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기_특강3] 탁주 일배 앞에 놓고 남한산성의 고금흥망을 이야기하다 - 남한산성과 문학 - 이 승 수 (한양대학교 교수) 1. 사림문로( 史 林 文 路 )의 산책자 넘실넘실 장강은 동쪽으로 흘러가며 물거품이 영웅들을 모두 다 쓸어가니 세상의 시비 성패 잠깐 사이 간 곳 없네 청산은 예전 있던 그대로건만 그새 석양은 몇 번이나 붉었는가 강가에는 백발의 어부와 나무꾼 가을 달 봄바람을 심드렁히 바라보다 한 동이 막걸리로 기쁘게 서로 만나 고금의 하고 많은 사연들 모두 담소 중에 부쳐버리네 滾 滾 長 江 東 逝 水 浪 花 淘 盡 英 雄 是 非 成 敗 轉 頭 空 靑 山 依 舊 在 幾 度 夕 陽 紅 白 髮 漁 樵 江 渚 上 慣 看 秋 月 春 風 一 壺 濁 酒 喜 相 逢 古 今 多 少 事 都 付 笑 談 中 명나라 때 양신( 楊 愼 )이 지은 노랫말 임강선( 臨 江 仙 ) 입니다. 뒷날 모종강 본 삼국지연 의 에 서사( 序 詞 )로 얹히면서 널리 알려졌지요. 인간세상의 모든 일이 순식간의 일인지라, 허무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합니다. 영웅의 삶도, 세상을 뒤엎은 사건도, 뼈저린 슬픔도 세 월의 강물 속에 쓸려 사라집니다. 하지만 도도한 세월의 강물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거센 물결을 거슬러 솟구치는 은어의 반짝거림 같은 짧은 노래와 이야기입니다. 은어 비늘의 반짝임이 내 마음 속에서 평생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것을 우리는 문학이요 역사라 고 합니다.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 복사꽃 고운 뺨에 아 탁주 일배 앞에 놓고 남한산성의 고금흥망을 이야기하다 23
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 승무 ) 영원할 것 같은 권력과 영화가 일순 사라지는 반면, 허무를 노래한 짧은 시가 영원히 기억되는 아이러니가 우리의 삶이고 문학의 실존입니다. 저는 역사 숲에 나있는 문학의 길을 산책하는 나그네입니다. 2. 종은 치는 자의 힘만큼 울리며, 지리공간은 역사의 어머니이다 물음에 잘 대답하는 것은 종을 치는 것과 같은지라, 작게 치면 작게 울리고 크게 치면 크게 울리는 법이다. 善 待 問 者 如 撞 鍾, 叩 之 以 小 者 則 小 鳴, 叩 之 以 大 者 則 大 鳴. 禮 記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나아가 과거의 사건과 앞으로 나타나게 될 미래 목적과의 대화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E.H. 카아) 지리는 역사의 자궁이요, 역사를 젖 먹이는 어머니이자 훈육하는 가정이다. W.J.듀란트 부부, 문명 이야기(The Story of Civilization) 산하를 직접 보면 느껴 앎이 깊으리니 山 河 觸 目 懲 感 深 10년 史 書 읽음보다 나음을 알리로다 可 知 勝 讀 十 年 史 김창흡, 큰형님 따라 연경에 가는 아우를 보내며 24 남한산성 아카데미 3기
당지( 當 地 )에 집안현( 輯 安 縣 )의 일람( 一 覽 )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독( 萬 讀 )함보다 낫다. 신채호, 총론, 조선상고사 3. 地 水 와 觀 魚 에 담긴 뜻 동문으로 들어서 300보 정도 걸으면 왼쪽으로 두 개의 연못이 있다. 첫 번째 연못 안에는 지수당( 地 水 堂 )이라는 건물이 있다. 두 번째 연못 안에는 작은 섬이 있는데, 몇 그루의 향목 이 군데 군데 서있다. 지금은 산성에서 가장 한가로운 곳 - 밥 먹고 잠시 바람을 쐬거나, 가 족들이 도시락을 먹거나,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벤치에 앉아 쉬거나, 힘든 거 싫어하는 연 인들이 둘러보거나 등 - 이다. 그런데 원래 연못은 세 개(혹은 네 개)였고, 토끼가 노는 섬에 는 관어정( 觀 魚 亭 )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지수당과 관어정은 언제 지어졌고, 그 기능은 무엇 이었으며, 이름에 담긴 뜻은 무엇일까? 여기에 관해서는 많은 문헌이 전해오지 않는데, 다행 히 중정남한지 에 두 편의 기록이 전한다. 지수당기( 地 水 堂 記 ) - 남학명( 南 鶴 鳴, 1654~?) 우리 현종 13년(1672, 임자) 충숙공 쌍백당( 李 世 華, 1630~1701)께서 홍주목사로 계시다 가 조정의 추천을 받고 광주부윤으로 승진하였다. 공은 일찍이 정사에 참여하여 임금의 마음 을 얻었는데, 남한산성을 맏으매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편안해졌다. 봉급으로 생계를 꾸려나 가는데 진( 晉 )나라의 효자로 유명한 오은지에 부끄럽지 않았다. 그때 마침 능을 옮기는 일이 있어 엄미리 고개에 임금께서 잠시 쉬어갈 집을 지었다. 일이 끝나자 그 재목들을 옮겨 행궁 동쪽에 당( 堂 )을 세웠다. 세 개의 큰 연못을 파고 한 곳에는 연꽃을 심었다. 그 뒤 경진년(1700)에 상서 이선부( 李 善 溥 )가 이곳에 부임하여 당을 수리하고 단청을 새 로 했다. 그리고 그 남쪽에 천양정( 穿 楊 亭 )을 또 세웠다. 나는 열 일곱 살(1670)에 처음 홍주의 근민당( 近 民 堂 )에서 쌍백당 공을 뵈었다. 하당( 荷 堂, 연못에 연꽃이 있었으므로 지수당을 이렇게 불렀던 것으로 보임)이 건립된 뒤에는, 용인 화곡( 花 谷, 현 위 치?)에 있는 선영과 선친( 南 九 萬, 1629~1711)께서 은퇴하여 쉬시던 파담( 琶 潭, 현 모현면 갈 담리 파담마을)을 자주 오갔는데, 하당은 내가 늘 중간에 쉬어 가는 곳이었다. 여기 앉아서 동 문을 보면 골짜기 언덕에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홰나무와 버들이 길가에 나란히 서있으며, 아 탁주 일배 앞에 놓고 남한산성의 고금흥망을 이야기하다 25
름다운 돌다리가 놓여져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산수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거나 여유로 이 활쏘기 하는 공간만은 아니니, 운주( 鄆 州 )에 있던 계당( 溪 堂 )[?]과 성격이 비슷하다 하겠 다. 내가 늘 시를 지어서 그러한 뜻을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이번에 마침 이선부가 놀러와 보름간이나 머무르고 있어 부윤이 나를 초대하여 당에서 술 을 대접했다. 새로 나온 연잎은 푸른 동전처럼 포개져 있고, 화려한 처마는 수면에 비추어 있 는 광경 속에서 손님과 주인이 모두 즐겁게 놀았다. 부윤의 사위인 이경원 군은 쌍백당 공의 손자인데 나에게 기문( 記 文 )을 부탁했다. 地 水 라는 이름은 건물을 처음 지을 때 붙인 것으 로, 주역 에서 이른바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군사를 기른다. 容 民 畜 衆. 에서 가져온 것이 다. 그런데 아직까지 여기에 대한 글이 없었다. 이군은 내가 글을 지어 선대의 업적을 기리기 를 바랬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나는 쌍백당 공과 나이 차이가 많은데도, 일찍이 모시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고, 공께서도 나를 후배로 각별히 대해주셨다. 또 己 巳 年 (1689년 숙종이 장희빈을 왕비로 책 봉했던 해)에는 나의 외사촌 아우인 박사원( 朴 士 元, 士 元 은 이때 페비 및 책봉의 절대불가를 주장하다 장살된 朴 泰 輔 의 字 임)과 함께 큰 절개를 세워, 그 이름이 세상에 밝게 빛났다. 갑술년(1694) 여름에 다시 영상에 임명된 선부군께서는 공을 대사도( 大 司 徒 ) 겸 하성수어 사( 荷 城 守 禦 使 )로 천거하였다. 얼마 안 있어 선부군께서 무고를 입어 파담으로 낙향하자, 선 대왕(숙종)께서는 특별히 공을 보내 함께 오게 했다. 이때 두 분은 삼전도의 창사( 創 舍 )에서 며칠을 함께 보내셨다. 용인과 광주는 땅이 맞물리는 어금니 형국으로 같은 고장이나 다름없다. 공께서 하주( 荷 州 )에서 벼슬하신 것이 세 번이나 된다. 또 나의 선부군께서는 일찍이 어사가 되어 군사의 실 정을 살피신 바 있고, 또 현절사를 건립하라고 청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파담으로부터 탄동 ( 炭 洞 )의 선조 병조의랑공 묘소 아래 사셨다. 이러하니 두 분께서 얼마나 가까이 지내셨는지 를 알 수 있다. 내가 하주( 荷 州 )와 하당( 荷 堂 )에 어찌 정이 없을 수 있겠는가! 공께서 썩어갈 재목을 버리지 않고 쓸모없는 것을 쓸모 있게 하였고, 뒤에는 기울어 가는 큰 집을 붙들어 세워 국가의 주석( 柱 石 )이 되었으니, 몸가짐은 물보다 맑았고, 국가는 그를 지축처럼 의지했다. 아! 저 아침 저녁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경치와, 외적을 지키고 군사를 조 련하는 형세는 밖으로 드러나는 자취일 뿐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나라를 튼튼하게 하는 것은 험난한 산하가 아니라고 했는데, 여기서도 그러한 사실을 체험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뒷날 이 마루에 앉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충군우국( 忠 君 憂 國 의) 마음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 나와, 땅 속에 늘 물이 고여있는 것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문 사이에 뜻을 얻을 수 있는 이름이 걸려있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감히 몇 줄을 읊조려 그 뜻을 되새긴다. 26 남한산성 아카데미 3기
我 顯 廟 十 三 年 壬 子, 李 忠 肅 雙 栢 公, 自 洪 州 牧, 廟 堂 交 遷, 陞 尹 廣 州. 公 曾 爲 從 事, 已 得 君 心, 及 專 城 吏 慴 民 安, 其 自 奉 無 愧 吳 隱 之, 時 値 遷 陵, 構 晝 停 之 屋 於 淹 峴. 事 卒 遂 輸 入 其 材, 立 堂 於 行 宮 東. 穿 三 大 池, 一 則 種 蓮. 後 庚 辰, 李 尙 書 善 溥 尹 于 玆, 改 修 加 丹 雘. 又 立 穿 楊 亭 於 其 南. 始 余 年 十 七, 拜 雙 栢 於 洪 之 近 民 堂. 及 荷 堂 之 建, 頻 來 往 龍 仁 花 谷 之 先 壟, 及 先 府 君 退 休 之 琶 潭, 荷 堂 實 爲 半 山 停 驂 之 地, 每 坐 看 東 門, 水 碓 夾 岸, 槐 柳 周 道, 石 橋 可 愛 者, 非 特 山 水 秋 花 鞲 臂 觀 德 而 已, 有 類 鄆 州 溪 堂, 每 擬 賦 詩 鋪 張 未 暇 焉. 今 適 溥 遊, 留 旬 朔 時, 府 尹 邀 余 觴 于 堂, 新 荷 疊 靑 錢, 畵 檐 壓 水 面, 賓 主 俱 樂 之. 府 尹 之 甥 李 君 景 元, 卽 雙 栢 之 孫, 請 余 記 之. 地 水 之 得 名, 在 其 初 建 時. 盖 取 諸 易 傳 容 民 畜 衆 之 義, 記 文 尙 闕 焉. 李 君 思 所 以 闡 其 先 蹟. 念, 余 於 雙 栢 年 德 相 懸, 旣 早 承 晤, 且 嘗 折 輩 行 眷 待 尙 在, 己 巳, 公 與 外 弟 朴 士 元 同 立 大 節, 周 已 誇 耀 於 世. 甲 戌 夏, 先 府 君 重 卜 首 輔, 又 擧 公 爲 大 司 徒 兼 荷 城 守 禦 使. 居 無 何 先 府 君 遭 誣 下 琶 潭. 先 大 王 特 遣 公 與 偕 來, 同 居 三 田 創 舍 者 數 日. 龍 廣 壤 地 交 牙 有 同, 同 鄕, 公 旣 爲 官 於 荷 州 者 三, 我 先 人 曾 以 御 史 閱 軍 實, 又 請 建 顯 節 祠, 晩 自 琶 潭 寓 炭 洞 先 祖 兵 曺 議 郞 墓 下, 然 則 兩 公 足 目 之 慣 習 可 知. 余 於 荷 州 荷 堂, 焉 可 以 無 情 哉. 公 旣 不 棄 材 朽, 轉 無 用 爲 有 用, 後 乃 扶 支 將 傾 之 廈, 爲 國 家 柱 石, 持 身 淸 勝 水 負 哉. 如 地 軸, 噫 彼 朝 夕 光 景 之 佳, 保 障 領 馬 之 資, 特 其 粗 跡 之 見 於 外 者. 古 稱 固 國, 不 以 山 谿 之 險 云 者, 可 以 體 驗 而 推 去. 後 之 坐 斯 堂 者, 孰 無 忠 君 憂 國 之 心, 出 自 秉 彛 之 天, 而 不 泯 滅 者, 如 水 之 在 地 中 也 哉. 顧 以 托 名 楣 間 爲 幸, 敢 誦 數 行 而 復 其 意. 이 글을 지은 남학명은 숙종년간의 재상으로 이름이 높았던 약천( 藥 泉 ) 남구만( 南 九 萬, 1629~17121)의 아들이다. 남구만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시조의 작자 로도 유명하다. 이들 의령 남씨는 오래 전부터 용인 모현면 일대에 세거하기 시작하여, 지금 도 모현면 초부리에는 묘역이 조성되어 있고, 갈월리에는 남구만의 초상이 전해진다. 이 글에 서 荷 堂, 荷 州, 荷 城 이란 명칭을 사용했는데, 하당은 지수당을, 하주와 하성은 각각 광주(또 는 남한산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地 水 는 주역 81괘 중 사괘( 師 卦 ) 를 설명하는 가운데 나온다. 괘는 ( / )이다. 위는 곤괘로 물을 땅을, 아래는 감괘( 坎 卦 )로 물 을 의미한다. 그러니 땅 속에 물이 있는 형국이다. 주역 에서는 이 괘상을 설명하기를 땅 속에 물이 있는 것이 師 이다. 군자는 이로써 백성을 편안케 하고 군사를 기른다. 고 하였다. 군사는 불길하지만 충분히 키우지 않을 수 없고, 움직이면 천하가 위태로워지지만 사용해야 만 백성들이 따를 때가 있다. 땅속에는 늘 많은 물이 간직되어 있는 것처럼, 평화로울 때에 충분한 군사를 잘 육성하여 먼 화를 대비해야 한다, 이것이 地 水 堂 에 담긴 뜻이다. 이건 또 오늘날의 문제이기도 하다. 탁주 일배 앞에 놓고 남한산성의 고금흥망을 이야기하다 27
남한관어정소지( 南 漢 觀 魚 亭 小 識 ) - 金 載 瓚 (1746~1847), 海 石 遺 稿 연못은 네 구역이 있는데 당은 그 가운데 있고 이름은 地 水 라고 한다. 지수당의 서쪽 정면 첫 번째 연못에 작은 섬이 있다. 버들과 단풍나무와 여러 화초들이 우거져 임택( 林 澤, 전원) 의 의취가 있다. 섬 위에 정자 하나를 세웠다. 위에는 띠를 덮었고 아래에는 난간을 두었다. 기둥 여섯 개를 세우고 가로목 하나를 얹었다. 지수당과 정면으로 마주본다. 작은 배를 두어 오갈 수 있게 했다. 觀 魚 라 편액하였으니, 제갈량이 연못에 임하여 물고기를 살폈던 뜻을 취 한 것이다. 연못에 임하여 승부를 결정하고 물고기를 보며 적을 헤아려 위나라의 십만 군사 를 물리쳤으니, 그 관찰에는 뛰어난 방법이 있다. 그러니 얻은 것은 물고기가 아니다. 뒷날 이 정자에 올라 이름을 말하는 자들이 알아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돌아보니 오 늘날 사방 교외에는 별탈이 없고, 군영엔 겨를이 많아, 나는 늦은 봄에 소년 예닐곱과 더불어 정자에 앉아 낚시 줄을 드리우고 술상을 차리게 하여 취하였다. 이때 잔잔한 물결이 맑게 일 고 헤엄치던 피라미들이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것을 보며 즐겼다. 이런 일이야 나는 남들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물고기를 보면서 적진을 살피는 묘법은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을 테니, 나는 장차 그를 기다려 물으려 한다. 계해년(1803) 4월 덕은병부 짓다. 池 有 四 區, 堂 在 四 池 之 中. 名 以 地 水, 直 堂 之 西 第 一 池 有 小 島. 環 以 楓 柳 雜 卉, 葱 蒨 有 林 澤 意. 就 島 上 立 一 亭, 上 茅 下 欄, 六 楹 一 架, 與 地 水 相 對, 置 小 舠 以 通 往 來, 額 之 曰 觀 魚. 盖 取 武 侯 臨 池 觀 魚 之 義 也. 噫, 臨 池 而 決 勝, 觀 魚 而 料 敵, 坐 了 魏 十 萬 師, 其 觀 固 有 術, 而 所 取 者 匪 在 魚 也. 後 之 登 亭 循 名 者, 其 可 不 知 警 哉. 然 顧 今 四 郊 無 壘, 一 營 多 暇, 余 於 春 暮, 與 冠 童 六 七, 坐 亭 垂 綸, 命 酒 而 落 之. 時 纖 波 淸 漪, 游 鯈 刺 潑, 觀 而 樂 之, 吾 與 人 未 嘗 不 同, 而 至 若 所 以 觀 之 妙. 惟 觀 者 觀 之, 余 將 俟 而 問 之. 癸 亥 四 月, 德 隱 病 夫 識. 이 글을 지은 김재찬은 영의정을 지낸 익( 熤 )의 아들로 대를 이어 영의정을 지냈다. 본 관은 연안, 호는 해석( 海 石 )이다. 1802년 11월부터 1804년 10월까지 광주 유수겸수어사를 지냈다. 위 글은 재임 중인 1803년 3월에 관어정에서 풍류를 즐기다 술에 취해 지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관어정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위의 글은 그의 문집인 해석유 고 에도 전한다. 보통 觀 魚 라 하면 유유히 노는 물고기를 보며 그들의 즐거움을 알았다고 한 장자의 물아 일체 인식론이나, 아니면 속세의 일을 잊은 느긋한 한정( 閑 情 )을 표상하는데, 여기서는 그 의 도가 다르다. 삼국지연의 85회를 보면, 유비가 죽은 뒤 위나라는 다섯 길로 나누어 촉나 28 남한산성 아카데미 3기
라를 공격해왔다. 이에 걱정이 된 후주가 제갈량을 찾았다. 제갈량은 마침 연못가에서 물고기 들을 살피고 있었다. 이를 본 후주가 지금 조비의 군대가 다섯 길로 쳐들어오고 있는데, 승 상께서는 어찌하여 부중에 나가 일을 보지 않으십니까? 물었다. 그러자 공명은 크게 웃으며, 다섯 길로 적병이 오는 것을 신이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신은 물고기를 본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후주는 안심하고 돌아갔고, 제갈량은 결국 연못에서 물고기들을 보 며 생각한 계책으로 위나라의 10만 군사를 물리쳤다. 여기서 觀 魚 는 坐 勝 의 의미를 지닌 것 이다.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에 가장 큰, 그리고 핵심적인 군영이었다. 그러니 坐 勝 이니 枕 戈 니 하 는 이름들마다 모두 군사 또는 전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정자 하나 마루 하나에도 그러한 긴장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위 글에서 보듯 후대에는 긴장감이 사라지고 수령들이 연회하는 곳으로 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여서 남한산성에는 군영 특유의 분위 기가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 앞으로 남한산성의 분위기를 어떻게 조성해 나가야 할까? 이는 무너진 성곽을 다시 쌓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4. 남한산성의 제의( 祭 儀 ) 공간 한자의 祭 는 제사상 위에 고기와 음식(술)이 차려져 있는 모습을 형상한다. 示 는 제물을 차리는 상을 나타내고, 따라서 示 를 부수로 하는 많은 글자들 社 祀 祈 祐 祖 祝 神 崇 祠 祭 禍 福 禮 등은 모두 신과 관련된 것을 의미한다. 고대로 올라갈수록,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 든 현상이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의 의지가 현시된 것이라고 믿었으며, 삶의 많은 부분 을 그들에게 의지했다. 제의( 祭 儀 ) 또는 제향( 祭 享 )은 초자연적인 존재인 신( 神 )을 모시는 행사이다. 그 신을 모시는 집을 보통 ~ 祠 ) 또는 ~ 堂, 아니면 합쳐서 祠 堂 이라고 한다. 당집, 당굿, 당목, 부군당 등의 예에서처럼 당( 堂 ) 은 상대적으로 민간 무속의 명칭에 많이 사용되 었다. ( 顯 節 祠 / 淸 凉 堂 / 崇 烈 殿 ) 또 민간의 제의에 있어서도 유교의 의식이 강조되면 祭 가, 무속의 성격이 강하면 굿 이 보통 사용되었다. (당제 / 당굿) 제의는 대개 신모심[ 請 神 ] 신맞이[ 迎 神 ] 신놀림[ 娛 神 ] 신보냄[ 送 神 ]의 세 단계로 구 성된다. 제의가 진행되는 시공간은, 신과 인간이 만나고 저승과 이승의 차원이 하나가 되는 세계이다. 신들이 만족하여 돌아갔을 때, 인간 세상에 동티가 생기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믿었 으며, 이 믿음이 강할수록 제의는 더 경건하고 엄숙하게 거행된다. 남한산성에서도 오랜 세월 다양한 제의가 있어왔는데, 이는 남한산성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남한산성 사 탁주 일배 앞에 놓고 남한산성의 고금흥망을 이야기하다 29
람들은 과연 어떠한 신을 모시고 살아왔는가? 그 제의의 역사적 맥락을 살필 수 있는가? 사 라진 제의에는 어떠한 것이 있으며, 그 흔적은 남아있는가? 제의는 현재 어떻게 전승되고 있 는가? 제의를 창조적으로 계승할 수는 없는가? 남한산성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들이다. 산성의 제의 공간 및 그 특징 단묘 건립 시기 위치 제의의 성격 제의 시기 비고 청량당 ( 淸 凉 堂 ) 수어장대 옆 백제 시절로 소급, 민간 신앙, 祈 雨 壇 으로도 활용 가뭄 쌀섬여울 및 매바위 설화 숭렬전 ( 崇 烈 殿 ) 1639 행궁 동편 유교, 예조 관할, 향축 제공 / 역대 왕조 창건조 예우. 봄과 가을에 2회 온조 현몽, 이서( 李 曙 ) 배향 현절사 ( 顯 絶 祠 ) 1688 지수당 북쪽 유교, 예조 관할, 향축 제공 / 尊 周 論 / 국가이념 유지, 강화. 왕의 致 祭 는 부정기 사직단 ( 社 稷 壇 ) 1735 남단사 동쪽 광주유수 관할 / 풍년 기원 성황단 ( 城 隍 壇 ) 북문 안 동쪽 언덕 광주유수 관할 / 城 隍 神 (중국에서 발생한 성곽 신앙) 여제 사흘 전 發 告 여제와 함께 지냄 여단 ( 厲 壇 ) 북문 안 광주유수 관할 / 역질이 돌 때 여귀( 厲 鬼 )에게 지내는 제사 1년 3회 / 청명, 7.15, 10월 초하루 기타 30 남한산성 아카데미 3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