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표조사-김해 진례 산본 685외 2-본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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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사진 24 _ 종루지 전경(서북에서) 사진 25 _ 종루지 남측기단(동에서) 사진 26 _ 종루지 북측기단(서에서) 사진 27 _ 종루지 1차 건물지 초석 적심석 사진 28 _ 종루지 중심 방형적심 유 사진 29 _ 종루지 동측 계단석 <경루지> 위 치 탑지의 남북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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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초기 도읍은 위례성( 慰 禮 城 )이다. 위례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책에 실려 있는데, 대부분 조선시대에 편 찬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 도 백제가 멸망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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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스님의 이 달의 법문 성철 큰스님 기념관 불사를 회향하면서 20여 년 전 성철 큰스님 사리탑을 건립하려고 중국 석굴답사 연구팀을 따라 중국 불교성지를 탐방하였습 니다. 대동의 운강석굴, 용문석굴, 공의석굴, 맥적산석 굴, 대족석굴, 티벳 라싸의 포탈라궁과 주변의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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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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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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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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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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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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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시 민 참 여 고 려 사 항 이 해 당 사 자 : 유 ( ) 무 전 문 가 : 유 ( ) 무 옴 브 즈 만 : 유 ( ) 무 법 령 규 정 : 교통 환경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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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진행과정 후쿠시마 제1원전(후쿠시마 후타바군에 소재)의 사고는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 지방 을 강타한 규모 9.0의 대지진으로 인해 원자로 1~3호기의 전원이 멈추게 되면서 촉발되었다. 당시에 후쿠시마 제1원전의 총 6기의 원자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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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표시・광고법 시행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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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화교의 어제와 오늘 34 정착부흥기 35 정착부흥기: 1884년 ~ 1940년 이 장에서는 인천 차이나타운에 1884년 청국조계지가 설정된 후로 유입 된 인천 화교들의 생활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기별로 정리하였다. 조사팀은 시기를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하였다. 첫 번

제주발전연구원 제주발전연구원 정책이슈브리프 2015년 11월 2일 Vol. 226 발행처 : 제주발전연구원 발행인 : 강기춘 주 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연로 253 TEL FAX 제주발전연구원은 지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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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민락초신문4호

13백점맞는세트부록2년(4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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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이전> ⑴ 문명의 형성과 고조선의 성립 역사 학습의 목적, 선사 문화의 발전에서 국가 형성까지를 다룬다. 역사가 현재 우리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었음을 인식하고, 역사적 상상력을 바탕으 로 선사 시대의 삶을 유추해 본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국가가 형성되고 문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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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부산연주문화\(김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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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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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답 과 해 설 1 (1)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어생활 주요 지문 한 번 더 본문 10~12쪽 [예시 답]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한 사 람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으며,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해쳐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04 5

3) 지은이가 4) ᄀ에 5) 위 어져야 하는 것이야. 5 동원 : 항상 성실한 삶의 자세를 지녀야 해. 에는 민중의 소망과 언어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입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가능성은 이처럼 과거를 뛰어넘고, 사회의 벽을 뛰어넘고, 드디어 자기를 뛰어넘 는

행당중학교 감사 7급 ~ 성동구 왕십리로 189-2호선 한양대역 4번출구에서 도보로 3-4분 6721 윤중중학교 감사 7급 ~ 영등포구 여의동로 3길3 용강중학교 일반행정 9급 ~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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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한국사능력검정시험대비(/, 목) 쪽 문. 다음 선언문의 필자와 관련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점][ 회] 내정 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동하는 자 누구이냐? 너희들이 동양 평화, 한국 독립 보전 등을 담보한 맹약이 먹도 마르지 아니하여 삼천리 강토를 집어먹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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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금융분야 개인정보보호 가이드라인 1. 개인정보보호 관계 법령 개인정보 보호법 시행령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령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전자금융거래법 시행령 은행법 시행령 보험업법 시행령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시행령 자본시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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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 인물 강순( 康 純 1390(공양왕 2) 1468(예종 즉위년 ) 조선 초기의 명장.본관은 신천( 信 川 ).자는 태초( 太 初 ).시호는 장민( 莊 愍 ).보령현 지내리( 保 寧 縣 池 內 里,지금의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에서 출생하였다.아버지는 통훈대부 판무

포천시시설관리공단 내규 제 24호 포천시시설관리공단 인사규정 시행내규 일부개정(안) 포천시시설관리공단 인사규정 시행내규 일부를 다음과 같이 개정 한다. 제17조(기간제근로자의 무기계약직 임용) 1 기간제근로자 관리규정 제16조 를 제19조 로 한다. 제20조(인사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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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은하 1 우리 은하 위 : 나선형 옆 : 볼록한 원반형 태양은 은하핵으로부터 3만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 2 은하의 분류 규칙적인 모양의 유무 타원은하, 나선은하와 타원은하 나선팔의 유무 타원은하와 나선 은하 막대 모양 구조의 유무 정상나선은하와 막대나선은하 4.

근대문화재분과 제4차 회의록(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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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진례면 산본리 685외 2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보고서 2016.04

CONTENTS 목 차 Ⅰ. 조사개요 01 Ⅱ. 조사지역과 주변 환경 02 1. 자연 지리적 환경 02 2. 고고ㆍ역사자료로 본 김해의 역사 11 Ⅲ. 조사내용 19 1. 고고분야 20 2. 민속분야 27 3. 지명분야 30 Ⅳ. 종합고찰 및 조사단 의견 35 1. 종합고찰 35 2. 조사단 의견 35 문화재 지표조사 결과서 37 참고문헌 39 지도목차 지도 1 김해지역 지질도(김정윤; 2008) 04 지도 2 고해면기(6,000~1,800 yr BP)의 김해지역 고지형(김정윤; 2008) 05 지도 3 조선시대 말엽(200 yr BP경) 김해지역 고지형(김정윤; 2008) 06 지도 4 대동여지도(1861년)의 김해지역 06 지도 5 조사구역과 주변의 지질도(1/50,000) 07 지도 6 해동지도 (1750 무렵) 김해부 08 지도 7 조선전도 (1770) 김해부 08 지도 8 대동여지도에 묘사된 김해 일원의 교통망 09 지도 9 김해의 옛길(최헌섭; 2013) 10 -ⅰ-

지도 10 조사구역 및 주변유적표시도(1/25,000) 19 지도 11 조사구역 지형도(1/5,000) 45 사진목차 사진 1 오규영 영세송덕비 20 사진 2 칠원윤씨정려비 20 사진 3 산본리 유물산포지 1 21 사진 4 산본리 유물산포지 2 21 사진 5 경전선 송변전설비 신축부지 전경 22 사진 6 중리 유물산포지 22 사진 7 양동리 유물산포지 23 사진 8 1호 주거지 전경 23 사진 9 각 유구 출토유물 23 사진 10 냉정고개 전경 23 사진 11 성법역 추정지 관동마을 24 사진 12 조사구역 전경 26 사진 13 조사구역 발견 유물 26 사진 14 조사구역 현황 26 사진 15 부전-마산 경전철 사업구간 중 산본리 발굴현장 26 사진 16 산본리 당산나무 29 사진 17 조사구역표시 항공사진 44 사진 18 조사구역 원경(북 남) 46 사진 19 조사구역 진입부 및 복토현황(서 동) 46 사진 20 조사구역 서남편 농로 및 복토현황 47 사진 21 조사구역 동편 687-1번지 복토층 및 잔여지 현황 47 -ⅱ-

김해 진례면 산본리 685외 2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Ⅰ. 조사개요 조 사 명 : 김해 진례면 산본리 685외 2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조사경위 : 민재영(님)이 단독주택 건립을 위해 김해시 진례면 산본리 685번지 외 2필지(617m2)의 건축 허가를 득하는 과정에서 김해시에서 문화재지표조사를 조 건부로 제시하였다. 이 사업은 국비로 지원하는 문화재지표조사가 가능한 대상이므 로 해당구역에 대하여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를 실시한 후 그 결과에 따라 사업 시행 여부를 결정하도록 조치됨에 따라 본 연구원에서 이 조사를 수행함. 조사지역 및 범위 경남 김해시 진례면 산본리 685번지 일원(617m2) 조사기간 : 2016년 04월 04일 2016년 04월 11일(6일간) - 문헌조사 : 04월 04일(1일간) - 현장조사 : 04월 04일 11일 중 1일간(1일간) - 정보분석 : 04월 07일(1일간) - 보고서작성 : 04월 08일 11일(2일간) - 제본 및 제출 : 04월 11일 제출 조사단 구성 - 조사단장 겸 책임조사원: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장; 고고학) - 조 사 위 원 : 박태성(두류문화연구원 연구위원; 지명유래) - 조 사 원 : 임지승(두류문화연구원 문화유산연구실 과장: 고고학) 조사의뢰 기관 : 민 재 영(님) - 1 -

www.duryu.or.kr Ⅱ. 조사지역과 주변 환경 1. 자연ㆍ지리적 환경 1) 김해의 자연환경 김해시는 우리나라의 동남쪽을 자리하고 있으며, 남한에서 가장 긴 洛 東 江 이 남해 와 만나는 河 口 를 차지하고 있다. 1) 수리적 위치로는 동쪽 끝은 낙동강과 접하는 대 동면 월촌리 평촌마을의 동경 129 0 48, 북위 35 16 16, 서쪽 끝은 진영읍 좌곤 리 廣 大 峴 마을의 동경 128 41 47, 북위 35 18 12 으로 동서 거리는 약 27km이 다. 북쪽 끝은 낙동강과 만나는 생림면 도요리의 동경 128 51 59, 북위 35 23 3 1, 남쪽 끝은 장유면 장유리의 동경 128 49 44, 북위 35 9 10 로 남북 거리는 약 32km에 이른다. 사방 경역 안의 면적은 463.26km2로 경상남도의 약 4.4%를 차지하 고 있다. 2) 사방 경계를 이루는 自 然 地 理 區 는 북쪽과 동쪽은 낙동강, 남쪽은 밤내재와 태정고 개 사이의 산계, 3) 서쪽은 창원과의 경계에 있는 광대현이 地 境 고개가 된다. 이렇 듯 서쪽을 제외한 방면은 지리적 경계가 강과 산(과거에는 바다)으로 명료하다. 이 와 같은 자연환경은 옛 김해 지역을 기반으로 하였던 가락국의 번영과 쇠퇴를 이해 하는 주요한 환경인자가 된다. 4) 인접 지역과의 관계적 위치는 동쪽으로는 낙동강 동쪽의 부산광역시와 양산시, 서쪽으로는 창원시, 남쪽으로는 부산시, 북쪽으로는 낙동강을 경계로 밀양시와 접하고 있다. 김해시의 주요 산계는 洛 南 正 幹 5)의 龍 池 峰 (743m) 6) -장고개-매봉산(338m)-황새봉 (393.1m)-금음산(376.1m)-나밭고개- 神 魚 山 (630.4m)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시역을 반분하고 있다. 이 낙남정간을 분수령으로 삼아 그 북쪽은 낙동강 유역에 속하고, 그 남쪽은 남해 또는 古 金 海 灣 7)의 영향을 받는 해안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1) 지금은 행정구역의 조정으로 낙동강의 하구가 부산시에 속하게 되었지만 문화사적 의미에서 김해를 고찰하기 위해 이렇게 표현한다. 2) http://www.gimhae.go.kr 3) 낙동강 하구가 부산에 귀속되기 전, 김해의 남쪽 경계는 남해 바다를 향해 열려 있었다. 4) 서쪽으로 경계를 맞대고 있는 창원지역과는 대체로 지금의 국도 14호선이 지나는 선형을 따라 열려 있어, 두 지역 간의 문화가 쉽게 교류할 수 있는 환경을 잘 갖추고 있다. 이런 환경 인자가 창원지역 고대문화 형성의 한 바탕을 이루게 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5) 智 異 山 迎 新 峰 ( 三 神 峰 )에서 김해군 大 東 面 梅 里 에서 洛 東 江 에 몰입되는 산줄기를 이른다. 낙동강의 남쪽 산줄 기로서 서쪽으로는 蟾 津 江 유역의 동쪽 경계로 작용하고, 이 구간에서 종점까지는 洛 東 江 유역과 경남의 해안 지대를 구분 짓는 경계를 이룬다. 대개의 경우 洛 南 正 脈 이라 부르고 있지만, 白 頭 大 幹 을 계승한 산줄기라는 위격을 부여 받은 점에서 洛 南 正 幹 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 신경준 지음, 박용수 해설. 1990, 산경표, 푸른산, pp.20~21. 최헌섭, 1998, 창원 반계동 취락유적 조사예보, 제8회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발표회, 사단법 인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 pp.68~69. 6) 옛적에는 이곳에서 무제( 祈 雨 祭 )를 지냈다고 하므로 용지봉의 원래 이름은 龍 祭 峰 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제가 지로 된 것은 제사를 지사라 하는 이 지역의 언어적 특성에 기인한 것이라 여겨진다. - 2 -

김해 진례면 산본리 685외 2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가운데 옛 가락국의 성장과 번영에 연동되는 핵심 지역은 낙남정간 남쪽의 해안 지 역이다. 바로 이곳에서 가락국이 태동 성장하여 밖으로 열린 물길을 이용한 철의 수출을 통해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 낙남정간 북쪽 지역에는 낙동강에 이어지는 가지 능선(평균 고도 300~400m)으로 이루어진 낮은 산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평지가 적은 편이다. 서쪽은 飛 音 山 (486m)-남산치(393m)- 大 岩 山 (669m)- 龍 池 峰 (743m)- 上 店 嶺 (430m)- 花 山 (798.4m)- 窟 庵 山 (662m)으로 이어지는 비교적 높은 산지로 에워싸여 있어 고개를 통한 제한적인 교통이 이루어졌을 뿐 폐쇄적이다. 8) 이 지역의 지형은 지질구조의 영향을 받았다. 대체로 험준한 산계는 풍화에 대한 강한 저항력을 가진 쳐트와 안 산암류 등이 우세하고, 평야지대는 저항력이 약한 화강암류가 저반을 이루며, 하천 의 발달은 구조선에 일치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침식윤회로 보아 山 系 는 대체로 晩 長 年 期 에 해당되고 平 野 는 老 年 期 지형을 형성한다. 9) 이 지역의 지질은 경상계 신라통에 속하는 퇴적암과 이를 관입한 반심성암류 및 화산분출암과 화강암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퇴적암류는 화성암류에 비하여 그 분포가 약세이며 주로 시역의 북동쪽과 남서쪽 및 중서부에 발달해 있다. 퇴적암이 형성된 뒤에는 비교적 큰 규모의 화성활동이 일어나서 반심성암과 화산암류의 관입 및 분출이 있었다. 이 반심성암과 화산암류는 주산안산암질에 속하는 안산암류 중 에서 장석반정을 갖는 도대동안산반암류가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분포한다. 10) 바로 이 신라통 주산안산암질암 및 도대동안산반암 내에는 鐵 鑛 脈 이 배태되어 있으며, 그것은 대체로 시역의 북동쪽 상동면을 중심으로 분포한다. 11) 구체적으로 이곳에서 채광이 이루어진 광산은 상동면 우계리의 삼우철광, 상동면 봉발리의 해동광산, 대 동면 주동리의 김해철광 등이 있다. 12) 김해의 대표적 水 系 는 洛 東 江 이다. 그 명칭은 상주의 옛 이름인 洛 陽 의 동쪽으로 흐른다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많은 이들의 이야기이지만, 다산 丁 若 鏞 (1762~1836)은 我 邦 疆 域 考 (1811)에서 洛 東 이라 하는 것은 駕 洛 의 동쪽이다. 라고 했다. 삼국시대에는 黃 山 江 이라 했는데, 13)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洛 水, 낙동강 이라 하였다. 그런데 다산에 앞선 시기를 살았던 이중환(1690~1751)의 擇 里 志 (1751) 14) 와 이긍익(1736~1806)의 練 藜 室 記 述 地 理 典 故 에는 낙동은 尙 州 의 동쪽을 말함이다. 15) 라고 했는데, 상주의 옛 이름이 洛 陽 16)인데서 7) 古 金 海 灣 은 完 新 世 에 들어와 기후가 계속 온난해 지면서 해수면이 급격히 상승, 현재의 김해평야 일대에 해수 가 침입하여 형성된 해역을 말한다. 8) 남산치와 상점령을 넘어 창원시 성산구를 오갔고, 밤내재와 너더리고개를 통해 창원시 진해구와 통했다. 9) 국립지질연구소, 1964, 한국지질도 -김해도폭- (SHEET 6919-Ⅰ), pp.1~2. 10) 국립지질연구소, 1964, 한국지질도 -김해도폭- (SHEET 6919-Ⅰ), p.2. 11) 국립지질연구소, 1964, 한국지질도 -김해도폭- (SHEET 6919-Ⅰ), p.20. 12) 국립지질연구소, 1964, 한국지질도 -김해도폭- (SHEET 6919-Ⅰ), pp.26~27. 13)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 가락국의 사방 경계를 이르기를 동쪽은 黃 山 江 서남쪽은 滄 海 서북쪽은 地 理 山 동북쪽은 伽 耶 山 으로써 경계를 삼았고, 남쪽이 나라의 끝이 되었다. 고 하였음이다. 三 國 遺 事 紀 異 第 二 駕 洛 國 記 東 以 黃 山 江 西 南 以 滄 海 西 北 以 地 理 山 東 北 以 伽 耶 山 南 以 爲 國 尾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황산강 또는 黃 山 河 는 낙동강 하류의 물금 구간을 이르는 이름으로 제한 사용되었다. 14) 擇 里 志 八 道 總 論 慶 尙 道 洛 東 者 謂 尙 州 之 東 也 - 3 -

www.duryu.or.kr 비롯한 이름으로 본 것이다. 지도 1. 김해지역 지질도(김정윤; 2008) 위의 기록에는 낙동강이란 이름이 조선시대에 비롯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이름은 이미 고려 때부터 그렇게 불렸다. 고려 말의 문인 李 奎 報 가 남긴 시에 洛 東 이란 이 름이 보이기 때문이다. 바로 한가로이 낙동강을 지나네/ 閑 行 過 洛 東 17) 라 한 구절 15) 練 藜 室 記 述 別 集 卷 之 十 六 地 理 典 故 總 地 理 慶 尙 道 洛 東 江 洛 東 者 謂 尙 州 之 東 也 16) 擇 里 志 八 道 總 論 慶 尙 道 尙 州 一 名 洛 陽 17) 백 겹으로 두른 푸른 산 속에/ 百 轉 靑 山 裏 한가로이 낙동강을 지나네/ 閑 行 過 洛 東 풀은 우거졌어도 오히려 길이 있고/ 草 深 猶 有 路 소나무가 고요하니 저절로 바람이 없네/ 松 靜 自 無 風 가을 물은 오리 머리처럼 푸르고/ 秋 水 鴨 頭 綠 새벽 노을은 성성이 피처럼 붉도다/ 曉 霞 猩 血 紅 누가 알랴 게으르게 노니는 손이/ 誰 知 倦 遊 客 사해에 시 짓는 한 늙은이인 줄을/ 四 海 一 詩 翁 - 4 -

김해 진례면 산본리 685외 2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에서 그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이 지역의 북쪽과 동쪽 경 계를 따라 흐르는 낙동강 은 경계로서는 자연지리구 로도 작용하지만, 그 하구 는 강을 거슬러 오를 수 있는 들머리가 되기도 하 고, 바다를 통해 밖으로 나 가는 날머리가 되기도 하 여 이곳을 오가는 물길의 關 門 으로 기능하였다. 18) 현 재의 김해평야를 이루는 낙남정간 남쪽 충적지는 조선시대까지 內 灣 을 이룬 곳이므로 당시의 하구는 보다 더 내륙에 있었던 것 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경관 요소는 가락국의 성 지도 2. 고해면기(6,000~1,800 yr BP)의 김해지역 고지형(김정윤; 2008) 장 동력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데, 바로 물길을 이용한 交 易 을 통해 가락국이 고대 국가로 성장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을 이론자료로 삼아 교역을 유추하였지만, 봉황 대 구릉 서쪽에서 海 上 交 易 을 시사해 주는 유구가 발굴되면서, 19) 교역에 대한 자 료가 적극적으로 구축되기 시작했다. 그 뒤 고김해만의 서쪽 灣 奧 인 관동리에서 가 야시대의 교역장인 부두와 도로 및 그 배후시설 등 津 과 聚 落 의 전모가 조사되어 해상교역의 실체를 밝힐 수 있게 되었고, 20) 최근에는 김해 봉황동에서 가야시대 船 舶 의 부재와 櫓 가 출토되어 그 사례를 더 하였다. 21) 이렇듯 봉황대와 관동리 등 고 김해만 연변에 패총과 해상교역과 관련되는 시설이 위치하는 것은 당시 이곳이 내 만 환경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22) 이규보의 낙동강을 지나다 에서 18) 그 위치는 기후변화에 따라 드나들었는데, 대체로 완신세의 고해수면기 이후로는 내륙(창녕 부곡면 근처)에 서 남쪽으로 계속 이동하였다. 대동여지도 (1861)가 그려지던 조선시대 말엽에는 대체로 지금의 김해 불 암동과 부산 구포 사이에 낙동강의 하구가 위치했다. 대동여지도 18-1, 19-1. 19) 심재용 김용탁, 2003, 김해 봉황동유적 발굴조사 고구려 고고학의 제문제, 제27회 한국고고학전국대 회, 韓 國 考 古 學 會. 20) ( 財 ) 三 江 文 化 財 硏 究 院, 2009, 金 海 官 洞 里 三 國 時 代 津 址. 21) 김갑진, 2012, 해상왕국 가야시대의 선박 -김해 봉황동 유적의 발굴 조사 성과를 중심으로-, 계간 한 국의 고고학 21, 주류성출판사, pp.26~35. 22) 최근 관동리유적에서 수행한 홀로세 후기 지형발달에 대한 연구에서 규조분석과 퇴적상을 통해 복원된 1,800 yr BP 경 남해안의 해수준은 2.6m 정도에 다다랐다고 한다. 이에 근거하면, 당시 봉황동유적 부근의 - 5 -

www.duryu.or.kr 지도 3. 조선시대 말엽(200 yr BP 경) 김해지역 고지형(김정윤; 2008) 지도 4. 대동여지도(1861년)의 김해지역 김해를 에우고 지나는 낙동강은 하류인 삼랑진에서 물금 사이가 협곡을 이루고 있 어 큰물이 들면 쉽게 물에 잠긴다. 23) 양산협곡을 벗어난 본류는 구포 위에서 세 갈 래로 갈라지므로 옛적에는 三 叉 水 또는 三 叉 江 이라 했으며, 24) 그 사이에는 대저도 와 같은 큰 하중도가 발달하게 되었다. 이렇듯 낙동강 하부 삼각주의 발달에 따라 내만은 서서히 충적 환경을 이루어 옛 김해만은 지금과 같은 모습의 金 海 平 野 가 되 었다. 2) 조사구역 일대의 地 形 과 地 質 조사구역이 위치한 진례면 일원의 지형은 동서가 짧고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 侵 蝕 盆 地 를 이루고 있다. 지표조사 구역의 지표지형은 분지 외곽의 구릉 말단에 해 당되는 곳이다. 분지의 외곽으로는 북동에서 시계 방향으로 무릉산(312.3)-황새봉 (392.6)-매봉산(336)-용지봉 25) (743)-대암산(669)-비음산(486)-태종산 등을 연결 하는 산맥이 병풍처럼 에워져 있어 안온한 경관을 제공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창원 과 장유의 경계를 이루는 大 岩 山 (607.4m)과 龍 池 峰 이 고지를 이룬다. 이곳 龍 池 峰 에서 발원한 화포천 26) 과 진례천 등 12개소의 대소 지류들은 棗 田 里 에서 합류하여 해반천과 관동리유적 부근의 율하천 하류는 내만의 형태를 띠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황상일 김정윤 윤순옥, 2009, 김해시 관동리지역의 Holocene 후기 지형발달, 金 海 官 洞 里 三 國 時 代 津 址, p.589. 23) 바로 이 구간을 일러 예전에는 황산하라 했다. 24) 이즈음에 이르러 낙동강 하부 삼각주가 발달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부터 고김해만의 육화가 서서 히 진행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해동지도 (1750년대 제작)에는 불암창과 나루가 있는 그 아래에 三 叉 水 라 적었고, 德 島 와 鳴 旨 島 만 섬으로 표현되었고 다른 섬들의 주변으로는 이미 육화가 진행되어 충적지 상의 구릉으로 묘사되었다. 25) 옛 이름은 龍 祭 峰 이니 이 산의 정상에서 물을 다스리는 용에게 기우제를 지낸데서 비롯한 이름이다. 26) 옛 이름은 이 하천의 雪 倉 즈음에 있던 섶다리(신교)에서 비롯한 薪 橋 川 이다. - 6 -

김해 진례면 산본리 685외 2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진례면 중앙을 관통하는 화포천을 따라 북쪽의 한림들을 지나 낙동강으로 유입된 다. 이 화포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棗 田 里 와 淡 安 里, 진영 本 山 里 에 이르는 넓은 유 역평야와 그 주변의 얕은 구릉은 인간에 의한 토지이용이 유리한 곳이다. 27) 조사구 역을 관통하는 하천은 없다. 조사구역 일원의 지질은 安 山 巖 및 安 山 巖 質 凝 灰 巖, 정각산층, 黑 雲 母 花 崗 巖 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기한 암층 중 안산암 및 안산암질응회암, 정각산 층은 進 禮 盆 地 의 배후산지에 띠처럼 분포하며, 조사구역이 포함되는 산각 과 분지저에는 흑운모화강암이 분포해 있다. 이와 같은 지질 구성에 따라 현 재의 지표지형이 형성된 것으로 이해 되는데, 각 암석의 경도 차이가 지금 의 지형을 만든 배경이 된 것이다. 즉, 흑운모화강암이 분포하는 조사구역 일 대는 화학적인 풍화에 약하기 때문에 지도 5. 조사구역 일대의 지질도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나타내는 구릉 의 완경사면과 侵 蝕 性 低 丘 陵 을 이루 고 있는 것이다. 28) 당 조사구역의 기반암을 구성하는 흑운모화강암(Kbgr)의 분포양상은 진례분지의 북쪽을 제외한 삼면을 U 자상으로 에워싸고 있다. 그 배후로는 중생대 백악기 유천 층군 구성의 안산암 및 안산암질응회암(Kat)이 북북동-남남서향의 대상으로 분포한 다. 진례분지의 북측과 서측, 남측에 분포하는 중생대 백악기 유천층군 구성의 정각 산층(Kjk)은 북북동~남남서향의 주향을 가진다. 29) 3) 조사구역과 그 주변의 교통로 조사구역의 주변으로는 고려시대의 金 州 道, 조선시대의 自 如 道 에 속한 省 法 驛 과 뒤 에 이곳으로 옮겨 온 冷 泉 院 등의 역원이 분포해 있어, 전통교통로의 일단을 엿볼 27) 조사구역과 가까운 당리고분군과 학성고분군, 담안리 서재골고분군, 담안유물산포지를 비롯하여 분지 외곽의 죽곡리 외촌고분군, 고모리고분군, 송정리 둔덕 취락유적. 신안리고분군, 신안리 토성 등의 삼국시대 유적과 냉정고개를 중심으로 분포하는 청동기시대~삼국시대의 유물산포지인 냉정유적, 고려시대 이래의 역인 성법역 과 그 길 등이 분포하는 것이 그 예증이다. 동아대학교 박물관, 1998, 문화유적분포지도 -김해시-, 김해시. 慶 南 發 展 硏 究 院 歷 史 文 化 센터, 2001, 金 海 陶 藝 村 豫 定 地 文 化 財 地 表 調 査 報 告 書. 昌 原 大 學 校 博 物 館, 2003, 釜 山 新 港 背 後 鐵 道 區 間 文 化 財 地 表 調 査 結 果 報 告, 鐵 道 廳. 慶 南 發 展 硏 究 院 歷 史 文 化 센터, 2005, 金 海 進 禮 ~ 酒 村 間 外 1 個 地 區 道 路 擴 鋪 裝 工 事 文 化 財 地 表 調 査 報 告 書. 28) 과학기술부(한국자원연구소), 1998, 부산지질도폭 설명서. 29) 과학기술부(한국자원연구소), 1998, 부산지질도폭 설명서. - 7 -

www.duryu.or.kr 수 있다. 가까운 과거의 자료로는 조선 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지도를 통해 당시 의 교통망을 헤아릴 수 있다. 해동지 도 (1750 무렵) 김해부 지도에는 金 海 府 城 을 나선 길은 서쪽으로 길을 잡 아 海 畔 川 에서 다리를 건너고, 지금은 사라진 流 民 山 서쪽 내에서 또 다른 다 리를 건너 유민산 기스락을 안돌이 하여 서북쪽으로 길을 잡아 德 橋 를 건너서도 서북쪽을 지향하고 있다. 이 지도에서는 지도 6. 해동지도 (1750 무렵) 김해부 생략되었지만, 기실은 주주봉과 천곡산 성이 있는 구릉 사이의 고개를 넘어 주촌면 내삼리에 들어 지금의 양동초등학교 부 근에 있었던 삼백천지 남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냉정고개를 넘어 진례의 省 法 驛 에 이른다. 이보다 약간 뒤인 1770년에 선조의 명을 받아 신경준의 주도 하에 제작된 조선전도 에 실린 김해지 도에도 김해부성에서 당 조 사구역이 포함된 주촌으로 이르는 길은 유민산 남쪽 기 스락을 돌아 거기서 서북방 으로 열려 있다. 주촌면 냉 정고개 아래서 분기한 길은 남서쪽으로 적항역을 거쳐 웅천현으로 이르고, 서북방 으로 진행하는 길은 성법역 을 거쳐 노현을 넘어 창원으 로 이른다. 대동여지도 에서는 당 조 지도 7. 조선전도 (1770) 김해부 사구역은 羅 田 峴 30)과 防 浦 사이에 자리하는데, 직접적으로 교통망에 배속되어 있지 않다. 다만 양동산성에서 망덕산성 31) 으로 이어지는 산계의 동쪽과 나전현 방포 사이에 이번 조사구역이 포 30) 삼계동에서 생림면으로 넘어가는 고개, 달리 露 峴 이라고도 했다. 31) 문화유적총람 에 泉 谷 城 으로 나오나, 성의 대부분은 천곡과 망곡의 경계인 마루금의 서남쪽 망곡리에 분 포하므로 망덕산성으로 부르고자 한다. 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 경상남도 편, pp.548~549. 또한 문화유적분포지도 -김해시- 에는 위의 책에 실린 천곡성과 신기산성을 같은 위치에 표시해 두었는데, 두 성은 별개의 성이 아니라 같은 성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분포지도에 실린 신기산성은 망덕산성을 설명하 고 있으므로 성이 속한 곳의 행정리를 취해 망덕산성이라 부르고자 한다. - 8 -

김해 진례면 산본리 685외 2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지도 8. 대동여지도에 묘사된 김해 일원의 교통망 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고학적 유적으로 보자면 청동기시대부터 인간생활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고,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가까운 구릉으로 고분군이 입지 하면서 주변평지를 생산 활동의 근거지로 삼아 가거지를 확대해 나간 것으로 보인 다. 위의 대동여지도 를 통해서는 당시 교통로의 선형을 헤아리기는 어렵다. 다만 각각의 지역을 잇는 교통망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고, 지역 간의 거리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다. 이 지도에서 당 조사구역이 포함된 주촌면으로 이르는 교통로는 김해 의 서쪽 방면으로 나아가는 주요 교통로로 묘사되어 있고, 망덕산성과 양동산성 사 이의 고개를 넘어 20여 리 되는 즈음에서 성법역을 지나 노현을 넘어 자여역에 도 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이지 그 정확한 경로를 파악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다. 그러나 옛길이 두 산성 사이의 고갯길을 통했음을 파악할 수 있게 한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가장 마지막에 제작된 김해지도(규12154) (1872)에는 김해부에서 당 조사구역 이 자리하고 있는 덕암리 일원으로 이르는 옛길은 유민산의 남쪽 기스락으로 전개 되고 있는데, 지도에 표시한 유민산은 봉황대를 잘못 표기한 것이다. 지금의 천곡리 덕교마을에서 덕교를 통해 德 巖 川 32)을 건넌 길은 10번 고속국도와 비슷한 선형을 동아대학교박물관, 1998, 문화유적분포지도 -김해시-, p.95, pp.146~147. 32) 이 지도에는 덕암천으로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을 보면 그 이전에는 德 津 橋 浦 라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에 덕진교포가 김해도호부에서 서쪽으로 10리에 있다. 雲 站 山 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 했음이다. - 9 -

www.duryu.or.kr 따라 망덕으로 이른 것으로 나온다. 지도 9. 김해의 옛길(최헌섭; 2013) 앞서 살핀 고지도를 토대로 지금의 상황에 맞게 재구하면 김해읍성의 서쪽에서 해 반천을 건너 유민산의 남쪽 기스락으로 난 길을 따라 덕곡리에서 덕교를 통해 덕암 천을 건너 서북쪽으로 길을 잡아 주주봉33)과 천곡산성 사이의 고개를 넘어 주촌면 내삼리로 든다. 내삼리(양동리) 서쪽의 삼거리는 전통시대의 사거리인데, 진례 송현 - 10 -

김해 진례면 산본리 685외 2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리에서 장고개를 넘어온 길과 진례 산본리에서 냉정고개( 冷 井 峴 )를 넘어온 길이 만 나서 하나는 김해로, 다른 하나는 장유로 갈라진다. 이 가운데 역로를 잇던 길은 냉 정고개를 넘는 길이다. 이 길은 고개 서쪽 산본리 관동마을에 있던 省 法 驛 을 거쳐 창원의 동읍의 송정리에 있던 자여도의 본역인 自 如 驛 을 잇는다. 장고개는 그 이름 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진례 송현리 방면에서 장을 보러 다니던 길이다. 이 루트를 설정하는 데는 망덕산성과 양동산성의 방비목적이 이 경로를 차단하기 위해 두어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고대 新 羅 의 西 進 경로를 유추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여겨진다. 삼국시대 전기에 신라와 가야가 黃 山 河 34)를 경계에 두 고 서로 영토를 다툰 기록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더러 실려 있다. 新 羅 軍 은 양산단층구조곡을 따라 열린 길을 따라 南 征 길에 올랐고, 때로는 황산하를 건너 월경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의 전투는 서로 일진일퇴를 거듭하였고, 평화 시에는 가락국의 수로왕이 신라의 요청으로 골벌국과 실직곡국의 영토 분쟁을 중재하러 이 길을 따라 신라의 수도 금성으로 오가기도 했다. 2. 고고ㆍ역사자료로 본 김해의 역사 1) 선사시대 (1) 신석기시대 김해에서 조사된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자료에 근거할 때, 이 지역을 배경으로 한 인간생활은 먼 신석기시대로부터 비롯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낙동강 하구의 북정, 수 가리 조개더미 유적과 옛 金 海 灣 35)의 언저리에 자리했던 농소리 조개더미 등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김해 지역의 신석기 문화를 엿보기 위해 수가리 조개더미 를 사례로 고구( 考 究 )할 수 있다. 수가리 조개더미 유적은 1978~79년에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수행한 조사를 통해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내었다. 이 조개더미의 조사를 통해 3기의 문화층으로 나눌 수 있는 6개의 퇴적층(해발 5~7m)이 드러났다. 출토유물의 형식학적 연구와 방사 성탄소연대측정을 통해 유적이 조성된 시기는 신석기시대 중기에서 늦은 시기(만 기)에 걸쳐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수가리 Ⅰ기(Ⅵ Ⅴ층)는 남해안 지역의 특징적인 굵은생선뼈무늬(태선어골문) 토기 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토기의 모양은 뾰족하거나 둥근 바닥이 기본이며, 무늬는 33) 옛 이름은 酒 旨 峯 이니 모처의 동쪽에 있는 산이란 뜻을 품고 있다. 민긍기, 2005, 金 海 의 地 名, pp.234~235. 34) 지금의 양산 물금 일대의 낙동강 하류를 이른다. 35) 고김해만의 성립을 기초로 김해평야 각지에서는 비로소 內 灣 系 패총이 성립하게 되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漁 撈 文 化 가 전개된다. 郭 鍾 喆, 1990, 洛 東 江 河 口 域 에 있어서 先 史 ~ 古 代 의 漁 撈 活 動, 伽 倻 文 化 제3호. - 11 -

www.duryu.or.kr 날카로운 줄무늬( 針 線 文 )를 새긴 것이 대부분이나 입술 위를 눌러 찍은( 押 捺 ) 것도 있다. 무늬는 그릇 바깥 전체에 베푼 것과 몸통과 바닥에는 새기지 않은 것이 섞여 있는데 그 비율은 비슷하다. 수가리 5층의 방사성탄소연대는 2,560±115 B.C.로 헤 아려져 그 편년적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수가리 Ⅱ기(Ⅳ Ⅲ)는 굵은생선뼈무늬를 새긴 토기가 줄어들고 무늬도 단순한 것이 많으며, 무늬가 없는 토기가 뚜렷하게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무늬를 새긴 경우에 는 토기 위쪽에만 사격자문을 새긴 것이 압도적이며, 생선뼈무늬는 뚜렷하게 새긴 것이 적고 대부분 스치듯 그어 새겼다. 수가리 Ⅲ기(Ⅱ Ⅰ)에는 무늬가 없는 토기가 더욱 늘어나며, 새로 겹아가리( 二 重 口 緣 )토기가 나타난다. 무늬를 새긴 경우라 하더라도 Ⅱ기보다 더욱 퇴화하여 하나의 무늬를 입술 아래에 희미하게 새기는 정도이다. 이와 같은 수가리 조개더미 유적의 Ⅰ Ⅱ기는 남해안 신석기시대 토기 편년의 기준 이 되는 동삼동 조개더미 유적의 Ⅳ기에 해당되며, Ⅲ기는 동삼동 Ⅴ기에 해당되므 로 이곳 수가리 조개더미가 만들어진 때를 신석기시대 중기 이후로 편년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3구 패총의 Ⅱ층 상부와 Ⅳ층에서 확인된 磨 耗 貝 層 은 당시의 海 水 面 變 動 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근거자료로 보고자는 적기하였다. 36) 그러나 1990년대 이래 로 발표된 일련의 논문에서 3구 패총의 패각 마모 현상은 해수의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라 地 下 水 에 의한 風 化 現 象 으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37) 수가리 보고자의 견해대로 이곳에서 확인된 마모패층이 해수면의 변동을 지시하는 자료라면 그것은 수가리 2 4층이 퇴적되고 난 이후 각각 두 차례의 해수면 상승이 있었다는 이야기 가 된다. 먼저 4층이 형성되고 난 뒤인 신석기시대 후기에 해수면 상승이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한 번은 이 유적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신석기 시대 만기 이후에 도 다시 그러한 자연현상이 일어났었다는 것이다. 36) 鄭 澄 元 林 孝 澤 申 敬 澈, 1981, 金 海 水 佳 里 貝 塚 Ⅰ. 패각 마모의 동기를 海 水 의 流 動 에 의한 것이라고 최초로 제기한 것은 李 彦 宰 의 석사학위논문을 통해서이 며,( 李 彦 宰, 1980) 이를 수가리패총의 보고자들이 수용한 것이다.( 鄭 澄 元 外, 1981) 그 뒤 尹 銑 과 李 彦 宰 는 고생물학회지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 마모패각이 출토되는 層 準 은 潮 間 帶 내지는 그 직하에 있었음을 의미한 다고까지 논의를 진전시켰다.( 尹 銑 李 彦 宰 ) 李 彦 宰, 1980, 水 佳 里 貝 塚 의 軟 體 動 物 化 石 群 集 에 관한 硏 究, 釜 山 大 學 校 大 學 院 理 學 碩 士 學 位 論 文, p.7. 尹 銑 李 彦 宰, 1985, 水 佳 里 貝 塚 의 軟 體 動 物 化 石 群 集 과 海 水 面 變 動, 한국고생물학회지 1, p.148. 秋 淵 植, 1993, 貝 塚 의 形 成 過 程 - 水 佳 里 貝 塚 의 後 堆 積 過 程 에 대한 검토를 中 心 으로-, 韓 國 考 古 學 報 29, 韓 國 考 古 學 會, pp,77~109에서 再 引 用. 37) 이에 대한 최초의 반론은 吳 建 煥 과 郭 鍾 喆 에 의해 제시되었다. 그들은 마모 패층이 형성된 원인의 하나로 地 下 水 의 作 用 을 들었다. 吳 建 煥 郭 鍾 喆, 1989, 金 海 平 野 에 대한 考 古 學 的 硏 究 (1) - 地 形 環 境 과 遺 蹟 -, 古 代 硏 究 2, p.13. 이후 秋 淵 植 에 의해 구체적인 해석이 제기되었는데, 그는 렌즈상으로 협재되어 있는 磨 耗 貝 層 의 위치가 과거 의 海 水 面 의 위치가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이에 대한 근거로 貝 塚 의 堆 積 層 속에서 구분되는 通 氣 帶 와 飽 和 帶 의 경계면에 형성된 間 層 속에 있던 純 貝 殼 의 일부가 地 下 水 面 과 부딪치면서 생긴 化 學 的 風 化 作 用 의 副 産 物 로 생성된 것일 뿐이라고 규정하였다. 秋 淵 植, 1993, 貝 塚 의 形 成 過 程 - 水 佳 里 貝 塚 의 後 堆 積 過 程 에 대한 검토를 中 心 으로-, 韓 國 考 古 學 報 29, 韓 國 考 古 學 會, pp,77~109. - 12 -

김해 진례면 산본리 685외 2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2) 청동기시대 청동기시대에는 고김해만에 연한 배후 구릉의 경사가 완만한 사면이나 고립 구릉의 정상부에서 당시의 유적이 확인되고 있어, 이러한 지형대를 입지배경으로 한 취락 의 존재가 상정된다. 최근 조사된 분산 남서록의 화정지구와 구산지구의 조사에서 도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와 지석묘로 추정되는 분묘가 조사된 바 있다. 보다 더 저 지에 입지한 내동 구산동 서상동 수로왕릉경내 지석묘군과 장유면 무계리 율하리 주촌 면 유하리 지석묘의 존재는 이 시기에 이르러 고김해만 연변에 인간거주가 집중적 으로 이루어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적의 분포양상을 통해 弁 辰 狗 邪 國 형 성의 기반을 헤아릴 수 있다. (3) 철기시대 철기시대에 이르면 고김해만으로 돌출된 봉황대유적을 거점으로 변진구사국이 형성 되기 시작하였다. 金 官 加 耶 중심 집단의 생활장소로 추정되는 봉황동유적 38) 은 鳳 凰 臺 자락의 가장자리를 아우르며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土 城, 39) 竪 穴 住 居 址 貝 塚 등으로 이루어진 취락지 40), 당시의 해안선에 연해 있는 陶 窯 旱 田 形 水 田 交 易 과 관 련되는 시설로 추정되는 고상건물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41) 토성은 봉황대의 북 동쪽에서 확인되었다. 그 범위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봉황대 서쪽 구 릉과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42) 봉황대의 서쪽 충적지에서 교역과 관련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고상건물지군이 조사되었다 43). 그 밖의 봉황대 외곽 구간에서는 성 내부 에 위치하는 취락과 관련되는 시설들이 각 층마다 매우 조밀하게 확인되고 있다. 38) 金 官 加 耶 중심세력의 생활 장소인 봉황동 유적의 범위는 최근 확인된 土 城, 交 易 시설, 古 金 海 灣 의 존재 등 을 고려하여 도면2)와 같이 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유적은 靑 銅 器 時 代 부터 유적이 조성되기 시작했지만 중심 시기는 鐵 器 時 代 ~ 加 耶 時 代 에 해당된다. 봉황동 유적의 성격과 그간의 연구성과에 대해서는 최근에 발 간된 아래의 책에 잘 정리되어 있다. 釜 山 大 學 校 博 物 館, 1998, 金 海 鳳 凰 臺 遺 蹟. 慶 南 發 展 硏 究 院 歷 史 文 化 센터, 2004, 金 海 會 峴 洞 消 防 道 路 區 間 內 遺 蹟 -13 14 15통-. 慶 南 考 古 學 硏 究 所, 2005, 鳳 凰 土 城 - 金 海 會 峴 洞 事 務 所 ~ 盆 城 路 間 消 防 道 路 開 設 區 間 發 掘 調 査 報 告 書 -. 39) 경남고고학연구소, 2003, 김해 회현동사무소~분성로간 소방도로 개설구간 발굴조사 영남고고학 33호, 영남 고고학회. 40) 聚 落 의 중심지는 鳳 凰 臺 라 불리는 구릉 일원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이 구릉에 대한 발굴자료를 검토해 보 면, 구릉의 중심지를 개별 주거 단위가 집중되는 狹 義 的 개념의 聚 落 으로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방증자료는 구릉 정상부위의 외연을 따라 분포하는 貝 塚 과 그 말단의 외연을 따라 조성된 土 城 을 들 수 있 다. 즉, 토성은 防 禦 施 設 임과 동시에 협의적 개념의 聚 落 을 규정하는 境 界 的 요소를 겸비한 장치로 이해된다. 釜 山 大 學 校 博 物 館, 1998, 金 海 鳳 凰 臺 遺 蹟. 釜 山 大 學 校 博 物 館, 2002, 金 海 會 峴 里 貝 塚. 41) 慶 南 發 展 硏 究 院 歷 史 文 化 센터, 2005, 加 耶 人 生 活 體 驗 村 敷 地 發 掘 調 査 報 告 書. 42) 慶 南 考 古 學 硏 究 所, 2005, 鳳 凰 土 城 - 金 海 會 峴 洞 事 務 所 ~ 盆 城 路 間 消 防 道 路 開 設 區 間 發 掘 調 査 報 告 書 -. 43) 조사자는 高 床 建 物 址 의 성격을 交 易 시설 혹은 交 易 品 을 보관하는 倉 庫 등의 기능을 가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 추정의 근거는 당시의 地 形 環 境 的 배경과 해안 埋 立 地 에 고상건물이 설치된 점, 고대의 교역기사 등을 들고 있다. 이것은 情 況 논리에 입각한 추정인 바, 향후 이 입론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심재용 김용탁, 2003, 김해 봉황동유적 발굴조사 -가야인 생활체험촌 조성부지 내- 고구려 고고학의 제 문제, 제27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 韓 國 考 古 學 會, pp.115~137. - 13 -

www.duryu.or.kr 또한 봉황동유적 북쪽 약 500m정도에 분포하는 대성동고분군 44) 은 금관가야 지배 집단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이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집인 陽 宅 과 陰 宅 을 구분 하고자 묘역을 성 밖에 두는 등 배치의 조절을 통하여 이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유적으로는 상기한 유적 외에 저명한 대성동유적 45) 을 비롯하여 조사지 역과 인접한 구지로 46) 와 화정지구에서도 당시의 분묘가 발굴된 바 있다. 加 耶 時 代 로 접어들면서 유적의 분포는 더욱 조밀해지는데, 이는 金 官 加 耶 의 成 長 및 繁 榮 과 연동된다. 김해의 진산인 분산 남록의 거의 전역에서 이 시기의 유적이 확인되므로 상기한 내용을 잘 반영하고 있다. 2) 역사시대 (1) 고대 1 駕 洛 國 의 형성과 성장 가락국(금관가야)은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로서 지금의 김해 일원을 세력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수로왕 탄강신화에서 보듯, 가야의 형성 이전 에 이미 이곳에 존재하였던 소단위 재지 권력 집단들을 통합하여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화에 나타난 대로 9간이라 불리는 9개 집단 지배자들의 합의에 의해 이 주민 계통의 수로왕을 추대함으로써 가락국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주민의 진원 은 탄강 및 난생이라는 신화적 요소에서 이미 북방적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 다. 이는 김해 일원의 고분군에서 출토되는 북방계 문물인 동복 등의 유물과, 대도 를 꺾어 묻는 등의 매장습속에 잘 나타나 있다. 금관가야 성장의 모태가 된 동력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철의 생산과 이를 통한 무 역이다. 현재적 개념에서 볼 때, 이는 김해라는 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십분 활용한 발전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다소 지겨운 인용이 되더라도 나라에서 철이 생산되어 한 예 왜가 모두 와서 사 간다. 시장에서의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서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 (낙랑과 대방의) 두 군에도 공급했다. 47) 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기실 이들 지역과의 교역의 증거는 고분 출토 유물이 잘 방증해주고 있을 뿐 아니라, 앞서 든 가락국기의 수로왕 혼인기사도 이 44) 慶 星 大 學 校 博 物 館, 2000, 김해 대성동고분군 45) 경남고고학연구소, 2006, 김해 대성동 유적 동편지구 46) 대성동고분군의 북동측 龜 旨 路 개설구간에 대한 발굴에서 木 棺 墓 14기, 木 槨 墓 38기, 石 槨 墓 1기, 甕 棺 墓 4 기 등 57기의 분묘가 조사되었다. 木 棺 의 구조는 割 竹 形 통나무 관과 板 材 를 사용한 箱 子 形 목관이며, 그 시 기는 漆 器 부장의 유무에 의해 Ⅰ Ⅱ기로 구분된다. 보고자는 목관묘 Ⅰ기의 연대를 2세기 전엽~중엽으로 비 정하고 있다. 木 槨 墓 는 바닥에 시상석이 깔리지 않고, 부곽이 채용되지 않은 單 獨 墳 이다. 목곽묘의 경우 墓 制 와 土 器 文 化 에 의해 2기로 구분된다. 목곽묘 Ⅰ기는 3세기 2/4분기~3세기 4/4분기, 목곽묘 Ⅱ기는 4세기 1/4분기~4세기 4/4분기로 비정하고 있다. 慶 星 大 學 校 博 物 館, 2000, 金 海 龜 旨 路 墳 墓 群. 47) 三 國 志 魏 書 東 夷 傳 弁 辰 國 出 鐵 韓 濊 倭 皆 從 取 之 諸 市 買 皆 用 鐵 如 中 國 用 錢 又 以 供 給 二 郡 - 14 -

김해 진례면 산본리 685외 2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러한 국제교류를 반영하는 한 사례가 아닐까 한다. 지금까지는 대부분의 연구자들 이 이 기사를 통해 許 黃 玉 의 출자를 규명하는 데에 집중해 왔다. 허왕옥을 비롯해 그녀와 동행한 잉신인 趙 匡 과 申 輔 등이 중국식 이름을 갖고 있으며, 그들이 가지 고 온 많은 물건 가운데 한나라의 저자에서 사온 여러 가지 물건( 漢 肆 雜 物 ) 이 포 함되어 있음은 무역에 대한 다른 표현은 아닐까. 그녀를 태우고 온 배가 쌀과 포목 등 많은 물건을 싣고 돌아갔다는 점은 더욱 그런 생각을 지우지 못하게 한다. 남북 으로 왜와 한을 잇는 중계무역도 행하였을 것이므로 南 北 市 糴 의 중간에서 이를 중 개했을 것임은 자명하다. 이와 같은 무역로의 설정은 탈해 관련 기사를 통해서도 충분히 방증되는 바이다. 이 시기는 고고학적 자료와 문헌사적 연구 성과에 의하면, 3세기를 전후한 무렵으 로 이해되고 있다. 고고학적 증거로는 분묘에서의 대형목곽묘의 출현을 들 수 있다. 2세기 후반으로 편년되는 양동리 162호분이 그 예증이다. 바로 이때를 즈음하여 무덤에 덩이쇠가 다량으로 부장되기 시작하므로 이로부터 가야 철기의 전성기를 열 어가게 된 것이다. 번영을 거듭하던 가야의 철 산업은 4세기 전반 국제정세의 변화 에 의해 그 수요가 크게 감소하게 된다. 바로 고구려 미천왕의 313년과 314년에 연이은 낙랑 대방 등 한사군 축출에 따른 주요 수요처의 상실이 그것이다. 낙랑 등 과의 원거리 무역의 차단은 시장을 잃은 이상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 이다. 이를 문화 전반의 문제에 걸쳐 생각한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2 가락국의 번영과 쇠퇴 가락국의 번영을 이끈 동력은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철의 생산과 무역이다. 번영 을 구가하던 가락국은 4세기 이후 동아시아 해상 무역체계의 변화에 따라 서서히 쇠잔해 가기 시작한다. 동아시아 국제무역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은 한사군 설치 이후부터이다. 한은 衛 滿 朝 鮮 을 멸하고 고조선의 옛 땅에 樂 浪 帶 方 등의 군현을 설치하여 한반도의 韓 濊 와 바다 건너 倭 와의 무역을 중개하도록 했다. 한반도와 일 본 九 州 및 關 西 지역에 이르는 연안의 무역 항로를 따라 貨 泉 五 銖 錢 등의 고대 중 국 화폐가 발견되는 것은 낙랑군 설치 이후 동아시아 국제무역이 활성화되었음을 반영하는 예증이다. 48) 우리 지역의 한반도 남부 해안지역에서 이와 같은 화폐가 출토된 곳으로는 창원 다 호리유적 1호 널무덤에서 출토된 五 銖 錢 3, 49) 성산패총의 五 銖 錢 1, 50) 김해 회현 리패총의 貨 泉 1, 51) 삼천포 勒 島 貝 塚 출토 前 漢 代 의 半 兩 錢 1매 등이 있다. 52) 이러한 유물이 전해지는 루트는 三 國 志 倭 人 傳 에 묘사된 바와 같다. 대방군에 48) 姜 鳳 龍, 2002, 古 代 동아시아 海 上 交 易 에서의 百 濟 의 역할, 韓 國 上 古 史 學 報 38, p.38~77. 49) 李 健 茂 外, 1989, 義 昌 茶 戶 里 遺 蹟 發 掘 進 展 報 告 (Ⅰ), 考 古 學 誌 第 1 輯, 韓 國 考 古 美 術 硏 究 所. 50) 崔 夢 龍, 1976, 西 南 區 貝 塚 發 掘 報 告, 馬 山 外 洞 城 山 貝 塚 發 掘 調 査 報 告, 文 化 公 報 部 文 化 財 管 理 局, pp.12 7~128. 51) 朝 鮮 總 督 府, 大 正 九 年 度 古 蹟 調 査 報 告 書, 圖 版 27. 52) 李 健 茂, 2001, 勒 島 遺 蹟 을 통해 본 古 代 國 際 交 流, 勒 島 遺 蹟 을 통해 본 韓 中 日 古 代 文 化 交 流, 慶 尙 南 道 慶 尙 大 學 校 博 物 館, pp.6~7. - 15 -

www.duryu.or.kr 서 왜에 이르는 노정은 해안을 따라 韓 國 을 지나 동남쪽으로 가면 왜의 북쪽 狗 耶 韓 國 (지금의 김해)에 이르고, 다시 바다를 건너면 對 馬 島 에 도착한다. 53) 물론 대마 도 이후의 노정은 一 岐 島 를 거쳐 열도로 이르게 된다. 최근 중간 기착지인 일기도 에서 彌 生 時 代 의 선착장이 발굴되어 이 루트를 일본학계에서는 南 北 市 糴 을 이끈 교 역로라고 하며, 54) 최근의 일본 연구자들은 이 길을 쇠의 길( 鐵 の 道 ) 이라고도 부른 다. 55) 이것은 이 길을 통해 바로 우리 지역 변한의 鐵 ( 鐵 鋌 ; 덩이쇠)이 왜로 수출되 었음을 방증하고 있음이다. 그러다 4세기 초엽 고구려에 의한 낙랑군(313년)과 대방군(314년)의 축출에 따른 국제질서의 변화에 미처 대응하지 못한 가락국은 철의 주요 수요처를 상실하게 됨 에 따라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漢 代 의 유물은 영남지역에 편중되어 발 견되는데 비해 魏 晉 ( 西 晉 )의 유물이 馬 韓 百 濟 의 고지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은 대조 적인 현상이다. 56) (윤재운; 2006) 이와 같은 고고학적 사실이야 말로 국제질서의 변 화를 반영하고 있는 단적인 예증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42년 김수로에 의해 건국된 가락국은 491년을 이어오다 10대 구형왕에 이르러 신 라에 투항하니, 그때가 법흥왕 19년인 532년이었다. 이때 신라는 가락국을 金 官 郡 으로 고쳤다. 3 통일신라시대 김유신으로 대표되는 가락국 후예들의 혁혁한 전공에 힘입어 신라에 의해 삼국이 통일되자, 문무왕은 20년(680)에 가락국 고지를 金 官 小 京 으로 삼았다. 경덕왕 16년 (757)에는 전국의 행정 구역을 중국의 제도를 차용하여 군현제로 개편하면서 金 海 小 京 으로 고쳤다. 이때의 행정개편은 별다른 변화 없이 통일신라 전반 및 고려시대 초까지 오래 동안 지속되었다. (2) 중ㆍ근세 1 고려시대 고려 太 祖 23년(940)에 김해소경을 김해부로 고쳤다. 뒤에 臨 海 縣 으로 내렸다가 다 시 臨 海 郡 으로 올렸다. 成 宗 2년(983)에는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전국을 12 牧 으로 나누어 설치하는 행정구역개편을 실시하였다.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지방 豪 族 勢 力 들로 인하여 당시 중앙에서 지방을 실질적이고 조직적으로 통제할 수는 없는 상 황이었고, 단지 처음으로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의 독자적인 호족들을 통제하였던 점에 의미를 두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성종 14년(995)에 지방 53) 三 國 志 卷 三 十 魏 書 三 十 烏 丸 鮮 卑 東 夷 傳 三 十 倭 人 傳 從 郡 至 倭 遁 海 岸 水 行 歷 韓 國 乍 南 乍 東 到 其 北 岸 狗 耶 韓 國 七 十 餘 里 始 渡 一 海 千 餘 里 至 對 馬 島 54) 長 崎 縣 敎 育 委 員 會, 2003, 壹 岐 原 の 辻. 55) 大 塚 初 重 外, 1997, 考 古 學 による 日 本 歷 史 - 交 易 과 交 通 - 9, 雄 山 閣. 56) 윤재운, 2006, 한국 고대무역사 연구, 景 仁 文 化 社, p.36. - 16 -

김해 진례면 산본리 685외 2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행정체계를 다시 4 都 護 府 10 道 로 개편하였으며, 顯 宗 9년(1018)에 전국을 4 道 護 府 8 牧 56 州 郡 28 鎭 으로 나누게 됨으로써 고려의 지방제도가 완성되었다. 이때 비 로소 통일신라 때 이루어 진 지방명칭과 행정체계에 대한 완전한 정비가 이루어지 면서 기존의 체계와 명칭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이 과정에서 김해시의 행정개편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成 宗 14년(995)에는 金 州 安 東 都 護 府 로 고쳤고, 光 宗 22년(971)에 금주도호부라 하였다가 穆 宗 3년(1000)에는 안동도호부로 고쳤다. 顯 宗 3년(1012)에 다시 金 州 로 고치고 방어사를 두었다. 元 宗 11년(1270)에 방어사 金 咺 이 密 城 에서 일어난 반 란을 평정하고 삼별초를 막은 공으로 金 寧 都 護 府 로 승격되었다. 忠 烈 王 19년 (1293)에 현으로 강등되었으며, 동왕 34년(1308)에 다시 金 州 牧 으로 승격되었고, 忠 宣 王 2년(1310)에 이르러 김해부로 개편되었다. 57)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였는데, 高 宗 10년(1223)~ 恭 讓 王 4년(1392)에 이르기까지 169년간 총 529회에 이를 만큼 빈번하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恭 愍 王 ~ 禑 王 통치 시기에는 총 493회로써 침략빈도가 가장 많았으니, 그 노략질과 규모 또한 점차 대담해져 남해안과 삼남지방은 물론 심지어 평안ㆍ함경지역, 그리 고 내륙지방까지 침략하여 그 피해가 高 麗 王 朝 의 기저를 위협하기에 이른다. 이러 한 상황은 김해지역도 예외일 수 없었다. 특히 김해지역은 日 本 ( 倭 )과 가장 가까운 海 路 의 요충지였으며, 物 産 또한 풍성한 큰 고을로서 잦은 왜구의 침략과 노략질의 대상이 되어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에 禑 王 때 김해부사 朴 葳 는 이를 격퇴하는 한편, 김해에 邑 城 과 盆 山 城 을 수축하여 왜구의 침탈로부터 방비를 강화하기도 하 였다. 2 조선시대 조선 초기에 이르러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道 중심체제 의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행 정개편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김해시는 먼저 太 宗 13년(1413)에 金 海 都 護 府 로 승격되었다. 이때에서야 이곳에 鄕 校 가 설치되었으며, 웅천ㆍ완포를 속현으로 대 산ㆍ천읍을 부곡으로 삼았다. 世 宗 實 錄 地 理 志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김해부 의 호구 수는 1,290호, 인구는 6,642명이었다. 58) 그리고 文 宗 2년(1452)에는 웅신 현과 완포현을 웅천현으로 통합하여 현감을 두었고, 世 祖 13년(1467)에 지방군제 개편으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관하의 鎭 管 을 설치하였다. 조선 중기 宣 祖 25년 (1592)에 壬 辰 倭 亂 이 발발하여 가락면 죽동에 상륙한 왜군 제3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결국 김해성이 함락되기도 하였다(김해성 전투). 59) 이후 金 海 府 邑 誌 의 기록에 의하면, 英 祖 35년(1759) 김해도호부의 호구 수가 8,511호에 인구가 57) 高 麗 史 卷 五 十 七 < 志 > 第 十 一 地 理 二 58) 世 宗 實 錄 卷 一 百 五 十 < 地 理 志 > 金 州 都 護 府 戶 口 條 59) 이때 四 忠 士 를 중심으로 백성들은 끝까지 왜군과 싸웠고, 모두 장렬히 전사하였다. 사충사는 宋 賓 ㆍ 李 大 亨 ㆍ 金 德 器 ㆍ 柳 湜 등 4명으로 후일 이들을 위해 분산성에 四 忠 壇 을 설치하고, 高 宗 8년(1871)에는 사충단비를 설 치하였다. - 17 -

www.duryu.or.kr 33,015명으로 기록되어 있어 조선전기에 비해 많은 증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보듯이 고려시대부터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인근 지역들과의 통합과 분 리를 거치면서 승강을 거듭하면서도 대체적으로 府 단위의 행정체계를 유지하였음 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는 郡 으로 행정개편 이 이루어 졌으며, 인근 지역들과 여러 차례 개편과 편입을 거치면서 현재 김해시 의 틀을 갖추게 된다. (3) 근ㆍ현대 조선 말기인 高 宗 32년(1895)의 23 府 制 의 지방관제 개편으로 인하여 金 海 郡 으 로 되었다. 이듬해인 高 宗 建 陽 元 年 (1896)에 다시 道 體 制 가 부활되면서 행정개편 되었으며, 光 武 10년(1906)에 大 山 面 이 창원군으로 편입되고, 양산군에 大 上 面 ㆍ 大 下 面 이 편입되었다. 이후 1910년 9월, 21개 面 이 13개 面 으로 개편되었고, 1914년 군ㆍ면 폐합에 따라 밀양군의 下 南 面 ㆍ 下 東 面 의 일부를 병합하여 14개 面 과 134개 里 로 개편하여 관할하였다. 1918년 좌부면과 우부면을 병합하여 金 海 面 을 신설하 고, 1928년 4월 하계면을 進 永 面 으로 하고, 1931년 11월 김해면을 金 海 邑 으로 승 격하였다. 1942년 진영면을 읍으로 승격, 2읍 11면이 되었다. 이후 해방이 되고도 별다른 변화가 없다가 1978년 남해고속도로가 개통되던 해에 김해군의 대저면, 명 지면, 가락면의 강동지구가 현 부산광역시 北 區 에 편입되었고, 1981년 김해읍이 김 해시로 승격되면서 김해군과 분리되어 한때 김해군의 세력이 많이 약화되기도 하였 다. 1983년 2월 김해군 生 林 面 의 금곡리와 생림리 일부가 二 北 面 에 편입되었으며, 1987년 1월 입구면이 翰 林 面 으로 개칭되었다. 1993년에는 낙동대교가 완공 개통되 었다. 그리고 1995년 도농통합시로 金 海 市 ㆍ 郡 이 통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60) 60) 김해시의 面 단위 행정구역명 변천관련은 경상남도 연구 에 잘 정리되어 있으므로 이를 참조하면 된다. 경남대학교경남지역문제연구원 저, 1997, 경상남도 연구, 경남대학교 출판부. - 18 -

김해 진례면 산본리 685외 2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Ⅲ. 조사내용 지도 10. 조사구역 및 주변유적표시도(1/25,000) - 19 -

www.duryu.or.kr 1. 고고분야 1) 주변유적 현황 당 조사구역의 주변에는 이곳과 일정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산본리유물산 포지 1 2, 중리유물산포지 등 의미 있는 유적들이 여럿 분포하고 있다. 특히 현재 발굴조사를 수행하고 있는 산본리유물산포지1 A구역은 당 조사구역과 같은 지형일 뿐만 아니라 매우 가깝게 분포하고 있어 주목된다. (1) 吳 奎 泳 永 世 頌 德 碑 61) 지방도 1042호 산본 삼거리에 있는 칠원 윤씨 정려비의 동쪽에 있다. 전 참봉 吳 奎 泳 의 덕을 기리기 위해 1919년 2월에 山 本 里 의 李 有 增, 新 月 里 의 朴 命 根, 棗 田 里 의 崔 世 益 3인이 세웠다. 비는 가첨석 을 갖추었으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前 參 奉 吳 奎 泳 永 世 頌 德 碑 受 他 委 司 在 肥 在 瘠 衆 口 志 曰 約 己 務 施 無 謟 無 私 一 心 屢 之 當 局 尤 我 永 矢 不 諼 咨 行 路 向 腢 有 誰 사진 1. 오규영 영세송덕비 樹 片 碑 觀 感 於 斯 己 未 二 月 日 竪 竪 者 進 禮 面 山 本 里 李 有 增 仝 面 新 月 里 朴 命 根 仝 面 棗 田 里 崔 世 益 碑 ; 90 36 19 cm. 加 檐 石 ; 23 59 31cm. (1)-1 漆 原 尹 氏 旌 閭 碑 62) 신월마을 도로변에 있다. 全 州 人 崔 文 瑢 의 妻 漆 原 尹 氏 의 孝 烈 을 기 리기 위해 조선 개국 504년 후인 1895년 10월에 김해부사 李 奎 大 가 글을 짓고 旌 閭 碑 를 세웠음을 밝히 고 있다. 윤씨는 지아비가 불치의 병에 걸리자 지아비를 대신할 것을 천지신명께 빌었더니 神 人 이 현몽 하여 너의 정성이 갸륵하여 남편의 목숨을 5년 더 연장시켜 주겠다. 고 사진 2. 칠원윤씨정려비 하였다. 그 뒤 지아비가 죽으니 그 녀의 나이 스물넷이었다. 지아비의 패도를 숨겨놓았다가 상례를 마치고 따라 죽으 61)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2005, 김해 진례-주촌간 도로구간 지표조사보고서, p.11. 62)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2005, 김해 진례-주촌간 도로구간 지표조사보고서, p.10. - 20 -

김해 진례면 산본리 685외 2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려 하였으나 이를 눈치 챈 시어머니의 만류로 지아비를 따르지 못하였다. 시어머니 가 돌아가실 때가지 3년을 지극 정성으로 섬기니 그녀의 효열행이 上 聞 되어 명정되 었다. 63) 비는 碣 形 이며, 네 개의 활주를 가진 가첨석을 갖추고 있다. 비의 재질은 안산암이며, 가첨석과 활주는 화강암이다. 비에 새긴 내용은 다음과 같다. 學 生 崔 文 瑢 妻 漆 原 尹 氏 之 閭 開 國 五 百 四 年 乙 未 十 月 日 孝 烈 閣 記 內 容 省 略 子 孫 吉 昌 開 國 五 百 四 年 十 月 日 通 訓 大 夫 知 郡 李 奎 大 記 碑 ; 102 41 10cm. 加 檐 石 ; 38 93 79cm. 闊 株 高 ; 120cm. (2) 산본리 유물산포지 1, 2 사진 3. 산본리 유물산포지 1 사진 4. 산본리 유물산포지 2 산본리 유물산포지 1은 산본리 관동마을 북동쪽에서 산본마을 북쪽으로 이어지는 충적지 일원에 넓게 분포하고 있다. 이곳은 모두 남쪽의 배후 산지에서 공급된 퇴 적물로 형성된 선상지성 충적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에 따라 경사가 매우 완만하여 토지이용에 유리한 곳이다. 이를 반영하듯 이번 지표조사에서 삼국시대 이래의 도 기편 및 와편이 채집되었다. 산본리 유물산포지 1의 관동 구간은 부전-마산간 철도 사업(BTL)사업으로 인한 발굴조사에서 조선시대 건물지의 축대와 수혈 등이 조사 되었으며, 64) 산본 구간에는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현재 발굴 중인 유적은 청동 기시대 이래의 주거지 및 수혈, 구상유구 등으로 구성된 취락이다. (3) 산본리 유물산포지 2 김해시 진례면 산본리에 위치하며 산본리 유물산포지Ⅰ의 서쪽으로 100m가량 떨어 져 있다. 이 유적은 낮은 구릉지로 서쪽에서 북쪽으로 용전천(진례천)이 흐르고 있 고 용전마을의 북쪽 낮은 구릉과 그 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입지상 유적의 분포가 능성이 높으며 회청색 경질토기편 등이 확인되었다. 63) 金 海 文 化 院, 1989, 金 海 人 物 誌, p.157. 64) (재)동양문물연구원, 2015, 부전-마산간 복선전철 건설부지내(산본 신월 신안리) 문화재 발굴조사 약보고서 (2차). - 21 -

www.duryu.or.kr (4) 김해 경전선 삼랑진-진주간 송변전설비 신축부지 2006년 (재)동서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 한 유적이다. 조사구역은 비음산-대암산- 용지봉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사면의 말단부와 매봉산의 남동쪽으로 뻗어 내 린 산록완사면이다. 경작지는 현재 논과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지표조사 결과, 산본리유물산포지Ⅰ Ⅱ, 신월유물산포지 Ⅱ와 오규영영세송덕비, 칠원윤씨지려가 주변에서 확인 조사되었다. 사진 5. 경전선 송변전설비 신축부지 전경 65) 그러나 해 당조사구역 내에서는 아무런 유적이 발견 되지 않았다. (5) 中 里 遺 物 散 布 地 김해시 장유면 산본리의 산본저수지와 인접한 구릉의 북서쪽 사면에 위치하고 있는 유적이다. 유적이 위치한 구릉은 해 발 114.4m의 정상부의 서쪽 사면에 해 당한다. 문화유적분포지도-김해시 에 서는 경질토기편과 기와 등이 수습되었 으며 지형상 유적의 입지에 유리한 곳으 로 판단되며, 고분군과 건물지 등이 분포 사진 6. 중리 유물산포지 할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판단된다. 고 하였는데 현재는 경전선 복선화철도공사가 진행 중인 상태다. (6) 경전선 부전-마산 경전철복선화 민간투자사업 구간 내 유적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인 유적으로 산본리 유물산포지1의 동쪽 선상지성 충적지에 분 포한다. 이곳에는 청동기시대 이래의 주거지, 수혈, 구상유구 등이 조사 중이다. 청 동기시대의 방형 주거지 1기는 기능 정지 이후 폐기장으로 전용된 것으로 조사단은 파악하고 있다. (7) 良 洞 里 遺 物 散 布 地 2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에 위치하며 남해고속도로 냉정분기점을 지나 창원 방향으로 약 1km 떨어진 고속도로 남쪽에 구릉에 분포하며, 장고개를 중심으로 양동리 유물 산포지Ⅰ과 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적갈색연질토기, 회청색경질토 65) (재)동서문화재연구원, 2006, 경전선 삼랑진-진주간 복선전철 송변전설비 예정구간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 - 22 -

김해 진례면 산본리 685외 2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기, 와편 등이 수습되어 선사시대 이래의 주거 유적이나 고분 혹은 건물지 등이 분 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민들의 전언 에 따르면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나 지표조사 시 유구를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이 구간에 대해서는 두류문화연구원에서 송전선로 설치 장소와 그 진입도로 구간에 대해 시굴조사를 거쳐 발굴조사를 수행하 사진 7. 양동리 유물산포지 였다. 이 조사에서는 철기시대 주거지 1기 와 수혈 5기, 구상유구와 다수의 주혈 등이 확인되었고, 이밖에 조선시대 민묘 1기 가 조사되었다. 출토유물은 퇴화형 무문토기와 지역성을 잘 반영하고 있는 시루를 비롯하여 豆 形 土 器 臺 脚 등이 출토되었고, 이밖에 시굴 트렌치에서 출토된 석제 劍 把 頭 飾 1점이 특기할 만한 자료다. 사진 8. 1호 주거지 전경 사진 9. 각 유구 출토유물 (8) 냉정유적/김해 진례-주촌간 도로확장구간 내 유적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398-32번지에 위치하는 유적으로 2008년 (재)경남문화 재연구원에서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곳은 진례면 산본리에서 장유면 부곡리로 이르 는 화성골과 냉정고개 일원이다. 미시적으 로는 매봉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구릉과 용지봉에서 북쪽으로 뻗은 구릉 사이의 鞍 部 와 작은 규모의 곡간지인 화성골에 입지한 유물산포지이다. 특히 냉정고개는 사진 10. 냉정고개 전경 고도가 낮고 경사가 완만하여 고래로 교 통로 형성에 유리한 지세를 이루어 고려시대 이래의 관도가 개설 이용되었다. 조사 결과, 동-서 방향의 1042번 지방도로를 기준으로 하여 도로 남쪽의 구릉과 계곡부 - 23 -

www.duryu.or.kr 는 표토층과 기반층인 황갈색점질토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 다. 66) 이 조사에서 도로가 확인되지 않은 것은 조사당시 사용 중인 도로를 그대로 이용할 계획이어서 도로의 하부를 조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9) 省 法 驛 址 67) 관동리 喜 田 橋 배후( 南 東 ) 산록의 말단부 에는 조선시대의 건물지가 분포해 있다. 밭둑에는 밭에서 제거된 瓦 片 과 瓷 器 片, 甕 器 片 등이 산란하다. 채집된 자기는 退 化 形 靑 瓷 의 底 部, 粉 靑 沙 器 甁 의 頸 部, 白 瓷 大 楪 片 등이다. 유물이 집중적으로 산포하는 경작지는 대상을 이루나 기단 이나 초석으로 여겨지는 석물은 관찰되 지 않는다. 이 건물지가 분포하는 곳에서 사진 11. 성법역 추정지 관동마을 관동마을에 이르는 구간에 성법역이 분 포했던 것으로 헤아려 진다. 이곳은 戶 口 總 數 에 栗 亦 面 省 法 里, 山 本 里 로 등재되어 있다. 68) 1914년에 율리 면의 官 洞 里, 山 本 里, 松 峴 里 일부를 통합하였다. 69) 성법역은 自 如 道 를 관할하는 自 如 驛 70)의 속역으로 고려시대에는 省 仍 驛 으로 불렸다. 71) 三 浦 倭 變 (중종 5년; 1510 년)이 발발했을 때 방어사 유빙년이 이곳에 진을 치고 웅천현으로 진격하였다. 72) 驛 址 로 추정되는 용전 마을의 서북쪽에는 약 150년 전에 조성된 것으로 전해지는 雜 木 林 (용전숲)이 있다. 譯 院 과 관련되어 조림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추후 연구가 필 요하다. 자여도에서 성법역의 관계적 위치는 다음과 같다. 서쪽으로는 창원의 자여 역과 이어지고, 동쪽으로는 김해부의 南 驛 73)으로 연결된다. 남쪽으로는 赤 項 驛 74)과 66) (재)경남문화재연구원, 김해 진례-주촌간 도로확장구간 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결과 약보고서, (재)경남문화재 연구원, 2010, 67)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2005, 김해 진례-주촌간 도로구간 지표조사보고서, p.10. 68) 戶 口 總 數 慶 尙 道 金 海 栗 亦 面 省 法 里 館 洞 里 山 本 里 69) 新 舊 對 照 朝 鮮 全 道 府 郡 面 里 名 稱 一 覽 金 海 郡 進 禮 面 山 本 里 栗 里 面 山 本 里 官 洞 里 省 法 里 松 峴 里 一 部 70) 昌 原 市 東 邑 松 亭 里 151-51번지의 송정마을 회관 자리가 自 如 道 를 통괄한 自 如 驛 옛터이다. 자여역에 대한 정보는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自 如 驛 在 府 東 十 九 里 丞 本 道 屬 驛 十 四 近 珠 昌 仁 大 山 新 豊 巴 水 春 谷 靈 浦 金 谷 德 山 省 法 赤 項 安 民 報 平 南 驛 昌 原 大 都 護 府 邑 誌 驛 院 에 자여역에 대한 기록이 다소 소상하게 전한다. 自 如 驛 在 府 東 二 十 里 承 ( 丞 의 誤 ) 本 道 屬 驛 十 四 近 珠 昌 仁 大 山 新 豊 巴 水 春 谷 靈 浦 金 谷 金 洞 省 法 赤 項 報 平 南 驛 安 民 承 一 人 革 承 爲 察 訪 本 驛 東 距 金 海 省 法 驛 二 十 里 西 距 新 豊 十 里 西 去 近 珠 驛 三 十 五 里 南 距 安 民 驛 三 十 里 北 距 金 海 大 山 驛 三 十 里 大 馬 二 匹 中 馬 二 匹 卜 馬 十 匹 驛 吏 九 百 四 十 四 人 奴 七 十 八 名 婢 三 十 七 口 71) 高 麗 史 志 卷 第 三 十 六 兵 二 金 州 道 掌 三 十 一 德 山 省 仍 赤 項 金 谷 大 驛 ( 金 州 ) 下 略 72) 金 海 文 化 院, 1991, 金 海 地 理 志, p.230. 73) 김해시 삼정동 남역마을이 南 驛 옛터이다. 慶 尙 道 地 理 志 金 海 都 護 府 驛 六 南 驛 德 山 金 谷 省 法 赤 項 大 山 新 驛 世 宗 實 錄 地 理 志 金 海 都 護 府 驛 七 南 驛 德 山 金 谷 省 法 赤 項 大 山 新 驛 熊 神 新 驛 慶 尙 道 續 撰 地 理 志 金 海 站 驛 南 驛 東 距 德 山 驛 三 十 里 西 距 省 法 驛 三 十 五 里 南 距 赤 項 驛 三 十 五 里 十 四 步 北 距 金 谷 驛 四 十 里 七 十 六 步 - 24 -

김해 진례면 산본리 685외 2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이어지고, 북쪽으로는 같은 김해부의 太 山 驛 75)(창원시 대산면 가술리 소재)과 이어 져 洛 東 江 이동의 밀양 良 洞 驛 76)에 이른다. 성벽역의 동쪽 驛 路 를 중계하는 驛 院 으로는 장유면 釜 谷 里 에 있었던 冷 泉 院 을 들 수 있다. 지금의 부곡리는 경상도속찬지리지 가 편찬되던 당시에는 釜 良 谷 里 로 불렸다. 77) 냉천원의 위치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김해부의 서쪽 30리 에 있다고 전한다. 78) 이후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냉천원은 성법역으로 이설되었 다. 79) 냉천원은 앞서 살펴 본 성법역과 함께 현재의 냉정고개 80) 를 사이에 두고 그 동서측에 배치된 驛 院 이다. 이 역로는 조선시대 自 如 道 에 속한 노선으로 自 如 驛 에 서 露 峴 院 - 省 法 驛 - 冷 泉 院 을 거쳐 동쪽의 赤 項 驛 -김해 南 驛 81)으로 이르는 루트 다. 82) 부전-마산간 복선전철 건설부지내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조선시대 건물지의 축대와 수혈 및 주혈, 구상유구 등이 조사되었다. 83) 유적의 성격은 이 일대에 분포할 가능 성이 있는 성법역과 관련되는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金 海 都 護 府 驛 院 南 驛 在 府 東 五 里 輿 地 圖 書 金 海 都 護 府 驛 院 南 驛 院 在 府 東 五 里 東 距 德 山 驛 三 十 五 里 南 距 赤 項 驛 三 十 里 西 距 省 法 驛 三 十 里 北 距 金 谷 驛 三 十 里 金 海 府 邑 誌 驛 院 南 驛 院 在 府 東 五 里 屬 自 如 道 74) 장유면 官 洞 里 가 적항역의 옛터이다. 적항역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慶 尙 道 地 理 志 金 海 都 護 府 驛 六 赤 項 驛 世 宗 實 錄 地 理 志 金 海 都 護 府 驛 七 赤 項 慶 尙 道 續 撰 地 理 志 金 海 站 驛 赤 項 驛 西 距 熊 川 報 平 驛 三 十 二 里 二 百 四 十 一 步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驛 院 赤 項 驛 在 府 南 三 十 一 里 輿 地 圖 書 金 海 都 護 府 驛 院 赤 項 驛 院 在 府 南 三 十 一 里 東 距 南 驛 三 十 里 南 距 熊 川 保 平 驛 三 十 里 西 距 昌 原 府 安 民 驛 三 十 里 北 距 省 法 驛 二 十 里 大 馬 一 匹 中 馬 二 匹 卜 馬 五 匹 驛 吏 二 十 人 奴 九 口 婢 二 口 金 海 府 邑 誌 驛 院 赤 項 驛 在 府 南 三 十 一 里 75) 自 如 驛 의 東 路 이다. 昌 原 市 大 山 面 加 述 里 에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자여역에서 이곳을 경유하면, 太 山 津 에서 도강하여 密 陽 의 良 洞 驛 에 이를 수 있다. 金 海 邑 誌 驛 院 에 大 山 驛 院 在 府 北 五 十 八 里 屬 自 如 道 라 하였다.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에 太 山 驛 在 太 山 部 曲 輿 地 圖 書 金 海 都 護 府 驛 院 大 山 驛 在 府 北 五 十 里 大 山 部 曲 東 距 金 谷 驛 五 十 里 南 距 昌 原 自 餘 驛 二 十 里 西 距 漆 原 昌 仁 驛 五 十 里 北 距 密 陽 良 洞 驛 十 里 大 馬 二 匹 中 馬 二 匹 卜 馬 十 匹 驛 吏 五 十 五 人 奴 五 名 婢 五 口 76) 密 陽 市 下 南 邑 良 洞 里 에 있었다. 輿 地 圖 書 慶 尙 道 密 陽 驛 院 良 洞 驛 在 府 南 三 十 五 里 南 距 無 屹 驛 三 十 里 東 距 金 洞 驛 十 五 里 中 馬 二 匹 卜 馬 七 匹 吏 十 四 名 77) 慶 尙 道 續 撰 地 理 志, 金 海 都 護 府 院 宇 釜 良 谷 里 冷 泉 院 78)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卷 三 十 二, 金 海 都 護 府 驛 院 冷 泉 院 在 府 西 三 十 里 79) 輿 地 圖 書 金 海 都 護 府 驛 院 冷 泉 院 在 府 西 三 十 里 移 設 省 法 驛 80) 진례면 新 安 里 新 月 里 와 주촌면 良 洞 里 를 잇는 고개이다. 81) 김해시 삼정동 남역마을이 南 驛 옛터이다. 삼정동은 南 驛 里 라 불리다가 戶 口 總 數 에 당시 활천면에 속한 驛 里 로 등재되었다. 이곳 남역 마을은 自 如 道 에 속한 남역의 驛 과 院 이 있던 곳으로 府 院 에서 活 川 고개를 넘 어 이 역으로 와서 동쪽의 德 山 驛 을 경우 洛 東 江 동안의 黃 山 道 로 가는 곳이었다. 閔 肯 基, 2005, 金 海 의 地 名, 金 海 文 化 院, p.148. 82) 최헌섭, 2010, 자여도, 한가람. 83) (재)동양문물연구원, 2015, 부전-마산간 복선전철 건설부지내(산본 신월 신안리) 문화재 발굴조사 약보고서 (2차). - 25 -

www.duryu.or.kr 2) 조사구역 내 유적 현황 사진 12. 조사구역 전경 사진 13. 조사구역 발견 유물 사진 14. 조사구역 현황 사진 15. 부전-마산 경전철 사업구간 중 산본리 발굴현장 조사구역은 김해시 진례면 산본리 685번지 외 2필지다. 조사구역은 진례분지의 동 남쪽 경계 즈음에 위치하고 있다. 조사구역이 위치한 진례분지는 비음산(518m)-대 암산(607m)-매봉산(338m)-황새봉(393m)-무릉산(313m)-대숭산으로 이어지는 산 체로 둘러싸인 침식분지로서 분지 바닥에는 진례천, 화포천 등 크고 작은 하천의 영력으로 형성된 충적지인 진례평야가 펼쳐져 있다. 진례분지 남동쪽은 대암산에서 매봉산으로 이어지는 산계에 속하며, 매봉산의 남쪽은 비교적 산세가 미약하여 예 로부터 진례분지와 김해 장유를 잇는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다. 냉정고개와 장 고개, 단고개는 현재 남해고속도로와 1042지방도가 지나고 있다. 이 가운데 조사구 역과 인접한 냉정고개가 전통시대의 주요 교통로로 기능하였는데, 고려시대 금주도 에 속한 성법역과 장유의 적항역, 김해의 대역을 잇는 역로가 오간 길이다. 이 길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자여도로 개편되면서 창원시 동읍 송정리의 자여역-노티-노현 원(진례면 시례리)-진례 산본리의 성법역-냉정고개를 넘어 김해의 남역 또는 장유 의 적항역을 오가는 역로를 이었다. 조사구역은 고려시대 이래의 관도를 덮어쓰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1042번 지방 도의 북쪽에 연접해 있으며, 지형적으로는 배후 산지에서 공급된 퇴적물로 구성된 선상지성 충적지에 입지하고 있다. 현재 조사구역은 1042번 지방도 확장으로 인한 - 26 -

김해 진례면 산본리 685외 2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우수관로 매설에 따라 유입된 흙과 근처에서 실어온 화강암풍화암반토가 다량으로 복토되어 있어 조사구역 전체 중 원지표면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제한된 범위에서 와편이 발견되었고, 당 조사구역과 연접한 논에서도 도기편과 와편, 백자편 등이 산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현재 당 조사구역의 서북쪽으로 약 250m 떨어진 곳에 부전-마산간 복선전철 건설 에 따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삼국시대 이래의 주거지 구상유구 수혈 주혈 등으로 구성된 취락 유적이 조사 중이다. 당 조사구역 과 현재 발굴조사가 진행 중인 곳은 다소 거리가 있지만, 선상지라는 입지장소가 동일하다는 점이 암시하는 바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입지장소가 동일하다는 것은 당 조사구역에서도 발굴조사 구역에서와 같은 토지이용이 이루어졌을 가능성 을 매우 높게 한다. 또한 지표조사에서 발견된 유물은 그러한 가능성을 더욱 높게 해주는 물적 증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번 지표조사 조사구역에 대하여서는 표본 조사를 실시하여 유적의 존재여부를 확인한 후 그 결과에 따라 보존방안을 수립해 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2. 민속분야 1) 생활환경 및 주변민속 민속분야에서는 해당 지역을 살아왔던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의식이 반영되어 있는 유 무형의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에 초점을 맞추어 조사를 진행하였다. 이를 위해, 해당지역에 대한 기초적인 문헌조사를 실시하였고, 보충하거나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준비된 설문지와 함께 현지조사를 통한 주민들과의 직접 인 터뷰를 실시하였다. 구체적으로 조사에 포함된 항목들은 김해시의 지리적 위치 인접 지역 인구추이 행정구역 등 일반현황과 송현리 주변의 지명유래, 가구구성, 생업형 태, 비공식 모임, 민간신앙 등에 관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1) 김해시 일반현황 경상남도의 남동부에 위치한 김해시는 서쪽으로 창원시 동읍과 인접해 있으며, 남 으로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북으로는 낙동강을 경계로 밀양시와 양산시 등과 행정 구역 간 경계를 이루고 있다. 면적은 463.3km2로 도내 전체면적의 4%를 차지하며, 이는 20개 시 군 중에서 13번 째로 평범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동서 극단 간의 거리는 27km, 남북 극단 간의 거리는 32km이다. 조사지를 포함하고 있는 북부동은 13.93km2로 김해시 전체면적의 3% 가량을 차지한다. 84) 84) 동단 : 대동면 월촌리, 서단 : 진영읍 좌곤리, 남단 : 장유면 장유리, 북단 : 생림면 도요리. - 27 -

www.duryu.or.kr 김해시의 전체인구는 해가 갈수록 증가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를 확인하기위 해 1985년, 1994년도와 2001년도의 김해시 인구추이를 비교해 보았다. 그 결과 2001년도 김해시의 세대 및 인구는 1985년도와 비교해서 세대수에 있어서는 7만 세대 그리고 인구수에 있어서는 18만 4천 명이 늘어난 것으로 파악되었다. (2002 년 김해시 통계연보 현황 참조). 이러한 김해시의 인구 및 세대수의 증가는 부산광역시와 창원시, 양산시, 밀양시 등에 인접한 지리적 이점을 기반으로 발달되어 있는 도로망6) 그리고 이를 바탕으 로 많은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신흥 아파트촌의 건립7) 등이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김해시의 인구증가는 대도시에 인접해 있고 도로가 잘 발달되어 있어서 거주지만 김해에 둔 채 부산이나 창원에 직장을 두고 출퇴근할 수 있다는 점, 상대적으로 부산이나 창원보다 물가가 저렴하다는 점 등이 김해를 거주 지로 삼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게 한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김해시의 행정구역은 1읍 7면 9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8), 구체적인 현황은 아래와 같다. 조사지를 관할하고 있는 북부동은 3개 법정동(대성동, 구산동, 삼계동)과 67 개 통으로 이루어져 있다. 85) 한편, 토지 지목별 현황을 비율로 살펴보면, 임야가 53.6%를 차지하며, 전답이 27.6%, 주택지가 3.1%, 기타가 15.7% 가량 차지하고 있다.(2002년 김해시 통계연 보 현황 참조). (2) 진례면 일대 마을현황 진례면 일원은 원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 중심이었던 곳이다. 그러나 약 20여년전 부터 다양한 형태의 공장들이 들어서고 고속도로 진입도로가 생기고, 최근에는 철 도까지 들어서면서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농사를 위주로 하던 원래의 원주민들 의 숫자는 급격하게 줄어들고 반대로 공장 근로자들은 급격하게 유입되는 주거인구 전환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외국인 근로자들도 많이 유입되어 길거리에서 외 국인 근로자들을 만나는 경우가 흔하다. 2005년 통계연보에 다르면 진례면 관내의 사업체는 1,100개소이며 종사자 수는 10,177명인데 반하여 농가수는 737호에 2,060명에 불과하므로 약 1/5에 불과하다. 이러한 현상이 지난 5년 동안 가속화된 것으로 보면 현재 인구비율은 훨씬 더 심각할 것임은 자명하다. 산본리 현황 : 산본리는 화전 신월 중리 세 자연마을이 하나의 리 단위를 이룬다. 원래 본마을인 산본마을이 있었으나 현재는 도로공사와 여타 개발공사로 인하여 이 주하고 두어집만 남은 상태이다. 리 단위 전체는 약 70여호이며 원래는 거의 농사 를 위주로 생업을 영위하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그런데 약 20여년 전부터 마을 주변으로 공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마을에는 많은 변화가 생기고 그에 따라 마을 앞 국도에 많은 차들이 왕래하면서 그 변화는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85) 1읍 : 진영읍 // 7면 : 대동면, 상동면, 생림면, 장유면, 주촌면, 진례면, 한림면. 9동 : 내외동, 동상동, 부원 동, 북부동, 불암동, 삼안동, 칠산서부동, 활천동, 회현동 - 28 -

김해 진례면 산본리 685외 2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젊은 사람들은 거의 도시로 진출하여 부산이나 김해, 창원, 마산 등지로 떠나버리고 마을에는 노인들만 남는 도시인근 농촌의 전형적 변화가 두드러졌다. 처음에는 노 인들도 다소 젊은 편이어서 농사를 짓기에 충분하였으나 점차 노령화되면서 농사를 포기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갔다. 25여년 전 쯤에 이곳 전체에 경지정리가 이루어졌는데 이 때 무작정 땅을 밀어 고 르는 형태로 경지정리를 하면서 화전마을과 신월마을 서쪽 편에 있던 돌무더기(애 기당산) 혹은 애장터의 수많은 돌무더기를 불도저로 밀어 논에 같이 넣어버리는 바 람에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었다. 그 돌을 골라내는데 거의 몇 년이나 걸렸고 그나마도 일손이 부족하여 군부대에서 지원을 나와 돌을 골라내었다. 경지정리 이 후 벼농사가 제대로 수확이 되지않고 흙속에 박힌 돌에 손이나 발을 다치는 경우가 허다하여 원성이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후에는 물이 잘빠지고 수확 이 많아지고, 벼의 질이 좋아 그나마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현재는 30여호 정도만 농사를 짓는데 경지정리 후 기계화영농으로 그나마 가능한 것이다. 도로의 확장과 인근에 많은 공장이 들어서면서 농촌에 생활기반을 두고 출 퇴근을 하는 젊은이들이 다소 있어 노인들과 더불어 농사 경영이 가능하게 되었다. 아예 노인만 있는 경우는 처음 못자리와 논갈이와 써레질까지만 하면 모를 심고 수 확하는 일은 거의 남에게 맞기고 그에 대한 돈을 지불하여 농사일을 대폭 줄여서 농사를 짓고 있다. 이곳에는 다른 마을에 비하여 여자노인과 남자노인의 비율이 비 슷하여 남자노인의 수명이 비교적 긴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는 마을 회관이 신월 리 한 가운데에 있는데 이곳이 마을 노인들의 놀이터이기도 하고 사랑방 혹은 쉼터 의 역할을 한다. (3) 산본리의 칠월백중일(7월15일) 꼼베기 김해시 진례면 산본리에서는 인근의 관 동리나 신월리와 마찬가지로 7월 백중 때 호미씻기를 하는데, 이 백중놀이를 꼼 베기라고 한다. 7월 백중이 되면 더 이 상 풀이 자라지 않기 때문에 한여름 동 안 계속해왔던 김매기를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된다. 그러므로 김매 기를 하는데 필수적인 도구인 호미를 씻 고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사진 16. 산본리 당산나무 호미씻기라는 말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 런데 논에서 피나 방동사니 등의 잡초를 뽑는 것은 논매기인데 논을 매는 데는 호 미가 사용되지 않는다. 직접 손으로 피의 줄기를 잡고 뽑으며 방동사니는 논바닥에 있으므로 허리를 숙여 손으로 훑어 뽑아야 한다. 백중이 지나면 이러한 잡초들도 더 이상 자라지 않으므로 논매기도 끝이 난다. 그러므로 더 이상 손을 사용하지 않 - 29 -

www.duryu.or.kr 는다고 하여 망수라고 하는데 한자어로 더 이상 손을 쓰는 일을 끝내다는 망수( 忘 手 )인지 보름의 별자리를 나타내는 망수( 望 宿 )인지는 불확실하다. 이때 산본리 마을 사람들은 모두 당산나무 아래에 모여서 막걸리를 마련하고, 밀을 볶고, 콩도 볶아서 會 聚 를 한다. 논이 많고 머슴이 있는 넉넉한 집에서는 막걸리를 한 말도 내고 두 말도 내며, 그렇지 않은 집에서는 밀이나 콩 등 안주가 될 만한 것을 내어서 자리 를 마련한다. 이 자리에서 풍물을 치며 놀기도 하고, 머슴들이나 마을의 건장한 젊 은이들이 씨름도 하고, 들돌을 들며 힘자랑을 하기도 한다. 이 꼼베기 행사가 산본 리에서는 가장 큰 행사이다. 3. 지명분야 1) 김해의 지명변천 김해( 金 海 )라는 지명은 김해 이외에도 다양한 이름이 있다. 그러나 그 이름만을 거 론할 뿐 그 이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언급하는 경우는 없다. 김해( 金 海 )라는 지명 에 표기된 쇠 금( 金 )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금관가야의 금( 金 )이다. 또한 금령이라 고 기록하고 김령이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금관도 김관으로 읽힐 수 있다 는 결론이 나온다. 즉 금( 金 )이 김( 金 )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인데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발음상의 문제만으로 보면 경상도 지방말로 금( 金 ) 발음은 검 이다. 검은 검 다. 까맣다. 가마득하다. 등에서 검이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그런데 검은 감으로도 발음이 변형되는데 검다가 까맣다로 발음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우리말 지명에 가물창(창녕 적포의 玄 倉 ), 가막골(까막골=가마골= 釜 谷 ), 까막섬, 감골 감나무골(창 원 팔용 부곡의 감나무먼당) 등이 있는데 이때 지명에 사용되는'감'은 옛말 '감'에서 온 말로, '신성하고 높다. 으뜸', 또는 '크다'의 뜻이다. '감'은 검, 곰, 가마, 가막, 까 막'으로도 변이되기도 한다. 여기서 감, 검, 곰, 가마 등은 지모신을 뜻하는 우리말 - (감-가마)의 변이형이다. 그런데 고대에는 우리말을 우리글로 기록할 수 없 었다. 그러므로 한자를 빌려서 우리말을 표기하였는데 한자의 음이나 훈을 따서 표 기하였다. 이러한 표기법을 차자표기( 借 字 表 記 )라고 한다. 지모신을 뜻하는,, 곰, 검 등을 한자로 표기할 때 사용되는 한자는 감 시( 柿 ) 가마 부( 釜 ), 곰 웅 ( 熊 ), 거북 구( 龜 =검) 등이다. 이 중에서 김해와 관련되는 지명에 사용된 한자는 구 ( 龜 )이다. 구산동( 龜 山 洞 ), 구지봉( 龜 旨 峰 )이 그것이다. 여기서 구산과 구지는 같은 말이다. 구산( 龜 山 )은 검산으로 읽히는데 거북 구( 龜 )의 고어발음은 검이기 때문이 다. 구지( 龜 旨 )에서 구는 검이며 맛 지( 旨 )는 봉우리나 언덕을 표기하는 우리말 맏 을 한자로 차자표기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지와 구산은 같은 말이다. 구지가 첫구절의 노랫말을 풀면 검하 검하 머리를 내어라 라고 읽을 수 있다. 이 때 검으로 불리는 구( 龜 )는 주술의 대상으로서의 검 곧 신이다. 구지봉 즉 검산, 검봉, 지모신에서 우두머리가 태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우두머리 즉 머리를 한자로 - 30 -

김해 진례면 산본리 685외 2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표기한 것이 수로( 首 露 )이다. 그러므로 우두머리를 부르는 한자말 수로는 일반명사 이다. 일반명사로는 그들의 우두머리를 다른 우두머리와 구분할 수 없다. 이를 구분 하기 위하여 그 사람이 태어난 장소를 이름에 같이 사용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택호를 사용하여 출생지를 표시하는 것과 같다. 수로는 검산에서 태어났다. 그러므 로 그 이름에 검을 붙이는 것은 당연하다. 검을 발음나는대로 한자로 표기하면서 검( 金 )이 되고 검( 金 )이 쇠금( 金 )과는 달리 지모신을 뜻하는 검( 金 )임을 뚜렷하게 구 분하고 또한 노력절감현상을 위한 음운탈락으로 김( 金 )으로 발음하게 된 것이다. 그 러므로 금령( 金 寧 )이 김녕으로 읽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금해 ( 金 海 )하고 기록해 놓고 김해( 金 海 )로 읽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이다. 한편 김수로라는 이름과 유사하게 일반명사형의 이름이 먼저 만들어진 다음에 그 뜻을 강조하거나 그 출신지를 강조하는 말을 앞에 붙인 경우가 박혁거세이다. 박혁 거세( 朴 赫 居 世 )의 원래이름은 혁거세이다. 혁( 赫 )은 밝다 이다. 거세( 居 世 )는 거서 간 즉 무당이나 왕을 지칭하는 고어이다. 그러므로 밝은 왕이 그 의미이다. 세상의 이치나 신을 모시는 일이나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 밝은 왕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일반명사이다. 그런데 혁거세( 赫 居 世 )라는 말이 사람들에게서 다른 사람과 구분하지 못하는 일반명사가 되면서 그를 다른 사람과 구분하기 위하여 밝다는 의미를 가진 다른 한자를 붙여서 그 뜻을 강조한 것이 박( 朴 )이다. 김해도호부의 연혁 변천에 대해서는 세종실록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 김해도호 부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김해도호부( 金 海 都 護 府 )는 본디 가락국( 駕 洛 國 )인데, 후한( 後 漢 ) 광무 황제( 光 武 皇 帝 ) 건무( 建 武 ) 18년 임인에 가락( 駕 洛 )의 장( 長 ) 아도간( 我 刀 干 ), 여도간( 汝 刀 干 ), 피도간( 彼 刀 干 ) 등 아홉 사람이 그 백성을 거느리고 계음( 禊 飮 )) 하다가 구지봉( 龜 旨 峯 )을 바라보니, 이상한 성기( 聲 氣 )가 있기에 가서 보았더니, 금합( 金 盒 )이 하늘에 서 내려왔는데, 그 속에 둥글기가 일륜( 日 輪 )과 같은 금빛 알이 있었다. 아홉 사람 이 절을 하고 신령스럽게 여겨 아도간의 집에 봉치( 奉 置 )하고 이튿날 아홉 사람이 함께 모여서 합( 盒 )을 열고 보니, 한 아이가 껍데기를 벗고 나왔는데 나이는 열다섯 살 가량 될 만하고, 용모가 매우 잘 났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모두 배하( 拜 賀 )의 예 ( 禮 )를 다하였다. 아이가 날마다 크고 뛰어나서 10여일이 지나매 신장( 身 長 )이 9척 이었다. 그달 보름날에 아홉 사람이 마침내 받들어서 임금을 삼으니, 바로 수로왕 ( 首 露 王 )이다. 나라 이름을 가락( 駕 洛 ), 또는 가야( 伽 倻 )로 일컫다가 뒤에 금관국( 金 官 國 )으로 고쳤다. 그 나라는 동쪽으로 황산강( 黃 山 江 )에 이르고, 동북쪽으로 가야 산( 伽 倻 山 )에 이르며, 서남쪽은 큰 바다에 닿았고, 서북쪽은 지리산을 경계로 하였 다. 즉위( 卽 位 )한 지 1백 58년, 후한( 後 漢 ) 헌제( 獻 帝 ) 건안( 建 安 ) 4년 기묘에 죽고, 9대손 구해왕( 仇 亥 王 )에 이르러, 양( 梁 ) 무제( 武 帝 ) 중대통( 中 大 通 ) 4년 임자에 국탕 ( 國 帑 )과 보물( 寶 物 )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였다. 수로왕으로부터 구충( 仇 衝 )이 나 라를 두기까지 무릇 4백 91년이다. 신라 법흥왕( 法 興 王 )이 이미 구해( 仇 亥 )의 항복 을 받아 객례( 客 禮 )로써 대접하고, 그 나라를 식읍( 食 邑 )으로 삼고, 이름을 금관군 - 31 -

www.duryu.or.kr ( 金 官 郡 )으로 하였는데, 문무왕( 文 武 王 )이 비로소 금관 소경( 金 官 小 京 )을 설치하고, 경덕왕( 景 德 王 )이 김해 소경( 金 海 小 京 )으로 고쳤으며, 고려 태조 23년 경자에 김해 부( 金 海 府 )로 고쳤다. 뒤에 낮추어서 임해현( 臨 海 縣 )으로 하였다가, 또 올려서 군 ( 郡 )으로 하였고, 성종( 成 宗 ) 14년 을미에 금주 안동 도호부( 金 州 安 東 都 護 府 )로 고 치고, 현종( 顯 宗 ) 3년 임자에 낮추어서 금주 방어사( 金 州 防 禦 使 )로 삼았다. 원종( 元 宗 ) 11년 경오에 방어사( 防 禦 使 ) 김훤( 金 暄 )이 밀성( 密 城 )의 난( 亂 )을 평정하고, 또 삼별초( 三 別 抄 )를 막아 공( 功 )이 있는 까닭으로, 올려서 금녕 도호부( 金 寧 都 護 府 )로 하고, 인해 김훤을 발탁하여 도호( 都 護 )로 삼아 진수( 鎭 守 )하게 하였다. 충렬왕( 忠 烈 王 ) 34년 무신에 금주목( 金 州 牧 )으로 올렸다가, 충선왕( 忠 宣 王 ) 2년 경술에 여러 목 ( 牧 )을 없앰에 따라 다시 김해부로 하였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가, 태종 13년 계사에 예( 例 )에 의하여 도호부( 都 護 府 )로 고쳤다.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여타 자료들을 참고하여 김해의 지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 은 지명의 변천을 볼 수 있다. 수로왕 때 가락국( 駕 洛 國 ) 혹은 가야( 伽 倻 )라고 하였다. 신라 법흥왕이 금관군( 金 官 郡 )이라 하였다. 680년 금관소경( 金 官 小 京 )을 설치하였다. 756년 김해소경( 金 海 小 京 )으로 개칭하여 양주( 良 州, 현 양산시)에 속했다. 940년 김해부( 金 海 府 )로 강등되었다. 임해현( 臨 海 縣 )으로 강등되었다가 임해군( 臨 海 郡 )으로 승격하였다. 971년 다시 김해부로 올렸다. 995년 영동도( 嶺 東 道 ) 김해안동도호부( 金 海 安 東 都 護 府 )로 개칭하였다. 1012년 김해군방어사로 강등되었다. 1270년 금녕도호부( 金 寧 都 護 府 )로 승격하였다. 1293년 금녕현( 金 寧 縣 )으로 강등되었다. 1308년 금주목( 金 州 牧 )으로 승격하였다. 1310년 김해부로 강등되었다. 1413년 김해도호부( 金 海 都 護 府 )로 승격하였다. 그 뒤 1895년(조선 고종 32년) 음력 윤5월 1일 진주부 김해군( 金 海 郡 )으로 개편되 었다. 1896년(건양 원년) 8월 4일 경상남도 김해군으로 개편되었다. 2) 진례면 산본리 주변지명 (1) 진례면( 進 禮 面 ) 진례면에 대한 기록은 통일 신라말기에 김인광( 金 仁 匡 )이 진례성 제군사가 되어 이 곳을 지켰다고 한다. 즉 김인곤( 金 仁 滾 924)이 기록한 < 眞 鏡 大 師 碑 >에 처음 등장하 - 32 -

김해 진례면 산본리 685외 2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는데 進 禮 城 諸 軍 事 金 律 熙 라는 대목에서 이다. 이후 進 禮 城 에 관한 기록들이 여 러 지리지에 등장한다. 진례의 進 은 훈이 가다의 갈- 이 있으므로 남쪽을 나타내는 우리말 의 차자표기로 보인다. 禮 는 훈이 뎔, 절- 이므로 들판의 의미인 들 덜 의 차자표기로 추정된다. 이러한 기준으로 보면 진례는 남쪽들에 위치한 마 을이라는 의미이다. 경상도지리지 (1469년)에 부서 진례촌( 府 西 進 禮 村 )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의 청천은 청천면으로서 속칭 청내라 하였으며 이는 열두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청천리에 모여 북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열두 청내라 불렀다. 1894년 갑오경장 때에는 청천,시례,송정,초전,신안을 중심으로 진례면,산본리,신월, 송현,담안,고모,고령,관동,성법,개동을 율리면으로 나누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진영의 의전리와 죽곡리 일부를 흡수하여 진례면이 되었다. 그 후(1942년) 진영면이 읍으로 승격하기 위해 죽곡리와 의전리는 다시 진영읍으로 편입되었다. (2) 산본리( 山 本 里 ) 일대 지명 산본마을 : 화전과 냉정사이의 산골에 위치한 마을이 山 本 마을이다. 본동이라고도 한다. 산본의 본마을이 이곳이고 나머지 화전과 신안 등은 행정구역상 산본리에 포 함되기 때문이다. 그 원래의 의미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마을 사람들은 산자락 아 래 발치에 있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라고 한다. 용지봉 : 관동마을 뒤쪽 산의 남서쪽 봉우리를 말한다. 원래 이름은 용제봉( 龍 祭 峯 )이었다. 산 정상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을 근거로 마을사람들은 용에게 제 사를 드린 봉우리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또 용제봉( 龍 蹄 峯 )이라고도 기록하 는데 이는 잘못표기된 것으로 보인다. 용지봉( 龍 池 峯 ) 혹은 용지봉( 龍 旨 峯 )이라고도 하는데 제 가 지 로 발음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못을 의미하는 池 와 관련 되는 내용은 없다. 다만 龍 旨 峯 으로 표기할 때 龍 은 우리말, 의 차자표기로 머리 즉 꼭대기라는 말로 추정된다. 旨 는 훈이 맛이다. 맏, 맛 등은 산이나 언덕을 지칭하는 우리말이다. 김해의 구지( 龜 旨 )가 이와 동일한 경우이다. 그러므로 용지봉 은 중심 혹은 머리가 되는 산의 봉우리라는 의미이다. 旨 와 峯 은 같은 말의 중첩이 다. 이곳을 넘어서면 창원으로 연결된다. 옛사람들은 이곳으로 걸어서 창원으로 다 녔다고 한다. 대암산 : 大 岩 山 은 용지봉이 있는 산이다. 大 岩 은 큰 바위라는 의미이다. 산 정상 부에 농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창원과 진례를 갈라주는 큰 능선이다. 소매골 : 용지봉 아래의 골짜기이다.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소를 먹이던 골 짜기라고 한다. 큰골 : 소매골 동쪽 다음 골짜기이다. 골짜기가 크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작은골 : 큰골 동쪽 다음 골짜기이다. 큰골과 상대적으로 작은 골짜기이기 때문에 - 33 -

www.duryu.or.kr 붙여진 지명이다. 물방골 : 산본마을 뒤의 골짜기이다. 마을사람들은 물방아골 이라고도 한다. 마을 바로 옆에 물레방아가 있었기 때문에 물방아골이라고 한다는 말도 있고 골짜기에 물이 많아서 산에서 이곳으로 물이 내려오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장고개 : 산본에서 냉정으로 넘어가는 골짜기이다. 냉정에서 학동으로 넘어가는 골짜기가 짧은데 비하여 고갯길이 길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 냉정 : 찬새미이다. 웃냉정과 아랫냉정이 있다. 진례면 산본리와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마을 회관 뒤와 중간마을 뒤에 찬새미가 남아있다. 웃냉정이 가장 서쪽이 다. 냉정의 원래 자리는 현재 남해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철거되었고 현재 냉정은 이주한 자리이다. 냉정고개 : 냉정에서 산본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냉정골 냉정에서 학동으로 넘어가는 골짜기를 말한다. 단고개라고도 한다. 장고개가 긴 고갯길이라면 단고개는 가파르지만 짧은 고개이다. 굴방아뜰 : 냉정마을 마을회관 뒤편 과수원 위에 굴이 뚫린 바위가 있어서 붙여 진 지명이다. 진골 : 마을 서남쪽 골짜기로 전투경찰 막사가 있는 곳이다. 긴 골짜기라는 의미 이다. 장고개의 가장 정상부이기도 하다. 대까바이 : 공식명칭은 매봉산이다. 냉정마을의 북쪽편 산 정상부와 그 일대이다. 의미는 알 수 없다. 야시골 : 냉정마을에서 약간 서쪽편의 골이다. 야시는 여우의 경상도 방언이다. 野 豺 즉 들에 사는 개모양의 짐승이라는 의미이다. 여우가 자주 출몰하는 골짜기라 고 하나 불분명하다. 청재골 : 야시골의 서쪽골이다. 관동마을 : 官 洞 이다. 옛날 驛 館 이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관동을 館 洞 으로도 표 기하는 것으로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생법역( 省 法 驛 )이 관동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 는 것으로 보아 이 역의 館 이 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잿등 : 관동마을과 산본마을 사이에 길게 남북으로 뻗은 구릉이다. 잿등은 재등이 변형된 것이다. 재는 고개를 의미하는 우리말이다. 즉 문경새재 등이 그것이다. 등 은 등성이 즉 산등성이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관동과 산본으로 오가는 고갯길이 있 는 등성이라는 의미이다. 갈모산 : 갈모산( 葛 牟 山 )은 관동마을 앞 남해고속도로가 동서로 관통하는 산을 말 한다. 갈미산이라고도 한다. 갈메로 보인다. 갈은 남쪽을 나타내는 우리말, 의 뜻이고 모는 미의 변형이며 메의 변형이다. 미, 메는 산을 지칭하는 우리말이다. 즉 남쪽 산이라는 말이다. 화전에 가까운 산이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이곳에 많은 고분들이 있다고 한다. 장등산 : 長 嶝 山 갈모산에서 이어져서 학성마을 남동쪽으로 뻗은 등성이를 말한다. 긴 등성이 산이라는 의미이다. 嶝 과 山 은 같은 말이 중첩된 것이다. - 34 -

김해 진례면 산본리 685외 2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Ⅳ. 종합고찰 및 조사단 의견 1. 종합고찰 調 査 面 積 : 617m2 調 査 期 間 : 2016년 04월 04일 2016년 04월 11일(6일간) 調 査 依 賴 機 關 : 민재영(님) 역사ㆍ고고 분야 - 총 현황(면적단위 : m2) 조사기관 유적 번호 유적이름 행정구역 (주소) 면적(m2) 유적성격 조사기관 의견 비고 두류문화 연구원 1 산본리 산본 유물산포지 김해시 진례면 산본리 685번지 617m2 유물 산포지 표본조사 2. 조사단 의견 경남 김해시 진례면 산본리 685번지 외 2필지(617m2)에 대한 문화재 지표조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조사구역은 김해시 진례면 산본리 685번지외 2필지이며, 고려시대 이래의 관도 를 덮어쓰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1042번 지방도의 북쪽에 연접해 있다. 2) 지형적으로는 배후 산지에서 공급된 퇴적물로 구성된 선상지성 충적지이며, 조 사 직전까지 논으로 경작되던 곳이다. 조사당시 외부에서 유입된 화강암풍화암반토 로 복토되어 있어 원래의 지표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 및 이와 연접한 경작지 등을 면밀하게 조사하여 유적의 분포여부를 판단하였다. 3) 조사구역 중 복토에 의해 원지표면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 다. 그러나 제한된 범위에서 와편이 발견되었고, 당 조사구역과 연접한 논에서도 도 기편과 와편, 백자편 등이 산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4) 또한 당 조사구역의 서북쪽으로 약 250m 떨어진 곳에 부전-마산간 복선전철 건설에 따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삼국시대 이래의 주거지 구상유구 수혈 주혈 등으로 구성된 취락 유적이 조사 중이다. 5) 당 조사구역과 현재 발굴조사가 진행 중인 곳은 다소 거리가 있지만, 선상지라 - 35 -

www.duryu.or.kr 는 입지장소가 동일하다는 점은 당 조사구역에서도 발굴조사 구역과 같은 토지이용 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매우 높게 해주며, 지표조사에서 발견된 유물은 그러한 가 능성을 더욱 높게 해주는 물적 증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사구역에 대해서는 표 본조사를 실시하여 유적의 존재여부를 확인한 후 그 결과에 따라 보존방안을 수립 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6) 단, 이번에 수행한 문화재지표조사는 육안관찰에 의하여 매장문화재의 분포여부 를 판단할 수밖에 없는 조사 상의 한계가 있으므로 사업의 시행 중에 위에 명시하 지 않은 문화재가 발견될 때에는 반드시 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의거 이를 관련기관에 신고하여 처리해야 한다. - 36 -

김해 진례면 산본리 685외 2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사업 내용 지표 조사 조사 결과 문화재 지표조사 결과서 사 업 명 김해 진례면 산본리 685외 2필지 국비 지원 문화재지표조사 사업기간 2016, 04~ 사업지역 ( 621 - )경남 김해시 진례면 산본리 685 일대 전체사업면적 617m2 면 적 지표조사면적 617m2 사업목적 주택건립 사업시행자 기관명 민재영 연락처 010-4622-9357 고고,역사분야 책임조사원 최헌섭 조사원 이하 임지승 민속분야 책임조사원 박태성 조사원 이하 조사기관 수중분야 책임조사원 조사원 이하 고건축분야 책임조사원 조사원 이하 자연문화재 책임조사원 조사원 이하 조사기간 사전조사 1일, 현장조사 1일, 정리분석 1일, 보고서 작성 2일(총 5일) 조사비용 *계약금액기 고고 역사 1,650,000원 민속 분야 원 수중 분야 준 원 고건 축 원 지정문화재 산본리유물산포지 1(약 50m이격) 산본리유물산포지2(약 200m이격) 주변문화재 조사결과 비지정 문화재 중리유물산포지(약 100m 이격), 양동리유물산포지2(약 400m 이격), 김해진례-주촌간도로공사구간내 유적(약 400m 이격), 경전선삼랑 진-진주간송변전설비신축부지문화재지표조사구역(약 200m이격), 사업부지내 문화재 조사결과 유적 있음 유적 없음 지상문화재 기존 문화유적분포지도 등에 표기된 유적일 경우 신규 해당사항 없음 매장문화재 기존 문화유적분포지도 등에 표기된 유적일 경우 신규 산본리 산본유물산포지 건축물 기존 문화유적분포지도 등에 표기된 유적일 경우 신규 해당사항 없음 민속자료 기존 문화유적분포지도 등에 표기된 유적일 경우 신규 해당사항 없음 조사구역의 지형은 선상지성 충적지이다. 현재 조사구역 대부분은 외부에서 유 조사기관 종합 의견 입된 화강암풍화암반토로 복토되어 있으나 제한된 지표에서 와편이 발견되었고, 당 조사구역과 연접한 논에도 도기편과 와편, 백자편 등이 산포하고 있다. 현재 당 조사구역의 서북쪽으로 약 250m 떨어진 발굴조사 구역에서 청동기시 대, 삼국시대 이래의 주거지 구상유구 수혈 주혈 등으로 구성된 취락 유적이 조 사 중이다. 당 조사구역과 발굴구역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선상지라는 입지장소가 동일 하다는 점은 당 조사구역에서도 발굴조사 구역처럼 토지이용이 이루어졌을 가 능성을 높게 해주며, 지표조사에서 발견된 유물은 그러한 가능성을 더욱 높게 해주는 물적 증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사구역에 대해서는 표본조사를 실시 하여 유적의 존재여부를 확인한 후 그 결과에 따라 보존방안을 수립해야 할 것 으로 판단된다. 지표조사의 방법 및 절차 등에 관한 규정 별표 3에 따라 문화재 지표조사 결과서를 제 출합니다. 2016 년 04월 11일 문 화 재 청 장 귀 하 기관명 : 두 류 문 화 연 구 원 (인) - 37 -

www.duryu.or.kr 문화재 지표조사 결과표 1 연번 2문화 재명 3 소재지 4 면적 5 시대 6 종류 7유적 구분 기존 신규 8의견 구분 조사의견 9조사 면적 10사유 11 비고 김해시 1 산본리 산본 유물산 포지 진례면 산본리 685번 지 617 m2 삼국 조선 유물 산포지 표본 조사 617m2 주택 건축 일대 - 38 -

김해 진례면 산본리 685외 2필지 국비지원 문화재지표조사 참고문헌 三 國 志 卷 三 十 魏 書 三 十 烏 丸 鮮 卑 東 夷 傳 三 十 倭 人 傳 三 國 史 記 卷 第 34 雜 志 第 3 地 理 1 金 海 小 京 三 國 遺 事 紀 異 第 二 駕 洛 國 記 高 麗 史 志 卷 第 10 地 理 2 金 州 慶 尙 道 地 理 志 金 海 世 宗 實 錄 地 理 志 慶 尙 道 晉 州 牧 金 海 都 護 府 宣 祖 實 錄 卷 二 百 三 十 九 年 六 月 二 十 七 日 慶 尙 道 續 撰 地 理 志 金 海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第 32 卷 金 海 都 護 府 擇 里 志 八 道 總 論 慶 尙 道 輿 地 圖 書 慶 尙 道 金 海 鎭 金 海 都 護 府 海 東 地 圖 金 海 練 藜 室 記 述 別 集 卷 之 十 六 地 理 典 故 總 地 理 增 補 文 獻 備 考 卷 二 十 七 輿 地 考 十 五 關 防 三 慶 尙 道 邑 誌 金 海 府 邑 誌 大 東 輿 地 圖 18-1, 19-1. 大 東 地 志 卷 十 慶 尙 道 八 邑 金 海 三 上 次 男, 1961, 滿 鮮 原 始 墳 墓 の 硏 究, 吉 川 弘 文 館. 국립지질조사소, 1964, 한국지질도 -김해도폭(SHEET 6919-Ⅰ)-. 金 龍 基 鄭 澄 元, 1965, 農 所 里 貝 塚 의 發 掘 調 査 報 告, 釜 山 大 學 校 博 物 館. 朴 敬 源, 1970, 金 海 地 方 出 土 의 靑 銅 遺 物, 考 古 美 術 106 號. 岡 內 三 眞, 1973, 金 海 良 洞 里 出 土 遺 物 에 對 하여, 史 林 56 卷 3 號. 崔 夢 龍, 1976, 西 南 區 貝 塚 發 掘 報 告, 馬 山 外 洞 城 山 貝 塚 發 掘 調 査 報 告, 文 化 公 報 部 文 化 財 管 理 局. 文 化 公 報 部 文 化 財 管 理 局, 1977, 文 化 遺 蹟 總 覽 中 卷. 建 設 部 國 立 地 理 院, 1980, 韓 國 地 誌. 李 彦 宰, 1980, 水 佳 里 貝 塚 의 軟 體 動 物 化 石 群 集 에 관한 硏 究, 釜 山 大 學 校 大 學 院 理 學 碩 士 學 位 論 文. 鄭 澄 元 林 孝 澤 申 敬 澈, 1981, 金 海 水 佳 里 貝 塚 Ⅰ. 한글학회, 1981, 한국지명총람 8(경남편 Ⅰ). 東 亞 大 學 校 博 物 館, 1981, 金 海 府 院 洞 遺 蹟. 金 海 文 化 院, 1984, 國 譯 金 海 邑 誌 地 方 編 Ⅲ( 釜 山, 大 邱, 慶 北, 慶 南 ). 尹 銑 李 彦 宰, 1985, 水 佳 里 貝 塚 의 軟 體 動 物 化 石 群 集 과 海 水 面 變 動, 한국고생 물학회지 1. 金 海 文 化 院, 1986, 金 海 文 化 財. - 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