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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 이진우 그림 우승우

4 노랗게 물든 아이들과 빨갛게 핀 어머니와 마른 나무 같은 아버지가 이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저구마을 아침편지 초판 1쇄발행2004년 1월 27일 초판 2쇄발행2004년 2월 03일 지은이 이진우 펴낸이 정중모 펴낸곳 도서출판 열림원 주간 이영희 책임편집 박은경 디자인 강희철 제작 송정훈 영업 김석현 배한일 관리 김명희 김은성 정소연 등록 1980년 5월 19일(제 호) 주소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문발리 파주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 전화 팩스 홈페이지 이메일 c 2004, 이진우 책값은 뒤표지에 있습니다. ISBN

5 공공건물을 빼고 3층짜리 양옥집 한 채와 2층짜리 양옥집 서너 채가 있습니 다. 마을 안으로 버스 한 대 겨우 지나갈 만한 1차로가 있습니다. 시내버스 는 하루 다섯 차례, 시외버스는 하루 여덟 차례 이 마을에 옵니다. 인근 마을 사람들은 버스를 타러 한 시간가량 걸어와야 하지요. 서 두르고 버스 시간을 잘 맞춘다면 서울까지 하루에 다녀올 수도 있습니다. 고 속 인터넷망이 들어와서 인터넷 사용에도 별 무리가 없습니다. 시골에서 산다는 것 그러나 5백 미터 정도 해안을 따라 늘어선 마을이고 1백가구정도산다 는데, 실제로얼굴을볼수있는사람은스물남짓입니다. 부지런히 선창과 논밭을 쫓아다니면 더 많은 얼굴을 볼 수 있기야 할 겁니다. 지난겨울, 서울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란 사람이 시골로 와서 살게 되면 모든 게 낯설기 마련입니다. 서울에서 거제도 남단에 있는 이 마을로 올 때는 이사 가는 게 아니라 이민 가는 거라고 여겼습니다. 도시는 번잡하고 찌들고 각박 하지만 시골은 한가롭고 평안하고 정감 넘친다는 관념조차도 지웠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삶이다, 작정했습니다. 시골도 시골 나름입니다. 시골에 사는 사람의 입장으로 볼 때 제가 사는 마을은 시골이라 부르기 좀 애매합니다. 면소재지거든요. 구청 규모의 면사 무소가 마을 어귀에 있습니다. 농협 건물도 번듯하고, 보건소도 그럴듯합니 다. 자그마한 우체국도 있습니다. 그 외에 2층짜리 마을회관도 있군요. 이런 종로 어느 건널목에 서 있다가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세어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이 마을 사람 다 모아놔도 이만큼은 안 되겠 다 싶었지요. 그래도 이 마을이 남부면에서는 제일 큰 마을입니다. 남부면은 남아메리카의 칠레처럼 좁고 길게 해안선을 따라 자리잡고 있 는 데다 산이 높고 험해 평지가 드뭅니다. 덕분에 거제도의 관광 명소는 거 의 다 모여 있고 한려해상국립공원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남부면, 특히 이 마을로 오는 공무원이나 바로 옆 마을로 오는 초등학교 교사들은 오 지 수당을 받는답니다. 그렇게 보면 이 마을이 오지인 것도 같습니다. 가장 가까운 도시까지 버스로 한 시간을 가야 하지요. 신호등 없는 길을 쌩쌩 달 6 시골에서 산다는 것 7

6 려 한 시간이니 거리를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마을에는 아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이 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온 집안의 아이들보다 근무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살러 온 집의 아이들이 많지요. 토박 이 아이들 중에는 부모와 함께 사는 경우가 드뭅니다. 대개는 할아버지, 할 머니 손에서 자라는 아이들이지요. 그 부모가 외지에 돈 벌러 나간 까닭입니 다. 그러다 보니 학교 갔다 오면 아이들은 참 심심합니다. 그래서 텔레비전 이나 컴퓨터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시골까지 살러 와서 그럴 수야 없지요. 숙제를 마치면 집 밖으로 내몹니다. 들에서 놀든 바다에서 놀든 알아서 놀라 하지요. 젊은 축에 드는 사오십 대는 거의 배를 탑니다. 농사일은 노인들 차지입 니다. 이 마을에서 노인 축에 끼려면 칠순은 되어야 합니다. 팔순 노인들도 몇백 평이나 되는 밭일을 혼자 다 합니다. 힘들어 죽겠다는 소리를 입에 달 고 살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안 믿습니다. 노인이 일하는 게 안쓰러워 일 도와주러 나갔다가 오히려 일 못한다는 핀잔만 한참 주워들은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노인들이 마을의 주도권을 잡고 있지요. 제가 사는 집은 마을 입구이면서 마을 끝입니다. 저희 집 뒤로 논밭이 쭉 펼쳐져 있고, 앞으로는 큰길 너머로 집들이 쭉 늘어서 있습니다. 노인들은 새벽 닭소리 울리기 무섭게 우리 집 옆으로 난 농로를 따라 농사를 지으러 갑니다. 점심때 그리고 해질 무렵 집 옆을 지나가지요. 집에 있다 보면 인사 하기 바쁩니다. 그렇게 산 지 3년째인데, 겨우 마을 사람으로 대접을 받을까 말까 하지요. 그분들 눈에는 제가 언제든 떠날 사람인 게 틀림없습니다. 시 골 살지만 시골 사람이 아닌 게지요. 계획을 세워 시골 생활을 작정하고 내려온 게 아니라서 생활 기반을 마련 하지도 못했습니다. 집 한 채와 거기에 딸린몇평안되는텃밭. 그마저아 버지 소유입니다. 도시에서 빚잔치 하고 나서 시골 와서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글 쓰는 사람 수입 뻔하지요. 인세라 도 받으면 밭을 조금씩 사보려고 했는데, 이 마을은 땅값이 너무 비 싸엄두를못냅니다. 집을개조하여방네개로민박을쳐서네 식구가 먹고살고 있습니다. 기반이 잡힐 때까지는 시골 사람이라 는 명함도 못 내밀 것 같습니다. 시골에 살고는 있으나 도시에서 수 입을 얻고 있으니, 시골 사람이 봐도 한심하고 도시 사람이 봐도 한심 한 노릇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생활이라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불안을 이기기 위해 우리 가족은 행복하게 살기로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무슨 재미있는 일을 할까, 어떻게 하면 모두 즐거울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시 골 생활이 가장 좋은 점은 자기 멋대로 무엇이든 해볼 수 있다는 점이지요. 8 시골에서 산다는 것 9

7 물론 결과 역시 전적으로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책임은 부 담스러운 게 아니라 즐겁습니다. 스스로 원한 책임이기 때문이지요. 시골 생활에 대해 학교에서조차 배운 게 거의 없는 터라 일단 몸으로 부 대껴봅니다. 실패를 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이 경험이 되어 실패 확 률이 점점 줄어들게 되지요. 시골에서 맞부딪히는 일이 무슨 초정밀 기계를 다루는 일이 아니라서 경험이 쌓이다 보면 해결책이 나오 기 마련이고요. 일은 어렵지 않은데, 해보지 않았던 일이라 두려움 이 많습니다. 그런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2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거듭된 실 패가 오히려 용기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실패가 용납될 뿐 아니라 값진 교훈 이 되는 곳이 시골이었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저의 실패를 재미있어하고 다시 해보도록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 역시 아이들에게 실패 시골로 돌아왔다? 으리으리한 집을 짓고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길 원한 다면 시골에 살러 올 필요 없지요. 시골에는 그런 게 안 어울립니다. 그리고 도시 근교 시골에 목조 주택을 지어놓고 도시로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도 시 골 사람은 아니지요. 생활의 기반이 어디에 있든 생각과 마음이 도시에 머물 러 있다면 전원생활이나 귀농이 행복할 수 없을 겁니다. 시골에서 살려면 마음이 시골을 닮아야 합니다. 시골 같은 마음, 어울려 사는 기쁨과 방법을 알면 도시에 살아도 시골에 사는 게 되겠지요. 도시나 시골은 인위적인 구분일 뿐입니다. 조금만 더 자신과 가족과 친지와 친구와 동료에게 넉넉한 마음을 가져보십시오. 내가 행복하려고 하기보다 남을 행 복하게 해서 그 모습을 보고 나까지 행복해지는 삶. 그걸 당신의 마음속에서 일구어나가시기 바랍니다. 거기가 시골입니다. 를 권합니다. 늘 잘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도시에서였다면 그럴 수 없었겠 지요. 실수나 실패를 너그럽게 봐줄 줄 알고 다시 도전하는 용기를 북돋워주 는 게 시골 사는 부모가 할 일 아닌가 싶습니다. 매일 칠팔순 노인을 보고, 해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마을 풍경을 보고,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자연의 순환을 보며 살다 보니 마음이 넓 어지고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간혹 시골로 돌아와 성공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그리하여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기사를 읽을 때가 있습니다. 성공하러 10 시골에서 산다는 것 11

8 차례 작가의 말 06 시골에서 살려면 마음이 시골을 닮아야 합니다 텃밭 68 흐르는 땀조차 단 웃음이 되었습니다 고구마 74 쟁기가 지나가면 탐스러운 자줏빛 고구마가 얼굴을 내밉니다 1. 생명을 가진 모든 것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화 79 일할 때 장화보다 요긴한 신발이 없지요 산불 조심 83 보이지 않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이 편합니다 풍경 19 번데기 24 가족 잠자리 30 이발사 33 풍경 소리에 취하면 어느새 꿈결이고, 아침입니다 언제든 아이들은 깜짝 놀랄 걸 들고 올 겁니다 누구도 아버지가 오래 잠 못 드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아내는 이 마을에 와서 이발사가 되었습니다 떠나오다 86 이 마을이 안전하다는 확신을 가지는 데 3년이 걸렸습니다 물맛 89 물을 고마워하며 마실 줄 알아야 반쯤 이 마을 사람이 된 거지요 새옹지마 92 샛노란 배추꽃과 하얀 무꽃, 게을러 씨 늦게 뿌린 탓에 보게 되었습니다 하루 95 촌사람으로 사는 게 살아본 것 중에서 가장 편하고 행복합니다 바로 지금 99 날짜나 요일을 모르고 살다 보니 나중에 라는 게 없습니다 낚시 38 팔자 사나운 도다리 한 마리 걸리면, 용왕님 선물이라 여깁니다 친척관계 102 헤어져도 헤어진 일이 없으므로 지난 세월을 묻지 않았습니다 쑥국 43 시골 봄 살림에 쑥국만큼 고마운 국도 없습니다 아지트 107 바위에도 마음이 있을 거란 생각에 혼자 낄낄거리고 말지요 별이 48 아무래도 세상에는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있나 봅니다 지는 해 110 황금빛 햇살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가난한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어줍니다 신문배달부 57 신문집 할아버지가 우리 마을 신문입니다 봄비 117 땅속에서 두려움을 참고 기다린 오랜 날들이 있어 그 빛은 시리도록 푸를 겁니다 소풍 61 가족 소풍 길에서 실수를 보듬어 안는 법을 연습합니다 슬픔 123 이틀이 지나자 친구는 오랜 불면증이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유치원 졸업식 65 어린 몸으로 자연을 겪어내며 딸아이는 부쩍 자랐습니다 청해반점 126 물때를 만나 바쁜 배 위에서도 자장면은 맛나게 비벼집니다

9 우물 178 우물물은 자꾸 퍼주어야 썩지 않습니다 2. 학교나 집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세상을 아이들은 자연과 뒹굴면서 알게 됩니다 덕률이 184 광신지업사 189 장기의 규칙 194 장마의 추억 199 할랑할랑, 살랑살랑, 한들한들, 덕률이 일하는 게 딱 이렇습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열심히 벽지를 발랐습니다 딸은 막무가내로 공격하는 형이고, 아들은 한 수 두는 데도 몇 분을 망설입니다 노란 비옷을 입고서 자전거를 타고 장맛비 속으로 들어가보고 싶습니다 형과 동생 131 세상 모든 형들이 이러겠지요 진수성찬 206 여기저기 나물들이 쑥쑥 올라온 밭둑은 그대로 샐러드 바였습니다 마음의 텃밭 137 먼저자라고먼저열매를맺는게꼭좋은것만은아니랍니다 아버지 211 아부지, 한판 두실랍니꺼? 조개잡이 142 오후 내내 몸을 부려 파낸 그 조개는 값으로 따질 수 없지요 아들처럼 215 장인어른, 올해도 죄송합니다 감국차 148 저도 감국차처럼 한결같은 맛이 나는 사람이 될 수 있을는지요 시골 냄새 219 밥상에 집에서 기른 채소가 올라오면 꼭 오줌 얘기를 합니다 클로버 153 세 잎은 행복, 네 잎은 행운, 일곱 잎은 뭘까? 친구 224 친구가 문득 그리우면 전화를 하는 대신 잘 살기를 바랍니다 마법사 157 진짜 마법사가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인터넷 227 시골에 산다고 인터넷까지 사람을 무시하냐며 투덜거립니다 밥상 161 방 한 귀퉁이를 차지한 쌀을 보면 자꾸 웃음이 나옵니다 서당개 230 가방도메지않고공부도안하는강아지, 과연3년 후엔 풍월을 읊게 될는지요 까치 둥지 165 흙과 풀과 가지가 인연으로 모여 까치 둥지가 되고 다시 풀의 집이 되었습니다 한살이 235 하루살이의 한살이든 사람의 한살이든 크게 다를 바 없지요 소중한 것들 169 무엇이 부끄럽고 부끄럽지 않은 것인지 아들에게 배워야겠습니다 상추 솎기 242 제가 받은 씨, 이젠 믿겠습니다 아이들 세상 172 그 세상은 아이들의 언어로만 설명되지요 배추꽃 246 저라는 사람, 배추만도 못한 사람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10 1. 생명을 가진 모든 것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마을에 와서 저는 무지렁이가 되었습니다. 전에 배우고 겪어 알고 있던 모든 걸 다 버렸지요. 그렇게 지내는 동안. 바닷빛에 젖어든 노을처럼 그렇게 마을 사람으로 젖어들었습니다. 경남 거제시 남부면 저구리에 있는 저구마을. 저에게 이 마을은, 많고 많은 마을 중의 하나가 아니라 새 나라입니다. 16

11 풍경 창밖에 오래된 풍경 風 磬 하나 달려 있습니다. 바람과 어울려 수다 를 잘 떨지요. 가만히 귀 기울여보면 풍경을 찾아오는 바람이 늘 같 은 바람이 아닌가 봅니다. 소곤소곤, 두런두런, 시끌벅적, 투덜투 덜. 뭔 말이 그리 많은지, 별꼴입니다. 아이는 학교 가고 아내마 저 어디 가고 없는 날, 목을 빼고 창밖을 내다보노라면 풍경은 신이 나서 더 큰 소리를 내지요. 바람이 많은 바닷가 마을이기는 해도 풍경이 입을 다물 때도 있습 니다. 저녁 아홉시, 막차가 끊어지면 아직 잠들지 않은 불빛도 꾸벅 꾸벅 좁니다. 나지막하게 울리며 빈 마을을 지키던 풍경이 기척조차 풍경 19

12 없을 때면 창문을 열고 바람의 행방을 수소문합니다. 풍경이 한숨을 쉬듯 한마디를 내뱉고 고개를 돌리면 아직 바람이 자지 않은 줄 알 뿐이지요. 걱정이 쌓여 뒤척이는 밤이면 풍경이 수다스러워집니다. 달래준다 고 하는 소리들이 오히려 오던 잠마저 쫓아버립니다. 그러나 걱정은 이내 풍경 소리에 마음을 내주고 맙니다. 풍경 소리에 취하면 어 느새 꿈결이고, 아침입니다. 제 집은 마을 어귀에 있습니다. 가까이 버스 정거장이 있지요. 마 을 입구이면서 출구인 셈입니다. 저희 집 앞 도로 건너로 집들이 줄 지어 섰고, 뒤로 할머니 혼자 사는 집이 한 채 있습니다. 바로 담을 맞대고 붙어 있는 집이 없지요. 집 바로 옆으로 농로가 나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 마을의 논과 밭 이 쭉 펼쳐져 있습니다. 새벽부터 마을 어른들이 일하러 가는 바람에 잠귀 밝은 아내는 새벽잠을 설치기도 합니다. 농로 바로 건너에 있는 폐가에서 닭을 키우고 있는데, 장닭 목청이 대단합니다. 20

13 부산하나 바쁘거나 시끄럽지 않은 시골 마을의 하루는 노을과 함 께 저물어갑니다. 경운기가 줄 이어 털털거리며 마을 쪽으로 몰려가 면 부엌에서 저녁밥 짓는 냄새가 풍겨 오지요. 밥상을 물리면 어두운 다. 보기는 흉해도 소리는 여전히 맑습니다. 그후로는 풍경을 떼어내 라는 사람도 없군요. 풍경이나 저나 누추하지만 행복하게 지내고 있 습니다. 창밖은 벌써 적막강산입니다. 막차가 도착하면 마을은 마음을 놓고 잠이 듭니다. 그날이 그날 같은 게 시골 풍경입니다. 보일 때가 되었는데 보이던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걱정을 하는 이 마을에 풍경이 매달리던 날, 사람들은 어리둥절했습니다. 낯선 소리에 신기해했지요. 풍경이 들 려주는 바람의 말은 귀보다 먼저 마음이 듣나 봅니다. 특히 바람 부 는 밤이 지나고 나면 풍경을 보며 한마디씩 던지고 지나갔습니다. 낮지만 멀리 퍼지는 그 소리에 마음이 아린 사람도 있었고, 흥겨운 사람도 있었지요. 누가 찾아와 풍경을 떼어내라고 말을 해서 떼어놓 으면 다른 누가 찾아와서는 왜 떼었냐고 합니다. 떼었다가 달았다를 반복할 뿐입니다. 그사이 풍경 아래 달린 물고기 모양 동판이 사라져버렸습니다. 풍 경 소리 듣기 싫어하는 누가 그 놈을 떼어버렸다고 하는 소리도 들렸 습니다. 물고기 없이 벙어리가 된 채로도 풍경은 한참을 매달려 있었 습니다. 지금은 쓰고 버린 그라인더 날을 물고기 대신 달아놓았습니 22 풍경 23

14 데기를 매일 들여다보았지만 점점 횟수가 줄었고 잊어버렸습니다. 입춘이 지난 며칠 후, 번데기를 여느 때처럼 살펴보러 간 아들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박각시나방이에요. 허물을 벗고 나온 건 눈이 크고 검어 토끼처럼 귀여운 나방이었습 니다. 아들의 동물백과에는 줄홍색박각시라고 적혀 있었지요. 아이 번데기 들은 줄홍이 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날려 보냈습니다. 허물은 아이 들의 보물 상자에 간직하고요. 작년 늦가을, 밭에 거름을 주려고 뒷집 할머니가 쌓아놓은 소똥을 가지러 갔습니다. 소똥더미를 뒤집다가 엄지손가락만 한 번데기를 발견했습니다. 함께 간 아들과 딸이 탄성을 지르며 손바닥 위의 애벌 레를 구경했지요. 어린이 동물백과를 거의 외우다시피 한 아들은 나 방 종류라고 했습니다. 번데기가 꿈틀거리자 아이들이 서로 만지겠 다고 야단이었습니다. 아버지, 번데기에서 어떤 곤충이 나올까요? 우리 키워요, 네? 짚을 잘게 썰어 유리병에 넣은 다음 짚 사이에 번데기를 넣었습니 다. 유리병은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올려놓았지요. 처음 얼마간은 번 아홉 살 난 아들 호윤이는 호기심을 타고났습니다. 동물에 대한 호 기심은 각별하지요. 한글을 배우기도 전부터 동물백과를 끼고 살았 습니다. 아들이 한글을 혼자 깨치게 된 것도 어찌 보면 동물백과 덕 분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러고 보니 공룡백과도 달달 외우고 있습니 다. 책을 보고 또 봐서 거의 외울 지경이 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 입니다. 요즘에도 학교 갔다 오면 책부터 집어듭니다. 비 오거나 아 주 추운 날이 아니면 제발 나가 놀라고 등을 떠밀지요. 24 번데기 25

15 여덟 살 난 동생 지윤이는 오빠와 함께 노는 버릇이 들어 호윤이가 책을 읽고 있으면 옆에 나란히 앉습니다. 아직 한글을다못깨친아 이인데도 오빠가 읽는 어려운 책이 지겹지 않은 모양입니다. 동물을 좋아하는 오빠 따라 자연보호자가 되겠다고 합니다. 자연을 살리는 일이라면 뭐든 하는 아이라서 밥알 한 톨도 흘리지 않습니다. 호윤이는 네 살에서 다섯 살 무렵까지 지윤이와 함께 놀이방에 다 녔습니다. 서울에살적일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는회사에다녀야 했기 때문에 동생을 돌보는 건 오빠의 몫이었습니다. 동생은 동생대 로 오빠한테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지요. 부모 없이 보내는 시간이 대 부분이었던 아이들은 같이 노는 법, 양보하는 법, 달래주거나 칭찬하 는 법을 서로에게서 배웠습니다. 시골로 이사를 와서 유치원을 다니게 되면서부터 둘은 꼭 손을 잡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3년이 흘렀고 부모가 곁에 있게 되었지만 뭘 해도 꼭 같이 하려고만 합니다. 서로 좋아하는 일이 다른데도 따 로 하지 않고 같이 합니다. 그러다 보니 하기 싫은 일도 서로를 위해 마다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와 함께 다니는 걸 좋아합니다. 아이들 눈에 아버 지가 하는 일은 마냥 신기한가 봅니다. 아버지가 밭일을 하면 밭으로 26

16 오고 나무하러 가면 산으로 오고 낚시를 가면 바다로 쫓아다닙니다. 뭐가 그리 볼 때마다 새롭고 신기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아이들 은 아이들. 아버지 일을 거들다가는 금방 싫증을 냅니다. 대신 아버 서 무얼 배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언제든 아이들은 깜짝 놀랄걸들고올겁니다. 그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마음을 비우고 살아야지요. 지 주위에서 뛰어놀지요. 제멋대로 놀면서 아이는 자연을 익히고 겪 고 마음에 두게 되었나 봅니다. 벌레나 날짐승, 들짐승 어느 것 하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건 죽었건 다르지 않나 봅니다. 언젠가 아이들과 함께 해변에 산책 나갔다가 죽은 갈매기를 발견 했습니다. 반쯤 뼈가 드러난 상태여서 끔찍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 은 갈매기가 불쌍하다며 그 옆을 떠날 줄 모르더군요. 그렇게 불쌍하면 무덤이라도 만들어주렴. 아이들은 조그만 자갈을 주워 갈매기의 주검 위에 하나씩 쌓았습 니다. 그러고는 갈매기의 영혼이 하늘에 가서 빛나는 별이 되기를 빌 었습니다.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있는 해변에서 짐승 뼈다귀를 주워 오 기도 합니다. 개나 염소의 두개골이지 싶은 커다란 뼈를 들고 오는 아이들을 보고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습니다. 아이들끼리는 공룡화 석이라 여겼던 모양입니다. 한동안 그 뼈를 연구하는가 싶더니 눈에 띄지 않더군요. 어디다 숨겼는지, 묻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 뼈에 28 번데기 29

17 내와 깔깔 웃는 딸, 뭐라 중얼거리는 아들이 어서 잠들라 재촉합니다. 그때가 가장 힘든 순간입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그러할 겁 니다. 앞으로 어찌 사나, 온갖 상념이 졸린 눈을 붙들고 늘어집니다. 졸음 겨운 대로, 뒤엉킨 식구들의 재촉에 못 이기는 척 잠들면 그뿐. 누구도 아버지가 오래잠못드는걸바라지않습니다. 가족 잠자리 우리 집에 온 사람들이 꼭 묻는 말이 있습니다. 연료비를 아끼느라 한방에 모여 자고 있습니다. 네 식구가 나란히 누우면 그만인 방입니다. 초등학교 들어가는 딸과 2학년 되는 아들 사이가 늘 제 자리입니다. 아이들은 팔베개를 한 채 이야기나 자장가 를 듣다가 스르르 잠이 들지요. 큰 아기, 아내도 덩달아 잠이 들고 나 면 세상이 모두 잠든 듯합니다. 창을 넘어든 희미한 불빛에 기대어 식구들의 얼굴을 둘러봅니다. 아 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불을 차며 이리저리 뒹굽니다. 잠버릇이 심 한 아들이 아버지의 다리를 베고 누우면 아내의 다리가 척 걸쳐 옵니 다. 딸은 더 깊숙이 아버지의 품을 파고들지요. 잠결에 배시시 웃는 아 부인은 시골 생활에 만족합니까? 아이들은요? 그러면 대답하지요. 그건 저한테 물어서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이네요. 집사람이나 아 이들에게 물어보세요. 그런데 묻기를 참 망설입니다. 실례가 된다 생각합니다. 아내나 아 이들에게서 마지못해 산다는 대답이 나오지나 않을까 지레 짐작들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저 역시 그들처럼 아내와 아이들이 어떻게 느 끼는지 종종 묻고 싶었습니다. 그간 괴로울 때도 있었고, 서로에게 상처 줄 때도 있었거든요. 그러나 그들이 아내나 아이들에게 사는 게 30 가족 잠자리 31

18 어떠냐고 물을 때, 저는 슬그머니 자리를 뜹니다. 그들도 제대로 알 아야 오해하거나 헛된 희망을 갖지 않을 겁니다. 몇 달 전까지는 아이들을 재웠습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 이들은 아홉시면 자야 합니다. 책도 읽어주고, 옛날얘기도 해주고, 자장가도 불러주며 잠을 재우지요. 제가 바쁜 날은 아내가 대신 아이 들을 재웠습니다. 도시에서 살 때, 그러지 못한 게 가슴에 맺혀 있었 습니다. 부모의 품에서 잠이 들 때처럼 아이들 마음이 편할 때가 있 을까 싶었지요. 마음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은 주저할 필요가 없었습니 이발사 다. 그러기 위해 시골에 살러 내려온 거였습니다. 가족끼리 사랑을 주고받는 일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을 거라 여깁 니다. 사랑이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하지요. 도시에서 맞벌이 를 하느라 아이들을 보기 힘들었습니다. 어른이야 나중에 잘해주면 될 거라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당장 사랑에 배가 고프고 외롭고 괴롭 습니다. 그사이 아들은 무엇엔가 집착하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고 딸 은 주위가 산만했습니다. 아직도 그런 모습이 모두 사라진 건 아니지 만 훨씬 나아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부모에게 사랑을 베풀어줍 니다. 사랑에 있어서 우리는 부모자식 사이가 아니라 그저 사랑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아내가 며칠째 은근한 눈길로 저를 바라보더니 가위와 빗을 꺼내 듭니다. 머리 기를 마음이 있던 터라 팔 아프게 무슨 이발이냐고 손 을 내저어보았습니다. 아내는 흥, 분홍 보자기를 제 목에 휙, 두르고 맙니다. 햇볕 잘 드는 창 아래 퍼질러 앉은 채로 투덜거려봤자 머리 카락 싹둑싹둑 잘리는 소리만 울려 퍼집니다.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구경하다가 이내 놀러 가버립니다. 아내가 땀 흘리며 머리를 자르고 있는 동안, 저도 졸고 봄날도 좁니다. 아내는 이 마을에 와서 이발사가 되었습니다. 자신 없 다며 손을 내젓는 아내에게 이발 가위를 쥐여주며 제 스스로 보자기 32 이발사 33

19 를 목에 매었지요. 그동안 아내의 가위질도 제법 쓸 만해졌습니다. 손님도 저, 아들, 딸, 셋으로 늘었고요. 요즘은 옆머리가 귀 밑으로 조금만 내려와도 아내의 눈빛이 달라집니다. 머리 모양을 제멋대로 할 자유가 없어진 대신 아내에겐 즐거움이 생겼습니다. 살림도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의 모습을 자기 맘대로 꾸 미지요. 구슬땀 흘려가며 가위질하는 아내나 꼬박꼬박 조는 저. 사랑 에는 늘 희생이 따릅니다. 아내가 가위를 들게 만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머리 모 양은 첫인상을 좌우하는 만큼 돈 아끼려 들지 말고 전문가에게 맡겨 야 한다고 했지요. 처음엔 아내의 말을 듣고 이 마을 전문가에게 차 례로 머리를 맡겼습니다. 맡길 때마다 실망이었지요. 그렇다고 다듬 으러 도시로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길어지면 괜찮겠지, 하면서 두세 달을 보냈습니다. 아들, 딸이 미용실에 다녀오는 날은 시골에 와서 사는 게 후회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차라리 내가 잘라줄래. 34

20 군대 시절, 병장 말년 시절에 이발병에게 이발하는 법을 대충 배웠 습니다. 그러나 실습은 충분히 하였습니다. 이발병은 혼자 부대원 백 여 명의 머리를 깎아줘야 했지요. 윗사람이 오늘 내로 다 깎으라면 그래야 하는 게 군대였으니까요. 잘 깎았나 못 깎았나는 문제가 아니 었습니다. 계급이 낮을수록 깎는 순서가 늦을 수밖에 없어 새벽까지 순서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등병이나 일등병은 제가 서툰 걸 뻔히 알면서도 머리를 맡겼지요. 아들이 제일 만만했습니다. 이발 가위와 빗을 꺼내고 아들을 신문 지 위에 앉혔습니다. 긴장한 아들을 달래면서, 윽박지르면서 머리를 잘랐습니다. 군인 머리가 아니라 힘드네. 머리 모양이 엉망이 된 아들에게 미안했습니다. 아들을 바로 마을 이발소로 보냈습니다. 줄곧 지켜보고 있던 아내도 답답했나 봅니다. 차라리 제가 할게요. 앉아봐요. 서 빠졌습니다. 누가 머리를 자르는 날은 가족 모두가 신이 납니다. 평상에서 목에 보자기를 두르고 앉은 사람은 힘들지 몰라도 좋은 구경거리가 되거 든요. 꼼짝 못하고 앉아 있는 사람을 놀리는 놀이, 참 재미있습니다. 특히 머리 깎기 싫어하는 아들이 그 자리에 앉아 있다면 더 신이 납 니다. 그러나저러나 아내는 열심히 머리를 깎습니다. 다음 머리 깎을 때까지 다른 사람에게 자기 남편이, 아들이, 딸이 예쁘게 보이기를 빌고 빌면서 열심히 깎고 다듬습니다. 참, 아내의 머리는 누가 깎아주냐고요? 중이 제 머리 못 자른다고, 아내는 가까운 도시로 나가는 일이 있을 때, 미용실에 갑니다. 가서 컷만 하고 오지요. 아내는 유심히 머리 깎는 걸 보고 배워 옵니다. 일 종의 수업료라고나 할까. 또 아내의 머리 모양이 예뻐야 아내에게서 머리를 깎은 가족들도 안심합니다. 우리 머리 모양도 저렇게 예쁘겠 지, 마음의 위안을 얻습니다. 아들이 앉았던 자리에 남편이 앉았습니다. 잔뜩 긴장하여 온몸이 뻐근할 정도로 참으로 오랜 시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렇게 아내의 이발사 경력은 시작된 겁니다. 주 고객은 남편이었는데, 가위질이 손 에 익자 고객을 아들로 딸로 늘리더군요. 덕분에 이발비가 가계부에 36 이발사 37

21 꿰어 던지면 아이들은 고래라도 잡을 것처럼 신이 납니다. 아이들은 허탕을 치는 아버지의 모습에 깔깔댑니다. 놀리는 아이들과 갯가에 서 뒹굴다 보면 생선도 잊고 맙니다. 노을이 지면 빈 낚싯대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지요. 그런 날이면 바 다가 밥상머리에 한자리를 차지합니다. 생선 없는 밥상에도 바다 내 음 가득하고, 먹지 않아도 배가 부릅니다. 낚시 바닷가 마을에 살게 되면 밥상이 바다를 닮아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였습니다. 마을에 시장이 없어서 생선 구경하기가 힘 들기 때문입니다. 이틀에 한 번꼴로 오는 부식 트럭에도 생선은 없었 습니다. 어부들이 사는 마을에 생선을 파는 게 말이 안 되지요. 어부 들도 자기 식구들 먹을 생선을 빼고는 모두 어판장에 내다 팝니다. 어부들에게 생선을 사려면 미리 이야기를 해두어야 하지요. 그래서 생선이 먹고 싶으면 먼 도시의 시장으로 나가거나 낚시를 하러 갑니다. 식구끼리 낚시하러 가는 날이면 아이들은 갯가에서 놀 고 저는 아내와 함께 호미를 놀려 지렁이를 잡지요. 낚시에 지렁이를 이 마을 사람들이 고기, 괴기라고 하면 생선을 말하는 겁니다. 보 통 말하는 고기는 육고기라 따로 부릅니다. 아직도 저는 생선을 보고 고기라고 부르는 게 어색합니다. 이 마을 사람들 어법에 따르자면 아 내와 아들은 육고기 체질, 저와 딸은 고기 체질입니다. 제 고향은 항구도시 통영. 열한 살 때 서울로 갔으나 어머니의 밥 상이나 식성은 고스란히 남아 있지요. 생선을 지져 먹고, 구워 먹고, 국으로 끓여 먹어야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것 같습니다. 어릴 때 회 를 별로 먹어보지 않아 지금도 회는 좋아하는 편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울 토박이인 아내가 회를 좋아합니다. 38 낚시 39

22 이 마을 어부들에게 생선을 사먹는 건 여간 부담스런 일이 아닙니 다. 이웃끼리 돈을 주고받는 것이 우선 껄끄럽습니다. 팔아도 3만 원, 5만 원어치씩만 팔겠다니 그것도 작은 살림에는 부담스럽습니 다. 싱싱한 생선을 맛보려고 어부를 찾지만, 한두 마리는 귀찮다고 안 팝니다. 생선을 가지러 선창으로 나가야 하거든요. 그래서 이웃에 게서 생선 사기를 아예 포기했습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생선을 갖다주는 이웃도 있습니다. 주로 제철 에 나는 생선들이지요. 이건 뭘 넣고 국 끓여 먹어라, 회 쳐 먹어라, 구워 먹어라, 지져 먹어라, 젓갈 담아 먹어라, 요리 강습도 빼놓지 않 습니다. 고마워서 생선 담아 온 그릇에 뭐라도 담아 건네지요. 아내가 회 맛을 잊을 만하면 낚시를 들고 마을 해변으로 나갑니다. 좀 멀리 가면 낚시가 더 잘 된다는데, 생선을 많이 낚을 욕심도 없습 니다. 2년 전에는 반년 가까이 밤마다 장어를 잡으러 다녔고, 팔뚝만 한 민어조기를 연달아 잡아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낚시 가 시들해졌습니다. 텃밭 가꾸는 게 더 좋았습니다. 낚시로 손바닥만 한 도다리나 한두 마리 잡으면 됩니다. 그 정도면 아내 혼자 실컷 먹을 수 있거든요. 그러나 요즘은 실력이 줄어 한 마 리도 잡을까 말까 합니다. 그런 사람이 낚시를 던져놓고 거의 신경을 40

23 안 씁니다. 애들하고 노는 게 재미있어서요. 팔자 사나운 도다 리 한 마리 걸리면, 용왕님 선물이라 여깁니다. 작은도다리비늘을치고껍질을벗기고회를치면딱회네점이 나옵니다. 접시 위에 상추를 깔고 무지갯빛 도는 도다리 살점을 올려 놓으면 아내의 눈가에도 무지개가 피어오릅니다. 특히 그런 날, 바닷 가에 살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쑥국 아이들이 손 잡고 학교 가고 나면 저희 내외만 집에 남습니다. 이 일 저 일, 함께하다 보면 알콩달콩 재미있습니다. 잠깐 책상 앞에 앉 아 있는 사이, 아내가 슬그머니 집을 비웠습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 조차 들리지 않는 집은 정말 쓸쓸했습니다. 한 시간이 지났나 아내가 마당을 들어서면서부터 일부러 큰 소리를 냈습니다. 말도 없이 어딜 갔다 와서 미안하다는 뜻이겠지요. 저는 저대로 바람을 쐬는 척, 마당에 나갔습니다.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소쿠리에 담긴 쑥을 내보였습니다. 새로 난 쑥으로 끓인 된장국을 세 번은 먹어야 일 년이 건강하다 42 쑥국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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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잖아요. 사실 쑥국을 많이 먹어서 질릴 때도 되었지만 아내의 말에 맞장구를 쳤습니다. 아이들 좋아하는 쑥떡도 만들어야 된다고 한술 더 떴고요. 시골 봄 살림에 쑥국만큼 고마운 국도 없습니다. 지천 으로 깔려 있는 게 쑥. 잠깐만 품을 팔아도 한두 끼 뭘 먹나 하는 걱 정은 끝이니까요. 어디 봄이라 쑥국이 맛있겠습니까? 제 남편, 제 새끼 먹이려고 들 로 나간 그 마음이 맛있는 거지요. 아내가 향긋한 쑥국 같습니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늘어지면 슬슬 짜증이 나지요. 혼자 뭐 그리 재밌는 일을 하누? 조바심을 내는 건 대개 이 사람 몫입니다. 딴청을 피우며 아내의 얼굴 보러 갑니다. 아내도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도 그만 손을 털고 일어납니다. 그렇다고 따로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일하는 사 람 불렀다고 핀잔 듣습니다. 핀잔을 들어도 즐겁네요. 그저 바라보고 만 있어도 좋으니, 이 일을 어찌합니까? 저기, 아내가 옵니다. 모자를 눌러쓰고 자전거를 끌고 옵니다. 차 나 한잔 하자고 불러야겠습니다. 남편은 서른아홉, 아내는 서른다섯. 아직 창창한 나이인데, 시골 살다 보니 하는 짓이 노부부 같습니다. 잘 차려입고 외식을 한다거나 쇼핑을 한다거나 여행을 간다거나 해야 어울릴 나인데 말이죠. 도시 를 떠나면서, 뭐 그런 건 다 잊었습니다. 부부가 하루 종일 얼굴 보면 질린다는 말, 참 우습습니다. 질리기 는요, 오히려 좋지요. 눈빛만 봐도 마음이 어떤지 알 수 있으니 서로 가 서로에게 도통했습니다. 그래도 서로 일할 때는 떨어져 있습니다. 46 쑥국 47

26 게서 밥상머리에 앉으면 맛있는 건 자식 입에 먼저 넣어주시던 어머 니를 보았습니다. 늘 한 걸음 물러나 자식들을 지켜보시던 어머니.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이러한가요? 어머니 때문에 감히 뒤를 볼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로 잘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 어봅니다. 어머니, 아직 거기 계신가요? 별이 별이가 이상합니다. 먹을 걸 들고 나가면 제 새끼들을 제치고 달려 오던 녀석이었지요. 그런데 오늘은 새끼들이 별이를 밀치며 달려가 도 서두르는 기색이 없습니다. 먼저 먹으려고 제비 새끼처럼 입을 쫙 별이는 아이를 키우는 이 사람에게 많은 걸 가르쳐주었습니다. 어 느 잡지에 별이의 자식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썼지요. 한번 읽어보세 요. 어느 어미의 마음이 이러할까 합니다. 벌리고 달려드는 강아지들 뒤에 엉거주춤 섰습니다. 손을 내밀어도 별이는 주춤거리며 물러나더니, 어느새 달려온 새끼들에게 자리를 내 사랑, 별이 내어주고 맙니다. 극성스럽게 장난을 치는 토토와 토토보다 좀 늦게 젖을 뗀 투투. 어미젖 말고도 맛있는 게 많다는 걸 알아버린 새끼들을 바라보는 별 이의 눈빛이 오히려 편해 보입니다. 아예 엉덩이를 깔고 앉은 별이에 별이는털이긴축에드는개로, 오즈의 마법사 에 나오는 토 토 처럼 생겼답니다. 암놈이고, 흰색에 회색 점이 박여 있지요. 본 래 옆 마을 명사에 살던 개인데, 우리 집 푸들 복돌이와 눈이 맞아 48 별이 49

27 제 집을 버리고 우리 집에 눌러앉았습니다. 복돌이는 별이가 오고 두 달쯤 지난 어느 날,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누가 훔쳐간 건지, 사 고를 당한 건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좋은 곳에 가서 잘 살고 있을 거라고만 믿고 싶습니다. 복돌이가 나간 후에도 별이는 집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복돌이 가 돌아올지도 모르는 데다 새끼를 배고 있었습니다. 별이 주인이 몇 번씩 별이를 데려갔지만 별이는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돌아왔습 니다. 출산이 가까워진 터라 별이가 새끼를 낳을 집을 지었습니다. 시 멘트 블록을 쌓고 양철 지붕을 덮고 블록 사이 바람구멍은 짚으로 막았습니다. 바닥에는 짚을 잔뜩 깔았습니다. 제가 며칠 집을 비운 사이, 별이가 강아지를 낳았습니다. 여섯 마리를 낳았는데, 네 마리는 별이를 닮았고 두 마리는 온통 검은데 발만 흰 푸들로 복돌이를 닮았지요. 그 소식을 들은 별이 주인이 강아지를 보러 왔습니다. 별이도 주 인을 보고 반가운지 꼬리를 흔들며 반겼습니다. 그러나 그뿐. 따라 나설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별이 주인은 그날도 별이를 집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명사로 가는 주인의 뒷모습은 50

28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별이에게 무척 섭섭한 모양이었습니다. 그 러나 계속 그렇게 살 수 없었습니다. 별이는 우리 개가 아니었거든 요. 마침내 결정을 내렸습니다, 별이와 강아지를 모두 명사로 보내 기로. 다음날 아침. 별이를 어루만지며 강아지들과 함께 본래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가서 잘 살라고,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젖도 안 뗀 강아지를 놔두고 오면 절대 안 된다 고 또 다짐해두었습니다. 그날 점심 무렵,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고 밭에 나갔습니다. 별이 가 밭을 지나 어디론가 다급히 가는 걸 보았지요. 금방 돌아오겠지 했는데. 별이와 강아지를 데리러 온다던 별이 주인은 오후가 되어도 오 지 않았습니다. 몇 번을 전화해서야 겨우 그 집 장난꾸러기 아들 둘을 앞장세워 왔습니다. 아버지는 멀찍이 서 있고, 아들 둘이 강 아지를 만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별이가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 았습니다. 우리 애들과 그 집 애들한테 별이를 찾아보라고 하고, 별이가 살 던 집을 허물었습니다. 깔았던 짚을 마당에서 태우고, 시멘트 블록 은 따로 쌓아놓고. 아이들이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마을이 떠 나가도록 별이를 불렀습니다. 그래도 별이는 나타나지 않았습니 다. 밥 때가 되면 오겠지 싶어, 그 집 아들들에게 강아지를 먼저 데 려가라 했습니다. 벌써 바다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지요. 너무나 붉어서 눈이 시릴 정도였습니다. 강아지들을 보내고 난 후에 우리 가족은 마당에 피워놓은 모닥 불가에 모여 앉았습니다. 아이들은 불장난에 신났고, 아내와 저는 그저 불만 바라보았습니다. 어둠이 마당을 감싸고 모닥불이 점점 잦아들 무렵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저녁 늦게 별이가 주춤주춤 마당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습니다. 사라진 제 집 주변을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으며 두리번거렸습니 다. 제 새끼를 찾는 모양이었습니다. 별이를 불러 집 안에 들인 후 별이 주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 집 안주인이 와 별이를 데려갔 습니다. 별이와 강아지들을 보내놓고 우리는 매정하게 여행을 떠났습니 다. 4박 5일의 여행이었지요. 돌아오는 길에 별이가 우리 집에 한 번은 왔었겠지, 하지만 사람도 없고 제 집도 없어졌으니 발길을 돌 리겠지, 명사에서 잘 살겠지 생각했습니다. 52 별이 53

29 그런데 돌아와 보니 뜻밖의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별이 가 강아지 두 마리를 물고 집에 몇 번이나 왔었다는 겁니다. 별이 가 물어 온 강아지는 검은색 푸들, 토토와 투투였답니다. 우리 아 이들이 특히 예뻐하던 강아지였지요. 거의 매일 별이는 그 두 마리 강아지를 우리 집으로 물어 나르고 별이 주인은 데려가고를 반복 했답니다. 마을 사람들은 별난 짓을 하는 별이를 지켜보면서 우리를 기다 렸답니다. 어떤 할머니는 집에서 쓰던 개집을 쓰라며 가져다주셨 습니다. 아무래도 그 개는 너희가 키워야겠다면서요. 별이가 제 주 인 집으로 돌아간 날, 우리 마을 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 다는 별이 주인의 말을 전해주던 마을 사람도 별이를 다시 쳐다보 았습니다. 사람들마다 입을 모아 사람보다 낫네를 연발했습니다. 며칠 전 토토가 차에 치여 죽었습니다. 캄캄한 밤, 아스팔트 도 로 위에 드러누운 제 새끼를 굽어보며 별이는 꺼어, 꺼어, 울고 있 었습니다. 토토를 묻고 그 위에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들어주었습니 다. 무덤가에 쪼그리고 앉은 별이를 두고 집으로 돌아올 때 별이의 슬픔이 가슴으로 밀려와서 저도 모르게 꺼어, 꺼어, 울었습니다. 우리가 다른 종 種 이란 것도 잊어버리고 슬픔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 습니다. 아무래도 세상에는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있나 봅니 다. 개의 운명을 알기에 개를 키우는 걸 좋아하지 않았던 저였습 니다. 전에 키우던 복돌이도 남이 버린 개였지요. 불쌍해서 걷어 키운 거지, 개가 좋아서 키운 건 아니었습니다. 애완견을 극성스럽 게 키우는 사람이나 보신탕을 먹는 사람 모두를 못마땅하게 생각 하였지요. 개는 개일 뿐. 개가 개처럼 살게 내버려둘 수는 없냐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별이 같은 개는 처음이고, 얘기를 들어보지도 못했습니 다. 생긴 건 개지만 하는 짓은 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날 이 갈수록 별이는 개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별이는 밭엘 가든 바 다에 가든 산엘 가든 늘 제 뒤를 따라와 저를 지켜주고 저와 놀아 줍니다. 도대체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기에 이런 사이가 되었을까요? 누가 별이에 대해 물으면 제 친구라고 얘기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 이 제 곁을 떠나도 별이만은 떠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습니 다. 제 눈을 보고도 눈을 피하지 않는 유일한 개, 별이. 우리는 눈 을 맞추며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들은 그런 저를 보고 아버지는 마 54 별이 55

30 법사라고 합니다. 개의 말을 하는 사람이라고요. 제가 마법사라 그 러겠습니까? 마음이 닿으면 통하지 않을 게 없는 법이지요. 신문배달부 마을 입구에 있는 태선상회 주인 황수만 씨를 우리 아이들은 신문 집 할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침마다 신문을 가져다주는 할아버지라 고 붙인 별명입니다. 가끔 신문지 할아버지라 부르기도 합니다. 신문은 통영에서 오는 첫차에 실려 옵니다. 참새들이 짹짹거리는 개복숭아나무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신문집 할아버지가 서성이고 있 으면 여덟시가 된 줄 압니다. 여덟시 5분. 버스에서 20부 정도의 신 문이 내려지면 제일 먼저 마을 끝, 저희 집에 들르지요. 그 발길은 이 마을을 거쳐 명사마을로 이어집니다. 명사 가는 길에 선창이 있습니다. 신문집 할아버지는 뱃일을 하고 56 신문배달부 57

31 있는 어부를 만나면 안부를 묻다가 소주를 권하면 뱃머리에 퍼질러 앉고 맙니다. 그사이 해는 신나게 솟아오릅니다. 누구를 만나든 안부 를 물어야 하고, 안부를 묻다 보면 뭐라도 하나 내놓는 이 마을 인심 때문에 명사 마을 끝 집은 점심때나 돼서야 신문을 받아볼 때가 많습 니다. 신문배달의 생명이 신속함에 있다는 걸 신문집 할아버지가 잊고 사는 건 아닙니다. 단지 사람 사는 정이 먼저라 생각할 뿐입니다. 마 을 사람들도 신문이 늦으면 으레 할 말이 많은 누군가를 만났구나, 여 깁니다. 대신 신문을 가져오면 신문은 제쳐놓고 누구네 무슨 일이 생 겼냐부터 묻지요. 신문집 할아버지가 바로 우리 마을 신문 인 셈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정이 담긴 그 신문에 울고 웃습니다. 오늘, 어떤 신문을 받아보셨는지요? 배달되는 건 큰일이 아닙니다. 우편물로 전해지는 지역 주간신문은 한참을 묵혔다가 읽기도 하지요. 한 번이라도 읽히고 처박히는 신문 은 다행인 편입니다. 들일로, 바닷일로 바쁜 철에는 배달된 그대로 창고에 쌓여갑니다. 그러고 보니 마을 사람이 한가로이 신문을 읽고 있는 모습을 아직 본 적이 없군요. 도시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신문이 알려주는 새 소식 중에는 시골 생활과 관련된 소식이 거의 없습니다. 시골에서 신문에 실릴 만 한 특별한 뉴스거리가 나오기도 힘들긴 하겠지요. 시골에서는 급격 한 변화를 바라지 않습니다. 변화는 늘 위험하다는 걸 해마다 자연에 서 배운 때문이지요. 모쪼록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이 이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시골 살림을 좌우하는 정책이 신 문에 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제껏 나온 정책이란 게 시골에 도움 이 되기는커녕 해만 되었다고들 합니다. 일기예보 빼면 신문에 뭐 볼 게 있냐고 합니다. 시골에서 신문은 구문이 되는 순간, 애물단지에서 보물단지가 됩 사실 시골에서 신문을 빨리 봐야 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신문은 이미 벌어진 일을 알리는 매체인 데다 도시에서 바쁘게 사는 사람들 에 초점을 맞춘 기사가 많지요. 그러다 보니 시골에서 신문이 늦게 니다. 신문지같이 얇고 질기고 커다란 종이는 시골에서 따로 구하기 도 힘들지요. 신문지는 쓰는 사람에 따라 쓰임새가 생깁니다. 차곡차 곡 쌓아놓은 신문지는 종이접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별이 되고 58 신문배달부 59

32 모자가 되고 배가 되고 꽃이 됩니다. 도시에 나간 식솔들에게 뭘 싸 보내는 데 쓰이고, 초배지로 쓰이고, 불쏘시개로 쓰이고, 밑닦개로 쓰입니다. 밭에 씨 뿌린 후 싹이 어서 나오라고 덮어둘 때도 신문지 를 들고 나갑니다. 소풍 봄볕 따뜻하고 모처럼 바다가 잔잔한 날, 가족 소풍을 갔습니다. 목적지는 예전엔 어장막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앙 기미 해변 근처 용새미골. 용이 살던 계곡이라 붙인 이름이랍니다. 여덟 살, 아홉 살 된 딸과 아들이 겁 없이 앞장섰습니다. 아내 손을 잡고 뒤따랐지요. 우리 개 별이도 신이 났습니다. 용새미골이 좋다며 가보란 얘기를 들은 지 이미 오래. 마을 사람들 에게 어떻게 가느냐고 물으면 멀리 보이는 앙기미 뒷산을 가리킬 뿐, 제대로 길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도가 있을 리 없지요. 예전에 혼자 용새미골 입구까지 간 적이 있었는데 길이 보이지 않아 60 소풍 61

33 발길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가족과 함께 떠난 길이라 두려울 게 없었습니다. 길을 잃어 헤맬 시간까지 예상하고 일찍 떠난 터라 마음도 넉넉했지요. 징검다리를 건너고 오솔길을 지나고 풀섶, 숲을 헤쳐 용새미골에 도착하였습니 다. 작지만 참 예쁜 골짜기였습니다. 가족과 함께인데 행복하지 않은 소풍이 어디 있기야 하겠습니까만, 사과 한 알과 빵 두 봉지로도 바 랄 게 없는 소풍이었습니다. 가족과 함께하는 길은 아무리 험해도 행복합니다. 행복해야 하고 요. 물론 마음대로 따라와주지 않는 어린아이들과 아내가 때로 번거 롭기도 할 겁니다. 그러나 그건 아이들이나 아내에게도 마찬가지라 는 걸 잊어서도 안 될 겁니다. 아버지나 남편이 도움은커녕 방해가 되는 때도 많으니까요. 우리는 먼 길을 걸어 소풍 갑니다. 가장 오래 걸었던 게 예닐곱 시 간. 아이들이 여섯, 일곱 살 때였지요. 대개 소풍 가는 길은 낯선 길 입니다. 그럴 때마다 대장놀이를 합니다. 가족 중 누구든 앞에 선 사 62

34 람이 대장. 대장은 작대기 하나 들고 길을 찾습니다. 대장이 정한 길 로 모두가 따라가지요. 그 길이 옳건 틀렸건 상관없습니다. 틀리면 되돌아와 다시 시작하지요. 되돌아오게 되어도 웃고 맙니다. 틀린 걸 오히려 즐거워합니다. 그게 먼 길 재미있게 가는 요령이지요.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하는 가족. 살다 보면 실수가 없을 수 없겠지 요. 실수로 괴로울 때, 누가 위로해주고 힘을 줄 수 있을까요. 가족 소풍 길에 우리는 미리 실수를 연습하고 실수를 보듬어 안는 법을 연습합니다. 함께 오래 행복하게 살 준비를 하고 있 유치원 졸업식 습니다. 오늘은 딸 지윤이 유치원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바닷가 옆에 붙어 있는 명사초등학교 병설 유치원. 상윤이, 상화, 광희, 초롱이, 보슬 이, 경환이, 혜빈이, 산하, 찬영이, 근영이, 소연이, 소희, 초원이, 권 욱이, 세호, 현하, 미옥이, 서윤이, 석환이 이렇게 스무 명이 졸 업했습니다. 상장도 하나씩 받고 선물도 하나씩 받았습니다. 이 아이들 중 근 포, 대포, 홍포 마을에 사는 아이들은 걸어서 유치원을 오가는데 학 교 길이 한 시간이 넘기도 합니다. 학교 오갈 때 바닷가에서 노느라 지각을 하곤 하는 딸아이와는 입장이 다릅니다. 64 유치원 졸업식 65

35 찬바람이 몰아치든 태풍이 오든 딸아이는 유치원에 갔습니다. 파 도가 들이치는 바닷길을 걸어 친구와 선생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노 란 비옷을 입고 장화를 신고 비바람 속으로 보란 듯이 달려가던 딸아 이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어린 몸으로 자연을 겪어내며 딸아이는 부쩍 자랐습 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삐악거리며 졸업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참 대견했습니다. 유치원을 오가면서 궂은 날보다 좋은 날이 많다는 걸 깨우친 이 아이들. 아마도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걸어서 다니든 버스를 타고 다니든 아이들은 시간에 맞춰 유치원 에 모이고 유치원에서만큼은 즐겁습니다. 아이들에게는 학교 오가는 길이 각각 다른 추억으로 남게 되겠지만요. 그 추억이 참 오랜 세월 동안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에 영향을 끼치게 될 거고요. 서로 사는 곳과 처지가 다를지라도 친구와 선생님을 만나러 오는 길은 힘들지만은 않습니다. 아무리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도 지윤 이, 학교 가기를 망설인 적이 없습니다. 그런 날, 딸을 내보내기 참 안쓰럽습니다만 마음을 독하게 먹습니다. 상윤이 어머니가 운전을 하게 되면서 비바람이 몰아치면 우리 아이들을 태워 가기도 하였습 니다. 참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버릇 될까 봐 웬만한 비 바람에는 차를 타지 말라고 이릅니다. 명사초등학교 병설 유치원 아이들은 걸어서 혹은 통학버스로 유치 원에 모입니다. 원아 수가 적은 저구, 근포, 대포, 홍포에 사는 아이 들은 한참을 걸어옵니다. 홍포 사는 아이는 한 시간 정도 걸어와야 하지요. 홍포에서 명사 오는 시내버스라도 제 시간에 있으면 좋으련 흠뻑 젖어 집으로 들어오는 아이들을 보면 달려나가 꼭 껴안아줍 니다. 고맙고 대견해서입니다. 어지간히 힘든 일은 힘들다 여기지 않 게 된 아이들. 그 아이들을 보고 도시에 젖어 살던 유약한 부모는 세 상을 다시 배웁니다. 만 사정은 그렇지 못합니다. 놀면서 30분 걸리는 우리 아이, 유치원 가는 길은 대포나 홍포 사는 아이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반 면 아이들이 많이 사는 도장포, 해금강까지는 통학버스가 다닙니다. 66 유치원 졸업식 67

36 록 흙과 어울렸습니다. 아이들은 흙더미 위에서 구르거나 미끄러지 며 깔깔거리고 강아지까지 신이 났습니다. 흐르는 땀조차 단 웃 음이 되었습니다. 얼추 밭 모양을 갖춰가는 흙과 돌을 보면서 따뜻한 석양을 맞았습 니다. 며칠 후 텃밭과 화단이 완성되면 예쁜 이름을 붙여줄 겁니다. 그리고 봄볕 완연한 날, 가족과 어울려 행복의 씨앗을 뿌릴 겁니다. 텃밭 행복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만들어나가는 거지요. 가족과 함께 행복 을 만들어보세요. 마을 배수로 공사를 하느라 흙을 실어 나가는 15톤짜리 트럭에 부 탁해서 흙을 마당에 부려놓았습니다. 마당이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 고, 집 앞으로 길이 나게 되면 손바닥만 하던 텃밭마저 없어질 형편 이었지요. 아들을 시켜 마실 나간 아내를 불러왔습니다. 산처럼 쌓인 흙더미를 보고 아내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러나 시멘트 마당 에 흙을 부어 텃밭을 만들고 화단을 만들자는 말에 팔을 걷어붙였습 니다. 흙을 옮기고 돌을 골라내면 아내는 돌로 축대를 쌓아 밭의 테두리 를 쳤습니다. 봄이 왔고, 풀처럼 꽃처럼 행복하게 살아야겠기에 늦도 사흘 만에 텃밭은 완성되었습니다. 사흘 내내 아침부터 노을 질 무 렵까지 삽으로 흙을 나르고 축대를 쌓았지요. 몸은 고단하였으나, 밭 이 조금씩 모습을 갖춰가는 걸 보니 멈출 수가 있어야지요. 꼭 그릇 을 빚는 것만 같았습니다. 밭을 어떤 모양으로 만들자는 계획도 없었습니다. 계획이라면 자 로 잰 듯 반듯하게 만들지 말자는 정도였지요. 마음 가는 대로 어느 곳은 튀어나오게 어느 곳은 들어가게 만들다 보니 밭의 테두리는 울 68 텃밭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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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퉁불퉁. 아들 머리 깎아놓았을 때처럼 후회 반, 뿌듯함 반이었습니 다. 내외는 목장갑을 벗고 연장을 씻으면서 늦은 밥상에 마주 앉아서 도 별말이 없었습니다. 말이 필요가 없었지요. 서로 먼 산을 바라보 며 피식 웃는 게 전부였습니다. 땅 깊이 묻혀 있던 흙으로 만든 텃밭. 세상 구경을 하게 된 흙은 어 었지만, 바로 그 못난 점 때문에 우리는 그 밭에 더 많은 관심과 애정 을 가지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아직 그 밭에 이름을 지어주지 못했습 니다. 언젠가 밭이 제 입으로 이름을 말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습 니다. 저에게 말을 하지 않더라도 제 아이들이나 제 손자들에게는 말 할 날이 있겠지요. 떤 기분일까 궁금했습니다. 흙에게 갑작스런 변화에 적응할 시간을 주려고 며칠을 멀리서 텃밭을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사이 몇 번 비 가 내렸습니다. 빗물을 타고 쌓아놓은 돌 사이로 흘러내린 황톳물이 마당을 덮었습니다. 그래도 가만 내버려두었습니다. 비가 내려도 더 이상 돌 사이로 흙이 흘러내리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안심을 했습니 다. 흙이 텃밭을 제 집으로 여겼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지요. 다시 며칠을 기다렸다가 고랑과 이랑을 만들고 퇴비를 뿌리며 흙 을 뒤집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바람에 날려 온 풀씨들이 먼저 자리 를 잡고 싹을 틔웠지요. 흙이 생명을 받아들일 마음이 되었다고 여기 고 씨를 뿌렸습니다. 평소에 별 인사 없이 지내던 건넛집 정 선생께서 두릅 두 그루를 갖다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텃밭을 둘러보고 한마디씩 거들었고 요. 마을 사람들에게 시멘트 위에 만들어놓은 그 밭은 거대한 화분이 72 텃밭 73

39 다. 또 고구마 수확을 요령껏 해낼 기계도 없고요. 이 마을 사람들은 고구마를 수확하기 하루 전, 고구마 줄기만 훑듯 걷어냅니다. 걷은 줄기는 밭가에 쌓아두지요. 다음날 아침 일찍 소가 쟁기를 메고 어슬렁거리며 고구마 밭으로 걸어옵니다. 함께 고구마 를 캘 사람들이 모일 때까지 소는 밭가에 쌓아둔 달콤한 고구마 줄기 로 배를 채웁니다. 고구마 대개 가을걷이라면 얼른 벼 수확부터 떠올리게 되는데, 고구마 농 사를 많이 짓는 이 마을에서는 사정이 좀 틀립니다. 다른 시골과 달리 이 마을 벼 수확은 왠지 농사일 같지 않습니다. 콤바인이며 트랙터며 경운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는 논을 지켜보노라 면 공장에 온 기분이 들지요. 수확하는 사람들도 인상을 쓰고 있으니 까요. 그래도 목돈은 될 겁니다. 그러나 고구마 수확하는 모습은 정겹기 그지없습니다. 고구마를 캘 때는 기계를 댈 수 없거든요. 고구마를 캐려면 밭을 뒤집어야 하 는데, 기계를 밭에 갖다댔다가는 고구마가 성하게 견뎌내지 못합니 사람들은 손에 손에 호미를 들고 등장하면서 소 등을 툭툭 두드리 며 오늘 욕 좀 봐라, 한마디씩 하지요. 소를 부리는 사람이 두둑하게 쌓아올린 고구마 밭이랑에 쟁기를 대고 이랴! 소리 지르면 나머지 사 람은 팔을 걷어붙이고 쟁기 뒤로 몰려갑니다. 쟁기가 지나가면 서 흙을 뒤집어놓으면 탐스런 자줏빛 고구마가 얼굴을 내밉니다. 쪼그리고 앉은 사람들은 호미로 슬슬 흙을 헤치면서 고 구마를 걷어냅니다. 이런 모습도 예전처럼 정겹지 않게 되었습니다. 고구마 수확을 할 때에 맞추어 중간상인이 인부 열 명 정도를 이끌고 마을로 들어섭니 다. 소가 밭을 뒤집으면 개미처럼 달려들어 고구마를 캐는 게 인부들 의 일입니다. 일당을 받고 하는 일이라 마을 사람들끼리 일하는 것처 럼 두런두런 얘기 나누면서 고구마를 캐고 있을 여유가 없지요. 74 고구마 75

40 하나에 몇백 평이나 되는 고구마 밭 몇 군데를 돌아가면서 고구마 를 캐야 하는 일은 고될 수밖에 없습니다. 중간상인은 얄밉게도 그 밭에서 난 고구마 중에서 제일 좋은 놈만 골라 가져갑니다. 비료 부 대 입이 안 다물어질 정도로 꽉꽉 담아 테이프로 붙이지요. 그렇게 담은 고구마 한 부대 값이 8천 원이랍니다. 한 친구는 쟁기질도 고구마를 상하게 한다며 호미로만 고구마를 캤습니다. 상한 고구마는 쉬 썩는다지요. 하지만 이 마을에서도 그 친구처럼 며칠에 걸쳐 쪼그리고 앉아 고구마를 캐내는 모습은 참 희 한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친구가 고구마를 캘 무렵, 집에 바쁜 일 이 있어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제일 처음 캔 고구마를 가져다주었고, 따로 가져가 라며 올망졸망 예쁘게 생긴 고구마를 밭에 모아두었습니다. 바쁘다 며 일을 도와주지 않던 이 사람, 고구마 가져가란 소리에 얼른 밭으 로 달려갔습니다. 아무리 친구가 심성이 좋아도 얄미웠을 겁니다. 고 구마는 겨울 내내 아이들 군것질거리가 되기 때문에 가져오지 않을 수도 없었지요. 평년작도 못 되는 고구마 농사. 작년에는 고구마가 풍년이라 마을 사람들한테서 두세 부대 얻었는데 올해는 틀렸다 생각하고 있었습니 다. 그래서 친구네 고구마를 아끼고 아껴 먹자고 아내와 얘기하고 있 던 참이었지요. 그런데 마을 이장님, 주정뱅이 아저씨, 꼬부랑 할머 니가 한 부대씩 가져가라 했습니다. 중간상인이 골라가고 남은 고구 마가 밭에 듬성듬성 쌓여 있었지요. 날을 잡아 집사람과 아이들을 데 리고이밭저밭을돌며고구마를 골라 주워 담아 왔습니다. 이렇게 고구마가 네 부대 생겼습니다. 고구마 농사를 망친 올해, 예년보다 더 많은 고구마를 얻게 되어 기쁘고 미안했습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한참이나 생각해보았습 니다. 누구보다도 고구마가 귀해진 걸 아는 사람들이 저희에게 다투 듯 고구마를 준 이유를 말입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고구마 농사 안 짓는 저희 집에 고구마를 가져다줄 사람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서로 한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 집에서도 주고 저 집에서도 주게 된 게 아닐까. 내가 부족함 을 느낄 때 더 부족한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그것 때문일 거라 76 고구마 77

41 짐작했습니다. 그래서 고구마를 창고에 들여놓자마자 부모님, 장인, 형님, 처남 등 가까운 사람들의 몫을 종이상자에 나누어 담았습니다. 아마 산지 가격으로만 따진다면 소포비가 고구마 값보다 많이 들었겠지요. 흙 묻고 정 묻은 고구마를 받아보고 무슨 생각들 하실지. 얼마 안 되는 고구마지만 이웃과 함께 나눠 먹는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내년에는 올해 고구마를 가져가라 한 분들이 고구마를 캘때꼭밭 에 나가 일을 거들어야겠습니다. 올해 받은 고구마를 내년 품삯을 미 장화 리 받은 셈 치고 지낼 참입니다. 그래야 덜 부끄럽지요. 게다가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사는 이 마을에서 1년은 아주 짧은 시간 일 터이니, 다음 고구마 철까지 느긋하게 이 사람을 기다려줄 거라 여깁니다. 바다나 들에서 일할 때 장화는 유명 신발 메이커의 최신형 기능성 신발보다 요긴합니다. 시골에 살게 되면서 장화는 비 오는 날만 신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니, 일할 때 장화보다 요긴 한 신발이 없었지요. 이 마을로 살러 오자마자 검은 고무장화를 샀습니다. 그 장화를 신 고 밭을 갈았고 바다에 나가 고둥을 줍고 조개를 캐고 지렁이를 잡고 낚시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을 사람을 닮아갔지요. 그사이, 장화는 점점 낡았습니다. 며칠 전 텃밭을 만들다 장화가 찢어진 걸 알게 되었습니다. 버리고 78 장화 79

42 다시 사면 그만이지만 정이 들어 그럴 수 없었습니다. 창고를 다 뒤 져 구멍 나서 빼놓은 자전거 고무튜브를 찾았습니다. 그걸 오려 찢어 진 장화에 본드로 덧붙였습니다. 누더기처럼 변한 장화가 멋져 보였 습니다. 그런 장화를 신을 수 있는, 몸으로 일하는 사람인 게 너무 자 랑스러웠지요. 이 사람의 육신도 장화와 함께 누덕누덕 낡아가겠지요. 하지만 마 음은 오히려 태평합니다. 세상에 스승 아니고, 친구 아닌 게 없네요. 장화 얘기만 했다고 고무신이 삐친 것 같습니다. 흰 고무신. 처음 샀을 때는 너무 탱탱해서 발을 옥죄어 불편하기만 했습니다. 고무신 은 제 뒤꿈치를 몇 번 까지게 하고 나서야 저를 친구로 받아주었습니 다. 그 불편을 감수하면서 고무신을 신고 다닌 이유는 간단했지요. 고무신의 불편함 정도도 못 참으면서 어떻게 시골에서 살 수 있나 했 습니다. 오기로 신고 다니는 동안 고무신의 마음도 말랑말랑해졌습니다. 발에 착 달라붙어 신발을 신었다는 걸 잊어버리게 합니다. 그러면서 80

43 장화가 홀대를 받기도 했습니다. 비가 와도 고무신, 밭에 가도 고무 신, 바다에 가도 고무신. 그래도 고된 일을 할 때는 장화를 신습니다. 고무신 신고 일하다 보면 발에 상처를 많이 입게 되거든요. 장화와 고무신 때문에 도시에서 신고 다니던 가죽신들은 창고에서 곰팡이 슬어가고 있습니다. 1년에 한두 번 볕 좋은 날, 마당에 쭉 늘 어놓는 게 전부입니다. 도시로 나갈 때나 되어야 가죽신을 둘러보는 데, 참 미안합니다. 도시에서는 그저 신고 버리는 신발이었는데, 이 제는 예사롭지 않습니다. 꼭 뭐라 말을 하는 듯합니다. 산불 조심 이번엔 나를 신어라. 세상 구경 좀 하자. 그래서 도시로 나갈 때 가죽신을 돌아가며 신습니다. 먼지나 툭툭 털어서 대충 신고 나가는 버릇은 장화나 고무신 때문에 생긴 버릇일 겁니다. 차를 타고 도시를 나가면, 그제야 후회를 합니다. 집으로 돌 아와서야 신발에 핀 곰팡이를 털어내고 닦아주지요. 그러고는 다시 창고로 돌려보냅니다. 아내는 가죽신을 정리해버리라고 하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딴 에는 맞는 말입니다. 그중에 문제 없는 신발은 절반도 안 되니까요. 그러나 그게 힘듭니다. 도시는 잊었지만 신발에 얽힌 추억은 쉽게 잊 혀지지 않는 까닭입니다. 마을 친구 성관이는 지난가을부터 산불 조심 에 뽑혔습니다. 산 불조심 은 면사무소 계약직 직원으로 가을부터 봄까지 산불 예방을 하러 다니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입니다. 그들 대부분은 오토바이나 트럭에 산불 조심 깃발을 달고 남부면 전역을 누비고 다닙니다. 성관 이는 남부면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가라산 정상에서 망을 봅니다. 어디서 연기가 피어오르면 지체 없이 무전기를 꺼내들지요. 바다에서 불어온 매서운 바람이 계곡을 타고 가라산을 휘감아도 성관이는 아침 일찍 산에 오르고, 해질 무렵 꽁꽁 언 채 산에서 내려 옵니다. 성관이가 쉬는 날은 비나 눈 오는 날뿐입니다. 82 산불 조심 83

44 엉성한 초소에서 혼자 하루 종일 주위를 살펴보는 일은 도를 닦는 일이나 다름없지요. 산불이 나지 않아 도리어 지루하고 외로운 그 시 간 동안, 성관이는 초소 유리를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았습니다. 바 다로 나가 일하던 어부들이 가라산 정상에서 반짝이는 유리를 보고 성관이, 사람 됐다 칭찬하는 말을 자주 합니다. 성관이처럼 보이 지 않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이 편합니다. 기를 틀어놓으면 성관이처럼 팔공산, 유달산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 의 무전까지 들어온답니다. 경상도, 전라도 말이 뒤섞여서 벌처럼 웅 웅거리는 하루. 성관이 초소 주위로 피어나는 꽃 따라 벌 나비 찾아 들고, 뱀이며 다람쥐, 참새며 까치, 까마귀까지 모여든답니다. 얼마 전 성관이가 까마귀 한 마리를 길들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 었습니다. 밥도 같이 먹고, 출출할 때 과자도 같이 먹는다지요. 둘러 보면 세상에 친구할 건 참 많습니다.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길들여지 면서 정이 들지요. 그러면서 다른 세상, 다른 일을 알아가고 받아들 이게 되고요. 비 오는 날, 비 많이 내린 다음날이면 성관이는 가라산으로 출근하 성관이는 가라산 꼭대기로 출근합니다. 성관이는 자칭 우리 마을 방범대장. 아무리 밤늦게까지 술을 마셔도 새벽같이 일어나 마을을 한 차례 돌고, 아침 먹고 한두 시간 텔레비전 보고 나서야 스쿠터를 타고 가라산 아래까지 달려갑니다. 걸어 오르면 한 시간인 거리를 성 관이는 산다람쥐처럼 달려갑니다. 아침 일찍 가라산에 오르다 웃통 을 벗어젖히고 산을 달려 오르는 삐쩍 마른 친구를 보게 된다면 성관 이인 줄 아십시오. 지 않습니다. 성관이 쉬는 날은 산이 흠뻑 젖어 있는 날. 그러나 성관 이는 쉬는 날, 더 바쁩니다. 재주가 많아서 이것저것 일러주고 고쳐 주어야 할 것도 많지요. 유난히 비가 잦았던 올봄. 성관이는 마을로 산으로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였습니다. 성관이가 오래도 록 산불 조심 하러 다녔으면 좋겠습니다. 늘 반짝반짝 빛나는 가라산 꼭대기 초소가 이 근방 마을 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전설이 되었으면 합니다. 농담인지 아닌지, 거제도에서 제일 높은 가라산 꼭대기에서 무전 84 산불 조심 85

45 지 않겠다며 베트남으로 떠나버렸습니다. 저는 몇 년을 더 서울에서 버텼으나 역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 싫어 서울을 떠났습니다. 이 마을이 안전 하다는 확신을 가지는 데 3년이 더 걸렸습니다. 그러나 몸을 부대끼며 얻어낸 확신이라 무엇과도 비 교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인생의 역전 따위는 꿈도 꾸지 않습니다. 부디 이 누추한 인생이 별 탈 없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러면서 이 떠나오다 봄,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소박한 희망의 씨를 뿌립니다. 제가 왜 서울을 떠났는지, 이유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동네에서 집을 옮길 때도 여러 이유가 따라붙습니다. 하물며 생활 터전, 미래를 송두리째 내팽개치고 국토의 끝자락으로 떠나왔으니 궁금하기도 할 것입니다. 저 역시도 그런 결정을 내린 데 대해 스스 로 놀랍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여러 이유 뒤에는 늘 기분 나쁘게 마음을 짓누르는 게 있지요. 성수대교가 붕괴되고 대구 지하철 공사장이 폭발하고 삼풍백화점 이 무너지는 걸 겪으면서 저는 미래에 대한 꿈을 접었습니다. 삼풍백 화점 참사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친구는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 낯선 마을에서 마음을 놓고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먼저 생계 를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마음을 짓누르고, 도시에서의 화려한 날들 이 머리채를 잡고 늘어집니다. 아무리 흘러간 유행가 나의 화려한 날은 가고 를 읊조려봐도 마음을 잡기가 힘들지요. 무언가를 포 기한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놈의 미련이 뭔지요. 그래서 아예 이사를 가는 게 아니라 이민을 가는 거라 마음먹었답니다. 같은 나라에서의 이민. 두 번 다른 나라를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인도와 베트남. 그 여행에서 그 나라를 이해하려면 그 나라 사람들의 86 떠나오다 87

46 삶을 존중해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이 마을에 와서 저는 무지렁이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하는 말을 받아 들였습니다. 전에 배우고 겪어 알고 있던 모든 걸 다 버렸지요. 그렇 게 지내는 동안, 바닷빛에 젖어든 노을처럼 그렇게 마을 사람으로 젖 어들었습니다. 경남 거제시 남부면 저구리에 있는 저구마을. 저에게 이 마을은, 많고 많은 마을 중의 하나가 아니라 새 나라입니다. 1백 가구 정도의 아주 작은 나라지만 참 아름답고 평화롭고 정겹습니다. 언제 이 나라에 놀러 오십시오. 비자도 필요 없고 비행기 탈 필요도 물맛 없습니다. 군대도 없고 경찰도 없습니다. 누구든 이 소박한 사람들에 게 마음을 열고 먼저 인사하면 환영받을 겁니다. 그러나 작은 나라라 고 무시하였다가는 배로 무시당할 테니 조심하십시오. 다른 나라에 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 마을에서는 마을 뒷산 계곡물을 송수관으로 연결해 물탱크에 잠시 저장했다가 각 집으로 공급합니다. 그런데 나흘째 마을에 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송수관 어딘가가 어설프게 막혔나 봅니다. 수압이 낮아 가정용 물탱크까지 물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송수관을 따라오면서 점검해봐야 막힌 곳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일에도 요령이 있어서 칠순을 넘긴 이장님 뒤를 따라다녀야 합니다. 요즘 이장님이 막내아들 혼사 때문에 여가가 없는 모양입니다. 물을 많이 쓰는 몇몇 집에서 불평을 터뜨리기도 하였습니다만 대부분은 태연합니다. 88 물맛 89

47 혼자 사시는 꼬부랑 할머니가 지나가시기에, 혹시 물 때문에 고생 하시느냐 여쭸습니다. 할머니는 허허 웃으시면서, 내사 하루에 물 한바가지모쓰고남는다 하십니다. 밥그릇 하나, 반찬그릇 하나로 사는 살림이라 따로 설거지할 일도 없고 재래식 화장실을 쓰니 밥 끓 일 물 한 바가지면 충분할 겁니다. 못살아서가 아닙니다. 자연을 거 스르지 않고 사는 게 몸에 배어 있어 그리 사십니다. 욕심이 없으시 니 몸도 마음도 태평하신 게지요. 할머니, 꼬부라진 허리에 뒷짐을 지고 훠이훠이 쑥 캐러 가십니다. 부터 이 마을, 수자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앙기미 해변 뒤 왕조산에서 내려와 큰골을 타고 바다로 들어가는 물줄기가 이 마을의 젖줄입니다. 마을에서는 팔뚝만 한 관을 큰골 상 류에서부터 마을까지 묻어놓았습니다. 저는 물맛을 잘 모르겠는데, 집을 다녀간 분들은 입을 모아 물맛이 좋다 합니다. 그 물로 씻으면 피부가 뽀송뽀송해진다고 하지요. 마을 입구까지 시 수도관이 묻혀 있으나 아직 수도를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 돈을 주고 믿을 수 없는 물을 왜 먹느냐는 거지요. 이 마을 물에 대해 수질 검사를 정기적으로 하는지, 검사 결과가 어떤지 사람 들은 관심도 없습니다. 혹, 이장님은 아실는지. 이 마을 어른들은 팔순을 넘겨도 정정합니다. 저 같은 사람은 오히 려 밭일에 방해가 될 정도니까요. 그 힘이 어디서 오느냐 물으면 마 을 물이 좋아서라고들 말합니다. 논에 대고 밭에 뿌리고 타는 연장 씻고 목 축이고 몸 씻는 물. 이 마을 사람들, 꼭 그 물 같습니다. 그 물을 고마워하며 마실 줄 알아야 반쯤 이 마을 사람이 된 거고요. 물이 고마운 걸, 여 기 살면서야 깨달았습니다. 거제도에서도 이 마을이 속한 남부면에는 높은 산이 많습니다. 산 이 높으니 골도 깊지요. 병풍처럼 둘러쳐진 높은 산 아래 좁고 긴 평 지에 마을이 있고 마을 옆이 바로 바다입니다. 그래서 사람도 적고 교통도 불편합니다. 대신 풍광이 아름답고 자연이 살아 있답니다. 올 90 물맛 91

48 추나 무가 되지 않는다지요. 배추꽃, 무꽃 보기 힘들어진 까닭이 여 기 있습니다. 샛노란 배추꽃과 하얀 무꽃. 보기만 하여도 마음이 풍성해 지는 그 꽃을 게을러씨늦게뿌린탓에원도없이보게되 었습니다. 그것들은 그것들대로 한살이를 끝내고 이 사람은 이 사 람대로 호사를 누리게 된 거지요. 새옹지마 추위와 게으름, 그 악재가 도리어 기쁨을 주는 호재가 되었습니다. 배추꽃, 무꽃과 함께 나비와 벌이 날아올 겁니다. 지난가을, 김장에 쓰려고 배추와 무 씨를 뿌렸습니다. 모자란 것 같아서 열흘쯤 뒤에 배추와 무 씨를 더 뿌렸지요. 앞에 뿌린 배추와 무는 제대로 자라 김장에 쓸 수 있었지만 뒤에 뿌린 것들은 예년보다 일찍 찾아든 추위에 성장을 멈추었습니다. 김장하고 나서, 밭에 듬성듬성 남은 배추와 무를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 못했습니다. 못난 사람 만나 고생하는 것 같아서요. 겨우내 얼고 녹기를 거듭하면서 버틴 그것들이 요즘 동을 내밀려 고 합니다. 동을 밀어올려 꽃을 피우겠지요. 마을에서는 배추나 무에 동이 나면 먹지 못한다며 잘라버립니다. 씨를 받아봤자 제대로 된 배 우리 식구가 도시에서 시골로 자리를 옮긴 걸 보고 주위에서 대체 로 안타깝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오죽하면 시골 살이를 하려 고. 솔직히 저 역시 걱정도 많았고, 적응하기까지 힘도 들었습 니다. 왜 내려왔나 후회도 했지요. 한때는 이런저런 걱정 때문에 술 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습니다. 몇 해를 넘겨가며 채소를 기르다가 문득, 인생사 새옹지마 란말 을 떠올렸습니다. 호사다마 란 말도 그뒤를 따랐습니다. 92 새옹지마 93

49 뜻대로 일이 안 될 때, 곧잘 남의 탓, 세상 탓을 합니다. 그게 맘 편 하니까요. 하지만 세상에 제 탓 아닌 일이 없더라고요. 좋은 일이 있 으면 그대로, 나쁜 일이 있으면 또 그대로, 모두가 스스로 정한 결과 입니다. 좋은 일은 반드시 좋고, 나쁜 일은 반드시 나쁘다는 생각을 버리고 부터 마음이 넓어지고 편해졌습니다. 어떤 일이 생겨도 마음은 늘 잔 잔하게 되었지요. 감정적으로 사람이나 일을 대하지 않게 되었습니 다. 섣부른 판단이나 결정으로 다른 사람 마음 아프게 하는 일도 없 하루 어졌습니다. 배추꽃, 무꽃도 처음엔 게으른 농부를 많이 탓했겠지요. 미래를 미 리 볼 수 있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 배추꽃이나 무꽃의 마음이 어떨까 싶습니다. 벌과 나비와 어울려 새옹지마, 호사 다마, 새옹지마, 호사다마 노래 부르고 있지 않을까 싶네요. 이 마을의 아침나절은 토끼 뜀박질처럼 빨리 지나가고 점심 무렵 은 참새처럼 수다스럽고 오후는 황소걸음처럼 느긋합니다. 밥 짓고 생선 굽는 냄새가 집에서 풍겨 나오면 해도 알아서 수평선 너머로 돌 아갑니다. 하루 동안 무얼 했는지는 물가에 앉아 손을 씻다 보면 알 게 됩니다. 손에 묻은 흙이나 냄새가 그 기록입니다. 따뜻한 밥 한 그릇과 소박한 찬이 놓인 둥근 밥상. 밥보다 둥글게 머리를 깎은 아들과 대문니가 모두 빠진 딸, 밥 냄새 은은하게 묻어 나는 아내가 둘러앉아 맛있게 하루를 먹습니다. 뉴스에도 없고 역사 책에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저녁입니다. 94 하루 95

50 봄 준비에 바쁜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주 앉아 다음날 할 일을 이야 기하고 있는 동안, 아이들은 부엉이 새끼들처럼 야단법석입니다. 밤 이 깊어 아이들이 잠들고 나면 세상도 따라 잠이 듭니다. 이 하루가 어찌 지나갔는지 다른 하루를 어찌 살아야 할지 생각할 줄 모르는 부모는 자식보다 더 철이 없습니다. 철이 없어서 걱정도 없습니다. 걱정이 없으니 마냥 행복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도시 사람들이 보면 과거에 살고 있습니다. 낡은 흑 백 다큐멘터리 속의 한 장면처럼 살고 있지요. 그러나 저보다 더 과 거에 살고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 마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요. 수십 년 전에 배운 지식과 상식으로 세상을 대하며 살고 있으니 까요. 호미 한 자루만 있으면 먹고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현재를 사는 걸까요? 아니면 원시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일까요? 기 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불편함을 모르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이 해하시겠습니까? 경운기로 하루면 다 갈 밭을 몇 날 며칠에 걸려 호 96

51 미 하나로 쪼고 있는 사람들이 이 마을에는 많습니다. 심야전기보일러나 기름보일러 대신 나무를 때는 집도 꽤 됩니다. 노 젓는 배로도 통발을 놓고 낚시를 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지요. 최 신기술 이란 글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자식 집에 전 화를 걸어달라고 집을 찾아오는 할머니들도 있습니다. 대신 할머니 들이 시골 생활을 가르쳐줍니다. 그 할머니들에게 저희는 팔푼이일 뿐입니다. 크게 눈에 띄지는 않으나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 보면 입에 풀칠할 바로 지금 수 있는 게 시골의 생활입니다. 세상이 변하여 시골도 도시를 닮아가 고 있습니다만 아주 먼 옛날부터 시골에서 살아온 방식은 그다지 변 한 게 없습니다. 자급자족하는 이웃들 사이에서 살면서 물건을 사는 게 참 부끄러웠습니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더니, 제가 이렇 게 변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그래도 세상물정 모르는 촌사람으 로 사는 게 살아본 것 중에서 가장 편하고 행복합니다. 오늘이 며칠이더라? 어쩌다 이 말이 튀어나오면 우리 부부는 서로 바빠집니다. 달력은 오히려 방해만 됩니다. 그날이 그날 같아 보여서요. 아내는 가장 최근의 일을 떠올리며 날짜를 꼽아봅니다. 제가 어딘 가 놓아둔 아침 신문을 찾는 것보다 아내의 계산이 정확하고 빠릅니 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머리를 맞댑니다. 지난 기억들을 방바닥에 좌 르르 펼쳐놓고 날짜를 꼼꼼히 따져보지요. 굳이 날짜를 따질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와 약속이 있다거나 어딜 가야 한다거나 기한에 맞춰 뭔가를 해야 한다 98 바로 지금 99

52 거나. 그럴 때마다 사실 좀 짜증이 납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더라? 이건 좀 빨리 알 수 있습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덕분이지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점심을 안 먹고 오니까 토요일, 가족 소풍 가니까 일요일, 아이들이 학교 가니까 월요일, 학교 가는 뒷모습을 보고 붙 잡고 싶어지니까 화요일 그러나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은 늘 헷갈립니다. 날짜나 요일을 모르고 살다 보니 우리 집에는 나중 에 라는 게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바로 그때 하고 말 지요. 바로 지금 이 가장 중요한 때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때가 제일 좋지요. 조금과 사리는 아직도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있습 니다. 그러나 이런 때도 달이 기울고 차는 모양, 해가 지는 모양으로 날짜를 짐작하는 마을 사람에게는 번거로운 겁니다. 굳이 외울 필요 가 없으니까요. 아까, 이따가, 때 되면 같은 두루뭉술한 표현도 사람에 따라 시간 길이가 다른데, 그걸 이젠 좀 알겠습니다. 절대적인 시간이란 게 없다고 인정해버리고 나면 사람마다 다른 상대적인 시간에도 익 숙해지나 봅니다. 참 복잡미묘한 게 사람이라지만요. 과거나 현재, 미래라는 개념이 별 소용이 없는 생활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 행복하지 않으면 아까 나 이따가 행복해질 수도 없지 요. 행복을 생활화하는 일. 시간을 잊고 사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 이라면 이런 게 아닐까 합니다. 행복을 위해 참고 견뎌내는 것이 아 니라, 바로 지금 여기의 모든 일을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것. 고통과 시간을 잊고 사는 건 참 무책임해 보입니다. 그러나 시골에 살다 보면 시간 관념이 저절로 없어집니다. 음력으로 날짜를 따지는 이 마 을에서 양력으로 적힌 달력은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지요. 물일을 하 는 사람들은 물때를 따집니다. 우리처럼 조개 파고 고둥이나 따러 바 행복을 달리 보지 않고 행복 그 하나로 뭉뚱그려 보는 넉넉함을 그간 배웠습니다. 몸은 세상일에 매달려 있어 여유를 부릴 수 없다 해도 마음은 얽맬 수 없는 것이니 얼마든 여유를 부릴 수 있을 겁니다. 마 음이 행복을 만든다고 하지요. 늘 행복하십시오. 다에 나가는 사람에게는 물이 많이 빠지는 여덟 물, 아홉 물, 열 물 100 바로 지금 101

53 아내와 밥을 짓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뒤엉켜 뒹굴었습니다. 주워 온 나무로 모닥불을 피우고 차를 끓이고 숯을 모아 고구마를 구웠습 니다. 입가를 검게 칠하면서 고구마를 먹는 아이들을 보며 맛나게 웃 었습니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른 시간들이었습니다. 오후에 사촌동생은 가족과 함께 서울로 돌아갔습니다. 다시 오겠 다고 했지만, 그게 언제일지 모릅니다. 10년이든 20년후든다시만 친척관계 나게 되면 이번과 똑같이 대할 겁니다. 이런 게 사람 사는 모습이라 여깁니다. 서울에서 사촌동생이 가족을 데리고 밤늦게 도착했습니다. 거의 10년 만에 만난 겁니다. 그 집 아이들은 물론이고 제수도 처음 보았 습니다. 그런데도 어제 보았던 것처럼 편했습니다. 피를 나눈 사람들끼리는 헤어지려고 해도 헤어질 수 없지요. 헤 어진 일이 없으므로 지난 세월을 묻지 않았습니다. 앞으 로의 일도 묻지 않았습니다.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얘기 를 나누었지요. 변한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안아주기에도 아까 운 시간이었습니다. 다음날 사촌동생과 함께 산에 가서 나무를 주워 왔습니다. 제수는 이 마을의 친척관계는 복잡합니다.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이 결혼 으로 인연을 맺다 보니 아버지 쪽으로 따지면 삼촌뻘인 사람이 어머 니 쪽으로 따지면 형이 되는 경우는 흔해서 얘기할 것도 못 됩니다. 마을 사람끼리 말다툼을 하게 될 때, 한 사람이 중간에 끼어 족보를 따지면 서로 말다툼을 하기 참 껄끄러운 사이가 되어버리지요. 친척 과 조그만 일로 핏대를 세우는 건 창피한 일이거든요. 사돈의 팔촌 이란 말도, 여기서는 참 무섭습니다. 예전에 양씨 집 102 친척관계 103

54 성촌이었던 옆 마을 명사에는 아직도 저의 증조모를 기억하는 노인 들이 계시고, 저와 족보를 따져보기도 합니다. 그런 분 중에는 사돈 의 팔촌쯤, 혹은 더 먼 분들도 계신데 그렇게라도 피가 이어져 있다 는 사실에 기뻐하고 반가워합니다.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을 꺼려하 는 씨족문화의 전통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얘기겠지요. 그런 분의 혈연관계와 저의 혈연관계가 만나게 되면 인근에 혈연 으로 이어지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객지에서 잠깐 살러 온 사람이 아니라면 일단은 먼 친척으로 보는 게 당연하지요. 이 마을에는 제가 아버지로 부르는 분이 열 분 정도, 어머니로 부 르는 분이 스무 분 정도 됩니다. 아버지뻘은 모두 아버지, 어머니뻘 은 모두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도시에서처럼 아저씨, 아주머니라고 불렀다간 인간 취급 받지 못하지요. 그렇게 부른다는 건, 당신과 아 무리 따져봐도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이니 나를 막 대해도 된다는 뜻 이 됩니다. 삼촌뻘은 삼촌, 형뻘은 형. 삼촌이나 형의 수만큼 숙모와 형수가 있습니다. 마을 전체가 호칭으로만 따지면 한 핏줄입니다. 마 을 토박이끼리는 아무리 멀어도 따지고 보면 사돈의 팔촌은 되지요. 모든 생명은 단 하나의 세포로부터 진화했다는 다윈의 가설을 받 아들인다면 이 마을 사람들 결국은 모두 한 핏줄입니다. 더 크게 생 104

55 각한다면 한민족이 한 핏줄이고, 전 인류가 한 핏줄이 되지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아버지, 어머니, 삼촌, 형이라 부르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곳에 살다 보니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제 핏줄조 차 모르고 살아온 날들이 참 부끄러웠습니다. 아무리 아니라 해도 핏 줄은 핏줄입니다. 한번 이어진 핏줄은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거지 요. 당사자들을 통해서, 그 후손을 통해서 핏줄은 이어집니다. 기억은 희미해질지 몰라도 몸은 피를 잊지 못합니다. 살아 있다면, 조금만 더 관심과 애정을 가진다면 핏줄처럼 따뜻한 관계도 없을 겁니다. 아지트 사촌이 데려온 조카들은 처음 보았지만 하나도 낯설지 않았습니 다. 참 신기하고 고맙고 예뻤습니다. 10년을 모르고 살아도 사촌은 사촌. 사촌의 아이들은 조카. 그들과 같은 하늘 아래서 살고 있는 것 으로도 참 행복하였습니다. 언젠가또볼수있겠지만더자주볼수 있기를, 그래서 더 사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도시의 번잡함을 피해 남쪽 바닷가 마을에 살러 와 네 번째 맞는 겨울입니다. 겨울의 초입에 들어설 때마다 한동안 멍해지는 병이 도 졌습니다. 하릴없이 또 한 해를 보냈구나, 마음이 착잡해지는군요. 그래서 내 마음의 아지트를 찾아 나섰습니다. 집 옆으로 난 농로를 따라 왕조산 쪽으로 가다 보면 왼쪽으로 염소 들이 차지하고 있는 잡초 무성한 논이 있지요. 그 논을 가로질러 가다 보면 돌배나무 앙상하게 서 있고, 그뒤로 비석도 없는 무덤 둘이 놓여 있습니다. 무덤가 오솔길로 접어들면 아 늑한 분지가 나옵니다. 본래 논이라서 그런지 늘 햇살이 풍성합니다. 106 아지트 107

56 인기척에 느긋하게 풀 뜯던 고라니, 놀라 달아납니다. 장끼는 후다닥 풀숲으로 몸을 숨깁니다. 그 옆으로 큰골이 있습니다. 큰골은 이 마 을 사람에게조차 잊혀진 계곡이어서 늘 크고 작은 바위 사이로 유리 같은 물이 흘러내립니다. 지난 태풍에 부러져 계곡을 가로지르며 걸쳐 있는 소나무는 누운 부처 같습니다. 너럭바위에 앉아 고개를 젖히면 빈 가지 사이로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와락 달려듭니다. 마음을 흐르는 물소리, 새 물론 이 사람도 외롭습니다. 가족과 함께 있어도 외롭고, 바다와 하늘과 계곡과 함께 있어도 외롭고, 꽃과 나무와 함께 있어도 외롭습 니다. 그러나 외로움은 홀로 태어난 생명들에게 자기 속을 들여다보 라 주어지는 시간이지요. 가끔은 큰골처럼 아무도 찾지 않는 자신만 의 아지트를 찾아 바위처럼 앉아보세요.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노라 면 외로움마저 친구처럼 여겨질 겁니다. 알고 보면 외로움도 참 다정 합니다. 소리에 맡겨두고 앉아 있으면 이 사람, 너럭바위 위에 놓인 바위가 된 듯합니다. 바위에도 마음이 있을 거란 데 생각이 미치 면 혼자 낄낄거리고 말지요. 시골에 살다 보면 외롭지 않느냔 말 많이 듣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외롭지 않느냐고 되묻습니다. 외로워할 시간이 없는 도시, 외로워선 안 되는 도시, 외로움을 병으로 여기는 분주한 도시의 사람들에게 외 롭지 않느냐는 말이 때론 욕이 되겠지요. 그러나 그건 도시의 생리일 뿐, 본래 사람의 마음이 흘러가는 길과는 다릅니다. 108 아지트 109

57 저물기 전의 해는 눈이 부셔서 잠깐씩밖에 볼 수 없지요. 중천에 떠서 희멀건 얼굴로 느리게 움직이는 해와 참 다릅니다. 해가 이글거 리는 불덩이라는 사실, 그걸 다시 깨닫게 되는 시간이지요. 실눈으로 섬 위에 떠 있는 해를 바라보는 동안, 마당 대숲에 사는 참새 떼가 몰려옵니다. 수십 마리가 전깃줄에 줄 지어 앉아 있지요. 몇 마리가 먼저 대숲으로 들어가 정탐을 마치고 신호를 보내면 후르 지는 해 르, 일제히 대숲으로 날아듭니다. 저녁거리를 마련하러 마을 고양이 들이 대숲으로 모여드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우리 집 개들에 게 들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지요. 고양이가 도망친 납작한 촌집 지 이 마을 바다는 서쪽으로 열려 있습니다. 왼쪽에서 망산, 오른쪽에 서 왕조산 자락이 바다를 감싸 안고 장사도, 비진도, 죽도, 용초도, 한산도, 추봉도가 서로 겹치며 수평선을 지우고 있지요. 하늘에서 보 면 호리병 모양인 바다입니다. 매일 이 바다 너머로 해가 넘어갑니다. 봄에는 장사도 너머로 지던 붕으로 개들도 쫓아 오릅니다. 눈부신 햇살 때문에 검고 진하게 두드러지는 섬들의 윤곽과 바다 에서부터 서쪽 창까지 이어진 황금빛 햇살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이 마을, 가난한 사람들을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로 만들 어줍니다. 해가 요즘은 한산도 쪽으로 집니다. 제 방 창은 서쪽으로 나 있고, 창 가에 책상이 놓여 있습니다. 책상에서 일에 취해 있다가도 오른쪽 뺨 이 절로 달아오르고 햇살에 눈이 부시면,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지요. 그럴 때는 만사를 제쳐두고 해를 바라봅니다. 오늘은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아 황톳물을 만들었습니다. 세상에 110 지는 해 111

58 가득한 황금빛을 받아 옷에 황톳물을 들이려고요. 미지근한 황톳물 에 색 바랜 내복을 담그고 평상에 앉습니다. 마당을 뛰어다니며 까르 르 웃는 아이들의 얼굴이나 그뒤를 쫓아다니는 개들의 꼬리에도 황 금가루가 묻어 있습니다. 밭에 나갔던 마을 노인들이 느릿느릿 집 옆 으로 지나가면 그 구부정한 등에도 황금가루가 휘휘 날리고, 그 뒤를 따르는 황소의 누런 이빨도 황금인 듯합니다. 참, 그렇지요. 피터팬에 나오는 요정 팅커벨이 뿌려주던 마법의 가 루도 황금빛이었지요. 팅커벨이 아니라도 이 마을을 뒤덮은 황금빛 은 매일같이 마법을 펼치고 있겠지요. 그게 어떤 마법인지, 조금은 알 듯합니다. 혼자 사는 노인들의 낡은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면 해는 섬의 머리부터 서서히 붉은빛으로 물들입니다. 텔레비전 만화영화를 보러 아이들이 집으로 들어간 마당에서 황톳물 먹은 내복을 꺼내 빨랫줄 에 넙니다. 붉은 기운을 받아 황톳빛은 더욱 그윽해질 겁니다. 집 안 에서 전어 굽는 냄새 풍겨 나오고 마을길에 인적이 드문드문해지면 해는 아주 크고 둥글고 붉게 섬의 머리에 걸쳐지고, 곧 섬 뒤로 숨어 버립니다. 이 시간은 너무도 짧아서 오히려 마음이 아프지요. 조금씩 가라앉던 해의 정수리가 완전히 섬 뒤로 사라지면 발갛게 물든 하늘과 바다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무심합니다. 둘이서 짜고 시 치미를 뚝 뗀 것만 같지요. 해 진 섬을 돌아 선창으로 다가오는 통통 배 몇 척도 능청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도무지 해가 지는 걸 봤다 고, 지켜보고 있었다고 말하기가 민망해집니다. 그러나 해는 오늘도 졌고, 지고 있는 거지요. 조금 전 해가 넘어간, 섬 너머에 사는 사람들 중 누군가는 소를 끌 고 가다가, 경운기를 몰고 가다가, 잠깐 멈추어 황금빛 해를 보고 있 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누군가는 생의 마지막 석양을 보고 있을지 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해가 지면 나도 죽을 거야.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누군가 그를 위해 담벼락에 해 지는 광경을 그려 놓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마을에서 더 멀어질수록 해는 거꾸로 떠오르겠지요. 아주 먼 서 쪽나라에서는 이 지는 해를, 새벽 여명을 뚫고 솟아오르는 해로 보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해는 지는 게 아니군요. 서쪽으로 펼쳐진 바 다와 섬과 산을 굽이굽이 넘어가는 셈이 되겠고요. 물론 지구가 돌지 않는다면 이런 일도 없겠지요. 우리는 무서운 속도로 자전하는 지구 위에 있으면서 지구의 자전 을 의식하지 못하고 삽니다. 공기가 있어야 숨을 쉬면서도 왜 공기가 112 지는 해 113

59 있어야 숨을 쉬는지 숨쉴 때마다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너무도 당연 한 일이라 그 당연함조차 잊고 삽니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본질 적인 그것들. 그러나 오늘도 해는 아무 말 없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방금 찍은 즉석사진 같은 그 모습으로 서 서히 저녁을 맞이하는 노을 진 풍경. 그 속에 다른 풍경으로 앉았다 가 아내가 밥 먹으라 부르는 소리에 자리를 털고 일어납니다. 막 지은 밥의 구수한 냄새에 쫓겨 황혼은 집에서 바다 쪽으로 서둘 러 물러납니다. 둥근 상에 둘러앉아 먹는 저녁. 형광등이 켜지면서 마법은 사라져버립니다. 저녁은 그저 밥을 먹고, 잠을 자야 할 시간. 일상이 깃들지요. 서로 많이 먹어라, 재촉하면서 수저를 재게 놀리다 보면 평상에 앉아 바라보던 찬란한 풍경은 까맣게 잊혀져버립니다. 밥상을 물리고 창가에 앉으면 창 밖은 어둠으로 지워져 있지요. 띄 엄띄엄 켜진 희뿌연 가로등 몇이 사람 사는 마을임을 알려줄 뿐입니 다. 밥 달라며 개 짖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면서 마을의 밤은 잠 을 재촉합니다. 이 마을의 하루도 잠자리를 펴고 자리에 눕습니다. 새벽같이 일어 나 바다로 들로 나가는 사람들의 시계는 꼬박꼬박 졸고 있지요. 밤 아홉시, 막차가 들어오면 마을은 인적이 끊기고 대부분의 집이 불을 끕니다. 밤잠을 못 이루는 몇몇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마을의 길을 타 고 귓전에서 웅얼거리는 소리로 들리면 그 소리를 별들이 내는 소리 라 여깁니다. 깊고 짙은 어둠이 별을 밝히는 밤하늘을 매일 밤 열시에 지나가는 비행기가 유성처럼 흘러가면 이 사람도 형광등을 끄고 벌써 잠든 아 이들과 아내를 보러 안방으로 건너갑니다. 새근새근 잠든 식구들의 얼굴을 달빛에 기대어 차례로 뜯어보다가 볼에 살짝 입맞추어봅니다. 그럴 때 빙긋이 웃어주기라도 하면 가슴 이 터져버릴 것만 같습니다. 너무 기분이 좋아지면 이 하루가 어제의 그 하루였는지, 몇 년 전의 그 하루였는지 아니면 내일의 하루인지 몇 년 후의 하루인지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식구들이 잘 잠들었으니 세상도 잘 잠든 겁니다. 바다 쪽으로 보이 는 성관이네도, 바닷가에 사는 금종이네도 불이 꺼져 있고, 파도 소리 하나 없으니 바다도 잘 자고 있는 겁니다. 이 마을 바다 끝에 솟아 있 는 섬들도 외눈박이같이 깜박깜박 따뜻한 불빛을 모스 부호처럼 보내 고 있네요. 섬 너머로 돌아간 해도 어디선가 하품을 하고 있겠지요. 하루 해가 지고 한 해가 저물고, 다시 하루 해가 지고 다른 한 해가 저물어 이 밤을 맞았습니다. 참으로 많은 하루를 보냈으나 노을 지는 114 지는 해 115

60 이 마을에서 보낸 하루하루가 참 편안하였습니다. 혹 도시에 나가 살 게 되더라도 이 마을에서처럼 지는 해를 기다리고 보내고 다시 맞을 겁니다. 해는 바닷가나 도시를 가려가며 떠오르지도 지지도 않지요. 이런 하루만 이어진다면 늙어도 하나 서러울 거 없을 겁니다. 봄비 어제 해 질 무렵부터 비가 한두 방울 떨어졌습니다. 어둠이 내리자 장대비로 변하더니 먼 바다에서 졸던 바람까지 휘몰아 왔습니다. 태 풍이 불어닥친 듯 천지가 요란했지요. 밤새 비는 양철 지붕을 요란하 게 두드리고 바람은 허술한 집을 뒤흔들었습니다. 참새들은 집 옆 대 숲에서 꼼짝도 않고 강아지는 문을 열어달라고 낑낑댔습니다. 이 비바람에 이젠 익숙해질 만도 한데, 흔들리는 마음을 쉽게 가눌 수 없습니다. 이 세찬 비바람이 지나가야 겨울의 때가 말끔히 지워질 줄 압니다. 이 비가 채 녹지 않은 땅의 품속까지 스며들어야 게으른 씨앗들도 봄이 온 줄 알겠지요. 116 봄비 117

61 오늘도 종일 비가 내리고, 바람도 여전합니다. 하지만 내일이면 그 치겠군요. 대숲에서 참새들 짹짹거리는 소리를 들었고, 무당새가 창 턱에 날아와 앉는 걸 보았습니다. 이 비 그치면 여기저기서 머리를 내민 새 생명을 보게 되겠지요. 땅속에서 두려움을 참고 기다린 오랜 날들이 있어 그 빛은 시리도록 푸를 겁니다. 둔한 사람에게 봄비 내리는 까닭 을 잊지 말라고 올봄도 잊지 않고 요란을 떠신 게지요. 유난히 비가 잦은 봄이었습니다. 농부들, 작년엔 가물어 걱정하더 니 올핸 비가 너무 잦아 걱정을 합니다. 늘 부족한 사랑. 자연은 사람 을 오냐오냐 하며 키우지 않습니다. 비를 맞으며 학교를 오가는 아이들이라 일부러 비 오는 날 데리러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아이들이 비가 오면 집 밖에서 놀 생각을 하 지 않는 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비 오는 날, 바닷가로 놀러 갔 습니다. 아이들에게 노란 비옷을 입히고 노란 장화를 신겼습니다. 놀러 간 118

62 다니까 아이들은 신이 났습니다. 병아리처럼 뒤뚱거리며 앞서 달립 니다. 집에서 걸어 10분 거리에 명사해수욕장이 있는데, 모래가 곱습니 다. 명사의 옛 이름은 밀개. 조개가 많이 나는 해변이라는 뜻입니 다. 특히 맛조개가 많았답니다. 파도가 들었다 나간 모래밭은 힘을 주어야 발자국이 날 만큼 단단합니다. 그 위에 작은 구멍이막짠여 드름 구멍처럼 나 있지요. 구멍 밖으로 나와 있던 게들이 달려드는 아이들을 보고 후다닥 숨고 맙니다.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찌르고 발 을 굴러보아도 게들은 꿈쩍도 않습니다. 아이들 웃는 소리가 빗소리를 타고 날아다닙니다. 파도도 덩달아 신이 났습니다. 둘러보면 아무도 없는 모래밭. 알 수 없는 소리들이 귓가를 맴돕니다. 모래 아래서, 바다에서, 근처 솔밭에서 우리를 지 켜보는 무언가가 있는 듯합니다. 저희들끼리 키득거리는게영수상 합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불청객이지요. 아이들은 비가 고마운지 허리를 펼 줄 모릅니다. 아내는 터벅터벅 바다로 걸어가 해초를 뒤적이네요. 녹아내린 미역이나 파래를 들어 올렸다가 무안한지 배시시 웃습니다. 꼭 무얼 찾으러 나온 게 아닌데 도 바다에만 오면 두리번거리는 가족. 바다가 먹여주고 가르쳐주고 보살펴준다는 걸 스스로들 깨달아버린 거지요. 아이들이 조그만 손바닥을 쫙 펼친 채 꺄 탄성을 지르며 달려옵니 다. 집을 잃은 소라게 한 마리가 그 위에 누워 있습니다. 너무 늘어지 게 누워 있어서 죽은 줄 알았는데, 가만히 보니 조금씩 움직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소라게가 어쩌다 집을 잃었는지 이야기를 지어봅니 다. 아이들이 도망치듯 소라게에게 맞는 집을 찾으러 달려가고 나면 아내는 또 시작이라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봅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에는 이야기가 있는 법이거든. 아내는 입술을 삐죽 내밉니다. 피식 웃고는 파도에 떠밀려 온 솔방 울을 발로 툭 찹니다. 떼구루루 구르다 파도에 실려 둥실대다가 다시 모래밭에 내려앉습니다. 얼마나 오래 바다를 떠돌다 온 솔방울일까 궁금합니다.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도 궁금해집니다. 비 내리고 바람 불고 파도치는 모래밭에서 노랗게 물든 아이들과 빨갛게 핀 어머니와 마른 나무 같은 아버지가 무심결에 잊혀진 이야 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슬픔 없고 외로움 없고 차가움 없고 화려함도 없는, 그저 무심히 살아가는 이야기지요. 때론 사진 한 장이 되기도 하겠고 그림이 되기도 하겠으나 눈길을 끌지는 못할 겁니다. 바다에 서 산에서 제멋대로 자라 눈길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는 모든 평범 120 봄비 121

63 한 것들의 삶이 그러하듯. 비와 바다에 흠뻑 젖은 가족이 한바탕 법석을 떨고 간 모래밭에 게 들이 몰려나와 집게발을 들고 수다를 떱니다. 겨우내 비어 있던 모래 밭에 사람이 다녀갔으니 게들도 봄이 온 걸 알아차렸겠지요. 슬픔 일 때문에 집을 비운 사이, 중학교 때 친구가 딸아이를 데리고 집 에 왔습니다. 아내가 전화로 이름을 말해주었지만 기억나지 않았습 니다. 집에 와보니 24년 만에 보는 얼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얼 굴에는 반가움 대신 저와 아내의 마음을 저리게 만드는 슬픔이 화장 보다 짙게 묻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친구가 왜, 어떻게 왔는지 묻지도 않았습니다. 우리의 마음 을 아리게 한 친구의 슬픔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우리를 휩싸고 있었던 슬픔과 그 슬픔을 달랜 방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슬픔이 기쁨을 찾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고 122 슬픔 123

64 슬픔을 차오르게 만든 모든 것들을 달래고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이틀이 지나자 친구는 오랜 불면증이 사라졌다고 했 습니다. 얼굴에도 열다섯 살 소녀 적 웃음이 되살아났지요. 서울로 떠나며 우리에게 선한 미소를 선물로 주고 갔습니다. 그 미소는 우리 집에 오래 남아 슬픔 안에서 행복을 찾는 길을 늘 열어놓을 겁니다. 을 하는 동안 자기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거든요. 자기 마음이 어떤 지 제대로 알면 마음을 둘러싼 껍질은 흐물흐물해집니다. 금례는 망설이다 네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말에 호흡법을 배웠습 니다. 슬픔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 슬픔을 용서하며 숨을 쉬라 일렀지 요. 금례는 호흡을 하다가 곤히 잠이 들었고, 깨어나서 얼굴이 밝아 졌습니다. 예전처럼 잘 웃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더 보내고 도시로 돌아갔습니다. 떠날때, 언제다시만나자는말도하지않았습니다. 중학교 때 여자친구, 금례는 저를 한번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무작정 저구로 찾아왔답니다. 마을 입구에서 민박집을 물으니 저희 행복해라, 인연이 되면 또 만나겠지. 만나고 헤어지면서 사람을 배우지요. 집을 가르쳐주더랍니다. 민박집에 머물면서 멀찍이서나마 사는 모습 을 보고 가려 했다는데, 들른 집이 바로 저희 집. 그냥 우연의 일치라 고 해두지요. 집으로 돌아온 저는 한눈에 금례를 못 알아봤습니다. 참 좋아했던 여자아이였는데 말이죠. 금례가 데려온 아이랑 우리 아이들, 모두 재 워놓고 어른들끼리 모여 앉아 옛날얘기를 했습니다. 금례가 자러 간 후, 아내가 금례에게서 느낀 슬픔에 대해 말을 꺼 냈지요. 그래서 우리가 배운 호흡법을 가르쳐주기로 했습니다. 호흡 124 슬픔 125

65 벼집니다. 피서철에는 해변을 따라 빈 그릇이 늘어섭니다. 자장면을 먹는 게 이 마을 사람들에겐 마음먹고 하는 외식이 되어 서 누구네 집 앞에 빈 그릇이 있으면 무슨 좋은 일이 생겼나 여깁니 다. 하지만 스쿠터도 주일에는 멈춰 쉽니다. 두 내외가 독실한 기독 교 신자인 탓이지요. 열심히 음식을 만들고 나르는 일에 감사를 잊지 않는 사람들, 그들이 그냥 푸른 바다입니다. 청해반점 청해 靑 海 반점은 그 이름처럼 푸른 바닷가에 있습니다. 환갑을 넘긴 부부를 닮아 허름한 중국집입니다. 남편은 음식을 만들고, 아내는 배 달을 나갑니다. 물고기 비늘처럼 빛나는 철가방을 실은 빨간 스쿠터 가 해변을 달리면 자장면이 먹고 싶어집니다. 고구마처럼 길쭉한 남 부면 유일의 중국집. 어디든 빨간 스쿠터는 달려갑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길을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달려갑니다. 일손 달리는 농사철에 빨간 스쿠터는 그야말로 신출귀몰. 포장 안 된 골짜기 깊숙이 있는 논밭까지 철가방은 구슬땀을 흘리며 달려가 지요. 물때를 만나 바쁜 배 위에서도 자장면은 맛나게 비 시골에서 외식이란 게 가당키나 합니까만, 가끔은 청해반점에서 시켜 먹습니다. 집에서 멀지 않으니 가서 먹을 수도 있지만, 네 식구 가 가서 두 그릇 시켜 먹자니 미안해서 전화를 겁니다. 원래 많이 먹 는 식구들이 아니거든요. 전화를 걸기 전에 뭘 먹을까, 의논합니다. 제일 먼저 정해지는 메 뉴는 짬뽕. 딸아이는 늘 짬뽕입니다. 생각이 많고 먹고 싶은 게 많은 아들은 망설이다가 선택권을 부모에게 뺏기지요. 그래 봤자 자장면 아니면 볶음밥 아니면 울면인데 말입니다. 가끔 남이 해주는 음식이 먹고 싶다는 아내가 아니라면 사실 청해 126 청해반점 127

66 반점에 전화 걸 일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맛난 음식은 아내의 손에서 나오거든요. 아이들도 어머니 음식 맛이 최고라고 입을 모으 지요. 아이들이 비교할 수 있는 음식이라고 해봐야 겨우 학교 급식이 2... 니, 아이들 말은 별로 믿을 게 못 되긴 합니다. 텃밭에서 키운 채소가 밥상에 오르는 날이면 일부러 큰 소리로 맛 좋다 를 연발하는 아이들. 몸에 좋고 맛이 좋은 건 우리 밭에서 나온 다고 믿는 아이들 때문에라도 여러 가지 채소를 심습니다. 아이들에 게도 채소를 돌보라 하고 반찬 하게 뜯어 오라 합니다. 채소가 우리 를 먹여 살리는 것처럼 우리도 채소를 먹여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요. 그래서 아이들은 채소를 친구처럼 여기고 고마워합니다. 2. 학교나 집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세상을 아이들은 자연과 뒹굴면서 알게 됩니다 우리 아이들은 도시에서 놀이방과 집밖에 몰랐습니다. 놀이방과 집 사이는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곳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시골에 와서는 집과 학교 사이에 참으로 놀라운 세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 세상은 아이들의 눈높이로 펼쳐지고 아이들의 언어로만 설명되지요. 채소를 키우며 살다 보니 어디서 났는지도 모르는 음식은 달갑지 가 않습니다. 외식 자체가 시큰둥해진 또 다른 이유입니다. 그래도 청해반점은 낫습니다. 먼저 마음씨 좋은 주인을 알고, 그분들이 어느 밭에서 채소를 기르는지를 알지요. 그분들이 쓰는 재료나 음식이라 면 믿을 수 있습니다. 티 없는 마음으로 정성껏 만들어내는 한 그릇 의 음식. 화려하지도 기가 막히지도 않은 맛이지만, 집에서 만든 음 식처럼 하나 남기지 않고 열심히 먹습니다. 128

67 형과 동생 초등학교 3학년 때, 중학교에 막 들어간 친형이 서울로 유학 갔습 니다. 형이 처음 집에 다니러 왔다 서울로 돌아가던 겨울 새벽, 눈을 비비며 배웅하러 갔습니다. 뭐가 그리 슬펐던지 버스를 쫓아가며 형 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불렀습니다. 버스 안에 있던 형은 두 팔을 벌 린 채 차창에 기대어 서럽게 울었습니다. 1년 뒤, 아버지 사업이 기 우는 바람에 서울로 이사 갔습니다. 그러나 다시 만난 형제는 말을 잃었습니다. 사는 게 어렵다 보니 옷을 사도 형 것만 샀습니다. 저는 늘 대물려 입었지요. 고등학생이 되자 형과 키도 같고 발 크기도 같아졌습니다. 형과 동생 131

68 형은 새 옷이 창피하다며 한사코 저한테 차례를 미뤘습니다. 그땐 형 의 깊은 속을 몰랐습니다. 시골로 내려와 살게 되면서 조금이라도 아 끼려고 형에게 옷을 물려 입습니다. 지켜보기만 하던 형이 그간 잊고 지낸 사랑을 옷과 함께 보냅니다. 그 옷을 입고 있으면 사랑했던 형 의 체온이 새삼스럽습니다. 제게 사랑을 일깨워주고 그 사랑을 베풀 라고 가르쳐준 사람, 형의 이름은 이재우입니다. 물론 세상 모든 형들이 이러겠지요. 한편 서울로 온 우리는 신림동 판자촌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어려 운 시절이었지요. 그곳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가 그 달동네 사람들 모 두의 목표일 정도였습니다. 가난한 시절, 우리 형제는 각자의 길을 갔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돌봐줄 여유가 없었습니다. 서로가 경쟁하듯 공부를 하였지요. 공부 밖에 길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모두 공부를 잘했지요. 한때 부모에게 가장 많은 기대를 받았던 저였지만, 글을 쓰겠다고 하면서부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집과 멀어졌습니다. 군대를 제대하면서 등단했고 거의 집을 나가 살았습니다. 부모, 형 제도 잊고 제멋대로 살았습니다. 명절이나 제사 때가 되어야 겨우 집 제 위로는 형이 있고, 아래로 여동생이 있습니다. 이름은 재우, 수 화입니다. 형은 아웃백 스테이크하우스 상무로 있고, 동생은 남편과 함께 오퍼상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했다는 말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식구가 서 울로 이사할 무렵, 아버지의 사업이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기울었습 니다. 아버지는 한뎃잠을 자면서도 어머니에게 꼬박꼬박 생활비를 보냈습니다. 사업을 일으켜보려고 애를 썼지만 빚을 남김없이 갚는 선에서 사업을 마무리지어야 했습니다. 그 세월이 10년입니다. 에 갔습니다. 그래도 형은 저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글을 쓰 겠다면서부터 워낙 부모로부터 꾸중을 많이 들어온 터라 형이 뭐라 한들 곱게 듣지도 않았겠지요. 부모나 형에게 바라는 것도 없었습니 다. 있다면 가만히 좀 내버려두라는 것. 그러니까 저에게는 가족이 없었습니다. 결혼을 하고도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 사는 모습이 변하 지 않았습니다. 결혼하고 변한 게 있다면 제가 책임져야 할 식구가 생겨 글을 더 132 형과 동생 133

69 많이 써야 했다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책을 낼 때마다 번번이 좌절 하였습니다. 그럴수록 오기가 생겨 더 지독하게 글을 썼습니다. 먹고 사는 건 남의 일이지 제 일이 아니라고 얘기하면서도 먹고살기 위해 다른 전업 작가보다 더 열심히 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가진 재 산이 처음부터 없었기에 밤을 새워 글을 써도 살기 힘들었습니다. 적 게 버니 적게 먹어야지 하면서 하루에 두 끼만 먹고 살았습니다. 그 때의 습관이 남아 지금도 하루에 두 끼만 먹고 삽니다. 아내가 첫아이를 낳을 때, 솔직히 돈이 거의 없었습니다. 분만실에 서 스물여덟 시간 만에 나온 아들은 탯줄을 목에 감고 나왔고, 보름 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했습니다. 형과 장인, 처남이 주고 간 돈으로 병원비를 내야 했습니다. 아내의 젖을 짜서 병원에 가져다주고 인큐 베이터 안에서 가쁜 숨을 쉬는 아들을 지켜보면서 이를 악물었습니 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습니다. 정말 쉬지도 않고 몇 달씩 글을 써댔습니다. 누구는 저더러 글 쓰는 공장이라고 했습니다. 몇 달 만에 장편소설 을 써내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것도 연달아서 쓰고 또 썼으니까요. 그러지 않으면 가족을 먹여 살릴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할 줄 아는 일이라곤 글 쓰는 것밖에 없었기도 합니다. 그런 저를 보는 형의 눈 에 늘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형도 바쁘고 힘 들게 살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 눈빛 말고 더는 무엇도 필요 없었 습니다. 아이엠에프 체제로 들어서면서 글공장도 가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 습니다. 출판사가 연달아 문을 닫았지요. 그나마 월급생활자로 밥벌 이를 하게 된 건 다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직장 생활을 하는 2년은 제 게 독이 되었습니다. 아내까지 직장에 나가야 도시에서의 생활을 유 지할 수 있었습니다. 어린 아들과 딸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사는 생 활. 저희는 저희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점점 지쳐갔습니다. 너무 지쳐 가족 모두 마귀처럼 변해버렸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고 싶었습니다. 도시를 떠나려고 할 즈음 아 내가 직장을 안 다녀도 될 만큼 월급을 많이 주겠다는 회사가 있어 한 달을 다녔지만, 그마저 싫었습니다. 그저 소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 습니다. 외딴 산속에서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도시를 떠났습니다. 저 때문에 너무 지친 가족을 살리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가족의 행 복만 생각하며 살아보자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마저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민박집을 해야 하는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상황이 어떻든 행복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너무 지쳐 더는 자학할 134 형과 동생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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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강습회원의 수영장 이용기간은 매월 1일부터 말일까지로 한다.다만,월 자유수영회 원,자유수영 후 강습회원은 접수일 다음달 전일에 유효기간이 종료된다.<개정 2006.11. 20,2009.6.15> 제10조(회원증 재발급)1회원증을 교부받은 자가 분실,망실,훼손 및 실 내 수 영 장 운 영 내 규 1999.6.1. 내규 제50호 개정 2001. 3.19 내규 제 82호 개정 2005.12.29 내규 제135호 2002. 3.25 내규 제 92호 2006.11.20 내규 제155호 2002. 8.28 내규 제 94호 2009. 6.15 내규 제194호 2005. 5.20 내규 제129호 2011.11.10 내규 제2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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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사 청 문 요 청 사 유 서

인 사 청 문 요 청 사 유 서 국무위원후보자(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 유일호) 인사청문요청안 의안 번호 제출연월일 : 2015. 12. 제 출 자 : 대 통 령 요청이유 국가공무원법 제31조의2에 따라 다음 사람을 국무위원(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으로 임명하고자 국회의 인사청문을 요청하는 것임. 인사청문 요청대상자 성 명 : 유 일 호 ( 柳 一 鎬 ) 생년월일 : 1955년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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