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1. 황비창천 이 새겨진동제 팔각 꽃 무늬 거울 煌丕昌天 [ 銘銅製八菱形鏡] 2014년 9월 12일(금) 오후 1시~6시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국제회의장 이 거울은 인물들을 태운 한
|
|
|
- 아영 손
- 9 years ago
- Views:
Transcription
1
2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1. 황비창천 이 새겨진동제 팔각 꽃 무늬 거울 煌丕昌天 [ 銘銅製八菱形鏡] 2014년 9월 12일(금) 오후 1시~6시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국제회의장 이 거울은 인물들을 태운 한 척의 배가 험난한 파도를 헤치며 항해하고 있고 윗부분에 아래위로 '황비창천(惶丕昌天)'이란 글자가 있어 '황비창천' 거울 또는 해선경(海船鏡), 해박경(海舶鏡)이라고도 한다. 왼쪽 아래에는 구름에 에워싸여 머리만 보이는 한 마리의 용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유형은 송 금대에 유행했는데, 주로 금 지역에서 많이 출토해 금계(金系) 동경(銅鏡)으로 생각된다. 개성(開成) 근처의 고려 고분에서도 여러 점 출토되었으며, 형태는 외연(外緣)이 원형(圓形)과 팔 릉형(八稜形)인 두 종류가 있다. 이 거울은 팔릉형으로 용과 물고기, 파도의 표현이 비교적 섬세하게 조각되었고 주조 수 법도 좋은 편이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황비창천' 거울(德 607)처럼 배가 오른쪽(깃발은 왼쪽)을 향해 순항하고 깃 발은 왼쪽으로 흩날리고 있어서 원래 거울을 고려에서 그대로 범(范)으로 뜬 다음 다시 주조하여 '황(惶)'자가 좌우 반대로 되었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2.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 1402년(태종 2)에 좌정승 김사형, 우정승 이무와 이회가 만든 세계지도. 채색 필사본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를 포함하는 구대륙 지도다. 지도 하단에 권근(權近)이 쓴 발문과 양촌집 陽村集 (권22, 歷代帝王混一疆理圖誌)에 의 하면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 聲敎廣被圖 와 천태승(天台僧) 청준(淸濬)의 혼일강리도 混一疆理圖 를 중국에 서 들여와 이 지도에 우리 나라와 일본을 추가하여 새로 편집한 지도이다. 현전하는 동양 최고의 세계지도이고 당시로서 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훌륭한 세계지도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는 이회의 팔도지 도 도 이 지도의 우리 나라 부분을 통해서 그 면모를 알 수 있다. 이 지도의 원본은 전하여지는 것이 없고, 사본이 일본 경도에 있는 류코쿠대학(龍谷大學) 도서관에 전하여지고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주최 및 주관 :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 후원 : 인천광역시
3 국제학술회의 진행순서 시간 제목(시간) 내용 비고 13:00~13:05 개회 (5분) 국제학술회의 일정 소개 김락기 (강화고려역사재단 사무국장) 13:05~13:10 개회사 (5분) 인사 말씀 채웅석 (한국중세사학회 회장, 가톨릭대 교수) 13:10~13:45 기조강연 (35분) 개방성과 고려, 그리고 현재의 동아시아 안병우 (한신대학교 교수) 제1부: 외교와 교류 <사회 : 강옥엽(인천역사자료관 전문위원)> 13:45~13:50 (5분) 국제학술회의 소개 및 발표 진행 13:50~14:10 발표1 (20분)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장동익 (경북대학교 교수) 14:10~14:30 발표2 (20분) 14:30~14:50 발표3 (20분) 제도와 정책의 수용과 배제 화풍( 華 風 )과 토풍( 土 風 )의 공존과 갈등 공동번영을 위한 교역과 문화교류: 여-송 교류를 중심으로 구산우 (창원대학교 교수) 백승호 (중국 절강대학교 교수) 14:50~15:10 휴식 (20분) 중간휴식 제2부: 상호인식과 배려 <사회 : 강옥엽(인천역사자료관 전문위원)> 15:10~15:30 발표4 (20분) 고려시대 투화( 投 化 )와 거류( 居 留 ) 국인( 國 人 )과 외국인( 外 國 人 ) 이진한 (고려대학교 교수) 15:30~15:50 발표5 (20분) 팔관회에 온 외국인들 천하관, 축제와 교역 김기덕 (건국대학교 교수) 15:50~16:10 발표6 (20분) 여일관계( 麗 日 關 係 )와 표류민 피로인 문제 모리히라 마사히코 (일본 큐슈대학교 교수) 16:10~16:30 휴식 (20분) 중간휴식 및 장내 정리 3부 : 종합토론 <좌장: 윤용혁(공주대학교 교수)> 16:30~17:55 종합토론 (85분) [약정토론] 김순자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E.J.슐츠 (미국 하와이대학교 교수) 이익주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이형우 (인천대학교 교수) [지정토론] 이정신 (한남대학교 교수), 한기문 (경북대학교 교수), 남동신 (서울대학교 교수) 최종석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이강한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17:55~18:00 폐회사 (5분) 인사 말씀 박종기 (강화고려역사재단 대표이사, 국민대학교 교수) * 일정 및 시간은 변동될 수 있습니다.
4 목 차 기조발표 : 개방성과 고려, 그리고 현재의 동아시아 11 안병우 한신대학교 교수 제 1주제 :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23 장동익 경북대학교 교수 제 2주제 : 제도와 정책의 수용과 배제 화풍( 華 風 )과 토풍( 土 風 )의 공존과 갈등 49 구산우 창원대학교 교수 제 3 주제 : 공동번영을 위한 교역과 문화교류 : 여-송 교류를 중심으로 61 백승호 중국 절강대학교 교수 제 4 주제 : 고려시대 투화( 投 化 )와 거류( 居 留 ) 국인( 國 人 )과 외국인( 外 國 人 ) 75 이진한 고려대학교 교수 제 5 주제 : 팔관회에 온 외국인들 천하관, 축제와 교역 89 김기덕 건국대학교 교수 제 6 주제 : 여일관계( 麗 日 關 係 )와 표류민 피로인 문제 99 모리히라 마사히코 일본 큐슈대학교 교수 토론문 1 :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토론문 113 김순자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토론문 2 : 10~14세기 고려의 국제관계사 119 이익주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토론문 3 : 12세기 초의 고려 129 Edward J. Shultz 서강대학교/University of Hawaii at Manoa 교수 토론문 4 :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토론문 135 이형우 인천대학교 교수
5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기 조 발 표 개방성과 고려, 그리고 현재의 동아시아 안 병 우 한신대학교 교수
6 기조발표 개방성과 고려, 그리고 현재의 동아시아 개방성과 고려, 그리고 현재의 동아시아 안 병 우 (한신대학교 교수) 1. 왜 개방을 말하는가? 2. 고려 전기 대외교류와 개방성 3. 원 간섭기의 대외교류와 개방성 4. 개방 논의의 현재성과 동아시아 1. 왜 개방을 말하는가? 개방성은 일반적으로 공간이나 지위의 이동(movement)과 변화(change), 행정이 나 정책의 입안과 수행에 있어서 공지성(publicity), 정치적 입장의 다양성이나 다원성 (diversity)을 의미한다..1) 그러므로 개방은 다른 나라 뿐 아니라, 국내에서 다른 집단이 나 개인에게도 적용되는 개념이다. 오히려 후자가 때로는 더 중요한 개방으로 여겨진다. 개방의 내용은 무엇인가? 정보와 물자, 지위와 권력, 문화와 사상 등이 개방의 내용이 될 것이다. 즉 정보와 전략 물자에 대한 접근 기회의 공유, 지위의 상승과 권력 획득의 기 회 보장, 사상 종교와 문화에의 접근과 향수의 권리 향유 등등을 꼽을 수 있겠다. 이런 기회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열려 있는 사회는 개방사회라고 할 수 있다. 개방은 개혁이라는 단어를 자주 동반한다. 20세기에 단행된 대표적인 개방 사례로 꼽 을 수 있는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이나 구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와 글라 1) 그 반대는 정지(immobility)나 정체(stagnation), 비밀(secret), 신념체계의 획일성(uniformity) 고수라고 한다.(황경식, 1995 개방사회란 무엇이며 누가 그 적인가 개방사회의 사회윤리 철학과현실사). 11
7 기조발표 개방성과 고려, 그리고 현재의 동아시아 스노스트(glasnost)에서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개방과 개혁은 깊은 관계에 있는 것 이다. 오히려 개방 보다 개혁 을 앞세워 개혁/개방으로 부르거나, 개방의 확대를 뜻하 는 글라스노스트보다 정치 경제 개혁 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가 훨씬 널리 알려진 데서 알 수 있듯이, 개방은 개혁의 일부 혹은 수단으로 간주되는 모습도 보인다. 개방이 개혁을 동반하거나 초래한 사실은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서구에 대한 문호 개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일본은 이미 16세기부터 유럽과 빈번히 접촉하며 유럽 문명 을 수용하였다. 유럽 상인들의 거주를 허용하였으며, 이들은 쇼군과 다이묘의 경제 이익 에 봉사하였다. 그러나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기독교 전파 문제로 갈등이 발생하자 네 덜란드 상인의 나가사키 거주만 허용하는 정도로 개방을 축소하였다. 무력을 앞세운 미 국의 개방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일본은 그 충격을 딛고 메이지유신을 단행하여 천황제 근대국가를 수립하였다. 개방이 국가 체제의 변혁을 초래한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문호를 개방한 나라는 청이었다. 18세기 이후 영국이 인도와 동남아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청과의 교역을 늘려가면서 차 수입 대금으로 지급하는 은 이 부족해지자, 인도산 아편을 수출하였다. 청이 이를 금지하자 영국이 청을 공격하여 1840년 아편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에서 패한 청은 서양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는 한편 양무운동을 전개하여 근대화를 추구했지만 중체서용( 中 體 西 用 ) 의 관념을 벗어나지 못 하는 한계를 보였다.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는 체제 개혁을 수반하지 않는 개방의 한계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마침내 1910년 신해혁명으로 청조를 무너뜨리고 동아시아에서 최초 로 민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조선은 개방론과 쇄국론이 대립하는 상태에서 1876년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개항한 후 잇달아 서구 열강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일본 상인을 비롯하여 서구의 의사, 선 교사, 사업자 등이 체류하였으며, 일본과 청을 통해 서구의 문물을 도입하여 변화를 꾀 하였다. 당시의 지배층은 신식 제도와 과학기술의 수용에는 적극적이었으나, 체제 변화 를 수반하는 전면 개방에는 반대하거나 소극적이었다. 체제 개혁을 수반하지 않는 소극 적 개방은 국권의 상실로 귀결되었다. 개방과 개혁의 갈등, 비대칭성이 2) 심각하게 나타났 고, 결국 이를 해소하지 못한 것이다. 개방사회는 인류가 지향하는 이상사회이며, 현실적으로는 민주주의 사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3) 그렇게 본다면, 중세사회에서 개방사회의 요소를 찾는 것은 무망한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서구의 민주주의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 고, 서구의 이론과 사상을 받아들여 성립된 한국의 민주주의도 그것을 수용하고 체화할 수 있는 역사적 바탕을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해왔다고 볼 수 있다. 중세 왕조 체제 하 에서도 점진적으로 개방을 위한 조치나 그것과 연관된 개혁 운동이 있었음에 유의할 필 요가 있다. 여기서는 고려를 중심으로 개방과 개혁에 관해 소묘해보고자 한다. 2. 고려 전기 대외교류와 개방성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동아시아에서 국가의 위상을 확고히 하 는 한편 선진 문물을 흡수하려고 하였다. 고려가 건국할 때 중원에서는 당이 멸망하고 5대10국이 다투는 격변의 시대였다. 태조는 건국 이듬 해 오월( 吳 越 )에 사신을 파견한 데 이어 후량, 후당, 후진에 계속 사신을 보냈다. 4) 고려의 적극성은 후삼국 쟁패 과정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혜종과 정종, 광종 대에도 후진, 후한, 후 주, 송과 사대외교를 계속하였으며, 거란의 침입으로 단절되었던 송과의 국교는 문종 25 년(1071) 고려가 사신을 보내 재개하였다. 고려의 주 교류국이었던 송은, 개방의 측면에서 볼 때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송은 주요 무역항에 시박사를 설치하는 등 적극적으로 무역을 장려하였지만, 한편으로는 화 이론을 강화하며 고전적 형태의 중화민족주의를 강화하였다. 고려시기의 대외 개방이 정치 사회 개혁으로 연결된 대표적인 사례로 과거제의 시행을 들 수 있다. 과거제는 광종 9년 후주의 귀화인 쌍기의 건의로 도입하였다. 과거제는 광 종이 새로운 지배층을 형성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채용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귀화인을 우대한 고려의 개방성이 낳은 성과였다. 이 때 시작된 과거제는 내용이 조금씩 바뀌기는 했지만, 조선 말기까지 900년 넘게 관료를 선발하는 제도로 기능하였다. 시험을 통해 관료를 선발하는 제도가 도입됨으로써 골품제에 기반을 둔 신라의 관등 제는 완전히 폐기되었고,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계층이 크게 확대되었다. 고려의 관료제 는 품관과 이서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을 합쳐 관리층 으로 부른다면, 고려 의 양인 신분은 크게 관리층 과 평민층 으로 구분할 수 있다. 과거를 통해 평민층에서 관리층으로, 향리층에서 품관층으로 계층 상승이 가능하였다. 품관층은 자신의 지위를 2 ) 김대환, 1988 개방과 개혁의 비대칭 사회경제평론 1, 한국사회경제학회 3) 칼 포퍼 지음 이현구 역, 2006 열린사회와 그 적들 민음사 4) 고려가 12회 파견한 데 비해, 중국은 2회만 보내왔다. 12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3
8 기조발표 개방성과 고려, 그리고 현재의 동아시아 신분화하지 않음으로써 향리나 평민이 지배층으로 진입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막지 않았 다. 또한 과거 시행 이후로 정치는 유학을 공부한 문인들의 몫이 되었다. 과거는 정치 주 도층을 무인에서 문인으로 바꾸었고, 지방의 무인과 지방 성주 장군의 후예들을 독서인 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볼 때 과거제는 보다 넓은 계층에게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으며, 그를 통해 고려의 지배층을 질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러한 개방적인 정 책은 지방 유력자로 존재하던 성주 장군층과 그 후예를 흡수하고 왕권을 강화할 정치 적 필요성에서 시행했지만, 그 전제는 그들을 현실적 세력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것 은 불교와 유학, 풍수지리, 도참 등 다양한 사상의 병존을 용인하던 당시의 사상 경향 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개방정책의 또 다른 성과로 관원의 부패를 막기 위한 대관제와,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 지만 언론의 보장을 위한 간관제의 도입을 들 수 있겠다. 역사상 한국은 여러 차례에 걸 쳐 중국의 제도를 도입하여 체제를 개혁하였다. 율령제를 일거에 도입하여 다이카개신을 추진한 일본과 같은 극적인 계기는 없었지만, 당 송의 제도를 도입한 신라 경문왕 때나 고려 성종 때의 개혁은 정치제도의 측면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정치제도 전반의 개혁 이 갖는 의미도 크지만, 여기서는 대간제의 정착에 관하여만 살펴보려고 한다. 중국에서 간관과 대관 제도는 진 한대에 시작되었다. 대관제는 당에 이르러 어사대로 정비되었고, 간관제는 수나라에 이르러 집서성과 문하성에 간관을 배치하는 것으로 정비 되었다. 당과 송은 이를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신라에서는 진흥왕 때 중앙 귀족 통제의 필요성 때문에 사정 담당 부서를 두었으며, 무열왕 이후 사정부( 司 正 府 ), 외사정( 外 司 正 ), 내사정전( 內 司 正 典 )으로 발전하였다. 발해에서도 감찰기구로 중정대를 두었고, 선조성 ( 宣 詔 省 )에 간관을 두었다. 그러나 삼국과 발해에서 간관의 활동은 그리 활발하지 못하 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건국 초기에 사헌대를 두어 관원의 비리를 규찰하게 하였으며, 내의성의 내의 사인( 內 議 舍 人 )이 간관의 기능을 수행케 하였다. 사헌대는 성종 때 어사대로 변경되었고, 간관의 기능은 내사문하성(중서문하성)의 낭사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고려에 이르러 감 찰과 간관의 기능을 법으로 규정하고 제도상으로 보장하였으며, 이 제도는 조선에서 더 욱 발전되었다. 5) 대관제는 관원의 부패를 방지하여 청렴도를 높이는 데 기여하며, 간관제는 정책 결정 과 인사에서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는 장치였다. 특히 고려의 대관과 간관이 서경권( 署 5 ) 박용운, 1980 대간제도의 성립 고려시대 대간제도 연구 일지사 經 權 )을 행사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서경권은 당 송에서는 시행하지 않았던 제도로서, 국왕의 인사권을 견제할 수 있는 유력한 제도였다. 대간제는 관료의 청렴 뿐 아니라 국 왕권의 남용도 제어하여 고려의 국왕으로 하여금 황제 독재 를 실현하지 못하도록 하 는 방패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사실은 당이나 송의 제도를 도입하면서 고려 나름대로 변용하여 개방성을 높이려 하였음을 보여준다. 12~13세기에 발생한 무인정변과 농민 천민의 봉기는 개방성의 위기 국면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11세기 중반 이후 고려의 개방성은 내적으로 약화되었다. 관료층이 고착화 되고, 문벌이 형성되어 권력을 독점하였다. 새롭게 진출하는 정치세력은 문벌에 의해 배척 도태되었다. 한안인 세력이 이자겸 일파에 의해 도태된 것이나 묘청 일파가 김부식 등에 의해 배척된 것이 그것이다. 문벌이 주도한 유학사상과 교종 불교가 맹위를 떨치면서 풍 수도참 사상은 약화되어 사상의 균형도 파괴되었고, 상대를 인정하는 관용도 약화되었 다. 향리층과 평민층은 물론 통일전쟁기와 여진 정벌 등에서 국가의 보위와 안정에 공헌 한 무반과 병사들의 계층 상승의 길은 좁아졌고, 대우도 나빠졌다. 무인정변에 다수의 병사들이 참여한 현상, 특히 사병 출신의 이의민이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실이 이를 뒷받 침한다. 무인정권 시기 개방성은 불균형적으로 확대되거나 위축되었다. 무인집정과의 사적인 관계에 따라 천인에게도 관직이 개방되었다. 양천의 신분제 질서는 파괴되었다. 그러나 모든 천인이 해방된 것은 아니며, 신분제 자체가 폐기된 것도 아니었다. 신분 이동은 개 별 수준에 그치는 것이었다. 반면 관료제 안에서 부패 감시와 언론의 역할을 담당하던 대간의 기능은 약화되었다. 무인집정은 황제도 갖지 못했던 독재권 을 행사했으며, 그 심복들과 함께 법과 제도를 무시하고 널리 농장을 설치하고 고리대를 하여 경제적 이득 을 챙겼다. 그들의 불법행위는 규제받지 않았다. 그에 따라 토지를 상실하고 과도한 수 탈에 노출된 농민은 봉기하였다. 3. 원 간섭기의 대외교류와 개방성 원 간섭기에 이르러 사정은 일변하였다. 원 제국의 일부로 편입되면서 고려의 국왕은 사상 처음으로 외국을, 그것도 빈번하게 방문하게 되었다. 몽골 공주가 고려 왕비가 되 어 개경에 거주하였으며, 국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의발( 衣 髮 )은 몽고 형식으로 바뀌었다. 14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5
9 기조발표 개방성과 고려, 그리고 현재의 동아시아 개경에 몽골인을 비롯한 색목인들이 거주하면서 그들의 언어와 풍속이 전파되었다. 고려 는 스스로를 몽고에 전면적으로 개방하였다. 국권을 크게 제약받은 상태에서 일어난 비 정상적 개방이었지만, 그 어느 시기보다도 대외 개방성은 높아졌다. 당시 개방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현상의 하나는 외국인의 귀화이다. 귀화인으로 주 목되는 것은 제국대장공주의 겁령구( 怯 怜 口 )로 따라온 6) 네 사람이다. 이들 네 명은 모 두 몽고식 이름을 보유하였지만, 출신 종족과 종교가 제 각각이었다. 인후( 印 候, 몽고 명 忽 刺 歹 )는 순수 몽고인으로 원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재상까지 올랐으 며, 연안 인씨( 延 安 印 氏 )의 시조가 되었다. 7) 차신( 車 信, 몽고명 車 忽 䚟 )은 고려인인데 어 머니가 황실 가문의 유모였으며, 상장군 찬성사를 지냈다. 장순룡( 張 舜 龍, 몽고명 三 哥, 1254~1297)은 회회인( 回 回 人 )으로 무관으로 출세하였으며, 덕수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노영( 盧 英, 몽고명 式 篤 兒 )은 색목인으로 분류되는 하서국( 河 西 國, Tangut) 사람으로 장군이 되었다. 8) 이들의 등장은 원나라의 세계성과 고려의 국제적 다인종적 교류를 단적 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의 귀화는 고려의 계획이나 의도와는 관계없이 이루어진 것이 어서, 타율적 성격을 띠었다. 그에 비해 홍건적의 난을 피해 1358년에 피난 온 위구르인 설손( 偰 遜 )을 공민왕이 부 원후( 富 原 候 )에 봉한 것은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고려의 개 방성을 잘 보여준 사례였다. 9) 그의 아들 장수( 長 壽, 1341~1399)와 미수( 尾 壽, )는 여말선초에 명( 明 )과 의 외교업무에 공헌하였고, 동생 설사( 偰 斯 )도 명의 사신으로 다섯 번이나 고려를 방문 하여, 고려와 명의 외교는 한때 설씨 가문이 담당하였다. 손자 설순( 偰 循 )은 세종 13년에 집현전 부제학으로 삼강행실도 를 편수하고 통감훈의( 通 鑑 訓 義 ) 의 저술에 참여하였 다. 그밖에 여러 외국인이 귀화하였다. 원 간섭기에는 개혁을 요구당하는 일도 발생하였다. 충렬왕 25년 정동행성의 평장정 사로 부임한 활리길사( 闊 里 吉 思 )가 노비제 개혁을 시도한 것이다. 그는 원의 법과 관행에 따라 노취양녀혼( 奴 娶 良 女 婚 )의 경우 절혼( 竊 婚 )으로 간주하여 그 소생은 양인으로, 비 가양부혼( 婢 嫁 良 父 婚 )의 경우 정상혼으로 간주하여 그 소생을 양인으로 판정하려 하였 6) 겁령구는 ke-ling-k ou(집안아이)의 음역이며, 怯 憐 口 로도 표기하였다. 겁령구는 충렬왕비만 데리고 왔다. 충선왕비 薊 國 大 長 公 主 는 闊 闊 不 花 와 闊 闊 歹 두 명을 수행원으로 데리고 있었지만 겁령구라고는 부르지 않았고 고려에 귀화하지도 않았다. 7 ) 고려사 열전 권36, 인후 열전 8) 고려사 열전 권36, 장순룡, 차신, 노영 열전 9) 박종기, 2008 새로 쓴 오백년 고려사 푸른역사 다. 이러한 활리길사의 방침을 고려는 일양위양( 一 良 爲 良 ) 으로 인식하였고, 전통적 판 정 기준인 약부약모( 若 父 若 母 ) 일천즉천( 一 賤 則 賤 ) 의 원칙과 어긋나는 것이라고 반발 하였다. 충렬왕은 직접 상소를 올려 노비제 개혁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10) 그의 노비제 개혁 시도는 원에서 지원신격( 至 元 新 格 ) 을 반포하며 추구하고 있었던 정치개혁을 고려 에 적용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원이 보장한 고려의 국속까지도 무리하게 변경하려 하여 충돌이 발생하였고, 결국 좌절되었다. 11) 비록 외부 권력에 의한 타율적 개혁 시도였지만, 활리길사의 노비제 개혁 시도의 좌절로 노비가 감소되고 양인이 증대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의 고려 사회가 그 정도의 탄력성도 지니고 있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성리학 도입과 사회변화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고려의 유학자들은 능동적으로 원에서 성리학을 도입하였다. 충선왕은 만권당을 조성하고 익재 같은 학자 를 불러 원의 성리학자들과 교유하게 하였다. 성리학자들의 출신은 다양하였지만, 지방 에서 진출한 향리의 자제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들은 차츰 관계에 진출하여 공민 왕 대에는 주요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고, 농장의 발달로 대표되는 당시의 사회 모순을 해결하려 하였다. 그런 면에서 성리학자들은 개방과 개혁의 비대칭을 극복하려는 실천성 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개혁방안을 놓고 성리학을 공부한 사대부들은 분열하였다. 온 건 개혁을 주장한 이색 등의 무리는 사상적으로는 불교의 역할을 인정하고 병존을 도모 하였으나, 사회 모순을 해결하지는 못하였다. 정도전 같은 급진 개혁파들은 농장문제를 해결하였으나, 불교의 교리를 부정하고 배척하는 입장을 가졌다. 사상의 다양성이 위협 에 직면한 것이다. 이들이 조선을 건국한 후 사상의 다양성은 부정되었고, 성리학만이 학 문[ 斯 文 ]으로 대우받는 유일성의 시대가 되었다. 4. 개방 논의의 현재성과 동아시아 현재 대외 개방의 주된 지표는 경제 즉 상품과 자본의 이동이다. 한국은 1960년대 이 래로 수출 위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하면서 점진적으로 대외 개방을 확대해 왔고, 중국은 1980년대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추진한 이래 자본주의 경제를 도입하며 개방을 확대 1 0 ) 고 려 사 권 8 5 刑 法 2 奴 婢, 충 렬 왕 2 6 년 1 0 월 1 1 ) 이 강 한, 征 東 行 省 官 闊 里 吉 思 의 고 려 제 도 개변 시 도 韓 國 史 硏 究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7
10 기조발표 개방성과 고려, 그리고 현재의 동아시아 해 왔다. 이러한 개방정책의 결과로 세계경제에서 동아시아의 경제적 위상은 빠른 속도로 높아졌다. 12) 동아시아 국가 상호간에는 무역 및 투자가 활발하며 제도적 통합도 많이 이루어져 있다. 한국은 ASEAN, 미국, EU 등에 이어 2012년에 한 중 FTA 협상을 개시 하였고, 한 중 일 3국간의 FTA 협상도 추진하고 있다. 13) 북한을 제외하면, 동아시아 3 국은 경제공동체 건설을 향해 전진을 거듭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부의 사정을 보면, 개방의 편차는 상당히 크다. 지금 시점에서 개방에 관한 논의를 하는 것은 대외 개방의 확대나 그 의미를 음미하는 데도 목적이 있겠으나, 현재 의 사회체제나 사회운영이 폐쇄적이라는 진단 위에서 사회 개혁을 위해 개방을 추진하거 나 강조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데에도 의미가 있다. 충분히 개방된 사회는 현 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개방사회의 이념적 기초에 바탕을 둔 유일한 체제가 민주사 회라고 한다면, 14) 동아시아의 현실은 개방사회에 가장 가까운 나라와 가장 먼 나라가 병존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하는 민주화지수로 볼 때 한국과 일본은 대개 20위 권에 속하며 완전한 민주주의 사회로 분류된다. 그에 비해 중국과 북한은 민주주의 지 수가 가장 낮은 권위주의 체제 로 분류되며, 특히 북한은 최하위에 속한다. 이런 발표 결과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대외 개방과 내부 개혁이 가장 필요한 나라는 말할 것 도 없이 북한이다. 중국의 내부 개방 정도도 상당히 미흡하다. 이러한 개방성의 격차가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불안정하게 하는 주요 요인의 하나이다. 그러면, 한국과 일본의 개방 정도는 충분한가? 그렇지는 않다. 개방사회에 도달하기 에는 아직 미흡한 점이 적지 않다. 개방사회를 측정하는 척도로 흔히 사용하는 언론자 유와 정보 공개를 살펴보자. 15) 국경 없는 기자회 가 발표하는 언론자유지수에서 한국 은 2007년 이래 계속 하락하여 2014년 57위를 기록했다. 16) 일본도 2011년 후쿠시마 원 전 사고 이후 언론이 제대로 진실을 보도하지 못하고 정부와 친( 親 )원전 세력들이 정보 를 차단하며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한 데 영향을 받아 2012년 22위에서 2013년 53위, 올 해 59위로 하락했다. 중국과 북한은 모두 최하위권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언론 상황 은 개방사회와는 먼 거리에 있다. 정보공개는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한 제도로, 사회 개방의 중요한 요소이자 전제이다. 한국은 공공기관이 보유 관리하는 정보에 대한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고 국 민의 참여와 국정 운영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1996년에 정보 공개법을 제정하였다. 17) 그러나 한국의 정보공개 실적은 일본보다 전반적으로 뒤지고, 시 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악화되는 기이한 현상을 보인다. 특히 2007년 이후 정보공개실적이 전반적으로 악화되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정책투명성의 급격한 악화로 귀결되었다. 투명 성의 부족은 국가경쟁력지수와 부패인식지수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게 하였다. 일본 은 정책투명성은 크게 후퇴했지만, 국가경쟁력지수와 부패인식지수에서 한국보다 월등히 앞서 있다. 18) 북한이나 중국 같은 권위주의 체제에서 정보공개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대내외 개방성은 반부패(청렴도)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다른 조건이 일정하다면 개방 의 확대와 소득의 증가는 부패와 역의 상관관계를 가지는데, 한국은 시장개방도에 비해 청렴도가 낮은 것으로 평가된다. 19) 부패는 소득의 증가뿐만 아니라 개방의 확대에 따라 감소할 수 있다. 개방의 결과로 국제 표준이 국내에 통용되게 되면 전통적 부패나 비리 가 줄어들 수 있고, 관세장벽이 제거됨에 따라 부패의 기회가 감소한다. 반면 부패한 사 회는 시장체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경쟁능력을 손상시키고 국제 신용의 상실과 금 융위기를 초래하여 시장개방을 늦추게 한다. 20) 동아시아에서는 국가별로 개방의 편차가 클 뿐 아니라 한국과 중국의 경우 개방과 개혁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대칭성을 보이고 있다. 이 점은 아직도 개방의 성과가 내부 개혁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측면이 있고, 개방을 통해 개방의 주체가 이익을 획득하 12)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11년 기준으로 28.4%로 유럽연합(EU) 25.2%, 북미국가(NAFTA) 25.8%를 능가하였 다. 세계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6.8%로 유럽의 38.3%보다는 낮지만, 유럽이 감소세에 있는 반면 동아시아는 증가 추세에 있다. 북미의 비중은 14.2%로 역시 감소하였다. 수입 비중도 26.7%로 증가한 반면 유럽과 북미의 비중은 각각 38.0%, 16.2%로 감소하였다. 13) 최낙균, 김영귀, 2013 동아시아의 가치사슬구조와 역내국간 FTA의 경제적 효과 분석 한국대외경제정책연구원 보고서 1 4 ) 황 경 식, 개방 사 회란 무 엇 이며 누 가 그 적 인 가 개방 사 회 의 사 회 윤 리 철 학 과 현 실 사 15) 언론자유지수는 영국의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하는 민주주의지수, 독일의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가 발표하는 부패인식지수와 함께 정치적으로 선진국 수준을 비교하는 기준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다. 16) 국경 없는 기자회는 한국의 언론자유 순위를 2003년 39위, 2004년 26위, 2005년 31위, 2006년 31위, 2007년 37위로, 2008년 47위, 2009년 69위, 2010년 42위, 2011년과 2012년 44위, 2013년 50위로 매겼다. 2009년에는 MBC PD 수첩 제작진을 체포하는 사건이 있었다. 17) 공공기관의정보공개에관한법률(법률 제5242호 신규제정 ) 18) 정책투명성은 2007년 34위에서 2010년 111위로, 제도는 26위에서 62위로 곤두박질쳤다. 그 결과 2007년 11위로 최고수 준까지 올라갔던 WEF 국가경쟁력지수는 차츰 하락하여 2010년 22위가 되었으며, TI부패인식지수는 40위 정도에 맴돌 고 있다(송희준 등, 2011 한국과 일본의 정보공개 성과 비교 하계학술발표대회 발표논문집). 19) 이재형, 2002 반부패와 시장개방사이의 상호관계 : 국가별 비교 도시행정학보 Vol.15 No.2.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 하는 부패지수에 따르면, 2009년에 180개 나라 가운데 한국은 39위로 일본의 17위보다 훨씬 낮았다. 중국은 79위, 베트 남은 120위였다. 20) 한국의 경우 개방과 반부패 그리고 소득사이의 효과를 나타내는데 100점 만점인 개방지수가 10점 증가하면 1인당 국내 총생산은 약 1,540 미국달러가 증가하며, 10점 만점인 반부패지수가 1점 증가하면 1인당 국내총생산은 약 2,304달러 증 가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이재형, 개방과 반부패 그리고 소득사이의 관계: 이중통계검사 ) 18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9
11 고 있으며, 민중을 위한 개혁에는 소극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개방과 개혁의 속 성은 사실 시대를 초월하여 나타나는 현상이다. 중세에는 개방의 효과가 극히 제한된 영 역에 미친 데 비해 오늘날은 개방의 효과가 사회의 거의 전 영역에 미치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동아시아에서 개방과 개혁은 더 확대되어야 하고, 대외 개방의 성과가 내부 개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의식의 개방이 필요하다. 개방과 개혁은 국제 표준, 인류의 보편 가치를 기준으로 하되, 동아시아의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각 사회집단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확대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배타적 민족주의(애국주의)가 불식되 고 역사문제와 영토문제를 둘러싼 갈등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의식의 개방은 갈등 을 해소하고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상품과 자본 뿐 아니라 사람 에게도 좀 더 개방적이어야 할 것이다. 단 일민족의 신화에서 벗어나 다양한 외국인들의 체류와 기여에 마음을 열고 기회를 제공해 야 한다. 정부가 작성한 2040년 통일한국의 미래상에서 열린 국가 정책으로 해외 인재 를 적극 영입하여 인구 구조의 역동성을 확보하고 경제적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여 세계 7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한다는 전망을 세운 것은 21) 쌍기를 받아들인 개혁이 지금도 필 요하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제1주제 발표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장 동 익 경북대학교 교수 21) 외교안보연구소, 2014 통일한국 2040 보고서 - 글로벌 리더 통일한국 국립외교원, 15쪽 20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2 제 1 주제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장 동 익 (경북대학교 교수) Ⅰ. 머리말 Ⅱ. 대립에서 공존으로 Ⅲ. 공존을 위한 제 방책 Ⅳ. 공존에서 패망으로 Ⅴ. 맺음말 Ⅰ. 머리말 21세기는 세계화가 급격히 이루어져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는 특정지역에서 는 국가 간의 연합화가 이루어져 장차 새로운 형태의 세계적인 국가의 등장을 예측해 볼 수도 있다. 이에 비해 동아시아에서는 새로운 패권주의가 등장하여 각국 사이에는 영토 문제, 어느 한 국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둘러싸고 대립과 투쟁이 날로 드세어지고 있다. 이들 현상 중에서 후자는 세계인들이 염원하고 있는 지구촌의 평 화와 공존( 共 存 ) 공영( 共 榮 )의 발전에 크게 역행하는 반동적인 처사임이 분명하다. 전근대사회에서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국가 간의 관계는 평화와 공존의 시대가 없었 던 것은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의 시기가 대립과 투쟁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하여 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국가 간의 관계는 대립과 투쟁을 본질로 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국가들은 공통의 목표 이익 혹은 이데올로기를 대체로 공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특정 국가의 대외정책의 결정은 국익( 國 益 )을 바탕으로 이 루어지는 것이기에 대외관계의 여러 현상도 오직 국익의 관점에서만 이해되어야 한다는 현실주의적 견해도 있다(Thomas A. Bailey 1980년 2쪽). 23
13 제 1 주제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그렇다고 하여 전근대사회에서 이루어졌던 국제관계는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할 때만 보다 실상에 접근할 수 있다는 명제 하에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현재성을 배제할 수 는 없을 것이다. 곧 지구상의 수많은 나라들이 정치 경제적 협력을 바탕으로 한 우호와 교류를 강조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전근대사회의 국가 간에 있었던 대립과 투쟁의 이면 ( 裏 面 )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공존을 위한 외교정책의 여러 양태( 樣 態 )를 부각시켜 볼 필 요성이 있다. 왜냐하면 국경을 마주한 나라 사이에는 늘 전쟁과 평화가 교차하였기 때 문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서 한국사에 있어서 여타의 그 어느 시기에 비해 주변의 여러 민족과 접촉 충돌이 많았던 고려시대를 대상으로 하여 북동아시아 3국의 국제정세의 변 화와 이에 따른 고려정부가 취한 대표적인 외교정책의 여러 유형과 그 결과에 대해 살펴 보려고 한다. 1) 이에서 제시된 부족한 점들은 향후 동학들의 조언을 받아 수정 보완하도 록 하겠다. Ⅱ. 대립에서 공존으로 년(태조25) 태조 왕건( 太 祖 王 建 )은 거란( 契 丹 )이 보낸 낙타를 모두 만부교( 萬 夫 橋 ) 아래에서 굶어죽게 하였다. 우리들은 후삼국을 통일하여 한반도를 재통일한 태조왕건의 외교정책을 논하면서 고 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하자, 그 유민을 포섭하고 거란을 적대시하였 다., 거란은 짐승과 같은 나라이니 본받지 말아야 한다. 라고 서술하기도 한다( 訓 要 十 條 ; 두산동아 2011년 99~100쪽). 또 이러한 태조의 거란에 대한 결연한 의지는 942 년(태조 25) 10월에 일어난 만부교의 사건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는데, 이 사실과 이에 관련된 자료를 적시하면 다음의 자료 1과 같다. 만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그 사신 30인을 섬[ 海 島 ]에 유배 하였고, 낙타[ 槖 駝 ]는 만부교( 萬 夫 橋 )의 아래에 매어두어 다 굶어죽게 하였다( 고려사 권2, 세가2, 태조 25년 10월). b. 처음 고려국왕 왕건( 王 建 )이 군사를 일으켜 인국( 鄰 國 )을 통합하여 상당히 강대해졌 다. (938년, 태조 21년 3월 이후) 호승( 胡 僧 ) 말라( 襪 囉 )를 통해 후진( 後 晋 )의 고조( 高 祖 ) 석경당( 石 敬 瑭 )에게 전하기를 발해는 우리들과 혼인( 昏 姻 )한 나라인데, 그 왕이 거란에 게 포로가 되었으니 청하건대 후진[ 朝 廷 ]과 함께 합세하여 공격하고자 합니다. 라고 하 였으나, 고조가 회보( 回 報 )하지 않았다( 자치통감 권285, 後 晉 紀 6, 齊 王 下 ). c. 충선왕[ 德 陵 ]이 일찍이 신 제현( 齊 賢 )에게 묻기를, 우리 태조 때에, 거란이 낙타[ 橐 馳 ] 를 보낸 것을 다리 밑에 매어두고 꼴이나 마태( 馬 太 )를 주지 아니하여 굶어죽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 다리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 낙타가 비록 중국에서 생산되지 않 으나 중국에도 또한 일찍이 양축( 養 畜 )하지 않은 때가 없고, 나라의 군주( 君 主 )는 수십 마리의 낙타를 가지고 있으나 그 폐해가 백성을 상하게 하는 데에는 이르지 않는다. 또 물리치고 안 받으면 그만이지, 어찌 받아가지고 굶겨서 죽이는 데에 이르게 하였을까? 라고 하셨다. 신은 대답하기를, 왕업( 王 業 )을 창시( 創 始 )하여 왕통( 王 統 )을 자손에게 영원히 전하는 임금은 그 보는 것이 멀고, 그 생각하는 것이 깊어서 후세에서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저 송( 宋 )의 태조( 太 祖 )와 같은 사람은 궁금( 宮 禁 ) 안에서 산돼지를 기르게 하였는데 인종 ( 仁 宗 )이 그것을 놓아 보내라고 명하였습니다. 뒤에 요인( 妖 人 )을 얻었을 때에 도리어 피 [ 血 ]를 채취( 採 取 )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송 태조의 생각이 또한 여기까지 미쳤던 것입니까? 이것도 또한 정론( 定 論 )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송 태조의 돼지를 양축( 養 畜 )한 뜻이 피를 채취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우 리 태조가 이러한 일을 한 까닭은 장차 오랑캐들의 속임수[ 譎 計 ]를 꺾으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또한 후세의 사치심을 억제하려고 한 것인지, 아마 반드시 미묘한 뜻이 있었을 것 입니다. 이것은 전하께서 공손히 묵묵히 생각하여 힘써 행하여 몸소 본받을 것이고, 어리 석은 신이 감히 경솔하게 논의할 바가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역옹패설 前 集 1). 자료 1a. 942년(태조 25) 10월 거란이 사신을 보내와서 낙타[ 槖 駝 ] 50필을 선물하였다. 왕이 거란이 일찍이 발해와 더불어 평화를 이어오다가 갑자기 의심[ 貳 心 ]을 일으켜 맹약 을 어기고 멸망시켜 버렸으니, 이는 매우 무도( 無 道 )하므로 화친을 맺어 이웃으로 삼을 1) 이 논문에서 外 交 는 국가와 국가의 政 治 的 交 涉 을 가리키지만, 이에는 使 臣 往 來, 國 書 授 受, 戰 爭, 漂 流, 歸 化 移 住 [ 投 化 ], 貿 易 과 같은 人 的 接 觸, 交 流 등도 포함된다. 이때 a는 태조 왕건이 거란의 사신을 유배시키고 낙타를 만부교의 아래에서 아사( 餓 死 )시킨 사실을 전하는 것이고, b는 고려와 발해는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라고 표현될 정 도로 긴밀한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c는 만부교사건에 대한 원인의 구명( 究 明 )과 그 에 대한 충선왕과 이제현의 판단이 제시되어 있다. a의 내용을 외교정책의 결정과 관련을 지어서 볼 때, 태조 왕건의 조치는 927년(태조 24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25
14 제 1 주제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10) 11월 무렵 후백제를 방문한 거란의 사신이 등주( 登 州, 현 山 東 省 登 州 市 )에서 피살된 소식을 듣고서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후백제가 거란과 접촉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반발 로 추측되기도 하였다( 韓 圭 哲 1994년; 李 孝 珩 2004년). 또한 이러한 태조 왕건의 외교적 자세는 오늘날의 시점에서 볼 때 발해를 동족의 국가로 인식한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북 진정책의 추진을 위한 방략의 하나로 이해되고 있다. 그렇지만 거란 사신의 피살(927년)과 만부교사건(942년)은 15년의 시간적인 차이가 있 어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고, 그 사이인 937년(태조 20) 거란의 사신 이 고려에 도착하였을 것인데, 이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였을 것이다. 곧 거란의 사신파견이 이루어졌던 1년 전인 936년(태조 19, 天 顯 11) 9월 8일 고려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과 11월 12일 거란에 의한 후진 황제( 後 晋 皇 帝 ) 석경당( 石 敬 瑭 )의 책봉과 석경당의 연운( 燕 雲 ) 16 주( 州 ) 할양으로 인해 북동아시아 3국의 대치 양상이 거란과 중원( 中 原, 五 代 )의 대립에서 거란과 고려의 대립으로 이전되었을 것이다. 이때 거란의 사신은 그들이 후진에게 신속( 臣 屬 )을 관철시켰던 바와 같이 고려에게도 신속을 요구하였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2) 그래서 다음해에 고려를 유람하던 인도승( 印 度 僧 ) 말라( 襪 囉, 㗌 哩 嚩 日 羅 )를 통해 고 조 석경당에게 인척( 姻 戚 )의 국가인 발해[ 渤 海, 我 婚 姻 也 ]가 거란에 멸망당했음을 전하 고, 후진과 함께 거란을 공격할 것을 제의하였을 것이다. 고려와 발해가 인척관계였다는 점은 당시의 기록이 극히 소략하여 어떤 실마리를 잡을 수 없고, 비교적 고려초기의 사실 을 많이 알 수 있었던 이제현( 李 齊 賢, 1287~1367)조차 그 발해와 서로 혼인하였다는 것과 같은 일은 국사( 國 史 )에서 보이지 않는다. 라고 할 정도였다. 이처럼 고려와 발해의 관계는 불분명한 점이 없지 않지만, 고대 이래 북동아시아의 여러 민족과 국가 사이에는 상호간의 세력관계에 의해 형제( 兄 弟 ), 옹서( 翁 壻 ), 부자( 父 子 ), 군신( 君 臣 ) 등의 형태로 결 합되던 사례가 많았음에 비추어 볼 때 태조 왕건의 말이 전혀 실제와 다른 식사( 飾 辭 )만 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발해와 고려의 인척관계가 어떠하였던 만부교사건에서 나타난 태조의 행위는 제왕( 帝 王 )으로서 지녀야 할 도덕적 군주상( 君 主 像 )이라고 판단하기에 어려움이 있으므 로 청소년들에게 자주 강조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구절은 아니다. 곧 충선왕이 말한 바 의 물리치고 안 받으면 그만이지, 어찌 받아가지고 굶겨서 죽이는 데에 이르게 하였을 까? 와 같이 외교적인 면에서도 비신사적인 행위의 하나일 것이다. 전근대의 어떤 특정국 가가 상대국에 대해 어떤 외교적인 제의를 하였을 때 상대국의 대응을 유형별로 상정해 2) 이때 거란은 915년 이래 弓 裔 의 泰 封 과 외교관계를 수립할 때 체결하였던 兄 弟 의 關 係 [고대국가 이래 북동아시아의 여러 민족 사이에 이루어졌던 慣 行 의 하나인 兄 弟 之 國 ]에서 君 臣 關 係 로의 改 定 을 요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보면 긍정적인 수락, 즉각적인 반발, 무대응, 묵살 등이 있을 수 있을 것인데, 태조의 행 위는 즉각적인 반발일 것이며 그 방법조차 충선왕이 언급한 것처럼 은근한 방법이 아니 라 적대적인 반대의 표시를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것은 국익의 관점에서 도 이해되지 않는 조치일 것이다. 이러한 태조의 정책결정을 준 수 하여야 하였 을 그의 아 들이며 후계자 들인 혜종 정종 광종 등은 국초의 공고하지 못했던 제왕( 帝 王 )으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하여야 할 급선 무를 제치고 거란과 접경하고 있던 북방지역의 국방력 확충과 성곽축조에 주력하지 않 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국가 간에 이루어지는 대립의 시기에는 오로지 군비( 軍 備 )의 강화만이 공존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될 수 있음으로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2. 서희( 徐 熙 )는 거란의 장수 소항덕( 蕭 恒 德 )과 담판을 벌여 강동( 江 東 ) 6주( 州 )를 획 득하였다고 한다. 993년(성종 12, 統 和 11) 윤10월 3일 이후 고려의 부수상인 내사시랑평장사 서희와 거 란 침공군의 사령관인 부마( 駙 馬 ) 동경요양부유수( 東 京 遼 陽 府 留 守 ) 소항덕이 거란군의 진영인 봉산군( 蓬 山 郡, 현 평안남도 구성시)에서 행한 담판은 여러 면에서 후세의 귀감이 될 수 있는 모범적인 외교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外 交 通 商 部 2009년; 韓 國 中 世 史 學 會 2012년). 또 이는 고려정부가 취한 실리적 외교의 하나로서 이후 고려의 외교정책의 결정에서 중요한 지침이 되었던 것 같은데, 이제 이의 명암을 찬찬히 살펴볼 때가 되었다. 만부교의 사건으로 인해 고려와 거란의 외교관계가 중단되었던 것 같고, 이후 양국의 관계는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944년( 會 同 7, 혜종 1) 1월 이래 거란의 후 진( 後 晋 )에 대한 대대적인 정토전( 征 討 戰 )으로 인해 거란이 고려 측에 어떠한 요구를 할 여건이 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이때 후진에 의한 고려와의 연대도 모색되었으나 고려의 병력이 매우 취약하여 어떠한 결실을 맺지 못하였던 것 같고, 고려도 거란의 남진을 방 어하기 위해 947년(정종 2) 광군( 光 軍 ) 30만을 편성하여 장차 동원될 수 있는 국방력을 증강시키는 동시에 서북지역의 성곽의 축조에 노력하였던 것 같다. 당시의 형편은 칠대 실록 의 소진( 消 盡 )으로 인해 그 전모를 알 수 없으나 거란과 단교한 942년(태조 26) 10월 이후 거란의 1차 침입이 시작된 993년(성종 12) 10월까지의 사실은 다음과 같다. 947년(정종 2) 光 軍 30 萬 을 編 成 함. 德 昌 鎭 西 京 王 城 鐵 甕 博 陵 三 陟 通 德 德 成 鎭. 950년(광종 1) 長 靑 鎭 ( 長 平 鎭 의 誤 字?) 威 化 鎭. 951년 撫 州, 952년 安 朔 鎭, 960년(광 26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27
15 제 1 주제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종 11) 濕 忽 ( 嘉 州 ), 松 城 ( 拓 州 ), 967년(광종 18) 樂 陵 郡, 968년 威 化 鎭, 969년 長 平 鎭 寧 朔 鎭, 970년(광종 21) 安 朔 鎭, 972년 雲 州, 973년(광종 24) 和 州 高 州 長 平 鎭 博 平 鎭 高 州 嘉 州 信 都 城, 974년 嘉 州 安 戎 鎭. 979년(경종 4) 淸 塞 鎭. 983년(성종 2) 樹 德 鎭, 隘 守 鎭, 984년(성종 3) 文 州, 또 이해에 鴨 綠 江 岸 에 城 을 쌓아 關 城 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女 眞 의 공격으로 실패함. 이들 성곽이 축조된 서북지역은 국초의 청천강과 함흥만을 연결 짓는 북쪽 국경선(북 위 39.5도)을 넘어 청천강 남쪽에 위치한 안북부( 安 北 府, 현 평안남도 안주시, 북위 39.5 도 )에서 덕창 진( 德 昌 鎭 ) 박 릉 ( 博 陵 ) 낙 릉 군( 樂 陵 郡 ) 신 도 성( 信 都 城, 이상 모 두 평안 남 도 박천군), 태주( 泰 州, 평안북도 태천군)를 거쳐 압록강 하류인 영삭진( 寧 朔 鎭, 현 평안북 도 의주군, 북위 40.2도, 경도 124.5도)에 이르는 내륙에 위치해 있었다. 이후 내륙의 요 새를 교두보로 삼아 각지에서 연해지역에의 진출을 도모하면서 984년(성종 3) 압록강안 의 영삭진에서 압록강구로 나아가 전진기지[ 關 城, 城 柵 을 위주로 쌓은 城 ]를 쌓으려고 하다가 실패하였던 것 같다. 후일 거란과 화평한 이후에 개척된 강동 6주는 모두 이들 고려의 성곽이 위치한 서쪽의 연해안에 위치하였다. 추측하건데 이 시기에는 거란과의 주된 통로이었을 청천강에서 압록강구까지의 연해 안 지역은 압록강 여진으로 불리던 서여진( 西 女 眞, 熟 女 眞 )이 장악하고 있었고, 고려와 연결되어 있었던 여진은 주로 한반도의 동부지역에 할거하고 있었던 동여진( 東 女 眞 )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형편에서 고려는 동여진의 협조를 받아 한반도의 내륙통로를 따라 압 록강까지 북진하면서 성곽을 축조하여 장차 거란의 침입에 대비한 요새를 구축하고 있 었던 것 같다. 고려가 942년(태조 26) 10월 거란과 단교한 이후 984년(성종 3)까지 42년간 고려와 거란 사이에 접촉했던 구체적인 흔적은 찾아지지 않는다. 이는 당시의 고려 측의 연대기 가 매우 소략한 결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거란 측의 자료에는 그 이전( 년)과 그 사이에도(984년) 거란의 사신이 고려에 도착하였음을 보아 거란 측의 통교 재개나 국경 [ 地 界 ] 획정을 위한 사신파견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송과 긴밀한 관계에 유지하고 있었던 고려, 특히 송의 선진 문물의 수용에 적극적이던 성종과 모화적( 慕 華 的 )인 면을 진하게 풍기고 있었던 유학자출신의 관료들에 의해 거란과의 통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 던 것 같다. 이로 인해 985년(성종 4) 7월 이래 거란의 고려정벌이 준비되었지만 요동지역에서의 홍 수로 인해 단행되지 못하였던 것 같다. 다음해(986년) 1월 거란이 고려에 궐렬( 厥 烈 )을 보내와 청화( 請 和 )하였다고 하는데, 6개월 전까지 정벌을 준비하던 거란이 화평을 제의 한 것은 고려의 군사력보다는 같은 달 21일 대대적으로 북벌을 단행한 송에 대처하기 위 한 하나의 방책에 불과할 것이다. 이는 2월 4일 송이 감찰어사 한국화( 韓 國 華, )를 고려에 파견하여 거란을 정벌할 때 조병( 助 兵 )을 권유하는 조서를 전하게 한 것 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서 고려가 이 전쟁에 참여하여야 할 명분은 없었던 것 같다. 곧 같은 해 5월 한국화가 도착하여 태종( 太 宗 )의 조병을 명하는 조서를 전달하였 으나 성종이 천연( 遷 延 )하여서 군사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한국화가 위덕( 威 德 )으 로써 달래니 설득하였다고 한다. 왕이 어쩔 수 없이 군사를 출동시켜 서쪽에서 만나겠다 고 약속한 후에 한국화가 돌아갔다고 한다. 이때 고려가 실제로 군사를 동원하였던 사실은 고려 측의 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지 만, 당시의 송 측의 자료에 의하면 한국화의 완강한 요청에 의해 성종이 대상( 大 相, 4 品 上 ) 한광( 韓 光 )과 원보( 元 輔, 5 品 上 ) 조항( 趙 抗 )으로 하여금 군사 25,000인을 이끌고 청 천강[ 浿 江 ]을 넘게 하였다고 한다. 이에서 고려군의 지휘관이 여타의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으나 그들이 띠고 있는 관계( 官 階 )는 중국인이 알 수 없는 고려초기의 관계이므로 이 자료는 송에서 임의로 만들어질 성질의 것이 아닐 것이지만, 이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하더 라도 약간의 과장이 있는 것 같다. 만약 이때 고려군이 압록강을 건너 거란을 공격하였 다면 고려와 거란의 양국 관계는 심각해져서 다음 해 6월 고려에서 주군( 州 郡 )의 병기를 거두어 농구로 만들 수 있는 형편은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후 991년(성종 10, 統 和 9) 2월 거란이 압록강 하류의 사주( 沙 洲 )인 검동도( 黔 同 島 ) 28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29
16 제 1 주제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에 위구( 威 寇 ) 진화( 振 化 ) 내원( 來 遠 )의 3성을 쌓아 수졸을 주둔시켜 고려를 공제하게 하는 동시에 여진(서여진으로 추측됨)과 송의 접촉을 차단시킬 때까지 5년간 송과 거란 은 군사적으로 대치, 전쟁을 번갈아 하였다. 이때 고려는 송과 긴밀한 외교관계를 유지 하는 것에 안주하고, 거란의 팽창에 대처한 여진이 송에 표를 올려 거란을 정벌해 줄 것 을 요청하다가 거절되자 거란에 투항하였음에도(991년), 또 거란이 소항덕으로 하여금 고려의 정벌을 명하였음에도(992년) 아무런 대응을 마련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이는 고 려가 거란과 송의 대치를 이용하여 고식적으로 자국의 안정과 국방제도의 정비에만 노력 하였을 뿐, 거란과 송이 일시적으로 휴전한 이후의 정세를 예단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 다. 이는 다음 해(993년) 5월 압록강 이남의 연해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서여진[ 西 北 界 女 眞 ]이 거란의 침입을 통보하였음에도 듣지 않다가 8월 재차 거란병의 도착을 전하자 그 때서야 제도( 諸 道 )에 병마제정사( 兵 馬 齊 正 使 )를 파견하였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같은 해 10월 거란의 1차 침입에 대처한 고려군의 응전은 패배뿐이었을 것이 고, 고려정부의 대응도 패망을 피하기 위해서는 굴복을 행한 후 토지의 할양[ 割 地 ], 또는 신속( 臣 屬 )을 전제로 한 조공과 책봉의 두 방책의 선택만이 제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 다. 이로써 후자를 제시한 서희와 이를 채택한 성종의 외교정책은 국가를 안정시키고 서 북쪽의 연해지역을 확보하여 국경선을 압록강구까지 확장시켰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오 늘날까지 받고 있다. 3) 이는 일면 경쟁에서 화평, 공존으로 나아가는 좋은 외교정책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한반도의 정세에 큰 영향력을 줄 수 없는 어느 특정국가 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에 안주하다가 일시적으로 제국( 帝 國 )의 자주성을 상실하고, 고 구려 영역의 회복이라는 국시( 國 是, 北 進 政 策 )조차 방기한 방책이었을 뿐이다. 또한 국제정세에 어두워 송의 북벌만을 믿어 그 병세( 兵 勢 )가 거란을 압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잘못 판단하였던 것 같고, 압록강 하류의 남북 양안에 위치하면서 거란에 저항 하고 있던 여진이 991년(성종 10, 統 和 9) 거란에 귀속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 같 다. 그래서 992년 거란에서 정벌의 명이 내려지고, 다음해에 거란의 침입에 대한 풍문이 있 어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진의 귀순에 의해 이루어 질 수 있는 거란군의 신속한 전진조차 예측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 결과 국초 이래 막대한 국력을 동원하여 축조 되었을 압록강 하류에서 출발하여 청천강에 이르는 내륙지역의 성곽에 포진하였던 진수 군( 鎭 戍 軍 )을 동원하여 침략군의 후방을 유린하지 못하고 황급하게 굴복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3) 이때 고려가 취한 외교정책은 송과 거란 사이의 對 立 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적절히 활용한 전형적인 세력 균형적 방책 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Ⅲ. 공존을 위한 제 방책 년(현종 10) 고려가 거란을 격퇴한 후 북동아시아 3국은 세력 균형을 이루며 어느 정도 평화를 유지하였다. 이 제목은 중학교교과서의 내용을 적절히 축약한 것으로(두산동아 2011년 105쪽) 사 실에 비교적 적합하지만, 3국이 비슷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여 세력균형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의 북동아시아 3국의 형편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993년(성종 12) 윤10월 고려가 거란에 신속( 臣 屬 )을 약속한 이후 같은 해의 12월 무렵 수상인 문하시중 박양유( 朴 良 柔 )를 거란에 보내어 표를 받들고 죄를 청하였다[ 奉 表 請 罪 ]. 다음해(994년) 1월 17일 박양유는 거란에서 표를 올리자 거란의 성종( 聖 宗 ) 야율융 서( 耶 律 隆 緖, 971~10311, 982~1031 재위)와 섭정을 하고 있던 승천황태후( 承 天 皇 太 后 ) 소작( 蕭 綽, 953~1009, 982~1009 섭정)은 여진의 거주공간이었던 압록강 동쪽 수백 리 의 땅을 취하여 고려에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어서 2월에 처음으로 거란의 연호인 통화 ( 統 和 )를 사용하였고, 4월에 박양유로 하여금 표문을 가지고 가서 정삭을 행한다는 것 을 통고하고 피로인( 被 虜 人 )들을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로서 고려는 중원의 종주국을 자처하고 있던 거란의 외번( 外 藩 )인 제후국[ 藩 屬 國 ]으로 지위가 격하된 형편에 서 여러 가지의 의무를 부담하게 되었을 것이다[ 稱 藩 納 貢 ]. 거란은 고려를 신속시켜 송과의 관계를 청산하게 하여 요동지역에서의 안정을 도모한 이후, 979년( 太 平 興 國 4) 이래 송에 의한 연운지역( 燕 雲 地 域, 현 북경시에서 산서성의 북 부 大 同 市 지역까지)의 회복을 위한 북벌에 의해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이른바 송 요 전 쟁을 다시 격화시켜 나갔다. 곧 거란은 995년( 統 和 13) 1월 이래 송의 서쪽 변경인 인주 ( 麟 州, 현 섬서성 神 木 市 서북지역)를 침입하기 시작하여 이후 10년간에 크고 작은 전쟁 들이 지루하게 이어지게 되었다. 997년( 至 道 3) 3월 송 태종 조광의( 趙 光 義 )가 붕어하고 진종( 眞 宗 ) 조항( 趙 恒 )이 즉위한 틈새를 노려 거란의 성종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누차 에 걸쳐 송을 공격하여 여러 지역을 점령하여 나갔다. 1004년 9월 소태후( 蕭 太 后 )와 성종 ( 聖 宗 )은 송을 공격[ 南 伐 ]하기 위해 고려에 사신을 보내 선무( 宣 撫 )하는 동시에 군사를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윤9월 거란군이 고안( 固 安, 현 하북성 지역)에 집결하여 순안군( 順 安 軍, 현 하북성 保 定 市 高 陽 縣 동부지역) 위로군( 威 虜 軍, 현 하북성 保 定 市 徐 水 縣 서 부지역) 북평채( 北 平 寨, 현 하북성 順 平 縣 동북지역) 등을 공격하고, 11월에 덕청군( 德 淸 30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31
17 제 1 주제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軍, 현 하남성 淸 豊 서북지역)을 격파하고 단주( 澶 州, 현 하남성 濮 陽 市 )를 압박하였다. 이때 거란군의 대장 소달름( 蕭 撻 凜 )이 전선을 시찰하다가 송의 복병을 만나 전몰하 자 거란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송군의 협격( 挾 擊 )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항장( 降 將 ) 왕계 충( 王 繼 忠 )을 통해 송에 화의( 和 議 )를 떠보기도 하였다. 이때 송의 진종은 깊이 남진한 거란군을 피해 남쪽으로 천도를 하려다가 재상 구준( 寇 准, 961~1023)의 건의를 받아들 여 전선에 나와 독전하면서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면서 단주( 澶 州 )를 결전장으로 삼 아 병력을 집중시켰다. 그렇지만 단주가 돌파되면 동경( 東 京, 현 하남성 開 封 市 )이 위험 하다고 판단하여 거란에 폐백( 幣 帛 )의 제공을 조건으로 하여 화약을 체결할 것을 제시하 였다. 이에 12월 양국이 단연( 澶 淵 )에서 강화를 체결하여 25년간에 걸친 송 요 전쟁은 끝 이 나고, 양국은 형제국가가 되어 송은 거란에 세폐( 歲 幣 )로 은( 銀 ) 10만 량, 견( 絹 ) 20만 필을 제공하게 되었다[ 澶 淵 之 盟 ]. 이상의 사실을 통해 볼 때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초반에 걸친 북동아시아의 정세는 북쪽에 위치한 거란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의해 송과 고려는 모두 북진이 좌절되었을 뿐 만 아니라 거란군의 침입에 대해 천도론( 遷 都 論 )과 할지론( 割 地 論 )이 제기되는 유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 국경선의 방어에 급급한 형편에서 송은 세폐를 통해, 고려는 신 속을 통해 영역의 경계[ 地 界 ]를 확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간혹 양국이 국경에서 충돌한 시기를 제외하고 거란이 멸망한 1125년(인 종 3, 保 大 5)까지 변함이 없이 조공과 책봉의 체제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4) 그렇지만 양국의 관계가 설정될 초기에 고려는 1000년(목종 3) 10월과 1003년(목종 6) 8월의 두 차례에 걸쳐 송에 사신을 보내 접촉하면서 송이 군대를 국경에 주둔시켜 거 란을 견제하여 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으나 받아들여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이때 고려가 송과 접촉한 의도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거란의 어떠한 압제로 부터 벗어나려는 방책의 하나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고려와 거란이 체결하였던 군신관계 곧 조공과 책봉 체제의 내용이 무엇이었던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인데, 이에 대한 기록이 매우 소략하여 이후에 이루어진 양국사이에 이루어진 각종 접촉 사례들을 모아서 그 실상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거란의 제후국으로 전락하였던 고려가 짊어져야 했을 부담의 일면 이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994년(성종 13, 통화 12) 4월 고려가 박양유를 거란에 파견하여 표를 올리고 정삭( 正 朔 )을 실행한다는 것을 통고한 이후, 같은 해 11월 기악( 妓 樂 )을 바쳤으나 퇴각( 退 却 ) 당하였다고 한다. 또 다음해의 2월 방물( 方 物 )과 매[ 鷹 ]를 바치고, 9월에 방물을 바치 고, 10월에 동자( 童 子 )를 보내 거란어( 契 丹 語 )를 학습하였고, 이해에 거란에 혼인을 요청 하여 다음해(996년) 3월 허락을 받아 부마 동경요양부유수 소항덕의 딸이 하가( 下 嫁 )되 기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1002년(목종 5) 6월 무렵에는 본국의 강역도( 疆 域 圖, 地 理 圖 ) 까지 바쳤다고 하는데, 이는 단순한 강역만이 아니라 강역도에는 호구의 총계가 기록되 어 있으므로 편적호구( 編 籍 戶 口, 版 籍 )를 보고한 것과 마찬가지의 경우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중원의 황제에 대해 주변의 외번( 外 藩 )인 제후국들이 행해왔던 군신관계의 양 태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기에 고려가 거란에 불평등한 관계에 놓여 있음이 분명하다. 당시 고려가 거란에 대해 행한 여러 유형의 사례 중에서 초창기의 모습을 5) 집행된 순서 로 살펴보면 다음 <표1>과 같다. 시기 994년 (성종 13) 995년 (성종 14) 996년( 성종 15) 997년 (목종 즉위) 999년 (목종 2) 1002년 (목종 5) 1004년 <표1> 10세기 후반 이래 고려의 거란에 대한 의례( 儀 禮 ) 고려 의례 내용 4.-, 表 를 올려 正 朔 의 施 行 을 報 告 11.- 頃, 妓 樂 을 바쳤으나 退 却 당함 2.- 頃, 方 物 과 鷹 을 바침 9.- 頃, 方 物 을 바침 10.- 頃, 童 子 를 보내 契 丹 語 를 學 習 是 年, 契 丹 에 請 婚 2.- 頃, 再 次 童 子 를 보내 契 丹 語 를 學 習 3.-, 納 幣 함 5.- 頃, 사신을 보내 問 安 人 事 를 함. 이후 일정한 때가 없이 使 臣 을 파견함 6.- 頃, 納 幣 하며 蕭 恒 德 의 妻 인 越 國 公 主 의 喪 을 弔 問 11.-, 成 宗 의 薨 去 와 穆 宗 의 卽 位 를 보고 1.- 頃, 使 臣 을 보내 宋 과의 戰 勝 을 賀 禮 6.- 頃, 本 國 의 地 理 圖 를 바침 요(거란) 3.14, 使 臣 을 보내 타이름 11.19, 고려국왕을 책봉 3.2, 고려의 請 婚 을 허락 11.-, 高 麗 國 王 生 日 使 를 파견 11.-, 高 麗 國 王 致 祭 使 兼 新 王 認 准 使 를 파 견 9,- 頃, 고려국왕을 尙 書 令 으로 임명 9.8, 南 伐 을 위해 宣 撫 4) 조공과 책봉의 체제는 John K. Fairbank가 언급한 것처럼 貿 易 을 위한 道 具 또는 形 式 의 次 元 을 넘어 國 家 의 安 保 를 담보할 수 있는 裝 置 이다. 곧 中 原 의 歷 代 王 朝 들의 周 邊 國 家 를 향한 王 道 的 이지 못한 軍 事 力 의 行 事 를 抑 制 할 수 있 는 독특한 國 際 秩 序 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階 序 制 (hierachy)를 특징으로 하였던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장 기간에 걸쳐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安 全 辨 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이는 세력 균형을 바탕으로 하는 Westfalen 體 制 에 익숙해 있었던 西 洋 人 들에게 매우 특이한 국제질서로 理 解 될 수도 있었다(David. C. Kang 2010년). 5) 고려사 의 凡 例 에 의하면 世 家 篇 은 圓 丘 籍 田 燃 燈 八 關 등과 같은 日 常 的 인 事 實 은 처음 보이는 것만 記 錄 하여 그 事 例 를 나타내었는데, 만일 帝 王 이 親 히 行 하였으면 반드시 記 錄 하였다.( 如 圓 丘 籍 田 燃 燈 八 關 等 常 事, 書 初 見, 以 著 其 例, 若 親 行 則 必 書 ) 라고 하였지만, 이들 항목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事 實 이 1~2 次 에 일어난 것은 반영되어 있으나 3 次 以 下 는 많은 경우가 省 略 또는 縮 小 되었다. 32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33
18 제 1 주제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시기 1005년 (목종 8) 1008년 이상의 사실들을 통해 보면 고려는 거란에 대해 조공과 책봉의 관계에서 흔히 보이 던 하례( 賀 禮 ), 문후( 問 候 ), 납폐( 納 幣 ) 등을 위해 사신을 정기적으로 파견하였고, 주청 ( 奏 請 ), 위문( 慰 問 ), 하례 등을 위해 비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다. 전자는 1009년(현 종 즉위) 12월 11일 소태후( 蕭 太 后 )가 붕어하기 전까지 3월의 천추사( 千 秋 使, 賀 皇 太 后 生 辰 使 ), 춘하계문후사겸납폐사( 春 夏 季 問 候 使 兼 納 幣 使 ), 9월의 추동계문후사( 秋 冬 季 問 候 使 ), 10월의 동지사( 冬 至 使 ), 11월의 성절사( 聖 節 使, 賀 千 齡 節 使 ), 하정사( 賀 正 使 ) 등의 6 개의 사행이 있었으나 명목이 다른 사신단이 함께 파견되기도 하였던 것 같다. 또 거란의 전승( 戰 勝 ), 황실의 경조사가 있을 때, 고려의 주청, 특별한 진헌( 進 獻 ) 등이 있을 때도 각각 사신이 파견되었다. 고려 4, 宋 과의 和 親 [ 澶 淵 之 盟 ]을 賀 禮 4.- 頃, 中 京 의 完 成 을 賀 禮 의례 내용 이에 비해 거란에서 고려에 파견된 정기적인 사신은 국왕생일사 뿐이었고, 책봉사, 선 무사( 宣 撫 使 ), 각종 물품의 하사를 위한 횡선사( 橫 宣 使, 혹은 橫 賜 使 ), 중요한 사안의 통보사( 通 報 使 ) 등의 비정기적인 사신이 있었지만, 고려가 거란에 파견한 사신단의 횟수 에 비해 그 사례가 극히 적었다. 이는 인신( 人 臣 )인 제후가 천자에게 세시( 歲 時 )에 따라 인사를 올려야 함이 마땅하지만, 잦은 사행에 따른 경제적 부담이 너무나 크기에 제후 국의 국력에 심대한 손상을 초래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보다 150년 정도의 세월이 경과한 1071년(문종 25, 熙 寧 4) 무렵 고려가 거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쪽으로 송과의 연결을 도모할 때, 그 주된 이유의 하나가 거란의 징구( 徵 求 )를 벗어나기 위함이 었다고 한다. 또 고려에 파견되어 온 거란 사신단의 탐욕과 징구도 심하여 그들을 접대 하는 장소의 각종 기물( 器 物 )들을 철거하여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요(거란) 1009년 (현종 즉위) 3.- 頃, 皇 太 后 의 生 辰 을 賀 禮 12.12, 皇 太 后 의 喪 을 通 報 1010년 (현종 1) 1020년 (현종 20) 1022년 (현종22) 1.- 頃, 사신을 보내 皇 太 后 를 致 祭, 會 葬 9. - 사신을 보내 秋 季 問 候 를 드리고, 사 신을 東 京 에 보내어 修 好 함 11.1, 사신을 보내 冬 至 를 賀 禮 2.-, 사신을 보내 表 를 올려 藩 을 稱 하고 朝 貢 을 從 前 대로 바칠 것을 약속하고 6년 간 拘 禁 되어 있던 거란사신을 귀환시킴 6.13, 持 書 使 를 東 京 에 파견 11.- 頃, 聖 節 使 를 파견 5.21, 사신을 보내 顯 宗 의 罪 를 容 恕 해주 고, 그의 요청을 수용 8.3, 거란의 東 京 持 禮 使 가 와서 春 夏 季 問 候 使 를 1 次 만 보내되 千 齡 節 賀 禮 使 正 旦 使 와 同 行 하게 하고, 秋 冬 季 問 候 使 도 1차만 보내되 太 后 生 辰 賀 禮 使 와 同 行 하게 함 그런데 조공과 책봉체제가 중원의 제국( 帝 國 )과 주위의 제국( 諸 國 )들이 종주국과 번 속국으로 맺어지는 일종의 우호적 국제관계로서, 천자가 번속국의 내정을 간섭하지 않 으며[ 王 者 不 治 夷 狄, 錄 戎 者, 來 者 勿 拒, 去 者 勿 追 ], 작은 규모의 조공에 대해 대량의 회 사( 回 賜, [ 薄 來 厚 往 ]를 표방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주변국의 내속( 來 屬 )을 권유하고, 자국의 인민들에게는 대국의 관대함을 보여 주려고 하는 자기현시적( 自 己 顯 示 的 )인 방책 으로 보이지만, 중원에 연륙( 連 陸 )되어 있는 한반도의 사례를 통해 볼 때, 이민족으로부 터 쓰라린 상처를 받았던 고려시대사를 전공하는 필자에게는 쉽사리 동의할 수 없는 관 용적 학자들의 견강부회로 받아들여 질 수도 있다. 6) 고려시대의 경우를 통해 볼 때도 한반도와 접경( 接 境 )하지 못하였고, 북방민족의 군 사적 압력을 고려와의 연대를 통해 조금이라도 약화시켜 보려고 했던 북송에서 그러한 정책이 일부 위정자에 의해 일시적으로 채택되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중원의 주변민족에 대한 일관적인 외교정책이었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북송을 제외한 고려와 접촉하였던 대 부 분 의 왕 조인 거란 ( 契 丹 ) 금( 金 ) 몽 골( 蒙 古 ) 명( 明 ) 은 고려왕 조 와 의 관 계에서 1 9 세기 이 래 소수의 제국주의국가가 세계를 제패하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외형적으로는 보호를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약소국에 대해 약육강식을 자행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지배를 받 은 식민지와 반식민지국가( 半 植 民 地 國 家 )들은 그들이 강요하여 체결했던 불평등조약에 묶여 수많은 인민들이 강하게 수탈을 당하였는데, 전근대사회에서 중원의 제국( 帝 國 )이 실시했던 조공과 책봉체제가 제국주의국가의 추한 행태와 같이 운영되었다고 하여도 과 언이 아니다. 이와 같이 허울만 번듯한 거란과 고려의 불평등적인 조공과 책봉체제는 1125년(인 종 3, 天 會 3) 8월 거란이 멸망한 후 금( 金 )에게도 그대로 계승되었던 같다. 곧 7년 전 인 1118년(예종 13, 天 輔 2) 2월 금주( 金 主 ) 아골타( 阿 骨 打 )가 거란에게 명하여 형( 兄 )으 로 금 제국( 金 帝 國 )을 섬기는 동시에 세공( 歲 貢 )을 바치게 하고, 거란의 송( 宋 ) 하( 夏 ) 고려에의 왕 복 서한 ( 往 復 書 翰 )인 조( 詔 ) 표( 表 ) 첩( 牒 )의 서식을 요 구 하 자, 6월에 거란 이 수용하였다고 한다. 이 점을 통해 볼 때 이후 송 하 고려는 금으로부터 지난 날 거란에 게 행하였던 외교정책[ 稱 藩 納 貢 ]과 같은 방식의 외교정책을 준수하도록 강요받았을 것 6) 조공과 책봉의 체제의 順 機 能 을 강조하였던 학자들은 오랑캐들[ 外 夷 ] 의 조공을 통해 中 原 의 皇 帝 는 정권의 정통성을 얻었고, 인근 국가의 帝 王 은 책봉을 통해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군사적인 압박에서 해소되었으며 朝 貢 品 과 回 賜 物 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조공과 책봉의 관계는 비용과 효과의 측면에서 중원과 인근 국가의 모두에게 利 得 이 되는 국제관계였다는 결과가 도출되기도 하였지만, 피압박국가의 자주성과 정체성이 고려 되지 못한 한계도 없지 않다. 34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35
19 제 1 주제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이고, 고려왕조도 1126년(인종 4, 天 會 4) 4월 금에 대해 신하를 칭하면서 표를 올렸고, 1129년(인종 7, 天 會 7) 11월 대대로 직공( 職 貢 )을 바치겠다는 서표( 誓 表 )를 올렸다. 7) 2. 11~12세기 북동아시아 3국의 우호와 선린을 위한 여러 사례 994년(성종 13, 統 和 2) 4월 고려가 거란에 신속되고, 1004년( 統 和 22, 景 德 1) 12월 거란과 송이 강화[ 澶 淵 之 盟 ]한 후 금 제국이 건립된 1115년(예종 10, 收 國 1)까지의 100 여 년에 걸쳐 북동아시아 3국은 큰 분쟁이 없이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렇지만 이 시 기에도 영역과 인민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 경계지역에서는 작은 규모의 충돌이 많이 발 생하기도 하였고, 공적인 사신단의 내왕에도 일정한 규제가 있었다. 또 국경지역에서는 인민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한 관소( 關 所 )가 설치되어 경비가 삼엄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 역상인 구법승이 자유롭게 3국을 오갈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자국의 안정과 인국( 隣 國 )과의 우호를 위해 전쟁을 준비하는 특정국의 조병요청( 助 兵 要 請 ), 제3 국의 초유( 招 諭 ) 등도 거부하였고, 타국의 군사력이 자국의 영내에 진출, 통과요청[ 假 道 ] 도 허락되지 않았다. 이러한 형편 하에서 북동아시아 3국의 정부차원에 이루어진 상대국의 관민( 官 民 )에 대 해 행해진 인도적 배려는 여러 형태로 찾아진다. 먼저 대립과 충돌의 시기에 구류되었던 사신단의 귀환, 또는 관료로의 발탁, 피로된 군인들을 자국군대에의 편입, 피로된 인민 들을 집단적으로 거주시킨 귀화주( 歸 化 州 )의 설치, 탈출한 피로인의 송환 등이 있었는데, 이는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그 외에 대다수의 경우는 무역상인 구법승의 내왕, 표류인의 귀환, 투화인의 수용과 귀환, 도망자[ 逋 逃 人 ]의 퇴거( 退 去 ) 등이 있었다. 이들 시책들은 왕도정치를 표방하는 통치자[ 皇 帝 ]가 인민을 교화하기 위해 먼저 행하 여야 기본덕목의 하나인 인정( 仁 政 )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이민 족[ 外 夷 ]에게도 미쳐야 한다는 유교[ 孟 子 ]의 영향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동북아 모든 지역의 여러 제왕( 帝 王 )들에 의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고 대체적으로 그렇게 이루어졌다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여러 국가에 유입된 여러 유형의 이민족들에게 통치자 들은 의식( 衣 食 )을 풍성하게 해주는 덕화( 德 化 )가 아닌 비인격적 처사로서 대우하는 경 우도 없지 않았으며, 고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시기 북동아시아 3국의 외교 방침은 오로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패권( 覇 權 )의 쟁탈과 패자( 覇 者 )로서의 위상을 확고 히 하는 것이고, 인의( 仁 義 )에 입각한 외교는 하나의 공구( 工 具 )일 뿐인 한비자( 韓 非 子 ) 에 의해 주창된 패도( 覇 道 )의 선양이었던 점도 없지 않다. 한편 북동아시아의 권역에 위치해 있었지만 해양으로 떨어져 있으면서 한 중의 어느 국가와도 공식적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았던 일본의 인민들도 3국을 왕래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들이 3국의 인민과 접촉하게 된 계기는 국제무역, 구법, 표류, 피로인 쇄환( 被 虜 人 刷 還 ), 해적 행위[ 倭 寇 ] 등이었는데, 왜구를 제외한 여타의 경우에는 한 중으로부터 비인도적 대우를 받았던 경우는 전시( 戰 時 )를 제외하고 찾아지지 않는다. 이러한 처사와 마찬가지로 일본에 도착한 3국의 인민들도 엄격한 조사를 받은 후, 표 류인은 연희( 延 喜 ) 년간(901~922) 단마국( 但 馬 國, 타지마노쿠니, 현 兵 庫 縣 의 북부지역) 에 내착한 이국인의 예에 의거하여 양( 糧 )을 지급받아 귀환되었던 것 같다. 이에 비해 투 화인( 投 化 人 )은 이주 희망인[ 參 來 人, 곧 投 化 人 ]과 도망자[ 逋 逃 人 ]가 구별되어 수용과 퇴거가 결정되거나 소지품이 몰수된 후 억류당하거나, 왕성( 王 城 ) 외곽의 가로( 街 路 )에 방치되어 인민의 구경꺼리가 되기도 하였던 것 같다. 이상에서 11~12세기 북동아시아 3국에서 행해진 우호와 선린의 여러 모습을 살펴보 았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북방민족인 거란, 여진의 강한 군사적 압박 하에서 북송, 남송, 고려 등이 납폐, 조공 등의 명목에서 차이가 있지만 실제적으로 동일한 내용인 세폐를 통 해 그들의 침입을 방어하고자 하는 방책에 의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송과 고려와 같이 피해자 측인 남쪽의 정주민( 定 住 民 )이 무력적 방어를 방기한 것은 아 니었고, 항상 굳건한 전비( 戰 備 )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고려왕조의 경우에 북 방민족과의 전선지역인 서북계에 거의 61,000~71,000인의 군인을 주둔시킬 수 있는 체 제를 구축하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성지( 城 池 )를 축조 보수하고, 새로운 무기의 개발과 이의 배치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것이 당시의 안정된 국제정세를 구축하는 가장 중요 한 요인이 될 수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8) 7) 이처럼 고려왕조가 中 原 에 대해 藩 屬 國 으로 부담하였을 의무는 13세기 후반 大 蒙 古 國 의 지배질서 하에 들어간 이후에 도 世 祖 쿠빌라이에 의해 강요된 納 人 質 籍 編 民 置 郵 驛 出 師 旅 輸 糧 餉 助 軍 儲 등의 六 事 로 이어졌다. 또 이것이 다시 1369년( 洪 武 2) 9월 21일 明 帝 國 에서 藩 王 [ 蕃 王 ]의 朝 貢 禮 를 定 할 때, 禮 官 이 1264 年 (원종 5, 至 元 1) 6월 元 宗 이 上 都 ( 現 內 蒙 古 自 治 區 錫 林 郭 勒 盟 正 藍 旗 동쪽)에서 世 見 之 禮 를 行 한 것을 上 奏 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볼 때 明 의 藩 王 朝 貢 禮 도 蒙 古 의 制 度 를 遵 用 하여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明 太 祖 實 錄 권45, 홍무 2년 9월 壬 子 21 日 ; 大 明 會 典 권58, 禮 部 16, 蕃 王 來 朝 儀 ). 8) 세계화가 급격히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對 立 과 紛 亂 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에서는 自 衛 를 보장할 수 있는 수준의 군사력과 상대방의 역량을 제한할 수 있는 적절한 외교는 國 益, 특히 국가안보를 擔 保 하는 최소한의 手 段 일 것 이다(Hans J. Morgenthau 1949년 440쪽). 36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37
20 제 1 주제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Ⅳ. 共 存 에서 敗 亡 으로 1. 야수( 野 獸 )는 순치( 馴 致 )될 수 없고, 늑대[ 狼 ]로 바뀐 경우는 있었다. 고려는 건국초기부터 한반도의 북변 일대에서 거주하고 있던 여진족을 회유 포섭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는데, 여진의 일부는 고려의 한반도 통일과정에서 참전하여 군공을 세워 호시( 互 市 )에서 어떤 특혜를 부여 받았던 것 같다. 그 후 고려정부는 정령( 政 令 )과 교화( 敎 化 )가 미치는 지역에 거주하던 여진을 화내 여진( 化 內 女 眞 )으로, 그 외곽의 여진을 화외 여진( 化 外 女 眞 )으로 구분하여 차등이 있게 대우하였던 것 같다. 전자 중에서 순화 ( 馴 化 )가 이루어진 일부는 판적( 版 籍 )에 편입시켜 고려인과 동일하게 취급하였고, 그렇지 못한 경우는 기미주( 羈 縻 州 )로 편제시켜 통솔하고 있었던 것 같다. 또 그 외곽의 화외 여 진은 독립적 정치적 단위를 형성하면서 고려에 조공을 바치고 관작( 官 爵 )과 각종 회사품 ( 回 賜 品 )을 받아 갔던 작은 규모의 제후국과 같은 위상을 지니고 있었고, 이들 중의 일 부는 고려를 부모지국( 父 母 之 國 )으로 부르기도 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긴밀한 관계로 인해 송에 파견된 고려의 사신단은 항상 여진의 사신단을 거느 리고 들어갔는데, 이로 인해 송도 여진의 사신이 오지 않을 때는 고려로 하여금 초유( 招 諭 )하여 함께 오게 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1098년(숙종 3) 이후부터 여진의 고려에의 내 조가 크게 감소되었는데, 이는 이 시기에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여진의 성장과 자 립성에 의한 결과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결과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도 여진에 대 해 종전의 회유정책에서 탈피하여 분리정책을 구사하여 이들을 천시하는 경향도 없지 않 았다. 이때 송화강( 松 花 江 ) 일대에서 발흥한 완안부( 完 顔 部 )가 주변의 부족을 통일하고 고려의 변경을 침입하였는데, 이에 대응한 고려 측의 반격이 1104년(숙종 9), 1107년(예종 2)의 두 차례에 거친 여진 정벌이었다. 그 결과 한반도의 동북쪽의 넓은 지역에 9성이 축 조되어 국초이래의 북진정책이 처음으로 실천된 것 같았으나 새로운 영역을 유지할 수 있는 인적, 경제적 기반의 결여, 주화론( 主 和 論 )의 등장, 여진의 환부( 還 付 ) 요청 등으로 인해 2년 후에 환부되고 말았다. 이후 여진은 한반도 동북부를 지배하면서 고려의 영향 력 하에 있었던 여진세력을 굴복시켜 인적 물적 기반을 더욱 확충하여 패자로서의 발돋 움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2세기 여진이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면서 북동아시아의 정세는 다시 요동을 치게 되 자, 거란과 송은 여진과 접경하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던 고려를 자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고 하였다. 곧 송은 고려가 요 여진 양국의 사이에 있으므로 1077 년( 熙 寧 10)의 예에 의거하여 고려사신단을 우대하였으며(1111년), 사신의 명칭을 국신사 ( 國 信 使 )로 승격시켜 개봉부( 開 封 府 ) 변경( 汴 京 )에 파견되어 온 사신의 서열[ 班 次 ]을 서하 ( 西 夏 )의 상위에 두고 객성( 客 省 )으로 하여금 대접하게 하였다가(1113년) 다시 거란의 예 와 같이 추밀원에 예속시키기도 하였다(1115년). 또 휘종( 徽 宗 )은 고려사신 이자량( 李 資 諒 ) 등을 불러 예모전( 睿 謀 殿 )에서 사연( 賜 宴 )하고 여진을 초유하여 오게 하였고(1117 년), 고려의 세자가 문종( 文 宗, 父 王 )의 신병치료를 위해 요청한 의관( 醫 官 )을 파견하기도 하였다(1119년). 그러다가 1125년 12월 금이 연경( 燕 京 )을 함락시키고 다음해 1월 변경( 汴 京 )에 침입하자 4월 고려에게 군사를 동원하여 금을 후방에서 공격할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1126년). 이러한 송의 고려 사신에 대한 우대는 북진정책을 추진하려던 신종대( 神 宗 代 )의 고려 에 대한 외교정책보다 더 적극적인 자세인데, 신종의 별세 후에 이루어졌던 고려의 사신에 대한 지방관의 영접 거부, 배신( 陪 臣 )이라고 멸시, 사신관( 使 臣 館 )의 출입 제한, 상경( 上 京 )을 위한 지리도( 地 理 圖 )의 압수, 거란의 세작( 細 作 )으로 의심 등과 각종 박대 행위를 일삼던 종래의 무례에서 이탈한 것이다. 이는 종래에 고려가 여진과 긴밀한 관계를 지닌 형편을 인지하고 있었던 송의 어떤 환상에 의한 것이겠지만, 고려는 그러한 송의 욕구를 채워줄 형편이 아니었다. 또 송과 대치하고 있으면서 신흥의 여진과 접전하여야 할 노제국( 老 帝 國 ) 거란은 1115 년(예종 10) 1월 금을 창건한 아골타가 공격을 더욱 강하게 해옴에 따라, 같은 해 4월 이래 3차에 걸쳐 고려에 사신을 보내와서 조병( 助 兵 )을 요청하였지만 어떠한 도움도 받 지 못했던 것 같다. 거란의 고려에 대한 조병 요청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을 것으로 추 측되지만 양국의 자료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으니 실상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1120년(예 종 15) 2월 금이 거란이 고려에게 조병을 요청한 것을 질책하였음을 볼 때, 상경( 上 京, 현 内 蒙 古 自 治 区 巴 林 左 旗 林 东 镇 남쪽)이 함락된 5월, 또는 다음해 1월 중경( 中 京, 현 辽 寧 省 昭 乌 达 盟 寧 城 县 天 义 镇 大 明 乡 지역)이 격파될 때 까지도 고려에 대해 어떤 기대 를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1111년(예종 6) 송이 거란과 여진의 사이에 있던 고려를 전략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고 려의 사신을 우대하기 시작한 이래, 고려도 대륙에서의 전운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곧 같은 해 10월 중서문하성과 추밀원[ 兩 府 ]이 변방사( 邊 方 事 )를 의논했던 것, 예종이 다음해 5월 3품 이상에게, 11월 중서성에 각각 방어 대책을 하문한 것을 통해 알 수 있 다. 그러다가 아골타가 즉위한 1115년 이후 거란의 조병 요청이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 38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39
21 제 1 주제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고 양국 사신의 내왕이 예전과 같았으나 원병의 파견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 던 것 같다. 이 시기에 고려가 거란에 보낸 국서의 내용이 남아 있지 않아 고려가 취한 정 치적 입장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단지 1126년(인종 4) 7월 송이 고려에 금을 공격할 것을 요청한 답서에서 송이 먼저 금을 공격할 때 조병하겠다며 완곡하게 거절하였던 것 과 같은 태도를 취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함께 고려는 1116년(예종 11) 8월 이래 금이 내원( 來 遠 ) 포주( 抱 州 ) 2성을 공격하 려고 할 때 금에 사신을 보내 포주를 돌려주기를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고, 다음해(1117 년) 3월 금이 형제지국의 체결을 요구해 왔을 때 어떤 결정도 하지 아니하고 관망의 자세 를 취하였다. 또 1118년( 政 和 8) 2월 이래 송이 여진을 초유 연계하여 거란을 협공하려고 할 때(1120년, 海 上 之 盟 ), 고려에 파견되어 온 의관( 醫 官 )을 통해 여진을 끌어들여 거란 을 도모하려는 것은 잘못이며, 호랑( 虎 狼 )과 같은 여진을 대비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고 한다. 9) 이는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 형세를 살피며 가만히 기회를 엿보는 늑대와 같 은 여진에게 스스로 문을 개방하고 들어오라고 하는 송의 외교정책에 대해 고려가 반대 의 의사를 제시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상과 같이 12세기 전반 북동아시아에서 금 제국이 등장하여 거란이 멸망하고 송이 남쪽으로 몰려날 때 송 거란은 무력에 의한 적극적인 공세를 펴지 못하고 고려를 매개로 하여 수성( 守 成 ) 또는 역전( 逆 戰 )을 도모하였던 것 같다. 그렇지만 신흥제국( 新 興 帝 國 )의 등장에 대해 관망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던 고려의 후원을 받지 못하고 모두 패망의 길 을 걷게 되었다. 어쩌면 우유부단한 정책을 취하였다고 할 수 있는 고려도 쟁패전을 전 개하고 있던 제국( 帝 國 )들의 틈새에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여 접경하고 있던 신흥의 패 자( 覇 者 )로부터 일정한 담보를 제공받지 못하고, 겨우 자신의 영역이었던 압록강 동쪽지 역의 극히 일부분만을 회복하였을 뿐이다. 그 조차 지난날 거란에 신속하였던 체제를 그 대로 인정한 연장선 하에서 이루어진 결과였다. 결국 12세기 전반 고려가 취한 외교정책 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던 인국( 隣 國 )이 새로운 제국으로 등장할 때 호혜적 동맹을 형성하거나 승세에 편승하지 못하고, 중립적 자세를 취하여 방관하다가 피압박의 국가 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9) 貴 耳 集 권 下, 宣 和 元 年 間, 高 麗 遣 使, 一 旦 忽 上 奏, 以 其 王 病 求 醫, 上 擇 二 良 醫 往. 歲 餘 方 歸, 二 醫 奏, 王 館 醫 甚 勤, 謂 曰, 高 麗 小 國, 世 荷 國 恩, 不 敢 忘. 聞 天 子 用 兵, 遼 實 兄 弟 國, 苟 存 之, 猶 是 爲 中 國 捍 邊, 女 眞 乃 虎 狼, 不 可 交 也. 願 二 醫 告 諸 天 子, 早 爲 之 備. 太 平 治 迹 統 類 권25, 契 丹 女 眞 用 兵 始 末, 宣 和 元 年 六 月, 高 麗 國 忽 上 奏, 以 其 王 病 求 醫. 上 命 擇 二 良 醫 往, 歲 餘 方 遣 歸 奏, 館 二 醫 甚 勤, 謂 曰, 高 麗 小 國, 世 荷 國 恩, 不 敢 忘. 聞 天 子 用 兵, 遼 人 實 兄 弟 國, 苟 存 之, 尤 足 爲 中 國 捍 邊, 女 眞 虎 狼 不 可 交 ( 深 沈 不 可 測 ) 也. 願 告 之 天 子, 早 爲 備 之. ( )는 四 庫 全 書 本. 2. 고려 사람들이 몽골의 침입에 어떻게 맞서 싸웠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제목은 중학교 교과서의 몽골의 침입에 맞서다 라는 작은 제목에서 제시된 학습 의 목표이며, 이에 대한 설명 중의 일부분이 40여 년 간 계속된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 지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포로로 잡혀갔다. 로 기술되어 있다(두산동아 2011년 125 쪽). 또 종래의 국정교과서가 만들어질 때 강조되었던 무인정권의 몽골에 대한 항쟁에 대 한 서술이 축소되고, 이 전쟁에서 고려가 입은 피해, 양국이 강화한 이후의 사실들이 보 완되어 있다. 향후 13세기 후반 이후 대원몽골국( 大 元 蒙 古 國 )의 지배질서 안에 들어간 고 려가 멸망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자주성을 유지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좀 더 보강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이 시기 이전에 있었던 몽골과의 항쟁과정에서 고려 가 채택한 외교정책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206년(희종 2) 12월 대몽골국을 건립한 테무진[ 鐵 木 眞 ]이 점차 남진하여 1209년 12 월부터 금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함에 따라 하북지역은 다시 크게 혼란하게 되었다. 이 때 금의 예하에 있던 거란인[ 契 丹 遺 種 ]들이 궐기하여 1213년(강종 2) 3월 야율유가( 耶 律 留 哥 )가 요동에서 요( 遼, 후일의 大 遼 收 國 )를 건국하였지만, 1215년에 야율유가가 몽골 에 투항한 후 야시불( 耶 厮 不 )이 요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들은 몽골군의 토벌에 밀려 다 음해 8월 14일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쳐들어 왔다. 이후 거란군은 2년 5개월 동안 한반 도의 서북부에서 고려군과 치열한 쟁패전을 거듭하다가 1218년(고종 5) 12월 주력부대가 고려군에 밀려 강동성( 江 東 城, 현 平 安 南 道 江 東 郡 )에 들어갔다. 이때 고려군은 예상하지 못한 1만의 몽골군과 그들에 의해 이끌려온 2만의 동진군( 東 眞 軍 )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동진에서 한반도의 동북부지역을 거쳐 강동성으로 왔다고 한다. 이들 몽골 동진군과 합세한 고려군은 다음 해(1219년) 1월 14일 강동성을 함락시켰 고, 20일 몽골군의 지휘관 카친[ 哈 眞 ] 자라[ 札 剌 ]와 고려군의 지휘관 조충( 趙 冲 ) 김취려 ( 金 就 礪 )가 하늘을 가리키면서 형제관계의 동맹을 맺어 자손만대까지 이날을 잊지 않기 로 하였다고 한다. 이어서 몽골군의 지휘관이 파견한 사신이 고려에 도착하여 24일 고종 ( 高 宗 )을 알현하고 강화하였다고 한다. 이때 몽골과 고려는 형제국이 되었다고 하지만 전선의 지휘관 사이에 체결된 동맹이 몽골정부에 의해 승인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또 이 후 몽골에 의한 수많은 요구사항을 통해 볼 때 국가 간의 형제관계라는 것은 의문의 여 지가 없지 않다. 그런데 고려사 에는 1218년(고종 5) 12월 몽골군이 강동성의 인근에서 고려군과 조 우( 遭 遇 )하기 이전에 고려와 몽골이 접촉한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몽골군의 40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41
22 제 1 주제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한반도에의 진입은 사전에 아무런 통고도 없이 군대를 이끌고 월경( 越 境 )하였다고 이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전쟁 중이라고 하더라도 침략행위로 이해될 수 있다. 더 구나 양국이 강화한 이후 몽골정부의 고려에 대한 정치적 압박과 경제적 수탈, 그들이 파견한 지휘관들의 도륙, 사신들의 행패 등과 결부시켜 볼 때, 오랑캐[ 夷 狄 ] 중의 오랑캐 [ 韃 靼 ]의 장수에게는 오직 전쟁에서의 승리가 최고의 목적일 뿐 질서와 교섭, 그 어느 것 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으로 우리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몽골군이 한반도에 진입했던 1218년(고종 5) 12월 이전에 몽골의 사신이 고 려에 도착하여 강화를 도모하려고 하였던 흔적이 찾아지고 있어 몽골이 외국과의 첫 접 촉에서조차 야만적인 행동을 취하였던 것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고려군의 지 휘관이었던 조충의 묘지명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金 龍 善 2006년 335쪽). 이때 몽골국( 蒙 古 國 )의 지휘관 카친[ 合 珎 ] 자라[ 札 剌 ] 등이 군사[ 勝 兵 ] 만여 인을 거느리 고 동쪽 경계로부터 들어와서 강동성( 江 東 城, 岱 州 )을 10) 함락시키려 하면서, 다만 우리나 라와 화친을 청하고 거란에게는 복수를 하고자한다는 사연( 辭 緣 )으로 조충[ 公 ]의 군영 에 청하니 조충이 즉각 왕에게 보고하였다. 이보다 먼저 몽골국이 40여 인을 보내 첩( 牒 ) 을 가지고 선박을 통해 정주( 定 州 )에 도착시켜 금일과 같이 강화를 요청한 일이 있었다. 조정이 의논하기를 이들이 대요수국( 大 遼 收 國, 契 丹 遺 種 )인지 알 수 없고, 일반인이 몽골 문서( 蒙 古 文 書, 蒙 古 文 字 )를 위작( 僞 作 )하여 거란에게 복수한다는 명목을 들고 있지만, 실은 우리를 정탐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면서 마침내 회보( 回 報 )하지 않았다( 時, 會 蒙 古 國 軍 帥 合 珎 札 剌 等 率 勝 兵 万 餘 人, 自 東 鄙 入, 欲? 拔 岱 州, 只 請? 和 我 國, 復 讎 契 丹 之 辭, 請 於 公 軍 營?, 公 卽 奏 聞. 先 是, 蒙 古 國 遣 四 十 餘 人, 齎 牒 乘 船 定 州, 請 如 今 日 講 和 事. 朝 廷 議 以 爲 莫 是 契 丹 遺 種, 一 般 人 僞 作 蒙 古 文 字, 名 復 讎 契 丹, 實 欲 偵 探 我? 耶, 遂 不 報 ). 11) 이 자료를 통해 보면 카친[ 合 珎 ] 자라[ 札 剌 ]의 군사가 고려에 진출하기 이전에 몽골 국( 蒙 古 國 )으로 표기된 몽골정부가 첩( 牒 )을 소지한 40여 인의 사신단을 선박을 통해 정주(현 平 安 北 道 定 州 郡 )에 파견하여 고려와 강화하려고 하였던 것 같다. 그렇지만 고 려정부는 대요수국의 전쟁의 와중이어서인지 알 수 없으나 몽골사신에 의해 제시된 강화 제의와 대요수국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첩을 대요수국의 모략, 또는 일반인에 의한 위조 1 0 趙 ) 冲 墓 誌 銘 에는 江 東 城 이 岱 州 城 으로 表 記 되어 있는데, 이때의 勝 戰 으로 인해 江 東 縣 이 岱 州 로 昇 格 되었을 가능 성이 있다. 11) 이에서 添 字 는 實 物 判 讀 에서의 推 定 이 아니고 文 脈 을 통해 추측한 것이다. 라고 치부하고 회신하지 않았던 것 같다. 1209년(희종 5) 12월 이래 몽골은 금 제국을 대파하고 하북과 요동을 석권하고 있었 으므로 1211년(희종 7) 5월 금에 파견된 고려사신이 통주( 通 州, 현 北 京 市 通 州 區 )에서 몽골군을 만나 피살되어 그 시신이 금에 의해 송환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도 사신이 길 이 막혀 귀환하였고, 1214년(고종 1) 금에 파견된 사신이 몽골군으로 인해 중도에서 귀 환하였음을 통해 고려는 신흥제국 몽골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때 카친[ 合 珎, 哈 眞 ] 자라[ 札 剌 ]의 군량요청을 받은 조충과 김취려는 사태의 엄중성을 인지 하고 즉각 정병( 精 兵 ) 1천을 파견하여 미( 米 ) 1천 석[ 千 斛 ]을 주었다고 한다. 또 한광연 ( 韓 光 衍 )의 묘지명에 의하면 이때 몽골군이 왔다는 사실을 접한 3군의 사기가 크게 저하 되었다고 한 점을 보아 당시 유라시아에서 공포의 대상이었다는 몽골군은 고려인에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이처럼 욱일승천과 같았을 몽골제국의 형편을 고려의 위정자들도 파악하고 있었을 것 임에도 불구하고 몽골사신을 처음 접한 정주( 定 州 )의 지방관이 박대하여 축출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고려정부가 몽골의 강화요청을 요구한 사신단과 첩에 대한 대처가 상대국의 제의에 대한 수락, 반발, 무대응, 묵살 중의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 비외교 적 대응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고려정부의 처사는 몽골에게는 묵살로 받아들여질 수 도 있었을 것이고, 양국 간의 공동관심사 또는 상호이익이 거부된 것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는 향후 양국 사이의 폭력행위의 실마리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반복될 때 정치 또는 외교의 최후 수단이라고 불리어지는 전쟁으로 이어 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시 고려정부의 지향점이 없는 외교적 자세는 이후에도 이어졌을 가능성이 농후한데, 이는 1224년(고종 11) 1월 몽골의 영향력으로부터 이탈하려던 동진이 사신을 보내와 몽 골과의 단절을 전하고 호시( 互 市 )를 요청하였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당시 고려 가 몽골과 형제맹약을 체결한 국가였다면 동진의 요청이 접수될 수 없을 것이고, 다음해 에 일어난 탐욕적이었다고 하는 자구르[ 著 古 與 ]의 피살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1129년(고종 16) 2월 이래 고려는 동진과 화의를 의논하였는데, 이것이 다음 해의 몽골에 의한 고려정벌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고, 1231년(고종 18) 8월 몽골원수 사르 탁[ 撒 禮 塔 ]에 의한 고려정벌로 이어졌던 것 같다. 또 1232년(고종 19) 12월 사르탁이 김 윤후( 金 允 侯 )에 의해 사살되었을 때 고려는 국서를 동진에 보내 몽골과의 화호는 본의 가 아닌 것, 사르탁의 사살, 몽골군의 철수 등을 전하고 동맹을 요청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몽골의 침입을 방어할 수 없는 약소국가들이 공동방어에 나서겠다는 무모한 약속 42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43
23 제 1 주제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고려가 택할 외교정책이 아니라 섶을 지고 불난 집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패망의 길을 자초한 것이었다. 12) 이후 고려의 지배층들은 과거 그들의 선조( 先 祖 )들이 실행했던 상대국과의 전쟁 화의 ( 和 議 )라는 전술 배합의 병행 위에 제3자와의 연대 모색을 통한 국익의 확보라는 외교정 책을 구사하지 못하다가 대원몽골국의 지배질서 하에 들어서고 말았다. 또 이 시기의 지 배층들은 오랑캐들로부터 국가[ 王 朝 ]와 신민( 臣 民 )을 지켜야 한다고 선창( 先 唱 )하였을 것이지만, 그들의 행동거지를 통해 볼 때 자신과 일족들의 온전한 삶을 보전하기 위해 전쟁을 지속적으로 이어 갔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Ⅴ. 맺음말 이상에서 10~13세기의 북동아시아 3국의 국제정세의 변화, 이에 따른 고려정부가 취 한 외교정책의 여러 유형과 그 결과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의 소결론들을 모아 결론으로 삼고자 한다. 먼저 고려왕조의 창업자인 태조 왕건의 외교정책의 하나로 이해되고 있는 942년의 만 부교 사건은 제왕( 帝 王 )으로서의 올바른 정치행위라고 판단하기에 어려움이 있고, 국익의 관점에서도 이해되지 않는 조치일 것이다. 또 태조의 그러한 행위는 상대국의 제의에 대한 즉각적인 반발이며, 국가 간에 대립이 있을 때 군비의 강화만이 공존의 근간이 될 수 있 다는 강경노선을 채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993년 서희와 소항덕의 사이에 이루어진 담판은 여러 면에서 후세의 귀감이 될 수 있는 모범적인 외교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 이는 고려정부가 취한 실리적 외 교의 하나로서 이후의 외교정책의 결정에서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곧 신속( 臣 屬 )을 전제로 한 조공과 책봉을 제시한 서희와 이를 채택한 성종의 외교정책은 국가를 안정시키고 서북쪽의 연해지역을 확보하여 국경선을 압록강구까지 확장시켰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일면 경쟁에서 화평, 공존으로 나아가는 좋은 외교정책 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한반도의 정세에 큰 영향력을 줄 수 없는 어느 특정 국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가 자주성을 상실하고, 영역의 회복이라는 국시( 國 是 )조차 12) 어떤 특정 강대국(great power)의 군사력이 너무나 강할 때는 중 소국에 의한 세력균형 역할은 불가능 할 것이다. 방기한 방책이었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셋째, 1019년(현종 10) 고려가 거란을 격퇴한 후 북동아시아 3국은 세력 균형을 이루 며 어느 정도 평화를 유지하였다고 하지만, 3국이 비슷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여 세력 균형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곧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초반에 걸친 북동아시아의 정세 는 북쪽에 위치한 거란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의해 송과 고려는 모두 북진이 좌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란군의 침입에 대해 천도론과 할지론이 제기되는 유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 국경선의 방어에 급급한 형편에서 송은 세폐( 歲 幣 )를 통해, 고려는 신속을 통해 영역의 경계[ 地 界 ]를 확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형편 하에서 고려와 거란 사이에 체결된 조공 책봉체제는 왕도정치를 표방하 는 통치자가 인민을 교화하기 위해 먼저 행하여야 하는 기본덕목의 하나인 인정( 仁 政 )에 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실상을 해부해 보면 이 시기 북동아시아 3국의 외교 방침은 오로지 국제관계의 기본 바탕인 자국의 이익을 위해 패권의 쟁탈과 패자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는 것이고, 인의( 仁 義 )에 입각한 외교는 하나의 공구( 工 具 )일 뿐인 한비 자에 의해 주창된 패도( 覇 道 )의 선양이었을 뿐이다. 넷째, 12세기 전반 북동아시아에서 금 제국이 등장할 때 송 거란은 무력에 의한 적극 적인 공세를 펴지 못하고 고려를 매개로 하여 수성 또는 역전( 逆 戰 )을 도모하였던 것 같 다. 그렇지만 고려의 어떠한 후원도 받지 못하여 모두 패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고려도 쟁패전을 전개하고 있던 제국( 帝 國 )들의 틈새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패자( 覇 者 ) 가 된 인국( 隣 國 )과 호혜적 동맹을 형성하거나 승세에 편승하지 못하고, 중립적 자세를 취하여 방관하다가 피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다섯째, 13세기 전반 고려의 무신정권은 중원( 中 原 )에서 새로운 패자로 등장한 몽골에 대한 정보와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그들의 교섭제의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 한 채, 임기응변적으로 동진( 東 眞 )과 같은 약소국과 함께 공동방어에 나서겠다는 외교정 책을 채택하기도 하였다. 곧 국초이래의 상대국과의 전쟁 화의라는 전술 배합의 병행 위 에 제3자와의 연대 모색을 통한 국익의 확보라는 외교정책을 구사하지 못하다가 대원 몽골국의 지배질서 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는 고려의 전통적인 세력 균형 정책이 대적이 없는 강한 군사력을 지닌 몽골제국에게 수용되지 않았던 결과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 다. 그렇다면 대원몽골국의 강한 압제 하에서 국가를 온전하게 살려 낼 수 있었던 당시의 외교정책은 어떠한 방책이었는가를 찬찬히 살펴보면서 한반도 분단이라는 현재의 외교 상황을 우리 역사학자들도 함께 생각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44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45
24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참고문헌 具 山 祐, 高 麗 成 宗 代 對 外 關 係 의 展 開 와 그 政 治 的 葛 藤 韓 國 史 硏 究 7 8, 金 龍 善, 高 麗 墓 誌 銘 集 成, 翰 林 大 學 出 版 部, 2006 朴 宗 基, 11 世 紀 高 麗 의 對 外 關 係 와 政 局 運 營 論 의 推 移 歷 史 와 現 實 30, 1998 徐 聖 鎬, 高 麗 太 祖 代 對 契 丹 政 策 의 推 移 와 性 格 歷 史 와 現 實 34, 1999 外 交 通 商 部, 21 世 紀 創 造 的 實 用 外 交 와 徐 熙 ( 發 表 要 旨 ), 2009 李 基 白, 高 麗 兵 制 史 硏 究, 一 潮 閣, 1968 李 鎭 漢, 高 麗 武 臣 正 權 期 宋 商 의 往 來 民 族 文 化 3 6, 李 孝 珩, 渤 海 遺 民 史 硏 究, 釜 山 大 學 校 博 士 學 位 論 文, 2004 張 東 翼, 宋 代 麗 史 資 料 集 錄, 서울대출판부, 2000 張 東 翼, 高 麗 時 代 의 對 外 交 涉 과 海 防 韓 中 日 의 海 洋 認 識 과 海 禁, 東 北 亞 歷 史 財 團, 2007 張 東 翼, 高 麗 時 代 對 外 關 係 史 綜 合 年 表, 東 北 亞 歷 史 財 團, 2009 張 東 翼, 佛 典 의 流 通 을 통해 본 高 麗 時 代 의 韓 日 關 係 石 堂 論 叢 58, 2014a 張 東 翼, 高 麗 世 家 初 期 篇 補 遺 1 2, 景 仁 文 化 社, 2014b 韓 圭 哲, 渤 海 의 對 外 關 係 史, 新 書 苑, 1994 韓 國 中 世 史 學 會, 中 國 에서 바라본 第 1 次 麗 遼 戰 爭 과 徐 熙 ( 發 表 要 旨 ), 2012 森 平 雅 彦 等, 櫟 翁 稗 說 譯 註 年 譜 朝 鮮 學 1 4, 宇 野 伸 浩, 遼 朝 皇 族 の 通 婚 關 係 にみられう 交 換 婚 史 滴 1 7, 張 東 翼, 高 麗 時 代 の 對 外 關 係 の 諸 相 東 アジ ア 海 をめぐる 交 流 の 歷 史 的 展 開, 東 方 書 店, 川 口 卯 橘, 傳 說 の 都 開 城 と 其 古 蹟 名 勝 朝 鮮 史 學 5, 宋 史 提 要 編 纂 協 力 委 員 會, 宋 代 史 年 表 ( 北 宋, 南 宋 ), 東 洋 文 庫, 1967, 1974 李 云 泉, 朝 貢 制 度 硏 究, 新 華 出 版 社, 2004 Thomas A. Bailey, A Diplomatic of the American People, 10th. ed. (Englewood Cliffs, NJ:PrenticHall, 1980) David. C. Kang, East Asia before the West : Five Centuries of Trade and Tribute(New York:Columbia University Press, 2010) Hans J. Morgenthau, Politics among Nations : The Struggle for Power and Peace(New York:Alfred A. Knopf, 1949, p.440) 제2주제 발표 제도와 정책의 수용과 배제 화풍( 華 風 )과 토풍( 土 風 )의 공존과 갈등 구 산 우 창원대학교 교수 46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25 제 2 주제 제도와 정책의 수용과 배제 제도와 정책의 수용과 배제 화풍( 華 風 )과 토풍( 土 風 )의 공존과 갈등 구 산 우 (창원대학교 교수) 1. 머리말 2. 성종대의 외교 관계와 도입 문물 3. 송 (문물)과 거란 (문물)에 대한 인식 4. 제도의 개혁 추진과 정치적 대립 1. 머리말 아시안게임 개최를 기념하고 이를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열리는 이번 국제학술 대회의 전체 주제는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이다. 발표자는 전체 주제 속의 세부 과제인 제도와 정책의 수용과 배제 - 화풍과 토풍의 공존과 갈등 에 대하 여 발표한다. 주최 측이 발표자에게 원래 의뢰할 때에는 원간섭기에 일어났던 통제론( 通 制 論 )과 국속론( 國 俗 論 ) 에 대해서도 아울러 검토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는 발표자가 지닌 능력 밖의 일이므로 여기서는 배제하기로 한다. 발표에서 다룰 주제인 이른바 화풍과 토풍 문제는 성종대(982~997)에 본격적으로 제 기된다. 이 시기는 정치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전환기에 해당한다. 먼저 국내 정치의 측면에서 보면, 고려가 건국된 후 왕조의 창업자인 태조가 죽고, 그 후에 벌어진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전개된 왕실과 외척을 비롯한 정치세력 사이의 치열한 권력 투쟁이 광종대를 고비로 일단락되면서 중앙집권화의 기초가 마련되었고, 성종대에 는 그 성과를 바탕으로 유교적으로 체제를 정비하는 일련의 정책이 시행된 시기였다. 그리고 동북아시아의 외교적 측면에서 보면, 성종대는 송과 거란 및 고려의 삼국 사이 국제 관계가 거란 주도의 형세로 변형시키고 이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는 결정적 계기가 49
26 제 2 주제 제도와 정책의 수용과 배제 되었던 전쟁으로서, 이른바 거란의 제1차 고려 침공이 일어났던 시기이다. 국내외적으로 이처럼 큰 전환기에 처해 있었던 성종대에 제도와 정책이 어떻게 수용되 었으며, 이를 둘러싼 정치세력 사이의 견해 차이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발표에서 정리 하기로 한다. 2. 성종대의 외교 관계와 도입 문물 성종대의 고려 외교는 12년 5월에 일어난 거란의 제1차 고려 침공을 기준으로, 그 이전 에는 송을 중심으로, 이후에는 거란을 중심으로 한 관계로 급변한다. 제1차 거란 침공 이전 고려가 송을 대상으로 펼친 외교관계에서 얻어내려 했던 것은 유교와 불교의 두 방면에 모두 걸쳐 있다. 유교 방면의 첫 번째 수입 대상은 유교 서책류였다. 그 중 하나는 종묘와 사직에 관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서류였다. 전자는 도입에 성공하여, 성종대에 추진된 유교적 체제정비의 큰 성과로 꼽히는 종묘와 사직 제도의 정비에 실제로 활용되었다. 후자는 정 확한 책명은 알 수 없고, 판본으로 된 9경서( 經 書 )라 했으나, 사신을 태운 배가 돌아오 는 길에 풍랑을 만나 유실함으로써 도입에 실패했다. 그리고 고려는 두 명의 유학생을 송에 파견하였고, 송의 추밀원을 본받아 새로운 정치기구로서 중추원을 설치했다. 불교 경전의 수입도 두 번 행해진다. 분량과 종류를 알 수 없으나, 고려는 성종 8년에 1 차로 대장경 을 입수했고, 성종 10년에도 사신을 보내 대장경 을 다시 도입했다. 제2차 도입은 제1차 도입의 연속선상에서 추진되었으며, 이때 입수한 불교 경전은 대장경 을 비 롯한 불교 서책류로서, 특히 대장경 의 분량이 481함( 函 ) 2,500권으로 밝혀져 있다. 고려가 성종 10년에 입수한 송의 대장경 은 당 나라 때 목록 등 기초 작업이 성취되 었으나 끝내 마무리하지 못한 채 미완성의 형태로 있었던 사업을 송에서 972년부터 12년 의 작업기간을 거쳐 984년(고려 성종 2년)에 완성한 것으로서 일명 촉판( 蜀 版 ) 대장경 으로 불리는 것이다. 촉판 대장경 은 대장경 으로 일괄하여 펴낸 최초의 것이라는 점 에서, 한역( 漢 譯 )으로 된 불교 경전과 대장경 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 로 널리 알려져 있다. 촉판 대장경 의 분량은 480함 5,048권인데, 고려가 입수한 촉판 대장경 의 분량을 보면, 함수는 일치하지만 권수는 약 절반에 해당한다. 성종대에 송과의 교섭을 통해 고려는 유교 서책류, 유학생 파견, 대장경 등의 불교 서책류, 정치기구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친 문물을 도입하여, 국내의 정치 사회 등의 체제 정비에 활용하였다. 송은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거란에게 상실했던 영토를 수복하고 동북아시아의 주도 권을 탈환하기 위해 고려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구했다. 당시 송은 이전에 거란에게 할양 한 연운( 燕 雲 ) 16주( 州 )를 회복하려는 군사 작전을 시도하기 위해 고려에게 군사적 지원 을 요청했다. 성종 4년 5월에 송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거란과 벌일 전쟁에서 노획한 전 리품을 모두 고려에게 주겠다고 제의하고, 고려가 출병할 수 있는 명분으로써 성종이 화 풍을 사모했다는 점, 고려가 그간에 당한 거란의 침탈을 복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들었 다. 송의 다급하고도 절실한 요청을 접한 고려는 처음에 시일을 지체하는 등 미온적 태 도를 취했다. 고려의 이런 미적지근한 태도를 본 송 사신이 재차 출병할 것을 촉구하자, 고려는 마지못해 출병을 약속했다. 3. 송 (문물)과 거란 (문물)에 대한 인식 송과 거란, 송 문물과 거란 문물에 대한 당시 고려의 인식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 문제 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고려 왕조의 창업자인 태조 왕건이 이에 대해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고, 아울러 최승로( 崔 承 老 )의 시무책( 時 務 策 )에서 나타나는 성종대의 그 것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최승로는 거란 침공 이전 고려 정계의 중심인물이었고, 그가 생 존한 시기까지 고려 외교정책의 근간을 마련했으며, 송과 거란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자료를 남겼다. 송과 거란에 대한 태조와 최승로의 인식을 상호 비교함으로써, 건국 이 후 성종대까지 펼쳐진 송과 거란에 대한 외교 정책의 기조를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자료는 중국과 중국 문물에 대한 최승로의 인식을 보여준다. 1 쌍기( 雙 冀 )를 등용한 이후로 문사( 文 士 )를 존중하여 은례( 恩 禮 )가 지나치게 풍성한 까닭에 비재( 非 才 )가 많이 나아가서 차례를 뛰어넘어 빨리 진급하고 두 해도 되지 않아 문득 경상( 卿 相 )이 되고 군국( 軍 國 )의 요무( 要 務 )가 막혀 불통하고 이에 남북용인 ( 南 北 傭 人 )이 다투어 의투( 依 投 )하기를 원하며 그 지혜와 재능을 고려하지 않고 모두 특 별한 은례로써 대우한 까닭에 후생( 後 生 )은 다투어 나아가는데 구덕( 舊 德 )은 쇠퇴했습니 다. ( 고려사 권93, 최승로전) 50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51
27 제 2 주제 제도와 정책의 수용과 배제 2 (광종은) 비록 화풍( 華 風 )을 중히 여겨도 중화( 中 華 )의 영전( 令 典 )은 얻지 못했고 비 록 화사( 華 士 )를 예우했다 하더라도 중화의 현재( 賢 材 )를 얻지 못했습니다. ( 고려사 권93, 최승로전) 위의 두 자료는 최승로 시무책 속에 나오는 광종의 치적을 평가한 부분에 있는 것이 다. 최승로는 태조 이후의 역대 군주 중에서 광종을 가장 혹평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1에서 보듯이 광종대에 군국의 요무가 불통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써 중국인 쌍기의 등용을 꼽고 있다. 최승로가 쌍기의 등용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고 해서 그를 중국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진 것으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최승로는 2에서 보듯이 중 화의 영전( 令 典 )과 현재( 賢 材 )를 얻을 수 있다면, 중국과의 교섭을 통해 문물을 적극적 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에 가깝다. 여기서 중화의 영전과 현재란 중국의 선진 문물 과 인재를 말한다. 중국 문물과 토착적 풍토와 습속에 대한 최승로와 왕건의 인식을 보여주는 다음 자 료를 검토해보자. 3 중국[ 華 夏 ]의 제도는 준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방( 四 方 )의 습속이 각기 토성( 土 性 )을 따르므로 모두 변화시키기 어렵습니다. 그 중 예악( 禮 樂 ), 시서( 詩 書 )의 가 르침과 군신, 부자의 도리는 마땅히 중국[ 中 華 ]을 본받아 비루함을 고쳐야 할 것이나 그 나머지의 거마( 車 馬 ), 의복( 衣 服 ) 제도는 토풍( 土 風 )에 따라 사치와 검약을 적절하게 하여 반드시 꼭 같게 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 고려사 권93, 최승로전) 4 우리 동방( 東 方 )은 오래 전부터 중국 풍습[ 唐 風 ]을 본받아 문물, 예악제도를 모두 그대로 준수하여 왔다. 그러나 지역이 다르고 인성( 人 性 )이 각기 같지 않으니 구태여 억지 로 맞출 필요는 없다. ( 고려사 권2, 태조 26년 4월) 리된다. 태조는 훈요10조에서 거란을 금수의 나라로 파악하고, 풍속과 언어가 고려와 다르므 로 거란의 의관( 衣 冠 ) 제도를 본받지 말라고 후대 왕들에게 당부했다. 태조는 거란을 야 만 미개의 나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그는 통교하기 위해 파견한 거 란의 사신을 억류하고 거란이 선물로 보낸 낙타를 굶겨 죽인 일이 있다. 외교 사신을 억 류하고 사신이 가져온 선물을 버린다는 것은 전쟁 중에 파견하는 사신에게도 잘 행하지 않는 것으로서, 이는 외교 관례상으로 매우 어긋난 처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태조가 거란을 외교적으로 이처럼 대우한 것은 거란에 대한 그의 강경한 인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거란을 금수의 나라로 간주하고 외교적인 통교를 거부한 태조의 대거란 외교정책을 최승로는 심원한 계책이라 하여 극찬했다. 최승로의 시무책에서 거란에 대한 구체적 인 식을 보여주는 기록은 없으나, 태조의 대거란 외교정책을 극찬하고 있는 점을 유추하면, 거란과 거란문물에 대한 최승로의 생각은 태조의 그것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송, 거란, 여진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여러 상대에 대한 최승로의 외교정책은 태조의 그것을 그대로 계승하는 것이었다. 최승로가 태조대의 외교정책을 고수한 것은 그 사이 에 일어난 국제 환경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근본적 취약성을 갖고 있다. 특히 그간 송을 제압하고 동북아시아의 최강국으로 떠오른 거란의 움직임에 대한 올바 른 대처를 하기 어려울 만큼 현실감각을 상실하고 있었다. 거란에 대한 이런 자세는 당 시에 큰 문제를 야기했다. 송과의 국경 문제가 안정되면, 이어서 군사 작전을 통해 고려 를 제압한다는 거란의 장기 계획을 고려가 제대로 읽어내서 이에 대비하지 못했고, 그것이 거란의 제1차 침공에서 고려가 패배한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3은 최승로 시무책, 4는 태조의 훈요10조에 있는 자료이다. 두 자료를 검토해보면, 중국 문물과 토착적 풍토에 대한 최승로와 태조의 입장은 같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태 조와 최승로는 예악, 시서와 같은 이념적 정신문화와 거마, 의복 등의 물질문명을 구분 해서 수용하려는 입장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악, 시서로 표현된 교화의 기준과 윤리 규범 등은 중국의 것, 즉 화풍을 받아들이고, 거마 의복 등 일상화된 물질 제도는 우리의 토착적 풍토와 습속, 이를테면 토풍에 따르자는 것으로 정리된다. 중국 문물과 토착적 풍토에 관한 두 사람의 공통적 생각은 정신문화와 물질문명 등 영역에 따라 화풍과 토풍을 구분하여 받아들임으로써 양자의 조화를 추구한 것으로 정 4. 제도의 개혁 추진과 정치적 대립 성종대에 고려는 송으로부터 2회 경전( 經 典 )을 비롯한 유교적 서책을 도입하려 했다. 도입에 성공한 유교 전범( 典 範 )은 종묘와 사직에 관한 책서( 書 冊 )이다. 종묘와 사직에 관한 서책을 도입할 당시, 고려 정국은 최승로 시무책이 정책 준거로 수용되어 정치 사회 방면의 유교적 체제정비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시기였다. 종묘에 관한 서책을 송에서 입수한 후 5년이 지난 성종 7년에 종묘의 건립 계획을 확 52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53
28 제 2 주제 제도와 정책의 수용과 배제 정하고, 성종 11년에 완공한다. 그 과정에서 성종은 백관( 百 官 )을 거느리고 몸소 재목을 운반하는 열의를 보인다. 종묘 건립을 완공할 시점에도 종묘 운영의 기본인 소목( 昭 穆 ) 의 위차( 位 次 )와 체협( 禘 祫 ) 의례를 확정짓지 못하고 있었고, 그 시점부터 논의를 하기 시 작했다. 성종의 생부인 대종( 戴 宗 )도 제5실에 모셔진다. 이 무렵에 원구제( 圓 丘 祭 ), 적전( 籍 田 )과 같은 유교 의례도 시행되었다. 원구제가 중국 천자가 거행하는 제천( 祭 天 ) 의식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당시 성종과 지배세력이 추진 한 일련의 유교적 의례 체계를 정비한 의도가 중국을 모델로 삼은 것임을 유추하기 어렵 지 않다. 말하자면 그것은 송과의 외교관계에서 얻어진 성과를 바탕으로 추진된 소중화 적( 小 中 華 的 ) 유교 정책의 추진, 곧 화풍적인 유교체제의 정비로 생각된다. 당시 송의 황제는 외교 문서에서 고려 성종의 이런 정책 추진을 화풍( 華 風 )이라는 표 현을 사용하여 매우 적극적으로 평가했다. 송의 이런 높은 평가에 고무되어 성종은 이에 상응하는 다른 사대적 조치를 시행했다. 성종과 지배세력이 추진한 유교적 체제정비는 단기간에 급속히 추진되었으므로, 여기 에는 한계가 드러나기도 했다. 적전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적전 의례가 시행된 후 얼마 동안, 적전 행사를 올바로 거행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절차를 빠뜨리고 있었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주례( 周 禮 ) 에 따르면, 적전 의례에서 국왕은 반드시 왕후가 눈을 틔워 바친 종자( 種 子 )를 심어야 하는데, 그때까지 고려에서는 이 절차를 빠뜨리고 적전 의례를 시행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미 뿌리내린 사회 관행이나 습속을 단기간에 도입한 새로운 유교적 의례로 일 거에 대체하는 것에는 많은 무리가 뒤따랐다. 그러므로 종전의 관행을 그대로 두거나, 종전의 관행과 새로운 유교 의례를 병행하는 형태로 추진되는 경우도 있었다. 반면 유교 적 의례를 일방적으로 강행하는 경우에는 많은 반발이 일어났다. 왕실 제례( 祭 禮 )의 경우는 전자의 측면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왕실의 제사를 유교 적으로 거행하는 장소인 종묘가 건립되고 있는 시기에, 성종은 태조와 자신의 생부모 제 사를 불교식의 기재( 忌 齋 )로 봉행했다. 고려가 송으로부터 대장경 등 불교 경전을 수 입한 사실을 아울러 생각해보면, 이는 당시 유교적 체제정비가 불교를 일방적으로 배척 하는 형태로 추진된 것이 아니라, 불교와 공존하면서 동시에 유교가 우위에 있는 의례 ( 儀 禮 ) 체계를 확립하려는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종묘가 건립된 후에도 고려의 역대 국 왕은 유교식으로 종묘 제례와 불교식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병행했던 점을 보면, 이 는 고려 왕실이 거행하는 제례의 특징적인 형태임을 말해준다. 성종과 지배세력이 유교적 의례를 일방적으로 무리하게 추진하는 과정에서, 다른 정책 이념을 가진 정치세력으로부터 가장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의례는 팔관회를 비롯한 전통 신앙 분야였다. 거란의 제1차 침공을 받은 직후 고려가 거란에 일방적으로 패전하 고 있었던 무렵에 열린 조정 회의에서, 이지백( 李 知 白 )은 국가가 멸망할 수도 있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건의했다. 태조가 나라를 창건한 후 대를 이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충신이 한 사람도 없어서 갑자 기 국토를 떼어주려고 하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청컨대 금은보화를 소 손녕에게 주고 그의 속마음을 타진해 보십시오. 또한 국토를 경솔하게 적국에 할양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선대로부터 전해오던 연등( 燃 燈 ), 팔관( 八 關 ), 선랑( 仙 郞 ) 등의 행사를 복구하고 타국( 他 國 )의 색다른 풍습[ 異 法 ]을 행하지 말아 그리하여 국가를 보전하고 태 평을 누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렇다고 여기신다면 응당 먼저 신명( 神 明 )에게 고하고 연후에 결전이냐 혹은 화의냐 하는 문제는 오직 주상께서 결정하십시오. ( 고려 사 권 9 4, 서희전 ) 이지백이 제시한 주장은 당시의 급박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선결 과제를 해결하 고 그 후에 결전 여부를 결정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선결 과제로 제시한 부분은 연등, 팔 관, 선랑 등의 전통적 행사를 복구하고 타국의 이법을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상으 로 보면, 이런 그의 주장은 한시가 급한 전시국면의 수습책으로는 다소 한가로워 보인 다. 그렇다면 타국의 이법이란 무엇이며, 이지백이 이런 주장을 내세운 것은 무슨 까닭일 까. 위의 기록의 말미에 있는 사신의 주에서 당시 성종은 화풍을 즐겨 모방하려 했으며, 국인( 國 人 )이 이를 달가워하지 않은 까닭에 이지백이 이 문제를 언급한 것 이라고 밝힌 점이 주목된다. 이 기록을 주목한다면, 이지백이 거론한 타국의 이법은 화풍을 가리킨다 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복구할 것을 건의한 연등, 팔관, 선랑 등의 행사는 다른 기록에 따르면 선조( 先 祖 )의 법도를 준수하는 토풍적 행사로 표현되어 있다. ( 익 재난고 권9하, 사찬 성왕) 따라서 그는 당시 위기가 초래된 근본적 원인은 거란 침입이 라는 현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간 화풍 정책이 사회적 여건과 유리된 채 추진되어 전 통적으로 주체적 정신기반을 이루어 온 토풍적 행사가 폐기된 것에 있다고 파악했음을 알 수 있다. 연등회와 팔관회는 고려시대에 국가적으로 행해지던 대표적 불교 행사이면서도 서로 다른 특색이 있다. 연등회는 수순한 불교신앙적인 성격이 강한 반면에, 팔관회는 산악 ( 山 嶽 )신앙, 용신( 龍 神 )신앙과 같은 전통신앙과 관련이 깊은 행사로서 연등회보다는 토 54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55
29 제 2 주제 제도와 정책의 수용과 배제 착적 성격이 더 두드러지는 행사로 알려져 있다. 태조는 훈요10조에서 이 두 행사를 폐지 하지 않고 지속시킬 것을 당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기록을 보면, 거란 침입 당 시에 연등회, 팔관회 등의 풍속이 거행되지 않고 폐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연등회와 팔관회 등 전통 행사가 폐기된 계기와 시점은 최승로 시무책이 수용된 후, 이에 따른 정책적 실현의 결과로 보인다. 최승로는 연등회와 팔관회의 폐지를 주장하지 는 않았다. 최승로 시무책이 정책적 준거로 수용된 이후 거란 침입 이전 시기의 연대기 자 료를 살펴보면, 연등회가 혁파된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성종 6년에 팔관회가 폐지된 기록이 있다. 연대기 기록상으로 팔관회 폐지 기록만 나타나는 이유는 팔관회가 거행되 는 장소가 개경과 서경 등 정치적 비중이 큰 도읍에서만 거행되는 행사이고, 연등회보다 는 전통적 성격을 더 강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선랑도 신라시대 화랑제도의 유제로서, 불교와도 긴밀히 결합되었다. 선랑은 고려초기의 법경대사( 法 鏡 大 師 ) 비문에서 승( 僧 ), 속( 俗 )과 함께 랑( 娘 ) 으로 기록되기도 했으며, 현종대의 예천 개심사( 開 心 寺 ) 석 탑을 건립한 추향도( 椎 香 徒 )를 이끈 임원의 하나로 나타난다. 그리고 팔관회 행사의 하 나로 포용되었으며, 전통신앙의 요소가 강하게 배어 있는 제도였다. 위의 기록에서 이지백은 성종에게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여긴다면, 먼저 신명( 神 明 )에게 이 사실을 고하고 차후에 결전 여부를 결정하자고 건의했다. 여기서 신명이란 토풍적 행 사인 전통신앙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받드는 정신적 실체인 신주( 神 主 )를 말하는 것이다. 최승로는 산악 제사와 성수( 星 宿 )의 초( 醮 )를 전통신앙의 대표적 실례로 거론하면서, 여 기서 받드는 신명의 효용성과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이처럼 전통적 신앙에 대한 이지백과 최승로의 입장은 극히 대조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각도에서 이지백의 건의가 지닌 역사적 배경을 분석한다면, 성종대 제도 와 정책의 수용과 배제 화풍과 토풍의 공존과 갈등 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 될 수 있을 것이다. 최승로의 시무책이 성종 즉위 이후 정치 개혁의 준거로 받아들여지면서, 제도의 개혁 기 준으로서 정신문화는 화풍, 물질문명은 토풍을 채택했다. 화풍에 의한 정신문화의 제도 적 개혁은 송에서 입수한 유교 전범을 기준으로 추진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불교 행사와 전통적 신앙인 연등회, 팔관회, 선랑은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태조는 훈요10조에서 연등 회와 팔관회 행사를 폐기하지 말고, 계속 거행해 줄 것은 후대 국왕에게 간절하게 당부 했다. 최승로도 연등회와 팔관회 행사에서 소모되는 막대한 비용과 제도적 폐단의 시정 을 지적했을 뿐이고, 두 행사의 폐지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연등회와 팔관회를 전면 폐 지할 것을 주장하지 않았던 태조와 최승로의 공통 인식은 당시 화풍과 토풍이 공존할 수 있는 정책적 공간이라고 여겨진다. 당시 송으로부터 막대한 분량의 촉판 대장경 을 도입한 것도 당시 유교적 체제정비가 불교를 전면 배척하는 형태의 배불론( 排 佛 論 )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좋은 근거가 된다. 이런 측면들은 당시 화풍과 토풍이 공 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책적 공간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지백의 건의문을 보면 거란의 1차 침공 당시에 선랑은 물론이 거니와 연등회와 팔관회가 이미 폐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지백의 상소문은 당시 종교 신앙 등 정신문화 방면의 제도 개혁이 송에서 수입된 유교 전범을 바탕으로 유교의 절대 적 우위에 입각한 형태로 전개된 것으로서, 불교와 전통신앙의 행사를 일방적으로 폐지 혹은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추진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성종 초반에 정국을 주도 하던 세력은 송과 유교적 체제정비를 모델로 한 이른바 화풍적 정신문화를 지향한 제도 개혁을 추진했으며, 그 결과 연등회, 팔관회의 불교 행사나 신명을 받드는 토풍적 전통 신앙이 폐지 혹은 축소되었고, 따라서 토풍적 행사의 가치를 존중하는 이지백 등의 세력 은 이에 강력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지백 등과 같은 토풍적 정신을 담은 종교 신앙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정치 세력 이 거란의 1차 침공 이후에 일어난 정국 주도세력으로 등장하면서, 팔관회 등 유교 우 위의 화풍적 정책을 추진했던 세력이 그간 폐기했던 토풍적 행사를 복구했다. 이후 고려 사회에서 팔관회, 연등회, 선랑 등의 행사는 불교와 전통 신앙 방면에서 가장 빈번하게 거행되는 행사들로 자리잡았다. 참고문헌 金 哲 埈, 崔 承 老 의 時 務 二 十 八 條 韓 國 古 代 社 會 硏 究, 지 식 산 업 사, 金 成 俊, 十 訓 要 와 高 麗 太 祖 의 政 治 思 想 韓 國 中 世 政 治 法 制 史 硏 究, 일 조 각, 許 興 植, 佛 敎 와 融 合 된 高 麗 王 室 의 祖 上 崇 拜 高 麗 佛 敎 史 硏 究, 일조각, 1986 河 炫 綱, 崔 承 老 의 政 治 思 想 韓 國 中 世 史 硏 究, 일 조 각, 李 基 白, 高 麗 貴 族 社 會 의 形 成 高 麗 貴 族 社 會 의 形 成, 일조각, 1990 具 山 祐, 高 麗 成 宗 代 對 外 關 係 의 展 開 와 그 政 治 的 性 格 韓 國 史 硏 究 7 8, 李 基 白 외, 崔 承 老 上 書 文 硏 究, 일조각, 1993 池 斗 煥, 朝 鮮 前 期 儀 禮 硏 究, 서울대출판부, 1994 具 山 祐, 成 宗 代 의 향촌지배층 통제와 鄕 吏 制 개편 및 그 정치 사회적 갈등 高 麗 前 期 鄕 村 支 配 體 制 硏 究, 혜안, 2003 具 山 祐, 高 麗 成 宗 代 정 치 세 력의 성 격 과 동 향 한 국 중 세 사 연 구 1 4, 김갑동, 성종대 고려사회의 성립 고려전기 정치사, 일지사,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57
30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제3주제 발표 공동번영을 위한 교역과 문화교류 여-송 교류를 중심으로 백 승 호 중국 절강대학교 교수
31 제 3 주제 공동번영을 위한 교역과 문화교류 공동번영을 위한 교역과 문화교류 여-송 교류를 중심으로 백 승 호 (중국 절강대학교 교수) 1. 머리말 2. 여-송 교류 통로 - 해로( 海 路 ) 3. 여-송 교류 주도세력 - 해상( 海 商 ) 4. 문화교류 양상- 단향( 單 向 )에서 쌍향( 雙 向 )으로 5. 맺음말 1. 머리말 중국과 한반도는 지연적인 관계로 아주 오래 전부터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방면에 서 다양하고 활발한 교역과 문화교류를 진행해왔다. 고려시기에 들어서 전대( 前 代 )의 전 통을 이어 송과의 교역과 문화교류가 지속적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의 대외교류는 새로운 국내외 정치 환경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그전 시대와는 다른 나름 의 특징들을 지니고 전개되었다. 예하면 고려의 통로에 있어 북방지역에 거란과 금나라의 흥기로 육로는 경색되어 모든 교류를 해로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 교류의 주역이 종래 조공무역을 그 형식으로 하는 사신들로부터 민간상인들로 변화되었으며 교류의 양상 도 종래 일방적인 전파에서 서로 간에 주고받고 서로 영향 주는 상황으로 전변되는 점 을 들 수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한 선행 연구 성과들도 적지 않기에 본문은 상기 특징들 을 규납하는 위에서 다소 미흡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에 대해 약간의 부연설명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61
32 제 3 주제 공동번영을 위한 교역과 문화교류 2. 여-송 교류 통로 - 해로( 海 路 ) 한반도는 북으로 중국대륙과 인접되어 있고 또 서해안과 남해안은 황해를 사이 두고 마주하고 있다. 따라서 자고로 양 지역 간의 교류에는 육로와 해로의 이용이 모두 가능 하다. 육로인 경우, 안전하긴 하나 지연정치의 영향에 매우 취약하여 종종 경색되거나 심 지어 아예 차단되는 경우도 발생한다. 반면, 해로의 경우, 안정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지나 지연정치의 영향은 적게 받고 보다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면이 있다. 고대 한 중간 해상교류의 통로는 조선술, 항해술, 천문지리 등 지식을 축적으로 점차 다양해졌는데 구태여 규납한다면 대체로 황해연안항로, 황해중부 횡단항로 그리고 황해 남부 사단항로 세 갈래로 정리할 수 있다. 이 항로들은 대략 7세기 중엽에 이르러 모두 개척되었다고 하겠으나 9세기 중반까지는 중부횡단항로가 대당 교류의 주요통로였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신라사신들은 모두 이 항로를 이용하여 당으로 오갔고, 한 때 한 중 일 삼국 민간무역을 주도했던 장보고 상단도 주로 이 항로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신라가 장보고 제거와 더불어 해상통제정책을 실시하게 됨으로써 종래 장보고가 중 부 횡단항로를 주요통로로 구축한 한 중 일 해상무역통로가 경색되었다. 이때 중국 강 남의 상인들이 일본 견당사들이 이용했던 남로선과 남도선을 이용하면서 신속하게 대 일무역을 전개하면서 장보고의 제거로 일시 발생한 동아 해상민간무역의 공백을 메웠다. 통계에 의하면 9세기 40년대부터 9세기 말까지 일본으로 오간 강남 상단( 商 團 ) 회수가 근 30회나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속에는 장보고 시기에 중부 횡단항로를 이용하면서 대일 무역을 진행하던 재당 신라상인들도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신라조정이 실시한 해상통제정책으 로 더 이상 횡단항로 이용이 어렵게 되자 생계를 위해 강남으로 옮겨 강남상인들과 합 작하여 대일무역에 뛰어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나말려초 무렵에 중국 강남의 황암( 黃 岩 ), 상산( 象 山 ) 등 지역에 신라방, 신라산, 신라오( 新 羅 岙 ) 등 지명이 생겨난 것은 이들이 남 하하여 활동한 흔적이라고 하겠다. 대 일 해상무역에 종사하지만 신라인으로서 한때 한 중 일 해상무역을 주도했던 사 람들이기에 대 신라 무역의 재개를 노렸을 법도 하다. 이는 현실적으로도 가능했다. 왜 냐하면 대일무역의 남로선이 신라와 강남을 연결하는 사단항로를 내포하고 있어 정치적 여건만 허용된다면 수시로 한반도 남해안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 의 기록 에 의하면 659년 제4차 일본 견당사들은 일본에서 떠나 한반도 남해안을 거쳐서 강남의 보타산-영파로 상륙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최초의 사단항로는 영파에서 떠나 보 타산과 제주도를 지나 한반도 남해안으로 이르는 통로라고 함이 합당할 것이다. 신라 말에 이르러 해상무역을 통해 상장한 여러 해상세력들 중 견훤을 중심으로 하는 남해안 의 박영규, 김총 등은 모두 이 사단항로의 이용자이고 수익자이라고 하겠다. 이 항로가 서해안을 거쳐 흑산도를 지나 강남으로 가는 노선으로 변한 것은 왕건이 후삼국을 통 일하여 고려의 정치 경제 중심으로 서해안 중부에 위치한 개성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10세기 초, 강남지역의 할거세력인 오월국과 민국은 민간인의 해상무역을 적극 장려하 는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당말 이래 활약하기 시작한 강남상인들은 지속적으로 활발하 게 해상무역을 진행하였다. 여-송 민간무역은 전대( 前 代 )의 그것을 계속한 것으로 고려와의 민간교류를 담당한 송나라 상인그룹도 그들의 후예들로 보인다. 문헌기록에서 출신지를 밝힌 송상의 경우 절대 다수가 역시 강남의 명주, 대주, 천주 상인들이기 때문이다. 1) 이는 당시 송이 본국 민간인의 해상무역을 통제하는 신고법을 실시하여 고려와 일본으로 가는 상선들은 모 두 항주와 명주에 있는 양절시박사에서 허가증인 공빙을 받는 후에야 무역을 할 수 있 게 규정함으로써 영파가 대 고려 해상교류의 유일한 합법적인 항구로 정해진 것과 얼마 후에는 거란을 의식하여 산동반도에 대한 군사방어를 강화하면서 그 지역으로의 무역활 동을 금지시킨 정책의 실시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남송시기에 들어서 금이 회하 이북의 중국 땅을 차지하고 있어 산동반도를 거쳐 횡단 하는 항로 사용은 더욱 불가능해졌을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중국 강남 상인들을 위 주로 구성된 송나라 상인들이 대 고려 무역에 이용한 항로는 고려 초기부터 남부 사단 항로임을 쉽게 추정할 수 있겠다. 반면에 조공무역을 형식으로 하는 여-송간 공무역의 통로는 다소 곡절을 겪었다. 고 려가 개성에, 송이 변량에 선후로 도읍을 정함으로써 지리적으로 볼 때 중부횡단항로 사 용이 제일 가깝고 안전한 항로임이 틀림없다. 이 점은 1084년에 송 조정의 조사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국초에는 고려와 송의 사신단 들은 모두 이 항로를 애용하였다. 993년, 송나라 사신 진정 등 일행은 동모(등주) 팔각정에서 고려사신 백사유 일행을 만났고 또 그들의 배를 함께 타고 지부도(연대)에서 출항해 순풍에 돛을 달아 이틀 만 에 옹진항에 도착하였다. 1014년에는 고려사신을 영송하기 위해 그들이 경상적으로 오 가는 지점인 등주에 고려관마저 지어 놓았던 것이다. 1) 杨 渭 生, 宋 丽 关 系 史 研 究, 杭 州 大 学 出 版 社, 1997, 269~279쪽 62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63
33 제 3 주제 공동번영을 위한 교역과 문화교류 그런데 이런 상황은 1074년 고려 사신 김양감의 요청으로 변화가 발생한다. 김양감 은 거란을 멀리 하기 위해 사신들의 출입항을 등주에서 강남의 명주로 바꾸어 줄 것을 요구했고 송 신종은 이를 수락하였던 것이다. 사실상 이런 변화에는 문종이 대송교류의 목적을 종래 정치 군사 중심에서 경제 문화 중심으로 전환시키고 송에서 경제 문화가 제 일 발달된 강남지역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선진문물제도를 대거 흡수함으로써 왕권 을 강화하여 조정 내 왕권을 견제하는 문신세력을 압도하고 2) 나아가 고려의 문물제도 를 발전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고 하겠다. 이 항로를 이용할 때 사신들의 규모도 송나라 사신의 인원수 제한과는 무관하게 날로 방대해졌는데 많을 때는 약 300명을 헤 아렸다는 점도 경제 문화적인 목적이 다분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송의 경우, 고려와는 달리 여전히 횡단항로와 사단항로를 동시에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078년 안도 등을 고려로 파견할 때 명주에서 떠나는 남부 사단항로를 사용하였으나 1083년 7월, 송 제전사 양경락, 조위사 전가 등은 고려 문종 조문을 하기 위해 고려로 떠날 때 여전히 횡단항로를 이용하였다. 이는 송이 대 고려 항로를 선택함에 있어 주로 군사 또는 정치적인 면을 보다 중시하였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공무역과 민간무역이 전반기에는 각자의 서로 다른 목적 하에 항로를 달리 사 용했지만, 후기에는 모두 경제 문화 쪽으로 초점을 맞춤으로써 결국 사용항로도 남부 사단항로로 통일되었다. 3. 여-송 교류 주도세력 -해상( 海 商 ) 주지하듯이 고려시기에는 고려와 송간의 교류는 사신들을 통한 공적인 교류가 활발 했음과 동시에 민간상인들의 무역활동 또한 번성하였다. 특히 민간상인이 여-송을 오간 회수는 140회 이상으로 통계되며 통계 가능한 인원수도 7,000명을 헤아리는데 이는 여- 송 양국 사신이 왕래한 회수를 합친 회수보다도 훨씬 많다. 또 시간상으로도 사신왕래 는 간헐적으로 이루어진 반면, 민간상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송이 건국에서 멸망 할 때까지 수백 년 꾸준히 여-송간 무역을 진행해왔다. 때문에 이들에 대한 연구도 많이 진행되었고 여-송교류는 민간상인들이 주도했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로 자리 잡고 2) 김당택, 우리한국사(개정판), 푸른 역사, 2006, 136쪽 있다. 그런데 미흡한 것은 여-송간 민간무역 활동연구는 송나라 상인에만 집중되고 고 려 상인들의 활동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에 본 절에서는 해상( 海 商 ) 중 고려 상인 들의 무역활동에 한해 설명을 부연해보고자 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9세기 전반기 장보고의 화려한 활동으로 신라상인들이 한 때 한 중 일 해상무역을 주도하였다. 그런데 장보고 피살 후 신라 조정은 청해진 폐쇄, 재당 재일 장보고 추종세력 제거작업 진행, 서남해역에 방수군을 배치하고 동시에 서해안에 대 당 교통의 요충지에 혈구진(강화), 장구진(장산곶)을 설치하여 민간인 해상활동에 대한 통제를 대폭 강화하였다. 이로 인해 신라인들의 해상활동은 크게 침체되고 장보고와 관 계가 밀접했던 재당 신라상인들도 대 신라 무역활동을 접고 중국 강남 상인들과 제휴 하여 수요에 따라 국적을 바꾸어가면서 대일무역에 뛰어든 것으로 보인다. 신라 말 고려 초(오대시기)에 명주(대주) 부근 해역에 신라서( 新 罗 屿 ), 신라오산( 新 罗 嶴 山 ) 등 신라인 활동 흔적이 생기고 3) 심지어 태주( 台 州 ) 황암( 黄 岩 )에는 신라인 집거지인 신라방이 형성된 것은 모두 이런 변화의 반영이라고 하겠다. 9세기 말기, 신라 왕실의 지방통제가 무너지자 신라 서해안과 남해안에는 대 당 무역 을 통해 해상세력으로 변신한 유력자들이 많이 출현하였는데, 경기만 일대의 왕건가문과 정주 유씨, 강주 왕봉규, 순천 박영규, 영암 압해현 능창, 나주 오다련 등은 모두 이 부 류에 속한다. 이처럼 신라후기이래 한반도에도 민간인이 해상무역활동을 진행할 여건들 이 상당히 잘 갖추고 있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들의 대 중국 해상무역활동은 고려 초 에도 여전히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파 앞바다에는 중국의 저명한 관음성지 보타 산이 있는데, 해상활동이 잦은 해상들은 먼 바다로 떠나기 전 반드시 이곳에 있는 사찰 에서 항해안전을 기원하는 제를 지냈으며, 사용하는 종이나 경 같은 법기들은 모두 계림 상인들이 보시했고 그 나라 연호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4) 경상적으로 이용하기에 이런 보시를 했을 것이고 새겨진 나라 연호는 아마도 태조나 광종시기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동국여지승람 에는 나주상객이 오월지역을 드나들었다고 하였고 오월국으로 오가면서 활동하던 고려선주( 高 麗 船 主 ) 왕대세( 王 大 世 )는 (오월에서) 근 1,000근이 되는 침수( 沈 水, 침향목)들로 남악형산( 南 岳 衡 山 )의 72봉을 방불케 하는 공예품을 만들었는데 오월 국주 전숙( 錢 俶 )이 황금 500냥을 주고사려고 해도 팔지 않았다는 5) 기록으로 볼 때, 당 시 고려해상들의 활동과 그 규모가 결코 작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3) 嘉 定 赤 城 志 권2, 방시 4 ) 墨 莊 漫 錄 권 5 5 ) 清 异 录 下, 熏 燎 旖 旎 山 条 64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65
34 제 3 주제 공동번영을 위한 교역과 문화교류 이외 이들은 횡단항로를 이용한 민간무역도 진행하였다. 태조 7년(924)에 왕건은 사 신의 명의로 상선을 산동반도 내주지역으로 보내 무역활동을 진행하였고 901년 3월 18 일에 세워진 모평( 牟 平, 위해) 무염사 석비에는 김청이라는 계림상인이 장보고처럼 산동에 근거지를 두고 영파 등 강남지역과 무역하였다. 이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인해 성종 초기 에도 민간에 송나라 비단 등 수입품이 많이 널려 고려의 색복제도를 문란케 할 정도였다 고 한다. 6) 이런 현상은 장보고의 해상무역이 전성기를 누릴 때만 신라에 나타났었다. 고려 상인들의 활발한 해상활동은 성종이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권을 강화하기 위 한 조치로서 실시된 해금( 海 禁 ) 으로 크게 위축되었다가 의종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해 상활동을 재개한 것으로 나타난다. 건도( 乾 道 ) 3년(1167)에 명주시박무( 明 州 市 舶 務 )에서 조정에 올린 보고문에, 매년 여름에 고려와 일본 상선들이 무역하러 들어오니 관례에 따 라 승선하여 물품을 검사하고 세금을 징수하였다 하였고, 7) 복건시박사(천주)에도 고려 상선이 활동한 기록이 나온다. 이 시기 고려 상선들의 규모 또한 작지 않았던 것으로 보 인다. 1170년에 수백 척의 규모로 동시에 영파에 몰려들어 송 황제까지 경동( 驚 動 )했다는 기록도 있다. 8) 비록 과장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당시 고려 상단들의 무역규모가 결코 작 지만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들이 남송시기에 이르러서는 종래 무역범위를 명주지역에서 남으로 연장하여 천주를 비롯한 복건 지역까지 오갔다는 점은 종래에 송 나라 상인들에 의해 중계되던 동남아시아 또는 아라비아 지역에서 출산되는 물품을 직 접 다루었을 것이다. 요컨대 문헌기록으로 볼 때 고려 상인들은 성종 이전과 의종 이후에 활동을 활발하 게 전개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송상들의 활동은 아이러니하게도 대체로 성종 이후 의종 이전 시기에 집중되어 있어서, 여-송간 민간무역은 초기에는 고려 상인, 중기에는 송나라 상인, 후기에는 또 고려 상인(또는 송상과 함께) 번갈아 가면서 주도했을 것으로 조심 스레 추정해본다. 4. 문화교류 양상- 단향( 單 向 )에서 쌍향( 雙 向 )으로 교역과 교류는 특정 지역에서 독특한 생활방식과 문화를 형성하여 상대적으로 독립적 인 삶을 살아오던 다양한 민족들 간에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면서 인류문명 발전사에 끊 임없이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 넣는 주요한 수단이라 하겠다. 동일한 또는 근사한 문화 배경을 갖고 있는 지역간 교류는 일반적으로 발달지역에서 후진지역으로 전파되는 것으 로 인식되고 있다. 중국과 한반도는 지리적인 원인 등으로 선사시대부터 인적왕래와 그 들을 통한 문물교류를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왔는데 고대로 올라갈수록 정치, 문화, 통 치체제, 과학 기술 등 지적 교류에 있어 양 지역 간 발전의 시간적 차이로 인해 중국에서 한반도로 일방적으로 전파되는 경향이 짙었다. 그러나 장기적인 흡수와 소화과정을 거 쳐 신라 특히 고려시대에 이르러 중화라며 문화 우월성을 자부하는 중원 정권으로부터 도 군자의 나라, 예의지국 으로 그 문화를 인정받았다. 이런 변화는 물질문화의 상품 은 물론, 지적 문화제품에 있어서도 일방적인 전수에서 점차 중국과 서로 주고받고 하는 양상이 점차 짙어가고 있는 데서도 느낄 수 있다. 송대 대외적으로 교류한 국가는 70여 국이며 수입품 종류는 400여 종인데, 고려 한 나라에서만 약 10분의 1 이상 품종인 40여 가지를 명주로 수출하여 민간에 유통시켰다. 9) 아래에 그 중 몇몇 전형적인 사례만 예를 들어 살펴보도록 하자. 도서는 인류가 생활 속에서 얻은 일체 경험과 교훈을 포함한 성과를 체계적으로 정리 해 놓은 기록물이다. 인적교류 외 사람들 지간에 감정을 교류하고 지식을 배우고 또 전 수하는 제일 중요한 매개물로 작용해 왔기에 고금중외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언제나 이 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중국은 일찍 서주시대부터 사관( 史 官 )을 두어 국가의 전적문헌( 典 籍 文 獻 )들을 관리하 였고, 동한시대에 이르러 비서감( 秘 書 監 )이라는 장서관리기관 설치를 위시하여 문헌관리 를 제도화하는 등 도서 관리를 각별히 중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잦은 전란과 왕 조교체, 심지어 최고통치자의 개인성향 등 주 객관적인 원인으로 진귀한 도서들이 소실되 는 문화 재앙이 종종 발생하였다. 전형적인 사례는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당 무종의 회 창법난( 會 昌 法 難 )을 들 수 있다. 한편, 고대 한반도는 상대적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정치환경을 장기적으로 누리면서 사 6 ) 고 려 사 권 9 3, 최 승 로 7 ) 宋 会 要 辑 稿 권 4, 职 官 44 之 29 8) 誠 齋 集 권120, 宋 故 左 丞 相 節 度 使 雍 國 公 贈 太 師 諡 忠 肅 虞 公 神 道 9) 宝 庆 四 明 志 권6, 市 舶 66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67
35 제 3 주제 공동번영을 위한 교역과 문화교류 회문물제도의 발전을 위해 중국에서 꾸준하게 대량으로 도서를 수입하였으며 동시에 도 서 관리에 힘을 기울였다. 고려시기에는 왕실 내에 비각, 어서각 같은 도서관을 설치하 여 도서를 관리하였고 출판과 교정에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고려사 에는 문종 10 년(1056)에 조정에서는 서경유수( 西 京 留 守 )가 과거응시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책들은 모두 필사본으로 오탈자가 많기 때문에 비각에 소장되어 있는 중국 도서들을 하사하 길 요청했고, 이에 문종은 특별히 한서( 汉 书 ), 진 서( 晋 书 ), 당 서( 唐 书 ), 논 어( 论 语 ), 효 경( 孝 经 ), 자 사 ( 子 史 ), 제 가 문 诸 집( 家 文 集 ), 의 복 医 ( 卜 ), 지리( 地 理 ), 율 ( 律 ), 산( 算 ) 등 방면의 책들을 인쇄하여 하사했다고 한다. 또 문종 12년(1058)에는 충주 목 에서 황 제팔 십일난 경( 黄 帝 八 十 一 难 经 ), 상 한 론 ( 伤 寒 论 ), 본 초 괄 요 ( 本 草 括 要 ), 소인소씨병원( 小 儿 巢 氏 病 源 ), 소 인 약 증 병 원 ( 小 儿 药 症 病 源 ) 18판( 板 ), 오장론( 五 脏 论 ) 97판, 주후방( 肘 后 方 ) 7 3 판, 의 옥 집( 疑 狱 集 ) 1 1 판, 천 옥 집( 川 玉 集 ) 1 0 판, 삼례도( 三 礼 图 ) 5 4 판, 손 경 자 집( 孙 卿 子 集 ) 9 1 판 을 올 렸 는 데, 비 각 에 보 관 하 였 다. 의종 5년(1150)에는 보문각 학사와 한림학사들이 정의당( 精 義 堂 )에 모여 책부원구( 冊 府 元 龜 ) 를 교정하였고, 명종 22년에는 이부상서 정국검 등이 증속자치통감( 增 续 资 治 通 鉴 ) 을 교정한 후 각 주현으로 내려 보내 인쇄하게 하였다. 같은 해에 송상이 가져다 바친 태평어람( 太 平 御 覽 ) 도 최선에게 명하여 오탈자를 교정보도록 하였다. 이처럼 고려에서는 교정, 인쇄 그리고 보관에 이르기까지 모두 철저한 관리를 했기에 선화 연간에 고려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이 고려에는 기이한 도서들이 많다. 병화( 兵 禍 )를 당하지 않아 진( 秦 ) 이전 것부터 진, 당, 수, 양 등 여러 조대의 도서들이 몇 천 종 류, 몇 천 책이 있는지도 헤아릴 수 없다. 지금 송 황실의 도서관에도 이처럼 다양하고 많은 책은 보관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감탄하였다. 때문에 오월국왕은 회창의 난으로 소실된 불교 경전을 찾아 고려로 사신을 파견하였 다. 송 철종도 사신으로 송에 들어온 이자의에게 고려에 진귀한 책들이 많다는 소문을 들었다면서 무려 128종에 달하는 도서목록을 내놓으면서 고서들을 요청하였다. 이에 고 려에서 얼마나 다시 기증해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지 않은 고서를 다시 역으로 기증 한 것 으 로 보인 다. 여타 의 중 국 문 헌에서 주역점( 周 易 占 ), 황 제침경( 黃 帝 針 經 ), 설 원( 說 苑 ) 등 진구한 고서들이 기증되어 왔다는 기록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의하면 설원 의 기증으로 완질을 맞을 수 있었고, 분실된 지 오래 된 의서( 醫 書 ) 황제침경 을 기증받은 철종은 즉석에서 비서성의 사람을 동원하여 교정한 후 출판하여 관련 의학자 들이 참조하도록 명하였다. 이처럼 고려의 철저한 도서 관리와 역 기증이 중국 전통문화 보존에 힘을 이바지 했을 뿐만 아니라 고려판 도서들은 오늘날 학자들로부터도 학술가 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고대 중국의 전통적인 수출상품으로 비단과 청자를 꼽을 수 있는데, 이 영역에서도 고려시기에 이르러 중국으로 역수출을 하였다. 삼국지 기록에 의하면 비단을 방직하 는 기술은 중국으로부터 늦어도 2,000년 전에 이미 한반도의 마한, 진한에 전해졌다. 이 런 기술들은 꾸준한 소화와 개진을 통해 고려시기에 이르러 특히 방직기술, 염색기술 면 에서는 송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 정도로 발전하였다. 서긍은 고려도경 에서 고려 는 비록 원사는 중국에서 수입해서 사용하지만 방직기술이 출중하여 문라( 文 羅 ), 화릉 ( 花 綾 ), 긴사( 緊 紗 ) 같은 비단을 매우 잘 짰으며 특히 무늬가 있는 비단을 더욱 잘 짠다 고 탄복하였다. 또 서긍과 비슷한 시기에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왕운도 그의 기행 문 계림지 에서 고려인들은 염색이 뛰어난데 특히 모란 같은 식물줄기 즙을 이용한 붉 은색이나 자주색을 특별히 잘 낸다고 하였다. 따라서 고려시기에는 비단은 두 황실 간 서로 기증하는 필수품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또 송대 황실에서는 서예와 그림 작품을 표구할 때 사용하는 비단은 엄격한 선별을 통해 총 26종류로만 한정시켜 사용했는데 그 중에 고려산 백로릉( 白 鷺 綾 )과 화릉( 花 綾 ) 두 가지나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은 고려 비단의 품질과 기술이 송에서도 최고의 상품으로 판정이 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비단에 대한 인정과 애용은 송나라 민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남송 정부가 필요한 군량과 말 사료를 사기 위해 국고에 저장해 두었던 고려견( 高 麗 絹 )을 한번에 1만 5천 필 이나 시중에 풀었다고 한다. 북송 후기 송으로 오간 대규모 고려 사절단이 한 번에 송 황제에 올린 최고의 금은보화의 대가가 비단 만 필이라고 했으니 이것이 얼마나 큰 수량 인지 짐작이 가며 당시 고려산 비단이 대량으로 비단 종주국으로 수출되었고 민간에도 많이 판매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자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 자기는 고대 해상실크로드를 해상자기로드라고 개칭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비단과 거의 쌍벽을 이루는 중국의 대표적인 수출품이 다. 청자 생산기술은 신라말기 경에 사단항로를 통해 한반도 남부지역에 전수된 것으로 보이나 고려시대에 이르러 그 제작기술을 발전시켜 독창적인 비색청자, 상감청자 만드는 기술들을 발명하여 생활청자를 예술청자의 경지로 한층 끌어올렸으며 다시 송으로 역수 출하면서 송의 자기생산을 자극하고 추진하는 작용을 했다고 하겠다. 항주 남송 황궁 터에서 적지 않는 고려청자 파편들이 출토되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했던 정양 모 선생님은 그 중 학 무늬가 들어간 파편을 포함하여 몇 점은 현재 한국에서도 찾아보 기 힘든 국보급 수준의 청자파편이라고 감탄했다. 또 항주의 남송 때 유적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중국 현지에서 생산한 것으로 보이는 고려청자 모조품 파편이 출토되어 관련 68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69
36 제 3 주제 공동번영을 위한 교역과 문화교류 학자들은 당시 고려청자를 모방하여 생산하는 요터마저 생겼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시기에는 고려의 완전한 토산제품이고 중국에도 없지 않으나 여전히 송에서 큰 인 기를 몰고 있는 경향도 나타났다. 그 전형적인 사례가 용수석( 龙 须 席 )이다. 용수석은 한 반도에서 일찍부터 생산한 전통제품인 듯하다. 1015년 사신으로 송에 들어간 곽원은 송 황제가 고려 특산품을 물을 때 지산용수석( 地 产 龙 须 席 ), 등석( 藤 席 ), 백지( 白 纸 ), 서랑 미필( 鼠 狼 尾 笔 ) 이라 대답한 데서 10) 용수석에 대한 고려인의 자부심을 알 수 있다. 서긍 은 이 제품의 특징에 대해 만드는데 사용한 풀들이 유연하여 접어도 손상되지 않는다 고 하였고, 왕운도 계림지 에 고려에는 용수석과 등석이 있는데, 요즘 해상들은 고려 에서 가져가는 것이 모두 돗자리이다. 풀(식물)로 짜는데 폭은 좁지만 탄탄하며 꽃문양 을 넣은 것도 있다 고 하였다. 돗자리만 가져간다는 기록은 과장된 표현이긴 하나 당시 송에서 매우 환영을 받고 있었다고 이해하는 데는 문제없을 것이다. 실제로도 선호도가 매우 높아 모조품을 만드는 현상도 나타났다. 사백채( 谢 伯 采 ) 는 밀 재필기( 密 斋 笔 记 ) 에서 고려석( 高 麗 席 )은 접었다 폈다 할 수도 있으며 가격 또한 비싸 쉽게 얻을 수 없다. 이에 사명에서는 가짜 고려석을 짰다 고 하였다. 나아가 고려의 전통예술도 송 황실에까지 수출되면서 송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서 긍은 고려의 음악은 당악과 향악으로 나뉘며 향악 악기로는 고판( 鼓 板 ) 생( 笙 ) 우( 竽 ) 율( 篥 ) 공 후( 空 候 ) 오 현 금( 五 弦 琴 ) 비파 ( 琵 琶 ) 쟁( 筝 ) 적( 笛 ) 등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또 1081년 사신으로 송에 간 최사제와 이자위는 조공품을 올릴 때 고려의 악기도 함께 올 렸다고 한다. 이듬해 정월 14일, 송 황제는 집희관( 集 禧 观 )에 행차하여 최사제와 따라온 악공더러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고 크게 만족하여 그들에게 옷, 띠, 비단, 은을 상으로 하사하였다. 그 자리에서 최사제는 고려 예술에 대해 소개하였는데, 오늘날 고려예술은 사실상 신라예술의 계승이며, 악기로는 가야금이 있으며, 중국의 피리 같은 악기는 대금 이라 불리며, 춤도 70여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최사제의 소개로 볼 때 당시 진상한 것은 한국 전통 예술과 악기였을 것으로, 중국의 예술문화에 다양성을 부여하고 발전하는데 기여하였다. 5. 맺음말 고려시기 주로 사용했던 항로는 중부횡단항로와 남부사단항로였다. 그러나 고려 전 반기에는 공무역과 민간무역이 서로 다른 목적 하에 교류를 진행하면서 항로도 달리 사 용했지만 후기에는 모두 경제 문화 쪽으로 초점을 맞춤으로써 결국 사용항로도 남부 사단항로 사용으로 통일되었다. 여-송간 민간교류에 있어 고려 상인들도 활발하게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문헌기 록으로 볼 때 고려 상인들은 성종 이전과 의종 이후에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아 이러니하게도 송상들의 활동은 대체로 성종 이후 의종 이전 시기에 집중되어 있어 여-송 간 민간무역은 초기에는 고려 상인, 중기에는 송나라 상인, 후기에는 또 고려 상인(또는 송상과 함께) 번갈아 주도했을 것으로 조심스레 추정해 본다. 한반도의 여러 정권들은 일찍부터 중국의 문물제도들을 적극적으로 흡수하였다. 그러 나 그들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 기초 위에서 적지 않은 방면에서 독창적인 발전을 성취 하여 중화라고 자부하는 중국으로부터 군자의 나라 또는 예의지국 으로 문화를 인 정받았다. 특히 고려시기에 이르러 서로가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측면에서 거둔 성취들을 주고받으면서 공동으로 동아 문화권의 형성과 발전에 기여하였다. 10) 송사 고려전 70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71
37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제4주제 발표 고려시대 투화( 投 化 )와 거류( 居 留 ) 국인( 國 人 )과 외국인( 外 國 人 ) 이 진 한 고려대학교 교수
38 제 4 주제 고려시대 투화( 投 化 )와 거류( 居 留 ) 고려시대 투화( 投 化 )와 거류( 居 留 ) 국인( 國 人 )과 외국인( 外 國 人 ) 1) 이 진 한 (고려대학교 교수) 머리말 1. 고려시대 투화인( 投 化 人 )에 대한 우대 정책 2. 투화인의 관적( 貫 籍 )과 향관( 鄕 貫 ) 3. 외국인들의 고려 거류( 居 留 ) 맺음말 머리말 고려는 투화인 덕택에 발전한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효과적인 귀부호족( 歸 附 豪 族 )에 대한 우대정책을 펼쳐서 후백제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926년에 발해가 멸망한 이후에는 많은 유민들이 고려에 온 것을 비롯하여 동서 여진, 거란, 일본 사람들이 지속적이며 대규모로 투화하였다. 투화인 1) 주최 측으로부터 받은 제목은 國 人 과 異 邦 人 歸 化 와 居 留 이다. 그런데 고려 사람을 국인이라고 한 것은 분명하지 만, 이방인은 용례가 거의 없다. 반면 해동천자에 귀의하러 오는 외국 이라는 표현이나, 외국투화인에게 면포를 주라 는 기록 등을 볼 때 국인과 이방인 보다는 국인과 외국인 이 적절한 것 같다. 아울러 귀화는 이 분야의 대표적인 저서가 선택한 용어인데, 실제 고려시대에 그것을 자주 사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연구의 결과 고려시대의 투화는 현재의 귀화 개념과도 상통하지 않아서 투화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였다. 한편 투화의 혜택과 거류의 차이가 국인과 외국인을 구별 하는 한 요소였으므로 주어진 부제와 제목을 바꾸었다. 이점 양해해주기를 바란다. 秋 七 月 乙 未 安 燾 等 還 王 附 表 謝 之 且 自 陳 風 痺 請 醫 官 藥 材 時 與 宋 絶 久 燾 等 初 至 王 及 國 人 欣 慶 除 例 ( 高 麗 史 권9, 世 家 文 宗 32년). 海 東 天 子 當 今 帝 佛 補 天 助 敷 化 來 理 世 恩 深 遐 邇 古 今 稀 外 國 躬 趍 盡 歸 依 四 境 寧 淸 罷 槍 旗 盛 德 堯 湯 難 比 ( 高 麗 史 권71, 樂 志 2 俗 樂 風 入 松 ). 制 曰 候 在 大 寒 風 雪 嚴 凝 言 念 貧 窮 必 至 凍 餒 其 外 國 投 化 人 及 沒 蕃 懷 土 男 女 共 八 十 餘 人 有 司 量 其 老 幼 各 賜 緜 布 ( 高 麗 史 권6, 世 家 靖 宗 5년 12월). 75
39 제 4 주제 고려시대 투화( 投 化 )와 거류( 居 留 ) 에게는 일정기간 조세와 요역을 면제해주었다. 그들이 완전히 정착한 이후에는 농업생산 이 늘어났고, 3세( 稅 )를 내며 국가 재정에 기여하였다. 고려시대 인구증가는 출생과 사망 에 따른 자연적인 것인 것보다는 투화에 의한 사회적인 요인이 더 컸을 것이다. 매년 경 작하는 불역전( 不 易 田 )보다 1년 또는 2년을 쉬고 경작해야하는 일역전( 一 易 田 )과 재역전 ( 再 易 田 )이 많았을 만큼 농업생산력이 낮았던 고려사회에서 투화인들은 진황전( 陳 荒 田 ) 또는 한광지( 閑 曠 地 )를 개간하고 농업기술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투화한 장인들 은 고려에서 생업을 영위하면서 수공업 기술을 진전시켰다. 또한 투화인 가운데 신분이 높았거나 학문적 능력을 갖춘 경우에는 고려의 지배계층 에 편입되고 직역을 수행하였다. 투화한 여진의 추장은 양계의 도령( 都 令 )이 되어 변방의 국방을 담당하였고, 문예( 文 藝 ) 의술( 醫 術 ) 무예( 武 藝 ) 등이 뛰어난 송나라 사람들은 투 화한 이후 관직에 종사하면서 중국과의 사대문서를 맡거나 고려 사람들에게 의술과 무 예 등을 가르치며 선진문물을 전수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는 외국인의 투화 자체가 많았을 뿐 아니라 투화인의 역할도 적 지 않아서 일찍부터 이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가 이루어졌고, 투화의 회수, 민족 및 국가별 투화인, 투화정책 등 투화에 관한 대체적인 전모가 파악되었다. 그러나 주로 농업에 종 사할 투화 여진인에 대한 혜택의 구체적인 내용과 실효성이 있었는지의 여부, 일시적으로 고려에 머무는 거류와 평생을 고려에 살겠다는 투화의 차이, 투화인이 과연 고려인인지 외국인인지의 구별과 같은 사소한 문제들은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따라서 본 발표에서는 문집에서 찾은 새로운 자료와 조선왕조실록 에 기록된 향관( 鄕 貫 )의 하사 등 고려시대 투화의 실체를 알려주는 간접 증거를 활용하여 이러한 의문을 풀어보고자 한다. 1. 고려시대 투화인( 投 化 人 )에 대한 우대 정책 고려시대 여진 거란인들의 투화 사례가 많이 남아있고, 그들의 신분에 따라 직역이나 경작지를 주었다는 기록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선행 연구에서 투화인에 대한 혜택을 주 요한 내용으로 서술하였다. 그런데, 동국이상국집 에 기존 연구보다 더 자세한 혜택과 실행방식을 알려주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남아 있어서 주목된다. A. 여진( 女 眞 ) 한아( 漢 兒 ) 등 관인( 官 人 )에게 은밀히 알린다. 그 매양 통한 바의 일을 하 나하나 다 알았다. 요즈음 너희들 및 회회( 回 回 ) 아만( 阿 萬 ) 등 여러 나라 사람이 몽고 ( 蒙 古 )를 따르기 싫어하고 우리나라에 투항해 오는 자 연달아 끊이지 않는데, 그 사람 들이 와서 당신네들의 말을 전하여 말하였다. (1) 듣건대 고려가 바다 가운데 들어 가 도읍하였는데, 토지가 꽤 넓으며, 또한 다른 나라에서 투항하는 사람들을 잘 대우하 여 각각 구분전지( 口 分 田 地 )를 주어 갈아 먹게 한다 하니 그곳이 낙( 樂 )을 누리며 살 만 하다. 다만, 도망쳐 투항하고 싶으나 탈출하기가 어려워 지금까지 틈만 엿보고 있다. 고 하였다. 매양 오는 사람들의 전하는 말이 이와 같으니, 그 말은 믿지 않을 수 없다. 왜냐 하면 우리나라가 너희 나라와 서로 화호( 和 好 )한 지 1백 년이 되었으되 조금도 혐극( 嫌 隙 )이 없었다. (2) 더구나 바다 안에 들어오기 전에는 곳곳에 투화장( 投 化 場 )을 설치하고 투화하는 당신네들을 조처하였는데, 각각 가장 좋은 토지를 주어 이를 경작하고 생업에 안락( 安 樂 )을 누리게 해 주었으며, 관인( 官 人 )들에게는 벼슬까지 하게 하였다. 이제 바다 안에서도 이와 같이 하였으니 너희들이 어찌 듣지 못하였겠는가. (3) 그 투화하려는 것은 믿음직하다. 과연 당신네들의 말과 같다면 10인을 모아 함께 오는 자에게는 얼마의 늠 식( 廩 食 )과 금백( 金 帛 )을 줄 것이요, 1백 인을 모아 함께 오는 자에게는 그 상을 3배를 더할 것이요, 이상은 모두 앞의 예의 차등에 따라 상을 내리겠다. 상만 그럴 뿐 아니라 모두 좋은 땅에 편히 살게 해 줄 것이니 의심하지 말라. 어찌 너희들 뿐이랴. 다른 나라 도 마찬가지다. 2) 이 글은 대몽항쟁기에 고려가 몽골군에 참여하고 있는 여진과 한인 등의 이민족을 회 유하여 투항하도록 권유하기 위해 이규보가 지은 것이다. 고려가 투항한 자들에게 어떤 혜택을 주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1)의 부분은 고려가 강화로 천도 한 뒤에도 토지가 넓어 투화인[ 投 歸 者 ]에게 구분전을 나누어주어 편하게 경작하여 먹게 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구분전은 투화한 자들이 종신토록 수조( 收 租 )하며 관직에 종사 하면 받지 못하였던 투화전일 것이다. 3) 이 토지는 투화하여 도령과 같은 군사적 직역을 수행하는 자들에게 지급되었다. (2)의 부분은 강화 천도 이전에도 매양 투화장을 두고 내투하는 사람들에게 기름진 땅[ 上 田 ]을 주어 개간하여 경작하고 생업에 안락을 누리게 해 주었으며, 관인( 官 人 )들에 게는 벼슬까지 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당연히 예전에 그렇게 한 것과 같이 차후 투화인 에게도 같은 혜택을 줄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것은 1219년 조충( 趙 沖 )이 몽골군 과 연합하여 강동성( 江 東 城 )에서 저항하고 있던 거란군을 함락한 뒤, 거란 포로를 각 도 2 ) 東 國 李 相 國 集 권28, 密 告 女 眞 漢 兒 文. 해당 글이 지어진 시점은 명확하지 않지만 해당 글의 앞에 위치한 동국이 상국집 권28의 上 大 金 皇 帝 表 가 1233년(고종 20) 3월로 편년되고 권28의 蒙 古 皇 帝 上 起 居 表 가 1238년 12월에 만 들어졌기 때문에 해당 글은 그 사이에 작성되었을 것이다. 3) 高 麗 史 권78, 食 貨 志 1, 田 制 祿 科 田. 76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77
40 제 4 주제 고려시대 투화( 投 化 )와 거류( 居 留 ) 의 주 현에 나눠 보내어서 빈 땅을 골라 모여 살게 하고, 그들에게 토지를 주어 농사를 지으며 백성이 되게 하였고 그곳을 거란장( 契 丹 場 )이라고 했던 것과 관련된다. 4) 고려는 투화인들에게 토지를 주어 농사를 짓게 해주되, 관리를 편하게 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거 주하게 했던 것이다. 이 때 고려가 투화인들에게 주는 토지는 수조지 성격의 토지가 아니 라 직접 개간하여 경작하는 땅이었다. 고려가 여진과 한인들에게 주겠다고 한 것이나 거 란의 포로에게 주었던 토지는 직접 개간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다. 투화인들에게 주는 토지는 수조지와 경작지가 있었다. 1046년 9월에 북여진( 北 女 眞 ) 장군 니우화( 尼 迂 火 ) 골보( 骨 輔 ) 등이 내투하자 전택( 田 宅 )을 주고 기내( 圻 內 )에 살게 하였 다 고 하였는데, 여진 추장과 같이 투화전을 받는 사람과 경작지를 받아 백정 농민 정도 의 신분이 되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5) 아 울러 후 자 의 경우 고려에 조 세( 租 稅 ) 역역( 力 役 ) 공 부( 貢 賦 )를 부담하는 편호가 되었다. 6) 투화인들은 오랫동안 살던 본거지를 버리고 타국에 왔을 뿐 아니라 농업을 하지 않던 자들도 있었으므로 투화하여 정착하기까지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고려는 여러 나라에서 내투하는 사람에게 의복( 衣 服 ) 면서( 緜 絮 )를 주었다. 7) 고려에 투화한 사람들이 하루라도 빨리 안정적인 생업을 영위하게 하는 것은 장 기적으로 국가 재정에 이득이 될 뿐 아니라 조기 정착을 돕는 이러한 혜택이 투화를 촉진 시키는 기능도 하기 때문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투화인은 낮은 생산력 아래서 가장 손쉽게 인구와 경작지를 늘려 국가적인 부를 증가시킬 있는 방법이었다. 특히 문종대와 같이 재정 이 풍부한 상황에서 넉넉한 국가적 지원은 투화인을 유인하는 효과가 더욱 컸을 것이다. (3)은 개별적인 투화가 아니라 집단 투화하는 것에 대한 추가적인 특별 혜택이다. 10 인을 모아 함께 오는 자에게는 약간의 늠식( 廩 食, 관에서 하사하는 곡식)과 금백( 金 帛 ) 을 줄 것이고, 1백 인을 모아 함께 오는 자에게는 그 상을 3배를 준다. 그 이상은 비례 하여 상을 줄 것이며, 그와 더불어 좋은 땅[ 好 地 ]을 주어 편하게 살도록 해준다고 하였 다. 마지막으로 여진과 한인 뿐 아니라 다른 민족에 대해서도 같은 혜택이 적용된다고 하였다. 고려시대에 발해 여진 거란 등을 불문하고 집단 투화가 많았고, 고려사 등에 는 내투한 자의 우두머리 이름을 넣어 여진( 女 眞 ) 모( 某 ) 등 몇 명이 내투하였다 는 식 으로 기록하였다. 그들이 고려에 투화를 유도한 자들에 해당되었으므로 그 사람의 수에 따라 늠식과 금백 등의 특별한 포상을 받았을 것이다. 4) 高 麗 史 節 要 권15, 고종 6년 춘정월. 5) 高 麗 史 권6, 世 家 정종 6년 9월. 6) 高 麗 史 節 要 권2, 목종 2년 동10월. 7) 高 麗 史 권5, 世 家 덕종 즉위년 庚 寅. 2. 투화인의 관적( 貫 籍 )과 향관( 鄕 貫 ) 고려시대에는 송 강남 천주인( 江 南 泉 州 人 ) 채인범( 蔡 仁 範 ) 8), 서송( 西 宋 ) 장주인( 漳 州 人 ) 임광( 林 光, 초명 完 ) 9), 몽고인( 蒙 古 人 ) 인후( 印 侯 ) 10), 심양인( 瀋 陽 人 ) 변안렬( 邊 安 烈 ) 11) 등 많은 투화인이 고위 관직에 오르며 활약하였다. 그런데, 고려 말의 변안렬을 제외하 고 본인 또는 후손들이 거의 대부분 중국의 본관을 가지고 있었다. 채인범은 아들 채충 순이 평장사에 이르고, 그 손자들도 고려에서 벼슬하였다. 인후는 본래 몽고인으로 초명 은 홀자알( 忽 刺 歹 )이었고, 제국공주( 齊 國 公 主 )의 겁령구( 怯 怜 口 )로 고려에 와서 인후라는 성명을 받았으며, 자의도첨의사사( 咨 議 都 僉 議 司 事 ) 평양군( 平 陽 君 )에 이르고 원의 만호 를 지냈다.12) 그의 서자 인승단( 印 承 旦 )은 1345년(충목왕 1) 좌정승에 제수되고, 공민왕 초에 연안부원군( 延 安 府 院 君 )에 봉해졌으며, 인승단의 비첩자( 婢 妾 子 ) 인완( 印 完 )은 호 군( 護 軍 )이 되었다. 인후와 인승단 2대에 걸쳐 재신이 되고, 인후의 손자 인완도 호군을 역임하였으니 3대에 걸쳐 4품 이상을 역임한 셈이다. 그러나 인후를 몽고인이라고 한 것 은 손자대까지도 고려의 지명을 본관으로 갖지 않고 벼슬했음을 알려준다. 인승단은 연 안부원군이 된 적이 있었고, 16세기에 간행된 씨족원류( 氏 族 源 流 ) 에 인승단은 연안 인 씨편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후손들과 계보로 연결되는 가장 오랜 조상은 석성 부원군( 石 城 府 院 君 ) 인당( 印 瑭 )이었으며, 인승단은 아버지 인후와 연결되지 않은 채 인 당의 좌측에 적었고, 직계후손들도 없었다. 13) 고려사 열전이나 묘지명을 남긴 투화인 들이 향관 대신 중국의 출신지를 기록한 것과, 변안렬이 원주를 향관으로 하사받았다 고 기록한 것은 중국 투화인과 그 후손들이 향관 없이 벼슬하는데 큰 지장을 받지 않 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많은 중국 투화인들이 재상에 이르고 2~3대에 걸쳐 3~4품에 오르는 경 8) 蔡 仁 範 墓 誌 銘, 13 15쪽(본 발표문의 묘지명은 모두 김용선 편,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아시아문화연구소, 1993을 인용하였다. 이후 편의상 묘지명과 쪽수만을 적겠다). 채인범묘지명 이 만들어지던 1024년(현종 15)에 내사시랑평장사이면서 채씨 성을 가진 사람은 1022년 4월에 내사시랑평 장사 겸서경유수사가 되고 1027년에 문하시랑평장사로 승진한 채충순이 있다( 朴 龍 雲, 高 麗 時 代 의 平 章 事 高 麗 時 代 中 書 門 下 省 宰 臣 硏 究, 一 志 社, 2000, 쪽). 그런데, 本 人 傳 에는 史 書 에 世 系 를 잃어버렸다[ 蔡 忠 順 史 失 世 系 ]고 하였다( 高 麗 史 권93, 蔡 忠 順 傳 ). 9) 林 光 墓 誌 銘, 쪽. 1 0 ) 高 麗 史 권 1 2 3, 印 侯 傳. 1 1 ) 高 麗 史 권 1 2 6, 邊 安 烈 傳. 1 2 ) 高 麗 史 권 1 2 3, 印 侯 傳. 1 3 ) 氏 族 源 流 쪽, 延 安 印 氏. 세 종 실 록 지리 지 나 신 증 동 국 여 지 승 람 의 연 안 도 호 부 성 씨 조 에 인 씨 는 없 다. 78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79
41 제 4 주제 고려시대 투화( 投 化 )와 거류( 居 留 ) 우가 있었지만, 국왕이 그들을 특별히 정치세력으로 후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려에 정 착하여 문벌을 이루지도 못하고 문벌과 혼인관계를 맺지 못했던 것 같다. 후대의 문헌 에 신안지, 장순룡, 인승단 등이 거창 신씨( 居 昌 愼 氏 ),14) 덕수 장씨( 德 水 張 氏 ) 15), 연안 인 씨( 延 安 印 氏 )의 조상으로 기록되었지만, 그들과 연결되는 후손들은 없었다. 채인범( 蔡 仁 範 ) 채충순( 蔡 忠 順 ), 주저( 周 佇 ), 유재( 劉 載 ), 임광( 林 光 ) 등 고위 관리가 되었던 인물조 차도 그 후손의 행적이 명확하지 않다. 후손들이 고위관직을 지낸 저명한 투화인들을 조상으로 내세우지 않았다는 것은 그 들을 기억할 필요가 적었다는 의미이다. 고려시대에 중국 투화인을 현조( 顯 祖 )로 두었다 는 것은 그다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은 향리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하 여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문지( 門 地 )를 세웠던 사례가 적지 않았던 것과 대조된다. 그 렇다고 해서 중국 투화인들이 특별히 차별받은 것도 아니었다. 중국 투화인들이 향관을 바꾸지 않은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여러 대에 걸쳐 고려 사람들과 혼인하고 동화되면서 부계로 뚜렷한 후손들을 남기지 못했거나 부계 계보의 영향력이 낮았던 고려사회의 현실 등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추후 실증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하지만 조선 초에 이르러 투화인들이 향관( 鄕 貫 )을 갖기 시작한다. 1462년 4월에 투 화왜인( 投 化 倭 人 )에게 향관을 준 사례는 투화인과 외국인의 구별은 물론 향관을 하사 하는 조건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조( 吏 曹 )에서 투화왜인 행대호군( 行 大 護 軍 ) 평순( 平 順 ) 등의 장고( 狀 告 )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평순의 아비 중추원부사( 中 樞 院 副 使 ) 평원해 ( 平 原 海 )는 지난 병자년(1396, 태조 5)에, 피상의( 皮 尙 宜 )의 아비 부사직( 副 司 直 ) 피사고 ( 皮 沙 古 )는 지난 기묘년(1399, 정종 1)에 조선에 와서 시위( 侍 衛 )하다가 죽었습니다. 뒤 에 평순 등이 말하기를 신 등은 여기에서 나서 자랐으며 특별히 성상의 은혜를 입어, 벼 슬이 3품에 이르렀으나 단지 본향( 本 鄕 )이 없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일본( 日 本 )을 본향 으로 일컫게 될 것이므로 미편( 未 便 )합니다. 매우( 梅 佑 ) 당몽장( 唐 夢 璋 )의 사례의 본향을 내려 주소서. 하였으므로 신 등이 조회한 바, 평순 피상의 등은 본국에서 났으며 시위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청컨대 본향을 내려 주소서. 하였다. 피상의에게 동래( 東 萊 )를, 평 순에게 창원( 昌 原 )을 하사하였다. 16) 평순과 피상의는 아버지가 투화한지 50여년 만에 일 본을 본향으로 삼는 것이 편하지 않는다며 향관의 하사를 청하였다. 조선에서 나고 벼 슬했다는 것을 이유로 들고 있고, 국왕도 본국 출생과 시위한 것을 들어 향관을 하사 하고 있다. 일본에서 투화한 사람들은 일찍이 한식 성명( 漢 式 姓 名 )을 받고 벼슬을 하였 으나 본관을 받지 못했다. 그들이 본관을 갖기 위해서는 조선에서 태어나는 것과 더불 어 관직이나 군역을 수행하여 국왕에게 이바지해야 했다. 17) 조선 초에 투화인들이 향관을 요청했던 것은 진정한 조선인이 되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 고려시대에 투화인들은 여전히 외국인으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다음의 기록을 보자. B1. (문종 9년 9월) 신미일 예빈성( 禮 賓 省 )이 송도강( 宋 都 綱 ) 황흔( 黃 忻 )이 장( 狀 )에서 칭하기를 신이 어린 포안( 蒲 安 ) 세안( 世 安 )을 데리고 내투( 來 投 )하였는데, 어머니의 나이 가 82세로 본국( 本 國 )에 있으며 애절하게 그리워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청컨대 장남 포안 을 되돌려보내 공양하게 하십시오 라고 주( 奏 )하였다. 왕이 허락하였다. 18) B2. (문종 25년 5월) 무술일에 헌사( 憲 司 )가 송인( 宋 人 ) 예빈성 주부( 禮 賓 省 注 簿 ) 주항 ( 周 沆 )이 본래 문예( 文 藝 )로써 임용되었으나 지금 뇌물죄를 범하였으니, 청컨대 직전( 職 田 )을 거두고 되돌려 보내십시오 라고 주하니, 제가( 制 可 )하였다. 19) 흥미로운 것은 예빈성은 투화인 황흔을 송도강 이라고 하고, 황흔은 송을 본국 이 라고 하였으며, 헌사는 예빈성 주부 주항을 송인 이라고 했다는 점이다. 주항도 고려에 서 벼슬하고 있으니 송의 투화인임이 분명하다. 묘지명 등에서 고려의 군현 본관 대신에 중국의 출신을 관적으로 기록했던 송의 투화인들은 여전히 송인이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과 통하는 것이다. 주항이 귀향형에 해당되는 뇌물죄를 범했을 때, 투화가 취소되고 송 으로 되돌려 보내졌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고려에 투화하는 것은 영주( 永 住 )할 수 있는 권한을 얻는 것일 뿐 고려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14) 氏 族 源 流 거창 신씨 편에 신수와 신안지가 있으나 후손이 없다. 대신 太 子 太 保 를 지낸 愼 翼 이 사실상 계보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랜 조상이었다. 신익의 오른쪽에 子 與 孫 未 考 라고 하였는데(621쪽). 이것은 자손을 알 수 없는 신안지에 대한 설명이다. 15) 장순룡의 덕수장씨도 씨족원류 에는 없으며, 본관에 관해서는 기록으로는 淸 陰 集 권24, 刑 曹 判 書 張 公 雲 翼 墓 碑 銘 幷 序 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선조 때 벼슬을 한 장운익의 묘비명에 의하면, 張 氏 는 본래 중국에서 나왔고, 시조는 張 舜 龍 이었다. 원나라 때 宣 武 將 軍 鎭 邊 摠 管 으로 齊 國 公 主 를 따라왔다가 그대로 고려에서 벼슬하여 여러 차례 승진해서 僉 議 府 參 理 에 이르렀다. 德 水 를 采 邑 으로 받아 드디어 명망이 드러나게 되었다고 하였다. 장순룡이 원나라에서 이미 宣 武 將 軍 鎭 邊 摠 管 을 제수받고 왔다거나 그의 당대에 덕수를 채읍으로 받았다는 것은 자료상으로 신빙하기 어렵다. 장 순룡의 직계후손들도 투화인들의 후손들이 향관을 하사받기 시작하는 조선 초에 덕수를 향관으로 삼았을 것이다. 16) 世 祖 實 錄 권28, 세조 8 年 4 月 己 丑. 세조대에 평씨가 동래에, 피씨가 창원에 향관을 갖게 되었지만, 신증동국여지승 람 에 동래와 창원의 성씨조에 들어있지 않다. 17) 1465년 7월에 충청도 泰 安 郡 에 사는 向 化 한 忠 贊 衛 金 允 績 이 자기 대에 向 化 한 것이 아니고, 자신은 본국에서 生 長 하 였으며, 그 아비 金 成 福 도 또한 原 從 功 臣 에 참여하였으니, 平 順 의 例 를 따라 泰 安 을 貫 鄕 으로 내려 달라고 요청하였고 이조가 아뢰어 허락했다고 한다( 世 祖 實 錄 권36, 세조 11 年 7 月 丁 卯 ). 김윤적은 자신이 조선에서 자랐다는 것, 아버지 가 원종공신으로 국왕에 기여했다는 것 등을 들고, 자신의 거주지를 향관으로 삼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1 8 ) 高 麗 史 권 7, 世 家 文 宗 9 년 9 월 신미. 1 9 ) 高 麗 史 권 8, 世 家 문 종 2 5 년 5 월. 80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81
42 제 4 주제 고려시대 투화( 投 化 )와 거류( 居 留 ) 3. 외국인들의 고려 거류( 居 留 ) 거류는 어떤 목적으로 고려에 온 외국인들이 일시적으로 머무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고국이나 고향으로 되돌아 갈 것을 전제로 한 것이므로 영구히 살고자 고려에 투화하는 것과 구별된다. 고려에 거류하는 가장 많은 사례는 송상이 무역하러 오는 것과 동서 여 진, 일본, 흑수말갈 등의 이민족들이 고려 국왕에게 입조하기 위해 고려를 찾는 것이 해 당된다. 송상들은 예성항에 들어오면 인원과 화물에 대한 검사를 마친 뒤 고려에서 활동할 수 있는 통행증에 해당하는 문서를 받았다. 1105년(일본 長 治 2) 8월에 박다( 博 多 )에 도 착한 송상 이충( 李 充 )은 배의 수, 도강 등의 인원과 직책, 화물과 그 수량 등을 적은 양 절로시박사( 兩 浙 路 市 舶 司 )가 발행한 공빙( 公 憑, 公 驗 )을 태재부( 太 宰 府 )에 제출하였는 데, 20) 고려의 예성항에서도 비슷한 절차를 거쳤을 것이다. 송상이 고려에 머무는 기간은 확실하지 않다. 1079년에 송은 고려를 왕래하는 해상들 가운데 재본( 財 本 ) 오천민( 五 天 緡 ) 이상에 미치는 자는 명주( 明 州 ) 관아에 성명( 姓 名 )을 적고 허가를 받아 매년 2척이 나 가 교역을 하는데 금하는 물건이 없어야 하며 차년( 次 年 )에는 돌아와야 한다고 했다. 21) 송상이 귀국하는 것은 사정에 따라 100일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으나, 보통은 다음 배 가 도착하면 귀국하였으며, 그 한도는 1년 이상을 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이상은 국왕 의 특별한 허락을 받아야했을 것이다. 주로 송상은 배가 정박한 예성항과 가져온 사치품들을 팔기 용이한 개경 지역에서 활 약하였다. 고려에 자주 왕래하고 오래 동안 거류하여서 송상은 고려 여인들을 처( 妻 )로 두기도 하였다. 일찍이 당상( 唐 商 ) 하두강( 賀 頭 綱 )이 예성강에서 미부인( 美 婦 人 )을 보고 그 남편과 바둑내기를 하여 그녀를 차지했다가 되돌려준 일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부 인을 잃은 남편이 후회하며 불렀다고 하는 예성강곡( 禮 成 江 曲 ) 은 송상들의 활동 지역 과 더불어 그 처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다. 22) 송상의 배편에 고려에서 문예를 갖춘 자를 우대한다는 소식을 듣고 벼슬하러 오는 자도 있었다. 그들은 무역하는 것이 거류의 목적이 아닌 만큼 고려에서 벼슬할 만큼의 실력을 가 졌는지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하였고, 그것이 거류기간이나 투화 승인의 여부를 결정하였다. 20) 朝 野 群 載 권20, 大 宰 府 附 異 國 對 宋 商 客 事. 21) 續 資 治 通 監 長 編 권296, 신종 元 豐 2년 춘정월 병자. 22) 高 麗 史 권71, 樂 志 2 俗 樂 禮 成 江. 1124년 5월에 명주( 明 州 ) 사람 두도제( 杜 道 濟 ) 축연조( 祝 延 祚 )가 상선( 商 船 )을 따라 본국에 도착하여 돌아가지 않은 것에 대해 고려가 황제에게 머물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 았다. 본래 두도제 등은 일시적으로 거류할 생각으로 고려에 왔으나 벼슬을 하면서 투 화를 했던 것 같다. 23) 이 기사를 통해 송은 출국한 인원을 계속 관리했고, 고려에 간 사 람들이 장기간 귀국하지 않으면 공문을 보내 찾았으며, 고려는 투화한 송인에 대해 송 에 그 사정을 알리고 머물 것을 허락받았음을 알 수 있다. 송상과 더불어 가장 많이 고려에 거류한 자들이 여진이었다. 동서 여진과 흑수말갈 등 고려 주변의 제 민족들은 고려에 와서 향직( 鄕 職 )과 무산계( 武 散 階 )를 받아 정치적 권위를 얻었고, 고려와의 진봉 회사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하였다. 아울러 개경에 머무는 동안 시전에서 고려의 상인은 물론 송상들과 원하는 물건들을 교역하여 되돌아 갈 수 있었다. 이에 각 부족의 추장들이 많은 인원을 거느리고 고려에 입조하였다. 서여 진은 압록강 부근의 도부서, 동여진과 흑수말갈은 원산만 부근의 도부서 또는 변경의 군현 관아를 찾아 입조 의사를 밝히고, 관원들의 인원과 물품에 대한 확인과 입조에 대 한 승인과 더불어 일정한 증명서를 받았을 것이다. 참고로 당대( 唐 代 )에 서인( 庶 人 )의 여 행증명서를 과소( 過 所 )라고 불렀으며, 여행 목적과 목적지, 여행자의 성명 연령 적관( 籍 貫 ), 함께 가는 수행원과 노비의 성명 등, 휴대하는 물품의 이름과 수, 대동하는 축산의 이름 털의 색 암수와 수효 등을 기록하였다. 신청인이 2부를 작성하여 제출하면, 군현의 관원이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서명하여 1부를 주어 증명서로 사용하도록 하고, 1부는 관청에 보관하였다. 24) 각 지역에서 출발한 여진인들은 고려의 수군과 군인들의 도움을 받아 개경에 도착하 고 궁궐에 가서 국왕을 알현하였는데, 개경에서 머무는 기간만큼은 일정한 제한이 있었 다. 1081년 5월에 여진인들이 개경에 머무는 기한을 15일을 넘지 않게 하고, 영원히 지켜 야할 규정으로 삼았다고 한다. 25) 고려에 입조하는 여진이 머물 개경의 객관으로 영선관 ( 迎 仙 館 )과 영은관( 靈 隱 館 ) 등이 있었는데, 26) 너무 많은 인원을 동시에 수용할 수 없어서 23) 高 麗 史 권15, 世 家 仁 宗 2년 5월. 24) 唐 의 公 驗 은 광의로 관청에서 발행하는 일체의 증명서를 지칭하지만, 협의로 여행허가증이나 功 勳 證 書 가 될 수도 있었다. 일본 유학승 圓 仁 이 당에 도착하여 여행증명서를 얻기 위해 노력하였고, 그것을 공험이라고 기록하였는데, 정확하게는 過 所 이지만 잘못된 기록은 아니었다고 한다(김택민, 在 唐 新 羅 人 의 活 動 과 公 驗 ( 過 所 ) 엔닌의 공험 취득 과정에서 장보고 신라인의 역할을 중심으로 대외 문물교류 연구 (권덕영 외), (재)해상왕장보고기념사 업회, 2002, 쪽). 25) 高 麗 史 권9, 世 家 文 宗 35년. 26) 高 麗 圖 經 권27, 官 舍 客 館. 82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83
43 제 4 주제 고려시대 투화( 投 化 )와 거류( 居 留 ) 이와 같은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그밖에 여진인이 입국한 뒤에 과거의 잘못을 처벌하기 위해 강제로 감금하는 것과 같 은 거류의 특별한 사례가 있다. 1050년 3월에 동여진 영새장군( 寧 塞 將 軍 ) 염한( 塩 漢 ) 등 이 와서 좋은 말을 바쳤으나, 염한은 그 이전의 범죄로 인해 개경에 오지 못하고 변방에 유치되는 징벌을 받았다. 27) 이러한 사례는 여진인의 잘못을 징벌하고자 이동을 제한하고 사실상 감금한 것으로 일반적인 거류와는 구별해야할 것이다. 맺음말 고려시대 투화인에 대한 우대 정책을 잘 보여주는 자료를 살펴보았다. 고려는 여진 거 란 등의 투화를 장려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투화인들에게는 투화장을 설정하여 기름지 고 좋은 토지[ 上 田, 好 田 ]를 주었고, 일정기간 조세와 요역을 면제하였다. 출신지에서 신 분이 높았던 자들에게는 그에 걸맞은 관직을 제수하기도 하였다. 집단 투화를 유도하기 위해 10인, 100인 단위로 늠식( 廩 食 )과 금백( 金 帛 )을 상으로 주었고, 그 이상은 비례하여 포상을 더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대몽항쟁이 이루어지던 고종대만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시행된 것으로 일시적으로 재정 지출이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인구 와 경작지가 늘어서 농업생산과 조세가 증대되어 국가 운영에 이익이 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고려에 투화한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출신을 어떻게 적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송인들은 출신지를 적었던 반면에 그 이외의 투화인들은 몽골인 또는 회회인 과 같 이 어떤 민족이었는지를 밝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고려에 투화한 이후 2세, 3세들 이 고려에서 계속해서 벼슬했는데도 여전히 국내의 군현으로 관적을 바꾸지 않았다. 그것 은 자신들의 부계 조상이 외국인이며 자신이 투화인의 후손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고려 국왕이 외국인들에게 투화를 허락했다는 것은 영주할 권리를 주었다는 의미 이상은 아 니었다. 28) 투화인은 외국투화인 의 줄임말이었으며, 투화한 외국인 의 뜻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중국 출신이라고 해서 특별히 우대받아서 문벌을 이루지도 않았으며, 자 신의 조상이 중국인이라며 내세웠던 사례는 보이지 않았다. 고려시대 재상을 지낸 투화인 들의 상당수가 계보적으로 후손들과 연결되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다. 조선후기에 많 은 성씨들이 시조가 중국에서 도래하였다고 기록하던 분위기와 확연한 차이가 있었던 것 이다. 거류는 외국인들이 고려에 와서 한시적으로 머무는 것을 말한다. 그 기간은 동서 여 진, 흑수말갈, 일본인들이 고려의 국경에 도착하여 고려 관원에게 신고하고 허락을 받아 고려국왕에게 입조하고 귀국하기까지가 해당된다. 송상들은 예성항에 도착하여 무역하 고, 다음 차례의 배와 교대하여 고려를 떠날 때까지이다. 외국인들은 인원과 물건 및 그 수량을 점검받고 고려에서 다닐 수 있도록 여행증명서 형식의 문서를 받았다. 거류는 한시적으로 머무는 것인 만큼 입국시 주어진 기한을 넘어서는 안 되었다. 만약 사정으로 더 오래 남기를 원한다면 국왕에게 거류의 연장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아야 했다. 고려에 필요한 재능이 있어 투화하고 벼슬하고자 왔던 송인들은 그들의 능력을 시험 하는 동안에 고려에 거류할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능력이 확인된 사람은 투화가 허락되 었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본국으로 되돌아갔다. 이처럼 투화를 위해서는 거류의 과정을 거쳐야한다는 점에서 거류는 투화에 선행하는 단계이기도 했다. 27) 高 麗 史 권7, 世 家 文 宗 4년. 28) 고려시대의 거류인과 투화인을 요즘의 제도와 거칠게 비교하면 거류인은 비자를 받은 여행객이나 상인, 투화인은 영주 권자와 유사하다. 그리고 투화인들이 향관을 받는 것은 영주권을 얻은 자들이 시험을 봐서 대한민국의 국적을 갖는 귀 화에 해당될 것 같다. 84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85
44 사료 및 참고문헌(사료, 저서, 논문, 국내, 국외순, 연도순, 가나다순) 高 麗 史, 高 麗 史 節 要, 東 國 李 相 國 集, 高 麗 圖 經, 朝 鮮 王 朝 實 錄,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谿 谷 集 金 龍 善 편, 高 麗 墓 誌 銘 集 成, 翰 林 大 아시아 文 化 硏 究 所, 1993 장동익, 高 麗 時 代 對 外 關 係 史 綜 合 年 表, 동북아역사재단, 2009 白 南 雲, 朝 鮮 封 建 社 會 經 濟 史, 改 造 社, 1937 金 庠 基, 東 方 交 流 史 論 攷, 乙 酉 文 化 社, 1948 金 庠 基, 東 方 史 論 叢, 서울대출판부, 1974 金 庠 基, 新 編 高 麗 時 代 史, 동국문화사, 1961; 서울 大 出 版 部, 1985(재간행) 李 丙 燾, 韓 國 史 ( 中 世 編 ), 震 檀 學 會, 乙 酉 文 化 社, 1961 姜 晋 哲, 高 麗 土 地 制 度 史 硏 究, 高 大 出 版 部, 1980 朴 玉 杰, 高 麗 時 代 의 歸 化 人 硏 究, 국학자료원, 1996 蔡 雄 錫, 高 麗 時 代 의 國 家 와 地 方 社 會 本 貫 制 의 施 行 과 地 方 支 配 秩 序, 서울대출판부, 2000 森 克 己, 日 宋 貿 易 の 硏 究, 國 書 刊 行 會, 1975 森 克 己, 續 日 宋 貿 易 の 硏 究, 國 書 刊 行 會, 1975 李 鍾 明, 高 麗 에 來 投 한 渤 海 人 考 白 山 學 報 4, 이세현, 고려 전기의 麗 眞 관계에 대하여 여진의 來 朝 와 來 投 를 중심으로 群 山 敎 育 大 論 文 集 4, 1971 全 海 宗, 歸 化 에 대한 小 考 東 洋 古 代 史 에 있어서의 그 意 義 白 山 學 報 13, 1972 李 鉉 淙, 外 國 人 歸 化 서울600년사, 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77 金 渭 顯, 高 麗 의 宋 遼 金 人 投 歸 者 에 대한 收 容 策 ( ) 史 學 志 16, 1982; 遼 金 史 硏 究, 裕 豊 出 版 社, 1985 韓 圭 哲, 高 麗 來 投 來 往 契 丹 人 渤 海 遺 民 과 관련하여 韓 國 史 硏 究 4 7, 金 恩 淑, 日 本 古 代 의 歸 化 의 개념 邊 太 燮 華 甲 紀 念 論 叢, 三 英 社, 1985 朴 玉 杰, 高 麗 初 期 歸 化 漢 人 에 대 하 여 國 史 館 論 叢 39, 1992 黃 雲 龍, 歸 化 姓 氏 始 祖 東 來 說 釜 山 女 大 史 學 10 11합, 이종일, 中 國 에서 東 來 歸 化 한 사람의 姓 氏 와 그 子 孫 의 身 分 地 位 素 軒 南 都 泳 博 士 古 稀 紀 念 歷 史 學 論 叢, 1993 黃 雲 龍, 韓 國 歸 化 姓 氏 와 土 着 姓 氏 의 比 較 芝 邨 金 甲 周 敎 授 華 甲 紀 念 史 學 論 叢, 1994 韓 圭 哲, 高 麗 來 投 來 往 女 眞 人 渤 海 遺 民 과 관련하여 釜 山 史 學 합, 金 南 奎, 高 麗 前 期 兩 界 地 方 의 原 住 來 投 女 眞 人 에 대하여 慶 大 史 論 8, 1995 韓 圭 哲, 渤 海 遺 民 의 高 麗 投 化 後 渤 海 史 를 중심으로 釜 山 史 學 3 3, 朴 龍 雲, 高 麗 時 代 의 平 章 事 高 麗 時 代 中 書 門 下 省 宰 臣 硏 究, 一 志 社, 2000 김택민, 在 唐 新 羅 人 의 活 動 과 公 驗 ( 過 所 ) 엔닌의 공험 취득 과정에서 장보고 신라인의 역할을 중심으로 대외 문물 교류 연구 (권덕영 외), (재)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2002 朴 玉 杰, 高 麗 의 歸 化 人 同 化 策 특히 거주지와 귀화 성씨의 관향을 중심으로 江 原 史 學 17 18, 2002 최양규, 고려-조선시대 중국 귀화성씨의 정착 白 山 學 報 7 3, 徐 根 植, 朝 鮮 時 代 向 化 개 념 에 대 한 硏 究 朝 鮮 王 朝 實 錄 을 중심으로 東 洋 古 典 硏 究 37, 2009 원창애, 향화인의 조선정착 사례 연구 여진 향화인을 중심으로 東 洋 古 典 硏 究 37, 2009 임선빈, 조 선 초 기 歸 化 人 의 賜 鄕 과 特 性 東 洋 古 典 硏 究 37, 2009 李 鎭 漢, 高 麗 時 代 における 宋 人 の 來 投 と 宋 商 の 往 來 年 報 朝 鮮 學 1 3, 高 ; 麗 時 代 宋 商 往 來 硏 究, 景 仁 文 化 社, 2011 和 田 淸, 定 安 國 に 就 いて 東 洋 學 報 6, ; 東 亞 史 硏 究 ( 滿 洲 編 ), 東 洋 文 庫, 1955 日 野 開 三 郞, 後 渤 海 の 建 國 帝 國 學 士 院 紀 事 2-3, 1943 江 原 正 昭, 高 麗 の 州 縣 軍 に 關 する 一 考 察 女 眞 人 の 高 麗 軍 への 編 入 を 中 心 にして 朝 鮮 學 報 2 8, 森 克 己, 東 洋 國 際 貿 易 の 普 遍 型 日 宋 貿 易 の 硏 究, 國 書 刊 行 會, 1975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제5주제 발표 팔관회에 온 외국인들 천하관, 축제와 교역 김 기 덕 건국대학교 교수 86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45 제 5 주제 팔관회에 온 외국인들 팔관회에 온 외국인들 천하관, 축제와 교역 김 기 덕 (건국대학교 교수) 1. 현재사와 현재적 관점 2. 고려 팔관회의 성격 3. 고려 팔관회의 현재적 계승의미 1. 현재사와 현재적 관점 크로체(Benedetto Croce)가 말한바 모든 역사는 현재사(contemporary history) 의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한국처럼 고려시대에 이어 역사상이 매우 다른 조선시대가 이어 지고, 그 조선시대의 영향이 현재까지 지속될 경우, 대중만이 아니라 전문가도 현재의 관 심과 상황인식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조선의 가문과 역사의식, 문화유산, 심지어 수도 위치까지 현재의 대한민국과 일치하는 관계로, 비록 일제 식민시기가 있었지만 일반적으 로 현대의 한국인에게는 조선시대 친연성이 매우 크다. 더욱이 한 왕조가 유럽과는 비교 가 되지 않을 정도로 500년이 넘기 때문에 이전 시대 분위기와의 단절성도 매우 크다. 조선시대는 성리학의 영향으로 제후국체제를 선택하였다. 이것을 일제 식민사관에서는 사대주의의 일환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사실상 명분( 名 分 )과 분수( 分 數 )에 입각한 성 리학 논리 체계에서는 고려처럼 황제국체제를 선택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조선은 지속 적인 쇄국정책을 취하여 단일성과 독자성에 있어서는 장점이 되었으나 또 다른 차원에서 다양성과 개방성은 부족했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또한 남녀유별의 사회상으로 인하 여 전반적으로 고려에 비해 축제적 요소가 제한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선시대 사회상은 주지하듯이 17세기 전반을 기점으로 성리학 질서가 향촌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정착되었으며, 그러한 역사상이 우리 고유의 역사상인 것으 89
46 제 5 주제 팔관회에 온 외국인들 로 현대에까지 인식되어 왔다. 비록 연구의 활성화로 고려시대의 역사상이 많이 소개되었 으나, 1) 500년 조선사와 그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한국 현대사회의 친연성은 강고하다 고 할 수 있다. 특히 시간성의 문제와 함께 장소성이라는 차원도 매우 중요한데, 조선의 수도가 곧 지금 대한민국의 수도라는 점과 조선의 주 무대가 그대로 지금의 남한이라는 점도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 결과 황제국, 다양성, 개방성, 축제성의 특성을 갖는 조선 이전의 역사상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매우 취약하다고 할 수 있다. 본 글에서는 이 러한 한계를 갖는 한국 역사상의 현재적 관점을 극복하고 고려 당대의 역사상의 관점에 서 고려 팔관회의 성격과 현재적 계승의미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2. 고려 팔관회의 성격 팔관회는 고유의 민간신앙과 불교 의례가 습합된 국가행사였다. 일찍이 안계현의 연구 이후 현재까지 다양한 연구가 축적되어 왔으며, 안지원과 김종명의 연구는 단행본으로도 출간되었다. 팔관회에 담긴 고유의 민간신앙의 실체, 불교적 요소의 비중, 인도 및 중국의 유사사례 검토, 신라 및 태봉의 팔관회와의 비교, 다른 행사와의 차별성 등등, 실로 팔관회 의 성격 규명은 그 스펙트럼이 대단히 넓다는 점에서 다양한 성과가 나온 것에 비례하여 많 은 이견( 異 見 )도 존재하고 있다. 이 글에서 발표자가 이러한 많은 연구성과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재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앞 장에서 언급한 문제의 식에 입각하여, 팔관회의 현재적 계승의미와 연결되는 주요 성격을 추출해 보고자 한다. 먼저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모든 자료 중 태조대의 팔관회 기록은 또 다른 차원의 고려 팔관회의 원형( 原 型, Archetype)을 갖는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 한다. 즉 후삼국을 통일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고려국가가 국왕이 중심이 되어 궁궐을 무대로 대규모 행사를 공식적으로 개최했다는 점, 그리고 그 행사를 후대에 반드시 유 의하라는 <훈요십조>에 중요하게 남겼다는 점을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고려 태조대 팔관회를 집중 검토하여, 궁예의 팔관회 계승 일통삼한 기복을 위한 팔관회 신라전통문화로서 사선악부 등이 습합된 팔관회[ 供 佛 樂 神 ] 위령제와 축제적 성격이 보완된 팔관회 천령( 天 靈 ) 및 오악( 五 嶽 ), 명산( 名 山 ), 대천( 大 川 ), 용신( 龍 神 )을 1) 전문성과 대중성을 갖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은 박종기의 새로 쓴 오백년 고려사 (푸른역사, 2008)를 들 수 있다. 섬기는 군신동락( 君 臣 同 樂 )의 팔관회로 발전했다고 태조대의 팔관회의 의미변화를 규명 한 연구는 주목할 만하다. 2) 이러한 고려왕실의 신성성 강화와 군신동락, 여민동락의 행 사는 고려 태조 때에 새롭게 정립된 팔관회의 원형으로서, 비슷한 사례의 외국 및 고려 이 전시대와도 차별성이 있는 것이며, 이후 고려시대 전개에 있어 기본 성격에 있어서는 별 차 이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팔관회에서 추출할 수 있는 의미와 성격은 먼저 고려의 천하관이다. 고려는 다 원적 천하관에 입각하여 스스로를 황제국으로 자처했다. 주지하듯이 고려는 황제국체 제로 운영하였다. 비록 중국과는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제후국으로서의 형식을 취하였 지만 실제 운영에 있어서는 황제국체제로 운영된 외왕내황( 外 王 內 皇 )의 이중체제를 취하 였으며, 이는 다원적 천하관에 입각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3) 그런 점에서 한정수 의 연구에서 지적한 것처럼, <훈요십조>의 팔관회 기록에서 새롭게 삽입된 용신( 龍 神 ) 은 의미심장하다. 황제국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정체성과 자존감이 전제되 어야 한다. 고려 태조는 팔관회를 통하여 왕실의 신성성을 강조하였다. 4) 팔관회 의식은 고려 군주를 황제로 위치시키면서 치러진 의례였다. 이 의식에 많은 수의 송상( 宋 商 )들과 왜( 倭 )와 동서번( 東 西 蕃 )의 나라들과 흑수( 黑 水 )의 제국( 諸 國 )들과 탐라국( 耽 羅 國 ) 등이 공물( 貢 物 )을 바치고 참관하였으며, 이를 통해 송, 거란, 금 등의 조정도 고려의 칭제사 실을 알았으나 문제 삼지 않았다. 심지어 송제( 宋 帝 )는 귀국한 송인( 宋 人 )을 통해 김부일 ( 金 富 佾 )이 지은 <팔관회치어구호( 八 關 會 致 語 口 號 )>의 문장을 보고 뒤에 고려의 사신 이 자량( 李 資 凉 )을 만나자 그 문장 속에 칭제( 稱 帝 ) 등과 관련된 참어( 僭 語 )가 있지만 훌 륭한 문장이라고 칭찬했다. 5) 발표자는 팔관회의 의미 추출을 천하관, 다양성, 개방성, 축제성의 네 가지로 할 것인 데, 이 중 황제의식에 입각한 천하관은 이 가운데 가장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실로 팔관 회 개최의 전제는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팔관회는 제후국으로 전락한 원 간섭기에서는 금오산액( 金 鼇 山 額 )에 쓰인 성수만년( 聖 壽 萬 年 ) 이란 네 글자가 경력천추( 慶 曆 千 秋 ) 로 고쳐지고, 일인( 一 人 ) 즉 국왕에게 경사가 있으면 8방으로부터 표문이 궁전 앞마당 에 이르고 천하가 태평하다 는 문구는 완전히 개작되었으며, 만세 를 천세 로 부르게 하였다. 이후 제후국체제를 유지한 조선시대에 와서는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다. 2 ) 한정수, 고려 태조대 팔관회 설행과 그 의미 대동문화연구 86, ) 노명호, 동명왕편과 이규보의 다원적 천하관 진단학보 83, 1997; 노명호, 고려시대의 다원적 천하관과 해동천자 한 국 사 연 구 1 0 5, ; 김 기덕, 고 려의 諸 王 制 와 皇 帝 國 體 制 국 사 관 논 총 7 8, ) 공주의 근친혼 또한 이러한 왕실의 신성성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5 ) 고려사 권97 열전10 김부일전 90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91
47 제 5 주제 팔관회에 온 외국인들 팔관회의 두 번째 의미 추출은 다양성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국가에서 대규모 국가 행사를 시행할 때에 불교적 요소가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세계사적으로 대규모 축제는 전부 종교적 제의를 축제로 승화시킨 것이다. 그런데 고려의 팔관회는 불교라는 종교에 뿌리를 두면서도 고유의 민간신앙을 습합시켰다. 이 점을 미개성이나 한계성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며, 고려의 창조적 변용으로서 그 다양성의 차원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 이다. 단재 신채호는 주체성의 문제를 고민하면서, 우리 조선은 매양 밖에서 진리를 찾 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 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 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 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노예의 특색 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통곡하려 한다 고 하였다. 6) 고려는 시 작부터 국민 통합과 정서, 종교의 창조적 변용을 염두에 두고 종교적 제의의 승화에 있 어 불교적 요소와 민간종교적 요소를 습합시켰다. 팔관회 때에는 고려시대의 아악, 당 악, 속악은 물론 여러 주변국의 음악이 주악되었고, 사상적으로는 예악사상에 따른 유 교적 의례, 도교적 신선 취향, 사찰 방문이라는 불교적 행사, 그리고 백희가무 공연에서 의 토속신에 대한 신앙 등이 총체적으로 연출되었다. 7) 그리고 이러한 팔관회에 담긴 종 교적 다양성은 이후 고려사회의 특징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팔관회의 세 번째 의미 추출은 개방성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대외적 개방성으로서 교역을 들 수 있다. 황제국의 일환으로 팔관회 때에는 많은 외국인이 고려 황제를 축하 하기 위하여 방문하였고, 많은 교역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교역은 고려의 자존의식과 개 방성이 함께 전제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아울러 팔관회는 개경만이 아니라 서경에서도 열렸다. 이는 물론 일찍부터 서경을 중시한 정책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개경 위주의 공간 관념을 뛰어넘는 지역적 개방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팔관회의 주 무대는 궁궐 이었다. 이 또한 진정한 군신동략( 君 臣 同 樂 ), 여민동락( 與 民 同 樂 )의 개방성의 발로라고 평 가할 수 있을 것이다. 팔관회는 고려의 궁궐 위봉루에서 치러졌다. 전근대시대에 궁궐을 주 무대로 의례와 축제가 벌어졌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사례라고 보아야 한다. 현대사회에 와서도 대통령 이 있는 청와대를 방문하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특히 이 날은 어명으로 궁금이 풀리 6 ) 신 채 호, 浪 客 의 신 년 만 필 동 아 일 보 년 1 월 2 일 ; 단 재 신 채 호 전 집 하, 재 수 록 7) 이 부분의 해석에 대해서는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특히 고려사 예지의 기록 중 萬 邦 呈 奏 九 成 雅 樂 沙 墀 衆 樂 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문제가 될 수 있다. 어, 도인사들은 마음대로 구경하노라 라는 기록을 통하여 보면 팔관회 날에 궁궐 나들 이가 특권의 계층만이 아니라 개경에 모인 사람들의 잔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고 려 팔관회는 궁궐이라는 특별한 공간을 보통 사람들과 함께 나누었다는 점에서 개방성 의 극치를 보여준다. 팔관회의 네 번째 의미 추출은 축제성이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듯이 우리 민족은 멀 티적 요소가 강한 놀이의 민족이었다. 고대부터 쓰여 진 중국기록에는 한반도의 국가를 언급할 때에 항상 함께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같이 즐기는 음주가무( 飮 酒 歌 舞 )의 특징 을 반복하여 언급하고 있다. 함께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라는 특징은 우리 민족만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이러한 놀이의 복합성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복합성은 멀티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 문화 전 반에 스미어 있다. 요즘 유행하는 용어로 표현하자면 팔관회의 콘텐츠는 위와 같은 멀티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축제콘텐츠라고 할 수 있다. 고려 팔관회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먹고 마시고 즐긴다는 데에 있다. 태조대 도입 당시부터 팔관회는 부처와 천지신명 그리고 군 신( 君 臣 )이 함께 즐기기 위해 설행한다고 밝혔고, 이후 자묘일( 子 卯 日 )은 잔치와 음악을 피해야 하니 재미가 없다 하여 그 날에 설행하기를 꺼릴 정도로 팔관회는 축제로서의 기 능이 강하였다. 팔관회 자체가 즐거움이었으며, 그 속에서 행해지는 많은 의식과 공연들 을 통해 고려 사회의 질서와 그 문화 내부의 특정한 의미들을 극화하여 재확인시켰고 정 교화시켰던 축제의 장이었다. 팔관회 때 3일간 휴가를 얻은 관리들은 상중( 喪 中 )이거나 탄핵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대궐 구정( 毬 庭 )에 모여 먹고 마시고 춤추고 놀았다. 이날 궁궐은 초겨울이었지만 상의국( 尙 衣 局 )에서 명주나 베로 만든 조화( 造 花 )를 이용해 장식 하기도 하고 참가자들의 관( 冠 )에도 왕이 하사한 꽃을 꽂아 봄을 방불케 했다. 여기저 기 갖가지 모양의 등을 달아 환하게 장식했으며, 사방 외국상인들이 가져온 진귀한 물 품들을 마당에 쌓아 놓고 전시하였다. 높은 무대를 가설하여 그 위에서 우인( 偶 人 )들도 포함시킨 백희가무( 百 戱 歌 舞 )를 공연하게 하고, 마당에서는 선녀( 仙 女 )에 비유되던 기녀 ( 妓 女 )들이 악관( 樂 官 )의 음악에 맞춰 왕의 만수무강과 덕( 德 ), 태평세월을 찬미하며 춤 을 추었다. 음식의 경우 술은 공사간( 公 私 間 )에 금주령( 禁 酒 令 )이 내려진 가운데서도 팔 관회에서의 사용은 예외로 하였으며, 꿀과 기름으로 만드는 유밀과( 油 密 果 )와 같이 당 시로서 매우 사치스러운 음식도 제공되었다. 8) 8 ) 김 혜 숙, 고 려 팔 관 회 의 내 용 과 기 능 역 사 민 속 학 9, , 5 0 ~ 5 1 쪽 92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93
48 제 5 주제 팔관회에 온 외국인들 축제성의 핵심코드는 공동체성으로서, 일종의 대동제( 大 同 祭 )인 것이다. 팔관회도 의례 와 가무를 통하여 모두 희열( 喜 悅 )의 충만함에 도달하는 대동제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고관대작들의 노비들이 넓은 뜰에 들어와 서로 싸우며 돌을 던지니 누각 위에까지 날아 들었다 는 기사에서 보듯이, 이는 규범과 제도, 계급 등으로 유지되던 틀과 일상으로부터 해방된 난장( 亂 場 )의 대동제였다고 할 수 있다. 황제국 의식이 팔관회 개최의 전제였다면, 이러한 축제성은 실제로는 팔관회의 진정한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고려 후기 팔관회가 쇠퇴할 때에는 공동체적 요소는 상실되고 단지 난장적 요소만이 남아 국 왕도 기녀와 궁녀들을 데리고 구경꾼의 입장으로 참가할 정도로 변모하게 된다. 9) 3. 고려 팔관회의 현재적 계승의미 발표자는 현대 한국의 과제는 국가자존의식의 회복, 글로벌 의식의 확대, 다문화의 이 해, 양극화의 해소, 공동체성과 평등사회 구현, 국민 삶의 질의 고양이라고 생각한다. 이 러한 과제와 관련하여 고려 팔관회가 보여준 특징들은 그 의미의 현재적 계승의미가 충 분하다.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국가자존의식에 있어 팔관회에 담긴 천하관을 계승할 필요가 있다. 물론 전근 대의 천하관이 그대로 계승될 수는 없다. 그러나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분단국 현실과 국 제관계, 그리고 최근 국가 재개혁과정에 직면해서 뼈를 깎는 반성도 필요한 것이지만, 지 나친 비하의식도 문제일 것이다. 현재 전세계 국가의 뉴스를 보면 잘 나가고 있는 곳은 한 곳도 없다. 전부 어렵고 위험하다. 단순히 경제적 상황만이 아니라 국제적 관계나 정 치적 능력, 국민적 통합에 있어 전부 위기상황인 것이다. 고려의 당당한 자존의식을 바탕 으로 문제를 헤쳐 나가야 할 것이다. 둘째, 종교문제와 양극화의 문제에 있어 팔관회에 담긴 다양성을 계승할 필요가 있 다. 아무래도 현대 한국인들에게는 기독교의 친연성이 강하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편 향성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국의 전통에서 많은 교훈을 가져올 수 있다. 특히 불교 외 에 고유의 민간신앙을 습합하고자 했던 재창조성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양극 화의 문제에 있어 적극 계승되어야 한다. 오늘의 보수-진보의 문제는 어느덧 양쪽 모두 객관성을 상실하였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 발짝도 좁혀지고 있지 못한 보수-진보의 갈 등 속에서 학계가 시도하는 노력들은 위기의 정치를 해결하고 있다고 판단할지 모르겠 지만, 발표자의 시각으로는 오히려 정치적 목적에 휘둘리고 그 자장 속에서 표류하는 정 치의 시녀 역할로 전락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러한 논쟁이 오늘의 주된 주제는 아니겠지만, 다양성과 관련하여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며 고려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셋째, 글로벌 의식과 다문화, 공동체의식에 있어 팔관회에 담긴 개방성을 계승할 필요 가 있다. 사실상 우리 민족의 개방성은 수많은 다문화가정으로 인하여 많이 변화한 것 이 사실이다. 외국인과의 단순 교류나 취업 수준이 아니라 혼인으로 결합하여 가계를 계 승하게 된 수준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 어쩔 수 없이 다문화를 실 감하고 이해하게 만든 동인( 動 因 )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이 부족한 현재의 상황에서 팔관회의 국제적 개방성, 지역적 개방성, 군신동락과 여민동락의 개방성이 계승 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국민의 삶의 질과 관련하여 팔관회에 담긴 축제성을 계승할 필요가 있다. 이 점 과 관련하여 최근 유행하는 한류에 있어서도 고려되어야 할 측면이 있다고 본다. 먼저 한류의 지향도 단순히 한국을 강조하거나 산업적 측면 위주로 흘러서는 안 된다. 한류 의 지향도 동아시아 공동의 집, 더 나아가 전세계의 공동의 집이라는 다양성과 개방성에 입각한 축제성으로 가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는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있다. 스포츠는 본래 정신이 소통과 교류를 통한 공동체성의 회복이다. 아시안게임과 관련하여 많은 문 화행사가 기획되고 있으며, 그 핵심에 최근 유행하는 한류 가 있다. 이러한 행사가 진정 한 축제로 지속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한 가지만 더 첨언한다면 팔관회의 설행절차는 고려사 권69 지23 예11 가례 잡의( 嘉 禮 雜 儀 ) 중동팔관회의( 仲 冬 八 關 會 儀 )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것을 멀티미디어콘 텐츠로 제대로 구축한다면 역사연구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다양한 산업적 활용에 있어서 도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9) 팔관회에서 연희되고 연주된 百 戱 歌 舞 와 雜 技 四 仙 樂 部 들은 鄕 樂 과 唐 樂 과 雅 樂 등 모든 樂 舞 가 총괄된 것으로 해 석하여, 팔관회를 전래된 민족 전통의식과 민족악무가 대융합된 民 族 禮 樂 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이민홍, 고려조 팔 관 회 와 예 약 사 상 대 동 문 화 연 구 3 0,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95
49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제6주제 발표 여일관계( 麗 日 關 係 )와 표류민 피로인 문제 모리히라 마사히코 일본 큐슈대학교 교수
50 제 6 주제 여일관계( 麗 日 關 係 )와 표류민 피로인 문제 여일관 계( 麗 日 關 係 )와 표 류민 피로인 문 제 모리히라 마사히코 ( 森 平 雅 彦, 일본 큐슈대학교 교수) 머리말 1. 여일관계( 麗 日 關 係 )의 개요 2. 표류민과 피로인의 동향 분석 3. 외교 계기로서의 표류민 피로인 송환 맺음말 머리말 표류민과 그 송환 이라는 주제는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교류사와 해양사 분야에서 주요 연구주제 가운데 하나로 주목받아 왔다. 특히 일본 한국 중국이라는 영역 국가의 구분이 명료해진 근세기(17~19세기)에 관해서 관계국 사이의 국교 유무는 상관이 없이 정치권력에 의해 표류민에 대한 보호와 송환이 어느 정도 제도화된 형태로 안정적으로 시 행되었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특징으로 간주되었으며, 표류민 송환 체제 라고 지칭된 바 있다.( 荒 野 1988) 한일 간의 상황에 대해서도 비교적 자세하고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李 薫 2000 등) 문제는 그것이 근세에 한정되는 특징인가라는 점이다. 이 문제를 총합적으로 밝히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시기와 지역마다 구체적인 사례 연구를 좀 더 축적할 필요가 있다. 본 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여일관계( 麗 日 關 係 ) 상의 표류민 문제에 대해서는 선행연구에서 부 분적으로 언급된 바 있는데( 山 内 2003; 김2009; 전2011), 전문적 통시적( 通 時 的 )으로 정리 해 본 연구는 없다. 또 이 학술회의의 주제인 인도 라는 관점에 입각한다면, 표류민과 함께 피로인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자연적 요인이냐, 전쟁 해적 등 인위적 요인 99
51 제 6 주제 여일관계( 麗 日 關 係 )와 표류민 피로인 문제 이냐는 차이점은 있지만, 본인의 의지에 반하여 외국에 오게 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서 로 공통적인 면이 있기 때문이다. 1. 여일관계( 麗 日 關 係 )의 개요 표류민 피로인 문제를 검토하는 전제로서 우선 여일관계사를 전체적으로 개관하고자 한다. 8세기 이후, 일본과 신라의 정치관계가 나빠져서 서로 간의 외교 교류는 활발하지 못 하였다. 한편, 9세기에는 장보고( 張 保 皐 )로 대표되는 신라 상인의 무역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그러한 민간 동향의 다른 일면으로서 신라 해적이 구주( 九 州 ) 북부를 습격 하기도 했다. 그러한 새로운 상황은, 옛 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심각하게 우려하는 일본 귀족들의 마음속에서 신라에 대한 적개심을 낳았다. 10세기 전반, 동아시아 각 지역 사회에서는 공통적으로 유동적인 상황이 나타났다. 그 중, 후삼국이 정립하게 된 한반도에서는, 우선 후백제가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고, 이어 서 통일을 이룬 고려가 두세 번에 걸쳐 사신을 보내고 우호관계( 友 好 關 係 )를 촉구하였 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의도적으로 고립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그에 응하지 않았다.( 石 上 1982) 그 후 고려는 972년과 997년에도 일본과 접촉한 모양인데(972년의 주체는 지방세 력일 가능성도 있음), 일본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관계가 냉각된 것과는 별도로, 민간 차원에서는 무역 이주 등의 형태로 서로 왕래가 이루어져 있었던 흔적이 단 편적인 기록을 통해 엿보인다.( 森 平 2013b) 그러한 가운데, 1019년에 고려 동북 국경 바깥에 사는 여진인들이 구주 북부 연안을 습격하여 주민을 납치했다. 이때 고려의 수군이 여진 선단이 돌아오는 길을 해상에서 공 격하고 납치된 일본인을 많이 수용했는데, 고려 정부는 그들을 후하게 대우하고 일본으 로 송환했다. 그러나 고려에 대한 일본 지배층의 경개심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石 井 2006; 村 井 2013), 국교 수립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다만 양국 사이에서 대립적 분위기가 완화 된 점은 중요하고( 山 内 2003), 양국 관계가 어느 정도 양호하게 될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 도 있다.( 森 2009) 11세기 후반에 이르러 고려 측의 기록에서는 일본에서 온 상인들이 많 이 등장하게 된다. 전술한 것처럼 무역 자체는 그 이전부터 행해져 왔는데, 이 시기까지 고려가 그들을 받아들일 체제를 정비하고, 특히 그들 상인을 조공자( 朝 貢 者 )로 간주함 으로써 왕권의 위엄을 높이는 데 활용하게 된 것이 기록 상황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상인은 주로 대마( 對 馬, 쓰시마), 일기( 壹 岐, 이키), 박다( 博 多, 하카타), 대재부( 大 宰 府, 다자이후) 방면에서 찾아왔던 것 같은데, 그 중에는 당시 박다 대재부 지역에서 거류 하고 있었던 송상( 宋 商 )도 포함된다. 12세기에 이르러 대한해협 연안지역 사회는 다시 불안정해지기 시작하였다. 여일 쌍방 에서 해적 사건이 발생했으며, 대일무역에 관한 기록도 감소했다. 그것이 얼마나 실태를 반영하느냐는 문제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13세기에는 이른바 초기 왜구가 발생하는 등,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것은 확실하다. 이 시기에 일본에서는 무가정권( 武 家 政 權, 鎌 倉 幕 府 가마쿠라 바쿠후)이 태어났고, 대외교섭의 창구였던 대재부의 실권도 어가인( 御 家 人, 고케닌=가마쿠라 將 軍 의 신하인 무사)인 무등( 武 藤, 무토우) 씨가 장악했다. 고려와 무등 씨는 왜구 금압과 무역을 둘러싸고 서로 교섭했다. 당시 여일무역( 麗 日 貿 易 )은 사료 상 진봉( 進 奉 ) 이라는 표현으로 등장한다. 여전히 일본 측의 통교자( 通 交 者 )가 고려 왕 권에 물품을 바치는 형식을 취한 셈인데, 11~12세기의 무역과의 연속성 여부가 문제이다. 13세기 후반, 고려는 몽골제국[ 元 ]에 번속( 藩 屬 )하고 일본에 대한 원의 조공 권고와 침략 활동을 돕게 된다. 이 때문에 여일 간의 평화적인 통교는 기록에서 사라져 버린다. 원의 위세가 퇴조된 14세기 후반에는 반대로 전기 왜구가 크게 발생하였다. 고려는 방위 에 힘쓰는 한편, 일본의 실정( 室 町, 무로마치) 막부나 지방 권력자[( 九 州 探 題 (큐슈 탄다 이), 大 内 (오오우치) 氏, 對 馬 宗 (소우) 氏 ]에 사신을 보내고 금압을 촉구했다. 이는 훗날 조선전기의 대일통교체제로 이어진다. 이렇듯이 여일관계는 기록상 크게 보면 소원(초기) 경제교류의 활성(전기) 군사적 긴장(후기)의 추세로 진행되었다. 평상시 통교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국가 차원의 직 접 교섭은 거의 없었다. (2) 특히 일본 측에서는 민간과 지방이 담당자였다. (3) 교섭 내 용은 무역 중심이었다. (4) 일본으로 건너간 고려 상인도 없지는 않았으나, 일본 측에서 일방적으로 고려로 찾아오는 경향을 보였다. 2. 표류민과 피로인의 동향 분석 본장에서는 앞서 정리한 麗 日 關 係 의 동향을 염두에 두면서, 표류민 피로인의 발생 양 상과 그 송환 상황을 개관하고자 한다. 다음 표는 그들 사례를 고려 사료와 일본 사 료로 나누어서 정리해 본 것이다. 여일( 麗 日 ) 간 표류인 피로인 사례 일람 번호 연대 고려 사료 일본 사료 고려인이 筑 前 (치쿠젠) 早 良 (사와라)에 來 到 함 石 見 (이와미)에 來 到 한 고려인을 귀국시킴. ( 日 麗 ) 100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01
52 제 6 주제 여일관계( 麗 日 關 係 )와 표류민 피로인 문제 번호 연대 고려 사료 일본 사료 고려로 표류한 大 宰 府 주민이 고려의 牒 狀 을 가지고 귀국함. 일본은 고려에 無 禮 하다고 항 의 함.( 麗 日 ) 大 宰 府 가 고려인을 追 伐 함 刀 伊 (여진)가 납치한 日 本 人 을 고려가 금주에서 송환함.( 麗 日 ) 표류한 耽 羅 人 貞 一 이 일본에서 귀국함. ( 日 麗 ) 日 本 이 표류민 謙 俊 등 11명을 송환함. ( 日 麗 ) 對 馬 島 가 표류민 金 孝 등 20 名 을 금주까지 송환함.( 日 麗 ) 對 馬 島 가 罪 人 良 漢 등 3명을 송환함.( 日 麗 ) 對 馬 島 가 표류민 位 孝 男 을 송환함.( 日 麗 ) 日 本 이 耽 羅 의 표류민 高 礪 등 18명을 송환 함.( 日 麗 ) 日 本 이 표류한 상인 安 光 등 44명을 송환 함.( 日 麗 ) 因 幡 (이나바)에 표착한 迂 陵 島 人 을 귀국시킴. 日 麗 ) 明 州 에 표류했던 고려인 未 斤 達 이 돌아오는 길에서 志 摩 (시마)에 표착하고 구류됨. 大 宰 府 가 耽 羅 人 8명이 표착했다 고 보고 함. 이 듬 해 귀 국 시 킴.( 日 麗 ) 大 隅 (오오스미)에 표착한 고려인을 對 馬 를 통 해 송환함.( 日 麗 ) 大 宰 府 가 고려인이 來 着 함을 보고함 金 州 가 日 本 이 표류한 고려인을 송환했다 고 보고함.( 日 麗 ) 전에 耽 羅 에 표착한 일본선의 재화를 副 使 와 判 官 이 약탈함 日 本 官 船 大 使 如 眞 등이 開 也 召 島 와 群 山 楸 子 島 에 표착함. 大 宰 府 少 卿 殿 白 船 78명이 宣 州 加 次 島 에 표착함. 모두 귀국시킴. 일본 상 선 30명이 亀 州 艾 島 에 표 착 함.( 麗 日 ) 對 馬 守 藤 原 親 光 (후지와라 치카미쓰)가 平 氏 정권의 탄압을 피해 고려에 망명함. 越 後 (에치고) 白 石 浦 (시라이시우라?)에 고려인 4명이 표착함. 上 京 했지만 추방됨. 日 本 僧 圓 爾 가 宋 에서 耽 羅 를 거쳐 귀국 함.( 麗 日 ) 몽골 使 와 高 麗 使 가 對 馬 島 주민과 충돌, 2명을 잡아 귀국함. 후에 송환함.( 麗 日 ) 표류한 탐라인이 일본에서 귀국함.( 日 麗 ) 제1차 일본 침략. 많은 일본인을 포로로 삼음. 번호 연대 고려 사료 일본 사료 제2차 일본 침략. 고려군 포로는 기술이 있거나 농사를 잘 하는 자는 살려 두고, 나머지는 처형함 일본인 19명이 오고 원에 압송됨 일본상선이 耽 羅 에 표착함. 2명을 송환하면서 원에 歸 順 하라고 권고함.( 麗 日 ) 鎭 邊 萬 戶 韓 希 愈 가 표류한 일본인 8명을 잡음 倭 舶 220명 남짓이 靈 光 에 표착함. 귀국시 킴.( 麗 日 ) 倭 人 을 원으로 압송함 今 川 了 俊 (이마가와 료슌)이 고려 피로인 수백 명을 송환함.( 日 麗 ) 今 川 了 俊 이 고려 피로인 230명 남짓을 송환 함. ( 日 麗 ) 일본이 고려 피로인 150명을 송환함.( 日 麗 ) 일본이 고려 피로인 112명을 송환함.( 日 麗 ) 覇 家 台 (하카타= 博 多 )가 고려 피로인 150명을 송환함. ( 日 麗 ) 표류해서 행방불명이었던 永 興 君 이 일본에서 귀 환 함.( 日 麗 ) 琉 球 中 山 王 이 고려 피로인 37명을 바침( 日 麗 ) 今 川 了 俊 이 고려 피로인 68명을 송환함.( 日 麗 ) 日 本 僧 如 聞 이 元 으로 건너가는 도중 耽 羅 에 표착함. 훗날 귀국함. 日 本 僧 南 海 寶 洲 가 원으로 건너가는 도중 고려에 표착함. 고려 측 사료에서는 기록이 집중되는 시기가 세 군데 있다. 제1기는 1020년대~1070년 대, 제2기는 1240년대~1340년대, 제3기는 1370년대~1390년대이다. 시기적으로 가까운 제2기와 제3기를 나누어 보는 것은 전자가 표류민 안건을 중심으로 하는 반면, 후자는 왜구로 인한 피로인 안건을 중심으로 하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제2기 표류 사례 중에 는 일송( 日 宋 ) 일원( 日 元 ) 무역선이 고려에 표착했다는 사례가 눈에 띈다. 전체적으로 고 려인의 일본 표착 사례가 많은 가운데, 일본인의 고려 표착 사례가 주로 이 시기에 집중 하는 것은 그러한 일중무역의 동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cf. 李 康 漢 2008) 고려 사료에서 표류민 관련 기록이 안 보이는 시기 가운데, 제1기를 전후하는 시기의 경우, 일본 사료에서 몇 가지 사례가 확인되기 때문에, 실태는 다름을 알 수 있다. 그 중 11세기 초까지는 고려 국가의 중앙집권화가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지방에서 일 102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03
53 제 6 주제 여일관계( 麗 日 關 係 )와 표류민 피로인 문제 어난 사건이 충분히 기록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니면, 원래 기록은 있었으나 11세기 초 거란의 대규모 침략으로 인해 그들이 산실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제1기와 제2 기 사이에 고려 측의 사료가 누락된 이유는 알 수 없다. 이 시기에는 대일무역도 실제로 는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관한 기록이 드물어지는데, 모종의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또 제1기의 최성기(11~16)에서 일본 측 사료에 사례가 안 보이는 것 또한 쉽게 이해하기 힘든 점이다. 13세기 후반 이후에는 고려 측에서 나름대로 표류민에 관한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 고, 일본 측에서는 기록이 안 보인다. 이는 일본 측의 상황 변화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 른다. 평안( 平 安, 헤이안) 시대(8세기 말~12세기 말)까지 일본의 대외교섭은 귀족 정권이 담당하였으며, 그들이 남긴 기록이 현재까지 종종 전승되어 왔다. 그러나 겸창( 鎌 倉, 가 마쿠라) 시대(12세기 말~14세기 초) 이후, 실질적인 대외교섭의 권한 또는 주도권은 무 가( 武 家 ) 정권[ 幕 府 ]으로 점차 넘어갔다. 무가정권이 기록을 얼마나 남겼느냐, 또 남겨진 기록들이 후대까지 얼마나 전승되었느냐가 문제인데, 적어도 무가 권력 상층부가 직접 관여했던 왜구 피로인 송환에 관해서도 일본 측에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점이 시사적 이다.(35, 36, 42) 13세기 중엽 이후에 관해서 확인되는 일본 측의 고려 표착 기록은 모두 해도승( 渡 海 僧 )에 관한 것이다.(20, 33, 34) 이는 당시 일중 사이를 왕래하는 승려의 활 동이 특히 활발했고, 그들에 관한 기록도 많이 남아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 13세기 후반 이후에는 일본에서 고려인 표착과 그 송환에 관한 사례가 거의 나타 나지 않는다. 이는 기록상의 문제라기보다는 일본 사회의 변화를 반영할 가능성이 있다. 우선, 일본과 원 고려라는 대립 구도 속에서 고려인의 전쟁 포로가 일본에서 거의 돌아오 지 못하고 고려가 보낸 사신도 일본에서 억류되었던 것을 통해 볼 때, 표류민 역시 현지 에서 억류되거나 위해가 가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다음으로, 그러한 국제적 조건과는 상 관이 없이, 중앙 권력의 통제력이 약해서 지방 세력의 자율성과 자립성이 강했던 중세 일 본에서는, 각 지방에서 조난물( 遭 難 物 ) 점취( 占 取 )의 관행이 공공연한 권리로서 일반화되 어 있었다. 그 때문에 표류해 온 외국인도 현지에서 획득한 재산으로 처리되었을 가능성 이 있다. 이 관행은 실제로는 이미 고대에서도 있었는데, 당시 귀족 정권은 공식적으로는 이를 금지했다. 중세부터 거슬러 올라갈수록 표류민 송환 사례가 많이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정권의 방침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다. 물론 보호 대상에서 빠져버린 사람도 있 었을 것이다. 한편, 고려시대 역시 한국 역사상 지방의 자율성과 자립성이 상대적으로 높 았기 때문에, 고려에서 표류민이나 그 재산이 탈점된 경우가 얼마나 있었느냐는 것은 흥 미로운 비교 논점이다. 지방관이나 지방 주민이 표착선의 짐을 약탈하거나 배를 덮쳤다 는 사례도 있지만(22, 29), 발각되지 않은 사건도 있었을 것이다. 14세기 후반에는 고려 측 기록에서 일본인 표류 사례가 나오지 않는다. 그 배경으로 는 왜구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바다의 치안 악화로 인해 표류선이 왜구로 처 리되거나 표류선과의 접촉을 피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 명의 해금( 海 禁 ) 정책 아 래에서 일중무역이 축소된 것도 표류 사고가 발생하는 전제로서 선박 운항의 양적 상황 에 모종의 변화를 초래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적어도 13세기 전반까지 중앙정부 차원에서 국교가 없어 도 표류민을 보호하고 본국으로 송환하는 길이 서로 간에서 열려 있었다는 것이다. 군 사 침공을 거쳐 대일관계가 악화된 13세기 말~14세기 전반에서도 고려 측에서는 표류해 온 일본인을 보호하고 본국으로 송환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표류민 송 환 체제 는 반드시 근세에만 한정된 특징은 아니다. 실정 막부( 室 町 幕 府 )의 권력이 구주 ( 九 州 ) 북부를 장악하고 고려와의 교섭으로 나서게 된 14세기 말에는 왜구가 잡아간 고 려인들도 송환되기 시작하였다. 다만 13세기 이후에는 양국관계 악화의 영향으로 서로의 대응 방식에서 비대칭성( 非 對 稱 性 )이 발생했다. 그리고 표류민 등의 보호 송환이 확인되 는 시기에서도 모든 사람을 구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음은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어디까 지 관철되느냐는 것은 권력자의 의지와 지방 사회, 특히 연안 지역에 대한 그의 장악 능 력에 달려 있었다. 이 점은 연안 지역에 대한 철저한 통제를 전제로 하면서 동아시아 각 국에서 비교적 균질하게 송환 체제가 이루어진 근세기와 똑같이 볼 수 없는 부분이다. 12세기 단계까지의 송환 루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도식이 제시되고 있다. 일본 大 宰 府 對 馬 金 州 東 南 海 船 兵 都 部 署 ( 慶 尙 道 按 察 使 ) 고려 변경의 행정관 및 그에 대한 감독 감찰 기구가 담당하였으며, 표류민 이외에 여러 안 건에 관하여 문서를 주고받을 때에도 이 선에서 처리되었다. 시기나 상황에 따라서는 감 독 기구가 제일선의 교섭 창구가 되기도 하였다.( 山 内 2003; 近 藤 2011; 전2011) 표류민이나 피로인을 송환하고자 하는 당사자의 논리는 사료에서 명확하게는 나오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11세기 초 이전에 법[ 格 文 ]으로 표류민에 관해서는 다른 문제가 없 으면 식량을 주고 본국으로 송환한다 고 규정된 바 있던 것 같은데, 그 논리까지는 알 수가 없다. 피해자 본인에게는 틀림없이 인도 적 조처이기는 하나, 권력자 측의 생각을 현대의 보편적 인권에 따른 인도주의와 똑같은 것으로만 보면 안 된다. 예를 들면, 9세 기 이후 일본 귀족층에서는 천황( 天 皇 )이 상징하는 중앙의 청정( 淸 淨 ) 과 그에 대비되는 104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05
54 제 6 주제 여일관계( 麗 日 關 係 )와 표류민 피로인 문제 변경 국외의 케가레(더러움) 에 대한 의식이 병적으로 고조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 무 역품에 대한 욕구는 컸다는 것이 흥미로운 점이다) 표류민의 송환은 더러운 이질물을 빨리 나라 밖으로 배출 시키려는 조처였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1224년에는 표류해 온 고려인들이 입경( 入 京 )하다가 거기에서 추방당했다고 하는데(19), 이 사건 역시 위와 같은 문맥에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비록 표류민에 대한 일정한 후의 에 따른 송환 조처였다고 해도, 그 동기를 순수한 인도 로만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소박한 생각이다. 그 구체적 양상을 1019년 도이( 刀 伊 ) 입구( 入 寇 ) 사건을 계기로 한 일본인 송환, 또 1292년에 이루어진 일본인 표류민 송 환을 통해 살펴보도록 한다. 3. 외교 계기로서의 표류민 피로인 송환 들은 7월 9일에 대마도에 도착했다. 일본 피로인들은 고려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는 데, 그 이유에 대해서 고려의 관리는 우리가 일본을 존중하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고 한 다.( 内 蔵 石 女 等 申 文 ) 피로인 송환을 보고 일본은 사신에 대해 위계( 位 階 )를 수여하거나 식량을 지급하는 것을 검토하는 등 이전보다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논의된 내용을 면밀하게 검 토해보면, 여전히 고려를 기피하는 마음이 그 배경에 숨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후한 대 우조처도 사신으로 하여금 빨리 귀국시키기 위한 방편 이며, 사태를 국교 교섭까지 발 전시키지 않도록 지방기관[ 大 宰 府 ]에서 처리하는 형식을 취했다. 한편, 고려가 보인 일본 에 대한 후의 역시 지속적으로 교류하고자 하는 의사를 내비친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 으로는 당시 고려가 북방에서 거란과 여진의 군사 침공과 위협을 받는 가운데, 남방 정 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취한 방편이었다고 생각된다.( 南 2000; 篠 崎 2014) 1) 도이( 刀 伊 ) 입구( 入 寇 ) 사건에서의 일본 피로인의 송환 2) 원의 대일경략과 일본인 표류민의 송환 1019년 3월 말, 고려 동북 국경 바깥에 사는 여진족의 병선 50척이 대마도( 對 馬 島 )를 습격하고 이어서 일기도( 壹 岐 島 )를 습격했다. 이 집단은 4월 7일에는 축전국( 筑 前 國, 福 岡 縣 북부)에 입구( 入 寇 )하여 많은 사람과 가축을 살상하고 식량 등 물품과 사람을 약 탈했다. 8일, 여진 집단은 박다만( 博 多 灣 ) 내에 있는 능고도( 能 古 島, 노코노시마)를 차지 하고 9일에는 박다의 경고소( 警 固 所, 케고쇼)를 공격했다. 10, 11일에는 강풍 때문에 여 진 측은 움직이지 않고, 일본은 그 사이에 군선을 마련했다. 12일, 여진은 다시 움직이고 지마( 志 摩, 시마)군( 郡 ) 선월진( 船 越 津, 후나코시쓰)을 습격하고 일본군이 그들을 격퇴했 다. 13일, 서쪽으로 이동한 여진 집단은 송포( 松 浦, 마쓰우라)군에서 다시 일본군과 싸 우고 그 후 북쪽으로 돌아갔다. 이상과 같은 침탈 활동으로 인해 대마( 對 馬 )에서는 사 망자 36명, 납치된 자 346명, 일기( 壹 岐 )에서는 사망자 149명, 납치된 자 239명, 축전( 筑 前 )에서는 사망자 180명, 납치된 자 704명이라는 피해가 발생했다. 그 과정에서 여진 측 의 사람들도 포로가 되었는데, 그 중에 고려인도 있었다. 이에 일본 측은 고려에 의한 해 적 행위임을 의심했는데, 이 고려인은 (나는) 여진[ 刀 伊 ]을 대비하기 위해 북쪽 변방에서 배치되다가 여진의 포로가 된 군사라고 공술하였다. 4월 29일, 근거지로 향하고 있던 여진 선단을 고려 수군이 진명포( 鎭 溟 浦, 元 山 부 근)에서 요격( 邀 擊 )하고, 일본 피로인 259명을 수용하였다. 고려는 그들을 김해부( 金 海 府 )로 보내고, 공역령( 供 驛 令 ) 정자량( 鄭 子 良 )이 그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송환했다. 그 원과 고려는 1274년과 1281년에 두 번에 걸쳐 일본을 침략했다. 고려의 입장으로서는 전쟁을 회피하기 위한 노력이 성취되지 않아 생각지 않게 말려든 일이었다. 하지만 고려는 이 전쟁에서 공헌하는 것을 발판으로 하여 원 제국 내에서의 지위를 격상시키는 데 성공 했다.( 駙 馬 國 王, 征 東 行 省 丞 相 ) 그러나 군사 침공은 실패로 끝나고 일본은 적대 세력으 로 남았다. 일본 측에서는 고려에 대한 적대의식이 생겨났고, 상호 간 무역활동도 표면적 으로는 끊어져 버렸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가 전쟁 후에도 대일 방위의 핵심 담당자로서 자신의 존재의의를 원에게 어필할 수 있는 효과를 낳았다.( 森 平 2013a) 단, 고려는 일본 표류민을 원에게 통보하고 처리하면서도 반드시 일본에 대해 적대적인 자세를 보였던 것 만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1292년 5월, 탐라( 耽 羅 )에 일본의 상선이 표착했다. 주민들은 배를 쫓아버리 고 타고 있었던 상인 2명을 포박했다. 고려 정부가 원에 통보한 결과, 황제는 그들을 일 본으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이에 고려는 김유성( 金 有 成 ) 등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그들을 송환했다. 실은 당시 원은 제3차 일본 공격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고려는 이에 대해 주전파의 입 장을 표방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자세였다. 고려 정부는 표류민을 송환하는 기회를 이용해서 다시 일본과 화평을 강구하려고 했다. 이때 충렬왕이 일본으로 보낸 국서에서 는 원에 번속( 藩 屬 )하는 이익, 번속하지 않는 불이익을 고려와 남송의 운명을 대비하면서 106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07
55 제 6 주제 여일관계( 麗 日 關 係 )와 표류민 피로인 문제 설명했는데, 그 맺음말에서 내가 여러모로 신경쓰는 이유는 오로지 양국의 백성을 위해 서다 라고 말했다.( 金 澤 文 庫 藏 高 麗 忠 烈 王 國 書 寫 本 ) 즉, 일본의 민중을 위한 행동임 을 강조했던 것이다. 물론 일본에서 타협안을 꺼내기 위한 방편이었겠지만, 전쟁으로 인 해 자국에 나쁜 양향이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국왕의 진심이 전쟁을 회피하는 데 있 었다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村 井 1997) 그러나 일본은 결국 이 국서를 무례( 無 禮 )하다 고 판단해서 방위 체제 강화를 추진했 다. 그리고 김유성을 비롯한 고려 사신들은 일본에 억류되어 훗날 거기에서 죽고 말았다. 맺음말 이상에서 본 것처럼 표류민 피로인 송환에 관해서는 상대국과 교섭하기 위한 구실이 라는 또 다른 측면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단 위에서 소개한 사례 뿐 아니 라, 이러한 사례는 많이 있다. 997년의 대일교섭, 원의 대일 조공 권고 당시에 생긴 납치 피해자의 송환, 왜구 피로인의 송환도 바로 그러한 사례들이다. 순수한 인도적 조처는 아니었던 셈이지만, 폐쇄된 교섭 창구를 여는 우회 루트로 이용하는 것은 안정적인 외교 관계가 없는 상황에서 표류민 피로인 송환이 띤 현실적인 기능이었다. 이에 대해 어떤 가 치 판단을 내리는 것은 역사학의 본분을 넘는 일이지만, 필자 개인으로서는 순수하지 못 하다고 해서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형태로든 이용할 수 있는 기 회를 이용해서 의사소통을 강구하는 노력은, 자기 입장을 고집만 하고 아무 교섭도 하 지 않은 채 덧없이 서로 반목해 나가는 것보다 훨씬 생산적이다. 적어도 피해자 본인에게 는 국가 차원의 사정보다도 고향에 돌아가서 가족과 다시 만나는 것이 제일 중요하며,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바로 인도 이다. 전근대의 국제관계에서는 쌍방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관계를 맺는 해석의 비대칭성 ( 非 對 稱 性 ) 이 자주 보인다. 그러면서도 쌍방의 입장이 어긋난다는 사실이 뚜렷해졌을 때 그 모순을 흡수해 버리는 놀라운 유연성과 탄력성을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임진 왜란 후에 강호( 江 戶, 에도) 막부와 조선왕조가 국교를 회복했던 것은 본래 조선 무역 의 부활을 바라는 대마번( 對 馬 藩 )이 덕천( 德 川, 도쿠가와) 장군과 조선국왕의 국서를 위 조해서 쌍방의 면목이 설 수 있는 상황을 날조한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1631~35 년에 이른바 유천일건( 柳 川 一 件, 야나가와 잇켄)에서 그것이 발각되었을 때, 에도 막부는 국교의 전제가 허위였다고 해서 양국 관계를 백지화시키지는 않았으며, 허위에서 나온 실 리를 우선시하고 유지하려는 조처를 취했다. 조선 측에서도 사정을 어느 정도 헤아리면 서 사태를 복잡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도쿠가와 조선 200년간의 평화적 관계가 성립하였다.( 田 代 1983) 물론 그것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시의, 모멸, 우월감 등 복잡한 감정이 서로 교차하 는 현실 속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완벽한 상호 이해와 100%의 호의로 이루어지는 상 호 교류는 궁극적인 이상으로서는 추구해야 하지만, 짧은 시간 내에서 모든 사람을 끌 어들인다고 해서 실현되는 것만은 아니다. 세계 유산화가 논의되고 있는 조선통신사는, 한일우호의 이상이라기보다는 반드시 전면적인 믿음으로 맺어지지 않는 자끼리 그래도 힘을 합쳐서 평화적 관계를 양성( 釀 成 )했던 노력의 성과 로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볼 때, 현재 우리 동아시아 사회는 과연 선인과 비견할 만한 도량과 지 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선인만큼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 노력하 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참고문헌 荒 野 泰 典, 近 世 日 本 と 東 アジア, 東 京 大 學 出 版 會, 1988 石 井 正 敏, 小 右 記 所 載 内 藏 石 女 等 申 文 にみえる 高 麗 の 兵 船 につ いて 朝 鮮 學 報 1 9 8, 石 上 英 一, 日 本 古 代 10 世 紀 の 外 交, 井 上 光 貞 他 編, 東 アジアにおける 日 本 古 代 史 講 座 7: 東 アジア 世 界 の 變 貌, 學 生 社, 1982 近 藤 剛, 高 麗 における 對 日 本 外 交 案 件 の 處 理 過 程 について, 中 央 大 學 人 文 科 學 硏 究 所 編, 情 報 の 歷 史 學, 中 央 大 學 出 版 部, 2011 篠 崎 敦 史, 刀 伊 の 襲 來 からみ た 日 本 と 高 麗 の 關 係 日 本 歷 史 7 8 9, 田 代 和 生, 書 き 替 えられた 國 書 : 德 川 朝 鮮 外 交 の 舞 臺 裏, 中 央 公 論 社, 1983 村 井 章 介, 文 書 からみた 東 アジア 地 域 の 交 流, 同 著, 國 境 を 超 えて: 東 アジア 海 域 世 界 の 中 世, 校 倉 書 房, 1997 村 井 章 介, 1019 年 の 女 眞 海 賊 と 高 麗 日 本, 同 著, 日 本 中 世 の 異 文 化 接 觸, 東 京 大 學 出 版 會, 2013 森 克 己, 新 編 森 克 己 著 作 集 2 續 日 宋 貿 易 の 硏 究, 勉 誠 出 版, 2009 森 公 章, 古 代 日 麗 關 係 の 形 成 と 展 開 海 南 史 學 4 6, 森 平 雅 彦, 10 世 紀 ~13 世 紀 前 半 における 日 麗 關 係 史 の 諸 問 題 : 日 本 語 による 硏 究 成 果 を 中 心 に 第 2 期 日 韓 歷 史 共 同 硏 究 報 告 書 : 第 2 分 科 會 篇, 日 韓 歷 史 共 同 硏 究 委 員 會, 2010 森 平 雅 彦, モンゴル 覇 權 下 の 高 麗 : 帝 國 秩 序 と 王 國 の 對 應, 名 古 屋 大 學 出 版 會, 2013a 森 平 雅 彦, 高 麗 朝 鮮 時 代 における 對 日 據 點 の 變 遷 : 事 元 期 の 對 日 警 戒 體 制 を 軸 として 東 洋 文 化 硏 究 所 紀 要 1 6 4, b 山 內 晉 次, 奈 良 平 安 期 の 日 本 とアジア, 吉 川 弘 文 館, 2003 김 보 한, 중 세 일 본 표 류 민 피 로 인 의 발 생 과 거 류 의 흔 적 史 叢 6 8, 南 基 鶴, 고 려 와 일 본 의 상 호 인 식 日 本 歷 史 硏 究 1 1, 이강한, 원-일본간 교역선의 고려 방문 양상 검토 해양문화재 1, 2008 李 領, 倭 寇 と 日 麗 關 係 史, 東 京 大 學 出 版 會, 1999 李 薫, 朝 鮮 後 期 漂 流 民 과 韓 日 關 係, 国 學 資 料 院, 2000 전영섭, 10~13세기 漂 流 民 送 還 體 制 를 통해 본 동아시아 교통권의 구조와 특성 石 堂 論 叢 50,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09
56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토론문1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토론문 김 순 자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57 토론문 1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토론문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토론문 김순자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1. 백승호, 공동번영을 위한 교역과 문화교류 : 여-송 교류를 중심으로 에 대하여 이 글은 여-송 교류를 중심으로 를 다룬 것이므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하여는 이견 ( 異 見 )이 없다. 그런데 13세기까지 고려시대의 대외 교류를 이해하는 기본 시각에 대하여 는 이견이 있다. 필자는 이 문제를 고려의 통로에 있어 북방지역에 거란과 금나라의 흥 기로 육로는 경색되어 모든 교류를 해로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 교류의 주역이 종래 조공무역을 그 형식으로 하는 사신들로부터 민간상인들로 변화 하였다는 전제하( 前 提 下 )에 이해하고 있다. 고려와 송( 宋 )이 책봉 조공의 국교( 國 交 )가 유지된 기간은 963~993년까지이다. 1020~1030년대 고려-거란의 영토분쟁 당시 송에 사신을 파견한 사례가 일부 있으나, 고려-거란 국교를 대체하려는 목적으로 추진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993년 고려를 침입한 거란의 요구로 고려-거란 간에 책봉 조공의 정식 국교가 수립된 이후 금( 金 )이 멸망하는 1220년대까지 고려의 주요 외교 상대국은 거란[ 遼 ], 금이었다. 993년 이후 고 려의 대외교류는 책봉 조공의 국교를 전제로 한 거란[ 遼 ], 금과의 공무역( 公 貿 易 )-육로 교통-과 비( 非 )책봉 조공 상대국인 송( 南 宋 포함)과의 사무역( 私 貿 易 )-해로 교통-으로 2분( 分 )해볼 수 있다. 1 2가지 교류 중에서 고려-송의 교류가 조공무역을 대체하여 교류의 주역 이 되었 다고 이해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국가와 국가 간의 교류는 경제적, 문화적 동기로만 이 루어지지 않으며, 대부분의 교류는 경제적인 것이든 문화적인 것이든, 혹은 인적 교류이 든 각 나라의 정치적 조건이 먼저 충족된 뒤에, 혹은 정치적 목적에 위배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고려가 건국한 918~1220년대까지의 기간 중에서, 993년~1220 년대까지 정식 국교를 유지한 대상이 북방민족왕조인 거란[ 遼 ]과 금이었고 거기에 공무 역이 수반되었다면, 고려-송의 교류를 대외교류의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113
58 토론문 1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토론문 고려사( 高 麗 史 ) 에 수록된 기록은 북방민족국가의 거란[ 遼 ], 금에 관한 것보다는 한족 ( 漢 族 )왕조인 송에 관한 것들이 더욱 중요하게 선택되었다는 점, 국경지대에서, 고려인과 의 상거래에 관여하였던 거란인, 금인( 金 人 )들이 스스로 남긴 기록이 거의 없다는 점 등 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2 이 논문은 고려도경( 高 麗 圖 經 ), 사명지( 四 明 志 ) 류( 類 )와 같은 송인( 宋 人 )의 기 록을 통해 고려사 에 기록되지 않은 고려-송 사이의 교류를 구체적으로 보충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도움이 된다. 구체적으로 송의 수입품목 400여 종 중에서 고려에서 의 수입품목이 40여 종이었다는 것 등을 설명하여 고려시대 상호 교류의 실상을 밝힌 점이 그러하다. 기록이 부족한 고려시대의 대외교류를 검토할 때 양적으로 분석하는 연 구 방법은 매우 필요하다. 918~1220년대까지 고려-송 민간교류와 거란,금과의 조공무 역을 계량적( 計 量 的 )으로 추산( 推 算 )하거나, 그러한 교류가 그 당시에 어느 정도의 중요 성, 비중을 가졌는지를 제시할 수 있는 어떤 연구방법이 있을까? 고여진한아문 은 군사 위협 상황에서 정치적 선전을 목적으로 만든 회유문이므로 사실 과 거리가 멀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문에 개연성이 있다면, 대규모로 귀화한 발해인, 여진인의 경우 어떤 토지를 나누어 줄[ 分 給 ] 수 있었을까? 2 고려시대 귀화정책의 사상적 배경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귀화 문제는 이민족 의식, 혹은 타자에 대한 인식 문제와 연관되어 이해되어야 할 것 이 다. 발 해 인, 여 진 인, 거 란 인 등 과 같 은 표 현 은 고 려인 과 같 은 동 류 ( 同 類 ) 로 바 라 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원간섭기를 거친 고려 말 시기에도 고려는 여진인, 일본인 등의 귀화를 수용하고 있었다. 이른바 해동천자( 海 東 天 子 ) 론에서 말하는 해동천하 의 구성 요소로 설명할 수 있을지, 고려가 중국의 실질적인 제후국가가 되었던 원간섭기 이후의 시기에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필자의 보충 설명을 바란다. 하여 2. 이진한, 고려시대 투화( 投 化 )와 거류( 居 留 ) 국인( 國 人 )과 외국인( 外 國 人 ) 에 대 고려가 투화인들을 정착시켜 고려민이 되게 하기 위한 정책에서 생업조건을 제공하는 것은 중요한 부분이다. 고려라는 국가가 인구를 파악하여 지배하는 방법[ 編 戶 ]과 조세 체계를 고려해볼 때 귀화인들을 고려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농민으로 정착시켜야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럴 경우 어떻게든 토지를 주어 경작하게 하였을 것이다. 이 논문에서도 귀화인들에 게 준 토지에 관한 서술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필자는 고려사회에서 투화인 들은 陳 荒 田 또는 閑 曠 地 를 개간하고 농업기술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머리말)고 하였는데, 기록상 확인되는 사례는 1219년(고려 고종6) 거란 유종( 契 丹 遺 種 ) 중 포로를 집단거주시킨 거란장 사례( 以 契 丹 俘 虜, 分 送 各 道 州 縣, 擇 閑 曠 之 地, 俾 之 聚 居, 量 給 土 田, 業 農 爲 民, 俗 呼 契 丹 場 者 )가 유일하다. 또한 1장 투화인들에 대한 우대정책 부분에서 이규보가 작성한 밀고여진한아문( 密 告 女 眞 漢 兒 文 ) (1230년대 作 )을 근거로 투화인들 에게는 기름지고 좋은 토지[ 上 田, 好 田 ] 를 주 었 다 고 서 술 하 였 다. 1 2가지 사례를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귀화정책으로 볼 수 있을까 의문이다. 2가지 사례는 몽골족의 남하, 금의 몰락, 고려와 몽골의 강제 접촉이라는 정세 변동 이 급박하게 전개되던 1220~1230년대 특별한 상황에서 취해진 조처로 보인다. 특히 밀 114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15
59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토론문2 10~14세기 고려의 국제관계사 이 익 주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60 토론문 2 10~14세기 고려의 국제관계사 10~14세기 고려의 국제관계사 이익주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머리말 1. 국제관계사란 무엇인가? 2. 10~14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고려 맺음말 머리말 전근대 한국의 역사에서 가장 개방적인 시기는 언제였을까? 아마 고려왕조 시기 (918~1392)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고려 사람들의 성향 때문이 아니라 해 당 시기 동아시아 세계의 개방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21세기 세계화 시대에, 특히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공동 번영을 위한 교류와 상호 우호가 요구되고 있는 시점에서 10~14세기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를 되돌아보는 것은 시의적절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교류와 우호를 지향하는 역사 연구는 어떠한 관점을 가져야 할 것인가? 과거 한국 역사학계의 대외관계사는 국난( 國 難 ) 을 소재로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결과 국난 극 복의 역사 이미지가 강화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대결적 관점과 적대적 이미지로 는 오늘날의 시대적 조류에 적응하기 어렵다. 동시에, 교류와 우호를 강조하려는 현재 적 필요에서 과거의 침략과 저항 등 갈등의 사실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과거의 갈등을 포함하여 실재했던 국가 간의 교류와 우호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재의 대외관계사( 對 外 關 係 史 ) 를 국제관계사( 國 際 關 係 史 ) 로 전환할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119
61 토론문 2 10~14세기 고려의 국제관계사 1. 국제관계사란 무엇인가? 대외( 對 外 ) 관계사 라는 말에는 이미 절대화된 주어로서 나 가 생략되어 있다. 즉, 그것은 나 를 중심에 놓고 다른 어떤 일국( 一 國 )과의 관계의 역사를 설명하는 방식이 다. 따라서 대외관계사에서는 객관적인 관점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다. 또 상호 관계 를 어느 한 편에서 일방적으로 관찰하고 평가하다 보니 역사적 실체와 괴리될 가능성도 높다. 더욱이 한국사처럼 침략을 하기보다 침략을 당한 경험이 많은 경우에는 타국과의 관계에서 피해자로 인식하게 되고, 그로부터 국난 극복의 역사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만 들어진다. 또한 대외관계사는 시종 일국사( 一 國 史 )의 관점에 선다. 고려시대의 경우 대송( 對 宋 ), 대요( 對 遼 ), 대금( 對 金 ), 대원( 對 元 ), 대명( 對 明 ) 그리고 대일( 對 日 ) 관계가 각각 연구되고 서술된다. 그 대신 동시대에 존재했던 송과 거란, 남송과 금의 관계는 부 차적으로 언급될 뿐이다. 더욱이 고려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던 하( 夏 )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나 송-거란, 남송-금의 관계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하와 거란 및 송의 관계가 당해 시기 고려의 대외관계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처럼 대외관계사의 관점과 연구 방법은 자기중심적이고 일면적이라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객관적인 관점을 갖기 어려우며, 국제관계에 대한 다면 적, 구조적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는 세계화 시대에 자국 중심의 일국사 를 지양해야 하는 현재 상황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럼 어떻게 하면 객관적이고 구조적인 이해가 가능할 것인가? 그 대안으로서 제시하고자 하는 국제관계사란 무엇인 가? 우선 국제질서( 國 際 秩 序, international order) 의 존재에 주목하고자 한다. 국제 질서란 말 그대로 여러 국가들 간에[국제] 형성된 질서를 말한다. 여기에는 그 질서에 참 여하고 있는 국가들이 공유하는 규칙 규범이 전제가 되며, 그 규칙 규범은 시 공간적으 로 각기 서로 다른 내용을, 즉 역사성을 갖는다. 예를 들어,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 후 성립된 주권국가체계( 主 權 國 家 體 系 )와, 그 이전 신성로마제국이 존속했던 시기 유럽 의 국제질서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근대 동아시아에도 책봉 조공 등을 통해 국가 간 의 상하 관계를 당연한 규칙 규범으로 인정하는 국제질서가 존재하였다. 이렇게 역사성 을 갖는 국제질서를 배경으로 하여 각국 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것, 이것을 국제관계사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제관계사의 연구 범위는 동일한 국제질서가 영향을 미치는 시간과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영향을 미치는 범위란 동일한 규칙 규범을 공유하는 시공간뿐 아니라 그 규칙 규범 아래서 서로 대립 경쟁하거나, 그로부터 의도적으로 이탈한/배제된 지역 국 가까지를 포괄한다. 따라서 이 범위는 (종래 대외관계사의 연구 대상이었던) 직접적인 관 계를 맺고 교류, 접촉한 국가의 범위보다 훨씬 더 넓어질 것이다. 또한 시기에 따라 그 범 위는 넓어지기도, 좁아지기도 할 것이며, 국제질서에 참여한 국가 중 어떤 국가의 입장에 서 보느냐에 따라서도 신축할 수 있다. 이러한 신축성이야말로 기존 동아시아세계론 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될 것이다. 과거에도 전근대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존재에 주목한 연구들이 있었다. 니시지마 사다 오의 책봉체제론( 冊 封 體 制 論 ) 이나 John Fairbank의 tributary system 등이 그것 이다. 이 연구들은 일국사의 관점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에 시사하는 바 크지만, 다음 두 가지 점에 문제를 안고 있었다. 하나는 동아시아의 범위를 고정시켰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강화시켰다는 점이다. 1) 이중 전자는 위의 신축성으로써 해결할 수 있을 것이지만, 후자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성립과 유지가 그 질서에 참여한 여러 나라들의 공존 을 위한 방편이었음을 인정함으로 써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국가 간의 적대( 敵 對 ) 관계 즉, 대등한 관계는 거의 인정되지 않 았다. 그보다는 상하 관계를 서로 인정하고, 그 관계를 책봉 조공 등의 행위를 통해 드 러 냈 다. 사 대 ( 事 大 ) 와 자 소 ( 字 小 ) 로 도 표 현 되 는 이 차 등 관 계 에 서 以 小 事 大 保 其 國 의 논 리 는 널 리 이 해 되 었 지 만 以 大 事 小 保 天 下 는 소 홀 하 게 취 급 된 감 이 있 다. 천 하 즉 자신이 중심이 되는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대국 이 누리는 최고의 이 익이었으므로, 이 관계는 하나의 대국 과 여러 소국 들이 공존을 모색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국가 간에 상하 관계를 인정하고 각각 천하 의 유지, 국가의 유지를 보장 받은 위에서 국제질서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공존을 전제로 국가 간 교류가 진행되었다. 오늘 발표된 10~14세기 동아시아의 교역, 문화 교류(수용), 투화와 거류, 표류민 송환 등이 모두 해당 시기의 국제질서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이것들이 모두 국제관계사의 주요한 연구 주제가 될 것이다. 국제관계사 연구는 특정 한 국제질서가 통용되는 시공간을 대상으로 하여, 국가 간의 관계(국제질서)를 구조적 으로 파악하고, 그 위에서 다양하게 전개된 교류의 양상을 밝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 )김한규, 천하국가 : 전통 시대 동아시아 세계 질서 (소나무, 2005) 및 박대재, 고대 동아시아 세계론 과 고구려사 고대 동아시아 세계론과 고구려의 정체성 (동북아역사재단, 2007) 120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21
62 토론문 2 10~14세기 고려의 국제관계사 2. 10~14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고려 국제질서는 시기에 따라 양상을 달리하며, 심지어는 하나의 국제질서가 포괄하는 지역 적 범위도 시기마다 다르다. 고려왕조가 존속했던 10~14세기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13 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하여 전, 후기로 양분된다. 전기는 거란과 송, 금과 남송이 천하 의 패권을 다투던 시기이고, 후기는 몽골제국이 동아시아를 포함하여 유라시아 대륙 대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시기이다. 이 가운데 전자(10~13세기)의 특징은 다원적 국제질 서, 2) 다 원 적 천 하 관 3) 등의 연구 결과에서 보이듯이 다원성 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가 황제국 체제를 갖추었던 것이나, 베트남에서 딘( 丁 ) 왕조가 칭제건원을 한 것은 4) 이러 한 국제질서 속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와 대비되는 후자(13~14세기)의 특징은 몽골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일원성 이 될 것이다. 따라서 고려시대 대외관계사는 10~13세기(고려 전기) 다원적 국제질서 속에서 고려의 위상, 13~14세기 몽골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서 고려의 위상을 밝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된다. 하지만 어느 경우에도 고려가 포함된 국제질서에 대한 이해를 우선 필요로 하며, 그러한 점에서 현재의 학문 분류로는 한국사와 동양사의 공동 연구를 통해서만, 더 나아가서는 동아시아 각국의 연구자들이 함께 연구해야만 온전하게 완성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공동연구에서 한국사 연구자가 담당해야 할 몫은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한국의 위상을 밝히는 일이 될 것이다.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들 가운데 한국만큼 책봉-조공 관계를 오래 동안 충실히 지킨 경우도 드물다. 5세기 고구려 이후 거의 모든 왕조가 중국 왕조와 책봉-조공 관계를 맺 었고, 늘 책봉을 받는 조공국의 위치에 섰으며, 그 외의 관계를 모색한 적도 거의 없었 다. 따라서 이 점은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독특한 위상이라 고 할 만하다. 고려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건국 직후인 933년(태조 16) 후당의 책봉을 받 은 이후 멸망까지 거의 모든 국왕이 중국 왕조의 책봉을 받았다. (<표> 5) 참조) 고려가 황제국 체제를 갖추고 있었지만, 동시에 중국 왕조와 책봉-조공 관계도 철저 히 준수하여 외왕내제( 外 王 內 帝 ) 의 상황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연호를 살펴보 아도, 건원( 建 元 )의 사례가 3건 있으나 모두 중국 왕조로부터 책봉을 받지 못하는 상황 에서 독자 연호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연호를 임시로 사용하는 것도 광종 때가 마 지막으로, 1116년(예종 11)에 여진이 흥기하고 거란이 쇠퇴하자 거란 연호를 정지하고 간 지( 干 支 )로써 해를 표시했고, 6) 1356년(공민왕 5)에는 반원운동에 성공한 뒤에도 원의 연 호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7) 고려가 중국 왕조와의 책봉-조공 관계를 충실히 유지하면서 얻은 대가가 국가의 유 지였다고 말하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가? 하지만 실제로 고려는 책봉-조공 관계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을 이용해서 국가를 유지하고 평화를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993년(성종 12) 거란의 침략을 받았을 때 사대의 대상을 변경함으로써 전쟁 을 피할 수 있었고, 1019년(현종 10)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에는 거란에 칭번납 공여고( 稱 藩 納 貢 如 故 ) 즉, 사대관계의 회복을 먼저 요구하였다. 8) 1126년(인종 4)에는 금의 요구를 받아들여 상표칭신( 上 表 稱 臣 ) 함으로써 불필요한 충돌을 피할 수 있었고, 1259년(고종 46)에는 그러한 정책의 하이라이트로서 몽골과 책봉-조공 관계를 맺는 데 성공하여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9) 마지막으로 1370년(공민왕 19)에는 신흥하는 명과 책봉-조공 관계를 맺음으로써 향후 명을 중심으로 새롭게 형성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 에 순조롭게 편입할 수 있었다. <표> 고려 역대 국왕의 被 封 상황 冊 封 國 시 기 被 封 國 王 비 고 後 唐 918년 고려 건국, 天 授 年 號 (923~935) 933년 ( 太 祖 16) < 1> 太 祖 後 晋 (936~946) 939년 ( 太 祖 22) 945년 ( 惠 宗 2) < 1> 太 祖 < 2> 惠 宗 後 周 (951~959) 953년 ( 光 宗 4) < 4> 光 宗 宋 (960~1126) 963년 ( 光 宗 14) 976년 ( 景 宗 1) 983년 ( 成 宗 2) < 4> 光 宗 < 5> 景 宗 < 6> 成 宗 後 漢 (947~950) 책봉 없음 < 3> 定 宗 (r.946~949) 피봉 없음 950년 光 德 年 號 959년 後 周 멸망 960년 峻 豊 年 號 2) 윤영인, 10~13세기 동북아시아 多 元 的 國 際 秩 序 에서의 冊 封 과 盟 約 東 洋 史 學 硏 究 101, ) 盧 明 鎬, 高 麗 時 代 의 多 元 的 天 下 觀 과 海 東 天 子 韓 國 史 硏 究 105, ) 劉 仁 善, 베트남 史 ( 民 音 社, 1984) 97~98쪽 5) 沈 載 錫, 高 麗 國 王 冊 封 硏 究 (혜안, 2002)를 참고하여 작성하였음 6) 高 麗 史 世 家, 睿 宗 11년 4월 辛 未 7) 李 益 柱, 14세기 후반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와 고려-원 명-일본 관계 震 檀 學 報 114, 2012, 106쪽 8) 高 麗 史 世 家, 顯 宗 11년 2월 9 )이익 주, 고려-몽골관계에서 보이는 책봉-조공 관계 요소의 탐색 13~14세기 고려-몽골관계 탐구 (동북아역사재단, 2011) 122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23
63 토론문 2 10~14세기 고려의 국제관계사 冊 封 國 시 기 被 封 國 王 비 고 거란( 遼 ) (907~1125) 金 (1115~1234) 몽골( 元 ) (1206~1388) 明 (1368~1662) 996년 ( 成 宗 15) 998년 ( 穆 宗 1) 1022년 ( 顯 宗 13) 1039년 ( 靖 宗 5) 1047년 ( 文 宗 1) 1085년 ( 宣 宗 2) 1094년 ( 獻 宗 즉) 1097년 ( 肅 宗 2) 1108년 ( 睿 宗 3) 1142년 ( 仁 宗 20) 1148년 ( 毅 宗 2) 1172년 ( 明 宗 2) 1199년 ( 神 宗 2) 1206년 ( 熙 宗 2) 1212년 ( 康 宗 1) 1260년 ( 元 宗 1) 1274년 ( 忠 烈 王 즉위) 1308년 ( 忠 宣 王 복위) 1313년 ( 忠 肅 王 즉위) 1330년 ( 忠 惠 王 즉위) 1344년 ( 忠 穆 王 즉위) 1351년 ( 恭 愍 王 즉위) 1377년 ( 禑 王 3) 1370년 ( 恭 愍 王 19) 1385년 ( 禑 王 11) < 6> 成 宗 < 7> 穆 宗 < 8> 顯 宗 < 9> 德 宗 피봉 없음 <10> 靖 宗 <11> 文 宗 <12> 順 宗 피봉 없음 <13> 宣 宗 <14> 獻 宗 <15> 肅 宗 <16> 睿 宗 <17> 仁 宗 <18> 毅 宗 <19> 明 宗 <20> 神 宗 <21> 熙 宗 <22> 康 宗 <23> 高 宗 피봉 없음 <24> 元 宗 <25> 忠 烈 王 <26> 忠 宣 王 <27> 忠 肅 王 <28> 忠 惠 王 <29> 忠 穆 王 <30> 忠 定 王 피봉 없음 <31> 恭 愍 王 <32> 禑 王 * 北 元 책봉 <31> 恭 愍 王 <32> 禑 王 <33> 昌 王, <34> 恭 讓 王 피봉 없음 동북아역사재단, 2011 그렇다면 고려시대의 전쟁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고려가 겪었던 전쟁들은 모두 동 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관련되어 있다. 거란의 고려 침략은 거란-송의 쟁패와 밀접하 게 연결되어 있으며, 몽골의 고려 침략 역시 몽골제국의 등장이라는 세계사적 변동의 일 환이었다. 거란-금 교체기에는 금으로부터 사대를 강요당함으로써 (전쟁까지는 아니지 만) 충돌을 빚었고, 고려 말 홍건적의 침략과 왜구의 약탈 역시 몽골제국 중심의 국제질 서가 붕괴되면서 그 여파가 고려에 미쳐온 것이었다. 따라서 이 전쟁들을 고려와 전쟁 상 대국의 1:1 관계로 설명해서는 언제나 불충분하며, 국제질서의 개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관점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 선다면 전근대사회의 국가 간에 있었던 대립과 투쟁의 이면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공존을 위한 외교정책의 여 러 양태( 樣 態 )를 부각시켜 볼 필요성 과는 정반대의 시선을 찾게 될 것이다. 맺음말 토론에 대신하여, 국가 간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보기 위한 방법으로서 국제관계사의 시각을 제시해보았다. 국제관계사는 국제질서를 밑바탕에 깔고 그 위에서 국가 간의 관 계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달리 말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의 관계 를 설명하 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러 국가들이 공존을 위해 동의한 원칙에 따라 관계 를 맺었고 그것이 하나의 국제질서를 이루었다는 가설이다. 국제관계사의 관점을 따른다면 자기중심적이고 일면적인 대외관계사의 한계를 극복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국제질서에 대한 구조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다면적인 관찰을 통해 객관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역사 속에서 국가 간의 대립과 충돌보다는 공존을 바탕으로 한 교류와 공동 번영의 사례를 찾을 수 있을 것이 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과거에도, 현재에도 국경은 엄연히 존재하고, 국가와 국가의 관 계는 기본적으로 배타적이지만) 인국( 隣 國 )은 서로 필요한 존재라는 점을 역사적으로 확 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은 공존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관계 재조정의 과정이다. 시 간으로 볼 때도 전쟁의 시간보다 평화의 시간이 더 길다. 평화가 긴 장마 중의 짧은 햇 살이 아니라, 전쟁이 맑은 날의 갑작스런 소나기이다. 이러한 관점에 선다면, 전쟁에 대한 연구는 전투 양상과 피해 정도를 밝히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전쟁을 전후한 국제 질서의 변동을 설명하는 것 또한 중요하리라고 본다. 객관적이고 구조적인 역사 연구의 방법으로서 국제관계사를 제안해보았다. 비단 국제 관계사만이 아니라 앞으로 한국사 역시 세계 속의 한국사 를 지향해야 하고, 전근대의 경우 그 세계는 곧 동아시아이므로 동아시아 속의 한국사 로 구체화될 것이다. 따라서 한국 전근대사 연구에 한해 말한다면, 동아시아사 는 한국사 의 미래다. 124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25
64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토론문3 12세기 초의 고려 Edward J. Shultz 서강대학교/University of Hawaii at Manoa 교수
65 토론문 3 12세기 초의 고려 12세기 초의 고려 Edward J. Shultz (서강대학교/University of Hawaii at Manoa 교수) 1096년과 1146년 사이, 숙종(r.1095~1105)과 예종(r.1105~1122) 그리고 인종 (r.1122~1146)의 세 왕이 고려를 통치하였다. 국제적으로 이 시기는 거란( 契 丹 )과 여진 ( 女 眞 )이 요동( 遼 東 )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였던 긴장의 시기였다. 여진의 우세가 점차 확 실해지자, 여진은 그들의 시선을 송( 宋 )에게로 돌렸다. 송과 새로이 형성된 여진의 금( 金 ) 왕조는 동북아 지역에서의 패권을 확보하기 위해 고려의 지원과 협력을 얻어내고자 하였 다. 당시 고려는 여진의 세력이 나날이 성장해 가고 송나라가 양자강 이남으로 후퇴하였 다는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국제적 긴장 상황은 고려 왕 실에 (묘청에 의한 무장 반란이 일어났을 정도로) 심각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묘청의 반란과 같은) 몇몇 도전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지도력은 잘 유지되었으며 고려왕조는 현 실적인 외교정책을 입안하는 것을 추구하였다. 여러 해 전에 나는 바로 이 시기에 송과 요( 遼 ), 금나라를 여행하였던 사람들에 대한 연구를 마무리지었다. 이 국가들에 대한 외교사절로 선택된 인물들에 대하여 살펴봄으로 써, 나는 고려의 내 외적인 정책들을 입안하였던 사람들에 대한 심화된 이해를 얻고자 하 였다. 외국 사신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고려는 그들의 국경 밖에서 발생하는 외국의 사 정에 대하여 잘 알 수 있었고, 이들과 나란히 동북아에서 발생하였던 기술적 제도적 지성 사적인 변화들을 유지해나갈 수 있었다. 고려와 송은 아마도 12세기 당시에는 동북아에 서 가장 정교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던 왕조들이었으며, 이 시기에 네 차례나 송과 고려를 왕래하였던 사신들은 이 두 왕조가 처해있었던 국제적 긴장 상태에도 불구하고 높은 수 준의 관계를 유지해나가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요와 금 그리고 송과의 모든 접촉에서, 고려는 무력이 아닌 외교를 통한 문제해결을 추구하였다. 유교 경전을 학습하였던 고려 의 정치인들에게는 물리적 무력의 행사가 아닌 도덕적 교화가 사람과 국가들 간의 조화 를 보장해주었다. 1196년과 1246년의 기간 동안, 188명의 인물들이 송과 요, 금으로 보내졌던 사신으 128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29
66 토론문 3 12세기 초의 고려 로 기록되어 있다. 그들 중 104명에 대해서는 사실상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고려사 와 고려사절요 에는 그들의 명단 외에 외교사절로서 그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단 한 문장 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나머지 84명에 대해서만 사료는 서술하고 있다. 이들 집단에 대 해 살펴보면, 이 사절단의 높은 문학적 소양과 그 중요성이 분명해진다. 이들 중 적어도 43명은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만약에 사료들이 보다 완벽하다면 이 수치는 분명히 더 높 아질 것이다. 고려왕조가 사절단을 보내는 임무에 유교적 사고방식을 학습하였으며 명 망 있는 과거시험에 합격하기에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엘리트들을 파견하였다 는 점 또한 분명하다. 서긍( 徐 兢 )은 그의 기행문 고려도경( 高 麗 圖 經 ) 에서 고려 관료들 의 높은 문학적 소양에 대해 서술하였다. 게다가 이 시기의 고려를 이끌었던 인물들을 조 사해보면, 각 왕대별로 거의 모든 핵심 지도자들이 적어도 한 번 이상 외국 사행( 使 行 )을 다녀왔다. 고려 관료제 사회에서 성공의 지름길은 분명히 외국으로의 공식 사행을 포함 하고 있었다. 윤관( 尹 瓘 )이나 한안인( 韓 安 仁 ), 김부식( 金 富 軾 )과 그의 형제들과 같은 각 시기별 고려왕조의 지도자들은 모두 공식 사절로서 외국을 여행하였다. 이들에 대해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적어도 20명은 외국 사행에 1번 이상 다녀왔으며, 이들 중 일부는 아마도 3~4차례의 외국 사행을 다녀왔다. 한 예로 1115년에 김단( 金 端 ) 은 왕실의 후원을 입어 송나라에 유학하였다. 고려로 돌아온 지 수년 후 그는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인종 대에는 1130년과 1135년에 금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서긍은 외국에서 사절들이 개경을 방문하였을 때면 김단이 이들을 접대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김 단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던 서긍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중국 황실로부터 사절단 이 도착할 때면, 고려는 항상 재능 있는 인재들이나 조공사절단에 참여하였던 적이 있는 인물들을 선발하여 사절들을 접대하도록 하였다. [관반( 館 伴 )]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들은 고려의 독립을 위협할 수 있는 복잡한 관계를 피할 수 있 는 신중한 외교정책을 선택적으로 입안하였다. 1115년에 고려가 요나라로부터 군사 원조 를 요청받았을 때, 몇몇 관료들은 궁지에 몰린 요나라의 원조요청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성공적으로 이러한 요나라의 원조요청을 거절하였던 것은 김부일( 金 富 佾 )과 한충( 韓 沖 ), 김부식, 민수( 閔 脩 ), 척준경( 拓 俊 京 )과 같은 이들이었다. 이들 중 상당 수는 외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적이 있으며 국제무대에 익숙한 이들이었다. 1135년에 묘청이 고려를 침략해 올지도 모를 금나라에 대한 공격적인 외교정책을 추진 하였을 때, 보다 신중하고 현실적이었던 이들 정치지도자들(김부식 등)은 다시 한 번 이 러한 신중한 정책으로서 이 문제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흥미롭게도 묘청의 후원자들이었 던 정지상( 鄭 知 常 ), 김안( 金 安 ), 백수한( 白 壽 翰 )은 분명히 외교관이었던 적이 없으며, 과거 에 대한 향수 속에서 묘청의 비현실적인 외교정책을 옹호하였다. 반면 서경 원정을 이끌 었던 거의 모든 묘청의 반대자들은 송과 요, 금의 수도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김부식과 진숙( 陳 淑 ), 이주연( 李 周 衍 )을 비롯한 많은 묘청의 반대자들은 고려가 국제적으로 고립 된 상태에 놓일 수는 없으며 중원 대륙의 패권국가와의 관계를 거부할 수도 없다는 사 실을 알고 있었다. 고려는 종종 누가 외교사절로서 더 적합한지에 대하여 신중하게 고민하였다. 고려왕 조가 상대국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할 때에는, 높은 신분과 명망이 있는 배 경을 지닌 인물이 사절단을 이끌었다. 한 예로 1099년 고려가 거란과 여진 모두로부터의 커져가는 압박에 직면하였을 때, 고려는 윤관을 개봉( 開 封 )으로 보내 고려와 송 사이의 유대를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20년 뒤 송이 국제적 압박에 처하자 고려는 김연( 金 緣 ) 과 임유문( 林 有 文 ), 김부철( 金 富 轍 )을 개봉으로 보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이자덕 ( 李 資 德 )과 김진( 金 縝 ), 문공인( 文 公 仁 )은 요나라를 방문하였다. 이들은 각각 과거에 합 격하였으며, 잘 알려진 고려 명문 출신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1135년에 송나라의 영향력 이 감소하자, 그리 대단하지 않은 배경의 인물로 구성된 사절단이 송나라를 방문하였다. 문승미( 文 承 美 ), 노현용( 盧 顯 庸 ), 유대거( 劉 待 擧 )와 같이 이 시기에 송나라를 방문했던 이들은 같은 시기 금나라의 수도를 방문하였던 김단이나 문공원( 文 公 元 )같은 인물들과 분명하게 대조된다. 예종 대와 인종 대의 많은 유명한 개혁가들은 사절단으로서 외국에 다녀온 경력이 있 었다. 이들 외교관들과 지속적으로 활성화되었던 고려왕조의 언론기관인 대간 사이에는 매우 흥미로운 연관성이 존재하였다. 기록이 남아있는 84명의 인물들 중에서, 적어도 45 명은 대간의 관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청렴함과 지성이 대간과 사절 모두에 게 요구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외국 사행의 경험은 의심할 바 없 이 다재다능하고 넓은 경험을 지닌 이상적인 대간을 만들어냈다. 고려의 외국 사절들은 사행을 통해 많은 것들을 배우고 훌륭히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고려의 국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와 요구들을 국내에 소개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통하여 이들은 고려왕조 통치의 높은 수준을 가능케 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계무대에서 고려의 지위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외교는 고려왕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였다. 고려왕조는 신중한 외교정책을 고안해 내고, 이웃 국가들과의 유대를 키워나가는 데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을 기울였던 이들은 국내 문제에도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다. 이들은 명망 있는 학자들로, 대 개 과거에 합격하였고 사절로서 외국의 수도에 다녀온 적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세계 어 130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31
67 느 나라의 역사를 보아도 이렇게나 많은 정치지도자들이 외교 업무에 친숙하였던 경우는 드물다. 고려왕조의 지배구조에서 최상위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외교 업무를 관장하는 관직과 적어도 한 번 이상의 외교사절로서의 경험이 분명하게 요구되었다. 고려의 국제관계는 고려의 성공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이다. 고려가 보 여주었던 국제관계는 모든 국가들에게 따라야 할 모범으로 여겨진다. 외교를 통하여 고 려의 관료들은 훈련받았고, 다른 문화들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그들이 국가적 위기 상황에 직면하였을 때 (그것이 내부적으로 기원한 것이든, 외부적으로 기원 한 것이든) 이에 대처할 수 있는 풍부한 경험을 제공해 주었고, 넓고 세계적인 안목을 가 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게다가 정책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높은 문학적 소양을 지닌 전 문적인 외교관들의 집단을 갖추고 있었던 고려는 이상이나 관례 따위에 얽매이지 않으며 고려의 국가적 이익을 추구해갈 수 있었다. 정책을 결정하는 데에 이러한 전문가들의 의 견을 참고해 감으로써 그들은 고려 문화의 발전을 촉진시켜 나갈 수 있었고, 동시에 고 려가 12세기의 아시아에서 활발한 성취를 이루어내는 데에 참여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토론문4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토론문 이 형 우 인천대학교 교수 132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68 토론문 4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토론문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토론문 이형우 (인천대학교 교수) 현재 고려는 개방성 과 다양성 을 인정하는 국가였다고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습 니다. 이번 학술대회의 발표들도 대부분 그런 인식 아래 보다 세부적인 주제 속에서 구 체적인 내용들을 살펴본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의 대외정책을 통해서 유일한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이 나아갈 외교의 방향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라는 교훈을 준 발표, 화풍( 華 風 )과 토풍( 土 風 )이 공존할 수 있는 정책적 공간이 있던 것을 긍정적으로 본 발표, 고려 시기에 서로가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측면에서 거둔 성취들을 주고받으면서 공동으로 동 아 문화권의 형성과 발전에 기여하였다고 본 발표, 고려가 투화인에 대해 우대 정책을 펼 쳤고 그것이 국가 운영에 이익으로 작용하였다는 발표, 팔관회가 가졌던 의미를 천하관, 다양성, 개방성, 축제성 4가지 측면에서 파악한 발표, 고려시기 동아시아 각국의 표류민 에 대한 정책을 살펴보고 당시 사회가 도량과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한 발표 등을 통해서 10~14세기 고려를 포함한 동아시아 사회에 대해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있었 습니다. 이렇게 좋은 여러 발표를 모두 이해하는 것은 토론자에게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까 닭에 발표문을 보고 느낀 궁금한 점 몇 가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서 토론자의 책임 을 면할까 합니다. 고려는 외국과 교류할 때 조선과 달리 황제국을 표방하면서 실리와 명분을 모두 얻 을 수 있는 방향에서 외교정책을 전개하였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이런 인식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내용의 발표가 있습니다. 곧 강동 6주를 확보한 성종 대의 외교 정책은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것을 1 제국( 帝 國 )의 자주성을 상실 하고, 고구려 영역의 회복이라는 국시( 國 是, 北 進 政 策 )조차 방기한 방책이었을 뿐이다. 라고 비판적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고려의 12세기 전반 외교정책에 대하여 2 밀접한 관 계를 지니고 있던 인국( 隣 國 )이 새로운 제국으로 등장할 때 호혜적 동맹을 형성하거나 승세( 勝 勢 )에 편승하지 못하고, 중립적 자세를 취하여 방관하다가 피압박의 국가에서 벗 135
69 토론문 4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토론문 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고 한 것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무신 집권기 외교정책을 비판하면서 그 이전의 외교정책에 대해서는 상대국과의 전쟁( 戰 爭 ) 화의( 和 議 )라는 전술배합( 戰 術 配 合 )의 병행 위에 제3자와의 연대모색을 통한 국익의 확보라는 외교정책을 구사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토론자로서는 13세기 이전 고려의 외교정책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또한, 대원몽골국( 大 元 蒙 古 國 )의 강한 압 제 하에서 국가를 온전하게 살려 낼 수 있었던 당시의 외교정책은 어떠한 방책이었는가 를 찬찬히 살펴보면서 한반도 분단이라는 현재의 외교 상황을 우리 역사학자들도 함께 생각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라는 부분에서는 무신정권 기간의 외교정책을 긍정적으로 본 것 같기도 합니다. 다양성과 개방성은 고려 전 시기를 일관할 수 있는 특징으로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 습니다. 2009년 개정 교육과정 고등학교 검정교과서 집필기준에서도 이민족과의 대립 외에도 다양한 교류를 통해 고려가 다양성과 개방성을 가지는 사회로 발전하는 상황에 대하여 파악한다. 라고 나와 있습니다. 화풍과 토풍이 공존한 것도 그런 측면이고, 투 화인에 대한 우대 정책, 팔관회가 가진 의미 등도 그런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됩 니다. 그런데, 고려가 가졌던 장점인 다양성과 개방성은 언제 어떻게 국가 정책에서 중요 성을 잃어버리고 없어졌을까요? 그리고 고려를 이어 건국된 조선은 다양성과 개방성을 가진 국가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만약 조선이 그런 장점을 가지지 못한 국가였다면 적어도 그런 측면에서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변화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옳은 판단인지 궁금합니다. 10~14세기 고려와 일본의 표류민 정책을 말하면서 13세기 이후에는 양국관계 악화의 영향으로 서로의 대응 방식에서 비대칭성( 非 對 稱 性 )이 발생하였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쌍 방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관계를 맺는 해석의 비대칭성 에 대해 가능하다면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추가설명을 해주면 좋겠습니다. 이번 학술대회 발표는 주로 원 간섭기 이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원 간섭기와 그 이후 고려 멸망 이전까지 시기의 고려에 대해서는 다양성과 개방성이라는 측면에서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지 어렵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해주기를 바랍 니다. 마지막으로 개방성과 다양성 측면에서 고려가 받아들인 성리학은 어떻게 평가하여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고려가 수용한 성리학은 원나라에서 관학화된 성리학이 었다고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몽골제국은 매우 개방적이고 다양성을 가 진 국가라고 보고 있는데, 그런 원나라를 통해서 들어온 성리학은 개방성과 다양성을 가진 학문이었던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성리학을 받아들인 정치세력인 신진사대 부 가 추구한 대외 정책은 어떤 성격이었을까도 그렇습니다. 원 간섭기 이전 고려가 추구 하였던 개방성과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었는지, 그렇지 않았던 것인지 말입니다. 136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37
70 MEMO MEMO
71 MEMO MEMO
72 MEMO MEMO
73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渡 變 峻 現 代 銀 行 勞 動 東 京 大 月 書 店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銀 行 新 報 關 東 渡 變 峻 現 代 銀 行 勞 動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相 互 銀 行 計 數 集 計 ꌞ ꌞꌞ ꌞ ꌞꌞ
目 次 第 1 章 總 則 第 1 條 ( 商 號 )... 1 第 2 條 ( 目 的 )... 2 第 3 條 ( 所 在 地 )... 2 第 4 條 ( 公 告 方 法 )... 2 第 2 章 株 式 第 5 條 ( 授 權 資 本 )... 2 第 6 條 ( 壹 株 의 金 額 )..
제 정 1973. 2. 28 개 정 2010. 3. 19 定 款 삼성전기주식회사 http://www.sem.samsung.com 目 次 第 1 章 總 則 第 1 條 ( 商 號 )... 1 第 2 條 ( 目 的 )... 2 第 3 條 ( 所 在 地 )... 2 第 4 條 ( 公 告 方 法 )... 2 第 2 章 株 式 第 5 條 ( 授 權 資 本 )... 2
緊 張 冷 戰 體 制 災 難 頻 發 包 括 安 保 復 舊 地 震 人 類 史 大 軍 雷 管 核 禁 忌 對 韓 公 約 ㆍ 大 登 壇 : : : 浮 上 動 因 大 選 前 者 : : : 軸 : : : 對 對 對 對 對 戰 戰 利 害 腹 案 恐 喝 前 述 長 波 大 産 苦 逆 說 利 害 大 選 大 戰 略 豫 斷 後 者 惡 不 在 : : 對 : 軟 崩 壞
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KR000****4 설 * 환 KR000****4 송 * 애 김 * 수 KR000****4
<C0BDBEC7B0FA2028BEC8B8EDB1E2292E687770>
音 樂 學 碩 士 學 位 論 文 P. Hindemith 음악에 대한 분석 연구 - 를 중심으로 - 2002 年 2 月 昌 原 大 學 校 大 學 院 音 樂 科 安 明 基 音 樂 學 碩 士 學 位 論 文 P. Hindemith 음악에 대한 분석 연구 - 를 중심으로 - Sonata for B-flat
60-Year History of the Board of Audit and Inspection of Korea 제4절 조선시대의 감사제도 1. 조선시대의 관제 고려의 문벌귀족사회는 무신란에 의하여 붕괴되고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족이 지배층으 로 되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새로이 신흥사대부가 대두하여 마침내 조선 건국에 성공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조선양반사회의
Readings at Monitoring Post out of 20 Km Zone of Tokyo Electric Power Co., Inc. Fukushima Dai-ichi NPP(18:00 July 29, 2011)(Chinese/Korean)
碘 岛 监 结 30km 20km 10km 碘 达 碘 测 时 提 高 后 的 上 限 [250,000 微 西 弗 / 年 ] [10,000 微 西 弗 / 年 ] 巴 西 瓜 拉 帕 里 的 辐 射 (1 年 来 自 地 面 等 ) > 辐 射 量 ( 微 西 弗 ) 250,000 100,000 50,000 10,000 注 : 本 资 料
토픽 31호(2016.3.7).hwp
절실히 묻고 가까이 실천하는 선진 산림과학 3.0 시대를 열겠습니다! 01 03 05 05 06 07 08 08 10 10 11 임업인에게는 희망을, 국민에게는 행복을 带 NIFoS 1 중국 닝샤회족자치구() 중국 무슬림 인구 주요 분포도 중국 닝샤의 회족 자치구 3 중국 무슬림 인구 Top 11 지역 순위 지역( 省 ) 인구(만)
<C3CAC1A12031322DC1DFB1B92E687770>
24 2004. 12 2004. 11 25 26 2004. 12 % 50 40 30 20 10 0 華 東 華 北 中 南 西 南 東 北 西 北 전 체 중 대 형 차 중 형 차 소 형 차 경 차 2004. 11 27 帕 28 2004. 12 2004. 11 29 30 2004. 12 2004. 11 31 32 2004. 12 2004. 11 33 34 2004.
211 1-5.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 石 村 洞 百 濟 初 期 積 石 塚 이도학, (서울의 백제고분) 석촌동 고분, 송파문화원, 2004. 서울 特 別 市, 石 村 洞 古 墳 群 發 掘 調 査 報 告, 1987. 1-6. 고창지석묘군 高 敞 支 石 墓 群 문화재관리국,
210 참고문헌 1. 능묘 1-1. 경주황남리고분군 慶 州 皇 南 里 古 墳 群 경상북도, 文 化 財 大 觀, 1-V, 慶 尙 北 道 編, 2003. 문화재관리국, 天 馬 塚 發 掘 調 査 報 告 書, 1974. 1-2. 함안도항리 말산리고분군 咸 安 道 項 里 末 山 里 古 墳 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咸 安 道 項 里 古 墳 群 5, 2004.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한류동향보고서 26호.indd
Story Story 2013. 1. 30. Story 26호 STORY Korean Wave Story 2013 STORY STORY 12 2012 한류동향보고 Korean Wave Story 2013 Korean Wave Story 2013 (2012년 1/4분기) 12 12 2012. 4. 9. 2 3 4 5 6 乱 世 佳 人 花 絮 合 集 梦 回 唐
다문화 가정 중학생의 문식성 신장 내용
교육연구 제58집 성신여대 교육문제연구소 2013년 12월 30일 2009 改 定 敎 育 課 程 에 따른 中 學 校 漢 文 敎 科 書 의 多 文 化 敎 育 에 對 한 一 見 이돈석 청주대학교 한문교육과 Ⅰ. 들어가는 말 Ⅱ. 한문 교과 교육과정 목표에 대한 검토 Ⅲ. 중학교 한문 교과서 분석 목 차 1. 재제 출전의 문제 2.. 교육 내용과 제시 방법의 문제
나하나로 5호
Vol 3, No. 1, June, 2009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KACPR) Newsletter 01 02 03 04 05 2 3 4 대한심폐소생협회 소식 교육위원회 소식 일반인(초등학생/가족)을
³»Áö_10-6
역사 속에서 찾은 청렴 이야기 이 책에서는 단순히 가난한 관리들의 이야기보다는 국가와 백성을 위하여 사심 없이 헌신한 옛 공직자들의 사례들을 발굴하여 수록하였습니다. 공과 사를 엄정히 구분하고, 외부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껏 공무를 처리한 사례, 역사 속에서 찾은 청렴 이야기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최부, 송흠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2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
발행일 : 2013년 7월 25일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2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정]--------------------------------------------
- 2 -
- 1 - - 2 - - - - 4 - - 5 - - 6 - - 7 - - 8 - 4) 민원담당공무원 대상 설문조사의 결과와 함의 국민신문고가 업무와 통합된 지식경영시스템으로 실제 운영되고 있는지, 국민신문 고의 효율 알 성 제고 등 성과향상에 기여한다고 평가할 수 있는지를 치 메 국민신문고를 접해본 중앙부처 및 지방자 였 조사를 시행하 였 해 진행하 월 다.
152*220
152*220 2011.2.16 5:53 PM ` 3 여는 글 교육주체들을 위한 교육 교양지 신경림 잠시 휴간했던 우리교육 을 비록 계간으로이지만 다시 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우 선 반갑다. 하지만 월간으로 계속할 수 없다는 현실이 못내 아쉽다. 솔직히 나는 우리교 육 의 부지런한 독자는 못 되었다. 하지만 비록 어깨너머로 읽으면서도 이런 잡지는 우 리
赤 城 山 トレイルランニンング レース 大 会 記 録 第 10 回 赤 城 山 選 手 権 保 持 者 男 子 須 賀 暁 記 録 2:35:14 女 子 桑 原 絵 理 記 録 3:22:28 M1 ミドル 男 子 18~44 歳, 距 離 32km 総 登 高 1510m ( 注 :DNF:
赤 城 山 トレイルランニンング レース 大 会 記 録 第 10 回 赤 城 山 選 手 権 保 持 者 男 子 須 賀 暁 記 録 2:35:14 女 子 桑 原 絵 理 記 録 3:22:28 M1 ミドル 男 子 18~44 歳, 距 離 32km 総 登 高 1510m ( 注 :DNF: 棄 権 DNS: 欠 場 ) 順 位 氏 名 記 録 順 位 氏 名 記 録 順 位 氏 名 記 録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2 목차 편집자의 말 ------------------------------------------------------------------------------------- 3 한국의 * 상1 개괄 한국의 병역거부운동 -------------------------------------------------------------------------
항일 봉기와 섬멸작전의 사실탐구
抗 日 蜂 起 와 殲 滅 作 戰 의 史 實 探 究 - 韓 國 中 央 山 岳 地 帶 를 中 心 으로- 이노우에 가츠오( 井 上 勝 生 ) 1) 머리말 지난 해(2015년) 10월과 11월, 日 本 軍 東 學 黨 討 伐 隊 의 進 軍 路 를 한국의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조사할 수 있었다. 後 備 第 19 大 隊 (당시 東 學 黨 討 伐 隊 라고 불리었다) 第 1
¹é¹üȸº¸ 24È£ Ãâ·Â
2009.가을 24호 2_ . 02 03 04 08 10 14 16 20 24 28 32 38 44 46 47 48 49 50 51 _3 4_ _5 6_ _7 8_ _9 10_ _11 12_ _13 14_ _15 16_ _17 18_ 한국광복군 성립전례식에서 개식사를 하는 김구(1940.9.17) 將士書) 를 낭독하였는데, 한국광복군이 중국군과 함께 전장에
40 /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었던 신창희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 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의 생애에 관한 개략적인 소개가 있었지만, 1) 여전히 많은 부분이 확인되지 않은 실정이다. 본고 또한 여전히 짧고 소략한 내용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39-44, 2008년 6월 Yonsei J Med Hist 11(1): 39-44, 2008 일반논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 신창희( 申 昌 熙 )의 생애와 활동 박 형 우(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 홍 정 완(연세대 의사학과) 40 /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었던 신창희의
<3429BFC0C1F8BCAE2E687770>
한국경제학보 제18권 제1호 The Korean Journal of Economics Vol. 18, No. 1(Spring 2011) 일제말 電 力 國 家 管 理 體 制 의 수립* 1) 吳 鎭 錫 ** 요 약 본고는 1940년대 전반 전력국가관리의 수립을 대상으로 정책 결정의 주체 에 주목하여 정책의 원안이 등장하여 최종안에 이르는 변천과정을 면밀하 게 분석한
16 經 學 研 究 集 刊 特 刊 一 墓 誌 銘 等 創 作 於 高 麗 時 代 與 朝 鮮 朝 時 代, 此 是 實 用 之 文 而 有 藝 術 上 之 美. 相 當 分 量 之 碑 誌 類 在 於 個 人 文 集. 夢 遊 錄 異 於 所 謂 << 九 雲 夢 >> 等 夢 字 類 小 說.
經 學 研 究 集 刊 特 刊 一 2009 年 12 月 頁 15~36 高 雄 師 範 大 學 經 學 研 究 所 15 韓 國 漢 文 學 硏 究 之 最 近 傾 向 김동협 金 東 協 教 授 / Professor Kim Donghyub 摘 要 我 想 對 於 韓 國 漢 文 學 最 初 之 專 門 著 書 是 金 台 俊 之 >. 此 冊 刊 行 於
356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5권 1883.01.24 釜 山 口 設 海 底 電 線 條 欵 / 海 底 電 線 設 置 ニ 關 スル 日 韓 條 約 漢 日 1883.06.22 在 朝 鮮 國 日 本 人 民 通 商 章 程 / 朝 鮮 國 ニ 於 テ 日 本 人 民 貿 易 ノ
근현대 한일간 조약 일람* 22) 1. 조선 대한제국이 일본국과 맺은 조약 주) 1. 아래 목록은 國 會 圖 書 館 立 法 調 査 局, 1964 舊 韓 末 條 約 彙 纂 (1876-1945) 上 ; 1965 舊 韓 末 條 約 彙 纂 (1876-1945) 中 ; 外 務 省 條 約 局, 1934 舊 條 約 彙 纂 第 三 巻 ( 朝 鮮 及 琉 球 之 部
그렇지만 여기서 朝 鮮 思 想 通 信 이 식민본국과 피식민지 사이에 놓여 있는 재조선일본인의 어떤 존재론적 위치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식민본국과 피식민지의 Contact Zone 에 위치한 재조선일본인들은 조선이라는 장소를 새로운 아이덴티티의 기
식민지의 목소리 - 朝 鮮 思 想 通 信 社 刊, 朝 鮮 及 朝 鮮 民 族 (1927)을 중심으로 鄭 鍾 賢 ( 成 均 館 大 ) 1. 伊 藤 韓 堂 과 朝 鮮 思 想 通 信 伊 藤 韓 堂 이 발간한 朝 鮮 思 想 通 信 은 1925 년에 발행을 시작하여 1943 년 그가 죽은 직후에 폐간될 때까지 대략 18 년 동안 간행된 조선문을 번역한 일본어 신문이다.
중국기본고적 데이타베이스 기능수첩
중국기본고적고 사용설명서 1 로그인( 進 入 ) 1.1시작을 클릭하신후 왼쪽 프로그램에서 AncientBook 을 찾으신후, AncientBookClient 를 클릭하세 요. 1.2 服 務 器 (ip), 用 戶 名 (id), 密 碼 (pw)를 입력 후 진입( 進 入 ) 클릭하세요. 1-3. 아이콘 설명 : 메인페이지 : 최소화 : 화면 닫기 2. 검색( 檢
건강증진 시범보고서 운영을 위한 기술지원 연구
짧활 康 t합샤훌 示 範 띔 健 所 運 營 응 위한 技 術 支 援 웹 JE - 示 範 保 健 所 模 型 開 發 을 中 心 으로l' 鍾 和 李 順 英 鄭 基 뽑 編 著 韓 國 띔 健 社 會 댐 究 院 머 리 말 美 國 이나 日 本 등 先 進 國 의 경우 이미 1970년대 부터 人 口 의 高 敵 化 와 生 活 樣 式 의 變 化 에 기인한 成 人 病 증가와 이에
POWERSHELL CONTROLLER + BATTERY Setup Guide English............................... 4 繁 體 中 文.............................. 12 한국어............................... 20 www.logitech.com/support................
allinpdf.com
이책은북한에대한이해를돕기위해통일교육원에서발간한교재입니다. 각급교육기관등에서널리활용하여주시기바랍니다. 차례 Ⅰ. 북한이해의관점 Ⅱ. 북한의정치 차례 Ⅲ. 북한의대외관계 Ⅳ. 북한의경제 Ⅴ. 북한의군사 Ⅵ. 북한의교육 차례 Ⅶ. 북한의문화 예술 Ⅷ. 북한의사회 Ⅸ. 북한주민의생활 차례 Ⅹ. 북한의변화전망 제 1 절 북한이해의관점 Ⅰ. 북한이해의관점 Ⅰ. 북한이해의관점
4 7 7 9 3 3 4 4 Ô 57 5 3 6 4 7 Ô 5 8 9 Ô 0 3 4 Ô 5 6 7 8 3 4 9 Ô 56 Ô 5 3 6 4 7 0 Ô 8 9 0 Ô 3 4 5 지역 대표를 뽑는 선거. 선거의 의미와 필요성 ① 선거의 의미`: 우리들을 대표하여 일할 사람을 뽑는 것을 말합니다. ② 선거의 필요성`: 모든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지역의 일을 의논하고
(012~031)223교과(교)2-1
0 184 9. 03 185 1 2 oneclick.law.go.kr 186 9. (172~191)223교과(교)2-9 2017.1.17 5:59 PM 페이지187 mac02 T tip_ 헌법 재판소의 기능 위헌 법률 심판: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면 그 효력을 잃게 하거 나 적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 탄핵 심판: 고위 공무원이나 특수한 직위에 있는 공무원이 맡
한류동향보고서 16호.indd
Story Story 2012. 9. 13. Story 16호 STORY Korean Wave Story 2012 STORY STORY 12 호 2012 한류동향보고 Korean Wave Story 2012 Korean Wave Story 2012 (2012년 1/4분기) 12 호 12 호 2012. 4. 9. 2 3 4 5 轩 辕 剑 之 天 之 痕 我 的
98 농업사연구 제 6권 1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6 주요어 : 농업기술, 농서집요, 농상집요, 수도, 휴한법, 연작법 1. 머리말 한국사에서 14세기는 고려왕조에서 조선왕조로 국가 지배체제가 크게 격변한 시기였다. 고려말 고려 사회 내부와 외부에서 발생한 여
14세기 高 麗 末, 朝 鮮 初 농업기술 발달의 추이* - 水 稻 耕 作 法 을 중심으로- 염 정 섭** < 국문초록 > 15세기 초반 태종대에 만들어진 농서로 현재 農 書 輯 要 가 남아 있다. 이 농서는 元 代 의 農 書 인 農 桑 輯 要 를 抄 錄 하고 吏 讀 를 붙여 간행한 것이었다. 간행연대가 아직 불확실하지만 15세기 초반 태종대로 추정된다. 고려말
238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생각해야 한다는 제안이 일어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貫 井 正 之 씨는 豊 臣 秀 吉 의 대외적 인 정복의도 전반을 검토하고 책 이름에 海 外 侵 略 이라는 문구를 채택했으며( 豊 臣 政 権 의 海 外 侵 略 과 朝 鮮 義 兵
文 祿 慶 長 의 役 연구의 학설사적 검토 237 文 祿 慶 長 의 役 연구의 학설사적 검토 나카노 히토시( 中 野 等 ) 머리말 Ⅰ. 근세 전기 일본의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대한 위치 설정 Ⅱ. 근세 후기 일본의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亂 )에 대한 위치 설정 Ⅲ. 근대 일본의 성립과 文 祿 慶 長 의 役 ( 壬 辰 倭
名門家 명문가 기록관리의 변천 2011년 부천 족보전문 도서관 變遷 序 文 나이 스물을 조금 넘겨 군대 생활을 할 때 우연찮게 족보를 보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 즈음에는 문맹률도 높았고 그래서, 당히 각 가정에서 책을 구경하기란 아마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얘기 같지만 국민학교 교과서 정도가 전부이지 동화나 소설이나 잡지는 구경할 수도 없었다. 혹여 나름대로
untitled
조선시대 형사판례를 통해 본 재판의 제원칙 조선시대 형사판례를 통해 본 재판의 제원칙 - 심리록에 수록된 사례를 중심으로 - 김 용 희 * 차 례 Ⅰ. 서 설 Ⅱ. 심리록에 나타난 지방관리들의 사법행정능력 1. 검험의 기준 2. 검험조서 Ⅲ. 심리록에 나타난 재판의 기본원칙 1. 관용의 원칙 2.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in dubio pro reo)
01¸é¼öÁ¤
16면 2012.7.25 6:14 PM 페이지1 2012년 8월 1일 수요일 16 종합 고려대장경 석판본 판각작업장 세계 최초 석판본 고려대장경 성보관 건립 박차 관계기관 허가 신청 1차공사 전격시동 성보관 2동 대웅전 요사채 일주문 건립 3백여 예산 투입 국내 최대 대작불사 그 동안 재단은 석판본 조성과 성보관 건립에 대해서 4년여 동안 여러 측면에 서 다각적으로
<4D6963726F736F667420576F7264202D20313030303931302D3242463531B27BA6E6A6D2BBCDA8EEABD72DBEC7BEA7A558AAA9AAC02E646F63>
前 1 前 言 現 行 考 銓 制 度 一 現 行 考 銓 制 度 對 人 事 行 政 的 重 要 性 : 強 烈 建 議 考 人 事 行 政 的 同 學 們, 一 定 要 精 讀 現 行 考 銓 制 度! 熟 讀 現 行 考 銓 制 度 的 好 處, 可 以 從 以 下 幾 個 角 度 來 分 析 : 相 對 重 要 程 度 高 : 現 行 考 銓 制 度 在 人 事 行 政 三 個 主 要 等
국사관논총103집(전체화일)
기원 전후 樂 浪 郡 의 支 配 勢 力 에 관한 일연구 吳 永 贊 * Ⅰ. 머 리 말 Ⅴ. 기원 1세기 전반 王 調 亂 과 Ⅱ. 樂 浪 古 墳 의 被 葬 者 에 대한 諸 論 議 支 配 勢 力 의 추이 Ⅲ. 기원전 1세기대 木 槨 墓 와 支 配 勢 力 1. 土 人 의 성장과 王 調 亂 Ⅳ. 기원전 1세기 중후반 墓 制 의 변천 2. 지배세력의 추이 1. 귀틀묘의
33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문 * 웅 입주자격소득초과 34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송 * 호 입주자격소득초과 35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나 * 하 입주자격소득초과 36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최 * 재 입주자격소득초
1 장지지구4단지 ( 임대 ) 59A1 김 * 주 830516 입주자격소득초과 2 장지지구4단지 ( 임대 ) 59A1 김 * 연 711202 입주자격소득초과 3 장지지구4단지 ( 임대 ) 59A1 이 * 훈 740309 입주자격소득초과 4 발산지구4단지 ( 임대 ) 59A 이 * 희 780604 입주자격소득초과 5 발산지구4단지 ( 임대 ) 59A 안 * 현
<BFACB1B82D30352DBFC0C7F6BCF62DC8B8B3B2C0DA20B1E2C0E720A1AEB0A5BCAEA1AFB0FA20A1AEBFE4BCF6A1AFB8A62D31C2F7BCF6C1A42E687770>
硏 究 論 文 회남자 기재 갈석 과 요수 를 통해 본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 오현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통합과정 수료, 한국고대사 전공 [email protected] I. 머리말 II. 갈석 과 요수 조문의 사료 맥락 검토 III. 갈석 과 요수 의 위치 고증 IV. 연장 진개 침입 이전 고조선의 중심지 V. 맺음말 I. 머리말 근대사학 도입
<5BB0EDB3ADB5B55D32303131B3E2B4EBBAF12DB0ED312D312DC1DFB0A32DC0B6C7D5B0FAC7D02D28312E28322920BAF2B9F0B0FA20BFF8C0DAC0C720C7FCBCBA2D3031292D3135B9AEC7D72E687770>
고1 융합 과학 2011년도 1학기 중간고사 대비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1 빅뱅 우주론에서 수소와 헬륨 의 형성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4 서술형 다음 그림은 수소와 헬륨의 동위 원 소의 을 모형으로 나타낸 것이. 우주에서 생성된 수소와 헬륨 의 질량비 는 약 3:1 이. (+)전하를 띠는 양성자와 전기적 중성인 중성자
sme_beta[1](류상윤).hwp
1930년대 중소 직물업의 발흥과 그 배경 류상윤( 서울대학교대학원 경제학부 박사과정 수료) 1. 머리말 1960 년대 이후 한국은 고도성장을 경험하였다. 고도성장의 원인 또는 배경이 무엇이었는 지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진행하여 왔다. 그 중에는 해방 후의 경제성장을 식민지기 조선이 경험했던 것들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연구들도 있다. 이들은 각각 자본주의
<C1DF29B1E2BCFAA1A4B0A1C1A420A8E8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01 02 8 9 32 33 1 10 11 34 35 가족 구조의 변화 가족은 가족 구성원의 원만한 생활과 사회의 유지 발전을 위해 다양한 기능 사회화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행동 가구 가족 규모의 축소와 가족 세대 구성의 단순화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 1인 또는 1인 이상의 사람이 모여 주거 및 생계를 같이 하는 사람의 집단 타나는 가족 구조의
연구노트
#2. 종이 질 - 일단은 OK. 하지만 만년필은 조금 비침. 종이질은 일단 합격점. 앞으로 종이질은 선택옵션으로 둘 수 있으리라 믿는다. 종이가 너무 두꺼우면, 뒤에 비치지 는 않지만, 무겁고 유연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두꺼우면 고의적 망실의 위험도 적고 적당한 심리적 부담도 줄 것이 다. 이점은 호불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일단은 괜찮아 보인다. 필자의
<C1A4C3A530302D31302DBFCFBCBABABB2E687770>
低 所 得 偏 父 母 家 族 의 生 活 實 態 와 政 策 課 題 金 美 淑 朴 敏 妌 李 尙 憲 洪 碩 杓 趙 炳 恩 元 永 憙 韓 國 保 健 社 會 硏 究 院 머 리 말 배우자의 사별, 별거, 이혼 등으로 초래되는 偏 父 母 家 族 은 産 業 化 의 진전에 따른 개인주의 팽배로 이혼이 증가하였고 經 濟 危 機 로 인한 가 족해체가 확산되어 최근 증가 추세에
101-03.hwp
人 文 科 學 제101집 2014년 8월 漢 字 문자 그 이상의 상징 체계 Ⅰ. 서론 중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한자의 본격적인 개혁운동은 5.4 白 話 運 動 이 후 지식인들에 의한 표음문자화를 지향하는 漢 字 革 命 論 이다. 근대 알파 벳 문자를 이상적 원형으로 사유하는 서구학계의 깊은 인식론의 영향으로 1954년 中 國 文 字 改 革 委 員 會 성립 이후
5 291
1 2 3 4 290 5 291 1 1 336 292 340 341 293 1 342 1 294 2 3 3 343 2 295 296 297 298 05 05 10 15 10 15 20 20 25 346 347 299 1 2 1 3 348 3 2 300 301 302 05 05 10 10 15 20 25 350 355 303 304 1 3 2 4 356 357
<B0EDBCBA20C0B2B4EB20B3F3B0F8B4DCC1F620B9AEC8ADC0E720C1F6C7A5C1B6BBE720BAB8B0EDBCAD28C3DFB0A1BCF6C1A4BABB292E687770>
固 城 栗 垈 2 農 工 團 地 造 成 事 業 文 化 財 地 表 調 査 報 告 書 2003. 11 慶 南 發 展 硏 究 院 歷 史 文 化 센터 固 城 栗 垈 2 農 工 團 地 造 成 事 業 文 化 財 地 表 調 査 報 告 書 Ⅰ. 調 査 槪 要 1. 調 査 目 的 고성군에서 추진중인 율대 농공단지 확장예정지에 대해 문화재보호법 제74-2와 동법 시행령 제43-2
#7단원 1(252~269)교
7 01 02 254 7 255 01 256 7 257 5 10 15 258 5 7 10 15 20 25 259 2. 어휘의 양상 수업 도우미 참고 자료 국어의 6대 방언권 국어 어휘의 양상- 시디(CD) 수록 - 감광해, 국어 어휘론 개설, 집문당, 2004년 동북 방언 서북 방언 중부 방언 서남 방언 동남 방언 제주 방언 어휘를 단어들의 집합이라고 할 때,
7 청보 86. 3. 29( 對 삼성 )~4. 5( 對 빙그레 ) NC 13. 4. 2( 對 롯데 )~4. 10( 對 LG) 팀별 연패 기록 삼 미 18 연패 ( 85. 3. 31~4. 29) 쌍방울 17 연패 ( 99. 8. 25~10. 5) 롯 데 16 연패 ( 0
전반, 타격, 투수, 수비 진기록 전반 시즌 최고 승률 0.706 85 삼성 (110 경기 77승 32패 1 무) 기별 최고 승률 0.741 85 삼성 ( 전기 55경기 40승 14패 1 무) 시즌 최저 승률 0.188 82 삼미 (80 경기 15승 65 패) 기별 최저 승률 0.125 82 삼미 ( 후기 40경기 5승 35 패) 시즌 최다 승리 91 00
*074-081pb61۲õðÀÚÀ̳ʸ
74 October 2005 현 대는 이미지의 시대다. 영국의 미술비평가 존 버거는 이미지를 새롭 게 만들어진, 또는 재생산된 시각 으로 정의한 바 있다. 이 정의에 따르 면, 이미지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지는 보는 사람의, 혹은 이미지를 창조하는 사람의 믿음이나 지식에 제한을 받는다. 이미지는 언어, 혹은 문자에 선행한다. 그래서 혹자는
*부평구_길라잡이_내지칼라
발 간 등 록 번 호 54-3540000-000057-01 2012년도 정비사업 추진 지연에 따른 갈등요인 길라잡이 INCHEON METROPOLITAN CITY BUPYEONG-GU INCHEON METROPOLITAN CITY BUPYEONG-GU 1970년대 부평의 전경 1995년 부평의 전경 2011년 부평의 전경 백운2구역 재개발지역 부평4동 재개발지역
國 統 調 9 0-1 2-1 0 7 南 北 韓 社 會 次 化 力 量 綜 출 評 價 統 院 調 査 硏 究 室 책 을 내 면 서 南 北 韓 이 分 斷 以 後 각기 相 反 된 政 治 理 念 과 政 治. 經 濟 的 制 度 에 토대를 둔 體 制 成 立 으로 相 異 한 社 會 文 化 를 形 成 해온 지도 벌써 4 5 年 이 지 났다. 이 기간동안 南 과 北 의 社 會
2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VOL.13 No.4 2011 08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CONTENTS XXXXXX XXXXXX 2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3 XXXXXXXXXXXXXXX XXXXXXXXXXXXXX 4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5 6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기본소득문답2
응답하라! 기본소득 응답하라! 기본소득 06 Q.01 07 Q.02 08 Q.03 09 Q.04 10 Q.05 11 Q.06 12 Q.07 13 Q.08 14 Q.09 응답하라! 기본소득 contents 16 Q.10 18 Q.11 19 Q.12 20 Q.13 22 Q.14 23 Q.15 24 Q.16 Q.01 기본소득의 개념을 쉽게 설명해주세요. 06 응답하라
단양군지
제 3 편 정치 행정 제1장 정치 이보환 집필 제1절 단양군의회 제1절 우리는 지방자치의 시대에 살며 민주주의를 심화시키고 주민의 복지증진을 꾀 하고 있다. 자치시대가 개막된 것은 불과 15년에 불과하고, 중앙집권적 관행이 커 서 아직 자치의 전통을 확고히 자리 잡았다고 평가할 수는 없으며, 앞으로의 과제 가 더 중요하다는 진단을 내릴 수 있다. 우리지역 지방자치의
¼øÃ¢Áö¿ª°úÇÐÀÚ¿ø
13 1. 객사(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8호) 객사는 영조 35년(1759년)에 지어진 조선 후기의 관청 건물입니다. 원래는 가운데의 정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동대청, 오른쪽에 서대청, 앞쪽에 중문과 외문 그리고 옆쪽에 무랑 등으로 이 루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정당과 동대청만이 남아있습니다. 정당에서는 전하 만만세 라고 새 긴 궐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국문초록 坦 齋 筆 衡 과 老 學 庵 筆 記 에서는 여요 성립의 계기로 정요백자의 有 芒 을 꼽 았다. 有 芒 의 芒 의 의미에 대해서는 그것이 芒 口 를 가리킨다는 견해와 光 芒 을 가리 킨다는 견해가 있는데, 두 문헌의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본 결과 전자가 타당하다고
제23호(2015.7) 115~149쪽 북송 여요의 성립과 그 의의 이희관* 목차 Ⅰ. 문제의 소재( 所 在 ) Ⅱ. 여요 성립의 계기 定 州 白 磁 器 有 芒, 不 堪 用 의 재검토 Ⅲ. 여요의 성립시기 Ⅳ. 여요의 성립과 어용자기 조달방식의 변화 Ⅴ. 여요의 성립과 휘종 Ⅵ. 나머지말 여요의 전개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들 * 前 호림박물관 이 논문은 2014년
<C1F6C7A5C1B6BBE7BAB8B0EDBCAD3134C1FD2E687770>
( 財 ) 東 亞 文 化 硏 究 院 地 表 調 査 報 告 第 14 輯 진영읍 신용리 아름다운아파트 신축공사 구간내 文 化 遺 蹟 地 表 調 査 報 告 書 2 0 0 4. 10 目 次 Ⅰ 7. 조사개요 Ⅱ. 역사 ㆍ 고고분야의 조사 8 1. 김해시의 자연환경 1. 8 2. 김해의 역사적 환경 2. 10 3. 조사대상지역 개관 3. 28 Ⅲ 29. 현지조사 및
....pdf..
Korea Shipping Association 조합 뉴비전 선포 다음은 뉴비전 세부추진계획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 조합은 올해로 창립 46주년을 맞았습니다. 조합은 2004년 이전까 지는 조합운영지침을 마련하여 목표 를 세우고 전략적으로 추진해왔습니 다만 지난 2005년부터 조합원을 행복하게 하는 가치창출로 해운의 미래를 열어 가자 라는 미션아래 BEST
41호-소비자문제연구(최종추가수정0507).hwp
소비자문제연구 제41호 2012년 4월 해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이용약관의 약관규제법에 의한19)내용통제 가능성* : Facebook 게시물이용약관의 유효성을 중심으로 이병준 업 요약 업 규 규 논 업 쟁 때 셜 네트워 F b k 물 규 았 7 계 건 됨 규 규 업 객 계 규 므 받 객 드 객 규 7 말 계 률 업 두 않 트 접속 록 트 른징 볼 규 업 내
<C7D1B1B9B5B6B8B3BFEEB5BFBBE733362E687770>
동학농민혁명기 在 朝 日 本 人 의 전쟁협력 실태와 그 성격 99 연 구 논 문 동학농민혁명기 在 朝 日 本 人 의 전쟁협력 실태와 그 성격 * 박 맹 수 ** 32) 1. 머리말 2. 在 朝 日 本 人 增 加 推 移 와 그 背 景 3. 在 朝 日 本 人 의 戰 爭 協 力 實 態 와 그 性 格 4. 스파이활동 事 例 分 析 5. 맺음말 1. 머리말 1894년
DBPIA-NURIMEDIA
119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역사와 법* 60) 조시현** 목 차 Ⅰ. 들어가며 Ⅱ.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전개 Ⅲ.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법 적용의 의미 -역사와 법의 관계 1. 법적 책임의 전제로서의 사실에 대한 규범적 평가 2. 법을 둘러싼 진실규명의 필요성 3. 연속된 법의식의 회복과 미래 -피해자의 권리와 공동행동원칙의 정립 4. 국가책임의
<3035B1E8BFECC7FC2E687770>
정신문화연구 2006 겨울호 제29권 제4호(통권 105호) pp. 119~148. 硏 究 論 文 주자학에서 혼백론의 구조와 심성론과의 관계 * 김 우 형 ** 1) Ⅰ. 서론: 귀신론과 혼백론 Ⅱ. 북송시대 주자학에서의 혼백과 귀신 Ⅲ. 주희 혼백론의 구조 Ⅳ. 혼백론에서 심성의 지각론으로 Ⅴ. 결론: 혼백론을 통해 본 주자학의 성격
¾Æµ¿ÇÐ´ë º»¹®.hwp
11 1. 2. 3. 4. 제2장 아동복지법의 이해 12 4).,,.,.,.. 1. 법과 아동복지.,.. (Calvert, 1978 1) ( 公 式 的 ).., 4),. 13 (, 1988 314, ). (, 1998 24, ).. (child welfare through the law) (Carrier & Kendal, 1992). 2. 사회복지법의 체계와
(중등용1)1~27
3 01 6 7 02 8 9 01 12 13 14 15 16 02 17 18 19 제헌헌법의제정과정 1945년 8월 15일: 해방 1948년 5월 10일: UN 감시 하에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 제헌 국회의원 198명 선출 1948년 6월 3일: 헌법 기초 위원 선출 1948년 5월 31일: 제헌 국회 소집. 헌법 기 초위원 30명과 전문위원 10명
( 단위 : 가수, %) 응답수,,-,,-,,-,,-,, 만원이상 무응답 평균 ( 만원 ) 자녀상태 < 유 자 녀 > 미 취 학 초 등 학 생 중 학 생 고 등 학 생 대 학 생 대 학 원 생 군 복 무 직 장 인 무 직 < 무 자 녀 >,,.,.,.,.,.,.,.,.
. 대상자의속성 -. 연간가수 ( 단위 : 가수, %) 응답수,,-,,-,,-,,-,, 만원이상 무응답평균 ( 만원 ) 전 국,........,. 지 역 도 시 지 역 서 울 특 별 시 개 광 역 시 도 시 읍 면 지 역,,.,.,.,.,. 가주연령 세 이 하 - 세 - 세 - 세 - 세 - 세 - 세 세 이 상,.,.,.,.,.,.,.,. 가주직업 의회의원
<302DC7D1B1B9B5B6B8B3BFEEB5BFBBE733392E687770>
일제 강제합병 이데올로기와 식민지교육정책 77 연 구 논 문 일제 강제합병 이데올로기와 식민지교육정책 이 명 화* 1. 머리말 2. 日 本 의 韓 國 强 占 과 强 占 論 理 3. 倂 合 條 約 의 締 結 과 統 治 論 理 4. 强 制 倂 合 前 後 의 植 民 地 敎 育 政 策 5. 맺음말 47) 1. 머리말 2010년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이하여 한일 양국에서는
<3120B1E8B1D9BFEC2D31C2F7C6EDC1FD2830292DB1B3C1A4BFCFB7E12831707E292E687770>
Perspectives J of Oriental Neuropsychiatry 2012:23(1):1-15 http://dx.doi.org/10.7231/jon.2012.23.1.001 심신치유를 위한 불교의학, 사상의학, 한의학에서의 心 의 연구 김근우, 박성식 동국대학교 한의과대학 신경정신과 교실, 동국대학교 한의과대학 사상체질과 교실 The Study on
완치란 일반인들과 같이 식이조절과 생활관리를 하지 않아도 다시 통풍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의 통풍이 몇 년이나 되었는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로릭과 진통 소염제로 버텼는지 이제 저한테 하소연 하시고 완치의 길로 가면 다. 어렵지 않습니다. 1 2015 11 10
완치란 일반인들과 같이 식이조절과 생활관리를 하지 않아도 다시 통풍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의 통풍이 몇 년이나 되었는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로릭과 진통 소염제로 버텼는지 이제 저한테 하소연 하시고 완치의 길로 가면 다. 어렵지 않습니다. 1 2015 11 10 # 2012 000081 1 000 95% 95% 60 5 B 507 070 4651 3730~4
DBPIA-NURIMEDIA
조선후기 判 付 의 작성절차와 서식 연구 * 1) 명 경 일 ** 1. 머리말 2. 判 付 의 개념과 구성요소 3. 判 付 의 작성절차에 따른 서식의 변화 4. 맺음말 초록: 조선시대 주요 관아가 각자 맡은 업무에 관하여 국왕에게 아뢸 때 사용한 문서를 계 啓 라고 했다. 그리고 啓 에 대한 국왕의 처결을 判 付 라고 했다. 본 논문은 판부의 작성 절차와 서식을
141018_m
DRAGONS JEONNAM DRAGONS FOOTBALL CLUB MATCH MAGAZINE VOL.136 / 2014.10.16 Preview Review News Poster PREVIEW K LEAGUE CLASSIC 32R JEONNAM VS SEOUL / 14.10.18 / 14:00 / 광양축구전용구장 서울과 뜨거운 한판 승부! 전남드래곤즈가 오는
50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사회의 변화, 5) 豊 臣 정권의 전략적 사고에 관한 연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6)동아시아 국 제질서, 특히 책봉체재 에 관한 재검토를 든다. 물론 이 순서가 과제로서의 순서를 의미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일본 측 위원의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49 동아시아 세계와 文 祿 慶 長 의 役 - 朝 鮮 琉 球 日 本 에 있어서 大 明 外 交 儀 禮 의 관점에서- 구와노 에이지( 桑 野 栄 治 ) 머리말 Ⅰ. 조선 전기의 동아시아 국제환경 1. 명과 조선의 관계 2. 명과 琉 球 의 관계 3. 명과 일본의 관계 Ⅱ. 조선 宣 祖 代 의 의례와 외교 1. 宣 祖 의 책봉의례
<5B323031345DB4EBC7D0BFE4B6F7283037332D30383229B1E2B1B82E687770>
2. 주요 보직자 명단 (2014년 4월 1일 현재) (1) 교무위원 총장 부총장(인사캠) 부총장(자과캠) 부총장(의무) 일반대학원장 학부대학장 유학대학장 문과대학장 법과대학장 사회과학대학장 경제대학장 경영대학장 자연과학대학장 정보통신대학장 공과대학장 약학대학장 사범대학장 생명공학대학장 스포츠과학대학장 의과대학장 예술대학장 기획조정처장 교무처장 학생처장 산학협력단장
È޴ϵåA4±â¼Û
July 2006 Vol. 01 CONTENTS 02 Special Theme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Beautiful Huneed People 03 04 Special Destiny Interesting Story 05 06 Huneed News Huneed
南 北 體 育 會 談 第 5 次 實 務 代 表 接 觸 會 議 錄 $은 幣 K7를구 淸 를9 를3 는r구# 國 土 統 - Q ( 漆 北 對 話 事 務 局 ) < 目 次 l - 般 事 項 l l l l l l l 3 l l l l l l l l l 3 2 會 議 錄 7 附 錄 : 代 表 團 記 者 會 見 9 7-7 - 린 一 般 事 項 가 日 時 :1990
需給調整懇談会の投資調整―石油化学工業を中心に
The 4th East Asian Economic Historical Symposium 28 EHCJ 117 논문 5 朝鮮總督府의 臨時資金調整法 운용과 資金統制 박현 연세대학교 1. 머리말 1937 년 7 월에 시작된 中日戰爭은 전쟁 당사국인 일본뿐만 아니라 그 식민지인 조선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전쟁을 계기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이 강화되고 전시 경제통제가
DBPIA-NURIMEDIA
광해군대 초반 대일정책의 전개와 그 특징 1) 김 태 훈 * 1. 머리말 2. 己 酉 約 條 의 성립과 倭 使 上 京 금지 조치 3. 대일정책상의 異 見 조정과 명분 확보 4. 대일정책의 功 利 的 宥 和 的 기조 5. 맺음말 초록: 본 연구에서는 조선후기 대일외교의 출발선이었던 광해군대 초반 대일정책을, 외형적 측면에서 통교틀의 마련, 정책추진의 안정적 기반
역대국회의원_PDF변환용.hwp
역대 국회의원 명단 당적표시는 당선당시(총선결과, 재 보궐당선, 의석승계) 소속정당을 나타냄. 제9 10대 국회의원의 당적중 국민회의 표시부분은 통일주체국민회의 에서 선출한 국회의원임. 제헌국회 (당적은 당선당시의 당적임) 성 명 선 거 구 당 적 비 고 성 명 선 거 구 당 적 비 고 姜 己 文 산 청 無 所 屬 金 若 水 동 래 朝 鮮 共 和 黨
<B1DDC0B6B1E2B0FCB0FAC0CEC5CDB3DDB0B3C0CEC1A4BAB82E687770>
여 48.6% 남 51.4% 40대 10.7% 50대 이 상 6.0% 10대 0.9% 20대 34.5% 30대 47.9% 초등졸 이하 대학원생 이 0.6% 중졸 이하 상 0.7% 2.7% 고졸 이하 34.2% 대졸 이하 61.9% 직장 1.9% e-mail 주소 2.8% 핸드폰 번호 8.2% 전화번호 4.5% 학교 0.9% 주소 2.0% 기타 0.4% 이름
.....6.ok.
Ⅳ 성은 인간이 태어난 직후부터 시작되어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므로 성과 건강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청소년기에 형성된 성가치관은 평생의 성생활에 영향을 미치며 사회 성문화의 토대가 된다. 그러므로 성과 건강 단원에서는 생명의 소중함과 피임의 중요성을 알아보고, 성매매와 성폭력의 폐해, 인공임신 중절 수술의 부작용 등을 알아봄으로써 학생 스스로 잘못된 성문화를
01정책백서목차(1~18)
발간사 2008년 2월, 발전과 통합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출범한 새 정부는 문화정책의 목표를 품격 있는 문화국가 로 설정하고, 그간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보완하는 한편 권한과 책임의 원칙에 따라 지원되고, 효율의 원리에 따라 운영될 수 있도록 과감한 변화를 도입하는 등 새로운 문화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란 국민 모두가 생활 속에서 문화적 삶과 풍요로움을
14 이용복 간단히 알아본다. 이어 고조선 강역에서 발견된 다양한 유적과 발굴된 당시의 청동 기 유물을 통하여 천문학적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다. 특히 청동기 유물에 나타난 문양을 통하여 천문학적 요소나 흔적을 알아보고자 한다. II. 고조선의 역사 고려( 高 麗 ) 시
고조선의 천문과 북두칠성 13 고조선의 천문과 북두칠성 이 용 복 서울교육대학교 / 소남천문학사연구소 I. 서론 고조선에 대한 것은 고대사를 전공하고 있는 역사학자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하 여 평소에 별로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이라도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 조선에 대한 연구는 학자들 간 많은 이견이 있고 학문적 논쟁의 중심에 있다. 고조 선( 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