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이( 無 二, advaya) 의 중도적 의미 김현구(전남대학교 철학과 BK21PLUS 학술연구교수) 1. 들어가며 20 세기 후반부터 논의되기 시작한 다원주의 (pluralism) 는 종교를 넘어 정치, 철 학, 문화 등의 분야에서 단일한 원리 또는 주장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 고 관계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으로부터 출발하였다. 또한 이 움직임은 진리를 결 정하는 원리가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으로 지난 세기까지 문명사를 지배 하고 있던 일원적 진리관에 대한 철학적 반성에 기초한다. 결국 다원주의는 철학적으 로 더욱 섬세한 탐구가 요청되는 분야가 되었으며, 이에 대한 쟁점들이 급부상했다. 특히 일원적 진리관으로서 객관주의 (objectivism) 나 본질주의 (essentialism) 를 거 부했을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입장으로 허무주의 (nihilism) 가 대두되면서 본질 주의 대 허무주의 구도가 형성 되었다. 1) 결국 다원주의 논쟁은 일원론 철학을 거부하 기 위해 탈( 脫 )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진리를 따져 물어야 할뿐더러, 가치의 기준을 제 시할 수 없거나 거부하는 입장인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이 논쟁의 근본 과제가 되었다. 시작되었으며, 따라서 다양한 철학영역에서 본질주의와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이를 선도해가는 철학적 주장들이 다원주의 논쟁 이후 급부상하고 있 다. 당연히 불교는 종교를 넘어 다원주의 논쟁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지만, 아직 그 빛을 발하는 데 시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2) 이 자리에서는 불교 학파 가운데 중관학파(Madhyamaka) 의 중도 ( 中 道, madhyamā-pratipad) 개념과 유식학파(Vijñānavādin)의 무이 ( 無 二, advaya) 적 관 1) 필자는 이 글에서 번스타인(R. Bernstein) 이 제시한 객관주의를 본질주의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한다. 이와 동일한 용어로는 토대주의 (foundationalism), 이성주의 (rationalism) 등이 있다. 번스타인에 따르면 객관주의란 합리성, 지식, 진리, 실재, 선, 또는 옳음 등의 본성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우 리가 궁극적으로 의지해야 할 항구적이고 초역사적인 모형 또는 틀이 있으며, 또 있어야만 한다는 기 본적 신념 이라고 정의한다. 리차드 번스타인, 객관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 정창호 외 역 ( 서울: 보광재, 1993), p.257. 2) 김용표, 통일적 종교다원주의에서의 공동본질 문제에 대한 중관학적 해명 불교학보 32 집 ( 동국대 학교불교문화연구원, 1995); 木 村 淸 孝, 불교와 다원주의 불교학연구 5 집 ( 불교학연구회, 2002); 윤이흠, 宗 敎 多 元 主 義 와 佛 敎 -세계종교사의 관점에 비쳐진 현대종교와 다원주의를 중심으로 불교 학연구 5 집 ( 불교학연구회, 2002); 윤영해, 유교와 도교, 그리고 불교의 다원주의 가능성 불교학 연구 5 집 ( 불교학연구회, 2002); 최유진, 종교다원주의와 원효의 화쟁 철학논총 31 집 ( 새한철학 회, 2003); 조윤호, 불교안에서의 다원주의 불교학연구 7 호 ( 불교학연구회, 2003), 동아시아 불 교의 두 얼굴 - 다원주의와 본질주의의 공존 불교학연구 13 호 ( 불교학연구회, 2006); 김정희, 중 국불교의 방편사상과 다원주의: 천태지의의 방편사상을 통해 철학연구 80 집 ( 철학연구회, 2008); 김용표, 종교다원주의 시대의 정토신앙과 그리스도교- 친란( 親 鸞 ) 과 Martin Luther의 절대 타력신앙 의 비교를 중심으로 동아시아불교문화 4 집 ( 동아시불교문화학회, 2009) - 1 -
점을 가져와 그들의 주된 입장에 함축된 철학적 의미를 본질주의와 허무주의 극복이 라는 관점에서 재구성할 것이다. 이 두 학파의 사상을 본질주의 대 허무주의 논쟁에 서 다루려는 이유는 이 논쟁을 해결하는 길로서 언어 와 경험 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데 따른다. 다시 말해 우리의 실제적 의사소통이 어떻게 이루어지 는지를 경험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이 논쟁의 쟁점이 되었다. 3) 이는 언어철학 전통의 인지언어학(cognitive linguistics)과 체험주의(experientialism) 입장으로서 레이코프 (G. Lakoff) 와 존슨(M. Johnson) 의 주장을 통해서도 확인되는데, 그들은 근세를 지배 했던 본질주의 전통의 철학을 비판하면서도 언어를 불신하지 않는 길을 탐색하고 있 다. 4) 언어와 경험에 관한 인지언어학과 체험주의, 그리고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주 장과 고민이 일치하는 것은 우연적인 사건만은 아니다. 특히 노양진은 레이코프와 존 슨의 주장을 근거로 우리의 경험과 언어 사이에 내재한 괴리를 거부하거나 극복해야 할 장애나 실패가 아니라 언어적 의미 산출의 근원적 조건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5) 사실 유식학파와 중관학파 모두 실체론 철학을 거부할 때, 언어와 경험 사이의 실 제적 괴리를 인정하면서 객관적 의사소통의 한계를 인정한 사상 전통이다. 더불어 중 관학파와 유식학파의 입장은 한 축에서 상견( 常 見 ) 으로 알려진 본질주의와 다른 한 축에서 단견( 斷 見 ) 으로 알려진 허무주의를 양극단으로 보아 배척하는 것으로 이해된 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제기되는 문제는 중도를 소개하는 중론( 中 論 : Mūlamadhyamakakārikā ) 의 주된 주장이 양극단만을 비판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실질적 노력이 미비하다는 점이다. 이는 현대 다원 주의 논쟁에서 보여주듯이, 본질주의에 대한 적극적 비판이 반드시 허무주의를 극복 하는 길은 아니라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결국 중관학파에 대한 유식학파의 비판은 중 관학파의 중도적 언명 이후에 제기된 허무주의의 혐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또 다른 중도의 길로 간주된다. 즉 본질주의 대 허무주의 구도가 중관학파와 유식학 파 사이의 기본 논쟁 구도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현대 철학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길 이 발견되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필자는 이러한 단서를 유식학파가 염오 ( 染 汚, saṃkleśa) 와 청정 ( 淸 淨, vyavadāna) 의 근거로 지시한 의타기성 ( 依 他 起 性, 3) 인지언어학은 전통적 실재론이 가정한 언어와 세계 사이의 모종의 대응설을 논파하며 의미 론 (semantics) 의 철학적 진보를 이루었다. 이 분야는 신경과학적 연구를 반영하여, 유아의 언어습득 에서부터 개념체계 (conceptual system) 형성과정까지 인지적 활동의 중요성과 체화된 인 지 (embodied cognition) 에 관한 심도 있는 연구를 보여주었다. 인지언어학자들은 언어를 연구하는 중요한 이유로 언어가 사고의 체계를 반영한다는 점을 들고 있으며, 이를 전제로 개념화의 해명에 주 력하고 있다. 이 경우 언어는 인지적 기능의 창구로서, 사고와 개념의 본질ㆍ구조ㆍ조직에 대한 통찰 력을 제공한다. 따라서 인지언어학은 언어가 어떻게 인간 마음의 근본적인 특성과 구성 자질을 반영 하는지 탐구하는 새롭고 흥미로운 시도라 할 수 있다. 김현구, 분별에 관한 인지언어학적 접근 불 교학보 제71 집( 서울: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2015), p.110. 4) 우리의 지각에 직접 관여하는 감각운동 신경회로들의 참여로 우리는 새로운 개념을 갖게 된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개념의 관점에서 (in terms of) 좀 더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하고 경험 한다. 레이코프와 존슨은 이를 은유 (metaphor) 라고 정의한다. G. 레이코프ㆍM. 존슨, 삶으로서의 은유, 노양진ㆍ나익주 역 ( 경기: 서광사, 1995), p. 23; G. 레이코프ㆍM. 존슨, 몸의 철학: 신체화된 마음의 서구 사상에 대한 도전, 임지룡 외 역 ( 서울: 박이정, 2002), 참조. 5) 노양진, 언어와 경험: 괴리와 거리 철학연구 제116 호, ( 경북: 대한철학회논문집, 2008); 노양진, 의사소통의 기호적 구조 범한철학 제75 호, ( 전남: 범한철학회, 2014) 참조. - 2 -
paratantra-svabhāva)을 우리 경험의 실질적 토대로 제시하려는 점에서 발견하였 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섭대승론( 攝 大 乘 論 : Mahāyānasaṃgraha ) 의 제안을 살펴 볼 것이며, 이를 통해 허무주의 분기( 分 岐 ) 를 제약할 근거를 탐색해볼 것이다. 2. 중도의 긴장: 본질주의와 허무주의 중관학파의 교의는 나가르주나(Nāgārjuna, 된다. 나가르주나가 정의하는 공성( 空 性, 龍 樹 : 150-250) 로부터 시작해서 체계화 śūnyatā) 이란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중론 관거래품( 觀 去 來 品 ) 의 거ㆍ래에 관한 고찰에서 실체의 속성, 실체의 변화 에 관한 주장이 봉착하는 모순을 도출한다. 이를 위해 가는 자(gantṛ) 는 가는 자 를 주체로서 실체화 했을 때, 가는 자로서의 실체와 감이라는 속성이 이분화되는 과 정과 다시 실체가 속성의 소유자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마치 비가 내린다고 말할 때 비가 갖는 속성으로서의 내림 과 내린다는 술어가 갖는 내림 의 의미가 반복됨으 로써 이중의 내림이 있게 되는 것과 같다. 즉 비가 명사화 되었을 때 비는 실체이고 내림은 비가 갖고 있는 속성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주어와 술어라는 언 어의 구조를 통해 이루어지는 우리의 사유의 형식을 실체가 속성을 소유하는 관계로 착각함으로써 봉착하는 문제이다. 또한 나가르주나는 중론 관오음품( 觀 五 陰 品 ) 제1 게에서 색( 色 ) 을 인식 대상으 로서 객관적 존재와 그 구성물로 나누어 고찰한다. 여기에서 나가르주나는 결과로서 의 색과 그 원인 사이를 구분하는 관념을 문제 삼는다. 6) 색의 인( 마차의 부속) 을 떠나서 색( 마차) 은 인식되지 않는다. 색이 없으면 색의 인은 보이지 않는다.( 중론 관오음품 제1 게) 7) 인식대상으로서의 대상과 그 대상을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색을 분리하면 인식대상 은 지각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수레를 분해했을 때, 그 부속들에서는 수레의 형상이 지각되지 않을뿐더러 수레의 부속으로서도 지각되지 않는 것과 같다. ( 四 大 ) 를 소유하고 있다거나 사대가 색의 원인이라는 관념을 논파하는 것이다. 즉 색이 사대 관오음품 제2-3게에서는 다시 원인 없는 결과와 결과 없는 원인을 거부함으로써 실체론적 관계와 연기 ( 緣 起 : pratītyasamutpāda) 의 차이를 명확히 한다. 색의 인을 떠나서 색이 있다면 원인이 없는 색이 라는 과실이 된다. 6) D. J. 깔루빠하나, 나가르주나, 박인성 역 ( 서울: 장경각, 1994), p.203. 7) MMK(1903: 123, 6-7): rūpakāraṇanirmuktaṃ na rūpam upalabhyate/ rūpeṇāpi na nirmuktaṃ dṛśyate rūpakāraṇam//4-1// - 3 -
원인 없는 사물은 어떤 것이건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색을 떠나서 색의 인이라는 것이 있다면 결과가 없는 인이 되는데 결과 없는 인은 없다.( 중론 관오음품 제2-3 게) 8) 결국 수레란 부속들에 의해 연기한 것이기에 그 부속들이 곧 수레이므로 수레가 부 속을 소유하는 관계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수레가 없을 때는 그 부속들은 수 레의 부속이 아니다. 따라서 원인과 결과란 상호의존적인 관계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이를 통해 나가르주나는 독립적인 원인 결과를 인정하는 실체론적 사고를 비판한다. 우리는 형이상학적 원리 또는 실체성을 따르는 입장을 존재론적 본질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이들에 대한 비판이 중론 전체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중론 의 철학적 태도가 분명히 반본질주의 노선이라는 것은 확인된다. 반면 가치의 기준을 제시할 수 없는 입장인 허무주의를 과연 성공적으로 거부했는가는 의구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 다. 왜냐하면 본질주의 비판이 곧바로 허무주의에 대한 거부까지 연결되는 것이 아니 라, 오히려 반본질주의 자체가 가치론적 허무주의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인도 사상사 안에서 보였듯이, 현실적인 경험이나 인간적인 사유가 무시된 가 운데 주장된 범아일여( 梵 我 一 如 ) 론과 같은 독단론에 대한 비판적 각성에서 태동한 자 유사상가들 역시 회의주의적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는 데는 실패 했다. 산자야(Sañjaya Belaṭṭhiputta) 의 회의론이든지 니간타(Nigaṇṭha Nātaputta) 의 상대주의는 이를 증명한다. 더구나 사문들의 사상은 사회적으로 윤리의 파괴를 초래 했다. 도덕 부정론자뿐만 아니라 세계와 인간을 비인격적인 요소의 우연한 결합체라 고 주장하는 짜르바까( Cāravāka) 나 결정적 인과론을 주장하는 숙명론자 그리고 회의 론까지도 결국 윤리를 부정하고 세속적인 쾌락에 빠져들었으며, 자이나교(jainism)에 서는 맹목적인 고행을 통해 육체를 학대하였던 것이다. 9) 짜르바까들은 감각적으로 지 각 가능한 인상만을 타당한 인식수단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이들은 인간의 노력을 부 정하고, 도덕적이며 정신적인 영역에서도 인과성을 부정한 무인론( 無 因 論 : ahetuvada) 자이다. 이들은 도덕적 인과성을 부정하고 인간 사후의 존재를 부정하는 단멸론( 斷 滅 論 ) 을 취한다. 이러한 단멸론적 태도는 아트만(ātman)의 불변성을 주장하 는 우파니샤드(Upaniśad)의 상주론( 常 住 論 ) 에 반대하는 허무주의이다. 상대주의 또는 허무주의로 규정되는 이들은 인도의 우파니샤드에 대한 반동에서 태동한다. 우파니샤 드가 자기동일성을 가진 실체를 상정하는 존재론적 본질주의자라면, 짜르바까는 세계 와 인간을 물질적 요소의 우연한 결합으로 설명하기에 가치론적 허무주의자이다. 10) 8) MMK(1903: 123, 12-13): rūpakāraṇanirmukte rūpe rūpaṃ prasajyate/ ahetukaṃ na cāsty arthaḥ kaś cid āhetukaḥ kva cit//4-2// MMK(1903: 124, 5-12): rūpeṇa tu vinirmuktaṃ yadi syād rūpakāraṇam/ akāryakaṃ kāraṇaṃ syād nāsty akāryaṃ ca kāraṇam//4-3// 9) 조애너 메이시, 불교와 일반시스템 이론, 이중표 역 ( 서울: 불교시대사, 2004), pp.61-62. 10) 짜르바까의 사상가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아지타 께사깜발린(Ajita Kesakambalin) 은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유물론자이다. 그는 지수화풍( 地 水 火 風 ) 의 네 가지 물질적 원소만이 참된 실재라고 하 - 4 -
따라서 짜르바까가 우파니샤드를 비판함으로써 본질주의를 거부하지만, 이런 반본 질주의적 입장이 곧 허무주의로 전락해버린 셈이다. 특히 실체론에 대한 비판이 곧 본질주의를 극복한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으며, 공성 과 같은 언명이 갖는 부정의 기 능 때문에 중관학파의 경우 허무주의의 혐의를 받아왔다. 이에 대한 대처가 중론 관사제품( 觀 四 諦 品 ) 제1-9 게에서 다루어진다. 논적의 논리에 따르면 공 이라는 법이 있다면 사성제( 四 聖 諦, catvāri-āryasatyāni) 로서 고( 苦 ) 의 견( 見 ), 집( 集 ) 의 단( 斷 ), 멸( 滅 ) 의 증( 證 ), 도( 道 ) 의 수( 修 ) 가 존재하지 않기에, 사향( 四 向 ) 사과( 四 果 ) 가 존재하 지 않게 된다. 따라서 승보( 僧 寶 ) 가 없고 정법이 없기에 공을 설하는 자는 삼보( 三 寶 ) 를 파괴하므로 모든 존재는 공해서는 안되게 된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나가르주나에 따르면 공성이 설해진 까닭과 의미를 알지 못하여 공의 의미 를 없다( 無 ) 라는 뜻으로 이해하여 공을 주장하는 이들을 허무주의자라고 비판한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중론 관사제품 제18게에서는 공성이 연기와 중도 사이를 어떻게 매개 하며, 서로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우리는 연기하는 것을 공성이라고 말한다. 그것( 공성) 은 [ 자신의 부분에] 의존해서 언어로 표현( 假 名 ) 된 것이며 그것( 공성) 은 실로 중도이다.( 중론 관사제품 제18 게) 11) 여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뿌라나 깟싸빠(Purana Kassapa) 의 비결정론은 일상적 의미의 우연 론이 아니라 불교적인 연기사상을 부정하는 절대적인 우연론으로서의 무인론이다. 막칼리 고쌀라 (Makkhali Gosala) 는 모든 것이 불변의 자연 법칙에 의해 생겨난다고 주장했으며, 인간의 모든 체 험에서 우연을 추방하고자 했다. 짜르바까의 사상에서는 마음 또는 영혼이 원인으로서 역할이 주어 지지 않으며 인식의 수단으로 직접적 지각만을 인정하고, 연역적 추론이나 귀납적 추론, 인과율 등 을 부정함으로써 인식론적 회의론의 입장을 견지한다. S. C. 차르테지 D. M. 다타, 학파로 보는 인도사상, 김형준 역 ( 서울: 예문서원, 1999), pp.93-94. 11) MMK(1903: 503, 10-11): yaḥ pratītyasamutpādaḥ śūnyatāṃ tāṃ pracakṣmahe/ sā prajñaptir upādāya pratipat saiva madhyamā//24-18// 이 자성의 공성, 그것( 공성) 은 [ 자신의 부분에] 의존해서 언어로 표현된다. 실로 이 공성이야말로 가 명이라고 확립된다. 바퀴 등 수레의 부분에 의존해서 수레가 언어로 표현된다. 그 자신의 부분에 의 존해 [ 시설된] 가명, 그것은 자성으로서는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또 자성으로서 불생인 것 그것이 공성이다. 실로 이 자성으로서 불생인 것을 특징으로 하는 공성이야말로 중도라고 확립된다. 자성으 로서 불생인 것 그것의 존재성(astitva) 은 없으며, 또 자성으로서 불생인 것에는 소멸이 없기 때문에 비존재성(nāstitva) 도 없다. 그러므로 존재와 비존재(bhāvābhāva) 의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있는 것 이기 때문에, 모든 자성으로서 불생인 것을 특징으로 하는 공성은 중도라고 말해진다. 실로 이와 같 이 공성과 가명과 중도는 연기의 다른 이름이다. ( 명구론 관사제품 제18 게 주석) MMK(1903: 504, 8-15): yā ceyaṁ svabhāvaśūnyatā sā prajñaptir upādāya/ saiva śūnyatā upādāya prajñaptir iti vyavasthāpyate/ cakrādīny upādāya rathāṅgāni rathaḥ prajñapyate/ tasya yā svāṅgāny upādāya prajñaptiḥ sā svabhāvenānutpattiḥ/ yā ca svabhāvenānutpattiḥ sā śūnyatā// saiva svabhāvānutpattilakṣaṇā śūnyatā madhyamā pratipad iti vyavasthāpyate/ yasya hi svabhāvenānutpattis tasya astitvābhāvaḥ/ svabhāvena cānutpannasya vigamābhāvān nāstitvābhāva iti/ ato bhāvābhāvāntadvayarahitatvāt sarvasvabhāvānutpattilakṣaṇā śūnyatā madhyamā pratipat madhyamo mārga ity ucyate// tad evaṁ pratītyasamutpādasyaivaitā viśeṣasaṁjñāḥ śūnyatā upādāya prajñaptir madhyamā pratipad iti// - 5 -
공성이란 연기설의 다른 표현으로 현상 밖에 초월적 원리를 주장하지 않고서도 일 체 현상의 발생과 소멸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또한 이는 실체론 비판과 허무주의 극 복이라는 철학적 과업을 완수하는 중도적 조망의 근간이 되는 원리인 셈이다. 이는 이미 중론 서두에서 제시하고 있는 팔불게( 不 生 亦 不 滅 不 常 亦 不 斷 不 一 亦 不 異 不 來 亦 不 出, anirodham anutpādam anucchedam aśāśvatam anekārtham anānārtham anāgamam anirgamam)를 통해 전통적인 실체론자들의 주장으로서 단상, 일이와 유위법의 자성을 인정할 경우 주장할 수 있는 생멸, 래출과 같은 개 념을 비판하면서 시작된 여정이다. 12) 특히 이들 관념에는 형이상학적으로 요청된 관 념의 구조물이 배후에 자리하고 있거나 혹은 그러한 존재론적인 구조물을 거부하는 입장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때 모든 쟁론이 단 상으로 모아지고, 이들은 존재론적 본 질주의와 가치론적 허무주의로서 중도적 조망을 통해 양극단으로 배척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중도적 조망이란 본질주의와 허무주의 비판의 인도 버전인 것이다. 이와 같은 중도적 조망이 실체론 비판을 통해 이루어지면서 본질주의 전통에 대한 중관불교의 비판적 입장을 반본질주의 또는 탈형이상학으로 간주된다. 반면에 짜르바 까와 같은 길을 걷지 않는 새로운 길로서 모든 반본질주의가 가치론적 허무주의가 아 니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는 이미 실체론 비판의 과정에서 나가르주나가 제시하 고 있는 바와 같이, 모든 현상이 원인과 조건에 의해 발생한다는 연기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원리는 본질주의와 허무주의 양쪽을 모두 거부할 수 있는 근거이므 로, 중론 에 나타난 입장만으로 허무주의적 우려를 불식시킬 수 없기에 이에 대해 새로운 대응 논리가 요청된다. 따라서 실체론 비판과 함께 어떻게 가치론적 허무주의 를 극복할 것인가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 엄밀한 의미에서 중도적 언명을 달성하는 길 이다. 결국 새로운 중도적 언명을 위한 탐구가 유식학파에 의해 시작된다. 3. 부정의 두 형식: 비정립적 부정과 정립적 부정 유식학파는 중론 의 실체론 비판에 담긴 조건에 의해 시설된 것으로서 가설( 假 說 ) 과 그 의지처 (āśraya) 에 대한 논의가 충분하지 않다고 본다. 유식학파에 따르면, 가 설의 의지처마저 무자성 (niḥsvabhāva) 하다는 논리는 허무주의의 혐의가 있다. 반면 에 유식학파는 시설된 것( 名 言 所 立 ) 이나,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 衆 緣 所 生 ) 을 구별 한다. 언어는 반드시 무언가에 의지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언어가 의지하는 바 로서의 사건이나 사물은 비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언어를 통해 드러내는 것을 가설이 라 하면서, 가설된 것과 가설의 근거가 되는 것을 구별한다. 그 가설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서의 사물ㆍ사건은 실체로서 있을 수 없지만 무엇인가의 사물이나 사건이 없다 면, 거기에 언어를 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가설된 것과 가설의 근거가 되는 12) 이중표, 중론 의 팔불과 연기 불교학연구 제22 호, ( 서울: 불교학연구회, 2009), pp.28-28. - 6 -
것은 존재론의 입장에서 명확히 구별되는 것이다. 13) 이와 같이 유식학파는 비실재를 증익한 실체론자와 그릇된 부정의 교학으로서의 중 관학파를 비판하는데, 이는 보살지( 菩 薩 地 : Bodhisattvabhūmi ) 진실의품( 眞 實 義 品 ) 에 드러난다. 그러므로 일부는, 대승과 상응하고, 심오하고, 공성과 상응하고, 의도를 가지고 설해진, 이해하기 어려운 경들을 들은 후에 여실하게 설해진 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올바르 지 못하게 분별한 후에, 오로지 사변만에 의해 올바르지 않게 인도되었기 때문에 이와 같 이 보고 이와 같이 말하게 된다. 모든 것은 가설뿐(prajñaptimātra) 이고 이것이 진실이 다. 어떤 자는 그는 바르게 보는 자라고 본다. 그들에게는 가설의 근거인 사( 事 ) 뿐 (vastumātra)인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바로 이 가설은 모든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 다. 다시 어디로부터 가설일 뿐인 진실이 존재하겠는가? 그러므로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에 의해 진실도 가설도 그 양자 모두 부정되게 된다. 가 설과 진실을 부정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허무론자(nāstika) 라고 알아야 한다. 그가 이와 같 이 허무론자라면 지자와 범행자는 그와 함께 말하지 말아야 하고 함께 머물지 말아야 한 다. 그는 자신을 파괴할 뿐 아니라 이 견해에 동의한 세간 사람들도 파괴한다. ( 보살지 진실의품 ) 14) 진실의품 에서는 언어 표현을 떠난 최고의 진실을 논리적으로 증명한다. 또한 모 든 것을 비존재라고 하는 악취공( 惡 取 空, durgṛhiīta-śūnyatā) 에 대해, 없는 것은 없 는 것으로 있는 것은 있는 것으로 여실하게 파악하는 선취공( 善 取 空, sugṛhīta-śūnyatā) 을 선양한다. 또한 유식학파는 반야경( 般 若 經 ) 과 그것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중관학파의 일체법 무자성이라는 공의 가르침이 아직 붓다 가르침의 진의를 문자 그대로 전하는 것이 아 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해심밀경 에서 설하고 있는 삼상( 三 相, tri-lakṣaṇa)ㆍ삼무자성( 三 無 自 性, tri-niḥsvabhāva) 설이 붓다 가르침의 진실한 의도 로서 요의설( 了 義 說, nītārtha) 이다. 15) 유식학파는 나가르주나의 입장을 계승하여 세 속에 있어서 인식 세계가 적멸( 寂 滅 ) 인 것이 진실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중 관학파의 일체법 무자성은 허무주의적 손감( 損 減, apavāda) 론으로 규정하고 요의로서 삼성설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서 삼성설은 무자성설의 긍정적 표현인 것이다. 유식학 13) 다케무라 마키오, 유식의 구조, 정승석 역 ( 서울: 민족사, 2006), pp.60-61 참조. 14) BoBh(2005: 99-100): ato ya ekatyā durvijñeyān sūtrāntān mahāyānapratisaṃyuktāṃ gambhīrāṃ śūnyatāpratisaṃyuktāṃ ābhiprāyikārthanirūpitāṃ śrutvā yathābhūtaṃ bhāṣitasyārtham avijñāyāyoniśo vikalpayitvāyogavihitena tarkamātrakeṇaivaṃdṛṣṭayo bhavanty evaṃvādinaḥ prajñaptimātram eva sarvam etac ca tattvaṃ yaś caivaṃ paśyati sa samyak paśyatīti teṣāṃ prajñaptyadhiṣṭhānasya vastumātrasyābhāvāt saiva prajñapatiḥ sarveṇa sarvaṃ na bhavati// kutaḥ punaḥ prajñaptimātraṃ tattvaṃ bhaviṣyati// tad anena paryāyeṇa tais tattvam api prajñaptir api tadubhayam apoditaṃ bhavati// prajñaptitattvāpavādāc ca pradhāno nāstiko veditavyaḥ// sa evan nāstikaḥ akathyo bhavaty asaṃvāsyo bhavati vijñānāṃ sabramacāriṇām// sa ātmānam api vipādayati/ lokam api yo 'sya dṛṣṭyanumatam āpadyate// 15) 山 口 益, 山 口 益 佛 敎 學 文 集, ( 東 京 : 春 秋 社, 1972), pp. 329-347 참조. - 7 -
파는 삼성설을 바탕으로 인식의 전도된 모습은 본래 적멸한 것이며, 그것을 이해하는 기반으로서 방편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즉 그 방편이 삼성설인데, 이는 세속의 조건 에서 발생한 법( 緣 生 法 ) 그 자체의 존재( 依 他 起 相, paratantra-lakṣaṇa), 그 전도성 ( 遍 計 所 執, parikalpita-lakṣaṇa ), 그리고 그 전도성을 부정해서 세속의 연생법 그 자 체의 전도되지 않은 진실성( 圓 成 實 相, pariniṣpanna-lakṣaṇa) 을 전환적으로 인식하 려고 하는 것이다. 16) 이와 같은 주장이 현양성교론( 顯 揚 聖 教 論 : Ārya-deśanā-vikhyapāna) 성무성 품( 成 無 性 品 ) 제1-2 게에 잘 나타나고 있다. 17) 나가르주나의 주장에 따르면 조건에 의해 시설된 것은 가설이기 때문에 가설의 의지처는 무자성한 것이다. 그런데 유식학 파에서는 가설의 조건이 되고 의지처가 되는 사물(vastu) 의 존재를 부정하면 가설은 성립할 수 없게 되어 일체는 비존재가 되므로 소의인( 所 衣 因 ) 을 부정하지 않고, 의지 처로서 의타기자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유가사지론( 瑜 伽 師 地 論 ), Yogācārabhūmiśāstra 을 계승한 현양성교론 에서는 유식학파가 의타기성의 존재 를 인정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현양성교론 성무성품 제10게에서는 의타기성의 존재를 증명한다. 가립된 것은 소의인( 所 依 因 ) 을 갖는다. 만약 다르다면 두 가지( 실물, 가법) 는 파괴된다. 잡 염은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의타기성이 존재한다고 알아야 한다. ( 현양성교론 성무성품 제10 게) 18) 이 10 게는 유식학파가 의타기성의 존재를 증명하는 대표적인 교설이면서, 중관학파 가 문제 제기한 교설이다. 19) 또한 중변분별론( 中 邊 分 別 論 : Madhyanatavibhaga-bhāsya ) 상품 제1 게에 허망분별(abhūtaparikalpa)은 있 다라는 표현을 통해 현실적인 허망분별을 출발점으로 한다. 20) 허망분별은 삼성 중 16) 야스이 고사이, 중관사상연구, 김성환 역 ( 서울: 홍법원, 1989), pp. 255-257 참조. 17) 바비베까는 반야등론 열반품 에서 현양성교론 을 인용하고 있다; 顯 揚 聖 教 論 ( 대정장 31, 557b): 삼성이 알려져야 한다. 첫째는 변계이다. 둘째는 의타이며, 셋째는 원성이다. 상과 같이 생과 승의 의 무자성으로서 그들 삼자성은 무자성성이라고 인정된다. 三 自 性 應 知 初 遍 計 所 執 次 依 他 起 性 最 後 圓 成 實 三 無 性 應 知 不 離 三 自 性 由 相 無 生 無 及 勝 義 無 性. 18) 顯 揚 聖 教 論 ( 대정장 31, 558c-559a): 假 有 所 依 因 若 異 壞 二 種 雜 染 可 得 故 當 知 依 他 有 논하길, 마땅히 일체의 법이 가유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가법은 반드시 소의인을 가지기 때문이다. 실물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법이 성립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실물이 없으므로 가법 역시 비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면 곧 두 가지 법( 실물과 가법) 이 파괴될 것이다. 두 가지 법이 파괴되므로 잡염의 법은 마땅히 얻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잡염의 법이 현실에서 얻어지고 있으 므로 반드시 의타기자성이 있다고 알아야할 것이다. ( 현양성교론 성무성품 제10 게 주석) 論 曰 不 應 宣 說 諸 法 唯 是 假 有. 何 以 故 假 法 必 有 所 依 因 故. 非 無 實 物 假 法 成 立. 若 異 此 者. 無 實 物 故 假 亦 是 無. 即 應 破 壞 二 法. 二 法 壞 故. 雜 染 之 法 應 不 可 得. 由 雜 染 法 現 可 得 故. 當 知 必 有 依 他 起 自 性. 19) 安 井 廣 濟, 中 觀 思 想 の硏 究 ( 京 都 : 法 藏 館, 1970) p.319; 竹 村 牧 男, 唯 識 三 性 說 の硏 究, ( 東 京 : 春 秋 社, 1995), pp. 337-342. 20) 山 口 益, 佛 敎 における無 と有 の對 論, ( 東 京 : 山 喜 房 佛 書 林, Re1975), p. 72. 중관학파의 바비베까 가 반야등론 에서 인용하고 있는 유식논서는 현양성교론 과 중변분별론 이다. 특히 반야등론 에 서는 현양성교론 성무성품 제1, 10 게를, 중변분별론 상품 에서 제3, 6, 13, 21, 22게를 인용 - 8 -
의타기성이고 이것을 소의( 所 衣 ) 로 해서 변계소집성이 고려되고, 이것에 대한 집착을 떠날 때 원성실성이라고 부른다. 이 의타기성이 삼성을 통일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삼계는 허망분별이고, 유식( 唯 識 ) 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나가르주나의 사상에서 부정 을 위한 매개물이 설명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한 반성의 결과물이다. 21) 이와 같은 반성이 중관학파에 대한 효과적이면서도 성공적인 비판이 되었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사실 바비베까(Bhāviveka/Bhāvaviveka, 靑 辨 : 490-570 경) 의 반론은 유식학파의 입장에 대한 상호간의 인식 차이만을 보여주는 것이다. 22) 이러한 두 학파 사이의 논쟁은 공성 해석을 둘러싼 한 가지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 중관학파는 공성 을 부정으로 일관하는 비정립적 부정 ( 非 定 立 的 否 定, prasajya-pratiṣedha) 에 의한 공성 해석을 정설로 받아들였다. 이 용어는 번역명의대집( 翻 譯 名 義 大 集 ) 4509에 따 르면 mer par dgag pa 에 상응한다. 이에 반해 유식학파는 실체성의 부정에 의해 남겨진 것을 긍정하는 정립적 부정 ( 定 立 的 否 定, paryudāsa-pratiṣedha) 을 공성 해 석의 정설로 선택한다. 이는 번역명의대집 4510 에 따라 ma yin par dgag pa 에 해당한다. 이 두 부정 형식의 가장 큰 차이는 정립적 부정이 명사적 개념을 부정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면, 비정립적 부정은 동사적 개념과 관련해서 명제 부정을 한다는 점이다. 이 차이는 결국 부정에 의해 모순하는 사항을 함의하는 정립과 함의하지 않 는 비정립의 기능이다. 이 부정의 사례 가운데 문법학에서 자주 드는 사례는 이 사 람은 바라문이 아니다.(nāyam brāhmaṇaḥ 혹은 ayam abrāhmaṇaḥ) 를 해석할 때, 명사적 개념을 부정하면 바라문이 아닌 크샤트리야(Kshatriya), 바이샤(vaiśya) 와 같은 다른 신분을 지칭하는 의미가 파생한다. 다시 술어를 부정하면 그는 바라문이긴 하지만 바라문의 자질이 없다는 의미를 지시한다. 23) 한다. 따라서 그는 주로 아상가를 비판의 주된 표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dbu ma'i sning po'i 'grel pa rtog ge 'bar ba, no. 5256(Peking edition) 218b: 대승교도인 궤범사 아상가(thogs med) 와 바수반두(dbyig gnyen) 를 시작으로 하는 여타의 사람들 은 여래에 의해 증험되고 또 성 나가르주나의 정해인 대승의 의궤를 다르게 받아들여, 무참무괴하게 의미를 알지 못한다. ( 중관심론주 사택염 입유가행진실결택장 ) theg pa chen po kyi slob dpon thogs med dang, dbyig gnyen la sogs pa gzhan dag ni de bzhin gshegs pas lung dstan cing, sa rab du brnyes pa'i 'phags pa klu sgrub kyis yang dag par rtogs pa'i theg pa chen po'i don gyi lugs gzhan du 'dren par byed cing ngo tsha dang khre la me pa don rnam par mi shes pa de bzhin du rnam pa shes shing mkhas par nga rgyal byed pa dag 'di skad smra ste. 21) 나가오 가진, 중관과 유식, 김수아 역 (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2005) pp.218-222 참조. 22) 야마구찌는 공ㆍ유 논쟁에 대해 공을 주장하는 중관학파와 시설된 것으로서의 존재를 주장하는 유식 학파가 각자의 특징을 상대에게 강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본다. 山 口 益, 佛 敎 における無 と 有 の對 論, pp.46-47. 바비베까에 의한 유식 삼성설 비판은 본 논문의 주제가 아니고, 이에 관한 연구 역시 충분히 이루어졌기에 요점을 정리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유식학파는 변계소집성을 의타기성으로서의 내용이 없는 비존재로 부정하기 때문에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이 별개의 성질이라 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바비베까는 현실적인 입장에서 변계소집성에 의타기성으로서의 성격을 부여 해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이 일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변계소집성은 의타기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지만, 잘못된 세속의 인식세계 외에 따로 의타기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잘 못된 변계소집성의 인식세계가 의타기성의 세계이기 때문에, 한 사태가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이라 는 두 가지로 구분되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바비베까는 인식의 실제 사태로서 변계소집과 논리 적인 추론에 의한 의타기성을 구분하는 것을 배격하면서 삼성설에 대해 체계적으로 논박한다. 그는 의타기성의 무용성을 주장하여 유식 삼성설을 변계소집과 원성실성으로 구분한다. 이것은 유식 삼성 설을 자신의 이제관에 근거해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 9 -
사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형식논리를 지탱해주는 네 개의 기본 원리가 있는데, 이는 동일률( 同 一 律 ), 모순율( 矛 盾 律 ), 배중률( 排 中 律 ), 그리고 충족이유율( 充 足 理 由 律 ) 이다. 24) 정립적 부정과 비정립적 부정은 형식논리를 토대로 이해하면 전자는 한 명 제는 동시에 참이면서 거짓일 수 없다 는 모순율과 한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이며, 그 중간적인 어떤 것일 수 없다 는 배중률을 위반하여 작동하는 우리의 사유 방법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모순율과 배중률에 의해 우리 지각 내용에 상응하는 사실을 그 경 험 내용과 관련 없는 사실을 배제함으로써 분명히 대상화하거나 지시할 수 있지만 정 립적 부정은 모순율과 배중률을 위반하여 제3 의 대상을 지시한다. 이는 우리의 일상 언어적 세계의 측면으로 우리 실제 판단의 논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비정립적 부정의 경우는 모순율과 배중률의 적용을 처음부터 받지 않는 사유의 방식이라 특히 낯설다. 중관학파는 부정 표현으로서 공 또는 무자성을 비정립적 부정에 의해 이해해야만 하는 논거를 회쟁론( 廻 諍 論, Vigrahavyāvartanī) 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회쟁론 11-12게에서는 논적의 주장으로 존재하는 것만을 부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소개하고 61-64게에서 이를 받아 부정 표현이 실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효과적으로 그 기 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논증한다. 논적은 언어와 대상 사이의 대응관계 에 기초 하여 부정된 것 (pratiṣedhya) 역시 언어에 의해 지시됨으로써 그 존재성을 획득하고 있기 때문에 부정 (pratiṣedha) 은 존재하고 있는 사물에 대해서만 가능하다는 입장이 다. 반면에 나가르주나는 실체성에 대한 부정만을 통해, 결여( 缺 如 ) 된 그 자체에 대한 지시가 가능하다는 주장을 한다. 이는 존재론적 본질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사태나 사 물에 대해 어떠한 훼손을 주지 않고서도 인식적 전환을 통해 본질적인 자성이 실재하 지 않음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즉 모든 사물에 실체가 없다 는 말은 모든 사물이 실 체를 갖지 않다는 것 을 알리는 말이지 모든 사물에 실체가 없다 라고 주장하기 위한 말은 아니다. 모든 사물들은 무자성하다 는 이 말이 모든 사물들의 무자성함을 지어내지는 않는다. 그렇 지만, 자성이 없는 상황에서 사물들은 무자성하다고 알려준다. 예를 들면 집에 데와닷따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집에 데와닷따가 있다 고 누군가가 말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누군가가 그가 없다 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그 말은 데와닷따의 부재( 不 在 ) 를 지어내 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집에 데와닷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다. 그와 같 이, 사물들에 자성이 없다 는 이 말은 사물들의 무자성성을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성의 부재를 알려준다.( 회쟁론 64 게 주) 25) 23) 江 島 惠 敎, 中 觀 思 想 の展 開 : Bhavaiveka 硏 究 ( 東 京 : 春 秋 社 1980), pp.113-116 참조. 24) 노양진, 논리적 사고의 길, ( 광주: 전남대학교출판부, 2004), pp.22-23. 이 원리들은 형식논리의 최상위 원리들로 간주되며, 따라서 형식논리에서 사용되는 모든 하위 규칙들은 여기에 부합하는 방 식으로 수립되어야 한다. 이 원리들은 증명되었다기보다 우리가 사고하는 데 부인할 수 없는 원리들 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일종의 공리로 간주된다. 하지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 원리들이 동 일한 시점에 동일한 관점이라는 특수한 조건 아래 성립한다는 점이다. 형식논리는 시간, 공간, 운동, 변화 등의 개념을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형식논리를 판단 의 논리 또는 정지( 停 止 ) 의 논리라고 부른다. 25) VV(Re 2005: 80-81) - 10 -
이와 같이 공이라는 말은 사물들에 자성이 없다는 말이 없음의 있음 을 주장하는 말이 아니라 실체가 있다는 착각만을 시정해 주는 말로서 그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 서 이는 양훼이난( 楊 惠 南 ) 이 지적하고 있듯이, 공 또는 무자성이라는 부정에 의해 우 리가 알게 되는 사실은 새로운 사실을 긍정하는 것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26) 이러한 무자성의 의미를 비정립적 부정으로 이해하는 해석의 주된 목적은 실체론 비 판이다. 또한 중관학파의 실체론 비판이 실패한 것이 아니다. 대신 이 비판이 본질주 의를 넘어 가치론적 허무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길을 분명히 제시하지 않았기 때 문에, 유식학파의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다시 말해 중관학파와 같이 실체론자들의 주 장 안에 담긴 모순을 드러내는 방법이 효과적일지라도, 경험적으로 책임 있는 태도는 가치론적 논의를 위한 근거를 정확히 제시하는 것이다. 중론 의 실체론 비판이 존재론적 본질주의에 대한 효과적 비판을 수행했음에도 불 구하고, 가치론적 허무주의의 혐의를 받는 것은 의사소통의 객관성을 확보하는 데 그 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이는 규약과 제도 에 의해서만 사물과 사건 에 대한 지시와 표현 이 가능하다는 입장만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이 경우 지시와 표현은 언어이고 포괄적으로 그것은 기호의 형태이다. 따라서 기호는 곧바로 대상과 직접적 관련성을 맺을 수는 없고 오직 사회적 약속 (dharmasaṃketa) 을 통 해 규정된다. 문제는 사회적 약속만으로는 기호가 대상을 전부 담보할 수 없다는 점 이다. 그 까닭은 우리의 경험 내용을 기술하거나 발화할 때 기호적 표현에 대입시켜 야하기 때문이다. 이를 체험주의 전통에서는 기호적 사상 (symbolic mapping) 이라 고 부른다. 예를 들어 우리가 고양이 라는 기표에 고양이에 대한 경험이 사상되지만 고양이에 대한 모든 경험이 동시에 사상될 수는 없다. 만약 고양이라는 기표에 고양 이에 대한 모든 경험이 사상될 수 있다면 고양이는 더 이상 기표가 아니라 고양이 자 체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경험은 본성상 언어와 괴리되어 있으므로, 중관학파의 언어적 실재 (prajñaptisat) 라는 실제 현실을 잘 반영한다. 27) 개념에 담긴 가설의 의미는 언어의 한계성과 우리의 yac cāhaṃ te vacanād asataḥ pratiṣedhavacanasiddhir iti/ atra jñāpayate vāg asad iti tan na pratinihanti//65// ya ca bhavān bravīti/ sate 'pi vacanād asataḥ pratiṣedhaḥ pratisiddhaḥ tatra kin niḥsvabhāvāḥ sarvabhāvāḥ iti/ etad vacanaṃ karotīti// atra brūmaḥ niḥsvabhāvā iti etat khalu vacanaṃ na niḥsvabhāvāna sarvabhāvāna karoti/ kintv asata svabhāva bhāvānām asata svabhāvānām iti jñāpayati/ tatra kaścit brūyād avidyamānagṛhe devadattas tam asti gṛhe devadatta iti/ tatrainaṃ kaścit pratibrūyān nāstīti/ na tad/ devadattasyāsaṃbhavāṃ karoti/ kintu jñāpayati kevalam asadbhāvaṃ gṛhe devadattasyeti// tadvā nāsti svabhāvo bhāvānām ity etadvacanaṃ na svabhāvānāṃ niḥsvabhāvatvaṃ karoti/ bhāveṣu svabhāvasyābhāvaṃ jñāpayati// tatra yad bhavatoktaṃ kim asati svabhāve nāsti svabhāva ity etadvacanaṃ karoti/ ṛte 'pi vacanāt prasiddhiḥ svabhāvasyābhāva iti/ tat te na yuktaṃ yad uktaṃ bālānām iva mṛgatṛṣṇāyāṃ sa yathājalagrāhaḥ/ evaṃ mithyāgrāhaḥ syāt te prasidhyate hy asataḥ/ yat punar bhavato mṛgātṛṣṇāyām ity atra brūmaḥ// 26) 楊 惠 南, 중관철학, 김철수 역 ( 서울: 경서원, 1995), pp.225-230 참조. 27) 노양진, 언어와 경험: 괴리와 거리, pp.64-67. - 11 -
이때 기호적 사상이란 증익 ( 增 益, samāropa)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우리가 무언가에 원래 대상이 가지는 의미 이상을 덧씌운다면, 그것은 과연 어디에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일까? 이는 우리가 경험한 물리적 사건을 언어 또는 개념이라 는 기호적 개념 또는 기표에 투사하는 것이다. 이때 기표는 기호 이상의 의미를 가지 게 되며, 우리는 기호가 가지게 된 경험 내용에 의미를 부여하여 물리적 대상보다 확 대되거나 축소된 의미를 가지게 된다. 28) 또한 대상을 지칭하는 기표가 그 이상의 의 미를 갖게 되는 것은 우리 활동의 산물이며 종( 種 ) 적인 특징이지만, 불교적 덕목은 이 를 경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해탈 ( 解 脫, mokṣa) 을 위한 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러한 의미의 덧씌어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즉 우리는 특정한 기표에 우리의 경험내용을 사상함으로써 그 경험내용의 관점에서 그 기표를 이해하고 경험한다. 사상된 특정한 경험내용의 관점에서 그 기표를 이해하고 경험하게 된다. 무엇을 어디 에 사상할 것인지는 개개인의 기호적 의도와 욕구에 달려 있으며, 이 때문에 사상의 과정은 본성상 비법칙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호적 사상은 확정적이지 않으며, 객 관적이지도 않다. 29) 결국 중관학파가 우리의 현실로서 경험과 언어 사이의 거리를 인정한 이후 우리의 관심은 경험이 언어를 통해 사상되는 패턴으로 옮겨간다. 사실 이 또한 쉽지 않은 여 정을 노정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경험도 타인과 직접적으로 공유할 수 없을 뿐 만 아니라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공유되기 때문이다. 즉 다만 그 경험을 특정한 구조나 단위로 분절화하고 패턴화 할 수 있을 뿐이다. 더군다나 그 패턴들에 기표로서 언어 적 개념을 부여하고, 그 명칭을 통해 경험 내용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정확히 공유되는지를 확증할 수 있는 방식은 없다. 따라서 본질주의 전통에서 말해왔던 우리의 경험 내용의 객관적 전달이란 형이상학적 독단에 의존하던 허망한 바램이었던 것이다. 30) 결국 우리는 유식학파의 주장처럼 각자의 기호적 경험세계에 거주하면서 언어의 교환에 의한 의사소통을 시도하고 있다고 인정해야한다. 이를 인 정한 이후 의사소통의 객관성을 확보하는 길이 열릴 것이다. 이는 먼저 언어의 본성 과 구조에 대한 탐구로부터 시작한다. 이는 무자성의 의미를 중도로 알리려한 나가르 주나 이후의 새로운 여정이다. 더불어 중관학파가 적극적으로 논변하지 않았던 우리 의 경험 조건에 관한 것이기도 하며, 유식학파가 선택한 것으로 정립적 부정 즉 가설 의 근거를 긍정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근거로서 없음의 있음을 통해 아상가(Asanga, 無 着 : 300-390) 의 무이 로 알려진다. 이는 인식론적 토대를 위한 가설적 섭대승론 에 의해 28) 또한 이 과정은 새로운 개념을 습득하거나 추상적 개념을 습득하는 형식에도 적용된다. 이러한 까닭 에 개념 확장의 지반은 우리의 신체활동과 직접적 연관성을 가지며 감각운동 경험에 토대한다. 즉 우리가 습득한 기표들은 경험 내용상 신체활동과 연관된 감각운동 영역 안에서 경험의 차이 를 갖 게 된다. 이러한 차이가 기표들에 물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필자가 사용하는 기호적 개념과 기표 는 의미가 투사되기 이전의 순수 개념으로, 기호는 떳씌우기가 이루어진 이후를 지시한다. 김현구, 분별에 관한 인지언어학적 접근, pp.121-122. 29) 노양진, 의사소통의 기호적 구조, p.348. 30) 노양진, 언어와 경험: 괴리와 거리, p.71. - 12 -
4. 중도의 재구성: 무이의 중도적 의미 2 장에서 현양성교론 을 인용하여 삼성설에 관한 논리적 근거를 살펴보았다. 사실 아상가는 현양성교론 이외에 섭대승론, 대승아비달마집론( 大 乘 阿 毗 達 磨 雜 集 : Abhidharma-sammucaya ) 등을 저술했으며, 금강반야경( 金 剛 般 若 經 : Vajracchedikā-prajñāpāramitā-sūtra ), 해심밀경( 解 深 密 經 : Saṃdhinirmocanasūtra ) 등을 주석하였다. 섭대승론 이 갖는 유식학파 내의 사상 적 특징은 개체 또는 오온( 五 蘊, pañca-skandha) 의 변화 상속 과정을 설명하기 위 해 제시된 12 지 연기설로부터 확립된다. 예컨대 섭대승론 은 무명을 번뇌로 물든 오 온으로, 행(saṃskāra)을 형성의 주체로서의 오온이라고 정의한다. 섭대승론 의 해 석은 행이 태어날 존재의 상태(gati) 를 결정하여 결생( 結 生 ) 의 식이 있게 된다는 것이 다. 31) 이는 오온 상속의 근저에 알라야식의 존재가 상정되지 않고 찰나 생멸하는 오 온의 상속만이 인정된다면 12 지 연기의 삼세양중( 三 世 兩 重 ) 인과가 성립할 수 없다는 유식학파의 입장을 드러낸다. [ 알라야식이 없다면] 업잡염(karm asaṃkle śa)이 발생한다는 것이 왜 타당하지 않는가? 12 연기에서 행을 조건으로 하는 식이 있다는 것이 타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 알라야 식이 ) 없다면 취를 조건으로 하는 유가 있다는 것도 타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섭대승론 소지의분 ) 32) 섭대승론 립될 수밖에 없다. 33) 소지의분 에 따르면 이상의 전제에 바탕해야만 존재로서의 오온이 성 또 다른 사상적 특징은 한 찰나 전에 발생한 표층의식으로서의 전6식만으로는 다음 찰나에 발생하는 마음의 심리적 토대( 所 依 根, āśraya) 가 될 수 없다는 논리에 근거하 여 알라야식(ālayavijñāna) 의 존재를 요청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섭대승론 에서는 알라야식에 이숙과 일체종자의 역할을 부여한다. 31) 분위( 分 位 ) 연기설을 정설로 받아들인 설일체유부( 說 一 切 有 部 ) 는 12연기설이 오온의 두드러진 상태에 근거하여 각 지분의 명칭이 설정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12지 연기에 있어서 무명과 행은 과거 2인으 로서 식, 명색, 6 처, 촉, 수는 현재 5 과가 된다. 다시 애, 취, 유는 현재 3 인으로서 미래 생, 노사라 는 결과를 낳는다. 섭대승론 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번뇌 잡염으로서 무명, 업잡염으로서 행 그리고 행이 취를 결정하여 결생의 식이 있게 된다. 이 관계는 애, 취가 다시 번뇌 잡염이며, 유는 행와 같이 업잡염이 되어 미래의 존재의 탄생에까지 적용된다. 長 尾 雅 人, 攝 大 乘 論 和 譯 と注 解 上, ( 東 京 : 講 談 社, 1982), pp. 189-90 참조. 32) MS(1982: 36 Ⅰ. 33): las kyi kun nas nyon mongs pa ji ltar mi rung zhe na, 'du byed kyi rkyen gyis rnam par shes pa mi rung ba'i phyir ro, de med na len pa'i rkyen gyis srid pa yang mi rung ba'i phyir ro. 33) 長 尾 雅 人, 攝 大 乘 論 和 譯 と注 解 上, pp. 188-199 참조. - 13 -
요약하면 알라야식의 본질은 모든 종자를 가진 이숙식인데, 거기( 알라야식) 에 3 계에 [ 속하 는] 모든 개체와 모든 생존형태가 포함된다. ( 섭대승론 소지의분 ) 34) 비록 섭대승론 에서는 8 식설의 개념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지만, 표층의식인 전6식 이 심층의식인 알라야식에 업 작용의 효과를 인상( 印 象 ) 의 형태로 남기는 것을 훈습 으로 정의한다. 훈습된 습기( 習 氣, vāsanā) 가 곧 바로 종자가 되어 새로운 생을 이끄 는 것이 알라야식의 기능이다. 즉 알라야식은 이숙식( 異 熟 識, 일체종자식( 一 切 種 子 識, sarvabījaka) 이다. 35) vipāka-vijñāna ) 이며, 이 외에 섭대승론 은 소지상분 에서 삼성설에 대한 설명에 집중한다. 우리는 삼 성설의 삼성을 개별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삼성은 서로의 존재를 통해 성립하고 구 분되기 때문이다. 섭대승론 소지상분 에 따르면 능변계( 能 遍 計 ) 는 의식, 소변계( 小 遍 計 ) 는 의타기성이다. 36) 의식이 이름을 갖는, 즉 의타기성의 세계에서 변계소집성은 성립한다. 이에 따르면 변계소집성은 적어도 공상( 共 相 ) 의 소산이며 언어세계 가운데 성립하는 것이 된다. 37) 원성실성은 삼성설과의 관계에서 진여라고 하거나 또는 의타 기성 가운데에 변계소집성이 없는 청정 의타기로 정의된다. 이어지는 주장을 살펴보면, Ⅱ. 26[ 절 구분은 長 尾 雅 人 (1982) 분류를 따른다] 에서 삼성의 원형적 설명이 대승경전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소개한다. 비록 대승 경전에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삼성설의 다양한 표현들로서 변계소집자성 은 무소유( 無 所 有 ) 로, 의타기자성은 환술( 幻 術 ), 아지랑이 등으로, 원성실자성은 네 가 지 청정한 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 전거들과 더불어 Ⅱ. 28에서는 윤회가 곧 열반 34) MS(1982: 28 Ⅰ. 21): mdor bsdu na kun gzhi rnam par shes pa'i ngo bo nyid ni rnam par smin pa'i rnam par shes pa sa bon thams cad pa ste, des khams gsum pa'i lus thams cad dang, 'gro ba thams cad bsdus so. 35) 長 尾 雅 人, 攝 大 乘 論 和 譯 と注 解 上, pp.12-21 참조. 알라야식은 해심밀경 에 그 이름이 등장하고, 유가사지론 의 여러 곳, 특히 섭결택분 에 상세히 고찰하지만 그 외 마이뜨레야(Maitreya: 彌 勒 ) 저술에 속하는 대승장엄경론( 大 乘 藏 嚴 經 論 : Mahāyānasūtrālaṃkāra), 중변분변론 의 본 송에는 전혀 그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법법성분별론( 法 法 性 分 別 論 : Dharmadharmtā-vibhāga) 도 비슷한데 내용적으로 대부분 알라야식으로 불러야하지만 단순히 심 ( 心 ) 등으로 부르고 있다. 아 상가가 완성한 현양성교론, 섭대승론, 대승아비달마집론 에 이르러서 알라야식 개념의 체계적 틀을 세우게 된다. 36) MS(1982: 74-5 Ⅱ. 16): 또한 변계하는 것( 能 遍 計 ) 이 존재해서 변계되는 바( 小 遍 計 ) 가 있으므로 변계소집성이 있다. 그 경우 능변계는 무엇인가? 소변계는 무엇인가? [ 그리고] 변계소집성은 무엇인가라고 하면, 의식이 능변계 인데 분별하는 것을 [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그것( 의식) 은 자신의 명언훈습의 종자로부터 발생하며, 모든 표상은 명언훈습의 종자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일체의 행상은 분별들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 이다. 모든 것을 분별에 의해서 변계하기 때문에 능변계라고 한다. 의타기자성은 소변계이다. yang kun tu rtog pa yod cing kun tu brtags par bya ba yod na, kun brtags pa'i ngo bo nyid do, de la kun tu rtog pa ni gang yin, kun tu brtags par bya ba ni ci zhiig, kun tu brtags pa'i ngo bo nyid ni gang zhe na, yid kyi rnam par she pa ni kun tu rtog pa ste, rnam par rtog pa can gyi phyir ro, de ni rang brjod pa'i bag chags kyi sa bon las byung ba dang, rnam par rig pa thams cad kyi brjod pa'i bag chags kyi sa bon las byung ba'i, de lta bas na rnam pa mtha' yas pa'i rnam par rtog pa dag gis 'byung ste, thams cad du rtog pas kun tu rtog pa zhes bya bas na kun tu rtog pa zhes bya'o. gzhan gyi dbang gi ngo nyid ni kun tu brtag par bya'o. 37) 竹 村 牧 男, 唯 識 三 性 設 の硏 究, ( 東 京 : 春 秋 社, 1995) pp.237-241 참조. - 14 -
(saṃsāranirvāṇāviśeṣaṇaṃ) 이라는 범문경( 梵 問 經, Brahmaparipṛcchā) 의 교설 을 토대로 삼성설의 논리적 구조를 확인해 준다. 이는 번뇌와 깨달음으로서 보리 또 는 생사윤회와 열반의 모순 대립하는 상황 사이의 간극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매개적 역할을 논리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해답이다. 이를 Ⅱ. 29 에서 아비달마대승경( 阿 毘 達 磨 大 乘 經, Abhidharmasũtra ) 의 잡염ㆍ청정 이분( 二 分, dvayāṃśika) 의 의미를 삼 성설의 논리에 적용한다. 이때 잡염분은 변계소집성, 청정분은 원성실성, 그리고 그 두 가지 분은 의타기성으로 정의된다. 이때의 분( 分, āṃśa) 이란 이문 ( 異 門, paryāya) 의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데 동의어의 의미라기보다 어떤 관점에 서 (paryāyeṇa) 라는 의미로 이해해야한다. 왜냐하면 하나인 것이 이 이문에 의해 삼 성을 다르게 만들기 때문에, 이문은 단순한 동의어가 아니다. 38) 섭대승론 에서는 잡염ㆍ청정 이분의 근거로서 의타기성의 역할을 확보하는 데 주 력한다. 이때 제시된 논리는 다음과 같다. 의타기성의 비존재, 원성실성의 비존재, 잡 염ㆍ청정의 비존재를 주장할 때 과실이 성립한다는 논리에 의해 이들의 존재를 논증 한다. 즉 의타기가 없으면 원성실성도 비존재가 되는 모순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잡염 에 있어서 청정 의타기성은 잡염에 관계하는 것으로서 존재해야만 한다. 다만 의타기 성과 잡염의 본래 관계는 의타기성에서 착각만이 잡염의 원인으로 작용하며 이 착각 으로 인해 의타기성이 허망분별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실체로서 보는 것은 전 도된 이해이다. 이 이해가 잡염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잡염ㆍ청정을 비존재로 만들지 않기 위하여 의타기성은 존재하는 것이다. 39) 섭대승론 Ⅱ. 30에서부터 의타기성은 원성실성의 부분에 말미암아 상주하는 것으 고, 변계소집성의 부분으로 말미암아 무상한 것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원성실성과 변 계소집성의 부분으로 말미암아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무상하지 않는 존재성 을 확보 한다. 40) 결국 의타기성의 존재성은 모순 대립하는 잡염성과 청정성을 담보하는 바로 서 둘이 아닌 바의 있음 이다. 이와 같은 원리에 근거해 섭대승론 은 의타기성의 존 재성을 12 가지의 예시를 통해 확보한다. a b 상주와 무상, 그 둘이 아닌 것과 같이 고와 락, 그 둘이 아닌 것 38) 나가오 가진, 중관과 유식, pp.278-279 참조. 39) 竹 村 牧 男, 唯 識 三 性 設 の硏 究, p.339 참조. 40) 세존께서 어떤 때에 모든 법은 상주한다고 설하고, 어떤 때에 무상한 것이라고 설하고, 어떤 때에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라고 설하였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상주한다와 같이 설하였 는가? 의타기자성은 원성실성의 부분에 말미암아 상주하는 것이고, 변계소집성의 부분으로 말미암아 무상한 것이다. 저 두 부분으로 말미암아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상주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의도에 의거해 이와 같이 설한 것이다. MS(1982: 92-93 Ⅱ. 30): bcom ldan das kyis la lar ni chos thams cad rtag go zhes bstan, la lar ni mi rtag go zhes bstan, la lar ni rtag pa yang ma yin mi rtag yang ma yin no zhes bstan pa ci las dgongs te, rtag pa zhes bstan ce na, gzhan gyi dbang gi ngo bo nyid yongs su grub pa i chas rtag[brtag(p)] pa o/ kun tu brtags pa i ngo bo nyid kyi chas mi rtag pa o/ gnyi ga i chas rtag pa yang ma yin mi rtag pa yang ma yin pa di las dgongs nas bstan to/ - 15 -
c 선과 불선, 그 둘이 아니다. d 공과 불공, 그 둘이 아닌 것 e 아와 무아, 그 둘이 아닌 것 f 적정과 비적정, 그 둘이 아닌 것 g 자성과 무자성, 그 둘이 아닌 것 h 생과 불생, 그 둘이 아닌 것 i 멸과 불멸, 그 둘이 아닌 것 j 본래적정과 본래적정 아님, 그 둘이 아닌 것 k 자성열반과 비자성열반, 그 둘이 아닌 것 l 윤회와 열반, 그 둘이 아닌 것도 또한 그러하다. 41) ae - 는 고성제의 4 가지 행상을 설명한 것이다. gl - 는 해심밀경 을 인용하였다. 해심밀경 에 따르면 법들은 무자성이고, 법들은 무생이며, 법들은 무멸이고, 법들은 본래적정이며, 일체법들은 본질적으로 열반이라고 밝히고 있다. 42) 이어지는 다섯 게 송 가운데 처음 세 게송은 출처가 명확하지 않다. 나머지 두 게송은 대승장엄경론 에서 인용되었다. 43) 그 가운데 다섯 번째 게송은 gl - 의 논리적 근거가 되는데 자 41) MS(1982: 92-93 Ⅱ.30): ji ltar rtag pa dang mi rtag pa dang gnyis su med pa de bzhin du, bde ba dang sdung bsngal dang[dag kyang(d)] gnyis su med pa dang, dge ba dang[dag kyang(d)] mi dge ba dang gnyis su med pa dang, stong pa dang mi stong pa dang gnyis su med pa dang, bdag dang bdag med pa dang gnyis su med pa dang, zhi ba dang ma zhi ba dang gnyis su med pa dang, ngo bo nyid yod pa dang ngo bo nyid med pa dang gnyis su med pa dang, skeys pa dang ma skyes pa dang gnyis su med pa dang, gags pa dang ma gag dang gnyis su med pa dang, gzod[bzod(p)] ma nas zhi ba dang gzod[bzod(p)] ma nas ma zhi ba dang gnyis su med pa dang, rang bzhin gyis[gyi(p)] nya ngan las das pa dang rang bzhin gyis mya ngan las ma das pa dang gnyis su med pa dang, khor ba dang mya ngan las das pa dang[dag kyang(d)] gnyis su med do zhes bya ba la sogs pa i rab tu dbye ba dag gis[gi(p)] sangs rgyas bcom ldan das rnams kyi ldem po dag thams cad rtag[brtag(p)] pa dang mi rtag pa la sogs pa i rnam grangs bstan pa bzhin du, ngo bo nyid gsum yin pa dag tu khong du chud par bya o// 42) 長 尾 雅 人, 攝 大 乘 論 和 譯 と注 解 上, pp.384-385. 43) 1 법이 실제로는 비존재임과 같고, 다양한 종류가 현상하는 바와 같이 법과 비법의 아님이다. 따 라서 둘이 아님의 의미를 설한다. 2 한 부분에 의지해 존재와 비존재로 드러나기에, 두 부분에 의 지해 말해지므로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라고 말해졌다. 3 현현하는 바와 같이 존재하지 않으 므로 비존재라고 말해졌으며, 그러나 그와 같이 현현하기에 존재라고 말해졌다. 4 그 자체로는 비 존재여서 자성적으로 지속할 수 없기 때문에 지각한 바대로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자성이 없다고 인 정한다. 5 자성이 없으므로 차례로 뒤의 것들에 대한 근거가 되어, 생 멸이 없어 본래 적정하며 자 성 그 자체로 완전한 열반이다. MS(1982: 92-93 Ⅱ.30): ji ltar chos rnams yod min zhing, ji ltar rnam pa du mar snang, de bzhin chos dang chos med min[pa(d)], gnyis su med pa i don du bstan//1// cha res de dag med pa dang, yod pa zhes ni rab tu bstan, gnyi ga i chas ni yod min zhin, med pa ng min zhes brjod pa mdzad//2// ji ltar snang ba de bzhin med, de phyir med ces brjod pa mdzad, gang phyir de ltar snang gyur pa, de phyir yod ces brjod pa mdzad//3// rang dang bdag nyid med pa i phyir, rang gi dngos la mi gnas phyir, gzung ba bzhin du de med phyir, ngo bo nyid med nyid du bzhed[du bzhed pa(d)]//4// ngo bo nyid ni med pa yis, phyi ma phyi ma brten byas te, skye med gag med gzod[bzod(p)] zhi dang, rang bzhin mya ngan das par grub//5// - 16 -
성이 없으므로 차례로 뒤의 것들에 대한 근거가 되어, 생 멸이 없어 본래 적정하며 자성 그 자체로 완전한 열반이다. 즉 자성, 생과 멸 등의 관념은 서로 모순하는 관념 들로 무자성, 불생과 불멸 등의 관념이 결국 무자성에 근거해 곧바로 모순 지향됨으 로써 세 번째 관념이 제시된다. 이때 세 번째 관념이 비존재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 문에 아상가는 없음의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의타기성의 존재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3 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없음의 있음 을 주장하는 부정의 형식은 정립적 부정이다. 이는 우리가 사용하는 형식논리와 달라서 모순율과 배중률을 따르지 않지만, 이러한 사유가 반드시 낯선 것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하였 다라고 했을 때 강조하려고 하는 표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하지 않음에 의한 함이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이 그 자체로 새로운 지시대상을 탄생시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 사태에 대한 하지 않음 과 하지 않음의 함 이라는 논리적 구분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논리적 구분에 토대해 유식학파는 변계소집성을 의타기성으로서 의 내용이 없는 비존재로 부정하기 때문에, 확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립적 부정에 의한 없음의 있음의 의미적 기초는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이 별개의 것으로 보살지 에서 중관학 파의 교학적 입장을 극단적인 허무론자 (nāstika) 로서 지시할 때 예정된 여정이었다. 이는 중관학파가 비정립적 부정을 통해 존재론적 본질주의 비판에 집중하면서 허무주 의의 분기를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빚어진 결과이다. 이에 반해 정립적 부 정에 의해 새로운 중도적 의미가 도출되는데, 없음의 있음과 같은 부정을 위한 매개 물을 통해 유식학파가 주장하려고 한 바는 가치론적 허무주의에 대처함으로써 이루어 진다. 따라서 중관학파가 중도를 통해 추구하려 했던 양극단의 지양이 유식학파에 의 해 새롭게 재구성된 셈이다. 결국 유식학파가 선택한 정립적 부정은 가치론적 논의를 위한 의지의 발로이다. 3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인지언어학과 체험주의는 객관적 의미 교환이 가능하다는 존재론적 전제가 우리의 철학적 열망이상이 아니었음을 인정하고, 이 논쟁의 소재를 의사소통의 객관성을 어떻게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로 압축시켰다. 다시 말해 의사소통의 객관성이란 우리의 경험과 사유의 내용이 제 3자와 공유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며, 우리의 언어적 표현이 다른 누군가에게 정확히 전달될 가능 성을 담보할 가능성을 형이상학에서 탐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과 언어 에서 찾아야한다는 뜻이다. 44) 철학사적 흐름에 따라 우리가 확인하게 된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입장은 먼저 실 체론 비판과 허무주의에 대한 인식이다. 이는 현대적 의미로 해석해 보았을 때 본질 주의와 허무주의를 동시에 거부하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 반면 중관학파와 유식학 파의 차이는 허무주의에 대한 대처이다. 중관학파와 유식학파 사이의 철학적 입장 차 44) 흔히 선( 善 ) 에 관한 판단은 모든 도덕적 언명처럼 가치론적 명제이지만, 그 자체로 정당성을 담보 하는 것이 아니라 타당한 근거를 형이상학에서 찾아왔다. 그리고 그 근거는 항상 보편성에 기반한 원 리로서 이데아(Idea), 선한 의지 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니체(F. Nietzsche) 에 와서 우리의 해석 으로 이해하면서 전통적인 형이상학은 붕괴되었고, 이제 현대 철학에서는 형이상학 없는 윤리학을 추 구한다. - 17 -
이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지점이 허무주의를 대처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언어와 경 험 사이의 괴리를 해소해가는 입장이다. 결국 우리가 따져 물어야하는 것은 기호적 개념이 가지는 객관적 의미가 아니라 경험을 기호에 사상함으로써 물리적 사물 이상 의 의미를 갖게 되는 우리의 인식 구조이다. 왜냐하면 물리적으로는 동일한 유형의 대상 접촉이라 하더라도 그 대상이 익숙한 물건인가 또는 낯선 상대인가, 가족인가에 따라 매우 다른 귀결을 낳는다. 이 때 접촉 이라는 사건이 유사하게 인식되는 물리적 경험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나서, 그 사건을 해석한다는 말은 그것을 의미화해 주는 우리 자신의 인식적 토대 에 근거한다. 45) 이러한 인식적 토대 위에 동일한 해석이든 상이한 해석이 가능할 뿐이며, 그것이 유식학파가 정립적 부정을 통해 세우려 한 의 타기성의 현대적 의미일 것이다. 결국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우 리에게 동일한 해석과 상이한 해석이 가능한 인식적 토대이지, 그 이외의 것에서 확 보할 수 있는 객관성이란 없다. 인식현상의 객관성이란 일체의 객관세계나 대상세계에 대한 지각 내용에서 찾아지 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혹과 번뇌가 창발 ( 創 發, emergent) 하고 있는 우리의 의 식세계 즉 인식적 토대를 통해서 제시해야 한다. 그것은 염오와 청정의 근거로서 의 타기성이며, 우리의 인식이 펼쳐지는 장으로서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경험 세계의 영 역이다. 다만 그 경험의 개인적 한계성 때문에 각자의 경험만이 있을 뿐이며, 우리는 타자의 경험 내용과 의미를 우리의 경험과 의미를 통해 추정할 수 있는 조건만이 같 다는 점에서 합의점에 도달할 수 있다. 이는 형이상학의 영역에서 확보된 지위가 아 니라, 접근법이다. 오히려 의식의 기능적 측면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첨단의 철학이 걷고 있는 하면서 찾아진 결과이다. 또한 이는 본질주의와 허무주의 극복이라는 중도적 언명의 근거를 확보 5. 나가며 필자는 이글에서 중관학파의 중도와 유식학파의 무이 개념에 함축된 철학적 의미를 본질주의와 허무주의의 극복이라는 관점에서 제시하였다. 우리는 형이상학적 원리 또 는 실체론을 존재론적 본질주의라고 부를 수 있으며, 가치의 기준을 제시할 수 없는 입장을 허무주의라고 부른다. 사실 중도는 무엇을 위한 논증이었나를 돌아보면 존재 론적 본질주의와 가치론적 허무주의를 양 극단으로 두고, 이를 연기설을 통해 그 문 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중도의 철학적 목적이 존재론과 가치론의 문제를 한 자리로 가져와, 연기설을 통해 일체 현상의 발생 근거를 설명함으로써 실 체성을 거부하고 가치론적 허무주의에 대응한다고 보여진다. 즉 본질주의로서 대표되 는 상견과 허무주의로 대표되는 단견을 거부하는 입장이 중론 에서 제시하는 중도관 45) 노양진은 이를 우리의 의미지반 (meaningbase) 으로 정의한다. 노양진, 의미와 의미지반 몸 언어 철학 ( 서울: 서광사, 2009), p.135 참조. - 18 -
이다. 더불어 양극단에 대한 비판이 중론 전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중 론의 철학적 태도가 분명히 반본질주의 입장이라는 것은 확인된다. 반면 허무주의에 대한 거부가 과연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는가는 의구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21세기 철학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는 실체론을 비판하면서도 가치론적 허무주의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논쟁이 중관학파와 유식학파 사이에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현대 철학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길이 찾아질 것으로 기대하였 다. 사실 우리가 이 길을 가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왜냐하면 본 질주의 비판이 곧바로 허무주의에 대한 거부까지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본 질주의 자체가 가치론적 허무주의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본질주의와 허무 주의의 극복이란 제일원리와 형이상학적 존재를 거부하면서도 나와 타자 사이의 인식 현상의 객관성을 담보해야 하는 문제로 압축된다. 근거해 인식적 토대로서의 의타기성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유식학파의 관점으로서 무이설에 그것은 염오와 청정의 근거로서 의타기성이며, 우리의 인식이 펼쳐지는 장으로서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경험 세계의 영역이다. -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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