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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 철학논집(제38집) 같다. 인간 존재가 가지고 있는 고통과 불행에 대해 많은 사람들의 지속적 인 관심이 있어 왔으며 인간을 불행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는 여러 가지 차 원의 노력이 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어떤 이는 의사의 길에서, 어 떤 이는 교육자,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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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립 중앙 도서 관 출 판시 도서 목록 ( C I P ) 청소년 인터넷 이용실태조사 보고서 / 청소년보호위원회 보호기준과 편. -- 서울 : 국무총리 청소년보호위원회, p. ; cm. -- (청소년보호 ; ) 권말부록으로 '설문지' 수록 I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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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硏究論文 자본주의 시대의 욕망과 진실의 길항 전도연의 밀양 과 하녀 를 중심으로 유진월 한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현대희곡 전공 jinwol@hanseo.ac.kr Ⅰ. 머리말 Ⅱ. 탈영토화된 분열자와 유토피아에의 욕망, 밀양 Ⅲ. 자본주의시대 무산계급/여성의 탈주 욕망, 하녀 Ⅳ. 맺음말

I. 머리말 특정 연기자들이 스타가 되는 이유는 그들의 이미지가 기존의 사회적 위기 속에서 중추적이지만 위협받는 가치들을 체현하기 때문1)이다. 스타가 연기한 인물들은 단지 허구적인 세계에 존재하는 가상의 인물이 아니다. 그들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한 면을 재현한 세트 안에서 우리가 가진 삶의 욕망과 진실의 혼돈을 함께 겪으며 진정한 가치를 찾아간다는 점에서 문제적 인물의 재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배우는 단순히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거나 대중의 코드에 맞는 작품에 출연함으로써 관객의 지지를 받는 것은 아니다.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가치의 혼란을 먼저 겪으며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대표성 을 띠게 될 때, 그리고 기꺼이 그러한 문제적 작품에 출연하여 고유의 해석을 통한 인물 창조에 성공할 때 진정한 스타의 의미를 구현하게 된다. 따라서 스타가 선택한 영화는 이 시대에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를 대중들에게 제시하는 것이며, 그 배우 개인으로서의 사회적 관심사와 사회적 역할을 알게 한다. 이는 특정한 배우가 출연하는 일련의 영화들이 어떤 식으로든 공통점이 있다는 전제가 되며, 그 영화들을 함께 묶어 분석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현재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 전도연은 2007년 칸 영화제에서 이창동 감독의 밀양 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후 2010년에도 임상수 감독의 하녀 로 다시 칸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으면서 국제적 스타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전도연이 유수한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으면서 더 유명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 그간의 출연 영화목록이 한 여배우의 치열한 영화탐구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정상의 여배우라는 칭호에 값한다. 전도연은 1997년 접속 으로 배우로서 성공적인 출발을 한 이후 약속, 해피엔드, 인어공주, 피도 눈물도 없이, 너는 내 운명 등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여 창조함으로써 매번 새로운 변신을 하다가 밀양 에서 마침내 연기의 한 정점에 달했음을 보여주었 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 를 리메이크한 2010년판 하녀 에서도 순진한 1) 크리스턴 글래드힐 편, 조혜정ㆍ박현미 공역, 스타덤, 욕망의 산업 1 (시각과 언어, 1999), 20쪽. 354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3호

듯하지만 요염하고, 여린듯하지만 강인하며, 두려움에 가득 차 있으면서 도 열정을 가진 복잡한 캐릭터를 표현하였다. 본고에서는 자본주의 시대를 살면서 욕망과 진실의 경계에서 혼란을 겪으며 갈등하고 나름의 길찾기를 모색하는 두 명의 여성 인물 캐릭터를 중심으로 전도연의 최근작 밀양 과 하녀 를 분석2)하고자 한다. II. 탈영토화된 분열자와 유토피아에의 욕망, 밀양 밀양 은 이청준의 소설 벌레이야기 를 각색한 작품이지만 인물의 설정, 서사구조, 주제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면에서 달라진 요소들3)이 있다. 특히 결말 부분에서 소설의 여주인공은 끝내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하는 데 반해, 영화에서는 주인공 신애(전도연 분)가 극심한 갈등을 극복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녀가 다시 삶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 을 갖게 되었음을 엔딩 장면의 한 조각 햇빛을 통해 비밀스럽게 보여준다. 원작의 비극적 세계관과 화해의 불가능성을 넘어서서 인간으로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진실한 용서와 화해의 지평에 도달하였음을 조심스럽게 제시함으로써 낙관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한 선택을 통해 신애는 탈영토화된 분열자4)라는 위치에서 강인한 인물로 옮겨가 거듭나 게 된다. 나아가 비극적 시대를 이겨낼 새로운 메시지를 온몸으로 드러내 는 조용한 영웅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이른다. 2) 3) 4) 본고는 기본적으로 여배우를 중심으로 한국 영화를 분석하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한 편의 영화는 배우에게 오늘날 한국 사회의 관심사를 반영하는 문제적 영화로서 선택되고 대중들에게도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영향을 준다는 가정 하에서 분석의 대상 이 될 만하다. 본 연구는 배우 연구가 아니라 배우가 선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고 문제작이 된 영화에 대한 연구임을 밝힌다. 이에 관해서는 허만욱, 소설 벌레이야기 와 영화 밀양 의 모티프 변환 연구, 한 국문예비평연구 (2008); 이만식, 이창동 영화의 문학적 의미, 비교문학 44집 (2008) 참고. 신애는 자신을 얽어매고 있던 남편과 가정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은 동시 에,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 알 수 없는 무산자의 자리로 밀려났다는 점에서 탈영토화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그녀의 욕망은 하나의 통일된 중심을 가졌던 과거의 욕망에서 중심이 해체되어 분산된 욕망으로 이동했다고 볼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신애는 분열적 욕망을 가진 자라는 의미의 분열자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이진경, 필로시네마 혹은 영화의 친구들 (소명출판, 2002), 148-149쪽 참고. 자본주의 시대의 욕망과 진실의 길항 355

1. 행동 이미지를 통해서 본 서사구조 밀양 의 서사구조를 몇 개의 시퀀스로 나누어보면 다음과 같다. 발단: 신애는 어린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인 밀양(密陽, Secret Sunshine)으로 내려온다. 호구지책으로 피아노학원을 차리면서 낯 선 고장에서 가난한 젊은 과부라는 신분으로 인해 무시당할 것이 두려워 돈이 있는 척하며 땅을 보러 다닌다. 전개: 이웃의 웅변학원 원장은 신애가 정말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줄 알고 신애의 아들을 유괴해서 살해한다. 위기: 신애는 큰 충격을 받지만 기독교를 믿으면서 점차 마음의 안정을 찾아간다. 절정: 신애는 살인범을 용서하겠다는 큰 결심을 하고 교도소로 그를 찾아가지만, 그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았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신애는 다른 누가 자기보다 먼저 그를 용서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정신병원에 가게 된다. 결말: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퇴원한 신애는 미장원에 갔다가 살인범의 딸을 만나게 되고, 거기서 뛰쳐나와 자신의 집 마당에 앉아 스스로 머리를 자른다. 처음부터 줄곧 신애의 곁을 지킨 종찬(송강호 분)은 그녀를 위해 거울을 들어준다. 들뢰즈에 의하면, 영화를 구성하는 운동 이미지들 중에서 행동 이미지 가 서사와 가장 큰 근친성을 갖는다.5) 행동 이미지는 한정된 환경과 현실태적 행위들(거동, 태도, 행위 등)과 관계가 있다. 이렇게 구체적이고 특정한 공간과 시간으로 이루어진 환경과 그 안에서 구체화되는 행동들은 곧 리얼리즘의 영역을 구성하게 된다. 여기서 행동이란 환경이나 다른 것들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과 같은 일련의 힘들 사이에서 이루어지 는 싸움들의 계열을 의미한다. 들뢰즈는 초기 상황(S)을 구성하는 힘들의 환경, 행동(A)을 구성하는 힘들의 싸움, 그리고 그 결과로 일어나는 5) 로널드 보그 저, 정형철 옮김, 들뢰즈와 시네마 (동문선, 2006), 131-135쪽. 356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3호

그 상황의 수정(S')을 S A S'라 공식화하고, 큰 형식 의 행동 이미지라고 부른다. 또한 S A S'가 행동 이미지의 하나의 형식이라면 A S A' 배열도 가능하다고 보고, 이를 작은 형식 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운동은 애매한 행동(A)으로부터 수정된 상황 혹은 변화된 상황(S)을 거쳐 새로운 행동들 (A')을 가능케 하는 흐름을 갖는다. 이러한 들뢰즈의 견해에 의하면, 밀양 의 서사구조는 큰 형식으로는 밀양이라는 낯선 공간의 상황(S) 신애의 용서와 화해의 행동(A) 신애 가 안주하고 살 수 있는 공간으로 변모된 밀양의 상황(S') 으로 요약할 수가 있다. 이렇게 보면 이 영화는 한없이 낯선 도시였던 밀양이 미약하나 마 햇빛을 품은 곳으로 변모되어 신애를 감싸안을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라 할 수 있다. 밀양이라는 비밀스러 운 빛의 도시는 처음에는 이방인 신애를 탈영토화시키는 힘의 공간으로 작용했으며, 유목민으로서의 신애는 그 마을을 지배하는 강력하고도 불온한 빛을 이겨내고 재영토화6)함으로써 밀양에 거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밀양이라는 공간은 신애가 그토록 큰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거주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고, 그 도시의 상징적 의미와 그러한 정착에 담긴 의미를 천착할 필요에 도달하게 된다. 종찬: 밀양이 어떤 곳이냐고예? 밀양이 어떤 곳이냐? (그 질문이 그를 약간 당황하게 한 것 같다. 마치 밀양이 어떤 곳인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듯이.) 뭐라카겠노 경기는 엉망이고예, 그 다음에 한나라당 도시고, 그 다음에 부산하고 가깝고, 말씨도 부산 말씨고. 좀 급하고, 말씨가. 인구는 15만 정도였다가 요새는 한 10만으로 줄었고. 신애: (말없이 창밖을 보다가) 아저씨, 밀양이란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종찬: 뜻요? (모른다.) 우리가 뭐 뜻 보고 삽니꺼? 그냥 사는 거지. 신애: 한자로 비밀 밀(密), 볕 양(陽). 비밀의 햇볕. 뜻 좋죠? 종찬: 비밀의 햇볕. 좋네예. (괜히 킬킬거리며 웃는다.) 종찬의 설명에 의하면 밀양은 그다지 별스런 곳이 아니다. 발전 가능성 이 있는 곳도 아니고, 그 도시만의 고유한 특성이나 장점도 없는, 그저 평범한 소도시에 불과하다. 그러면 왜 이창동 감독은 굳이 이러한 별다른 6) 들뢰즈에 의하면 연속해 있는 어떤 힘들은 어떤 생명을 무엇이 되도록(영토화) 할 수도 있고 무엇이 되지 않도록(탈영토화) 할 수도 있으며 탈영토화된 항을 되돌려줄(재 영토화) 수도 있다. 클레어 콜브룩 저, 한정현 옮김, 들뢰즈 이해하기 (그린비, 2008), 45쪽 참고. 자본주의 시대의 욕망과 진실의 길항 357

특성도 없어 보이는 밀양을 영화의 제목이자 공간으로 삼아 이야기를 펼치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원작의 제목인 벌레이야기 를 밀양 으로 바꾼 이유는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원제가 작품의 추상적인 주제를 충분히 이해한 후에야 비로소 그 의미를 알게 되기에 영화의 제목으로는 너무 난해하다. 영화는 포스터로 제작되어 시각적으 로 기호화되는 특성이 있어서, 제목은 간결하고 강한 인상을 주며 기억하 기도 쉽고 말하기도 쉬운 것이 좋다. 둘째, 밀양이라는 지명이 가진 의미를 작품의 주제와 연결시킬 수 있다는 유용성이 있다. 위의 인용 부분에서 종찬에게 이 도시명의 깊은 의미를 굳이 설명하는 장면은 엔딩의 햇빛을 통해 비로소 의미를 완성한다. 밀양은 구체적인 도시명을 넘어서서 용서와 구원과 화해라는 절대적이고 숭고한 가치를 표현하기 위한 아주 적절하고도 비밀스러운 기호로 놀랍게 변화하고 있다. 비밀과 햇빛은 인간을 사이에 둔 종교와 신과 구원이라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비의적인 단어이자 구체적인 재현물이자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이미지이기도 하다. 결국 밀양은 그저 이 땅에 현존하는 일개 도시가 아닌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함의를 담은 구원의 장소로 보편화될 가능성을 담은 유토피아로서의 기호로 상정된다. 이름 보고 사느냐는 종찬의 말처럼 그냥 사는 사람들과 의미를 굳이 찾아보고 생각도 해보고 뜻 좋죠 하고 말하는 신애는, 유토피아에 대한 지향의지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조를 보여주고 있으며, 삶의 진정성이 누구를 통해서 구현될 것인지 암시한다. 평범한 도시를 하나의 구원의 유토피아로 변화시키는 것은 주인공 신애의 행동인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큰 형식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수없이 많은 작은 형식들의 집적에 의해 서사는 진행되고, 나아가 큰 형식의 성취로 이어진다. 신애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중요한 작은 형식의 행동 이미지들은 다음과 같다. 남편은 교통사고로 죽고 아들은 살해당하고 자신은 정신병원에 수용됨 으로써 가정은 파괴되고 가족은 와해되는 것이 주된 상황이다. 부부와 자녀로 이루어진 완벽한 근대 가족의 형태는 사라지고 신애는 홀로 남겨진다. 이 가족이 파괴되는 이유는 외적으로는 교통사고와 살인이라 는 외부로부터의 폭력성에 기인하고 있으므로 거기에 대해서 신애는 아무런 책임이 없고 완전한 피해자로 보인다. 자동차와 유괴범이라는 358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3호

애매한 행동 A 상황 S 새로운 행동 A' (외도한 남편에 대한 실망과 미움) 남편의 죽음 밀양으로 귀향하는 신애 의기소침한 신애 경제적으로 어려움 돈이 있는 척 호기를 부리는 신애 일상적 삶에 몰두 아들이 유괴 살해됨 종교를 받아들임 온유해진 신애 살인범의 평온한 모습에 충격을 광기를 부리는 신애 받음 극심한 갈등 정신병원에서 퇴원 갈등의 극복 폭력의 주체는 신애가 맞서 싸울 수 없는 기계적이고 물리적인 힘이거나 볼 수도 알 수도 없는 숨겨진 존재이다. 개인의 힘으로 방어할 수 없는 강력한 외적인 힘이기에 철저한 피해자인 신애는 동정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내적으로 들어가보면 좀 다른 측면에서 이 상황의 진실을 볼 수 있다. 신애의 남편은 외도를 하고 있었으나 신애는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문제적인 부부관계의 책임이 어느 한쪽에만 있다고는 볼 수 없고 결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호간의 노력과 관심이 중요하다 는 입장에서 보면, 남편의 외도에 대해서 신애가 완전히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남편의 사후에 오히려 남편의 고향을 찾아와 살기를 결심한다는 것은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남편에 대한 상당한 애정과 그리움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신애의 선택은 출발 지점에서 이미 위선적인 측면이 있다. 또한 아들의 유괴는 자신이 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한 것처럼 과장한 것에서 기인하므로, 비록 가난한 과부라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보호막으로 설정한 것이라 해도 신애는 아들의 죽음에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 신애를 고통으로 밀어넣은 이 두 가지 문제적 상황은 냉정하게 보면 신애의 욕망이 진실을 외면하고 억압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애에게나 관객에게나 이러한 진실을 대면하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신애는 남편으로부터 외면당하고 과부가 된 것이나 아들을 잃은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기 버거운 탓에 이성적으로 자신의 진실을 직시할 겨를이 없다. 모든 고통은 외부로부터 온 것이라 믿는 것이 살 길이다. 관객 또한 딱한 처지의 신애를 동정하는 것에 급급해 진실을 탐구할 겨를이 없다. 그러는 동안 신애의 진실은 가려지고 타인에 대한 용서의 문제로 초점이 옮아간다. 자본주의 시대의 욕망과 진실의 길항 359

신애가 가장 큰 행동의 변화를 보이는 것은 살인범을 면회하는 장면 전후이다. 세상에 던져진 자로서의 의무는 아무리 생이 극한으로 치닫는 다 할지라도 산 사람은 살아가야 하는 것이어서 신애는 기독교에 귀의하 고 생의 의지를 다잡는다. 그리고 마침내 살인범을 용서해야겠다는 큰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은 의외의 국면으로 전개된 다. 그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았다며 살인범에 어울리지 않는 매우 평온한 얼굴로 신애를 맞는다. 그 앞에서 신애의 크나큰 결심과 용기는 덧없이 무너지고 자신보다 먼저 그를 용서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하고 의문을 던지게 된다. 아무리 신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예의가 아니다. 그럴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거기서 신애는 다잡았던 자신을 다시 잃어버리며 기행을 하게 되고, 끝내는 정신병원으로 가야 할 정도의 광기를 보인다. 신애에게 있어 아들의 죽음보다도 더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 소중한 아들을 죽인 자에 대한 용서의 주체가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강렬한 의문이었다. 그 의문은 신애를 소수자 되기 로 이끈다. 들뢰즈와 가타리 는 소수자와 다수자라는 용어를 수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구성의 양태적 인 측면에서 기술하기 위해 사용한다.7) 다수성은 이미 고정된 이미지 혹은 이상을 갖고 그 표준에 비추어 누가 수용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고 지배한다. 반면 소수자 는 그러한 표준을 갖고 있지 않으며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고 기존의 것을 변형시킨다. 또한 우리가 세계 내에 고정되지 않고 더 높은 어떤 지향점을 가져야 하고 그에 따라 사유하는 행위 자체도 이동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되기 라는 개념의 중요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신애는 기독교의 고정된 진리관에 승복함으로써 기독교도라는 다수자에 속하지 않고 자기가 중시하는 가치에 대해 새로운 표준을 찾기 원하는 강렬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소수자 되기의 정치학을 보여준다. 오늘날 기독교는 변화된 세계를 수용하고 그에 따른 변모를 보여줄 수 있는 열린 자세와 겸손한 의식이 필요하다. 단지 그들만의 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단합이 아니라, 삶과 현실과 진리의 통합을 지향하는 동시에 진리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열정이 기독교에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신애의 일련의 7) 클레어 콜브록 저, 한정헌 역, 들뢰즈 이해하기 (그린비, 2008), 36쪽. 360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3호

행동은 기독교에 대한 소수자의 반항이자 도전이며 변화에 대한 요구이다. 데리다에 의하면 용서는 불가능한 것이다.8) 진정한 용서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기에 용서가 너무 쉽게 주어진다면 진정한 용서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이 쉬우면 쉬울수록 용서의 가치는 적어진다.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결과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되는 용서는 거의 가치가 없다. 그러므로 용서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를 넘어서 있는, 극히 높은 수준의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고려하여 신애의 행동을 볼 때, 이창동 감독은 종교적 의무 혹은 신의 명령을 사람의 윤리보다 앞세우고 강조하 는 근대 기독교를 넘어서, 무조건적으로 신을 섬기기보다는 스스로 자기 의 영성을 가꾸려고 하는 포스트모던 기독교9)에 근접해 있다. 이창동 감독은 전작 오아시스 를 나와 남과의 경계, 우리와 우리가 배척하는 것과의 경계,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경계, 사랑이라는 환타지와 일상과의 경계, 영화라는 환타지와 현실과의 경계에 관한 영화라고 말한 바 있으며, 밀양 또한 그런 생각의 연장선상에 있다. 경계선에 서서 그 충돌을 경험하는 것은 불편하고 고통스런 일이지만, 진정한 소통을 원한다면 피할 수 없는 자리이다. 상반된 것들이 만나 충돌하는 접점으로 서의 경계선, 그 위에서의 위험하고 불안한 줄타기는 진실에의 욕망을 가진 자, 더 나은 장소 곧 유토피아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자가 설 수밖에 없는 그런 자리일 것이다. 2. 분열자가 창조하는 현세적 유토피아 유토피아는 니체의 관점에 의하면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10) 하나는 욕망과 현실의 거리로 인해 만들어지는 이상적인 세계의 환상을 통해 현실을 벗어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에도 없는 내세적인 것으로, 현실의 추함을 더 부각시키고 고통스런 현실을 부정하는 의지를 보일 뿐이다. 이는 결과적으로는 부정적인 유토피아요 내세적인 유토피 페넬로페 도이처 저, 변성찬 역, 하우 투 리드 데리다 (웅진지식하우스, 2007), 142쪽; 이만식, 이창동 영화의 문화적 의미, 비교문학 44집(2008), 106쪽에서 재인용. 9) 이정석,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www.jsrhee.com. 10) 이진경, 필로시네마 혹은 영화의 친구들 (소명출판, 2002), 166-167쪽. 8) 자본주의 시대의 욕망과 진실의 길항 361

아이다. 다른 하나는 의지가 욕망과 현실과의 거리를 메움으로써 만들어 지는 환상으로서의 유토피아가 있다. 이 경우에 욕망은 환상으로 도피하 지 않으며 현실로 되돌아가려 한다. 여기서는 이상적 사회에 대한 그림에 몰두하기보다는 비참한 현실을 비판하는 양상을 취한다. 유토피아는 현실을 직시하고 비판하게 하는 준거가 되며, 비참한 현실을 바꿈으로써 만 욕망이 충족된다는 의미에서 현세적이다. 이러한 유토피아는 현존하 는 것을 넘어서서 새로운 가치와 현실을 창조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므로 긍정적 유토피아요 현세적 유토피아이다. 밀양 은 현실과 종교, 현세와 내세, 폭력과 용서, 기독교와 구원 등 몇몇의 대립항들이 혼재하는 작품이기에 자연스럽게 유토피아와 연결하여 생각해볼 수 있다. 신애는 복잡한 외적 현실과 내적 갈등의 충돌 속에서 방황을 거치고 궁극적인 하나의 지향점을 깨닫게 된다. 격동적이고 신산한 날들을 거친 후 스스로 머리를 자르기 위해 거울 앞에 앉는 엔딩 장면은 신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담아내는 자아성찰의 의미를 담고 있다. 신애가 지향하는 유토피아는 부정적인 유토피아에서 긍정적인 유토피아로 변모한다. 내세적이고 환상적인 유토 피아를 부정하고 깨뜨림으로써 새롭게 완성되는 유토피아는 현세적인 유토피아이고 이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신애는 능동적인 주체자로서의 의미를 구현한다. 또한 유토피아는 일반적으로 노스탤지어11)와 연결된다. 여기/현재 에 존재하지 않는/잃어버린 낙원/유토피아 에 대한 그리움/상실감 은 과거 적이든 미래적이든 노스탤지어라 할 수 있다. 흔히 과거적인 노스탤지어 의 지향점은 순수의 세계로 요약되고 이는 초록 물고기 나 박하사탕 과 같은 이창동 감독의 전작들에서도 반복되는 주제이다. 그러나 밀양 은 유토피아와 노스탤지어라는 기본 주제를 반복하면서도 이들과는 다른 점이 있다. 전작들에서는 노스탤지어의 지향점에는 순수를 상징하 는 여성이 있고, 그 여성은 궁극적인 구원이 되지는 못하고 나약한 남성의 이상화된 자아의 다른 측면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진다. 그러나 11) 노스탤지어는 17세기에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투하던 스위스 용병들에게서 나타나던 증상으로 멜랑콜리, 식욕부진, 흐느낌, 절망, 자살기도 등의 구체적 증상을 보여주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공간적 의미의 욕망은 과거의 특정한 지점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시간적 욕망과 일치된다.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편, 박하사탕 (삼인, 2008), 165쪽. 362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3호

밀양 에서 여성은 더 이상 노스탤지어의 텅 빈 대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노스탤지어는 병리학적 측면보다는 근대성 의 경험 자체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는 근대라는 것이 단순한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상실감을 유발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곧 근대화를 진보의 서사인 동시에 타락의 서사로 인식하게 될 때 노스탤지어 서사가 두드러지게 되었던 것이다. 신애의 유토피아는 남편과 아들과 함께 단란한 가족을 이루고 살던 과거의 시절 혹은 남편의 사후에 사랑하는 아들과 새로운 삶을 시작한 밀양 초기 시절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시대의 금전만능주의는 사람들을 인륜도덕보다 물질을 중시하게 만들었고 얼마간의 돈을 위해서 이웃의 어린아이를 살해하는 잔인한 폭력을 저지르게 하였다. 그 시점부 터 신애의 낙원은 상실되었고 실낙원에서의 혼란과 고통의 삶이 이어지게 된다. 종교를 통한 회복에의 희망을 가져보기도 했지만 더 큰 절망과 좌절을 경험하고 광기를 드러내게 되고, 마침내 정신병원으로 격리되는 경험을 거친 후에야 겨우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 과정에서 신애는 철저하 게 분열자의 자리에 서 있다. 정상과 비정상, 이성과 감정, 받아들여지는 행동과 배척되는 행동 등의 경계로부터의 탈주를 일삼고 두 개의 대립되 어 있다고 상정되는 세계를 넘나든다. 이러한 신애의 행동은 표준화된 사고에 익숙하고 코드화된 질서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당황스 럽고 수용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신애는 그들의 고정되고 획일화되고 표준적인 가치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완전하게 격리되어야 한다. 그렇게 신애를 탈영토화시킨 연후 다수자들은 안도하게 되고, 다시 찾은 평온함을 바탕으로 신애를 위해 코드화된 기도문을 욀 수 있다. 병원에서 나온 신애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미장원에 가는 것이다. 커다란 거울 앞에 자신을 앉혀놓고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일은 과거로부터 의 단절과 미래를 향한 새로운 의욕과 의지를 담은 상징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애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시도는 다시 한 번 좌절된다. 병원에서 나온 첫날 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미용사가 되어 있는 살인범의 딸과 마주치게 되고, 신애는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온다. 아직 완전한 용서를 할 단계에 도달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결국 집에서 작은 거울을 앞에 두고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르면서 신애는 새로운 출발을 위한 의식의 참된 주례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시대의 욕망과 진실의 길항 363

비밀스러운 햇빛 한 조각이 비치면서 신애가 극심한 투쟁 끝에 얻게 된 유토피아의 실체가 밝혀진다. 그것은 종교를 통한 미래적이고 내세적 이고 환상적이고 이상화된 유토피아가 아니라, 현세적이고 일상적이며 현실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구현되는 긍정적인 유토피아이다. 타인을 용서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의 욕망을 반성하고 외면해왔던 모든 진실과 직면한 다음에 도달하는 현실적 유토피아에 대한 인식을 통해, 관객은 복잡한 현상의 본질을 꿰뚫고 진실로 나아가는 일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입에 발린 형식적인 기도나 허울 좋은 용서와 화해로 진정한 구원에 이를 수는 없다. 긍정적 유토피아는 위험한 경계선상에서 끝없이 탈주하 며 몸과 마음을 다한 투쟁과 고통을 통해서 스스로 새로운 표준을 찾아낸 자만이 도달할 수 있다. 욕망과 진실의 치열한 갈등을 겪고 마침내 유토피아 앞에 선 신애를 비밀스러운 햇빛 한 조각이 비추고 있다. III. 자본주의 시대 무산계급/여성의 탈주 욕망, 하녀 임상수 감독의 하녀 는 1960년 김기영 감독의 하녀 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김기영 감독은 힘 있고 유혹적이며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양육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잔인하고 파괴적이 며 치명적이기도 한 전복적인 여성 인물을 창조했고12), 이는 당대 영화에 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예외적인 인물이다. 하녀 는 1960년대 근대화와 함께 새롭게 부상하는 중산층 가정에서 억압받는 계층에 속한 하녀를 위협적인 여성 인물로 등장시킨다. 평소에 억압되고 그래서 더욱 강력하 기도 한 여성적 본능을 하녀를 통해 그로테스크하게 그려낸 것이다. 이 영화는 중산층 가족의 부상과 붕괴라는 사회적 현상을 배경으로 여성 성애와 위기에 처한 남성 정체성의 측면을 강조하였다. 이를 리메이크한 임상수 감독의 하녀 는 기본적인 줄거리는 차용하지 만 달라진 점들이 있다. 외적 변화로는, 경제수준의 상승을 반영하기 위해 훨씬 화려한 집을 세트로 마련했고, 부수적 인물들을 더 배치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자본주의 태동기였던 1960년대를 지나 고도의 자본주의 12) 김소영, 근대성의 유령들 (씨앗을 뿌리는 사람, 2000), 208쪽. 364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3호

사회가 된 2010년의 사회적 특성도 깔려 있는데, 예컨대 계급이 더욱 강화되어 도저히 그 간극을 뒤집을 수 없다는 절망 같은 것이다. 하녀는 견고한 상류계층에 대항하기가 더 어려워졌고 그들에게 복수하는 것도 더 어려워졌다. 중산층은 붕괴되고 빈부격차는 점점 커지고 천민자본주 의가 활개치는 오늘날의 사회를 배경으로 한 하녀 에는 이따금 블랙 유머가 엿보인다. 하녀 는 극도로 계층화된 집에서 하층계급에 속한 여성의 삶에 대한 도전과 절망, 전복적 욕망과 진실의 추구를 보여준다. 1. 억압하는/억압당하는 욕망의 변주 하녀 의 간략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발단: 은이(전도연 분)는 부유하고 품위있는 집에서 하녀로 일하게 된다. 전개: 어느날 은이는 주인 남자 훈(이정재 분)과 정사를 벌인다. 위기: 은이가 임신하게 되자 훈의 부인 해라(서우 분)와 어머니가 유산을 종용하다가 강제로 유산시킨다. 절정: 은이는 복수를 결심하고 훈의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거대한 샹들리에에 매달려 자살한다. 결말: 어린 딸의 생일날 훈의 가족은 삭막하고 피폐한 분위기의 생일파티를 한다. 하녀 은이에게 주어진 의상은 흰색 블라우스와 검은색의 짧은 치마와 하이힐이다. 제복처럼 깔끔한 이 외적 기호는 은이의 여성적 욕망을 그 단정함 속에 억압하면서 여성이 아닌 하녀라는 직업으로만 존재하도록 명한다. 그러나 은이의 성적 이미지는 충만하게 차올라 있고 그 발산을 기다리듯 팽팽한 긴장감을 내보인다. 젊고 친절하고 예의바른 훈은 집에서 항상 상류계층의 상징인 듯한 와인을 마신다. 포도주를 마시는 행위는 식욕을 드러내는 동시에 성욕과 연결되며 은이에게도 마침내 그와 함께 문제의 와인을 마실 기회가 온다. 어느날 훈은 은이의 방에 찾아오고, 흰색의 속옷으로 자신의 순결과 순수를 표현하는 은이는 잠재 되어 있던 욕망을 발산한다. 은이의 억압하던 욕망은 억압당하려는 자본주의 시대의 욕망과 진실의 길항 365

욕망으로 변하여 두 사람의 욕망은 사도메저키즘의 에너지를 드러내며 상호작용을 일으킨다. 일반적으로 식욕과 성욕은 흔히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먹는다는 것은 욕망의 환유이고, 성적인 행위 또한 빈번하게 먹다와 연관되어 표현되곤 한다. 은이가 식당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훈이 음식을 먹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는 것은 이와 관련된다. 하녀인 은이와 병식(윤여 정 분)은 주인 가족이 먹을 시각적으로 화려한 음식을 장만하고, 그들이 남긴 음식을 먹으며 때로는 주인을 모방하여 몰래 와인을 마신다. 남긴 음식을 먹는 이들의 행위는 이중적인데, 먹는다는 점에서 주인의 욕망을 그대로 답습하는 욕망의 구현 행위이자 남긴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에서 계층적으로 분화된 하층계급의 욕망 구현방식을 보여준다. 그들은 먼저 먹을 수 없으며, 오직 남겨진 것 곧 버려질 것들만을 먹도록 허용된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먼저 구현할 수 없고, 주인의 욕망의 찌꺼기만을 통해 이차적인 욕망을 구현할 수 있다. 욕망은 본능에 의한 것이며 자발적으로 원하는 것을 하고자 하는 강렬함을 기본 속성으로 한다. 그러나 이들의 욕망은 철저하게 억압되어 있으며 억제되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더욱 폭발적인 위력을 가지고 있다. 반복적으로 억압당하고 제어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것은 언젠가는 강력하게 폭발할 수 있는 위험한 욕망으로 내재화되고 있다. 어떤 사회도 착취와 예속, 위계의 구조 없이는 욕망의 정립을 견뎌낼 수 없다는 점에서, 들뢰즈는 욕망이 본질적으로 혁명적13)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욕망은 제멋대로 하려는 의지를 통제하는 코드화의 과정을 거쳐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기존의 질서를 뒤엎고 혁명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음식을 만들고 먹은 다음에는 배설하는 행위가 이어진다. 은이는 영화에서 두 번 배설한다. 한 번은 화장실에서 안주인 해라처럼 욕조에 몸을 담그고 목욕하는 병식과 대화하면서이고 다른 한 번은 여행을 가서 눈밭에서이다. 아무도 배설하지 않는데 유독 은이만 두 번 배설한다. 그것도 통상적인 사적인 공간에서 혼자 하는 행위가 아닌, 남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이 배설 행위는 음식을 만들고 먹고 배설하 는 삼단계의 마지막 행위라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자신을 위해 음식을 13) 이진경, 앞의 책, 85쪽. 366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3호

만들지 못했으며 그들처럼 제대로 앉아서 먹지 못했던 은이는 세 번째의 배설 행위를 통해 그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오직 자신만의 욕망을 구현한다. 이 배설은 음식을 먹다 와 관련된 욕망, 나아가 성적인 행위에 대한 은이의 강렬한 욕망을 상징하며 두 번이나 시위하듯 전시된다. 하녀 는 이 상류층 저택에 단 두 명의 하녀를 배치한다. 하녀들은 깔끔한 옷을 입고 하이힐을 신고 그 거대한 저택의 모든 집안일을 해내고 있는데 특히 은이는 요리, 청소, 안주인의 마사지와 손톱 발톱 정리, 아이 돌보기에 이르기까지 일인 다역을 담당한다. 이러한 상황의 제시는 이 영화가 불필요한 인물들을 제거함으로써 은이 훈 해라라는 단 세 사람의 욕망과 권력의 파워게임에 집중하게 한 알레고리적인 작품임을 의미한다. 한 남자를 둘러싼 두 여자의 삼각관계는 흔히 돈과 집안, 학벌과 미모, 임신과 아이, 사랑과 계산 등의 많은 요소들의 유무에 따라 두 여자를 경쟁관계에 놓는다. 여기서 은이는 아내에 비해 완전한 열세에 있다. 은이에게 비록 주인 남자와의 사이에서 욕망을 불사른 사적인 사건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통상 멜로드라마의 삼각관계 같은 순수한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건장한 주인의 하룻밤 여흥이자 다음 날 바로 돈으로 상환되는 매우 경제적인 교환행위일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정사가 임신으로 연결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내에게 있어 하녀의 임신은 사랑보다도 훨씬 더 위협적인 일이므로 은이의 아이는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위험한 아이로 인식된다. 그러나 주인은 누가 감히 내 아이를 이라고 말한다. 하녀와의 외도에 관하여 아내에게 전혀 죄책감을 갖지 않는 그는 자신과 관계 있는 아이는 비록 그것이 하녀의 아이건 사랑 없는 정사의 소산이건 무조건 자신의 아이로서 존중받아야 한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의 물질만을 숭배하는 장모는 그의 말을 무기력하게 수용하고, 그의 물질을 완전히 자신의 아이에게 물려주기를 욕망하는 아내 해라는 은이의 아이를 죽이기 위한 독약을 준비한다. 은이는 살기 위해 또 아기를 지키기 위해 보약을 마시고 그 보약/독약은 아이를 유산시킨다. 이 과정에서 은이는 계속 빨대를 사용해서 한약을 마신다. 성교시에 훈이 말한 빨대로 빨듯 이라는 대사와 빨대 로 한약을 빨아먹는 행위는 명백하게 연결된다. 몸을 보호하기 위한 한약을 빨대로 빨아먹지만 그 한약 속에는 은이의 아이를 유산시키려는 목적으로 해라가 숨겨놓은 자본주의 시대의 욕망과 진실의 길항 367

독약이 들어 있다. 그것도 모르고 한약을 먹는 행위는 훈과의 성행위에 담긴 행복의 가능성과 불행의 결말을 동시에 암시하며 빨대/빨다 안에서 뒤엉켜 있다. 이는 사랑과 성교, 임신과 모성의 생명보호, 살해와 죽음을 둘러싸고 상호 적대적인 가치와 행위와 의미들이 뒤섞인 혼란스러움을 드러낸다. 은이는 남들이 보는 데서 배설하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남자와 정사를 벌이고 임신하고 유산하는 비체로서의 여성의 몸을 반복해 서 드러내면서 여성의 문제적 몸에 대한 사고를 표면화시키고 토론의 장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훈의 성행위의 특이성과 그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훈은 사랑을 나눌 때 아내/은이와 마주보지 않는다. 그의 성행위는 남녀 상호간의 사랑과 쾌락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오직 남자 한 사람을 권력자 또는 지배자로 만들고 여성은 그의 쾌락을 위해 종사하는 피지배자로 만들면서, 두 사람 간에 존재하는 수직적 신분관계와 상하관계를 시각화 하는 특성을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는 해라와 은이가 동일한 자리에 있게 된다. 아내 해라는 권력자를 마주보지 않는 자세를 취하고, 은이는 꿇어앉거나 올려다보는 자세를 취하며, 남자는 급기야 슈퍼맨과 같은 포즈를 취하기도 한다. 남자의 절대권력은 은이의 임신과 장모가 그 아이를 유산시키려 했던 사건 앞에서 당신 딸이 낳은 아이만 내 아인 줄 아십니까? 라고 말하는 오만함과 부도덕함으로 이어진다. 아버지가 남들에게 친절하라고 하셨어요. 그게 남을 높여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나를 높이는 거랬어요. 라는 딸아이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남자의 세련되어 보이는 친절의 의미는 위선과 오만의 다른 얼굴에 불과하다. 저마다 진실을 외면하고 욕망만을 향해 치닫는 하녀 의 인물들은 폭발 지점을 향해 달려간다. 욕망이 억압해온 진실의 힘이 그 억압을 이겨내는 순간, 욕망의 에너지로 맹렬하게 질주하던 이들은 진실과의 대면을 견디 지 못하고 파멸할 수밖에 없는 종착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2. 복종하는/저항하는 하녀의 복수와 억압된 것들의 귀환 훈ㆍ해라, 은이ㆍ병식은 한 사람의 개인이라는 측면에서는 각기 욕망의 주체들이다. 그러나 전자는 부르주아 계층에 속한 욕망의 능동적 주체자 들이고, 후자는 프롤레타리아 계층의 인물들로서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 368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3호

고 숨겨야 하는 욕망의 원조자들이다. 후자는 전자가 자신의 욕망을 완전하게 구현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하며, 이는 언젠가는 이들이 자신의 욕망을 주체적으로 분출하는 혁명적 순간을 준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훈에게 있어서 욕망이란 결핍을 메우기 위해 대상을 소비하는 것이다. 훈은 임신중인 아내에게서 욕망을 충족시키기 어려워지자 은이를 찾아간 다. 그들은 성교를 하지만 거기에는 사랑이라는 정서적 기반이라곤 전혀 없으며 은이는 다만 훈의 욕망의 대상으로서 소비되었을 뿐이다. 성매매를 하고 돈을 내듯이 훈은 은이에게 놀랄 만큼 큰 액수의 수표를 지불한다. 그의 마음은 아무런 정서적 반응도 일말의 갈등도 죄책감도 없으므로 완전무결하게 깨끗하다. 그는 자신의 구매에 대해서 정당하게 혹은 그 이상으로 지불을 했기 때문이다. 수표를 받고 은이는 당황하고 실망한다. 은이는 훈의 방문과 성행위에 그와는 다른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고, 훈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부적절한 반응이다. 은이는 적어도 남자와 여자가 성행위를 하는 순간 거기에는 어떠한 진실이 내재되어 있다는 믿음이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기를 적극적으로 드러낼 수도 있다. 그러나 훈에게는 진실이라곤 전혀 없다. 그는 물질만 중시하는 타락한 사회에서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부도덕하고 이기적인 인간이며 진실의 가치라곤 전혀 모르는 욕망덩어리에 불과하다. 훈은 집안에서 모든 욕망의 대상을 독점하고 있다. 그는 아내는 물론 하녀도 욕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고, 먹고 마시는 행위는 그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자신의 부도덕한 행위의 결과로 은이가 임신하자 아내와 장모에게 자신의 아이를 함부로 할 수 없음을 주장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을 독차지하려는 그들의 욕망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알려줌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를 각인시킨다. 장모는 심지어 자신의 딸 해라에게, 비록 남편이 외도를 하더라도 너와 네 아이들이 가지고 누릴 것들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용납할 수도 있지 않느냐. 는 타협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해라와 장모는 훈과 마찬가지로 진실과는 거리가 먼 물질중심적 인물들이다. 아내 해라는 훈과의 관계 안에서 보면 욕망의 객체이다. 비록 그와의 결혼을 통해 안주인으로서 물질의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언제라도 훈의 의사와 결정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 그래서 자기 자리를 확고하게 자본주의 시대의 욕망과 진실의 길항 369

다지기 위해 임신중이고, 앞으로도 더 많은 아이를 낳아서 그와의 관계를 강화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는 해라에게는 주체로서의 욕망을 구현하는 의지보다는 남성과 물질에 끌려다니는 객체로서의 특성이 더 강함을 의미한다. 부르주아 계급에 속해 있으나 남편과는 남성/여성의 수직적 계층관계를 보여준다. 반면 은이는 아내와는 수직적 계층을 이룬다는 점에서 열등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나, 남성/부르주아의 지배에 쉽게 굴복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주체의 자리에 선다. 우선 남자와의 관계에서 정사를 물질적 교환의 행위로 생각하기보다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소산이기를 기대한다. 그래야 두 사람의 정사가 대등한 행위로서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물질로 교환되는 순간 그 행위는 성을 둘러싼 구매자/판매자의 자리에서 일어난 일종의 교환행위로 바뀌며 자본주의 사회의 성노동이라 는 측면으로 이행한다. 그러나 은이가 자신을 성의 판매자의 자리가 아닌 사랑의 행위자로 보려는 것은, 자신의 행위가 비록 남자의 요구에 응하여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나 내적으로는 자신의 은밀한 욕망을 구현하 는 주체적 행위로 의미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이에게 그것은 물질로 보상할 수 없는 진실이 담긴 중요한 행위이므로, 예기치 못한 수표를 받는 순간 모욕감을 느끼게 된다. 또한 임신을 알게 된 후 아이를 지키고 출산하려는 의지는 이를 금지하 려는 권력과 맞서는 강한 욕망의 구현 행위로 이어진다. 권력의 욕망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진실에 충실하려는 은이의 자세는 탈주의 욕망을 드러낸다. 생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계층간 대립의 부당함에 대해서 자신의 새로운 삶을 창조하고 나아가려는 진실을 향한 의지의 표출이고 불온한 혁명을 꿈꾸는 욕망이다. 욕망은 위반을 낳고 위반은 탈주로 이어진다. 아이를 강제로 잃고도 항변할 길이 없는 나약하고 억압받는 프롤레타리아 계층의 하녀 은이는 거대하고 폭력적이며 강압적인 부르주 아의 집안을 떠났다가 혁명적 탈주자가 되어 돌아온다. 자기의 목숨을 걸고 온전히 저항하는 은이는 비로소 전사로 거듭난다. 부르주아가 가진 것들에 주눅들고 억압당한 과거의 자신에서 탈주한 은이는 지배계급의 권력을 완전히 해체하고 파괴한다. 진실을 중시하고 욕망과의 조화를 꿈꾸던 은이의 죽음 이후, 이들에게는 가정도 가족도 모두 사라지고 허울 좋은 껍데기만 남아 비틀거리는 형국이 된다. 어린 370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3호

딸의 생일날 남자는 아이의 마음과는 동떨어진 비싼 그림을 선물하고 아이는 예의바르게 그것을 받아들이며, 세 사람은 일체의 진실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되고 괴리되어 의례적으로 생일축하 노래를 부른다. 이 괴기스러운 가족은 은이가 있던 시절 은이와 아이를 중심으로 오가던 약간의 인간적인 면모마저 완전히 사라진 섬뜩한 풍경 안에 놓여 있다. 이미 가족이라 부를 수 없는 비인간적이고 물화된 이들의 불행한 모습은 진실의 가치를 모르는 이들을 향한 은이의 복수가 완성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기존의 질서와 권력을 전복하는 혁명 14) 으로 나아간다. 욕망과 혁명은 불가피하게 만나는데 첫째, 혁명이 기존 질서의 전복인 한 그것은 기존 질서에 길들지 않은 힘에 의해 추동되어야 한다는 점, 둘째, 욕망이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고 저항하려는 한 그것은 혁명이라는 정치적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 다. 욕망과 계급의 접속은 탈주하려는 욕망이 통과해야 할 지점이며 이는 일종의 욕망의 정치학이라 부를 수 있다. 복수로서의 은이의 죽음 장면은 일면 과도하게 폭력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는 여러 종류의 폭력성을 제공하며, 어쩌면 영화는 폭력성에 가장 잘 맞는 예술 15) 일 수 있다. 폭력성은 미학의 중요한 주제이며 그것은 모든 창조적 행위의 중심에 있다. 폭력은 일종의 억압의 해소이며, 개인과 세계와의 긴장에서 생겨나서 그 긴장이 정점에 달했을 때 폭발한다. 이는 어떤 평정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예술작품은 어느 정도의 폭력성을 포함하 고 있거나 적어도 그것을 상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술은 갈등관계 를 인식함으로써 폭력성을 완화시키는 한 방법이며 그러한 인식을 통해 폭력성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지닌다. 폭력성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영웅이 가는 길을 보여주며 힘과 고귀함을 표현하고 도전의 순간을 제공한다. 이러한 순수하고 직선적인 폭력성은 패배가 아닌 승리로 가는 길을 보여준다. 그것은 삶에 대한 용기, 인간과 자연간의 투쟁 및 인간에 대한 인간의 투쟁에 대한 인식, 승리하고자 하는 의지의 해방을 표현한다. 이것은 평화로 가는 문을 열고 넘쳐나는 행복을 알리는 폭력성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은이의 폭력적인 죽음 장면은 진실의 14) 이진경, 앞의 책, 115-117쪽. 15) 크리스턴 글래드힐 편, 앞의 책, 118-120쪽. 자본주의 시대의 욕망과 진실의 길항 371

가치를 드러내는 중요한 행위로 의미화할 수 있다. 프로이드는 무의식 속에 깊이 묻혀 있던 과거의 기억이 의식으로 잔혹하게 침투하는 것을 억압된 것의 귀환 16)이라고 불렀다. 이 개념으로 보면 김기영의 하녀 는 자신의 육체를 계급상승을 위해 이용하지만 결국 실패하는 괴물같은 여성을 창조해냄으로써 1960년대 한국 사회의 불안함을 그려냈다. 그리고 임상수의 하녀 는 진실을 억압하는 부당함 에 대항하여 자신을 온전히 던져 부조리한 현대사회에 도전한 은이를 통해 억압된 것의 귀환을 보여준다. 은이는 억압된 것의 폭발적인 힘과 폭력성의 미학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여성으로 매우 강렬하게 형상화되 고 있다. IV. 맺음말 전도연은 첫 영화 접속 에서 사랑의 가능성과 소망을 가진 순수한 여성상으로 그려졌다. 해피엔드 에서는 남편과 옛애인 사이에서 사랑 의 열정을 택하는 팜므파탈을 연기했고 남편으로 대표되는 한국 사회와 가부장제의 응징을 받아 살해되는 역할을 맡았다. 너는 내 운명 에서는 에이즈로 죽어가면서 순애보의 대상이 되었고, 밀양 에서는 현실과 종교, 위선과 진실 사이의 경계선상에서 진정한 화해와 용서는 가능한가 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붙들고 씨름했다. 하녀 에서는 자본주의의 견고한 계급간의 갈등을 겪으며 삶의 진실을 찾으려 애썼다. 가진 자의 멸시에 죽음으로 저항하면서 억눌린 욕망의 귀환과 폭력의 미학을 보여주 었다. 예술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다. 예술을 통해 우리는 재현들이 작품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여 사유와 접속하고 스타일을 생산하는지 알 수 있다. 예술은 우리의 사고를 정향하는 언어와 양식을 진단하는 방식이며 우리에게 가치의 힘 또는 생산력을 보여줄 수 있다.17) 전도연이 그동안 영화에서 보여준 여성 인물들은 당대의 보편성을 가진 인물이면서도 문제적 쟁점을 사회에 던질 만한 중요한 경계선상에 있는 인물들이었다. 16) 김소영, 앞의 책, 216쪽. 17) 클레어 콜브록 저, 앞의 책, 49쪽. 372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3호

관객들은 그 인물들을 보면서 언제나 격동기 아니었던 적이 없었던 한국 사회의 극심한 갈등을 함께 고민할 수 있었다. 스타는 대중문화의 산물이며 영화 속에서 의미작용을 하는 한 요소지만 동시에 산업의 마케팅 장치이며, 문화적 의미와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전달하는 동시에 개인적 퍼스낼러티의 친밀감을 표현하고 욕망과 동일화를 끌어내는 사회적 기호18)이다. 전도연이 영화 안의 한 역할을 맡고 관객과 동일시 작용을 거치며 공감과 감동을 이끌어내는 과정에는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도전과 새로운 가치 구축의 시도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스타가 어떤 영화를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단지 개인적인 기호와 취향의 문제를 넘어서는,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 는 과정에 참여하고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밀양 의 신애와 하녀 의 은이가 혼란에 빠져 방황하다가 어떤 선택 을 내리는 과정은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사랑과 열정을 가졌으되 그런 순수함이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타락하고 물화된 사회에서 삶에 대한 안간힘의 노력을 경주하는 인물들을 통해 궁극적으로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하는가에 대한 도전을 추동받는다. 관객은 동일화 과정을 통해서 자본주의로 인해 철저하게 물화되고 더 공고한 계급사회가 된 한국 사회와 지배체계에 대한 반감과 그에 대한 투쟁에의 욕망을 생산한다. 스타와의 동일화는 잠재적인 저항으로 관객을 인도하고 그 저항에 힘을 부여한다. 전도연의 최근 영화 두 작품을 통해 보여준 여성 인물들은 한 여배우의 뛰어난 연기를 전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 혼란의 시대에 욕망의 갈등을 유발하는 문제들과 직면하여 진실을 선택하기 위해 투쟁하며 나아가는 문제적 인간을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가치의 창출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18) 크리스턴 글래드힐 편, 앞의 책, 16쪽. 자본주의 시대의 욕망과 진실의 길항 373

참 고 문 헌 김소영, 근대성의 유령들. 서울: 씨앗을 뿌리는 사람, 2000, 208쪽. 들뢰즈ㆍ가타리 저, 이진경 옮김,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서울: 동문선, 2001, 14-20쪽. 로널드 보그 저, 정형철 옮김, 들뢰즈와 시네마. 서울: 동문선, 2006, 131-135쪽.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편, 박하사탕. 서울: 삼인, 2008, 165쪽. 이만식, 이창동 영화의 문화적 의미. 비교문학 44집, 한국비교문학회, 2008, 106쪽. 이정석,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www.jsrhee.com. 이진경, 필로시네마 혹은 영화의 친구들. 서울: 소명출판, 2002, 85쪽, 148-159쪽. 크리스턴 글래드힐 편, 조혜정ㆍ박현미 공역, 스타덤, 욕망의 산업 1. 서울: 시각과 언어, 1999, 20쪽. 클레어 콜브록 저, 한정헌 옮김, 들뢰즈 이해하기. 서울: 그린비, 2008, 36, 45쪽. 허만욱, 소설 벌레이야기 와 영화 밀양 의 모티프 변환 연구, 한국문예비평연구. 2008, 453-474쪽. 374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3호

국 문 요 약 본고에서는 자본주의라는 시대적 특성 안에서 욕망과 진실의 경계에서 갈등하고 혼란을 겪으며 나름의 길찾기를 모색하는 두 여성 인물 캐릭터 중심으로 전도연의 최근 작품 밀양 과 하녀 를 분석하고자 했다. 밀양 에서 신애는 현실과 종교, 위선과 진실 사이의 경계선상에서 진정한 화해와 용서는 가능한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보여주었다. 하녀 에서 은이는 자본주의의 견고한 계급간의 갈등을 겪으며 삶의 진실을 찾으려 애썼다. 가진 자의 멸시에 죽음으로 저항하고 억눌린 욕망의 귀환과 폭력의 미학을 보여주었다. 밀양 의 신애와 하녀 의 은이가 혼란에 빠져 방황하다가 어떤 선택 을 내리는 과정은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사랑과 열정을 가졌으되 그런 순수함이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타락하고 물화된 사회에서 삶에 대한 안간힘의 노력을 경주하는 인물들을 통해 궁극적으로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하는가에 대한 도전을 추동받는다. 관객은 동일화 과정을 통해서 자본주의로 인해 철저하게 물화되고 더 공고한 계급사회가 된 한국 사회와 지배체계에 대한 반감과 그에 대한 투쟁에의 욕망을 생산하게 된다. 투고일 2010. 6. 28. 수정일 2010. 8. 5. 게재 확정일 2010. 8. 13. 주제어(keyword) 전도연(Jeon DoYoun), 밀양 ( Secret Sunshine ), 하녀 ( The House- maid ), 자본주의(capitalism), 욕망 (desire), 들뢰즈(Deleuz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