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기조강연 : 중세 동아시아에서의 해양 방어시설 -방어시설의 축조 배경과 성격Backgrounds and characteristics of building the marine defense fortresses of East Asia in the Middle Ages 차 윤용혁 肖彩雅 Coastal Defenses and Japanese Pirates in Qunzhou During 1522-1566 Xiao Caiya 일본 중세의 해양방어유적 - 원구방루(元寇防塁)와 해성(海城) 小野正敏 류큐국[琉球国]의 해양방어체제와 시설 The marine defense fortresses of Okinawa s Ryukyu Dynasty 특별발표 : 베트남 19세기 초 대표 해안 방어시설 - 후에 요새를 중심으로 09 Yoon, Yong-hyuk 천주(泉州) 가정시기(嘉靖時期 1522~1566)의 왜환(倭患)과 해양방어 The marine defense fortresses against mongol troops in the Middle Ages Contents 33 73 Ono Masatoshi 池田榮史 113 Ikeda Yoshifumi Nguyen Tuan Lam 147 이 169 The marine defense fortress of Hue Vietnam in early 19C 여말-선초 해양방어시설 구축의 역사적 배경 영 The historical background of the marine defense fortresses built in the Late Goryeo to Early Joseon Dynasty(麗末鮮初) Yi, Young 전라좌수영 관내 진성의 배치 -사정지적도를 중심으로- 박학순 The space arrangement of the marine defense fortresses in the southern coast of the Joseon Dynasty 부록 : 조선시대 전라수영(朝鮮時代 全羅水營) 191 Park, Hak-sun 223
16 우려가 있었으므로 방어시설 구축은 필수적이었다. 내성, 중성, 외성이라는 대략 3중의 성곽 구축이 이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이는 개경의 방어 체계를 옮긴 것인데, 동시에 해안을 둘러 외부로부터의 상륙과 침입을 방어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1270년 고려정부는 강화도에서의 항전을 포기하고 개경으로 환도하였지만, 잔여 항몽세 력인 삼별초는 이 같은 정부의 결정에 반발하여 서남단의 진도(珍島)로 거점을 옮기면서 고려 에 맞서는 새 정부를 구성하였다.14 이때 해변을 포함하여 성을 구축한 용장산성이 진도의 거 점이다. 진도에 들어온 이들은 다시 제주도를 후방기지로 확보하고 1271년 진도에 이은 새 거점으로서 제주도를 활용하였다. 이에 의하여 내외 토축으로 지은 항파두성과, 돌로 해안을 둘러친 환해장성 이 제주도에 이루어졌다.15 1273년 몽골의 공격으로 제주도가 함락되고, 바로 이어 1274년 몽골은 고려군을 앞세워 일본에 침입하였다. 문영의 역(文永의 役), 혹 은 갑술의 역 이라는 사건이다. 전투는 짧았지만, 대륙 세력의 내습이라는 이 미증유의 사건 이 가마쿠라 막부의 일본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가마쿠라 막부는 몽골의 재침 위협을 대비하였다. 상륙하는 적을 저지하기 위하여 해변에 구축한 차단성(遮斷城)이 원구방루[石築地] 이다. 원구방루(元寇防壘) 는 1276년 3월부터 8월까지 약 반 년 간 이마즈[今津]에서 카시이[香椎]에 이르는 하카타만[博多灣] 연안 약 20km에 걸쳐 구축한 방어시설이다. 고고학적 연구에 있어서는 일찍부터 이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진행되었고 7지구(10지점)에 걸치는 잔존 유적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16 그 리고 이 방루 는 1281년에 2차 침입 여몽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석축지의 방어선 때문에 연합군은 연안에 직접 상륙하는 데 실패하였고, 뒤늦게 도착한 구 남 송군과 다카시마[鷹島]로 일단 후퇴하여 있던 상태에서 태풍을 만나 궤멸되고 말았던 것이 다.17 이점에서 원구방루(元寇防壘) 의 구축은 대륙세력의 침입을 막아 내는 데 크게 기여하 였던 방어시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해안을 따라 석축 방어시설을 길게 구축한 것은, 제주도에서의 전례가 있다. 제주도의 환해장성(環海長城) 이 그것이다. 1270년 경 시공되 14) 동아시아 해양사의 관점에서 삼별초에 대하여 접근한 근년의 연구로서 강봉룡의 논고(2011, 몽골의 침략과 고려 무인정권 및 삼 별초의 도서해양전략, 동양사학연구 115, 동양사학회)가 유의된다. 15) 근년 삼별초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괄목할 만한 점이 있다. 이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尹龍爀, 韓國における最近三別抄遺 跡の調査と硏究, 韓國硏究センター年報, 九州大學 韓國硏究センター참고. 16) 일본에 있어서 근년 원구방루 의 연구 현황에 대한 소개는 윤용혁, 2013, 일본에 있어서 元寇 연구의 현황(1276-2011), 도서문화 41,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참고. 17) 근년 다카시마[鷹島] 해저 유적의 조사에 대한 개요는 池田榮史, 2012, 長崎縣松浦市鷹島海底遺跡の發掘調査, 戰跡からみ たモンゴル襲來, 九州史學會, 36-41쪽 참고.
17 어 1273년까지 기능하였다. 1273년 제주도를 함락하였던 여몽군은 1274년 큐슈 후쿠오카 상륙전의 주력이 되어 있었다. 이 같은 상응점 때문에, 석축의 방루를 구축하여 적을 저지한 다는 원구방루의 착상(着想)이 제주도의 환해장성과 관련성이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필자는 피력한 바 있다.18 아이디어의 공유에 대한 다양한 루트의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해안 거점 도시의 방어와 군사적 필요에 의하여 건설한 방어시설의 역사는 훨씬 오랜 역 사를 가지고 있다. 중국 산동(山東)의 봉래(蓬萊, 登州) 수성(水城)이 그 예가 된다. 산동반도 (山東半島)는 고대 이래 동아시아의 주요 통로로서, 한반도 혹은 일본과의 대외교류 및 군사 적 필요의 주요 관문이 되었던 곳이다. 신라의 고승과 학자들이 당을 출입한 것도 모두 이 산 동 반도를 통해서의 일이었다.19 634년(당 정관 8) 봉래진(蓬萊鎭)을 처음 설치하고, 707년(당 神龍 3) 등주(登州)의 치소가 된다. 1042년(북송 慶歷 2) 해로를 이용한 거란의 남침을 막기 위하여 해구(海口)에 말발굽[馬蹄] 형태의 토축을 쌓고 도어수채(刀魚水寨, 刀魚寨) 20라는 방어 요새를 구축하였다. 이 시기 요(遼) 금(金)의 침입 위협으로 경제적 교류보다는 군사적 성격으로 전환되었다. 1376년 등주(登州)는 1주 7현의 영현(領縣)이 딸린 부(府)로 승격되었 는데, 이 무렵 방어 시설을 강화하여 성곽을 수축하고 뒤이어 그 시설을 보강함으로써 해항 (海港)과 육지를 묶어, 진가공(進可攻) 퇴가수(退可守) 의 군사적 거점으로 발전하였다.21 봉래(蓬萊) 수성(水城)이 근년 특히 한국에서 주목된 것은 2005년 수성(水城) 안에서 발견 된 2척의 고려 고선(古船, 봉래 3 4호선) 때문이었다. 명(明)초기의 선박(봉래 2호)과 함께 발견된 이 배는 특히 3호선의 선상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고려시대 도자기류가 출토함으 로써 해외에서 발견된 고려 선박 으로 주목을 끌었다. 발굴보고서에서는 이들 선박의 국적 에 대한 문제는 논의되어 있지 않으나, 그 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열린 신안선 발굴 30주년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봉래 3 4호선을 고려고선(高麗古船) 으로 지칭하여 발표하 였다.22 편년에 대해서는 김성범이 고려 말 조선 초 로 규정하였는데, 출토유물 중 청자 접시 의 편년을 감안한 것이었다.23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에 걸치는 이 시기는 왜구의 피해가 18) 윤용혁, 2009, 삼별초와 여일관계, 몽골의 고려.일본침공과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187쪽 19) 신형식 외, 2004, 중국 동남연해지역의 신라유적 조사,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53-76쪽. 20) 도어채(刀魚寨) 라는 것은 당시 송 수군의 전선(戰船) 모양이 도어(刀魚)와 같은 형태라는 것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山東省文 物考古硏究所 外, 2006, 蓬萊古船, 文物出版社, 8쪽) 21) 山東省文物考古硏究所 外, 2006, 蓬萊古船, 文物出版社, 3-9쪽. 22) 袁曉春, 2006, 中國蓬萊水城古船發掘與成果, 14세기 아시아의 해상교역과 신안해저유물 (신안선발굴 30주년 기념 국제학술 회의 자료집) 국립해양유물전시관, 477-490쪽 참조. 봉래 3 4호선이 고려 선박으로 규정된 것은 김성범과 김병근의 견해(2006, 韓國安佐島船和中國蓬萊第3號船的比較硏究, 文集 )가 반영된 것이었다. 23) 김성범, 2009, 중국 봉래수성 출토 고려선, 한국중세사연구 27, 258-260쪽.
24 의 조건에 대한 문제이다. 이 시기 타이완은 국가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서 침입할 만 한 이유가 불분명하고, 더욱이 몽골군을 맞아 싸울만한 조직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48 이에 비 하여 류큐왕국의 오키나와는 해양의 교류 거점의 확보 및 일본을 압박하는 효과도 있었기 때 문에 원정을 검토할 만한 대상으로서 보다 적합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보는 것이다. 오키나와는 13세기 이후 대형 구스크[城]가 조영되기 시작하는데, 포첨구스크[浦添城]에 근거한 영조왕권(英祖王權, 1260-1299)의 성립이 그 시초로 인식되고 있다.49 14세기에는 오키나와 각지에 지역에 거점을 둔 정치세력이 대두하면서 중산, 남산, 북산의 삼산시대(三山 時代)가 전개된다. 중산왕국(中山王國)은 찰도왕(察都王, 1350-1395) 때인 1389년(창왕 1) 고려에 사신을 보내 공식적 교류의 시초를 열었다. 고려도 이에 대해 답사(答使)를 파견함으 로써 류큐왕국과 조선왕조는 본격적 교류의 시대를 맞게 된다. 이 시기 창궐한 왜구는 오키나 와에도 영향을 미쳤고, 이에 의하여 발생한 피로인(被虜人) 문제는 조선왕조와 류큐왕국의 관 계를 보다 밀접하게 만드는 한 가지 요인이 되었다.50 1406년 남산(南山)의 쇼하시[尙巴志]에 의하여 중산 왕통은 무너졌고, 이로부터 이른바 상씨(尙氏) 왕조가 개시된다. 우라소에[浦添] 시대는 종식되고 슈리성(首里城)이 개발되어 슈 리성은 1429년부터 1879년까지 450년 간 류큐왕국의 왕성이 되었다.51 왕궁이 있는 슈리성 의 외항인 나하[那覇]항에는 오모노구스크[御物城]라는 해변성이 구축되어 있었다. 무역과 관 련한 저장용 창고 및 방어 요새의 성격을 갖는 것인데, 주변 해저에서는 이미 1908년에 조선 의 도자기 유물이 다수 수습된 바 있다.52 13 14세기 오키나와 역사 및 방어시설 관련의 중요한 문제는 대형 구스크 의 출현에 대 한 문제이다. 오키나와 구스크[城]의 실수(實數)는 250개소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그 본질에 대해서는 성역(聖域, 拜所)설과 방어집락 설로 나누어져 있다.53 오키나와에 있어서 대형 구스 크의 출현이 13 4세기에서 비롯되고 그 변화가 매우 급격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구스크시대 로의 돌입 계기는 외부로부터의 충격 혹은 도래(渡來)의 가능성이 역시 크다고 생각한다. 이 48) 타이완은 16세기 유럽인에 의하여 발견되기 전까지도 이렇다 할 정치체나 문명이 존재하지 않았다. 周婉窈, 2007, 圖說 臺灣の 歷史, 平凡社, 27-41쪽 참조. 49) 安里 進, 2006, 琉球の王權とグスク, 山川出版社. 50) 이훈, 2002, 인적 교류를 통해서 본 조선 유구관계, 조선과 유구, 아르케. 51) 슈리(首里) 의 지명 어원에 대해서는 조선의 수도 서울(한양) 에서 옮겨온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多和田眞淳, 1980, 古都首 里と古圖, 古稀記念 多和田眞淳選集, 古稀記念選集刊行會, 222쪽. 52) 東恩納寬淳, 1941, 黎明期의 海外交通史, 83쪽. 53) 安里 進, 1998, 考古學におけるグスク論爭の整理と問題點, グスク 共同體 村, 榕樹書林.
25 러한 점을 고려하면 13세기 후반 동아시아에 있어서 몽골세계의 전반적 확대와 같은 외부로 부터의 충격이 오키나와에 있어서의 대형구스크의 출현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구스크의 발굴 조사 보고에 의하면 중국의 자기류가 보편적으로 확인(確認)된다. 수준 높 은 기술이 동원된 축성 기술의 원류에 대해서는 중국과 한반도 기원설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 지고 있지만, 구체적 결론에 이르고 있지 못하다.54 이와 관련, 최근 국내에서는 삼별초와 같 은 고려로부터의 집단 이동을 지목하는 논의가 제기된 바 있다.55 1273년 고려에서의 삼별초 항몽세력의 붕괴, 1276년 몽골에 의한 남송의 수도 임안(臨安, 현 항주)의 함락과 같은 대륙 의 정세 변화가 오키나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구명해 보아야 할 과 제이다. 그러나 이 같은 몽골 세계의 확대가 오키나와 제도(諸島)에서의 정치 세력 혹은 국가 발생의 기폭제가 되고, 국가 간의 상쟁이 다시 대형 방어시설의 성립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즉 13 4세기의 대형구스크 출현에는 오키나와 내부의 정치적 여건만이 아니라 이 시기 동아 시아 대외 정세의 변화가 한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56 Ⅵ. 맺는말 동아시아에 있어서 13 14세기는 전란의 시대였다. 13세기는 몽골 세계의 확대에 의하여 전란은 대륙을 넘어 해양으로 확산되었으며, 14세기 이후에는 일본 열도에서 발생한 왜구가 동아시아 해역 일대를 다시 소요와 혼돈에 몰아넣었다. 이러한 침략의 파도를 막기 위하여 각 지역에서 15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많은 해안 방어시설들이 축성되었다. 마침 이 시기(14세기 후반)에 원과 명, 고려와 조선, 가마쿠라와 무로마치 등 동아시아 각국의 정 권 교체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짐으로써 혼돈의 폭과 파장은 적지 않았다. 몽골의 군사적 압박으로 고려에서는 지금까지 주목되지 않았던 연안 도서의 중요성이 부각 되었으며, 특히 고려는 몽골에 저항하는 주요 방편이 국가의 중심을 섬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54) 嵩元政秀, 1980, 中 近世考古學의 動向 - グスク(城), 考古學ジャーナル 182, 39-41쪽. 55) 임영진, 2012, 오키나와 구스쿠의 축조 배경 - 삼별초 세력의 이주 관련성, 호남문화연구 52, 전남대 호남문화연구원. 그러나 이것이 구체화되기 위해서는 앞으로 보다 적극적인 자료의 뒷받침이 필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56) 오키나와가 포함된 것은 아니지만 중세 동남아시아와 고려, 조선왕조의 교류에 대하여는 조흥국의 논고(1999, 근대 이전 한국과 동남아시아간 접촉에 대한 역사적 고찰, 국제 지역연구 8-1, 서울대 국제학연구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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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천주(泉州) 가정시기(嘉靖時期 1522~1566)의 왜환(倭患)과 해양방어 肖 彩 雅 泉州海外交通史博物馆 Ⅰ. 명나라 천주 해양방어시설의 기본구도 Ⅱ. 가정시기 천주(泉州)의 왜환(倭患) Ⅲ. 천주의 해양방어체제의 보완과 재건 Ⅳ. 결어 명나라의 해양방어체제는 하나의 위소(衛所)를 중심으로 보(堡), 채(寨), 돈후(墩堠), 봉수 (烽燧), 순검사(巡檢司) 등이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연동 방어체제로 구성되어 완벽하고 체계 적이고 층차가 분명하였다. 그 이념과 초반의 구조는 상대적으로 완벽했지만 결국 운영과정 에서 결함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정시기(嘉靖時期) 왜의 끊임없는 도발로 인해 명나라 의 해양방어체제는 점차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당국은 왜환을 막는 동시에 해안방어 구조를 재정비하여 천주[泉州]의 해양방어체제를 보완, 재건하였다. 명나라 해양방어체제의 축소판 으로 일컬어지는 천주의 해양방어체제의 정비 과정을 통해 명나라 전체의 해양방어 전략이 외양(外洋)공격형에서 연안 수비형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34 Ⅰ. 명나라 천주 해양방어시설의 기본구도 위(衛), 소(所), 보(堡), 채(寨), 돈후(墩堠), 봉수(烽燧), 순검사(巡檢司)로 이루어진 연동 체제는 완벽하고 체계적이고 층차가 분명하였다. 진강현지 도광판(晉江縣志 道光版) 의 해방지(海防志)에 따르면 홍무 20년, 강하[江 下]의 제후 주덕흥(周德興)을 복건으로 보냈다. 3정1호(三丁一戶)1 로 해안을 지키는 술병(戌 兵)을 뽑아 왜를 막았으며 군사 요충지에 위소(衛所)를 이전하였다. 당시 천주에 위(衛) 하나 를 설치하고 영녕(永寧)이라 불렀고 수어소(守禦所) 다섯개를 설치하고 각각 복전(福田), 숭무 (崇武), 중좌(中左), 금문(金門), 고포(高浦)라 불렀다. 순검사(巡檢司)는 19개였고, 같은 해에 오서(浯嶼) 수채(水寨)를 설치하였다. 홍무 21년에는 탕화(湯和)에게 명하여 복건성과 광동성 해안가를 순시하고 성을 쌓고 군사를 늘리도록 하였다. 영녕지휘사(永寧指揮使)와 숭무, 복 전, 금문, 고포 천호소를 신설하였다. 2 (<표 1> 명나라 천주 해양방어표, <표 2> 천주 순검사표, <표 3> 명나라 천주 군사 주둔표 및 첨부 이미지1, 2 참조) <표 1> 천주(泉州) 해양방어표 유형 명칭 설치시기 위치 부연위 (府沿卫) 천주위 (泉州卫) 홍무원년 (1368) 천주부 성내 연해위 (沿海衛) 영녕위 (永寧衛) 홍무 20년 (1387) 또는 홍무 27년 30도(都)에 설치 개 요 개수 한채 (悍寨)21 성곽은 둘레 875장(丈)(만력부지에는 895장으로 기록됨), 터의 넓이 1장 5척, 높이 2장 1척이었다. 와포(窩鋪)는 32개(만력부 지에는 31개로 기록됨)이며 성문은 다섯 개로 남쪽은 금오(金鰲), 북쪽은 옥천(玉泉), 동쪽은 해녕(海寧)과 동영(東瀛), 서쪽은 영청 (永淸)이라 불렀고 그 위에 누(樓)를 지었다. 성 밖에는 호(濠)를 팠는데 넓이는 1장 6척으로 중간중간에 큰 돌을 끼워 넣었으며 어떤 곳은 깊고 어떤 곳은 얕았다. 영락(永樂) 15년 성 둘레를 세 척 넓히고 대문에는 월성(月城)을 신축했다. 정통(正統) 8년 에는 각 대문마다 적대(敵臺)를 증설했다. 한채152 * 지명은 [ ]로, 한문 설명은 ( )로 표기함-역자 주 1) 가문에 성인 남자 세 명이 있으면 그 중 한 명을 현역 군인으로 입역시키는 제도-역자 주 2) 천주부지 권 24 군제(軍制)의 기록에 의하면 홍무 21년에 강하의 후 주덕흥을 해안가로 파견하여 순검사 18개를 설치하고 또 대 단 무태산 밖에 수채 하나를 만들었다가 경태(景泰) 3년에 하문 중좌소(廈門 中左所)로 이전하였다. 가경 말에 왜의 침략으로 군사 가 유명무실해지자 마을의 향용(鄕勇)들을 병사로 훈련시켰다.
35 유형 명칭 설치시기 위치 개 요 천호소 수어 (千戶所 守禦) 숭무소 [崇武所] 홍무 20년 (1387) 혜안[惠安]현 동쪽 27도 성곽은 둘레 737장, 터의 넓이 1장 3척, 높이 2장 1척, 와포 16개(만력부지에는 36개)이며 성문 제개 위에 누를 지었다. 영락 15년에 성곽을 4척 높이고 동과 서에 월대를 증축했다. 한채1 봉수 223 천호소 수어 (千戶所 守禦) 복전소 [福全所] 홍무 20년 (1387) 진강[晉江] 15 도 성곽은 둘레 650장, 터의 넓이 1장 3척, 높이 2장 1척이었다. 와 포는 16개이고 성문 네 개 위에 누를 지었다. 영락 15년에 성곽 을 4척 높이고 동, 서, 북 세 방향으로 월성을 증설했다. 정통 8년 에 적루 4개를 증축했다. 채1, 봉수104 천호소 수어 (千戶所 守禦) 고포소 (高浦所) 성곽은 둘레 432장 여장(女檣) 1장 7척 만력부지-둘레 450장, 높이 1장 7척), 터의 넓이 1장, 와포 16개, 성문 4개였다. 영락 15년에 성의 높의를 3척 더 쌓았고 월성을 신축했으며 정통 8년 에는 적대를 신설하였다. 한채3, 봉수55 홍무 20년 성곽은 둘레 630장, 터의 넓이 1장, 여장(女檣)2장 5척(부지에는 높이 1장 7척으로 기록돼있다), 와포 36개였다. 성곽 밖은 호로 둘러싸있는데 호의 넓이와 깊이는 모두 1장 남짓하였다. 동, 서, 동안 오주서 남, 북 네 개의 성문 위에 누를 지었다. 영락 15년에 성의 곽의 [同安浯洲嶼] 높이를 3척 증축했고 서, 북, 남쪽에 월성 3개를 신축하였다. 정통 8년에는 적루 4개를 증축하였다. 가정 37년에 화재로 타버렸다. 강희 동안현지에는 27년으로 기록돼 있다. 한채8, 봉수66 홍무 27년 동안 가화서 [同安嘉禾嶼] 둘레 425장 9척 여장 1장 9척, 넓이 8척 5촌(만력부지에는 둘 레 425장, 넓이 9척, 높이 1장 9척이라고 기록돼 있다), 와포 22개, 타자(垜子) 496개가 있었다. 성문은 네 개로 남문은 흡덕 (洽德), 동 문은 계명(啓明), 서문은 회음(懷音)이라 불렀으며 그 위에 누를 지었다. 영락 15년에 3척 증축했고 월성을 신축하였으 며 정통 8년에 적대 4개를 증설하였다. 한채2, 봉수87 21년 본래는 대단[大 担] 남쪽의 태 무산[太武山]에 설치하였으나 나중에 가화서 [嘉禾嶼]로 옮 기었다. 바다와 70리 떨어져있 었다. 천호소 수어 (千戶所 守禦) 천호소 수어 (千戶所 守禦) 水寨 금문소 (金门所) 중좌소 [中左所] 오서 [浯嶼] 동안[同安]현 홍무 24년 서남 14도 홍무 23년 안인리 (만력부지) [安仁里] 대단[大担] 남쪽의 태무산[太武山]에 수채(水寨) 하나를 축조했다. 태경(泰景) 3년에 하문 중좌소[中左所]로 옮겼다.(천주부지 기록) 정통 초에 시랑(侍郞) 초굉(焦宏)이 바다에 홀로 떠있는 것을 안타 까이 여기어 봉화 수채를 송산(松山)으로, 남일(南日) 수채를 길료 (吉了)로, 오서 수채를 가화(嘉禾)로 옮겼지만 이름은 옛 명칭을 써왔다. 만력 30년에 수채를 진강[晉江] 석호[石湖]로 옮겼다. 개수 매년 영녕[永 寧]과 장주[漳 州]의 군사가 번갈아가며 이 곳을 지켰다.영 녕위: 관(官)26, 기군(旗 軍) 2242, 장주위: 관(官)12, 기군 (旗軍) 656 주: 위의 표는 천주부지(泉州府志) 만력(萬曆), 건륭판, 진강현지(晉江縣志) 도광판(道光版), 남안현지(南安縣志) 민국 판, 동안현지(同安縣志) (민국판, 안계현지(安溪縣志) 가정, 건륭판), 금문현지(金門縣志) 광서판, 하문지(厦門 志) 도광판, 영춘현지(永春縣志) 건륭판, 노강지(鷺江志), 팔민통지(八閩通志), 숭무소성지(崇武所城志), 가정 동남평왜통록(嘉靖東南平倭通錄), 주해도편(籌海圖編) 등 문헌을 통해 교정 후 작성함. 1. 혜안[惠安]현 북쪽 12도에 설치. 백수채(白水寨)와 동갱채(東坑寨)이다. 2. 진강 동남쪽 20도, 21도에 설치. 오산채(吳山寨), 중채(中寨), 갱미채(坑尾寨), 사제채(沙堤寨), 신채(新寨), 미채(尾寨), 고운채(古雲寨), 사포채(沙浦 寨), 창후채(倉後寨), 동점채(東店寨), 용파채(龍婆寨), 호변채(湖邊寨), 동포채(東浦寨), 심노채(深蘆寨), 용미채(龍尾寨) 3. 한채는 진강[晉江]현 동남쪽 26도 청산[靑山]에 설치하고 봉수는 모두 혜안[惠安]에 설치. 해두(海頭), 하두(下頭), 후황(後黃), 봉미(峯尾), 대산(大 山), 고산(高山), 소산(蕭山), 노두(爐頭), 하주(下朱), 후임(後任), 백사(白沙), 백기(白崎), 가산(柯山), 랄굴(獭窟), 대작(大岞), 고뢰(古雷), 적산(赤 山), 정태(程埭), 소작(小岞), 첨산(尖山), 청산(靑山), 마두(馬頭). 4. 한채는 진강 남쪽 10도 반경(潘徑)에 설치하고, 봉수는 전부 진강[晉江]에 설치하였다. 안평(安平), 갱산(坑山), 동문외(東門外), 양하(洋下), 진갱(陳 坑), 석곤(石悃), 반경(潘徑), 애포(隘鋪), 석두(石頭), 소하(蕭下) 5. 한채는 홍무 23년에 동안[同安]현에 설치하였는데 고포채(高浦寨), 대원당채(大員堂寨), 마란채(馬銮寨)등이 있었다. 봉수도 모두 동안에 설치하 였는데 각각 하기(下崎), 동관심(東關潯), 정니(亭泥), 유산(劉山), 소하(蕭下)등이 있다. 6. 한채는 동안[同安]현에 설치, 유오점채(劉五店寨), 오두채(澳頭寨), 우령채(牛嶺寨), 예림채(穢林寨), 구산채(甌山寨), 홍산채(洪山寨), 서산채(西 山寨), 천보채(天寶寨) 등이 있었고 봉수 6개는 석정(石井), 계동(溪東), 가내(街內), 하오(下吳)등 남안[南安] 4곳과 백엽두(白䈎頭), 엽료(䈎了) 등 동안[同安] 2곳이었다. 7. 한채는 동안[同安]현 서남쪽 22도에 설치, 동오채(東澳寨)와 오통채(伍通寨)였으며 봉수는 모두 동안[同安]현 서남쪽에 설치하였고 하문(廈門), 고 포(高浦), 경산(徑山), 동도(東渡), 하미(下尾), 유초(劉礁), 정상(井上), 용연(龍淵) 등이 있었다.
40 <그림 2-1> 출처: 주해도편(籌海圖編), 권 14, 명 정약증(鄭若曾) 저 <그림 2-2> 출처: 주해도편(籌海圖編), 권 14, 명 정약증(鄭若曾) 저 <그림 2-3> 출처: 주해도편(籌海圖編), 권 14, 명 정약증(鄭若曾) 저
41 다시 말해 명나라 때 천주에는 위(衛) 2개, 수어 천호소(守禦千戶所) 5개, 순검사(巡檢司) 19개, 한채(悍寨) 32개, 봉후(烽堠) 45개가 있었으며 기병(旗兵) 18, 911명, 궁병 1,650명, 수채병 2,500명으로 병력이 상당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천주 위소의 구축 연혁은 천주 해양 방어체제의 형성과 발전을 잘 보여주는 이정표이다. 이로써 위소가 주가 되어, 수채, 순검사, 돈대(墩臺) 등이 보조적 역할을 하는 해양방어 체제가 만들어졌다. 위소와 순사 (巡司)는 육로 에서, 수채(水寨)는 바다에서 적을 막았으며 해안의 봉수와 돈대는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어 완벽하고 체계적이며 층차가 분명한 수륙(水陸)방어체제를 구성하였다. 만약 이러한 시설이 제 역할을 충분히 발휘하였다면 왜를 제어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방어시설의 운영과 정에서 후방보급이 보장이 되지 못하여 군향(軍餉)이 늘 부족했고 위소(衛所) 관리의 부패와 병사가 도망가는 일 등이 빈번히 발생하여 노후된 위소 (衛所), 돈후(墩堠), 봉수(烽燧) 시설 이 파괴되어도 보수공사가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천주의 해양방어시스템에 허 점이 생기고 연동시스템이 본연의 역할을 발휘할 수 없어 결국은 유명무실해지게 되었다. <표 3>의 병사 수량의 급격한 감소가 바로 천주의 방어시스템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예이다. 또한 왜가 천주로의 대량 유입됨으로 하여 해양방어체제는 거의 와해되었다. 그 렇다면 가경시기 천주의 왜환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아래 부분에서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Ⅱ. 가정시기 천주(泉州)의 왜환(倭患) 천군[泉郡]의 왜변(倭變)은 홍무(洪武)3년(1370년)에 시작되어 가정 42년(1563년) 척계 광(戚繼光)이 선유[仙遊]에서, 유대유(俞大猷)가 조주[潮州]에서 왜를 격파하고 장기봉(張奇 峰)이 몇 해에 거쳐 잔여세력을 숙청하면서 전멸되었다. 3 가정 시기의 왜환에 대해 천주부 지(泉州府志), 진강현지(晋江縣志), 남안현지(南安縣志), 영춘현지(永春縣志), 덕화 현지(德化縣志), 안계현지(安溪縣志), 동안현지(同安縣志) 등 천주 각 현의 현지와 지방 문집, 필기에는 관련 기록이 남아있다.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표 4> 가정 시기 천주 [泉州] 왜환 현황 참조) 3) 남안현지(南安縣志) 권 49, 잡지 3, 기병(紀兵), 민국판, 대희주(戴喜朱) 편찬
46 위의 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가정 33년에서 45년까지 십여 년 동안 덕화현[德化縣] 한 곳 을 제외하고 천주부의 모든 지역은 왜의 침략을 당했다. 특히 해안지역인 진강[晉江], 동안[同 安], 혜안[惠安], 남안[南安] 등 네개 현은 왜가 침범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가정 37년부 터 41년, 5년 사이 천주 각 지역에서는 한 달에 한번 꼴로 병력을 동원하여 왜를 막는 등 왜와 싸우는 일에 목숨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짧은 십여 년 동안 천주 한 곳만 봐도 왜가 그토록 창궐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토록 큰 중국이 어찌하여 한개 현에도 못 미치는 왜에게 그토록 시달렸을까? 가장 큰 이유는 우리 백성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에는 돈 을 받고 왜를 도와준 자, 왜가 두려워 왜에게 타협한 자, 나라에서 기아와 역병에서 백성을 구 휼하지 못하자 왜의 돈을 받고 심지어 끄나풀 노릇을 한 자들이 있었다. 당시 왜의 수는 30만이 나 되었고 그 횡포가 4~5년간 이어졌다. 따지고 보면 그 중 2~3할이 왜였고 6~7할은 왜에게 굴복한 자들이었다. 4 명나라 조항(趙恒)이 이미 우리에게 답을 제시해 주었다. <표 4> 가정 시기 천주[泉州] 왜환 현황에서 보이듯 천주의 해양방어시설은 가정 시기 왜 의 침략이 창궐하던 때에 와서는 이미 유명무실해졌다. 1. 왜가 천주를 침략할 때 상륙지로 주로 이용했던 지점이 바로 방어시설이나 위소(衛 所)의 소재지 혹은 돈대(墩臺), 봉수(烽燧), 한채(悍寨)가 설치되어있는 곳이었다. 이는 당시 해양방어시설이 제역할을 하지 못하였고 위소와 봉후(烽堠) 등 시설이 유명무실 하였음을 보 여준다. 천주[泉州]의 해양방어시설은 새로운 구축이 필요했다. 2. 오서 수채(浯嶼 水寨)의 중좌소(中左所, 지금의 하문[廈門]항)로의 이전은 해양방어체 계가 외적의 침입을 막는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잃게 하였다. 오서 수채는 원래 대단(大担) 태 무산(太武山) 밖에 설치되어 대단섬과 소단섬 두 섬의 요충지에 있어 해문(海門)과 월항(月 港) 두 지역의 첩자를 제거하고 복주[福州]의 봉화[烽火] 수채, 소정[小埕] 수채, 흥화[興化]의 남일(南日)수채, 장주[漳州]의 동산(銅山) 수채와 어우러져 적을 막았었다. 하지만 이러한 역 할은 이미 유명무실해졌다. 오서[浯嶼]에서 수채를 철수함으로써 오히려 이 섬의 지리적 환경 이 적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원래의 군사요충지가 왜의 집결지로 전락되어 왜의 끊임없는 침 략을 받게 되었다.이는 천주 해양방어체계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시기에 다른 곳 의 수채도 대부분 내륙지역으로 이전하였다. 수채의 내륙으로의 이동은 명나라 해양방어 이 4) 천주부지(泉州府志) (건륭판), 권 73, 기병(紀兵), 조항평왜기략(趙恒平倭記略)
47 념의 변화를 말해준다. 이때로부터 명나라는 외양에서 적을 막던 적극적인 전략에서 해안에 서 적을 방어하는 전략으로 바뀌어 전반적인 해양방어체제가 보수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3. 위소(衛所)제도와 더불어 군사 둔전제를 실시하였다. 군인 가족은 나라로부터 땅, 종 자, 소 등을 받아 자급자족을 하도록 하였다. 나라로서는 막대한 군사비용과 물자를 아낄 수 있었다. 명태조 주원장은 경사(京師)에 군사 100만 명이 있어도 백성의 쌀 한 톨 먹지 않는 다 고 자랑스러워하였다. 둔전제의 실시와 더불어 황무지가 개간되었다. 군사 둔전제는 명나 라 위소제도의 전형적인 특징이었으며 위소제도가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위 소제도는 인력과 물자를 최대한 동원하였지만 그 폐단이 날이 갈수록 드러나기 시작하여 군 사 식량부족 문제, 군관이 토지를 대량으로 소유하거나 병사가 도망가는 등 일련의 문제를 야 기시켰다. 이로 말미암아 위소(衛所)의 병력이 현저히 줄어들고 전투력이 약해졌다. 백성이 왜의 앞잡이가 되어 왜가 천주 변경에서 노략질하는 것은 식은죽 먹기와 같았다. 4. 돈후(墩堠), 봉수(烽燧)와 같은 전방 관측시설에 대한 보수가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았 다. 돈대에서 떨어진 돌을 가져다 다른 용도로 사용하였다. 라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 다시피 법이 엄격하지 못하여 해양방어시설이 늘 파괴의 위험에 직면해있었다. 전망대로 사 용한다. 적의 배가 쳐들어오기 전에 백성들이 먼저 감지하고 경계하고 피함으로써 태연 하게 적을 막고 힘을 합쳐 적과 싸운다. 는 역할을 못하게 된 것이다. 가정 시기 천주의 왜환이 가장 심각했던 상황에서 천주의 지방관리와 정부는 해양방어시 설의 구축에 대해 다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Ⅲ. 천주의 해양방어체제의 보완과 재건 가정시기, 명나라의 전반적인 해양방어시스템에 허점이 드러나 왜의 침략에 직면하였다. 명나라 정부는 해양방어에 대한 연구의 일환으로 주해도편(籌海圖編), 주해중편(籌海重 編), 가정동남평왜통록(嘉靖東南平倭通錄), 비왜기(備倭記) 와 같은 책을 집대성하였다. 책에는 왜를 막기 위해서는 왜의 근원지를 파악하고 역적을 제거하고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 고 향병(鄕兵) 훈련을 강화하며 징병을 신중히 하고 바다를 막고 해안을 공고히 하며 정찰을 자주 하고 성을 쌓고 보갑제를 실시하는 등 전략이 자세히 나와있다. 이러한 전략은 그 후 복 건 도어사(都御使), 순무와 천주의 지방관리들의 해양방어 지침이 되었으며 그들은 이 내용에 근거하여 해양방어체제를 보완 재건하였다. 위로는 중앙정부의 계획이 있었고 아래로는 지
48 방 관리들의 집행과 백성들의 지원이 있어 천주의 해양방어체제는 새롭게 조정되었다. 1. 민병과 객병(客兵)을 뽑고, 향병과 어병(漁兵)을 연합, 참장(參將) 및 파총(把摠)을 충원하고 돈대(봉수), 수채를 복구하였다. 가정 37년 도어사(都御使) 왕순(王詢)이 명을 내려 민병을 증원하여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 천주의 민병 수는 846명으로 기병(機兵)과 함께 훈련을 받았다. 그 해 왕순은 또 복건(福建)의 수군(水軍)을 3갈래로 나누어 조안[詔安], 남일[南日], 오서[浯嶼], 동산[銅山], 현종[玄鐘]등 지에 주둔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41년, 총병 유대유가 돈대를 정비하여 적을 관측하는 용도 로 사용할 것을 청하였다. 가정 42년, 각 수채의 지휘를 흠이파총(欽伊把摠)으로 명하고 위마 다 지휘 한 명을 두고 병사를 지휘하게 하였다. 흠이파총은 도지휘의 명을 받아 움직이게 하 였다. 2. 성(城)과 보(堡)을 쌓아 왜를 막았다. 천주 각 현은 이 기간 동안 잇따라 성과 보를 쌓아 왜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표 5>가정 시기 천주 축성(築城) 현황표 참고) <표 5> 가정시기 천주의 축성 현황 시간 지역 현 황 혜안[惠安]현 청 초 고조우(顧祖禹)의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권 99 복건[福建] 5 천주[泉州]부 혜안[惠安]현 에 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명 가정 연간에 왜를 막기 위해 성곽을 축조하고 호(濠)를 팠다. 명 가정 31년(1552)년 총독 왕여(王忬)가 왜의 공격으로부터 절강[浙江]을 지키기 위하여 성을 설치할 것을 주청 하였다. 혜안[惠安] 지현 유문진(兪文進)이 성을 지었는데 둘레는 986장 5척, 터의 넓이는 1장 2척, 높이는 1장 9척이었으며 성가퀴는 1700여 개, 돌로 쌓았다. 문은 네 개로 남문은 통혜(通惠), 북문은 조천(朝天), 동문은 계명(啓明), 서문은 영안(永安)이라 불렀고 아래 위로 수관(水關)을 설치하였다 서쪽은 옥련관 (玉蓮關)이라 부르고 수문 두 개를 동쪽은 용진관(龍津關)이라 부르고 수문 세 개를 설치하였으며 각각 갑 (閘)이 있었다. 38년 월성을 쌓고 높이 3척을 증축했으며 성곽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적루(敵樓)2개와 적대 (敵臺) 3개를 설치하였다. 39년 호(濠) 주위에 깊이 1020장, 넓이 3장을 더 파고 41년에는 와포 망루를 설 치하였다. 가정 36년 (1557) 덕화[德化]현 가정 36년(1557년) 지현 등경무(鄧景武)가 처음으로 둘레 837장, 높이 1장 5척의 성원(城垣)을 쌓을 것을 주청하였다. 39년(1557년) 왜가 영춘[永春]을 침략하였다. 덕화[德化] 지현 장대강(張大綱)은 성곽 둘레가 너무 커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성벽의 둘레를 668장으로 줄이고 동과 서로 문 두 개만 설치할 것 을 요구하였다. 44년, 성 북쪽의 용심산(龍潯山)에 북진루(北鎭樓)와 와포를 설치하고 군사가 순찰하도록 하였다. 가정 37년 (1558) 천주[泉州]성 월성을 쌓았으며 성곽 북쪽의 호(壕)에는 큰 바위가 가로막고 있어서 물이 흐르지 않았다. 작은 성루(城 樓)를 짓고 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어 방어하였다. 남안[南安]현 남안[南安]현에는 원래 성곽이 없었다. 가정 37년 왜가 쳐들어와 관가와 민가 전부 훼손되었다. 지현 하여 려(廈汝砺)가 처음으로 성곽을 쌓을 것을 청하였다. 성곽은 돌로 쌓았는데 문 네 개, 누(樓)와 월성이 설치 되어 있었으며 남쪽 월성은 병영을 지키는 역할을 하였다. 성곽의 둘레는 774장이 넘고 성가퀴는 2024개, 적루 7개, 와포 36개가 있었다. 43년 돌로 700여 장이 넘는 길을 깔았으며 호 200여 장을 파고 만석파[萬 石坡]의 물을 끌어다 성곽 주변을 에워싸고 흐르게 하였다. 가정 31년 (1552) 가정 37년 (1558)
49 시간 지역 가정 37년 1558년 동안[同安]현 왜가 쳐들어오자 지현 서종석(徐宗奭)은 성곽의 높이를 3척 증축하였다. 둘레는 846장 8척, 서쪽과 남쪽 문은 겹문이었고 와포 59개를 설치하였다. 38년 비가 많이 내려 성곽 절반이 훼손되었다 도 지휘 백 진(白震)과 장인 동지(掌印 同知) 이시방(李時芳)이 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었다. 가정 37년 1558년 안평[安平] 보(堡) 37년 왜가 쳐들어오자 지현 노중전(盧仲佃)이 성곽을 쌓을 것을 주청하여 절반을 쌓았다. 적이 쳐들어와 백성들을 노략질하고 가자 진(鎭)의 지부(知府) 가실경(柯實卿)이 동안교를 부수고 돌로 나머지 부분을 쌓음 으로써 성곽이 완성되었다. 성곽의 둘레는 1027장 남짓하고 높이 1장 2척이었다. 문은 4개로 누(樓)가 설 치되어있고 와사(窩舍)와 수관(水關) 8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가정 37년 1558년 망천[輞川]진 읍내 37년 왜가 혜안[惠安]으로 쳐들어오자 41년 지현 진옥성(陳玉成)와 초계미(肖繼美) 등이 성곽을 쌓을 것을 주청하였다. 성곽은 둘레 700여 장, 높이 1장 8척이었으며 동과 서로 문이 하나씩 있었고 북쪽과 동쪽으로 또 작은 문이 하나씩 있었다. 영춘[永春]현 지명(至明) 가정(1522-1566) 연간에 왜를 막기 위해 성곽을 쌓기 시작했다. 청 초 고조우(顧祖禹)의 독사 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권 99 복건[福建] 5 천주[泉州]부 영춘[永春]현 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가정 연간에 왜를 막기 위해 성곽을 쌓았다. 성곽의 둘레는 삼리도 안 되었다. 지금은 편호(編戶) 14리이 다. 가정 39년(1560년) 왜가 영춘[永春]현을 침략하고 3문과 민가를 훼손하였다. 지현 만이충(萬以忠)이 적을 막지 못하고 성을 내주자 그때 처음으로 성곽을 쌓는 것이 논의되었다. 가정 40년(1561년) 덕화[德 化] 지현 장대강(張大綱)을 파견하여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성곽은 돌로 쌓았으며 높이가 꽤 높았다. 40년에는 둘레 518장 2척, 넓이 8척, 높이 1장 9척으로 증축하기 시작했으며 41년에는 성문 4개를 설치 하여 동문은 영휘[迎暉], 서문은 내덕[來德], 남문은 문명[文明], 북문은 공극[拱極]이라 불렀으며 돌로 쌓아 연방(連房)을 지키도록 하였다. 성곽 밖의 동쪽, 서쪽, 북쪽 호(壕)는 성곽 둘레만큼 팠으며 서남쪽 안계[安溪]현 청 초 고조우(顧祖禹)의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권 99 복건[福建] 5 천주[泉州]부 안계[安溪]현 에 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처음에는 성곽이 없었다. 가정 39년 왜가 선유[仙遊], 영춘[永春]을 갑작스레 들이치는 바람에 41년에 성곽을 쌓을 것을 의논하고 44년에 성이 완공되었다. 가정 39년 7월, 왜가 읍내로 쳐들어 와 성이 함락되자 41년에 처음으로 성곽을 쌓을 것을 의논하였다. 서 남쪽과 동쪽 긴 시내를 따라 돌을 쌓아 터를 만들면서 지현이 성곽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성곽의 둘레는 620장, 터의 넓이는 1장 8척이었고 성문 4개와 동서로 수문 각 하나씩 설치하였다. 44년, 성 밖에 돌로 쌓 아 연방(連房)을 보호하였다. 가정 39년 1560년 가정 41년 1562년 현 황 주: 위의 표는 천주부지(泉州府志) (만력(萬曆), 건륭판), 진강현지(晉江縣志) (도광판(道光版)), 남안현지(南安縣志) (민국판), 동안현지(同安縣志) (민국판), 안계현지(安溪縣志) (가정, 건륭판), 금문현지(金門縣志) (광서판), 하문지(厦門志) (도광 판), 영춘주지(永春州志) (건륭판), 팔민통지(八閩通志), 등 문헌을 참고하여 교정 후 작성하였다 천주 부(府)와 현에 성을 쌓았고 특히 백성들이 왜환을 두려워했으므로 지리적 요충지에 채보(寨堡)를 구축하였다. 채보는 주로 산간지대의 고을에 많이 세웠는데 동안[同安]지역에 그 수가 가장 많았다. 또한 진강[晉江]의 안평보(安平堡)는 길이가 십 여리나 되어 규모가 한 개 현 못지 않았다. 채보를 구축함으로써 천주의 해양방어는 한층 강화되었다. 3. 보갑법(保甲法)을 실시하여 방어를 강화하고 첩자를 몰아냈다. 보갑법은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한 법안이었지만, 비상시기에는 끄나풀을 경계하고 왜를 따르고자 하는 생각을 차단하는데 효과가 있었다. 천주 지역의 해양방어체제의 수정과 개선은 여전히 위소 중심으로, 수채, 순검사, 봉후,
50 돈대, 성곽 등이 함께 방어하는 기존의 구도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위소에 한해서만 행정소 속을 변경하거나 지휘를 담당하는 관리를 교체하고 시설을 개선하고 군사를 늘이는 등 일련 의 개혁을 진행하였다. 천주의 해양방어체제는 점차 공고해져 가경 후반기에 상대적으로 안 정적은 방어체제를 운영하는 기반이 되었다. Ⅳ. 결어 한마디로 명나라의 천주해양방어체제의 이론은 비교적 완벽하였다. 위소를 중심으로, 보 (堡), 채(寨), 돈후(墩堠), 봉수(烽燧), 순검사(巡檢司) 등이 보조적 역할을 하는 연동 해양방어 체제는 완벽하고 체계적이고 층차가 분명하였다. 위소(衛所) 또한 배치가 치밀하고 지리적 우 위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군사 요충지에 설치해 성을 지키고 공격을 막는데 유리하였다. 다만, 위소제의 운영과 함께 여러가지 문제점이 나타나 방어체제를 수시로 보완해야 했다. 왜의 침략은 당국으로 하여금 해양방어에 힘쓰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왜환이 가장 창궐할 때가 바로 해양방어체제를 수정, 보완하는 시점이었다. 전반적인 배치 구도는 그대로 두고 군 사 공급원과 지휘관에 대한 조정, 방어의 하드웨어적인 부분에 대해 개선한 것은 해양방어체 제를 공고히 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수채를 내륙으로 옮기고 해안에 채와 보를 증설한 것은 방어전략의 변화를 의미한 다. 기존의 방어전략이 적극적인 공격을 통해 방어했던 것이라면 이 시기에는 더 이상 출격하 지 않고 해안에서 적의 공격을 막는 보수적인 전략으로 바뀌었다. 명나라 전반적인 해안방어 체제의 한 부분으로서의 천주 지역의 해안방어체제의 조정을 통해 명나라의 해양방어전략이 보수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1 嘉靖时期泉州的倭患与海防 肖 彩 雅 泉州海外交通史博物馆 一 明朝泉州海防基本布局 二 嘉靖时期的泉州倭患 三 泉州海防体系的修正与重建 四 結語 明朝的海防体系由一个个以卫所为中心 辅以堡 寨 墩堠 烽燧 巡检司等的联动机 制构成的 它具有整体性 系统性 层次性 其理念及初期的建构都是相对完备 但是随着该 体系的运行 其缺陷随之显现 至嘉靖时期 在倭患炙热外在因素的影响下 作为整个海防体 系一环的泉州海防已如同虚设 当局在抵制倭寇的同时对海防布局进行调整 对泉州整个海 防体系进行修正与重建 作为明朝海防体系的缩影 从泉州海防体系调整中可一窥整个明朝 海防由主动出击御外洋趋向于固守沿岸的战略
52 一 明朝泉州海防基本布局 卫 所 堡 寨 墩堠 烽燧 巡检司等构成具有整体性 系统性 层次性的联动机制 据 晋江县志道光版 海防志载 洪武二十年 命江夏侯周德兴入福建 抽三丁之一为沿海 戌兵防倭 移置卫所当要害处 时泉设卫一 曰永宁 守御所五 曰福全 曰崇武 曰中左 曰金门 曰高浦 又设巡检司一十九 是年设浯屿水寨 洪武二十一年 命汤和行视闽粤濒 海地 筑城增兵 置永宁指挥使及崇武 福全 金门 高浦千户所 1(见表一 明朝泉州海防表 表二 明朝泉州巡检司表 表三 明朝泉州府驻军情况表 附图一 附图二) 综上 明代泉州有卫2 守御千户所5 水寨1 巡检司19 悍寨32 烽堠245 拥有旗军18 911名 弓兵1 650 水寨兵2 500 其兵力配比雄厚 泉州卫所的建置沿革正标示着泉州海 防体系的形成与发展 这就形成一种以卫所为主要承载体以及与所辖水寨 巡检 峰堠 墩 台等共同构成的海防布局体系 卫所 巡司可以控贼于陆 水寨可防之以海 沿海的烽燧墩 台可备瞭望 这种具有整体性 系统性 层次性的水陆结合的抗倭防御体系 这种守望相助 建制相对完备的体系 若能充分发挥 是足以抵御外敌 但是随着这个体系的运行 后勤保障 跟不上 兵饷缺乏扣银之事时时发生 卫所官员贪污事件屡发 卫所兵员逃亡事故渐次 卫 所 寨 墩堠 烽燧等设施没能及时修整 逐渐遭受破坏 倭寇炙热的加压下 使得整个明 朝的海防体系出现纰漏或者说这个体系的整体联动机制不能充分发挥 表三嘉靖时期泉州驻 军数量的急剧下降 是泉州驻防薄弱的表现之一 而倭大举入寇泉州使得其海防体系几近瓦 解 那么 嘉靖时期泉州的倭患之情况如何 详见下分解 1) 据 泉州府志 卷二十四 军制中载 洪武二十一年 遣江夏侯周德兴于沿海要害处置巡检司十八 复于大担南太武山外建浯屿 置水寨一 景泰三年 移厦门中左所 嘉靖末 倭奴为寇在籍之兵 徒有虚名 延复练乡勇为士兵 名外营为客兵 2) 要皆使民得以知寇至而为之备也
53 <表一> 泉州海防表 类别 名称 建置时间 地址 府沿卫 泉州卫 洪武元年 1368 泉州府城 永宁卫 或洪武 二十七年 寨 烽燧 1 悍寨2 在三十都 城周八百七十五丈 万历府志曰八百九十五丈 基广一 丈五尺 高二丈一尺 窝铺三十有二 万历府志曰三十有 一 为门五 南曰金鳌 北曰玉泉 东曰海宁 曰东瀛 西曰永清 各建楼其上 城外濠广一丈六尺 间凝大 石 深浅不同 永乐十五年 增广城垣三尺 门各增筑月 城 正统八年各门增置敌台 悍寨15 洪武二十年 1387 沿海卫 概况 2 守御千户所 崇武所 洪武二十年 1387 惠安县东 二十七都 城周长七百三十七丈 基一丈三尺 高二丈一尺 窝铺二 十六 万历府志三十六 门四建楼其上 永乐十五年 城增高四尺 筑东西月台 悍寨1 3 烽燧22 守御千户所 福全所 洪武二十年 1387 在晋江 十五都 城周长六百五十丈 基广一丈三尺 高二丈一尺 窝铺十 六 为门四 建楼其上 永乐十五年 增高城垣四尺 并 筑东西北三月城 正统八年 增筑四门敌楼 寨1 4 烽燧10 城周四百三十二丈 高建女樯一丈七尺 万历府志周围 四百五十丈 高一丈七尺 基广一丈 窝铺十六 门四 永 乐十五年 城增高三尺 筑月城 正统八年 增筑敌台 悍寨3 5 烽燧5 同安 浯洲屿 城周六百三十丈 基广一丈 高连女樯二丈五 府志注高 一丈七尺 窝铺三十六 外环以濠深广丈余 东西南北四 门各建楼其上 永乐十五年增高三尺并砌西北南三月城 正统八年增筑四门敌楼 嘉靖三十七年所署毁于火 康熙同安县志作万历二十七 悍寨8 6 烽燧6 同安 嘉禾屿 周四百二十五丈九尺 高连女樯一丈九尺 阔八尺五寸 万历府志作周围四百二十五丈 广九尺 高一丈九尺 窝铺二十二 垛子四百九十六 门四 南曰洽德 东曰启 明 西曰怀音 上个建楼 永乐十五年 增高三尺 筑月 城 正统八年 添增四门敌台 悍寨2 7 烽燧8 于大担南太武山外建置水寨一 景泰三年 移厦门中左所 泉州府志载 正统初年 侍郎焦宏 以其孤悬海中 乃徙烽火于松山 南 日于吉了 浯屿于嘉禾 各仍其旧称 备寇记 万历三十年 水寨移至晋江石湖 每岁分永宁 漳州二卫 军士更番备 倭于此 永 宁 卫 官 26 旗 2242名 漳州卫官 12名 旗 军 656名 洪武二十四年 同安县西 守御千户所 高浦所 洪武二十三年 南十四都 万历府志 安仁里 守御千户所 金门所 洪武二十年 守御千户所 中左所 洪武二十七年 水寨 浯屿 原设大担 南太武山 洪武二十一年 后迁嘉禾 屿 隔海七 十里 主: 本表根据 泉州府志 万历 乾隆版 晋江县志 道光版 南安县志 民国版 同安县志 民国版 安溪县志 嘉靖 乾隆版 金门县志 光绪版 厦门志 道光版 永春州志 乾隆版 八闽通志 筹海图编 等典籍进行校 正而成 1. 在惠安县北十二都 白水寨 东坑寨 2. 在晋江县东南二十 二十一都 吴山寨 中寨 坑尾寨 沙堤寨 新寨 尾寨 古云寨 沙浦寨 仓后寨 东店寨 龙婆寨 湖 边寨 东浦寨 深芦寨 龙尾寨 3. 悍寨在县东南二十六都青山 烽燧俱在惠安 海头 下头 后黄 峰尾 大山 高山 萧山 炉头 下朱 后任 白沙 白崎 柯 山 獭窟 大岞 古雷 赤山 程埭 小岞 尖山 青山 马头 4. 悍寨在晋江南十都 潘径 烽燧俱在晋江 安平 坑山 东门外 洋下 陈坑 石悃 潘径 隘铺 石头 萧下 5. 悍寨在同安县 洪武二十三建 高浦寨 大员堂寨 马銮寨 烽燧俱在同安 下崎 东关浔 亭泥 刘山 西卢 6. 悍寨在同安县 刘五店寨 澳头寨 牛岭寨 秽林寨 瓯山寨 洪山寨 西山寨 天宝寨 烽燧6 南安4处 石井 溪东 街内 下吴 同安2处 白叶头 叶了 7. 悍寨在同安县西南二十二都 东澳寨 伍通寨 烽燧俱在同安县西南 厦门 高浦 径山 东渡 下尾 流礁 井上 龙渊
64 时间 嘉靖三十九年 1560年 嘉靖四十一年 1562年 县城 情况 永春县 至明 嘉靖 1522-1566年 间 为防倭寇 始筑城 清初 顾祖禹 读史方舆纪要 卷99 福建5 泉州府 永春县 嘉靖间 因倭寇筑城 周不及三里 今编户十四里 嘉靖卅九年 1560 年 倭寇攻永春县 捣毁三门 破坏民房 知县万以忠失守 始议筑城 嘉靖四十年 1561年 委德化知县张大纲督之 砌以石 周围高丈许 四十年 始增筑长五百一十八丈二尺 广八尺 高一丈九尺 四十一年 成四门 东曰迎晖西曰来德南曰文明北曰拱极砌以石覆以连房城外 东西北浚壕壕周围如城数西南隅 安溪县 清初 顾祖禹 读史方舆纪要 卷99 福建5 泉州府 安溪县 旧无城 嘉靖三十九年倭自仙 游 永春突犯 四十一年始议筑城 四十四年城始完固 嘉靖三十九年七月 倭寇突至县 不能守 四十一年始议筑城 西南及东畔倚长溪一带砌石为 基 知县筑之 周围六百二六丈 高二丈一尺 基广一丈八尺 置四门 设东西二水门 四十四 年 砌城外以石覆以连房 主: 本表根据 泉州府志 万历 乾隆版 晋江县志 道光版 南安县志 民国版 同安县志 民国版 安溪县志 嘉 靖 乾隆版 金门县志 光绪版 厦门志 道光版 永春州志 乾隆版 八闽通志 等典籍进行校正而成 三 行保甲之法 修举而力行之 则处处有备 人人皆兵 奸究无所容 尤寓兵于农之法 保甲之法 虽说是控制老百姓 但是在非常时期 却对从倭之人有警戒作用 同时也断绝了 从倭之心 综上 泉州海防的修正与改进依旧是在以卫所为承载体 以水寨 巡检 峰堠 墩台 城 堡等共同构成的基本布局中进行的 这种体系保持建制以来的基本格局 只在卫所行政隶属 指挥官员的更换 防驻设施的提升及兵源等进行新一轮的调整 泉州海防体系得以巩固 这 样也使是泉州的驻防在嘉靖后半个世纪都相对平静 整个海防体系运行得相对顺畅 四 結語 总之 明代泉州海防体系建构理念相对完备 以卫所为中心 辅以堡 寨 墩堠 烽燧 巡检司等构成的联动防御体系 它具有整体性 系统性 层次性 算是较为完备 每个卫所 的选址都充分发挥天然地理条件 地处要冲 易守难攻 卫所的布局都较为严密 但因卫所制 运行后 出现种种的缺陷使得这种防御体系需要及时进行修正与改进 在面对倭患时 逼迫 当局重视海防 倭患的炙热之际即是海防体系调整之时 在整个海防基本格局不变的情况下 政府通过兵源及军队指挥官的调整及驻防硬件的提升等方面对海防体系进行修正和改进 使 得海防体系得以巩固 但是水寨的内移及沿海寨堡等陆续增筑印证了整个海防战略思维已由 主动出击 御敌于外洋转为固守沿岸的保守思维 作为整个明朝海防体系的一环 泉州地方 的海防体系所进行的调整 即窥见出整个明朝海防体系趋于保守
65 천주(泉州) 가정시기(嘉靖時期 1522~1566)의 왜환(倭患)과 해양방어 에 대한 토론문 한 지 선 전남대학교 본고는 천주부의 왜란의 입침의 형태를 분석하고 이로 인해 가정연간 해방체제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논문이다. 이 논문의 의의를 두 가지 정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명대사 연구에 있어서 가 정왜환는 민족문제로서 일찍부터 논의되기 시작했으며, 정치 사회적으로는 체제 붕괴의 기 점으로 명의 쇠퇴를 초래했다고 지적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가정 왜환은 17세기 세계체제 의 성립과 함께 새로운 국제환경의 조성되는 시작점으로써 검토하는 경향이 있다. 즉, 가정왜 환은 포르투갈의 중국 접촉, 인구이동과 상공업의 발전 대내외적 여건과 사회 경제적 변화와 함께 발생한 것으로 명초 조공을 중심으로 한 해양질서는 변화를 모색할 수 밖에 없었고 마 카오체제, 월항의 개방이 가능했던 계기라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대내외 질서변화를 가져 온 것은 근본적으로 해방체제에서의 변화와 명조의 해양에 대한 지배가 관철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으며 본고를 통해 해양 방어 시설의 변화를 통해 이를 읽을 수 있으리라 는 점이 기대된다. 첫째, 본 연구는 명조의 해방 전반을 다루는 기존 연구들의 접근과는 달리 천주부의 해방 체제 변화를 천착한 사례연구로써 주목된다. 또한 사료 찾기의 번거로움을 감안할 때 필자가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보인다. 명 후기 장주부의 월항(月港)이나 澳門(마카오)이 해외무 역의 중심점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다른 복건지역에 대한 강력한 통제와 해방 가능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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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일본 중세의 해양방어유적 - 원구방루(元寇防塁)와 해성(海城)- 小野正敏 人間文化硏究機構 *번역 : 최연식(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Ⅰ. 머리말 Ⅱ. 원구방루(元寇防塁) Ⅲ. 해성(海城) : 에도 만[江戸湾]과 세토 내해[瀬戸內海]의 게이요 제도[芸予諸島] Ⅰ. 머리말 일본은 주변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지만 중세의 경우 바다로 부터의 커다란 위협을 대비한 방어시설의 건설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원칙적으로 바다는 교역이나 사람, 문화의 교류 공간으로서 열려 있는 곳이라는 의식이 우선시되었고, 이를 위한 기능이 중시되 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오랜 역사 속에서 몇 차례의 커다란 사건들이 있었다. 고대에는 백촌강(白村江) 전 투에 패한 다음 해인 664년에 텐치[天智] 천황이 국방을 위해 쓰시마[対馬], 잇키[壱岐], 치쿠 시[筑紫]에 방인(防人, 사키모리)과 봉수를 두어 다자이후[太宰府]를 방어하고, 나아가 쓰시마 의 가네다죠[金田城], 세토[瀬戸] 내해의 나가토[長門], 사누키야시마죠[讃岐屋島城], 다카야 스죠[大和高安城] 등의 산성이 축조되었다. 또한 막부 말기인 18세기 이후 유럽세력의 동아 시아 진출이 활발해지자 에도[江戸] 막부는 그 침공에 대비하여 다이바[台場]와 포대[砲台]를 일본 열도 각지의 해안에 설치하였다. 또한 에도성의 입구인 에도만[江戸湾; 도쿄만]에는 만
74 의 주위 해안선에 포대를 두었을 뿐 아니라 만을 횡단할 수 있도록 만(灣) 안에도 인공섬의 다 이바[台場]를 건설하였다. 거기에는 해외로부터 구체적인 위협이 있을 때에 그것에 대응하려 한 모습이 보이고 있다. 이번 학술회의의 테마인 중세 바다로 부터의 위협에 대비한 방어시설로서는 첫 번째로 가 장 두드러진 사례로서 가마쿠라[鎌倉] 막부가 몽골의 두 번째 침략에 대비하여 건설한 원구방 루(元寇防塁, 겐코보루이)를 들 수 있다. 이것은 목적과 축조연대 모두 대단히 명확한 사례이 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해적성(海賊城, 가이조쿠시로) 혹은 해성(海城, 우미시로)이라고 불리 고 있는 바다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성을 들 수 있다. 최근 이 분야에 관한 연구가 진 전되면서 그 특징적 모습들이 보고되고 있다. 그러나 우미시로[海城] 그 자체의 정의와 기능 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어 아직 많은 과제가 남겨져 있다. Ⅱ. 원구방루(元寇防塁) 1. 원구방루는 무엇인가? 1274년(文永 11年) 10월에 원나라 군대는 쓰시마, 잇키에 상륙하여 섬을 정복한 후 다시 마쓰라[松浦]를 경유하여 하카타[博多]로 향하였다. 하카타 만에 도달한 원군이 이마즈[今津], 모모치바루[百道原]를 통해 상륙한 후 하카타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는 원군이 우 세한 상황이었지만 무슨 일인지 하룻밤 사이에 그들이 물러나면서 끝나고 말았다. 가마쿠라 막부는 원의 또 다른 침입에 대비하여 하카타 주변의 방어를 강화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것 이 이국경고번역(異国警固番役, 이코쿠케이고반야쿠) 이다. 나아가 구체적인 방어시설로서 방루(防壘)도 축조하였다. 당시의 사료에는 요해석축지(要害石築地, 요가이이시츠이지) 라 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와 병행하여 고려를 공격하는 이국정벌(異国征伐)도 계획 되었지만, 이것은 도중에 중단되었다. 석축지는 하카타 만을 따라서 서쪽의 이마즈에서 동쪽의 가시이[香椎]까지의 해안선 약 20km에 이르는 것이었다. 서쪽의 고지다케[柑子岳]와 비샤몬야마[毘沙門山], 이마즈 항에서 나가타레야마[長垂山], 나가타레야마에서 오도미사키[小戸岬], 오도미사키에서 아타고야마 [愛宕山], 다시 해구(海口)를 건너서 고즈사키[荒津崎]까지, 하카타의 서쪽으로 펼쳐진 소데노 미타토[袖の湊]의 해구, 하카타의 끝부분인 오키노하마[息の浜], 하코자키[箱崎] 해변, 하코
75 자키의 해구를 건너서 가시이의 해변에 이르기까지 산의 끝자락에서 끝자락을 연결하여 모래 해변을 완전하게 막는 형태로 축조되었다.<그림 1> 정말로 1274년의 전투의 교훈을 살린 계 획이었다. <그림 1> 하카타만 원구방루 분포도 또한 같은 시기에 하코자키 항구가 있던 다다라가와(多々良川)의 하구(河口) 지역에도 원 나라 배의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말뚝들을 어지럽게 박아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다 다라가와 하구뿐 아니라 다른 작은 강의 하구들에도 같은 공사가 행해졌다고 추정된다. 이것 은 한국의 경상남도 제포만(薺浦灣) 내부의 말뚝 유구와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 구 자체는 발굴되지 않아서 실제 모습은 확실하지 않다. 석축지 축조 명령은 1276년 3월에 내려졌으며, 규슈 각 구니[國]의 고케닌[御家人]1들에 게 각자의 영지 규모에 따라 담당 거리를 분배하는 형태로 축조를 분담시켰다. 구체적으로는 영지 1단(段, 약 99 ) 당 1촌(寸, 약 3cm)의 길이가 원칙이었다. 나아가 축조에 필요한 인부 들도 담당자가 자신의 영지에서 데리고 가도록 정해졌다. 1) 고케닌[御家人]은 가마쿠라막부 시기 막부장군에 직접 예속되어 지방에 영지를 가지고 있던 무사들을 가리킨다. - 역자 주
76 또한 문헌사료 연구를 통해 구니[國]별로 담당 지역이 정해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마즈는 오오스미[大隅] 휴가(日向)[가고시마鹿児島県], 이마쥬쿠[今宿]는 후젠(豊前)[오이 타大分県], 이키노마츠바라[生の松原]는 히고(肥後)[구마모토熊本県], 메이노하마[姪浜]는 히 젠(肥前)[사가佐賀県], 하카타는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후쿠오카福岡県], 하코자키는 사 츠마(薩摩)[가고시마鹿児島県], 가시이는 후고(豊後)[오이타大分県]가 담당하였다. 지역별로 각 구니의 고케닌들에게 다시 세분화하여 할당하는 방법[割普請, 와리부신]을 채용하여 단기 간에 공사가 진행되어 8월에는 대부분이 완성되었다. 2. 원구방루의 규모와 구조 이 방루는 높이 2~3m, 바닥 부분의 폭 약 3m의 석루(石塁)로, 원나라 군대의 상륙을 저 지하기 위해 백사장 가장자리 끝 부분의 모래 위에 축조되었다. 발굴된 원구방루를 보면 각 지구에 따라 구조나 사용된 돌의 재질이 다른 것이 특징이다. 하카타의 오키노하마(제111차 <그림 2> 오키노하마지구(제111차 조사지구) 원구방루 A B
77 <그림 3> 오키노하마 원구방루(제68차 조사지구) <그림 4> 니시하마 지구 원구방루 <그림 5> 이미즈 나가하마 지구 원구방루의 동 서 조사)에서는 밑 부분의 폭이 약 3.8m이고 바다 쪽과 육지 쪽에 수직으로 70cm 정도의 돌을 쌓고, 내부에 40~50cm의 돌을 채우고 있다. 높이 1.3m 까지 남아 있다. 석재는 비교적 가 까운 해안에서 채취한 역암(礫岩)과 사암(砂岩)이 사용되었다.<그림 2, 3> 이마즈에서는 밑 부분의 폭이 약 3m, 윗면이 약 2m, 높이 약 3m의 사다리꼴로 쌓았다. 석재는 현무암 부분과 화감암 부분이 있는데, 전자는 모두 돌로 쌓았지만 후자는 바다 쪽은 윗부분까지 돌로 쌓은 반 면 육지 쪽은 내부 1m 정도를 모래로 채운 후 그 위를 작은 돌로 쌓았다. 현무암은 비샤몬야 마[毘沙門山], 화감암은 고지다케[柑子岳] 지역이다.<그림 5> 이키노마츠바라[生の松原]에서는 폭이 1.2m로 좁고, 바다 쪽에는 커다란 돌을 쌓은 반면 육지 쪽은 작은 돌로 쌓고서 점토로 보강하고 있다. 높이 1.8m 정도까지 남아 있다. 석재는
78 <그림 6> 이키노 마츠바라 지구 원구방루 나가타레야마[長垂山]와 해안의 화강암, 오도미사키[小戸岬]의 사암이다.<그림 6> 메이노하마[姪浜]에서는 밑 부분이 약 1m이고 높이 약 1m 정도가 남아 있다. 석재는 아 타고야마[愛宕山]에서 온 사암이 사용되고 있다. 니시하마[西浜]의 니시진[西新]에서는 폭이 3.4m로 넓고 사구(砂丘) 위에 점토로 밑 부분을 만들고, 석축 내부도 점토와 모래를 번갈아 쌓아 견고하게 하였다. 석재는 노코노시마[能古島]에서 가져왔다고 분석되고 있다. 이와 같은 지구별 구조와 규모의 차이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구니[國]별로 할당하여 급하게 축조한 것을 반영한다고 생각되고 있다. 석재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 에서 조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원구방루의 효과 1281년 5월 다시 원[江南軍]과 고려[東路軍]의 연합군에 의한 일본 원정이 시작되었다. 6월, 쓰시마와 잇키를 제압한 동로군이 하카타만의 시카노시마[志賀島]에 도착한 후 하카타
79 만에서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앞서와는 달리 이때의 전투에서는 석축지가 축조되었고, 그것 을 이용한 방어체제가 갖추어졌다. 몽고습래회사 ( 蒙古襲来絵詞, 모오코슈라이에코토 바)에는 완성된 석축지의 상황과 그 윗부분에 경비를 분담한 갑옷을 입은 많은 무장들의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회화 자료를 통해 볼 때 석축지는 윗부분이 평탄하게 만들어졌 고, 책(柵) 등의 방어시설은 덧붙여지지 않았던 것 같다. 석축지의 높이는 발굴조사에서 가장 높게 남아 있는 이마즈 지역이 3m로 보고되어 있는데, 이 자료를 통해서도 그 수치가 아마도 본래의 상한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나라 군대는 그 효과 때문인지 상륙이 저지되어 해상에서의 전투가 중심이 되고 있다. 또한 일본군이 있는 우미노나카미치[海の中道]2를 경유 한 육상의 전투도 있다. 예정보다 늦은 7월에 동로군(東路軍)은 강남군(江南軍)과 다카시마 [鷹島]에서 합류하였는데, 그 직후 폭풍우를 만나 괴멸상태가 되면서 2차에 걸친 일본 원정은 끝나게 되었다. 이 방루는 14세기 이후 점차 모래에 묻혀갔고, 또한 하카타 시가지가 확대됨에 따라 석재 도 대부분 시가지 조성을 위해 전용되었다. 그러나 1563년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확인되는 성복사지회도(聖福寺之絵図, 쇼후쿠지노에즈)에는 사찰과 접하고 있는 해안에 오키노하마(息 の浜; 博多前浜)의 석축지가 그려져 있어 15세기 경까지는 하카타의 여러 곳에 석축지가 남 아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카타의 별칭인 석성부(石城府, 세키죠후) 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오키노하마의 서쪽 끝 스자키[須崎]에 있던 묘라쿠지[妙楽寺]의 산호(山号)에도 석성산(石城山, 세키죠산)으로 남아 있다. 이 방루의 2차적 효과로서 후세에 백사장을 보호하는 호안(護岸)이 되어 하카타 만의 침식을 방호하였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4. 그 기술 계보 석축지는 1276년에 축조된 사실이 문헌사료에서 확인되고 있지만, 그 기술 계보 등에는 명확하지 않은 점이 많다. 북일본을 제외하면 간토[関東] 서쪽에서 중세 다테(館, 소규모 성) 등의 방어시설로서 본격적인 해자[堀]와 토루(土塁)가 도입된 것은 13세기 후반이다. 물론 그 시기의 다테[館]에는 석벽과 석루는 갖추어지지 않았다. 돌을 쌓는 기술은 사찰과 신사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석축지(石築地)로서 해안 방어를 위해 축조한다는 발상과 함 2) 시카노시마[志賀島]와 규슈 본토를 연결하는 좁은 모래섬. 길이 약 8km, 최대 폭 2.5km의 거대한 모래섬으로 북쪽이 현해탄, 남쪽은 하카타만이다. - 역자 주
80 께 실제로 그것을 쌓는데 있어 각각의 부분을 분담한 고케닌[御家人]들의 영지에서 인부들을 데려와 쌓았다는 것, 또한 근처의 석재를 사용하여 모래밭 위에 높이가 3m나 되는 석루를 쌓 고, 그 석루가 적어도 1~2세기에 걸쳐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끼게 된다. 그 기술 계보 및 왜 이 석루가 다테[館] 등의 방어시설 혹은 권위 표현에 사용되지 않았는지 등의 문제 가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 있다. Ⅲ. 해성(海城) : 에도 만[江戸湾]과 세토 내해[瀬戸內海]의 게이요 제도[芸予諸島] 1. 해성(海城), 해적성(海賊城)이란 종래 해안부에 위치한 성곽들을 막연히 해성(海城) 이라고 불렀지만 보소반도(房総半 島)의 성곽을 연구해 온 다키가와 쓰네아키[滝川恒昭]는 최근의 성곽연구자 및 중세사연구자 들의 지적을 총괄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① 해상세력(영주)의 거점, ② 항만(港湾)과 바다에 돌출한 곶[岬]이나 산 위에 축조된 것, ③ 바다에 대해 감시 지휘 통신하는 등 해관 (海関), 해상경계[海上警固]의 기능을 갖는 것 등. 특히 항만과 깊은 일체적 관계를 가진 것에 주목하여 항구성[湊城, 미나토죠] 이라는 호칭도 제안하고 있다. 한편 세토 내해의 중세사를 연구하는 야마우치 유즈루[山内譲]는 일반적으로 해성(海 城)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구조적으로는 각지에 있는 산성(山城)과 다르지 않은 것들이 많음을 지적하고, 세토 내해 등에서 두드러진 작은 섬 전체를 성곽화한 것을 해성(海城)이라고 부르 고 있다. 그리고 세토 내해의 성곽연구에서 이제까지 해적성(海賊城)이라고 불린 것들과 정의 가 중복되는 것을 인정한 위에 육지부의 산성(山城)과 대비하는 의미를 담아서 해성(海城)이 라는 용어를 채용하고 있다. 또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중세의 해적 은 현재 연상되는 항해 하는 선박을 습격하여 도적 행위를 할 뿐 아니라 일정의 해역(海域)을 지배하는 바다의 영주 로서, 통행세[関銭]를 거두는 대신 다른 해적들로부터 보호하고 물길을 안내해 줌으로써 배와 사람, 상품 항해의 안전을 보장하는 기능, 그리고 해상유통을 담당하는 상업적 기능 등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나아가 그들은 커다란 수군력(水軍力)을 가지고 있어서, 종종 센고쿠[戦国] 다이묘[大名]의 휘하에서 직속 혹은 계약 수군으로 편성되는 일이 많이 알려져 있다.
81 2. 에도만[江戸湾]의 해성(海城) 다키가와 쓰네아키[滝川恒昭]는 앞에서와 같이 해성을 정의한 후 구체적 사례를 소개하면 서 그 입지 등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① 대부분의 해성이 시나가와항[品川 湊]과 같이 항만도시로 발달하는 장소<그림 11>는 물론 크고 작은 항구와 세트를 이루고 있으 며, ② 그 분포도<그림 7>를 보면 에도 만 중에서도 우라가수도[浦賀水道]이라고 불리는 입구 의 좁은 물길 부분에 해성이 집중하고 있다. 나아가 문헌사료를 통해 이들 해석에 관하여 그 기능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를 소개 하고 있다. 바다에 대한 감시소, 지휘소로서 수군의 거점으로 확인되는 사례는 오카모토죠[岡 本城], 가나야죠[金谷城]<그림 8, 9>이다. 이 두 성은 아와노구니[安房国]의 사토미[里見] 씨 의 본거지로서, 사가미노구니[相模国]의 호죠[北条] 씨의 수군 야마모토[山本] 씨가 본거지 미우라[三浦] 반도에서 아와노구니에 침공했을 때에, 오카모토 가나야 신지(新地)의 3성에 서 수군이 출동하고 있다. 또한 해관(海関)에 대해서도 햐쿠슈죠[百首城]가 보소[房総]에서 무사시[武蔵]나 시모우사[下総]를 왕래하는 배를 검문할 권리를 가지고 있던 것과 사토미 씨 가 가나자와항[金沢湊]<그림 7>의 상인 야마구치[山口]] 씨에게 (자기 영지의) 어느 항구에서 <그림 7> 에도만의 해성 분포도 <그림 8> 오카모도죠[岡本城]
82 <그림 9>가쓰야마죠[勝山城] <그림 10> 우라가죠[浦賀城] 도 통행료[関料]를 면제해주는 문서를 소 개하고 있다. 그리고 호죠 씨 측의 미사키 항[三崎湊]에서는 배가 귀항할 때에 호죠 씨의 수군 책임자 무장의 허가가 필요했음 을 지적하고, 선박에 대해 검문(사람과 화 물에 대해)이 실시되었음과 그것에 관여한 것이 호죠 씨의 미우라 반도 지배 거점이 었던 미사키죠[三崎城], 우라가죠[浦賀 城]<그림 10>였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림 11> 고텐야마죠[御殿山城] 3. 게이요 제도[芸予諸島]와 해적(海賊) 무라카미[村上] 씨의 해성(海城) 게이요 제도[芸予諸島]는 세토 내해를 동과 서로 나누는 것처럼 섬들이 이어지고 있는 곳 으로, 항해하는 배는 세토[瀬戸]3라고 불리는 좁은 수로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는 항해하기 3) 세토[瀬戸]는 급류의 입구라는 뜻이다. - 역자 주
83 <그림 12> 게이요제도의 해성과 항로(1来島, 12 能島, 34 甘崎城 어려운 곳이다. 또한 주요한 항로가 집중하는 해역이기도 하다. 현재 이 섬들을 세토 내해를 횡단하는 다리들이 연결하고 있는 것처럼 남과 북쪽의 히로시마[広島]현과 에히메[愛媛]현(시 코쿠四国 지방)을 연결하는 최단 루트이기도 하다. 중세에 이 중요한 해역의 권익을 장악하고 있던 것은 해적 혹은 수군이라고 불리던 바다 의 영주들로,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라카미[村上]씨 일족이었다. 그들은 본거지 로 삼는 섬의 이름을 따라 노시마 무라카미[能島村上]씨, 쿠루시마 무라카미[来島村上]씨, 인 노시마 무라카미[因島村上]씨로도 불렸다. 그들의 활동은 14세기경부터 확인되며, 전국시대 라고 불린 15~16세기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다른 곳에 비해 이 해역에 해성들이 매우 밀도 높게 분포하고 있는 것도 이 해성들이 가지 고 있는 지리적 위치와 함께 그것들을 배경으로 활약한 무라카미 씨들의 본거지가 이곳에 집 중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 본거지가 된 해성에는 그 기능을 특징짓는 공통된 유적들이 보이
84 고 있다. 해안의 암초지대에 보이는 기둥구멍 유적[柱穴群]으로서, 그 기능이 중요하다. 발굴 조사된 두 사례를 소개한다. 1) 아마사키죠[甘崎城]의 구조와 유구<그림 13, 14> 아마사키죠가 있는 곳은 게이요 제도의 중심에 있는 오오미시마[大三島]의 동쪽, 하나구 리세토[鼻繰瀬戸]이다. 성이 문헌에서 처음 확인되는 것은 1541년으로, 중세의 성주로는 이 마오카[今岡] 씨와 무라카미 요시츠구[村上吉継]가 알려져 있다. 전자는 노시마 무라카미 씨 계열, 후자는 쿠루시마 무라카미 씨의 일족이다. 이 성은 게이요 제도의 해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돌담(石垣)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것은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 이후 에 도오도[藤堂] 씨가 들어와 쇼쿠호오[織豊]계 성곽4의 특징인 높은 돌담과 기와 건물을 지닌 <그림 13> 아마샤키죠[甘崎城] 전체도 <그림 14> 서부의 암초지구 유구도 4) 쇼쿠호 계열 성곽[織豊系城郭]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및 그 휘하 영주들에 의해 완성된 성곽들 을 가리킨다. - 역자 주
85 성으로 개수하였기 때문이다. 1608년 경에는 폐성이 되었다. 아마사키죠는 산정부를 평평하게 깎아서 조성한 북곽(北郭), 남곽(南郭)의 주요 성곽과 산 자락의 테라스, 해안부의 기둥구멍 유적[柱穴群]과 돌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곽, 남곽의 발 굴에서는 두 시기의 초석 건물과 거기에 사영되었던 기와, 도자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들 유 물은 크게 15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 및 그 이후로 구분되고 있다. 유물량으로 볼 때에는 16세기가 전성기였다. 암초지대에는 기둥구멍 유적이 먼저 존재하였고, 17세기 초가 되어 돌 담이 축조되었다. 그 때에는 기둥구멍 유적은 기능하지 않았다고 보고되고 있다. 아마사키죠를 특징짓는 것은 동해안의 암초지대에 남아 있는, 구조물의 흔적인 기둥구멍 유적들이다. 이것들은 해안선과 나란히 가는 횡렬과 직각으로 교차하는 종렬이 있다. 암초 남 부의 Ⅱ구의 사례에서는 종렬 기둥구멍들이 두 개 있는데, 9m의 간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양 자가 세트로서 잔교(桟橋)와 같은 구조였다고 추정하기는 힘들고, 각기 배를 계류하기 위한 시설이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만조 때에 기둥구멍 유적은 물에 잠기고 있는데 반해 기둥구멍 이 산기슭 부근에 접속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테라스는 물에 잠기지 않고 있는데, 이곳이 배에서 내린 사람과 화물의 이동을 위한 연락통로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2) 노시마죠[能島城]의 구조와 유구<그림 15, 16, 17> 노시마죠[能島城]는 무라카미 수군의 중심 일족인 노시마 무라카미 씨의 본거지이다. 이 곳은 최단의 주요 항로 중 하나인 게이요 제도를 통과하는 미야쿠보세토[宮窪瀬戸]라고 불리 는 지점으로, 하카타지마[伯方島]와 오오시마[大島] 사이의 매우 좁은 수로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발굴된 도자기들로 볼 때 14세기 중엽에서 16세기에 사용되었고, 특히 전성기는 15세 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이었다. 노시마는 주위 약 900m의 작은 섬이다. 섬 전체는 평평하게 깎아낸 3단의 곡륜(曲輪, 쿠 루와)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남쪽과 동쪽으로 돌출한 곶[岬]에도 작은 평탄지가 있다. 또한 섬의 남서부에는 해안을 매립한 남부 평탄지가 있고, 북측에도 모래 해안이 있다. 남부 평탄 지의 발굴에서는 중세에 3시기에 걸쳐 매립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이 해안에는 이 매립 때의 해안 방호 시설로 생각되는 기둥 열과 어지럽게 박은 말뚝들이 있다.<그림 16> 이 성의 특징 은 이 해안 매립과 함께 동쪽의 암초에 존재하는 다수의 기둥구멍 유적과 산기슭에 있는 통로 형태의 테라스이다. B지점의 기둥구멍 유적은 해안의 산기슭에 병행하는 횡렬과 그것과 직각 으로 교차하는 종렬이 확인된다.<그림 17> 발굴자는 이들은 기둥이 서로 연결되어 コ 자 형 태를 이루어 도크와 같은 배를 계류하기 위한 시설이었다고 보고 있다. 또한 D지점의 기둥들
86 <그림 15> 노시마죠[能島城] 전체도 <그림 16> 노시마죠[能島城] 남부평탄지 유구도 <그림 17> B지점 암초 유구도
87 도 배를 정박하기 위한 잔교로 추정되고 있다. 그림에 있는 물결선은 바다 쪽이 간조선, 산 쪽 이 만조선이다. 게이요 제도에서는 간만의 수위차가 약 4m로 큰 것이 특징인데, 이 기둥들로 만들어진 구조물을 방어시설로 생각하지 않고 간만의 창에 따른 배의 접안, 정박 시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들 유구에서 방어 기능성이 두드러지지 않는 것은, 나와바리[縄張 り]에도 성의 방어적 특성이 보이지 않는 등 노시마죠 전체의 구조에도 공통되고 있다. 이 섬 의 기능이 해상의 요해로서 방어시설을 지닌 전쟁용의 성이 아니라 세토 내해 항로의 중요 지 점에 위치하면서 배를 중심으로 한 해상활동의 거점으로서의 기능을 중시하는 것에 있었다고 이해된다. 4. 해성(海城)의 기능과 해방(海防) 이상 검토한 바와 같이 넓은 의미에서의 해역(海域)의 권익 및 사람 물자 정보가 집중하 는 정치 경제의 중심지인 항만 도시의 권익을 안정적으로 권력의 지배하에 두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해성(海城)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성(城)과 경제 권익의 관계를 살펴보면 - 바 다만이 아니라 육지도 마찬가지인데 - 중세의 권력은 생각과 같이 커다란 것이 아니었다. 전 국시대의 다이묘[大名]을 포함하여 독자적 힘으로 도시를 만드는 것 보다 기존의 경제 권익이 존재하는 곳에 가서 그곳에 기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 후 점차 힘을 길러서 그 공간 을 자신이 지배하는 곳으로 바꾸는 방식을 취하였다. 15세기까지는 그러한 공간에 다테[館]가 만들어졌고, 그 이후에는 성(城)이 축조되었다. 따라서 중세에는 해성(海城)에서 협의의 의미 에서의 해방(海防) 시설 및 그러한 기능이 현저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해역의 권리에 대한 보전 및 지배라고 하는 관점에서는 해성(海城)이 단독적으로 존 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되는 해역 네트워크를 구성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특히 육상의 가도(街道)라는 한정된 선(線)을 지배하는 것과는 달리, 넓은 바다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성격이 더욱 필요하였다. 해관(海関)의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도 네트워크는 효과적 이었다. 게이요 제도 및 에도 만의 거점이 되는 해성의 분포는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바다만이 아니라 비와코[琵琶湖]나 동일본 지역의 가스미가우라[霞ヶ浦]를 비롯한 내륙의 넓 은 수면세계(水面世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1576년에 비와코[琵琶湖]의 곶 모양으로 돌출된 지 역에 아즈치죠[安土城]를 축성하고, 이어서 일족 및 휘하의 장수들에게 나가하마죠[長浜城], 사카모토죠[坂本城], 오오미조죠[大溝城] 등의 호상교통(湖上交通)의 요지에 호숫가의 성들을
88 만들게 하여 비와코에 아즈치죠를 중심으로 하는 호수의 네트워크를 완성시켰다. 세토 내해 나 비와코에서 안전하게 항행할 권리를 인정받은 배는 무라카미 씨 등이 발급한 과소기(過所 旗)나 기치[幟]를 배에 게양하여 항행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감시에 의한 정보전달은 봉화나 깃발에 의해 성에서 성으로 전해졌다. 이러한 네트워크야말로 해성(海城)이 지닌 해방(海防) 기능을 최대한으로 살린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89 참고 인용문헌 본문 중에는 직접 인용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이 발표문은 다음과 같은 연구성과들을 활용하여 발표자가 정리한 것이다. 井上繭子, 2008, 博多の元寇防塁, 中世都市博多を掘る 愛媛県教育委員會, 2002, しまなみ水軍浪漫のみち文化財調査報告書 埋蔵文化財編 大庭泰時, 2008, 考古学から見た博多の展開 中世都市博多を掘る 大庭泰時, 2009, 中世日本最大の貿易都市博多遺跡群 佐伯弘治, 2003, モンゴルの襲来の衝撃 日本の中世 9 柴田圭子, 2003, 瀬戸内海における海賊の世界 戦国時代の考古学 柴田龍司, 2008, 海城の様相と変遷 中世城郭研究 22号 滝川恒昭, 1994, 戦国期江戸湾岸における 海城 の存在形態 千葉城郭研究 3. 田中 謙, 2012, 能島城における海岸遺構の構造と機能 西国城館論集Ⅱ 中国 四国地区城館調査検討会 中井 均, 1997, 近江の城 城が語る湖国の戦国史 福岡市教育委員會, 1992, 博多 32 博多遺跡群第68次発掘調査報告 福岡市教育委員會, 2002, 博多 85 博多小学校建設に伴う埋蔵文化財発掘調査報告書 柳田純孝, 1988, 元寇防塁と中世の海岸線 東アジアの国際都市博多 よみがえる中世1 山内 譲, 1997, 海賊と海城 瀬戸内の戦国史 平凡社選書168 도판 인용문헌 원구 방루(元寇防塁) 관련 도판 중 <그림 1>은 참고 인용문헌 1과 13을 참고하여 작성하였고, <그림 2>는 참고 인용문헌 12, <그림 4~6>은 참고 인용문헌 11에서 인용하였다. 해성(海城) 관련 도판 중 에도 만(江戸湾) 지역의 <그림 7~11>은 참고 인용 문헌 8에서 인용하였고, 게이요 제도(芸予諸島) 지역의 <그림 12~14>는 참고 인용문헌 2, <그림 15~17>은 참고 인용문헌 9에 서 인용한 것이다. 여기에 밝혀 감사를 표한다.
90 日本 中世の海洋防御遺跡 元寇防塁と海城 小野正敏 人間文化硏究機構 Ⅰ. はじめに Ⅱ. 元寇防塁 Ⅲ. 海城-江戸湾と瀬戸内海芸予諸島 Ⅰ. はじめに 日本は周囲を海に囲まれていながら 中世においては 海からの大きな脅威に備 えた防御施設の建設はあまり顕著ではなかった それは原則的に海は交易や人 文化 の交流の世界として開かれた場であるという意識が優先され そのための機能が重視 されていたからと思われる しかし 長い歴史の中では 何回かの大きな出来事があった 古代においては 白村江の戦いに破れた翌年664年に天智天皇が国防のために対馬 壱岐 筑紫に防 人と烽を置き 太宰府を固め さらに対馬の金田城 瀬戸内海の長門 讃岐屋島城 大和高安城に山城が造られた また 幕末 18世紀以降に欧米の東アジア進出が盛 んになると 江戸幕府はその侵攻に備えた 台場 や 砲台 を日本列島各地の海岸に造 り また 江戸城の入り口である江戸湾 東京湾 では湾の周囲の海岸線に砲台を建造 しただけではなく 湾を横断するように湾内にも人工島の台場を建設した そこには
91 海外からの具体的な脅威がある時に それに対応する姿がある 今回のテーマである中世における海からの脅威に備えた防御施設としては 第一に もっとも顕著な例として鎌倉幕府が2回目の蒙古襲来に備えて建設した元寇防塁があ る これは目的も築造年代も非常に明確なものである また 第2に 海賊城 とか 海城 と呼ばれている海と密接な関係をもって造られた城がある 近年 この各分野 の研究が進展しつつあり その特徴的な姿が報告されている しかし 海城そのもの の定義やその機能についてさまざまな見解があり まだ多くの課題が残されている Ⅱ. 元寇防塁 1.元寇防塁とは何か 1274年 文永11年 10月に 元軍は対馬 壱岐に上陸し 島を征服 さら に松浦を経由して博多へ向かった 博多湾に到達した元軍は 今津 百道原から上陸 し 博多では激しい戦闘となり 元軍が優勢のまま進むが なぜか一夜のうちに撤退 して終了した 鎌倉幕府は 元の再度の襲来に備え 博多周辺の守りを固める政策を <図 1> 博多元寇防塁分布図
104 参考引用文献 本文中には 直接引用を注記してないが この報告は 下記の文献による成果を使いながら報告者 がまとめたものである 井上繭子, 2008, 博多の元寇防塁, 中世都市博多を掘る 愛媛県教育委員會, 2002, しまなみ水軍浪漫のみち文化財調査報告書 埋蔵文化財編 大庭泰時, 2008, 考古学から見た博多の展開 中世都市博多を掘る 大庭泰時, 2009, 中世日本最大の貿易都市博多遺跡群 佐伯弘治, 2003, モンゴルの襲来の衝撃 日本の中世 9 柴田圭子, 2003, 瀬戸内海における海賊の世界 戦国時代の考古学 柴田龍司, 2008, 海城の様相と変遷 中世城郭研究 22号 滝川恒昭, 1994, 戦国期江戸湾岸における 海城 の存在形態 千葉城郭研究 3. 田中 謙, 2012, 能島城における海岸遺構の構造と機能 西国城館論集Ⅱ 中国 四国地区城館調査検討会 中井 均, 1997, 近江の城 城が語る湖国の戦国史 福岡市教育委員會, 1992, 博多 32 博多遺跡群第68次発掘調査報告 福岡市教育委員會, 2002, 博多 85 博多小学校建設に伴う埋蔵文化財発掘調査報告書 柳田純孝, 1988, 元寇防塁と中世の海岸線 東アジアの国際都市博多 よみがえる中世1 山内 譲, 1997, 海賊と海城 瀬戸内の戦国史 平凡社選書168 図版引用文献 元寇防塁に関するは 図1は文献1 13を参考に作成し 図2は文献12より 図4 6は文献1 1からの引用である 江戸湾の海城関係の図7 11は 文献8よりの引用である 芸予諸島に関する 図は 図12 14は文献2より 図15 17は文献9より引用したものである 記して感謝します
105 일본 중세의 해양방어유적 - 원구방루(元寇防塁)와 해성(海城) 에 대한 토론문 나 동 욱 부산근대역사관 1. 현재까지 일본 전국에 존재하고 있는 성의 총 수는 3~4만여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 부분은 일본의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1334~1573)부터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에 걸쳐 축 조된 중세성곽으로 근세 초두에 대부분 폐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성곽의 발달사에서 볼 때 성곽에 석축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은 16세기 후반으로서 그 이전에는 거의 토축이나 해자, 목책으로 방비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고대의 경우 일본의 성곽 건축은 7세기 중반 백제기술자의 지도로 시작됐다는 것이 통설 이다. 당시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해 쌓은 것으로 알려진 조선식산성(朝鮮式山 城)과 신롱석식 산성(神籠石式山城)은 외래의 석축기술을 이용한 성곽으로 국제적 긴장관계 가 해소되자 더 이상 축조되지 않았다. 중세에 들어와서 성곽은 방어성이 높은 산성이 구축되 었으나 여전히 토루와 해자[空堀: 隍], 목책(木柵) 등이 주요 방어시설이었고 성의 입지도 산 성(山城)과 산록의 거관(居館) 형태로 변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1274년과 1281년에 몽고군의 내습을 방어하기 위하여 하카타만 서쪽 이마즈에서 동쪽 가시이 해안에 이르기까지 구축한 석축의 원구방루(元寇防塁)는 성벽의 높 이와 너비가 3m 전후인 길이 20km의 장성(長城)으로 일본에서는 그 유례가 없는 것이다. 일본 중세 최대의 대외전쟁의 산물인 원구방루는 고대 대륙계의 축성기술과는 달리 규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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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류큐국[琉球国]의 해양방어체제와 시설 池田榮史 日本 琉球大學 *번역 : 최연식(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Ⅰ. 머리말 Ⅱ. 류큐열도의 지리적 구분과 간략한 역사 Ⅲ. 류큐국의 등장과 초기의 해양방어체제 Ⅳ. 류큐국의 해양방어체제와 시설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일본 열도는 동아시아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남북으로 길게 연결되어 있는 섬들이다. 이 때문에 일본 열도의 주변에는 여러 개의 내해(内海)라고 부를 수 있는 해역들이 존재한다. 즉, 일본열도와 아시아 대륙 연해주 및 한반도와의 사이에는 동해가 있고, 한반도 및 아시아 대륙과 일본 열도의 큐슈 섬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류큐 열도, 대만 섬 사이에는 중국해가 있다. 아시아 대륙에서 일본열도를 거쳐 동쪽으로 향하면 멀리 남북아메리카 대륙이 있는데, 그 사이에는 태평양이 펼쳐져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일본 열도의 주변은 모두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바다는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섬들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 통행을 가로막는 장벽인 동시에 통로의 역할을 하였 다. 이것은 일본열도 안에 사는 사람들만의 관계만이 아니라, 동해나 동중국해, 나아가 대만 섬의 남쪽에 위치하는 남지나해를 포함하여, 바다는 일본 열도의 사람들과 동아시아, 나아가 남아시아까지를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바다를 매개로 한 사람들의 교류의 역사와 그것이
114 각각의 지역에 미친 다양한 영향들을 연구의 주제로 삼기 위한 시도로서 일본에서는 아시아 사람들을 때로는 가로막고, 때로는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였다고 하는 아시아 해역사 라는 연구 분야가 제창되고 있다.1 일본에서의 아시아 해역사 연구 주제들은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최근 많은 연구자들이 주목하고 있는 주제가 일본 열도의 남쪽에 위치하면서 한반도, 아시아 대륙, 대만 섬 등과 함 께 동중국해를 둘러싸고 있는 류큐 열도의 역사적 위치에 대한 것이다. Ⅱ. 류큐열도의 지리적 구분과 간략한 역사 류큐 열도는 일본의 큐슈 섬에서 중화민국의 대만 섬 사이의 약 1,200km의 바다에 점재 하고 있다. 약 2백 여 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 큐슈 섬에 가까운 요론섬 [与論島]까지 약 40개 섬은 가고시마현[鹿児島県]에 나머지 약 160개의 섬은 오키나와현[沖 縄県]에 소속되어 있다. 류큐 열도는 기후나 동식물의 분포, 혹은 역사 및 문화적 차이 등에 따라 북 중 남의 3분설과 남북으로 구분하는 2분설이 제시되고 있다.2 이 중에서 3분설은 오쿠마제도[大隅諸島]를 북부권, 아마미제도[奄美諸島]에서 오키나와 제도[沖縄諸島]까지를 중부권, 미야코제도[宮古諸島]에서 야에야마제도[八重山諸島]까지를 남부권으로 구분하고 있다. 한편 2분설에서는 오쿠마제도에서 오키나와제도까지를 북류큐, 미야코제도에서 야에야마 제도까지를 남류큐로 구분하고 있다. 3분설과 2분설의 차이는 2분설에서 북류큐로 보는 지역 을 3분설에서 다시 둘로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2분설은 일본 열도의 죠몽문화[縄文文 化]의 영향이 미친 북류큐와 미치지 않은 남류큐의 문화 내용을 설명할 때에 유효하다. 이에 대해서, 3분설은 야요이문화[弥生文化] 이후 기본적으로는 큐슈섬의 영향하에 들어 있던 오쿠마제도와 큐슈를 통하여 일본 문화와 관계를 가지면서도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마침 1) 1980년대 이후 일본에서는 동아시아사 연구 방법으로서 2국간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대외교섭사나 대외교류사뿐 아니라 동해나 동중국해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제국, 나아가 그들을 넘어 확대되는 국제관계를 다루려는 시각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무라이 쇼 스케[村井章介], 1988, アジアの中の中世日本, 校倉書房.). 이에 기초하여 환일본해해역 이나 환동지나해해역 등을 설정하 여 바다를 매개로 한 사람, 물건, 현상 등의 움직임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2) 류큐 열도를 역사 문화적 차이에 의해 셋으로 구분하는 설은 고쿠부 나오이치(国分直一, 1966, 南島の先史土器, 考古学研究 12-2)등, 한편 2분설은 아자토 아사토 시쥰(安里嗣淳, 2011, 先史時代の沖縄, 第一書房.) 등에 의해 제시되고 있다.
115 내 류큐국을 성립하였던 아마미제도에서 오키나와 제도까지의 섬들의 문화 내용을 설명할 때 에 유효하다. 이와 같은 복수의 지역 구분설이 제시되고, 또한 그 유효성을 둘러싸고 활발하 게 논의되는 배경에는 류큐열도의 섬들 대부분이 일본 중세시대에 오키나와섬에 왕도(王 都)를 두었던 류큐국의 판도에 포함되는 등 일본의 다른 지역과는 구분되는 독자적 역사를 가 졌던 사실이 있다. 이제 지리적 구분설 중의 3분설에 기초하여 각각의 지역의 역사를 개관해 보면, 북부권은 기본적으로 일본사의 틀에 위치 짓는 것이 가능하다. 이와 달리 중부권은 죠몽문화 단계에서 는 죠몽문화의 분포 범위에 포함되지만 야요이문화 단계에 들어와서도 야요이문화로 이행하 지 않고 계속하여 죠몽문화와 같은 수렵 어로 채집 경제에 의존하는 문화가 유지된다. 이 문 화는 오키나와 패총 후기문화로 불리며, 10세기경까지 계속된다. 오키나와 패총 문화 단계에 는 야요이문화를 비롯한 일본 문화의 영향을 산발적으로 받으면서도 일본 문화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11세기에 들어오면 중부권 전역에 농경생산이 정착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점차 사회적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추측되고 있다. 이후 14세기 후반 명(明) 왕조의 성립 이후 중부 권 중의 오키나와 섬에 명 왕조의 책봉을 받는 복수의 정치세력이 출현하게 된다. 15세기 전 반이 되면 오키나와 섬의 정치세력이 하나로 통합되고, 이 세력이 점차 주변 섬들의 정치세력 을 지배하에 두면서 류큐 열도 전역의 통합을 추진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한편 남부권에서는 11세기까지도 중부권이나 북부권과는 전혀 다른 수렵 어로 채집에 의존하는 문화가 단속적(斷續的)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단계에는 남부권과 류큐 열도 북 중 부권 사이에 전혀 교류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중부권이 농경사회로 이행하는 11세기 단계에 들어와서는 중부권의 영향 하에 남부권도 농경사회로 이행하게 된다. 이 단계부터 류 큐 열도 중부권과 남부권 사이에 교류가 생겨나 같은 문화권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나아가 16세기에 들어와 오키나와 섬을 통합한 정치세력이 남부권의 섬들을 지배하에 두면서 중부권 과 남부권은 류큐문화권으로 통합되게 된다. 14세기 후반에 명 왕조의 책봉을 받아 조공국이 된 오키나와 섬 세력과 그 지배 영역을 명 왕조에서는 류큐국이라고 불렀는데, 그 판도가 류 큐 열도의 중부권과 남부권을 포함하는 범위로 확대된 것은 류큐 열도의 남부권이 중부권에 성립된 정치세력의 지배하에 들어간 16세기였다. 명 왕조와의 사이에서 시작된 류큐국의 책봉은 명 왕조의 뒤를 이은 청(清) 왕조와의 사이 에서도 지속되었다. 류큐국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명 청 왕조에 의한 책봉을 받는 조공관 계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초에 일본의 군사적 지배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막부[徳川幕 府]의 인가 하에 1609년 시마즈씨[島津氏]가 류큐국에 무력 침공을 감행한다. 시마즈씨는 류
116 큐국 제압 이후 류큐국의 지배하에 있던 중북권 북쪽의 아마미 제도를 직할영지로 빼앗고, 오 키나와 섬 및 서쪽의 중부권과 남부권의 섬들만을 류큐국의 판도로 남겨 두었다. 또한 시마즈 정복 이후의 류큐국은 이전과 같이 독립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고 명 청 왕조에 조공관계를 유지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시마즈 씨를 통하여 일본의 막번체제(幕藩体制)에 포함되었다. 이 양속관계(両属関係)는 도쿠가와 막부가 망할 때까지 지속되는데,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 정부는 1879년 류큐국을 없애고 오키나와 현을 설치하여 류큐국의 판도를 강제적으로 일본 국가에 편입시켰다. 일본의 메이지 정부에 의한 류큐국 병합에 대하여 류큐국에서는 여러 차례 저항 운동이 일어났지만 1895년 일본이 청일전쟁에 승리하면서 저항 운동은 점차 사라지게 되고, 오키나 와현으로서 일본화가 진행되어 간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일본 본토 방위의 전초전 으로 위치 지어진 오키나와 섬을 중심으로 하는 지상전(=오키나와 전투)이 일어나 주민들에 게 크고 많은 피해를 주었다. 오키나와 전투 이후의 오키나와 현은 일본의 행정에서 분리되어 27년간 미군의 지배를 경험하였다. 이것은 현지 사람들의 의향과 관계없이 국제적 정치 관계 의 요구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과 오키나와 전투 및 미군 지배의 경험은 오늘날에도 류큐 열도의 사람들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국가로서의 일본의 존재 방식에 대해 강한 의문을 갖게 하는 동시에 일찍이 류큐 열도에 존재하였던 류큐국에 대하여 동경을 포함한 강한 관심을 갖고서 류큐국 및 류큐 문화에 대한 연구에 주목하게 하는 토대가 되고 있다.3 Ⅲ. 류큐국의 등장과 초기의 해양방어체제 14세기에 성립한 명 왕조의 초유에 응하여 조공사절을 파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류큐국은 아시아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아시아 각지에 남아 있는 문헌기록에는 그 이전의 류큐 열도에 국가조직이라고 인정될 수 있는 정치세력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수서(隋書), 유구 전(流求傳) 에 기록되어 있는 지지(地誌)적 기록이나 일본의 육국사(六国史) 에 보이는 남도 인(南島人)에 대한 기록 등이 확인되는 정도에 불과하다. 3) 류큐, 오키나와 역사에 대해 개설한 근래의 책으로는 도미야마 가즈유키[豊見山和行](豊見山2003)와 아사토 스스무[安里進] 다카라 구라요시[高良倉吉]외(2004, 沖縄の歴史 (県史47), 山川出版社.) 등이 있다.
117 류큐국에 관한 명 왕조의 기록은 명사(明史) 나 명실록(明実録) 을 비롯한 문헌에서 확 인된다. 류큐국 내부의 기록으로는 명 청 왕조를 비롯한 동 동남아시아 나라들과의 외교 관 계 문서를 기록한 역대보안(歴代宝案) (1424~1867년 사이의 외교문서집성)이 존재 한다. 또한 류큐국에서는 17세기에 들어와 국사 관계 사료의 편찬사업이 시작되어 중산세감(中山 世鑑) (1650년 편집)이나 중산세보(中山世譜) (蔡鐸本 1701년 간행, 蔡温本 1725년 간 행), 내정 기록으로서의 구양(球陽) (1743~45년 편집, 이후 1877년까지 추기됨) 등이 정리 되었다. 류큐국과 함께 명 청 왕조와 책봉관계를 맺고 있던 조선 왕조에 남아 있는 역사자료 로서는 조선왕조실록 및 신숙주(申叔舟)가 지은 해동제국기(海東諸国紀) (1471년 간 행)에 류큐국에 관한 기록이 보이고 있다.4 13세기 말에서 14세기에의 류큐 열도에서는 각지에 구스크(グスク)라고 불리는 시설이 출현하고 있다. 오키나와현 교육위원회가 실시한 구스크 분포조사에 의하면 각각의 구스크에 관한 규모나 구조를 포함한 정보에 상당한 격차가 있기는 하지만 오키나와현 내에 약 3백 개 소가 존재하고 있다. 이 중에서 고고학적인 조사가 행해진 구스크에는 주위를 책열(柵列)이나 석루(石壘, 城壁) 등으로 둘러싼 방어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구스크는 류큐 열도 의 섬들이 군사적 긴장관계에 덮이게 된 것을 계기로 출현하였다고 생각되고 있다(오키나와 현 교육위원회[沖縄県教育委員会] 1983 1990 1993). 류큐사 연구에 의한 이제까지의 이해는 11세기에 시작된 농경사회가 발전한 결과, 농경지 나 수확물(부)의 소유와 분배를 둘러싼 사회적 긴장의 발생을 계기로 하여 집락을 단위로 하 는 방어를 목적으로 한 간단한 시설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13세기말부터 14세기에 걸쳐서 구 조화되면서 구스크가 성립되었다고 한다. 그 후 지역 수장에 의한 구스크의 점유(占有) 및 거 성화(居城化)가 진전되고, 15세기에는 류큐 열도 각지에 대형화된 거점적 구스크가 등장한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서는 오키나와 섬에 성립된 세력에 의해 류큐 열도의 정치적 통합이 도모된 결과 구스크의 사용과 새로운 축조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된다. 최종적으로는 왕성 (王城)으로서의 슈리성[首里城]을 정점으로 하는 구스크군(群)만이 류큐국의 행정시설 및 군 사시설, 혹은 제사시설로서 지속적으로 사용되게 된다.5 4)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国紀) 에 대해서는 다나카 다케오(田中健夫, 1991, 海東諸国紀ー朝鮮人の見た中世の日 本と琉球ー (岩波文庫33-458-1) 岩波書店.) 역주본을 참조하였다. 5) 구스크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아사토 스스무(安里進, 1987, 琉球 沖縄の考古学的時代区分をめぐる諸問題(上), 考古学研究 34-3) 등에 의해 역사적 평가가 행해져 왔다.
118 일반적으로 구스크는 해안 및 저평지를 굽어보는 얕으막한 구릉 및 단구의 끝부분에 축조 되고 있다. 100~1000 전후의 평지를 조성하고, 그것을 책열 및 석루(성벽)로 둘러싸는데, 성립 단계부터 방어를 의도한 군사적 기능이 확인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하였다. 이제까지의 류큐사 연구에서는 13세기 말부터 14세기의 구스크 성립 요인을 류큐 열도사회 내부의 군사 적 긴장에서 찾았다. 하지만 13세기 말의 아시아 세계를 살펴보면 1279년에는 원(元)이 남송 (南宋)을 멸망시켰고, 이어서 원은 일본과 베트남에 대한 침공을 도모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 들을 감안하면 구스크의 축조에는 이와 같은 원의 군사 행동이 야기한 아시아 각 지역의 긴장 관계의 영향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이케다 요시후미[池田榮史] 2007). 또한 구스크 성립기와 겹치는 14세기에는 한반도에서 산동반도를 포함한 동중국해 북부 해역에서 전기(前期) 왜구의 활동이 격화되고 있다. 왜구는 일본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멸망(1333년)과 그 후의 남북조(南北朝)의 내란(內亂)에 의하여 정치적 혼란 상태에 빠진 서 일본, 특히 큐슈 연안 지역에서 도당(徒堂)을 결성하여 해적 행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출현 한 결과라고 여겨지고 있다.6 왜구는 한반도 연안부를 중심으로 하여 산동반도를 포함한 중국 대륙연안부 지역 등에서 준동하면서 고려와 원의 국력을 피폐하게 하였다. 왜구들의 활동이 격화되는 가운데 1368년에 원을 멸망시키고 건국한 명 왕조는 주변 나라들에 대하여 조공을 요구하는 초유사(招諭使)를 파견하는데, 이때 일본에 대해서는 왜구의 통제를 요구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일본은 남북조 쟁란이 한창이어서 이 쟁란이 종식되는 14세기 말까지 왜구 의 준동은 중단되지 않았다. 이와 달리 류큐국은 명 왕조의 초유에 응하여 1372년부터 조공 을 시작하였고, 명 왕조는 해선(海船)을 제공하는 등의 우대책으로 류큐국을 상대하였다. 이 것은 류큐국이 일본을 대신하여 왜국 대책을 추진하는 담당 세력이 되기를 기대하는 동시에 류큐 열도가 왜구의 거점으로 되는 것을 두려워한 대응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점들을 고 려하면 류큐 열도에는 명 왕조로부터 책봉을 받은 이후에 왜구에 대한 방어시설로서 축조된 구스크, 혹은 책봉 전후의 단계에 왜구가 류큐 열도를 거점으로 삼기 위해 축조한 구스크가 존재할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7 1372년에 명 왕조에 대한 조공을 개시한 류큐 열도의 정치세력은 류큐중산왕(琉球中山 6) 왜구(倭寇)에 관한 연구는 다나카 다케오(田中健夫, 2012, 倭冦ー海の歴史ー 講談社学術文庫版 (初版 教育社歴史新書 日本 史66)의 저작을 참고하였다. 7) 종래의 구스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류큐 열도의 內的 발전론 으로 일관되었다. 하지만 구스크 축조의 배경에는 對外關係 를 포함한 다양한 요인들을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119 王)이었다. 이에 이어서 1380년에 류큐산남왕(琉球山南王), 1383년에 산북왕(山北王)이 명 왕조의 책봉을 받아 조공을 개시한다. 류큐 중산왕은 오키나와 섬 우라조에시[浦添市] 우라조 에 구스크(浦添グスク), 산남왕은 오키나와섬 이토만시[糸満市] 난잔구스크(南山グスク), 산 북왕은 오키나와섬 나키진촌[今帰仁村] 나키진구스크(今帰仁グスク)에 각기 왕성을 두고 있 었다. 이 단계에는 아직 류큐 열도를 통일한 정치세력은 성립되지 않았다. 중산왕의 왕성인 우라조에성[浦添城]은 표고(標高, 해발) 130~140m의 석회암 구릉 위에 있으며, 동서 약 300m, 남북 약 100m의 범위를 석루로 둘러싸고, 내부에 복수의 구획을 만들었다. 석루의 외 측 완만한 경사면에는 산지를 깎아 만든 낭떠러지(일본의 성곽 용어로는 기리기시[切岸]라고 함)와 해자를 둘러 중층적인 방어기능을 갖추고 있다. 또한 우라조에 구스크의 주변에는 여러 개의 집락 유적이 둘러싸고 있는데, 죠카마치[城下町]적 기능을 담당하였다고 생각된다. 산남 왕의 왕성으로 여겨지는 난잔성[南山城]은 표고(標高, 해발) 약 50m의 석회암 단구산에 있으 며, 동서 약 250m, 남북 약 150m의 범위를 석루(성벽)으로 둘러싸고 있다. 현재 초등학교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에 상세한 구조는 알 수 없다. 산북왕의 왕성이었던 나키진성[今帰仁城]은 표고(標高, 해발) 90~100m의 석회암 구릉상에 축조되었으며, 남북 약 400m, 동서 약 200m의 범위에 석루(성벽)으로 둘러싼 네 개의 성곽(郭)이 만들어져 있다. 석루는 10m 이상 의 비고차(比高差)가 있는 부분이 있으며, 가장 높은 부분에 설치된 하나의 성곽(郭)을 중심으 로 하여 엄중한 방어 구조를 갖추고 있다. 구스크에서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면에는 집락 유적 이 확인되고 있으며, 구릉의 끝부분에는 나키진 구스크의 지성(支城)이라는 전승을 가진 유적 도 존재하고 있다.8 이와 같은 14세기 후반 오키나와 섬에 할거하였던 정치세력들의 왕성 구스크를 보면 각기 야트막한 구릉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를 석루(성벽)으로 둘러싼 구조를 하고 있다. 이것은 구 스크가 군사적으로 유리한 지역을 장악한 후 그에 방어기능을 부가하여 축조된 시설임을 명 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우라조에 구스크나 나키진 구스크는 석루로 둘러싼 왕성의 주 변부에 죠카마치[城下町]로 비정되는 집락 유적들이 확인되고 있는데, 구스크는 석루(성벽)으 로 둘러싸인 단독의 건조물이 아니라 주변의 집락 유적을 포함한 복합적인 유적군의 중심적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왕성이 된 구스크의 방어시설은 이들 주변 유적을 포 8) 각 구스크의 입지 및 규모, 구조 등에 대해서는 각각의 구스크 발굴보고서를 비롯하여 오키나와 현 교육위원회[沖縄県教育委員 会]에 의한 구스크 분포조사보고서(1983, ぐすくーグスク分布調査報告(Ⅰ)ー沖縄本島および周辺離島ー, 沖縄県文化財 調査報告 53)를 참고하였다.
120 함하는 일대를 대상으로 하여 계획적으로 배치되었다고 생각되며, 그 중에서 가장 중요시된 시설이 구스크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구스크에 대한 조사 연구는 기본적으로 석루(성벽)과 그 내부의 유구 및 유물 구성을 파악하고, 그 연대적 추이를 해명하는 것에 중점이 두어져 있었다. 이 때문에 각각의 구스크를 주변 유적을 포함하는 유적군으로서 파악하고 유적군 전체의 배치 상황 및 각각의 기능을 상세하게 복원하는 이해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 전반에 걸쳐서 명 왕조로부터 책봉을 받은 정치세력이 거점으로 삼았던 왕성(구스 크)과 그 방어시설의 실태 해명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조사 연구의 진전을 기다려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Ⅳ. 류큐국의 해양방어체제와 시설 15세기에 들어와 류큐국 내부에서는 명 왕조와 책봉 관계를 맺은 정치세력들의 흥망이 일 어났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류큐 중산왕은 1406년에 왕권이 교체되고, 이에 수반하여 왕성도 우라조에 구스크에서 슈리구스크(首里グスク)로 이동하였다. 새로운 중산왕 왕통을 류큐사에 서는 제1상씨(尚氏) 왕통이라고 부른다. 제1 상씨 왕통이 왕성으로 삼은 슈리 구스크는 표고 (標高, 해발) 약 130m의 석회암 구릉상에 축조된 동서 약 400m, 남북 약 270m, 면적 약 47,000 의 석루(성벽)으로 둘러싸인 성곽이다. 축성 당시는 한 겹의 성벽이었지만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중엽에 걸쳐 두 차례에 걸쳐 증축되어 2중의 성벽을 가진 류큐 최대의 왕성 이 되었다. 제1상시 왕통은 1416년에 산북왕, 이어서 1427년에 산남왕을 멸망시키고 오키나와 섬 내부의 통일을 이루었다. 그 후 제1상씨 왕통은 1460년까지는 아마미 제도를 지배하에 넣었 지만 1469년에 다시 왕위 찬탈이 일어나 새로운 왕통으로 바뀌었다. 이 새로운 왕통을 류큐 사에서는 제2상씨 왕통이라고 부른다. 제2상씨 왕통은 오키나와 제도와 대만 섬 사이에 위치 하는 미야코, 야에야마 제도에의 압력을 강화하여, 16세기초 경에는 이 지역을 지배하에 두 었다. 그 결과 제2상씨 왕통 시대의 류큐국은 아마미 제도에서 미야코, 야에야마 제도까지를 포함하는 류큐 열도의 중 남부권 전 지역을 판도로 하는 도서해역국가(島嶼海域国家)로 성장 하였다. 이후 이 제2상씨 왕통은 메이지 정부에 의한 류큐국 병탄 때까지 존속하였다. 제1 상씨 왕통 및 제2상씨 왕통 지배하의 류큐국에서는 명 청 왕조와 맺은 책봉관계에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