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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민법(2) 1. 계약 청약 + 승낙 의사의 합치, 무방식 계약 자유 2. 온전한 구속력을 가질 수 없는 합의 합의 성립과정에 흠이 있거나 합의 내용 자체가 사회질서에 반할 경우, 그러한 계약은 무효이거나 취소 가능 3. 반사회질서 법률행위: 무효(제 103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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硏 究 論 文 新 羅 八 部 衆 圖 像 전개에 있어 雙 塔 의 역할 신용철 통도사성보박물관 학예실장, 불교미술사 전공 38shin@hanmail.net Ⅰ. 머리말 Ⅱ. 신라석탑 팔부중상의 도상 및 배치 Ⅲ. 쌍탑 팔부중상의 도상변화 Ⅳ. 신라 팔부중상의 계보 Ⅴ. 맺음말

I. 머리말 신라석탑은 감은사지 삼층석탑에서 이중기단과 삼층 탑신이라는 전형 양식을 이룩한 이래 발전과 퇴보를 거듭하였다. 8세기 초중반 이후 신라석탑은 시대의 하강에 따라 탑을 구성하는 부재를 차츰 줄이면서 단순화 과정을 겪게 되는데, 이로 인해 기단부 면석의 숫자가 감소한다. 결국 탑의 전체적 크기는 차츰 작아지며 건축적 요소보다는 조각적 요소가 강조되면서 탑 표면에는 다양한 부조상이 등장하게 된다. 탑에 새겨지는 부조상으로는 불보살상 이외에 제석ㆍ범천, 금강역사, 사천왕, 팔부중, 십이지 등 거의 모든 신장상들이 망라되어 있다. 이 가운데 팔부중상의 등장은 신라석탑에서 창안된 독특한 부조상이며 다른 나라 탑에서는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다. 이 같은 특징은 팔부중상이 8구라는 숫자적 특성을 상층기단 면석에 적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신라석탑에 등장하는 신장상들은 팔부중상을 제외하면 조탑 사례가 그다지 많지 않으며 시대에 따른 양식적 변화는 나타나고 있으나 도상적 으로는 정형화된 경우가 많다. 그러나 팔부중상이 부조된 석탑은 수량에 있어 거의 30여기에 달하며 분포도 전국적으로 나타난다. 1) 또한 양식적 변천은 물론이요 9세기를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확연한 도상적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 같은 도상변화가 어디서 비롯되었으며 도상적 계보는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라는 물음이 본고의 출발점이다. 필자는 팔부중 도상의 변화와 관련하여 쌍탑에 주목하였다. 쌍탑 출현은 통일신라시대 불탑의 가장 큰 특징이며 동시에 삼국시대 가람배치 1) 신라 팔부중상에 대한 논고로는 張 忠 植, 統 一 新 羅 石 塔 浮 彫 像 의 硏 究, 考 古 美 術 154ㆍ155(1982); 姜 友 邦, 石 窟 庵 佛 敎 彫 刻 의 圖 像, 美 術 資 料 56호(1995); 水 野 さや, 韓 國 江 原 道 襄 陽 陳 田 寺 址 三 層 石 塔 の 八 部 衆 像 について, 美 學 美 術 史 硏 究 論 集 16호 (1998); 水 野 さや, 慶 州 崇 福 寺 址 東 ㆍ 西 三 層 石 塔 の 八 部 衆 像 について, 佛 敎 藝 術 249 (2000); 水 野 さや, 慶 州 昌 林 寺 址 三 層 石 塔 の 八 部 衆 像 について, 美 術 史 51(2001); 曺 元 榮, 신라하대 팔부신중상 연구, 역사와 경계 39(2000); 朴 亨 國, 慶 州 石 窟 庵 諸 佛 像 에 관한 佛 敎 圖 像 學 的 考 察, 新 羅 文 化 祭 學 術 論 文 集 21집(동국대 신라문화 연구소, 2000); 田 正 中, 新 羅 石 塔 八 部 衆 像 의 樣 式 과 變 遷, 文 化 史 學 16호(2001); 文 明 大, 신계사 삼층석탑 팔부중상의 연구, 金 剛 山 神 溪 寺 (문화유산발굴조사단, 2002); 申 龍 澈, 統 一 新 羅 八 部 衆 像 의 考 察, 新 羅 文 化 祭 學 術 論 文 集 24집(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03); 韓 載 沅, 統 一 新 羅 石 塔 浮 彫 八 部 衆 圖 像 과 配 置 硏 究, 미술 사연구 20(2006); 신용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慶 州 출토 八 部 衆 面 石 의 원소재지 검 토, 美 術 史 論 壇 29호(2009.12) 등이 있고, 이외에 몇 편의 석사학위 논문이 있다. 136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1호

와는 비교되는 중요한 변화이다. 팔부중상이 새겨진 석탑은 시기적으로 8세기 중엽경에 시작되며 단탑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9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쌍탑에도 팔부중상이 새겨지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도상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부조상이 새겨진 쌍탑의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는 동일 도상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는 팔부중 쌍탑도 예외는 아니어서 같은 상을 표현하면서도 동서탑에 서로 다른 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같은 조탑 의식은 8세기에 완성된 팔부중 도상 변화에 동인( 動 因 )이 되었으며, 새로운 도상의 창안이 동일 쌍탑에서 시작되어 9세기 다른 석탑의 도상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신라 팔부중상 도상의 변화 시점에서 쌍탑의 역할과 이후 전개되는 팔부중 도상의 전개와 새로운 팔부중상의 계보를 설정해 보고자 한다. II. 신라석탑 팔부중상의 도상 및 배치 1. 팔부중 도상의 문제 팔부중은 사천왕의 권속으로서 나타나는 사천왕팔부중( 四 天 王 八 部 衆 ) 2) 과 여래의 설법이나 열반의 장소에 등장하는 불타팔부중( 佛 陀 八 部 衆 ) 의 2종이 있다. 그러나 도상적으로 사천왕팔부중의 조상은 찾아보기 어렵고 3), 일반적으로 팔부중이라 할 때는 각종 경전에서 여래의 설법을 2) 四 天 王 이 거느리는 八 部 鬼 衆 에 대하여는 佛 陀 耶 舍 ㆍ 竺 佛 念, 長 阿 含 經 大 正 藏 1, 79c-80쪽a; 不 空, 仁 王 經 念 誦 儀 軌 大 正 藏 19, 514a-515쪽a; 良 賁, 仁 王 護 國 般 若 波 羅 蜜 多 經 疏 大 正 藏 33, 515c-517쪽a; 吉 藏 撰, 仁 王 般 若 經 疏 大 正 藏 33, 320쪽 b-c 등에 나타나고 있는데, 세부적으로는 이름이 조금씩 다르지만 이를 정리하면 아래 와 같다. 방위 명칭 권속 방위 명칭 권속 東 方 提 頭 賴 吒 天 王 ( 持 國 天 ) 乾 闥 婆 龍 西 方 毘 留 博 叉 天 王 ( 廣 目 天 ) 毘 舍 闍 富 單 那 南 方 毘 留 勒 叉 天 王 ( 增 長 天 ) 鳩 槃 多 夜 叉 北 方 毘 沙 門 天 王 ( 多 聞 天 ) 薛 荔 多 羅 刹 3) 현재까지 정확하게 사천왕팔부중의 존재 여부는 확인되고 있지 않지만 여러 경전에 언급된 바 조상되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판단된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에 대한 연구에서 초층탑신 사방에 나타나는 신장상을 순밀계 성격을 나타내는 도상집에 근거한 오방신상( 帝 釋 ㆍ 四 天 王 )임을 논증한 바 있다. 이 논고에서는 백장암 발굴결과 신장상이 새겨진 하층기단 면석편이 몇 편 발굴되었는데, 이를 사천 新 羅 八 部 衆 圖 像 전개에 있어 雙 塔 의 역할 137

듣기 위해 모인 청중 무리로 또한 경전 말미에 그 경을 받들어 행하는 무리의 대표자들로의 불타팔부중을 지칭한다. 따라서 팔부중은 특정 신장보다는 불계에 여러 신장이나 중생을 표현하려는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4) 이들 팔부중의 명칭에 대하여는 이른 시기의 대승경전인 구마라집( 鳩 摩 羅 什 ) 역( 譯 ), 묘법연화경( 妙 法 蓮 華 經 ) 구나발타라( 求 那 跋 陀 羅 ) 역, 과거현재인과경( 過 去 現 在 因 果 經 ) 등에서 천( 天 )ㆍ용( 龍 )ㆍ야 차( 夜 叉 )ㆍ건달바( 乾 闥 婆 )ㆍ아수라( 阿 修 羅 )ㆍ가루라( 迦 樓 羅 )ㆍ긴나라( 緊 那 羅 )ㆍ마후라가( 摩 喉 羅 伽 )의 순으로 되어 있으며, 이들을 통칭 천룡팔부( 天 龍 八 部 )라고 칭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자세한 팔부중 도상의 연원 등은 생략하고 5) 신라 팔부중 도상의 특징과 변화에 대하여만 간단히 살펴보고 표1-신라 팔부중상의 도상변화 像 名 8-9세기초 9세기초-10세기 비고 龍 龍 冠, 보주 龍 冠 (대형), 右 手 -보검 夜 叉 輪 形 念 珠 丨 자형 念 珠 阿 修 羅 3면8비 3면6비 보합형(해, 달) 보주형(해, 달) 보검, 천칭 곡척, 천칭 ㄱ자형곡척, 끈 합장 금강저, 해골 乾 闥 婆 獅 子 皮 冠, 지물 없음 獅 子 皮 冠, 공후 天 右 手 -금강저 摩 竭 魚 冠 右 手 -보검, 左 手 -보주 迦 樓 羅 새부리, 지물 없음 또는 보주 새부리, 右 手 -보검, 左 手 -보주 緊 那 羅 소머리-새-말( 畜 生 冠 ), 합장 좌동 摩 喉 羅 伽 蛇 冠, 左 手 - 蛇 尾 蛇 冠 (대형), 右 手 -보검 창림사지 삼층석탑, 담엄사지 석탑, 진전사지 삼층석탑, 선림원지 삼층석탑, 천관사지 석탑, 남산동 서삼층석탑, 중금리 삼층석탑, 대안리사지 삼층석탑, 숭복사지 동서 삼층석탑 등 신계사 삼층석탑, 지보사 삼층석탑 등 향좌우측 손의 순서 왕팔부중일 가능성을 제시하여 주목된다. 비록 발굴된 상이 파편에 불과하여 정확한 도상분석을 시도하지는 못했으나 여러 밀교 護 國 經 에 나타난 帝 釋 天, 四 天 王 과 함께 국토를 수호하는 팔부중의 존재를 부각하였다. 허형욱, 實 相 寺 百 丈 庵 석탑의 五 方 神 像 에 관한 고찰, 미술사연구 19호(2005), 14-22쪽. 4) 申 龍 澈, 統 一 新 羅 八 部 衆 像 의 考 察, 新 羅 文 化 祭 學 術 論 文 集 24집( 東 國 大 新 羅 文 化 硏 究 所, 2003), 159-160쪽. 5) 경전에 나타난 팔부중의 기원과 도상의 연원에 대하여는 몇 편의 논문이 있으나 가장 치밀하게 분석하고 있는 연구로는 韓 載 沅, 統 一 新 羅 石 塔 浮 彫 八 部 衆 圖 像 과 配 置 硏 究, 미술사연구 20(2006), 202-217쪽; 張 惠 媛, 石 窟 庵 八 部 衆 像 硏 究, 동국대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2004), 40-72쪽. 138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1호

자 한다(표1). 신라사회에 언제 어디서 팔부중상이 처음 조상화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재 남아 있는 사례로 보면, 경주 남산 창림사지 삼층석 탑 상층기단부의 팔부중상이 가장 이른시기의 조상으로 생각된다. 창 림사지 삼층석탑은 8세기 중반 이 전에 제작되었으므로 팔부중상은 늦어도 750년을 전후한 시기로 본 격적으로 조상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도1).6) 중국의 경우 팔부중은 군집도상 내에 청법자의 일부로 표현되어 8 구를 모두 표현하지 않은 사례가 많다. 그러나 신라 팔부중은 석탑 도1-창림사지 삼층석탑, 8세기 상층기단 4면에 8구 모두 등장했다 는 점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성립 단계부터 각각 상들의 완벽한 도상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한국만의 독특한 팔부중 도상이 신라 석탑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런데 통일신라 석탑 팔부중상은 8세기와 9세기의 도상적 변화가 확연하게 비교된다. 천상(天像)은 오른손 삼고저를 들고 있는 모습에서 마갈어관(摩竭魚冠) 을 쓰고 오른손에는 보검, 왼손에는 보주를 쥐는 모습으로 바뀌고, 용상(龍 像)은 머리 위에 용이 점차 커지는 형상을 보이며 지물도 보주에서 오른손에 보검을 쥐는 모습으로 바뀐다. 야차는 입에 윤형(輪形)염주를 물고 양손으로 염주를 잡고 있는 모습에서 丨자형 염주를 물고 양손으로 받쳐 든 모습으로 변한다. 건달바상은 사자피(獅子皮)를 쓰고 있는 모습은 같으나 지물 없이 무인(舞印)의 손모양에서 공후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바뀐다.7) 건달바상이 들고 있는 공후는 활시위처럼 생긴 공명통 아래쪽으 6) 7) 申龍澈, 慶州 南山 昌林寺址 三層石塔의 考察, 東岳美術史學 3호(2002), 48쪽. 8세기 전반 善無畏가 번역한 千手觀音造次第法儀軌 에서 건달바는 左手執歌琴 右手 舞印 身色白紅也 라고 적고 있어 舞印의 손가짐과 악기가 모두 등장하고 있다. 善無畏, 千手觀音造次第法儀軌 大正藏 20, 138쪽c. 新羅 八部衆 圖像 전개에 있어 雙塔의 역할 139

로 손잡이를 약간 남긴 지점에 직각의 횡가가 있어 13현을 거는 소공후(小 箜篌)로 알려져 있고8) 이는 9세기 모든 건달바상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아수라상은 가장 확연한 도상의 변화를 보여준다. 즉 8세기 아수라상은 3면 8비로 보합형(寶盒形)의 해와 달을 양손에 들고 두 번째 양손으로는 보검과 천칭(天秤)을 들고 세 번째 아래로 내린 손은 ㄱ자형 곡척과 노끈을 쥐고 있고 마지막 몸 안쪽에 표현된 손에는 금강저와 해골을 들고 있다. 그러나 9세기 아수라상은 3면 6비로 단순화 되며 보합형의 해와 달이 보주형으로 변하고 신체 밖의 양손에 ㄱ자형 곡척과 천칭만을 지물로 들고 신체 내부의 손은 합장하고 있어 지물의 단순화를 확인할 수 있다. 가루라상은 새부리와 고기수염의 표현은 같으나 지물이 없거나 보주를 든 모습에서 오른손에 보검, 왼손에는 보주를 든 모습으로 바뀐다. 마후라가상은 머리의 뱀이 소형에서 대형으로 커지는 가운데 오른손에 보검을 든 모습으로 정착된다. 긴나라상은 머리위에 새의 형상과 좌우로 소와 말머리로 구성된 축생관(畜生冠)을 쓰고 있고 손은 합장하고 있는데, 팔부중 도상 가운데 유독 변화 없이 동일한 도상이 지속된 특이한 상이다 (도2, 3). 도2-경주 남산동 서 삼층석석탑 팔부중상 (향우측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동면-야차, 용; 남면-아수라, 건달바; 서면-천, 가루라; 북면-긴나라, 마후라가) 8) 申龍澈, 앞의 논문(2003), 157쪽. 140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1호

도3-고성 신계사 삼층석탑 팔부중상 (향우측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동면-용, 긴나라ㆍ남면-건달바, 야차ㆍ서면-가루라, 아수라ㆍ북면-마후라가, 천). 金剛山 神溪寺, 대한불교조계종 문화유산발굴조사단(2002), 도면 10ㆍ11에서 전재) 이상에서 확인되는 팔부중 도상의 가장 큰 변화를 두 가지로 정리해보 면, 첫 번째 각 상의 도상적 특징을 강조하기 위한 점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용, 뱀, 마갈어의 관(冠)을 과장되게 크게 표현하거나 악신(樂神)의 형상을 구체화하기 위한 악기의 등장이 그것이다. 두 번째 탑, 즉 부처를 호위하는 각 상들의 시위적(侍衛的) 성격이 정착된 점이다. 용, 천, 가루라가 거의 동일한 보검을 들고 등장한다는 점에서 분명 이전에 단순히 불법의 장 혹은 열반의 장에 모여든 청중이라기보다는 불탑과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의 개념이 강조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2. 팔부중상 배치의 문제 우리나라에서 다수 조성된 불교의 신장으로는 제석ㆍ범천, 금강역사, 사천왕, 팔부중, 십이지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신장상은 그 숫자에 따라 석탑의 하층기단부터 초층탑신까지 부조상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석탑은 신라 신장상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신라석탑에 등장하는 신장상 은 크게 방위적 신장과 그렇지 않은 신장이 있다. 우선 제석ㆍ범천은 新羅 八部衆 圖像 전개에 있어 雙塔의 역할 141

단독으로 등장하지 않고 금강역사나 사천왕과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으며 금강역사는 탑신 문비에 좌우로 혹은 사방에 문비가 있을 경우 사방에 나타나기도 한다. 방위적 신장상으로 대표적인 것이 사천왕과 십이지상을 들 수 있다. 사천왕은 주로 초층탑신 한 면에 각각 방위의 신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십이지상은 상층기단, 혹은 하층기단부의 면석 이 12면으로 구성된 석탑에서 북쪽면 중앙을 자상( 子 像 )으로 시작하여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며 12지신을 배치하였다. 그런데 초기 팔부중상은 다른 신장상과 조합하지 않고 단독으로 나타나 고 있다. 또한 도상적으로 방위적 개념을 지닌 사천왕팔부중은 없고 불타팔부중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팔부중은 특정 방위에 따라 표현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각종 대승경전에 언급된 여래팔부중의 명호는 천ㆍ용ㆍ야차ㆍ건달파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의 순서 9) 인데 이 는 경전상에서 설법을 듣거나 탑에 공양드리는 군중, 혹은 부처를 호위하 는 역할로 묘사된 것일 뿐 석탑 부조에 있어 배치 등의 의미는 아니다. 10) 실제로 다른 경전에도 여래팔부중에 대한 배치 순서 등이 언급된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남아 있는 신라석탑을 분석해 보면 두 가지의 배치 형식이 있었던 것으로 상정된다. 11) 현재의 팔부중 석탑들은 도괴 9) 佛 陀 跋 陀 羅, 觀 佛 三 昧 海 經 卷 1, 六 譬 品, 大 正 藏 15, 645쪽c. 爾 時 天 主 夜 叉 主 乾 闥 婆 主 阿 修 羅 王 主 迦 樓 羅 主 緊 那 羅 主 摩 喉 羅 伽 主 龍 主 等 及 諸 眷 屬 皆 悉 已 集 이라고 되어 있어 다른 경전에서와는 달리 용왕의 위치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10) 妙 法 蓮 華 經 序 品 등 여러경전에서 여래의 설법장에 모여든 군중을 묘사할 때 항상 팔부중 이외에 人 非 人,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전륜왕 등 여러 무리가 함께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팔부중은 단지 여러 중생 가운데 하나의 무리를 지칭하고 있을 뿐이다. 11) 통일신라 석탑 상층기단 팔부중상의 배치에 대하여 첫 번째 형식인 남면 아수라 건달바, 서면 천 가루라, 북면 마후라가 긴나라, 동면 용 야차의 배치법은 張 忠 植, 統 一 新 羅 石 塔 浮 彫 像 의 硏 究, 考 古 美 術 154ㆍ155(1982), 106-109쪽에서 처음 논의 되었고, 水 野 さや, 慶 州 崇 福 寺 址 東 ㆍ 西 三 層 石 塔 の 八 部 衆 像 について, 佛 敎 藝 術 249(2000), 55쪽; 田 正 中, 신라석탑 팔부중상의 양식과 변천, 문화사학 16호(문화사학회, 2001), 141-144쪽.; 申 龍 澈, 앞의 논문(2003), 167-168쪽에서 발전시켜 언급하였다. 이에 대하여 기존 팔부중 명칭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면서 팔부중 상이 陀 羅 尼 集 經 의 순서를 따른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文 明 大, 신계사 삼층석탑 팔부중상의 연구, 金 剛 山 神 溪 寺 (문화유산발굴조사단, 2002), 164쪽. 한편 한재원은 팔부중배치가 2가 지 형식이 존재하며 남면: 아수라 건달바, 서면; 천 가루라, 북면: 마후라가 긴나라, 동면; 용 야차의 배치형식을 Ⅰ형식으로, 남면 건달바 야차, 동면 가루라 아수라, 북면 마후라가 천, 서면 용 긴나라의 배치형식을 Ⅱ형식으로 분류하였다. 한재원, 앞의 논문(2006), 217-223쪽. 참조. 142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1호

후 복원된 탑이 많기 때문에 팔부중상의 배치에 있어 복원된 탑의 면석을 신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8세기 말 이후 신라석탑에 있어 상층기단 면석을 1면 1매로 결구하는 방식이 나타나고 이 같은 면석에 팔부중이 쌍으로 부조되어 주목된다. 따라서 1면 2상씩 짝지어 등장하는 점에서 팔부중 배치형식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형식은 동면 야차 용, 남면 아수라 건달바, 서면 천 가루라, 북면 긴나라 마후라가(향좌우측 방향)의 배치방식이다(표2). 12) 현재 팔부중석탑 가운데 1면 1매의 면석으로 남아 있는 팔부중상과 남산동 서삼층석탑, 숭복사지 동서삼층석탑, 운문사 동서삼층석탑을 살펴보면, 팔부중상의 배치에 있어 이 같은 공통점이 발견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에 간단한 보수를 거쳤을 뿐 도괴된 적이 없는 남산동 서삼층석탑의 경우 동면 용 야차, 남면 아수라 건달바, 서면 천 가루라, 북면 마후라 가 긴나라의 순서임을 알 수 있다. 13) 더구나 중금리 쌍탑의 경우 마후라 가 긴나라의 면석이 1매로 되어 있고, 최근 발굴에서 3매의 면석이 출토된 원주 대안리사지 석탑의 경우도 아수라 건달바, 야차 용, 마후 라가 긴나라의 규칙이 확인되었다. 14) 한편 1면 2매로 구성된 석탑의 경우 진전사지 삼층석탑의 예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이 탑 역시 완전 도괴를 겪지 않은 탑으로 상층기단 팔부중의 배치가 변형되지 않은 표2-팔부중상 배치1 (전형적 배치법) 摩 喉 羅 伽 緊 那 羅 天 북 龍 迦 樓 羅 서 (상층기단) 동 남 夜 叉 阿 修 羅 乾 闥 婆 12) 본고에서 언급하는 각 면의 상들의 명칭은 향좌우측으로 명기한 것임. 13) 신용철, 앞의 논문(2003), 167-168쪽. 14) 原 州 大 安 里 寺 址 ( 江 原 文 化 財 硏 究 所 ㆍ 原 州 市, 2004). 新 羅 八 部 衆 圖 像 전개에 있어 雙 塔 의 역할 143

표3-팔부중상 배치2 (9세기말 이후 일부 변화된 배치법) 天 摩 喉 羅 伽 迦 樓 羅 阿 修 羅 북 서 (상층기단) 동 남 緊 那 羅 龍 乾 闥 婆 夜 叉 석탑이다. 15) 그런데 명칭에 있어 남면 아수라 건달바, 동면 천 가루라, 북면 마후라가 긴나라, 서면 용 야차의 배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러 석탑의 조합을 통해 봤을 때 신라석탑 팔부중상의 배치는 남산동 서삼층석탑과 같은 배치가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형식은 전형적인 배치가 지속되는 가운데 9세기말 경주를 벗어난 일부 석탑에서 변화가 보이고 있다(표3). 강원 금강산 신계사 삼층석탑, 군위 지보사 삼층석탑이 대표적이다. 이들 석탑은 1면 1매의 면석에 팔부중상을 부조하였는데, 배치에 있어 남면 건달바 야차, 서면 가루라 아수라, 북면 마후라가 천, 동면 용 긴나라의 순이다. 따라서 9세기 중기 이전의 배치에서 1상씩 시계방향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같은 배치의 변화가 무엇에 기인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기존 팔부중상의 배치에 새로운 변화를 꾀했거나 혹은 배치순서를 잘못 이해했고 이것을 답습했을 가능성이 있다. 시기적으로 봤을 때 탑의 크기나 조각적으로 유사한 신계사 삼층석탑과 지보사 석탑석탑 등 9세기 말엽 경 시작되어 고려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보원사지 오층석탑까지 나타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팔부중상의 배치는 표4에 나타나는 석탑에 적용이 가능 하고 현재 각 면과 상의 위치가 맞지 않을 경우 이를 통한 원위치로의 15) 일제강점기에 한 차례 도굴시도가 있었으나 탑신부에 해당되는 것이었으므로 기단부 의 변형은 없었다. 이후 1968년 4월 완전 해체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陳 田 寺 址 發 掘 報 告 (단국대 박물관, 1989.6), 15-19쪽. 144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1호

표4-1매 면석에 부조된 팔부중상의 배치법과 조탑사례 동면 남면 서면 북면 조탑사례 긴나라- 남산동 서삼층석탑, 숭복사지 야차- 아수라- 천- 용 건달바 가루라 마후라가 동서삼층석탑(동탑동면만 1면2매), 운문사 동서삼층석탑 중박소장면석, 동부동 출토면석, 시기 8세기말9세기 중반 사제사지 면석,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 면석, 진전사지 삼층석탑(1면2매), 선림원지 삼층석탑(1면2매), 원주 대안리석탑 용- 건달바- 가루라- 마후라가- 신계사 삼층석탑, 지보사 삼층석탑, 긴나라 야차 아수라 천 보원사지오층석탑 9세기말10세기초 복원이 가능하다고 판단된다. 숭복사지 동서삼층석탑을 예로 들면 동탑 의 경우 현재 동면과 북면이 바뀌어야 하며, 서탑의 경우 반시계방향으로 모든 면을 바꾼다면 원래의 배치에 합당하다고 판단된다. 또한 운문사 서삼층석탑의 경우 현재 북면이 남면으로 바뀌고 복원된 남면은 결실된 북면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석탑의 면석을 복원할 경우 상층기단에 존재하는 우주와 탱주의 조합까지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이 밖에 신라석탑 팔부중상의 배치에서 문제시되는 것이 입상으로 등장하는 팔부중상과 경상도 서남부지역과 전라도지역에 나타나는 팔부 중상의 문제이다. 우선 입상의 팔부중상이 표현된 탑은 영양 화천동 삼층석탑과 영양 현일동 삼층석탑, 화엄사 서오층석탑이 있다(도4). 이 3기 석탑의 공통점은 다른 지역의 팔부중상이 단독으로 등장하는 것에 비해 하층기단에 12지, 상층 기단에 팔부중, 초층탑신에 사천왕 등 다른 신장상과 함께 부조된 점이 다. 문제는 이들 석탑의 상들은 외 관상 쉽게 구분이 가능한 아수라, 용, 야차 등 몇 개의 상들을 제외하 면 다른 팔부중상과 도상적으로 비 교가 불가능하다. 한편 산청 범학 리 삼층석탑, 승주 금둔사지 삼층 석탑의 팔부중상도 앞서의 석탑과 마찬가지로 도상적으로 불분명할 도4-구례 화엄사 서오층석탑 부조상, 9세기 뿐만 아니라 도상 파악이 가능한 상들 역시 배치에 있어 통일성을 新羅 八部衆 圖像 전개에 있어 雙塔의 역할 145

보이고 있지 않아 도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6) 다만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배치법은 경전에도 찾을 수 없어 정확히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이와 관련된 새로운 연구가 필요하다. 17) III. 쌍탑 팔부중상의 도상변화 신라시대 건립된 쌍탑 가운데 부조상이 조식된 경우를 살펴보면, 같은 도상의 중복을 피하기 위하여 자세, 의복 등의 표현방식에 있어 차이를 보인다. 18) 이 같은 쌍탑에서의 특수성이 팔부중 쌍탑에도 나타나 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팔부중 쌍탑은 경주 숭복사지 동서 삼층석탑, 청도 운문사 동서삼층석탑, 횡성 중금리 동서삼층석탑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팔부중면석 석탑(전 인용사지 동서삼층석탑 이하 중박 소장 면석으로 약칭) 19) 등 4곳의 사례가 있다. 그런데 팔부중상의 경우 자세나 의복 이외에 도상의 구체적 전거인 지물 및 배치의 변화를 동일 쌍탑에서 시도하고 있어 주목된다. 필자는 이 같은 도상의 변화가 시기에 따른 신라 팔부중 도상의 변화에 주요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보고 싶다. 다시 말하면, 같은 도상의 중복 회피로 인해 새롭게 탄생한 도상이 이후 16) 신용철, 앞의 논문(2003), 172-177쪽. 17) 특히 초기 신라팔부중상 배치법에 대하여 천신 가루라는 고대 인도의 아리안족을 대표하는 신이고, 용 야차는 드라비다의 신이며 아수라 건달바는 그 외 이민족을 대표하는 신, 긴나라 마후라가는 축생을 대표하는 신이라는 점에 주목하였다. 따라서 아리안족과 드라비다족의 대립, 또 두쌍의 신들도 반대쪽에 배치하여 신라 팔부중의 배치가 인도의 신화적ㆍ문학적 지식까지를 반영한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한재원, 앞의 논문(2006), 223쪽. 18) 대표적인 사례로 장항리사지 쌍탑, 간월사지 쌍탑은 금강역사상이, 원원사지 쌍탑은 십이지상과 사천왕상이 각각 다른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19)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팔부중 면석은 현재 1면 2상씩 조각된 4매의 면석이 전해지고 있다. 이 면석들은 일제강점기에 경주읍성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어 국립중앙박 물관의 전신인 이왕가박물관으로 귀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종전에는 쌍탑의 부재 라는 점과 경주지역의 어느 절터의 탑 부재였다고 추정되었을 뿐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최근 경주지역 寺 址 발굴이 진행되면서 북남산자락에 위치한 傳 仁 容 寺 址 탑지에서 팔부중 면석 1매가 출토되었는데, 이 면석과 국립중앙박물관 면석 과의 양식적 유사성, 크기 등이 일치하여 같은 탑재였다고 추정한 바 있다. 신용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慶 州 출토 八 部 衆 面 石 의 원소재지 검토, 美 術 史 論 壇 29호 (2009.12), 129-146쪽. 참조. 146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1호

건립된 다른 석탑 에서 채용되면서 또 다른 도상의 변 용을 가져오는 원 인으로 작용했다 도5-경주 담엄사지 석탑 팔부중상 (향좌-아수라, 향우-건달바), 8세기 고 생각된다. 따 라서 본 장에서는 표 5 20)에 나타난 바와 같이 동일 쌍탑 가람에서 나타나는 팔부중 도상의 변화와 이 같은 변화가 이후 성립된 팔부중상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표5-쌍탑 팔부중상의 주요 도상 탑명 숭복사지 아수라 동 삼층석탑 서 중박소장 면석 (전 인용 사면석) 동 서 동 운문사 삼층석탑 서 동 중금리 삼층석탑 서 건달바 3면8비 지물없음 3면8비 (합장형) 3면6비 (합장형) 3면6비 (합장형) 3면6비 (합장형) 3면6비 (합장형) 3면6비 (합장형) 3면6비 (합장형) 야차 용 輪形염주 용관, 보주 상동 丨자형염주 상동 지물없음 결실 결실 공후 윤형염주 용관, 보주 공후 윤형염주 용관, 양손-보검 (검방향-아래) 용관, 우수-보검 상동 윤형염주 좌수-보검 잡음 (검방향-위) 천 우수삼고저 우수독고저 보주 우수삼고저 독고저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 보주 합장형 좌수- 蛇冠, 蛇尾 상동 우수보검 보주 좌수환두대도 좌수- 좌수- 독고저 창 상동 상동 결실 결실 결실 결실 합장형 좌수- 蛇冠, 蛇尾 결실 공후 丨자형염주 합장형 상동 丨자형염주 합장형 결실 蛇冠, 좌수蛇尾 20) 현재 팔부중 쌍탑은 여러차례 수리를 거치면서 각 방위가 뒤바뀐 경우가 많아 본 표에서는 방위와 상관없이 각 상의 세부도상을 제외하고 주요 도상의 특징만을 분류하 였다. 특히 중금리 동서석탑의 경우 횡성댐 건설로 인해 원 위치가 수몰되어 망향의 동산에 옮겨졌는데, 현재 동탑에 1상, 서탑에 2상을 제외하면 모두 남아 있으나 필자의 寡聞함으로 도상적으로 확실한 상을 제외하면 마모와 원위치의 교란으로 존상 파악에 어려움이 많다. 따라서 본 표에서는 도상적으로 불확실한 상은 제외하였다. 新羅 八部衆 圖像 전개에 있어 雙塔의 역할 147

쌍탑 팔부중상 가운데 가장 앞서는 사례는 숭복사지 동서삼층석탑으로 판단된다. 우선 창림사지 삼층석탑 아수라상, 담엄사지 출토 아수라상에 서 보이는 3면8비 아수라상과 지물 없이 무인(舞印)의 손모양을 가진 건달바상 등 8세기 팔부중상의 도상이 나타나고 있다(도5). 또한 각 면 팔부중상의 도상에 있어서도 8세기말에 조영된 남산동 서삼층석탑과 동일하지만 조각적 수법에서 약간 늦은 것으로 추정되어 800년을 전후한 시기에 건립되었다고 생각된다.21) 숭복사지 동서삼층석탑의 팔부중상 가운데 아수라상, 야차상, 천인상 의 3개상이 주목된다. 우선 동탑 아수라상은 신체 내부에 표현된 2수가 기존에 금강저를 들고 있고 서탑 아수라상은 합장형으로 표현되었다. 9세기 이후 모든 아수라상은 3면 6비에 신체내부에서는 합장형을 취하고 있는데, 숭복사지 삼층석탑에서 이 같은 변화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야차상의 경우 동탑은 입 에 윤형의 염주를 물고 있 는 것에 비해 서탑은 丨자 형 염주로, 천상의 경우도 동탑의 삼고저에서 서탑의 독고저 형식으로 차이가 있 음을 발견할 수 있다(표6). 중박 소장 팔부중 면석 은 숭복사지 서탑의 아수 라상에서에서 영향을 받아 기존 8비일 때 지닌 지물 도6-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팔부중면석 (아수라, 건달바상), 9세기 가운데 향좌측 3수(手)의 21) 지금까지 숭복사지 석탑의 편년에 대하여는 팔부중상의 조각을 근거로 9세기말(경문 왕대)로 보려는 의견(水野さや, 앞의 논문, 2000, 54쪽)과 동탑에 비하여 서탑의 조각이 세부적 기법에서 떨어진다고 하여 동탑은 9세기중반, 서탑은 헌강왕대인 9세기 후반으 로 보려는 의견(한재원, 統一新羅 石塔浮彫 八部衆像 硏究, 홍익대 미술사학과 석사 학위논문(2002), 111-112쪽)이 있다. 그러나 최치원이 쓴 四山碑銘 중의 하나인 숭복 사비에 따르면 원성왕의 왕릉을 조영하면서 창건된 사실이 있어 798년을 전후하여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최근 신라석탑의 주요 편년기준으로 제시되고 있는 기단부의 결구방식에 따른 분류에서 상하층기단의 탱주 숫자가 1:2이면서 판석으로만 결구하고 있는 수법은 780년에서 830년경에 나타나는 특징임을 감안한다면 800년을 전후한 시기에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申龍澈, 統一新羅 二重基壇石塔의 形式과 編年, 東岳美術史學 9호(2008), 217-218쪽. 148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1호

표6-숭복사지 동서석탑 팔부중 도상비교 張忠植, 통일신라석탑부조상의 연구, 考古美術 154ㆍ155(1982), 108-109쪽에서 변형하여 전재 아수라 건달바 야차 용 천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 동탑 서탑 동탑 서탑 견삭(羂索)과 향우측 2수의 보검을 생략하고 6비로 단순화 되었는데, 해와 달, ㄱ자형 곡척, 천칭을 지물로 채용하여 이후 모든 팔부중상의 기본형이 되었다(도6). 한편 건달바상에서 사자피를 쓰고 지물 없이 등장하는 기존형식과 9세기 이후 건달바상의 대표적 도상인 공후(箜篌) 를 들고 있는 상이 공존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가루라상에서의 변화이다. 전 인용사지 면석은 가루라상이 우수(右手)에 경주지역 팔부중 상 가운데 처음으로 보검을 들고 있는데, 탑을 수호하는 시위형(侍衛形) 팔부중상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도상의 변화로 판단된다(도7).22) 이 22) 전 인용사지 출토 팔부중면석은 발견 당시 경주문화재연구소 측에서는 향좌측상을 迦樓羅像, 향우측상을 龍像 보았으나 가루라는 용을 잡아먹어 서로 상극이기 때문에 新羅 八部衆 圖像 전개에 있어 雙塔의 역할 149

같은 시위형 팔부중 도상은 또 다른 쌍탑, 즉 운문사 팔부중상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용상의 경우 보검의 위치가 서로 다르며, 가루라 상의 경우에도 환두대도와 창으로 도상의 변화를 주고 있다(도8). 단탑 팔부중상의 경우 시기의 변화에 따라 양식적 변화는 감지되지만 도상에 있어서는 기존에 성립되어 있던 팔부중상을 따르는 경향을 보인 다. 그러나 쌍탑 팔부중의 성립은 팔부중 도상에 있어 두 가지 점에서 새로운 변화를 제시했다고 생각된다. 첫째 쌍탑 팔부중상은 자세는 말할 것도 없고 특히 같은 상이더라도 다른 도상의 변화를 추구했으며 이것이 차후 제작되는 다른 석탑의 도상변화에 영향을 주어 도상의 다양화에 일조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예를 들면, 3면 6비 아수라 상, 공후를 든 건달바상, 丨 자형 염주를 문 야차상 등을 들 수 있다. 둘째, 신라에서 8세기 팔부중 도상이 성립된 이후 전투의 신( 神 )인 아수라를 제외한 팔부중상은 설법의 장소, 혹은 열반에 장소에 모여든 팔부중으로 공양( 供 養 )과 청법( 廳 法 )의 의미가 강했기 때문에 무기의 소지 등이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밀교경전의 유입과 호법개념으로서의 인식이 확산되면서 팔부중은 점차 탑을 수호하는 개념이 강해져 본격적인 시위형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보검을 든 팔부중 도상의 탄생으로 이어졌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9세기 이후 등장하는 새로운 시위형 팔부중 도상의 변화를 주도한 것이 팔부중 쌍탑에 있다고 판단된다. IV. 신라 팔부중상의 계보 지금까지는 팔부중상의 지역적 특성과 도상의 상이함 등으로 팔부중상 의 계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탑의 편년이나 도상의 오판 등으로 계보설정에 오류도 있었다. 이에 필자는 선행 연구의 검토와 본 연구를 통한 새로운 계보를 설정해 보고자 한다. 미즈노사야( 水 野 さや)의 연구는 우선 신라 팔부중 도상이 8세기 말엽경 경주지역과 강원 진전사에서 동시에 시작되어 발전한 것으로 판단하였 다. 23) 따라서 경주지역의 선두적 팔부중상을 창림사지 삼층석탑으로 한 면석에 표현된 사례가 없기 때문에 재고의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하여 최근 연구에서 는 향좌측상을 迦 樓 羅 像 으로 향우측상을 天 像 일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신용철, 앞의 논문(2009.12), 139-140쪽. 150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1호

도7-경주 전 인용사지출토 팔부중 면석, 9세기 도8-청도 운문사 동서삼층석탑의 용상 (향좌-서탑, 향우-동탑), 9세기 보고 이를 창림사계(Ⅰ계통 담엄사, 남산동, 동부동, 사제사지 등), 진전 사지 삼층석탑에서 시작된 팔부중의 도상을 진전사계(Ⅱ계통 선림원 지, 중금리, 보원사지 등)로 나누고, 여기서 기타 팔부중 유형이 도상과 구성의 복합화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 예로 경주 숭복사지 삼층석탑의 편년을 9세기 말기로 보고 현재 서탑 동면 향우측상을 대어(大魚) 를 쓴 상의 형식으로 보아 나머지상들은 창림사계를 답습하는 가운데 진전사 계의 도상을 수용한 복합적 양상으로 파악하였다.24) 그러나 창림사지 삼층석탑의 편년과 진전사지 삼층석탑의 편년에 다소 문제가 있으며, 숭복사지 서탑 동면 향우측상은 사관(蛇冠)이 뚜렷함으로 마후라가상으 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이 같은 주장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편년이나 도상 등 원초적인 오류로 인한 이 같은 계보의 전개는 받아들이 기 어려운 실정이다. 한편 한재원은 크게 8세기 경주지역과 9세기 진전사계열 2종의 팔부중 계보를 세우고 경주지역 팔부중상은 9세기로 보는 운문사 동서삼층석탑 등에서 지속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밖에 입상형식과 도상이 불분명한 기타형식 등 총 네 부류의 팔부중상이 신라시대 말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았다.25) 우선 팔부중상 계보에 있어 필자는 지역의 문제, 도상의 확실성 문제, 23) 水野さや, 韓國江原道襄陽陳田寺址三層石塔の八部衆像について, 美學美術史硏究論 集 16호(1998), 60-63쪽; 水野さや, 앞의 논문(2000), 71-72쪽. 24) 水野さや, 앞의 논문(2000), 63쪽. 일반적으로 팔부중상 가운데 大魚 는 인도 신화 중에서 大海에 사는 海獸를 지칭하는 것으로 摩竭魚(Makara)라고 부르며, 9세기 이후 진전사계열 석탑에서 보검을 지물로 든 天像의 摩竭魚冠으로 나타난다. 한재원, 앞의 논문(2006), 202쪽. 25) 韓載沅, 앞의 논문(2002), 106-124쪽. 新羅 八部衆 圖像 전개에 있어 雙塔의 역할 151

배치의 문제, 무장화의 문제 등이 계보 설정에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8세기 중반경 창림사지 삼층석탑에서 성립된 경주지역 팔부중 도상은 숭복사지 서삼층석탑이 건립되는 9세기까지는 다른 부조상과 조합되지 않으면서 단독으로 불탑에 등장한다. 이 시기의 팔부중상은 각종 대승경 전에 언급되어 있는 탑을 공양하고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든 청중의 일원으로서 성립된 것으로 지물이나 보관 등을 통해 각각 팔부중의 특징적인 도상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시기적으로나 도상적으로 신라 팔부중상의 시원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 같은 팔부중상은 9세기 말기까지 경주에서 지속되는데, 창림사 서방사지 면석과 동부동 출토 팔부중상, 사제사지 팔부중상, 이화여대 소장 팔부중상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에 필자는 창림사지 삼층석탑, 담엄사지 팔부중상, 천관사지 팔부중상, 남산 동 서삼층석탑, 숭복사지 동서삼층석탑의 팔부중상을 경주계열①로 분류 하고 이에 직접적으로 도상의 계승을 따른 창림사 서방사지 면석을 포함한 경주지역의 팔부중상을 경주계열③으로 분류하고자 한다. 그런데 9세기 초중반부터 경주지역에서 기존의 팔부중상 도상에서 보이지 않던 보검 등을 쥔 시위형 팔부중상이 등장하게 된다. 이를 경주계열②로 분류하고자 하는데, 이 같은 팔부중상의 탄생은 기본 적으로는 기존 경주계열①에 모티 프를 두고 있으나 중박 소장 팔부 중상(전 인용사지 팔부중면석) 등 에서 새롭게 시도되었고 9세기 중 반 이후 경주 인근 청도 운문사에 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진전사지 삼층석탑에서 나 도9-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 9세기 타난 팔부중은 경주지역에서 종전 에 나타나던 도상과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특히 용, 천, 가루라, 마후라에 나타난 과장된 보관과 신장으로서의 보검 등을 지물로 지니고 있어 청법(廳法) 신중으로 팔부중 의 의미보다는 호법 신중, 구체적으로 탑을 수호하는 시위형 팔부중으로 변화를 유추해 볼 수 있다. 특히 기존에 없었던 사방불, 천인상 등과 152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1호

함께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도9). 이 같은 점에서 지금까지 진전사계열 팔부중상은 경주와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 도상적으로 성립되었다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전 인용사지 출토 가루라상에서 나타난 도상은 보검을 든 진전사계열 팔부중상의 선행 도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9세기 초반경 경주지역에서 성립된 팔부중 도상을 일부 수용ㆍ변용하여 탄생된 도상일 가능성을 제시하고 싶다. 26) 진전사와 경주의 석조물 교류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9세기 초반 건립된 전( 傳 ) 도의국사탑과 경주 천관사지( 天 官 寺 址 ) 석탑의 관계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전 도의국사탑은 9세기 중엽 폭 넓게 유행한 한국 승탑의 시원형으로 일반적 팔각당형의 신라승탑과는 달리 기단부는 상하층 방형기단을 갖춘 일반형석탑형이며 탑신과 옥개가 팔각당형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발굴조사를 거쳐 확인된 경주 천관사지 석탑 역시 기단부는 이중기단의 일반형 탑과 동일하지만 탑신부터는 팔각을 형성하 는 독특한 이형석탑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27) 발굴보고서에는 결실부 를 포함하여 3층으로 복원하였으나 발굴 당시에도 초층탑신 이상의 파편은 확인되지 않아 정확한 층수를 알 수 없다. 따라서 필자는 전 도의국사탑과 같은 단층일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천관사지 석탑은 기단부의 구조와 특징으로 봤을 때 편년을 8세기 중반 내지 후반경으로 보고 있어 28) 현존 최고( 最 古 ) 승탑인 진전사지 전 도의국 사탑의 기본형이 천관사지 석탑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초기 승탑의 건립은 국왕이 입적한 선사( 禪 師 )의 시호와 탑호를 내리고 석공을 파견하여 탑과 탑비 건립에 관여한 점 등을 감안한다면, 당시 경주에서 진전사로 직접적인 석조기술의 전파가 존재했다고 생각 된다. 따라서 진전사지 석탑에서 나타나는 시위형 팔부중은 경주계열2에서 무장형 도상의 확산과 정착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진전사계열1로 분류하 26) 진전사지 석탑의 편년에 대하여 8세기말로 보는 설도 있으나 水 野 さや, 앞의 논문 (1998), 61쪽. 결구 수법이 신라석탑의 가장 마지막 단계의 형을 유지하고 있어 도의 국사가 주석한 920년 이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蘇 在 龜, 禪 林 院 址 三 層 石 塔 의 造 形 的 特 徵 과 意 義, 강좌미술사 18(2002), 44쪽. 27) 발굴결과 천관사지는 금당의 서쪽에 탑이 위치하는 소위 東 堂 西 塔 式 가람배치법을 보이고 있어 특이하다. 천관사지 석탑의 발굴과 복원에 대하여는 慶 州 天 官 寺 址 發 掘 調 査 報 告 書 國 立 慶 州 文 化 財 硏 究 所 (2004), 32-42쪽 참조. 28) 申 龍 澈, 앞의 논문(2008), 208쪽; 國 立 慶 州 文 化 財 硏 究 所, 앞의 책, 245쪽. 新 羅 八 部 衆 圖 像 전개에 있어 雙 塔 의 역할 153

고자 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이중기단에 삼층의 전형적인 신라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점과 초기 선종사원은 중앙정부와 밀접한 연관성 속에서 불사가 진행된 점 등 진전사지 석탑 팔부중상은 선종과 밀교신중 의 교합을 통한 호국적 신앙체계가 탑 조각으로 구체화 된 사례이며 이 같은 측면에서 초층탑신의 밀 교적 사방불을 구현했다고 판단된 다.29) 이 계열 팔부중상은 진전사 지 삼층석탑, 선림원지 삼층석탑, 중금리 동서삼층석탑, 원주 대안 리사지 석탑30) 등 9세기초 강원지 역에서 성립되어 9세기말까지 유 행하였다. 진전사계열②는 도상적으로 진 전사계열①과 동일하지만 배치에 서의 변화가 가장 큰 특징이다. 즉 일반적 팔부중 배치에서 시계 도10-군위 지보사 삼층석탑, 9세기 방향으로 1구씩 옮겨진 배치법을 보이고 있다. 이 같은 계보의 첫 번째를 장식하는 것이 진전사에서 거리적으로 가까운 금강산 신계사 석탑이다. 이 탑의 편년은 860년경인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되기 때문에31) 늦어도 9세기 후반에는 진전사계열①에서 발전한 팔부중상 계열이 성립 되었다고 생각된다. 흥미로운 것은 탑의 결구가 소략해지고 세장해지는 가운데 조각에 있어 인물의 세부표정까지 자세히 묘사한 팔부중상이 군위 지보사 삼층석탑에서 등장하여 고려초인 10세기까지 전승되어 29) 진전사지 석탑 탑신 사방불은 중앙의 비로자나를 중심으로 동방 阿閦佛, 서방 阿彌 陀佛, 남방 寶生佛, 북방 不空成就佛 등 정순밀교계열 오방불의 개념이 표현된 것으 로 확인되었다. 李淑姬, 統一新羅時代 五方佛의 圖像 硏究, 미술사연구 16호 (2002), 37-39쪽. 30) 이 사지는 일제강점기에 藥師庵址로 알려져 朝鮮古蹟圖譜 에 도괴된 모습이 수록되 어 있다. 이때의 사진을 보면 현재는 없어진 초층탑신에 사방불이 조각되어 있어 진전 사석탑과 같은 구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朝鮮古蹟圖譜 4冊(朝鮮總督府, 1916), 442 쪽. 한편 2004년 5월부터 약 5개월간 강원도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 고 탑지에서 아수라 건달바, 야차 용, 긴나라 마후라가의 3개 팔부중 면석이 출토 되었다. 강원문화재연구소, 앞의 책, 참조. 31) 문명대, 앞의 논문, 165쪽. 154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1호

도11-영양 화천동 삼층석탑, 9세기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에도 나타 나고 있다(도10). 32) 그러나 보원사 지 오층석탑을 마지막으로 이 같은 팔부중 도상은 사라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경주계열이나 진전 사계열과 영향 관계를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기타지방계열의 팔부중 상이 있다. 팔부중의 자세로는 입 상계열과 좌상계열 두 가지의 부류 가 있는데, 공통적인 점은 극히 몇 개의 상을 제외한 대부분의 상이 기존 팔부중상의 도상적 특징이 나 타나지 않아 존명파악이 불가능하 표7-신라 팔부중상의 계보 경주계열2 (중박면석-전인용 사지, 운문사) 侍 衛 形 도상의 등장 진전사계열1 (진전사지, 선림원지, 중금리, 대안리사지) 武 裝 形 도상의 정착 진전사계열2 (신계사, 지보사, 보원사지) 무장형의 계승과 배치의 변화 경주계열1 (창림사지, 담엄사지, 천관사지, 남산동, 숭복사 등) 聽 法 形 도상의 성립과 발전 경주계열3 (창림사 서방사지, 동부동, 사제사지) 경주1 도상의 계승 기타지방계열 1 입상계열-화천동, 현1동, 화엄사, 금둔사 2 좌상계열-범학리 입상의 등장과 도상의 불확실성 32) 이처럼 팔부중상의 세부표현이나 안면의 사실적 묘사로 이들 석탑이 경주지역의 영향 을 받았으며, 진전사나 선림원지석탑보다 오히려 먼저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였 다. 한재원, 앞의 논문(2002), 118쪽. 新 羅 八 部 衆 圖 像 전개에 있어 雙 塔 의 역할 155

다는 점이다. 특히 입상계열로 나타나는 영양 화천동 삼층석탑, 현1동 삼층석탑, 구례 화엄사 서오층석탑은 하층 12지 상층 팔부중 초층탑신 사천왕의 신중을 위계적으로 배치하여 탑을 수호하는 시위형 신장 속에서 의 팔부중상을 보여주고 있다(도11). 이들 석탑은 이후 1010년에 제작된 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으로 이어져 전승되었다. 33) 한편 승주 금둔사 삼층석탑,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의 팔부중은 배치장 소가 상층기단이라는 점, 무장형이라는 점에서 막연히 팔부중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나 도상적 근거는 찾을 수 없다. 만일 이 2기의 석탑의 상들이 팔부중이라면, 혹시 사천왕 팔부중일 가능성과 다른 신장일 가능 성 등을 모두 열어둔 상태에서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표7). V. 맺음말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한국의 팔부중상은 석굴암 전실 팔부중상을 제외하면 석탑 기단부라는 한정된 공간에 표현되었다. 이는 항상 8구를 표현해야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라 팔부중상은 8세기 중엽경에 성립되어 10세기 고려초까지 약 200여 년간 석탑 기단부에 등장하면서 도상적 변화를 이루었다. 그런데 팔부중은 여러 경전에 언급되어 있지만 배치나 도상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도상 변화에 관해서는 중국이 나 일본에서 비교대상을 찾기 어렵다. 따라서 신라팔부중의 도상변화는 결국 신라석탑 자체 내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 부조상이 나타나는 쌍탑은 동일 도상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쌍탑 팔부중상의 등장은 팔부중 도상 변천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같은 변화는 숭복사지 동서삼층석탑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중박 소장 팔부중상(전 인용사지 석탑)에서는 보다 적극적 변용을 시도하 여 종전에 경주 지역에서 나타나지 않던 시위형( 侍 衛 形 ) 팔부중상의 탄생을 이루었다. 이는 9세기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불탑을 수호하는 신장 개념의 팔부중 도상 성립에 원동력으로 작용했다고 판단된다. 본 연구를 통하여 쌍탑은 팔부중상 도상의 변화에 있어 8세기에서 9세기로 전환되는 신라팔부중 도상에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33) 개심사지 오층석탑은 초층 문비를 만들고 금강역사를 배치하는 것에 차이가 있다. 156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1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쌍탑 팔부중상의 출현과 성립이 새로운 도상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신라석탑이 갖는 내적 발전의 또 다른 측면에 서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신라 팔부중상은 그동안 경주지역과 강원지방 에서 나타나는 팔부중상은 단절된 채 각각의 영역에서 발전한 것이 아니라 도상의 동질성( 同 質 性 ) 속에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본 연구를 통해 새로운 신라 팔부중상의 계보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신라 팔부중상의 계보에 있어 아직 미해결의 과제는 입상 팔부중상의 도상과 도상적으로 불분명한 호남 지역 팔부중상의 문제이 다. 지금까지 입상의 팔부중상은 단순히 도상적 몰이해의 산물로 치부되 었으나 앞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도상의 연원과 존명에 대한 추정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新 羅 八 部 衆 圖 像 전개에 있어 雙 塔 의 역할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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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요약 본고는 신라석탑에 새겨진 부조상 가운데 가장 많은 사례를 남기고 있는 팔부중상의 도상적 변화와 전개과정에 있어 나타난 계보에 대한 연구이다. 현재 남아 있는 신라석탑 팔부중상은 수량에 있어 30여기에 달한다. 또한 양식적 변천은 물론이요 9세기를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확연한 도상적 변화를 보이고 있다. 필자는 이 같은 팔부중 도상의 변화와 관련하여 쌍탑에 주목하였다. 쌍탑 출현은 통일신라시대 불탑의 가장 큰 특징이며 이전 사찰 배치와는 비교되는 중요한 변화요소였다. 팔부중상이 새겨진 석탑은 시기적으로 8세기 중엽경에 시작되며 단탑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9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쌍탑에도 팔부중상이 새겨지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도상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부조상이 새겨진 쌍탑의 공통적인 특징 중에 하나는 비록 탑형이 같다하더라도 같은 도상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는 팔부중 쌍탑도 예외는 아니어서 같은 상을 표현하면서도 동서탑이 서로 다른 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같은 조탑 의식은 8세기 완성된 팔부중 도상 변화에 동인이 되었으며, 9세기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불탑을 수호하는 신장 개념의 팔부중 도상 성립에 원동력으로 작용했다고 판단된다. 본 연구를 통해 그동안 경주지역과 강원지방에서 나타나는 팔부중상은 단절된 채 각각의 영역에서 발전한 것이 아니라 도상의 동질성 속에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새로운 신라 팔부중상의 계보를 정립할 수 있었다. 투고일 2010. 1. 11. 수정일 2010. 2. 22. 게재 확정일 2010. 3. 1. 주제어(keyword) 팔부중(Eight Classes of Divine Beings), 신라석탑(Stone Pagoda of silla), 경주(Gyeongju), 쌍탑(Twin Pagod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