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1. 모월곶, 석곶, 서곶, 개건너 검단지역이 편입되기 전, 인천의 서구 전체는 지난날 서곶으로 불리던 지역이었다. 1914년 4월 1일 부평군 모월곶면과 석곶면을 통합되어 서곶 면이 되었다. 서곶이라는 지명은 군 소재지인 부평에서 서쪽 해안에 길 게 뻗어있으므로 그렇게 지어졌다. 이 지명은 반세기 이상 사용되었다. 그래서 인천시가 구제( 區 制 )를 변경하여 서곶출장소를 폐지하고 북구에 서 서구를 분리할 때, 서곶구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서곶은 서쪽으로 길게 뻗은 해안 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지명이다. 동 아출판사가 발행한<국어사전>에 의하면 우리말의 곶 또는 고지 는 바다나 호수로 길게 뻗은 육지의 끝부분을 가리킨다. 그리고 황해도의 장산곶 이나 경상북도의 장기곶 처럼 지명 뒤에 붙어 바다로 뻗어나 간 곳이라는 의미로 확장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인천이라는 고유 지 명에 곶 자를 붙이면 인천의 한 해안지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지칭 되는 것인데, 주지하는 바처럼 서곶은 그렇지 않다. 한자로 표기할 때는 땅이름을 나타내는 곶( ) 자를 차용하는 것이 위의 장산곶이나 장기곶처럼 일반화되어 있다. 8 15 광복 이후 수십 년 간 서곳 으로 표기되었는데, 이는 받침소리 ㅈ이 ㅅ으로 대표음화되는 것으로 잘못 유추하였기 때문이다. 중세국어 에는 그런 현상이 있었으나 근대국어의 음운 변화에 따르면 ㅈ은 ㅅ, ㅊ, ㅌ과 더불어 ㄷ으로 대표된다. 1933년에 만들어진 한글맞춤법통일안 규정은 받침은 어원을 밝혀 적고, 읽을 때만 대표음화로 하도록 이미 인 정하고 있었다. 이 잘못된 지명은 1970년대 후반에 들어, 지명의 오류를 주목한 서곶초등학교(당시는 서곳국민학교였다) 교사들에 의해 정식으 로 이의가 제기되어 서곶으로 고쳐졌다. 지명고사 114
언뜻 생각하면 서곶 지역은 오늘 인천의 다운타운에서 보면 서쪽이 아니 라 북쪽에 위치하므로 이치에 맞지 않는데, 그것은 위에서 말한 바처럼 이 지역이 부평군에 속해 있던 시기에 부평 중심으로 그렇게 명명되었기 때문 이다. 서곶은 지형이 바다를 끼고 남북으로 길게 놓인 형상이다. 계양산과 철마 산을 품고 있는 원적산맥이 바다를 향해 치맛자락을 늘이며 남북으로 뻗쳐 있기 때문이다. 고려 때에는 서곶의 북쪽 지역이 황어현에 속했으며, 남쪽지 역은 부평현에 속했다. 조선시대에는 남쪽과 북쪽이 모두 부평부( 富 平 府 )에 속했으며, 오늘의 가정동, 신현동, 석남동, 원창동, 가좌동을 포함하는 남쪽 을 석곶면이라 하고, 오늘의 백석동, 시천동, 검암동, 경서동, 공촌동, 연희동, 심곡동을 포함하는 북쪽을 모월곶면이라 하였다. 이 두 면의 경계는 승학현 ( 昇 鶴 峴. 싱아고개라고도 한다)을 중심으로 구분되었다. 모월곶이라는 지명은 이 곳의 지형이 마치 반달처럼 생겼는데 작은 맥이 터럭( 毛 )같이 뻗어내려서 터럭이 많은 반달과 같다 는의미를내포한다. 그러나 전설을 보면 물이 많은 고장이라 물곶 이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석곶이라는 지명은 속칭 돌곶이를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다. 이 곳의 지형 이 꼬챙이같이 길게 뻗어있으며 돌이 많다고 해서 그런 지명이 붙었다. 돌곶 이가 어디인가는 한 장소를 잡아 지칭하기는 어렵다. 대체로 보아 가좌동, 원창동, 가정동의 해안이 형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석곶이라는 명칭과 관련하여 조선 중기의 기록이 보인다. 숙종 36년(1710) 금위영제조( 禁 衛 營 堤 調 ) 민진후( 閔 鎭 厚 )가 품계하였다. 수도 한양의 먼 방위를 강화 덕진과 영종진이 맡고 있으나 유사시에 두곳이동시에 공격당하면 한양도성이 위태로워지니 길목인 석곶에 군 대를 주둔해야 합니다. 그의 뜻대로 석곶에 방어진이 설치되었다. 122 천마와 아기장수 외
이 병영은 가좌동 해안에 아직도 전설처럼 남은 지명 번작이(또는 번지 기하라고도 함)와 연관하여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에는 민가가 적었으나 점차 인구가 늘어나고 조선후기에 면 으로 독립시켜 명칭을 부여하면서 석곶 으로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모월곶면은 면소재지가 현재의 검암동의 윗마을 上 洞 에 있었음이 확실 하나 석곶면의 소재지가 어디였던가는 알 수가 없다. 이 두 면은 일제가 1914년 3월 1일, 부천군을 만들어 부평군 전체와 인천의 일부를 흡수하면 서 부천군 소속이 되었다. 그리고 동년 4월 1일 두 면이 합병되어 서곶면 으로 명명되었다. 서곶이라는 지명을 갖게 된 것은 이 때가 처음이다. 부천이라는 지명은 인천 일부와 부평을 통합해 만든 지역이라 조합식으 로만든것이었다. 이 때, 부평군 군내면 부평리(현재의 계산동)에 있던 부 평군 청사를 폐지하고 옛 인천읍의 소재지(현재의 관교동)에 부천군청을 개설하였다. 서곶을 통치하던 행정력의 중심이 부평을 떠나 원인천으로 가 게된것이었다. 서곶은 1940년 4월 1일, 인천부( 仁 川 府 )에 편입됨으로써 부천이란 지명과도 멀어졌다. 이 때, 인천지역은 면제가 폐지되어 있었으므 로 서곶도 그렇게 바뀌었다. 인천부는 이 지역이 인천의 중심지로부터 상 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행정편의를 위해 서곶출장소를 설치하였다. 이 서곶출장소는 1968년 인천이 구제를 실시하면서 북구에 편입되었다. 1988년에 전체 서곶 지역이 서구로 독립되었으나, 서곶이라는 유서 깊은 지명은 1968년 구제 실시와 함께 내무행정의 지명에서 공식적으로 사라지 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서곶초등학교와 서곶중학교의 교명 속에, 그리고 서곶교회, 서곶공인중개사사무소 등 민간의 고유명사 속에 상당히 많이 남 아 있다. 서곶면의 청사는 모월곶면의 자리를 이어받아 연희동의 옛 연희 진 자리에 있었다. 이 곳을 서곶출장소가 다시 계승했으며, 1970년대에 마 을을 관통하는 48번 국도에서 가까운 곳으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서구청이 이를 계승하였다가 서구 보건소로 물려주고 현재의 위치로 신축해 나갔다. 인천의 중심지에 사는 사람들은 서곶을 개건너 라고 부르기도 했다. 현 지명고사 116
재의 남구 도화동과 서구 가좌동 사이에는 길고 깊은 해협이 뻗쳐 있어서, 이곳에바닷물이 들어와 있을 때는 나룻배로, 물이 빠져 있을 때는 갯벌에 놓인 징검다리를 딛고 건너 다녔다. 이 곳을 보도진 나루 라고 불렀다. 개 건너는 좁은 뜻으로는 이 해협 건너편 마을을 가리키기도 했지만 넓은 의 미로는 서곶의 모든 지역을 지칭했다. 당시 서곶과 검단으로 가는 노선버스도 있었다. 두 시간에 한 번쯤 동인 천을 출발해 김포 양곡이나 강화로 가는 버스였다. 그 버스는 경인국도를 타고 숭의동과 주안을 지나 십정동에서 서쪽으로 꺾어져 굽이굽이 산야를 달려 서곶의 중심지인 연희동까지 가는데 한 시간 이상 걸렸다. 서곶이 직 선거리로는 결코 멀지 않으면서도 인천 다운타운에 살던 시민 일반에게 먼 곳이라는 느낌을 주고, 인천의 선진문화에서 낙후되고 소외된 것은 바로 이 지리적 여건 때문이었다. 개건너 라는 명칭은 약간은 멸시하는 뉴앙스로 사용되고 서곶 사람들이 그것을 열등감으로 받아들인 시기도 있었다. 1961년 도화동과 가좌동의 해협에 인천교( 仁 川 橋 )가 놓이면서 그것은 모 두 사라졌다. 노선버스가 가는 시간이 30분 이하로 줄어들었으며 운행도 빈 번해져 통학과 통근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서곶은 길게 해안을 끼고 있는 터라 연안에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이 있 었다. 청라도( 靑 羅 島 ), 사도( 蛇 島. 뱀섬), 일도( 一 島 ), 장도( 獐 島. 노렴), 곰의바위, 쟁끼섬, 까투렴, 율도( 栗 島. 밤염) 소염도( 小 鹽 島 ), 세어도( 細 於 島 ), 장금도, 목섬, 호도( 虎 島. 범섬), 등이 그것이다. 서곶의 앞바다는 경사가 매우 완만하여 밀물과 썰물이 빠르게 드나들었다. 섬들은 밀물 때는 바다에 잠겨 푸른 수평선 끝에 보이기도 하고 썰물 때는 망망한 갯벌의 끝 에 얌전히 앉은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 밀물과 썰물의 시간 차를 이용하여 드넓은 갯벌에서 게와 조개와 맛조개를 잡았으며, 썰물을 따 라서 섬까지 걸어가 한두 시간 일을 보고 밀물에 앞서 해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섬들은 갯벌 매립으로 거의 모두 사라졌다. 1차로 원창동과 석 124 천마와 아기장수 외
남동 앞바다가 매립되어 율도와 소염도가 사라졌으며, 2차로 백석동, 검 암동, 연희동 앞바다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이 청라 매립지(동아매립지라 고도 한다)에 포함되면서 호도와 세어도를 제외한 청라도, 일도, 장도 등거의모든섬들이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물론 이 매립사업으로 인해 서곶의 면적은 원래보다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지명고사 118
2. 왕이 하늘에 제사 지낸 신성한 땅 검단 검단의 뜻에 대하여 원로들은 이 곳의 해안이 넓은 갯벌로 되어 있는데다 가 개흙이 유난히 검어서 검( 黔 )자를 쓰고, 드넓은 갯벌이 석양에 낙조가 시 작되면 그것이 마치 홍학의 날개와 같이 아름다워서 단( 丹 )자를 써서 그렇 게 부르게 되었다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검( 黔 )이 신성하고 으뜸이라는 뜻을 가졌고, 단( 丹 )은 제단을 나타내기도 하므로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제단 이라는 거룩한 뜻을 가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초기 백제의 도읍지라고 추정되는 하남 시의 위례성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검단이라는 지명이 있다. 그리고 검단의 검( 黔 )자 외에 검소할 검( 儉 )과 소매 금( 衿 )자로 표기된 경우도 있었다. 16세기 문헌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검소할 검, 18세기 후반의 <호구총수>에는 검을 검, 19세기 후반의 <김포군읍지>는 소매 금을 썼다. 이것은 모두 우리말의 어떤 고유어를 음차( 音 借 )하여 쓴 때문이다. 검단 출신의 국어학자 김병욱 교수(인천대학교)는 최근 발간된 <인천 서구 사>에서 그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위의 검-금은 모두 어휘로 예로부터 거의 현대에까지 사 용되어 왔다. 은 감, 검, 금으로 인명, 지명 등에 나타나는 바, 그것은 신( 神 ) 또는 왕( 王 )에 해당하는 의미였으니 단군왕검의 검, 응녀의 곰은 모두 신화의 주인공으로 신적 존재들이다. 예전의 검단면 판도 안에 있던 현 금곡동 쇳골 마을 뒷산 사자봉 남쪽 기슭에 검데이 란곳이있다. 이 마을의 뒷산을 당제라고 부르고 그 왼 편(서편)을 검데이라고 부르는데 검단>검데이로 변천한 것으로 추정되 거니와 검단은 ㄱ단 의 변형으로신또는존장을 의미하는 과 곡 126 천마와 아기장수 외
( 谷 ) 즉 마을을 의미하는 말의 결합이다. 단 은 고대의 지명표기에서 단( 旦 ), 둔( 屯 ), 탄( 呑 ) 등의 글자로 표기되었으니 곡( 谷 )의 뜻이지 만 단순히 지명을 만들기 위한 접미사의 기능도 하여 마을로 해석해도 무난한 경우가 많다. 이렇게 쓰이던 단( 旦 )이 후대에는 의미가 좋은 글 자로 바뀌어 붉을 단( 丹 )으로 써서 기원의 뜻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결 국 검데이는 검, 즉 신( 神 )의 의미와 단( 旦 丹 ), 곧 곡( 谷 )의 뜻이 결 합된 단어로 신 또는 존장의 마을이 나 신에게 제사하는 마을 이라는 뜻이다. 이 마을의 지명으로 검데이와 당제 사이에 계저 라는 곳이 있 다. 계는 훈차로 달, 즉 높다는 뜻이며, 저는 담의 뜻이므로 제단 또 는성의뜻이다. 그러므로 계저는 지존한 제단 또는 높은 성 의 뜻 으로 추정되므로 천신제를 지내는 제단의 뜻으로 이해된다. 금곡리와 오류리 사이의 넓은들 중간쯤에 예전에는 갯골이 있어 조수도 드나들 었다고 하는데 그 갯골을 검단개(검당개), 그 갯골로 흘러드는 하천을 검단천이라 부르는데 이들도 모두 쇳골의 검데이에서 연관된 지명이다. 쇳골은 마을 이름 그대로 예전부터 금, 은, 동, 철이 매장되어 있었고 광복 후까지 채광했다. 이러한 광물자원은 선사시대부터 세력 집단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생산물이 되었는데 그것으로 무기와 장식물을 만드 는한편권력과 부의 상징물이 되기도 했다. 하늘에 제사지내는 제사장 은 무당이며 왕에 버금가는 신분의 소유자이므로 검데이에서 제사를 집전하던 신분의 소유자가 이 마을에서 생산되던 금 동 철을 가지고 상당한 권세를 누리며 살았으므로 그러한 지명이 남아 있고, 또 그것이 옛면의명칭으로 사용된 것이다. 인천의 검단은 백제 때는 양주( 楊 洲 ), 고구려 때 포현( 浦 縣 ), 신라 때는 김포현( 金 浦 縣 ) 소속이었다. 조선 시대 중기에 검단 지구는 검단면, 노장 면, 마산면 등 3개 면으로 구분되었다가 1914년 검단면으로 합해지고 검단 면 금곡리, 당하리 일부가 양촌면과 계양면에 일부 편입되었다. 이 때부터 지명고사 127
1995년 인천시에 편입될 때까지 검단면은 마전리, 당하리, 원당리, 불로리, 대곡리, 금곡리, 오류리, 왕길리, 등 8개 법정리에 41개 행정리를 관할했으며 면사무소는 마전리 원현에 있었다. 그리고 인천에 편입되면서 검단동이 설 치되었고 2002년에 이르러 마전, 금곡, 오류, 왕길, 당하를 아우르는 검단 1 동과 불로, 원당, 대곡을 아우르는 검단 2동으로 분동되었다. 검단도 길게 해안을 끼고 있는 터라 연안에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이 있 었다. 안동포 앞에 서서 보면 바로 드넓은 갯벌 건너 눈앞에 면도( 免 島 ), 서 남쪽으로 큰 섬 길무도( 吉 舞 島 )가 보였다. 오류동 해안에서 보면 북쪽부터 붕도( 朋 島 ), 육도( 陸 島 ), 축도( 丑 島 ) 등이 보였다. 갯벌은 경사가 매우 완 만하여 밀물과 썰물이 빠르게 드나들었다. 사람들은 이 밀물과 썰물의 시간 차를 이용하여 드넓은 갯벌에서 게와 조개와 맛조개를 잡았으며, 썰물을 따 라서 섬까지 걸어가 한두 시간 일을 보고 밀물에 앞서 해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섬들은 서해안 매립사업으로 거의 모두 사라졌다. 물론 이 매립사업으로 인해 검단은 면적은 크게 늘어났지만 바다와 갯벌을 송두 리째 잃어버렸다. 그리고 옛 북서곶 앞바다와 함께 수도권 쓰레기 매립지로 지정되면서 천만 인구의 쓰레기를 받아 안아야 하는 숙명을 안게 되었다. 검단 사람들은 인천에 편입되기 전에도 문화 지향성은 군 소재지인 김포 읍보다는 인천을 향한 측면이 강하다. 그것은 교통상황에 크게 영향 받은 때문이었다. 인천에서 서곶을 경유해 강화로 가는 노선버스가 일찌감치 생 겨 검단의 중심을 관통해 나갔다. 검단인들은 노선버스가 없는 김포읍보다 는 교통이 편리한 인천을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30분 안팎 걸어 나오면 이를 수 있는 백석동의 한들 부락에는 부평을 거쳐 서울로 가 는 노선버스도 있었다. 검단은 서곶과 문화적, 정서적으로 친근하다. 인접해 있다는 지역적 특성 외에 위에서 말한 교통 상황이 가져다 준 조건이 가장 큰 이유이다. 또하나의 이유는 학교 교육이다. 서곶 사람들은 서곶초등학교와 석남초등학교, 검단 사 람들은 검단초등학교와 단봉초등학교, 창신초등학교를 나왔지만 중학교 이 128 천마와 아기장수 외
후 학교 동창이 된 사람들이 많다. 검단 사람들이 김포읍의 학교보다는 인천의 학교들을 선호하였던 것이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것은 검암동에 있는 서인천고교의 전신인 인광중학교의 존재이다. 1950년대에 서곶의 지 역 유지들에 의해 설립되어 영화중학교 분교로 개교한 뒤 서인천중학교, 고려중학교, 인광중학교 등으로 교명을 바꾸어온 이 학교는 졸업생의 거 의 절반이 검단 출신이었다. 그래서 서곶 사람들과 선후배로 이어진 경우 가매우많다. 지명고사 129
3. 계양산은 강서의 진산 계양산은 해발 표고가 395m로 인천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수주악( 樹 州 岳 ), 안남산( 安 南 山 ), 아남산( 阿 南 山 ), 노적봉( 露 積 峰 ), 환여금( 環 如 金 ), 용장자산 ( 鏞 獐 子 山 ) 등의 별칭을 갖고 있었다. 이규보가 지은 <망해지( 望 海 誌 )>에는 산정에 올라가 보면 삼면이 모두 물이 라고 하였다. 남쪽 부평평야는 바닷물과 한강물이 혼합되어 드나들고 서쪽은 서 해가 있고 동쪽은 한강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려 숙종 때 풍수가 김위제 신라의 승려 도선( 道 銑 )의 <신지비사 ( 神 誌 秘 詞 )>의 삼각산 명당 도참설 을들어수도를 개경에서 남경(오늘의 서 울)으로 옮기자고 왕에게 품신하였다. 그의 글에 수주악이 나온다. 삼각산의 남방에 다섯 가지 덕의 언덕이 있으므로 균형잡힌 좋은 저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다섯 가지 덕은, 가운데 면악산( 面 嶽 山 )이 있어 단형 ( 丹 形 )이 되매토형( 土 形 )의덕이요, 북쪽에 감악산( 甘 嶽 山 )이 있어 곡형 ( 曲 形 )이되니수덕( 水 德 )이요, 남쪽에 관악산( 冠 嶽 山 )이 있어 첨예하니 화 덕( 火 德 )이요, 동쪽에 양주 남행산( 南 行 山 )이 있어 직형( 直 形 )이 되니 목덕 ( 木 德 )이요, 서쪽에 수주악( 樹 州 嶽 )이 있으니 방형( 方 形 )이라 금덕( 金 德 ) 이므로 이것 역시도 선대사의 삼경( 三 京 )에 부합합니다. 계양산은 부평과 서곶과 계양 사람들의 정신적 귀의처이다. 세 지역 사람들은 각각 이 산이 자기 고장 산이라고 말하며, 타국이나 타향에 머물 때도 고향이 그 리울 때면 이 산을 떠올린다. 이산은멀리서 떠돌아왔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바다에서 떠올랐다는 전 설도 있다. 옛날에 부평평야는 바닷물과 강물이 혼합되어 드나드는 간사지 130 천마와 아기장수 외
였다. 계양산의 한 줄기는 북으로 뻗어가 거의 한강에 이르는데, 한강은 그 주위를 둥글게 휘어 감아 흐르면서 서해로 흐르니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 처럼 보여서 그런 전설이 생긴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강화 마니산( 摩 尼 山 )의 반조각이 갈라져서 떠돌아왔다는 전설도 있다. 그 래서 마니산을 형산( 兄 山 ), 계양산을 아우산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계양산의 이름은 계수나무와 회양목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어졌다고 알려 져있다. 그러나 계수나무는 열대수목이니 설득력이 약하다. 회양목은 계양 산에 매우 많았다. 고려 시대에 부평 일대를 관장하는 행정관청의 명칭을 계양도호부로 붙이고 그것이 일제 때 부천군 계양면으로까지 이어오면서 대표성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필자의 유년시절 기억에는 안남산 명칭이 선연하게 남아 있다. 사람들은 안남산 불여우 같은 녀석 이라든지, 포수 들이 안남산에서 노루를 세 마리나 잡았다 라든지, 안남산으로 도롱뇽 알 찾아 먹으러 가세 하는 식으로 이름을 사용했다. 계양산에는 세 개의 큰 봉우리가 있는데 표고 395m에 달하는 주봉을 군 자봉 또는 명장군봉이라 부르고, 그 봉우리와 나란히 선 것을 옥녀봉이라 부른다. 두 봉오리와 조금 떨어져 있는 봉우리를 꽃뫼봉[ 花 山 峰 ]이라 부른 다. 그런 봉우리들 이름 때문인지 옛사람들은 이곳을 비범하고 용감한 장군 이 아름다운 미녀(옥녀)와 더불어 꽃밭에서 노니는 명승지라고 여겨왔다. 계양산은 삼국시대에 중국으로 통하는 큰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서 삼국시 대에 이미 민가 5백여 호가 살았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삼남지방과 왕도 개 성을 잇는 중요한 통로였다. 추측하건대 이 길은 가정동 봉화재 앞으로 뻗은 길을 따라 걸어서 심곡동 을거친뒤연희감리교회 앞을 지나 연희동의 옛 연희진터를 지나 지금의 305번 국도를 타고 가서 빈정교와 서인천고교 뒷문 앞을 거쳐 검암동 동사 무소까지 나아간 뒤 오른쪽 상동으로 뻗은 언덕을 따라가 계양산 북쪽 지맥 의 언덕을 넘어가는 것이었다. 일제 초기에 주민들의 강제노역으로 305번 국도가 뚫리기 전 인천 서부지역의 교통로는 이것이었다. 조선 중기 남서곶 지명고사 131
의 전신인 모월곶면 사무소가 검암동의 상동으로 넘어가는 언덕길 초입에 있었던 것, 서곶면으로 통합된 뒤 연희진 자리에 서곶면사무소가 자리잡고, 그 인근에 서곶 경찰지서가 자리잡은 것도 그것과 유관하다. 계양산의 꽃뫼봉과 시천동, 그리고 검암동의 상동 일대를 장모루촌( 長 牟 婁 村 )이라고 불렀다. 이 마을들에는 예로부터 이 곳에 관아가 있었다는 전 설이 전해 온다. 백제와 고구려 때는 부평과 김포 일대를 주부토군( 主 夫 吐 郡 )이라고 불렀고, 신라 때는 장제군( 長 堤 郡 )으로 불렀고, 고려 때에는 수 주군( 樹 州 郡 )으로 불렀는데, 이 곳에 바로 수주의 관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규모가 큰 여각( 旅 閣 )과 저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조선왕조의 건국과 한양천도로 인해, 계양산 일대는 삼남지방을 왕도로 연결하는 주교통로의 기능을 많이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 시간은 길지 않았 다. 장모루촌을 거쳐가는 교통로 대신 계양산의 또다른 산록을 거쳐 곧장 부평으로 넘어가는 큰고갯길인 경명현이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 고 갯길이 물론 이 때 새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삼국시대부터 존속했던 것 이지만 관아가 있는 부평을 거쳐 서울로 가기에는 최단거리 교통로가 되었 던 것이다. 그래서 이 고개에는 도둑떼가 끊이지 않았다. 계양산은 옛날에 도둑떼가 활동하기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인천과 부평 일대에 서가장높고깊은산이며, 아름드리 수목이 우거져 은신하기가 좋고, 산의 동서남북 아래에는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부자들한테서 빼앗을 것이 많았 다. 게다가 산의 허리에 걸쳐진 경명현은 서울로 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 고개는 삼국시대 이래로 개성과 인천, 안산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 으며 길이가 8km에 달했다. 김정호의<대동지지( 大 東 地 誌 )>부평조( 富 平 條 )에는 경명원서십리석곶로( 景 明 院 西 十 里 石 路 ) 라는 기록이 있다. 그 리고 한국 소설의 최고봉이라고 부르는 홍명희의 대하소설<임꺽정>에도 나 온다. 서곶초등학교가 개교하기 전, 서곶의 학동들은 계양산 반대편 산록 아래 있던 부평소학교(현재의 부평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이 고개를 걸어서 넘어 다녔다. 132 천마와 아기장수 외
경명현은 징매고개, 또는 징맹이 고개 라고도 불렀는데 그 명칭은 고 려때이곳에매사냥을 하기 위한 국영 매방[ 鷹 房 ]이 있었기 때문에 매 를 징발한다 는 뜻으로 그렇게 붙여졌다. 천명고개 라는 이름도 있었는데 그것은 도둑이 많아 천 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계양산에는 이 경명현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도둑이 끓었다. 옛날에 충청과 호남에서 범선을 타고 와서 서울로 가는 사람들이나 짐은 이 고개를 지나야 했다. 원창동 환자곶 해안에 있는 정부 세곡창고에서 세 곡을 서울로 싣고 가려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도둑 떼가 자리잡기에 는 안성맞춤이었다. 계양산이 강서지역의 가장 저명한 지형지물이라는 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비행기 조종사들은 김포공항이나 인천공항에 접근하면서 우뚝 솟은 이 산 을보며방위를 찾는다고 한다. 그리고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서곶의 해안 은 남파간첩의 상륙루트로 자주 이용되었는데, 그들의 회고담에 의하면 해 안상륙 즉시 나침반으로 계양산의 방위를 재고 그것으로 서울이나 인천으 로가는침투로를 잡았다고 했다. 계양산에는 3~4부 능선에 회양목이 지천으로 많았다. 그것은 전국적으로 유명하여, 마구잡이식 채취가 이루어졌다. 1960년대만 해도 어디서 왔는지 모를 인부들이 수십 명씩 트럭에서 내려 산록으로 올라가 마구 캐서 가마 니에 담아 트럭에 가득 쌓아올리고 떠나는 것을 무수히 볼 수 있었다. 심지어는 필자가 초등학생이 된 뒤 회양목을 캐는 일에 동원된 적도 여 러번있었다. 기억하기에 서울 어느 관청의 정원을 다시 꾸미는데 필요해 서인천교육청을 통해 요청해온 때문이라고 한 것 같다. 그래서 옛날에 지 천으로 많던 회양목도 거의 멸종되어 갔다.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남아 있 던 회양목 군락은 그 뒤 주택 건축경기가 일어나면서 마구 캐서 멸종되어 버렸다. 도롱뇽도 그러했다. 이른봄이면 수십 명씩 몰려가 맑은 시냇물에 숨듯이 놓여진 것을 잡아다가 몸보신을 했다. 그러나 외지 사람들이 찾아와 마구 채취하여 지금은 거의 멸종단계에 있다. 지명고사 126
4. 화승총의 필수품 계양산 부싯돌 임진왜란에서 참패한 조선 조정이 화승총을 만들고 화약과 함께 신속히 불을 일으켜 심지에 불을 붙일 수 있는 부싯돌을 연구하게 되었다. 거기 열 심히 매달린 사람으로 정두원( 鄭 斗 源 )이라는 무관이 있었다. 정두원은 광주정씨( 光 州 鄭 氏 ) 가문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병서와 경서를 읽고 무예를 닦은 뒤선조21년(1588)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로부터 3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므로 그는 하급 지휘관으로서 혹독하게 전쟁을 치렀다. 전란이 잦아들었을 때, 그는 부하 정효길( 鄭 孝 吉 ), 박무길( 朴 武 吉 )과 더 불어 지나간 전쟁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가 부하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정신적인 무장이 덜 되어 왜놈들한테 짓밟혔지만 그보다 큰 건 무기가 왜놈들한테 뒤진 때문이네. 백성들의 정신적인 무장은 나라님이나 정승님들이 고심할 내용이네. 우리는 무관으로서 무기개발을 힘써야 하네. 왜놈들 조총보다 훨씬 좋은 총과 화약을 만들어야 하네. 정효길이 말했다. 총이야 군기도감에서 단단히들 벼르고 만들려고 애쓰는 모양입니다. 우 리는 총을 발사시키는 심지나 점화장치를 만들어 보는 게 어떨까요? 정두원은 그게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전국의 부싯돌 생산지를 수소문하여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마침내 계양산 근처까지 오게 되었다. 여름에 모월곶의 한 저자에 온 정효길은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피할 겸 빈속도채울겸주막으로 들어갔다. 술손님이 없어 하품을 하고 있던 주모 가 반색을 하며 일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나으리. 134 천마와 아기장수 외
정효길은 마루에 앉았다. 배도 출출하고 하니 알아서 주시게. 계양산에서 잡은 꿩고기 안주와 계양산 약수로 만든 약주가 있습니다. 그걸 주시게. 비에 젖은 갓을 털던 그는 주모가 부싯돌을 툭툭 쳐서 손쉽게 불을 일으 키는 것을 보는 순간 벌떡 일어섰다. 충충하게 어두운 구석에서 부싯돌은 번쩍번쩍 섬광을 일으키며 단 두 번 만에 부싯깃에 불이 붙었다. 부싯깃은 보통의 마른 약쑥이었다. 주모, 그 부싯돌 나좀 보여주게. 정효길은 부싯돌을 받아 들었다. 주방에서 쓰는 것이라 손때가 묻어 있지 만그는그것이 티 하나 없는 순백의 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 것을 부딪쳐 보았다. 번쩍번쩍 불이 일어나는데 몇 번 반복하자 허공에서 잠깐 불길이 일어나 일렁거리다가 꺼졌다. 전국 각지를 다녀 보았지만 이렇 게좋은부싯돌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이걸 어디서 났는가? 그의 물음에 주모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주정뱅이 박판돌이가 줬어요. 이걸 어디서 구했다고 들었는가? 안남산에서 주웠다고 들은 걸요. 그 사람이 어디 사는가? 안남산 아래 고현리에 살지요. 날 좀 만나게 해주게. 아주 중요한 일이네. 주모는 술 심부름하는 아이를 시켜 박판돌을 데려 왔다. 내 부탁을 들어주면 자네석달마실술값을대겠네. 주모가가진부싯 돌있는곳을가르쳐 주게나. 알았습니다. 당장 모시고 갈 수 있지요. 내가 마음이 바쁘지만 비가 그친 뒤 가세. 지명고사 128
정효길은 다음날 박판돌을 데리고 계양산으로 갔다. 그리고 두 군데에 서매우큰석영원석을 발견하였다. 부싯돌로서는 최고라 할 수 있는 강하고 단단한 돌이었다. 정효길의 보고에 따라 정두원은 현장에 와 보 고, 군사들이 휴대할 수 있는 부싯돌을 대량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술주정뱅이에게 발견되었던 원석을 확보함으로써 이 때부터 계양산 부싯돌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 후 원석은 계양산과 주변에서 또 다시 발견되었고 군사용뿐만 아니라 총을 쏘는 포수들에게 애용되었다. 그리고 대궐이나 사대부 집은 물론 백성들도 사용하게 되었다. 전국의 저자에서 단 한번에일어나는 부싯돌, 부평 안남산 부싯돌이오. 하는 한 마디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산 근처에 사는 사람 들은 전국으로 행상을 나갔다. 그들은 근방의 바로뫼 고개(현재의 검암 동 소재)의 특산물인 숫돌과 함께 부싯돌을 지고 나가 팔았다. 부평 안남산의 부싯돌, 부평 바로뫼의 숫돌을 팝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더구나 몇십 년 지난 뒤 담배가 급속도로 퍼져나가면서 부싯돌의 인기는 더 커졌다. 계양산 부싯돌은 개항과 동시에 인천에 진출한 외국 회사 세창양행이 성냥을 수입하고, 뒷날 성냥공장을 인천에 세우면서 인기를 잃었다. 보충 부싯돌은 옥수( 玉 髓 )와 석영( 石 英 )으로 구성된 차고 단단한 암석을 말한다. 회색 갈색 흑색 등 여러 가지 빛깔이 있으며 반투명 또는 불투명하 다. 두 개의 부싯돌을 잡고 부딪치면 불이 일어나는데, 그 위에 마른 쑥 같은 부싯깃을 놓아 불을 붙였다. 계양산의 부싯돌은 까마득한 전설이 아니다. 필자는 소년시절에 무수히 많 은 차돌을 보았다. 계양산뿐만 아니라 집 앞 산기슭에서 칡뿌리를 캘 때도 나 왔다. 소년들은 거의 수정처럼 단단한 이 돌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으며 밤에 병정놀이할 때 번쩍번쩍 신호를 하며 놀았다. 136 천마와 아기장수 외
5. 수십 번 쓰러진 중심성 사적비 계양산 경명현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로 길게 이어진 성벽의 흔적이 지금 도남아있는데이것이 중심성( 衆 心 城 )이다. 이성은부평부사 박희방( 朴 熙 房 )이 백성들을 부역으로 동원해 쌓았다. 이양선의 자주 출현하자 장차 있을지도 모르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비한 고종이 교시를 내렸고 박희방은 고종 20년(1883) 9월에 쌓기 시작하여 한 달만에 완공했다. 경명현은 한반도 남북을 가로지르던 옛 중심 교통로의 한 요충이었고 이 곳을 통과해 70리를 가면 한양에 이를 수 있었다. 서해안을 지키는 수비군 이 무너지면 2~3km 떨어진 이 곳에서 적을 막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고종은 이 고개에 성을 쌓게 하였다. 축성을 끝내고 박희방은 성문 옆에 축성의 경위를 기록한 중심성 사적 비 를 세웠다. 그는 고을의 원로들에게 말했다. 이 사적비는 자기 목숨을 초개같이 던져 오랑캐를 막아야 한다는 호국의 정신을 길이 알려주게 될 것입니다. 그는 비석을 세우고는 중심성을 감회어린 눈으로 돌아보았다. 나라 경제 가 어렵고 백성들도 사정이 어려운데 그는 악전고투해서 이 성을 쌓았던 것 이다. 신식 총을가졌다는 서양 오랑캐들이 바다에서 상륙해 서울로 가려면 여 기를 장악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여기서 목숨을 걸고 건곤일척 의 전투를 할 것입니다. 그는 다시 고을 원로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이 사적비는 엉뚱한 속설 때문에 수십 번을 쓰러지고 다시 세워졌 다. 이 곳에서 가까운 지금의 공촌동과 연희동, 심곡동 사람들은 어떤 연유 지명고사 130
에서인지 그것이 서 있으면 자기 집안 며느리가 바람이 나서 부정한 행실을 한다고 믿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산아래 박첨지네 며느리가 옆마을 홀아비와 정분이 나서 내쫓겼다지 않 은가. 중심성 비석이 여자들로 하여금 외간남자의 품속을 그리워하게 만든 다네. 그의 벗이 말하였다. 나도 그이야기를 들었네. 최근 수년간 우리 마을이나 이웃 마을에 젊은 여자가 탈선하는 일이 몇 차례나 생기기 않았나. 그게 모두 그 비석 때문이 라네. 또다른사람이말하였다. 우리들 모르게 마누라가 바람이 나면 어떡하나. 그런 속설이 퍼져 나가고 마침내 누군가가 그 사적비를 쓰러뜨렸다. 부평부사 박희방은 비석을 다시 세우며 어이가 없어서 탄식을 했다. 어리석은 백성들 같으니라구. 걸핏하면 이양선이 나타나 통상을 하라고 협박을 하고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져 있는 때가 아닌가. 그걸 막기 위해 성곽을 쌓고 몸을 던져 나라를 지키자고 한 비석에 웬 부정한 여자들 을거기끌어다 붙이는가. 그리고 그는 명령하였다. 널리 알려라.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를 만든 자는 투옥하고, 그것을 퍼뜨리 는자는장형( 杖 刑 ) 서른 대, 구경하고 들은 자도 열 대에 처하겠노라. 그러나 이상하게 돌아가는 민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경험 많고 판별 력이 높은 관장이었으나 귓속말로 퍼지는 유언비어를 차단할 수 없었다. 게 다가 사적비를 누군가가 또 쓰러뜨렸다. 박부사는 명령하였다. 어서다시일으켜 세우라. 그리고 거기 경비병을 세우라. 그래도 막을 수가 없었다. 언제 경비병의 눈을 속였는지 사적비는 또 쓰러 138 천마와 아기장수 외
졌다. 그렇게 쓰러지고 세워지기를 반복하자 박부사는 다시 일으켜 세우기 를 포기하였고 다음해 다른 관직으로 옮겨갔다. 박부사가 전출되어 갔지만 중심성 사적비는 쓰러지고 일어서는 일을 반 복했다. 박부사 대신에 누군가가 열심히 다시 세웠는데 그것은 마을의 여인 들이 정절을 잃기를 바라는 짓궂은 한량들이었다. 그들은 밤에 키득거리며 성으로 갔다. 허무맹랑한 말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실제로 그리되지 않았는가. 지난 삼 년간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정분이 났는가 말일세. 그러게 말일세. 비석이 다시 세워졌다는 소식이 들리면 여자들은 외간남 자의 거시기가 세워진 것으로 여겨 스스로 눕혀지고 싶은가 보이. 우리 같은한량들에게 여자들이 눕혀지고 싶어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고 마운 일인가 말이야. 그들은 사적비를 세우고 산을 내려왔다. 그러면 누군가가 또 쓰러뜨렸다. 그들은 젊고 아름다운 아내를 둔 사람들 이었다. 그렇게 쓰러지고 세워짐을 끝없이 반복한 중심성 사적비는 광복 후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성문인 공해루도 무너져 자취가 사라지고 중심성도 거의 다 무너진 채 그 비석만 덩그러니 누워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인천상륙작전 때 박물관이 파괴되면서 사적 비는 없어졌다. 어떤 사람은 미군의 함포를 맞아 산산조각이 났다 하고, 어떤 사람은 무 너진 박물관에서 누군가가 꺼내서 계단이나 담장을 쌓는 재료로 썼을 것이 라고 말한다. 보충 중심성은 부평의 한 애국심 많은 부자가 헌금한 돈과 백성들의 울력으 로 쌓았다고 전해진다. 필자의 선친이 생전에 실측한 노트에 의하면 성문을 중심 으로 동쪽이 171m, 서쪽이 297m, 총연장이 471m였다. 성곽의 아래 너비는 3.3m 맨위 너비는 2m였다. 지명고사 132
그러나 성을 쌓을 때 한달 만에 완공한 것이라 별로 단단하지 못했다. 자갈 과흙을섞어쌓아올리고 외부를 돌로 감쌌으나 엉성하였다. 재정도 부족했 지만 현장에 축성 전문 토목기술자가 없었고 지휘자인 박희방도 문관 출신이 었다. 부사 박희방은 백성들의 마음을 모아 축성했다 하여 중심성( 衆 心 城 ) 이란 이름을 붙였다. 성문은 공해루( 控 海 樓 )라고 이름짓고 현판을 걸었다. 한 번도 군사작전이 일어나지 않았고 일제에 강제 합병된 뒤 방치되다가 10년쯤 된 뒤부터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성문은 1914년에 일제가 헐어버렸다. 말썽 많았던 중심성 사적비 내용(한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계양산 서쪽에 고개가 있으니 그 이름이 경명이고 연해관문이라 이를 수 있다. 내가 이 고을에 관장으로 와서 방어를 결심하였으나 바로 이루지 못하 였는데 그 이듬해 9월 말에 폐하의 조칙이 있어 성을 쌓게 되었다. 아전과 백 성들에게 여기 관문을 지켜야 나라와 고을이 안전한 점을 말하였더니 백성들 이 즐겁게 울력에 응하여 서쪽에 장대를 쌓고 군사훈련을 하는 곳으로 삼았 다. 문은 고개 이름을 따서 경명문이라 하고 바다를 바라보며 지키게 하는 뜻 으로 누각을 공해루라 하고 성 이름을 중심이라 한 것은 읍민이 마음으로써 성을 만들었다 함이라. 그런 연유로 중심성이라 하였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 랴. 아울러 무기를 고치고 포사들에게 굳게 지키게 했다. 성을 다 쌓은 날에 고을의 여러 사람들이 이 업적을 기리는 글을 문장을 잘 쓰지 못하는 나에게 쓰게 청하므로 특별히 읍의 상 하동에서 금 60냥을 출연하여 축성자금을 마 련한 것을 갸륵하게 여기며 이 글을 쓰노라. 광서 9년 계미 10월 행부사 박희방이 기록하고 쓰다. 140 천마와 아기장수 외
6. 중심성 공해루에 걸렸던 한시 <부평팔경> 계양산 경명현에 중심성을 쌓은 부평부사 박희방은 축성이 끝난 뒤 성문 누각 공해루( 控 海 樓 )에 <부평팔경>이라는 사언고시( 四 言 古 詩 )의 한시를 써 서 걸었다. 이것이 박부사의 자작시인 것은 짐작할 수 있으나 8개소를 부평 관내 최고의 절승이라고 한 것이 그의 생각인지, 당시에 일반화된 인식에 따 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로부터 비롯되어 인천과 부평 사람들은 물론 부평 관아에 오는 묵객 시 인들은 부평팔경을 즐겨 찾았다. 그런데 그 8개소 대부분이 서곶에 위치하니 지금도 돌이켜볼 만하다. 원문을 해석하면 그것을 알 수 있다. 桂 陽 孤 鐘 (계양고종) 계양산의 외로운 종이라는 뜻이다. 계양산 중심 성공해루에걸렸던 종을 말한다. 蘭 浦 歸 帆 (난포귀범) 경서동 난지도 포구에 돌아오는 돛단배의 아름다 움을 말한다. 大 橋 漁 火 (대교어화) 한다리에서 밤에 고기잡이하는 불빛을 말한다. 한다리는 계양구에 있다. 景 明 落 照 (경명낙조) 경명현에 지는 해라는 뜻으로 계양산의 유명한 경명현, 일명 징맹이 고개로 지는 저녁해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溫 洞 瀑 布 (온동폭포) 온수동의 쏟아지는 폭포를 표현했다. 부천의 온 수가 옛날에는 부평 관내였다. (고성목적) 옛 성에서 부는 목동의 피리 소리라는 표현으로 계양산 고성의 정취를 담았다. 遠 積 暮 雨 (원적모우) 원적산에 내리는 저녁비를 표현했다. 원적산은 지명고사 134
부평구와 인접해 서구에 걸쳐 자리잡고 있다. 西 川 院 沙 (서천원사) 서쪽 시내에 쌓인 모래라는 표현으로 아마도 빈정천의 모래밭 정경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보충 <계양팔경>이라는 제목을 가진 정지석( 鄭 芝 錫 )의 시가 있다. 이 시 도8구의 사언고시 형태로 되어 있는데 서곶의 원로들 일부가 박희방의 <부 평팔경> 시와 혼동하거나 두 사람의 시를 뒤섞어 기억하고 있어 자료를 찾아 옮겨 본다. 그리고 부평향교를 지낸 정영근( 鄭 英 根 )의 <서곶팔경( 西 串 八 景 )> 이라는 시가 있어 그것도 옮겨 싣는다. 桂 陽 八 景 (계양팔경) 정지석 虛 庵 冷 井 (허암냉정) 검암동 허암산에 있는 찬 우물 雷 岩 宿 雲 (뇌암숙운) 벼락바위에 머무는 구름 蘭 浦 靈 葉 (난포영엽) 난지도의 신비한 난지초 잎 桂 山 懸 瀑 (계산현폭) 계양산 절벽에 내걸린 폭포 尾 島 落 照 (미도낙조) 서해의 꼬리섬에 지는 해 鷹 峯 朝 輝 (응봉조휘) 매봉재의 빛나는 아침빛 琢 玉 成 文 (탁옥성문) 탁옥봉에서 수도하여 문장을 이룸 天 馬 皇 瑞 (천마황서) 천마산의 상서스러운 기운 西 串 八 景 (서곶팔경) 정영근 桂 陽 輪 月 (계양윤월) 계양산에 떠오른 둥근 달 虎 島 落 照 (호도낙조) 범섬으로 떨어지는 저녁 낙조 銀 波 沈 月 (은파침월) 서해 만조의 파도 위에 잠긴 달 142 천마와 아기장수 외
蘭 浦 歸 帆 (난포귀범) 난지도 포구에 돌아오는 돛단배 北 川 細 柳 (북천세류) 북쪽 냇가에 늘어진 수양버들 西 湖 垂 釣 (서호수조) 서쪽 호수에서 낚시하는 모습 虛 岩 古 跡 (허암고적) 검암동 허암산에 남은 옛 모습 黑 岩 龜 形 (흑암구형) 검암동의 거북 모습의 검은 바위 지명고사 136
7. 원당동의 당( 堂 )에 대한 궁금증 원당동은 조선조 초기에 원당( 元 堂 )이라는 당이 있어서 그런 지명이 붙었 다고 전해 온다. 이 원당의 의미는 상당히 큰 것이어서, 아래쪽에 당하리( 堂 下 里 )라는 지명이 생겼고 원당으로 들어오는 입구는 당곡리( 堂 谷 里 )라는 지명이 붙었다. 그러므로 이 당 의 의미를 안고 있는 지역은 상당히 넓다. 원당 또는 당( 堂 )의 실체는 무엇일까. 평생 동안 인천의 향토사 연구를 한 필자의 선친도 의문을 가졌으나 명확한 결론은 얻지 못했다. 주변 마을에는 이것을 추측하게 하는 전설조차 없다. 다만 이 곳은 장릉이 있는 북성산 남 쪽의 한 봉우리인 옥계봉으로 산림이 울창하여 좋은 목재가 생산되는지라 좋은 집을 지어 원당이라 했다는 이설( 異 說 )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곳에 대한 이야기는 필자의 답사기로 대신하려 한다. 설화가 없 음에도 굳이 글을 쓰는 것은 답사 때 느낀 신비로움 때문이다. 필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하여 검단 지역의 현지 답사에 나서면서 이 당터 를 밟아보기로 결심했다. 평생을 원당의 옥계봉 아래서 살아온 김병학 선생 이 노구를 이끌고 앞장서 주었다. 원당터가 있는 옥계봉을 오르기 위해서는 원당동 산 37번지의 공장 뒤편 가파른 언덕을 타고 올라가야 했다. 경사가40~50도 되는 가파른 구릉을 오 르는데 오랫동안 사람이 오르지 않아서인지 길이 수풀에 묻혀 있었다. 여기 저기 아람이 벌어서 저절로 떨어진 붉은 회오리밤들이 눈에 띄어 열심히 주 워 주머니에 넣으며 올라갔다. 밤나무, 졸참나무, 오리나무 들이 밀밀하게 들어선 교목지대를 뚫고 들어가는데 길은 보이지 않았다. 20분쯤 숨을헐떡이며 올라갔을 때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교목들이 사 라졌다. 대신 넝쿨과 관목들이 뒤엉킨 평지가 나타났다. 건평이 100평쯤 되 는사찰암자가 들어앉으면 좋을 만한 곳이었다.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144 천마와 아기장수 외
지팡이 삼아 관목의 풀숲을 헤치니 여기저기서 기와 조각과 주춧돌 따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몇 군데 파묘( 破 墓 ) 흔적이 있는 구덩이가 보였다. 그평지가 끝인줄알고사진을 찍는데 김선생이 말씀하셨다. 3단으로 되어 있으니 더 올라가세. 비탈을 더 올라가자 또 다른 평지가 두 차례 나타났다. 돌보지 않는 묘지 도 나타나고 풀숲에 숨어 있는 약수터도 나타났다. 대체로 보아 지금이라도 법당 네댓 채를 가진 불교 사찰을 지으면 딱 좋 을것같은명당이었다. 이곳에산막이라도 짓고 살았으면 좋을 듯한 매혹 적인 장소였다. 그런데 문득문득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하단 중단 상단 모두 합 해2천평정도로 보이는 그 곳이 소나무는 하나도 없고 무릎 높이 만한 교 목하나 자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50~60미터 옆에 교목들이 울타리처럼 늘어섰으니 씨앗이 날아와 뿌리를 내릴 만도 한데 온통 수분이 많은 넝쿨식 물뿐이었다. 결코 벌목 때문이 아니라 교목이 자생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필자는 문득 가방에 넣어온 <신증동국여지승람> 김포지역 복사본을 열었 다. 원당이라는 곳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언뜻 느끼기에 상고시대에 천신 숭배를 위한 기도처가 있었거나 후대에 불교사찰이 들어섰던 곳인 듯했다. 그렇다면 근세에 불교 사찰이 없어졌을까. 그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골자기의 평지를 덮은 넝쿨식물들이 수분이 많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선생, 내 생각에 여기는 산 전체의 지하수 통로인 듯하네. 그래서 수맥 이워낙왕성하여 사찰이 못 견디고 내려간 거지. 김선생의 말씀에 필자는 동의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특히 이 산 너머 북성산에 장릉을 만들 때 지하수 문제로 곡절이 있었다는 전설이 있지 않습니까? 김병학 선생은 이 골짜기의 3단 평지에 자리잡은 묘지들을 바라보며 말해 주었다. 이 곳은 우리 근세에 풍산김씨 소유였네. 저 아래 파묘 자리를 보지 않았 지명고사 138
는가. 거기 묘를 썼는데 자손은 번성했지만 영화는 없었네. 그래서 묘자 리가 잘못되었다 생각해 이장했지. 그 뒤 김포공항이 개발될 때에 그 곳 에있던선영을 잃게 된 고씨 가문이 이 산을 사서 조상들을 이장해 왔 네. 이장을 추진한 사람이 벽돌공장 사장으로 돈을 많이 번 사람인데 그 뒤 사업이 갑자기 기울어 망했고, 장손이 자살했고, 후손이 변변치 않았 네. 아직 일부가 남아 있긴 하지만 그 사람들도 묘를 이장했네. 필자는 풍수지리를 잘 모르지만 수맥이 강한 곳에 집도 묘지도 들어앉 으면 나쁘다는 속설을 생각했다. 산을 내려오면서 김병학 선생이 다시 몇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골짜기를 하늘이 뻥 뚫려 보인다 하여 천( 天 )나무골 이라 불렀 다는 것과, 가장 늦게 얼음이 녹아 냉장고가 없던 시대에 5월에도 얼음 을얻을수있었다는 이야기였다. 매혹적인 명당으로 느껴지면서도 사라진 영화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 는듯한장소, 신비감과 궁금증을 안은 채 필자는 원당터를 내려왔다. 146 천마와 아기장수 외
8. 인심이 넘쳐난 두밀 마을 대곡동 두밀( 斗 密 )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네모진 말[ 斗 ]같이 생겼다 해서 그런 지명이 붙었다고 전한다. 그것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옛날에 이곳은 드넓은 경작지를 갖지 않은데다가 사방이 산으로 막혀 다른 마을과 왕래하기도 힘들었다. 어느 해 집도 절도 없는 사람들이 이 곳으로 들어와 산기슭을 일구기 시작했다. 내 땅이라고는 바늘 하나 꽂을 곳이 없어 굶주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열심히 땅을 파서 나무 등걸을 캐내고 있는 데스님한분이지나갔다. 나이 많은 사람이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은 어느 도량에 계신지요? 소승은 망해사에 몸담고 있습니다. 스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산아래 잡초로 뒤덮인 평지에 눈길을 던졌다. 저기를 개간하시지요. 거기를 파보려고 했지만 땅이 메말라서 괭이와 삽날이 부러져 나갔습니 다. 겉만 그렇지요. 겉으로는 못쓰는 땅처럼 보이지만 땅 밑으로 수맥이 지나 가 아무데를 파도 한 길만 파면 물이 펑펑 쏟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잊어서 는안될게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나이 많은 사람이 물었다. 스님은 염주를 굴리며 입을 열었다. 물이 넘치고 곡식이 넘치면 그것을 아낌없이 남에게 주어야 합니다. 정말물이넘치고 곡식이 넘친다면 그렇게 하구 말구요. 사람들은 스님의 말을 믿고 땅을 파 보았다. 역시 처음에는 바위처럼 단단 지명고사 140
해 힘들었지만 일단 그것을 뚫고 들어가자 한결 부드러운 흙이 나왔다. 그 스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애. 흙에 물기가 배기 시작했어. 그래. 어서 파보세. 한길가까이 파고 들어가자 샘물이 기다렸다는 듯이 터지면서 솟아 올랐 다. 사람들은 산기슭을 개간하던 일 따위는 잊어버리고 샘을 여러개 팠다. 모든 샘에서 물이 풍부하게 솟아나와 메마른 땅을 적셨다. 사람들은 그 곳을 옥토로 바꾸었다. 정말 스님의 예언대로 물이 넘치고 곡식이 넘쳤다. 특히 바로 앞에 있는 논은 벼가 잘 자라고 열매가 많이 열 렸다. 마치 가마솥처럼 많은 소출을 내는 곳이라 그곳을 가마 라고 불렀다. 그들은 굶주림을 면하게 해 준 스님을 잊지 못했다. 스님이 남겨준 말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후한 인심을 베풀었다. 그것은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계속되었다. 어느 해 큰 가뭄으로 인해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죽어 갔다. 그런 가운데 소문이 퍼져 나갔다. 어떤 사람이 저자 거리에서 말했다. 두밀에 가면 먹을 게 있을 것이오. 거긴 물이 마르지 않아 가뭄을 끄떡 없이 이겨냈을 것이고 인심이 참 좋단 말이오. 그말을받아다른사람이말했다. 내가 작년에 쌀을 사러 거기 간 적이 있소. 글쎄 쌀을 말[ 斗 ]로 되어서 파는데 수북이 쌓아 올려 도대체 말이 보이지 않았소. 또다른 사람이 말했다. 거긴 산으로 둘러싸여 논이 많지도 않은데 인심이 좋소. 그런 이야기들 때문에 굶주린 사람들이 두밀로 찾아들었다. 사흘 동안입에풀칠을 못했습니다. 먹을 걸 주십시오. 두밀 사람들은 자신들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굶주리는 사람들을 도왔 다. 그러자 다음해에 풍년이 왔다. 두밀 사람들은 굶주린 사람들이 찾아 오 지않아다시저자에서 말을 후하게 하여 곡식을 팔았다. 148 천마와 아기장수 외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다시 두밀은 인심이 샘처럼 넘쳐나는 곳이야. 라고 말하였다. 보충 두밀은 두곡( 杜 谷 )이라는 한자 지명으로 불리웠다. 산이 사방으로 막히고 계곡이 깊은데다 나무가 무성하고 조용하여 두견새가 낮에도 놀러 온 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전한다. 지명고사 149
9. 연희동의 군사기지 연희동은 검암동 장모루에 있던 모월곶면 행정중심이 옮겨오면서 서곶 지 역의 중심이 되었는데 그것은 이 곳에 해안을 지키는 군사기지가 있었기 때 문이라고 서곶의 원로들은 말한다. 1880년대 후반에 들어 통상을 요구하는 이양선들이 서해에 나타나고, 고 종 3년(1866)에는 병인양요가, 고종 8년(1871)에는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그리고 고종 12년(1875)에는 운요호( 雲 揚 號 )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 조정은 서해안 방어를 위해 1879년 7월 연희동에 수군기지인 연희진 을 설치하고 용의머리산에 용두포대를 배치하였다. 배치된 포는 강화의 초 지진이나 광성진에 설치한 것과 같은 구식 가농포였다. 연희동에 수군기지 가 들어선 것은 바다를 향해 길게 반도처럼 뻗어간 지형 때문이었다. 뻗어 간 지세가 마치 용이 엎드려 있는 듯한 형상이고 바다로 뻗어간 땅끝의 산 이용의머리처럼 생겨 그곳을 용의머리산 또는 한자음 그대로 용두산 이라고 불렀다. 가농포 2기는 그 용의머리산의 머리 부분에 있었다. 필자는 소년시절에 여러 차례 그 곳에 간 적이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 지만 참호와 호안( 護 岸 )이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고 쇳조각도 더러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는 가기 어려웠다. 포대가 있던 바로 그 자 리에 북한의 간첩 침투를 막기 위해 해안경비 부대가 주둔하고 민간의 출입 을 막았던 것이다. 그 때 필자는 막 향토사 연구를 시작하셨던 선친을 따 라 군부대의 허락을 얻어 그 곳에 간 적이 있었다. 정확히 바로 그 자리였 다. 포대가 놓였던 그 자리에 57밀리 무반동총과 중기관총 따위가 은폐된 채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이었던 용두포대 자리는 청라 매립지(일명 동아매립지) 공사로 바다가 메워지면서 육지로 변했고 군사적인 중요성도 150 천마와 아기장수 외
잃어버렸다. 포병대의 중대본부라고 이를 수 있는 연희진은 안동네 깊숙한 곳에 있었 다. 보다 자세한 설명을 위해 지리적인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지금 연 희동 안동네를 가르고 나가는 305번국도가 생기기 이전의 큰길은 조금 달랐 다. 봉수대가 있었던 가정동의 축곶산 앞으로 놓인 길을 따라와서 심곡동을 거쳐(이 길은 뒷날의 국도와 일치한다) 밋밋한 언덕을 올라가 현재의 연희 교회까지 가서 왼쪽으로 내려갔다. 그러면 곧장 연희동 안동네를 거치게 되 고다시밋밋한 언덕길을 오르는 곳에 연희진이 있었다. 그 언덕에 도당제 를 지내는 엄나무 도당수( 禱 堂 樹 )가 있어 도당재라고 불렀다. 이 언덕에서 길은 두 갈래로 갈라져, 계속 넘어가면 또 다른 군사기지가 있던 과기평(빈 정교 부근)으로 가게 되고, 오른쪽으로 뻗은 길을 타고 가면 징맹이고개를 넘어 부평으로 갈 수 있었다. 이 길 때문에 자동차가 달릴 수 있는 신작로 가 생기기 전 문을 연 서곶초등학교와 부평경찰서 서곶주재소(뒷날 서곶지 서)도 이 길 옆에 자리잡았다. 연희진은 1890년에 폐지되었고, 그 자리에는 모월곶면 사무소가 자리잡고 그뒤서곶면사무소가 자리잡았다. 그리고 8 15 광복 후에는 인천시 서곶 출장소가 뒤를 이었다. 조선 조정은 연희진과 포대를 설치한 것으로 안심이 안 되었는지 1883년 에 이곳에서 지척으로 가까운 경명현에 중심성을 쌓고 기연해방영( 畿 沿 海 防 營 )이라는 사령부급의 큰 군사지휘부를 설치하고 민영목( 閔 泳 穆 )을 지휘 관으로 파견했다. 그리고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시험을 통해 해안 감시병을 공개로 모병했다. 전설에 의하면 사령관 민영목은 기존의 해안 경비병들이 나태하고 무능하 여젊고빠른병사들을 보충하려고 고심한 것으로 보인다. 시험과목은 활쏘 기와 돌팔매질이었다. 첫째로, 활을 한 번에 다섯 대씩 3회를 쏘아 채점하 고, 둘째로는 무명 끈에 돌을 싸서 멀리 던지기를 10회 실시해서 채점하였 다. 그리하여 500명을 선발해 입대시키고 일정기간 훈련을 시킨 뒤 해안경 지명고사 144
비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연희진은 너무 교통이 불편한데다 막상 전투상황이 일어나지 않 아 기연해방영은 몇 년 뒤 서울 용산 만리동으로 이전하였다. 연희동이 조선 말기에 군사적 요충으로 중요한 기능을 한 결과는 지금 지명으로 남아 있다. 그 하나가 군인길이다. 지금 연희교회와 농협창고가 있는, 지대가 높은 지역이며 위에서 말한 대로 국도에서 옛 연희진으로 가 는 샛길이 시작되는 곳이다. 연희동 원로들은 연희진에서 군인들이 이 곳을 거쳐 용두포대를 향해 행군한 터라 그런 지명이 붙었다고 말한다. 지금도 연희동의 토박이들은 이 언덕마을을 군인길 도는 군잇길이라고 부른다. 또하나남은지명이 주란마루이다. 연희동 옛 국도에서 농협창고를 지나 들판으로 향한 길을 가리킨다. 주란마루는 주마마루라고도 불렸으며 한자 로 주자현( 走 者 峴 )이라고 썼는데 그대로 뛰어 달리는 길이라는 의미를 생 각하면 연희진 본부에서 용두 포대까지 군명을 받은 전령이 달려갔을 것이 라는 추측과 연결해볼수있다. 이지명은지금도살아있다. 연희동토박 이들은 이곳을 주란마루라고 부르며, 이 부근에 세워진 아파트 단지에 붙여 진거리이름도 주란마루로 적혀 있다. 보충 연희진 터에 서구청이 1994년에 연희진지비( 連 喜 鎭 址 碑 )를 세웠다. 갈 색의 대석 위에 두 개의 비석 받침대와 비 양편에 흰색 돌기둥을 세우고 그 가운 데에 다섯 가지 색의 비석을 세웠다. 둥근 공의 모습이며 높이가 60cm, 넓이는 92cm이다. 고종3년(1866)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가 경서동 난지도와 호도에 정박하 였다가 강화도에 상륙하고, 고종 8년(1871)에 미국 함대가 호도 부근에 정박했다 가 강화도를 침략했으며, 고종 12년(1875)에는 일본군함 운요호( 運 揚 號 )가 영종 진을 파괴하니 이를 방비하기 위해 연희진을 세우고 연해에는 요소요소에 포대 를 축조하여 군대를 배치해 방어하였다 고쓰고있다. 필자의 선친은 <인천지명고>에서, 용두포대를 놓기 전에 이미 주란마루길이 152 천마와 아기장수 외
뚫렸다고 썼다. 조선 영조 때 판금( 判 禁 )벼슬을 지낸 구선복( 具 善 復 )이 부친의 묘를 용의머리 반도의 용두산에 쓰면서 이 길을 닦았다고 기술했다. 짐작에 그 때 만들어진 길이 교통을 용이하게 하여 뒷날 용두포대를 설치하는 또하나의 요 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사전에 의하면 민영목은 조선 말기 세도 가문이었던 여흥민씨( 驪 興 閔 氏 ) 집안 사람으로 순조 26년(1825)에 출생해서 고종 21년(1884)에 죽었다. 그의 경 력을 더듬어보면 기연해방영 사령관으로 재임한 것은 1년 정도인 것을 알 수 있 다. 그는 연희동에 부임한 다음해 갑신정변 때 개화파에 의해 살해되었기 때문이 다. 그리고, 고종 8년에 알성문과( 謁 聖 文 科. 임금 앞에서 시행한 과거시험의 문 과)에 급제한 것을 보면 그는 문관이면서 무관이 맡아야 하는 군사기지 사령관을 맡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조판서, 한성부판윤, 평안도관찰사 등을 지냈고, 박 문국에 책임자로 있을 때는 <한성순보>를 창간하였다. 1883년 인천 화도진에서 한미통상수호조약을 체결할 때 조정의 대표로 서명했으며 인천의 해안마을을 일 본의 치외법권 지대로 승인하는 일본조계조약도 체결했다. 지명고사 146
10. 저절로 오므라지고 넓어진 심곡동 은행나무 철마산의 심곡동 쪽 산자락, 현재 인천지방공무원 교육원 경내에 수령이 7백년이 넘는 거대한 은행나무 고목이 서 있다. 교육원 건물이 들어서기 전 에는 2~3km 멀리서도 그 장려한 모습이 보였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 모습과 비슷하여 개신교 신자들은 기도의 말을 중얼거리 기도 했다. 이 거목은 여러 차례 벼락을 맞아 큰 가지가 타버렸고 구멍이 나 있다. 심곡동에는 이 고목과 연관하여 두 개의 전설이 구전되고 있다. 평화시에는 구멍이 좁아지고 전란시에는 커진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때는 사람이 지게 를지고드나들 정도로 커졌었다 한다. 또 하나는 이 곳을 명당으로 알고 묘자리로 탐낸 사람이 벌을 받은 이야 기이다. 옛날 심곡동에 사는 이씨 성 가진 사람이 지관을 찾아갔다. 지관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아버지 묘를 잘못 썼는지 집안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관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 아버지 묘를 자신이 찍어 준 기억이 없었다. 장례 때유명한 지관에게 묻지 않고 아무데나 묻었거나, 아무것도 모르 는 어중이떠중이 지관에게 물어서 묻었기 때문이오. 더 불행한 일이 생기기 전에 대책을 세웁시다. 이씨는 겁이 덜컥 나서 지관을 모시고 아버지 묘로 갔다. 지관은 딱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무식해도 유분수지 자기 아버지를 최악의 혈( 穴 )에 묻어놓고 집안이 잘 154 천마와 아기장수 외
되기를 바라다니. 이씨는 지관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지관님이 좋은 묘자리를 잡아주십시오. 내가 사례는 서운치 않게 해드리 지요. 지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한번찾아보리다. 지관은 나침반을 꺼내들고 한나절을 찾아다녔다. 이씨는 열심히 그를 따 라다녔는데 그는 해질 무렵 나침반을 주머니에 넣고 입을 꾹 다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씨가물었다. 지관은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 아버지나 당신이나 사주가 강해요. 그래서 웬만한 곳은 묘자리로 맞지 않아요. 당신 아버지 묘터로 딱 알맞은 한 군데가 있긴 하지만 거긴 엄두를 내기 어려운 곳이오. 이씨는다시지관을 붙잡고 늘어졌다. 거기가 어딥니까? 늙은 은행나무가 선 자리요. 거긴 정말 영험이 있는 자리요. 당신 집안 을 부귀영화로 이끌어줄 곳이오. 이씨는 저녁 햇빛을 받고 있는 은행나무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그냥 늙어 죽어 가는 나무로 보였다. 저까짓것, 곧 말라죽을 나무인 걸요. 내가 베어버리겠소이다. 뒷일은 내 책임이 아니오.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지관은 그렇게 말했다. 이씨는 마을의 순박하고 어수룩한 박씨를 골랐다. 박씨는 가난하여 농사 일에 품팔이를 하며 사는 사람이었다. 자네가 은행나무를 잘라주게. 이씨의 말에 박씨는 눈을 끔벅거렸다. 지명고사 148
그 나무는 전쟁이 날 때 저절로 오므라지고 넓어지는 나무라는데 베 어도 될까요? 그건 다 지어낸 이야기야. 은행나무가 문어대가리도 아닌데 어떻게 입을 벌리고 오므리고 한단 말인가? 맞아요. 은행나무는 나무이지 문어가 아니지요. 문어처럼 입을 벌렸 을리가없지요. 그래. 그러니까 베어도 된단 말야. 그리고 나는 스무 날치 품삯을 줄 거야. 스무 날치품삯이라고요? 박씨는 입이 벌어졌다. 다음날, 이씨가 지켜보는 앞에서 박씨는 도끼로 은행나무 고목을 자르 기 시작했다. 탕탕탕 깊은 산중에 도끼 소리가 울려 펴지고 놀란 장끼가 꺼겅꺼겅 울며 날아갔다. 7백년이나 된 나무는 단단하여 도끼가 파고들 지 못했다. 열댓 번을 찍었을 때였다. 갑자기 나무전체가 우우웅 하고 우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고개를 들어보니 나무 윗동에 달린 잎들 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도끼질을 하는 박씨는 겁을 먹었으나 이씨가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자네가 도끼질을 힘차게 해서 울린 거야. 박씨는 다시 도끼를 들어올렸다. 대여섯 번을 찍었을 때였다. 아까처럼 고목이 잎들을 흔들며 울었다. 그순간도끼질을 하던 박씨가 가슴을 그러쥐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지켜보던 이씨가 깜짝 놀라 부축하자 그는 한 마디 중얼거렸다. 아아, 내 가슴이 오그라들어. 그것이 끝이었다. 이 사람아, 정신 차려! 이씨가 계속 그의 뺨을 때렸으나 그는 눈을 뜨지 못했다. 그리고 그대 로숨을거두었다. 156 천마와 아기장수 외
박씨가 절명한 것이 신성한 은행나무의 노여움을 탄 때문이라고 생각 하면서 이씨는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나무는 그때까지도 잎을 흔들며 울 고 있었다. 이씨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잘못했습니다. 모두 제 탓입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그 때서야 나무는 진동을 멈추었다. 이씨는 동네 사람들에게 사건의 전말을 고백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이 나무의 신성함을 더욱 믿게 되었다. 이 나무는 일제 때 처음으로 경기도 지정목( 指 定 木 )으로 지정되어 보 호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8 15광복 후에도 인천시가 보호소로 지정 했다. 나무는 고사할 듯 고사할 듯하면서도 한 해 한 해를 넘겼다. 인천 시가 공무원교육원을 신축하면서 건축에 지장이 있어 10m를 옮겨 심었 는데도 살아남았다. 지명고사 150
11. 약효가 으뜸이었던 경서동의 사자발쑥과 난지초 경서동의 옛 이름은 고잔인데 쑥댕이고잔 이라는 별칭도 있었다. 경서동 에서 양질의 약쑥이 생산되었음을 알게 한다. 이 곳의 약쑥은 사자발쑥 獅 子 足 艾 이라고 불렀는데, 생김새가 오글오글하여 마치 사자의 발가락처럼 생긴 때문이었다.<조선왕조실록>의 <세종실록지리지>에 이 쑥의 효능에 대 한 기록과 함께 부평 고잔의 사자발약쑥이 최고라는 기록이 있다. 쑥댕이고잔의 노씨 집안에서 과천으로 시집간 딸이 있었다. 몇 해가 지나 아들 둘에 딸 둘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걱정스러운 일이 생겼다. 시 아버지가 이름 모를 중병에 걸리고 시동생이 머리가 뻐개지는 듯이 아픈 병 에 걸렸다. 이름난 의원들이 번갈아 찾아와서 진맥을 하고 탕재를 만들어준 것을 달 여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 두 사람은 모두 몸이 바싹 야위어가고 집안 사람 들은 이러다가 큰일을 치르는 게 아니냐고 불길한 말을 하기도 했다. 시어머니가 말했다. 나쁜 귀신이 집에 든 걸까. 그러나 무당을 불러 굿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쑥댕이고잔에서 시집온 며느리 노씨는 문득 고향의 사자발쑥을 생각했다. 어려서 열병이 나거나 배가 아프거나 피부에 발진이 돋아도 그저 쑥을 삶은 물을 마시거나 으깨어 바르면 씻은 듯이 나았던 기억 때문이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내가 왜 사자발쑥 생각을 못했을까요. 친정마을 뒷산의 사자발쑥을 삶아먹으면 무슨 병이든 나았어요.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말을 마침 진맥하러 온 먼 친척인 의원에게 말했다. 158 천마와 아기장수 외
그 의원은 궁궐에 들어가 임금과 왕족의 병을 치료하는 내의원이었다. 의 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약쑥이야 이미 지어드린 탕재에 들어가 있었네. 그리고 잘 알지도 못하고 중환자에게 독한 풀을 달여 먹이면 목숨이 위태하네. 그말을듣고그녀는 망설였지만 시아버지와 시동생의 병이 더 깊어가 이 제는 절망적인 상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친정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 서 인편으로 보냈다. 며칠 뒤, 친정 오라버니가 말린 사자발쑥을 싸들고 달려왔다. 죽어가던 시아버지가 간신히 입을 열어 말했다. 어차피 죽을 건데 사돈이 가져온 쑥을 달여 주오. 그녀는 오라버니와 함께 고향에서 하던 대로 사자발쑥을 달인 물을 두 환 자에게 먹였다. 그러자 다음날 금방 차도가 보였다. 원기를 회복한 환자들이 말하였다. 며늘아기야, 쑥탕을 더 다오. 형수님, 저도 사자발쑥탕을 더 주세요. 두환자는 한 달만에 몸을 툭툭 털고 일어났다. 이 소문이 먼 친척인 의원에게 알려지고, 마침내는 대궐에까지 보고되었 다. 그리하여 내의원에서 그 약쑥을 쓰고 큰 효험을 보았으며 마침내 부평 해안 쑥대고잔 마을의 사자발쑥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경서동의 난지도는 옛날에 한약재의 명약 난지초( 蘭 芝 草 )가 자생했기 때 문에 붙은 섬이름이다. 난지도보다는 우리말 지명 난점 으로 더많이불렀 는데, 이는 난지염 의 음운변화인 듯하다. 사멸된 우리말에 염 이라는 것 은섬과동의어였던 것이다. 난지초는 고란초처럼 만병에 좋은 약초로 알려져 있다. 고란초가 강가에 나는 약초라면 난지초는 바닷가에 나는 것이 다르며 이것이 약효가 더 좋다 고 한다. 난지염의 난지초가 약효가 좋다는 소문이 퍼져나가자 전국의 의원 지명고사 152
들이 보낸 채집꾼들이 몰려들어 몇 해만에 거덜이 났다고 전해진다. 어떤 사람들은 이 곳의 난지초를 캐다가 자기 고장에 이식해 보았는데 모두 말 라죽었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중병이 걸린 부모를 살리기 위하여 이 곳에 와서 한 뿌리라도 구하려고 기원하며 절까지 했다고 전한다. 아무튼 난점의 난지초는 그렇게 멸종해 버렸다. 8 15 광복을 전후해 난지도는 뭍과 워낙 가까운데다 간척사업을 하면서 만든 방죽으로 연결되면서 섬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육지화되었다. 40~50 년 전에는 인구가 50호에 달했으나 지금은 한두 가구만 살고 있다. 보충 검암동에서 살아온 원로들은 검암동의 사라진 고을 바로뫼의 저자가 명약인 사자발쑥과 난지초의 집산지 구실을 했다고 말한다. 한편 대곡동의 광인 원에서도 이 두 가지 특산물이 외지 상인들에게 팔려 나갔다는 전설이 있다. 그 들은 개성의 벽난도 상인들이거나 보부상들이었는데, 그들에 의해 사자발쑥은 전 국 한의원으로 팔려나갔고, 일부는 중국인 무역상들에게 넘겨져 중국 땅으로 들 어갔다고 말한다. 난지도는 조선 말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강화도를 침략하기 전 프랑스 함 대와 미국함대가 정박해 공격준비를 했던 것으로 기록에 나와 있다. 그러나 그들 이 여기서 물이나 식량을 조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60 천마와 아기장수 외
12. 궁궐 건축을 위한 경서동 소나무의 징발 경서동의 해안과 갯벌 위에 박힌 섬 뱀섬[ 蛇 島 ]에는 꼿꼿하게 뻗은 해송 이 많았다. 조선시대에 조정은 궁궐 건축에 쓸 목재를 충당하려고 이 곳을 양송금벌구역( 養 松 禁 伐 區 域 )으로 정했다. 지름이 어른의 손으로 두 뼘 또 는세뼘이 되는 해송이 꼿꼿하게 하늘을 향해 뻗쳐올라 울창한 숲이 장관 을 이루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소나무의 껍질에도 손댈 수가 없었다. 영조 17년(1741) 초봄에 조정에서 관리들이 내려와서 쑥댕이고잔 마을 좌수 집에 묵으면서 조사활동을 벌였다. 고잔 마을사람들은 좌수에게 물었 다. 좌수님, 한양에서 오신 나리님들에게 묵을 방을 내주고 음식을 마련해 드렸으니 톡톡히 돈을 받으셨겠지요? 좌수는 손을 내저었다. 나라의 일로 왔는데 무슨 돈을 받나? 하지만 줄 생각도 안 하더군. 한양에서 오신 나리님들은 소나무 숲에 들어가 한 나절을 있다가 나왔 는데 거기서 뭘 한답디까? 모르겠네. 나라 일에 쓰려고 벌목을 하려는지 쓸 만한 나무가 몇 개인가 조사하는 것 같더군. 내일은 범섬으로 간다니까 내 생각이 맞을 거구만. 좌수의 말에 이웃 사람이 대꾸했다. 그럼 인부가 필요할 테니까 우리는 품삯을 받을 수 있겠군요. 다른 이웃 사람이 나섰다. 품삯을 준다면야 얼마나 좋겠소만 부역을 하라고 하면 뼛골이 빠지는 일이 아니오? 좌수는 그러리라고 짐작하는 듯 어두운 얼굴을 하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지명고사 154
그건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겠네. 쑥댕이고잔 사람들의 불안한 짐작은 맞아떨어졌다. 며칠 뒤 서슬이 퍼런 포고문이 붙여졌던 것이다. 주상전하의 명에 의하여 장차 새 궁궐을 짓는데 필요한 목재를 충당 하고자 부평부민을 부역에 동원하노라. 18세부터 40세에 이르는 장정은 소집에 응하라. 이명령한마디로 부평부 사람들 중 힘을 쓸 만한 남자들은 동원되어 무 더기 무더기로 이 마을에 왔다. 당시 부평부는 오늘의 행정구역으로 말하면 인천의 부평구, 계양구, 서구, 북구, 부천시 일부와 서울 오류동까지였다. 그해4월, 70여가구에3백명정도인구가 있는 마을에 2천 명이 넘는 남자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산기슭에 초막을 치고 잠을 잤다. 벌목사업 본 부에서 밥을 짓고 국을 끓여서 급식을 하였지만 그들은 늘 굶주렸으며 마 을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구걸했다. 배고파 못 견디겠어요. 보리밥좀 주세요. 처음에는 딱한 마음으로 남은 밥이라도 주었으나 끝이 없어 도와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부역민들의 가족이 찾아와 그들에게 돈푼을 쥐어주고 갔다. 여보, 부모님은 내가 모시고 논밭 일도 내가 할 테니 당신은 몸 건강히 만 있다가 무사히 돌아오셔요. 부부가 기원하고 격려하는 일도 벌어졌다. 쑥댕이고잔 사람들은 부역 나온 사람들에게 쑥떡을 만들어서 싼값에 팔 았다. 때로는 사람이 죽어 관에 넣었다가 연락을 받고 찾아온 연고자에게 넘겨 주기도 했다. 내 아들아, 부역을 나와서 이렇게 죽다니. 아들이라곤 너 하나인데 우리 는대가끊어지겠구나. 162 천마와 아기장수 외
그렇게 피눈물을 흘리는 부모들도 있었다. 벌목 일은 10월까지 7개월이나 걸려서 끝났다. 그 때 베어진 수천 그 루의 해송들은 잘 다듬어져서 그 마을 선착장에서 배에 실려 서해와 한 강을 타고 한양으로 갔다. 수십 척의 큰 돛배가 원목을 싣고 순풍을 맞 으며 바다로 나가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내 다시는 이 쑥대고잔에 오지 않을 거야. 나는 이쪽을 보며 소변도 보지 않을 거네. 부역 나온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며 고단했던 7개월의 부역을 끝냈다. 대개 심한 고생을 한 터라 대부분 피골이 상접한 몰골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으며 북적북적이던 쑥댕이고잔 마을은 옛날처럼 평온을 되찾았다. 지명고사 163
13. 폭풍을 이긴 안동포의 도사공 조선 중기의 일이었다. 검단의 안동포 포구에서 작은 배를 부리던 김호 ( 金 浩 )라는 선주 겸 도사공(선장)이 있었다. 그는 나이가 마흔이 넘고 네 사람의 동사(서해안에서 하급선원을 가리키던 말)를 데리고 있었는데 추젓 잡이(새우젓을 만들기 위한 초가을 새우잡이)에서 만선을 하고 귀항했다. 그는 곧장 그것을 수집상에게 팔아 넘겨 쌀로 바꾸었고 동사들 몫을 따로 떼어놓았다. 사흘 동안애들썼구만. 이번엔 짓잽이(어부들이 받던 품삯)가 괜찮았지 만내가두됫박씩더넣었네. 어획물은 안동포의 어선들이 모두 그렇듯이 2할은 현물세를 내고, 나머지 의 절반을 선주가 갖고 그 나머지 절반은 사공들이 나눠 갖게 되어 있었다. 도사공은 두 몫, 가장 나이가 많은 영좌( 領 座 )는 한 몫 반, 나머지 동사들 은한몫을갖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선주가 자기 몫에서 떼어 가난한 동 사들에게 더 준 것이었다. 동사들은 착한 도사공에게 고개를 숙였다. 도사공님, 고맙습니다요. 도사공은 그냥 씩 웃었다. 그는 어딜 가도 나만큼 후한 뱀자(배임자의 준말)는 없다는 걸 알게. 하 는 식으로 공치사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도사공처럼 오십을 바라보는 늙은 어부 박영좌가 입을 열었다. 도사공님이 착해서 많이 잡은 거야. 그건 저희도 압니다. 김도사공은 뱃머리에서 뭍으로 뛰어내리다가 문득 예감이 이상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공교롭게도 박영좌도 그렇게 했는데 두 사람은 잠시 후 눈이 164 천마와 아기장수 외
마주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밤에 폭풍이. 내 생각도 그렇소이다, 뱀자님. 두 사람은 낙조의 빛이 유난히 붉고 갈매기가 유난히 소리를 크게 내며 낮게 나는 것을 보고 육감적인 예감을 한 것이었다. 두 사람의 말을 알아들은 동사들이 자기 집에 있는 밧줄까지 가져오면서 다른 배들을 향해 소리쳤다. 폭풍이 와요. 단단히들 묶어요. 다른 배들이라고 날씨의 이상한 조짐을 모를 리가 없었다. 열심히들 묶고 당기고 야단이었다. 김호 도사공은 불길한 예감을 안은 채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보냈다. 아침 빛이 창에 스며들 무렵, 갑자기 창문이 우르르 흔들렸다. 그리고 이어서 바 람이 호호이 호이 하며 추녀 끝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강력한 폭풍이 오 고있는것이었다. 그는 주섬주섬 옷을 입고 일어섰다. 선착장에 가서 배에 올랐다. 한식경쯤 지나자 폭풍이 거센 빗줄기와 함께 포구를 때리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도사공님, 어서 배에서 내려요. 미친 듯이 춤을 추는 배에서 내다보니 자신의 동사들과 아내가 나와 바라 보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요동하는 배에서 악을 썼다. 내가 내리면 배를 살릴 수 없어. 그는 육감으로 알고 있었다. 어제 오후 귀항하여 배를 단단히 붙잡아 매었 지만 아무소용이 없다는 것을. 폭풍은 파도를 일으켜 마치 이동하는 절벽처 럼다섯길열길높이일어선파도를앞세우고 포구를 덮칠 것이었다. 그러 면 선착장에 잡아맨 배들은 속절없이 깨어지고 말 것이었다. 열네 살에 아버지를 따라 남의 배에 올라 화쟁이(배청소와 취사를 맡아하 는 최하급 선원)부터 시작했던 그는 먹을 것을 참고 배를 주린 끝에 천신만 지명고사 158
고끝에이배를마련했다. 지금은 칠순이 넘은 노모와 아내와 자식 넷을 부양하고 있었다. 그의 가족뿐만 아니었다. 영좌 박영감과 세 사람의 동사 들, 그리고 그들에게 딸린 식구들의 목숨이 그의 배에 달려 있었다. 배를 잃느니 죽는 게 낫지. 차라리 배를 몰고 바다로 가자. 바다에 떠 있 으면 배는 상하지 않는다. 내가 죽으면 배도 죽고 내가 살면 배도 살 것이 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뱃머리에 묶인 밧줄을 풀었다. 그때그는 보았다. 커다란 널빤지를 대고 박영좌가 배에 오르는 것을. 어서 내려욧! 그가 소리치자 박영좌가 마주 악을 썼다. 도사공 혼자 하게 놔둘 수 없어! 밧줄이 풀리는 순간 배는 미친 듯이 춤추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몇 번이 나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 때 그는 보았다. 안동포에서 가장 큰 윤좌수 의배가우지끈 허리가 꺾어지는 것을. 두 사람은 해안선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닻 2개를 모두 내려 배를 고정시 켰다. 파도에 휩쓸려 나갈 것을 염려해 옷을 벗고 맨몸이 되었다. 박영좌가 밧줄로 그의 몸을 감았다. 파도를 얻어맞아 바다에 떨어지면 끝 장이기 때문이었다. 김도사공은 방향타를 잡아 정확하게 바람의 방향에 맞추었다. 파도가 배 의 옆구리를 친다면 그것으로 끝이기 때문이었다. 잠시후 배는 우지끈 소리 와함께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그 시간이 매우 길었다. 그렇게 싸우기를 한 나절, 배는 포구에서 한참 멀리 밀려나와 있었다. 입술이 터지고 온몸이 멍들고 기진맥진한 채로 마지막 힘을 다해 버티는 데 서서히 파도의 힘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됐어, 도사공. 됐어요, 박영좌. 두 사람은 살았다는 생각에 얼싸안았다. 폭풍은 거짓말처럼 잦아들고 두 사람은 배를 몰고 포구로 들어갔다. 삼십여 척이나 되던 배들이 한 척도 안 166 천마와 아기장수 외
보였다. 모두 부서져 버린 것이었다. 그해가을에서 다음해 가을까지, 안동포에서 고기잡이에 나선 배는 그의 배한척뿐이었다. 그는 많은 돈을 벌어 몇 해 뒤에는 배 세 척의 선주가 되었다. 박영좌도 늘그막에 자기 배를 마련했다. 두 사람은 안동포의 선단 을 이끌고 조기잡이 어장을 개척해 포구를 더 풍요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더 늙어서 배에서 내렸으며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두 사람이 죽은 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사람들은 그들을 기억하며 마음이 착해 복을 받았다고 하였다. 보충 안동포는 지난날 검단에서 가장 큰 어선 포구였다. 조기와 새우를 많이 잡아왔으며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드넓은 갯벌을 안고 있었다. 맛, 방게, 굴, 대 합등어패류가 풍요롭게 깔린 곳이었다. 조수가 갯골을 타고 들어올 때는 망둥 이도 많이 잡혀 필자는 그 곳에 가서 짧은 낚싯대로 백여 마리를 잡은 적도 있 다. 그러나 지금은 바다와 갯벌이 매립되고 우후죽순으로 공장들이 들어서 모든 것이 전설 속에 남았다. 지명고사 160
14. 섬 사람들이 안았던 가혹한 현물세 서곶과 검단은 길게 해안을 끼고 있는 터라 연안에 크고 작은 수많은 섬 들이 있었다. 난지도( 蘭 芝 島 ), 청라도( 靑 羅 島 ), 사도( 蛇 島, 뱀섬), 일도( 一 島 ), 장도( 獐 島 ), 곰의바위, 쟁끼섬, 까투렴, 율도( 栗 島, 밤염) 소염도( 小 鹽 島 ), 세어도( 細 於 島 ), 장금도( 長 金 島 ), 목섬, 호도( 虎 島,범염), 면도( 免 島 ), 길무도( 吉 舞 島 ), 붕도( 朋 島 ), 육도( 陸 島 ), 축도( 丑 島 ) 거첨도( 巨 詹 島 )등이 그것이다. 갯벌은 경사가 매우 완만하여 밀물과 썰물이 빠르게 드나들었다. 섬들은 밀물 때는 바다에 잠겨 푸른 수평선 끝에 보이기도 하고 썰물 때는 망망한 갯벌의 끝에 얌전히 앉은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 밀물과 썰 물의 시간차를 이용하여 드넓은 갯벌에서 게와 조개와 맛조개를 잡았으며, 썰물을 따라서 섬까지 걸어가 한두 시간 일을 보고 밀물에 앞서 해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섬들은 갯벌 매립으로 거의 모두 사라졌다. 1차로 금곡동과 오 류동 앞바다가 매립되고 2차로 원창동과 석남동 앞바다가 매립되었으며, 2 차로 왕길동, 백석동, 검암동, 연희동 앞바다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이 청라 매립지(동아매립지라고도 한다)에 포함되면서 거의 모든 섬들이 지도상에 서 사라졌다. 옛날의 그 섬들 중 난지도와 율도를 제외한 섬들은 모두 국유지였다. 섬 에사는사람들은 혹독한 세금과 착취에 시달렸다. 지금 매립이 되었지만 섬마을의 형태가 비교적 잘 보존된 청라도에는 지긋지긋한 가렴주구에 대 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선선한 가을이 되면 뭍에 사는 관리인인 좌수가 배를 타고 섬으로 왔다. 현물세가 준비되었느냐? 금년에도 조개젓 다섯 독에 굴젓 다섯 독이니 168 천마와 아기장수 외
라. 그것은 섬 주민이 온힘을 다해 조개와 굴을 잡고 그것을 까고 젓을 담 근것의6할이 넘었다. 좌수가 다시 와서 그것들을 배에 싣고 다음 섬으로 갔다. 그러면 섬사람들은 탄식 섞인 처량한 노래를 불렀다. 우리 섬 조개젓은 나리들이 너무 좋아해 좌수님이 두 독 먹고 사또님이 두 독 먹고 감영에서 두 독 먹고 호조에는 두 독만 가지 그것은 사실이었다. 청라도의 예를 들면 좌수는 그 섬에서 그렇게 거 둔 10독 중2독을 수송비 명목으로 빼고 1독은 자기가 먹고 1독은 세도 가에게 상납했다. 나머지 6독은 부평관아에 바쳤다. 그러면 부평 부사는 자기 몫으로 또 2독을 떼어냈다. 나머지 4독을 경기감영으로 보내면 감 영에서는 다시 2독을 착취하고 결국 2독만을 호조( 戶 曹 )에 바치었다. 그래서 섬마을은 혹독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명고사 162
15. 매립되지 않고 살아 있는 호도, 세어도, 거첨도 서곶과 검단의 바다가 청라 매립지에 포함되어 사라졌지만 호도와 세어 도와 거첨도는 남아 있다. 호도( 虎 島 )는 뭍에서 보면 청라도와 장도 사이로 멀리 보였다. 보다 정확 히 말하면 두 섬의 서쪽으로 3km나 떨어져 있다. 밀물 때나 썰물 때나 바 닷물이 머무는 넓은 갯골 가운데 앉아있다. 범섬 이라고도 했으며, 생긴 모습이 호랑이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뭍에서는 장도와 청라도에 가려 져볼수없었으니 뱃사람들이 붙인 이름으로 짐작된다. 호도는 갯골에 앉아 있어서인지 밀물 때나 썰물 때나 큰 배가 다니기 쉽 고 정박하기 쉬워서 1871년 5월에는 미국 함대 5척이 강화에서 신미양요를 일으키기 전 며칠 동안 정박했다. 융희 3년(1909)에 이 곳에 화약고가 들어섰다. 인천개항과 더불어 신문물 이 들어오고 화약류도 수입되었는데 독일계 화사인 세창양행과 미국계 회 사인 타운센트사가 율도에 화약 저장고를 짓고 독과점을 하면서 조선 조정 에 화약을 팔자 조정이 국영화약고를 만든 것이었다. 이국영화약고는 다음해 일제에 강제합방되면서 일본 수중으로 넘어갔 고몇년뒤폐지되었다. 그런데 이 시절 호도 관리인들의 사냥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진다. 호도에는 오리와 지네가 유난히 많았다. 섬의 화약을 지키는 관리인들은 지네를 잡아 말려 팔아 짭짤한 수입을 올렸는데 더 신나는 것이 있었다. 그는 항상 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섬에는 산란기가 되면 청둥 오리 수천 마리가 앉아서 알을 낳고 품었다. 관리인이 탕 하고 총을 한 방 만쏘면오리들은 놀라서 알을 두고 날아갔다. 170 천마와 아기장수 외
관리인들은 자루를 메고 다니며 알을 주워 담기만 하면 되었다. 그들은 그것을 육지 저자에 팔아 쏠쏠한 수입을 올렸다. 세어도( 細 於 島 )는 인천관내에서는 뭍에서 가장 먼 섬으로 청라 매립지에 포함되지 않아 아직 섬으로 살아 있다. 경서동 서단 금산에서 서쪽 6km 떨 어져 있으며 안동포에서는 4km 떨어져 있어 더 가깝다. 밀물 때나 썰물 때 나 바닷물이 머무는 큰 갯골 건너편에 있다. 그러므로 썰물 때 갯벌을 걸어 나가도 이 섬에는 갈 수 없다. 가늘게 늘어진 섬이라 세어도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세루, 또는 서천도 ( 西 遷 島 )라는 별칭도 있다. 세루는 서쪽에 멀리 머물다 의 뜻으로 서유 ( 西 留 ) 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세루로 음운이 변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서천은 서쪽 멀리 귀양가 있는 섬이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 섬에는 삼남에서 오는 세곡선이 기항했다. 세곡선이란 징수가 끝나 지 방 창고에 보관했던 농지세 현물을 서울로 실어가던 운반선을 말한다. 많은 조선들이 한강 수로에 이르기 전 마지막으로 이 섬에 기항하였는데 선원들 은 여기서 세곡을 빼돌렸다. 세금 운반선의 기항지이고 보니 그런 부패 행위가 섬을 활기 있게 바꾸 어 놓았다. 강화에서 온 정씨, 김포 양촌에서 온 채씨, 영종도에서 온 김씨 등이 주막과 객주집을 짓고 들병이 여자들을 데려와 술을 팔기 시작했다. 그들은 톡톡한 재미를 보았다.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이주해 와 세어도는 한 시기에 70여 호가 넘는 큰 마을로 변했다. 한번은이런일도있었다. 1783년 6월 충청도 결성현( 結 城 縣 )에서 수곡 한 세곡미 1,039석을 싣고 세어도에 정박한 운반선이 폭풍으로 침몰했다. 세어도의 객주집 주인들은 미인계를 내세워 도사공과 관리들을 사로잡았 다. 춘삼아, 추월아. 너희 좋고 나 좋고 모든 사람이 다 좋은 것 아니냐? 도 사공을 녹여라. 네 몸으로 녹여버리란 말이다. 지명고사 164
그렇게 하겠사옵니다. 두 여자가 다짐하고 나섰다. 여자들의 관능에 마음을 빼앗긴 도사공과 관리는 침수되지 않은 벼 582석과 콩 53석은 국고에 납부, 나머지 400석은 침몰한 것으로 결손처 리했다. 그 덕분에 섬 주민들이 침몰한 곡식을 건져 식량으로 사용하였다. 사람들은 실컷 먹고 부른 배를 두드렸다. 일생에 이렇게 배불리 먹기는 처음이네. 모두가 춘삼이와 추월이의 거시기 덕분이지. 그러다가 구한말 개화와 함께 현물세의 관리방식이 달라지고 세곡선 의 기항도 그치게 되자 섬은 다시 한적한 어촌 마을로 변했다. 세어도에는 꿩이 유난히 많았다. 꿩들은 탕 하고 총성을 울리면 놀라 서 바위틈이나 덤불에 머리만 처박고 숨었다. 그래서 그들은 민첩하게 손을 뻗어 그것들을 잡아 자루에 담기만 하면 되었다. 거첨도( 巨 詹 島 )는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다. 방위로 따지면 경서 동 범머리 반도의 정서쪽이고 안동포 포구에서는 서남서쪽이다. 거리는 범머리 반도나 안동포에서나 4km 떨어져 있다. 이 섬은 지난날 김포군 오류리에 속해 있었으며 세어도와 호도처럼 조수가 늘 머무는 바다 가 운데 깊은 갯골에 있다. 그래서 어업을 하기에 좋았으며 온돌 놓을 때 쓰는 구둘돌이 많이 생산되었다. 지금은 인천 시계에 들어와 있고 건설 용골재채취로지명이 알려져 있다. 172 천마와 아기장수 외
16. 대제학의 상여가 지나간 경서동 섬피둑길 조선 세종 때 일이었다. 현재의 경서동 범머리산( 虎 頭 山. 金 山 이라고도 함)에 갑자기 말을 탄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한양에서들 오신 모양인데 무슨 일인가? 마을 사람들은 목을 뽑고 바라보았다. 그들 가운데는 베로 만든 건( 巾 )을 쓴 사람들도 있었고 언젠가 이 마을에 나타난 적이 있는 부평 관아의 이방 ( 吏 房 )도 있었다. 마을의 좌수가 급히 신발을 꿰면서 달려나가자 부평 관아의 이방이 말했 다. 좌수는 인사 올리지 않고 뭣하시오? 한양에서 대제학 나으리의 조카이 신 공조참의 나으리께서 오셨소. 아이구, 못알아 뵈어 송구스럽습니다. 좌수는 허겁지겁 그 자리에 엎드렸다. 참의는 부평부사보다도 두 직급이 높다. 건을 쓴 공조참의가 엄숙하게 말했다. 내 당숙부이신 대제학께서 오늘 새벽 숙환으로 운명하셨네. 그대가 아는 지 몰라도 당숙께서는 생전에 이 곳을 다녀가신 적이 있고 이 곳을 묘터로 결정하셨느니라. 좌수가 답했다. 저는 존귀하신 대제학 나으리는 뵙지 못했고 수년 전에 존귀하신 대제 학 나으리 집안에서 지관과 함께 나오셔서 범머리산을 돌아보고 가신 게 기억납니다. 좌수는 속으로 어이쿠 큰일났구나 하고 생각했다. 묘역을 크게 쓸 것이고 지명고사 166
한창 농번기인데 마을 사람들을 산역에 동원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참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행 중 하나를 가리켰다. 그 때왔던지관이같이왔네. 좌수가만난건내사촌아우이네. 그때지 관을 데리고 여길 다녀갔으니까. 그 사람은 지방 관장으로 나가 있다가 부친 상 소식을 듣고 집으로 달려오는 중이라네. 이방이 입을 열었다. 좌수, 대제학 나으리가 여기 와서 묻히신다는 건 마을의 영광이 아니오? 이마을백성들을 산역에 써야겠소. 병자나 노인만 빼고 남녀 모두 나서서 일하라고 부사 나으리도 말씀하셨소. 그 때부터 마을은 발끈 뒤집혔다. 한양에서 다시 십여 명이 와서 좌수네 집과 옆집에 묵고 마을사람들은 그들의 침식을 시중 들면서 부역에 나가느 라 정신이 없었다. 한양에서 온 공조참의가 산으로 올라가는 작은 둑을 가리켰다. 그 곳은 갈 대가 우거진 습지였다. 개개비새들이 무슨 일인가 놀라 야단스럽게 울었다. 여긴 상여가 갈 수 없지 않은가? 참의의 말에 좌수가 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럼길을만들어야지. 거리가 삼백 보는 되옵니다. 그런데 사흘 동안에 어떻게 길을 만들 지. 참의는 헛기침을 했다. 좌수가 애를 써 줘야지 어찌하겠나? 백성들의 노고는 모른 척하지 않을 테니 애를 써주게. 마을 사람들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매달렸다. 수렁이나 다름없는 갈대밭 에 높이가 어른 키 반길이 되고 너비가 열 자( 尺 )가 되는 길을 수백 보나 만들려니 도저히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열살이못된아이들까지 들것을 만들어 흙을 날랐는데 능률이 오르지 않 174 천마와 아기장수 외
았다. 그 때 마을 소년 하나가 제안했다. 섬피에 흙을 담아 쌓으면 어떨까요? 섬피란 곡식을 담는, 짚으로 만든 자루를 말했다. 그게 좋겠군. 사람들은 나뉘어졌다. 한 쪽에서는 짚으로 엮어 흙을 담아 나르기에 적당 한 크기의 섬피를 만들고, 한 쪽에서는 그것에 마른 흙을 퍼 담고, 힘이 좋 은 장정들이 그것을 줄을 지어 등에 지고 날랐다. 그것을 다섯 층 깔아 놓 은뒤에평탄하게 흙을 깔면 될 것이었다. 예고 없이 닥친 일, 그리고 장례날 상여가 오기 전에 끝내야 할 일이었으 므로 마을 사람들은 횃불을 켜고 정신 없이 뛰었다. 몸이 약한 사람들이나 아녀자들은 지쳐 쓰러졌다. 그러나 불호령이 떨어지니 쉴 수가 없었다. 아이고, 대제학인지 소제학인지 하는 분은 왜 여기 묻히고 싶다고 해서 우리를 고생시키는가 몰라. 이러다가는 나도 죽어 죽은 양반 따라가겄네. 쉿, 이 사람아. 볼기를 맞고 싶은가. 아까 보니 부평부사 나으리도 나오 셨던데? 그럴 거네. 백성들이야 죽어라 일하고 볼기를 맞아야 하는 거니까. 그리 구내가섬피메고가다쓰러져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야. 사람들은 저희들끼리 목소리를 죽여 소곤거렸다. 마을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 울력을 한 끝에 마침내 둑길이 장례날 아 침 번듯하게 완성되었다. 한낮이 되자 화려하면서도 장엄하게 꾸며진 상여 가 구슬픈 만가( 輓 歌 )와 함께 도착했다. 만장( 輓 章 )이 백 개는 되고 따라 온 사람도 수백 명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기진맥진한 채로 생전 처음 보는 지체 높은 분의 상여를 향해 절을 올렸다. 장례가 끝난 뒤 류씨 가문과 조정에서 마을 백성들을 위로하여 쌀 백 섬 을보내왔다. 단순하고 착한 것이 백성들이라 그들은 기뻐하며 그 때의 고 단한 울력을 잊었다. 지명고사 175
이길은그때부터 섬피둑길로 불려졌다. 얼마나 탄탄하게 만들었는지 5 백년이 넘도록 훌륭한 농로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천 최초의 골프 장인 국제컨트리클럽의 진입로로 사용되고 있다. 해설 경서동 범머리산에 묻힌 대제학은 류사눌( 柳 思 訥 )이다. 그는 황해도 태생으로 문화류씨 중시조이다. 18세 때인 태조 2년(1393)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에나간후내외의 주요 관직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에 올랐다. 특히 예문관 대제 학 재직시에는 악학제조( 樂 學 提 調 )를 겸하여 <아악보( 雅 樂 譜 )> 서문을 찬하기 도 하였으며, 세종 16년(1434)에는 <진작가사( 眞 雀 歌 辭 )>를 찬하여 <제악부( 諸 樂 府 )>에 싣는 등 박연과 더불어 아악정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현재 경서동 금산 의 문화류씨 묘역 윗쪽에 자리잡고 있는 그의 묘에는 호석을 두른 봉분과 묘비, 상석 문인석 각 1쌍, 장명등 등이 배치되어 있다. 류사눌은 소년시절 고아가 되어 계양산 만일사에 와서 학업을 닦았다고 전한 다. 그의 시 <망월사시( 望 月 寺 詩 )>가 남아 있는데 이 책의 만일사의 이전 항 목에 소개하였다. 류사눌은 대제학을 지내고 은퇴하여 만일사를 찾아보고 이 시 를 지었다고 하는데 그 때 경서동에 와서 자신의 묘자리를 보아 둔 것으로 추측 할수도있다. 구전되는 전설은 그가 대제학 재임중에 죽어 범머리산에 묻힌 것 으로 되어 있지만 기록을 보면 그가 은퇴 후 죽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176 천마와 아기장수 외
17. 서곶과 검단의 봉수대 서곶과 검단에는 세 곳의 봉수대( 烽 燧 臺 )가 남아 있다. 하나는 가정동 봉 오재 마을 앞 축곶산 봉수이고 하나는 오류동의 봉화촌 백석산 봉수이다. 그 리고 또 하나는 경서동의 반도 돌출부 범머리산에 있었다는 봉수이다. 봉수란 멀리 바라보기 좋은 높은 산봉우리에 설치하여 밤에는 횃불[ 烽 ]을 피우고, 낮에는 연기[ 燧 ]를 올려 외적이 침입하거나 난리가 일어났을 때에 나라의 위급한 소식을 중앙에 전하는 비상 연락수단이었다. 가정동 축곶산은 싸리나무가 무성하고 산의 생김새가 꼬챙이같이 생겨 생 긴 이름이다. 이 산에 봉수대가 있었는데 이것은 세종 5년(1423년)에 설치하 여고종32년(1894년) 갑오경장 때 없어져 471년 간 사용하였다. 오류동 봉화촌 마을의 백석산은 작은 산으로 정상에는 석영으로 된 큰 바 위가 있어 매우 성스럽게 보인다. 이 산의 봉수대가 있던 곳을 봉화둑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지고 어느 집안의 분묘들이 자리잡고 있다. <세종대왕실록> 제148권은 백석산 봉수는 김포 서쪽 20리에 있는 봉수로 남쪽 부평의 축곶산에서 연락을 받아 북서쪽 통진( 通 津 ) 약산( 藥 山 ) 봉수 로 전달했다 고나와있다. 두곳에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 동지지>등 다른 문헌에도 나와 있다. 백석산 봉수는 해발 표고가 73.6m로 낮은 편이지만 통진 약산의 봉수까지는 이보다 높은 지형이 없어 문제가 없 었다고 한다. 경서동 바다 쪽에 박힌 범머리산은 한자음으로 호두산( 虎 頭 山 ) 또는 금 산( 金 山 )이라 불렀다. 금산은 여기서 금이 많이 났다 하여 붙은 이름이고, 범머리산은 형용이 호랑이 머리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설에는 이 산에 병인양요 후 이양선의 출몰을 관측하는 망루와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 다. 이 봉수는 위의 <세종대왕실록>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 지명고사 170
에 나오지 않는다. 국내의 전체 봉수를 계통적으로 집성한 <한국의 성곽과 봉수. 상.중.하>(한국보이스카웃연맹 발행. 1989년)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 러나 경서동의 원로들은 지금 비록 흔적은 남아 있지 않지만 봉수가 있었 던것이확실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양선 침범을 보고 받기 위한 연변봉수( 沿 邊 烽 燧 )의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연변봉수란 국경선이나 해륙 연변에 제1선을 설치하여 기점 구실을 하였다. 통신이외에 국경의 초소와 수비대 기능도 가졌다. 해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봉수에 대해 다음과 같 이 설명한다. 봉수 제도가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의종 때 확립되었으므로 봉수대의 시설도 그때확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세종 4년(1422년)에 각 도의 봉수대 시 설을 정비하기 시작하여 세종 20년에 완비하였는데, 연해나 변방에 설치된 각 연 변봉수 에는 목수가 쓰는 자로 높이 25척, 둘레 70척의 봉수대를 쌓고, 그 아래 에깊이 너비각10척의참호를팠다. 봉수대 위에는 임시로 집을 지어 각종 병 기와 생활용품을 준비해 놓게 하고 봉수군(봉화꾼, 봉졸, 봉군)과 봉수군을 통솔 하고 감시하는 오장( 伍 長 )이 생활하면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전국의 봉수가 집결되는 목멱산(남산) 봉수대(경봉수대) 사이에 설치된 내지 봉수 에는 연기를 올리는 봉수대는 쌓지 않고 아궁이만 쌓았으나 적이 침범하기 쉬운 곳은 봉수대를 쌓고, 맹수의 습격을 막기 위해 둘레에 담을 쌓은 곳도 있었 다. 성종 5년(1474)에는 모든 봉수대의 아궁이 위에는 반드시 연통을 높이 달아 서낮에올리는 연기가 바람에 흩어지지 않고 잘 보일 수 있게 하였다. 전국에서 올라온 봉수의 정보는 목멱산 봉수대의 오장이 병조에 종합 보고하 면 병조에서는 매일 새벽 승정원에 알려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고종 31년(1894) 봉수제도가 현대적 전화통신 체제로 바뀌어 폐지되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봉수 대는 지방기념물로 지정하여 각 도 시에서 보호하고 있다. 178 천마와 아기장수 외
18. 황포 방죽에 스님을 생매장하다 서구 금곡동의 좌동 마을을 양곡과 강화로 가는 305번 국도가 스쳐 지 나간다. 좌동 마을에서 일단 멈춰 서쪽 소로를 따라 내려가면 좌동을 관 통하고 곧바로 대포동으로 들어선다. 그 사이에 인천시와 경기도의 경계 가있다. 좌동은 행정 구역상 인천시에 속하고 대포동은 경기도 김포시 에 속한다. 대포동 본마을을 지나 계속 내려가면 황포( 黃 浦 ) 마을이 있 다. 황포의 아래쪽에는 상무지라고 부르는 작은 취락이 있다. 황포 본마을과 상무지를 지나 계속 서쪽으로 내려가면 드넓은 무논지 대 사이로 둑이 나타난다. 이것이 18세기에 바다를 막아 쌓은 황포방죽 이다. 지금은 방죽의 위아래가 모두 광활한 무논지대이지만 둑을 막기 전에 위쪽은 육지요 아래쪽은 바다 갯벌이었던 것이다. 지금 이 방죽길 의 위쪽(동쪽)은 인천시에 속하고 서쪽(아래쪽)은 김포시에 속한다. 물 론이지역은 오랜 세월 김포였는데 검단이 인천에 편입되면서 방죽길 이인천시계( 市 界 )의 끝선으로 그렇게 획정된 것이다. 옛날 이 방죽을 쌓을 때의 전설이 있다. 농토를 넓히기 위하여 조선 후기에 둑 막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오류 동 뒷산과 황포 마을의 상무지를 있는 대공사였다. 대략 육지 쪽은 끝도 안 보이는 광대한 담수호가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펼쳐져 있었고, 바다 쪽은 어마어마하게 넓은 갯벌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다 둑을 쌓으면 호수가 모두 논이 된단 말이지. 헐벗고 굶주리는 창생( 蒼 生 )들을 위하여 반드시 성공해야 하네. 경기 감영에서 관찰사가 현장까지 행차하여 그렇게 격려했다. 강화도에서 둑 쌓는 경험을 많이 한 감독이 대답했다. 많은 고난이 따르겠지만 분부 받들어 꼭 완공하고야 말겠습니다. 지명고사 172
무엇이 제일 문제인가? 개결수를 막는 일이옵니다. 감독은 관찰사를 둑 쌓을 곳에 있는 세 개의 갯골 중 가장 큰 갯골로 데리 고갔다. 폭이30보는될넓고깊이가두길은되는 갯골이 바다를 향해 뻗 쳐가고 있었다. 검단개, 또는 곧은개라고 부르는 갯골입니다. 이 갯골로 밀려드는 밀물과 빠져나가는 썰물의 힘이 엄청나겠군. 관찰사의 말에 감독이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강화에도 이만한 갯골은 없습니다. 관찰사는 가까운 둔덕에 서서 밀물 때를 기다렸다. 어마어마한 기세로 조 수가 치밀어 올라오고 육지에서 흘러내리는 냇물과 충돌해 쏴아 요란한 소 리가 울렸다. 굉장하군. 나는 그대의 경험을 믿겠네. 관찰사가 말했다. 공사는 양쪽에서 차근차근 시작되었다. 뭍에서 가까운 곳부터 물컹거리는 개흙을한길이상퍼내고맨땅이나오면그위에돌과흙을쏟아넣었다. 모두 다 인력으로 해야 하는 일이라 진척은 느렸다. 아홉 달이 걸려 양쪽 둑이 갯골 앞까지 뻗어갔다. 감독이 비장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자, 이제 한번 싸워 보는 거다. 마차라는 마차는 모두 끌고 와서 돌과 흙 을 싣고, 소라는 소는 모두 끌고 와서 길마에 흙을 채워라. 일꾼이라는 일꾼 은모두지게에 흙을 담아놓고 기다려라. 십장들도 지게를 져라. 썰물이 끝 나고 밀물이 시작되기 전의 짧은 시간에 퍼부어야 한다. 전인력이만반의 준비를 했다가 물이 빠진 순간에 모든 것을 쏟아 넣었 다. 그 부분은 이미 쌓은 둑보다몇배더단단했다. 밀물이시작되자둔덕 에서서숨을죽이고 기다렸다. 밀물이 갯골을 타고 뱀처럼 꿈틀거리며 밀려왔다. 먼 갯벌은 조수로 하얗 180 천마와 아기장수 외
게 덮였다. 밀물이 둑의 중간까지 차 오른 순간, 갯골을 타고 온 개결수가 위협적으로 둑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얼마후 우르르 소리와 함께 개결수는 갯골에 쌓은 흙과 돌을 무너뜨리고 쏜살같이 뭍으로 달려 올라갔다. 아아, 수포로구나. 감독은 탄식했다. 대엿새에 한 번씩 힘을 집중시켜 개결수를 막았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조 수가 적게 밀려오는 조금때는 견뎌냈다. 조수가 많이 찰 때까지 힘을 합해 둑을 보강했다. 그러나 사리 때가 되면 여지없이 무너졌다. 사람들이 모두 지쳐갈 즈음 스님 한 사람이 제방공사 현장을 지나가며 중얼거렸다. 공연히 쓸데없는 고생을 하는군. 쓸어 묻고 막기 전에는 백날 해도 헛일 이야. 기골이 장대한 십장 한 사람이 뒤따라가며 물었다. 그는 무식하고 막 되 어먹은 불한당이었다. 여보시오, 스님. 지금 뭐라고 했소이까? 스님이 돌아섰다. 쓸어 묻고막기전에는 백 날 해도 헛일이라 했소이다. 뭘 쓸어 묻는단 말이오? 사람을 산 채로 묻기 전에는 개결수를 이길 수 없소. 그순간기골이 장대한 십장은 스님을 번쩍 들어올려 갯골의 진흙 속에 다 처넣었다. 스님이 놀라 소리쳤다. 왜 이러시오? 날 생매장할 셈이오? 그렇다, 이 중아. 네놈을 산채로 고사지내야겠다. 스님은 진흙을 헤치고 나오려고 버둥거렸다. 여보시오. 날 살려주시오! 그때십장이 일꾼들에게 명령했다. 지명고사 174
어서 흙과돌을처넣어라. 수십 수레의 흙과 돌이 퍼부어지고 스님의 비명은 그 속에 묻혀버렸다. 그뒤방죽은 개결수를 이겨냈다. 그뒤그자리에수문을 만들고 둑 위 쪽 호수의 물을 빼고 밀물을 막게 했다. 그 결과로 어마어마한 경작지가 생 겨났다. 보충 황포 방죽은 지난날 김포였지만 지금은 인천과 김포의 경계를 가르고 있어 이 책에서 다루었다. 필자는 외가가 대포동이라 소년기에 외가에 가서 이 전설을 들은 바가 있지만 윗글은 좌동의 토박이 원로인 양재동 선생의 구술에 의 존하여 구성하였다. 필자는 2003년 9월 양재동 선생과 함께 황포 방죽을 답사했다. 머릿속에는 외 가에 와서 지냈던 추억이 떠오르고 그 속에 방죽이 살아 있었다. 40여 년 전 바 다와 육지를 구분하던 방죽, 억새가 유난히 많이 났던 그 유서 깊은 황포 방죽은 이제 승용차가 갈 수 있는 농로가 되어 있었다. 바다는 없었다. 1960년대에 황포 방죽 아래 갯벌을 매립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 전설의 현장이자 옛날 수문이 있었던 개결수 갯골은 여전히 살아 있는데 시멘트 교량이 놓여 있고 검단천이라 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둑을 쌓아 해면을 매립하는 난공사에 인신공희를 한 전설은 백석동의 한들 방 죽에도 있어 이 책의 뒤에서 따로 다루었다. 두 전설은 희생된 사람이 황포 방죽 은스님, 한들 방죽은 거지라는 것만 다르고 대체로 비슷하다. 축조 시기가 황포 방죽이 빠르므로 황포 방죽의 전설이 원형이 되어 한들 방죽에서도 그런 전설이 생성된 것으로 보인다. 인신공희(human sacrifice)에 대해서 <두산세계대백과사전>은 이렇게 설명한 다. 옛날 제사에서 공양의 희생물로 인간을 신에게 바친 일을 말한다. 세계 여러 민족에서 볼 수 있던 공신( 恭 神 )의 풍습이며, 수렵시대 유목시대를 거쳐 농경 시대까지 존재한 것으로 추정된다. 방법과 목적은 여러 가지여서 일정하지 않으 182 천마와 아기장수 외
나, 예를 들면 비의적( 秘 儀 的 )으로 추대한 왕의 활동력이 감퇴하여 대지( 大 地 ) 의 번식력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고 생각할 때, 왕을 죽여 희생으로 바쳤 다. 때로는 그 대리인이 일정 기간 왕위에 있다가 희생되기도 하였다. 아프리카 에서는 풍작의 기원과 장례에서 널리 하였으며 멕시코에서는 태양신에게 인간을 희생으로 바쳤다. 페루 잉카 고대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타인 이란 인도 그리스 로마 중국 등 고대 문명의 발상지에서는 대부분 인신공희가 있었던 것으로 알 려져 있다. 이와는 달리 토목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옛날에 축성 제방 교량 공 사 등에서 사람을 물 밑이나 흙 속에 묻어 신의 마음을 달래고, 축조물에는 인간 의 영혼을 옮겨 튼튼하게 유지되도록 하였다는 인주전설( 人 柱 傳 說 )도 여러 곳에 서 전하나, 사실이 확인되지는 않았다. 한국도 인신공희의 전설로 공양미 300석 에몸을팔아인당수의 제물로 희생된 심청의 이야기를 들 수 있다. 또한 개성의 지네산[ 蜈 蚣 山 ] 전설, 제주의 금녕굴( 金 寧 窟 )의 구렁이 전 설, 제주 대정산방( 大 靜 山 房 ) 길가에 있는 음사( 淫 祠 ) 광정당( 廣 靜 堂 ) 이무 기전설 등은 모두 흉악한 동물의 횡포를 막기 위하여 마을에서 매년 또는 정기 적으로 인신을 공양하였다는 전설이다. 에밀레종 에 얽힌전설은 귀여운 옥동자 ( 玉 童 子 )를 희생물로 바친 이야기이다. 지명고사 176
19. 한들방죽에 거지를 생매장하다 백석동의 한들방죽은 거지방죽이라고도 부른다. 그런 별칭이 붙게 된 사 연이 전설 속에 있다. 서곶과 검단의 해안 쪽이 거의 다 그러하지만 이 곳도 지난날 바닷물이 드나드는 드넓은 갯벌이었다. 조선 중기 이후 강화( 江 華 )에서 수많은 간척 사업이 이루어진 것에 비해 서곶의 해안은 조선 말기와 구한말에 대대적인 공사가 이루어졌다. 한들 마을 앞의 갯벌은 경사도가 낮아 썰물 때면 어머 어마하게 넓게 드러났다. 조선 말기는 나라 경제가 빈약해져서 대규모 제방공사를 할 수 가 없었 다. 서울의 돈 많고 권세 높은 사람들이 둑을 막고 간척을 하려 했으나 뻘 이깊어번번이 실패하였다. 기계장비가 없이 썰물 때를 이용해 간신히 갯 벌을 파놓으면 밀물이 밀려와 모두 덮어 버렸다. 특히 갯골 매립은 힘들었 다. 결국 마지막에 돈을 대며 덤벼든 것이 송병준( 宋 秉 畯 )이었다. 송병준이 방죽축조에 돈을 대기 시작하고 나서도 갯골 제방이 거듭 터져 나가 몇 달째 공사가 지연되었다. 서해안의 갯벌에는 갯골이 많다. 갯벌 가 운데 이리저리 뱀처럼 굽어진 채로 뚫려 있는 골짜기인데, 대개는 육지에서 큰 시내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어 바다 가운데로 나아간다. 갯골은 밀물과 썰물이 가장 빠르게 드나드는 곳이다. 썰물 때 바닷물이 멀리 나갔을 때도 물기가 많고 토질이 약해 곤죽상태가 되어 보통 무릎 높이까지 빠지며 어 떤곳은한길이넘어수렁처럼 사람을 삼켜버리는 곳도 있다. 한들방죽의 축조에도 이 갯골이 문제였다. 양쪽에서 둑을 쌓아나가면 마 지막에는 마치 수문처럼 바닷물이 드나드는 물길 하나가 남게 되는데, 이것 을 개결수 라고 부른다. 한들 방죽을 쌓을 때, 마지막으로 가장 큰 갯골을 물길로 남겨 놓았는데, 돌과 흙을 퍼부어 쌓아놓으면 밀물에 여지없이 무너 184 천마와 아기장수 외
져 버렸다. 그것이 열 번 스무 번 반복되니 공사 책임자로서는 여간 걱 정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날 현장감독을 맡은 책임자가 다시 무너진 둑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을 때였다. 탁발에 나선 스님 하나가 바랑을 메고 지나갔다. 현장감독은 스님의 바랑에 돈을 넣으며 말했다. 스님, 제발 부탁이오니 둑이 무너지지 않게 기원이나 해주십시오. 스님은 그 자리에 서서 목탁을 두드리며 기원을 했다. 그러나 돌아가 기위해목탁을 거두면서 한 마디 했다. 감독님, 소승이 불가에 의탁한 몸으로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도 리가 아닌 줄 아오나 물길을 막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감독은 스님의 가사자락을 움켜잡았다. 스님, 그게 뭔가 가르쳐 주십시오. 스님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저었다. 감독은 무릎을 꿇었다. 스님, 이 방죽을 막으면 수만 명이 굶어 죽지 않고 살 수 있지 않습 니까. 제발 가르쳐 주십시오. 스님은 다시 목탁을 꺼내 두드리며 나무아미타불을 외고 나서 입을 열 었다. 인신공희밖에 없소이다. 신라 때저서라벌의 에밀레종을 만들 때 쇳 물에 사람을 넣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스님은 목탁을 치며 홀연히 가버렸다. 감독은 밤새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그 뒤 열흘이 걸려 다시 막은 둑 이또무너지고, 또다시 열흘이 걸려 막은 곳이 또 무너졌다. 게다가 겨 울이 눈앞에 다가와 찬바람이 칼날처럼 몰아쳤다. 공사장에 가끔 찾아와 일꾼들이 점심을 먹을 때 배를 채우고 가는 장 쇠라는 총각 거지가 하나 있었다. 오랜만에 공사장에 찾아와 구박을 받 으며 찌꺼기를 얻어먹는 것을 바라보던 감독은 장쇠를 불러 앉혔다. 지명고사 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