此建內宿 之子. 幷九[男七女二]. 波多八代宿 者[波多臣 長谷部之君之朝也]. 次蘇 賀石河宿 者[蘇我臣 岸田臣等之朝也]. 次平群都久宿 者[平群臣 馬御 連等祖也]. 次木 角宿 者[木臣 坂本臣之朝]. 라고 나온다. 이 紀角宿 는 紀氏의 조상으로 전승상의 인물이 다(岸俊男, 1966,`紀氏に關する一試考a, 日本古代政治史硏究, 書房). 紀氏의 姓은 臣으로 천 무천황 13년(684)에 朝臣을 받았다. 新撰姓氏錄 左京皇別에는 紀朝臣石川朝臣同祖. 建內宿 男紀角宿 之後也 라고 되어 있다. 본거지는 和歌山(와카야마)縣 紀ノ川(키노카와)일대이고, 야 마토의 平郡(헤구리) 지방까지 그 세력이 미쳤다. 紀氏는 紀ノ川 북부일대에서 나는 질 좋은 목재 덕택으로 일찍부터 수군을 보유한 군사씨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본거지를 중심으로 한반도계 유적 유물의 분포는 紀氏와 한반도 제세력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말해준다(森浩一, 1989,`紀伊 の國と韓の國a, 韓國の古代遺跡 ; 金井塚良一, 2002,`海を渡った馬一紀伊の古代豪族, 紀氏と 加耶一a, 三國時代硏究 2, 學硏文化社). 일본서기 에는 5~6세기 紀小弓宿 紀生磐宿 등 기씨의 주요 인물들의 활동이 자주 보이는데 모두 대외교류(특히 가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95) 羽田矢代宿 : 古事記 孝元段에 나오는 波多八代宿 를 말하며 波多臣 등의 조상이다. 古事 記 에서 波多八代宿 는 建內宿 (武內宿 )의 장자이고 波多臣 林臣 波美臣 등의 조상이라고 나온다. 新撰姓氏錄 左京皇別에는 八多朝臣. 石川朝臣同祖. 武內宿 命之後也 라는 기록을 통 해서 蘇我氏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주 38) 참조). 96) 石川宿 : 古事記 孝元段의 蘇賀石河宿 를 말하며 蘇我臣 등의 조상이다. 古事記 에서 蘇 我石河宿 는 建內宿 의 자식이고 蘇我臣 川 臣 田中臣 등의 조상으로 나온다. 蘇我(소가) 氏는 6세기에서 7세기 중엽에 걸쳐 왜왕권 최대의 정치 세력을 형성한 씨족이다. 그 계보 전승 은 蘇賀石河宿 를 시조로 滿智 韓子 高麗로 계승되었다. 稻目(이나메)대에 이르러 稻目이

42 日本書紀 43 木 宿 (츠쿠노스쿠네)97)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꾸짖었다. 이에 백제국은 辰斯王을 죽 명하여 여러 韓人101)을 거느리고 연못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그 연못을 韓人池102) 여 사죄하였다.98) 紀角宿 라고 불렀다. 등은 阿花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99) 應神天皇 7년(276) 應神天皇 8년(277) 추9월 춘3월 가을 9월. 高麗人 百濟人 任那人 新羅人이 함께 來朝하였다.100) 이 때 武內宿 에게 봄 3월. 百濟人이 來朝하였다. <* `百濟記a 에서 말하기를, 阿花王이 즉위하여 귀국에게 無禮하였다.103) 그래서 우리의 枕彌多禮 및 峴南 支侵 谷那 의 東韓의 땅104)을 빼앗았 大臣이 되고 자신의 딸을 欽明의 왕비로 삼은 것을 계기로 정치의 중심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 다. 이후 稻目의 아들 馬子(우마코)는 物部守屋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더욱 그 권력기반을 다 져 나갔다. 馬子의 아들인 蝦夷(에미시)와 손자인 入鹿(이루카)을 거치면서 소아씨의 권력은 더 욱 절대화되어갔지만, 中大兄皇子(天智天皇)와 中臣(藤原)鎌足 등에 의해 蝦夷 入鹿 부자가 살 해됨으로써 소아씨는 몰락하게 된다. 소아씨의 본거지는 大和(야마토)와 河內(카와치)지역이었 을 것으로 여겨지며, 그 출자가 백제계 이주민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주 38)과 주 138) 참조). 97) 木 宿 : 古事記 에 平群都久宿 로 나오며 平群(헤구리)臣 등의 조상이다. 日本書紀 仁德 元年 春正月條에 의하면 木 宿 가 태어날 때 집에 (굴뚝새)가 날아들었다고 한다. 같은 날 仁德天皇도 태어났는데 황궁에 木 (부엉이)가 날아들었다. 이것을 길조로 여긴 應神天皇과 武內 宿 가 새의 이름을 따서 자식의 이름을 짓되, 날아든 새의 이름을 교환하여 각자 자식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인덕천황은 大 皇子(오오사자키노미코)라 하였으며 武內宿 의 자식은 木 宿 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전승이 있다. 木 宿 의 실존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와 같은 전승이 남게 되는 시기는 일반적으로 武內宿 계보에 平群氏가 포함되는 시기 즉 推 古朝로 보고 있다(塚口義信, 1980, 앞의 글). 98) 百濟國은 사죄하였다 : 三國史記 卷25 백제본기 辰斯 8년(392) 10월 11월조의 王狗原 田旬經返. 十一月. 狗原行宮薨 라는 기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진사왕의 죽음이 정상적이 아 님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支王 원년(405)조에 國人이 왕위에 있던 禮를 죽인 예 에서도 왕위 계승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는 경우에 國人의 반발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無禮와 관 련하여 百濟國 운운하는 부분은 정상적이지 않은 진사왕의 죽음을 바탕으로 일본서기 편찬자가 만들어낸 표현일 것이다. 99) 紀角宿 돌아왔다 : 阿花 즉 阿莘王의 즉위에 대해서는 三國史記 卷25 백제본기 아신왕 원년(392)조에 阿莘王<*或云阿芳>. 枕流王元子 王薨詩年少. 故叔父辰斯繼位. 八年薨. 位 卽 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三國史記 에는 왜국이 阿莘王의 즉위에 간여한 사실을 전하고 있지 않 다. 이 또한 진사왕의 사망기사와 함께 일본서기 편찬자가 조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100) 고려인 내조하였다 : 古事記 應神段에는 亦新羅人參渡來 라고 하여 신라인만 건너온 것 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 한다> 다. 이에 왕자 直支105)를 天朝에 보내 先王의 우호를 닦도록 하였다. 101) 韓人 : 日本書紀 에서는 넓은 의미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에서 도래한 사람들을 말하고, 좁은 의미로는 가야에서 도래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는 본래 韓이 三國志 卷30 魏書 東夷傳 이후 한반도 남부에 있던 부족집단을 총칭하여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다. 고사기 에서도 막연히 한반도를 가리킬 때 韓 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102) 韓人池 :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古事記 應神段에는 建內宿 命이 도래한 신라인을 이끌고 百濟池 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古事記 에서 신라인이 만든 연못을 왜 百濟池라고 부르 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103)`百濟記a 無禮하였다 : 어떤 이유로 무례했다고 하는지 알 수 없다. 응신 3년 시세조에 진 사왕의 무례와 이어서 백제국이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일본서기 편 찬자의 조작으로 여겨진다. 104) 東韓의 땅 : 峴南 支侵 谷那 東韓의 땅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東韓之 地 는 峴南 支侵 谷那 지역을 총칭하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鮎貝房之進, 1931, 앞의 글). 峴 南은 三國史記 卷37 地理志 4의 甘勿阿를 가리키며 현 전북 咸悅지역에 해당된다. 谷那는 현 전남 谷城을 가리킬 가능성이 크다(주 72) 참조). 그런데 支侵의 비정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 가 있다. 三國志 卷30 魏書 東夷傳 馬韓條의 兒林과 같다고 보아 현 충남 大興의 옛 이름인 任 城에 비정하는 견해(鮎貝房之進, 1931, 앞의 글)와 支侵國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 충남 洪城지역 으로 보는 견해(末松保和, 1949, 앞의 글, 70~76쪽)가 있다. 105) 直支 : 阿莘王의 아들로 백제 제18대왕 支王(재위 405~420). 三國史記 에는 支, 宋書 와 梁書 에는 映으로 기록되어 있다. 三國史記 권25 백제본기 支 元年條에 支王<*或云直支>. 梁書名映. 阿莘之元子. 阿莘在位第三年立爲太子. 六年出質倭國 이라고 나온다. 支가 왜국에 質로 파견되었다는 내용은 三國史記 阿莘王 6년(397)조(王與倭國結好. 以太子 支質爲)에도 보인다.`廣開土王碑a의 永樂 9년(399) 己亥條에는 百殘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해 군사를 끌어들였다(百殘違誓與倭和通)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 397년에 백제가 왜국에 支를 質로 파견한 이유가 고구려의 남하를 견제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데는 이론이 없다 (李基白, 1975, 韓國古代史論, 探求堂, 74쪽 ; 山尾幸久, 1977, 日本國家の形成, 岩波書店,

44 應神天皇 14年 (283) 춘2월 봄 2월. 百濟王106)이 縫衣工女107)를 바쳤는데 이름은 眞毛津108)이라고 한다. 지금 來目衣 日本書紀 이끌고 歸化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라인이 방해하여 모두 加羅國112)에 머물러 있습 니다. 라고 아뢰었다. 이에 葛城襲津彦(카즈라키노소츠비코)113)을 보내어 弓月의 人夫를 加羅에서 불러들이도록 하였다. 그런데 3년이 지나도록 襲津彦은 돌아오지 않았다. 縫(쿠메노키누누이)109)의 시조이다. 應神天皇 15年 (284) 是歲 추8월 壬戌朔 丁卯 이 해에 弓月君110)이 백제로부터 來歸하였다. 그리고 臣은 저희나라의 人夫 120縣111)을 45 가을 8월 壬戌朔 丁卯(6일). 百濟王114)은 阿直岐115)를 파견하여 良馬 2마리를 바쳤다. 이 에 輕(카루)116)의 언덕 위의 마굿간에서 기르도록 하였다. 그리고 阿直岐에게 사육하는 일 137쪽 ; 羅幸柱, 1993,`古代韓日關係에 있어서의 質 의 意味a, 建大史學 8). 한편 이러한 支의 왜국 파견은 백제의 고구려 견제정책의 일환임과 동시에 국내적으로 볼 때 왕위계승을 둘 러싸고 추방된 것이거나(梁起錫, 1982,`百濟 支王代의 政治的 變革a, 湖西史學 ), 반대로 후 계자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 취해진 조치(연민수, 1997,`백제의 대왜외교와 왕족a, 백제연 구 27)로 이해되기도 한다. 106) 百濟王 : 阿莘王. 107) 縫衣工女 : 옷을 꿰매는 여자 기술자. 108) 眞毛津 :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백제의 대성8족의 하나인 眞氏인 점을 감안하면 상층신분의 여성일 가능성이 있다. 109) 來目衣縫 : 來目은 현 奈良縣 原(카시하라)市 久米(쿠메)町 지역이다. 和名類聚抄 에 大和國 高市郡久米 라고 나온다. 衣縫에 대해서는 新撰姓氏錄 和泉國 諸蕃條에 衣縫. 出自百濟國神 露命也 라는 기록이 보이지만, 和泉(이즈미)國의 衣縫과 大和(야마토)國의 來目지역이 어떤 연 관성이 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110) 弓月君 : 秦(하타)氏의 선조. 應神 16년 8월조에도 秦氏의 도래전승이 보인다. 古事記 應神段 에는 秦造之祖 韓直之祖 參渡來也 라고 기록되어 있다. 秦氏는 新撰姓氏錄 左京諸蕃 上 에 의하면 太秦恭宿. 秦始皇帝三世孫. 孝武王之後也. 男功滿王. 帶仲彦天皇<*諡仲哀>. 八年 來朝. 男融通王<*一曰弓月王>. 譽田天皇<*諡應神>. 十四年來朝. 率百二十七縣百姓歸化. 獻金銀 玉帛等物 이라고 하여 秦始皇帝의 후예를 칭하고 있지만 실제는 신라나 가야 방면에서 건너간 도래인 집단이다. 秦氏는 山背(야마시로)國의 葛野(카즈노) 紀伊(키이)郡을 중심으로 近江(오우 미)國 愛智(아이치)와 太上郡에서 美濃(미노) 越前(에츠젠) 攝津(셋츠) 播磨(하리마)國 등 전 국각지에 퍼져 있는 대규모 문화전파 집단이다. 특히 농지개발과 양잠, 광산개발, 그리고 鑄造 및 木工 기술이 뛰어났다고 한다. 따라서 관련 자료도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지만 특히 京都府 남부의 山城(야마시로)지역과 큐슈 북부지역의 宇佐(우사)지역에 많은 관련 자료가 남아있다. 일본서기 에 의하면 秦氏는 일본열도에 정착한 후 재지의 호족이나 야마토정권의 창고 등의 실 무를 담당하는 하급관인으로도 활동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姓은 초기에 造였다가 天武 12년 (683)에는 連, 이어서 同 15년에는 忌村姓을 하사받는다. 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말을 사육하는 곳을 일러 廐坂(우마야사카)117)라고 불렀다. 阿直岐는 또한 經典118)을 잘 읽었으므로 태자 道稚郞子(우지노와키이라츠코)119) 111) 120縣 : 新撰姓氏錄 左京諸蕃 上에는 127縣으로 기록되어 있다. 112) 加羅國 : 日本書紀 에는 加羅라는 용어가 加耶諸國을 가리키는 경우와 고령의 加耶(大加耶)를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는 어느 쪽을 가리키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113) 葛城襲津彦 : 주 76) 참조. 114) 백제왕 : 阿莘王 14년(404) 115) 阿直岐 : 古事記 應神段에는 阿知吉師(아치키시)로 나온다. 그런데 古事記 에서는 아지길사를 왜국에 보낸 백제왕을 照古王, 즉 近肖古王(재위 346~374)이라고 기록하고 있다(百濟國主照古 王. 以牡馬壹疋牝馬壹疋. 付阿知吉師以貢上<*此阿知吉師者. 阿直史等之祖>). 또한 일본서기 에 서는 阿直岐의 천거에 의해 王仁을 초빙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고사기 에는 아직기와 왕인 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116) 輕 : 현 奈良縣 原(카시하라)市 大輕(오오가루)町 부근이다. 117) 廐坂 : 輕(카루)의 坂 위에 있는 마굿간. 廐坂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왜국에 승마 풍습이 전해진 것은 대체로 4세기 중후반으로 추정되지만, 馬胄 등으로 말을 무장하는 것은 5세 기 후반까지 내려간다(一瀨和夫, 2002,`倭國の古墳と王權a, 倭國と東アジア, 吉川弘文館). 이 점을 고려하면 牧馬 및 騎馬 관련한 기술도 백제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118) 經典 : 여기서는 經書와 典籍이라는 의미로 유교 관련 서적을 말한다. 119) 道稚郞子 : 應神의 태자. 日本書紀 仁德卽位前紀에 의하면 應神이 사망한 후, 당시 太子였던 道稚郞子가 大 皇子(오오사자키노미코 : 후에 仁德天皇)와 서로 황위를 사양하였기 때문에 한동안 空位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 때 大山守皇子(오오야마모리노미코)가 황위를 찬탈하고자 했지만 道稚郞子가 이를 알아차리고 大山守皇子를 제거한 후 자신은 大 皇子가 천황에 즉 위할 수 있도록 자살한다. 120) 博士 : 고대 일본의 博士는 율령제하에서 陰陽寮나 大學寮 등의 부서에 소속되어 학문과 교육에

46 의 스승이 되었다. 이에 천황은 阿直岐에게 너보다 훌륭한 博士120)가 있느냐? 고 물었다. 라고 하였다. 이에 上毛 대답하길, 王仁121)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우수합니다. 野君(카미츠케노노키미)122)의 조상인 荒田別(아라타와케) 巫別(카무나기와케)123)를 백제에 日本書紀 47 보내어 왕인을 불러오도록 하였다. 阿直岐는 阿直岐史(아치키노후비토)124)의 시조이다. 應神天皇 16년(285) 춘2월 종사하는 官人을 말한다. 이외에도 대학이나 교육과는 무관한 전문기술자(瓦博士 등)를 박사로 호 칭하기도 하였다. 본조에서는 막연히 學者라는 의미가 강하다. 日本書紀 에는 繼體 欽明紀 등 에 백제가 五經博士 曆博士 易博士 등을 파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것은 6세기 대에 백제에 박사제도가 성립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梁書 卷54 列傳 百濟條에서 백제가 中大 通 6年(534)과 大同 7年(541) 두 차례에 걸쳐 梁나라에 毛詩博士를 청하는 기사가 참고 된다. 121) 王仁 : 古事記 應神段에는 和邇吉師(와니키시)로 나온다. 왜에 건너가 論語와 千字文을 전파하 였고, 文首氏(西文氏)의 시조가 되었다(故受命以貢上人名. 和邇吉師. 卽論語十卷千字文一卷. 幷 十一卷. 付是人卽貢進. <*此和爾吉師者文首等祖>). 王仁의 도래에 대해서는 日本書紀 에 의하 면 王仁은 阿直岐의 추천을 받아 왜에 건너 간 것으로 나온다(주 115) 참조). 그러나 두 사람의 전승은 원래 별도로 되어 있던 것이 후대에 같은 백제계라는 동족적 의식에 의해 결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도래 시기는 古事記 의 경우 照古王(近肖古王)의 시대로 적고 있다. 이에 비해 日 本書紀 에는 응신 15년에 기록되어 있는데 120년 내리면 백제 전지왕 원년(405)에 해당된다. 日本書紀 에는 바로 이 해에 아화(아신)왕이 사망하고 직지(전지)왕의 즉위사실을 전하고 있고, 삼국사기 의 왕력과 일치한다. 따라서 王仁의 도래 시기는 日本書紀 에 전하는 전지왕대일 가 능성이 크다(연민수, 2005,`古代日本의 한반도계 氏族의 역할-西文氏와 東漢氏를 중심으로-a, 한일관계사연구논집 3 임나문제와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한편, 일본 나라시대의 최고의 고 승이었던 行基의 墓誌에는 本出於百濟王子王爾之後 라 하여 행기를 王爾 즉 王仁의 후예라고 기록하고 있다(齊藤忠 編著, 1983, 古代朝鮮 日本金石文資料集成, 吉川弘文館). 행기의 묘지 명에 의하면 왕인의 후예씨족들은 적어도 8세기 중엽까지는 그들의 선조의 본관을 백제로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22) 上毛野君 : 上毛野氏는 下毛野(시모츠케노)氏와 함께 崇神의 황자인 豊城入彦命(토요키이리히코 노미코토)의 후예를 칭하는 皇別氏族이다. 天武 13年(684)에는 朝臣姓을 사성받는 당대 유력씨 족이었다. 新撰姓氏錄 左京皇別條에 의하면 上毛野朝臣은 日本書紀 웅략 9년 7월조에 보이 는 田邊史伯孫(타나베노후히토하쿠손)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이는 원래 河內(카와치)지방에 있던 田邊史가 東國의 上毛野지방(현 群馬縣 지역)으로 이동하여 上毛野氏가 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 다(三品彰英, 1964,`荒田別 田道の傳承-歸化人と上毛野氏-a, 朝鮮學報 31). 田邊史는 河內 지방의 도래인 집단으로 일본서기 웅략 9년 7월조에 의하면 王仁의 후예씨족인 書首(西文)氏 와 혼인관계를 맺었다. 이 書首(西文)氏와 田邊史의 밀접한 관계가 그대로 田邊史의 후신인 上毛 野氏와의 관계에 반영되어 王仁의 초빙에 활약하는 荒田別 巫別의 기사가 첨가되었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김은숙, 1988-b,`西文氏의 歸化 傳承a, 歷史學報 118). 123) 荒田別 巫別 : 주 45) 참조. 봄 2월. 王仁이 왔다.125) 이에 태자 道稚郞子는 王仁을 스승으로 삼았다. 여러 典籍을 배우니 통달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이른바 王仁은 書首(후미노오비토)126)의 시조이다. 124) 阿直岐史 : 古事記 應神段에는 阿直史로 나온다. 天武 12年(683) 10月에 連姓을 받고, 承和 元 年(834) 9월에는 阿直史福吉 등 3인이 淸根宿 로 改姓되었다. 新撰姓氏錄 石京諸番 下에 安勅連. 百濟國魯王後也 라고 되어 있다. 安勅은 阿直과 음이 통한다. 魯王에 대해서는 毗有王 의 誤記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정확히 알 수 없다. 史(후히토)는 야마토 정권에서 문서기록을 담 당했던 씨족에게 주는 姓으로 주로 도래계 씨족이 사성받았다. 대체로 6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걸쳐 성립된 것으로 여겨지며(加藤謙吉, 1995, 史姓の成立とフミヒト制 日本古代の社會と 政治, 吉川弘文館), 史姓을 가진 도래계 씨족으로는 王辰爾의 후예씨족인 船史 白猪史 津史 가 유명하다. 125) 王仁이 왔다 : 주 121) 참조. 古事記 應神段에 의하면 和邇吉師(王仁) 論語 10권과 千字文 1권을 가지고 왜에 건너갔다고 전한다. 그런데 천자문은 중국남조의 梁武帝(502~549)가 周興 嗣에게 명하여 편찬한 것으로 연대적으로 맞지 않다. 126) 書首 : 文首 또는 일반적으로 西文(카후치노후미)氏라고 하며 王仁의 후예씨족(주 121) 참조). 비 교적 이른 시기의 도래전승을 갖고 있는 대표적인 도래계 씨족으로 馬史 櫻野首 高志史 등은 동족이다. 西文氏는 河內國 古市郡(현 大阪府 羽曳野市)을 중심으로 야마토 정권에서 문서행정을 담당하는 문필씨족이었다. 西文氏는 姓이 首(오비토)이면서도 문필 담당의 史(후히토) 집단 위에 있었던 존재였다. 天武 12년(683) 9월에는 連을, 同 14년 6월에 忌寸姓을 받았다. 延曆 10년(791) 4월에는 그 일부가 宿 로 改姓되었다. 한편, 5세기 후반 이후 西文氏와 함께 기록 등의 전문직에 종사했던 도래씨족으로 阿知使主(아치노오미)의 후예를 칭하는 東漢(야마토노아야)氏 혹은 倭漢 氏가 있었다. 日本書紀 敏達 元年(572) 5月條에서는 西文氏와 東漢氏를 가리켜 東西諸史 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런데 續日本紀 卷40 延曆 10年(791) 夏四月條에는 西文氏의 후예인 文 忌寸最弟가 자신의 조상인 王仁의 출자를 중국 漢高祖의 후예라고 칭하면서 천황에게 宿 의 姓 을 받기를 청하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에 의하면 西文氏는 8세기 후반부터 중국 황제 후예씨족임 을 칭하고 있는데 新撰姓氏錄 左京諸番 上에도 文宿. 出自漢高皇帝之後鸞王也 라고 같은 기 록이 보인다. 이렇게 서문씨가 漢高祖의 후예씨족임을 칭하게 된 것은 前漢시대 王氏의 낙랑지역 에의 이주에 관한 역사적 지식이 반영된 것으로 倭漢氏가 延曆 4年(785)에 後漢靈帝 증손인 阿智 王을 조상으로 주장한 것이나 百濟 왕족에 대한 賜姓정책 등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金恩淑, 1988-b, 앞의 글). 한편 井上滿郞에 의하면 씨족들의 출자개변은 고대 일본이 중국

48 日本書紀 是歲 49 加羅에 보냈다. 이에 정병을 주며 襲津彦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분명히 신라 이 해에 백제 阿花王이 薨하였다.127) 천황이 直支王128)을 불러 그대는 나라로 돌아가서 왕 129) 위를 이으라. 라고 하였다. 이에 다시 東韓의 땅을 주어 보냈다. 131) 130) <*東韓이란 甘羅城 132) 高難城 爾林城 이 이것이다.> 가 방해하여 체류하고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빨리 가서 신라를 치고, 그 길을 열도록 하 라. 라고 詔를 내렸다. 이에 木 宿 등은 정병을 이끌고 나아가 신라의 국경에 이르렀 다. 신라왕은 놀라 服罪하였다. 이에 弓月의 人夫를 거느리고 襲津彦과 함께 돌아왔다. 8월 應神天皇 25년(294) 133) 134) 8월. 平群木 宿 (헤구리노츠쿠노스쿠네) 的戶田宿 (이쿠하노토다노스쿠네) 를 문화에의 동경이 강했고 견당사가 빈번히 행해질 무렵에 자신의 씨족을 중국황제에 결부시키는 일에 의해 이익을 얻으려고 했던 것이 동기라고 한다(1987, 渡來人, リブロポ一ト, 173쪽). 127) 이 해에 薨하였다 : 阿花王은 阿莘王을 말한다. 阿莘王의 사망시기에 대해서는 三國史記 권25 백제본기 阿莘王 14년(405) 9월조와 일치한다. 128) 直支王 : 支王(주 105) 참조). 전지왕의 귀국과 왕위 계승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권25 백제본 기 전지왕 원년조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29) 이에 보냈다 : 應神 8년 춘3월조에 인용된`百濟記a에는 阿花王이 즉위하여 귀국에게 無禮 하자 枕彌多禮와 峴南 支侵 谷那의 東韓 땅을 빼앗았다는 기사가 나온다(주 104) 참조). 130) 甘羅城 : 현 전북 咸悅. 應神 8년 춘3월조에 인용된`백제기a에는 峴南으로 나온다. 131) 高難城 : 현 전남 谷城. 應神 8년 춘3월조에 인용된`백제기a에는 谷那로 나온다. 132) 爾林城 : 應神 8년 춘3월조에 인용된`백제기a의 支侵과 같은 것으로 보아 현 전북 任實로 비정 하거나(鮎貝房之進, 1931, 앞의 글), 전북 金堤郡 利城으로 보기도 한다(末松保和, 1949, 앞의 글, 70~77쪽). 日本書紀 에서 爾林이라는 지명은 현종 3년(487) 시세조와 흠명 11년(550) 4월 조에도 보인다. 133) 平群木 宿 : 古事記 에 武內宿 의 아들인 平群都久宿 로 나오며 平群(헤구리)氏 등의 조 상이다(주 94)와 주 97) 참조). 古事記 履中段에 의하면 住吉仲皇子(스미노에노나카츠미코)의 모반사건 때 履中을 구출하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平群(헤구리)氏는 姓이 臣이며 천무 13년 (684)에 朝臣姓을 받는다. 5세기 중후반 雄略朝부터 仁賢朝에 걸쳐 大臣을 배출했다고 하는 전 승을 가진 씨족으로 6세기 초 武烈朝에 몰락한다. 平群都久宿 가 武內宿 계보에 포함되는 것 은 推古朝 전후의 시기이다(塚口義信, 1980, 앞의 글). 推古朝 전후시기에 平群氏 일족은 蘇我氏 와 함께 物部討伐軍에 참가하거나 征新羅軍의 장군으로 등장하는 등 蘇我氏 밑에서 군사적으로 활약하고 있다. 특히 崇峻卽位前紀(587)에 物部大連守屋의 모반을 토벌하여 崇峻 즉위에 공을 세운 장군으로 등장하는 平群神手는 平群木 宿 와 유사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이에 平群木 宿 는 平群神手를 과거에 투영한 가상의 인물일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김은숙, 1988-a, 앞의 글). 이와 관련하여 平群氏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平群谷 고분군의 축조연대를 6세기 중엽 이후로 보고 平群氏가 중앙호족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6세기 중엽이후로 보아야 한다는 연 구(辰巳和弘, 1972,`平群氏に關する基礎的考察a(上), 古代學硏究 64)도 참고 된다. 백제의 直支王이 薨하였다.135) 이에 아들 久爾辛136)이 왕위에 올랐다. 왕이 어렸다.137) 大 134) 的戶田宿 : 的戶田宿 의 加羅 파견 기사는 日本書紀 에 보이는 的(이쿠하)氏에 관한 최초의 기사인 동시에 的氏의 시조전승에 해당된다. 日本書紀 仁德 12년 8월조에는 的臣의 조상인 盾 人宿 가 고구려에서 헌상한 철과녁을 관통시켜서 的戶田宿 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는 전승이 있다. 的氏는 古事記 孝元段에는 葛城長江會都毘古의 후손으로, 新撰姓氏錄 山城國皇別條 에 의하면 武內宿 의 자식인 葛城襲津彦의 후손으로 나온다(주 76) 참조). 동족으로 葛城氏 平群氏 蘇我氏 許勢氏 등이 있다. 日本書紀 에 의하면 的氏는 任那日本府와 관련하여 河內 直과 함께 가야에서 활동하는 등 河內지역에 본거지를 두고(直木孝次郞, 1964,`的氏の地位と 系譜a, 日本古代の氏族と天皇, 書房) 왜국과 한반도 제국과의 외교 교섭에서 활약하였다. 135) 百濟의 薨하였다 : 백제 直支王( 支王)의 사망 시기는 三國史記 권24 백제본기에 의하 면 支王 16년(420)이다. 應神 25년은 日本書紀 기년으로 294년이므로 수정연대로 계산하 면 414년이 된다. 삼국사기 와는 6년의 차이가 난다. 한편, 宋書 卷97 列傳 百濟國條에 의하 면 景平 2年(424)에 餘映이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되어 있어 424년에도 전지왕이 생존한 것으 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일본서기 응신 39년(수정연대 428) 춘2월조에도 直支王이 新齊都媛 을 왜에 파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支王의 사망시기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차제 에서도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 응신 39년은 日本書紀 기년으로 308년으로서 수정연대를 적용 하면 428년이 된다. 428년은 삼국사기 에 의하면 毗有王 2년에 해당되고 前王은 久爾辛王이 다. 따라서 응신 39년의 직지왕은 일반적으로 久爾辛王의 誤記로 보고 있다. 136) 久爾辛 : 支王의 아들로 백제 제19대 왕인 久爾辛王(420~427). 三國史記 에는 구이신왕의 즉위가 전지왕의 사후 바로 420년에 이루어지는데(久爾辛王. 支王長子. 支王薨. 卽位), 일 본서기 에서는 전지왕의 사망 시기와 마찬가지로 414년에 즉위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 편, 宋書 卷97 列傳 百濟國條에는 구이신왕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支王이 416년(義 熙 12)에 동진으로부터 백제왕으로 책봉받고 있고, 또 424년(景平 2)에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였 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중국측 사서에서 전지왕이 424년까지 조공하였다는 기록에 주목하여 구이신왕의 재위 기간을 424년에서 427년까지로 보는 견해(盧重國, 1988, 앞의 글, 138쪽)와 중국측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하여 삼국사기 의 기록대로 420~427년으로 보는 견해 (李基東, 1974,`中國史書에 보이는 百濟王 牟都에 대하여a, 歷史學報 62)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