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동방정책”과 한국 통일: 유사점과 차이점 및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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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동방정책 과한국통일 : 유사점과차이점및교훈 * 한스기스만, 함부르크대학교평화안보연구소 IFSH 서론 전후독일과한국간에는일견상당한유사점들이있다. 두경우모두완고한정치체제와이념이다른두국가로의분단이야기되었으며서로다른경제체제방식을도입하였다. 동독 ( 독일민주공화국, GDR) 의경우와마찬가지로, 북한 ( 조선민주인민공화국, DPRK) 은민주주의의결여, 사상주입강요, 군사력에의의존성및통제경제체제에입각해왔다. 동독과북한모두사회주의블록의동맹국이었고, 무대로하는지역은달랐지만소련의위대한세계적전략 (the Soviet Grand Global Strategy) 에중요한기능을담당했다. 서독과남한이라는 자본주의상대국 의존재로인해공산주의지도자들에게두나라모두정치적으로중요성을가지며공산주의가자본주의보다 고유한우월성 (endemic superiority) 을지님을입증하는방편이되었다. 다른소련동맹국들과비교해볼때, 동독과북한은특수한지정학적위치와민족배경으로인해군사적, 경제적직접지원을훨씬더많이누렸다. 그렇기때문에소련제국이무너지고체제의안정을가능케한외적지원이고갈되자이두나라의경제및사회체제가와해되었다고할수있다. 하지만, 동독이개별국가로의존재력을상실하게되었던것과는대조적으로현재의북한은건재하고있다. 물론독일을방문한이유는서로달랐지만, 1990 년이래많은남과북의대표단들이독일을시찰하며 `독일의경험 ' 을배우고자했다. 여러가지유사점들에도불구하고, 통독이한국에있어서도통일모델이라고하는주장은사실상환상 ( myth ) 이라고주장할수있다 1. 그러나독일의경험으로부터유용한교훈을끌어 * 2001 년 5 월 17 일인하대학교와프리드리히에버트재단이공동으로개최한 평화공존을위한대북 포용정책의성과와전망 국제학술대회에서발표한논문. 1 Hans J. Giessmann 의논문 ` 독일통일모델을 ` 복제 ' 하려는환상과한국 ' 참조, Korea and World Affairs, vol. 23 no. 2, 1999, pp. 225-240.

낼수있다는사실이무시되는것은아니다. 특히통독전기간과, 60 년대말빌리브란트 (Willy Brandt) 와발터쉴 (Walter Scheel) 의사회-자유연합하에서추진된소위 동방정책 (Ostpolitik) 은도움이되는교훈이될것이다. 1. 독일의신 동방정책 (New Ostpolitik ) 베를린장벽이세워지고쿠바미사일위기가정점에이른바로직후에, 당시베를린시장이던빌리브란트의최측근이던에곤바르 (Egon Bahr) 는 1963 년바바리아의투찡 (Tutzing) 시에서한연설 2 을통해, `국가 ( 독일 ) 문제 (national question)' 에대한전후서방의정책을심도있게변화시킬것과동구국가들과의협력을촉구하였다. 1949 년이후아데나워수상과집권기독민주당의정책은주로다음의세가지주요목표를특징으로하였는데, 대서양 ( 미-유럽간 ) 안보, ( 서 ) 유럽통합, ( 독일 ) 통일이그것이었다. 아데나워는단지강경한전략적결단과경제적우위를보여주게되면조만간소련은부실한정치, 사회, 경제체제로되어있는 `골칫덩이 ' 동독을떨쳐버리고자노력할것이라고기대했다. 이같은희망은 1953 년 6 월동독에서발생한노동자봉기이후더욱힘을얻었다. 아데나워에게있어이기간중가능성있는유일한통일방안은합병이었다. 이맥락에서주목해야할것은, 그같은기대가나올수있었던것은베를린의울브리히트 (Ulbricht) 정권에도일부기인한다는점이다. 동독의울브리히트정권은적어도 1959 년까지물론 `독일의사회주의화 ' 라는전제하에평화통일의가능성을완전히배제한것은아니었기때문이다. 하지만통일가능성에대한울브리히트의긍정적인발언은액면그대로받아들여져서는안되었을것이고, 도리어동독내여론을달래려는의도를가지고있었다고볼수있다. 그런데 1950 년대말에는상황이다소달라졌다. 소련은서독의군비강화를피하기위한협상수단으로몇차례동독을이용하려는시도를했지만실패하고나서, 독일의중립화에입각한통일논의나과도단계로서의연방 (confederation) 에대한일절의논의를일축하였다. 그대신, 소련은동독을독일에위치한 `사회주의적군사요새 ' 라고간주하기시작하였다. 직접적으로장벽을세우라는명령을내린것은아니었지만, 소련이동독에 `좀더효과적인 ' 국경체제를구축할것을촉구했으며, 독일인들이서독으로탈출하는것을막고, 동독내소련기지방첩을위해, 그리고주권국가이나소련에의존하는동독으로강화하는것이목적이었다. 이제소련과동독당국모두 `평화공존 ' 이념에입각한 `2 국가이론 ' 을주창하게되었다. 더욱이, 미 소간관계악화후독일과특히베를린은소련의유럽교두보가되었다. 서독이동독을 `존재하지않는 ' 국가, 정통성없는체제로규정하는방식을계속하자, 소련은더욱비타협적이되었다. 서독정부는그와같은자신의입장을우방들이지지할것으로가정했으나이는착각이었고, 베를린위기동안분명해진사실은서독의동맹국들은독일통일을위해자국 ( 미, 영, 불 ) 군인을희생할마음이없다는것이었다. 도리어미국과소련은쿠바위기및베를린사태동안나타난대립의 2 Egon Bahr, Sicherheit für und vor Deutschland, Munich: Carl Hanser, 1991, pp. 11-17 을참조.

상호파멸잠재력을인정하자, 핵심적인상호이해영역을규정하고서로더긴밀히협조하기시작한것이다. 서독의통일주장은소수독일인들에게외에는설득력을잃게되었다. 베를린주민 ( 에곤바르 ) 이서독의수많은정치인들보다먼저더정확하게소련이동독을자신의대서방군사경계선으로간주하고있음을이해했다는것은아마별로놀라운일이아니었다. 이리하여독일의재통일은더이상단순히독일인들의 `국가위업 ' 이아니라전반적인유럽의안보문제가된것이었다. 소련의지원이없으면통일은단지소망에그칠뿐임을바르는확실히이해했으며, 동독을소련의마수에서건져내려는일체의시도는실패할수밖에없음을깨닫고있었다. 더욱이, 그러한시도는소련이가혹한대응을취함으로써동독의고립을더욱심화시킬수도있으니동서독양국국민간의틈이더욱벌어질수가있었다. 또한, 대립정책은동독인들의사회경제적생활환경과인도적차원의환경을더욱악화시킬것이라고예측되었다. 하지만그런상황이라도통일가능성이더높아질것같지는않았다. 바르는정치, 사회, 경제원조를향한광범위한협력패턴을도입하는것이소련과동독이서방세계로부터스스로를고립시키려는경향을완화할것이라고결론지었다. 바르의유명한 화해를통한변화 (Change through Rapprochement) 는간단하나정곡을찌른사고에기초한것으로, 기존상황을인정하는것은협력의건전한기반을조성할수있으며이를통해이상황이더나은방향으로변화할수있다는내용이다. 물론 1969 년브란트가집권하게되자, 이개념을이행하는것은줄타기를하는것과다름없는모험임이판명되었다. 브란트수상의 신동방정책 은서독의보수여론으로부터강력한압력을받게되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브란트나바르, 신동방정책의지지자들은통일이란궁극적인목표를포기할의사가없었다. 목표에는기본적인차이가없었고, 다만달성방법과시간범위상의차이가있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 3 의핵심업적은, 한전문가가지적했듯이, 불가피한것의인정 (acceptance of the inevitable) 4 에있다. 그에따르면, 서독은 동독인정을묵인하였으며, 그대가로서베를린의서독과의유대에대한계약상의보장을받았고동서독간통신과여행의제한된기회를얻어냈다. 더욱중요한것은, 서독이국제적으로새로운재량권을확보한것이다. 즉, 소련과의갈등이나제 3 국들에의한협박가능성을피할수있었고, 심지어통일지지를받기위해계속해서서방에의존해야하는상황도피할수있었다. 5 한편, 대부분의동독지도자들은 `관계정상화 ' 로자신들의정권을국제적으로인정받을수있기를바랬다. 결국제 2 의독일국가라는존재의정당성을제공한것은본질적으로그체제가사회주의라는사실이었다. 그런데역시많은공산당관리들은동독인들이자유와 3 Peter Bender, Neue Ostpolitik. Vom Mauerbau bis zum Berliner Vertrag, Muenchen: DTV, 1986 참조. 4 Wilhelm Bleek, 냉전에서부터동방정책까지 : 단독적아이덴티티를찾는두독일 : World Politics, vol. 19, no. 1, 1976. pp. 114-129, 여기서는 : p. 119/120. 5 Ibid.

민주주의의이상에물들기시작하지않을까우려하였다. 즉, 사회주의체제의탈정통성화 (delegitimization) 가서서히진행되는것을걱정한것이다. 그러나동서독은 1960 년대말정치변화를겪게되었고이는양자관계에새로운접근을야기하였다. 서독의사민당 (SPD) 이집권하게된때는동독의울브리히트당서기의사회주의로의독일통일이라는비전이심각한경제난으로무너지기시작할때였다. 그의후임호네커는독일통일에대한생각을버림으로써소련당국에서환영받았다. 베를린사태이후독일통일논의는소련에게있어상당한의혹의대상이되어왔기때문이다. 한편호네커는국제및국내문제에서재량권을확대하는것에관심이있었고이같은목적을달성하는데에는소련당국으로부터좀더독립적이어야할필요가있었다. 새로운당지도부는국민들에게좀더많은사회적혜택을제공함으로써사회주의체제의정통성을강화하는것에특히신경을썼다. 하지만처음부터분명했던것은 70 년대에시작된수많은 `사회적프로그램 ' 에자금을공급하는것은동독경제의능력에지나친무리였다. 이같은문제에직면하자호네커는 1 석 2 조를해낼수있으리라고믿었는데, 서독의도움을받아경제체제를강화시키고, 이로써정권의정통성도강화한다는것이었다. 동서독양정부에의한양국의공식상호인정은국제관계에서양측에게좀더독자적인행동을할수있는자유를주었다. 독일이유럽안보를해치는 돌발행위 (sonderweg) 를모색하지않을것임을동서방동맹들에게분명하게알림으로써, 동서독관계개선을통해서구통합과정과소비에트블록내에서양국역할의신뢰성에대해우려가야기되는것을피할수있었다. 일부전문가들은기존의현상유지를공식인정한것이동서독이각각의제도적기구들안에서영향력을강화시켰다고주장했다. 하지만동독의경우는더욱더외국의경제및재정지원에의존적이되었다. 6 2. 신동방정책 이끼친영향과결과는무엇이었나? 우선단기적으로, 그리고아마도가장중요한것은, 국가간관계 `정상화 ' 는유럽내안정된협력의틀이발전하는데기여하였으며, 이는 1975 년 CSCE 설립과 MBFR, 나중에는 CFE 등일련의다자간협상회의를통해공고히되었다. 사실상, CSCE 설립과정을가능케한것은신동방정책이었다. 더욱이, 독일을둘러싼긴장완화는미소관계가좀더건설적으로된데에기여했을수도있다. 미 소는 1972 년최초로전략적무기수를제한하는협정과 ABM 협약을체결하였다. 또중요한것으로는, 1970 년소련과서독간의기본조약은쌍무관계뿐만아니라 -1971 년베를린협정과관련하여- 동서독간및독일내부관계를더욱긴밀하게하는데상호허용가능한틀을제공하였다. 6 Roger Morgan, in: Roger Tilford, ed., 독일의동방정책과정치적변화. Westmead, Farnborough: Saxon House, 1975, pp. 95-108 을참조.

둘째로, 동서독기본조약 (German-German Basic Treaty, 1972) 은국내또는국외로부터오는일체의분열책동들로부터양자간체제 (framework) 를법적으로보호하였다. 결론적으로, 긍정적인국제환경과동서독모두에서있었던국내정치변화가우연히겹침으로써관계정상화가가능했으며, 이는두독일간의데땅뜨에기반을제공했다. 셋째로, 외부로부터의불신을효과적으로피할수있게되자독일내관계는급속도로개선될수있었다. 이는상호이해관계를증진하는데도움이되었으며, 동독에게는협력에구조적으로의존하도록하여서, 점차고유의정치적역동성을이루었다. 더욱이, 일상적인협력을통해비공식채널이발달하게되었고이는동서간이해및분쟁조정으로활용할수도있었다. 마지막으로, 단기적및장기적으로보아중요한것은, 신동방정책이여러인도적문제들 ( 예를들면비자관련규정이나통과규정완화 ) 의해결을용이케했다는것이다. 언론과 TV 의활동여건도개선되었다. 이것은양측국민들을더가깝게하는데기여하였고, 적어도국경저편에서무슨일이있는지에대해더잘알게되었다는것이다. 이는동독인들에게특히중요했는데, 이제그들은자신들의실제경험과일상적인정치적선동을대조확인할수있게되었다. 결국은, 에곤바르가한화해에대한예측은참으로실현되었다. 다만그자신이 1963 년이나 1969 년에는거의꿈꾸지못할실제적방식과시간반경에서이루어졌다. 우선 동방정책 ' - 그리고특히그것의경제적영향과정치적틀 - 은점차적으로 적 에대한인식을제거했을뿐만아니라대부분 사회주의사회 들의반자본주의선전의정당성뿐만아니라공산통치그자체의정당성을손상시켰다. 1970 년대말강화된동독의 국가지위 는호네커정권이국제문제에서독자적으로행동할수있는여지를많이주었지만, 한편으론동독이증가하는국내에서의비판에더취약하게만들었고, 나중에가서이같은국내의비판적여론은 CSCE 원칙에기반을둔것이자지지를받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동독지도부가국제문제에서활발하게될수록, 동독정권의정통성은국내경제위기심화의영향과다른바르샤바조약기구회원국들에서시작된정치개혁의영향으로인해점점손상되었던것이다. 솔리다르노즈 (Solidarnosz) 운동이공산정권에대항하는비정부세력의핵심을제공한폴란드와는대조적으로, 동독권력와해가초기에는당지도부파벌의인텔리및문화엘리트들의소외로부터심화되었다는것이다. 서방에대한개방으로실제로가장많이혜택을본이들의소외는후에더가속화되었고, 그이유는고르바쵸프의페레스트로이카와글라스노스트정책을동독국민들이지지하는반면, 호네커정권은소련과노골적인결별정책 ( 소련잡지의금지, 개혁에대한비판등 ) 을추진한데서온모순이심화되었기때문이다. 이는 1985 년고르바쵸프취임직후동독의경제위기가급속도로정치적위기화한이유를설명할수있다. 동독사회의변화측면에서본다면 화해를통한변화 라는바르의개념은진정잘들어맞은셈이다. 둘째로, 불가피한것의인정 은결코양측이상대방의정치체제의정통성을인정함을의미하지않았지만, 일시적타협 (modus vivendi) 을하여양측이사회적이슈등과같은다른

문제해결에착수하게해주었다. 서독의경제, 재정적지원이, 만일없었더라면불가능했을동독정권의장기생존을가능케했던것인지의여부는물론여전히논의의여지가있다. 하지만어떤의미로그것은오해를낳는질문이다. 고르바쵸프의페레스트로이카와소위시나트라독트린 (Sinatra-Doctrine) 이없었더라면통일의마지막단계가가능치않았거나, 적어도 1989 년처럼빨리이루어질수는없었을것이라고도똑같이주장할수있을것이다. 게다가, 페레스트로이카와글라스노스트정책은그이전에 CSCE 프로세스가강화되지않았더라면구소련내에서거의성공가능성의없었을것이라고주장할수도있다. 앞서서지적한대로, `동방정책 ' 은이프로세스에대한결정적인필요조건이었다. 마지막으로기민당의헬무트콜수상이브란트의 `동방정책 ' 을계속하고강화하였던덕택으로협력관계의패턴이동독의계속적인구조적의존도와합해져동독인들, 특히젊은세대들사이에서독민주주의에대해부정적인인식을덜하게만들었다. ( 대부분젊은 ) 동독인들이 1989 년봄여름에서독으로대거탈출한것도독일국내외로서독정책에대해압도적으로긍정적인반응이있었다는점을고려하지않고는설명하기어려울것이다. 셋째로, 바르가예측했듯이 `동방정책 ' 은동독정권의점차적인변화에기여하였다. 동독은 1989 년이른가을엄한이미지를보였지만, 실제로는조금만들어가보면정치경제적으로얼마나취약한지를알수있었다. 당, 국가관료, 군, 경찰, 심지어는비밀경찰 ( 스타지 ) 의일부세력은더이상분명히당지도부방침과일치하지않았다. 심지어당지도부내에서도국내위기에대한적절한대응을논하는맥락에서내분의조짐을보였다. 결국, 당호위대는라이프찌히와베를린가두시위대에게사살명령을내릴엄두를내지못했는데그이유는그같은명령을따를지장담할수없었기때문이다. 해를거듭하면서, 독재정치의정당성은거의사라지고말았다. 정치권력의변화는국가문제해결모색의가능성을다시열어주었으며, 그것의선결요건은평화적정권이양을가능케한순조로운국제환경내에서의체제변화였다. 3. 선택가능한남북통일방식 독일의경우에서처럼, 남북분단도주로 국가이슈 (national issue) 로서만특징지어질수없다. 중심적인특징에는군사적대치, 상이한정치및사회경제적시스템, 그리고상반되는이데올로기가있다. 분명진정한통일체는적어도동종의정치사회경제체제가필요하며양측에공통적으로공유되는가치를요구할것이다. 만일통일목표가원칙적으로공유된다면, 그다음문제는통일달성을위한순서가될것이다. 동방정책 의경우, 이문제에대한답은분명했다 : 국가적문제 는오직더광범위한유럽차원에서만해결될수있었고, 유럽의변화가먼저일어난후뒤이은결과가될것이라는것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독일통일은궁극적으로유럽통합보다훨씬더급속히일어났다. 하지만그이전에모스크바, 폴란드, 헝가리에서변화가없었더라면독일통일은가능치않았을것이다. 단지 5 년먼저독일인들의통일요구를감행했었더라도실패했을것이거의분명하다. 더욱이, 통일요구는동독에서먼저

시작된거지서독이한것이아니었다. 결국 동방정책 으로펼쳐진기회를활용하는것은동독국민들에게달려있었다. 두번째문제는북한의주체사상에입각한사회주의체제와정치적으로다원적인시장경제체제가결합할수있을것인가하는것이다. 또는한체제는그저사라져야만할것일지의여부이다. 동독에서개혁성향정당들은소위 제 3 의길 (third way) 을고안했다. 그러나다원적민주주의를 사회주의적 사회경제체제와결합한다는생각은구조적뿐만아니라정치적인이유로인해실패할수밖에없는것이었다. 40 년간의통치후국민들은최대한빨리모든형태의 사회주의 를제거하고싶어했다. 동방정책 은결코한체제를다른것으로맞바꾸려하지않았고, 단지동독의 폐쇄적시스템 을점차개방하고변화시키면 ( 유럽차원의환경이유리함을전제로하여 ) 궁극적으로동독사회가체제변형을준비하고독일의미래를자유로이결정할기회를준비하게할것이라는가정하에출발하였다. 동방정책 과비교하면 1972 년시작된한국의새로운 `북방정책 ' 은다른시각에서출발하였다. 동방정책 이의도적으로독일의미래지위가어떻게될것인지를미제로남겨놓고 국가문제 해결을미룬데반해, 한국의북방정책은처음부터통일이란목표에초점을맞추게되었다. 그렇기때문에 `국가적문제 ' 는처음부터여러다른이슈들과구분할수없이연결지어져버렸던것이다. 또는다르게표현하면, 모든다른이슈들이그때이래규정된통일목표에맞추어측정되어져왔다. 그후 1992 년과 2000 년에 ( 세부내용은다르나 ) 남북한간이해증진은기본적으로동일한원칙을따랐다. 7 그리하여남한의북방정책과독일의 `동방정책 ' 간중요한차이는장기간동안, 협력의전제로서두국가의존재를인정하지못했다는점이다. 통일, 협력, 통합은모두한바구니에담겨져왔고유사한 (parallel) 일이라고인식된다. 남한의북방정책과 동방정책 간의구조적인차이는이념적대립뿐아니라정치및경제- 사회적체제간의차이를남한의통일정책이어떻게해결할것인가하는문제를제기한다. 이론적으로통일방법에는세가지가있다. 남한의 사회주의화, 북한의 자본주의화, 또는현재남북한에존재하는것과다른일종의혼합체제 (hybrid system) 가그것이다. 처음두방식은, 통일맥락에서논의되면분명남북한중적어도한쪽이거부할것이고, 세번째방안은양측모두에게개연성없이들릴것이다. 세가지방안중어느것도단기에협상, 합의가될가능성은없으며절대불가능할수도있다. 처음두방안은아마도한측이상대방에게무력으로강요해야할것이다. 셋째방안은북한사회-경제체제가 경착륙 (hard landing) 을하고난뒤변환기이후때가되어서야진정한선택방안이될것이다. 반면, 그같은체제의붕괴로인한불안이야기된다고하면급속한통일의전망을꼭강화시키지는않을것이다. 7 Hans Maretzki, 남북한간정상화와데땅뜨라는미제, Pugwash Workshop, Seoul, Korea, 2-6 April 2001, mimeo 을참조.

이로부터결론지을수있는것은, 현재의현상유지가 국가적문제 해결의시발점으로인식되고, 양측모두적대적인합병을원하지않는다고한다면, 단지 국가적긴밀함 (national coherence) 에입각한화해는매우비현실적이다. 2000 년 6 월남북정상회담선언문은두체제와두정부에기초한 느슨한연방 을통한남북통일을언급함으로써, 다소불가능한일을하려는시도를하고있다. 하지만구조분석적입장에서보면, 그같은방안은대답보다는질문을더만들어낸다. 느슨한 연방이라는것이연방 (federation) 과연합 (confederation) 사이에있는그무엇을나타낸다고추측할것이다. 두체제와두정부를유지함은단순히북한통치의 내적메커니즘 을유지함을의미하며, 이에따라정치, 경제, 사회, 군사적요소와기저이데올로기가모두긴밀히상호연관이있으며상호의존한다. 이러한메커니즘들은남한의그것과는완전히다르다. 그리고이러한개별요소들이다른것들에게직접적인영향을끼치지않고변화할수있을것인가에대한문제는답이나올수없다. 느슨한연방 이라는용어는짧은기간동안남한의국민들이통일의비전을살아있게해줄수있고또한북한인들에게도일말의희망을불러일으킬수있는정치적포부를뒷받침한다. 하지만운영차원에서는다소허술하다 (loose cannon). 연방이건연합이건, 현재계속되는체제대항위에서는안정된기반을찾을수없을것이다. 이에대한기본적인논리는꽤나간단히수립할수있다. 즉, 두개별체제구상에의존하는사람들은아마도두개의개별국가고수를결코포기하지않을것이지만, 통일을원하는사람들은하나의생존하는체제로합의를보아야할것이다. 세가지의대안적인정치적옵션들이훨씬더개연성을가질것이다. 왜냐하면이방안들은남북통일이조만간이루어질수있다는가정에서시작하지않기때문이다. 첫째, 남북한간 공존 이라는의미로남북관계의 정상화 ; 둘째, 북한에서 위로부터의 변혁에기초한일반적인 연방 으로의움직임 ; 셋째, 북한의정치및사회-경제체제가 아래로부터 변화하여궁극적으로평화권력이전으로이어질수도있는가능성이세가지옵션들이다. a) 공존 전지역을가로지르는군사적안정의측면에서, 그리고북한에서아직까지기능하는권력메커니즘을놓고볼때, 통일과정을향한개연성높은접근법은남북한간공존의강화이다. 8 일견해서는, 그것이분단된민족의정당성을증가하는것처럼보일런지도모른다. 하지만좀더심도깊은분석을해보면그렇지않다. 남북한정상은작년최초의정상회담중분명히통일의목표가포기되지않을것임을천명했다. 현재의현상상태와무관하게통일의목표를다짐하였다. 통시에분명한것은, 만일남한이법적現狀의변화를요구한다면아마도북한정권은 8 Ibid.

즉각적으로적대적인반응을보일것이다. 하지만남한이당분간은법적현상태 ( 現狀態 ) 를불가피한것으로명백히인정한다면, 50 년간분단의왜곡된산물들로정의될수있을현상태의다른요소들 ( 군사대치, 적대적상호비방, 경제협력의결여, 인도적차원문제등 ) 이다뤄질수있을것이다. 언뜻보면, 공존 개념은평탄한통일과정의반대자들을지지하는것같아보인다. 하지만그것은오직양측이실제로구체적인통일계획에합의된다면그럴것이나, 지금까지는해내지못한일이다. 더욱이이제작년정상회담후의기대를고조시키던외교의흥분이가라앉고나니, 통일이단시일내에이루어지지않을것임이분명해졌다. 좀더이성적인통일논의를하는것이더욱실질적인고려사항을포괄하는방향이될것이다. 공존 이라는개념은북한정권이 경착륙 도 연착륙 도하지않을전망이라는가정과, 비록북한의심각한경제및사회적위기상황에도불구하고북한정권의정치및군사력의존속은아직까지심각히의문시된바가없다는가정에서출발한다. 공존 개념은더나아가알수없지만얼마동안은한반도에두국가 (two states) 가하나의민족 (nation) 을이루면서존재할것임을가정하면서. 통일과정의구체적인단계와일정, 그리고한국국가의미래모습에대해서는미지로남겨두게된다. 북한국가를사실상 (de facto) 인정한다고해서평양정권의정치적정당성을공식인정하는것은아닐것이지만, 국제법원리에따르는상호행동을규제할수있는안정되고신뢰적인틀을만들수는있을것이다. 반어적이나, 북한이남한에의해적법국가 (legitimate state) 로인정받을수록, 북한정권은내정에있어국제적규칙에따라야한다는압력하에놓이게될가능성이크다. 북한의정통성이 위협적인 ( 적국 ) 남한에대한것으로규정되는한, 북한정권은자국의국내통치를자신의존립을노리는외부의위협에대항한방어수단인것으로합리화할수있다. 하지만더이상기존의외부적위협에대한선전을믿을근거가없어지면, 북한의국내정통성은기본적으로남한과비교되어정권이이룬성과에근거해야하는것이다. 공존 이란개념은상이한의미를가지는것이분명하고, 북한정권이사용할때는여기서논의한것과는다소다를것이다. 러시아의공산당지도자레닌은공산주의가궁극적으로자본주의에대한역사적인우월성을입증하게된다는일시적인체제간대결이라는전세계적으로혁명적인개념을가지고있었지만, 김일성은 1993 년더욱수세적으로다음과같은발언을했다 : 통일 (unity) 은공존, 공영, 공통이해관심사를주창하고모든것을민족통일의대의에종속시키는원리위에이루어져야한다. 9 김일성이가장원했던것이통일을향한길로써공존을진지하게논의하고자하기보다는, 자신의기울어져가는정권을보호하는것이었는지의여부는논란가능할것이다. 신지도부는매우심각한사회-경제적압력하에서도 공존 의개념을사용해왔지만, 더나아가정권의정통성을강화하려는노력역시늦추지않았으며 하나의통일된국가내상이한체제들의공존 에대해이야기한다. 이미논한 9 KCNA, 7 April 1993 을보라.

대로, 하나의통합된국가내에두개의구조적으로상이한정치, 사회-경제체제가있는것은진지한선택방안으로생각될수없다. 김대중대통령은정상회담후북한이주장하는 평화공존 이라는말을취해쓰면서통일실현까지는약 30 년정도의긴기간이필요할것이라고암시했다. 하지만김대통령은민족통일을체제적인대결관계와결합하는구조적인모순을다루지않았다. 사실, 공존이통일을위한시행도구로받아들일수는없지만, 그래도제도화된대화, 합의, 협약을통해일체의쌍무적인분쟁이나이해관계를다루는기반은될수있을것이다. 이것이상도이하도이루기를바랄수는없을것이다. 지금까지김대중대통령의 햇볕정책 은공존기준들에정확하게부합한다. 하지만단순히공존을주창하는것만으로는양체제간깊은구조적차이를해소하지못한채인한통일의가능성을증가시키리란법은없다. 선전과대결을중단하는약속이나합의는문서상으로는보기좋고양자관계를개선시킬수는있을지모르나, 오래지속되지는않을것이다. 공존은 -만일북측이그렇게할수만있다면단지국가대국가차원의갈등을완화시키는데기여할수있고, 양측이발전할수있는실용적이고안정된조건들을제공할수는있을것이다. 국가대국가차원의화해는대립하는정치및사회-경제체제의화해를가져오지않는다. 하지만평화적인경쟁의바람직한기반은만들수있을것이다. 그래서그승리는두나라중한쪽국민들에의해결정될것이다. 평화적대결이라는상황하에서열등한체제는 위에서부터 변화하거나아래서부터변화할것이라는기대에기초한다. b) 위로부터의 변화 김정일이신중하게북한을개방하여대화와협력을하기로결정한배후이유들은자세히논의되어왔다. 일부분석가들이김정일을진정한개혁자로인식하는데반해, 다른이들은그를배신자로비난한다. 분명히김정일은다른대안의여지가없다. 심각한사회및경제난에봉착해있고, 공식적인공급과지원채널은고갈되었다. 과거동맹국들도사라졌다. 북한은국제사회에서고립되어왔다. 기식 (parasitic) 적인통치구조와비효율적인통제경제를유지하는것은엄청난자원이들어가고있다. 무기와군사기술수출을통해경제를부양하던전통적방식은국제사회로부터강력한정치적및도덕적압력을받게되었다. 북한은인도적구호및경제원조의계속적인흐름에크게의존해왔다. 분명히이러한상황하에서, 북한정권은수중에쓸수있는카드가얼마없다. 가장유망한것이남한과의관계이다. 하지만남에서북으로자원이아무리이전되어도무너지는사회-경제적체제를구하기에는불충분할것이다. 김정일이단기간사이두차례의중국방문을한것은등소평식의 사회주의적시장경제 를북한을위한매력적인모델로생각한것일수도있다는것을함축한다. 즉, 중국식모델은기득권층에의한관료적통치와점차적인경제의민영화와대규모외국인투자를결합한것이다. 하지만중국에서성공했다고해서북한의경우에도똑같이효과적일수는없을것이다. 북한은중국보다여러가지이유로인해훨씬덜매력적인투자대상이다. 또한평양의

통치상층부가중국지도부만큼융통성있고실용적인가의여부도의문시될수있다. 정치적분열의가능성역시배제할수없다. 김정일의균형자적역할은중-동부유럽의다른구공산지도자들의경우보다훨씬더어렵다. 체제를유지하는것은국내외적으로체제개방의폭을제한할것이다. 경제체제의자유화는구조적인조세개혁을필요로하고현재의지출수준의세제기반을위협할것이며, 이는관료층과군부등기득권세력일부의불만을가중시킬수도있다. 강경파에대처하기위해김정일은점차권력을당관료정통파들로부터이전함으로써경제자유화를정치적공격으로부터보호해야할것이다. 그런데점진적인정치적개혁과자유화없이는경제체제의자립도를높이는것과정치개혁과정의신뢰도를높이려는데대한모든희망을물거품으로만들것이다. 한편, 외국투자자들에게경제체제를개방하는것역시정치적모험을야기할것이다. 특히김정일은점차로강력한남한경제가허약한북한경제를흡수하는것을두려워하는것같다. 어느쪽전망도딱히안심할수가없는것이다. 김정일은아마도두가지사이에서절충안을모색해서헤쳐나가보려는시도를할것이며, 이방향을선택한것이당연한것같다. 개방에대한화려한말을해왔지만신년사에서는다시금 혁명시대의필요에부합 해야하는군부의군사력을칭송하였다. 이같은이중적접근법은공존상황하에서는얼마정도효과가있을지모르나궁극적으로는국내외적으로불만을야기할것이다. 10 이와같은상황에남한은어떻게할수있는가? 냉전동안서유럽에서있었던두가지사조가한국에서도발견된다. 첫째부류는 채찍과당근 을결합하는방식으로체제의변화에영향을주려고했다. 상대가여러가지내용에서양보하는것이 `당근 ' 을얻는선결조건이었다. 다른쪽사조는, 공존공영 (live and let live) 정책을선호하면서, 국민들의선택자유권의중요성을강조하였다. 두정책모두지지와반대세력이있었으며, 한국에서도상황은마찬가지일것이다. 위로부터의 개혁과정의초기단계에서는지도자 ( 들 ) 의행동준비상태가지나치게강조되어서는안된다. 일단한편으로는, 적당한억제를행사하고기존의움직임과차후계획을너무요구함없이장려하는것은도움이될것이다. 그래야만이개혁프로세스가외국으로부터정권을붕괴시키려는수단으로악용되지않을것이라는믿음을가져올것이다. 그리고서다른한편으로는, 민주화및자유화의지지가다른대안방도가없는정권을강화시켜주는대가로교환되어서는안된다. 동방정책 으로부터내릴수있는결론은, 상기한두가지정책조종은동시에적용될때가장좋다는것이다. 대립정책도유화정책도개혁프로세스를지도하는데는좋은수단이되지못할것이다. 그이유는양쪽모두정권으로하여금다시재생할수있는출구를열어두기때문이다. 앞서논의한모든것에도불구하고, 개혁을추진했던세력이그개혁을끝까지해내게될사람들인지는미지수로남아있다. 러시아와중-동부유럽에서는그렇지않았고, 중국에서도신지도부세대가등소평이 20 년전구상했던것이상을해냈다. 상이한목표를가진다음 10 http://www.korea-np.cojp/pk. 에서인용.

단계들을함축하는정치적변화의점진적성격을이해하는것이중요하다. 양자를혼합하는것은시기상조일것이다. c) 아래로부터의 변화 현재로서는 아래로부터의 변화가능성은희박하다. 이념주입, 정치적압박과통제, 극도의사회-경제난에다가자유언론을국민들에게차단했기때문에국민들이표현하거나조직적인저항을하는것을막았을뿐아니라다른선택대안의존재에대한희망과신념을축소시켜왔다. 이러한상황이향후수개월간어떻게바뀔수있을지알수없다. 북한의 연착륙 을가정한다면, 많은것이 위로부터의 변화속도에달릴것이다. 하지만남한과국제사회는북한주민들에게기본적인생활여건을향상시킴으로써필요한변화작업을촉진시킬수있을것이다. 직접북한주민들에게제공되는원조와지원은무엇보다도희망을소생시키는데기여할것이고, 또한수십년간그들이들어왔던것처럼남한이침략야욕을가지지않음을더욱인식하게될것이다. 다른변화들로부터얻을수있는교훈은첫발자국을내딛으면계속해서나아간다는것이다. 일단초기의자유를누리게되면사람들은더요구하게될것이다. 상부의압력과통제없이조직할수있는기회를준다면그것을잡으려할것이다. 시간은길게걸릴지모르지만조만간그렇게될것이다. 유럽에서 CSCE 원칙들이시행된것은유럽사회들내부에서자신감이성장하는데크게기여했지만, 폴란드와헝가리를제회하고는동독을포함한다른사회들에서붕괴의조짐이보이기시작한것은십년이상걸렸다. 북한의특수상황을고려컨대, 더긴시간이걸릴수도있다. 이런측면에서경제자유화가반드시정치적변화과정을가속화시키지는않을것이라는점을인정해야한다. 공공지출의여유가적어지면서그로인해적어도일부계층주민들에게는국가가여전히보장해주는생활수준에압박이가해진다면더욱더많은빈민들이인민주의적명분 (populist cause) 을지지하게만들것이다. 그러므로당분간은, 해외로부터의구호지원의차단또는장애가혹시라도발생하면이는자유화와민주화모두의전망을심각하게위협할수도있다. 동시에경제지원과정치적대화는그자체가목적이되어서는안된다. 주민직접원조와국가간정치적대화는균형을이룰필요가있다. 이런접근방식은최대한의개방성과투명성을요구한다. 직접원조와관련해서는부패한현지인들에의한자원누출을피하는것이매우중요하다. 그렇기때문에어떤자원을전달하는프로그램에대해서도투명한통제체계가권장되는것이다. 독일의경우에서처럼, 남북한쌍무관계를 당사자화 (Koreanization) 하는것은세가지이유에서유용할수있다. 우선, 남북관계의배경을공유하고있다는것이외부개입이라고인식될수있는것들을다루는데자신감을가져올수있다. 공통의근원, 문화적정체성, 같은언어와지리적인접성은실제로중요하고즉각적인경제적지원을용이하게해줄수도있는것이다. 둘째, 제 3 국가들과의관계는덜중요할수도있고, 그것을이용하여불화를일으켜

자신이득을보려는수단으로사용될수는없을것이다. 마지막으로, 양측국민들이조국통일에대한현대적인비전을개발할수있게해줄것이다. 4. 국제환경 앞서언급했듯이, 동서독관계를둘러싼긍정적인환경은 동방정책 의성공과그후독일통일에많이기여했다. 불행히도한반도상황은꽤다른것같다. 11 1970 년대유럽의데땅뜨기간과같은것이동북아시아에는없었고, 유럽과대조적으로전략적편가르기가양극체계가아니라더복잡한전략적 4 강구도를하고있다. 지역강국들간공공연한영토분쟁이미해결로남아있고, 중국과미국간관계도불안하며, 적어도중국정부는미국에대해 한국카드 를쓰고싶은생각이들것이다. OSCE 의비동맹국가들과중립국들처럼중재국역할을하는나라도없다. 중, 소, 미, 일의사회적배경에는깊은문화적차이가특징적이다. 군축의패턴이존재하지않으며, 지역안보협력의틀도없다. 지역안보체계를세우려는기회는결코좋았던것이없으며, 아마오랫동안개선되지않을것이다. 한반도의화해프로세스는궁극적으로주변의유리한환경이선결조건일것이나그것에의존할수없다. 그럼에도불구하고긍정적이고건설적인남북한관계는어려운시기에도점진적인화해무드 (rapprochement) 를보존하는데기여할수있을것이다. 이는마치독일의경우 1980 년대초 SS-20 미사일위기동안의동서독관계의경우와같다. 물론그당시 동방정책 은벌써 10 년이넘은정책이었다. 5. 예비적결론 한국인들은궁극적으로자신들의통일방안을찾아야할것이다. 동방정책 은본떠야할모델도아니지만, 그로부터얻을수있는교훈을생각하면무의미한것도아니다. 이중가장중요한것은아마도불가피한것을인정하고개선을향한점진적인변화를모색하는것간의균형을잘맞추는것일것이다. 최종해결책 을기다리는것은의미가없다. 왜냐하면각진전은탄탄한기반위에서이루어져야하기때문이고이는점증하는단계들을요구한다. 최초의남북정상회담이그러한단계였다. 다음단계들은더진전되어야할것이다. 공존, 위로부터의 변화, 아래로부터의 변화, 유리한국제환경조성등각단계는더나은것을위한변화를약속하는것이며, 하나도간과되어서는안된다. 11 Hans J. Giessmann, 세계적시각으로본유럽안보와국방아이덴티티문제 : KNDU Review, vol. 5, no. 2., December 2000, pp. 33-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