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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orean Ethnic Custom Scholar Conference 실용과 성과주의 시대의 민속학 일시 2013년 10월 25일(금)~26일(토) 장소 경남 밀양시 밀양연극촌 주최 : 사단법인 한국민속학술단체연합회 국립민속박물관 경상남도

2 개회사 깊어가는 가을에 우리 민속학계의 큰 잔치인 2013 한국민속학자대회 를 10월 25~26일 이틀간 경남 밀양에서 개최합니다. 올해는 실용과 성과주의 시대의 민속학 이란 주제로 12편의 논문이 발 표될 예정입니다. 그동안 민속학도 실용주의와 양적 성과를 중요시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 다. 민속학은 본래 학문적 특성상 현장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동안 민속학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현장에 다가가고 어떤 시각으로 학문에 접근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단편적인 논의가 있었습니다. 접근의 방향에 있어, 학문적 순수성과 본질을 추구해야 한다는 시각과 실용적 학문으로서 변화와 활용에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또한 대응 방식도 현장에 적극 다가가서 민속 의 실상과 변화양상을 조사하고, 이에 따라 전승과 정책적 방향성까지 제시해야 한다는 시각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현장에 지나치게 밀착하거나 주관적 시각을 갖고 본질을 왜곡하거나 지나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현장과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습니 다. 이번 기회에 우리 민속학자들이 학문과 현장에 어떤 자세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다양 한 논의를 할 수 있는 자리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8개 학회를 대표해서, 민속에 대한 문화정책, 문화창출, 문화상품화, 문화융합, 자원활용 방안, 민속과 축제, 실용과 한계, 실천성 재고 등에 대한 다양하고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집니다. 특히 올해는 예년의 주제보다 실천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논의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경남민속의 해 를 맞이하여 경남 민속에 관한 4편의 논문도 발표됩니다. 특이한 것은 올해는 기존의 호텔 공간 중심의 행사에서 벗어나 색다른 기획을 하게 되었습니다. 연극연출가인 밀양연극촌 이윤택 촌장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학술대회와 각종 공연 및 숙식을 한 곳에서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굿의 연극화에 힘써온 밀양연극촌 측에서 오구굿, 씻김굿, 칠 머리당굿 등을 중심으로 굿의 연극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이후 연출가와의 대화의 시간도 가질 예정입니다. 또한 밀양백중놀이 공연, 밀양 지역 민속 답사 등도 계획되어 있습니다. 무덥고 긴 여름을 지나 이제 결실의 계절을 맞아, 이번 자리가 알찬 학문적 결실을 맺는 자리가 되길 기대합니다. 특히 밀양이 갖는 다양한 상징적 공간 속에서 진지한 학문적 시간과 반갑고 흥겨 운 여흥의 시간을 되길 기원합니다 (사)한국민속학술단체연합회 회장 정형호 3

3 환영사 환영사 여러분 반갑습니다. 천고마비의 계절, 단풍이 짙어가는 이 가을에 2013 경남민속문화의 해 를 기념하는 한국민속학 자 대회 를 개최하게 된 것을 매우 뜻 깊게 생각합니다. 오늘 학술대회를 준비하여 주신 한국민속단체연합회 정형호 회장님, 강정원 교수님을 비롯한 발 표자 토론자 선생님 그리고 경남을 찾아주신 전국의 민속학자 여러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아울러 오늘 이 자리를 빛내 주시기 위하여 참석하여 주신 국립민속박물관 천진기 관장님을 비롯 한 내외귀빈들과 바쁘신 가운데도 함께 하여 주신 도민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경남민속문화의 해 사업은 우리 문화의 현대적 전승과 사라져 가는 경남의 민속을 조사하 여 기록하고 그 안에서 우리 고유 문화를 발견하고 자원화 하는 것을 목표로 국립민속박물관과 함께 추진하고 있습니다. 오늘 개최하는 학술회의는 실용과 성과주의 시대의 민속학 을 주제로 민속문화 정책에 대한 비 판적 성찰을 바라보는 자리로 마련하였습니다. 또한 경남의 음식, 남해 독일마을을 통해서 본 파독 광부 간호사의 이주사와 역이주, 경남 합천 율지리의 공간변화와 주거유형을 새롭게 인식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조상들이 물려준 소중한 민속자원과 정신문화의 가치를 더욱 계승 발전시키고 개성있는 문화상품을 만들어 민속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재고시켜야 할 것입니다. 한국 민속학의 위상을 정립하고 전통문화 진흥을 위해 노력해 오신 전국 민속학자 여러분께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하며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께도 건강과 행운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경상남도지사 홍 준 표 2013년 경남민속문화의 해 를 맞이하여 2013한국민속학자대회 가 이곳 밀양에서 개최됨을 기쁘 게 생각합니다. 실용과 성과주의 시대의 민속학 이라는 주제로, 경상남도 최낙영 문화관광체육국장 님, 사단법인 한국민속학술단체연합회 정형호 회장님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의 민속 관련 학자 여러 분을 역사와 문화 그리고 아리랑의 고장, 밀양에서 만나게 되어 그 의미가 더욱 남다를 것으로 여겨 집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지역민속의 발굴과 활성화를 목표로 하여 2006년 제주도를 시작으로 각 도와 공동으로 지역민속의 해 사업을 추진해 오고 있습니다. 2013년은 경남민속문화의 해 로, 지난해에 경상남도를 대상으로 합천과 남해 2개 지역에서 학술조사를 진행하여 2013년 7월에 조사보고서를 발간하였습니다. 이와 아울러 경남지역민속의 해 와 연계하여 한국민속학자대회가 이곳 밀양에서 개최되는 만큼 이번 대회를 통해서 경남의 지역민속에 대한 가치와 중요성을 더욱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올해 본 대회의 주제는 실용과 성과주의 시대의 민속학 입니다. 현시대 한국사회를 표현해낼 수 있는 것이 실용과 양적 성과 에 대한 강조라 표현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빠른 압축 성장을 해오면서 무엇보다 경제적 논리가 모든 분야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대중들도 실용적이지 못하고, 경제적이지 못한 인문학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번 2013한국민속학자대 회는 이런 현 시대의 상황과 맞물려 과연 민속학은 어떤 대응을 해왔고, 할 수 있는지 논의해보는 장이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실용과 성과주의 시대의 민속학 이란 기획 주제를 통해 민속 관련 8개 학회가 공동으로 한국민속학자대회를 추진하는 것은 매우 시의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2013한국민속학자대회 를 통해서 모든 민속 관련 연구자들이 실용과 성과주의 시대의 민속 학적 과제와 한국 민속학의 전망을 논의하고, 아울러 경남 지역민속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축제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를 위해 학술대회를 준비하신 사단법인 한국민속학술단체연합회 관계자와 이 자리를 빛내주실 민속학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국립민속박물관장 천진기 4 5

4 프로그램 10월 25일(금) 11:00~11:30 기획위원회 회의 11:30~12:00 점 심 12:00~12:30 등 록 사회 최원오(광주교대) 개회사 한국민속학술단체연합회 회장 개회식 12:30~12:50 경상남도지사 환영사 국립민속박물관장 실용과 성과주의 시대의 민속학 제1부 사회 허용호(동국대) 국가와 민속-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발표1 12:50~13:30 이상현(안동대) 발표: 강정원(한국민속학회) 토론 김정하(한국해양대) 민속 관련 문화창출에 대한 민속학자의 역할 발표2 13:30~14:10 강성복(공주대) 발표: 박흥주(한국무속학회) 토론 김형근(경기대) 14:10~14:20 휴 식 제2부 사회 이창식(세명대) 판소리를 활용한 지역관광자원 개발과 의미 발표3 14:20~15:00 이하나(고려대) 발표: 최혜진(판소리학회) 토론 이명진(국립문화재연구소) 구비문학과 축제의 실용적 상관성 발표4 15:00~15:40 최원오(광주교대) 발표: 이정재(한국구비문학회) 토론 김기호(영남대) 15:40~15:50 휴 식 제의 관련 공유자원 활용의 역기능과 사회자본의 향방 발표5 15:50~16:30 이균옥(안동대) 발표: 조정현(실천민속학회) 토론 서종원(단국대) 16:30~16:50 대학(원)생 현상논문시상 총평 / 한국민속학술단체 연합회 총회 16:50~17:00 휴 식 17:00~18:30 밀양연극촌 <굿과 연극> 공연 18:30~19:00 연출가와의 대화 진행 심상교(부산교대) 19:00~ 만 찬 10월 26일(토) 제1부 사회 이윤선(목포대) 문화기억과 기억융합으로서의 아리랑 발표6 09:00~09:40 최은숙(한서대) 발표: 권오경(한국민요학회) 토론 오진호(부산대) 남도의 민속사회를 통해서 본 실용과 허영의 현상적 파노라마 발표7 09:40~10:20 김미경(전주대) 발표: 나경수(남도민속학회) 토론 송 준(고려대) 10:20~10:30 휴 식 누구의 무엇을 위한 실용 인가? : 한국 민속학의 실천성 재고 발표8 10:30~11:10 정수진(동국대) 발표: 남근우(비교민속학회) 토론 이경엽(목포대) 11:10~11:20 휴 식 11:20~12:00 밀양백중놀이 공연 12:00~13:00 점 심 경남의 지역 민속 사회 정연학(국립민속박물관) 경남 합천 율지리의 마을공간변화와 주거유형 발표1 13:00~13:40 발표: 박선주(국립민속박물관) 토론 노용석(부산외대) 심청굿의 전승과 확산 발표2 13:40~14:20 발표: 윤동환(고려대) 토론 홍태한(중앙대) 14:20~14:30 휴 식 파독 광부 간호여성의 이주와 역이주 발표3 14:30~15:10 발표: 김창일(국립민속박물관) 토론 이은정(영남대) 경남음식의 근대성 : 마산과 진주를 중심으로 발표4 15:10~15:50 발표: 주영하(한중연) 토론 유장근(경남대) 15:50~16:00 휴 식 총평 16:00~16: 한국민속학자대회 총평 정상박(동아대명예교수) 폐회식 16:20~16:30 폐회사 한국민속학술단체연합회 회장 16:30~18:00 밀양민속문화탐방(여주 이씨 고가 퇴로댁, 영남루 등) 연합회 연락처 대표이사 정형호 사무총장 최원오 , 사무간사 윤준섭

5 목차 발표논문 실용과 성과주의 시대의 민속학 발표 1 국가와 민속-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15 발표 강 정 원 한국민속학회 토론 이 상 현 안동대학교 김 정 하 한국해양대학교 발표 7 남도의 민속사회를 통해서 본 실용과 허영의 현상적 파노라마-한옥으로 조성되는 전남지역의 행복마을 을 중심으로- 169 발표 나 경 수 남도민속학회 토론 김 미 경 전주대학교 송 준 고려대학교 발표 2 민속 관련 문화창출에 대한 민속학자의 역할-대구광역시의 부정적인 사례를 중심으로- 39 발표 박 흥 주 한국무속학회 토론 강 성 복 공주대학교 김 형 근 경기대학교 발표 3 판소리를 활용한 지역관광자원 개발과 의미 61 발표 최 혜 진 판소리학회 토론 이 하 나 고려대학교 이 명 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발표 4 구비문학과 축제의 실용적 상관성-영상 디지털문화와의 비교- 87 발표 이 정 재 한국구비문학회 토론 최 원 오 광주교육대학교 김 기 호 영남대학교 발표 5 제의 관련 공유자원 활용의 역기능과 사회자본의 향방 111 발표 조 정 현 실천민속학회 토론 이 균 옥 안동대학교 서 종 원 단국대학교 발표 6 문화기억과 기억융합으로서의 아리랑 141 발표 권 오 경 한국민요학회 토론 최 은 숙 한서대학교 오 진 호 부산대학교 발표 8 누구의 무엇을 위한 실용 인가?-한국 민속학의 실천성 재고- 185 발표 남 근 우 비교민속학회 토론 정 수 진 동국대학교 이 경 엽 목포대학교 발표논문 경남의 지역 민속 발표 1 경남 합천 율지리의 마을공간변화와 주거유형 207 발표 박 선 주 국립민속박물관 토론 노 용 석 부산외국어대학교 발표 2 심청굿의 전승과 확산 239 발표 윤 동 환 고려대학교 토론 홍 태 한 중앙대학교 발표 3 파독 광부 간호여성의 이주와 역이주-남해독일마을을 통해 본 파독근로자에 대한 재조명- 257 발표 김 창 일 국립민속박물관 토론 이 은 정 영남대학교 발표 4 경남음식의 근대성 : 마산과 진주를 중심으로 297 발표 주 영 하 한중연 토론 유 장 근 경남대학교 8 9

6 2013한국민속학자대회 현상논문 심사평 2013한국민속학자대회 현상논문 심사평 장 장 식 심사위원장 국립민속박물관 아쉽게도 2013년 현재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바람과 달리 어려움에 처해 있다. 민속학의 독립성 이 점차 평가절하되고 있고, 그 쓰임새 역시 타분과 학문에 밀리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 이처럼 절박하고 먼 길을 가기에는 고독한 수행자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학부생 6편의 논문과 대학원생 4편의 논문은 어두운 거리의 등불( 暗 衢 明 燭 ) 처럼 길을 밝히고 있다. 또 농촌, 어촌, 도시와 같은 연구영역의 공간적 확장과 전통과 현대와의 소통을 탐구하는 질적 연구가 다량 제출된 것은 험한 나루의 뗏목( 迷 津 寶 筏 ) 처럼 큰 기쁨이다. 사정이 이렇기에 6명의 심사위원은 모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심사에 임했다. 젊음 후학에 대한 기 대와 선배들이 미처 관심을 갖지 못한 다양한 영역으로 연구 지평을 확장하고 있다는 믿음에서다. 하지만 심사위원의 처지에서 이들을 서열화하고 애써 1, 2등을 가려야 한다는 데 따른 중압감도 적 지 않았다. 치밀한 심사와 평가가 이루어지기까지 비교적 긴 시간이 필요했음을 이런 까닭이다. 이제 심사위원으로서 교과서적인 당부를 하면서 젊은 학도의 발전과 건승이 있기를 바란다. 첫째, 문제의식에 대한 합리적 의문이 앞서야 한다. 둘째, 용어에 대한 정의를 특정하고 이를 기반해야 한다. 셋째, 문제 해결에 대한 해결방식과 논리성이 뒤따라야 한다. 이렇게 지적했지만 글쓰기가 너나없이 쉽지 않은 영역임을 인정한다. 그만큼 어렵고 지난한 논리 적 싸움이기 때문이다. 경험적으로 볼 때, 문제는 지도교수와 얼마나 소통, 감통( 感 通 )할 수 있느냐 에 달려 있다. 지도교수에 대한 전폭적인 의지와 이에 따른 협업 및 소통적 지도를 통해 옛 말처럼 사제간의 줄탁동시( 啄 同 時 同 時 )가 이루어진다면 젊은 학도들의 연구가 더욱 강화될 것이다. 제출된 논문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심사는 궁극적으로 상대적 순위를 가리는 것이다. 앞서서 말한 것처럼 우열을 가리는 것이 퍽이나 힘든 일이었지만 대학생의 경우, 선학의 문화이론을 검토하 고 변화상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했다는 점에서 안동지역의 추석과 중구의 관계 를 다룬 논 문에 좀 더 높은 점수를 주었고, 농촌 여성을 대상으로 문화양태의 변화를 실증적으로 다룬 농촌여 11

7 성의 미용의식 에 주목하였다. 대학원생의 경우, 어촌사회의 민속관행 변화를 권력관계 라는 틀에서 분석한 전통과 현대 항법 지식 에 좀 더 높은 점수를 주었고, 기존 연구의 치밀한 분석을 통해 정확한 논제를 도출하여 나름의 해결을 시도한 세경본풀이의 내적 질서와 세경신의 좌정원리 에 특별히 주목하였다. 나름의 장단점을 지녔지만 이들 논문은 지적된 심사평을 반영하여 완성도 높은 논문이 되기를 바라며, 등위에 들지 않은 논문들 역시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고민하여 훌륭한 논문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갈 길이 멀고 바쁘다. 빨리 가려는 사람은 홀로 가겠지만 먼 길을 함께 가려는 사람은 더디 갈 수밖에 없다. 먼 길을 함께 가려는 한국민속학자대회 현상논문에 투고한 학부생, 대학원생 여러분의 노고를 거듭 치하한다. 실용과 성과주의 시대의 민속학 발표 1 국가와 민속-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발표 강정원 한국민속학회 토론 이상현 안동대학교 김정하 한국해양대학교 발표 2 민속 관련 문화창출에 대한 민속학자의 역할 -대구광역시의 부정적인 사례를 중심으로- 발표 박흥주 한국무속학회 토론 강성복 공주대학교 김형근 경기대학교 발표 3 판소리를 활용한 지역관광자원 개발과 의미 발표 최혜진 판소리학회 토론 이하나 고려대학교 이명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발표 4 구비문학과 축제의 실용적 상관성 -영상 디지털문화와의 비교- 발표 이정재 한국구비문학회 토론 최원오 광주교육대학교 김기호 영남대학교 발표 5 제의 관련 공유자원 활용의 역기능과 사회자본의 향방 발표 조정현 실천민속학회 토론 이균옥 안동대학교 서종원 단국대학교 발표 6 문화기억과 기억융합으로서의 아리랑 발표 권오경 한국민요학회 토론 최은숙 한서대학교 오진호 부산대학교 발표 7 남도의 민속사회를 통해서 본 실용과 허영의 현상적 파노라마 -한옥으로 조성되는 전남지역의 행복마을 을 중심으로- 발표 나경수 남도민속학회 토론 김미경 전주대학교 송 준 고려대학교 발표 8 누구의 무엇을 위한 실용 인가? -한국 민속학의 실천성 재고- 발표 남근우 비교민속학회 토론 정수진 동국대학교 이경엽 목포대학교 12

8 국가와 민속-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2013 한국민속학자대회 국가와 민속-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강정원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목차 1. 서론 2. 선행 연구 검토 3. 민속 이념 4. 민속 정책 5. 현대 국가와 민속 6. 결론 1. 서론 민속에 대한 관심을 국가가 가진 것은 동양의 경우 상당히 오래 되었지만, 동서양 모두 민속에 대해 체계적인 관심을 국가가 가지게 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 된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국가는 세금을 거둔다거나 징병 제도를 체계화하거나, 종교나 여가, 교육 정책을 수립하기 위한 자료 확보 차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민속을 수집하고 정리하게 된다. 민속에 대한 정책은 민속에 대한 장려나 금지, 기록, 수집 등으로 나타나게 된다. 민속에 대한 정책을 경찰이 시행하는 경우도 있고, 교육부 등에서 주관하기도 하며 일부 국가의 경우에는 문화부가 주관하는데, 한국의 경우 교육부가 주관하 다가 문화부에서 담당하였다. 민속 정책의 이데올로기 혹은 이념은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민족주의와 세계시민주의, 민주주의 와 전체주의 등 다양하며, 다양한 이념에 따라 정책도 여러 모습으로 실천되었다. 다양한 이념이 모두 정책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민속 정책이 체계화된 것은 국가주의적이고 계몽주의적인 이 념 혹은 낭만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이념과 관련이 깊지만, 현재까지 주목을 많이 받아 왔다. 본 고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를 추가하여 민주주의의 체계화와 민속 정책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도 15

9 국가와 민속-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보여 주고자 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한반도에서 물러가고 미군정이 실시되었고, 1948년부터 대한민국이 성 립되었다. 대한민국이 건국된 지 7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 민속학계에서는 해방 이후 한반도를 다스린 통치 권력의 민속 정책에 대하여 충분한 검토를 수행했다고 보이지 않는다. 민속학 계는 오히려 국가가 흘리는 여러 프로젝트에 대해서 충분하게 성찰하지 않고 수행하는 데에 오히려 급급하였다. 민속학계에서 국가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많지만, 본고에서는 민속 연구의 핵심이 되는 민속 자료 의 수집과 체계화에 국가 상당한 정도로 이에 개입해 왔다는 점에 우선 주목한다. 국가에서 주도해 나가는 문화재 정책은 한국 민속학계의 방향을 좌우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발휘해 왔으며, 많은 학 자들이 이와 연관되어 있다. 두 번째로 본고에서 굳이 민속 이념과 정책을 고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민속에 대하여 국가가 당연히 해야 할 의무를 깨우쳐주기 위함이다. 국가의 주권자인 국민들의 생활방식에 대해서 이에 개입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이를 기억해 주는 것은 국가가 국가 건설을 위해 기여한 국민들에게 되돌려주는 중요한 의무인 것이다. 본고에서는 대한민국 국가가 수행한 민속 정책의 배경이 되는 이념을 중심으로 국가 이념과 정책, 국가와 민속과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 이해해 보고자 한다. 민속 정책의 결정 과정이나 정책과 성과 의 연관성을 따지는 방식보다는 민속 이념과 민속 정책에 대하여 거시적인 차원의 이해를 해 보고자 한다. 아울러 한국의 민속 정책을 좀더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미국이나 독일, 일본 등의 민속 정책과 비교도 시도해 보고, 향후 반드시 행해져야 할 민속 정책에 대해서도 언급해 볼 것이다. 이를 통해서 향후 국가가 민속에 대해 좀더 존중하고, 올바르고 체계적인 민속 정책이 펼쳐지기를 기대하 며 이 연구가 민속과 국가 정책의 관계에 대한 향후 연구의 디딤돌이 되기를 희망한다. 2. 선행 연구 검토와 본고의 시각 대한민국의 민속 정책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본고에서 본 논의를 전개하기 전에 해결해야 할 개념 문제가 있다. 민속 정책의 범주를 설정해야 하는데, 정책이라는 단어 보다는 민속이라는 단어 의 범주를 해결하는 데에 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정책이라는 개념도 명확하기 설정하기는 어렵지 만, 국가(지방자치단체)가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특정 분야에 행하는 일련의 행위를 말하는데, 이 행위에는 목적과 가치를 설정하고, 순위에 따라 재원을 배분하고, 법에 따라 보존하고 규제하는 행 위 등이 포함된다. 1) 특정 분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 분야에 개입하는 일련의 행위 및 상호 작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민속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이 정의를 시도했지만, 아직도 만족할만한, 모든 학자들이 동의할만한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사람들의 생활 1) 임학순, 창의적 문화사회와 문화정책 (진한도서, 2003), 53~61쪽. 방식과 표현 체계를 민속이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이러한 규정에 전승이라는 개념이 첨부되는 것이 민속학계의 일반적인 관행이기 때문에 본 연구의 출발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정리해 보면, 물질과 행위 언어를 통해 전승된 생활 방식과 표현 체계에 대한 국가의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민속을 광의로 정의하였을 때 민속은 거의 모든 사회 영역에 해당이 되므로, 국가의 민속 정책은 정책의 주된 대상에 따라 문화재 정책과 박물관 정책, 예술 민속에 대한 정책, 민속 교육학술 정책, 민속 경제관광 정책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민속 정책은 주로 문화관광부에 의해서 집행되기는 하지만 교육부 등을 비롯한 여타 행정 부서에서도 담당하고 있다. 민속 정책에 대한 기존 연구는 행정학계에서 주로 행해진 문예 중심의 문화 정책 연구와 민속학 계에서 주로 행한 민속 정책 연구로 구분된다. 문예 중심의 문화 정책 연구는 본 연구와 큰 연관성이 없기 때문에 필요한 경우에만 언급하기로 한다. 본고에서 주목한 행정학계에서의 문화정책 연구는 Langsted 2) 의 연구이다. Langsted는 문화민주화와 문화민주주의 정책을 구분하는데, 본고에서 말하 는 민속 민주주의와 일정부분 구분되기는 하지만, 민속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분석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본 장에서는 주로 민속학계에서 발표된 민속 정책 전반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성과를 검토하고 자 한다. 민속학계에서는 무형문화재 관련 연구를 주로 수행한 편이기는 하지만, 민속 문화 일반에 대한 연구도 행해진 바 있다. 기존에 문화재 관련 연구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본 장에서 이를 모두 검토하는 것은 큰 무리가 따른다. 3) 따라서 민속 정책 일반을 다룬 연구에 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민속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는 이미 강정원 4) 등에 의해서 행해진 바가 있지만, 강정원은 민속 전승 주체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중요하다는 점만을 제시하였을 뿐, 민속 정책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지는 않았다. 구체적으로 민속 정책에 대한 연구는 나경수 5) 에 의해 서 시도되었다. 나경수는 주로 문화재 보존 정책과 콘텐츠 정책을 집중해서 다루었다. 그는 기존 민속 정책을 물질문화를 중시하는 후진적 문화정책 이라고 비판하고, 국가에서 민속 전담 부서를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속에 대한 정기적 조사와 조사 결과물 등의 아카이빙을 구체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민속의 콘텐츠 정책도 민속을 제대로 대접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 2) Langsted는 문화민주화와 문화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문화민주화는 전문가들이 만들고 보존해 온 뛰어난 문화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며 문화민주주의는 비전문가들의 창조적 활동을 돋우어 문화의 다양성을 높이는 것으로 설명한다. 창조적 예술 활동에 문화를 한정짓는 점과 수준을 상정하는 점 등에서 본고의 시각과 차이가 있다. 본고에서는 민속에 대한 존중과 이를 수행하는 정책이 문화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라고 본다. Langsted, Jorn, Double Strategies in a Modern Cultural Policy Journal of Arts Management, Law and Society 19(4), p.53~71; 배관표 이민아, 한국 문화정책 의 대상과 전략의 변화, 한국정책학회보 22-1(한국정책학회, 2013), 143~146쪽에서 재인용. 3) 무형문화재 정책에 대해서는 이미 박사 학위 논문이 3편이나 나와 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이를 참고하면 된다. Yang, Jongsung, Folklore and Cultural Politics in Korea; Intagible Cultural Properties and Living Treasure, (Indiana University, 1994); 이장열, 한국 무형문화재정책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2005); 정수진, 무형문화재의 탄생 (역사비평 사, 2008); 송준, 한국 무형문화재정책의 현황과 발전방안 (고려대학교 대학원, 2009). 4) 강정원, 동제 전승주체의 변화, 한국민속학 36(한국민속학회, 2002), 1~25쪽. 5) 나경수, 21세기 민속문화와 정책 방향, 한국민속학 40(한국민속학회, 2004), 41~65쪽

10 국가와 민속-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으로 평가한다. 이정재 6) 도 민속아카이브와 관련된 문화 정책에 대한 논문을 작성한 바 있는데, 민속 자료의 수집 과 정리가 요구된다는 점과 박물관과 아카이브를 구분하여 설치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 다. 기존에 제시된 민속 아카이브 관견 연구들을 정리하며, 국립 민속 아카이브의 설립이 필요함을 제시한다. 민속을 다루는 국가 기관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수행한 논문으로 이두현 7), 이종철 8) 의 논문을 들 수가 있는데, 두 논문 모두 본 연구와 동일하게 광의의 민속 개념을 사용하면서, 기존의 한국 민속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이종철은 기존 문화 정책을 통하여 향토의 삶이 응축된 민족문화조사와 기 록화는 수몰되는 악순환을 낳고 있다 9) 고 보고 있으며, 따라서 전반적인 향토조사 문화가 이루어져 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이두현의 경우에 민속 정책에 대한 일관성을 지적하는데, 담당 부서들의 중복 기능을 큰 문제로 보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체계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보면서, 민속 에 대한 기록과 이를 담당할 정부 기관 설립을 제안하고 있다. 현재까지 발표된 민속학계의 정책 관련 논문의 경우, 이념이나 담론 분석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 았다. 관심이 있더라도 대부분 포괄적인 언급을 하는 데에 그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민속 일반 에 대한 관심이 적으며, 이를 관장할 정책이 부족하다 등이 지적 사항이지만, 이에 대한 근거를 충분 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 정책을 끌고가는 이데올로기를 체계화시켜서 이해를 시도하지 못하고 있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대한민국 정권 중에서 현대 한국 민속 정책을 관철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한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준 정권은 박정희 정권인데, 민속 일반에 대한 경시와 최소한의 문화재 보호를 통한 국가주의 강조가 박정희 정권을 통하여 드러난 지점에 대하여 정유진 10) 은 잘 보여준다. 이러한 규제적 보호 정책과 국가민족주의의 결합에 대해서는 강정원 11) 에서도 지적된 바가 있다. 한국을 포함한 신생국가가 취해야 할 민속 정책은 보호와 장려 정책 혹은 억압 혹은 규제 정책으 로 구분될 수 있는데, 민속에 대한 정책을 통해서 국민 정체성 강화를 추구할 경우에 보호와 장려 정책적 수단을 선택하게 되고, 경제 발전이라는 근대화 정책을 목표로 내걸 경우에 억압과 규제 정 책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 클리포드 기어츠는 신생국가에서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하면서 토착적 생활양식을 강조하는 본질주의와 시대정신을 중시하는 시대주의를 대비시켰는데, 12) 이는 서구나 미 국의 근대화 과정에서도 등장하는 상반된 이데올로기이다. 러시아에서는 슬라브주의와 서구주의로 6) 이정재, 민속아카이브와 문화정책, 한국민속학 40(한국민속학회, 2004), 67~107쪽. 7) 황수영/윤무병/이두현, 문화재 보존을 위한 연구, 학술원논문집(인문사회과학편) 41(대한민국학술원, 2002). 8) 이종철, 향토학의 위기에 따른 민속문화 보존, 향토사연구 제13/14합집(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 2002). 9) 이종철, 앞의 논문, 11쪽. 10) 정유진, 박정희 정부기 문화재정책과 민속신앙, 역사민속학 39(역사민속학회, 2013). 11) 강정원, 무형문화재 제도의 문제점과 개선책, 비교문화연구 8-1 (비교문화연구소, 2002), 147~148쪽. 이 논문에서 강정 원은 무형문화재 제도를 소극적인 보호책과 통제책이라고 표현하였다. 12) 클리포드 기어츠(문옥표 역), 문화의 해석 (까치, 1998), 284~293쪽. 나타나기도 하고, 독일에서는 낭만주의와 계몽주의라는 철학 사조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는 혈연 주의적 민족주의와 헌법에 기반한 시민주의라는 개념으로도 둔갑하기도 한다. 본고에서는 이를 경제적 발전과 서구 중심의 합리화를 중시하는 계몽주의적 근대화론과 경제적 발전과 인간적(민족적) 가치를 함께 중시하는 낭만주의적 근대화론을 대비시켜서 설명하고자 한다. 근대화론을 양쪽 모두에서 제외하지 못하는 것은 탈식민화된 국가에서 근대화하지 말자는 주장은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서민의 생활방식에 대한 탐구를 주업으로 하는 민속학자들도 근대화론 을 일방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계몽주의가 국가민족주의적인 모습을 띄면서 민속 정책에 투영되는 모습과 낭만주의적 민족주의가 민속정책에 반영되는 모습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와 함 께 민속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분석하고,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이데올로기인 민주주의가 민속 정책 에 투영되어야 하는 점에 대해서 검토해 볼 것이다. 해방 이후에 국가를 끌고 간 최고지도자나 그를 수반으로 한 정부의 정책과 제도를 본 연구의 대상으로 한다. 최고자도자의 생각을 살펴보기 위해서 취임사를 분석하고자 하며, 정부의 정책에 대 해서는 정부에서 발표한 다양한 자료를 1차 자료로 활용하고, 여러 선행 연구에서의 분석 결과도 함께 분석 자료로 사용하고자 한다. 민속 정책은 주로 문화관광부에서 집행되기 때문에 문화관광부 의 정책이 주된 대상이 되겠지만, 필요한 경우에는 교육이나 관광 정책도 함께 검토될 것이다. 3. 국가의 민속 이념 1) 이승만 정부 1948년에 출범하여 1960년까지의 민속 정책은 이승만 정부에 의해서 주도되었는데, 이승만 정부 정책의 이념을 파악하기 이전에 이승만 정부 이전의 정책을 주도한 미군정의 정책 이념에 대하여 간략하게나마 검토해 보고자 한다. 현재 존재하는 국립민속박물관과 간접적으로 연계가 되어 있는 국립민족박물관의 설립이 일제 강 점기 대표적인 민속학자 송석하의 주도로 1946년 미군정 치하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미군정이 한국의 민속에 대하여 일정한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고고학이나 미술사학 중심의 국립 박물관의 건립은 일제 강점기에 수집된 유물의 보존 차원에서 이해가 되는 부분이지만, 새롭게 건립 된 민속학 혹은 인류학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는 국립민족박물관의 건립은 미군정 정책의 어떤 차원 에서 이루어졌는지 명확하지는 않다. 전경수는 미군정에서 문화국의 책임자로 일하였던 Eugene I. Knezevich 대위가 박물관 창설에 지원을 하였다고만 밝히고 있다. 13) 본인은 미군정이 박물관 정책과 대학 교육 정책에 좀더 깊숙이 개입했다고 추정하는데, 당대에 민속학자로 인정을 받고 있던 송석하 13) 전경수, 한국인류학 백년 (일지사, 1999), 119쪽

11 국가와 민속-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가 특별한 이유없이 인류학자로 전환했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해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국립민족박물관의 창설이 미군정이 제시한 전통 민족 문화를 자유로운 민주주의 노선에 따라 보 존 발전시키도록 지원한다 14) 라는 미군정의 정책 목표에 일정부분 부합함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미군정의 경우 일제 강점기의 박물관 정책을 기본적으로 유지하는 위에서 담당자를 한국인으로 교 체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송석하의 개인적인 노력과 미국의 정책 목표가 맞물린 결과로 국립민족박 물관이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군정의 문화정책 목표 중에서 민주주의 노선에 따라 전통 민족문 화를 발전시킨다는 목표는 한국의 민속 정책에 관철된 바가 었었지만, 현재 한국의 민속 정책에 중 요한 의미를 가진다. 한국 정부의 민속 정책의 시금석이 될 국립민족박물관은 1949년에 대통령령에 따라 정식으로 국 가의 중요 박물관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1년 뒤에 전개된 6.25전쟁으로 인하여 국립박물관에 통합되 고 만다. 이승만 정부의 어떤 이념이 이러한 결과와 연관을 가지는지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 만, 이승만 대통령의 취임사를 통해 담론적 차원의 평가는 내릴 수 있다. 1848년 7월 24일에 행한 취임식에서 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취임사를 마무리한다: 부패한 백성으로 신성한 국가를 이루지 못하나니 이런 민족이 날로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행동으 로 구습을 버리고 샛길를 찾아서 날로 분발 전진하여야 지난 40년 동안 잊어버린 세월을 다시 회복해 서 세계문명국과 경쟁할 것이니 나의 사랑하는 3천만 남녀는 이날부터 더욱 분투용진해서 날로 새로 운 백성을 이룸으로써 새로운 국가를 만년반석 위에 세우기로 결심합시다.(강조는 필자) 15) 년에 행해진 3대 취임사에서도 경제 발전과 정치적 자유, 분단의 극복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 민속 에 대한 언급은 없다. 행정학이나 문화정책학계에서도 이승만 정부 시기에 특별한 문화정책은 없었 던 것으로 평가한다. 16) 전쟁의 피해 복구와 혼란으로 인하여 정부가 실질적인 문화정책을 추진할 수 없었다고 얘기되는데, 민속학의 입장에서 보면 이승만 정부는 민속 정책을 오히려 후퇴시켰다고 할 수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의 활동을 재개시키지 않음으로 인해서 민속 자료 수집과 민속 연구에 큰 차질을 빚었다. 이승만의 취임사에서 나타난 민속에 대한 계몽주의적 관점이 관철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2) 박정희 정부 박정희 정부 이전에 있었던 윤보선 대통령 시기는 본고에 큰 의미를 차지하지 않기 때문에 1961 년부터 1979년까지 정권을 유지하면서 한국 현대사와 국가의 민속 정책에서 중요한 박정희 정부의 이념을 파악해 보기로 한다. 근 20년에 걸치는 시기 동안 국가의 정책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현재 한국 국가가 펼치는 민속 정책의 골간을 구성한 시기라고 판단해도 무리가 없다. 1963년 12월 17일의 박정희 대통령 취임사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단군성조가 천혜의 이 강토 위 에 국기를 닦으신 지 반만년으로 시작하는 취임사는 대혁신운동을 강조한다. 정치적 자주나 경제적 자립, 사회적 융화와 안정을 목표로 대혁신운동을 추진함에 있어서 선행되어야 할 전제 조건으로 개개인의 정신적 혁명을 내세운다. 직접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승만의 취임사에서 우리는 국가주의와 계몽주의에 입각한 민속관을 볼 수가 있다. 위에서 예시 한 취임사에서 국민의 기존 생활방식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 생활 방식을 구습이라고 통칭하면서 국민들(평민들 혹은 백성들)에게 이를 폐기하기를 요구하는데, 이는 새로운 국가를 이루기 위함이라고 제시한다. 기존의 국가에서 더 나은 국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생활방식이 변경되어야 한다는 점을 계몽주의적이고 엘리트적 관점에서 요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승만의 민속 이념은 궁극적으로 민속에 대한 경시와 민속 정책의 부재로 연결된다. 민속을 국가 발전에 엘리트들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경우에만 취사 선택하는 정책적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1952년 전쟁 과정에서 발표된 2대 대통령 취임사에서는 민속 정책에 할애된 부분이 없으며, ) 안진이, 미군정의 문화정책과 시각문화, (서울대학교 대학원, 2006), 15쪽에서 재인용. 1946년 미군정은 SWNCC 176/23(민사행정에 관한 임시훈령) 제2편(문화) 9장에서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 점령의 총체적 목표 달성에 기여한다. b. 한국인들이 남한의 문화제도, 특히 교육제도에 있어서 과거에 강요되었던 일본식 민족주의의 영향을 제거하고, 자유롭고 쇄신된 교육제도를 확립하고, 전통 민족문화를 자유로운 민주주의 노선에 따라 보 존 발전시키도록 지원한다. c. 조건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인들이 국제 문화 기구 참여와 국제 문화 교류를 준비, 실행하 도록 돕는다. 이는 유엔의 의도와 목표에 부합하는 것이어야 한다. 15) 대통령기록관에서 취임사를 구하지 못한 관계로, 인터넷 상에서 구하였다. korean.go.kr 참조.... 우리는 먼저 개개인의 정신적 혁명을 전개하여야 하겠습니다. 국민은 한 개인으로부터 자주적 주체의식을 함양하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다는 자립 자조의 정신을 확고히 하고, 이 땅에 민주와 번영, 복지사회를 건설하기에 민족적 주체성과 국민의 자발적 적극참여의 의식, 그리고 강인 한 노력의 정신적 자세를 바로잡아야 하겠습니다...(강조는 필자) 국민이라는 표현을 박정희 대통령이 사용하여 일반 국민을 백성이나 평민이라고 지칭한 이승만 대통령보다 좀더 낮은 계몽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신혁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 면서 좀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계몽주의적 이념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의 일반 국민들의 민속은 혁명적으로 극복되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초반에 정신혁명을 주창한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사는 후 반에 가면 민속에 대해 상반된 태도를 보여주는데, 정신혁명을 주창함과 동시에 낭만주의적 관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16) 정갑영, 우리나라 문화정책의 이념에 관한 연구, 문화정책논총 (한국문화정책개발원, 1993), 91쪽

12 국가와 민속-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이 오욕된 반세기는 이 나라 사회의 전통적 미풍과 양속을 짓밟아 도의는 타락되고, 사상분렬과, 사치와 낭비... 속에 사회는.. 불안하며, 민심은 각박해지기만 했습니다. 이에 대혁신운동은 대중 사회 의 저변으로부터 사회적 淸 潮 운동의 새 물결을 이끌어 들여, 이 모든 오염과 악풍을 세척하고, 세대가 평화 속에 이루었던 전원적 향토를 되찾아 선린과 융화의 새 사회 건설을 촉진시킬 것입니다.(강조는 필자) 이 문장에서 보면, 당시의 민속은 이전의 전원적이고 목가적이었으며 상호 도덕적인 상태에서 벗 어나 타락한 상태에 도달한 것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판단하고 있다. 현재와 과거의 평화로웠던 민속 (전원적 향토)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키면서 이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황금시대에 도달하기 위해서 사 회적 청조 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신적 혁명의 도달해야 할 목표를 서구가 아니라 과거의 어떤 시대로 상정하고 있는 낭만주의적 민속관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이 취임사에서 만 나타날 뿐, 그 이후의 어떤 취임사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낭만주의적 이념은 서민들의 민속에서 이를 극복할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특정 시기에서 대상을 구하는 것에서 서구적 낭만주의와 차이점을 보여 준다. 제5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그는 지속적으로 질서와 타협을 강조하며, 조국의 경제적 근대화, 민생 문제의 해결에 강조점을 둔다. 박정희 대통령의 이상적 가치가 경제 발전에 주어져 있다는 점을 확 인할 수 있으며, 낭만주의적 민속관도 이에 복속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제6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는 좀더 명확하게 공업을 기반으로 한 경제발전이 국정 목표로 제시되었다. 이를 위하여 전근대적으 로 비합리적 요소를 추방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민속 전반이 이러한 이념의 잣대 속에서 폄하되었 다고는 보이지 않지만, 엘리트적인 잣대로 민속을 평가했고, 그 잣대의 기준이 합리성과 근대성이었 다는 점은 명확하다. 1971년에 행해진 제6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처음으로 전통과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킨다는 언급을 하고, 문화 한국의 중흥에 관심과 지원을 다 할 것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한다. 아울러 민속학의 주 영역인 일상에 대한 관심을 표하는데, 이를 가정과 직장과 사회를 연결하는 넓 은 생활 영역이라고 개념화하고 있다. 이 생활 영역에서 근대 시민의 생활 이념이 자리잡아야 한다 고 강조한다. 이 당시에 개념화한 전통과 문화의 계승에서 민속은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가. 일상 생활 방식을 민속이라고 개념 정의한 바 있는데, 이러한 기준으로 보았을 때, 근대성에 미치지 못하 는 민속은 여전히 계몽의 대상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근대 시민의 생활 방식은 근대성 에 기반한 민속, 즉 현존하지 않고 끊임없는 계몽 뒤에 다가 올 민속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강조한 전통과 문화가 당대의 민속도, 이전의 서민들의 생활 방식도 아님은 명확하다. 전통과 문화 는 품위가 있어야 하는데, 이 품위는 근대성과 합리성에 의해서 뒷받침되는 것이다. 1972년에 유신이라는 일련의 정치적 변화 뒤에 치루어진 제8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그는 전통 문 화를 창의적으로 계발하여 민족문화가 꽃피도록 하겠다고 천명하는데, 구체적인 안으로 문예중흥의 시책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1971년의 취임사와 큰 차별성을 보여 주지 않는다라고 할 수 있다. 여전 히 합리성과 근대성에 기반한 생활풍토를 강조하면서 발전론적 계몽주의를 보여준다. 박정희 정부가 국민들의 일상에 대한 기준을 합리성과 근대성에 두고 끊임없이 개입하고 계몽하 고자 하는 것은 1978년 제 9대 대통령 취임사에서도 변함이 없이 지속되고 있다. 여기에서도 정신 문화를 계발하고, 미풍을 살려야 하며, 격조높은 민족 문화를 꽃피워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에 서 잘 알 수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이어 내려온 계몽주의적 민속관은 대한민국 국가 엘리트 들의 이념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를 국가전체에 관철시킨 점에 이 시기의 큰 문제점이 있었다. 3) 전두환 정부와 노태우 정부 1980년대에 들어선 전두환 대통령은 1980년과 1981년 두 번에 걸쳐서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제11 대와 제12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먼저 1980년에 밝힌 취임사부터 검토해 보고자 한다. 제11대 취 임사에서는 국민정신을 개조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 교육혁신과 문화창달로 국민정신을 개 조하는 것을 4번째 국가지표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국가지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행해질 부분에 대 해 부연 설명한 것이 있다: 우리가 새시대를 여는데 있어서는 국민 개개인의 의식구조가 바뀌어야 하고 가치관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새 기치관이라고 결코 고답적인 개념이나 거창한 내용이 아닙니다. 규칙을 지키지 않고, 약속 을 어기고..., 등의 폐습을 우리 일상 생활 저변에서 하나씩 고쳐가려는 마음가짐 이것이 바로 새 가치관인 것입니다. 정부는 이러한 새 가치관이 우리 국민의식 속에 뿌리를 내려 정의로운 사회가 구현될 수 있도록 새마을 운동과 연계시켜 범국민적 사회정화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가겠습니 다.(강조는 필자) 전두환 정부는 지난 박정희 정부와 동일하게 국민들의 일상 세계에 지속적으로 개입해서 국민들 의 의식을 개조시키겠다는 전체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발상을 명확하게 드러내는데, 새 가치관의 준거를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지난 박정희 정부가 제시한 합리성과 근대성을 준거로 삶고 있 다고 생각된다. 전두환 정부는 문화발전이 필요하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문화가 문예를 의미하든, 민속을 의미하든 문화에 발전론적인 인식체계를 개입시키고 있다. 즉 여전히 계몽주의적이고 발전 론적인 국가 이념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볼 수 있다. 1981년에 밝히 제12대 취임사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국민들의 민속에 대하여 특별한 언급이 없이 문화창달에 대한 잠깐 언급할 뿐, 구체적인 사안은 11대 취임사로 돌리고 있다. 즉 1980년대 초중반 을 지배한 전두환 정부의 민속 이념은 여전히 계몽주의적이고 발전론적이었다. 제13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노태우 대통령의 경우, 국민들의 민속에 개입하겠다는 의지를 일체 피 력하지 않는 점이 같은 뿌리를 지닌 전두환 정부와 구분되는 점이다. 보통 사람들의 시대, 즉 민속을 22 23

13 국가와 민속-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중시하는 시대를 열겠다는 노태우 정부는 민족 자존을 내세운다. 민족 자존은 민족이 스스로를 존경 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전의 계몽주의적인 민족 의식 개조와 현격한 차이를 보여준다. 이러한 민 족 자존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고 밝히는 점에서도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국가 차원에서 민속에 대한 존중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경시하는 태도를 가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은 이 취임사에 서 알 수 있다. 4) 1990년대 정부 1990년대에는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였다.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김영삼 대통 령의 취임사를 보면, 정신적 패배주의를 언급하면서 행동양식과 의식을 개조해야 한다는 점을 적시 하는데, 이러한 차원에서는 오히려 국가주의적 민속 이념이 이 정부의 주된 이념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전두환 정부와 비교해서 구체적인 내용은 보이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발전론적이고 계몽주의 적인 민속 이념이 주된 것이라고 판단된다. 1998년에 행해진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사에는 전 정부와 비교해서 중요한 차이가 보이는데, 문화 산업에 대한 언급이다. 문화에 대한 경제주의적인 접근을 명확하게 한 것인데, 문화의 한 부분인 민속의 가치도 경제적 효용성 측면에서 접근하겠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민속이 민족 정체성 형성에 기여하는 부분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전에 경제적 가치에 따라 민속 가치가 매겨지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문화의 세계화를 이룬다는 점을 명시하면서 문예도 시장주의적 가 치에 따라 평가되기 시작한다. 5) 2000년대 정부 2000년대에 들어서서 대한민국은 세 명의 대통령을 선출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2003년에 취임하였는데, 취임사에서 앞선 취임사에서 흔히 나온 문화 정책이나 정신 혁명 등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민족이 가진 긍정적인 측면에 대한 찬사는 있어도 부정적인 면에 대한 지적과 이의 극복 이 필요하다는 식의 계몽주의적 접근은 보이지 않는다. 2008년의 이명박 대통령 취임사에는 민속 문화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우리나라는 오랜 역사를 가진 문화국가입니다. 최근 세계무대에서 주목받는 한류는 그런 전통과 맥이 닿아 있습니다. 전통문화의 현대화와 문화예술의 선진화가 함께 가야 경제적 풍요도 빛이 날 것입니다. 이제는 문화도 산업입니다. 콘텐츠 산업의 경쟁력을 높여 문화강국의 기반을 다져야 합니 다. 문화 수준이 높아지면 삶의 격조가 올라갑니다. 앞서서 1980년대 전두환 정부까지 보였던, 수준이라든가 선진화라는 개념이나 현대화, 산업이라 는 표현은 민속에 대한 발전론적이고 계몽주의적인 관점을 명확히 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하지만 정신혁명 등을 언급하면서 국가가 무리하게 민속에 개입한다는 점은 보이지 않으며, 시장을 통한 평가가 바람직하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2013년에 출범한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권위주의적이고 계몽주의적인 모습을 찾기는 어렵 다. 문화의 국력론이나 문화 융성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문예적인 차원에서의 콘텐츠화만을 강조할 뿐, 국민 개개인의 가치관이나 생활 방식에 대해 국가가 개입한다는 발상은 일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국민의 개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힘과의 비례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낭만주의적 민속관에 가 장 가깝게 다가가 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21세기는 문화가 국력인 시대입니다. 국민 개개인의 상상력이 콘텐츠가 되는 시대입니다. 지금 한류 문화가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기쁨과 행복을 주고 있고, 국민들에게 큰 자긍심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대한민국의 5천 년 유무형의 찬란한 문화유산과 정신문화의 바탕 위에서 이루 어진 것입니다. 새 정부에서는 우리 정신문화의 가치를 높이고, 사회 곳곳에 문화의 가치가 스며들게 하여, 국민 모두가 문화가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문화의 가치로 사회적 갈등을 치유 하고, 지역과 세대와 계층 간의 문화격차를 해소하고, 생활 속의 문화, 문화가 있는 복지, 문화로 더 행복한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위 취임사에서 문화가 국력이라는 표현과 문화가 있는 삶, 생활 속의 문화, 유무형의 문화유산 등에서 문화 개념이 문예와, 가치체계, 민속 등을 넘나들면서 혼란스럽게 사용되고 있는 것은 명확 하지만, 적어도 권위적이고 계몽주의적 민속 이념이 전제되어 있지는 않다는 점은 명확하다. 시장주 의적이기는 하지만 발전론적이지는 않고, 엘리트 중심이 아닌 일반 국민 개개인의 가치관이나 상상 력, 생활 방식에 대한 인정 등을 통해 낭만주의적이며 민주주의적인 민속 이념이 자리 잡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4. 국가의 민속 정책 민속은 크게 보았을 때, 광의로 정의된 문화의 일부분으로서 사람들의 생활문화와 그 표현체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국가의 문화 정책의 일부분으로서 문화 정책을 중심으로 검토하여도 큰 무리는 없다. 물론 민속의 교육이나 민속 연구 장려 정책 등은 교육부의 소관이며, 농촌 활성화 정책 등은 농림수산식품부의 소관이다. 본 장에서는 앞에서 밝힌 국가 민속 이념의 변화 과정을 염두에 두고, 이러한 이념의 실천과정에 대한 검토를 해 보도록 하겠다. 이념은 정책을 통하여 표현되고 실천되는 데, 실천의 결과에 대해서는 본장에서 검토하지 않는다. 본 장에서는 각 시기 별로 정책을 검토하기 보다는 정책 사안별로 변화과정을 이해하도록 하겠다. 이유는 각 정부의 문화 정책에서 민속과 직접 24 25

14 국가와 민속-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관련된 정책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민속 정책은 주로 민족문화창달과 연관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예산이 문화재청 예산이며, 실제 민속을 국가 주도로 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17) 본고 에서 주로 다룰 정책은 1960년대에 초석이 놓여진 정책들이며, 그 이후에 큰 변화가 없는 정책들이 라고 할 수 있다. 기존 정책은 민속의 수집과 연구 정책, 민속의 보호 정책, 민속 장려 정책으로 구분 할 수 있다. 1) 민속 수집 정책 현재 국가통계포털(kosis.kr)을 통해 수집되는 민속 관련 자료는 많지 않다. 국가통계포털은 국가 가 국가의 통치를 위해서 필요한 자료를 통계낸 것을 말하는데, 16개 국가 통계 항목에서 민속은 교육/문화/과학 항목 중에서도 문화 항목에 속한다고 볼 수 있지만, 민속과 관련된 항목은 국민여가 활동조사 항목과 문화재 관리 현황 항목, 관광 항목 정도라고 판단된다. 기관별 통계에서 문화체육 관광부에서 수집한 전통문화, 예술향유, 문화활동, 문화시설 이용, 문화관광 항목등도 민속과 관련된 통계라고 할 수 있다. 농촌진흥청의 농촌생활지표조사나 문화재청의 무형문화재 항목도 민속과 관 련된 국가 수집 자료이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은 농촌생활지표조사라고 할 수 있지만, 포함된 항목은 가족생활, 사 회복지, 인구 및 사회, 지역 개발 및 정보화 등으로서, 여기에도 민속학에서 관심을 가질 영역은 다 수 배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통계청에서 밝힌 국가통계기본원칙을 보면, 첫 번째 항목이 국가 통계는 공익적 가치를 가진 공공재로서 중립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라고 18) 되어 있는데, 민속 일반은 충분히 공익적 가치를 가진 공공재이며 중립성이 보장되어 있음에도 국가통계에 포함되어 있지 않 다. 이런 차원에서 국가의 민속 수집 정책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에 국가에서 민속 관련 항목을 포함시킨다면, 민속학자들이 민속의 수집을 위해서 시간을 덜 할애해도 될 것이다. 국가에서 민속 자료의 수집과 정리에 관심을 일체 표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철저하게 계몽주의적 이었던 이승만 정부에서는 민속 수집 정책이 시도되지 않았지만, 계몽주의적이고 엘리트 국가민족 주의적 민속관을 표방한 박정희 정부에 들어와서 대한민국 최초의 한국민속종합조사가 이루어진다. 1966년도에 장주근에 의해 구상이 된 한국민속종합조사 사업 19) 은 1968년도에 조사가 시작되어 1969년도에 1권이 출판된 이래 2011년도에 58권이 출판되고, 2011년도에 이를 정리하는 심포지 움 20) 을 끝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장주근이 직접 구상한 사업계획이 상향식으로 장관에게 보고되고, 계획안의 조직성을 높이 평가한 군출신의 장관에 의해 채택되어 시작되었던 관계로, 오랜 기간 수행 된 사업이기는 하지만, 여타 경제개발 계획처럼, 체계적인 계획 하에서 일사분란하게 수집/조사가 마무리되지 못하였다. 즉 이 조사는 전면적인 국가 주도의 조사라기보다는 체면치례 정도의 조사에 그쳤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규모는 민속문화가 늘 푸대접받고 있 21) 던 당시 상황과 밀접한 연관 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속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 국가가 행할 수 있는 정책 중에 가장 좋은 것은 자료 조사 기관의 상설화일 것이다. 이러한 상설 기관에 속하는 것은 박물관과 민속연구소인데, 국립민속박물관의 기초 가 놓인 것도 1965년 박정희 정권 때이고,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설치되어 있는 무형문화재연구실이 시작한 것도 1969년이 된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1960년대 중후반은 많지 않은 민속자료이기는 하지만, 민속자료를 수집하여 민속 연구가 조금씩 가능하게 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민속 도 민족 문화의 한 부분을 차지할 수 있다는 인식이 국가엘리트 내나 사회 속에서 조금씩 자리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박정희 정권 하에서는 계몽주의적인 민속 정책이 펼쳐지기는 했지만, 소멸하 는 민속을 구제하고, 민속을 민족문화의 조그만 영역으로 인정하려는 정책도 함께 펼쳐졌다. 민속의 모든 전승물들을 수집하고 정리하기 위해서는 국가 단위의 체계적인 계획이 필수적이지만 1960년부터 현재까지 수행된 민속 정책에는 그러한 계획성이나 조직성 등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 원인으로 민속이 가지는 가치나 의미, 기능 등을 각 기관들이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점과 각 기관 들을 조직할 체계 부족을 들 수 있다. 각 기관들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는 여러 계획이나 결과물을 책임지고 조직할 수 있는 기관을 설정하거나 새로운 위원회나 기관을 조직할 필요가 생긴다. 가령 민속 수집이나 정리를 위해서 만들어지는 민속지나 민속 통계, 민속 유물 편람 등을 통해서 정리된다. 민속지는 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민속박물관, 각 지방 박물관, 각각의 지역자치단체의 시사(민속지)편찬위원회 등을 통해서 출판되고 있지만, 이를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작업을 수행하는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민속 통계는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거의 수행되지 않으 며, 민속 유물도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되지 않고 있다. 이 모든 불합리한 점은 대한민국 국가엘리트 내에서 민속의 가치에 대한 충분한 인정이 수반되지 않은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민속 가치에 대한 폭넓은 사회적 합의가 존재한 다고 생각되지 않으며, 국가에서도 민속이 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정도에서 인정하는 정도이다. 좌파 이든 우파이든 엘리트 중심의 민족 문화론을 극복하고 국민의 대다수를 형성하는 서민 문화에 대한 논의가 사회와 국가에서 이루어질 때, 민속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와 연구가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2) 민속 보호 정책 17) 문화정책의 변화에 대해서는 박광무, 한국 문화정책의 변동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 청구논문, 2009) 참조. 18) 참조. 19) 장주근, 한국민속종합조사의 기획과 그 경위, 한국민속종합조사의 성과와 민속학사적 의미 (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민속 학회, 2011), 10~14쪽. 20) 2011년 9월 한국민속학회와 국립문화재연구소 공동 주최로 열렸으며, 총 11편의 정리하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대한민국이 대표적으로 수행한 민속 정책이 일부 민속에 대한 보호 정책이다. 1962년 1월 10일 법률 제961호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고 공포됨으로 해서 그 이전 시기에 주된 문화 행정의 대상이 21) 장주근, 앞의 논문, 10쪽

15 국가와 민속-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었던 유형문화재에 민속 자료와 무형문화재까지 포함되게 되었다. 이 법은 박정희 정권이 1961년 5 16 쿠데타로 성립한 이후인 1961년 10월 설치한 문화재관리국과 함께 박정희 정권이나 이후의 정권의 대표적인 민족 문화 정책으로 꼽힌다. 박정희 정권의 경우 쿠데타라는 절차로 탄생하였기 때문에, 자신들이 가지지 못한 절차상의 정통성을 이러한 국가민족주의적 정책을 통해 보상하는 차 원에서 수행하기도 했겠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문화 정책 중에서 세계에서 주목받는 대표적인 정책 이기도 하다.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수행되는 정책은 대표적인 규제 정책이고, 일부에 대해서는 보호 정책이 된 다. 이 민속 보호와 규제 정책이 가지는 장단점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논의되었다고 생각하기 때 문에 여기에서 이를 지속할 필요는 없다. 본고에서는 강조하는 것은 민속을 규제하면서 보호한다는 정책이 대한민국을 끌고 가고 있는 엘리트들과 국가의 민속관을 잘 보여준다는 점이다. 원형을 보존 하고 있다고 학계에서 인정된(?) 일부 문화재에 대해서 보호를 해 주지만, 국가에서 인정되지 않은 민속은 일체 정책의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문화재 보호 정책인 것이다. 문화재 보호법 내에 서도 민속은 일부가 무형문화재에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민속 자료(현재는 민속문화재)라 는 이름 하에 유형의 민속만 보호 대상이 되는 푸대접을 받았다. 일반 서민들의 생활 방식이나 그 표현물의 경우 계몽주의적 철폐 대상이었을 뿐, 국가에서는 장려는커녕 보호(?)의 장치도 베풀어주 는 데에 인색하였다. 이러한 국가의 민속 정책은 현재에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3) 민속 장려 정책 장주근이 지적한 것처럼 22), 1960년대에도 민속은 푸대접을 받았고, 국가 정책에서도 계장의 지원 하에 추진될 정도밖에 되질 못하였다. 이러한 국가의 계몽주의적 태도는 민속을 폐습으로 간주하였 고, 민속은 폐기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따라서 일상에서 민속을 국가가 장려하는 정책은 거의 존재하기 어려웠다. 민속 장려 정책에 속할 수 있는 정책은 1958년부터 시작된 전국민속경연대회 23) 였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대회였는데, 이승만 정권의 이념을 감안한다면, 예외적인 행사였다고 할 수 있다. 2회 대회는 2년을 건너뛰어서 1961년에 개최되었고,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 다. 1999년부터는 대회 명칭을 한국민속예술축제로 변경하여 시행하고 있는데, 각 시도별 대표가 참가하여 농악이나 민속극, 민요, 민속놀이, 민속무용의 5개 종목에서 경연을 벌인다. 지나친 경쟁을 막기 위하여 축제로 이름은 변경하였지만, 지역사회 주민들의 참여가 보장된 진정한 의미의 축제로 자리잡지는 못한 것으로 간주된다. 전국민속경연대회는 문화체육관광부와 개최 시도가 공동으로 주최를 하는데, 현재까지 이를 통하 여 중요무형문화제 36종과 시도무형문화재 103종 등 139종을 무형문화재로 지정시키는 역할을 하 였다. 이 경연대회를 통하여 그 당시까지 소멸된 것으로 간주된 다양한 놀이나 예술이 복원되었고, 문화재로 지정을 받음으로 인하여 현재까지 소멸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당시의 대표적인 민속학자들이 깊이 개입하였는데, 이를 복원 민속학이라 고도 할 수 있고, 한편에서 이야기하듯이 민속주의 민속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민속 장려 정책이 완전히 불필요한 것이었고, 당시의 민속학자들이 모두 가짜민속을 양산 해내었다고 일방적으로 비판하기는 어렵다. 장주근의 회상처럼 민속을 일방적으로 폐기대상이라고 간주하는 상황에서, 민속에서 민족 문화의 자양분을 발견하고 이를 구제하고 체계화시킬 시민사회 가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국가가 이러한 최소한의 지원을 하지 않았다며 현재 한국 민족 문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민속 문화는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시도한 최소 한의 민속 정책이 문제가 될 수는 있지만, 당시의 정책 방향이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두현의 말처럼 24) 민속이 모국어와 더불어 민족 정체성의 핵심을 이룬다고 할 때, 민속에 대한 정책은 더욱 적극적이었어야 한다는 점에서 문제점을 찾아야 하지, 국가가 최소한의 영역에서 개입했다는 점을 비판하는 것은 곤란하다. 5. 현대 국가와 민속 현대에 들어서서 국가는 단순히 경찰국가로서의 기능만을 수행하지는 않는다. 경제정책이 국가의 경제발전에 큰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바가 있다. 사회복지부분이나 여성부분, 국가인프 라부분 등 국가가 국민들의 세금을 거두어서 수행해내는 수많은 긍정적 역할이 있다. 민속에 있어서 도 국가는 일정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 국가는 일체 관여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가? 이때까지 의 한국 국가가 민속에 대해서 가진 이념과 정책을 기반으로 이에 대해서 논해 보고자 한다. 현재까지 한국에서 국가는 모든 국민들의 일정한 의무를 수행하고 권리를 행사하는 민주국가의 국체를 유지해 왔지만, 국가가 이들 국민들의 개별 정체성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는 민속에 대해서 충분히 거리를 유지하거나 적절한 개입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현대 한국은 주권재민의 원칙 하에 움직이며, 모든 국민들의 개인 생활은 보호를 받아야 할 원칙이 있다. 몇몇 영웅에 의해서 움직 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는 기록을 통해서 국가의 역사를 기억할 의무를 지니고 있는데, 기억되어야 할 역사는 민주주 의의 원칙에 따라야 할 필요가 있다. 25) 영웅이나 엘리트만이 아니라 민주 공화국을 건설하는 데에 기여한 모든 국민들의 역사가 기록되어야 한다. 이러한 정신을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국가는 미국 22) 장주근, 앞의 논문, 12~14쪽. 23) 참조. 24) 이두현, 문화재 보존을 위한 연구, 학술원논문집(인문사회과학편) 41(학술원, 2002), 45쪽. 25) 미군정기의 문화 정책의 목표에 민주주의적 원칙이 제시되어 있다. 배관표 이민아, 앞의 논문 참조

16 국가와 민속-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이다. 한국의 민속학계에서 주로 일본이나 독일을 주목하고 있지만, 미국은민속을 기록하고 이를 연 구하는 역사는 세계 여느 국가보다 길고 체계적이다. 미국은 민속학의 원산지 중의 하나인 핀란드나 아일랜드보다는 늦지만 1976년에 법을 제정하고 The American Folklife Center를 건립한 바 있다. 26) 이 미국민속센터는 미국이라는 국가공동체를 건설하고 있는 미국민들에게 미국이라는 국가가 보 내는 최소한의 선물이라고 생각된다. 한 국가가 몇몇 영웅이 아니라 수많은 개개인들의 삶과 노력을 통해서 유지된다는 점을 잘 인식한 결과인 것이다. 또한 다양한 집단들의 민속이 미국 민속 문화를 구성하며, 이는 미국 문화의 아름다움으로 연결된다는 미국인들의 인식이 이에 반영되어 있다. 이러 한 민속 정책은 모든 현대 국가의 귀감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민주주의 원칙이야말로 현대 국 가가 취하여야 할 민속 정책의 출발점이 된다. 국가가 주권자들에게 시혜를 베풀고 가르치기 위해서 민속을 수집하고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들에게 행하는 최소한의 의무를 행하는 것이다. 독일의 경우에는 이러한 기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속지도를 만들고, 민요 아카이브를 구축하 고, 각 지역별로 민속기록소를 만들어서 지역별 민속을 체계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27) 국가가 주도 를 하여 민속 자료를 정리하고 수집을 한 독일과 달리, 시민 사회가 일찍 발달한 영국의 경우에는 1895년에 시작된 National Trust 시민운동이 민속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정리하는 것을 볼 수 있 다. 28) 국가보다는 시민 사회가 주도하여 민속 자료를 수집하였고, 그 소유 관계에 대한 법을 국가에 서 제정하여 이를 뒷받침하는 방식이다. 국가가 주도를 하든, 시민 사회가 주도를 하든, 서구나 미국 의 경우에 국가 권력의 원천인 국민들의 민속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수집하고 정리하며 체계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럽의 작은 나라이면서 식민지였던 아일랜드나 핀란드의 경우에 이러한 노력은 가히 전국가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29) 서구 국가의 경우 30) 민속의 수집과 정리, 연구에 근대성이나 합리성이 잣대가 아니며 오히려 그 자체가 가지는 가치에 대한 인정이 궁극적인 잣대였음을 알 수 있다. 민속 그 자체가 가치를 가지며, 이를 정리하는 목표는 그 가치를 가진 민속 주체를 인정하고 그들이 국가를 건설하는 데에 들인 노 고에 대하여 높이 받들고 기억하기 위함이다. 사람이 경제적 합리성만으로 살지 못하는 민속인 (Homo Folkloricus)라는 점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한 것이다. 국가가 주도하여 이렇게 긍정적인 민속 담론을 형성하는 것은 국민들의 긍정적인 정체성 형성에 도 큰 기여를 하게 된다. 한국 국가는 이런 점에서 본다면, 박근혜 정부의 취임사에서 상당부분 극복 한 모습은 보이지만, 여전히 계몽주의적이고 서구중심적인 민속관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된다. 따라 서 한국 사회 전체로 본다면 여전히 민속에 대한 부정적인 민속 이념이 지배적이라고 할 수 있다. 26) 강정원, 한국민속종합조사의 민속학사적 의의, 한국민속종합조사의 성과와 민속학사적 의미 (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민 속학회, 2011), 340~343쪽. 27) 강정원, 위의 논문, 333~339쪽. 28) 참조. 한국에서도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이 시작되었지만, 영국에 비해서는 많이 못 미친다. 29) 이두현, 앞의 논문, 384~385쪽. 30) 이는 본인의 생각이며, 다양한 정치 세력에 의한 민속의 도구화 또한 발견할 수가 있다. 이와 관련된 다양한 논의에 대해서는 Felix Oinas, Folklore, Nationalism, And Politics, 1978, Colombus. 시민 사회가 충분히 성숙해서 이를 극복해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를 주도할 수 있는 주체는 지 식인 집단과 국가라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한국과 같은 상황에서는 국가가 좀더 많을 일을 할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하지만, 이것은 다양한 차원에서의 노력이 경주될 때만 가능할 것이다. 이러 한 노력을 통해 국가가 민속의 가치를 그 자체로 인식하였을 때,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민속 에 대한 기록과 정리를 담당하는 중요한 두 기관, 국립민속박물관의 위상 강화와 국립민속센터 31) 의 건립일 것이다. 유형 자료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수집하고 정리하며, 무형자료의 경우 국립민속센 터에서 수집하고 정리하면 된다. 한국의 경우 박물관 지형에서 보면 여전히 민주주의적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권위주의적 국가주 의적 원칙이 관철이 되고 있다. 박물관의 전시내용을 일체 드러내지 않는 국립중앙박물관의 명칭부 터 국립역사박물관으로 바뀌어야 한다. 소장품 중에서 전통미술과 관련된 것은 국립미술관으로 옮 겨야 한다. 이와 동급의 박물관으로 국립민속박물관을 새롭게 세우고, 야외민속박물관도 더 늦기 전 에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박물관 개혁을 통하여 국가와 엘리트 중심의 역사와 서민 중심의 역사가 서로 맞물리면서 화해할 길이 열리게 되고, 국가에서 강조하는 민족역사가 새롭게 탄생하게 될 것이다. 아울러 무형의 민속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국립민속센터 혹은 국립민속자료보관소가 새롭게 건립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을 건립하고 지탱하며 향후 발전을 보장할 국민들의 일상 생활을 밑에서 위로 의 방식으로 수집하고 정리할 중심 기관, 국립민속센터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생활 방식의 다양성 과 동질성이 확보가 되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원칙에 걸맞게 문화재청의 관할 사업인 문화재에 속하 는 민속문화재에 유형만이 아니라 무형의 민속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대한민국 건국을 기념 하는 민속지와 민속지도 작성작업이 거행되어서 기존의 민속종합조사를 뛰어넘는 대한민국 위상에 걸맞는 대한민국 민속지가 탄생하기를 기대해 본다. 6. 요약과 결론 민속학계에서는 주로 문화재 정책을 위주로 다루어 왔지만, 민속 정책 전반에 대한 검토를 수행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특히 대한민국 65년 동안 이루어진 대통령으로 대변되는 국가 엘리트들의 민속 이념을 분석한 경우는 더더욱 적었다. 이는 권력에 대한 견제와 비판을 통해 휴머니즘을 구현하는 민속학으로서 보완해야 할 측면이었다. 국가의 민속 정책에 대한 연구는 역사상 국가는 항상 중요한 민속 주체라는 측면에서도 반드시 행해져야 할 민속학적 주제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본고에서처럼 광범위한 정책을 다루는 것이 생각보다 용이한 연구 과제는 아니었다. 정책의 범위 31) 이를 이두현은 국립민속자료보관소라 하였고, 이종철은 한국민속자료보존소라고 표현하였고, 이정재는 국립민속아카이브로 표현하였다. 이두현, 앞의 논문, 385쪽 참조; 이종철, 향토학의 위기에 따른 민속문화 보존, 향토사연구 (한국향토사연구 전국협의회, 2002), 12쪽 참조; 이정재, 앞의 논문 참조

17 국가와 민속-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도 광범위하고 시기도 길었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대통령 취임사라는 구체적인 데이터를 두고 분 석을 시도한 부분에서는 만족하지만, 구체적인 정책을 사안별로 다루지 못한 점에서는 여전히 미흡 하다. 분석 결과 이승만 정권 시기는 민속 정책의 암흑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속에 대한 몰이 해와 계몽주의적 태도로 인하여 기존에 존재하던 민속 기관(국립민족박물관)도 폐지할 지경에 이르 렀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야 대한민국에도 민속 정책이 생겨나고 실행되었지만, 여전히 계몽주의 적 정권 하에서 최소한으로 시행된 민속 정책의 폭은 협소했다. 실제로는 국가주의임에도 민족주의 를 표방한 정권에서 시행한 민속 정책은 선별 구제였으며, 구제되지 않은 민속은 폐기되었다. 1980년대 초반에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정권에서 추진한 방식을 큰 변화없이 적용시켰고, 국민들의 일상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정책을 추진하였고 엘리트 중심의 민족 문화 틀에 적용되는 민 속만 구제하였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에 들어서면서 국가가 서민들의 민속을 간섭하고 계도하고자 하는 시도는 없어졌고, 점차 이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변경된다. 하지만 문민정권이라는 김영삼 정권 이후부터는 근대성과 합리성 및 고급 미학적 기준을 시장주 의적, 경제적 효용성 기준을 민속에 갖다 대었고, 이는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 이명박 정권에 거치면서 점차 강화되었다. 민속 정책도 경제 정책의 하나로 취급되었다. 현 박근혜 정권의 취임사 에서는 민속의 가치를 사용가치 그 자체로 인정하려는 시도가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 정책으로의 연결은 미지수이다. 민속은 국민들의 생활방식과 그 표현방식으로서 이에 대한 전폭적인 인정과 지지를 국가에서는 표방해야 하며, 이를 통해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보답을 해야 한다. 이러한 정책을 실천으로 옮긴 국가는 미국으로서 미국 의회도서관 내에 설치된 American Folklife Center가 좋은 예가 된다. 미국 이나 영국 등보다 시민 사회가 충분히 성숙되지 않고 국가가 많은 일을 수행하는 한국에서 국가가 민속기록보존소 혹은 민속 아카이브를 설치하고 민속박물관과 역사박물관을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 은 당연한 국가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헌법에서도 명기하고 있듯이 국가는 한국에서 올바른 민족 문화의 전통을 수립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민속 정책이 이를 실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아울러 다양한 문화 경제 행위의 기초 자료로서 수집된 민속 자료는 기능할 것이며, 자료와 어떤 관계라도 맺은 국민들은 국가 민족 공동체와 깊은 공동체 유대 의식을 가지게 될 것이다. 국가와 민속-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에 대한 토론문 이상현 안동대 본 글은 민속과 관련된 국가 정책의 특징과 문제점을 분석하기 위하여 작성되었다. 이를 위하여 발표자는 본 주제와 관련된 선행 연구를 검토하고 다음으로 국가 정책과 민속정책의 상관성을 살펴 보기 위하여 대통령 취임사에서 함축되어진 민속 정책의 방향과 배경을 분석하였다. 다음으로 구체 적 사례를 통해서 국가의 민속 정책의 특성을 알아보기 위하여 기존 민속 정책을 민속 수집 정책, 민속 보호 정책, 민속 장려 정책 등 기존 정책을 세 유형으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마지막으로 정부의 민속 정책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다. 본 연구는 발표자가 직접 언급한 것처럼 국가 정책과 민속 정책을 거시적으로 다른 드문 연구이 다. 더구나 한국의 많은 민속학자들이 정부의 문화 정책과 직간접으로 참여하고 있어 이러한 논의는 한국민속학의 과거와 현재를 되집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다고 판단된다. 본 토론자는 문화정책에 관여하거 이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글을 쓴 적은 없어 토론하는 데 일정 부분 한계가 있다는 점을 먼저 밝힌다. 다만 안동의 민속이 국가의 민속 정책에 의하여 발굴되고 활용되는 배경과 과정 혹은 안동문화원과 안동 민속의 창출 과정에 관한 글을 쓰면서 본 발표문의 주제인 국가의 문화 정책과 민속에 대해서 고민한 적은 있다. 기존 토론자의 연구를 바탕으로 몇 가지 궁금한 점 그리고 본 연구에서 추가할 점에 대하여 논의 하고자 한다. 먼저 대통령의 취임사를 연구 대상으로 선정한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 아마 민속 이념 을 통시적으로 알아보기 위하여 취임사를 분석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민속에 대해서 민속학자 이외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으며 또한 이를 정책에 활용하는 데 대통령 을 비롯한 정치권 혹은 문화정책 전문가들도 그리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발표자는 10쪽 각주 17번에 제시한 것처럼 실제 민속을 국가 주도로 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라고 제시하면서 제왕적 대통령 체제인 한국에서 대통령 취임사와 민속 이념 그리고 정 책을 연계하는 논지 전개 방식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다음으로 민속에 관한 발표자에 대한 생각이 한 논문에서 다양하게 이해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대통령 취임사에서 주로 전통문화 정책을 발표자는 민속의 범주에 넣어 분석하였으나 참고문헌은 각주로 대체함. 국가의 민속 정책에서는 민속을 광의의 의미로 생활문화로 간주하고 있다. 더구나 민속 정책 중에 민속 수집, 보호, 장려 정책에는 민속예술, 민속놀이, 민간신앙, 구비문학 등 전통적인 민속과 관련된 정책의 특징과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다. 민속을 다양하게 이해하고 논지를 전개할 경우에 발표자의 생각과 요구가 객관적으로 전달되기 어려운 점이 있다

18 국가와 민속-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마지막으로 발표자는 우리나라의 기존 민속정책을 대부분 비판적으로 기술하면서 외국의 우수 사 례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논지 전개는 우리나라의 민속 정책이 발전을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생 각된다. 다만 특정 정책을 비판과 더불어 이해하려는 관점도 동시에 제시되어야 체계적인 문제점 검토와 올바른 방향 설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본 발표문 10쪽에 민속이 국가 통계에 포함되지 않는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 라고 비판 했는데 그럼 왜 국가통계에서 제외되었는지에 대한 이유 그리고 만일 국가통계에서 민속에 관한 조 사가 포함된다면 민속에 어떤 부분을 조사하여 통계에 포함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동일한 이해의 필요성은 외국 제도의 도입에 관한 논의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본 논의에 서 미국민속센터를 현대 국가의 귀감이 된다고 생각한다 라고 강조하였는데, 아마 다민족 국가인 미국에서 각 민족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민속센터는 당연히 중요 기관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와 더불어 본 글에서 제시된 독일의 민속아카이브는 현재 거의 운영되고 있지 않고 도리어 생활사아카이브, 영상아카이브, 대중음악 아카이브가 민속학자들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다. 따라서 다른 국가에서 운영되는 민속과 관련된 기관 혹은 정책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배경과 과정이 먼저 제시되어야, 우리나라 민속 정책의 방향에 활용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판단된다. 국가와 민속-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에 대한 토론문 김정하 한국해양대 우선 다루기 어려운 테마를 맡아주신 발표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항용 지식인에게 요구되는 것이 권력에 대한 비판자의 소임 이라지만 국가와 민속 의 관계야말로 가장 다루기 어려운 과제다. 특히 외세의 억압으로 시작된 근대기에 태동하는 과정부터 권력과 연구자의 주체적 태도 사이에 논쟁의 불씨를 안고 태어나 오늘에 이른 민속학은 더욱 그렇다고 본다. 해방으로 근대민족국가가 태어난 뒤에도 위정자들은 걸핏하면 봉건군주나 식민 통치자를 연상케 하는 태도로 민속을 남용하고 동원 하면서도 정작 민속은 홀대하였으며 민속학의 발전에도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그런 가운데 발표자는 국가를 비판대상으로만 보고 경원이지( 敬 遠 而 之 ) 하거나 민속을 보호하라 는 주문을 정언명제로 내세우지 않고, 국가와 함께 민속을 수집하고 보호하고 장려할 수 있는 방법 을 찾고자 고민했다. 그 고민에 대한 존중의 표시로 발표에서의 개념과 방법론을 중심으로 몇 가지 초보적 질문을 드리고 싶다. 1. 발표자는 계몽주의적 근대화론 과 낭만주의적 근대화론 의 대비를 주요 방법론으로 삼고 있 다. 계몽주의적 근대화론 은 억압 혹은 규제 에, 낭만주의적 근대화론 은 보호와 장려 에 기울기 쉽다. 하지만 민속이 국가시책의 일부가 된 근대국가에서 보호와 장려 와 억압 혹은 규제 는 흔히 혼동 되기 일쑤고, 또 그 혼동이 당연시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보호와 장려 의 목적인 국민정체성 강화는 억압 혹은 규제 의 목적인 경제 발전과 동전의 앞뒷면을 이루면서 서로 배타적이면서도 실제로는 상호 협력하기도 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본질주의 / 시대주의, 슬라브주의 / 서구주 의, 낭만주의 / 계몽주의 역시 대립적인 듯 하면서도 일방에 타방이 의존하는 관계가 될 수 있다. 이는 마치 메이지시대 일본에서 다회( 茶 會 ) 와 소고기 시식회( 施 食 會 ) 가 동시에 벌어지고, 1970년 대 말 한국에서 민족주의 와 민주주의 가 동시에 추구된 것과 같다. 그런 협조와 공존에도 불구하고 종국적인 비중은 표준어 사용, 청결, 시간 준수, 근로시간 증대 등 근대국가의 목적을 추구하는 계몽주의적 근대화 으로 기울게 마련이었다. 그렇다면 근대국가에 대한 설명에서 계몽주의적 근대화론 과 낭만주의적 근대화론 을 대비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한 방법론이 아니었나 싶은데, 그 양자 관계를 다시 설정하거나 이를 다른 방법론으로 대치할 수는 없 는지에 대한 발표자의 생각을 알고 싶다

19 국가와 민속-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2. 민속정책 이란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면, 문화정책 이란 말과 달리, 민속 과 정책 은 함께 이어서 쓰기 어려운 개념이 아닌가 싶다. 고대 중국에서라면 약탈결혼을 방지하고자 관청이 가마를 빌려주면서 민속으로서의 결혼절차를 자리 잡게 했다. 그러나 근대국가는 구정( 舊 正 )을 규제해 국가 인력을 동원하는 예처럼 정책을 통해야 위민( 爲 民 )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근대국가의 정책 에서는 국가의 개입이 과도하면 국민에 대한 배려가 약해지고, 반대로 국민에 대한 배려만 강조되면 국가의 개입이 부당하게 여겨진다. 민속으로서는 국가의 정책과 맞물리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하는 것이 타고난 숙명이 아닌가 싶다. 발표자는 이를 해결할 방안을 역대 정권의 문화정책과 정부의 지원을 받은 민속조사 내지 연구 사례 및 그 성과에서 참고 있다. 그런데, 후기근대사회로 접어든 시점에서 사회분위기는 차차 국가 의 개입 이나 국가의 의무 보다 시장의 자본주의적 원리와 대중의 자유로운 선택과 감각에 좌우되 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유. 무형의 정부재산도 점차 민영화되고, 축제를 비롯한 민속의 향배에 대해 서도 관의 일방적 의지가 실린 정책 보다는 민과 관의 합의운영[governance]을 모색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부가 여전히 민속정책 의 주도권을 쥐고 이를 강화하는 것이 국가와 민속의 관계 개선에 유리할 것인지, 아니면 시장의 원리와 대중의 선택에 맡겨두는 것이 나을지, 혹은 또 다른 제3의 길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지를 발표자에게 묻고 싶다.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와 민속 사이에 박물관 개혁 을 설정하면 모든 문제가 해소된다는 것인지 의 문이다. 그 역시 민속 자체보다 박물관 민속학, 혹은 박물관 정책 이나 박물관 운영론 을 주장하 는 것이 아닌지 묻고 싶다. 만약 누군가 그것이 박물관을 매개로 국민을 회수하는 방법이라 비판한 다면 발표자는 어떻게 대답할지 궁금하다. 다소 외람되지만, 그런 단선적 대안보다 온전히 대중을 주체로 삼은 아카이브 구축 과 국가적 사업으로서의 박물관 전시 를 동시에 진행한다든가(이정재, 2004), 국가와 서민이 함께 지향해야 할 민속의 목표를 정해놓고 공동으로 노력하는 방향을 제시하 는 방법(나경수, 2004)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듣고 싶다. 질문을 다시 요약하면, 이 연구가 국가와 민속의 관계에서 무엇을, 어떻게 찾으려는 것인지 묻고 싶다. 국가와의 관계를 분석하다 도리어 국가주의에 함몰되는 위험은 없는지, 국가의 문화정책을 바 로잡아 민속의 진정성을 드러낼 능력이 민속학자에게만 있다고 믿는 것인지, 이에 대한 발표자의 고견을 듣고 싶다. 3. 발표자는 국가의 개입 여부를 간취( 看 取 )하고자 대통령의 취임사에 대한 분석을 시도했다. 국가나 정치인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던 1990년대에 현 정권의 모순은 민( 民 )의 반동에 의해 해결됐고, 그 심판의 결과는 다음 정권의 출범 내지 그 취임사에 반영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 서 취임사를 통해 정권이 변화하는 맥락을 짚는 일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 취임사는 민속이념 만 담은 게 아니라 정권의 이데올로기 와 시대정신 등을 포괄하 여 새로운 정부의 국정지표를 밝힌 내용이 주였다. 그러면서도 취임사는 역대 어느 정권도 그에 담 았던 보랏빛 청사진을 구현해낸 예가 드문 의식용 연설문 으로서 자못 진정성이 의심스러운 수사 ( 修 辭 )에 머물고 만 예가 많았다. 혹여 그로부터 모종의 진정성을 찾아냈다고 하더라도, 민속에 대한 국가의 자세를 문제 삼다 보니 도리어 국가주의에 함몰될 위험성은 없는지, 발표자에게 묻고 싶다. 4. 결국 문제는 국가가 구사하고 동원하는 엘리트적 이성이 그와 대비되는 서민의 단순하고 무지 하며 소박한 의식과 소망이 담긴 민속을 얼마나 포용할 수 있느냐이다. 발표자는 박물관 개혁 의 예를 들어 국가와 엘리트 중심의 역사와 서민 중심의 역사가 서로 맞물리면서 화해할 길 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1960년대에 시작된 민속조사만 해도 조사 란 말이 풍기는 관( 官 ) 주도형 뉘앙스, 민속학 내지 인류학 전문가에 의한 조사과정에 문제가 적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정책적으로 추진된 1970년 대 전국민속예술종합경연대회 나 무형문화재 제도 역시 국가에 의해 동원된 민속으로서의 문제를 36 37

20 민속 관련 문화창출에 대한 민속학자의 역할 2013 한국민속학자대회 민속 관련 문화창출에 대한 민속학자의 역할 -대구광역시의 부정적인 사례를 중심으로- 박흥주 경희대학교 목차 1. 들어가며 2. 원형론 의 적용 실태와 무형문화재 3. 문화재위원의 자질과 전문성 문제 4. 마무리를 대신하여 1. 들어가며 다음의 인용문들은 민속학자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1 지도교수라고 왔는데 그렇게 무식한 말을 했다 고 하데예. 김천 빗내농악은 진도 양북춤처럼 양북을 칩니다. 그런데 그 교수님이 반자반(엎어배기)이 멋있으니 그렇게 바꾸라고 했답니다. 그 교수님이 대구날뫼북춤은 잘 아시거든예. 대구날뫼북춤의 북놀이처럼 바꾸라는 거지예. 1) 2 공부하는 교수님들을 존경했는데 자기가 12가지(전공분야)를 다 최고로 생각하면서 멋을 부 리고 다니는 걸 보고 그래서 문화재를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 습니다. 그래서 옆에서 적극 권했습니다. 공부하시고 학위도 받으시라고. 2) 1) 제보자 : 배 (남, 농악인), 조사일 : , 조사방법 : 직접면담인터뷰, 조사장소 : 대구 2) 제보자 : 박 (남, 시조동호인), 조사일 : , 조사방법 : 전화인터뷰 39

21 민속 관련 문화창출에 대한 민속학자의 역할 3 평생을 농악만 치고 사물놀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사물놀이를) 치지 말라고 하니 답답합니다. 교수들이 옳게 모르면서 심사보고 있어요. 교수들 지그 마음대로예요. 교수들이 주는 전통은 무슨 의미로 주는지 모르겠어요. 지정해놓으면 없어진다카이. (사람들이) 안친다. 3) 더 심각한 것은 문화재지정 과정에서 돈거래가 암묵적으로 자행되고 있다는 소문들이다. 이 이야 기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 집 한 채가 오고간 사실마저 있었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현재 지방 문화재의 경우 3,000~5,000만원이 필요하다는 말들이 돌고 있다. 4 모심기를 하는데 박자가 한 개도 안 맞는다 캐요. 박자가 안 맞을 수밖에요. 모심기할 때는 박자가 절대 맞을 수가 없습니다. 일하며 박자 맞추는 소리는요 물 풀 때 하는 소리하고, 도리깨질 같은 거밖에 없어요. 그 사람들이 모를 심어봤심니꺼? 문화재위원 자격을 가질려면요 직접 그 현장에 가서 들아보고 배와봐야되요. 그냥 무대뽀로 가가지고요 한 두 사람의 말만 듣고 판단하면 안되요. 4) 5 실태조사라카면서 나와 갔고 물의를 일으켰지. 교수와 교수 둘이가 왔는데, 서너 달 됐나. 왔시며는 위원이라카는 사람들은 항상 그렇기든, 우리를 어떻게 하면 전승을 잘 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기 위원이지 어디 취소시키고, 깨부시고, 안 시키고, 허는 기 위원이 아니거든. 지금 그 사람들 오면, 우월감이 딱 있어가지고 와가지고는 마 티껄이 없나? 이거 보는 기 겉애. 이래서는 안 돼. 문화재라꼬 지정해줬이면, 전승을 잘 할 수 있으려면 요거는 이렇게 하는 기 안좋겠나 이래야 되는데, 그기 아니고 5) 6 힘 없는 사람, 글 짧고, 빽 없고 이런 사람들은 (문화재)지정이 안 됩니다. 나 같은 사람들은 말이라도 할 수 있지만 그분들을 보면 참 안타까워요.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심사를) 해야 하는데 안목이 없는 사람들이, 그것도 해당 사항(전공분야)이 없는 사람이 말이 안 됩니다. 6) 주로 문화재지정과 관련하여 파생되는 생생한 증언들이다. 모두 문제점에 대한 강한 인식과 안타 까움을 토로하고 있다. 학자들에 대한 강한 불신과 멸시가 깊게 각인돼 있음이 드러난다. 이해 당사 자들 간에 생길 수 있는 감정상의 문제제기와 불만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4번은 대학에서 10여년 이상 강의를 한 경력소유자이며, 5번은 지방문화재의 현역 예능보유자의 이야기이고, 4번은 문화재위원으로서의 활동 경력도 갖고 있는 현역 대학교수이기 때문이다. 7) 자 신들이 그 현장을 직접 경험한 사실에 바탕을 두고 나온 문제의식이라는 점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위의 내용들은 학자의 전문성과 공정성의 문제로 집약되고 있다. 그 사실여부에 대한 확인 작업과 돈 써야 한다는 말이 있었지만 전 안 썼습니다. 위의 말은 대구광역시에 문화재신청을 했다가 부결판정을 통보받았던 분의 이야기이다. 이런 류 의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돌고 있다. 실기만 잘하면 됐지 누구하고 친해야 하며, 누구 눈치를 봐야 하는가? 는 불만과 문제의식도 상당부분 이 사안의 연장선에서 파악해야할 성질의 것이다. 만약 돈 거래와 친분관계의 온도 차에 의해 문화재지정이 불공정하게 이뤄지고 있다면, 학문적인 차원에서 의 문제점 지적은 무의미해질 수 있다. 기존 제도의 허점 이용과 사실의 왜곡도 교묘하게 이뤄질 수 있어서다. 결국 학자로서의 자존심과 양심의 문제로 귀결될 사안이다. 위에서 제기되는 학자들은 전통문화와 관련된 학문분야의 학자들이며, 민속학 영역의 학자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을 중시할 수 밖에 없다. 재삼 언급하지만 위 사례들은 문화재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영역의 이야기들이다. 따라서 소수 학 자들의 문제, 특수한 영역에서의 문제점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문화재 관련 사안에 대한 문제의식은 해방이후 대한민국의 전통문화 란 전체 영역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그 영향력이란 측면 을 고려하여 볼 때 매우 중요하다. 1958년 전국민속경연대회(현 한국민속예술축제)가 도입되고 8), 이 대회에서 입상을 한 종목과 단체들이 1962년부터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궤적을 걸어왔기 때 문이다. 이 시스템은 전통문화에 대한 한국사회의 재인식과 더불어 전통문화의 계승발전 이라는 시대적 요구와 담론에 구체적으로 조응하는 국가 차원의 사업에서 그 핵심영역을 차지해왔다. 이에 근거한 권위 획득과 더불어 그 영향력은 심대했다 할 것이다. 이는 국가가 제정한 법률에 근거하여 창설됐 기 때문이다. 문화재 보호법에 따라 국가가 문화재 위원회의 자문을 거쳐서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보호 대상으로 삼은 무형문화재 9) 였다. 암묵적인 관행이 아니라 국가가 인정하는 공식적인 절차이자 시스템이라는 성격을 분명하게 갖게 된 것이다. 그 집행과정을 보더라도 발굴자 로, 전국민속경연대회에 도 대표를 뽑는 심사위원으로, 참가가 확정되면 대회용으로 다듬는 지도 혹은 지도교수 로, 문화재위원, 문화재전문위원 란 직함을 갖 더불어 문제점에 대한 학문적인 검토가 절실히 필요해 보인다. 3) 제보자 : 양 (남, 농악인), 조사일 : , 조사방법 : 직접면담조사, 조사장소 : 대구 4) 제보자 : 정 (여, 민요소리꾼), 조사일 : , 조사방법 : 직접면담조사, 조사장소 : 대구 5) 제보자 : 윤 (남, 농악인), 조사일 : 조사방법 : 직접 면담조사, 조사장소 : 대구 6) 제보자 : 이 (남, 대학교수), 조사일 : 조사방법 : 직접 면담조사, 조사장소 : 서울 7) 당연히 제보자들의 인적 사항이 공개돼야 타당하겠지만 그 사안의 예민함 때문에 익명으로 처리하게 됨이 안타깝다. 언급된 사람들의 명예 및 사후 불이익에 대한 우려 때문에 대부분 익명을 요구하였다. 8) 전통민속예술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창설됐다. 대한민국 수립 10주년 기념행사를 겸하여 1958에 제1회 대회가 경연대 회방식으로 거행됐다. 잊혀지고 사라져가던 전통예술을 발굴 보존하게 된 것을 큰 수확이지만, 경연대회라는 성격 때문에 지나친 경쟁심을 불러일으키거나 예술 자체가 상품화되는 등의 여러 가지 부작용이 드러남으로써 1999년 대회 명칭을 현재의 한국민속예술축제로 변경하고 새롭게 출발하였다. 참조. 그러나 대회 명칭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경연대회 방식은 지속되고 있다. 9) EB%AC%B8%ED%99%94%EC%9E%AC 40 41

22 민속 관련 문화창출에 대한 민속학자의 역할 고 문화재를 지정받고 싶어 신청한 품목과 그 보유단체 및 기능인에 대한 내용을 사전 조사하는 조 사자로서의 역할이 민속학자들이나 전통문화관련 학자들에게 주어졌다. 경연대회를 직접 준비한 지 도 및 지도교수들은 자신이 관여하여 입상한 경력을 갖추게 된 출품작 들의 문화재심사에 직 간접 으로 관여한 사례가 대부분이다. 민속학과 그 연관 학자들에게도 권위와 더불어 정책(문화재보호 법)-학자-행정 이라는 시스템과 네트웍이 생겨난 것이다. 다음의 사례가 그 전형의 한 예이다. 영남대학교 민속학자 김택규 교수와 대구효성여자대학교 민속학자 권영철 교수에 의하여 이론적 으로 정리 발표되니 명실공히 천왕메기 가 민속학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10월 23일 제27회 전국대회에서 비산농악이 출전하여 공로상을 수상했으니 비산농악이 전국대회에 연이어 4년 간 수상하는 우수 민속예술단체가 되었다. 10) 이 성과 를 바탕으로 천왕메기는 1989년에 문화재지정을 받으며, 비산농악에 뿌리를 둔 날뫼북춤 은 천왕메기에 앞서 1984년에 문화재지정을 받는다. 따라서 이 시스템에 편재된 학자는 그 전문성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위상에 있어서도 권위를 부여받게 됐으며, 문화재심사권이라는 권한을 갖게 됐다. 특히, 문화재심사권은 전통문화관련 영역 에서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평생 천대에 가까운 무관심과 소외로부터 일거에 벗어날 뿐 만 아니라 국가가 인정하는 예술가로 신분상승이 일순간 이뤄지는 제도가 생겨난 것이기에 그에 대 한 욕구는 대단했다. 문화재 기능보유단체나 보유자로 지정을 받게 되면 작품이나 출연료의 가격이 몇 배 높아지게 되는 등 현실적인 이득도 다양하게 생겨나는 자격증이었다. 기 예능인들에게 인간 문화재 는 피해가기 힘든 꿈이자 유혹이 될 수밖에 없는 절절한 이유들이다. 자신의 출신과 삶을 일거에 보상받게 해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한을 화려하게 풀어주고, 경제적인 큰 이득까지 평생 동 안 보장되는 인간문화재 에 대한 목표의식은 수단방법을 다 동원하고 싶은 유혹을 배태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문화재심사권은 대단한 권위와 힘을 갖게 됐으며, 이를 부여받게 된 연관학자들의 힘은 문화권력 으로 작용하게 됐다. 단순히 이론을 제시하는 학문적 차원의 사안만이 아닌 것이다. 사업의 타당성뿐만 아니라 전통문 화 라는 대중적 인식토대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실질적인 현장을 갖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학문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이를 집행하는데 있어 민속학자들의 역할과 몫이 매우 커진 것이다. 당대 문화를 생산하는데 직접적인 역할과 영향력도 생겨났다는 의미이다. 이 정책과 집행의 중심에 다가갈수록 큰 힘(권력)을 갖게 되며, 이에 대한 유혹 또한 민속학자들이나 연관 학자들에게도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두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현 재태라는 점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큰 영향력은 동시대의 일반 대중뿐만 아니라 모든 전문영역에까지 전통문화 에 대한 10) 박동희, 꽹과리로 한 우물을 판 국악인 김수기 (북랜드, 2009), 153쪽. 개념과 실체, 그리고 그에 대한 상식이나 인상( 印 象 )을 만들어주고 각인시키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 고,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전통 = 과거의 민속이자 문화 = 고리타분한 것 = 나와는 무관 한 영역과 내용 이란 등식으로의 귀결이다. 민속이라는 측면에서도 과거의 민속, 정체된 민속, 현실 과 유리된 민속 이란 이미지를 강하게 각인시켜왔다. 결국 죽은 민속 이란 진단이 가능해지게 만드 는 결과들이다. 그 폐해는 소위 전통문화 의 자생적인 변화와 생성력을 거세시키는데 크게 일조하였으며, 국가권 력의 입맛과 정책에만 적극 순응하는 민속학이나 민속학자로 대중에게 인식될 수 있는 여지를 키워 왔다. 학문이 시대나 대중으로부터 타당성을 획득하지 못했을 때에는 그 학문은 시대적으로나 사회 적으로 그 존립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야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난 60여 년간의 무형문 화재제도와 그에 대응하는 민속학과 민속학자의 모습이 대학 민속학과의 폐지 11) 와 학문으로서의 정 체성을 획득하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학문으로서의 본분과 역할 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음을 증명 받게 되는 상징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 모든 부정적인 결과는 그간 민속학과 민속학자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결과물, 즉 자업자득로서의 성격이 강하다는 뜻이다. 그 근원적인 요인을 무형문화재심사의 판단기준과 그 전문성 공정성 여부에서부 터 찾게 된다는 진단인 것이다. 이제 민속학 과 민속학자들이 당당한 학문으로 대중이나 사회로부터 인식되고 대접받기 위해서 는 자기비판에 입각한 대대적인 자기 변신이 필요한 때라고 판단된다. 본고는 그 일환으로서의 성격 을 부여하고자 하며, 무형문화재와 민속학 민속학자간의 관계를 재조명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하려 한다. 언급한 바와 같이 부정적인 결과를 야기 시킨 구조적인 요인에서 무형문 화재제도와의 상관성파악은 피해갈 수 없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전국적이고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의 결과를 검토해야하는 방대함에 비춰 현재 진행되고 있는 현상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이마저도 한 지역을 집중 살펴보는 방법론에 입각하였 다. 도 단위로 지정되고 있는 지방무형문화재의 존재에 비춰볼 때, 한 지역의 지방무형문화재는 전 국적인 현상과 궤를 같이할 가능성이 높다. 그 표본으로서 대구광역시의 무형문화재 현황을 설정하 였다. 본 연구자가 풍물굿에 대한 전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문화재심사를 실질적으로 수행하는 위원들의 문제점 중에서 전문성이 크게 대두됐다.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연구 자의 전문성도 크게 중시될 수밖에 없다. 대구광역시는 2013년 현재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17개 종 목 중에서 농악과 농악에서 파생된 관련 품목이 4개이다. <표 1> 그 지정번호에서도 알 수 있듯 농 악이 제일 먼저 주목을 받았으며, 지정의 혜택을 받았다. 공산농요(제7호)와 달성하빈들소리(제16호) 11) 독립된 학과로서 민속학과가 있었던 대학은 안동대학교와 중앙대학교였다. 중앙대학교의 경우 2011년에 인문대학의 아시아 문화학부 안에 비교민속학전공 으로 바뀌어 독립 학과로서의 정체성이 크게 훼손됐다. 2013년 4월에는 비교민속학전공마저 도 폐지한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학생들이 받은 상태이다. 참조. 이에 학생들이 학과구조 조정 집행정치 가처분 신청 을 법원에 2013년 7월에 내 법정싸움으로 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참조

23 민속 관련 문화창출에 대한 민속학자의 역할 처럼 농악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종목까지 하면 6개에 이른다. 현재 무형문화재를 꿈꾸는 농악단체 도 여럿이다.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에서 풍물굿(농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대구광역시민들에게는 전통적으로 농악이 매우 친숙하고 대중적인 민속예술이었음도 드러 난다. 연구자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살펴보기에 적합한 지역으로 판단한 근거이다. <표 1>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중 농악과 농악에서 파생된 종목 이름 전승 근거지 지정번호 지정일 보유자 비고 고산농악 내환동(수성구) 제1호 정창화 날뫼북춤 비산동(서구) 제2호 윤종곤 단체지정일 욱수농악 욱수동(수성구) 제3호 故 김호성 천왕메기 비산동(서구) 제4호 김수기 1997년 천왕메기와 날뫼 북춤보존회가 분리 물놀이 라는 사물놀이단체를 직접 구성하여 상쇠로 활약한 경력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 단체를 이끌고 있는 사물놀이안(samulnorian)이기도 하다. 달구벌사물놀이 창단 5주년기념공연 (1991)의 경우, 달구벌사물놀이대표 자격으로 인사말을 하고 있으며, 달구벌사물놀이대표 와 지방 무형문화재 제4호 를 병기하여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14) 달구벌사물놀이패의 창단은 1987년이며, 천왕메기 보유자로 지정받은 것은 1989년의 일이다. 15) 따라서 문화재심사과정에서 김수기라는 사람 이 사물놀이안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천왕메기를 원형대로 체득 보존 시키는데 전혀 결격사유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같은 성격의 사안에 대해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린 사례도 발견된다. 배관호라는 인물이 신청한 달 성다사12차진굿 에 대한 심의결과를 부결로 판정하면서 통보한 부결이유에서 사물놀이와의 상관성 을 거론하고 있다. 다음은 부결이유로 통보한 첫 번째 사유이다. (상략)그의 농악은 사물놀이와 타 지역의 농악이 섞여 있기에(하략) 16) 2. 원형론 의 적용 실태와 무형문화재 무형문화재가 존립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는 바로 원형론이다. 원형을 갖고 있느냐 여부가 문화재 심사에 있어서 판단 기준 역할을 한다. 대구광역시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대구광역시무형문화재 보유자 및 보유단체의 인정기준은 <대구광역시문화재보호조례시행규칙>에 명시돼 있다. 이 시행규 칙 제5조 제1항에 명시한 인정기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배관호는 김수기가 창단했던 달구벌사물놀이의 멤버로 활동한 경력을 갖고 있다. 김수기와 같은 맥락에서 평가돼야 할 조건인 셈이다. 김수기의 경우 사물놀이를 적극 수용하여 비산농악과 활동을 병행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김수기 선생님께서 비산농악단의 먼 장래를 내다보고 지금의 단원 연령대가 너무 노령화해서 언젠 가는 끊어지지 않을까 걱정을 하셨습니다. 당시만 해도 서울에서조차 사물놀이라는 단어가 익숙해지 기도 전인 1987년 3월에 대구지역에서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사물놀이를 만들어, 선생님과 저를 보유자 : 무형문화재의 예능 또는 기능을 원형대로 체득 보존하고 이를 그대로 실현할 수 있는 자. 포함한 단원 중에서 가장 어리다고 생각하는 4명이 달구벌 사물놀이를 창단하게 하셨습니다. 17) 보유단체 : 무형문화재의 예능 또는 기능을 원형대로 체득 보존하고 이를 그대로 실현할 수 있는 단체 12) 무형문화재선정의 절대 기준이 바로 원형 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원형 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 의나 시기 성격 범위 등에 관한 규정사항은 없다. 이는 심의과정에서 일관된 판단을 내리기 위해 필요한 구체적인 근거로서 기능할 것이다. 구체적인 기준이 제시되지 않았을 경우 심사과정에서 문 화재위원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되거나, 서로 상치되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런 우 려는 실재로 발생하였다. 농악분야의 경우 사물놀이에 대한 견해와 그 적용사례에서 두드러진다. 김수기는 비산농악의 전승력을 확보하는데 제일 기본일 인력확보를 위한 궁여지책으로 사물놀이 에 착안하였다는 것이다. 비산농악에 젊은 회원들이 충원되지 못함으로서 점점 노령화하는 반면 당 시 사물놀이가 젊은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현상을 주시하여 젊은 사람들을 농악으로 끌어들이기 위 한 방편이었으며, 결과적으로 큰 효과를 봤다는 것이다. 결국 1989년 대구광역시 문화재심의는 이를 인정하였으며, 천왕메기 전승에 하등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셈이다. 그 반면 2002년의 배관호에 대한 심의는 똑 같은 성격에 대해 정 반대의 판단을 내리고 있다. 이 결정에 대해 배관호는 이의신청서를 대구광역시에 제출하였으나 반영되지 못했다. 김수기는 대구광역시지정 무형문화재 제4호의 보유자이다. 이 보유자는 최연소자(47살, 실제49 살)로 예능보유자가 된 것은 대구시에서는 최초의 일이었다. 고 자찬할 정도로 대구를 대표할 만한 농악인이자 문화재 보유자이다. 13) 그런데 김수기는 사물놀이를 대구에 최초로 도입하여 달구벌사 12) 13) 박동희, 앞의 책, 169쪽. 14) 프로그램 <달구벌사물놀이 창단 5주년기념공연 우리의 소리, 위대한 진동 >( , 대구시민회관대강당). 15) 박동희, 앞의 책, 307~308쪽. 16) 대구광역시 공문 문화 /시행 ) 박동희, 앞의 책, 246쪽

24 민속 관련 문화창출에 대한 민속학자의 역할 배관호의 사물놀이 활동의 궤적을 보면, 달구벌사물놀이패에서 나와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면서 배관호제 고유사물놀이가락정립을 시도한다. 달구벌사물놀이패에서 나오게 된 주요 요인에 음악적 견해차이가 자리 잡고 있기도 했다. 배관호는 사물놀이가락과 음악을 본인이 어렸을 때부터 배우고 익혀 몸에 배어 있는 다사농악에 접목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다사농악을 중심으로 한 경 상도농악의 가락과 맛을 살리는 독자적인 사물놀이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이 고민의 결과가 배관호 제 고유사물놀이가락정립 공표(1997)로 나타났으며, 18) 이를 실현시켜내기 위해 단체(랑전통풍무악 예술단)를 독자적으로 이끌면서 자신의 사물놀이를 활발하게 알리는 작업을 한다. 동시에 사물놀이를 통해 흡입되는 젊은 풍물인들을 달성다사12차진굿보존회로 흡수하여 달성다 사12차진굿의 전승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도 병행한다. 배관호는 사물놀이뿐만 아니라 20세기 중 후반에 경상도농악에 도입되기 시작한 전라굿의 설장구놀음을 경상도화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고민 을 하기도 한다. 19) 경상도농악에 수용된 설장구는 대부분 전라도 설장구 영향을 받고 있다. 비산농 악에 설장구를 직접 지도한 사람은 故 임재식이라는 우도농악인이었다. 대구 비산농악은 설장구도 했고 쇠도 했고. 아직까지 욕심이 나서 우리 것(우도굿)을 허긴 했지만 즈그까지는 사용을 허지만 대회까지는 사용을 않더라도 비교를 해서 많이 이용을 하지. 20) 이런 여러 사실에 비춰보면, 김수기와 배관호는 시대상황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실기인 으로서의 자생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 만남이 사물놀이이기도 하고, 전라도의 설장구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토대이자 근거인 경상도농악과 고향의 굿이 자생력을 확보하고 발전하기 위한 고민을 주체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문화재심사에서는 이를 김수기만 인정하고 배관호는 부정한다. 사물놀이에 대한 대구광역시의 상반된 견해와 결정은 몇 가지 쟁점을 야기시킨다. 첫째, 문화재를 끊임없이 변화 소멸 생성하는 변화체로 볼 것인가, 아니면 어느 시기에 존재했던 양식을 그대로 보존해야 하는 정태물로 볼 것인가이다. 후자의 경우라면 김수기에 대한 문화재지정은 타당하지 않 으며, 배관호에 대한 결정은 타당하다. 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김수기의 지정은 타당하며, 배관호에 대한 결정은 부당하다. 지역의 문화재를 지정하는 대구광역시의 경우, 대구와 그 일원의 문화적 정체성을 전승시켜야 한 다는 대전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에 변화하더라도 대구의 정체성 이라고 할 그 무엇이 있느냐? 와 이를 발전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주체적이면서도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 그 완성도를 획득하고 있느냐? 가 관건이 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판단한다면, 김수기와 배관호는 시도에 있어 18) <랑 창단공연>(팜플렛, 1998). 19) 제보자 : 배관호, 조사일자 : , 조사방법 : 직접 면담조사, 조사장소 : 서울 20) 임재식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이지만 일찍 전사습명인 등에게서 설장구를 익혀 자신의 가락을 정립한 분이다. 전라북도 이리 에도 근거를 두고 전라남북도의 농악판에서 활동하였다. 박흥주녹취 서종대정리, 우도굿판의 기술자 임재식 선생, 굿 9호(굿연구소, 단기43330), 64쪽 참조. 서만은 매우 모범적인 사례에 해당할 것이다. 이 연장선에 서 예술적인 완성도나 당대 지역사회문화 에의 기여도 등 여러 요소를 종합적으로 요구할 경우에는 보다 전문적이고 종합적인 평가와 판단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이는 심사권을 갖고 있는 문화재위원과 기초 조사를 미리 수행하는 문화재전문 위원들의 자질과 구성을 결정하게 되는 기준이 될 것이다. 사물놀이나 전라도 설장구의 수용은 당대 대중의 선호도와 미적 감각에 의한 자연스런 귀결이기 도 하다. 단적으로 관심과 인기가 없는 문화와 예술은 아무리 훌륭한 유산이라 하더라도 전승력을 확보하기 힘들다. 21) 자생력에 기반을 둔 전승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관심을 주시해야 하며, 그들의 환호와 돈을 끌어낼 수도 있어야 한다. 일단 지속적인 회원확보가 급선무이며, 기존 회원의 이탈을 방지할 수 있는 경제적, 예술적, 사회적 욕구를 기본적으로는 해결시켜줘야 한다. 문화재지 정으로 제공되는 전수보조금이나 운영자금으로는 소수의 몇 명만이 겨우 가능한 수준이다. 이 상황 에서 후자의 입장을 계속 요구하였을 때, 전승력 확보에 다양한 편차를 보일 수밖에 없다. 당대 대중 의 기호도를 수용하는데 성공한 종목은 살아남을 것이며, 22) 그렇지 못한 경우는 점점 쇠퇴하거나 기형적인 모습으로 고착화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둘째, 원형에 대한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첫 번째의 논점은 문화재지정에 있어서 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통예술 전반에 적용될 성질이기도 하다. 이는 바로 원형이 무엇인가? 란 근본적인 논의를 제기하게 된다. 후자의 입장을 견지할 경우 시기, 내용 확인 방법과 타당성여부, 전승자와 전승단체의 변화양상정도 등 여러 측면에서의 기준이 요구된다. 그러나 그간 명확한 기준이 제시되지 못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대구광역시의 경우는 후자 입장에서의 원형론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고 보여진다. 다음은 2000년대에 들어 지속적으로 대 구광역시 문화재위원을 지내며 농악관련 종목 발굴과 심사과정에 있어 일원이었던 석대권교수의 견 해를 통해 이를 엿보게 된다. 23) 무형문화재의 전승은 그 문화재가 가지고 있는 구성요소를 온전히 보존하는 일이지 새롭게 창조하 는 것이 아니다. 무을풍물은 구미가 자랑할 만한 무형문화재로 가치를 지니고 있으나, 앞으로 얼마나 무을풍물이 갖는 원래의 복색과 가락 등을 정확하게 전승하느냐가 문제이다. 가끔 각 지역의 풍물들 이 지나치게 기교에 치우치다보니 자신의 색깔을 버리고, 다른 지역의 가락과 복색 등을 섞어 지역불 명의 풍물을 자신의 지역 것이라 주장하는 사례도 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풍물과 사물놀이를 21) 사물놀이가 전통적인 풍물굿의 미학과 전승기반을 와해시켰느냐?의 여부는 다른 차원의 논의가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자신 의 고향굿을 발현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방안으로서의 수용이라면 그런 문제점과 한계를 극복시키기 위한 방안으로서의 가능 성을 배제하기 힘들어진다. 이에 대한 치밀한 분석 작업이 수행돼야할 시점이기도 하다. 22) 판소리 등 일부 자생력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종목의 문화재지정이 중단돼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23) 석대권교수의 대구광역시 문화재위원 경력은 다음과 같다. 2002~2003, 2006~2007, 2008~2009, 2012~ ~2011 기간은 경상북도 문화재위원 역임. 참조 일 재차 확인결과 이 공지사항이 삭제된 상태

25 민속 관련 문화창출에 대한 민속학자의 역할 혼돈하고 있다. 사물놀이는 마당놀인 전통적인 풍물을 1970년대 후반 무대화한 것이고, 쇠, 징, 북, 장고 4가지 악기를 가지고 논다고 하여 붙인 창작음악의 이름이다. 그래서 사물놀이 나름대로 복식과 악기를 갖고 연주하고 있다. 24) 굿거리 장단에 덥배기 춤은 경상도 농무의 특징이거니와, 차산농악은 춤과 민요가 삽입된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12가락 36마치로 표현하고 있다. 열두가지의 변화를 가지는 놀이에 서른 여섯 종류의 장단이 있다는 것이다. 순서와 마치의 종류를 상쇠 김오동 과 마을의 고로들이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다. ** 12거리** 1. 굿거리굿 (춤 굿) --살풀이 2. 부정굿 (차츰걸음) 후자의 입장이 기저를 이뤄왔지만 지정문화재들 역시 끊임없이 변화해왔다는 사실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대구광역시 지정 농악의 경우 단적인 예가 경연대회용 절차가 공식절차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이 발견된다. 대표적인 거리가 입장굿 이고, 무대를 상정한 판제구성이다. 천왕메기의 경우를 보면, 형성배경에 대해서는 마을굿으로서의 정체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연 행과정에 대한 소개 또한 마을굿 절차에 준한다. 그러나 실제 행해지는 놀이방식과 판제를 엿볼 수 있는 천왕메기무보에서는 무대와 관객을 상정한 판제구성이다. 질굿을 무대 연행이나, 좁은 공간에 서 북춤이 연행될 때에는 풍물꾼들이 之 모양을 그리고 무대나 마당에 입장함으로 으로서 입장굿 으로 전환되고 있다. 다른 굿거리의 절차는 장단의 숫자까지 규정하고 있다. 25) 비산동의 마을굿에 토대를 둔 날뫼북춤의 경우도 창작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다음의 인용문에 서 창작 상황을 유추할 수 있다. 날뫼북춤의 경우는 기존의 가락인 비산농악의 가락에서 특징적인 북가락을 뽑아 체계화하고 정리 하기까지 김수배 선생의 손과 발이 되었다. 북가락은 김수배 단장을 비롯하여 임문구, 임봉구, 정만섭 등이 잘 쳤다. 당시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이 체계화되고 예능화된 북춤은 어려웠을 것으 로 본다. 26) 날뫼북춤은 비산농악에서 경상도 농악의 하나의 특징인 북춤을 설북 김수배의 뛰어난 북 솜씨로 재구성한 것이다. 즉 비산농악에서 파생한 것이라 할 수 있고, 그 첫 번째 예능보유자가 고 김수배( 金 壽 培, 1927~2006)인 셈이다. 27) 천왕메기의 경우도 천왕기가 차산농악의 천왕기와 유사하다. 이는 원래 그쪽이 고향이었던 김수 배가 차산농악의 천왕기를 모방했다는 설도 있다. 28) 어쩔 수없이 원형 이 변화될 수밖에 없음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기도 하다. 차산농악의 경우 공식 홈페이지에서 차산농악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다. 24) 석대권, 무을풍물의 역사와 전승방안, 舞 乙 풍물 (무을풍물단, 2002), 64쪽. 25) 2010년에 천왕메기보존회와 대구광역시서구문화원이 공동으로 발간한 비산 천왕메기의 전승과 발전 의 내용으로서 공식적 인 천왕메기의 구성과 절차로서의 성격을 분명하게 갖는다. 천왕메기보존회 대구광역시 서구문화원, 비산 천왕메기의 전승 과 발전 (북랜드, 2010) 참조. 26) 천왕메기보존회 대구광역시 서구문화원, 위의 책, 13쪽. 27) 천왕메기보존회 대구광역시 서구문화원, 위의 책, 17쪽. 28) 제보자 : 배관호, 조사일 : , 조사장소 : 대구 연풍기굿 (호호 딱딱) 4. 자진모리굿 (막조우기) 5. 물레굿 (미영잦기) 6. 진굿 (2석, 4석) 7. 농사 굿 (논서르기, 씨뿌리기) 8. 모내기굿 (줄서기) 9. 김매기 (논매기) 10. 타작굿 (발들기) 11. 조름쇠(굿) (판굿) 12. 오방진 (뚤뚤말기) ** 36마치** 1. 행진굿 (7마치) 2. 부정굿 (6마치) 3. 조름쇠 (10마치) 4. 살풀이 (6마치) 5. 자진모리 (7마치) ### 위 나눔은 편의상 나눠 놓은 것으로 특별한 의미가 없다. 판굿은 계속 변화하고 있으며 전국민속 경연대회 전후의 판제 자체가 조금씩 차이가 나고 그에 따라 가락이 조금씩 들어가고 나가고 하기 때 문이다. 그러나 가락이 변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29) 변화는 현재 활발하게 활동을 하면서 문화재지정을 꿈꾸고 있는 단체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심각 성은 변화를 하되 서로 간에 변별력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획일화 현상이 뚜렷하다. 위의 인용에서도 드러나고 있지만 발굴을 거쳐 도 대표로 경연대회에 참가하는 과정에서 급격하게 변화 하고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영천군(경상북도) 명주농악의 사례가 그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 다. 입상을 목표로 할 수밖에 없는 경연대회 특성상 발생되기 쉬운 외곡이다. 배-그 때 인자 그 농악을 판을 만들고 지도를 한 분이 김오동선생님(당시 차산농악 상쇠)이라는 분이 담당을 했는데. 직접 와가 지도를 하고... 자기 하고 나이가 비슷한 나 많은 할배들을 갖다 가 초등학생 뭐락카듯이 막 뭐락하데. 대단하데 질-아 보셨어요? 같이? 배-같이 나도 같이 연습하고... 저도 같이 상모로 팔려 가가 연습하고. 그 때 조교 역할을 한 사람이 영남대학교 민속연구반 출신 추현태라고 그 유명한, 동아리출신 치고는 정말 잘쳐요. 내가 보더 라도 잘 치데예. 밀양 오북놀이의 김타업선생 수제자로 알고 있어요. 그 이가 연습과정에서 조교를 하면서 실제로 상쇠를 쳤죠. 연습을 다 시키고 대회를 갔다 오는 과정까지도 추현태라는 사람이 다 하게 됐죠. 그동안 죽어져 있다가 상까지 받아왔으니 살려야 한다는 영천군에서 그게 있어 가지고 그래 한동안 저한테 연락이 많이 왔어요. 많이 왔는데 내가 가가 영천농악을 참 뭐 다사농악으로 할 수도 없고 그걸 해가가 내가 알 수도 없는 기고 하다하다 안되니까 내가 전화기를 꺼놓고 한 동안 연락이 많이 오다가 끊어져노니까 지금은 추현태씨가 한닥카데요 자기가 상쇠를 해놓으니 잘 아니까... 질-그러면 그 (명주농악)판제는 누구 판제인가요? 배-옛날 김오동씨 판제라 카데예. 글자짓기, 농사짓기... 그 때 상모해 논기 소나무가지로 잘라가. 29)

26 민속 관련 문화창출에 대한 민속학자의 역할 그 때 94년돈가... 춘천에서 할 때. 춘천에서 했는데. 내가 처음부터 상모 역할을 해가 팔리가가 지고, 우리 단원들이 장구잽이 역할을 한 사람도 있었고 상모잽이 역할을 한 사람도 있었고... 그 팜플렛에 제 이름도 올라가 있데예 그 때 같이 다 갔으니께네 30) 그 발굴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신문기사가 2013년도에 나온 바 있다. 1994년 10월 21일 춘천공설 운동장에서 열린 제3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명주농악이 농악부문 최우수상인 문화체육부장 정 : 김태훈이 거 안 들어가 있나? 배 : 그기 김태훈이 영향이 많았지. 이천농악도 그렇고 배 : 시에서도 그 인물들을 잘 알면서도 거 가가지고 비산농악 그 자체를 그대로 하고 있는데 용수동 전통농악이라고 그렇게 인정해주고 받들어 주고 또 보내고 했다 아이가. 민속예술제 까지 몇 번 갔다 아이가 윤 : 올해도 대구광역시 대표로 한국민속예술축제에 나가데. 32) 관상을 수상할 당시 김일홍단장(영천명주농악단장, 66, 남)의 회고담을 바탕으로 작성한 기사이다. 대외적으로는 가루뱅이농악이 대구광역시 용수동이 전승기반이라고 이야기한다. 위의 대화가 사 당시 대구경북의 최고권위자로 심사를 맡았던 영남대 김택규교수가 새롭게 발굴된 가락에 관심을 갖고 경상북도대표로 출전할 것을 종용해 동민들이 회의를 한 끝에 한번 도전해보기로 했다고 한다. 김택규ㆍ권영철 등 4명의 교수가 지도를 하면서 주변 마을을 돌아다니며 가락을 채집해 정( 丁 )ㆍ전 ( 田 )ㆍ토( 土 )자 등 글자 시연과 상모의 모심기 공연 등 12마당을 완성하고 메구 3, 징 4, 북 8, 장고 8, 상모 8명으로 악기배열도 마쳤다. 추현태씨를 상쇠로 부쇠 손종구ㆍ전상호ㆍ박경돈, 선상모, 배관 호, 수북 김해석씨 등 지금도 각지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실력자들이 한마음으로 화합해 열심히 연습했고 마침내 최고의 성적을 낼 수 있었다. 31) 심사에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기량이 뛰어난 전문인들을 초빙하여 멤버를 구성하는 차원에 그치 지 않고 판제 자체를 대폭 수정하여 명주농악 이름으로 도 대표로 출전하고 있으며, 입상을 하게 되면 그것이 대외적인 명주농악이 되는 것이다. 심히 부끄러울 수도 있는 사실을 자랑삼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이런 풍토와 관행이 일반화됐으며, 오히려 능력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사실 을 웅변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문화재 추진 작업이 시도되게 되며 발굴과정에 직 간접으로 관여한 지도교수와 목표가 뚜렷한 시군 행정이 서로 묵인한 가운데 문화재심사가 이뤄질 수 있는 구조적인 토양이 형성 될 수 있다. 위 기사에서 언급되지 않은 한 명의 민속학자는 석대권교수이다. 이런 풍토와 관행은 2010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대구광역시 가루뱅이농악의 경우이다. 배 : 동네에서 만들었다 하더라도 실제 판을 만들어 낸 거는 날뫼에서 만들어준 것이야 윤 : 처음에는 구십 몇 프로까지 배 : 구십 몇 프로가 아니라 거진 100%였지 윤 : 차츰차츰 바꽈져 차산이고 뭐... 이제 91% 됐데. 나 모르겠다. 이제 차산걸 많이 집어넣데 30) 제보자 : 배관호, 조사일 : , 조사방법 : 직접면담조사, 조사장소 : 대구 31) 실이라면 사실외곡과 더불어 긍정적인 창작이라고 평가받기 힘들어 진다. 김태훈이라는 인물은 대 구광역시뿐만 아니라 경상북도의 주요한 농악단 단원 명단에서도 발견된다. 차산농악, 33) 비산농악, 이천농악 34) 등이다. 선수급 전문인이 도 대표로 출전하는 단체에 직접 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참가 한다는 것은 그 단체의 판제와 가락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합법적인 조건을 갖추게 되는 셈이다. 이 모두를 종합해 볼 때, 후자의 원형론을 전면에 내세우더라도 현장은 그와 정반대의 현상이 벌 어지고 있었으며, 점점 심화되는 추세임이 드러났다. 이는 문화재제도를 이론적으로 지탱해온 후자 의 원형론이 허구였으며, 현장은 그 이미 정태적 차원의 원형이 아니라 변화체로서의 원형론이 실질 적으로는 작동했음을 인정해야할 단계에 접어들었다. 역설적으로 후자의 원형론이 60여 년간의 실 행과정을 통해 얻은 결론은 허구였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그 변화의 양상 또한 원형성과 정체 성을 긍정적으로 발현시키는 방향으로가 아니라 부정적인 차원으로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해소 방안이 요구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3. 문화재위원의 자질과 전문성 문제 원형론을 제시하고 이를 직접 심사하고 이를 현장에서 관철시켜나간 전문가들은 바로 학자들이 중심을 이뤄왔다. 특히 민속학자들의 역할과 활약이 두드러진다. 앞서 살펴본 이론과 실제의 괴리 현상 을 실제적으로 주도한 중심에 민속학자들이 있으며, 공과에 대한 평가와 그 책임에서 피해갈 수 없다.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와 관련하여 심각하게 제기되는 민속학자들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 32) 제보자 : 배관호, 윤 (남, 농악인), 조사일 : , 조사장소:대구 33) 현 상쇠 김오동은 조카인 김위근 (1996년 작고)을 보유자 후보로 두었지만 사망하였고 같은 차산리의 박수운을 부쇠로 두었지 만 1989년에 작고하고 만다. 1970년 후반에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를 나가면서 영남대학교 민속보존연구회와 인연을 맺고 상쇠계보를 이어 간 다. 10여명의 쇠잽이를 배출하였으나 이름을 꼽을 수 있는 이는 김정한, 정병철, 정중현, 추현태, 김태훈, 손정우 정도이다. 지금 할동 중인 이는 추현태, 김태훈뿐이다. 1984년에 풍각면 소재의 풍각농고 농악반을 만들게 되어 추현 태와 상쇠 김오동이 직접 지도하게 되어 상쇠계보를 잇게 되는데, 백진환, 조일환, 박준오를 꼽을 수 있다, 현재 활동 중이다. 참조. 34) <2013년 달성이천농악 정기발표회>(팜플렛, 달성이천농악보존회, 2013)

27 민속 관련 문화창출에 대한 민속학자의 역할 은 바로 공정성과 전문성 결여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재삼 환기할 필요가 있다. 다음은 그 정황을 생생하게 전해 받을 수 있는 대화이다. 질 : 석 교수라는 분을 다 싫어하는 이유가 뭡니까? 김 : 공정하지 못하니까요. 공정하지 못해요... 진짜 학자 같으며는 제대로 판단하고, 자기가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해야지요. 아는 분야는 진짜 제대로 도와주려고 해야 하고요.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걸로 해야 하고, 되는 것은 되는 걸로 해야 하는데 안 되는 걸 되는 걸로 하면 당연히 욕 얻어먹을 수밖에 없죠. 한 마디로 말해가 석 교수 손 교수는 문화재위원 하면 안 됩니다. 본인 일 해야 돼요, 본인 일. 어디 뭐 문화재 박살낼 일 있습니까. 뭐뭐 문화 다 부술 일 있나요. 공정하게 하고 35) 달성다사농악의 일련의 변화들은 앞서 살펴본 이론과 실제가 다른 사례에 속할 개연성을 높인 다. 문화재를 위한 목적에 의해 일관되게 전개되고 있다는 징후로 해석되기에 충분하다. 이 둘 간의 정통성 시비를 판단하는데 있어 결정적일 수 있는 주요한 증언들도 발견된다. 한 예로 다사읍 차원 에서 농악패를 결성하고 판제를 재구성하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했던 배기순의 증언을 경청해 볼 필 요가 있다. 시골마을에서는 딴데가믄 꽹과리 하나 징 하나 북 하나 장구 하나 요래 사물만 가지고 놀았지 2개씩 가지고 논는 건 없었다고... 우리마을 베께 없었다고... 아버지(배기순 자신)가 할 때만 하더래도 다사면에 그저 덧배기가락이나 칠 줄 알았지 살풀이가락 칠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슴다. 내밲에 없었는겨. 39) 이로 인해 생기는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같은 지역이나 같은 뿌리에서 분화된 단체들 간의 정통성 시비가 발생하고 있으며, 법정으로까지 비화하기도 했다. 농악분야에서는 달성다사12차진 굿 과 달성이천농악 간의 갈등이다. 이 갈등은 15여 년에 걸쳐 지속되고 있으나 해결가능성이 희박 하다고 양측 다 이야기한다. 이들은 2013년에 같이 문화재심사를 받기 위해 신청한 상태이며, 그 결과가 정통성을 인정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다주게 돼있다. 공정하고 객관적이고 전문적인 판단에 의해 심사가 이뤄져야만 할 예민한 사안이다. 두 단체 간의 정통성에 대한 판단은 두 단체가 하고 있는 판제와 가락에 대한 전문적인 비교와 분석이 전제될 수밖에 없다. 두 단체가 그간 보여주고 주장하는 판제의 경우 그간 변화를 거듭해왔다. 2003년도 제44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 대구광역시 대표로 달성이천농악이 참가했을 때의 판제와 내용이 달성12차진굿 이 1995년과 1998년에 대구광 역시 대표로 한국민속예술축제에 참가했을 때의 내용(12차 36거리) 중에서 23거리가 대동소이하다 는 주장을 달성다사12차진굿 측에서 주장하고 있다. 2006년에 달성다사농악이 다시 한국민속예술축 제에 참가했을 때는 12거리로 바뀌어 있다. 2007년에도 연이어 달성다사농악이 한국민속예술축제에 참가하는데 이때는 20거리로 확대돼 있다. 달성다사농악을 이끌고 있는 추교순상쇠는 2006년도와 2007년도 이후의 풍물이 크게 다른 이유 에 대해 경연대회 특성상 거리를 줄였기 때문 이라고 설명한다. 36) 가락에 대한 추교순상쇠의 입장 은 평생 농악만 했기 때문에 사물놀이가락이 섞여있지 않지만, 배관호상쇠는 사물놀이를 해서 원형 성이 훼손됐다 는 견해를 갖고 있다. 달성다사12차진굿 측에서는 달성이천농악이 보여주는 판제와 가락을 구체적으로 비교하면서 이천농악의 정통성에 대해 강한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37) 단체 명칭 의 변화에 대해 추교순상쇠는 박사님들의 조언에 의해 이뤄졌다 고 밝히고 있다. 38) 결국 현재 기예와 연희중심으로 변화돼 있고, 그 양상이 점점 더 심화되는 모습들은 어떤 이론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마을두레굿으로서의 정체성과 이를 정통으로 잇고 있다는 주장이 허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 심사를 담당할 대구광역시 문화재위원(무형민속분과) 구성에 농악전문가는 편성되어 있지 않다. 이 사안에 대한 2010년도의 현장조사를 수행한 손태도전문위원도 농악전문가가 아니다. 그간 다사농악에 대한 학술자료나 조사를 수행한 학자들은 고 김택규교수, 김경배교수, 석대권교수, 그리고 손태도박사이다. 김경배교수를 제외하고 다른 분들은 모두 민속학자들이다. 김경배교수는 국악전공의 실기인 출신이지만 민속악이 아니라 정악전공자(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보유자)이 다. 그 전문성에서 대한 강한 의문과 문제제기가 생겨날 수 있는 조건이다. 계보를 달리하는 같은 분야의 문화재보유자가 문화재위원 자격으로 심사를 해서는 안된다 는 견해도 경청할 필요가 있다. 농악뿐만 아니라 정악에서도 정통성 시비가 있었다. 제6호로 지정된 영제시조의 맥을 이어가야할 후계자의 지정에서다. 보유자였던 채숙자가 타계하고 난 다음 후계 지정을 신청한 김영리가 부결되 는 과정에서 첨예하게 부각되는 전승계보에 대한 논란이다. 김영리의 주장에 대한 타당성 여부도 가려져야할 사안이다. 40) 또한 심사위원의 위촉에 대해 강한 불만으로 제기되는 것 중에 하나로서 한 위원이 다른 분과의 위원까지 겸임하는 현상도 포함된다. 현재 무형민속분과의 문화재위원은 총9명이다. 그 중에서 석대 권문화재위원은 유일하게 건축사적분과를 겸임하고 있다. 석교수가 들오면서 두 개 파트를 맡고 들었다꼬. 이례적으로 없는 일이야. 무슨 파워가 쎈 지.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어. 분과를 한 개 맡아 허는 것도 아니고 두 갤 맡아. 야~~ 41) 35) 제보자 : 김 (남, 농악인), 조사일 : 조사방법 : 직접 면담조사, 조사장소 : 대구 36) 제보자 : 추교순(남, 농악인), 조사일 : , 조사방법 : 전화통화 37) <달성이천농악의 문화재 지정 및 추교순의 보유자 인정 심사에 대한 이의의견서 증빙자료>(달성다사12차진굿풍물보존회, 2010). 38) 제보자 : 추교순(남, 농악인), 조사일 : , 조사방법 : 전화통화 39) 조사자 : 김신효, 제보자 : 배기순(남, 작고, 농악인) 조사일 : , 조사방법 : 직접면담조사 40) 김영리, 영제시조의 맥과 계보를 찾아서 (유한사, 2012) 15~39쪽 참조 52 53

28 민속 관련 문화창출에 대한 민속학자의 역할 대구광역시 문화재위원 구성을 보면 기념물분과, 무형민속분과, 건축사적분과, 동산분과로 나뉘 어 있다. 무형민속분과를 제외한 다른 분과에서는 겸임을 맡는 사례(12)가 많이 보인다. 42)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형민속분과의 경우는 이례적인 사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셈이다. 석대권교수의 민속관 련 전문성과 더불어 건축사적분과에서 담당해야할 사안들에 대한 전문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의 문이 제기될 수 있는 반응이다. 또 한 가지 우려되는 현상은 문화재심의를 장악하여 이를 지속적으로 이어가려는 징후가 감지된 다는 점이다. 43)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제까지의 문화재심의의 파행상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해내는 토 대를 공고히 갖춘 상태가 될 것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런 문제를 피부로 체감하고 있고 지속적으 로 제기됨에도 불구하고 피해 당사자들은 문제를 공론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보다 더 심한 사람이 오면 어떻게 해 라는 우려도 한 몫 한다는 사실에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택규교 수님, 성병희교수님 같은 분들은 나름대로 그 당시 하기 힘든 일들을 많이 하시고. 업적도 있으시고. 괜잖았는데 란 견해도 더불어 주목할 요소이다. 4. 마무리를 대신하여 이 상황인식에 동의할 경우, 그간 이뤄졌던 문화재심의 안건들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꼭 필요해보 인다. 부결된 사안과 지정 판정을 받은 사안들 모두가 평가 대상이 돼야 할 것이다. 실태조사를 해야 합니다. 조사궤적, 지정의 타당성 및 공정성 등을 제대로 했는지 평가해 봐야 합니다. 문화재위원들에 대한 평가를 해야 합니다. 제출했던 서류들을 검토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44) 이는 단순히 문화재 차원에서 끝날 사안이 아니다. 작게는 한국민속이 살아있는 민속 으로 거듭 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할 사안에 해당한다. 크게는 대중들과 각 전문분야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 대해 한국의 문화 를 재정립시키고 건설해 나가는데 크게 기여할 수 방안창출의 보고일 수 있다는 판단이다. 이는 귀중한 체험이자 투자였으며, 그 결과를 긍정적이면서도 순기능적으로 전환시킬 수 만 있다면 구체적인 사안이자 논의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문화재위원으로 참석한 민속학자들에 대한 평가가 전문성, 공정성 에 입각하여 냉정 하게 이뤄질 필요가 있다. 이는 민속학자들의 역할과 그 범위. 한국 민속의 건강한 생성과 그 기여에 대한 담론형성을 대중적으로 이뤄내는데 성공했을 때 가능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스스로를 과감 하게 드러내고 비판할 수 있는 살신성인의 자세와 노력이 전제될 수밖에 없다. 대구광역시를 중심으로 살펴본 결과, 이론적으로는 원형론 의 절대성부여이며, 실천적으로는 문 화재제도(특히, 무형문화제)와의 적극적인 밀월관계 로 집약시킬 수 있다. 이는 정책-민속학자-행 정 간의 긴밀한 네트웍을 구축시켜 문화권력 을 형성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지방자치시대를 맞이 해서는 소수의 지방토호문화세력 의 구축과 그 권력행사의 도구로 전락한 측면까지 엿보인다. 즉, 현재 문화재위원회를 장악한 소수 민속학자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교묘한 권력남용 에 가까웠 다. 그 결과는 원성에 가까운 비판이며, 건강한 원형성의 발현을 저해하는 결과를 야기시키고 있었 다. 더 우려되는 것은 이것이 구조적으로 정착되고 있다는 점이다. 대구광역시 전통문화예술인들의 문화재심사에 대한 문제제기는 전문성 결여, 공정성 실종 으로 집약시킬 수 있었다. 이는 전국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두 가지 측면에서 본 논고를 제안 차원에서 정리할 수 있겠다. 문화재제도를 지탱하고 있고 일반 대중에게 전통문화에 대한 정태적이고 과거적인 인식과 이해를 제공했던 원형론에 대한 논의를 재 삼 활성화할 시기라고 판단된다. 담론적 차원에서의 논의가 아니라 결코 짧지 않은 50~60여 년 간 의 실천결과를 바탕으로 한 논의 방식을 통해서도 가능한 시점이다. 41) 제보자 : 윤 (남, 농악인), 조사일 : 조사방법 : 직접 면담조사, 조사장소 : 대구 42) 참조. 43) 대구광역시 전통문화예술인들 사이에서는 이구동성으로 나오는 문제제기 중의 하나다. 구체적으로 실명이 거론되고 있으며, 대구광역시 문화관광국의 실무담당 라인에 대해서도 그 유착관계에 대한 의구심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언급되 는 당사자들 중에서 석대권교수와 김희석 대구광역시 문화관광국의 주무담당관과는 고등학교 동문이라는 소문이 있으며, 달 성다사12차진굿과 달성이천농악간의 실태조사를 수행한 문화재전문위원도 같은 동문이라는 소문이 있다. 44) 제보자 : 이 (남, 대학교수), 조사일 : 조사방법 : 직접 면담조사, 조사장소 : 서울 54 55

29 민속 관련 문화창출에 대한 민속학자의 역할 민속 관련 문화창출에 대한 민속학자의 역할 에 대한 토론문 강성복 공주대 민속학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연구자는 무형문화재 심사나 현지실사 등을 한두 번쯤 경험했을 것이 다. 토론자 역시 전문위원의 자격으로 여러 지역의 문화재 심사에 나아가 이런 저런 의견을 개진한 적이 있다. 또 일각에서 민속을 왜곡하는 대표적인 행사 로 비판 받아온 한국민속예술축제의 심사위 원도 맡아 부족한 식견을 절감한 바가 있다. 그런 전과(?)가 있는 입장에서 발표자의 글은 마치 피고 석에 앉아 판사의 선고를 듣는 죄인처럼 준엄한 꾸짖음으로 다가온다. 사실 무형문화재 심사뿐 아니 라 민속학자들이 민속을 망치는 주범이라는 비판이 제기된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대구광역시의 부정적인 사례를 중심으로 한 민속학자의 역할 은 그간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문화재 지정의 어두운 단면을 수면 위로 드러낸 부끄러운 자화상의 한 단면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1. 지난 반세기 동안 이루어진 문화재 지정의 문제점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는 발 표자의 지적에 적극 공감한다. 그 핵심적인 요체인 전문성과 공정성 논란은 민속학자에 대한 불신 을 조장하는 중차대한 요인이라는 점에서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발표자는 대구지역의 사례를 들어 문화재 지정의 불공정성과 문화권력의 남용, 원형에 대한 이중 잣대, 심지어 뒷돈거래 가 암묵적으로 자행되고 있음을 질타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현재태 이며, 한 지역의 무형문화재 실태는 전국적인 현상과 궤를 함께 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발표자의 상황인식이 타당한 것이라면, 이는 무형문화재 제도 자체의 존립근거를 훼손하는 심각한 문제가 아 닐 수 없다. 다만 대구지역의 사례 및 특정종목을 가지고 전국적인 현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면 의당 각 지역 에 대한 치밀한 조사와 검토가 뒷받침될 때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아울러 발표자는 전통문화에 대한 정태적인 시각이 국가권력의 입맛과 정책에만 적극 순응하는 민속학이나 민속학자로 대중에게 인식될 수 있는 여지를 키웠다 거 나, 심지어 모대학 민속학과 폐지가 학문으로서의 본분과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민속학자의 2. 발표자는 무형문화재 지정의 중요한 근거로 작용한 원형 이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특히 원형론의 적용실태에서 이미 문화재로 지정을 받은 김수기와 심사에서 탈락한 배관호의 사례를 집중적으로 검토하면서, 60여 년 동안 무형문화재 제도를 이론적으로 지탱해온 원 형론이 허구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또 이미 정태적 차원의 원형이 아니라 변화체로서의 원형론 이 실질적으로 작동했음을 인정해야 할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보았다. 풍물굿 하나만 놓고 본다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지적이다. <질문2> 그렇다면 여기에서 변화체로서의 원형 을 주도한 주체가 민속학자였는지, 아니면 농악 전승의 담지자인 풍물꾼 그들 스스로였는지가 궁금해진다. 풍물에 문외한인 토론자의 단견으로 보 건데 전국적으로 획일화되어 가고 있고, 마치 마스게임을 보는듯한 잘 각색된 풍물판제는 각종 경연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대부분 풍물꾼 스스로 선택한 인위적인 변화가 아닌가 하는데, 이에 대한 발표자의 고견을 듣고 싶다. <질문3> 토론자는 문화재 심사의 준거로 작용해온 원형 이란 용어를 전통성 으로 대치하는 게 적절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발표자는 풍물을 포함한 무형문화재 심사에 있어서 전통성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고, 또 얼마만큼의 비중을 두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와 관련하여 사물놀이와 호남의 설장구를 수용하여 대중의 선호도와 예술적 감각에 부응한 이른바 배관호식 판제 는 전통풍물을 창 조적으로 계승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언정, 그것이 당장 문화재로 지정되어야 할 정당성을 획득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견해가 성립될 수도 있다. 즉 배관호식 판제가 대구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나름의 전통성과 정통성을 확보했다고 인정될 때 문화재 지정을 검토할 여지가 있다 고 본다. 3. 무형문화재 심사에서 전문성 결여, 공정성 실종 으로 집약되는 문제제기가 그 진정성이나 당위 성과는 무관하게 심사에 관여한 민속학자의 부정적인 모습만을 부각시키거나, 특정인에 대한 마녀 사냥식 비판으로 흐를 수도 있음을 경계한다. 특히 몇몇 사람의 증언을 토대로 혹여 사실이 침소봉 대된 측면이 있다면, 발표자의 표현대로 지역의 문화권력을 장악한 소수의 민속학자들로 인해 묵묵 히 민속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다수의 연구자가 호도될 여지도 없지 않다. 차제에 무형문화재 제도와 그 운용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가 종합적으로 검토되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민속문화의 올곧은 전승 방향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향후 그 대안 모색을 위한 담론의 장이 활짝 열리기를 바라 면서 토론의 소회를 대신하고자 한다. 자업자득 결과 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질문1> 그렇다면 오늘날 민속학(인문학)의 위기가 초래된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까지 고스란 히 민속학자에게 혐의를 씌우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발표자 역시 민속학자의 일원으로서 좀 가혹한 비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궁금하다

30 민속 관련 문화창출에 대한 민속학자의 역할 민속 관련 문화창출에 대한 민속학자의 역할 에 대한 토론문 김형근 경기대 1. 박흥주 글의 좌표점 찍기 지원이 끊기면 그것만을 바라만 지금까지 그 단체 생활했던 이들의 엄청난 민원도 따른다. 발표자의 의견처럼 본 체제를 유지하여 수술을 가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는 그 제도를 없애는 것만큼이나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완전한 법은 없고, 온전성을 추구하는 것이 정책 방향이듯이 앞으로의 방향을 위한 지침으로 삼아 심사의 엄밀성을 더욱 기하는 것 정도가 가능한 대안일 것이고, 문화재 지정받지 못하더라도 지원받 을 수 있는 전통예술 지원 확대, 기존 문화재 제도의 전승 모니터링 활성화를 통한 전승 지원 독려 및 지정 해제 등의 제도가 현실적인 방안으로 보인다. 2013년 한국민속학자대회의 전체 타이틀은 <실용과 성과주의 시대의 민속학>이다. 이 주제는 두 가지 상반된 논의가 예상된다. 실용과 성과주의 의 현 시대에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민속 의 대응이 한 측면의 논의이다. 지금까지 연구만 묵묵히 하면서, 현실에 대한 비판에서 끝날 것인지 적극적인 자구책을 찾아야 할 것인지 등 다양한 논의가 예상된다. 다음으로 국가의 많은 민속 관련 프로젝트들이 있는데 이러한 프로젝트들 또한 실용과 성과의 영향을 받게 되기도 한다. 이러면서 생기는 부끄러운 이면들이 존재한다. 이런 이면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 또한 담아 볼 수 있다. 박흥주 의 글 또한 후자적인 측면에서 <실용과 성과주의 시대의 민속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2. 어찌 대구뿐이랴, 무형문화재 무형문화재 제도 관련 문제는 너무 다양하며, 국가에서 지방자치단체까지 광범위하고 보편적이 다. 많이 제기되는 문제가 1) 심사의 전문성 또는 일관성, 2) 민원성 종목 심사, 3) 보존단체의 내부 갈등, 4) 개인, 단체종목 간의 차이, 5) 기예능 종목과 민속문화 종목 간의 차이, 6) 전승위기와 지정 3. 이 세상에 원형 이 있더냐 전통문화의 원형 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전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사업의 문화원형 사업에 서도 이 원형 이라는 용어는 시비거리였다. 다만 원형 을 축자적으로 해석하기보다 상징적인 의미 로 해석하여 받아들여 이해한다. 원형 을 어떻게 정의하고, 그 범위를 구축할 것인지는 사실 그 결 론 맺기를 기대하기란 힘들다. 학자마다 시기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어떤 측면에서 학자의 토론에 의하기 보다는 정책적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심사자가 누구로 구성되느냐에 따라 문화재 지정이 들쭉날쭉하다. 엄밀한 정통성, 계보 를 중시하는 학자로 구성된 때에는 지정이 보류된 문화재가 어느 해인가는 결국 지정된다. 전통예술 의 파이를 키우는 것이 전통예술을 위해서 좋으며, 완전 창작품이 아니고, 원형이란 따지고 보면 없는 것이라면 나름 의미있는 것이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즉, 심사위원의 구성에 의하 여 어떤 때는 되기도, 어떤 때는 안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런 기준은 심사위원이 가져야 할 것이 아니라, 정책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제 등이 그러한 예들이다. 너무도 다양한 문제로 인해 문화 전승의 순기능보다 역기능을 우려, 무형문화재의 해체를 주장하는 이 또한 많다. 박흥주의 논의에서는 해체인가 유지인가라는 결론은 유보하고, 지정의 가장 중요한 기준인 원형 을 어떻게 정의하고 영역 긋기 할 것인지, 그리고 그에 따른 재조사를 통해 새틀짜기를 제안하고 있다. 해체를 시키든, 새틀을 짜든 문제는 기존 제도에 대한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하다는 인식이다. 이런 인식에 이견은 없을 것 같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인식한다고 정책이 그렇게 바뀔 수는 없을 것 같다. 정책이란 전공자를 보기 보다 국민을 보고 수립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떤 문화재의 전승력이 약화되어 있으면, 전공자들은 지정해제 하는 것이 낫다 생각 한다. 하지만, 정책 입장에서는 지정해제 제도가 있지만 개인적 비리와 전승자가 없을 경우가 아니 면 지정해제를 하지 않고 있다. 문화재가 없어졌을 때 생기는 관리 소흘의 화살이 돌아오기도 하며, 없는 것보다는 그나마 미약하지만 있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당장 전승 약화의 문제로 4. 바이블(bible)이 되어버린 문화재지정보고서 요즘 무형문화재의 원형은 지정 당시 보고서 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단체의 전승 교육도 그 문 화재의 지정 당시 보고서에 준해서 하고 있고, 문화재의 모니터링 등도 그것에 준하여 잘 준수하고 있는 가를 본다. 그야말로 문화재 지정보고서 가 원형의 교본이 되고 있다. 학자의 연구에 따라 지 정 당시의 보고서 보다 고증된 사항들이 있을 수 있지만 보존회에서는 여전히 지정 당시의 보고서를 모범으로 삼아 그대로 전수하곤 한다. 보존회원 내에서도 나름 고증의 노력을 더하는 전수자가 있지 만, 때론 이들을 이단시 여기기도 한다. 문화재를 제대로 지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적인 고증의 작업들이 함께 이루어지고, 그것이 전승교육에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31 판소리를 활용한 지역관광자원 개발과 의미 5. 그래도 예능민속은 지원이라도 해주지 지금까지 무형문화재는 기예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민속학 범주로 보면 예능민속이다. 그러 나 민속에도 다양한 민속들이 존재하며, 그것의 보존 가치 또한 있다. 그런 측면에서 기예능을 가진 한 사람을 지정하는 기존 무형문화재 제도에서 관점을 이동하여 한국무형문화유산이라는 측면으로 이동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이번에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 유력하다는 김치와 김장문화 처럼 어떤 한 사람이 특정화된 문화가 아닌 지역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우리의 문화들도 소중한 문화유산임을 인식하며 이들에 대한 지원, 보호 정책들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민속학자대회 판소리를 활용한 지역관광자원 개발과 의미 최혜진 목원대학교 목차 1. 머리말 2. 판소리와 지역문화 3. 판소리 서사를 활용한 관광자원의 실제 4. 실용적 성과와 문제점 5. 맺음말 1. 머리말 판소리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모습을 갱신하며 살아남은 장르다. 그 근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판소리를 좋아하고 상품으로서 소비할 수 있도록 자기 모습을 변화하고자 한 노력이 있었다. 형성기 에는 판놀음의 일종으로 혹은 제의(서사무가)의 한 부분으로 시작된 판소리는 연창자와 고수 2인으 로 독립하여 오락과 유흥을 담당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창극으로 혹은 음반으로 모습을 바꾸어가 며 살아남았다. 1) 현대에 와서는 고급청중을 위한 전통예술이며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지위를 누리 고 있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판소리는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면서 지금의 다섯 바탕을 전 승하고 있는 것이다. 2) 1) 최동현, 문화변동과 판소리, 판소리연구 31(판소리학회, 2011) 참조. 2) 판소리의 문화적 재창조와 형성, 확장에 대해서는 다음 논의를 참고할 수 있다. 김용범, 인류무형문화유산 판소리의 원형 보존과 창조적 계승, 문화예술콘텐츠 4(한국문화콘텐츠학회, 2009), 5~35쪽. 최동현, 판소리 문화콘텐츠에 관한 연구, 판소리연구 22(판소리학회, 2006), 393~422쪽. 이명현, 다문화시대 판소리의 재인식과 문화적 가치 탐색, 다문화콘텐츠연구 12(중앙대문화콘텐츠기술연구원, 2012), 163~185쪽

32 판소리를 활용한 지역관광자원 개발과 의미 현재 판소리는 원형적 모습을 잃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재창조되고 확산되는 노력을 지 속하고 있다. 특히 문화콘텐츠 창작의 발달로 판소리는 다양한 장르 변형을 이룩하며 지금도 계속 그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판소리와 대중의 거리는 여전히 멀고 대중성의 확보는 아직 요원하다는 진단 3) 은 많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전통문화의 경우 대부분 비영 리 예술활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배경에는 전통성, 교육성, 공익성, 실험성, 재정적 취약성 등이 자리잡고 있기 4) 때문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현실과의 괴리에도 불구하고 민속예술의 한 영역으로 판소리의 실용적 노 력과 성과를 진단해보고자 한다. 판소리가 문화의 한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고 우리 전통예술의 중요 한 부분으로 인식이 되기 위해서는 비영리 예술이라도 상업적 경쟁력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타당 한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판소리의 보존, 전승은 결국 향유층의 확대 문제와 연결되 어 있다 그리고 대중화를 위해서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필요로 한다. 5) 이와 함께 판소리 연구의 미래가 실용론, 문화론, 인간론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 6) 은 생성, 발전해가는 판소리에 대한 책임을 연구자도 함께 가져야 함을 암시한다. 판소리의 재창조와 확산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이유이다. 이를 위해 본고에서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관광자원으로서의 판소리이다. 특히 판소리 유물 유적 이나 명창관련 유적지가 아닌, 순수하게 관광자원으로 기획된 지역문화콘텐츠에 관심을 가지고 살 펴보려고 한다. 1990년대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판소리 관련 마을과 공원, 축제가 그 주요 관심대상 이다. 이를 위해 필자는 2012년 1월부터 2013년 8월까지 태안, 남원, 곡성, 함양 등에 대한 현지조사 를 수행하여 최대한 현재적 관점에서 이를 다루고자 하였다. 이외에 미처 답사를 하지 못한 분야에 대해서는 정보검색 등을 통해 보충하였음을 밝힌다. 본 논의를 위해 우선 판소리와 지역문화와의 연관성을 살펴보고 판소리 서사를 활용한 관광자원 개발 현황에 대해 고찰하도록 한다. 이를 통해 판소리의 실용적 성과와 문제점을 짚어봄으로써 미래 판소리 전승의 향방에 대해 제언하는 것이 목적이다. 2. 판소리와 지역문화 지역문화의 전통이란 지역의 생활양식 또는 행동동기를 지역주민들의 자각과 긍지를 갖고 전승시 켜 가는 것이며, 지역전통문화는 당해 지역에 뿌리를 내린 지역 색이 넘치는 생활문화의 부흥과 창 조가 그 기반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지역문화란 시간과 공간의 구상을 실현시키고 주체적이고 적 극적인 참여와 활동을 유발시키는 기반이 되는 것 이다. 이러한 지역문화는 당해 지역사회를 구성하 는 지역주민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생명력을 유지하며, 그 자체가 생활의 중심이 된다. 또한 자신 들의 생활을 여과 없이 진솔하게 반영하며, 희로애락과 관련된 모든 구성원들의 삶의 모습을 역사적 으로 농축하고 있어 지역주민 모두가 주체적, 자발적으로 참가하고 창조해가는 일상의 생활 형태이 기도 하다. 7) 판소리가 생긴 이면에는 이러한 그 지역의 문화와 관습, 설화가 반영되어 있다. 다양한 레파토리 의 판소리는 또한 다양한 지역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역적 연관성을 문화관광자원 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점차 많아지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남원이 그 사업의 중심지이자 대표격이라 하겠는데, 다음과 같은 논의가 저간의 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지방자체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1995년 이후 각 지역에서는 그 지역만의 독자성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문화상품 개발에 치중하기 시작하면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양적, 질적 변모를 보이기 시작한다. 각종 축제가 난립하고 작품 속의 인물을 실제 인물로 비정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되 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남원도 예외가 아니어서 판소리를 중심으 로 한 국악에 대한 지역적 관심을 이전에 비할 바 없이 매우 강하게 분출되고 있다. 남원에서 판소리 를 중심으로 하여 국악의 외연을 넓히고 <춘향전>과 <흥부전>뿐만 아니라 <변강쇠가>의 고향임을 주장함으로써, 판소리 동편제의 탯자리 이자 판소리문학의 배경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려고 노력 하는 것이 그 직접적 증거이다. 8) 남원이 주도적이고 공격적으로 판소리적 연관성을 주요 테마로 살리고 있지만, 여타의 여러 지역 에서도 역시 판소리 서사를 활용한 관광자원의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나의 서사 가 서로 다른 지역에서 관광자원으로 개발되어 원조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지역문화콘텐츠의 발 굴이라는 차원에서 스토리텔링을 하기 좋은 판소리 서사가 활용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는 이미 대중 화된 이야기를 실제로 체험케 한다는 측면에서 관광자원으로서 판소리의 효용가치는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판소리는 이미 그 형태가 전국적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각 지역의 문화를 풍요롭게 장식하 고 있었다. 그리고 각 지역에 존재하던 판소리적 형태는 선행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각지역의 음악과 결합하여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9) 이러한 판소리의 발생 환경과 전승 내용, 그 가치와 의미가 주로 관광자원으로 주목받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명진, 판소리 콘텐츠의 애니메이션화 연구, 판소리연구 27(판소리학회, 2009), 275~309쪽. 3) 이태화, 판소리에 대한 엇갈린 인식과 대중화의 향방, 판소리연구 35(판소리학회, 2013), 154~161쪽. 4) 박정경, 판소리 문화관광 프로그램 현황과 과제, 판소리연구 25(판소리학회, 2008), 52쪽. 5) 최혜진, 판소리 대중화를 위한 문화콘텐츠 전략, 비교민속학 27(비교민속학회, 2004), 540쪽. 6) 류수열, 현대사회와 판소리 연구, 구비문학연구 15(한국구비문학회, 2002), 139~163쪽. 7) 박진규 정철상, 지역문화와 축제 (글누림, 2005), 17쪽. 8) 김기형, 남원지역과 판소리 문화, 구비문학연구 20(한국구비문학회, 2005), 156쪽. 9) 정병헌, 판소리 전승과 공간적 배경의 관계 연구, 판소리연구 25(판소리학회, 2008), 75쪽

33 판소리를 활용한 지역관광자원 개발과 의미 현재 판소리 서사를 활용하여 지역문화관광자원으로 개발한 곳은 남원을 비롯 곡성, 함양, 태안, 백령도, 경남 사천시 등이다. 이러한 개발은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판소리 문화의 실용과 확산 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긍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전승판소리 뿐만이 아니라 실창판소리의 서사 또한 여러 지역과 연관되어 있느니만큼 앞으로의 개발 가능성도 존재하고 있다고 하겠다. 3. 판소리 서사를 활용한 관광자원의 실제 1) 춘향 서사와 남원 남원은 그 자체가 춘향의 도시라 할 만큼 춘향의 서사를 브랜드화하고 있다. 춘향골 이라는 브랜 드네임이 시 전역 곳곳에 사용되고 있다. 남원시가 의욕적으로 조성한 춘향테마파크 는 관광자원으 로서 대표적인 곳이다. 이곳은 1995년 어현동 관광단지 입구 1만여m2에 조성되었는데, 국립민속국악 원과 춘향문화예술회관이 하나의 단지 안에 있어 전통문화 체험과 국악 탐방코스로서 매우 시너지 효과가 높다. 테마파크 내의 시설이나 조형물도 매우 정갈하고 수준있게 구성되어 있어 내,외국인 관광객에게 관광지로 손색이 없다. 테마파크는 춘향전 서사를 따라 만남의 장, 맹약의 장, 사랑 이별의 장, 시련의 장, 축제의 장 으로 구성되어 실물 조형과 건축물 등을 보며 자연스레 이야기를 따라가도록 구성해놓았고, 곳곳에 체험시설을 마련해 놓았다. 특히 마지막 축제의 장을 지나면서 소 공연장에서 판소리를 듣고 배울 수 있는 상설 공연하고, 나가는 길을 통해 간단한 기념품을 구입할 수 있게 해놓았다. 테마파크를 나가면 그 동선이 식당거리를 지나도록 연결해놓은 점도 지역경제를 위해 좋은 아이 디어라고 할 수 있다. 입장료는 성인 3000원이어서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한편 광한루원 은 춘향전의 배경이 되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개발되고 관광지가 되었던 곳이다. 광한루는 1963년 보물 제 281호로 지 정되었고 광한루원이 1983년 사적 제 303호로 지정되면서 본격적으로 관광자원으로서의 개 발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1985년 서쪽 경계 를 확장하고 월매집, 춘향관, 서문 등을 신축 그림 3 광한루원 내 춘향사당 하였으며, 지속적인 개발과 보수에 들어갔다. 2008년 사적에서 해제되고 명승 제33호로 지 정을 받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10) 이곳에는 광한루는 물론 춘향영정이 있는 춘향사당과 월매집, 춘향관 등을 따로 지어 춘 향전에 대한 복합적 체험과 이해를 돕고 있다. 또한 광한루원 일대에 그네 체험이라든지 복 식 체험을 하는 곳을 마련하고, 연중 상시적인 공연과 이벤트가 벌어지기도 한다. 광한루원 그림 4 광한루원 출구 쪽 기념품점 거리 입장료는 성인 2500원으로 저렴한 편이다. 광 한루 구경을 마친 관람객은 나오는 길을 통해 기념품 상점 거리를 거치도록 이동경로를 마련해놓은 점은 매우 특징적이다. 기념품 상점이 매우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고, 친절하다. 구비해놓은 기념품들은 주로 남원지역 특산품인데 춘향관련 상 품 개발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1990년에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 육모정 앞에 춘향묘역을 조성함으로써 춘 향문화를 선양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명실공히 남원은 거대한 춘향의 도시인 것이다. 춘향터널을 지 나 오리정, 춘향버선발 등의 지역을 곳곳에 배치해놓으며 춘향을 상징화하였다. 지역축제로서의 춘향제 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1931년 이래 2013년 현재 83회를 맞고 있으 며, 매년 4-5월에 열린다. 2010년부터는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3년 연속 우수축제로 선정되었다. 1986년부터 사단법인 춘향문화선양회의 발족으로 보다 체계적이고 수준높은 행사가 되고 있다. 5일 동안 열리는 행사들을 일별하면 다음과 같다. 춘향국악대전/춘향묘 참배/사랑등불 행렬/전국남녀시조경창대회/민속씨름대회/춘향제향/ 춘향어울림마당/전통혼례/판소리춘향가연창/춘향길놀이/창극 춘향전/명인명창 국악대향연/ 전국궁도대회/춘향사랑그림그리기/춘향선발대회/춘향명창 퍼레이드 그림 1 춘향촌 입구 그림 2 춘향테마파크 내 관아 재현 10) 광한루원 홈페이지 참조

34 판소리를 활용한 지역관광자원 개발과 의미 <상설행사> 장원주 합환주체험/사랑체험부스/전국춘향사진촬영대회/전통문화작품전시/남원특산물판매홍 보마당/미꾸리체험/사랑등 띄우기/춘향시대속으로/춘향그네체험 대회 11) 남원의 춘향제는 그 명성에 걸맞게 다양한 춘향문화 관련 행사를 진행한다. 애초에 춘향제는 춘향 에 대한 제사를 위주로 진행되었지만, 점차 축제로 변화 발전하였고, 긴 역사 속에서 다양한 행사와 체험, 이벤트 등이 첨가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많은 지역의 축제가 정체성 없이 산만하게 운영 되는 데 비해 춘향제는 매우 특성화된 프로그램으로 그 정체성을 확보하고 있다. 또한 춘향제 운영 기간 중 남원 전역에서 행사를 진행함으로써 지역주민들의 참가와 관심을 유도하고 있는 점도 중요 하다. 밝아졌다고 하는 내용이다. 추론하여, 서기 300년 곡성땅은 철의 주산지였으며, 고대국가 형성의 중요 한 자원이었던 철을 확보하기 위해 섬진강을 따라 중국 상인과 무역선이 드나드는 과정에서 곡성의 효녀가 중국 양자강 어귀의 보타섬으로 건너가 귀인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에 따라 곡성군이 심청 의 고장으로 떠오르면서 곡성군은 심청이 실천했던 아름다운 우리의 전통문화 효 사상을 계승 발전시 키고자 전통한옥으로 된 심청이야기 마을을 조성하게 되었다. 즉 효녀 심청의 이야기가 있는 마을을 만든 것이다. 심청이야기마을 이전에는 쇠쟁이 마을이라고 불리었으며, 예로부터 철이 많이 생산되었 다고 알려져 있다. 12) 곡성군은 관음사 연기설화를 바탕으로 효녀 심청의 고장이 곡성이라는 점을 내세우며 효 를 테마 로 한 다양한 관광자원을 개발하고 있다. 특히 심청이야기마을 은 마을 단위의 숙박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심청연수원 1동, 한옥 펜션 18동(기와 6동, 초가 12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른 숙박에 비해 매우 저렴하여 인기가 높다. 이 마을에는 심청 이야기를 테마로 한 다양한 조형물과 초가집 체험이라는 특수한 숙박을 통해 색다른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숙박시설은 매우 우수하며 주변경관 도 훌륭하고 근처 곡성기차마을과 연계할 수 있어서 이용률이 높다. 그림 5 춘향제 홈페이지 그림 6 춘향 길놀이 2. 심청 서사와 곡성/백령도 심청 이야기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한 곡성의 사례를 보고자 한다. 먼저 전남 곡성은 심청이야기마 을 을 조성하여 관광단지화 하였다. 곡성군청은 이 마을을 조성하게 된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 고 있다. KBS 역사스페셜 역사추적 심청의 바닷길 을 통해서 소개된 바와 같이 관음사 연기설화는 1700년 경 장님 아버지를 둔 곡성의 효녀가 중국으로 건너가 진나라 황제의 황후가 되었는데, 아버지를 그리 워하며 관음상을 만들어 고국으로 보내고, 아버지는 딸과 헤어지는 것이 슬퍼 흘린 눈물때문에 눈이 그림 7 심청이야기마을 입구 그림 8 마을 내 우물가 젖동냥 조형 한편 심청전의 근원설화 중 하나로 알려진 관음사 연기설화는 곡성군 내 관음사 경전에 잘 설명 되어 있다. 관음사로 가는 길목에 심청효문화센터(곡성군 오산면 선세리 702)와 심청공원 역시 관광 자원으로 개발, 사용되고 있다. 심청효문화센터 는 관음사와 연계하여 효 문화 교육공간을 조성하 고 체험학습과 숙박을 할 수 있도록 꾸며놓은 공간이다. 기존의 폐교를 활용하여 체험학습공간과 박물관을 조성하였다. 이곳의 교육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11) 남원 춘향제 홈페이지 참조 12) 곡성군청 홈페이지 참조

35 판소리를 활용한 지역관광자원 개발과 의미 알음알이 심청(여성가족부인증 제854) : 심청전과 관음사 연기설화 연관성 교육 내 안의 심청 : 효의 실천 및 적용을 위한 청소년 대상 교육 효 종주 탐험 : 관내 효 실천 마을과 가정 견학 효 사진(아트타일) : 부모님의 사진으로 아트타일을 만들고, 부모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느낌 효 예절교육 : 관혼상제, 절, 인사법(공수법), 다도예절 등 교육 효 체험교육 : 효 백일장, 효 촛불의식 등 효 인성교육 : 한시짓기, 한국화그리기, 다문화 효체험 등 농 촌 체 험 : 인근 농촌체험마을을 활용 농사 체험, 천연염색, 손두부 만들기 등 체험 삼강원풍물패/심청골문화한마당 14) 심청효문화대축제는 5일 동안 매우 다채로운 행사가 열린다. 특히 지역의 어르신을 모시고 하는 경로잔치라든가 심봉사 체험, 심청 마당극, 창극 등은 심청 이야기와 연관된 행사로 심청에 대한 주제적 행사라고 할 수 있다. 섬진강 기차마을과의 연계는 물론 곡성에서 열리는 세계 장미축제, 목화축제와 코스모스축제와의 연장선 속에서 축제가 이어지고 있다. 사 물 놀 이 : 사물놀이 교육 및 합주를 통한 전통 문화 체험 도 예 체 험 : 간단한 다기 제작 및 집단별 퍼즐 도예 체험 문화유적탐방 : 관내 문화유적 탐방을 통한 선조의 얼을 느낌 13) 그림 12 심청효문화축제 한편 심청 서사와 연관하여 백령도(인천 옹진군)는 1995년 8월부터 한국교원대 최원식 교수 등에 그림 9 효문화센터 입구 그림 10 효문화센터 내 교육관 박물관 그림 11 심청공원 의해 인당수가 백령도 앞바다라는 점이 고증되면서 개발된 곳이다. 이곳에 있는 심청각은 1999년 10월에 완공되었으며 전시관과 휴게소를 갖추고 있다. 아울러 심청각 마당에는 가천문화재단에서 기증한 심청 동상을 세워서 기리고 있다. 이밖에 심청효심동산과 심청공원 등이 관음사 가는 길목 도로에 조성되어 있다. 이들 공원에는 주로 장승 위주의 조형물이 있는데, 미관상 도로 옆 이정표 역할이 주가 되고 사람들이 걷거나 쉬는 등의 휴게소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올해로 제13회를 맞는 곡성 심청효문화대축제 는 심청 테마를 중심으로 한 지역축제로 매년 10월에 5일간 개최된다. 섬진강 기차마을에서 개최되어 관광연계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축제 중에 개회되는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효녀심청건강체조경연대회/향토예술공연/교류협력도시초청공연/아시아인한마당/황후마마전국 주부가요열창/구곡순담장수벨트양로연의/KSC군민노래자랑/요들송공연/전국어린이가요제/마당극 황후마마 심청전 품바공연/심청창극/7080콘서트/보성문화원판소리공연/심청골청소년어울마당/ 그림 13 심청각 그림 14 효녀심청상 13) 곡성군청 홈페이지 참조 14) 곡성군청 홈페이지 프로그램 일정 참조

36 판소리를 활용한 지역관광자원 개발과 의미 3. 흥보 서사와 남원 현재 남원시 아영면 상성마을과 하성마을은 흥부 마을로 조성되어 있다. 흥부 관련 조형물과 공 원, 흥부(박춘보) 무덤, 흥부생가터 등이 곳곳에 조성되어 있고, 산책로를 따라 답사할 수 있도록 길이 잘 닦여있다. 이 마을에는 오래 전부터 박춘보 설화가 전해져 오는데 흥부전과 내용이 유사하 다는 점에서 흥부마을로 지목되어 개발되었다. 1992년 경희대 민속학연구소의 주관으로 흥부 출생 지가 인월면 성산리로, 발복지가 야영면 성리로 고증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1993년부터 흥부제를 개최하고 있다. 15) 흥부마을 일대를 모두 돌게 된다. 흥부길은 성리 마을을 중심으로 10km 가량 펼쳐진 길로 약 3시간 코스이다. 흥부전의 이야기를 따라 걸으며 백두대간과 지리산, 아영면을 둘러보게 되어 있으며, 2012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문화생태탐방로 로 지정이 되었다. 지역축제인 흥부제 는 1993년 시작하여 매년 음력 9월 9일 남원시와 아영면 일대에서 2일간 개최 된다. 올해로 21회를 맞고 있다. 봄에 개최되는 춘향제와 함께 남원의 또 하나의 향토문화축제이다. 흥부제의 주요 행사는 다음과 같다. 흥부전 독후감 대회/창극 흥부와 놀부/흥부놀부 백일장/흥부마을 터울림/흥부골남원농악대회/흥 부 놀부상징 그림그리기 대회/전통회혼례/흥부사랑 떡 나눔(4대종단)/광대전(MBC)/판소리 서바이 벌 경연/inet-TV 그리운 가요/퓨전국악,창극/흥부체험마당 (짚풀공예 전시체험)/흥부주제체험/남원 예술제/예술단체회원 공연/흥부놀부 어울림경연 한마당 17) 그림 15 흥부길 안내판 그림 16 박춘보묘 안내판 그림 17 아영면 성리의 발복지 성리에는 흥부전 관련 지명이 마을 곳곳에 남아있다. 허기재, 고둔터, 새금모퉁이, 흰묵배미 등이 그것이다. 허기재 는 허기에 지쳐 쓰러진 흥부를 마을 사람들이 도운 고개라고 전해진다. 고둔터 는 고승이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 흥부에게 잡아 준 명당으로, 흥부는 이곳에서 제비를 고쳐주어 발복 집터가 되었다고 한다. 사금모퉁이 는 사금꾼들이 금을 채취하던 곳으로, 흥부가 이곳에서 금을 주 워 부자가 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한편, 흰죽배미 란 장소는 흥부가 부농이 된 후 은인들에게 보답으로 주었다는 논으로 전해진다. 흥부아내가 이웃들이 준 흰죽을 먹고 살아나서 흰죽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노디막거리 는 흥부가 부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부가 화초장을 지고 건넜다 는 개울로 추정된다. 16) 이렇게 흥부의 서사와 연관된 지명의 유래를 읽어가면서 흥부길을 걷다보면 15) 남원시 아영면사무소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력을 소개하고 있다. 아영면 성리에서는 춘보 라는 분의 이름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주민들은 이 춘보 를 흥보의 원형적 인물로 상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는 춘보를 말로만 기리는 것이 아니라 마을제사로 춘보제( 春 甫 祭 ) 또는 춘보망제 ( 春 甫 望 祭 ) 를 옛날부터 지내 내려왔다고 한다. 이 제사는 1940년 무렵 중단되었다가 한 반세기만에 1992년부터 부활되어 계속 시행되고 있다. 이 제사는 중요한 고증적 가치가 있다.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실존인물이었음을 증명해주기 때문이 다. 이 제사가 부활된 계기는 아영면 성리에서 1991년 12월에 임세강 비석이 발견되어 그 사실이 이듬해 1992년 1월에 TV에 소개되었다. 그것을 현재 장수군 산서면 하월리에 거주하는 이 마을 출신 김명수( 金 命 受, 1911년생)씨가 우연히 보고 옛날에 춘보망제를 지내던 일이 생각이 나 고향에 살고 있는 동생(김인곤)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16) 소설속의 흥부 朴 春 甫 (박춘보) 마을을 찾아서, 문화저널21, 참조. 그림 18 흥부제 홈페이지 독후감, 백일장, 그림그리기대회 등 흥부전과 연관된 학생 행사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는 춘향 제와 차별화된 전략으로 우애 나눔 보은 행운 을 주제로 하는 교훈적 가치관을 전파하기 위한 방안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창극과 판소리 서바이벌 등의 판소리 관련 행사가 적고, 이벤트와 체험행사가 비교적 많은 것으로 보인다. 17) 흥부제 홈페이지 참조

37 판소리를 활용한 지역관광자원 개발과 의미 4. 별주부(토끼) 서사와 태안/사천 별주부 마을과 관련되어 관광자원으로 개발되고 있는 곳은 충남 태안군과 경남 사천시이다. 먼저 개발이 된 곳은 충남 태안군 원청리 청포대해수욕장 인근 별주부 마을이다. 이 마을은 자라가 용왕 의 명을 받고 토끼의 생간을 구하기 위해 처음으로 육지에 올라온 용새골 을 비롯하여 유혹에 넘어 간 토끼가 자라의 등에 업혀 수궁으로 들어간 후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간을 떼어 청산녹수 맑은 샘에 씻어 감추어 놓고 왔다는 묘샘, 구사일생으로 육지에 돌아온 토끼가 간을 떼어 놓고 다니는 짐승이 어디 있느냐며 자라를 놀려댄 후 사라진 노루미재, 죽어있던 자라가 바위로 변한 자라바위 (덕바위) 등의 지명이 있는 마을이다. 18) 이 마을은 일찍이 별주부전의 무대로 알려지며 마을이름을 상표로 등록했고, 이후 태안군의 지원으로 가공식품, 야채, 숙박업 등 180여개의 상품에 별주부마 을 상표를 이용하고 있다. 19) 또한 이 마을은 농 산물 판매와 체험마을 조성 등으로 2007년부터 농촌관광마을로 집중 개발되었다. 2009년에는 독살문화관 별주부센터를 완공하여 관광생태마 을로도 주목받고 있다. 경남 사천시와 원조논쟁 을 벌이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일찍 개발되고 운 영한 덕에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곳에서는 해마다 정월대보름에 용왕제를 올림으 로써 지역축제로서의 역할도 감당하고 있다. 그림 19 자라바위 앞 조형물 한편 토끼전의 또다른 원조로 최근 주목받고 있는 경남 사천시 비토섬 일대는 현재 경남에서 해양관광단지로 개발을 하면서 부상하고 있다. 경남도는 2011년 서포면 비토리 일대를 테마형 해양 관광지로 조성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비 토관광지는 2016년까지 공공자금 402억 원, 민 간자본 368억 원 등 모두 770억 원을 투입해 용 궁호텔과 별주부전 문학체험관, 토끼와 거북이 그림 22 사천시 비토섬 입구의 조형물 집, 애니메이션센터 등을 갖춘 해양체험 테마공 간으로 개발된다고 한다. 20) 비토관광지는 한려 해상국립공원의 빼어난 자연경관을 갖추고 있는 곳으로 시너지 효과를 누릴 것으로 기대된다. 토끼전과 관련하여 비토섬 월등도 등에 내려 오는 전설은 다음과 같다. 서포면 비토, 선전리 선창과 자혜리 돌끝을 생 활터전으로 살아가는 꾀 많은 토끼부부가 행복 그림 23 비토섬 별주부 전설 표지판 하게 살아가던 중 남편 토끼가 용궁에서 온 별주 부(거북)의 감언이설에 속아 용궁으로 가게 된다. 용궁에 도착하니 용왕은 병들어 있고 오직 토끼의 생간이 신효하다는 의원의 처방에 따라 자신이 잡혀왔음을 알게 된 토끼는 꾀를 내어 한 달 중 달이 커지는 선보름이 되면 간을 꺼내어 말리는데 지금이 음력 15일이라 월등도 산중턱 계수나무에 걸어두고 왔다고 거짓말을 한다. 이에 용왕은 토끼 그림 20 별주부마을센터 그림 21 별주부마을 용왕제 의 말을 믿고 다시 육지로 데려다 주라고 별주부에게 명한다. 월등도 앞바다에 당도한 토끼는 달빛에 반사된 육지를 보고 성급히 뛰어내리다 바닷물에 떨어져 죽고 말았으며, 그 자리에 토끼 모양의 섬이 생겨났다.(현재의 토끼섬) 토끼를 놓친 별주부는 용왕으 로부터 벌받을 것을 걱정하여 용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거북 모양의 섬이 되었다.(현재 의 거북섬) 한편 부인 토끼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다 바위 끝에서 떨어져 죽어 돌 끝 앞에 있는 섬(현재의 목섬)이 되었다. 현재의 이곳 주민들은 월등도를 돌당섬이라 부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토끼가 용궁에 잡혀간 후 돌아와 처음 당도한 곳이라는 뜻에서 돌아오다 또는 당도하다 의 첫머리 글자를 따서 돌당섬이라 부르고 있다. 21) 18) 별주부마을 홈페이지 19) 태안 별주부 마을 상표로 등록, 조선일보, ) 별주부전 고향 사천 비토섬, 해양형 관광지로 거듭난다 국제신문, ) 사천시청 홈페이지 사진 참조

38 판소리를 활용한 지역관광자원 개발과 의미 사천의 비토섬 일대 관광자원은 태안과는 또다른 볼거리를 선사해줄 것으로 기대되고, 특히 대규 모로 개발되는 만큼 해양문화산업과 판소리 서사가 결합되는 양상을 새롭게 보여줄 것으로 본다. 더욱이 사천의 토끼전 서사는 판소리와 달리 매우 비극적으로 끝나고 있어 새로운 이야기의 파생이 라는 점에서도 매우 흥미롭다. 5. 변강쇠 서사와 남원/함양 그림 25 장승공원 내 조형물 그림 26 주막터 그림 27 변강쇠와 옹녀의 무덤 남원의 백장골 계곡은 변강쇠가 옹녀를 만나 운우지정( 雲 雨 之 情 )을 나누었던 전설이 전하는 곳이다. 변강쇠 백장공원 은 <변강쇠 타령>을 상징화한 공원이다. 백장골이라는 명칭 은 변강쇠가 백장골 곳곳에 있던 장승들을 뽑아 땔감으로 사용하자 크게 노한 대방장승이 팔도의 백장승 신( 神 )을 모 아 변강쇠에게 벌을 내린 데서 유래한다. 1998년 남원문화 원에서는 남원 지역 읍 면 동에 대한 상징화 작업의 일환 으로, 2500만원의 예산을 들여 쌈지공원 조성사업을 시작하 그림 24 백장공원 내 조형물 였다. 이에 따라 제1차 쌈지공원사업으로 1998년 5월부터 9 월 14일까지 득독골과 옹녀탕, 음양바위, 태아바위, 선녀소 와 폭포 등의 명칭이 전해 오는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백장암계곡에 변강쇠 쌈지공원을 건립하였다. 2000년 남원시에서는 변강쇠 쌈지공원 주변에 축대를 쌓고 정자를 세우는 등 공원 시설을 보강하여 변강쇠 백장공원으로 정비하였다. 변강쇠 백장공원은 정자, 변강쇠와 옹녀가 포옹하는 모습의 대리 석 상과 팔도의 장승들, 솟대, 기이한 형태의 바위들, 바위에 대한 안내문, 공원비 등의 조형물로 구성되어 있다. 22) 한편 경남 함양군 마천면 지리산제일문 앞에 조성된 지리산조망공원은 일대에 장승공원을 세워 변강쇠가와의 관련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 일대는 변강쇠와 옹녀가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던 곳으로 여겨지면서 장승공원이 건립되었다. 지리산조망공원 아래로 마천면 오도재를 오르는 길목의 월평리가 변강쇠의 집이 있던 곳으로 추 정된다. 그곳에서 조금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변강쇠와 옹녀의 무덤이 있는 주막터가 나오는데, 이곳 은 표지만 있을 뿐 관리가 되지 않고 현재는 캠핑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남원은 팔도장승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였던 곳으로, 함양은 변강쇠와 옹녀가 살았던 지리산 자락 으로서 의미가 있는 곳인데, 지역적으로는 인접한 곳이다. 남원이 상징적 의미가 크다면 함양은 실 증적 의미가 더 있는 곳으로 볼 수 있겠다. 4. 실용적 성과와 문제점 판소리 서사와 관련된 관광자원의 개발과 활용은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동시에 지역적 정체성을 확보하고 경제적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또한 다른 문화콘텐츠 산업과는 달리 지역에 연고를 두고, 지역민이 사는 터전에서 지속적이고 상시적이며, 물질적인 차원에서 언제나 찾 아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마을과 축제가 연속성을 띠면서 활용, 발전되고 여기서 나아가 체험, 교육, 생태를 표방하는 관광으로 변화하고 있는 점도 관광객들을 유도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다. 춘향, 흥보, 변강쇠의 서사를 활용하는 남원의 경우 지역적 특성상 판소리와 매우 관련이 깊고, 캐릭터의 활용을 통해 판소리의 고장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춘향 캐릭터의 경우 남원 의 브랜드네임이 되고 있는 동시에 모든 상표, 광고 등에서 춘향의 명칭이 보편적으로 사용될 만큼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있다. 곡성 역시 심청을 브랜드네임화 하고 지역생산품에 심청의 명칭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심청의 고장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홍보하고 있다. 23) 그러나 과도한 의욕으로 투자 대비 관광상품으로서의 역할을 많이 하지 못하는 곳도 존재한다. 흥부마을이 단적인 예이다. 그곳은 곳곳에 흥부길을 조성하고, 생가, 묘역, 공원 등등을 개발, 건축해 놓았지만 제대로 관리 운영되고 있지 못하다. 더욱이 마을입구에 상품판매나 홍보를 위해 지어진 우애관 은 텅빈 공간으로서 제대로 쓰여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흥부전만의 스토리텔링에 너무 의존하였기 때문이다. 1995년 어현동 관광단지입구 1만여m2에 조성된 춘향테마파크는 한 때 이벤트 부족 등으로 관람객이 매년 감소하는 등 애물단지로 전락했었다. 24) 그러나 민간위탁을 맡긴 이후 관람객이 증가하여 수입도 증대되는 추세라고 한다. 변강쇠, 옹녀 관련 관광자원으로 개발된 백장공 원이나 지리산 장승공원 등은 컨셉이 겹쳐서 좋지 않다. 그리고 공원 관람만을 위해 관광객이 오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다른 관광지를 방문하면서 들르는 곳이니 만큼 주변 관광지와 연계해서 개발하 22) 참조. 23) 심청주유소, 심청식당, 심청쌀, 심청효심의 동산, 심청볼링장 등. 24) 남원 춘향테마파크 관광명소로 재도약 연합뉴스

39 판소리를 활용한 지역관광자원 개발과 의미 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도로 주변에 있기 때문에 잠깐 쉬거나 내려서 사진을 찍기 어렵고, 휴게 시설 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에 비해 별주부마을의 경우는 스토리의 비중은 작은 대신 어촌체험이나 농산물 판매, 해변의 숙박 등 매우 실속있는 부가가치 상품을 많이 개발하고 있다. 일찌감치 별주부마을 을 상표등록함 으로써 대외인지도를 높이고, 판소리 서사와는 별개로 마을의 특성을 잘 접목하여 상품 판매와 관광 산업을 병행하고 있는 것이다. 심청이야기마을의 경우 실제 주민들이 사는 터전은 아니지만 숙박시 설을 심청전과 연관지어 개발함으로써 매우 좋은 인상을 주고 있다. 실제 마을처럼 꾸며진 동네에서 외관은 초가집이지만 현대적인 내부시설에 만족하고, 조용하고 친절한 관리에 감동하며 마을을 나 서게 된다. 산자락에 위치하여 주변경관이 매우좋고 심청의 서사 관련 테마 조형물을 적절히 잘 활 용한 점도 눈에 띈다. 또한 군에서 운영하기 때문에 이용료가 매우 저렴하다는 점도 장점이다. 축제의 경우 춘향제는 이미 우수축제로 선정될 만큼 매우 안정적이고 역사적인 축제로서의 위상 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심청효문화축제와 흥부제는 그 내용에 걸맞게 진행되는지 의문이고, 명칭에 비해 행사의 진행은 매우 부실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심청효문화축제의 경우 5일 동안이나 진행되 지만 실제 테마와 관련된 행사는 매우 적고 여타의 행사들과 별반 차이없는 행사가 나열되고 있 다. 25) 흥부제 역시 국악행사의 나열보다는 나눔이나 가족문화를 선양하는 내용이 더 많아지는 것이 유용하리라 생각된다. 별주부마을의 용왕제가 하루이지만 지역주민의 화합과 참여에 의해 이루어져 알차게 이루어진다는 점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 판소리 관련 서사물을 활용하여 지역의 인지도를 높이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은 우리의 전 통문화를 재창조한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더욱이 판소리가 향유층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적 층된 예술이라는 점에서 이야기를 현실로 되살리고 우리 삶 속에 밀착시키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야기 속의 허구를 지나치게 현실에서 꿰어맞추려고 하는 의도는 상상력을 저해하는 요 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더욱이 설화를 바탕으로 재해석되는 원조논쟁은 시민들에게 혼란을 끼치는 폐해를 낳기도 한다. 또한 판소리가 과거에는 전국적으로 인기가 있었고, 그 유래도 다양하며, 여러 지역과 연관성이 있다는 점에서 좀더 폭넓은 시각도 필요하다. 판소리가 전라도 지역만의 것이 아니듯 강릉매화타령의 강릉, 옹고집전의 안동, 배비장전의 제주, 무숙이타령의 서울 등등 지역관광자원으로의 확산도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관광자원의 발굴은 판 소리의 확산과 관심에 매우 유용할 것으로 본다. 5. 맺음말 판소리는 언어 및 예술 상징 음악부문에서 아리랑 등과 함께 100대 민족문화상징으로 선정된 26) 우리의 전통문화이자 세계의 문화유산이다. 판소리 세계화를 위해 찾아가는 판소리가 아니라 찾아 오는 판소리를 만들기 위한 방안을 전략적으로 검토해야 할 때이다. 이를 위해 판소리를 원형으로 하는 다양한 문화상품의 개발이 중요하고, 관광자원의 개발 역시 중요하다. 그리고 관광자원의 개발 에서 나아가 여러 지역이 연계된 관광코스를 개발하고 상업화할 수 있는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 여 타의 관광자원이 그러하듯이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가 확보되어야 하고 여기에 체험이나 교육, 힐링 등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부여할 수 있는 정체성도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정책적 지원도 필요한데, 27) 관광자원으로서의 판소리 개발과 투자에도 적극 나서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관광은 체험이기 때문에 직접 보고 걷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판소리 관련 관광 자원은 판소리에 대한 의미를 공유하고 확산하는데 기여해야 한다. 곧 판소리가 우리 공동의 가치를 표상화하는 상징 문화로 이해 28) 되므로 관광을 통해 판소리적 가치를 이해, 습득, 체험하고 가도록 해야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 대중화된 판소리적 접근 문법을 개발하고, 문화콘텐츠적 요소를 적극 활용해야 할 필요도 있다. 판소리 서사는 긴 역사를 통해 검증된 인간적 가치를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인의 관심을 받을 만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문화산업에서 이제는 관광자원으로의 탐색이 필요하며, 이러한 노 력은 판소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더욱 촉발하게 만들 수 있다. 관광자원의 발굴과 가치의 습득이 라는 두 가지 이익을 위해 판소리 관광자원의 개발이 좀더 재화를 획득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은 지금 현재 진행중이다. 25) 남도지역의 축제만 해도 매년 45개가 개최된다고 하는 보고가 있다. 판소리 관련 축제의 차별성이 요구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표인주, 남도 지역축제의 현황과 특징, 중앙민속학 11(중앙대한국문화유산연구소, 2006), 143~165쪽. 26) 김영민, 판소리의 국가 문화브랜드화 전략 연구, 문화예술콘텐츠 3(한국문화콘텐츠학회, 2009), 9쪽. 27) 정책지원의 현황과 과제에 대해서는 박병호, 문화콘텐츠 소재로서의 판소리 정책적 지원 방안 연구, 문화예술콘텐츠 3(한 국문화콘텐츠학회, 2009), 27~60쪽 참조. 여기서는 주로 문화콘텐츠와 관련된 지원을 다루었다. 28) 김대행, 21세기 사회 변화와 판소리 문화, 판소리학회, 판소리의 전승과 재창조 (박이정, 2008), 627쪽

40 판소리를 활용한 지역관광자원 개발과 의미 참고문헌 김국태 외, 대중문화와 문화기획, 글누림, 김기형, 남원지역과 판소리 문화, 구비문학연구 20, 한국구비문학회, 2005, 면. 김영민, 판소리의 국가 문화브랜드화 전략 연구, 문화예술콘텐츠 3, 한국문화콘텐츠학회, 2009, 5-26면. 김용범, 인류무형문화유산 판소리의 원형 보존과 창조적 계승, 문화예술콘텐츠 4, 한국문화콘텐츠학회, 2009, 5-35면. 류수열, 현대사회와 판소리 연구, 구비문학연구 15, 한국구비문학회, 2002, 면. 박병호, 문화콘텐츠 소재로서의 판소리 정책적 지원 방안 연구, 문화예술콘텐츠 3, 한국문화콘텐츠학회, 2009, 27-60면. 박정경, 판소리 문화관광 프로그램 현황과 과제, 판소리연구 25, 판소리학회, 2008, 31-63면. 박진규 정철상, 지역문화와 축제 글누림, 이명진, 판소리 콘텐츠의 애니메이션화 연구, 판소리연구 27, 판소리학회, 2009, 면. 이명현, 다문화시대 판소리의 재인식과 문화적 가치 탐색, 다문화콘텐츠연구 12, 중앙대문화콘텐츠기술연구원, 2012, 면. 이태화, 판소리에 대한 엇갈린 인식과 대중화의 향방, 판소리연구 35, 판소리학회, 2013, 면. 정병헌, 판소리 전승과 공간적 배경의 관계 연구, 판소리연구 25, 판소리학회, 2008, 65-87면. 최동현, 판소리 문화콘텐츠에 관한 연구, 판소리연구 22, 판소리학회, 2006, 면. 최동현, 문화 변동과 판소리, 판소리연구 31, 판소리학회, 2011, 면. 최혜진, 판소리 대중화를 위한 문화콘텐츠 전략, 비교민속학 27, 비교민속학회, 2004, 면. 판소리학회, 판소리의 전승과 재창조, 박이정, 표인주, 남도 지역축제의 현황과 특징, 중앙민속학 11, 중앙대한국문화유산연구소, 2006, 면. 별주부전 고향 사천 비토섬, 해양형 관광지로 거듭난다, 국제신문, 소설속의 흥부 朴 春 甫 (박춘보) 마을을 찾아서, 문화저널21, 참조. 남원 춘향테마파크 관광명소로 재도약, 연합뉴스 태안 별주부 마을 상표로 등록, 조선일보, 남원시청 홈페이지 광한루원 홈페이지 남원 춘향제 홈페이지 곡성군청 홈페이지 흥부제 홈페이지 별주부마을 홈페이지 사천시청 홈페이지 판소리를 활용한 지역관광자원 개발과 의미 에 대한 토론문 이하나 고려대 최혜진 선생님은 판소리를 활용한 지역관광자원의 개발과 의미 라는 발표문을 통해 판소리의 실 용적 노력과 성과를 지역관광자원으로서의 측면에서 고찰하셨습니다. 관광자원으로 기획된 지역문 화콘텐츠 로서 판소리 서사의 활용을 실제적으로 살피고, 분석하는 작업으로 판소리를 활용한 지역 문화관광의 현황을 조명하셨습니다. 또한 판소리를 활용한 문화콘텐츠 개발 의 범위까지 논의를 확 장할 수 있도록 선행콘텐츠 분석 이라는 토대를 구축하셨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전세계의 관심이 문화에 집중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따라 전통예술의 영역에서도 원천소스의 활용에 관한 연구가 부쩍 증가하고 있음 을 확인하게 됩니다. 특히 본 발표문의 소재인 판소리 는 2003년, 유네스코에 의해 인류구전 및 무 형유산 걸작 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는 판소리가 인류문화의 다양성에 기여하는 보편적 가치를 지 닌 문화이며, 문화콘텐츠적 활용의 가능성이 충분한 문화라는 점을 방증하는 결과입니다. 하지만 문 화콘텐츠 학계에서 민속 또는 민속문화의 활용과 관련하여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 구하고, 판소리의 문화콘텐츠적 활용, 판소리와 관련된 문화콘텐츠 개발 1) 등에 대한 연구의 결과물 은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 2) 입니다. 그런 점에서 최혜진 선생님의 발표가 매우 반갑게 느껴집니다. 발표문이 좋은 논문으로 완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음의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1. 발표문을 살피며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판소리 서사를 활용한 관광자원의 현황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기준이나 유형의 분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타당한 기준을 설정하고 활용의 유형을 분류하면 더욱 체계적인 논의가 가능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러한 판단으로 본 발표 문의 III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판소리 서사를 활용한 관광자원의 유형 을 분류해 보았습니다. 그 활용의 유형은 대체로 판소리 서사를 원천소스로 한 스토리텔링, 테마파크, 축제, 네이밍을 통 한 브랜드화 의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부합하지 않는 활용에 대해서는 기타 로 설정하시어 이를 총 다섯 가지로 분류하신다면 각 지역의 현황을 누락 없이 조명할 수 있는 것은 1) 민속학 분야에서 문화콘텐츠를 바라보는 관점은 대체로 민속활용론 과 민속상실론 의 두 가지로 나뉘는데 문화콘텐츠의 개 발과 관련한 논의는 민속활용론에 속한다.[심승구, 한국민속의 활용과 문화콘텐츠 전략, 인문콘텐츠 제21호(인문콘텐츠 학회, 2011), 12면 참조]. 2) 판소리의 문화콘텐츠화 방안, 혹은 이와 같은 내용의 논의가 확인되는 논문은 현재까지 약 20편 정도 작성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41 판소리를 활용한 지역관광자원 개발과 의미 물론, 지역간의 콘텐츠화 현황을 비교하는 작업에도 유용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체로 중앙정부 주도의 정책추진으로 인한 지역개발 정책의 자립성 결여, 지역사회의 역량을 고려하 지 않은 지역개발사업 추진, 중앙집중식 지역개발로 인한 지역성 없는 지역개발 난무 등의 문제점 3) 2. 초반에 본 발표문을 살피며 본고의 주제가 판소리의 활용 과 관련되었다는 점에서 판소리 자 체가 문화자원으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에 대한 논의가 존재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간 판소리 라는 민속예술의 문화콘텐츠 개발에 있어서 최고의 난제로 인지되었던 대중성 확보 의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한 선생님만의 방안이 무엇인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발표문을 읽으면서 선생님께 서는 판소리 활용과 관련한 관광자원의 현황을 살피기 위한 기준으로 판소리 서사 를 중심으로 서 술하셨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III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판소리 서사의 활용 과 관련한 논의가 이루어진 현재 의 상황에서는 판소리 자체의 활용 이 아니라 판소리 서사의 활용 이 이루어진 이유에 대한 언급이 존재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판소리 분야에서 판소리 와 판소리 사설 이 가지는 위상이 어떻게 다른 지에 대한 언급도 따라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한 원천소스의 측면에서는 판 소리 서사 가 판소리 의 상위에 놓일 수 없습니다. 즉 판소리의 하위 소스로서 판소리 서사가 존재 하는 것이기 때문에 판소리의 서사적 측면에서 선행콘텐츠의 현황을 분석하고자 한다면 판소리 서 사 의 범주 이외의 소스에 대해서는 분석할 수 없는 제한점이 생기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판소리 서사의 활용 이 아닌 판소리 활용 의 측면에서 현황을 분석하시는 것이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선생님께서 판소리의 서사 를 활용한 콘텐츠의 현황을 분석하고자 하신다면, 판소리 서사의 원문과 관련한 스토리텔링 현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피시는 방법을 취하셔야 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와 다르게 판소리 를 활용의 원천소스로 결정하신다고 하더라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보충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발표문에 의하면 판소리 는 대체로 축제의 유형 내에서만 경연 과 공연 의 형태로 활용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활용의 비중이 높지 않은 편으로 확인됩니다. 춘향 서사를 활용하고 있는 남원의 경우, 춘향제 라는 축제에서 진행하는 25가지의 행사 중 창극을 포함하여 판 소리와 관련된 행사 5가지가 있었고, 심청 서사를 활용하고 있는 곡성의 경우, 심청 효문화 축제 에 서 진행하는 16가지의 행사 중 2가지가 있었습니다. 흥보의 서사를 활용하고 있는 남원에서는 흥부 제 의 17가지 행사 중 4가지가 있었고, 별주부의 서사를 이용하는 태안과 사천에서는 판소리를 자원 으로 이용하고 있는지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양적인 측면에서만 살폈을 때 판소리 의 활용도는 매우 낮은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적인 측면에서도 일정한 기준에 의한 현황의 제시와 분석이 따라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은 현황 연구와 분석이 이루어진 후에야 판소리 서사 혹은 판소리 활용의 방법에 대한 제언도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선생님의 견해가 궁금합니다. 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본 연구를 진행하시기 위해서 발표문에서 언급하신 다양한 지 역을 방문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방문하신 지역에서도 앞서 언급한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는지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4. 본고의 IV장 실용적 성과와 문제점 에서 흥부마을은 흥부전만의 스토리텔링에 너무 의존하였 기 때문 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흥부마을이 흥부전만의 스토리텔링에만 의존 하고 있다는 점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흥부마을이 성공적으 로 판소리를 문화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방안이 무엇인지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가 있으시다면 듣 고 싶습니다. 3. 본 발표문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지역개발, 지역문화자원 과 관련한 연구는 90년대 이후부터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지역과 관련된 문화관광, 혹은 지역개발과 관련된 논의에서는 대 3) 윤주, 지역개발정책에서 관광과 문화, 관광연구논총 제19권 제2호(한양대학교 관광연구소, 2007), 209~210면

42 판소리를 활용한 지역관광자원 개발과 의미 판소리를 활용한 지역관광자원 개발과 의미 에 대한 토론문 이명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전통문화는 아무리 비영리를 추구해도 대중성의 확보가 쉽지 않다. 이러한 때문인지 전통문화를 활용한 관광자원 개발이나 축제 등은 다양하게 추진되고 있음에도, 큰 성공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문화를 활용한 전통관광자원, 전통지식자원, 전통축제 등의 개발이 필요 하다는 목소리는 여전히 높다. 이런 상황에서 판소리를 활용한 지역관광자원에 관심을 갖고 그에 대한 사례와 성과, 문제점 등을 짚어보는 논문이 발표되어 반가운 마음이다. 발표자는 관련 지역을 답사해서 꼼꼼하게 대상을 살피 고 있어서 현장감도 느낄 수 있다. 그 대상 중에는 토론자가 아직 가보지 못한 지역도 포함되어 있어 서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었다. 논문 내용에 많은 부분을 공감하였고, 몇 가지 궁금한 점을 질문하 고자 한다 년 이후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각 지역에서는 독자성을 담은 관광자원(문화상품, 축제 등) 의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 중 판소리를 지역관광자원으로 어필 한 곳이 발표자가 조사한 곡성, 함양, 태안, 백령도, 사천 등이다. 남원의 경우는 훨씬 이전(1931년)부터 춘향제가 개최 되고 있었기 때문에 약간 경우가 다르지만, 흥부제나 남원관광단지(현재의 춘향촌)의 적극적인 개발 은 1990년 중반부터이므로 지방자치제의 영향으로 볼 수 있겠다. 발표자는 이들 관광자원에 대해 판소리 유물 유적이나 명창관련 유적지가 아닌, 순수하게 관광자원으로 기획된 지역문화콘텐츠 라 고 머리말에 밝히고 있다. 이는 곡성 등의 지역이 최근 판소리 스토리와의 연관성을 내세우고, 그것 을 중심으로 축제나 테마 마을을 조성하는 등 새로운 관광자원을 형성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 된다. 그런데 발표자가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남원의 경우는 판소리의 서사적 유사성으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남원 춘향제는 기생제향이라는 무형적인 요소와 광한루라는 유형적인 요소가 그 기 반이 되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발표자가 조사한 태안과 사천의 경우에도 비토 섬, 묘샘, 자라바위 등 관련 유적과 설화 전승으로 인해 오히려 그 당위성을 인정받았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한 필자의 생각이 궁금하고, 혹여 토론자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면 순수하게 관광 자원으로 기획된 문화콘텐츠 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려주기 바란다. 2. 지역의 관광자원으로서 가치는 상업화를 통한 지역 이익 창출에 있고,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지역 축제이다. 그렇다보니 좋은 계절(일정), 좋은 콘텐츠는 각 지역에서도 경쟁적으로 선점하고자 한다. 이러한 현상은 일정과 콘텐츠의 중복을 가져왔고, 언제부터인지 전통축제는 어디를 가도 크게 다르 지 않다는 대중의 인식도 높아졌다. 그래서 최근에는 전통축제보다는 특산품, 자연을 활용한 축제가 주목받고 있다. 약 400여개에 이른다는 지역축제 중에는 관광객들의 유치에 성공한 사례도 있겠지 만, 반면에 크게 흥미를 끌지 못하고 단발성으로 끝나는 곳도 상당하다. 그렇다면 발표자가 조사한 남원, 곡성, 태안, 사천, 함양 등의 판소리를 활용한 관광자원으로서의 축제는 어떤 상황에 직면해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정도의 관광객을 유치했고, 또 어느 정도의 이익을 창출했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수치도 궁금하다. 그리고 이 글에 많은 지역축제들 속에서 주목 받을 수 있는 판소리 관련 축제의 독자적이고 차별 적인 무엇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되었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 우수축제이자 안정적, 역사적 이라고 말하는 춘향제는 어떤 측면에서 그러한지, 왜 같은 지역에서 개최하는 흥부제는 춘향제와 달리 크게 흥행하지 못하고 있는지(춘향제와 흥부제의 콘텐츠 및 예산 투입의 차이) 등 이러한 구체 적인 원인분석을 통해 실질적인 대안과 과제가 제시되었으면 한다. 3. 춘향제가 우수축제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전통성과 더불어 지역주민(길놀이, 용마놀이 /실전)이나 국립민속국악원(창극 춘향전) 등의 적극적인 지원, 다양한 콘텐츠 개발 등이 있었기 때문 이다. 더하여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 의 성공(영화 세트는 춘향 테마파크 조성으로 연계)은 우 연일지는 몰라도 일반 대중에게 춘향과 남원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거기다가 대통령상이 주어지는 국악대전의 개최는 판소리 관련 축제로서의 위상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이렇듯 우수한 관광자원이라고 알려진 춘향제 역시도 아직까지 진통을 겪고 있다. 그 단적인 하나 의 예가 춘향제 개최일의 변화이다. 1) 춘향제는 초기 음력 5월 5일에 개최되었다. 5월 단오는 춘향과 이도령이 만나서 사랑을 싹틔운 날이라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 시기는 농번기에 속해서 주민들의 동원이나 관광객 유치가 어려워 음력 4월 초파일로 날짜를 옮겼다. 음력 4월 초파일은 양 력으로는 5월 초~중 사이로, 음력은 아니지만 5월 5일이라는 날짜가 속해 있고, 어린이날, 어버이날 등 가족 연휴 기간에 속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정이다. 하지만 최근 양력 4월 마지막 주 금요 일로 옮겨졌고, 남원 시민들 사이에서는 음력 4월 8일로 되돌려야 된다는 목소리가 높다. 날짜의 변경으로 인해 춘향제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퇴색된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월 마지막 주 금요일에 춘향제를 열 수 밖에 없는 건 바로 전주에서 열리는 1) 춘향제 개최일의 변화 1~3회 : 음력 5. 5 / 4~68회 : 음력 4. 8 / 69-77회 : 양력 5. 4 / 78~79회 : 양력 5. 1 / 80회 : 양력 4.23 / 81회 : 양력 5. 6 / 82~83회 : 4월 마지막 주 금요일 82 83

43 판소리를 활용한 지역관광자원 개발과 의미 축제인 풍남제 때문이다. 풍남제 역시 춘향제에 못지않은 역사적 전통을 지닌 축제로, 1959년 음력 단오에 처음 개최되었던 것이 오늘날에는 양력 5월 5일에 의미를 두고 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이렇 듯 유사한 시기에 가까운 지역(차량으로 1시간 거리)에서 열리는 축제 때문에 관광객은 줄어들거나 방문 일정이 짧아졌다. 더군다나 전주는 최근 한옥마을, 음식문화(음식창의도시), 전통음악 등을 토 대로 그 지역 자체가 세계관광도시로 부각되고 있기에, 남원은 전주에 가려 크게 알려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남원은 춘향제를 살리기 위해 일정을 바꾸는 선택을 했다. 일정의 변경으로 인해 춘향제의 의미가 변질된 것은 아니지만 풍남제와 더불어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관광자원을 개발하지 못했다는 점에 아쉬움이 남는다. 전주만 보더라도 지역의 관광자원이 성공적으로 유치되기 위해서는 인기 있는 하나의 축제, 그 뿐만 아니라 365일 관광객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자원들이 다양하게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판소리를 활용한 여러 지역들의 관광자원들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축제 이외의 다양한 저변 자원들이 발굴되어야 한다. 관련 조형물을 세워놓고 그것을 관광객들에게 볼거 리의 하나로 내세우는 것은 이제 먹히지 않는 방법이다. 곡성, 태안, 사천, 함양 등의 지역에서도 판소리 이외에 저변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을만한 것들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은 아쉬움이 있다. 또한 토론자가 발표자의 논의를 잘못 이해한 바가 있다면 양해를 바란다. 이 토론 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지역 관광자원의 개발과 활성화에 대해 관심을 더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4. 전승 판소리, 실전 판소리의 서사를 활용한 지역관광자원의 개발은 판소리의 전승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판소리의 서사에 집중하는 지역관광자원의 개발에도 맹점은 있다. 즉 우리나라와 지역적 관련성이 없는 <적벽가>의 문제이다. <적벽가>는 중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지역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관광자원에서는 당연히 소외될 수밖에 없다. 지역 이라는 틀에 갇혀 유용한 판소리 자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겨날 수 있다. 이렇 듯 지역과 국가를 넘어선 세계적인 판소리 관광자원을 개발하는 것도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 라고 하겠다. 5. 발표자는 판소리 서사를 활용한 지역관광자원의 개발에 초점을 두고 살피고 있지만, 최근 판소리 음악이 중심이 되는 지역관광자원도 다양하게 개발되고 있다. 보성소리축제, 전주대사습놀이, 장흥 국악대전, 광주임방울국악대전, 전주세계소리축제, 구례동편제소리축제 등 판소리를 비롯한 우리 전 통음악을 지역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판소리를 활용한 지역 관광자원의 유형과 특징을 본문에 제시해 준 다면 향후 연구자들이 참고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지역관광자원 개발에 대한 토론자의 경험이 일천해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 같아 많 84 85

44 구비문학과 축제의 실용적 상관성 2013 한국민속학자대회 구비문학과 축제의 실용적 상관성 -영상 디지털문화와의 비교- 이정재 한국구비문학회 목차 1. 머리말 2. 구비문학 실용성의 입장과 경향 3. 구비문학 실용적 연구의 다양함과 지평 4. 구비문학과 축제, 그 실용적 접근 5. 구비문학과 축제의 실용성 비판적 검토 6. 마무리 1. 머리말 실용성을 논할 때 그 정확한 개념의 이해가 요구된다. 의미가 너무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순수 연구의 결과와 의미에서 실생활의 활용도에까지 그 폭이 너무 넓기 때문이다. 편의상 협의와 광의로 나눌 수 있겠다. 보통 학문이나 연구의 구분을 순수와 응용학문 및 연구로 나눌 때 주로 후자의 구분 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실제 구비문학의 연구 경향이 순수연구에서 실용적 연구로 진행되는 경향 을 보이는 근래의 시점에서 후자의 구분을 따르고 있다. 이렇게 나눈 뒤에도 실용의 범위는 너무 넓다. 실용을 논할 경우 그 현재성과 현장을 피할 수 없 다. 그러나 구비문학은 오랫동안 이 둘을 피해왔다. 근래들어 현장과 실용을 논하기 시작 한 것은 과거적 전통이 사라지고 새로운 흐름이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실용을 논할 경우 순수문학을 지향하던 구비문학은 당황되지 않을 수 없다. 구비문학과 실용성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 은 그리 오래지 않다. "구비문학과 공동체"라는 일련의 의욕적인 시리즈 기획연구는 이전의 구비문 학의 영역과 내용 및 연구 목적을 새롭게 설정하는 계기를 만든다. 본 고는 이를 주요 대상으로 한 다.(이렇게 해도 우리가 다룰 내용에 부족함이 없다고 판단되었다.) 87

45 구비문학과 축제의 실용적 상관성 본고의 논의가 축제의 실용성을 논하고자 한 것이나 실용성에 속하는 타 분야 즉 소위 디지털문 화와의 비교를 통해 알아보고자 하였다. 둘의 차이가 현저함에도 불구하고 구분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은 앞으로의 연구에 혼선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내용적으로도 현저한 차이가 있고 나아가 그 접근 방법이 서로 달라야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나아가 오늘의 축제가 가지는 실상을 분 석해 과거의 축제연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기로 한다. 실용을 논할 때 매체의 발달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전파문화, 매체문화, 미디어문화, 영상문화, 멀티미디어, 디지털환경 등의 혼란스런 용어는 빠르게 달라지는 환경을 묶어낼 수 있는 신개념의 용어설정에 어려움이 초래되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화의 단계로 접어든 느낌이 든다. 즉 모든 소스가 디지털화되는 마당에 이를 모두 디지털문화라 칭해도 무관해 보인다. 인터넷과 SNS, 멀티미 디어 방송, 영화 드라마, 게임, 애니메이션, 모바일매체, 문화콘텐츠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이 이 기술을 활용한다. 이런 획일화는 전 영역이 서로 넘나들며 간섭할 수 있게 했고, 또한 개발자 및 생산자와 향유자간의 상호 소통을 전 분야에 걸쳐 가능하게 하였다. 나아가 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분 마저 허물고 있는 상황이다. 그간의 구비문학연구는 이 지점이 구비문학의 속성과 맞 닿아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런 온라인적 속성을 가진 디지털문화와 방법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축제같은 현장의 연 행물이다. 같은 속성을 가진 구비전승은 판소리, 무속, 극, 민요 등을 더 들 수 있다. 민요는 현장이 점차 부재하여가고 있고 대중가요로 전환한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나머지가 공연의 양상으로 실현 되고 있다. 이에 비해 축제는 공연의 경계를 가지지 않는 특징을 가진다. 그래서 순수 및 실용적 구비전승은 다음의 몇 가지 방향으로 갈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순수구비문학연구, 디지털구비전승 연구, 축제구비전승연구, 공연구비전승연구 등이다. 실용적인 뒤의 세 분야는 다시 온라인과 오프라인이라는 구분을 포함해 디지털과 아날로그라는 구분이 가능하다. 즉 디지털구비전승문화와 아날로그구비전승문화로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이 둘의 차이는 현저하다. 현장과 현재성 및 실용성이 두루 갖추어져 있어 큰 차이가 없는 듯 하지만 매체 여부의 차이는 둘을 완전히 다르게 정의하고 있다. 이제 그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간의 과정과 상황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구비문학의 관심분 야와 그의 변화, 변화를 주도한 근거 및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 변화 등을 살펴야 한다. 다소 중복 의 기술이 불가피하나 새로운 관점의 안목을 더해 이를 피해보고자 한다. 끌어들여 연구실 안에 가두어버린 데서 비롯되었다. 1) 소위 문학이라는 영역에 포함시켜 다루었던 점이 그것이다. 살아있으면서 현장성과 연출성이 겸비된 자료를 정지된 텍스트로만 접근한 것이다. 구비문학은 문학이라는 장르에 편입이 되어 순수문학적 연구를 거듭해왔다. 그 결과 나름의 성과 를 올렸으나 다시 실용성의 질문을 던져야 하는 이유는 상황이 과거와 너무 많이 달라졌다는데 있 다. 다른 민속개열의 분과보다도 심각하다. 구비문학의 터전이자 기초인 현장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 이다. 필자는 여기서 왜 현장의 문학을 책상머리에 붙들어 매놨는지를 다시 묻지 않기로 한다. 다만 문학이라는 장르에 묶어 논 점은 짚어야할 대목이다. 문학이라는 대학의 편재가 서구에서 온 것이고 이는 우리의 상황에 맞지 않아 문학의 개념을 광의와 협의의 관점으로 바꾸어 가야한다는 인식은 합리적인 설명이며 자타가 인정하고 있던 바다. 그러나 이 역시 현장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세태의 분위기는 왜곡된 개념이 당연한 것으로 행세하며 진정한 문학의 모양을 구석으로 몰아붙이는 형국이 되었다. 이때 서대석은 지적은 이를 재고하게 한다. 구비문학을 고전문학의 하위 영역처럼 취급하는 관행이 수정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구비문학은 고전문학과 현대문학 나아가 미래문학에 두루 걸쳐있는 보편적이고도 기초적인 문학의 영역이다. 그것은 문학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공부해야 할 기초분야가 되는 것이다. 기초학 문으로서의 구비문학의 학술적 가치는 실로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구전의 현장이 어느정도 존재하고 있을 때는 이런 식의 연구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때의 현장이란 보조 수단으로의 현장이다. 주류는 어디까지나 연구실 안의 미학 탐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보조적 현장이 점차 사라진다는 데에 있다. 현장에 대한 인식이 갑자기 중요한 관건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다 기계화와 도시화 및 첨단화가 가속화되고 제보자들의 고령화로 인한 자료출처의 근거가 박탈되어가는 상황이 점점 심각해졌다. 이때부터 구비문학의 고민은 시작 된다. 현장은 없어질 수 밖에 없고 현장에 대한 인식도 없었고 또 애초부터 연구의 출발이 현장을 무시했던 주체였기 때문이다. 구비문학이란 현장을 근거로 하는 것이니 현장을 찾는 것만이 구비문 학이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디지털화의 신세계는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블루오션 이라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학문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학문적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실생활과 생산적 연관성을 맺는 방향의 연구작업이 필요하며 현실적 삶에서의 효용을 추구하는 실용적 연구라 하더라도 무조건 그것을 배 2. 구비문학 실용성의 입장과 경향 구비문학은 애초부터 실용적인 것이었다. 삶의 현장에서 이야기되고 불려지고 연행되며 사람들의 희노애락과 애환을 담아냈던 일상이었다. 다시금 그 실용성을 논한다 하니 새삼스럽고 아니러니하 다. 그렇게 된 연유를 생각하면 할 말이 길어진다. 그 주요 원인은 현장에 있던 문학을 대학으로 1) 이와 관련된 안목있는 글을 신동흔, 임재해, 최원오 등에 의해 꾸준히 논의되었다. 다음의 논문은 이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진전시켰다. 신동흔, 삶, 구비문학, 구비문학 연구, 구비문학연구 1집; 신동흔, 현대 구비문학과 전파매체, 구비문학연구 3집; 임재 해, 사이버공동체의 소통양식과 설화 전승양상의 재인식, 구비문학연구 22집; 임재해, 구비문학의 축제성과 축제에서 구비문학의 기능, 구비문학연구 24집; 최원오, 구비문학과 다문화주의( 多 文 化 主 義 ), 구비문학연구 26집; 최원오, 구비 설화에 갈무리된 입말, 문자, 언어권력의 상관관계, 구비문학연구 35집. 2) 서대석 외, 한국인의 삶과 구비문학 (집문당, 2002), 26쪽

46 구비문학과 축제의 실용적 상관성 척만 할 것이 아니라 허와 실을 가려 포용하는 것이 옳다고 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3) 서대석은 이어 이와 함께 근래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구비문학의 문화산업적 가치에도 관심을 기 울일 필요가 있다. 구비문학 유산은 문화산업 및 관광사업 자원으로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애니메이션과 영화, 컴퓨터게임, 캐릭터 산업, 테마축제 및 테마파크 등 수많은 영역에서 구비문학 유산을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적극적이고도 전향적인 자세가 필 요하다고 본다. 4) 고 하여 현장성과 실용성을 구비문학 연구의 중요한 대상임을 강조한다. 말문학의 성격은 원래 멀티미디어적이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귀, 눈, 몸, 느낌 때로는 입과 냄 새까지도 동반되었던 종합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디지털의 세계는 이런 속성을 재현하고 있다. 연 구자들은 이 점에 착안하여 구비문학의 부흥, 재현 혹은 부활이라고 까지 과대 표현을 하기까지 이 르렀다. 문제는 남들도 그렇게 인식을 해주느냐의 것과 어떤 과정과 방법을 거친 연구를 할 것이냐 의 문제가 간단치 않다. 구비문학이 본래 입체적 디지털적 연구에 적합한 연구 대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나아가 미래의 인문학을 이끌어갈 패러다임이 구비문학의 세계에서 도출되기를 기대하 는 것은 단순한 희망 사항만은 아라고도 했다. 5) 그러나 현실은 이와 다른 입장도 만연하다. 구비문 학이 설자리가 없으니 이제 별것을 우기며 연구를 해댄다고 비난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막상 그렇 지 않다고 강변할 대안이 먼저 없고, 편을 들어주는 우군도 없는 상황이다. 구비문학의 위기는 현장이 사라지고 있는 데에 있다. 구비문학연구의 짧은 역사에 비해 이룬 성과 를 치하해야 할 상황이지만, 그럴 겨를도 없이 현실은 급변하였다. 사라지는 현장대신 새로운 현장 을 찾아나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동안의 연구는 문학적 미학과 예술성을 찾아내고 정리 하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설정하고 있었음을 이제야 반성하고 있다. 작품성으로 승부해야하는 기록문학 작품과 달리 사람들의 생활현장 속에 삶의 한 부분으로 존재 하면서 예술적 욕구 외에 생활적,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온 구비문학의 정체성을 직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7) 구비문학의 정체성이 현장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차별하여 대하는 자세가 여전히 석연 치 않다. 구비문학의 정체성을 생활적, 문화적 욕구와 연관시켰다. 예술적, 미적인 내적 가치를 추구한 것 과 달리 현장의 의의를 찾아야한다는 의미다. 그는 이를 일상적이고 아마추어적인 문학 으로 보았고 그의 일상생활과의 연관된 단순성 및 보편성의 미학을 재인식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따라서 이 영역 을 구비문학이라는 대상에 걸맞는 접근방법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8) 현장의 문학을 아마추어적인 것으로 본 것도 문제이지만 현장으로 나오되 다시 문학으로 회귀한 다는 의미로 들린다. 이미 기록된 구비자료는 아마추어적이 아닌가 묻고 싶다. 또한 앞서 지적한 반성적 입장이 모호해진다. 현장으로 나와 구비문학의 영역을 확장시키되 텍스트 속성을 버릴 수는 없다는 논리다. 다음의 언급이 이를 확인시킨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자체를 수용자의 관점에서 문학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이라고 본다. 단순한 현상에 대한 연구에 그치지 않고 질을 해명하고 평가하는 본격적인 연구가 수행되어야한다는 뜻이 다. 9) 앞으로의 구비문학연구에 있어서는 그 예술적 사상적 가치 외에 생활적 문화적 가치를 탐구하는 방향의 연구작업을 활발하게 수행하여 조화를 이뤄나갈 필요가 있다. 특히 전통 구비문학에 대한 연구의 경우, 고전문학의 일반적 연구동향에 발맞춰서 미적 구조나 세계관 같은 작품 내적 가치를 찾는데 치중해온 관행에 대하여 반성적 모색을 할 필요가 있다. 6) 여기서 반성적 모색은 현장인식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고, 그 살아있는 현장성을 거세한 텍스트에 만 집중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이는 단순히 방법적인 데에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연구의 목적 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이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말한 다음의 방법적 모색을 보면 더욱 모호해진다. 전통적인 굿이나 연희가 현대사회에 들어와 계승 변용되고 있는 양상이라든가 무용이나 뮤지컬, 오페라 같은 현대 공연예술이 전통구비문학을 수용하는 양상 역시 흥미롭고 유익한 연구대상이 된다 고 믿는다. 10) 이는 구비문학 자료의 변용과 수용 양상을 응용 및 확장의 영역으로 본 것이다. 구비문학의 확장 은 자료의 상관성과 무관한 구비문학의 말문학적 속성을 강조한 영역으로 확대하기도 하였다. 3) 서대석, 한국인의 삶과 구비문학-구비문학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찾아서- (서대석 외, 한국인의 삶과 구비문학 (집문당, 2002), 28쪽. 4) 서대석, 위의 글, 28~29쪽. 5) 서대석, 위의 글, 27쪽. 6) 서대석, 위의 글, 24쪽. 7) 서대석, 위의 글, 24쪽. 8) 서대석, 한국인의 삶과 구비문학-구비문학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찾아서- (서대석 외, 한국인의 삶과 구비문학 (집문당, 2002), 24쪽. 9) 서대석, 위의 글, 23쪽. 10) 서대석, 위의 글, 22~23쪽

47 구비문학과 축제의 실용적 상관성 토크쇼, 가요쇼(대중가요), 드라마, 코미디, 영화 등의 문화예술 제반 양식에 대해 구비문학적 접 근을 시도해 볼 수 있다....이와 관련해서는 제작과정에 대해 이해가 선행되어야하고 작가나 연예 인, 프로듀서와의 인터뷰 등 환경적 요소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11) 이는 구비 서 사의 연장이 아니다. 말로 된 것들을 문학으로 포함시키고자 한 것으로 그 기준과 연구 방법의 설정 이 관건이다. 연구방법이 디지털화되어야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멀티미디어적 연구 방법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연구의 방향이 어떠해야하는가를 떠나서 구비문학이 본래 입체적 디지털적 연구 에 적합한 연구 대상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해둔다. 12) 디지털의 속성과 구비문학의 속성을 상호 소통의 관점에서 동일시한 관점이다. 이렇게 그는 구비 서사의 연장, 말문학의 연장, 소통문학의 연장에서 현대의 디지털문화는 과거의 구비문학과 그 속성 이 매우 유사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나아가 문화비평의 영역으로까지 연구의 범위를 확장 할 수 있다고 하였다. 특히 그 연구가 객관적인 사실 확인에 머물지 않고 작업의 성과와 문제점을 짚어내면서 미래의 방향을 찾아나가는 몫까지 수행할 수 있다면 의의는 더욱 커질 것이다. 객관적 고찰을 기초로 하되 필요에 따라서는 비평적 작업까지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13) 이렇게 되면 이는 이미 구비문학의 영역을 넘어 방송학이나 문화학의 영역으로 확장된 것이다. 마지막 인용구의 내용은 문화비평의 부분을 말한 문학이 아닌 문화학의 영역이다. 더욱이 입체적 디지털화 되어야하는 연구방법의 지적은 현재학으로서의 민속학으로의 전향을 선언한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구비문학적 연구가 되어야 한다는 지적은 서로 모순되는 주장이다. 국문학과에서 구 비문학을 기초학문으로 다룰 수 있는 점은 가능하다. 서대석이 앞서 구상하는 연구방법은 이미 현재 학으로서의 민속학 혹은 도시민속학, 현대민속학의 연구와 다름이 아니다. 이런 노선을 이미 밟고 있는 서구의 민속학 연구의 경우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서대석의 말대로 실용은 실생활과의 연관성을 가지며 생산적이어야 하며 이런 것이 실용적 연구 라고 규정하고 있다. 실생활의 생산성은 다시금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동일은 구비문학의 영역이 확장해가는 마당에 야기되는 새로운 과제를 몇 가지 예시하고 있다. 구비문학과 대중문화, 구비문학과 문화산업, 구비문학과 여론정치, 구비문학과 종교문화, 구비문학과 민 족운동, 구비문학과 현대문명 등을 연구해야한다고 했다. 아울러 구비문학이란 말 대신 구비전승 이라는 용어가 확장된 개념에 어울린다고도 했다. 14) 얼핏보기에 산만한 나열인 듯 보이지만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주제들이다. 정치(여론정치), 경제(문 화산업), 사회(민족운동), 문화(대중문화, 현대문명), 종교(종교문화) 등을 인식하고 적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구비전승은 사회 전반에 걸쳐 간섭을 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구비전승은 이를 모두 망라하 고 있다는 실용적 말이다. 실로 방대하고 원대한 확장이고 구상이다. 구비문학의 연구는 이미 이런 분야로 연구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그러나 확장은 중첩의 현상을 초래한다. 학문간의 경계를 넘나들어야하는 과정에서 학문간 갈등과 출동이 야기된다. 이를 해결하 는 방법은 각 영역의 경계를 허무는 것인데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치고 있는 상황이다. 앞으로는 가 야겠는 데 장애가 너무 많아 길은 보이지 않는 형국이다. 연구 대상이 다른 것들과 얽혀있는 양상을 과감하게 받아들이고, 연구의 방법과 목적을 확대하는 것이 마땅하다. (조동일, 31쪽)고 했다. 받아들이는 것은 어쩔 수 없고 좋은 방법이나 그런 다음에 구비문학의 위상과 실체는 존재하느냐의 문제가 고민된다. 학제간 융합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조동일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세분화와 전문화를 목표로 했던 근대를 넘어 총괄학문으로 나아 가야한다고 했다. 15) 앞서 서대석이 설명한 것도 사실은 이런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다만 그의 논지에는 앞서 분류한 구비문학 연구의 네 가지 분류가 뒤섞여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논의를 하는 2013년 현재는 김이 빠진 이야기가 된 느낌이 없지 않다. 각 대학에서 시행했던 학부제는 다시 원위치로 환원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며, 다시금 더욱 세분화와 전문화를 고 수하고 있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총괄학문의 의미가 퇴색된 것은 아니다. 이후 지속적으로 통합, 혁신, 선택과 집중, 창신, 융합, 복합, 융복합 등의 의지와 시대정신의 경향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제도와 기관이 모두 복고를 고수하고 부동의 자리를 지키는 상황에서 총괄학문을 논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기도 하다. 한편 여기서 진행되는 실용성 논의의 한계를 동시에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 다. 메아리 없는 외침만이 거듭 되풀이 되는 모습에 지식인들은 지치다 못해 탈진한 상태로도 보인 다. 이는 관련 학문후속세대의 급감 현상에서 확인된다. 실로 국학의 위기라 아니할 수 없는 현상이 진행중이다. 인문학의 위기를 논할 때 인문학자와 비인문학자는 주장이 서로 다르다. 그 가치를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인문학자는 강변하는 반면 상대는 경제와 실용 논리를 내세우며 압박한다. 현실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자체 조정을 실현시키지도 못하는 인문학 주체의 대응은 한편 구차하기는 하지만 너무 실용논리로 몰아붙이는 것은 바르지 않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오늘 인문학은 실용을 논하고 있다. 뉘앙스와 방법이 다르다고 하겠으나 큰 틀에서는 다르지 않다. 이를 겨냥하는 핵심어는 경제 논리다. 앞서 제시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모든 영역은 중심에 경제 논리가 축을 이루고 있었 11) 서대석, 위의 글, 23쪽. 12) 서대석, 위의 글, 27쪽. 13) 서대석, 위의 글, 22~23쪽. 14) 조동일, 구비문학의 미래, 무엇이 문제인가?, 구비문학연구 18집, 31쪽. 15) 학부제를 실시하고 더 나아가 전공없는 대학과정을 둔다고 하는 최근의 개혁에 적극 참여해 전환을 선도하는 것이 마땅하 다. (조동일, 위의 논문, 31쪽)

48 구비문학과 축제의 실용적 상관성 던 것이다. 경제가 강조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할 것만은 아니다. 그 연유가 구성원들 행복의 현실적 실현의 경향에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과거와 같은 내세적 행복의 보장 논리는 더 이상 오늘에 통하지 않는다. 현재 여기서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오늘은 열려있기 때문이다. 3. 구비문학 실용적 연구의 다양함과 지평 앞서 정의한 실용적 관점에 따른 연구가 많은 것은 아니나 일련의 결과물들을 산출해내고 있다. 여기서는 최근에 연구된 것들을 살펴 그 경향과 영역과 방법 등을 알아본다. 아울러 이들의 연구가 가진 특징은 무엇이며 기존의 실용적 정의와도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검토해보기로 한다. 오늘 공동체와 축제를 논할 때 그것을 가능케 했던 성스러움과 신성함과 초월성의 장치 (institution) 즉 제의는 아주 중요한 구심점이 되어 작동했다. 그러나 이 신성은 점차 사라지고 어떤 대안을 찾아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설화연구도 이와 직결되어있다. 대부분의 자 료가 과거의 산물이고 그런 관점의 연구를 지속했다. 상황이 바뀐 오늘 현장의 소위 현대설화를 어 떻게 이해하고 연구할지 종잡기 어려운 국면에 치우쳤다. 이런 관점에서 현대신화의 행방을 찾는 작업은 유의미하다. 박종성에게 현대신화의 행방을 찾는 뜻은 구비문학적 전통의 계승과 실제의 가 능성을 확인하고자 한 데에 있었다. 16) 고대 중세와는 달리 확실하게 구체화되거나 신화생산의 실체 를 확인하기는 어렵고 파편화되어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스타의 생산과 출현을 살폈 다. 그 의의를 부여한 점은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나, 그것이 가지는 구비문학과의 상관성은 미지 수로 남기고 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설화와 종교와의 상관성을 오늘날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 것이냐 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설화는 전근대적인 세계관을 바탕하여 형성된 것이다. 그 중심에 신 과 영웅과 신비함이 내재되어있다. 이런 요소들이 거세되고 있는 현대에 과거의 설화는 어떤 의미로 존재하며 살아있다고 보는 현대설화는 어떻게 이해해야하는 가의 문제와 직결되어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명쾌하게 제시되지 않는 상황에서 구비문학연구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근래에 들어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이는 영역은 구비문학과 매체와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이다. 천혜 숙(현대의 이야기 문화와 TV)이 분석한 연구는 구비문학이 가지는 현장성의 원리를 강조하여 TV와 시청자간의 달라진 양상을 분석하였다. 굿판이나 이야기판이 사라져가는 오늘날 이를 대신하는 공간 중 하나로 TV토크쇼를 예로 들었다. 쇼 자체에서 다양한 층의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토론에 참가하여 획일적이지 않은 장점을 연출 한다. 이와함께 지나친 시청률 의식이나 너무 가벼운 신변잡기의 가벼움이 지적 되기도 하지만 이를 주목할 수 있는 이유는 시청자가 직간접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는 점을 부각시켰다. 16) 박종성, 현대신화의 행방을 찾아서, 구비문학연구 18집. 소위 시청자코너나 시청자게시판은 구비문학의 속성인 상호소통의 기능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여주 고 있는 점을 들었다. 17) 천혜숙이 토크쇼에 관해 다루었다면 김종군(현대드라마의 구비문학적 위상)은 드라마에 집중했 다. 시청자가 직간접으로 드라마에 참여하여 이야기가 변개되어가는 실례를 들어가며 이야기 제공 자와 수용자간의 소통을 들어 구비문학 전통의 재현을 강조한다. 특히 인터넷의 확산으로 인해 이런 경향은 일상이 되어버린 정도의 상황을 연출함을 지적하며 이야기판의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고 있 다고 까지 하였다. 이야기판을 선도하며 이야기판의 담론이 변개를 이끌어내기도 하며 나아가 새로 운 드라마의 창출하는 단계에 까지 이른다고 지적하고 있다. 천혜숙의 경우처럼 구비문학이 가지는 연행적 현장적 특징이 미디어 환경에서 작동되고 있음을 재확인한 지적이다. 그러나 이런 둘 간의 유사성과 전통의 재현을 지적한 것만이 연구의 목적은 아니다. 매체의 상호 교섭적 연행적 접근 이외에 구비문학의 서사적 특징을 강조하여 연관시킨 연구가 있다. 조미라,윤의섭(구비문학 애니메이션 활용에 관한 방안과 전망)는 구비문학의 본래적 특성을 확장시켜야 하며 구비문학의 특징을 살려 현대적 감각에 맞게 재창조되어야 하며 환상성, 캐렉터성, 변형성 등의 특성 활용을 강조했다. 또한 구비문학의 세계성을 살려 구비문학의 일반적 유형 혹은 구조를 채용하되 한국적이며 전통적인 것을 살려야 한다고 했다. 또한 구비문학의 스토리, 소재, 인 물유형 들에 따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풍부한 이야기 소재를 제공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 지적이라 생각된다. 현장과 자료 및 연구결과와의 접목이 요구되는 마당에 해결되어야할 과제임을 더욱 강조한 의의를 가진 연구였다. 또한 구비문학이 가지는 특성을 십분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타 장르와의 변별력을 세우는데 중요한 지적임이 인정된다. 다만 이런 구비문학의 특징이 어떤 인간적 심리의 원리적 접근이 없이 오로지 실용적 요구에 부응하는 방향으 로만 이끌려 논의를 진행시킨 아쉬움이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의 유희와 놀이적 속성이 강조되는 오 늘의 문화적 현상은 오늘만의 특징이 아니며 인간 본래의 속성과의 미학적 상관성을 설명하고 그의 과거와의 전통상관속에서 입증이 되는 과정을 거쳤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는 글이었다. 매체와 미디어 그리고 구비문학과의 상관성은 문화콘텐츠라는 관점으로 접근되기도 한다. 김진순 (현대 문화콘텐츠산업과 민요의 수용 양상)은 전자책콘텐츠, 방송영화콘텐츠, 인터넷콘텐츠, 모바일 콘텐츠 등에서 활용되고 있는 실례를 들어 민요의 수용양상을 살피고 있다. 예를 들어 모바일 활용 은 벨소리, 통화대기음(컬러링), 모바일사운드 등의 사례를 들고있다. 그러나 이는 아주 미미한 활용 도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18) 문화콘텐츠는 구비문학뿐만이 아니라 인문학과 사회예술의 전 영역에 두루 적용되는 분야이다. 현황을 정리하고 어떻게 실질적으로 대중문화와 접목이 될 수 있는가의 다분히 경제적 실용을 목적 17) 이런 의의는 이미 신동흔과 임재해 등이 다룬 적이 있다. 삶, 구비문학, 구비문학 연구 제1집; 현대 구비문학과 전파매체, 구비문학연구 제3집; 임재해, 사이버공동체의 소통양식과 설화 전승양상의 재인식, 구비문학연구 22집; 임재해, 구비 문학의 축제성과 축제에서 구비문학의 기능, 구비문학연구 24집. 18) 예를 들어 구전민요의 컬러링서비스는 10여곡 정도에 이를 뿐이다. 활용이라고 볼 수 없는 실정이다

49 구비문학과 축제의 실용적 상관성 으로 한 분야이다. 영역중 구비문학은 중요한 요소로 작용된다. 그 미래의 경제적 활용도에 대해서 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를인식한 서대석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이와 함께 근래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구비문학의 문화산업적 가치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구비문학 유산은 문화산업 및 관광사업 자원으로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애니메 이션과 영화, 컴퓨터게임, 캐릭터 산업, 테마축제 및 테마파크 등 수많은 영역에서 구비문학 유산을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적극적이고도 전향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19) 그러나 CT와 IT이 결합이 필수로 요구되는 상황에서 접점을 찾아가기가 쉽지 않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상호 협력도 중요하지만, 성공 여부는 재고해야 한다. 인문학자에게는 특히 불리한 상황 이다. 양쪽의 능력을 갖춘 즉 융합적 능력을 갖춘 인재가 요구된다. 이외에도 구비의 전통이 오늘에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대중문화에서 지속적으로 찾아가고 있는 모 습을 보여주는 논문들이 있다. 장유정은 동경과 그리움의 서사적 닮음의 요건을 들어 전통의 지속을 확인하며 또 다른 변모가 창출되었음을 강조하였다. 20) 이 역시 전통의 재창출을 의도한 글이다. 박애경은 랩의 수용 과정을 통해 본 대중가요 이식과 전통의 문제 에서 랩을 현대의 한 구술문화 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한 것으로 구체적인 전통의 지속보다는 구술문학으로서의 구비문학적 속성을 드러내려했던 글이다. 21) 연구 중에 특별한 분야를 다룬 것은 최혜실은 디지털 문화환경과 서사의 새로운 양상 에서 디지 털 환경의 새로운 서사양식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다. 22) 스토리텔링의 방식으로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구비전통 확산을 인지해야한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 다. 원소스 멀티유저의 관점은 적절한 지적이나 이는 구비문학과 문화현상과의 경계를 허물어 오히 려 문화현상의 한 구성요소로서의 구비문학의 입지를 확인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것은 서사양식 확장의 현상을 지적한 것으로 구비문학 응용의 총체적인 모습을 보여준 사례이 다. 그러나 이때 서사가 어떻게 그리고 어떤 원리로 작동하고 있는가 하는 심도있는 연구의 과제를 더욱 부각시킨 측면이 강하다. 원소스 멀티 유저의 평범한 현상만을 언급한 것으로는 부족함을 메울 수 없다. 각 유저들간의 특별한 상관관계나 작동 원리 혹은 각 유저들 간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구비문학적 특징은 어느 것인지 등이 다루어져야 한다. 또한 이런 식의 접근과 연구가 과연 구비문 학적인 연구냐의 분야 간의 모호한 경계 문제도 다루어야 할 부분이었음을 부각시킨 꼴이 되었다. 구비문학과 축제의 상관성도 구비문학의 측면을 강조하며 다룬 글이 있다. 안이영노, 김광욱은 입으로 새기는 현대적 축제 - 구비문학과 지역축제의 상생을 위하여- 에서 지역축제에서 구비문학 적 요소를 집중하여 다루었다. 한편 최명환은 현대의 지역축제와 전설 - 강원도 영월지역의 단종 문화제를 중심으로 에서 단종설화를 중심으로 한 재구성을 제언하는 글을 썼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루기로 한다. 위의 주제들을 보면 모두 공연, 영상문화, 멀티미디어 등의 이차적 재창조의 영역이다. 또 매채와 공연이라는 매개를 위주로 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구비문학이 가지는 내용적 형식적 특징을 현대의 매체에서 확인하는 작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 형식적 원리 즉 현장성과 연행성이 일정 한 제한의 상황에서만 작동된다는 한계를 보여준다. 이것을 과연 구비문학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와 함께 그런 지적이 과연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지 모호하다. 그래서 서대석은 문 화비평의 분야도 담당해야 한다고 했고 조동일은 총괄학문의 탄생을 기대했다. 그러나 아직 그런 연구는 아직 없다. 구비문학의 어떤 관점에서 그리고 어떤 기준을 근거로 연구할 것인가의 바탕이 마련되지 못한 이유이다. 또한 학제간의 간섭 여부가 큰 제한 요소이다. SNS도 구비문학의 영역에 넣고 있는 실정인데 역시 매체소재의 특징을 넘지 못하지만 작동원리는 위의 것들과 구별된다. 보다 직접적이며 구비문학적 현장성이 바로 적용된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현대적 기술을 기초로 하고 있는 점이 그렇다. 구비문학이 현장을 중시해야 하고 현장에서 재현되고 있는 점을 주목할 때 이 모두가 현장이긴 하지만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 환경인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또한 어떤 점에서 구비문학에 포함되며 그 연구의 방법과 목적은 무엇인지 모호하다. 축제와 구비문학의 상관성은 먼저 현장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매체와 매개물이 필요 없고 현대화의 기술을 요하지 않으며 더구나 창자와 청자의 구분이 없는 상태의 현장이다. 즉 서로 소통을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환경이 특징이다. 내용과 형식에서 가장 구비문학적인 속성을 재현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많은 글들이 있으나 위의 방법적 접근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향을 보이고 있다. 다만 다루었던 장르가 판소리, 무속 전래동화와 현대소설 및 무대공연 및 유머 등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 특징을 가진다. 23) 소위 현대구비문학이 전승의 속성을 구비하려면 텍스트화의 가능성이 담보되어야한다. 매체상에 서의 상호 소통만을 들어 구비전승적이라 단정하는 것은 부족함이 존재한다. 매체에 올라와 있지 않은 일상의 대화나 각종의 토론이나 여럿이 모여 이루어지는 회의도 모두 상호소통을 하고있기 때 문이다. 텍스트화 되지 않은 이것이 오히려 구비에 적절하다. 이 모두와 어떤 차별을 가지는지 엄정 19) 서대석, 위의 글, 28~29쪽. 20) 장유정, 한국 트로트의 정체성에 대한 일고찰, 구비문학연구 16집, 그는 현대 트로트의 특성 고찰-2004년 하반기 인기 곡을 중심으로- 를 다시 구비문학연구 제20집에 실었다. 21) 박애경, 랩의 수용 과정을 통해 본 대중가요 이식과 전통의 문제, 구비문학연구 제16집. 22) 최혜실, 디지털 문화환경과 서사의 새로운 양상, 구비문학연구 제16집. 23) 단행본 한국인의 삶과 구비문학 (2002, 집문당)에는 다음의 글들이 실려있다. 서대석, 한국인의 삶과 구비문학-구비문학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찾아서-, 이지영, 현대소설과 설화의 만남, 그리고 그 가능성, 김진순, 전래동화출판과 설화문학의 현대적 수용, 박경신, 넘치는 신명, 굿과 가면극이 오늘날 선 자리, 신동흔, 창작판소리의 새로운 길을 찾아서, 이인경, 무대에 오른 구비문학, 그 성과와 전망, 현대의 구비문학 미래의 구비문학, 정충권, 현대신화의 양상과 그 이면, 심우장, 현대 유머의 존재양상과 미적 특성, 정진희, 사이버 판타지, 그 현상과 심층, 장유정, 민요와 대중가요의 만남을 위하여, 박종성, 현대 영상예술과 구비문학

50 구비문학과 축제의 실용적 상관성 한 정의가 필요하다. 접근 가능함의 한계를 둔다든지 텍스트화의 기준을 근거를 들어 마련한다든지 혹은 문학의 본질 즉 인식의 전환을 야기하는 감응의 내용과 형식의 기능을 활용하던지 분명한 나름 의 설정이 필요하다. 여기서 한 가지 상기할 점은 문학의 기존 개념과 설정이 변해간다는 점이다. 즉 문학연구에서 문 화연구로 또 문학에서 문화로의 전반적인 변화 추이를 사회는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학에 대한 개념이 바뀌어가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고민해야 현대구비문학의 개념이 드러날 것이다. 헤체의 시대를 맞이한 오늘 헤체를 통한 진정한 현대구비문학의 재설정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좀더 진 지한 논의가 요구되는 것이다. 4. 구비문학과 축제, 그 실용적 접근 구비문학을 중심에 두고 축제와의 상관성을 다룬 글들이 다수 있다. 이들의 최근 논의를 살펴 그 중심 논지가 어떤 것 인지를 살펴 보자. 상당히 많은 수의 축제가 구비문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축제와 구비문학의 상관관계를 그 실용성을 놓고 논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며 많은 수의 구비문학 전공자들이 관여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를 재론하는 이유는 축제 집행의 당사들 간의 기획 과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즉 일차원적 단순 결합만을 유지 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24) 축제를 기획한 사람들은 그들의 부족한 자질이나 능력 외에도 미진한 진행의 기술적인 문제도 한 몫을 차지한다. 더구나 관민의 차이에서 유발되는 주체자들의 권위와 형식적 자세도 문제가 되 고, 또 구비문학연구자는 기획자들에게 실용성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실책도 있었다. 예를 들어 정선아리랑제는 공연으로 들려줄 수 있는 노래가 아닌데도 무대로 끌고 온것이 지적되 었다. 즉 아리랑제는 삶의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민요가 주를 이룬다. 그런데 이를 공연적 이벤트의 형식에 맞춰 기획한 것은 청자와 창자사이의 소통이 단절되었다. 그 결과 축제는 박제화되어 그 생 명력을 상실하고 있다. 지역생활의 현장에 맞는 콘텐츠를 개발하여 입체적으로 기획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는 구비문학 전공자들이 축제기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너무도 먼 거리에 있다. 전공자가 현장을 알고 있느냐의 문제도 문제이지만, 알고 있어도 어떤 입체적 방법 을 써서 현실성과 그를 통한 생명력을 담보해 내느냐도 문제이다. 더구나 기획자의 입장은 전공자의 입장과 다르고 특히 현실적 여건이 이를 용납하지 않는 점도 문제이다. 설령 이런 문제들이 모두 해결되었다고 하여도 과연 그 현장성과 생명력의 효과를 긍정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가는 여전히 미지수다. 그럼에도 현재 미진한 부분을 채워가는 노력은 경주되어야 한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단양 온달문화축제의 경우도 미진함은 여전하다. 온달장군 선발대회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한 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장애 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온달 마당극, 온달장군 승전 행렬 및 온달 평강 가면 가장행렬, 온달 평강 사랑노래, 온달장군 진혼제 등의 다양한 나열식 프로그램은 특징과 집중이 부재한다고 보았다. 결국 이 축제는 전체적으로 단순한 복고주의적인 반복이라는 평을 면하 기 어렵다고 했다. 프로그램 간의 일관성, 기획의 일관성 및 다른 민속자원의 결여 즉 온달과 관련된 콘텐츠의부재가 관건이라 했다. 아울러 전통적인 온달을 넘어 현대적으로 되살아 날 수 있게 해야 하는 기획 부재도 극복할 부분이다. 어떻게 창조적 재해석해서 축제의 규모를 갖추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하는 사례이다. 25) 진도 영등축제의 경우 지역축제 중에서 비교적 성공한 사례로 회자된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회동앞바다의 바닷물이 갈라지는 신비한 자연현상을 테마로 한 점이 압권이다. 그러나 이 점이 성공의 필수 요인은 아니다. 바다가 갈라지는 지역은 서해에도 여러 곳이 있기 때문이다. 진도 의 풍부한 문화적 기반은 이외의 중요 요인이 되었다. 그 중요한 것으로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영 등제의 연장선에서 개발된 뽕할머니 전설의 활용을 들어야 한다. 영등살놀이로 거듭난 이 전설은 실제로 축제현장의 핵심 원동력으로 작동되고 있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가족과 헤어지게 된 뽕할머니의 재회의 기원은 용왕제를 구현하고 그 결과 바닷길이 열려 재회하 게 된다. 그러나 할머니는 기진해서 임종을 맞이하게 되고 이를 진도의문화재인 씻김굿으로 할머니 를 신격의 지위에 올려 놓게 되며, 또 마지막을 진도 만가를 통한 저승 체험까지 완벽한 축제의 과정 을 이루어내고 있다. 신화재현의 여정을 연상케 한다. 신비한 자연현상을 진도의 민속전통과 구비문 학을 어울리게 하여 구성해낸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성과를 이룬 데 에는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가 없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특히 구비문학과 연관된 것으로 적극적이지 못한 대안 마련을 하지 못한 채 문제만을제기하고 해결책을 고민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한 반성이다. 또한 구비전공자들이 기획단계에서 배제되어온 것도 지적 되어야 할 부분이다. 아무튼 축제 안에서 구비문학이 살아날 수 있도록 해야하는 주체는 구비전공자 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하는 교훈을 얻게 하는 기회가 된다. 최명환의 현대의 지역축제와 전설 - 강원도 영월지역의 단종문화제를 중심으로- 은 지역에서 진행되는 현대의 지역축제가 올바르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축제를 통합할 수 있는 정신적 지주 개념 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 축제의 상징과 이미지를 드러낼 수 있는 축제의 주제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 점에서 전설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월 단종제의 경우 단종이 정신적 지주가 되어야하는 데도 종합예술제의 경향으로 흘러 축제의 정신을 상실하고 있다고 보았다. 여기 서 지역성과 정통성에 대한 인식이 우선되어야 한다. 더구나 단종전설은 전설이 아닌 신화로 까지 인식되고 있는 점을 살려야 하며, 신화적 공간의 재현이라는 관점을 부각시켜야 된다. 26) 고도 했다. 24) 안이영노, 김광욱, 입으로 새기는 현대적 축제, 구비문학연구 제18집, 314쪽. 25) 안이영노, 김광욱, 위의 글, 327~329쪽. 26) 최명환, 현대의 지역축제와 전설-강원도 영월지역의 단종문화제를 중심으로-, 구비문학연구 제16집

51 구비문학과 축제의 실용적 상관성 과연 오늘날 그것이 가능한 것인지 묻지않을 수 없다. 축제의 정신적인 것을 놓고 고민한 것 중 밀양 아랑제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아랑제는 구전과 야담으로 전해오는 아랑이야기에 근거를 둔 축제다. 아랑을 추모하는 사당인 아 랑각에서 치러지는 아랑제향과 아랑의 사연과 연관된 각종 공연, 전시가 이루어진다. 그는 이 둘이 성격을 달리하며 이원화되어있다고 보았으며 비판적인 입장의 검토를 진행하였다. 27) 아랑제는 2000 년에 밀양문화제로 다시 2004년에는 밀양아리랑대축제로 개명된다. 아랑의 사연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행사로 일관되는 밀양아리랑대축제는 그 생명력을잃고 있다고 비판하며 아랑제의 진정 한 의미를 살려내야 한다고 했다. 아랑제의 실제는 원귀의 부활로 봐야하며 이는 공적인 우울과 상 실의 상징으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원귀 아랑은 사회가 만들어낸 공적 우울증을 해소 하기 위한 축제로 전환해야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서 아랑제는 진정한 애도의 장이 되어야한다고 했다. 오늘날 아랑제는 열녀 아랑을 기념하고 교육하는 정치적 교화와 틀에 박힌 축제로 일관하고 있다. 그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우울증과 상실을 애도하는 진정한 해원굿 으로 거듭나야한다고 주장했다. 여러 차례 개명이 된 이유는 오늘의 대축제 모습으로 바뀌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성폭행을 당 한 억울한 아랑의 죽음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축제화해야 하는 가를 놓고 한 고민의 흔적이었다. 아랑의 정절과 열 그리고 말하기 꺼려지는 성폭력에 의한 희생과 아랑의 실책(?)의 차이를 어떻게 승화해갈 수 있는가의 여정이었다. 축제에 대한 과거적 틀에 얽메인 전형적인 과정을 보여준다. 축제의 규모나 성격이 전근대의 재현 그것이다. 오늘날 축제는 실용적인 축제가 되어야한다. 아랑의 사연은 현대인의 애환과 치료에 적합 한 주제를 가지고 있다. 우선 사연의 모호함과 부도덕 혹은 꺼림을 피하려 해서는 안된다. 사연을 직시하고 그에 따른 실용적 치유를 연결시켜야 한다. 정조와 열의 개념은 오늘날 과거의 개념이 아 니다. 진정한 오늘의 개념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런 관점의 재검토를 통하면 아랑제는 치 유와 힐링의 축제로 거듭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임재해는 구비문학과 축제에 관한 전반적인 논의를 개진한 바 있다. 그는 축제의 기원을 설명하고 축제를 확산시키며 발전시키는데 구비문학은 긴요한 구실을 할 뿐만아니라, 구비문학의 구연 자체가 곧 축제를 이루기도 한다고 하였다. 구비문학이 지닌 축제성을 발견하고 축제에서 발휘되는 구비문학 의 기능과 구비문학에 의한 축제 만들기의 가능성을 찾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는 축제의 본질을 제의 적 반란과 커뮤니타스의 조성으로 보았다. 제의적 반란은 상하질서의 변혁적 전도의 신명풀이로 보았 고, 커뮤니타스는 공동체 놀이를 통한 규범과 제한의 해방 신명풀이라 하였다. 오늘날 제의성은 약화 되어 이를 주장할 수 없고 대신 놀이를 통한 신명풀이는 가능하다고 했다. 이를 통해 규범적 체제와 조직의 질서를 넘어 자유와 인간해방의 상태를 조성할 수 있다고 하였다. 28) 이런 속성은 구비문학이 27) 김영희, 밀양 아랑제 전승에 대한 비판적 고찰, 구비문학연구 제24집. 28) 임재해, 구비문학에 의한 현실문화 만들기의 가능성과 필요성-구비문학으로 축제 만들기 의 현실과 나아갈 방향, 구비문 학연구 23집. 13~15쪽. 가진 허구적 반란의 속성과 일치하기 때문에 구비문학의 축제적 속성이 정당화된다고 보았다. 이런 축제적 속성은 구비문학전반에 걸쳐 입증되고 있음을 민요, 탈춤, 굿놀이, 풍물 그리고 구비문학의 현장은 물론 구비전승을 구심점으로 하는 축제 모두에게서 발견되고 있음을 설명하였다. 그는 이미 구비문학과 현실문화 만들기에서 29) 구비문학을 둘로 나눈 뒤 각각 축제의 의미와 소재 를 결정한다는 논의를 한 적이 있다. 신화와 전설은 축제의 주제와 의미를 부여해주고 민요, 탈춤, 판소리 등은 축제의 소재를 결정해준다고 했다. 단양 온달문화제, 자인단오문화제, 울산처용문화제, 밀양아랑제, 진주논개제 등은 각각 관련 설화가 축제의기원과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다고 했고, 정선 아리랑제, 전주대사습, 진주탈춤 한마당, 안동국제 탈춤페스티발 등은 각각 민요, 판소리 탈춤 등이 그 소재를 제공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구비문학은 축제의 전승력을 확보하고 새로운 축제를 만 들어 낼 수 있다고 했다. 그가 논의했던 결론은 축제의 정신적 측면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축제정신의 결핍 은 구비문학의 향유를 통해 보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제도화된 지배질서와 통념으로 굳어진 가 치를 뒤엎고 지배체제에 도전함으로써 대동세상의 해방공간을 만들어내고 민중문화는 애초부터 민 중문학이었던 구비문학을 통해 이룰 수 있다는 설명이다. 과거적 반란과 거역으로서의 축제는 과거의 제도에 걸맞는 행위였다. 제의성과 커뮤니타스는 같 은 맥락의 전도 장치였다. 이를 통한 인간해방과 신명풀이 또한 당시의 가치지향에 부합한다. 지금 은 그런 제도의 정도와 내용이 달라졌다. 당시와 오늘의 공동체 구성원의 능력과도 큰 차이를 보인 다. 과거에는 제도와 신적 세계관이 각 개인을 통제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오히려 신, 인의 위계가 무효화되고 전도된 양상까지 보인다. 달라진 제도와 장치에 걸맞는 축제가 되어야한다. 해방 의 공간과 신명풀이의 양상이 전과 같을 수 없음은 당연하다. 오늘날 축제가 달라져야 한다며 그 방법적 모색을 하고 있으나 근원적인 고민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즉 해방과 신명이라는 전근대의 정신을 달성하는 것을 축제의 본질이자 의미로 내놓 는 이상 올바른 이해가 어렵다는 것이다. 해방과 신명풀이는 호모루덴스적 인간속성과 더욱 연관성 을 가진다. 모든 장치와 제도와 그의 궁극의 목표는 인간의 안정된 행복 달성에 있다. 축제는 인간의 규범 전복과 반란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음을 직시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아랑제는 새로운 기획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즉 억울함의 치유와 한풀이의 힐링, 나아가 실책의 방어력 등에 대한 주제로 축제가 재구성된다면 실용적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여성과 성문제의 진정성있는 축제로 거듭나는 전환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여성과 남성의 입 장에서 그들이 가진 가능한의 성적 문제들을 주제로 설정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많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래야 밀양 아랑제가 가진 진정한 정절과 열의 의미가 진정으로 드러 날 것이다. 실상을 왜면하며 감추어서는 축제는 겉돌 수 밖에 없고, 여기에 참가하는 모두는 속임과 29) 임재해, 구비문학에 의한 현실문화 만들기의 가능성과 필요성-구비문학으로 축제 만들기 의 현실과 나아갈 방향, 제23집

52 구비문학과 축제의 실용적 상관성 외면의 공범자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오히려 축제를 열지않음 만하지 못한 결과를 낳게 된다. 오늘 날 성문제는 심각한 사회적 이슈이다. 풀어야할 문제가 갈수록 많아진다. 관련된 학술대회나 관련 힐링과 치유의 센터의 건립하고 그 주최의 조용한 축제를 진행해야 진정한 실용의 효과가 살아날 것이다. 일회적 행사가 되어서는 한계를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5. 구비문학과 축제의 실용성 비판적 검토 구비전승적 축제의 연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구비문학의 위상은 어떤 것이어야 하나. 이미 학문 영역간의 경계를 허문 상황이지만 그 가치를 따로 논함은 또한 요구된다. 구비적 축제를 가능하게 했던 근간을 이룬 것은 축제 기원설명이다. 이는 참가자들에게 적지 않은 정서적 정신적 영향을 미친다. 정신적 주체와 분위기를 형성하며 문화적 정신적 효과를 창출한다. 지역민의 공동체와 연대를 확인시켜주며 민중운동의 일환을 담당한다. 나아가 관과 민은 나름의 목 적을 정치적으로 각각 달성하기도 한다. 앞서 살핀 실용적 구비문학적 축제의 양상은 이런 보수성을 내재하고 있다. 논의는 주로 축제의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구비전승적인 수용 여부에서 찾고자 한 것이다. 실용성을 논하는데 구비전승은 중요 요소임이 분명하다. 성공적인 진도 영등제의 경우 뽕할 머니의 서사를 잘 활용한 예로 다른 축제에의 적용을 생각하게 하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여러차례 의 변화를 거치며 유지되는 아랑제도 실패라고는 단언할 수 없다. 이런 류의 축제 즉 앞서 살핀 온달 문화제, 영월단종제 및 정선아리랑제 같은 축제가 구비전승의 활용도로 성패의 근거를 마련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충분한 서사를 적용하고도 그 효과를 살려내지 못하는 축제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접근과 섣부른 단정은 또 다른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축제의 속성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30) 앞서 살핀 축제의 속성에서 늘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제의성의 전승 여부와 변화 정도였다. 제의적 속성이 거세되고서 과연 축제의 의미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 본질이라 할 수 있는 공동체성의 구현을 어떻게 담보해낼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는 잘 풀리지 않는 주제였고 계속 논의 중에 있다. 중세와 근대를 지나 현대에 이른 문명은 너무도 급격한 전환을 맞이했다. 이전 과는 차원이 다른 현대적 특징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 현대적 특성을 잘 정리하면 답을 찾아낼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축제가 가졌던 원래의 속성을 떨쳐내야 한다. 오늘날 축제의 경향은 탈근대적 경향을 띤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문화로 급격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듯 가치관의 교체 또한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제의는 중세적 가치관과 세계관에 근거를 둔 문화장치였다. 중세적 가치란 신과 절대자 중심의 30) 필자는 축제의 요소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즉 축제의 속성은 문화적 장치, 주기성, 의례성, 탈현실성, 재생성, 놀이성, 문화소의 재결합과 창조성 등의 특성을 구비해야한다. 여기 의례성과 탈현실성은 축제의 중심축이라기 보다 일부의 요소일 뿐임을 강조한다. 획일화된 사회구성과 체제다. 그 사회가 돌아가기 위해서 축제는 그에 맞는 방법을 마련하여 시행했 다. 과거 축제의 제의성은 이런 사회의 체제와 세계관에 부합한 장치였다. 그리고 이런 실천은 사회 구성원들의 다수 행복과 안정화를 구현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각 시대별 장치는 사회구성원 대다수 의 행복과 평안을 안정적으로 담보하는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현대사회는 과거의 가치관과 거리를 둔다. 가장 큰 차이가 하필 제의성과 관련이 있다. 절대자와 신에의 설정이 와해되버린 현장이 관건이다. 그러나 축제는 여전히 과거의 모습을 재현하려 한다. 특히 제의성이 문제다. 현대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걸맞는 축제의 모습은 이 제의성을 어떻게 해결하 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과거적 신명, 해방, 반란적 제의성과 커뮤니타스는 이제 재조정되어야 한다. 여기서 재고할 점은 모든 문화장치의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의 문제다. 과거나 오늘이나 그것은 공동체 다수의 행복과 평안, 그의 안정적 지속에 있다. 현대인이 제의를 거부하고 그와 연관된 전통 을 거부한다면 그를 따라야 순리에 맞다. 그러면 축제의 의미가 없고 전통의 거부는 문화적 단절과 민족적 주체성 상실의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행복을 안정화할 수 있다면 어느 것이나 할 것이다. 문화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앞선 전통과 전승의 문제를 우려하는 우리는 이런 문화적 잔존 장치를 어떻게 가능한 유지시켜 나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여기 서 중요한 점은 공동체의 안정적 행복 추구를 훼손해서는 안된다는 점일 것이다. 성공적인 문화장치는 그 장치가 전통적이었거나 의미로웠거나 했기 때문이 아니다. 당시의 사회 적 상황에 맞는 문화실천을 했을 뿐이다. 이들은 그 구성원들의 안정적인 행복을 담보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성공으로 이끈 오늘의 축제는 바로 이 점이 충족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던 것이 다. 구비전승은 그 방법적 한 요소였을 뿐이다. 구비전승이 잘 살려져서 혹은 그것을 활용해서, 또 그 정신을 계승하게 한다거나 축제의 중심을 이루는 상징이나 캐릭터를 만들어서 그랬었던 것은 아 니다. 31) 과거에는 공동체 구성원의 행복을 제의의 방법으로 충족시킬 수 있었다면, 오늘은 이를 버림으로 서 충족시킬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들의 행복 추구는 그래서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가진다. 과거에는 내세적이며 지속적이며 집단적이며 획일적인 것이라면 오늘의 행복 추구는 현세적이며, 순간적이고 개인적이며 또한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오늘의 축제가 일회적이며 버라이어티하며 무 가치 지향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도와 규범이 느슨해진 오늘날 해방과 이를 상징하는 신명풀이는 불필요한지도 모른다. 이런 상 황을 인식한 임재해를 비롯한 축제를 논의한 많은 학자들은 제의적 반란 대신 놀이적 변혁과 해방을 강조했다. 그것은 하나의 방편으로 일리가 있다. 그러나 제의성의 제거와 함께 과거적 신명의 놀이 를 지속해야 하는지 재고되어야 한다. 오히려 오늘의 축제는 신명을 요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광 란의 축제나 신명의 축제는 전근대적인 것이다. 이에 대한 집착은 불필요하다. 실제로 현대인들이 31) 최명환, 현대의 지역축제와 전설-강원도 영월지역의 단종제 를 중심으로-, 구비문학연구 제16집

53 구비문학과 축제의 실용적 상관성 요구하는 것은 심리적 정신적 안정의 추구이며 이생의 즐거움을 찾는다. 서구에서 진행되었던 뉴에 이지운동은 그 신호였으며, 그 연장선에서 생성된 다양한 문화장치는 지속적으로 이를 따르고 있다. 요즘 한국에서 진행되는 웰빙과 힐링 및 치유의 장치들은 이를 입증한다. 나아가 이와 맥을 같이하 는 한방축제, 건강축제, 음식축제, 미용축제 등을 비롯한 각종 건강축제와 심리치유의 축제가 각광 을 받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축제는 장려할 것이 아니라 줄여야하고, 아울러 국고도 아껴야 한다. 관 단체의 의도에 농락되어서는 안된다. 조용하고 다양한 축제로 전환되어야 한다. 광란의 축제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이미 충분한 관련 장치가 사회에 만연한다. 게임, 영화, 연극, 드라마, 스포츠, 다양한 유흥문화, 사행성 게임까지 이룰 셀 수 없을 정도다. 축제는 이런 광란과 몰입으로 피로해진 민중을 다시 추슬러야하는 기능을 담당해야 할 입장이다. 이런 현상은 이미 널리 확산되고 있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즉 순천 음식축제, 금산 인삼축제, 양양 송이축제, 강경 발효젓갈 축제, 광주 김치축제, 전주 비빔밥축제, 산청 한방축제, 서울 한방문화축제, 대구 약령시축제, 오산 뷰티힐링축제, 소리축제(전주, 보성, 경주 등), 보상다향제, 고양 꽃축제를 비롯한 다양한 꽃 축제, 순천만 정원축제, 백제 정원축제, 금산 아토피치유축제, 천안 흥타령축제, 서울 춤축제, 울상 태화강 웰빙축제, 성주 생명문화축제, 노인건강축제(공주, 예천, 성남 등), 성남 시민건강축제, 제천 한방건 강축제 등 다양하다. 이외에 비축제적 공동체현장 즉 영화제, 비엔날레, 엑스포 등 까지 이르면 그 수와 성격에서 현대인은 어떤 흐름을 택하고 있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신명은 해체의 과정을 겪고있다. 이제 신명은 파편화되어 대중문화로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이에 대한 면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여전히 사회에는 규범과 제도의 억압이 실재하지만 이미 과거 와 같은 것이 아니다. 민주화의 가속화는 이를 더욱 완화할 것이다. 반란과 변혁을 강조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일 수 밖에 없다. 해방은 소형화되고 소소해져가고 있으며 실용화의 단계로 돌입했다.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행복 추구가 실현되고 있으며 과거의 그것과 질과 내용이 차원을 달리한다. 행복의 안정화가 내세적 기대 가 아닌 현세적인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다. 앞서 살핀 다양해진 현대의 문명양상 즉 디지털문화는 이를 실현하는 현장이다. 앞으로의 축제는 떠들썩할 것이 아니라 조용한 축제가 되어야 하고 작지만 다양하고 실질적인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다양함은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기왕에 성공했다고 보여지는 축제에서도 배울 것도 있다. 모든 축제가 조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선 다양함의 존속은 필요하며 과거의 전통에 대한 향수도 필요하며 계층별 취향별 선택의 여지를 더 이상 아니라는 점이다. 새 패러다임의 시대에 상관된 자료를 규정해야하는 작업이 남아있다. 이 런 문명적 도약의 모색도 관건이지만 이런 추세를 반영하는 자료의 파편화와 불규칙성 그리고 급변 하는 환경과 자료산출의 속도 등을 모두 고려하는 노력이 같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구비문학과 해체된 축제의 실상과의 상관성은 이런 점을 의식한데서 재고되어야 한다. 구비문학 과 관련된 축제는 이런 관점에서 재고되어야 한다. 치유와 힐링의 구비문학실용축제는 충분히 가능 하며 이는 광란적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관련해 구비문학연구가 이어온 소통원리는 당연 한 것이 된지 오래다. 조용한 축제성 지향의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 치유와 힐링, 그를 통한 효용성 연구 나아가 이를 위한 비평의 기능이 더해져야 할 것이다. 디지털 문화의 구비문학적 연관성을 지 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영화, 드라마, 게임, SNS 등의 현장에서 조용한 축제적 실현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 가를 관찰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진정한 구비문학의 역할이 될 것이다. 문학의 정의도 새로워져야한다. 구비문학의 확장은 문학의 판도를 뒤바꿀 수도 있을 것이라 판단 된다. 아울러 인문학의 개념도 그 연구의 대상과 방법에서 인식의 대전환이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현대적 가치관에 따른 재설정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위의 논의는 축제의 소멸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걸맞는 새로운 축제의 부활의 의미한다. 파편화되어있고 편집증적 경향을 보이는 신명풀이와 행복 추구의 방만한 현장을 정상화 시키는 역할을 미래의 축제는 담당해야 한다. 구비문학 연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가치관에 서 벗어난 새 패러다임의 가치관을 설정한 연구가 장려되어야 할 것이다. 연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속성을 먼저 이해해야하는 것이다. 또한 이를 객관적으로 바라보 고 정리하는 것과 필요할 때는 조언과 비평을 해주는 것이다. 여기서 비평이란 지휘자나 지도자적 위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부여와 새로운 해석 및 퇴행의 견제 등에 있을 것이다. 문화적 전통 요소 지향은 중요한 비평점이다. 다양한 자료와 방법을 제시하는 것도 여기에 포함 될 것이다. 물론 이는 전통의 고수가 목적이 아니라 유희와 행복추구의 수단으로서의 다양함 창출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6. 마무리 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축제를 놀이의 장치로 본다면 이 또한 어느 정도는 장려되어야 할 부분이다. 구비문학은 민중의 살아있는 현장이었다. 오늘 민중의 현장은 디지털환경의 현장이다. 당연히 구 비문학의 연구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를 생소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동안 현장의 문학을 문학이라는 고정틀에 묶어놓은 결과이며, 그 연장선에서 시대가 바뀌고 매체가 바뀐 데서 오는 낯설음과 그 차 이의 오인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동안 이를 연구해온 것처럼 연구를 지속하면 된다. 그 상관성을 참고문헌은 각주로 대체함. 굳이 지적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해야 할 것은 구비자료가 과거의 속성을 가진 것이

54 구비문학과 축제의 실용적 상관성 구비문학과 축제의 실용적 상관성 에 대한 토론문 최원오 광주교대 오페라 같은 현대 공연예술이 전통구비문학을 수용하는 양상 역시 흥미롭고 유익한 연구대상이 된다 고 믿는다. 이는 구비문학 자료의 변용과 수용 양상을 응용 및 확장의 영역으로 본 것이다. 구비문학의 확장은 자료의 상관성과 무관한 구비문학의 말문학적 속성을 강조한 영역으로 확대하기도 하였다. 위의 인용문에는 서대석 교수의 글 인용과 발표자의 생각이 모호하게 섞여 있다. (1) 우선 이 점에 대해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2) 다음으로 현장의 문학을 아마추어적인 것으로 본 것 이 구비문학을 실용적 관점, 특히 축제와의 상관성에 초점을 맞춘 본 발표문을 통해 구비문학 연구 경향의 반성적 측면과 나아갈 측면을 아울러 언급했다고 본다. 그런데 전자에 대해서는 한국구비문 학회의 기획주제를 통해 여러 차례 점검해온 바라서 익숙한 관점이라 생각되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나름의 새로운 관점을 제기하였다고 판단된다. 그것은 축제 그 자체가 갖고 있는 성격 탓이겠지만, 달리 보면 오늘날의 축제가 구비문학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상태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익숙한 관점에 대한 비판이든, 새로운 관점에 대한 주장이든 연구자의 주관적 오해와 견해가 개입되기 마련이다. 아닌가 하였는데, 이에 대한 해명도 필요할 것이다. (3) 서대석 교수는 구비문학의 영역 확장(소위 현대 구비문학이라 지칭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한 논의를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문학 텍스트 를 전제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구비문학 연구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구비문학의 말문학적 속성을 강조한 영역 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 해 구비문학의 실용적 연구방법론으로는 모호 하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오해이다. 이러한 오 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서대석 교수가 구비문학 연구의 새로운 방향 과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 연구 방향을 제시하였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 전자의 관점에 대한 토론 발표자는 주로 서대석 교수의 논문 한국의 삶과 구비문학-구비문학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찾아 서 를 대상으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대부분은 정확하게 비판하였다고 판단되지만, 제2장 의 다음 논의는 약간의 오해와 모호함이 개입되어 있다고 본다. 구비문학 연구의 지속(문학적 관점 지속):1 전통 구비문학 현대 구비문학 구비문학 연구의 확장(문화비평적 관점의 모색):2 구비문학(또는 구술문화)의 속성을 근거로 한 미디어 문화 분석(이는 소위 문화비평가 로 행세하는 사람들보다는 구비문학 연구자가 더 적합하다 고 보았기 때문에) 구비문학의 정체성이 현장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차별하여 대하는 자세가 여전히 석연 치 않다. 구비문학의 정체성을 생활적, 문화적 욕구와 연관시켰다. 예술적, 미적인 내적 가치를 추구한 것 과 달리 현장의 의의를 찾아야한다는 의미다. 그는 이를 일상적이고 아마추어적인 문학 으로 보았고 그의 일상생활과의 연관된 단순성 및 보편성의 미학을 재인식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따라서 이 영역 (4) 구비문학의 실용적 연구를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등과 관련시킬 때, 중요한 전제는 구비문 학 작품이 내재하고 있는 가치 해명이다. 이것은 새로운 대상(소위 현대 구비문학이라 지칭하는 것들)을 구비문학에 포함시킬 때도 마찬가지다. 문학의 기존 개념과 설정의 변화가 핵심은 아니라는 뜻이다. 을 구비문학이라는 대상에 걸맞는 접근방법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현장의 문학을 아마추어적인 것으로 본 것도 문제이지만 현장으로 나오되 다시 문학으로 회귀한다 는 의미로 들린다. 이미 기록된 구비자료는 아마추어적이 아닌가 묻고 싶다. 또한 앞서 지적한 반성적 입장이 모호해진다. 현장으로 나와 구비문학의 영역을 확장시키되 텍스트 속성을 버릴 수는 없다는 논리다. 다음의 언급이 이를 확인시킨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자체를 수용자의 관점에서 문학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이라고 본다. 단순한 현상에 대한 연구에 그치지 않고 질을 해명하고 평가하는 본격적인 연구가 수행되어야한다는 뜻이다. 그가 말한 다음의 방법적 모색을 보면 더욱 모호해진다. 전통적인 굿이나 연희가 현대사회에 들어와 계승 변용되고 있는 양상이라든가 무용이나 뮤지컬, 2. 후자의 관점에 대한 토론 4장과 5장에서 토론과 관련한 부분을 발췌하여 각각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4장] 과거적 반란과 거역으로서의 축제는 과거의 제도에 걸맞는 행위였다. 제의성과 커뮤니타스는 같은 맥락의 전도 장치였다. 이를 통한 인간해방과 신명풀이 또한 당시의 가치지향에 부합한다. 지금은 그런 제도의 정도와 내용이 달라졌다. 당시와 오늘의 공동체 구성원의 능력과도 큰 차이를 보인다. 과거에는 제도와 신적 세계관이 각 개인을 통제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오히려 신, 인의

55 구비문학과 축제의 실용적 상관성 위계가 무효화되고 전도된 양상까지 보인다. 달라진 제도와 장치에 걸맞는 축제가 되어야한다. 해방 의 공간과 신명풀이의 양상이 전과 같을 수 없음은 당연하다. [5장] 신명은 해체의 과정을 겪고있다. 이제 신명은 파편화되어 대중문화로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이에 대한 면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여전히 사회에는 규범과 제도의 억압이 실재하지만 이미 과거 와 같은 것이 아니다. 민주화의 가속화는 이를 더욱 완화할 것이다. 반란과 변혁을 강조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일 수 밖에 없다. 해방은 소형화되고 소소해져가고 있으며 실용화의 단계로 돌입했다.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행복 추구가 실현되고 있으며 과거의 그것과 질과 내용이 차원을 달리한다. 행복의 안정화가 내세적 기대 가 아닌 현세적인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다. 앞서 살핀 다양해진 현대의 문명양상 즉 디지털문화는 이를 실현하는 현장이다. 앞으로의 축제는 떠들썩할 것이 아니라 조용한 축제가 되어야 하고 작지만 다양하고 실질적인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다양함은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기왕에 성공했다고 보여지는 축제에서도 배울 것도 있다. 모든 축제가 조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선 다양함의 존속은 필요하며 과거의 전통에 대한 향수도 필요하며 계층별 취향별 선택의 여지를 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축제를 놀이의 장치로 본다면 이 또한 어느 정도는 장려되어야 할 부분이다. 적합한 지적이다. 전통 축제가 내재하고 있는 속성을 현대의 축제에도 요구할 수는 없다.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한국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 민주주의 사회로서의 모습은 전통 축제의 정신과 부합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광란의 축제 대 조용한 축제 로 전통 축제와 현대 축제를 구분할 필요가 있는가? 전통 축제가 내재 하고 있는 속성을 현대의 미디어적 환경 속에서 새롭게 변용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하는 의문을 제 기해 본다. 특히 후자의 의문은 구비문학(또는 구술문화)의 속성을 현대의 미디어 환경에서 찾아 문 화비평적 관점에서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관점을 현대 축제에도 적용해보자는 것을 전제로 한다. 광란의 축제가 따로 있고, 조용한 축제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통 축제와 현대 축제가 유희와 행복 추구의 수단 이라는, 발표자가 설정한 축제의 속성 의 측면에서 상호 유사하더 라도, 전통 축제가 내재하고 있는 긍정적 가치의 추출과 그것의 현대적 변용이라는 관점에서 더 치 밀하게 고찰되고, 기획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구비문학과 축제의 실용적 상관성 에 대한 토론문 김기호 영남대 발표 잘 들었습니다. 실용성의 화두는 특히 구비문학의 위기와 관련하여 대두 된 지가 오래 되었 습니다. 구비문학회에서는 10여 년쯤 구비문학의 실용성을 주제한 학술대회를 개최하였고 이 자리 에서 스토리텔링이 기조발표로 소개된 바 있습니다. 오늘 이 글은 구비문학과 축제의 실용성에 대한 논의로 과거 10년 전의 실용성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조용한 축제 성 지향의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 치유와 힐링, 그를 통한 효용성 연구 나아가 이를 위한 비평의 기능이 더해져야 할 것이다. 디지털 문화의 구비문학적 연관성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 다. 영화, 드라마, 게임, SNS 등의 현장에서 조용한 축제적 실현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관찰 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진정한 구비문학의 역할이 될 것이다. 고 했습니다. 치유와 힐링의 구비문학축제가 그러하듯이 과거의 가치관에서 벗어난 새 패러다임의 가치관을 설정한 구비문학 연 구가 장려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대단히 시의적절한 것으로 연구자의 창의적 노력을 촉구하는 것으 로 이해됩니다. 토론자의 입장에서 발표자의 주장에 대체로 동의를 표하면서 부분적으로 설명이 더 필요한 부분이나 궁금한 점을 질문하는 것으로 소임을 다하고자 합니다. 1. 최근 Y대학교에서는 전공교육과정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그 중 소속 학과에 편성되 어 있는 구비문학교과목이 학생들의 진로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매우 도움이 됨 5점, 약간 도움이 됨 4점, 보통 3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음 2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 1점)라는 설문을 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해 학생들은 진학 관련해서는 3.13점(교수는 4.78로 답함)으로, 취업 관련해서는 2.71(교수는 4.13점으로 답함)점으로 답을 하였습니다. 점수에 미친 변수들은 많겠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실용에 관한 학생의 인식과 교수(연구자)의 인식 차가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실 은 연구자들이 생각하는 실용과 학생과 대중이 생각하는 실용에 차이가 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 다. 이 점을 고려하면 선생님께서도 제안하신 구비문학과 축제의 실용적 상관성 의 보편성을 확보 하기 위해서는 전승자 혹은 향유자 인식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실용성에 대한 독립변수는 연구자의 생각이 아니라 대중의 기호이기 때문입니다. 2. 오히려 오늘의 축제는 신명을 요구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광란의 축제나 신명의 축제는 전 근대적인 것이다. 이에 대한 집착은 불필요하다. 실제로 현대인들이 요구하는 것은 심리적 정신적 안정의 추구이며 이생의 즐거움을 찾는다. 고 했습니다. 현대인들은 조용한 축제를 통해 심리적 안

56 제의 관련 공유자원 활용의 역기능과 사회자본의 향방 정을 추구함으로 다양한 축제를 존중하지만 조용한 축제성 지향의 원리를 지향해야 한다고 했습니 다. 현대인의 심리와 현대인에 필요한 축제에 대한 선생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구비문학이나 축제의 존립 근거는 공동체에 있지 않나 합니다. 개인의 문제와 직접 관련된 문제들은 구비문학이나 축제의 고유 기능에서 다소 벗어난 것이거나 너무 강조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개인의 심리적 안정이나 힐링은 구비문학이나 축제가 아니어도 다른 것에서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공동체의 원형적 힘을 회복하거나 공동체의 유대를 회복하는 것과 관련한 실용성 이 구비문학과 축제의 고유한 기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현대를 소외와 불안의 시대로 규 정하는 만큼 구비문학과 축제의 공동체적 기능은 오히려 오늘날 더욱 필요한 것이라 봅니다 한국민속학자대회 제의 관련 공유자원 활용의 역기능과 사회자본의 향방* 조정현 안동대학교 3. 위의 논의는 축제의 소멸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걸맞는 새로운 축제의 부활을 의미한다. 파편화되어있고 편집증적 경향을 보이는 신명풀이와 행복 추구의 방만한 현장을 정상화시키는 역할을 미래의 축제는 담당해야 한다. 구비문학 연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가 치관에서 벗어난 새 패러다임의 가치관을 설정한 연구가 장려되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역설적이게도 현재의 구비문학 연구가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 혹은 창조적인 패러다임의 실현을 위해서 연구자들은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발표지 마지막 단락에서 말씀하셨지만 좀 더 부연 설명을 듣고자 합니다. 특히 목차 1. 다시 마을공동체와 유무형 공유자원 으로 시각 전환 2. 제의 관련 공유자원의 활용양상 3. 제의 관련 공유자원 활용의 역기능 4. 제의 관련 공유자원과 사회자본의 향방 문화적 전통요소 지향은 중요한 비평점이다. 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듣고자 합니다. 1) 구비문학의 실용성이든, 축제의 실용성이든, 구비문학과 축제의 실용성이든 이는 오늘날 연구자 들에게 핵심 주제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오늘날 구비문학이 처한, 학문후속세대가 찾지 않 는 소외 된 현실을 감안하면 이 분야에 대한 작업은 지속적으로 요구되는 연구 과제라 생각합니다. 덕분에 여러모로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혹 오독한 부분이 있다면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1. 다시 마을공동체와 유무형 공유자원 으로 시각 전환 그동안 마을공동체가 전승해온 각종 민속은 파편화된 민속예능, 세시풍속, 사회조직 등으로 분류 되고, 이를 먼저 발견 하고 가공 하는 주체의 장 안에 놓여지게 되었다. 정부의 민속예술경연대회 를 통한 무형문화재 지정, 지자체 또는 문화권력의 문화자원화를 겨냥한 편의적 무대화 혹은 공연 화, 이데올로기를 왜곡시키는 상부상조의 미덕 등으로 재발견되고 활용되어온 것이다. 정작 해당 민 속의 주인이자 저작권을 가진 마을공동체 주민들은 일정하게 소외되는 방식이다. 따라서 이러한 무형의 민속을 총유( 總 有 ) 1) 개념의 마을공동체 공동자산으로 새롭게 인식함으로써 해당 민속의 주체와 지적재산권을 분명하게 규정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그동안 이루어져온 * 이 논문은 2012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NRF-2012-S1A5B5A ]을 받아 연구되었 음을 밝힌다. 1) 법적인 구속력을 갖는 용어로서 공동자산에 관한 개념으로, 총유(민법 275조), 합유(민법 271조), 공유(민법 262조) 등이 있는 데, 마을공동체의 공동자산은 지분이 허락되지 않고 이용권만 주장될 수 있는 총유 형태로 존재하였으며 그 처분 역시 정관 혹은 규약 등에 명시된 절차를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57 제의 관련 공유자원 활용의 역기능과 사회자본의 향방 민속의 주체에 대한 왜곡을 바로잡고 복권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간 민 속학자들이 추구해온 학문과 현실참여 양상에 대한 근원적인 반성 역시 필요하다. 마을공동체 제의와 관련한 유무형 공유자원은 2) 그동안 크게 주목되지 못한 분야이다. 무대화, 공 연화가 중심이 된 민속에 대한 관심은 해당 민속이 자리하고 있는 제 기반을 애써 무시해온 것이다. 따라서 이와 관련한 다양한 자료들을 발굴하고 논의의 토대로 활용함으로써 기존의 시각에서는 살 필 수 없었던 마을공동체의 유무형 공유자원과 해당 민속의 관계, 지속가능성, 문제점과 대안 등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특히 무형 공유자원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통해 이전에 수집했던 것과는 차별화된 자료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며, 마을공동체 민속의 물적 기반으로서 총유 개념을 확대 적용함으로써 민속 전승의 한 문법을 읽어낼 수 있다. 실상 민속의 쇠퇴와 왜곡 등은 공유자원의 붕괴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상 기할 필요가 있다. 즉 막연하게 산업화, 도시화로 민속이 단절되거나 쇠퇴한 것이 아니라 공유자원 이 왜곡되고 붕괴되면서 관련 민속이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에는 더욱 많은 변수들 이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유무형 공유자원과 마을공동체의 관계를 주목하면 보다 분명하게 민속의 변화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현재 마을사회 내에서 벌어지는 전통적인 총유자원의 분배 등을 둘러싼 역기능이나 갈등양상,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전승되고 있는 동제, 별신굿 등의 민속이 제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문제 역시 유형의 공유자원과 무형의 공유자원이 명실상부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벌어지는 갈등임을 알 수 있다. 총유 개념의 마을공동자원이 몇몇 주민이나 소집단의 전유물이 되면 당연히 관련 민속 의 전승과도 갈등을 빚게 마련인 것이다. 게릿 하딘(Garrett Hardin)은 사이언스 지에 공유의 비극 논문을 게재하였는데, 3) 공동소유의 제 한적 토대를 바탕으로 개인들이 자유롭게 이윤추구를 하다보면 결국 모두가 파멸로 치닫게 되는 상 황에 이른다고 주장하였다. 이 논문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다양한 논의를 이끌어내었다. 또한 공유 회와 충돌하며 공유의 개념으로 변개함으로써 물적 기반을 잃고 마을공동체마저 갈등과 반목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특히 두 번째 공유의 비극은 유무형 분야에서 두루 이루어져왔는데, 유형자산에 대한 지분 개념이 도입되거나, 아예 유형자산에 대한 소유권을 개인 혹은 특정조직, 공권력 등이 점유해버리는 식으로 전개되었으며, 무형자산에 대해서는 무형문화재 제도, 명장 제도, 각종 인증 제도가 편의적으로 도입 됨으로써 마을 공동의 자산으로서 민속이 몇몇의 문화권력에 귀속되는 방식으로 왜곡되어온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마을공유자원의 활용 양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마을 유형별 사례를 통해 극복의 단초를 마련하고자 한다. 또한 여전히 정립되지 못한 한국적 사회자본의 5) 문제를 마을공동 체 제의와 연계시켜 논의하고 유무형 공유자원 의 맥락과 대조해가면서 한국적 사회자본의 향방을 제시하고 향후 이론으로 발전시켜나갈 수 있도록 한다. 또한 현지조사와 분석을 통해 제의 관련 유 무형 공유자원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동시에, 이러한 현재적 활용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역기능과 그 핵심을 이루고 있는 사회자본의 문제를 살피고자 한다. 기존 마을문화에 대한 시각은 원형적인 민족문화로서 바라보면서 지키고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으로 인식하는 경향과 이를 적극 활용하여 문화산업화해야 한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공존해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부 무형 문화재 정책 속에서는 보존하는 경향 외에는 대부분 경제논리를 관철시킴으로써 문화산업화를 겨냥 하는 경향이 더욱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제의 관련 마을문화는 지역축제 등으로 재창출되거나 몇몇 마을사람들의 전 유물이 되기도 하는 사례가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때 주목되는 것이 바로 사회자본의 문제인 데, 마을주민 모두가 공유하고 혜택을 누려왔던 공유자원 관련 사회자본을 몇몇 사람들이 혹은 특정 집단이 사유화하는 경향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사회의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마을공동체에 자본주의적 경제, 경영 원리가 적용되는 가운데 만들어진 부작용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공유자 원의 형성과 활용, 이와 관련한 순기능적 사회자본의 운용이 절실한 상황인 것이다. 의 비극을 넘어설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지역공동체 와 전통 으로부터 찾아내고자 하는 성과도 4) 나타났다. 각 국가나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이어오던 공유자원에 대한 관리방식을 통해서 공유의 비 극을 극복하거나 최소화한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공유의 비극 은 두 가지 방향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나는 게릿 하딘이 주장한 공유 의 비극이다. 공유지 혹은 공유자산에 대한 무분별한 탈취로 인해 우리 산림이나 해양자원이 고갈되 어 주민 삶을 압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총유로서 지속되어오던 공동자산이 산업화, 도시화 사 2. 제의 관련 공유자원의 활용양상 급격한 사회변동 속에서 마을공동체의 사회 경제 구조에 맞물린 문화의 구조들이 대안을 찾지 못하고 사라지거나 약화되어 왔는데, 이는 마을굿 연행 주체들이 사회와 경제 그리고 문화의 근대적 2) 이글에서 전통적인 마을공동체의 공동재산을 의미하는 총유( 總 有 ) 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공유자원 을 표방하는 이유는, 첫째, 마을공동체의 총유가 변화를 거듭하면서 총유, 합유, 공유의 개념이 혼재하는 현실적 상황을 고려하고, 둘째, 전통적인 개념의 총유자원으로 규정하기 애매한 마을재산들(임야, 어시장, 공원 등 법적 등기가 필요한 자산과 민속예술 등 지적재산 권)이 생겨났으며, 셋째, 특정집단의 소유권은 인정되지만 궁극적으로는 마을 공유의 재산인 사례 등이 다양하게 등장했고, 넷째, 무형의 총유자원을 포괄하면서 법률적인 개념이 아닌 문화적 분석단위로서 포괄적인 용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3) Garrett Hardin, The Tragedy of the Commons, Science Vol. 162 No. 3859, 13 December 1968, pp. 1243~ ) 엘리너 오스트롬 지음, 윤홍근 안도경 옮김, 공유의 비극을 넘어 (랜덤하우스, 2010). 5) 유석춘, 장미혜, 정병은, 배영 공편역, 사회자본-이론과 쟁점 (도서출판 그린, 2003), 5~6쪽. 이 책에서는 인간관계, 공동 체, 규범, 신뢰, 호혜성, 연결망 등을 구체적인 내용으로 하는 사회자본 에 관한 연구는 이미 1980년대 중후반 서구에서 초석 이 깔렸고, 이어서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는 사회과학의 중요한 연구주제로 자리잡아 왔다. (중략) 한국은 관계의 철학인 유교를 배경으로 연고에 기초한 지역주의를 통해 정치적 민주화를 이룩했고 또 가족주의에 기반한 재벌을 통해 경제 발전을 달성했 다고 설명하면서 사회자본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부르디외, 퍼트남, 콜맨 등에 의 해 발전되어온 사회자본의 개념은 특정 사회의 관계망이 가지는 자본적 속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글에서는 마을공동체가 축적해온 전통적 사회조직, 제도, 규범, 제의, 세시풍속 등 유무형 공유자원의 운용방식 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58 제의 관련 공유자원 활용의 역기능과 사회자본의 향방 재편에 따라 분산 고립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에 따라 마을굿 양식의 분화라는 과도기 적 양태가 나타나며, 큰굿이나 별신굿, 도당굿, 풍어제, 대동굿 등의 마을굿을 권역별로 담당하던 무계 집단이 탈무업화와 탈지역화되었다. 신분사회가 해체된 이후의 마을굿 연행집단도 마을공동체 구조의 재편과 그로 인한 공동체의 해체 속에서 변화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물적 기반이 되었던 유형의 마을공유자원 역시 전통적인 방식, 즉 위토( 位 土 )나 지선어장과 짬 등 을 확보하고 운용하는 형태에서, 다각도의 현대적 방식, 즉 정부관공서와 지자체의 지원금, 공유자 산의 매각이나 대여, 상포계(상여계) 기금, 어시장 임대, 출향인사의 찬조 등으로 변화되었다. 또한 마을사회와 제의의 콘텐츠라 할 수 있는 다양한 무형의 마을공유자원에 대한 관심도 점차 높아지면 서 유형공유자원과 괴리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마을굿이 역사적 전개과정 속에서 어떻게 유무형의 공유자원을 확보해왔고 이것이 마을사회 속에서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의식주의 빈곤 속에서도 마을 굿이라는 중핵을 중심으로 동토 혹은 위토를 마련하거나 다중의 압력을 통해 마을과 인근지역의 지 배세력으로부터 후원을 이끌어낸 농촌과 산촌, 지선어장과 짬이라는 해양자원을 마을굿의 중요한 공유자원으로 확보하고 다양한 운용방식을 창출해온 어촌 등의 사례를 통해 구체적으로 밝히고자 한다. 또한 마을공동체 제의 관련 유형 공유자원으로서 위토, 지선어장, 짬 등과 무형 공유자원으로서 부조권, 후원자, 주재집단(당주, 노반계, 서낭계 등) 등이 자본주의화의 물결 속에서 어떻게 왜곡되 고 변질되어 왔는지를 살핌으로써 마을공유자원의 문제와 사회자본의 의제가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당초 계획에 추가하여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과 관련한 문제로 다룰 수 있도록 한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에 의해 초래된 유무형 공유자원의 변화가 제의전통 자체를 변질시키는 문제점을 검토하고, 사회자본의 바람직한 쓰임새가 마을공동체 및 제의 전통과 합치될 수 있는 접점 을 모색한다. 마을굿의 속성과 본질은 문화사의 전개 속에서 굴절되고 훼손되었으며 최근에는 공공재, 즉 사회 자본으로서 그 의미와 가치가 향유되기보다는 문화자본의 논리에 포섭되어 사적 소유화 혹은 관변 화되는 경향이 농후하다. 물론 마을을 기반으로 한 굿 문화를 잔존문화 혹은 주변문화로서 존재하게 하는 문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본주의의 체제 내에서 그 활력을 모색하려는 공세적 인 문화적 의지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굿의 근본 속성이자 원리인 나눔과 분배의 정치 경제학 구현은 요원하기만 하다. 경북 동해안의 사례를 살펴보자. 울진군 후포마을의 노반계는 6)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나눔을 실천 한 기록이 현판으로 남아있을 만큼 마을에서 지도적인 위상을 키워왔으며, 등기산 공원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 또한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왔다. 매년 두 번의 성황제와 5년 터울의 별신굿 역시 여전히 노반계가 주축이 되어 개최하고 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어촌계가 주도하고 있는 이웃마을과 달리 노반계가 중심이 되어 별신굿을 이끌어온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 지만 모든 정성을 기울여야 하는 일이므로 어려움이 있더라도 노반계에서 지켜가야 한다는 것이 표 면적인 이유이다. 후포는 또한 웃어른에 대한 공경심이 남다른 곳이다. 우리 마을의 덕목이라 하여 웃어른 공경 잘하기 라는 액자가 마을회관에 걸려 있고, 어른들의 이야기에 비교적 순종적인 문화 적 전통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굿의 세부절차에도 노반계의 전통은 지속되고 있다. 별신굿 기금을 모금하는 데 있어 정월 대보름 을 전후하여 집돌이(지신밟기) 풍물을 통해 자금의 일부를 조성하고 있다. 현재는 물론 미리 정해진 몇 집을 도는 것으로 간단하게 행하고 있지만 공동의 기금마련을 통해 마을 전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별신굿 정신을 실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굿의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맞이굿(문굿)을 통하여 무업집단의 역량을 확인하고 마을의 축제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절차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러 나 실제적인 별신굿 기금 마련에 대한 기여도는 미미하며 노반계의 주민들에 대한 정치적 행동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노반계가 마을주민들을 대표하여 마을굿을 이끌어가고 있음에도 그 대표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주민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마을주민들을 대표해서 성황제와 별신굿을 주도하고 있음 에도 마을주민들을 점점 더 소외시켜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2008년 불거진 노반계 임원들의 자금 횡령 의혹으로 인해서 마을주민들로부터 불신을 받는 지경에 이르고 있어 민주적인 자치조직 의 전통이 아닌 가장 첨예화된 천민자본주의의 본보기가 될 처지까지 밀려나고 있는 형편이다. 역사적으로 농업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농민의 위험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기술적 장치들이 고안되 고 실행되어 왔으며, 많은 사회적 장치들 또한 동일한 목적에 기여했다. 호혜성의 유형들, 강요된 관대성, 토지의 공동체적 소유 및 공동노동 등이 한 가족의 생계자원 속에 생기는 불가피한 골들을 메워줌으로써 생계선 아래로 추락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7) 따라서 마을의 공유자원은 기본적으로 농민의 생존을 위한 사회문화적 장치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이러한 사회문 화적 장치가 문중이나 마을공동체의 공유자원과 이를 기반으로 연행되어온 관혼상제례 중심의 의례 와 공동체제의로 표면화되었다. 그런데 마샬 살린즈(Marshall Sahlins)가 지적했듯이, 사회적 특성에 따라서 친족제도가 토대가 되 기도 하고 상부구조가 되기도 하며, 생산관계가 되기도 하고 의례적 관계가 되기도 한다. 8) 친족사회 를 기반으로 한 한국 농민의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사회문화적 장치로서 공유자원이 형성되고 이것 이 의례와 제의의 역영에서 특화되는 과정에서 토대와 상부구조가 뒤섞이는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제의 관련 유무형 공유자원은 이러한 특수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한국사회에서의 유무 형 공유자원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데, 유형의 공유자원과 관련해서는 이미 상당한 논의가 이루어진 6) 경북지역 노반계에 대해서는 권삼문의 동해안 어촌의 민속학적 이해 (민속원, 2001), 173~220쪽과 조정현의 동해안 마을 굿의 전승주체로서 노반계 와 마을공유자원의 활용 문제, 한국무속학 24집(한국무속학회, 2012) 참조. 7) 제임스 스콧, 김춘동 옮김, 농민의 도덕경제 (아카넷, 2004), 15~16쪽. 8) 마샬 살린즈, 김성례 역, 문화와 실용논리 (나남, 1991), 18~19쪽 참조

59 제의 관련 공유자원 활용의 역기능과 사회자본의 향방 반면, 무형의 공유자원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개념적 접근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따라서 유 무형 공유자원이라는 개념을 설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마을문화로서 주목하면 보다 새롭게 마을민 속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구체적인 사례로서 어촌을 살펴보자. 어촌과 관련하여 바닷가 마을의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 최근 에는 대기업에서 연안어장과 갯벌을 매입할 수 있도록 개방한다는 정부정책도 9) 시행될 예정이다. 전통적으로 마을공동체가 소유하고 관리해온 공유자원에 대한 자본의 침투가 시작된 것이다. 최근 이슈가 계속 되고 있는 제주도 강정마을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마을 앞 바위와 연안이 외부로 부터, 정확히는 정부와 대기업의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다. 앞에서 밝혔듯이 어촌의 공유자원은 본래 총유( 總 有 ) 의 개념으로 인식되고 운용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공동체적 소유와 운용 방식은 일제강점기와 식민지 시기의 왜곡된 전통에 대한 인식 등이 영향을 미치면서 조금씩 변질되어갔다. 여기서 필자가 총유란 용어 대신 공유( 共 有 ) 자원이라는 용 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총유로 인식되던 어촌의 자원이 상당부분 변질되어 있는 상황을 반영하는 것 이기도 하고,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어촌 공동체의 공유자원으로서 전통적인 민속 기반의 사회자본 을 포함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즉 이제는 물질적 혹은 경제적 측면에서의 마을공동체의 자원과 비물질적 혹은 사회적, 문화적 측면에서의 자원까지를 포괄하여 논의함으로써 어촌의 실상을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근현대를 맞이하면서 이러한 마을공유자원 기반에 대한 혼란은 마을굿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 데, 식민지적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전개 아래 일제강점기 동안 길들여진 강제된 마을굿에 대한 인식이 해방 후에도 고스란히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부 수립 뒤에도 미신에 대한 고정관념은 회복되지 않았기 10)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마을굿과 공유자원의 전통은 전근대, 일제강점기와 근대화, 현대자본주의 등을 거치면서 다종다양한 양태들을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왜곡되고 비틀어져 단순논리로 설명되기 힘든 양상을 띠고 있다. 어촌공동체가 농촌공동체의 원리를 따르는 가운데 어촌으로서 특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은, 첫째, 어업의 노동장소와 생산의 터인 어장은 그 자연적 기술적 사정에 의하여 경지보다도 훨씬 개별화가 곤란하며 동시에 어업엔 공동노동이 한층 요구된다는 점, 둘째, 한국의 어촌은 타국의 그것과 마찬 9) 박진섭, 갯벌민영화법 당장 폐기하라, 경향신문, 2012년 4월 30일자. 최근 들어 대규모 간척 논란이 잠잠해지나 싶더니 갯벌양식 민영화 라는 이름으로 갯벌의 수난이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다. 농림수산식품부가 정부입법이 아니라 절차가 간단 한 의원입법 형식을 빌려서 수산업법 개정과 갯벌양식어업의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 제정을 추진하고 나선 것이다. 이 법안의 주된 내용은 기업과 외부 자본이 갯벌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제도를 대폭 완화하고, 마을 어장의 어업권 을 기업에 넘겨주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외부 자본참여 지분을 50%까지 허용한 어업회사법인 에는 어업권 임대차를 허용 하겠다는 것이다. 애초에는 외부 자본참여 비율을 90%까지 계획했다가 반대에 부딪히자 부랴부랴 50%로 수정했지만 큰 의 미는 없다. 기업의 자본 유입을 허용하겠다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며 외부 지분 참여비율은 언제든지 올릴 수 있다. 이러다가 국민의 공공자산인 갯벌이 기업의 사유재산처럼 이용되는 것은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마을어장이 기업과 외부자본에 임대차된다면, 갯벌에서 어패류를 채취하여 경제적 소득을 올리며 살아가는 고령의 맨손어업 종사 어민들은 일자리가 사라지 게 된다. 갯벌 민영화는 흡사, 대형마트가 골목 상권을 장악해 중소상인들을 거리로 내모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 10) 최경호, 미신타파 이후의 洞 祭 와 마을의 정체성, 종교연구 (한국종교학회, 1997), 70쪽. 일제가 동제를 비롯한 민속신앙들 을 탄압한 방법과 대상은 해방 후에도 여전히 한국의 정부에 의해 이어진다. 가지로 본래 농주어종( 農 主 漁 從 )의 생업형태가 오래 계속되다가 근대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어주 농종( 漁 主 農 從 ), 내지 순어업촌락이 발전했던 것이며 반대의 경우는 상정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 면 어업생산은 본시 부식물을 제공하는데 불과하며 또한 어로기술의 저위생산성, 어업생산의 불규 율성=불요정성 및 어업생산물의 교환경제적 성격 등은 자급자족경제를 전제로 하는 한 어업에 전업 화할 수는 없고 항상 농업의 보완물로서만 존립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업에의 전업 화는 어로기술의 발달과 어업생산을 위요하는 전체국민경제구조와 화폐상품경제적 체제에로 재편 성됨을 전제로 한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의 어촌은 본래 반농반어의 겸업어촌으로서 출발하였고 또한 그러한 생업형태는 오래도록 계속되었으므로 농업과 농촌의 제도는 이를테면 수조단위인 결부제의 어업에의 공용과 같이 그대로 어촌에도 적용되었다고 하는 점에 근거하는 것이다. 11) 박광순은 12) 한국어업의 낙후성과 정체성을 가장 표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한국어업의 대종을 점하고 있는 연안어업에 있어서의 공동체적 생산양식 이라 규정하고 한국 어업공동체의 성격을 검 토하고자 하였다. 그는 우리의 어촌이 전업적 성격을 띠게 된 것도 조선 후기의 일 이고, 심지어 전업성의 정도도 반농반어의 성격을 의미하는 것 이었다고 말하며, 이로 인해 근해 연안어업이 주 종인 영세한 촌락 경영에 있어서 연안 어장의 소유 개념은 원칙적으로 마을공동체의 공유적 점유가 될 수밖에 없으며 생산관계 역시 총유적 경영을 요구했다. 고 주장한다. 요컨대 우리나라의 어촌은 생산력의 발전단계가 낮기 때문에 농촌에 비해 월등히 촌락공동체적 경영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이다. 위 주장과 같이 어촌공동체는 발전된 어로기술이 도입되기 이전에는 확실하게 농촌공동체와는 구 별되는 특수성을 띠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근현대사회로 넘어오는 과 정 속에서 그러한 특수성이 다른 방식으로 변화되어 왔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즉 1980년대까지도 지역농협을 중심으로 하는 농촌공동체적 속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공유자원에 대한 총유적 운영방 식에서 어촌계 중심의 공유적 운영형태와 함께 수익원의 다변화를 모색해왔기 때문이다. 어촌공동체의 공유자원은 바다를 토지로 인식하고 이를 총유하는 방식을 취하였다는 점에서 그 특성이 드러난다. 대부분의 어촌이 반농반어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토지의 소유권은 일부 지주 나 몇몇 소농들에게 귀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선어장의 공유자원은 어촌 주민들에게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어촌의 공유자원은 아래와 같이 몇 가지 층위로 나누어진다. 1 짬을 중심으로 한 미역 채취권 등 2 후리 그물을 통한 공동작업의 성과물 3 포구를 갖춘 지역의 관련 수익 4 마을 소유의 임야를 활용한 화목, 나물, 특산물 등 11) 박광순, 한국 어업공동체의 성립과 존립양태에 관한 조사연구-어촌계를 중심으로, 경제학연구 (1971), 128쪽 참조. 12) 박광순, 한국어업공동체에 관한 연구-성립과 전개형태를 중심으로-, 지역개발연구 6집(전남대학교 지역개발연구소, 1974), 121~126쪽 참조

60 제의 관련 공유자원 활용의 역기능과 사회자본의 향방 5 해안지역 공유지에 대한 임대수익 6 해변 모래사장을 활용한 해수욕장 등 관광사업 수익 어촌의 공유자원은 크게 두 가지로 구별된다. 유형자원과 무형자원의 형태이다. 유형자원은 마을 공동체가 소유, 혹은 운용하고 있는 동산, 부동산을 의미한다. 무형자원은 유형자원을 운용할 수 있 는 전통 기반의 규범, 제도, 관행, 네트워크 등을 포함해서, 각종 사회조직, 마을굿, 대동놀이, 세시풍 속 등의 문화자원 혹은 사회자본까지를 아우른다고 볼 수 있다. 어촌공동체에서는 이러한 유무형 공유자원이 미분화되어 있다는 특성을 보여준다. 물질적 재화와 무형의 사회자본이 분화되지 않은 채 마을공동체를 배경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구조이다. 짬에 대 한 운영과 관리 측면에서만 보아도 향약, 동규 등을 통해 어촌공동체 성원들을 강제하기도 하고, 짬의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일찍 분가하는 것이 유리한 상황에서 농촌과는 다른 사회구조를 파생시 켰을 것으로 판단된다. 어촌에서 가족의 주기( 週 期 ) 또는 가족의 크기는 경제활동의 영향에 자극받고 있다. 공유수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생산활동에서 생산의 단위는 개인이기보다 가구이다. 즉 한 가구의 가족 구성원이 많은 경우보다 가구가 분할하여 두 가구가 되는 것이 유리하다. 따라서 어촌경제활동의 특징은 분가 를 촉진하는 원인을 배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잦은 분가는 가족 규모의 크기를 작게 할 것이다. 가구원의 수가 적은 상태에서 가옥 또한 작은 규모로 꾸며지는 것에서, 물질문화(material culture)가 사회구조(social structure)를 반영하는 측면을 엿볼 수 있다. 13) 이러한 공유자원의 특성에 기반한 분가 촉진의 문화는 해안지역의 특성으로 꼽히는 제사 분할 혹은 제사 모셔가기 관행과도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제사 모셔가기와 관련하여 김미영 은 해촌 주민들의 유교이념과 양반을 지향하는 경향성에 의한 것으로 해석을 하고 있는데, 14) 일면 타당하지만 어촌 주민들의 생업기반 등에 대한 주목이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여겨진다. 필자는 두 가지의 요인을 들고자 하는데, 첫째는 어촌의 공유자원이 최소한 하나의 가구를 이룬 인간의 도리로 서 제사를 모셔야 한다는 인식을 강화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제사를 모실 수 있는 물적 조 건을 제공했다는 것이며, 둘째는 어로활동의 위험한 특성상 마을신이나 각종 직능신에 대한 신앙심 과 더불어 나와 함께 하는 영적 존재 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후포마을에서는 향약(동규)에 죄의 경중을 판명해 벌을 받게 되는 12조항을 열거하면서 그 벌칙 으로 最 極 罰 은 장이 15이고 最 中 罰 은 태 이라 15) 정리해두고 있어 공유자원과 연계된 형벌은 가하지 않았거나 후대에 개정하면서 사라진 것으로 파악된다. 반면 이웃의 기성마을에서는 다음과 13) 권삼문, 동해안 어촌의 민속학적 이해 (민속원, 2001), 29쪽. 14) 김미영, 제사 모셔가기 에 나타난 유교이념과 양반지향성, 민속연구 9(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 1999), 226~239쪽 참조. 15) 厚 浦 洞 中 老 班 契, 鄕 土 史 硏 究 厚 浦 洞 誌 ( 大 成 印 刷 所, 1989), 59~61쪽. 같이 규정이 나타나고 있다. 하나. 선박 공동시설에 대하여 타인의 물품을 절취한 자에 대하여서는 연령을 따지지 않고 한 집안 의 주인에 대하여 공동어업권 행사를 3년간 정지함. 하나. 기성리의 거주자로서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다른 집안을 업신여기고, 동네에서 부정한 언사 또는 폭행을 감행할 시에는 이유를 불문하고 동안으로 제명함과 동시에 3년간 공동어업권 행사를 정지함.(1960년) 16) (밑줄 필자) 위의 기성리 동규에서는, 타인의 물건을 절도한 자와 마을공동체의 질서를 어지럽지는 행위에 대 해 주민의 생존권과 같은 어업권을 3년간 정지한다고 정해두고 있다. 공동어업권이라 표현되어 있 지만 사실상 마을 구성원 자격을 박탈하는 것이자, 동민으로서 권리 17) 행사 일체를 3년간 정지한다 는 내용이다. 마을의 법을 주민의 총유 기반의 생존권과 연동시킴으로써 강력한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어촌공동체의 공유자원은 물질적인 기반과 제도적인 운용이 상호 연동되면서 유기적인 구조 를 가지고 있으며, 공동체의 성원을 공유자원의 공동이용자로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서 생존 권이 좌우될 정도로 큰 파급력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후포마을이나 기성마을의 사례와 같이 공유자원의 성격에 따라서 마을사회의 구조 자체도 변동될 수 있고, 역으로 마을사회의 구조에 의해 공유자원 역시 역동적인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유자원의 운용주체로서, 주민들의 자치조직인 노반계의 정식명칭은 후포동중노반계( 厚 浦 洞 中 老 班 契 ) 이다. 노반계가 만들어진 것은 1788년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1803~4년(순조4년) 간의 연이 은 흉년이 계기가 되어 동사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 후포의 18) 다른 지명인 남호동은 포구의 한 가운 데 위치한 관계로 여러 지역의 지방관들이 배를 타고 움직이다가 중간에 묵고 가는 숙박지었다. 남 호동 주민들은 이들 지방관들을 접대해야만 했다. 그러나 2년간의 흉년을 겪는 중에도 이러한 접대 는 계속되었고, 결국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렀다. 동리재산이 바닥나 집집마다 경비를 거두고 푼돈을 모아 충당하였으나 폐단이 막심하여 동민들은 떠나거나 흩어져 마을이 폐허 상태에 이르렀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동민 최진우, 우계현, 안세태가 중심이 되고 유사 김천익과 더불어 마을공동기금 조성사업에 나섰다. 네 사람의 남호동민은 남북상선을 대상으로 한 부식장사 수입을 적립해나갔다. 당시 남호동 포구(후포)는 남북을 왕래하는 상선이 수시로 드나드는 중간 기착지였다. 북에서 내 16) 윤동환, 별신굿의 경제적 기반과 전승주체의 변화: 경북 울진군 기성면 기성리를 중심으로, 한국무속학 25(한국무속학회, 2012), 104~105쪽 참조. 17) 동민의 권리에는 생존에 필수적인 공유자원으로서 임야에 대한 화목, 특산물 등에 대한 획득 등까지를 포괄하는 것이다. 18) 후포는 본래 후리포로 일컬어졌는데 후리 그물로 고기를 잡는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다. 천혜숙, 동해안 마을의 신당과 제의 (민속원, 2007), 187쪽

61 제의 관련 공유자원 활용의 역기능과 사회자본의 향방 려오는 배에는 주로 명태가 실려 있었고, 남에서 올라오는 배에는 쌀이 실려 있었다. 대량의 물품을 운송할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이 뱃길인 시절이었다. 네 사람의 노력에 결과 마을재산은 점차 늘 어났다. 동민들이 뜻을 같이 하게 되어 재산증식에 노력하게 되면서 동자금도 넉넉하게 되고 동규 (마을자치규약)도 엄격히 정하게 되어 인심을 되찾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레 계가 형성 되었고 초대 좌상은 김천익이 맡게 되었다. 1913년(순조13년)에는 동사를 짓게 되고 14년 후인 1827 년 마을을 부흥시킨 4인의 덕을 기리기 위해 그간의 역사를 기록해 현판을 걸게 되었다. 현재까지 14대 좌상이 활동하면서 공유자원에 대한 운용, 동제사와 별신굿의 주재 등을 담당 해오던 후포 노반계에도 지속적인 도전이 있었다. 1923년 8월 8일에 厚 浦 漁 業 組 合 이 설립되어 인 가를 받았다. 19) 이때의 조합장은 일본인 濱 田 興 三 郞 이었는데, 대정 6년(1917)부터 8년(1919) 사이 에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의해 울진에 이주한 일본인은 총 115명이었고, 이후에도 많은 수의 일본 인이 거주하게 되었으며, 20) 해방되기 전까지 일본인 조합장이 계속 역임해오면서 후포항을 조성 하였다. <사진 1> 후포항 전경(1931년) 상 단체로서 수협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러한 틀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962년에는 후포어업 협동조합이, 1977년에는 후포수산협동조합이 설립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어촌계의 활동이 시 작되었다. 어촌계가 자리를 잡게 되면서 어촌에서는 마을자치조직이나 말단행정조직보다 막강한 힘을 가지 게 되었다. 이는 또한 전통적인 반농반어의 생계형태가 어업을 중심으로 하는 편제로 변화해가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후포수협에서 후포별신굿에 주목하여 울진대게축제와 연계 를 제안하였으나 성황님께 신탁을 청한 결과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노반계가 독자적으로 별신굿을 개최함으로써 수협과 갈등을 초래하였으며, 22) 지역사회의 호응을 끌어내는 데 실패하는 계기가 되 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어업과 관련한 공유자원은 어촌계가, 그 외의 것은 노반계가 운용하는 방식이 자리 잡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적 조직사회 즉 전통사회를 기반으로 한 사회자본의 특성은 해당 조직의 안정적인 전승을 위한 물적 기반과 조직적 기반의 확보에 철저하였다는 점이다. 마을의 동토와 대동회, 문중의 조상 선양을 위한 위토와 문중조직, 마을굿 연행을 위한 위토와 전승체계 및 네트워크, 각종 계조직을 위한 토지와 연망 등을 확보해왔다. 특히 3년, 5년, 7년, 10년 등의 주기를 가졌던 별신굿의 경우에 는 장기적인 물적 기반 조성을 위한 각별한 방법이 더욱 발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전승력 을 확보하고 있을 만큼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때 어촌마을에서 주목한 것이 바로 바다 속의 토지 라 할 수 있는 지선어장(마을 앞 바다)과 짬 23) 이다. 이 짬을 마을운영 기구에서 주민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하여 임대하고 거기서 나오는 재화가 마을기금이 되는 구조이다. 각 마을에 따라서 축적된 공유자원은 기본적으로 짬이 중심이기는 하지만 전답이나 임야, 대지, 건물 등까지를 포괄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노반계의 영향력이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마을의 경우, 대부분 공유자원의 폭이 넓고 다양하다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즉, 짬의 경우에는 어촌계로 이양되었 지만 전통적으로 마을에서 소유하고 있던 토지나 임야 등은 어촌계와 관련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노반계에서 계속 관리할 수 있었고 이러한 공유자원에 대한 권리가 노반계 유지의 기반이 된 것이다. 후포 노반계의 공유자원을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후포 노반계가 관리하던 공유자원에는 짬, 어시장, 등기산, 동사 등이 있다. 먼저 짬은 어촌계가 공식화되면서 자연스레 소유권이 이전되었 고 대신 동제와 별신굿 때 일정한 지원금을 납입하도록 합의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일제당국에 의해 어획물의 운송을 위한 철길이 설치했음을 알 수 있다. 1957년에는 東 林 水 産 ( 株 ) 厚 浦 통조림 工 場 이 吳 辰 鎬 를 대표로 하여 강원도 울진군 평해면 후포리 606번지에 설립되었다. 21) 수산업법(1953년 9월)은 일제강점기 법령을 참조하는 가운데 촌락 공동 어업의 경영에 대해서는 어장의 총유화를 인정하였다. 수산업협동조합법(1962년)의 제정으로 법률 漁 村 契 라 함은 漁 民 들의 共 同 事 業 모임 契 로 1977 年 4 月 에 水 産 法 에 依 해 洞 中 에서 古 來 로부터 미역 짬(곽암) 其 他 로 生 産 되는 水 中 채치 物 로 생긴 돈으로 洞 中 行 事 에 利 用 하여 오든 中 그 權 利 를 漁 村 契 로 19) 朝 鮮 銀 行 會 社 組 合 要 錄 (1937년판)[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0) 동양척식주식회사, 동양척식주식회사이주민분포도, 1919(대정 8년). 이 지도에는 각 지역별 이주민 숫자가 기록되어 있으 며, 뒷면에는 조선이주에 관한 정보를 상세하게 안내하고 있다. 21) 全 國 企 業 體 總 攬 (1958년판)[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2) 박흥주, 바닷가 마을굿에 나타난 3수 원리분석-당산굿을 중심으로 (경희대 석사논문, 2004), 142쪽 참조. 23) 일반적으로 5~20m의 얕은 바다 속에 자리잡은 수중바위 군락을 의미하는데, 이 주변으로 미역, 다시마, 김 등 해조류가 서식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류, 전복, 소라, 문어 등의 해양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어촌마을의 중요한 공유자원으로 인식되고 있다. 권삼문은 동해 연안촌락에서 짬의 배정과 미역의 분배를 일종의 사회보장제도로 간주하기도 하였다[권삼문, 어촌의 미역채취관행에 관한 연구 (영남대 석사논문, 1991)]

62 제의 관련 공유자원 활용의 역기능과 사회자본의 향방 移 讓 됨으로써 不 得 己 三 年 마다 擧 行 하는 豊 漁 祭, 年 七 回 에 大 祭 祠 를 奉 行 하는 費 用 條 로 豊 漁 祭 分 은 年 50 萬 원, 7 回 大 告 祠 費 60 萬 원 式 漁 村 契 로부터 保 助 를 依 賴 해 왔으나 앞으로는 豊 漁 祭 도 3 年 이 5 年 으로 延 長 이 되었고, 날날이 物 價 上 昇 으로 洞 中 老 班 契 로서는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다. 24) 위 기록을 통해 1977년 중앙 정부의 수산법에 의해서 어촌계로 짬에 대한 권리를 이양하였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 댓가로 어촌계로부터 매년 동제사 비용 60만원과 별신굿(풍어제) 비용 50만원을 지원받았다. 다음으로 2007년 울진군에 매각한 등기산 공원이 있다. 맞은편( 案 對 )에 있는 등기산( 登 起 山 )은 본시 동유산( 洞 有 山 )인데 孫 氏 들의 묘계( 墓 界 )에 편입( 編 入 ) 이 되어 온 동민( 洞 民 )이 분개( 憤 慨 )히 여기지 않은 자가 없었고 뒤에 임야측량( 林 野 測 量 ) 때 광연씨가 극력항변( 極 力 抗 辯 )하여 도로 찾아 지금은 막대한 동중 수입원( 收 入 源 )이 되고 있다. 25) 마을 공유자원으로서 규모가 가장 큰 것인데, 노반계원들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조성된 곳이다. 노반계원들이 직접 자신들의 손으로 나무를 베어내고 땅을 다지고 시설을 끌어들이며 1982년 조성 하였다. 이때 어촌계, 박곡마을, 거일마을, 금음마을, 그리고 무당(양중) 제갈태오도 찬조를 하였음 이 26) 확인된다. 등기산 공원의 경우 2007년 울진군에 매각해 4억4천만원 정도의 기금이 생겼다. 다음으로 매년 임대료로 노반계에 고수익을 안겨주고 있는 후포어시장이다. 어시장은 해방되고 그 땅을 샀습니다. 샀는지 기증받았는지 확실히 모르고 애매합니다. 요거 동네 가 어시장 건립했다는 현판이 있습니다. 그때 가난했습니다. 18년 전에 그랬는데 아무 장사도 안되고 수입이 있어야지. 그후에 안 되겠다 해서 활어장사를 시작했지요. 처음에는 마른고기를 했는데 18년 전에 안되겠다 회 장사를 하자. 그래서 저거만 하더라도 돈이 없으니깐 땅은 우리가 대고, 건물은 입주자 너거가 해라. 지금은 땅은 노반계 땅이고 건물은 각자 소유가 다릅니다. 27) 마을 공유자원을 기초로 해서 헐값에 매입한 어시장 터가 1990년대부터 동해안 관광 붐을 타면서 회센터로 각광받기 시작하였고,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오르게 되면서 매년 5천만원 이상의 수익을 내고 있다. 매년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기금이기 때문에 안정적인 노반계 운영의 일등 공신이 되고 있다. 위와 같은 공유자원으로부터 나오는 기금을 바탕으로 연 4회의 제사와 5년마다의 별신굿을 치러낸다. 하지만 매년의 수회 제사나 별신굿 비용으로는 실제로 큰 돈이 들지 않기 때문에 지속적 으로 기금이 늘어가고 있다. 후포마을은 공동체의식과 전통계승의식이 남다르다. 그 중심에 노반계가 자리잡고 있다. 어른들 이 후포는 대통령은 바꾸지만 전통은 그대로 한답니다. 라고 28) 할 만큼 전통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곳이다. 노반계는 계 형태의 모임으로 노인회 성격과 더불어 마을 원로회의 성격을 아우르고 있다. 동사는 1813년에 지어진 뒤 3차례 중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노반계원들의 집결지가 바로 후포1리에 자리 잡은 동사이다. 노반계의 임원은 가장 연장자인 좌상을 비롯해서 부좌상, 총무, 감사, 임원, 준 임원, 시존위, 시동수, 회원 등으로 구성된다. 임원이 되려면 시동수와 시존위를 각각 2년씩 거쳐야 한다. 2011년 현재 노반계원은 43명이다. 한편 주민들은 5년에 한 번(만 4년) 별신굿을 벌여 마을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한다. 약 20년 전까지는 3년에 한 번(만 2년) 별신굿을 벌였지만 경제사정과 주 민들의 사정에 따라 현재와 같이 5년 주기로 변경한 것이다. 노반계는 성황제와 별신굿의 주도적인 전승주체이면서도 이중적인 인식과 자기모순을 드러내기 도 한다. 第 三 條 先 祖 祭 祀 받들기를 삼가지 않고 遙 祀 (무당, 迷 信 등)을 行 하기 좋아하는 者 祭 祀 를 全 廢 하는 者 는 次 極 罰 이요 비록 祭 祀 는 行 하나 不 謹 不 契 한 者 次 中 罰 이요. 무당을 맞아 풍악을 베풀고 穀 物 을 허비한 者 次 下 罰 이나 父 母 의 病 에 무당 말을 잘못 믿고 막연히 祈 禱 를 行 한 者 는 罰 에서 除 外 한다. 29) 무당과 함께 적극적인 협력을 이루면서 별신굿 등 마을굿의 굳건한 전승주체로 활동하는 노반계 의 향약(동법)에서 미신 등을 벌로 다스린다는 항목을 주요하게 언급하고 있는 모순이 드러나고 있 다. 성리학적 명분으로서 좌도음사로 배격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방임했던 유림세력의 패러다임을 답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통적으로 후포의 지신밟기는 성황님 바람 쐬인다 고 표현되는데, 이는 성황님이 당에만 좌정해 있으면 답답하고 동민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없으므로 성황님을 모시고 가가호호 방문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더욱 중요한 의미는 성황님의 명과 복, 영험성 등을 각 집에 전달한다는 것이다. 성 황제를 흠향한 마을 수호신이 각 가정에 명과 복을 내려준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몇 해 전까지 는 후포면 삼율마을에 거주하는 이 지역 세습무 김장길씨가 주동이 되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무당까지 참여해서 더욱 구체적인 무가와 공수로 각 가정을 축복해주는 방식이었던 셈이다. 2011년 지신밟기에는 무당은 참여하지 않았고 청주지역에서 활동하는 조진국 대표를 30) 비롯한 풍물패 10여명이 31) 함께 했다. 노반계 성원들이 이따금씩 꽹과리를 잡거나 북을 치기도 했지만 추 24) 厚 浦 洞 中 老 班 契, 앞의 책, 68쪽. 25) 厚 浦 洞 中 老 班 契, 제4호 남호동동사이차중수기번역, 남호동 노반계 현판 역사 (2004, 미간행), 1943년 동사를 중수할 때의 기록에 함께 실려 있어 일제강점기 말엽의 일로 판단된다. 26) 厚 浦 洞 中 老 班 契, 앞의 책, 31~34쪽 참조. 27) 후포 노반계 이원태 총무 제보( ). 28) 김음정(여, 77세, 후포주민)과 2008년 6월 4일 후포1리 마을회관에서 면담. 29) 厚 浦 洞 中 老 班 契, 앞의 책, 59쪽. 30) 청주 신명풍물예술단. 31) 이때 참여한 풍물패들은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학생들이었다

63 제의 관련 공유자원 활용의 역기능과 사회자본의 향방 운 날씨와 장거리 행진 등의 조건으로 인해 대부분의 지신밟기 연행을 조진국 대표와 그 일행들이 담당하고 노반계원들은 소고를 치며 춤을 추는 등으로 참여했다. 후포마을에서는 정월과 9월 중정일 때의 성황제 때 드리는 성주고사와 별도로 2번의 성주제사를 따로 추가로 더 지낸다. 음력 6월 27일 성주생일날과 추석에 성주제사를 올린다. 이때에는 다른 당 에는 가지 않고 성주신에게만 제사를 드린다. 다른 내륙지역과 비교해볼 때 특수성을 보여준다. 이 들이 성주에 열성인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공유자원에 대한 논의와 관련된다. 동사를 중심으로 한 노반계 자체가 하나의 집 을 이룬 셈이다. 본래의 명분은 마을전체의 성주이지만 노반계와 동사 자 체의 성주이기도 하고 노반계의 역사와 함께 한 역대 좌상 등의 조상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으로 파 악된다. 후포마을의 별신굿은 20여년 전까지 3년 두리였던 것이 5년 두리로 바뀌어 노반계의 주도 하에 개최되고 있다. 노반계가 독점적 주제권을 강조하게 되면서 어촌계와 주민들의 호응이 점차 줄어들 었고 인근 지역에서도 찾는 이가 거의 사라지게 된 상황이다. 일반적인 별신굿의 주축인 선주들의 참여가 저조하고 노반계 이외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게 되면서 더욱 형식 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후포에서는 마을굿에 필요한 허드렛일도 고령의 노반계원이 도맡아 하고 있다. 굿거리마다 무인 들의 뒷수발을 하고 주변을 정리하고, 굿판에 필요한 무구와 장비들을 노반계원들이 직접 나른다. 청년회원들이나 부녀회원들이 주축이 된 어촌계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들의 참여가 원초적으로 막혀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도 자의든 타의든 굿판의 참여를 원하지 않는다. 어촌계 주최 시 청년회나 부녀회의 참여가 적극적이고 열성적인 다른 마을과는 비교되는 대목이다. 별신굿 주재집단인 노반 계의 영향력 약화는 자연스럽게 굿판의 기능과 전승력의 약화로 이어진다. 2012년 4월 13일부터 16일까지 개최된 후포별신굿은 같은 후포면의 삼율에 거주하고 있는 김장 길 송명희 부부가 당주무당을 맡아서 연행되었다. 무업집단은 4월 12일에 미리 와서 굿당을 점검 하고 지화를 제작, 설치하였다. 4월 13일 오전 10시부터 마을풍물패와 무업집단들이 서로를 맞이하 는 맞굿(합굿, 문굿) 을 연행하고 후포 일대로 지신밟기를 하였다. 이날 밤에는 성황당에 고사를 올 림으로써 별신굿의 시작을 서낭신에 고했다. 이때에는 다른 당에는 가지 않는다. 4월 14일부터 본격적인 별신굿의 굿거리들이 시작된다. 굿을 시작한다는 명금 (징)을 울리고 굿 당차림을 완료한 뒤 부정굿을 시작한다. 이후 청좌굿, 당맞이굿(안산, 주산, 수천당, 동사 등에 다니 면서 굿을 함), 화회굿, 조상굿, 세존굿, 중도둑잡이굿, 지신굿, 산신굿으로 첫날을 마무리했다. 그런 데 이날 낮에 갑자기 경찰이 굿당에 출동하였다. 옥상에 설치한 스피커 소리가 시끄럽다고 들어온 민원 때문이었다. 무당들과 노반계 임원들은 누가 민원을 넣었는지 얘기해달라며 흥분했고, 경찰의 입장 역시 별신굿이 마을의 큰일이기 때문에 스피커 방향만 조금 바꾸어달라고 요구했다. 마을의 가장 큰 행사라고 할 수 있는 별신굿에 대해 시끄럽다며 경찰에 신고를 하는 주민이 있다는 사실에 무당이나 노반계원들 모두 놀라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했다. 4월 15일 둘째날에는 축원굿, 성주굿(동사로 이동해서 연행, 성주신체를 갈아줌), 천왕굿, 심청굿, 용왕굿, 놋동이굿, 탈굿이 진행되었다. 지난번 별신굿 때에는 선주들의 참여가 저조했는데, 이번에는 어촌계장의 노력으로 10여명의 선주들이 용왕굿 때 참가하였다. 노반계와 어촌계원들 사이에 어색 한 긴장이 흐르기도 했지만 다음 별신굿부터는 어촌계에 맡겨주면 잘 해보겠다는 의도가 어촌계장 을 통해서 노반계에 전달되기도 하는 등 점차 분위기가 나아지고 있었다. 탈굿에 많은 주민들이 박 장대소하며 즐겁게 참여하였다. 4월 16일 별신굿 마지막날이다. 축원굿, 손님굿, 제면굿, 대내림굿, 꽃노래, 뱃노래, 등노래, 대거 리굿이 연행되었다. 특히 이날의 대내림굿은 향후 별신굿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어서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그런데 마을주민들 중에는 신이 내리는 사람이 없어 5~6명 정도 시도해보다가 무당 중 강금순이 대를 잡았다. 서낭신에게 다음 별신굿 때부터 어촌계가 주도해서 진행하는 것이 좋겠냐고 물어보았는데, 결국 다음에는 노반계와 어촌계가 합심해서 별신굿을 개최하라는 내림이 있었다. 대 내림굿이 끝나고 꽃노래굿이 연행될 때에는 노반계원들 10여명, 어촌계장 등이 무대 쪽으로 나와서 무당들이 주는 명잔복잔을 받아 마시고 돌아가면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풍물도 울리면서 모처럼 흥겹게 놀았고 이는 향후 어촌계와 노반계가 합심해서 별신굿을 개최해나가겠다는 합의의 장이 되었다. 공유자원과 관련하여 성주는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맥락 이 동시에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하나는 동사 성주의 경우처럼 통합으로서 집단지향의 마을조상에 대한 섬김이라는 측면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공유자원의 혜택을 입기 위해서는 분가를 해서 한 가구를 이뤄야 한다는 측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가구 혹은 집 의 창출과 관련한 신인 성주는 집집마다 모셔지는 한편 마을 대동제인 풍어굿에서도 주요한 신으로 섬겨진다. 공유자원의 특성에 따라서 분가가 활성화되었던 상황에서 성주신과 삼신, 용왕 등에 대한 신앙심 이 컸고 이에 따라 관련 제의형태가 동제와 별신굿을 통해 발달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다른 지역 에 잘 나타나지 않는 마을 성주의 존재 및 제의형태나, 각 개인집의 성주에 대한 애착, 제사 분할, 삼신에 대한 각별한 관리 등이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주고사와 제미고사, 별신굿에서의 성주굿과 삼신과 관련되어 있는 세존굿(제석본풀이), 그리고 제면굿 및 용왕굿에 대한 비중이 높다 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구의 재생산과 관련하여서는 삼신 의 존재도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오락적인 혹은 후대에 확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산신굿, 지신굿, 천왕굿, 탈굿, 심청굿 등을 제외 한 32) 중요한 굿거리들이 바로 어촌의 공유자원으로부터 파생된 사회구조의 특성을 긴밀하게 반영하 32) 프랑스 인류학자인 기예모즈(A. Guillemoz)가 정리한 1974년 기성마을 별신굿의 제차에서는 주요 12거리를 제외한 굿거리들 이 나타나지 않는다. A. Guillemoz, Les Algues, Les Anciens, Les Dieux(Le L opard d'or, 1983), p.266. <기유모즈씨는 巫 俗 에 관한 연구를 하다보니 굿 禮 讚 者 가 되었다면서 웃는다. 숙련된 무당이나 박수 중에는 아주 어려운 장단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6시간이나 굿을 계속하는데 정말 놀랐습니다. 무당이 아니더라도 길고 어려운 巫 歌 를 처음부터 끝까지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그런 분들이 바로 文 化 財 이고 민족문화의 精 髓 를 간직한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또 오락과 종합예술로서의 굿이 16세기 프랑스에서 나타난 笑 劇 이나 이탈리아의 판토마임과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기유모즈씨는 굿이 文 化 的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생활에서도 긍정적인 일면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동네전체가 참가하는 굿 또는 각종 祭 는 지금도 마을의 공동체의식을 높여주고 주민들에게 정서적 만족감을 준다는 것이다.> 송태호 기 자, 韓 國 을 익히는 나그네, 경향신문, 1975년 3월 7일자 4면

64 제의 관련 공유자원 활용의 역기능과 사회자본의 향방 고 있다는 것이다. 공유자원으로 강고히 결속된 어촌의 공동체는 그들의 제의 연망을 끊임없이 공유자원과 연동시키 며 동일시하려 노력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예를 들어 다른 지역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마을의 성 주를 모시고, 이를 가정의 성주와 배의 성주까지로 연동시키는 방식이다. 유사한 맥락에서 마을의 여신(할매)이나 별신굿의 당금애기 등을 가정의 삼신이나 영등신과 연동시켜 인식하기도 한다. 또한 마굿간의 군웅과 별신굿의 군웅장수굿, 영등과 짬고사, 까꾸리, 그리고 용왕굿, 제면굿 등, 가정의 조상과 마을의 조상 그리고 별신굿의 조상굿 등으로 드러난다. 생업과 마을조직, 마을신앙, 가신신 앙 등이 일련의 세트로 구성되는 어촌공동체의 특성이라 하겠다. 지금까지 어촌의 사례를 살펴보았는데, 다음으로 농촌과 산촌을 살펴보자. 농촌지역 읍치 별신굿 의 대표적 사례로서 은산별신굿의 경우, 병오년(1906) 기록에 따르면, 은산역에 귀속되어 있던 역토 ( 驛 土 )로부터 얻어지는 도지가 총 1백7십2석7두에 이르고 있음을 33)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역원제도 가 일제강점기를 맞이하면서 해체되고 이 토지를 마을의 공유자원으로 삼게 되었고, 이러한 자산을 바탕으로 별신굿의 연행이 지속될 수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후 시장을 기반으로 한 전승이 이루어졌고, 백제정신 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지역문화로서 자 리매김되기도 하였다. 또한 시장이 쇠락하고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정부지원금을 기반으로 전승 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무형문화재 지정이 이루어지면서 은산별신굿의 연행은 보존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무형문화재 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일반주민들 은 별신제의 전승에서 점차 멀어지게 되었고, 참여도 또한 저조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충남 공주시 소라실 마을의 장승제의 경우, 마을 양편의 경쟁구도와 맞물려 있으면서 각각의 제의 기반을 만들어서 전승되던 장승제가, 무형문화재 지정이 이루어지면서 기존의 전통적인 구도가 해 체되는 과정을 걸어왔다. 게다가 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해 일부 연출된 부분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공론화됨에 따라서 마을주민들은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34) 결국 이러한 과정은 전통적인 제의 관련 공유자원의 운용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발생된 사건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문화재 지정을 위한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면서 자기 마을 고유의 전통적 지적재산권을 행사 하지 못하고 관련 학자나 연출가의 뜻에 따라 좀더 화려하고 민속적인 문법에 맞도록 한 것이 화살 이 되어 돌아와 마을주민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또한 양대 마을로 맞서며 경쟁하는 가운데 대동의 축제를 열어내던 것을 문화재 지정이 이루어지면서 자발적 참여가 사라지게 된 점도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하지만 2012년 현지조사에서 확인했듯이 외지에 나가있던 주민들을 적극 끌 어들이면서 본래 자신들이 추구했던 장승제의 위상을 복원하고 외부인을 위한 행사가 아닌 주민들 스스로를 위한 장승제를 시도해나가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어 향후 전개양상이 고무적이다. 외부로 나간 출향인사들을 적극 끌어들이는 모습은 해체되었던 사회자본의 맥락을 다시금 현대사회에 맞게 33) 조선총독부, 恩 山 驛 畓 賭 租 成 冊, ) 2013년 대보름 소라실 장승제 필자 현지조사 및 충남역사문화연구원(김효경), 공주 탄천 장승제 (민속원, 2010) 참조. 재구축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또 다른 사례로, 경북 영주시 순흥면 배점마을의 동제를 들 수 있는데, 대장장이 출신의 배순이라 는 인물이 퇴계의 제자가 되고 선조대왕의 3년상을 정성을 다해 지냄으로써 정려를 받게 되었고, 배순이 거주하던 마을에서 그를 마을신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제의를 지속시킨 것은 배순의 후손들이 아니라 바로 정려시 받은 토지와 대장간 터를 마을의 공유자원으로 삼게 됨에 따라 서 35) 무후제사와 유사한 형태로 동제를 전승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마을에 거주했던 단양 할머니가 남긴 재산을 추가로 공유자원화하여 제사비용으로 충당했음을 볼 때, 마을주민 중 재산을 내놓은 분을 동신 혹은 배위신으로 삼는 경향이 일반적인 형태로 전해왔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도시 속에서 전승되는 양상을 살펴보자. 대구시 달서구 진천동의 한 주거지역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에 동제를 지내고 있다. 이곳의 동제는 1980년대까지 대구시 일대에서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었던 천왕매구 와 유사한 당굿의 형태로 지내고 있다. 상당, 중당, 하당의 제당 구성과 신탁에 의한 제관선정방식, 살아있는 돼지를 마을사람들이 직접 잡아 장만하는 제수, 거리굿과 판굿 을 벌이며 행하는 제의절차는 당굿에 의한 무속적 방식에 준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주변 에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개발되고, 곧이어 백화점과 대형할인마트가 들어설 정도의 신흥주거지역으 로 성장한 것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옛 형태의 동제가 전승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36) 진천동의 동제는 과거 용천마을 사람들로 구성된 용천계( 龍 泉 契 )가 주관하고 있는데, 당시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농촌공동체의 정체성에 위기가 닥치면서 마을주민들의 결속을 위해 동제를 강 화하면서 만들어진 조직이다. 또한 마을 공유자원의 관리와 처분을 명확히 할 필요성도 용천계의 결성에 영향을 미쳤다. 결국 용천계의 결성에는 사회적, 문화적 정체성과 공유자원에 대한 권리를 존속하기 위한 용천마을 사람들의 집합적 의지가 반영되었다. 37) 도시화가 진행되며 땅값이 급격히 상승하자 용천마을 공유자원의 가치도 수백배 오르게 되었고, 마을에서는 총유로 규정되어 있던 자 산을 마을규약을 변경해가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주민들에게 분배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용천계에서 보유한 자산의 가치는 백억 원을 상회하였으며, 절반가량은 보상금으로 지급받 아 관리하였다. 각종 개발사업에 포함된 부동산 형태의 공유재산에 대한 보상금이 지급된 2000년대 중반 무렵부터는 용천계의 행사도 크게 확대되었다. 하지만 마을 공유자원을 분배하기로 결정하고 야유회, 총회, 명절 등에 20만원에서 50만원까지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하자 일면 마을의 결속 력이 강화되는 듯 했지만 마을기금이 100억 가까이에서 수억 단위로 줄어들자 위기를 맞이하게 되 었고, 동제 역시 상당부분 축소되었다. 용천계를 통한 용천마을의 동제 전승은 도시화로 인해 더욱 강화되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결국 35) 2013년 1월 16~18일간 필자의 현지조사 및 이재완, 대장장이 배순에 대한 지역사적 인식과 신격화, 민속학연구 28(국립 민속박물관, 2011) 참조. 36) 용천마을의 동제에 관해서는 이창언, 도시지역 민간신앙의 전승에 관한 연구: 대구시 진천동 용천마을의 동제를 중심으로, 민속학연구 제18호(국립민속박물관, 2006) 참조. 37) 이창언, 도시마을의 사회조직: 제의 주재집단을 중심으로, 도시마을의 민속문화 (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 학술대회, ) 47쪽 참조

65 제의 관련 공유자원 활용의 역기능과 사회자본의 향방 도시화가 전통의 지속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어 전통과 현대가 비례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용천마을의 경우 도시화는 시차를 두고 두 가지 측면에서 동제의 전승에 영향을 미쳤다. 도시화의 영향을 받기 시작할 무렵에는 변화하는 사회경제적 환경에 대한 저항의 논리로서 공동체 의 지속을 필요로 하였고, 이때 동제는 성원 결속의 상징재로 작용하였다. 도시화가 크게 진전된 이후에는 공동체 지속에 필요한 경제적 기반이 크게 확충되었고, 이로 인해 강화된 경제적 기반의 적절한 관리의 필요성이 대두됨으로써 공동체의 상징재인 동제의 전승에 작용하였다. 38) 최근 들어 유형의 공유자원은 사라졌지만 그 공유자원을 기반으로 전승되어온 무형의 공유자원이 다시금 유형의 공유자원을 생산해내는 사례들이 상당히 발견되고 있어 주목을 요한다. 이러한 양상 은 마치 신화와 제의의 관계와 같이, 신화가 제의의 전승을 보증하고 제의는 신화 재생산의 기반이 되는 원리와도 유사한 맥락이다. 즉 특정 민속을 전승하기 위한 공유자원과 해당 민속은 신화와 제 의 같은 관계를 형성하면서, 물적 기반으로서 유형 공유자원이 사라져도 무형의 민속은 전승력을 유지하는 가운데 다른 방식의 기반을 확보해나가게 되는데, 이렇게 전승력을 유지해나가는 가운데 다시금 유형의 공유자원을 확보해나갈 수 있게 되는 구조이다. 3. 제의 관련 공유자원 활용의 역기능 앞에서 기술했듯이 후포마을에는 39) 노반계가 발달하였는데, 노반계는 동해안 마을의 자치조직으 로서 화려했던 역사의 뒤안길에서 공동체신앙의 전승집단으로서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특히 후 포 노반계의 경우 대부분의 다른 어촌마을 노반계가 사라지거나 명맥만 유지하는 것과 달리, 현재까 지도 동제와 별신굿의 전승주체이자 지역사회의 자치 집단으로서 행세하고 있다. 이러한 일이 가능 할 수 있는 배경에 후포 노반계의 마을공유자원에 대한 전유가 자리잡고 있다. 어시장과 등기산 공 원을 기반으로 한 막대한 수익과 자산은 조직의 유지와 강화를 견인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폐쇄성이 강화됨으로써 어촌계나 마을주민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반목하는 일 이 잦아지게 되었고, 이러한 갈등은 결국 어촌 정체성의 중심축인 동제와 별신굿의 전승에도 악영향 을 미치고 있는 상황이다. 마을공유자원의 운용을 통해 조성된 잉여재화가 자연스럽게 마을굿을 통 해 재분배되던 전통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공유자원의 재분배는 어떤 지역, 어떤 시대에도 관철되 어야 할 공동체의 운영원리임에도 이것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자 더욱 갈등의 골은 깊어 지고 있다. 결국 후포의 노반계는 공동체신앙의 전승집단으로서 순기능과 함께 마을 내 배타적인 이익집단으 로서 역기능을 동시에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전통사회로부터 전승되어온 사회조직으로서 미풍양속 의 모범이 되어야 하겠지만, 현실세계에서는 자본주의 정신으로 무장한 소수 개인들의 이익집단으 로서 양태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도시와는 다른 공동체 정신과 미풍양속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가장 느리게 자본주의화될 것 같다고 여기는 한 어촌에서, 어쩌면 가장 최첨단의 자본주의적 사고와 행동 이 벌어지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후포 노반계와 마을굿의 양상은 우리 사회의 급박했던 변화양상 과 그 부작용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비춰주는 우리 사회의 거울인 셈이다. 사회자본의 긍정적 측면에 대한 기대와 달리 후포마을 노반계의 전반적인 상황은 역기능이 부각 되고 있는 실정이다. 마을공동체의 전통적인 운영원리에 따르면 자연스럽게 순기능적 사회자본의 역할이 강화되어 나가야 할 것인데, 왜 후포마을에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의문이다. 그 동안의 조사자료를 통해 나름대로 원인을 밝혀보면, 조그만 포구였던 동네가 일제강점기 대규모의 항구가 되면서 외부 주민들이 대거 유입되었고 토박이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기득권을 지켜낼 수 있 는 단위로서 전통지식과 유교적 틀을 담지한 노반계를 강화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어촌계의 득세와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 강화되면서 노반계는 더욱 폐쇄적인 조직이 되고 스스로 고립의 길 을 외로이 가고 있는 것이다. 별신굿을 둘러싼 전승주체들의 현실적 대응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전승에 대한 선별과 배제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전승주체는 의미와 실천의 일부를 지지하거나 또는 적어도 그 요소들과 모순 되지 않는 형식으로 재선별 또는 재해석하거나 변형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이 선별과정은 자신들의 경험을 선택 폐기 재해석 변형하면서 자체를 조절, 적응시키는 작용까지도 한다. 즉 역동적인 문 화의 상호관계 속에서 의례의 형태가 선택되고 배제되었던 것이다. 40) 후포마을의 공유자원과 마을굿은 겉으로 보기에는 전통사회에 비해서 훨씬 풍족한 상태를 유지하 고 있고, 마을굿에 대한 비약적인 투자와 윤택한 조건을 확보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물적 기반 이 잘 조성되면 마을굿 역시 이전보다 훨씬 의미가 크고 온 주민들이 신명풀이를 해낼 수 있는 축제 의 장이 되어야 할 것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먼저 공유자원의 문제를 짚어보자. 노반계에서 서류를 공개하지 않아 정확한 액수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현재 노반계가 확보하고 있는 기금은 5억원 이상일 것으로 판단된다. 매년 5천만원 이상씩 들어오는 어시장 임대료와 2007년 울진군에 매도한 등기산공원 대금(4억원 가량)이 고스란히 적립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방식대로 한다면 후포마을 주민들이 더욱 다양한 혜택 을 41)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인데 노반계 회원들만을 위한 일에 이 기금이 독점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공유자원의 재분배라는 원칙과는 점점 더 멀리지고 있는 것이다. 후포의 노반계는 마을공유자원이던 해양자원(연안어장과 짬 등)을 어촌계에 넘기는 대신 공유자 원으로부터 축적된 노반계의 기금으로 어시장을 지어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 또한 마을 공유의 재산 38) 이창언, 도시마을의 사회조직: 제의 주재집단을 중심으로, 도시마을의 민속문화 (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 학술대회, ) 47쪽. 39) 조정현, 동해안 마을굿의 전승주체로서 노반계 와 마을공유자원의 활용 문제, 한국무속학 24(한국무속학회, 2012) 참조. 40) 윤동환, 동해안 무속의 지속과 창조적 계승 (민속원, 2010), 339쪽. 41) 1980년까지는 그래도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에 대한 노반계원들의 적극적인 물심양면적 지원, 1985년에는 후포소방대 후원 (소방대기 제작 증정 등) 등이 이루어졌다. 현재는 200여만원의 장학금을 매년 지역 초중고교생들에게 지급하고, 인근 군대나 경찰서에 크리스마스 위문품을 전달하는 정도의 활동이 이루어진다

66 제의 관련 공유자원 활용의 역기능과 사회자본의 향방 인 등기산에 전략적으로 공원을 조성함으로써 소유권을 획득하고 이를 매도함으로써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어시장의 경우 동해안 관광산업의 발전과 함께 회센타가 들어섬으로써 매년 5-6천만원의 임대료를 받고 있으며, 등기산 공원의 경우 울진군에 매도해 4억 4천만원 정도의 기금이 생겼다. 또한 동회관과 성황당 부지에 대한 재산권까지 소유하고 있어 마을공유자원의 혜택이 특정 이익집 단에게 돌아간 모양새이다. 게다가 2008년 1월 정기총회시 임원진은 구두로 회계잔고가 3억 5천 8백만원이라고 밝혔는데, 동 년 7월 10일 있은 총회시에는 2차(08년 3월) 등기산 매도수입 약 3억여 원이 발생했음에도 회계 장 부에는 잔고가 1억 8천 7백여 만원으로 기재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예금통장이나 통장 사본을 보지 못해 실제 현 잔고가 얼마인지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이에 몇몇 노반계 회원들이 울진경찰서 와 영덕검찰청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사건이 42) 벌어졌다. 이후 사건이 더 이상 커지길 원하지 않던 관공서와 주민들의 중재에 의해 사건은 무마되었지만 여전히 불신은 남아있다. 마을공유자원의 대리관리자로서 공동잉여를 축적하고 대동적인 행사를 통해 재분배하는 일반적 인 노반계의 전통을 망각한 후포 노반계의 행태는 전통문화와 공동체신앙이라는 사회자본에 기대어 소수를 위한 이익집단으로 변모해가는 양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공유자원의 가치 및 수익 증진이 마을 전체의 수혜로 이어져야 함에도 노반계와 어촌계, 마을주민들 간에는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노반계의 독단적인 운영은 마을운영위원회의 해산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약 20여 년 전에 타지사람들이 운영위원회를 만들어 4-5년간 동의 행정을 맡아왔으나, 현 좌상이 동 회원 과반수의 날인을 받아 운영위원회를 해산시키고, 좌상제도를 다시 찾은 공로를 현판에 기록해 두고 있는 사실 만 보더라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물론 현재의 자산축적에는 노반계원들의 노고가 담겨있다는 사실 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자산이 마을공유자원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43) 마을굿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전에 비해서 훨씬 많은 제물과 인건비를 들이고 있지만 동제와 별신굿에 참여하는 주민들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다. 노반계원 주도로 제의를 진행하게 되면서 같은 마을 주민이면서도 들러리 혹은 구경꾼으로 참여하는 방식에 적극적일 수가 없기 때문 이다. 심지어 일반적인 별신굿의 중심적인 전승주체 중 하나인 어촌계의 참여 역시 미온적이기 때문 에 다른 별신굿판과는 확연히 다른 연행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2012년 별신굿 때 확인한 결과, 여느 마을에서나 이루어지는 놀음굿이 벌어지지 않았으며 별신굿판의 확성기 소리가 시끄럽다며 경찰에 신고하는 주민까지 나타나는 상황인 것이다. 42) 이우근 기자, 후포 남호동 노반계원 공금유용 횡령 진정, 울진타임즈, 2008년 7월 19일자 참조. 43) 조정현, 앞의 논문, 275~276쪽. <사진 2> 2012년 후포별신굿 결산서 위 결산서를 보면 총 53,771,800원의 경비 중 각종 지원금과 찬조금으로 5천만원 이상을 확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노반계에서 지출한 돈은 3,594,800원뿐이다. 후포 별신굿이 만 4년마다 개 최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매년 90만원 정도만 적립하면 별신굿을 개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이라면 마을주민들에게 돌아갈 수 있는 혜택이나 구경꾼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편의를 더욱 확 대하여 많은 주민들과 주변 이웃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충분한 기반이 조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노반계의 현재 상황은 그렇게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5억원 이상의 기금을 확보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지속적인 자본의 축적을 겨냥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실제로 노반계 회원들은 이 기금을 마을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철저한 회원 관리를 통해 각 회원의 지분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기존 노반계의 총유자원 개념에서 이미 너 무나 멀리 와버렸음을 알 수 있다. 결산서에서 또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무당들의 굿을 공연 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을주 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굿이 아니라 하나의 행사 개념으로서 공연 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인식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래서인지 굿판에서도 노반계 회원들의 모습은 마을의 안녕과 풍요 를 비는 자세이기보다는 하나의 행사를 치러내는 공연기획자 혹은 연출자, 스텝 등의 태도로까지 비춰지고 있다. 어촌공동체의 공유자원은 물질문화 혹은 경제적 변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변화를 견인하고 사회자본의 흐름 자체를 강제해온 중요한 기반이 되어 왔다. 특히 후포마을 공동체의 제의 는 변형된 공유자원과 직접적인 영향관계를 형성하면서 역류적인 변화가 마을굿의 변화와 동시에

67 제의 관련 공유자원 활용의 역기능과 사회자본의 향방 이루어져 왔다. 농업시대에는 지역사회 전체가 하나의 대가족과 같은 인적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지역사회 내에서 형성된 규범은 국가의 법에 견줄 만큼의 권위적인 힘을 부여받았고, 지역사회 구성원간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으며, 따라서 구성원들의 신뢰는 매우 높고, 서로가 서로의 사생활까지도 매우 잘 아는 수준으로 끈끈하게 연결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지역사회 내에서 상호 밀착된 인적 네트워 크가 발전되지 않으면 농업사회에서 필요한 협력이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즉 상호 밀착된 인적 네트워크는 바로 생존과 직결된 것이다. 따라서 지역사회 내에서만은 사회자본이 고도로 발전되 지 않고는 그 지역사회가 존속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에 반해 산업화시대 요구되는 사회자본은 농업시대 사회자본과 양상이 매우 다르다. 산업화시대 물질적 풍요를 위해 필요한 가치였던 표준화가 사회자본에도 적용된다. 산업화시대 사회자본은 끈끈하고 밀착된 협소한 사회자본보다 느슨하지만 상호 소통할 수 있는 개방된 사회자본이 더 요구되는 것이다. 44) 현재는 60여 명에 머물고 있지만, 2000년대에는 이보다 많았다. 이들에게 매년 차례비용으로 두 차 례 지급된 금액은 30만원으로 증액되었다. 야유회에는 준회원 모두에게 지급되었는데, 야유회에 참 석하지 않은 회원에게도 지급하여 보통 이 명목으로 한 해 1,000명 정도에게 지급되었다. 이런 방식 으로 매년 수억 원의 공유재산을 분배한 결과 2006년 당시 현금화된 공유재산이 약 50억 원 정도였 는데, 현재는 거의 소진된 상태이다. 45) 1970년대 급격한 도시화에 맞서기 위해 결설한 용천계가 초기에는 동제를 지속하고 발전시키는 데 공헌했지만, 그 기반이 되었던 마을 공유자원의 현금화가 이루어지면서 마을주민들간의 갈등이 커졌을 뿐만 아니라 동제의 전승도 상당부분 축소된 양상이 나타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진천 동의 경우, 용천계라는 튼튼한 사회자본과 지가상승에 의한 막대한 현금자산이라는 공유자원을 확 보하고 있었지만, 현대사회에서 제기되는 일반적인 문제로서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주의의 틀을 벗어 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나갈 수 있는 구조적 제도 혹은 모델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한다. 위 인용문은 끈끈하고 밀착되지만 타지역 사회구성원에게 배타적인 사회자본은 더 이상 미덕이 될 수 없고, 느슨하고 공식적이지만 타지역 사회구성원을 포함한 누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개 방된 사회자본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항구로서, 관광지로서, 지역 거점 소도시로서 개방성이 높은 후포마을의 경우에는 어촌공동체라는 특수성을 고려하는 가운데 새로운 방식의 공유자원 운용 과 마을굿의 전승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향후 변화양상을 지속적으로 주목하는 가운데 한 어촌마을의 공유의 비극 이 어떤 돌파구를 마련해나가는지 살펴봄으로써 공유의 비극을 넘어 설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대안을 모색해나가고자 한다. 도시마을의 사례인 용천마을에서 지내는 동제는 현재 크게 간소화되었으며, 근래 농어촌지역에서 촌락공동체 제의가 간소화되는 일반적인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의 배경으로 마을 사람들은 용천계의 경제적 기반과 인적 기반의 약화에 주목하고 있다. 경제적 기반의 약화는 현금화 된 공유재산의 분배에서 비롯되었다. 2006년 공유재산의 분배를 결정한 이후 용천계원들은 규약을 개정하고 분배 방식 역시 결정해야 했다. 분배 방식은 다시금 논란이 되었다. 모든 계원에게 형평성 을 적용하려면 분배되는 금액도 적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타지로 이주해간 후손들을 찾는데 엄청 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논란 끝에 마을사람들은 예전부터 지켜온 정회원과 준회원의 구분을 엄격히 하여 차등적으로 지급하는 것으로 상호 의견을 조율하였다. 이러한 의견을 수립하는 용천계의 정회원은 용천마을의 권역에 거주하는 회원을 가리키고, 준회원은 타지로 이주 한 회원을 가리킨다. 분배 방식은 정회원에게 매년 설과 추석 그리고 야유회 때 20만원씩 지급하고, 준회원에게 야유회 때 20만원씩 지급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동제에 선정된 제관에게도 20만원씩 지급하기로 하였고, 정기총회 참석자 모두에게도 참가비 명목으로 일정액을 지급하였다. 정회원이 4. 제의 관련 공유자원과 사회자본의 향방 현대사회에서 마을 공유자원의 활용문제는 사회자본의 현재적 상황과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다. 제의 관련 공유자원이 효과적으로 현대의 산업화, 도시화 사회에 적응하면서 자연스럽게 사회자본 으로 전화된 사례가 있는 반면, 사회자본으로 전화되지 못한 채 공동체의 흔적마저 사라지게 만들거 나 교묘한 진화를 통해 유무형의 마을 공유자원과 사회자본을 악용하는 사례조차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인 대동회는 촌락 단위에서 존재하는 다양한 사회조직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마을의 모든 성원이 가입한 마을을 대표하는 기구이다. 촌락사회의 운영과 제반사항을 토의 결정하는 대표 적인 자치조직으로서 대동회는 동제, 수로, 농로, 친목, 제재, 공적 부역 대책, 풍기, 행정, 인선, 품앗 이, 임금, 부조, 계몽, 오락, 규칙제정, 모곡, 구휼 등 촌락생활 전 영역에 대한 문제를 결정한다. 이로 써 대동회가 촌락사회의 행정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측면 등 촌락사회의 모든 국면에서 규범으로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46) 따라서 유무형 공유자원을 지속시켜나가는 주체로서 인적구성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사회자본의 문제와 맞물리게 된다. 이 글에서는 마을굿과 관련한 공유자원 운용의 역기능을 함께 주목하는 가운 데 사회자본의 운용 문제를 제기하였다. 경북 울진군 후포마을의 노반계는 마을주민들을 대표하여 마을굿을 이끌어가고 있음에도 그 대표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주민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상황 이며, 마을주민들을 배제한 노반계만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마을굿 역시 쇠퇴하고 있다. 44) 박희봉, 사회자본-불신에서 신뢰로, 갈등에서 협력으로 (조명문화사, 2009), 385~388쪽 참조. 45) 이창언, 앞의 논문, 47~49쪽 참조. 46) 김택규, 한국농경세시의 연구 (영남대학교 출판부, 1985), 376쪽

68 제의 관련 공유자원 활용의 역기능과 사회자본의 향방 또다른 사례로 충남 공주시 소라실 마을 역시 장승제의 문화재 지정과 맞물려 마을내 사회자본의 역기능이 발휘됨으로써 무형문화재정책 전반을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 마을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현재까지도 장승제를 전승하고 있는 주민들에게 이러한 과정이 큰 상처로 남게 되고 제의적 맥락이 쇠퇴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47) 공유자원의 공급처가 마을내부의 공유 자원에서 정부지원금으로 대체됨에 따라서 빚어진 비극이자, 굳건하게 유지되어 오던 소라실의 사 회자본이 외발적인 충격에 의해 무너지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마을 공유자원의 활용양상과 여기에서 파생된 역기능의 문제는 자본주의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마 을주민들에게 실제 삶의 현실적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각 개인의 삶과 동떨어져 있을 것만 같았던 과거 공동체적 삶의 유물이 현실에서 되살아나 현재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마을주민의 공유자원에 대한 관리 전략이나 제도적 전승력 확보는 자연스럽게 사회 자본의 특성과 맞물리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마을공동체 제의와 관련한 유무형의 전승기반은 총유의 원칙이 해체되면서 함께 쇠퇴해왔다 고 볼 수 있다. 유형의 자원이 지분을 인정하는 공유의 개념으로 전환되면서 물적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고, 무형의 자원 역시 일부 문화재로 지정되거나 전문화된 문화권력으로 중심이 이동함에 따라 서 연행의 기반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유무형 공유자원을 통합시키면서 운영해나 갈 수 있는 사회자본의 재구축이 절실한 상황이라 하겠다. 엘리너 오스트롬 지음, 윤홍근 안도경 옮김, 공유의 비극을 넘어, 랜덤하우스, 유석춘, 장미혜, 정병은, 배영 공편역, 사회자본-이론과 쟁점, 도서출판 그린, 윤동환, 동해안 무속의 지속과 창조적 계승, 민속원, 윤동환, 별신굿의 경제적 기반과 전승주체의 변화: 경북 울진군 기성면 기성리를 중심으로, 한국무속학 25, 한국무속학회, 이우근 기자, 후포 남호동 노반계원 공금유용 횡령 진정, 울진타임즈, 2008년 7월 19일자. 이재완, 대장장이 배순에 대한 지역사적 인식과 신격화, 민속학연구 28, 국립민속박물관, 이창언, 도시지역 민간신앙의 전승에 관한 연구: 대구시 진천동 용천마을의 동제를 중심으로, 민속학연구 제18호, 국립민속박 물관, 이창언, 도시마을의 사회조직: 제의 주재집단을 중심으로, 도시마을의 민속문화, 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 학술대회, 全 國 企 業 體 總 攬 (1958년판)[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임스 스콧, 김춘동 옮김, 농민의 도덕경제, 아카넷, 朝 鮮 銀 行 會 社 組 合 要 錄 (1937년판)[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조선총독부, 恩 山 驛 畓 賭 租 成 冊, 조정현, 동해안 마을굿의 전승주체로서 노반계 와 마을공유자원의 활용 문제, 한국무속학 24집, 한국무속학회, 천혜숙, 동해안 마을의 신당과 제의, 민속원, 최경호, 미신타파 이후의 洞 祭 와 마을의 정체성, 종교연구, 한국종교학회, 충남역사문화연구원(김효경), 공주 탄천 장승제, 민속원, 厚 浦 洞 中 老 班 契, 제4호 남호동동사이차중수기번역, 남호동 노반계 현판 역사, 2004(미간행). 厚 浦 洞 中 老 班 契, 鄕 土 史 硏 究 厚 浦 洞 誌, 大 成 印 刷 所, 참고문헌 A. Guillemoz, Les Algues, Les Anciens, Les Dieux, Le Léopard d'or, Garrett Hardin, The Tragedy of the Commons, Science Vol. 162 No. 3859, 13 December 권삼문, 어촌의 미역채취관행에 관한 연구, 영남대 석사논문, 권삼문, 동해안 어촌의 민속학적 이해, 민속원, 김미영, 제사 모셔가기 에 나타난 유교이념과 양반지향성, 민속연구 9, 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 김택규, 한국농경세시의 연구, 영남대학교 출판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동양척식주식회사이주민분포도, 1919(대정 8년). 마샬 살린즈, 김성례 역, 문화와 실용논리, 나남, 박광순, 한국 어업공동체의 성립과 존립양태에 관한 조사연구-어촌계를 중심으로, 경제학연구, 박광순, 한국어업공동체에 관한 연구-성립과 전개형태를 중심으로-, 지역개발연구 6집, 전남대학교 지역개발연구소, 박진섭, 갯벌민영화법 당장 폐기하라, 경향신문, 2012년 4월 30일자. 박흥주, 바닷가 마을굿에 나타난 3수 원리분석-당산굿을 중심으로, 경희대 석사논문, 박희봉, 사회자본-불신에서 신뢰로, 갈등에서 협력으로, 조명문화사, 송태호 기자, 韓 國 을 익히는 나그네, 경향신문, 1975년 3월 7일자 4면. 47) 2013년 대보름 소라실 장승제 필자 현지조사 및 충남역사문화연구원(김효경), 공주 탄천 장승제 (민속원, 2010) 참조

69 제의 관련 공유자원 활용의 역기능과 사회자본의 향방 제의 관련 공유자원 활용의 역기능과 사회자본의 향방 에 대한 토론문 이균옥 안동대 7. 별신굿의 주도권 문제에서 마을의 젊은 주민들은 별신굿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의지가 있 으나, 주도적인 참여가 제한되거나 봉쇄되기도 한다. 어떤 마을의 경우에는 젊은이들이 몇 가지 이유로 동초 에 참여할 수 없다. 현재, 어업에 종사하고 있는데도, 어촌계 정관상 어촌계원으로 가입되지 않기 때문이다. 1. 이 논문의 목적을 현지조사와 분석을 통해 제의 관련 유무형 공유자원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 는지를 살피는 동시에, 이러한 현재적 활용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역기능과 그 핵심을 이루고 있는 사회자본의 문제를 살피고자 한다. 라고 했다. 위의 예에서 보듯이 공유자원 과 사회자본 의 차이나 각각의 분명한 정의가 이 논문에서 무엇인 지 불분명하다. 2. 무형의 공유자원에 대한 언급은 잘 보이지 않는데, 발표자의 의견은 어떠한지? 3. 민속의 쇠퇴와 왜곡 등은 공유자원의 붕괴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고 했다. 논문의 주제를 분명히 하고 논리를 세우기 위한 언급이라고 해도, 전승 현장에서 민속의 변모는 이 보다 더 중요한 요인으로 생길 수도 있다. 변화의 요인으로 물적 토대만 주목하는 것은 전체의 변화 양상을 파악하는 시각을 흐릴 수 있다. 별신굿의 전승주체로서 사람 이 또 다른 중요한 변화 요인이라고 생각하는데, 발표자의 의견은 어떠한지? 4. 마을 공유자원의 변화를 전통적인 방식인 위토( 位 土 ), 지선어장, 짬 의 수익에서 현재에는 정 부관공서와 지자체의 지원금, 공유자산의 매각이나 대여, 상포계(상여계) 기금, 어시장 임대, 출향 인사의 찬조 등이 포함되는 것으로 보았는데, 별신굿이 거행되는 마을마다 다르겠지만 별신굿의 총경비(원섬과 뒷돈)에서 각종 재화(주로 돈)의 구성 비율이 공시적, 통시적으로 어떻게 달라지는 지 따져본 마을은 있는지? 5. 무당의 마을에 대한 찬조 또는 기부금은 마을에서 연행 무당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 도 하는데, 무당의 찬조 또는 기부금을 주목한 예는 있는지? 6. 후포별신굿의 경우 노반계가 별신굿을 주도하고 있다. 노반계가 주도하기 때문에 마을 주민 특히 어민(선주)들의 별신굿에 대한 참여도가 낮다. 이런 현상은 공유자원의 문제가 아닌 다른 문제이기도 한 것 같다. 노반계의 재산에 대한 독점이 어촌계가 별신굿에 참여하지 못 하는 주 이유는 아닌 것 같다. 다른 요인은 없을까요?

70 제의 관련 공유자원 활용의 역기능과 사회자본의 향방 제의 관련 공유자원 활용의 역기능과 사회자본의 향방 에 대한 토론문 서종원 단국대 조정현 선생님의 제의 관련 공유자원 활용의 역기능과 사회자본의 향방 은 참으로 어려운 연구가 분명한 듯합니다. 제목에서 공유자원, 활용, 역기능, 사회자본, 향방이라는 용어가 보이는 것만 보아 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토론자 역시 발표문을 읽는 과정에서 제목에 보이는 이들 용어를 인지 하였는데, 전문성이 부족한 연유로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평소 발표자 선생님께서는 마을제의, 특히 동해안 지역의 마을제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금번 발표문에서 중점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대상 지역도 동해안 지역이었습니 다. 일부 다른 지역 사례도 언급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주요 내용은 동해안과 관련된 내용이었습 니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것은 발표자 선생님의 선행 연구와 금번의 연구가 어떠한 차이 가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발표문을 늦게 받은 관계로 선생님의 선행 연구를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지 만 본 내용에서 거론되는 내용들 중, 동해안 지역의 노반계와 몇 가지 마을 제의 등은 분명 선행 연구에서 모두 다루고 있는 내용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과연 본 발표문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은 선행 연구에서 다루었던 내용을 공유자원 활용의 역기능과 사회자본의 향방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하여 재차 언급하고 있는 건 아닌지 조심스레 여쭙고 싶습니다. 유사한 내용을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의미 내지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기존 의 연구 방법과 접근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경 써야 할 내용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특히 선행 연구와는 다른 한 가지 목적 설정이 중요한데, 그렇지 않으면 기존의 연구와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토론자가 보기에는 본 발표문은 이러한 고민이 조금은 부족해 보입니다. 본 발표문을 접하는 과정에서 이런 흔적은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수정 및 보완할 것도 적지 않는데, 발표문을 토대 로 몇 가지 내용을 언급하겠습니다. 에) 이 글에서는 마을 공유 자원의 활용 양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마을 유형별 사례를 통해 극복 의 단초를 마련하고자 한다. 또한 여전히 정립되지 못한 한국적 사회자본의 문제를 마을 공동체 제 의와 연계시켜 논의하고 유무형 공유자원 의 맥락과 대조해가면서 한국적 사회자본의 향방을 제시 하고 향후 이론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한다. 또한 현지조사와 분석을 통해 제의 관련 유무형 공유자원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동시에 이러한 현재적 화룡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역기능과 그 핵심을 이루고 있는 사회자본의 문제를 살피고자 한다. 결국 뚜렷한 연구 목적 설정이 중요한 듯 보입니다. 2. 대상 지역 문제 본 발표이 설득력과 논리성을 지니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어촌 지역인지, 농촌 지역인지, 해안의 경우에는 동해안인지, 남해안인지를 분명하게 정한 다음 지역을 중심으로 한 논의가 진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발표자는 폭넓은 관점에서 논의를 진 행하고자 했을지 모르지만(궁금한 내용), 적어도 본 발표문에서 다루고 있는 지역은 동해안, 그것도 동해안 후포 지역이 중심입니다. 이점은 중요합니다. 농촌과 어촌의 사례가 다르겠고, 해안별 양상도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 발표문의 2장 제의 관련 공유자원의 활용 양상 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혼란으로 인해 2장의 내용이 명확하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발표문에서 다루고 있는 지역이 동해안 지역, 그것도 후포지역이므로 이 지역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시키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발표문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을 통해 보면 아마도 동해안, 그것도 후포 지역의 노반계 문제에 더욱 천착 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3. 명확한 개념 정리 및 구체성 결여 발표문은 기존의 연구와는 많은 부분에서 차별성을 지닌 건만은 사실입니다. 새로운 관점에서 마 을 제의를 분석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생소한 접근인 관계로 여러 가지 용어에 대한 개념 정리가 필요한 듯 보입니다. 또한 언급하고 있는 내용 가운데 구체성이 부족한 부분도 적지 않았습니다. 토론자가 보기에는 다음의 내용들이 그러한 것 같습니다. 1. 연구 목적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본 발표문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이 다양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로 발표자가 언급하고 있는 내용에서도 이런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래 내용을 보시면 연구 목적을 압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 1 마을의 공유자원 이 내용은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발표문을 접했을 땐 마을 주민들이 함께 공유하는 다양한 자원을 이야기하는 줄 알았는데, 발표문에서 언급하는 것을 보면 마을 주민들, 특히 마을의 조직에서 관리하는 마을의 자금인 듯 보입니다. 혹여 발표자가 정리한 것처럼 마을의 자금만을 마을 의 공유자원으로 보시는지, 혹 마을의 공동 자금만을 대상으로 한다면 마을의 공유자원이라는 용어 사용은 좀 더 고려해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지 궁금합니다

71 문화기억과 기억융합으로서의 아리랑 또한 발표문에는 유무형의 공유자원이라는 용어가 많이 보이는데, 과연 유무형의 공유자원은 각 각 어떠한 것을 말하는지 설명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 역기능 발표문에서 마을의 공유자원 활용의 역기능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 역시 마을 기금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발표자께서는 결국 노반계라는 사회조직이 공유자원인 마을 자금의 운용에 있어 투 명하지 못하다보니 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고, 이 과정에서 마을제의가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을주민들이 마을제의에 등을 돌린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발표자께서 주장하는 내용은 어쩌면 마을 제의 연구자들이 한번쯤 언급한 부분이라고 생 각합니다. 결국 본 발표문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데, 보다 다양한 역기능이 도출되었으면 하는 아쉬 움이 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역기능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 내지 대안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3 역기능 해결을 위한 사회자본의 재구축 문제 발표자께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을의 유무형 공유자원을 통합시키면서 운영해나갈 수 있는 사회자본의 재구축이 절실하다고 보고 계십니다. 이 부분 역시 보다 구체적인 언급이 필요 하다고 생각됩니다. 어떻게 마을의 공유자원을 통합시키고 어떠한 방향으로 사회자본의 재구축 되 2013 한국민속학자대회 문화기억과 기억융합으로서의 아리랑 권오경 부산외국어대학교 목차 1. 서론 2. 문화기억으로서의 아리랑 3. 기억융합을 통한 아리랑의 문화융합 방안 4. 결론 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이상에서 언급한 내용이 발표자 선생님의 옥고에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비전문가인 연유로 발표문을 좀 더 큰 틀에서 접근하다 보니 그러한 내용이 포함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아무쪼록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리며, 토론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1. 서론 민속학은 민간전승학이다. 그런데 이 민간전승(folklore)은 민간의 지식이다. 1) 민간의 지식이란 지 층문화로서의 삶의 양식과 관련된 일체의 문화를 말한다. 그런데 이 민간지식 중에는 단순히 저장된 기억으로서의 지식이 있는가 하면 현대에도 여전히 전승되면서 삶의 주요한 요소로 작동하는 활성 기억으로서의 지식이 있다. 민속의 역할과 가치는 이 활성기억으로서의 지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저장된 기억으로서의 민속문화는 전통문화를 회상하고 보존하는 역할에 치중하는 반면, 민속의 새 로운 위상과 가치를 모색해야 할 때는 소통되는 기억으로서의 민속기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속문화로서의 향토민요는 지성이 아닌 지식의 측면에서, 그리고 실용과 성과 측면에서 미래가 밝지만은 않다. 향토민요의 현장 기능이 중단된 상황에서 민요는 기억 저 너머로 사라지고 있으며 아직 남아있는 것들은 기억의 파편에 불과하다. 현대문화로 계승되어 보존되는 민요들도 원형 보존 에 치우쳐 있어 늘 익숙함만 추구할 뿐 새롭고 낯선 느낌의 민요문화 창출에는 한계가 있다. 특히 1) 박계홍, 한국민속학개론 (형설출판사, 1983), 17쪽

72 문화기억과 기억융합으로서의 아리랑 신세대에게 향토민요는 체험의 기억이 거의 없는 단절된 문화로 여겨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장기억으로만 남아있는 향토민요를 활성화시켜 경쟁력있는 문화로 재창조할 방법도 여러 차례 다루어졌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다하여 박물관이나 체험관에서 향토민요를 듣고 감상해야만 하는지, 소비층과 유리된 콘텐츠 제작에만 몰두해야 하는지, 맥빠진 향토 축제의 한 꼭 지로 민요부르기 대회가 들어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지 등의 물음에 대해서는 여전히 시원한 답을 찾기가 어렵다. 이 글은 향토민요의 성과와 실용성을 탐색하는 차원에서 우선 아리랑을 대표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향토민요가 대중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받으며 전승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보고 자 한다. 즉, 아리랑의 새로운 문화창출을 위한 방안 모색을 통하여 민요의 미래 모습을 진단해보기 로 한다. 주지하듯이, 아리랑은 이제 명칭 그 자체로 세계적 문화브랜드가 되었다. 아리랑이 유네스코 세계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이러한 현상은 가중되고 있다. 이제 아리랑은 민요의 차원을 넘어 문화로, 한국을 넘어 세계의 소리로 나아가고 있다. 한국의 민요가 이토록 세계의 주목을 끈 예는 일찍이 없었음을 감안할 때 민요를 포함한 민속의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상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냥 기뻐할 일만도 아닌 듯싶다. 아리랑이, 우리 민요가, 한국의 민속이 세계인 이 즐기는 소리문화와 전통문화로 자리매김하는 데는 여전히 걸림돌이 많다. 아리랑에 열광하는 이 면에는 아리랑의 한계도 존재한다. 이 글에서는 문화기억이론을 적용하고자 한다. 문화기억은 문화학의 한 분야로 아리랑의 전개와 성과를 파악하기 위한 이론적 바탕이 되며 구술문화인 아리랑의 본질에 접근하는 데도 유리하다. 그리고 어떠한 형태로든 아리랑의 효용성, 실용성을 위해서는 아리랑을 많은 사람들이 잘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 기억만 할 것이 아니라, 기억과 기억의 융합을 통하여 새로운 아리랑문화를 지속적으로 창조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기억과 문화융합은 상통한다고 본 다. 그래서 기억의 융합에 의한 문화융합을 지향함으로써 현재와 미래의 아리랑문화의 창달을 위한 방법론적 가능성을 진단해보고자 한다. 아리랑은 전승되는 무형의 문화유산이다. 무형의 유산은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는 것이지만 엄밀 히 말하자면 기억에서 기억으로 전승된다. 또 아리랑은 무형의 민요이지만 기억 속의 아리랑은 기 억하기 를 통하여 늘 현재 시점에서 새롭게 구연된다. 그래서 아리랑은 기억 속에 있고 실체가 있는 것처럼 인식될 뿐이다. 아리랑은 개개인이 기억하고 향유하고 전승하는 개인기억으로서의 아리랑인 동시에 문화 공동체가 공유하는 집단기억으로서의 아리랑이기도 하다. 3) 아리랑은 개인기억의 입장 에서 개인의 정서를 표현하고 사상을 집결하는데 기여해왔으며 집단기억으로서 정체성 확보를 포함 한 상실에 대한 치유, 폭력에 대한 저항의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런가하면 문화로서의 아리랑은 필연적으로 변화를 내포한다. 그래서 개인기억이 집단기억화되 기도 하고 집단기억으로서의 아리랑이 개인기억화되기도 한다. 변화한다는 것은 기억의 변화이기도 하고 전승의 변화이기도 하며 매체, 담당층의 변화이기도 하다. 또 변화한다는 말 속에는 간섭과 교섭현상에 의해 아리랑 장르 틀 이 변한다는 뜻도 포함된다. 그래서 노랫말의 교섭과 대치뿐만 아 니라 없던 후렴구가 생기고 있는 후렴이 지역에 따라 달라지고 섞이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모두 기억과 망각이 빚어내는 구술문화로서의 민요 아리랑의 문화적 현상들이다. 또 문화로서의 아리랑은 시대와 지역, 담당층과 매체의 변화에 따라 인식이 달라진다. 개인 정서 를 토로하는 개인서정의 노래로서, 지역성을 담보한 향토민요로서, 또 통속성을 함유한 근대민요로 서, 그리고 민족과 국가를 대표하는 노래로서 아리랑은 장르와 장르의 혼합을 통하여 개인화되고 또 새로운 집단문화로 기억되고 있다. 문화권과 문화권이 교섭하고 사람과 정보가 빠르게 이동하는 과정에서 아리랑문화도 고유한 문화로만 자리를 지킬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아리랑은 그 자체로 하나의 아리랑학, 아리랑문화로 인식되며 유네스코 등재 이후 국제문화로서의 경쟁력이 핵심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 장에서는 아리랑이 기억되는 유형과 그 과정에 대하여 살펴봄으로써 아리랑이 지닌 본질성을 탐색하고 그 본질성이 지닌 장단점에 주목함으로써 아리랑문화의 성과와 창조의 방향을 모색해 보 고자 한다. 1) 개인기억으로서의 아리랑 2. 문화기억으로서의 아리랑 기억 이론의 전문가인 제프리 K. 올릭의 견해를 빌리자면, 기억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성찰 적 상호작용으로 재구성(re-member-ing)하기의 산물 이다. 그리고 기억행위 는 하나의 경험을 원래 형태대로 다시 끄집어내거나 재생산하는 과정이 아니라 새로운 기억으로 짜깁기하는 과정이다. 2) 그 래서 기억에서 가장 비슷한 것을 끌어내어 패턴을 완성하는 것이 기억하기 이다. 모리스 알박스(Maurice Halbwachs)는 사람들은 보통 사회 속에서 기억을 얻는다. 또 사회 속에 서 기억을 회상하고 인식하고 구체화한다. 4) 라고 하였다. 이 말은 개인과 집단의 관계를 말한 것인 동시에 집단기억의 중요성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개인기억과 집단기억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집 단기억 없는 개인기억이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개인은 사회구조에서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는 문화생물체이며 개인의 기억이 모여 공동체 기억이 성립된다. 2) 제프리 K. 올릭, 강경이 역, 기억의 지도 (옥당, 2011), 7쪽, 53쪽. 3) 개인기억과 집단기억에대해서는 알라이다 아스만, 변학수 채연수 역, 기억의 공간 (그린비, 2012), 175~185쪽 참조. 4) 제프리 K. 올릭, 강경이 역, 기억의 지도 (옥당, 2011), 41쪽

73 문화기억과 기억융합으로서의 아리랑 그런데 개인적 기억이 모두 집단화 되지는 않는다. 개인기억으로 불리는 것 중에는 윌리엄 제임스 가 영혼의 가시 라고 표현한 5) 트라우마가 있다. 아리랑은 원래 개인기억으로 노래되었다. 노래하는 이유 중에는 상실에 대한 상처를 노래하는 것이 많다. 아리랑은 자기 존재의 근거가 되는 젊음, 욕 망, 님, 고향, 조국의 상실에 대한 아픔을 노래하거나 그 상실의 트라우마에 맞선 자기 치유의 노래 이다. 그래서 애원성( 哀 怨 聲 ), 말하기 치료(talking cure)라고도 한다. 6) 상실을 노래로 치유하는 방법 으로는, 상실을 상실 이전의 가상세계로 회상하여 되돌림으로써 슬픔의 기쁨화를 통한 치유와, 상실 을 다른 무엇으로 대치, 치환함으로써 치유받는 방법 등이 있다. 죽음에 따른 상실은 저승에서의 재회 등으로 노래되고 고향이나 국가의 상실에 대한 트라우마는 귀향, 광복 등으로 치유하고자 했 다. 그러나 그 치유는 쉽지 않다. 노래가 끝나면 트라우마는 다시 트라우마로 남기 마련이다. 그래서 노래는 반복된다. 개인의 상실을 드러내고 그 상실에 대응하는 다양한 방법 중의 하나로서 노래 부르기가 있다. 이 는 개인기억에 의해 양산되고 개인기억으로 각인된다. 상실의 단위가 집단화될수록 공동기억으로 각인되는데 그 과정에서 집단치유가 이루어진다. 아리랑의 경우, 후렴은 지역문화로서의 아리랑이 라도 각기 다른 개인발화 양상을 보일 수 있다. 즉, 고개를 넘어가네, 고개로 넘겨다오, 고개에서 놀다가세 등으로 적극적/수동적, 주체적/객체적 발화 양상을 보이고, 내가 넘는 고개가 있는가하면 님이 넘어가는 고개로도 표현된다. 상실에 따른 희생적 결과물로서 넘기 싫은 고개를 넘어가는 경우 도 있고, 돌아가기 위해 넘는 고개, 즉 희망의 고개, 새 세상의 고개다. 광복군에게 고개는 고향을 가는 희망의 고개이며, 고향의 그리움에 대한 기억이 활성화된 표상으로서의 고개이다. 도망가는 며 느리, 눈맞은 연인들처럼 세상에서 좌절하여 넘는 고개는 빨리 넘어가야 할 장애물로서의 고개이다. 억지로 떠나야하는 세상은 눈물의 고개로 기억되며 고개를 넘어가네 처럼 강제화된다. 그럴 경우 트라우마로 기억되고 노래로 불려진다. 놀다가는 고개는 유희의 장소로 기억되어 통속성을 확보하 는데 이는 아리랑 띄어라 노다가게 처럼 유희요로서의 아리랑타령의 기억의 영향으로 볼 수도 있다. K. 올릭은 또 세대를 아무리 객관화해도 개개인의 경험이 주요한 매개체로 남는다 고 했다. 7) 이 는 개인의 경험이 그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개인의 경험은 개인기억으로 남게되며 강한 체험은 시간이라는 망각의 장애를 극복하고 개인기억으로 각인되고 표상화된다. 나 운규의 경우, 영화 아리랑에 대한 기억을 술회한 자리에서 아리랑을 촬영할 때는 자랑할 만한 조선 의 정서를 가득 담는 것, 결코 실망하지 말자는, 남성적 의협, 용맹, 패기를 영화 위에 살리려 했다. 8) 고 한다. 영화 아리랑에 대한 나운규 개인의 기억은 다수의 사람들이 기억하는 슬픔이나 좌절, 이별, 여성성으로서의 아리랑보다는 이것을 극복하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가 아리랑 영화를 만든 이 유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인기억과 집단기억은 같으면서도 다른 영역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아리랑은 원래 개인의 심중을 풀어내는 신세한탄의 소리이자 노동요이며 또 유희요였다. 아리랑은 그 노랫말을 보면 개인적 정서 표출을 위한 노래가 많다. 개인 서정의 기억화는 아리랑 노랫말의 대부분이 사랑, 이별 등의 인간 보편적 정서를 표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분명해진다. 9) 현재 기록화되거나 구전되는 수많은 아리랑 노랫말과 가락은 일차적으로는 대부분이 개인기억에 의 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노랫말과 가락은 현재 시점에서 중요하게 기억되고 재편집된다. 아리랑 노랫말과 가락을 분석한다는 것은 마치 인류학자가 파편을 들고 과거를 보는 일과 같다. 아리랑의 과거는 과거로서 존재하며 그 과거는 현재와 연결될 때 특히 의미가 있다. 따라서 아리랑의 모든 것이 소중한 것은 아니며 그것이 현재의 아리랑문화로 연결될 때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아리랑의 수많은 노랫말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남기려 했을까? 아리랑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공간에 대한 자탄의 소리이다. 아리랑을 부른다는 것은 곧 과거의 회상이고 현재의 점검이 며 미래설계이다. 아리랑을 반복적으로 부른다는 것은 기억의 재생, 기억하기. 자신의 변화를 위한 행위예술이다. 자기 정체성의 확인인 동시에 정체성 변화를 꾀하는 것이다. 과거의 현재화인 동시에 자신의 미래화이다. 다양한 아리랑 버전은 기술(ars)기억으로서의 아리랑이 아닌, 활력기억으로서의 아리랑을 확인시켜준다. 그래서 아리랑 속에 담긴 활력(vis)으로서의 아리랑 코드를 찾는 일을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한다. 활성화된 기억 찾기, 이것은 비활성화된 상태로 저장되어 있는 저장기억으로부 터 멀어지는 데서 시작된다. 가령, 아리랑을 통하여 역사찾기를 계속하는 한 아리랑의 제 기능과 미래 모습을 읽어내기가 점점 더 어렵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리랑은 전체로서가 아닌 개인문화 로 먼저 기억되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연극에서 극적 체험 에 해당하는 것으로, 희곡작품은 체험 될 때 그것도 각각의 관객에게 서로 다르게 체험될 때 비로소 창조가 이루어지는 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관객이다. 희곡작품은 무대나 책 속에 그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시간, 공 간상의 규정된 움직임으로서 체험되는 매 순간에 새롭게 생성된다. 10) 는 사실과 상통한다. 이처럼 아리랑의 개인기억은 수많은 아리랑 노랫말을 몇 개의 유형으로 획일화하는 것을 막고 지역의 다양한 아리랑에 생명을 불어넣는 데 기여한다. 2) 집단기억으로서의 아리랑 집단기억은 한 집단이 시간 속에서 스스로 연속적인 실체로 인식하는 것을 뜻하는 동시에 연속성 인식의 표현이자 연속성 인식을 강화하려는 노력이다. 11) 집단기억으로 인식되는 경우는 여러 가지 이다. 1)개인기억이 집단기억으로 변화한 경우도 있고 2)처음부터 집단기억화된 경우도 있으며, 3) 5) 제프리 K. 올릭, 강경이 역, 위의 책, 61쪽 재인용. 6) 김승희, 아리랑의 정신분석-상실에 맞서는 애도, 우울증, 열락(jouissance)의 언어, 비교한국학 Vol.20 No.2(2012), 81 쪽. 7) 제프리 K. 올릭, 강경이 역, 기억의 지도 (옥당, 2011), 52쪽. 8) 나운규, 아리랑과 영화와 나, 삼천리, 월호. 9) 그러다가 개인서정의 기억화는 차츰 집단 서정의 기억화로 고정화되는 단계를 거치게 된다. 그리고 집단적 서사의 기억화는 식민지, 분단, 6 25전쟁 등의 민족, 국가적 환경 속에서 구체화된다. 10) 김형기, 연극비평에 관한 연극학적 고찰, 동시대 연극비평의 방법론과 실제 (연극과 인간, 2009), 28쪽. 11) 제프리 K. 올릭, 강경이 역, 기억의 지도 (옥당, 2011), 147쪽

74 문화기억과 기억융합으로서의 아리랑 현재에 와서 인위적으로 집단기억화하는 경우도 있다. 혹은 4)잊혀진 집단기억을 재구해낸 집단기 억도 있다. 이 중에서 2)는 신화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구속으로, 현재에 미치는 과거의 영향력과 연 결된다. 3)은 도구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구속으로, 과거에 미치는 현재의 영향력과 관계된다. 가령 정치적 목적으로 아리랑 시원을 지역의 민속기억과 연계하여 재구하려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집단기억하기 역사는 집단기억으로 남는 경우가 종종있다. 그 역사의 덩어리가 지역, 민족, 국가의 흥망과 직결 되는 경우 더욱 그러하다. 모리스 알박스도 가장 중요한 결속력은 공동기억의 의미라고 했다. 여기 서 집단적 기억이 도출된다. 아리랑은 신화처럼 한민족 속에서, 그리고 한국이라는 국가 단위 속에서 절대적 지위를 확보해가 고 있다. 강원도의 지역민요 로서 출발한 아리랑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누구도 거역하거나 거 부할 수 없는 신화가 되었다. 아리랑에 대한 절대적 찬사는 신화적 영웅 숭배주의를 닮아있다. 아리 랑에 대한 금기와 금지는 아리랑 부정에 대한 정신적, 민족적, 국가적 처벌에 해당한다. 12) 민족 고유 의 노래라서가 아니라 집단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리랑 속에 담겨있는 집단기억은 한, 슬픔, 이별, 여성성, 부끄러움 등이다. 그리고 유희와 저항, 재회 등이다. 구체적 단어로 말하자면 고향, 어머니, 죽음, 가난, 독립, 통일, 환호, 놀이 등이다. 그리 고 자연적, 물리적 조건에 대한 저항, 사회제도에 대한 저항, 반민족, 반국가행위에 대한 저항 등, 일체의 폭력에 대한 저항의 소리로서의 아리랑은 영화 아리랑 기억을 통하여 형성된 관념적 집단기 억이다. 통일, 통합(남북, 세대, 계층 등)의 노래로서의 아리랑 기억은 문명추구를 노래하는 아리랑 인데 남북 회담, 월드컵대회, 유네스코 등재 등을 거치면서 형성된 아리랑의 집단기억이다. 그런데 기억은 사료( 史 料 )일 수는 있어도 역사일수는 없다. 불변의 실체가 아니며 변화하기 때문 이다. K. 올릭은 집단기억을 독립 또는 종속 변수가 아닌, 기억의 결합태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집단기억은 변화하는 과정 속에 존재하는 유동적 실체이다. 13) 라고 했다. 이처럼 기억은 저장체가 아니다. 시간에 따라 구성되고 변화하는 능동적인 과정이다. 그래서 모든 문화는 관계 속에서 변화 하는 구성체들간의 구성행위의 결과물로 보아야한다. 아리랑 역시 이런 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리랑은 지역향토민요로서의 집단기억과 통속민요로서의 근대민요, 저항과 독립으로서의 아리 랑, 자주독립국가의 단합과 일체성으로서의 아리랑 등으로 기억하기 가 변화해왔고 그 간극마다 사 실상 경계가 있고 차이가 존재한다. 아리랑을 전체로 접근하면 주관과 객관이 섞인 전체로서의 아리 랑을 기억하는 것과 같다. 기억을 시간과 공간, 매체, 장르 등으로 나누어 접근해야 아리랑 기억의 역사를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런 다음에 아리랑문화를 논해야 한다. 아리랑 종합조사보고서 처럼 세대나 시대 구분없이, 그리고 개인기억의 과감한 집단기억화하기와 같은 방식으로는 아리랑 12) 집단기억의 구속으로는 제한(금기와 금지)와 명령(의무, 요구) 등이 있다. 13) 제프리 K. 올릭, 강경이 역, 앞의 책, 155쪽. 의 본질파악과 발전모형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집단기억 만들기 현대에 와서 과거의 일을 영웅시하고 신화화하는 일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독재자의 신화화하 기, 승자의 영웅시하기는 많은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되는 바이다. 아리랑을 신화화하는 작업은 지금 도 각 지자체마다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나쁘게 보면 만들어진 아리랑 이고 좋게 보면 아리랑의 문화적 상품화, 그리고 지역민의 정체성과 일체성 확보라는 상업적, 정치적 행위의 융합에 해당한다. 집단기억화를 통하여 아리랑을 영웅시하는 행위들은 앞에서 살핀 아리랑 부정에 대한 금기, 금지 의 실질적 현상에 해당하며 그 이면에는 정치적, 상업적, 문화역량강화 목적 등이 숨어있다. 그리고 집단기억 만들기의 일환으로 없던 역사를 새로 만들어내기를 시도하는 것은 지역적 표징찾기에 대 한 과도한 집착현상 14), 홉스봄(E. Hobsbawm)의 만들어진 전통, 15) 전통의 허구성에 해당한다. 마 치 민족주의 연구에서 집단기억을 민족의 경계를 긋고 민족주의의 정당성을 증명하려는 민족주의 자들의 이데올로기 무기고에 있는 도구 중의 하나처럼. 아리랑을 지역의 경계를 긋고 지역주의를 정당화하고자 하는 도구로 쓰고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동기억으로서의 아랑설화를 끌어와서 밀양아리랑의 탄생을 설명하려는 것은 공동기억하기의 순환구조를 통해 밀양아리랑의 지역화 토착 화를 꾀하고 허구의 역사화를 통한 아리랑의 정체성, 진실성, 역사성을 확보하려는 목적이 있다. 그 러나 지역민의 기억에서 아랑설화는 살아 있어도 밀양아리랑이 살아남지 못하는 이유는 개인기억의 집단기억으로의 각인 현상이 약하기 때문이다. 즉, 공유된 밀양 아리랑의 기억이 약하기 때문이다. 영천 아리랑을 복원하는 영천시의 노력과, 아리랑 박물관을 건립하고 새재아리랑을 영남권 아리랑 의 원조로 삼고 싶은 문경시의 지역 아리랑 살리기 노력도 이와 같은 이치에서 설명이 가능하며 그 귀추가 주목된다. 문화적 기억은 자체적으로 기억을 위한 기구가 없기 때문에 매체와 정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생생하고 개인적인 기억에서 인위적이고 문화적인 기억으로서의 이행은 기억의 왜곡, 축소, 도구화 의 위험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분히 문제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런 축소와 강화는 공공의 비판, 성찰, 토론을 통해서만이 해결될 수 있다. 16) 그래서 아리랑 역시 정치적으로, 의도적으로 만들 어지기 마련인데 박물관이나 기록물보관소, 기념비, 추모지 등과 같은 매체상의 기억에 의존하는 경 향이 있다. 그러나 지난 것의 강제적 재구를 통한 아리랑의 박제화, 새로운 아리랑의 창조를 통한 정치화, 상품화는 실패한다. 개인체험이 없고 문화적 기억의 개인화 과정이 없기 때문이며 재구를 위한 노력 을 지속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개인기억이나 공유된 집단기억이 형성되지 않으면 쉽게 잊혀진다. 그 14) 최은숙, 아리랑의 지역 찾기에 대한 비판적 논의-경상도 아리랑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예술문화비평 8호(한국예술문 화비평가협회, 2013), 183쪽. 15) Hobsbawm, Eric, and Terence Ranger, eds. The Invention of Tradition, N.Y.: Cambridge Uni. Press, ) 알라이다 아스만, 변학수 채연수 역, 기억의 공간 (그린비, 2012). 15쪽

75 문화기억과 기억융합으로서의 아리랑 래서 매체, 문화, 교육을 통해 개인적 인지와 가치평가, 습득의 과정을 거쳐야 문화기억으로 변화, 자리매김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장기적으로 이행해야 집단기억화할 수 있다. 의례적 형식 을 통해 세대로 학습되는 것은 활성기억이며 강제화, 박제화된 저장기억은 비활성기억이기 때문에 지역문화로 자리매김하기 어렵다. 특히 개별기억과 분리된 집단기억이 있다면 그것은 원칙적으로는 선험적인 개념에 해당하는 허구에 해당한다. 집단기억의 해로운 가정 17) 으로 단일성(Unity), 모방의 직접성, 실체성(Tangibility), 독립성을 든다. 집단기억 만들기 작업 역시 집단기억에서 피해야 할 위의 4요소에 해당하는 바가 많아 보인다. 먼저, 집단기억은 다양하고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일하며 합의 된(혹은 주어진) 것이다. 라는 단일성(Unity)은 기억과 문화 자체가 변화하는 유동체라는 점에서 큰 오류에 해당한다. 예를 들면, 문경새재아리랑을 경상도 아리랑의 원조이자 원형이라 주장 18) 하는 경 우가 이에 해당한다. 오히려 다양하고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는 집단기억 으로 아리랑에 접근해야 지역성을 살릴 수 있다. 새재아리랑이 경상도의 원조여서 얻는 게 무엇인 가. 문경새재소리 또한 상위의 강원도아리랑에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이 있음을 상기한다면 이는 옥 상옥의 구조를 만들고 문화를 수직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다음으로, 집단기억은 재현형태로 처음 실체화되는 것이 아니라 재현 이전에 존재하는 과거를 어떤 방식으로든 재현하거나 모방하는 것 이라는 모방의 직접성(Mimetic directness)이 있다. 그런데 기억은 직접적 재현의 과정이 아니다. 아리랑 역시 과거 어떤 사실이나 기억의 재현이나 모방이 아 니라 현재 시점에서 기억을 편집해내는 과정에서 무수히 발생하는 것이다. 집단기억은 사물로 구체화되거나 재현되는 과정이나 활동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로 보는 집단기 억의 실체성(Tangibility) 역시 해로운 가정에 해당한다. 한 문화 내 집단기억이 단순히 전해지는 것 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시대적 타협을 통해 매개되고 적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곧 기억을 수정하 고 저장할 새로운 양식(modi)들로 선택된 언어적, 조형적, 제의적 반복이라는 소통 과정을 통해서 집단기억의 내용은 새롭게 교호적( 交 互 的 )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집단기억은 상처의 흔적과 는 달리 조작될 수 있고 저장된 내용은 언제든지 변환될 수 있다. 19) 또한 집단기억은 다른 종류의 문화와는 다르며 분리 가능한 것으로, 다른 의미와 일반적 목적의 관계망에 복잡하게 얽혀 있지 않다 는 집단기억의 독립성(Independence) 역시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진정한 공동체는 기억의 공동체. 즉, 자신의 과거를 잊지않는 공동체이다. 집단기억은 어떠한 형태 로든 개인기억, 혹은 집단기억들과의 연관을 맺고 있다. 문화는 그 자체가 관계이고 소통이기 때문 이다. 그래서 지자체마다 펼치고 있는 만들어진 기억으로서의 아리랑문화 사업 이 성공하려면 문화 17) Tilly, Charles, Big Structures, Large Processes, Huge Comparisions, N.Y(1984), 1984; 제프리 K. 올릭, 강경이 역, 기 억의 지도 (옥당, 2011), 152쪽 재인용. 18) 배경숙, 문경새재아리랑의 영남아리랑사적 고찰- 영남전래민요집 을 중심으로, 문경새재아리랑학술심포지엄자료집, ) 김기란, 집단기억의 무대화와 수행적 과정의 작동 메커니즘, 드라마연구 Vol.- No.30, (한국드라마학회, 2009), 27쪽. 와 문화를 엮어야 한다. 건물을 짓더라도 불이불일( 不 二 不 一 )하여야 하듯이, 공연, 축제 등을 통한 지역 아리랑만의 독립된 집단기억화는 이미 문화 속성을 거부한 것이어서 생명이 없다. 그래서 인문 학적 상상력, 문화융합을 통한 다문화성, 창조문화 등이 강조된다 재구된 집단기억 망각된 기억, 상실된 체험은 재구가 가능한가. 특히 사라지는 토속민요의 경우 현대사회에서 필요 로 하는가? 이런 질문은 집단기억의 존재성-기능, 실용성, 공과주의 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지역 아리랑의 경우, 영천아리랑은 지역주민이 이미 기억하지 못하는 노래가 되었다. 그러나 북한 이나 러시아 등에서 불린 것을 계기로 영천 아리랑의 실체를 확인하였다하고 영천시에서 아리랑 복 원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기억과 무관하게 영천시 문화로 집단기억화된다면 그 가 치를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을지가 미지수이다. 영천아리랑처럼 사라진 아리랑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은 많은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숨어있다. 사실 아리랑은 특수한 장소, 시간 등의 실재 로 억압되어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시간에 따라 기억의 유동성을 보장하는 쪽으로 아리랑 기억하기 가 필요하다. 즉, 각기 다른 장( 場 )을 인정하지 않으면 모든 아리랑은 시간과 장소의 이동에도 불구하고 같은 것으로 취급된다. 다시 말하면, 년대에 영천에서 불려진 아리랑과 중국이나 북한에서 불려진 영천아리랑은 이미 개인기억 이나 집단기억 측면에서 전혀 같지 않다. 하물며 해외에서 불린 영천아리랑도 1세대와 2, 3세대가 받아들이는 영천 의 이미지가 다르다. 그래서 다른 성격이나 정체성을 지닌 아리랑을 지역명이 같 다하여 현재에도 같은 것으로 인정한다면 모든 아리랑은 그야말로 원조 하나만 남게 된다. 하와이아 리랑, 연변아리랑 등을 모두 이주 직전의 지역아리랑으로 복귀시키는 일과 같다. 그렇게되면 문경아 리랑도 강원도아리랑에서 나왔다면 그저 강원도아리랑의 변형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아리랑이 불리는 공론장이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아리랑문화는 발전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온갖 시대적 시류가 잡탕처럼 섞일수록 아리랑은 발전한다. 그것이 아리랑의 속성인 것도 잘 알고 있다. 흔히 열린구조로서의 아리랑을 자주 언급하기 때문이다. 영천아리랑은 중국이나 북한에서 2세대 영천아리랑으로 자리바꿈이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따라서 중국이나 북한 의 영천아리랑을 가져온다 해서 그것이 바로 과거의 영천아리랑이 되지 않는다. 이미 예전의 영천아 리랑으로 기억되지 않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나 해외에서의 아리랑을 복원하는 모든 작업은 이와같 은 생태적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하기 가 어렵고 그 기억을 유지하기도 어렵 다. 또 기억하기 쉽지 않으면 문화로서 지속하거나 전승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잊혀진 아리랑의 복 원, 재구 작업은 방법이 훨씬 더 중요해진다. 특히 특정인에 기댄 복원사업은 개인숭배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집단기억을 위한 개인기억의 지나친 확대현상이다. 이보다 사정이 좀더 나은 경우가 청주아리랑이다. 청주에서는 이미 개인기억과 집단기억에서 사 라진 청주아리랑이 1938년 일본의 강제 이주정책으로 연변으로 이주해간 청주주민들에 의해 지금도

76 문화기억과 기억융합으로서의 아리랑 연변 도문시 정암촌에서 불려지고 있다, 이들에게 청주아리랑은 타향에서의 고달픈 삶과 고향을 이 어주는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들에게 청주아리랑은 고향 그 자체였다. 20) 이 청주아리랑은 최 근 도문시에서 열린 2013 중국 두만강 문화관광축제 개막식에서도 불려졌다. 이런 경우 노래찾기 는 잊혀진 고향찾기이자 기억찾기이며 역사찾기에 해당한다. 하나이면서 여럿인 아리랑. 민속기억, 문화기억의 경계선이 아리랑의 경계선이다. 그러나 사실 이 것을 선험적으로 전체화하는 것은 필요에 의한 재구( 再 構 )행위에 속한다. 문화를 선험적으로 금긋기 하는 행위는 문화기억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리랑은 주기적 반복을 통해 되살아나지만 결코 가역적이지 않다. 즉, 이전의 양태로 결코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재구, 복구, 복원하였다하 여 그 기억까지 복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예술과 정치의 융합이라는 측면에서 제 3의 아리 랑을 기대해보는 것이다. 3) 개인기억의 집단기억화 개인기억으로서의 아리랑이 집단기억화되는 과정을 추적하는 작업은 쉽지 않다. 기억의 망각 과 정과 역동적 변화 과정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우선 환경의 변화 전체를 살펴야 하고 기억의 기능에만 의존해서는 안된다. 21) 얀 아스만은 사물이 상징으로 변화되어 사물의 기억 의 지평을 넘어설 때 그 사물에 시간의 차 원과 정체성의 차원이 각인되어 문화적 기억으로 된다. 22) 고 했다. 이 말을 아리랑에 적용해보면, 아리랑은 개인기억물인데, 그것이 상징으로 변화되어 민요로서의 아리랑의 지평을 넘어서면 시공간 의 차원을 갖게되고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면서 문화기억, 집단기억으로 각인된다. 그리고 그 집단기 억은 다시 시공간을 따라 변화하면서 재기억된다. 지금까지 수집된 아리랑은 개인기억과 집단기억의 산물이다. 즉, 수집된 아리랑은 개인기억에 의 해 재창조(re-making)된 소리인 동시에 개인의 주관적 경험과 객관적 문화기억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민속기억이자 사회기억이다. 그래서 아리랑은 용어 그 자체에서부터 민요, 영화를 포 함한 타 장르, 그리고 아리랑이 함유하고 있는 코드와 정서, 사상 등의 관념문화를 총체적으로 함유 하는 아리랑문화 그 자체이다. 이런 이유로 아리랑에 대한 개인기억과 집단기억은 다양한 스펙트럼 을 가지며, 이것이 아리랑문화를 지속적으로 확산, 재창조할 수 있는 바탕이자 열린구조로 이행된다. 아리랑의 기억 역사를 추적하면 기억하기의 층위를 살필 수 있다. 그리고 이 층위 구분은 형식이 나 내용, 매체, 담당층 등을 통해 지평구조가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예들 들면 후렴구의 다양성, 줄 20) 충청타임즈, 2013년 08월 22일 (목) 타향서 고달픈 삶 고향 이어주는 희망 기사 참고. 21) 각 문화는 내적 논리를 이해해야 한다. 문화형성은 환경에서 출발해야 한다. 본래의 위치와 장소와 생태적 지위, 틈새 등등... 그래야 그것이 현재의 맥락으로 옮겨지면서 변질, 퇴화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허영식, 다문화사회와 간문화성 (강현출판 사, 2010), 49쪽. 22) 이병준, 문화적 기억과 문화교육, 문화예술교육연구 3권 1호(2008), 56쪽 재인용. 수의 다양성, 내용의 서정과 서사의 혼합을 통한 장형 등은 개인차원의 기억문화로 존재함을 간접적 으로 비춰주는 것이다. 그리고 고쳐부르기 작업도 개인차원의 작업이다. 그리고 고쳐 부른 것이 다 시 개인기억화되고 민중의 호응을 얻으면 집단기억화되는 과정을 밟게 된다. 23) 아리랑을 전수하는 전문가의 담화를 들어보면 어린 시절 접한 아리랑과 학습과정에서 접한 아리 랑,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들은 아리랑 등이 각기 다른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아리랑 노랫말 중에서 자신만의 아리랑을 만들어 공연하거나 전수 활동을 하기도 한다. 24) 또한 개인기억이 집단기억화되는데는 도구의 발전이 한몫했다. 때때로 생물체는 문화의 특수화된 연장물(extension)을 발달시켜서 그것으로 몸 전체가 움직여야 할 일을 대신시키고 몸은 자유롭게 다른 일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사실 인간이 만든 물건은 모두 일찍이 인간의 몸이나 몸의 특수화된 부분이 하던 일들을 대신하는 연장물로 간주될 수 있다. 25) 아리랑도 개인의 몸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는데 예를 들면 노동에 수반된 아리랑의 기억이 몸으 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남은 것은 표상화된 기억, 관습적으로 남은 기억들, 혹은 새로운 몸의 기억으로 기억되는 것들이다. 이 새로운 기억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개인기억을 넘어 통속민요, 민 족민요, 애국가와 같은 국가노래로 기억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매체의 변화나 사 회노래환경의 변화, 기억할 만한 역사적 사건을 수반하게 된다. 그래서 개인기억으로서의 아리랑 틀 이 바뀌게 된다. 예를 들면, 아리랑의 두 줄 양식은 안정성, 기억의 용이성, 즉흥성의 장점을 가져다 준다. 26) 그리고 이 장점들 때문에 노래 고쳐부르기가 쉽고 가능해지는데, 이 단계는 벌써 아리랑이 개인의 노래를 떠나 지역의 민요로, 근대 통속민요로, 그리고 민족과 국가의 노래로 널리 가창되는 계기를 마련함과 동시에 아리랑의 대중적 기억화가 일어났음을 뜻한다. 그런데 자신의 문화를 언어 이전의 차원으로 이해하고 통합할 수 있는 이 오래된 뇌가 흔히 새로 운 문화적 체험을 이해하고 통합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27) 아 리랑 역시 생활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생활과 유리되면 아리랑의 본질이 변화한다. 이때 아리랑은 몸에서 떨어지고 뇌에 남은 것만 기억되는데, 뇌는 아리랑의 변화를 거부한다. 특히 생활 과 관련없는 것, 정황적 틀 28) 이 깨질수록 더 강하게 거부한다. 그래서 아리랑의 변화는 문화적 거부 23) 노랫말 바꿔 부르기 또한 아리랑이 지닌 대표적인 장점이다. 다른 민요 장르가 그나마 소극적으로 노랫말을 차용한 것에 비하 면 아리랑은 노랫말의 생산공장이며 창고라고 할 수 있다. 기억의 융합은 노랫말에서 가장 쉽게 일어나고 그 다음이 후렴의 개조, 가락, 토리(조) 등이 변한다. 24) 진용선이 정선아라리 가창자를 인터뷰한 자료를 보면 이와 같은 사정을 잘 알 수 있다. 정선군, 정선아리랑 소리꾼의 삶과 아리랑 (2009). 25) 에드워드 홀(Hall), 최효선 역, 침묵의 언어 (한길사, 1999), 90쪽. 26) 김기현, 아리랑 요의 형성 시기, 어문론총 34(경북어문학회, 2000), 7쪽. 27) 에드워드 홀, 최효선 역, 문화를 넘어서 (한길사, 1999), 110쪽. 28) 정황적 틀이란 하나의 완결된 실체로서 분석하고, 가르치고, 전파하고, 후대에 물려줄 수 있는 실행가능한 문화의 최소 단위 이다. 이 틀은 언어적, 동작적, 근접공간적, 시간적, 사회적, 물질적, 인격적 요소를 비롯하여 여러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77 문화기억과 기억융합으로서의 아리랑 반응을 수반할 가능성이 많다. 가령 정선아리랑 경연대회에서는 가창자들이 후렴을 자주 부르지 않 는데 이는 고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뇌의 반응 때문이기도 하다. 즉, 원형 유지의 구심력이 원심력보 다 더 강하게 작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억이 망각에 의해 변하기 마련이듯이 뇌도 세뇌되 어 정황적 틀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새로운 틀이 집단기억화되려면 뇌가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되어 야 하고, 그것이 생활이어야 하고, 그러다 다시 지루해지면 개인기억화하기 위한 몸의 이탈이 시작 된다. 개인기억으로서의 아리랑이 집단기억화되는 과정에는 역사적 사실들이 많이 존재하였다. 아리랑 현황조사보고서(2008) 29) 에 따르면 아리랑의 컬쳐코드로 부끄러운 자식, 여권, 나라 이름 을 들었다. 조사결과를 섣불리 전체화,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부끄러운 자식은 버릴 수 없고 키워야 만 하는 자식과 같은 존재로 아리랑이 무의식적, 심층적, 집단적으로 지니고 있는 문화코드로 보았 다. 부끄러운 자식으로서의 아리랑 인식은 아마도 가난과 식민생활이 아리랑의 원형 기억으로 각인 된 탓이 크다. 이는 한과 슬픔의 아리랑에 해당한다. 강원도 아리랑이 개인적 신세한탄의 소리였다 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여권과 나라 이름은 개인과 국가의 정체성과 관련된다. 나와 국가(여권, 나라이름)의 정체성과 관련되는 아리랑은 극복으로서의 아리랑, 독립, 저항으로서의 아 리랑이다. 현재의 아리랑은 문화(상품)으로서의 아리랑에 해당한다. 이처럼 아리랑은 초기에는 개인 차원에서 주로 전승, 향유되었던 상실의 아리랑 이었다면 영화 아리랑과 광복군 아리랑은 저항과 극복의 아리랑 이었고, 지금은 문화로서의 아리랑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기억, 개인의 신세한탄 의 아리랑이 여러 개의 노래, 여러 정서의 표출이라면 집단기 억, 민족과 국가의 노래 로서의 아리랑은 하나의 아리랑, 하나의 정서를 표현하는 문화기억으로서의 소리이다. 즉, 개별 아리랑이 집단적 서정민요 단계를 거치고 민요를 넘어 문화로(민족문화), 지역을 넘어 국가로, 다시 세계로 (유네스코 등재이후) 나아가는 아리랑이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개인 한탄의 민요가 민족민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서의 공감대를 통한 민요화, 지역화, 그리고 경복궁 중수, 일제강점기, 나운규 영화, 남북회담, 월드컵 경기 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근대성(봉건주의, 근대시민주의, 개방주의, 유교주의, 신여성주의, 도시화, 상업화 등 )이 중요한 주제로 공론장 합류함으로써 아리랑의 내용은 더욱 풍성해질 수 있었다. 아리랑의 정황적 틀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 노랫말과 음악, 전승맥락이다. 이 중에서 노랫말은 유동적이다. 어떤 지역의 아리랑에 특정 지역명이 드러난 노랫말이 불렸다하여 그 지역의 역사성으 로 단정하는 데 주저하는 것이 바로 이 노랫말의 유동성 때문이다. 반면에 음악의 가락 선율 등은 기억하기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는 집단문화의 표상이기 때문에 변개나 유동성이 비교적 어 렵다. 그래서 음악요소의 변화에서 지역의 경계를 찾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아리랑은 개인기억에서 집단기억화되기 쉬운 틀을 갖고 있다. 소위 언어에서 말하는 친교적 기능이 강하다. 다가가는 말투, 옆사람과 말하는 투, 무거운 것을 내려놓고 주변의 이야기를 주섬주섬 말하는 투, 존칭보다는 하대 함으로써 심리적 동일성을 획득하는 전략 등등, 서로가 서로를 당기는 맛이 있다. 이런 것들이 개인 의 집단화를 촉발하는 데 기여한다. 전승은 주요 노랫말과 음악성이 단단히 고정되어 있을 때 강한 전승이 형성되고 집단기억화된다. 다만 전승이 활발하게 일어날 경우라는 단서조건이 필요하다. 창작된 아리랑이 널리 기억화될 기회 를 획득하지 못하면 그 아리랑은 개인과 집단기억에서 사라진다. 그래서 전승맥락, 즉 전승의 환경 획득이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아리랑 살리기, 아리랑 경쟁력 확보하기는 전승맥락의 활성화를 통한 기억의 강화, 그리고 개인과 집단의 기억과 기억의 융합, 즉 문화와 문화의 소통 활로를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기억의 집단기억화에 기여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심리적 기저가 공감 이다. 한국인은 천성적 으로 유대감이 강한 민족이다. 다른 사람의 정서적 상태에 공감함으로써 그들의 감정을 자신의 감정 에 이입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30) 아리랑 역시 공감하는 힘에 의해 다양한 노랫말이 생기고 전국적으 로 불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아리랑은 평형유지 욕망의 결과다. 박탈, 상실, 차이에 대한 동질성 회복을 기대하는 심리 적 기저가 강하게 작용한 결과다. 나와 너를 비교하고 자연과 인간(나)을 비교함으로써 생기는 상대 적 차이, 상실감의 치유를 통하여 평형상태가 유지되기를 기대한다. 또 사람들은 상실의 상태에 놓 인 타인의 상태에 대한 동정심이 강하여 그러한 심리에 쉽게 동의한다. 세계와 자아의 차이-사물에 자신의 감정이 이입된 상태-를 발견하고 한국인은 격분하는 것 대신 한탄을 선택한다. 그리고 동질 성, 평형성 회복을 기대하고 이에 대한 심리적 공감대가 형성된다. 여기에는 한국인 특유의 동정심 (측은지심, 仁 )이 작용한다. 동정과 공감, 이것이 아리랑 정신의 핵심이며 아리랑이 확대되고 집단기 억화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4) 집단기억의 개인기억화 개인에게 있어 기억실천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31) 개인과 집단 사이에 도 상호작용은 계속 일어난다. 예를 들어, 아리랑을 처음 접하는 때가 초등학교 음악 시간이었다면 아리랑은 음악수업과 함께 기억된다. 이때의 음악수업은 학교 수업이라는 형태로 전승, 학습된 것이 어서 그 수업을 들은 학생들에게는 비슷한 체험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수업이라는 그 자체가 이미 집단적 활동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집단기억으로 전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체험하지 못한 기억은 단지 문화적 기억을 통해서만 과거를 회상하고 기억할 수 밖에 없 기 때문에 어떠한 사건과 지식을 공동체가 기억할 수 있는 문화적 기억으로 자리매김을 하는 것은 그 정당성과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학습과정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틀이란 행동을 일으키는 물질적 환경이나 맥락, 즉 모든 행동계획의 기반이 되는 기본단위를 말한다. - 알라이다 아스 만, 기억의 공간, 129쪽. 29)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2008 아리랑 현황조사보고서 (2009.3). 30) 제러미 리퍼킨, 공간의 시대, 인터뷰 중, 동아일보, 기사. 31) 제프리 K. 올릭, 강경이 역, 기억의 지도 (옥당, 2011), 100쪽

78 문화기억과 기억융합으로서의 아리랑 집단기억으로서의 아리랑은 항상 변하기 마련이다. 구한말 개화기 시절의 아리랑과 일제 강점기 의 아리랑, 그리고 광복 후의 아리랑, 1980년대 이후 산업화 정보화 시대의 아리랑은 각기 다르게 기억된다. 아리랑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바뀌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리랑이 집단으로 획일화되어 전 승된다면 그 생명은 단축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집단기억의 개인기억화 과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새롭게 기억되어야 아리랑이 산다. 민족기억이 개인 체험없이는 괴리현상에 의하여 약해지기 때문 이다. 집단기억의 개인기억화 현상은 민요현장에서도 드러난다. 통속성과 토속성을 함께 지니고 있는 지역의 아리랑은 여럿 있다. 아리랑 형태로 구연되는 소리 중에서 노동요와 같은 토속민요로 기억되 면서 전승되는 경우와 통속민요 형태로 전승되는 경우가 혼재하는 지역이 이에 해당한다. 집단은 이처럼 토속과 통속의 민요를 뚜렷이 가려 구연하고 있다. 기억의 차원에서 경험에 의한 것이든, 노랫말이나 가락, 구연의 장소 등에 의한 것이든 이미 구분되어 있는 것이다. 흔히 토속은 폐쇄적 전승이고 통속은 개방적 전승이라 한다. 소리의 통속화를 끌어낸 사회적 환경 으로는 경복궁중수( )시절의 타령, 1926년 영화아리랑, 방송과 유성기문화의 대두, 기방문 화 성행에 따른 통속화 등을 들 수 있다. 그래서 통속문화가 토속문화에 영향을 주어 모심는소리에 도 아리랑 후렴이 붙게 된다. 이것은 지역 전체에서 일어난 소리 현상일수도 있고 개인에게 영향을 준 것일 수도 있다. 32) 그래서 일부 지역에서 토속적 아리랑이 존재하는 이유를 강원도 아리랑의 전 승, 전파 영향에서 찾는 경우와, 통속노래의 대중화 영향으로 향토민요가 영향을 받은 것을 현장조 사에서 채록된 것으로 이원화해서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는 일종의 혼합, 교섭현상이며 좁은 의미의 융합현상에 해당한다. 서로 다른 텍스트가 공통의 시각을 공유하는 것이 장르접촉 33) 이며 시각이 다르면 장르간섭이 일 어난다. 여하튼 장르간의 접촉이나 간섭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집단의 개인화 과정에 해당한다. 사례로, 경남 사천시 곤양면에서 조사된 진도아리랑(2)는 진도아리랑 곡에 밀양아리랑 노랫말을 넣어 부르기도 하고, 중간에 후렴구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가 에야데야 어허야데 야 어허야어허야 사랑이로구나 로 바뀌기도 하는 현상을 보여준다. 34) 진도도 아니고 밀양도 아닌 경남 사천시에서 불려진 만큼 지역의 집단기억이 작용하지 않아 개별화, 개체요로 보아야 될 아리랑 이 된 것이다. 35) 문경아리랑의 경우, 문경 지역 모심는소리에 아리랑이 있다. 기능상 모심는소리이고 노랫말도 모 심는소리의 일반적 사설에 해당하고 농민이 부른 것이어서 토속적 아리랑에 해당한다. 그러나 모심 는소리에 아리랑이 개입한 것은 분명 장르의 접촉이나 간섭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가창 자는 모심는소리의 정형의 틀을 깨고 아리랑 후렴을 가창한 것이다. 집단기억의 개인기억화가 시작 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개인기억화는 다시 시대적 조류를 타고 집단기억화되어 문경 일부지역에 서도 모심는소리로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집단기억의 개인기억화는 노래 현장을 더 욱 다양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독일의 괴퇴는 말한 바 있다. 민족을 강조하다보니 나온 말이다. 그런 논리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현대의 개인주의 를 강조한 말이다. 현대는 개인의 것이어야 향유가 되고 전승이 된다. 특히 현대 개인화사회에서는 더욱 더 그 증세가 심하다. 또한 집단은 집단 속에서만 집단의 치유로 존재할 뿐, 개인 차원의 기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 아리랑은 민족적인 것이고 집단기억으로만 다루어진다. 사회 곳곳 에서 아리랑을 집단의 그 무엇으로 몰아가고 연구자도 사료에 치중하여 아리랑을 역사화하고 민족과 국가의 소리로만 취급하는 경향이 많다. 집단의 소리도 개인화 되어야 자기 소리가 된다. 선입견이 현재 경험과 그 경험의 기억에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원조 맛집이라 하면 맛있는 이유 를 찾으려 하고 또 맛있었다고 기억한다. 기억은 역사적 사실(실제 사실)과 서사적 사실(개인이 기억 하는 사실)이 있다. 역사적 사실의 서사적 사실화는 개인기억화 과정이다. 달리 말하면 개인우화 (fable)이다. 기억의 왜곡현상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상상력이 더 팽창한다. 그리고 이 상상력은 기억의 융합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과 서사적 사실을 혼동하면 안된다. 우리 사회가 주관적 요소와 객관적인 요소가 뒤섞여 있어 객관적인 것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하는 혼동의 현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실과 기억의 혼동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 다양한 경험은 다양한 개인 서사의 사실을 축적시키기 때문에 자서전적 아리랑이 된다. 김산의 아리랑도 사실(fact)에 근거하지만 엄밀 히 말하면 서사적 사실에 속한다. 나운규도 어렸을 때 국경의 철도 노동자들이 부르던 구슬픈 노래 가 어쩐지 가슴에 충동을 주어 서 기억하고 있었다며 회고한다. 서울에 올라와서 다시 들으려 했으 나 기생들도 알지 못하고 명창들도 부르지 않아서, 본인이 가사를 짓고 곡은 단성사 음악대에 부탁 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온 국민이 다 부를 줄 아는 영화 아리랑이 신민요 아리랑타령인지 구조 아리랑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 노래가 개인기억에 의해 만들어지고 매체를 통해 집단화된 것이다. 밀양아리랑이나 진도아리랑도 집단기억으로서의 아리랑이 개인단위로 기억되다가 집단화된 경우 이다. 여타 지역의 아리랑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언어나 가창환경, 지리적 환경과 문화적 환경에 따라 아리랑이 달리 불려지고 그것이 지역민의 승인을 받게되면 지역문화기억으로 전승된다, 32) 그래서 제보자 조사가 뒤따라야 한다. 33) 제프리 K. 올릭, 강경이 역, 기억의 지도 (옥당, 2011), 105쪽. 34) 류종목, 현장에서 조사한 구비전승민요-사천시편- (민속원, 2011), 462~463쪽. 곤양면 맥사리 이례순 제보. 35) 이러한 사례는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조희웅 외, 영남구전민요자료집 (월인, 2005)만 보더라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로 부르다가 낮이 낮이나 밤이 밤이나 내사랑이로다 로 마무리하거나(의령군 대의면 민요4), 하동군 악양면 민요19(정만순제보)의 아리랑도 후렴구가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쿵덕쿵덕궁 아리라기 났네 로 시작해서는 에이야 디야 에헤 에야 에야 디어라 사랑이로구나 로 마쳤다. 영화 아리랑이 유행하면서 본조 아리랑(영화 아리랑)이 1920년대 야구대회의 응원곡 36) 으로 기억 되었듯이, 200년대 신세대에게도 아리랑은 월드컵 응원가로 기억된다. 그래서 신세대는 아리랑은 흥겨운 집단국가의 응원가 혹은 전통민요로 체험하고 기억한다. 그러다가 느리고 슬픈 가락의 아리 36) 동아일보, 기사

79 문화기억과 기억융합으로서의 아리랑 랑을 듣게 되면 아리랑의 이중성을 기억한다. 기억의 중층이 더할수록 다중정체성을 보이며 아리랑 의 정체가 모호해지거나 반대로 아리랑을 위대한 노래, 위대한 문화로 인식한다. 월드컵 응원에서 아리랑의 집단문화표상으로서의 맛을 체험했다면 집단문화의 개인화는 이루어 진 것이지만 이 체험이, 이 기억이, 이 문화표상이 개인의 다른 체험이나 개인문화에도 기능할 때 아리랑은 살아 꿈틀거리는 개인기억의 유기물이 된다. 그래서 아리랑의 생활화, 이것이 아리랑을 살 리는 답이다. 아울러 사료의 발굴도 중요하지만 저장된 기억을 활성화시키는 작업도 매우 중요하다. 3. 기억융합을 통한 아리랑의 문화융합 방안 융합으로서의 아리랑문화 창조는 기억의 융합이라고 했다. 그리고 기억은 항상 현재 시점에서 새 롭게 출발한다. 그런데 기억은 과거를 현재에 연속시킨다. 기억은 무( 無 )인 과거를 존재하게 하는, 과거의 존재 근거이다. 37) 따라서 기억의 융합은 곧 과거의 융합을 현재에서 행동하는 것이다. 행동 은 깊은 과거의 의식 속에 거의 무의식적, 잠재적으로 저장되어 있는 순수기억을 선별적으로 불러내 서 이것을 현실적으로 활동시키는 것이다. 행동은 기억을 물질화하고 감각을 관념화한다, 현재는 그 런 행동이 행해지는 현장이다. 38) 다시 정리하면 기억의 융합은 과거를 현재화하고 물질화하며 관념 화하는 행동이다. 나아가 기억의 융합은 행동과 행동을 융합하는 것이며, 과거와 현재를 융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억의 융합은 곧 상상력을 가져온다. 즉, 문화융합은 기억의 융합에서 비롯되는 것 이다. 아리랑을 포함한 한국 민요문화의 융합적 창조를 위해서는 우선 과거의 현재화가 필요하다. 그리 고 그것을 개인기억에 각인될 정도로 물질화, 문화화해야 한다. 또 개인기억과 집단기억의 표상으로 관념화하고 기호 상징화할 필요가 있다. 개인과 개인, 지역과 지역의 민요 혹은 이종( 異 種 )문화를 융합하는 행동의 융합도 필요하고 노랫말과 가락, 매체와 담당층의 융합, 즉 과거와 현재의 상황을 융합할 필요도 있다 1) 기억융합의 전제조건 기억융합을 통한 문화융합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가)기능기억화, 나)개인기억화, 다)기억층위화, 라)기억동기나 매개의 강화, 마)선택적 지식화 현상의 경계, 바)소비자의 소비양식 파악 등을 먼저 고려할 필요가 있다, 가) 단지 기억하고 저장하는 기술(art)로서의 아리랑 시대는 가고 활력의 아리랑문화를 개척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39) 저장기억으로서의 아리랑은 책이나 박물관 등에서 다루면 될 일이다. 원형으로 서의 아리랑 기억은 기술로서의 기억일 뿐이다. 베르그송으로 말하자면 단순한 습관적 기억에 해당 한다. 그래서 기능기억으로서의 아리랑이 필요하다. 나) 쟝르 변화를 통한 기억을 위해서는 아리랑의 개인기억화(체험화)가 필요하다. 기억은 정보의 집산이 아니라 정보를 재발생시키는 매커니즘이기 때문이다. 40) 즉, 기억은 융합의 도구이다. 기억으 로서의 융합, 기억에 남고 기억과 기억이 융합하는 아리랑문화 창조가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개 인이 아리랑을 경험하고 감상하고 창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개인기억화와가 우선시된다. 다) 아리랑문화의 지속 및 문화창출을 위해서는 기억의 층위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즉, 민족의 아픔을 체험한 세대의 기억문화와 체험이 아닌 학습이나 매체를 통해 기억하는 신세대의 기억문화, 그리고 집합적 기억이 없는 외국인과 같은 경우로 층위화하여 문화융합 방향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특히 공감의 입장에서 보면, 아리랑 1세대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며 아리랑노래에 공감하 는 세대이고, 지금 사회의 기반 세대는 아리랑 코드와 사회적 인식(아리랑은 민족의 노래, 한의 노 래, 민족전통의 노래...반 의무적 이행 수준)에 공감하는 세대로서, 공감을 도구적 가치(사회적 관심, 사회적 관계유지)로 삼는다. 그리고 신세대(외국인포함)는 1세대와 2세대가 가지는 아리랑에 대한 공감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 주도의 아리랑축제는 1과 2세대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아서 과거 기억의 회상용 정도에 그친다. 공감의 지역적, 세대적, 문화적 확산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라) 기억이 기억으로 강하게 남고 활성화되려면 기억의 매개나 동기가 강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전쟁이나 천재지변, 대규모 폭력과 같은 강력한 파동이 있거나 종교나 민족성, 가치관 등이 강력하 게 작용하거나, 기대와 그 기대의 상실이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가져오거나 문화적으로 심각한 차이 가 발생하여 법적, 물리적, 그리고 자아 자체에 충격을 가져올 때는 기억이 깊게 각인된다. 이러한 기억이 많을수록 개인 서사적 기억이 많고 강해진다. 마) 알라이다 아스만의 현대사회의 위기, 즉 지식의 위기, 매체의 위기, 정체성의 위기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41) 지식의 위기는 고도화된 특정 지식은 기억에서 멀어지고 삶에 덜 습득되고 선택적 지식화 현상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아리랑은 선택되는데 다른 민요는 선택에서 소외될 가능성이 있다. 특정한 문화만이 정당화되는 문화로 인정된다면 사회적 선발에서 불평등이 문제가 되며, 민요사회를 포함한 전통문화간의 관계가 엉성하게 되어 시너지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특 히 매체의 변화는 아리랑문화의 전승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매체와 매체의 융합이 곧 아리랑 융합 37) 소광희, 시간의 철학적 성찰 (문예출판사, 2001), 425쪽. 베르그송은 기억을 순수기억과 습관적 기억으로 나누어보았는데, 순수기억은 과거를 저장해 가지고 있는 것이며 설사 기억이 재생되는 일이 없다 해도 순수기억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 을 무의식이라고도 하는데 행위로 직접 연결되지 않고 의식 속에 표상으로 저장되며 비가역적이다. 반면에 습관적 기억은 순수기억을 현재 속에서 재생하며 옮기는 것이며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반복이 가능하다. 38) 소광희, 시간의 철학적 성찰 (문예출판사, 2001), 424쪽. 39) 기술ars-기억술은 인풋과 아웃풋의 등질성-저장, 공간적 저장소의 개념이다. 활력vis- 회상은 시간이 개입하고 고유한 법칙 을 띤 에너지,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계기가 되지만 반면에 통찰, 의지, 욕구에 의해 조종당할 수도 있다. 또 기억을 불러오는 것을 어렵게 하고 기억을 차단할 수도 있다. 40) 유리 로트만, 김수환 역, 기호계 (문학과 지성사, 2008), 305쪽. 41) 알라이다 아스만, 변학수 채연수 역, 기억의 공간 (그린비, 2012), 60쪽

80 문화기억과 기억융합으로서의 아리랑 을 견인할 수 있다. 바) 문화기호학적으로 볼 때, 소비자의 개성, 자아, 동일성, 이미지, 태도, 생활방식 등이 소비자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가치추구와 문화형성, 소비자의 행동양식을 제어한다. 아리랑을 포함한 민요 문화도 현재 시점의 소비자의 소비 양식을 충분히 고려한 융합이 되어야 한다. 2) 기억융합 단계 베르그송에 의하면, 기억은 순수기억과 습관적 기억, 심상적 기억으로 분류된다. 순수기억은 잠재 된 기억, 즉 무의식으로 잃어버린 시간에 해당한다. 습관적 기억은 시간과 노력에 의해 현재화된 기억이며 심상적 기억은 순수기억이 필요에 의해 초발적 감각이 된 기억을 말한다. 그래서 과거는 순수기억의 저장고이며 현재는 습관적 기억에 의한 행동의 장소 42), 미래는 순수기억이 심상화되고 그것을 현대 속에서 재생할 잠재태 혹은 가능태이다. 그래서 1)습관적 기억화(과거의 현재화), 2)기억의 심상화(과거의 미래화)가 아리랑문화 창출의 핵심과제가 된다. 1)을 위한 과제로는 기억의 회상이 해당되는데 예를 들면 박물관 건립, 축제 및 경연대회개최, 기록화사업 등, 아리랑 보존, 보관, 전승과 관련한 것이 포함된다. 그래서 습관적 기억 화는 기억하기단계 라고 할 수 있으며, 존재의 문제와 연관된다. 그리고 기억이 전혀 없거나 있어도 약하게 저장된 대상자를 위해서 기억만들기 가 필요하다. 2)기억의 심상화를 위해서는 현재까지 기 억되지 않고 순수기억으로 잠재된 기억들을 감각화하는 것이다. 예술이나 기술의 융합 등이 포함된 다. 이제 이들을 기억하기단계 - 기억만들기단계 - 기억융합단계 로 나누고 각 단계별로 필요한 문 화융합방안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사례를 들어 설명하기로 한다. (1) 기억하기 단계: 이 단계는 나 와 아리랑 의 관계(기억) 찾기에 해당한다. 그러다보니 아리랑과 관련된 아무런 기 억이 없거나 있어도 잠재되어 쉽게 활성화되지 않는 기억을 찾아 습관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선 개인이나 집단이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이 기억찾기이다. 이것은 과거의 일과 관련되며, 과거를 현재 화하는 일이다. 지역이나 국가단위의 사업으로 아리랑 박물관, 체험관 건립, 기념비 건립, 기록화사 업, 기타 아리랑 관련 자료 수집 및 전시 등이 이에 해당한다. 특히 대표적인 것이 박물관건립 혹은 기록화 사업이다. 박물관이나 기록보관소는 기본적으로 매 체상의 기억역할을 한다. 43) 그리고 박물관은 저장기억의 대명사이다. 또 박물관은 정전( 正 典, Canon) 의 창고이다. 유, 무형의 아리랑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전시함으로써 아리랑을 보존함과 동시에 체 험을 통한 전승의 장을 확보하는 것이 박물관 건립의 기본 목적이다. 그리고 기록물보관소는 고대의 42) 소광희, 시간의 철학적 성찰 (문예출판사, 2001), 425~426쪽. 43) 알라이다 아스만, 변학수 채연수 역, 기억의 공간 (그린비, 2012), 15쪽. 기록들을 보존하는 장소일뿐 아니라 과거가 구성되고 만들어지는 장소이다. 44) 기억이론에 의하면 송덕 은 미래지향적이며 잊어서는 안될 사건으로 오랫동안 보존해야 할 때의 행위를 말한다. 그래서 후손을 겨냥한다. 그런데 기억은 과거 회귀적이며, 망각의 배일을 통해 과거 로 흘러들어 간다. 그리고 그 기억은 상실되고 실종된 흔적을 찾아내고 현재에 의미있는 증거들을 재구성한다. 45) 아리랑은 상실의 노래, 실종의 노래이다. 그래서 더욱 기억하고자 노래부르며, 기억 을 통해 현재의 의미있는 행위를 재구성하게 된다. 아리랑이 그토록 많이 불려진 것은 기억을 통한 상실의 치유 때문이다. 따라서 아리랑 박물관과 기록화 사업의 방향은 과거의 유물을 모으고 전시하 는 것을 포함하여 현재 그 행위와 과정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박물관과 기록화는 잘 쌓아올린 멋진 현대식 건물이 아닌 곳에서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예를 들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일제의 위안부 피해자 배기봉 할머니의 슬픈 이야기는 오키나와 의 토카시키 섬에 아리랑 비 로 남았고 그의 사연은 영화 <아리랑의 노래>로 만들어졌다. 46) 또 지금까지 수집된 아리랑 노랫말을 한지에 한글서예로 적는 서예로 담아낸 아리랑 일만수 사 업은 한국서학회와 문경시에서 공동으로 작업중이다. 만 여수의 아리랑 노랫말은 다행히 기억된 기 록물이지만 기억되지 않은 기억으로서의 아리랑 노랫말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기억된 기억 으로서의 아리랑은 현재 이 시점에서 표상화된 것이며 망각의 장애를 이겨내고 생존한 것이다. 그런데 기록화 작업은 신중을 요한다. 박물관에 전시되는 것들은 가치와 권위를 가지기 쉽다. 대 표성을 띠면서 정전화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표성을 잃은 것들은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자동 취급될 수 있다. 그래서 아리랑 증인들이 갖고 있는 경험기억이 미래에 더 상실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후세의 문화기억으로 번역, 기록화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때 생생하고 개인적인 기억이 인 위적인 기억으로 이행되면 기억의 왜곡, 축소, 도구화의 위험성이 있다. 매체와 정치에 의존하기 때 문이다. 기억하고자 한 행위가 기억을 축소, 왜곡해서는 안되며 기억이 정치의 도구가 되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념비, 추모지, 박물관, 기록물보관소 등의 건립과 내용물 전시와 교육, 보관 에 더욱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현재의 각종 아리랑 자료는 더욱 귀한 대접을 받을 것이다. 과거가 현재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47) 망각이 기억을 더욱 갉아먹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더 기록물들의 가치와 역할은 커질 것이다. 우리는 그 기록물에 더욱 더 의존하게 되고 그것들을 통하여 역사와 예술과 문학과 문화를 논할 것이며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동력으로 삼을 것이다. 박물관과 체험관 기록관, 연구관 등은 기억의 사회적 생성과 기억의 사회적 기능에 비추어 아리랑 의 사회적 생성과정과 사회적 기능을 살필 필요가 있다. 특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리랑의 최고 송덕은 명예의 전당이나 기념비 건립이 아닌 영혼 속에 구현된 기억이다. 44) 알라이다 아스만, 위의 책, 18쪽. 45) 알라이다 아스만, 위의 책, 2쪽. 46) 세계뉴스, , 국제문화재단 편, 한국의 아리랑 문화 (박이정, 2011), 57쪽 재인용. 47) 이병준, 문화적 기억과 문화교육, 문화예술교육연구 3권 1호(2008), 54쪽

81 문화기억과 기억융합으로서의 아리랑 (2) 기억만들기 단계: 기억만들기단계는 기억하기단계에서 찾은 기억을 강화하거나 아리랑 관련 기억을 새롭게 생성하 는 단계이다. 그래서 이 단계는 문화융합의 핵심 행위과제이자 바탕이 된다. 행위는 소극적이거나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소극적인 경우에는 T.V시청, 각종 매스컴으로부터의 정보 입수 등이 해 당된다. 적극적인 경우에는 경기장, 공연장 방문, 거리응원처럼 직접 참가하여 주체적으로 체험하는 것이 가장 좋다. 아리랑축제나 경연대회 등이 대표적이다. 규칙적인 축제나 기념(공연)이 중요한 것은 의례, 생산, 기능의 소멸이 기억전승의 중단을 가져오 기 때문이다. 또 기념이 중요한 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의미를 창조해가는 기제인 장르, 정확히 말하자면 장르기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48) 현재 아리랑과 관련하여 열리는 축제는 지역마다 존재한다. 정부나 지자체, 개인에서부터 특별기 획, 정기적 행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49) 그리고 현재 진행되는 아리랑 축제는 지역문화의 종합물 처럼 보인다. 집단문화로서의 아리랑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축제가 제공하는데, 여기서 개인기억 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으로든 새롭게 형성된다. 축제는 원래 제의이다. 그리고 제의는 뜻을 행동으로 완성하는 것, 행위양식과 사유양식의 규범화된 질서, 원리가 공동체 속에서 작동하는 시공간이다. 이때의 시공간은 공동의 문화토대를 제공하는 장이 되어야 하며, 시대와 세대 간의 의사소통이 자연 스럽게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축제나 경연장은 아리랑에 대한 기억의 전승현상이다. 브라질의 삼바 재즈 뮤지션 자이르 올리베이라(Oliveira 38)가 한국을 찾아 제4회 문화소통포 럼(CCF Culture Communication Forum) 2013 에 참석한 후 언젠가는 삼바 아리랑 이나 보사노바 아리랑 도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50) 아리랑을 접한 외국인이 아리랑에 대한 개인적 감동이 기억화 되어 행동화된 사례이다. 일찍이 헐버트가 아리랑을 듣고 악보로 옮겨 서양에 전한 것과 비슷한 상 황이다. 이처럼 개인기억과 집단기억은 다양한 관심과 세계관이 교차하는 곳에서 탄생하며 집단기 억을 개인기억화해야 공감 이 형성되고 문화융합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아리랑 노랫말에 등장하는 동작어휘를 재구성하면 아리랑 춤 이 된다. 그리고 여러 아리랑 가락을 응용하거나 재구성하면 아 리랑 음악 이 되고 이들을 합하면 춤음악, 뮤지컬이 된다. 그래서 아리랑의 질서와 원리, 그리고 사고와 행동 양식에 감응하는 몸, 이 둘이 관계를 맺고 공유할 때 아리랑 문화창조가 시작된다. 기억화된 과거는 전문지식(객관화된)으로서의 역사화와는 다르다. 기억화된 과거는 정체성의 문 제이자 현실의 해석, 가치의 정당화이다. 역사는 정체성 형성의 한 요인이 될 뿐이다. 그래서 아리랑 의 과거에 매이면 아리랑의 미래가 없다. 그리고 아리랑을 실체로 접근하면 새로운 문화창출이 어렵 다. 기억으로서의 아리랑이 필요한 이유는 기성세대들(아리랑 유경험자)만의 리그가 돠어서는 안되 기 때문이다. 아리랑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 신세대나 외국인에게도 공유되는 아리랑 기억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문화로서의 각종 아리랑 축제나 경연대회는 이벤트로서의 대상 에 머물러서는 안된 다. 문화적 기억으로서의 아리랑 축제와 경연은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행위이며 과정이어야 한다. 그래야 아리랑 기억이 해마다 저장되어 일상에서 활성화될 수 있다. 물론 축제로서의 아리랑문화는 현대인의 필요와 욕구를 기본적으로 충족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3) 기억융합단계: 기억융합은 필요에 의한 기억의 감각화단계이다. 기억융합은 예술, 기술, 정치, 경제 등의 감각의 발현에 해당한다. 기억은 사실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다. 집단기억은 더욱 더 관념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기억은 개인간 서로 구매할 수도 없고 학습할 수도 없다. 다만 기억을 교류할 수는 있다. 그래서 기억의 융합이 가능하다. 51) 나 속의 기억들간의 융합, 나 와 너 의 기억을 섞는 융합, 그리고 방법 (매체)융합의 문제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심상적 기억 활성화를 위한 기억융합은 사회나 환경, 이념의 변화, 혹은 페러다임의 변화 등에 따라 순수기억이 감각화되어 현재에서 융합이 일어나는데, 이 경우에는 아리랑중심의 융합, 여러 소재 중의 일부로서의 아리랑, 아리랑정신 계승으로서 새로운 문화융합 등으로 유형화된다. 이 과정에서 예술융합, 장르융합, 기술 매체융합, 동종/이종융합, 환경융합 등이 발생한다. 이 시대의 아리랑학 혹은 아리랑문화를 창출한다면 우선 동아시아 가치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문화창출이 일어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문화, 문명 도출보 다는 동아시아적 가치를 기반으로 하하는 것이 공감의 예술, 공감의 미학, 공감 의 실천문화로서의 아리랑이 확장되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융합은 거창하기 보다는 이전의 것을 조금 변화시키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예를 들면, 아리랑은 문고리 잡고 발발 떠는 총각과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처녀를 대비시키면서 52) 이미 개인과 전통(남성 중심사회)의 대립보다 적극적 개인과 수동적 개인의 대결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상상력, 창조 력 생성을 기반으로 하는 문화융합은 예술장르간의 융합-영화, 뮤니컬, 퓨존음악, 연극, 시, 소설 등 예술성 지향이 목적-, 정치와의 융합-독립군가, 응원가, 계몽가, 지역로고송, 지역상품화, 결속력 등 - 아리랑의 정치적 사용, 경제와의 융합-아리랑의 상품화지향, 이익창출이 목적- 등 다양하게 아리 랑이 개입되거나 활용되거나 아리랑의 본질을 유지l하면서 힐링기법으로 쓰일 수도 있다. 대표적으 로 예술융합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기억의 위기를 주제로 삼고 그에 대한 새로운 형식을 창안하는 것이 바로 예술인데, 예술을 통해 문화적 기억과 망각의 역동성이 생생한 모습을 띠게 된다. 53) 아리랑이 지닌 예술로서의 실효성은 48) 올릭, 기억의 지도, 144쪽. 49) 이에 대해서는 권오경, 아리랑, <세계무형문화재 지정 이후의 현황과 과제예술문화비평>, 예술문화비평 10호(한국예술문화 비평가협회, 2013 가을호) 참조. 50) 조선일보 ) 공감하다 고 하면 현재의 상태에 동정하고 공감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과거의 현재 상태에 대한 공감인데 이는 곧 기억의 공감이다. 그래서 기억은 교류가 가능하다. 52) 담 넘어 갈 적에 큰 맘을 먹고 문고리 잡구보니 발발 떠네 -정선, 춘천, 예천아리랑 중에서. 53) 알라이다 아스만, 앞의 책, 18쪽

82 문화기억과 기억융합으로서의 아리랑 새삼 재론할 필요가 없다. 아리랑은 배재학당 애국가(1896년)와 대한제국 애국가(1902년)가 불리던 시절부터 제2의 애국가 역할을 해왔다. 기방에서 통속민요로 불리던 아리랑은 동포가(1906년), 독립 군가(1910년)를 대신하여 힘차게 불려졌다.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고 하는 <압록강행진곡> (한형석 작)에서도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듯 백두산 넘어가자고 한다. 이처럼 예술로서의 아리랑은 노 동이자 유행가며 애국가이자 독립가, 창가로서 개화를 노래했다. 이제 다시 예술로서의 아리랑을 생각해야 한다. 문예학의 문화학을 통한 문화가치를 창출해야 한 다. 아리랑의 역사성, 진실성은 역사학자와 민요학자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문예학자는 아리랑의 예술성, 가치성을 더욱 살펴야 한다. 그리고 정치인, 문화기업가의 역할은 아리랑의 정치성, 현실성, 상업성, 미래성을 따져야 한다. 문화는 관계이며 소통이며 또한 소통의 도구이다. 일상과 예술, 예술과 예술, 예술과 기술의 관 계로서의 융합을 위해서는 아리랑이 소통이자 소통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아리랑은 원래 일상으 로서의 소리예술, 민요였다. 일상에서 예술을 분리할 수 없듯이 일상에서 아리랑을 분리할 수 없다. 그런데 일상성이 극대화되면 진부해진다. 싫증나고 무관심해지고 쇠퇴하다보니 희귀성을 띠고 오 히려 예술성을 획득하여 비대중적 고급 예술문화가 되어 보존된다. 따라서 융합은 일상으로의 복 귀를 전제할 필요가 있다. 일상으로서의 아리랑은 개인기억과 집단기억이 활성화될 때 가능하다. 그러나 과거 기억으로 되돌아가는 복귀는 불가능하며 의미도 없다. 새로운 장르로서 다만 그 본질 에 복귀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랑의 본질은 대중가요이며 대중문화이다. 그리고 아래 문장에 주 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의 예술과 기술의 융합 현상에서 한 가지 더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예술이 다시 인간이 일정 부분 원시 혹은 고대 예술의 속성으로 회귀하는 듯한 양상을 보인다는 점이다. 원시 예술의 가치는 종교적 가치, 즉 제의적 가치에 있다. 이때의 제의란 인간 자신의 안전과 번영, 그리고 풍요 따위에 대한 간절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54) 개인주의와 기술주의, 물질주의가 만연할수록 문화는 원시의 본질로 복귀하고자 한다. 간단하고 단순하며 종합예술로서 즐기고 풍요와 다산을 추구하면 그만이다. 너무 화려한 아리랑은 아울리지 않는다. 모두의 문제와 희망과 기원이 노래를 통해 치유되어야 한다. 아리랑 가락과 노랫말 속에 있는 동아시아적 인문사고(사상, 종교, 학문, 예술)를 통한 야만과 폭력으로부터의 탈출, 상실의 치 유를 담당할 때 아리랑은 공감하는 예술로, 그리고 세계인의 집단기억의 표상이 될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리랑을 포함한 민요는 삶에 더 밀착되어 삶의 가치를 고양함으로써 감동을 주는 가치를 지녀야 한다. 또 세상을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실용적 가치와 인생을 올바르 게 알 수 있도록 하는 교육적 가치도 지녀야 한다. 문제는 이것을 누가 할 것인가 하는 것인데, 주체 54) 장정인, 복원과 혁신의 시도로서의 예술과 기술의 융복합, 예술문화비평 (한국예술가문화비평가협회, 2013 봄호), 32쪽. 는 늘 자신에서 출발하여 타인에게 이르러야 한다. 자신이 직접 체험함으로써 기억을 강화하고 기억 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의 행동은 교육에서 문화경험으로 이어져야 한다. 민속을 포함한 민요, 아리랑의 문화융합을 통한 실용화는 우선 무엇을 위해서?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순서이다. 예술이 정치나 경제의 시녀 역할을 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다만 창조 경제를 위해 아리랑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아리랑의 융합문화화이다. 그리고 기술과학문화와의 융합에서 출발하는 것이 실용적이다. 레이저 빔이나 홀로그램 등과 같은 매체는 미래 영화관을 밤하 늘로 옮겨놓을 것이다. 예술은 그 가운데 지속적인 스토리와 아름다음을 제공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억의 융합은 곧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의 정치화, 상상력을 동원한 예술의 문화콘텐츠화의 입장에서는 역사적 사실(실제의 사실)보다는 서사적 사실(기억된 사실)을 더 중요시 할 수도 있다. 이 때 역사의 허구화, 만들어진 전통이 발생한다. 그래서 민속의 실용성의 측면에서는 서사적 사실, 개인기억으로 접근하는 것이 유 리하고 민속학은 역사적 사실로 접근해야 진리 추구가 이루어진다. 4. 결론 지금까지 기억문화학과 기억융합을 통한 아리랑의 문화창출 방안을 살펴보았다. 우선 개인기억으 로서의 아리랑의 기능과 본질을 살펴보았고 아리랑이 개인문화로 먼저 기억될 필요가 있음을 말하 였다. 또한 아리랑은 개인기억이 집단기억으로 변화한 경우도 있고 처음부터 집단기억화된 경우도 있으며, 현재에 와서 인위적으로 집단기억화하는 경우도 있다. 혹은 잊혀진 집단기억을 재구해낸 집 단기억도 있음을 살펴보았다. 또 상실의 아리랑 이 영화 아리랑과 광복군 아리랑을 거치면서 저항 과 극복의 아리랑 이 되고, 지금은 문화로서의 아리랑 으로 개인기억이 집단기억화 되어 가는 과정 도 살펴보았다. 여기에는 매체의 변화나 공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파악된다. 반면에 장르간의 접 촉이나 간섭현상에 의해, 그리고 집단체험 속에서 장르의 틀이 깨어지면서 집단기억의 개인기억화 가 발생하기도 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융합으로서의 아리랑문화 창조를 위해서 기억융합이 필요하다고 보고, 그 전제조건으로 기능기억 화, 개인기억화, 기억층위화, 기억동기나 매개의 강화, 선택적 지식화 현상의 경계, 소비자의 소비양 식 파악 등을 제시하였다. 기억융합을 위해서는 습관적 기억화(과거의 현재화)와 기억의 심상화(과 거의 미래화)가 필요한데 기억하기단계 - 기억만들기단계 - 기억융합단계 로 나뉘어진다. 그래서 각 단계별로 필요한 문화융합방안을 살펴보았다. 대표적으로 기억하기단계 에서는 박물관건립 혹은 기 록화 사업을 사례로 살펴보았고, 기억만들기단계 에서는 아리랑축제나 경연대회를, 기억융합단계 에서는 예술융합을 대표적으로 살펴보았다. 아리랑은 형식이나 내용, 장르나 담당층, 시대나 공간의 측면에서 융합의 속성을 이미 지니고 있 다. 두 줄 형식의 열린 구조, 단순상징이 갖는 복잡한 의미 55), 후렴구가 주는 신명과 반복으로서의

83 문화기억과 기억융합으로서의 아리랑 기억의 용이성, 일, 유희, 의례, 그리고 표출, 저항, 금기, 제한 등의 다기능은 이미 아리랑이 지닌 융합의 속성을 확인시켜 준다. 1940년대에 이미 형성된 아리랑문화는 시, 자서전, 영화, 연극, 대중 가요, 일상생활에서의 아리랑 상품명 등으로 그 융합성이 실현되었다. 어쩌면 현재는 100년 전 아리 랑의 융합문화를 반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매체가 다를 뿐이다. 아리랑은 이제 다시 불려지기 시작하였다. 전 국민을 포함한 해외동포, 그리고 글로벌 공동체 구 성원으로서의 전 세계인이 보존하고 즐기고 전승해야 할 소리가 되었다. 그런 만큼 아리랑은 다시 조사되고 연구되어야 한다. 그리고 아리랑을 사모하는 모임이 자발적으로 생기고 그들이 프로슈머 가 되어 새로운 아리랑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관( 官 )이 주도하는 아리랑문화는 지속성을 보장할 수 없다. 다만 공정하게 예산을 확보하고 지원하면 될 일이다. 또한 지자체마다 자기 아리랑을 내세 우면 아리랑은 화합하지 못한다. 아리랑이 가진 결속의 기능을 우리 스스로 아리랑을 통해 잃게 된 다. 아리랑이 세계의 평화를 노래하고 약한 자를 위무하며 신나는 세상을 여는 응원가가 되어야 한 다. 그리고 아리랑을 통한 다양한 문화콘텐츠가 개발되고 그것이 우리 몸과 마음과 늘 함께 할 때 아리랑은 제 원형을 유지하면서, 또 변신하면서 지속적으로 울려 펴질 것이다. 냄비 근성으로 아리 랑을 접할 일이 아니다. 민요사회도 변화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잘 알듯이, 무형문화재보존 법칙이 아직은 원형보존 원칙 에 있기 때문에 보존회 차원에서는 전승되는 지역 민요를 바꿀 수가 없다. 그래서 원형을 두고 조금 씩 변화를 주면서 공연에 임하는 경우도 있는데 현실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다. 향토민요가 아리 랑처럼 하나의 브랜드를 가진 민요문화가 되려면 아리랑이 걸어온 자취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즉, 지역사회에서 간직한 집단기억으로서의 민요문화를 개발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지역에서부터 그 민요문화를 개인기억화하는 일을 우선해야 한다. 참고문헌 강등학, 형성기 대중가요의 전개와 아리랑의 존재양상, 한국음악사학보 32집, 한국음악사학회, 강등학, 아리랑의 존재양상과 국면의 이해, 민속원, 김태준 김연갑 김한순, 한국의 아리랑문화, 박이정, 권오경, 아리랑, 세계무형문화재 지정 이후의 현황과 과제예술문화비평, 예술문화비평, 10호, 한국예술문화비평가협회, 2013, 가을호. 김기란, 집단기억의 무대화와 수행적 과정의 작동 메커니즘, 드라마연구, 한국드라마학회, No.30, 김기현, 아리랑 요의 형성 시기, 어문론총 34, 경북어문학회, 김기현, 아리랑 노래의 형성과 전개, 퇴계학과 한국문화 35집, 경북대학교 퇴계학연구소, ) 유리 로트만, 김수환 역, 기호계 (문학과 지성사, 2008), 304쪽. 단순한 상징은 매우 복잡하고 다층적인 내용, 그러니까 맥락 에 따라 의미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는 반면 복잡한 상징은 항시적이고 단층적인 의미론을 갖게 마련이다. 결국, 터너 의 말에 따르면 단순한 상징이 복잡한 상징에 비하여 훨씬 더 큰 의미론적 용량을 지니는 것이다. 김기현, <문경새재소리아리랑>의 아리랑 사적 위상, 한국민요학 29집, 한국민요학회, 김성호, 융합예술의 개념, 예술문화비평, 7호, 2012 겨울호. 김승희, 아리랑의 정신분석-상실에 맞서는 애도, 우울증, 열락(jouissance)의 언어, 비교한국학, Vol.20 No.2, 김시업 외, 근대의 노래와 아리랑, 소명, 김형기, 연극비평에 관한 연극학적 고찰, 동시대 연극비평의 방법론과 실제, 연극과 인간, 류종목, 현장에서 조사한 구비전승민요-사천시편-, 민속원, 문경문화원, 시민을 위한 문경새재아리랑, 문경시, 문경의 민요와 아리랑을 찾아서, 문화재청, 아리랑 종합 전승실태 조사보고서,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2008 아리랑 현황조사보고서, 박계홍, 한국민속학개론, 형설출판사, 박슬기, 민족의 노래로서의 아리랑, 발명과 수행-아리랑과 조선 민요 담론-, 비교한국학 Vol.20 No.3, 2012, 국제비교한국 학회, 박정경, 대중가요의 상징성 획득 과정 비교 연구-한국의 아리랑과 아프리카의 말라이카, 비교한국학 Vol.20 No.2, 국제비교 한국학회, 2012, 소광희, 시간의 철학적 성찰, 문예출판사, 송효섭, 아리랑의 기호학, 비교한국학, Vol.20 No.3, 국제비교한국학회, 2012, 유대안, 영남지역 아리랑의 음악양상, 아리랑의 세계화-영남아리랑의 재발견, (사)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 한중아리랑심포지엄 자료집, 이병준, 문화적 기억과 문화교육, 문화예술교육연구 3권 1호, 이보형, 아리랑 소리의 근원과 변천에 관한 음악적 연구, 한국민요학 5집, 한국민요학회, 이용식, 만들어진 전통: 일제 강점기 기간 아리랑의 근대화, 민족화, 유행화 과정, 동양음악 27집, 서울대학교 동양음악연구소, 이창식, 태백문화권과 문경새재아리랑의 가치, 어문논총 57호, 한국문학언어학회, 장정인, 복원과 혁신의 시도로서의 예술과 기술의 융복합, 예술문화비평, 한국예술가문화비평가협회, 2013 봄호, 정우택, 아리랑 노래의 정전화 과정 연구, 대동문화연구 57집,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조정현, 문경지역 민요전승의 기반과 아리랑의 재발견, 구비문학연구 36집, 한국구비문학회, 조희웅 외, 영남구전민요자료집, 월인, 진용선, 러시아 고려인 아리랑 연구, 정선아리랑문화재단, 진용선, 정선아리랑 소리꾼의 삶과 아리랑, 정선군, 최민자, 통섭의 기술, 모시는사람들, 최은숙, <문경새재아리랑>에 대한 연구 성과 및 과제, 문경새재아리랑 학술심포지엄 발표자료집, 최은숙, 아리랑의 지역 찾기에 대한 비판적 논의-경상도 아리랑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예술문화비평 8호, 한국예술문화비 평가협회, 최문규 외, 기억과 망각, 책세상, 편해문, <문경새재아리랑>의 뿌리를 찾아서, 문경의 민요와 아리랑을 찾아서, 문경시, 허영식, 다문화사회와 간문화성, 강현출판사, 알라이다 아스만, 변학수 채연수 역, 기억의 공간, 그린비, 에드워드 홀(Hall), 최효선 역, 침묵의 언어, 한길사, 에드워드 홀, 최효선 역, 문화를 넘어서, 한길사, 유리 로트만, 김수환 역, 기호계, 문학과 지성사, 제프리 K. 올릭, 강경이 역, 기억의 지도, 옥당, 하르트무트 뵈메 외, 손동현 이상엽 역, 문화학이란 무엇인가, 성균관대출판사, Hobsbawm, Eric, and Terence Ranger, eds. The Invention of Tradition, N.Y.: Cambridge Uni. Press,

84 문화기억과 기억융합으로서의 아리랑 문화기억과 기억융합으로서의 아리랑 에 대한 토론문 최은숙 한서대 본 논문은 문화기억이론을 적용하여 아리랑의 정체성을 밝히고 기억융합 및 문화융합의 관점에서 아리랑 문화 창달을 위한 방법론적 가능성을 진단하고 있다. 아리랑의 정체성을 학술적으로 탐색하 고 그에 입각하여 문화론적 차원에서 그 전승과 계승에 대해 논의하였다는 점에서 논문의 의의가 크다. 몇 가지 질의를 통해 연구자의 논의를 확인하고 이를 통해 논의가 심화되기를 기대한다. 4. 아리랑의 현대화 미래화 방안을 문화융합의 측면에서 단계적으로 분석하고 실재적인 예를 들 어 설명하였다. 그런데 기억융합하기 단계에서 논의된 내용들은 좀 이해가 어렵고 추상적이다. 연구 자는 여기서 동아시아적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공감의 실천문화로서의 아리랑, 예술로서의 아리랑 -특히 삶의 예술로서의 아리랑, 실용으로서의 아리랑 을 이야기하고 있다. 바람직한 방향성이며 타 당한 지적이다. 최근 들어 현장에서 아리랑의 현재화 예술화 그리고 실용화 또한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데, 이들 중 연구자가 제시한 방향성을 실재적으로 구현한 예가 있는지 제시해 주면 논의를 이 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1. 이 논문에서 중요하게 사용된 용어 및 방법론에 관한 질문이다. 문화융합 이라는 용어인데, 이 것은 통섭, 교섭, 혼합/혼종 등의 기존 용어와는 다른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지. 이들 용어들과 어떤 차별성이 있는가? 그리고 아리랑의 정체성과 미래로의 방향성을 논의하는데 문화기억 과 문 화융합 이론을 적용함으로써 얻게 되는 기존 논의와의 차별성과 유효성에 대해 좀더 명확히 확인하 고 싶다. 2. 연구자는 아리랑의 정체성(본질)에 접근하는 기준으로 기억 의 변주를 활용하였다. 그런데 그 변주는 개인 과 집단 이라는 하나의 대립항에 초점을 두어 논의하였다. 상대적이며 상보적인 대립 항을 설정함으로써, 아리랑의 본질에 대한 체계적 분석과 검증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개 인과 집단이라는 코드가 때로는 기억의 주체의 측면에서(누가 기억하는가), 때로는 기억의 내용 측 면에서(무엇을 기억하는가, 개인서정인가 집단감정인가)논의되어 있어 혼동스러운 면이 있다. 예를 들어 문경새재아리랑이 모심는소리로 들어오는 경우 그것은 어느 한 개인에 의한 것이기에 개인기 억화라고 할 수 있지만 또 그 후렴구를 차용한다는 점에서는 그 성격상 새로운 집단기억화하고 볼 수 있지 않을지. 또 이렇게 본다면, 아리랑의 (정체성)본질은 연구자의 논의처럼 몇 가지로 나누어진다기보다는 끊임없는 개인기억과 집단기억의 지속적인 넘나듦 그 자체에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3. 연구자는 아리랑의 개인기억화를 중요한 지향점 중 하나로 보고 있다. 아리랑의 개인기억화에 대해 좀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현재 이러한 시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예가 있는지 소개해 주면 그 실상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85 남도의 민속사회를 통해서 본 실용과 허영의 현상적 파노라마 문화기억과 기억융합으로서의 아리랑 에 대한 토론문 오진호 부산대 2013 한국민속학자대회 남도의 민속사회를 통해서 본 실용과 허영의 현상적 파노라마 -한옥으로 조성되는 전남지역의 행복마을 을 중심으로- 이 글은 문화기억이론을 적용하여 아리랑의 전개와 성과를 파악하고, 기억에 의한 문화융합이라 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현재와 미래의 아리랑문화의 창달을 위한 방법론적 가능성을 살펴본 것이 다. 전체적인 글의 취지와 논의의 방향에 대한 공감하는 바이다. 이글의 가장 큰 목적은 아리랑의 문화창출 방안 일 것이다. 여기에 이르는 이론적 방법이 문화기억과 기억융합이라고 읽혀진다. 아리랑의 문화창출 방안의 핵심이 예술로서의 아리랑 이라는 점, 그리고 기본적으로 아리랑의 본 질은 대중가요이며, 노래로서 공감 하는 예술로 가는 방향도 설득력이 있다. 물론 아리랑과 관련된 콘텐츠는 수없이 많으며, 아리랑이 이미 노래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콘텐츠임에도 분명하지만 그 나경수 남도민속학회 목차 1. 민속사회의 외관 현상 2. 전남 행복마을 조성사업 3. 행복마을 의 허와 실 4. 체용론적 반성과 지향 것은 본질은 노래라는 점이다. 여기서 대중음악으로서의 아리랑 이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가 좀 더 분석되었으면 좋겠다. 필자도 언급했지만 대중가요로서 아리랑은 1926년 나운규의 영화 아리 랑부터 시작하여 2002년 월드컵 기간에 윤도현의 응원가 아리랑까지 수많은 아리랑이 불려졌다. 그 리고 토론자의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 것은 2002년 월드컵 기간때의 응원가 아리랑 이다. 2002년 월드컵은 고대의 나라굿인 동맹, 무천과 같이 전국민이 즐기는 축제였고, 응원가 아리랑은 전국민이 하나 되게 만들어 주었던 같다. 대중음악을 논하면서 매스미디어나 컨텍스트도 영향을 제외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논문에서는 이 부분이 너무 긍정적으로 생략된 감이 있다. 1. 민속사회의 외관 현상 종교는 사회의 중요한 문화적 근간이다. 민간신앙만 아니라, 기독교나 불교 역시 사회문화적 민속 의 중요한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주변 국가의 종교문화적 외관현상에 대해서 사회민속학적 측면 에서 감지되는 하나의 피상적 판단의 근거를 종교건축물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아리랑과 창조경제를 연결시키는 건 지금 정부에서 창조경제 1) 를 강조하기 때문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공산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중국은 종교에 대한 외관적 모습이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가까운 일본 이나 대만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일본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신사( 神 社 ), 대만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도관( 道 觀 )은 규모면에서도 대단한 것들이 많다. 건축물의 수와 규모가 사회적 중요도에 비례한다는 가설에서 출발한다. 자신들의 고유종교라 할 수 있는 신도와 도교가 일본과 대만에서 중시되는 것은 그와 관련된 종교건축물들에서 쉽게 간파 된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건축물을 찾는 일반인들이 많고, 또 거기에서 전승되는 각종 제례 1) 영국의 경영전략가인 존 호킨스(John Howkins)가 2001년 펴낸 책 <The Creative Economy>에서 처음 사용한 말로, 그는 창조경제란 새로운 아이디어, 즉 창의력으로 제조업과 서비스업, 유통업, 엔터테인먼트산업 등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 이라 고 정의했다. 2013년 2월 25일 공식 출범한 박근혜 정부가 최우선 국정운영 전략으로 창조경제를 강조하면서, 이 용어가 큰 주목을 받았다. 역시 활성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굳이 거론할 필요는 없겠다. 그야말로 생활종교로서 살아 있는 것 이다. 수량과 규모에서 일본의 신사나 대만의 도관에 비교될 수 있는 우리의 종교건축물은 무엇일까?

86 남도의 민속사회를 통해서 본 실용과 허영의 현상적 파노라마 건축물이 우람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재래종 교 건축물이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는 현상과 연계될 수 있는 또 다른 사회문화적 현상도 목도된다. 우리 주변에는 서양의 궁전이나 신전의 모 습을 닮은 건축물들이 있다. 외형의 유사성에 대만 진란궁 지하에 보관 중인 제물 평일 일본 신사의 참배객들 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런 건물들이 사용되는 용도를 보면 일률적이지는 않다. 일반적으로 인왕산 국사당 ( ) 이러한 외형을 가진 건축물들은 주로 유치원 첫째, 민족고유의 종교적 전통성을 준거로 비교하자면, 이웃나라의 신사나 도원에 비견할 수 있는 우리 종교건축물은 당집이나 굿당일 것이다. 둘째, 수나 규모를 준거로 비교하자면, 이웃나라의 신사나 도원에 비견되는 우리의 종교건축물은 교회나 사찰이다. 종교건축물이라는 점만 기준으로 하고 보자면, 우리나라의 교회나 사찰이 오히려 신사나 도관을 압도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어린이집 포함), 모텔, 예식장 등으로 쓰인다. 건물의 형태와 기능이 일치하는 것이 일반적 건축문법인데, 일반 문법을 벗어난 외관현상이 엄연히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다. 이들이 형태와 기능의 일치라는 소박한 체용론적 일반성을 벗어나있는 까닭은 일반성이라는 것으로 측정할 수 없는 그 뭔가의 일탈된 성격의 공유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의견이 분분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 분명한 일탈적 성격은 꿈이 있는 곳 이 아닐까 한다. 꿈은 이상적일 수도 있고, 허망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허망한 것을 좇으려 건축주들이 막대한 투자를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꿈의 추구를 위해 투자한 것이 분명하다. 꿈이 사람들이 추구하고 소망 하는 바로 그 이상( 理 想 )이라면, 그리고 그 이상의 형상화가 서양의 신전이나 궁전의 모습이라면, 우리의 현재형 건축민속은 멀리서 모범을 구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의 사회현상으로서 이러한 외관 민속이 보여주는 참 모습이 과연 실용일까 허영일까 묻지 않을 수 없다. 2. 전남 행복마을 조성사업 전라남도에서는 2007년부터 역점사업의 하나로 행복마을 조성사업을 해오고 있다. 매년 증가추세 서울 진관사 ( ) 밤섬부군당 ( ) 에 있으며, 2013년 현재 135개 마을이 선정, 조성 중에 있다. 전라남도의 행복마을 정의는 다음과 같다. 개화기를 훨씬 지나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섰다고 하는 한국, 일본, 대만의 종교건축물이 이렇듯 두 가지의 비교 준거를 가져야 하는 것은 결국 우리나라의 예외적 현상 때문에 말미암은 것이다. 재래종교의 건축물인 굿당이나 당집이 형편없이 초라한 것에 반해서, 외래종교인 불교의 사찰이나 기독교의 교회건물은 대단하다. 비교를 위해서는 비교되는 대상이 등가적이여야 하는데, 등가적이 지 못한 현실적 상황이 너무나 또렷하다. 더구나 역사적으로 보자면, 일제강점기 때 신사에 밀려 남산에서 쫓겨나 겨우 인왕산에 터를 잡고 있는 국사당을 본래의 자리인 남산으로 이건하자는 논의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외래종교의 낙후되어 있는 농어촌마을을 사람이 살고 싶은 마을을 만들어 현 주민들과 후손들이 정착하고, 도시민들이 돌아오는 마을로 조성

87 남도의 민속사회를 통해서 본 실용과 허영의 현상적 파노라마 전라남도 행복마을 조성사업 추진현황( 현재 135개 마을) 1) 신규마을 조성형 : 17개 시군, 26개 마을 (착수 10, 미착수 16) 기존마을 정비형 : 21개 시군, 109개 마을, 1,566동(완공 924, 추진중 642) 시 군 지정 마 을 명 확정동수 완공 추진중 계 109개 마을 1, 소라 상관 여수시 10 돌산 봉림 (58동) 12 화양 안정 소라 오룡 대대 대대 안풍 안풍 교량 교량 낙안 금산 순천시 09 낙안 이곡 (157동) 09 해룡 와온 낙안 내동 승주 괴목 월등 외동 낙안 동내 다시 보광 나주시 13 다시 복암 (40동) 13 다도 도래 광양시 12 옥룡 양산 (25동) 13 옥룡 진틀 대덕 무월 수북 황덕 수북 나산 담양군 11 봉산 방축 (106동) 11 월산 달뫼 대덕 운수대통 대덕 시목 고서 교촌 곡성군 09 옥과 금의 (40동) 10 오곡 창동 구례군 08 마산 상사 (42동) 08 토지 오미 금산 명천 대서 신기 고흥군 11 도양 용정 (105동) 12 동강 마동 대서 개명 학산 영흥 영암군 10 군서 모정 (81동) 12 군서 월암 몽탄 약실 일로 복룡 현경 석북 운남 학례 무안군 09 청계 월선 (156동) 09 해제 창산 일로 신정 삼향 맥포 해제 송계 함평군 08 해보 상모 (30동) 08 해보 오두 법성 법성포 영광군 10 군남 반딧불 (110동) 11 법성 발막 묘량 효동 시 군 지정 마 을 명 확정동수 완공 추진중 12 고흥 신장전 고흥군 12 두원 운동 (105동) 13 두원 운곡 용정 장기 조성 삼정 미력 춘정 보성군 09 웅치 대은 (74동) 11 복내 원봉 보성 삼산 벌교 내추 남면 남계 이서 야사 화순군 10 도곡 모산 (79동) 10 이서 산사 도암 도장 도곡 죽청 장평 우산 유치 신덕 용산 어서 장흥군 09 장평 병동 (108동) 10 유치 봉덕 관산 옥촌 장동 산동 도암 귤동 군동 안풍 강진군 10 도암 덕룡산 (73동) 12 칠량 동백골 신전 사초 삼산 매정 황산 기성 북평 김치 해남군 11 계곡 태인 (116동) 11 산이 대진 현산 덕흥 화산 하마 영암군 08 군서 동계 (81동) 09 신북 산정 영광 월평 군남 육창 영광군 12 염산 한시 묘량 운암 남면 자풍 장성군 10 서삼 한실 (47동) 10 서삼 괴정 북하 원동 군외 남선 완도군 11 청산 도락 (34동) 12 군외 초평 조도 신전 진도군 11 조도 돌목 (35동) 13 진도 청용 증도 우전 신안군 10 비금 우산 (50동) 11 임자 진리 압해 신촌 착수 마을 : 10개 마을 242동 (완공 96, 추진중 146) 시군 지정연도 마 을 명 확정동수 완공 추진중 비 고 계 10개 마을 순천시 (26동) 13 별량 화포 다시 신광 나주시 (54동) 11 노안 금안 담양군 (11동) 11 창평 유천 장흥군 (22동) 13 안양 수문 강진군 (23동) 10 성전 월남 영암군 (23동) 13 삼호 산호 장성군 (11동) 12 장성 황룡 진도군 (21동) 12 진도 남동 신안군 (31동) 13 증도 방축 미착수(예비) 마을 : 16개 마을 (441동 신축 예정) - 순천 상사 마륜 (21), 광양 옥곡 묵백 (22), 광양 봉강 도솔 (30), 광양 옥룡 왕금 (25), 곡성 옥과 금의 (14), 구례 토지 단풍 (22), 구례 계산 (30), 보성 회천 영천 (22), 화순 동면 대포 (20), 장흥 안양 기산 (32), 영암 삼호 난전 (50), 영암 삼호 저두 (30), 무안 삼향 예뜨랑 (20), 함평 해보 금덕 (22), 함평 주포 (50), 완도 약산 (31)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추진 방향을 정해놓고 있다. -주거환경 정비로 정주여건을 개선하고, 주민 소득증대에 역점을 두고 추진함 한옥만으로 주택을 개량하고, 마을 상 하수도 및 회관, 진입로, 안길, 주차장 등을 확보. 주민 소득증대는 마을의 특화작물(약초, 녹차, 연꽃, 딸기, 야생화 등)을 소득화 -도시민을 유치하여 민박과 체험을 실시하면서 지역특산품을 판매하는 전략(1사1촌/1도시1농촌 자매결연 등) 2013년 9월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충청권 인구가 5,263,233명, 전라권이 5,250,329명이다. 광복 당시만 해도 충청권과 전라권의 인구는 170만명 이상의 차이가 났다. 압도적으로 전라도 인구가 많 았다. 현재는 13,000여명 정도의 차이로 충청권 인구가 전라권 인구에 비해서 많지만, 이러한 차이 는 앞으로 좀 더 벌어진 전망이다. 이러한 인구비에 대해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정치권이다. 2) 현재 국회의원 의석수가 충청권은 25명, 전라권은 30명이다. 인구비례로 국회의원 의석을 정하는 지금의 제도로 보자면 당연히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 상황이다. 1) ) 2) 동아일보 일자 기사(

88 남도의 민속사회를 통해서 본 실용과 허영의 현상적 파노라마 17세기에 전라도는 전체 국가 세곡의 절반 가까이를 부담했다. 3) 농업사회에서는 농산물이 가장 부가가치가 높기 때문에 농토가 넓은 지역이 가장 잘 사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세곡부담도 그만 큼 많을 수밖에 없었다. 농자천하지대본 의 시대는 항구적이지 않았다. 뒤이어 공장천하지대본 의 시대가 되면서 농자( 農 者 ) 가 빈자( 貧 者 ) 의 대표단수로 되었다. 농촌인구의 감소추세는 전남만의 현상은 아니다. 통계로 보자면 이미 1965년부터 우리나라의 농촌인구는 감소하기 시작했다. 아래 그림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지난 30년간의 농가비중과 농민의 감소 추세는 여실하다. 림축산식품부), 산촌생태마을조성사업(농식품부), 전원마을조성사업(농림축산식품부), 농촌체험마을 조성사업(농림축산식품부) 등이며, 전라남도 행복마을 사업비 총액은 대강 아래와 같이 추계된다. 5) 구 분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도비 151억 134억 122억 148억 사업비 시군비 151억 134억 122억 148억 융자금 35억 79억 55억 62억 도청 내에 행복마을과를 두고, 21명의 직원이 상근을 하고 있으며, 업무지원을 위해 (사)행복마을 협의회를 운영 중에 있다. 마을을 단위로 했을 때 행복마을의 유형은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기존의 마을을 대상으로 하며, 한옥으로의 신 개축을 지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옥(기와집)으로만 된 마을을 새로 만 드는 것이다. 10여채 이상의 신청만 있으면 새로 마을 하나를 만들어준다. 2013년 기준으로 기존 마을 정비형이 109개 마을, 신규 마을 조성형이 26개 마을이다. 현재 135개의 마을이 정비 또는 조 성 중에 있으며, 서업비를 기다리고 있는 곳도 많다. 앞으로 이러한 행복마을사업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른다. 왜냐하면 현 도지사의 역점사업이기 때문이다. 내년이면 새로운 도지사가 부임하게 된다. 이러한 인구변동에 있어서 가장 크게 사회적 영향을 받은 곳은 역시 농업생산성이 높았던 지역일 것이다. 따라서 전남은 결과적으로 다른 지역 이상의 낙후도를 보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중앙정치권에서 국회의원 의석수를 문제삼을 정도로 전라지역의 정주인구가 감소해오고 있는 추 세에서, 전라남도 지방정부는 자구책의 일환으로 행복마을 이라는 정책적 대안을 들고 나왔다. 이 전남지역 행복마을의 두드러진 외관현상은 한옥마을이다. 행복마을은 전문가들로 구성된 행복마을 선정위원회에서 선정하지만, 전라남도한옥위원회가 선정된 행복마을 중에서 마을정비계획과 한옥 신축설계도 등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심사해 최종 확정한다. 4) 여기서 말하는 한옥이란 기와집을 가 리킨다. 행복마을의 연간 사업비는 도비와 시군비가 5:5로 책정된다. 사업항목은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농 3) 17세기의 지역별 조운 세곡을 보면 아래와 같다. ( 인조실록 41권, 인조 18년 12월 정미) 도별 세액 쌀 콩류 계 석 비율(%) 석 비율(%) 석 비율(%) 경기도 2, , , 강원도 충청도 12, , , 전라도 28, , , 경상도 9, , , 계 53, , , ) 3. 행복마을 의 허와 실 1) 초가집이 아닌 기와집 기와집과 초가집의 대립은 시간을 돌려보면 훨씬 예리해진다. 마치 쌀밥과 보리밥처럼 과거 시간 대에서 그 대립은 빈부의 외형적 표식으로 분명했다. 마을에서도 기와집은 가장 위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상하의 사회적 위계가 집의 위치에서도 차이로 나타났던 것이다. 기와집에 대한 수식어로 가장 흔한 것은 고래등 같은 이다. 크고 우람하다는 뜻일게다. 뿐만 아니라 그 지붕아래 사는 사람 들은 고래만큼 힘이 세다는 뜻도 함의되어 있을 것이다. 신체적인 힘이 아니라 사회적인 힘이다. 기와집은 궁궐, 관청, 향교, 서원, 사찰 등 권력이나 권위와 함께 했기 때문이다. 순천의 낙안읍성과 안동의 하회마을은 좋은 대조를 보인다. 두 민속마을 중 하나는 새우등 같은 초가집이 즐비하고, 다른 하나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즐비하다. 물론 이 둘의 외형적 차이를 가지 5) 전남도청 업무담당자와 전화통화로 받은 자료

89 남도의 민속사회를 통해서 본 실용과 허영의 현상적 파노라마 고 낙안과 하회, 또는 전라와 경상을 대비하여 보려는 것은 옳지 않다. 기와집을 짓고 살만한 사람들 이, 관리들이 시도 때도 없이 성가시게 굴 읍성 안에 집을 짓고 살았을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본래 읍성 안에는 관청을 제외하고는 일을 보는 하급 관리나 또는 노비들이 거주했기 때문에 관청건물이 아닌 다음에는 낙안읍성처럼 초가가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민가건축으로서 기와집은 오히려 힘의 중심에서 멀었다. 전남의 행복마을은 기와집을 필수로 한다. 먼 과거에 기와집에서 사는 사람은 초가집에서 사는 사람과는 그 자체만으로도 신분이 달랐다. 기와집은 초가집보다 크기만 큰 것이 아니다. 기와의 하 중을 견디기 위해서는 목재가 그만큼 튼튼해야 한다. 건축비용을 비교했을 때, 기와집을 짓는 것은 부자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초가집에 사는 사람은 늘 기와집에 사는 사람을 부러워했을 법하다. 부러움을 사는 것이 행복이라면 기와집은 행복의 농도와도 비례할 수 있었다. 굳이 전남의 행복마을이 기와집을 필수로 하고 있는 까닭이 과거에 기와집에서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도 하고, 또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던 데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무덤 역시 마찬가지로 집이다. 벼락부자가 되면 큰 집을 지을 뿐만 아니라, 선산도 화려하게 조성하는 심리와도 상통할 수 있다. 기와집에 사는 사람들은 선산을 비석, 상석, 문인석 등 석물로 장식하는 것이 상례였기 때 문이다. 견고하게 지어진 기와집은 대물림을 하면서 여러 대에 걸쳐 산다. 석물을 많이 써서 조성된 선산은 명당일 뿐만 아니라, 기와집이 그런 것처럼 무덤들이 즐비하게 여러 대에 걸쳐 있다. 중요민 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는 가옥만 하더라도 대부분은 기와집들이다. 한편으로는 내구성도 강한 때문 이다. 마을 대부분이 초가집이었던 과거의 시간대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기와집은 행복의 외관적 징표 였으며, 그런 시대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은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던 지붕 개량사업일 것이다. 행복마을사업은 또 다른 의미의 새마을사업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지도 모른 다. 행복마을의 기와집은 주거용도 있지만, 민박이나 펜션의 용도로도 쓰인다. 살림집으로 사용하는 사람도, 하룻밤 묵어가는 사람도 과거의 쓰라린 가난을 상기시는 초가집보다는 기와집에 매력을 느 낄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시간대가 아닌 현재의 시점에서 초가집과 기와집은 초기투자비가 컸던 건축비와는 달리 유지비용에 있어서 큰 차이가 난다. 내구연한이 긴 기와집은 한번 얹어놓으면 오래 간다. 그러 나 초가집은 1년에 한번씩 새로 이엉을 이지 않으면 안된다. 예전같이 질좋은 짚을 구하기도 어렵다 는 말을 듣는다. 이엉을 엮을 사람도 얻기 힘들고, 더구나 지붕에 올라가 새로 이엉을 이을만한 기술 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찾기가 쉽지 않다. 장기적으로 보자면 초가집의 유지비용이 기와집의 그것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높은 것이다. 낙안읍성이나 보성 강골마을의 초가집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왜냐하면 시와 군에서 각 각 이엉을 이을 비용을 전액 부담해주기 때문이다. 본인에게 노동력이 있다면 인건비를 벌 수 있는 기회도 된다. 본인의 집 초가를 이으면서 돈도 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보장은 극히 제한적 이다. 문화재라는 이름을 얻어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새로 초가집을 지을 경우는 매년 어려움 은 물론 상당한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현실이다. 마치 잡곡밥을 먹는 것이 쌀밥을 먹는 것보다 돈이 더 많이 드는 것과 같이, 시간이 상황을 역전시켜 놓았다. 2) 양옥이 아닌 한옥 남산 한옥마을이나 전주 한옥마을은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한옥이 즐비한 아산 외암마을, 경주 양동마을 등도 마찬가지다. 가장 한국적인 외형을 간직하고 있다는 평이다. 전남지방의 행복마을사업이 가옥을 한옥으로 제한하는 것은 멀리 보자면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명소를 만드는 일일 수 있다. 더구나 한옥은 기와지붕뿐만 아니라, 목재와 황토를 사용한 자연친화적인 건축물이다. 특히나 사람들이 건강에 관심이 많은 요즈음, 유인 효과가 분명히 보장된 사업일 수 있다. 한편 한옥에 대한 명확한 개념은 아직 마련된 바 없는 것으로 안다. 개념을 규정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한옥이 기와집을 의미하는 것이 너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와집은 한국에 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와집이 한국 고유의 건축이라고 굳이 말할 수조차 없다. 그것도 멀리 보자면 엄밀한 의미에서 일종의 수입 형태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릇을 고를 때나 집을 지을 때, 겉모습이나 재료 등에 관심이 높지만, 실제 사용하는 것은 빈 공간이라고 노자는 꼬집었다. 외형의 한옥이 마치 이런 셈이다. 안이 아닌 겉을 보고 한옥을 규정하는 것이 그렇다는 것이다. 또 집을 짓는 재료를 이유삼아 한옥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다. 굳이 기와집이라고 하더라도 중국이나 일본 등 다른 나라의 기와집과 구별되는 우리만의 양식이 있 을 때 한옥이라는 말이 성립될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준비는 아직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건축학 에서 들려오는 말이다. 온돌방, 툇마루, 시렁 등은 건축의 형태보다는 기능적 측면에서의 차별성을 돋보이게 하는 한국형 건축의 특징이다. 이것은 기와집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초가집도 해당된다. 어느 결엔가 한옥을 기와집으로 한정하는 사회적 인식이 일반화되고 있다. 온돌의 부가가치는 인류에게 복음일 수 있다. 시골집 툇마루의 쓰임새는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시렁은 한정된 공간을 확장할 수 있는 놀라운 발 명품이다. 자형 내부 구조 ㄴ자형 ㄷ자형

90 남도의 민속사회를 통해서 본 실용과 허영의 현상적 파노라마 위 행복마을 한옥의 설계도를 보면 온돌도 있고, 툇마루도 있고, 붙박이장도 있어서 한옥의 기능 적 구조와 거의 일치한다. 한편 아파트의 내부구조에 가깝기도 하다. 공간의 기능적 분화가 잘 이루 어진 구조인 것이다. 한옥의 특성은 오히려 외형이나 설비보다는 기능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체용론적 완전성 을 전제로 하고 보자면, 외형이나 설비가 실용적 기능과 일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와냐 초가냐 하는 지붕의 형태나 집을 짓는 재료가 아니라, 온돌, 툇마루, 시렁 등이 한옥의 특징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이 유용한 실용적 기능을 가졌을 때 비로소 고유의 특장점으로서 자격을 얻게 된다. 한옥의 진정한 특장점은 복합성과 확장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불 한번 지펴서 밥도 하고 난방도 한다. 안방에서 밥먹고, 잠자고, 놀고, 일하고, 심지어 제사도 모신다. 툇마루가 있어서 또 얼마나 다양하게 쓰이는지 모른다. 툇마루는 다용도실의 원조격이다. 붙박이와 시렁은 구조가 다르다. 붙박 이는 사용가능한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지만, 시렁은 사용하지 않는 공간을 확장하는 방법을 쓴다. 수납공간으로서 시렁이 차지하는 공간 확장의 기능은 이사할 때 실감하게 된다. 인간의 공간에 대한 욕망은 자제가 어렵다. 공간 활용의 복합적 기능은 인간의 공간 욕구를 현명 하게 처리한 전통지혜의 하나라 하겠다. 그러나 전남지역에서 한옥을 지어서 행복마을을 가꾸고 있 는 일련의 사업에서는 한옥이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특장점과는 관련이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옥에 대한 개념이 피상적이기 때문이다. 양옥의 기본적 구조는 기능적 분화가 철저하다. 이미 가재도구만 두고 보더라도 공간의 기능적 분화에 얼마나 충실한지를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침대는 항상적 공간을 차지한다. 식탁도, 응접셋트 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국의 전통적인 가재도구는 대부분 접이식, 또는 이동식이었다. 하나의 공 간을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행복마을의 한옥은 이러한 이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추진되고 있다. 4. 체용론적 반성과 이해 한류의 시대다. 한식, 한복, 한옥도 모두 한류다. 그러나 양식, 양복, 양옥에 익숙해 있는 우리로서 보면 오히려 이런 한식( 韓 式 )은 이벤트성 사업이 된다. 지난 정부에서 한식사업에 통 크게 투자하였 다. 현 정부에서 한복사업에 대해 역시 똑같은 투자정책이 예견된다. 지방정부이기는 하지만, 전남 역학적 관계구조와 연계되어 있다. 그러나 높은 사람들의 지시나 관심에 의해서 추진되는 한식, 한 복, 한옥 보급의 정책적 추진이 현 시대의 추이로 볼 때 성공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투자비용에 비해서 회수비용이 의심스럽다. 두 번째 이유는 체용론적 완결성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체용론이 자연 해체되는 문화적 현상 중의 하나는 잔존문화이다. 타일러가 말한 잔존문화란 형태는 남았지만 더 이상 기능이 없어진 것을 말한다. 체가 형태, 용이 기능이라고 한다면 체와 용의 해제는 형태와 기능의 해제와 같은 말이 된 다. 지게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있다. 헛간에 그냥 그대로 걸려 있다. 쟁기도 사용되지 않지만, 시골마을의 어느 집 헛간에 지금 보습이 녹슨 상태이기는 하지만 그대로 남았다. 우리는 한 때, 동양의 문화 또는 한국의 문화를 잔존문화로 보았다. 실제로 잔존문화는 세계 어디 에서나 나타날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동양사회나 한국사회에 그것이 과다한 것인 양 호도되었던 역사를 우리는 경험해 왔다. 이는 자연스러운 변화가 아닌 의도적인 변 경의 산물이었다. 동양적인 것이, 또 한국적인 것이 서양적인 것으로, 미국적인 것으로 바뀌기를 문 화적으로 강요되면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한식, 한복, 한옥에 대한 정책적 드라이브가 마치 컴퓨터를 고를 때 디자인만 보고 고르는 꼴이다. 아니 성능 좋은 부품도 함께 고려하면서 고르는 경우까지 포함해도 좋다. 그러나 소프트웨어를 모른 다면 부품이 좋고 디자인 완벽한 컴퓨터가 할 수 있는 일은 비관적이다. 한식이 가지고 있는 복합식 품으로서의 특장점, 한복이 가지고 있는 평면구성으로서의 특장점, 그리고 한옥의 기능적 복합이라 는 특장점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한류정책은 체용일여( 體 用 一 如 )의 법칙을 무시한 꼴이다. 더구나 아무리 용을 쓰고 공급자의 역할에 매진할지라도 소비를 촉진하는 것도 한계가 분명하다. 전남에 조성되는 행복마을에 입주를 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귀농이 아닌 귀촌이라고 한다. 은퇴 자 마을이 되어가는 것이다. 사회보장을 위한 복지비가 첨예한 관심이 되고 있는 실정으로 보면, 귀촌이라는 인구유입 형태는 사회적으로 썩 바람직한 모습일 수는 없다. 사회보장비용이 과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외관적 현상의 다채로운 파노라 마가 실제로 실용인지 허영인지에 대해 민속학적인 반성과 성찰이 함께 해야 한다고 본다. 이를 위 해 우리는 전통적인 말이라서 기피할 수도 있는 체용론 을 다시 한번 고려해보는 과제를 안게 된다. 에서는 한옥에 대한 정책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이들 정책이 두 가지 점에서 성공 담보가 어렵다고 본다. 첫째는 공급자중심주의로서는 문화시대를 이겨내지 못한다.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것은 공업시대의 경제학이다. 인류 역사상 그 무시무시한 제국주의를 배태한 것도 바로 이러한 공업시대의 경제학이었다. 원가의 절감뿐만 아니 라 소품종 다량생산으로 소비층을 확보하는 전략이 공업시대에는 지극히 당연한 경제원리였기 때문 이다. 그러나 문화시대에는 다품종 소량생산이 정답이며, 또한 이는 소비가 공급을 창출하게 되는

91 남도의 민속사회를 통해서 본 실용과 허영의 현상적 파노라마 남도의 민속사회를 통해서 본 실용과 허영의 현상적 파노라마 에 대한 토론문 김미경 전주대 먼저, 평소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하는 남도민속 연구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오고 계신 나경수 교수 님의 토론을 맡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남도 민속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나경수 교수님께서 오늘, <2013년 민속학자대회>를 맞아 실용과 성과주의 시대의 민속 학 이라는 전체 주제에 부응하여 발표하신 남도의 민속사회를 통해서 본 실용과 허영의 현상적 파 노라마-한옥으로 조성되는 전남지역의 행복마을 을 중심으로- 라는 발표문을 잘 읽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오늘 발표의 핵심 주제인 <한옥으로 조성된 전남지역의 행복마을> 은 본 토론 자가 몇 년에 걸쳐 행복 마을 만들기 공간 스토리텔링 방안 연구 을 비롯한 여러 주제로 전남에 소재하고 있는 몇몇의 행복마을에 가서 특강과 현장답사를 실시한 바가 있어 아주 생소한 분야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발표가 전라남도의 민속문화와 관관산업의 활성화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 지 아는 저로서는 교수님의 발표에 문제 제기가 아니라 궁금한 점을 풀고자 하는 차원에서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1. 교수님은 모두( 冒 頭 )에 민속사회가 갖는 의미를 설명하시기 위해 민속사회의 외관 현상 을 논 하면서 대만의 도관( 道 觀 )과 일본의 신사( 神 社 )를 예로 들면서 건축물의 수와 규모가 사회적 중요도 에 비례한다는 가설에서 출발한다. 자신들의 고유종교라 할 수 있는 신도와 도교가 일본과 대만에서 중시되는 것은 그와 관련된 종교건축물들에서 쉽게 간파된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건축물을 찾는 일반인들이 많고, 또 거기에서 전승되는 각종 제례 역시 활성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굳이 거론 할 필요는 없겠다. 그야말로 생활종교로서 살아 있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사실, 행복마을 은 종교적인 차원에서의 민속사회로서의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을만이 지니고 있 는 다양한 민속문화원형을 활용한 스토리텔링 개발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조금 논리적 전개에서 다른 각도의 논리를 펼치신 것은 아닌지 궁금해서 여쭈어 봅니다. 2. 본론에서 <전남 행복마을 조성사업>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통계적인 분석 자료까지 첨부해 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는데요. 낙후되어 있는 농어촌마을을 사람이 살고 싶은 마을을 만들어 현 주민들과 후손들이 정착하고, 도시민들이 돌아오는 마을로 조성 하는 목적만 언급해 놓으셔서요. 제 가 좀 궁금한 것은 이런 목적을 어떤 방향으로 실천해야 하는지 그 방안에 대한 교수님의 복안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3. 교수님께서는 공간 활용의 복합적 기능은 인간의 공간 욕구를 현명하게 처리한 전통지혜의 하나라 하겠다. 그러나 전남지역에서 한옥을 지어서 행복마을을 가꾸고 있는 일련의 사업에서는 한 옥이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특장점과는 관련이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옥에 대한 개 념이 피상적이기 때문이다. 라고 피력하셨는데요. 제가 알기로는 한옥으로 지었거나 혹은 짓고 있는 행복마을 만들기 사업의 한옥들은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공동체 문화(예를 들어 현재 전남 보성 대 은 행복마을에서 짓고 있는 다목적용 문화관 등)를 잘 살려 스토리텔링 로드맵을 짜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요. 혹시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한옥이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특장점 은 무엇이며 전남 행복마을에 어떤 방식으로 그 특점과 장점을 살려야 한옥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개념과 부합할 수 있는지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4. 요즘, 한류( 韓 流 )에 대한 논의가 다양한 분야에서 전개되고 있는데요. 교수님께서는 한식, 한 복, 한옥에 대한 정책적 드라이브가 마치 컴퓨터를 고를 때 디자인만 보고 고르는 꼴이다. 아니 성능 좋은 부품도 함께 고려하면서 고르는 경우까지 포함해도 좋다. 그러나 소프트웨어를 모른다면 부품 이 좋고 디자인 완벽한 컴퓨터가 할 수 있는 일은 비관적이다. 한식이 가지고 있는 복합식품으로서 의 특장점, 한복이 가지고 있는 평면구성으로서의 특장점, 그리고 한옥의 기능적 복합이라는 특장점 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한류정책은 체용일여( 體 用 一 如 )의 법칙을 무시한 꼴이다. 더구나 아무리 용을 쓰고 공급자의 역할에 매진할지라도 소비를 촉진하는 것도 한계가 분명하다. 라는 좋은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전남의 행복마을에 조성 중인 한옥의 기능적 복합 을 위해 어떤 방식의 소 프트웨어를 활용해야 문화콘텐츠 산업으로서의 성공을 가져 올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 습니다. 5. 교수님께서는 전남에 조성되는 행복마을에 입주를 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귀농이 아닌 귀촌 이라고 한다. 은퇴자 마을이 되어가는 것이다. 사회보장을 위한 복지비가 첨예한 관심이 되고 있는 실정으로 보면, 귀촌이라는 인구유입 형태는 사회적으로 썩 바람직한 모습일 수는 없다. 사회보장비 용이 과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제가 알기로는 현재 행복마을 만들기 조성 사업은 귀촌하기 위해 한옥을 짓는 인구보다는 기존의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그들 스스로 마을 과 자신의 경제적 이익 창출을 위해 마을 특산품 공동 사업, 한옥 체험 민박 사업 등 여러 방면으로 열심히 국내외 관광객들을 끌어 들이기 위한 스토리텔링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사회보장비용의 과대함을 논하는 것은 조금 앞서 나가는 생각은 아니신지요? 사실, 교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논( 論 )하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외관적 현상의 다채로운 파노라마가 실제로 실용인지 허영인지에 대해 민속학적인 반성과 성찰이 함께 해야 한다고 본다. 라

92 남도의 민속사회를 통해서 본 실용과 허영의 현상적 파노라마 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우리 민속학이 실용을 논하면서 혹시 현실에서는 실천하기 어려운 허영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민속학자대회 같은 학술대회에서 자주 논의되고, 철저히 분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만이 민속학이 실용 학문으로 그 자리매김을 확실히 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이상 제 질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남도의 민속사회를 통해서 본 실용과 허영의 현상적 파노라마 에 대한 토론문 송준 고려대 이 원고는 토론문이기 보다는 질문을 드리는 글입니다. 나경수 선생님께 이른바 허영의 현상적 파노라마 그 중에서도 관 주도 사업을 통해 드러난 한국사회의 현실과 향후 사회적 방향성 모색에 대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행복마을 프로젝트를 예로 들어 전반적인 한국의 시대상황과 농촌의 현실 그리 고 관주도사업의 현황과 방법론적 부정교합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현재 우리나라 국민의 취향은 이미 상당부분 서구화 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의복이나 가옥뿐만 아니라 생활방식 심지어는 얼굴 생김새도 서양식으로 고치는 경우 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저는 만연된 서구취향의 사회문화 속에서, 농촌지역마다 한옥마을을 새롭게 조성하려는 것은 일부분 긍정적인 측면을 가질 수 있는 하나의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전주한옥마을 의 경우처럼 대도시에도 한옥마을이 조성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문화가 경험재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주 볼 수 있 는 것에 애착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옥이 이른바 전통마을이나 민속마을이 아닌 곳에서도 자주 접할 수 있게 된다면, 즉 자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면 한옥에 대한 취향도 일부분 다시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재 조성되는 한옥마을은 지역적 특성이나 역사성과 무관하게 획일적인 테마파크형으로 조성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외관은 한옥인데 내부 구조가 기능 분할을 강조한 서양식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서구적 생활양식에 익숙한 사람들이 거주를 원하도록 유인하기 위한 사회적 절충안으로 보여 집니다. 이러한 절충적인 사업 시각이 관주도사업에 적용되었다는 것은 역 으로 우리 사회의 실용과 허영의 현상적 실체 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상황을 다시 역전 시키는 것은 내외부적인 시대 상황을 고려할 때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실 로서의 행복마을 조성사업 이 그나마 긍정적인 효 과성을 갖도록 만들기 위해서 어떤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지, 나경수 선생님께 여쭙는 것으로 토론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93 누구의 무엇을 위한 실용 인가? 2013 한국민속학자대회 누구의 무엇을 위한 실용 인가? - 한국 민속학의 실천성 재고- 남근우 비교민속학회 목차 1. 어용과 실용과 무용 사이 2. 실천적 문화민족주의의 허실 3. 새마을운동과 미발의 현재학 4. 구제 민속학의 체제화 1. 어용과 실용과 무용 사이 올해의 한국민속학자대회는 실용과 성과주의 시대의 민속학 을 주제로 내걸었다. 이 대회의 기 획위원회에 따르면, 한국 사회가 압축 성장을 해오면서 생활의 모든 부면에서 경제적 논리를 앞세운 실용과 (양적) 성과 가 중시되고, 그 때문인지 대중들도 실용적이지 못한 학문들에 냉랭한 반응 을 보인다. 고 한다. 이러한 작금의 상황을 맞이하여 과연 민속학은 어떤 대응을 해왔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논의해보 자는 것이다. 무엇보다 기왕의 민속학은 실용과 성과주의 시대 의 현실과 관계없이 민속 연구에만 집중하여 묵묵히 연구 그 자체만을 해오지 않았는가 하는 자성. 이 자성 이 이번 논의를 제안한 배경 1) (이하 인용문 안의 밑줄은 내가 친 것임)이라고 강조한다. 이와 같은 제안 에 대해 난 솔직히 위화와 자괴의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우선 위화감부터 말하 면, 그것은 민속학의 성찰을 환기하는 물음에서 연유한다. 위 인용문의 밑줄부분으로, 이 물음은 한 1) 한국민속학자대회 의 기획위원회가 전송한 2013년 민속학자대회 기획 및 세부 일정 문건의 주제 선정 사유 부분에서 발 췌, 1쪽. 185

94 누구의 무엇을 위한 실용 인가? 국 민속학의 실천성 2) 에 대한 충분한 학사적 고려 없이 제기된 게 아닌가 싶다. 후술하듯이 한국의 민속학사를 돌아보면 실용 을 강조하거나 실천한 성과가 산견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의 제안에 동참하기에 앞서, 그 배경으로 제시된 자성 의 진정성부터 되물어야 하는 까닭이다. 과연 한국의 민속학은 지금까지 실용과 무관하게 오로지 민속 연구에만 집중하여 묵묵히 연구 그 자체만을 해[온] (이하 인용문 안의 [ ]는 내가 붙인 토나 주임) 것일까? 오히려 민속의 실용성을 앞세우다 혹은 민속학의 실천성을 빙자하여 어용이나 자본에 복무한 경우가 비일비재하지 않은가? 게다가 한편으론 고속( 古 俗 )의 잔존물로서 민속 연구에 골몰한 나머지, 3) 민속학이 지금 여기 를 살 아가는 생활주체들의 현실적인 삶을 도외시해온 게 아닌가? 결과적으로 그것들이 주체들의 실생활 에 무용( 無 用 )한 민속학의 위기를 초래한 장본( 張 本 )인 것은 아닌가? 나는 이 일련의 물음이야말로 이번 학술대회에서 우리가 성찰해야 할 긴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대중들을 향해 민속학이 얼마나 실용적일 수 있는지 적극 해명에 나서 4) 는 것보다는 유의 미하며, 논의의 결과 역시 생산적일 것이다. 가령, 민속의 자원화 나 민속문화의 콘텐츠화 와 같은 기왕의 상투적 수사를 더 갈고닦아 해명에 나서 면 민속학의 실용성이 얼마나 제고되겠는가. 그리 하면 대중들[의] 냉랭한 반응 이 뜨거운 열기로 반전되어 민속학의 존[립] 근거 가 마련되기라 도 한단 말인가. 5) 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다. 민속학이라는 학문의 존립 근거는 실용성과 그 성과 를 지렛대로 대중 들의 인기와 반응에서 찾을 수 있는 게 결코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포퓰리즘적 사고와 실천 은 학문을 하려는 민속학도들에게 불필요한 자괴감을 심어줄 뿐이다. 그래서다. 본디 실용학문이 아 닌 민속학에 무리하게 실용 의 당의( 糖 衣 )를 입혀 굳이 대중들을 설득 하려 들기보다는, 지금까지 한국 민속학이 추구해온 실천적 성과들을 차분히 되짚어보는 게 그 존립 기반의 재구축을 위해선 필요하다고 보인다. 위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이하의 본론에서는 민속학의 실천성을 지향한 기왕의 연구 성과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보겠다. 특히 누구의 무엇을 위한 실천인가? 에 논의의 초점을 맞춰 해방 전의 조선 오락 선도론부터 최근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론에 이르기까지 민속학의 실천을 강조하거나 도모 한 주요한 성과들을 재고함으로써 무용한 민속학 의 위기가 어디에 기인하는지를 고찰해보겠다. 나 아가 이 비판적 성찰 결과를 가지고 민속학의 존립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아보겠다. 2) 여기서 실천성 이란 민속 연구를 통해 실사회에 이바지하려는 의식과 자세 및 그 구체적인 행위를 말한다. 3)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남근우, 민속 개념 재고, 실천민속학 21(실천민속학회, 2013) 참조. 4) 주 1)과 같음, 1쪽. 5) 이와 관련하여 위의 문건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실용과 성과주의는 마냥 비판할 수만은 없는 사안이기도 한다. 이를 테면 대중들을 상대로 민속학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이 실용성 내지는 그것의 성과 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대중들을 설득해야 하는 이유는 민속학의 존재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민속학과 그리고 민속을 전공하 는 후속세대가 계속해서 수급이 되어야 학문의 존재가 보장된다. 아울러 민속을 전공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한 일자리들이 창출되어야 계속해서 그 학과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음, 2쪽) 2. 실천적 문화민족주의의 허실 해방 전에 활약한 한국의 민속학자 중에서 송석하보다 더 실천적인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일제 식민지 시기 그와 함께 조선민속학 을 주도한 손진태의 발언 6) 이 그것을 증언한다. 요컨대, 민속자 료의 수집과 그 연구 성과를 금일의 실생활에 활용 하는 데 있어 송석하가 선각자 라는 것이다. 실제 송석하가 지향한 이 세용실익( 世 用 實 益 )의 실천성은 1930년대 중반부터 현재화하기 시작한 다. 구체적으로, 그의 주 관심사였던 민속예술(광의의 향토예술) 7) 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얼추 이 루어지고, 더불어 조선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을 배경으로 향토예술의 부흥 기운이 사회적으로 비등 한 1934년 이후, 8) 그것을 생활 속에서 활용 하기 위한 제언과 활동이 본격화한다. 그 결절점( 結 節 點 )의 하나가 중일전쟁 발발 이듬해에 치러진 민속예술대회 라고 보이는바, 9) 이 대회를 전후로 송 석하는 두 편의 글을 조선일보에 기고한다. 하나는 향토예술의 정수와 그 민속학적 고찰 10) 이고 다른 하나는 인멸에서 부활로 찬연히 [빛]난 민예대회 다. 우선 전자에서 주목할 것은, 민족예술의 모태로서 향토예술의 재음미가 필요하다는 주장과 함께, 그러한 예술적 입장을 떠나서 사회정책상의 당면한 공리적( 功 利 的 ) 입장으로 생각하더[라]도 11) 그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한 점이다. 곧 문화적 혜택이 태부족한 농어촌의 촌락사회에서는 향토예 술이 유일한 위안거리이며, 심신의 피로는 오로지 이를 통한 정신적, 정서적 위안만이 치유책이라고 주장한다. 후자에서는 민속예술을 상아탑[의 연구대상]에서 민중에게 내[어]준 게 이번 민예대회 ( 民 藝 大 會 ) 의 의의란 지적과 함께, 시대호흡에 뒤떠러 12) 지지 않는 민속예술의 현대적 부활을 강 6) 1941년에 발표한 농촌오락 진흥론의 모두에 등장하는 대목으로, 나는 종래 농촌의 오락, 신앙 기타의 민속에 대해 자료를 수집하고 그 민속학적 연구를 시도해 왔지만, 이를 오늘날의 우리 생활 속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깊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 다. 同 學 송석하 씨와 같은 이는 바로 그러한 방면의 선각자로, 사리원의 가면무용은 완전히 씨의 열정과 노력으로 부활된 것 ( 孫 晉 泰, 農 村 娛 樂 振 興 問 題 について, 綠 旗 1941년 6월호, 綠 旗 聯 盟, 151쪽)이라고 한다. 이 시국 영합적인 농촌오락 진흥론 의 자세한 내용은 남근우, 토민 의 토속 발견과 신민족주의, 남창 손진태의 역사민속학 연구 (민속원, 2003), 159~162 쪽 참조. 7) 송석하, 남조선 가면극의 부흥 기운 : 진주 인사의 성의적 기도, 동아일보 1934년 4월 21일[ 석남 송석하 : 한국 민속의 재음미(하) (국립민속박물관, 2004), 637쪽]. 8) 일제의 식민지화 이후, 인멸되어 가던 조선의 민속예술과 향토오락이 1930년대 전반 홀연히 부흥의 기운을 맞이한다. 1935년 의 동래 들놀음 부활에 즈음한 송석하의 발언을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겠다. 곧 이 數 三 年 來 에 향토색을 표방한 연중행사가 우후의 죽순처럼 출현 [ 민속극 東 來 野 遊 : 그 부활에 際 하야 一 言 함, 동아일보 1935년 4월 13일( 석남 송석하 : 한국 민속 의 재음미<상> 에 재수록, 452쪽)]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1933년 무렵엔 노량진 산대가 부활된다[ 봉산의 무용가면, 동아일보 1933년 12월 17일( 석남 송석하 : 한국 민속의 재음미<상> 에 재수록, 425쪽)]. 그리고 이듬해 1934년 정월 대보 름에는 진주의 오광대가 부활되며, 단옷날에는 봉산의 탈춤이 재개된다. 또 추석날에는 경주에서 황창전설희화 의 부활이 시도된다. 송석하가 이 1934년을 가리켜 조선 민속예술상으로 잇지못할 가장 의미기픈 해 [ 黃 倡 傳 說 戱 化 의 부활 : 경주의 금년 추석 행사, 조선일보 1934년 10월 23일( 석남 송석하 : 한국 민속의 재음미<하> 에 재수록, 658쪽]라고 한 까닭이다. 9)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남근우, 조선민속학 과 식민주의 : 송석하의 문화민족주의를 중심으로, 한국문화인류학 35-2 (한국문화인류학회, 2002), 105~106쪽 참조. 이하의 송석하 관련 기술은 이 졸고의 내용을 요약, 보완한 것이다. 10) 동 대회 직전인 4월 21일부터 29일 사이 일곱 번에 걸쳐 연재된 글로, 제 2회부터는 조선의 향토예술 : 간단한 史 的 梗 槪 로 제목 변경. 11) 송석하, 향토예술의 정수와 그 민속학적 고찰, 조선일보 1938년 4월 21일[ 석남 송석하 : 한국 민속의 재음미(상) (국립민 속박물관, 2004), 368쪽]

95 누구의 무엇을 위한 실용 인가? 조한다. 이러한 민속예술과 향토오락을 둘러싼 사회정책상의 당면한 공리적 입장 의 강조와 그 공리성에 기초한 현대적 부활론은 물론 여기서 처음 표명된 게 아니다. 남선( 南 鮮 ) 가면극의 부흥 기운 (1934 년)과 민중의 정서와 연중행사[ 民 衆 の 情 緖 と 年 中 行 事 ] (1934년), 13) 농촌오락의 조장과 정화에 대 한 사견 (1935년) 등에서도 위와 유사한 견해를 피력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위 민예대회 의 달포 뒤 동아일보에 발표한 민속에서 풍속으로 란 글이 그 세용실익의 현대적 부활론을 웅변한다. 그에 따르면, 민속이란 과거의 잔존물 이며 풍속이란 현대에 호흡할 만한 현대의 것을 말한 다. 따라서 논제의 민속에서 풍속으로 란, 인멸의 길을 밟는 묵은 것에 새 옷을 입혀서, 새 호흡을 시 켜서 현대에 부활시 켜 사회정책상의 공리를 추구하자는 뜻이다. 부연하면, 강강술래나 줄다리기와 같은 묵은 민속으로서 새 풍속으로 재생할 만한 14) 건전한 향토오락을 부활시켜, 국민의 정서적 만족을 채 워주고 정조적( 情 操 的 ) 함양을 꾀하 15) 자는 것이다. 1929년에 발표한 조선의 인형극[ 朝 鮮 の 人 形 芝 居 ] 이후, 송석하가 주로 추구한 민속예술(광의의 향토예술) 의 연구는 결국 이러한 경 세제민의 오락 선도론( 善 導 論 )으로 수렴된다. 우리는 그것에 기초한 일련의 향토오락 부흥 운동을 가리켜 실천적 문화민족주의라고 불러도 물론 좋을 것이다. 하지만 민속 의 풍속 화를 선도( 先 導 )한 그의 실천적 문화민족주의가 반드시 일제의 조선 지배에 대항하는 현실 변혁적인 유토피아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송석하의 조선민속학 이 추 구한 문화민족주의의 담론과 실천이 곧바로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는 정치사회적 의미와 결과를 산출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의미와 결과에 대해 송석하가 자각적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떠나서, 그가 중시한 향토오락의 사회 교화적 의미 와 사회 윤리상[의] 해독 16) 여부, 나아가 그 연장에서 강 조한 사회정책상의 공리적 입장은 일제의 식민지정책과 공명하거나 연동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농촌오락의 조장과 정화에 대한 사견 의 경우와 같이, 송석하 스스로 그 조장과 정화 의 주체로 상정한 식민지 당국과 오락의 지도자 제위( 諸 位 ) 17) 입장에서 보게 되면, 조선 농촌경제 파멸의 근본 원인이 되고 있는 식민지 근대화의 모순을 도외시한 채, 18) 조선 민중의 고단한 삶을 명랑한 오락 으로 달래어 내일의 새로운 정력 을 창출하자 19) 는 그의 주장은, 이른바 총후 조선( 銃 12) 송석하, 인멸에서 부활로 찬연히 빗난 민예대회, 조선일보, 1938년 5월 7일( 석남 송석하 : 한국 민속의 재음미<하> 에 재수록, 656~657쪽). 13) 大 阪 每 日 新 聞 조선판에 1934년 7월 14, 15, 17일에 연재한 글로, 송석하는 그 말미에서 조선 민중의 적막한 정서 생활에 주의 하여 사리원의 가면무용 과 같은 향토오락을 적극적으로 장려한다면, 농촌진흥책 곧 농촌진흥운동의 대책 마련에 득이 되는 게 많을 것이라고 제언하고 있다. 이 자료를 제공해준 일본학예대학의 김광식 씨에게 감사드린다. 14) 송석하, 민속에서 풍속으로 : 인멸하는 민속에서 새 호흡을!, 동아일보, 1938년 6월 10일( 석남 송석하 : 한국 민속의 재음 미<하> 에 재수록, 684~685쪽). 15) 송석하, 민속에서 풍속으로 : 인멸하는 민속에서 새 호흡을!, 동아일보, 1938년 6월 12일( 석남 송석하 : 한국 민속의 재음 미<하> 에 재수록, 688쪽). 16) 송석하, 농촌오락의 조장과 정화에 대한 사견, 동아일보 1935년 7월 15일( 석남 송석하 : 한국 민속의 재음미<하> 에 재수 록, 624쪽). 17) 위와 같음, 627쪽. 18) 김광억, 일제 시기 토착 지식인의 민족문화 인식의 틀, 비교문화연구 4(서울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1998), 83~83쪽. 後 朝 鮮 ) 의 생산력 증강을 위한 오락 정책론으로서의 활용 가능성도 내장하고 있다. 실제로 농촌오락의 조장과 정화에 대한 사견 을 비롯한 일련의 오락 선도론과 그 실천에는 조선 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 후생운동 등과 직 간접적으로 연동하는 대목이 적지 않다. 이미 졸고( 拙 稿 ) 20) 에서 살펴보았듯이 조선의 건전한 우량오락 으로서 봉산탈춤이 생산 유통 소비되는 과정이 그러하며, 1938년 여름 총독부 학무국의 민중오락 선도( 善 導 ) 방침 21) 이 공표되고 난 직후에도 송 석하는 그 선도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듬해 정월의 동아일보 특집이 좋은 보기로, 조선 고유 운동경기[의] 대중화 현대화 를 위한 각계 인사의 제언 에서 그는 줄다리기의 간이화와 그것 을 장려할 수 있는 모체기관의 설립을 제언한다. 22) 그뿐만이 아니다. 조선총독부가 반도 향토의 건전오락[ 半 島 鄕 土 の 健 全 娛 樂 론 23) 을 발표한 1941 년 1월 직후부터, 폐간을 면한 친일 잡지에는 그 건전오락 의 진흥 방안에 관한 특집 구성과 좌담회 개최가 줄을 잇는다. 곧 농촌 문제 특집 을 꾸민 녹기연맹의 녹기( 綠 旗 ) (1941년 2월호)를 시작으 로, 조선의 농촌문화 문제 특집 구성과 조선 무예와 경기를 말하는 좌담회 를 개최한 조광 (1941년 4월호), 향토예술과 농촌오락의 진흥책 을 특집한 삼천리 (1941년 4월호), 생활과 오락 을 특집한 녹기 (1941년 6월호), 그리고 조선의 풍년 춤을 이야기한[ 朝 鮮 の 豊 年 踊 を 語 る] 문화조 선 (1942년 12월호)과 농촌오락 진흥 좌담회 를 펼친 조광 (1944년 4월호) 등이다. 일제 말기 이른바 신체제 하의 생업보국, 건강보국 을 위한 오락 진흥과 그 대책 강구. 손진태의 즉물적 표현을 빌리면 전통오락을 주목하여 식민지 조선의 구구체제( 舊 舊 體 制 )를 총력체제화 하 24) 기 위해 마련된 위의 특집과 좌담회에는 식민지 당국자들뿐 아니라 민간의 연구자들도 다수 참가한다. 송석하의 경우, 향토예술과 농촌오락 의 전문가답게 게다가 그 실용의 선각자 로서 빈번 한 참석을 보인다. 그리고 조선 민중의 정서 만족과 정조 함양 및 내일의 신 정력 창출을 위한 건전 오락 의 진흥책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민속의 풍속화 에 기초한 그 실천적 문화민족주의의 행방과 정치적 의미 등에 대해선 금후 실증 적인 논거로 생산적인 논쟁이 필요하겠거니와, 25) 여기선 다음의 두 가지 점만을 지적하고 넘어가자. 19) 주 16)과 같음, 627쪽. 20) 남근우, 봉산탈춤의 근대, 민속소식 96(국립민속박물관, 2003). 21) 1938년 7월 11일의 조선일보 보도기사에 따르면, 총독부 학무국에서는 일즉부터 민중오락의 선도방침을 세우고저 각도시와 농촌으로 두루두루 민중오락을 조사중이더니 요즘와서 이것이 끗낫스므로, 이를 토대로 그 선도방침 을 내놓게 된다. 특히 학무국에서 중시한 것은 농어촌의 오락으로서 1 농 산 어촌의 생활에맛는것, 2 직업과 관련되는것, 3 향토적인것, 4 체 육적인것, 5 민속에 알맛는것, 6 일반대중의공동적인것, 7 실시하기 쉬운것, 8 경비가 적게드는것 을 진흥하여, 일반의 정 조도야와 공동심( 共 同 心 )의 함양을 꾀하려는것 이 그 목적이라고 한다. 요컨대, 식민지 조선의 민중오락을 선도 하여 정조 도 야와 공동심을 함양함으로써, 조선 민중의 화합과 협동을 촉진하고 후방의 생산 활동에 지구성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22) 동아일보 1939년 1월 4일. 23)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 1941년 1월호에 발표된 무라야마 지준[ 村 山 智 順 ]의 글로, 조선의 재래 오락을 잘 선도하여 건전오 락 으로 갱생시켜 그 조장과 진흥을 통한 명랑 화락( 和 樂 )의 사회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총후 조선 의 증산 활동을 위한 견인 지구( 堅 引 持 久 ) 정신을 앙양하자는 내용이다. 24) 孫 晉 泰, 農 村 娛 樂 振 興 問 題 について, 綠 旗 1941년 6월호, 綠 旗 聯 盟, 151쪽. 25) 이와 관련하여 전경수는 조선민속학회 창립 80주년을 기념한 한국민속학회의 포럼( 민속학 80년을 논하다 ) 내용을 거론하 며, 동 학회가 일제에 저항 을 하였다면 조[선]민[속학]회 의 작업과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났는지에 대한

96 누구의 무엇을 위한 실용 인가? 첫째, 송석하가 강조한 사회정책상의 공리적 입장과 거기에 내재된 교화의 시선은 총후 조선 의 식 민지 오락 정책 및 그 규율의 논리와 공액( 共 軛 )의 관계로 귀결될 위험성이 있었다. 둘째, 결과적으 로 조선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 직후부터 일제의 패망에 이르기까지의 10여년, 그가 일관되게 추구 한 세용실익의 오락 선도론과 그 사회적 실천은 일제의 어용과 조선 민중의 실용 사이에서 미묘한 진자( 振 子 ) 운동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3. 새마을운동과 미발의 현재학 다음, 해방 후 한국 민속학의 전개 과정에서 70년대의 새마을운동보다 더 큰 충격을 준 사건은 없을 것이다. 이 위로부터의 근대화 프로젝트는 농어촌 지역사회의 구조 변동뿐 아니라 그곳에서 현실적 삶을 영위해온 농어민들의 생활 세계에도 다대한 변화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민속의 전승 기반으로 농어촌의 시골 마을을 중시해온 민속학자들에게, 그 조사 현장의 구조 변동과 일상의 변화 는 민속학의 실천성을 묻는, 나아가 민속학 존립의 근거를 다시 물어야 하는 중차대한 국면이 아닐 수 없겠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하고 싶은 게 1972년 6월 4일에 열린 제1회 민속학 전국대회 다. 3년 전에 출범한 민속학회 26) 가 처음으로 마련한 전국대회로 당일 오전엔 개별 연구발표, 그리고 오후엔 두 개의 주제를 놓고 토론회가 열린다. 민속학의 역할, 문화재의 보존과 전수 라는 두 주제로 당시 학회장을 맡은 임동권을 필두로 김태곤, 이상일, 지춘상, 최길성, 황패강 등의 당대를 대표하는 민속 연구자들이 참석하여 열띤 토론을 펼친다. 우리가 살펴볼 것은 전자의 토론회로, 사회를 맡은 임동 권은 그 배경과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 나라가 지금 근대화작업이 한창이고 그러한 와중에 오랜 전통 속에 전승되어온 민속자료들이 인멸되어 가고 있읍니다. 그 중에는 의도적으로 파괴되고 [있는 경우도] 있어서 이러한 시점에서 민속 자료의 보존은 매우 위급한 상태에 있고 여기에 대해서 마땅히 민속학회로서도 무슨 발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 이번 대회에는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협찬을 받았읍니다. 그래서 토론에 나타난 논증이 필요하다. 조민회 가 탄압 을 받았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탄압을 받은 것인지에 대한 증거들이 필요하다. 조민회 의 활동으로부터 저항, 저항 으로부터 탄압 과 해체 로 이어지는 구체적인 내용의 제시 없는 주장은[,] 주장만 있고 증거는 없는 어설픈 한국[민속]학계의 허구성만 드러낼 뿐이다. 한국민속학계에서 주도하는 학문하는 방식(논리 비약)의 허점 을 드러내는 수준으로는 조민회 의 실체를 밝힐 수 없 [ 조선민속학회와 조선민속 의 植 民 知 와 隱 抗 寫 本 : 식민지 혼종성의 가능성, 21세기 민의 재해석과 민속학 (한국민속학회, 2012), 56쪽]다고 비판한다. 이 식민지 혼종론 을 비롯한 조선민속학 회론의 새로운 성과들에 대해선 조만간 지면을 달리하여 비판적 고찰을 꾀함으로써 조선민속학 과 식민주의의 관계성을 재론 하겠다. 26) 1969년에 임동권이 중심이 되어 한국민속학연구회 를 결성하고 그 해 12월 기관지 한국민속학 을 창간한다. 그리고 이듬해 에 학회 이름을 바꾸는데, 최상수의 주도 아래 1956년에 창립된 한국민속학회 가 이미 존재하고 있어 불가피하게 민속학회 로 개칭한다. 이 두 학회를 2000년에 통합한 게 오늘의 한국민속학회 다. 문제점들은 정리해서 학회의 의견으로서 문화재정책의 행정자료로 참고토록 제출할 예정입니다. 27) 밑줄부분에 보이는 민속자료의 의도적 파괴 란, 박정희 군사정권이 미신타파와 허례허식 일소를 명분으로 행정력을 동원하여 마을의 장승과 서낭당 등을 강압적으로 훼손, 철거한 것을 말한다. 60 년대 말의 신생활운동 및 70년대 초반의 새마을운동과 함께 자행된 일로, 28) 이에 대한 마을 주민들 의 반발과 저항이 빈발하자 72년 4월 28일 내무부는 장승 보호령 을 발표하고 장승의 특별 보호 지시를 내린다. 29) 이어, 서낭당의 경우 역시 민족적 단결을 촉진하는 민속으로 발전시켜 국민총화 의 중추로 삼아야 한다는 문화재 전문위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당국이] 신중한 검토를 하 30) 기에 이른바, 이미 성황당 과 같은 부락제당[은] 미신타파 운동의 대상이 되어 전국에서 3분의 2 정도가 파괴 31) 된 상황이었다. 이와 같이 민속자료의 보존[이] 매우 위급한 상태 에서 민속학의 역할 을 긴급히 논의해보자는 게 위의 토론회다. 곧 민속의 가치와 의의 등을 재음미, 제고함으로써 그 구제의 필요성과 보존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아울러 토론에 나타난 문제점들을 정리해서 문화재정책의 행정자료로 참고 토록 제출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취지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동 토론회에서는 기층적 민족문화론에 기초한 민속자료 의 구제 보존론이 대세를 이룬다. 이 아카데믹한 결론 32) 이 민속자료의 의도적 파괴 에 대한 민속학회 나름의 비판적 대응이었음 은 새삼스레 지적할 필요도 없겠다. 하지만 그것이 문화재정책의 행정자료 로 크게 참고 가 되었다 고는 보이지 않는다. 학회가 제시한 민속자료 구제론은 이미 제출된 문화재 전문위원들의 건의 내용 33) 에 비해 실제적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 현실적인 보존 대책 또한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동 토론회에 문화재 전문위원 자격으로 참석한 최길성에게, 관련 내용에 관한 발언의 기회가 주로 주어졌던 까닭이기도 하다. 정리하면, 민속학회는 민속학의 역할 모색으로 미신타파 라는 현실의 사회 문제에 개입을 시도 한 셈이지만, 사안의 정치적 민감성 때문인지 조심스레 34) 송석하 이래의 소멸의 이야기 35) 를 대부 27) 민속학 전국대회 토론회, 한국민속학 5(민속학회, 1972), 106쪽. 28) 최길성, 민속으로 보호를, 한국일보 1972년 3월 14일. 29) 장승 보호령, 조선일보 1972년 4월 28일. 30) 장승 서낭당 보호령, 동아일보 1972년 5월 6일. 31) 최길성, 미신타파에 대한 일 고찰, 한국민속학 7(민속학회, 1974), 40쪽. 32) 임동권은 모두 발언의 말미에서 문화재라든가 민속자료에 대해서는 그동안 문화재위원회에서도 수차 논의되었읍니다마는 우리 학회 회원들만으로 문제를 분석해보는 것도 새로운 시도로서 아카데믹한 결론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이번 토론 회를] 기획한 것 (주 27과 같음, 106~107쪽)이라고 말한다. 33) 주 30)의 동아일보에 따르면, 문화재전문위원들은 최근 서낭당이 1 부락 共 同 祭 로 사회적 결속을 촉진하고 2 근대화의 저해 요인이 안 되며 3 문화재보호법 4조 4항에 규정된 민속자료로 4 관광자원의 일부가 된다는 점을 들어 그 보호를 관계부처에 긴급 건의하는 한편 오는 11일에는 문화재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정식으로 논의, 관계당국에 건의문을 내기로 했다. 문화재 전문위원들은 이 긴급 건의에서 그 대책으로 1 서낭당의 파괴 또는 철거를 즉각 중지하고 2 이미 대폭 파괴된 제주와 충남에 전문가를 파견, 파괴에서 오는 부작용과 문화재적 손실을 조사, 보호 대책을 세우되 3 전국의 부락제당을 조사하여 지역별 유형별로 중요민속자료로 지정 보호하는 한편 4 충남의 경우 서낭당을 파괴하고 장승에 페인트칠을 한 사실이 확인될 때에는 문화재보호법에 의거, 조치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97 누구의 무엇을 위한 실용 인가? 분 되풀이함으로써 그 실효성이 컸다고는 보기 어렵다. 어찌 보면 민속학자들의 민속학 연구를 위한 민속자료 의 구제 보존론으로도 읽힐 수 있는 토론회로, 그 점 조선일보 지상에서 전통의 단절 을 문제 삼은 이두현의 칼럼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마을의 서낭당 제사를 둘러싼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에 괴리와 갈등이 있고, 농어촌 지역의 해체와 재편성이 진행되며 촌락의 사회구조와 사회관 계, 그리고 농어민의 생활과 의식에도 점차 변용을 가져오고 있는 것이 사실 이라고 지적하면서도,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시급한 문제[는] 전통문화[를] 버려야할 유산 으로만 인식[해]온 전통의 단절 이라고 주장하고, 그 중심을 이루는 민속문화재 36) 의 보존 필요성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 토론회의 참석자들 중에는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그러한 구제 민속학의 역할 제시에 대해 이견을 보인 이가 있어 주목된다. 황패강과 김태곤이 그들로 우선 전자의 경우, 민속이라고 하는 것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대전제 를 과감히 내세운다. 민중이 없어지지 않는 한 민속은 있다고 보아야 하며, 민속이 없어진다 고 하는 건 실은 다른 것으로 바[뀌]고 있다 는 이야기 37) 로, 따라 서 민속은 특별히 보호할 필요도 없고 [또] 특별히 박대할 필요도 없고 어디까지나 민중이 가지고 있는 상태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 38) 고 주장한다. 그리 내버려 두면 민중이 자기가 알아서 [하] 39) 며, 결과적으로 없어지면 그것[도] 민속의 운명 40) 이라고 되풀이 강조한다. 그렇다면 민속학의 역할은 무엇인가? 외부의 민속학이 나서 마을의 민속을 특별히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대체 민속학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황패강에 따르면, 민속학자는 그 민속의 운 명을 관심 깊게 바라보면서 관찰하고 조사하고 거기서 흔들리지 않는 어떤 지배적인 계기를 찾아내 는 것이 중요하다[.] 41) 밑줄부분의 흔들리지 않는 어떤 지배적인 계기 란, 우리 민족문화의 하나 의 원형적인 요소로서의 원시형 42) 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민속 변화의 사실 뒤에 숨어있는 과거 와 현재와 미래를 꿰뚫고 있는 43) 원형적( 原 型 的 ) 요소 를 뜻하며, 버선본이나 다식판과 같은 그 부동의 틀 거리 44) 를 찾아내는 게 민속학의 역할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결국은 원형주의 민속론으로 회귀해버리는 황패강의 지론을 여기서 또 다시 비판할 45) 필 34) 이와 관련하여 임동권은, 우리가 국가의 이러한[미신타파와 같은] 어떤 정책이라든가 그런데[에] 부정적이고 싶어서 그런 것인 아닙니다마는, 나날이 소멸되어 가는 이런 민속자료를 이 시점에서 어떻게 할 것이냐 그것을 우리가 정책적으로 이야기한다 기보다는 민속학자로서는 이런 경우에 그것도 유익하니까 보존하자든가 또는 응당히 그런 것은 필요 없는 것이니까 응당 소멸시 켜도 괜찮다고 하는 문제까지도 이야기하고 싶어서 민속학의 역할을 내걸었던 것 (주 27과 같음, 128쪽)이라고 발언한다. 35)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주 3)의 졸고, 92~95쪽 참조. 36) 이두현, 전통의 단절, 조선일보 1972년 5월 3일[ 의민당수기 (도서출판 한샘, 1989)에 재수록, 131~132쪽]. 37) 주 27)과 같음, 139~140쪽. 38) 위와 같음, 132쪽. 39) 앞과 같음, 142쪽. 40) 앞과 같음, 132쪽. 41) 앞과 같음, 132쪽. 42) 김태곤 편, 한국민속학원론 (시인사, 1984), 188쪽. 43) 주 27)과 같음, 114쪽. 44) 이 틀 거리 원형론에 관해선 임재해, 무형문화재의 가치 재인식과 창조적 계승, 한국민속학 45(한국민속학회, 2007), 252~255쪽 참조. 45) 주 3)의 졸고 114~115쪽 참조. 요는 없겠다. 문화 본질주의 운운의 새삼스런 비판을 덧붙이기보다는, 민중이 존재하는 한 민속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그의 대전제 를 상기해보는 게 생산적이겠다. 그리고 민속의 운명 은 민속의 주체자인 민중 46) 이 스스로 판단할 일이지, 외부의 어떤 권력이나 지식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을 함께 곱씹어보는 것도 좋겠다. 기왕의 한국 민속학에서 일반화한 소멸의 이야기처럼 민속을 구제하겠다는 의지나 욕망을 정당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구제 민속학이 내장하기 십상인 교 화의 시선과 다르게, 민속에 대한 민중의 현실적인 선택과 주체적인 의사 결정을 허심탄회하게 [수 용]하는 자세 47) 를 취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민중 주체들의 실생활을 대상화하자는 김태곤의 다음 발언이 그래서 주목되는 까닭이다. 민속이 인멸된다는 이야기는 성립이 되지 않겠읍니다. 인멸 대신에 민속은 변화한다. 그렇게 때문 에 변화하는 과정까지도 대상으로 할 때에 민속학의 분야는 현재의 학으로서 현재적이고 현실적인 넓은 토대를 갖지 않을까, 이런 기반 위에서 민속학이 나가야 할 것이고, [그] 위에서 민속학이 해야 할 일은 민중의 생활 그 자체, 민중을 둘러싸고 있는 입체적인 생활 모두를 지[칭]하는 문화, 이것을 대상으로 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속학은 우선 과거의 개념에서 과감하게 탈피 내지는 수정할 수 있는 이런 용기를 갖어야 하겠고 민중에 대한 보다 더 적극적인 연구가 되어야 하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48) 위의 인용문으로도 헤아릴 수 있듯이 민속학은 과거학 에서 탈피하여 현재학 으로 거듭나야 한 다. 그러려면 종래와 같이 민속=잔존문화 만을 외부의 객체적인 입장 에서 어떤 목적의식을 전제 로 대상화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민중 자체의 내적이고 주체적인 입장에 서서 49) 그들의 생 활 그 자체 를 탐구해야 한다. 김태곤의 표현을 다시 빌리면, 민간인의 현실적인 [삶] 속에서 무 한히 생동해 가고 있는 생활의 전체적 현상 50) 을 포착해야 한다. 이와 같이 연구의 관점을 전환하고 대상을 확대함으로써 민속학은 민간층의 현실적 실제 생활 문제에 참여하는 민간층의 학문이 되어 야 한다. 51) 고 그는 거듭 강조한다. 민속학의 이러한 관점 전환론과 영역 확대론이 내포한 학사적 의의와 한계에 대해선 이미 몇 차 례 관견( 管 見 )을 밝힌 바 있거니와, 52) 여기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그가 강조한 현재학 으로서의 민속학이 과연 구현되었는지 그 실천 여부다. 결론부터 말하면, 내관적(emic) 접근을 통한 민중의 46) 주 27)과 같음, 140쪽. 47) 위와 같음, 142쪽. 48) 앞과 같음, 109~110쪽. 49) 주 42)와 같음, 58쪽. 50) 위와 같음, 57쪽. 51) 앞과 같음, 59쪽. 52) 남근우, 민속 의 근대, 탈근대의 민속학, 한국민속학 38(한국민속학회, 2003)과 도시민속학에서 포클로리즘 연구로, 한국민속학 47(한국민속학회, 2008) 및 민속 개념 재고, 실천민속학 21(실천민속학회, 2013) 참조

98 누구의 무엇을 위한 실용 인가? 실생활 탐구라는 인식론의 전환 촉구가 무색하게도, 새마을운동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농어민들의 실존적 삶을 도외시했다. 여타의 구제 민속학자들은 물론이고 민중에 대한 보다 더 적극적인 연구 를 주문한 김태곤이나 이상일조차도 별 관심이 없었다. 문제의 장승제나 서낭제 혹은 무속 신앙과 같은 고속의 편린들을 민속문화재 나 전통문화 로 본질화하여, 근대에 대항하는 내셔널리즘의 교두 보로서 그 잔존문화의 수집과 보존과 연구에 힘을 기울였을 뿐, 자신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농 어촌 민중의 현실적 실제 생활 문제 에는 모두 눈을 감고 말았다. 53) 결과적으로 농어촌의 생활주체들이 새마을운동이라는 급격한 사회변동 과정을 어떻게 주체적으 로 경험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강압적인 근대화 프로젝트로 말미암아 지역사회의 권력 재편과 사회관계를 비롯한 구조 변동이 어떻게 일어나고, 농어민들의 의식주와 생업, 의식, 관행 등 일상의 생활 세계가 어떻게 변모해갔는지? 이에 대한 물음이 부재하거나 혹은 연구 실천이 뒤따르지 않음 으로써 한국 사회의 근대화 과정을 내관적( 內 觀 的 ), 미시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민속 학은 잃게 되었다. 오늘 우리가 맞이한 학문적 위기는 실은 이 주체 없는 민속 연구가 자초한 면이 크다고 보인다. 생활주체와 그들의 현실적, 실제적 삶에 무관심한 구제 민속학, 그 과거학 으로부터 의 탈각 가능성을 내장한 미발( 未 發 )의 현재학 을 우리가 급선무로 실천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4. 구제 민속학의 체제화 그런데 한국 민속학의 주류를 형성해온 본질주의 민속학자들 중에는 구제 민속학의 실천적 성과 로 민속의 문화재화를 그 업적으로 내세우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명분과 논리를 간추리 면 대개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우선, 각 지역의 고유한 역사와 풍토 속에서 배태, 성장 한 우리 민속이 서구 모델의 근대화 과정에서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를 맞이한다. 이에 민속학이 나 서 그 로컬 민속을 구제, 발굴하여 민속예술경연대회 등의 여과장치를 거쳐 국가 공인의 내셔널한 문화재로 지정한다. 그 결과, 인멸의 위기를 극복한 로컬 민속이 민족문화의 원형적 표상으로 거듭 난다. 한국의 민속학은 이러한 명분과 논리로 지난 반세기 동안 민속의 문화재화, 보다 정확히 말하 면 민속자료 의 무형문화재 화 54) 를 주도해왔다. 이어, 금세기에는 그것을 다시 글로벌한 문화유산 53) 관견에, 문교부와 내부무의 연구 지원비를 받아 김택규가 사회과학자들과 공동으로 추구한 몇 가지성과, 곧 새마을운동의 전통성 연구, 부락 구성과 새마을 [ 새마을연구 1(영남대 새마을연구소, 1979)]와 농촌 취락구조 개선 방향 정립을 위한 연구 [ 영남대학교논문집 14(영남대, 1979)] 이외에 새마을운동을 대상화한 민속학적 성과는 거의 없어 보인다. 54) 관견에, 문화재보호법 상의 민속자료 가 무형문화재 로 전화하는 요인과 과정은 다음과 같다. 곧 무형문화재 카테고리에 무형의 민속자료 를 포함하자는 임동권의 영역 확장론과 그 밑바탕이 된 양자의 융통적인 지정 기준, 그리고 민속자료 선택 제도의 탈락과 그에 따른 민속 소멸의 위기의식 및 민속의 예술화를 조장하는 경연대회의 존재 방식 등이 상호공명을 일으킴 으로써 민속자료 의 무형문화재 화가 암묵적으로 허용되고, 그 허용 종목과 빈도가 늘어나면서 이윽고 그것이 기정사실로 탈바꿈한다. 그러한 기정사실화 과정에서 민속의 자료화에 능통한 민속학 전공의 문화재위원들이 자연스럽게 담론적 권위의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것을 지렛대로 무형문화재 제도의 헤게모니를 쥘 수 있었다고 보인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으로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실천적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민속학이라는 학문이 체제화하고 그 정도와 강도가 갈수록 커지고 세어진다 는 점이다. 여기서 체제화란 민속의 가치가 그것을 담당해온 민중 주체로부터 분리되어, 체제의 권 력자에 의해 그 가치가 결정되는 것 과 관련한다. 그러한 국면에서 그 가치 결정에 학자가 개입하 여, 특정한 민속을 체제의 권력자에게 제공하는 작업 단계에 [연구가] 머물러 있는 것, 그게 곧 쓰 보이 요분[ 坪 井 洋 文 ]이 비판한 일본 민속학의 체제화 다. 그에 따르면, 경세의 목적을 상실했을 때 체제화가 시작되며, 민속학자 중에는 민속을 주체로부터 박리( 剝 離 )하여 민속 사실만을 소개하고, [심지어 그것을 마치] 제 것인 양 상품화하는 방향을 선택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55) 고 한다. 위 인용문에 보이는 경세의 목적 이란, 일본 민속학의 대부 야나기타 구니오[ 柳 田 國 男 ]가 지향한 경세제민의 학으로서 민속학을 말한다. 부연하면, 체제의 권력자 쪽이 아닌 어디까지나 그 반대편 의 민중 주체 쪽에 선 민속 연구로, 현실 사회의 문제 해결에 공헌하려는 학문구세( 學 問 救 世 ) 의 실천성을 의미한다. 56) 바로 이 초심의 목적을 상실했을 때 민속학의 체제화가 시작된다고 쓰보이 요분이 일찍이 경고한바, 이는 한국 민속학의 실천성을 성찰하는 데도 참고할 만한 비판이겠다. 일례로, 그가 말한 체제의 권력자 를 앞서 언급한 새마을사업 관련 부처나 문화재 행정 당국으로 상정해보자.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우리 민속학에 던져보자. 곧, 한편에선 생활의 민속 을 미신 으로 몰아 소탕에 나서고 다른 한편에선 그중 일부를 문화재로 올려 동결하려 드는 모순적 상황에 서, 과연 민속학은 이 기막힌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농어촌 민중의 처지에 입각하여, 당절( 當 節 )의 지역개발 행정이나 문화재 정책에 정면으로 대치( 對 峙 )한 적이 있었는가? 앞서 거론했듯이 관견에 는 별로 없었다고 보인다. 오히려 소멸의 이야기를 명분으로 민속을 주체로부터 떼어내어 민족문화의 본질이나 정체성 탐 구를 위한 민속자료 로 수단화함으로써, 그것이 생활 현장에서 가지는 현실적 의미와 생동하는 동 태를 결국 형해화하고 박제화한 게 과거학 의 민속학이다. 뿐만 아니라 민속예술경연대회와 무형문 화재의 원형 구성에 대한 담론적 권위 57) 를 앞세워 민속의 가치 결정에 개입 해온 것 또한 그 주류 의 본질주의 민속학이다. 결과적으로, 본디 다양하고 평등한 로컬 민속을 표준화하고 위계화하여 그 중의 특정 민속 을 가치 있는 문화 재( 財 ) 로 물상화함으로써, 체제 권력 쪽의 이용과 오남용에 편의 를 제공한 게 바로 구제 민속학이 아니던가. 정수진이 그 무형문화재의 탄생 58) 과정을 체계적 연구로 명확히 밝힌 게 벌써 5년 전의 일. 이제 는 문화재 행정의 관학 아카데미즘이 다름 아닌 민속학이라는 비판적 인식과 자기반성이 나올 법도 하지만, 문화재청과 지자체의 문화재위원, 문화재전문위원 후보 모집에 앞 다퉈 나서는 게 작금의 남근우, 민속의 경연과 예술화, 한국문학연구 36(동국대 한국문학연구소, 2009) 참조. 55) 坪 井 洋 文, 稻 を 選 んだ 日 本 人 ( 未 來 社, 1982), 161~162쪽. 56) 이에 관한 자세한 것은 남근우, 야나기타 민속학과 식민주의 : 순국 이데올로기의 창출, 조선민속학 과 식민주의 (동국대 출판부, 2008), 249~250쪽 참조. 57)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정수진, 무형문화재 제도의 성립, 그 역사성의 재고, 한국민속학 40(한국민속학회, 2004) 참조. 58) 정수진, 무형문화재의 탄생 (역사비평사, 2008)

99 누구의 무엇을 위한 실용 인가? 우리 모습이자 민속학계의 현실이다. 관방의 문화재(전문)위원 이라는 상징적 문화 권력의 획득과 그에 따른 경제적 부가가치 때문인지, 그중에는 자천( 自 薦 )의 몰염치를 무릅쓰는 경우도 적지 않아 참으로 씁쓸하다. 한국 민속학의 체제화는 단지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다. 90년대 중반 지방자치제도가 전면적으로 실시된 이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지역축제에서 확대 재생산된다. 이와 관련하여 임재해는, 지역 축제가 관광자원이나 관변행사로 상품화되면서 그것을 비판적으로 고찰해야 할 민속학자들이 오히 려 그럴듯한 논리로 이벤트에 축제적 의미를 부여해 주 고, 그러한 들러리 지식인 구실을 통해 지역사회 문화행정의 기득권을 누리는 세태를 신랄히 비판한다. 민속의 전승주체는 민중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야 할 민속학자가 지역 민중을 배제한 채 반민중적인 관변 측 문화이벤트를 만들어 놓고 축제라고 억지를 부리 며, 그러다보니 축제의 주체이어야 할 지역 민중 들은 소외되어 있거나 기껏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관변 축제의 이벤트화 등 에 복무한 민속학자들은 그 대가로 지자체와 행정적 밀착을 유지하며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고] 경제적 이득까지 취 59) 한다고 나무란다. 관견에는 임재해의 이러한 질책성 논의가 대부분 정당하다고 보인다. 민속학의 관변 문화행사 개 입에 대한 지당한 비판이자 체제화한 민속학자들에 대한 마땅한 질타로, 이른바 응용민속학을 추구 하는 연구자들이 특히 명심하고 자계( 自 戒 )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최근 10여년 사이 민속의 콘텐츠화를 비롯한 자원화, 상품화와 등을 선도적으로 주장하고, 더불어 관변에서 지역의 행정라인 을 움직여 그것들을 실행하려 애쓴 게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60) 또 하나, 민속학의 체제화는 최근 열기를 더하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과정에서 더욱 심화되고 있어 문제다. 지난 세기 원형 담론을 앞세워 민속의 문화재화를 주도해온 구제 민속학이, 이번에는 그 글로벌한 권위부여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며, 61) 로컬의 내셔널한 무형문화재를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제고하겠다고 나서기 때문이다. 비근한 보기를 남도민속학회의 최근 활동에 서 찾아볼 수 있겠는데, 이 학회는 2011년의 정기 학술대회에서 광주지역 무형문화유산의 창조적 59) 임재해, 마을민속 조사연구 방법 (민속원, 2007), 205~208쪽. 60)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사족을 붙이건대, 나는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경우와 같이 행정이라는 공공부문의 활동에 무턱대고 경계심을 가지고, 선험적으로 그 행위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공공민속학 을 추구하는 스가 유타카 의 지적처럼,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에서 지역주민들의 다종다양한 사고와 생활을 고려할 때 공공부문의 관여는 불가결하며, 또 그것은 지역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 희구되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공공부문의 행위를 백안시할 게 아 니라, 그것을 지역사회의 거버넌스를 위한 필요조건의 하나로 제대로 자리매김하고 나서, 그 정치권력성을 적확히 꿰뚫어보 면서 보다 좋은 협동 혹은 대항을 모색해가는 ( 菅 豊, 公 共 民 俗 學 の 可 能 性, 民 俗 學 の 可 能 性 を 拓 く, 靑 弓 社, 2012, 125~126쪽) 자세가 필요하다고 보인다. 단, 근년 미국에서 활성화한 공공민속학(public folklore) 의 연구와 그 의식적인 실천, 실험적인 시행착오 등이 거의 부재한 한국의 경우, 응용민속학의 실천적 자세가 지역사회의 주민들을 향하는 게 아니라, 중앙과 지역 행정 체제 쪽으로 기울어지기 십상이란 건 기왕의 민속공학 이나 문화공학 논의가 증명하고도 남는다. 공공민속학 의 비판 적인 수용과 제대로 된 연구 실천이 필요한 까닭이다. 61)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조약과 무형문화유산조약이 글로벌한 권위부여 시스템으로서 어떻게 성립, 작동하고 있는지, 이에 대한 한일 양국의 전략적 수용과 지역사회의 전용( 轉 用 ) 과정 및 거기에 관여하는 민속학의 정치권력성 등에 대한 비판적 연구 성과 를 단행본으로 묶어낸 게 얼마 전에 출간된 世 界 遺 産 時 代 の 民 俗 學 : グローバル スタンダードの 受 用 をめぐる 日 韓 比 較 ( 風 響 社, 2013)다. 계승과 활용 을 주제화한다. 그리고 그 부제로 광주칠석고싸움놀이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를 위한 기초연구 를 표방한다. 고싸움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를 목표로 그것을 관할하는 광주 남구 청의 후원을 받아 학회 차원에서 기초연구 에 나선 것이다. 흥미로운 건 기조발표를 맡았던 나경수의 다음 발언이다. 고싸움은 이제 전국화를 넘어서 세계유 산으로서의 가치 획득을 위한 학술적 단초를 마련한 셈 62) 이라고 자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술 대회의 프로시딩을 보면, 고싸움의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 획득 을 위해 연구 발표를 한 건 나경수 가 유일하며, 63) 따라서 그 학술적 단초 는 그의 발표문과 그것을 다듬고 보완한 논문에서 찾아볼 수밖에 없겠다. 실제 동 학회지에 실린 그의 논문을 펼치면 고싸움놀이의 가치 점검 과 문화유산 고싸움놀이의 전경화 란 항에서 그것을 집중적으로 논한다. 우선 전자에서는 창의성에 기반한 민속적 가치 와 변증법에 기반한 철학적 가치, 그리고 기질 성에 기반한 상징적 가치 를 점검한다. 64) 이 세 가지의 가치 점검 결과를 가지고 후자에서는 고싸 움놀이를 전경화 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한다. 곧 탈맥락화를 통해 발전의 궤적을 그려내기 위해서 는 마을 밖으로 고싸움을 가져가고, 원형에서 일탈한 다른 차원의 OSMU를 실천하고, 그리고 하나 의 전체에서 다시 전체의 하나로 성격을 전이하는 다차원적인 상황적 고려와 전략이 필요 하다고 지적하며, 그 구체안을 내놓는다. 기왕의 본질주의 구제 민속학에서는 일종의 금기어와도 같았던 탈맥락화 나 원형에서 일탈 의 수사적 사용, 아니 그 실천 을 스스럼없이 제안하는 게 놀랍기도 하 지만, 여기선 나경수 스스로 오늘[의] 과제 65) 로 중시한 밑줄부분의 탈맥락화 문제를 톺아보기로 하자. 그에 따르면, 하나의 전체 란 독립적인 문화유산으로서의 고싸움놀이를 뜻한다. 전체의 하나 란 의향 광주의 수많은 문화유산 또는 역사자원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 하나 의 구성요소, 곧 지역문 화와의 연계적 관계 를 의미한다. 전자는 유네스코의 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 등재, 후자는 유네스코 의 이른바 세계유산 등재를 각각 지향하는바, 고싸움의 경우는 두 방향 모두 가능하다. 그 세계 문화유산화의 작업은 이제 시발점 에 선 까닭에, 고싸움이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지속가능한 발전을 도모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토론, 그리고 정책적 연구가 함께 병행되어 나아가야 66) 한다. 이러한 주장과 실천에 찬물을 끼얹을 생각은 물론 추호도 없지만, 남도민속학회 회원의 한 사람으 로서 그 진지한 고민과 토론 에 끼어드는 게 허용된다면, 다음의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겠다. 하나 는, 고싸움놀이를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세계유산은 기념물이나 건조물군, 유적지 등의 이른바 유형의 부동산 이 등재 대상으로, 무형 의 62) 나경수, 광주칠석동고싸움놀이의 문화적 표상과 가치, 남도민속연구 23(남도민속학회, 2011). 63) 총 6명의 발표자 중 4명이 고싸움을 직접적으로 다뤘는데, 나경수의 의향의 문화적 표상으로서 광주칠석고싸움놀이 : 세계 무형유산으로서의 가치 점검 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의 연구 발표는 고싸움의 세계유산화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64) 주 62)와 같음, 34~43쪽. 65) 위와 같음, 44쪽. 66) 앞과 같음, 45~47쪽

100 누구의 무엇을 위한 실용 인가? 생동하는 고싸움의 경우는 거기에 당연히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2003년에 체결된 무형문화유산조약이 기왕의 세계유산조약에 대한 맹성( 猛 省 )에서 비 롯되었다는 것과 관련한다. 후자의 필요조건인 대상물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는 그것을 평가하는 전문가 집단이 주로 서구인들로 구성된 까닭에, 그 탁월한 가치를 충족시키면서 선정된 세계유산 들 또한 구조적으로 서구나 기독교문화에 편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불만과 비판이 비 서구 제국( 諸 國 )에 공유되면서, 무형문화유산조약은 문화의 다양성과 평등성을 이념적 대전제로 성립할 수 있었다. 학문적으론 말할 것도 없고 등재 전략적으로도, 고싸움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를 강조해 서는 이 대전제 를 클리어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아무튼,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왜 칠석동 옻돌마을의 고싸움놀이를 무형문화유산으로 만들려고 하는가다. 그것도 외부의 민속학이 나서서 남구청과 손을 잡고 유네스코에 등재하려 드는 까닭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나경수가 결론에서 강조한 것처럼, 문화유산을 유네스코에 등재 하는 것은 일종의 세계화 전략 이며, 결과적으로 그 대표목록 등재로 엄청난 브랜드 효과를 획득하 게 된다. 67) 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브랜드 효과 가 과연 엄청[날] 지 어떨지는 금후 지켜볼 일이겠지만, 68) 진정 민속학이 진지한 고민과 토론 으로 주제화해야 할 것은, 그것이 대체 주장을 보완하고 그들의 권위를 강화함으로써, 행정 권력이 추진하는 고싸움의 이벤트화와 세계화 에 소극적이거나 반대하는 주민들에 대해 집단적 압력의 강제력을 작동시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민속의 문화재화를 주도해온 구제 민속학, 이어 그 문화유산화에도 복무하려는 한국 민속학의 체제 화가 멈춰야 하는 까닭은 여기에도 있다. 이상, 몇 가지 사례 분석으로 한국 민속학의 실천성을 재고해보았는데, 논의의 충실성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선 마땅히 실천민속학 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 실천으로서 학 문 을 강조해온 게 다름 아닌 실천민속학 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고찰 결과를 보태 이 글의 결론 을 도출해야겠지만, 중간 마무리를 갈음하여 다음의 두 가지를 제언하며 이 발표를 마치겠다. 하나는 기왕의 주체 없는 민속 연구 에서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생활주체들의 일상 연구 로 민속학의 프레임을 전환하자는 것이다. 동시에 문화재(유산)학화 를 지양하는 민속학이 지향할 곳 은 외부의 행정 권력이 아니라 생활 현장의 다양한 주체들이며, 그들의 일상을 구성하는 미시적 현 장성에 대한 천착이야말로 오늘의 민속학이 추구해야 할 실천적 과제라는 게 다른 하나다. 이러한 잠정적 결론이 주체들의 실생활에 무용한 민속학 의 존립 근거를 재상상하는 데 작은 실마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누구의 무엇을 위한 실천인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일 것이다. 69) 이경엽의 지적처럼 고싸움놀이의 세계화는 상업적 가치의 제고나 외형적인 성대함을 얻었다고 해서 성취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70) 설령, 대표목록 등재로 세계화 가 성취되었다고 해도, 그 로 인한 인류무형유산 이라는 상징적 재화의 획득과 그 경제적 부가가치의 분배를 둘러싼 행정 권 력과 지역주민의 대립, 그리고 주민들 상호 간의 갈등이 이윽고 첨예화할 공산이 매우 크기 때문이 다. 고싸움놀이의 기능보유자 및 후계자의 선정과 고싸움보존회[의] 급증한 재정의 합리적 집행을 둘러싼 마을 내 이해 집단들 간의 내부적 갈등 71) 에 대해서는 이미 김경학이 고찰한 바 있으며, 그 러한 관계 주체들의 복수성과 다성적( 多 聲 的 ) 상황에 대한 보다 농밀한 천착이야말로 금후 민속학이 담당해야 할 중요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나경수 역시 비록 문맥은 다르지만 전승지의 지역민과 긴밀한 협력적 연구가 추진되어야 할 것 72) 이라고 말하거니와, 그 전승지의 지역민 은 물론 기능보유자들이나 보존회 임원들에 국한되는 게 아닐 터다. 그런 특권화한 일부 주민들과의 긴밀한 협력 은 김경학이 명명한 민속권력집단 73) 의 67) 앞과 같음, 48쪽. 68) 유형의 세계유산과 달리 무형 문화유산의 경우 그 브랜드 효과 가 생각만큼 엄청난 사례는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찾아 보기가 쉽지 않다. 가장 오래 전에 등재된, 게다가 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강릉단오제의 경우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 강릉단오제의 곤경 에 대해서는 남근우, 복원주의 민속학의 아이러니 : 강릉단오제 의 곤경을 중심으로, 한국민속학 52 (한국민속학, 2010) 참조. 69) 구체적으로, 지역사회의 풍요와 그곳 주민들의 생활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지역행정 권력의 정치를 위한 것인가, 그것도 아 니면 체제 지향의 민속학자들이나 관변의 민속쟁이들이 누리는 문화 권력의 기득권 유지와 확대를 위한 것인가 등이다. 70) 이경엽, 고싸움놀이의 문화재 지정과 축제화, 재맥락화, 남도민속연구 23(남도민속학회, 2011), 81쪽. 71) 김경학, 민속놀이의 문화재 지정과 축제화에 따른 갈등양상 및 탈맥락화, 민속학연구 14(국립민속박물관, 2004), 54쪽. 72) 주 62)와 같음, 48쪽. 73) 이에 관해서는 주 71)의 43~47쪽 참조

101 누구의 무엇을 위한 실용 인가? 누구의 무엇을 위한 실용 인가? 에 대한 토론문 정수진 동국대 토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발표자가 본 대회의 주제 선정 사유 에 대한 비판적 검토로부터 발표 를 시작했듯이, 토론자 역시 이 사유 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으로부터 토론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겠다. 민속 연구에만 집중하여 묵묵히 연구 그 자체만을 해 온 연구가 과연 얼마나 있었는지? 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연구 경향을 자성 하고 민속학의 실용성(민속학의 가치와 의미, 민속학의 실용과 양적 성과 에 대한 주장을 모두 포함해서)을 추구하자는 발상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민속학이 민속 연구 에 집중하여 묵묵히 연구에 몰두하는 것, 그것을 자성 하자 는 것은 곧 더 이상 학문임을 포기하자는 것이거니와, 이는 전국의 민속 학자 들이 모인 학술 대회에 내놓을 만한 공적 제안이라고 보기 어렵다. 게다가 학문임을 포기하고 실용으로 나가자고 한다면, 그것은 그나마 인문학의 엄연한 분과학문으로서 민속학이 견지해 온 존재 이유 자체를 쉽사리 폐기 하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제안 앞에서 토론자 또한 위화감과 당혹감을 지울 수 없었음을 토로하면서 발표자에게 몇 가지 질문을 드리는 것으로 토론을 갈음하겠다. 1. 이 대회의 기획위원회가 이런 제안을 한 데에는 대중들의 냉랭한 반응 이 설마 그리 큰 문제 였을 리 없고, 오히려 대학의 한 학과로서 민속학과가 처한 위기 문제가 더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 라고 짐작된다. 민속학과가 축소되고 학문 자체의 재생산이 어려워졌을 뿐더러, 민속학과를 졸업하 더라도 생계가 보장되지 않는 오늘의 현실 문제가 민속학의 실용 추구를 제안한 배경으로 보이는바, 발표를 통해 확인했듯이 이 문제는 오늘날 인문학 전반이 처한 위기 (?)와는 다른 차원에서 재고해 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발표자는 민속학(자)이 식민지기부터 현재까지 줄곧 체제지향적인 실천 을 거듭해왔다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실천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과가 초래된 이유 는 무엇인지? 발표자의 고견을 여쭙고 싶다. 발표자가 추구하는 실천민속학 에 대한 비판적 성찰 (15쪽)의 내용은 무엇인지 개괄적으로나마 보 충적인 설명을 부탁드린다 년대 새마을운동과 관련해서 민속학의 역할 을 주제로 내걸었던 토론회는 그간 주목되지 않았던 대목으로 매우 흥미롭다. 다만, 토론자는 이 토론회에서 제기된 논점들이 민속자료의 보존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쪽과, 내버려 두면 민중이 자기가 알아서 [하] 므로, 없어지면 그것[도] 민속의 운명 (8쪽)이라고 주장하는 쪽으로 양분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최길성은 사회적 기능과 관련된 설 명을 바탕으로 특정한 신앙을 미신으로 치부해서 인위적으로 파괴하거나 조성하는 행위 자체를 지 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민속학 전국대회 토론회 ( 한국민속학 5, 1972), 130쪽) 황 패강 또한 발표자가 인용한 글 앞에서 민중이 가지고 있는 상태로 내버려두어야 한다 (위의 글, 132 쪽)는 점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따라서 황패강과 김태곤, 그리고 최길성까지도 민속자료의 보존만 을 강조하는 입장과 달리 민중 문화로서 민속에 인위적으로 개입해서 그것을 미신 이라는 미명으로 자의적으로 평가하거나, 조성, 파괴하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 공히 비판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문제는 중요한데, 이들의 주장 또한 당대의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적 개입이고 또한 학문적 실천 이라고 보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그들의 주장을 미발 에 그친 현재학 으로만 평가하 는 이유를 좀 더 설명해주셨으면 한다. 4. 마지막으로 생활주체들의 일상을 구성하는 미시적 현장성에 대한 천착이야말로 오늘의 민속학 이 추구해야 할 실천 적 과제 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이 결국은 주체들의 실생활에 무용한 민속학 의 존립 근거를 재상상하는 데 실마리가 될 수 있기를 (15쪽) 바란다고 기술했다. 결국, 민속학의 실 천 이라는 것은 주체들의 실생활에는 무용 한 것임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한지, 만약 그렇 다면 학문의 실천과 실생활의 유용성은 서로 무관한 것이라고 이해해도 되는지 고견을 여쭙고 싶다. 2. 준비 기간의 부족 때문인지, 사안의 중요성 때문인지 실천민속학 에 대한 검토가 생략되어 있 다. 발표자가 지적한 것처럼 실천민속학회야말로 실천으로서의 학문 (15쪽)을 강조해왔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다. 다만, 실천민속학회가 표방하는 실천 과 오늘의 학술대회가 내세우고 있는 실용 은 차이가 크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실천민속학회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임재해의 경우 민속학이 민중문화에 대한 연구라는 점에서 민속학의 계급적(계층적) 특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임재 해, 마을민속 연구와 인문학문의 길 ( 민속연구 19, 2009, 64쪽) 이에 대한 발표자의 의견과 함께,

102 누구의 무엇을 위한 실용 인가? 누구의 무엇을 위한 실용 인가? 에 대한 토론문 이경엽 목포대 단락에서 제언한 생활 주체들의 일상 연구 나 다양한 주체들의 일상을 구성하는 미시적 현장성에 대한 천착 은, 앞선 여러 주장과 상관없이도 나올 수 있는 의견이고, 인문사회학계에 이미 일반화돼 있는 논점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이것을 잠정적 결론 이라고 한 것에 대해 솔직히 허전하다는 느낌 을 받게 된다. 쟁점을 뚜렷하게 내세웠지만 그 때문에 논의 구도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든다. 발표자는, 소멸의 내러티브에 기초한 구제 민속학(과거학)-민속자료의 무형문화재화와 민속 남근우 선생님의 발표는 논지가 분명하고 쟁점 또한 뚜렷하다. 1장에 잘 드러나 있듯이, 실용과 성과주의 시대의 민속학 이란 주제를 내건 한국민속학자대회 기획위원회의 취지문에 대해 위화와 자괴감 을 표시하고, 제대로 된 자성 이 필요하다는 입장에서 한국 민속학이 추구해온 실천적인 논 의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발표문에서는 학계의 여러 동향에 대해 비판적인 검토를 하고 있다. 많은 이들에게 자극을 줄 만한 통렬한 지적도 마다하지 않는다. 어떤 부분에서는 토론자 역시 그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학계의 아픈 부분을 지적하고 있기도 한데 그런 논의들을 회피하지 않고 근원부터 차근차근 따지고 방향을 찾는다면 새로운 에너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도발적이면서 도 논리적으로, 논거에 의거해서 합리적으로 시의적절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글의 목적 이 민속학의 존립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데 있음을 표방한 만큼 생산적으로 수용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토론자가 발표문에 대해 갖고 있는 전체적인 의견이다. 하지만 이견도 있다. 토론자 의 소임을 생각해서 후자를 중심으로 토론하고자 한다. 전체적으로 명쾌한 논지를 펴고 있으나 비판의 강도에 비해 제언이 형식적이고 구체성이 약하다 고 생각한다. 민속학이 과거학에서 탈피하고 현재학으로 거듭나야 하고, 한국 민속학이 처한 상황 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당연한 말이다. 당위성에 공감한다. 하지만 실질적인 논의가 빠 져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발표자의 모든 논의가 비판 대상에 기대고 있어서 발표자 스스로가 확보한 논의의 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비판 대상이 없으면 안 될 만큼 전적으로 기존 논의의 행적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발표자는 이미 수년 전부터 이번 발표와 비슷 한 논지의 글을 발표(중요성과 심각성으로 볼 때 지속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함)하고 있는데, 논평 위주의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이번 발표 역시 기존 논의에 기댄 비판 방식을 취하고 있다. 한편 논평 위주의 주장은 발표자의 표현처럼 실마리 로는 충분하지만 더 이상의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 것 같다. 그 다음 논의가 마련돼야 파급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파급과 확장은 논평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경기의 관전자나 논평자가 아닌 선수로서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민속 현장의 실상들을 직접 다루고 생활주체의 삶과 일상을 직접 연구하면 서 현재학으로서의 민속학의 입지와 그 실천 방안들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논문의 마지막 을 주체로부터 박리시킨 체제화 를 한국 민속학의 주도적인 흐름이라고 하고서 그에 대한 문제점 을 집중적으로 캐묻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대안이고 실천적인 과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앞서 얘기한 대로 일정 부분 공감한다. 그런데 한국 민속학의 미래가, 발표자가 대립 구도로 설정한 이 틀에서만 찾아진다고 제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특히 현재학으로서의 민속학의 지평이 제대로 제시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발표자가 언급한 구도 이외에, 민속학의 존립 근거를 모색하고자 하는 논의의 시발점 또는 귀착점을 더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대사회의 복잡성이나 민속 전승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현재학을 지향한다 는 큰 틀의 방향성을 세워두되 세부적으로는 약간 다른 입장들이 놓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승력 이 위축돼가는 민속자료를 적극적으로 수집하는 것과 생활주체들의 일상을 연구 하는 것이 충돌된 다고 보지 않는다. 전자를 두고 민속을 잔존문화로 여긴다고 하거나, 소멸 이야기에 토대를 둔 구제 민속학이라고 무조건 딱지 붙일 수는 없다. 얘기를 편하게 하기 위해 토론자의 예를 든다면, 토론자 의 경우 옛날 자료를 찾는데 관심이 많고 현행되지 않고 기억에만 남아 있는 자료라도 구술채록을 해서 재구성하고자 노력하는 편이다. 물론 그것을 전승주체의 삶과 괴리시켜 자료화하지는 않는다. 또한 누군가의 논의에서는 古 俗 의 편린이라고 언급하는 무속신앙의 역사성과 현재적 양상 모두에 관심을 갖는다. 무속이 오래된 종교 전통에 그치지 않고 전승주체의 다양한 관계나 삶을 담고 있는 매개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형문화재 지정과 관련된 조사에 참여하기도 하고, 생활주 체가 펼치는 지역문화운동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그런 기획에 개입하기도 한다. 전자의 일을 한다고 해서 관에 복무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때론 엉뚱하게 논에 다시 들어가 들소리를 재현할 것 을 제안하고 무농약 농산물 판매와 연관된 친환경 생태주의를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이럴 땐 전승 주체의 의지나 현실적인 문제를 의식하기 마련이다. 토론자는 이런 식으로 소멸돼가는 민속자료 수 집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고, 살아 있는 굿판이라면 더욱 집중해서 주목하고, 경우에 따라 지역 풍물패의 문화운동이나 축제 기획 등에 일정 부분 개입하기도 한다. 다른 민속학자의 경우라면 물론 다른 방식으로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민속학의 실천성은 기치를 들어 표방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례 속에 서 점검해야할 쟁점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 사례별 방향이 적절한지 미흡한지 따져 묻고 지향점을

103 새롭게 모색하는 게 훨씬 더 생산적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민속학의 온전한 실천성 제고를 위해 서는 학자와 생활주체와의 소통이 활성화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중요한 실천 의지를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학자들끼리의 논의에 그친다면 누구를 위한 실용인가에 대한 답이 궁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의 무엇을 위한 실용 과 더불어,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라는 문제도 새롭게 환기할 주제라고 생각한다. 경남의 지역 민속 발표 1 경남 합천 율지리의 마을공간변화와 주거유형 발표 박선주 국립민속박물관 토론 노용석 부산외국어대학교 발표 2 심청굿의 전승과 확산 발표 윤동환 고려대학교 토론 홍태한 중앙대학교 발표 3 파독 광부 간호여성의 이주와 역이주 -남해독일마을을 통해 본 파독근로자에 대한 재조명- 발표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토론 이은정 영남대학교 발표 4 경남음식의 근대성 : 마산과 진주를 중심으로 발표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토론 유장근 경남대학교 204

104 경남 합천 율지리의 마을공간변화와 주거유형 2013 한국민속학자대회 경남 합천 율지리의 마을공간변화와 주거유형 박선주 국립민속박물관 목차 1. 머리말 2. 조사지 개관 3. 마을 공간 변화 4. 주거문화 5. 맺음말 1. 머리말 본고는 국립민속박물관과 경상남도가 공동으로 주관한 경남민속문화의 해 사업의 일환으로 2012 년 마을민속조사가 이루어졌던 경상남도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에서의 조사 내용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조사자들은 마을내에 10여 개월을 체류하면서 마을 내의 일상, 비일상을 기록하고 과거의 모습 을 주민들과의 면담과 사진, 문헌 자료 등을 통해 정리하여 2013년 7월 보고서로 발간하였다. 여기서는 보고서의 내용 중 두 분야에 초점을 맞추어 언급해 보고자 한다. 그 첫 번째는 193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이유로 급속한 변화를 겪어온 율지리의 마을 공간 구성이다. 이는 율지리 의 근현대사를 대변하는 과정이라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완 전히 폐허가 되었던 땅 위에 새로운 삶을 일궈가기 위해 지어진 가옥들의 모습을 조명해 보고자 한 다. 집이라고 하는 것은 그 형식과 구성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삶의 모습 이 투영된 것이기 때문에 새롭게 지어지는 가옥 속에서 율지 사람들의 과거 주거문화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고 또한 그것이 현재에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확인해 보고자 함이다. 207

105 경남 합천 율지리의 마을공간변화와 주거유형 2. 조사지 개관 1) 인문지리적 환경 합천군은 경상남도의 북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남부로는 창녕군, 의령군과 서부로는 거창, 산 청군과 접하며, 북으로는 경상북도 고령, 성주군에 접하고 있다. 합천군의 지형적인 특징은 수계( 水 系 )와 산계( 山 系 )의 발달로 형성된 빼어난 자연환경을 복합적으로 표현한 水 려한 합천 에서 잘 나타 난다. 합천군은 전체 면적의 약 75%가 임야로 북쪽의 가야산을 비롯하여 서쪽으로는 비계산, 두무 산, 오도산이 남쪽으로는 황매산이 둘러싸고 있다. 이러한 험준한 산맥 사이로 합천군을 서에서 동 으로 가로지르는 황강과 합천댐 준공으로 생겨난 합천호, 합천군 덕곡면을 따라 흐르는 회천과 창녕 군과의 군계를 따라 흐르는 낙동강이 대표적인 수계를 형성한다. 이 강들이 만들어 놓은 비옥한 평 야는 과거부터 합천군민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다. 조사지인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는 앞서 말한 합천군의 지형적인 특징인 산계와 수계가 축소 형상 처럼 보인다. 덕곡면의 북부는 고령군, 서부는 쌍책면, 남부는 청덕면과 맞닿아 있으면서 각 면계는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동부는 회천과 낙동강이 흘러 창녕군, 고령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산악지형으로 둘러싸여 있는 덕곡면은 합천에서 가장 접근하기 힘든 오지가 되었으며, 과거 덕곡면민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은 낙동강을 통한 교류였다. 이러한 소통의 중심 에 율지리가 있었다. 율지리는 낙동강과 맞닿은 덕곡면의 최동단에 위치하고 있다. 회천과 낙동강의 합류지점에 위치 한 이 마을은 과거부터 물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다. 20세기 초반 율지나루가 낙동강의 주 요 포구 중 하나였던 시기에 이 마을은 지역 상권의 중심지 기능을 수행했다. 마을 내에는 수많은 식당과 여관들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인파로 북적였다. 하지만 육로의 발달로 인해 점차 율지나루가 포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해갔다. 그로 인해 부산에서 소금과 게젓 등의 특산품을 싣고 올라오던 상선 은 사라졌다. 하지만 낙동강을 가로질러 사람들을 실어 날랐던 배는 계속 운행되어 교통의 중심지로 서의 율지리가 부각되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치열했던 낙동강 전투의 여파로 마을이 전소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피난을 갔던 다수의 주민들은 고향을 잃고 외지로 나갔으며 남은 사람들은 힘 을 모아 마을을 재건했다. 고향을 지키던 사람들은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해갔다. 낙 동강이 만들어 준 비옥한 평야와 풍부한 수산물은 그들의 삶의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강은 그들에 게 수마로 다가오기도 했다. 잦은 홍수로 인해 그들이 경작한 농작물은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일 이 빈번했고, 마을이 침수되어 대피하는 일도 잦았다. 그들은 수마로부터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제방을 쌓았고,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다리를 건설하였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안정적인 농경으로 환 금작물인 마늘과 양파를 재배하여 농가들이 고소득을 올리는 마을로 거듭났다. <사진 1>율지리의 항공사진 모습 (출처 : <그림 1>율지리의 경계와 주변 지도 이처럼 율지리는 수계와 관련하여 다양한 변화를 겪으며 지금의 마을을 형성했다. 마을의 문화지 리적인 환경이 변화될 때마다 사람들은 그에 알맞게 적응을 해야 했다. 계속된 변화와 그에 따른 적응은 마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적응에 실패한 마을 구성원은 마을을 떠났으며, 새로운 환경을 찾아온 외부인들이 그 빈자리를 메꾸었다. 이러한 과정이 지속되면서 마을의 문화적 경관이 크게 변화했다. 율지리는 수계와 인접했기 때문에 타 마을에 비해 변화의 정도가 심했다. 그래서 현재 율지리의 모습에서는 27가구 45명의 사람 1) 이 사는 조용한 농촌마을로 보여질 뿐 과거 포구마을로 1) 2012년 9월 21일자 덕곡면 율지리의 행정 상 인구현황은 53가구 82명이다. 이 가구 수에는 율지리에서 상주 하며 근무하는 면사무소를 비롯한 여러 행정기관의 직원들이 개별 호수로 포함된 수치다. 그리고 마을을 떠났지만 아직까지 호적을 이곳에 두고 있는 사람들도 개별 호수로 잡혀있다. 그래서 현지조사를 통해 실제 거주인구를 조사해본 결과 27가구 45명의 인구조사

106 경남 합천 율지리의 마을공간변화와 주거유형 서의 번영은 찾아보기 힘들다. 합천군에서 가장 작은 면인 덕곡면, 덕곡면에서도 가장 작은 마을인 율지리를 겉으로만 훑어보면 침체되어있고, 고령화된 인구로 인하여 해체되기 시작한 마을로 보여진다. 하지만 그 속을 들려다 보면 그들은 아직까지도 변화하는 외보 환경에 적응하려고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 또한 적은 인구 수를 보안하기 위해 면단위의 사회조직을 구성해 활동하며 서로간의 결집력을 높이려는 여러 시도 를 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2) 역사적 기록 인해 율지리는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이처럼 유동인구의 증가는 율지리의 상권 발전을 야기했 다. 당시 율지리의 상권을 구성하던 대표적인 직종은 요식업과 숙박업으로 마을에는 수많은 식당과 여관이 성황리에 운영되었다. 당시 이러한 율지리의 모습은 합천군지 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글에 의하면 당시 율지리의 가구 수는 800호에 다다랐으며, 나루에는 크고 작은 10여척의 선박이 항시 정박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루터의 주막집에서는 10여개의 큰 가마솥에서 항상 국밥을 끓이고 있었으며, 도축을 전문적으로 하는 업소에서는 평일 소 2마리 장날 소 5마리를 잡았다고 한다. 5) 2011년도 기준 덕곡면의 전체 인구가 1,004명인 것을 감안하면, 6) 당시 율지리와 율지장의 규모가 굉장히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경상남도 합천군 덕곡면의 면소재지인 율지리는 마을이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발전해 나갔 는지를 기록하고 있는 자료가 전무한 지역이다. 또한 지역적인 특성으로 인한 잦은 수해와 한국전쟁 으로 인한 마을의 전소의 피해로 인해 율지리에 대한 근대의 기록들이 소실되기도 했다. 그래서 단 지 문헌이나 현재 남아있는 일부 자료를 통해서 율지리의 과거상을 되짚어 나간다는 것은 단편적인 추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1950년대 한국전쟁을 기준으로 하여 그 이전 시기의 경우 문헌을 중심으로, 그 이후의 시기는 사진자료 및 구술 자료를 중심으로 마을의 변화상을 살펴보았다. (1) 지역 상권의 중심지 율지리가 문헌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1830년대로, 1980년대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林 園 十 六 志 와 1832년에 편찬된 慶 尙 道 邑 志 에서 栗 旨 場 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율지리가 아닌 율지장 이 문헌에 우선적으로 언급된 이유는 마을에 있었던 율지나루 때문이다. 2) 율지나루는 율지리 남쪽 낙동강에 인접해 있던 나루터로, 그 형성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1930 년대까지 지역 수상 물류운송의 중심지의 기능을 수행했던 낙동강의 주요한 나루중 하나였다. 율지 나루를 운행했던 배들은 주로 부산에서 게젓과 소금 등을 싣고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던 상선이었 다. 선주들은 배에 싣고 온 소금과 게젓을 지역 상인들에게 판매하고, 그 돈으로 쌀과 보리 등의 곡식을 산 다음 부산을 내려갔다. 이러한 상행위의 결과로 율지리와 율지장은 지역상권을 대표하는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과거 율지장 3) 은 1일과 6일에 장이 서는 오일장의 형태였다. 마을 주민들의 제보에 따르면 과거 율지장날이 되면 진등재 4) 를 넘어오는 행렬로 인해 산길이 한복을 입은 사람들로 인해 희게 보였다 고 한다. 이처럼 선단에서 일을 하던 노동자들과 더불어, 장을 보기 위해 율지리에 몰려든 인파들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2) 이영기, 草 溪 대광대( 竹 廣 大 ) 탈놀이 (합천문화원, 2001), 25쪽, 재인용. 3) 율지장이 서던 곳은 현재 문화 역사마을 선정기념 조형물이 있는 곳으로 비어 있는 채 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4) 청덕면 소례리와 합천군 덕곡면을 이어주는 고개길의 명칭이다. 과거에는 덕곡면을 타 지역으로 이어주는 주요 도로인 1034 번 지방도가 건설되지 않아, 진등재가 주요한 육로로 사용되었다. <그림 2>낙동강 나루와 주막 (출처 : naver 지식백과, 정치/ 경제 / 생업, 나루와 주막) 수륙 물류운송의 중심지의 기능을 하던 율지리는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점차 그 역할이 약화되기 시작한다. 일제강점기 효율적인 식민 지배를 위해 일제가 건설한 신작로와 철도의 등장으로 물길을 통한 운송의 비중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육상교통의 발전으로 인해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던 상선 들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고, 1930년대가 되어 율지리에서는 더 이상 상선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930년대 이후 율지나루는 물류운송의 거점 기능은 상실했지만 마을주민들이 외지와 소통할 수 있는 강나루로써의 역할은 계속 이어졌다. 이는 덕곡면의 자연지리적인 특성에 기인한 결과이다. 앞선 말했던 바와 같이 덕곡면의 면계는 험준한 산맥과 강으로 가로막혀 있다. 그래서 다른 지역으로 가기 5) 합천군, 합천군지 (1995), 쪽. 6) 합천군, 2011년 통계연보 (2012), 66쪽

107 경남 합천 율지리의 마을공간변화와 주거유형 위해서는 진등재를 넘거나 혹은 낙동강을 건너야 한다. 고개를 넘는 것 보다는 강을 건너는 것이 수고를 줄이는 방법이었기 때문에 덕곡면민들은 율지나루에서 운행하던 나룻배를 타고 타 지역으로 나갔다. 이처럼 율지리는 교통의 중심지로 부각되어 많은 유동인구가 들고 났으며, 동시에 면소재지로 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상권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덕곡면의 타 마을에 비해 규모가 축소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율지리 주민들의 소득감소로 이어졌다. 그들은 상업 중심의 마을에서 주변에 넓게 펼쳐진 농지에 그들의 삶을 기댈 수 밖에 없다는 결정을 하고, 이와 때를 맞춰 시작된 국가 주도의 경지 정리 사업과 제방공사로 새로운 생계의 수단을 찾아 나섰다. (2) 한국전쟁과 마을의 재건 율지리는 1950년까지 작은 농촌 마을임과 동시에 상권의 중심지, 그리고 교통의 요지로서의 기능 을 수행해 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해 한순간에 자취를 감추게 된다. 율지리는 낙동강 도하가 가능한 나루가 있는 마을로, 전쟁 때 군사적 요충지였다.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8월에서 9월 사이에 벌어진 낙동강전투에서, 밀려드는 중공군을 막아내기 위해 한미연합군 은 마을에 대해 폭격을 감행했다. 율지리는 나루가 있던 마을이었기 때문에 이 폭격 대상에 포함되 었다. 그 결과 마을의 95채 가옥 중 93채가 전소되었다고 한다. 낙동강 전투가 끝나고 전선이 북상한 이후 마을 사람들은 다시 마을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의 걸림돌이 된 것은 북한군의 지속적인 공격이었다. 대치 전선이 북상했지만, 지형지세가 험준한 곳에 매복하고 있던 북한군의 기습적인 공격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낙동강 전투 이후에도 창녕군에 진지를 구축한 한미연합군은 북한군의 잔당을 소통하기 위하여 다남산 자락을 대상으로 하여 지속적인 포격을 감행했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주민들은 마을의 재건에 힘을 쏟았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떠난 상태였지만, 남은 이들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마을의 재건은 경관을 바꾸어 놓는 시작점이 되었다. 이는 가옥의 형태변화에서 가장 먼저 찾아볼 수 있었다. 한국전쟁 이전 마을내 대부분의 집들은 초가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전쟁이후에는 일부에서 기와집들이 지어지기 시작 했다. 토착민과 이주민들의 노력으로 마을은 재건되었지만, 더 이상 율지리는 과거의 영광을 가진 마을이 아니었다. 1960년대에 들어 시작된 이촌향도 현상은 마을 주민들의 수를 감소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낙동강 의 잦은 범람은 농사를 기반으로 살아가던 율지리 주민들의 생활고를 가중시켰다. 그래서 많은 이들 이 마을에 정착하지 못해 떠나갔으며 그들의 빈자리는 새로운 이주민들이 대신했다. 이러한 마을의 불안정한 상황은 율지장의 사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율지장은 한국전쟁 이후 마을을 재건하는 기간 동안은 활성화 되었지만, 1960년대에 접어들며 그 규모가 대폭 축소되기 시작했다. 원인은 앞서 언급한 인구의 감소와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다. 덕곡 면의 인구가 감소하자 율지장을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었고, 율지장에서 고정적으로 물건을 판매하 던 나이든 상인들만이 명맥을 유지하다 결국 1967년 폐쇄되었다. 율지나루가 물류운송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고 율지장마저 폐쇄되자, 더 이상 율지리는 지역 상 권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상권이 붕괴되자 상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주민들이 모두 타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렇게 인구의 이주가 가속화되자 율지리는 면소재지라는 특징 3. 마을 공간 변화 1) 사진 기록 속의 율지 마을 주민들이 간직하고 있는 과거의 사진들 속에서 지금과는 다른 율지의 모습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전쟁의 피해로 인해 현존하는 자료들의 수가 극히 작고 또한 상태가 좋지 않아 정밀한 판단이 어려운 부분도 있다. 그러나 마을 공간 변화의 가장 큰 원인이 제방 축조와 율지교의 건설에 의해 이루어졌음은 분명히 보인다. (1) 제방의 축조 가난한 농촌마을인 율지리가 부촌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은 제방축조사업이었다. 율 지리는 비옥한 농토를 가지고 있었지만 빈번히 발행하는 수해로 인해 힘들여 키워놓은 경작물의 대 부분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잦았다. 그래서 쌀과 보리와 같은 일반적인 곡식을 먹기보다는 피죽이나 무밥과 같은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이 대다수였다. 율지리에서 태어난 여자들은 당시의 가난한 상황을 시집가기 전까지 쌀 3되를 먹기 힘들다. 라는 말로 비유하는 것을 통해서도, 제방이 축조되 기 이전 이들이 얼마나 가난한 생활을 이어갔는지를 알 수 있다. <사진 2>는 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온 아낙네들이 강변 백사장인 백구마당을 지나 마을로 들어 가는 모습이 담겨 있다. 이렇게 제방이 없었던 시절 강이 범람하면 율지리는 바로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진 2> 백구마당을 통해 마을로 들어가는 아낙네들(1960년대 초반 추정)

108 경남 합천 율지리의 마을공간변화와 주거유형 <사진 3>은 1960년대 후반 율지나루의 경관을 가장 잘 나타내는 사진이다. 이 시기는 앞서 <사진 2>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던 기본적인 제방이 완성되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 서 예전보다는 강변 백사장의 면적이 줄어들고 정비가 되었다. 낙동강을 건너는 배가 닿기 편리하도 록 접안 시설이 되어 있으며, 그 주변에는 빨래를 하는 모습, 물동이를 들고 물을 길으러 나오는 마을 주민, 마을을 향해 걸어 들어가고 있는 여인과 아이들의 모습 등이 보인다. 아직 완공되지 않은 제방 너머에 세워진 집들의 지붕도 앞서의 사진과는 다르게 기와를 이은 예도 보인다. 율지나루로 들어오던 상선의 운송이 중지되면서 나루는 북적이는 모습을 찾아 볼 수는 없지만 여전히 마을과 외부를 잇는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자 주민들에게는 공동생활공간으로도 함께 이용되고 있었다. <사진 4>에서 주민들이 청소를 하고 있는 이 길은 제방과 맞닿아 있는 부분으로 율지나루 및 낙동 강과 이어지는 길이다. 현재 이 길은 약 5m 가량 높이의 제방으로 가로 막혀져, 이 제방을 올라가야 낙동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이 사진을 통해 보면 마을길의 높이보다 제방의 높이가 낮아 마 을 내에서 강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초기의 제방은 수해를 완벽하게 방지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마을은 여전히 이 길을 따라 외부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진 5>의 현재 모습에서 보듯이 지금은 같은 길이지만 이곳은 이제 높게 쌓여진 제방으로 인해 더 이상 뚫린 통로가 아니다. 이러한 변화는 마을 공간의 성격을 바뀌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 던 중 더 이상 수해의 피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에 관리하는 데는 신경을 쓰지 않아 큰 홍수로 제방이 터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보수과정에서 기존 보다 제방을 더 높게 쌓고 제방 관리위원회 를 만들어 체계적인 유지 관리에 들어갔다. 현재의 제방은 이렇게 하여 마을의 안공간을 완전한 안전지대로 만들었지만 강과 맞닿아 있던 과거의 모습은 마을속에 들어와서는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사진 3> 낙동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율지리의 전경(1960년대 후반 추정) 제방의 축조는 국가사업의 일환으로 건설되었다. 1962년부터 1981년까지 계속된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는 낙동강 인근 마을 농경을 보호하기 위한 제방 축조사업이 포함되어있었다. 율지리도 여기에 포함되어 1963년부터 제방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이 제방의 축조는 3차례에 걸쳐 다년간 진행되는데, 1963년에 시작된 제방의 축조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였다. 이는 다음의 사진을 <사진 6> 강변을 제방으로 둘러싼 율지마을의 현재 전경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제방의 형성과 관리로 인해 농경생활이 안정되자 마을 주민들의 부가 증대되기 시작했으며, 이를 통해 수익을 창출할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다. 그 결과 주민들은 1980년대 중반부터 마늘과 양파를 전문적으로 경작하기 시작했다. 현재 이 두 작물은 고소득 작물로 자리 잡아 덕곡면민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1980년대 초반까지 삼시세끼를 먹는 것조차 힘들었던 마을 이, 제방의 축조와 마늘 양파의 경작 성공으로 인해 가구당 연간 수익 1억 이상의 마을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사진 4> 나루로 이어지는 마을길(1970년 초반) <사진 5> 나루로 이어지는 마을길(현재) (2) 율지교의 건설과 율지나루의 소멸 1930년대 중반 율지나루가 가지는 수상 물류운송의 기능은 사라졌지만, 1970년대 것으로 추정되 는<사진 7>와 <사진 8>에서 보듯이 이때까지도 마을 주민들은 나루를 이용해 외부로 나들었음을

109 경남 합천 율지리의 마을공간변화와 주거유형 백사장의 모습이다. 현재는 창녕 합천보의 건설로 인해 낙동강의 수심이 깊어져 사진에서 보이는 백사장은 모두 물에 잠기게 되었다. 하지만 이 사진에는 이러한 백사장의 모습이 모두 나타나있다. 세 번째로 율지나루의 마지막 모습이다. 사진에서 제방 아래로 난 길을 따라 나루로 가는 길이 있으 며, 배가 정박할 수 있도록 콘크리트로 나루를 만든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보이는 이 나루가 율지나루의 마지막 모습이다. 율지교가 완공됨에 따라 이 나루는 물에 잠기게 되었고 자연스레 부식 되어 사라졌다. 율지교가 건설되자 율지리는 대구, 창녕, 고령, 합천과 육로로 한 시간 이내에 이동할 수 있는 곳 <사진 7> 낙동강을 건너는 인도선 <사진 8> 낙동강을 건너는 인도선 알 수 있다. 특히 아침 저녁 등하교길의 학생들에게 배는 없어서는 안되는 교통수단이었다. 이러한 역할은 80년대까지도 지속적으로 이어져 갔다. 이 배의 운행은 1980년대까지 활발히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 1034번 지방도가 확장 증축되 자, 덕곡면 사람들은 고령으로의 육로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육로의 발달은 수로의 쇠퇴를 가지고 왔다. 이렇게 쇠퇴해 가던 율지나루가 사라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율지교의 건설이다. 덕곡면은 낙동강과 험준한 산에 가로막혀 고립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면민들은 이를 개선 하기 위해 행정기관에 수차례 민원을 제기했고, 그 결과 1995년 율지교를 착공하기에 이른다. 율지 교 건설 공사는 4년간 진행되었으며, 1999년 6월 1일에 개통되었다. 율지교가 건설됨에 따라 율지나 으로 바뀌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의 생활권도 이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편리해진 교통 때문에 마을을 떠났던 고향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침체되어 있던 율지리가 활성화되는 계기를 맞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율지리 주민들을 포함하여 덕곡면민들은 도리어 마을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대구 교외의 경우 대도시와 인접하고 있어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여건 도 좋으며, 생계 수단인 농업을 계속해 나가는 데도 별 다른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재 덕곡면의 청장년층의 일부는 대구에 거주지를 둔 상태에서 율지리를 오가며 농사를 짓고 있다. 그래 서 율지리에 형성된 상권도 큰 타격을 받았다. 교통이 편리해지자 율지리에 위치한 음식점이나 상가 를 이용하기보다는 가까운 고령이나 이방면을 이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율지교는 율지 리를 세상과 이어주었지만, 실제로는 세상과 더욱 고립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루는 폐쇄되었다. <사진 10> 율지교 전경-율지에서 창녕 쪽을 바라 본 모습 <사진 9> 건설 중인 율지교의 모습 <사진 9>는 낙동강 건너인 창녕군 이방면에서 율지리를 바라보고 찍은 율지교의 건설 사진이다. 이 사진은 많은 사실을 전달해준다. 첫 번째로 1990년대 율지리의 제방 모습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제방의 모습은 현재와 거의 유사하며, 과거에 비해 높아지고 견고해 진 것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사진 11> 율지교 전경-창녕에서 율지 쪽을 바라 본 모습

110 경남 합천 율지리의 마을공간변화와 주거유형 2) 현재의 마을 모습 현재 율지리는 <그림 3>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덕곡면 면소재지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다양한 공공기관을 비롯하여 편의시설, 상업시설 등이 마을 내에 위치하고 있다. 범례와 함께 제시된 아래 의 그림은 마을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가 행정, 상업, 주거영역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 한 각각의 영역은 마을로 진출입하거나 내부를 관통하는 4개의 길로 연결되어 있다. 편의상 줄여서 칭하는 말이다. 4번 도로는 율지교를 지나면서 낙동강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율지리 의 서쪽을 지나다가, 율지리 마을 어귀에서 북서쪽으로 꺾여 덕곡면을 동서로 가로질러 합천읍으로 향한다. 이 도로를 통행하는 주요 버스는 고령과 창녕행 버스다. 과거 개인 소유 차량이 흔치 않은 시절에는 매일 버스가 다녔지만, 이용객이 줄면서 장날에만 오전 오후 두 번 운행한다. 율지리 주민 들은 버스나 자가용을 타고 이 길을 통해 타 지역으로 오가는 생활에 이제 익숙해졌다. 4번 도로는 외부와의 소통로이자 주요한 농로이다. 4번 도로 중 덕곡면을 관통하는 오광대로의 양옆에는 덕곡면민의 생활 터전인 논과 밭이 펼쳐져 있다. 그래서 많은 농민들이 이 도로를 따라 농기계를 가지고 논으로 향하며 마늘과 양파 농사에 소요되는 노동력, 즉 고용된 인부들도 이 길을 따라서 각자의 논으로 향한다. 또한 이곳에서 출하된 농산물도 이 도로를 통해 출하된다. 이러한 4번 도로의 특성으로 인하여 이 길 주변에는 마늘 가공 공장인 덕곡농산물산지유통센터와 덕곡농기계가 위치하고 있다. 덕곡농산물산지유통센터에서는 매일 10여톤의 가공 마늘을 출하하기 때문에 도로와 인접해 있어야 하며, 수매한 마늘을 저장창고로 넣기 위해서는 차들이 쉽게 오갈 넓 은 장소가 필요하다. 율지리 마을 어귀에서 4번 도로는 율지리 마을 내부로 통하는 율지 1길과 만난다. 율지 1길은 마 을 어귀에서 율지포두길과 율지 2길로 분화된다. 율지포두길은 율지리와 율지리 북쪽에 위치한 포 두리, 개독리, 학리, 북동을 이어주는 길이다. 4번 도로가 타 지역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길이라 면, 율지포두길은 율지리 주민들과 덕곡면민들을 이어주는 길임과 동시에 농업을 위한 길이다. <그림 3> 율지리 공간 구성 요소들 <사진 13> 율지마을에서 이어지는 율지포두길 <사진 12> 율지교에서 이어지는 4번 도로 분기점-우측 방향이 율지마을 첫 번째는 외부 세상과 소통의 중심이 되는 4번 도로이다. 이는 마을 주민들이 1034번 지방도 7) 를 율지리 북쪽에 위치한 평야는 경지정리를 통해 구간별로 구획되어 있으며 각 구획 당 하나의 농로 가 논을 꿰뚫는다. 율지포두길이 율지리에서 북동에 이르기 까지 총 13개의 농로가 이 길과 맞닿아있 7) 1034번 지방도는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과 거창군 남상면, 신원면, 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 합천읍, 율곡면, 쌍책면, 덕곡면 을 거쳐 창녕군 이방면, 대합면, 성산면을 잇는 경상남도의 지방도이다. 근래에 들어 길을 중심으로 한 새주소명이 생겨나면 서 1034번 지방도가 지역별 구간에 따라 명칭이 분화되었다. 그 중 율지리를 포함하여 덕곡면을 관통하는 즉, 율지교에서 합천군 쌍책면 사양리에 이르는 1034번 국도의 이름은 오광대로이다. 하지만 지역민에게는 오광대로 보다는 오랫동안 사용되 던 4번 도로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다

111 경남 합천 율지리의 마을공간변화와 주거유형 다. 그래서 율지리를 비롯하여 인근 지역에서 농사를 짓는 이들은 이 길을 통해 논과 밭으로 간다. 4번 도로와 율지포두길에는 주민들의 농업과 관련한 일부의 구성요소들이 위치하고 있는 반면 율지 1길과 2길에는 율지리가 면소재지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행정기관을 비롯하여 여러 편의시 설과 주민들의 주거 공간이 펼쳐져있다. 율지 1길은 4번 도로에서 분기하여 율지리 마을 내부를 남 북으로 가로질러 남쪽에 위치한 제방과 맞닿아 길이 끝난다. 마을 어귀에서 마을로 진입하면 전면에 보이는 신작로가 바로 율지 1길이며, 이 길에는 식당, 구멍가게 등이 있어 매우 소규모이긴 하지만 상업 영역이 형성되어 있다. <사진 16> 행정기관이 밀집한 율지 2길의 큰길 <사진 14> 율지 1길 초입에서 바라본 율지리-몇개의 식당이 보인다. <사진 17> 율지 2길의 마을 안길-당목, 할인대, 정자 율지 2길의 두 번째 길인 마을 안길은 외부에서 가장 접근하기 힘든 공간이다. 앞서 언급한 3가지 종류의 길은 율지리가 면사무소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형성된 것으로 마을의 공적인 영역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마을 내 안길들은 마을 주민들의 사적인 영역으로 덕곡면민을 위한 공간이라기보다는 율지리 주민들을 위한 공간이다. 그래서 이 길에는 마을 주민들의 주거영역 이 밀집되어 있으며, 마을 주민들의 휴식처인 마을회관과 율지리를 상징하는 활인대 그리고 당목도 <사진 15> 율지1길과 율지2길이 만나는 마을안 삼거리-주거 위주 지역 율지 2길은 크게 두 종류의 길로 나뉜다. 하나는 마을 어귀에서 율지 1길과 분기되어 마을의 동편 을 율지 1길과 나란히 가로지르는 큰길이며, 다른 하나는 율지 1길과 만나는 3개의 길을 비롯하여 마을 내부의 좁은 골목길들이다. 첫 번째 길에는 면소재지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덕곡면사무소를 비롯한 행정기관들이 위치해 있다. 위치하고 있다. 이 주변이 과거 낙동강변에서 가까워 가장 번성한 곳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마을 공간 구성의 성격 변화가 지형 지물에 의해 얼마나 크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인지를 다시금 생각 하게 한다. 3) 마을 공간의 변화 과거 기록을 통해 본 율지리와 현재의 율지리는 마을 내 공간의 의미와 사용에 있어서 분명한

112 경남 합천 율지리의 마을공간변화와 주거유형 변화를 찾아 볼 수 있다. 우선 마을의 관문 역할을 하는 지점이 강을 통한 경로에서 육로로 바뀌면서 그 위치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제방의 축조, 율지나루의 쇠퇴, 율지교 의 건설, 육로 교통의 발달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나루가 왕래의 주요 거점으로 사용되던 시점, 이 근처는 마을내에서 가장 모든 행위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중심이었을 것이다. 마을을 찾는 외지인들과 이들에게 필요한 숙식을 제공하기 위한 주민들,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내는 생업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선의 발길이 끊기고 한국전쟁 이후 낙동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제방을 쌓기 시작하면서 제방 밖 백사장은 면적뿐만 아니라 그 활용도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곳은 단지 마을 앞 낙동강을 왕래하는 배가 닿는 선착장이자 아낙들이 빨래를 하고 물을 긷는 주민들만의 공동생활 공간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백사장에 펼쳐져 있던 객주들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배로 낙동강을 건너는 일은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 계속 되었지만, 마을 안길에서 보이던 낙동강은 안전을 위해 점점 더 높게 쌓은 제방에 의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마을은 제방에 의해 둘러 쌓인 요새처럼 되어 갔다. 그리고 그 제방의 한 부분에 다리의 끝이 올려지면서 창녕과 육로로 이어 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마을의 주출입로는 배가 닿는 강의 선착장이 아닌 율지교로 바뀌고 마을 내 부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제방으로 수해를 입지 않게 된 마을의 농지에서는 양파와 마늘을 특 화작물로 재배하는데 성공했으며, 이곳의 생산물인 마늘의 가공공장과 양파의 저온창고를 율지교를 통해 들어오는 마을 입구에 세워 율지리 생업 현주소을 바로 보여주고 있다. 강변으로 전진 배치되어 있던 상업공간들은 사라졌고, 강에 가까운 마을 안길은 도리어 조용한 주거지역으로 성격이 변했다. 현재 남아 있는 몇 개의 식당들은 다리가 놓이면서 접근성이 좋아져 유지를 하고 있으니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마을의 경관과 공간의 구성이 경제 발전 등과 맞물려 재구 성된 것이다. 처음 낙동강변의 번창한 상업공간과 거리를 두었던 행정기관들은 율지교의 건설 이후 에도 접근성이 떨어지지 않아 제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4. 주거문화 마을 안의 집들은 모두 한국전쟁 이후에 지어진 것들이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미군과 북한군의 격렬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라 오두막 한 채를 남겨두고 전소되어, 다시 마을을 찾았을 때 주민들은 아무 것도 없는 곳에 새로운 그림을 그려야 했었다. 그 시점 율지 사람들이 다시 그 땅에서 살기 위해서 지은 집들에는 적어도 두 가지의 원칙이 적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는 당장 급하게 삶을 이어갈 피신처로써의 공간, 그리고 두 번째는 전쟁의 화마에 사라져버렸지만 그들이 그때까지 살아왔던 주거 공간에 대한 기억이다.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면서 집들도 하나둘씩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갔다. 현재 마을에는 이에 대 한 기억을 상세히 간직하고 있는 이는 없다. 나이 든 남자어른이 많지 않고, 또한 있어도 근처 마을 에서 그 후 이주해 들어온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집의 모습에서 과거를 추정해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살아가면서 외관과 기능이 조금 바뀌었더라도 원형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벽과 기둥을 다시 다른 재료로 싸서 외부에서 구분이 쉽지 않더 라도 옆칸과의 연결 관계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원래의 모습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한국전쟁 후 6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율지에는 그 만큼의 시간을 간직한 다양한 집들이 있다. 가구수 자체가 많지 않지만 그 안에는 60살에 가까운 나이를 먹은 가옥에서부터 올해 처음으로 땅에 뿌리를 내린 가옥까지 모양, 크기, 간직한 이야기 등이 다채롭다. 현재의 시점에서 율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을 통해 과거의 주거문화를 밝혀보고 또 지금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온 과정과 그 이유 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전통의 모습이 남아 있는 가옥을 중심으로 그리고 작은 규모에서 큰 규모의 순서로 나열하였다. 그 이외에 현존하는 현대식 가옥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후반부에 다루었다. 율지리의 집들 8) 은 크게 세가지로 분류가 가능하다. 한국전쟁 이후 한옥양식을 고수하면서 신축한 가옥, 처음에는 한옥으로 건축하였으나 살아가면서 거주자의 편의성을 위해 내부를 입식으로 개조 한 가옥, 그리고 완전히 양옥으로 신축한 가옥이다. 이들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한옥으로 지었던 집을 거주자의 상황에 맞게 변화시킨 유형으로 대부분은 여러 차례의 변형 과정을 거쳤다. 새롭게 완전히 신축한 집들은 처음 지을 당시 급하게 거처를 마련해야하는 상황에서 세워져 거주공 간으로써의 기능을 잃어버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집주인의 경제적인 능력이나 가족구성원의 변화에 의해서도 많이 좌우가 되었다. <사진 18> 율지리 내에 위치하고 있는 공공시설들 8) 여기서 집 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거주하는 곳을 말한다. 율지리는 덕곡면소재지라서 필요한 행정기관들이 다 모여 있다. 여기에 근무하는 이들중 실제로 율지리 주민은 한명도 없다. 그러나 본가와의 거리가 멀거나 공중보건의의 경우는 기관건물내에 숙소에서 주중에는 생활을 한다. 그러나 이들은 율지의 주생활을 설명하는데는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 나 여기서 우체국은 예외다. 이곳은 2층의 양옥건물을 신축하여 아래층에는 우체국 업무를 보는 공간으로, 윗층은 실제로 우체국장 내외가 거주하는 일반 가옥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113 경남 합천 율지리의 마을공간변화와 주거유형 1) 율지의 집들 우리나라 남쪽 지방의 집들은 안채의 지붕 모양이 기본적으로 一 자형을 이룬다. 이는 내부의 공간 이 용마루를 꺾지 않아도 되는 실의 구성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방의 배열은 홑열이 될 수도 있고, 겹열이 될 수도 있으며, 때로는 이 둘이 섞여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런 집을 일반적으로 一 자집 이라고 부른다. 율지리의 한옥들도 이런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단지 정면이나 측면칸의 규모에 있어 차이가 있을 뿐이다. (1) 성영순 가옥 율지리 내에서 一 자집 으로 과거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집은 성영순 가옥이다. 이집 부엌에는 아직도 아궁이가 남아 있는데, 날이 추우면 여전히 장 작을 떼서 방에 난방을 하고 걸려 있는 가마솥에서는 취사도 가능하다. 집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안채 <사진 19> 성영순 가옥 안채 전경 를 가지고 있는데, 그 안에는 3개의 방과 마루, 부엌이 포함된다. 여기서 2칸 크기의 영내방 9) 을 제외한 나머 지 안방, 마루, 작은방은 1칸 규모로 모두 합하면 6칸 규모의 집이 된다. 전후면의 칸간격이 거의 동일하게 유사한 것을 보면 처음부터 계획을 하여 지은 집이라 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성영순은 이 집을 구입하여 들어왔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전면 중앙에 있는 마루는 밖에서 집안으로 들어가는 <사진 20> 성영순 가옥 마루 전경 입구 역할을 함과 동시에 안방과 영내방으로 이어지는 분기점이 된다. 그리고 지금은 부엌에서 마루로 통하 는 문이 가구로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직접 오갈 수 있 는 출입문이 나 있다. 결국 마루는 이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실과 소통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동시 에 집의 중심점이 된다. 우측에 있는 부엌은 마당의 장독대와 가까운 거리에 <사진 21> 성영순 가옥 부엌 아궁이 입구를 두었다. 음식을 조리하기 위해 주부가 가장 많 이 오가야할 곳이기 때문이다. 부엌문을 들어서면 정 면으로 작은방의 출입구가 보이고 그 아래에 아궁이가 있다. 아궁이는 안방과 작은 방이 만나는 모 9) 비슷한 구조를 가진 집에서 이 방을 긴방 이라고 대부분이 불렀으나, 성영순은 이를 영내방 이라고 불렀다. 서리에 불을 넣을 수 있도록 되어 있고 그 상부에 솥을 걸어 놓았다. 한곳에 불어 넣어 두 방을 다 덮일 수 있 는 구조로 고래를 만든 것이다. 안방으로 나가는 고래 는 영내방까지 이어져 한 구들로 되어 있고, 작은방은 따로 구들을 놓았다. 이렇게 되다보니 부뚜막은 직각 으로 꺽인 모습이 되었다. 지금은 안방 벽쪽에 아래까 지 내려오는 찬장이 달려있지만 예전에는 같은 위치에 <그림 3> 성영순 가옥 배치 평면도 더 작은 크기의 장을 놓았을 것이다. 이는 부엌 살림을 보관하고 정돈하는데 매우 유용하게 쓰였을 것이고 지금의 싱크대와 같은 역할을 했다. 부엌에 딸린 작은방은 사실 전면이 가려져 있어 채광이 거의 되지 않는다. 예전에는 주로 며느리가 들어오면 신 혼방으로 꾸미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부엌과 바로 연결이 되어 있고, 나머지 방들과는 연결성이 없어 그나마 독립적인 성격의 공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식구들이 함께 살았던 생활 속에 서 채광보다는 프라이버시의 배려가 더 나은 선택으로 생각된 것이다. 성영순 가옥은 이처럼 작은 공간안에서 매우 짜임새 있는 구성을 하고 있다. (2) 유인식 가옥 마을내에서 유인식 가옥이 성영순 가옥과 유사한 평 면을 하고 있는데 내부를 많이 개조했다. 실들의 구성 에 있어서는 부엌 뒤쪽의 방이 없어지고 부엌을 입식 으로 개조하면서 넓게 사용하고자 벽을 털어 버렸고, 후면에 화장실과 보일러실 등을 달아내서 처마밑까지 공간을 확장했다. 그러나 집의 기본 칸수는 정면3칸 측면2칸으로 총 6칸으로 이루어진 것이 같은 골격을 <사진 22> 유인식 가옥의 마루에서 본 전경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영순 가옥이 조금 더 원 형에 가까운 것으로 보았을 때 유인식 가옥은 가족 수 의 변화와 부엌의 현대화로 인해 방의 숫자가 달라지 고 주거 환경이 개선되었다는 차이점을 가진다. 결국 같은 뼈대 속에서도 거주자의 필요성에 따라 변신이 가능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런데 방문 살과 같은 소재로 건축 시기를 비교해보면 유인식 가 <그림 4> 유인식 가옥 배치 평면도 옥이 훨씬 후에 지어진 것이 확실한데 두 집의 평면은 아주 유사하다는 것이 흥밋거리다. 물론 두 집의 건축 년대가 수백년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나중에 집을 지을 때도 비슷한 모습을 고수한다는 것은 이 지역 주거형식의 기본형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114 경남 합천 율지리의 마을공간변화와 주거유형 (3) 성윤용 가옥 위의 이야기는 1995년에 지은 성윤용의 집 평면을 함께 보면 이 점은 더욱 명확해진다. 그의 집은 지붕은 서까래를 없어 한옥양식을 취할 수 밖에 없었지만 몸 체는 완전히 양옥으로 지어졌다. 그러나 평면을 보면 가운데 거실을 중심으로 주방과 방들이 좌우로 배열되 어 있는 모습이 성영순 가옥과 유인식 가옥의 틀을 크 <그림 5> 성윤용 가옥 배치 평면도 게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생활양식의 변화로 인해 거 실공간이 자연스럽게 확대되었고, 주방 뒤에 있었던 작은 방은 채광을 우선으로 생각하여 앞으로 전진배치 되었다. 그리고 오른쪽에 긴방은 사용의 효율성을 높 이기 위해 2개로 나누었다. 집에서 거주자가 살아오던 방과 주방의 위치에 대한 기본 개념은 바꾸기가 힘들 지만 주거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인들로 필요 에 따라 진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논밭에서 농사일로 <사진 23> 성윤용 가옥 거실 전경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예전에는 가족 단란과 화목의 시간에 필요한 거실이 그리 필요한 곳이 아니었을 것 이며, 함께 사는 가족이 많아 도리어 하나의 방이라도 더 만드는 것이 우선이었다. 지금은 방이 들어 갈 자리에 외부에 있었던 화장실이 들어왔고, 부엌 살림을 보관하고 빨래를 할 수 있는 다용도실이 주부들을 위해 내실화 된 것이다. 경제적으로 윤택해짐과 동시에 가족구성원의 소수화 그리고 여자 들의 신분 상승 등이 밖에서는 비슷해 보이는 집의 안모습을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바꾸어 온 것이 다. 이렇게 세 가옥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율지리에서 나타나는 세가지 유형으로의 구분 에도 맞아 떨어지는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들의 건축 시기가 다르고 사는 거주자의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결과물이 나오지만 같은 마을안에 사는 이들의 주거 관념은 시간의 흐름에 쉽게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이 보인다. (4) 임호연 가옥 이 이외에 정면 3칸 크기의 집으로 살아가면서 변화를 꾀한 집으로 임호연 가옥을 들 수 있다. 부엌의 뒤로 있는 방을 부엌공간으로 들이고 입식으로 개조해서 사용한다. 그리고 마루의 폭을 줄이 고 대신 긴방 앞으로까지 넓혀 마루보다는 방들의 기능을 강조했다. 이는 양옥에서 거실이 가지는 역할을 마루가 할 수 없기 때문에 안방의 확장을 통해 이 공간에서 그 역할까지를 수행하도록 만든 것이다. 가족들이 모여 함께 모여 보내는 여가시간이 예전보다 늘어나면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변화의 양상이다. 그리고 자녀들이 독립해 외지로 나가게 되면서 2개의 방을 하나로 터서 내부에 침대와 같은 가구를 들이면서 생활의 편의를 도모하는 내부공간도 현재의 시점에 맞게 점점 새로운 모습으로 되어 가고 있다. 다음으로 한옥의 형식을 따르면서 규모가 커지는 집 들이 있다. 이들은 4칸 혹은 5칸의 정면 규모로 내부의 모습은 약간씩 차이를 보인다. 앞에서 보았던 정면 3 칸의 집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대청이 생긴다는 것이다. 정면 3칸의 집에서도 안방의 앞으로 작은 마루를 들이거나 부엌 옆에 이어 <그림 6> 임호연 가옥 배치평면도 지는 방들 앞으로 긴 마루를 놓은 예들이 있었다. 바닥 이 마루로 마감되어 있다는 것은 공통점이지만 마루의 크기와 위치, 그리고 이어지는 방들과의 위계성에서 구성이 달라진다는 것이 집 전체 형식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예를 갖춘 집으로는 변상수 가옥, 율지휴게소(김정권 가옥 안집), 김점수 가 옥이 있다. (5) 변상수 가옥 이집은 대청 도리에 상량이 노출되어 있어 확실한 건축년대를 알 수 있는 집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집이 율지리에서는 가장 오래된 사례라고 이야기를 했다. 실제 지어진 년도가 1957년으로 되어 있으니, 한국전쟁으로 전소 되었던 마을에 안정기가 오자 바로 지어진 집 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 거주를 위해 급하게 지은 집이 아니라 처음부터 계획 하여 전문적인 건축일을 하는 목수에 의해 건 <사진 24> 변상수 가옥 대청 <사진 25> 상량이 적힌 도리 축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200여평에 달하는 대지에 건물을 반듯하게 남향으로 앉히고 전 면의 넓은 마당에는 많은 나무를 심었다. 대 문에 들어서면 집안쪽이 바로 보이지 않도록 대청문 앞에 주목을 심어 시선을 차단하고 집 가까이는 봄과 가을에 꽃을 감상할 수 있도록 다양한 수종의 꽃나무를 식재해 놓았다. 집은 정면에서 보면 4칸으로 각각의 칸이 비슷한 크기로 만들어졌으며, 좌측부터 부엌-안방- <사진 26> 변상수 가옥 전경 대청-건넌방 의 순으로 이어진다. 부엌 후면 으로 3칸집에 있었던 것처럼 작은

115 경남 합천 율지리의 마을공간변화와 주거유형 방을 하나 두었는데 여기는 거주용이라기 보다는 수장 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방의 크기는 안방보 다 건넌방이 앞의 마루 공간이 없어 더 크게 만들어져 있지만 집의 중심은 부엌 옆에 있는 안방이다. 건넌방 의 북측벽에는 벽장을 두었는데, 상하로 나뉘어 있어 공간의 활용도를 높였다. 안방은 정면과 측면에 미닫 <사진 27> 변상수 가옥 건넌방 이 문을 두었지만 정면의 것은 주로 환기를 위한 것이 고, 출입은 대청쪽으로 난 문을 통해서 이루어졌을 것 이다. 또한 부엌에서 안방으로 직접 들어 갈 수 있는 여닫이문이 있는데, 이는 예전 아궁이가 있었을 시절 에는 사람이 드나들기 보다는 식사상을 안방으로 전달 하는 용도였던 것을 개조하면서 크게 만들었을 것이 다. 건넌방은 마당쪽으로는 창문을 만들고, 대청으로 는 각 칸마다 문을 내었다. 일반적으로 우리 전통한옥 에서는 트여 있는 하나의 방에서도 각각의 칸에 출입 <그림 7> 변상수 가옥 배치 평면도 구를 두는데 이 집도 그런 방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부엌 앞쪽 마당에 낮은 담을 두르고 장독대를 만들 었으며, 그 옆에는 지하수를 파서 물을 끌어 올렸다. 이로 미루어보아 예전에는 마당에서 부엌으로 들어가 는 문이 정면에 있었을 것으로 예측되며, 집을 개조하 면서 부엌 옆으로 창고를 달아내서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만들고 정면의 출입구는 폐쇄하였을 것이다. 지 금 부엌은 입식으로 바뀌어 있으며, 건넌방의 옆으로 <사진 28> 변상수 가옥 담장 화장실도 달아내었다. 난방방식도 기름보일러로 전향 하면서 뒤란에 가벽을 치고 보일러실을 만들었다. 이 곳에는 다른 여러 가지 기계들과 집안 살림에 필요한 잡동사니도 함께 보관하고 있다. 내부의 구조는 3량가옥이며, 천장의 층고가 매우 높은 편이다. 지붕은 처음 건축 당시에는 기와를 올렸으나, 유지 보수 등의 편의를 위해 양철로 개조했다. 마당에는 율지리의 다른 가옥처럼 까대기 를 세웠는데 안채의 동측과 마당의 남쪽 끝 두 군데에 만들었다. 집을 두르고 있는 담장은 일부분은 무너져 블록으로 바꾸었으나, 대문이 있는 길가 쪽은 돌과 흙으로 쌓은 처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 하고 있다. 척 관계이기도 하고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이웃이다. 집은 앞에 넓은 마당을 두고 남향으로 좌향 을 잡았다. 전면은 변상수 가옥처럼 4칸으로 되어 있 으나 내부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대청을 뒤까지 만 들지 않고 2칸 넓이에서 앞으로는 마루를 뒤로는 방을 들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정지-안방-가운데방-끝 방 으로 3개의 방이 이어지고 가운데방 앞으로 1칸 크 <사진 29> 현재 하영식 가옥 모습 기의 마루를 놓았다. 아마도 가족의 수가 많아 거주할 공간이 더 필요했기 때문에 변상수 가옥과는 약간 다 른 평면을 선택했을 것이다. 집의 칸살이 규모나 짓는 방식이 비슷했지만 가족의 구성원과 그들의 생활방식 에 따라 달리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집이다. 이 집은 처음 건축했을 당시 집 앞에서 찍은 하영식 부모의 사진이 남아 있어 예전의 모습을 잘 살펴 볼 수 있다. 나무틀로 짰던 문들이 지금은 바뀌었으며, 집의 <사진 30> 처음 건축 당시 하영식 가옥 모습 전면 우측으로 까대기를 세웠다. 이 집을 짓기 전 바로 이 자리에는 초가집이 있었으며, 한국전쟁으로 전소되고 난 후 지금과 같은 규모로 신축을 했다. 과거의 사진들을 보면 초가집, 기와집 모두 집의 전면으로 꽤 높은 굴뚝을 낸 것이 매우 이채롭게 보인다. 아마도 정지에서 불을 떼서 모든 방들을 한번에 덮일 수 있도록 고래를 만들고, 그 연도의 끝을 끝방에서 대청 아래를 통과하는 방식을 택했을 것이다. 지금은 보일러로 난방방식이 바뀌어 굴뚝은 사라졌다. <그림 8> 하영식 가옥 안채 평면도 (6) 하영식 가옥 변상수 가옥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예가 하영식 가옥으로, 두 집은 가까운 친 <사진 31> 한국전쟁 전 하영식 가옥

116 경남 합천 율지리의 마을공간변화와 주거유형 (7) 율지휴개소(김정권 소유 가옥) 그 다음으로 유사한 가옥은 현재는 비어 있는 채로 길가에 율지휴게소 라는 간판이 걸린 우체국 안집이다. 이곳은 덕곡우체국을 운영하는 김정권 소유의 집으로 우체국을 신축하면서 2층에 살림집 을 함께 올려 이사를 하면서 거주를 하지 않게 되었다. 휴게소 간판이 걸려 있는 것은 최근까지 이 집의 일부에 다방영업을 했었기 때문이다. <사진 32> 율지휴게소(김정권 가옥) 안방 <사진 33> 다방 영업 흔적이 남아 있는 모습 변상수 가옥과 아주 유사한 내부 구성을 하고 있는 데 단지 다방을 하면서 건넌방 쪽을 확장한 것이 보인 다. 집으로 들어가는 대청문은 새로 개조를 했지만 내 부의 문들은 처음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이 집은 마당에서 부엌(작은방)으로 들어가는 전면의 출입문이 그 위치에 그대로 남아 있다. 집을 짓는데 사용된 부재 들을 보면 미리 꼼꼼하게 칫수에 맞게 치목을 하여 사 <그림 9> 율지휴게소(김정권 가옥) 배치평면도 용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변상수 가옥 이나 하영식 가옥도 마찬가지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가까운 형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영식 가옥처럼 대 청의 한쪽에 방을 넣은 것은 거주자의 필요에 의해 약간 의 변화를 추구한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정면 4칸을 주축으로 一 자 모양의 지붕 양식을 하고 있는 것은 공통 점이다. 전통 방식으로 지어진 집으로 더 이상 큰 규모 는 찾아지지 않았다. 다만 살아가면서 옆으로 임시 확장 을 하여 창고나 화장실을 넣은 예들만 보일 뿐이었다. <사진 34> 김점수 가옥 전경 이는 생활습관의 변화와 거주자의 편의 추구, 그리고 가족 구성원의 변화에 의해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과정 이다. 집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필요에 의해 그리고 의도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고 이는 즉 집의 진화라고 할 수 있다. 불편한 부분을 감소하면서 생활하는 것이 한계에 달하면 이러한 과정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가옥은 경남지역에서 지어진 근대한옥과 그 <그림 10> 김점수 가옥 배치 평면도 규모에서는 조금 차이가 보이지만 비슷한 평면구성을 가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성, 밀양, 산청 등지에서 그러한 예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대청을 중심에 두고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이 마주하고, 안방의 옆으로는 정지가 이어진다. 대청이 2칸인 집, 안방 옆에 방을 하나 더 들여 전면 8칸까지 확장한 집, 정지의 전면에 정지방을 두어 율지의 집들과 매우 유사한 형식을 만든 예도 보인다. 10) 결국 율지에서 한국 전쟁 이후 전통 방식에 기본을 두고 신축한 가옥들이 이 지역 주거 형식을 많이 반영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 것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집에 서도 우리의 주거문화는 예전의 것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집을 지은 시기가 아직 획기적으로 새로운 가옥 양식이 나타나기 전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생활해 왔던 주생활의 패턴을 이어가는 것이 그들의 삶에 가장 편안한 안식처의 기능을 유지해가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현재도 기둥이나 보, 도리 등이 비틀림 없이 잘 유지되고 있다. (8) 김점수 가옥 다음으로 김점수 가옥은 위의 집들에 비해 건축년대가 많이 떨어지지만 평면의 구성에 있어서는 같은 형식을 지니고 있다. 오히려 칸살이의 크기에 있어서는 정면 4칸이 각 칸마다 더 정확하게 일치하 는 면을 보이기도 한다. 아무도 거주하지 않기 때문에 집이 언제 지어졌는지에 대해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이웃들의 말에 의하면 1980년대로 추정이 가능하다. 양옥으로 집을 지을 수 있는 시대였음 <그림 11> 고성 최영덕 가옥 안채 평면도 <그림 12> 밀양 손용상 가옥 안채 평면도 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양식을 따르는 것이 생활하기에 더 편하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이상의 4개 사례를 보면 기본적으로는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대청을 두는 것이 조금 더 원형에 10) <그림 11>에서 <그림 16>은 최규철 이호열, 경남지역 근대한옥의 안채 평면특성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 제15권 2호( ). 와 이호열 외 5명, 근대한옥 밀양 퇴로리 이병수 가옥의 건축적 특성, 한국건축역사학회 2008년 추계학술발 표대회 자료집 (2008). 에서 인용함

117 경남 합천 율지리의 마을공간변화와 주거유형 을 짓고 살다 개조의 한계에 부딪치거나 경제적인 여유 가 생기면서 신축을 한 경우 들이다. 조희철 가옥, 성화 순 가옥, 박순자 가옥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중 조희철과 성화순의 집은 2층인데, 농촌의 생활 특성상 1층은 전부 창고로 만들어 농산물과 농기계의 보관용으 로 쓰인다. 매번 계단을 올라가야 집으로 들어가는 불편 <그림 13> 산청 권갑용 가옥 안채 평면도 <그림 14> 밀양 손영배 가옥 안채 평면도 을 겪어야 하지만 그 보다 생업과 관련된 것들이 더 우 선이기 때문이다. <사진 37> 조희철 가옥 전경 <그림 15> 창녕 성씨고가 안채 평면도 <그림 16> 밀양 퇴로리 이병수 가옥 안채 평면도 (9) 전통가옥에서 변화를 보인 사례들 이렇게 아직도 외관상 한옥의 모습이 남아 있는 집들도 있지만 내부에 들어가보면 뼈대는 옛날 것인데 외관은 새로운 소재로 완전히 바꾼 집들도 있다. 물론 이때 내부공간도 쓰임과 모양도 많은 변화를 겪는다. 예를 들어 식구수가 줄어 필요 없어진 방을 화장실로 개조한다던지 재래식 정지를 현대화하는 것이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사례들이다. 마을내에서 차상선 가옥, 이판수 가옥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사진 38> 박순자 가옥 전경 <사진 39> 서병휴 가옥 전경 그리고 마을에서 가장 최근에 지은 서병휴 가옥은 다른 집들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는 신축한 건물이 유난히 눈에 들어 온다. 그런데 이렇게 양옥으로 신축을 하는 2012년에도 이들은 그들의 농 사일과 관련된 까대기를 집과 나란히 지었다. 그들에게는 집만큼이나 중요한 공간인 것이다. (11) 기타 가옥 식당 등을 운영하는 가구는 집과 영업장이 이어져 왕래가 편하도록 만들었다. 이진현과 황숙녀의 예가 여기에 해당된다. 전면에 식당을 배치하고 거주를 위한 집은 후면에 두는데 밖에서 보아서는 각 동으로 분리된 건물이지만 내부에서는 바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 <사진 35> 차상선 가옥 전경 <사진 36> 이판수 가옥 전경 (10) 현대식 가옥 이 이외에 율지리에는 완전히 양옥으로 지어진 집들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한국 전쟁 이후 초가집 <사진 40> 대중식당과 황숙녀 가옥 전경 <사진 41> 부산식당과 이진현 가옥 전경

118 경남 합천 율지리의 마을공간변화와 주거유형 그리고 조립식으로 간단하게 지은 집도 있는데 거주 자는 집을 지을 당시에는 공기도 짧고 경비도 많이 들 어가지 않아 좋았지만 살면서는 조립식으로 지은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이상 율지리에서 현재 사람이 거주하는 집들의 다양 한 유형을 소개하였다. 구옥을 없애고 완전히 현대식 <사진 42> 곽귀선 가옥 전경 양옥으로 신축을 한 경우보다는 예전부터 살아오던 집 의 기본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일부분만 개량하거나 증축한 예들이 더 많다. 이는 모든 가옥이 한국전쟁 이후에 지어진 것들이기 때문에 아직은 주거공 간으로써의 역할을 충분히 할 만하다는 의미다. 물론 전쟁 직후 급하게 건축하느라 제대로 과정을 거치지 못해 이미 집으로써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된 경우와 가족수의 변화 등으로 신축이 불가피한 가구들이 변화의 과정을 많이 겪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외지에서 들어오면서 일단은 기존에 있던 집을 구입해서 생활을 시작했지만 살아가면서 필요에 따라 혹은 집의 노후화 때문에 새롭게 건축을 하게 된 예들이 있다. 완전히 현대식으로 지어진 집들과 건축년대에서 많이 차이를 가지지 않는 경 우에도 전통한옥의 양식을 따른 집들이 보이는 것도 특징이다. 앞으로 율지리의 집들은 어떤 모습으로 달라질까?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은 무엇이 사라지고, 어떤 것이 새로 생겨날까? 이러한 변화는 또 집을 바꿀 것이다. 살던 집을 하루 아침에 털어내고 새 집을 짓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능하면 기존의 틀안에서 조금씩 고쳐가면서 적응해 나가려고 한다. 도저히 안되겠다는 한계점에 달해야만 지니고 살던 집을 버리고 새 것을 구한다. 이처럼 집은 우리를 가장 편하게 해주는 것이기에 쉽게 버리지 못하고 그 주거 관습도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율지리의 집들이 나이를 많이 먹지는 못했지만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서 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뿌리는 한국전쟁을 만나기 전 그리고 더 그 이전에 닿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주거의 유형은 한국전쟁 이후 새로 지어지는 집들의 모양이 예전 주변 지역 전통가옥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이런 집들이 지어졌던 50 60년대에는 우리의 모든 사정이 지금과 같은 현대식가옥을 신축할 아무런 여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기술은 물론이고 재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80년대에 들어 신축하는 가옥에서도 예전의 형 식을 유지하고자 하는 예를 통해 판단해보면 사람들의 주거문화라고 하는 것이 이어져 내려온 습관 을 쉽게 벗어날 수 없다는 단면을 보여 준다. 같은 기간 동안 마을공간 변화에 비한다면 주거의 유형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마을 공간 성격과 구성의 변화는 자연 재해를 막는 기술의 발달, 경제적 발전에 의한 기반 산업의 확장 등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결과는 마을에 양면성으로 다가 왔다. 마을 차원에서의 생활의 편의성은 매우 좋아 졌지만, 이로 인해 이동성이 용이해짐으로써 마을의 규모는 점점 줄어 명목상의 면소재지로 축소되 어 가고 있다. 이에 비하면 율지의 집들은 주인의 자발적인 의지와 환경에 따라 개선되어 왔기에 필요치 않은 부분으로의 진화는 최소화되었다. 마을과 주거 유형이 함께 모두가 만족할 수 없는 방 향으로 나아갈 수 없음은 두 가지가 가지는 의미 자체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율지리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공간과 주거의 변화로 우리 농촌의 근대화 과정에서 일 어나는 마을 변화의 일면을 대변할 수 없다는 것도 반드시 고려할 점이라 생각된다. 참고문헌 <단행본> 이영기, 草 溪 대광대( 竹 廣 大 ) 탈놀이, 합천문화원, 합천군, 합천군지, 합천군, 2011년 통계연보, 맺음말 <논문> 이호열 외 5명, 근대한옥 밀양 퇴로리 이병수 가옥의 건축적 특성, 한국건축역사학회 2008년 추계학술발표대회 자료집, 최규철 이호열, 경남지역 근대한옥의 안채 평면특성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 제15권 2호, 율지리의 마을 구성 변화 모습과 그 원인 그리고 거주공간의 특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경관은 주 변 환경의 개발에 따른 마을 입지와 주민들의 생업유형 변화에 의해 짧은 기간 동안 마을의 중심공 간과 활동 영역이 바뀌는 양상을 확실히 보였다. 그중 가장 중요한 배경은 율지교의 건설과 제방 축조로 볼 수 있다. 제방의 축조는 정주 환경을 향상시켜 생업활동과 생활이 안정적인 궤도에 오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한 율지교의 건설은 낙동강에 많이 의존하던 외부와의 소통 방법을 확장시켜 정체되어 있던 마을이 변해가는 사회를 더 넓고 빠르게 경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119 경남 합천 율지리의 마을공간변화와 주거유형 경남 합천 율지리의 마을공간변화와 주거유형 에 대한 토론문 노용석 부산외대 최근 들어 인류학 현지조사의 경향이 점차 세계화되어가고, 한국의 경우에도 상당부분 이국적인 타문화 소개가 주요 범주로 등장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측면에서 마을 조사의 실행이 문화 연구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지하는 사실일 것이 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 논문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한국 전통 촌락의 통시적이고 공시적인 조사 를 수행하였고, 이에 대한 다각적인 측면에서의 분석을 실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은 향후 한국의 마을사 및 생활사를 집대성하는데 있어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본 토론문에서는 논문에서 밝힌 사실에 대해 몇 가지 추가적 질문과 토론자의 간략한 제안을 추가해보고자 한다. 다. 하지만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조사당시 율지리 주민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공식적, 비공식적 생 활사 부분에도 조사의 많은 부분을 할당한 듯하다. 이 지점에서 토론자는 공간 구성의 역사뿐만 아 니라, 주민과 실시한 인터뷰 등을 분석하여 이들의 생활사가 어떻게 변천하였고 지속되었는가에 대 한 부분에도 추가적인 연구 검토가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또한 글에서 확보한 많은 양의 데이터 들은 단순히 텍스트로만 기록되기에는 상당히 아쉬울 수밖에 없는 것들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 게 모인 자료들은 향후 디지털 작업을 거쳐 광범위한 아카이브 시스템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 이에 대한 계획과 방안이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지식을 공유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1. 공간 구조의 변화는 해당 사회의 실질적 문화양식을 바꾸는데 중요한 역할을 끼칠 수 있다. 논문에서 지적하다시피, 근대화작업이 한창이던 1960년대 율지리에 들어선 제방과 이후 신설된 다 리의 건설은 마을의 전체적 구조와 특성을 바꾸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율지리는 공간 적 측면에서 상당히 많은 변화를 맞이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변화가 마을 내부의 공동체 조직 내에는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에 대해서도 조금 설명이 있으면 좋을 듯하다. 예를 들어 논문에서는 외부적 환경 변화로 인한 마을의 전체 형태의 변모에 대해 집중하여 설명하고 있지만, 마을 내부에 있던 다양한 공동체, 즉 결사모임이나 이들의 조직 방식은 어떠한 변화를 겪었는가에 대해서도 설명 이 추가된다면 더 큰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 거대 한국 사회의 마을 변천사와 비교한 율지리의 보편성과 특수성 본 논문은 율지리라는 마을의 미시사를 중심으로 공간구조와 주거유형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미 시적 접근이 좀 더 큰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해당 조사 마을의 특성이 거시적 특징과 비교하여 어떠한 보편성과 특수성을 지니는지를 파악할 때 더욱 명확해 질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율지리 마을 공간의 변천사가 일반적인 한국 농촌 사회의 변화와 비교하여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마 지막 부분에 서술된 율지리 가옥구조는 여타 인근 지역의 가옥과 비교하여 어떤 특수성을 가지는지 에 대해 좀 더 추가적인 설명이 있으면 좋을 것으로 보인다. 3. 현재 본 논문은 마을의 공간변화와 주거라는 공간 인지적 차원에서 마을의 변천사를 연구하였

120 심청굿의 전승과 확산 2013 한국민속학자대회 심청굿의 전승과 확산 윤동환 고려대학교 목차 1. 서론 2. 맹인거리와 추남굿 3. 심청굿 4. 심청굿의 확산과 의미 전환 5. 결론 1. 서론 심청굿은 여러 분과학문의 학자들에 의해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판소리 형성과 관련하여 유 일하게 전승되는 굿이기 때문에 심청굿은 중요한 대상이 되었다. 판소리의 형성에 대한 서사무가 기원설을 살펴보면, 서사무가와 판소리의 성격이 유사하고, 무가가 판소리보다 선행되는 갈래이기 때문에 판소리의 기원은 서사무가라는 주장이다. 정노식의 조선창극사 1) 이후 이혜구, 2) 장주근, 3) 박헌봉, 4) 서대석, 5) 조동일 김흥규, 6) 김난주 7) 등에 의해 줄곧 주장하였다. 1) 정노식, 조선창극사 (조선일보사 출판부, 1940). 2) 이혜구, 무속연구, 사상계 통권24(사상계사, 1955); 송만재의 관우희, 30주년기념논문집 (중앙대학교, 1955). 3) 장주근, 한국의 신화 (성문각, 1961). 4) 박헌봉, 창악대강 (국악예술학교 출판부, 1966). 5) 서대석, 판소리 형성의 삽의, 우리문화 3(우리문화연구회, 1969); 성주풀이와 춘향가의 비교연구, 판소리연구 1(판소 리학회, 1989). 6) 조동일 김흥규, 판소리의 이해 (창작과 비평사, 1978). 7) 김난주, 굿과의 관계에서 본 판소리의 기원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6). 239

121 심청굿의 전승과 확산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이후 서사무가 기원설을 부정하는 논의에서도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었다. 김선풍은 동해안 무녀를 사례로 들어 심청근원설화 고대소설 심청굿 심청가로 변하였다고 시안을 제시하였고, 8) 이경복은 심청전 심청가 심청굿으로, 9) 김헌선은 심청가 심청굿으로, 10) 이보형의 경우 육자배기토리 무악권 창우집단의 광대들이 부르는 소리가 판소리 발생에 영향을 끼 쳤다고 보았다. 11) 조동일은 심청굿이 심청가를 받아들여서 이루어졌다고 추정하였고, 12) 홍태한과 최재호는 심청가 심청전 심청굿으로, 13) 이균옥 김구한 심오섭은 교정 심쳥젼 의 영향으로 심청굿이 형성되었다고 밝혔다. 14) 이상의 연구를 통해서 심청굿의 형성과 관련하여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정작 심청굿의 전승맥락과 연행현장을 주목한 논의는 몇몇에 불과하다. 본인 역시 동해안의 발원굿, 세존굿과 함께 심청굿의 전 파와 수용을 다룬 적이 있지만, 15) 현장론적 측면에서 심청굿에 대하여 정밀하게 살펴보고 재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현재 심청굿의 변화과정에 대하여 전승현장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17) 추남굿은 눈 질환 중 하나인 삼눈 18) 의 번성과 관련이 있다. 삼눈은 삼( 紅 )과 눈( 目 )을 결합한 말로 비위생적이고 영양실조로 인한 열악한 환경으로 인하여 눈이 붉게 충혈되고 전염성이 강한 안질환 이다. 이러한 삼눈은 당시의 눈병 중에서도 발병률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전염성이 강하여 농어촌 할 것 없이 퍼져있었던 병이다. 이외에도 노화로 인한 백내장과 녹내장을 적절히 치료하지 못하여 맹인이 되는 사태가 빈번했다. 이러한 눈병과 관련하여 현재까지 추남굿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 기록은 조선신가유편( 朝 鮮 神 歌 遺 篇 ) 에 있다. 무녀( 巫 女 )는 원래 성악에 능하기 때문에, 굿을 할 때 곧잘 속요( 俗 謠 )나 민요( 民 謠 )와 같은 것을 불러 관중을 기쁘게 하는 일이 있다. 석씨 무녀( 石 巫 女 )는 경북 선산군( 善 山 郡 )의 무녀와 같은 이들은 실제로 삼국지연의( 三 國 志 演 義 ) 이야기 중 한 대목을 손짓발짓해가며 재밌게 부르곤 한다고 했다. 2. 맹인거리와 추남굿 동해안의 무속제의는 크게 마을공동체 단위로 이루어지는 공동제의와 가족 단위로 이루어지는 개 인제의로 분류할 수 있다. 김태곤이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동해안의 개인제의는 기자( 祈 子 )를 위한 삼제왕굿(삼신제왕굿), 재수발원을 목적으로 하는 논부굿(농부굿, 안택굿), 천연두 퇴치를 위한 별상 굿, 안질의 퇴치를 위한 맹인거리, 광인을 고치기 위한 광인굿(광인퇴신굿), 사령( 死 靈 )의 낙지천도 ( 樂 地 薦 度 )를 위한 오구굿과 수망굿 등이 있고, 공동제의로는 별신굿이 있다. 16) 이 가운데에서 치병굿의 하나인 맹인거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맹인거리는 추남굿 또는 봉사 굿 으로도 불리는데, 추남굿이라고 하는 명칭은 동해안 무집단의 은어( 隱 語 )와 관련되어 있다. 추남 이라는 말은 눈을 감다, 잠을 자다 라는 뜻이다. 이와 더불어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봉사(맹인) 라 그 이유는 삼국지 조선어 번역본이 민간에서 널리 애독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석씨 무녀는 눈병이 났을 때 추남굿 이라고 하는 굿을 연행하는데, 그때는 심청가를 부른다고 말했다. 심청은 심청전( 沈 淸 傳 ) 이라는 유명한 소설 속의 여주인공으로, 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눈을 고치고자 뱃사람에게 해신 ( 海 神 )의 인신공양으로 팔렸다. 그렇게 해서 얻은 쌀 삼백 석을 불전( 佛 前 )에 공양하고, 결국에는 왕후 가 되어 부처님의 힘으로 아비의 눈병을 낫게 한 것이다. 이 소설은 노래로 불리기 때문에 무녀도 그것을 흉내 내어 부르는 것이리라. 19) 위의 인용문은 손진태가 1922년 8월 동래군 구포면 구포리 20) 에 있는 큰무당 석성녀( 石 姓 女 )를 면 담하여 조사한 내용으로 당시 굿 연행상황을 알 수 있다. 석씨 무녀( 石 巫 女 )에 의하면 눈병( 眼 病 )이 발생했을 때 추남굿을 하고, 이 굿에서 심청가( 沈 淸 歌 )를 부른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손진태는 심청 이 당시 널리 알려졌던 심청전( 沈 淸 傳 ) 의 주인공이라는 점과 심청소설이 판소리로 불리는 상황에 8) 심청굿 노래를 口 演 하는 現 存 巫 女 들이 한결같이 沈 淸 傳 을 자꾸 읽고 외어 神 歌 唱 으로 濾 過 시키고 있는 事 例 로 보아, 다음과 같은 變 化 를 겪어 왔던 것이 아닌가 하여 다만 試 案 만을 提 起 해 둔다. 沈 淸 根 源 說 話 古 代 小 說 심청굿 노래 판소리 沈 淸 歌. 김선 풍, 한국시가의 민속학적 연구 (형설출판사, 1977), 86~87쪽. 9) 이경복, 심청굿 연구 (명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75). 10) 김헌선, 판소리의 발생론과 영향론, 판소리연구 2(판소리학회, 1991), 161~173쪽. 11) 이보형, 창우집단의 광대소리 연구, 한국전통음악 연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0). 12)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3 제3판(지식산업사, 1994), 575쪽. 13) 홍태한, 심청굿 무가의 변이 양상과 형성과정 추론, 한국무속학 2(한국무속학회, 2000), 275~303쪽; 최재호, 심청굿에 수용된 심청 사사 수용 요인, 인문과학연구 34(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0), 219~244쪽. 14) 이균옥, 심청굿의 형성 문제, 동리연구 1(동리연구회, 1993), 205~227쪽; 김구한, 심청굿 무가의 형성 과정 재론, 제 24차 한국무속학회 학술발표회 발표논문집 (한국무속학회, 2009), 38~55쪽; 심오섭, 동해안 심청굿 연구, 문화예술콘텐 츠 3(한국문화콘텐츠학회, 2009), 61~92쪽. 15) 윤동환, 굿의 형식 전환과 무악의 변화, 한국무속학 20(한국무속학회, 2010), 99~125쪽. 16) 김태곤, 한국무속연구 (집문당, 1981), 96~110쪽. 17) 윤동환, 동해안 무속의 지속과 창조적 계승 (민속원, 2010), 236쪽. 18) 구결막( 球 結 膜 ) 또는 각막에 좁쌀 크기의 회백색 반점이 다수 발생하는 안질이다. 원인은 결핵 알레르기에 의한다고 하며, 유 아나 젊은 여자에 많고, 안면의 습진을 수반하며, 반복 재발이 특징이다. 의학 용어로 플릭텐(phlycten)이라고 한다. 대한간호 학회 편, 간호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6); 두산백과. 19) 巫 女 は 元 來 聲 樂 に 長 じてゐる 故 賽 神 の 際 に 善 く 俗 謠 や 民 謠 の 如 きをも 歌 つて 觀 衆 を 喜 ばせることがある 慶 北 善 山 郡 の 巫 女 の 如 きは 實 に 三 國 志 ( 演 義 ) 物 語 中 の 一 くだりを 手 眞 似 足 眞 似 で 面 白 く 歌 ふこともあると 石 巫 女 は 言 つた 因 に 三 國 志 は 朝 鮮 語 に 譯 されたものがあ つて 民 間 に 於 て 非 常 に 愛 讀 されてゐる 又 眼 病 のときはチユナムクス(추남굿)と 云 ふ 賽 神 を 行 ふが その 際 は 沈 淸 歌 をうたふものであ るとも 石 巫 女 は 言 つた 沈 淸 とは 沈 淸 傳 と 云 ふ 有 名 な 小 說 中 のヒロインで 父 の 盲 目 を 治 さんと 船 人 に 海 神 への 人 身 犧 牲 として 賣 られ その 得 たる 三 百 石 の 米 を 佛 前 に 供 養 し 遂 ひには 王 后 となり 佛 力 で 父 の 眼 病 を 治 し 得 た 者 である この 小 說 は 歌 ふやうになつてゐるの で 巫 女 もそれを 眞 似 て 歌 ふものであらう 孫 晉 泰, 朝 鮮 神 歌 遺 篇 ( 東 京 : 鄕 土 硏 究 社, 1930), 204쪽. 20) 한말( 년)에는 양산군 좌이면 구포리로 되었다가, 1904년 말부터는 동래부 계서면 구포리로 되었다. 1906년에는 동래부 좌이면 구포리로, 1910년에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 부산부가 부산부와 동래군으로 조정되면서 동래군 구포면 구포리가 되었다. 1943년 구포면이 구포읍으로 승격되었고, 1963년 정부 직할시 승격과 함께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부산진 구 구포동이 되었다. 1978년 이후 현재까지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에 속해있다. 부산광역시청 홈페이지( 참고

122 심청굿의 전승과 확산 서, 무녀가 판소리를 모방하여 부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심청전과 관련한 소설은 19세기에 이르러서 본격적인 발전을 보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필사 본 고소설의 경우 1870~1930년대의 농한기에 집중적으로 필사되었다. 현재까지 전국적으로 유통된 필사본은 대략 300편으로, 경북이 90편, 부산 경남이 27편, 대구 7편 등을 합치면 영남지역에서 124편이 유통된 것으로 나타난다. 21) 호남이나 충청지역에 비해 영남지역은 유통된 작품이 많고, 남 성에 비해 여성 향유층의 비율이 높았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한문보다 사용하기 편리한 한글 필 사본 고소설이 유통되었다. 22) 일제는 언론을 탄압 통제하기 위하여 1907년 7월 24일 신문지법( 新 聞 紙 法 ) 23) 을 공포하고, 1910 년 8월 이후 출판물에 대한 허가와 검열을 한층 강화하였다. 활자본 고소설의 출판이 1910년 이후에 나 활기를 띠게 되었는데, 이 시기 가장 잘 팔렸던 서적은 춘향전, 심청전 등의 고소설류였다. 24) 이러한 고소설에 대한 향유층의 수요증가는 1920년대에도 지속되었기 때문에 무당들이 심청전 또는 심청가를 수용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안질 퇴치를 위한 굿인 맹인거리는 맹인환자가 있는 집에서 각각 성( 姓 )이 다른 일곱 집에 돌아다 니며 쌀을 동냥하여 스무 번을 씻어서 시루에 백설기를 쪄서 독상( 獨 床 )에 바치고, 일반 제수( 祭 需 ) 를 차린 상을 그 옆으로 나란히 차려놓고 무당이 굿을 한다. 이 굿은 부정굿, 골매기굿, 세존굿, 군웅 굿, 성주굿, 조상굿, 맹인거리, 거리굿 순으로 진행된다. 25) 여러 굿거리 중 맹인거리에서는 환자의 치병을 위한 굿거리로 심청이야기와 관련된 무가가 구연된다. 맹인거리 過 程 에서는 沈 淸 이 父 親 의 開 眼 을 위해 供 養 米 300 石 에 몸을 팔아 印 唐 水 에 몸을 던졌다가 還 生 하여 父 親 을 다시 만나는 內 容 의 巫 歌 辭 說 이 唱 되고, 맹인대( 盲 人 竿 )로 眼 疾 患 者 의 눈을 씻어 준다. 맹인대는 100cm 정도 길이의 竹 竿 에 白 紙 로 오려서 만든 紙 錢 을 잡아맨 것인데, 이 맹인대의 紙 錢 으로 굿을 구경하는 觀 衆 들의 눈을 씻겨 주면 그 觀 衆 의 當 事 者 는 맹인대의 紙 錢 에 돈을 달아매 준다. 이것 은 눈을 앓지 않고 눈이 밝으라는 厄 막이의 뜻이다. 여기서 눈을 씻겨 주는 方 法 은 巫 가 맹인대에 맹인거리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이 글을 살펴보면, 맹인거리는 굿거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무당에 의해 서사적 성격을 지닌 심청이야기가 구연된다. 이 굿거리에서 무당이 안질환자의 병을 다스리고 관중의 안질 예방을 위하여 맹인대를 들고 있으면, 관중들은 맹인대의 지전에 돈을 매달고 눈을 씻 어 치병과 액막이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당들은 안질 예방과 치병의 목적을 지닌 맹인거리에 관중들의 서사적 흥미를 북돋우기 위해 심청이야기를 수용한 것이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현재 동해안 무당 중에 어느 누구도 심청굿에서 무녀가 들고 있는 대를 맹인대 라고 부르지 않는다. 다만 이 무구( 巫 具 )를 손대 라고만 칭할 뿐이다. 맹인거리에 사용하는 손대를 의미가 통하도록 만든 조어( 造 語 )가 맹인대인 것이다. 손대의 원래 의미는 손님굿에서 무녀 가 사용하는 무구로 손님굿의 손 과 대나무의 대 가 결합된 단어이다. 무당이 심청굿을 구연할 때 어깨에 걸치고 있는 대를 손대라고 부르는 것은 서사무가로 구연하는 심청굿이 손님굿 보다 후에 정형화되었음을 나타내는 지표이다. 29) 추남굿에서 아삼 추남아, 바삼 추남아 또는 임추남아 담추남아 열추남을 걷웃차 로 시작한다는 무당들의 전언과 이 굿거리를 청 보장단에 맞춰 구연하였다는 것은 추남굿에서 축원과 액막이 위주로 굿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의미 한다. 그리고 심청굿에서 손대를 차용한 것은 손님굿보다는 후대에 생성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이다. 서사무가에서 무당의 무구 30) 손에 든 무구 서서무가 기타 굿 종류 오른손 왼손 세존굿 부채 종이고깔 백팔염주(목) 별신굿, 오구굿 제면굿 신칼 - 제면떡 별신굿 손님굿 부채 손대 - 별신굿 심청굿 부채 손대 흑립(머리) 별신굿 발원굿 부채 손대 지화(머리) 오구굿 맨 紙 錢 으로 觀 衆 의 눈 앞을 스쳐 가는 것을 3~4 回 반복하는 것이다. 26) 무녀가 심청굿에서 손대를 들고 구연하는 것은 서사무가의 연행방식과 연관이 있다. 서사무가를 위의 인용문은 1976년 김태곤이 김석출과 27) 의 면담을 통해 작성한 것 28) 으로, 현재 전승이 중단된 21) 김재웅, 경북 지역에 유통된 필사본 고소설에 대한 실증적 연구, 고소설연구 24(한국고소설학회, 2007), 219~252쪽. 22) 김재웅, 영남 지역 필사본 고소설에 나타난 여성 향유층의 욕망,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16(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08), 5~37쪽. 23) 광무신문지법( 光 武 新 聞 紙 法 )이라고도 한다. 24) 권용선, 구활자본 삼국지의 유통과 변이, 한국학연구 14(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5), 23~49쪽. 25) 김태곤, 앞의 책(집문당, 1981), 103쪽. 26) 김태곤, 위의 책, 103쪽. 27) 김석출( 金 石 出, 일명 金 京 南, 1922년 음2월 29일~2005년 음6월 20일)은 1985년 2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82-가호 동해안별 신굿 보유자(악사)로 인정되었고, 2005년 4월 20일 명예보유자로 인정되었다. 동해안 별신굿과 오구굿의 절차와 내용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무당 중 한 사람이었다. 구연할 때 관중에게 서사적인 무가의 전달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시끄러운 꽹과리의 반주 없 이 장구와 징만으로 반주한다. 남무가 꽹과리 소리를 내면 관중이 오히려 사설이 들리지 않는다고 저지하기도 한다. 무당의 입장에서 손대를 사용하게 됨으로서 별비를 자주 걷으러 가는 수고를 덜 수 있고, 돌아다니지 않고 한 자리에 서서 구연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맥을 놓치지 않게 된다. 추남굿은 봉사점을 제외하고는 주술성이 약하다. 다른 서사무가가 신화로 존재하는 것에 비해 심 28) 김태곤, 앞의 책(집문당, 1981), 92쪽. 29) 현지 무당들이 사용하는 민속어휘(folk terms)가 심청굿의 실체를 규명하는데 유의미하다. 30) 지역에 따라 무구를 사용하는 것에서 차이가 있는데, 동해안 남부지역 세존굿에서는 목에 염주를 걸지 않고, 손님굿에서는 손대에 오색 천을 건다

123 심청굿의 전승과 확산 청굿은 심봉사신 또는 심청신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른 굿거리에 비해 맹인거리가 가지고 있는 특이 한 주술성은 안질 치료와 예방이라는 것이다. 심봉사의 개안( 開 眼 )과 관련된 심청이야기는 굿의 목 적과 관련하여 수용될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3. 심청굿 동해안 무당들은 안질 예방과 치병의 목적을 지닌 굿인 맹인거리 또는 추남굿을 별신굿의 굿거리 로 확장한다. 심청이야기를 수용하여 관중들의 서사적 흥미를 유발하였던 맹인거리에서뿐만 아니라 별신굿에서 하나의 굿거리로 확장시킨 것이다. 지는 심봉사가 황성으로 올라가는 대목과 눈뜨는 대목을 부르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다른 무당의 구술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옛날에는 여게(동해안 중부지역에) 심청굿이가 없었어. 그러니깐 그 심청전으로(제마수장단으로 심청굿을 구연) 하는 게 아니고, 창부거리라고 이 맹인거리라고 그냥 청보(청보장단)를 대가주고 그래 하는 거지. 창부굿 이라 그러지. 심청굿 맨치로(처럼) 요새 해가주 쭉 해가 나가는 게 아니고(제마수 장단에 심청이야기를 구연하는 것이 아니고), 청보 대가주고 마 심청굿이라 이래 했는 거지. 옛날에는 안 했다 카이. 지가(이금옥이) 냈는(만든) 것이 아니고, 지가 요(동해안 중북부지역) 나와서 지가 인기 끌라고 했는 거지 뭐. 돈도 벌고, 돈이 더 많이 나오거든. 청보(청보장단에) 대가(사설을 구연) 하는 거 보다. 첨부터 끝까지 줄거리를 해가 나가면은(구연하면) 중간중간 돈을 또 뜯는 데가 있고 이라기 (이렇기) 때문에. 그랄라고(그렇게 할라고) 했지 뭐. 심청전에 다 있는 건데, 책에 다 있는 건데. 35) 人 間 은 本 來 뱃속에서부터 봉사가 되어 나오는 게 드물고 흔히 삼눈을 앓든지 눈을 앓아서 장님이 되는 수가 많다. 그러므로 굿으로 장님(봉사)과 심청이 넋을 불러 주면 眼 疾 이 미연 방지되고 눈총이 밝아지며 장님이 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또 바닷가 風 雨 祭 祀 에도 심청굿을 하는데, 이는 漁 夫 들이 바다에 나갔을 때 안개 속일지라도 늘 총기를 주어서 앞을 잘 보아 어디를 가든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게 해달라는 뜻으로 심봉사 넋을 부르는 심청굿을 한다. 이 굿의 特 質 은 長 篇 神 歌 이기 때문에 長 時 間 이 소요되는 굿거리라는 점과 가장 숙련된 巫 女 가 맞아 行 한다는 점이다. 內 容 은 古 代 小 說 인 沈 淸 傳 과 大 同 小 異 하나 때로 唱 者 의 潤 色 이 加 해진다. 31) 동해안 중부지역 별신굿의 창부굿에서는 청보장단의 반주에 맞춰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대목까 지 축약하여 구연하고, 굿의 후반부에는 방아타령과 봉사점을 했었다. 이처럼 청보장단에 무가를 실 어 굿을 했을 때에는 심청이야기를 간단하게 구연하고, 유희적인 방아타령과 주술적인 봉사점이 주 가 되었다. 특히 창부굿에서 맹인과 관련된 방아타령과 봉사점을 했다는 것은 안질 예방과 관련된 굿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이 굿을 청보장단에 구연했다는 점은 교술무가적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치병을 위한 맹인거리에서 장님과 심청의 넋을 위로하여 안질 예방과 실명 방지, 시력이 좋도록 기원하였으나, 별신굿에서도 어민들을 위해 심봉사 넋을 불러 심청굿을 하였다. 이러한 별신굿 내의 심청굿에서는 심청전 소설을 윤색한 장편의 서사무가를 구연하기 때문에 숙련된 무녀가 연행한다고 하였다. 동해안 중부지역 32) 에서는 별신굿에서 연행한 이 굿거리를 창부굿 이라고 하였다. 이 지역의 창부 굿에서는 심청이야기 중에서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대목까지만 1시간 정도 부르고 마쳤다. 그러 나 동해안 남부지역 무당들이 관중들의 요구에 따라 심청이야기 전부를 구연한 것의 영향으로 신석 남 33) 무녀의 경우 1950년대 중반부터 심청이야기 전판을 구연하였다고 한다. 34) 즉 1950년대 중반까 심청이 사설은 다 알지. 아는데 제마수로(제마수장단으로) 안하고 여긴(동해안 중부지역은) 다 청 보로(청보장단으로) 했거든. 그것도(심청굿을 제마수장단에 구연하는 것도) 뚱땡이가(이금옥이) 그래 내놨지. 부산 가서 배워 와가(와서) 책을 사다보고 한 거지. 부산사람들 하는 거 보니 좋거든. 그게 (이금옥의) 특기라. 청보 같은 거 하믄(하면) 칸이 턱턱 비고 이랬거든. (제마수장단에 구연하면) 청보 보다 칸도 쉽고 하기 쉽거든. 제마수 2장으로 하니 지(자기가) 편코(편하고) 관람하는 할매네들(할머 니들) 듣기 좋고. 그래 그걸 가지고 명( 名 )을 얻었는(얻은) 거라. 근데 심청굿은 잘하니 뚱땡이 뚱땡이 이래지. 귀에 쏙쏙 드가는 것만 하니까. 그것도 아마 (동해안 중부지역으로 들어온 지가) 한 40~50년 되지. 뚱땡이 젊을 때 그랬으니까. 36) 31) 김선풍, 앞의 책, 84~85쪽. 32) 동해안 각 지역 굿의 절차와 내용을 토대로 문화권역(culture areas)을 설정하면, 강원도 고성에서 속초 양양 강릉 동해 삼척 지역까지를 지리적 범위로 하는 동해안 북부와 경북 울진 영덕 포항 경주를 포함하는 동해안 중부, 울산과 부산을 동해안 남부지역으로 구획할 수 있다. 윤동환, 앞의 책, 107~108쪽. 33) 신석남( 申 石 南, 1925년 음3월 15일~1992년 음9월 9일)은 무업 능력이 뛰어나 1980년 전수장학생, 1984년 보유자후보, 1990 년 5월 8일 강릉단오굿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34) 이 거리는 원래 창부굿 이라고 했고( 金 石 出 談 ), 한 시간 가량의 길이로 沈 淸 이 印 塘 水 에 빠져 죽는 대목에서 끝냈다고 한다. 申 石 南 巫 女 (1982년 현재 56세)도 지금처럼 심청가의 내용 전부를 부른 것은 그의 30대부터라고 한다. 창부굿은 경기도굿의 창부거리와 비교되는 점과, 觀 衆 들의 요구에 따라(특히 경남 지방 觀 衆 들의) 심청가의 줄거리를 모두 하게끔 되어온 1950년대 그러나 1900년대 초중반 동해안 남부지역에서 활동하던 무녀 중에는 심청이야기를 구연하는 무 중반부터의 변화는 천왕 곤반놀이의 卑 俗 化 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따로 고찰될 문제들이라고 생각된다. 이두현, 한국민속학논 고 (학연사, 1984), 199쪽. 35) 조연남, 동해안 세습무의 굿 전승방식과 창조적 연행능력 (안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55쪽 재인용. 제보자인 김미향 ( 金 美 香, 1940년 음3월 6일~2006년 음12월 25일)의 구술에 대한 부가설명은 필자가 덧붙였다. 36) 2005년 2월 22일 경북 영덕군 영해면 자택에서 송동숙 구술

124 심청굿의 전승과 확산 녀들이 있었다. 울산의 이퉁이(1890년생), 이차순(1918년생), 싹불네(1917년 이전 출생), 부산의 김 순기(1918년생), 이경직의 부인(1928년생) 등이 심청이야기를 잘 구연했다. 당시 이 지역에서는 심 청이야기를 제마수장단에 맞춰 연행하였다. 37) 현재에도 동해안에서 제마수장단에 맞춰 구연하는 세 존굿, 제면굿(걸립굿), 손님굿, 발원굿 등의 무가는 모두 서사무가이다. 동해안 남부지역에서 심청이 야기를 제마수장단에 맞춰 구연하였다는 것은 이미 서사무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청이야기 전부를 구연하는 심청굿은 1950~1960년대에 동해안 중북부로 확산되기 시작한다. 강릉 단오굿에서는 1930년대 당시 있었던 <가문굿>과 <조왕굿> 등의 굿거리가 사라지고, 38) 1930년대 초반 박용녀가 참여한 강릉단오굿에도 심청굿은 없었다. 39) 1966년도 조사 때부터 그 이전에 없던 심청굿 거리가 추가되었다. 40) 이후 김태곤은 1968년 1월 21일 울진의 변연호가 심청굿을 구연한 것을 처음으 로 채록하였다. 41) 변연호는 심청굿의 마지막에 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심청이 굿으로 어찌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이 일철정기가 눈인데 어찌야 하다가보 면 성한 눈도 궂힐 수가 있고 애삼도 막아주고 테삼도 걷어주고 못된 도둑 눈두야 걷어주시고 이 물가에 사넌 소철( 所 致 )로 께삐(고삐) 없던 철리매( 千 里 馬 ) 타고 가가부 자여손들이 만경창파 나갈지 라도 첫째는 알기를 잘 보아야 아무 사고나 없임나이다 눈에는 총기 ᄃᆞᆯ라꼬 이 뜻으로 심봉사를 도 불구하고 무당들은 굿의 주술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무당들이 주술성을 강조하는 까닭은 굿이 존재하는 이유이며, 이 이유가 무당들의 경제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43) 마을사람들에게 눈병을 막고 눈에 총기를 준다는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굿이 심청굿인 것이다. 별신굿에서 심청굿이 연행된다는 것은 안질 치료와 예방의 차원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어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이것은 맹인거리에서 창부굿에 심청이야기가 확대되면서 굿의 주술성이 변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4) 1950년대 이전에는 동해안 남부지역에서 맹인거리뿐만 아니라 별신굿에서도 서사무가로 심청굿 이 연행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45) 당시 동해안 중북부지역의 무당들은 남부지역 무당들과 교류를 통해 심청굿을 접할 수 있었고, 이를 수용한 것이다. 4. 심청굿의 확산과 의미 전환 유희적 성격이 농후하고, 관중의 기호에 부합하는 심청굿은 늦어도 1960년대부터는 강릉을 포함 한 동해안 중북부지역에서 중요한 굿거리로 인식되었다. 이들은 주로 문고본으로 발행된 딱지본, 즉 고소설을 새롭게 윤색한 심쳥젼 을 모본으로 삼았다. 모시나이다 42) 아주 옛날에는 심청이굿도 없었어. 문세(문서)가 다 나오고, 옛날 돌아가신 할머이들(할머니들) 무당은 심청굿에서 눈병을 막아주고 눈에 총기를 줘서 바다에 배를 타고 나가더라도 사고가 나지 않도록 기원한다.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 어민들은 구름 바람 하늘의 색깔 등을 통하여 날씨를 예측하여야 하며, 바다의 해류 물색 깊이 등을 가늠해야 한다. 눈으로 정확한 배의 위치와 방향 거리 등을 파악하는 것은 풍어뿐만 아니라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무당이 굿에서 연행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주로 주술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굿이 지닌 예술성에 37) 윤동환, 앞의 글(한국무속학회, 2010), 108~109쪽. 38) 무라야마 지준( 村 山 智 順 )의 부락제( 部 落 祭 ) 에 기록된 강릉단오굿의 굿거리는 다음과 같다. 열두거리의 굿은 (1) 부정굿 (2) 가문굿(가족의 안녕과 행복을 빈다) (3) 구눙굿(가축의 번식을 빈다) (4) 시준굿(풍년을 기원) (5) 서황굿(성황에게 빔) (6) 지신굿(지신에게 빔) (7) 마짓굿(해신에게 빔) (8) 벨상굿(역신에게 빔) (9) 조상굿(선조에게 빔) (10) 성주굿(가신에게 빔) (11) 조왕굿(조왕신에게 빔) (12) 거리푸리굿이었다. 당시의 굿에 출연한 한 나이 많은 남무의 말에 의한다[ 十 二 段 の 神 樂 は (1) プジヨンくツ (2) カ 厶 ンくツ( 家 族 の 安 幸 を 祝 す) (3)クヌンくツ( 家 畜 の 蕃 殖 を 祝 す) (4) シジユンくツ( 豊 年 祝 ) (5) ソフアンくツ( 城 隍 祝 ) (6) チシンくツ( 地 神 祝 ) (7) マジツくツ( 海 神 祝 ) (8) ペルサンくツ( 疫 神 祝 ) (9) チヨサンくツ( 先 祖 祝 ) (10) ソンジユくツ( 家 神 祝 ) (11) チヨワンくツ( 竈 神 祝 ) (12) コリプりくツであつたと 當 時 の 神 樂 に 出 演 した 一 古 覡 の 談 に 依 る]. 村 山 智 順, 部 落 祭 ( 朝 鮮 總 督 府, 1937), 70~71쪽. 39) 이 당시의 굿거리는 부정, 서낭, 산신, 칠성, 조상, 당고마기, 성주, 군웅, 제면, 꽃노래, 뱃노래, 등노래, 환우굿 순이다. 문화재 연구소 예능민속연구실,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무의식편(문화재관리국, 1983), 150쪽. 40) 장대연의 구술에 의한 것으로 (1) 부정굿, (2) 서낭굿, (3) 성주굿, (4) 군웅굿, (5) 세존굿, (6) 조상굿, (7) 설영굿, (8) 제석굿, (9) 당고마기, (10) 심청굿, (11) 손요굿, (12) 뒤풀이 순이다. 임동권, 강릉단오제,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9호(문화재관 리국, 1966), 360~362쪽. 41) 김태곤, 한국무가집 1(집문당, 1971), 296~341쪽. 42) 김태곤, 위의 책, 340~341쪽. 문세가 있으니 그 책에 판에 찍어가지고 나오고. 심청이굿도 책이 있잖는가. 책보고 다 외와였지(외워 서 넣지). 우리도 그전에 야들(박금천의) 아버지(박유관) 있을 때 심청이 길냈고(길을 내고), 심청이 책이(심청전 딱지본이) 있었지. 우리 어무이(최재분) 웃대에는(윗대에는) 심청이굿도 없고. 46) 심청가가 있고 심청전이 있잖아. 심청전 그걸 사가지고 보고, 또 그쪽 하는 걸 보니 좋거든. 그래가 책을 보고 외와가(외워서) 했지. 심청굿은 그 먼저 부산에서 했지. 지금 우리 딸(송명희)도 책을 가지 고 배와가(배워서) 안하나. 책을 보고 하믄(하면) 칸을(박자를) 알겠다, 숩거든(쉽거든). 47) 심쳥젼 은 현재와 같은 심청굿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심청굿 사설이 완판 심청전보 다 구활자본 심청전의 내용과 유사하다는 것은 이미 기존 연구에서 밝혀진 바이다. 48) 심청굿의 연행 43) 이균옥, 심청굿의 연행 방식, 동리연구 3(동리연구회, 1996), 216쪽. 44) 심청이 해신에게 인신공양으로 바쳐진 화소는 별신굿에 자연스레 수용될 여지가 있다. 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방석2리(독 석) 별신굿의 경우 마을사람들이 배를 타고 근해로 나가 무당을 바다에 빠뜨려 액을 막기도 한다. 45) 퉁이 할마이(이퉁이)가 눈 뜨고도 눈이 어둡아(어두워). 열여덟(1958년)에 이천별신 맡아가 할 직에 심청이굿 맡아가 할 사람 이 없아가(없어서), 퉁이 할매를 모셔와 가지고 세워놓고 심청굿을 하는데 잘 하더라고. 눈이 어두와가지고 앞은 보지를 못해 도, 사설이고 섬(목청)이고. 2007년 3월 2일 부산 기장 자택에서 김영희 구술. 46) 2005년 10월 30일 강원 강릉자택에서 사화선 구술. 47) 2005년 2월 22일 경북 영덕군 영해면 자택에서 송동숙 구술. 48) 이균옥, 앞의 글(동리연구회, 1993), 205~227쪽; 심오섭, 앞의 글(한국문화콘텐츠학회, 2009), 61~92쪽

125 심청굿의 전승과 확산 단락과 딱지본의 내용을 비교하면 대부분 일치함을 알 수 있다. 49) 이러한 점은 무당들의 연행에 모 본이 되기도 하고, 굿을 배우는 사람에게는 구연대본이 되기도 하는 필사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심쳥이 안에셔 팔경을 다 본 후에 한 곳을 당도한니 풍이 이러나면 옥 소 들니던니 엇 한 거리보다는 주기적인 마을공동제의에서 지속적으로 연행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익이다. 이들은 소설을 기반으로 한 심청전 외에 판소리 심청가의 일부를 차용하기도 했다. 동해안 필사본 무가 중에서 김장길본의 <심청가>와 김명대본의 <심청가중에서>의 내용 또한 유사하다. 여기에는 심 봉사가 황성가는 대목이 필사되어있다. 김명대본은 김장길본과 달리 뒷부분이 탈락되었을 뿐이다. 54) 두 부인니 션관을 놉히 쓰고 두러시 나오든니 져에 가난 심소져야 나을 어이 모로난야 우리 셩군 유우씨가 남수수하시다가 창오야예 붕하신 후 속졀업난 이 두 몸이 소상강 수풀에 피눈물을 러든 니 가지마당 아롱져셔 입입픠 원혼니라 창오산붕 상수졀리라야 쥭상지위 가 멀니라 쳔추에 깁푼 한을 하소할 길 업섯든니 너 호셩이 지극키로 너다러 말하노라 순 붕우 깃쳔연에 오연금 남풍 서을 지금 지 젼하든야 수로 만니에 조심하여 단여올나 (중략) 송옥에 비추뷰가 이에셔 슬풀손 야 동여울 실러신나 진씨왕에 약 가 방사난 업셔신나 한무제 구션 가 가 진즉 쥭자한니 션인들 리 수직을 하고 사라 실여 가자한들 고 사가 이러한니 고국이 창망코나 50) 심청이 배안에서 소상팔경 다 본후에 한곳을 가노라니 향풍이 이러나며 옥패 소리 들리더니 의회 한 주럼사이로 어떠한 두부인이 선관을 높이 쓰고 자하상을 걸어 앉고 뚜렸이 나오더니 저기가는 심소자야 나를 어이 몰으느냐 우리 성군 유우씨가 남순수 하시다가 창호산에 붕하시니 속절없는 판소리 <심청가> 김장길본 <심청가> 김명대본 <심청가중에서> 정처없이 떠나간다 도화동아 잘있거라 무릉촌아 부디 잘살아라 나는 간다 나는 간다 네가 이제 떠나가면 어느때나 돌아오리 도화동 남녀노소 모두나와 인사를 허고 울며불며 떠나갈제 그때여 옥황상재께서 사해용왕을 불러 다시 하교를 내리실제 심낭자 방명이 늦어가니 정처없이 떠나간다 도화동아 잘있거라 무릉추나 부뒤 잘있거라 나는간다 나는간다 이재내가 떠나가면 어너시절이 돌아오리 동화동 남녀노수 모두나와 인사를 하면 울면불면 떠나올때 뼝득이내를 앞세우고 황성천리를 올라갈제 어이가리나 어이갈고 황성천리 를 어이갈고 청처없이 떠나간다 동화동아 잘있거라 무릉촌아 부디 잘있거라 나는간다 나는간다 이제내가 떠나가면 어느 시절에 돌아오리 동화동 남녀노수 모두나와 인사를 허고 울며불며 떠나올때 뺑덕 이내를 앞세우고 황성천리를 올라갈제 어이가리 어이갈고 황성천리를 어이갈고 이 두 몸이 소상강 대숲풀에 피눈물을 뿌렸더니 가지마다 아롱저서 잎잎이 원한이라 창오산 봉상수절 에 죽상지루 내가 멀어라 천추에 깊은 한을 하소할길 없었더니 네 효성이 지극키로 너다러 말하노라 대순붕후 기천년에 오현금 남풍시를 지금까지 전하더냐 수로 말리 먼먼 길에 조심하여 다녀오라 (중략) 송옥에 비추부가 이에서 슲을소냐 동녀를 실었으니 진시황의 채약밴가 방사는 없었으나 한무제 그 선밴가 내가진작 죽자하니 선인들이 수직하고 살아 실여가자 하니 고국이 창망하다. 51) 판소리에서는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진 뒤 옥황상제가 용왕에게 전교( 傳 敎 )하여 심청을 수궁으로 데려가고, 심청의 효심에 감동하여 무릉촌 장승상부인과 동네사람들이 비를 세운다. 이후 심봉사는 뺑덕이네와 살림을 차려 살다가 도화동 무릉촌에서 다른 마을로 떠나는 장면에서 광대가 중모리로 부른다. 그러나 심청굿에서는 심봉사와 뺑덕이네가 황성의 맹인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떠나는 장면 에 차용하였다. 남해안별신굿기능보유자 정형만이 소장하고 있는 필사본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피난 중에 많은 부 분이 소실된 낙장본이다. 52) 현재 남아있는 부분은 심청이 인당수 가는 길에 소상팔경을 구경하는 장면이다. 딱지본 심쳥젼 과 동일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53) 동해안에서는 무녀들이 딱지본을 놓고 심청굿을 학습하였다. 신석남, 이금옥, 김영희, 송명희, 빈 순애 등은 딱지본 심쳥젼 을 토대로 심청굿을 학습했다. 심청굿은 당시 관중의 요구와 대중적 인기 에 힘입어 큰 굿거리로 인식되었다. 무당의 입장에서도 비정기적인 개인 치병 제의에서 행하는 맹인 49) 심청굿의 현지 전승적인 면에서 심청굿 선행설, 심청가 선행설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녀의 제보, 전승되고 있는 사설 유형에 근거하여 심청굿의 형성은 소설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특히 심청굿 사설의 내용적인 특징을 구활자본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심오섭, 위의 글(한국문화콘텐츠학회, 2009), 89쪽. 50) 김선풍 편, 남해안별신굿 (박이정, 1997), 347~353쪽; 김진영 김영수 홍태한, 서사무가 심청전집 (민속원, 2001), 608~610쪽. 51) 윤동환, 한국의 무가 11-동해안 필사본 무가 (민속원, 2007), 607~609쪽. 52) 김진영 김영수 홍태한, 앞의 책(민속원, 2001), 608쪽. 53) 현재 남해안 굿에서 심청굿이 전승되지 않고, 심청굿을 연행하지 않았다는 1998년 정형만의 제보도 있으나, 무당이 필사본으 로 보관하고 있고, 1900년대 초중반의 상황으로 보아 굿에서 연행될 개연성이 있다. 동시대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연행물끼리 상호 영향을 주는 것은 연행문학의 일반적인 경향 55) 이 다. 이 당시 심청굿이 별신굿의 굿거리 하나로 정착되었고, 판소리 역시 광범위하게 확산되었기 때 문에 육자배기조 소리를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은 무녀라도 판소리를 흉내 내어 부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굿에서는 활자화된 소설과 달리 연행 상황에 따라서 내용을 확장하거나 생략할 수도 있다. 관중의 흥미를 유도하고, 무당의 경제적 목적을 취하기 위해 빈번하게 삽입가요를 사용한다. 굿의 연행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무당은 굿의 내용이나 형식에 관객의 예술적 요구를 반영하여 경제적 욕망이 관철되는 방향으로 변화하기 마련이다. 56) 시대에 따른 대중적 취향에 맞춰 무당이 단가 민 요 유행가를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무당들은 심청이 태어나는 장면에서 기저귀 값을 요구하고, 심봉사가 뺑덕이네와 황성을 올라갈 54) 윤동환, 동해안 필사본 무가의 존재양상과 기능적 특성, 한국무속학 14(한국무속학회, 2007), 329쪽. 55) 이균옥, 앞의 글(동리연구회, 1993), 210쪽 56) 이균옥, 위의 글, 225쪽

126 심청굿의 전승과 확산 때, 심봉사가 강을 건너는 대목에서 강을 건너기 전에 피리를 부는 장면, 57) 봉사 오줌 누는 장면 58) 등에서도 선주 마을임원 관객 등에게 별비를 요구한다. 이외에도 무당은 심청굿의 많은 부분에 별비를 요구하는 장면을 삽입하면서 자신들의 경제적 욕구를 충족한다. 판소리에는 창과 아니리 부분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만, 심청굿은 불분명하다. 서사무가를 구 연하는 무당은 이야기를 노래로 부르는 강창사( 講 唱 師, singer of tale)가 되기도 하고, 담화조로 이야 기하는 강담사( 講 談 師, story teller) 59) 가 될 수도 있다. 사설 구성 방식은 무당이 광대에 비해 더 유연 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60) 판소리 심청가가 음악선법을 통한 예술성을 지향하였다면, 심청굿은 동 해안 사람들을 토대로 현지 대중화를 지향하였다. 굿은 제의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굿은 제의성을 공고히 할 내용이 뒷받침되어야 만 그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다. 무당은 안질의 치료와 예방은 심봉사의 개안에서, 해상안전과 풍어 기원은 심청의 인신공양과 연관지어 소설 내용을 수용했다. 또한 유행하던 판소리 대목과 단가 민 요를 삽입하여 현재의 심청굿을 완성시킨 것이다. 5. 결론 사회적 요구가 상실된 굿은 점차 전승력을 상실하게 된다. 개인이나 가족중심의 무속의례인 삼제 왕굿, 논부굿, 별상굿, 맹인거리, 광인굿 등과 상업적 목적을 지니고 시장 번영을 위한 장별신, 현실 에 적응하지 못한 음악적 형식의 하나인 우도반경, 61) 놀음굿의 단가 등은 현재의 사회적 상황에 적 응하지 못하고 소멸되었다. 62) 동해안 무당들은 안질의 퇴치를 위한 맹인거리를 별신굿의 심청굿으로 전환했다. 또한 심청전을 동해안 지역의 언어와 무악을 기반으로 하여 굿으로 재창출했다. 이러한 시도는 무당들에게 있어서 계속 진행되었다. 김석출과 이금옥의 경우 1950년대에 동해안 중남부지역에서 봉덕이타령을 서사무 가로 구연하였다고 한다. 63) 봉덕이타령은 에밀레종 전설과 관련된 것으로 에밀레종(성덕대왕신종)을 57) 자진모리장단에 맞춰 무당이 피리 부는 흉내를 내며, 관중에게 피리소리가 들리는가 묻는다. 관중들이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하면 무당이 다시 피리를 불어야 되니 다시 부는 값을 요구하고, 피리 소리가 난다고 하면 잘 들리는 값을 요구한다. 2013년 10월 15일 경북 울진 거일별신굿에서 김영희 구술. 58) 무녀는 꽹과리채를 치마에 넣어 남자가 오줌 누는 흉내를 낸다. 무녀는 오줌이 거름이고, 고기가 오줌냄새 맡고 많이 들어온 다고 하면서 오줌 값을 요구한다. 2013년 10월 15일 경북 울진 거일별신굿에서 김영희 구술. 59) 임형택은 전문적 직업적인 예능인으로 활동한 이야기꾼의 성격을 강담사( 講 談 師 ), 강독사( 講 讀 師 ), 강창사( 講 唱 師 )로 구분하였 다. 임형택, 18 9세기 이야기꾼과 소설의 발달, 한국학논집 2(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1975), 285~304쪽. 60) 이균옥, 앞의 글(동리연구회, 1996), 221~224쪽. 61) 우도반경은 판소리의 대중화와 맞물려 동해안에 들어온 것으로 청보 변형장단에 맞춰 구연했다. 현재 우도반경이나 단가는 무당의 재능을 보이는 측면에서 잠시 구연하기도 하나, 연행되는 경우가 드물다. 적응력을 상실한 우도반경의 경우 결국 기존 의 형태로 회귀하여 동해안 지역사람에게 익숙한 메나리조의 청보로 구연하게 되고, 단가의 경우는 새롭게 민요나 유행가로 전환되었다. 62) 윤동환, 앞의 책(민속원, 2010), 325~326쪽. 만들 때 맑은 종소리를 위해 아이를 쇳물에 넣었다는 이야기를 별신굿 또는 오구굿에서 중모리장단에 맞춰 무당이 서서 구연했다는 것이다. 이 봉덕이타령은 그 당시 대중적 취향에는 부합하였으나, 굿거 리로서 주술성이 없었기 때문에 관중의 외면으로 인하여 더 이상 전승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64) 우도반경은 판소리의 대중화와 맞물려 동해안에 들어온 것으로 청보 변형장단에 맞춰 구연했다. 현재 우도반경이나 단가는 무당의 재능을 보이는 측면에서 잠시 구연하기도 하나, 현재 연행되는 63) 2013년 10월 16일 김영희와 전화 인터뷰이다. 전날 경북 울진 거일별신굿에서 김영희와 심청굿과 관련하여 인터뷰하였으나, 봉덕이타령에 대한 내용이 누락되어 전화로 인터뷰하였다. 조사자 : 봉덕이타령 하는 것을 언제쯤 봤어요? 김영희 : 그기(그것이) 내가 열 몇 살, 내가 지모질(무녀일) 확실히 안하기 전에 봤지. 조사자 : 아! 열 몇 살쯤 됐을 때. 김영희 : 어. 처자 때 조사자 : 그때 강원도 쪽에 했어요? 아니면 김영희 : 경북 쪽에서도 하고, 부산 쪽에서도 하고. 부산에는 불도( 佛 道 )가 씨니깐(쎄니까). 조사자 : 아! 부산은 불도가 쎄니깐 김영희 : 강원도서는(강원도에서는) 별로 안하고. 경북, 부산. 조사자 : 아! 그랬구나. 열 몇 살쯤 됐을 때 그때 봤단 말이죠? 김영희 : 처자 때 봤지 뭐. 처자 때. 조사자 : 아! 그랬구나. 김영희 : 그건 마 구경하면서 봤기 때문에 참 듣기도 좋고. 어른들 잘 하지 뭐. 아부지(아버지) 참 잘 했어. 봉덕이타령. 조사자 : 그러면 이금옥 선생이 하고. 또 다른 사람이 하는 걸 봤어요? 김영희 : 구룡포 아부지(김석출), 구룡포 삼촌(김재출), 뚱땡이 큰엄마(이금옥). 그 세분이 그 하는 거 봤지, 그 다음에 하는 사람 없어. 조사자 : 그 분들 외에는 하는 사람이 없었고. 김영희 : 응. 조사자 : 김석출 어른도 서가지고 구연했어요? 김영희 : 누구? 조사자 : 김석출 어른이 서가지고 했냐구요? 아니면 반주만 하셨어요? 김영희 : 아부지가 서가 했지. 앉아가 하는 게 아이고(아니고), 서가(서서) 하는 기라. 조사자 : 앉아가 하는 게 아니고, 서서하고. 김영희 : 서가 하는 거. 봉덕이 그거 인경( 人 定 ) 만드는 거. 시주가 시주해가주고 하는 그 사설이가 그래 다 있더라꼬. 조사자 : 아! 있었어요? 그것도 이야기책으로 있었어요? 김영희 : 응? 조사자 : 이야기책으로 있었어요? 심청전처럼? 김영희 : 그냥 책으로 안가고, 그냥 말 세와가지고 하더라고. 조사자 : 그냥? 김영희 : 책도 없아요. 그거는. 조사자 : 아! 책도 없었고. 김영희 : 응. 조사자 : 오구굿에 했으면 어느 굿거리 쪽에 했어요? 김영희 : 경북에는 오구자리가 많으니까 어디서 했는지 그 기억이 잘 안난다니까. 조사자 : 굿거리 순서, 예를 들어서 부정굿, 골매기굿 이렇게 한다고 하면, 어느 부분에서 했는지 기억이 나세요? 김영희 : 경북에는 밤에 짬수 봐가주고 하고, 부산에는 일나서가주고 맞이굿, 그 맞이염불하고 나가주고 인자, 염불할 직에 고깔 씌고 봉덕이타령. 아부지가 많이 했지. 조사자 : 아! 그랬구나. 김영희 : 아부지가 사실이가(사설이) 무궁무궁하니까네. 조사자 : 그렇죠. 김영희 : 그 다음엔 한 사람 없아. 64) 동해안 무당이 별신굿 또는 오구굿에서 봉덕이타령을 굿에서 구연했다는 것은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127 심청굿의 전승과 확산 경우가 드물다. 적응력을 상실한 우도반경의 경우 결국 기존의 형태로 회귀하여 동해안 지역사람에 게 익숙한 메나리조의 청보로 구연하게 되고, 단가의 경우는 새롭게 민요나 유행가로 전환되었다. 무당들은 무업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이들은 사회적 요구에 부합하여 끊임없이 굿을 세련되게 다 듬고 다양화시켰다. 추남굿 우도반경 단가 봉덕이타령 등은 그 시대에서 효용성이 있었으나, 시 대의 변화에 따라 점차 사라졌다. 이에 반하여 심청굿은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동해안 무당들은 추남굿의 주술성을 수용하였고, 이를 토대로 소설 심청전을 무가의 모본으로 삼았고, 판소리 심청가 일부를 장면에 맞게 삽입가요로 구연함으로써 심청굿을 완성했다. 또한 무당들은 관객에게 별비를 요구하는 새로운 장면들을 삽입하면서 자신들의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켰던 것이다. 이혜구, 무속연구, 사상계 통권24, 사상계사, 이혜구, 송만재의 관우희, 30주년기념논문집, 중앙대학교, 임동권, 강릉단오제,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9호, 문화재관리국, 임형택, 18 9세기 이야기꾼과 소설의 발달, 한국학논집 2,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장주근, 한국의 신화, 성문각, 정노식, 조선창극사, 조선일보사 출판부,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3 제3판, 지식산업사, 조동일 김흥규, 판소리의 이해, 창작과 비평사, 조연남, 동해안 세습무의 굿 전승방식과 창조적 연행능력, 안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村 山 智 順, 部 落 祭, 朝 鮮 總 督 府, 최재호, 심청굿에 수용된 심청 사사 수용 요인, 인문과학연구 34,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홍태한, 심청굿 무가의 변이 양상과 형성과정 추론, 한국무속학 2, 한국무속학회, 참고문헌 권용선, 구활자본 삼국지의 유통과 변이, 한국학연구 14,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김구한, 심청굿 무가의 형성 과정 재론, 제24차 한국무속학회 학술발표회 발표논문집, 한국무속학회, 김난주, 굿과의 관계에서 본 판소리의 기원,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김선풍, 한국시가의 민속학적 연구, 형설출판사, 김선풍 편, 남해안별신굿, 박이정, 김재웅, 경북 지역에 유통된 필사본 고소설에 대한 실증적 연구, 고소설연구 24, 한국고소설학회, 김재웅, 영남 지역 필사본 고소설에 나타난 여성 향유층의 욕망,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16, 한국고전여성문학회, 김진영 김영수 홍태한, 서사무가 심청전집, 민속원, 김태곤, 한국무가집 1, 집문당, 김태곤, 한국무속연구, 집문당, 김헌선, 판소리의 발생론과 영향론, 판소리연구 2, 판소리학회, 대한간호학회 편, 간호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연구실,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무의식편, 문화재관리국, 박헌봉, 창악대강, 국악예술학교 출판부, 서대석, 판소리 형성의 삽의, 우리문화 3, 우리문화연구회, 서대석, 성주풀이와 춘향가의 비교연구, 판소리연구 1, 판소리학회, 孫 晉 泰, 朝 鮮 神 歌 遺 篇, 東 京 : 鄕 土 硏 究 社, 심오섭, 동해안 심청굿 연구, 문화예술콘텐츠 3, 한국문화콘텐츠학회, 윤동환, 동해안 필사본 무가의 존재양상과 기능적 특성, 한국무속학 14, 한국무속학회, 윤동환, 한국의 무가 11-동해안 필사본 무가, 민속원, 윤동환, 굿의 형식 전환과 무악의 변화, 한국무속학 20, 한국무속학회, 윤동환, 동해안 무속의 지속과 창조적 계승, 민속원, 이경복, 심청굿 연구, 명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이균옥, 심청굿의 형성 문제, 동리연구 1, 동리연구회, 이균옥, 심청굿의 연행 방식, 동리연구 3, 동리연구회, 이두현, 한국민속학논고, 학연사, 이보형, 창우집단의 광대소리 연구, 한국전통음악 연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28 심청굿의 전승과 확산 심청굿의 전승과 확산 에 대한 토론문 홍태한 중앙대 1. 심청굿은 흥미로운 대상이다. 고소설, 판소리로도 전승되고 있어서 심청전승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따라서 심청굿의 정체를 탐색하는 것은 한국 구비서사시 연구에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 을 것으로 판단한다. 오랫동안 동해안굿을 연구한 윤동환 선생이 심청굿을 연구했으니 그 의의가 크다. 이를 통해 앞으로 심청굿을 포함한 동해안별신굿의 다양한 굿거리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기 를 희망한다. 있다. 문제는 자료를 어떻게 요리하는가이다. 주어진 자료를 통시적으로 일별한 후 변화상을 도출하 고, 그것을 연행주체인 무당들의 의도와 굿판의 환경 변화와 연관시켜 다루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사회적 요구가 상실된 굿은 점차 전승력을 상실하게 된다. 개인이나 가족중심 의 무속의례인 삼제왕굿, 논부굿, 별상굿, 맹인거리, 광인굿 등과 상업적 목적을 지니고 시장 번영을 위한 장별신,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음악적 형식의 하나인 우도반경, 놀음굿의 단가 등은 현재의 사회적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멸되었다. 라는 진술은 앞으로 굿을 바라보는 데 의미있는 시각을 제공한다. 문제는 이러한 의도와 생각이 심청굿을 다룬 이 글에는 단초만 보이지 줄기가 보이지 않 는다는 것이다. 동해안굿의 상세한 변화상이나 사정을 알고 있는 발표자여서 분명 앞으로 더 좋은 성과를 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이런 말로 논평을 마무리한다. 2. 추남굿과 심청굿의 관련성을 따진 연구는 심청굿의 형성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려 주는 귀중한 성과이다. 그동안은 굿거리 심청굿에만 주목하여 1960년대 이후에 심청굿이 형성되었 을 것이라는 추론이 있었기 때문에 추남굿에 대한 연구는 기존의 이러한 시각에 새로운 관점 전환을 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다만 추남굿이 왜 심청굿으로 확장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는지를 추남굿의 성격과 본질을 바탕으로 좀 더 명확하게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무당이 심청굿을 구연할 때 어깨에 걸치고 있는 대를 손대라고 부르는 것은 서사무가로 구연하는 심청굿이 손님굿 보다 후에 정형화되었음을 나타내는 지표이다. (...) 그리고 심청굿에서 손대를 차용한 것은 손님굿보다는 후대 에 생성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는 부분은 설명이 더 필요해보인다. 이 부분만을 읽어서 심 청굿이 손님굿보다 후대에 생성되었다는 근거가 왜 되는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3. 심청굿의 확산 양상은 의미있다. 이를 통해 심청굿이 굿판의 관심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심청굿의 확산 양상은 알 수 있지만 왜 이러한 변화가 일어났는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소설 심청전을 무가의 모본으로 삼았고, 판소리 심청가 일부를 장면에 맞게 삽입가요로 구 연함으로써 심청굿을 완성했다. 또한 무당들은 관객에게 별비를 요구하는 새로운 장면들을 삽입하 면서 자신들의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켰던 것이다. 라는 결론은 의미심장해보이지만, 그 과정에 대한 설명이 불친절하다. 심청굿의 완성이 연행 주체인 무당들의 의도로 보여지는 이러한 진술은, 논문의 앞 부분에서 굿거리의 변화상을 바탕으로 살펴본 것과 긴밀한 관련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왜 이러한 굿거리의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좀 더 명확하게 그리고 글쓴이의 굿판을 바라보는 의도가 드러나게 기술해주길 부탁한다. 4. 다양한 자료를 가져와서 심청굿을 바라보는 시각을 새롭게 제시했다는 데에 이 글의 의의가

129 파독 광부 간호여성의 이주와 역이주 2013 한국민속학자대회 파독 광부 간호여성의 이주와 역이주 -남해독일마을을 통해 본 파독근로자에 대한 재조명-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목차 1. 머리말 2. 조사방법 3. 희망을 찾아 독일로 간 사람들 4. 남해독일마을로 역이주한 파독 근로자들 5. 맺음말 1. 머리말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경남의 어촌마을조사지로 남해군 삼동면 물건마을을 선정하여 2012년 1월 부터 10월초까지 물건마을에 거주하며 어촌 주민들의 삶의 모습을 조사하고 기록하는 작업을 하였 다. 물건마을의 위쪽에 동일 법정리에 속해 있는 독일마을이 위치해 있어 물건마을을 조사하면서도 틈틈이 독일마을에 올라가서 그들의 일상생활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작업을 병행 하였다. 그들을 통해 60년~70년대 한국사회의 단면을 볼 수 있고,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여성 1) 을 재조명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부와 간호여성이 파독된 역사적 배경과 남해독일마을 건립 과정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60년~70년대에 광부와 간호원 혹은 간호보조원으로 취직되어 서독으로 떠났던 사람들은 1만8천 1) 본고에서는 간호사라는 용어를 대신하여 간호여성이라는 포괄적 용어를 사용한다. 이는 나혜심이 파독 한인여성 이주노동 자의 역사, 서양사론 100호(2009), 독일 한인간호여성의 노동의 성격, 독일연구 (2009) 등에서 사용한 용어이다. 당시 간호를 위해 갔던 여성의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간호사뿐만 아니라 간호보조원 등 간병을 포괄하는 좀 더 넓은 범위이기 때문이다. 257

130 파독 광부 간호여성의 이주와 역이주 여 명에 이른다. 그들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혹은 졸업을 해도 취직할 일자리가 없어서, 외국에 대한 동경 때문에, 한국의 암울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벗어나고자... 이유는 다르지만 결국 그들은 희망을 찾아 서독행을 택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30년 혹은 40년의 독일생활을 뒤로하고 남해로 왔다. 경제대국, 문화선진국, 사회보장제도 가 잘 되어 있는 국가에서 정착해서 살던 그들이 다시 돌아왔다. 그것도 대한민국의 끄트머리에 위 치한 남해로 와서 모여살고 있다. 그들은 왜 파독 근로자로 서독행 비행기에 올랐으며, 한국으로 역이주한 이유는 무엇이고, 현재 그들의 삶은 어떠한가에 조사 연구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2013년은 광부가 파독된 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요즘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여성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작년에 개관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상설전시실에도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도 2012년 하반기 기획전시를 파독 광부 간호여성을 주제로 하였다. 명지대 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에서는 2012년 정기학술포럼의 주제를 박정희 시대와 파독 한인들 로 하여 정기적으로 포럼을 개최하기도 했다. 그러나 파독 광부와 간호여성에 대한 논의의 초점은 언제나 60년~70년대 그들의 고난과 역할에 맞춰져 있다. 가난한 시절 타국에서 고생하며 모은 돈을 한국으로 송금했고, 이를 종자돈으로 하여 한국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현재의 기적을 이룬 것 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는데 최적의 소재였고, 아직도 이것은 유효하게 활용되고 있다. 핵심은 이들의 희생이 경제발전의 중요한 기재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강의 기적으로 표현되는 경제성장을 설명할 때 가장 앞줄에 서는 것이 파독 근로자들이다. 한국경제발전의 신화화 에 이보다 좋은 소재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60년~70년대의 울타리에 갇혀 있던 그들에 대한 고정된 시각에서 벗어날 때이다. 지금까지는 파독 근로자들을 한국경제라는 거대담론의 물결에 던져두었다면 이제는 그들 개개인에 게 손을 내밀어 진솔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1963년 12월 한국의 광부 123명이 처음으로 서독행 비행기에 올랐다. 파독 간호여성은 초창기에 는 종교단체와 개인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1957년 처음으로 간호여성이 파독된 지 벌써 56년의 세월이 흘렀다. 20대~30대의 젊은 나이에 서독 땅을 밟았던 그들은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파인 70 대~80대의 노인이 되었다. 그런 그들이 새삼 한국으로 역이주하여 모여 살고 있는 곳이 있다. 이곳 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현재적 관점에서 기록하는 것은 화석화된 신화에서 눈을 돌려 살아 있는 신화를 만나는 것이다.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지금껏 간과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장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2. 조사방법 1) 제보자 선정 남해독일마을은 2003년부터 파독 근로자들이 입주하기 시작했다.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점 차적으로 가구 수가 증가하여 34가구가 들어서게 되었고, 현재도 주택이 건립되고 있는 상황이다. 물건마을을 조사하면서 이와 병행하여 독일마을의 34가구를 전수조사 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한정된 조건에서 심층적 이해를 추구하는 질적 조사를 위해서는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하기 에 다양한 사례의 제보자를 어떻게 선정하느냐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여성 이 결혼한 가정, 파독 간호여성과 독일 남성이 결혼한 가정, 파독 간호여성이 귀국 후 한국 남성과 결혼한 가정 등 다양한 형태로 구성된 가정을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파독될 당시 한국의 근로자들은 미혼이 많았다. 결혼 적령기의 남녀가 타국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파독 광부와 간호여성이 만나서 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계약기간이 끝나고 한국으로 귀국 한 간호여성들은 한국 남자와 결혼했지만, 독일에 남기로 결심한 간호여성들은 독일 남성과 결혼하 는 경우도 흔히 있었다. 그래서 파독 광부와 간호여성이 결혼한 김두한 이경자 부부, 이병종 문원자 부부를 제보자로 선정하여 조사하였다. 다음으로 파독 간호여성 출신이면서 한국으로 귀국하여 한국남성과 결혼한 한건섭 박미자 부부, 파독 간호여성으로 독일남성과 결혼한 우춘자 빌헬름 엥엘프리드 부부를 제 보자로 선정하게 된 것이다.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여성이 결혼한 가정을 2가구로 한 것은 두 경우 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김두한 이경자 부부의 경우 한국에서 결혼을 한 후 김두한이 파독 광부 로 가게 된다. 그리고 아내인 이경자가 근무할 수 있는 병원을 마련한 후 서독으로 불러들인 경우이 다. 반면 이병종 문원자 부부는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여성으로 갔다가 서독에서 만나서 결혼한 경우이다. 이들 네 가구를 제보자로 선정한 또 다른 이유는 이들이 독일마을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김두한 이경자 부부는 독일마을에서 민박(베토벤하우스)을 운영하면서, 독일마을과 접해 있는 원예예술촌 내의 독일식 주택에 거주 한다. 그리고 독일마을에서 커피숍(커피브레멘)을 운영하고 있 다. 김두한은 제1회 남해독일마을맥주축제 때부터 중심적인 역할을 하여 축제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다. 부인 이경자는 2012년에 원예예술촌 회장으로 선출되어 연간 25만 명 이상의 유료관람객이 찾는 원예예술촌을 끌어가고 있다. 이병종 문원자 부부는 독일마을에 2010년에 입주한 늦깎이 주민인데도 주민들과 소통을 잘하여 2012년 5월에 독일마을주민운영위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마을의 가장 큰 행사인 남해독일마을맥주 축제를 개최하느라 매년 하반기는 바쁘게 보내고 있다. 한건섭 박미자 부부는 파독 간호여성이 계약만료 후 한국으로 귀국하여 한국 남성과 결혼한 경

131 파독 광부 간호여성의 이주와 역이주 우이다. 그런데 박미자는 귀국 후 24년이 지난 1992년에 다시 독일에 있는 병원에 취업이 되어 줄곧 독일에서 생활한 독특한 경우이다. 남편 한건섭은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아내를 만나기 위해 독일과 한국을 오가는 생활을 했다. 따라서 수십 년을 독일에서 생활하여 독일식 사고를 하는 독일마을 주 민들보다는 아랫동네인 물건마을 사람들과 더 친숙하게 지낸다. 그래서 물건마을 노인회 총무를 몇 년째 역임하고 있고, 물건마을 동제 제관으로도 참여한다. 그리고 한건섭은 독일마을이 건립되는 과 정에서 군청에서 배포한 설명회 자료, 건의문, 남해군 발송 편지 등을 모두 보관하고 있다. 심지어는 남해군청에서도 보유하고 있지 않은 자료까지 가지고 있어서 독일마을건립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로 유용하게 활용하였다. 우춘자 빌헬름 엥엘프리드 부부는 독일마을에 가장 먼저 입주한 가정이다. 빌헬름 엥엘프리드는 아내와 자신은 결혼한 후 줄곧 독일에서 살았기 때문에 여생은 아내의 나라에서 살겠다는 생각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우춘자는 5년~10년쯤 살다가 다시 독일로 갈 생각이었으나 남편의 결심이 완 고하여 남해에 계속 살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독일마을에 처음 입주 했을 때 빌헬름 엥엘프리드는 이웃마을 주민들과 무용도 함께 배우고, 행사에도 참여하고, 학생들에게 독일어도 가르치는 등 적극 적인 활동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기력이 쇠하여 물건마을 해변을 산책하는 일 외에는 주로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이들 부부는 TV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했고, 다큐멘터리 영화의 주인공으로도 등장했 으며, 잡지, 신문 등에 가장 많이 노출되는 가정이다. 이상의 4가구를 중심으로 과거 한국에서의 삶과 서독행을 택한 배경 그리고 독일에서의 생활과 결혼, 남해독일마을의 건립과정과 독일마을에서의 그들의 일상과 축제 등을 기록하였다. 2) 조사 과정 2012년 1월 12일부터 10월 5일까지 남해에 거주하면서 조사를 진행했다. 물건마을에 상주를 하며 물건마을과 독일마을을 병행하여 조사하였다. 물건마을과 독일마을은 동일 법정리에 속하기 때문에 동일 생활권에 있다. 그래서 참여관찰 방식으로 조사를 하였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자연스럽 게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유도하기도 하고 때로는 인터뷰 형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년 후 2013년 10월 4일~5일, 제4회 독일마을맥주축제 기간에 재방문하여 주민들을 인터뷰함으로써 그 동 안의 몇몇 변화상을 확인하였다. 독일마을에서 처음으로 찾은 곳이 김두한 이경자 부부가 운영하는 커피브레멘이었다. KBS 다 큐멘트리 3일 에서 독일마을에 관한 내용이 방영되었는데 커피브레멘 장면이 많이 나와서 낮이 익 은 곳이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장소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물건마을조사를 위해 2012년 1월 12일 남해로 들어왔다. 그리고 일주일동안은 마을 이장, 노인회, 면사무소, 학교 등지를 다니며 인사 다니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1월 19일 처음으로 독일마을을 찾아서 커피브레멘의 문을 열었다. 때마침 김두한이 출근해 있었는데 인사를 하자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커 피를 마시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이후로 틈틈이 커피브레멘에 들러서 김두한 이 경자 부부가 출근해 있으면 독일에서의 그들의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아르바이트 혼자 있을 때는 커피 한잔을 마시고 물건마을로 내려가기도 하면서 조금씩 대화의 양을 늘려가는 방식을 취하 였다. 한건섭은 물건마을 경로당에서 만났다. 물건마을 총무를 4년째 맡고 있고 마을일에 적극적이기 때문에 경로당에 거의 매일 나오다시피 한다. 조사자도 물건마을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조사와 기록을 하기 때문에 종종 경로당을 방문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 후로는 가끔씩 한건섭이 거주하는 겔베하우스를 방문을 하였다. 한건섭의 부인인 박미자는 방송출연을 하면서 좋지 않은 기 억이 있었다. 그 후로는 방송이나 취재에 거부 반응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파독 간호사 생활에 관한 질문은 삼가고 가벼운 이야기를 하면서 라포 형성에 힘을 기울였다. 몇 달 동안은 잠깐 씩 방문을 해도 깊이 있는 이야기는 하지 않고 커피를 마시며 가벼운 이야기만을 하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조사자를 편안하게 생각하고 경계심을 풀게 되었다. 그때부터 본격 적으로 조사자의 질문에 편안하게 답을 해주기 시작했다. 빌헬름 엥엘프리드는 물건마을 해변에서 종종 마주쳤다. 빌헬름 엥엘프리드는 집에서 키우는 개 를 데리고 물건해안과 마을을 산책 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그는 방송과 영화 등에 자주 출연하 기 때문에 한 눈에 알아 볼 수가 있었다. 독일마을을 걸어 다니다 보면 정원을 가꾸고 있는 우춘자를 자주 보게 된다. 하이디하우스 정원은 도로에서도 훤히 내려다보이는데 독일마을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광경 중의 하나가 정원을 손질 하고 있는 우춘자의 모습이다. 우춘자 빌헬름 엥엘프리드 부부는 조성형 감독의 독립영화 그리움의 종착역, KBS "다큐멘터리 3일"( ), "굿모닝 대한민국"( ), 부산MBC "떳다! 통하는 TV"( ) 등 방송 과 영화에 다수 출연했기 때문에 간접적인 정보를 미리 접할 수 있어서 맨 뒤에 방문을 하였다.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여성이 독일에서 만나서 결혼한 가정을 찾고 있었다. 물론 김두한 이경자 부부도 파독 광부 간호여성 출신의 가정이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에 있을 때 이미 결혼을 한 상태 였고, 김두한이 먼저 광부로 파독된 후 아내가 근무할 수 있는 병원을 섭외하여 아내를 서독으로 불러들인 경우이다. 따라서 광부와 간호여성으로 각각 생활하다가 독일에서 만나서 결혼한 일반적 인 가정도 만날 필요가 있었다. 그러던 중 5월에 새로운 독일마을대표가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 다. 때마침 그동안 찾고 있던 형태의 가정이었다. 그래서 방문하여 인사를 하게 되었다. 이병종 문 원자 부부는 처음 만남부터 적극적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3. 희망을 찾아 독일로 간 사람들 1960년대 한국사회는 6.25전쟁의 상흔에서 벗어나고 있었으나 급속한 인구증가와 농업중심의 경 제구조로 인해 실업률이 높았고 이는 곧 사회불안 요인이 되었다. 국민소득 67달러, 실업률 23%,

132 파독 광부 간호여성의 이주와 역이주 물가상승률 42%, 저축률 3%라는 61년도 우리나라 경제 지표가 이를 잘 보여준다(베를린한국간호요 원회). 2) 실업자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사회가 안정될 수 없었기 때문에 박정희 정부는 5.16군사 정변으로 성사 전에 중단되었던 서독으로의 근로자 파견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외 화까지 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단 파독 광부의 경우에는 차관에 대한 담보의 성격이 있었지만, 파독 간호여성의 경우 한국이 서독으로부터 얻게 된 차관에 대한 담보라는 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에서 밝힌 바 있다. 1965년~75년까지 파독 광부와 간호여성이 송금한 액수가 1억153만 달러로 연평균 1,000만 달러 이상 송금되었다. 이는 같은 기간 총 수출액의 2% 가까이 차지하는 액수였다. 파독 계약 기간은 3년 이었고, 봉급의 일정액을 반드시 송금해야 한다는 조건도 있었다. 또한 파독될 때는 달러를 최소한 으로 소지하도록 유도하여 외화 유출을 최소화했다. 한국의 상황과는 정반대로 서독은 1950년대 중반부터 경제가 호황을 누렸으나 노동력이 심각하 게 부족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2차 대전 시기의 낮은 출생률에 따른 1960년 전후의 청년 인구의 급감, 1955년 이후에는 독일군이 재구성되면서 50만 가까운 인력이 노동시장에서 빠져나갔고, 1961 년 설치된 베를린 장벽으로 인해 동독 지역에서 유입되던 노동 인력마저 급속히 줄어드는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3) 서독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터키, 모로코, 포르투갈, 튀니지, 유 고슬라비아 등의 노동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특히 자국인이 기피하는 업종인 광부, 간호사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한국도 제3세계 지원형식인 산업 연수 프로그램을 골자로 하는 양 해각서를 체결하여 인력을 수급하는 정책을 마련한다. 서독정부 외국인 인력 모집 정책은 1955년부터 시작 되었으나 1970년대 경기 침체에 따른 대량 실업 사태로 인해서 1973년 중지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간호여성의 파독은 1976년까 지 이어진다. 한국 간호여성의 파독은 서독정부의 외국인 인력 모집 정책이 아니라 한 독 양국의 양해각서에 의한 협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독 정부는 1978년에 외국 신규 근로자 고용 전면 금지 를 공표하게 되고, 더 이상의 한국 근로자 파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 파독 광부 간호여성의 역사 (1) 파독 광부 1961년 3월 18일 대한민국 정부와 독일연방공화국간의 기술원조에 관한 협정을 체결한다. 그리고 1963년 12월 16일 한국 정부와 서독탄광협회가 한국 광부 해외 고용 계획에 관한 협정 체결이 이루 2) 이영석 박재흥, 재독일 교민의 역이주와 귀향 의식에 대한 연구, 독어교육 제36집(2006), 445쪽. 3) 이영석 박재흥, 재독일 교민의 역이주와 귀향 의식에 대한 연구, 독어교육 제36집(2006), 446쪽. 어지고 마침내 12월 21일 파독 광부 제1진 제1기 123명이 독일행 비행기에 탑승하게 된다. 1963년 8월 파독 광부 첫 모집에 지원자가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이때 동아일보(1963년 8월 31일 자)에는 좁은 루르 坑 口 의 길목 - 西 獨 갈 鑛 夫 募 集 마감 이라는 기사가 실린다. 競 爭 5 對 1 20 代 태반... 高 卒 만 50% 라는 내용이다. 대학 졸업자와 대학중퇴자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 당시 고학력자에 해당하는 고졸이상의 학력을 가진 20대의 젊은이들이 광부모집에 대거 몰렸다는 사실만 으로도 60년대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그만큼 일자리가 없었다는 뜻이고 특히 고학력의 젊은이들 의 일할 수 있는 곳은 더더욱 희소했다는 의미이다. 특히 대학졸업자와 중퇴자 중에는 대학을 졸업 해도 취직할 수 없는 막막함을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의 암담한 정치적 상황 에 환멸을 느껴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를 품고 떠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진실 화해를 위한 정리과거사 위원회 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1963년~66년까지 전문대를 포함한 대학졸업자의 파독 비율이 24%였다. 당시 파독 광부 선발 조건은 20세~35세의 남성으로 1년 이상 탄광 근무 경력이 있는 자였다. 그 러나 실제 선발된 인원은 광부 경력을 가진 사람은 소수였다. 선발된 사람들은 광산에서 채탄 작업 을 실습하는 과정을 거쳤다. 처음으로 파독된 한국의 광부들은 독일의 뒤셀도르프 공항에 도착하여 함본과 아헨 지역의 광산 으로 나뉘어 배치되었다. 광산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서 2명~4명이 거주하는데 비용은 본인이 부담 했다. 광산 현장에서는 이론과 현장교육 등 6주간의 교육을 시킨 후 갱도에 투입 시켰는데 한국에서 광부경력이 거의 없었던 대다수의 한국 젊은이들이들은 일이 힘에 부쳤다. 이런 한국의 광부들을 보는 독일 광산회사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고 한다. 광산 일은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채탄부, 굴전부, 잡부 등으로 나뉘어 배치된다. 지상근무보다는 위험하고 노동의 강도가 높은 지하갱도 근무가 임금이 높았다. 1964년 무렵에 지상근무는 20마르크 내외의 일당을 받았고, 지하갱도 근무는 30~39마르크의 일당을 받았다고 한다. 지상근무냐 지하근 무냐에 따라 임금의 격차가 확연하기 때문에 한국의 광부들은 지하갱도 일을 많이 했다고 한다. 파 독 초반에는 계약기간이 3년으로 정해져 있었으나 나중에는 1년 연장이 가능해졌다. 당시 한국은 심각한 실업문제를 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독일사회를 경험한 광부들은 억압적인 사회분위기의 한국으로 돌아가기 보다는 독일에 체류할 수 있는 방법을 찾거나 제3국으로 의 이민을 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반해 파독 간호여성은 계약연장이 쉬웠다. 따라서 파독 광부들은 쉬는 날이면 몇 시간씩 기 차를 타고 한국인 간호여성이 많이 근무하는 곳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파독 광부가 독일에 계속 체 류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파독 간호여성과 결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독 광부 중에는 고학력자가 많았기 때문에 대학교에 진학하는 경우도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1963년 1진으로 파독 된 247명중 3년의 고용기간을 채우고 귀국한 파독광부는 142명이었다.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여성 의 계약만료 후 독일 잔류가 약 40%, 한국으로의 귀국이 약 40%, 제3국으로의 이민이 약 20%였다. 1963년 12월 21일 제1진이 출국한 후 1964년 7월 30일 제7진까지 파독된 광부는 총 2,521명이었

133 파독 광부 간호여성의 이주와 역이주 다. 이후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광부의 파독이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다. 당시 정권에 의해 조작된 간첩단 사건으로 독일과 프랑스에 거주하던 학자나 유학생을 강제적으로 소환하였다. 이 사건으로 독일정부와 한국정부 사이가 벌어졌다. 결국 1969년 2월을 시작으로 수감자들이 모두 석방됨으로써 일단락된다. 그리고 1970년 2월 18일 한 독 정부 간 제2차 광부 파독을 위한 협정 체결 을 하게 된다. 그 결과 1970년에 파독 광부 간호여성이 한해 기준으로 가장 많은 수의 파독이 이루어진다. 광부는 1,305명, 간호여성은 1,717명이 그 해에 파독이 된다. 이는 3년 동안 광부의 파독이 이루어지지 않다 가 한 독 정부 간 제2차 광부 파독을 위한 협정 체결 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그 동안 파독을 못했던 것을 만회하는 차원이라 할 수 있다. 1970년 2월 19일부터 1977년 10월 22일까지 총47집 5,415명이 파독되었다. 그리하여 1963년부터 1977년까지 총 7,936명의 광부가 독일 땅을 밟게 된다. 4) (2) 파독 간호여성 1957년 주한 독일인 신부 파비안 담(Fabian Damn)이 경북 김천의 성의여자고등학교 졸업생 30명 을 선발하여 독일로 보낸 것이 파독 간호여성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이후 재독 의사 이종수 및 독일종교 관계자 주선으로 1963년~65년까지 개별적인 파독이 이루어 지는데 그 수가 1,043명에 이른다. 그리고 1966년 3월 18일 이수길 박사의 중재와 한국해외개발공사 의 협조로 간호사 128명이 파독되기도 했다. 그리고 1968년 10월 3일 한 독 정부간 한국인 간호원 및 간호보조원 모집 요강 에 합의가 이루 어지면서 정부주도로 간호여성이 파독 되었다. 그리고 1969년 8월 한 독 정부간 간호원 진출에 관한 협정 이 체결된다. 파독 간호여성은 정식 간호원 자격을 가지고 병원에서 근무하다가 파독되는 경우가 있었고, 일정 한 교육을 받고 간호보조원으로 파독되는 경우 그리고 아무런 자격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독일에서 교육을 받은 후 간호 일을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간호원 경험이 있든 없든 독일에 도착한 간호 여성 들은 1~2개월 간 병원 근무와 독일생활에 필요한 기초적인 독일어 교육을 받았다. 한국에서의 간호원은 전문직으로 선망 받는 직업이었으나, 서독에서의 간호원은 대표적인 기피 직종에 속했다. 이는 당시 서독에서의 간호 업무의 특성에 기인하는데 간호사의 역할보다는 간병인 의 업무에 가깝기 때문이다. 환자의 식사와 용변을 돕고, 환자 목욕과 옷 갈아입히는 일까지 간호원 의 업무였다. 그러면서 주사 놓기, 간호 기록 작성 등 전문 간호 업무까지 도맡아야 했다. 이렇듯 독일에서의 간호원 업무는 노동의 강도가 높기 때문에 기피 업종이었고, 자국민이 간호원이 되기를 꺼려하여 제3국의 인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4) 본 장의 데이터는 주로 한인의 독일 이주와 한인사회의 형성(나혜심, 젊음, 독일행 비행기에 오르다, 한국이민사박물관, ), 파독 한인 간호여성들의 이주사와 그 역사적 의미(나혜심, 명지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제58회 정기학술포럼 발 표자료,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관도록(대한민국역사박물관, ) 등을 참조 하였다. 한국에서 파견된 간호여성들은 성실함을 인정받게 되어 1976년까지 지속적으로 파견을 하게 된 다. 그리하여 1957년부터 1976년까지 총11,057명의 간호여성들이 독일에서 동양에서 온 연꽃이라는 뜻의 로투스 블루메(Lotus-Blume) 로 불리며 성실하고 친절한 한국인 간호여성이라는 이미지를 서 독 사회에 심었다. 5) 2) 서독행 동기 김두한은 화재탐지기 회사의 소장으로 일하며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지만 외국으로 나가서 사는 꿈을 이루기 위해 파독 광부의 길을 택하였다. 그리고 부인 이경자는 남편을 독일로 보내고 1년 남 짓 간호보조원 교육을 받고 파독 간호여성으로 서독으로 파견되어 남편과 재회하게 된다. 박미자 서독으로 가서 간호사 생활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첫째 이유는 외국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 이었다고 한다. 동경하던 사회에서 생활도 하면서 동생들 교육 시키는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독행을 택하게 되었다. 우춘자는 공무원 월급 2만원으로 아이들 둘을 교육시키기도 벅찬데 시어머니는 자주 아팠다. 그 래서 간호보조원으로 서독행을 결심하게 된다. 이병종은 늘 꿈꾸어왔던 암울한 사회로부터의 탈출과 빚을 갚기 위한 방책으로 파독광부에 응시 하게 된다. 경찰이 가위들고 다니면서 장발을 단속하는 통제된 사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한다. 마산에 가면 밀항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얼쩡거리다가 여수로 갔는데 돈을 너무 많이 달라고 해 서 밀항을 포기한 일도 있다. 문원자는 외국에 동경심과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친구가 서독으로 가자고 제안을 해서 서독으로 가게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보면 이들의 주된 서독행 동기는 외국에 대한 동경, 자유가 억압된 한국사회에서의 탈출, 높은 급여로 압축된다. 경제적 동기 이외에도 한국의 정치 사회적 배경과 개인적인 생애사적 배경 등과 연관되어 서독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다. 파독 광부는 실제 광부는 소수에 불과했고 대체로 고학력자들의 취업 혹은 탈출구였다. 1963년 8월 31일자 동아일보에 파독 광부 모집에 고졸만 50%이고 대학 졸업자와 대학중퇴자도 상당수 포 함되어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당시 고학력자에 해당하는 고졸이상이 주로 지원을 했고 심지어는 대학 졸업자들도 상당히 지원했음을 알 수가 있다. 파독 간호여성 역시 당시의 여성으로서는 상당한 고학력인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이 대부분 이었다. 이렇듯 파독 근로자들은 고학력이 많았기 때문에 독일에서 공부를 계속 이어가서 교수 혹은 의사가 된 사람들도 상당수 있다. 남해독일마을의 서원숙(알프스하우스)은 간호전문대학을 나왔고, 김남옥(괴테하우스)은 간호보조원으로 파독되었다가 에센시 종합병원의 의사가 되기도 했다. 5) 본 장의 데이터 역시 앞의 각주와 동일

134 파독 광부 간호여성의 이주와 역이주 통계청(한국사회의 지표조사, 2004:293) 자료에 따르면 2000년도 기준 50세 이상 한국인의 평균 교육연수가 중학 중퇴(7.2년) 수준에 불과 하다 6) 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파독 근로자들은 당시 평균 을 훨씬 웃도는 고학력자들임에 분명하다. 김두한 이경자 부부 김두한과 이경자 두 사람 모두 서울 종로구가 출생지이다. 김두한은 1945년생으로 5남매의 장남 이고, 부친은 주물공장을 운영을 했다. 이경자는 1946년생으로 5남매의 막내였으며, 오빠가 공무원 이었다. 김두한은 1964년 중동고등학교 졸업하고 종로 YMCA 뒷골목에 있는 음악 감상실을 종종 다녔는데 이경자를 여기서 처음 만났다. 그리고 5년 사귄 후 1969년에 결혼을 했다. 김두한은 파독되기 전까지 충무로에 있는 화재탐지기 회사인 삼윤의 소장이었는데 월급을 2만5천 원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아주 많이 받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늘 외국으로 가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 사무실로 찾아온 친구의 형을 통해 파독광부에 대한 소식을 듣고 지원을 하게 되었다. 해외개발공사에 신청을 했는데 한국일보 파독광부 합격자 명단을 보고 하늘을 날듯이 기분이 좋았다. 합격 후 강원도 황지 탄광에서 2주 교육 받았는데 탄광은 딱 한번 가봤을 뿐 실습은 박미자는 25세에 서독으로 갔다. 서독에 가서 간호사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첫째 이유는 외국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이었다. 그리고 동생들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간호사 생활을 해서 버는 돈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한건섭은 1938년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서, 청량국민학교와 덕수 중, 덕수상고를 거쳐 중앙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부친은 지금의 오리온제과(당시에는 풍국제과, 동양제과) 간부로 있었기 때문에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했다. 한건섭은 그 당시로는 드물었던 대학원을 진학을 했는데 중퇴 후 군납 일을 했다. 외가에서 군납관 련 일을 했는데 군납권을 줘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춘자 빌헬름 엥엘프리드 부부 우춘자는 1938년 경상북도 외관이 고향으로 3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건축업을 했기 때문에 집안 형편은 좋은 편이었다. 외관초등학교, 순심중학교, 순심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를 졸업하자마자 곧 바로 결혼을 하고, 군청보건소에서 근무를 했다. 결혼은 했지만 남편과는 함께 살아본 적이 없다. 슬하에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공무원 월급 2만원으로 아이들 둘을 교육시키기도 벅찬데 시어머니는 자주 아팠다. 그래서 1970년에 서독으로 가서 간호보조원을 하기로 결심한다. 없이 거의 말로 교육받는 게 다였다. 김두한은 결혼을 하여 가정이 있었지만 꿈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아내인 이경자는 남편이 독일로 가겠다고 했을 때 남편의 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반대할 수가 없었다. 남편을 서독으로 보내고 이경자는 해외개발공사 간호보조원 교육을 1년 넘게 받으며 서독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한편 김두한은 독일의 딘스라켄지방에서 광부 일을 하게 된다. 광부생활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아 내를 독일로 데려 오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독일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뒤셀도르프에 있는 카이저스빌헬름병원(기독교 병원)을 직접 찾아가서 아내를 간호보조원으로 써달라고 부탁을 해서 승낙을 받아낸다. 곧 바로 취업 확인서를 한국으로 보내서 이경자를 1973년 3월에 독일로 불러 들인다. 한건섭 박미자 부부 박미자는 1943년 충남 예산읍 예산리에서 1남 4녀 중 둘째딸로 태어나서, 예산국민학교와 예산여 중을 졸업하고 간호고등기술학교를 나왔다. 아버지는 목재소를 운영하면서 농사도 지었기 때문에 시골에서는 잘 사는 편에 속했다. 박미자는 간호고등기술학교를 졸업하고 충남 당진에 있는 송학초등학교 양호교사와 예산읍에서 보건소 근무했고, 독일 파독 직전에는 서울 을지로 입구에 있었던 경찰병원에서 6개월 근무를 했다. 6) 이영석 박재흥, 재독일 교민의 역이주와 귀향 의식에 대한 연구, 독어교육 제36집(2006), 451쪽. 이병종 문원자 부부 이병종은 1945년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군상리에서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진안국민학교와 진안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전주에 있는 신흥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한양대학교 상대에 입학을 한다. 고교시절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으나, 부모님의 반대로 상대에 진학하게 된 것이다. 대학 을 졸업할 당시 한국사회는 실업자가 70~80%였는데 상대로 나온다고 해서 취업할 길이 열려 있지는 않았다. 부친은 공무원이었는데 퇴직 후 사업을 했기 때문에 가정 형편은 좋은 편이었다. 문원자는 1949년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이 고향이고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진천에 있는 삼수 국민학교와 진천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청주여고를 다녔다. 아버지는 약국을 운영하였다. 이병종은 제대 후 친구와 중간도매사업을 시작했는데 친구의 배신으로 사업이 망하게 되었다. 사 업실패에 따른 빚을 진 상태에서 전신전화국에 시험을 봐서 입사를 했다. 그런데 첫 달 월급으로 7,500원을 받았는데 실망을 많이 했다. 그 월급으로 빚 갚는 것은 고사하고 생활하는 것도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친구의 형이 독일 광부로 가는데 생활비를 쓰고도 5만원은 저축 가능 하다는 말을 듣고 서독행을 결심한다. 그리하여 1970년 7월에 파독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파독행은 빚은 갚을 목적도 있었으나, 사업이 망하기 이전부터 한국사회를 떠나고 싶었다. 당시 한국사회는 통제된 사회였다. 머리 길다고 경찰이 가위들고 다니면서 머리를 자르지를 않나 숨도 크게 못 쉴 정도로 답답한 사회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밀항이라도 할 마음으로 마산과 여수를 간 적도 있다. 마산에 가면 밀항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얼쩡거리다가 여수로 갔는데 돈을 너무 많이 달라고 해서 포기하고 말았다

135 파독 광부 간호여성의 이주와 역이주 결국 서독행은 통제된 한국사회를 탈출하면서 빚을 갚을 방책이었던 셈이다. 늘 꿈꾸어왔던 암울 한 사회로부터의 탈출과 빚을 갚아야 한다는 현실에 마주한 이병종은 파독광부에 응시하게 되는데 경쟁률이 엄청나게 높았다. 이병종이 지원하던 1970년 7월 파독 광부 160명, 보조 20명으로 총180명 선발하는데 3,800여 명이 지원했다. 필기시험으로 절반 떨어뜨렸는데 일반상식과 독일어 등을 쳤다. 그리고 적성검사 했다. 3,800여 명 중 필기시험과 적성검사에 통과한 1,000명이 체력검사를 받았다. 1,000명 중 180명이 최종합격했다. 체력검사는 40kg 모래포대를 어깨에 메고 뛰기 등을 했는데 통과 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26세부터 35세까지로 연령제한이 있었다. 최종합격자는 1주일 동안 의무적 으로 소양교육을 받았는데 내용은 주로 반공교육이었다. 외화 유출을 막기 위해 정부에서는 독일 갈 때 2달러 이상 소지하지 못하도록 공지를 하기도 했다. 그 때는 다들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데 콜라를 공짜로 주니까 마구 마시다가 배탈이 나는 사람도 많았다. 1968년 동백림 사건으로 파독 인력이 끊겼는데 70년 2월 재계되었다. 이병종이 독일로 갈 당시의 함께 비행기를 같이 탔던 사람들의 평균 학력이 대학교 5학기가 평균학력이었다. 그런데 1972년부터 는 전남 화순 광부경력자가 많이 파독 되었다. 문원자는 고등학교 졸업 후 간호보조원 시험을 봤는데 당시 시험이 10대 1이었다. 합격 후 보건소 가족계획원과 결핵관리원에서 일을 했다. 늘 외국에 동경심과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친구가 서독으로 가자고 제안을 했다. 그런데 제안을 했던 친구와 같이 합격하고도 부모님들의 반대로 친구 는 가지 못하고, 21세의 문원자는 1970년 9월 서독으로 떠나게 된다. 3) 서독 생활 김두한은 광부 경험이 전혀 없기에 광산 일은 만만치 않았다. 8시간 일을 하고 올라오면 피곤해서 잠자기 바빴다. 같은 광산에 한국인 광부가 100여 명이 있었는데 일이 끝나면 피곤해서 대화하고 친분 쌓고 할 여력이 없었다. 일은 힘들었지만 한국에 비해 월급은 훨씬 많았다. 처음에는 원화로 환산해서 7만5천원에서 8만원을 받았는데 나중에는 10만원을 받았다. 한국에 있을 때도 다른 사람 들에 비해 월등히 많은 월급을 받았음에도 한국에 있을 때보다 3배~4배를 받은 셈이다. 이경자는 병원에서 첫 근무하는 날 혼자 있는데 전화가 울려서 당황한 나머지 화장실에 숨었다. 언어 소통이 되지 않아서 6개월 동안은 전화가 오면 무서웠다. 아이는 둘을 키우기 위해 김두한이 주간근무를 하면 이경자는 야간근무를 하는 식으로 주야간 근무를 맞춰서 일을 했다. 이런 생활을 하다 보니 늘 잠이 부족했다. 돈 문제보다는 언어문제와 한국음식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힘들었는데 독일생활 1년 정도 지나서는 밥을 해먹기 시작했다. 이경자는 원화로 환산해서 12만원을 받았는데 당시 남편보도 더 많이 받았다. 월급은 한국으로 송금을 해서 저축을 했다. 둘이 맞벌이를 했기 때문에 독일에서도 생활수준이 높았다. 1982년에는 독일에서 33만 마르크(2억 3천정도) 주고 집을 구입했다. 독일은 한국과는 달리 거의 월세 방식인데,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은 그 당시 송금하고 남은 돈으 로 살았기 때문에 저축을 제대로 못한 사람이 많았다. 송금하고 남은 돈으로 월세내고 생활 나면 따로 저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하층민으로 사는 사람도 많이 있다고 한다. 박미자는 1966년에 서독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는데 간호여성이 파독되던 초창기에 서독으로 갔 다. 1966년은 한국정부와 서독정부 사이에 간호원 진출에 관한 협정 이 체결되기 이전으로 주로 이수길 박사 등 개인의 중재로 파독이 이루어지던 시대이다. 월급으로 460마르크를 받았는데 400마르크는 한국 보내고 60마르크로 생활비로 충당했다. 파독 되기 전 경찰공무원으로 근무할 때보다 6배를 많이 받았다. 간호원의 경우 3교대 근무에서 야간근무 는 야근수당을 받을 수 있었지만, 야간근무는 하지 않았다. 3년 동안 야간 근무는 전혀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휴가 때 일을 하면 월급만큼 받을 수 있는데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말에는 다 쉬었다. 그런데 간호보조원들은 악착같이 살았다고 한다. 독일은 사회보장제도가 아주 잘되어 있기 때문에 간호보조원이라도 아이가 있거나 남편이 무직이면 간호원보다 월급이 높았다. 독일생활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언어문제였다. 파독되기 전 근무에 필요한 독일어를 공부했 지만 환자들과의 의사소통도 어려웠고, 동료들과의 대화도 쉽지 않았다. 두 번째 애로점은 한국음식 에 대한 그리움과 독일음식에 적응해야하는 문제였다. 우춘자가 간 병원에는 필리핀 간호원이 많았는데 영어로 간단한 의사소통할 정도는 했지만 환자 나 독일인 간호원과의 의사소통은 어려웠다. 언어 외에도 덩치가 큰 환자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목욕 시키는 일은 고된 일이었다. 환자에게 제공하고 남은 빵으로 아침식사와 저녁식사를 대신할 때가 많았는데 한국음식에 대한 그리움도 힘든 점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춘자가 힘들었던 것은 시누이에게 맡기고 온 두 아이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잠을 이룰 수 없어 수면제를 먹고 자는 날이 많았다. 서독에서 간호보조원 생활을 한지 6개월 만에 야간근무를 했는데 돈도 많이 주고, 1주일 일하면 1주일을 쉴 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기차를 2시간을 타고 퀠른으로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 다. 그렇게 번 돈을 송금해서 한국에 논 서마지기, 소 한 마리를 사기도 했다. 한국에서 서독으로 갈 때 의무적으로 계좌를 만들고 갔는데 90퍼센트는 송금하고, 10퍼센트를 가지고 생활비로 사용했 다. 3년이 지나면서 부터는 송금 대신에 개인적으로 돈을 모았다. 계약기간 3년이 끝나고 독일면허 증 받은 후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병원에서 30년을 근무 했는데 근무 환경이 아주 좋았다. 여기서도 또 야간 근무를 했고, 쉴 때는 양로원 가서 또 돈을 벌었다. 간호보조원 32년 중 야간 근무를 20년 했다. 이병종은 독일에 살면서 처음 4년~5년 동안은 빵을 먹지를 못해서 고생을 했다. 빵이 잘 넘어가 지를 않았다. 국내에 있을 때 65kg이었는데 독일생활 8개월 만에 54kg이 되었다. 이후로는 괜찮아졌 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부부가 직장생활을 하기 때문에 아이 키우는 일이었다. 그래서 한국에 아이 를 데려다 놓는 사람들도 많았다. 문원자는 퀠른공항에 도착한 다음 날 빌레펠트의 요하네스크 크랑케스트(기독교 종합병원)에 발

136 파독 광부 간호여성의 이주와 역이주 령을 받고 곧 바로 근무를 시작했다. 한국 간호보조원 26명이 같은 병원으로 지정받았는데 교육도 없이 바로 다음날 일을 시작했다. 근무시간이 불규칙해서 독일어를 배울 시간조차 없었다. 그래서 언어 소통이 잘 되지 않았다. 특히 환자들과 대화가 되지 않을 때 가장 힘들었다.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 정신적으로 힘들 뿐만 아니라 계속 서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늘 다리가 아팠다. 정신 적 육체적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기 때문에 기숙사에 돌아오면 거의 울며 지냈다. 언어 소통이 제대 로 되지 않아 미안함의 표시로 웃음 지으면 비웃음으로 여겨 오해를 받기도 했다. 독일문화에 익숙 해지는데 5년 정도 걸렸다. 이상으로 살펴봤을 때 언어문제와 음식을 공통적인 애로점으로 꼽는다. 처음 서독생활을 할 때 가장 심각한 적응의 문제는 언어였지만, 지속적으로 힘들었던 점은 음식이었다고 한다. 언어는 한번 습득하고 나면 크게 문제될 게 없지만 30년~40년을 독일음식을 먹고 살아도 한국음식에 대한 그리 움은 줄어들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에서 생활하는 지금은 반대로 독일 음식이 그리워서 힘들다고 토로하는 주민들이 많다. 이외에도 노동 강도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을 힘든 점으로 꼽았다. 언어와 음식문제를 공통적인 애로점으로 꼽고 있지만, 삶의 모습은 일률적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우춘자는 2시간을 기차를 타고 퀠른으로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는가 하면 양로원에 가서도 돈을 벌 었다. 간호보조원 32년 중 20년을 야간수당을 받기 위해 야간 근무를 했을 만큼 악착 같이 돈을 벌 었다. 반면 박미자의 경우에는 야간근무를 하지 않았고 휴가기간에 근무를 하면 월급만큼 받을 수 있는데도 전혀 하지 않았으며 주말에는 다 쉴 만큼 돈에 얽매이지 않은 생활을 했다. 파독 광부 간호여성 부부의 경우 대부분 잘 살고 있지만 어려운 점도 많았다. 맞벌이를 하기 때 문에 경제적으로는 어렵지 않았으나, 자녀들을 키우기 위해 부부가 주간근무와 야간근무를 번갈아 가며 하는 가정이 많았다. 부부가 함께하는 시간이 적어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지 못한 나머지 자녀들이 성장한 이후에 이혼을 하는 가정도 많다고 한다. 이 일을 쉬이스만 이라고 하는데 김두한은 가족을 위해 이일도 하게 된다. 다이너마이트를 지고 1,000m가 넘는 지하로 내려가기 위해서 샤크틀을 타고 다시 엘리베이트를 갈아탄다. 그리고 다시 지하광차를 타고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일은 힘들었지만 한국에 비해 월급은 훨씬 많았다. 처음에는 원화로 환산해서 7만5천원에서 8만원 을 받았는데 나중에는 10만원을 받았다. 한국에 있을 때 다른 사람들에 비해 월등히 많은 월급을 받았음에도 한국에 있을 때보다 3배~4배를 받은 셈이다. 아내가가 간호보조원으로 서독으로 오게 되자 기숙사 생활을 청산하고 방을 얻어서 함께 생활했다. 김두한은 광부 계약 3년이 만료되고 맥주회사에 3개월 다녔다. 그리고 제철회사에서 74년 3월에서 89년 6월까지 근무했다. 이후로는 사업을 시작했는데 89년 식당과 식자제 유통회사를 운영했다 년부터 오버하우젠 첸트로라는 쇼핑몰에 아시아 패스트푸드점 이라는 상호로 운영하였다. 이후 점포 를 늘려서 퀠른 등에서 총3개 점포를 10년 동안 운영하였다. 이 점포들은 한국으로 귀국할 때 아들에 게 물려주었다. 처음 사업을 시작 할 때가 52세였는데 딱 10년만 사업을 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 를 했다. 그래서 10년 사업한 후 아들에게 물려주고 은퇴를 했다. 이경자는 줄곧 병원에서 근무하다가 1994년 레스토랑 서울 이라는 식당을 개업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김두한은 종교 사회활동도 열정적으로 한다. 1974년 뒤셀도르프에 한인회를 조직해서 회장을 역 임했는데 회원은 300명 정도였다. 1976년에 부산 전국체전에 임원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또 1980년도 에 딘스라켄에서 한인회장을 역임 했다. 그리고 1993년 세계한민족대회때 수석부단장으로 참석했고, 코엑스에서 열린 제2회 한상대회도 참석했다. 2001년에는 기독실업인회 지회를 독일에 설립했고, 2005년에 유럽 총회장을 역임했다. 2008년도에 세계한인기독실업인 대회를 두바이에서 개최되었다. 세계한인기독실업인회는 유럽에 15개 지회가 있다. 현재는 한국기독실업인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있을 정도로 대외활동에 열심이다. 김두한 이경자 부부 김두한은 1970년 12월을 독일행 비행기를 타게 된다. 당시 탔던 비행기는 에어프랑스였고 뒤쏠드 공항에 착륙을 했다. 공항에서 전세버스를 타고 로베르크 광산촌으로 가면서 느꼈던 심정은 아직도 생생하다. 눈이 내리는 밤 차창 밖을 보는데 불안감이 밀려왔다. 다음 날 아침 기숙사 앞에 펼쳐진 푸른 잔디밭을 보자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면서 불안감도 사라졌다. 광부 경험이 전혀 없던 김두한에게 독일 광산 일은 만만치 않았다. 8시간 일을 하고 올라오면 피곤 해서 뻗어 자기 바빴다. 같은 광산에 한국인 광부가 100여 명이 있었는데 일이 끝나면 피곤해서 대화 하고 친분 쌓고 할 여력이 없었다. 탄을 캐서 오면 컨베이어벨트로 옮기게 되는데 탄이 컨베이어벨트에서 땅으로 흘러내린다. 이렇게 흘러내린 탄을 삽으로 퍼 담아 주는 일을 했다. 또 탄광의 지반은 그냥 두면 지반이 점점 올라와 탄광이 좁아지게 되는데 이를 막기 위해 수시로 땅을 깎아 내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광산 일은 어렵 고 위험한 일일수록 월급이 많았다. 다이너마이트 운반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특별수당을 받는다. 독일 아셈지역에 소망교회를 차린 후 96년에 한국에서 목사님 모시고 왔는데 장로로서 모든 재정 을 지원을 했는데 이렇게 되자 신자들이 목사님보다는 장로인 김두한을 더 따르게 되었다. 이러다가 는 하나님께 크게 혼나겠다 싶어서 브레멘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이경자는 병원에 처음 근무하는 날 때마침 혼자 있을 때 전화가 왔는데 당황해서 화장실에 숨었다. 언어 소통이 되지 않아서 처음 6개월은 전화가 오면 무서웠다. 독일에서 간호사는 3교대 근무에서 야간근무는 야근수당을 지급해 준다. 3주 근무 하면 2주간 휴가 까지 준다. 그래서 2주간 휴가를 받고, 다른 병원 가서 일하면 또 돈을 벌 수 있어서 한국인 간호보조 원들이 지원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야간근무 다음으로 오전근무가 인기 있었는데 2시 근무가 끝나면 꽃집 같은데서 아르바이트를 하면 시간당 5마르크 정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경자는 아이는 둘을 키우기 위해 김두한이 주간근무를 하면 이경자는 야간근무를 하는 식으로 주야간 근무를 맞춰서 일을 했다. 이런 생활을 하다 보니 늘 잠이 부족했다. 돈 문제보다는 언어문제와 한국음식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힘들었는데 독일생활 1년 정도 지나서는 밥을 해먹기

137 파독 광부 간호여성의 이주와 역이주 시작했다. 당시 한국 간호보조원 12명과 함께 일했는데 지금은 연락하는 사람이 없다. 당시 파독광부들이 독일체류연장을 위해 한국인 간호사 만나려고 노력한 건 알고 있는데 이경자는 이미 결혼을 했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다. 이경자는 원화로 환산해서 12만원을 받았는데 당시 남편보도 더 많이 받았다. 월급은 한국으로 송금을 해서 저축을 했다. 둘이 맞벌이를 했기 때문에 독일에서도 생활수준이 높았다. 1982년에는 독일에서 33만 마르크(2억 3천정도) 주고 집을 구입했다. 독일은 한국과는 달리 거의 월세 방식인데,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은 그 당시 송금하고 남은 돈으로 살았기 때문에 저축을 제대로 못한 사람이 많았다. 송금하고 남은 돈으로 월세내고 먹고 나면 따로 저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하층민이 많다. 그러나 2세는 교육을 많이 시켰기 때문에 독일사회에 잘 적응하여 살고 있다. 김두한 이경자 부부는 슬하에 1남 1녀를 뒀었다. 큰아이가 아팠지만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이수 길 박사의 소개로 마인츠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던 중 1985년 딸이 사망을 한다. 감내하기 힘든 슬픔 이었지만 남아 있는 자식을 위해 견뎌내야 했다. 아들은 현재 40세(74년생)로 김두한의 사업을 이어 받았는데 현재는 신학을 공부를 5년째 하고 있다. 손자는 16세, 손녀는 6세이다. 한건섭 박미자 부부 박미자는 1966년에 서독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는데 간호여성이 파독되던 초창기에 서독으로 갔다. 1966년은 한국정부와 서독정부 사이에 간호원 진출에 관한 협정 이 체결되기 전으로 주로 이수길 박사 등 개인의 중재로 파독이 이루어지던 시대이다. 박미자도 개인초청으로 12명이 함께 서독행 비행기를 탔다. 서독에서 처음 근무한 병원은 프랑크푸르트 인근의 겔하도마클리닉(결핵요양소)이었다. 나중에는 루루공업지대의 대학병원으로 갔다. 한국에서 파독된 간호여성은 간호보조원이 많았는데 대학병원 월급이 높았다. 사실 독일에서 정식 간호원을 원했으나 한국에서 자꾸 간호보조원을 보내니까 실망하 는 분위기가 있었다. 독일생활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언어문제이고 두 번째는 한국음식에 대한 그리움과 독일음식 에 적응해야하는 문제였다. 서독으로 오기 전 근무에 필요한 독일어를 공부하여 갔지만 환자들과의 의사소통도 어려웠고, 동료들과의 대화도 쉽지 않았다. 서독생활 초창기 영화 닥터 지바고 를 보기위 해 극장으로 가는데 반대 방향으로 타서 한참 만에 극장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영화가 끝난 줄 알고 기숙사로 돌아왔는데 영화를 보고 온 동료들에게 들으니 1편이 끝나고 휴식시간이었고 바로 2편이 이어졌다고 한다. 독일어가 서툴렀기 때문에 영화가 끝났느냐는 질문을 못해서 그냥 집으 로 온 것이다. 병원 생활하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특히 수간호원과 친하게 지냈는데 혼자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오페라 공연에도 데려가주고 아주 잘 지냈다. 3년간의 계약이 만료되고 1969년 11월에 귀국했다. 그리고 23년 후 다시 간호사로 취업을 하여 독일로 가게 된다. 독일문화원 소속의 우정회 연락을 받고 1992년 또다시 간호사로 취직되어 독일로 향한다. 아이들 키우며 집에만 있으니까 직장생활 하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는데 결정적으로 딸들이 부추겨서 결심을 하게 되었다. 두 아이들이 독일 유학을 가고 싶으니까 부추겼다. 그래서 큰아이가 대학 2년, 작은 아이가 고1일 때 독일로 갔다. 처음에는 2년만 있다가 귀국할 생각으로 갔는데 12년을 있게 되었다. 보훔시의 대학병원 암병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간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숙소는 기숙사 대신 의사 아파트 3층이었다. 60년대 간호사 생활에 비하면 여러 가지로 편하게 생활했다. 한국에 있을 때 45세에 취직해보려고 노력했는데 나이가 많아서 취직이 되지 않았다. 양호교사를 다시 하고 싶었으나 나이 제한 때문에 할 수가 없었다. 조산원 자격도 있었지만 조산원은 가기 싫었는 데 때마침 독일 갈 기회가 왔던 것이다. 50세에 다시 독일로 건너가서 12년 동안 독일생활을 하다가 독일마을조성 설명회를 듣고 남해독일마을로 오게 되었다. 이어서 자격이 있는 간호원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월급으로 460마르크를 받았는데 400마르크는 한국 보내고 60마르크로 생활비로 충당했다. 파독되 기 전 월급이 많은 경찰공무원으로 근무할 때보다 6배를 많이 받았다. 월급을 받으면 10개월 치는 한국으로 송금하고 2개월 치는 가지고 있다가 휴가를 내고 여행을 다녔다. 그리고 한 달에 한번 씩 엘피판을 하나씩 구입했다. 그렇게 삼년을 샀으니까 30여 장 정도 된다. 1장에 33마르크를 주고 샀는데 상당히 고가였다. 그 외에는 3년 계약을 마치고 귀국할 때 밍크 코트 하나 산 게 전부다. 간호원의 경우 3교대 근무에서 야간근무는 야근수당을 받을 수 있었지만, 야간근무는 하지 않았다. 3년 동안 야간 근무는 전혀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휴가 때 일을 하면 월급만큼 받을 수 있는데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말에는 다 쉬었다. 그런데 간호보조원들은 악착같이 살았다. 독일은 사회 보장제도가 아주 잘되어 있기 때문에 간호보조원이라도 아이가 있거나 남편이 무직이면 간호원보다 우춘자 빌헬름 엥엘프리드 부부 우춘자는 시누이에게 두 아이를 맡기고 1971년에 간호보조원으로 서독행을 택하게 된다. 정신요양 병원인 란데스크란켄하우스(주립) 병원으로 한국인 간호여성 13명이 함께 갔다. 우춘자가 간 병원에는 필리핀 간호원이 많았는데 영어로 간단한 의사소통할 정도는 했지만 환자나 독일인 간호원과의 의사소통은 어려웠다. 퇴근을 하면 기숙사 방문 앞에 신발을 벗어놓고 들어갔는데 독일 동료가 매일 방문을 두드려서 신발을 가리키며 무슨 말을 했다. 한국 간호보조원들은 신발에서 냄새가 나서 그러는 줄 알고 자주 빨았다. 그런데 한 달 후에 독일어를 가르쳐주는 대학생을 통해서 신을 방에 두라는 말인 줄 알게 되었다. 언어 외에도 덩치가 큰 환자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목욕 시키는 일은 고된 일이었다. 제공하고 남은 빵으로 아침식사와 저녁식사를 대신할 때가 많았는데 한국음식에 대한 그리움도 힘든 점 중의 하나였

138 파독 광부 간호여성의 이주와 역이주 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춘자가 힘들었던 것은 시누이에게 맡기고 온 두 아이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잠을 이룰 수 없어 수면제를 먹고 자는 날이 많았다. 서독에서 간호보조원 생활을 한지 6개월 만에 야간근무를 했는데 돈도 많이 주고, 1주일 일하면 1주일을 쉴 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기차를 2시간을 타고 퀠른으로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돈을 벌어서 한국에 논 서마지기, 소 한 마리를 사기도 했다. 한국에서 서독으로 갈 때 의무적 으로 계좌를 만들고 갔는데 90퍼센트는 송금하고, 10퍼센트를 가지고 생활비로 사용했다. 3년이 지나 고 부터는 송금 대신에 개인적으로 돈을 모았다. 계약기간 3년이 끝나고 독일면허증 받은 후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병원에서 30년을 근무 했는데 근무 환경이 아주 좋았다. 여기서도 또 야간 근무를 했고, 쉴 때는 양로원 가서 또 돈을 벌었다. 간호보 조원 32년 중 야간 근무를 20년 했다. 그때 돈을 많이 벌어서 퇴직금이 적다. 부부가 돈을 많이 벌면 퇴직금 없는 것이 독일사회보장제도 의 특징이다. 그나마 개인보험을 들었기 때문에 지금 350만원 가량 연금을 받고 있다. 독일에서 혼자 살다가 마흔이 되자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남자를 만나려고 하니 까 없었다. 독일에도 중매쟁이가 있다. 그래서 중매쟁이를 통해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처음 남편을 만날 때 서로 다른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의 오페라 극장 앞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는데 우춘자는 연극공연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둘을 소개시켜준 중매쟁이 가 와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6개월 동안 고민이 많았다. 남편은 그 때 마흔아홉이고, 항공 관련 일을 했다. 고민을 하다가 조건을 걸었는데 다 맞춰주겠다고 해서 결혼을 했다. 결혼 후에는 심신이 안정 되었다. 친구들이 독일인과 결혼을 하면 우춘자는 그 친구와 거리를 두곤 했다. 우춘자 본인도 독일인과 결혼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그때 같이 근무하며 친하게 지내던 한국인 친구들이 한번 씩 남해까지 놀러 오기도 한다. 우춘자는 사진이 몇 장 되지 않는다. 함께 간호보조원으로 갔던 친구가 병으로 사망을 했는데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볼 때마다 너무나 괴로워서 사진을 촬영을 꺼리게 되었다. 기계 라고 대답했다. 다행히 항공 정비부대에서 정비공으로 근무를 했던 경력이 있어서 정비공으로 전환되었다. 당시 13개국 광부가 같은 광산에서 일을 했는데 이병종이 근무하는 동안에 막장에서 3명이 죽었다. 막장일은 늘 위험을 안고 있다. 막장에서는 스파크가 일어나면 폭발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전기도 못 쓴다. 이병종은 3년 내내 야간 근무만 했기 때문에 동료들과 시간 보낼 시간이 없었다. 8개월 만에 독일 여행을 처음 해 봤고, 그 이후로도 그런 생활을 했다. 결혼 후에 아이를 낳고 비로소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 때는 스위스 여행을 많이 했다. 독일에 살면서 처음 4년~5년 동안은 빵을 먹지를 못해서 고생을 했다. 빵이 잘 넘어가지를 않았다. 국내에 있을 때 65kg이었는데 독일생활 8개월 만에 54kg이 되었다. 이후로는 괜찮아졌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부부가 직장생활을 하기 때문에 아이 키우는 일이었다. 그래서 한국에 아이를 데려다 놓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문화적 이질감 때문에 어려웠던 점도 많았다. 표현방식이 한국 과는 다른데 독일인들은 이거 아니면 저거식의 이분법적 사고를 하고 정말 급하지 않으면 뛰지도 않는다. 문원자는 퀠른공항에 도착한 다음 날 빌레펠트의 요하네스크 크랑케스트(기독교 종합병원)에 발령 을 받고 곧 바로 근무를 시작했다. 한국 간호보조원 26명이 같은 병원으로 지정받았는데 교육도 없이 바로 다음날 일을 시작했다. 근무시간이 불규칙해서 독일어를 배울 시간조차 없었다. 그래서 언어 소통이 잘 되지 않았다. 특히 환자들과 대화를 해야 하는데 의사소통이 되지 않을 때 가장 힘들었다.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 정신적으로 힘들 뿐만 아니라 계속 서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늘 다리가 아팠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기 때문에 기숙사에 돌아오면 거의 울며 지냈다. 언어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미안함의 표시로 웃음 지으면 비웃음으로 여겨 오해를 받기도 했다. 독일문 화에 익숙해지는데 5년 정도 걸렸다. 문원자가 살던 곳은 오후 4시가 되면 이미 어두워지는 지역이었다. 시장은 오전 10시에 열어서 오후 6시에 닫는 지역이었는데 휴일에는 문을 열지를 않아서 장보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독일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일이 끝나면 동료들과 저녁식사도 하고, 수영도 함께하며 즐겁게 지냈다. 이병종 문원자 부부 26세의 나이에 서독행 비행기를 탄 이병종은 홍콩과 파키스탄을 경유하는 영국 칼로도니아 전세기 를 타고 3일 만에 뒤셀도로프 공항에 내렸다. 루루콜레 운서프리츠 광산에 배정되었는데 다음날 바로 회사와 개인이 계약을 했다. 그리고 곧 바로 언어와 장비 교육을 받고 지상근무를 시작 했다. 지상근 무를 한 달 동안 한 후 지하 갱도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선로 주변의 석탄이 떨어져서 지반이 올라가 는 것을 막기 위해 석탄을 퍼 올리는 작업을 했는데 광부 일이 생소했기 때문 일이 미숙했다. 그래서 모진 소리도 들었는데 일을 잘못하니까 집에 가라는 말도 들었다. 8개월이 지났을 무렵 나무기둥이 무너져 내리는 사건 때문에 이병종은 휴가를 가야했다. 사고 후 휴가를 보내는 것은 근로조건을 이행 한 후 해임 시키기 위한 절차이다. 그런데 휴가를 다녀오니 어떤 일을 잘 할 수 있느냐고 물어 봐서 동료 중에 생일이 있으면 파티를 열어 즐기기도 했다. 가끔 파독 광부들이 술 산다고 하면 단체로 놀기도 했다. 한국에서 교육 받을 때 낮선 남자들이 접근하면 간첩일 수 있으니 만나서 이야기 하지 말라는 교육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한국인 광부들이 찾아 왔을 때 무섭기도 했는데 나중에 는 단체로 놀았다. 이병종과 문원자는 서독에서 서로 모르던 사이였는데 이병종의 사돈처녀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다. 이병종의 사돈처녀는 문원자와 같은 병원 근무하던 간호보조원이었다. 이병종은 사돈처녀와 가끔 식사를 하기도 했는데 어느 날은 우편으로 김치를 보내왔다. 잘 받았다는 전화를 하고 빌레펠트로 인사차 갔는데 간호보조원 4명이 함께 있었는데 그 자리에 문원자도 있었다. 그렇게 알게 되어 데이 트를 시작했다. 2시간 30분 걸리는 기차를 타고 다니며 데이트를 했다. 1972년 봄에 약혼을 하고

139 파독 광부 간호여성의 이주와 역이주 같은 해 12월에 결혼을 했다. 당시만 해도 외국을 쉽게 드나들 수 없었기 때문에 양가 부모님을 모시 지 못하고 독일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에 몇 년이 지나서야 첫째 아이를 데리고 잠시 귀국하여 구입했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까 셋집 사는 게 쉽지 않았다. 독일에서는 남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 그런데 한참 크는 아이들을 늘 조용히 시키고 하는 게 어려워서 집을 사기로 결심했다. 부모님께 인사드렸다. 이병종은 당시 독일광부 생활을 하면 생활비를 제하고 최소 5만원을 저축할 수 있었다. 처음 8개 월 동안에는 500마르크 정도 받았는데 최소생활비도 안 되는 정도였다. 그래서 가불을 하여 생활하 기도 했다. 처음 8개월까지는 먹고 살기도 바빴고, 8개월 후 부터는 2,000마르크 가불한 돈 갚는데 사용했다. 처음 막장일을 할 때 수직으로 1,100m를 들어가는데 냄새 때문에 비위가 상해서 계속 토해서 일을 못했다. 심장 약한 사람은 빠른 속도로 내려가기 때문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이후에 기계공 일을 하면서부터는 120명 한국 근로자 중 월급을 제일 많이 받았다. 독일에서는 부양가족이 있으면 세금이 적은 대신 가족이 없으면 세금이 많다. 이병종은 총각이었기 때문에 세금을 많았다. 월급 총액을 1,500마르크정도 받았고, 연장 근무하면 1,800마르크정도를 받았다. 문원자는 한국에서 9,500원, 독일에서는 900마르크 정도 받았다. 문원자자 역시 처음 받는 월급으 로는 생활비도 안됐다. 옷, 신 생필품 구비하다보니 처음에는 쓸게 없었다. 이후에 자리 잡히고부터는 한국으로 송금을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대중교통 이용하기 어려워서 택시를 주로 타고 다니면서 지출이 많았는데 1년이 지나면서 안정이 되었다. 문원자는 돈이 급할 게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야간 근무를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아이들이 생기면 서 야간근무를 하기도 했는데 부부가 오전과 오후 근무를 교대하면서 아이들을 키웠다. 그래서 부부 가 만나는 시간이 적었다. 문원자는 1970년에서 2010년까지 무려 40년을 요하네스 크랑케스트(기독교 종합병원)에서 근무를 했다. 광산에서 3년 계약 끝난 후 빌레펠트로 이사해서 앙카라 라는 계산기 만드는 회사에 입사해서 4~5개월 근무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4년 콕스아들러 라는 산업용 재봉틀 공장으로 옮겨서 2007년 정년퇴직할 때 까지 근무했다. 동백림 사건이후 파독이 동결되었다가 1970년 2월 재계되었다. 몇 년 동안 동결되었다가 풀리니까 1970년에는 사람들이 더 많이 몰렸다. 그 때 동백림사건을 계기로 파독 광부들도 연루되었다고 조작 하여 귀환조치 시키기도 하고,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로는 파독되는 사람들은 반드시 소양교육을 1주일 간 받았다. 교육 빠지면 독일에 갈 수가 없었다. 교육은 거의 반공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낯선 한국인이 접근하면 간첩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피하라는 내용 등이었다. 그런데 4. 남해독일마을로 역이주한 파독 근로자들 1) 남해독일마을의 조성과정과 현황 1963년 12월 21일 파독 광부 제1진 제1기 123명이 독일행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2013년은 그로부 터 50년이 되는 해이다. 당시 서독행 비행기를 탔던 파독광부의 연령이 20세~35세였으니까 지금 그들은 70세~85세의 노인이 되었다. 1977년까지 파독된 광부와 간호여성이 총 18,993명이었는데 계약만료 후 독일 잔류가 약 40%, 한국으로의 귀국이 약 40%, 제3국으로의 이민이 약 20%였다. 그때 파독되었던 근로자들이 재독한 인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가슴 한 구석에는 한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자리 잡 고 있고, 노년에는 한국에 돌아가서 여생을 마치고 싶은 사람들도 상당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남해군에서는 이러한 점을 일찍이 파악을 하고 그들이 함께 모여서 살 수 있는 곳을 마련하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 시작은 1990년대 중반으로 올라간다. 남해군은 스포츠마케팅을 위해 운동장을 만들고 잔디를 깔았다. 여기에 시공관리비가 적게 드는 독일의 복합잔디를 사용하게 된다. 1996년 남해공설운동장 을 시작으로 97년 서상매립지와 학교운동장에 파종하면서 우리나라 잔디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된 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잔디밭에는 출입금지 팻말이 세워진 보는 잔디 에서 마음껏 밟고 다니는 사용하는 잔디 로 개념을 바꾸게 된다. 이를 더욱 널리 활용하기 위해서는 몇몇 문제점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남해군 관계자들이 독일에 잔디 연수를 자주 가게 되고, 1997년 독일의 노드프리슬란트 군과 국제자매도시가 된다. 이 과정에서 남해군에 협조를 해준 베를린과 함부르크의 교민들이 한국 정부가 독일마을을 조성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하게 된다. 당시 김두관 남해군수는 본인의 큰형과 형수가 파독 광부와 간호사였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이해를 하고 있었던 점도 적극적인 추진에 한 몫을 하게 된다. 1998년 독일마을 조성을 통한 5대 목표를 설정하고 본격적으로 독일마을조성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사실 북한에서 서독으로 들어오기도 어려웠는데, 그 당시에는 공 자만 나와도 겁이 났던 분위기였다. 이병종은 처음에는 독일에 상주해서 살려고 하다가 중간에 미국, 호주 등으로 이민을 고민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내가 언어적 문제 때문에 꺼려해서 포기를 했다. 독일에서는 영주권만 받아도 투표권 만 없을 뿐이지 불편한 게 없었다. 1979년에 20만 마르크 주고 독일에 집을 샀다. 둘이 맞벌이해서 어느 정도 벌었지만 한국으로 송금 하는 게 있어서 목돈이 없었다. 그래서 집을 짓기 위한 정기예금을 들고 그걸 담보로 대출을 받아서 1. 조국 근대화를 위해 애쓴 파독 간호사 광부의 노후 보금자리 제공 2. 독일마을 입주민과 관광객의 교류를 통한 선진 생활 환경 문화의 도입 3. 디자인과 실용성 환경성이 뛰어난 독일 주택문화의 보급 4. 독일 주택건축 기술의 남해 건축업계 보급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 5. 남해군의 특색 있는 문화관광지 조성

140 파독 광부 간호여성의 이주와 역이주 남해군은 당시의 행정자치부의 포괄사업비와 문화관광부의 남해안 관광벨트사업비를 확보하여 남해독일마을 조성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7) 김두관 군수 등은 2000년 6월에 7일간의 일정으로 독일 마을 투자 유치 설명회를 위해 베를린, 함부르크, 본, 마인츠, 카셀 등지를 방문하게 된다. 이러한 설명회는 2000년 6월~2001년 11월에 걸쳐 총4회를 개최한다. 파독 광부와 간호여성으로 파독되었던 한국의 근로자들 중 많은 수의 사람들이 독일에 남게 된다. 60년~70년대 파독될 당시만 하더라도 20대~30대였던 그들은 2000년을 즈음하여 어느 듯 정년을 눈앞에 뒀거나 이미 정년 후 연금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자녀들도 가정을 이루 고 떠난 자리는 두 부부만 남게 되고, 그동안 눌러두었던 고국에 대한 향수는 짙어만 갔다. 그런데 남해군에서 독일마을을 만든다고 하니 재독교포들은 환호를 하게 된다. 4차례에 걸친 독일 현지 설 명회는 성황을 이루었고 수많은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30년~40년을 독일에서 살았 던 그들이기에 막상 결단을 내리기에는 불안감이 적지 않았던듯하다. 설명회에서 입주희망을 했던 열기에 비해 실제로 남해독일마을로 들어온 사람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독일마을 건설 중에 빚 어진 차질과 계획변경 등의 영향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는 연금을 받을 수 있는 나이까지 기다렸다가 귀국한 사람들도 있다. 남해독일마을은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에 속하며 물건마을 위편에 자리 잡고 있다. 국수산 산자락 에 자리하여 시원하게 트여 있어 푸른 바다와 물건방조어부림이 조화를 이룬 풍광이 한눈에 펼쳐지 는 자리에 위치해 있다. 흰색 벽에 주황색 지붕의 전통 독일식 집이 모여 있어 마치 독일은 어느 마을을 옮겨 놓은 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인근의 물건마을, 봉화마을 사람들의 임야를 남해군청에서 구매하여 대지를 조성하였고 평당 12만원에 분양을 하였다. 독일마을 조성 후보지 4곳 중 독일 교민 대표들의 실사 후 2001년 1월 16일 현재의 위치를 확정했다. 이렇듯 남해군의 노력과 재독교민의 열망 속에서 34가구가 들어선 한국 최초의 집단적 역이주 마을이 탄생하게 된다. 남해독일마을의 주민들은 주로 독일에서 지급되는 월200~400만원의 연금과 민박운영으로 생기 는 수익 등으로 생활하고 있다. 독일마을 34가구 중 현재 민박을 운영하는 가구는 27가구이다. 34가구 중 일부 가구는 파독 근로자 경력이 있는 친척의 명의를 빌려서 들어와 있거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아직 독일에 살고 있어서 빈집으로 있는 집도 있고, 친척이나 세입자가 거주하는 집도 있 다. 파독 근로자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가구와 친척 혹은 세입자가 거주하는 가구, 빈집 등을 제외 하고 파악된 가구는 23가구이다. 파악된 23가구 중 파독 간호여성 출신은 23명, 파독 광부출신은 6명이다. 파독 광부 간호여성 부부는 6가구이고, 파독 간호여성과 독일인과 결혼한 한독가정이 8가 구이다. 파악된 23가구에 파독 광부는 6명인 반면 파독 간호여성은 23가구에 모두에 가족 구성원으로 포 함되어 있다. 즉 파독 광부 6명은 파독 간호여성과 결혼한 가구이다. 파독 간호여성의 비율이 월등 히 높은 이유는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여성의 계약기간과 관련이 있다. 파독 광부의 경우 기본 계약 기간이 3년으로 한정되어 진학이나 결혼 등 특별한 경우에 한정하여 체류 연장을 할 수 있어 파독 간호여성과 결혼을 하지 않은 경우의 대부분은 귀국을 했고, 일부는 미국, 캐나다 등지로 이민을 가기도 했다. 반면 파독 간호여성의 경우에는 쉽게 계약연장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파독 광부 혹은 독일인 남성과 결혼하여 독일에 거주하는 비율이 높았다. 따라서 파독 광부 출신은 일찍 귀국하여 각자의 터전을 닦고 살고 있기 때문에 굳이 남해독일마을로 이주할 필요성이 적다. 그러나 파독 간 호여성의 경우 독일에 거주하며 수십 년을 살다가 여생을 한국에서 보내고 싶었던 차에 남해독일마 을 건립 소식을 접하고 귀국을 하게 된다. 따라서 남해독일마을의 구성원의 중심은 파독 간호여성이 라 할 수 있다. <독일마을 34가구와 필지번호 : 2012년 기준> : 진하게 표시한 필지가 파악된 가구임 필지 번호 성 명 필지번호 성 명 1113 조용길 이문자 1191 유윤자 1112 신병윤 서원숙 1190 박군자 1117 베르너(유)길자, 베르너 헬므트 1169 송애영, Dohle Klaus 1120 권점순 1174 정동양, 이정희 1122 이문삼 1142 류순희 1123 최숙녀, 이도근 1140 류정희 1127 서부임, 울리쉬 울머 1144 김우자, 스트라우스 김 루드빅 1155 최순자, 훼어리드 빌리 1143 타이스 영숙, 아르민 타이스 1166 배정일 1135 고재순, 김연식 1165 석숙자 1134 정문채 1160 왕 넬리 1133 구장서, 주봉순 1200 하봉학, 윤명희 1132 이병종, 문원자 1198 김두한, 이경자 1130 이양자 1196 선우곤, 서범호 1145 우춘자, 빌헬름 엥엘프리드 1183 김남옥, 김옥례 1150 김경자 1185 한건섭, 박미자 1150 추자, Metzger 1189 허완자 1152 어명순 입주하고 부지나 건물을 10년 이내에는 내국인에게 매매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런데 2012년이면 2002년 계약한 사람들은 10년 동안 내국인에게 매매할 수 없다는 조항에서 벗어나게 된다. 즉 내국인에게 매도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벌써부터 매도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봐서 독일마을은 차츰 내국인으로 채워 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독일마을 조성의 원래 취지와는 맞지 않은 방향으로 마을이 변화할 가능성 이 다분하다. 7) 가슴속 달맞이꽃(남해문화원, 2011), 10~14쪽

141 파독 광부 간호여성의 이주와 역이주 2) 일상과 축제로 본 남해독일마을주민의 정착 (1) 일상 독일마을은 마을의 겉모습만 독일풍이 아니라 주택 내부로 들어가도 독일의 가정집에 온 듯한 느낌을 주는데 주민들 대부분 독일에서 사용하던 물품을 그대로 가져와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마을 주민들은 독일에서 적어도 20년 이상을 생활했기 때문에 독일식 삶에 익숙해 있다. 그래 서 이웃집을 가더라도 미리 전화를 하고 방문을 할 정도로 개인의 사생활과 삶의 공간을 최대한 침 해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더군다나 형성된 지 10년 밖에 되지 않았고, 몇 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입주를 했기 때문에 서로 간에 활발하게 교류하지는 않는다. 독일에서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거나 근접한 구역에 살고 있는 이웃과 내왕을 하는 정도이다. 독일마을은 크게 독일로를 중심으로 위쪽과 아래쪽으로 나뉘어 있는 데 가까운 몇몇 이웃이 모여 와인 파티를 열기도 한다. 앞뒤로 이웃한 물건마을, 봉화마을과도 교류가 빈번 하지는 않다. 독일마을맥주축제 준비를 위해 서 주변마을 이장들과 회의를 하는 정도의 교류는 하고 있다. 독일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독일에서 정년을 하고 귀국했기 때문에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평일에는 관광객도 많지 않기 때문에 정원을 손질한다든지 집안일을 하거나, 가벼운 산책을 하면서 지낸다. 평일의 독일마을은 조용하고 평온하다. 반면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관광객이 많이 찾 기 때문에 정원 손질보다는 집안에서 책을 보거나 차를 마시며 조용히 보내는 사람들이 많다. 계절적으로는 여름철이 바쁜데 특히 여름 피서 철에는 예약을 하지 않으면 민박을 구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기 때문에 민박손님 받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낸다. 그리고 10월 초에 있는 독일마을 맥주축제 기간과 준비 기간에도 바쁘게 보낸다. 김두한 이경자 부부는 늘 한국이 그리웠는데 무엇보다 온돌방과 한국음식에 대한 향수가 깊었 다. 은퇴 후에는 향수가 깊어져 갔다. 그러던 중 남해독일마을 조성에 대한 소식을 듣고 노후에는 한국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2004년 토지를 분양 받고 2007년 집을 완공했다. 집을 비워두고 1년에 한번 씩 귀국해서 관리를 했는데 이게 힘들어서 이주를 앞당겨서 2010년 남해독일마을 주민 이 되었다. 한건섭 박미자 부부는 남해군의 독일마을 조성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독일에서 개최된 설명 회에 참석한 후 남해독일마을 입주를 결심한다. 우춘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가지 고 있던 차에 남편이 먼저 제안을 하여 남해독일마을 조성 설명회에 참여한 후 결정하게 되었다. 마침내 33년간의 독일생활을 청산하고 2003년 독일마을에 가장 먼저 독일마을에 입주하게 된다. 이병종 문원자 부부는 2001년 뒤셀도르프에서 남해독일마을 조성에 대한 설명회를 들었으나 세 딸과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결정을 못하다가 2010년 독일마을을 방문했는데 아름다운 풍경 에 반하고 말았다. 그래서 남해군에 직접 찾아가서 분양신청을 하고 남해독일마을 주민이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봤듯이 이들의 역이주는 한국에 대한 그리움-정년퇴직-남해독일마을조성 이 맞물 리며 일어난다.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었는데 2000년을 전후로 파독 근로자들의 정년퇴직 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어 남해독일마을조성 소식을 듣고 귀국을 결심을 하게 된다. 30년~40년을 독일에서 생활했음에도 한국 음식에 대한 그리움이 가족과 친구 못지않게 컸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생활하는 지금은 독일 음식, 특히 독일식 빵, 소시지, 치즈 등이 그렇게 그리 울 수가 없다고 한다. 이들 4가구는 남해독일마을에 잘 적응을 하고 있지만 다름에서 오는 문화적 차이를 실감하고 있 다. 독일마을 주민과 주변마을 주민간의 불신, 독일마을 주민간의 갈등, 독일마을과 군청간의 갈등 등이 대표적이다. 남해독일마을에 대한 군청의 예산지원과 관광객의 독일마을로의 집중 현상으로 주변마을 토착민 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가지고 있다. 반면 독일마을 주민들은 독일마을로 인해 주변마을 식당, 상점 등이 활성화되는 데도 불만을 가지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입장이다. 주변마을 토착민들은 남해독일마을에 예산지원이 상대적으로 집중되는 점에 불만이 있는 반면 독 일마을 주민들은 오히려 군청의 지원이 적음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 독일마을 입주 설명회 때 했던 약속과는 달리 계획에서 대폭 축소되었다는 것이다. 정책의 일관성이 없는 군청에 대한 불만을 독일 마을 주민들은 종종 토로 한다. 독일마을 주민들 간의 갈등도 예사롭지 않다. 2012년 마을대표와 독일마을맥주축제 운영위원장을 두고 심각하게 분열되었는데 2013년에는 이러한 갈등이 증폭되어 이병종 마을대표가 사임을 하는 등 마을주민들 간의 분열이 심화되어 큰 홍역을 앓고 있다. 갈등의 원인이기도한 맥주축제를 통해 화합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이상에서와 같이 독일마을주민들은 여러 가지 갈등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주민 대부분은 남해독 일마을에서의 생활에 만족을 하고 있고, 갈등을 극복해 나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김두한 이경자 부부의 일상 김두한 이경자 부부는 2007년 독일마을에 베토벤하우스를 완공하였고, 2009년 한국으로 건너와 서 독일마을에 정착을 하게 된다. 김두한이 파독 광부로 떠난 지 39년만의 일이다. 이들 부부는 독일마을에서 가장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독일마을 내에 있는 커피브레멘이라는 커피숍과 베토벤하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민박을 운영하고 있다. 처음에는 베토벤하우스에서 거주를 했으나 지금은 민박으로만 사용하고 독일마을과 접해 있는 원예예술촌 내의 독일식 주택에 거주하고 있다. 김두한은 동천교회 협동장로이며, 독일맥주축제의 총무이기도 하다. 부인인 이경자는 원예예술촌 회장직을 맡고 있다. 그래서 이들 부부의 일상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아침은 주로 독일식으로 먹는다. 부부가 함께 먹을 때도 있지만 김두한은 커피브레멘에서 소시지, 식빵, 커피로 간단하게 먹는 경우가 많다. 점심도 바쁠 때는 식당에서 먹을 때가 많다. 저녁은 부부가

142 파독 광부 간호여성의 이주와 역이주 한국식으로 식사를 함께한다. 커피브레멘의 오전은 한가하기 때문에 주로 아르바이트가 전담하고, 오후가 되면 관광객들이 많이 찾기 때문에 김두한 이경자 부부가 함께 나와서 일을 한다. 독일마을을 찾는 관광객은 오후 늦은 시간에는 거의 없기 때문에 오후 5시에 문을 닫고 정리한 후 함께 집으로 향한다. 커피브레멘은 원예 예술촌 후문과 접해 있는데 이들 부부의 집도 원예예술촌 내 후문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걸어서 1분 이내의 거리이다. 김두한은 남해독일맥주축제를 처음 만들 때부터 깊이 관여해 왔기 때문에 축제의 활성화에 열성이 다. 그래서 축제가 시작되는 몇 달 전부터 축제준비에 열정을 쏟는다. 이경자는 2012년에 원예예술촌 회장으로 선출되어 올해 처음으로 제1회 원예예술촌 FLOWER & MUSIC FESTIVAL 을 2012년 6월 9일~10일 개최하였다. 원예예술촌은 유료관람객만하더라도 연간 25만 명 이상이 찾는 곳이다. 부부는 일요일에는 동천교회에 나가서 함께 예배를 본다. 이들 부부는 개인적으로는 민박과 커피 숍을 운영하면서, 독일마을과 원예예술촌 두 마을을 위해서 맥주축제와 FLOWER & MUSIC FESTIVAL의 기획과 실무를 맡고 있고, 교회도 다니는 등 대내외 활동으로 늘 분주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정착) 이들 부부는 독일에서 40년을 살았는데도 한국이 그리웠다. 무엇보다 온돌방과 음식에 대한 향수 가 깊었는데 은퇴 후에 한국 생각이 더 많이 났다. 그러던 중 남해독일마을 조성에 대한 소식을 듣고 노후에는 한국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2004년 토지를 분양 받고 2007년 집을 완공했다. 집을 비워두고 1년에 한번 씩 귀국해서 관리를 했는데 이게 힘들어서 원래 계획보다 영구 귀국을 앞당기기 로 결심했다. 2009년에는 11개월은 남해에서 지내고 1개월을 독일에 있는 아들네에서 지냈다. 그리고 2010년 온전한 독일마을주민이 되었다. (역이주 동기) 한국에 오니까 한국음식 마음껏 먹을 수 있어 좋았다. 그래도 아침은 독일식으로 커피, 빵, 치즈, 햄을 먹는다. 현재 제일 그리운 건 독일식 아침식사이다. 한국의 빵, 치즈, 햄은 독일의 맛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 힐튼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는데 너무 비싸다. 요즘은 간혹 독일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1년에 한번 정도는 아들부부가 있는 독일에 가는데 독일공 항에 가면 너의 집에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는 말을 해주는데 눈물이 핑 돈다. 독일가면 독일이 좋고, 한국에 오면 한국이 좋다. 독일에 있으면 스트레스가 없어서 좋다. 한국에 오면 사람과 사람사 이로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다. 독일은 신고 정신이 대단하고 법만 지키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곳이다. 한국에서 운전하면 화가 나서 견디기가 힘든 경우가 많다. (문화적 갈등) 독일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독일국적은 100유로만 내면 어렵지 않게 받는다. 국적을 받지 않으면 영국 같은 국가에 여행 갈 때 불편한 것과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는 다는 점 외에 특별히 불편한 점이 없다. 연금 받는 것은 상관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주유소와 개인병원은 국적이 없으면 영업허가를 안내주기 때문에 영업을 할 수 없다. 그래도 큰 불편함이 없기 때문에 독일시민권을 받지 않은 교민도 많다 독일에서는 86년부터 외국인에게 사업영업허가를 내주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인들 중에 사업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김두한은 89년에 한국월간지를 독일에 들여와서 판매사업을 하기도 했다. 김두한 이경자 부부는 처음에는 2007년 완공한 베토벤하우스에 살았으나 지금은 민박으로 사용 하고 있다. 현재는 원예예술촌내에 있는 독일식 주택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커피브레멘을 2010 년 9월 오픈하여 운영 있다. 김두한은 현재 독일식 레스토랑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남해독일마을에는 독일식 먹을거리가 없다. 독일식 음식점이 있어야 독일마을이 좀더 활성화될 수 있기 때문에 기회가 되면 독일에서 정통 요리 사를 데리고 와서 운영해 보고 싶은 꿈이 있다. 독일마을을 처음 조성할 당시의 계획과 약간의 괴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김두한은 설명회 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한 불만은 없다. 독일식은 말을 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해주는 게 원칙이다. 군청에서 잘 해주는 부분도 많지만 독일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펜션이 계속 들어서고 있는데 허가를 남발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군청과의 갈등) 현재 독일마을에 특별하게 친하게 지내는 이웃은 없고 동천교회 협동장로라서 교회친구가 더 많 다. 독일마을 구성원은 서로에 대한 관심 없다. 독일식 개인주의가 몸에 남아 있어서 불시에 이웃을 방문한다든지 서로의 일에 관심을 가지는 일이 없다. 김두한은 제1회 남해독일마을맥주축제 때부터 총무를 맡았는데 7월 23일 축제추진위원회에서 새 로운 임원진이 선정 되었는데 또다시 총무를 맡았다. 김두한은 지금까지 축제를 진행하면서 주민이 주체가 되는 축제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올해는 남해군의 생각보다는 주민이 중심이 되는 축제 를 만들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경자는 2012년 2월에 원예예술촌 2년 임기의 대표가 되었다. 원예예술촌은 연간 유료관람객이 25만을 육박하는 남해군의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독일마을 내에서도 서로간의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지지도 않지만 이웃한 물건마을과도 원만한 건 아니다. 독일마을 생기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독일마을에 관광객이 많이 오니 까 주변에 커피숍도 생기고 활력이 넘쳐나게 된 것이다. 1회~2회 독일마을맥주축제 때에는 주차문제 로 이웃마을에 불편을 초래한 건 사실이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이웃마을 이장들도 축제준비 회의에 참석하여 함께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문화적 갈등과 해결 노력) 한건섭 박미자 부부 한건섭과 박미자 부부는 1970년 6월 28일 결혼을 했다. 박미자는 간호여성이 파독되던 초창기인 1966년에 독일로 갔다. 외국에 대한 호기심 반,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 반으로 독일행을 택했다. 프랑크프르트에서 간호원으로 근무하였고, 계약기간 3년을 채우고 1969년 12월 31일 한국으로 귀국 했다. 귀국하고 친척의 소개로 한건섭을 만나게 되고 몇 번 만나보지도 않고 결혼을 했다. 결혼 후 한국에서 두 딸 둘을 낳고 살다가 독일문화원 소속의 우정회의 취업 초청장을 받고 50세에 재취업을 하여 독일로 향한다. 베스트팔렌주 보훔시의 대학병원 암병동에서 1992년 1월부터 근무하던 중 남해

143 파독 광부 간호여성의 이주와 역이주 군의 독일마을 조성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독일에서 개최된 설명회에 참석한 후 독일마을 입주를 결심한다. 두 부부의 현재 보금자리인 겔베하우스가 완공되고 2004년부터 독일마을 주민이 되었다. (역이주 동기) 한건섭은 아내가 50세에 재취업이 되어 독일로 떠났을 때 한국에 남아 있었다. 1년에 몇 차례 씩 독일을 방문하여 아내와 함께 생활하다가 귀국하는 생활을 했다. 한건섭은 중앙대 철학과를 졸업했 고, 지금도 서재에는 책으로 가득할 정도로 독서를 좋아한다. 그리고 여러 나라의 우표를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한건섭은 독일마을 주민들 중 유일하게 토박이와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물건마을 사람들과 친밀하 게 지내고 있다. 몇 년째 물건마을 노인회 총무직을 맡고 있으며, 물건마을 동제 제관으로도 참석한다. 독일마을은 법정리는 물건리에 속하지만 행정리는 다르기 때문에 이장 혹은 마을대표가 다르며 각기 별개로 운영되는 각각의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한건섭은 물건마을 주민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는 아마도 한건섭이 주로 한국에서 생활했고, 가끔씩 아내를 만나기 위해 독일을 다녀오는 정도였 기 때문에 한국식 사고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독일마을주민 다수는 독일생활을 30년 이상하고 귀국했기 때문에 독일식 사고를 가지고 있고, 파독 광부와 간호여성이라는 그들만의 연대의식 혹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해 한건섭은 아내가 파독 간호사였지만 본인 은 국내에서 일반적인 한국인의 생활을 하며 살았기 때문에 사고방식과 생활패턴 등이 독일마을 주민들보다는 물건마을 주민들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침식사를 하고 함께 생활하며 돌봐주 는 손자를 초등학교에 등교 시킨 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물건마을 경로당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한건섭 박미자 부부는 정년한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수입이 있는 특별한 일을 하지는 않는다. 아 침식사를 마치면 한건섭은 사륜오토바이로 손자를 동천초등학교까지 등교를 시키고, 집으로 와서 정원손질, 화단보수 등을 한다. 오후에는 물건마을 경로당에서 시간을 보내고 매주 수요일 점심식사 는 경로당에서 노인들과 함께 단체식사를 한다. 손자가 쉬는 날에는 사륜오토바이에 태우고 물건항에 나오기도 하며 손자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박미자는 주로 집안일과 손자돌보는 일을 하며 독일마을 내에 머문다. 아침에 손자의 아침식사 챙기고 등교준비를 시킨다. 손자가 학교에서 하교하기 전까지는 집안 청소나 좋아하는 요리를 하고, 매실차를 담그기도 하는 등 집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손자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함께 독일마을을 산책하기도 한다. 겔베하우스도 민박을 운영하는데 본체의 1층과 방갈로 2개가 민박용으로 쓰인다. 여름 피서철에는 민박 손님 받고, 정원의 잡초 뽑고 손질하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낸다. 박미자는 1969년 12월에 귀국을 했다. 간호사의 경우 본인이 원하면 연장할 수 있었지만 결혼할 나이가 찼기 때문에 부모님의 걱정이 많았다. 귀국을 하고보니 부모님에 의해 결혼이 추진되고 있었 다. 1970년 5월 16일 한건섭을 처음 만나고 6월 28일 결혼했다. 어른들끼리 모든 걸 정한 후 둘을 만나게 한 것이다. 박미자는 이 때 선을 처음 봤고, 한건섭은 수도 없이 선을 봐왔던 상황이었다. 박미자가 생각했을 때 한건섭은 학생회장을 하여 리더십도 있고 능력도 있었다. 그리고 집도 꽤나 잘 살았다. 머슴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동네에서 밥술깨나 먹었다. 그런데 박미자는 거의 혼수도 없이 결혼했다. 시어머니는 독일 갔다 왔으니까 혼수를 많이 해 올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이 시집오니까 시어머니께서 많이 실망을 하셨다. 그래서 미움을 받았는데 더군다나 딸만 둘을 낳고 더 이상 아이를 가지지 않아서 더욱 구박을 많이 받고 살았다. 독일 생활을 해서 그런지 독일인들은 아이 없이도 잘 살고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도 잘 사는 것을 봐 왔기 때문에 아들을 꼭 낳아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남편도 이에 동의를 했다. 한건섭은 철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종교적인 사고를 많이 했다. 그래서 결혼할 생각조차 없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아들 없는 게 후회되기도 한다. 상가집에 가면 딸만 있는 집안은 쓸쓸해 보여서 그때 아들을 하나쯤 낳을 걸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큰딸은 이화여대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지금은 캐나다에서 주부로 살고 있는데 공인중개사 자격증 을 따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다. 큰 사위는 국내에서 개인사업 하고 있고, 손자는 1남 1녀를 뒀는데 캐나다에서 딸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캐나다 간지 4년째인데 그동안 한 번도 못 봤다. 작은 딸은 중앙대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성모병원 간호사로 재직하고 있다. 내년 3월쯤은 남해 독일마을로 내려오기로 했다. 내려와서 1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쉴 계획이다. 물건마을 위쪽에 있는 암자(결재암)을 구입했다. 딸 부부가 내려오면 생활할 수 있는 가정집으로 꾸밀 계획이다. 어차 피 둘째딸에게 겔베하우스도 물려 줄 생각이니까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처음에 남해 내려왔을 때는 실망을 많이 했다. 첫 약속과는 달리 계획이 축소되고, 변경되는 게 많았다. 겔베하우스 뒤쪽에는 전망대가 들어설 예정이었는데 지금의 독일마을은 설명회의 모습이 아니다. (군청과의 갈등) 그래도 10년쯤 사니까 남해가 살기에 좋다. 박미자는 현재가 너무 행복하기 때문에 독일이 그립지 않다. (정착) 독일연방연금과 가톨릭 재단 병원에서 연금이 110만원정도 나온다. 그리고 민박을 운영해서 조금 씩 수입이 있고, 딸들이 생필품을 보내주기도 한다. 아침은 주로 빵을 먹고, 점심과 저녁은 한국식으 로 먹는다. 한건섭은 65세에 남해독일마을로 내려왔는데 매일 물건마을을 돌며 조깅을 했다. 조깅하면서 만나 는 사람들과 인사도 하고, 술을 좋아하니까 한잔씩 하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정착) 그리고 물건마을 경로당을 출입하게 되었다. 물건마을은 김씨와 이씨로 연결된 인척관계로 얽히다보니까 노인회 총무 하기를 꺼리는 분위기이다. 그래서 노인회 총회하는 날 한건섭이 참석을 하지 않았는데도 총무를 시켰다. 물건마을과 독일마을의 관계 형성에 도움을 될 것 같아서 순순히 승낙을 하게 되었다. 올해 4년째 노인회 총무를 맡고 있다. 우춘자 빌헬름 엥엘프리드 부부 경북 왜관 출신의 우춘자는 파독되기 전에는 거창군 보건소에서 근무를 했다. 한국에서 결혼하여 시어머니와 아이 둘을 데리고 월급 2만원으로 어렵게 생활하다가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두 아이를 시누이에게 맡기고 독일행을 결심하였다. 1971년 1월 독일로 건너가서 뮌스터 시립병원에

144 파독 광부 간호여성의 이주와 역이주 서 근무했다. 독일에서의 급여는 한국에 있을 때보다 7배 정도 많았다. 월급을 받으면 최소 생활비만 남겨두고 90%는 한국으로 송금을 했다. 뮌스터 시립병원에서 3년 계약을 마친 후 프랑크푸르트의 국립병원으로 자리를 옮겨 7년 근무했 다. 현재의 남편인 빌헬름 엥엘프리드는 1979년 만났는데 그 당시 항공계통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 다. 몇 년 동안의 만남을 이어오다가 우춘자가 42세 되던 1983년에 결혼을 했다. 우춘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별 어려움 없이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던 차에 남편이 먼저 제안을 하여 남해로 오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다. 마침내 33년간의 독일생활을 청산하고 2003년 독일마을에 가장 먼저 독일마을에 입주하게 된다. (역이주 동기) 원래는 5년~10년 살다가 다시 독일로 돌아갈 마음이었는데 남편이 남해독일마을에서 계속 살기를 원한다. 빌헬름 엥엘프리드의 자식들도 이미 노인으로 접어드는 나이가 되었고, 독일로 돌아가도 친구들도 저 세상으로 많이 갔기 때문에 아내의 고향에서 여생을 마감하기로 했다. 엥엘프리드는 평화의 천사 라는 의미인데 남해의 맑은 공기와 멋진 풍광을 누리다가 평화의 천사처럼 아내의 곁에 서 죽을 것이라 한다. 이들 부부 역시 오래 전에 정년을 했기 때문에 독일에서 나오는 연금과 민박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 부부는 상대적으로 연금을 많이 받고 있어 생활하는데 부족함은 없다. 우춘자는 정원 손질과 텃밭 경작에 정성을 많이 쏟는다. 그래서 하루의 많은 시간을 정원에서 보낸 다. 그리고 해질녘에 이웃 혹은 남편과 물건마을 해변까지 산책을 하기도 한다. 하이디 하우스도 민박을 운영하는데 숙박을 하면 아침식사는 독일식으로 햄과 빵, 커피 등을 제공 한다. 1층은 부부가 사용하고 2층을 민박으로 이용하는데 경치가 좋고, 깨끗하게 정리된 공간과 아침 독일마을조성에 관한 설명회가 있다는 내용을 읽고 설명회장을 찾았는데 그때 김두관 군수를 보고나 서 확신을 했다. 남편 빌헬름 엥엘프리드는 물건마을 사람들을 잘 알고 있어서 생활하는데 특별히 어려운 건 없다 고 한다. 당뇨 증세가 있어서 부지런히 산책을 한다. 빌헬름 엥엘프리드는 독일이 그립지 않은데 오히려 아내가 독일로 가고 싶어 한다. 우춘자가 독일 음식도 그립고 친구도 독일에 있으니 가자고 아무리 말해도 저 양반(빌헬름 엥엘프리드)은 한사코 안가겠다고 한단다. 이들 부부의 아침식사는 독일식으로 한다. 그런데 한국의 햄, 치즈는 맛이 없어서 늘 독일식 햄과 치즈 생각이 난다. 그 중에서도 독일빵이 제일 그립다고 한다. 독일에서 함께 근무했던 한국인 친구들은 아직도 연락하고 있고, 남해독일마을에 놀러 와서 하이 디하우스에서 여러 날 자고 가기도 한다. 현재 독일마을에 살고 있는 김우자는 독일에서도 알고 지내 던 사이이다. 우춘자는 정원 가꾸기를 좋아하는데 독일에서 생활할 때도 정원을 잘 가꿨고, 특히 장미를 잘 가꿨 다. 지금도 많은 시간을 정원 가꾸는데 사용하고 있다. 현재 3마리의 개를 키우고 있다. 하이디라는 이름의 흰색 강아지는 14년째 키우고 있는데 독일에서 키우던 개를 데리고 왔다. 우춘자는 작년(2011년)까지 독일국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올해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빌헬름 엥엘프리드는 한국 국적을 취득할 계획이다. 2년마다 거소증(일종의 비자)을 연장 하는 게 귀찮아서 조만간 신청할 계획인데 신청하고 취득하기 까지 2년 걸린다고 한다. (정착) 독일마을은 주말이면 관광객으로 차량과 사람으로 포화상태가 되고, 독일마을 입구에는 펜션단지 가 하루가 다르게 확장되고 있다. 독일마을이 처음 계획될 때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군청에서 이러한 것들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군청과의 갈등) 식사 제공 등으로 매년 찾는 사람들이 많다. 빌헬름 엥엘프리드는 물건마을 해변 산책을 즐긴다. 독일에 살 때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남해독일 마을에 살면서 건강이 좋아졌다. 우춘자가 텃밭에서 경작한 여러 가지 채소와 감자 등으로 식생활을 바꾸고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 매일 거르지 않는 산책 등을 원인으로 꼽는다. 빌헬름 엥엘프리드는 강아지와 함께 물건마을 해안을 산책하기 때문에 물건마을 주민들은 빌리(Willy)를 보면 나오셨어 요? 라는 짧은 인사말을 건넨다. 빌헬름 엥엘프리드는 1930년생으로 올해 한국나이로는 83세이다. 처음 독일마을주민으로 왔을 때 는 주변 마을의 주민들과 함께 춤도 배우고 여러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지금은 기력이 쇠하여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 (정착) 우춘자는 1971년 서독으로 간 후 1987년까지 한 번도 한국을 다녀가지 않았다. 87년도에 딸이 아들 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손자가 그렇게 보고 싶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몰래 귀국해서 딸의 집에만 다녀가려고 했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당부를 하고 한국으로 왔는데 가족 전체 가 공항에 나와 있었다. 그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눈앞이 깜깜했다. 독일에서 설명회에 참석했는데 그 때부터 남해독일마을로 와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교포신문에서 이병종 문원자 부부 이병종(45년생)과 문원자(49년생)은 독일에서 만나서 결혼을 했다. 이병종은 1970년 7월 21일 독일 행 비행기에 올랐고, 뒤셀도르프 루루지방의 운서푸리츠주식회사에서 근무하였다. 문원자는 1970년 9월 19일 궬른 공항에 내려 다음날인 20일부터 요하네스 크랑케이스트 기독교 종합병원에서 근무를 했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만나서 1972년 봄에 약혼을 하고 그해 12월에 결혼을 했다. 이듬해 3월 이병종은 계약만료와 함께 아내가 있는 빌레펠트로 이사를 해서 함께 살았다. 2001년 뒤셀도르프에서 남해독일마을 조성에 대한 설명회를 들었으나 세 딸과 멀리 떨어져야 한다 는 생각에 바로 결정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2010년 귀국 후 독일마을을 방문했는데 아름다운 풍광에 반하고 말았다. 그래서 남해군에 직접 찾아가서 분양신청을 하였다. 독일생활 40년을 청산하고 남해 독일마을 주민이 되었고,(역이주 동기) 이병종은 2012년에 독일마을 대표가 되어 마을을 위해 많은 봉사를 하고 있다. 이병종 문원자 부부의 보금자리는 조광 혹은 모르겐죤네라고 부른다. 아침 朝 (조), 빛 光 (광) 즉 아침햇살이라는 의미인데 독일어로는 모르겐죤네라고 한다. 이들 부부의 집은 물건해안이 잘 내려다

145 파독 광부 간호여성의 이주와 역이주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어서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과 반짝이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병종의 하루 일과는 집 짓는 일로 시작한다. 조광(모르겐죤네)은 이병종이 직접 짓고 있다. 1층은 완공이 되었는데 2층은 아직 공사가 진행 중이다. 매일 틈이 날 때 마다 조금씩 짓고 있다. 독일에서 살던 주택도 직접 지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다고 한다. 급하게 완성하기 보다는 천천히 본인이 직접 만드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집 짓는 일 외에도 정원손질을 하거나 독서를 하며 하루를 보낸다. 커피를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부부가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자주 나눈다. 문원자는 알레르기가 심했는데 공기 좋은 독일마을에서 생활하면서 많이 좋아졌다. 이병종은 2012년 5월에 치열한 경선을 통해 독일마을 대표로 선출되었다. 대표로 선출된 후 독일마 을맥주축제운영위원장을 겸하여 하반기에는 축제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병종 문원자 부부는 슬하에 3자매를 두었다. 현재 큰딸은 스위스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는데 병원 책임과장이다. 둘째딸은 베를린에서 결혼해서 살고 있고 비교문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셋째 딸은 경영학을 전공하고 함부르크에서 직장생활하고 있다. 딸들이 방한해서 함께 지내다 돌아가기도 하고, 이병종 문원자 부부가 크리스마스에는 딸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함께 지내다가 귀국하기도 한다. 한국 사람들은 교육열이 높아서 2세들은 독일사회에 자리를 잡았다. 독일에서 나올 즈음(2010년) 빌레펠트대학에 학위를 받은 한국 사람이 57명이었다. 그 사람들 중에도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꾀 있었다. 그러나 파독 근로자들은 못사는 사람들도 상당히 있다. 그나마 독일마을로 이주한 사람들 은 독일에서도 경제적으로 괜찮은 사람들이다. 이병종 문원자 부부는 독일에서 나오는 연금과 독일 과 마찬가지로 아침식사는 독일식, 점심과 저녁은 한국식으로 먹는다. 이병종은 당대의 암울한 시대상황 때문에 서독으로 가겠다는 결심을 했기 때문에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경제개발에 대한 공을 인정하면서도 그 시절의 경제개발 계획은 이미 자유당시절에 있었던 계획을 수정변경해서 실천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한국의 사회 정치적 미성숙함의 원인은 힘의 논리로만 해결하려던 군사정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병종은 독일 국적을 받으라는 권유가 3번 있었지만 받지 않았다. 선거권, 투표권, 출마권을 제한 받는 거 외에는 불편함이 없기 때문이다. 영주권만 있으면 연금 등 모든 사회보장 혜택도 누릴 수가 있다. 이병종은 남해독일마을의 자연환경은 대만족하는 반면 공무원들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한다. 공무원 을 말을 했으면 그것을 지켜야 하는데 잘 지키지도 않고, 책임을 안 지려고 한다. 독일의 공무원은 되는 것과 안 되는 게 분명한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 공무원들이 지시하는 것은 강력하게 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은 슬슬 빼고, 전문성도 부족하다. 김두관 군수는 내년을 보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10년, 20년 뒤를 보고 일을 했다. 그게 독일식이다. 그런데 김두관 군수가 떠나니까 그 때 약속들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 독일에서는 약속을 했으면 그 뒤에 부임한 사람도 약속을 지킨다. 자기가 약속한 사항이 아니라고 모른 채 하지 않는데 한국은 사람이 바뀌면 약속도 없어진다. 독일생 활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군청과의 갈등) 이병종은 2012년 5월에 마을 대표로 선출되면서 부쩍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특히 남해독일마을맥 주축제를 준비하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이병종은 공동체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투명성을 강조한다. 축제를 준비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또한 재정의 투명성이다. 에 있는 집을 처분한 돈으로 생활하고 있다. 이병종은 독일마을 주민 중 김경자, 우춘자, 구장서, 고재순, 하봉학 등 이웃한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다. 문원자는 중고등학교 동창들과 연락을 하고 지내는데 독일마을에 동창들이 종종 놀러오 기도 한다. 이병종은 남해독일마을에서 가장 좋은 점으로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 화창한 날씨를 꼽는다. 처남 이 비염이 있는데 1주일 독일마을에서 생활하면서 비염이 좋아졌다. 그 정도로 공기가 맑다. 반면 독일마을 내 도로가 불편하다. 주말만 되면 자동차가 온 마을에 빼곡히 들어선다. 독일마을 입구에 주차장이 있어야 하는데 뒤편에 있으니까 관광객들이 주택가에 주차를 한다는 것이다. 독일마 을과 접해 있는 해오름예술촌 유료 관람객이 25만 명을 육박하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추산하면 독일마 을에 연간 100만 명 내외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것으로 이병종은 추산한다. 그런데도 주차공간이 부족 하여 독일마을주민들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겪고 있다. 근처에 시장이 없는 점도 불편한 점으로 다가 온다. 그래도 부부는 남해독일마을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독일에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가끔씩 은 그리워질 때가 있는데 특히 독일식 소시지와 치즈가 생각이 많이 난다. 한국의 소시지는 치즈는 종류도 적고 맛도 없어서 아침은 채소를 많이 먹는다. 이병종 문원자 부부도 독일마을의 여느 가정 (2) 남해독일마을 맥주축제 독일마을 맥주축제는 2013년 4회째를 맞이하는 소규모 축제이다. 독일마을은 현재 34동의 주택이 들어서 있고 대다수가 노인부부 2명이 1가구를 이루고 있는 형태이다. 아주 작은 규모의 마을에서 그것도 마을주민을 구성하는 대부분이 노년층인 마을에서 열정적인 기운이 가득한 맥주축제를 성공 적으로 개최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독일마을맥주축제를 독일마을주민들은 옥토버페스트라고도 하는데 이는 독일 뮌헨의 옥토버페스 트에서 아이디어를 얻었기 때문이다. 독일 옥토버페스트는 1810년부터 뮌헨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 3대 축제 중의 하나이다. 축제기간은 매년 9월말부터 10월 초까지 2주 동안 개최한다. 이 기간 동안 뮌헨을 찾는 관광객은 약 700만 명에 달하며, 2011년 맥주 소비량이 790만 리터가 소비되었다. 치킨 은 52만 마리, 소시지는 12만개, 소가 118마리, 송아지 92마리가 소비되었다. 축제 장소는 독일 뮌헨 의 서쪽에 있는 126만평 규모의 테레지엠비제 광장이다. 축제기간에 양조사들은 알콜도수가 높은 맥주를 만들어 판매하는데 뮌헨에 소재한 파울라너(Paulaner), 호프브로이(Hofbrau), 뢰벤브로이 (Lowenbrau), 아우구스티너(Augustiner), 하크-프쇼어(Hacker-Pschorr), 슈파텐(Supaten) 등 6개 대 형 맥주회사만 참여한다. 8) 이렇듯 그 규모와 역사에서 옥토버페스트는 어마어마하다

146 파독 광부 간호여성의 이주와 역이주 반면 독일마을맥주축제는 34가구의 조그마한 마을이 주체가 되는 소규모 지역축제이다. 규모와 역사에서 비교의 대상이 되지는 않지만 옥토버페스트를 롤모델로 삼아 남해독일마을을 널리 알리는 데 성공한 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마을단위의 작은 축제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 은 사례이다. 축제는 신에 감사의 마음을 올리고 지속적인 풍요로움을 기원하는 제의로서 인류역사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왔다. 현대의 축제는 그 본래의 의미에서 멀어졌지만, 그 상징적 의미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일상에서의 탈출을 통한 흥분과 신명 더 나아가 지역과 사회의 통합과 번영을 지향하고 있다 는 점이다. 독일마을축제에 참여한 많은 관광객은 문화적 색다름에 신기해하기도 하고 일상탈출의 흥겨움을 누리고, 독일마을주민들은 주도적으로 축제를 개최함으로써 남해독일마을의 인지도를 높이고, 파독 광부 간호여성의 자긍심을 고취시켰으며, 경제적인 이득을 얻었다. 독일마을맥주축제가 성공적인 방향으로 갈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독일마을 주민이 주도 적, 자발적,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이다. 물론 독일마을맥주축제도 군청의 예산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에 군청의 관광 상품화 전략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독일마을맥주축제는 기존의 지역 축제가 가지는 정치적 역학관계로부터 자유롭고자 노력을 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나 사회단체가 지역축제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래서 지자체장이 제관이 되고,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개회사를 하며 일장 연설을 하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러나 독일마을맥주 축제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또한 최대한 독일마을주민이 중심이 되어 축제를 기획하며 스스로 스폰서를 찾아 나선다. 정치적 도구에서 벗어나서 그들이 주인공이 되는 축제를 만들기 위해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손님을 맞이하는 입장이지만 사실은 그들 스스로가 축제를 적극적으로 즐기는 향유자이도 한 셈이다. 독일마을축제를 통해 독일마을이 수확한 긍정적인 부분을 몇 가지로 요약하자면 첫째 남해독일마 의 정체성 확보이다. 독일마을은 인위적으로 조성된 마을로 10년이라는 짧은 역사를 가졌다. 마을주 민 역시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여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대다수가 독일의 각기 다른 지역 에서 모여든 사람들이다. 따라서 마을구성원들 간의 지역공동체라는 인식이 약할 수밖에 없다. 축제 를 준비하고 행사를 치러냄으로써 집단적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독일마을이라는 지역공동체의 정체 성을 확인하고 집단통합의 과정을 체험하고 있다. 둘째 파독 광부 간호여성의 자긍심을 고취를 들 수 있다. 독일마을은 파독 광부와 간호여성이 모여 사는 곳이다. 그들은 대한민국 경제발전에 일조했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축제를 개최함으로써 그들의 삶이 조명 받고 이를 통해 자긍심을 고취하려는 목적을 획득하고 있다. 셋째 관광객 동원을 통해 경제적 이익의 창출과 인지도 상승이다. 축제를 통한 직접적인 수익창출 과 더불어 축제기간 중 민박, 커피숍 등 마을주민들이 운영하는 상업시설을 관광객이 이용함으로써 수익을 얻기도 한다. 독일마을은 주거목적으로 건설되었지만 노후의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다수는 민박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독일음식 혹은 독일 상품을 진열하여 판매하는 주민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축제를 통해 독일마을의 인지도를 상승시켜 평상시에도 관광객이 찾을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렇듯 독일마을맥주축제는 독일마을의 정체성 확보 및 파독 광부와 간호여성의 자긍심 고취라는 목적과 경제적 생산성 증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축제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독일마을맥주축제는 짧은 역사와 적은 재정지원, 작은 마을단위의 축제라는 난제를 극복 하고 성공적으로 축제를 만들어가고 있다. 남해독일마을에 거주하는 파독 광부 간호여성들은 젊은 시절 독일에 건너가서 30년~40년의 세 월을 독일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한국인이지만 독일문화가 더 익숙한 사람들이다. 남해독일마을에 정착했지만 그들에게 이곳 역시 낯선 곳이다. 수많은 관광객은 독일마을이 주는 이국적 느낌에 흥미 로운 시선 잠깐 보냈다가 스쳐지나갈 뿐이고, 인접마을주민들 역시 그들을 지역공동체의 울타리에 넣기보다는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다. 또한 남해독일마을 주민들조차도 독일문화와 한국문화 사이에서의 혼란, 사생활을 중시하는 문화, 독일마을 정착시기의 차이 등으로 서로 간에 교류가 원 활하지는 않다. 그리움을 따라 남해로 찾아왔지만 그들에게 이 땅 역시 낯선 땅인 것이다. 그런데 남해독일마을 축제를 준비하면서 독일마을 주민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성공적인 축제를 위해 힘을 합치는 과정을 거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융합하고자 하는 공감대가 형성 된다. 이웃한 마을 주민들 중에는 독일마을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들이 일부 있다. 남해군의 많은 예산 이 독일마을로만 간다는 피해의식과 독일마을로 인해 여러 가지 성가신 일만 생기지 실질적인 도움 이 없다는 인식이다. 특히 남해독일마을맥주축제 기간에는 교통이 마비되어 불편함만 초래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2012년 독일마을맥주축제 때는 준비과정에서 주변마을 이장을 참여시켜 여러 가지 해결방안들을 협의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그리고 축제기간에 많은 관광객 들이 물건마을과 동천마을에 소재한 식당, 편의점, 커피숍 등을 찾음으로써 독일마을맥주축제에 대 한 인식이 좋아지고 있다. 독일마을맥주축제를 통해 독일마을주민들은 통합하게 되고, 이웃마을과의 협의 과정을 통해 지역 공동체로서의 유대감이 형성되게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스쳐지나가던 관광객들로 하여금 장시간 축제에 참여할 수 있게 하고, 파독 광부 간호여성 관련 영상물 상영과 전시회 등을 통해 그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였다. 남해독일마을이 이웃, 주변 마을, 관광객들에 둘러싸인 고독한 섬이었다면 독일마을맥주축제는 이웃, 주변 마을, 관광객과의 가교 역할을 하는 셈이다. 독일마을맥주축제는 한국인이지만 독일문화 에 더 익숙한 문화적 소수자의 정체성을 표현한 축제이며 이를 통해 그들은 정체성 혼돈의 상태를 극복해 나가고 있다. 8) 독일 뮌헨 공무국외여행 결과보고서(권태효 외 3명, 국립민속박물관, 2012) 참조

147 파독 광부 간호여성의 이주와 역이주 5. 맺음말 파독 광부와 간호여성의 파독 계기와 독일에서의 삶은 일률적이지 않다. 각기 그들만의 이유로 서독행을 택했고, 서독에서의 삶의 모습도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들을 바라보는 시 선은 국가주의적 입장에서의 산업역군에 맞춰져 있었다. 60년~70년대 한국을 일으켜 세운 사람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삶, 역경을 이겨내며 송금한 돈으로 일궈낸 경제개발 신화의 주역, 개인의 숭고한 희생을 발판으로 이뤄낸 국가의 번영 등으로 귀결된다. 물론 이것이 틀리지는 않았으나 전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다. 그들이 파독 근로자로 가게 된 것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이유만이 아니었다. 파독 근로자들은 학력이 높은 사람이 많았고, 가정 형편 이 상대적으로 좋은 편에 속하는 사람들 또한 많았으며, 좋은 직업을 가지고도 내 팽개치고 광부를 택한 사람들도 많았다. 지금까지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파독 근로자들을 하나로 규정하여 그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좀 더 솔직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때이다. 1963년 12월 한국의 광부 123명이 파독 되었다. 2013년은 파독 50년이 되는 해이다. 간호여성의 파독은 그보다 앞선 1957년 종교단체와 개인의 주선으로 이루어져 56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때 서 독으로 건너간 파독 근로자들이 근간이 되어 현재의 독일한인사회를 이루고 있는데 베를린, 본, 함 부르크 등지에 3만여 명이 있다. 한국의 경제개발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위치 때문에 지금도 관심은 이어지고 있다. 최초의 인력수 출을 통해 그들이 송금한 외화가 경제 개발에 도움을 준 점도 있지만 그 보다는 그들이 가지는 상징 성에 더 무게를 두기 때문이다. 그래서 2012년 개관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제3전시실 산업 역군의 해외진출 파트의 첫 머리 에 자리 잡고 있다. 명지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에서는 박정희 시대와 파독 한인들 을 주제로 2012년 학술포럼을 정기적으로 진행하였다. 몇 해 전에는 국회회관에서 파독 근로자를 주체한 세미 나를 개최하기도 했다. 파독 근로자의 삶을 보여주는 서적들도 많이 출판된다. 아우토반에 뿌린 눈물(백영훈, 한국산업개 발연구원, 1997), 한강에 흐르는 라인강의 기적(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 2001) 등 파독 근로자 를 옆에서 관찰하면서 쓴 책뿐만 아니라, 막장 광부 교수가 되다(권이종, 이채, 2012) 등과 같이 본인 들의 이야기를 직접 책으로 출판하는 경우도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강(조정래)과 같이 대하장편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남해독일마을에 살아가는 주민을 모습을 주제로 만들어진 그리움의 종착역 다큐멘터리 영화(조 성형 감독)도 있다. 이 영화는 우춘자 빌헬름 엥엘프리드 부부, 김우자(우자 슈트라우스 김) 스트 라우스 김 루드빅(루트비히 슈트라우스 김) 부부, 타이스 영숙 아르민 타이스 부부가 독일마을에서 남해문화원에서는 독일마을 가정의 이야기를 간략히 엮은 가슴속 달맞이꽃(남해문화원, )을 펴내기도 했다. 이처럼 남해독일마을에 대한 관심도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파독 근로자에 대한 접근은 과거의 경제발전 초석에 맞춰져 있고, 남해독일마을에 대한 접근은 이국적인 마을, 독일인들도 함께 살고 있는 마을이라는 특이성에 맞춰져 있다. 단절적, 획일적으로 바라보았던 지금까지의 시선을 거두고, 진솔한 그들의 삶 그 자체를 존중해야 할 때이다. 그들은 국가를 위해서 서독행 비행기에 올랐던 것도 아니고, 외화획득 혹은 돈벌이만을 위해 고된 일을 견뎌내고 외로움과 그리움을 이겨낸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 서독은 희망의 땅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가난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해주는 곳이 서독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통제된 사회로부터의 탈출구였으며, 또 다른 젊은이들에게는 동경하는 세계로의 여행이었으며, 열정을 가진 사람에게는 더 큰 세계에서 꿈을 펼칠 수 있는 무대였다. 우리가 지금까지 그들의 어깨에 올려둔 거창한 구호와 무거움 짐을 내리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봐줄 때가 온 것이다. 이들의 삶은 과거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며, 남해독 일마을 주민들은 재이주라는 도전에 직면하여 한국사회에 새롭게 적응해 나가고 있다. 참고문헌 권이종, 막장광부 교수가 되다, 이채, 권태효 외 3명, 독일 뮌헨 공무국외여행 결과보고, 국립민속박물관, 2012 김창일, 파독 광부 간호여성 정착촌, 남해독일마을, 남해의 보석 물건마을, 국립민속박물관, 나혜심, 한인의 독일 이주와 한인사회의 형성, 젊음, 독일행 비행기에 오르다, 한국이민사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관도록,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독일교포정착마을 독일공원 조성계획 1차 설명회 자료, 남해군청, 독일교포정착마을 독일공원 조성계획 2차 설명회 자료, 남해군청, 독일교포정착마을 3차 설명회 자료, 남해군청, 독일교포정착마을 4차 설명회 자료, 남해군청, 이영석 박재홍, 재독일 교민의 역이주와 귀향 의식에 대한 연구, 독어교육 제36집, 2006 이희영, 이주 노동자의 생애 체험과 사회 운동, 2005 조혜연, 가슴속 달맞이꽃, 남해문화원, 포럼자료 나혜심, 박정희 시대와 파독한인들, 명지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제58회 정기학술포럼, 권이종, 박정희 시대와 파독한인들, 명지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제61회 정기학술포럼, 오종식, 박정희 시대와 파독한인들, 명지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제63회 정기학술포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KBS 방송국의 다큐멘터리 3일 에서도 독일마을의 3일 동안의 모습을 촬영하여 방영하기도 했다

148 파독 광부 간호여성의 이주와 역이주 파독 광부 간호여성의 이주와 역이주 에 대한 토론문 이은정 영남대 이 로 이러한 다양한 갈등의 양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독일마을 주민간의 갈등의 사례로 마을대표가 2013년에는 사임하는 등 분열이 심화된 경험이 있다고 하셨는데, 이것도 문화적 차이 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요? 독일마을 내 갈등의 양상과 사례의 경우, 차원을 달리해 서 접근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파독 50주년 을 기념하는 행사가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2013년, 파독광부와 간호여성이 역이 주 정착한 남해 독일마을에서 현지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쓴 이 글은 시사점을 제공하기에 충분 합니다. 이 글은 파독광부와 간호여성을 산업 역군 혹은 경제성장의 숨은 주역 으로만 보는 단일한 시선 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있으며,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화석화된 신화 에 균열을 일으키고자 하 는 기획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기획에는 전적으로 동의를 하는 편입니다만, 그것이 글에 적절하게 녹아들어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드는 지점이 있습니다. 먼저 목차를 살펴보면 각 장과 절이 유기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목차 간의 논리적인 연결고리를 보다 분명하게 설정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전반적으로 글의 내용이 일종의 보고서 에 가깝게 여겨지기 때문에 쟁점에 대한 토론보다는 질문을 통해서 해명의 기회를 드리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됩니다. 첫째, 이 글에서는 역이주한 파독광부 간호여성을 인터뷰한 내용을 연구자가 정리해서 싣고 있 습니다. 선생님의 기획 지금까지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파독 근로자들을 하나로 규정하여 그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좀 더 솔직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때이다. 에 따르자면, 정리된 내용보다는 이들의 목소리를 통한 구술내용을 직접 제시해 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구술자의 발화내용과 연구자의 인식에는 일정한 간극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습니다만, 이에 대해 선생님 의견을 여쭙고 싶습니다. 둘째, 남해독일마을의 조성과 현황 말미에 보면, 2012년부터 독일마을 부지와 건물을 내국인에 게 매매할 수 있게 되면서 벌써부터 매도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봐서 독일마을 은 차츰 내국인으로 채워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고 전망을 하셨습니다. 이런 전망의 근거가 있으신 지 궁금합니다. 셋째, 남해독일마을에 잘 적응을 하고 있지만 다름에서 오는 문화적 차이를 실감하고 있다. 독일 마을 주민과 주변마을 주민간의 불신, 독일마을 주민간의 갈등, 독일마을과 군청간의 갈등 등이 대 표적이다. 고 하시면서, 여러 갈등의 원인을 문화적 차이 로 귀결시키고 있습니다. 비단 문화적 차

149 경남음식의 근대성 : 마산과 진주를 중심으로 2013 한국민속학자대회 경남음식의 근대성 : 마산과 진주를 중심으로*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민속학 목차 1. 서론 2. 선행 연구 검토 3. 민속 이념 4. 민속 정책 5. 현대 국가와 민속 6. 결론 1) 1. 들어가는 글 1970년 여름에 경상남도 지역의 음식을 조사한 황혜성은 보고서 1) 에서 특색 있는 지역음식을 다 수 적었다. 이 중에서 지역을 분명하게 밝힌 음식을 다음에 소개한다. 먼저 주식으로는 진주비빔밥, 통영비빔밥, 진주냉면을 적었다. 국으로는 통영 대구국, 진해 풍장어국, 진주 깨집국, 통영 나물국 등을 꼽았다. 찜으로는 통영의 돔찜, 마산의 미더덕찜 조리법이 소개되었다. 바닷고기로는 멸치가 가장 눈에 띈다. 1960년대만 해도 멸치 마리는 덕장이 마산 앞바다의 돛섬에 있었다. 하지만 1970년 대가 되면 마산 앞바다의 오염으로 인해서 더 먼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마른 멸치는 물론이고 멸젓과 멸장은 경상남도 남해안 지역의 특색 있는 지역음식이다. 멸젓과 함께 매우 다양한 젓갈이 이 지역에서 만들어졌다. 호리기젓은 작은 꼴뚜기인데, 양념을 넣은 호리기젓과 함께 젓국을 만들어 김장김치에 넣기도 했다. 통영에서는 전어 내장만으로 담근 * 이 글은 주영하, 경남의 전통음식과 근대음식, 경남의 민속문화 (국립민속박물관, 2013), 194~220쪽의 내용을 수정 보 완한 것이다. 1) 文 化 公 報 部 文 化 財 管 理 局, 韓 國 民 俗 綜 合 調 査 報 告 - 慶 尙 南 道 編 ( 文 化 公 報 部 文 化 財 管 理 局, 1972), 472~498쪽. 297

150 경남음식의 근대성 : 마산과 진주를 중심으로 밤젓과 굴을 씻어 이틀간 덮어 두었다가 담그는 꿀내기젓, 대구알젓, 합자젓 등이 유명했다. 김치는 마산의 장제김치가 특이하다. 장제젓은 대구아가미 밑에 붙은 창자만 모아서 담근 젓갈이다 2). 무를 나박김치 감으로 썰어 장제젓과 대구알을 터트려 넣고 고춧가루를 빨갛게 버무리고 파, 마늘, 생강, 볶은 깨를 넣는다 3). 진주의 전복김치는 가을에 무를 나박김치감으로 썰어 소금을 살짝 뿌린 다음에 배, 유자, 생강을 곱게 채로 썰고, 크고 두꺼운 마른 전복을 물에 불려서 넓고 얇게 떠서 김치를 담근 다. 4) 농촌진흥청 농업과학기술원 농촌자원개발연구소에서 2005년에 경상남도의 전통향토음식을 발굴 조사하였다. 문헌과 설문지, 그리고 현지답사를 통해서 조리법을 정리한 이 작업의 결과는 2008년에 책자로 발간되었다. 5) 그 결과 이 책에는 452종의 경상남도 전통향토음식의 음식명, 재료 및 분량, 만드는 법, 참고사항, 출처 및 정보제공자, 조리시연자, 고문헌에 의한 기록, 사진자료 등이 정리되어 있다. 이 자료를 통해서 경상남도의 특색 있는 음식들을 살펴볼 수 있다. 알다시피 경상남도는 동해안과 남해안을 끼고 있기 때문에 조선시대부터 해산물이 풍부했다. 다 만 20세기 이후 일본인들을 통해서 유입된 어로기술은 조선시대에 소비했던 해산물보다 그 종류나 양을 더욱 많아지게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들이 즐겨 먹는 해산물이 경상남도의 도민들에게 도 소비되는 현상을 보였다. 해방 이후 산업화 기지로 경상남도 해안 지역이 개발되면서 해산물 소 비는 외식업의 형태로 자리를 잡았다. 그 과정에서 횟집은 가장 주도적인 외식업이 되었다. 20세기 초, 일본인들의 거주는 근대적인 식품산업을 출발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간장산업, 청주산업, 미곡산업은 해산물 유통과 가공업과 함께 경상남도의 특징으로 자리를 잡았다. 따라서 경 상남도는 한반도의 어떤 지역에 비해서 근대식품산업의 출발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개항 지였던 마산은 청주를 비롯하여 일본식 간장과 된장의 생산지였고, 그 물품은 한반도는 물론이고 일본열도, 그리고 중국으로까지 수출되었다. 경상남도의 내륙에서 생산된 좋은 품질의 쌀이 마산에 집결되면 그것은 청주를 만드는 좋은 재료가 되었다. 좋은 물을 품은 마산은 청주뿐만 아니라, 일본 식 간장을 대량생산하는 데도 적지였다. 이러한 기반은 해방 이후에도 마산을 중심으로 간장과 희석 식 소주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았다. 이런 면에서 필자는 경남의 음식이 지닌 근대성에 주목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음식의 근대성 은 식품의 산업화를 가리킨다. 상품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표준화된 대량생산 체제를 갖춘 식품공장과 균일한 메뉴에 의해서 예상되는 정해진 음식을 판매하는 음식점은 음식의 근대성 이 표현되는 장소 이다. 지난 20세기는 한반도의 각 지역에서 음식의 근대성 이 실현된 시기였다. 기존의 경남음식에 대한 논의에서는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전근대 시기부터 지속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음식에 주목 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오늘날 경남음식의 특징은 오랫동안 지속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의 음 식은 20세기 식민화 산업화 도시화를 거쳐서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글에서 식민지시 기의 식품산업과 일본요리옥, 그리고 해방 이후 진주와 마산의 외식업에 초점을 맞추어 경남음식의 근대성을 살펴보려 한다. 2. 식민지시기 일본식 식품산업의 형성 진해만을 비롯하여 경상남도의 남해안 일대는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지점이기 때문에 어족이 풍 부한 지대이다. 특히 일본인의 어장 장악은 그들이 상업적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어종을 주로 잡아 가공하는 사업으로 진행되었다. 대표적인 업종이 건조가공하거나 통조림으로 포장하는 것이었다. 1926년에 출간된 마산항지 6) 에 의하면, 정어리 멸치 오징어 새우 등을 말려서 양념을 가미하 거나 가츠오부시처럼 아예 건조한 것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마산전온판매조합( 馬 山 煎 鰮 販 賣 組 合 ) 이 있었다.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잡지 조선 (1929년 10월편)의 경남의 특산 에 실린 가공품인 사쿠라보시와 깐쯔메는 일본으로 수출되는 생선가공업이었다. 사쿠라보시( 櫻 干 ) : 연산액( 年 産 額 ) 20만원에 달하는데 특히 통영산은 외관 광택 조미 등이 우 수하야 일본에서 상당히 명성이 고( 高 )하며 장래가 더욱 유망하다. 7) 일본어로 さくらぼし는 생선을 말려서 조미를 한 어포( 魚 脯 )를 가리킨다. 본래 사쿠라보시는 벚꽃이 피는 3~4월에 잡히는 정어리가 지방이 적어서 말리기에 적당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곧 주된 재료는 정어리이다. 식민지시기에 통영은 정어리가 많이 잡히는 어항이었다. 반쯤 말려서 축축한 정어리에 간장과 설탕을 조미하여 제조하였다. 1960년대 이후 삼천포를 중심으로 생산과 유통이 되어 전국적으로 팔렸던 쥐치포도 이 사쿠라보시에서 변형된 제조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황교익은 쥐치포를 소개하면서 사쿠라보시로부터 그 연원을 찾기도 했다. 삼천포에는 화어 ( 花 魚 )라는 이름으로 그 흔적이 전하고 있어 쥐포의 역사를 일제시대까지 끌어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화어 는 새우, 학꽁치, 달강어, 붉은메기(나막스) 등을 머리와 뼈를 제거한 후 꼬리가 붙어 있는 상 태로 조미하여 건조한 어포이다. 꼬리에 노란색과 빨간색 물을 들여 꽃처럼 보인다 하여 화어란 이 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1935년부터 대를 이어 화어를 가공하고 있는 신선수산의 김득주 씨는 삼 천포에서 개발된 것으로 일본인들이 즐기던 음식 이라 주장했다. 8) 칸쯔메류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칸쯔메( 罐 詰 )류( 類 ) : 수산 칸쯔메은 고등어[ 鯖 ] 전복[ 鮑 ] 장어[ 鰻 ] 등이 주인데 일본 대만 지나( 支 那 ) 방면에 이출되며 연산액( 年 産 額 ) 20만원에 달한 다. 고등어 정어리[ 鰛 ] 등은 본도 각 연안에 요산( 饒 産 )함으로 장래에 크게 발흥할 기운에 있다. 9) 2) 文 化 公 報 部 文 化 財 管 理 局, 앞의 책, 489쪽. 3) 文 化 公 報 部 文 化 財 管 理 局, 앞의 책, 489쪽. 4) 文 化 公 報 部 文 化 財 管 理 局, 앞의 책, 489쪽. 5) 농촌진흥청농업과학기술원농촌자원개발연구소, 한국의 전통향토음식9-경상남도 (교문사, 2005). 6) 諏 方 史 郞, 馬 山 港 誌 ( 朝 鮮 史 談 會, 1926), 174쪽. 7) 朝 鮮 總 督 府, 慶 南 의 特 産, 朝 鮮 1929년 10월, 204쪽. 8) 황교익, 팔도식후경, 네비버캐스트, 9) 朝 鮮 總 督 府, 앞의 글, 204쪽

151 경남음식의 근대성 : 마산과 진주를 중심으로 고 했다. 수산물의 통조림 가공 역시 마산을 비롯하여 통영 등지에서 중요한 산업으로 식민지시기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생선가공품은 일본인에 의해서 주도되었고, 많은 생산품이 일본으 로 보내졌다. 식민지시기 개항장으로 일본의 거주지가 된 마산은 주류 생산의 중심 지역이었다. 특히 일본 술인 청주는 부산과 함께 마산은 조선 전체는 물론이고 일본에까지 수출되었다. 1929년에 나온 경남의 특산 에서도 청주는 가장 먼저 소개되었다. 청주( 淸 酒 ) : 본도( 本 道 )의 청주양조업은 기후풍토수질 의 천혜에 우수한 원료미( 原 料 米 )를 산( 産 )하기 때문에 기( 其 ) 품질이 일본 명양주( 銘 釀 酒 )를 능가( 凌 駕 )하고 연산액( 年 産 額 ) 역( 亦 ) 2만석 이상에 달하야 선내( 鮮 內 )는 물론 멀리 만주에 수출되야 도처 에 명성이 높은데 주요 산지는 부산 마산이다. 10) 그 중에서도 마산은 마산주 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청주의 맛이 좋기로 유명했다. 당시 진해에 있었던 해군 군항에 기항하기 전에 마산 앞바다에 함대를 세운 일본인 장교들은 작은 배로 갈아타고 마산에 들려서 청주를 맛보았다. 1935년에 출판된 조선주조사 에서는 벚꽃으로 유명한 마산에 마 산주 도 있어 좋다는 글을 실을 정도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지방은 기후도 온난하며 물도 상당히 좋은 곳이기 때문에 옛날부터 청주의 양조를 시험해보고 소위 조선의 고베의 나타( 灘 ) 지방 에서 나는 고급 청주로서의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또한 감히 나다의 명주보다 더 좋은 맛을 내는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조선 청주의 발상지라고 말해지게 되었다. 비록 식민지였지만, 마산은 당시에 조선에 가장 맛있는 청주를 생산하는 곳이었다. 조선주조사 의 제11장 주요 주조장 개황에서 지금의 경상남도에 속하는 지방에서 주류업을 하고 있었던 업자와 회사의 목록이 나온다. 11) 이 자료는 1930년대 경상남도의 주류업 현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만 당시에 경상남도 각지에서 운영되던 주류업 전체를 담은 자료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자료는 재단법인 조선주조협회 3400여 회원과 회원사 중에서 대표적인 구성원을 추려낸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주조사 에 의하면 마산에서 개업한 청주양조장의 대표적인 상표는 다음과 같다. 정통불정종 ( 井 筒 不 正 宗 ), 빈학( 濱 鶴 ), 미생( 彌 生 ), 한목단( 寒 牧 丹 ), 계림( 鷄 林 ), 대정앵( 大 正 櫻 ), 大 典 正 宗 ( 大 典 正 宗 ), 염록( 艶 錄 ), 달의 포구( 月 の 浦 ), 아침의 나다( 朝 の 灘 ), 앵정길( 櫻 正 吉 ), 소나무의 색( 松 の 色 ) 등이 다. 이외에도 소주카네다마루( 燒 酎 カネタマル)도 이름이 났었다. 이 중 앵정길을 생산했던 소화주류 주식회사( 昭 和 酒 類 株 式 會 社 )는 일본 고베의 나타에서 정종을 처음으로 생산했던 야마무라주조( 山 邑 酒 造 )가 마산에 진출하여 세운 공장이다. 한국어로 앵정종 으로 읽히는 사쿠라마사무네( 櫻 正 宗 )는 식민지시기에 일본열도와 한반도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일본청주였다. 지금도 지속되는 이 상표 로 인해서 해방 이후 한국인들은 일본청주를 마사무네 의 한국어인 정종 이라고 부른다. 본래 간장 된장 고추장 등은 집에서 직접 담가서 먹었던 음식이었다. 그런데 19세기 말에 일본 인들이 대거 조선에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일본식 간장공장이 한반도 각지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10) 朝 鮮 總 督 府, 앞의 글, 203쪽. 11) 細 井 亥 之 助 編, 朝 鮮 酒 造 史 ( 京 城 : 朝 鮮 酒 造 協 會, 1935), 389~590쪽.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주도 세력은 재래의 음식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다. 유럽화를 목표로 했던 신지식인들 중에는 일본의 된장국인 미소시루( 味 噌 汁 )를 폐지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이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1878년 여름 내무성 위생국에서 미소( 味 噌 ) 두부 유바(ゆば, 두유를 가열할 때 표면의 응고된 막)를 분석하였는데, 이들이 단백질을 많이 함유하여 우수한 식품이라는 점이 소 개되었다 12). 이것이 계기가 되어 미소의 새로운 제조법의 개발은 물론이고 대규모 공장생산이 도모 되기 시작했다. 미소와 함께 일본인의 가장 오래된 조미료인 간장[쇼유, 醤 油 ] 생산은 이미 에도시대부터 특정지 역에서 대량생산되고 있었다. 미소의 대량생산 체제에 영향을 받아 관동( 關 東 )에서 재래식 방식으로 생산을 하고 있던 노다가( 野 田 家 )가 근대적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그 생산 방식은 여전히 재래의 생산방식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사실 1882년 이후 메이지 정부는 일본간장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 결과 온도조절 통해 황국( 黃 麴 ) 미생물을 배양하는 방식이 도입 되면서, 공장마다 단일한 맛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석탄으로 불을 때서 강제로 온도를 높이면 서 발효시간도 단축시켰다. 1904년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5천명을 넘어서면서 자연스럽게 일본 간장 공장이 서울 청파동에 들어섰다. 다카미( 高 見 ) 장유양조장( 醬 油 釀 造 場 )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 만 양조간장인 일본간장은 조선인들에게 인기를 끌지 못했다. 조선간장과는 너무나 다른 맛이었기 때문이다. 이한창이 정리한 자료 13) 에 의하면, 1924년 말 부산을 제외한 경상남도에는 장유제조업체가 15곳, 종업원은 일본인이 62명이고 조선인은 한 명도 없었다. 그만큼 일본인에게 장유제조업은 독점되어 있었고, 그 생산품도 주로 재조일본인에게 판매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알다시피 마산은 일본인 거 주지로 개척되었다. 그러니 마산은 일본 장유양조장이 가장 많이 자리 잡은 곳이었다. 1911년경에만 해도 여섯 군데의 영세 장유양조장이 있었다 14). 하지만 점차 규모가 큰 장유업체가 생겨나면서 이들 영세업체들은 통합되거나 폐업하였다. 식민지시기 마산의 중요한 장유업체는 다음과 같다. 야마다 장유양조장( 山 田 醬 油 釀 造 場 )을 비롯하여 아카몽( 赤 門 )장유양조장, 후쿠이( 福 井 )장유양조장, 히라이 ( 平 井 )장유부, 그리고 마루킹( 丸 金 )장유주식회사 등이 식민지시기 마산에 있었던 일본식 장유공장이 었다. 야마다장유양조장은 마산 장유업의 효시로 1905년 4월 9일에 창업하였다. 15) 이 야마다 장유양조 장의 창업자는 야마다 노부스케( 山 田 信 助 )이다. 그는 처음에 부산의 구포에서 식품상을 하였다. 하 지만 구포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가 100여 명에 지나지 않아서 영업이 잘 되지 않았다. 이미 1901 년에 259명의 일본인이 거주하던 마산이 야마다 노부스케에게는 훨씬 좋은 시장이었다. 마침내 1905년 3월부터 야마다 상사를 지금의 창원시 마산중앙동5-18번지에서 문을 열었다. 한 달의 작업 12) 昭 和 女 子 大 学 食 物 学 研 究 室 編, 近 代 日 本 食 物 史 ( 東 京 : 昭 和 女 子 大 学 近 代 文 化 研 究 所, 1971), 69쪽. 13) 李 漢 昌, 醬 歷 史 와 文 化 와 工 業 (서울 : 신광출판사, 1999), 109쪽. 14) 平 井 斌 夫, 馬 山 と 鎭 海 灣 ( 濱 田 新 聞 店, 1911), 117쪽. 15) 몽고식품100년의발자취편찬위원회, 몽고식품 100년의 발자취 (서울 : 몽고식품(주), 2008), 93쪽

152 경남음식의 근대성 : 마산과 진주를 중심으로 을 하여 같은 해 4월 9일에 야마다 노부스케는 장유양조장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 양조장은 공장 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웠고, 단지 가게에 지나지 않았다. 점차 일본식 양조간장에 대한 수요가 증가 하면서 야마다 노부스케는 1910년경에 지금의 자산동 번지 일대를 매입하여 공장을 짓게 되 었다. 1906년에 구다 다케오( 管 武 夫 )가 창립한 장유공장이 아카몽장유양조장이다. 지금의 신창동 18번지 에 있었다. 1911년에 후쿠이 마쓰타로( 福 井 增 太 朗 )가 지금의 중앙동에 창업한 후쿠이장유양조장은 1928년 마산 장유 총 생산량의 70%를 생산한 대형공장이었다. 히라이장유부는 히라이주조를 경영했 던 히라이 마사타로( 平 井 政 太 郞 )가 1928년에 설립했다. 마루킹장유주식회사는 1942년에 지금의 신포 동 일대 해안 매축지에 설립된 대형공장이었다. 마루킹장유주식회사의 설립 이후 마산의 장유 생산량 은 3만 석으로 증가하였다. 16) 생산품은 대부분 군수용으로 납품되었기 때문에 다른 장유양조장과의 경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공장에서 생산된 간장과 된장은 만주와 중국내륙으로 보내졌다. 이 중 망월루는 가장 큰 규모의 요리점이었다. 경남지사로 오는 일본인 관리들이 마산과 진해의 유지들을 모아서 연회를 베푸는 곳으로도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1923년 4월 21일자 동아일보 에서 는 와다 준( 和 田 純 ) 신임 경남지사가 신임피로로 마산진해 관민다수를 망월루에 초대하여 성연을 장하였더라 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마산부윤이 회의를 한 후에 망월루에서 식사를 초대하는 일도 많았다. 식민지시기 마산에는 제과점도 여러 곳 있었다. 주로 일본풍의 과자제조점이었던 이들 제과점은 당연히 일본인이 주로 경영주였다. 1910년대 마산에서 유명했던 제과점의 상호는 다음과 같다. 19) 옥천당( 玉 川 堂 ), 송풍헌( 松 風 軒 ), 판곡( 板 谷 ), 동양당( 東 洋 堂 ), 고천( 古 川 ), 복수당( 福 壽 堂 ), 지엽( 志 葉 ), 산본( 山 本 ), 시야( 矢 野 ), 장복( 長 畗 ), 영석( 永 石 ), 대등( 大 藤 ) 등이다. 조선인에 의해서 운영된 진주의 근대 외식업의 대표는 비빔밥전문점이다. 1929년 12월 1일자 잡 지 별건곤 제24호에서는 진주에 자리 잡고 있는 비봉산( 飛 鳳 山 )을 내세워 필명을 비봉산인이란 사람이 썼다. 그 내용을 요사이 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3. 식민지시기 일본요리옥의 등장 마산의 근대 외식업은 일본인 중심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조선인 위주의 음식점이 있었지만, 규모를 갖춘 음식점은 일본인이 주로 운영하였다. 1910년 12월에 마산에 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일본인들은 음식점 조합을 만들었다. 17) 요리업의 전개 역시 일본 요리점이 그 출발이었다. 1911년에 출간된 마산과 진해만( 馬 山 と 鎭 海 灣 ) 이란 책에서는 당시 마산의 요리점 상황을 적었 다. 18) 그 내용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마산은 노일전쟁 이후 일본열도와 한반도를 이어주는 중요한 항구가 되었다. 특히 진해에 군항이 개설되면서 마산은 군인들의 유흥처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오 사카의 요리점에서 활약하던 게이샤를 불러들어 영업을 하는 요리점이 생겨났다. 가옥을 새로 짓고 일본에서 데리고 온 여작부가 수백 명에 이를 정도였다. 청주는 한 도쿠리에 12전, 맥주는 35전, 한 사람의 요리 값은 다섯 여섯 가지에 1원 50전에서부터 2원 혹은 3원, 게이샤는 1시간에 60전, 작부 의 화대는 40전 등이었다. 그러면서 당시 마산에서 이름난 일본 요리점을 다음과 같이 나열하였다. 망월루( 望 月 樓 ), 이로와 (いろは), 일락( 一 樂 ), 봉천관( 奉 天 館 ), 화월( 花 月 ), 산수루( 山 水 樓 ), 조일루( 朝 日 樓 ), 동양헌( 東 洋 軒 ), 신개루( 新 開 樓 ), 산해루( 山 海 樓 ), 진해루( 鎭 海 樓 ), 칠복루( 七 福 樓 ), 가무천( 加 茂 川 ), 대해루( 大 海 樓 ), 명월루( 明 月 樓 ), 동초의가( 同 初 の 家 ), 동군의도( 同 君 の 都 ) 등이다. 주로 경정( 京 町 ), 영정( 榮 町 ), 본정 ( 本 町 ), 항정( 港 町 ) 일대에 많이 있었고, 구마산에도 있었다. 맛나고 값 헐한 진주( 晋 州 ) 비빔밥은 서울비빔밥과 같이 큰 고기점을 그냥 놓은 것과 콩나물발이 세치나 되는 것을 넝쿨지게 놓은 것과는 도저히 비길 수 없습니다. 하얀 쌀밥 위에 색( 色 )을 조화시켜 서 나는 듯한 새파란 야채 옆에는 고사리나물 또 옆에는 노르스름한 숙주나물 이러한 방법으로 가지 각색 나물을 돌려놓은 다음에 고기를 잘게 썰어 끓인 장국을 부어 비비기에 적당할 만큼 그 위에는 유리 조각 같은 黃 (황) 청표 서너 사슬을 놓은 다음 옆에 육회를 곱게 썰어 놓고 입맛이 깔끔한 고추장 을 조금 얹습니다. 여기에 일어나는 향취는 사람의 코를 찌를 뿐 안이라 보기에 먹음직합니다. 값도 단돈 10전( 錢 ). 상하계급을 물론하고 쉽게 배고픔을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담하고 비위에 맞는 비빔밥으로 길러진 진주의 젊은이들은 미술의 재질이 많은 것입니다. 또한 의기( 義 氣 )의 열열( 烈 烈 )한 XX정신을 길러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식민지시기에 진주 근처로 출장을 오는 서울 사람들 중에서 이 진주비빔밥을 먹기 위해서 특별히 시간을 내서 진주로 가기도 했을 정도로 그 맛이 이름이 났다.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는 진주 시 대안동 천황식당은 1927년에 개업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처음에 개업할 때는 장터로 가는 골목 어귀에 있는 가정집이었다. 20) 사람들은 이 골목을 나무정거리라고 불렀고, 당시 땔감 장사들은 나무 정거리를 지나 장에 갔다가 다 팔지 못하면 마당이 넓었던 천황식당 앞마당에 땔감을 내려두고 집으 로 돌아갔다가 다음날 다시 가져다 파는 일이 많았다. 1대 사장 강문숙은 이들 땔감장사들에게 음식 을 팔았고, 그것이 진주비빔밥이 되었다고 한다. 21) 1920년대 서울과 진주는 우시장이 활발하게 운영되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육회비빔밥이 식당의 16) 몽고식품100년의발자취편찬위원회, 앞의 책, 111쪽. 17) 平 井 斌 夫, 앞의 책, 101쪽. 18) 平 井 斌 夫, 앞의 책, 95~96쪽. 19) 平 井 斌 夫, 앞의 책, 103쪽. 20) 한식재단, 한국인이 사랑하는 오래된 한식당 (한식재단, 2012), 38쪽. 21) 한식재단, 앞의 책, 38쪽

153 경남음식의 근대성 : 마산과 진주를 중심으로 주요 메뉴로 자리 잡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우시장의 설치와 도축의 시행은 도시에 서 쇠고기 육회를 먹을 수 있는 기회를 그 이전에 비해 증가시켰다. 1922년의 조사 자료에 의하면 당시 전국에는 760개의 우시장이 있었다. 특히 진주 우시장은 경남에서 대표적인 곳이었다. 그러나 1914년에만 해도 진주에는 영세한 소규모의 비공식 우시장만 있었다. 이 점은 현재도 육회비빔밥을 판매하고 있는 진주의 천황식당이 1927년에 문을 열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래도 식민지시기 진주비빔밥은 서민의 음식이었다. 진주에 있던 일본식과 조선식 요리점은 진 주 외식업의 가장 고급에 속했다. 진주요리점은 조선후기부터 이어져온 진주 권번과 관련이 있다. 진주기생은 1900년대에 기생조합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1915년에 진주기생조합은 잠시 해산되었 다. 22) 1939년 11월 2일경에 주식회사진주기생권번을 창립하였다. 주식회사를 설립한 후 전통적인 진주기생의 기능과 품위를 회복하는 훈련을 전문적으로 하는 견습소를 운영하였다. 1939년의 기생 이 벌어들이는 수입은 10만3천여 원에 달하며, 권번에서 받는 수수료는 15%, 요리옥에서 받는 수수 로는 10%로 기생은 나머지 75%를 자신의 수입으로 확보하였다. 1940년대에 성업을 이루었던 진주의 요리점 상호는 다음과 같다. 23) 망월( 望 月 ), 타코헤이(たこ 平 ), 갱과( 更 科 ), 도정( 都 亭 ), 사요미(さよみ), 진주관( 晋 州 館 ), 금곡원( 金 谷 園 ), 올림피크, 등아각( 登 雅 閣 ), 동아헌( 東 亞 軒 ), 경성관( 京 城 館 ), 분양관( 汾 陽 館 ), 오다복(お 多 福 ), 연승관( 聯 陞 館 ), 군현관( 群 賢 館 ), 건흥관( 建 興 館 ) 등이다. 4. 해방 이후 진주의 외식업 진주비빔밥은 해방 이후 중앙시장을 중심으로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였다. 천황식당의 비빔밥이 육회비빔밥이라면, 중앙시장의 비빔밥은 육회와 콩나물을 함께 올린 비빔밥이라고 할 수 있다. 중앙 시장이 진주에서 가장 큰 집산지 역할을 하면서 시장비빔밥이 대단한 성업을 하였다. 실제로 진주에 서 진주비빔밥의 조리법은 꽃밥, 일곱 색깔 꽃밥 또는 화반( 花 飯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24) 둥근 놋그 릇에 흰빛의 밥, 그리고 다섯 가지의 나물이 올라가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1970년에 황혜성이 조사한 진주비빔밥 식당은 창조집 이란 상호를 가진 곳이었다. 25) 그 솜씨의 비결을 들어 보니 첫째 재료 하나 하나를 좋은 것, 싱싱한 것으로 선택하고 나물을 무치는 모든 조미 료는 모두 자기 집에서 장만을 한다. 즉 깨소금, 참기름, 엿꼬장(엿처럼 단 고추장)에 이르기까지 정성을 들여서 장만하여 쓴다. 비빔밥에 따라 나오는 국은 곰탕거리 즉 소의 내장인 감바지고기, 고동줄기, 삶은 선지 등을 오래 끓여 단 맛이 나며 고사리, 숙주, 콩나물, 장아찌외(참외의 일종) 등 나물거리를 넣고 건지가 많은 국을 만든다. 이것을 보탕국이라 부른다. 밥에 얹는 나물은 콩나물, 질금(숙주나물), 건대, 애호박(여름), 박(가을), 소풀(부추) 등 채소를 정히 손질하여 살짝 데쳐서 각 각 묽은 장, 참기름, 깨소금을 치고 바락바락 주물러 뽀오얀 물이 나올 때까지 무쳐야 간이 제대로 배어서 맛이 있다. 이렇게 무치는 것을 나물이 까바지게 무친다고 말한다. 쇠고기는 살덩어리로 육 회로 썰어서 맛나게 무친다. 밥을 더 맛있게 하려면 밥물을 곰국으로 붓고 고슬고슬하게 지어야 한 다. 따뜻한 놋대접에 고슬고슬하게 밥을 푸고 각색나물을 옆옆히 색 맞추어 얹고, 육회를 가운데 듬뿍 놓는다. 엿꼬장을 한술 떠 놓는다. 진주에서는 비빔밥을 화반이라 하는데 여러 가지 나물과 고추장이 꽃처럼 곱게 담아진 모양에서 오는 별명이다. 먹을 때에는 보탕국을 조금씩 떠 얹으면서 나물을 비벼서 간을 맞게 촉촉하게 먹으면 더할 나위가 없는 성찬이다. 26) 1970년 76세의 이상달 할머니가 구술한 내용을 정리한 자료를 보면 그 조리법을 짐작하고 남는 다. 27) 재료는 밥과 함께 미나리, 소풀[부추], 질금, 콩기름, 속대기, 엿고추장, 쇠고기육회 또는 불고 기, 오징어 무침, 청포묵, 보탕국, 육회장국 등이다. 밥은 비빔밥의 맛을 내는 데 가장 중요한 재료이 다. 밥은 새로 갓 지은 밥을 사용한다. 보탕국은 쇠고기와 합자를 섞어서 잘게 치고 기름에 볶아서 물로 뽀듯하게 끓여 조선간장으로 맛을 낸다. 육회장국은 쇠고기 연한 살코기, 콩기름, 겨울에는 무, 봄에 죽순, 마늘, 파 등의 재료를 참기름으로 무치고 장으로 간을 조절한 뒤에 쌀뜨물로 끓인다. 비 빔밥은 놓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밥 두 주걱을 놋그릇에 담는다. 나물을 예쁘게 둘러 놓는다. 보탕 국을 친다. 엿고추장을 놓는다. 육회를 얹는다. 실고추를 놓는다. 청포 또는 오징어회를 놓는다. 황혜성은 진주비빔밥의 유래를 제사음식에서 찾았다. 28) 진주에는 3-40년 전에 헛제사밥이라는 별호를 붙여 아무 제사도 아닌데 밤중에 음식점에서 제사집과 똑같은 음식을 마련하여 팔았다고 한 다. 출출한 사람이 밤참을 먹는 시각이 제사집의 비빔밥을 먹는 시각과 같이 하여 즐겨 찾았다고 한다. 이는 핑계낌에 밤참을 잘 먹자는 슬기로운 관습인 듯 재미있는 이야기거리가 되었다. 29) 그러 면서 황혜성은 진주비빔밥의 특징으로 다음의 다섯 가지를 꼽았다. 30) 첫째, 비빔밥에 따라오는 탕이 서울에서 해장국이라는 국과 닮아 건지가 많고 재료가 다양한 점, 둘째, 보탕국이라 하여 비빔밥을 담은 위에 맛이 있게 하려고 바지락을 볶아서 만든 자작한 볶음을 한 수저씩 보태서 맛을 돋우는 점, 셋째, 나물을 무칠 때 바락바락 주물러서 나물이 까바지게 하는 방법, 넷째, 서울은 볶은 고기를 쓰는 데 비해 쇠고기육회를 쓰는 점, 다섯째, 고추장이 엿꼬장이라는 특별하게 만든 것을 쓰는 점이 라고 했다. 최근 진주비빔밥과 함께 진주냉면은 명물로 여겨진다. 하지만 본래 냉면은 평안도와 황해도가 본 고장이었다. 조선후기부터 유행했던 그곳의 냉면은 본래 겨울에 먹는 음식이었다. 식민지시기 이후 22) 勝 田 伊 助, 晋 州 大 觀 ( 晋 州 大 觀 社, 1940), 161쪽. 23) 勝 田 伊 助, 앞의 책, 163~164쪽. 24) 韓 國 文 化 院 聯 合 會 慶 尙 南 道 支 部, 慶 南 民 俗 資 料 集 (한국문화원연합회, 1993), 161쪽. 25) 文 化 公 報 部 文 化 財 管 理 局, 앞의 책, 472쪽. 26) 文 化 公 報 部 文 化 財 管 理 局, 앞의 책, 472쪽. 27) 韓 國 文 化 院 聯 合 會 慶 尙 南 道 支 部, 앞의 책, 161쪽. 28) 文 化 公 報 部 文 化 財 管 理 局, 韓 國 民 俗 綜 合 調 査 報 告 - 鄕 土 飮 食 編 ( 文 化 公 報 部 文 化 財 管 理 局, 1987), 34쪽. 29) 文 化 公 報 部 文 化 財 管 理 局, 앞의 책, 34쪽. 30) 文 化 公 報 部 文 化 財 管 理 局, 앞의 책, 34쪽

154 경남음식의 근대성 : 마산과 진주를 중심으로 서울로 진출하여 겨울에 저장해둔 한강의 얼음을 띄운 차가운 여름냉면으로 자리를 잡았다. 서울을 비롯하여 기생조합이 생기면서 전국적인 이동도 잦았다. 결국 진주로 이동해온 평양과 서울의 기생 들 사이에서 냉면을 야참으로 먹는 일이 생겼다. 이로부터 진주냉면의 출발이 시작된 것으로 추측된 다. 1970년에 황혜성이 조사한 진주냉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냉면은 전국 각 곳에 맛난 것이 있어 서로 자랑을 한다. 평양냉면, 함흥냉면, 서울냉면 등이 있고 남쪽에도 이에 못지 않게 유명한 진주냉면이 있다. 냉면국수로는 순메밀로 뽑아 삶고, 쇠고기는 삶아서 수육을 썰고 국물은 냉면 육 수로 쓴다. 돼지고기는 쓰지 않는다. 여름에도 잘 만드나 겨울에 특히 더 즐겨 먹는다. 냉면을 담고 계란 황백지단에 다 쇠고기편육, 쇠고기볶음, 채로 썬 배, 실고추 등을 멋있게 꾸며 얹는다. 31) 그러나 최근의 진주냉면은 이러한 모습이 아니다. 삶은 메밀국수에 쇠고기 육전, 잘게 다진 배추 김치, 달걀지단 등 고명으로 얹고, 저온 숙성시킨 해물육수를 넣는 방식으로 만든다. 이러한 조리 법으로 만드는 지금의 진주냉면은 부산식육식당을 운영했던 황덕이가 중앙동의 냉면집에서 배운 방식으로 알려진다. 진주냉면은 진주와 가까운 사천 등 해안지방에서 나는 개발(바지락조개의 경 상도 사투리)을 비롯한 디포리(멸치), 홍합을 이용한 해물육수와 메밀과 고구마전분을 이용해 면발 을 뽑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32) 1970년에 황혜성이 조사했던 진주냉면과 지금의 진주냉면 식당에서 판매하는 것의 차이는 육전을 올리는 데 있다. 생각건대 어느 정도 변화와 창작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20세기 내내 진주의 외식업은 중앙시장을 중심으로 한 중앙동 일대에서 번창하였다. 식민지시기 요리옥의 메뉴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아직 밝혀진 자료가 없다. 최근에 진주교방음 식이라는 것이 재현되고 있지만, 그 역사성을 증명할 수는 없다. 1970년 진주성 지정화사업이 완료 되면서 진주성의 동쪽에 민물장어구이 식당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 민물장어구이 식당이 성업 을 하게 된 시기는 대체로 1980년대 후반이다. 5. 해방 이후 마산의 외식업 해방 이후 마산의 외식업은 크게 세 가지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복국식당, 다른 하나는 아구찜식당, 또 다른 하나는 어시장 해안에 있었던 홍콩빠이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마산에 자리를 잡은 외식업은 복국식당이다. 구 마산시 시절에 조성된 복국거리에는 고모, 쌍용, 마산, 김해, 덕성, 충무, 미진, 남성, 금복, 진미, 초원, 명동, 광포, 경북, 경남, 남성, 괭이, 고성, 동경 등의 상호를 붙인 복국집이 50여 곳 있다. 33) 이 복국집들은 가게마다 거의 다 50-60년 손맛 전통을 내세우고, 2대째 운영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이들 볶국집에서는 동해 밀복, 서해 졸복, 은복, 참복, 까치복 등을 사용 하여 매운탕, 지리, 수육, 껍질튀김, 복회 등을 요리해 낸다. 복어는 자주복(참복) 검복 까치복 복섬 등이 있다. 늦가을부터 초봄까지 맛이 가장 좋으며, 남 해안과 제주도 근해에서 많이 잡히는 복어는 바다복어이다. 서해안 강에서 초봄에 많이 잡히는 복어 는 황복과 같이 바다에서 민물로 이동하는 복어이다. 바다복어나 민물로 올라오는 복어나 모두 문제 는 독을 몸에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동아일보 1924년 1월 10일자 휴지통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 렸다. 모든 살림살이가 남만 못한 우리의 살림에는 비참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마는 남이 먹다 내어버린 복의 알을 집어다가 그래로 고깃국이라고 끓여 먹다가 죽은 일이 최근 일 개 월 동안에 경성에서만 십이 명이라 한다. 하지만 식민지조선에서는 결코 복어 식용 금지령 이 발포되지 않았다. 야마구치현의 어부들은 식 민지 조선의 동해와 남해 바다에서 마음대로 복어를 잡았고, 그것을 부산이나 마산 항구에 풀어놓았 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들의 복어요리법을 배워 부산과 마산 사람들도 복국을 먹기 시작했다. 이것 이 바로 복지리 로 알려진 복어국이다. 복지리 의 지리 는 일본어 지리(ちり)이다. 알다시피 지리 는 냄비 요리를 가리킨다. 일본인들이 주로 복어를 요리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1958년 6월 3일 경향신문 에서는 마산에서 복어를 잘못 먹고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위독 상태에 빠졌다는 기사를 실었다. 마산 오동동 거주 성덕수(42) 씨는 31일 하오 3시경 시내 어시장에서 복 어 한 마리를 사다 그의 첩 김봉점(39) 집에서 이웃에 사는 마귀남(37) 씨와 함께 요리를 해 먹었는 데 마씨는 약 1시간 후에 사망하고 성 김 양씨는 중독으로 해동병원에서 가료중인데 생명이 위독 하다 한다. 고 했다. 1962년 3월 12일자 동아일보 횡설수설에서 당시에도 횡횡했던 복어중독을 두고 희생자의 빈궁 과 무지 로 그 탓을 돌렸다. 복어알 중독과 구공탄 중독으로 비명( 非 命 )에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 不 知 其 數 )다. 죽고 또 죽고 이렇듯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허구한 날 희생자가 나건말건 거기에 조심 을 않음은 우리만이 있는 빈궁과 무지의 비극이 아니랄 수 없다. 고 했다. 심지어 이런 주장도 펼쳤 다. 복생선 이놈은 전부터 일인( 日 人 )이 이 땅에 와서 극성맞게 진어( 珍 魚 )로 상식( 常 食 )하던 것. 그 러나 그들은 그것을 다루는 방법도 배웠고 또 먹는 격식도 알았다. 국 으로 회 로 심지어는 술에까 지 담가서 애식( 愛 食 )을 했다. 그렇다해서 일인이 그것에 중독 탈명( 奪 命 ) 당했다는 말은 별로 들은 적이 없다. 하지만 식민지시기 재조 일본인 중에서도 복어를 잘못 먹고 사망한 사람은 제법 있었다. 마산시사 에서는 마산에서 복국이 유명하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보았다. 옛날 마산의 해안은 낙동강물이 섞이고 해안선이 복잡하여 복이 서식하기에 좋은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어시장 에서는 복을 경매하여 전국 일식집으로 보내어졌다. 이 때문에 마산의 복요리가 유명해졌을 것이 다. 34) 사실 1960년대 이전의 마산만은 청정해역으로 복어의 서식지였으며, 마산 어시장은 복어 집 하장이어서 복요리가 개발되고 전수되어 전국의 유명음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35) 31) 文 化 公 報 部 文 化 財 管 理 局, 앞의 책, 474쪽. 32) 디지털진주문화대전 : 33) 마산시사편찬위원회, 馬 山 市 史 (마산시사편찬위원회, 2011), 242쪽. 34) 마산시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243쪽. 35) 농촌진흥청국립농업과학원, 전통향토음식용어사전 (교문사, 2010), 203쪽

155 경남음식의 근대성 : 마산과 진주를 중심으로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251-8의 남성식당을 1945년에 처음 개업했던 최달옥은 식민지시기에 일본에서 복어 조리법을 배웠다고 알려진다. 이처럼 본래 복국은 일본식에서 만들어진 음식이다. 비 록 조선시대에도 복국을 먹었지만, 지금의 마산 복국은 일본식에서 진화한 것이다. 1960년대 중반이 되면 복어 식용이 증가하면서 그 조리법이 거의 처음으로 신문에 등장했다. 최달옥의 딸 박복련도 1962년 3월 특수식품취급자 증명서를 경상남도지사로부터 받았다. 새나라가정요리학원장 왕준련은 동아일보 1967년 11월 23일자에 복어국 만드는 법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그 다음해인 1970년 12월 5일자 경향신문 여적 에서는 복어국 조리법에 대한 당 시의 경향을 제법 사실에 가깝게 묘사를 했다. 복어요리라고 하면 오랫동안 일본식이 풍미( 風 靡 )한 때가 있었지만 그것도 점차 꼬리가 가늘어져 간다. 그 대신 일본식 국에 고추장을 풀어서 복어매운 탕 이라는 이것도 거짓도 아닌 것이 새로 등장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시원치 않다. 역시 콩나물에 미나리를 곁들여 끓인 국에 초를 약간 쳐서 먹는 한국식이 제일이다. 이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인 다면 왕준련이 소개한 복어국 조리법은 일본식을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당시 새롭게 등장한 고추장 을 넣은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경향신문 에서는 일본식 국에 고추장을 풀어서 그 맛이 시원치 않다고 했다. 왕준련이 제시한 조리법을 보아도 상에 올리기 전에 고추장을 한술 푼다고 했 으니 그 맛이 지금의 칼칼한 복매운탕과는 달랐다. 식민지 경험으로 인해서 생겨난 복국은 마산뿐만 아니라, 부산과 군산에서도 유명하다. 이에 비해 아구찜은 마산의 대명사로 알려진다. 보통 마산말로는 아구 라고 불렀다. 정약전( 丁 若 銓, 1758~ 1816)이 쓴 현산어보( 玆 山 魚 譜 ) 에서는 조사어( 釣 絲 魚 )라는 공식 이름과 함께 사람들이 부르는 이 름이 아구어( 餓 口 魚 )로 나온다. 마치 굶주린 듯 아무 것이나 먹으면서 입도 매우 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산의 오동동아구찜 골목에는 오동동아구할매집, 구강할매집, 오동동진짜초가집, 원조아구찜 등 의 식당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2011년에 출간된 마산시사 에서는 아구찜의 유래를 정확하게 파악 할 수 없지만, 그 대강을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적고 있다. 어시장과 가깝고 또한 원래 마산포가 있던 오동동에서 아나고를 삶아서 만든 장어국을 팔던 혹부리할매 가 된장과 고추장을 섞고 마늘, 파 등을 첨가해 만든 양념장을 꼬들꼬들하게 말린 아구에 발라 북어찜처럼 구워서 팔다가 매운 맛을 감하기 위하여 삶은 콩나물을 곁들인 것이 시초라는 설이 유력하다. 더욱 구체적으로 초가집을 출 발로 삼는 주장도 있다. 1965년에 개업했다고 알려진 초가집의 경우 원래 부산이 고향이었던 박영자 씨가 마산으로 이주하여 초가집에서 상호도 없이 겨울에는 아구국, 여름에는 장어국을 팔았다. 그러 던 어느 날 아구국으로 팔다가 남은 아구를 빨래줄에 걸어 말려 놓았던 것을 손님들의 요구로 콩나 물에 고춧가루와 파, 마늘로 버무려 된장으로 간을 해 쪄 내 주었다. 이것이 식당에서 처음 팔린 마산 아구찜의 출발로 알려진다. 36) 1960년대부터 오동동 사거리에는 할매 라는 상호를 내건 식당들 사실 1950년대 초반만 해도 아구는 마산 어시장에서 버리는 생선이었다. 귀한 생선을 잡으려고 쳐 놓은 그물에 그것이 들어오면 어부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어시장에서 일하던 부인들은 그것을 집으로 가져와서, 동네 냇가에 쳐진 줄에 매달아서 말렸다. 꾸덕꾸덕 마르면 본래 흉물스럽 게 퉁퉁했던 모습이 날씬해졌다. 이것을 한겨울 밤에 연탄불에 구워서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그 고 소했다. 마산아구찜은 적당히 말린 아구를 물에 불려서 찐 다음에 여기에 미더덕과 콩나물, 그리고 고춧가루와 전분을 풀어서 만든 음식이다. 미더덕의 뭉클하면서 톡 쏘는 맛과 꾸덕꾸덕한 아구의 뼈를 쪽쪽 빨아먹는 맛은 어느 생선에서 느끼지 못하는 아구찜의 특색이었다. 하지만 마산사람들은 오동동에 있던 전문식당에서 사서 먹기를 즐겼다. 이 아구찜이 서울로 진출 하여 전국에 마산의 이름을 떨친 때는 1982년 KBS문화사업단이 여의도에서 개최한 팔도미락전 에 소개된 후다. 38) 서울의 아귀찜은 아무리 마산 이란 지명을 그 앞에 붙이지만, 아구가 꾸덕꾸덕하지 않다는 데 큰 차이가 있다. 여느 생선과 마찬가지로 말리지 않은 것을 그대로 찜을 했기 때문에 쪽쪽 빨아먹는 재미가 없다. 더욱이 고춧가루를 많이 넣어서 마산의 것에 비해 너무 맵다. 아구는 더 이상 1970년대처럼 천하게 대접을 받지 않는다. 마산 앞바다에서 잡히던 아구 자체가 없어졌다. 지금은 원근해에서 잡히는 아구를 재료로 이용할 수밖에 없다. 다만 서울식 아구찜도 마산 아구찜 식당에서 는 내놓는다. 본래의 마산 아구찜이 생선 말린 쿰쿰한 냄새가 나는 데 그것이 싫다는 손님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외식업의 주된 메뉴로 개발은 되지 않았지만, 마산에서 아구찜만큼 유명한 음식은 미더덕찜 이다. 1970년에 이곳을 조사한 황혜성은 미더덕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미더덕은 마산 앞바다에서 나는 해산물이다. 미는 바다에서 나는 것이라는 뜻이고 더덕 같이 생겼다고 하여 미더덕 이란 이름이 있다. 미더덕은 껍질을 벗기고 조갯살을 까서 똥을 따고, 쇠고기는 다진다. 조갯살과 쇠고기를 먼저 강한 불에 볶다가 미더덕, 콩나물, 고사리를 넣고 같이 볶으면서 간장으로 간을 한다. 물을 자작하게 부어서 서서히 끓인다. 그 동안에 불린 멥쌀과 통고추를 풀매에 갈아서 체에 밭쳐 끓는 냄비에 부으면서 잘 저어 걸쭉하게 골고루 익게 한다. 끝으로 미나리를 넣고 살짝 익으면 그릇 에 뜬다. 매옴하고 부드럽고 미더덕을 씹는 맛이 일품이다. 39) 아구는 생산량이 많았고, 부족할 때는 외국에서 수입을 할 수 있지만, 미더덕은 생산량에 한정이 있어 외식업의 주된 메뉴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항구도시에서 가장 큰 특징은 부둣가에 자리 잡은 횟집이다. 마산은 물론이고 통영이나 삼천포의 부둣가에는 1960년대 이후 횟집이 대단한 성업을 하였다. 1970년 황혜성이 이 지역에서 관찰한 횟집 모습은 다음과 같다. 고기를 큰 대구리에 담아서 바닷물에 담가 놓고 손님을 청을 듣고 고기를 건져다 칼질을 한다. 잘 하는 집을 찾아서 먼 곳에서 먹으러 온다. 해변에서는 바다에서 나는 것이면 크고 작고 간에다 횟감이 될 수 있다. 그 종류를 보면 낙지, 문어, 장어, 전복, 이 성업했다. 37) 36) 한식재단, 앞의 책, 2248쪽. 37) 마산시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240쪽. 38) 마산시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240쪽. 39) 文 化 公 報 部 文 化 財 管 理 局, 앞의 책, 478쪽

156 경남음식의 근대성 : 마산과 진주를 중심으로 소라, 우릉쉥이(멍게), 홍어, 생멸(멸치 생 것), 상어, 숭어, 전어, 돔, 가재미, 뱅어, 가오리, 민어 등 어느 고기나 다 훌륭한 횟감이다. 회를 찍어 먹는 초고추장이나 겨자집이 또한 맛나서 회맛이 더 좋은 것 같다. 40) 1960년대 이후 마산어시장이 있는 남성동 해안가 일대에는 홍콩빠 라고 불렀던 횟집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바다가 접한 곳에 나무로 지은 횟집은 마치 홍콩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음식을 먹는 곳과 닮아 사람들이 홍콩빠 라고 이름을 붙였다. 1980년대 초반에 홍콩빠는 새로 조성이 되어 60개가 넘 는 점포가 자리 잡고 있었다. 41) 1989년 마산어시장이 매립되면서 홍콩빠는 사라지고 홍콩빠에서 장 사하던 상인의 일부가 새로 자리를 잡은 곳이 선유도 횟집이다. 홍콩빠의 상인은 12명씩 4팀으로 나뉘어 이전했다. 6. 나가는 글 최근 전라북도 군산은 식민지시기의 건축물을 활용한 근대역사문화도시를 형성하는 어느 정도 문 화적 경제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당초 식민지시기의 건축물을 복원하고 역사로 재구성하는 작업 에 대한 시민사회 내부의 갈등은 제법 상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배를 극복하고 오히려 역사문화 관광도시로 거듭나는 노력 또는 방향 전환을 다시 평가할 필요가 있다. 당대의 동아시아사 속에서 군산의 역사적 경험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하면서 그 대안으로 평화도시를 였다. 하지만 그것의 정통성에 대한 논쟁이 진주 요리업계 내부에서 진행 중에 있다. 43) 심지어 서울 에서 진주교방음식을 내세우고 영업을 하는 한 외식업체는 제작비를 지원한다는 조건으로 관련 역 사 다큐멘터리를 지방 공영방송으로 하여금 제작하도록 유도하는 시도를 했다. 일종의 진주교방음 식의 역사 만들기 프로젝트가 개인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시도될까? 식민지 경험과 산업화 도시화는 오히려 많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조선후 기를 한국문화의 원점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더욱이 음식을 역사로 만들고 싶고, 역사를 정답 으로 생각하려는 사회적 풍토가 학계나 일반인들이나 가리지 않고 매우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 44) 만약 20세기 경남음식의 전개과정을 좀 더 촘촘하게 살핀다면 이런 식의 인식이 얼마나 허구인가가 밝혀질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20세기 경남음식의 사회사적 진화 과정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 특 히 특정 음식물을 메뉴로 판매하는 음식점의 역사는 경남음식의 근대적 진화 과정을 살피는 데 매우 중요한 연구주제이다. 45) 이 연구의 대상지역은 경상남도의 주요 도시이다. 재조일본인들의 영향, 지 역 유지의 양조업과 정미업, 음식점의 전개, 식품유통, 식품가공업, 새로운 특산물의 등장 등의 주제 는 경상남도는 물론이고 지역음식문화의 근대적 전개를 살피는 주제이다. 이미 이경미는 마산어시 장을 대상으로 이러한 연구를 시도하였다. 46) 향후 더 많은 연구가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제창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42) 2009년 10월에 마산에서 개최된 마산음식의 세계화 라는 세미나에서 필자는 마산 역시 군산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시기 식품산업의 중심지였음을 강조하면서 그러한 문화유산을 재생시킬 것을 제 안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세미나에 참석한 마산지역 대학의 식품학자와 식품관련 기자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마산의 문화적 특징을 근대식품산업으로 설정할 경우, 일제 강점기와 연결되어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들의 생각도 충분히 일리가 있지만, 마산의 오늘날 식품소비 경향 속에는 식민지시기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다. 간장산업이 그렇고, 희석식 소주업이 그렇다. 이 점은 진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육회비빔밥은 식민지시기에 외식업의 대표적인 메뉴로 자리 를 잡은 음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주 육회비빔밥의 기원을 임진왜란 진주성 싸움에서 찾으려 는 일부의 접근은 몰역사적이다. 심지어 진주교방음식 의 역사를 조선시대로 끌어올리려는 시도도 상업적 의도를 가지고 전개되고 있다. 사실 진주교방음식의 부각은 2002년경에 시도되기 시작했다. 진주논개제의 일환으로 재현된 진주교방춤과 함께 요리업계에서도 진주교방음식의 복원을 시도하 40) 文 化 公 報 部 文 化 財 管 理 局, 앞의 책, 483쪽. 41) 이일균, 걷고 깊은 길 (산지니, 2006), 205쪽. 42) 문예은, 근대문화유산을 둘러싼 담론의 변화-군산시를 중심으로- (전북대학교대학원석사학위청구논문, 2010), 106쪽. 43) 교방 교자상을 복원한 사람은 궁중요리 전문가인 이소산(41)씨. 교자상은 대부분 궁중요리와 제철따라 나는 신선한 향토음식 으로 차려진다. 각종 자료와 전해오는 말을 통해 복원한 이소선씨의 교방 교자상은 의외로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의 성찬은 아니지만 감히 입에 넣기가 아까울 정도로 음식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모양과 색을 자랑한다. 이소산씨의 손끝에서 우러나는 정성으로 만들어지는 교방음식은 두릅 등 지리산 산채로 만든 산채구절판,들깨와 된장으로 양념한 가오리찜,돔 살을 갈아서 고추장으로 빚은 고추장장떡,해삼에 소고기 양념을 넣어 전을 부친 해삼전,전복찜,맥적,닭말이약식,어만두,신선로,건안주,새 우찜 등 30여가지. 은은한 가야금 반주와 함께 음식을 즐기다보면 절로 조선시대의 선비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 다. ( 국민일보, [되살아나는 진주 교방문화] 이 불타는 충절 님은 아실는지, :39 기사입력) 44) 주영하, 식탁 위의 한국사 : 메뉴로 본 20세기 한국음식문화사 (서울 : 휴머니스트, 2013), 524~525쪽. 45) 대표적인 연구성과로 목포대학의 윤형숙 교수가 주도한 토속음식과 지역정체성 관련 저작이 있다. 윤형숙 외, 홍어 : 토속 음식과 지역정체성 1 (서울 : 민속원, 2009); 윤형숙 외, 소금과 새우젓 : 토속음식과 지역정체성 2 (서울 : 민속원, 2010); 梁 渼 景, 전주한옥마을과 전주비빔밥의 문화자원화 과정 연구 (성남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대학원박사학위청구논문, 2013) 등이 있다. 46) 이경미, 수산물유통방식의 변화와 상인의 존재양식 : 마산어시장의 사례 (영남대학교대학원박사학위청구논문, 2005)

157 경남음식의 근대성 : 마산과 진주를 중심으로 경남음식의 근대성 : 마산과 진주를 중심으로 에 대한 토론문 유장근 경남대 1. 주영하교수와의 인연은 오래전에 그의 책으로 시작되었다. <음식전쟁, 문화전쟁>, <중국, 중국인, 중국음식>은 나에게 음식을 통한 역사읽기에 안성맞춤인 책이었다. 생활사의 주요 부분인 음식이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역사학계에서는 그렇게 중요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먹거리를 인본의 주요 테마로 삼지않았던 유교주의적 사고에 연유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학계의 분위기 속에서 역사학과 인류학, 그리고 민속학을 전공한 주교수께서 다양한 방법과 자료를 통해 분석한 책들은 그간 천시 당해 온 역사 속의 음식을 본격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 사 실 어느 누구도 음식을 먹지 않고 생존하기는 불가능하다. 곧 그것은 삶의 본질인 것이다. 따라서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음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 점을 주영하 교수가 일깨워주었다.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한다. 곧 일상적 음식의 근대성이 같이 검토되어야 그 틀이 나름의 정합성을 가지리라 생각한다. 또한 음식의 근대성을 설명하는데 기준이 된 음식의 산업화는 일본인들만이 시도한 것은 아니었 다. 예컨대 마산에서는 일본식의 청주 산업이 발전하였지만, 그것은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신마산 일 대에 한정되었다. 창동과 그 일대의 조선인 사회에서는 전통적인 가내 탁주제조법을 공장화한 탁주 공장들이 신마산의 청주 공장 못지 않게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음식의 산업화라는 분석틀의 경우 부분적으로 마산이나 통영, 혹은 삼천포 등지는 모두 항구도시 이고 일본인 사회가 존재하였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또한 수산물을 중심으로 산업화가 진행되었다 는 점에서 공통성이 있지만, 진주 지역에서는 이러한 특성을 발견하기 어렵다. 일제 시기에 농산물 과 육류 중심의 산업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이 발표문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음식 산업 중에 서 주교수가 거론하는 것은 진주비빔밥 정도이다. 이 점에서 음식의 근대성이란 주제 아래 마산과 진주가 선택된 것은 불균형적이다. 오히려 진주 음식의 산업화는 해방 이후에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그 점에서 근대성의 내용 뿐만 아니라 시차도 함께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3. 주영하 교수님의 이 발표문은 내가 생각하기로는 경남의 음식문화사에서 최초의 글이 아닌가 한 다. 이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이상에서 제기한 몇 가지 문제가 좀 더 잘 서술된다 면, 경남 음식의 근대성에 관한 연구는 더욱 더 풍성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2. 이 발표문에서 잘 분석된 부분은 음식의 산업화에 관한 것이다. 특히 마산 지역에서 진전된 음식 의 산업화 중에서 일제 시기에 발전한 양조산업은 많은 이들이 주목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또한 해방 이후 1960년대에 팔리기 시작한 복어집, 찜집 등에 관한 분석도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며, 진주 의 경우 비빔밥과 냉면이 산업화되는 과정 역시 흥미있는 부분이다. 이 때문에 주교수의 글은 근대 기 특히 20세기 이후 수산물 관련 음식, 양조업 등의 산업화를 전반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경남음식의 근대성의 분석 대상으로 마산과 진주 두 도시를 선택한 것도 의미가 있다. 마산 은 잘 알려진 것처럼 오랫동안 해양음식을 발전시켜왔고, 특히 지난 1세기 동안에 일본의 음식 문화 가 적지 않게 영향을 끼친 곳이다. 반면 진주는 서부의 내륙 도시로서, 오랫동안 행정도시로서의 전통을 이어온 곳이어서 축산 및 농산물에 기반한 음식을 발전시켜온 곳이다. 이 두 곳에서 전개된 근대기의 음식문화사를 이해한다면 경남지역 음식의 역사성, 지역성 등 중요부분을 잘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다음과 같은 토론거리도 제기된다. 그 하나는 음식의 근대성이라는 틀에 관한 것이다. 주교 수가 이 지역에서 음식의 근대성을 음식의 산업화 로 정의하였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논란 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근대성이라는 것이 오늘날의 사회구조를 만들어낸 시대와 그 내적 특성을 이야기한다고 본다면, 산업화라는 측면 못지않게 일상적 음식이 자리잡은 시기와 내용에 대해 좀

158 실용과 성과주의 시대의 민속학 초판1쇄 발행 2013년 10월 25일 엮은이 (사) 한국민속학술단체연합회 발행처 사단법인 한국민속학술단체연합회 주 소 서울시 마포구 대흥동 제 작 민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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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176 177 178 179 180 181 182 183 184 185 186 187 188 (2) 양주조씨 사마방목에는 서천의 양주조씨가 1789년부터 1891년까지 5명이 합격하였다. 한산에서도 1777년부터 1864년까지 5명이 등재되었고, 비인에서도 1735년부터 1801년까지 4명이 올라있다. 서천지역 일대에 넓게 세거지를 마련하고 있었 던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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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 음운 [ㄱ] [국], [박], [부억], [안팍] 받침의 발음 [ㄷ] [곧], [믿], [낟], [빋], [옫], [갇따], [히읃] [ㅂ] [숩], [입], [무릅] [ㄴ],[ㄹ],[ㅁ],[ㅇ] [간], [말], [섬], [공] 찾아보기. 음절 끝소리 규칙 (p. 6) [ㄱ] [넉], [목], [삭] [ㄴ] [안따], [안꼬] [ㄹ] [외골], [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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