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어느 맑은 날의 斷 想 세상에는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이 존재합니다. 성공의 기준이야 저마다의 철학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일반적인 성공의 의미에 대해 우리 대부분은 의견을 같이 합니다. 무릇 성공한 사람은 자기가 남보다 잘 할 수 있는 것을 좋아하고 끝없이 추구하여 무언가를 일구 어낸 사람이고, 반면 실패한 사람 또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가 남보다 잘할 수 있는 것보다는 잘하지 못하거나 잘 할 수 없는 것을 지나치게 좋아하여 인생에서 진정으로 필요하고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 리고 그 무엇도 성취하지 못한 사람이라는데 대하여도 異 論 의 여지는 없으리라 봅니다. 여기 자기가 잘하지 못하며 잘할 수 없는 것을 지나치게 좋아하고, 결 코 해서는 안 될 것들에 대한 평생의 집착으로 인해 어쩌면 순탄하게 풀릴 수도 있었던 단 한 번의 인생을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빠뜨린 한 남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는 6.25 전쟁의 상흔이 서서히 가셔가는 50년대 후반 베이비붐을 타 고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세 살 때 속옷 원단을 짜는 기계 기 술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와 서울에서 줄곧 성장했습니다. 어릴 적 기억은 잘나지 않지만 당시의 여타가정과 마찬가지로 넉넉지 못한 가정이었으며 아버지가 술 한 잔하고 들어오시면 으레 나를 불러 놓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인생철학에 관하여 지겨 울 정도로 설교하시던 기억과 생모가 3살 아래 여동생을 낳다 산고로 돌아가시고 의붓어머니가 우리 남매를 키우셨다는 사실을 초등학교 6 학년이 되어서야 알게 되고는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들이 납니다. 철없던 어린 시절과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놀기에 바빴지만 고등학교 에 진학하여 철이 들면서부터는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온 가난의 대물 림을 내 세대에서 끝내야겠고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공 부밖에 없다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고2, 3 방학 때에 는 독서실에 틀어박혀 하루 15시간 이상씩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고3이 되어 장군이 되겠다는 저의 꿈을 좇아 특차인 육사시험에 응시 하여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필기시험에 합격하였으나 시력 때문에 신 - 1 -
체검사에서 낙방한 뒤 잠시 방황하다 다시 이를 악물고 공부해 상위 권대학에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생 시절 10.26이며 12.12며 하는 어수선한 시절을 보내고 군대를 제대한 뒤 고시 공부에 다시 도전해 보았지만 경제력이 없는 저로서는 일단 계획을 뒤로 미루고 직장의 문 을 두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역회사에 다니며 무역, 은행, 세관, 영업 등의 업무를 경험하였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부모님이 낙향해 계시던 영월로 내려가 1 년여의 준비 끝에 7급 국가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 하였습니다. 평균점수 100점으로 수석합격 하였으니 공부머리는 꽤 있었나 봅니다. 지금만큼은 아니지만 당시도 공무원은 꽤 인기직종이었고 업무도 적성 에 맞는 것 같아 이후 몇 년간은 자부심을 갖고 평온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항공사에서 근무하던 지금의 아내를 만나 뜨거 운 연애 끝에 결혼도 하게 되었고 결혼 후 몇 년 간은 아기 갖는 것도 미뤄가며 열심히 맞벌이를 해서 내 집 마련의 꿈을 소중히 키워가던, 돌이켜보면 이후에는 결코 맛보지 못한 꿈같은 세월들을 보내게 되었 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어찌어찌 저를 수 소문해서 직장으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빽빽 우는 아이를 들쳐 맨 아 내와 함께 찾아와 어려운 형편을 호소하며 부모님 고향이 이북이라 당 시 남북교류의 분위기에 힘입어 설립된 동화은행 주식을 배당받아 되 팔면 생활비가 마련되니 급전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이었습니 다. 반갑고도 측은한 마음에 거절하지 못하고 백만 원을 빌려준 것이 결국 받지 못하게 되고 빠듯한 공무원 월급으로 갚아나가려니 생활에 압박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순탄한 길이 예비 되어 있던 내 인생에 소위 마 가 끼기 시작합니다. 우연히 직장동료와 함께 구경하러 갔던 동인천역 인근의 성인오락실에 서 지금의 카지노 슬롯머신과 비슷한 기계를 장난삼아 돌리다가 가운 데에 과녁 4개가 맞아 30만원을 따게 됩니다. 지금은 모두 없어졌지만 당시에는 이런 합법적인 성인 오락실이 성행하여 전국의 크고 작은 호 텔을 비롯하여 사람이 많이 모이는 요지에는 어김없이 자리 잡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돈 만원에 발발 떨며 검소하게 살아가던 저로서 - 2 -
는 큰 돈 이었습니다. 이거 괜찮은데. 잘만하면 친구한테 빌려준 돈 을 만회할 수 있겠네. 하는 순진하고 어리석은 생각에 이후에도 틈 만 나면 오락실을 찾아 잃고 따고를 반복하면서 재미를 붙이며 점점 도박에 물들어가게 됩니다. 계속 잃다가도 어쩌다 몇 푼 건지면 공돈 이라도 생긴 양 착각하고 마구 써댔습니다. 만 원짜리 한 장 들어있기 바빴던 지갑에는 항상 몇 십 만원이 들어 있어야 마음이 푸근해졌습니 다. 이렇게 돈에 대한 균형 감각이 무너지면서 신혼 초에 둘이 오순도 순 머리를 맞대고 앉아 세웠던 인생의 단계별 계획들이 하나하나 물거 품이 되어 사라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게임을 하면 할수록 돈을 잃었 고 그럴수록 통제력을 잃어 더 많은 돈을 잃는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게임의 횟수와 규모가 점점 커지고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갔습니다. 급기야는 손실을 메우고 게임을 계속하기위해 대출까지 받아 충당하기 시작했습니다. 맞벌이 하던 아내에게는 늦은 귀가 이유에 대해 계속해 서 끝없는 거짓말을 하게 되고 거친 말로 짜증을 내며 상처를 주게 됩 니다. 신용카드 십여 개를 발급받아 돌려막기를 하고, 공무원으로서 받 아서는 안 되는 돈과 청탁을 받기도 하고 저의 삶은 이렇듯 파국을 향 하여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리 크게 성공한 인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큰 불만 없이 만족하며 순풍에 돛단 듯 순조롭게 흘러갈 수 있었던 저의 인생이 이렇게 되기 까지는 채 1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공무원 월급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채무를 견디지 못해 우편으로 사표를 제출한 뒤 어느 날 아무 도 모르게 홍콩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됩니다. 물론 돌아 올 생각은 없었습니다. 죽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다는 생각에 죽음의 여행 을 떠났던 것입니다. 아내에게는 잠시 바람쐬러가니 찾지 말라는 편지 만 남긴 채 김포공항을 떠난 후 동남아와 중국을 넋이 빠진 채로 돌아 다녔지만 죽을 장소를 찾지도 못하고 죽을 용기도 없어 한 달 후 다시 귀국길에 오르게 됩니다. 중국 톈진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여객선 갑 판에서 검푸른 밤바다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죽 자. 죽어 버리자. 살아서 무엇 하나. 이미 망쳐버린 인생 이렇게 중 얼거리며 몇 번이고 뛰어내리려다 세상에 대한 무슨 미련이 있었는지 무슨 용기가 그리도 없었는지 끝내는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다음날 아 - 3 -
침 배는 목적지인 인천항에 닿았습니다. 해당 직군 공채에 수석 합격하여 내부 승진 기대서열 1위, 각종 연수 훈련 성적 항상 1등, 우수한 외국어 실력, 남 못 지 않은 학벌, 준수한 외모, 어여쁘고 정숙한 아내. 그 무엇 하나 부족한 점이 없어 시간만 가면 조직의 수장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나의 전도양양했던 미래는 이 렇게 하여 그 1막을 내리게 됩니다. 돌아와 아내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서로 부둥켜안고 얼마를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내의 그 착하고 고왔던 얼굴에 흐르던 눈물의 기억은 수 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저의 마음 을 아리게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착한 사람은 그래요 이제 모든 것 다 잊고 처음부터 새 출발해요. 우리 아기도 갖고. 당신 능력 있잖아 요. 난 당신을 믿어요. 이렇게 저를 용서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살던 집 전세금을 빼 몇 천 만원에 이르는 은행 빚과 카드빚을 청산하고 아 내의 권유로 교회에도 나가고 왕십리 단도박 모임에도 참석하고 하며 그렇게 반성하는 듯, 회개하는 듯 1~2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몸속에 흐르는 도박의 피는 쉽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출국할 때 제출한 사표가 제대로 수리되지 않아 파면 처분되는 바람에 공무원 소청 심사위원회에 소청을 제기하였으나 기각되어 퇴직금도 절반밖에 수령하지 못하고 그마저도 빚잔치를 하고나니 생활비마저 쪼들리는 형 편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아내가 임신을 하게 되어 직장을 그만두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영월에 계시던 아버님이 혈뇨를 보여 진찰을 받 은 결과 담도 암으로 밝혀져 수술을 받게 됩니다. 재수술 까지 하는 등 결과가 좋지 않아 병원생활이 길어지자 아버님의 원대로 퇴원하여 제가 사는 서울집 근처에 방을 얻어 누워계셨습니다. 막막해진 당시의 제 나이가 30대 후반. 무얼 해도 잘 할 것 같고, 어떻게 해도 잘될 것 같던 그 자신감에 서서히 회의가 찾아들게 됩니다. 퇴직 후 얼마간은 중국에서 물건을 수입해서 팔아보겠다고 친구와 함 께 무역회사도 차려보고 이것저것 손을 대보았으나 장사나 영업에 소 - 4 -
질이 없고 자본과 경험도 없어 어느 것 하나 여의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어려운 와중에서도 틈틈이 성인오락실을 찾아 아드레날린을 분비합니다. 사업이 잘 될 리가 없었습니다. 그 날도 오락실에서 몇 시 간을 보내고 요즘 들어 부쩍 상태가 안 좋아진 아버님을 찾아뵙는데 집안에서 어머님과 여동생의 통곡소리가 들립니다. 그렇게 나는 아버님이 고통 속에서 임종하시는 그 순간에도 오락실에 서 희희낙락하며 불효를 하는 천추의 한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몇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고 합니다. 그러던 차에 공무원 시절 함께 일했던 동료가 취업을 알선해주게 됩니다. 대기업의 협력업체로 컴퓨터부품을 생산하던 그 회사가 중국에 현지법인을 세우 려 하는데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특채한다고 해서 소개한 것입 니다. 이렇게 해서 공무원 시절 심심풀이로 해 둔 중국어 덕에 내 인 생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됩니다. 몇 개월의 준비 끝에 회장님의 전권을 위임받아 비장한 각오로 여행가 방 하나 메고 도착한 곳은 중국 심양시 외곽의 한 시골마을이었습니 다. 옛 고구려 땅이었던 이 황량한 대륙의 벌판에서 저는 또 한 번의 인생을 불사르게 됩니다. 당시 막 태어난 딸아이와 아내는 대구의 처 가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가족 걱정 없이 회사설립 일에만 몰 두할 수 있었습니다. 연말연시의 공휴일과 설날, 일요일 모두 반납하며 이것이 절벽에 매달린 저를 구해줄 유일한 생명 줄이라고 생각하고 낯 설고 물 설은 곳에서 온몸을 던져 일한 결과 최단 기간 현지법인 설립 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6개월 만에 직공 400여명 규모의 공장가동에 들 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현지법인의 책임자는 당연히 내가 되어야 마땅 하다는 것은 순진한 나의 착각이었습니다. 회사가 본격적으로 돌아가 기 시작한지 몇 개월 뒤 본국에서 회사와 영업상 이해관계에 있던 군 출신 예비역장성이 현지법인 책임자인 총경리로 임명되어 낙하산을 타 고 서해를 건너 날아옵니다. 저는 부사장격인 경리. 무척이나 고지식한 총경리 와는 매일 매일이 갈등의 연속이었습니다. 회장님에게 직접 고 충을 호소하며 결정을 촉구했지만 때 마침 아직 해결하지 못했던 부채 로 인해 급여 가압류가 들어와 매달 50%를 공제한 금액을 수령하게 - 5 -
되면서 나는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고 결국 본사로 발령이 납니다. 또 다시 사표를 던집니다. 2년여에 걸친 짧은 기간이었지만 일생 중 도박을 잊고 살았던 유일한 기간이었습니다. 귀국해서 일자리를 찾아봅니다. 이놈의 인생은 왜 이렇게 발전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맨 날 맨땅에 헤딩해야 하는지 자문해봅니다. 그래 내가 영어는 좀 하니까. 그리고 애들 가르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이러면서 구한 직장이 입시학원 영어강사 자리였습니다. 간 신히 취직은 했지만 도박 빚으로 인해 신용불량자 된 저는 이후 채권 자들의 추적을 피해 실체가 없는 그림자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인생 3막의 시작입니다. 1년 정도 경력을 쌓은 뒤 같이 근무하던 수학 선생과 의기투합하여 서울 근교에 입시학원을 차리게 되며 여기서 대 박을 냅니다. 물론 제 명의로는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은 동업 자 명의로 진행되었고 저는 혹 나중에 문제가 될 경우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그림자 인생이었습니다. 어쨌든 학원은 대 성공이라서 처음 몇 명이던 학생이 자고나면 불어납니다. 교실이 모자라 밤을 새 며 칸막이공사를 직접하고 잠도 못 잔채 수업을 하고 이러기를 1년도 안 돼 확장이전을 하고 몇 년 뒤에 또 2차 확장이전을 하면서 많을 때 에는 강사가 20여명, 학생 수가 500여명에 이르게 됩니다. 학원이 성장 하면서 집도 커집니다. 단칸방에서 24평으로 24평에서 35평으로. 이렇 게 10여 년간 매일 들어오는 현금이 너무 많아 나중에는 돈세는 기계 를 써야 할 정도로 많은 돈을 벌게 됩니다. 한 달 수입이 동업자와 둘 이 나누어도 천만 원을 훌쩍 넘겼습니다. 이제 먹고살만하게 되었습니 다. 학원을 열고 처음 몇 년간은 도박이나 게임 따위는 잊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 거 안 해도 풍족했습니다. 아니 그런 걸 안하니까 풍 족했습니다.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즈음 사랑하는 딸은 중학교에 다니고 아내는 딸을 보살피며 살림만 하고 있었습니다. 7,8년간의 호황기를 누리던 중 호사다마 라던가 예의 그 도박마귀 가 또 다시 내 주변을 멤 돌게 됩니다. 이젠 수업도 강사들에게 맡기 고 여유가 있어지니 한눈을 팔게 됩니다. 동네 유지들이나 학원장들과 - 6 -
만나 술자리를 하는 경우가 빈번해졌습니다. 그러다 우연치 않은 기회 에 포커 판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당시까지도 심심풀이 고스톱 이나 할 줄 알았지 카드게임에는 문외한이어서 판에 끼지는 못하고 관 전만 했습니다.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카드를 배우게 됩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기 량에 대견에 하며 정말 날 새는 줄 모르고 다시 도박의 세계에 몸을 담그게 됩니다. 십여 년 전 서해를 건너오던 배안에서 밤바다를 바라 보며 오열하던 그 아픔, 착하디착한 젊은 아내의 뺨에 흐르던 그 눈물 의 기억이 희미해지려니 또 다시 악마가 나를 찾아온 것입니다. 학원이 삐꺽거리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학원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고 학생들이 빠져나갑니다. 2차로 확장 이전한 학원의 교실이 점점 남 아돌게 됩니다. 몇 번의 변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결과는 더욱 좋지 않 았습니다. 아 10년 영화는 여기서 끝인가. 그래도 밤마다 모여서 카드를 쪼는 스릴은 놓치기 싫었습니다. 집에는 또 거짓말을 합니다. 학원일이 너무 많아서. 누구누구 부모님이 돌아 가셔서. 이 번 달 학원 수익이 시원찮아서. 동업자와도 거리가 생기게 됩니다. 카드도박으로 얼마를 잃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고 계산도 되지 않습 니다만 날이 갈수록 늘어나야 할 통장의 잔고는 도리어 자꾸 줄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해인가는 12월 말일 새해를 앞두고 벌인 포커 판에 서 하룻밤에 천만 원을 잃은 뒤 새벽에 귀가해서 아내와 심하게 다툰 기억도 있습니다. 포커, 일명 세븐오디 라는 카드도박에 익숙해질 무렵 이번에는 바둑이 라는 카드도박을 새로 배워 한 단계 업그레 이드 하게 됩니다. 판돈이 더욱 커지고 아드레날린이 팍팍 분비됩니다. 사람한테 지니까 기계한테 달려들었습니다. 포커, 바둑이, 고스톱 이라는 문구를 내건 사행성 게임장의 vip로 등장합니다. 하룻밤에 백만 원은 기본적으로 풀어주었으니까요. 육백만원을 잃은 적도 있었습니다. 사기라는 걸 어느 정도 알면서도 한번 해보자며 부나방같이 달려들었 습니다. 바다이야기 라는 스릴 있는 게임도 저의 아드레날린 분비 를 촉진했습니다. 이즈음 누군가 카지노를 강력 추천합니다. 그 돈이 면 강원랜드 카지노에 가서 한번 해 보세요. 잘하면 한 밑천 잡을 수 도 있어요. 하지만 당시에는 강원도까지 도박하러 갈 엄두는 나지 - 7 -
않았습니다. 카지노가 어떤 곳인지도 잘 모르고. 우여곡절 끝에 학원 경영권을 동업자에게 넘기고 지분을 받는 그날 일 부는 아내에게 온라인으로 송금해주고 나머지를 갖고 여행을 떠났습니 다. 또 한 번의 도피여행. 이번에도 돌아온다는 기약은 없었습니다. 혼 자 배낭을 메고 백두대간을 종주하겠다고 그래서 새사람이 되어야겠다 는 일말의 계획도 있었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그 때 이미 내 마음속에 는 정선 카지노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청량리에서 열차 를 타고 증산에 내려 모텔에 방을 잡았습니다. 복잡한 사북이나 고한 보다 조용한 증산이 저에게는 좋았습니다. 이후 일주일 정도 카지노를 출입하며 가져온 적지 않은 돈의 대부분을 뭐 어떻게 잃었는지도 모르 게 수업료로 지불하게 됩니다. 칩이 돈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 집히는 대로 갔다댔습니다. 마법에 홀린 듯 그렇게 대패한 후 백두대 간은커녕 민둥산 자락도 밟지 못하고 속상한 마음을 달래러 속초로 향 했습니다. 이번에는 서해가 아닌 동해를 바라보며 십여 년 전 서해를 건너올 때 느꼈던 아픔을 잠시 떠올렸지만 이미 도박 중독의 깊은 인 이 박힌 저로서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즈음 집사람과 딸아이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됩니다. 가족을 볼 면목 도 없고 돌아 가봐야 나를 기다리는 일도 없어진 아니 애당초 돌아갈 계획이 없었던 나는 이 때부터 얼마 남지 않은 돈을 가지고 험난한 유 랑의 길을 시작합니다. 그 때 제 나이 이미 50.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 기에는 모든 것이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 도박으로 망친 인생. 도 박으로 끝장을 내자. 카지노 근처에 머물며 새로운 도박, 카지노 게 임에 본격적으로 달려듭니다. 얼마 안 되서 가지고 온 돈은 바닥났고 친척, 친구, 지인들로부터 푼돈을 애걸하는 비참한 생활이 시작됩니다. 바야흐로 바람직하지 못한 인생의 4막이 시작된 것이지요. - 1막 공무원, 2막 중국, 3막 학원, 4막 카지노- 처음에는 ARS에 당첨되면 자리 값이 30~40만원하던 시기라 일주일에 한두 번만 당첨 되도 그런대로 생활할 만 했습니다. 또 마냥 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떨 때는 제법 이기기도 하고 해서 그럭저럭 지낼 - 8 -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추운 겨울에 천 원 한 장 안 남기고 다 잃을 때면 그 비참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강원도의 겨울 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밥 먹을 돈이 없어 교회에 가서 밥을 얻어먹고 김밥 한 줄로 하루를 연명하곤 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추운 겨울밤에 주머니는 비었고 잘 곳은 없어 지금은 철거된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카지노 인근 철거예정아파트에 더듬거리며 들어가 역에서 받아온 뜨거운 물이 든 유리병을 안고 집 주인이 버리고 간 벽장의 두꺼운 이 불로 얼굴까지 덮고 자던 일도 비일비재 했습니다. 그야말로 길거리의 노숙자가 되어 카지노 주위를 배회했습니다. 꼭 그러지 않았어도 될 것을 왜 그렇게 미련하게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와 돌이 켜 생각해 보니 그건 아마도 일종의 자학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 나는 이래도 싸. 나는 가족과 함께 살며 따뜻한 밥을 먹을 자격도 따 뜻한 잠자리에서 잘 자격도 없는 인간 말종이야. 가진 돈이 다 떨어지고 도박종자돈 마련이 어려워지자 정해진 수순대 로 갑니다. 여동생, 동서, 대학동창, 업무상 알고 지내던 사람들, 심지 어 데리고 있던 강사들, 더 심지어는 옛날에 헤어진 여자들. 반평생 살 아오며 알고 지냈던 아니 옷깃만 스친 인연이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돈 부탁을 하게 됩니다. 적게는 몇 십 만원에서 많게는 천만 원까지. 그리고 당연히 갚지 못합니다. 그렇게 힘든 겨울을 카지노 인근 찜질방 등지에서 보내고 나니 봄이 되었습니다. 우연찮은 기회에 정선 읍에 가게 되고 얼마간 일을 해서 그 곳에 방을 얻게 되면서 카지노를 좀 덜 가게 되고 그러면서 생활도 전 보다는 안정이 되기 시작합니다. 이 때 평생 책상머리에만 앉아있 던 내가 소위 노가다 라는 일용직 육체노동을 하게 됩니다. 처음 보름정도는 아침에 일어날 때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손이 퉁퉁 붓 고 오므려지지 않아 애를 먹었습니다. 전에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 던 하루8시간 이상의 힘든 육체노동을 자학하는 심정으로 받아들였습 니다. 그러면서 어떨 때는 운동한다고 생각하자 라며 스스로를 위 로 했습니다. 운동이라니 길가는 소가 웃을 일이지요. 사람들이 부러워하며 길가 점쟁이도 예술가의 손이라며 칭찬해주던 그 멋진 손이 흙을 만지고 쇠를 만지며 굳은살이 배겨가는 과정에도 당시 - 9 -
나의 집념은 오직 하나. 도박으로 망친 인생. 도박으로 승부보자. 는 어리석은 집착을 떨치지 못하고 몇 푼 모이면 카지노에 올라가 패 대기치기를 무한 반복합니다. 이길 때도 있었지만 질 때가 더 많았습 니다. 열 번을 이기면 무얼 합니까. 단 한 번의 패배로 그 열 번 이긴 돈에 가진 것 모두를 더해 반납하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하는 것 을. 그래도 누구는 다 잃고 단돈 5천원 남은 것으로 다시 시작해 한 달 만에 2억을 만들었다느니(얼마 안 돼 다 잃었다고는 하지만), 또 누 구는 5만원 한 장으로 몇 천만 원 짜리 잭팟을 잡았다느니 하는 이야 기들을 들을 때마다 나도 그 행운의 주인공이 되지 말란 법이 있느냐 며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적은 돈으로 덤비니 자꾸 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목돈을 마련하기 위해 서는 월급제로 일해야겠다는 생각에 몹시 추웠던 어느 해 성탄절 전야 에 생활정보지를 보고 알게 된 강원도 횡성의 어느 양계장에 도착합니 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눈 딱 감고 두 달만 버티자.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즐거워해야 할 크리스마스이브를 저는 그렇게 축사 한 켠 에 마련된 쪽방에서 추위에 떨며 보냈습니다. 다음 날부터 시작된 일 은 닭에게 모이 주는 자동시설을 감시하고 닭똥을 치우는 일이었습니 다. 하루는 사료가 나오지 않아 기계 속을 손으로 더듬거리다가 기어 가 장갑을 물고 들어가 손가락을 잃을 뻔했던 아찔한 사고가 있었습니 다. 다행히 민첩하게 손을 빼어 손톱을 다치는데 끝났지만 정말 아찔 한 순간이었습니다. 여기서 두 달을 일하고 모은 돈을 카지노에 갖고 와 며칠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집니다. 얼마를 방황하다 궁리 끝에 이 번에는 전라도로 내려갑니다. 전남 강진 인근의 한 장어 양식장에서 노예 같은 생활을 하며 또 힘들게 두 달을 일하고 같은 과정을 겪습니 다. 어느 날 가지고 온 돈을 천 원짜리 하나 없이 다 잃고는 머리를 쥐어박고 속으로 욕을 해대며 내 자신을 원망하면서 힘없이 객장을 나 서려는 순간 한 바카라 테이블이 눈에 들어옵니다. 예의 그 먹고 죽고 하며 그에 따라 탄성과 비명을 지르고 한숨을 짓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불현 듯 이건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라는 생각이 들어 그 즉시 상황실을 찾아 출입정지 신청을 하게 됩니다. 강원랜드 카지노에는 도박중독자들을 위해 가족 또는 본인의 신청에 따라 3년간 - 10 -
출입을 정지시키고 여비를 주어 귀가를 돕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충동적으로 출입정지를 하고 난 직후 그리운 아내와 이제는 훌 쩍 자라 고등학생이 되어있는 딸아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2년만이었습니다. 나의 몰락과 함께 집은 이미 13평 서민아파트로 이 사를 한 상태였습니다. 35평 아파트 살림이 13평 아파트에 자리잡다보 니 집안은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비좁았습니다. 그래도 한 동안 은 가족과 함께 있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집에서 저 를 기다리는 일은 없었습니다. 나이가 있어 학원 강사로 취업할 수는 없었고 한두 명 과외도 해보았지만 돈이 되질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달리 무슨 기술이나 자본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결국 할 수 있는 일이 라는 건 동도 트기 전 새벽같이 인력사무소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일을 배정 받으면 아무리 멀어도 대중교통으로 달려가서 어떻게든 하 루를 버텨 8~9만원을 벌어 들어오고 일이 없으면 빈손으로 그냥 들어 오는 무미건조하고 힘들기만 한 일상이 계속되었습니다. 집사람도 딸 아이도 옛날에 그 잘나가던 아빠가 노가다를 한다는 사실을 주변에서 아는 게 싫었는지 쉬쉬하는 눈치였고 저 역시 주변 사람들 보기가 민 망해서 피해 다니게 되었습니다. 일을 하다보면 힘든 일도 있고 쉬운 일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나 는 아주, 무척 힘든 일을 좋아했습니다. 아니 좋아 했다기보다는 원했 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나의 육체를 혹사시켜야만, 나를 학대해야만 자신에게 속죄가 될 것 같아서. 오랜만에 눈물이 납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 그런 나를 혹사시 켜 나에게 속죄해야만 했던 그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만든 그것이 바 로 다름 아닌 나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사실에 제자신이 죽이고 싶을 만큼 밉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불쌍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눈물이 납니다. 자꾸. 나이는 먹어 가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않은가를 늘 생각 하면서도 도박으로 모든 것을 잃은 저로서는 대안이 없었습니다. 자존심 굽히고 먼저 학원 동업자를 찾아가 그냥 평강사로 일 할 테니 자리를 달라고 부탁하여 1년가량 영어강사로 근무합니다. 요즘 학생들 은 나이 먹은 강사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도 천방지축인 요즘 아 - 11 -
이들과 씨름 하는 게 무척 힘들었습니다. 제가 떠난 뒤 학원형편도 더 욱 좋지 않아 졌습니다. 게다가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그 누구도 더 이상 저를 믿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기간에도 틈만 나면 형편상 크게 는 못했지만 포털 사이트의 온라인 포커게임을 즐겨 했습니다. 이것 역시 작게 했다고는 하지만 당시의 제 형편으로는 적지 않은 돈을 잃 고 있었습니다. 컴퓨터 게임에 몇 시간째 몰두하고 있는 저를 보다 못 해 딸이 울먹이며 말합니다. 아빠, 이제 도박 그만하면 안 돼? 아빠 가 도박 안하던 옛날에는 우리 식구 행복했었잖아. 구제불능 도박 중독자는 그 말에도 개의치 않고 열심히 좋아하는 것을 합니다. 어느덧 3년이 흘러 카지노출입정지 기간이 지나자 정들었던 정선이 내 게 손짓합니다. 그래 그 때는 너무 뭘 몰랐어. 이제 또 다시 가면 잘 할 수 있을 거야. 잃은 돈 찾아와야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학원을 그만두고 다시 정선으로 향합니다. 아내는 가지 말고 어떻게든 서울에 서 버텨 보라고 말리지만 제 귀에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변호사 개업 을 하고 있던 손아래 동서를 그럴듯한 말로 속여 천만 원을 받아 냈습 니다. 그 사실을 나중에 안 아내는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고 합니 다. 정선에 방을 얻었습니다. 소정의 교육을 받은 뒤 출입정지를 해제하고 의욕적으로 새로운 카지노 정복 전략을 수립합니다. 인터넷과 카지노 관련서적을 탐독하며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각오를 다집니다. 이젠 욕심 부리지 말고 조금만 따면 내려와야지. 하지만 그건 연구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시작한 카지노 컴백 무대는 별 소 득도 없이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채 먹고 죽고, 죽고 먹고 하 며 꾸역꾸역 또 2년이 흘러갔습니다. 성공을 위하여 하얗게 지새웠던 젊은 날의 불면의 밤들. 수많은 아픔 과 좌절. 고통과 회한을 뒤로 한 채 저의 도박으로 점철된 인생은 이 렇게 덧없이 흘러 어느덧 내일모레면 나이 60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마음은 청춘인데 세상은 내게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잃지 않았을 그 많은 소중한 것들을 그렇게 함으로서 다 떠 나보냈습니다. - 12 -
이렇게 해서,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었지만 온갖 종류의 도박과 사행성 게임에 대한 일생의 집착으로 인해 모든 것을 내쳐버린 한 남자의 별 로 대단치도 불쌍하지도 슬프지도 않은, 하지만 조금은 안타까운 이야 기는 2015년 가을 현재에 이르게 됩니다. 금년 들어 너무 늦었지만, 많이 늦었지만, 돌이킬 수도 없지만, 이제 그만 포기하고 고개를 숙여야할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에 아니 이제 부터는 고개를 들어 저 맑고 푸른 가을 하늘도 바라보며 살아야 할 때 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지만 당장 대안이 없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때에 지인 중 한명으로부터 카지노 출입고객을 대상 으로 하는 도박중독 치유 및 직업재활 프로그램 등이 있다는 말을 듣 고 긴 터널 끝 희망의 빛이 보이는 듯 했습니다. 망설이던 끝에 전에 인문학 순례행사에 참여하면서 면식이 있는 KL 중독관리센터의 전문 위원님을 찾아 상담한 후에 카지노 출입을 영구정지 시키게 되었습니 다. 이제는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그 동안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지켜야 할 소중한 것들을 버려가면서 물욕에 사로잡혀 나와 그리고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했던 모든 사람 들의 시간과 재산을 축내고 인생을 낭비한 죄 속죄하며 살아가야 하겠 지요. 이제는 얼룩진 아내의 눈물자국을 닦아주고 치유될 수 없을 정 도로 만신창이가 된 나와 가족의 상처를 돌보며 더 이상 헛된 것을 좇 아 발버둥 치지 말고 아직까지 나를 떠나지 않고 남아있는 소중한 것 들을 보듬으며 열심히 살아가야겠습니다. 겪어보니 도박은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얼마 나 강력하고 사악한 악마인지 그 마수에 털끝만 스쳐도 온몸과 정신이 감염되어 세상의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치유할 수 없는 난 치병, 불치병에 걸리고 맙니다. 치사율 100%의 죽음에 이르는 무서운 병이지요. 이것은 한번 걸리면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는 덫과도 같습니 다. 우리 주변에는 알게 모르게 수없이 많은 도박의 덫이 놓여 있습니 다. 주식, 경마, 화투, 카드, 바둑, 성인 오락실, 스포츠 토토, 복권, 카 지노. 우리가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이 덫에 걸리지 않거나 이제껏 걸 리지 않았다면 그것만으로도 축복받은 겁니다. 그래서 제가 가장 부러 워하는 사람은 권력이나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도박을 좋아하지 않 - 13 -
거나 도박에 별관심이 없어서 또는 천운으로 도박의 덫에 걸리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도박은 공연히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길바닥에 쏟아버리고 그것을 다 시 주워 담으려는 어리석은 행동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잘 주워 담아 도 이미 버려진 것은 온전히 다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왜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아니 너무도 잘 알면서 왜 철부지 같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종류의 도박이라도 그 본질은 같습니다. 짧은 기간 운이 좋아 이길 수는 있어도 영원히 이길 수는 없습니다. 몇 백 몇 천 번을 이기다가도 한 번 크게 지는 순간 인생은 희망의 빛을 잃고 어둠속으로 사라집니다. 여러분들은 부디 도박으로 점철된 저의 파란만장한 인생수기를 읽고 정말 도박만은 하지 말아야 겠다고 다짐해주십시오. 눈물 콧물 흘려가며 제가 이 글을 쓰는 목적 입니다. 절대 여러분의 비용으로 경험하지 마십시오. 저를 비롯한 수많 은 사람들이 이미 그들의 전 재산을 들여 경험해서 깨달은 것을 여러 분은 공짜로 얻어 가면 되는 것입니다. 나만은 예외라고, 잘하면 된다 고, 지금까지 이기고 있다고, 언제까지만, 얼마까지만 하겠다고 이런 생각은 하지도 말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다 부질없는 생각입니다. 엊그제 하늘이 참 맑고 날씨가 좋아 산행을 하였습니다. 정상에 올라 두 팔을 벌려 따스한 가을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눈을 감으니 가을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귀여운 다람쥐도 보았습니다. 가을의 정취를 흠뻑 느끼며 그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 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