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재외동포 문학상 수상집 재외동포 문학의 창 2009년 11월 30일 발행 발행처 재외동포재단 발행인 권영건 주소 서울시 서초구 서초2동 (외교센터 6층) 전화 (02) 팩스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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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외동포 문학의 창

2 제11회 재외동포 문학상 수상집 재외동포 문학의 창 2009년 11월 30일 발행 발행처 재외동포재단 발행인 권영건 주소 서울시 서초구 서초2동 (외교센터 6층) 전화 (02) 팩스 (02) 제작 소통( ) 비매품 ISBN 본 작품에 대한 일체의 권한은 재외동포재단에 있으며 본 재단의 동의 없이 무단 복제나 전재를 금합니다.

3 제11회 재외동포 문학상 수상집 재외동포 문학의 창

4 세계 어디에 살더라도 당신은 자랑스러운 한민족입니다 지구촌 곳곳에 거주하고 있는 700만 재외동포들은 한민족의 귀중한 자산입니다. 재외동포재 단은 날로 늘어나는 동포들이 거주국서 존경받는 모범적인 구성원으로 정착하고, 나아가 국 내외 한민족이 공동 번영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1997년 설립되었습니다. 재외동포재단 은 교육, 문화, 경제, 교류를 위한 한민족네트워크 구축을 위해 오늘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 고 있습니다. Tel :

5 재외동포 문학의 창은 재외동포들의 문학을 향한 열정의 마당이며, 한민족 공동체의 꿈을 마음껏 펼칠 문학의 한마당입니다.

6 발간사 700만 재외동포들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삶의 진중함을 담아낸 재 외동포 문학의 창 을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올해로 열한 돌을 맞이한 재외동포문학상 은 지난 2년간 논픽션 분 야에만 한정되었던 응모분야를 시, 소설, 수필, 청소년 부문으로 확대 하여 전 세계 33개국으로부터 1천 1백 여의 작품이 접수되었습니다. 작품 수준도 그 어느 때 보다 높았다는 심사위원들의 평은 재외동포 문학인들의 한글문예창작에 대한 열정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최근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공식문자로 채택하였다는 소 식이 있었습니다. 한민족의 이민과 이주의 역사가 한 세기를 넘기고 동 포 2-3세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서 한글을 모르는 젊은 동포들이 늘 어나는 상황 속에서 한글의 우수성을 확인시켜준 고무적인 일이었습니 다. 이처럼 우수하고 아름다운 한글로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우리 민 족은 참으로 행복한 민족입니다. 우리 재단은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마음껏 문학적 재능을 발휘 하고, 국내외 동포들이 문학작품을 통해 서로 소통하는 자리를 마련하 6 재외동포 문학의 창

7 고자 재외동포문학상 을 시행해 왔습니다. 한글 문예창작의 어려움 속 에서도 창작 활동에 매진하는 재외동포 문학인 여러분의 계속적인 참 여를 당부 드립니다. 특히, 해를 거듭할수록 풍성해지는 재외동포문학상이 동포 2-3세들 에게 한글을 잊지 않고,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큰 도움 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끝으로, 작품을 출품해주신 재외동포 문학인 여러분과 공정한 심사 를 위해 많은 작품을 하나하나 진지하게 살펴주신 심사위원 여러분들 께도 감사의 뜻을 전하며, 재외동포의 삶을 진솔하게 엮은 가슴 따뜻한 글이 여러분의 일상에 신선한 활력으로 다가가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권 영 건 발간사 7

8 차례 재외동포 문학의 창 발간사 6 심사평 12 시 부문 27 대 상 바 퀴_김효남(미국) 29 우수상 나무의 꿈_김아영(아르헨티나) 31 대나무의 DNA_이종배(캐나다) 32 민들레_강설령(중국) 34 크리스티 경매장 가는 길_전영애(영국) 38 종이 비행기_최남규(독일) 40 가 작 8 재외동포 문학의 창

9 소설 부문 43 대 상 우수상 폭 우_신정순(미국) 45 엄마, 미안해_김민정(일본) 66 아이야 도망가_황희(미국) 91 가 작 어둠 속에서_김 건(호주) 123 알렉산드리아의 여자들_아미라 L.S.리(이집트) 154 노래하는 밀라노_조민상(이탈리아) 175 수필 부문 219 대 상 우수상 재즈 아리랑_윤종범(미국) 221 스팅키_박혜자(미국) 230 아버지_조성숙(중국) 240 가 작 한 잔 속에 피어나는 엘도라도_유금란(호주) 250 사라져가는 빨래방치 소리_천광일(중국) 257 프리데리케의 아이_천복자(독일) 265 9

10 중고등 부문 279 대 상 당신의 은신처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는 엄마, 엄마를 위하여_송진아(뉴질랜드) 281 우수상 장려상 노 새_박연희(미국) 287 강은 그에게 무엇이었을까_윤영(중국) 292 행 복_최송지(피지) 295 따뜻한 사람들이 사는 곳_김가영(우즈베키스탄) 309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_김고자(일본) 315 이중국적자의 딜레마(International Grey Spot)_ 김호연(미국) 우리는 사춘기!_문정희(베트남) 325 나의 친구 첼로에게_이수정(미국) 348 재외동포 문학의 창

11 초등 부문 355 대 상 우수상 우리 아빠 한국 가실 때와 오실 때_안찬원(몽골) 357 영원한 숙제 한국어 _김태양(호주) 359 아빠의 마음_유재원(미국) 363 나의 꿈은 식물학자_이기혜(뉴질랜드) 366 장려상 새파란 신발과 민수_김성안(중국) 369 사랑을 기다리고 평안을 기대하는 그들_ 김진희(우즈베키스탄) 374 우리가 체험한 사랑으로 가는 길 _리승희(중국) 379 보고 싶은 천사 미래_박서연(태국) 383 신세대 신데렐라_송미령(뉴질랜드) 386 수상소감

12 심사평 <시 부문 심사위원 신달자, 오형엽, 정호승, 조정권> 올해 재외동포문학상 시 부문에는 700여 편의 많은 작품들을 응모하 여, 해외에서 생활하는 우리 동포들의 시 창작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실감하였다. 심사위원들은 심사가 진행되는 과정 내내 재외동포들의 체험과 사색과 추억과 의식 및 무의식의 세계를 접하면서 매우 의미 있고 소중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응모작들은 크게 세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첫째, 재외동포들의 해외 생활을 단순히 소재의 차원으로 접근한 작품, 둘째, 이러한 차원 을 한 단계 뛰어넘어 시적 형상화의 수준에 도달한 작품, 셋째, 이 두 가지가 결합된 작품이 그것이다. 심사위원들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유형 에 속하는 작품들을 눈여겨 살피면서 예심을 진행하였다. 먼저, 심사위원들은 <바퀴>를 대상으로 결정하는 데 만장일치로 합 의했다. 이 시의 1연은 혼잡한 다리 위에 차를 세우고/손수레에 짐을 부리는 일상적 삶의 단면을 제시하지만, 무겁거나 축축한 순서로 식 료품들을 올리는 것이 가벼운 것부터 쟁인 생의 순서와는 반대 라는 표현은 범상치 않은 생의 통찰을 보여준다. 평범한 일상의 한 장면으로 부터 생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는 이러한 발견술은 이 작품에 시적 깊 12 재외동포 문학의 창

13 이와 밀도를 부여한다. 2연에서는 식료품을 실은 손수레를 끌고 가면 서 덜컥, 다리의 파인 상처를 바퀴가 주무르고 지날 때/미끄러져 떨어 지는 상추 의 모습에서도 이러한 특성이 발견되고, 차도로 굴러가는 토 마토 몇 알 과 3연의 귀가가 늦어지는 아이 의 무거워 눈빛 을 오버랩 시키는 대목도 자연스러우면서도 절묘하다. 마지막 연인 4연은 지금은 수레를 멈출 수 없는 저녁 속으로 굴러야 할 시간 쩔뚝이는 바퀴 시간의 병목 속으로 흔들리며 구른다. 에서 보듯, 이러한 상황을 바퀴 의 이미지 및 시간 의 의미와 결부시킴 으로써 한 단계 더 의미를 상승시키는 확장의 힘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대나무의 DNA>와 <나무의 꿈>이 우수상으로 선정되었 다. <대나무의 DNA>는 사철 푸르고 곧게 자라는 대나무 의 그림자 를 내 마음의 정원에/ 옮겨심 는다는 시적 발상이 참신하고, 밤 이면 그 뿌리를 베개 삼아 누워 잠들고, 사철 내내 나에게 푸른 옷을 입히 는 시절이 가고 난 후, 인생의 가을낙엽이 질 무렵 비워두고도 담지 아니하는 디엔에이 를 노래하는 시적 전개과정에서, 생애의 흐름을 대 나무의 상징으로 치환하는 솜씨가 높은 점수를 얻었다. <나무의 꿈>은 고개 숙여/ 생각을 깎고 다듬 는 나무 가 꽃들과 더불어 희노애락 을 나누고, 열매 잃고 지쳐 쓰러져도/ 다시 일어 서며, 땅 아래 뿌리를 박으며/ 기초를 가다듬고, 양 옆을 살피며 자라 균형을 다잡는 모습 심사평 13

14 을 통해,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간결하고 함축 적인 언어로 형상화한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가작으로는 <종이 비행기>, <민들레>, <크리스티 경매장 가는 길> 이 선정되었다. <종이 비행기>는 화자인 아빠 가 잠든 아이 옆에 놓인 종이비행기에 초록빛 꿈과 소망을 부여하는 아름다운 장면을 효과적 인 어조로 표현한 점에서, <민들레>는 이국에서 겪는 고달픈 애환의 역사를 강한 남성적 어조로 표현하면서도 민들레 꽃씨 의 상징성을 적 절히 형상화한 점에서, <크리스티 경매장 가는 길>은 크리스티 라는 단어의 반복을 통해 경매장 가는 길의 감각을 발랄함과 빈정거림이 혼 재된 미묘한 뉘앙스로 잘 살려낸 점에서, 각각 일정한 시적 성취를 이 루면서 심사위원들의 주목을 끌었다. 14 재외동포 문학의 창

15 심사평 <소설 부문 심사위원 김종회, 김형경, 최인석> 올해 재외동포 문학상 소설 부문에 응모한 작품은 모두 75편이었다. 응모작들은 모두 특별한 삶의 모습을 담고 있고, 그 특별한 삶에는 저 마다 절절한 진실이 담겨 있었다. 그렇기에 심사하는 입장에서 한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특별하고 감 동적인 이야기 와 소설로서의 문학 작품 사이에 놓인 엄염한 차이를 어떻게 적절히 작품 심사에 적용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었다. 응모작들 을 거칠게 구분하면 두 종류가 있었다. 한 부류는 외국 생활의 간난신 고와 그 끝의 축복 같은 성취를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지만 소설적 완성도 면에서 아쉬움이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다른 한 종류는 소설 적 구성 요건들에 맞춰 작품을 잘 만들어내기는 했지만 삶의 진한 속살 을 첨예하게 드러내는 데는 다소 부족한 감이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심사위원들은 문학상의 이름으로 소설 을 뽑는다는 사실을 더 염두에 둔 채 두 영역을 적절히 조화시켜가며 심사에 임했다. 대상으로 선정된 신정순(미국)의 <폭우>는 소설적 형상화의 덕목들 을 안정적으로 성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남편이 교통사 고로 입원하면서 사고 속에 숨은 의혹이 드러나고, 남편에 대한 억압된 심사평 15

16 감정이 심리 표면으로 떠오르면서 그 교통사고의 다른 진실이 드러나 는 시점까지의 과정을 적절한 소설적 구성을 차용하여 진행시키고 있 다. 인간 심리의 기층과 표층의 어긋남, 의식과 무의식의 괴리 등을 세 밀하게 들추면서 우리는 누구도 자기의 진짜 속마음, 숨은 의도를 모르 는 채 생을 마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섬뜩하게 일깨운다. 다만 보험 사기라는 소재의 통속성과 몽유병이라는 장치를 동원하여 갈등을 흐지 부지 얼버무린 방식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우수상으로 뽑은 김민정(일본)의 <엄마, 미안해>와 황희(미국)의 <아 이야 도망가>는 대상과 견주어볼 때 그 완성도에서 그다지 손색이 없는 작품들이었다. 엄마, 미안해 는 천차만별의 엄마와 딸들 이야기 중 하나 이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라고 다짐하며 종속적인 여성의 삶을 벗어던지고 먼 나라로 떠나 자립적인 삶을 추구해온 엄마의 딸은 또다 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라고 말한다. 독립적인 엄마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 것이었는가를 목격했기에 재빨리 의지할 남자를 찾아내어 임신 하고 결혼하려 한다. 서로 사랑하지만 이해하지는 못하는 엄마와 딸이 그 질곡의 세대차를 진흙구덩이처럼 겪어내는 심리가 잘 그려져 있다. 아이야 도망가 는 이민 사회의 소외감과 그 구성원들의 불안감을 그 려낸 작품이다. 뿌리 뽑혔다가 다시 심겨지는 것과 같은 외국 생활에서 불안감은 삶의 한 요소가 되며, 불안감을 다스리기 위해 의존하는 종교 는 일상의 중요한 부분이 된다. 어른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생활하면서 전도나 봉사 활동에 전념하는 동안 아이러니컬하게도, 집에 혼자 남겨 진 아이는 걷잡을 수 없는 불안과 공포에 노출된다. 빈 집에서 내적 외적 공포와 맞서는 아이 화자의 심리가 세밀하게 그려지고 있다. 불안 16 재외동포 문학의 창

17 이 불안을 낳고, 부모의 불안이 자식에게 상속되는 과정을 기승전결의 소설적 구성을 따라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 가작으로 선정한 작품은 김건(오스트레일리아)의 <어둠 속에서>, 아 미라리(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여성들>, 조민상(이탈리아)의 <노 래하는 밀라노> 등 세 작품이다. 어둠 속에서 는 한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그 사회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역량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작품이다. 옛 조국을 위해 위험을 감수했던 과거 경험과 새 로 터를 잡은 사회를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현재 사건이 교직되면서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이 안정적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여자들 은 카 이로에 거주하는 외국인 여성들의 삶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해낸 작품이다. 저마다 다른 국적, 취향, 목적을 가진 여성들이 낯선 곳에서 만나 엮어가는 삶이 모여 태피스트리처럼 인상적인 무늬를 펼쳐 보인 다. 노래하는 밀라노 는 성악을 공부한 후 그곳에 자리 잡기 위해 애쓰 는 가장의 내적 고민들이 가감 없이 노출되어 있는 작품이다. 그 땅에 자리 잡는다는 일은 그곳에서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 수 있는가와 비례 하며, 그 일은 지리멸렬한 인내와 불안을 넘어서는 일이라는 사실을 일 관된 목소리로 전달한다. 문학상을 심사하면서 응모된 작품들이 저마다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경험은 처음이었다. 수상 작품뿐 아니라 응모된 모든 작품들이 우열을 가려 따질 수 없는 저마다의 가치, 색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외국에 살면서도 모국어를 잊지 않고, 모국어로 작품을 쓰는 일은 글쓰기를 넘 어서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수상자뿐 아니라 응모작을 보내신 모든 분 들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심사평 17

18 심사평 <수필 부문 심사위원 복거일, 오정희, 이재복> 예심을 거쳐 본심에 진출한 작품은 모두 18편이었다. 본심에 오른 작품은 예심의 치열함을 반영하듯 모두가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 었다. 어느 것 하나 선외로 하기에는 실로 그 공들여 쓴 육화된 문장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우리 심사위원들은 선뜻 수상작을 결정하지 못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 우리 나름의 기준을 정하였다. 그 중 요한 기준 중의 하나가 바로 재외동포문학상 의 취지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8편 모두 이런 취지에 부합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심사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재외동포로서의 체험의 진정성과 그것의 미적인 형상화였다. 이러한 기준은 재외동포문학상 이 단순한 체험수기 수준 의 문학적 성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미적인 결과물로서의 문 학적 성취를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기준에 입각해 조성 숙의 <아버지>, 천광일의 <사라져가는 빨래방치소리>, 윤종범의 <재 즈 아리랑>, 박혜자의 <스팅키>, 유금란의 <한 잔 속에 피어나는 엘도 라도>, 천복자의 <프리데리케의 아이> 등 6편의 작품을 선정했다. 먼저 조성숙의 <아버지>는 잔정이 없고 무뚝뚝한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을 진솔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아버지의 모습 18 재외동포 문학의 창

19 을 과장됨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큰 장점임에 틀림없 다. 그 아버지를 통해 우리는 신산고초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되짚어보 는 시간을 가지고 미래의 우리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소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회상이 지나치게 복고적으로 또 감상적으로 흐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나 의 인식이 다소 식상하고 상투적이다. 천광일의 <사라져가는 빨래방치소리>는 이미 제목에서부터 회고적 임을 알 수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점 해체되어가는 연변 조선족 공동체의 운명을 사라져가는 빨래방치소리를 통해 되짚어내고 있다. 공동체의 해체는 안타까운 일이며 그것은 심각한 실존적 위기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에 값한다. 하지만 빨래방치소리의 사라 짐을 안타까워한다고 해서 조선족 공동체의 운명이 어떤 전망(perspective) 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실존적 위기에 대처하는 의지가 투영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윤종범의 <재즈 아리랑>은 이국 땅에서 동포로서 겪는 어려움을 진 솔하게 보여주면서 또한 그것을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를 그 어느 작품 에서보다도 잘 드러내고 있다. 재즈 아리랑 이야말로 이국 땅에서 그가 찾은 실존의 방식이다. 그런데 그가 찾은 실존의 방식의 근간이 아리 랑 으로 표상되는 한민족의 오랜 전통이라는 사실이 잔잔한 감동을 불 러일으킨다. 그가 이국땅에서 재즈 아리랑이라는 생존의 방식을 발견 한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한민족의 오랜 전통을 잃지 않고 치열하게 살아온 자에게 내린 신의 축복인지도 모른 다. 이런 점에서 그의 발견은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수필은 이렇 심사평 19

20 게 일상의 삶 속에서 어떤 지혜를 발견하는 기쁨을 기록한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박혜자의 <스팅키>는 문화적인 장벽을 스팅키 라는 버려진 애완견 을 통해 아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아주 실감난다는 것은 그만큼 스팅키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웃들과의 미묘한 문화적인 차이 를 꼼꼼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이런 대목이 그렇다. 자신은 스팅키를 우리집에서 같이 사는 걸로 생각하는 데 비해 이웃들은 그것을 돌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생각의 차이가 자신의 삶을 힘들게 하고 있다고 그 녀는 말한다. 하지만 그것을 외계인들하고의 의사소통이라고 냉소해버 리는 것은 올바른 삶의 해결 방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 말 자체 가 자꾸 씁쓸함으로 다가오는 것은 왜 일까? 유금란의 <한 잔 속에 피어나는 엘도라도>는 글에 세련미가 묻어난 다. 이런 류의 글을 많이 써본 솜씨다. 군더더기 없는 세련됨은 글의 훌륭한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세련됨이 지나치면 감동이 사라진다. 커피 한 잔의 여유를 통해 소중한 인연을 만들었다는 구절에 공감하면서도 새로운 엘도라도를 꿈꾸느라 늘 상대적인 외로움에 허덕 이며 산다는 말에는 공감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 지나친 세련성에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과의 일정한 거리를 통한 반성적인 사유는 필요 하지만 그 사유가 질퍽한 삶 속이 아니라 세련된 말 속에 있다면 공감 의 정도는 그 만큼 작아질 것이다. 천복자의 <프리데리케의 아이>는 장애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당당 하게 내 보이면서 스스로의 길을 찾도록 도와주고 또 개척해 가는 독일 20 재외동포 문학의 창

21 인들의 삶의 모습을 정성들여 쓴 그런 글이다. 그녀가 보여준 독일인들 의 삶이 자신뿐만 아니라 그것을 읽는 우리에게까지 그 감동이 전해져 오는 것은 진실을 드려내려는 그녀의 의지 때문이다. 그녀의 의지를 우 리는 글 속에서 느낄 수 있다. 다만 지나치게 전달에만 치중해 정작 중요한 자신의 내면의 소리는 글 속에 녹아 있지 않다. 수상한 분들께는 축하의 인사를 그리고 선에 들지 못한 분들께는 심 심한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다. 선에 들었건 그렇지 못했건 중요한 것 은 글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삶 을 반성하는 것이라고 본다. 느끼고 반성하는 삶만큼 행복하고 아름다 운 것이 어디 있으랴. 심사평 21

22 심사평 <청소년 부문 심사위원 서하진, 이상숙, 이혜경> 2009 재외동포 문학상에는 초등학생과 중고생 부문이 확대되었고 세계 각지 동포 어린이들이 많은 글들을 보내주었다. 물론 성인부문과 비교하면 응모작 수가 적었지만 창작의 열의와 수준만큼은 성인 부문 은 물론 국내 어린이 글짓기 공모와 비교해도 뒤질 것이 없었다. 초등학생, 중고생들이 한국을 떠나 있으면서도 한국어로 생활문과 수필을 쓰고 나아가 시와 소설을 지어 응모를 하였다는 것만으로도 대 견한 일이다. 재외 동포 어린이, 청소년들은 한국어라는 모국어를 저절 로 터득할 수 없어 학습과 공부로 익혀야하는 의지적인 한국어 화자 들 이기 때문이다. 언어와 문화의 체험과 생활을 통해 자아를 형성해 나가 야할 시기에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모국어로 한국어를 받아들이고 익히는 것은 물론 이를 창작의 즐거움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초등부문에서는 나의 꿈과 미래, 아빠와 할아버지 같은 가족을 소재 로 한 수필, 한국어 배우는 이야기, 한국방문과 같은 일상적인 소재의 생활문 등이 많았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여느 초등생들의 글과 다르지 않게 소박하면서도 발랄한 동심을 보여주어 심사를 위해 읽으면서도 22 재외동포 문학의 창

23 심사위원들은 내내 즐거운 마음이었다. 또 외국에서 외국어처럼 한글 을 배우는 어려움을 드러낸 글을 읽을 때는 어린이들과 부모님들의 노 력에 숙연해지기도 하였다. 초등 부문의 경우 몽골토요한글학교 5학년 안찬원 어린이의 <우리 아빠 한국 가실 때와 오실 때>가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몽골 돌소금, 징기스 보드카, 몽골 하늘과 말 그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빠를 따라 몽고에서 한국으로 가고, 어묵, 붕어빵, 고추장이 내 친구의 답장 이 한국에서 몽고로 아빠를 따라 온다. 어린이가 좋아하는 것들이 아빠 를 따라다닌다는 어린이다운 정겨운 표현도 좋았고 내가 한국 것 몽골 것 모두 좋아하듯이 두 나라도 사이좋은 친구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마 음도 따뜻하여 심사위원 모두 즐겁게 초등부 대상으로 골랐다. 호주에서 태어나 한국나이로 12살인 김태양 어린이의 <영원한 숙제 한국어 >는 한국어 공부 분투기라 할 수 있다. 공부로 해야 하는 한국 어 때문에 무서워지는 엄마와 이런 엄마에게 심술 부리는 나의 모습이 생생하였고 한국사람이니까 한국말을 몰라서는 안 된다 고 의젓한 결 론을 맺으면서도 엄마가 하시는 말씀 영어는 영원한 숙제야 처럼 내게 는 한국어가 영원한 숙제인 것 같다는 귀여운 푸념이 눈에 띄었다. 이 국생활로 고단하게 살아가는 아빠의 사랑을 바라는 딸이 아빠의 편지 를 통해 사랑을 확인하는 수필 <아빠의 마음>도 재외동포의 삶의 모습 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이 외의 수상작들은, 물론 대한민국 어린이들 의 매끈한 한국어는 아니었지만, 모두 어린이다운 밝은 마음과 진실 한 표현과 진지한 생각이 들어 있어 수상의 영예를 받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심사평 23

24 중고등부의 경우 자신의 정체성이나, 이중국적의 문제, 낯선 환경 적 응의 어려움, 생활고 등의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 성인의 그것 못 지 않은 다채로움과 생각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정체성, 친구, 사 춘기의 방황, 이중국적 등 관념적으로 보이는 이 문제들은 청소년들에 게는 너무도 현실적이고 절박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절박함은 청 소년기의 혼란과 방황을 더해주었겠지만 재외한인 청소년들은 수필, 소설 등의 창작으로 고민을 가다듬고 마음을 다독거리며 모국어가 주 는 위안을 경험하고 있었다. 대상으로 선정된 송진아의 <당신의 은신처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는 엄마, 엄마를 위하여>는 이국생활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한 딸의 이야기이다. 바쁜 이국 생활 속 에서 잊고 지내던 엄마의 외로움과 고통을 발견한 딸은 엄마를 위해 기도하고 무언가를 할 시간이 지금 온 것 같다는 의젓한 모습과 진심 을 보여주었다. 박연희의 <노새>는 당나귀 아빠의 지구력과 말 엄마의 스피드를 갖 고 태어난 노새가 장거리 경마대회에서 우승한 예를 들어 1.5세 이민자 로서의 정체성을 세워나가는 글이다. 주변의 비웃음을 받던 노새가 스 스로도 모르던 자신의 유전자 때문에 우승을 할 수 있었듯이 자신 또한 주변의 따돌림과 무시를 딛고 삶의 승리자가 될 것이라는 깨달음은 대 견스러울 정도였다. 1.5세대가 스스로를 외톨이나 주변인이 아니라 양 국 문화의 혜택을 입은 행운아로 인식하고 자신의 꿈을 향한 경주를 승리자로 마치리라는 확신을 가지는 광경은 이미 그만의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24 재외동포 문학의 창

25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의 한국어 화자로서 살아온 윤영 학생의 <강은 그에게 무엇이었을까>는 같은 한국어이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표현과 어휘가 눈에 띄였고 이것은 생경함을 넘어선 우리말의 또 다른 모습으 로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외의 수상작 모두가 소중한 한국문학의 범주 안에서 의의를 지니 는 작품이라고 믿고 있으며 이들과 함께 한국문학이 성장하리라는 믿 음 또한 가지고 있다. 수상자 모두에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심사평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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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시 대상 우수상 부문 바 퀴_김효남(미국) 나무의 꿈_김아영(아르헨티나) 대나무의 DNA_이종배(캐나다) 가작 민들레_강설령(중국) 크리스티 경매장 가는 길_전영애(영국) 종이 비행기_최남규(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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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바 퀴 대상 김효남(미국) 그가 죠지타운 혼잡한 다리 위에 차를 세우고 손수레에 짐을 부린다 무겁거나 축축한 순서로 생닭 두 박스, 쌀 두 포, 음료수 세 박스 채소 박스 까지 올리는 것은 가벼운 것부터 쟁인 생의 순서와는 반대다 좁아진 다리를 비켜 가는 차들의 경적이 꼭대기에 얹혀진 가벼운 것들을 흔든다 덜컥, 다리의 파인 상처를 바퀴가 주무르고 지날 때 미끄러져 떨어지는 상추 차도로 굴러가는 토마토 몇 알 바퀴 밑에 깔린다 중요한 것을 얻으며 잃는 작은 손실처럼 요즘 들어 귀가가 늦어지는 아이 어쩌다 마주치면 그를 피하는 무거운 눈빛도 저만치 굴러간다. 시 부문 29

30 지금은 수레를 멈출 수 없는 저녁 속으로 굴러야 할 시간 쩔뚝이는 바퀴 시간의 병목 속으로 흔들리며 구른다. 30 재외동포 문학의 창

31 나무의 꿈 우수상 김아영(아르헨티나) 고개 숙여 생각을 깎고 다듬고 꽃들과 더불어 희로애락을 나눈다면 흔들려 열매 잃고 지쳐 쓰러져도 다시 일어설 힘이 샘솟길 때로는 땅 아래 깊숙이 뿌리를 박으며 기초를 튼튼히 가다듬어야겠지. 때로는 양 옆을 살피며 자라 균형을 다잡을 필요도 있겠지. 가지가 너무 버거워 지탱하기 힘겨울 때가 있더라도 위로 쭉쭉 뻗을 수 있기를 하늘만이 배경이 되는 그 날까지 하늘과 하나 되는 그 날까지 시 부문 31

32 대나무의 DNA 우수상 이종배(캐나다) 나이테가 없으니 나무가 아니요 땅 위에 풀잎이 되어 말라 죽지도 않으니 잡초도 아닌 당신 사철 푸르고 곧게 자라는 모습 부러워 나는 그 그림자를 내 마음의 정원에 옮겨 심었습니다. 밤이 오면 당신의 깊은 뿌리가 묻힌 낮은 땅을 베개 삼아 누워 잠들었습니다. 사철 내내 나에게 푸른 옷을 입히고 올곧은 모습으로 바람이 태우는 간지럼에 즐겁게 노래 부르던 시절이 가고 난 후 이제 32 재외동포 문학의 창

33 내 인생의 가을낙엽이 질 무렵 나는 나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비워두고도 담지 아니하는 디엔에이 청빈으로 살아왔던 지난 생이 행복하고 값있었노라고 아! 바람 이는 대숲 속에 다시 죽순 하나 머리 든다. 시 부문 33

34 민들레 가작 강설령(중국) 칠흑 같은 어두움 가는 뿌리, 송곳 같은 두려움 한 치도 돌아누울 수 없는 공간에서 얼굴과 등 구별 없이 실타래로 엮여서 땅을 부둥켜안았다 이른 봄 인내만큼 쓴 잎사귀 열리고 외팔로 받친 힘만큼이나 가녀린 노란 얼굴 봄 내내 휘청거리다가 하얀 머리를 건뜻 풀어헤쳤다 누구보다 배고파서 누구보다 추워서 자기보다 더 가벼운 바람에 실려 만년의 끈을 끊고 34 재외동포 문학의 창

35 그리움이라는 사치품을 헌 쪽박에 챙기고 삼삼오오 떼를 지어 길을 떠났다 산을 건너 강을 건너 팔뚝 같은 강냉이 이삭 달리고 미운 놈 기장밥 해준다는 간도의 낙토에 터를 잡고 손이 갈퀴가 되어 욕망이 짐승이 되어 갈 뿌리, 나무뿌리를 걷어내고 노란 민들레 부락을 이루었다 밤이면 같은 사연을 지닌 이웃끼리 오구굿 모여서 할배, 할매한테 들은 옛말로 그리움의 심지 돋우고 서로 다른 아리랑 노래로 기나긴 겨울밤을 달랬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할아버지의 잠꼬대는 흰 회벽에 가맣게 그을었다가 시 부문 35

36 학교 가는 손자의 가방끈에서 그네 타다가 어느새 봉분의 민들레홑씨 되었다 청산리 포수꾼들의 함성이 흩어진지 오래고 양지바른 뒷산언덕 낭랑하던 아리랑노래 폐교된 교실의 거미줄에 꽁꽁 포박되던 어느 해 겨울 150년만의 이상기후로 동토를 뚫고 민들레 피더니 하룻밤사이에 사람도 마을도 또다시 미친 듯이 흰머리 풀었다 민들레 꽃씨는 매서운 북풍에 소소리 떠서 갈 곳도 모른 채 올 곳도 잊은 채 뿔뿔이 흩어졌다, 빈 몸으로 한 가닥 미련도 없이 무당이 영신하듯 춤추며 갔다 36 재외동포 문학의 창

37 띵호와 띵호와 밭고랑에서 중얼대는 낯선 소리가 풍년가을 낟알처럼 탱탱 여문 이후로 고향엔 지금도 민들레 피고 지는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샅샅이 흩어진 민들레 꽃씨가 타향에서 튤립으로 피었는지 아니면 장미로 피었는지 알려주는 이 아무도 없다 시 부문 37

38 크리스티 경매장 가는 길 가작 전영애(영국) 그린 팍(Green Park)역부터 야금야금 그늘을 삼키며 걸었다 한강을 건너 인천 앞바다와 시베리아를 넘어 온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Christie s Auction) 밀어와 상상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크리스티! 크리스티! 눈짓이 사붓사붓 오가는 요염한 크리스티! 크리스티! 이름을 꼬옥 품자 한껏 가슴이 부푼다. 호주머니 속에 주먹을 깊이 넣었다 페니도 만져지지 않는 호주머니가 삼킨 주먹이 팽팽하게 주름을 펴며 오! 크리스티 아담과 이브의 당당함으로 오! 크리스티 사랑으로 헤엄치던 물고기가 세인 제임스 스트리트에서(St. James s Street) 지느러미를 활짝 펼치며 오! 크리스티 38 재외동포 문학의 창

39 한 올 흘러내리지 않게 올린 머리칼 밑으로 땀방울이 흥건해지자 킹 스트리트다(King Street) 호흡이 멈춘 페이지에 앉은 파란 나의 그대 크리스티의 태초에 시 부문 39

40 종이 비행기 가작 최남규(독일)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잠든 아이 옆에 방금 착륙한 하아얀 종이비행기 하나 꿈을 가득 싣고 있다. 콩코드형 동체 위에 가득 적재한 꿈들 파아란 미래를 향해 출항을 기다리고 있다. 방바닥에 기착한 비행기 옆에서 잠든 아이는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아빠도 너 만한 나이였을 때 종이비행기를 접어서 날려 보내며 미래를 향해 초록빛 꿈들을 실어 보냈지. 이 아빠가 엄마랑 너희들을 데리고 비행기로 열아홉 시간이나 걸리는 서쪽 머언 나라 땅 끝에 있는 머언 나라에 와 보니 어렸을 때 종이비행기에 실어 보냈던 그 꿈들 미래를 향해 무수히 띄워 보냈던 그 꿈들은 이 지상 어디에도 안 보이고 40 재외동포 문학의 창

41 먼 하늘에 가서 별들로 깜박이더라. 내 어렸을 적에 발돋움하면 손에 잡힐 듯하던 초록별들은 먼 하늘에서 아직도 희망으로 빛나는데 이젠 어렸을 때의 아빠 대신 네가 유치원에서 종이 접기 시간에 배워 온 콩코드형 종이비행기를 접어서 먼 미래를 향해 날려 보내는구나. 아빠가 닿지 못한 꿈들을 향해 날마다 종이비행기를 날려 보내는 너는 아빠가 닿지 못한 꿈의 나라에 도달하겠지. 아빠가 잡지 못한 초록별들을 향해 날마다 종이비행기를 날려 보내는 너는 아빠가 손닿지 못한 별들에 가 닿겠지. 지금은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초록빛 꿈들이 저렇게 가물가물 날아가는구나. 우리가 바라는 소망은 언제나 멀리 있는것- 눈앞에 보이는 것을 누가 소망이아 이름하랴? 카펫 바닥에 여덟 八 자로 누워 잠든 아이 옆에 종이비행기 하나 미래를 향한 출항을 기다리며 카펫 위에 하아얀 모습 사뿐히 착륙해 있다. 시 부문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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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소설 대상 우수상 부문 폭 우_신정순(미국) 엄마, 미안해_김민정(일본) 아이야 도망가_황희(미국) 가작 어둠 속에서_김 건(호주) 알렉산드리아의 여자들_아미라 L.S.리(이집트) 노래하는 밀라노_조민상(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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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폭 우 대상 신정순(미국) 몸이 왜 이렇게 떨리는지 모르겠다. 수술실 입구에는 수술 중 이라 는 네온사인이 붉은 야광 색을 띤 벌레처럼 불길하게 빛나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웬만한 무거운 것도 두 손으로 번쩍 들곤 하던 싼체스가 이토록 맥없이 수술대에 누워있게 되다니. 거리로 넘쳐난 빗물을 퍼내는 야간작업을 하면 이번 겨울에는 꼭 멕시코로 휴 가를 떠날 수 있다며 즐겁게 휘파람을 불며 집을 나갔던 싼체스였는 데. 문득 대기실 구석에서 히터가 쉬익 쉬익, 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형체를 드러내지 않고 몰래 남을 숨어 엿보고 있는 짐승의 숨소리 같기 도 했다. 이것을 계기로 공기 청정기, 필라멘트를 타고 흐르는 전등 안 에 고인 전기 등 평소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조용한 것들이 그동안 얼마나 우리 생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 기 위해 소동이라도 벌이는 것처럼 우우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텔레비전 리모컨의 작동 단추를 눌렀다. 천장 가까이 달려 있는 텔 레비전은 주파수가 잘 안 맞는지 바늘을 부수어 놓은 것 같은 자잘한 직선의 무늬들을 그리며 프라이팬에 전 부치는 소리를 냈다. 잠시 후 소설 부문 45

46 파란 눈의 백인 여자 아나운서의 얼굴이 나왔다. 밤 열한 시 뉴스에서 는 싼체스가 당한 사고를 제법 상세히 보도하고 있었다. 오늘 오후 아홉 시 경, 구십사 번 하이웨이 튜이 길 출구 가까이에 서 생긴 사고로 피해자는 중상을 입고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습니다. 이 번 사고는 싼체스 마카오 씨 차를 뒤따라가던 승용차가 갑자기 속력을 내면서 마카오 씨의 차가 서너 번 들이받으면서 생긴 사고로 추정됩니 다. 경찰은 마카오 씨의 차가 여러 번에 걸쳐 받힌 점과 사고 직후 조금 도 주저하지 않고 뺑소니를 친 점으로 미루어 이번 사고가 혹 고의적 살인 시도가 아니었나 의심하고 있습니다. 경찰은 이 사건을 다각적으 로 조사 중에 있습니다만 범인은 아직 체포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현재 구십사 번 하이웨이에서 튜이 길로 빠지는 곳은 사고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봉쇄되었으니. 여자 아나운서의 얼굴은 지지지, 수많은 바늘비 속으로 다시 사라져 버렸다. 실례합니다. 소리 나는 입구 쪽을 돌아보니 경찰복을 입은 거구의 백인 남자가 서있었다. 머리카락과 어깨 부분은 비에 젖어 있었고 허리춤에 권총을 차고 있었다. 상심이 크겠지만 몇 가지 질문에 아시는 대로 대답해주시기 바랍니 다. 경찰이 먼저 말을 꺼냈다. 혹 고의적 살인 사건이 아닌가 해서요. 아, 네. 46 재외동포 문학의 창

47 남편께서 주위에 원한을 살만한 친구나 이웃이 없었는지 생각나는 대로 자세히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경찰은 싼체스의 직장 생활과 그의 친구들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싼체스의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 본 적이 없고 그들이 초대하는 날에도 싼체스만 갔지 내가 동행 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에게 가까운 친척이 있는지 그가 몇 달 전 새로 옮긴 직장은 이름만 알 뿐 정확히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싼체스와 그래도 부부로 십 년 가까이 살았는데 그에 대해 이 토록 아는 것이 없다니. 나는 그에게 무엇이었고 그는 나에게 무엇이었 던가. 부부? 그냥 같이 한 공간에서 먹고 자고 하는 관계에 있는 남녀 가 부부라면 그와 나는 분명 부부다. 뺑소니 차 사고임에는 틀림없지만 좀 이상한 점이 있어서요. 목격 자 증언이 있었어요. 목격자 증언이요? 사건 현장을 목격했던 사람이 경찰서로 제보 전화를 해줬습니다. 혹시 주위에 까만 색 쉐비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없나요? 폭우 때문 에 운전자의 정확한 인상착의는 확실하진 않지만 멕시코 청년인 것처 럼 보였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멕시코 청년 중에 까만 색. 없는데요. 나는 단호한 음성으로 경찰의 말을 잘랐다. 이마에선 갑자기 진땀이 송글 배어나오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까만 색 쉐비 까만 색 쉐비 미국에서 가장 흔한 차가 까만 색 쉐비가 아닌가. 몇 천 대, 아니 몇 만대, 몇 십 만대가 넘을 지도 모른 소설 부문 47

48 다. 그리고 멕시코 청년. 이 나라, 아니 이 동네만 하더라도 멕시코 청 년이 얼마나 많은가. 며칠 전 마크를 데리러 온 요즘 만나기 시작했다는 멕시코 친구. 얼 굴에 칼자국이 나 있고 근육이 두드러진 팔에 문신이 새겨져 있는 그 친구가 까만 쉐비 차를 타고 왔다가 마크를 데리고 나간 적이 있었다. 퇴근길에 주차장에서 그 청년과 마크가 같이 차를 타는 걸 우연히 보게 된 싼체스는 평소와는 달리 눈살을 몹시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걘 누구야? 몰라. 요즘 사귄 친구 같아. 꼭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은 놈이야. 당신이 어떻게 알아? 멕시코 애니까. 하긴, 그건 한국 사람도 마찬가지다. 한국 사람끼리는 한 눈에도 서 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감각이 있다. 아까 그 놈은 눈빛에 살기가 들어 있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선 어떤 짓이라도 할 놈이지. 기회 봐서 마크에게 얘기 해 줘. 깊게 사귀진 말라 고 해. 내가 놀지 말란다고 안노나, 뭐? 지가 정신을 차려야지. 요즘 내 말 안 들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좀체 마크의 친구들에 대해선 이러쿵저러쿵 평을 하지 않던 싼체스의 말이라 마음에 새겨듣긴 했다. 언제 기회가 되면 넌지시 얘길 해 줘야지, 생각했는데 실제로 마크에게 한 번도 그 런 말을 하진 못 했다. 48 재외동포 문학의 창

49 마크에게 전에는 한국 친구가 있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마크와는 달 리 사 학년이나 되어서야 한국에서 이민을 와 영어가 서툴렀던 제이슨 은 늘 마크에게 숙제 도움을 받곤 했다. 하지만 제이슨 아버지가 주식 투자에 성공을 하고 제이슨이 과외 공부를 다니고 성적이 좋아지면서 마크는 제이슨과 부쩍 사이가 멀어졌다. 제이슨과 만나지 않는 마크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되었다. 멕시코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는 모습이 그 리 좋아보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말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않았다. 경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자세히 질문한다고 기분 상하셨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사 실, 보험회사 측에서 좀 더 자세히 조사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보험회사요? 혹시 모르셨나요? 오늘이 백만 불을 타는 보험 약정 기간 마지막 날인데. 가슴에서 쿵쾅거리는 박동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오는 듯하였다. 몰랐어요. 정말 몰랐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잊어버리고 있었다. 경찰은 윗도리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기록하기 시작했 다. 나는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경찰은 기록을 마쳤는지 수첩을 다시 집어넣었다. 물론 부인께 혐의가 있는 건 절대 아닙니다. 사고 시간에 집에 계셨 더군요. 어떻게 아셨나요? 그 시간, 아드님과 전화 통화를 했더군요. 보험회사에서 형사 사건 소설 부문 49

50 쪽으로도 알아봐 달라고 해서 전화 통화를 조사해 봤습니다. 아드님은 바텐더로 일하는 식당에서 막 퇴근을 하면서 전화를 했던 거구요. 아, 네. 아드님은 차가 없다는 게 확실한가요? 나도 모르게 음성이 높아졌다. 아, 아, 그렇죠. 아직 못 사줬어요. 직장에 갈 때도 모터사이클을 타고 다니지요. 그래. 마크에겐 아직 차를 못 사줬지. 중고차라도 사달라고 그렇게 졸랐는데 월부금이 부담스러워 야단만 쳤다. 기껏 사 준 게 제법 속도 를 낼 수 있는 고급 모터사이클이었다. 경찰은 잠시 고개를 떨어뜨리고 생각을 정리하는 듯 손으로 턱을 문 지르기 시작하였다. 내가 물었다. 아직 질문이 더 남았나요? 아, 아닙니다. 경찰의 주머니에서 부르릉, 전화 진동 울림소리가 났다. 경찰은 문자 를 들여다보았다. 아드님도 곧 도착할 겁니다. 그 쪽에서도 조사가 끝났다는 연락이 왔군요. 아, 그렇군요. 아들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를 보는 게 두렵기도 했다. 오 년 전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오랜만에 마크도 싼체스를 도와 생 일상을 차리는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크가 오븐의 조리 시간을 너무 50 재외동포 문학의 창

51 길게 조절해놓는 바람에 고기에 불꽃이 붙고 화재탐지기가 울리기 시 작했을 때 보험회사 직원이 들어왔다. 싼체스는 의자 위로 올라가 잔뜩 손을 뻗쳐 부엌 천장 한복판에 달 린 화재경보기를 뗐다. 경보기는 아쉬운 듯 삑삑 두어 번 더 소리를 내고는 잠잠해졌다. 활짝 열어둔 창문으로 신선한 바람이 들어오고 고 기 탄 냄새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당신도 이리 와 싸인 하지? 싼체스는 내게 펜을 내밀었다. 사람 일을 알 수 없잖아. 내가 죽거나 당신이 죽으면 각각 십만 불 씩 나와. 지난 번 친구 장례식엘 갔는데 갑자기 떠나니까 그 부인이 장례식 치룰 비용이 없어서 쩔쩔 맸다는 소릴 듣고 결정한 거야. 서류를 내밀던 보험회사 직원이 내가 싸인 해야 할 부분을 가리키며 말을 덧붙였다. 오 년 내로 두 분 중 한 분이 돌아가시면 배우자 위로금이라는 특별 보험금, 백만 불을 받게 됩니다. 감정이 전혀 들어있지 않은 사무적인 말투였다. 백만 불요? 나는 웃음이 기어 나오는 것을 입으로 가리며 싼체스를 쳐다보았다. 올해 가입자들에게 주는 특별혜택이래. 확률이 없으니까 회사에서 도 손해 볼 건 없고 가입자들 기분 좋게 해주자는 거겠지. 싼체스는 두 어깨를 으쓱 위로 올렸다가 내렸다. 직원은 서류를 챙겨 가방 속에 넣고 싼체스에게 먼저, 그리고 내게도 악수를 건네고는 문을 나섰다. 그때 등 뒤 쪽에서 쿵 소리가 났다. 마크 소설 부문 51

52 가 오븐에 들어있던 숯검정이 된 고기 덩어리를 쓰레기통에 처넣고 있 었다. 수술 중 이라는 네온사인의 불이 꺼졌다. 초록색 가운을 입은 의사 가 수술실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대기실에서 나와 그에 게로 걸음을 옮겼다. 진땀이 나기 시작했다. 의사는 안경을 벗으며 피 곤한 듯 입을 열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회복은 거의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사실 그 렇게 많이 다치고도 아직까지 숨을 쉰다는 게 기적에 가깝습니다. 재수 술을 하면 성공 가능성은 5퍼센트 정도인데 설사 성공한다 하더라도 중증 장애인이 될 겁니다. 산소 호흡기를 떼면 지금이라도 당장 생명을 잃게 될 텐데 어떡하시겠어요? 부인이 원하시면 언제든 산소 호흡기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대기실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간호사 가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싼체스의 아내로서 그의 재수술에 동의하느 냐 마느냐, 의사를 표시하는 서류였다. 재수술을 안 한다면 산소 호흡 기를 언제 뗄 것인지, 시간 표시도 정확하게 시, 분, 초까지 기록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재수술 동의 난에 동그라미 표시를 하였다. 5퍼센트, 아니 1퍼 센트의 확률이라도 그를 그냥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0.1퍼센트의 성공 가능성만 있어도 포기할 수 없다. 그래, 포기할 수 없어. 한 숨이 흘러 나왔다. 간호사는 내게 하얀 색의 위생용 가운을 내밀었다. 52 재외동포 문학의 창

53 환자분을 중환자 입원실로 옮겼어요. 가운을 꼭 착용하신 후 들어 가셔야 합니다. 친 가족 외에는 아무도 병실로 출입을 시켜서는 안 됩 니다. 아셨죠? 친 가족? 싼체스에게 핏줄을 나눈 친 가족이 있는가? 마크도 싼체스 의 친 가족은 아니다. 가운을 걸친 후 싼체스가 누워있는 입원실의 문을 밀었다. 이제까지 밀어 본 중에서 가장 무거운 문이었다. 싼체스는 나의 두 번째 남자였다. 첫 번째 남자는 당시 시카고 대학 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던 유학생이었다. 그를 만난 곳은 내가 웨이츄레 스로 일하고 있던 한국 식당, <고향집>이었다. 자기 이름이 장우현이 라고 소개한 그가 내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채 두 달도 걸리지 않았다. 과부였던 엄마는 미국에서 내내 불법체류자로 살다가 과로로 병을 얻 어 돌아가시고 열네 살에 고아가 되어 버린 나는 외로움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우현은 어느 날 내게 반지를 내밀었다. 반지를 받는 대신 나는 그동 안 열심히 부어온 적금 통장을 그에게 내밀었다. 우현과 살림을 차린 후로 몸은 더 피곤해졌다. 가정을 꾸리기 위한 일은 모두 내 몫이었다. 적금 통장에 넣어둔 돈은 일 년도 못 버티고 바닥이 났다. 일 년에 사만 불이나 되는 우현의 학비를 벌기 위해서 얼마나 일을 많이 해야 했던 가. 동거 전에는 그냥 <고향집>에서만 일해도 되었는데 이젠 새벽부터 이십사 시간 문을 여는 도넛 가게나 편의점에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 다. 파김치가 되어 집에 들어가면 빨래나 설거지거리가 잔뜩 쌓여 있었 소설 부문 53

54 다. 하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그땐 꿈이 있었다. 나도 곧, 그의 부인이 된다는. 그렇게 삼 년 반이 지났다. 어느 날 우현은 내게 이상한 말을 던졌다. 당신, 몽유병 환잔 줄 몰랐어. 몽유병 환자? 몽유병? 나는 웃었다. 그러다 금세 웃음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신 어젯밤 무슨 일 했는지 기억 안 나? 나는 공격을 당한 어린 짐승처럼 발끝이 절로 오므라졌다. 부엌에서 무슨 소리가 나서 다가갔더니 빈 도마 위에 헛 칼질만 하 더라고. 도마 위에는 아무 것도 없었어. 내가 말을 시켜도 눈길 한 번 안 주고 계속 칼질만 계속하더군. 한 이십 분, 삼십 분? 그러더니 그냥 침대로 들어가 자더라고. 나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초조했다. 만성빈혈 때문에 종종 어지럼증을 일으킬 때는 있었지만 내게 그런 병이 있는 줄은 정말 몰 랐다. 당신이 그렇게 무서운 사람인 줄 몰랐어. 우현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들렸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음부터 나는 자기 전에 꼭 칼을 손이 잘 닿지 않는 가장 높은 찬장에 올려놓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혹 도마를 꺼내거 나 칼질을 한 흔적이 있나 면밀히 조사해 보았지만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마침 식당이 쉬는 날이어서 낮잠을 자다가 54 재외동포 문학의 창

55 눈을 떠보니 우현이 커다란 이민 가방 두 개를 챙겨 택시로 운반하고 있었다. 당신 뭐하는 거야? 한국으로 떠나.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언제 돌아오는데? 안 돌아와. 뭐라고? 그가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젯밤에도 당신 또 식칼 들고 혼자서 빈 도마에서 칼질을 하더라 고. 언제 내 목에 칼을 들이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돈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신과 상담부터 받아보는 게 어때? 그 말을 한 후, 우현은 떠났다. 미련을 둘 만한 어떠한 말도 남기지 않은 채. 그가 떠난 지 한 달 쯤 되었을까? 그의 이름이 수신인으로 되어 있는 누런 봉투가 배달되었다. 시카고 대학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봉투를 뜯 어보니 박사 학위증서가 들어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그의 박사 과정이 끝났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우현의 공부는 늘 끝없이 계속되고 있 는 줄로만 알았다. 문득 천장에서 한 가닥 거미줄을 타고 거미가 수직 으로 내려오다가 내 숨소리에 위협을 느꼈는지 하강을 멈추었다. 거미 는 거미줄에 매달린 채 대롱거렸다. 나는 가까이 놓여있던 학위 증서로 놈을 힘껏 내리쳤다. 누런 진물이 증서 위에 길게 묻어났다. 거미는 박 제가 되어 납작하게 눌러져 붙어 있었다. 몸서리가 쳐졌다. 증서를 아 소설 부문 55

56 무렇게나 구겨 쓰레기 봉지에 처넣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알게 되었다. 내 뱃속에서 우현의 아기가 자라고 있 다는 것을. 그를 찾기 위해 수소문을 해 볼까. 생각도 해봤다. 그때 문 득 깨달았다. 나와 그를 연결해 줄만한 아무런 끈이 없다는 것을. 나는 왜 그의 가족, 친척, 친구의 전화번호 하나 갖고 있지 않았을까. 아니, 그는 왜 내게 자기 주위 사람을 단 한 명도 소개해 주지 않았을 까. 지옥 불구덩이 한 가운데 맨발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싼체스를 처음 만난 날은 유난히 해가 눈부시게 빛났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내가 좀 더 싼 아파트를 찾아 멕시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로 이사 오던 날, 햇볕에 잔뜩 그을린 그와 아파트 복도에 서 마주쳤다. 나는 배가 많이 불러 있었고 양 손에 이삿짐을 가득 들고 있었다. 나의 짐 보따리에 허벅지가 스쳤던 그는 반대편으로 가다 말고 다시 뒤돌아섰다. 한국 사람이시죠? 이리주세요. 제가 들어드릴게요. 제법 유창한 한국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의 어깨는 옷걸이 처럼 딱 벌어졌지만 짙은 눈썹 아래에는 물기가 많아 보이는 맑은 눈이 빛나고 있어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한국 가게에서 일하세요? 한국 가게에서 일하는 멕시코 사람 중에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 들이 더러 있다는 사실이 상기되었다. 아뇨. 우리 엄마가 한국 사람이에요. 그러고 보니 입술 선이 전형적인 멕시코 사람과는 달리 가늘어 보이 56 재외동포 문학의 창

57 는 것 같기도 했다. 그날 저녁 나는 그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그는 입술에 가득 미소 를 머금고 김치찌개와 야채 튀김이 놓인 식탁에 앉았다. 김치찌개 먹을 줄 알아요? 알다마다요. 아주 좋아해요. 그가 막 첫 숟가락을 입에 넣으려는 순간, 나는 그만 바닥에 주저앉 았다. 진통이 시작되었다. 그는 숟가락을 한 손에 든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어느 병원이에요? 제가 데려다 줄게요. 아파트에서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그만 차 뒷좌석에서 양수 를 터뜨렸다. 그리고 병원 침대에 눕자마자 아기가 나왔다. 아기의 첫 울음 소리가 들릴 때 백인 간호사가 말했다. 아들입니다. 안아보세요. 간호사는 내가 얼마나 기운이 없는지 고려하지 않은 채 아이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아기를 떨어뜨릴까 봐 손을 내저었다. 나, 나중에. 간호사는 아이를 초록 색 위생용 가운을 입고 옆에 서 있는 남자에 게 건네주었다. 싼체스였다. 아직 안 갔어요?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해서요. 그는 겸연쩍다는 듯이 웃으며 팔에 안겨있던 아기의 얼굴을 내 쪽으 로 돌려주었다. 한 눈에는 쌍꺼풀이 있고 다른 한 쪽 눈은 길쭉하고 가늘었다. 아기의 눈이 우현처럼 짝짜기인 것 같아 가슴이 덜컹 내려앉 소설 부문 57

58 았다. 간호사가 출생신고서 서류를 내밀었다. 아기 이름 난이 비어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가 이름 칸에 마크라고 적고 성을 적는 난에는 내 성을 따서 안 이라고 기입했다. 마크는 싼체스의 영세 명이자 중간 이 름이었다. 마크는 어느새 유치원생이 되었다. 나는 그날 직장에서 휴가를 받아 마크의 학교 소풍에 따라갔다. 버스는 시카고 다운타운 고층 건물 앞에 서 멈추었다. 꼬마들이 삐뚤삐뚤 줄을 지으며 걸어갔고 학부형들이 교 사의 지령에 따라 서너 명씩 아이들을 인솔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스파이더맨이다! 소리치는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고층 건물에는 높이를 알 수 없는 건물 꼭대기에서부터 동아줄로 만든 그네가 양 갈래로 늘어져 있었고 그 가운데 네모 판에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유리창 외부를 닦는 중이었다. 엄마, 싼체스야! 마크가 조그만 소리로 속삭였다. 마크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마 크가 직접 라이온 킹 그림을 그려 준 초록색 티셔츠를 입고 있는 싼체 스의 모습이 보였다. 싼체스는 스펀지가 달린 막대기를 움직이며 열심 히 유리를 닦고 있었다. 한 층을 다 닦았는지 그네가 출렁하고 한 칸 아래로 내려왔다. 눈이 부셔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속에서도 햇빛은 비 명을 지르며 주홍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그는 아파트 문을 잠그지 않았다. 문 근처에만 가도 늘 도미니카 커피의 진한 향기가 났다. 그는 커피를 마시면서 텔레비전 앞 58 재외동포 문학의 창

59 에 앉아 있었다. <야생세계>는 그가 즐겨 보는 프로그램이었다. 위험하지 않아요? 뭐가요? 유리창 닦는 거. 몰랐어요. 그냥 청소만 하는 줄 알았지. 아, 그거요. 유리 닦다가 샌드위치도 먹고 플라스틱 병에 오줌도 싸 고 하는데요, 뭐. 그가 넓적하고 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높은 데서? 높지 않아요. 높지 않다고요? 아래를 안 내려다 보거든요. 유리창만 보거든요. 일 층 유리창이나 백 층 유리창이나 똑같잖아요. 그거 알아요?.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나서 죽은 사람 확률보다 고층 유리 창 닦다가 죽은 사람 확률이 더 적다는 거요. 왜 그렇죠? 유리창 닦는 사람들은 대부분 밀입국해 들어온 사람들이에요. 죽다 살아난 사람들이지요. 밤에 총소리를 들으며 국경을 넘어본 사람들은 아무리 높은 곳에서 춤을 추라 해도 무섭지 않아요. 뒤에서 총 겨누는 사람이 없잖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엄마,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요? 엄마? 느닷없이 엄마 얘기는 왜? 나는 싼체스를 처음 만나던 날, 자 소설 부문 59

60 기 엄마가 한국 여자라고 말했던 것을 상기했다. 국경을 넘어오다가 돌아가셨어요. 밀입국 할 때요. 그믐밤이었지요. 캄캄한 들판을 기어가는데 뒤에서 총소리가 났어요. 미국 경찰들이 쏘 아대는 무차별 사격이었어요. 총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더니 바로 뒤에 서 사람 발자국 소리가 났어요. 들켰구나. 직감적으로 알겠더라고요. 내 옆에서 기어가던 엄마가 갑자기 내 등 위로 올라탔어요. 총알이 엄 마의 등을 뚫었어요. 난 그 덕에 살아났지요. 엄마가 내 귀에 대고 속삭 였어요. 잘 살아라. 죽어서도 널 지켜주마. 엄마의 마지막 말이었어요. 텔레비전에서는 작살을 맞은 상어가 더 깊은 바다 속으로 헤엄쳐 들 어가는 장면이 계속 되고 있었다. 석양빛에 물든 바다는 어디가 상어의 상처에서 나온 붉은 물이고 어느 부분이 석양빛인지 가늠하기 어려워 어지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가 새로 끓인 커피를 내게 내밀었을 때 나도 모르게 불쑥 이런 말 이 튀어나왔다. 몽유병 앓고 있는 사람 본 적 있어요? 싼체스는 무슨 소리냐는 듯이 내 쪽을 쳐다보았다. 마크 아빠가 그랬어요. 내가 몽유병 환자라고. 칼을 들고 자기에게 언제 덤빌지 모른다고 했어요. 그리고 며칠 후 날 떠났고요. 그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수면 제가 거기 묻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잠으로 가는 길이 거기서 시작되 기라도 한다는 듯이. 마크가 워싱턴으로 수학여행을 떠나던 날, 나는 싼체스의 아파트에 서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려 하니 뭔가 팔을 잡아당기는 것이 있었 60 재외동포 문학의 창

61 다. 끈이었다. 싼체스의 팔과 내 팔이 끈으로 묶여 있었다. 너무 단단 하게 묶여 있어 이빨을 사용하여 끈의 매듭을 풀어야 했다. 쿡, 하고 웃음이 나왔다. 한 번 터진 웃음은 계속 흘러나왔다. 오랜만에 아주 크 게 웃었다. 언제부턴가 서로의 팔에 끈을 묶는 일을 하지 않았다. 내가 부엌 정 리를 하지 못 하고 먼저 잠이 든 다음날 아침이면 전날 밤 과일을 깎아 먹느라 사용했던 칼이며 포크가 그냥 그대로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싼체스는 흉기가 될 만한 물건이라 해서 따로 높은 곳에 숨겨두거나 하지 않았다. 혹, 우현이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일었다. 마크가 중학생이 되던 해, 싼체스는 나와 결혼을 했다. 마크도 늘 자기에게 친절한 싼체스 아저씨가 아빠가 되었다며 좋아했다. 결혼식 을 특별히 올린 건 아니었다. 둘이 함께 시청에 가서 결혼신고 서류를 작성했고 나는 금반지를 그의 손에 끼어주었다. 싼체스는 내게 목걸이 를 내밀었다. 목걸이 가운데는 레이스 장식이 달린 수건을 머리에 덮어 쓴 성 마리아를 닮은 여인이 새겨져 있었다. 꽐라루페에요. 꽐라루페? 멕시코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고 믿는 성모상이에요. 엄마 가 늘 몸에 지니고 있던 목걸이에요. 나는 머리카락을 들어올렸다. 그가 등 뒤로 와서 목걸이를 내 목에 걸어주었다. 소설 부문 61

62 싼체스의 머리 부분은 온통 붕대로 감겨있었고 얼굴부분도 산소호흡 기로 덮여 있었다. 마크는 무얼 하는 걸까? 취조가 끝났다면서. 왜 아직 오질 않는 걸 까? 며칠 전 느닷없이 마크가 한 말이 떠올랐다. 싼체스를 사랑해? 갑자기 그건 왜 묻는데? 물어보면 안 돼? 글쎄. 나는 잠깐 망설였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지 않으면 같이 안 살겠지. 그래? 의외네. 마크는 무언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가죽 장갑을 낀 후 탁탁 손바닥을 두들기더니 거칠게 문을 닫고 나갔다. 아래층에서 오토바이 엔진 거는 소리가 부르릉 들려왔다. 나는 후욱,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정말 남편을 사랑하는가? 조금이라도 그를 사랑했다면 왜 그가 그렇게 아기 를 기다리는데도 몰래 피임약을 먹어왔던가. 병실이 춥게 느껴졌다. 실내온도 조절계의 눈금 바늘을 조금 올렸다. 바늘은 변화를 감당하는 게 힘들다는 듯이 파르르 떨었다. 싼체스는 지 금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답답했다.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걷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퍼붓 고 있었다. 번쩍, 번갯불이 비쳤다. 땅에서 꺾인 나무의 뿌리가 뒤집 혀진 채로 하늘 꼭대기로 올라가 제단에 바칠 제물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키고 하늘 이 편에서 저 편까지 달리고 있었다. 하늘이 쪼개지고 62 재외동포 문학의 창

63 있었다. 커튼을 다시 닫는 순간, 귀에서 윙 소리가 나면서 천장이 빙글 돌기 시작했다. 현관 바닥이 쑤욱 올라오기도 하고 꺼지기도 하더니 파도처 럼 일렁거렸다. 또 빈혈이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거의 기다시피하며 싼 체스의 침대 머리맡에 달려있는 비상벨을 향해 다가갔다. 벨에 손을 뻗 는 순간, 머리 위로 압력기 같은 것이 내리꽂히면서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둠의 실이 잔뜩 헝클어져 있는 공간 안에는 나도 그도 아무 도 없었다. 깨어나니 팔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다. 마크가 옆에 서 있었다. 엄마, 이제 깨어난 거야? 바로 오려 했는데 그러질 못 했어. 모터사 이클이 고장 났나 봐. 엔진에 물이 들어갔는지 시동조차 안 걸렸어. 택 시도 안 오겠다고 그러고. 장난이 아니었어. 한 치 앞도 안 보였거든. 그렇게 억수로 퍼붓는 비는 처음 봤어. 그래서 늦었어. 미안해. 싼체스 마지막 순간을 못 봤어. 마, 지, 막, 순, 간? 다시 한 번 빙글, 천장이 돌았다. 그가 죽었다. 그는 죽었고 나는 살아 있다. 마크는 커피 한 잔을 내게 내밀었다. 커피는 따스했지만 너무 쓰게 느껴져 마실 수가 없었다. 커튼 걷어줄까? 마크가 물었다. 마음대로 해. 소설 부문 63

64 빛이 와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너무 눈부셔서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벽을 향하여 모로 돌아누웠다. 엄마. 잘 했어. 싼체스도 엄마가 잘했다고 할 거야. 싼체스가 엄마 에게 살아서 줄 수 없었던 돈, 주고 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돼. 무슨 얘기야? 나는 몸을 다시 돌려 마크를 쳐다보았다. 심장이 마구 두근거려져 숨이 가빠졌다. 엄마, 혹시. 기억 안 나? 어젯밤 일? 아니. 아무 것도. 엄마, 새벽녘에 간호사한테 그랬다며? 싼체스 산소호흡기 떼어 달 라고. 보험회사 직원한테도 알려달라고 했다며? 의사한테는 직접 전화 까지 했다며? 재수술 안 할 테니 지금 당장 사망신고서 떼 달라고. 기 억, 안 나? 야근하던 간호사 둘 다 같이 들었다고 하던데. 숨이 콱 막혀왔다. 그래, 그런 꿈을 꾸었었다. 꿈인 줄 알고 꾸었었 다. 분명 꿈이었다. 꿈이어야만 했다. 내가 싼체스에게 그럴 수는 없었 다. 5퍼센트 아니라 1퍼센트, 아니 0.1퍼센트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수술을 해보아야 했다. 눈을 감았는데 그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가 걸어주었던 목걸이가 손에 잡혔다. 목걸이의 가운데에 달린 꽐라루페는 여전히 말 이 없었다. 문득 눈앞에 어떤 여인이 떠올랐다. 모습의 윤곽은 있는데 무게감이 없는 듯한 얼굴. 멕시코 복장을 한 한국 여인이었다. 가난 때 문에 멕시코 농장까지 흘러 들어와 멕시코 남자와 결혼을 하여 싼체스 를 낳았던 여인. 국경을 넘다 아들의 몸을 덮고 아들 대신 죽어갔던 64 재외동포 문학의 창

65 여인. 싼체스가 자기 인생의 중심이었던 여인. 얘기로만 들었지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여자가 왜 이토록 또렷이 떠오르는 걸 까. 여자의 얼굴은 잠시 꽐라루페의 얼굴과도 겹쳐졌다. 여자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정신을 잃어 아무 생각을 하지 못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노을빛이 바다에 잠겨든 듯한 그런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마크가 문을 열자 검은 정장 차림을 한 남자 가 들어왔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가 생명보험 회사 직원 이라고 소개하며 한 손에 들고 있던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기 시작했다. 보험회사 직원은 문가에서 마크와 몇 마디 말을 나누는 듯하더니 악 수를 나누곤 나갔다. 마크가 내 한 쪽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한 손길이었다. 엄마. 잘 할게. 아들의 목소리에 오랫동안 쉬지 않고 달려왔던 사람이 오랜만에 쉴 때의 안심 같은 것이 묻어났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입안이 꺼끌꺼끌 했다. 물만 마셨는데 도 모래가 잔뜩 씹히는 듯 했다. 눈꺼풀이 주체할 수 없이 무겁게 느껴 지기 시작했다. 소설 부문 65

66 엄마, 미안해 우수상 김민정(일본) 엄마와 딸 새벽 2시. 화장실에서 나와 냉장고로 향한다. 요 며칠 잠이 들면 새벽녘에 꼭 한 번씩 깨게 된다. 임산부를 위한 잡지에 따르면 엄마가 되는 준비 라 설명되어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3시간에 한 번씩 모유를 수유해야 하고 그 준비로 엄마가 자꾸 밤에 깨게 된다는 거다. 엄마가 츠키시 수산시장까지 가서 사온 가자미조림 한 접시, 엊저녁 손님치레 때문에 엄마가 삶아둔 호박잎과 쌈장, 엄마가 싸준 콩나물, 시금치 가지 무침이 가득한 타파웨어 몇 개. 결혼하고 4년이 지나도 냉장고엔 엄마가 가득했다. 허기를 채우기엔 충분하지만 딱히 먹고픈 게 없다. 냉장고 두 번째 칸, 야채실을 당긴다. 먹다 남은 멜론, 엄마가 한국 수퍼마켓까지 가서 사온 참외 여섯 개, 엊저녁 손님이 가져온 포도 한 송이. 엄마대신 손님을 택한다. 얼른 포도 서너 알을 입으로 옮긴다. 66 재외동포 문학의 창

67 너 뱄을 때 엄만 포도만 먹었어. 아예 포도밭까지 가서 먹었다니 까. 아들이래. 아들은 나아 뭘 하려구? 아들이 얼마나 번거로운지 알어? 걔네들은 엄마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한다니까. 그리고 여자 생기면 또 어떤 줄 아니? 엄마한텐 1원도 아까우면서 여자한테 명품 갖다 바치고, 여행까 지 시켜주고. 아들을 낳겠다구? 엄마는 우리 애가 딸이 아니란 사실을 서글퍼했 다. 아들, 아들, 반복하면서 한숨을 쉬었던가. 처음 임신을 했다고 전했을 때도 엄마는 기뻐하지 않았다. 마지못 해 축하한다고 덧붙여 준 거 같기도 하지만 엄마 얼굴엔 실망감이 가 득했다. 아이가 있으면 사는 게 얼마나 힘든데. 평생 애 걱정해야 한다구. 엄마는 애 보는 사람이 집에 있어서 키웠지, 안 그랬으면. 엄마는 늘 그랬다. 나 걸스카웃 할래. 걸스카웃? 그런데 가서 뭘 배 우겠어. 겨우 캠핑이나 가는데 아니니? 엄마는 그날 당장, 당시는 국민 학교라 불리던 초등학교로 찾아와 날 컴퓨터부에 입부시켰다. 엄마, 음 악 선생님이 나보고 성악을 해보라는데. 성량이 좋고 목소리가 고와서 전문가한테 한 번 지도를 받아보는 게 좋겠대. 너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음대 나와서 뭐 먹고 살라구? 너 지금 고2야. 지금부터 무슨 성 악을 하겠다는 거니? 음악 같은 소리 집어치우고, 책이나 읽어! 그러나 엄마는 공부를 하라는 남들 엄마완 달랐다. 공부하란 소린 초등학교 입학부터 대학 졸업까지 장장 16년간 단 한 번도 입에 올린 소설 부문 67

68 적이 없었다. 그치만, 난 안다. 엄마가 내 성적표에 늘 만족하고 있었단 사실을. 나처럼 복잡한 머리상태와 정신상태를 가진 아이에겐 공부하 란 소리보다 그냥 두는 것이 가장 적절하단 사실을. 엄마가 공부하란 소리를 하지 않은 덕에 난 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다른 엄마들처럼 공 부하라고 한 마디만 해 줘, 엄마. 시험 잘 봤다고 칭찬해줘, 엄마. 엄마는 언제나 부엌에 서서, 창밖으로 봄엔 수국을 내려다보며 가을 엔 감나무에 열린 떫은 감을 보며 묵묵히, 마치 내겐, 아니 내 성적엔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 책이나 읽어. 아니면, 늘 당당하게 살아라고 덧붙일 뿐이었다. 당당하게! 성적위주로 돌아가는 학교에서 당당하기 위해선 공부밖엔 별 도리가 없단 사실은 학교에 석 달만 가보면 익히게 되는 진실임을 엄마는 어찌 그리 잘 알고 있던 것일까. 참 한 가지 더 있었지. 아빠 없는 아이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도 공부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닐지 몰라도 학교의 카스트는 성적순으로 매겨지니까. 그날 신주쿠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제야 같이 사는구나. 라며 엄 마가 데려간 곳엔 일본어만 말하는 일본인 남자가 있었다. 3년 만에 우린 또다시 네 식구가 되었다. 난 고교생이 되어있었다. 남자는 수더 분했고, 성격도 좋았다. 나와 동생은 조용했고, 우린 매주 외식을 하는 겉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는 가족이 되었다. 그치만, 그저 식구에 불과 했다. 밥을 같이 축내는 식구. 밥 때문에 이어진 인연. 목숨을 연명하 68 재외동포 문학의 창

69 기 위한 타지 생활에서 엄마가 고른 건 나와 동생을 부담스럽지 않게 생각해줄 남자가 아니었을까. 가끔 저 남자가 없었으면,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것도 아니었다. 남자는 가끔 지나치게 수다스러웠다. 남자는 아빠처럼 술을 좋아했지만, 아빠처럼 주정을 부리는 스타일은 아니었 다. 아빠처럼 여자에게 손찌검을 하는 스타일도 아닌 것 같았다. 그치 만 아빠처럼 과묵하고, 속이 깊어보이지도 않았다. 아빠처럼 고독하고, 달관된 눈빛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치만 아빠처럼 키가 컸고, 아빠 처럼 노래도 잘했다. 하지만, 그는 아빠가 아니었다, 물론. 신주쿠 역엔 서문, 동문, 남문이 있다. 서문을 나오면 도쿄도청이 있 고, 스미토모 빌딩이며 힐튼 호텔, 게이오 프라자 호텔, 하야트 호텔 높다란 건물이 즐비하다. 폭 넓은 인도를 무작정 걸을 수 있는 서문은 신주쿠를 처음 밟은 그 날부터 마음에 쏙 들었다. 밤이 되면 일본 최고 의 환락가가 된다는 동문도 나쁘지 않았다. 호객꾼들 중엔 안녕하세 요? 라 한국어로 손님을 끄는 흑인들도 있었다. 최고의 환락가란 단어 에 걸맞지 않게 그곳은 쿨 했다. 고교 교복을 입고 걸어도 치근덕대지 않았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활보해도 그들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최고 의 환락가에서 길 거리를 걷는 여자는 손님이 될 수 없었다. 손님이 아닌 여자에게 가부기쵸는 아무 관심이 없는 듯 했고, 일본최고의 환락 가는 평범한 여자에겐 치안면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 의심할 여지도 주지 않았다. 1992년 그해는 곧잘 비가 내렸다. 신주쿠엔 서문, 동문, 남문 모두 외국인들로 넘쳐났고, 교복을 입고 돌아다니면 가끔 차 한 잔 어떠냐 는 아저씨들도 있었지만 한국과 다를 것도 없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 소설 부문 69

70 은 일본은 어때? 한국이랑 어디가 틀려란 편지들을 보내왔지만, 과연 어디가 다른지 아무래 생각해봐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럴 땐 틀려가 아니라 달라란 단어를 쓰는 거야. 건물이 똥그래, 여자들이 하나같이 다 뚱뚱해, 굴러가려하고 있어, 게다가 코끼리 뿔처럼 커다란 덧니도 있어, 바닷물이 달아, 하늘색이 샛노래, 뻔한 거짓말을 쓰는 일도 없었 다. 틀려가 아니라 달라란 단어를 써줬음 어디가 다른지 찾아내려 노력 이라도 해볼 수 있었을 텐데 말야. 포도 사갈까? 아니 괜찮아. 순대를 먹으러 갈 생각이야, 엄마는? 난 속이 안 좋아서 순대는 됐구. 그나저나 애 낳으면 일은 어쩔 건 대? 집에서 놀 거니? 모르겠어. 원 이렇게 대책이 없어서야. 엄마의 혀 차는 소리가 들린다. 츳. 츳 츳. 나 이제 일하러 들어갈래.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대책 없는 내게 엄마는 그 소리가 하고 싶었던 것일까. 420엔짜리 우동 한 그릇에 젓가락도 채 대지 못한 채 레인보 브릿지 를 바라본다. 인공적으로 만들었다는 이 섬은 남들에겐 오아시스일지 몰라도, 정작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겐 무인도에 가깝다. 후지 티비 18층 사원 식당에서 내려다보면 이 인공섬이 얼마나 삭막한지 알게 된 다. 바다 위로 걸쳐진 저 다리며, 그 사이사이를 달리는 차들, 그리고 70 재외동포 문학의 창

71 전철까지. 텅 빈 망망대해 같은 건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 가슴이 후련 한 바다가 그립다. 모든 걸 다 털어내도 받아줄 바다가 그립다. 오다이 바 비치엔 파도조차 일지 않는다. 그래도 사람들은 여름이면 수영복을 입고 찾아와 뭐 그리 신이 난다고 바다 앞에서 폼을 잡는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모래성을 쌓고, 공놀이도 하고, 여름햇볕에 한 손을 들어 눈을 가린다. 답답해. 처음부터 엄마가 축하를 해주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치만 섭섭했다. 오바이바의 밋밋한 바다가 섭섭한 것처럼. 당당하게 살아야 돼. 누구 앞에서라도 당당하라구! 엄마가 원하는 당당함엔 경제적인 요소들도 고스란히 포함되어 있었 다. 대학을 졸업하고 엄마는 내게 기자가 되길 권했다. 도쿄도내 신문 사에 입시지원서를 내고 시험을 봤지만 번번이 필기에서 낙방이었다. 일본 역사가 부족했고 일반상식도 부족했다. 솔직히 준비조차 하지 않 았다. 기자가 되라 기자가 되라. 엄마의 말은 늘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가끔 엄마는 꿈에 나타나 기자가 되라고 했다. 엄마의 아빠는 종군기자 였다 한다. 엄마가 날 키우면서 가장 강조해 온 것은 여자도 자기 힘으 로 먹고 살아야해, 그래야 이혼도 하지. 늘 당당해야해. 내 나이 스물이 되었을 때 엄마는 말했다. 이제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할 나이야.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 아. 그치만 네 인생의 책임은 니가 져 엄마는 그 날로 내 용돈을 끊었다. 태풍이 북상해도 내 빨래만큼은 거둬들이지 않았다. 난 이모 친구한테 소개받은 야끼니꾸점(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소설 부문 71

72 시작했다. 일 년 내내 일해도 대학 학비는 모아지지 않았다. 일본 최고의 명문 사립대는 수업료만 해도 백만 엔은 더했다. 엄마가 내니까 걱정하지마. 용돈을 자르긴 했지만 엄마는 대학학비만큼은 어떻게든 자기가 대겠 다며 작은 바를 하나 오픈했다. 그 무렵 엄마의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 져버렸다. 어느 날 갑자기 소리 소문 없이 우리 식구가 되었던 남자는 소리 소문 없이 집을 나가버렸다. 엄마는 나도 이 나이 되서 남자 밥해 주고 빨래해주는 거 진이 빠진다 며 아무 일 없다는 듯, 오히려 가벼워 진 듯 헤벌쭉 입을 벌리고 웃었다. 엄마의 가게는 생각보다 손님이 많 았고, 금세 단골이 생겼다. 엄마는 바가지를 씌우는 일이 없었고, 화학 조미료도 사용하지 않았다. 한 손님의 조카가 일한다는 농장에서 농약 을 쓰지 않은 야채들을 다량으로 사들이기도 했다. 고기는 꼭 일본산을 고집했다. 말이 술집이지 실은 엄마 반찬을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더 많을 정도였다. 그러나 단골이 생겨도 수용인원이 열도 채 안 되는 가 게에서 나오는 돈으로 대학학비를 마련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 괜찮아. 지금까지도 먹고 살았는데 뭐. 그때부터일까, 엄마에게 미안하단 마음이 생긴 게. 기자가 되지 못했 을 때도 미안했던 거 같다. 아니, 미안한 마음은 처음부터 있었다. 늘 미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빠는 지방유지의 장남이었다. 소 백 오십 마리, 수만 평이 넘는 논, 옥수수 밭, 양계장, 그 동네 모든 땅이 아빠의, 아니 할아버지 것이 라 해도 좋을 터였다. 매년 잘 알지도 못하는 지역에서 할아버지 또는 72 재외동포 문학의 창

73 할머니, 또는 증조할아버지 이름의 땅이 나왔다. 아무도 얼마나 땅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 그 동네 사람들은 모두 아빠의, 아니 할아버지의 소작농이거나, 머슴이거나, 일꾼이었다. 동네 아줌마 들은 식모였고, 보모이기도 했다. 라디오를 가장 먼저 산 것도 아빠네 집이었고, 티비를 보러 서른 명쯤 되는 동네사람들을 처음 모은 것도 아빠네 집이었다. 명절엔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안방, 건넌방, 사랑방, 마루에도 부엌에도 할머니가 잘 다듬은 정원에도 상이 차려졌다. 하루 에도 수 십 번은 밥상을 차려내야 했다. 증조할머닌 거지를 위한 쌀과 반찬까지 준비해두었다. 그들은 밥을 먹고 갈 때도 있었고, 밥을 싸갈 때도 있었다. 가끔은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다가 소모는 쉐파트 견 케 리에게 물려, 쌀을 더 달라 소리소리 지르기도 했다. 아빠는 집을 비우면, 석 달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빠가 집을 나가서 뭘 했는지, 엄마는 결코 묻지 않았다. 아니 물었는지도 모른다. 아빠 언제와? 대신 내가 물은 것도 같다. 엄마는 조용히 날 바라봤다. 그게 처음이 었을까. 괜히 엄마한테 미안했던 게. 아빠가 돌아오지 않는 밤의 숫자만큼 아빠가 돌아온 후 부부싸움은 심했다. 왜 결혼했어? 당신이 그러고도 아빠야? 애들 크는 거 몰라? 그러다가 엄마는 흐느꼈고, 비명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엄마, 내 가 잘못했어. 아빠 내가 잘못했다니깐. 아빠는 비교적 온순했다. 늘 미소를 띄고 있었다. 술만 안 마시면 그는 부처님이고 예수님이었다. 남들에게 늘 친절했다. 돈 없다고 찾아 오는 친구는 빚보증을 서주고, 술 마시러 찾아오는 후배에겐 상다리가 소설 부문 73

74 부러져라 대접했다. 나와 동생을 데리고 곧잘 여행을 떠났다. 자연농 원, 서울대공원, 대천해수욕장, 해운대, 설악산, 부곡하와이. 운전 을 좋아하는 아빠는 차를 바꾸기 일쑤였고, 경찰을 따돌리며 아이들을 태운 차를 대한민국 전역으로 몰았다. 여권 만들기도 수월찮던 시절, 국내긴 했지만 우리 반 그 어느 아이보다도 여행을 제일 많이 한 아이 가 되었다. 어느 성당에서 아빠는 난 숨 쉬는 것도 죄요 라 신부님께 속삭였다. 아빠는 아무래도 천성이, 아니 천성은 착한 사람 같았다. 열 살 나던 여름날 아침, 커튼이 드리워진 방, 엄마 혼자 침대 구석 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걸 발견한 그 아침. 아빠는 어디 갔을까. 엄마 눈에 생긴 시커멓고 커다란 멍을 보면서 내내 미안했다. 엄마, 엄마를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그날 우리는 짐을 쌌다. 아빠가 돌아가신지 얼마나 되었던가. 그런 걸 일일이 기억할 만큼 인생은 순탄하지 않다. 아빠 없는 아이를 둘씩이나 안고 엄마는 격정의 날들을 보내왔다. 그녀가 오밤중에 돌아와 눈물 흘리며 신세 한탄을 할 때도 우리 묵묵히 들어줄 도리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아, 인생이 여! 그 참혹함이여! 엄마를 보면서 삶은 오롯이 자신만의 몫이며 정신적이나 경제적인 보살핌을 아주 약간 얻을 수는 있지만 완전한 삶의 위로를 얻기란 불가 능에 가까운 일이란 걸 일찍이 고교시절에 깨닫지 않았던가. 엄마는 6남매의 3째 딸로 태어났다. 엄마네 집안은 유독 딸이 많았 고 그 딸들은 모두 미인이었다. 엄마는 특히나 그랬다. 그 시절에 쌍꺼 풀이 굵은 눈에 코까지 오똑했던 것이다. 게다가 듣기론 공부도 꽤나 74 재외동포 문학의 창

75 했다고 한다. 그 시절, 성적순으로 분단을 메기던 때 엄마는 8분단 중 늘 1분단이나 2분단에는 앉아있었다니 말이다. 엄마의 단아한 고교시절 사진은 고스란히 엄마의 성격을 말해준다. 엄마는 대학에 가고 싶었겠지만, 6남매의 3째 딸을 챙겨줄 만큼 시대는 부유하지 않았다. 고교를 졸업한 엄마는 은행에서도 일하다가 음악다 방 디제이로 직업을 바꾸고, 서울에서 유명한 미인으로 등극했다. 서울에서 대학생을 하던 아빠는 엄마에게 첫눈에 반했고, 그치만 엄 마에게 반한 건 아빠뿐만이 아니라 그 음악다방 모든 청년들도 그러했 으리라, 매주말 시골에서 달걀 한 판에 배추까지 싸들고 와 엄마가 일 끝나고 나오길 온종일 기다렸다 한다. 이런 아빠에게 반한 건 엄마가 아니라 음악다방 안주인과 엄마의 엄마와 아빠였다.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을까, 엄마에게, 그리고 아빠에게. 여하튼 엄마가 학벌 콤플렉스를 가진 건 아니지만, 엄마는 알고 있 다. 남편 없이 홀로된 여자를 취업시켜 줄만큼 세상이 안이하지 않다는 것과 아이 둘 키우는 데 드는 희생은 자신의 인생의 절반 이상을 소비 해야 한다는 사실도. 엄마는 나와 동생을 정말이지 반듯하고도 남 을 대학에 진학시켰다. 공부를 워낙에 어릴 적부터 좋아해서 그놈의 리 포트들을 밤새 써냈고,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그래, 여기까지는 엄마의 시나리오대로였다. 딱 여기까지만! 일본 최고의 사립 명문대를 졸업하고도 난 취업을 하지 않았다. 세 상에 어떤 직업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취업을 하다니, 그건 내 인 생론과 정말이지 맞출래야 맞출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내 친구들 처럼 토요타니 소니에 무작정 들어가기엔 왠지 꺼림칙했다. 인간을 파 소설 부문 75

76 멸시키는 대기업이라는 편견을 그 시절 난 고스란히 가슴에 파묻고 있 었다. 지금은 대기업에서 오라면 설설 기어서라도 가버릴지 모를 그런 정 신의 소유자가 되었건만, 그 시절엔 그랬다. 졸업하고 놀 수만은 없어서 작은 출판사에서 기자 일을 시작했다. 3년쯤 일하다가 이런 저런 인연이 생겼고, 후지 티비 리서치팀에 발탁 되어 방송 일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특별히 재미나지도 않았고 화려하 지도 않았다. 방송국은 밖에선 의리쩡쩡 하지만 그 안은 별나지도 않 다. 넘쳐나는 서류, 블라인드가 내려진 창문, 특종 때문에 잠 못 자는 사람들과 피눈물도 없는 경쟁, 카스트제도보다 더한 계급사회였다. 방 송국 정직원은 잡일 없이 연출자가 되었고 제작사 직원은 밤샘을 천일 해봐도 AD에 만족해야 했으며, 프리랜서는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몰라 주말 출근도 마다하지 않았다. 노이로제 때문인지 프리랜서 중엔 1년 365일 목을 가려주는 목티만 고집하는 중년 남성도 있었다. 목이 약 해서 그래 란 그의 변명을 목이 날아갈까 봐 그래 로 듣는 사람들은 물론 한 둘이 아니었다. 엄마가 원하고 원하던 신문기자는 아니었지만 기자 근처에서 얼쩡거 린 건 분명하다. 그리 햇볕 쨍쨍 나는 일자린 아니었다. 엄마는 딸자식 을 못미덥고 안쓰러워했다. 어떻게 키운 딸이 그 좋은 대학을 나와 겨 우 리서치 팀에서 일하는 건지, 도대체 왜 엄마는 못간 대학을 나온 딸이 겨우 임신이나 해서 주부가 되려고 하는 건지 엄마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알기에 딸은 요즘 유행하는 엄친아였다. 성적은 초중고 단 76 재외동포 문학의 창

77 한 번도 빠짐없이 전국 상위권이었고, 일본에 와서 현역으로 대학에, 그것도 명문 사립대에 입학했으며, 딸 주변엔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남녀노소 불구하고 명랑하고 친절한 딸애를 누구든 마음에 들어 했다. 연극 무대에서도 늘 주인공을 맡아왔다. 딸이 무대에 설 때면 어찌나 감동을 했는지. 대학에선 밴드의 보컬을 맡아 행사 때마다 박수갈채를 받아온 딸의 남다른 재주에 손님들 앉혀놓고 딸자랑에 바쁜 날도 있었 다. 도대체 그런 딸이 왜? 뭐 때문에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주부가 되려는 걸까? 열 재주 있는 놈이 밥을 굶는다더니. 가슴 한 켠이 서늘했다. 엄마한테 결국 말하지 못했다. 엄마가 원하는 직업을 갖기엔 때가 너무 늦었어. 엄마, 차는 이미 떠난거라구. 미안해. 미안해. 딸과 아이 엄마는 결국 임신을 축하한다. 고 웃어주지 않았다. 도대체 어쩔 작정이냐고 묻고 또 물었다. 일은 어떻게 할 거야? 애는 아무나 키우 는 줄 아니? 도대체 니가 하는 게 뭐가 있어? 애 낳으면 평생 걱정이 야 난 대답하지 않았다. 괜한 싸움을 하기엔 나도 나이를 너무 많이 먹 어버렸다. 서른이 다된 딸에게 엄마란 존재는 서글픈 것이다. 미간에 푹 패인 주름을 볼 때마다, 점점 가늘어져 모델보다 더 날씬한 다리로 마켓에서 산 물건을 양 손에 들고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볼 때마다 소설 부문 77

78 가슴 한 켠이 서늘해졌고, 눈시울은 뜨거워졌다. 아빠가 죽고 얼마가 된 걸까. 아빤 여전히 삼십대인데, 엄만 이제 육십을 바라보고 있다. 아빠 없는 아이를 아빠 있는 아이처럼 키우기 위해 엄마가 얼마나 애써 왔는지는 굳이 되돌아보지 않아도 가슴에 그리고 내 온몸의 피와 살이 되어 남아있다. 엄마의 투정을 들을 때마다 괜시리 아이를 갖은 게 아 닌가 미안해졌다. 솔직히 미안할 건 없었다. 미혼모가 되는 것도 아니 고, 아직은 이혼할 건덕지도 없으며, 잠시 일을 쉬게 되어도 프리랜서 로 번역 일을 맡으면 가계에 조금쯤 도움이 될 만 했다. 엄마의 기대엔 미치지 못하겠지만. 어느새 성큼 가을이 다가와 있었다. 그치만 더위는 두풀은 커녕 한 풀도 죽지 않고 있었다. 도쿄는 여전히 30도를 웃도는 기온에 냉장고에 들어가지 못한 양배추처럼 축 늘어져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입덧은 천 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야마나시에서 났다는 씨 없는 피오네 포도는 흑빛이 요염했고, 이탈 리아에서 난 게 아닐까 싶은 로사리오 비앙코는 길쭉한 모양새가 서양 스러웠다. 오까야마의 히로타 모리마사가 품종을 개발했다는 네오 마 스컷은 연초록빛이 싱그러웠다. 냉장고엔 빨강 파랑 노랑 검정 다양한 빛을 발하는 포도들로 가득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의 포도들로 가 득했다. 엄마는 올 때마다 오늘은 이세탄 백화점에서 오늘은 오다큐 백 화점에서 오늘은 동네 시장에서 포도를 구입해왔다. 아이를 낳으면 어떡할 건데? 애 키우는 게 장난인 줄 아니? 그거 보통일 아니야. 란 잔소리를 해가면서도 포도가 떨어질 만하면 초인종 을 눌렀다. 포도뿐이 아니었다. 오이지무침, 각종 나물과 김치, 간장 게 78 재외동포 문학의 창

79 장, 다랑어 회, 쑥떡이며, 떡볶이 떡, 신오쿠보의 한국 슈퍼마켓에서 사 왔을 뻥튀기 과자들도 모두 엄마가 가져온 것들이다. 엄마는 어느새 우 리 냉장고 안에 사는 사람이 되었다. 순산 기원 복대를 챙겨온 것도 엄마였다. 일본에 사니 일본식으로 하자며 내 허리에 복대를 채우고 사 진을 한 장 찍었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엄마생각이 났다. 엄마가 사온 로사리오 비앙코 한 송이를 해치우고 전철에 올랐다. 그 무렵 난 후지 티비 14층 정보방송 제작국에 사요나라(마지막 인사) 를 하고 집에서 뒹굴다 지쳐 자동차 교습소에 다니고 있었다. 5센티 짜리 속눈썹을 붙인 그녀의 네일 아트는 예쁘다기보다 커다란 큐빅이 너무 많아 혐오스러웠다. 독특하지도 않았고 과하다 싶었다. 게 다가 그녀는 철지난 발이 다 들여다보이는 샌들을 신고 있지 않은가? 패션의 기본은 구두와 가방인데도 말이다. 가을이 무르익은 이 계절에 갈색 화장을 하고 샌들을 신은 그녀의 모습은 5센티짜리 속눈썹 마냥 어색하게만 보였다. 전철에서 우연히 내 옆에 서있던 그녀는 내 앞자리 가 비자, 임산부인 나를 제치고 그 자리에 앉았다. 임신 6개월, 서 있는 게 힘들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매우 불쾌해졌다. 천차만별. 운전교습소에서 8번 운전을 하면서 8명의 강사를 만났다. 그 8명은 다 제각기 가르치는 법도 다르고 운전하는 법도 다르고, 중요 시 여기는 부분도 달랐다. 말 그대로 천차만별이다. 엄마가 된다. 천차만별의 엄마중 하나가 된다는 거다. 난 어떤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적어도 늦가을에 샌들 신는 그런 무감 각한 엄마가 되고 싶진 않다. 5센티 눈썹 붙이고 위화감을 못 느끼는 무분별한 엄마가 되고 싶진 않다. 외적인 부분이나 패션센스가 문제가 소설 부문 79

80 아니다. 임산부에게 자리 양보도 못하는 엄마만큼은, 절대 되고 싶지 않다. 아이는 부모를 보고 자란다. 강인하고 튼튼하면서 여린 감성을 가진 아이로 성장하도록 도와줄 수 있었음 좋겠다. 분별력과 사고력과 타인의 마음이나 타인의 경우를 상상하는 상상력도 있었음 좋겠다. 아이를 위해 나부터 많은 걸 돌아봐야겠다. 먼저 자세부터. 바르게 앉기, 바르게 걷기, 바르게 먹기. 지금까지 살아온 것보다 더 열심 히 나를 살아야하는 이유가 또 이렇게 찾아오는구나. 엄마, 차는 이미 떠났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포기해. 엄마만 빼곤 모든 게 순조로웠다. 남편은 마냥 기뻐하고 있었다. 남 편에게 바란 건 술 안 하는 사람이란 단순한 조건 딱 하나였다. 그는 술만 안 하는 게 아니라, 바람을 피우지도 않았고 소란을 피우지도 않 았고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 그는 자상했다. 매주 일요일이면 화장실 을 직접 청소했고, 집 주변을 둘러싼 잡초들을 뽑아냈다. 자전거를 깔 끔히 닦는 일도 그가 좋아하는 일이었다. 밥맛이 없다고 투정대지도 않 았고, 반찬이 적다고 밥상을 엎는 일도 없었다. 먹고 싶은 게 있을 땐 휴대전화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 그거 못하는데 라 문자를 보내면, 그 는 수퍼마켓에 들려 재료를 사와 직접 만들어 내게 맛을 보였다. 그가 만들어주는 스키야끼와 오꼬노미야끼는 일품이었다. 10년을 혼자 살아 온 그에게 가사일은 번거로운 일이 아니라 일상의 일부였고 차곡차곡 해나갈수록 쾌적함을 가져다주는 노력한 만큼 결과를 내주는 드문 일 중 하나였다. 가사 일은 수학 문제 같았다. 끈기를 가지고 풀어내면 대 부분 해답이 보였다. 80 재외동포 문학의 창

81 그는 대학동창이었다. 연극 무대에 서겠다는 포부로 가득한 끼있는 학생들 사이에서 그는 늘 묵묵했다. 그에겐 서늘한 아우라가 넘치고 있 었다. 그는 쓸데없는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늘 정확하고 냉정하게 다른 학생들을 평가했다. 그 대사는 쓸데가 없어. 네 감정은 슬픔이 아니라 과장이야. 그 웃음소리도 마찬가지라구. 과장만이 연기 가 아니야. 제발 좀 대본을 읽고 이해를 해와. 아닌 건 아닌 거야. 그는 연극 동아리를 박차고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동아리 학생들은 모두 그를 부담스러워했다. 아무도 그에게 다시 돌아오라 요구하지 않았다. 책상 한 귀퉁이에 박혀있던 쓸모없는 못 하나를 빼버린 기분이었다. 난 가끔 그를 떠올렸다. 내가 제대로 가는 건지 기분이 꿀꿀할 때, 연극무대가 끝난 후 관객 반응이 시원찮을 때, 취업활동 때 한국인이란 이유로 원서 접수를 거절당했을 때, 사랑하는 남자가 바람을 피웠을 때, 별 갖은 이유로 그가 그립곤 했다. 졸업 후 우연한 기회에 재회한 후, 그와 결혼을 했다. 망설임 따윈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가 정답이었다. 엄마의 대답은 시원스러웠다. 어차피 일본에 살건데 일본남자랑 결혼하는 게 당연하지. 엄마답게 쿨하고 합리적이었다. 어떤 이는 모국어가 다르단 이유로 내게 비수를 던졌다. 정작 결혼 하는 건 나인데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 걱정을 했다. 그러나 그가 한국말을 못한다고 해서 그게 내 가슴을 찢어놓을만한 결점이 될 수는 없다. 같은 언어를 말해도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 모르는 프랑스어를 말해도 왠지 필이 꽂히는 날도 있지 않은가. 말 이 안 통해 결혼생활이 오래 못가면 어쩌지? 글쎄다. 중요한 건 가슴이 소설 부문 81

82 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불행에 대해 걱정만 하는 머리가 아니 다. 어차피 헤어질 인연이라면 그건 언어 문제가 아니라 성격차일 수도 있고, 운명일 수도 있는 법이다. 같은 나라 사람끼리 결혼해도 헤어지 는 게 인생 아닌가. 남들은 국제결혼이라 하지만, 내게는 그냥 연인일 따름이다. 가장 따뜻한 연인, 내일 일은 나도 모르니까 말야. 포도를 백 송이쯤 먹어치웠을 무렵이던가. 가을 냄새가 폴폴 풍기고 있었다. 신주쿠 서구 쪽에 늘어선 상록수들의 빛깔은 점점 더 짙은 초 록으로 변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발걸음을 서둘렀 다. 무작정 초콜릿이 먹고팠다. 메종 드 쇼콜라. 프랑스에서 일찌감치 들어온 그 초콜릿 전문점엔 코코아보다 농도가 짙은 초콜릿 100퍼센트 음료를 판매한다. 가격은 한 병에 2천 엔이 넘는다. 선물이나 하면 했 지, 내 몫으로 사기엔 여간 아까운 게 아니다. 메종 드 쇼콜라의 그 초 콜릿 드링크가 먹고 싶어진다. 임신을 하면 먹고자하는 욕심이 풍선처 럼 부풀어 오른다. 오모테산도로 갈까. 거긴 너무 먼데. 근데 임산 부에게 초콜릿은 독이라던데? 카페인이 들어있다나 뭐라나. 친구 들 중 가장 먼저 아이를 가진 하나가 아이를 낳으면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도 먹을 거구, 맥도널드도 갈 거야. 참, 모스 버거의 모스 치즈 버 거의 그 소스, 토마토가 듬뿍 든 잘게 썬 양파가 춤추는 그 햄버거를 서너 개는 먹고 싶다. 롯데리아의 새우 버거도 좋아. 피자도 실컷 좀 시켜먹고 싶어. 하던 투정이 떠올랐다. 날이 갈수록 임산부에 대한 절 제는 심해졌다. 먹어선 안 될 것들이 투성이인 세상천지에 매일 신선처 럼 먹고 살라니. 의사들은 임신중독증을 남발하며 먹는 것부터 자 82 재외동포 문학의 창

83 제시켰다. 포식의 사회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는 임신했을 때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라 메종 드 쇼콜라의 초콜릿보다 더 맛있는 초콜릿이 나왔대. 장 폴 에반 가봤어? 문득 회사 동료의 말이 떠올랐다. 이세탄 백화점의 장 폴 에반 앞은 대여섯의 손님들이 진을 치고 있 었다. 입구엔 실내 온도 유지를 위해 손님 수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한 분씩 안내할 테니 기다리십시오. 란 안내 문구가 표시되어 있다. 뜬금없이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초콜릿을 먹어야해. 꼭 먹 어야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초콜릿이라잖아. 매일 초콜릿만 먹고 사 는 어떤 여자 탤런트도 추천한 곳이란 말야. 조금만 더 기다려 봐. 안 돼,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구, 화장실로 직행해. 아. 아. 하아. 내 손은 어느새 배를 감싸고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봐. 저기 직원이 나오고 있잖아. 하아. 아. 아. 후우. 그 손은 어느새 배 밑으로 내려가 있었다. 아. 아. 배가 뭉친 거 같아. 화장실로 가라구. 하아. 후우. 아. 후우. 다이죠부?(괜찮아요?) 아냐, 아이가 나오기엔 일러. 책에서만 보던 라마즈 호흡법이 입 밖 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후우, 쓱, 후우, 쓱, 하아. 순대가 먹고 싶어. 수술실에서 나와 마취에서 채 깨지 못한 상태에서 난 순대를 찾았다. 아이를 잃고도 뱃속은 아직 그 사실을 터득치 못했는지, 아니면 6개월 소설 부문 83

84 새에 아이를 핑계로 탐욕스러워졌는지 잔인하게도 난 먹을 걸 찾았다. 순대? 그게 뭐야? 그걸 어디서 사? 그는 괜찮냐고 묻기 전에 순대가 뭐냐고 묻는다. 내가 지금 순대가 먹고 싶다고 했어?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에게 물었다. 응, 그랬어. 6인용 병실은 조용했다.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느라 그런지 일본 대학 병원의 병실엔 제각기 커튼이 쳐져 있었다. 360도 날 감싼 커튼 안은 가을인데도 더웠다. 옆엔 누가 있는 걸까. 내 옆에 누워있을 여자들의 존재는 커튼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안쓰러운 듯 내 옆에서 나보다 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엄마 울지 말고 이제 가.. 자꾸 울거면 집에 가라구. 나도 안 우는 데 엄마가 도대체 왜 울어? 그래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자꾸 왜 이래? 집에 가라니까. 이 기집애야, 딸이 이렇게 누워있는데 엄마가 눈물이 안 나오겠어? 엄마 왜 아이를 가졌냐고 그랬잖아. 어떻게 키울 거냐고 그랬잖아. 그래 엄마가 미안해. 도대체 엄마가 뭐가 미안한데? 이제 엄마가 원하던 대로 된 거 아 냐. 안 그래? 엄마는 그 길로 병실을 나가버렸다. 엄마가 울면서 나갔던 거 같기 도 하고, 눈을 흘겼던 거 같기도 하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던 것 같기 도 하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게 아니었어. 난 그냥 엄마의 축하한 84 재외동포 문학의 창

85 다는 그 말 한 마디가 듣고 싶었던 거야. 맨 처음부터 말야. 다른 엄마 들처럼 임신을 축하한다고 듣고 싶었어.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동시에 원망이 내 기억 저편에서부터 올라 왔다.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엄마는 그 많던 재산을 할아버지에게 그 대로 돌려주어야했다. 하루 아침에 경제력을 잃은 엄마는 두 아이를 데 리고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을까. 서른 여섯 엄마에게 일자리를 주는 곳 은 없었다. 엄마는 자기 언니가 있는 일본을 향했다. 엄마는 내가 엄마 처럼 되는 것만은 피하고 싶어했다. 공부를 잘 했고, 글 쓰는 걸 좋아했 으니 기자가 되어 세상 곳곳을 다니며 자유롭게 살아주기를 엄마는 원 했다. 그치만 엄마가 원하는 길은 누구나 다 환영받는 길은 아니었다. 취업시험에서 떨어진 사람에게 기자가 되는 길은 프리랜서 밖에 없었 다. 그치만, 엄마는 딸이, 아니 우리 딸이라면 뭐든 다 해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엄마는 내가 일본이란 타국에 있는 사실도 잊고 사는 거 같았다. 차별 받아보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타국에서 성공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글 또는 말 로 일본인들과 상대를 겨루는 건, 지난 내 이십 대를 뒤돌아보면 치열하고 또 치열하고, 때로는 더럽 고 자존심 상하고 상처받을 수 밖에 없는 시절이었다. 아니, 무엇보다 도 내 자신에 대한 불신과의 싸움에서 조금씩 조금씩 웅크려 들다보면 이내 자존심도 자신도 사라지고 남는 건 삶에 대한 회의뿐이었다. 얼마 나 날 갉아먹어야 글은 태어나는지 얼마나 날 갉아먹어야 기획은 창조 되는지. 그런 값비싼 고민이 아니라 갉아먹을 흔적조차 남지 않는 자신을 뒤덮기 위해선 담요 한 장만으로 택도 없이 벅찼다. 내게 있는 소설 부문 85

86 건 남들보다 몇 번 더 상을 쥐어준 글 솜씨와 남들보다 조금 빼어난 관찰력과 남들보다 아주 조금만 우월한 인내였을 뿐. 인맥도 연줄도 아 무것도 없었다. 물론 노력이 부족했다는 건 만인이 아는 사실이니 새삼 끄적이기도 불편하구나. 단지 무모함만큼은 넘치고도 남을 만큼 가지 고 있었는데 삼십이 되면서 모든 게 더욱 불편해졌다. 신문기자가 되지 못한 게 한처럼 느껴졌다. 엄마가 원하는 직업을 못가져 준 게 너무나 도 미안했다. 아이를 유산하고 병실에 누워있는 내 자신이 한심했다. 그냥 아팠다. 아이는 얼마나 아팠을까. 옆 커튼 안에 들리지 않게 숨을 죽이고 눈물을 닦았다. 닦아도 닦아도 멈추지 않았다. 그럴수록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엄마는 왜 나한테 공부하란 소리를 안 한거야? 왜 기자 말고 다른 회사 시험을 보라고 안 한 거야? 왜 엄마 는. 근데 말이지, 그 어릴 적 그렇게 춤을 좋아하고 노래를 좋아했 던 나한테 엄마는 왜 발레를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일까? 그놈의 텔레비 전 컬러바가 나오는 5시에서 5시 30분까지 클래식 컬러바에 따라 나오 는 클래식 음악에 맞춰, 회전을 수백 번 해도 엄마는 그게 내 특기인지 아직도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난 발레리나나 뮤지컬 배우가 되었음 했 는데 말야. 엄마란 아이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면서 실 은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닐까. 그날 밤 울다 잠든 사이 누군가 다녀갔다. 침대 곁에서 바스락 거리 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였다. 난 눈을 뜨지 않았다. 숨을 죽이고 옆으 로 고개를 틀었다. 엄마가 의자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십분쯤 지났을 까. 엄마는 날 깨우지 않고 머리를 쓰다듬은 후 자리를 떴다. 엄마 의자 위엔 바스락 거리는 비닐 봉투가 놓여있었다. 봉투를 뜯었다. 김이 모 86 재외동포 문학의 창

87 락모락 솟아올랐다. 순대! 서른이란 나이는 혼자임을 감출만한 여력을 충분히 가지고도 남는구나. 결단코 외롭지 않은 사람 마냥 방바닥을 뒹군다. 결단코 외롭지 않다고 누군가의 방명록에 끄적이고 내 자신의 게시 판에 끄적인다. 외로움이나 그리움을 다 감추고 과연 글을 쓸 수나 있을까. 고독의 고고함 없이 탄생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조용한 밤이구나. 아이의 유골이 놓인 텔레비전 옆 탁상 위에 우유를 따르고 짧은 기 도를 바친다. 당분간은 아이의 유골과 함께다. 아마 그 영혼과는 평생 함께겠지. 아멘. 조용한 밤이구나. 타이핑 소리가 밤을, 방을 울린다. 아이를 잃고 가장 많이 생각하는 건 엄마인 거 같다. 엄마는 간혹 삼계탕을 해서 가져오기도 하고 도가니탕을 끓여놓고 가기도 했다. 삶이 잔혹하단 사실을 아빠는 죽음으로 엄마는 삶으로 내 게 가르쳐줬다. 엄마가 뼈 빠지게 일해 봤자 서민이란 겨우 학교가고 밥 먹는 게 전부였다. 아빠가 살아있을 때 그리도 자주 가던 여행 같은 건, 아빠가 돌아가신 후 단 한 번도 떠나지 못했단 사실을 난 그쯤에서 기억해냈다. 그치만 삶이 아무리 잔혹해도 싸우고 또 싸우고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도 아빠와 엄마가 알려주었다. 엄마는 늘 웃음을 잃지 않았 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자기 바에 서서 새벽 4시까지 일을 하면서도 소설 부문 87

88 엄마는 자기 걱정보다 우리 걱정을 더 많이 했다. 나이가 들면서 엄마 는 입버릇은 하나였다. 나 죽을 때 장례비는 남겨놓고 죽어야지. 제발 깨끗하게 갔으면 좋 겠다. 몸 아파서 너희들 고생시키지 말구 엄마가 그런 말을 할수록 왠지 딸은 더더욱 미안했다. 엄마랑 난 아주 친한 친구처럼 지내고 있지만 우리 둘은 너무 많이 달라서 엄마가 내게 속내를 보여줘도 딸인 내가 엄마한테 내 맘을 보여 주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솔직히 뭐, 내가 속을 보여준 일이 얼마 나 있겠는가. 늘 혼자였다. 학창시절엔 아빠 뭐 하냔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고, 작은 집으로 친구들이 놀러오는 것도 꺼려했다. 뭐 하나 흠이 라도 잡힐까봐 조심해야했다. 엄마, 여행 한 번 못 시켜드렸는데. 내 것만 좋은 걸로 챙기고 엄마 것은 챙기지도 못했는데. 막상 여행 시켜드리고 뭔가 챙기려하면 쑥스럽기도 하고, 별 것도 아니면서 생색부터 내려한다. 엄마가 아이를 축하하지 못했던 건, 엄마의 인생이 서글펐기 때문일 수도 있고, 딸에 대한 꿈이 너무 컸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치만 여전 히 섭섭했고, 아이의 죽음이 엄마 탓인 냥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머릿속은 복잡했다. 엄마가 밉다가도 고맙고 고맙다가도 밉고 괜시 리 눈물만 흘렀다. 그날 밤 병원에서 혼자 순대를 손으로 집어먹었다. 신주쿠 역에서 20분은 걸어야 있을 손으로 만든 순대집의 순대는 찰떡처럼 차지고 속 까지 꽉 차 있었다. 엄마, 고마워. 결국 난 엄마한테 고맙다는 말을 하 88 재외동포 문학의 창

89 지 않았다. 미안하단 말을 목젖 뒤에 숨기고 사는 것과 동일한 이치다. 조용한 밤이구나. 시간은 잘도 가는구나. 울어도 가고 웃어도 가고, 울면서도 보내고 웃으면서도 보내고 그래 시간은 잘도 가는구나. 잘 살아야하는데 자꾸 막연해진다. 아빠가 자신의 죽음으로 남겨준 게 있다면, 살아있는 것 자체에 만족 하란 충고였다. 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야 물론이지만, 그 어떤 고 뇌 앞에서도 생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아빠의 죽음을 통해 익혔다. 목 숨이 어찌나 끔찍한 건지, 그걸 지키는 게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 인지 죽은 후에도 아빠는 늘 가슴속에 살아서 끊임없이 삶을 감사하라 고 삶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라 고 속삭였다. 근데 자꾸만 욕심이 앞선 다. 창조해내고 생산해내고 길러내고 싶다. 창조와 생산이 없는 빈곤한 삶을 어찌 받아들이면 좋을지 모르겠다. 눈물은 짜고 짜도 또 나왔다. 12월 어느 날. 아이를 묻고 돌아온 바로 다음날, 생리가 왔다. 이제 몸이 본 상태로 돌아오고 있다는 시그널이다. 몸은 마음보다 가끔 더 단단하고 더 솔직하고 더 생리적이며 더 인 간적이고 더 야만적이다. 몸은 늘 내게 살아라 살아라 그리 가르친다. 사는 건 늘 죽음과 연계되어 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따름 이다. 그건 슬퍼해야 하거나 아파해야 할 일이 아니라 당연하게 받아들 여야 할 진실인 것이다. 아이의 유골이 없는 집은 서늘했다. 이제 우유를 살 일도 아기 과자 소설 부문 89

90 를 사올 일도 없구나. 아이가 내게 남겨준 건 무얼까. 그 죽음으로 내가 깨달아야 할 건 무얼까. 탄생 없이 떠나간 너에게 엄마로서 난 앞으로 어찌해야 하는 걸까. 너도 태어났음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픈 아이가 되었을까. 우 린 왜 만나지 못했을까. 우리 서로 미안해하는 사이였음 좋았을 것 을. 아이는 꿈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형체도 없이 사라진 아이를 어떻게 끌어안으면 좋을지 난 알지 못했다. 미안해. 미안해. 백 번을 사죄해도 천 번 무릎을 꿇어도 용서를 완벽하게 빌 수는 없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일상은 조용히 내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의 흔적을 미니 홈피에서 지워나가는 대신 내 머릿속에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새겨두기로 했다. 삶은 내게 자꾸만 미안한 사람들을 만들어주고 있다. 엄마, 미안해. 아이야, 미안해. 그리고 여보, 미안해. 미안할수록 삶을 풍요롭게 살아 야겠다고,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마치 초등학생의 기도처럼 중얼거 려본다. 90 재외동포 문학의 창

91 아이야 도망가 우수상 황희(미국) 뾰족하게 다듬어진 손톱에 세게 힘을 줘 손등을 힘껏 찔렀다. 마음 이 검은 새처럼 죽었을 때 통각도 함께 죽은 걸까. 손톱이 살을 파고들 었지만 아프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언젠가 엄마가 물었다. 어째서 손톱을 그렇게 길러 삼각형으로 자르고 다니느냐고. 불량스러워 미치 겠다고. 삼각형 뾰족한 손톱은 내 자신을 찌르기 위한 흉기다. 엄마가 미국으로 온 것은 내 공부 때문이 아니라 종교의 자유를 위해서란 걸 나는 알고 있다. 학교에서 돌아와 열쇠로 문을 열자 햇빛을 등져 낮에도 어두컴컴한 아파트 거실이 드러났다. 한 발자국 거실로 들어서는데 어두침침한 실 내에 누군가가 현관을 노려보며 앉아 있었다. 순간적으로 오싹했다. 다 음 순간 그것이 엄마라는 것을 알았다. 심장이 불쾌하게 두근거리기 시 작했다. 엄마가 눈치를 챈 것일까? 아무리 물어도 대답을 안 해 주시네. 우리주님께서. 엄마의 시선은 아무데도 보고 있지 않았고 목소리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신경질적인 날카로움이 감춰져 있었다. 엄마? 거기서 뭐해? 소설 부문 91

92 이게 모두 너 때문이야! 엄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엄마한테 지금까지 거짓말을 했어. 엄마가 노려보자 나는 발끝으로부터 한기가 스며 올라오는 것 만 같 았다. 한기는 정강이를 타고 무릎까지 올라가 심장을 마구 흔들어대고 있었다. 너 학교 급식시간에 한 번도 감사기도를 하지 않았지? 해, 했어. 했다고! 안했어. 한 번도 안했어. 쪽팔리기 싫어서 안했어. 거짓말! 이년이 어디서 거짓말을 해! 그래 거짓말이야. 엄마도 거짓말을 하잖아. 거짓말 아니야! 매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감사기도를 했단 말이야. 두 명의 내가 차례로 소리를 질러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는 쪽이 훨씬 셌다. 아니야. 입 닥쳐. 네가 뭐래도 내가 다 알아. 널 잘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는 거야. 네 친구들한테 전화해서 다 물어봤어! 기도하는 거 한 번도 못 봤단다. 일루와! 회개해!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 싫어! 나는 하느님 안 믿어! 목사들이 먹고 살려고 마음 약한 사람 들을 끌어들이는 거래. 할머니가 그랬어. 학교 애들이 날 얼마나 이상 하게 보는지 알아? 만날 학교로 찾아오는 엄마 때문이야! 나는 미리 도망칠 생각부터 하며 현관 벽 쪽으로 바싹 붙어 섰다. 뭐얏! 92 재외동포 문학의 창

93 엄만 제 정신이 아닌 듯 마구 소리를 질러대며 나를 향해 닥치는 대 로 물건을 집어던졌다. 그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거칠게 냉동고 문을 열고 꽁꽁 언 고깃덩이를 꺼내 도마 위에 쿵! 하고 내려놓았다. 막 식칼을 잡으며 바 락바락 목에 핏대를 세우는 것을 보던 나는 집이 부서져라 세게 현관문 을 닫고 나왔다. 엄마는 언젠가는 나를 버리고 도망칠 것이다. 그런 상황이 오면 어 떻게 해야 할지 미리 계획을 세워 놔야한다. 먼저 한국의 할머니에게 국제 전활 걸어야 하고 엄마의 돈을 훔쳐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 표를 어떻게 사는지 알아야한다. 택시를 어떻게 부르는지도. 그것 세 가지만 준비해 놓으면 국제 미아가 되진 않을 것 같았다. 쭈그리고 앉아 신경질적으로 숙제를 꺼냈다. 어째서 나는 빨리 자라 지 않는 것일까. 한밤 자고 일어나면 어른이 되어 있을 수는 없을까? 빨리 지긋지긋한 여기서 떠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면 좋을 텐데. 사 람들이 기러기 아빠라고 부르는 내 아빠가 그랬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 이들이 해야 할 일은 공부라고. 공부만 잘하면 지긋지긋한 모든 것에서 빠져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고 했다. 늘 산수 45점. 이번엔 반드 시 백점을 받고 말 것이다. 나는 연필을 꼭 잡고는 산수 문제를 노려보 았다. 속으로는 퍽(fuck) 하고 욕을 했다. 영어로 욕을 배우는 건 몹시 쉽다.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곧바로 따라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산 수 문제는 아무리 노려보아도 어떻게 푸는 건지 떠오르지 않았다. 엄마 한테 물어보면 영어로 된 문제를 엄마가 어떻게 아냐며 수업시간에 잘 듣지 뭐했냐고 쥐어박을 것이다. 그러면서 또 기도를 하겠지. 산수 문 소설 부문 93

94 제를 계속 노려보자 눈알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문득 산수 문제 가 흐릿하게 보인다 싶더니 한국에 있을 때 동네 아줌마가 겁을 주며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네 엄말 교회 못 가게 막는 사람은 모두 죽어.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숙제해야해. 저리 꺼져. 시도 때도 없이 불 쑥 불쑥 떠오르는 목소리들은 숙제를 방해하는 악당이었다. 늘 거짓말 이 이기듯이 악당들이 이겼고 숙제는 늘 해가지 못했다. 산수 문제에 집중하고 싶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교회를 못 가게 막는 네 할머니를 슬쩍 밀어 다리를 부러뜨리고 나 서는 시치미를 뗐어. 공중목욕탕 바닥이 미끄러워 넘어 진거라고. 그래 놓고 시어머니 다리 얼른 낫게 해달라고 새벽기도를 다녔지. 누구든 네 엄마가 교회 가는 걸 막으면 교묘하게 다치게 될 거야. 그러니까 너도 네 엄마가 교회에 가는 걸 막아서는. 그만 해! 나도 모르게 입이 소리를 냈다. 눈을 질근 감고는 두 손으로 눈을 가 렸다. 눈을 가리니 이상하게도 더 잘 보인다. 겁에 질린 내 얼굴을 손가 락질하며 앞니 빠진 동네 아줌마가 깔깔깔 웃고 있다. 눈까풀 밑에서. 엄마는 저녁 예배를 보기 위해 떠났다. 엄마의 구두 발자국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갑작스럽게 집안이 조용해졌다. 지금까지 들리 지 않았던 괴상한 노래 소리가 귀속을 파고들었다. 위층 백인 애들이 틀어놓은 음악 소리였다. -엄마 방금 한 사람을 죽였어. 총을 그의 머리에 겨누고 방아쇠를 94 재외동포 문학의 창

95 당겼어. 진짜 이상한 노래야. 나는 천정을 노려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부서 져라 세게 문을 닫고 자물쇠 3개를 모두 걸어 잠갔다. 문을 잠글 때마 다 꺼림칙한 것은 누군가 밖에서 강제로 뜯고 들어온 듯 나무 기둥 쪽 으로 움푹 팬 칼자국이었다. 우리가 이사 오기 전에 어떤 사람들이 살 았던 걸까. 그 사람들 강도를 당했을까. 그래서 이사를 간 거겠지? 잠 시 궁금증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침입하려고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 도 들어오는 거지. -삶은 막 시작되었을 뿐인데. 노래는 계속 들려왔다. 나는 컵라면을 먹고 소파로 와서 손톱을 다듬기 시작했다. 어제 보 다 약간 더 길어진 것 같았다. 손톱 줄로 좀 더 뾰족한 삼각형으로 간 다음 검은 색 매니큐어를 칠했다. 하느님이 금지하시는 모든 나쁜 일들 이 TV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염되기 때문에 집에는 TV도 컴퓨터도 없 었다. 컴퓨터를 사용해야 하는 숙제가 주어지면 난감했다. 그때마다 걸 어서 트윈브룩 공공도서관으로 가야 했다. 나는 양말을 벗고 발가락을 꼼지락 거려 보았다. 발톱도 손톱처럼 삼각형으로 뾰족하게 다듬고 검은 매니큐어를 칠했다. 사람의 간이라 도 파먹을 수 있을 것 같이 뾰족한 손톱과 발톱은 나의 방어수단. 누군 가 나를 때리려고 들면 그 인간의 팔과 얼굴을 새빨갛게 할퀴고 말 것 이다. 나는 실제로 누굴 할퀴기라도 하는 듯 고양이처럼 손톱을 세우고 허공을 휙 하고 긁는 흉내를 내며 야옹 하고 울었다. 집 밖으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사이렌은 언제나 사람을 불안하 소설 부문 95

96 게 만든다. 그건 엄마랑 함께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다쳤다. 누군가 죽어간다. 세상은 살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 죽지 못하면 살아 야 하는 일상. 그런 무언의 위협을 주려는 것이다. 사이렌 소리는 언제 나 저쪽 끝에서 옅은 소리로 달려와 엄청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 다음 저쪽 끝으로 사라져간다. 그랬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점점 가깝게 들려오던 사이렌 소리는 우리 아파트에서 큰 소리로 울려대더 니 뚝 끊겼다. 누군가 죽은 걸까? 문을 열고 내다보고 싶었지만 혼자 있는 게 들킬까봐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어둠 속에는 항상 지켜보는 눈이 있기 마련이다. 지켜보고 있다가 누군가 경찰에 신고한다. 문득 현관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아찔했다. 노크 소 리는 한 밤중이라 그런지 심장이 철렁할 정도로 크게 들려왔다. 불길 했다. 입으로 손톱과 발톱을 후후 세게 분 다음 발꿈치로 일어나 슬쩍 블 라인드 밖으로 내다보았다. 나와 자주 어울리는 흑인 에니와 그 애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일까? 혹시 학교에서 약간 다 퉜는데 그것 때문에 엄마까지 데리고 온 것일까? 아무도 없는 척 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체인을 풀지 않고 문을 조금 열었다. 엄마는? 어른이 커다란 눈을 굴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애니의 동그란 눈도 문틈으로 들어왔다. 그럴 줄 알았다. 흑인 여자는 뭔가를 심하게 따지 러 온 것이었다. 에니의 겁에 질린 듯, 뭔가에 주눅 든 듯한 눈빛이 모 두 말해주고 있다. 96 재외동포 문학의 창

97 목욕하는데요? 좀 나와 보시라고 해. 목욕하다가 어떻게 나와요? 뭐? 여자는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럼 아빠는? 아빤 회사에서 아직. 나는 눈썹하나 떨지 않고 거짓말을 한다. 너, 혹시 혼자 있는 거 아니니? 여자가 잠시 말을 멈추고 확인을 하려는 듯 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아니라니까! 엄마! 나는 일부러 엄마를 부르는 척 하면서 욕실로 달려 들어갔다가 흑인 여자가 들으라는 듯 혼자서 엄마와 말을 주고받는 척 연기를 한 다음 다시 달려 나왔다. 엄마가 중요한 일 아니면 내일 보자는 데요? 흑인 여자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더니 다시 말했다. 너 오늘 놀이터 갔었지? 아파트 놀이터라면 플라워벨리 초등학교 버스가 도착하는 곳이었다. 아이들은 버스에서 내리면 놀이터에서 놀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대부 분의 아이들처럼 나도 놀이터에서 10분 정도 놀다가 집으로 온다. 오늘 도 그랬다. 아줌마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듣고 있다가 네 엄마한테 그대로 소설 부문 97

98 말해줘야 해.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러 온 게 아니라고 생각되자 눈에 힘을 풀었다. 앞 동에 사는 여자 아이들 둘이 죽었어. 엄마한테 말하면 교살 이 뭔지 알아듣기 쉽게 말해줄 거야. 여자 아이 둘 다 밤에 혼자 집에 있다 가 그런 변을 당한 거래. 낮에 놀이터에서 군인 모자를 눌러 쓴 상의군 인처럼 보이는 남자가 죽은 아이 둘한테 이것저것 묻는 걸 다른 아이들 이 봤데. 너한테도 물었다면서?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깜짝 놀라 마구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자리에서 군인과 이야길 했다고 하면 소문이 나서 FBI가 찾아올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혼자 있을 때 찾아온다면 큰일이다. 아뇨. 난 거기 없었는데? 여자가 인상을 쓰고 나와 에니를 번갈아 보았다. 있었다는 소릴 들 었는데 왜 거짓말을 하는 거지? 하고 추궁하는 것 같았다. 난 거기 없었다고요! 알았어요? 큰 소리로 소리치고는 여자의 얼굴 앞에서 문을 꽝 닫아버렸다. 그리 고 금세 후회했다. 에니의 엄마는 그렇게 말하겠지 저 따위 년이랑은 놀지 마. 못 배워 처먹은 년. 쳇, 친구라고는 그래도 에니뿐이었는데. 여자가 가고 난 뒤 재빨리 자물쇠를 모두 걸어 잠그고 창문도 잠겼 는지 확인했다. 그다음 방안으로 달려 들어가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자꾸 흑인 여자의 말이 생각났다. 여자 아이들 둘이 죽었데. 혼자 집에 있다가 변을 당한 거래. 너한테 도 물었다면서? 98 재외동포 문학의 창

99 엄마한테 전화를 할까. 전화해서 무서우니까 와달라고 하면 와 줄 까?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와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 기도 중에 전 화 받는걸 얼마나 싫어하는데.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난 엄마의 휴대 전화 번호를 눌렀다. 나는 신호음이 끊길 때까지 들고 있었지만 결국 엄마는 전화를 받아주지 않았다. 전화를 끊는 동안 새로운 분노가 치밀 어 올랐다. 휴대폰이 울리면 번호 확인부터 한 다음, 필요한 전화라고 생각되는 전화만 받고 다른 전화는 무시하는 엄마를 매번 봐왔다. 필요 없는 존재가 된 기분이란. 땅바닥으로 꺼지고 싶을 뿐이다. 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려왔다. 무서 워서 몸을 더 웅크리니 의외로 따듯해져 졸음이 왔다. 하지만 자면 안 된다. 다시 두 눈을 부릅떴지만 어느새 끄덕 끄덕 졸고 있었다. 잠결에 불쑥 불쑥 생각지도 못했던 영상들이 튀어나오며 좀 더 깊은 꿈길로 이끌었다. 꿈속에서 나는, 아파트 아이들과 놀고 싶어 놀이터에 우두커 니 서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차 있던 놀이터는 텅 비어 있었다. 벗겨진 페인트 밖으로 녹슨 쇳덩어리가 보이는 놀이 기구 들만이 부슬부슬 내리는 가랑비에 젖어가고 있었다. 그 위로 늦가을 밤 의 어둠이 짙은 안개를 토해냈다. 얼굴을 돌리자 음산한 안개에 싸인 나무 가지에 덩어리들이 매달려 있었다.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보자 덩어리들은 목이 매달린 아이들이었다. 모두 하체가 발가벗겨진 여자 아이들이었다. 비명을 질렀는데 목구멍이 비명을 토해내지 못했다. 갑자기 등 뒤에 서 쇠붙이 같은 것으로 벽을 긋는 소리가 났다. 소스라쳐 놀라 돌아보 자 칼을 든 군화를 신은 사람이 걷고 있었다. 나는 꿈속에서 그가 살인 소설 부문 99

100 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위엔 개미새끼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얼굴 없는 남자는 우리 집 아파트 문 밖에 멈춰 서고는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낄낄거렸다. 목에 건 여러 개의 군번들이 서로 부딪히며 쩔렁 쩔렁 소리를 냈다. 내 얼굴을 아는 것들은 죽어야 해. 혼자 있으면 안 돼. 밤에 혼 자 있는 아이들을 모두 죽어. 불을 꺼. 그 놈이 훔쳐보고 있어. 눈에 띄면 안 돼. 엄마가 지금 여기 없다는 걸 눈치 채게 해서는 안 돼. 살인마가 주머니 속에서 만능키를 꺼내들었다. 엄마 무서워. 나는 혼자 자기엔 너무나도 넓은 퀸 사이즈 침대 시트를 손바닥으로 꼭 움켜 잡았다.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퍼뜩 눈을 뜨자 아침이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내 귀는 자동적으로 전화벨이 몇 번 울리는지를 셌다. 등이 식은땀으로 서늘했다. 한 번 울리고 전화가 끊기고 다시 울리면 그건 엄마였다. 그 외의 다른 전화는 절대로 받아서는 안 된다고 엄마 가 말했었다. 나는 몽롱한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쓰며 온 신경을 곧추 세웠다. 첫 번째 신호가 울린 뒤, 끊겼다가 다시 울리자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엄마? 어제 밤에 전화했었니? 100 재외동포 문학의 창

101 응 왜라고 물어봐줘. 엄마가 선교 봉사하는 노인이 어젯밤에 죽었단다. 오늘 엄마랑 교 회 사람들이 노인 가시는 길을 봐줘야해. 엄마는 왜 전화했는지 묻지 않고 딴 소리만 했다. 나 혼자 있기 싫어! 무서워. 얼굴 없는 군인이, 살인마가, 무서워. 무서운 게 어디 있어? 주님이 지켜줄 거야. 전화기 너머로 울부짖는 소리, 기도하는 소리들이 들렸다. 그러다가 목사가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지영 씨 뭐해. 얼른 와. 꽤 다정한 음성. 아빠만이 부를 수 있는 엄마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나는 화 가 나서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눈언저리를 바르르 떨었다. 손톱이 저도 모르게 카펫을 긁고 있었다. 어제 그 노인 떠나면서 예수님 영접하고 떠나셨어. 기쁜 일이지. 천 국 갈 거야. 엄마 얼른 가야 해. 밥 챙겨먹고 가. 전화는 끊겼다. 목사에게 달려가는 지영 씨의 뒷모습이 생생하게 보 이는 것 같다. 어째서 지영 씨는 자기 딸 보다 다른 사람들의 영혼과 죽음, 그리고 믿음이 중요한 것일까? 자기 딸도 죽을지 모르는데!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무력하게 앉아 있던 내 눈에 책상 위의 가위 가 보였다. 나는 가위를 집어 들고 전화선을 싹둑 잘라 버렸다. 모든 것이 이렇게 전화선 자르듯 싹둑 잘라내 버릴 수만 있다면, 하고 생각 하다가 굴러다니는 신문지 위에 교회와 목사와 지영 씨와 얼굴 없는 소설 부문 101

102 군인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위로 싹둑 싹둑 아무렇게나 그림을 잘랐다. 통쾌했다. 학교 시작 시간은 9시. 20분 정도 일찍 도착한 나는 가방 안에서 살 인 백서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학교 버스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책만 봤다. 살인백서를 읽으면 세상의 모 든 미운 것들에 대한 스트레스가 다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서 좋았다. 문득 끈이 풀린 나이키 운동화가 내 발 앞에 멈추었다. 눈엣가시 같은 놈. 샘. 또 날 괴롭힐 만한 소문을 들은 것일까. 샘은 상체를 숙이고는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어제 너 네 아파트에서 기집 애 둘이 발가벗겨져 죽었다면서? 에니의 엄마가 하고 간 소릴, 무슨 새로운 뉴스라도 되는 모양 떠들 어대고 있다. 나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책 밑에 감춰진 열개의 손톱을 갈퀴처럼 오그라뜨렸다. 여차하면 튀어 올라 샘 네 얼굴 을 할퀼 거야! 뒤로 아이들이 키득거리며 하나 둘 모여들었다. 한국에 서 학교를 다닐 때 아이들에게 집단으로 폭행을 당했던 일이 떠올라 아이들이 모이는 건 무서웠다. 집단 폭행을 당한 것도 엄마 때문이었 다. 엄마가 서울역에서 믿지 않는 사람을 전도하다가 싸움이 붙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엄마와 전도사 아줌마들이 역 화장실로 끌고 가 두 들겨 팬 믿지 않는 사람 은 우리 반 반장의 엄마였다. 여기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까봐 내 작은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오늘 밤은 네 차례야. 어머, 무서워. 샘이 여자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두 다리를 바싹 붙이고는 달달 떨자, 102 재외동포 문학의 창

103 지켜보고 있던 남자 아이들이 깔깔대며 넘어갔다. 나는 한대 칠 듯 손 을 치켜들고는 샘을 노려보았다. 주근깨로 뒤덮인 밀가루 반죽 같은 샘 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는 대신 내 손가락은 지금 막 읽어 내리던 문장 하나를 딱 짚었다. 샘의 시선은 즉시 내 손가락 끝의 검은 문장으로 옮겨졌다. 그는 함부로 지껄여대는 놈의 입을 가로로 10센티 찢어 버렸다. 벌 렁거리는 입술 사이로 비명과 함께 피가 튀어나왔다, 샘, 아 프니? 나도 아프다 네 눈깔을 빼기 전에 반드시 쇠꼬챙이로 망막 근 처를 찔러 줄게. 문자를 읽은 샘과 내 시선이 책에서부터 서서히 떠올라 허공에서 마 주쳤다. 샘은 얼른 뒤로 물렀다. 내 눈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살기를 느 꼈을 것이다. 오줌을 지리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는 것 보단 그 편이 훨씬 나았겠지. 으하하하. 그랬다. 그 잔혹한 소설의 희생자 이름은 바 로 샘이었다. 나를 괴롭히는 샘의 이름과 꼭 같은 S. A. M. 샘. 엄마는 식료품이 가득 쌓인 카트 안으로 돼지고기를 던져 넣으며 휴 대 전화 통화에 열을 올렸다. 할머니는 음식이란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 는데 엄마의 카트 안에는 냉동 음식과 인스턴트 음식뿐이다. 엄마가 교회일이 바빠서 음식 만들 시간이 없어. 어차피 구원받아 야 할 것은 육신이 아니라 영혼이니까. 우리 영혼만은 깨끗하게 지키 자. 소설 부문 103

104 늘 엄마는 전자렌지에서 냉동음식을 꺼내 놓으며 그렇게 말했다. 변 명이지. 냉동음식 먹고 얼어버린 육신에 무슨 깨끗한 영혼이람. 엄마는 핑계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진짜처럼 말한다. 자기 자신의 거짓말에 세 뇌당한 거다. 하지만 난 세뇌당하지 않아. 아빠는 기러기로 살자는 것에 대해 완강히 반대했었다. 가족이란 무 슨 일이 있어도 함께 살아야 한다. 고통도 즐거움도 함께 나누고 이겨 나가도록 힘을 주고받는 것이다, 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러나 고통 을 나누고 싶은 순간에 전화를 하면 아빠는 항상 회사의 회식, 아니면 노래방에서 핸드폰에다 대고 그것도 알아서 못해? 하고 소리쳤다. 엄마는 화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주여 를 찾으며 한숨을 내 쉬곤 했 다. 지금도 아빠가 뭔가 엄마 속을 끓이는 소리를 하고 있나보다. 나는 카트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엄마의 휴대 전화에 귀를 갖다 댔다. 그러자 엄마는 눈을 흘기며 나를 밀어냈다. 나는 여기서 잘 지내고 있어요.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하루하루 밝아 지고 그 일은 다 잊었나봐. 미국에 있는 게 애한테 정말 좋은 거 같아 요. 다 당신 덕분이야. 고마워. 엄마는 미소 지으며 상냥하게 말한다. 그러나 두 눈은 얼음처럼 차 갑다. 어머, 어머님. 아빠와 통화를 하고 있던 엄마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할머니 가 그때쯤 출현 하실 줄 알고 있었다. 늘 하듯 아빠 곁에서 밉살스럽게 통화를 엿듣고 있다가 전화기를 뺏어들었겠지.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하 는 것이다. 이년아, 내 아들 뼈 빠지게 일해 번 돈 매달 네년한테 고스 104 재외동포 문학의 창

105 란히 보낸다. 내가 더는 못 참겠다. 들어 와. 나는 내 아들 이렇게 사는 거 더는 못 본다. 내 아들이 돈 버는 기계냐? 언젠가 학교에서 돌아 왔을 때, 자동응답기에 녹음된 할머니의 말을 들은 적이 있었고 그 말 은 이후로도 조금씩의 토씨만 다를 뿐 거의 같은 내용이 녹음되어 있었 다. 할머니가 나를 바꾸라는 것 같았다. 엄마는 휴대전화를 건네주며 내게 입 조심하라는 시늉을 했다. 전화를 받자 다짜고짜 할머니가 소리 를 질렀다. 은별아! 여시 같은 네 어미, 거기서 교회 다니지? 나는 순간적으로 엄마를 쳐다보았다. 엄마가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 다. 머릿속으로는 아뇨, 교회 안가요. 라고 대답해야 한다고 알고 있었 지만 마음속으로는 네. 엄마 여기까지 와서 교회 다녀요. 게다가 냉동 음식만 잔득 사요. 라고 일러바치고 싶었다. 어느 쪽을 택해 대답해야 할까, 1초에 한번씩 마음이 변했다. 네 어미 교회 나가냐니까! 할머니가 다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엄마가 아빠와 이혼을 하던지 할머니가 엄마를 내쫓으면 누가 날 먹여 살려줄까. 내 머리는 그 와중 에도 계산을 한다. 그것은 당연히 아빠였고 아빠는 할머니의 아들이었 다. 그렇다면 할머니에게 잘 보여 둬야 하는 것이다. 엄마는 교회 나간 다는 소릴 하면 죽었어. 하고 노려보고 있다. 거짓말하면 지옥 간다고 했는데 엄마는 어째서 거짓말을 하라고 하는 걸까. 엄마의 영혼을 구제 하기 위해선, 나라도 교회에 나간다는 것을 일러바쳐야만 했다. 아뇨. 엄마 교회 안 나가요. 나는 거짓말을 택했다. 지금 당장 나를 먹여 살리는 것은 엄마였다. 소설 부문 105

106 우선은 엄마한테 잘 보여야지. 이제 지옥에 가겠군. 하는 마음의 소리 가 들려왔다. 그러나 또 다른 마음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옥 따위 어디 있다고. 흥.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겨버린 것 같았다. 엄마는 휴대 전화를 닫았다. 엄마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한국에 있는 동안 시집살이 하면서 생 겼던 그 울화증이 다시 치밀어 오르는 것이었다. 오 주여, 주여, 엄마 어지러워. 잠시만. 엄마는 하체의 힘이 모두 빠져버려 걸을 힘도 없는 듯 잠시 시장 바 닥에 웅크리고 앉아 자신의 가슴을 텅. 텅. 쳤다. 나는 웅크리고 앉은 엄마를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나한테 못하기만 해봐. 그냥 할 머니한테 일러바칠 테니까. 교회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TV 뉴 스를 보지 않으니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엄마. 아빠가 송금을 해주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엄마의 자유는 끝이다. 집에 돌아와서도 울화증이 풀리지 않은 엄마는 저녁을 먹는 대신 소 주를 마셨다. 그리고는 우두커니 벽에 기대앉아 혼자 중얼거렸다. 네 외할머니와 외삼촌이 밧줄을 들고 들어오셨어. 그리고는 내 목 에 밧줄을 걸고 천정에 매달았지. 그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한 집안 에 종교가 둘이면 조상님들이 노하셔서 집안을 말아먹게 된다고 조상 님들이 눈치 채기 전에 날 죽이려고 했어. 엄마의 목은 죄어들었고 양 쪽 관자놀이로 피가 몰려들어 뇌를 터트리기 직전까지 갔어. 단지 숨이 넘어가질 않았을 뿐, 이미 엄마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어. 엄만 그 순 간, 붉은 빛에 휩싸인 주님의 모습을 보았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몰라. 사람들은 자기가 경험하지 못하면 믿어주지 않아. 주님은 날 사 106 재외동포 문학의 창

107 랑한다고 하셨어. 너무나도 사랑하니까, 지금은 목숨을 건지고 봐야 할 때라면서, 거짓 증언을 용서해 준다고 하셨어. 그래서 엄만 할머니에게 맹세했지. 다시는 교회 문턱에도 가지 않겠다고. 울먹이는 엄마의 말은 모래시계 속의 모래가 빠져나가듯이 졸린 내 의식 밖으로 스르르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찌되었건 엄마가 교회에 가 지 않고 밤중에 같이 있어주니 좋았다. 오늘밤은 얼굴 없는 군인이 나 타나지 않을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나는 엄마가 도망갈까 봐 엄마의 발을 꼭 잡고는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잠결에 누군가와 통화하는 엄마 의 조용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에요, 울긴. 목소리가 그랬나? 주님께서 날 얼마나 사랑하시 는데? 응. 새벽기도 가야지. 엄마가 가려한다. 팔을 들고 엄마를 잡으려했지만 무거운 눈이 떠지 지 않았다. 잠든 내 의식 속으로 형언할 수 없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밖에서 누군가 문을 뜯고 있는 소리가 났다. 카펫을 밟고 얼굴 없는 군인이 다가오고 있다. 한 발 한발 거실을 지나 욕실로 향하는 좁은 복도를 지나 욕실 끝의 내 방으로, 얼굴 없는 군인은 내 침대 맡에 가만히 서 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숨을 쉴 때마다 쇅, 쇅, 쇅, 하는 소리가 났고 입에서는 숨결대신 음습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 다. 군화 옆으로 새벽이슬들이 굴러 떨어졌다. 투명한 이슬방울에서 조 그만 벌레들이 꼬불꼬불 대가리를 흔들며 태어났다. 난 밤에 혼자 있는 아이들만 골라서 죽이는 얼굴 없는 군인이야. 무서운 밤인데도 혼자 있는 아이들은 부모가 버린 것 들이지. 소설 부문 107

108 그것들은 이슬방울에서 나와 공기와 접촉하자마자 시커멓고 징그러 운 벌레들로 변해 증식하기 시작했다. 우글거리는 벌레들은 급속도로 침대를 타고 올라 돌돌 말린 이불의 틈 사이로 기어들어왔다. 나는 비 명을 내지르며 이불을 걷어찼다. 벌레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식 은땀이 흘렀다. 엄마, 너무 무서워. 꿈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어깨위 에 다닥다닥 붙은 소름은 떨쳐지지 않았다. 텅 빈 방안을 두리번거리며 엄마를 불렀다. 싸늘한 어둠 속, 넓은 침대위엔 엄마의 체온 따위는 남 아 있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잠든 동안 교회에 가버린 것이다. 엄마의 따듯한 체온 대신 야광 페인트가 칠해진 붉은 십자가만이 어두운 벽 위에 걸려 있었다. 나쁜 엄마. 나쁜 엄마. 나쁜 엄마 계속해서 중얼거 리며 울었다. 다음 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도착해 열쇠로 문을 열려는데 웬 낮선 여자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분명히 엄마는 교회에 가 있는 시간이 었다. 어머 은별이 왔구나. 조용히 하고 네 방으로 들어가. 교회 집사다. 집사의 어깨 너머로 엄마와 몇몇 아줌마들이 동그랗게 원을 그리고 앉자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는 울부짖으며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원의 한 가운데로 어떤 할머니가 벌벌 떨며 앉아 있었다. 어서 네 방가. 집사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까봐 조심하려는 듯 현관문을 꼭 닫 고, 쉿 하며 손가락을 입에 댔다. 나는 문턱으로 올라서며 일부러 세게 108 재외동포 문학의 창

109 가방을 턱 놓았다. 엄마가 돌아봤다. 집사 아줌마는 눈에 쌍심지를 켜 고 나를 쳐다보며 조용히 하라고 했잖아! 하는 인상을 지었다. 쳇! 지가 내 엄만가! 나는 입을 튀어내며 더욱 심술궂게 엄마를 노려보았다. 엄마 나 배고파 밥 줘. 귀신들린 신도야. 기도해야 해. 넌 숙제 해. 기도 끝나면 함께 먹 자. 엄마가 교양 있는 여자처럼 조근 조근 말했다. 급속도로 기분이 나 빠졌지만 집사가 등을 떠미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방으로 들어왔다. 나 는 문을 꼭 닫는 척 한 다음, 다시 조금 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엄마가 벌벌 떨고 있는 할머니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동그랗게 둘러 앉아 있던 여자들이 입을 꾹 다물고는 갑자기 할머니를 때리기 시작했다. 비명소리나 욕 같은 건 나지 않았다. 툭. 툭. 주먹을 쥐고 머리를 때리거나 퍽. 퍽, 온 몸을 때리고 차는 소리만 났지만 새빨간 아줌마들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너무 무서웠지만 또 한편으로는 엄마가 저런 미친 여자들과 함께 어울 려 다니며 같은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에 화가 났다. 나는 엄마를 꾀어 내는 저런 여자들이 싫다. 나는 꽝!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는 선반위 에 놓여있는 부러진 크레용 통을 꺼내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검은 땅속에 십자가가 거꾸로 파묻혀 있는 교회 그림이었다. 교회 앞에 서서 두 손을 하늘 높이 쳐들고 있는 사람 그림을 그린 뒤 두 눈에 검게 낙서 를 하며 소리쳤다. 죽어! 죽어! 죽어버려! 진짜 하느님이 재림하시면 너희들부터 벌을 받을 거야. 소설 부문 109

110 악에 받혀 씩씩거리며 사람들의 눈에 검은 구멍을 냈다. 종이를 찢 을 듯 낙서를 하다가 스케치북을 확 집어 던졌다. 스케치북은 화라락 날아가더니 벽에 부딪치고는 액자처럼 곳곳하게 방바닥에 섰다. 나는 그림을 노려보았다. 언제나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리면 미술 선생님은 내게만 그림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어째서 공을 그린 거지? 어째서 나무에는 잎사귀가 없는 거지? 어째서 네가 그린 집은 창문이 없는 거지? 내가 그린 그림이 해괴하게 느껴졌다. 얼굴은 찌그러진 동그라미고, 코조차 없는 얼굴에, 어떤 얼굴은 이빨만 고스란히 그려 놓은 것도 있 다. 머리카락들은 쭈뼛쭈뼛한 작대기 아니면 빠글빠글 파마머리다. 오, 주여, 주여, 죄를 사해주시고. 나는 그림을 보며 엄마 흉내를 내며 히죽 히죽 웃었다. 나와서 밥 먹어 방문이 열리고 엄마가 얼굴을 내밀었다. 거실로 나가자 밥을 먹던 아줌마들의 눈초리가 모두 내게로 향했다. 두들겨 맞은 할머니는 산발 을 한 채 바닥에 밥그릇만 놓고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손과 입에 밥풀 이 붙어있었지만 그것을 떼어낼 정신도 없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우 물거리며 삼겹살을 씹는 아줌마들의 입과 음식물을 꿀꺽 삼키는 목을 쳐다보았다. 쩝쩝 소리를 내며 입술을 혓바닥으로 핥는 모습이 영혼이 비어버린 시커먼 괴물 같이 느껴졌다. 저 여자들 모두 가라고 그래! 부엌으로 들어가던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다시 엄마 110 재외동포 문학의 창

111 가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나를 잡으려 했다. 그러자 여자들 중 한명이 조용히 다가와 쪼그리고 앉더니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리 은별이, 왜 화났을까. 아줌마가 하느님께 기도 해 줄게. 역겨운 냄새가 난다. 짙은 화장품 냄새와 오래되 상한 립스틱 냄새. 김치와 마늘 냄새. 여자가 다정한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았다. 착한 척 하지 마. 속은 안 그러면서! 나는 여자의 손을 뿌리치며 얼굴에 퉤 하고 침을 뱉었다. 나머지 여 자들이 동그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순식간에 내 주위의 공기가 차 갑게 얼어붙는 것이 느껴졌다. 무서웠지만 무섭지 않은 척 아줌마들을 노려보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얼굴에 불똥이 튀었다. 엄마가 눈알 이 튀어나올 정도로 내 따귀를 때린 것이다. 도대체 뭐 이따위 년이 다 있어! 엄마는 화가 날대로 나 주위를 잊고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할머니한테 일러바칠 거야! 나는 바락바락 대들었다. 여자들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엄마와 나를 쳐다봤다. 너 다시 말해봐! 할머니한테 일러바친다고 그랬어! 다시 말해봐! 엄마는 온 몸에 힘을 주고는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러댔다. 그것은 말이 아니었다.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치는 끔찍한 비명이었다. 확 그냥 대가리를 오도독 뜯어 죽여 버리고 싶어! 시퍼런 광기를 흘리며 엄마가 소리쳤다. 소설 부문 111

112 너 나가! 나가란 말이야! 왜 날 이렇게 못 살게 구는 거야! 지긋지긋 한 인간들 피해 여기까지 왔는데 어째서 자식까지도! 엄마는 부들부들 떨다 못해 눈물까지 흘리며 씩씩거렸다. 저러다가 은별 엄마 일 나는 거 아냐? 애가 뭘 안다고 저게 애에요? 난 저런 악마 같은 애는 보지도 못 했어 이런 저런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들려 왔다. 그때였다. 방안의 화장실에서 변기 물을 내리는 소리가 나더니 아줌마들 중 한명이 놀란 얼굴로 걸어 나오며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저 애 혹시 귀신 든 거 아니에요? 여자의 손에는 내 스케치북이 들려있었다. 이것 좀 보세요. 여자가 스케치북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다. 나는 여자에게 달 려들어 스케치북을 빼앗았다. 십자가 지붕은 검은 땅 속에 처박혀 있고 사람들은 모조리 끔찍하 게 그려놨다고요. 얼마나 오싹하던지. 여자가 끔찍하다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떨며 말했다. 이리 내! 엄마가 소리쳤다. 싫어! 내 거야! 그때였다. 갑자기 아줌마들이 내게 달려들더니 손목을 비틀며 스케 치북을 빼앗으려 했다. 나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버티다가 본 능적으로 손톱을 휘둘렀다. 악 하고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바로 그 순 간 스케치북이 좍 찢어졌다. 스케치북을 들고 나온 여자의 뺨에 선명한 손톱자국이 시뻘겋게 나 있었다. 함부로 내 것에 손을 대? 본때를 보여 112 재외동포 문학의 창

113 주지. 나는 씩씩거리며 재빨리 벽에 걸린 십자가를 뜯어 부엌으로 달려 갔다. 내 뒤를 쫓아 엄마가 부엌으로 달려 들어왔다. 나는 가스렌지에 불을 붙이고는 십자가를 그 위에 던져버렸다. 이년이 미쳤어! 저 할망구한테 붙었던 귀신이 이년한테 달라붙었어! 오 주님 아버지! 달려온 엄마는 가스 불을 단번에 끄고는 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내 머리를 세게 때렸다. 나는 엄마의 무지막지한 힘에 단번에 바닥에 쓰러졌고 엄마는 쓰러진 내 머리채를 움켜잡아 일으켜 앉히고는 다시 한 번 세게 때렸다. 끈적끈적한 코피가 입술을 타고 내렸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엄마의 눈동자 속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검은 파도가 보였다. 바다를 뒤집는 격렬한 파도는 오랫동안 엄마의 눈동자 속에서 요동쳤다. 그러 다가 차츰 가라앉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잔잔해졌다. 엄마의 표정은 순 식간에 돌변했다. 갑자기 온화하고 착한 엄마가 된 척 연기를 시작한 다. 눈물을 글썽이며 두 팔을 벌리고 나를 끌어안으려했다. 그러나 나 는 엄마의 가슴을 밀치고 뒤로 물러섰다. 궁지로 몰렸을 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해지는 엄마의 저 태연자약한 연기. 거짓말. 내게 남 은 것은 불신과 분노뿐이었다. 죄송해요. 서울 살 때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이혼하자고 하는 바람 에 애가 좀 충격을 받았어요. 미국으로 온 것도 그래서. 엄마의 거짓말에 웃음이 나왔다. 저기 자매님, 내가 처녀 때 미술 치료사를 해서 아는데 이렇게 그림 그리는 애들이 좀 위험해. 애가 사탄이 든 거라면 목사님께 알리고 사 소설 부문 113

114 탄 퇴치를 해야 해. 그 방법뿐이야. 집사는 진지하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엄마를 다독였다. 네. 엄마는 무기력하게 대답했다. 그래 자매님, 우린 일단 갈게. 애 잘 타이르고 저녁 기도에 봐. 사람들이 모두 가고 나자 엄마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엄마는 손바 닥으로 불탄 십자가의 거스름을 닦아내고는 다시 벽에 걸었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기도하자. 싫어! 좋은 말로 할 때 무릎 꿇고 회개해. 이 미친년아!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엄마의 증오심으로 팽창된 싸늘한 눈빛 이 무서웠다. 나는 숨도 쉬지 못하고 엄마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엄마 를 따라 회개 기도를 하는 동안 엄마의 목소리는 차츰 원래대로 돌아왔 다. 엄마는 기도가 끝나자 핸드백과 성경책을 들고는 조용히 일어났다. 목사님과 네 영혼에 달라붙은 사탄을 퇴치하는 방법을 의논해야겠 어. 엄마가 일어섰다. 아까 할머니처럼 두들겨 패 죽여! 그럼 되잖아. 의 논은 무슨 의논? 이라는 말이 목구멍 끝에 달랑달랑 매달렸지만 나는 본심을 숨기고 착하게 말했다. 엄마 나 옷 꺼내주고 가 무슨 옷? 엄마가 빤히 봤다. 114 재외동포 문학의 창

115 밤에 잘 때 춥단 말이야. 솜 든 바지 꺼내줘. 나는 높은 데 있어서 못 꺼내. 엄마는 인상을 쓰더니 성경책을 내려놓고는 창고로 갔다. 나는 밖에 서서 어두운 창고의 불을 켜고 옷을 꺼내기 위해 사다리로 올라가는 엄마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창고 문을 재빨리 닫고 밖에서 잠금 버튼 을 눌렀다. 창고는 엄마가 나를 가둬놓기 위해 문손잡이를 바꿔달아 둔 것이다. 엄마는 이 안에 나뿐만 아니라 사탄이 들었다는 아줌마 아저씨 들을 가둬놓곤 했다. 뭐 하는 짓이니. 문 열어라 낮게 가라앉은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처럼 겁에 질려 문을 두들기지도 않는 침착한 엄마가 밉다. 그렇다면, 나는 두꺼비 집으로 달려가 전원을 내려버렸다. 문 열어! 머리가 쭈뼛하게 설 정도로 엄마가 크게 고함쳤다. 어릴 적에 교회 에 가지 못하도록 광에 갇혔던 경험이 있어 폐쇄된 어둠을 무서워한다 는 게 지금 막 떠올랐다. 엄마가 아이처럼 비명을 질러대는 꼴을 보니 그러지 않으려는 데도 자꾸 웃음이 흘렀다. 통쾌한 기분 비슷한 것이 느껴진다. 그 봐 어두운 곳에 혼자 갇히니까 무섭지? 내가 얼마나 무서 웠는지 좀 당해봐. 문 열어! 문 안 열어? 엄마는 문을 꽝 꽝 치며 발악했다. 나는 입을 꾹 닫고는 창고 문을 바라보는 자세로 침대에 누웠다. 문이 금방이도 부서져 열릴 듯 덜컹거 렸다. 소설 부문 115

116 은별아, 문 열어. 엄마 어두운 거 무서워. 엄마가 발톱을 숨기고 금방 나긋해졌다.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것 같았지만 또 다시 연기다. 그런다고 속을 줄 알아? 내일 까진 안 열어 줄 거야. 엄마도 하루 밤이 지나면 문을 열어줬잖아. 우리 은별이 착하 지? 문 열어줘 나는 입을 꾹 닫고 침대에 웅크리고 누웠다. -목사님과 네 몸에 달라붙은 사탄을 퇴치하는 방법을 의논해야겠어. 엄마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만약 나를 그 할머니처럼 두들겨 패면 손톱으로 면상을 모조리 할퀴어 버리고 도망쳐야지. 그냥 당하고 있지 만은 않을 거야. 다음날 아침, 엄마를 가둬놓은 채 학교로 걸어가는 동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무섭고 크게만 보이던 엄마. 내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던 엄마를 간단하게 가뒀다니. 갑자기 세상이 만만하게 보이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샘 은 엄마보다 작다. 샘 정도야 어깨가 우쭐해졌다. 이상하게도 강한 힘이 생기는 것 같아 학교까지 한달음에 달렸다. 정말 사탄이 내 몸에 들어온 것일까? 모두들 오늘 면담에 부모님들 오시는 것 맞지? 변동 사항 있는 사람 손들어 봐. 손을 들자, 선생님은 조금은 놀란 듯 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알았 다. 하고 짧게 대답했다. 왠지 선생님의 얼굴에서 이상한 징조가 느껴 져 혹시 엄마를 창고에 가둔 나쁜 아이라는 걸 알아챈 게 아닌지 불안 116 재외동포 문학의 창

117 했다. 샘은 어제 그 사건 이후로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진 않았지만 오늘 따라 말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게 이상했다. 집단 따돌림이 시 작되려는 걸까. 이상한 열기와 증오의 눈초리가 등 뒤에서 느껴진다. 불안했다. 휙 돌아보면 시선들은 이미 숨고 없다. 모두 나를 피하고 있 다. 어째서? 아침까지만 해도 힘이 솟았는데. 나는 주눅이 들었다. 나 쁜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들면서 온 몸과 행동이 위축되기 시 작했다. 어디에든 숨고 싶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복도로 나갈 때 공교롭게도 샘과 마주쳤다. 넌 버려진 자식이야. 너네 엄만 너한테 관심도 없잖아. 학부모 면담 에 안 오는 부모는 한명도 없다고, 도축장에서 일하는 탐 아빠도 그날 만큼은 오는데. 샘은 살짝 상체를 기울이고 속삭인 다음 복도 끝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리고 곧 바로 교장이 나를 호출하는 교내 방송이 들려왔다. 교장은 학적부를 뒤져 비상시 연락처로 전활 걸었다. 그리고 한참을 전화기를 든 채 기다렸다. 걸어보라지, 누가 전활 받는지. 엄만, 창고 속에 갇혀 어서 문을 열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 중일걸. 주님께서 행 하시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단다. 나쁜 일이건 좋은 일이건 엄마는 모든 일들의 결과를 그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규율 선생이 들어왔다. 나는 규율 선생의 손에 들려있는 책을 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은 내가 분노에 휩싸이거나 누군가를 죽이 고 싶을 때마다 꺼내 읽는 살인백서였다. 샘이 일러바친 것이 틀림없었 다. 규율 선생은 시선은 나를 불길한 무엇을 보듯 흘끗 보더니 교장의 귀에 뭔가를 소곤거렸다. 언뜻 위험한 아이 라는 말을 들은 것 같다. 소설 부문 117

118 교장은 세상에! 라고 외치며 책을 펼쳤다. 책의 내용을 훑으며 페이지 를 넘기던 교장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또다시 끔찍한 일이 일어날 뻔 했군요. 저 아이 칼 같은 것은 숨기 고 다니지 않았나요? 가방 조사, 소지품 조사 했습니까? 규율 선생이 고개를 끄덕이자 교장은 내게 질문했다. 너희 집에 총 있니? 나는 교장을 노려보며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하느님이 알아서 해 줄 테니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학교서 보관하고 있으마. 오늘은 이대로 집으로 가거라. 그 리고 내일 부모님과 함께 학교로 등교해. 네 부모님이 전화를 받지 않 으시는구나. 연락할 다른 번호는 없니?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긴 네 부모가 오든 오지 않던 너는 무기정학이다. 너는 정말 위험 한 아이야. 정학 처리된 동안에는 미국 내 어느 학교에도 갈수 없다. 경찰이 24시간 너를 지켜볼 것이고. 정신과 치료를 받도록 주선하마. 공부만 잘하면 된다던 아빠 말도 다 거짓말이었고 하느님이 지켜준 다는 말도 거짓말이었다. 이제 모든 것은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싶은 데로 그림을 그렸을 뿐인데 악령이 깃들었다고 몰아대지 를 않나 읽고 싶은 책을 읽었을 뿐인데 정신병원에 처넣겠다고 하질 않나. 내 힘으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교장 앞에서는 울지 않았다. 무서운 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장실 문을 열고 나서 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118 재외동포 문학의 창

119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왔다. 부엌으로 들어서자 시커 먼 바퀴벌레들이 아침에 만들어 둔 땅콩 샌드위치를 뜯어 먹다가 한꺼 번에 도망쳤다. 엄마가 배가 고플 거야. 나도 그랬으니까. 새로 빵을 만들고 우유를 따듯하게 데워 설탕을 조금 넣고 옷 창고가 있는 방으로 갔다. 창고문은 아침과 다름없이 잠겨있었다. 엄마, 배고프지? 그렇게 말하고 나니 괜히 눈물이 났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학교 따위는 상관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엄마 없는 아이만 큼은 되고 싶지 않다. 어찌되었건 엄마를 내게 돌아오도록 만들어야겠 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번엔 상자라도 만들어서 꼭 꼭 가둬버리고 휴대 전화도 빼앗아 버려야지. 교회에 못 가게 가둬두면 엄마는 내 곁으로, 아빠 곁으로 돌아올 거야. 엄마를 용서해야 하는 건 하느님이 아니라 나야. 엄마는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화가 단단히 나 있는 것 같았다. 창고 문을 밀었다. 기대했던 엄마의 샤넬립스틱 향기 대신 기분 나쁜 나프탈렌 냄새가 난다. 가슴이 철렁했다. 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엄마는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제야 창고로 들어갈 때 엄마의 왼팔에 걸려 대롱대 던 핸드백이 떠오른다. 그 안에 있었을 휴대전화. 형언할 수 없는 배신 감에 부르르 떨려왔다. 철저하게 버려졌다. 분노와 눈물에 사로잡힌 내 머릿속으로 온갖 단어들이 빙글빙글 돌았다. 엄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긋지긋해도 다시 돌아오겠지? 내가 없이는 송금도 오 지 않을 테니까. 소설 부문 119

120 엄마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전화선은 그날 내가 잘라낸 그 모양 그대로 놓여있다. 나는 울면서 잘려나간 전화선을 연결해 보려고 했지 만 어떻게 연결하는지 알 수 없었다. 늘 혼자 있었는데도 오늘밤은 왠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얼굴 없는 군인. 그날 놀이터에서 나는 얼굴 없는 군인의 얼굴을 봤다. 그래서 증 거를 없애기 위해 여자 애 둘이 먼저 살해당한 것이고 이제 마지막 목 격자인 내 차례다. 설명하려 했지만 엄마는 단 한 번도 내 말을 끝까지 들어준 적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설명했다고 해도 하느님이 지켜주니 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라고 했겠지. 왜 이렇게 가슴이 불쾌 하게 뛰는 걸까. 조그만 소리에도 심장이 덜컹거린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무슨 일이 일어날 것 만 같다. 꼼짝도 할 수 없다. 갈증이 났지만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가는 것조차 무섭다. 이럴 때면 읽던 살인백서도 학교에 빼앗겨 버렸다.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누군가 좀 안아줬 으면 좋겠다. 한국에 있는 할머니 생각이 난다. 언제나 무서워하면 꼭 안아줬는데. 달력에 적혀있는 긴 번호를 보다가 싹둑 잘려있는 전화선을 봤다. 절대 로 다시 이어지지 않을 엄마와 나처럼 보였다. 전화선을 고치면 할머니 에게 일러 바쳐야겠어. 엄마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은 할머니니까. 그 때 일러바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후회됐다. 지옥은 지금 이순간이 아닐 까. 그때 거짓말을 해서 지옥에 빠진 것이다. 그때 문득 목덜미로 습기 를 가득 머금은 찬바람이 일었다. 누군가 집안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나는 전화선을 꼭 움켜잡았다. 너무 무서워 돌아볼 수 없었다. 하얀 벽 에 커다란 그림자가 비쳤다. 그림자는 얼굴 없는 군인을 닮아 있었다. 120 재외동포 문학의 창

121 문 밖으로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저벅 저벅. 한 두 명이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중에는 낯익은 목소리도 있었다. 나는 악령퇴치를 위해 교회 사람들을 끌고 오는 엄마 의 곁으로 달려가 나란히 걸었다. 엄마는 내가 옆에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살짝 손까지 잡았지만 그래도 전혀 알지 못했다. 이번엔 저리 치워! 하고 뿌리치지 못하겠지? 십자가를 태우다니. 그런 불경스러운 짓을 어떻게. 그렇게 말한 건 한 번도 보지 못한 여자다. 오늘 악령퇴치를 구경하 기 위해 따라 온 것 같다. 그 아인 그러고도 남을 아이에요. 저번에 구역예배 본다고 잠시 와 있었는데 그때 그 아이의 표독한 눈이랑 행동을 목사님께서 보셨어야 했어요. 집사가 두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무서워죽을 뻔했다는 시늉을 했다. 표독한 내 눈이 얼마나 섬뜩했는지를 강조하고 싶은 거지. 오버하고 있 네. 카아 하고 독을 내뿜는 고양이의 날카로운 이빨처럼 나는 새빨간 손톱을 바싹 도사렸다. 자매님을 창고에 가뒀다는 게 정말이에요? 엄마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있던 목사가 말했다. 밤마다 얼굴 없는 군인이 죽이러 온다며 헛소리를 해댔어요. 엄마의 마음속에 출렁이는 검은 바다가 보인다. 모든 걸 신에게 맡 기고 매시매초 기도를 잊지 않는 엄마의 마음속에 빛 대신 검은 바다? 어허 악령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군요. 그 얼굴 없는 군인이 바로 사탄일 게야. 소설 부문 121

122 목사가 그렇게 확신하는 동안 사람들은 문 앞에서 멈추었다. 엄마가 열쇠를 꺼내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뉴스가 생각나네. 은별이 집엔 tv없다면서? 그러면 그 뉴스 못 들었겠네? 무슨 뉴스요? 은별 사는 아파트에서 혼자 집 보던 여자 애들 둘이 목 매달린 시체 로 발견 되었데. 나도 언뜻 들어서 자세히는 몰라. 세상에 그런 일이 한둘인가요. 종말이 오고 있는 거죠. 살고 죽는 건 모두 하느님 뜻이죠. 뭐. 그래. 나는 사악한 미소를 짓는다. 하느님 뜻이야. 잠금 장치가 열렸 다. 들어와. 들어와 보라고. 진짜 하느님 뜻이 뭔지 보여줄게. 살며시 문이 열렸다. 눅눅한 빗물로 가득 찬바람이 툭 터지듯 밀려든다. 비 소 리가 더욱 세게 들려왔다. 은밀한 의식을 치룰 검은 무리들은 문을 닫 고 이중 삼중으로 달려있는 잠금 쇠를 단단히 걸어 잠갔다. 나는 흰자위를 치켜뜨고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체가 벗겨진 채 나뭇가지에 목이 매달려 살해된 소녀들처럼 두 손과 두 발을 축 늘어뜨 린 내 몸은, 바닥에서 50센티미터 정도 되는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고 내 목을 칭칭 감고 있는 것은 절단된 빨간색 전화선이었다. 122 재외동포 문학의 창

123 어둠 속에서 가작 김 건(호주) 1 시드니 북쪽도시 고스포드, 시드니에서 1번 국도를 따라 한 시간여 북쪽으로 달리면 예로부터 호주 원주민들이 흰산( 白 山 )이라 이름 붙인 맹그로브마운틴의 장엄한 산세( 山 勢 )가 나타난다. 이 산( 山 ) 자락을 따라 해변을 끼고 이어지는 구 도로( 舊 道 路 )가 있다. 이 길이 지난 반세기 동안 가난한 이민자들이 좀 더 돈 벌이가 좋다 는 노천광산( 露 天 鑛 山 )이나 제철소( 製 鐵 所 )같은 일자리를 찿아서 북 ( 北 )으로 뉴카슬과 더 멀리는 브리스베인 퀸슬랜드 주 까지 줄지어 이 동했던 바로 그 길이었다. 바다와 접한 이 센츄럴 코스트(Central Coast) 도로변은 어김없이 마 을과 구멍가게와 값싼 술집과 모텔들이 들어서 있었다. 이들 마을 중에 가장 큰 마을이 고스포드였다. 주말 저녁이면 고스포드 펍(*선술집)에는 한국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들었다. 소설 부문 123

124 이들은 월남 전쟁터에서, 혹은 서부독일 지하 탄광에서, 혹은 중동 건설 현장에서 곧바로 귀국 행 비행기를 타지 않고 좀 더 돈(Dollar)을 벌어 금의환향( 錦 衣 還 鄕 )을 꿈꾸며 이곳 호주로 온 한국인 근로자들 이 대부분이었다. 모두들 한 주간 힘든 노동일을 마치고 이 값싼 선술집에 모여 고국 ( 故 國 )을 생각하며 두고 온 부모 형제와 처자식들을 그리면서 아리랑 을 불렀고 기타를 두드렸었다. 이런 이야기는 지금 호주 이민사( 移 民 史 )의 한 페이지요, 오늘의 도 시로 발전한 고스포드 역사( 歷 史 )의 한 장( 場 )이 되어 버렸다. 이곳은 또한 천혜의 자연 조건이 두루 갖추어진 곳이기도 하다. 병 풍처럼 둘려 쳐진 맹그로브의 장엄한 산세를 보라. 이 높고도 수려한 산세가 급히 남태평양 바다로 빠져내려 산과 바다 의 자연경관이 더욱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도시가 고스포드였다. 이같이 시드니 북부지역 마을들은 모두 맹그로브 산세가 바다로 떨 어진 급경사 지형 위에 마을들이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뒤늦게 승우가 이 동네에 자리를 잡은 지 벌써 5년이 됐다. 승우는 기능직 소방 공무원의 정년을 간신히 채우고 곧 바로 시드니를 벗어나 도망이라도 치듯이 이곳으로 물러나 앉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승우는 전화벨이 계속해 울리는 소리를 잠에 취해 듣고만 있었다. 늦은 점심을 먹은 후 소파에 기댄 채로 깜박 오수를 즐기고 있었기 때 문이다. 여보! 빨리 전화 받아요 아내가 발코니에서 빨래를 걷다 말고 소리 124 재외동포 문학의 창

125 쳤다. 갑자기 날씨가 변덕을 부리고 있었다. 승우는 겨우 몸을 일으켜 전화기로 손을 뻗었다. 이승우 씨 댁입니까? 저는 고스포드 비상재난 센터 수잔 로렌스 입 니다. 승우가 수화기를 들자마자 그녀는 용건부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선생님께서 급히 도와주실 일이 생겼습니다. 방금 빗물 배수관에 한 소녀가 빠졌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도와주십시 오. 부탁드립니다. 승우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내가 열어젖힌 발코니의 문으로 차가운 바닷바람이 들이 닥쳤다. 정신이 번쩍 났다. 그 신고를 받은 게 언젭니까? 바로 조금 전이예요. 지금 거기 센터에는 아무도 없나요? 예, 모두 뉴카슬 침수지역으로 출동 했습니다. 알았어요. 곧 가겠소. 승우는 윗옷을 집어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무슨 일인지 조심하세요. 여보! 아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현관 까지 따라 나오며 그에게 말했다. 걱정 말아요. 곧 다녀오리다. 승우는 하늘을 쳐다봤다. 하늘에는 검은 먹구름이 가득했다. 금방이 라도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오전 까지만 해도 맑은 하늘이었는데 요즘 날씨는 통 종잡을 수가 없었다. 소설 부문 125

126 빅토리아 주에서는 유래 없는 가뭄으로 인해 두어 달 전에 큰 산불 이 번졌다. 그 산불이 한 마을을 덮쳐 200여 명의 인명피해를 낸 호주 사상 초유의 자연재해를 발생시켰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물난리가 난 것이다. 뉴사우스 웨일스주 시드니 근교 일부 지역에 어제 밤부터 폭우가 쏟 아졌다. 한 마을이 통째로 물에 잠겨버렸다. 수해를 입은 마을은 이곳 에서 50여 킬로미터 더 북쪽으로 올라가야 했다. 그 수해지역에서 가장 가까운 구조센터가 여기 고스포드 소방서였다. 그래서 이곳 S.E.S(State Emergency Services) 재난구조 반원 들이 모두 그쪽 침수지역으로 총 출동해 일손이 딸린 나머지 부득이 승우에게 도움을 요청 한 것으로 짐작이 됐다. 승우는 이미 현직에서 은퇴 했지만 인명구조 요원으로 계속 소방본 부에 적을 두고 무급( 無 給 )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승우는 차를 몰아 거리로 나섰다. 태양을 가린 먹구름으로 어둠이 저녁처럼 깔린 거리는 어수선한 느낌이 들었다. 거리에는 귀가를 서두르는 행인들과 하교시간 학생들로 분주했다. 차도에는 불을 밝힌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골목길에서 나온 차들은 곡예를 하듯 끼어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승우는 차 콘솔박스 에서 경광등을 찿아내 그것을 승용차 지붕위에 부착 시켰다. 그의 차에서 곧 귀 찢어지는 경보음과 붉은색 경광등이 요란하게 번 쩍였다. 드디어 그는 양보하는 차량들의 틈새를 비집고 힘껏 액셀레이 터를 밟았다. 126 재외동포 문학의 창

127 SES(재난구조) 본부는 고스포드 소방서 아래층에 설치되어 있었다. 승우는 우선 당직 반장에게 접수된 신고전화 내용부터 분석해 보자 고 말했다. 이 신고 센터는 경찰과 합동으로 운용되고 있었는데, 센터로 걸려온 모든 신고전화들은 24시간 동안 전부 녹음이 됐다. 신고자의 목소리는 젊은 여자였다. 아 여보세요. 거기 구조센터죠? 지금 배수로에 여학생이 빠졌어 요. 빨리 구해주세요 분명히 신고했습니다. 알았죠? 예? 배수로라니요? 어디에 있는 배수로죠? 지금 무슨 소리죠? 아 가씨. 에리나 쇼핑센터 사거리 왼쪽에 빗물 배수관 멘홀이 있죠? 거 깁니다. 멘 홀이 어떻게 됐길래? 아가씨! 잠깐만요. 에리나 쇼핑몰 그 러니까 테리갈 바닷가로 나가는 큰길 옆 사거리를 말하는 겁니까? 예. 바로 그곳입니다. 사고 지점이. 거기 빠진 사람이 아가씨와 동행인입니까? 아는 사람 이예요? 빠 진 사람 이름과 아가씨 이름은 어떻게 되죠? 아니? 이것보세요. 내 이름은 알아서 뭣합니까? 우리는 이 전화가 장난 전화가 아니라는 것을 먼저 확인해야 합 니다. 아이참 기가 막혀. 이것보세요. 사람이 멘홀에 빠졌단 말이에요. 어 린 여학생이에요. 내 눈으로 직접보고 신고합니다. 이렇게 한가히 이럴 때가 아니라고요. 죽을지도 몰라요 그 애가. 소설 부문 127

128 그럼 구조 소방관이 도착할 때까지 잠시 거기에 계시겠습니까? 아 가씨. 아니 나는 젖먹이 아이가 있어요. 지금 당장 집으로 가야해요. 알 아서 하세요. 나는 분명히 신고를 했어요. 알았죠? 철컼, 뚜 뚜 뚜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겼다. 아마도 공중전화를 이용 한 것 같았다. 당직 반장인 그녀가 캐비닛에서 커다란 청사진들을 꺼내며 승우에게 말했다. 이건 에리나에서부터 테리갈 해변까지의 배수시설 도면입니다. 배 수터널, 하수구 등이 모두 표시된 거죠. 지금 지하에 있는 시설물들의 위치는 모두 여기에 모두 나와 있어요. 그녀는 청색 도면 한 장을 상황판 위에 넓게 펼쳤다. 여기 이 지점이에요. 아이가 빠졌다는 하수구가. 그녀가 팔을 뻗어 도면위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찍었다. 승우는 돋보기를 쓰지 않은 흐릿한 눈으로 상황판을 향해 허리를 굽 혔다. 그녀가 빠른 말로 승우에게 계속 설명했다. 신고 지점 맨홀이 여깁니다. 여기 배수터널은 폭 3.5미터, 높이가 4미터정도로 내부가 꽤 넓습니다. 빗물과 오수를 테리갈 앞 바다로 밀 어내는 펌프장이 가까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 요즘 같은 우기에는 맹 그로브 산 계곡에서 흐르는 물 까지 모두 이리로 합류 됩니다. 얼마 전에 내린 소나기로 수량이 어떨 진 알 수 없지만 만약 맨홀에 어린 학생이 빠졌다면 아마 포기를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벌써 128 재외동포 문학의 창

129 바다까지 멀리 떠내려갔을 수도 있으니까요. 아무튼 먼저 현장 확인이 필요 합니다. 빠르게 설명을 마친 그녀에게 승우가 간단히 질문 했다. 배수로 중간 중간에 안전망 같은 것은 없습니까? 혹 말입니다. 카 운슬(*구청)에서 배수로 청소 작업을 할 때 작업 요원들을 위한 안전시 설 같은 것을 해 놓진 않았을까 해서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이 부근이 바다와 가까운 메인(main)배수로이 다 보니 그러나 너무 믿을 건 못됩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오래전에 설치된 것 일테니. 알았습니다. 수잔양! 머뭇거릴 시간이 없군요. 곧 바로 뒤 따라 구조팀이나 빨리 출동 시켜주시오. 나이 먹은 사람이 하수도에 오래 쳐 박혀 있기는 싫소, 하하하. 승우는 경직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농을 하며 크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미 혼스비 센터로 구조지원 요청을 해 놓았 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현장 확인만 해 주십시오. 그녀의 말을 뒤로하고 승우는 출동 차량 대기실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바깥 날씨는 점점 더욱 험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웅~웅~ 거리는 바람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태풍의 징조라는 것을 알아 챈 작은 새들이 유칼립스 나무 위에서 분주하게 숨을 곳을 찾아 날개 짓을 하고 있다. 멀리서는 천둥소리가 포성처럼 울렸다. 차량에 오른 승우는 무전기 스위치부터 켰다. 얼마동안 전파를 잡느 소설 부문 129

130 라 칙칙 거리던 무전기에서 침수지역으로 출동한 케빈의 목소리가 들 렸다. 케빈은 이곳 고스포드 재난 구조대 책임자였다. 그는 이미 여기 상 황을 모두 보고를 받은 모양이었다. 승우가 지금 출동 중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흥분했다. 이런 맙소사, 혼자서 출동이라니요 선배님! 긴급 신고가 접수됐는데 어쩌겠나? 가서 살펴봐야지. 조금만 더 기다리셨다가 혼스비 팀이 도착하면 그들을 현장으로 안 내나 해 주세요. 지금 맹그로브에 집중 호우 경보가 내렸다고요. 그 쪽 산 계곡의 물이 모두 그리로 몰릴 겁니다. 맹그로브에 비가 언제 부터 내렸나? 지금 막 지금 빗줄기가 마치 양동이로 쏟아 붓는 것 같답니다. 그 물살이 여기까지 도달 하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리겠지? 아닙니다. 40분정도 어쩌면 더 빠를 수도 있습니다. 알았네. 내가 먼저 그 아이를 빨리 찾아 봐야겠네. 아니? 선배님 혼자서요? 그건 무립니다. 맨홀에 어린 학생이 빠졌다는 신고를 받았는데 어쩌겠나 너무 걱정 말게. 선배님 그럼 멘홀 안으로 너무 깊숙이 들어가진 마십시오. 곧 구 조대가 현장에 도착할겁니다. 약 40분 정도 시간적 여유가 있습니 다. 시간적 여유라니??? 40분 후면 수량( 水 量 )이 어느 정도 될 것 같은가? 130 재외동포 문학의 창

131 40분이 지나면 안 되죠 그땐 배수로 안에 물이 하나 가득 꽉 차 버릴 겁니다. 맙소사!!! 고맙네, 자 시간이 없네, 이만 끊어야겠네. 승우는 운전석 앞에 붙은 비상출동 경보스위치를 켜며 소방차의 액 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앵~앵~앵~ 곧 요란하게 번쩍이는 경광등과 사이렌 소리가 도로에 하나 가득 울려 퍼졌다. 거리는 아직도 어수선 했지만 출동한지 10분이 채 되기 전에 그는 빗물 배수터널 사고현장에 도착했다. 승우는 곧 뒤따라 올 구조팀을 위해 차 시동도 끄지 않고 경광등까 지 켜 놓은 채 맨홀 안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그는 우선 등에 짊어질 장비들 중에 산소병과 마스크와 호스, 비상로 프, 방수랜턴 등 장비들을 눈으로 확인했다. 장비를 둘러본 승우는 출 동차량에 비치되어 있는 잠수복처럼 생긴 다목적 구조복으로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램프가 달린 안전 모자를 쓰며 사다리에 올랐 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숙달되고 익숙해진 자연스런 몸놀림이었다. 승우는 사다리를 타고 천천히 멘홀 아래로 내려가며 모자 앞쪽에 붙 은 램프를 켰다. 불빛에 비친 터널 벽은 이끼들이 물풀처럼 길게 자라 덮여 있었으며 아래쪽 바닥에는 검은빛 물결이 강물처럼 도도히 흘렀다. 흐르는 물과 배수로는 승우에게 늘 생경한 이질감을 불러 일으켰다. 아들 녀석이 승우는 아들 녀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녀석은 보이 스카우트 훈련 중에 계곡의 급류에 휘말려 실종이 됐다. 그렇게 된지가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었다. 소설 부문 131

132 그녀석이 만약 살았더라면 올해로 나이가 스물일곱 살인가? 제법 의 젓한 청년이 되었을 터 인데. 승우는 단 하나 뿐인 늦둥이 자식 놈을 그렇게 비명에 잃은 후 스스 로 지은 죄가 많음을 한탄했다. 그리고 바로 그 해에 인명구조 대원으 로 자원 했었다. 승우가 내려선 지하 빗물 배수시설( 排 水 施 設 )은 크고 작은 곁가지 배수관들이 한곳으로 모여 마치 작은 운하( 運 河 )를 이룬 듯 했다. 땅속에 이렇게 거대한 물길이 있으리라고는 미쳐 생각지 못 했었다. 승우는 번쩍이는 은빛 물결을 따라 한걸음씩, 한걸음씩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수색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맨홀에 빠진 소녀가 아래쪽으 로 떠내려갔을 것이란 짐작 때문이었다. 물은 제법 허리까지 찾다. 승우는 우선 배수로 벽에 한 뼘 씩나 자란 이끼 위를 더듬어서 안전 로프를 고정시킬 만한 장치가 있는 지를 확인했다. 그런데 녹이 쓸 긴 했지만 커다란 금속이 대략 오륙 미터 간격으로 벽을 따라 촘촘히 박혀 있었다. 승우는 로프 한쪽을 든든한 금속 고리에 걸고 잠금 장치를 했다. 이제부터 어깨에 걸친 줄을 서서히 풀어 나가며 하류를 향해 수색 작업을 벌이면 될 터이다. 승우는 한 발 한 발 어둠속을 향해 물결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발아래 감지되는 바닥은 몹시 미끄러웠다. 물의 깊이와 바닥의 미끄러움 때문에 여학생이 충분히 떠내려 갈 만 했다. 132 재외동포 문학의 창

133 갈수록 점점 터널속이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어두움의 깊이가 너무 깊어 켑 램프 불빛이 점점 오렌지색갈로 변해 가는 것 같았다. 그동안 승우는 곳곳에서 숱한 인명구조 작업에 참여 했지만 이처럼 혼자서 터널 속으로 들어오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승우는 터널을 몹시 싫어했다. 터널은 깜깜한 어둠과 숨 막히는 긴장감이 자신의 모든 것을 옭아 메기 때문이었다. 어둠속에서 일어날 예상치 못한 일들이 그를 한없이 두렵게 했다. 일정하게 들려오는 이 물 흐르는 소리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이 어둠 괴기스런 이 공포감은 어디에서 오는 건지? 승우는 몰려드는 두려움을 물리치기 위해 아들 녀석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더 떠 올리려 애를 썼다. 올해로 나이가 27살 되었으니 이젠 제법 의젓해 졌을 거야, 암 그렇고말고. 검은 벽 저쪽에서 아들 녀석이 그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도 승우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인해 등에 땀이 배어났다. 그는 어둠을 헤치며 한 발 두 발 계속해 전진했다. 계속 전진하며 그는 가끔씩 저 깜깜한 앞쪽을 향해 커다란 목소리로 사람을 찾았다. 거기 누구 없어요? 대답해요. 우웅~웅~ ~ 웅~ 없어요~ 해용~ 우웅~ ~ 어둠속 저편에서 메아리가 습기 찬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서 되돌아 왔다. 소설 부문 133

134 그는 자신이 본능적으로 터널 속의 위험을 냄새 맡을 수 있는 예민 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전율 했다. 떠오르는 옛 생각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승우는 몰려드는 두려운 생각을 떨치려 머리를 세차게 도리질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이미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2 베트남 투이호아(Tuy Hoa)의 붉은색 연기( 煙 氣 ), 적군이 파놓은 땅 굴을 28연대 수색중대가 발견했다. 대규모의 땅굴이었다. 28연대는 치고 빠지는 적의 매복 작전에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부 대였다. 28연대 병사들은 눈이 뒤집혔다. 복수심에 불타올라 적을 추적 했다. 그러나 땅굴 속으로 숨어 버린 적군을 찾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악착같이 찾던 중에 이런 대규모의 땅굴을 발견 했던 것이다. 상황은 즉시 상부로 보고되었다. 사령부에서는 승우를 포함한 땅굴 수색 정보병 다섯 명을 28연대로 급파했다. 대원들을 태운 시누크(*헬리콥터)가 땅굴 앞에 착륙했다. 대원들은 그동안 셀 수도 없이 많은 작전과 임무를 수행해 왔지만 매번 땅굴 앞에 설 때마다 서로 간 얼굴만 쳐다보며 머뭇거렸다. 굴속 이 무섭고 두려웠기 때문이다. 특수작전을 수행하는 부대원으로 차마 두렵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 지만 실은 모두가 깜깜한 굴속을 무서워했고 두려워했다. 팀장인 승우가 먼저 붉은색 조명탄 몇 발을 굴 속 깊숙이 던져 넣어 터트렸다. 그런 후에 공기 압축기로 강력한 바람을 굴속으로 불어 넣음 134 재외동포 문학의 창

135 으로서 땅굴은 금새 거대한 굴뚝처럼 되어 버렸다. 곧 반경 6~7백 미터 이내의 푸른 초원에서 3줄기의 붉은색 연기가 빠져나와 하늘위로 뭉게 뭉게 피어올랐다. 이제 적이 땅굴 속에서 도망칠 수 있는 탈출구는 3곳 이라는 것이 증명된 셈 이다. 작전은 항상 이런 방식으로 신속히 시작 됐다. 승우는 아직도 붉은 연기를 토해 내고 있는 3곳 탈출구에 그 구멍 마다 대원들을 2명씩 짝을 지어 들여보냈다. 그러나 자신은 짝 없이 홀로 깜깜한 터널 안으로 몸을 굴렸다. 대원들은 누구나 땅굴 안에서 공포와 죽음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다. 적들이 숨은 굴속의 어둠은 그들을 한없이 두렵게 했다. 그래서 땅 굴 수색병들은 서로 간에 무언( 無 言 )의 약속을 한다. 땅굴 속에서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기로 절대 전우를 그 안에 혼자 버려두고 철수 하지 않기로. 그래야만 죽음의 그림자를 알아볼 수 있는 자 들끼리 서로 신뢰가 쌓이고 의지가 되기 때문이었다. 적이 숨어있는 어두운 굴속은 언제 어 디서 무슨 위험이 닥칠지 아무도 모른다. 숨 막히는 공포의 연속이었 다. 그래서 개별적으로 행동 하거나 굴속에 혼자 남겨지기를 원하는 병 사는 아무도 없었다. 드디어 땅굴 세구멍에 대한 수색을 끝낸 대원들이 돌아왔다. 돌아온 병사는 3명이였다. 한 명의 얼굴이 보이질 않았다. 승우는 보이지 않는 얼굴의 파트너를 족쳤다. 네 반쪽을 어디에다 잃어버리고 너 혼자 왔느냐? 라고, 녀석은 자신의 반쪽이 깜깜한 굴속에 적이 설치한 부비트랩(*덪)에 소설 부문 135

136 걸려서 죽창( 竹 槍 )이 깔린 깊은 함정 속으로 추락해 버렸다 고 말했다. 순간, 승우의 송충이 같은 검은 눈썹이 꿈틀 하고 움직였다. 승우는 칼날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녀석을 향해 단호히 명령했다. 지금 즉시 너는 네 반쪽이 있는 그곳으로 돌아가라. 그 굴속으로 다시 가 죽은 시체라도 건져 오너라. 그것이 싫으면 이 칼로 자결해라. 승우는 녀석의 코앞에 M16 대검을 던져 주었다. 이렇게 승우는 녀석 의 등을 떠밀어 또다시 터널 속으로 들여보냈다. 그것이 녀석과의 마지 막 이별이 될 줄이야. 녀석은 끝내 살아 돌아오지 못 했었다. 승우는 지금도 녀석의 얼굴과 낭랑한 그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녀석은 늘 경상도지방 사투리로 말을 재빠르게 지껄였다. 조장님예, 지는 왜 이러는지 모르겠심더, 굴속으로 들어갈 때 마다 머릿속이 멍청해져 뿌리요, 바보처럼 말이요, 어두운 토굴이 지를 죽일 것만 같아예 조장님은 그런 생각 안 들어예? 안 그래예? 10여 년 전에 승우가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을 때도 가장 먼저 생각 난 것이 녀석의 이런 목소리였다. 무서워예. 조장님! 땅굴이 어둠이 지를 죽일 것만 같아예, 조장 님은 안 그래예? 씨끄러 임마, 너 지금 당장 그곳으로 기어들지 못해, 빨리 가서 시체 라도 찾아오란 말이야, 그렇게 해야 넌 우리 전우야. 승우는 지금 자신의 숨소리조차도 너무 크게 들렸다. 아마 지나친 긴장감 때문이리라. 일정하게 쉼 없이 들려오는 이 물 흐르는 소리 알 수 없는 이 오싹한 냉기의 정체는 역시 공포 때문이었다. 136 재외동포 문학의 창

137 승우는 공포심을 밀어내기 위해서라도 계속해서 소리를 크게 질러야 했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대답해요. 없어요~ㅇ 옹~옹~ 해요~ㅇ 옹~옹~ 어김없이 메아리는 되돌아왔다. 녀석의 말이 백번 옳았다. 나 역시 땅굴속이 무섭고 한없이 두려웠 지만 내가 팀을 이끄는 리더 다 보니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 나 녀석을 그때 억지로 등 떠밀어 그 굴속으로 재차 들여보내지는 말 것을. 얼마나 무서웠으랴 얼마나 죽음이 두려웠으랴 이때였다. 자신이 물속을 걷는 첨벙대는 소리에 석여 색다른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승우는 더럭 겁이 났다. 그의 내면에서 유혹의 속삭임이 계속 됐다. 자 이승우 이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마라. 위험하다. 어서 돌아가. 그만 돌아가 어서 이 어둠속을 탈출해 더 늦기 전 에 어서. 승우는 그제야 허리띠에 매 달린 방수용 야광 시계로 시간을 확인 했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면의 유혹은 여전히 계속 됐다. 얼굴도 모르는 여자애를 위해 너는 지나치게 위험을 무릅쓰고 있 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어서. 그만 포기해 버려라 그런데 이번에는 그 색다른 소리가 더욱더 분명하게 들렸다. 소설 부문 137

138 흐르는 물소리와 자신이 물속을 걷는 첨벙대는 소리에 섞여서 확연 히 들여오는 사람의 목소리 헬로우~핼프. 핼프미~. 정신이 번쩍 났다. 승우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저만치 검은 공간에 나타난 섬뜩한 여자의 형상이 희미한 캡 램프 불빛을 받아 어른거렸다. 승우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드디어 소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겁에 질린 소녀가 몸을 떨며 승우에게 말했다. 뭔가가 제 한 쪽 발을 잡고 있어요 도와주세요. 그래 알았다. 안심해라. 이제 내가 널 도와주마. 흐르는 물이 아이의 가슴 까지 차올라 있었다. 아이가 주춤 주춤 물 살에 떠밀려 내려가다 무엇엔 가에 발이 걸려 멈추어 선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아이는 물속으로 쓰러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버티 고 있었다. 아이는 무서움에 절어 울지도 못했다. 울음조차 잊은 아이가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간신히 또 승우에게 말했다. 무엇이 제 발목을 꽉 붙잡고 놓아 주질 않아요. 승우가 아이를 진정 시키려 황급히 아이 가까이 다가갔다. 급히 서 둘렀다. 그는 아차 하는 순간 길게 미끄럼을 탔다. 아이가 있는 주변 바닥이 유난히 미끄러웠다. 승우의 왼쪽 발이 미끄럼을 타고 어디론가 푹 빠지 며 몸이 물속으로 곤두박질했다. 그 서슬에 아이도 동시에 넘어졌다. 138 재외동포 문학의 창

139 둘이 함께 물속으로 잠겼다가 손을 마주잡고 같이 일어섰다. 얘야, 괜찮니? 네, 괜찮아요. 흐~흑. 아이는 그제야 울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래, 진정해라 이제 우리는 아무 일없이 곧 구출될 꺼야. 승우의 말에 아이가 더욱 더 흐느꼈다. 깜깜한 배수로 검은 물속에서 두 사람이 모두 무엇인가로부터 한쪽 발목을 잡힌 채 서로에게 위로의 말을 주고받았다. 자, 얘야, 내가 널 꼭 구해주마 나를 믿어라.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모두 잘 되겠지요? 승우는 곧 자기 머리에 쓴 전등이 달린 안전모를 벗어 들었다. 그는 그것을 소녀의 머리위에 씌워 주었다. 대신 그는 잠수용 마스크를 뒤집 어썼다. 그리고 등 뒤 산소통의 벨브를 열었다. 그는 순식간에 시원한 공기가 가슴속 까지 가득 차오르는 기분을 느 꼈다. 승우는 주저앉는 자세로 물 밑으로 내려갔다. 재바른 몸놀림 이었다 물속은 침전물이 가득했다. 수중 램프를 켰지만 불빛이 흐렸다. 그는 곧 자신과 소녀의 발밑을 살폈다. 그러나 잘 보이질 않았다. 그는 자신의 왼쪽 발을 움직여 보았다. 발은 덫에라도 걸린 것처럼 쉽게 빠지질 않았다. 아마도 오래전에 콘크리트 바닥에 설치된 무슨 철 제구조물 사이로 두 사람의 발이 빠진 듯 했다. 승우는 먼저 소녀의 빠진 발을 장님처럼 두 손으로 더듬어 만져 보 았다. 소설 부문 139

140 소녀의 발목을 잡고 있는 철 구조물의 두께가 만만하게 만져졌다. 용기가 났다. 그는 소녀에게 말하듯 자신 스스로에게 말했다. 자 내가 곧 빼내 줄 테니 얘야 너무 무서워 말아라. 곧이야 잠깐이면 될 거야. 승우는 전신에 힘을 모아 소녀의 발목을 잡고 있는 그 쇠붙이를 벌 려보려 애를 썼지만 그것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몸을 버둥거리며 용을 쓰는 동안에 흙탕물만 가득히 일어났다. 승우는 허리에 차고 있던 스패너를 지렛대로 이용해 보기로 했다. 스패 너를 그 쇠붙이 틈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눌러 버티기 시작했다. 물속에서 그는 팔목이 시큼거리도록 계속해서 그 지렛대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손과 팔이 아프도록. 손과 팔이 너무 아팠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통의 신음소리가 산소마스크를 통해 공기방울이 되어서 물위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산소가 쉭 쉭 소리를 내며 승우의 폐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승우는 계속해서 혼신의 힘을 두 팔에 집중시켰다. 더욱더 이를 악 물었다. 장갑을 끼지 않는 손과 손목이 시큼 거리고 아팠지만 그는 온 몸으 로 더욱 힘을 썼다. 드디어 소녀의 발목을 잡고 있던 철제빔의 두텁게 부식된 녹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조금씩 휘어지는 느낌이 왔다. 1미리씩 2미리씩 조금씩 아주 조금씩 휘어지는 그런 느낌 이 었다. 금방 곧 잘 될 것 만 같았다. 승우는 한층 더 힘을 써서 젖 먹던 힘 까지 모두 쏟아냈다. 어깨근육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마와 목, 140 재외동포 문학의 창

141 팔의 푸른 정맥이 실지렁이처럼 꿈틀 꿈틀 움직였다. 손과 팔에서 느껴 지는 극심한 고통은 심장에까지 전달 됐다. 그런데 쇠붙이의 틈 사이는 더 이상 벌어질 기미가 없는듯했다. 진전이 없었다. 그는 이제 힘에 부쳐서 도저히 못할 것만 같았다. 그만 포기를 해 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언제 어느 때 부터인가? 승우의 귓가에 아들의 목소리 가 들렸다. 아빠! 힘내세요 조금만 더요 조금만 더요. 이상하다? 그는 이상했다. 그에게 새로운 힘이 솟았다. 그는 자신의 몸 어디에서 이런 새 힘이 솟아나는지를 알 수 없었다. 믿겨지지가 않았다. 그가 최후로 마지막 남은 힘을 두 팔에 모두 쏟아 부었을 때 그때 소녀의 발이 그곳으로 부터 쑥 빠져 나왔다. 기진맥진 해진 승우가 물속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무의식 적으 로 등 뒤로 손을 뻗어 등에 진 산소통 벨브를 잠궜다. 가능한 산소를 아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목을 길게 뺀 다음 힘겹게 산소마스크를 벗었다. 어둠 속에서 소녀가 승우에게 안겨왔다. 소녀는 작은 새처럼 몸을 떨며 말했다. 됐어요 아저씨 이제 발을 뺐어요, 어서 밖으로 나가요. 어서 어 서. 승우는 빨리 판단하고 재빨리 행동에 옮겨야 했다. 소설 부문 141

142 이제 맹그로브 산 계곡으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거대한 물결이 곧 이 터널 안을 휩쓸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조급했다. 야광시계 분침은 벌써 2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소녀가 혼자서도 능히 행동할 수 있도록 승우는 소녀에게 용기를 북 돋워 주어야만했다. 그는 소녀에게 물속을 걷는 요령과 로프를 다루는 방법을 간단명료하게 요점만 설명했다. 설명을 마친 그는 곧 바로 결론 을 내렸다. 자, 이제는 너 혼자 힘으로 이곳을 탈출해야한다. 어둠속에서 소녀의 두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얘야 나는 도저히 너와 같이 갈 수 없구나. 나도 너처럼 뭔가 가 지금 내 왼쪽 발을 꽉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는단다. 그러니 이번 에는 네가 나를 도와주어야 할 차례야. 어떻게요? 제가 어떻게. 너는 이 로프를 잡고 계속해서 이 줄만 따라 가 거라. 그러면 밖으 로 나갈 수가 있어. 가능한 빨리 움직여야 해, 20분 이내로 꼭 이곳을 벗어나야 하거든. 소녀가 20분이라는 말에 또다시 수긍치 못하고 머뭇거렸다. 얘야 20분이 지나면. 이 배수로 안은 물이 하나 가득 찰 거야. 그러니 부지런히 움직여야 해. 네가 먼저 빨리 밖으로 나가 나를 구출 해 줄 사람들을 불러 다오. 지금 나는 숨을 쉴 수 있는 공기마저도 산소 통에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 자 어서 출발해라. 빨리. 승우는 소녀의 머리위에 씌어준 전등이 달린 안전모의 끈을 다시 한 142 재외동포 문학의 창

143 번 단단히 조여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혁대에 걸려있는 안전 고리를 풀어 소녀의 허리에 든든히 채워 주었다. 이렇게 그는 두 손을 부지런 히 놀리며 소녀가 자신감을 가지고 잘 해 낼 수 있도록 세심하게 설명 하고 격려하는 말을 계속했다. 소녀의 표정에서 결연한 결심이 묻어났다. 드디어 소녀가 용감히 출 발했다. 소녀가 로프를 잡고 물길을 거슬러 오를 때 배수로가 굽어지는 지점 에서 불빛은 사라졌다. 깜깜한 터널의 어둠이 또다시 승우에게 몰려들 었다. 깜깜한 터널 터널작전을 손쉽게 종료( 終 了 )시키기 위한 한 방법 으로 승우 팀은 늘 굴속에 폭약을 설치했다. 베트남의 구찌 땅굴에서도 승우는 녀석과 함께 폭파장치를 했다. 그는 어두운 굴 안에서 온 신경 의 촉수를 손끝에 모았다. 둘은 20분 후에 터지도록 폭약의 타이밍을 정확히 맞추어 놓은 후 서둘러 철수하기 시작했다. 굴속으로 들어갈 때와는 달리 퇴각할 때는 랜턴을 켜 들고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 퇴각을 시작한지 10여분이나 됐을까? 들어 갈 때는 보 지 못했던 또 다른 새끼 터널 입구를 발견하게 되었다. 승우는 그 굴속을 향해 전등불을 비추며 반사적으로 사격자세를 취 했다. 그런데 터널 벽에 기대어 앉아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하마터면 승우는 M16을 쏘아 갈길 뻔 했다. 그것은 정글복을 입은 피습된 아군의 시체였다. 시체의 목이 헝겁 조각으로 만든 인형 목처럼 앞으로 깊숙이 꺾여 있었다. 소설 부문 143

144 정글복 가슴에 새겨진 부대 마크위로 목에서 부터 흘러내린 검은 피 가 바닥에까지 흥건했다. 놈들이 칼을 사용해 우리 수색대원의 목을 뼈 만 남긴 채 단칼에 잘라버린 모습이었다. 아직 어린병사였다. 반쯤 열려진 병사의 눈꺼풀은 눈동자가 없는 텅빈 검은 구멍이었다. 병사의 목을 뒤로 젖히자. 거기에는 그것보다도 더 큰 목구멍이 뻥 뚤려 있었고 그 구멍 속에 아직 채 응고 되지 않은 검붉은 핏덩이가 가득 고여 있었다. 하마터면 승우는 토할 뻔 했다. 그때도 그는 파트너 녀석과 시비가 붙었다. 녀석은 병사의 시체라도 건져 본국으로 송환시키자 했고 승우는 이 미 폭파장치가 된 땅굴 속에 오래 머물 수 없다고 했다. 승우는 훈련 받을 때 배운 대로 우리는 빈손으로 어서 빨리 퇴각해 야 한다고 녀석을 설득했다. 그러나 녀석이 계속해서 고집을 부렸다. 승우는 녀석을 위협해 겨우 굴 밖으로 끌고 나왔다. 녀석이 끌려나오며 승우에게 말했다. 조장님예, 전우를 적진에 내 삐리고 도망치면 안 된다고 했잖아예, 조장님이 먼저 그리 말 했잖아예. 안 그래예? 야, 임마! 그건 땅굴에 폭파장치가 안 되었을 때 얘기야. 마치 녀석은 승우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렇게 어깃장을 놓았다. 녀석은 가끔 야생 대마 잎을 담배처럼 피워 물고 환각 상태의 몽롱 한 정신으로 혼자 땅굴 폭파 작업을 하겠다며 나설 때도 있었다. 공포 로 부터 벗어나려 녀석이 대마초를 흡입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작전 144 재외동포 문학의 창

145 병으로서는 골치 아픈 존재였다. 평소 승우는 자신의 마음속에 녀석의 행동을 경멸하고 미워하는 그 런 잠재의식이 깔려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자신의 의식 속에 녀석 에 대한 그런 미움의 감정이 존재했었다면? 때를 맞추어 녀석이 자기에게 잘못 걸려든 것은 아닌지? 그래서 자기가 녀석을 재차 땅굴 속으로 그 사지( 死 地 )로 내몬 것은 아닌지? 승우는 생각을 지우려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소녀가 거슬러 올라간 물길을 따라 어둠속 저편에서 또다시 녀석의 목소리가 메아리쳐 오는 듯 했다. 조장님예! 전우를 내삐리면 자신의 반쪽을 삐리면 안된다고 조 장님이 먼저 그리 말했잖아예, 안 그래예~에~에~에~에~~~~~~. 그래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어. 승우는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어둠의 공포가 점점 그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승우는 끝내 구조대의 구조를 받지 못할 것만 같은 두려움에 빠졌다. 무서웠다. 이 터널은 맹그로브 산( 山 ) 계곡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수십 만 톤의 물 폭탄으로 이미 폭파장치가 된 터널이었다. 승우의 머릿속에서 계속 위험 경보가 울렸다. 경보와 함께 푸른 연기가 자욱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승우는 또다시 머리를 도리질했다. 소설 부문 145

146 3 푸른 연기( 煙 氣 )가 오른 곳은 판문점 이었다. 북한은 같은 공산국가 인 북 베트남의 전술교리를 본받아 땅굴을 처음 파기 시작한 것이 1973 년이었다. 베트남 전쟁이 종전될 무렵이었다. 한반도에서 6.25전쟁 휴전 이래 새로운 남침 계획의 일환으로 드디 어 북한이 남쪽을 향해 비무장지대를 관통하는 터널을 판 것이었다. 북쪽에서 파 내려온 그 남침용 땅굴을 우리 국군이 최초로 발견한 날이 그 해 11월 15일 이었다. 한미연합사( 韓 美 聯 合 司 )와 1군( 軍 )은 즉각 데프콘2를 발령했다. 군( 軍 ) 작전처는 당연한 조치로 베트남 전쟁터에서 특수작전 경험이 풍부한 병사들을 소집했지만 이미 예비군이 된 그들 중에 땅굴수색을 자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도 승우는 어김없이 녀석의 예의 그 낭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승우는 당일 13시에 육군 헬리콥터에 실려 파주군 고량포 비무장 지 대에 투입 됐다. 놀랍게도 서울기점 52km, 파주 동북방 8km지점에 그 땅굴이 있었다. 행정구역상으로 경기도 연천군 백합면 백령리였다. 승우는 GOP(*최전방 관측소)에 올라 베트남에서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우선 발견된 땅굴 입구 깊숙이 푸른색 조명탄을 계속 던져 넣어 터 트렸다. 그런 후 아트라스 코프코 압축기로 강력한 선풍기 바람을 굴속 으로 불어넣기 시작했다. GOP에서 바라보이는 북한 땅은 겨울철 마른잡초가 우거진 황량한 146 재외동포 문학의 창

147 불모지였다. 드디어 그 마른잡초 더미 사이를 비집고 북녘 땅의 한 지점에서 푸 른색 연기가 하늘 높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관측 장교가 재빨리 거리 계산을 했다. 직선거리 3천5백 미터 지점 이었다. 북한군이 3천5백 미터 이상의 지하터널을 남침용으로 건설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후일 이 터널을 제1호 땅굴이라 이름 붙였다.) 이미 그날 오전에 지역 부대장이 땅굴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소대 장에게 수색을 지시해 다섯 명의 부하를 잃고 한 명의 병사마저도 행방 이 묘연한 사건이 벌어진 이후였다. 승우가 재수색을 겸한 실종병사의 행방을 찾아 나선 것은 짧은 겨울 해가 떨어질 시각이었다. 승우는 파트너로 옛 부하 한명과 함께 그 굴 속을 들어섰다. 비무장 지대를 관통해 북녘 땅으로 이어진 긴 터널 입구는 높이가 1.2미터 폭이 90센티 정도로 좁은 굴이었다. 휴대장비 검사를 마친 두 사람은 엎드린 자세로 포복 전진하기 시작 했다. 승우가 총을 잡고 승우 짝이 손전등을 비추며 각자 해야 할 일들을 분담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긴 막대기 끝부분에 손전등을 윗 쪽으로 매달아 겨우 어둠을 밝혔다. 막대기를 이용해 전등불을 사람 키 높이만큼 높인 이유는 어둠 속 저편에서 날아드는 총탄이 항상 불빛을 조준해서 쏘기 때문이다. 또한 소설 부문 147

148 예상치 못한 기습을 받았을 때도 역시 적을 속이는 한 방법이 되었다. 천천히 조심조심 굴속을 포복하고 있는 두 사람은 공포의 열기로 땀 이 비 오듯이 흘러 내렸다. 승우는 눈으로 흘러드는 땀방울을 손 등으로 훔치며 땅굴의 벽과 바 닥을 열심히 살폈다. 행여 적군이 설치했을 지도 모를 부비트랩(*위장 된 폭탄)의 견인 철선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을 계속해 포복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까진 무릎과 팔꿈치 의 상처에 땀이 스며들어 쓰리고 아팠지만 그런 정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드디어 어느 때 쯤 인가 둘은 휴식 자세를 취하기 위해 전등 을 껐다. 불이 꺼지자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의 공포가 곧 두 사람을 덮 쳤다. 어둠 속에서 둘은 자신의 거친 숨소리를 진정 시키려 어금니를 깨물 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애를 써도 코와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숨소리 는 쉽게 진정이 되질 않았다. 쿵쿵 뛰는 가슴은 곧 터질 것 같았다. 굴속 어둠이 마치 자신들과 함께 살아 숨 쉬는 것 같아 두렵고도 무 서웠다. 휴식이 휴식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차례 더 휴식을 취하고 또다시 움직였을 때 승우는 희미 한 손전등 불빛 아래 거뭇한 핏자국을 보았다. 터널이 좀 넓어진 지점 이었다. 148 재외동포 문학의 창

149 핏자국은 암반이 굴착된 흰색 바닥에서 더욱 선명했다. 병사는 앉아서 변을 당했다. 땅굴 벽에 등을 기댄 채로 병사는 고개 를 앞쪽으로 깊숙이 꺽인 자세로 죽어 있었다. 그의 전투복 상의에 쓰 인 민정경찰 이라는 네 글자가 목에서부터 흘러내린 검은 피로 얼룩져 읽을 수조차 없었다. 피는 가슴을 적시며 아래로 흘러내려 바닥에 흥건 히 고여 있었다. 승우가 베트남의 땅굴 속에서 발견했던 그 어린병사의 죽음과 너무도 흡사한 그 모습 그대로였다. 승우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온 몸이 덜덜 떨렸다. 맹세코 그 떨림은 두려움에서 오는 그런 부류의 떨림이 아니었다. 그 해 겨울은 승우에게 너무나 추운 그런 겨울이었다. 또다시 승우는 세차게 머리를 도리질해 생각을 떨쳐내려 애를 썼다. 어두운 배수로 안에서 물소리 흐르는 소리 이외에 어떤 작은 소리라 도 놓치지 않으려 승우는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작은 빛이라도 무슨 빛이 보이지나 않는지 눈이 아프도록 어둠속을 응시했다. 아직은 나타나지도 않을 구조대의 손길을 그는 그렇게 기다렸다. 이마로부터 흘러내린 소금기 섞인 땀방울이 눈으로 흘러들어 눈을 거북하게 만들었다. 눈이 따가웠다. 눈물이 났다. 눈을 수없이 깜박이는 동작을 반복했다. 그때였다. 섬뜩한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 내렸다. 승우는 어둠속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코발트 빛 두 눈동자를 분 명히 보았다. 심장이 멎는 듯 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소설 부문 149

150 그 눈동자 가 드디어 천천히 신중하게 이쪽을 향해 몸을 움직 였다. 점점 승우에게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온 몸의 신경세포가 머리로 비상경보를 전달하며 아우성을 쳤다. 껴입은 잠수복 안으로 식은땀이 축축하게 흘러내렸다. 승우는 반사적으로 허리에 차고 있던 몽키스페너를 단단히 움켜잡 았다. 그리고 어둠속 가까운 곳에서 빤짝이는 그 눈을 향해 묵직한 쇠붓치 를 힘껏 휘둘렀다. 처~처엄~ 벙 잠시 요란한 물소리가 났지만. 승우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물위로 헤엄쳐 떠내려 온 한 마리의 커다란 퍼슴(*쥐과 대형 동물)이였다. 터널의 어둠이 또다시 평상을 되찾았다. 승우는 지나치게 체력을 소모했다. 지나치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몸이 떨리고 추웠다. 체온이 떨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숨이 차오르고 오한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등에 걸머진 산소통이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아~아 이제 곧 산소 부족을 알리는 경고등이 깜박일거야. 먼 곳으로 부터 천둥치는 소리가 들렸다. 승우는 그 소리가 거대한 물보라가 배수로 벽을 강타하며 기세롭 게 흘러 내려오는 소리라는 것을 금세 알았다. 허리춤을 더듬어 야광시 계를 찾았다. 150 재외동포 문학의 창

151 시계의 분침이 1분을 표시하고 있었다. 소녀를 떠나보낸 지 25분이 지났다. 소녀가 배수로를 벗어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희미한 미소가 잠시 그의 얼굴을 스치는 듯 했다. 이제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산소로 최후 순간까지 버티어야 했다. 거 센 물보라가 들이 닥쳐 자신의 몸을 산산조각 내기 이 전에 그는 어서 몸을 숨겨야 했다. 그는 멜빵의 끈을 단단히 조였다. 다시금 산소마스크를 얼굴위에 썼 다. 산소통의 밸브를 열었다. 그리고 물속으로 깊숙이 가라앉았다. 그가 막 물밑 바닥의 철 구조물을 두 손으로 꽉 붙잡았을 때 그 순간 머리위로 거대한 물기둥이 회오리치며 통과했다. 마치 물속에서 일어 나는 태풍과도 같은 엄청난 위세의 소용돌이가 간발의 차이로 그의 머 리 위를 지나쳤다. 순식간에 지하 배수로 안이 물로 하나 가득 꽉 들어차 버렸다. 물이 가득 채워진 배수로 바닥은 마치 깊은 호수의 바닥처럼 어둡고 도 고요했다. 승우는 부유물이 떠다니는 어두운 호수의 바닥에 발이 붙잡혀 가라 앉아 있었다. 붉은 빛 경고등이 검은 물결에 반사되어 깜빡였다. 산소통 에서 공기가 부족 하다는 응급 신호였다. 그는 힘없는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흔들리는 물결에 스스로 몸을 맡겼다. 그리고 호흡 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숨을 쉬며 공기 소모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그의 머릿속은 베트남과 판문점과 고생한 아내와 아들 녀석의 얼 굴들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소설 부문 151

152 베트남에서 먼저 보낸 녀석들을 나는 곧 만나게 될 거야 그리 고 또 사랑하는 아들을 만나면 녀석이 나를 이 아빠를 알아나 볼 까? 아내는 연금으로 여생을 쓸쓸히 살아가겠지? 그는 호흡이 점점 가빠지기 시작했다. 숨을 쉴 공기가 부족했기 때 문이다. 승우는 폐활량을 더욱 더 줄였다. 승우는 가능한 긍정적인 생각을 계속했다. 아마 지금쯤 수중 구조대원( 水 中 救 助 隊 員 )들이 나를 찿기 위 해 이 부근을 샅샅이 탐색하고 있을 거야. 승우는 계속해 희망을 가지려 노력했다. 그러나 줄어드는 폐활량으로 인해 가슴에 통증이 오기 시작 했다. 서서히 의식이 가물거렸다. 그래도 그는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래 구조대가 지금 날 찾고 있어 조금만 더 견디자. 승우는 안간힘을 썼다. 어느 때 쯤 인가부터 가슴의 고통은 사라지고 다시 평안이 찾아 왔 다. 깊은 물속의 고요한 어둠은 한없이 계속 됐다. 산소부족을 알리는 경고등 불빛마저 슬며시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을 그는 뒤늦게야 깨달았다. 산소가 바닥났다. 주위는 칠흑처럼 어두 웠다. 점 점 숨이 막혔다. 가슴이 시렸다. 추웠다. 152 재외동포 문학의 창

153 아내가 보고 싶다. 아내의 따뜻한 손길이 한없이 그리웠다. 따뜻한 생기를 나누어줄 사람의 체온이 몹시도 간절하다. 아내 사진을 넣어둔 지갑이 있는 곳을 더듬어 보기 위해 승우는 떨 리는 손을 연신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이미 팔과 손이 모두 생각처럼 움직여 주지를 않았다. 반쯤 뜬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눈물 한 방울이 잠수경안으로 뚝 떨어졌다. 눈물 고인 망막위로 그는 한줄기의 빛이 아련히 스며들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소설 부문 153

154 알렉산드리아의 여자들 가작 아미라 L. S. 리(이집트) 프롤로그 마케도니아의 청년황제 알렉산더는 바다 건너 고국과 가장 빠르게 연결될 수 있고 통치하기 수월한 위치에 정복국 이집트의 수도를 둘 것을 희망했다. 그는 친히 지중해변을 따라 가로형으로 가늘고 긴 직사 각형의 자그마한 어촌을 지목하고 도시건설의 장대한 프로젝트에 참여 하였다. 알렉산더가 세상을 떠나고 그리스계의 왕조가 이집트에 들어 선 이후로도 이 프로젝트는 근 2세기가량이나 지속되어 일개 어촌에 지나지 않았던 알렉산드리아는 마침내 완성된 수도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그 최초의 건설자이자 정복자였던 이의 이름을 딴 이 도시의 이름은 오늘날까지 근 2천여 년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집트 북단의 지중해변의 휴양도시이면서 두 개의 항구를 가지고 있 는 이 도시는 오늘날 이집트 산업 및 교육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154 재외동포 문학의 창

155 알렉산드리아의 여자들 1 나는 이렇게 메모를 적어 그의 앞으로 밀어냈다. 우리 아이는 내가 여기 온 이유를 몰라요. 그는 눈치를 채고 말했다. 노 프라블럼 이런 일에 대단히 익숙한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경험은 적지 않다는 얘기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이번에는 그가 물었다. 얼마를 생각하고 있습니까? 나에게 그를 소개해준 사람이 입에 물어준 대로 나는 대답했다. 그 는 잠시 생각하는 척하더니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건 예전 가 격이고 지금은 조금 더 인상이 되었다고 했다. 이것도 다른 무수한 것 들처럼 내가 외국인이기에 지불해야만 하는 과외비(extra fee)일테 지. 그렇다면 나 역시 노 프라블럼. 마취과 닥터의 개인클리닉으로 옮겨야 한다길래 나와 아이는 그를 따라나섰다. 그의 차는 상당히 낡은 빨간색 푸조였다. 그의 아이들 것 으로 보이는 장난감들이 꽉 들어찬, 에어컨도 없고 창문도 빡빡한, 안 그래도 가슴이 꽉 막혀서 심란한데 이런 상황까지야. 차 좀 바꾸지, 돈 벌어 뭐해, 이런 일하고 받는 돈이 적지 않을 텐데, 싶다가 문득 그가 일하는 우리가 인터뷰 했고 막 떠나온 병원의 리셉션이며, 산부인 과 간호사들이며, 앞으로 만나게 될 마취과 닥터까지, 그가 쿠키를 물 려주어야할 입들이 참 많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부문 155

156 본래 카톨릭과 이슬람에서는 낙태를 금하고 있다. 나라의 근간인 종 교가 그러하니 나라법도 그에 맞춰 이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한반도의 다섯 배씩이나 되는 땅덩어리 가운데에 고작해야 3퍼센트 정도의 땅에 서만이 사람이 살아 숨 쉬는 이 나라에서, 남북한을 훌쩍 넘어서는 총 인구가 해마다 그 수를 보탠다고 쳤을 때, 집도 없고 잡도 없는 사람들 이 과연 잉태되는 대로 아이들을 낳을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여기에도 방법이 있을 거야, 분명히 그걸 해주는 클리닉이 있을 거 야, 숨어서라도 하는 닥터가 틀림없이 있을 거야. 아무리 고급 직종이 라 해도 그 많은 이 나라의 닥터들이 하나같이 풍요로움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온몸의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 일 을 해줄 닥터들을 찾았다. 전 화 몇 통화, 꼬박 이틀의 시간이 걸렸다. 그럴 줄 알았다니까. 처음 전 화로 상대가 외국인임을 확인한 목소리들은 하나같이 환영을 하는 분 위기. 곧장 수술일자를 예약 받으려 들었다. 남편에 대해서도 묻지 않 았다. 나이는 몇이죠? 현재 자녀수는요? 아, 그럼 당신을 이해합니다. 또다시 아이를 낳기에는 건강에 무리가 있죠, 정도였다. 예의상 아니었 을까. 엄마 금방 끝나? 응, 한 두 시간쯤? 수술 마치고 잠에서 깨어나려면 그 정도는 걸리지 않을까? 그동안 난 뭐해? 여기서 엄마 지키구 짐 지켜야지 156 재외동포 문학의 창

157 그 어떤 과목의 닥터도, 이 나라에서는 절대로 여자 혼자서는 만나지 않는다. 남편이나 아버지, 할아버지, 삼촌, 오빠, 동생, 그도 아니면 나 처럼 아들이라도 동반하는 것이 풍습이었다. 남들로부터 혹은 담당 닥 터로부터도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함이다. 마취과 닥터는 인상이 좋았 다. 빨간 푸조 닥터보다 나이가 들어 보였는데, 설마 스승은 아닐 것이 고 뭐 좋은 일이라고 제자와 결탁해 이런 짓을 하겠는 가 선배쯤이 려니 짐작해보았다. 그는 될수록 환자를 혹은 고객을 편안하게 만들 어주려 애썼다. 마취과로는 이 일대에서 꽤 유명한 곳이라고 했다. 아 무렇든지 실력만 있으면 돼. 나를 다시 깨어나게만 해줄 수 있으면. 이름이 뭐죠? 파티마 장입니다 당신은 어느 나라 출신인가요? 한국입니다. 남쪽. 2 소하는 내내 마음이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엊그제도 경찰이 다 녀갔다. 이번 일로 모임이 해체될까 그것이 제일 우려되었다. 모임 창 단 멤버 중에서 아직까지도 알렉산드리아에 남아있는 건 소하가 유일 했다. 그들의 모임은 이미 단순한 <5세 미만 어린 아이를 둔> 외국인 엄마들의 모임이 아니었다. 이 나라로 시집온 외국여자들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사랑방이며, 주저 없이 하소연을 토해낼 수 있는 고해성사의 장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회원 모두에게 그리고 앞으로 회원이 될 사람들에게까지도 이 모임은 더더욱 소중하고 이곳에 사는 동안이라 소설 부문 157

158 도 지켜내고 싶은 존재였다. 소하가 셀리나의 전화를 받은 건 일주일 전이었다. 다급했고 위험스러운 목소리였다. 통화하는 내내 소하는 가 슴이 두근거렸다. 셀리나는 이미 미국대사관 안에 들어와 있다고 했다.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기어이. 정말 결심한 거니? 응 다시 한 번만 생각해보면 너도 알잖아. 더 이상 다른 길은 없어. 내가 뭘 해주면 되겠니? 그냥, 나를 모른다고 해줘 분명히 떨리고는 있었지만 친구에 대한 최선의 배려를 해야 한다고 소하는 생각했다. 모임의 멤버 중에서 소하와 같은 국적에다가 가장 친 한 사이인줄 모두가 아는 데 그런 거짓말이 과연 통할까, 경찰이 믿어 줄까 스스로도 반신반의 하긴 했지만 힘껏 낭랑하게 음성을 매만졌다. 내 걱정은 하지 말아. 내가 알아서 할께. 그보다 제발 몸조심해, 응? 니가 보고 싶을 거야, 소하. 도착해도 한동안은 연락 못할 거야 그래, 알아. 잘 가 셀리나. 잘 살아 제발 잘 살아라, 두 번 다시는 그런 사람 만나지 말고, 귀여운 너의 세 딸들과 함께 제발 잘 살아라, 친구야. 앞으로는 앞만 보고 살아라, 너를 위해서 살아라. 소리 없이, 가슴이 답답할 때면 늘 그러했듯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렇게 또 한 사람이 위험스러운 시도 를 하려는 구나. 둘도 없는 친구였던 만큼 셀 리나만은 무사히 뜻을 이기를 바라며, 소하는 차례로 몸을 씻었다. 손, 158 재외동포 문학의 창

159 입 안, 코끝, 얼굴, 팔, 머리, 귀 그리고 발. 친구를 위해 기도를 준비하 는 중이었다. 소하, 나 무서워, 어떡해? 한밤중에 걸려온 하난의 전화를 소하의 남편이 받았다. 다짜고짜 울 먹임이 건너오니 소하의 남편은 의아해하며 돌아보았다. 당신친구 하 난이야. 무슨 사고라도 난거지? 그의 눈빛은 이미 단정을 짓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의 하난은 얼마나 놀랬는지 소하가 아무리 달래어도 진정 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미국여자인 셀리나가 현지인 남편과의 사이 에서 낳은 아이들을 몽땅 데리고 자기나라로 도주했다는 소식은, 굳이 클럽의 장인 소하의 입을 거칠 필요도 없었다. 한 주일 내내 폴란드인 인 하난을 시작으로 줄줄이 멤버들이 경찰의 호출을 받았다. 덩달아 이 집트로 시집온 외국여자들에 대한 시각이 의혹으로 바뀌었고, 남편들 이나 시댁으로부터 쏟아지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들을 저항 없이 받아내 야 했다. 남편 하나 믿고 이국땅으로 건너온 여자들에게 이보다 더한 고통은 없었다. 오직 시간만이 해결책이 되어줄수 있을 뿐. 이집트로 시집온 어떤 여자들은 국적문제를 상당히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신들의 국적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당신들이 어쩔 수 있겠느냐,는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에 있어서는 문제가 달라 지기 마련이었다. 어떤 이집션 아이도 아버지의 허가 없이 자국을 벗어 날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되어있기 때문이었다. 남편을 따라 국적을 바 꾼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문에 대개의 외국여자들은 자국과 이 집트 두개의 국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둘 중 하나를 포기 하도록 자국의 대사관으로부터 종용받기는 한다. 소설 부문 159

160 셀리나의 경우는 미국 국적을 보유한 상태로 살면서 셀리나는 이 집트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다 자기 아이들에게 미국여권을 만들어준 케이스였다. 이집트인들은 미국 국적을 상당히 선호하므로 미국여자, 미국여권 따위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미국인에게 대단히 우호적인 편이었다. 정치적인 이슈를 떠들 때와는 정반대의 태도이다. 수개월에 걸친 치밀한 준비 끝에 결국 셀리나는 하교 길의 아이들을 직접 픽업해서 그대로, 쉬지도 않고 무려 네 시간을 차를 몰아 카이로 의 미국대사관으로 피신을 했고 도움을 청했다. 외교적인 문제에 대해 서, 미국은 상당히 자국민 보호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당연히 미국 의 시민들 인 셀리나와 그녀의 아이들은 안전한 보호 속에서 미국으로 떠날 수 있었다. 도주 당일에 이를 눈치 챈 남편으로부터, 이집트정부 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긴 했지만 누구도 이 지구상에서 가장 힘이 센 골리앗의 결정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대신 평소 셀리나가 출입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외국인여성모임과 멤버들이 고스란히 그들로부터의 괴롭힘을 떠안아야했다. 그 후로도 아주아주 오랜 동안을. 3 현지인 수준 이상으로는 줄 수 없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굵은 안경알 너머로 미안함이 엿보였다. 진심인 것 같았다. 리요는 상체와 함께 고개를 구부렸다. 미안하게 해서 외려 미안하다는 표시였 다. 같은 일본인으로서 일본인을 이집트인으로 취급해야하는 어려움이, 난처함이, 혹은 마음의 불편함이, 교장의 현재 기분 상태일 것이었다. 고용이 확정된 순간의 안도감도 마음껏, 그런 교장 앞에서는 차마 내 160 재외동포 문학의 창

161 보일 수 없었다. 학생 수가 그리 많지 않으니 마사오상이 힘들 일은 별로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떤 조건을 제시해도 수락할참이었다. 현지인 초보교사와 같은 수 준의 월급도, 그것도 달러도 아니고 이집트 파운드화라 할지라도, 수학 영어 일어 세과목을 담당해야하는 막중한 업무도 이미 고려의 대상은 아니었다. 필요한 건 돈이었으니까. 아이들은 엄마 힘으로 사는 거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들려주곤 하던 말이었다. 비공식적 으로 아이들의 기를 살려주는 것이 엄마의 본분이며, 아이들이 기가 살 고 죽고는 오직 엄마의 능력 경제력 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라고. 자 신의 어머니로부터 배우고 체험하여 긍정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는, 그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서 어머니는 늘 아버지 몰래 시장에서 아르바이 트를 했다. 어물전, 스시집, 슈퍼, 만화가게, 미용실... 어머니가 거치지 않은 상점이란 그 동네에서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곧잘 리 요의 작은 손에 당시 그 또래들의 유행이던 이쁜 팬시용품이나 아니면 적은 액수나마 용돈을 쥐어주곤 했다. 친구들한테 무시당하지 말라고, 유행에 뒤처지지 말라고. 물론 리요, 아버지에겐 비밀!을 잊지 않으며. 이집트 현지인들에게 평범한 일본여자 는 없었다. 일본에서라면 지 극히 평범한 일본인 중의 하나였을 리요가, 역시 평범한 이집트 남자인 소설 부문 161

162 지금의 남편에게로 시집왔을 때, 그녀는 더 이상 평범한 일본여자 가 아니었다. 오로지 일본여자 였다. 당연히 부자여야 하고, 당연히 기만불이나 하는 스포팅클럽 평생 멤 버쉽도 취득해야 하고, 당연히 아가미(* 저자주: 알렉산드리아 근교의, 지중해의 휴양지)에 별장도 구입해야 하고, 자가용도 당연히 도요타 코롤라 이상의 것이어야 하고, 아이들은 당연히 국제학교에 넣어야 하 고, 당연히 영화 오싱 처럼 남편에게 순종적이어야 하고, 당연히 시동 생들 자립하는 데에 상당한 기여를 해주어야 하고, 당연히 시댁의 사업 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수년 내에 거뜬히 일으켜주어서 동네의 자랑 을 삼아야 하고, 만일 직장을 갖는다면 당연히 월급이 수천불은 거뜬히 넘는 뽀대나는 잡이어야 하고, 당연히 그 월급은 남편명의의 은행계좌 로 다달이 전액 불입되어야 하고, 또 당연히, 빌어먹을. 평생을 검소하게 살아온 부모 밑에서, 능력 이상의 것이나 운명 이상 의 것을 누려 본적도 탐내어 본적도 없는 리요는 이런 시선들에 목이 졸렸다. 당황했고 난처했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평범 한 일본여자 였을 때, 평범한 일본여자인 애인 으로 만났던 남편조차도 현실을 넘어선 기대 를 품고 있다는 눈치를 챘을 때에는 정신이 다 아 득했다. 에이, 그래두 명색이 일본여잔데, 나 모르는 뭔가를 꿍쳐두고 있을 거야. 언젠가는 스스로 내 앞에 내놓을 거야. 거기다 외동딸이잖아. 부 모 유산이 다 어디로 가겠어. 하는 기대를 감히, 그이까지도 품고 있었다니. 사랑 하나 달랑 믿고 쭐레쭐레 이역만리까지 따라온 자신의 행실이 너무나 기가 찼다. 울고 162 재외동포 문학의 창

163 불고 쓰러지기까지 한 어머니를 보면서도 이 사람 없으면 저 죽을 래 요. 라며 그 가슴에 못을 박은 그녀였다. 연애할 때 <결혼하면 그렇게 변할 사람>인줄 어떻게 아느냔 말이 지, 세상 어떤 여자가 그걸 알 수 있단 말이야. 그리구 더 솔직히 말하 자면, 그이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지. 어디 한번 생각해 보자구. 심성이 우선 착하고 잘 생겼잖아. 나에 대한 그런 기대 는 내가 외국인 이라 갖는, 다른 이집션들과 똑같은 감정상태일거야. 그 사람도 이집션 이잖아. 내가 쥐뿔도 없다는 진실을 저도 곧 알게 될 거야. 그럼 이내 그 어쭙잖은 기대 따윌랑 포기할 테지. 근데 시동생들까지 나한테 기대 하는 건 좀 그러네. 나더러 시아버지 사업 빚까지 처분해줬으면 하는 저 태도는 또 뭐야? 그것두 좀 그렇다. 가만. 생각해보니 역시 잘한 결 혼이 아닌 거 같네. 어휴 바보. 애가 둘인데 이제 와서 뭘 어쩔 수 있단 말야. 그 후로 리요는, 언젠가는 자살을 하거나 질식사를 하거나 둘 중 하나일거야, 그게 내 미래일거야. 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버거운 시선들에 떠밀려 없는 체하지도 있는 체하지도 않을 거야. 내식대로 살 거야. 남편의 수입만을 가지고, 거기에 매달려 살 거야. 규모 있게 쓰고 아끼고 모으고 그렇게 살 거야. 실망들 하라지. 기대하 다 지치면 절로 나가떨어질 테지. 그 누구보다도 먼저 제풀에 나가떨어진 건, 그러나 그녀 자신이었다. 소설 부문 163

164 매일아침 버석거리는 호밀 빵에 기름에 절은 따메이야 (*콩완자 튀 김)를 먹고, 오후 4, 5시나 되어서야 양이 과한 점심을 그것도 역시 기름에 절은 튀김이나 오븐구이들로만 가득한 먹게 하고, 밤11시나 되어서야 샌드위치로 저녁을 때우는 그날이 그날인 일상에 그녀는 물 론이고 아이들도 말라갔다. 아이들의 체질이 워낙 외탁을 한 탓에 가뜩 이나 입들도 짧은데 허구헌 날 기름진 것을 먹이려드니 자연 식사량은 줄어들고 식욕은 떨어진 모양이었다. 먹을거리도 이 모양인데 장을 볼 때에도 간단한 쇼핑을 갈 때에도 남편이 동반을 하고 직불을 했다. 리요는 돈을 만져볼 사이도 없었다. 이렇게 지폐를 그리워하며 살게 될 줄은 정말이지 꿈에서조차도 상상 해 본적이 없었다. 결국, 내가 벌어야해 결심하기에 이른 리요였다. 이제는 아이들만이 아니라 자신의 기도 스스로 살려줘야겠다는 결심, 누구를 만나도 특히 일본인들을 꿀 리지 않겠다는 결심,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처지지 않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래, 앞으로는 이렇게 살 거야 리요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도 모르게 주먹이 굳게 쥐어진 것도 같았다. 다음 주 일요일부터 출근하세요. (*저자 주석 이집트는 일요일부터 한 주의 업무가 시작됩니다.) 리요의 상념을 깨며 굵은 안경알이 말했다. 164 재외동포 문학의 창

165 4 파티마가 종이를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잔뜩 가져왔다. 모임의 멤 버들에게 한 장씩 나눠주고 있었다. 니가 만든 거니? 아유브는 시큰둥한 음성으로 물었다. 생활지 같은 신문으로 두 쪽으 로 되어있었다. 신문이름 옆에 편집자로 파티마 장의 이름이 적혀있었고, 발간을 시 작한지 벌써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집에 컴퓨터가 없는 듯 수기로 작성해 깨끗하지 않았다. 영문이었고, 아이들 작품코너, 칼럼, 격언, 생 활정보, 각국의 요리, 외국의 소식 등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저애는 도대체 왜 이런 <귀찮은> 짓을 하는 걸까? 분위기를 훑어보니 신참 멤버 몇은 관심을 두는 눈치였다. 다들 아직 어려서 그래. 여기가 어딘지 도통 의식하지 못하고들 있 군. 아유브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도 알렉산드리아에 십 년 이 상 거주한 사람이라면 그 실체를 분명히 깨달을 수 있을 텐데. 쯧. 니가 얘기해줘 슬쩍 소하를 보며 눈치를 줬다. 그래도 소하와 친한 멤버가 데려온 신입이니까 아무래도 자신보다 는 소하가 말해주는 게 낫지 이윽고 소하와 친한 멤버 가 파티마를 발코니 쪽으로 불러내었다. 그들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 아유브는 거실에 남아있는 신참멤버들에게 소설 부문 165

166 <사상을 주도한다고 의심을 살만한 신문 잡지 등의 발간에 대한 이집 트정부의 강력한 대응 및 발행인과 독자들이 처해질 가능성이 있는 불 이익>에 대하여 장장한 연설을 해주었다. 신입멤버들은 하나같이 과 도하게 긴장을 했다. 너무 심했나, 아니지, 셀리나 후유증이 아직까지 남아있는데 우리 모임이 더 이상 경찰의 주목을 받아선 곤란해. 이윽고 파티마가 거실로 돌아오자 그녀를 대하는 분위기가 지금까지 와는 달리 냉랭하게 돌변했다. 파티마도 자초지종을 들은 듯 상황을 이 해하는 눈치였다. 앞으로는 가져오지 않을게. 너무 풀을 죽여 놨나 싶어 아유브는 그녀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대 었다. 너를 위해서 하는 충고야,파티마. 그 신문발간을 중단하는 것이 좋 을 거야. 하지만 충고를 받은 대로 그러겠다는 건지 생각해보겠다는 건지 아 니면 이도 저도 아니고 그냥 계속 밀고나갈 생각이라는 건지, 이 코리 언은 도통 반응이 없었다. 알아서 하라지. 요즘은 아시안들이 더 활동적이야 화제는 자연스럽게 클럽의 고참 중 하나인 아유브에게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선배들로부터 이집트 적응하기 를 배우려는 신참들이 많다보 니 대개는 듣고자 하는 눈치들이었다. 아유브는 이집션 닥터와 결혼했 고 이집트에서는 꽤 부유한 집안으로 시집을 왔다. 물론 시댁의 위치가 166 재외동포 문학의 창

167 그 정도인 줄은 그녀도 결혼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시부모가 일찍 돌 아가시는 바람에 이층짜리 빌라가 고스란히 외아들인 남편에게로 떨어 졌다. 아유브의 남편은 표면상의 개업의 일뿐 현역에서 활동하지는 않 았다. 닥터의 수입으로는 빌라의 유지비도 벌어들일 수 없기 때문이었 다. 대신 그는 시댁의 가업을 잇고 있었다. 큼직한 빌라에 어울리게 아 유브는 무려 여덟 명의 아이를 낳아서 가득 채웠다. 내부가 얼마나 큰 지 여덟 명의 아이들이 흩어지면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남편은 이집 트까지 와서, 이집트의 풍습 아이가 생기면 생기는 대로 거부 없이 낳는 대로 아이를 낳아준 아유브가 대단히 고마운 눈치였다. 아유브 는 모임의 멤버들에게 자신이 받고 있는 시댁과 남편으로부터의 존경 과 사랑 에 대해서 종종 열강을 하곤 했다. 친정으로부터의 대우와 반 응은 슬그머니 감춰둔 채로. 베트맨 ~ 베트맨 ~ 지난여름 검은 히잡을 둘러쓰고 검은 망토를 걸친 그녀가 런던에 도 착했을 때, 거리의 십대들은 그녀를 뒤따라오며 놀려대었다. 부모와 형 제들도 영국인으로서 적합하지 않은 선택을 한 딸에게 그다지 호의적 이지 않았다. 단지 아유브의 아이들에게만 사랑을 표시할 뿐이었다. 그 나마도 감지덕지라고 아유브는 생각하고 있었다. 친정을 방문할 때에 는 언제나 남편을 동반하지 않는 것도 결국은 자신의 나라와 그 안의 사람들, 그녀의 가족들까지도 온몸으로 품고 있는 종족 내지 국적우월 감 때문이었다. 남편이 아무리 이러한 상황을 이해한다고는 해도 아이 들 방학 때마다 친정을 방문하는 아유브로서는 여간 미안한 맘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소설 부문 167

168 꼭 한번. 17년 전에 아유브는 이집트에서 결혼을 하고, 남편과 함께 영국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간 적이 있었다. 당시 그녀는 여대생이 었고 친구 몇과 어울려 이집트 여행을 떠났었다. 그런데 보름 안에 돌 아오기로 예정된 딸이 뜬금없이 남편을 데리고 나타난 것이었다. 그것 도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딸이 그것도 이집트인 남편을 동반하고, 이름 마저 아랍식으로 바꾸어버린 상태로. 아버지는 노발대발했고, 어머니 는 현관문조차 열어주지 않았고, 형제들은 대꾸하지도 내다보지도 않 았다. 그날의 그 기억이 아유브의 남편에게는 온몸으로 비로소 느낀 이집트인에게 가지는 외국인들의 시각 으로 굳어졌다. 이후 아유브는 줄기차게 자신이 얼마나 풍요로운 집으로 시집와서 행복하게 아이 낳고 잘 살고 있는 지. 요는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장성 한 딸들에게 한결같이 바라는 그 사실을 꾸준히 친정에 알렸다. 그녀의 노력이 효력을 보았는지 어느 날 런던으로부터 카드 한 장이 도착했다. 어머니로부터였는데, 아유브가 셋째를 임신했을 때였다. 셋째는 런던에서 낳아도 좋다 아유브는 울었고, 이후부터는 남편 없이 아이들을 낳았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서, 자신의 부모와 형제 곁에서.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다들 한결같이 느끼고 있을 텐데 뭘. 아유브는 신참멤버들의 초롱초롱한 눈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모두 들 그녀가 부러운 빛들이 역력했다. 아유브는 한껏 만족한 표정을 지었 다. 그날의 모임은 그럭저럭 즐겁게 끝이 났고, 다음 주 개최지로 자신 의 집을 제공할 멤버를 정한 후에야 헤어졌다. 아유브에게는 대단히 만 168 재외동포 문학의 창

169 족스러운 하루였다. 화원의 여인 어느 날 노오랗고 동그란 얼굴의 여자가 찾아왔다. 살짝 열린 대문 안으로 고개를 빠끔히 들이밀고 있었다. 여자는 한 손은 아주 작고 하 얗고 몹시 가벼워 보이는 어린 아이의 손을 꼬옥 쥐고 있었다. 마담 야스민은 때마침 정원 깊숙이 들어앉은 그녀의 오두막집 창가에 서있 었다. 볕이 따스한 오후였다. 계세요? 아무도 안계세요? 얼굴이 동그란 여자가 한 발을 대문 안으로 들여놓으며 영어로 소리 쳤다. 워낙 정원이 커서 이쪽은 보이지도 않을 터였다. 여자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쥐고 있던 아이 손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여자 는 마담의 지척이다. 자세히 보니 눈은 상당히 작고 옆으로 가늘게 찢 어져있었다. 아주 오래 전 고향인 오스트리아에 있을 때 꼭 한 번 이런 얼굴을 본적이 있었다. 아주아주 머언 나라의 사람들이었다고 마담 야 스민은 기억했다. 아무도 없나봐. 실례이긴 하지만, 조금만 더 보구 가자. 여자는 어린 아이에게 영어로 말했다. 영어가 그들 사이의 주 언어 인 것 같았다. 마담은 천천히 발걸음을 떼어 문으로 다가갔다. 몸의 움 직임이 날이 갈수록 둔해지고 있었다. 마담의 눈에 넋을 잃은 듯 정원 의 나무들 한가운데에 서있는 여자가 들어왔다. 아이는 여자에게 잡힌 소설 부문 169

170 한 손을 빼내려고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잠깐만, 잠깐만. 주인이 아이들 뛰어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일 지도 모르잖아. 조금만 있다가 가자. 마담은 저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심성은 착한 여자인가보군. 창가에서 움직여 문을 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 모양이었다. 어 느새 여자와 아이는 정원 한 바퀴를 다 돌고 막 원래 서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여자는 울창한 나무들에게서 좀체 시선을 떼지 못했다. 덩달 아 아이도 물끄러미 나무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미!! 제일 먼저 마담 야스민과 눈이 마주친 것은 어린 아이였다. 머리숱 이 별루 없어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여자아이였다. 마담을 보자마자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서 여자를 불렀다. 엄마였나 보다. 동그란 얼굴의 여자가 이윽고 마담을 발견하더니 활짝 웃으며 뛰다시피 다가 왔다. 그녀는 거의 직각으로 과도하게 상체를 굽히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마담. 죄송해요, 그냥 들어왔어요. 괜찮아요. 담장 밑을 지나가는 데 키 큰 나무들이 잔뜩 보이지 뭐예요. 정말 이렇게 아름답고 울창한 나무들이 이 동네에도 있을 줄은 몰랐어요.. 너무나 나무가 그리워서 이 기후에, 이 공해에, 숨이 막혀 죽는 줄 알았다며, 주인 허락 없이 무례하게 들어왔던 것을 용서해주겠느냐고, 여자는 숨도 안 쉬고 진지하게 사과부터 했다. 친근감이 가는 명랑한 여자였다. 마치 귀여운 손녀라도 된양 여자는 마담의 곁에 바짝 붙어 170 재외동포 문학의 창

171 섰다. 정원을 안내해달라는 애교 같았다. 마담 야스민은 여자와 아이를 우선 자신의 오두막집 안으로 초대했다. 여자는 자신의 이름은 파티마 장이며, 코리언이라고 소개했다. 코리아, 코리아. 마담은 나직이 이 이름을 외워보았다. 오두막집까지 지으시구 참 대단하셔요. 마담두 외국인이시죠? 난 오스트리안 이란다. 이 집에서 벌써 오십 년을 살고 있지. 내 나 이가 몇 인줄 아니? 아니요. 몇이신데요? 올해로 아흔이 넘었단다. 파티마는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렇게 보이지 않으세요. 고향에 가고 싶진 않으세요? 난 열 아홉에 고향을 떠났지. 그리고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이 집트에 정착한 세월이 내 인생의 절반을 넘으니 이곳이 바로 내 고향이 지. 저는 마담 야스민은 파티마가 머뭇거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주 오 래 전에 그녀가 느꼈던 두려움, 번민, 혼동 그리고 자신감 상실 같은 것들을. 이 나라에 계속 안주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마담 야스민은 파티마와 그녀의 어린 딸에게 의자를 권했다. 좁은 거실에 생전 켜지 않는 티븨 한 대,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둔 일인용 소파 하나씩이 가구 의 전부였다. 자녀분들은 저 빌딩에 사나요? 정원을 지나 오두막집 뒤로 보이는 3층짜리 빌딩을 보며 파티마가 소설 부문 171

172 물었다. 마담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층마다 아이들이 살고 있지. 일층에는 막내아들의 가족들이, 이층에 는 둘째네, 삼층에는 맏이네가 산단다. 다들 바빠. 외롭지 않으세요? 내 아이들은 이집트인들이야. 나의 정원이 풍기는 눅눅함을 질색하 지. 하지만 난 이게 편하다. 마담 야스민은 파티마와의 사이 작은 테이블 위로 한 손을 얹었다. 알이 작은 돋보기와, 제법 묵직한 코란이 놓여있는. 한 장을 펼쳐 파티 마에게 보여주었다. 한쪽에는 독일어로 다른 쪽에는 아랍어로 쓰여 진 코란이었다. 파티마는 감탄을 했다. 독일어 코란은 처음 봐요. 남편이 죽고 나서는 유일한 나의 벗 이란다 오스트리아에는 한 번도 안 가셔요? 휴가에라도? 마담 야스민은 깊게, 미소를 머금었다. 내 나이가 되면 비행기를 타는 것이 두렵단다, 아가. 그래서 늘 나는 마음으로만 고향엘 간단다. 마담이 한창일 때에는 아이들을 키워내느라 짬이 없었고, 그렇게 살 다보니 어느새 몸이 쇠약해진 것도 깨닫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남편을 먼저 보내니 이제는 정말 오도 가도 못하는 마음 반, 장거리여행이 주 는 두려움에 포기하는 마음 반으로, 마담 야스민은 이집트를 떠나 어디 론가 가는 행위에 대해서는 욕심을 접어두었다. 그래도 나에게는 나를 붙든 자부심이 있단다. 일인용 쇼파에 푹 파묻혔던 등을 곧추 세우며, 마담의 눈동자가 반짝 172 재외동포 문학의 창

173 였다. 나는 내 남편을 몹시 사랑했단다. 그를 존경하고 믿으며 사랑하며, 평생을 꼿꼿하게 살아왔다. 그것이 내가 그를 앞서 보내고도, 이 건조한 나라에서 홀로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하는 받침이 되어준 이유였단다. 파티마는 어느새 빨려 들어가듯이 마담의 인생담을 경청하고 있었 다. 열린 창밖으로 어느새 쫓아나가 정원의 나무들 사이를 뛰어다니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에필로그 사람들은 항상 그 순간의 올바른 일 을 한다. 적어도 결정을 내리는 그 순간에 만큼은 가장 적절한 판단을 내리고, 그리고 그것이 그 외에 는 대안이 없는 최선책이었노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후회란 있을 수 없다, 더 이상의 길은 없었다, 라며 때로는 호언도 서슴지 않는다. 그리 고 짧게는 한두 주일, 길게는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은 그때 다른 결정을 내릴 수도 있었음 을 발견하게 된다. 세상은 이렇게 늘 우리들의 능력 밖으로 우리를 내몬다. 우리에게는 아주 조금의, 성취감만을 허락할 뿐이다. 그래도 그것으로 우리는 희망 을 삼는다. 이방인으로서든 현지인으로서든 고국에서든 그 어느 나라 에서든 크게 다르지는 않은 모습으로. 여느 평범한 사람들처럼, 여자들 처럼 고뇌하며 살아가는 숱한 시간들의 의지를 삼는다. 우리들의 입에 소설 부문 173

174 희망을 물려주는 것이 아무래도 세상이 거기 존재하는 이유가 아닐까. 정말 그런 것이 아닐까, 라고 오늘도 알렉산드리아의 여자들은 짐작하 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74 재외동포 문학의 창

175 노래하는 밀라노 가작 조민상(이탈리아) 자명종이 7시를 울렸다. 커튼 사이사이로 뚫고 들어와 방안을 신비 스럽게 채우는 지중해 국가의 이른 6월의 태양마저 자명종 소리를 거 들자, 신기수는 무거운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렵사리 깨어 일어서려던 그는 허벅지와 허리의 뻐근한 통증에 다시 눕고 말았다. 어 제 하루 종일 제노바 근처에 있는 세라발레(Serravalle)의 대규모 아울 렛 상가를 누비고 걸어 다녔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자책하다가, 오늘도 가이드 건이 있어 나가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이 일까지 맡은 것에 괜한 화가 치밀어 왔다. 사실, 그는 유학초기부터 작년 초까지 가이드나 통 역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이태리 어도 잘하고 더불어 이태리문화에도 제법 안목이 있었지만, 가이드 아 르바이트를 하면서 결국 성악도의 길을 접은 선배들을 본 후, 자신은 정통 성악가로서 승부를 걸겠다고 다짐하고서는 아르바이트 제안을 모 두 거절했었다. 정확히 말하면 대여섯 번 정도 통역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지만, 그 때는 일을 주는 쪽에서 신기수씨가 아니면 안 됩니다. 라고 하였기에 좋은 보수에 대접을 받아가며 자존심까지 세울 수 있어 수락한 일들이었다. 아내가 늦지 않겠냐는 말에 잠시 으쓱하던 망상에 소설 부문 175

176 서 깨어, 침대를 뒤로하고 화장실로 간 그는 소금물을 입 안 가득 넣고 목 안 깊숙이 세정하였다. 그리고 이태리에 온 이후 즐겨 사용하던 이 태리어 기본 단모음인 A(아) E(에) I(이) O(오) U(우)를 이용하여 아침 발성을 해 보았다. 방금 일어났기에 가라앉은 목에 가래가 낀듯하여 헛 기침을 크게 서너 번 하니 이번에는 목젖이 약간 따끔한 느낌이 왔다. 이태리 유학 2년차가 되었을 때, 후두에 작은 혹이 생겨 의사로부터 몇 달 동안 발성은 물론 말조차 하지 말라는 진단을 받았던 그때 이후 몸이 피곤하면 이러한 증상이 간혹 발생하였다. 어제 그 두 중년 부부, 정말 힘들었지. 묻는 것도 많고, 안 되는 할인 도 무대포로 통역하라고 하고. 그러니 내 목이 이렇게 되었지. 그는 자조적인 독백을 뇌었지만, 어제 세라발레 명품 아울렛에서만 3천 유로 이상을 쓴 그 중년부부로부터 수고비로 300 유로를 이미 받 았고, 오늘도 반나절만 가이드하면 150 유로가 들어온다는 생각에 오 히려 들뜬 마음이 되어 면도까지 끝내었다. 450 유로면 연초부터 어 려워지는 경제상황과 맞물려 점점 쪼들려가는 살림에 단비와도 같은 수입이었다. 방으로 돌아와 무엇을 걸칠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고위 공무원 특별단체관광인데 잘 보여야지 하며 결국 단벌 여름양복을 꺼 내 입었다. 그리고 곧 아이들 방으로 갔다. 6월 초순부터 시작되는 이태리 학교들의 여름방학을 맞아 아직도 자고 있는 딸과 아들의 볼 에 입맞춤을 한 다음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현관으로 나설 때, 아내가 그를 불렀다. 뭣 좀 먹고 가지 그래요. 그의 아내는 그가 아침에는 뭘 먹지 않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잘 알 176 재외동포 문학의 창

177 고 있으면서도 하는 말에 은근히 불쾌한 마음으로 답하였다. 생각 없어. 알면서 왜 그래. 여기 꿀물을 타 놨어요. 성악가와 함께 산지 15년이 넘은 아내는 그의 아침 발성만 듣고도 벌써 목이 안 좋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Grazie!(그라찌에!). 겸연쩍거나 자존심에 금이 간다싶을 때면 한국말 대신 꼭 이태리어 로 대응하는 그는 이번에도, 조금 전 불쾌하게 응대했던 자신을 쑥스 러워하며 이태리어로 고맙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오늘은 반나절만 하 면 되니까 별 일 없을 거라고 아내를 안심시키면서 꿀물을 단숨에 들 이켰다. 9시 10분 전 모임장소인 밀라노 두오모 광장에 들어섰을 때 6월 중 순 밀라노의 날씨는 무척 화창하였다. 최고평균기온이 26 정도이고 습 도도 가장 낮은 달일 뿐만 아니라 구름도 7, 8월에 이어 가장 적게 끼는 달이라 독일을 포함한 북유럽국가의 관광객들이 밀려들기 시작하는 때 이기도 하다. 두오모 성당은 몇 달 전 2년 넘게 이어졌던 전면 보수공 사를 위해 처져 있던 보수막이 말끔히 걷혀졌기에, 맑은 날씨와 함께 밝고 투명한 베이지색 바탕에 아주 옅은 노란색과 붉은색을 은근슬쩍 흡수한 대리석 벽면을 도도하면서도 세련된 자태로 뽐내도 있었다. 기수 형, 여기서 뭐하세요? 같은 교회에 다니며 역시 같은 과 대학후배인 박인태가 그의 감흥을 깼다. 아, 인태구나! 악보 사러 나왔어? 소설 부문 177

178 신기수는 대답을 피하고 오히려 질문을 했다. 아뇨. 한국에서 배낭여행 온 조카와 만나기로 해서요. 박인태는 명랑한 목소리로 답한 직 후 혹시 오늘 가이드 있냐고 물 었다. 으응. 무언가 들킨 사람처럼 신기수가 얼버무리며 대답하자, 박인태도 괜 한 질문을 했다싶었는지 급히 인사를 했다. 형, 늦었는데 저 먼저 갈게요. 교회에서 봐요. 그래, 그럼 재미있는 시간 보내. 사라져 가는 얄미운 그의 뒷모습 건너편에 다섯 명의 한국인 그룹이 성당입구 계단을 향하여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전형적인 한국 관료들의 자태를 드러내며 걸어오고 있었다. 힘 준 목에 약간 거만한 듯한 걸음걸이, 이태리사람들이 보면 약간 무 표정하다 못해 짜증스런 얼굴표정, 메이커 있는 옷가지로 단장하였으 나 어딘지 모르게 코디가 덜 된 의상들은 그들이 한국인 관료임을 확실 하게 하였다. 사실, 같이 앉아서 이야기 하다보면 점잖고 겸손한 사람들도 있는데 왜 저렇게 구태의연한 행태를 버리지 못 하나 하고 비난하는 한편, 자 신은 16년간 이태리에 살면서 의식이 깬 사람이니 당신들보다 나은 편 이오 라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러나 그들에게 다가서서 머리 숙여 인 사는 하며 예는 취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여러분! 신기수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아시겠지만, 우리는 인천시에서 나왔습니다. 178 재외동포 문학의 창

179 다들 목례만 하는 가운데, 그 중에서 단장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화 답하면서 늘 일어나는 의례적인 대화가 오갔다. 그래 가이드 분은 뭐 하시는 분인가? 저는 성악을 하고 있으며 테너입니다. 아, 그럼! 이태리 하면 성악이지. 그런데 오신지 얼마나 되었소? 올해 만 16년 됩니다. 어이구, 그럼 이태리 사람 다 되었겠군. 그럼 나이도 꽤 될 텐데. 마흔 입니다. 한국엔 돌아가지 않으실 건가? 모르겠습니다. 제 청춘을 여기서 보냈기에. 자자, 가이드 분, 오후일정도 있고 하니 어서 둘러봅시다. 처음 이일을 시작했을 때, 가이드라는 호칭에 불끈했던 기억을 피식 웃어 버리고는 신기수는 자신이 해야 할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1386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1965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완공된 밀라 노 두오모는 로마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과 스페인의 세빌리아 성당 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성당입니다. 외부의 전면 높이가 68m, 외부 폭이 93m, 외부 길이는 158m 이며 최상부에 놓여 있는 황금으로 덮인 마돈니나 상까지의 높이는 108m입니다. 30분 가까이 밀라노 두오모 성당을 세세히 설명하면서 신기수는 1993년 가을 밀라노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이 성당을 대면하였을 때를 회고하였다. 그때 한국의 국보 1호 남대문과 보물 1호 동대문이 저 안에 대체 몇 소설 부문 179

180 개나 들어갈 수 있을까 하고 한 동안 충격에 잠긴 적이 있었다. 그가 그렇게 확신하던 한국문화만의 위대성과 창조성이, 그리고 그렇게 넘 쳐나던 배달민족의 자긍심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그러면서 자신 을 우물 안의 개구리로 만든 한국교육정책에 심히 분개하였고, 한국에 는 지나치게 국수적인 역사관과 편협한 저널리즘이 판을 치고 있다고 단정해 버렸다. 아마도 이러한 경험으로 인하여 그가 한국과 멀어지고 이태리에 장기체류하게 된 것이라고 한 그의 아내의 말이 해가 바뀔 때마다 점점 맞아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두오모 성당에 이어 갈레리아 빅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1) 를 지나 스 칼라 극장에 도착하였을 때, 신기수는 이번에도 옅은 좌절감을 떨쳐버 릴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그룹 중의 누군가가 자신에게 여기 스칼라 좌에 서 보았는지 혹은 이 무대에 올라간 한국인이 누구인지를 제발 묻지 않기를 바랐다. 역사적 사실과 야사는 물론 건축분야까지 세세히 곁들여, 중세기 밀 라노 영주였던 스포르짜 가문이 완공한 가스뗄로 스포르쩨스코(Castello Sforzesco ; 스포르짜의 성)까지 가이드를 마치고 났을 때, 그룹의 대표 는 흡족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신 선생, 가이드를 참 잘하세요. 게다가 박식하시고. 안 그렇습니 까? 아, 오늘 정말 좋았어요. 설명도 참 잘하시고. 아침에 가이드라던 호칭이 선생이라고 바뀌자 그는 잠시 대학교수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수고비 150 유로에 50 유로를 팁으로 더 주자, 1) 밀라노시 제일 중심에 있는 거리 180 재외동포 문학의 창

181 그는 대학교수의 기분을 즉시 벗어 던져야 했다. 한국에 오면 꼭 연락하라며 명함을 주고받는 의례를 끝으로, 그는 어제와 오늘 받은 수고비를 챙겨 담은 지갑을 뿌듯한 기쁨과 함께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주말에는 가족들에게 무엇 인가 해 줄 수 있다는 작은 희망에 잠긴 채. 자신을 기다리던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늦은 점심을 마치고, 신기수 는 아이들에게 자신 있는 투로 주말에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아빠, 전 그냥 집에 있을래요. 졸업시험이 있어서요. 만 14세로 이태리학제에 따라 9월부터 고등학교에 가게 될 큰 딸 미 라는 일상적인 말은 한국어로도 잘 표현하였다. 난, 수영장가고 싶어요. 동네 수영장 말고 온다랜드(Ondaland) 요. 2) 큰 딸과 세 살 터울로 역시 이태리학제에 따라 9월부터 중학교에 다 니게 될 둘째 녀석 도원이는 기쁨과 개구쟁이 끼가 섞인 미소를 지었 다. 그러나 한국어 표현이 아직은 어눌한 둘째는 곧 자신의 희망을 이 태리어로 수정하였다. 누나가 안 가면 재미없으니까, 누나 시험이 끝나면 같이 가요. 좁은 집안에서 자주 다투긴 해도 친척도 없는 외국생활에 서로 유일 한 남매간이라 기실 속으로는 서로 생각해 주는 바가 깊었다. 하지만, 아무튼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지방이나 교외에 있는 친척집 혹은 여름 휴양지에 빌린 집을 마련하여 바다와 산으로 다 떠나버리는 2) 밀라노 근교에 있는 대형인공파도수영장 소설 부문 181

182 이태리 초중고학생들을 볼 때마다, 자신의 두 아이들에게 미안한 감정 을 금할 수 없던 신기수는 먹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럼, 일단 이번 주말에는 돼지갈비와 메밀국수를 먹자. 그의 제안에 동의한 아이들이 그들의 방으로 돌아가자, 그의 아내가 잠시 머뭇하더니 고지서 한통을 식탁위에 조심스럽게 내 밀었다. 미라아빠, 혹시 루이지한테 연락해 봐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어 요. 그는 직감적으로 밀린 신호위반벌금이라고 생각했다. 90년대에는 벌금을 내지 않아도 시간이 가면 해결되었는데, 2000년대에 들어와서 는 세금징수청에서 꼬박꼬박 이자까지 포함하여 추가고지서를 보내고 있다. 행정이 느리고 엉망인 이태리가 돈 걷는 것에는 작심을 한 모양 이었다. 고지서를 보니 몇 년간 밀린 벌금과 연체료가 합산된 2,500 유 로를 보름 안에 지불하지 않으면 자동차를 차압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온 몸에서 힘이 다 빠져버리는 느낌이었다. 근간 장보는 돈도 빠 듯하여 각종 세금도 밀리고 있는 형편을 잘 알고 있기에 어디론가 도망 가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 자신 스스로 강하다고 믿고 있었 고 아내와 아이들도 남편과 아버지가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고 인정하 고 있었기에 그는 한숨 한번 쉬지 않고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였다. 하 지만 그 고지서에서 눈을 떼지 못 했다. 눈을 돌리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애써 별 일 아니라는 듯 아내에게 말했다. 이태리가 요즘 별 일이군. 이렇게까지 발전했어. 아무튼 루이지에 게 연락하면 무슨 해결책이 있을 거야. 182 재외동포 문학의 창

183 그러나 그는 아무리 루이지가 오랜 친구이며 변호사일지라도, 이미 발급된 고지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말없이 고지서철에 그것을 끼워 넣는 아내의 무표정한 얼굴이 시들 어가는 꽃송이 같았다. 15년 전 자신 하나만 믿고, 하던 피아노학원 강사직도 접어두고 밀 라노로 시집 온 유현지. 자신도 국립음악원에 다니고 싶어 했지만, 결 혼 직후 아기를 갖게 되었고 자신의 남편이 후두염으로 고생하고 있는 것을 본 후 남편과 육아를 위해 모든 것을 접은 여자였다. 그리고 5년 전 남편이 시부모로부터 경제적 자립을 하겠다고 선언하자, 교민자녀 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생활비를 벌어온 심지 또한 굳은 여자였다. 그러나 이틀 전 밀린 세금고지서들과 아이들 교과서 구입비 명세서를 책상에 두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아내를 본 그는 지금 아내에게 무언가 말을 해 주지 않으면 아내가 쓰러져 버릴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꼈다. 신기수는 이틀간 번 돈 500 유로를 아내의 쪽으로 밀면서 말했다. 영훈이가 그러는데, 지난번 오디션 본데서 연락이 곧 올 거라고 하 더군. 바리톤으로 이태리에서 제법 자리를 잡은 강영훈은 신기수에게 자 신이 속해 있는 아젠찌아 3) 를 몇 달 전 소개해 준 적이 있었다. 사십 이 된 신기수는 이제 나이 제한으로 성악 콩쿨에 참가할 수 가 없었 기에 성악가로서 연주무대에 설려면 아젠찌아를 통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신기수가 오디션을 본 토스카는 그래도 자신이 있는 오페라여서 내 3) 에이전트의 이태리어 소설 부문 183

184 심 기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잘 되었으면 좋겠네요. 미라 아빠는 역시 노래를 할 때가 멋있어 요. 아내의 희미한 미소를 담은 입술은 절망을 삼키려는 듯 굳게 닫혔다. 그날 밤 신기수는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중앙 콩쿨에서 2등을 한 다음, 기필코 위대한 테너가 되겠다고 결심한 이태리 유학. 당당히 밀 라노 베르디 국립음학원에 합격하며 부풀었던 야망. 그러나 지나친 욕 심이 부른 후두염을 앓으면서 시작된 고통. 간신히 졸업한 국립음악 원. 단 한번의 2등 입상 이외엔 번번이 탈락의 고배를 마시게 한 여러 성악콩쿨. 작은 지방대의 강사자리보다는 이태리에서 성악가로서의 캐리어를 쌓겠다는 예술가적 고집. 그리고 이제는 가이드와 통역으로 꾸리는 삶. 월세 900 유로, 식생활비 300 유로, 각종 세금 150 유로, 학비는 무 료지만 두 아이의 교재 및 문구비와 용돈 100 유로 각종 잡비로 200 유로 등 월 지출비가 1,650 유로. 그의 수입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월 평균 1,200 유로였으나, 원화의 약세로 인하여 한국인 관광객과 비즈니스맨이 줄어들어 가이드 수입이 적어진 올해는 월 평균 700 유로로 떨어졌고 피아노를 가르치는 아내 의 수입이 약 500 유로 정도로 월 총수입이 1,200 유로 정도. 통장의 잔고는 2,000 유로. 가끔 하게 되는 작은 연주회나 결혼식 축가 사례비로 들어오는, 부정 기적이나마 목돈이 되는 과외 수입금이 있기는 하지만 가계를 아주 힘 겹게 맞춰가고 있었다. 184 재외동포 문학의 창

185 이렇게 몇 달만 가면 자신이 파산하고 만다는 생각에 이르자 신기수 는 시트로 몸을 감싸고 웅크리고 말았다. 그는 혹시 아내가 깰까 봐 가슴으로만 울기 시작했다. 아이들 학교는 어떻게 보내나, 먹을 것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중고차가 고장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나, 다 접고 한국으로 가야하나, 창밖으로 몸을 던지면 아프지 않게 죽을 수 있을까, 가족과 다 함께 뛰어내려야 하나. 이런 모진 상상이 그의 꿈 속 안으로까지 극심한 위기감으로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거의 끊 었던 담배를 피워 물고는 베란다로 나갔다. 나이 사십이 되도록 받기 만 하고 해드린 것 없는 부모님, 뭐 하나 잘난 것 해주지도 못하고 잘 난 남편도 못되는 그를 아직도 믿어주는 아내, 아버지가 최고의 성악 가인 양 자랑하는 아이들. 그 모두들에게 죄송 죄송 미안 미안만 반복 하였다. 새벽에 아내가 급히 신기수를 깨웠다. 도원이가 이상하다는 것이었 다. 머리가 아프다고 하며 머리에서 무슨 소리가 난다고 하였다. 아이 들 방에 들어갔을 때, 도원이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잡고 이 상한 소리를 질렀다. 무서운 생각이 든 신기수와 아내는 다급하게 아이 를 잡고 엄마 아빠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달랬다. 잠시 후 정신이 돌아온 도원이를 데리고 신기수는 병원 응급실로 향하였다. 지난 새벽 에 간신히 잠에 들었다가 불과 2-3시간 만에 깨었지만, 놀란 새벽공기 에 정신이 번쩍 든 그는 전속으로 질주하였다. 대기실에 들어서서 응급 접수를 하니 4단계 위급도 중에서 3단계로 처리되어 대기하게 되었다. 대기실에 도원이를 안고 털썩 주저앉은 신기수는 어제 오후 돈 문제부 소설 부문 185

186 터 오늘 새벽까지 이어지는 도원이의 응급실행까지 일련의 환란에 절 망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너무 피곤하여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고 아 주 잠시 동안이지만 깜빡 졸고 말았다. 신기수는 비몽사몽간에 또 한 시간 이상은 기다려야 호명될 거라는 생각이 들자, 이태리에 살면 인생 의 오분의 일은 기다리다 버린다는 말을 또 한 번 실감하게 되었다. 우체국에 가서 제세공과금을 내거나 편지를 부치려 해도 30분은 족히 기다려야 하고, 은행에 가서 돈을 찾거나 입금하려고 해도 못해도 역시 30분간의 대기가 필요하고, 일반 관공서는 이 보다 더 심하고, 1년짜리 체재허가증을 신청하면 거의 1년 있다가 발급되면 다행이고 그러면 곧 다시 갱신 신청을 해야 하고, 재판진행은 유럽에서 가장 더디고. 한국 같으면 창구직원들이 빠르고 숙달된 자세로 일을 처리하는데, 이태리 직원들은 이 서류 저 서류 만지작거리고 옆 사람과 수다 떨며 굼벵이 삶아먹은 듯 일을 처리하니 이 꼴을 보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아마 한국 같았으며 민원실과 창구가 다 뒤집어졌 을 것이다. 이태리에 처음 와서 이런 꼴을 보고 씩씩대던 신기수에게 잘못하면 고혈압으로 죽을지도 모르니 그저 이태리라는 완행열차를 탔 다고 생각하라는 선배의 말이 시간이 갈수록 진짜 명언으로 바뀌고 있 었다. 완행열차를 타고 그 안에서 팔짝팔짝 뛰어봤자 결과는 바뀌지 않 고 자신만 손해를 볼 뿐이었다. 그러나 누군가 신기수 자신에게 이런 나라에 왜 살고 있느냐고 물을 경우에는 이렇게 대답하곤 하였다. 이태 리에는 인종차별이 거의 없고, 없는 자를 위한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사실, 한 이태리 젊은이가 25세에 정규 직업을 가졌다고 가정하면, 186 재외동포 문학의 창

187 그 사람은 이미 미래, 즉 노후대책까지 보장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정규직 직원은 아주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해고당할 일이 없고, 보장된 월급을 바탕으로 대체로 20년 상환의 모기지론을 하여 집을 구 입할 수 있으며, 35년 근속 후 퇴직하면 죽기 전까지 노후생활에 충분 한 연금을 받게 된다. 과유불급이라고 정규직 노동인구가 줄고 생존연 령이 높아지면서 복지제도에 대한 개혁이 요구되고 있지만, 아직도 이 태리는 카톨릭의 박애문화와 노동자와 약한 자를 위한 공산사회주의가 저변에 깔려 있기에, 일할 때는 일하고 쉴 수 있을 때는 편히 문화생활 을 영위할 수 있는 나라이다. 그리고 이태리에 거주하는 내국인 및 외 국인들은 매년 수입에 따라 의무적으로 의료보험을 지불하기 때문에 어떤 병에 걸려도 큰돈을 내야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더구나 응급실에 들어오게 되면 누구에게든지 일단 모든 진료 및 치료가 무료로 이루어 진다. 따라서 이태리에는 돈이 없어 죽는 환자는 없다. 라는 말이 있 을 정도이다. 신기수 역시 매년 의료보험을 내고 있기에 치료비에 대한 문제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며 벽에 기대어 앉았지만, 가계 가 어려운 지금 도원이의 상태가 심각한 것이 아닌가 하여 별별 생각을 다 하였다. 귀와 눈 검사 그리고 뇌의 단층촬영검사를 마친 의사는 특 별한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성장하는 아이에게 간혹 있을 수 있는 신경성 증상일 수 있으니 퇴원하였다가 또 다시 증상이 반복되 면 오라고 하였다. 의사의 진단에 한시름 놓은 신기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원이 에게 당부하였다. 이번 주 토요일 저녁에 모이는 피자파티에 가지 말자. 소설 부문 187

188 도원이가 다니는 축구클럽은 매년 6월 중순 팀별로 피자파티를 벌렸 다. 이 파티에는 아이들의 가족들도 같이 참석하여 축구이야기, 학교이 야기, 사는 이야기 등을 나누곤 하였다. 신기수도 이런 자리를 좋아하고 또 유일한 외국인으로 있는 도원이 의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 꼭 참석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피자파 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시즌을 마감하는 격렬한 경기가 이어지기 때문에 신기수는 도원이보고 가지 말자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기수는 도원이가 반대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년 겨울에 안정환이 소속된 뻬루지아 팀이 밀라노의 산시로(San Siro) 4) 경기장에서 밀란 팀 5) 과 경기하는 것을 본 다음 축구선수가 되겠다고 선언한 도원이는 축구라는 말만 들으며 모든 것을 망각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도원이가 공부를 게을리 하거나 말을 잘 듣지 않을 때면, 너 축구클럽에 안 보내! 라는 구호가 특효약으로 들었다. 유치원 다닐 때 오후시간에 도원이를 봐 주던 이태리 가정의 할아버지가 밀란니스타 6) 였기에 저절로 밀란 열성팬이 된 도원이는 카카(Kaka)를 우상처럼 섬 기고 있었다. 아빠, 저 괜찮아요. 축구할 수 있어요. 녀석아, 네 건강을 위해 그러는 것인데 쉬어야지. 그래도 하고 싶어요, 제발. 한 이삼일 도원이의 상태에 문제가 없으면 이번 토요일에도 결국 도 4) AC 밀란의 홈구장 5) AC 밀란을 이태리에서 단지 밀란이라고 한다. 6) 밀란팀 팬 188 재외동포 문학의 창

189 원이에게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신기수는 피자파티에 참석 할 돈을 계산하며 아내와 딸에게는 참석하지 말라고 해야겠다고 생각 하였다. 세금징수청에서 나온 벌금납부 고지서를 들고 집을 나선 신기수는 자전거를 타고 루이지의 변호사 사무실로 향하였다. 시내는 교통이 복 잡하고 시내 중심은 출입 제한이 있어 자동차로 다니기가 무척 불편하 기도하였고, 또한 부족한 운동량을 채우기 위해 그는 자전거를 즐겨 탔 다. 그러나 신기수는 이틀 전 입었던 단벌 여름 양복을 또 걸치고 있었 다. 루이지는 딸 미라와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실비아의 아버지로 대 대로 변호사 집안의 장남이다. 신기수와 그의 집 식구가 아주 가깝게 지내게 된 것은 미라의 담임선생 안나마리아 덕분이었다. 안나 마리아 의 딸이 결혼식을 올릴 때, 축가를 불러줄 사람을 찾다가 미라의 아버 지인 그가 테너라는 것을 알고 축가를 부탁 했었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고 오페라 공연을 자주 관람하던 루이지는 그때 신기수의 목소리에 반하여 자신의 집에도 초대하는 등 신기수의 가족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마침 그 당시 세 들어 살던 아파트의 집주인과 문제가 있어 법원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때 루이지가 아무 보수 없이 이것을 해결하 여 주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자녀들을 매개로 때마다 교류하는 집안이 되었다. 그러나 중상류층의 삶을 구가하는 루이지 가정과 만날 때면, 자신의 힘겨운 모습을 감추고 싶기도 하고 특히 미라의 자존심을 위해 서라도 복장에 신경을 썼다. 고지서를 받아 훑어 본 루이지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자신이 소설 부문 189

190 알아서 해 보겠다고 신기수를 안심시켰다. 그러면서 7월 말경에 고향 인 시칠리아에 휴가를 가는데 함께 가겠냐고 하였다. 결혼하기 전에 고 대 그리스유적이 숨 쉬는 타오르미나 7) 의 야외극장에서 호기 있게 한곡 불렀다가 거기에 있던 관광객들로부터 환호의 박수를 경험한 적이 있 던 신기수는 가고 싶다는 말이 목까지 치밀었다. 그러나 네 가족이 그 곳에 갔다 오는 교통비만도 몇 백 유로였다. 하지만 돈이 없다는 말을 차마하지 못하고 여름에 연주가 있을 것 같다는 핑계를 대었다. 루이지 는 그러면 아이들만이라도 보내라고 계속 성화를 했다. 학교친구들이 다 떠나고 아무도 없는 뜨거운 밀라노에서 두 아이들 홀로 집에서 빈둥 빈둥 거리며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아이들이 너무 불쌍해 보였다. 신기 수는 같이 가면 아주 좋겠는데 중요한 연주가 있어 못 가니 안타깝다고 한 다음, 떠나기 전에 시간이 되면 식사나 한번 같이 하자고 허튼 객기 를 떨면서 나중에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고 하였다. 루이지의 사무실을 나선 신기수는 근처에 있는 밀라노 최대의 쇼핑 거리인 코르소 부에노스아이레스(Corso Buenos Aires)거리에 들어섰 다. 비아 몬테나폴레오네(Via Montenapoleone) 8) 와는 다르지만 2km 가 넘는 양쪽 길가에 빽빽이 들어선 상점들 사이에 Calvin Klein, Liu Jo, Guess 등 명품가게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사고 싶고 갖고 싶은 것 은 많지만, 집에 오는 광고전단지를 살펴보면서 마음을 스스로 달래곤 하던 그는 가끔 쇼핑거리에 와 이곳저곳 들러서 실물과 가격을 비교해 7) 시칠리아의 메시나 시 근처에 있는 작은 도시로 그리스와 로마유적이 많이 있음 8) 밀라노 최대의 명품거리 190 재외동포 문학의 창

191 보며 엷은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걷곤 하였다. 성악도가 악보를 하나 더 사서 공부를 해야지 하면서도 아무리 깨끗이 닦아도 자세히 보면 군데 군데 흠이 있는 구두를 볼 때마다 새 구두 한 켤레를 구입하고 싶은 욕망은 무서운 불길처럼 올라 신기수의 몸 전체를 태워 먹을 것만 같 았다. 보름만 있으면 여름정기세일이 시작될 텐데 그때 보지. 이렇게 쓸쓸한 독백을 날린 그의 눈에 복권판매를 하는 타바키 (Tabacchi) 9) 간판이 들어왔다. 신기수는 로또복권에 자기가 선호하는 숫자를 써 넣었다. 기본이 1 유로이지만 그는 8 유로짜리로 작성하였고 내친 김에 2 유로짜리 복권을 하나 더 구입하였다. 10 유로면 네 가족 이 삼겹살 파티를 할 수 있는데 라고 독백하다가 자꾸 치졸해 지는 자 신을 꾸짖었다. 10 유로가 나갔기에 더욱 얇아진 지갑이지만, 복권을 구입할 때면 곧 억만장자가 된 기분, 아니 될 수 있다는 기분에 황홀한 미래를 향하여 나래를 펴는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신기수는 2-3일마다 발표하는 로또복권의 결과를 즉시 확인하지 않았다. 당첨되지 않았다 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확인하지 않으므로 실낱같은 희망이 연장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때는 한 달 이 지난 다음 확인하면서, 자신이 희귀한 경우의 불치병에 걸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며 억만장자의 희망을 꾸겨 휴지통에 던져 버리곤 하였다. 하지만 이번에 는 확률을 높여 10 유로치 복권을 구입하였으니 뭔가 당첨될 것이라는 강력한 느낌이 그의 전신에 전기처럼 흘렀다. 그리고 밤에는 신기수가 그의 부모 및 장인, 장모와 함께 그의 네 가족이 호화 유람선을 타고 9) Tabacchi는 담배와 우표, 수입인지, 각종 복권을 파는 가게 소설 부문 191

192 지중해를 일주하는 꿈을 꾸었다. 신기수가 다니는 교회는 필요한 제반 설비를 갖춘 제법 큰 건물에 비해 성도수가 200명을 넘지 않기에 쾌적감보다는 한산하다는 느낌을 들게 하였다. 돈 문제로 울적한 기분이 교회성도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어느 정도 가라앉기는 했지만, 얼굴에 박힌 수심은 감출 수가 없었다. 신 집사, Come va? (꼬메 바? : 어떻게 지내) 이태리에 살다보니 너스레 떨며 하는 대화는 이태리어로 할 때가 많 았다. Bene! Grazie! (베네. 그라찌에! : 잘 지내. 고마워) 신기수도 형식적으로 응답하였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독백하였다. 잘 지낸다고 해야지 뭐라고 답하나? 어렵게 지낸다고 솔직히 말해도 바뀌는 것은 없지. 오히려, 그 이유를 물으면 힘들게 설명해야 되지 않 아? 그 잊고 싶은 것들을 하소연 하듯이 말이야. 하긴 너도 나와 크게 다른 처지는 아닐 터이니 그저 이렇게라도 잘 지낸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어야지. 스스로 자조하다보니 정말 서글퍼진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 다. 사실, 그는 자신이 진짜 신앙인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었 다. 중학교 시절 친구의 손에 이끌려 그저 재미로 다니던 교회에 신앙 이라는 미명을 덧 씌워 봉사하게 된 것은 대학 입학 후 성가대에서 솔 로를 맡았을 때이다. 위치가 사람을 만든다고 성가대를 하며 기도와 봉 사도 많이 하여 결국은 성가대 지휘까지 하였다. 나중에 자신을 돌아보 니 그 모든 처신에 있어 교회에 있으니 교회의 색깔을 입고 있었던 한 192 재외동포 문학의 창

193 마리의 카멜레온이었다. 교회에서 대접도 받고 수고비도 받았으니, 녹 을 주는 종교기관에 벨칸토 발성으로 아멘하며 화답한 것뿐이었다. 이태리에서도 다니던 관성에 젖기도 하고, 그래도 친숙한 환경이기 도 하여 계속 교회에 다닐 뿐이었다. 목사는 오늘도 모든 걱정을 전능하신 주 앞에 다 내려놓으라고 강변 하였다. 도대체 무엇을 다 내려놓으라는 것인가? 목사님 당신이 우리가 겪는 고통을 아는가? 이태리어 해야지, 느려 터진 행정으로 1년이 넘게 체재 허가증을 갱신하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지, 세금내야지, 자녀 키워야지, 매일 밥값 해결해야 하지, 그리고 학업을 마치려고 몸부림치고 있지. 이 모든 것이 당장 처리되어야 하는 것들인데 당신은 이런 일들을 성도들이 해결해 주고 있으니 잘 모르지. 당신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이 아니기에 세상에서 당신의 가르침대로 행하려고 하지만, 구호적인 관 용과 포용의 정신보다 합리와 준법을 더 앞세우는 문화가 저변에 깔린 이태리에서 살면서 겪는, 상호 도그마의 비호환성과 괴리감으로 성도 들이 힘들어하고 있음을 아는가? 밖에서 겪는 어려움을 교회의 가르침 으로 풀어가며 신앙을 정립하려고 하는데 당신은 우리가 부족하다고 책망만 하고 있지. 현실에서 치이고 교회에서 치이고 불쌍한 성도들. 내려놓고 싶지만 어떻게 내려놓는지 그것을 알려 주어야하지 않는가? 한국교회가 전제주의, 사교( 私 敎 )주의, 폐쇄주의로 흐르고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그는 조금의 평안이라도 얻어 보고자 하였던 소망바구 니를 헌금을 꺼내면서 주머니에 도로 접어 넣었다. 설교가 끝나고 광고시간에 김동석 부부가 귀국한다고 하였다. 강대 소설 부문 193

194 상 앞으로 작별인사를 위해 나와선 두 부부와 어린 아이를 위해 모두들 송가를 불렀다. 대부분 귀국하거나 다른 나라로 가게 되면 어느 대학 혹은 어느 직장으로 가게 되었다고 하는데, 김동석 부부에 대해선 그저 귀국한다는 말 밖에 없었다. 아마도 경제형편이 좋지 않아 귀국하는 것 이라고 신기수는 확신했다. 몇 달 전 그룹모임에서 조금 젖은 기저귀를 왜 말려 쓰지 않고 버렸냐고 자신의 아내를 나무랐다고 고해하며 울먹 이던 김동석의 처연한 모습이 떠올랐다. 가는 사람 남는 사람 다 같이 울어버린 예배가 끝난 후 같은 학번으로 삼성의 주재원으로 근무하는 정영근 차장과 점심식탁에 같이 앉았다. 그때 한 아가씨가 미소를 살랑 살랑 지으며 그들 곁으로 다가섰다. 정영근 차장님, 안녕하세요!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 괜찮으시겠어 요? 아, 앉지, 보현 씨! 아녜요. 그 말씀하신 것이 다 준비되었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럼 내일 우리 사무실로 들르면 좋겠는데. 네, 그럼 오후쯤에 들리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디자인 문제로 삼성에서 뭔가를 의뢰받은 그녀는 자신의 출세가 정 차장에게 달린 마냥 아주 사근사근하고 공손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 런데 돌아가는 뒷모습에서 그녀가 누구인지 기억이 났다. 작년에 자신 에게 아저씨라고 호칭하였을 때, 아저씨가 뭐냐고 그가 쏴 붙인 아가씨 였다. 하긴, 영근이는 차장이라는 직함이라도 있지. 내가 뭐 교수인가 사 장인가, 아무것도 아닌데. 집사라는 호칭이라도 있으니 다행이지. 194 재외동포 문학의 창

195 마음 한번 추슬러 볼 희망으로 갔던 교회를 뒤로 하는 신기수는 가 족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차에서 아이들과 노래를 부르며 귀갓길 에 올랐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는 교회에 다니지 말까 고민하였다. 쌀이 다 떨어졌다고 하는 아내의 말에 신기수는 아이들과 다 같이 슈퍼마켓에 가자고 제의를 했다. 지난주에 번 돈으로 돼지갈비를 먹자 고 했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벌금고지서를 생각하다가 결국 아무 장도 보지 못한 것이 아이들에게 미안했던 것이다. 신기수는 슈퍼에 가면 아 내가 장을 보는 동안 주로 전자제품과 성악연주 CD와 오페라 DVD 코 너에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아 고르다 고르다 하릴 없이 아내를 찾아 그냥 돌아설 때가 대부분이었다. 아내는 열심히 가격 을 비교하며 가장 싼 것이나 할인을 해 주는 품목을 고르고 있었다. 그 고기는 푹 끓여먹자. 30%나 할인해 주는 고기를 집어든 아내에게 신기수는 한마디 툭 던 졌다. 할인해 주는 고기는 어디가 상했을 지도 모르니 잘 알아서 하라 는 남편의 의도를 아는 아내는 피식 웃기만 하였다. 미라 아빠, 어떤 치약을 살까요? 이번에는 아내가 먼저 물었다. 싼 것 살까요, 아니면 전에 쓰던 AZ 10) 를 살까요? 신기수는 싼 치약을 썼을 때 입안이 개운하지 않은 느낌이어서 AZ 를 사고 싶었으나 가격차가 두 배나 나자 망설였다. 비싸지만 사서 1cm 씩 짜서 쓰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고민하는 자신이 미워 10) 치약회사 상표 소설 부문 195

196 서 아내에게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냥, 알아서 아무거나 사! 순간 얼어버린 아내의 옆모습을 피해 돌아설 때, 큰 딸 미라가 그를 나무랐다. 아빠, 사람들도 많은데 왜 그러세요. 흘깃 처다 보는 이태리사람들의 눈길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듯이 행 동했지만, 미라의 나무람이 돈 문제와 결부되었다고 생각되니 수치심 이 등을 핥고 지나갔다. 장보는 것이 끝나자 신기수는 겸연쩍은 마음에 옆에 있는 대형스포 츠백화점인 데카슬론에 가자고 하였다. 도원이가 지난 토요일 축구클 럽에서 축구를 할 때 옆이 약간 찢어진 자신의 축구화를 보고 창피해 하는 모습을 보았기에, 새 축구화를 사줄 요량이었다. 도원아, 너는 계속 발이 크고 있으니 너무 비싼 것 사지 말아라! 신기수는 부드럽게 말했으나, 계속해서 카카의 사인이 든 200 유로 짜리 나이키 제품만 만지작거리는 아들이 못 마땅하였다. 아빠, 축구부 친구들은 다 이런 신발 신고 있어요. 도원이는 하소연 하듯이 토해 내었다. 네가 다 크면 정말 좋은 축구화 사줄게. 그리고 어린이는 그런 비싼 것 신는 것이 좋은 게 아니야. 또 축구화가 좋다고 축구를 잘 하는 것도 아니잖아. 너는 나이키 신발이 아니었는데도 이번 시즌에 득점왕을 했 잖아. 신기수가 그렇게 설득을 했지만, 도원이는 시무룩하기만 하였다. 도원아, 아빠가 충분히 설명했으니 이제 네가 알아서 해라! 196 재외동포 문학의 창

197 신기수는 은근한 강요를 해 놓고 아내와 미라가 있는 곳으로 갔다. 둘은 댄스복 코너에서 밝고 즐거운 눈길을 나누고 있었다. 무용을 좋아 해 재즈댄스학교에 다니고 있는 미라는 비욘세 풍의 Freddy 11) 댄스복 을 무척 갖고 싶어 하였다. 이것 살려고 하니? 신기수는 불안한 생각을 간신히 떨쳐버리며 물었다. 음 아녜요. 다른 것 입으면 되요. 이미 알 것을 다 아는 딸 미라는 아쉬운 눈길을 거두며 들었던 댄스 복을 다시 걸어놓았다. 계속해서 아이쇼핑을 하는 그들에게 도원이가 합류한 것은 30분이 훨씬 지나서였다. 도원이는 가격이 좀 싼 나이키 축구화를 들고 왔다. 신기수는 가격을 보고 안도했지만, 어린 녀석이 30분 동안 고민 고민 하다가 결국 아빠를 생각해서 비싼 것을 고르지 못한 것에 가슴이 아팠다. 미라와 도원이는 각각 학교와 클럽에서 유일한 동양인이자 한국인이 라 외모가 눈에 튀었다. 그것을 잘 아는 아이들은 가끔 자신들의 정체 성에 대한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이태리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교육 을 받았지만, 외모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부터 이태리 친구들과 동질감을 못 느낄 때가 있었다. 그러기에 그들과 동 떨어지는 행위를 하지 않으려고 하며 적어도 같은 유의 옷이나 신발 그리고 악세서리 등을 착용하면서 그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려고 하였다. 아이들에게 원하는 것을 사주지 못한 신기수는 젤라또(gelato) 12) 가 11) 스포츠 및 댄스 의상 상표 12) 이태리 아이스크림 소설 부문 197

198 게에 들려 아내와 아이들에게 젤라또를 하나씩 사주면서 미안한 마음 을 조금이나마 삭혔다. 차에 오르자 운전 때문에 젤라또를 먹을 수 없다고 자신의 몫을 사 지 않은 신기수에게 아이들은 서로서로 한 입 드세요 라고 하며 자신들 의 젤라또를 내 밀었다. 내가 정말 가난하여 두려워하는 것인가, 아니면 가난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서러운 것인가? 젤라또의 향긋하고 시원한 맛이 목까지 적실 때, 신기수는 상념에 젖었다. 7월 중순이 되었다. 밀라노의 날씨는 더욱 열기를 뿜어냈다. 미라와 도원은 먼저 내려가는 루이지의 아내와 그의 두 딸과 함께 시 칠리아로 갔다. 한 달 동안 지중해에서 새까매지도록 놀다 올 것이다. 아이들에게 이렇게나마 행복감을 선사할 수 있다는 기쁨과 가장으로 서의 존재감을 만끽하는 오후에 강영훈이 전화를 했다. 기수야,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어떤 것을 먼저 말할까? 좋은 소식이라는 말은 귓전에서 흘러가버리고 나쁜 소식이라는 말이 그의 머리를 띵하게 하였다. 신기수는 이제는 나쁜 소식이 하찮은 것일 지라도, 듣는 순간 그의 전신에서 맥이 빠져버리고 나락으로 서서히 낙 하하는 공포심에 떨었다. 그의 체념한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차라리 나쁜 소식을 먼저 듣자.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는데. 야. 너 운 튼 줄 알아라. 198 재외동포 문학의 창

199 신기수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였으나 발동되는 호기심으로 다음 말에 조바심쳤다. 몬팔코네(Monfalcone) 13) 성악콘서트에 다른 테너가 캐스팅된 것이 나쁜 소식이지만, 목원대학에서 테너강사를 찾는다고 연락이 왔다. 이 낙중 선생님 알지? 그 분이 너의 이력이면 충분할 거라고 하면서 네 연락처를 물어오셨어. 아마 근간 너한테 연락이 갈 거야. 단발성 캐스팅보다 대학의 강사자리가 더 낫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 은 강영훈에게 신기수는 수고했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을 하며 이낙중 선생을 떠 올렸다. 같은 대학 성악과 한참 선배였던 이낙중 선생은 신 기수가 유학을 나온 지 2년 만에 대학 강사로 임명되어 귀국했었다. 자상한 성격에 후배들의 귀감이 되었던 이낙중 선생은 2년 이라는 짧 은 기간이었지만 중앙 콩쿨에서 2등을 한 신기수에게 은근한 시기도 보이지 않았고 군기도 잡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 였었다. 그 보답으로 이낙중 선생이 귀국독창회에 쓸 이태리 옛 가곡을 번역해 주었었다. 그 후 흘러가는 세월 속에 이어지지 않았던 교류가 이렇게 신비하게 되살아났다. 이낙중 선생은 이제 그 대학 성악과의 중 요한 위치에 있기에 그 분이 OK하면 신기수의 강사자리는 거의 따 놓 은 당상이나 진배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사가 된다고 하여도 나이 사십에 그 강사수입으로 네 식구가 생활하기는 불가능하고, 결국 개인 레슨을 뛰어서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한국 한쪽 조그만 곳에서 강사직과 개인레슨을 하게 되면, 대형무대를 그리던 그의 웅대 한 연주가로서의 포부를 포기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더구나 이 13) 이태리와 슬로베니아 국경근처에 있는 작은 도시 소설 부문 199

200 태리에서 태어나 각각 11년과 14년 동안 자라난 아이들은 어쩔 것이며, 16년간 고행이라면 고행, 수행이라면 수행이었던 그의 삶의 결말을 생 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부하던 지방대 강사자리였는데 막상 제의가 들어온다니까 마음이 흔들렸다. 판단이 혼돈으로 바뀌자, 그는 일단 연 락이 오고 일이 진행될 때까지 생각을 보류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아내에게는 당분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잘 하지 않던 외출로부터 오후 늦게 집으로 돌아 온 아내와 별 말없 이 저녁을 끝냈다. 아이들이 없으니 이른 저녁을 끝낸 신기수는 안방으 로 가 TV를 켰다. 할 말을 감추려하니까, 할 다른 말도 생각나지 않았 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피아노를 열더니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였다. 평 소 저녁에는 잘 안치던 아내가 이번에는 쇼팽, 베토벤, 라흐마니노프, 바하 등 쉬지 않고 쳐 대었다. 곡곡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연주하였 다. 다시는 피아노를 안 칠 사람처럼 신들린 연주를 하는 아내의 모습 을 상상하면서 그녀가 피아니스트의 길을 포기한 것은 자신 때문이 아 닌가 하는 자책감이 엄습했다. 그러나 아내가 아파트관리규정에 적힌 저녁 8시가 다 되서야 피아노를 덮었을 때, 그는 저녁 8시 뉴스 시그널 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저녁 뉴스가 흐른다. 나폴리 해변가에서 시체를 옆에 두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과 물장구를 치는 어린 아이들의 화 면이 잡힌다. 아침에 해수욕을 나왔던 75세의 이 사람은 어린이도 빠져 죽지 않을 얕은 물가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으나, 아무도 이 사람의 주 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결국 한 젊은이가 주검을 해안가로 끌어내 200 재외동포 문학의 창

201 뉜 다음 수건을 덮고 파라솔로 한 쪽을 가렸지만, 경찰이 오기 전까지 해변가의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그 주검에 대한 시선을 피하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심하게 해수욕을 즐겼다. 늦저녁 동물의 왕국 다큐멘터리가 진행된다. 비비원숭이 무리가 보 이고 다른 한 쪽에는 암표범 한 마리가 먹이를 찾고 있다. 한 마리의 비비원숭이가 힘들게 움직이고 있자, 암표범이 쏜살같이 달려들어 물 어죽이고 끌고 간다. 끌려가는 비비원숭이의 아래쪽에서 탯줄로 연결 된 새끼가 달려있다. 자기가 사는 나무에 먹이를 올려놓은 암표범은 갓 태어난 비비원숭이 새끼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한다. 그런데 잡아먹 지 않고 그 새끼를 물어다가 나무 위에 올려놓고 혀로 핥아주며 모성애 를 발휘한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결국 간밤의 추위에 견디지 못한 비 비원숭이 새끼가 죽자, 암표범은 그것을 한 쪽으로 버리고나서 전날 사 냥하여 잡은 어미 비비원숭이를 자신의 보금자리고 끌고 간다. 비몽사몽간에 신기수는 그날 밤 자신은 차라리 한 마리의 표범, 아니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라고 확신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간밤에 일찍 잠에 들었기 때문인지 신기수는 일찍 일어났다. 아내가 없는 것을 보니 아마도 아이들 방에서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 할 일이 없는 이태리 여름의 아침은 빛나는 태양도 희망이 되지 못 하였 다. 오히려 그것은 수치심을 밝혀 줄 뿐이었다. 그는 이럴 때마다 어딘 가로 사라지고 싶었다. 처자식으로부터, 부모로부터, 현실로부터, 모든 속박과 책임과 의무와 가식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꿈 꿔왔던 그 세계를 소리 질러 노래하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산에서 바 소설 부문 201

202 다에서. 그러나 불가항력에 체념하면서, 신기수는 그래도 하나의 구원 자를 막연히 기대해 왔었다. 단테에게 있었던 베아트리체와 같은 그런 구원자를. 불과 몇 달 전까지 신기수에게는 고정희라는 구원자가 있었다. 2007년 6월 초에 열렸던 떼아트로 챡(Teatro Ciak) 14) 의 아리아 음악 회의 연주자들 중 테너로 선정되었던 신기수는 무대 디자인를 담당하 던 고정희와 처음 알게 되었다. 그녀는 밀라노 브레라(Brera)국립예술 대학교를 졸업하고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있었다. 빼어난 외모는 아니 지만, 늘씬한 몸매에 잘 어울리는 화장과 의상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시 선을 끌었다. 그리고 흘릴 듯 말 듯 한 입술의 미소는 묘한 매력을 풍겼 다. 게다가 상냥하고 쾌활한 성격과 재치 있는 솜씨로 모든 스텝진들로 부터 호감을 받던 그녀는 신기수가 준비한 곡 풋치니의 E lucevan le stelle (별은 빛나건만) 에 무척 매료되어 있었다. 연주자와 스텝진 중 신기수와 고정희만 유일하게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종종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연습이 늦게 끝나던 날, 집으로 가는 방향이 비슷하여 신기수 는 고정희를 그녀의 집까지 데려다주게 되었다. 고정희 씨, 밤늦게까지 피곤하시죠? 나란히 앉아 달리다 보니 좀 어색한 느낌이라 분위기를 풀고자 신기 수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뇨, 저희 노가다 하는 사람들은 밤샘을 잘 해요. 오히려 신기수씨 가 노래연습을 하느라고 더 피곤하시겠어요. 고정희는 대화를 기다렸다는 듯 풀어댔다. 그러나 밤늦은 시간이라 14) 밀라노에 있는 공연극장 202 재외동포 문학의 창

203 서 그런지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달리 제법 차분하였다. 저희 성악하는 사람들 역시 밤에 연주를 하기 때문에 야행성입니다. 밤에 컨디션이 좋아야 하죠. 그런데 신기수씨가 부르는 노래는 정말 감동적이에요. 정말 잘 부 르세요. 곡도 좋고 가사도 시적이라 그런 것이죠. 전 고음에 무리가 있고 저음에 불안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서로 크게 웃었다. 그로 인하여 둘의 사이가 많이 풀어졌다. 그래도 밤늦게 들어가면 가족들이 섭섭해 하지 않을까요? 그녀가 용기를 내어 물었는지 앞을 가만히 응시하며 느닷없이 갈라 진 목소리로 물었다. 신기수는 이것이 질문인지 독백인지 분간을 하기 어려워 잠시 머뭇 거리며 신호등만 바라보았다. 아이가 몇 이세요? 고정희는 얼굴을 그에게 돌리며 물었다. 둘입니다. 딸 하나 아들 하나. 아이들이랑 참 재미있겠네요. 재미는요, 매일 다투고 해서 정신없어요. 그건 그렇고 저야 남자지 만, 고정희씨가 더 문제 아니겠어요, 더 늦게 들어가면. 아, 저 지금 혼자 있어서 괜찮아요. 가족은 다 어디계세요. 신기수는 갑자기 호기심이 생겼다. 남편은 한국에 있고요, 아이는 없어요. 소설 부문 203

204 일 때문에 가셨나보죠? 밀라노에서 남편이 한국에 갔다고 하면 그것은 사업차 가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아뇨 일 때문이 아니라 유학생인데요 건축공부해요. 아, 네. 뭔가 이야기를 하려다 마는듯하게 이어지는 고정희의 말에 신기수는 건성으로 응답하였다. 그러다가 그녀가 그를 보며 입술을 움찔하는 순 간 그는 여기가 집이냐고 물었다. 밀라노 위성도시로 지하철 1호선의 종점인 세스또 산 조반니(Sesto San Giovanni)역은 늦은 시간에도 귀갓길을 서두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고정희는 자신을 위해 차 문을 열어준 신기수에게 고맙다고 인 사를 하고 아파트 정문을 열쇠로 열었다. 전, 맨 위층 8층에 살아요. 평상시로 돌아온 그녀의 명랑한 목소리에 싱긋 웃으면서 신기수는 맨 위층을 한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수고했다고 인사는 하였지만, 그녀 가 승강기를 타고 8층까지 올라갔을 시간이 되었을 때에서야 차에 올 라탔다. 이틀 뒤 리허설을 하던 날, 무대장치의 점검을 마친 고정희는 신기수 에게 다가와 무성한 꽃송이가 수놓인, 희미한 핑크빛이 배어든 하얀 행 거치프를 건네었다. 그녀는 그에게 연주하는 날 그것을 연미복의 가슴 주머니에 코디하라고 하면서 그 꽃이 6월에 피는 라일락꽃이라고 하였 다. 다음날 무대에 선 신기수는 애인에게 받은 듯 희희낙락해 하며 그 행거치프를 파바롯티처럼 손에 들고 노래할까 한번 망설여 보았다. 연 204 재외동포 문학의 창

205 주회가 끝난 다음 고정희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아내와 가 족 그리고 친구들이 주변에 있어 멀리 아쉬운 눈인사만 하고 말았다. 그해 가을로 접어들 무렵 신기수는 밀라노 아우디토리움 극장의 합 창단원에서 나와야 했다. 경기가 안 좋으면 문화 분야에서 먼저 느끼게 되는 것인지, 그는 계약갱신을 하지 못하였다. 갑자기 벌이가 없어진 신기수는 아내의 얼마 안 되는 수입과 처갓집으로부터 받은 약간의 송 금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누구에겐가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지만, 부끄러운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기에 어떤 결단을 준비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성악의 길을 잠시 접고 가족의 미래를 돌봐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자 그는 옷장을 열어 연미복을 한번 쓰다듬 어 보았다. 그는 라일락꽃의 수가 놓인 그 행거치프를 보고 잠시 시선 을 고정시켰다. 그는 고정희의 남편이 벌써 한국에 간지 1년이 넘었고 거의 이혼상태라는 것을 음악회가 끝난 뒤에 알게 되었다. 그는 그녀가 참 특별한 여자라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컴퓨터를 켜고 백과사전을 열 었다. 그는 하얀 라일락꽃의 의미가 사랑의 감동 이라는 것을 알게 되 었다. 그는 휴대전화에 입력되었던 고정희의 이름을 찾아 그녀에게 전 화를 하였다. 벨이 5번 울렸을 때 그는 숨이 가빠져서 전화를 끊어 버 리려고 하였다. 그때 수화기에서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기수씨가 웬일이세요? 그녀의 시원한 인사말에 오히려 당황한 그는 지난 번 음악회를 녹화 한 DVD를 아직 잊고서 전해주지 못하여 미안하다고 하였다. 그녀는 작품제작이 있어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아무 때고 시간이 되면 갖다 줄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소설 부문 205

206 그 다음날 오후 5시경 신기수는 녹화 DVD를 들고 고정희의 집을 찾아가면서 이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와 그리고 테너가 있다. 라는 농 담을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성격이 괴팍하고 바람기가 있는 테너인지 아니면 진정한 테너가 되기 위해서는 괴팍한 성격과 바람기를 획득해 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디자인하는 사람의 집답지 않게 잘 정돈된 아담한 거실에는 향기로 운 비누냄새가 은은히 배어있었다.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식탁 앞에 앉은 고정희는 그 날 음악회가 너무 좋았다며 다시 한 번 보고 싶다고 했다. DVD를 돌렸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모르는 신기수는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며 건성으로 보고 말하고 있었다. 오히려 어색함을 해소하려고 하다가 쓸데없는 질문을 하고 말 았다. 남편 되시는 분은 언제 오시나요? 멍청한 질문을 했다고 자책하는 신기수에게 고정희는 남의 말 하듯 이 답하였다. 안 올지도 몰라요. 제가 싫다고 가버렸거든요. 신기수는 뜻밖의 우문현답에 말을 잃었다. 그저 화면만 응시하고 있 는데 고정희는 말을 이었다. 사실 어제가 제가 사랑했던 사람이 죽은 날 이예요. 교통사고로 사 망하였죠. 전 그 이후 아무도 사랑할 것 같지 않았는데, 지금의 법적 남편과 만나 결혼하고 유학을 하게 되었죠. 그런데, 유학 온지 1년이 좀 넘었을 때 남편이 제가 죽은 그 사람과의 과거가 있다는 것을 알고 는 심히 고민하다가 한국으로 가버렸어요. 분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 206 재외동포 문학의 창

207 지만, 지금은 초연한 상태가 되었죠. 사랑이란 것에 의문도 갖게 되고 요. 결혼한 지 15년이 되었고 처자식이 있지만, 때때로 젊은 시절의 청 춘을 회고하며 누군가 함께 밤새 예술과 사랑을 토로하고 싶었던 신기 수는 동반자를 만난 느낌이었다. 그 때처럼 삶이 어려운 적이 없었던 그는 현실에서 일탈하고 싶은 욕망에 휘감겨 있었기에 그녀의 고백에 빠져들었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녀가 먼저 용기를 내었다. 토스카가 여가수이고 카바라도씨가 화가잖아요. 그런데 노래를 듣 고 있는 신기수씨가 지금 가수고 제가 화가이니 참 재미있네요. 유학을 오기 전에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다는 고정희는 푸치니 의 토스카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수도 잘 놓으시잖아요? 신기수가 의도적으로 물었다. 아, 그 행커치프요! 토스카의 이름인 플로리아가 꽃이라는 뜻이라, 신기수씨의 노래에 맞을 것 같아서 신기수의 유도심문에 넘어간 고정희는 그 수를 자신이 놓은 것이라 고 고백한 꼴이 되었다. 이번에는 신기수가 용기를 내어 곧바로 응수하였다. 흰 라일락의 꽃말은 그런데 사랑의 감동 이라는 것도 알고 있죠? 고정희는 말없이 신기수를 바라보았다. 신기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그녀가 그의 등을 안자 그는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나는 향이 라일락 향이 라고 믿었다 소설 부문 207

208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신기수는 고정희가 그의 곁에 누워 서 한 말을 되새겨 보았다. 기수씨가 사실 옛날 그 남자와 여러 모로 닮았어요. 처음 만났을 때 깜짝 놀랐거든요. 나를 집에까지 바래다주던 날, 집에 올라와서 아 래를 보니, 기수씨가 아직 가지 않고 위를 올려다보는 것을 봤죠. 그 순간 기수씨가 언젠가 나의 집에 들어올 것이라고 예감했었죠. 집으로 돌아 온 신기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이상하리만큼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였다. 무언가 미안한 감정은 있지만, 윤리적인 죄책감은 물 론 양심을 속였다는 자괴감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사랑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찾기 위해 한 동안 고민하였다. 그리고 사랑은 정형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었다. 사랑은 정형이 아니다. 사랑은 논리도 아니다. 그렇다고 사랑이 감 각적인 것도 아니다. 어떠한 사랑도 아름다울 수 있고 어떠한 사랑도 추할 수 있다. 윤리 를 기준으로 선악을 규정하는 사랑은 너무나 제한된 보편적인 사랑일 뿐이며, 사람 각자의 내부에서 피어나는 절대적인 사랑을 비교 정의하 는 것은 사랑의 본질을 말살하는 것이다. 물이 담긴 그릇에 따라 물의 모양과 물의 맛의 느낌이 달라질 수 있듯이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두 마음이라는 그릇에 따라 다른 어느 하나와도 똑같지 않은 그들만의 사랑의 정의를 만들어 간다. 신기수는 냉정한 현실을 끝없이 극복해야 나아가야 하는 가장으로서 이런 종류의 정신적 공간이 필요할 수 있다고 합리화 하였다. 그리고 고정희와의 아슬아슬한 만남 속에 서로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비밀스 208 재외동포 문학의 창

209 런 세계를 따로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 비밀스런 세계는 올해 3월 고정희가 취직과 함께 그녀의 남편이 있는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막을 내렸다. 그녀의 남편은 이태리 에서 건축 공부하는 것이 너무 힘들자 고정희의 과거를 핑계로 귀국한 것이었다. 용서를 구한 남편을 받아들인 고정희가 한국으로 떠나던 날 신기수는 리나떼(Linate) 공항 쪽을 향한 채 자신의 빈 가슴처럼 뻥 뚫 린 하늘을 끝없이 응시하며 사랑하는 만큼 줄 수 없고 사랑하는 만큼 받을 수 없는 우리사이 라고 한 그녀의 고백을 가슴에 주어 담았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부스스한 얼굴로 아내가 전화를 받으라고 하 였다. 그 소리에 현실로 돌아 온 그는 시계를 보니 8시가 채 안 되었다. 이른 아침에 오는 전화치고 반가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기수야, 나 지금 한국에 가야한다. 아버님이 돌아가셨단다. 강영훈의 말에 신기수는 말을 잃었다. 아니, 어떻게 건강하시다더니. 급성 심장마비라고 형님이 그러시더라.. 부탁이 있는데, 아젠찌아 아르떼 오페라(Agenzia Arte Opera) 15) 에 서 올 연락이 있는데 너한테 하라고 해 둘 테니 나중에 연락 좀 부탁한 다. 전화를 끊은 신기수는 유학사회에서 가끔 발생하는 부친상이 자신과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도 일어났다는 사실에 무력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15) 성악에이전트회사 이름 소설 부문 209

210 느꼈다. 러시안 룰렛의 부친상이라는 운명의 탄환이 다른 이에게 발사 되면, 신기수는 운명의 탄환이 이번에도 자신을 피했구나 하는 얄미운 안도감 속에 안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신기수는 부모님께 자립하겠다고 선언하면서 하루빨리 자리 잡아 부 모님께 효를 다해야겠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외국에서 간신히 이어 가고 있는 삶은 부모님께 용돈 한번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불효만 낳게 하였다. 장인과 장모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사위 덕 하나 누리지 못 하 는 자신의 부모님께 아내 역시 송구한 마음 극심했을 것이다. 장인, 장모님은 건강하시데? 아내를 위한다고 모처럼 한 말인데, 너무 남의 말 하듯이 해버리고 말았다. 아내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결국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면 너무 불쌍해요. 큰딸 하나 믿고 사셨는 데, 난 외국에 와서 살고 있고. 의지할 곳도 없는데, 용돈 한번 보태드 리지 못하고 연락도 제때 못하고.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아내는 흐느끼느라고 말이 자꾸 끊겼다. 그래도 못 산다는 것을 보이지 않으려고 미라 아빠가 곧 좋은 무대 에 설 것이라고 해 왔는데, 이제 더 이상 그런 말도 못하겠고. 당신과 아이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남들 앞에 제대로 차리고 나가고 싶 은데, 장을 열면 마땅한 옷이 없고. 부모님 생각에 울던 아내는 이제 자신의 처지까지 쏟아 놓으며 어린 아이처럼 울었다. 신기수는 아내의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결코 본 적 이 없었다. 210 재외동포 문학의 창

211 아끼고 절약해도 나아지는 것은 없는데 미라 아빠는 몰라주고. 어 디 가서 미어진 가슴 하소연 하고 싶어도 친한 친구들은 다 한국에 있 고, 창피해서 말도 못하고 혼자 엄마 엄마하며 울며 부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신기수는 그녀의 호소로부터 비로소 깨달았다. 아내인 유현지도 신 기수 자신 이상으로 힘겨운 삶을 살아왔다. 남편의 괴팍하고 강한 성격 을 다 받아들여 안으로 삭여왔던 아내의 마음을 신기수는 지금까지 헤 아려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성악적 자질이 결혼으로 인하여 정체되었 고, 지금은 가족을 위하여 자신의 야망마저 억누르며 살고 있다고 생각 해 왔다. 자신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아내와 아이들의 의사를 자신 의 중심에 맞춰왔다. 아내가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 하였으며 자신의 무능력을 남의 탓으로 돌리던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신기수는 간밤에 자신이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라고 확신했던 것에 얼 굴이 달아올랐다. 그는 자신이 해변가의 무심한 한 사람일 뿐이었다고 자탄하였다. 울음을 간신히 넘긴 신기수가 아내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단 하나 였다. 미라 엄마,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못나서 그래! 신기수는 처절한 마음이 되었다. 아내의 도피하고 싶은 세계의 구원 자는 신기수 자신일 수밖에 없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뼈저 리게 통감하였다. 그를 얼싸안은 아내는 잦아들기 시작한 울음과 들먹 거림 사이로 고백했다. 소설 부문 211

212 미라 아빠, 나 어제 밀라노 LG전자에 이력서내고 왔어요. 신기수는 베르가모 시에 갔다. 그는 밀라노에 살면서 힘들거나 고향 이 그리울 때면, 이태리어를 배우기 위해 처음 거주했던 이태리 중부지 방의 도시인 뻬루지아를 떠 올렸다. 그러나 척추처럼 이태리를 종으로 길게 가르는 아뻬니니 산맥이 지나는 산 위에 세워진 뻬루지아는 밀라 노에서 기차로만도 6-7시간 걸리는 거리에 있어 늘 마음뿐이었다. 그런 데 밀라노에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에 있는 베르가모는 높은 고지에 위치하고 있어 뻬루지아와 유사한 분위기를 제공하고 있었다. 돌로 세운 벽들과 좁은 길들 사이에 동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작은 창 문이 달린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고대와 중세의 향기와 신비를 그 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중세복장으로 다닌다면 시간이 그대 로 중세에서 멈춰 버릴 그런 도시다. 종종 유학초기의 싱그러웠던 삶을 되새기고자 왔던 베르가모는 특히 도니제티가 태어나고 사망한 도시라 성악도인 신기수에게는 더욱 정감이 가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는 근세 이후 확장된 베르가모의 낮은 도시에서 톱니바퀴와 체인 으로 끌어올려지는 기차를 타고 중세의 향을 간직한 높은 도시에 도착 하였다. 7월의 무더운 날씨에 찾아온 베르가모지만, 좁은 골목길을 만들고 있는 두꺼운 돌벽으로 지어진 집들이 촘촘하고도 높이 늘어서 있기에 해가 들지 않는 곳은 무척 시원하였다. 그는 도시 제일 높은 곳에 세워진 요새 로까(Rocca)로 향하였다. 자 갈을 박아 만든 길을 따라 올라가니 통일이태리왕국을 세울 때, 오스트 리아 군에 의하여 여기서 사형당한 베르가모 시민들의 이름이 새겨진 212 재외동포 문학의 창

213 비문이 눈에 들어왔다. 비문을 통과하여 로까에 들어서니 베르가모 시 의 전경이 360도로 한 눈에 들어왔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 15세기 풍의 건물, 성벽, 멀리 푸른 풀밭에 누워있는 전원주택 등이 반사하는 빛을 모아 놓은 이곳에 신기수는 고정희와 온 적이 있었다. 2007년 9월 극장계약을 갱신하지 못하여 결국 성악의 길을 아르바이트와 병행하기 로 결정한 그해 11월에 신기수는 이곳에 와서 고정희 앞에서 한 없이 울었었다. 되돌리기 어려운 길로 접어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뇌 속에 신기수는 자신의 절망까지 포식하며 커가는 좌절로 인하여 가슴에 생 기는 균열을 그렇게 터 뜨려야 했었다. 그곳은, 아내에게는 할 수 없었 던 아니 해서는 안 될 분출을 했던 신기수의 등을 고정희가 가만히 안 았던 비밀의 공간 이었다. 그러나 어제 아내 유현지의 눈물의 고백을 온 가슴으로 들었던 신기 수는 자신이 실제로 고정희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 다. 그것은 사랑이 있어 유지된 관계가 아니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요구되던 명분으로써의 사랑이었다. 그녀와의 관계는 자신만의 숨겨진 공간을 희구하는 욕망과 그 미지에 대한 불안으로 발생하는 억눌린 긴 장이 유사한 또 다른 긴장과 증폭반응을 하여 폭발한 것이었으며 그 사랑의 행위는 구원자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카타르시스였 을 뿐이었다. 신기수는 그리고 사랑을 담은 두 사람의 가슴으로 만든 그릇도 시 간과 환경에 따라 진화하면서 그 담겨있는 사랑의 형태와 본질을 갱 신해야 하는 것인데, 자신은 과거의 낭만에 남은 채 현실을 회피하고 자 하였기에 아내와 함께 형성해야 할 사랑의 그릇이 진보하지 못한 소설 부문 213

214 것이고 그로 인하여 그들의 사랑이 정체되고 고착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난간에 기대어 저 멀리 아래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7월의 뜨거 운 태양아래 모든 것이 맑고 깨끗하였다. 최후에는 까바라도씨도 죽고 토스카도 죽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고정희가 준 행커치프를 꺼냈다. 그 리고 허공에 날렸다. 성벽 밑으로 몸을 던진 토스카의 뒤를 따르듯 행 커치프가 떨어졌다. 라일락 꽃잎 하나가 나풀나풀 뒤를 이었고 저 멀리 베르가모 국제공항에서 비행기가 이륙하고 있었다. 밀라노로 돌아 온 그 다음 날 아젠찌아 아르떼 오페라에서 전화가 왔다. 신기수는 즉시 강영훈이 아직 한국에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였 다. 그런데 전화한 사람이 신기수를 찾는다고 하였다. 그는 푸치니 페 스티발(Puccini Festival)에서 공연되는 토스카의 까바라도씨 역을 맡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8월 2일 공연에 선정된 이태리인 테너가 병으로 갑자기 입원하게 되었고, 7월 공연에 선정된 테너는 이미 다른 기획을 잡아놔서 시급히 다른 테너를 구한다는 것이었다. 7월 들어서 백수와 다름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던 신기수는 순간 큰 기회이자 행운이라는 육감이 들었다. 푸치니가 태어난 도시 루까(Lucca) 근처에 있는, 그의 이름을 딴 호수도시 또레 델 라고 푸치니(Torre del Lago Puccini)에서 열리는 푸치니 페스티발은 그 역사와 권위가 대단한 것이었다. 공연까 지 2주 밖에 남지 않았지만 토스카는 늘 공부하던 것이고 자신 있는 작품이었기에 아젠찌아로 즉시 계약하러 가겠다고 하였다. 214 재외동포 문학의 창

215 7월 25일 공연 스텝진도 미리 만나야하고 오케스트라와 연주도 맞춰 봐야하기에 신기수는 루까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자신 이 받을 금액을 계산해 보았다. 아젠찌아 커미션과 세금 그리고 호텔체 재비 등을 제외하여도 3,000 유로는 충분히 남길 수 있는 개런티였다. 기차가 아뻬니노 산맥을 관통할 때 그간 미루어 두었던 안도감과 흐뭇 함을 전신에 퍼트리던 신기수는 숲과 시내가 어울린 그 풍경이 도시인 에게는 느긋한 휴식일 수 있겠지만, 성악가에는 예술혼이 담긴 영감일 것이라고 믿었다. 공연 이틀 전 연습을 끝내고 막 호텔로 들어왔을 때 아내로부터 전 화를 받았다. 공연 전날은 부담을 주기 싫다며 꼭 그 전에 연락을 하는 아내였다. 컨디션 잘 조절하고 편히 연주하라는 말과 걱정 말고 잘 지 내고 있으라는 늘 그런 이야기가 오갔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내가 덧 붙였다. 루이지가 그러는데, 벌금고지서 얘기예요. 70 유로씩 36개월 분할 하여 지불할 수 있게 만들었데요. 그 정도면 내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 LG에 취직됐거든요. 9월부터 출근하래요. 공연 당일 무대에 오른 신기수는 자신에게 돌아온 이 행운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온 열정으로 연기와 연주를 했다. 2막이 끝났을 때 그는 소리가 너무 잘나며 컨디션이 최상이라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 3막의 피날레에서 들어선 신기수는 E lucevan le stelle 를 부르기 시작 하였다. 고정희의 얼굴과 아내의 얼굴이 겹쳤다. 신기수는 마지막 부분 의 L ora è fuggita, e muoio disperato!(로라 에 후짓타, 에 무오이오 디스페라또 :내 사랑했던 그 순간은 가버리고 나는 절망 속에 죽는구 소설 부문 215

216 나.)를 부르며 자신의 이기심, 독선, 기만 그리고 고정희와의 시간을 묻 어버렸다. 그리고 E non ho amato mai tanto la vita! (에 논 오 아마또 마이 딴또 라 비따! : 내가 이렇게 살아있음을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라고 피날레를 장식하면서 자신이 진정 삶을 사랑하고 있음을 처절한 감정으로 관객들에게 고해하였다. 기차가 밀라노로 급하게 달리고 있었다. 기립박수와 커튼콜을 두 번 이나 받았고, 음악감독으로부터 가을 연주회와 내년도 공연에 대한 제 의도 받은 신기수는 한껏 상기된 상념에 젖어 있었다. 이미 받은 개런 티가 든 봉투는 아내가 갖고 싶어 하던 정장과 구두도 담겨진 채 그의 가슴 깊숙이 고동치고 있었다. 그는 낯익은 풍경을 뒤로하며 밀라노에 서 자신을 기다리는 아내의 얼굴을 하나하나 그려 보았다. 그렇다. 나는 홀로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나의 이상과 욕망을 찾아 홀로 있고 싶었고 홀로라고 믿었던 것뿐이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아 내와 희망을 주는 아들과 딸이 있지 않은가! 여기서 태어나 자라는 미 라와 도원이의 미래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나와 아내의 삶, 그 삶이 있는 밀라노로 나는 지금 귀환하고 있다. 신기수는 밀라노로 돌아가면 이낙중 선생께 한국에 가지 않겠다고 연락하겠다고 결정하였다. 역에서 내린 신기수는 역사 안쪽에 자물쇠로 묶여 진 채 온전히 그 를 기다리고 있는 자전거를 집어타고 집으로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들이 그렇게도 원하던 카카의 사인이 든 나이키 축구화와 딸이 동경하던 비욘세 풍의 Freddy 재즈댄스복이 가득했다. 혹시 여름 세일에 다 팔려나가지는 않았겠지 하면서 그는 달리는 자전 216 재외동포 문학의 창

217 거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외쳤다. 자기, 어서 내려와 있어! 데카슬론 매장에 가야해! 아무도 없는 휴가철 8월의 밀라노 가로수 길을 홀로 질주하는 그의 등 뒤로는 청록에 물든 눈물이 계속 날리고 있었다. 소설 부문 217

218

219 수필 부문 재즈 아리랑_윤종범(미국) 대상 우수상 스팅키_박혜자(미국) 아버지_조성숙(중국) 가작 한 잔 속에 피어나는 엘도라도_유금란(호주) 사라져가는 빨래방치 소리_천광일(중국) 프리데리케의 아이_천복자(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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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재즈 아리랑 대상 윤종범(미국) 그때를 회상하면 언제나 그때처럼 두근거리는 가슴과 함께 님 생각 이 난다. 위기에 처한 나를 구하기 위해 수만 리 태평양을 단숨에 건너 온 님.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흙 내음을 맡은 곳, 나의 앙증맞은 두 발 을 처음으로 내 디딘 곳. 나의 유년과 청년 시절을 몽땅 간직하고 있는 바로 나의 고국이다. 일 년 후면 내 나이가 오십이 되는 어느 여름날이었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여느 때처럼 집을 나서는 아내와 나는 가벼운 운동복 차림이었 다. 서쪽 하늘에 붉으스레 수를 놓고 있는 노을은 걷고 있는 내 몸이 빨려 들어갈 듯 아름다웠다. 살아 있음에 행복할 수 있음은 저처럼 아 름다운 노을을 내 작은 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동네 한가운데 만들어진 여인의 부드러운 허리를 닮은 S자 형태의 호수를 산보하기 시작한 것이 한 두어 달 되고 있었다. 한 바퀴 돌면 대략 이십 분이 걸리는 호수를 두 바퀴로 늘린 것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매주 토요일마다 아내의 몸이 올라서는 체중계가 보여주는 눈금에 수필 부문 221

222 잔뜩 재미를 붙이고 있던 아내가 호수를 따라 걷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을 즈음 이제부터 두 바퀴 어때? 했었다. 그런다고 체중계 눈금 이 두 배 속도로 후진하는 것은 아닐 텐데 두 바퀴를 제안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내게는 그런 소리로 들려와 아무 불평 없이 그때부터 나는 아내와 두 바퀴를 돌고 있었다. 잡고 있는 아내의 손에 땀이 나는 듯 촉촉해 지는 것은 늘 두 바퀴가 끝날 무렵이었다. 한 바퀴를 돌고 두 바퀴 째를 막 시작하려고 할 때였다. 기승을 부리 던 여름 더위는 한풀 꺾여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산보 길에 서 가끔씩 만나는, 이름이 에드 인 앞집 남자가 하얀 털이 온 몸을 풍성 히 덮은 푸들을 끌고 호숫길로 들어섰다. 나란히 걷고 있던 아내와 나 를 보고 그는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와 말을 걸어 왔다. 살랑대는 푸들 의 꼬리가 내 다리를 간질여 아내 곁으로 조금 비켜서며 한참동안 오고 갔던 그와의 대화 속에서, 그가 세상을 떠난 자기 아버지 얘기를 꺼낸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기억에 없지만 내 뇌수에 박힌 것은 에드 아버지의 불행이었다. 제 아버지의 불행은 은퇴하고서 부터 시작되었죠. 별달리 취미도 없으셨던 분이라 은퇴 후 소일할 거리가 마땅치 않았어요. 따분하게 집 에서만 맴도는 일상생활에서 행복할 순 없었겠죠. 그게 단명의 원인이 됐을 겁니다. 오죽했으면 은퇴는 최대한 늦게 하라고 돌아가시기 전 저 에게 유언처럼 말씀하였겠어요. 은퇴로 이어지는 선이 그리 길게 남지 않았음을 느낀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산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사뭇 심각해져 있었다. 에 드 아버지의 불행이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사실이었지만 나를 심각하 222 재외동포 문학의 창

223 게 만든 것은 은퇴가 그리 멀지 않은, 일 년 후면 벌써 오십이 되는 내 나이였다. 하루 빨리 무슨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머리가 허예진 나 에게도 불행이 덮칠 것 같았다. 할 일 없이 집에서만 빈둥대는 처량한 할아버지 신세는 상상만으로도 끔찍스러웠다. 그래서 내 자신에게 던 진, 늙어서 뭐 할 거니? 라는 물음에 아, 다행히도 쏜살같이 다가오는 대답이 하나 있었다. 바로 재즈 바이올리니스트였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는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나의 직업 이다. 조그만 대학교 연구소에서의 여덟 시간 일이 부족했는지 집에 돌 아와서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가 일쑤인 나였다. 피곤해진 눈 생각을 해서라도 그만 들여다보라는 아내의 애정 어린 핀잔이 내 귀에 닿으면 그제야 모니터 앞을 슬그머니 떠났으니 거실의 피아노 위에 올려 놓은 바이올린은 먼지만 잔뜩 덮어 쓰고 있기가 십상이었다. 게다가 머리 굳 고 손도 굳은 후에야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목에 걸었다. 남 앞에 나서 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반짝 반짝 작은 별 수준은 벗어났지만 모차르트나 사라사테의 곡을 연습할라치면 내 손가락은 어느새 꼬이기 시작하고 멀쩡하던 손에서는 쥐가 나려는지 손가락이 뻣뻣해지기까지 한다. 이 정도면 재즈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대답은 쉽게 풀어지지 않는 미스터리에 속할 만하다. 원숭이에게 사람으로 변하는 재주를 피워 보 라는 식으로 터무니없기도 하다. 그래도 굳이 대답의 이유를 밝혀 보자 면 노후대책의 물음에서 내가 무게를 둔 것이, 보잘것없던 바이올린 수 준이 아니라 은퇴하기 전 까지 창창히 남은 미래의 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필 부문 223

224 군말 없이 잘 다니고 있는 지금의 직장에 발길을 뚝 끊는 것은 앞으 로 십 년 후의 일이나 될 것이고,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강 산도 변하는 그 십년 동안 내 바이올린 수준이 높은 산봉우리를 넘지 말란 법 또한 없는 것이다. 실로 내가 그 변화에 잔뜩 기대를 걸고 있었 음이라. 게다가 클래식이 아닌 재즈가 아닌가. 바이올린이 재즈 세계에 선 상당한 희소가치가 있을 거라는 것이, 복잡한 컴퓨터 코드로 이십 년간 다져진 내 머리에서 쉽게 계산이 되었던 것이다. 신나게 불어대는 트럼펫, 섹소폰 소리와 전자 기타, 피아노 소리에 익숙해져 있는 재즈 애호가들의 귀에, 흔치않은 재즈 바이올린 소리는 오랜 가뭄 뒤에 뿌려지는 비의 소리일 것이다. 단비 같을 바이올린 소 리. 그것이 내가 계산한 희소가치였고, 그 희소가치까지 가미된 재즈 바이올리니스트는 마치 내가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왔던 미래의 꿈처럼 나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모니터에 바짝 눈을 붙이고 들여다 본 음악대학의 웹 사이트에는 다 행히 재즈 입문 이 가을학기에 개설되어 있었다. 강의 시간 또한 절묘 했다. 마치 나를 위해 짜여진 듯 점심시간에 식당 대신 강의실을 찾아 가면 될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마냥 흐뭇해 할 수만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서둘러 음대에 전화를 걸었던 것은 음대 강의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내가 과연 음대 과목을 수강할 자격이 있는지가 의문스러웠 기 때문이었다.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약간 쉰 듯한 그러나 상냥한 목 소리는 오디션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고, 오디션 날짜와 더불어 지정곡까지 친절히 알려 줄 때는 나의 가슴이 그만 철렁 내려앉 224 재외동포 문학의 창

225 고 말았다. 불과 일 주일 밖에 남지 않은 오디션이었다. 내 기억엔 그 일주일은 하얀 밤들이다. 컴퓨터는 간데없고 바이올린만 붙잡고 지새 운 하얀 밤들이었다. 음대 건물로 들어서고 있는 나의 심정은 긴장을 넘어 비장했다. 총 대신 바이올린을 든 전사였다고나 할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재즈라는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에 마음이 설레어 바이올린을 든 내 손에 가벼운 전율마저 일었다. 나에게 G장조 스케일과 지정곡을 연주해 보라고 주문하는 교수 앞 에서 치러진 오디션에서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오디션의 좋은 결과는 어찌 보면 하얗게 지샌 밤들 덕분이 아니라 협박처럼 들렸 을지도 모를 애원조의 내 목소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강의를 수강하 지 못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마치 생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어조로 한숨까지 푹푹 내 쉬는 나를, 교수는 아마도 길거리에서 손 내미는 걸인처럼 측은하게 여겼으리라. 나보다 나이가 서넛 젊어 보 이는 교수는 내가 어렸을 때 동전 한 닢으로 자주 드나들던 구멍가게 주인아저씨처럼 마음이 후덕해 보였다. 한번 열심히 해 보라는 격려까 지 아끼지 않던 교수였다. 음대 강의실의 특이함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강의실을 들어서면서 부터 한 눈에 들어오는 대형 오선지 같은 칠판은 뜻밖이었다. 그러나 금세 고개가 끄덕여 졌다. 음악의 언어인 음을 표시하는 데는 오선이 필수지 않는가. 강의를 하면서 칠판에 일일이 오선을 그어야 하는 시간 은 사실 낭비인 것이다. 오선지 칠판으로 그 시간 낭비를 덜은 셈이다. 수필 부문 225

226 책상 또한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강의실이었다. 가운데가 텅 비워진 채 의자들만이 서로 마주보며 둥글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칠판 바로 앞에는 드럼 한 대가 학처럼 긴 다리를 세우며 외롭게 서 있었고 칠판 앞 오른쪽 구석에 놓여 있는 그랜드 피아노는 칠판을 지키는 파수꾼처 럼 늠름했다. 강의실로 들어서는 학생들의 눈부신 젊음은,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 내기 시작하던 나의 흰 머리카락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눈에 돋보 인 것은 유독 내 흰 머리카락뿐이 아니었다. 트럼펫과 섹소폰 그리고 전자 기타는 여러 학생들 손에 잡혀 있었지만 나만이 홀로 바이올린이 었다. 재즈에서 바이올린의 희소가치에 대한 나의 계산이 맞아 떨어지 는 순간이었다. 이론과 연주가 함께 병행되는 강의에서 이론은 별로 어렵게 느껴지 지 않았다. 선정된 연주곡 역시 음표들이 단순하게 그려져 있어 일단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 안심이, 쉽게 생각한 재즈에 대한 나의 결례 였음을 알아차리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자, 이제 앉은 순서대로 돌아가며 연주를 해 봅시다. 이론을 끝낸 교수가 드럼으로 박자를 치기 시작했다. 곧 이어지는 기타 반주에 따라 교수에게서 가장 왼쪽에 앉은 학생부터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악보 따라 연주하는 것이 아닌 즉흥 연주였다. 재즈의 심장이 즉흥이니까 즉흥적으로 연주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지만 나는 그 당연한 것을 불행히도 그때껏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모두가 초보와는 거리가 멀고도 먼 전문가 들 소리였다. 사실 나는 입문이라고 해서 용기를 내었던 것인데 학생들 226 재외동포 문학의 창

227 의 재즈 연주 실력은 대부분이 프로에 가까 왔다. 나중에 알아 버린 사실이지만 재즈바에서 아르바이트로 연주를 하는 학생도 있었다. 자 기 차례가 돌아 올 때마다 학생들은 애타게 기다린 연인이라도 돌아온 듯 섹소폰과 트럼펫을 미친 듯이 불어 대고 전자 기타를 떡 주무르듯 했다. 그 속에서 나의 바이올린은 수줍은 색시였다.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고 얼굴 붉히며 내 무릎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한껏 흥이 돋은 강의실 분위기는 즉흥 연주는 고사하고 언제 연주를 시작해야 하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나를 수천 길 낭떠러지로 몰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는 즉흥연주 속에서 그들이 어디쯤 가 고 있는지 나는 도통 알 길이 없었다. 내 옆 자리의 학생이 몸까지 흔들 어 가며 섹소폰을 불기 시작했을 때 내 가슴은 바람에 심하게 떠는 창 호지였다. 박자에 맞춰 발을 까닥거리고 머리를 흔들기 시작한 것은 떨 려 오는 가슴을 어떻게든 진정시켜 보려는 나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남들이 보면 강의실에서 제일 흥겨워하는 사람이 바로 나인 줄로 착각 했으리라. 박자 따라 흔들리는 내 머리가 가져다주는 것이 흥겨움이 아 닌 두통이었음을 남들은 결코 알 리 없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강의실은 기타 반주와 교수의 드럼 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아무 생각 없던 내 머리는 여전히 아무 생각 없이 흔들 리고 있었고 내 귓가는 트럼펫 소리의 여운이 남아 윙윙 거렸다. 내 머리를 멈추게 한 것은 느닷없이 나를 향한 교수의 드럼채였다. 나의 눈을 찔러 오는 교수의 드럼채는 나에게 보낸 출발 신호였다. 화 들짝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흔들던 머리를 멈추고 턱 밑으로 바이올 린을 서둘러 집어넣었다. 그리고 악보에 적힌 암호처럼 난해한 재즈 코 수필 부문 227

228 드를 응시했을 때는 밀려오는 파도처럼 현기증이 몰려왔다. 제 때 시작을 놓친 터라 언제 시작하나 모든 학생들의 눈이 나를 향 하고 있었다. 그 맑고 호기심 어린 눈들에게 악보를 그대로 베끼는 연 주로 실망을 안겨 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상황이 급박하다 해 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즉흥 연주가 갑자기 나에게서 툭 튀어 나올 수는 없는 법이다. 거의 울상이 되어 버린 나에게 하늘은 무심히도 내 려앉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지 않 았던가. 그때 내가 찾아낸 구멍이 바로 아리랑 이었다. 사천 만 한국인이 애창하고 있는 아리랑이 내 바이올린에서 조용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강의실에서 연주하던 곡의 분위기가 아리랑과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인데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연주곡 분위기가 아리랑과 흡사했던 것이 아니라, 오갈 데 없이 궁지로 몰린 애처로운 내 처지가, 떠난 임을 그리워하는 아리랑 곡의 애처로움과 닮아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강의실에는 다행히도 나만이 유일하게 콧등이 약간 가라앉고 눈이 가늘게 째진 한국인이었다. 아리랑이 그들에게 색다른 재즈풍으로 다가갔던 것일까. 단조롭게 시작했던 교수의 드럼채엔 제법 흥이 붙어 있었고 학생들의 몸도 이리 저리 흔들리며 박자를 타고 있었다. 아리랑에 도취한 듯 지그시 눈을 감은 학생도 눈에 들어왔다. 교수와 학생들의 예상치 않은 반응에 내가 힘을 얻었던 것일까, 아니 면 죽기 살기로 내가 용기를 냈던 것일까. 나는 아리랑에 엇박자를 넣 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스윙으로 재즈 흉내를 어설프게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설프긴 해도 위기에 몰린 나를 구하기에는 충분한 아리랑이 228 재외동포 문학의 창

229 었다. 나만의 재즈 아리랑이었다. 아, 그리고 그때, 엇박자를 넣고 있던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리랑에 재즈의 기본만을 설 입힌 나의 재즈 아리랑은, 내 한 몸이 온전히 용해 될 수 없는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점심 식사 때는 빵에 버터를 발라 먹지만 진정 나의 배를 충족 시켜주는 것 은 저녁 식사 때의 김치와 밥이었음을. 그랬다. 비록 어설프고 못난 재 즈 아리랑이었지만 그것은 고국의 따뜻한 품속이 아닌 황량한 바람 이 는 타국에서 살아가는,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어느새 아리랑은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 었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가슴 졸이며 앉아 있던 가엾은 중년은 간데 없고 대신 가슴을 활짝 편 중년이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바이올린을 높이 치켜 올렸다. 치켜 올라간 바이올린에서 흘러나오 는 힘찬 재즈 아리랑을 따라 한 마리 봉황이 하늘을 차고 올랐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위기에 처한 나를 향해 아리랑 손길을 뻗어준 나 의 님에게, 비록 보잘 것 없지만 힘찬 재즈 아리랑으로 보답하는 나 자신이, 예전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님을 버리지 않아 발병 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임을 확신하는 나의 몸 떨림이였다. 수필 부문 229

230 스팅키 우수상 박혜자(미국) 스팅키는 어딜 갔을까? 난 얼마 전 하이웨이 287 east를 달리다 까만 개 한마리가 하이웨이 가장자리에 죽어있는 것을 보았다. 그 개는 다리 를 포개고 옆으로 드러누운 자세인데다 얼굴은 하이웨이 반대편 쪽으 로 향해있어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새벽이어서 자세히 볼 수는 없었 으나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에 그 죽은 개는 분명 까만색 레버도르 (labrador)종류였다. 스팅키가 사라지고 난 뒤 2주쯤 지난 뒤라 난 그 죽은 개가 스팅키인지 아닌지 궁금해졌다 그날 새벽, 나는 가게에 가는 중이었으므로 돌아오는 길에 저 죽어있는 개가 스팅키인지 확인하리라 마음먹고 그냥 지나쳤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반대편 하이웨이 선상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개를 나는 다시 보았다. 개는 분명 까만 색이었으며 크기도 스팅키와 비슷해보였고 한 눈에도 윤기 없는 털이 늙은 개 같아 보였다. 이번에도 나는 하이웨이여서 정차를 못한다는 핑 계로 차에서 내리지 않고 차 유리창을 통해 죽은 개를 확인했을 뿐이 다. 그런 탓에 그 개의 얼굴과 다리의 종기는 볼 수가 없었다. 스팅키는 우리가 뉴왁이라는 컨추리 지역으로 이사 오고 나서 우연 히 우리와 함께 같이 살게 된 개의 이름이다. 이사 오고 나서 여름이 230 재외동포 문학의 창

231 바로 시작되었다. 이사를 5월에 했으니 텍사스날씨로는 여름의 시작이 었다. 그해 7월 어느 날 해질 무렵 스팅키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거의 탈진한 모습으로 우리 집 창고가 있는 곳에 와 쓰러졌다. 그때 제차 청소를 하고 있던 앤드류가 스팅키를 보더니 안 된 마음에 물을 한 그 릇 떠다줬는데 이튿날 아침이 되어 밖에 나가보니 이개는 여전히 어제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어제 앤드류 말로는 다리 쪽에 큰 종기가 몇 군데 보이고 양쪽 눈에 누런 눈곱이 잔뜩 끼어 있는 게 병들어서 누가 버린 개 같다고 했다. 나는 앞마당에 잡초를 뽑으면서 짐짓 저한테는 관심도 없는 양 그 개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걸 아는지 스팅키는 남편 주위만 어슬렁거리며 따라다녔다. 그런데 언뜻 보기에도 그 개는 다리 를 심하게 절고 있었고 얼마나 떠돌이생활을 했는지 냄새가 역하게 났 다. 눈에는 누런 눈곱이 잔뜩 끼어 있는 게 어디가 아픈 개임에는 틀림 이 없어보였다. 그래서 보다 못한 내가 오늘 당장 내쫓더라도 목욕은 시켜서 쫒아야겠다고 물 호스를 가지고 그 개 옆으로 갔다. 개는 목욕 을 시키려하자 물을 사방대로 털며 자꾸 도망을 가려 했다. 그때 이 광경을 멀리서 보고 있던 건너편집 스펜서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 우리 집 쪽으로 걸어왔다. 이사 오고 나서 서로 먼발치에서 손을 흔들고 인 사는 했지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우리부부보다 한 십년은 젊 어 보이는 이 스펜서 부부는 한눈에도 개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사랑하 는 애견애호가들 같았다. 이집에는 개를 세 마리 키우고 있었는데 오후 가 되면 개들을 데리고 산책을 하거나 개들과 놀고 있는 이들 부부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날 스펜서는 강아지용 샴푸를 들고 와서 는 사실 며칠 전부터 이 개를 이 동네에서 봤노라고 했다. 어제도 자기 수필 부문 231

232 집 뒷마당 쪽으로 이 개가 들어오려고 했었는데 자기 집은 펜스가 높아 서 못 들어오고 우리 집 쪽으로 걸어가는 걸 봤는데 한눈에도 아픈 개 같았노라고 하면서 개를 자세히 보더니 다리에 종양이 커 보이는 게 암에 걸린 것 같다고 했다. 자기가 보기에 종자는 좋아 보이는 개인데 늙고 병드니 주인이 안락사 시키기에는 비용이 많이 들고 해서 다소 시내와 떨어진 이곳에 버린 것 같다고 했다. 요즘은 시내에서 개를 키 우던 사람들이 이사를 가거나 개가 병에 걸리면 시골 동네에 개들을 버리고 가서 이런 개가 부쩍 늘어나는 추세라고 덧붙였다. 그날 스펜서 는 개한테 필요한 걸 이것저것 가져다주면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지 자기한테 부탁하라고 하면서 관심을 많이 보였다. 사실 그날 나는 개보다는 이 이웃들에게 조금 놀랐다. 왜냐면 평소엔 그렇게 서로 말붙 일 일들이 별로 없고 관심들이 없다가 이 개가 우리 집에 오고 나서는 스펜서네도 그렇거니와 그 옆집인 타미네에서도 부쩍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처음 이사 와서 간단히 인사는 했지만 이 두 이웃과 우리는 별로 왕래 할 일이 거의 없었는데. 우리가 개를 한 마리 키움으로서 이웃들과 뭔가 공통의 분모가 생긴 것이다. 사실 남편 이나 나나 미국에서 산지는 거의 20년이 되가는 데도 우리는 아직도 이웃들과 친해지는 방법을 잘 몰랐다. 그 후로 이 떠돌이 개는 우리 집에서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다. 또한 우리부부는 본의 아니게 병에 걸린 늙은 개를 거둬서 키우는 인정이 넘치는 동양인 이웃으로 소문이 났다. 나는 사실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별로 관심도 없고 232 재외동포 문학의 창

233 키우는 방법도 잘 모르고 동물과 잘 지내는 방법은 더더구나 잘 모른 다. 그런데도 이 개가 거의 여름이 지나갈 무렵까지 우리 집에 머물게 된 것은 사람을 귀찮게 하는 법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내가 집에서 쉬는 날이어서 유심히 보니 이 개는 집안에 누가 일어나기 전까 지는 저도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다가 누군가 인기척이 나면 그때야 기상을 해서 어슬렁거리며 다녔다. 특히 앤드류와 남편을 잘 따랐는데 앤드류는 자고나면 스팅키의 눈에 낀 누런 눈곱을 제 손으로 떼어주곤 했다. 난 보기만 해도 비위가 상하는 그 누런 액체를 그 애는 아무렇지 도 않게 닦아 내는 게 참 내 아들이지만 대견하기도 하고 비위가 좋아 보이기도 하고 그랬다. 어쨌거나 살아있는 생명체를 사랑하는 법을 그 애는 엄마인 나보다도 더 잘 아는 것이다. 그러나 작은 애 에릭은 그 개가 우리 집에 머무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를 안했지만 그렇다고 썩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개의 이름을 스팅키로 지은 것도 에릭이었다. 첫날 개를 한번 쓱 보더니 고약한 냄새가 난다고 주저 없 이 스팅키로 불렀다. 그 뒤 우리 온 식구도 그 개를 스팅키로 불렀다. 스팅키가 영어로는 냄새가 난다는 뜻의 형용사인데 우리는 그 이름이 재미있기도 하고 특이하기도해서 그 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다들 좋 아했다. 남편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일 끝나고 귀가하면 아이들에게 스 팅키는 잘 있었냐고 물어보며 은근히 스팅키를 우리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해 주었다. 스팅키는 주로 뒷마당 포우치에서 자고 먹고 했는데 스 팅키가 오고 난 뒤 포우치는 빈공간이 없게 되었다. 이사 온 뒤 우리는 야외용 식탁과 의자 여섯 개를 포우치에 들여놨었다. 여름날 저녁 무렵 이면 지는 텍사스의 석양을 보며 식사를 하거나 요요마의 첼로연주를 수필 부문 233

234 포우치에 설치해놓은 시디플레이어를 통해 듣고는 했다. 그런데 스팅 키가 오고 난 뒤 포우치는 스팅키의 살림살이들로 점점 발 디딜 틈이 없게 되고 점점 지저분해지기 시작했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개들도 나날이 사는데 필요한 게 참 많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스팅킨 늙어서 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밥도 마른 개밥이 아닌 부드러운 통조림 밥이 필요 했고 늘 털이 한 움큼씩 빠져 서 온 마당에 날라 다니기 때문에 그 부석부석해 보이는 털을 정리하기 위해서 촘촘한 빗도 필요했다. 그리고 저녁에 산책을 나갈 때 목에 두 르는 끈도 필요했다. 사실 스팅키는 기력이 떨어진 탓인지 밖에 나가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다른 개들처럼 저한테 놀자고 공을 던져주 어도 별 반응이 없었다. 스팅키는 너무 늙고 병들어서 우리 집엘 온 것이었다. 그러나 아마도 스팅키도 한때는 주인집의 기쁨이 되었던 시 절이 있었으리라 짐작을 하며 우리는 그 개가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그저 쉼터를 제공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집에 아무도 없고 저와 나 만 있으면 나를 지키는 양 꼭 식탁이 보이는 유리창 앞에 앉아있거나,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에 한 번씩 우리 집 주변을 맴돌며 집 점검을 하는 시늉을 하는 것은 그래도 제 딴엔 밥값을 한다는 뜻 같기도 해 대견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여름이 다가고 애들이 각자 학교기숙사로 돌아갔다. 동시에 남편은 오후근무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집에는 나와 스팅키만 남기 시작하였는데 공교롭게도 그 주에 나는 이런 저런 일로 바쁜 일이 생겨서 집엘 늦게 들어가는 날이 많았다. 해질 무렵 집에 들어가면 스팅키는 차 엔진소리를 듣고 걸어 나오는 것인지 뒷마 당에서 차고 쪽으로 다리를 절뚝거리며 걸어 나와서 나를 맞이하곤 했 234 재외동포 문학의 창

235 다. 한 번은 집에 와서 보니 뒷마당에 스팅키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집안으로 들어가려고 보니 뒷마당과 통해있는 식탁 쪽 문 이 열려있었다. 그리고 식탁주변과 키친 아일랜드주변에 식빵이 여기 저기 흩어져있었고 뭔가 한바탕 소란을 떤듯 부엌이 잔뜩 어질러있었 다. 난 순간 도둑이 들어왔나 하고 놀라서 이 방 저 방을 점검해봤는데 별 이상은 없었다. 그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 누가 이랬지? 하고 옷 을 갈아입기 위해 안방 문을 여니 스팅키가 천연덕스럽게 침대발치 카 펫에 앉아있었다. 마치 그자리가 예전부터 제자리였던 것처럼 스팅키 는 내가 방에 들어갔는데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순간, 나는 스 팅키가 전주인집에서는 집안에서 키운 개였음이 짐작이 갔다. 왜냐면 방 한쪽에 앉아있는 스팅키의 모습이 참으로 익숙하고 편안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날 오후 현관 앞 화단에 물을 주다가보니 건너 편 스펜서 집에 웬 노부부가 걸어가는 게 보였다. 스펜서는 그 노부부 와 잠깐 애기를 하더니 손으로 우리 집을 가리켰다. 나는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 노부부가 잃어버린 개나 고양이를 찾으러 다니나 보다 생각하고 계속 물을 주고 있었는데, 그 노부부가 우리 집 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 노부부는 대뜸 나에게 자기들은 개 베이비시터 라고 하면서 이집에 개 베이비시터가 필요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자기 들은 하루에 두 번씩 와서 개밥이랑 물도 주고 주인이 늦게 들어오는 집은 밖에 불도 미리 켜준다고 했다. 나는 우리가 여행을 가면 모를까 지금은 필요치 않다고 애기를 했다. 그러자 그 부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자기네가 알기로는 이 집은 개 베이비시터가 필요하다는 이야 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고개를 저으며 돌아갔다. 나는 순간 스펜서가 전 수필 부문 235

236 화를 해서 저 사람들이 이곳까지 왔구나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 나갔다. 이 동네 살지도 않는 사람들이 저 집이 뭐가 필요한지를 어떻 게 알고 찾아올 것인가? 더구나 미국에 별별 세일즈가 다 있지만 개 베이비시터를 해준다고 특정 집을 찾아다니는 것은 한 번도 본적이 없 던 터였다. 그러고 보니 며칠 집에 늦게 들어올 때마다 우리 집 쪽을 쳐다보고 있던 스펜서의 얼굴이 생각났다. 하루는 스팅키가 그 집을 향 해 가려하기에 우리 스팅키가 내가 없을 때 너를 귀찮게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 사람 좋은 것처럼 보이는 백인 남자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는데 며칠 사이에 우리가 개만 혼자 집에 방치해둔다고 개 베이비시터한테 전화를 걸다니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웃이었다. 제가 그렇게 우리 개가 걱정이 되면 우리에게 직접 얘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꼭 이런 방법을 택하는 게 미국식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정나미가 떨어졌다. 내가 한국에서 살 때 어떤 교수가 일본인에 대해 쓴 책에 속마음과 겉이 다른 일본인이라는 글을 본적이 있는데 미국 살면서 느끼는 것은 미국 사람들, 특히 백인들의 겉과 속 이 다른 것은 가히 일본인들을 능가하고도 남는다. 특히 장사를 백인동 네에서 해본 사람들은 겉으로는 절대로 싫은 내색하지 않으면서 냉정 하게 단골집을 바꾸어버리거나, 아무것도 아닌 일에 소송을 하는 손님 들도 대부분 백인들임을 안다. 반면 흑인들이나 멕시칸들은 그 자리에 서 투덜대거나 말싸움을 해도 내일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찾아온 다. 사실 기질적으로 정 많은 우리 한국 사람들은 정서적으로는 후자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비즈니스를 하는 많은 한인교포들은 위험한 면도 있지만 흑인이나 멕시칸동네에서 236 재외동포 문학의 창

237 장사하는 게 속은 더 편하다고도 한다. 아마도 저 스펜서 같은 백인들 한테 느낀 감정이리라. 뭐든 사람과 사람끼리 직접 부딪치지 않고 제삼 자나 공공기관을 통해서만 일을 해결하려 하며, 이런 방법이 더 합리적 이고 서로 감정 다치지 않고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 는 사람들. 집 나간 부모는 찾지 않으면서 집 나간 애완견은 현상 금을 걸고 찾는 애완견 왕국에서 어찌 보면 우리 부부의 개에 대한 태 도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도 우리는 개를 돌봐야 된다는 생각 보다는 그냥 자연스럽게 우리 집에서 같이 사는 걸로 생각하기 때문이 다. 다음날 나는 일찍 집에 돌아오는 길에 스펜서에게 우리부부는 밖에 나가있는 시간이 많아서 저 개를 잘 돌볼 수 없으니 이 동네에 개를 갖다 줄 수 있는 쉘터나 저 개를 키울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알아봐달라 고 부탁을 했다. 내가 스펜서에게 이 부탁을 한 것은 어쨌든 스팅키가 우리 집에 온 뒤에 이런저런 도움을 줬기에 스팅키를 떠나보내더라도 알리기는 해야 한다는 생각과 우리가 우리식대로 개를 혼자 놔두는 상 황이 계속될 경우 또 다른 개 베이비시터사건과 같은 일이 생길 것 같 은 우려 때문이었다. 나의 우려가 다소 오버됐다고 해도 나는 이웃이 내 생활을 간섭하는 일 따위는 다시는 만들고 싶지 않은 게 나의 솔직 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오후에 집에 오니 그 스팅키가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 집주변을 아무리 찾아봐도 스팅키는 보이지 않았다. 그 절룩거리는 다리로 절대 스스로 나가지는 않았을 텐데. 나중에 스펜서에게 오늘 우리 스팅키를 본적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아침에 잠 깐 보았다고 짧게 대답하더니 얼른 자기 집 뒷마당으로 휑하니 걸어가 버렸다. 난 그날 스펜서의 태도가 평소와는 다른, 뭔가 우리에게 숨기 수필 부문 237

238 는 게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스팅키 와 이별을 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내가 스펜서에게 스팅키가 있을 곳을 부탁한 그 다음날 스팅키는 사라졌다. 뒷마당에 있는 스팅키의 물과 밥 이 그대로 인 것으로 보아 스팅키는 그날 오전 중에 누가 데려간 게 분명 했다. 나는 지금도 스팅키가 제 발로 걸어 나갔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비록 우리가 저를 떠나보낼 생각을 했더라도 그 개는 스스로 집을 나갈 개가 아니었다. 저나 우리나 서로 떠나보낼 준비도 안 됐었 는데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지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 한 구석이 편 치가 않았다. 본의 아니게 우리가 저의 주인이 되었지만 주인이 자기 집 개의 행방을 모르다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시내 살 때 같으면 이웃들이 많으므로 그 중에 반드시 본 사람들이 있을 텐데 생각할수록 모를 일이었다. 이곳에 살면서 느낀 것은 미국 사람들이 남의 일에 관 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살아보면 이 사람들처럼 은근히 남 일에 관심이 많은 국민들도 드물다. 집집마다 유리창을 브라인더로 가 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들은 브라인더 저편으로 이웃들이 뭘 하고 있는 지 다 내다보고 있음을 나는 안다. 스팅키가 사라진 날은 토요일인데 우리 집 앞 두 집은 쉬는 날이었다. 그 날도 우리가 집에 왔을 때 그 두 집은 스펜서네 뒷마당에 같이 있었다. 두 집이 같이 공모 를 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스팅키 거취 문제를 부탁했었는데 만일 스펜서가 애니멀쉘터를 불렀다면 우리에게 속일 이유란 또 뭐란 말인가? 내가 저에게 우리 몰래 스팅키를 어떻게 처리해 달라고 한 것도 아 닌데 생각할수록 그들의 태도가 이해되지가 않았다. 그날 아침 우리 부 238 재외동포 문학의 창

239 부가 집에 없어서 자기들끼리 스팅키를 애니멀셀터에 보냈다고 해도 오후에 우리에게 설명을 하면 되는 일을 이렇게 모른 대니, 정말 그들 이 모른 대니, 모른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남편도 그들이 뭣 때문에 거짓말을 하겠느냐고 하면서 스팅키는 제 발로 나갔 다고 쉽게 단정을 했다. 무슨 문제든 남편에게 오면 이렇게 간단하다. 그러나 나는 남편처럼 그렇게 쉽게 사실이 인정되지가 않았다. 스팅키 가 사라진 사실만 인정할 뿐 사라진 경위에 대해선 아직도 쉽게 수긍이 가질 않았다. 어쩌면 내가 가장 인정하고 싶지 않는 부분은 나도 공범 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스팅키를 떠나보낼 생각을 맨 먼저 한 사람은 나이므로, 그리고 떠나보낼 마음이 있다는 메시지를 스펜서 에게 흘린 사람도 나이므로 스팅키의 행방에 대해서 나도 분명 일련의 책임이 있다. 그런데도 나는 내심 스팅키의 사라짐에 대한 책임을 저 이웃들에게 돌리고 싶은지도 모른다. 도대체 내가 생각하는 떠나보내 기 적당한 때는 언제인가? 만일 스펜서가 나에게 이야기를 먼저하고 스팅키를 보냈다면 내 마음은 홀가분했을까? 이런 여러 가지 상념들이 두고두고 꼬리를 물고 내 마음을 어지럽힐 때 나는 하이웨이에서 까만 개의 시체를 본 것이다. 그 개가 스팅키였 던 아니었던 미국에서만이 겪을 수 있는 이 상황이 이십 여 년의 나의 이민생활에 또 다른 수수께끼를 남기고 간 셈이다. 우리는 한 번도 보 지 않은 혹성에 사는 외계인들하고만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게 아니다. 같은 지구에서 같은 해와 같은 달을 보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지구 인들끼리도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수필 부문 239

240 아버지 우수상 조성숙(중국) 내가 어렸을 때의 아버지에 대한 인상을 말하라면 아버지는 자애로 운 분도 아니시고 자상한 분도 아니시며 그렇다고 자식들을 너무 엄하 게 교육하거나 그런 분도 아닌 것 같다. 어릴 때 나는 아버지가 무서웠 다. 지금 애들처럼 아버지 무릎에서 어리광을 부려보거나 아버지의 꺼 실꺼실한 얼굴에 뽀뽀를 해보았거나 하는 기억은 거의 없으니 말이다. 한 가정의 세대주로서 아버지는 밤낮 생산대 일에 바삐 돌아치신 것 같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고 학교에 다니는 고모 둘에다 조롱조롱 한 우리 여섯 자식까지 12식솔이나 되는 대가족이여서 아버지는 언제 우리 자식들을 곱다고 어루 만져줄 사이가 없었는가 보다. 그 때는 자 식들에 대한 자상한 사랑보다 12식솔의 생계문제가 더 급선무였을 테 니 말이다. 식솔이 많아서였는지 그때 우리 집에는 할머니와 어머니 사 이에 전쟁 이 자주 일어나곤 하였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다툰 날 만약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아버지는 불문곡직하고 어머니를 때리 시곤 하였다. 그때면 우리들은 한쪽 구석에서 울고 계시는 어머니 옆에 가서 같이 울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이년들, 모두 죽지 못해 환장했 어. 그만 울지 못할까. 하고 꽥 소리를 지르면 우리는 감히 소리 내어 240 재외동포 문학의 창

241 울지도 못하고 속이 한줌만해서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어느 한번은 생 산대에서 소를 잡고 술을 마셨는데 아버지는 엉망이 되여 돌아오셨다. 그리고 무슨 일로 어머니와 걸고 들어 주정을 하였는데 가마뚜껑이 땅 바닥에 메쳐지고 밥상이 바닥에서 뒹구는 대소란이 일어났다. 그때 나 는 너무도 무서워서 포대기를 둘러쓰고 구석에서 덜덜 떨었었다. 얼마 나 무섭고 놀랐는지 이발이 덜덜 떨리고 머리칼이 곤두서던 기억이 아 직도 생생하다. 아마도 소학교 3학년쯤의 일인 것 같다. 그때는 겨울이었다. 마을 옆에는 늪이 있었는데 겨울이면 늪의 물이 땅땅 얼어 우리 꼬맹이들은 짬만 있으면 거기에 가서 미끄럼을 타기도 하고 썰매를 타기도 하였다. 그때 농촌아이들에게 있어서 이 천연 얼음판은 무상의 즐거움과 쾌락 을 주는 곳이었다. 지금 지니스락원에서도 느껴볼 수 없는 그런 즐거움 을 우리는 그곳에서 만끽했다. 그날 우리는 얼음판에서 친구들과 미끄 럼질을 타다가 깨진 유리병을 주었다. 그것을 얼음 대신 이리 차고 저 리 차면 때구르르 소리 내면서 굴러가는 것이 여간 재미났다. 그러다가 한 아이가 깨진 유리병 을 박살내보자고 하였다. 몇 아이가 얼음판에 메쳤지만 유리병은 좀처럼 박살나지 않았다. 나는 앞의 아이들이 힘이 모자라서 그런 줄로 알고 젖 먹던 힘까지 내서 그 유리병을 얼음판 위 에 냅다 메쳤다. 그런데 그것은 깨지기는 고사하고 얼을 판에서 튕겨 올라 면바로 나의 눈썹에 와 맞혔다. 원래 깨진 유리병이라 날이 있어 서 나의 눈 등에서는 대뜸 뻘건 피가 뚝뚝 떨어졌다. 나는 놀라 와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나의 눈 등에서 피가 나자 같이 놀던 애들은 겁이 나서 다 달아나버렸다. 나는 피가 흐르는 눈을 싸쥐고 울면서 집에 달 수필 부문 241

242 려왔다. 그때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와 쉬려던 아버지는 내가 울며 들어오자 원인도 묻지 않고 계집애가 어디에 가서 일을 저지르고 울 며불며 다니느냐며 당장 나가지 못할 가하고 소리를 꽥 질렀다. 나는 눈을 싸쥔 채 울면서 집에서 쫓겨났다. 엄마가 나를 데리고 위생소에 가서 다친 곳에 약을 바르고 가제를 붙여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다행 스러운 것은 눈 등을 다쳤으니 망정이지 눈알이라도 다쳤으면 내가 지금 얼마나 아버지를 원망하랴 말이다. 비록 상한 것이 아버지 탓은 아니지만 어쩌면 피를 흘리며 달려간 어린것을 그렇게 쫓아 낼 수 있 었는지. 그때 아마도 아버지의 눈에는 징징 우는 나만 보였지 눈을 싸쥔 나의 손에 묻은 피는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어릴 때 내 기억속의 아버지는 호랑이같이 무서운 존 재였을 뿐이다. 그 이상 은 없는 것 같다. 생산대장이시였던 아버지는 그때 사원대회를 하면 언제나 우리 집에 서 하시였다. 식솔이 많았던 만큼 집도 컸으니 말이다. 한 생산대에 40 여 호가 되였으니 40여 세대의 일할 수 있는 노동력들은 다 우리 집에 모여 회의를 하였다. 보통 남정들은 윗목에 앉아 담배를 피웠고 여인들 은 아랫목에 앉아 뜨개질을 하였으며 처녀 총각들은 마당켠이나 부뚜 막이 있는데 앉았다. 처녀들은 코바늘 뜨개를 들고 다녔다. 겨울이면 담배연기가 꽉 찬 집안에서 회의를 두 시간 좌우 씩 하였다. 회의 때면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동네 마실을 나가시고 언니와 오빠는 친구 집에 놀러가고 어려서 어디도 갈수 없었던 나와 동생들은 윗간에서 또는 아 랫간에서 졸다가 되는대로 엎뎌 자군 하였다. 회의가 끝날 때면 저녁에 밥을 하면서 덥혀놓은 온돌이 거의 다 식은 데다 집안의 공기가 너무 242 재외동포 문학의 창

243 혼탁해서 겨울날의 마당 문을 열고 공기를 한참씩 바꾸지 않으면 안 되였다. 어머니는 사람들이 다 간 다음 썰렁해진 집안을 다시 거두면서 푸념을 하였다. 우리 집만 집인가. 한번쯤은 다른 집에 가서 회의를 해 도 안 되는가. 아이들이 불쌍하지도 않는 가고 말이다. 그럴 때면 아버 지는 가타부타 아무 말씀도 없으시었다. 다른 집에서 하면 그 집 식솔 들이 우리가 겪는 고생을 겪어야 할 건 뻔한 일이니 말이다. 또 우리 집처럼 큰 집도 드물었거니와 자기 집에서 회의를 해도 된다고 집을 선뜻 내놓을 사람도 있는 것 같지를 않았다. 내가 소학교를 졸업하고 현성 학교에 가서 공부하면서 이런 고생은 겪지 않게 되였다. 후에 생 산대가 무너지고 도거리를 하면서 이런 회의도 아마 없어진 것 같다. 생활이 푼푼하지 못했던 우리 집에서 오빠 언니는 집 살림을 돕느라 고 초중밖에 다니지 못했지만 나는 고중을 다니고 대학시험까지 보게 되였다. 그런데 첫 대학시험에서 미역국을 먹고 말았다. 대학교는 가고 싶은데 시험에서 미끄럼을 탔으니 재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 려운 생활형편을 뻔히 알면서 한해 더 해보겠다는 말을 하자니 차마 입 밖에 번질 수가 없었다. 기실은 고중까지 졸업한 것만 해도 감지덕 지해야 할 일이지만. 새 학기가 곧 닥쳐오게 되자 나는 집에 들어 누워 끙끙 앓기만 하였다. 나의 속심을 안 아버지는 저녁에 나를 불러놓고 말을 하시였다. 다시 한해 더 해볼 생각이 있니? 나는 겨우 입속말로 예. 하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일 나와 같이 하구에 가자. 외삼촌 집 에 가서 어떻게 방법을 대보자. 농촌에서 8월은 제일 바쁜 고비였다. 일 년 농사가 이제 막 수확하게 되지만 전해 지은 농사의 밑천을 거의 부려먹은 때였다. 진짜 보릿고개였다. 그런데 재수하자면 500원이란 수필 부문 243

244 재수비를 내야 했다. 이 돈이 그때 우리 집에선 엄청난 액수여서 어디 가 변통을 하지 않으면 안 되였다. 그때 외삼촌은 군대에서 제대하고 임장에서 책임자 직을 맡고 있었다. 우리 가문에서 유일한 봉급쟁이였 다. 그래서 외삼촌 집에 가보기로 한 것 같았다. 외삼촌에게 돈이 없다 하더라도 봉급쟁이들이 모여 사는 임장에서 삼촌이 변통할 수도 있으 니 말이다. 이튿날 아침 나는 아버지를 따라 하구에 가는 길에 나섰다. 지금처럼 교통이 편리하지 않아 도보로 가지 않으면 안 되였다. 우리 집에서 삼촌네 집까지는 거의 60여리가 되였다. 8월의 무더운 날씨 때 문에 우리는 아침 6시에 길을 떠났다. 10시가 넘자 맥이 빠진데다가 지쳐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으며 따가운 땡볕 때문에 목에서는 겻불 내가 확확 났다. 성큼성큼 걷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기란 정말 너무너 무 힘에 겨웠다. (지금 생각하면 내 평생에 이런 길을 다시 걸을 기회 가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래서인지 그때의 내가 참 대견스럽다. 어떻게 60여리나 되는 길을 걸었을 가. 지금 애들이라면 상상도 못할 먼 노정 이었다.) 한마을을 지나면 다음 마을이 빠끔히 보이는데 저곳인가 하 면 아버지는 아니시란다. 가다가 참외막도 있고 수박밭도 있었다. 그러 나 손에 단돈 한 푼 쥐지 않은 나는 그런 것을 먹으려니 생각도 못했다. 어쩌다 한 동네를 지나면서 한족 집에 들려 물 한 모금씩 얻어 마이면 고작이었다. 그 때 앞에서 씨엉씨엉 걸어가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아버 지가 혼자 가셔도 될 일을 왜 나까지 따라 나서게 해서 이런 고생을 겪게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불만이 있어도 겉으로 드러 낼 수가 없었다. 내가 다시 공부하려 했기에 떠난 이 길이였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공부하기 위해서는 참아야 했다. 그때 나는 나만 힘들다고 244 재외동포 문학의 창

245 생각했지 아버지의 고생쯤은 그때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아버지도 피와 살로 된 사람일진대 그 혹독한 땡볕에서 걸으시는 그이신들 왜 갈증이 나지 않고 힘들지 않았으랴. 하지만 그때 아버지가 나보고 많 이 힘들지. 바쁘더라도 곧 도착하게 되니까 참아라. 고 격려했지만 나 는 아버지도 힘들지요. 라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아버지가 겪 는 고생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아버지에게 미안하다는 생 각을 가져보지도 않았다. 아버지이기에 돈을 변통해야 되고 60여리 길 을 땡볕에서 걸어야 되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세상에 응당 그래야 되 는 것이 없고 각자가 생각해서 하기에 달렸는데도 말이다. 나는 그때 변통했던 500원으로 다시 재수할 수 있었고 나중에 대학까지 다니게 되였으며 지금은 육체적 노동에서 해탈되어 봉급을 타는 공무원으로 되였다. (그때 우리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농촌에 서 벗어날 수가 없었 다. 그래서 선생님들이랑 우리가 공부하기를 싫어하면 촌에서 한평생 소 궁둥이를 때리겠는가고 하였다.) 땡볕에서 걷던 그 한나절은 나에 게 너무 많은 것을 주었다. 단돈 500원만이 아니었다. 그때 이를 악물 고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면서 어떻게든 공부를 해야 하겠구나 하는 생 각을 백번도 더 하게 되였다. 그런데 지금도 아버지가 그때 왜서 나까 지 데리구 외삼촌 집에 가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혼자 가시 더라도 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지금은 아버지가 감사하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인츰(이내) 결혼을 하게 되였다. 남편은 대학생 이 아니고 제대군인이었다. 우리 두 집 부모님들은 아래 윗동네에서 살 면서 서로의 정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때 남편네 집 생활형편을 보면 동네에서 손꼽히게 잘 살았다. 내가 우리 둘의 관계가 이젠 부모님들도 수필 부문 245

246 알 때가 되였다고 생각하고 아버지에게 결혼을 하련다고 말을 꺼냈다. 그때 아버지는 담배만 태우시면서 한참동안 말이 없으시었다. 아마도 내가 여태까지 겪은 돈고생 때문에 사람보다도 돈을 선택한 것이 아닐 가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하신 한마디 말씀이 사람이 살 아가느라면 돈고생 하기보다 마음 고생하기가 더 어렵네라. 였다. 나 는 아버지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인지 알만했다. 그러나 그때 까지도 단순했던 나는 남편의 이런저런 남들이 알고 있는 그런 결함들 을 보아내지 못하였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또 그렇다면 아무 두려울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어떻 게 해서라도 내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부모님들께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생활이란 것이 다 생각대로 되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결혼 후 이런 저런 곡절을 겪을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곤 한다. 백번 지당한 말씀이시였다. 그러나 나는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8 월의 땡볕을 걸음처럼 힘겨워도 지금까지 하나만을 위하여 즉 내 가정 을 위하여 힘겹게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 그 많던 식솔도 하나하나 줄기 시작하더니 큰 집에 아버지와 어머니 만 남게 되였다. 연세가 드신 아버지는 손군들을 그렇게도 귀여워하시 었다. 오빠네 아이들은 할머니네 집에 놀러오면 돌아갈 념을 하지 않았 다. 그리고 잠 잘 때면 할아버지의 팔을 베고 잤다. 큰 조카애는 두 살 적에 할아버지의 발자국소리까지 분별해들었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 실 때면 발자국소리만 듣고도 할아버지가 오시는 줄 알았다. 젊어서 자 식을 귀여워해주지 못했던 것을 손군들에게 깡그리 부어주는 것 같았 다. 그런데 그 사랑은 그렇게도 많아 철철 차고 넘치였으며 무조건적이 246 재외동포 문학의 창

247 었다. 우리 딸애는 외할아버지의 볼에 뽀뽀를 해라 하면 수염이 많다고 질색해 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허허, 고놈 계집애 하며 그래도 귀엽다 하신다. 딸애는 모를 것이다. 엄마가 얼마나 그 애를 질 투하는지를, 어릴 때 엄마는 외할아버지에게 한 번도 뽀뽀를 못해봤기 때문에. 너무도 무서워서. 연세가 많아지면서 아버지도 이런저런 병을 앓으셨다. 당뇨병 때문 에 아버지는 그렇게 즐기시던 술도 못 마시게 되였다. 그리고 식사 전 마다 혈당을 내리게 하는 주사를 맞곤 하시였다. 밥 먹듯이 매일 반복 하는 그 일이 얼마나 지겨웠으랴. 그러나 아버지는 자식들 앞에서 언제 한 번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셨다. 자식들이 걱정하고 근심스러워 할까 봐. 명절이 되여 우리 형제들은 엄마네 집에 모이게 되였다. 아버지는 집에서 키우던 개를 잡아 가마에 앉히고 장작불을 땠다. 장작을 때면 따로 불을 지켜보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아버지는 너희들이 어쩌다 한 데 모였는데 앉아서 엄마랑 이야기를 나누고 불은 아버지가 보겠다고 하시였다. 밖에 나가 장작 한 아름을 안고 들어오신 아버지는 갑자기 기운이 빠지시었던지 장작을 부리워 놓고 구들 모서리에 쭈그리고 눕 는 것이었다. 아마도 지치시여 혈당이 불시에 내려간 것 같았다. 우리 들이 깜짝 놀라 허둥대며 설탕물을 대접하고 의사를 부르려 하자 아버 지는 이렇게 조금 누워있으면 괜찮으시다고 하시며 괜히 너희들을 놀 라게 했구나 하며 도리여 미안해 하시였다. 여직껏 자기 살림을 하느라 부모님들을 잘 돌봐드리지 못한 우리 자식들은 아버지가 힘겨워 하는 것을 보자 죄책감에 부모님 앞에서 골을 들 수 없었다. 자식으로서 부 모님들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 들이려고 돈이라도 내놓으면 아버지 수필 부문 247

248 는 아직 너희들의 방조를 받지 않고도 얼마든지 제 힘으로 살수 있다면 서 자식들의 내놓은 돈을 받아쓰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러면서 우리 딸 들에게 시집살이를 잘하라고 천만번 당부하시였다. 늙은이들의 앞날이 아무래도 젊은이들보다 많지 못할 것이기에 시부모님들을 절대 노엽히 지 말라신다.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이 되여 뵈러 가면 그리도 반가와 하시였다. 그리고 떠날 때면 언제 다시 오는가며 자꾸 기다리신다. 아마도 연세가 드시면서 외롭고 사람이 그리운가본다. 강냉이 철이면 풋강냉이를 먹 지 못할 가봐 걱정하시였고 밭에 심은 감자를 햇감자를 맛보라고 보내 주시였고 가을이면 고추를 말리우고 물고기새끼들을 말리워서 자식들 에게 보내주시느라 명심이 대단하시였다. 전에는 부모님 뵈러 갔다가 아침 버스로 떠날 때면 문밖까지 배웅하시던 아버지는 그 번은 마지막 인줄 앓으셨던지 버스 역까지 나오시어서 버스가 떠나는데도 들어가시 지 않으시고 오래오래 서 있으시는 것이였다. 아버지가 불시에 위급하 다기에 만사를 제쳐놓고 두 시간 만에 달려갔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때 는 이미 조용히 눈을 감고 계셨다. 뇌출혈이 와서 링겔을 건채 두 시간 도 안 되시여 자식들도 보지 못하시고 급급히 세상을 떠나시었다. 그때 까지 아버지의 손은 부드러운 그대로였다. 불러도 못 돌아오실 줄 알면 서도 아버지를 부르며 내 기억 속에서 생전 처음으로 눈물범벅이 된 내 얼굴을 아버지의 얼굴에 대고 부벼 보았다. 떠날 준비를 하시였는지 수염도 반반하게 깎으시었다. 아버지, 이렇게 급급히 떠나시다니요. 아 직 자식들의 효성도 받아보시지 못하시고.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 아픈 기억이 새롭다. 장작을 들고 들 248 재외동포 문학의 창

249 어오셔서 지쳐서 구들 모서리에 쭈그리고 누우셨던 그 모습, 버스가 떠 났는데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있으시던 그 모습이 수시로 가슴이 저 리게 떠오른다. 돈 고생보다 마음 고생하기가 더 어렵네라. 그러시면서 이 딸에게 절대적으로 사랑을 선택할 권리를 주시였던 아버지. 이 딸이 그렇게 미더우셨을가. 아니면 그런 도리를 살면서 알게 될 것이라고 믿 으셨을가. 아마도 이 딸이 쓸데없는 속을 태우지 말고 편하게 살 수 있기를 그렇게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닐까! 인생을 살면서 땡볕을 걸을 때처럼 힘겹고 지겹고 답답한 순간들이 많 기도 하다. 그러나 아버지를 따라 나는 그 길을 걸어냈다. 그래서 사는 것이 힘들 때가 많지만 묵묵히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 아버지에게 미안 한 자식이 되지 않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버지가 우리 곁을 떠나셨다. 지금도 내가 어릴 때의 아버지는 자 식에 대하여 자애로우시도 않으시고 자상하시지도 않으시며 그저 무서 운 그런 존재로 떠오른다. 그렇지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다시는 없는 것으로 하여 한없이 슬프기만 하다. 지금 생전이라시면 아 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겠는데. 수필 부문 249

250 한 잔 속에 피어나는 엘도라도 가작 유금란(호주) 한국에서 장기 출장 중인 남편이 이번 휴가 때는 한 잔하자고 한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엇인가 긴하게 할 말이 있다는 표현이다. 언젠가 한잔하자며 잔뜩 분위기 잡고 꺼낸 말이 주식으로 재산을 축냈 다는 고백이었다. 인터넷 전화와 채팅으로 매일 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데 한잔하면서까지 해야 할 그 무엇인가에 신경이 곧추선다. 가족을 해 외에 두고 강남 중심가에 위치한 오피스텔에서 혼자 기거하고 있는 중 년의 사업가. 나의 사고는 한국드라마가 고질적으로 보여주고 있 는 파행적인 부부관계에서 자유로워지지가 않는다. 스무 살 나던 해 가을, 남편으로부터 커피 한 잔하자는 제의를 받아 들인 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의 만남은 결실을 맺었다. 다방문화에서 카 페문화가 들어설 즈음이었다. 그 당시 커피 한 잔 은 데이트를 하자 는 의미였고 술 한 잔 은 좀 더 발전된 관계를 원하는 우회적 표현이 기도 했다. 누군가의 우정 어린 충고나 은밀한 유혹 또한 으레 한 잔에서 출발 했다. 한 잔은 모든 관계형성의 시발점이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여 250 재외동포 문학의 창

251 있던 낯섦이란 강물을 건너게 하는 징검다리였다. 커피 한 잔, 술 한 잔을 핑계 삼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하는 대화는 인색할 수가 없었 다. 오히려 미처 말로 다하지 못한 속내까지 헤아리는 너그러움이 생겼 다. 그러는 가운데 서로에게 길들여졌고 일방적이 아닌 주고받는 관계 가 만들어졌다. 언론자유화로 날마다 새로 생기던 언론사들 덕분에 나도 한때 기자 란 타이틀을 가지고 잡지사 물을 먹은 적이 있다. 잊을 만하면 터지던 사이비 기자들 때문에 명함 내놓기가 민망하던 시절이었다. 일류는 아 니더라도 사이비는 되지 않겠다는 각오와 함께 여의도가 좁고, 충무로 는 답답하다고 여기며 열심히 뛰어 다녔다. 그러나 대가로 받은 월급은 겨우 용돈이나 충당할 정도 가끔씩 나오는 촌지를 보너스라고 합리 화하면서 받아 들고는 삼류라는 자괴감에 시달렸다. 그 알량한 촌지를 받은 날이면 우리는 용산 삼각지에 있는 원조대구 탕 집으로 몰려갔다. 화덕에서 끓고 있는 대구탕 한 냄비를 가운데 두 고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삼류처럼 여겨지던 인생의 허무한 감정들은 부글부글 끓는 냄비 속으로 그냥 녹아 들어갔다. 상사로부터 쓴 소리를 들은 날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술자리를 펼쳤다. 할 소리, 못할 소리 모두 한 잔에 쓸어 담아 목으로 넘기면 그 뿐, 더 이상의 위로가 필요치 않았다. 동료애는 일하는 현장에서보다 뒤풀이 자리에 서 주고받던 그 한 잔에서 싹트고 자랐다. 그래서였는지 열 명 남짓 되던 직원들은 편집회의 때마다 날을 세우며 신경전을 벌였어도 서로 미워하거나 밟고 일어서려고 하지 않았다. 술을 하지 못하는 나조차도 기꺼이 그 분위기를 함께 마시며 어울릴 정도로 그 자리는 따듯했다. 수필 부문 251

252 이민사회, 큰물에서 놀겠다고 왔지만 한국에서보다 더 고립된 생활 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답답할 때가 많다. 인터넷을 통해 들여 다보는 나의 조국 또한 나와는 무관한 삶을 살고 있는 듯해 황망히 들 어갔던 길 되돌아 나오기를 반복하게 된다. 모든 것이 느리게 진행되는 이곳에서의 생활에 젖어서인지, 사고가 이민 오던 당시에 머물러 있어 서인지, 급변하고 있는 고국의 행보를 따라잡기가 나에겐 많이 버겁다. 이곳에서 나의 한국이름 석 자 들먹일 만한 곳은 교회와 문학회 모임뿐 이다. 그래서 인간관계는 아주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 속에서 겪는 일들이 나에겐 사회의 전부이고 온 우주인 셈이다. 일전에 두 모임에서 크고 작은 마찰이 있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소모전을 하는 가운데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서로를 할퀴고 뜯고 하 는 사이에 영혼은 피폐해지고 여기저기에서 피 흘리는 소리가 낭자했 다. 한 번만이라도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했다면 쉽게 풀릴 일들이었 다. 그러나 인터넷 매체를 통한 대화는 오히려 오해와 불신의 벽을 더 두텁게 했다. 한 잔의 위력이 간절했다. 자리를 마련하고 싶은 마음이 야 굴뚝같았지만 술은 금단의 열매가 되는 모임인지라 그저 상한 상처 만 바라보아야 했다.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닐 바에야 해물탕 한 냄비 앞에 놓고 한잔 부딪히다 보면 일그러진 자존심쯤이야 분명히 못이기 는 척 슬쩍 내려놓았을 터인데. 나에겐 한 잔으로 시작된 소중한 인연들이 많다. 그 중에 가장 잊을 수 없는 인연은 스리랑카 할아버지 테드와의 만남이다. 이민 초창기, 구세군교회에서 개설한 이민자를 위한 영어 학교에 다닌 적이 있다. 테 252 재외동포 문학의 창

253 드는 그룹지도를 담당했던 선생님이다.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던 그와 나는 프로그램 중간에 있는 티타임에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정통 영국식 교육을 받고 자란 품위 있는 노신사로, 동서남북도 분간 못하던 나에게 첫 만남에서 티타임에 대한 설명부터 하던 티타임 마니아이기 도 했다. 영국인들이 아주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하는 티타임. 시키코 엘름부 륵 교회 사모였던 질 브리스코는 영국식 티타임은 그들에게 유산의 일 부가 된 아주 특별한 시간이라고 어느 글에선가 회고한 적이 있다. 그녀는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매일 밤 폭격으로 인해 반공호에 웅크리고 앉아 공포의 밤을 보내야 했다. 그때 어머니는 그녀와 언니를 위해 위로의 차를 끓였고 그들은 땅굴 속에서 그것을 나누며 무서운 시간을 극복했다고 한다. 한 잔의 차는 그들에게 교제의 시간을 음미하 게 했으며 무엇인가를 채워 주었고, 할 일을 주었던 특별한 선물이 된 것이다. 그녀는 영국식 티타임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어떤 것 이 아닌 시간 을 주는 옛 전통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 죽었 거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언제든지 한 잔의 티를 마시며 시간을 나누 어 주어 아름다운 관계가 형성 되는 것. 테드는 영국식 티타임을 즐겼다. 곧잘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차를 나 누어주곤 했다. 서로의 집을 오가며 티타임을 갖는 동안 나는 이방 나 라의 문화를 조금씩 알아갔고 언어도 조금씩 늘려갔다. 정갈하게 머리 를 땋아 올린 그의 아내가 만들어 주었던 티는 유난히 향기가 좋았다. 그녀가 끓여주는 차를 마시는 동안에는 낯선 땅에서의 공허함을 무엇 인가로 채울 수 있었다. 그들과 가졌던 티타임은 이민 초기의 불안했던 수필 부문 253

254 나의 마음을 위로하던 의식이었으며, 그와 나누었던 한 잔의 차는 이민 자로서 겪는 애환을 녹이는 관심과 사랑이었다. 까만 피부로 인해 희끗 희끗한 머리카락이 더 돋보이던 테드가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다고 한 다. 워낙 고령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노신사의 품위를 잃지 않고 열성을 다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감사와 미안하다는 말이 숙제처럼 남아 마음을 더욱 아리게 할 뿐이다. 나의 일터인 파라마타 쇼핑센터 후드코트의 아침은 하얗다. 테드가 좋아하던 영국식 티타임을 즐기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네들 때문이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그들의 테이블엔 여지없이 한 잔의 차와 한 조각의 샌드위치가 놓여있다. 찻잔을 쥘 힘조차도 없어 보이는 그들이지만 차 를 앞에 두고 나누는 눈빛과 담소는 정겹기만 하다. 사그라져가는 세월 을 차향에 실어 서로를 위로하며 행복해 한다. 이들에게 한 잔의 티는 함께 나누는 시간이고 관심이고 사랑의 접촉인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사람 관계가 서먹해지면 대화로 풀려고 하지 않고 메 일을 보내 해결하고 있는 나를 본다. 상대방의 뜻과는 상관없이 나의 의중에 더 중점을 두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은행이나 우체국에 가서 내 던 공과금이나 카드결제조차도 인터넷으로 처리하고 있다. 사람을 마 주대하고 대화하는 일은 이래저래 점점 드물어지고 있는 모양새다. 모 임의 공지사항 또한 메일로 주고받으면 그만이다. 이 나라 문화야 워낙 레터로 일을 처리하는 곳이니 이곳에서의 대화매체는 메일이나 우편이 단연 우선이다. 증거가 남고 불필요한 감정이 실리지 않아 합리적이어 254 재외동포 문학의 창

255 서 좋긴 한데 상대방의 속내까지 읽으면서 하던 깊은 대화의 맛을 느낄 수 없어 많이 아쉽다. 상대방의 눈빛을 바라보지 못하는 관계는 허허로울 수밖에 없다. 차 한 잔, 술 한 잔 기울이며 얼굴을 바라보며 나누던 대화, 조금의 실수쯤 이야 말 한 마디 미소 한 번 날리면 눈 녹듯 사라졌던, 그런 관계들이 그립다. 바쁘다는 핑계로 멀어져 간 사람들이 떠올려 본다. 시간을 나누어 주기가 아까워 슬그머니 놓아버린 관계들. 인터넷과 메일이 생활 의 주요 대화 수단이 되면서 얼굴 보기가 요원해진 사람들 할 도리 를 다하지 못해 미안해서 더더욱 연락을 할 수 없는 사람들. 그렇잖아도 내 뜻대로 되지만은 않는 것이 세상이다. 아마존 유역 어디엔가 존재 했다던 황금의 고향인 엘도라도를 찾아왔지만 어디에도 엘도라도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엘로라도를 꿈꾸느라 늘 상대적인 외로움에 허 덕이며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이란 끊임없이 새로운 황금 향을 찾아 떠나는 이민자와 같은 것일 텐데 내 감정과 나의 생활에 몰두하느라 너를 잊고 지내면서 내 안에 있는 진짜 엘도라도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잠시 분주한 일상을 멈추고 잊었던 사람들을 응시한다. 내가 먼저 차 한 잔을 청하고 말문을 열어 외로운 영혼들을 위로하고 싶다. 그 안에 바로 진정한 엘도라도가 있음을 상기하면서. 시드니에 봄바람이 분다. 수필 부문 255

256 이번 봄은 한국에 있는 가을을 만끽하며 보내고 싶다. 이미 소식이 끊겨 찾을 길 없는 친구들도 수소문해 차 한 잔 앞에 놓고 케케묵은 옛 이야기를 들추며 사람 사는 냄새를 기억하련다. 약한 모습 보이기 싫어 남몰래 고달파하는 유난히 자존심 강한 남편과도 한 잔 기울이며 서로를 위로하리라. 누군가 한 잔하자고 다정한 목소리로 청한다면 이 또한 기꺼이 응하리라. 256 재외동포 문학의 창

257 사라져가는 빨래방치 16) 소리 가작 천광일(중국) 봄이라 출렁 해란강 풀리고 마을의 처녀들 빨래를 하네 옥순아 웬 빨래를 그리 깨끗이 빠냐 옳지 알았소 뒷동네 그 총각이 어화라 방치야 지화자 방치야 흥겨웁게 노래하자 빨래방치야 강변의 실버들 멋들어 졌어도 살뜰한 처녀마음 더 아름답네. 비할데 없이 흥겹고 정겨운 우리 민족의 얼이 폭 배인 노래이다. 이 노래는 60년대, 70년대에 연변의 시가지, 시골 마을 곳곳에서 처녀 총 각들이 사랑을 동경 하면서 즐겨 부르던 노래이다. 이곳 연변은 사계절이 분명한 곳이다. 그런 환경의 세례를 받아서인 지 이곳 사람들의 마음가짐도 계절에 따라 변화되는 양상으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이 찾아오니 쌀쌀하던 날씨가 따스해지면서 실외 활동이 방치: 방망이의 평안도 방언 수필 부문 257

258 잦아지는 사람들의 얼굴마다에는 활기 띤 모습들이 어려 있다. 휴식일을 맞아서 한주일간 사업 중에 피로해진 머리를 쉬우면서 시 원한 공기도 마시고 오래도록 일터를 지켜가며 무거워진 몸을 움직이 며 운동도 할 겸 백양나무와 버들나무가 늘어선 강변 제방뚝으로 찾아 갔다. 비록 따스한 늦봄이라고는 하지만 유유히 흐르는 맑은 강물은 아 직은 퍽 찬듯한데 강가에 놓인 넓적한 빨랫돌을 마주하고 한 여인이 빨래 방치를 휘두르며 빨래를 하는 모습이 바라보이는 중에 척, 척, 척 하는 절주있는 방치소리가 귀맛좋게 들려온다. 그림 같은 그 정경을 바라보노라니 고향 마을에 살던 때에 날씨기 따스해지면서 마을 앞 도랑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동네의 아낙네들과 처녀들이 저마다 빨래 함지를 머리에 이고 냇가에 찾아와서는 널찍한 빨랫돌위에 옷견지들을 올려놓고 빨래 방치를 휘두르면서 찬물에 적셔 지는 맨손이 시린 줄도 잊은 듯이 왁자그레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흥겨 웁게 빨래를 하던 정경이 눈앞에 생생히 떠올랐다. 지금은 시가지에 사는 가정들은 두말없고 시골 마을에서 사는 집들 에서도 세탁기를 갖추어놓고 콸콸 흐르는 수돗물을 쓰면서 옷견지는 물론 이불 안팍같은 큰 빨래감도 집에서 마음대로 씻을 수 있으며 또 생활이 많이 펴이면서 예전처럼 판나서 덧기운 묵직한 옷들이 없이 성 한 옷견지들이기에 씻기도 헐하다. 더구나 지금은 세척제, 가루비누, 빨래비누들이 구전하여 부녀들은 힘든 일에서 많은 해탈을 받고 있는 좋은 세월이지만 빨래 방치는 차츰 집구석을 지키는 신세가 되였으며 강가의 빨래 방치소리도 차츰 사라지고 있다. 예전에는 가루비누는 원체 없고 빨래 비누도 귀하여 통장제를 하던 258 재외동포 문학의 창

259 세월인지라 마음대로 쓰지 못하였기에 옷견지들을 씻을 때에는 손으로 부비고 방치로 두드리여서 때물을 빼면서 억지 빨래를 하여야했다. 그 러다보니 집집마다 방치가 있는 것은 물론 어떤 집들에는 여러 개씩 갖추어져 있었다. 낙후하고 가난하게 살던 그 세월에는 이불 하나로 여럿이 덮고 자야 하였고 입는 옷들도 일할 때나 나들이 할 때도 춘하추동 한 벌 옷으로 행세를 하다 보니 판나면 깁고 덧기워 가죽옷마냥 두터웠고 그마저 자 주 갈아입지 못하여 때가 푹 배인 옷들을 씻으려면 참말로 힘들었다. 더욱이나 수돗물까지 없다보니 때시걱에 쓰는 물도 부녀들이 물동이를 이고 드레박 우물물을 힘겹게 길어먹는 형편에 물을 왈랑왈랑 마음대 로 쓸 수 없었기에 아낙네들과 처녀들은 봄이 오면 한 동삼을 내처 입 던 진때가 얼룩진 옷견지들과 뜯은 이불 안팍들을 빨래 함지에 담아서 머리에 이고 강가에 이르러서는 빨랫돌 위에 올려놓고 방치로 자근자 근 두드리고 맑은 물에 헹구고 또 헹구어서 묵은 때를 쭉 빼여 널어 말리우면 진때 묻은 옷견지들은 알뜰한 여성들의 손을 걸치고 나면 둔 갑이나 한 듯이 말쑥하고 깨끗하게 변해진다. 비누가 귀한 그때는 빨래를 할 것이 있으면 어머니는 낡은 버들광주 리를 찾아서는 볏짚을 엷게 한 벌 깔고 그 위에 양사보를 펴고 부엌에 서 파낸 싸리 나뭇재를 좀 두텁게 편 다음 재광주리를 큼직한 토기 물 그릇위에 올려놓고 물을 떠놓으면 노르스름한 재물이 흘러내리는 데 그물에 빨랫감들을 담궈 밤을 재운다. 이튿날 되면 어머니는 할아버지께서 손수 깎아 만든 널찍한 피나무 함지에 빨래 견지들을 담고 빨래방치까지 올려놓은 다음 머리에 이고 수필 부문 259

260 서 나의 손을 이끌고 마을 뒤 오솔길을 걸어 산골짜기에서 졸졸 흘러내 리는 맑고 깨끗한 시냇가에 찾아가서 반듯한 빨래돌 곁에 함지를 내려 놓고는 빨래 견지들을 물에 헹구면서 돌 판에 올려놓고 방치질을 하면 척, 척, 척 소리가 절주 있게 들려오는데 어머니의 빨래를 하는 모 습에 그 소리는 아름다운 멜로디로 들려왔다. 어머니는 차디찬 시냇물에 맨손이 벌겋게 되여도 아랑곳하지 않고 깨끗이 씻어진 이불안을 물을 꽉 쥐여 짜서는 앞마당에 매여 있는 빨랫 줄에 널어서 햇빛에 며칠 동안 바래우면 눈가루를 뿌린 듯이 새하야 케 변해 진다. 그러면 어머니는 이불 안팎에 멀건 죽을 쑤어서 만든 풀을 먹여서는 방치돌 위에 올려놓고 툭탁툭탁 쌍방치질하여 자근자근 두드린 다음 헝겊 보에 싸두었다가 이불을 꾸며놓으면 주름살 없이 깨 끗한 이불이 되는데 그 이불을 덮고 잠을 잘 때면 포근하고 잠도 잘 온다. 그토록 어머니는 한평생을 집식구들의 살림에 모든 심혈을 다 바 쳐 우리 여섯 남매를 키우면서 아버지가 정성들여 만든 빨래 방치로 낡은 옷이라도 남의 자식들보다 깨끗이 챙겨 입히고자 모든 정성을 바 쳐오셨다. 내가 시대의 흐름 속에 사라져가는 빨래방치를 그토록 선호하고 고 집하는 데는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굴 닮았는지는 몰라도 늦되는 축이여서 사춘기도 늦게 찾아 왔다 그래서인지 일찍이 셈이 드는 동년배 아이들은 소학교 때부터 얼뜨기 연애를 하노라고 계집애들 뒤를 쫓아다니면서 으시댔지만 나는 초중을 졸업하고 집에 돌아와서 농사일을 하면서부터 늦되기 연애에 눈을 뜨게 되였다. 260 재외동포 문학의 창

261 우리 동네에는 나와 함께 초중을 함께 다니던 나보다 한살위인 분옥 이란 여자애가 있었다. 학교에 다닐 때에는 한 반에 다니면서 때론 한 책상에 앉아서 함께 공부를 하기도 하였는데 그때에는 그저 일개 계집 애로 여겨왔지 그가 고왔던지 미웠던지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러던 것 이 차츰 나이가 들면서 또 한 생산대에서 그들과 일 밭에도 함께 다니 고 회의도 함께 참가하면서 차츰 여자 애들한테 호감을 갖게 되였고 여자애들과 친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면서 처녀애들을 눈여겨 살펴보게 되였는데 올리 보고 내리 봐도 분옥이가 말수가 적고 키도 맞춤하며 동그스름한 얼굴에 쌍겹진 눈으로 사람을 대할 때마다 활짝 피는 해당 화 마냥 웃는 그 모습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로부터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아도 아름다워 보였고 하루만 못 보아도 보고 싶었다. 그러다가도 일을 할 때나 회의 때면 그녀와 정작 가까워지게 되면 저절로 쑥스러워지고 문예선전대에서 함께 노래 와 춤을 연습하고 연출을 할 때에도 그녀의 가까이에 다가설 때면 저절 로 얼굴이 붉어지군 하였다. 그때만 하여도 원체 말수가 적고 활달하지 못한 내성적인 성격의 소 유자였던 나는 사랑의 고백을 마음 한구석에 잠겨두고 안타까운 짝사 랑만을 하였다. 마을 앞 논 물도랑 가에는 커다란 수양버들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해마다 도랑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동네의 아낙네들과 처녀들이 이곳에 찾아와서 옷견지들을 씻곤 하였는데 우리 집과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날도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때시걱이 아직 이르기 에 밭일을 하면서 흙이 묻어 어지러워진 옷을 소래에 담아가지고 물도 수필 부문 261

262 랑으로 찾아갔는데 멀리서 보니 누군가 빨래를 하고 있기에 남자가 빨 래하려 다닌다고 비웃음이라도 살까봐 잠간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여 다가가 보니 마침 분옥이가 빨래를 한창하고 있었는데 나를 보더니 무 척 반색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쑥스러워서 소래를 살그머니 내려놓으면서 빨래를 하니? 응 그래, 너는 여기에 뭘 하려 왔지? 저기, 일하고 돌아와서 시간이 좀 있기에 옷을 좀 씻으려고. 라고 나는 조금 떠듬거리며 대답했다. 그러자 분옥이는 가볍게 웃으며 새파란 젊은 남자가 빨래를 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웃으면 어쩔 라구? 하였다. 나는 그 말에 웬간이 반발심이 생겨나며 쳇 남자들은 왜서 못 한다더냐. 하며 팔을 거두고 옷견지를 도랑물에 적시였다. 그러지 말고 내가 씻어줄게 그저 구경이나 하려무나. 라고 하며 분옥이는 소래를 자기 앞으로 당겨가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 당황하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하여 이럼 미안해서 어쩌 지? 라고 하니, 미안하긴 뭘 동생의 옷을 누나가 씻어주는 것이 응당한 일이지. 나는 그의 허물없이 하는 대답에서 저도 모르게 담이 커지면서 그래도 처녀가 동네 총각의 빨래를 해준다고 놀려주면 어쩌려고. 그녀는 내가 마음에 내켜 하는데 남이야 무어라든 무슨 대수냐 라 262 재외동포 문학의 창

263 고 약간 수줍어하는 표정으로 대꾸하는 것이었다. 나는 제꺽 네가 한평생을 나의 빨래를 해주면 얼마나 좋겠니. 라고 하였더니 분옥이는 홍조가 어린 새무룩이 웃음 띤 얼굴로 말없이 나를 흘겨보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날 날이 어두워지는 줄도 모르고 분옥이가 빨래를 마칠 때 까지 빨래터에서 많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분옥이는 동생 여럿이다보니 자주 빨래하려 다녔는데 그날의 만남이 있은 후부터 나는 일터에서 하루 일을 마치고 아무리 피곤하여도 또 날이 저물어도 그 빨래방치소리가 들리면 모든 피로가 말끔히 사라진 듯이 어김없이 빨래터를 찾아가서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우리는 이렇게 사랑의 싹을 틔워가면서 일터에서, 회의모임에서 만나면 반갑고 헤여 지면 그리워하면서 우리들의 사랑노래 엮어갔다. 풍운조화는 가늠하기 어렵듯이 사람일도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분옥이는 친척의 소개와 부모들의 주장으로 시가지의 노동자한테로 시 집을 가게 되였다. 그날 신랑과 함께 길 떠나는 그녀를 바라보는 나는 사랑을 지키지 못한 무능한 자신을 통탄하였으며 노동자와 농민을 차별시한 세상을 저주하였으며 시골 농부의 신세를 한탄하였다. 그 뒤로 내가 사회에 진출하고 시가지 처녀와 결혼을 하여 시내에 와서 새 살림을 꾸리게 되였는데 어머니는 우리에게 빨래방치 하나를 넘겨주면서 항상 부지런하고 깨끗이 옷견지들을 씻어 입으면서 참답게 살라고 부탁 하셨다. 우리는 그 방치로 옷견지들을 씻으면서 두 아이를 자래웠고 셋집에서 단칸집으로 단칸집에서 아파트로 옮겨 살면서 그 수필 부문 263

264 방치는 언제나 잊지 않았는데 비록 다슬고 또 다슬었지만 화장실 구석 에 놓여있는 그 방치를 볼 때면 어머님이 집안 어디엔가 계시는듯한 친절한 느낌이 갈마든다. 내가 고향을 떠나서 30년이 훨씬 넘은 지금 고향마을을 찾아가 보 면 도랑 옆 수양버들은 온데간데없고 옛 빨래터도 황폐해지는 마을의 사연을 하소연하듯이 풀만 자라서 그토록 정겨웁던 빨래방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글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발전하는 사회 변혁으로 빨래방치 소리가 사라지는 것이 불가피한 일이겠지만 그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단란하게 모여 살던 조선족 마을들에서 너도나도 외국으로, 내지로 돈벌이를 떠 나고 시내로 진출하면서 마을에는 처녀라야 금싸락같이 귀하고 그나마 인간 동네를 생기 넘치게 이끌어 주던 적지 않은 아낙네들마저도 돈벌 이를 떠났으며 바자굽을 오가면서 아래윗집 문전 나들이를 하며 조금 이나마 동네에 생기를 안겨주던 할매들마저도 자식 따라 시내에 옮겨 살다보니 동네 골목에 뜸하게 보이는 사람들이라야 삶의 희망을 저버 리고 인생을 하느님께 맡겨 허송세월을 살아가는 덜먹 총각들과 친인 들을 타향에 떠나보내고 매일마다 불쌍한 술로 허황한 가슴을 달래는 남정들만이 하늘을 쳐다보며 울바자굽만 지키고 있는 식어가는 동네에 그 누가 빨래방치를 휘두르겠는가? 그래도 나는 고향을 다녀올 때 마다 옛 빨래터를 바라보노라니 기억 속의 옛일들이 떠오르며 마음 한 구석에 잠겨있던 처녀의 빨래방치 소 리가 아름다운 멜로디로 귀전에 울려오면서 언젠가는 고향 마을에 또 다시 정다운 빨래방치 소리가 울릴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264 재외동포 문학의 창

265 프리데리케의 아이 가작 천복자(독일) 내가 사귄 첫 독일 친구는 지그프리드 Siegfried와 프리데리케 Friederike다. 처음 독일에 와서 어학 코스를 다닐 때의 일이다. 하루는 자료를 찾기 위해 도서관에 갔다. 컴퓨터로 자료를 찾는 방법을 몰라서 망설이고 있는데, 마침 컴퓨터로 자료 찾기를 마친 어떤 남자가 막 일 어서고 있었다. 얼굴의 반은 길지 않은 수염으로 덮여 있는데, 착하게 생겼다. 용기를 내어 좀 도와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찾는 책은 맞은편에 있는 언어학과 도서관에 있다면서 그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 서, 내가 찾는 첫 번째 책이 있는 자리를 알려 주고는, 더 도움이 필요 한지 물었다. 다른 책들은 혼자서 찾을 수 있으며 도와줘서 고맙다고 했더니, 싱긋 웃으며 이 친절한 남자는 가버렸다. 책 찾기에 열중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툭툭 친다. 돌아보니 조금 전의 그 남자가 컴 퓨터로 책 찾는 방법을 가르쳐 줄 거냐고 묻는다. 염치가 없어서 부탁 하지 못한 속마음을 이 착하게 생긴 남자가 읽은 것일까? 컴퓨터 사용 법을 배운 후, 우리는 도서관 아래에 있는 카페테리아로 내려가서 그 남자는 맥주를, 나는 커피를 한 잔 마셨다. 내 주위 한국 친구들이 모두 부러워한 나와 지그프리드, 그리고 그의 아내 프리데리케와의 우정은 수필 부문 265

266 이렇게 시작되었다. 지그프리드는 그 당시 제 2차 국가고시에 합격해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박사과정에 있었다. 법률학과 도서관에 고정석을 받아서 박 사논문 쓰기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마치 회사원이 회사에 출퇴근하듯 매일 아침 8시에 도서관에 나와서 오후 5시가 되면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오후의 시간은 그의 아내와 함께 보낸다고 했다. 처음에는 박사 논문을 쓴다는 사람이 어떻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하지 않고, 마치 회사원이 직장을 나가듯이 공부를 하는 것일까 하고 이상스럽게 생각 했는데, 들쭉날쭉한 나의 공부하는 시간과 늘 고정적인 그의 공부 시간 을 계산해 보니, 그가 공부에 투자하는 시간이 나와는 비교가 안 되게 많은 것이었다. 나의 오전 4 시간의 어학 코스가 끝나는 시간이면 지그 프리트도 점심을 먹는 시간이어서, 우리는 자주 만나 함께 식사를 하거 나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의 아내 프리데리케는 김나지움을 졸업한 뒤 금세공사 Goldschmied가 되기 위한 견습공 과정에 있었다. 아버지가 의사인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그 애의 꿈은 요리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리사는 가정과 양립하기에는 힘든 직업이어서, 손으로 두드리고 만 드는 것을 좋아하는 그 애의 취미를 쫓아서 금세공사 공부를 시작했다 고 한다. 기계로 대량 생산되는 장식품에 밀려서 전처럼 호황을 누리지 는 못하지만, 값비싼 귀금속은 여전히 금세공사의 손으로 만들어진다 고 한다. 졸업 작품으로 그 애는 철사 줄처럼 동그란 은테에 여러 가지 보석을 박은 특이한 모양의 목걸이와 귀걸이 한 쌍을 완성했는데, 이 모든 과정을 손으로 만드느라, 덩치가 큰데 비해 작고 섬세한 프리데리 266 재외동포 문학의 창

267 케의 손은 언제나 꾀죄죄했다. 이들 부부를 통해 나는 낯선 환경을 극 복하고 외국 생활에 비교적 쉽게 적응해 갔을 뿐만 아니라, 독일 사회 를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서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이들 부모는 빌레펠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소도시에 사는데, 프리데 리케의 아버지는 은퇴한 의사고, 어머니는 간호사이었는데 결혼 후 일 하는 것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들은 먼지 하나 없이 잘 닦여진, 맨 위층의 지붕 아래에는 넓은 파티 홀까지 갖춘 멋진 집에서 살고 있었 다. 나는 그때까지 이렇게 멋진 집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프리드리 케가 집을 구경시켜주는 동안 놀란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프리데 리케의 어머니는 집에서도 옷에 구두의 색깔까지 맞추어서 차려입는 전형적인 도시풍의 부인이었는데, 점심식탁에 올랐던 가늘게 채 썬 산 뜻하고 정열적인 황색 당근사라다의 새콤달콤한 맛은 지금도 입에 침 이 고이게 한다. 지그프리트의 부모는 그와는 반대로 따뜻하고 푸근한 인상을 풍기는 촌사람들이다. 이들 부부는 아들 5 형제에 막내로 고명딸을 두었는데, 막내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결혼해서 대부분이 부모의 집에서 km 근방에 살면서 자주 왕래한다고 한다. 모임이 있을 때면 온 집안이 떠나가게 시끌벅적 각자 자기주장을 하며 다투다가도, 바깥에 문제가 있을 때면 모두가 하나로 똘똘 뭉친다고 프리데리케가 말했다. 차를 타 고 도시 입구에 들어서면 길게 이어진 담장에 S T R A U T M A N N이라고 쓰인 건물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지그프리트의 아버지가 맏아 들 볼프강 Wolfgang과 함께 경영하는 농기구 회사명이자, 이들의 가족 의 성씨이다. 최근에 이들이 만드는 신제품은 젖소 마사지 기계 라고 수필 부문 267

268 한다. 풀을 많이 먹은 젖소들이 올록볼록한 점이 있는 큰 기계에 가서 잔잔한 음악을 들으면서 등을 비벼대면, 기분이 좋아진 젖소가 우유를 더 많이 내놓는다고, 지그프리트의 아버지가 웃으면서 설명했다. 환갑 을 갓 넘겼을 이 얼굴이 붉고 건장한 할아버지는, 나와 마주한 짧은 시간에 동양과 한국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을 해서, 나는 그의 왕성한 탐구욕에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1년이 지나 지그프리트의 박사과정과 프리데리케는 금세공 사 견습과정이 끝나, 이들 부부는 빌레펠트를 떠났다. 지그프리트는 그 의 아버지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자그마한 휴양도시인 받 이부륵 Bad Iburg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자동차가 없는 나는, 하루에 두 번 운행되는 그곳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끔 이들 부부를 만나러 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동차를 가진 탓인지 객실이 두 개 밖에 없는데도 기차 안은 텅 비어있어서, 마치 내 전용기차를 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차창 밖으로 푸르게 펼쳐진 밭들을 따라 눈을 주다보면 산꼭대기에 성 이 하나 나타나는데, 이것이 라벤스부륵 Ravensburg이다. 옛날에 이곳 의 영주에게 딸이 셋 있었다고 한다. 영주는 세 딸들에게 근처에 각각 성을 하나씩 지어주었는데, 이 성들은 세 딸의 이름을 따서 테클라의 Teckla 테클렌부륵 Teklenburg, 이다의 Ida 이부륵 Iburg, 라벤다의 Ravenda 라벤스부륵 Ravensburg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다. 라벤스부륵은 지금은 성만 산꼭대기에 남아있지만, 테클렌부륵과 이 부륵은 중세도시의 유산을 간직한 아름다운 관광도시이자 휴양도시로 발전했다. 특히 빌레펠트를 중심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펼쳐져있 는 토이토부르거 봘트가 Teutoburger Wald (튜톤족이 살던 숲이라는 268 재외동포 문학의 창

269 뜻) 정점을 이루는 테클륵은 높은 산꼭대기 마을에서 주위의 넓은 들판 을 내려다보는 풍광이 빼어나고, 가을 햇빛 속에서 나뭇잎들이 황금빛 으로 반짝이기 시작하면 마치 마술사가 금가루를 뿌린 동화 속의 마을 처럼 아름다워서, 저지대의 네덜란드 인을 비롯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곳에는 세계인형박물관, 여름철에 연극을 상연하는 야외극장, 중세의 암흑시대에는 마녀라 간주된 여자들을 가두어 두었 다가 화형에 처했다는 마녀탑도 있다. 이부륵에는 시계의 발전사를 한 눈에 보여주는 시계박물관이 있는데, 정시가 되면 뻐꾸기시계를 비롯 한 온갖 시계들이 있는 대로 각각 제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한다. 지그 프리트는 이곳 이부륵에다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지그프리트의 변호사 일이 어느 정도 괘도에 접어들자 프리드리케는 임신을 했고, 검소한 그 애의 성격대로 몇 달을 청으로 된 멜빵 임신복 하나로 버티더니 건강한 남자아이를 낳았다. 그래도 뜸하게나마 왕래 가 계속되었는데, 한동안 그 애로부터 소식이 뚝 끊어졌다. 마침 성탄 절도 가까워 오고해서, 그해 여름 석사과정 논문을 쓰면서 머리 식히기 로 시작해 본 비단에 그림그리기 Seidenmalen 를 해서 큰 사각 마후라 를 보냈다. 곧 프리데리케로부터 답장이 왔는데, 놀라운 내용이 담겨있 었다. 그 동안 둘째 아이가 태어났는데, 아이가 정상아가 아니란다. 아 이는 소위 몽고병자 Mongoloid 라 불리는 병을 가지고 태어났다한다. 이 병은 학문적인 용어로는 트리조미 Trisomie 21 이라 하며, 이는 부 모의 유전자중 21 번 염색체 이상으로 생긴다. 이 병을 갖고 태어난 아이는 보통 지능이 낮은 저능아로 정상인으로 성장하기 어려우며 키 가 작고, 얼굴과 특히 눈매가 동양인처럼 가는 모양을 하고 있어 흔히 수필 부문 269

270 들 몽고병자 라 불린다. 대개 나이가 30 세 이상의 산모에게서 이 유전 병을 가진 아이가 태어날 확률이 높다하여, 자기는 단 한순간도 그런 가능성에 대한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단다. 프리데리케는 건강해서 아 이를 낳고 곧 돌아다닐 수 있었는데, 간호사가 아기를 데려왔을 때 그 애는, 아니야! 이건 내 아기가 아니야! 하고 소리쳤단다. 남자아기 인형을 사 가지고 프리데리케를 만나러갔다. 그 애는 그 사이 출산 때의 충격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듯, 다시 씩씩한 얼굴을 하고는 열심히 두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우리가 갔을 때 프리데리케는 이제 3 개월이 된 아이의 온 몸을 은박지로 싸고는 주무르면서, 아이에 게 마사지를 하고 있었다. 정상아는 몸의 감각이 저절로 자라나지만, 이 병을 가진 아이는 이렇게 외부적인 접촉을 통해서 감각을 일일이 일깨워줘야 한단다. 일주일에 두 번씩 전문가의 지도에 따라 마사지를 하며, 집에서는 매일 마사지를 하는데, 노력을 많이 기울이면 보통아이 들이 다니는 학교에도 보낼 수 있고 거의 정상아로 키울 수 있다며 프 리데리케는 희망찬 얼굴을 했다. 벽에는 나를 몽고병자라고 부르지 마 세요! 내 이름은 프레데릭Frederick 이랍니다. 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붙여져 있었다. 그 다음 해 여름 그 아이를 방문했을 때, 프리데리케는 집을 짓느라 고 바빴다. 여기는 거실, 여기는 부엌, 여기는 아이들 놀이 방. 이 곳저곳을 보여준 다음 그 애가 말했다. 지붕아래 3 층은 그냥 공간을 남겨 두는데, 이는 프레데릭을 위한 것이란다. 그 애가 자라서 성인이 되었을 때 부모와 함께 살기를 원하면 지붕 밑에 그 애만의 공간을 꾸 밀 것이고, 그 애가 자기와 같은 병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기를 270 재외동포 문학의 창

271 원하면, 집 앞에 함께 마련해둔 공터에 정부의 보조를 받아서 이 병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생활할 수 있는 복지시설을 지을 거란다. 그러면서 그사이 네 살이 된 큰 애가 자기 동생을 얼마나 예뻐하고 잘 보살피는 지를 열심히 자랑한다. 아이를 돌보려면 육체적으로 몹시 힘이 들 터인 데도, 장애아를 두었다며 난처해하거나 그늘진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 다. 그냥 보통의 아주 행복한 가정이다. 독일에서는 장애인이나 지체부자유자를 길거리에서 드물지 않게 만 난다. 이는 이들이 한국과는 달리 숨어살지 않고, 가정과 사회에서 자 기자리를 가지고 살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는 장애인들도 정 상인처럼 살 수 있도록 국가가 각종 복지시설이나 장애인 고용법 등의 정책적인 지원을 하기도 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장애인과 일반인들 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이다. 이들은 당당하다. 보통 사람들 역시 무언가 도와 줄 일이 있는가를 물어보지, 피하고 적 대시하거나, 거리감이나 멸시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대 부분의 장애인들은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가족과 사회의 일 원으로서 비교적 안정된 삶을 누린다. 내가 독일에서 개인적으로 처음 알게 된 장애인은 안겔리카 Angelika다. 보통 겔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지금은 벌써 30세가 다 된 여자인데, 트리조미 21번 장애인이다. 처음 독일에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나는 어학코스의 선생님을 통하여 한 독일가정을 소 개받았다. 아저씨는 대학의 행정업무를 담당하고 아주머니는 우리나라 의 중학교 격인 하웊트슐레의 Hauptschule 영어 선생님인데, 대학에 서 미술을 전공하는 아들과 김나지움에 다니는 쌍둥이 딸이 있었다. 이 수필 부문 271

272 들 부부 카를로스 Carlos와 바바라 Barbara는 따뜻하고 교양이 깊으 며, 다른 문화에 대해 개방적이고 관심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다. 우리 는 만나면 늘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 밤 한 두 시가 되어서야 아쉽게 헤어지고는 했다. 이들은 천장이 높다래서 박물관 같은 느낌을 주는 로 마 풍의 넓고 오래된 집에, 많은 독일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세를 산다. 남편을 만나게 되기까지 그 후 몇 년을 독일인들의 가장 큰 명절이자 가족명절인 크리스마스 때마다, 나는 가족의 일원으로서 초대받아 이 들 가족과 성탄전야를 함께 보냈다. 그런데 그 성탄모임에 나보다 더 오래 전부터 항상 초대되는 사람들 이 있었는데, 이는 바바라 아주머니의 가장 친한 친구인 에다 Edda 아 주머니와 그녀의 아들 볼프강, 그리고 그녀의 딸 안겔리카다. 에다 아 주머니는 초등학교의 음악과 종교 선생님이다. 남편은 이름 있는 지휘 자인데, 젊은 소프라노 가수와 눈이 맞아 아줌마와 아이들을 떠나갔다 한다. 에다 아주머니의 얼굴은 항상 밝고 다정한 미소로 빛나고, 그녀 의 눈길은 깊고 잔잔하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천사가 있다면 바로 저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바깥에서 보기에는 불 행의 조건을 많이 가진 이 여인의 얼굴이, 이렇게 꾸미지 않은 온화함 으로 빛나는 것이 처음에 내게는 커다란 의문이었다. 그러나 안겔리카 를 조금 더 알게 되면서, 나는 나름대로의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아마 항상 어린아이 같은 장애인 딸을, 늘 웃음과 사랑으로 대하는 엄 마의 태도가 그대로 그녀의 행동양식이 된데서 연유하는 것일 거라는. 소위 저능아라 불리는 사람들의 모습과 태도에는 인간의 때 묻지 않은 원초적인 순수함이 그대로 배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를 띠지 272 재외동포 문학의 창

273 않을 수 없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에다 아줌마의 미소는, 매일 이 천 상의 비밀을 조금씩 엿보는 혜택을 누리는 사람의 모습일까? 이 후펜딕씨네 가족과 처음으로 보낸 성탄 모임에서, 나는 안겔리카 를 만났다. 그 때 사춘기의 나이에 접어든 안겔리카는, 모두의 사랑 어 린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이리저리 뛰어 다니기도 하고, 음식을 먹 는가하면 그 날 받은 선물들을 만져보기도 하면서, 재미있게 놀았다. 시간이 꽤 흘러서 아저씨가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안겔리카 가 피리를 들고 나와서는 카를로스, 카를로스 우리 합주하자. 한다. 우리는 피아노 주위를 빙 둘러섰다. 안겔리카가 피리를 입에 물고 비스 듬히 서서 Hänchen klein ging allein (나비야 나비야)를 불기 시작한 다. 그 애의 연주는 높낮이는 없고, 장단만 있다. 그러나 후펜딕 아저씨 는 안겔리카의 높낮이가 없는 피리 연주를, 마치 시대의 명연주가를 반 주하듯이 때로는 여리게, 때로는 힘차게 따른다. 둘러선 우리들은 짝짝 짝 박수를 하고, 안겔리카는 으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답례한다.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내 눈앞에 환하게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21세가 되었을 때 안겔리카는 에다를 떠나 가까이 있는 복지시설에 들어갔다. 안겔리카는 자기와 비슷한 신체적, 정신적 어려움을 가진 사 람들과 생활하게 되었는데, 아주 만족해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 한다고 했다. 에다 아주머니는 안겔리카의 방을 그대로 두어서, 그 애 가 원하면 언제든지 주말은 집에서 지내다 간단다. 이번 여름 후펜딕 아저씨의 생일파티에서 만난 아주머니는, 안겔리카가 얼마 전 가벼운 심장발작을 일으켰다는 슬픈 소식을 전해주었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 수필 부문 273

274 게 되어 그 동안 살던 2 층에서 아래층으로 이사했으나, 활발한 그 애 의 성격대로 곧 새 그룹에 적응했을 뿐 아니라, 그 곳 동료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고 한다. 네가 그 애에게 사랑을 많이 주어서 길렀기 때문에 안겔리카가 그렇게 여러 사람에게 친절하고 사랑 받는가 보다 고 했더니, 에다 아주머니는 그게 아니라 안겔리카는 정말로 아주 특 별한 아이 라며 예의 그 천사 같은 미소를 짓는다. 얼마 전 남편 동료의 생일파티에 갔을 때다. 집안을 들어서는데 유 독 활발하게 웃고 떠들며 이야기하고 있는 한 남자가 내 눈에 들어왔 다. 짧고 뭉툭한 모양의 제대로 자라지 않은 손이 어깨에 붙어있다. 임 신부의 약물사용 부작용으로 기형아가 된 경우이다. 1960년 초 독일에 서는 콘타간 Contergan 이라는 수면제를 임신기간 중에 복용한 많은 산모들이, 기형아를 출산했다. 지금 나이가 40대 중반에 접어든 이 장 애인들은 대부분 팔이 없이 기형의 손이 어깨에 붙어 있거나 발이 기형 이다. 나는 저녁 내내 올라프 Olaf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는 폭포수가 흐르듯 거침없이 자기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수학과 역사 를 전공했고, 지금은 교수의 조수로 컴퓨터로 프로그래밍 하는 일을 주 로 하며, 박사과정에 있단다. 유럽 공동체가 (EG) 지원하는 학술부문 에 프로젝트를 신청했는데 아마도 곧 허락이 날 것 같으며, 그러면 자 기가 살고 있는 뮌스터 Münster를 하나의 예로 전자통신망을 통한 자 발적인 시민단체의 발달을 조사할 거라고 한다. 여자 친구를 대동하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면, 기형아로써의 그늘 같은 것은 어느 구석에서 도 찾아 볼 수 없다. 토마스 크봐스토프 Thomas Quastoff라는 성악가가 있다. 슈베르트 274 재외동포 문학의 창

275 의 겨울 나그네를 열창하는 이 남자의 얼굴은 아름답다. 그러나 카메라 가 무대 전체를 조명하면, 우리는 보통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그의 모 습을 보게 된다. 미소년을 연상하게 하는 얼굴을 지나 시선을 아래로 하면, 10 cm도 안 되는 아주 짧은 팔이 보이고, 팔 길이에 맞추어 재단 한 양쪽 옷소매 밖으로 유난히 길게 뻗어 나온 가운데 손가락 세 개가 보인다. 키는 보통 사람들의 절반 정도 밖에 못 미친다. 양쪽 다리의 길이가 다른 까닭에 걸음 또한 매우 불안정하다. 40 대 중반의 이 성악 가 역시 콘타간 약물 부작용으로 기형아가 된 경우이다. 그의 부모는, 이미 그가 어릴 때 성악에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고, 성 악가로 키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러나 토마스가 25 년 전에 하노버 Hannover 음악대학에 입학하고자 했을 때, 연주하는 악기가 없다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했다고 한다. 데트몰트 Detmold 음악학교를 졸업한 이 성악가는, 기다란 여섯 개의 손가락으로 피아노 를 연주해 보여준다. 신체가 불구라는 가혹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항상 대중을 앞에 서야하는 성악가로써 직업을 가지고 자기 인생을 당당하 게 걸어가는 이 남자의 모습은, 작은 일에도 좌절하곤 하는 우리 보통 사람들을 숙연하게 한다. 가끔 TV에서 장애인에 대한 실제적인 고용 차별을 정부가 더욱 적 극적으로 막으라 는 장애인들의 시위를 보면, 법적인 동등권의 보장에 도 불구하고, 이곳의 장애인들 역시 실제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 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는 해도, 이곳의 장애인들의 삶은 한국의 장애인 들의 삶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듯하다. 한국의 장애인들이 사회적 차별 의 차가운 시선 때문에 여전히 가족들의 보호의 울타리 아래서 자신이 수필 부문 275

276 원하는 형태의 사회적인 삶의 기회를 포기하고 있는데 비해, 독일의 장 애인들은 비교적 사회 속에서 제자리를 찾아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주 장하며 산다. 국가는 가능한 한 이들이 보통사람들과 다름없는 삶을 영 위할 수 있도록 여러 형태로 지원을 한다. 장애자 복지시설, 휠체어를 이용할 수 있는 공공건물의 장애인용 출입구, 모든 주차장의 가장 편리 한 위치에 장애자용 주차공간의 설치. 그러나 이 외적인 조건에 앞서, 신체적인 결함이 있는 사람들에게 멸시의 눈길을 보내지 않는 보 통 독일 사람들의 의식이, 이들의 삶이 그늘 속에서 숨어살지 않도록 도와주는 가장 큰 요인인 것 같다. 여러 가지 신체적인 제약으로 인해, 보통사람이 영위하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개인적인 노 력과 인내가 요구되기에, 이들에게 더 많은 도움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결론이 아닌가. 그날 저녁 올라프는 자기는 다리에도 결함이 있어서 뼈를 보조하는 쇠를 갈아 넣는 수술을 다시 해야 한다며 웃었다. 얼마 전 알록달록 밝고 환상적인 색깔의 어린이, 청소년의 옷을 많이 생산하는 이탈리아의 베네통 Benetton 이라는 회사가 옷을 선전하는 플래카드에 트리조미 21 을 가진 여자아이를 모델로 삼아 화제가 되 었다. 이 회사는 전에도 유고 내전의 한 장면, 또는 기아와 전쟁을 피해 서 이탈리아에 배를 타고 밀입국한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기나라로 되 돌려 보내지는 광경 등을 선전 포스트로 사용해서, 여론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이번에도 기형적인 것을 이용해서 시선을 끌려고 하는 파렴치 한 상술의 일환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과, 왜 잘 생긴 사람들만 모델이 되어야 하는가, 트리조미 21 을 가진 사람들도 모델이 될 권리가 있으 276 재외동포 문학의 창

277 며, 자기와 다른 것은 구분 지으려는 사람들의 의식이야말로 비민주적이 며 구시대적이다, 트리조미 21 을 가진 여자애가 방울모자를 쓰고 웃는 모습이 정말 귀엽지 않은가? 하고 반론하는 사람들로 의견은 양분된다. 화제의 주인공인 카타리나의 Katharina 어머니는 카타리나가 사진을 찍는 작업과정을 아주 즐겼다고 전해준다. 카타리나는 사람들의 중심 에 서는 걸 좋아하죠. 그 애는 성격이 활달해서,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 에게 집중되는 것을 아주 즐긴답니다. 녹색 윗도리를 입고 빨간 모자 를 썼어요. 청색 외투도 입구요. 카타리나가 TV에서 자랑스럽게 말한 다. 왜 모양이 조금 다르게 생겼다고 해서, 우리는 어디에나 정상인, 비정상인의 잣대를 들이대는가! - 나를 몽고병자라고 부르지 마세요. 내 이름은 카타리나랍니다. - 수필 부문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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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 중고등 대상 우수상 부문 당신의 은신처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는 엄마, 엄마를 위하여_송진아(뉴질랜드) 노 새_박연희(미국) 강은 그에게 무엇이었을까_윤영(중국) 행 복_최송지(피지) 장려상 따뜻한 사람들이 사는 곳_김가영(우즈베키스탄)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_김고자(일본) 이중국적자의 딜레마 (International Grey Spot)_김호연(미국) 우리는 사춘기!_문정희(베트남) 나의 친구 첼로에게_이수정(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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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 당신의 은신처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는 엄마, 엄마를 위하여 대상 송진아(뉴질랜드) 학교에서 데드라인이 얼마 남지 않은 미디어 과제 때문에 오후 5시 쯤 집에 들어간 날이었습니다. 평소보다 늦은 하교 시간이었기 때문에 엄마에게도 늦는다고는 미리 말해 두긴 했지만, 나는 혹시 엄마가 화가 나있나 하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집에 도착해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엄 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기분이 상하거나 안 좋 은 일이 있을 때면 항상 아무 말 없이 모습을 감추고 혼자 시간을 보냈 는데, 그때처럼 엄마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동생들에게 엄마의 행방을 물어보아도 모른다고 합니다. 혹시 엄마 화났니 하고 물 어보자 아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고 했습니다. 그럼 집안에 무슨 일 이 생겼나, 하고 혹시 누구한테 전화 왔었니 하고 물었더니 그것도 아니랍 니다. 슬슬 걱정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그럴 리 없지만, 엄마 가 집을 나가신 게 아닐까? 차와 차 키, 그리고 엄마 신발도 확인 해 보았습니다. 그대로입니다. 집안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엄마를 찾다가 문득 엄마의 은신처 생각이 났습니다. 늘 엄마가 무슨 일이 있을 때마 다 들어가 숨어 버리는 장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찾기 힘든 장소 중고등 부문 281

282 는 아니었습니다. 부엌에 딸려 있는 조그만 문을 열기만 하면 바로 보 이는 장소였습니다. 세탁실과 부엌 문 사이, 뒷마당으로 통하는 조그만 공간이 하나 있는데, 엄마는 늘 그곳에 쭈그리고 앉아 울거나, 가만히 앉아 계시곤 했습니다. 엄마만의 시간을 보내기엔 완벽한 장소라는 것 은 나도 동의합니다. 엄마가 늘 일하는 부엌과 가깝고, 우리들의 출입 이 적으며, 문만 닫으면 내부와 격리 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엄마 가 그곳을 찾을 때는, 우리 집안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라는 뜻이라 는 겁니다. 아무튼 그곳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빠르게 부엌 쪽으로 가 문을 벌컥 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열자마자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습니다. 차가운 바깥 기온이 마치 문어가 여덟 개의 발로 먹이를 감싸 듯 내 몸을 감쌌습니다. 언제부터 여기에 계셨던 것일까요. 이렇 듯 엄마의 은신처는 추운 날 보온이 안 된다는 단점이 있기 때문에 늘 겨울에 엄마가 이곳에 나올 때면 나를 걱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춥거나 비바람 치는 날 아빠와 다툴 때면 특히나 더 걱정이 됩니다. 그런 날엔 엄마가 따끈따끈한 전기장판 이 깔린 침대나 안방 같은 곳에 가면 얼마 나 좋을까하는 은근한 내 마음과는 달리, 엄만 차가운 벽돌 바닥에 달 랑 종이 한 장 깔아 놓고 앉아 계셨습니다. 내가 문을 열었던 쪽과 등을 지고 앉아 계셨기 때문에, 나는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때문 에 엄마가 화난 얼굴을 하고 있는 지 걱정하는 표정 혹은 슬픈 표정 인지를 확인하려면 엄마가 몸을 돌려 나를 보게 하거나, 내가 엄마 앞 으로 가는 방법 이 두 가지였습니다. 나는 일단 첫 번째 방법을 택했습 니다. 엄마! 282 재외동포 문학의 창

283 대답이 없었습니다. 이번엔 엄마를 툭툭 치며 물었습니다. 엄마 여기서 뭐해. 역시나 묵묵부답. 꿈쩍도 하시지 않습니다. 결국 나는 마지막 방법 을 택하기로 결정 했습니다. 엄마의 몸으로 꽉 찬 공간에 기어이 발을 들여 놓고, 그 좁은 틈을 낑낑거리며 들어가 엄마 앞으로 갔습니다. 엄 마의 앞모습이 보이자마자 가장 먼저 엄마의 얼굴을 확인 했습니다. 그 러나 엄마의 얼굴은, 내가 바로 앞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땅을 바라보 고 있었습니다. 엄마 진짜 뭐 하는 거야. 엄마! 아무 말 없는 엄마가 걱정이 되어서 엄마를 막 흔들며 부르다가, 엄 마의 공손히 모아진 두 손이 보였습니다. 몸을 굽혀 엄마의 얼굴을 올 려다보자, 엄마의 감긴 두 눈이 보였습니다. 아, 엄마는 기도 중 이었습 니다. 그래서 그토록 대답이 없었구나. 나는 한발 짝 물러나 엄마를 보 았습니다. 역시나, 기도하는 포즈 였습니다. 걱정이 앞서서 그 모습이 뒤늦게 보인 것 이었습니다. 별일이 없다는 것을 확인을 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집에 들어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나의 눈에 보인 또 다른 무언가가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것은 그 자리에 나를 못 박아 버렸습니 다. 고개 숙인 엄마의 머리 위에 어제보다 하얘진 엄마의 머리카락들이 요. 엄마의 검은 색 머리 위에 정말 말 그대로 파 뿌리 처럼 길게 내려 온 흰머리 한 움큼 이 내 두 눈을 땔 수 없게 했습니다. 정말 우리 엄마 가 맞는 것인지, 늘 앞머리 넘길 때만 보이던 흰색 머리카락 들이 이제 는 들추지 않아도 너무 빤히 보이는 것입니다. 도대체 언제 그렇게 말 중고등 부문 283

284 없이 자란 건지 우리에게 어쩜 그렇게 경고도 없이 길게 자랄 수 있는 것인지. 그 머리 한 움큼이 자꾸만 내 가슴을 때립니다. 뉴질랜드에 와 있는 동안 수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또 영어라는 커다란 장벽과 외로움 이라는 것이 엄마를 얼마나 괴롭혔을지 힘들어 하는 엄마의 모습들이 슬며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동안 내 할 일에만 바빠 외면하고 있었 던 엄마의 모습들이요. 그 흰 머리는 엄마가 혼자서 그들과 싸우는 동 안 하얗게 물들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와중에서도 아빠, 나, 그리 고 동생들 위해 지금 이 모습처럼 얼마나 공들여 기도하였던가요. 지금 처럼 저 거친 두 손을 모으고 차가운 벽돌 위에 앉아 밥을 굶어 가며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던가요. 그러면서 생긴 흰 머리 때문에, 그리고 늘 쑤시고 아프다던 두 팔과 어느새 주름 잡힌 엄마의 두 손 때문에, 내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엄마의 얼굴엔 내가 태어난 해부터 십칠 년이 흐른 지금까지 동생들과 내가 박아 놓은 주름살이 너무나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가속도가 붙어, 처음의 몇 배 의 속도로 짙어져 버린, 나와 함께 엄마가 살아온 세월의 자국 입니다. 내가 이제껏 이것들을 어떻게 외면하며 버텨왔을까요? 또한 엄마는, 이렇게 이기적인 딸에게, 얘, 너 정말 이기적이야, 이런 말 한마디 없이 늘 내 일만 챙기고 때 쓰던 나를 그토록 챙겨 주었을 까요. 얼마 전 학교 영어 시간에 아버지 사랑 에 대해 에세이를 쓴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사랑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다. 라는 주제로 쓰고 있었는데, 그때 영어 선생님이 나에게 어머니 사랑 은 더욱 훌륭하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씀하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당연히 영어 선생님이 여자이시니까 그렇게 말한 것일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 284 재외동포 문학의 창

285 니까 꼭 그래서 그런 것 같지도, 그 말이 틀린 것 같지도 않습니다. 엄 마도, 내가 그 날 에세이에 거의 주제로 했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에 그의 사랑하는 아들과 아내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위험까지 감수하려했던 조슈아의 아버지처럼 늘 희생하고, 조건 없는 사랑으로 늘 우리를 보살 펴 주시며, 또 기도하고 계셨던 겁니다. 식구들이 함께 모여 기도 하는 날이면 엄마의 기도가 길어서 불평하곤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엄마 자신의 기도보다 늘 우리의 기도가 먼저였고 가장 길 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그때 기도 내용이 늘 놀랍도록 내 상황에 맞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늘 내 말만 할 때도, 아무리 불평하고 짜증을 낼 때도, 자꾸 힘들다고 중얼거릴 때도 그저 엄마는 다 듣고 사소한 것 까지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내 앞에서 당신의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처럼 그때도 그렇게, 하지만 그땐 내가 들을 수 있도록, 소리 내어 기도 했던 것 입니다. 엄마의 은신처에서의 기도 시간은 역시나 그날도 길었습니다. 구석 구석 우리의 모든 것에 손을 대고 엄마의 아버지인 하나님께 우리 이야 기 하느라, 오늘도 밤하늘에 별이 뜨도록 저녁이 늦어집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우릴 위해 기도하던 엄마의 두 손으로 만든 음식을 도대체 어디에 비교를 하고 불평을 할 수 있을 까요? 어떻게 밤이 늦도록 차가 운 벽돌 바닥 위에서 우리 기도하던 엄마에게 왜 이리 늦었냐며 저녁은 꼭 여섯 시 전에 먹어야 한다고 또 다시 투정 부릴 수 있을 까요? 중고등 부문 285

286 그날 밤 엄마의 팔을 주무르는 데, 나는 그때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엄마가 아프다며 주물러 달라시던 그 팔은 우리를 위해 헌신한 그 팔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공부, 우리 밥, 우리 빨래, 그리고 우리 기도. 단 한 번도 미루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그저 당연하다는 듯 해치웠 던 그 무쇠 같던 팔이 이제는 삐걱거리며 녹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당연하다는 듯 그 일들을 했던 것처럼 나도 당연하다는 듯 엄마의 팔에 자주자주 기름칠을 해 줬어야 했는데, 이제서야 한꺼번에 하려니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서야 나도 진심으로, 좀 더 긴 시간 동안 엄마를 위해 기도합니 다. 엄마를 위하여 무언가를 해드릴 수 있는 나이는 이미 왔었지만, 그 것을 진심으로 할 수 있는 때가 나에게는 지금 온 것 같습니다. 286 재외동포 문학의 창

287 노 새 우수상 박연희(미국) 노새는 당나귀도, 말도 아닌 잡종입니다. 노새는 당나귀의 지구력이 나 말의 스피드와 같은 장점을 물려받지 못하여 부모에 비하여 보잘 것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생식능력도 없어서 처음 보는 많은 사람들은 쓸모없는 사고뭉치로 취급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1976년 미국의 Great American Horse Race를 이긴 건 최고의 스피드를 자랑하는 미국의 철강 말들이 아닌 캘리포니아 주의 어느 한 노새였습니다. 넓고 넓은 미국 땅을 3000마일이나 달리는 이 대회에서는 다른 말들이 갖 지 못한 당나귀 아빠의 지구력과 말 엄마의 스피드가 미흡하나마 섞여 있는 노새가 1등으로 마무리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유학을 위해 3살 때 미국에 건너온 1세도, 2세도 아닌 1.5세 동포입니다. 한인 1세 이민자들만큼 한국에 대해 알지 못하고, 또한 그들이 따르고 지키는 미국과는 색다른 한국 고유의 전통예의와 정서에 대해서는 정식으로 배워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태 어난 2세들에 비해서는 한국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강해서 그들과 문 화차이를 느낄 때도 있습니다. 중고등 부문 287

288 미국에 와서 시카고에 있는 유치원에 처음 갔을 때 한국말을 자유롭 게 사용하던 저에겐 영어로만 얘기하는 Ms. Debby 선생님의 새파란 눈은 공포였고, 제 얼굴보다 큰 까만 손으로 저를 안아주시던 Mrs. Carney 선생님은 무섭기까지 했습니다. 밥과 반찬에 익숙해 있던 제게 치킨, 피자와 같은 간식을 점심으로 주는 학교가 이상하게 여겨졌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밥을 찾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흑인, 백인, 그리고 인도인도 우리와 다 같은 사람임을 알게 되었고, 6년 동안 그들과 소중한 추억을 쌓으며 지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 저는 초등학교 3학년을 한국에서 보내게 됐습니다. 같은 한국아이들로 가득 차 있던 교실이 신 기하면서도 얼마나 편안했는지 모릅니다. 첫날 받아쓰기 시험을 20점 받아 창피했고, 선생님이 아이들을 때린다는 것이 당황스러웠지만 미 국에서 전학 온 아이라는 이유로 아이들로부터 호기심과 관심을 듬뿍 받으며 행복한 학교생활을 했습니다. 그런 편안함과 관심이 제게 자신 감을 주어 적극적인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고, 반장, 부회장도 해보고, 경기도 주최 영어웅변대회에 나가 대상을 타기도 했습니다. 설날 한복 입고 할머니 댁에 가서 세뱃돈을 받아 본 경험, 추석날 친척들과 둘러 앉아 송편을 만들어 먹은 경험, 그리고 학교 끝나고 친구들과 포장마차 떡볶이를 사먹은 경험 등은 지금도 한국을 그리워하게 되는 소중한 추 억입니다.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이사한 미네소타에서 새로이 시작된 미국생활 288 재외동포 문학의 창

289 은 지금 살고 있는 샌프란시스코나 예전에 살았었던 시카고와는 달리 동양인들이 별로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사춘기가 절정이던 고등학교 에서는 1000여 명의 학생 중 몇 안 되는 동양인으로서 스스로의 모습 이 불편하기까지 했습니다. majority와 다르다는 것이 싫어 그들과 어 울리기 위해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고, 최대한 백인인 것처럼 행 동하며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척 한 적도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백인아이들 사이에서는 저 아시안 이라고 불렸고, 드러나지 않 게 소외되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또한 나의 작은 실수나 부족한 점들이 한국인들 전체에 대한 편견으로 굳어 질까봐 늘 나의 행동에 대해 조심 하며 남들보다 더 에티켓을 지키려 노력해야 했습니다. 2세 동포들의 부모님들에 비해 저희 부모님은 영어실력이 뛰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철이 없는 저는 학교 컨퍼런스 날 선생님과 말이 잘 통 하지 않는 부모님이 부끄러웠고, 제 친구들의 부모님들과 친해지지 못 하는 부모님께 속상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인 특유의 성실 함으로 부인과 자녀 2명과 시작한 유학생활을 마치시고 지금은 한국에 서 신약개발을 위해 부서의 리더로 연구를 이끌고 계신 아버지는 늘 제 인생의 든든한 존재셨습니다. 한국에서 명문대를 나온 자존심을 버 리고 세탁소일과 웨이트리스 일을 해가며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 며 미래를 준비하여 나중에 작지만 멋진 레스토랑을 운영하셨던 어머 니 또한 저에게는 제가 개척해 가야 할 삶에 대한 방향을 보여 주셨습 니다. 켈리포니아의 노새도 처음 경주에 참가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비웃 중고등 부문 289

290 고 무시했을 것입니다. 노새는 말보다 체격이 작고, 말들의 속력을 따 라갈 수 없기 때문에 노새는 분명 질 거라고 모두 판단했겠지요. 그 비웃음과 무시를 이겨내고 경주에서 당당히 1등을 할 수 있었던 이유 는 노새의 끊임없는 노력을 가지고 있는 그렇지만 노새 스스로는 모르 고 있는 독특한 유전자였습니다. 저 역시 따돌림 당하고, 무시당한 적 도 있지만, 또한 노새와 같은 독특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데 노새와는 달리 이제 저는 그 유전자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다른 평범한 사람이 갖지 못한 것을 저는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 다. 많은 2세들에 비해 한국어 실력이 뛰어나고, 많은 1세들과 달리 영 어는 원어민 수준입니다. 한국인의 근면성과 미국인의 합리성을 알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1.5세이었기에 격어야 했던 아픈 경험들을 겪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비웃었을 때 노새의 주인은 꿋꿋이 노새를 참가시키고 끝까지 믿어주었듯이 저의 뒤에는 저를 믿고 응원 해주는 가족과 몇몇 친구들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값으로 따질 수 없 는 경험에 더하여 힘들고 쓰러질 때 일으켜 세워주는 힘이 있습니다. 지금은 학생으로서 남보다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려 최선을 다하고 있 으며, 많은 커뮤니티 활동들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학교 한인클럽의 리 더로서 많은 한인들과 인연이 생겼고, 그렇게 공부와 네트워킹을 통해 조금씩 사회적 힘을 얻고 있는 것을 느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에는 세계가 하나가 되어 나라간 인종 간에 더 많은 교류 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언어와 습관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오해로 인해 발생할 상처를 치유해주고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중간에서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한국인으로써 주위 한인동 290 재외동포 문학의 창

291 포들의 영어문제와 인종차별 때문에 겪는 가슴 아픈 일들을 아주 어릴 때부터 지켜보아 왔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한인들의 작은 버팀목이 되는 것이 저의 소중한 소망입니다. 흔히 말하는 1.5세는 1세와 2세도 아닌 항상 소외되는 외톨이로 살 아갈 수도 있지만, 1과 그리고 또 2분의 1을 누릴 수 있는 큰 행운을 가진 사람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1.5세의 피해자로 살아가는 길과 1과 그리고 2분의 1의 승리자로 살아가는 길 중 결국 어떤 길을 택할 것인 지는 본인의 의지인 것 같습니다. 저의 꿈을 향한 경주는 이미 시작되 었고, 1세도 2세도 아닌 1.5세인 제가 꼭 승리자로 시합을 마칠 수 있 으리라 믿습니다. 중고등 부문 291

292 강은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우수상 윤영(중국) 언제인가, 택시 운전기사였던 아버지께서 훈춘을 다녀오는 길에 내 가 좋아하는 미꾸라지 두 마리를 가져왔다. 하여 어머니와 나는 아주 오래 외로웠던 어항을 깨끗이 가셔내고 미꾸라지를 그 안에 넣었다. 그 리고 매일매일 그 미꾸라지를 구경하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맛있 는 간식을 먹을 때면 언제도 잊지 않고 미꾸라지에게도 좀씩 나누어주 며 미꾸라지가 어서 빨리 더 살찌고 크기를 바랐다. 물장사가 올 때면 광천수로 낡은 물을 갈아주기도 하며 미꾸라지에게 정성을 쏟았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 지났을까. 가을이 저무는 초겨울, 미꾸라지는 눈 에 띄이게 여위여 갔다. 원래 연필대만큼 길고 어른 엄지손가락만큼 실 했던 미꾸라지가 꽁다리 연필만큼 작아져버렸다. 정말 믿기 어려운 일 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여위다 보니 미꾸라지는 아예 힘도 없고 생기가 없어 보였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가슴이 뭉클하게 했 다. 하여 어느 날 나는 그 미꾸라지를 강에 돌려보내자고 아버지에게 뜻을 보였다.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얘야, 지금 그 미꾸라지를 강물에다 넣으면 이 겨울 추위를 그 고 기가 이겨낼 수 없단다. 만약 강물에 돌려보내려면 내일부터라도 어항 292 재외동포 문학의 창

293 을 차가운 테라스에다 내다 놓아 고기에게 온도 단련을 시켜야 해. 미꾸라지가 여위여 죽을 까봐 근심했던 나는 그날부터 어항을 테라 스에 내여 놓았다. 그러자 처음 미꾸라지는 추워하는 것 같았지만 차츰 차츰 그 추위에 적응하는 것 같았다. 아침에 나가보면 어항 위에는 살 얼음이 끼여 있고 그 밑에서 작아질 때로 작아진 미꾸라지가 꼼지락 거리고 있었다. 나는 하루 속히 그 미꾸라지를 자연에 돌려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 단계 더 단련시키다 봄이 오면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비록 사람에게 아무것도 아닌 미꾸라지였지만 나와 아버지는 작은 생명에 대한 연민과 책임감을 늘 가지고 지냈다. 헌데 미구의 어느 날 우리 가족이 집을 비워두고 어디에 갔다가 왔 더니 미꾸라지 한마리가 그만 어항밖에 뛰쳐나와 이미 죽어 있었다. 그 것을 본 나는 더욱 가슴이 아파났다. 어항이 얼마나 외롭고 갑갑했으면 그렇게 맥없어하던 미꾸라지가 그 높은 유리벽을 뛰어 나올 수가 있었 을까. 순간 나는 마치 미꾸라지 앞에 할 말을 잃은 죄인 같았다. 그렇게 소리 없는 시간이 흘러 초봄 어느 날 우리는 남은 미꾸라지 한 마리를 갖고 강역으로 갔다. 이 날은 우리로 말하면 퍽 기다리던 날이다. 하지만 정작 우리의 곁을 떠나보내자니 그간 묻은 정이 느껴졌 고 말 못할 아쉬움이 목구멍을 눌렀다. 더욱 아직 더워지지 않은 초봄, 집 테라스에서 살던 미꾸라지가 아직은 찬 강물을 견디어 낼 수 있을 까? 그리고 자기절로 먹이를 찾을 수 있을까?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처음 강물에 들어간 미꾸라지는 얼핏 보기에 중고등 부문 293

294 도 몸이 뻣뻣해 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전일 그런 환경에서 살아왔던 생물임을 조용히 시사하듯 잠시 후 미꾸라지는 몸을 비틀며 작은 돌 밑으로 기여 가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또 한 번 손뼉 치며 환성을 울 렸다. 돌아오는 길 우리는 즐거웠다. 어찌 생각하면 서운했지만 미꾸라지 를 강으로 돌려보냈다는데서 일면 기뻤다 그런데 이튿날 그 미꾸라지가 생각나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에 그 강 역에 머물던 나는 그만 깜짝 놀랐다. 흰 고양이 한마리가 비린내 싱긋 한 강역을 꼬리를 드리우고 오르내리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 그날의 소녀는 벌써 소학교란 벽을 넘어 어엿한 중학생 이 되였지만 그날의 생각은 이 머리를 항상 비워주지 않는다. 만약 미 꾸라지에게도 여차여차 기재되는 역사가 있다면 그들의 역사에 나나 아버지는 어떤 인물일까. 지금은 커서 생각하나가 더 보태졌다면 아버지는 그 고기를 백킬로 도 넘는 훈춘시 경신 진에서 가져 왔다고 했는데 우리는 그 고기를 도 문강에다 놓아주었으니 그 고기가 제 고향으로 돌아갔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씻어도 씻어도 씻기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죄리라. 294 재외동포 문학의 창

295 행 복 우수상 최송지(피지) 어느 여름날의 새벽녘, 카나비 가의 정적은 고요히 피지의 지상을 덮어가고 있었다. 은영은 아무도 없는 거리에 혼자 나와서 주위를 둘러 보고 있었다. 그녀가 두리번거리는 곳은 근처 풀밭에서 들려오는 찌르 레기의 울음소리만이 들리는 한적한 곳 이었다. 은영은 수그리고 앉아 바닥에 난 신경초를 손가락으로 건드려 보았다. 작고 여린 그 신경초는 은영의 손가락을 눈치 채고서 자신의 얼굴을 가리기 시작했다. 아무 의 미 없는 일상의 한 부분, 등굣길에 흔히 지나치는 풀 하나가 왠지 가슴 미어지는 슬픔을 자아내었다. 은영은 멍하니 그 신경초를 바라보며 몇 분을 보내다 가족들이 부르는 소리에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은영아, 밖에서 뭐하니. 안에 들어와서 기다려라. 은영은 고개를 가로저어 그 골목에 남아 있을 것이라는 신호를 보내 고 다시 몸을 수그려 작은 풀잎을 바라보았다. 여름이라 그런지 따스한 밤바람이 은영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곧 몇 분이 흐르고 어떤 전화를 받은 가족들이 짐을 들고 은영이 있 는 곳으로 나왔다. 와! 신난다. 중고등 부문 295

296 동생 준희는 환호성을 지르며 은영의 옆을 왔다 갔다 거렸고 어머니 와 아버지는 짐 가방을 현관 앞으로 옮기고 있었다. 은영은 침울한 표정 으로 혹시 저 골목의 끝에서 차 한대가 오지 않을까 계속 힐끔거렸다. 왜 그러니, 은영아. 섭섭해? 어머니가 은영의 어께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그러자 은영은 밝은 표정을 지으며 아니라고 대답 하였다. 사실은 모두가 기쁨에 들떠있었 다. 그리고 그 기쁨을 장식해주는 밝은 차의 라이트가 어두운 골목을 뚫고 다가왔다. 짐을 실은 후 난디 국제공항까지 가는 그 차에 탄 가족 들은 모두 편안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정들었던 집의 마지막 모습을 바 라보는 중 이었다. 이윽고 모두를 태운 차는 앞으로 나아갔고. 은영은 속으로 쓸쓸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저 신경초도 흔하지 않을 텐데. 빌리아메를 처음 만났던 것은 아마 3년 전인 2006년 초였을 것이다. 그 때 은영은 15세, 준희는 12세였다. 골프장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그 녀의 가족은 환하게 웃으며 캐디, 캐디 를 외치던 한 피지언 청년을 기억한다. 무더운 햇빛아래 형광색으로 빛나는 필드에서 은영과 준희 에게 멋진 폼으로 골프를 치는 법을 알려주던 청년. 그리고 인상적인 그의 미소. 그는 앞니 하나가 없었다. 자! 너희들이 친 공이 내가 한손으로 친 공보다 더 멀리 날아가면 내가 음료수를 사주지.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은 좋아라하며 너도나도 클럽을 휘두르기 시작 했다. 이윽고 은영과 사촌언니 슬지의 차례가 되었고, 은영이 친 공은 296 재외동포 문학의 창

297 고작 반 도 못 날아갔다. 하지만 고된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슬지는 공을 빌리아메 보다 조금 더 멀리 칠 수 있었는데, 모두의 영웅이 되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빌리아메는 슬지에게 2불씩이나 하는 환타 한 병 을 사 주었다. 아이들은 부러움 반 존경 반으로 꼴깍 꼴깍 시원한 환타 를 마시는 슬지를 바라보았다. 조용히 웃던 빌리아메는 곧 모든 아이들 에게 음료수를 사다 주었다. 하지만 유독 은영만 기뻐하지 않았다. 빌리, 괜찮아요. 승자는 슬지 언니잖아요. 슬지 언니만 사주세요. 그랬더니 빌리아메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기분이 안 좋은 은영에 게 이유를 물었다. 왜냐하면. 너무 비싸잖아요. 은영은 알고 있었다. 이곳 피지에서는 인권비가 낮아서 하루 종일 일하는 가정부도 8불도 채 못 되게 벌며 캐디 역시 작고 고정적이지 못한 수입을 번다. 그녀는 돈도 없으면서 아이들에게 음료수를 사주는 빌리가 안타깝기만 했다. 그리고 치과 가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서 앞니 도 성하지 못한 그에게 더욱 미안했다. 하지만 금세 물 만난 듯이 음료 수를 마시는 아이들을 따사롭게 쳐다보던 그를 발견했다. 몇 달 후. 은영이 다니는 프라이머리 스쿨의 종례시간이 끝나고 교 실이 발칵 뒤집어지는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바로 은영의 금시계가 없 어진 것이다. 그것은 어머니가 주신 소중한 추억이 담긴 것 이었으며 은영은 순간 하늘이 두 쪽이 나는 것을 느꼈다. 깜짝 놀란 선생님들은 그것을 찾아주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썼다. 한 시간이 넘도록 아이들 을 집에 보내주지 않았으며 가방검사는 물론이고 여자아이들의 몸 검 중고등 부문 297

298 사 까지 하였다. 하지만 이미 범인은 다른 곳에다 숨긴 후라서 시계는 나오지 않았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집으로 돌아오던 은영은 생각하 였다. 사람들이 말하길 피지는 좀도둑이 많다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이었 구나. 하지만 정말 너무해. 그것은 단순한 금시계가 아니었어. 훔쳐가 서 구멍가계에 얼마 안 받고 팔아버릴 만큼 값어치 없는 게 아니야. 범인은 한 순간에 그것을 가져간 것 일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무척 소중 한 거였단 말이야. 워낙 가난한 나라다 보니까 타운에서든 학교에서든 자질구레한 것을 훔치는 좀도둑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왜 그때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나 싶었다. 혹시 그 시계를 팔고 번 돈으로 굶는 동생들을 먹여준 것 일수도 있었을 텐데. 오히려 은영 자신이야 말로 현지인들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남 탓만 한 것 아니었는가. 준희와 장난을 치며 싱글벙글 신이 난 빌리아메가 침울한 은영에게 다가와 신경초를 내밀었다. 은영이 이게 뭐냐고 묻자 그는 이 풀잎은 아주 신기하게도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잎사귀를 접는다. 라고 설명했 다. 은영은 다 아는 사실에 피식 웃고서 다시 시선을 아래로 고정하며 말하였다. 한국에도 있어요. 그런데 흔하지가 않아서 돈 주고 사야 되죠. 그러니? 하지만 한국에는 절대 없다는 꽃이 피지엔 많단다. 내가 어 렸을 때 할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긴데, 피지에는 가끔 피는 빨간 꽃이 하나 있단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 세상에 둘도 없이 아름답데. 옛날이 야기에 따르면 그 꽃은 행복을 의미해서 보는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온 298 재외동포 문학의 창

299 다더라. 나도 한번만 그 꽃을 보고 싶어. 하하. 그런데 어딜 놀러 다닐 돈이 있어야지. 은영은 관심 있다는 듯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수긍하였다. 그리고 나 선 빌리아메는 갑자기 피지가 좋냐 고 물어보는 것 이었다. 은영은 잠 시 침묵을 했다. 사실 대답은 아니요 였다. 피지는 비싼 보일러를 설치하지 않는 이 상 물이 뜨겁게 나오지 않아서 매일 추운 샤워를 해야 했고, tv 에서도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없었으며 비싼 수입품을 먹지 않는 이상 음식은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 둥 정말 여러 가지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내색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빌리아메의 밝은 미소 앞에 은영은 하얀 거짓말을 하고야 말았다. 예. 저는 피지가 아주 좋아요. 특히 이곳의 전통문화는 너무 신비로 워요. 그랬더니 빌리아메는 피지 문화 중 무엇이 가장 좋냐 고 그러니까 은영은 잠시 생각했다. 메케 댄스? 피지 전통 의상? 아니면 불에 달군 돌 위에 올라서는 의식? 갑자기 나무 잎사귀를 엮어 만드는 부채가 뇌 를 스쳤다. 반 아이들이 이따금씩 가지고 오는 그 맘에 들지 않는 못생 긴 부채를 말이다. 피지 전통 부채요. 빌리아메는 조용히 미소 짓다가 준희가 친 공을 주우려 가버렸다. 이윽고 돌아온 그에게 준희가 짧은 영어로 무언가를 물어보았다. 그 는 피지밖에 아직 가본 나라가 없는데 그는 어떤 나라들을 가 보았냐는 것이다. 중고등 부문 299

300 나는 아직 비행기를 타 본적이 없단다. 그래서 소원이 우리 어머니 를 데리고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가보는 거야. 그 말을 듣고 은영은 한국이 어떠냐고 물어보았더니 빌리는 즐겁게 웃었다. 그런데 속없는 준희가 아빠는 데리고 가지 않을 거냐고 물어 보았다. 은영은 빌리의 표정을 읽고 그는 아버지가 안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빌리는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13살 때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다. 그렇게 또 몇 달이 흘렀다. 은영과 준희, 그리고 다른 사촌 두 명 모두 학교에서 잘 적응을 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골프도 꽤 잘 치게 되었다. 은영과 준희를 평소 예뻐하던 빌리아메는 그들에게 영 어와 숙제마저 가르쳐주었다. 가끔 빌리아메가 필드에 나오지 않아 다 른 캐디보이가 그들과 함께할 때가 많았는데 그게 그들은 항상 불만이 었다. 메투이, 메투이는 너무 조용해요. 맞아. 심심해. 메투이는 말이 별로 없고 소심한 듯한 피지언 청년이었다. 그리고 그는 정말이지 너무나 가난해 보였다. 입고 있는 옷들과 신발마저 너무 닳고 오래된 것들만 신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준희가 빌리가 보고 싶다며 메투이한테 때를 쓰자 그는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 하였다. 걔는 원래 도둑놈 이었어. 그래서 모두가 피하지. 워낙 작은 목소리에다가 빨리 말해서 준희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은 영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순간 화가 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 300 재외동포 문학의 창

301 은 예전의 이야기 이며 지금의 그는 다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었다고 해도 그는 자신을 바꾸려 노력하는 중일 것이다. 그리고 예전에 빌리아 메는 메투이를 소개하면서 그는 자신의 오래된 친구라고 하였다. 은영 은 잠시 메투이를 노려보았고 메투이는 그런 시선을 느꼈는지 이내 고 개를 돌려버렸다. 잠시 후. 저 멀리서 달려오는 빌리아메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 병든 어머니를 간호하다가 늦은 것이 분명하다. 은영은 반가운 마음에 그에 게 달려갔지만 곧 멈추었다. 그는 다른 손님의 카트를 끌어주려 오고 있던 것이었다. 곧 돌아서려는 은영은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어 다시 그를 쳐다보았고. 인도에서 온 부잣집 손님이 거만한 태도로 그를 대하 는 것이었다. 한 여자의 고함은 멀리서도 다 들을 수 있는데 그것은, 그거 손대지마! 그리고, 냄새나니까 옆으로 좀 떨어져. 였다. 다른 손님들 역시 그에게 하찮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은영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은영과 가족들 역시 맨 처음 피지에 왔을 때 현지 인들한테서 나는 냄새가 싫었다. 하지만 그것은 서로 다른 나라에서 자 라온 인종의 특유 냄새기 때문에 뭐라 하는 것은 몰상식한 일이라 그녀 는 생각했다. 가서 뭐라 따질 수 도 없기에 은영은 빌리의 당황한 모습 을 안타깝게 쳐다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더욱 놀랄만한 일이 잠시 후에 벌어졌다. 바로 클럽하우스의 여성 락커룸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다. 시큐리 티와 매니저, 그리고 매점에서 쉬고 있던 몇몇의 캐디보이들도 깜짝 놀 라 모두 로비로 몰려들었다. 내 목걸이가 없어졌어! 중고등 부문 301

302 아까 인도에서 온 여자 손님의 앙칼진 목소리가 매니저에게 항변하 였다. 사람들은 너무도 당황하여 일단 가방부터 다시 뒤져보라고 하였 지만 그 여자는 다시 소리 질렀다. 내 락커의 문고리가 부수어져 있었단 말이야! 이것은 분명히 누군가의 짓이었다. 다른 인도 손님들은 그 여자를 위로하며 일단 진정하라 했다. 매니저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는 표정으로 주위 캐디들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캐디들은 하나같 이 증오어린 눈빛으로 빌리아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 중 누군 가가 외쳤다. 범인은 이자식이야! 그 소리에 인도 손님들과 다른 골퍼들, 그리고 시큐리티가 모두 고개 를 돌려 빌리를 바라보았다. 아까 이자식이 하우스로 돌아왔었어. 그리고 오늘 늦었다는 게 좀 수상하지 않아? 맞아. 그리고 그는 예전에 도둑질을 하던 불량배로 유명 했었지. 그를 노려보던 캐디들이 한마디씩 하며 증거를 대기 시작했다. 그러 자 인도여자는 살기어린 눈으로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도 못하는 빌리 에게 다가가서 뺨을 쳤다. 짜악! 잔인한 그 소리는 고요한 로비를 울리기 충분 했고. 인도여자는 어 서 당장 못 내 놓느냐면서 더욱 강한 기세로 빌리를 때리기 시작했고 곧 다른 캐디들은 빌리에게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비난과 욕설을 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은영의 가족이 18홀을 다 돌고 클럽하우스로 302 재외동포 문학의 창

303 돌아왔다. 은영의 아버지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사건을 듣게 되었고 곧 격한 싸움이 시작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그만 집에 돌아가자 고 했지만 은영은 듣지도 않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빌리는 자신이 결백하다고 소리쳤지만 왠지 아무도 그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본 은영은 너무 마음이 아파 죽을 것만 같았고 그의 결백을 두둔하려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모두 이걸 보세요! 한 구석에서 낡은 가방을 들어 올리며 소리치는 메투이가 서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고정되었고, 그 가방엔 락커의 자물쇠 하나쯤은 부술 듯한 흉기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가장 슬픈 사실은 그것 이 빌리의 가방이었던 것이다. 빌리는 악을 쓰며 자신이 아니라고, 분명 다른 누군가의 짓이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메투이는 이 가방은 땅의 모양이 수상해서 파 봤더니 나온 것이고 너의 가방이지 않냐 강하게 반박하였다. 모든 사람은 이제 완전히 빌리를 범인으로 간주하게 되었고 그것은 은영을 포함하고 있 었다. 화가 나있던 캐디들은 빌리아메를 잡기 시작했다. 너무도 결백하고 억울한 표정의 빌리아메는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자 낙심했 지만 많은 인파 속에 있는 은영의 얼굴을 보자 너는 날 믿지? 라는 눈빛을 보내었다. 왠지 은영 하나만 알아준다면 그걸로 됐다는 듯한 표 정이었다. 은영은 빌리가 범인이 아니길 바랬다. 진심으로 바랬다. 하지만 슬 픈 세상은 그가 범인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임을 인정하고 말았다. 어 중고등 부문 303

304 쩔 수 없었다. 은영은 더 이상 사람들이 남의 소중한 물건을 훔쳐가지 않길 바랬다. 빌리라는 착한 친구가 이번 일로 많은 깨달음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만약에 이것이 빌리의 마지막 모습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절대 은 영은. 그대로 싸늘하게 뒤돌아 서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몇 주가 지나 추운 겨울 시즌에 들어서게 됐고, 은영과 그녀의 가족 은 한동안 골프장에 나가지 않았다. 은영은 속으로 빌리를 걱정하고 있 었지만 아무 일 없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을 놓고 그녀의 학교공부에 충실했다. 유창한 영어실력과 노력 덕에 은영과 준희는 반에서 5등 안 에 드는 우등생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바쁜 공부도 하고 다른 과외도 하면서 골프를 잊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 한번 골프장에 다시 가게 된 다면 빌리의 웃는 얼굴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뉴스에 그 소식이 실리기 전 까지. 23세 캐디보이의 비극적인 사망 그 신문은 빌리아메 테오네아의 사망소식을 1면에 싣고 있었다. 기 사에 따르면 내용은 대략 이랬다. 다른 캐디보이들이 빌리를 의심하며 구타하자 화가 난 빌리는 따지 려고 한 캐디에게 다가갔는데 다른 캐디들이 빌리가 폭력을 쓰려는 줄 알고 뒤통수를 골프채로 잘못 내리쳐 그는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그 런데 중요한 것은 그 후 죄책감을 느끼던 진짜 범인 메투이 카부키(23) 가 자신이 한 짓이라고 자백을 해버린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보석을 훔쳤는데 사건이 거세어지고 두려움에 304 재외동포 문학의 창

305 죄를 자신의 오랜 친구 빌리아메에게 떠넘긴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죽자 밀려오는 죄책감과 미안함에 자신의 범행을 모두에게 밝혀버리고 말았 다. 기사 옆의 사진엔 눈물 흘리는 메투이 카부키의 힘없는 팔에 걸려있 는 수갑과, 슬픈 얼굴로 땅을 바라보고 있는 한 인도여자모습이 있었다. 기사를 읽고 난 은영과 준희는 울지 않았다. 다만 웃었다. 힘없이 웃었다. 그러고 나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너무나 서럽게 울었다. 지 치고 지쳐 잠이 들 때까지 울었다. 잠의 세계에서 빌리의 미소를 잊어 버릴 때까지 울고 말았다. 빌리는 예전엔 어땠을지 몰라도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1년 동안의 경험에서 할 수 있는 말이다. 화도 잘 내지 않고 언제나 웃고 아이들을 걱정할 줄 알고, 아이들이 피지의 생활에 잘 적응 할 수 있도록 많은 것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따뜻한 사랑도 주었다. 자신과는 관계 도 없는 준희를 아들처럼 귀여워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나쁜 친 구들과 어울려서 무엇을 했던, 지금은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으며 몸이 편찮으신 어머니를 항상 생각하고, 여행시켜드리고 싶다던 너무나 착 한 친구였다. 너무나 좋은 친구 였다. 그런데 그런 당신이. 모두에게 버림받을 정도로 나쁜 사람이었나요 골프채로 한 대 맞 고 죽어버릴 정도로 약했었나요 이렇게 갑자기 떠나버릴 정도로 무 심했나요 왜 당신에게 미소 한 번 지어줄 기회도 안주고 가버렸나 요. 정확히 며칠이 지났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후 언제 한번 골프 클 중고등 부문 305

306 럽을 찾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빌리의 어머니를 만났다. 초라 한 행색에 야윈 얼굴의 피지언 아주머니. 하지만 그 사람은 밝아보였 다. 나중에 듣고 안 사실이지만, 빌리의 친구 중 하나가 그의 어머니를 상처주지 않기 위해 빌리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말하였다. 그 아주머니는 다른 캐디들을 보더니 손을 한 명 씩 한 명 씩 잡으면서 감사의 말을 전했다. 자기의 아들과 그동안 잘 지내주어 고맙다고. 빌 리는 집에 오면 항상 친구들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캐디보이들은 제각기 눈을 다른 데로 돌리고 있었고 그중 몇몇은 소리 내어 울기도 하였다. 모든 캐디들의 손을 잡은 아주머니는 은영의 가족에게로 왔다. 그리 고 은영과 준희냐고 어설픈 한국 발음으로 물어보았다. 은영은 울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마찬가지 였다. 은영은 자신이 너무 많이 울었다 생각했다. 이미 빌리로 인해 너 무 많은 눈물을 흘렸기에 더 이상의 눈물은 없다고 생각했다. 아주머니 는 사랑이 담긴 눈으로 준희와 은영의 볼에 뽀뽀를 하더니 그들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며 말했다. 우리 아들이 너흴 너무도 사랑했단다. 이건 빌리가 직접 만든 거란 다. 너희를 주려고 매일 집에 돌아와서 만든 거야. 그것을 받은 은영은 참던 눈물을 누르지 못하고 이내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크게 울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은영이 말했던 피지 전통 부채였다. 마른 나뭇잎을 꼬깃꼬깃 엮어 만든 정성 가득 들어간 빌리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준희는 영문을 몰라 누나에게 왜 우냐고 계속 물었지만 은 306 재외동포 문학의 창

307 영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울기만 했다. 부채를 안고 계속. 예전일이 계속 기억이 나 가슴이 아팠다. 창가로 멀어져만 가는 피 지에서의 추억들이 눈꽃처럼 휘날려 갔다. 4년 동안 만났던 많은 사람 들, 그리고 그중 가장 사랑하는 빌리아메 제일 오래된 기억이지만 뚜렷하게 그의 미소를 기억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여기서 쉬었다 갑시다. 차는 어느 휴게소 앞에 잠시 멈춰 섰고 은영과 그녀의 가족들은 화 장실도 다녀오고 간식도 사먹었다. 먼저 차로 돌아가 창밖을 바라보던 은영의 눈이 커졌다. 바로 휴게소의 잔디밭에 아주 아름다운 빨간 꽃 한 송이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꽃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녀는 생 각했다. 이런 꽃은 한국엔 없을 거야. 화려한 수술과 커다란 꽃잎을 찬찬히 보고 있던 은영은 옆의 팻말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 그 꽃의 이름은 바로 Happiness 즉 행복이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작은 글씨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적혀져 있었는데 그 꽃을 보는 사람은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 이었다. 무언가 기억이 날 것 같았다. 예전에 누군가가 이 꽃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 같았다. 곰곰이 생각을 해 봐도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아 은영은 그냥 좋게 생 각하기로 했다. 자신이 행복해질 거란 생각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이윽고 차는 출발 했고, 피지의 기억들은 더욱더 멀어져만 갔다. 은 영은 창밖을 내다보며 행복이라는 꽃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그러다 창문을 열고 하늘 올려다보았다. 그날따라 피지를 넓게 감싸고 있는 하 중고등 부문 307

308 늘은 크고 아름답게 보였다. 저 오늘 행복이라는 꽃 봤어요. 정말 너무 아름다웠어요. 저는 이제 행복해 질 수 있겠죠. 꼭 예전의 당신 같네요. 저희들에게 행복을 주 던. 이제 피지를 떠나요. 예전에 당신이 물었었죠. 피지가 좋냐구요? 예. 너무 좋아요. 당신이 태어나고 자란 이 평화로운 나라가 좋아요. 지금 피지는 더욱 아름다워요. 여름이라 더욱 많은 과일들과 꽃들이 온 들판 을 장식하는군요. 당신이 있는 곳은 어떤가요. 행복한가요? 부디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 곳만큼은. 이곳 같지 않게 행복 꽃이 많이많이 피었으면 좋겠네요. 씨앗을 빼다가 전 세계에 심을까요. 못 본 사람이 하나도 없게 말 이예요. 그리고 나중에 가져가고 싶어요. 그래서 당신이 사는 곳에도 많은 행복 꽃을 심을 수 있게 말이예요. 너무 졸려서 계속 떠나가는 피지를 바라 볼 수 없네요. 자면 안 되는데. 한국에 도착해 버리는데. 눈이 감겨요. 그냥 나중에 다시 찾아뵐게요. 나중에 당신이 잠든 평화로운 곳에 돌아와서 행복 꽃 을 놓아드릴게요. 308 재외동포 문학의 창

309 따뜻한 사람들이 사는 곳 장려상 김가영(우즈베키스탄) 천년을 넘게 실크로드의 중심이였던 이곳을 처음 온 사람들은 모두 들 말합니다. 70년대에 멈춰 버린 듯한 곳. 저는 이 느리게 성장해 나가는 도시의 따스함을 적어보려 합니다. 제가 이곳에 오게 된 건 벌써 11년 전, 부모님들의 사업차 우즈벡으 로 온 가족이 이사를 오면서 부터입니다. 그때는 지금보다도 훨씬 발전이 안 되어 있었을 때죠. 처음 우즈벡을 마주했을 때의 기분은 마냥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많이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이곳 우즈벡에 사람들과 함께하면 할수 록 이곳의 매력을 더욱더 느끼게 되었죠. 처음 공항에 내린 순간 한국의 공항과는 너무 다른 모습에 조금 놀 라기도 했습니다. 벽에는 금이 많이 가있어서 금방이라고 무너질 것 같았고 화장실은 지저분했습니다. 거기다 화장실 이용이 유료라니! 하지만 전 자신을 애써 달랬죠. 외국이잖아, 이정도도 예상 못한 거 야? 공항에서 나와 집으로 가면서 부모님이 애기해 주셨습니다. 중고등 부문 309

310 집에는 저를 도와주실 아주머니가 저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저는 솔 직히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항상 한국 사람들과 생활해서 현지 분은 한 번도 만나 본적이 없던 저는 아주머니의 노랑머리와 파란 눈부터 상상 되었습니다. 왠지 그런 낯선 모습의 아주머니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를 제게 하면 저는 그 자리에서 얼어 버릴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너무 친근하게 들리는 한 마디! 안녕하세요? 누가 봐도 한눈에 한국인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아주머님이 서 계셨 습니다. 아주머니는 고려인이셨고 저는 그날 우즈벡이라는 곳에 우리와 같은 말을 하는 한국인이 산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우즈벡으로 온지 며칠이 안 되어 처음 동네 산책을 갔던 때였습니다. 그땐 러시아어는 인사말 밖에 하지 못했지만 내가 앞으로 살아갈 동 네를 둘러본다는 게 설레기도 하고 무언가 도전한다는 기분까지 들었 습니다. 그때가 여름이여서 참 많이 더웠습니다. 35~40도를 오가는 날씨였지만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 했습니다 동네 풍경은 생각보다 많이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한국의 시골 동네 와 푸근한 느낌이 참 많이 닮았었습니다. 마음대로 풀어져서 돌아다니 는 양떼들과 소떼들을 빼면 말이죠. 처음으로 제 눈앞에 양들이 뛰어 노는 것을 보며 신기해하고 있을 때 한 집에서 할머님 한 분이 나오셨 습니다. 날씨가 더움에도 불구하고 긴치마에 고쟁이바지, 머리에 스카 310 재외동포 문학의 창

311 프까지 두른 우즈벡 정통복장의 할머님. 할머님을 보고 솔직히 조금 당황했습니다,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내 소개를 해야 하는데 하며 안절부절 하다 문득 한 가지 걱정이 떠올랐습니다, 혹시 이 동네에 외국인이 산다는 걸 싫어하시진 않으실까? 당신과 는 다른 옷차림을 하고 있는 우리를 나쁘게 보시지는 않을까? 하지만 제 걱정은 모두 쓸데없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님은 저를 보시고는 인자한 미소와 함께 다가오셔 제 손을 꼭 잡아 주시며 인사를 해주셨고 잠시만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시더니 자 신의 마당에서 자라던 석류나무에서 가장 크고 예쁜 석류를 몇 개 따주 시며 제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기 집에 자주 놀러 오라고 같이 차 마시자고 말입니다. 그렇게 동네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 왔을 때 저희들 손엔 과일들 이 한 가득 했고 마음엔 따뜻한 기운이 가득했습니다. 그날 제 손에 과일을 쥐어주시며 환영한다는 말을 해주신 분은 할머 님 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분들께서는 그렇게 저희를 반겨주신다 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아, 저분들께서는 정말 진심으로 해주시는 말씀이구나. 저였다면, 처음 보는 외국인 여자애가 동네를 구경한다며 외국어로 뭔가 계속 제잘 거리며 모든 것에 신기한 듯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면 먼저 다가가기보단 호기심 가득한 눈으 로 바라보기만 했을 텐데. 그분들은 그렇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실 수 있는 가장 따스한 분들이셨습니다. 중고등 부문 311

312 가끔 시내로 나들이를 나가면 여기가 시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시내에는 나무가 참 많습니다. 매 1미터 마다 꼭 나무가 심어져 있고 보통 모든 나무는 거의 몇 십 년씩 되는 것들입니다. 나무를 심어 본적은 없지만 이렇게 보는 사 람 마 져도 나무를 아낄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는 초록색도시, 이런 초록색 도시를 보며 시대에 뒤떨어져 보인다는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회색 빛 빌딩숲에 물들어 마음까지 딱딱하고 차가워 보이는 것 보단 이런 초록색에 순수함을 간직하는 게 전 좋은 것 같은걸요. 모든 도시들이 다 점점 발전해 나가면서 회색으로 변할 때도 우즈벡 은 이렇게 항상 푸르른 빛으로 남겨 있다는 게, 그게 이곳의 매력이 아닐까요? 시대에 따라 흐름에 따라 그것을 따라가기 보단, 시원한 에어컨을 더 많이 설치하는 것 보다 시원한 나무그늘을 더 만드는 게 그게 더 현명한 거라고 생각 합니다. 나무는 아무리 많아도 지나치지 않으니까요. 제가 살던 동네는 차도 잘 안 다니는 시골이라 가만히 있으면 시간 이 멈춘 것처럼 바람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지만 오후만 되면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길에서 축구 하는 소리로 시끌벅적 해지곤 했습니다. 뜨거운 햇빛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웃으며 뛰어 노는 아이들, 길에 서 카펫을 빨고 계시던 아주머니들과 소와 양들을 집으로 몰고 가던 사람들. 저녁이 되면 동네 분들은 뜨거워 질대로 뜨거워진 길 위에 물을 뿌 리셨고 길에선 매미 울음과 비슷한 물 스며드는 소리가 나곤 했습니다. 312 재외동포 문학의 창

313 저희 집 뒤에 사시던 빵을 참 잘 구우시던 할머니가 계셨는데 가끔 저녁때쯤 되면 까욘~ 하고 저를 부르시는 소리가 들리시곤 했습니다. 우즈벡 전통 빵인 리뾰쉬까를 오븐에서 바로 꺼내서 뜨끈뜨끈 한걸 주시곤 하셨는데 큰 빵은 엄마 것이고 작은 빵은 제 것이라며 담 너머 로 빵을 건네주시던 할머니의 미소는 항상 인자하시고 평화로웠습니 다. 아직도 전 그 할머님이 해주셨던 그 빵이 제일 맛있었던 것 같습 니다. 그리고 우즈벡의 설날인 나브루스가 되면 한국에서 설날 떡국을 나 눠 먹듯이 이곳 분들은 저희가 기름밥이라고 부르는 고기와 쌀과 콩을 기름에 볶은 쁠로프를 이웃끼리 나눠 먹곤 합니다. 움푹한 그릇에 쁠로프를 가득 담고 그 위에 리뾰쉬까를 뚜껑 삼아 덮어서 이웃 분들이 나브루스 저녁이 되면 가져다주시곤 했습니다. 가끔은 너무 여러 이웃 분들이 주셔서 6~7그릇까지 받은 적도 있습 니다. 물론 그럴 땐 며칠 동안 삼시 세끼 기름밥만 먹어야 하는 웃지 못 할 상황도 벌어지곤 합니다.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우즈벡만의 사람 사는 방법은 참 따뜻합니 다. 만약 차 사고가 난다면 보통은 서로 자기 책임을 회피 하려 하고 서로를 탓하기 바쁘지만 우즈벡은 확연히 다릅니다. 우선 차에서 내려 운전자들은 서로 미소와 함께 악수를 청하고 예의를 갖춘 후에 어쩌다 사고가 나게 되었는지 살피기 시작합니다. 그런 후 잘못을 한 운전자는 정말 죄송하다는 표현으로 가슴에 손을 올리고 정중히 사과를 하면 다 른 운전자들은 당연히 그것을 용서해줍니다. 처음엔 그런 상황들이 참 신기했는데 이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게 중고등 부문 313

314 되었습니다. 화가 난다고 해서 자기 내키는 대로 말을 뱉어내면 그건 당연히 저에게 그대로 돌아오니까요. 우즈베키스탄, 어쩌면 너무 생소한 이름이어서 멀게만 느껴질 수도 있는 이곳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 어쩌면 우리보다 더 따뜻하고 넒은 마음을 가진 분들, 그런 너무나 좋은 사람들이 그리고 사랑들이 있는 곳입니다. 처음엔 우리들의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들의 일상까지 다를 거라 생각했지만 한 폭 의 평화로운 그림 같은 그들의 일상은 그렇게 우리들의 일상으로 스며들어 왔습니다. 314 재외동포 문학의 창

315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장려상 김고자(일본) 나는 행복한 사람! 이라고 언젠가 말할 것이다 이런 다짐을 어릴 때부터 계속해왔다. 왜 그랬냐 하면 나의 경우 행복을 느낄 시간보다 압도적으로 불행을 느낄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그 후유증으로 지금은 하반신 부자유이시며 요즘은 치매까지 걸리셨다. 아버지는 내 이름을 잊으셨다. 내 나이를 모르신다. 이런 일들은 나에게 하루하루 큰 고통을 주고 말았다. 나의 어머니는 부산에서 시집을 오셨다. 그래서 일본어를 잘 못하신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간병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하시 면서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신다.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면서 매일 매일 나는 눈물을 흘리다가 결국엔 우울증에 걸렸다. 보도에서 자주 들 었던 사람들이 자주 말하던, 나에게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었던 그 런 병에 나는 걸렸다. 병원에서 증상이 심하다고 약을 받았다. 의사한테서 병명을 들은 순 간부터 난 멍해졌다. 내가 왜? 나만 왜? 중고등 부문 315

316 그때 나의 옆에 있어 주었던 사람은 바로 목욕탕에서 우연히 만나서 친해진 일본 아줌마였다. 그 아줌마하고의 만남은 내가 살아왔던 지금까지 중에 가장 행복하 고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아줌마는 순수한 일본 아줌마인데도 한국을 너무 좋아하신다. 그 리고 어느새 그 아줌마의 친구 분들하고도 친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왠지 처음으로 만났던 그 순간부터 뭔가를 느끼고 있었다. 그 래서 어느 날 난 그 아줌마에게 상담을 했다. 그랬더니 같이 병원으로 한번 가 보자며 날 따라와 주신 것이었다. 병명을 듣고 아줌마는 울으셨다. 내가 우는 옆에서 소리 없이 아 줌마는 눈에 쓰레기가 들어갔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 나는 아빠하고 엄마하고의 사이에서 솔직히 너무 힘들어 해왔다. 그 런데 그 고통을 다 잊게 해 준 사람이 바로 그 아줌마였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내 마음을 알고 또 이해를 해주신다. 지금에서야 느꼈다. 그 아줌마들하고의 만남은 하느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었다는 걸. 그 아줌마하고 또 주위의 사람들의 배려 덕분에 조금씩 병은 고쳐졌 다. 물론 나도 노력은 했지만 나의 노력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이제는 매일 매일 감사하면서 살고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복이 있다 고 여러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솔직히 뭐가 그리 복이 있는가 하고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서야 그 대답을 찾았다. 그건 내겐 돈으로 살수 없는 좋은 인연을 많이많이 알게 된 것이다. 316 재외동포 문학의 창

317 그리고 병이 조금 나아진 지금 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내가 아픔과 고통을 느끼다 보니까 남이 힘들어 할 때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 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 아줌마들처럼.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시간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하고 함께 웃 고 있을 때이고, 내가 불행하다고 느끼는 시간은 점점 진행되어 가는 병과 싸우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이다. 아버지의 병은 막을 수가 없지만 난 아버지와 어머니를 너무너무 사랑하니까 서로 행복해주길 바라고 있다. 그 행복을 위한 것이라면 난 뭐든지 할 수 있다. 어머니는 언제나 웃고 뭐든지 꾹 참으신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어 느새 나는 남의 행복을 같이 기뻐해줄 줄 알고 남의 슬픔을 같이 슬퍼 해줄 줄 알게 됐다. 솔직히 지금도 행복하진 않지만 어쩌면 진실한 행복은 이렇게 지금 글을 쓸 수 있고, 또 그 글을 읽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 다. 앞으로는 행복보다 불행을 더 많이 느끼게 되더라도 전처럼 좌절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강해지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게 모든 사람 들에게 할 수 있는 은혜 갚기라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나에게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 이해 주었던 사랑한다는 말 을 앞으로는 내가 여러 사람들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주면서 살 고 싶다. 중고등 부문 317

318 이중국적자의 딜레마(International Grey Spot) 장려상 김호연(미국) 미국에 사는 한국인은 그리 적지 않다고 생각을 한다. 내가 사는 곳 도 한국인들은 길가에 차이는 돌처럼 많고, 학교에서도 어떻게 보면 백 인들보다도 동양인이 더 많다는 생각을 종종하곤 한다. 나와 똑같은 상 황에 놓여 진 사람들은 매년, 매일 늘고 있고 이유야 어찌되었든, 남은 평생을 여기서 지내고자 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고 있다. 이 상황을 보 자면 나는 그들과 별다를 차이점이 없다. 하지만 미국에서 태어나 반평 생을 거기서 머물고, 8년을 한국에서 지내고 다시 이곳으로 이민을 온 사람은 그다지 많다고 생각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나의 상황이다. 미 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살고, 한국으로 들어와 최악의 소 년기를 지내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으며 대학을 이곳에서 지내려고 계획하는 사람으로서 한 가지 늘 맘에 걸리 는 점이 있었다. 미국이 더 편하고, 더 잘 맞는 특성의 나는 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가 하는 것에 관한 고민이었다. 나의 탄생기를 짧게 요약하자면,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니시게 된 아버 318 재외동포 문학의 창

319 지와 임신하신 어머니가 미국으로 옴으로부터 시작한다. 커네티컷의 한 병원에서 태어난 나는, 태생부터 동시에 법적으로 한국인과 미국인 이 되어버린 이중 국적자가 되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나는 미국의 방식 으로 교육을 받았고, 영어를 먼저 말하기 시작했으며, 미국의 아이들과 더 어울리기 시작했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하여 집에 서는 한국어를 썼고 어머니는 나에게 한글을 가르치셨다. 그리하여 한 국어에는 능숙하게 되었으나, 나는 한국인 이라는 생각보다 나는 미국 에 사는 사람 이라는 생각이 우월했다. 미국에서 지내기를 7년, 나는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가게 되었다. 나는 기억도 하지 못하는 가족과 만나게 되었고 익숙하지 않은 국가에서 살게 되어 버린 것이다. 코리아 라는 나라에서 나는 초등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학교를 다니 자마자 나와 그들의 차이점은 느낄 수 있었다. 현재의 미국에서는 어린 나이에서부터 규칙의 중요성을 가르치며, 교육적으로 그 규칙을 철저 하게 지키게끔 아이들이 배워간다. 하지만 내가 새로 이사 온 곳은 내 가 있었던 곳보다 훨씬 활동적이었고, 단도직입적이었으며, 급작스러 웠다. 미국에서 활발하다는 소리를 들은 나도 이곳의 아이들에 비하여 소극적이었고, 부끄럼을 잘 탔다. 다른 아이들과 페이스를 잘 맞추지 못하면서, 한국어도 아직 어눌했던 나는 금방 혼자가 되었다. 그래도 나이가 적었을 때에는 괜찮았던 나의 상황은 10대가 되면서부터 악화 되기 시작하였다. 남들처럼 그다지 친한 친구가 없었던 나는 시작하자 마자 아는 사람 없이 청소년기를 맞이했고, 그래도 친구를 만들고자 열 심히 하였으나 잠깐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고작이었고, 워낙 둔한 성 중고등 부문 319

320 격 탓에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이 진전이 되질 않았고, 결국은 학교를 옮기기까지 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중학교를 들어가면서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고 반드시 초등학교 때 의 시간을 잊으려 했으나, 중학교는 이름만 다른 연극이었지 각본과 연 출은 베낀 듯 그대로였다. 중학교로 올라온 소년소녀들은 자신들이 이 미 알고 있었던 친구들이 같이 졸업했고 쉽게 학우를 구해서인지 중학 교에 가서도 외부자라는 느낌이 컸었다. 마치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잘 알고 있던 것처럼 중학교는 돌아갔고, 시작부터 불리했던 나의 마음은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어떻게든 한국인 다운 사람이 되려고 했으나 늘 그랬던 것처럼 효과는 없었다. 내세울 만한 특기나 장기도 없던 나는 늘 혼자서 지내는 것이 큰 타격으로 다가왔고, 사춘기를 맞이하면서 우 울증으로 변했다. 참다못한 부모님은 나에게 상담을 권하였고 얼마동 안은 계속했으나 변하는 것 없이 나날이 자나가니, 자연스럽게 그만두 게 되었다. 나의 미래는 어두워보였다.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에는 출구는 어디에도 없었고, 조만간 그 터널을 벗어날 수 없던 것처 럼 보였다. 대학 생각은 둘째 치고 나에겐 고등학교 때가 걱정되었다. 공부하는 시간이 늘음은 물론이요, 모르는 사람들은 더더욱 늘어나버 린다. 그 무섭다는 고3을 넘어서서 대학을 갈 수나 있을까 하는 생각뿐 이었다. 부모님의 걱정은 두말할 것도 없이 깊었다. 장님인 마냥 앞을 보며 살 수 없는 나의 모습을 보며 우리 부모님은 속이 타들어 갔다는 320 재외동포 문학의 창

321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기가 죽고 자신감을 잃은 나는 어깨와 허리 가 구부정하게 휘어갔고 나는 나 자신의 가치를 상실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상상하지도 못했다. 하 지만 가장 뜻하지 않던 때에 답은 찾아온다고, 그것은 갑작스럽게 나타 났다. 재작년 여름, 미국으로 가족여행을 떠난 우리 가족은 잠시간 대 부님 댁에서 지내게 되었다. 몇 주후, 아버지께서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셨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니? 그 한마디에 솔깃해진 나는 좋다는 대답을 했고, 6주 만에 미국으로 이민을 오고 살게 되었다. 미국으로 간 나의 생활은 정말로 한국의 정반대였다. 한국에선 친구 하나 만들지 못했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들의 사이에 둘러싸였 고, 그렇게 길게 느껴지던 점심시간은 너무나도 짧아졌다. 매일 나는 점심을 사람들과 함께 나무 밑에서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잊으며 떠들고 얘기를 하고 웃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던 적던, 친구가 되는 것 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혼자서 기나긴 시간을 숟가락과 노는 시 간이 없어진 것이다. 잠깐 돌아보면, 이것은 여느 청소년의 일상에 지 나지 않는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한국에선 겪어보지 못한 평범함 은 나 에게 너무나도 큰 변화였다. 그런 환경 속에서 성적은 자동적으로 올라 갔고 학교를 가는 것이 거북하고 싫었던 나는 순식간에 학교 가는 것이 중고등 부문 321

322 하루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 되었다. 나의 말을 들어주고 존중해주는 사 람들과 함께, 나는 인생이 새로 시작하는 듯한 느낌이었고, 그리고 무 엇보다 내가 있어야 할 곳에 돌아왔다 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고, 그것 을 믿기 시작했다. 왜 그랬을까? 명백히 한국인인 내가 어째서 미국에서 더 적응을 잘 했을까? 미국에서 태어난 나는, 그쪽의 국민성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 다. 한국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낯설면 거부하는 일면이 있다. 어린 내 가 어떻게든 친구를 만들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접근을 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너 누구니 와 함께 이상한 눈길이었다. 미국에선 모르는 사람하 고 곧잘 인사를 주고받던 나는 한국에서 대화가 성립이 되지 않자 그만 그 사람을 멀리하기 시작하였고, 문제는 거기서 부터 시작을 했다. 모 든 사람이 똑같은 반응을 보이자, 나는 금방 혼자가 되어버렸다. 정반 대인 국민성과 나는 조합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단도직입 적인 경향도 도움이 되질 않았다. 속이 시원하다고 할 수 있는 한국인 들은 거의 외국인인 나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불쾌한 깨어남에 지 나지 않았다. 싫으면 싫다고 단호하게 거부하는 한국 사람들은 내가 어 떻게든 끈질기게 얘기를 하고자 하면, 나를 너무나도 속 시원하게 거부 하거나 무시를 했다. 이러한 것 또한 미국과는 정반대의 것이라 적응을 하지 못하였다. 한국 사람들이 곧 잘 말하기를, 미국사람들은 속을 알 수 없다 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에게는 그 작은 감춤 이 너무나도 당연한 예의였다. 곧잘 자신의 속을 내보이지 않는 미국사 람들은 처음엔 가볍게 지내다가도 만약 싫은 기색이 있다면 서로 거리 322 재외동포 문학의 창

323 를 두고 멀어진다. 한국사람들이 보자면 정말로 답답한 인간관계일수 도 있으나 오히려 그 답답함이 더 편했다. 그런 나에게 갑작스럽고 직 선적인 한국 사람들의 거부반응은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이중 국적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것은 많은 갈등의 이유가 되었다. 어디까지나 한국인의 외모와 정신을 가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들하고는 교류가 거의 불가능했고, 미국에서 생활을 하면서 오히 려 그쪽의 민족성과 생활이 편하게 되어버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 쪽으로 치우치자고 해도 그들의 눈에는 나는 이 민자 이고 한국인 이지 미국인 이 될 수가 없다. 그 사실을 거부하고 생활을 하고 산다고 해도 그것은 변함이 오지 않는다.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장소에 놓인 애매한 위치인 것이다. 이제 곧 나는 18번째 생일을 맞이하게 되고 선택을 해야만 한다. 법적으로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 는 미국은 나에게 힘든 선택을 하게 만든다. 그것은 아마 한국은 전 국민이 알고 있을 국적의 선택일 것이다. 한쪽의 국적을 포기하고 단하 나의 시민자가 되어야만 하는 힘든 선택이다. 물론 이것은 법적인 것으 로서 민족적으로 문제가 없고 누가 보든 나는 한국인 이지만, 포기 한 다는 단어는 마치 한국인인 나를 지워버린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버 린다. 바보 같은 고민이지만 생각만큼 국적을 포기한다는 생각이 가볍 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느 한 쪽에도 편안하게 기댈 수 없는 나는 둘 중의 하나가 지워지면 그 중점을 잃어버리게 되어버리니, 그렇게 가볍 게 생각이 되질 않게 되어버린다. 중고등 부문 323

324 앞에서 말을 했듯이, 미국에서 지내는 한국인의 수 그리고 다른 이민 자들의 수는 많다. 그리고 이중적인 국적을 사진 사람들도 적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을 한다. 그중에서 나와 같은 상황이 아니더라도 같은 고민 을 하는 사람 수 또한 있을 것이라 예상이 된다. 자신의 뿌리와 근원,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듯한 상황과 특성. 상반되지만, 결코 어느 한쪽 에 치우칠 수 없는 애매한 장소. 그리고 결국은 그곳에 있을 수 밖에 없는 가볍지만 무겁기도 한 선택. 이 모든 것들은 나에게만 해당이 된 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기적인 생각일 것이다. 이 순간 그리고 계속 나 는 이 고민을 계속 할 것이고, 만약 내가 하나의 국적을 포기해야만 하는 때가 온다면 이 고민은 그 후에도 나를 괴롭힐 것이다. 사소한 생각일지도 바보 같은 답답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생각과 철학, 무려 사는 방식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한 사람의 정체 성은 중요하다고 생각을 한다. 어느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는 흑도, 백도 아닌 회색에 있는 나로서는 이 한순간의 선택이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 지지만 언젠가는 해야하는 선택임에는 다름이 없다. 지금은 혼란스럽 고 어지럽지만 언젠가는 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내가 올바른 선택 을 할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324 재외동포 문학의 창

325 우리는 사춘기! 장려상 문정희(베트남) 까악 어떻게 나 어쩜 좋아?! 뭐가 어떻게 어떠하긴. 2009학년도 나는 어엿한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처음 중학생 교복을 입었는데, 역시 초등교복과 달리 어딘가가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초등학생들이 진심으로 언니, 누나로 바라봐준다는 점에서 무척 뿌듯하였고요. 간단히 우리 학교를 소개하자면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 지 1,2,3층으로 붙어있는 짬뽕학교여서 그런지 나와 서로 다른 반이 된 은지는 오빠들이 멋있고 어쩌고 하며 쑥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합니 다. 대체 왜 쑥스러워하는 건지 선머슴 같은 성격을 가진 전 이해가 전혀 안가는 행동에다가 왜 오빠들을 보고 헤벌레 침까지 흘리며 웃는 지,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내게 은지는 여우처럼 눈을 치켜들어 쏘아보며, 넌 쑥스러움이라는 게 전혀 없니? 라며 무섭게 눈을 올렸습니다. 안 그래도 큰 은지의 눈을 볼 때마다 무서운데 바다같이 넓은 눈을 여 우처럼 올리다니 그 순간 저의 눈에는 은지가 백년 묵은 구미호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은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요. 그렇게 우리가 티 중고등 부문 325

326 격태격 싸우는 순간 거인같이 키가 큰 오빠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우 리는 제각각의 말을 했지요. 외모를 중심으로 두는 은지는 여러분의 생 각처럼 멋있다 라며 내게 귓속말을 해주었고 전 고등학생 이라는 말 과 함께 은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렇게 우린 봄 꽃피는 중학교를 보냈 습니다. 얼마 후. 으앙 난 죽었다고!! 어떡해 하필이면 우리 담임이 사회냐!!!!!!! 크큭 사회선생이냐? 웃음이 나와?! 니 친구는 지금 사회에 완전 미쳐있구만 그 친구의 담임이 사회라니!!! 으흐흐흐흐 나의 사랑스러운 친구여 내가 솔직하게 말해줄까??? 뭘 솔직하게 말해? 7학년 담임 중에서 너희반이 제일 불쌍한 반이라는 거. 이씨, 야! 너 가! 너희 반에 가! 으흐흐흐, 친구 희망을 버리지 말게!! 풋하하하. 안 그래도 담임이 학년주임에 다가 담당과목이 사회라는 게 무지 마 음에 걸리는데 은지는 기껏 위로한다 치고 한다는 소리 7학년 중에서 우리 반이 제일 불쌍한 반. 저게 친군지 원순지 이럴 때면 강철 한 주 먹으로 웃음을 두 손으로 막으며 걸어가고 있는 은지의 머리를 때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왜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을 한다는 것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으실 것입니다. 성격이 쿨 하신 분들은 담임이 학년주임이면 어때? 라는 생각을 가 지고 있으실 수 있겠지만, 성격 자체가 다혈질 면이 있는 저는 처음 326 재외동포 문학의 창

327 저의 담임선생님을 보는 순간 나무늘보가 생각나 지루해 죽는 줄 알았 습니다.(내가 아닌 다른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커다란 키에 번뜩이는 안경을 쓰고 있는 번듯한 몸체와는 달리 여자같이 조근 조근한 말투와 거북이와 달리기 경주를 하여 이길 수 없을 만큼의 느릿느릿한 말 그리고 느릿느릿한 말 덕분에 우리 반 선생님이 충청도 사람이라고 착각하신 분들은 정말 큰 착각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반 선생님의 지역출신은 다름 아닌 서울 (도덕선생님께 이야기를 들었을 땐 충격적이었다. 나도 우리 반 선생님이 충청도 사람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뭐 그래도 지금은 어느 정도 정이 들어서 수업시간마다 여유로운 유 머도 날려주시는 덕분에 처음과는 달리 선생님을 시각적으로 보는 태 도는 달라졌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우린 시간이 점차 지나자 꼬르륵 소리를 내는 배를 움켜잡고 교복치마를 입은 상태에서 죽기 살기로 급식실로 뛰었습니다. 도중에 넘어질 뻔도 하였지만 우린 선배들께 줄을 내놓기가 싫었기에 죽기 살 기로 뛰고 또 뛰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발 늦은 건걸까요? 이미 중학생부터 고등학생선배들이 줄을 서고 있었습니다. 쩝. 오늘은 급식 빨리 못 먹겠다. 응 그래도 뭐 어때 멋있는 선배들이 있는데! 그 상황 속에서도 은지는 키가 훤칠한 선배들을 바라보았습니다.(이 때, 난 내 친구 은지의 성격이 단순한 건지 긍정적인건지 생각을 해보 기도 하였다.) 멋있는 선배들 감상보다는 난 급식이 중요해 아침부터 계속 배고팠단 중고등 부문 327

328 말이야. 야! 너 어떻게 애가 먹을 거 밖에 몰라? 이제 남자들의 시선도 좀 보고 느끼란 말이야. 훗 느끼기는 개뿔. 대체 뭘 느껴보라는 건데? 전 은지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리고 은지는 절 답답하다는 듯이 큰 눈동자를 가늘한 실처럼 감았구 요. 뭐 그래도 은지의 행동에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갔습니다. 왜냐하면 제자신이 생각해보아도 주변의식 자체는 하나도 없거든요. 누가 누구 를 욕하든 누가 누구의 패션을 욕하든 전 앙갚음을 하거나 마음에 담아 두는 대신 내가 뭘 하든 이라는 강철한 생각으로 버텨왔습니다. 그래 도 지금은 예전처럼 주변의식 자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뿐이지. 그러니 얼굴도 예쁜 만큼 주변 신경도 많이 쓰는 은지의 입장에서는 전혀 절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겠죠. 어! 언니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우리가 티격태격 싸우고 있을 때 봉사부에서 우연치 않게 만난 고3 언니들 그중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언니가 지나갔습니다. 우리가 그 언니를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친한 선배가 생 겼다는 것에 좋아하였고, 두 번째는 언니가 예쁘다는 것에 좋아하였 습니다. 그리고 우린 예쁜 언니선배가 지나갈 때 마다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 하고 서로 소근 소근 거리며 언니 너무 귀여워 응, 그리고 너무 예쁘 지 않어? 저 얼굴을 내 얼굴이랑 바꿨으면 좋겠다. 라며 예쁜 얼굴을 328 재외동포 문학의 창

329 가지고 있는 선배언니들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리고 우린 일을 점점 저 지르게 되었습니다. 토요일은 CA활동이어서 사복을 입고와도 괜찮습 니다. 이때를 노려 우린 이쁜 옷을 한껏 입고 학교에 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일이 벌어지고 만 것입니다. 은지가 저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옆에서 조잘 재잘 같이 웃 고 떠들던 예림이는 야! 너희들 어디가!! 나도 같이가!! 라며 우리 둘을 뒤따라왔습니다. 그리고 은지는 죽일 듯이 쫒아오는 예림이를 뒤 로 한 채 화장실문을 잠근 동시에 쭈그려 앉아 가방을 뒤지기 시작하였 습니다. 게다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쫓아오던 예림이는 화장실 문을 두드리면서 야 니들 뭐하냐니깐!? 대첼 뭘 하길래 그래? 라며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난 그런 예림이가 측은해 보여 화장실문을 열려고 하였 지만 살벌한 은지의 손은 피해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예림이의 고함을 뒤로한 채 저도 화장실 타일에 같이 쭈그려 앉아 은지 가 뭘 하는지 지켜본 결과 은지의 가방에서는 여러 가지 색깔을 띈 화 장품들이 줄을 써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 뭐해? 혹시 화장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지?? 설마 하는 물음에 은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응 화장하려고 가져왔어! 라며 아주 당당히 나의 물음을 간단히 넘 겼고, 은지의 당당한 행동에 난 어쩔 줄 모르며 너 미쳤어!? 너 아직 중1밖에 안됐어!! 아직 넌 14살밖에 안됐다고, 너 언니들한테 찍히고 싶냐? 라며 은지를 나무라했지만 은지의 대답은 더 확실해진 체 저의 귀에 들어왔습니다. 왜? 14살이면 화장하면 안 돼는 거야? 그런 건 아니잖아, 한국에 있는 여자애들 이만 때면 화장하고 돌아다녀 그리고 중고등 부문 329

330 언니들한테 찍히지 않으려고 화장실에 숨어서 하고 있는 거잖아. 순간 기가 막혔습니다. 은지의 대답은 저의 입을 꾹 다물게 하였고 은지는 아무도 모르게 비밀스러운 화장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음 니 생각엔 투명 립클로즈가 좋을 것 같아, 분홍빛 맴도는 립클 로즈가 좋을 것 같아? 둘 다 바르던가!. 그럴까? 너 혹시 거울 있냐? 있기는 선머슴 같은 내가 거울 같은 게 있을 꺼같냐? 쯧쯧 너도 너가 선머슴 같다는 걸 알고 있구나. 저걸 그냥. 순간적으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두를 뻔하였다. 하지만 은 지는 나의 주먹 따위는 무섭지 않은지 은지는 계속하여 분을 바르고 립클로즈를 바르며 마지막 단계 향수까지 뿌리며 일어났습니다. 이때 저는 드디어 냄새나는 화장실을 나가는구나. 라는 생각에 허겁지겁 화장실 문을 열었지만, 은지는 있지, 나 머리 묶는 게 좋을 것 같아, 푸는 게 좋을 것 같아? 라며 저를 불러 세우는 게 아니겠습니까? 성질 더러운 은지에게 욕을 한 다발 듣기 싫어서 할 수 없이 묶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러면 청순함과 섹시함이 조화를 이룰 거야 라며 은지의 기 분에 장단을 맞추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은지는 저의 한마디에 힘을 얻 었는지 서둘러 머리를 묶고 화장실 문을 여는 동시에 예림이는 여태 기다렸는지 여우같은 눈초리로 너희들 뭐했어? 그리고 은지 너한테서 향수냄새난다? 라며 다짜고짜 은지와 나를 잡으며 정보를 캐물으려 하 자 단순하지만 예리한 예림의 조사에 당황한 은지는 그런가? 난 아 330 재외동포 문학의 창

331 안 뿌렸는데. 라며 서둘러 변명꺼리를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때 저의 머릿속에 꽂히는 단순한 예림이를 따돌릴 변명거리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전 잊을 새라 예림이에게 연기를 들어갔습니다. 저기 예림아 우리 좀 나줄래 그럼 내가 얘기해 줄게. 싫어, 얘기를 먼저해줘 그럼 놓아 줄게. 별거 아니야 우리 그냥 화장실에서 잠깐 싸운 것뿐이야? 음,.. 그러니깐 아까 전에 은지가 나보고 저번 주에 꿔갔던 돈을 이 자까지 합쳐서 내놔라고 했는데 내가 그런 말할려고 이렇게 사람 화장 실에 끌고 왔냐면서 째려봤거든 내가 그걸 어떻게 믿어? 순간 전 은지의 손길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은지에게 예림이가 눈 치체지 못하도록 살짝 눈을 감아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미련곰탱이 같 은 은지가 오늘 만큼은 상황 파악을 하였는지 내게 알았다는 신호를 보내며. 이 년이 꼴아보잖어 그래서 욕 좀 써가면서 말다툼을 쫌 했지 그래 도 화해했으니깐 괜찮아. 안 그러냐, 나의 영원한 친구 문정희? 스읍.. 니들 수상해. 아무리 봐도 수상해. 수상하긴? 자, 이제 가자! 수업 늦었다고요, 늦었어~ 흐억 벌써 9 시다. 은지와 저는 눈치 100단 예림이의 수사를 얼떨결에 넘겨 각자 CA반 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같은 봉사부 은지랑 전 안도의 한숨을 내쉬 며 예림이의 예리한 눈을 주의하자며 지친 듯 의자에 털썩 앉았습니다. 중고등 부문 331

332 조금 시간이 지나자 그냥 있으니 심심하여 봉사부를 휘젖고 다니다가 8학년 언니들에게 쪼르르 달려갔습니다.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를 반듯이 하자 날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던 은지는 순식 간에 뛰어와 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언니 안녕~!? 어. 그래 근데 언니 오늘도 화장하셨어요? 오늘? 아니 안했어. 아, 그렇구나 언닌 화장 안하셔도 피부가 하얗네요. 입술도 빨갛고. 그래? 솔직히 피부는 원래 하얀 타입이고 입술은 좀 했어 흐흐흐 헤헤 저도요! 뭘? 저도 이거. 너도? 립클로즈 발라달라고? 아니요. 저도 오늘 화장했다고요. 순간 은지의 말에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저는 경악하며, 은지를 바라보았습니다. 게다가 은지의 당당하고 힘찬 대답에 언니들은 정말 황당하고 당황 했는지 서로 눈치를 보며 말까지 더듬었습니다. 그, 그래 그렇구나. 이런 기어코 은지가 사고를 치는 군요. 그것도 대형사고로 솔직하게 말해서 도도하고 지적여보여도 은지도 은근 단순 무식하여 332 재외동포 문학의 창

333 이런 일을 잘 벌입니다. 그래서인지 어느새 은지 사고 처리 담당 매니 저역할도 제가 하고 있고요. 아하 은지 너도 참. 아니에요 언니 그냥 영양제 바른 것뿐이에요. 그치 은지?? 야 너 나랑 같이 있었잖어. 나 립클로즈 바르는 거 봤잖어. 야 너 왜 그래? 영양제를 발랐는지 립클로즈를 발랐는지 너 자신도 모르면 어떡해? 그런 넌 왜 그래? 너 치매냐? 네가 립클로즈를 발랐는지 영양제를 발랐는지 모르냐? 아직 중학생 1학년 밖에 안됐는데 치매는 무슨 니가 잘못보고 바 른 거겠지. 하하 그, 그런가??? 혹시 내가 치매가 아닐까? 나 왜 이러지. 역시 저의 미끼에 한 번에 걸려들었습니다. 다른 애들 같았으면 벌 써 싸우고도 남을 일인데 말 한마디로 그대로 믿어버리는 팔랑귀 은지 는 싸울 이유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씩 은지의 팔랑귀를 역이용해 사용하기도 하죠. 은지는 여태 그걸 모르고 있겠지만요. 그리고 나선 우린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때마침 은지처럼 큰 눈과 날씬한 봉사부 선생님이 들어오셨습니다. 저기 얘들아 오늘은 봉사하러 밖에 안 나갈 꺼야 너희들도 며칠 있 으면 중간고사도 다가오고 우리 12학년 언니들도 대학 준비를 해야 하 니깐 이제 봉사부 올 때마다 중간고사 공부할거 가져와서 틈틈이 공부 할거니깐 이제부터 문제집을 가지고 오면 좋을 것 같아 선생님 저흰 선생님의 의견을 진심으로 사양하겠습니다. 중고등 부문 333

334 저도요 집에서도 공부하는데 학교에서도 공부하라고요? 그건 너무해요 차라리 영화나 보죠? 영화 보는 조건이 안 되면 과자파티나 하고요 선생님의 말에 때를 쓰는 우리들을 그저 선생님은 눈여겨 볼 분이었 습니다. 할 수 없이 저희들은 앉아서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억울함은 대체 어디다 분풀이를 해야겠습니까? 토요일에도 학교를 나 온다는 것이 지겨울 지경이어서 그나마 밖에 나가서 한다는 봉사부를 선택했는데 공부를 하자니요. 다른 부들은 영화를 보거나 과자파티에 한참 들떠있을 텐데요. 공부를 죽어라 싫어하는 저희들에게는 선생님 의 선언이 왠지 독재적으로 들려왔고 꼭 우린 독일인들에게 당하는 유 태인 같았습니다. 물론 히틀러는 우리 봉사부 선생님이고요. 예쁜 꽃이 제일 독하다던데 그 말이 딱 맞군. 아. 기분 참 더럽네! 토요일에도 공부라니. 어차피 시험이 이번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계속 학년 올라 갈 때마다 있을 텐데. 내 말이 집에서도 공부하랴 바쁜데. 여기서 잠깐 여러분들은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저희가 말은 이 렇게 했지만 집에서도 공부하느라 바쁜 것은 아닙니다. 물론 거짓말이 죠. 선생님의 마음을 바꾸기 위한 유치하고도 치사한 거짓말을 제대로 연기에 몰입을 하면서 한거죠, 뭐 그래도 완전 연기는 아니었을 것이었 습니다. 어느 정도는 솔직함과 진심이 담겨 있거든요. 우린 그저 히틀러 봉사부 선생님의 어명에 따라 열심히 공부를 했 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요? 옆에서 국어 공부를 하고 있던 은지가. 334 재외동포 문학의 창

335 으악 내 눈! 정말 미치겠다. 이 검은 것들이 줄줄이 늘여놓고 있으 니깐 내 눈이 썩어 들어갈 것만 같해! 안구 정화를 좀 해줘야겠어! 나 가자 어딜 아직 쉬는 시간되려면 5분이나 남았어. 괜찮아 5분이면 어때 남아도는 게 시간인데. 야 시간이 금이라는 이야기도 모르냐. 나 그딴 거 몰라 난 그딴 거 모르니깐 매점 가서 안구 정화를 좀 하자구요. 너 혼자가 5분 지나면 갈래 봉사부 선생님한테 예쁨 받을 려고 얼마 나 착한 척 노력했는데 이제 와서 나쁜 짓을 하면 내 노력이 물거품이 되잖어. 게다가 안구 정화하는데 왜 매점에 가는데! 아 진짜 그럴래? 봉사부 선생님은 언제 어떡해 어디로 다른 학교로 갈지 모르는 데 난 너랑 지속적으로 우정을 쌓아 갈 건데 너 한순간에 우정을 휴지통에 버리겠다는 거냐? 그건 아니지만, 내가 봉사부 선생님께 예쁨 받으려고 안하던 착한 척을 했는데 너 때문에 물거품이 됐어 이씨. 역시 넌 우정을 선택했었어. 자 빨리 갔다가 오자. 마지못해 은지의 말대로 매점으로 발걸음을 향했습니다. 그리고 왜 은지가 안구 정화로 매점을 갔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멋있고 키 큰 오빠들과 예쁜 언니들이라 해도 베트남의 뜨거운 햇볕은 호랑이와 같은 무서운 존재거든요. 그래서 매점이라는 요상한 물건들을 파는 곳 에서는 예쁜 언니들과 함께 멋있는 오빠들이 줄지어 있기에 은지가 절 이리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여기서 혼자 가도 될 것을 왜 저를 끌고 중고등 부문 335

336 갔을까 하는 분들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윤 정말 간단합니다. 멋있는 오 빠들과 예쁜 언니들 사이를 혼자 비집고 매점에 들어간다는 게 쑥스러 웠던 것이죠.) 역시 안구는 꽃미남, 꽃미녀의 얼굴을 보고 정화를 시켜주어야지 맑 다니깐 너 사이코 같아. 생긴 건 멀쩡한 애가 왜 이러는지 몰라. 사이코라도 괜찮아 안구 정화를 마쳤으니 빨리 봉사부로 가자고 허무하게 안구 정화만 하고 가냐? 너 때문에 시원한 에어컨 바람 버리고 뜨거운 바깥으로 나온 불쌍한 어린양이 안 보이냐? 뭐야 그 징그러운 눈빛은. 니가 원하는 걸 내가 해줬으면 너도 내가 원하는 걸해야 하는 거 아니냐? 야 솜방망이 좀 줘라 내 귀가 환청을 들었는지 니 말이 아이스크림 사줘 라고 들린다. 역시 눈치 하난 빠르네? 들어가서 사가지고와 초코맛 아이스크림으 로. 나의 철학적인 장사에 은지는 큰 눈을 내게 흘기며 마지못해 매점으 로 뛰어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사왔습니다. 헤헤 내 돈으로 사먹는 아이스크림보다는 남의 돈으로 먹는 아이스 크림은 달구나. 아 열 받아. 어엇. 야 조심해. 순간 전 은지의 팔뚝을 잡고 제 곁으로 땅겼습니다. 이런 상황은 드 336 재외동포 문학의 창

337 라마 속에서도 나오듯이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을 해줘야 하는데 솔로인 저희들은 그럴 형편이 아니었기에 저희들의 형편을 아쉬워했 습니다. 에구 에구 괜찮냐? 으응 근데 아까 지나간 오빠 멋있지 않냐? 너 지금 이 상황에서 저 오빠가 중요하냐? 니 목숨 구한 니 친구가 중요하냐? 멋있는 오빠가 더 중요해. 맞어, 너 왜 잡아땡겼어? 그대로 나뒀으 면 드라마나, 인터넷 로맨스 소설처럼 나도 그렇게 됐을 건데. 넌 내 생명의 은인보다는 친구 돈이나 뜯어먹고, 인생 가로막을 못된 악마야 이게 살려줬더니 벼락 맞을 소리하고 있네. 어디 그 소릴 선배들 앞에서도 당당히 하나 보자 정말 내가 본 오빠들 중에서 키도 크고 잘 생겼단 말이야 너 정신 나갔냐? 드라마랑 로맨스 인터넷 소설이란 건 허구로 만들 어낸 이야기일 뿐이야. 실제로 일어날 가망성이 1%라도 없다고. 그리 고 너 저 오빠랑 부딪혔으면 저승길 먼저 갔을 거다. 저승길은 아니지, 꽃밭이라면 몰라도 제대로 돌았구먼 너 저 오빠랑 부딪혔으면 욕 엄청 들었을 거라 고! 그런가? 그래도 내 얼굴 정도면 괜찮지 않아? 그건 니 착각이고 암튼 희망사항을 무모하게 현실에서 펼치려고 하지마. 무모하다니! 용감한 거지! 중고등 부문 337

338 에휴 한마디도 안 지려고 저렇게 애를 쓰니 한번만 더 말하면 은 지의 대꾸에 화산이 폭발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요렇게 말 하고 저렇게 말하면 또 이렇게 말하고, 말 못해서 죽은 귀신이 달라붙 었는지 왜 그리 수다에 열광하는지 어떨 땐 귀가 멍멍해 질정도입니다. 그리고선 우린 봉사부를 향해 발길을 빠르게 돌렸지만 봉사부로 돌아 왔을 땐 선생님께 꾸중을 듣고 제자리에 앉아 수업이 마칠 때까지 앉아 서 공부만 하고 있어야 됐습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강물처럼 흐르고 흘러 드디어 수업이 마쳤습니다. 끝났다 으함 드디어 끝났네. 이제 집에 가자. 토요일에도 공부하는 사람들은 우리밖에 없을 거야 피곤하다 빨리 가자 우린 약속이나 한 듯 자리에 일어섰고, 햇살이 비추는 사이로 집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일요일은 내 외모가 어떠냐? 하며 거울을 보며 그럭저럭 잘 지냈습 니다. 그리고 하루가 빨리 간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듯이 벌써 월요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다녀올게요. 오빠!!! 오빤 자전거 타고 오니깐 나 먼저 출발 한다. 어! 매일같이 언제나 느려터진 우리 오빠. 다른 오빠들처럼 듬직한 기색도 없다. 그래도 쉬는 시간 마다 내 반에 찾아와서 인사를 건네주 지만 너무 정도가 심해서 대부분 남자애들이 너 저 형이랑 사귀냐? 라고 묻습니다. 그럴 때면 우리 친오빠다 라 338 재외동포 문학의 창

339 고 대답을 해주기도 하지만 거의 무시하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분 이 나쁠 때는 심하게 발끈합니다. 그것도 학교가 우주로 날아갈듯이 소 리를 꽥꽥 지르면서 말입니다. 얼마나 컸으면 서로 다른 반인 은지가 헐레벌떡 달려와 뭐야 너 또 싸우냐? 라고 다그치며 오기도 하지만 적응을 완전히 했는지 이젠 달려오지도 않습니다. 다만 같은 반인 예림 이만 배꼽이 빠지랴 웃을 뿐입니다. 웃지마! 크크 그래도 너무 웃긴 걸 어떻해. 하나도 안 웃기니깐 그만 웃어! 크크크크 다시 생각해봐도 너무 웃겨 안 웃겨! 그러니깐 조용히 해. 응 크크크. 이런 웃음폭탄이 너무 급속도로 예림의 몸에 펴졌군요. 이럴 땐 피 하는 게 제일 안전하고 좋은 방법입니다. 전 예림의 곁을 떠나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무려 4교시가 끝나갈 때까지 배고프다고 야단법석 인 배를 움켜잡고, 수업을 들었습니다. 점심시간이 다 되니 알아서 스 물 스물 오는 은지도 배가 고팠는지 야 나 배고프다 빨리 좀 가자 라며 힘없이 말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전 배고파도 힘없는 은지와 달리 아주 힘찬 발걸음으로 은지의 손을 잡고 배고픈 하이에나마냥 뛰어가 줄을 섰습니다. 다행이기도 오늘은 줄이 길게 이어지지 않아서 눈 깜짝 할 틈도 없이 배고프다고 꼬르륵 울어대는 배를 달랠 수 있었습니다. 꿀맛이다. 응 어쩌면 꿀보다 달지도 모르겠는데? 중고등 부문 339

340 흐흐흐 그럴지도, 근데 너 오늘 왜 이렇게 안 웃냐? 평소 같았으면 매일같이 싱글벙글일텐데? 밥 다 먹고 얘기 해줄게. 안 웃는 이유를 밥 다 먹고 이야기하다니요? 그냥 이러이러한 일 때 문에 못 웃는다고 간단명료하게 말하면 될 것을 말입니다. 그래도 은지 가 중요하다 듯이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밥만 그저 묵묵히 먹었습니다. 야 너 내 물음에 답해야지 여기선 말 못해 조용한 도서실에 가자 응 은지의 말대로 우린 조용한 도서실에 들어가 구석에 틀어 앉어 이야 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래 이제 내 물음에 답 해봐 저기 이거 일급비밀이다. 응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사실은 일요일 날 컴퓨터를 하다가 갑자기 문뜩 양아치가 되고 싶 어서 검색창에 양아치 되는 법 이라고 쳐봤더니 몇몇 지식인들은 인 생 망친다고 그러고 몇몇 지식인들은 괜찮다고 그러는데 난 정말 양아 치가 되고 싶거든 그래서 양아치가 될까 말까 고민 중이야. 뭐야 그럼 그런 이유로 여태 우울모드였던 거야? 응 너도 내 심정을 알게 되면 그렇게 황당한 표정은 안 지을걸! 그럼 넌 어는 쪽이 되고 싶은데 지식인들 상관하지 말고 너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잖아. 340 재외동포 문학의 창

341 그러곤 싶은데 인생 망친다잖아. 그러면 양아치 안 되면 되겠네. 그래도 내 마음은 양아치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빠졌는데? 그럼 양아치가 되던지. 휴 내가 간단명료한 너한테 물어본 내가 잘못이다. 그러면 좋은 날라리 하면 되잖아, 니가 양아치의 고정관념을 깨면 되지않나? 넌 돈 안 뺏고 애들한테 욕 안하고 잘 대해주는 슈퍼우먼 양아치가 되면 되지 않나? 인생도 망치기 싫고 양아치는 꼭 되고 싶으 면. 내가 왜 애들한테 욕 안하고 잘 대해주는데 나한테 이득이라는 건 전혀 안 오는데? 니가 말하는 이득은 물질적 이득이겠지. 니가 애들한테 욕 안하고 잘 대해주면 애들이 반드시 훗날 너한테 도움을 줄걸? 얘가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는구나? 요즘 애들 중에서 그렇게 생각 하는 애들은 하나도 없어. 그렇게 한다면 나한테 오는 이득은 물질적 이득도 그렇고 정신적 이득도 그렇고 다 없을걸. 그럼 못된 양아치하던가! 요즘 애들이 물질적인 이득을 요구하면 너도 그렇게 따라가면 되잖아. 그래 나도 너랑 생각이 같아, 하지만 말이야 우리학교에는 순양아 치가 없다고! 우리학교에 순양아치가 없는 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순한척하긴 순양아치가 우리학교에 있어야지 내가 그 위대하고 도 고대한 분들께 양아치의 기본적 정신을 배우지 중고등 부문 341

342 드디어 머리가 돌았구만 너 아무래도 하얀 병원가야겠다. 손이랑 발은 전부다 묵어놓고. 은지는 미쳐도 단단히 미쳤습니다. 중학교1학년이면 이제 막 선배님들한테 굽실거리고 잘 보이는 시긴 데 은지는 굽신거리기는 커녕 양아치가 된다고 선포를 하다니요. 더군 다나 유치원생들부터 고등학생들까지 같이 다니는 우리학교는 선배들 눈에 잘 띄기 때문에 언제나 행동을 조심해야합니다. 근데 여기서 화장 품사건에서 모자라 양아치 사건으로 신문기사 특종을 내다니요. 미친것도 한계가 있지만 간뎅이도 심하게 부풀어 올랐나봅니다. 그래서 말인데 너가 나한테 도움을 줘야겠어. 난 내 친구 인생을 망치고 싶진 않다. 야 니 인생이냐 내 인생 내가한다는데 너 왜그러냐? 그래도.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가는 거니깐 걱정 말고 나 양아치 되는 법 좀 가르쳐줘라 안 돼! 야 그냥 가르쳐달라고. 야 니가 인터넷 찾아서 행동해 그러면 되잖아. 왜 나한테 가르쳐달 라고 해? 당근이 우리 집은 인터넷이 잘 안되니깐 그렇지 그리고 너 한국에 있는 친구 중에 양아치 한 명 있다메? 바보야 그건 완전 거짓말이지 그걸 믿냐? 그래도 같이 찾아줘라 342 재외동포 문학의 창

343 아씨 진드기 같은 년 그래 찾아준다 찾아줘 그 대신 나중에 나한테 뭐라 하지마라. 응! 고맙다 친구. 일단 나도 예전에는 양아치 되고 싶어서 조사한 게 있었거든 그거 알려줄게 일단 양아치 되는 건 되게 간단해 무표정, 절대 웃지 않음, 싸움 잘함, 잘 논다, 선생님한테 대들기. 그렇군. 선생님한테 대들기는 좀 그렇지만 나머지건 할 수 있 을 거 같아. 으응 그렇냐? 응 아무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공부하러 들어가자 벌써 선생님 들 오셨겠다. 어쩔 수 없이 은지에게 양아치 되는 법을 알려주었고, 우린 서로 각 자 다른 반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우린 일주일 내내 핸드폰으로 또는 인터넷으로 쪽지를 주고 받으며 양아치 되는 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정보를 각자 수집해 서 노트에 요약하여 은지에게 알려주었고, 은지는 모았던 정보를 곧바 로 실천하였습니다. 하지만 선생님한테 대들기는 은지도 무서웠나 봅 니다. 그것만큼은 절대 안한다고 한다니 완전히 간뎅이가 붓지는 않았 나봅니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적으로 흘러 드디어 중간고사가 다가왔 습니다. 하지만 중간고사를 다보고 나서 나온 말은 시험 대박 망했 다!!!! 하긴 다른 애들은 기말고사 시험공부에 매달려 있을 동안 은지 와 전 양아치 수색을 하느라고 정신이 팔렸으니 중간고사 점수가 잘 나올 리가 있나요 중고등 부문 343

344 물론 은지도 마찬가지로요. 시험 어때? 알다시피. 역시 너도 망쳤구나 그럼 너도 망쳤냐? 당근이지. 근데 시험 치자마자 5분도 안 되서 점수가 나오다니 너 너희 엄마 한테 얘기 할거냐? 미쳤다고 얘기 하냐? 내 점수 우리 부모님이 아시면 난 이미 저승길 행차다 하긴 직접 만나보진 못했지만 너희 부모님 성격이 어떨 진 상상이 간다. 마귀할멈 마귀 할범. 그렇군. 걱정 마, 우린 아직 미래가 밝다고! 단순해서 좋겠다. 박은지. 세상 뭐있니?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거지!! 인생은 한번 밖에 없다고 죽을 나이돼서 놀려면 재대로 못 놀아. 꼭 어른 같다 말하는 투가? 헤 그런가? 시험을 망쳤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웃는 얼굴로 날 위로해주는 은 지. 뭐, 위로한답시고 어른스러운 말을 해대는 은지가 적응이 안 되지 344 재외동포 문학의 창

345 만, 아직까지는 은지마음에는 천사들이 살아 숨 쉬고 있나봅니다. 은지 시험 마지막 날이니깐 매점가자. 오옷! 니가 왠일로 나한테 먹을 걸 사주냐? 언제나 내 돈 뜯어 먹으 면서. 원래 기분이 꿀꿀 할 때는 달콤한 걸 먹어줘야 되. 맞아 맞아 일리가 있는 말이군. 자기가 하고 싶은 오버는 오버대로 다하면서 뛰어가는 은지는 역시 내 친구답게 미끄러운 타일바닥에 넘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스읍 완전 아퍼! 타일에 넘어지고 안 아픈 애가 어딘냐? 아퍼 아퍼 아프다고!!!!! 어쩌라고! 아픈데 나보고 어쩌라고! 니가 넘어진거잖어! 그래도 아프다고! 조용히 해! 너 계속 그러니깐 아이스크림사줄 마음이 바뀌었어.. 아이스크림 사주고 싶지 않다는 말에 금세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 해진 은지 역시 내 친구답게 칠칠한데다가 단순하기까지 하니 이정도 면 내 친구로 딱 안성맞춤입니다. 성격이 더러운 건 빼고요 (근데 저 녀석 양아치 된다고 무표정 유지한다고 하지 않았나?). 너 무슨 맛? 초코! 좋았어! 아저씨 초코아이스크림 2개 주세요! 자~ 여기 맛있게 먹으렴. 중고등 부문 345

346 네! 감사합니다. 매점아저씨는 언제나 싱글벙글 이라니깐. 응 꼭 호호 아줌마 같아. 풋 아줌마는 아니다 아저씨이면 몰라도. 그, 그런가? 응 아 그리고 미안해. 뭐가 미안해? 나 양아치 안 할래. 뭐야?! 그럼 왜 중간고사동안 양아치 수색한 노력은! 너 그렇게 마 음 바뀔 거면 왜 양아치 수색하라고 심부름 시켰어! 너 때문이야! 내 중간고사 점수 돌려내. 으흐흐흐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잖아 앗! 야 나 스쿨버스 늦겠다! 나 먼저 갈께! 이씨! 너 내일보자! 내일 내손에 잡히면 죽을 줄 알아. 너의 손에 쉽게 죽을 박은지가 아니지! 아참, 넌 걸어 다니니깐 오 토바이 조심하고. 걱정 붙들어 매셔! 이 천하장사가 그깟 오토바이 때문에 병원에 실 려 갈 것 같냐? 크크크크, 그래 잘 가라. 버스가 떠나겠다고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면서 뛰어가는 은지는 화장 을 하고 욕을 쓰며 멋을 내는 여느 때와 달리 오늘만큼은 아름다워 보 였습니다. 역시 친구란 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해 주면서 지내는 게 진정한 친구라는 것을 이번 중학생이 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 346 재외동포 문학의 창

347 고 전 이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자는 다짐과 함께 햇살이 비추는 거리를 힘차게 뛰었습니다. 베트남이라는 나라 안에 있어도 친구가 있어 행복한 내일을 향해 서. 중고등 부문 347

348 나의 친구 첼로에게 장려상 이수정(미국)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너를 마지못해 연주하면서 쏟아내는 나의 온갖 불평불만을 너는 다 받아줬지. 너는 항상 차 트렁크나, 거실 구석에 거 칠게 쳐 박히곤 했지. 너는 나로 인해 뼈가 부러지기도 했었구나. 그리 고 내가 너에게 온갖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주었지만, 너는 한마디 불 평도 없었지. 너는 불평 대신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운 날이나 더운 날이나, 어디든지 나와 함께 해 주었지. 이렇게 착한 너에게 나는 너를 포기함으로써, 다시 한 번 큰 상처를 주었구나. 내가 너에게 상처를 주 고, 너를 슬프게 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야. 지금까지 정말 미안했 어. 나를 용서해 줄래? 네가 처음 우리 집에 오던 날을 기억하니? 아마 그때는 내가 3학년 이었다고 생각돼. 너를 만나기까지 정말 목이 쭉 늘어날 정도로 기다렸단다. 네 모습 을 처음 본 순간 나는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어. 색깔은 벌꿀과 같은 금갈 색을 띄었고, 긴 목과 네 몸의 멋진 곡선은 완벽 그 자체였어. 나 는 곧 바로 너의 은빛 머리카락( *첼로의 스트링)을 브러시(*활)로 빗 348 재외동포 문학의 창

349 질해 주었지. 그런데, 너는 나의 이런 마음도 몰라주고 싫다고 비명을 질렀어. 그 비명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나는 귀를 꼭 막아 버렸어. 그렇지만, 네가 싫다고 비명을 질러도, 내가 계속 너에게 빗질을 해주 었더니, 너도 점점 나에게 마음을 열고, 조금씩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 래 부르기 시작했지. 나는 너와 내가 한걸음씩 가까워지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되었어. 너도 분명히 그랬을 거야. 이렇게 우리는 둘도 없는 베 스트프렌드가 되었어. 그러나 그 후에 왠지 너를 좋아하는 나의 마음이 점점 식어가게 되 었어. 전에는 너를 연주 할 때마다, 항상 기쁨으로 흥분되곤 했는데. 하지만, 절대 한 번도 너를 싫어한 적은 없었다는 것만은 알아주길 바 래. 단지 몇 시간씩 앉아서 너의 머리를 빗질하는 것에 싫증이 났던 것뿐이야. 생각해 봐. 너도 누군가의 머리 빗질만하며, 몇 시간씩 앉아 있으라면, 피곤하고 짜증났을 걸? 점점 나는 우리 엄마가 네 이름을 말하기만 해도, 너를 노려보고, 너에게 성질을 부리게 되었어. 그렇지 만 이것만은 너도 인정해야 돼. 몇 년 사이에 나의 빗질 솜씨가 많이 늘었었다는 것을. 가끔은 네가 비명을 지르기도 했지만, 너는 거의 나의 빗질에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 잖아. 생각해보니, 우리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내가 중학교에 입학 한 후였던 것 같아. 처음에는 너를 학교에 데려가 친구들 모두에게 너 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려주고 자랑하고 싶었어. 물론 너도 노래를 잘 중고등 부문 349

350 불러 주었지만, 다른 첼로들의 소리가 너무 훌륭해서, 네 목소리는 단 지 오리가 꽥꽥거리는 것 같았어(미안!). 모두들 너하고 나보다 훨씬 우정이 깊었나봐. 우리도 질세라, 나는 더 열심히 네 머리를 빗질했고, 너도 더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위해 노력했지. 하지만, 중학교에 와보 니, 숙제와 시험의 양이 초등학교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 았어. 욕심이 많은 나는 이 두 가지를 다 잘하고 싶었지. 그러나 생각처 럼 쉽지는 않았어. 결국에는 너보다는 항상 학교 공부가 우선이 되어 너는 항상 뒷전이 되었어. 그러니 다른 친구들은 점점 우리를 앞질러 가고, 너와 나는 뒤쳐질 수밖에 없었나봐. 어려운 악보 앞에서 나의 빗 질과 너의 목소리는 점점 움츠려 들었어. 하지만 겨우 겨우 첫 콘서트 는 무사히 치렀지? 우리 둘은 무대 구석에서 줄곧 있었지만, 너는 크고 힘차게 노래를 잘 불러 주었어. 그것만으로도 만족 할 수밖에. 하지만 사람은 참 간사한 것 같아. 시간이 지날수록 왜 나는 너의 목소리가 돼지 멱따는 소리로 들려오는지, 결국에는 너에게 립싱크마저 시키게 되었었지. 단지 창피당하는 것만 모면하려고, 참 부끄러운 짓까지 했던 것 같아. 그래도 5,6학년 때 창피했던 것은 참을 만 했어. 저학년이었 으니까. 7학년부터는 립싱크로 더 이상 우리의 실력을 감출 수가 없었어. 7 학년부터는 지역 오디션을 치러야 했으니까. 오케스트라의 학생이면 누구나가 이 오디션에는 합격하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하잖아. 나도 예외 는 아니었지. 오디션에 꼭 붙어서 오케스트라에서 인정받고 싶었어. 그 해 여름부터 오디션 날까지 우리의 우정은 정말 깊어졌던 것 같아. 나 350 재외동포 문학의 창

351 의 빗질에 너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답해 주었고, 너와 나는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고 느껴졌어. 너와 함께라면 오디션 정도는 하나 도 두렵지 않았지. 게다가 엄마는 너에게 미끄러지지 말라고 새 신발(* 첼로가 미끄러지지 않게 해주는 도구를 표현)도 사주셨잖아. 너는 어 땠을지 모르지만 나는 우리가 오디션을 위한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다 고 생각되었어. 아니, 너와 내가 오디션을 위해 할 수 있었던 100%의 노력을 다 했다고나 할까?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오디션을 보러 방에 들어선 순간 왜 이렇게 떨리기 시작하던지. 다행히 스케일은 완벽히 마 쳤고, 이제 오디션의 가장 중요한 지정곡을 연주할 차례가 되었지. 내 가 마음을 가다듬고, 너의 머리를 빗질하니, 너는 너의 아름다운 목소 리를 과시하기 시작했어. 그런데 곡의 중간에서 너의 몸이 네팔에서 점 점 미끄러지기 시작하는 거야. 네 목소리는 점점 이상해지고 너는 더욱 나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어. 우리가 오디션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너는 그런 실수를 할 수가 있었니? 나는 오디션에서의 실수의 책임이 다 너에게 있는 것 같아서, 네가 정말 꼴도 보기 싫었단다. 네 코트(* 첼로 케이스)속에 너를 쑤셔 넣고 지퍼를 닿았지. 그리고 너를 등에 들쳐 업고 화가 나서 발을 쿵쿵거리며 건물을 뒤고 안 돌아 보고 빠져 나왔어. 그때 나는 너무 화가 나서 너의 새 신발도 잃어버리고 왔어. 차 트렁크에 너를 던지듯이 집어넣은 후 나는 너를 원망하며 엉엉 울었 었지. 그때는 내가 몰랐지만 너도 많이 속상했었을 거야. 네 새 신발도 잃어버리고 지퍼로 네 몸에 큰 상처까지 생기게 했으니 그리고 너무 늦었지만 네가 미끄러진 것은 네 잘못만은 아니었는데, 미안해. 오히려 내가 너를 꼭 붙잡아 주지 못해서 네가 미끄러졌던 것 같아. 누구의 중고등 부문 351

352 잘못이었든 우리는 합격자 명단에는 들수가 없었지. 다음해에 너와 나는 첫 번째의 실패에 굴하지 않고 두 번째의 기회 를 잡기로 했었어. 이번 오디션은 중학교의 마지막 오디션이기 때문에 우리는 꼭 붙어야 했지. 그런데 8학년은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바빠서 나는 너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 수가 없게 되었어. 당연히 너와 나의 관계는 점점 멀어졌고, 우리의 마음도 더 이상 예전처럼 통 하지 않게 되었지. 오디션 날은 정말 최악이었어. 나의 빗질에도 너는 전혀 기뻐하지 않고, 비명만 질러댔으니까. 음치가 따로 없었다니까. 두 번째 오디션에서 떨어진 후에도 나는 내가 너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 것은 잊고, 네가 다른 첼로들보다 싸구려라서 좋은 소리 를 낼 수 없었다고만 탓했지. 그렇지만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어. 모든 잘못은 다 나한테 있었다는 것을 말이야. 다만 자존심이 상하고 창피해 서 모든 잘못을 너에게만 돌렸었어. 이렇게 너와 나의 우정에 금이 갔는데도 나는 네가 쉽게 포기되지 않았어. 고등학교에 가서도 쭉 너와 함께 보내고 싶었어. 너,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아주 좋아하고 또 남들보다 잘 그리는 것 알고 있지? 그래 서 고등학교 스케쥴 짤 때는 정말 고민이 많이 되었어. 너를 포기하고 내가 잘하는 미술을 선택할까 말까하고. 사실 나와 너는 오케스트라에 서 그렇게 빛나는 존재는 아니었잖니? 그렇지만 나는 너와 다시 베스 트 프렌드가 되고 싶었어.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선생님과 함께 너와 친구가 되는 법을 배워나가기로 했지. 희망이 보였어! 우리는 예전의 352 재외동포 문학의 창

353 베스트 프렌드로 돌아가고 있었어. 콘서트에서도 우리는 환상의 콤비 였어(내 생각에는). 그러나 그 뒤에 연주하는 것을 들은 뒤로는 나는 확실하게 알게 되었어. 이제는 내가 너와 이별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말이야. 우리가 다른 아이들보다 너무 뒤쳐져 있어서, 도저히 앞설 수 가 없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어. 친구야! 정말 미안해. 너를 포기하게 되어서. 너도 내가 너를 포기하 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지? 나는 만약 이라는 단어는 왠 지 노력 없이 후회만 하는 것 같아서 싫어하는데, 지금은 이 단어를 쓸 수밖에 없을 것 같아. 내가 만약 너를 험하게 다루지 않았다면 네가 지금같이 상처투성이는 아닐 텐데. 내가 만약7학년 오디션에서 너를 꼭 잡아 주었더라면 우리는 합격했을 텐데. 만약 내가 8학년 때 더 열 심히 연습했더라면 두 번째 기회는 잡을 수 있었을 텐데. 만약 내가 좀 더 일찍부터 너와 친해지려 노력했다면 너를 포기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뻔뻔스럽지만 지금까지 수도 없이 너를 상처주고, 마음 아프게 한 것 용서해줘. 마지막으로 한 가지 너에게 부탁할 것이 있는데, 앞으로는 내 동생 을 위해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줘. 내 동생이 훌륭한 첼리스트가 될 수 있도록. 나의 친구 첼로야!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너를 잊지 않을게. 그리고 언젠가는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너를 남에게 자랑하려는 마음은 버리 중고등 부문 353

354 고, 정말 너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너를 다시 찾아 갈게. 꼭 약속 지킬 게. 354 재외동포 문학의 창

355 초등 대상 우수상 부문 우리 아빠 한국 가실 때와 오실 때_안찬원(몽골) 영원한 숙제 한국어 _김태양(호주) 아빠의 마음_유재원(미국) 나의 꿈은 식물학자_이기혜(뉴질랜드) 장려상 새파란 신발과 민수_김성안(중국) 사랑을 기다리고 평안을 기대하는 그들_김진희(우즈베키스탄) 우리가 체험한 사랑으로 가는 길 _리승희(중국) 보고 싶은 천사 미래_박서연(태국) 신세대 신데렐라_송미령(뉴질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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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 우리 아빠 한국 가실 때와 오실 때 대상 안찬원(몽골) 우리 아빠 한국 가실 때 몽골이 다 따라 가요. 이건 이 아픈 할머니께 드릴 몽골 돌소금 저건 애주가 아빠 친구 선물 골드 징기스 보드카 우리 아빠 한국 가실 때 몽골이 다 따라 가요. 이건 할아버지께 드릴 몽골 하늘과 말이 있는 대자연의 그림 저건 내 친구에게 줄 가장 중요한 내가 직접 쓴 편지 한 장 우리 아빠 한국 갔다 오시면 한국이 다 따라 와요. 이건 홈플러스의 핫 초크 저건 포장마차의 어묵과 붕어빵 이건 할머니의 고추장 초등 부문 357

358 우리 아빠 한국 갔다 오시면 한국이 다 따라 와요. 이건 교촌치킨의 간장 치킨 저건 김말이 넣은 컵 떡볶이 가장 중요한 내 친구가 직접 쓴 답장 편지 보고 싶고 만나고 싶어요. 아빠 따라 다니는 몽골과 한국은 사이좋은 친구의 나라. 358 재외동포 문학의 창

359 영원한 숙제 한국어 우수상 김태양(호주) 나는 호주에서 태어난 한국 사람이다. 누가 나이를 물어보면 11살이 라고 대답하는데 엄마는 옆에서 꼭 그러신다. 한국 나이로는 12살이에 요. 한국에서는 8살이 되면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는데 호주는 5살 이 되면 킨디 가든 이라고 불리는 초등학교 제일 아래 학년부터 시작 한다. 학교 유니폼을 입고 키 보다 더 큰 가방을 메고, 그 가방 안에는 간식 시간과 점심시간에 먹을 도시락만 들어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 귀 엽다. 호주 학교에서는 책도 많이 없고 대부분 학교에 두고 다니기 때문에 지금 6학년인데도 나는 여전히 도시락과 숙제 공책만 내 가방 안에 들 어있다. 내가 4살 때 그러니까 호주 학교 들어가기 1년 전부터 나는 한글학 교에 다니기 시작하였는데 나의 엄마가 한글학교에서 선생님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그냥 따라 다닌 것 같고, 그래서 5살이 되어도 한글학교 유치부를 1년 더 다니면서 공부했다. 그러니까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1년을 더 빨리 시작하였는데 1학년이 되었을 때도 한글을 읽을 줄도 초등 부문 359

360 몰랐다, 정말 기초도 몰랐다. 엄마는 다른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도 아들 인 나는 숙제도 안 봐주고 돌보지 않으셨다. 그런데 1학년 첫 번째 텀이 끝나고 봄방학 때 엄마는 결심을 하셨 다.(호주는 1년에 네 번 방학이 2주 씩 있다.) 나중에 안 이야기인데, 한글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아이가 글을 못 읽어서 창피했다고 하셨는 데 사실 너무 바쁘니까 나를 신경 못 쓴 것 같았다. 아무튼 엄마는 너무 무섭게 (목소리가 크고 흥분을 잘 하셔서) 나를 책상에 앉혀 놓으셨다. 자주 큰 소리를 내셔서 엄마는 아빠에게 많이 혼도 나셨고, 엄마의 생 각대로 안 되는 나와 아빠의 참견 때문에 우리가 한글 공부를 마친 후 에는 며칠 동안 말씀도 안하셨다. 그래도 나의 엄마는 포기를 안 하셨 고, 1학년 봄방학 때부터 나는 드디어 글을 읽기 시작하였다. 내가 받침 있는 낱말까지 읽기 시작하자 이상하게 아빠가 더 많이 좋아하셨다. 한국어 능력 시험을 보기 시작할 때도 같았다. 한국어 능력 시험은 한국에서 시험 문제가 오고, 전 세계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는 학생과 어른들이 한국어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서 봐야 하는 중요한 시험이라 며 나의 엄마도 내가 한글학교 3학년 때부터 보게 하셨다. 시험 예상 문제는 우리가 호주에서 배우는 한글 공부보다 꽤 어렵고 모르는 단어도 많았지만 엄마의 끈질긴 엄마의 가르침 덕에 나는 3학 년 때 초급에 합격했고, 나도 내가 너무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4학년 때 준비한 중급은 내가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엄 마의 목소리는 더 커지고 나는 무조건 따라했던 1학년 때나 3학년 때 같이 안하고 하기 싫다고 울기도 하고 심술도 많이 부렸는데 그때마다 360 재외동포 문학의 창

361 아빠는 수준이 맞지 않는 공부를 시킨다고 엄마를 힘들게 하셨다. 그럴 때는 엄마에게 좀 미안 했지만 정말 하기 싫었고 엄마도 그만 두자고 하시면서도 시험은 보게 하였지만 결국 중급에 떨어졌다. 내가 하기 싫 어서 떨어졌는데 나는 실망을 많이 하였다. 5학년이 되자 엄마는 다시 나를 위해 예상문제를 공부시켰고, 이때 는 정말 재미있게 설명도 해주시고 아빠의 잔소리에도 꿋꿋하게 (사실 은 아빠가 집에 안 계시는 날만 골라) 스트레스를 극복하며 우리는 같 이 공부를 했고, 나도 엄마를 도와(?) 꾹 참아서인지 드디어 5학년 때 중급에 합격했다. 요즘은 한국 비디오를 통해 한국말을 많이 배운다. 가족이 같이 보는 천추태후, 정말 재미있게 보는 1박 2일. 1박 2일을 보게 된 이유는 한국 식품점에 엄마와 함께 갔을 때다. 내가 모르는 어떤 조그만 남자 아이가 나를 계속 쳐다보며 따라 다니자 나의 엄마는 너 이 형 아니? 왜 자꾸 따라오면서 쳐다보니! 하시자 그 꼬마가 저 형 강호동 닮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강호동이 1박 2일 프로그램에 나 오는 걸 알았고, 강호동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저렇게 생겼나! 실망을 많이 했고 엄마는 너무 웃어서 얼굴까지 빨갛게 되었다. 한국에 갔을 때도 (여기는 여름, 한국은 겨울) 나는 영어를 안쓴다. 아빠는 내가 영어 쓰는 것을 할머니께 들려주고 싶어서 가끔 영어로 물어 보았지만 영어를 이해 못하는 친척들이나 사람들에게 영어를 쓰 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엄마는 한국 다녀 온 후, 친구들에게 엄청 나를 칭찬하고 자랑하신다. 우리 태양이는요, 한 국에서 한국말만 써요. 내가 생각하는데, 한국에서 한국말 쓰는 것이 자랑할 거린지? 초등 부문 361

362 사실, 나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 친구들은 영어로 말 하는 게 편해서 한글학교에서 만나도 영어로만 말한다. 선생님들께서 한국말 사용을 하라고 하시지만 호주에서 태어나고, 호주 학교에 다니기 때문 에 쉽게 영어가 먼저 나오고 한국말은 잘 안 쓰게 된다. 집에서 부모님 과 한국말을 사용하고, 한글학교 숙제를 힘들지만 꼭 하려고 하고, 무 엇보다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말을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옆집 사는 하이스쿨 다니는 제이슨은 포르투갈 사람인데도 자기 나라말도 못하는 걸 보면 답답하다. 꾸준히 한글학교에 보내주시고, 집에서도 꼭 한국말과 존댓말을 사용하게 하시고, 엄마가 자주 하시는 말씀 중에 영어는 영원한 숙제야. 라고 하듯이 나에게 한국어는 꼭 해야 하는 영 원한 숙제인 것 같다. 362 재외동포 문학의 창

363 아빠의 마음 우수상 유재원(미국) 나는 아빠 생각을 할 때마다 갑자기 팽이가 생각난다. 돌고, 돌고, 돌고 아주 한참 후가 지나야 멈출 것 같다. 우리 아빠는 일 할 때마 다 팽이처럼 행동 하신다. 매일 매일 나가시고, 볼 수 있는 때는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이다. 특히 토요일엔 밤 12시가 넘어야 들어오신다. 그래서 아빠의 얼굴이라도 보려면 늦잠 자고 싶은 토요일이라도 일찍 일어나야한다. 부스스 일어나 억지로 비벼 뜬 눈으로 아빠 얼굴을 간신 히 보고 다시 잠이 들 때도 있다. 함께 앉아 오손 도손 이야기를 해본 시간이 언제였는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어제 아침도 쾅 하는 문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창문으로 아빠의 뒷모습을 겨우 보았다. 갑자기 슬프기도 하고 속상하기도한 이 상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아빤, 왜 이렇게 늘 바쁘신 걸까. 나두 아빠 가 필요한데. 밤늦도록 잠이 오지 않아 책을 보고 있는데, 아빠가 일을 마치시고 집으로 오셨다. 아빠는 휴스턴의 더위와 스트레스 때문인지 땀으로 흠 뻑 젖어 있었다. 피곤에 지친 아빠의 얼굴. 아빠는 가방을 여시더니 편지 봉투 하나를 꺼내셨다. 그리고 엄마께 초등 부문 363

364 그 봉투를 내밀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다. 이 편지를 재원이에게 전해줘요. 나는 갑자기 화가 났다. 나한테 주고 싶은 게 있으면 직접 주셔야지 왜 엄마를 통해서 주시 려는 거지? 그렇지 않아도 않아도 얼굴보기도 어려운데. 참. 속을 부글 부글 끓이다가 또 다른 생각에 미쳤다. 내가 무슨 잘못 이라도 했나? 고민을 하다 잠이 들어 버렸다. 새벽예배를 위해 맞춰놓은 알람 소리에 눈이 떠져 일어나보니 내 옆 에 작은 편지 봉투가 있었다. 어제 그 편지? 나는 생각도 다 하지 않고 그 편지를 덥석 잡아 봉투 를 찢고 읽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딸 재원아 아빠가 요즘에 너무 바빠서, 우리 딸에게 아빠의 사랑을 많이 전해주 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러나 항상 이것을 기억해 다오. 아빠는 너를 아주아주 많이 사 랑한단다. 네가 무엇을 하고 있어도 나는 너를 사랑하고 지켜보고 있단다. 아빠가 사랑하는 이 마음을 더 잘 표현하고 재원이가 느낄 수 있도 록 더 좋은 아빠가 되도록 노력할게. 곁에서 지켜봐 주고 아빠를 위해서 기도해 주렴! 다시 한 번 재원이를 아빠 엄마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재원아! 진짜루 마~니 마~니 사랑해. 364 재외동포 문학의 창

365 아빠가 눈물이 났다. 아빠의 사랑이 담긴 편지를 꼭 껴안고 다시 잠자리에 누우니 금방이 라도 행복한 꿈나라로 날아갈 것만 같다. 편안한 마음. 아빠의 작은 마음 조각 안에 있는 사랑 때문에 내 마음은 이렇게 평 화롭고 행복하고 기쁘다. 나두 아빠를 마~니 마~니 사랑해요. 초등 부문 365

366 나의 꿈은 식물학자 우수상 이기혜(뉴질랜드) 저는 뉴질랜드 웰링턴에서 살고 있는 이기혜 입니다. 저는 제 꿈에 대하여 쓰려고 합니다. 제 꿈은 식물학자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식물에 대하여 즉 꽃이나 나무나 풀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저는 가 끔씩 산에 오릅니다. 산에 가면 나무나 풀꽃이 많죠? 계절마다 달라지 는 식물이 신기하고 꽃이나 나무에서 나는 향기가 너무 좋아서 좀 더 많이 연구하고 공부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가을에 나뭇잎 색깔이 변하는 것을 아시죠? 왜 그런지도 아 시나요? 저는 모릅니다. 작년 11월에 한국에 갔는데 한국은 겨울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늦은 가을이었죠. 할머니와 함께 우체국으로 걸어가던 날 노란 나뭇잎들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나뭇잎은 초록색에서 노란색으로 바뀌다가 떨어진 것도 있었습니다. 참 신기하고 궁금했습니다. 왜 색깔 이 바뀔까? 그래서 저는 공부하고 싶은 겁니다. 저희 집에 토끼 한 마리를 키웁니다. 저희 집 토끼는 사료를 싫어합 니다. 그래서 당근이나 풀, 그리고 저희 식구들이 안 먹는 야채를 주기 도 하고, 가끔씩 공원이나 숲에 가서 풀을 뜯어서 줍니다. 그런데 풀을 366 재외동포 문학의 창

367 뜯어서 줄 때 마다, 이 풀이 무슨 풀인지, 정말 토끼에게 먹여도 좋은 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토끼가 어떤 풀은 먹고 어떤 풀은 안 먹기 때문입니다. 공부가 필요하겠지요? 그리고 예쁜 꽃을 보면 제 마음이 예뻐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꽃 이름을 잘 모르니까 답답할 때도 있지요. 그래서 가끔씩 제가 이름을 만들어서, 불러 줄 때도 있습니다. 아무튼 꽃의 이름들을 많이 알아서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꽃을 더 많이 기억하지 않을까요? 저는 가끔씩 제 아버지와 함께 식물 공원으로 갑니다. 저는 식물 공 원 안에 들어가서 예쁜 꽃들하고 크고 건강한 나무들을 보면 정말로 마음이 시원합니다. 노란색 초록색 빨간색 꽃들이 예쁘고, 이상하게 나 무들도 쑥쑥 자라는 것을 보면, 저도 마음이 예뻐지고 키가 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정말로 알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예쁜 꽃이 독인가 아니 면 못 생긴 꽃이 독인가, 이상한 꽃이나 풀이 약인가 잘 아는 꽃이나 풀이 약인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알고 싶은 이유는 약을 만들 어서 아픈 사람들을 많이 돕고 싶어서 입니다.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 들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프면 무조건 병원에 가거나, 무조건 약을 사먹는 것보다, 약이 될 수 있는 풀을 먹고 병이 나으면 훨씬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공부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 발에 밟히는 풀이 간혹 사람들에게 약이 될 때도 있고, 귀하다고 예쁘다고 해서 소중하게 생각했던 풀이나 꽃이 독이 될 수도 있답니다. 가장 흔한 것은 예쁘게 초등 부문 367

368 생긴 독버섯. 여러분도 잘 아시죠? 많이 보셨죠? 제가 공부를 많이 해 서 잘 구분하여 책을 쓴다면, 우리 같은 어린이들도 잘 알 수 있을 거라 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들도 식물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보세요. 공원에 가 거나 산책을 할 때에, 꽃향기, 나무 향기, 풀 냄새를 맡아 보세요. 마음 이 넓어 질 것입니다. 368 재외동포 문학의 창

369 새파란 신발과 민수 장려상 김성안(중국) 민수의 생일 때 나는 민수의 하나밖에 없는 새파란 신발이랍니다. 민수네는 내일 일본으로 여행을 갑니다. 오늘은 민수에 생일이라서 친구들이 놀러오기로 하였습니다. 민수의 생일은 4월 6일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죠. 조금 있다가 친구들이 선물을 가지고 한명씩 들어오기 시작했습 니다. 아이고, 친구들이 들어오자마자 저를 마구 밟는 것이 아니겠어요? 나는 그때 정말 아팠어요. 여기 저기 많이 밟혔거든요. 다른 친구의 빨갛고 깨끗한 신발이 저에게 말을 걸었어요. 넌 민수 신발이니? 나는 깜짝 놀랐어요. 정말 안됐구나. 우리 주인은 나를 가장 끝에다 놔두어서 나는 절대 초등 부문 369

370 로 밟히지 않아. 빨간 신발은 민수에 친구 중 하나인 권해 라는 아이의 신발이었어요. 그렇구나. 너희 주인은 참 좋으신 분이구나. 그런데 이번에는 주황색 신발이 말했어요. 내 주인인 은해는 날 자꾸 던지고 밟고, 내가 밖에서 걸을 수 있게 해 주는 데도 날 자꾸 밟지를 않나, 나를 닦지도 않고, 이 주황색 신발 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서 날 들고 다른 신발로 바꿔 달라고 한 단 말이야. 나는 가끔 실수로 똥을 밟아. 그래서 가끔 똥한테 미안하다고 사과 도 하지. 또 개미를 밟아서 개미가 죽은 적도 있어. 그 때, 개미 경찰들 이 쫓아와서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는지 몰라. 민수네 가족 이야기 밖에서 민수 아빠가 들어오셨습니다. 민수 아빠의 신발은 검정색 바탕에 빨간 선이 들어있었습니다. 나는 민수 아빠 신발을 처음 봤습니다. 민수 아빠 신발은 피곤해 보였어요. 민수 아빠 신발이 말했습니다. 아이고, 나는 항상 내 몸에 총알이 떨어지는 것 같아. 땀을 뻘뻘 흘 리시기 때문에, 나는 민수 아빠의 얼굴에서 흐르는 땀방울을 맞고 있는 단다. 그런데 그 땀방울이 나한테 빗물 같이 흘러내리니. 그나저 370 재외동포 문학의 창

371 나 민수의 아버지는 한 신발 공장에 사장이시란다. 그래서 항상 땀을 흘리시면서 일하시지. 나는 민수 아버지께서 무엇을 하시는지, 어디어 디에 가셨는지 다 알고 있단다. 난 민수 아빠의 신발이기 때문이야. 내 주인은 요리를 정말 잘해. 가끔 요리 재료를 나에게 떨어뜨리기 는 하지만 말이야. 쇼핑을 정말 좋아해. 나를 제대로 쉬게 해준 적이 없어. 나는 내 주인에게 충고하나 해주고 싶어. 제발 발 좀 씻고 다니라고 말이야. 내 주인이 나를 신을 때마다 나는 정말 숨이 막힐 것 같아. 도 망치고 싶어. 흠. 우리 주인은 말이야. 나를 정말 아프게 만들어. 커다란 검 은 색과 하얀색이 섞여있는 동그란 돌덩어리가 나를 자꾸 치게 만드니 말이야. 나는 살짝 괴로워. 나를 깨끗하게 닦아 주지만, 너무 많이 닦아대니 까 내 몸이 따가워 죽겠어. 민수네 가족은 모두 여섯 명이였습니다. 아빠, 엄마. 동생 한 명. 형아. 누나와 내 주인 민수가 있습니다. 그 여러 신발들이 모여서 서로 웅성웅성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신발들의 대작전 그 때였습니다. 초등 부문 371

372 민수는 새파란 신발을 신고 나가서 친구들과 누가 신발을 제일 멀리 던지나 시합을 했습니다. 아이 무서워. 새파란 신발은 덜덜 떨었습니다. 쉬이익 새파란 신발은 멀리멀리 날아갔습니다. 우당탕 탕탕! 아이고! 내 척추야~ 새파란 신발은 이리저리 구르면서 여기저기 다쳤습니다. 그 후, 저녁이 되었습니다. 새파란 신발과 다른 여러 가지 신발들은 모여서 작전을 짰습니다. 그 다음날 이른 아침 갑자기 공항에서 안내방송이 나왔습니다. 탑승객 여러분! 탑승을 하기 전에 이 약속을 꼭 지켰으면 합니다. 신발들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신발들을 너무 못살게 군다고 말하였 습니다. 특히 깔창에 전민수꺼 라고 쓰여 있는 새파란 신발이 가장 힘들답 니다. 여러분 앞으로 신발들에게 못살게 굴지 말자고 약속합시다. 민수는 두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내 신발이? 민수는 깜짝 놀라 어리둥절했습니다. 민수는 부끄러웠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빨갛게 달아올랐습니다. 신발들은 서로 마주보고 씩 웃었습니다. 372 재외동포 문학의 창

373 민수는 이제 더 이상 신발들을 괴롭히지 않는 착한 어린이가 되었답 니다. 초등 부문 373

374 사랑을 기다리고 평안을 기대하는 그들 장려상 김진희(우즈베키스탄 ) 사람은 서로서로에게 늘 기쁨과 희망이 되어왔다. 알게 모르게 사람 은 항상 상대방에 사랑을 기다리고 평화를 기대하는 이들에게 사랑과 평안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우즈벡에는 사랑을 받고 싶어도 못 받는 사람들이 있다. 세계의 곳곳에서 봉사활동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런 해택을 받는 것은 아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 인물들 중에 나이팅게일 이라는 사람이 있다. 나이팅게일은 부잣집의 딸로 자랐지만, 어릴 적부터 불쌍하고 가 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의 집에 문병을 가곤 했다. 그녀는 부모님의 반대 에도 불구하고 간호사가 되었다. 당시 병원 시설들은 그리 좋지 않았고 치료하는 방법을 모르는 병들이 많아 어려움이 많이 있었지만, 나이팅 게일은 포기하지 않고 평생 간호사로써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 하는 것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날마다 보는 병자들의 그녀를 애타게 기다 리는 듯한 눈빛들 그들에 대한 나이팅게일의 사랑은 커져만 갔다. 안타깝게도 지금도 가난하고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세계인구의 삼분의 일 이나 된다. 팔년 째 우즈벡키스탄에서 살고 있는 나는 이곳 에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길에서 374 재외동포 문학의 창

375 나 상점 앞에서 돈을 구걸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별 어려움 없이 잘 살아온 나는 매일 보는 그들이 가엽게만 느껴진다. 왜 그들은 불행하고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등의 질문이 늘 생겼다. 20년 전만 해도 한국은 우즈벡보다 못 살던 나라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은 많이 발전하였기 때문에 그런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다. 고통과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우즈벡이란 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며 이곳에서 가까운 나라인 아프카니스탄이나 파키스탄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세계의 삼분의 일이 다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삶을 살고 있지만, 넉넉하고 풍부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아쉽게도 불행한 사람들을 도와주기는커녕, 자신들의 해택만 을 생각하고 있다. 가장 행복감을 느끼는 나라 사람들이 가난한 나라 사람들 중 하나 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비록 가난하고 가진 것은 없지만, 행복함 을 느낀다는 것이 놀라웠다. 조금 무엇이 불편해도 불평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오히려 그들이 나에게 만족할 수 있는 행복을 가르쳐 주는 듯 했다. 한국에서는 흔히 보고 느낄 수 없는 것을 우즈벡에 와서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길에 버려진 아이들, 부모님이 안 계셔 혼자 나가 사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 같은 아이들의 삶인데도 나한테 는 너무나 어색하고 낯설다. 가족이 함께 외식 나가던 날이었다. 공원을 지나치고 있을 때 어떤 여자 아이가 공원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돈을 구걸하고 있는 모습을 봤다. 배고픈 배를 움켜잡고 있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밀려왔다. 난 그 초등 부문 375

376 장면을 본 순간 어린이들을 도와주는 소아과 의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 었다.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과정을 밟아야만 하지만 무언가 그들 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나는 길에 우두커니 서 있다 말고 그 여자 아이의 손에 돈을 쥐어 줬다. 돈을 받자마자 그녀는 날 기다렸 다는 듯이 얼굴에 미소가 가득 번졌다. 따뜻한 마음을 전해 주고자 한 것뿐이었는데 그 아이가 그렇게 기뻐 할 줄은 전혀 몰랐다. 문득 먹을 것이 부족해 굶고 있는 사람들이 다 나의 친구들이란 생 각이 들었다. 내가 기운을 북돋아 줘야 하는 가족이라는 생각까지도 하게 되었다. 우즈벡에서 같이 살면서 그들을 볼 때 마다 얼굴을 찡그 리고, 나와 그들을 구분하려고 했었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게 느껴졌 다. 그들이 원하지 않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도 그들을 멀리하려 한다는 것은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난 그들이 느끼는 것을 느껴보고 싶었고 자신의 처지에 대한 생각과 또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등이 궁 금해졌다. 어쩌면 이 모든 궁금증 또한 이곳 우즈벡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즈벡에서는 병이 나도 찾아갈 의사가 없고 치료할 방법도 모 른채 고통 가운데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도와줄 사람이 없 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추운 한 겨울이었다. 아빠하고 나는 시장에 갔다 오던 중 눈이 수북이 쌓인 길가에 쓰러 져 있는 한 아저씨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눈에 파묻혀 있어 생김새는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충분히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376 재외동포 문학의 창

377 차를 급히 세우고 아저씨를 일으키려는데 아저씨는 정신을 잃은 상태 여서 계속 쓰러지려고 하셨다. 어렵게 차에 태워 따뜻한 공기를 쐬게 하였다. 목에 잔뜩 약이 발라 있었던 그 아저씨는 몇 번 긴 기침을 하고 서는 내렸다. 그냥 지나쳤다면 아마도 목숨을 잃었을 번한 그 아저씨의 발걸음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헤어질 때에도 무거워 보였다. 나는 이런 일들을 보며 우즈벡과 우즈벡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 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곳에 살면서 느낀 것 하나가 있다. 겉으로 는 잘 보이지 않지만 이들 속에는 공통적으로 행복함이 있다. 이들은 어떤 환경에 있든지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갖고 있다. 한국과 비교 한다면 너무나 안 된 일들이 자주 일어나지만 넉넉하고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보다도 더 나은 만족함 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어려운 사람들은 우즈벡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아주 많다. 그들은 사랑을 베풀어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고 평화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들은 원하지만 그들의 힘으로써는 해낼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이 있다. 그들이 지금 바라는 것은 우리들의 도움이다. 당장 가서 도와 줄 수 는 없겠지만 바라지 않는 환경에서 살고 있는 이들이 우리 가운데 있다 는 사실 하나만 이라도 기억하고 산다면 그것으로도 그들에게 큰 도움 이 될 것이다. 물 한 방울에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을 내 친구들로 생각하고 함께 울고 웃으며 만족하고 함께 살면서 작은사랑의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나는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싶어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 나 그들 안에는 벌써부터 행복이 있다. 언제나 서로서로를 기쁘게 해주 초등 부문 377

378 는 모습이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평화롭게 보인다. 아직 그들 안에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사랑과 평안을 기대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행복이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 378 재외동포 문학의 창

379 우리가 체험한 사랑으로 가는 길 장려상 리승희(중국) 그날 점심식사가 끝나자 우리 학교 4, 5학년 친구들은 대대부(보도 원:강명자)의 지령에 따라 즉각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저마다 자기가 준비해온 상품 들을 진열해놓고 다른 반 친구들에게 자기의 상품 을 홍보하느라 야단법석을 놓습니다. 상품은 별별 것들인데 인형, 장난감, 만화책, 자기 솜씨를 자랑하는 수공제작으로 된 것들도 있었습니다. 미 리부터 포치되였던 애심시장 펼치기 활동이 정식으로 선을 보인 것 입니다. 때맞춰 다른 학년 친구들이 쓸어 와서 고마운 소비자 가 되어주었 어요. 1, 2학년 꼬마들은 기웃거리며 자기 맘에 드는 상품 을 구매하 느라 사뭇 진지한 표정들입니다. 그들은 오늘 활동의 의의를 알게 되자 달가이 호응해 나선 꼬마천사들이랍니다. 약 한 시간가량의 시간이 흐르자 적지 않은 상품 들이 새 주인을 찾아갔고 그 대신 수입으로 들어온 돈은 학년별로 보도부에 전달 되였 습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보도원 선생님께서 날 찾으셨습니다. 애심 전 달하는 현장을 찾아가는데 나와 5반의 남자애 천우가 학생대표로 뽑혔 초등 부문 379

380 다는 거였어요. 놀랍고도 반가웠습니다. 텔레비전에서나 보아오던 그 런 행사를 직접 자기가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차례졌으니 왜 가슴 뿌 듯하지 않겠나요? 곧장 차를 타고 조양천진소학의 1학년생 장찬이네 집을 찾아 노크합 니다. 장찬이 어머니가 앓는 몸으로 마중을 나오셨어요. 집은 헐망하다 못해 당금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데 집안에 들어가 보니 구들에서는 몇 년 전 차에 치여 불구의 몸으로 되어 버린 장찬이 아빠가 신음을 뽑고 있습니다. 때로는 끼니를 이어댈 쌀마저 걱정된다며 장찬이 엄마 가 땅 꺼지게 한숨을 짓습니다. 보도원선생님과 얘기를 나누시며 엄마 가 눈물을 짓자 어린 장찬이 얼굴도 따라서 눈물범벅이 되어버렸습니 다. 그 눈물을 보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찡-저려왔어요. 그 애를 달래 느라 이런저런 수다도 떨어봅니다. 얘, 우린 원래부터 남남이 아니라니까. 난 너의 언니 되고 얜 너의 오빠 되지. 내말에 장찬이는 울던 아이 같지 않게 해시시 웃어 보입니다. 그러 자 그 얼굴이 더구나 애달 퍼 보여 마음 쓰리여 납니다. 옷소매로 조심 스레 그 애의 볼을 따라 이랑 짓는 두 줄기 눈물을 닦아줍니다. 나와 천우는 장찬이한테 글도 배워주고 노래도 배워주었어요. 그랬 더니 신기하게도 장찬이의 어둡던 얼굴이 차츰 밝아지는 게 아니겠어 요. 처음에는 서먹서먹해 하던 애가 구면인 듯이 우리와 제법 응석까지 부립니다. 보도원 선생님께서 우리 학교 전체 사생들의 뜨거운 맘이 담긴 선금 을 장천이 엄마 손에 쥐여 주실 때 우리는 장천이의 죄꼬만 손을 꼬옥 380 재외동포 문학의 창

381 잡아주었어요. 장천아, 우리 학교 친구들 모두가 널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넌 아 마 모를 거야. 이번 6.1 아동명절에는 먹고프던 맛나는 것도 실컷 사 먹구 새 옷도 한 벌 사 입구, 기분 좋지? 그러니 파이팅, 어때? 약속 해줄래? 장천이는 힘 있게 머리를 끄덕여주었어요.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가 부르릉 발동을 걸자 장천이는 집안에서 달 려 나오며 한사코 우리를 향해 손을 젓습니다. (귀여운 병아리야, 장하게 모진 가난을 이겨내고 무럭무럭 어서 크 거라!) 나는 입속말로 축복을 보냅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5월 30일 날 저녁 장찬이네 사연과 더불어 우 리가 찾아갔던 화면들이 연변 텔레비를 통하여 시청자들과 대면하게 되였어요. 면목도 서로 모르는, 성명조차 남기지 않은 따스한 맘과 맘 들이 사방팔방에서 따릉따릉 전화 (한 번 치면 인민페 5원)로 애심의 손길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참말이지 장내 장 밖의 시청자들을 감동의 휘몰이에 빠져들게 하는 그런 특수한 시간이었고 현장이었습니다! 그 날 저녁 나도 사랑을 실천하는 그 분들의 행렬에 끼여 연속 두 번 전화 를 눌렀어요. 첫 번은 내 몫으로, 두 번째는 할머니가 부탁하신 몫으로. 지금도 가끔씩 흑흑 서럽게 울던 장찬이의 앳된 얼굴이 눈앞에 떠오 릅니다. 장찬이의 눈물이 인제 곧 멎게 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요? 장찬아, 더는 눈물을 짓지 말어. 만약 이제 다시 흘린다면 그때는 슬픔의 눈물이 아닌 기쁨의 눈물이었음 좋겠어. 장찬아, 울지 말어, 그 초등 부문 381

382 리구 잊지 마, 네 곁엔 항상 우리가, 아니, 더 많은 사람들이 서있다는 걸. 도우며 뭉치며 그러다보면 이 세상엔 또 하나 불어나겠지. 하나로 되어 버린 어느 한 패밀리의 화끈한 이야기가!! 382 재외동포 문학의 창

383 보고 싶은 천사 미래 장려상 박서연(태국) 오늘도 미래 와 유희 는 싸우고 있습니다. 야! 이거 내 꺼 맞잖아! 유희가 짜증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왜 짜증을 내? 티격태격 주위에 있던 아이들이 정말 못 말린다는 듯이 귀를 막으며 쳐다보았습니다. 겨우 2학년 밖에 안 된 아이들이 절교라는 말은 어디서 들었는지 또 절교를 하고 토라져서 집에 돌아갑니다. 다음날 아침, 미래와 유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히히거리며 등굣길을 함께 합니다. 그 때 미래가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냅니다. 유희야, 자 커플반지. 요즘 한창 유행인 커플 반지를 미래가 유희에게 건넵니다. 와~ 고마워. 하며 유희가 그 반지를 자세히 들여다봤는데 미래의 반지에는 착한 미래 라고 쓰여 있고 유희의 반지에는 못난이 유희 라고 쓰여 있었습 니다. 초등 부문 383

384 야! 왜 난 못난이야! 못난이 맞잖아! 맨날 싸울 때 시비 걸고. 뭐? 야! 너는 안 그래? 그리고 네가 더 많이 시비 걸잖아! 미래는 낄낄거리며 먼저 휭 달려가 버렸습니다. 씨, 두고 봐! 우린 이제 진짜 절교야! 마음 같아서는 유희는 이 반지를 던져 버리고 싶었지만 반지가 너무 예쁘고 아까워서 그냥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터덜터덜 걸어서 교실로 들어가려고 문에 손을 대는 순간 유희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 었습니다. 여러분, 내일부터 미래가 학교에 못 나오게 될 거에요. 미래 아빠가 회사에서 발령받게 되어서 저기 멀리 있는 미국으로 가게 되었어요. 멀 리 전학 가는 미래에게 모두 안녕 해주세요. 유희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머릿속에는 전학과 미국이란 단어 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미국 간다고 정말 부러워할 유희였지만 지금은 슬프기만 합니다. 눈물만 나 왔습니다. 유희는 문을 벌컥 열며 소리쳤습니다. 너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유희가 소리쳤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유희는 큰소리로 울 뿐이었습니다. 유희는 다음날 밤에 공항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나가면 더 슬플까 봐, 창피하게 큰 소리로 울게 될까봐 서였습니다. 유희는 유치원에서 미래와 만나게 된 것에 대해 엄마가 알려준 이야 기가 떠오릅니다. 유희는 이제 미래가 왜 커플반지를 줬는지 알았습니 384 재외동포 문학의 창

385 다. 유희는 반지를 손에 꼭 끼었습니다. 유희는 그 반지를 미래와 다시 만날 때까지 잘 간직하며 끼고 다니고 싶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백발 할머니가 되어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요. 유희는 갑자기 커서 도 못난이라고 놀리며 미래와 싸울지 궁금합니다. 초등 부문 385

386 신세대 신데렐라 장려상 송미령(뉴질랜드) 여러분 모두 동화 신데렐라 는 아시겠죠?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간 단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신데렐라는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돌아가셔서 새 엄마와 언니들 밑 에서 커 왔습니다. 그녀들은 신데렐라의 미모와 현명함에 질투가 나서 신데렐라를 하인처럼 취급 했습니다. 나라에서 무도회가 열려서 새엄 마와 언니들만 가고 신데렐라만 외톨이가 될 때, 요정 할머니가 와서 유리 구두, 호박 마차 등을 마련해 주셨지요. 12시가 되자 신데렐라는 급히 뛰쳐나오는 바람에 유리 구두 한 짝을 잃어버렸지요. 그리고 그 잃어버린 구두로 인해 왕자랑 결혼할 수도 있었죠. 그러나 저는 우리의 시대, 신세대 신데렐라였으면 이랬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자, 이제 저만의 송데렐라의 이야기로 들어가 볼까요? 송데렐라? 이거 좀 해줄래? 도와줘? 라고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매번 똑 같은 대답을 하죠. 네, 뭘 도와드릴까요? 이다. 이 송데렐라라는 사람이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송데렐라는 어렸을 386 재외동포 문학의 창

387 때부터 남한테 의지하는 것을 꽤 싫어해 사소한 일에도 서툴지만 스스 로 척척 해내죠. 발은 차가운 유리 구두보다 운동화가, 드레스보다는 청바지가, 호박 마차보다 튼튼한 두 발이, 비록 지금은 부족하고 넘침보다 모자람이 있 지만 요정이나, 행운 같은 요행을 바라지도 않죠. 가끔 꿈은 꾸기도 하지만 주변의 이웃을 도와주며, 먼저 배려할 줄 알고, 생색 내지 않으며 봉사할 맘을 갖고 있는 따뜻한 사람입니다. 묵묵히 자신의 일에 성실과 정직으로서 보답을 바라며, 모자람을 오 만과 편견의 틀로 가두지 않는 현명한 송데렐라 입니다. 그리고 외모의 화려함에 짠하고 나타나는 그런 왕자 병(?)이라는 불치병에 걸린 왕자 보다는 아름다움의 진정함을 알고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평범한 사랑 을 아는 멋진 사람과 연애를 한답니다. 아니면 테레사 수녀님처럼 세상에 한 발 더 나아가, 보다 못한 많은 이 들을 위해 봉사하며 헌신하는 삶을 살고 있을 겁니다. 너무나 허황되다고 생각진 않죠. 또한 그렇게 되는 세상에 살고 싶 고, 그런 세상이 되게 생각을 바꾸고 먼저 손 내밀어 사랑스럽게 사는 세상에 동참하는 한 사람의 송데렐라였습니다. 누구나가 부러워할 예쁜 캐릭터로 동화 같은 삶을 동경도 하고, 현실 속에 안주하여 발전하지 않는 인생을 사느니 힐러리 같이 진취적이고, 헬렌 클락처럼 대범한 여장부로 사는 롤 모델로 시작하고 꿈꾸는 송 데렐라의 하루입니다. 꿈이 있고,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합니다. Dreams come true! 초등 부문 387

388

389 수상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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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1 수상소감 시 부문 대상 김효남(미국) 언제나 행복한 사람은 없다. 늘 불행한 인생도 없을 것이다. 별나게 도 나는 남들보다 좀 더 불행한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 살았었다. 좀처 럼 철들지 않는 나에게 시의 큰 산이 불쑥 나타났다. 시를 읽지 않고는 내 길로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시인들이 어떻게 고통이나 그리움을 관조하며 시로 승화시키고 꼿꼿하게 사는지를 읽고 배운다. 어쩌면 나 도 시의 손을 잡고 지나간 슬픔이나 아픔을 들여다보고 정리하며 그런 구덩이에서 걸어 나올 수 있겠다 하고 생각했다. 시를 읽고 배우는 일 에 품이 많이 든다. 처음에는 시가 될 만한 소재를 발견하면 조급하게 그 속에 빠져 허우적거려보았지만, 시가 좀처럼 되지 않았다. 형체도 없어 보이는 시의 소재를 데리고 천천히 책을 읽고 음악도 듣고 때론 영화도 보며, 그렇게 공을 들이며 시가 좋아하는 곳으로 다니다 보면 참 어렵게도 한 마디씩 들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아직 그 말들을 제대로 수상소감 391

392 받아 적지도 못하지만 말이다. 볼품없고 능력도 변변치 못한 나에게 와 고생만 하며 산 아내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늦게나마 나에 게 와준 시의 위로를 아내와 같이 누리지 못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 아내의 말처럼 시간만 나면 지하에서(내 컴퓨터가 지하에 있다) 도나 닦는 재미없는 남편이 되어 또 미안하다. 내가 시에 대하여 작은 성취 를 이뤘다면 나를 이해해주는 아내의 몫이 정말 크다. 넉넉하게 뒷받침 하지 못했지만, 대학을 무리 없이 마쳐준 사랑하는 세 딸에게도 자상한 아빠가 되지 못해 항상 미안하다. 나는 시를 읽으며 즐겁지만, 가족들 은 시와 시간을 많이 보내는 내가 마땅치 않을 줄 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족을 사랑하지 않거나 덜 사랑하게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내 가 좀 더 시를 알고 깊어진다면 그만큼 사랑도 은은하고 깊어질 것으로 믿었으면 좋겠다. 끝으로, 부족한 시를 선 해주신 심사하신 분들의 노고와 재외동포들 의 복지와 문화향상을 위해 애쓰시는 동포재단 제위의 수고에 감사드 립니다. 분발하라는 의미로 상을 주신다 생각하고 앞으로 노력하는 성 숙한 시인이 되어갈 것을 다짐합니다. 392 재외동포 문학의 창

393 수상소감 시 부문 우수상 김아영(아르헨티나) 뜻밖의 이런 큰 상을 받게 되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날아갈 듯이 기쁘면서도 부담스럽기도 하네요. 시와 더욱더 가까워지도록 주위에서 북돋아 주시는 모든 분들 덕분 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심사 위원님들께 고개 숙여 인사드립니다. 미래를 설계 하느라 어느 때보다도 정신없던 때, 시는 저에게 휴식처 가 되어 주었습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혀 주고 희망을 불어 넣 어주며 긍정적인 맘을 품고 다시 일어서게 해주는 그런 동반자였습니다. 바쁘게 쉼 없이 돌아가는 이 세상을 살아가더라도 시는 잠시 서서 주위의 사소한 아름다움에 눈길을 주고 만끽하고 나누라고 항상 기억 해주는 친구입니다. 어린 나이에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왔기에 한글이 너무나도 미흡한 저이지만 그나마 마음과 생각을 내 나름대로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수상소감 393

394 우리 조국의 언어, 한글이 있음이 너무나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전문적으론 스페인어나 영어가 편할 수 있을 진 몰라도 마음을 열어 주는 언어로는 언제나 한글이 일 순위 일겁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합니다. 사랑합니다. 394 재외동포 문학의 창

395 수상소감 시 부문 우수상 이종배(캐나다) 그것은 여러분 가방 속에 있습니다. 그것들을 꺼내어 언어란 손수 건에 담아 모은 후 표현이란 글씨로 종이위에 적으십시오. 인간의 연민과 고뇌, 감명을 불러일으킬 시를 쓰도록 나에게 집착력 을 주었고 원동력이 되어온 어느 시평론가의 귀한 가르침이였다. 캐나다 에드몬톤 시의 외곽과 도심에 찾아드는 단풍이 이번 가을따 라 새삼 아름답다. 단풍같이 고와야할 내 인생의 가을이 올 무렵 나는 나에게 물어볼 중요한 옛이야기가 있다. 비워둔 채 담지 아니했고 행복하게 살아 왔는 가? 라고. 애착과 열정에서 시작되는 설레임의 시를 지금 이곳에서 계속 쓰리라. 이것이 또한 심사위원 여러분께서 나에게 주는 진지하고 왕성한 창 작활동을 하라는 권고의 말씀이리라. 수상소감 395

396 수상소감 소설 부문 대상 신정순(미국) 미국으로 건너간 지 어느덧 이십칠 년이 지났습니다. 한국에서보다 미국에서 산 햇수가 더 많은데도 피부색이 다른 미국 사람들과 영어로 이야기하고 집에 돌아오면 왜 그리 한글로 된 소설이며 시가 읽고 싶던 지요. 그러면서도 우리 문학을 보면 기가 죽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아, 나는 더 이상 한글로 시나 소설을 쓸 수 없겠구나, 문체도 문장력도 너무 뒤떨어져 있구나. 주눅이 들어 가슴이 울컥거린 날도 많았 지요. 그런데 오늘 밤엔, 담쟁이가 담을 넘어오고 있네요. 담쟁이가 수 직의 담을 넘어 길을 트고 있네요. 아, 그래요. 악착같이 붙들고 지독하 게 그리워하니 수직이 수평이 되는 이치. 담도 길이 되니 어렸을 적 동네 오빠가 생각납니다. 손바닥에 칼로 흠집을 만들어 손금을 새로 만들던 오빠. 무모한 사 람이라 생각했는데 이젠 저도 그 사람 흉내를 내 보려합니다. 손바닥을 396 재외동포 문학의 창

397 뿌리 삼아 담을 넘나드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피멍이 든 단풍 담쟁이 가 오늘은 씨익 웃고 있네요. 말없음표로 지냈던 세월을 물줄기 휘돌아 가는 힘찬 징검다리로 만들어 볼 욕심도 부려보겠습니다. 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이런 기회를 마련해주신 재외동포 재단 및 재외동포문학 관계자 모든 분께 감사 감사드립니다. 재주가 부 족하니 부족한 만큼 더욱 열심히 쓰겠습니다. 수상소감 397

398 수상소감 소설 부문 우수상 김민정(일본) 우리 어머니!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가 오래도록 베스트셀 러에 올라있다. 신경숙 님 같은 저명한 스타작가에게도, 나처럼 코흘리 개 작가 지망생에게도 어머니란 존재는 평생 명제가 아닐 수 없다. 엄 마라 발음할 때 비로소 더 절실해지는 무언가. 일본이란 타국에서 당당히 하루하루를 영위할 수 있었던 건 엄마 덕분이었다고 밖에 달리 대답할 길이 없다. 엄마란 단어는 오감을 품고 있다. 엄마의 미소는 다분히 시각적이고, 엄마가 벗어놓은 옷가지들은 코를 자극하고, 엄마 손은 세계 최고의 레 스토랑 이상이며, 엄마 목소리처럼 청각을 자극해 가슴을 에이게 하는 것도 없다. 또, 엄마 품이란 단어처럼 따뜻한 것도 없다. 재외동포문학상 마감이 코앞이라기에 교정도 못 본 원고를 이메일로 송신한 후, 어찌나 가슴 졸였는지 모른다. 미흡하고 또 미흡한, 부족하 398 재외동포 문학의 창

399 고 또 부족한 글을 수상작으로 선정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어린 감사를 표한다. 그리고 한국어에 목마른 해외에 사는 동포들에게 글 쓸 기회를 제공해준 <재외동포문학상>이란 존재 자체에 다시금 감사드 린다. 아무도 내게 글을 쓰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아무도 내게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어릴 때부터 책이 많은 집이었고, 백과사전을 보는 게 시골마을 에선 세상을 보는 창과도 같았다. 방이 넘치도록 만화책을 선물해준 아 빠와 수많은 문학전집을 마련해준 엄마가 있었기에, 동경한국학교에 훌륭한 도서관이 있었기에, 일본에 있어도 한국책을 보내주는 고마운 친구들이 있었기에 늘 좋은 글에 묻혀 살 수 있었다. 일본이란 타국에서 한국어로 쓰인 양서를 만나는 일은 늘 어려운 일 이었고, 같이 글을 쓰는 동지를 만드는 일도 쉽지만은 않았다. 일본에 서 태어난 재일동포문학은 수많은 작가 배출과 더불어 저명한 일본의 문학상도 수상했지만, 나처럼 10대에 일본에 온 뉴커머라 불리는 세대 는 이 땅에선 아직 도상국 같은 존재다. 뉴커머 문학인이 일본 땅에서 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홀로서라도 꿋꿋하게 걸어가고 싶다. 이제 겨우 스타트라인에 섰을 따름이다. 여하튼 글을 써도 된다고 누군가 말해준 것 같아 무척이나 고맙고, 참으로 다행스럽다. 이번 수 상을 게으름 청산의 계기이자, 뉴커머 문학인 탄생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도록 더 노력하고 싶다. 끝으로 늘 함께 해주신 어머니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며, 결국은 입 밖으로 내지 못할 사랑한다는 한 마디로 수상소감을 마친다. 수상소감 399

400 수상소감 소설 부문 우수상 황희(미국) 세상은 지독하다. 지독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군상의 심연은 우물처럼 새까맣다. 매시매초, 듣도 보도 못한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이 우물의 밑바닥을 스윽 기어 다닌다. 우리는 시커먼 심연의 우물 밑을 결코 들여다볼 수 없다. 왜냐면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들이 있다는 것을,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세상은 소설보다 더 기괴하고 잔혹하다. 나는 그 이지러진 세상의 얼굴을 나만의 방식으로 드러내고 싶다. 아이야 도망가라 는 종교성이 짙은 공포소설이고 각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는 심히 삐뚤어져있다. 이런 공포소설 이 재외동포문학에선 당선되었다는 것이 그저 놀랍 400 재외동포 문학의 창

401 고 고마울 뿐이다. 삶은 역시 반전의 연속이다. 당신은 10분 후의 반전을 점칠 수 없다. 그래서 세상은 살만하지 않은가. 수상소감 401

402 수상소감 수필 부문 대상 윤종범(미국) 어설픈 재즈 아리랑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긴 첫 강의가 끝나고 나는 두 번 다시 그 강의실에 들어가지 않을 것을 맹세했었다. 즉흥연주는 둘째 시간에도 계속 될 것이고 거기에 대응할 무기가 내겐 없었던 것이 다. 날아오는 화살을 막아낼 방패가 내 손에는 들려있지 않았다. 한 학 기 내내 아리랑만 연주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나 웬일인지 나는 강의를 취소하지 않았다. 강의실에서 느꼈던 초긴장감은 다음날 다소 누그러져 있었고, 두 번째 강의가 있는 날 아 침에는, 이판사판 한번 부딪쳐 보자는 오기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밤 을 새며 견뎌낸 한 학기였다. 나는 즉흥 대신 작곡을 해야 했다. 남들은 신나게 즉흥연주를 할 때 나는 밤새 작곡해서 암기했던 곡을 겨우, 겨 우 연주했던 것이다. 긴장으로 내 기억이 삐걱하면 곡은 순서 없이 뒤 죽박죽으로 엉망이 되는 연주였다. 그렇게 힘든 한 학기였으면 다음 학 402 재외동포 문학의 창

403 기는 포기했을 법도 한데 나는 다음 학기에도 그 강의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마 한 학기 동안 오기도 함께 키워왔던 것일까. 두 학기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음대 강의실을 더 이상 얼씬 거리지 않았고 재즈 바이올리니스트의 꿈도 조용히 접을 수 있었다. 나 의 단념은, 일 년 동안 강의실에서 느꼈던 긴장감 때문이 아니었다. 열 심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즈가 내 가슴에 내 것처럼 와 닿지 않은 결 과였다. 나는 다시 늙어서 뭐 할거니? 의 물음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때는, 한 순간에 다가왔던 재즈 바이올리니스트의 대답과는 달리 아무 대답 도 선뜻 다가오지 않았다. 며칠의 고민 끝에 내게 다가온 대답은 글쓰 기 였다. 머리를 쥐어짜며 떠올린 기억 속에 아련히 존재하는, 어린 시 절 글짓기 대회에 나가면 받아오던 상장들이 그 대답의 지대한 공로자 였다. 그래서 쓰기 시작한 글이었다. 틈틈히 글을 썼고, 글을 쓰기 시작 하면 시간가는 줄 몰랐다. 눈이 아려 고개를 들면 밤 두 시가 넘고 있었 다. 그렇게 보낸 작년 한 해였다. 이번 재외동포 문학상에 공모하기 전, 나는 가작 작가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올 해는 상복이 많은지 미주 중앙일보의 논픽션 부문과 미주 한국일보의 단편소설 부문에 연이어 가작으로 입상되는 기쁨을 누렸다. 그래서 나에게 붙여진 별명이었는데, 이번 재외동포 문학상 응 모로 제발 가작 작가라는 별명을 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컸었다. 대상 소식을 접하던 날의 감격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수상 소 식에 내 기쁨이 한층 더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가작 작가라는 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 수상소감 403

404 이다. 떼고 싶었던 그 별명이 대상 소식과 함께 그렇게 친근하게 와 닿을 수가 없었다는 것. 결과를 기다리던 주위 사람들에게 대상의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이 말 또한 잊지 않았다. 계속해서 가작 작가로 불러 주세요. 내가 계속해서 가작 작가라고 불리고 싶은 것은 계속해서 글을 열심 히 쓰겠다는 나의 의지요 다짐이기도 하다. 가작 건너에는 내가 넘어야 할, 높은 그 무엇이 늘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것은 대상 소식이 내게 가져다 준 큰 기쁨 외에 앞으로 더 열심히 글을 쓰라는 채찍과도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이번 행사를 주관하신 재외동포재단과 미천한 제 글을 대상으로 뽑 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404 재외동포 문학의 창

405 수상소감 수필 부문 우수상 박혜자(미국) 예상치도 않은 가을비가 종일 내내 내렸습니다. 이 비가 그치고 나 면 텍사스의 가을이 정말로 찾아올 것입니다. 이 가을비처럼 생각지도 않은 수상소식이 저를 문학의 길로 이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 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글을 쓴다는 것은 저의 오랜 소망이었고, 외로 운 이민생활에 저를 지탱해주는 커다란 구원의 불빛이었습니다. 모쪼 록 이런 기회를 마련해주신 코리언넷 관계자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또 한 이런 기회가 많아질수록 우리의 디아스포라 문학도 더욱 더 발전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수상소감 405

406 수상소감 수필 부문 우수상 조성숙(중국) 처음으로 글이라고 써서 보내봤는데 이렇게 우수상이라는 영예를 주 시니 참 당황하고 부끄럽습니다. 나의 글이 이런 자격을 갖추었을 가 고. 그래서 이런 높은 영예를 안겨주신 동포재단의 평의원 여러분에게 감사합니다. 나에게 앞으로 글을 써 보고 싶을 용기를 줬으니깐요. 글 을 읽는 것은 나의 취미생활입니다. 이렇다 계획이 없이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왔습니다. 그러면서 글을 쓰는 분들을 흠모해마지 않았습니 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나도 글을 쓰고 싶어지였습니다. 무엇을 쓸까 크게 머리를 굴리지 않았습니다. 명절이 되거나 또는 내가 어려울 때나 항상 떠오르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언제나 가슴 아 프게 떠오르는 아버지의 모습은 내가 그저 마음속에 간직하기엔 부담 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툭 털어놓고 싶었던 것입니다. 살아 계실 적에 효성을 드리지 못한 것이 한없이 후회되면서 이 글을 아버지에게 올리 406 재외동포 문학의 창

407 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저에게 영예를 주시고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셔서 천만번 감 사합니다. 수상소감 407

408 수상소감 중고등 부문 대상 송진아(뉴질랜드) 대상이요? 처음에 믿기지 않아서 또 한 번 물어봤습니다. 사실 이번 에 낸 글은 엄마에게 보내는 작은 고백의 편지와도 같은 것 이었습니 다. 그런데 너무나 큰 선물이 돌아 왔습니다. 사실 엄마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쓰고 싶었었습니다. 어릴 적 선 생님이 시켜서 쓰던 글 말고, 어버이날 형식적으로 쓰던 편지 말고, 내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고 내 머 리 속에 끈끈하게 달라붙어 있던 엄마에 대해서요. 너무 오랫동안 당연 하게 함께 살면서도 단 한 번도 엄마의 삶을 들여다 본 적이 없었습니다. 큰 딸 이라면서도 늘 필요할 때만 엄마, 아쉬울 때만 엄마였습니다. 그냥 나에게 엄마는 그저 엄마였습니 다. 이곳에 와서 늘 언어의 장벽과 외로움과 싸웠을 엄마. 그러면서도 우리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 아낌이 없고 힘듦이 없었던 엄마. 옛날 어린 아이였을 적에는 그냥 모른 척 넘어갔을 엄마의 모습이지만 이젠 408 재외동포 문학의 창

409 그러지 못하는 것이, 이제 엄마와 나의 관계가 어른과 아이에서 어른과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과정을 거치고 있기 때문일까요?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늘 마음속에 꼭꼭 감추어 두었었는데 이 글로 조금 열어두게 되었습니다. 다 컸다 기엔 조금은 어리고, 어리다고 하기엔 훌쩍 커 버린 딸 의 두 눈으로 본 엄마의 모습과 그 모습을 보는 딸의 마음을, 부족한 글 솜씨로 담은 이 글이 조금은 쑥스럽지만 상을 탄다 고 하니 너무나 기쁩니다. 어렸을 때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하고 또 자주 썼었는데 한국을 떠 나 있으면서 아무래도 한국말로 글쓰기가 조금 힘들어 지고, 서툴러져 서 많이 속상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속상함이 이 기쁜 소식 하나로 한방에 날라 가는 듯합니다. 이번을 계기로 앞으로도 더욱 용기 내어 더 좋은 글, 더 많은 글을 쓰고 싶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수상소감 409

410 수상소감 중고등 부문 우수상 박연희(미국) 저의 부족한 글을 이쁘게 봐주시고 우수상이라는 큰 상을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대학 원서를 써가면서, SAT공부 해가 면서, 그리고 대학에서 강의도 들으면서 쓴 노새 는 바쁜 방학 속에서 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조금 더 알아 갈 수 있었던 작지만 달콤한 휴 식이었습니다. 하루하루 앞만 보고 미래를 위해 마치 쫒기는 듯 바쁘 게 지내는 저에게, 잠시남아 뒤를 돌아보고 지금 까지 살아온 제 삶의 대해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대학 입시의 여러 가지 스트 레스 속에서 헤매던 저에겐, 노새 는 제가 지금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 한 번 깨우치게 해주었고, 대학 이후 저의 더 큰 목적도 다시 리마인드 시켜주었습니다. 그렇게 쓴 노새 가 우수상을 탔다는 이메일을 보고 처음에는 실감이 안 났습니다. 이런 귀한 기회를 주신 재외동포재단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앞으로 한인 1.5세로서의 자부 410 재외동포 문학의 창

411 심과 책임을 다하는 제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수상소감 411

412 수상소감 중고등 부문 우수상 윤영(중국)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어 더없이 감사함과 아울러 생각 밖의 영광을 안게 되여 더없이 행복합니다. 공부에 많이 신경을 쓰다 보니 책 볼 여가도 별로 없지만 이번 이후로 문학을 좀은 사랑하게 될 것 같습니 다. 아직 많은 것에 낯선 저에게 기실 재외동포문학상은 아름이 버는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다 좋은 글은 있지만 가장 좋은 글은 없듯 이 이 기회를 빌려 많은 부족한 점과 노력해야할 면들을 생각하게 됩 니다. 상은 앞으로 더욱 좋은 작품을 쓰라는 부탁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412 재외동포 문학의 창

413 수상소감 중고등 부문 우수상 최송지(피지) 이제 두 달이면 피지 섬을 떠나게 된다. 그토록 그리던 고국, 대한민국으로 돌아가는 날이 머지않은 것이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처음의 낯설음, 친구들 사이에서의 소외감, 그리 고 후진국에서의 가난한 생활은 이제 슬픔만을 남겨둔 채 멀어져만 간다. 한인회 홈페이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재외동포 문학상 은 나에게 이 곳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바쁜 고3의 스트레스와 혼란 속에서 피지의 아름다움을 잊지 않도록 가슴속에 새길 수 있는 기회를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만큼 성실하진 못해도 가슴은 그 누구보다 따뜻 한 피지사람들, 지상낙원임을 자랑하듯 당당히 펴 보이는 멋진 경관과 너무나 맑고 깨끗하여 숨이 탁 트이는 공기. 전 세계적으로 열린 이 글짓기 대회에서 수상하게 된 것은 나에게 정말 큰 행운이었다.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에서, 평범한 나에 의해 수상소감 413

414 쓰인 글이 높이 평가받은 것은 너무나 영광스런 사실이다. 어렸을 적부 터 꿈이었던 성공한 작가가 되어 자랑스러운 한국인을 대표하고 더불 어 내가 자라온 작은 피지섬을 더욱 멋지게 그리고 싶다. 그리울 나의 작은 나라여, 이젠 안녕. 414 재외동포 문학의 창

415 수상소감 초등 부문 대상 안찬원(몽골) 안녕하세요. 전 몽골 울란바타르에 살고 있는 안찬원입니다. 현재 러시아 학교인 필하노 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며 토요일에는 몽골 토요한글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러시아 학교생활을 하면서 한국말을 소홀히 할까봐 매주 한글학교에 다니며 친구들도 만난답니다. 토요일마다 우리는 한국어는 물론 애국 가도 부르고 체조도 하고 한국문화와 예절을 배우면서 우리나라 대한 민국을 생각하곤 합니다. 7월 여름방학에 저는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글학교 허영숙 교장선생님께서 저에게 재외동포 문학상 글 쓰기 대회에 참가해보라고 권유해 주셨습니다. 저에겐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고 한번 도전해 보았습니다. 여름방학을 보내고 새 학년을 시작하며 분주히 보내고 있던 중 발표 수상소감 415

416 가 언제쯤 날까하는 궁금한 마음이 들었지만 새로운 공부에 정신없이 공부하느라 사실은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9월의 마지막 날 공부시 간이었습니다. 뜻밖의 수상 소식에 기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였습니 다. 빨리 집으로 돌아와 메일을 확인한 후 부모님과 교장선생님께 기 쁜 소식을 전해드렸습니다. 어른들의 축하전화와 메시지를 받으니 조 금씩 실감이 났습니다. 제가 초등부 대상이라는 큰상을 받았다는 사실 에 하늘을 날을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저에게 이런 좋은 기회를 주신 토요한글학교 교장선생님과, 평소 잘 지도해 주신 담임선생님, 제외동포 문학상 관계자 여러분, 또한 저의 수상을 축하해 주신 몽골교민분들, 축하메일을 보내주신 석정민 선생 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글쓰기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안찬원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416 재외동포 문학의 창

417 수상소감 초등 부문 우수상 김태양(호주) Term2 한글학교 방학숙제로 써낸 글을 한국에 보낸 것은 기억이 나 는데 상금과 상패가 있는 것은 몰랐고 내가 쓴 글이 뭐였는지도 잊어버 렸다. 학교에서 집에 오자 엄마가 기쁜 소식이라며 알려 주셔서 메일을 확인 하니 이럴 수가 없었다. 무엇을 썼는지 잘 기억도 안 나는데 우수 상을 받았다니 그리고 상금까지 준다니 너무 기뻤지만 좀 미안한 생각 도 되었다. 하지만 앞으로 받을 상금을 어떻게 쓸지 고민이 되었다. 편 지함에서 꺼낸 부로셔에 게임기가 세일 한다고 해서 미리 상금을 꿔주 면 안되냐고 엄마한테 얘기 했다가 좀 지독하신 우리 엄마한테 혼났다. 엄마께서 저장해 놓으신 나의 글을 보여 주시자 그 때는 숙제라고 해서 억지로 썼는데 역시 엄마 말씀을 잘 듣고 학교 숙제를 열심히 해야 하 며 또 기쁘게 써야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리고 글을 잘 쓰기 위해 서는 평소에 일기를 잘 써 놓아야지 생각이 안 날 때 이어서 쓸 수 있다 는 생각도 했다. 수상소감 417

418 나는 얼마 전에 한글학교 백일장 대회에서 게임과 공기놀이 라는 시 를 써서 장원을 했다. 심사하신 시인 선생님이 내용이 엄마와의 대화를 통해 재미있게 시로 표현했다고 심사평을 해 주셨다. 그때 받은 상품권 으로 방학하자마자 가지고 싶었던 것을 잔뜩 샀다. 이번에 받는 상금은 계획을 잘 세워서 저금도 하고 엄마, 아빠를 위해서도 조금 쓸 생각이 다. 마지막으로 나의 글을 재미있게 읽고 뽑아주신 선생님들께 감사드 리며 앞으로 더 열심히 한글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418 재외동포 문학의 창

419 수상소감 초등 부문 우수상 유재원(미국) 제가 아빠의 마음 을 쓰고 있었을 때는 아빠가 아주 바쁠 때였어요. 불만스럽고 슬픈 나의 마음을 아빠에게 알려주고 싶었지요. 그래서 남 의 이야기처럼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반만 쓰다가 그만 두었 어요. 하지만 어느 날, 엄마가 제게 편지를 주셨어요. 저는 누가 보낸 편진지 궁금해서 고개를 갸우뚱 했어요. 그러자 엄마가 이렇게 말을 했 어요. 아빠가 써 주신 거야. 편지의 첫 글을 읽자마자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왜냐구요? 그 편지 안에는 아빠의 마음과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기 때문이지요. 저는 눈 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연필을 들었어요. 그리고 다시 글을 써서 완 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도 아빠의 편지는 제 머리맡에 붙여져 있 어요. 제게 우수상을 주신다고 하셨을 때, 저는 깜짝 놀랐어요. 처음에는 수상소감 419

420 받아도 될까 고민이 되었지요. 엄마가 마무리를 많이 도와 주셨거 든요. 담당하시는 분께서 용기를 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받게 되었 습니다. 글씨도 틀리지 않고 매끄럽게 쓰려면 아직도 연습을 많이 해야 하지 만 자꾸 글을 쓰고 싶고, 정말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좋은 상이 큰 격려가 되네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지켜봐 주 세요. 420 재외동포 문학의 창

421 수상소감 초등 부문 우수상 이기혜(뉴질랜드) 저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이런 상 받는 게 처음이거든요. 고맙습니 다. 한글을 가르쳐 주신 웰링턴 한글학교 교장 선생님과 우리 반 선생 님께서 글쓰기를 가르쳐 주셔서 이제는 한글을 잘 쓰게 되었어요. 모두 모두 고맙습니다. 식물학자가 되는 희망이 커졌습니다. 아주 큰 상을 받았으니까요. 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더 많이 납니다. 식물을 더 많이 공부하고 싶습 니다. 식물학자가 되는 꿈을 키우고 싶습니다. 식물학자가 되는 글쓰기 를 했는데, 이제 약을 찾을 줄 아는 식물학자가 되어 신기한 식물들을 살피고 도와주면 좋겠지요? 식물을 보고 열심히 공부하자! 그러고 생각했는데, 뭔가가 조금 이상 했습니다. 상 받은 게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메일을 확인했지요. 이건 꿈 일거야. 응! 꿈이야. 그러고 생각하면서 메일을 열었는데 이기 수상소감 421

422 혜 학생 우수상 정말 상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너무 너무 기뻤습니다. 이 상 가지고 씨앗을 많이 사서 키우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씨앗에 서 싹이 나오면 제가 잘 키워서 예쁘고 큰 꽃이 나오도록 잘 키울 것입 니다. 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422 재외동포 문학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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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능 원 묘 기본 사료집 -부록 : 능 원 묘의 현대적 명칭표기 기준안 차 례 서 장 : 조선왕실의 능 원 묘 제도 11 제 1부 능 원 묘 기본 사료 Ⅰ. 능호( 陵 號 ) 및 묘호( 廟 號 )를 결정한 유래 1. 건원릉( 健 元 陵 ) 21 2. 정릉( 貞 陵 ) 22 3. 헌릉( 獻 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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