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部 地 域 粘 土 帶 土 器 文 化 의 時 空 間 的 正 體 性 1 中 部 地 域 粘 土 帶 土 器 文 化 의 時 空 間 的 正 體 性 李 亨 源 (한신대박물관 학예연구사) - 목 차 - Ⅰ. 머리말 Ⅱ. 硏 究 史 Ⅲ. 時 間 軸 設 定 Ⅳ. 空 間 的 分 布 樣 相 을 통한 몇 가지 問 題 提 起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주지하는 바와 같이 남한지역의 점토대토기문화는 점토대토기옹, 흑색마연장경호, 두 형토기와 같은 토기류와 세형동검, 동경, 주조철부, 주조철착 등 금속기류, 그리고 적석 목관묘와 같은 묘제가 등장하는 등 일련의 새로운 물질문화가 유행하면서 이전 시기에 비해 계층분화가 한층 심화되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물질문화의 계보와 관련하여 심양 정가와자유적을 비롯하여 신민현 공주둔 후산유적, 무순 연화보 유적 등의 점토대토기옹 과 흑색마연장경호를 주목하기 시작했고( 鄭 漢 德 1992), 이어서 남한 점토대토기문화의 기원이 요령지역에 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朴 淳 發 1993b; 李 健 茂 1994). 이와 같 은 남한 점토대토기문화의 요령지역 기원설은 이후 많은 연구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 朴 辰 一 2000; 李 淸 圭 2000; 李 成 載 2007 등), 발표자 역시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 李 亨 源 2005). 앞서 말한 점토대토기와 세형동검, 전국계 철기를 표지로 하는 남한지역의 점토대토기문화는 지역 별로 문화의 전개양상이나 그 내용이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데, 본 발표문은 중부지역 1) 점토대토기문 화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검토하기 위해서 마련한 글이다. 이를 위해 이 지역의 선행 연구성과를 점검 하면서 편년을 보완 또는 교정하고, 이와 함께 이 지역 점토대토기문화가 가지고 있는 공간적 분포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가운데 특히 초현기로 볼 수 있는 점토대토기문화의 등장과 재지문화와 의 시간적 위치 관계를 파악하고, 세형동검문화 성립기의 자료를 검토한다. 이어서 원형점토대토기의 늦은 시기부터 삼각형점토대토기 존속기에 해당하는 초기철기유입단계를 검토하기로 한다. 1) 본 발표의 중부지역은 서울 경기지역과 강원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적 범위를 지칭한다.
Ⅱ. 硏 究 史 중부지역의 점토대토기문화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파악하기 위해 검토한 선행 연구성과 는 다음과 같은데, 이를 중부지역을 포괄하는 논문과 서울 경기지역과 강원지역을 중심으 로 검토한 문헌을 시기순으로 나열하였다. <중부지역 포괄> 韓 相 仁 1981, 粘 土 帶 土 器 文 化 性 格 의 一 考 察 서울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李 淸 圭 1982, 細 形 銅 劍 의 型 式 分 類 및 그 變 遷 에 對 하여, 韓 國 考 古 學 報 13 朴 淳 發 1993a, 한강유역의 청동기 초기철기문화, 한강유역사, 민음사 朴 淳 發 1993b, 우리나라 初 期 鐵 器 文 化 의 展 開 過 程 에 대한 약간의 考 察, 考 古 美 術 史 論 3 李 健 茂 1994, 韓 國 式 銅 劍 文 化 의 性 格 - 成 立 背 景 에 대하여-, 東 아시아의 靑 銅 器 文 化, 文 化 財 管 理 局 文 化 財 硏 究 所. 노혁진 2001, 粘 土 帶 土 器 文 化 의 社 會 性 格 에 대한 一 考 察 - 住 居 遺 蹟 의 特 色 을 중심으로-, 韓 國 考 古 學 報 45 金 範 哲 2001, 남한지역 후기무문토기문화의 성격 연구-서울지역 연구를 위한 시론적 고찰-, 서울학연구 ⅩⅥ 李 南 珪 2002, 韓 半 島 初 期 鐵 器 文 化 의 流 入 樣 相 - 樂 浪 설치 以 前 을 중심으로-, 韓 國 上 古 史 學 報 36 朴 淳 發 2004, 遼 寧 粘 土 帶 土 器 文 化 의 韓 半 島 定 着 過 程, 錦 江 考 古 創 刊 號 朴 辰 一 2007, 粘 土 帶 土 器, 그리고 靑 銅 器 時 代 와 初 期 鐵 器 時 代, 韓 國 靑 銅 器 學 報 1 宮 里 修 2009, 韓 半 島 劍 把 頭 飾 의 分 類 와 編 年, 嶺 南 考 古 學 50 쇼다신야 2009, 원형점토대토기시기 취락구조론(Ⅰ)-중부지역-, 韓 日 聚 落 硏 究 의 새로운 視 角 을 찾아서 第 5 回 共 同 硏 究 會, 한일취락연구회 <서울 경기지역> 李 白 圭 1974, 京 畿 道 出 土 無 文 土 器 磨 製 石 器 土 器 編 年 을 中 心 으로, 考 古 學 第 三 輯, 韓 國 考 古 學 會 진수정 2005, 경기지역의 초기철기시대 유적과 유물-점토대토기 단계 유적을 중심으로-, 畿 甸 考 古 제4호(2004) 徐 吉 德 2006, 원형점토띠토기의 변천과정 연구-서울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세종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박진일 2006, 서울 경기지방 점토대토기문화 試 論, 고고학 5-1 李 和 種 2006, 中 部 地 域 初 期 鐵 器 文 化 의 展 開 過 程, 중부지역 초기철기문화의 현황과 과제, 2006년도 제3회 서울경기고고학회 정기발표회 발표요지 <강원지역> 이숙임 2007, 강원지역의 점토대토기문화 고찰, 古 文 化 69 朴 榮 九 2010, 嶺 東 地 域 圓 形 粘 土 帶 土 器 文 化 의 展 開 樣 相, 韓 日 聚 落 硏 究 의 새로운 視 角 을 찾아 서, 韓 日 聚 落 硏 究 會
中 部 地 域 粘 土 帶 土 器 文 化 의 時 空 間 的 正 體 性 3 <도면 1> 중부지역의 점토대토기문화 주요 유적 분포도
Ⅲ. 時 間 軸 設 定 고고학연구의 가장 중요한 기본 자료 가운데 하나가 토기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으며, 특히 시간성 을 다루는 측면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점토대토기문화를 편년할 때, 많은 연구자들이 인정하고 있는 것은 토기상에서 단면원형점토대토기가 삼각형점토대토기보다 빠르고, 파수부호의 형태는 환형파수에 서 조합우각형파수로, 이어서 다시 봉상파수로 변화한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점토대토기옹의 동최대경 이 상위에서 하위로 이동한다거나, 또는 그 반대의 경우가 주장되기도 하며, 토기의 크기를 주목하기 도 하는데 논자에 따라 견해차가 상존한다. 이를 감안하여 여기에서는 토기상의 변화는 큰 틀로 활용 하고 나머지는 석기와 청동기의 선행 연구성과 2) 를 검토하면서 중부지역 점토대토기문화의 단계 설정 을 실시하고자 한다. 1. 琵 琶 形 銅 劍 段 階 의 粘 土 帶 土 器 文 化 점토대토기문화는 세형동검문화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듯이 이 두 용어의 표지유물이 된 점토대토기 와 세형동검은 출현 시점이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일반적이었지만, 중국 동북지역의 점토대토 기문화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서 남한내 점토대토기의 등장이 세형동검에 선행한다는 견해들이 나타 나기 시작했다( 李 淸 圭 2000; 朴 辰 一 2007 등). 여기에서는 이와 관련된 중부지역의 자료를 검토한다. 우선 남한 점토대토기문화의 계보와 직접 연결되는 것으로 판단되는 중국 심양 정가와자의 비파형 동검과 점토대토기옹, 흑색마연장경호의 존재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는 평양 신 성동 석관묘에서 점토대토기는 출토되지 않았지만, 이와 세트관계를 이루는 흑도장경호가 늦은 시기 비파형동검과 함께 나왔고(국립중앙박물관 2006), 김천 문당동 목관묘에서도 역시 말기 비파형동검 과 점토대토기 옹이 부장품으로 확인된 점이 그러하다. 이와 같은 자료는 예산 동서리, 아산 남성리, 대전 괴정동유적 등 이른 시기의 세형동검과 점토대토기옹, 흑도장경호를 핵심 조합으로 하는 세형동 검문화보다 앞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울 경기지역과 강원지역을 공간 범위로 하는 중부지역의 경우는 어떠할까. 먼 저 유구석부와 석촉을 대상으로 하여 이 문제에 접근하도록 한다. 이 지역의 유구석부에 대해서는 자료의 제약으로 그동안 별다른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최근 발굴 결과 가 속속 공표되면서 검토가 요구되는 시점으로 볼 수 있다. 점토대토기와 관련 없는, 즉 역삼동유형 송국리유형 천전리유형의 주거지에서 출토된 유구석부는 <도면 2>에서 볼 수 있으며, 점토대토기와 공반되는 유구석부의 전체적인 양상은 <도면 3>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유구석부는 구하부와 등면의 형태에 따라 크게 3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A형 ( 背 部 3)직선, 溝 下 部 사선), B형(배부직선, 구하부 직선으로 기부와 평행), C형(배부곡선, 구하부 직선 또는 사선)이 그것이다. 유구석부를 포함한 주상편인석부를 치밀하게 분석 한 배진성(2001)의 분류와 비교하면, 배진성의 구하부 대분류Ⅰ형과Ⅱ은 사선이고 Ⅲ형 은 직선에 해당하므로, 발표자 A형은Ⅰ형(구하부 短 斜 線 ) Ⅱ형(구하부 長 斜 線 )에 B형은 Ⅲ형에 각각 대응한다. C형은 기부의 형태가 곡선을 띠는 것인데, 배진성 분류에서는 구 2) 청동기 역시 세형동검의 경우 新 式 과 古 式 사이에 서로 병존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동검을 표지유 물로 시기구분을 하는 것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는데( 李 淸 圭 1982, 35쪽), 여기에서도 이를 염두 에 두고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3) 背 部 는 溝 와 대칭되는 등면을 말하는데, 頭 部 에서 刃 部 가 시작되는 지점까지에 해당한다.
中 部 地 域 粘 土 帶 土 器 文 化 의 時 空 間 的 正 體 性 5 하부를 주속성으로 두었기 때문에 등면 형태는 중시하지 않았다. 배진성의 연구성과인 구하부 형태변화(Ⅰ Ⅱ Ⅲ)는 학계에서 대체로 인정받고 있는데, 유구석부의 이와 같 은 변천양상은 (선)송국리유형에서 점토대토기문화로 이행하는 시간적 측면을 잘 반영하 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를 발표자의 형태분류에 적용하면 A B C의 흐름이 되는 것이다 4). 늦은 시기의 C형은 주로 영남지역에 편중되는 점에서 어느 정도 지역성을 엿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유구석부 형태 변화의 방향성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전제하면서 중부지역의 유구석부를 검토해보자. 북한강유역의 장방형주거지와 경기 남부의 반송리식 또는 송국 리식주거지에서 A형 유구석부가 공렬토기와 함께 출토된다. 그리고 춘천 천전리유적에 서 볼 수 있듯이 규모가 작은 방형주거지에서 B형 유구석부가 확인된다. 한편, 점토대토 기와 공반된 유구석부의 경우는 고성 초도리 1호 주거지와 같이 장방형주거지에서 A형 이, 고성 송현리 B-6호 말각방형 주거지에서 B형이 출토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을 적극 해석한다면 점토대토기문화의 A형 유구석부는 비점토대토기문화인 역삼동유형 송국리유 형 천전리유형의 A형 유구석부와 같은 시기에 존재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유구석부 A형의 존속 폭에 대한 고려와 함께 점토대토기의 후행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 려한다면, 적어도 非 점토대토기문화의 A형 유구석부가 사용되는 늦은 시기에는 점토대 토기문화의 A형 유구석부가 공존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천전리유형에서 유행하 는 일체형석촉이 초도리 1호 주거지에서 A형 유구석부와 함께 확인되는 점도 이를 뒷받 침한다. 또한 非 점토대토기문화의 B형 유구석부가 존재할 때에는 점토대토기문화의 B형 유구석부도 공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춘천 천전리유적의 3단계의 어느 시기부 터는 점토대토기문화가 중부지역에 존속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박순발(2004)은 압록강, 청천강 등 한반도의 북서지역 기원을 주장하는 전영래의 견해에 동 조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배진성의 Ⅲ형식(발표자의 B형식)이 가장 이른 형식일 가능성도 있다고 하 였지만, 이는 수긍하기 어렵다. 유구석부는 노혁진이나 배진성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구하부가 사선인 A형에서 구하부가 직선인 B형식으로 변천하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다만 발생지역은 전영래나 박순발 의 주장과 같이 남한지역 보다는 대동강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서북한지역일 가능성이 더욱 높은 것으 로 생각된다 5). 이는 북한지역에서도 이른 시기의 A형과 늦은 시기의 B형이 모두 나타나며, 남한지역 청동기시대 전기에서 송국리유형시기의 석기상이 서북한지역의 석기상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 것도 이와 연결시킬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6) (도면 10). 다음으로 검파두식을 통해 같은 고민을 해보도록 한다. <도면 4>는 검파두식의 공반 양상과 비교 자료를 나타낸 것이며, <도면 6-9>는 검파두식과 검의 상관성 및 분포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도면 5>에서 볼 수 있듯이 미야자토(2010)의 검파두식 편년을 함께 고려한다면, 미야자토 편년 Ⅱ단계의 石 製 十 字 立 柱 形 검파두식에서부터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이 같이 확인되며, 그 이전 4) 발표자의 A B형은 노혁진(1981)의 유구석부 분류 Ⅰ(구하부 사선) Ⅱ(구하부 직선)의 흐름과 동 일하다. 다만, 여기에서는 큰 틀에서의 변화양상을 검토하기 위한 것으로 노혁진의 Ⅲ Ⅳ형식이나 배진성의 하위 속성의 베리에이션은 검토하지 않았다. 물론 더욱 세밀한 시간성과 공간성을 밝히 기 위해서는 배진성의 연구와 같은 정치한 분석이 요구된다고 볼 수 있다. 5) 일찍이 이백규(1974)는 경기지역의 주상편인석부나 유구석부의 기원을 대동강유역 팽이형토기문화 권의 유단석부에서 구한 바 있다. 6) 강화 삼거리유적이나 화천 용암리유적에서 각형토기가 출토된 적도 있지만, 각형토기문화권의 강 한 지역성을 고려하면 집단의 정체성을 잘 반영하는 토기보다는 석기나 청동기와 같은 유물의 상 호작용이 더욱 활발히 일어났을 것이다.
의 석제 枕 形 이나 석제 山 形 또는 석제 十 字 平 形 검파두식은 비파형동검 단계로 파악된다. 그리고 초 포리나 남양리유적 등 초기철기 유입시점을 전후한 시기부터는 청동제 검파두식이 주류를 차지한다. 용인 농서리 1호묘의 산형 검파두식과 유경식석검, 흑색마연장경호의 공반 양상이나 고성 송현리 D-7호 주거지의 십자평형 검파두식과 반월형석도, 일체형석촉의 출토 양상이 바로 비파형동검기 점 토대토기문화의 한 측면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비파형동검기 송국리유형 단계의 검파두식으로 잘 알려져 있는 안동 지례리 19호지석묘나 보성 봉능리 지석묘 출토의 立 柱 形 검파두식 농서리의 공반 관계를 감안한다면, 초현기 점토대토기문화와 병행할 가능성이 있다 7). 지례리와 봉능리의 검파두식을 비파형동검기의 점토대토기와 같은 시기로 볼 수 있다면, 점토대토기 등장 이전에 해당하는 비파형동 검기의 검파두식은 현재로서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셈이다. 이 밖에 용인 대덕골을 비롯하여 중서부 지역의 서천 추동리, 대전 궁동유적의 경우도 비파형동검기의 점토대토기와 검파두식으로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추론이 타당하다면 화천 용암리 7호 주거지나 강릉 입암동 3호 주거지의 십자평형 검파두 식의 경우도 남한 점토대토기문화 병행기에 속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이 역시 용암리3단계나 천전리3단계에 해당하는 전술한 유구석부의 분석과도 일치한다. 상기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송국리유형과 동시기로 편년되는 천전리유형( 金 權 中 2008)의 어느 시기에 점토대토기문화가 중부지역으로 들어와 공존하면서 상호작용을 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이와 같은 비파형동검기 점토대토기문화의 절대연대는 요령 심양 정가와자유적 6512묘를 기원전 6-5세기 보면서 燕 과 齊 의 요서진출, 요중지역 凉 泉 문화와 한반도 점토대토기문화의 밀접한 관계를 생각하는 박진일(2007)의 견해가 중요하다. 또한 평양 남경유적의 점토대토기옹과 미송리형토기가 공반된 3호 주거지의 연대를 요령지역 미송리형토기 Ⅲ단계에 해당하는 기원전7세기중엽-6세기초로 추정하는 견해( 金 美 京 2006)와 함께 남한지역 점토대토기 주거지의 절대연대측정치를 적절히 고려한 다면 대략 기원전 500년 이전에 점토대토기문화가 중부지역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한다. 이어지는 세형동검기의 출현 시기를 고려하면 점토대토기가 사용된 비파형동검단계는 대략 기원전 500-400년 으로 비정할 수 있다. 7) 실제로 안동 지례리 19호 지석묘와 인접한 곳에서는 점토대토기와 조합우각형파수부호가 출토된 점이 참고되는데, 이미 박진일(2000)에 의해 지례리의 검파두식이 원형점토대토기단계로 파악된 바 있다.
中 部 地 域 粘 土 帶 土 器 文 化 의 時 空 間 的 正 體 性 7 <도면 2> 중부지역 역삼동유형 송국리유형 천전리유형의 유구석부(유구,유물 축척동일)
<도면 3> 중부지역(강원)의 점토대토기와 관련된 유구석부(유구,유물 축척동일)
中 部 地 域 粘 土 帶 土 器 文 化 의 時 空 間 的 正 體 性 9 <도면 4> 중부지역 검파두식의 공반 양상 및 비교자료(유구,유물 축척 동일)
<도면 5> 검파두식과 동검의 관계 및 검파두식 편년(미야자토 오사무 2010)
中 部 地 域 粘 土 帶 土 器 文 化 의 時 空 間 的 正 體 性 11 <도면 6> 한반도 출토 石 製 枕 形 및 十 字 平 形 劍 把 頭 飾 ( 近 藤 喬 一 2000 가필)
<도면 7> 한반도 출토 石 製 十 字 立 柱 形 劍 把 頭 飾 ( 近 藤 喬 一 2000 가필)
中 部 地 域 粘 土 帶 土 器 文 化 의 時 空 間 的 正 體 性 13 <도면 8> 한반도 출토 靑 銅 製 十 字 立 柱 形 劍 把 頭 飾 ( 近 藤 喬 一 2000 가필)
<도면 9> 한반도 출토 石 製 枕 形 및 十 字 平 形 劍 把 頭 飾 ( 近 藤 喬 一 2000 가필)
中 部 地 域 粘 土 帶 土 器 文 化 의 時 空 間 的 正 體 性 15 <도면 10> 북한지역의 유구석부(1/8) 2. 細 形 銅 劍 段 階 의 粘 土 帶 土 器 文 化 세형동검 성립기(한국식동검문화 성립기)의 점토대토기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으로는 중서부지역의 아산 남성리유적을 비롯하여 대전 괴정동, 예산 동서리유적 등을 들 수 있다( 李 健 茂 1992). 중부지역 에서 이와 관련된 자료는 먼저 강릉 송림리 주거지에서 출토된 검파두식과 점토대토기옹을 지목하고 자 한다. 그 이유는 송림리와 유사한 형태의 십자입주형 검파두식은 ( 傳 )전북 출토품과 같이 조문경 과 공반되는 초기 세형동검과 짝을 이루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부여 수목리나 황해도 서흥 천곡리, 영암 장천리 1호지석묘에서도 세형동검 혹은 말기비파형동검과 공반된다. 또한 송림리 이후에 형식학 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장수 남양리에서 볼 수 있듯이 석제가 아닌 청동제 십자입주형이 나타나는 점 에서 송림리의 검파두식은 세형동검 형성기로 편년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송림리 주거지는 파괴 유 실된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지만 비교적 작은 규모의 방형 주거지와 그 내부의 중앙부에 노지가 존재 하는 구조를 보이는 점에서 고성 송현리 B-6호 주거지도 동시기일 가능성을 지적해 놓고자 한다. 다음으로 속초 조양동 1호 지석묘에서 출토된 선형동부와 삼각형무경촉으로, 이는 아산 남성리나 전주 여의동유적 출토품과의 형태적 유사성에서 볼 때, 역시 세형동검 성립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 다. 그리고 양평 상자포리 지석묘에서 1호 지석묘에서 출토된 세형동검도 같은 시기로 볼 수 있으며 안성 만정리 신기유적의 4지구 1호 목관묘의 세형동검도 아산 남성리의 그것과 동일한 점에서 같은 시기로 위치를 부여한다. 상자포리와 만정리 신기의 세형동검 사이에 약간의 시간차가 존재할 가능성 이 있지만, 일단 큰 틀에서 세형동검 성립기로 분류한다. 한편, 점토대토기를 출토하는 환호가 확인된 화성 동학산유적은 동착용범이 부여 구봉리유적의 동 착과 같은 형식인 점에서 세형동검 발전기(한국식동검문화 발전기)( 李 健 茂 1992)로 볼 수 있는데, 서울 영등포의 동착도 같은 단계로 비정할 수 있다. 안성 만정리 신기유적에서 지표채집된 동착과 동 사도 여기에 속할 것이다.
<도면 11> 중부지역 점토대토기문화기의 청동기(용범) 철기집성(1-17:1/6,18-28:1/4)
中 部 地 域 粘 土 帶 土 器 文 化 의 時 空 間 的 正 體 性 17 <도면 12> 중부지역 점토대토기문화기의 청동공구류와 비교자료(1/6)
<도면 13> 중부지역 점토대토기문화기의 석촉 동촉 철촉과 비교자료(1/4) 세형동검 발전기에 나타나는 정문경의 경우는 양양 정암리와 횡성 강림리 출토품이 알려져 있는데, 함흥 이화동이나 봉산 송산리에서 정문경과 중국의 전국계 철기가 같이 나오는 점에서 남한지역 내 초기철기 이입기로 연대가 내려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한국식동검기의 성립기와 발전기를 포함하는 이 시기의 절대연대에 대해서 이건무(2003)는 상한연 대로서 4세기 전반에서 3세기말에 해당한다고 보았으며, 박진일(2007)은 이건무의 성립기 개시연대 를 따르는 한편, 발전기는 燕 下 都 의 辛 庄 頭 30호묘 출토 동과에 대한 이양수와 近 藤 喬 一 의 연구성과
中 部 地 域 粘 土 帶 土 器 文 化 의 時 空 間 的 正 體 性 19 를 받아들여 초기철기 이전의 세형동검기를 기원전 3세기 후반대로 편년하였다. 필자는 남한 세형동 검의 시작을 4세기 전반으로 보는 것에 동의하며, 후술할 초기철기 유입기를 안정적으로는 기원전 250년 빠르면 기원전 300년 경까지도 올려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고려하여 세형동검단계 점토 대토기문화의 연대를 기원전 400-300년 경으로 비정하고자 한다. 3. 初 期 鐵 器 段 階 의 粘 土 帶 土 器 文 化 중부지역에서 철기 자체가 직접 확인된 것은 안성 만정리 신기유적 출토품과 강릉 포남동유적 보고 예에 지나지 않는데, 이를 포함하여 동시기로 편년되는 자료들을 검토하기로 한다. 우선, 만정리와 포남동 자료를 살펴보면서 논의를 전개시키고자 한다. 안성 만정리 신기유적의 2지 점 나구역 1호 목관묘에서는 삼각형편평무경촉 11점과 동촉의 경부편으로 추정되는 유경식동촉1점, 그리고 형태가 불분명한 동제품 1점 등 모두 13점이 출토되 었다. 이 운데 삼각형편평무경촉은 석촉 8점, 동촉 1점, 철촉 2점으로 나뉜다. <도면 13>에 제시된 바와 만정리의 동촉은 합천 영창리유적 28호 수혈에서 출토된 동촉과 유사하지만, 신부에서 봉부로 향하는 각도에 다소 차이가 있다. 석촉은 점 토대토기문화의 전 시기에 사용되었는데, 비파형동검기와 세 형동검기의 삼각만입촉이 비교적 대형인 반면에 초기철기단계 의 그것은 상대적으로 소형인 점에서 차이가 있다. 신부에서 봉부로 이어지는 전체적인 형태 역시 조금 다르다. 철촉 2점 은 삼각형편평무경촉이면서 약간 만입된 형태를 띠는데, 현재 까지 확인된 초기철기시대의 철촉은 만정리의 예가 유일하다. 형태상 주조철부가 공반된 장수 남양리 1호묘의 석촉, 그리고 단조철부 단계인 경산 임당 조영ⅠB-7호묘 출토 석촉과 유 사하다. 만정리의 철촉은 중부지역에서는 원삼국시대의 철원 와수리유적에서부터 다시 나타나는데(최영민 2010), 남부지 역에서도 대구 팔달동, 창원 다호리 등 원삼국 전기의 출토품 과도 바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만정리의 예는 초기철기 단계의 철촉으로서는 비교대상이 없는 점이나 촉의 단면이 비대 <도면 14> 강릉 포남동유적의 칭을 띠는 볼록렌즈상인 점에서 볼 때, 鐵 鍦 를 재가공해서 제작 초기철기시대 유물과 비교자료 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석촉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강릉 포남동유적( 李 蘭 暎 1964)의 예는 그동안 학계에서 주목하지 않은 자료이다. 장방형주거지에 서 이단병식석검이나 삼각만입석촉, 이단경식석촉, 반월형석도 등이 출토되어 청동기시대 전기로 편년 된다. 여기에서 확인된 동촉 역시 석검이나 석촉으로 보아 청동기 전기나 비파형동검문화단계로 보는 견해( 李 淸 圭 1988, 86-87쪽; 李 健 茂 1992, 128쪽)가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형태의 이단경식 동 촉은 중국 전국시대의 연하도나 목양성 등에서 유사한 예가 있으며, 춘추시대의 이단경촉과는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전국계 동촉의 한 종류일 가능성을 새롭게 제기하고자 한다 8). 함께 보고된 철기는 파 손되었지만(현존 길이 9.2cm) 송곳으로 추정되는 鐵 錐 일 가능성이 있는데, 무순 연화보유적의 그것 8) 서울 암사동유적의 문화층에서 출토된 이단경식동촉도 포남동 동촉과 유사하다( 岩 寺 洞 遺 蹟 發 掘 調 査 團 1983).
과 닮았다 9) (도면 14). 그리고 서울 상일동이나 양양 부근 출토로 알려진 세형동검의 경우는 동검의 형식이 늦을 뿐만 아 니라, 같이 나온 석제 枕 形 검파두식의 형식이 삼각형점토대토기와 철기가 공반된 대구 월성동 777-2번지유적 Ⅱ-4호묘 출토품(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08)과 흡사한 점에서 초기철기 단계로 볼 수 있다. 한편, 이 시기를 대표하는 토기는 삼각형점토대토기를 표지로 한다. 안성 만정리 6지점의 초기철기 1호 토광묘로 명명된 목관묘 출토품이 여기에 해당하며, 화성 반송리 행장골유적을 비롯하여 서울 가 락동 4호 주거지, 시흥 오이도, 고양 대화리 가와지, 문산 당동리, 수원 고색동, 이천 이치리유적 등지 에서 삼각형점토대토기가 출토되었다(도면 15). 이 밖에 단면 원형점토대토기도 일부 병존했을 가능 성이 높지만, 중부지역의 현재의 자료로써 이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쉽지 않다. 다만 원형점 토대토기와 삼각형점토대토기가 같이 출토된 고양 대화리 가와지나 시흥 오이도유적의 양상을 참고할 수 있지만, 동시기성 여부가 분명치 않다. <도면 15> 중부지역 초기철기시대의 삼각형점토대토기와 관련 유물(1/10) 한반도에 戰 國 時 代 燕 國 系 의 철기가 유입하는 시점에 대해서는 기원전 3세기말에서 2세기초로 보 는 이건무(2003)의 견해가 있으며, 청천강 이북지역은 기원전 3세기경에, 청천강 이남의 서북한지역 과 금강유역권은 기원전 2세기경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남규 2009). 박진일(2007) 역시 남한지역 초기철기의 중심 연대를 기원전 2세기대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의문을 갖는 것은 과연 서 북한지역과 남한지역의 초기철기 유입 시점에 어느 정도의 시기차를 두는 경사 편년을 적용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점이다. 소위 '세죽리-연화보유형' 문화의 철기 연대를 기원전 300년을 전후한 시점의 燕 將 秦 開 의 東 侵 과 연결시키는 것이 타당하다면, 비슷한 유물상을 보이는 한반도 남부의 초기철기유적 의 시작도 여기에서 멀지 않은 시점으로 비정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양 지역간에 굳이 시기 차를 둘만한 적절한 이유가 없다면 남한지역의 초기철기 유입도 기원전 300년에서 가까운 시기로 이 해하고자 한다. 이와 관련하여 늑도옹관의 인골에 대한 C14연대측정결과를 검토하여 삼각형점토대토 기인 늑도식토기의 상한연대가 3세기 전반까지 올라갈 가능성을 제시한 견해도 참고할만하다 10) ( 李 昌 9) 철경동촉의 슴베일 가능성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데, 실물을 보지 못해 단언하기는 어렵다. 10) C14연대측정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적극 수용하여 신중할 필요가 있지만, 古 木 효과나 해양레저 버효과 등을 제거하고 오차범위가 ±20년 또는 15년까지 줄어드는 등 측정방법이 더욱 정교화 된 결과치는 신뢰도가 높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번 늑도 옹관의 C14연대측정결과는 실연대에
中 部 地 域 粘 土 帶 土 器 文 化 의 時 空 間 的 正 體 性 21 熙 金 憲 奭 2010). 이와 같은 점에서 초기철기단계의 점토대토기문화는 기원전 250년경 또는 다소 넓 게 시간폭을 잡는다면, 기원전 300년 경부터 원삼국시대가 시작되는 기원전 100년 경으로 설정해 놓 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4. 中 部 地 域 粘 土 帶 土 器 文 化 의 編 年 調 整 과 時 代 區 分 지금까지 중부지역의 점토대토기문화에 대해 큰 틀에서의 시간축을 설정해 보았는데, 이를 요약하 여 나타내면 <도면 16>과 같다. 비파형동검단계-세형동검단계-초기철기단계의 3단계 편년이 바로 그것인데, 세형동검이 사용되기 이전 단계에 이미 요령지역의 점토대토기문화가 한반도에 유입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와 같은 견해는 이미 이청규(2000)의 문제 제기와 박진일(2006 2007)의 연구 에 의해 어느 정도 공감대가 조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본 발표를 통해 비파형동검기 점 토대토기유입설을 더욱 보강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제기된 중부지역 점토대토기문화의 편년안 가운데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박진 일의 연구와 필자의 검토 내용을 비교해보자. 박진일은 중부지역 점토대토기문화 편년연구에서 환형 파수 단순기의 존재 여부나 유구석부의 공반 여부, 세형동검과 철기의 등장 등을 기준으로 하여 다음 과 같이 단계를 설정하였다. 즉 1단계(환형파수단순기:수석리,백령도)-2단계(유구석부를 통한 재지문 화 접변기, 환형파수와 조합우각형파수 공존:반제리,교성리 등)-3단계(세형동검기,환형파수소멸:남성 리,괴정동,구봉리 등)-4단계(전국계 철기문화,삼각형점토대토기,명사리식토기:소소리,오이도)-5단계 (전국계철기문화2차파급,단조철기,와질토기,한경:오이도,독서리 등) 구분안이다(박진일 2006: 朴 辰 一 2007). 이를 필자의 편년안과 대비하면 원삼국시대에 편입되는 5단계를 제외한다면 박진일의 1-2단 계만 통합하여 비파형동검단계로, 3단계는 세형동검단계로, 4단계는 초기철기단계로 하여 큰 흐름은 일치한다. 그렇지만 환형파수 단순기의 존재가 아직은 너무 미약하고 11), 재지문화와의 접변을 보여주 는 표지유물로 삼은 유구석부는 앞서 검토한 바와 같이 이미 서북한지역에서 완성된 상태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재검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필자 역시 아직은 환형파수 단순기 를 적극적으로 인정할 단계는 아니지만, 앞으로의 자료 증가를 기다려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는 있다 고 보는데, 일단 여기에서는 박진일의 1-2단계를 늦은 시기 비파형동검기의 점토대토기문화로 위치 부여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박진일과 필자의 단계 설정을 토기의 형식변화와 관련하여 생각해보면 동최대경의 변화가 상위에서 하위로 내려간다는 주장은 재고의 여지가 많다. 적어도 중부지역에서는 비파형동검단계의 점토대토기는 동최대경이 동하위와 동상위에 있는 것이 모두 확인되기 때문이다 12). 물론 유적에 따라서 혹은 지역에 따라서 이러한 형식변화가 유효한 경우도 볼 수 있겠지만, 이를 일 반화시키는 것은 위험하다.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중국 동북지역으로부터의 점토대토기문화 유입이 단 순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그 시기 중부지역의 재지문화 역시 역삼동유형과 송국리유형, 그리고 천전리 유형 등으로 매우 다양하여 이들이 접촉하면서 상호작용을 한 결과가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한다 13). 가까운 연대가 도출된 것으로 보아도 좋다 고 생각한다. 반면에 아직 일부 연구기관에서 측정된 결과는 오차범위가 ±50년 이상되는 것이 대부분이며, 고 목효과에 대한 문제의식도 개선되고 있지 않은 점에서 신뢰도는 어느 정도 떨어질수밖에 없다고 본다. 11) 환형파수 단순기의 핵심 근거로 거론되고 있는 남양주 수석리의 자료에 대해서는 환형이 아니라 조합우각형 파수라는 이창희(2008)의 재검토가 있었다. 12) 사실, 심양 정가와자 출토품을 비롯한 중국 동북지역 점토대토기의 동최대경이 동상위에 있는 것 이 많기 때 문에 이와 같은 선입견에 사로잡혔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13) 이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청동기 혹은 초기철기문화는 중국동북지역이나 북한지역으로부터 끊임 없이 새로운 문화가 들어오고, 남한지역 내에서도 집단간에 활발한 상호작용이 일어났던 것으로
위와 같은 편년안이 타당하다면 비파형동검기에서 세형동검기, 초기철기단계에 걸치는 점토대토기 문화를 시대 또는 시기구분과 어떻게 대응시킬 것인가를 다시 한 번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2005년도의 논문까지는 철기 등장 이전의 세형동검기 점토대토기문화는 청동기시대 후기로, 그 이후 에 전국계 철기가 공반되는 시기부터는 초기철기시대로 부르는 박순발(1993a 1998)의 제안을 따랐 다( 李 亨 源 2005). 그러나 2006년도에 새로이 주창된 안재호의 청동기시대 3분기설(조기:미사리유형 -전기:가락동역삼동 흔암리유형-후기:송국리유형)에 따라 점토대토기문화를 초기철기시대(삼한시대) 로 취하여 따르고 있다( 李 亨 源 2007 2010). 초기철기시대에 대한 안재호의 삼한시대론은 점토대토기 문화가 외래문화이면서 주거지, 분묘, 유물 등 대부분의 물질문화가 기원전 3-4세기에 급격하게 변 하며, 문헌상의 삼한을 의식한 것이었다. 필자 역시 삼한 이라는 용어의 국지적 한계를 제외한다면 비슷한 관점에서 점토대토기문화의 등장을 초기철기시대로 보았던 것인데, 이는 김원룡에 의해 1960 년대 중반에 처음으로 제시되어 1986년 한국고고학개설 제3판에서 확정된 구석기-신석기-청동기 -초기철기-원삼국-삼국-통일신라라는 시대구분( 李 熙 濬 2004)을 따른 것이다. 이와 같이 기원전 300년 경부터 원삼국시대가 되기 전까지의 기간을 초기철기시대로 구분하는 것은 한국고고학회에서 2007년에 발간한 한국고고학강의 초기철기시대(이청규 2007)편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물론 아직 도 김원용의 초기철기시대를 청동기시대 후기로 구분하는 연구자가 상당수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세형동검과 점토대토기, 철기의 등장을 동일시하고 이를 계기로 새로운 물질문화가 한반도 남한 전역을 광범위하게 변화시켰다는 논리가 중요한 근거가 된 초기철기시대론은 지금의 고고학자료 로 볼 때는 잘 어울리지 않는 모순점이 몇 가지 있다. 먼저 금번 검토에서도 이루어진 점토대토기문 이해되는데, 아마도 문화 의 내재적 변화발전의 방향성과 더불어 역동적인 외부 충격의 결과가 고고학자료에 나타나기 때문에 형식학 적 검토에 어려움이 많다고 생각한다.
中 部 地 域 粘 土 帶 土 器 文 化 의 時 空 間 的 正 體 性 23 <도면 16> 중부지역 점토대토기문화 편년(주거지1/300,무덤1/150,토기1/12,기타1/8) 화의 등장은 비파형동검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500년 이전에 한반도로 유입되며, 세형동검문화는 연 구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기원전 400년에서 300년 경 사이에 형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철기는 기 원전 300년 이후에 한반도에 유입되고 생산된다. 즉 점토대토기와 세형동검, 그리고 철기의 등장 및 확산은 모두 시차를 두고 이루어진 점에서 김원용의 초기철기시대 핵심 물질자료 3가지가 기원전 3 세기에 동시에 나타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김원룡이 제안한 초기철기시대 개념을 인용하면, 이렇게 서기전 3세기가 되면 철기의 현
지 생산, 청동 利 器 의 실용성 상실이라는 점에서 청동 제품이 급증하고 청동기술이 크게 발전하지만, 실질적인 문화 단계는 철기 사용 단계이며 초기철기시대라고 규정짓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종래 청동기Ⅱ기라고 불러오던 이 서기전 300년간(B.C.300-0)을 초기철기시대로 부르기로 하는 것이 다. 또한 초기철기시대의 분기에 대해서는 초기철기시대는 Ⅰ식 세형동검, 精 文 式 세문경으로 대 표되는 Ⅰ기(B.C.300-100)와 Ⅱ식 동검의 출현, 車 馬 具 의 부장, 세문경의 소멸, 철기 생산의 본격화 시기인 Ⅱ기(B.C.100-0)로 다시 갈라진다. 고 하였다. 현재는 연구성과에 따라 김원룡의 초기철기 후반은 원삼국시대로 편입하게 되었다( 李 康 承 朴 淳 發 成 正 鏞 1996; 李 熙 濬 2004; 朴 淳 發 2009). 그 렇다면 초기철기시대는 기원전 300년 경을 전후한 시점부터 기원전 100년 경까지의 200년간에 해당 한다. 아무튼 이제 기원전 3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관찰되는 고고학자료 변화상의 획기를 중국 전국 철기 점토대토기 세형동검 등의 일련의 새로운 문화요소의 출현으로 규정하여( 朴 淳 發 2009) 초기철기시대 로 부르는 것은 신중히 재검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기왕의 초기철기 시대를 철기시대로 부르거나 초기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를 통합하여 철기시대 또는 삼한시대로 구분 하는 것은 모두 근본적인 문제점을 내재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한편, 삼시대 구분법에 따라 전통적으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등의 도구 재질에 따른 시대 명칭을 사용하는 사례가 많이 있지만, 한반도와 같이 역사기록이 남아 있는 역사시대에 대해서는 해 당 시간대의 대표적인 정치체명을 따라 쓰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朴 淳 發 2009). 이와 같 은 관점에서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의 구분을 세형동검과 적석목관묘 등 물질문화와 함께 馬 韓 이라는 정치체를 원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原 史 로 규정하고, 마한의 성립을 한국식동검문화의 등장과 동일시하여 청동기대의 점토대토기문화 이후의 기원전 4세기 부터를 초기철기시대로 구분한 박진일(2007)의 견해도 주목된다. 초기철기시대의 용어의 합당성을 떠나서 마한과 같은 정치체의 존 재를 통해 원사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므로 청동기시대와는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논리는 청동기시대의 (고)조선과도 연결될 수 있는 것이므로 초기철기시대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쨌든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 동북지역을 외연으로 하는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초기철기시대의 시대구분 및 명칭에 대한 견해 차이는 그 이후의 원삼국-삼국시대에 대한 논쟁만큼이나 잘 해결이 되지 않고 있지만. 이번 검토를 통해 2006년도에 간행된 안재호의 박사 논문 이후에 급속도로 확산 되고 있는 조기-전기-후기의 청동기시대 삼시기구분에서 벗어나 다시 안재호의 2000년 논문 당시의 4시기구분, 즉 조기(미사리유형)-전기(역삼동 가락동 흔암리유형)-중기(선송국리 송국리유형)-후기 (점토대토기단계)로 회귀할 필요성도 다소 느끼고 있다. 다만, 이를 조정하여 청동기시대 조기(미사리 유형)-전기(가락동 역삼동 흔암리유형)-중기(송국리유형)-후기(수석리유형)-만기(초기철기단계)의 5시기로 구분하는 것도 하나의 방편일수도 있다고 본다. 만기의 경우는 청동기 및 무문토기문화가 여 전히 강하게 유지되면서 초기철기문화의 일부 요소가 유입되는 단계인데, 한반도에 유입되는 초현기 의 철기는 주로 주조철부나 철착과 같은 공구류로서, 이는 기존의 동부와 동착을 대체한 것으로 보인 다( 李 盛 周 1996). 철기 생산과 관련해서는 한반도의 일부 지역에서 철기의 자체생산이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李 南 珪 2002), 있었다고 해도 그 양상은 매우 미미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러한 이유로 '초기철기시대'라는 시대명칭이 부여되었던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역시 한 반도에서의 철기생산은 기원전 100년 이후에 해당하는 김원용의 초기철기시대 후반이 되어서야 활발 하게 이루어지는데, 이 시기는 지금은 원삼국시대로 편입되었음을 고려해야할 것이다. 시대구분이라는 큰 틀을 이야기하면서 상세한 논증 없이 초기철기시대론을 비판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되지만, 적어도 점토대토기문화의 등장 시점부터를 초기철기시대로 보기 어렵다는
中 部 地 域 粘 土 帶 土 器 文 化 의 時 空 間 的 正 體 性 25 것만은 지적해 놓고자 한다. 앞으로 철기가 한반도에 유입된 기원전 3-2세기대 이후부터 원삼국시대 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양상을 자세히 분석하여 이 시기에 대한 초기철기시대의 개념을 더욱 명확하게 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시대명을 쓸 것인지, 또는 청동기시대에 포함해도 좋을 것인지에 대해서 다 각도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대와 시기를 구분하는 기준과 획기를 무엇으로 둘 것인지, 어떤 용어가 그 시대를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까지의 인지도를 반영하여 그 개념만을 정교하게 다듬을 것인지 등에 대해서 고고학이나 문헌사학 등 역사 관련 학계뿐만이 아니라 일반 시 민사회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예를 들어 교과서나 박물관 전시의 경우 등) 시대구분안이 마련되기 를 기대한다. Ⅳ. 空 間 的 分 布 樣 相 을 통한 몇 가지 問 題 提 起 1. 요령 점토대토기문화 남한지역 유입 창구로서의 중부지역 중국동북지역로부터 점토대토기문화가 남한지역으로 유입되는 경로에 대해서는 서해안 해로와 함께 압록강유역-청천강유적-원산만을 경유한 육로도 동시에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 박순발(2004)의 최근 견해는 금번 검토를 통해서도 뒷받침할 수 있었다. 일찍이 평양 남경유적 3호주거지의 토기가 점토대토기로 인식되기 시작한( 林 炳 泰 1986; 鄭 漢 德 1992) 이후, 박순발(1993a)에 의해 점토대토기 대동강유역 발생설이 제기된 바도 있었지만, 이는 주 창자에 의해 바로 폐기되면서 요령 기원설로 바뀐다( 朴 淳 發 1993b). 이후 이건무(1994)에 의해 요 령지역과 남한지역 점토대토기문화의 주거구조와 분묘, 유물 등이 종합적으로 검토되면서 이는 학계 의 통설로 자리 잡았다. 199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이른 시기의 점토대토기유적은 중서부지역에 동 서리, 괴정동, 남성리 등 저명한 유적들의 존재와 옹진 백령도에서 출토된 환형파수부호의 분포를 통 해 요령 점토대토기문화의 한반도로의 파급 경로는 서해 연안해로와 함께 일부는 대동강유역을 경유 하였을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와 강원 영동지역의 발굴조사를 통해 본 발표문 에서도 설명한 이른 시기의 점토대토기 관련 유적이 속속 확인되었기 때문에 압록강-청천강-원산만 -동해안 루트가 부각된 것이다. 그리고 남경유적의 점토대토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비판적인 견해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성재가 잘 지적한 바와 같이 평양 신성동 석관묘(국립중앙박물관 2006)에서 말기비파형동검과 함께 점토대토기옹과 세트를 이루는 흑색마연호가 출토된 점에서 대동 강유역에도 점토대토기문화가 일부 들어간 것으로 이해된다( 李 成 載 2007). 현재로서는 대동강유역을 우회하는 루트가 일반적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남경유적의 점토대토기옹이나 신성동유적의 흑색마연 호의 존재에서 볼 수 있듯이 일부는 대동강유역에도 파급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도면 17> 평양 남경유적과 신성동유적의 점토대토기옹과 흑색마연장경호 이와 같이 중부의 강원 영동지역으로 들어온 점토대토기문화의 한 갈래는 계속 동해안을 따라 내려 갔을 것이며, 또 다른 한 축은 영서를 통해 북한강유역을 거쳐 한강유역으로 남하했을 것이다. 그런데 경기지의 점토대토기문화는 서해안 연안 루트와 더불어 동해안을 경유한 육로를 통해 서로 다른 코스 의 점토대토기문화가 정착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유적의 분포상과 더불어 이에 대한 공통점과 차이점 을 찾아내는 등 향후의 본격적인 검토가 요망된다. 2. 지역별 재지문화와 외래문화의 접촉 양상 규명 고성 송현리유적과 동해 지흥동유적(예맥문화재연구원 2010)에서는 각각 방형의 휴암리식주거지와 원형의 송국리식주거지에서 원형점토대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외래문화와 재지문화의 상호작용을 살필 수 있는 양호한 자료이다. 물론 이 지역의 송국리식주거지의 존재 역시 타 지역으로부터의 파급 의 결과물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그 해석에 어려움이 있다. 이것이 바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점토 대토기옹의 형식변화가 뚜렷하게 인지되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될지도 모르겠다. 전반적인 문화 의 내적 흐름과 외적 변화의 방향성을 잘 읽어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이 시기 고고학자료의 형식 학적 편년이 정치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전에 중서부지역(호서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송국리유형이라는 토착 재지 문화와 점토대 토기문화로서 외래 문화인 수석리유형의 상호작용에 대해서 고지성의 '교성리형 취락'(외래주체+재지 수용)과 구릉성의 '관창리형 취락'(재지주체+외래수용)으로 초보적인 개념화를 시도한 적이 있는데 ( 李 亨 源 2005), 중부지역의 경우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거 구조와 분묘양상, 유물의 조합상, 혹은 제작기법 등을 면밀히 검토해야만 한다. 강원지역의 경우는 선 주민의 주거형태인 작업구역이 분명한 천전리식주거지나 역삼동식의 장방형 주거형태와 점토대토기문 화의 관련성 여부를 점검할 필요가 있으며, 위에서 언급한 휴암리식주거지나 송국리식주거지의 점토 대토기관련 유물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도 관심의 대상 가운데 하나이다. 아직 영동지역을 제외한 중부지역의 송국리식주거지에서 점토대토기가 출토된 예가 전혀 없는데, 이에 대한 해석도 필요할 것 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서부지역에서는 원형의 송국리식주거지에서만 원형점토대토기관련 유물이 출 토되고 있는데, 보령 관창리유적을 비롯하여 보령 진죽리, 대전 궁동, 대전 가오동, 공주 장원리, 부여
中 部 地 域 粘 土 帶 土 器 文 化 의 時 空 間 的 正 體 性 27 나복리, 서천 도삼리, 청주 봉명동, 아산 대추리유적 등이 있다 14). 경기남부를 비롯하여 호서지역의 방형 휴암리식주거지에서 점토대토기가 출토된 예는 아직 확인되 지 않은 점에서 송국리유형의 후기단계의 어느 시점부터 원형점토대토기문화가 공존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고성 송현리나 동해 지흥동의 예도 송국리유형 후기 병행기에 속할 가능성이 높다. 송현리의 방형 휴암리식주거지에서 점토대토기가 나온 것으로 볼 때, 원형 송국리식주거지에 앞서 유행한 방형 휴암리식주거지의 존속 폭이 지역에 따라 상당히 크다는 것도 확인되었다고 생각한다 15). 또한 호남 남해안의 장흥 갈두유적에서도 방형 및 원형주거지에서 점토대토기가 출토된 점에서 볼 때, 송국리문 화의 최외곽지역에서는 재지의 장방형주거지 전통과도 관련되었을 방형의 휴암리식주거지가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경기지역의 경우는 부천 고강동유적의 주거지에서 공렬토기나 구순각목토기가 점토대토기와 공반되 었을 가능성이 주장되기도 하고(박진일 2006, 46쪽), 구순각목이 시문된 점토대토기를 주목하기도 하였다( 李 亨 源 2002, 65쪽) 16). 주지하는 바와 같이 중서부지역의 송국리유형과 점토대토기문화가 공존하던 시기에는 송국리식토기의 외반구연옹이나 심발형토기에 구순각목이 유행한 것을 생각해 보 면, 경기지역의 점토대토기에 토착 역삼동식토기 제작과정상의 장식요소를 채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이른 시기의 점토대토기문화 유적인 남양주 수석리유적에서는 지표채집품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외반구연호의 동체 외면에 타날문이 시문된 것이 한 점 있는데, 이는 서해안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 견되는 무문타날문토기와 거의 흡사한 점이 주목된다. 외래계의 점토대토기 가운데에서 타날문이 보 이는 것은 보령 교성리유적 출토품이 있는데, 아마도 충청 서부해안지역의 송국리유형 집단과의 교류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서로 다른 문화를 지닌 집단간의 인적교류, 예를 들어 通 婚 圈 분석과 같은 연구를 진행하는 데에 좋은 자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3. 세형동검기의 청동기 생산과 중부지역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선사-고대의 청동기 제작은 채광기술, 제련기술, 합금기술, 주조기술 등 복잡 하고 전문적인 최고의 하이테크놀로지가 적용된 작업으로 이를 담당한 사람들도 극히 제한적이며, 청 동기를 사용한 사람들 역시 상위계층에 국한되었을 것이다( 李 健 茂 2007). 이러한 청동기의 생산은 유통의 문제를 비롯하여 사회조직 및 사회성격을 밝히는 데에 매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와 관 련하여 鎔 範 (거푸집)은 현지에서 직접 청동기를 주조하여 제작하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동안 중부지역은 청동기문화 및 초기철기문화가 매우 낙후된 지역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도 면 18>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석제 용범이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지역은 호남지역과 서북한의 대 동강유역, 그리고 중부의 경기지역이며, 이 밖에 동해안의 원산만유역도 거론할만하다. 중부지역에서는 용인 초부리에서 세형동검 용범이, 화성 동학산에서 동착 용범, 그리고 고양 원당 면에서는 동모 용범이 출토되어 분포와 수량에서만 보면, 세형동검기의 청동기 생산이 그렇게 미약한 14) 화순 백암리의 원형 송국리식주거지에서는 삼각형점토대토기도 출토된 점에서( 趙 現 鐘 殷 和 秀 2005) 지역에 따라서는 송국리식주거지가 늦은 시기까지 존속한 것으로 볼 개연성이 높아졌 다. 호서와 서부호남지역의 송 국리식주거지의 하한연대를 초기철기단계까지 내리려는 김장석 (2009)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하는 자료 이다. 15) 이에 대해서는 필자와 상반된 견해가 최근 송만영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 주장의 핵심은 휴암리 식주거지나 반송리식주거지는 그에 선행하는 원형의 송국리식주거지와 역삼동식 장방형주거지 와의 문화적 접변의 산물로 서 시기가 늦다는 것인데, 고성 송현리의 휴암리식주거지에서 점토 대토기가 출토되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고 한다( 宋 滿 榮 2010). 16) 화성 동학산유적의 원형점토대토기에서도 구순각목이 시문된 것을 직접 실견한 바 있다.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만 초기철기 단계 철기의 분포상은 호서나 호남지역에 비해 열세인 것은 확실한데, 이 에 대한 배경 및 원인을 규명할 필요가 있 을 것이다. Ⅴ. 맺음말 지금까지 서울 경기와 강원지역을 중심으 로 하는 중부지역의 점토대토기문화를 비파 형동검단계에서 세형동검단계, 그리고 초기 철기유입단계에 이르기까지의 대략적인 시 간축을 설정해보았다. 점토대토기와 세형동 검의 남한지역 등장을 동일시했던 견해가 주류였으나, 최근 일부 연구자가 제기하고 있는 세형동검 출현 이전에 해당하는 점토 대토기단계의 존재를 다시 한 번 구체적으 로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를 통해 점토 대토기문화 출현기에 공존한 외래문화와 재 지문화의 상호작용에 대해서 앞으로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언급하였다. 그렇다면 재지 무문토기문화의 어느 시점부 <도면18> 한반도 출토 석제 용범 출토지 터 외래의 점토대토기문화가 공존하면서 관 ( 趙 眞 先 2007) 계를 맺게 된 것일까. 본 발표에서는 이 문 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연구자에 따라 청동기시대 중기 또는 후기로 분류하는 송 국리유형 시기의 후반부, 즉 원형 송국리식주거지가 주체를 이루는 단계부터 원형점토대토기문화가 존속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방형의 휴암리식주거지를 중심으로 하는 선송국리유형에서는 점토대토 기의 존재가 보고된 바 없으며, 원형의 송국리식주거지 단계에 양자의 공반관계가 인정되는 다수의 예가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점토대토기의 상한 연대가 청동기시대 송국리유형 단계로 소급되는 현실에 비추어 보면, 점토대토기의 등장부터를 초기철기시대로 구분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연구자간의 편년차를 감안한다 면, 세형동검이 등장하는 기원전 400-300년 사이, 또는 철기가 유입되는 기원전 300-200년 사이 부터 원삼국시대가 시작되는 기원전 100년 이전까지를 초기철기시대로 보는 안이 더 합리적이다. 그 렇지만 이 역시 송국리유형의 문화가 세형동검 단계 이후까지 지속되고, 철기의 유입이 매우 단편적 인 현상이라는 점을 유의한다면, 점토대토기단계를 초기철기, 또는 철기시대로 분류하는 시대구분은 재고의 여지가 많다고 생각한다. 한편, 본 발표에서는 서울 경기지역과 영서, 그리고 영동지역을 중부지역이라는 하나의 큰 틀에서 점토대토기문화를 검토했지만, 각 지역별로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 분석하지는 못했다. 예를 들 어, 외래문화인 점토대토기문화와 재지의 여러 무문토기문화가 접촉하는 양상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 했을 터인데, 이에 대한 더욱 면밀한 접근이 요구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늦은 시기 점토대토기
中 部 地 域 粘 土 帶 土 器 文 化 의 時 空 間 的 正 體 性 29 문화를 대표하는 삼각형점토대토기의 분포상 역시 경기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강원지역에서는 그 존재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실정이다. 물론 경기지역 역시 삼각형점토대토기 관련 유적이 최근 의 발굴조사를 통해 서서히 증가하고 있는 경향을 감안하면, 강원지역도 향후의 조사 추이를 지켜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론 이와 관련해서 강원지역의 원형점토대토기와 원삼국시대의 경질무 문토기를 연결시키고자 하는 일부의 연구 시도가 주목되는데, 영남지역에서 원형점토대토기의 전통이 지속되면서 와질토기로 변화하면서 삼각형점토대토기와 상당 기간 병존하는 현상도 함께 비교대상으 로 삼아야만 할 것이다. 참 고 문 헌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08, 大 邱 月 城 洞 777-2 番 地 遺 蹟 (Ⅱ) 宮 里 修 2009, 韓 半 島 劍 把 頭 飾 의 分 類 와 編 年, 嶺 南 考 古 學 50 權 五 榮 1986, 初 期 百 濟 의 성장과정에 관한 一 考 察, 서울대학교대학원 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金 權 中 2008, 江 原 嶺 西 地 域 靑 銅 器 時 代 住 居 址 와 聚 落 構 造 의 變 遷, 한일취락의 연구-생산 유적과 취락유적, 제4회 공동연구회, 한일취락연구회 金 美 京 2006, 美 松 里 型 土 器 의 변천과 성격에 대하여, 한국고고학보 60 金 範 哲 2001, 남한지역 후기무문토기문화의 성격 연구-서울지역 연구를 위한 시론적 고찰-, 서울학연구 ⅩⅥ 金 元 龍 1986, 韓 國 考 古 學 槪 說 第 三 版, 一 志 社 김장석 2009, 호서와 서부호남지역 초기철기-원삼국시대 편년에 대하여, 湖 南 考 古 學 報 33 金 鐘 一 1994, 韓 國 中 西 部 地 域 靑 銅 遺 蹟 遺 物 의 分 布 와 祭 儀 圈, 韓 國 史 論 31 盧 爀 眞 1981, 有 溝 石 斧 에 대한 一 考 察, 歷 史 學 報 89 노혁진 2001, 粘 土 帶 土 器 文 化 의 社 會 性 格 에 대한 一 考 察 - 住 居 遺 蹟 의 特 色 을 중심으로-, 韓 國 考 古 學 報 45 노혁진 2009, 남한 청동기문화 조사연구의 성과와 과제-점토대토기문화를 중심으로-, 동북아 청동기문화 조사연구의 성과와 과제, 학연문화사 미야자토오사무 2010, 한반도 청동기의 기원과 전개, 사회평론 朴 淳 發 1993a, 한강유역의 청동기 초기철기문화, 한강유역사, 민음사 朴 淳 發 1993b, 우리나라 初 期 鐵 器 文 化 의 展 開 過 程 에 대한 약간의 考 察, 考 古 美 術 史 論 3 朴 淳 發 1998, 前 期 馬 韓 의 時 空 間 的 位 置 에 대하여, 마한사연구, 忠 南 大 學 校 出 版 部 朴 淳 發 2004, 遼 寧 粘 土 帶 土 器 文 化 의 韓 半 島 定 着 過 程, 錦 江 考 古 創 刊 號 박순발 2009, 硬 質 無 文 土 器 의 變 遷 과 江 陵 草 堂 洞 遺 蹟 의 時 間 的 位 置, 사적 제490호 강릉 초 당동유적, 주요유적 종합보고서Ⅰ, 한국문화재조사연구기관협회 朴 榮 九 2010, 嶺 東 地 域 圓 形 粘 土 帶 土 器 文 化 의 展 開 樣 相, 韓 日 聚 落 硏 究 의 새로운 視 角 을 찾아 서, 韓 日 聚 落 硏 究 會 朴 辰 一 2000, 圓 形 粘 土 帶 土 器 文 化 硏 究 - 湖 西 및 湖 南 地 方 을 中 心 으로-, 부산대학교대학원 사학 과 석사학위논문 박진일 2006, 서울 경기지방 점토대토기문화 試 論, 고고학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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