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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시험지 출제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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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어 교육자료(중등)-작업.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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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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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시 민 참 여 고 려 사 항 이 해 당 사 자 : 유 ( ) 무 전 문 가 : 유 ( ) 무 옴 브 즈 만 : 유 ( ) 무 법 령 규 정 : 교통 환경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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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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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용지도서_쓰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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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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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2016학년도 수시모집 전형별 면접질문(의예과포함)(최종 ).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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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민락초신문4호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24권6호-전체최종.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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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사진 24 _ 종루지 전경(서북에서) 사진 25 _ 종루지 남측기단(동에서) 사진 26 _ 종루지 북측기단(서에서) 사진 27 _ 종루지 1차 건물지 초석 적심석 사진 28 _ 종루지 중심 방형적심 유 사진 29 _ 종루지 동측 계단석 <경루지> 위 치 탑지의 남북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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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부산연주문화\(김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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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 石 堂 論 叢 49집 기꾼이 많이 확인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의 유형이 가족 담, 도깨비담, 동물담, 지명유래담 등으로 한정되어 있음도 확인하였 다. 전국적인 광포성을 보이는 이인담이나 저승담, 지혜담 등이 많이 조사되지 않은 점도 특징이다. 아울

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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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 hwp

퇴좈저널36호-4차-T.ps, page Prefligh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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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답 과 해 설 1 (1)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어생활 주요 지문 한 번 더 본문 10~12쪽 [예시 답]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한 사 람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으며,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해쳐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04 5

민속지_이건욱T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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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금융분야 개인정보보호 가이드라인 1. 개인정보보호 관계 법령 개인정보 보호법 시행령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령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전자금융거래법 시행령 은행법 시행령 보험업법 시행령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시행령 자본시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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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았다. 임진왜란으로 권위가 실추되었던 선조는 명군의 존재를 구세 주 이자 王權을 지켜주는 보호자 로 인식했다. 선조는 그 같은 인 식을 바탕으로 扈聖功臣들을 높이 평가하고 宣武功臣들을 평가 절하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려고 했다. 이제 명에 대한 숭 앙과 충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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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馬 兵 의 한글일기 난리가 연구 1)정우봉 * <차례> 1. 서론 2. 난리가 의 장르, 작가 및 창작 시기 3. 난리가 의 주제의식과 표현방식 4. 결론 <국문요약> 난리가( 亂 離 歌 ) 는 1728년에 발생한 戊 申 亂 (일명 李 麟 佐 의 난)을 진압하 기 위해 官 軍 으로 참전한 訓 練 都 監 소속의 한 馬 兵 이 산문으로 기록한 한글 일기 작품이다. 난리가 의 작가가 누구인지 그 정확한 정보는 알기 어렵다. 다만 작품내 몇몇 단서를 통해 난리가 를 쓴 작가는 訓 練 都 監 소속 馬 兵 이 며, 가족들과 함께 수도 한양에 거주했던 인물로 추정된다. 난리가 는 무신란 이 끝난 이후 1728년 12월 무렵에 원고를 완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난리가 는 하층 병사에 의해 창작된 한글일기라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품 이다. 현존하는 한글일기가 많지 않아 자료적 희소성의 측면에서도 중요하겠 지만, 무엇보다도 무신란에 직접 참전한 한 하급 병사의 손에 의해 창작되었다 는 점이 조선시대 일기문학사의 흐름 속에서 더욱 의미 깊다고 하겠다. 현존하 는 한글일기는 대부분 상층 사대부층, 특히 남성 사대부들에 의해 창작 향유되 었던 점을 고려할 때, 난리가 의 존재는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문학과 교수

296 古 典 文 學 硏 究 第 43 輯 무능한 지휘관의 부정적 행태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비판한 점, 하급 병사들의 고단하고 힘겨운 군영 생활의 단면을 부각시키기도 하고 그들의 전투 상황과 활약상을 생생하게 표현한 점, 아이러니의 기법, 시조 작품 등에서 항용 사용 되는 돈호법의 수사기교 그리고 천근한 일상 구어를 적절하게 운용한 점 등은 난리가 가 보여주는 독특한 면모이다. 그리고 이같은 작품적 특징은 도시 하 층민으로 살아가던 훈련도감 소속 병사들의 정서와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주제어 : 난리가, 날리가, 馬 兵, 일기문학, 이인좌의 난, 戊 申 亂, 하급병사, 아이러니, 반어, 돈호법 1. 서론 이 논문은 18세기초에 훈련도감 소속 한 馬 兵 이 쓴 한글일기인 난리 가( 亂 離 歌 ) 를 주대상으로 하여 작가, 주제의식과 표현방식의 문제를 구 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난리가 는 제목만 놓고 보면 詩 歌 작품이라 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로 한국문학통사(3) 4판에서는 이 작품에 대 해 일상의 구어를 활용하여 병졸의 생활을 다룬 가사 로 설명했으며 1), 한 국민족문화대백과 에서도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때 쓰여진 작자 미상의 가사 라고 하였다. 2) 하지만 난리가 는 1728년에 발생한 戊 申 亂 (일명 李 麟 佐 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官 軍 으로 참전한 訓 練 都 監 소속의 한 馬 兵 이 산문으로 기록한 한글 일기 작품이다. 난리가 는 1728년 3월 17일부터 4월 19일까지 약 30일동안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체험했던 사건과 사실들을 노정에 따라 산문체로 기록한 한글일기인 것 1) 조동일, 한국문학통사(3) 4판, 지식산업사, 2005, 382면. 2)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제공하는 네이버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의 난리가 항목 참조.

18세기 馬 兵 의 한글일기 난리가 연구 정우봉 297 이다. 난리가 는 다음 세가지 측면에서 주목되어야 할 작품이다. 첫째, 일차적으로 전근대시대에 전해지는 한글일기가 많지 않다는 점 에서 난리가 는 자료적 가치가 높다. 조선시대 때에 기록된 일기는 거의 대부분 한문 일기이며, 한글로 쓰여진 일기는 극히 소수만이 전해진다. 자료적 희소성의 측면에서 일단 이 작품은 주목되어야 한다. 둘째, 난리가 의 가치는 한글이라는 표기 수단으로 기록했다는 점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의 작가는 성명과 신분이 명확하지는 않지 만, 훈련도감 소속 馬 兵 의 일원으로 무신란에 참여했던 인물로 추정된다. 난리가 는 훈련도감 소속 병졸의 손에 의해서 자신의 체험을 일기의 형 태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지배층인 양반 사대부에 의해 작성된 것이 아니라, 하급 계층인 한 병졸에 의해 창작된 것이다. 난리가 는 하급 병졸들의 의식과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게 다루어질 사항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무능한 지휘관에 대 한 야유와 풍자, 무고한 백성들의 희생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의 표출, 고 단하고 힘겨운 군영 생활에 대한 실감있는 묘사 등을 통해 하층민의 입 장과 처지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중요하다. 셋째, 난리가 는 무신란의 전개과정을 살피는 데에 유용한 역사 사료 로서 가치가 있으며, 馬 兵 의 활약상과 군영생활을 다루고 있어 조선시대 騎 馬 軍 의 일단을 이해하는 데에도 자료적 가치가 높다. 난리가 에 대해서는 유탁일 교수가 학계에 소개함으로써 비로소 알려 졌다. 작품 원문과 간략한 해제를 제공함으로써 이 작품의 존재와 의미에 관해 처음으로 소개하였다. 3) 이후 작품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제대로 3) 난리가 는 유탁일 교수가 소장하고 있던 필사본 戊 申 錄 에 합철되어 있다. 유탁 일 교수는 미발표작품 날리가에 대하여, 국어국문학 61(국어국문학회, 1973) 에서 처음 이 작품을 소개했다. 이후 아뢴즉 장수잡는 일이기에, 오늘의 문학 창간호(오늘의 문학사, 1977)에 원문을 수록하고 현대어로 표기하고 주석을 붙였 다. 한편 한국고서종합목록 (국회도서관, 1968)을 보면, 필사본 무신록 (합철 : 난리가) 1책이 경북대와 일본 정가당문고에 소장된 것으로 나와 있다. 일본 정가

298 古 典 文 學 硏 究 第 43 輯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만 판소리계 소설 적벽가 의 군사설움 대목의 형 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언급되었을 뿐이다. 4) 2. 난리가 의 장르, 작가 및 창작 시기 난리가 는 날짜를 표시하고 일정한 시간 단위를 기준으로 하여 작가 자신의 체험을 산문의 형태로 기록한 일기이다. 먼저 난리가 의 기술방 식의 특징을 언급해 둔다. 한글일기는 한문일기와 달리 그날그날 기록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일정 시간이 지난 후 회상의 방식에 의해 쓰여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기술방식 또한 한문일기의 그것과 다소 다르다. 1 그날 밤의 적병이 도망 야 쳥뇽산으로 믈러 갓거 이 십 일 미명( 未 明 )의 마군( 馬 軍 ) 일 과 보군( 步 軍 ) 삼 을 달 쳥뇽산의 다 니 적병( 賊 兵 )이 딘셰( 陣 勢 )를 일워시며 2 삼일을 무거 군병( 軍 兵 )을 호궤( 犒 饋 ) 고 이십구일의 쳥 쥬을 나 문의로 향 산은 텹텹 고 믈은 잔잔 산새 슬피 울어 집 난 의 근심을 더 더라. 삼십일 미명의 군병 을 총독( 總 督 ) 야 옥쳔으로 향 3 군냥( 軍 糧 )이 젼혀 업서 모든 쟝졸이 밥을 굼고 밤을 겨 유 새와 초팔일 미명의 군( 行 軍 ) 야 함양 오십니 드러가 니 (밑줄과 한자 병기는 인용자. 이하 동일) 당문고에 소장된 무신록 은 국립중앙도서관에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되어 있어 서 직접 열람하였다. 무신란의 과정을 일기 형태로 기록해 둔 것으로, 版 心 에 燕 巖 山 房 이라고 찍힌 私 稿 紙 를 사용하고 있어 이 자료가 연암 집안에서 필사, 소장 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난리가 는 합철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경북대 도서관 에는 무신록 이 소장되어 있지 않다. 4) 정창권, 적벽가의 형성과 난리체험, 판소리연구 24, 판소리학회, 2007, 303~327면.

18세기 馬 兵 의 한글일기 난리가 연구 정우봉 299 하루를 시간 단위로 매일의 일상을 그때그때 즉시 기록하는 방식이 아 니라, 일정한 시간이 경과한 후 과거의 사건과 사실들을 회상하면서 시간 의 연속적인 흐름 속에서 서술하는 방식을 택했다. 매일의 날짜를 앞에 적고 그날의 일상을 써내려가는 한문일기와 달리 난리가 는 위의 인용 문에서 보듯이 마침표에 의해 매일의 시간들이 분절적으로 구분되지 않 는 방식을 취했다. 5) 난리가 는 그날의 일상을 그때그때 즉시적으로 기 록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일정 시점이 지난 후 회상의 방식을 통해 집 필되었다. 그런데 난리가 를 시가 작품으로 오해했던 데에는 작품 제목이 난리 가 였던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제목만으로 시가 형식의 가사와 산문 형식의 일기를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예컨대 송씨부인이 쓴 기행 작품 금행일기 는 가사 장르임에도 일기 라는 제목을 붙였고, 나주임씨 가 쓴 병인양란록 은 일명 병인양난시가사 로도 불려지는데, 병인양요 당시의 전쟁 체험을 산문 형식으로 기록한 일기이다. 6) 또한 일기와 가사 작품이 서로 넘나드는 사례도 보인다. 1810년에 金 元 根 이 일기 형식으로 쓴 慈 慶 志 咸 興 日 記 에는 부분적으로 가사체의 형태를 적절하게 운용한 대목이 있으며, 가사 작품 동유가 는 시간 단위를 명료하게 표시하는 일 기 형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7) 난리가 의 작가가 누구인지 그 정확한 정보는 알기 어렵다. 다만 작품 내 몇몇 단서를 통해 난리가 를 쓴 작가는 훈련도감 소속 馬 兵 이며, 가 족들과 함께 수도 한양에 거주했던 인물로 추정된다. 5) 조선시대 한글일기의 시간의식과 회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정우봉, 조선시대 국문 일기문학의 시간의식과 回 想 의 문제, 고전문학연구 39호, 한국고전문학회, 2011 에서 지적한 바 있다. 6) 병인양란록 의 작가를 경주김씨 로 본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작가 문제를 재론하고 작품세계를 분석했다. 정우봉, 19세기 여성일기 병인양란록 의 작가와 작품세계,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26,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13, 161~193면. 7) 가사작품 동유가 가 일기 형식을 전면적으로 활용한 점에 대해서는 이승복, 동유 가의 서술방식과 작가의식, 고전문학과 교육 23, 한국고전문학교육학회, 2012, 199~233면 참조.

300 古 典 文 學 硏 究 第 43 輯 1 삼월 십칠일 파루( 罷 漏 ) 후의 군병( 軍 兵 )을 발 ( 發 行 ) 나도 역 시 군 ( 軍 士 )로셔 북당( 北 堂 )의 하딕 고 8) 2 퉁노고의 밥블 지으니 그 리 무금도 므글시고 덩이식 손의 쥐고 3 슬프다 우리 삼 명 마군( 馬 軍 )이 비록 일일 냥식( 糧 食 )을 더 머거니 나 도쳐의 션봉( 先 鋒 )이 되야 졔적( 諸 賊 )을 소멸 야시니 4 군( 行 軍 ) 야 길 갈 제 뒤옹신을 시 야 거러가기 어렵더라. 5 돈화문 밧긔셔 호궤( 犒 饋 ) 머근 후의 고동 휘드 며 집의 오 니 부모쳐 식들히 완연 여시니 이거시 뉘 덕이리오 위의 인용문을 종합해보면, 난리가 의 작가는 작가는 훈련도감 소속 馬 兵 300명 중의 한 사람으로 무신란에 참여했으며, 가족들과 함께 수도 한양에 거주하고 있었다. 무신란이 일어났을 때에 동원되었던 군사 현황 을 보면 실제로 당시 훈련도감에서 마병 357명이 출정하였다. 아래 도표 는 1728년 무신란에 동원된 군사 현황이다. 9) 시기 군영 총인원 구성 1차 (3.18) 2차 (3.22) 訓 練 都 監 386 馬 兵 357, 京 標 下 軍 14, 別 將 1, 哨 官 3, 敎 鍊 官 1, 別 武 士 10 禁 衛 營 1,065 御 營 廳 572 5 哨 兵 572 開 城 郡 200 馬 兵 2 哨 京 標 下 軍 392, 5 哨 軍 572, 別 驍 衛 55, 別 武 士 23, 別 將 千 摠 把 摠 各 1, 哨 官 10, 軍 官 4, 敎 鍊 官 3, 旗 牌 官 2, 鍼 醫 1 위의 표를 보면, 무신란에 출병한 군사 중에서 훈련도감 소속 馬 兵 이 357명이었으며, 馬 兵 을 통솔하였던 馬 兵 別 將 은 李 遂 良 이었다. 357명은 작품 내에서 우리 馬 軍 300명 이라는 언급과 일치한다. 원래 훈련도감 내에서 馬 兵 은 6 哨 (711명)의 규모로 출발하였고, 이 인원은 1682년(숙종 8) 8) 난리가 의 작품 인용은 유탁일 교수의 다음 논문에 의거한다. 유탁일, 아뢴즉 장 수잡는 일이기에, 오늘의 문학 창간호, 오늘의 문학사, 1977, 34~67면. 이하 작 품 출처는 생략한다. 9) 이근호 외, 조선후기의 수도방위체제,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1998, 1~276면.

18세기 馬 兵 의 한글일기 난리가 연구 정우봉 301 軍 制 變 通 이후에도 6 哨 (714명)로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무신란이 발 발하자 국왕의 호위와 도성 수비를 위해 馬 兵 의 절반을 남겨두고 그 나 머지 절반을 반란 진압에 동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0) 그렇다면 우리 馬 軍 300명 의 일원이었던 작가는 어떤 지위와 신분의 사람이었을까? 행군하여 길을 간다 고 하거나 퉁노고에 지은 밥이 묽었 는데 한 덩이씩 손에 쥐고 먹었다 라는 언급 등을 미루어 보았을 때, 작가 는 훈련도감 마병대의 지휘부에 속한 중상층의 인물이 아니라, 하급의 병 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훈련도감 소속 군인은 여러 신분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들의 생활과 거주 지역도 다양했다. 현존하는 한성부 호적에 나오는 훈련도감 군 63명을 조사한 결과 私 婢 를 처로 둔 婢 夫 都 監 軍 이 44%였다. 11) 이들 婢 夫 도감군은 신분은 양인이지만 노비와 같은 처지에서 생활하던 층이 었다. 그리고 노비를 소유한 도감군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대체로 훈 련도감 소속 군졸은 신분이 양인이거나 천민이었으며, 그들의 생활은 빈 천하고 열악하였다. 미천한 신분의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훈련도감 병사들은 신분상승에의 욕구가 강했으며, 국왕에 대한 충성으로서 군역에 임했던 것이 아니라 생계 수단으로서 군역에 근무하 였다. 훈련도감 군사들은 조선전기와 달리 수도 한양에서 상시 근무하는 일종의 직업 군인이었으며, 급료 이외에 군역 근무에 대한 보상으로 각종 賞 物 이나 賞 職 을 원했다. 12) 작가 문제와 관련하여 좀더 추론을 해본다면, 난리가 의 작가는 마병 10) 무신란의 전개와 성격에 관해서는 고수연, 英 祖 代 戊 申 亂 硏 究 의 現 況 과 課 題, 역사와 담론 39, 호서사학회, 2004, 177~211면 ; 오갑균, 英 祖 朝 戊 申 亂 에 관한 考 察, 역사교육 21, 역사교육연구회, 1977, 65~99면 ; 정석종, 조선후기의 정 치와 사상, 한길사, 1994, 1~545면 등을 참조. 11) 김종수, 朝 鮮 後 期 中 央 軍 制 硏 究 : 訓 練 圖 鑑 의 設 立 과 社 會 變 動, 혜안, 2003, 1~374면. 12) 이에 대해서는 다음 논저를 주로 참조했다. 김종수, 17세기 訓 鍊 都 監 軍 制 와 都 監 軍 의 활동, 서울학연구 2, 서울학연구소, 1994, 155~195면 ; 김종수, 朝 鮮 後 期 中 央 軍 制 硏 究 : 訓 練 圖 鑑 의 設 立 과 社 會 變 動, 혜안, 2003, 1~374면.

302 古 典 文 學 硏 究 第 43 輯 중에서도 문서 실무를 담당했던 書 字 的 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 다. 書 字 的 은 조선시대 각 군영에서 문서의 작성과 기록을 맡아 보던 하 급 군졸이었다. 실제로 훈련도감에는 마병 1초마다 書 字 的 이 1명씩 배치 되어 있었다. 13) 작가가 馬 兵 중에서 書 字 的 일 가능성을 제기하는 이유는 작품 속에 임금의 傳 旨, 반란군의 檄 文, 지휘관의 訓 示 등을 충실하게 수 록했으며, 무신란에 참여했던 다수 인물들의 지위와 성명, 무신란이 끝난 이후 임명되거나 봉훈된 직위 등이 정확하게 기술되었기 때문이다. 아울 러 난리가 가 합철되어 있는 戊 申 錄 에는 임금의 敎 書, 四 道 巡 撫 使 南 征 勝 捷 記 등이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도 작가 추정에 함께 고려되어 야 할 사항이다. 14) 난리가 를 창작한 시기는 언제쯤일까? 작품 내 관련 정보를 종합해 보았을 때, 난리가 는 무신란이 끝난 후 1728년 12월 무렵에 완성되었 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신란에 참여했던 관군의 지휘관들을 호칭할 때에 작가는 무신란 진압 이후에 공신으로 녹훈되거나 관직에 제수된 것을 함 께 기록해 두었기 때문이다. 1 응관( 採 鷹 官 ) 권희 ( 權 喜 學 )아 화원군( 花 原 君 )의 곤양 군슈( 郡 守 ) 2 우읍다 별쵸의 별쟝( 別 將 )은 어 잇고 아니오뇨. 젼양군( 全 陽 君 ) 졀 나병 ( 全 羅 兵 使 ) 긔 무슴 공이런고. 3 용 시고 운봉현감 손명대( 孫 命 大 ) 본현 군병을 거 리고 구( 隘 口 ) 딕희여셔 도적의 동졍( 動 靜 )을 시히 아라 문보( 問 報 ) 니 졀나수 ( 全 羅 水 使 ) 아니 가. 인용문 1의 權 喜 學 은 무신란 때에 채응관(교련관)으로 참가했으며, 이후 그 공을 인정받아 花 原 君 에 봉해지고 곤양군수를 제수받았다. 2의 13) 만기요람, 훈련도감 참조. 14) 난리가 의 작가가 훈련도감 馬 兵 으로서 어떤 지위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 정확한 신분은 어떤 것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추후 더 정밀한 논의가 필요하다.

18세기 馬 兵 의 한글일기 난리가 연구 정우봉 303 李 益 馝 은 禁 衛 右 別 將 으로 참가했다가 무신란이 끝난 후 全 陽 君 에 봉해 졌으며, 1728년 8월 2일에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영조를 친견하 였다. 3의 孫 命 大 는 운봉현감으로 재직하다가 무신란 이후 경상좌도 수 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난리가 가 수록되어 있는 필사본 책자 의 끝에 歲 戊 申 臘 月 完 山 後 人 書 于 私 家, 즉 무신년(1728) 12월에 完 山 後 人 이 집에서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의 언급 등을 근거로 추정할 때 난리가 의 작가는 무신란이 끝난 이후인 1728년 12월 무렵에 원고를 완 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3. 난리가 의 주제의식과 표현방식 (1) 무능한 지휘관에 대한 풍자 : 아이러니와 呼 名 의 修 辭 난리가 의 특징적 면모 중의 하나는 지배층 - 지휘관, 지방 수령과 양 반 사족 등 - 의 행동에 대해 작가의 감정과 의식을 적극적으로 표출하 고 있다는 점이다. 덕망 높은 지휘관에 대해서는 한없는 애정과 칭송을 하였지만, 무능하고 비겁한 지휘관의 행태에 대해서는 야유와 조롱을 퍼 붓었다. 1 착 샤 죵 관( 從 事 官 ) 박문슈( 朴 文 秀 )여 디략( 智 略 )과 의긔( 義 氣 ) 죠흘시고. 마보군병( 馬 步 軍 兵 )을 식 티 랑 야 됴셕( 朝 夕 )으로 친문 ( 親 問 ) 니 네 군 의 등창 던 오긘( 吳 起 )들 이예셔 더 소냐. 도집 ( 都 執 事 ) 시텰( 白 時 哲 )아 군법( 軍 法 )이 엇더콴 어드러로 도망 뇨. 응관 ( 採 鷹 官 ) 권희 ( 權 喜 學 )아 화원군( 花 原 君 )의 곤양 군슈( 郡 守 ) 넨들 아니 괴( 內 愧 ) 랴. 가련 다 안셩 군슈 제군 거 리고 우텬봉의 오 거다. 디략( 智 略 ) 만 금의듕군( 禁 衛 中 軍 ) 션봉으란 아니 고 자텬봉의 오 고. 우읍다 별쵸의 별쟝( 別 將 )은 어 잇고 아니오뇨 젼양군( 全 陽 君 ) 졀나

304 古 典 文 學 硏 究 第 43 輯 병 ( 全 羅 兵 使 ) 긔 무슴 공이런고. 2 용녈 샤 샹듀( 尙 州 ) 영쟝( 營 將 ) 한속( 韓 속( 玉 + 束 )이여 분개( 憤 慨 )도 업슬시고. 샹 군마( 軍 馬 ) 일만병을 슈하( 手 下 )의 거 리고 군냥( 軍 糧 )만 허비 고 부졀업시 안잦다가 도적을 파 후의 무엇 려 예 왓 다. 네 죄 상( 罪 狀 )을 혜어내면 효시 죄언마 도무 ( 都 撫 使 )의 은덕으로 십오도 ( 十 五 度 ) 결곤( 決 棍 ) 니 넨들 아니 참괴( 慙 愧 ) 랴. 본현 군병을 거 리고 구( 隘 口 ) 딕희여셔 도적의 동졍( 動 靜 )을 시히 아라 문보( 問 報 ) 니 졀나수 ( 全 羅 水 使 ) 아니 가. 3 仙 人 橋 나란 물이 紫 霞 洞 에 흘너드러 半 千 年 王 業 이 물소 이로다 아희야 故 國 興 亡 을 무러 무 리오 15) 작가에게 있어 유능한 지휘관은 병사들을 자식 같이 대하는 사람이다. 위의 글에서 작가는 從 事 官 으로 참전했던 朴 文 秀 에 대해 馬 兵 과 보병을 자식 같이 사랑 한 인물로 칭송하면서, 중국 戰 國 시대의 吳 起 장군의 고 사에 견주었다. 兵 法 家 吳 起 는 中 山 國 을 공격할 때에 병졸 가운데 악성 종기로 괴로워하는 군졸이 있었는데, 이때 吳 起 가 무릎을 꿇고 그 종기를 입으로 빨아 고름을 제거해 주었다고 한다. 작가는 하급 병졸의 종기를 빨아 주었던 吳 起 장군의 고사를 원용하여 지휘관으로서의 박문수의 덕 망을 칭송하였다. 이에 비하여 무능하고 비겁한 지휘관들의 행태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풍자와 조롱을 가하였다. 특히 작가는 아이러니의 기법을 활용하고, 돈호 법과 영탄법을 적절하게 운용하는 呼 名 의 修 辭 를 구사하여 그 풍자의 효 과를 극대화하였다. 그들의 무능과 위선이 여지없이 폭로된 인물들 - 採 15) 김흥규 외편, 고시조대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2012. 작품번호 2781.

18세기 馬 兵 의 한글일기 난리가 연구 정우봉 305 鷹 官 權 喜 學, 禁 衛 中 軍 朴 纘 新, 全 陽 君 李 益 馝 - 은 무신란이 평정되고 나서 오히려 揚 武 原 從 功 臣 으로 冊 錄 되어 관직 승진과 명예를 획득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하였다. 작가는 당시 무신난의 진압에 참여했던 지휘관들을 호명하면서 그들의 행적과 능력을 엄정하게 평가하였다. 난리가 에서는 착 샤 죵 관 박 문슈여, 도집 시텰아, 응관 권희 아, 가련 다 안셩 군슈, 디략 만 금의듕군, 우읍다 별쵸의 별쟝, 용녈 샤 샹듀 영쟝 한속 이여 등에서처럼 특정 인물을 하나하나 차례대로 호출하는 돈호법의 표 현 방식을 택하였다. 돈호법은 원래 연설자가 연설자가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을 호명함으로써 일시적으로 하던 말을 중단하고 말머리를 돌리는 수사법이다. 문맥을 도중에서 끊고 대상을 불러 봄으로써 듣는 사람의 주 의를 강하게 환기시키는 효과를 거둔다. 난리가 에서도 해당 인물의 이름을 먼저 호명함으로써 극적 장면화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리고 돈호법은 대상을 불러들 이고, 그 대상을 향해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거나 특정 목적을 요구하고 기원한다. 즉 돈호법은 화자의 정서와 입장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장치 의 하나이다. 실제로 난리가 에서는 돈호법의 수사 기법을 통해 해당 인 물의 공적과 행위에 관한 작가의 뚜렷한 감정과 태도를 적극적으로 표현 하였다. 사실 頓 呼 法 은 상고 시대의 시가 이래로 고전 시가의 작품에서 빈번하 고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시조에 보이는 아희야 등의 돈호법 활 용은 그 대표적인 실례이다. 흥미로운 것은 작가가 산문으로 기록한 일기 작품에서 의도적으로 작품 중간중간에 고전시가에 항용 사용되던 돈호법 의 수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용문 시조작품 3에 운 용된 표현은 시조에 자주 나타나는 전형적인 종장의 전환적 표현이다. 16) 16) 고전시가 장르에서 운용되는 돈호법에 관해서는 정종진, 한국 고전시가와 돈호법, 한국문화사, 2006, 1~240면 ; 송지언, 돈호법을 중심으로 본 시조 작시법, 작문 연구 12, 한국작문학회, 2011, 169~201면 참조.

306 古 典 文 學 硏 究 第 43 輯 이 작품에서 화자는 仙 人 橋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고려 왕조의 몰락을 절감하게 된다. 이같은 화자의 심정은 아희야 라는 돈호법과 무 리오 라는 의문 종결사와 결합되어 순간적 감정의 영탄적 표출을 효 과적으로 연출하였다. 난리가 의 작가는 이같은 시조 작품에서 항용 사 용되던 돈호법의 수사 기법을 적극적으로 작품 속에 원용하였다. 이 점이 난리가 의 독특한 면모를 드러내준다. 작가는 대상을 불러들이는 呼 名 의 행위를 통해 독자의 주의와 관심을 집중시킨 다음 문장 종결에서 죠흘시고, 더 소냐, 도망 뇨, 공이런고 에서 보이는 詠 嘆 과 設 疑 의 語 法 과 결합시켜 해당 인물에 대한 작가의 감 정과 태도를 적극적으로 드러내 보였다. 돈호법은 강력한 감정 전달의 도 구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영탄법, 설의법과 유사한 점을 가진다. 감탄과 의 문의 종결어미로 문장을 끝맺는 방식은 특정 인물을 하나하나 호명하는 수 사 방식과 결합되어 영탄적 기능을 더욱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요컨대 난리가 의 작가는 감정 표출의 강력한 수단인 돈호법, 영탄법, 설의법 등의 표현방식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해당 인물의 행적에 대한 화자의 감정과 태도를 적극적으로 표출하였다. 덕망 높은 인물에 대 해서는 칭송과 찬미를 아끼지 않고, 무능하고 비겁한 지휘관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풍자와 비판의 어조를 더욱 높였다. 작가가 특별하게 문제 삼고 있는 부분은 논공행상의 정당성이다. 무신란의 진압 과정에서 별다른 활 약을 보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망 가기에 바빴던 인물들이 난의 진 압 후에 오히려 공신에 책봉되고 높은 벼슬을 하사받기에 이르렀던 사실 이 현실의 불합리한 점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실제로 무신란 평정 후 權 喜 學 (1672-1742)은 花 原 君 에 책록되었고 그 의 초상화를 궁궐 뿐만 아니라 私 家 에도 보관하게 하였는데, 현재 그때의 공신 초상화가 후손가에 전해지고 있다. 17) 그리고 朴 纘 新 (1679-1755)은 揚 武 原 從 功 臣 2등에 책록되었는데, 작가는 그 점에 대해 지략 많은 禁 17) 이에 대해서는 이수환, 조선후기 안동 향리 권희학 가문의 사회경제적 기반과 봉 강영당 건립, 대구사학 106, 대구사학회, 2012, 201~240면 참조.

18세기 馬 兵 의 한글일기 난리가 연구 정우봉 307 衛 中 軍 이 선봉에 서서 싸우는 대신 도리어 산봉우리 꼭대기로 도망간 덕택이라고 하였다. 반어법을 적절하게 운용하여 박찬신의 무능과 위선 에 대해 거침없는 조롱과 야유를 퍼붓었다. 지략 많은 금위중군 이라는 표현은 언어적 irony를 효과적으로 운용한 실례이다. 난리가 에서는 呼 名 의 수사와 함께 아이러니의 기법을 운용 하여 특정 인물의 행적과 공과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표현하려는 원래의 의미와 정반대되는 말로 표현하는 언어적 irony의 활용을 통해 작가는 禁 衛 中 軍 박찬신의 부정적 행태를 여지없이 폭로하고 풍자, 야유 하였다. 박찬신이 무능하고 비겁한 점을 드러내기 위해 작가는 모르는 척 자신감에 찬 無 知 로 아이러니를 구사하였다. 아이러니의 필수 요소는 대립과 거리이다. 아이러니는 외관과 현실의 상반 또는 부조화를 요구한 다. 그리고 다른 조건들이 같은 상태에서는 대조가 크면 클수록 아이러니 의 효과는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8) 박찬신의 무능, 비겁과 지략의 대립 요소가 크면 클수록 아이러니의 효과는 더욱더 증대되는 것이다. 그 리고 대립요소는 서로에게서 벗어날 수 없기에 필연적으로 긴장을 수반 하며, 이 긴장은 분노에서 환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감정적 반응을 유발 한다. 난리가 의 작가는 언어적 아이러니를 활용하여 지휘관으로서 책 임과 덕망을 갖추어야 할 박찬신이 오히려 무능하며 비겁하고 무책임한 인물임을 여지없이 폭로하였으며, 해당 인물의 그릇된 행동에 대한 분노 의 감정을 숨김없이 표출하였다. 다음 인용문은 언어적 아이러니의 기법을 더욱 효과적으로 운용한 예 이다. 함원군( 咸 恩 君 )의 쵸이좌 적딘( 敵 陣 )을 야 션봉( 先 鋒 )으란 아니하 고 보군( 步 軍 ) 오쵸( 五 哨 )을 거 리고 노픈 산의 오 공이로다. 군 ( 軍 行 )을 도라보니 타 ( 打 吹 )타 올커니와 군듕( 軍 中 )의 권마셩( 勸 馬 聲 )은 18) D Muecke, 문상득 역, 아이러니, 서울대출판부, 1980, 1~132면.

308 古 典 文 學 硏 究 第 43 輯 무 일고. 타( 吹 打 ) 뎌 균 야. 쳘리 길흘 부러오니 네 부리가 쇠부 리라도 견 디 못 리로다. 이보소 군병들아 여 후의 츌젼커든 이 듕군 ( 中 軍 ) 려 가새. 군병( 軍 兵 )을 랑 니 산 을 파 후의 산영개 믄 일과 이 엇디 다 소냐. 텬문( 天 門 )이 구듕( 九 重 )이나 셩샹( 聖 上 )이 아 시 면 블샹히 너기시리. 위의 인용문에서 咸 恩 君 과 禁 衛 中 軍 은 모두 朴 纘 新 을 지칭한다. 앞에서 도 지략 많은 인물 이라는 아이러니를 활용해서 풍자의 효과를 높였는데, 여기에서는 박찬신 한 명에 초점을 맞추어 아이러니를 연속적으로 운용했 다. 군병을 사랑하는 사람, 높은 산에 오른 공, 훗날 출전할 때에 함께 데리고 가자 등에 보이는 다수의 언어적 아이러니는 무능하고 부덕한 지 휘관의 그릇된 행태를 풍자 조롱하는 데에 더욱 큰 효과를 발휘한다. 화자는 겉으로는 모르는 척, 자신감에 찬 無 知 의 태도로 박찬신에 대해 軍 兵 을 사랑하고 공을 세우고 훗날 함께 출전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한껏 추켜 세웠다. 시치미를 떼고 화자는 외관을 내보이면서 현실을 모르는 척 하는 것이다. 외관과 현실의 상반되는 거리가 크면 클수록 아이러니의 효 과는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화자는 그 점에 주목하여 박찬신의 외관을 최 대한 칭송하고 높이었다. 이같은 언어적 아이러니를 통해 무신란이 끝난 후 揚 武 原 從 功 臣 2등에 책록되었던 박찬신의 본래 면모는 독자들의 눈앞 에 남김없이 폭로된다. 화자는 이같은 아이러니의 수법을 활용하여 권위 있고 신분이 높은 인물을 마음껏 희화화하고 조롱하였다. 권위의 전복에 따른 독자의 카타르시스를 동반한다. 박찬신의 무능에 대한 풍자와 조롱의 이면에는 무신란 이후 논공행상이 정당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당대 현실의 불합리와 모순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시선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작가는 무신란에 참전하여 온갖 고생과 역경을 견디어낸 일반 병 사들의 처지를 吹 打 兵 에 빗대어 재치있게 표현했다. 吹 打 란 원래 입으로 부는 취악기와 손으로 치는 타악기를 함께 연주하는 것에서 나온 용어이 다. 천리 먼 길을 행군할 때마다 취타병이 악기를 부느라고 온갖 고생을

18세기 馬 兵 의 한글일기 난리가 연구 정우봉 309 한 점에 대해 작가는 쇠붙이로 만든 입술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라고 표 현하였다. 기지 넘치는 표현을 통해 온갖 희생과 고통을 감내하는 하급 병사와 자기 과시에만 힘쓰는 무능하고 위선적인 지휘관의 대립적 형상 을 효과적으로 연출하였다. 이에 비해 한문으로 기록된 각종 관찬 사료와 일기 및 관련 자료들의 시각은 난리가 의 그것과 큰 격차를 보였다. 정오가 채 못되어 말을 달려 승첩을 알려 왔고, 晡 時 에 朴 纘 新 이 鼓 角 을 울리며 깃대에다 적의 머리 여러 개를 매달고 오니, 군중에서 승전곡을 울리고 군사와 말이 기뻐 날뛰었다. 捷 書 를 써서 박종원 등의 머리를 함에 담아 군관 申 漫 에게 주어 서울로 馳 報 하였다. 이때 조정에서 상하가 밤낮으로 초조하게 걱정하며 첩보를 기다리고 있다가, 이날 동북풍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모두 말하기를, 왕의 군대에 이롭다. 했는데, 과연 크게 이겼던 것이다. 19) 위의 인용글은 영조실록 에 나온다. 박찬신이 반란군 진압에서 공을 세우고 귀환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실록 뿐만 아니라 영조와 정조 임금에 의해 편찬된 南 征 日 錄, 戊 申 倡 義 錄 등의 관찬 기록을 비롯하여 사대 부들에 의해 기록된 다수의 한문 기록들에서는 난리가 에 보이는 것처 럼 공신에 책록된 지배층 인물들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조롱의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공신의 높은 등급을 받았으며 토지와 노 비를 하사받고 관직 승진의 혜택 등을 함께 누렸다. (2) 하급 병사의 활약상과 고단한 삶에 대한 묘사 : 일상 구어의 활용과 집단 정서 난리가 는 하급 병사에 의해 창작된 작품으로, 그들의 용감하고 희생 19) 영조실록 권16, 1728년(영조 4) 3월 23일.

310 古 典 文 學 硏 究 第 43 輯 적인 활약상과 함께 고단하고 힘겨운 생활상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특히 한달이 넘는 기간동안 감내해야 했던 힘들고 고단한 군영 생활의 모습들을 작품 곳곳에서 실감 있게 증언해 놓았다. 굶주림, 더위와 싸우 며 군영 생활을 보내야 했던 병사들의 고단한 삶을 다룬 작품은 흔치 않 다. 이 점에서도 난리가 는 특별히 주목된다. 1 검쳔셔 지숙( 止 宿 ) 고 십팔일 미명의 군 야 과쳔을 디날 녀염 ( 閭 閻 )이 일공( 一 空 ) 고 인( 行 人 )이 긋첫더라. 퉁노고의 밥블 지으니 그 리 무금도 므글시고 덩이식 손의 쥐고 나모 져을 못 엇거든 쇠술을 각 며 소금을 못 엇거든 쟝김 각 랴 손의 쥔 밥덩이을 머글 저긔 돌과 뉘 어이 워석버석 괴야. 2 부러진 활 것거진 툥 동로구 메고 원 노니 黃 帝 軒 轅 氏 를 / 相 奪 與 아닌 前 에 人 心 이 淳 厚 고 天 下 泰 平 여 一 萬 八 千 歲 사랏거든 / 엇더 타 習 用 干 戈 여 後 生 困 케 연고 20) 위의 인용문 - 난리가 와 사설시조 작품 - 은 통노구를 소재로 활용 하여 병졸의 고단하고 힘겨운 삶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퉁 노구는 구리로 만든 작은 솥으로, 자유롭게 옮기어 따로 걸 수 있게 만들 어져 있다. 화자는 통노구에 지은, 돌과 뉘 21) 가 뒤섞여 있는 밥을 나무젓 가락도 없어서 손에 쥐고 먹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이를 통해 화자는 무 신란의 관군으로 참여했던 당시 훈련도감 소속 마병들의 열악했던 군영 생활의 단면을 드러내었다. 이 점은 통노구를 시적 소재의 하나로 등장시 켜 전쟁에 시달리는 병졸의 고달픈 처지를 노래한 사설시조 작품과 유사 하다. 또한 이같은 고단한 군영생활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작가는 나 20) 김흥규 외편, 고시조대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2012, 작품번호 2067.1 21) 뉘는 쌀 속에 등겨가 벗겨지지 않은 채로 섞인 벼 알갱이를 말한다.

18세기 馬 兵 의 한글일기 난리가 연구 정우봉 311 모 져을 못 엇거든 쇠술을 각 며 소금을 못 엇거든 쟝김 각 랴 라고 하여 馬 兵 의 한탄을 직접 들려주었다. 병사의 한탄어린 탄식 속에 소 금에 절인 김치나 나무젓가락조차 없이 돌이 뒤섞여 있는 설익은 밥을 손 에 쥐고 먹어야 하는 병졸들의 열악한 군영 생활이 잘 드러나 있다. 1 초삼일 미명의 디례로 향 더니 드 니 디례 원이 도적의게 패 야 라나니 도적이 창곡( 倉 穀 )과 군긔( 軍 器 ) 다 가져 갓 디라. 수다( 數 多 ) 군병( 軍 兵 )이 므엇 먹고 길흘 가리오. 도무 ( 都 撫 使 ) 뎐령( 傳 令 ) 야 압고을 냥식( 糧 食 )을 시러다가 밥 지어 먹로라 니 인매( 人 馬 ) 주린 일이 야 엇디 다 긔록 리오. 2 군냥( 軍 糧 )이 젼혀 업서 모든 쟝졸( 將 卒 )이 밥을 굼고 밤을 겨유 새 와 초팔일 미명의 군 야 함양 오십니 드러가니 그 골프믈 견 디 못 러라. 3 삼십일 미명의 군병( 軍 兵 )을 총독( 總 督 ) 야 옥쳔으로 향 나리 더온 년일 야 갑듀( 甲 冑 ) 벗디 못 야 군 ( 軍 士 ) 병드러 게 러디 쟤 삼십여인이라. 4 이러구러 셔 월( 四 月 ) 망간( 望 間 )이 되니 봄의 니븐 군병이 덥기 마 견 디 못 야 고 리 연 야 길흘 가니 피골( 皮 骨 )리 상졉( 相 接 ) 야 편( 百 遍 )의 일보( 行 一 步 ) 갈길흔 쳘리( 千 里 )로다. 육체적 고통 중에서 병사들이 감내해야 하는 가장 큰 것은 굶주림이었 다. 군량미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서 병사들뿐만 아니라 軍 馬 또한 배고 픔을 견뎌야 했다. 또한 병사들은 무거운 갑옷을 두른 채 전투에 참여하 고 군영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4월에서 5월로 이어지는 한달 동안 더 운 날씨와도 씨름해야 했다. 특히 무거운 철갑을 입은 馬 兵 들의 고통은

312 古 典 文 學 硏 究 第 43 輯 더하였으며, 행군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지는 병사가 속출하기도 했다. 여기서 하나 더 지적할 것은 워석버석하다 와 같은 의태어의 활용, 그 리고 피골이 상접하다 등의 일상 구어체 등은 굶주린 병사들의 고단한 삶의 단면을 효과적으로 드러내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난리 가 의 작가가 훈련도감 소속 마병이라는 하급 계층의 의식 및 정서와 연 관되는 것으로 보인다. 먼 길 포 구티( 驅 馳 ) 야 니 군 ( 軍 士 )라 하 졀박 야 일시에 라드러 울며 로, 셔울 올나가셔 뇨( 料 ) 타셔 오 머근 냥식을 갑 올 거시니 덕분을 니버지라 고 삼 마군( 馬 軍 )이 울며 보채되 죵시 ( 終 始 )히 고집 고 아니 주니 쳘리예 츌졍나온 군 어 가 밥을 어더 머그 리오. 젼혀 굴므니 그 셟기 엇디 다 니 이요. 슬프다. 우리 삼 명 마군이 비록 일일 냥식을 더 머거니나 도쳐( 到 處 )의 션봉( 先 鋒 )이 되야 졔 적( 諸 賊 )을 소멸 야시니 이 공을 각 들 그대도록 박졀 랴. 녜날 오긔 ( 吳 起 )은 군 의 보드릇도 라시니 그와 이 일을 비 딘대 어 야 낫다 고. 4월 22일 반란군을 진압하고 돌아올 때 전주에서 일어났던 한 사건을 기록했다. 하루치 양식을 미리 타서 먹었다는 이유로 금위중군 박찬신은 병졸들에게 양식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러자 하루를 꼬박 굶게 된 마군 삼백명은 서울로 올라가 급료로 갚을테니 하루치 양식을 달라고 집단으 로 청원을 하였지만 거절을 당하였다. 이로 인하여 마군 삼백명은 하루를 꼬박 굶을 수밖에 없었다. 작가는 자신을 포함해 마군 300 여명이 도처 에 선봉이 되어서 적을 소멸 한 공을 세웠다고 생각하지만, 그같은 그들 의 공을 제대로 인정하거나 대우해주지 않았다. 열악한 사회경제적 현실 에서 살아갔던 마병들은 전란에 참여하는 것을 계기로 공을 세우고 후에 신분을 상승시키는 등의 일정한 보상을 기대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 치 양식을 미리 앞서 먹었다는 이유를 내세워 그들을 굶게 만드는 것이

18세기 馬 兵 의 한글일기 난리가 연구 정우봉 313 눈앞의 엄연한 현실이었다. 추후에 급료로 갚을 것이라고 약속함에도 불 구하고 그들의 요청은 묵살되었던 것이다. 작품 마지막 부분에 다시 이 점을 언급하고 있는 데에서 작가의 비판과 분노의 목소리가 어떠한지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1 나라히 문누( 門 樓 )의 뎐자( 殿 座 ) 시고 군졸을 위로 시며 대공( 大 功 )을 기리시며 무 소회( 所 懷 ) 잇거든 알외라 시니 엇디 소회 업 리오 마 알왼 즉 쟝슈 잡 일이 되매 비록 거져 도라오나 젼쥬셔 굴믄 일이야 어 군 니 리오. 2 경셩( 京 城 )셔 텰기( 鐵 騎 ) 수만이 려 와셔 너희 안셩 듁산을 믓디 고 시방 너희 티러 올 날이 수일은 격( 隔 ) 야시니 대군( 大 軍 )이 번 오 면 너희 다 어육( 魚 肉 )이 될디라. 무신란을 평정하고 수도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의 장면이다. 국왕이 친 히 나와 군사들을 맞이하면서 소회를 말해보라고 하였지만, 화자는 장수 를 잡는 일이 되기 때문에 말없이 있었다 고 하였다. 불만을 토로하고 싶 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작가의 한탄을 통해 우리는 작가의 비판과 불만의 목소리를 읽을 수 있다. 또 하나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일상 구어체의 적절한 활용이다. 1에 나오는 장수 잡는 일 이라는 표현이 그 하나의 예이다. 여기서 잡 다 는 말은 손에 넣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 극심한 곤경에 몰아넣다는 뜻 이다. 일상의 구어체로 지금도 많이 사용되는 용례이다. 인용문 1에 나 오는 비록 거저 돌아왔지만 의 거저 (아무 것도 없이 빈손으로), 인용문 2에 나오는 시방 (지금을 뜻함) 등도 일상 구어의 실례이다. 한편 난리가 에는 훈련도감 소속 마병들의 고단한 생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전투상황 및 활약상을 매우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314 古 典 文 學 硏 究 第 43 輯 기픈 밤의 도적기 딘( 陳 )의 니 러시니 망디소조( 罔 知 所 措 ) 야 블과 활 만 로라 니 은 절로 노혀 이리 며 뎌리 제 포댱( 布 帳 )이 닷 텨 문허디니 더옥 놀라 샹쳔답( 自 相 踐 踏 ) 야 혼 ( 魂 魄 )이 몸의 븟디 아닌 디라. 이러 굴제 그 도 ( 都 事 )와 소졸( 所 卒 )을 다 주겻더니 ( 刺 客 ) 뉵칠명이 듕군( 中 軍 )의 라드러 도무 ( 都 撫 使 )을 해 려 니 이 역시 블의지변( 不 意 之 變 )이라. 군병( 軍 兵 )이 질녁( 盡 力 ) 야 겨유 두 놈을 자바 베히니라. 위 샤 션뎐관( 宣 傳 官 )의 머리여 손을 드러 칼흘 바다 잔 명( 殘 命 )을 보젼 나 손길히 간 업. 희미 빗히 도망 쟤 긔 뉘 런고. 이 아니 니 ( 李 培 )런가. 이인좌 반군이 습격대를 조직하여 吳 命 恒 의 진지에 쳐들어 왔을 때의 위급한 상황을 묘사했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관군들이 당황하는 장면 묘 사가 인상적이다. 이인좌 반군은 李 培 에게 50명 정예병을 보내 관군을 습격하도록 했다. 그 습격대의 주임무는 관군의 총사령관 오명항을 처치 하기 위함이었다. 관군은 조직이 채 정비되기 전이었고, 강행군 끝에 진 위(지금의 경기도 평택)에 도착한 터였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습격에 제 대로 대처하지를 못했다. 극도의 혼란 속에 관군들은 허둥거릴 뿐이었다. 서로 밟고 밟히는 혼란 속에서 관군들은 허둥지둥하느라고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작가는 그 점을 혼백이 몸에 붙지 않았다 고 절묘하게 표현 했다. 더구나 반란군 이배의 정예병사들은 오명항이 있는 중앙 진지의 막 사에까지 습격을 하였다. 그때 당시 선전관이 부상당한 상황을 효과적으 로 드러내기 위해 작가는 위태할사 선전관의 머리여 라고 하여 독자의 주 의를 환기하는 돈호법을 구사하고, 손길이 간 데 없구나 라는 영탄법을 결 합시켰다. 관군은 전열을 재정비하면서 반군의 습격을 물리쳤다. 그 당시 관군에 의해 사로잡힌 병사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관군의 감시가 소홀 해진 틈을 타고 달아났다. 그 사람이 바로 반군의 습격을 이끌었던 李 培 였 다. 그는 이인좌 반군의 중군으로 선봉이 되었으며, 관군이 진위에 이르렀 을 때에 일군의 무리와 함께 습격을 하였다가 체포되었던 인물이다.

18세기 馬 兵 의 한글일기 난리가 연구 정우봉 315 한편 난리가 에서 작가는 마병 부대의 일원으로서 그들 마병의 활약 상을 부각시켰다. 적군을 만나면 냥녑픠 개을 돗틴 야 긔가 드러티니 저마다 용쟝 ( 勇 將 )이라 쳔만군( 千 萬 軍 )인들 엇디 당 리오. 쟝슈 비룡( 飛 龍 ) 고 군 호( 猛 虎 ) 니 압녹강을 건네여도 도라셔든 아니 러라. 장수는 비룡 같고 군사는 맹호 같아 압록강을 건너도 돌아서지 않을 것이다 는 비유적 표현을 통해 작가는 馬 兵 의 활약상을 작품 전면에 부 각시켰다. 실제로 무신란에 동원된 군사들의 편제를 보면 마병이 700 여 명, 보병이 1500 여명으로, 마병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다. 이같은 마병 중 심의 군사 편제는 반란군을 신속하게 토벌하기 위함이었다. 기동성 확보 를 위한 군사 編 制 였던 셈이다. 아래의 인용문은 돌격 선봉대로 활약하는 마병들의 전투 장면을 실감 나게 묘사했다. 1 못 보던 갑듀군 ( 甲 冑 軍 士 ) 저희 눈의 엇더 디 적쟝( 賊 將 )이 긔 둘러 군 호령 되 응 쟤 젼혀 업. 듁산 압 너른 들 마군( 馬 軍 ) 삼 이 일시예 칼흘 혀 들고 고함을 크게 고 적딘( 敵 陣 )의 라드니 그 군 오합지졸( 烏 合 之 卒 )이라 엇디 뎍( 對 敵 ) 리오. 면으로 헤여디 니 군병이 승승 야 적쟝을 금( 生 擒 ) 고 자충우돌 야 적병을 믓디 니 주검이 뫼 고 피 흘너 내히 되얏더라. 2 마보군병( 馬 步 軍 兵 )이 일시예 납함( 吶 喊 ) 고 좌우로 협공( 挾 攻 ) 야 도적을 싀살( 弑 殺 ) 야 적쟝( 賊 將 )도 버히며 적병( 賊 兵 )을 즛디 니 주검 이 산곡( 山 谷 )의 득 고 피 흘러 내히 되더라. 기듕의 난 도적이야 쥐 숨 라나니 군병이 승젼곡( 勝 戰 曲 )을 울리고 본딘( 本 陣 )의 도라오니 대 쇼쟝졸( 大 小 將 卒 )들히 즐겨 티하( 致 賀 ) 소 텬디진동( 天 地 震 動 ) 더 라. 군긔( 軍 器 )와 마필( 馬 匹 ) 어든 거시 그 수 엇디 다 혜리오.

316 古 典 文 學 硏 究 第 43 輯 인용문 1은 마병 부대의 활약상에 초점을 맞추어 전투상황을 묘사했 다. 장하다 마병별장 이라는 돈호법을 통해 마병 부대를 통솔하는 지휘관 의 출중한 능력을 드러내었고, 장함도 장할시고, 아니 하랴, 전혀 없네, 대적하리오, 되였더라 등 의문과 감탄의 종결사를 통해 적진을 향해 돌 진하는 마병들의 용감무쌍한 활약상을 강조하였다. 1에서 못 보던 甲 冑 軍 士 는 바로 마병 부대를 가리킨다. 당시 훈련도 감 소속 馬 兵 은 철갑, 보병은 皮 甲 을 각각 착용하였다. 갑옷의 길이도 馬 兵 은 짧고 보병은 길었다. 철갑을 두르고 선봉에 서서 돌격하는 마병들의 힘찬 위세에 상대 적들이 위축되어 대응하지 못하였음을 부각시켰다. 마 병은 활을 주무기로 하며, 환도와 편곤을 보조무기로 휴대하였다. 작가는 철갑을 두르고 날쌘 말과 함께 적진을 향해 용감무쌍하게 돌격하는 마병 들의 활약상을 부각시켰다. 인용문 2 또한 마병 군대가 보병 군사들과 함께 반란군을 진압하는 과정을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쥐 숨듯 달아나 니 라는 비유적 표현은 마병들의 활약에 의해 관군이 승리를 거두는 상황 을 인상적으로 드러내 주었다. 난리가 의 서술태도에서 특징적인 점은 작가 개인의 입장과 감정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보다는 작가를 포함하여 300 여명의 馬 兵 전체를 대변하는 목소리를 더 강하게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1 삼월 십칠일 파루( 罷 漏 ) 후의 군병( 軍 兵 )을 발 ( 發 行 ) 나도 역 시 군 ( 軍 士 )로셔 북당( 北 堂 )의 하딕 고 짓 지고 길흘 나니 셩톄읍 ( 呑 聲 涕 泣 ) 고 일보십고( 一 步 十 顧 ) 야 나가 이 형상이야 엇디 나 혼자 이리오. 2 도무 ( 都 撫 使 ) 각읍( 各 邑 )의 븐부 야 병든 군 각별 티료( 治 療 ) 야 낫거든 경셩( 京 城 )으로 올녀 보내라. 그러나 쳔리 타향의 디형녜( 死 地 兄 弟 )라 병든 거슬 두고 가니 거류지졍( 去 留 之 情 )의 슬프믈 엇디 견 리오.

18세기 馬 兵 의 한글일기 난리가 연구 정우봉 317 인용문 1은 가족들과 헤어져 출정을 떠날 때의 장면이다. 길을 처음 떠날 때의 행색이 어찌 나 혼자이겠는가 라는 표현 속에는 출정을 떠나 는 많은 군사들의 한 일원이었음을 강조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어 있다. 우리 마군 300명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거나, 천리타향의 死 地 兄 弟 로서 의 동료애를 강조하는 것 또한 이와 관련된다. 작가는 부상당한 병사들을 각 읍에 머물게 하여 치료한 후에 한양으로 돌려보내라는 명을 받았을 때에 천리타향의 사지형제이므로 병든 사람들을 두고 가니 떠나고 머무 는 슬픔을 어찌 견딜 수 있겠는가? 라고 탄식을 하였다. 형제간의 우애와 집단의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좀더 확대해서 말한다면, 일기를 쓰는 기 본 자세의 하나는 함께 출정했던 군사들 중에 나도 한 사람이었다는 의 식, 즉 그들과 동고동락을 함께 하는 집단 의식이었다. 난리가 에서 작가는 자기 개인의 감정과 의식에 갇히지 않고, 함께 출 정했던 동료 군사들의 처지와 입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하였다. 개인의 목 소리는 되도록 감추고, 작가가 소속된 집단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주조를 이루었다. 무능한 지휘관에 대한 풍자와 조롱, 덕망 있는 지휘관에 대한 칭송, 반란군과 그 협조자들에 대한 분노, 무고한 백성의 희생과 참전 병 사들의 고된 생활에 대한 안타까운 시선 등은 전란에 참여했던 하급 병 사의 집단적 정서와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훈련도감 소속 병사는 수도 도성의 하층민으로 생활하였던 도시 서민 이었다. 그들은 농민의 신분으로 일정 기간동안 수도에 올라와 군인 복무 를 하고 정해진 기간이 끝나면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던 병사들과 달랐다. 훈련도감 병사들은 군인 각자에게 무기와 군장, 마필 등 모든 것을 부담 시키는 조선전기의 병농분리제와 달리 모든 군사 물자를 확보하여 군인 들에게 지급하여야 했다. 그리고 국가에서 도성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군 인들의 의, 식, 주를 해결해 주어야 했으며, 이들에게 조총, 화약, 창검, 궁 시, 갑주, 마필 등을 제작 공급해 주어야 했다. 그들은 군대에 근무한 일 수에 따라 정해진 급료를 받았으며, 가족들과 함께 도성에서 생활하였다. 특히 보병 보다 馬 兵 의 양성 유지에 더 많은 비용이 들었다. 국가에서는

318 古 典 文 學 硏 究 第 43 輯 馬 兵 들에게 말을 지급하였고, 말을 관리할 수 있도록 더 많은 급료를 주 었으며, 皮 甲 대신 鐵 甲 을 보급해 주었다. 국왕의 호위, 도성 수비 등을 담당했던 훈련도감 병사들은 일종의 직업군인이고 국가 상비군이었다. 22) 이 점은 난리가 에 투영된 작가의 의식과 정서를 파악하는 데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피지배계층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은 일반 백성들의 처지에 대한 공감으 로 이어진다. 아래 인용문을 들어본다. 잔잉( 殘 忍 )타 그 쳔여명 셩이 긔이 도적의 뉴( 類 )의 드럿던 거시니 블 샹긔 젹거니와 피란 던 셩이 남녀( 男 女 )업시 다 살려 고 산 의 올낫닷가 노쇼( 老 少 )업시 다 주그니 그 잔잉호믈 엇디 다 측냥( 測 量 ) 리오. 무신란 진압의 과정에서 관군에 의해 무고한 백성이 무려 1,000 여명 희생을 당하였는데, 이에 대해 작가는 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는 동시 에 그들을 억울하게 죽음으로 내몬 지배층의 잔인함을 지적하였다. 일반 백성들에 대한 이같은 공감의 표현은 하급 병사의 사회적 지위와 처지가 그들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훈련도감 소속 병사들 은 대부분 양인이나 천민으로 구성되었으며, 사회경제적 기반 또한 취약 하였다. 그들은 長 番 兵 으로서 일종의 직업 군인이었지만, 국가에서 주는 급료만으로는 서울에서 생활하기가 쉽지 않았다. 국가에서 지급하는 급 료와 면포가 서울 생활에 충분하지 않자 군인들은 군역 근무 이외의 시 간을 이용하여 상행위 등의 다른 활동을 통해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이 22) 차문섭, 선조조의 훈련도감, 사학지 4, 단국사학회, 1970, 11~30면 ; 김종수, 朝 鮮 後 期 中 央 軍 制 硏 究 : 訓 練 圖 鑑 의 設 立 과 社 會 變 動, 혜안, 2003, 1~374면 ; 유승희, 17-18세기 漢 城 府 內 軍 兵 의 家 垈 지급과 借 入 의 실태, 서울학연구 36,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2009, 137~164면 ; 조성윤, 19세기 서울의 상비군 제 도와 하급군병, 연세사회학 10,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1990, 171~196면 참조.

18세기 馬 兵 의 한글일기 난리가 연구 정우봉 319 같은 그들의 사회경제적 처지는 일반 백성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며, 이 러한 공통된 기반 위에서 작가는 반군 진압의 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당 한 백성들의 죽음을 동정하였고, 다른 한편 관군의 잔인한 진압 행위를 비판하였다. 4. 결론 난리가 는 훈련도감 소속 馬 兵 에 의해 한글로 기록된 일기문학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하급 병사에 의해 창작된 일기작품이라는 점이 난리가 의 자료적 가치를 높여주는데, 이와 유사한 선행 사례로서 16세기말 임진 왜란 때에 한 병졸이 쓴 한글일기를 예로 들어본다. 한 군졸이 공( 鄭 運 )의 절의에 깊이 감복하여, 전쟁을 치루는 여가에 한글 로 일기를 썼다. 배를 출항하던 4월초부터 9월에 탄환을 맞던 날까지 군중 에서 일어난 사실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자세히 기록했다. 牛 山 安 先 生 ( 安 邦 俊 )이 그 한글기록을 가지고 漢 文 으로 엮어내고, 釜 山 記 事 라고 이름지 었다. 23) 일찍이 고흥에서 吳 氏 성을 가진 사람을 만났다. 그는 전란이 일어난 초 기 때부터 水 軍 에 참전하여 시종일관 공을 세운 사람이었는데, 언문으로 일 기를 매우 상세하게 썼다. 주엽이 그 기록에 의거해 한문으로 옮겨 나에게 보여주었다. 내가 번잡한 것들을 깎아내고 소략한 것들을 보완해서 釜 山 記 事 라고 이름붙였다. 24) 23) 崔 是 翁, 贈 兵 曹 參 判 鄭 公 行 狀, 東 岡 遺 稿 권7, 韓 國 文 集 叢 刊 續 集 46, 558면. 有 一 戍 卒 深 服 公 節 義, 戰 伐 之 暇, 以 諺 書 爲 日 記. 自 四 月 發 船 之 初, 至 九 月 中 丸 之 日, 軍 中 事 實, 纖 悉 無 遺. 牛 山 安 先 生 困 其 諺 記, 以 文 字 撰 出, 名 之 曰 釜 山 記 事. 24) 安 邦 俊, 釜 山 記 事, 隱 峯 全 書 권7, 한국문집총간 74, 422면. 嘗 遇 吳 姓 人 於 興 陽 地, 吳 自 亂 初 從 舟 師, 終 始 有 功 者. 以 諺 譯 爲 日 記 詳 悉, 曄 依 其 錄, 作 一 文 字, 來 示 余. 余 卽 刪

320 古 典 文 學 硏 究 第 43 輯 위의 인용문은 16세기 말엽에 하급 계층에 속한 한 水 軍 병졸에 의해 한글 일기가 창작되었음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한글일기 중에서 이른 시기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뒤를 이어 柳 成 龍 의 아들인 柳 袗 이 쓴 壬 辰 錄 과 壬 子 錄 이 등장한다. 25) 이들 작 품은 1610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바로 이를 뒤이어 양반가 여성인 남평 조씨(1574-1645)가 쓴 병자일기 (1636-1640)가 나왔다. 본고에서 다룬 난리가 는 이들 한글일기의 글쓰 기 전통을 계승한 작품이다. 26) 그 중에서도 난리가 는 수군 병졸에 의해 임진왜란 때에 기록된 한글 일기의 전통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아쉽게도 수군 병졸에 의해 한글로 쓰여진 원본 한글 자료는 현재 찾을 수 없고, 安 邦 俊 의 윤색과 가공을 거 쳐 한문으로 옮겨진 釜 山 記 事 만이 전한다. 이 일기에는 李 舜 臣 장군과 그의 선봉장으로 있던 鄭 運 의 활약상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안방준은 임진왜란의 실상과 경과 등을 기록한 隱 鋒 野 史 別 錄 을 편 찬하였는데, 여기에는 趙 憲 과 七 百 義 士 의 순절을 다룬 壬 辰 記 事, 이순 신의 활약상을 다룬 露 梁 記 事, 진주성 싸움을 다룬 晉 州 敍 事 세 편 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안방준이 釜 山 記 事 를 隱 鋒 野 史 別 錄 에서 뺀 이유는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 다. 그러한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에 현재 전하는 부산기사 의 기록 내 其 煩 蔓, 補 其 闕 略, 名 之 曰 釜 山 記 事. 25) 柳 袗 의 壬 辰 錄 과 壬 子 錄 에 관해서는 柳 袗, 홍재휴 역주, 역주 임진록, 영남 대출판부, 2000, 1~192면 ; 정우봉, 조선시대 국문 일기문학의 시간의식과 회상 의 문제, 고전문학연구 39, 한국고전문학회, 2011, 31~56면 ; 장경남, 국문본 실기 임진녹 임자록으로 본 修 巖 柳 袗, 퇴계학과 유교문화 50, 경북대 퇴계연 구소, 2012, 31~56면 참조. 26) 남평조씨가 쓴 한글일기 병자일기 를 다룰 때에 이 문제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다. 임진왜란 때에 한 수군 병졸에 의해 한글로 작성된 일기 작품이 16세기 말엽에 등장했으며, 그 일기작품은 한문으로 개작되어 본래의 모습은 잃었지만, 그 이후의 한글일기의 성장에 초석을 놓은 것임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서는 정우 봉, 남평조씨 병자일기 의 성격과 작품공간,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25집, 한 국고전여성문학회, 2012, 209~239면.

18세기 馬 兵 의 한글일기 난리가 연구 정우봉 321 용은 한글로 작성되었던 본래의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 된다. 현재 전하는 한문기록 부산기사 를 통해 이름이 전하지 않는 한 水 軍 병졸의 손에 의해 한글로 창작된 종군 일기의 면모를 미루어 짐작 케 한다. 16세기 말엽에 한 水 軍 병졸에 쓰여진 한글일기는 조선시대 한 글 일기문학사의 흐름을 선도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난리가 는 하층 병사에 의해 창작된 한글일기라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현존하는 한글일기가 많지 않아 자료적 희소성의 측면에서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무신란에 직접 참전한 한 하급 병사의 손에 의 해 창작되었다는 점이 조선시대 일기문학사의 흐름 속에서 더욱 의미 깊 다고 하겠다. 난리가 의 작가는 당시 수도 한양에서 생활하던 훈련도감 소속 馬 兵 의 일원이었다. 난리가 를 쓴 작가의 신분과 지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훈련도감 소속 하급 병사라는 점에서 서 울의 도시 하층민에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현존하는 한글일기는 대 부분 상층 사대부층, 특히 남성 사대부들에 의해 창작 향유되었던 점을 고려할 때, 난리가 의 존재는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무능 한 지휘관의 부정적 행태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비판한 점, 하급 병사들의 고단하고 힘겨운 군영 생활의 단면을 부각시키기도 하고 그들의 전투 상 황과 활약상을 생생하게 표현한 점, 아이러니의 기법, 시조 작품 등에서 항용 사용되는 돈호법의 수사기교 그리고 천근한 일상 구어를 적절하게 운용한 점 등은 난리가 가 보여주는 독특한 면모이다. 그리고 이같은 작 품적 특징은 도시 하층민으로 살아가던 훈련도감 소속 병사들의 정서와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점은 반란의 진압 과정을 한글로 기록한 일기 자료 평남록 이나 임신평란록 등과 비교할 때 더 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규장각에는 한글일기자료 평남록 (필사본 1책)이 전하는데, 무신란의 경과와 관군의 진압과정을 날짜별로 기록했다. 무신란의 진압을 위해 관 군측 내부에서 주고 받은 문서들 - 狀 啓, 移 文, 關 文 등 - 국왕의 諭 旨 등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따라서 하급 병사의 의식과 정서를 적극적

322 古 典 文 學 硏 究 第 43 輯 으로 반영한 난리가 와 그 성격을 달리 한다. 관군 내부에서 오고 간 문 서들을 중심으로 전란의 과정을 한글로 기록한 일기 자료로는 평남록 이외에 홍경래 난을 대상으로 한 壬 申 平 亂 錄 이 있다. 27) 홍경래 난이 발발하면서부터 평정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이 한글자료는 날짜별로 전란 진압의 과정을 서술하고, 지방관이 올린 狀 啓 등을 수록해 놓았다. 관변측 문서 등을 주로 수록해 놓았다는 점에서 평남록 과 유사한 성격 을 지닌다. 난리가 는 평남록, 임신평란록 과 함께 전란의 진압 과정 을 한글로 기록한 일기 자료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하지만 난리가 는 관변측의 문서를 중심으로 전란의 진압 과정을 서술한 평남록 이나 임 신평란록 과는 달리 훈련도감에 소속된 하급 병졸인 한 馬 兵 에 의해 기 록되었고, 마병을 포함한 하급 병사들의 의식과 정서를 적극적으로 표현 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참고문헌 미상, 난리가 (유탁일, 아뢴즉 장수잡는 일이기에, 오늘의 문학 창간호, 오늘의 문학사, 1977에 원문 수록) 미상, 임신평란록, 필사본 3책, 장서각 소장본. 미상, 임신평란록, 필사본 3책, 규장각 소장본. 미상, 평남록, 필사본 1책, 규장각 소장본. 미상, 戊 申 錄, 필사본 1책, 日 本 靜 嘉 堂 文 庫 소장본. 남평 조씨, 전형대 박경신 역주, 역주 병자일기, 예전사, 1991. 柳 袗, 홍재휴 역주, 譯 註 壬 辰 錄, 영남대출판부, 2000. 安 邦 俊, 隱 峯 全 書, 韓 國 文 集 叢 刊 74. 崔 是 翁, 東 岡 遺 稿, 韓 國 文 集 叢 刊 續 集 46. 27) 현재 규장각과 장서각에 필사본 3책이 소장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동일하다.

18세기 馬 兵 의 한글일기 난리가 연구 정우봉 323 고수연, 英 祖 代 戊 申 亂 硏 究 의 現 況 과 課 題, 역사와 담론 39, 호서사학회, 2004, 177~211면. 김종수, 17세기 訓 鍊 都 監 軍 制 와 都 監 軍 의 활동, 서울학연구 2, 서울학 연구소, 1994, 155~195면. 김종수, 朝 鮮 後 期 中 央 軍 制 硏 究 : 訓 練 圖 鑑 의 設 立 과 社 會 變 動, 혜안, 2003, 1~374면. 김흥규 외편, 고시조대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2012, 1~1386면. 남도영, 韓 國 馬 政 史, 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1997, 1~615면. 송지언, 돈호법을 중심으로 본 시조 작시법, 작문연구 12, 한국작문학회, 2011, 169~201면. 오갑균, 英 祖 朝 戊 申 亂 에 관한 考 察, 역사교육 21, 역사교육연구회, 1977, 65~99면. 유승희, 17-18세시 漢 城 府 內 軍 兵 의 家 垈 지급과 借 入 의 실태, 서울학연구 36,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2009, 137~164면. 유탁일, 미발표작품 날리가에 대하여, 국어국문학 61, 국어국문학회, 1973, 108~111면. 유탁일, 아뢴즉 장수잡는 일이기에, 오늘의 문학 창간호, 오늘의 문학사, 1977.9, 34~67면. 유탁일, 한국문헌학연구 : 국문학연구의 기초, 아세아문화사, 1991, 1~561면. 이근호 외, 조선후기의 수도방위체제,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1998, 1~276면. 이승복, 동유가의 서술방식과 작가의식, 고전문학과 교육 23, 한국고전 문학교육학회, 2012, 199~233면. 이수환, 조선후기 안동 향리 권희학 가문의 사회경제적 기반과 봉강영당 건립, 대구사학 106, 대구사학회, 2012, 201~240면. 장경남, 국문본 실기 임진녹 임자록으로 본 修 巖 柳 袗, 퇴계학과 유교문화 50, 경북대 퇴계연구소, 2012, 31~56면. 정석종, 조선후기의 정치와 사상, 한길사, 1994, 1~545면. 정우봉, 조선시대 국문일기문학의 시간의식과 回 想 의 문제, 고전문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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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馬 兵 의 한글일기 난리가 연구 정우봉 325 Abstract Themes and Expression Mode of A Cavalry s Naliga Chung, Woo-bong This thesis aim to examine to explain themes and expression mode of a cavalry s Naliga which was written in Korean in the 18th century. And I was concerned about it s status within diary literature in the late Chosun dynasty. Naliga was written by a cavalry which was affiliated in Hunryondogam( 訓 鍊 都 監 ). He saw active service in Lee In-jwa s Rebellion(Musin Rebellion) as a cavalry. The cavalry lived in Seoul. And the cavalry as lower class people was poor and they leaded the hard life. He was concerned about expressing the satire on incompetent commanders and the praise on generous commanders. He powerfully expressed his position, opinion and emtion. And also he tried to express the cavalry s hard day during the war. Naliga reflected collective emotion of lower class people including cavalry. Naliga made use of various literary techniques, for example irony, satire and apostrophic technique. Especially Naliga made the best use of irony. There was a note of irony in his voice. This work has been filled with lots of irony. Such characteristics reflects the emotion and consciousness of the cavalry who was the lower classes in Chosun dynasty. In this way Naliga has important meanings in diary literature in the Chosun dynasty. It has important significances in the 18th century.

326 古 典 文 學 硏 究 第 43 輯 I believe that analyzing characteristics of Naliga can contribute to understanding the literature history of diaries in Chosun dynasty. Also, I expect that this kind of approaching could play a role in creating another methodology to analyze diaries as a branch of literature. Key words : Naliga, Korean Diary, Cavalry, Lee In-jwa s Rebellion, Irony, apostroph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