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역사, 신정일 교수님의 글모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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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 역사, 신정일 교수님의 글모임4 초보산꾼

2 소개글 신정일 교수님의 매일로 온 편지를 모아논 글입니다

3 목차 1 펀치볼 둘레길과 동해 두타산 아래의 무릉 계곡 길을 걷는다. 8 2 숲이 무성한 길 문경새재와 하늘재를 넘는다 함양의 용추계곡과 화림동계곡을 거닐다 14 4 천삼백 리 한강 여섯 번 째를 걷는다.원주 흥호리에서 에서 여주 이포나루까지 16 5 고조선의 땅이자 연암 박지원이 걸었던 열하를 가다 고조선의 땅, 갈석산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현장을 답사합니다 한 여름에 내외 선유동을 따라 걷는다 계사년 시월에 걷는 제주도의 제주 올레 43 9 서해의 절경 흑산도와 홍도를 가다 천삼백 리 한강 다섯 번 째를 걷는다.단양읍에서 충주댐 거쳐 원주 부론면까지 관악산에서 느낀 성간의 소회, 섬진강 테마 강따라 길따라 도보 여행 계사년의 여름 걷기 학교- 월출산에서 청산도까지(선착순 90명) 천삼백 리 한강 네 번 째를 걷는다. 영월 거운리에서 단양 도담삼봉까지 신록의 계절에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다 인제 진동계곡과 원대리 자작나무 숲을 가다 천삼백 리 한강 세 번 째를 걷는다..- 동강 가수리에서 어라연까지 다시 돌아본 동학농민혁명의 현장, <소백산 자락 길>중 온달 평강 로맨스 길을 오월에 걷는다 계사년의 사월 초파일 삼사 三 寺 기행과 영남지방의 문화유산을 찾아 그리운 미륵의 나라 꽃 피고, 또 피는 남원을 다녀와 금강 무릉도원 길을 걷는다, 년 섬 기행 <비렁길이 있는 여수 금오도를 가다.> 천삼백 리 한강 두번째를 걷는다. 97

4 26 네번 째 한강 천 삼백리 길에 나서며, 봄꽃을 보러 섬진강으로 가다 익산 미륵산 둘레길을 3월 30일 토요일에 걷는다 익산 미륵산 둘레길을 걷다 태백의 검용소에서 삼척시 하장면 갈전리까지 계사년 2월에 고흥반도 길을 걷다 봄맞이 섬 기행, 고군산군도의 선유도를 가다 [신정일의 길]삼남대로 옆에 웬 신 삼남길 (경향신문 (금)) 이청준 문학의 산실인 소록도와 장흥 회진을 걷다 통영의 섬(비진도. 대매물도, 소매물도)들을 걷다 섬진강 오백 삼 십리를 가다 영남의 4대 길지를 찾아 가다 상주에서의 하룻밤 맛과 멋이 함께하는 남도에서 해넘이와 해맞이를 하다 북촌과 경복궁을 다녀온 소회 영암사지나 해인사 가는 길에 어떤 풍경을 만나게 될까?, 옥정호를 감싸고도는 물안개 길을 걷는다 바닷바람과 소나무 향기를 맡으며 태안반도를 걷는다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을 보고 서강을 걷다 안면도 노을길을 걷는다 서해의 섬, 영흥도, 선재도 대부도를 걷는다 무주 금강변 마실길 - 복사꽃 만발한 무릉도원으로 가는 길, 한탄강변의 철원을 가다 강화 남문에서 연미정까지를 걷다 섬진강 5백 삼십 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걷는다. 170

5 51 합천의 영암사지와 해인사가 있는 홍류동계곡의 소리길을 가다 새 책 '눈물편지'가 나왔습니다 남해의 절집들과 순천만을 가다 겨울의 초입 부석사를 답사하고 고치령을 넘다 늦은 가을에 성주사와 무량사를 거닐다 늦가을 조선 권력의 중심부였던 북촌과 경복궁을 거닐어 본다 늦은 가을에 의주로를 고양과 파주 일대를 걷다 섬진강에서 돌아와 다시 강물소리를 그리워하다 울릉도에서 보낸 며칠 만개한 가을에 남도에서 꽃 무릇(상사화)을 보다 오대산 옛길과 구룡령 옛길을 걷다 조선시대 옛길 관동대로를 일곱 번 째를 걷는다 남한강 변 단양에서의 하룻밤 <가슴 설레며 걷는 천년 고도 전주 옛길> 임진년 만추에 만나는 제주도 관동대로 여섯 번 째를 걷는다 김천 청암사에서 수도암으로 가는 길을 걷는다 그새 그리운 창녕의 용선대 영덕의 해파랑 길과 울진 십이령 길을 가다 제주 삼무공원에서의 하룻밤 제주, 그리운 제주, 바닷가의 고을 거제도와 역사의 고장 창녕 걷기 관동대로> 다섯 번째 문재에서 전재 너머 원주까지, 한여름 괴산 산막이 길을 가다 아침가리와 생태문화의 보고 곰배령을 가다. 268

6 76 백령도 너머 몽금포 해수욕장, 년 여름 걷기 학교. 바닷가의 고울 거제도와 역사의 고장 창녕 걷기 <관동대로>네 번째 하진부에서 모릿재 너머 여우고개까지, 한탄강변의 철원을 가다 서해의 외 딴 섬, 백령도를 가다 다시 지리산을 생각하며, <관동대로>세 번째 묵호항에서 대관령 너머 횡계까지, 임진년의 삼사기행에 초대합니다 천년 고도 전주의 옛길을 걷는다 교동도에서 보낸 하루 임진년 석탄일에 통도사에서 운문사로 이르는 길을 걷는다, 정기도보 답사 <관동대로>두 번째 울진군 북면 부구리에서 동해시까지, 죽령 옛길과 병산서원, 그리고 낙동강 길을 걷는다 합천 해인사 천년길과 청량사 길을 걷는다 최시형 선생의 묘소를 찾아가다 불꺼진 방 - 바다가 육지라면 (안면도가 육지라면)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은 섬들이 있어 청송과 영양의 외씨 버선길을 걷는다 추석 연휴에 동해 바다 먼 곳에 있는 섬 울릉도를 갑니다 역사의 길 관동대로를 걷는다 봄꽃이 만개한 섬진강 길을 걷는다 남해 보리암과 김만중의 적소 노도,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을 보고 서강을 걷다 그 아름다운 남강 3번째 여정을 걷는다. 촉석루에서 정암나루까지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을 찾아가는 역사기행 342

7 펀치볼 둘레길과 동해 두타산 아래의 무릉 계곡 길을 걷는다 :23 펀치볼 둘레길과 동해 두타산 아래의 무릉 계곡 길을 걷는다.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에서 8월 30일에서 구월의 초입인 1일까지 양구의 펀치볼 둘레길과 동해 두타산 아래의 무릉 계곡 길을 걷습니다. 가을 들판이 무르 익어가는 해안면 일대를 가칠봉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노란 화채그릇이나 운동장같이 보이는 그 풍 경 아래 펀치볼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곳을 걷고, 삼화사 지나 쌍폭까지 이르는 동해 두타산 아래 계곡 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그 외에도 강릉 옥계 부근의 바닷가 길과 추암 일대를 답사하게 될 이번 여정에 참여 바랍니다. 펀치볼 둘레길, 한국전쟁의 상징인 국내 최북단 강원 양구의 일명 '펀치볼'에 둘레길이 조성돼 생태 및 안보관광 자원으로 활용된 다. 북부지방산림청(청장 윤영균)은 양구군 해안면 일원 펀치볼 둘레길 44km 구간을 내달 1일 개통한다고 29일 밝혔다. 이날 개통식에 이어 둘레길 구간 가운데 평화의 숲길 4Km를 걷는 '숲사랑 숲길 걷기' 행사가 진행된다. 펀치볼 둘레길은 테마별 순환노선으로 평화의 숲길(통일관~현리시내ㆍ12.3km) 구간과 오리나무 숲길(통일관~도솔천~ 현리교ㆍ14.6km), 만들벌판길(통일관~물골교ㆍ17km) 구간으로 조성됐다. 해안면은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분지 하나가 1개면을 이루는 지역으로 세계 유일의 분단현장이 라는 DMZ의 가치와 전쟁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펀치볼은 한국전쟁 때의 격전지로, 외국 종군기자들이 가칠봉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 마치 '화채 그릇(Punch Bowl)'을 닮았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두타산 아래 무릉계곡, 동해시 삼화동과, 삼척시 미로면의 경계에 있는 이 산은 백두대간이 동해안을 따라 뻗어 내려오다가 삼척지방 해안가 에서 크게 한 번 용트림하여 세워진 산으로써 무릉계곡을 중심으로 청옥산(1404M)과 쌍둥이처럼 서있는 산이다. 두타 산과 청옥산은 거의 연결된 듯 보이나 형상이 매우 대조적 인데 두타산은 정상부가 첨봉을 이루고 주변은 급경사면 이어서 날렵한 산세를 자랑하고 청옥산은 완만하고, 묵직한 형상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청옥산보다 두 타산이 51m가 낮은데도 불구하고 이산 전체를 일컬어 두타산으로 부른다는 것이다. 이 고장 모든 사람들도 그러하고 펀치볼 둘레길과 동해 두타산 아래의 무릉 계곡 길을 걷는다. 7

8 옛 문헌들이 다 그러하다. 삼화사 현판에도 두타산 삼화사라고 기록되어 있고, 윤두서의<동국여지지도 東 國 餘 地 地 圖 > 에도 청옥산이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다가 신경준의 산경표 山 徑 表 에 이르러서야 청옥산이 보이는데 두타산보다 아랫 자락에 청옥산이 놓여있는 것이다. 두타산은 예로부터 삼척 지방의 영적인 모산 母 山 으로 숭상 되었으며, 동해안 지방에서 볼 때 서쪽의 먼 곳에 우뚝 솟 아 있기 때문에 이산은 정기를 발하는 산으로 여겨져 민중들의 삶에 근원이 된다고 여겼던 산이다. 그래서였는지 조 선 선조 때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동인의 중심인물 이였고 그 당시 삼척부사로 재 직했던 김효원은 두타산 일기 에서 금강산 다음으로 아름다운 산을 두타산으로 꼽았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이 흐릿하게 내 눈 안에 가득차고 사람들의 발길에서 발길로 드러난 그 산길은 아슴프레 하다. 배낭을 벗고 떡과 물 그리고 사탕을 꺼내 놓는다. 젖과 꿀이 넘쳐흐르는 땅 이 두타산이 그러할 것이다. 산스크 리트어의 두타(Dhuta) 에서 유래되었고 그것이 다시 한자음으로 표기된 두타에는 의식주에 대한 탐욕과 세상의 모든 번뇌와 망상을 버리고 수행, 정진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러므로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깨끗하게 불 도를 닦는 수행 처 라는 유래를 지닌 이 두타산은 불교와 인연이 깊은 산이다. 현재는 삼화사와 관음암, 천은사만이 남아 있지만, 불교가 융성했던 시기에는 중대사, 상원사, 대승암, 성로암, 내화암 등 십여 개가 넘는 절이 있었다. 금강산 다음으로 아름다운 산 두타산을 중심으로 세 개의 하천이 형성된다. 하나는 박달골의 계류와 서원터골 계류가 함께 모여 장장 14Km에 이르 는 무릉계곡을 거쳐 살내가 되어 동해로 흘러들고, 남동쪽 기슭에서 발원한 하천은 골지천 과 합류하여 한강이 되고 동쪽 기슭에서 발원한 계류는 오십천과 합류하여 동해에 접어들며 두타산 아랫자락의 쉰음산(688M)에는 돌우물이 50 여개가 있어 오십정산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에는 산 제당을 두어 봄, 가을에 제사를 지냈으며 비가 오지 않을 때에는 기우제도 지냈다. 이산 아래 미로면에는 천은사 라는 옛 절이 있고 이 절에서 고려 충렬왕 때의 학자였던 이승휴가 은둔 생활을 하며 제왕운기 를 지었다고 한다. 두타산성에서 산들은 찬연하다. 아니 찬연하다 못해 눈이 부셔서 바라볼 수가 없다. 산자락 마다 우뚝우뚝 서 있는 바위 들이 기립한 채 달려오고 건너편의 청옥산 관음암이 한 폭이 그림이다. 그 산 그 바위들이 나를 에워싸고 내 피 로함과 내 근심 걱정까지도 덜어내 준다. 일설에는 이 산성에서 관음암 사이에 허공 다리가 있어서 임진왜란 때 사용 되었다고 하나 아무래도 그 설은 낭설일 듯싶다. 태종 14년에 축성된 이 두타산성은 천연적인 산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부분적으로 쌓은 성으로 성을 한 바퀴 도는데 약 7일간이나 소요된다고 하며 성벽이 그렇게 견고하지는 않으나 천연의 요새로서 손색이 없다. 어느 새 구름 모두 걷히고 나는 쓰러 질 듯 한 몸을 바위 위에 기댄 채 산들을 바라본다. 저 골짜기 어디쯤에 오늘은 갈수 없는 문간재 가 있을 것이고 그리고 쌍 폭포와 용추폭포를 지나 넘는 박달재는 임계, 정선을 거쳐 서울로 가는 옛 사람들의 고갯 길 이다. 호랑이 바위, 베틀 바위, 학소대, 벼락 바위, 병풍 바위, 번개 바위, 문바위등 절경들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그 비경들이 우리들을 다시 오라고 부를 것이다. 일행들 중에 우리 몇 사람만 패잔병처럼 남아 아직도 내려가야 할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러나 60~70cm도 안 되는 우리의 한걸음 한걸음이 모여 이산을 넘어왔는데 저 아래를 못 내려갈까. 힘들더라도 내려가야지. 두타산의 자연 성문을 지나 산길을 내려가자 계곡은 어둡고 침침하 였고 길은 삼화사로 이어진다. 절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고 삼화사는 신라 선덕여왕 11년에 자장율사가 이곳 두타산에 이르러 절을 짓고 흑연대라고 한 것이 효시였지만 경문왕 4년에 구산 선문 중 사굴산파의 개조인 범일국사가 중창하여 삼공암이라고 한 때부터 뚜렷한 사적을 갖는다. 일설에 는 신라 말에 세 선인이 회의를 하고 그 뒤 품일대사가 불사를 지어 삼불사라고 했다는데 고려 태조 원년에 삼창되 펀치볼 둘레길과 동해 두타산 아래의 무릉 계곡 길을 걷는다. 8

9 면서 세 나라를 하나로 화합시킨 영험한 절이라는 뜻을 지닌 삼화사라고 이름지어 졌다. 태조 이성계는 칙령을 내려 이 절의 이름을 문안에 기록하고, 후사에 전하게 하면서 신인이 절터를 알려준 것이니, 신기한 일이라 하였다. 삼화사는 그 뒤 임진왜란 때 전소 되었고 효종 때 중건 하였으며 몇 차례의 중건을 거쳐 오늘 에 이르렀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로는 적광전 과 약사전 그리고 요사채가 있으며 문화재로는 대웅전 안에 안치된 철 불이 있다. 현재 국보로 심의 중인 이 철불은 삼화사 창건 설화에 관련된 약사 삼불가운데 맏 형의 불상이라고 전해 지고 대웅전 아래마당에 세워져 있는 삼화사 삼층 석탑(보물 127호)은 높이가 4.95m의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는 고 려 시대의 탑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승휴가 이 절 가까이에 객안당을 짓고 거쳐 하였다고 한다. 삼화사의 일주문을 나서서 다리를 건너면 거대한 무릉반석이 나타난다. 천여 명이 앉아도 너끈할 널찍한 너럭바위를 흐르는 물줄기는 곳곳에 담을 이루고 그 너럭바위에는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글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단종 폐위 이후 조선의 산천을 주유했던 매월당 김시습의 글도 있고 조선전기 4대 명필 중 한사람인 양사언의 무릉선원 중대 천석 두타동천 武 陵 仙 源, 中 臺 泉 石, 頭 陀 洞 天 " 이라는 달필들 속에 무슨 계 무슨 계 하며 적혀진 같은 계원들의 이름 들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이름들 속에 조선 시대 이 산에 숨어들었던 사람들을 잡기위해 왔었던 수많은 토포사 討 捕 使 (조선시대 포도대장)들이 새겨 놓았던 이름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신해 3년, 계미 3년 등의 글자들과 함께 토 포사 아무개, 토포사 아무개 등의 글씨들의 여미에 그 때 그들이 이 너럭바위에 자신들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쪼아 댔을 날카로운 정의 끄트머리가 보이고 내리치는 망치의 불꽃들이 스러지는 백성들의 신음소리가 들린다. 사람만이 사람을 그리워한다. 1981년 시인 김지하는 이곳 너럭바위에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죽어갔을 수천 명의 아우성 소리를 들었다 고 한다. 어버이를 부르는 아이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이상하게 떨리던 여인들의 귀곡성 머리를 잡아끌던 보이 지 않는 손길들 마치 썩어가는 시체처럼 거무칙칙한 절벽에서 빛나는 음산한 햇빛 검은 갈 까마귀들의 울부짖 음. 그는 달아나다 시피 파쏘, 비린내골 파소굽이라는 원한 서린 이름들이 남아 떠도는 이 골짜기를 떠났고 구술로서 검은 산 하얀 방 의 두타산을 이렇게 표현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라./산이 산을 그리워하던가./된장이 된장을 그리워하던가./양파가 양파를 그리워하던가./사람만이 사람을 그리워한다./이 것은 절대 지상 철학이다./나는 이것을 두타산에서 배웠다./개새끼들 너럭바위를 지나 금란정을 지난다. 1910한일합방 이후 향교가 문을 닫자 이 고장의 유림과 선비들이 나라 잃은 수치 와 울분을 이기지 못해 금란계를 만들어 기념정각을 세우려 했지만 일제의 반대로 세우지 못하였다. 해방이 된 그 후 그의 자손들이 북편에 있던 이 정각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신정일의 <사찰기행>에서 두 산의 힘을 모아 빚어낸 물줄기를 따르는 발품은 언제나 행복하다. 속세를 등지고 청정하게 불도에 전념한다는 두타행( 頭 陀 行 )과 어울리는 산길이다. 속세를 벗어난 발길은 어느덧 학소대로 이어진다. 왼쪽은 벼랑이고 오른쪽은 거 대한 암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바위 벼랑엔 4단 폭포가 그림처럼 걸려 있고 송림이 그 주변을 감싸듯 우거져 있 으니 그대로 한폭의 동양화다. 학소대를 지나면 산길 왼쪽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굉음이 깊은 산중의 적막을 깨뜨린다. 두개의 골짜기에서 두줄기 폭 포수가 쏟아지는데 음양의 섭리처럼 하나로 만나는 쌍폭포다. 초록으로 우거진 숲과 거무튀튀한 암벽에 새하얀 모시 를 걸어놓은 듯하다. 쌍폭포 바로 위쪽엔 무릉계 최고의 절경으로 꼽히는 용추폭포가 손짓한다. 청옥산에서 흘러 내려온 계류가 3단으로 하얗게 부서지며 쏟아져 내리는 용추폭포는 무릉계곡 미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폭포수가 쏟아지는 각 단마다 담 ( 潭 )이 형성되어 있는데, 맨 아래 하담은 속을 알지 못할 정도로 깊다. 조선시대 삼척부사로 왔던 유한전이 폭포 오른쪽 하단 암벽에 ' 龍 湫 (용추)'라는 글을 새기고 제사를 올린 뒤부터 용추 폭포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무릉계곡을 들어선 사람은 반드시 들렀다 가는 곳이고, 쌍폭과 용추폭포를 보지 않 으면 비록 무릉반석에서 탁족을 했다 해도 무릉계곡은 다녀온 게 아닌 셈이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탐승객들은 폭포 수 아래에서 발을 담그고 있다가 발걸음을 돌린다.. <머니 투데이>에서 펀치볼 둘레길과 동해 두타산 아래의 무릉 계곡 길을 걷는다. 9

10 펀치볼 둘레길과 동해 두타산 아래의 무릉 계곡 길을 걷는다. 10

11 숲이 무성한 길 문경새재와 하늘재를 넘는다 :20 숲이 무성한 길 문경새재와 하늘재를 넘는다. 계사년 8월 마지막 주인 8월 31일 토요일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설된 옛길인 계립령, 곧 하늘 재와 문경새재를 넘 습니다. 여름의 막바지에 나라 안에서 가장 잘 정비된 길이자 역사가 깊은 길인 문경새재와 영남대로 옛길 중에서도 가장 원형이 그래도 남아 있는 관갑천 잔도와 고모산성과 미륵리 절터로 이어지는 하늘재(계립령)는 문화재청에서 명 승지로 지정한 길입니다. 그 길에 얽힌 유래와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이번 기행은 여름의 막바지와 가을을 첫 머리를 가슴 깊히 호흡하는 그런 시간이 될 것입니다. 너무 좋은 길이라서 치마를 입고도 걸을 수 있는 길, 그 길을 걸으실 분의 참여를 바랍니다. 길은 그리 길지 않지만 너무 아름다워서 천천히 오르고 싶은 이 길이 곧 계립령 하늘재다. 이 지역 사람들이 한티, 천티,마골령이라가도 부르는 계립령 즉 하늘재는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 신라의 8대 임 금인 아달라 왕 3년인 156년에 개척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계립령 鷄 立 嶺 은 마골점 혹은 마목현이라고 불렸는데 그 것은 껍질 벗긴 삼대를 겨릅(사투리로는 지릅)이라고 하니, 그것을 한자로 옮기면서 음을 따면 계립( 鷄 立 )이 되고 뜻 을 따면 마골( 麻 骨 ) 또는 마목( 痲 木 )이 되었으리라 짐작하고 있다. 2년 뒤에 개척된 죽령과 더불어 오랫동안 백두대간 을 넘는 주요 교통로로 활용되었다. 고려 후기에 지름길인 문경새재가 개척되었어도 조선시대까지 주요 교통로 활용 되었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이화령과 죽령에 터널이 뚫리면서 그 기능을 잃고 말았다. 이 고개는 포졸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새재를 떳떳이 통과할 수 없는 신분의 사람들이나 보부상들, 그리고 길을 더럽히는 말이나 소를 동반한 사람들이 넘는 눈물고개였다. 소설가 김주영은 객주( 客 主 ) 에서 문경읍에서 여주 목 고개를 올라서서 대의산 자락을 오른쪽으로 끼고 여우목을 지나 중평리 계곡을 거쳐 포암산 중턱인 하늘재를 넘 어 수안보에 이르는 험로가 바로 이곳이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고개 마루를 넘어서면서 충청도 땅에서 경상도 땅인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 이른다. 여기서부터 길은 포장도로다. 이곳 관음리 일대에는 관음리마애반가사유상( 半 跏 思 惟 像 )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 136호인 문경관음리석불입상을 비 롯한 여러 점의 문화유산들과 함께 아름다운 옛 지명들이 남아 있다. 신정일의 <가슴 설레는 걷기 여행>.에서 조선시대 영남지역의 사대부들이 서울로 가던 길이 세 개가 있었다. 부산 동래에서 경주와 영천 안동영주 풍기를 거쳐 죽령 넘어 서울로 가던 길이 열닷새 길이었고, 양산, 삼랑진 밀양 대구 상주 낙동나루를 거쳐 문경새재 넘어 가 숲이 무성한 길 문경새재와 하늘재를 넘는다. 11

12 는 열나흘 길이었다. 마지막이 김천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청주로 해서 가는 길이 열엿새 길이었다. 그러나 벼슬길에 오르거나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들은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에 넘지 않았고, 죽령은 죽 미끄러 진다는 속설 때문에 넘지 않고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문경의 새재를 넘었다.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굽이야 굽이굽이가 눈물이 난다 노다 가세 노다 가세 저 달이 떴다지도록 노다나 가세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서 지며 날 두고 가는 님은 가고 싶어서 가느냐 청천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살이 수심도 많다 아리 아이랑 아리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진도 아리랑 속에 나오는 칠천만 우리민족의 노래아리랑 가락을 부르며 넘 는 고개가 바로 문경새재다. 문경새재가 있는 문경은 삼국시대에 고구려와 신라, 백제의 세력이 각축전을 벌인 전략적 요충지였다. <가슴 설레는 걷기 여행>에서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면서도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 문경새재와 하늘재를 걷고자 하는 분들의 참여를 바 랍니다. 숲이 무성한 길 문경새재와 하늘재를 넘는다. 12

13 함양의 용추계곡과 화림동계곡을 거닐다 :10 함양의 용추계곡과 화림동계곡을 거닐다 년 8월 첫 주 토요일 함양군 안의면으로 갑니다. 거창과 함양의 경계에 솟은 황석산에서 흘러내린 맑은 시내와 용추 폭포, 그리고 아름다운 계곡에서 한 여름의 더위를 식히고, 가을이나 겨울만 찾았던 나라 안의 절경 화림동계곡 을 걷습니다. 피서가 겹치지 않은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함양의 용추계곡 깊은 계곡의 아름다움으로 진리 삼매경에 빠쪘던 곳이라 하여 삼진동이라고도 불리웠다. 기백산과 황석산에서 흘러 내리는 계류가 만나 형성된 계곡으로 지연경관이 수려하며 유학자 돈암 정지영이 노닐던 곳에 후손들이 1806년에 세 운 정자인 심원정이 자리하여 운치를 더해준다. 또한 계곡에는 높이 18m에 달하는 용추폭포가 자리하고 있는데 깊은 소와 세차게 떨어지는 물줄기가 장관을 이루어 여름철피서지로 각광받고 있다. 조선시대 안의 고을이었던 곳, 그 아름다운 정자들이 즐비한 화림동 계곡(거연정. 군자정, 동호정, 농월정 광풍각등 의 정자도 정자지만 화림동 계곡의 길이 아름다운 곳이 바로 안의입니다. 육십령 아래 화림동계곡에는 거연정 동호정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정자가 있어 예로부터 정자문화의 보고라 불렀 다. 그 중 하나인 농월정( 弄 月 亭 )은 조선 선조 때 관찰사와 예조참판을 지낸 지족당( 知 足 堂 ) 박명부( 朴 明 溥 )가 정계에 서 은퇴한 뒤에 지은 것으로,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뒤쪽 가운데에 한 칸짜리 바람막이 작은 방이 있다. 농월정이 라는 이름은 달을 희롱한다 는 뜻으로, 밤이면 달빛이 물아래로 흐른다고 한다. 또한 정자 앞에는 달바위라고 부 르는 1천여 평쯤 되는 너른 반석이 있으며, 흐르는 물길 너머로 줄지어 서 있는 소나무 숲은 바라만 봐도 가슴이 확 트인다. 천하의 일은 뜻을 세우게 되는 것이 우선이다. 뜻이 지극해진 뒤에는 기( 氣 )가 따르게 마련 이라고 했던 박명부의 기상을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그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농월정마저 2003년 가을 불에 타버리고 말았다. 화림동계곡 아래에 안의가 있다. 비단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안의면 금천변에 광풍루( 光 風 樓 )가 우뚝 솟아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태종 12년(1412) 안의현감 전우( 全 遇 )가 객사의 누각으로 초창하여 선화루( 宣 化 樓 )라고 하였던 것을 성종 25년 정여창 이 현감으로 부임한 뒤 중건하고 광풍루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후 정유재란 때 불에 타버렸던 것을 다시 복구하고 함양의 용추계곡과 화림동계곡을 거닐다 13

14 숙종 때 중건하였다. 동계 정온의 옛집 덕유산 동남쪽에 있는 안음현( 安 陰 縣 )은 지금의 거창과 함양지방에 있었던 현이나 영조 4년인 1728년에 정희량( 鄭 希 亮 )이 변란을 일으키자 그 땅을 갈라서 함양과 거창에 편입시켰다. 동계( 桐 溪 ) 정온( 鄭 蘊 )의 고향으로, 지금의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강동마을에 정온 고택이 있고 종부가 그 집을 지키고 있다. 정온은 벼슬이 이조참판에까지 이르렀으며, 광해군 때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하다가 10여 년 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청나라 군사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정온은 명나라를 배반하고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은 옳지 못하 다 하였는데, 인조가 항복하려고 성에서 내려가자 스스로 칼로 배를 찔러 죽으려 했다. 정온의 아들이 창자를 배에 넣고 꿰매었더니 오랜 후에 깨어났다고 한다. 정온은 전쟁이 끝나고 청나라 군사가 돌아가자 곧 시골로 돌아가서 다 시는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의 4대 후손이 바로 정희량이다. 안음에 거주하다 순흥으로 이사를 간 그는 1728년 이인좌 박필현( 朴 弼 顯 ) 등과 함께 공모하였다. 영조가 임금에 오른 뒤 벼슬에서 물러난 소론일파의 호응을 받아 이인좌를 원수로 하여 군사를 일 으킨 뒤 청주를 습격하였는데, 한때 안음 거창 합천 삼가 등의 고을을 제압하였으나 오명항( 吳 命 恒 )이 이끄는 관 군에 패배하였다. 그 뒤 정희량은 거창에서 체포되어 참수당했다. 이로 인해 안음현은 폐현되었고 이 지역 사람들의 벼슬길이 막히게 된다. 동국여지승람 안음현 조에는 억세고 사나우며 다투고 싸움하기를 좋아 한다 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그런지 함양군 사람들이 흔히 안의 송 장 하나가 함양 산 사람 열을 당 한다 라는 말이 이어져 오고 있는데, 이 말은 그만큼 이곳의 사람들이 기질이 세다 는 말이다. 이중환이 안음 동쪽은 거창이고 남쪽은 함양이며 안음은 지리산 북쪽에 있는데, 네 고을은 모두 땅이 기름지다. 함 양은 더구나 산수굴( 山 水 窟 )이라 부르며, 거창 안음과 함께 이름난 고을이라 일컫는다. 그러나 안음만은 음침하여 살 만한 곳이 못 된다 고 말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용추계곡과 화림동계곡에서 팔월의 하루를 보내고 싶으신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함양의 용추계곡과 화림동계곡을 거닐다 14

15 천삼백 리 한강 여섯 번 째를 걷는다.원주 흥호리에서 에서 여주 이포나루까지 :10 천삼백 리 한강 여섯 번 째를 걷는다. - 원주 흥호리에서 에서 여주 이포나루까지- 한강 천 삼백리 도보답사의 여정이 여섯 번째로 실시됩니다. 원주시 부론면에서 실시될 이번 여정은 고즈넉한 폐사지 인 법천사지와 그윽한 숲길이자 남한강변에 펼쳐진 문체부의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인 <여강 길>과 남한강변 을 따라가는 여정입니다. 특히 남한강에 자리 잡은 신륵사에서 이틀을 머물며 펼쳐질 것입니다. 신륵사의 새벽예불과 신륵사에서 여명을 맞이 할 것입니다. 한편 이곳 흥호리 부근을 사람들은 삼합지점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겨울철 강물이 얼면 담배 한 대 필 참에 3 도 땅을 다 밟아볼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3도의 물이 한데로 모인다 해서 합수머리라고 부르기도 하 였다. 모여지는 것이 물뿐만은 아니었다. 3도의 물산과 세미들도 이곳으로 모여들어 남한강 뱃길을 따라 서울로 내려 갔던 곳이었다. 섬강교 바로 위쪽으로 영동고속도로가 지나고 섬강교 바로 아래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피서를 즐기고 있는 것이 보인 다. 섬강은 강원도 횡성군 청일면 속설리 봉문산 서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원성군 부론면 흥호리 동매마을에서 남한강 에 합류한다. 송강 정철이 "한수를 휘어돌아 섬강은 어드메뇨 치악은 여기로다"라고 노래했던 아름답고 유서 깊은 이 강의 원래 이름은 달강 또는 달래강이었다. 강원도 원성군 지정면 간현리 강변에 병암이라는 바위가 절벽에 있는데, 이 병암 상류 50미터 지점에 한 마리 두꺼비 가 기어오르는 듯한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바로 두꺼비바위이며 섬강의 이름을 탄생시킨 유명한 바위이다. 곧 두꺼비바위가 있어 이 냇물을 '두꺼비 섬 蟾 ' 자를 써서 섬강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호 1리 마을을 지나 북내면으로 접어든다. 오후의 햇살을 받아들이며 논바닥에는 수많은 잠자리 떼들이 날아다니 고 들은 넓고도 넓다. 조선 초기의 학자였던 서거정이 "강의 좌우로 펼쳐진 숲과 기름진 논밭이 멀리 몇 백 리에 가 득하여 벼가 잘 되고 기장과 수수가 잘 되고 나무하고 풀 베는 데에 적당하고 사냥하고 물고기 잡는 데에 적당하며 모든 것이 다 넉넉하다"라고 말했듯이 여주군은 먹고 살 양식이 넉넉하게 나는 곳이다. 특히 "광주 분원 사기 방아, 여주 이천 자채 방아"라는 민요도 있듯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주군은 이천시와 더불어 쌀의 산지로 이름났다. 남한 강 언저리에 널려 있는 기름진 땅은 물이 늘 넉넉하여 벼농사에 더없이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택리지 에 서도 대동강 언저리의 평양과 소양강 언저리의 춘천과 함께 이곳을 나라 안에서 가장 살기 좋은 강촌으로 꼽았다. 천삼백 리 한강 여섯 번 째를 걷는다.원주 흥호리에서 에서 여주 이포나루까지 15

16 소나무숲 우거진 길을 내려서자 신륵사 보제존자 부도비와 석등이 있는 유물전에 이른다. 태백에서부터 발원한 남 한강이 흘러내리며 만든 여러 물굽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의 한 군데가 신륵사 부근일 것이다. 한강의 상류인 이곳을 이 지역 사람들은 여강 驪 江 이라 부르는데 주변의 풍경과 그 수려함이 하도 뛰어나 옛부터 시인 묵객들의 발 길이 끊이질 않았다. 조선초기의 학자였던 김수온은 그가 지은 신륵사기 에서 "여주는 국도의 상류지역에 있으며 산이 밝고 물이 아름다워 낙토라고 칭하여 오는데, 신륵사가 바로 이 형승의 복판에 있다. "라고 썼는데 김수온이 말 했던 국도는 바로 충청도 충주에서부터 서울에 이르는 한강의 뱃길을 말함이었다. 신작로나 철길이 뚫리기 전까지는 경상도의 새재를 넘어온 물산이나 강원도, 충청도에서 생산된 물산들이 한강의 뱃길을 타고 서울에 닿았으므로 한강 의 뱃길을 '나라의 길'로 부른 것은 올바른 것이었다. 그러나 1974년에 팔당댐이 생기고 충주댐이 만들어지면서 '나라 의 길'이라고 일컬어지던 뱃길은 아예 사라지고 말았다. 전국의 3대 선원 고달선원 멀리 보이는 북내면 상교리에 남한강변의 이름난 폐사지 고달사가 있다. 도의 경지를 통달한다는 뜻의 고달사 高 達 寺 는 혜목산 아래에 있다. 아늑하게 감싸인 지형이 큰 소쿠리 속에 있는 듯하다. 신라 경덕왕 23년(764년)에 창건되었다 는 기록만 있을 뿐 누가 창건했으며 어느 때 폐사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추정하기로 이때는 신라가 한강 유역을 장악했던 시기였고 남한강의 유리한 수로를 확보하기 위해 거대한 사원을 경영했을 때였으므로, 고달사를 신라시대 창건설로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원종대사가 창건했다는 설보다는 원종 이전 나말여초에 세력을 떨친 선종 계통 의 절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달사는 구산선문 중 봉림산파의 선찰이면서 고달선원으로 불리었는데 창원에서 봉림 산문을 개창한 진경대사 심회는 원감국사 현욱의 제자였고 진경대사는 원종대사에게 법통을 넘긴다. 김현준이 쓴 이야기 불교사 에 "문성왕 2년(840년) 현욱선사는 거처를 여주 혜목산 고달사로 옮겼는데 사람들은 산 이름을 따와서 스님을 혜목산 화상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곳에서 30년 가까이 선풍을 떨치다가 경문왕 9년에 입적하자 경문왕은 원감이라는 시호를 내렸다"라고 적고 있다. 고달사를 중흥시킨 신라 말의 고승이며 고려 초의 선승이었던 원종대사 찬유는 성은 김씨였고 자는 도광, 계림이며 하남에서 용의 아들로(경문왕 9년) 태어났다. 열세 살 때 상주 공산 삼량사에서 융제선사에게 배웠으나 융제는 그가 법기 法 器 임을 알고서 혜목산의 심회를 스승으로 모시게 하였다. 890년(진성여왕 4년) 삼각산 장의사에서 구족계를 받 았다. 광주 송계선원에 있던 원종은 심회의 권유에 따라 892년에 상선을 타고 당나라로 들어가 서주 투자산의 대동 大 同 에게 배우고 곧 도를 깨달았다. 그 뒤 중국의 여러 사찰들을 유람하다가 921년(경명왕 5년)에 귀국하여 봉리마에 머물렀고 원감국사 현욱에 이어 진경대사 심회에게 법맥을 이어받게 된다. 심회는 삼창사에 머물 것을 명하였고 3년 동안 머물렀던 원종은 고려 태조 왕건의 요청에 따라 경주 사천왕사로 가 게 되지만 다시 이곳 혜목산 고달사로 되돌아와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게 된다. 국사의 자리에 오른 원종대사는 이곳 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대선림을 이룩하였고 혜종과 명종은 가사를 내렸으며 광종은 그를 국사로 책봉하고 증진대사라는 호를 내렸다. 국사의 자리에 오른 원종에게 임금은 은병, 은향로, 수정염주, 법의 들을 내렸으며 고려 왕실의 막대한 지원에 힘 입 은 원종대사는 이곳 고달선원을 전국 제일의 사찰로 만들었다. 사방 30리가 모두 절의 땅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고 달선원은 희양원, 도봉원과 함께 전국 3대 선원으로 불렸다. 고달사지에는 석물만 남아 있고 천삼백 리 한강 여섯 번 째를 걷는다.원주 흥호리에서 에서 여주 이포나루까지 16

17 현재 발굴중인 고달사터에 들어서서 맨 처음 만나게 되는 유물이 보물 8호로 지정되어 있는 석불대좌이고, 석불대좌 에서 서북쪽으로 보물 6호인 원종대사 부도비의 귀부와 이수가 있다. 1915년 봄에 넘어지면서 8조각으로 깨진 비신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고, 이 곳에는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이색의 마지막을 지켜본 남한강 또한, 이중환은 택리지 에서 "웅장하거나 급하지 않고 마치 호수처럼 잔잔하다"라고 쓰고서 그 까닭을 "강의 상류 에 마암 馬 岩 과 신륵사의 바위가 있어서 그 흐름을 약하게 하는 데에 있다"고 하였는데 여주읍 영일루 아래에 있는 큰 바위가 마암이다. 그곳에는 목은 이색에 얽힌 일화가 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지 5년째 되던 오월 신록이 물들어 가는 이곳 여강에 한 척의 배가 떠 있었고 그 배에 는 고려말의 충신이었던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더불어 3은인 목은 이색과 그를 따르는 젊은 선비들이 타고 있었 다. 당시 이색은 이태조가 사신을 보내 벼슬을 내리는 것을 거절한 채 초야에 살고 있었고 이색의 제자들 역시 새 왕 조에 참여치 않은 사람들이었다. 어떠한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몰라도 분위기가 무르익은 연후에 목은 이색은 술 한 병을 꺼냈다. 이성계가 보낸 술이었다. 그 술을 한 잔 마신 이색은 그 배 위에서 그만 세상을 하직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이색의 제자들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을 주도했던 정도전과 조준이 꾸민 계획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이색의 의문사는 세월 속에 잠재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도 남한강은 유유히 흐르고 그 마암 건너편에 신륵사가 있다. 벽절이라고 불렸던 신륵사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봉미산 기슭에 위치한 이 절은 신라 진평왕 때에 원화스님이 창건했다고 하지만 정확한 기록 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절 신륵사가 유명해진 것은 고려 말의 고승 나옹선사가 이 절에서 열반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양주 회암사에서 설법하던 나옹선사는 왕명에 의하여 병이 깊었는데도 불구하고 밀양의 형원사로 내려가던 중 이곳 에서 입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의 일을 이색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 이날 진시에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고을사람들이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산마루를 덮었다. 화장을 하고 유골을 씻고 있는데 구름도 없는 날씨에 사방 수백 보 안에 비가 내렸다. 이에 사리 1 백 55과를 얻었다. 신령스런 광채가 8일 동안이나 나더니 없어졌다." 이러한 연유로 퇴락해 가던 신륵사는 대대 적으로 중창불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륵사의 절 이름에 얽힌 유래 두 가지는 이렇다.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서 용마가 자주 나타났는데 매우 거칠 고 사나워 누구도 다룰 수가 없었다. 그때 이 절의 인당대사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다는 설이 하나이 다. 또 다른 전설로는 나옹선사가 이 사나운 용마에게 굴레를 씌워 용마를 길들였다는 전설인데 그래서 절 이름이 신 령한 '신'과 굴레 '륵'자를 써서 신륵사가 된 것이다. 또한 이 절 동쪽의 바위 위에 탑 전체를 벽돌로 쌓아올린 다층전 탑이 있어 벽절이라고도 불리웠다. 나옹선사가 입적한 3개월 후 절의 북쪽 언덕에 진골사리를 봉안한 부도를 세우는 한편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이 절 또한 사세가 크게 위축되었다가 크게 중창된 시기가 광주의 대모산에 있던 세종대왕을 모신 영릉이 인근에 있는 능서면 왕대리로 이전해 오면서부터였다. 세종의 깊었던 불심을 헤아려 왕 천삼백 리 한강 여섯 번 째를 걷는다.원주 흥호리에서 에서 여주 이포나루까지 17

18 실에서는 신륵사를 원찰로 삼았고 절 이름도 잠시 보은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 뒤 이 절은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전락되었다. 그러나 임진, 정유재란 때 전소되면서 그때에 지어진 건축물로는 드물게 대들보가 없는 조사당만 남아 있다가, 현종 12년에 계헌이 중건하면서 오늘날 신륵사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거대한 기둥 두 개가 떠받치고 있는 신륵사 일주문을 들어서서 먼저 강월헌에 올라선다. 본래는 석탑 밑에 붙어 있었 다는데 큰 홍수로 떠내려가는 바람에 철근 콘크리트로 세운 6각 모양의 누각에서 우리 일행은 바위 위에 퍼지고 앉 아 강물이 흐르는 것을 바라본다. 강물은 유유히 흘러서 가고 강월헌에서 바라보면 날렵하게 솟아 있는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226호)이 보이는데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는 국내 유 일의 전탑이다. 탑이 대개 경내 중심부에 있는 것과는 달리 이 전탑은 금당의 본존불과는 무관하게 남한강과 그 건너 드넓은 평야를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탑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신라 말기 무렵이었고 도선국사가 활동하던 시대였 다. 그래서 풍수지리상 허한 곳을 보 補 하고 지기를 원활하게 하는 방법으로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데 설득력이 있다. 전탑 위쪽에 대장각기비가 있다. 신륵사에 있던 대장각의 조성에 따른 사정을 기록한 것으로서 목은 이색 집안의 애 달픈 사연이 어려 있다. 목은의 부친 이곡은 그 부친이 세상을 떠났을 때 명복을 빌기 위해 대장경을 만들려 했으나 미처 이루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하자 목은 이색이 그 소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대장각기비문은 이숭인이 짓고 권주가 해서체로 썼다. 절 마당에 들어서면 구룡루가 있다. 나옹선사가 아홉 마리의 용에게 항복을 받고 그들을 제도하기 위해 지었다는 전 설의 누각인 구룡루를 돌아가면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보전이 있다. 좌측으로 빼꼼 열린 요사채 대문 사이로 세 마리 의 개가 질서도 없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오수를 즐기고 있고 대웅보전 앞 다층석탑 앞에는 절을 찾은 사 람들이 탑을 바라보고 있다. 높이 3미터의 다층석탑(보물 225호)은 특이하게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상층기단의 면석에는 신라나 고려의 석탑 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비룡문과 연화문, 그리고 물결무늬와 구름무늬의 조각들이 빼어난 솜씨를 자랑하며 새겨져 있 다. 이 석탑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성종 3년(1427년) 이후에 조성되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대웅보전 좌측으로 돌아가면 나옹 대사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향나무 앞에 신륵사 조사당(보물 180호)이 서 있다. 대 들보가 없는 팔각지붕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자그마하면서도 예쁜 건물이다. 정면에는 여섯짝의 띠살 창호를 달고 양측면과 후면은 모두 벽체로 마감하였다. 이 조사당은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조선 태조가 무학대사를 추모 하기 위해 지었다는 설이 남아 있다. 조사당 뒤편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나옹선사 석종부도와 부도비, 그리고 석등을 만나게 된다. 언덕 일대가 나 라 안에 유명한 명당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보다 나옹선사를 추모했던 수많은 제자들이 지극한 공력으로 만든 부도라 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영월루를 흐르는 남한강에는 아침 안개가 살포시 내려앉아 있다. 나는 영월루에서 여주 팔경을 회상해 본다. 여주 팔경이나 금사 팔경은 옛날부터 이름났던 이곳의 빼어난 경치 여덟 가지를 이르는 말이다. 이색과 정몽주 그리고 이 곳에서 태어난 이규보와 같은 많은 선비들의 시구에 남아 있는 이곳의 경치는 아직까지 여주 팔경으로 불리고 있기 는 하지만 세상이 바뀌고 또 여주군의 형편이 바뀜으로써 더러 없어졌거나 바뀌기도 했다. 동국여지승람 은 이곳 의 팔경으로 반도낙안 여강 언저리에 내려앉은 기러기, 동대망월 동대인 청심루에서 바라본 달, 연탄귀범 포구로 천삼백 리 한강 여섯 번 째를 걷는다.원주 흥호리에서 에서 여주 이포나루까지 18

19 돌아오는 돛단배, 학동모연 학동의 저녁 연기, 신륵종성 신륵사의 종소리, 마암어화 마암 아래에 떠 있는 고깃배 의 등불, 어릉춘수 두 영릉의 신록, 자수장림 팔대수의 우거진 숲 등을 뽑았다. 또한 이곳 여주, 이천 사람들의 기질을 나타내는 말로 "여주, 이천 사람은 참새에 굴레 씌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곳 사람들이 참새보다도 더 약다는 이야기이다. 이중환이 택리지 에서 "여주에는 사대부의 집이 많아서 대를 이어 산다"고 기록했듯이 이곳에서 인물이 많이 났는데 명성왕후 민비와 민씨 집안의 세력에 도전하여 갑신정변을 일으켰 던 홍영식과 나라를 팔아먹는 사람으로 알려진 이완용의 고향이 이곳 여주였다. 조선초기의 문신 임원준 任 元 濬 이 < 승목기 陞 牧 記 >에 북으로 서울과의 거리는 밤낮 이틀의 노정 路 程 이요, 남으로는 세 도 道 를 통하는 길이 읍 邑 밑에서 나누어진다. 진실로 국가의 상유 上 遊 를 눌렀고, 경기 京 畿 의 깊숙한 구역이 다. 라고 하였던 곳이 이곳 여주였다. 아파트 쇠창살 안에 갇힌 청심루터 여주여자종합고등학교를 지나며 길은 길대로 뻗어 있고 강은 강대로 길게 흐른다. 남한강에는 시베리아로 떠나지 못 하고 남아 텃새가 된 듯한 일곱 마리의 청둥오리들이 유유자적 헤엄을 치고 있고 여주문화의 거리 라고 씌어진 길은 한산하다. 아파트 쇠창살 안으로 옛 시절 청심루가 있었다는 표지석이 보인다. 청심루는 동국여지승람 뿐만이 아니라 택리지 나 연려실기술 과 같은 옛 기록에 거의 다 나오는 이름난 누 각이었다. 고려 때의 가정 이곡, 목은 이색 또는 정몽주, 도은 이승인과 조선조의 서거정, 신용개 등이 시를 지어 현 판에 걸었었다. 대들보가 하나인데 칡으로 되었다 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청심루에 올라서면 여주 팔경을 거의 다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누각은 해방이 되자마자 일어난 폭동 때에 불에 타서 없어졌다. 그 폭동은 제국주의 일본과 그 앞잡이들한테 시달렸던 이곳 사람들이 일으킨 것인데 그때의 여주 군수였던 강진수가 그 앞잡이 노릇을 워낙 지 독하게 했기 때문에 그 앙갚음으로 청심루 곁에 붙어 있던 그의 사택에 불을 지른 것이 청심루에 옮겨붙어 잿더미가 되었던 것이다. 능서면 왕대리에 있는 세종과 효종의 능인 영릉은 한자로는 틀리지만 읽기가 똑같아서 이릉이라고 부른다. 세종대 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인 영릉 英 陵 은 예종 대에 이곳에 옮겨졌는데, 택리지 에 따르면 "여러 능 중에서도 첫째로 꼽았다"고 한다. 또한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영릉 寧 陵 은 원래 양주의 건원릉 서쪽에 있었는데, 헌종 14년(1673년)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이곳 왕대리의 새능 동쪽 남한강에는 이기수, 여계수, 외계수라고 불리는 소가 있다. 이곳의 지형이 평양과 비슷하고 돈이 많으므로 술집과 여자가 모여들어 '소평양'이라고 불렀는데 1900년쯤까지만 해도 고급 요릿집이 즐비하고 술집 기생이 이백여 명이 넘어 고을의 풍기가 몹시 어지러웠다. 여주 목사가 이를 근심하던 끝에 꾀를 내어 모든 기생을 모아 뱃놀이를 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취흥이 무르익자 미리 준비한 대로 배 밑에 구멍을 뚫어서 모든 기생을 죽게 하였다고 한다. 그 뒤부터 비가 오면 여자들의 울음소리가 나고, 해마다 사람이 빠져 죽는 사고가 난다고 한다. 이포나루에서 여정을 풀다 드디어 금사면 이포리에 접어든다. 조선시대에 세곡과 물화를 싣고 풀던 큰 나루였던 이포나루는 배개나루, 배나루, 이포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지금은 간 곳이 없다. 천령현이었던 천령마을을 지나며 다리가 무거워진다. 천삼백 리 한강 여섯 번 째를 걷는다.원주 흥호리에서 에서 여주 이포나루까지 19

20 이포떡방앗간, 이포우체국이라고 씌어진 간판들이 보이고, 기천서원이 있었던 원촌 서쪽에는 천령 최씨의 시조와 그 의 묘소를 잡은 무학대사 그리고 산신당을 모신 삼신당이 있다. 이포대교에 이르러 강물은 쏜살같이 흘러서 가고 길은 서울 양평`-`원주 여주 37번 국도로 나뉜다. 여기 이포대교에 서 마지막 4구간 여정의 막을 내린다. 멀리 양평 너머로 흐르는 남한강을 따라가다 보면 정약용이 태어나고 말년을 보낸 두물머리가 나오고 이제 서울이 멀지 않을 것이다. 천삼백 리 한강 여섯 번 째를 걷는다.원주 흥호리에서 에서 여주 이포나루까지 20

21 고조선의 땅이자 연암 박지원이 걸었던 열하를 가다 :03 고조선의 땅이자 연암 박지원이 걸었던 열하를 가다. 추천 :36 // 몇 년 전, 고조선 영역과 박지원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산해관, 그리고 동이족의 조상인 치우천황의 사당이 남아 있는 탁록현을 답사했습니다. 그 답사 이후 이덕일, 김병기 선생과 함께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를 발간했고, 다시 몇 년이 지나 다시 그곳 으로 갑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현장인 열하와 함께 답사할 고조선의 옛 땅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아래의 글은 책에 실린 기행문의 일부입니다. 천하 제일문인 산해관에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도착한 산해관, 입장료가 만만치 않은 4십원이라고 한다. 그래도 들어가야지 하는데, 전형 적인 중국의 젊은 사람이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나서 아주 싼 값인 10원에 천하제일관 天 下 第 一 關 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밑져야 본전 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골목골목을 따라갔는데 도착하자마자 이렇게 황당할 수가, 산해관 후 문 앞 슈퍼에서 바라보면 산해관 정문을 볼 수가 있는데,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렇게 바라보는 값이 10원이라는 얘기였다. 우리가 난감해 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그 안내원의 얼굴도 겸연쩍음으로 가득 차 있는데, 화를 낼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안내원도 서운하지 않을 금액을 주고 제 값의 입장료를 지불하고서 산해관을 들어갔다. 자욱한 안 개 때문에 산해관 주변의 경관을 제대로는 볼 수 없었지만 산해관 건물에서 바라본 산해관 일대를 바라보며 조선 사 신들이 이곳의 위용에 놀랐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다. 박지원은 이곳 산해관에 도착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서는 중국의 큼을 모를 것이요, 산해관을 보지 못하고는 중국의 제도를 알지 못할 것이요, 관 밖의 장대를 보지 않고는 장수의 위엄을 알기 어려울 것이다. 산해관을 1리쯤 못 미쳐 동향으로 모난 성 하나가 있다. 높이는 여남은 길, 둘레는 수백 보요, 한 편이 모두 칠첩( 七 堞 )으로 되었고, 첩 밑에는 큰 구멍이 뚫려서 사람 수십 명을 감출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구멍이 스물 네 개이고, 성 아래로 역시 구멍 네 개를 뚫어서 병장기를 간직 하고, 그 밑으로 굴을 파서 장성과 서로 통하게 하였다. 역관들은 모두 한( 漢 )이 쌓은 것이라 하나 그릇된 말이다. 혹은 이를 오왕대( 吳 王 臺 ) 라고도 한다. 오삼계( 吳 三 桂 )가 산해관을 지킬 때에 이 굴 속으로 행군하여 갑자기 이 대에 올라 포성을 내니, 관 안에 있던 수만 병이 일시에 고함을 질러서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관 밖의 여러 곳 돈대에 주둔했던 군대도 모두 이에 호응하여 삽시간에 호령이 천리에 퍼졌다. 일행의 여러 사람들과 함께 첩 위에 올라서서 눈을 사방으로 달려보니, 장성은 북으로 뻗고 창해( 滄 海 )는 남에 흐르고, 동으로는 큰 벌판을 다다르고 서 로는 관 속을 엿보게 되었으니, 이 대만큼 조망( 眺 望 )이 좋은 곳은 다시없을 것이다. 관 속 수만 호의 거리와 누대 ( 樓 臺 )가 역력히 마치 손금을 보는 듯 하여 조금도 가리어진 곳이 없고, 바다 위 한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 뾰족하 고조선의 땅이자 연암 박지원이 걸었던 열하를 가다. 21

22 ( 樓 臺 )가 역력히 마치 손금을 보는 듯 하여 조금도 가리어진 곳이 없고, 바다 위 한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 뾰족하 게 솟아 있는 것은 곧 창려현( 昌 黎 縣 ) 문필봉( 文 筆 峯 )이다. 박지원은 산해관의 돈대에 서서 이곳저곳을 바라보다가 내려오려 하였지만 아무도 먼저 내리려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과, 벽돌 쌓은 층계들이 하도 가팔라서 내려다보기만 하여도 다리가 떨려 낭패를 당할 지경까지 이르러 저절로 어 지럼증이 생겼는데, 그 허물은 스스로의 눈에 있었노라고 적었다. 그리고 그 특유의 비유법으로 벼슬살이도 역시 이와 같아서 바야흐로 위로 자꾸만 올라갈 때엔 일계 반급이라도 남에게 뒤떨어질까 보아서 혹은 남을 밀어젖히고 앞을 다투다가 마침내 몸이 높은 곳에 이르매 그제야 두려운 마음이 생기니 외롭고 위태로워서 앞으로는 한 발자국 도 나아갈 길이 없고 뒤로는 천인절벽이어서 다시 올라갈 의욕마저 끊어졌을 뿐더러 내려오려고 해도 잘되지 않는 법이니, 이는 고금이 없이 모두들 그러한 이가 많을 것이다. 라고 결론을 맺은 뒤 산해관을 설명한다.. 산해관은 옛날의 유관( 楡 關 )인데, 왕응린( 王 應 麟 )의 <지리통석( 地 理 通 釋 )>에 우( 虞 )의 하양(하양), 조( 趙 )의 상당 ( 上 堂 ), 위( 魏 )의 안읍( 安 邑 ), 연( 燕 )의 유관, 오( 吳 )의 서릉( 西 陵 ), 촉( 蜀 )의 한락( 漢 樂 )은 모두 그 지세로 보아서도 꼭 응거해야 하고 그 성으로 보더라도 꼭 지켜야 한다. 하였다. 명( 明 )의 홍무( 洪 武 ) 17년에 대장군 서달( 徐 達 )이 유관 을 이곳에 옮겨 다섯 겹의 성을 쌓고 이름을 산해관 이라 하였다. 태행산( 太 行 山 )이 북으로 달음질하여 의무려산 ( 醫 巫 閭 山 )이 되었는데, 순( 舜 )이 열두 산을 봉( 封 )할 때 의무려산을 유주( 幽 州 )의 진산으로 삼았다. 그 산이 중국의 동북을 가로막아 중국과 외국의 경계가 되었으며, 관에 이르러서는 크게 질리어서 평지가 되어 앞으로 요동 벌을 바 라보고, 오른편으로는 창해를 낀 듯하니, 이는 우공( 禹 貢 )의 오른편으로 갈석( 碣 石 )을 끼었다. 는 것이 곧 이를 두 고 일컬음이다. 그리고 장성이 의무려산을 따라 굼틀굼틀 굽이쳐 내려와 각산사( 角 山 寺 )에 이르며, 봉우리마다 돈대 가 있고 평지에 들어와서 관을 둔 것이다. 장성을 따라 다시 15리를 가서 남으로 바다에 들어서 쇠를 녹여 터를 닦 아 성을 쌓고는 그 위에 삼첨( 三 簷 ) 큰 다락을 세워서 망해정( 望 海 亭 ) 이라 하니, 이는 모두 서중산( 徐 中 山 )이 쌓 은 것이다. 이 관의 첫째 관은 옹성( 甕 城 )이어서 다락이 없고, 옹성의 남 북 동을 뚫어서 문을 내고 쇠로 만든 문 위의 홍예( 虹 霓 ) 이마에는 위진화이( 威 振 華 夷 ) 라 새겼고, 둘째 관에는 네 층 적루( 敵 樓 )로 되었는데 흥예 이마에 산해관 이라 새겼고, 셋째 관은 삼첨 높은 다락에다 천하제일관( 天 下 第 一 關 ) 이라는 현판을 붙였다. 삼사( 三 使 )가 모두 문무로 반( 班 )을 나누어 심양에 들어왔을 때와 같이 하다. 세관( 稅 官 )과 수비( 守 備 )들이 관 안의 익랑( 翼 廊 )에 앉아서 사람과 말을 점고하되 전에 봉성의 청단( 淸 單 )에 준한다. 대체 중국의 상인과 길손은 모두 성명 과 사는 곳과 물화( 物 貨 )의 이름과 수량을 등록하여 간사한 놈을 적발하며 거짓을 막음이 매우 엄하다. 수비들은 모 두 만인인데, 붉은 일산과 파초선( 芭 蕉 扇 )을 가지고 앞에 병정 백여 명이 칼을 차고 늘어섰다. 박지원이 그 당시 보았던 세관과 수비들이 사라진 자리를 입장료를 파는 사람들과 입장권을 받는 사람들 그리고 관 광객들의 주변에서 무엇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이 어슬렁거리는 중국인들로 대체되어 있을 뿐이다., 진시황과 조조가 올랐던 갈석산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도시인 창려현의 선태로 仙 台 路 를 따라가자 인공호수인 갈석호가 碣 陽 湖 가 나타나고, 우측 으로 중국에서 보기 드문 공동묘지를 바라보는 사이 갈석산 입구에 도착하였다. 차에서 내리자 천고신악 갈석산 千 古 神 岳 碣 石 山 이라는 표지판이 보이고, 등산로 입구에 기록된 시 한편이 갈석산의 신비를 부추긴다. 神 岳 碣 石 신악이라는 갈석산은 觀 海 勝 地 바다를 바라보는 뛰어난 경승지라 九 帝 登 臨 아홉 명의 황제가 올랐다네 千 古 之 謎 何 解? 천고의 수수께끼를 누가 풀랴? 어디를 보아도 붉은 빛이 감도는 바위산인 갈석산 정상을 바라보자 봉수대 혹은 돈대 모양의 바위가 눈에 띄고 정상 에는 통신대의 송신탑이 있어 접근이 불가능할 것 같다. 천천히 올라가자 수암사 水 岩 寺 라는 절이 나타나고 절 마당에서 바라보는 갈석산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갈석산 고조선의 땅이자 연암 박지원이 걸었던 열하를 가다. 22

23 아래 뾰족하게 솟아오른 봉우리에 잘 지어진 정자 하나, 내가 날아오를 수 있는 새라면 날아가서 앉고 싶지만 바라 보면 정자는 하늘만큼 멀고 마음만 날아 갈 뿐이다. 수암사, 생각보다 정갈하고 아늑하다. 천왕문에 들어서자 건물이 꽉 들어차게 네 분의 사천왕상이 이국적인 풍모를 보이며 앉아 있고, 향로 뒤에 본전 건물 너머 갈석산이 한눈에 들어 온다. 먼저 간 이덕일 선생과 김병기 선생의 그림자라도 남아 있을세라 뒤따라가지만 어느새 갔는지 불러도 대답이 없다. 권태균 기자와 함께 갈석산 오르는 초입에 들어서자 돌로 만든 종 석고가 산속에 홀로 앉아 있다. 어둔 밤에 이 길 을 걸을 때 석고 石 鼓 에서 울리는 낭랑한 종소리 들린다면 얼마나 좋으랴 만 지금은 대낮이고, 그리고 돌로 만든 종 이 어떻게 소리를 내겠는가? 부질없는 생각을 지우고, 천천히 산을 오르면서 <소창청기 小 窓 淸 記 > 중의 한편을 떠올 린다. 아름다운 경치와 유람을 논하는 사람은 반드시 명승지를 탐방하기에 알맞은 신체적 조건을 우선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이렇다. 그 사람의 정취 情 趣 가 아름다운 경치와 한 덩어리가 되어 산을 오르고 물을 건널 때 스스 로 정신이 왕성해짐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잘 달릴 수 있는 건각 健 脚 을 가졌더라도 갑자 기 쉬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산에 오르거나 길을 걷기에 가장 알맞은 체격을 타고 났는지 모른다. 키가 크지도 작지도 않고 몸무게가 많이 나가지도 않으니, 체중 때문에 걸어가면서 느끼는 부담이 적고, 집만 나서면 집을 잊어버리고, 경이 로운 세상에 마음을 홀딱 빼앗겨 헤어나지를 못하니 이 얼마나 산천유람을 위해 타고난 육체이고 자유로운 영혼인 가? 하고 느끼는 적도 있지만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이 힘겹게 보낸 세월을 어느 누가 보상해준단 말인가? 이렇게 척박해서 먼지만 풀풀 날리는 산이고, 그래서 가끔가다 생기를 잃어가는 소나무만 듬성듬성 서 있는 이 산을 오르며 반도의 조그마한 땅에서 신선처럼, 아니 먼지처럼 날아온 나는 이 산의 의미나 역사를 떠올리기보다 아직도 내 살아온 날의 아쉬움을 생각하며 천천히 오르기 시작한다. 길은 갈림길에 이르고 노란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갈라져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나는 두 길을 갈수가 없는, 한 사람의 나그네라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덤불 속으로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보았습 니다. 라고 노래한 로버트 프로스트 의 <가지 않는 길>이 생각난다. 아무래도 위로 가는 길도 자신이 없고, 아랫길도 의심스러워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요란스레 떠들며 한 무리의 중국 인이 산에서 내려왔다. 종이에 정상 頂 上 을 어디로 가는가, 적어 내밀자 위쪽으로 난 길을 손짓해준다. 산을 오르는 마음은 다 같지만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말을 해서 필담을 나누어서야 통하는 이렇게도 어설픈 관계가 어 디 이 산에서 만 있으랴만, 고조선의 땅이자 연암 박지원이 걸었던 열하를 가다. 23

24 우우 소나무 잎 스치는 소리에 오르던 발길을 멈추고 그냥 돌계단에 앉는다. 소나무 잎 사이로 언뜻 보이는 푸른 하 늘이 마치 잘 닦아 빛나는 푸른 구슬과도 같아 보이고, 수암사 너머 올망졸망한 집들을 지나 펼쳐진 갈석호는 한 폭 의 그림을 펼쳐 놓은듯 하다. 다시 산을 오르자 바로 위쪽에서 쉬고 있던 두 사람이 일어나는데, 사십대 후반의 여자는 오이,와 감자등 생필품이 가득 담긴 대 광주리를 짊어지고 삼십대 후반의 건장한 남자는 그 뒤를 따라가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오르고 있 다. 그래서 이 산 정상 어느 부근에서 좌판을 펼치고 팔기 위해 짐을 짊어지고 오르는 아주머니를 마음씨 좋은 젊은 남자가 말동무해주며 오르는 것이겠거니 지레 짐작했는데, 알고 보니 그 남자는 갈석산 정상에서 근무를 하는 사 람이고, 그 여자는 그 남자에게 50원의 돈을 받고 짐을 올려주는 중이었다. 맨 몸으로 걸어 오르기도 힘든 이 바위산 을 겨우 50원을 받고 물건을 져 나르는 것이 가슴이 아픈데 얘기를 나누다보니 어떤 때는 10원에서20원을 받고도 짐 을 운반하기도 한다고 한다. 먹고 살기가 힘든 이곳의 실정에서 그렇게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것도 어쩌면 불교에서 말하는 보시중의 보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나온 창려 일대가 환히 내려다뵈는 지점의 바위벽에 해탈문 解 脫 門 이라고 쓰여 져 있다. 그 해탈문을 힘겹게 올라가는 그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며 이렇게 지속되는 삶은 도대체 무엇이고, 해탈은 무엇이란 말인가? 생각해 본다. 이 문을 넘어서면 번뇌 煩 惱 와 속박 束 縛 에서 벗어나 속세간 俗 世 間 의 근심이 없는 편안한 심경 心 境 에 이르게 될까? 그리하여 미망 迷 妄 에서부터 해방이 되고 이 문을 넘어서면 선정 禪 定 으로 공 空. 무상 無 想. 무원 無 願 의 세 가지를 얻게 되어 마침내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부처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도 아직도 나는 자신이 없다 그래, 마음속에 부처도 있고 마음속에 악마도 있을 것이다. 해탈문을 지나 내려다보자 멀리 바다가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바위벽에는 흡사 개의 형상을 한 호랑이가 그려 져 있으며 머리 부근에는 임금 왕 王 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망해장랑 望 海 長 廊 과 관해정 觀 海 亭 을 지나 팔선대 八 仙 臺 까지 올라가면 일반인은 오를 길이 없다. 갈석산(695m) 정상 은 선태정 仙 台 頂 이라고 하며 지금 나는 갈석산의 팔선대에 서있다. 이 갈석산은 열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서 바다의 경치와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고 갈석산의 10경이 이름 이 있다고 하는데, 마이산이나 비슷하게 암산 巖 山 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나마 현재는 나무들이 많지 않아 옛날의 빼 어난 경치를 즐길 수는 없을 듯싶다. 산에 오르는 것이 이상한 것이라서 힘겹게 올라온 산이지만 막상 올라서서 바 라보면 오르면서 느낀 고단함이나 견디어낸 시간들이 까마득하게 잊혀지고 만다. 바람 부는 정상에서 아래를 굽어보 면 개미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생애가 가여워지고, 성냥갑처럼 자그마하게 보이는 세상자체도 불현듯 우스워진다. 문 고조선의 땅이자 연암 박지원이 걸었던 열하를 가다. 24

25 득 외롭다 는 생각과 함께 아득하게 보이는 마을과 사람들과, 나 자신마저도 어쩌면 그렇게 한없이 작아지고 안 타까운지, 멀리 용솟음치며 달려 올 듯 한 바다와 드넓게 펼쳐진 들녘을 내려다보고 있자, <지비록 知 非 錄 >의 한 구절이 생각났 다. 일찍이 높은 산에 올라 성시 城 市 를 내려다보았다. 성이 개미집처럼 보이니, 모르겠지만 거기에 있는 사람은 얼마 나 되겠는가? 높은 데에서 내려다보니 세상사는 것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이 산이 성의 높이보다 과연 얼마나 더 높겠는가, 그런데도 이렇게 보이는데 진정으로 진짜 신선이 하늘 위에서 인간 세상을 내려다본다면, 사람 사는 집이 마치 개미집같이 보이고 사람 역시 개미나 별반 달리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와 비슷한 말을 했던 사람이 독일의 철학자인 니체였는데,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제 2부 독 서와 저술 에서 산에 올라 느낀 심정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그대들은 높은 곳을 갈망할 때 위를 쳐다본다. 그러나 나는 높은 곳에 있으므로 아래를 굽어본다. 그대들 가운데 웃으며 높이 오를 자가 누구인가? 가장 높은 산에 오른 자는 온갖 비극과 비참한 현실을 비웃는다. 이런 저런 생각 끝에 이 갈석산과 이 산에 올랐던 사람들의 면면을 생각해보니, 이 산의 위상이 얼마나 높고 위대한 것인지를 알 것도 같다. <고문관지 古 文 觀 止 >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높다고 해서 다 산이 아니니, 신선이 있어야 이름이 날 수 있고, 깊다고 해서 다 물이 아니니, 용이 있어야 영험해질 수 있는 것이다. ( 山 不 在 高 有 仙 則 名. 水 不 在 深. 有 龍 則 靈 ) 영험한 산이라고 여겨서 그랬을까? 조선시대에 이곳에 왔던 서거정은 갈석청조 碣 石 晴 照 라는 시를 남겼다. 해문은 예로부터 풍랑이 거세게 치는데 한 줄기 황하수가 끝없이 콸콸 흐르누나. 나는 당장 갈석산을 부여잡고 올라가서 술잔보다 작아 뵈는 바다를 굽어보고 싶네. 海 門 從 古 浪 奔 雷 一 帶 黃 河 衰 衰 來 我 欲 琴 綠 登 碣 石 俯 看 溟 勃 小 於 杯 그래 저렇게 멀리에 바다가 있어 바다가 보이는 산이고, 뒤에 조성되었지만 갈석호가 저렇게 푸르고 푸르니 저 바다 나 호수에 용이 살지 않는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오기원전 215년에 동쪽을 순행 巡 行 했던 진시황이 올 라 갈석문 碣 石 門 이라 새기고 그의 이세 황제인 호해 胡 亥 가 올랐고, 뒷날에 서한 西 漢 의 무제 武 帝. 당 태종( 唐 太 宗 ), 고조선의 땅이자 연암 박지원이 걸었던 열하를 가다. 25

26 북위 문선제( 北 魏 文 宣 帝 )등 일곱명의 황제가 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갈석산에는 당나라 때의 빼어난 문장가인 한유 韓 兪 을 제사 지내는 한문공사 韓 文 公 祠 라는 사당이 있는데, 그런 연유 탓인지 갈석산 아래 자리 잡은 도시 창려 昌 黎 는 한유의 호 號 이다. 그리고 동한 東 漢 말기를 살았던 그 불세출의 영웅 조조 曺 操 는 요서 遼 西 의 오환족 烏 桓 族 을 치고 개선하여 돌아가던 길에 이 산에 올라 <관창해 觀 滄 海 步 出 夏 門 行 >라는 시를 남겼다. 동으로 갈석에 이르러 푸른 바다를 바라보노라. 바다는 어이 이리도 출렁이고 섬은 우뚝 솟았는가. 수목은 울창하고 백초 百 草 는 무성하네. 가을 바람 소슬한데 큰 파도가 솟구치는구나. 일월 日 月 의 운행은 이 바다에서 솟고 은하수의 찬란함은 이 바다에서 떠오르네. 그 얼마나 다행한가, 노래 불러 뜻을 읊노라. 東 臨 碣 石 以 觀 滄 海 水 何 澹 澹 山 鳥 竦 峙 樹 木 叢 生 百 草 豊 茂 秋 風 蕭 瑟 洪 波 通 起 日 月 之 行 若 出 其 中 星 漢 燦 爛 幸 甚 至 哉 歌 以 咏 志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1950년 가을 이곳을 찾았던 혁명가 모택동은 <낭도사 浪 淘 沙 >라는 시 한편을 지었으며 북대 하의 응각정 앞에 새겨져 있다. 연 燕 나라 땅엔 큰 비가 쏟아지고 흰 파도는 하늘까지 넘실거리네. 진황도 바깥 고깃배는 아득한 바다에 보이지 않네. 어디로 갔는지 아는가. 천년도 지난 아득한 옛일 위무제 魏 武 帝 는 채찍을 휘둘러 동으로 갈석에 와서 시를 남겼는데, 소슬한 가을바람은 그때나 다름없지만 사람은 바뀌었으니. 大 雨 落 幽 燕 自 浪 天 秦 皇 島 外 打 魚 船 一 片 汪 洋 都 不 見 知 向 護 邊 往 事 越 天 年 魏 武 揮 鞭 東 臨 喝 石 有 遺 篇 蕭 瑟 秋 風 今 又 是 換 了 人 間 역사의 기록들에는 이곳 갈석산이 진나라의 국경이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기 史 記 > <진시황본기 秦 始 皇 本 紀 >에는 이곳 갈석산에 관한 글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조선의 땅이자 연암 박지원이 걸었던 열하를 가다. 26

27 진제국 秦 帝 國 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대해 大 海 와 조선 朝 鮮 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임조 臨 와 강중 羌 中 에 이르렀 으며,, 남쪽으로는 북향호 北 響 戶 에 이르렀고, 북쪽은 황하 黃 河 를 근거지로 하여 요새 要 塞 를 만들어 음산 陰 山 과 나란 히 요동 遼 東 에 이르렀다. 32년, 진시황이 갈석산에 가서 연나라 사람 노생 盧 生 을 시켜 신선들이 지은 선문 羨 門 과 고서 高 誓 를 찾도록 보내면서 이곳 갈석산에서 전송한 뒤에 갈석산의 석문에 비문을 새겼다. 진시황은 그 비문에다 그가 황제에 오른 뒤에 천하 天 下 가 태평 太 平 해졌다고 쓴 뒤에 한종 韓 終. 후공 侯 公. 석생 石 生 을 시켜 영원히 죽지 않고 살게 하는 신선의 약을 구하도록 하였다고 하는데, 사마천은 요동을 갈석산 지역으로 보 았다. 진시황이 죽고 난 뒤 진시황의 아들인 이세 황제가 이곳 갈석산 일대를 순행하였으며, 그 때의 상황이 <사기> 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진제국 秦 帝 國 2세 二 世 황제가 조고 趙 高 와 더불어 의논하기를 짐 朕 이 나이가 어려 처음 즉위 했을 때는 백성들이 짐 을 따르지 않았다. 선제(진의 진시황)께서는 군현 郡 縣 을 순행 巡 行 함으로써 진제국의 강함을 나타내셨고, 해내 海 內 를 위엄으로 복종시켰다. 지금의 짐은 안일하여 순행을 하지 않으니, 그것은 바로 짐이 약한 것으로 보여 신하로 따 르는 사람이 없는 천하가 되었다. 고 하였다. 봄에 2세 황제는 군현을 순행하였는데, 이사 李 斯 가 따랐다. 갈석산 碣 石 山 에 이르러 그곳으로부터 바다를 따라 남쪽 으로 회계산 會 稽 山 에 이르렀다. 그때 시황제 始 皇 帝 가 세었던 비석 碑 石 에 글씨를 새겼는데, 비석의 한쪽에 대신으로 서 따라간 사람의 이름을 새김으로서 시황제의 성공 成 功 과 성덕 盛 德 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순행이 끝난 후에 황제는 말하기를 금석각 金 石 刻 은 모두 시황제께서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짐은 시황제께 서 사용하셨던 칭호를 물려받고 있으면서도 금석각사 金 石 刻 辭 에 시황제를 칭송하지 않았으니 후사 後 嗣 가 영원무궁 하게 계승해야 할 그 성공과 성덕을 칭송하지 않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 승상 丞 相 이사와 거질 去 疾, 어사대부 御 史 大 夫 덕 德 은 잘못되었음을 빌고 말하기를 신 臣 등이 청하옵건대 조서 詔 書 를 자세하게 각석에 새겨 황제의 뜻을 명 백하게 하겠습니다. 신 등은 죽음을 무릅쓰고 그렇게 해주시기를 청하옵니다. 라고 하였다. 황제는 그렇게 하도록 승낙하였다. 신하들은 마침내 요동 遼 東 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위의 글을 보면 진시황제의 2세가 동부지역을 순행 하는데, 당시 황제를 수행했던 신하들이 진시황이 갈석산에 세워 놓은 비석에 그들의 이름만을 새긴 것을 알고서 나무라자 신하들이 다시 가서 진시황제의 송덕비를 세웠다는 것이 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곳 갈석산이 진제국의 국경이었으며 갈석산은 요동 땅이었고, <한서 漢 書 >의 < 武 帝 記 >에 는 서한 西 漢 무제가 태산 泰 山 으로부터 다시 동쪽의 바닷가를 따라 순행하여 갈석에 이르렀다. 그리고 요서 遼 西 에 서부터 순행하여 북쪽 변경의 구원 九 原 에 이르렀고, 5월에 돌아가 감천궁 甘 泉 宮 에 도착했다. 라고 써 있는데 요서 군 遼 西 郡 이 서부 유역에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글이다. 고조선의 땅이자 연암 박지원이 걸었던 열하를 가다. 27

28 추적추적 장맛비가 내리는 밤, 다시 그날의 추억에 잠기다 보면 꿈속에서라도 산해관에서 갈석산으로 가는 버스에 탈 수 있을까? 계사년 칠월 초나흘 밤 고조선의 땅이자 연암 박지원이 걸었던 열하를 가다. 28

29 고조선의 땅, 갈석산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현장을 답사합니다 :01 고조선의 땅, 갈석산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현장을 답사합니다. 추석 연휴에 고조선의 옛 땅이자, 진시황을 비롯한 중국 천자 여덟 명이 올랐던 갈석산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현장을 답사합니다. 산해관, 열하, 북경 일대를 돌아보며,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되짚어보는 시간을 마련할 것입니다. 고조선의 땅, 갈석산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현장을 답사합니다. 29

30 고조선의 땅, 갈석산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현장을 답사합니다. 30

31 고조선의 땅, 갈석산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현장을 답사합니다. 31

32 고조선의 땅, 갈석산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현장을 답사합니다. 32

33 고조선의 땅, 갈석산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현장을 답사합니다. 33

34 고조선의 땅, 갈석산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현장을 답사합니다. 34

35 고조선의 땅, 갈석산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현장을 답사합니다.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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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고조선의 땅, 갈석산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현장을 답사합니다. 37

38 TEL: FAX: 주소: 서울시 중구다동131번지 삼덕빌딩208 고조선의 땅, 갈석산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현장을 답사합니다. 38

39 한 여름에 내외 선유동을 따라 걷는다 :58 한 여름에 내외 선유동을 따라 걷는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 선생이 금강산 이남의 산수 중 가장 빼어난 경치를 두고 문경과 괴산 일대에 펼쳐진 내와 선 유동과 화양동 계곡을 들었습니다. 문경시 가은읍의 가은 선유동의 아홉 경치와 대야산 자락의 용추, 그리고 괴산군 송면의 괴산 선유동의 아홉경치와 송시열 선생의 자취가 남아 있는 화양동 구곡이 바로 그곳입니다. 그 내외선유동을 따라 걷는 여정이 7월 21일(일요일>일에 실시됩니다. 어딜 보나 감탄이 절로 나오는 경관도 경관이지만 푸르고 맑게 흐르는 계곡의 냇물이 아름다운 곳이 바로 내외선유 동입니다. 그 계곡을 걸으며 한 여름의 하루를 보내실 분은 참여 바랍니다. 이번 여정은 강가를 거닐게 될 것이므로 오래된 트레킹화(물에 젖어도 될 신발)을 준비하면 훨씬 마음과 몸이 편안한 기행이 될 것입니다. "가은 선유동과 용추 계곡은 바라만 보아도 서늘해지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다. "칠성대 서쪽으로 백두대간을 넘으면 충북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에 있는 외선유동이다. 이곳 송면리는 조선 선조 때 붕당이 생길 것을 예언했던 동고 이준경이 장차 일어날 임진왜란을 대비하여 자손들의 피난처로 정했다고 한다. 선유 동 입구에는 바위절벽에 선유동문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바위에는 천연적으로 문이 뚫려 있고 선유구곡이 펼쳐져 있다.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 화양동구곡에서 동쪽으로 14킬로미터 지점 화양천 상류에 있는 선유동구곡은 옛 신라의 고운 최치원이 이곳을 소요하면서 선유동이라는 명칭을 남긴 데서 유래된 곳으로 그 이후 퇴계 이황이 칠송정에 있는 함 평 이씨 댁을 찾아왔다가 이곳의 비경에 사로잡혀 아홉 달을 돌아다닌 뒤 아홉 개의 이름을 지어 글씨를 새겼다고 한다. 주자학을 창시한 주희( 朱 熹 )는 성리학을 탐구하기에는 굽이굽이 돌아가는 계곡이 이상적인 장소라고 보았다. 그 는 그러한 형세를 갖춘 계곡을 중국 남부에서 발견한 뒤 무이구곡( 武 夷 九 曲 ) 이라고 이름을 지은 뒤 1곡에서 9곡 에 이르는 물의 구비마다 그 모양새에 합당한 이름을 붙인 뒤 성리학의 경지에 비유했다. 일반적으로 문경의 소금강이라 부르는 선유동구곡은 30미터 높이의 커다란 바위에 구멍이 뚫려 있는 선유동문 이 라는 글씨가 음각된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기암절벽으로 절경을 이룬 경천벽, 옛날에 암벽 위에 청학이 살았다는 학 소대, 계류변에 있는 바위 위 중앙이 절구통같이 생겼다는 연단로, 와룡이 물을 머금었다 내뿜는 듯이 급류를 형성하 여 폭포를 이룬 와룡폭, 방석같이 커다란 모양의 난가대, 바둑판의 형상을 한 커다란 암반인 기국암, 거북같이 생긴 한 여름에 내외 선유동을 따라 걷는다. 39

40 구암, 두 바위가 나란히 서 있고 뒤에는 큰 바위가 가로 놓여 그 사이에 석굴이 있는 은선암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위의 수석층암과 노송이 어우러져 세속과는 거리가 먼 이상향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데 그중 난가대와 기국암 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서려 있다. 조선 명종 때의 일이다. 한 나무꾼이 도끼를 가지고 나무를 하러 갔다가 바위에서 바둑을 두는 노인들을 발견하고 가 까이 가서 구경을 했다. 그러자 한 노인이 여기는 신선들이 사는 선경이니 돌아가시오. 했다. 그 말에 정신을 차 리고 옆에 세워둔 도끼를 찾았는데 도끼자루는 이미 썩어 없어진 뒤였다. 터덜터덜 집에 돌아오니 낯 모르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누구인가 물었더니 그의 5대 후손이었다. 그곳에 간 날을 헤아려보니 그가 바둑 구경을 한 세월이 어느 사이에 150년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도끼 자루가 썩은 곳을 난가대 라고 불렀고, 노인들이 바둑을 두던 곳 을 기국암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송시열과 화양구곡 선유동에서 송면리를 지나 화양천을 따라 내려가면 화양구곡에 이른다. 택리지 에는 화양동계곡에 대한 기록이 다 음과 같이 실려 있다. 화양동 華 陽 洞 (충북 괴산군 청천면)은 파곶 葩 串 아래에 있는데, 파곶 물이 이곳에 와서 더욱 커지고 돌도 또한 더욱 기이한 것이 많다. 우암 송시열 宋 時 烈 이 주자의 운곡정사 雲 谷 精 舍 를 모방하여 여기에 집을 지었다. 또 주자 朱 子 가 대 의를 회복 恢 復 하던 옛일을 모방하여, 고을(동중 洞 中 )에서 명나라 명종 明 宗 과 신종황제를 제사지내다가 후일에 사당을 세운 뒤 만동묘 萬 東 廟 라 하였다. 일찍이 송시열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푸른 물의 야단스러움이 성난 듯 하고, 푸른 산의 말없음은 찡그리고 있는 것 같다. 1975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화양동계곡은 원래 청주군( 淸 州 郡 ) 청천면의 지역으로서, 황양목( 黃 楊 木 :희양목)이 많으 므로 황양동( 黃 楊 洞 )이라 불렸다. 그러나 효종( 孝 宗 ) 때의 정치가인 우암( 尤 庵 ) 송시열( 宋 時 烈 )이 이곳으로 내려와 살 면서 화양동( 華 陽 洞 )으로 고쳐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현천리( 玄 川 里 )를 병합하여 화양리라 해서 괴산군 청천면에 편입되었다. 화양구곡과 만동묘 그리고 화양동서원이 있는 이곳 화양동계곡은 사시사철 사람들의 발길이 끊 이지 않는 곳이다. 우암 송시열은 벼슬에서 물러난 후 이 골짜기에 들어앉아 글을 읽으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자신을 주자에 비유했던 송시열은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떠서 화양동계곡의 볼 만한 곳 아홉 군데에 이름을 붙이고 화양구곡이라 했다. 입구에 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1곡부터 9곡이 펼쳐진다. 화양천 건너편에 높이 치솟은 바위벽으로 큰 바위가 공중에 높이 솟아 마치 하늘을 떠받친 듯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 이다. 경천벽 아래쪽에 화양동문( 華 陽 洞 門 ) 이라 쓴 송시열의 글씨가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다. 다리를 넘어서면 화양구곡 중의 제2곡인 운영담( 雲 影 潭 )이다. 계곡에서 빠르게 내려온 맑은 물이 잠시 고여 숨을 가 다듬은 뒤 내려간다는 이곳 운영담의 바위 위에는 주자( 朱 子 )의 시인 천광운영공배회( 天 光 雲 影 共 徘 徊 ) 의 뜻을 따 서 운영담 이라는 글씨 석 자가 새겨져 있다. 제3곡인 읍궁암( 泣 弓 岩 )은 계곡을 향해 퍼져 누운 너부죽한 바위인데 그 바위 위에서 송시열은 돌아간 효종임금을 기 리며 매일 새벽과 효종의 제삿날인 5월 4일에 엎드려 곡을 했다고 한다. 순임금이 죽은 후 신하가 칼과 활을 잡고 울었다. 는 고사에서 유래했다는 읍궁암을 지나면 하마비를 만나게 된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이곳을 지나는 길에 한 여름에 내외 선유동을 따라 걷는다. 40

41 말에서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패대기질을 당했다는 하마비 우측에 그 이름 높았던 화양동서원과 만동묘가 있다. 화양동서원( 華 陽 洞 書 院 )은 1695년(숙종21)에 이곳에 머물며 후진을 양성했던 송시열을 제향하기 위하여 그의 문인인 권상하, 정호 등의 노론계 관료와 유생들이 힘을 합쳐 세웠다. 온 나라에 걸쳐 44개 소에 이르는 송시열 제향의 서원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서원이 된 화양동 서원은 건립 당시 소론 측의 반대를 받아 중단될 뻔하기도 했다. 노론 측의 강력한 요구와 임금의 특별배려로 설립된 이 서원은 1696년 대사성 이여가 사액( 賜 額 :임금이 사당이나 서원 등에 이 름을 지어 그것을 새긴 편액( 扁 額 )을 내리던 일)의 필요성을 역설한 뒤 사액을 받았고 영조 때에 송시열이 문묘에 배 향되자 이 서원의 위세는 날로 더하면서 국가의 물질적 지원은 물론이고 유생들이 땅을 기증하여 강원도를 비롯한 삼남 일대에 토지가 산재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 서원은 민폐를 끼치는 온상으로 변해갔다. 제수전 징수를 빙자하여 각 고을에 보내는 이른바 화양묵패 ( 華 陽 墨 牌 )를 발행하여 때로는 관령( 官 令 )을 능가할 정도였다. 서원의 제수 비용이 필요하니 어느 날까지 얼마를 봉 납하라. 는 명령을 거부하는 수령들에 대해서는 통문을 보내어 축출을 했고 복주호( 福 酒 戶 )와 복주촌( 福 酒 村 )을 운영 하며 양민들에게 피역( 避 役 )을 시켰다. 또 그 대가로 돈을 거두어들이며 이를 잘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사형을 시키 기도 했다. 이러한 폐습이 심화되자 1858년 영의정 김좌근이 복주촌 폐지를 요청했고 1871년에는 노론사림들의 반대 에도 불구하고 서원이 철폐되었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우리 산하 에서 한 여름에 내외 선유동을 따라 걷는다. 41

42 계사년 시월에 걷는 제주도의 제주 올레 :55 계사년 시월에 걷는 제주도의 제주 올레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에서 계사년(2013) 10월 3일(목)에서 6일(일요일까지)에 제주를 갑니다.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10 월에 제주도와 제주 올레를 답사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제주로 가는 교통편(비행기, 배)은 각자 알사서 구입하시기 바립니다. 황금연휴기 때문에. 미리 미리 구입하십시오. 제주의 억새가 하얗게 나풀거리고, 노란 감귤이 올래(올레) 길과 돌담을 수놓는 계절에 제주의 길과 제주의 역사를 만날 분들은 미리 신청하십시오. 북쪽으로 큰 바다를 베개 베고 남쪽으로 높은 산에 대하고 한라산 북쪽은 제주읍이다. 이곳은 옛 탐라국으로 신라 때 부속국이 되었다. 원나라에서 방성에 해당하는 지역이라 하여 말과 소를 놓아 먹여서 목장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지금도 좋은 말이 생산된다. 제주읍 동쪽과 서쪽에 있는 정의 旌 義 대정 大 靜 두 고을은 풍속이 제주와 대략 비슷하다. 목사와 두 고을 수령이 예 부터 본토에서 왕래하였으나 풍파에 표류하거나 빠져 죽은 일이 없고, 또 조정에 벼슬하던 사람이 여기에 많이 귀양 왔으나 역시 풍파에 떠밀리거나 빠진 일이 없었다. 이것은 왕의 덕화 德 化 가 멀리 미쳐서 온갖 신이 받들어 순응하였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중환 李 重 煥 의 <택리지 擇 里 志 > 산수 山 水 편에 실린 제주도에 관한 글이다. 한 시절 전만 해도 제주도 사람들은 육지의 가장 북쪽에 자리 잡은 백두산을 한 본 보기를 소원했다. 그와 반대로 육지 사람들은 아열대 식물이 자라는 한반도의 남쪽 바다 건너에 있는 제주도를 보고자 했다. 지금은 서울에서 한 시간 남짓이면 올 수도 있고 돌아갈 수 도 있는 제주도를 두고 사람들은 여러 이름으로 부르며 그리워한다. 낙원의 섬, 하늘의 축복을 받은 섬 휴양지, 누구나 가보고 싶고, 살아보고 싶은 그리움의 섬 이 제주도 라고, 그러나 역사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보면 눈물과 한숨이 없이는 가까이 할 수 없는 한 많은 땅이 제주도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기쁨은 모래알처럼 작았고, 시련은 바위처럼 컸다 라는 말로 제주도를 비유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아무리 제주도와 관계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제주도 바다의 역사를 다 읽었다면 그 역사를 제주 의 눈물, 눈물, 눈물 이라고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제주 해협의 바다는 곧 제주 사람들이 역사에 바 친 눈물의 양으로 출렁거린다. 고 말하기도 했다. 계사년 시월에 걷는 제주도의 제주 올레 42

43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제주가 고향인 고득종 高 得 宗 은 제주의 형승을 <홍화각기 弘 化 閣 記 >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북쪽으로 큰 바다를 베개 베고 남쪽으로 높은 산에 대하였다. 집집마다 귤과 유자요 곳곳마다 준마로다. 제주는 멀리 남해 가운데에 있으며, 큰 산이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이 솟아 있기 때문에 한라 漢 拏 라고 부른다. 한라산 은 은하수를 붙잡을 수 있다 하여 붙여졌다. 다른 이름으로는 원산 圓 山 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생김새가 활 모양으로 굽어져서 둥글기 때문이다. 제주는 조선 태종 16년인 1416년에 세 고을로 나누어졌다. 동쪽을 정의라 하고 서쪽을 대정이라고 하여 나누어 다스 렸다. 옛날에는 동영주. 탁라. 또는 탐라라고도 불렀으며, 시대에 따라 바꿔 부른 것이 사적에 기록되어 있다. 정이오 鄭 以 吾 는 그의 서 序 에서 본토에서 탐라를 바라보면 큰 바다 아득하고 먼 가운데에 따로 한 구역이 되어 부 속국과 같다. 고 하였다. 고려 의종 13년에 제주도의 안무사 按 撫 使 로 근무했던 조동희 趙 冬 曦 는 조정에 들어가서, 탐라는 험하고 치고 사우는 것이 미치지 못하는 곳입니다. 라고 하였다. <동문감 東 文 鑑 >에 남해 가운데에 있어 물길로 무려 백리나 되고 그 가운데가 대단히 넓다. 고 하였던 곳이 바로 제주도였다. 우리나라의 가장 먼 곳의 행정구역 제주 한반도의 최남단, 즉 바다 건너 가장 먼 지역에 있는 제주도는 우도를 비롯 상추자도와 하추자도 그리고 가파도를 포 함한 50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사람이 살고 있는 섬은 우도를 포함하여 몇 개 뿐이다. 제주시 추자면 대서리가 제주도의 가장 북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도가 최남단이다. 제주시 한 경면 고산리 차귀도가 가장 서쪽이고, 동쪽은 제주시 우도면 연평리가 가장 동쪽이다. 목포에서 141.6km 떨어져 있으며, 부산에서는 286.5km 떨어져 있고,일본의 대마도에서는 255.1km쯤 떨어져 있다. 제주도는 현재 제주특별자치도 濟 州 特 別 自 治 道, Jeju Special Self-Governing Province로 관리되고 있고,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포함하여 2시. 7읍 5면 31동으로 되어 있으며, 총 면적은 km2이다. 주호인이 살았던 제주도 어느 곳에서건 멀리 보이는 수평선과 그 아래로 시원스럽게 펼쳐진 바다를 볼 수 있고 한라산을 볼 수 있는 곳이 제 주도인데, 이곳 제주도에는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을까? 가장 앞 선 기록이 <삼국사기>중 백제 본기 중 서기 476년 4월의 일이다. 탐라국이 특산물을 바쳤으므로 임금이 기뻐하며 그 사자에게 은솔 恩 率 이라는 벼슬을 주었다. <삼국지>와 <위지>그리고 <후한서>와 <동이전>등의 고문들에는 제주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주호족 이라고 실려 있다. 육조 시대에 범엽이 지은 <후한서>에 실려 있는 내용을 보자. 마한 馬 韓 서해의 큰 섬에 주호족이 있는데, 그 인종은 몸집이 작고 언어는 한족과 같지 않으며 머리를 짧게 깎아 선비족과 비슷하다. 그들은 가죽옷을 입고 있는데, 윗도리만 걸치고 아랫도리는 입지 않고, 소와 돼지를 잘 기르며, 계사년 시월에 걷는 제주도의 제주 올레 43

44 배를 타고 한나라와 왕래하며 교역한다. 그런 주호족을 두고 일부에서는 도서 족 계통, 즉 일본의 원주민이이었던 고루보그족이나 아이누족으로 보기도 한다. 그들은 일본 열도 전역에서 살았던 종족으로 체구는 작고 옷도 상의만 입었고 하의는 입지 않고 생활했으며 사냥과 고기잡이를 주업 主 業 으로 삼았던 종족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제주도에 터를 잡고 살았던 제주도 사람들은 1세기쯤에 있었던 한라산의 화산폭발로 멸망하고 말았다. 그들이 살았던 제주도는 제주 신화의 주인공인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가 등장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제주의 신화가 시작되다. 원래 탐라국( 耽 羅 國 ) 또는 탁라( 羅 )라고 불렸던 제주도에 전해 내려오는 신화에 따르면, 제주의 역사는 고을나 高 乙 那 양을나 良 乙 那 부을나 夫 乙 那 라는 세 을나( 乙 那 )에 의하여 시작된다. 제주의 시조가 되는 세 을나가 독특하게도 제주 1동에 자리 잡은 삼성혈( 三 姓 穴 )의 모흥혈 毛 興 穴 이라고 부르는 세 구멍에서 솟아났다고 한다. 가야나 신라 고 조선 부여 등의 다른 나라 시조들이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알에서 태어난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시조가 한 사 람도 아니고 셋인 점도 다르다. 당초 세 사람은 바로 신인이었는데 서로 짝 지어 해 뜨는 동쪽에 와서 살았네. 오래도록 세 성씨만 서로 혼인을 한다더니 듣건대 그 남아 전하는 풍습 주진 朱 陳 과 비슷하구나. 조선 초기의 문장가인 점필재 김종직의 시이다. 그런 연유로 의병장 고종후 高 從 厚 가 의병을 모집하면서 세 성씨가 모두 같은 후손임을 언급한 글이 유성룡이 지은 < 난중잡록>에 실려 있다. 제주. 정의. 대정. 3 고을. 고성. 양성. 부성. 43가문호의 모든 어른들에게 고하나이다. 옛적 태고 때에 인물이 생기 던 시초에 하늘이 3신을 한라산 밑에 내려 보내시니, 고씨. 양씨. 부씨라. 또 아름다운 여인과 망아지. 송아지의 종자 를 함께 주어 한 지방에 터를 여는 조상이 되어 이제에 이르러 인구의 번성함과 말( 馬 )을 길러냄이 대개 3 신인의 덕 택이 아닌가 하옵니다. 그 후세에 자손이 혹은 바다에 떠서 이리저리 여러 곳에 흩어져 사니, 세상에서 이른바 제주 고씨, 제주 양씨는 모두 그 후손입니다. 삼성혈에서 솟아난 세 을나는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고 나물을 캐서 먹으며 이동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배를 타고 온 벽랑국( 碧 浪 國 )의 세 공주를 각자의 배필로 맞아들였으며, 그들이 가져온 오곡종자와 송아지 망아지 등 육 축으로 농경생활을 했다다. 성산읍 온평리에 있는 혼인지( 婚 姻 池 )는 세 을나가 벽랑국의 공주들과 혼례를 올린 곳으 로 알려져 있다. 계사년 시월에 걷는 제주도의 제주 올레 44

45 농업과 목축업을 시작한 뒤 점차 제 몫의 땅이 필요해진 세 을나는 각자 자기가 살아갈 터전을 결정하는 데 화살을 이용했다. 활을 쏘아 화살이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이다. 세 을나가 쏜 화살은 각각 일도 이도 삼도에 떨어졌 고, 일도 이도 삼도동이 여기서 유래하였다. 세 을나가 활을 쏘았던 장소가 바로 제주시 봉개동과 아라동에 걸쳐 있는 제주도 말로 쌀손장오리( 射 矢 長 兀 岳 사시장올악)라고 하며, 세 을나가 쏜 화살이 박힌 돌을 모아둔 곳이 제주시 화북동에 있는 삼사석( 三 射 石 )이라 한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제주 시조의 탄생 이후 바다를 통하여 발달된 외래문 화가 유입되었고 비로소 제주도에서 농사를 짓게 되었음을 알려준다. 그 때까지가 제주도의 신화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제주가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때는 삼국시대부터이다. 삼국사기 의 기록을 보자. 백제 문주왕 2년(476)에 탐 라국이 백제에 토산물을 바치자 벼슬을 주었고, 동성왕 20년(498)에는 탐라가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왕이 친히 정벌 하기 위해 지금의 광주에까지 이르자 탐라국의 왕이 그 소식을 듣고 사죄하였으며, 백제가 멸망한 이후 신라 문무왕 2년에 탐라국의 왕이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독립국이었던 탐라국이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 신라의 속국이 된 탐라국 탐라 耽 羅 로 표기 된 제주가 <당회요 唐 會 要 > 권 100 탐라국 耽 羅 國 에 다시 등장한다. 탐라는 신라의 무주 바다 위에 있다. 섬에는 산이 있고, 주위는 모두 바다에 접하였다. 북쪽 백제와 배를 타고 5일 에 갈 만한 거리이다. 그 나라 왕의 성은 유리이고, 이름은 도라인데, 성황은 없고, 다섯 마을로 나뉘어 있다. 그들의 집은 동굴에 돌담을 둘러서 풀로 덮혔다. 호구는 8천 가량 된다. 활과 칼 및 방패와 창이 있으나 무기는 없고, 오직 귀신을 섬긴다. 항상 백제의 지배아래 있었고, 용삭 원년(661년) 8월에 조공 사신들이 당나라에 이르렀다. 고 실려 있다. 그 뒤로 별 다른 기록이 전해지지 않다가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숙종 10년에는 탐라군으로 바뀌었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제주도) 중에서 10월 3(목요일)일 오전 8시 관덕정 앞 집결, 제주 관아 답사, 오후 제주 올레 19코스를 걷고 11월 9일(금요일) 신평곶자왈에서 무릉곶자왈코스를 걸을 예정입니다. 11월 10일(토요일)은 날이 맑으면 한라산을 오르고 그렇지 않으면 사려니 숲길을 길게 걷거나 한라산 부근을 걸을 예 정입니다. 11월 11일(일요일)은 아름다운 제주 올레 중 서쪽 서귀포에서 모슬포, 그리고 한림일대와 역사유적을 돌아보고 해산 할 예정입니다. 비행기나 배편은 각자가 예약하여 제주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회원 분들이 좋은 곳 추천해주시면 일정에 반영하겠습니다 계사년 시월에 걷는 제주도의 제주 올레 45

46 서해의 절경 흑산도와 홍도를 가다 :52 서해의 절경 흑산도와 홍도를 가다. (사)우리 땅 걷기에서 2013년 섬기행의 일환으로 홍도와 흑산도를 갑니다.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으로 알려져 있는 홍도와 다산 정약용의 형님인 정약전과 면암 최익현의 유배지로 그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흑산도를 갑니다. 7월 마지막 주 금요일에 출발하여 일요일까지 이어질 이번 기행은 선착순 45명입니다. 목포 앞바다의 섬들로 이루어진 군이 신안군이다. 신안군이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은 1969년이었다. 그 이전에는 지도 군이었으며, 1914년에는 무안군에 소속되었다가 1969년에 신안군이라는 이름으로 떨어져 나왔다. 안좌도 압해도 암태도 장산도 대흑산도 등을 비롯, 유인도 111개와 무인도 719개로 이루어져 있다. 흑산도는 우리나라 3대 파시 즉 흑산도. 위도 연평도의 조기파시 중 제일 남쪽에 위치해 있는 곳이다. 성어기 때 어항에서 열리는 생선시장. 넓은 의미로는 해상에서 열리는 어시장( 魚 市 場 )뿐만 아니라 연안의 육지시장까지도 포함한다. 파시에서는 어선( 漁 船 ) 과 상선( 商 船 ) 사이에 또는 어업자와 어부들 간에 매매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세종실록 世 宗 實 錄 과 신증동국여 지승람 新 增 東 國 與 地 勝 覽 에는 매년 봄에 열리는 파시의 광경을 묘사한 기록이 있으며, 칠산해( 七 山 海 )의 칠산도( 七 山 島 )는 조기의 어획장으로 성어기( 盛 漁 期 )에 파시가 형성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에서 파시가 형성되는 곳은 주로 조기의 산란장으로 유명한 대흑산도 위도 칠산도 개야도 녹도 고군산군도 어청도 연평도 등지의 서해안이다. 조기는 제주도 남서쪽 및 중국의 상하이[ 上 海 ] 동남쪽 근해에서 겨울을 지낸 후 2월경에 북상하여 전라남도 영광군의 칠산해, 옹진군의 연평도 근해, 평안북도의 대화도 근해 등지에서 산란하게 되는데, 이 시기가 3~6월경으로 파시는 주로 이때 일시적으로 열리며, 특히 4월 하순부터 5월 하순경까지 이루어지는 연평도 근해의 조기어장은 전국 최대의 어장으로 파시 또한 유명하다. 파시가 열리게 되면 인근 어촌은 외부로부터 어부와 상인들이 모여들어 호황을 누렸으며, 일시적인 촌락이 형성되기도 했다. 거문도 청산도 추자도 등지의 남해 안에는 이 지역에서 많이 잡히는 고등어 멸치 등이 성어기를 이룰 때 파시와 같은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오 늘날에는 그동안의 남획으로 인해 서해안으로 회유해오는 조기가 적어짐에 따라 현재는 거의 사라졌다. 흑산도는 나라의 술꾼들이 즐겨 찾는 홍어와 홍탁삼합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홍어하면 떠올리게 되는 흑산도 홍어는 흑산도 근해에서 잡히는 홍어다. 흑산 홍어는 인천이나 군산에서 잡히는 홍어 와 달리 육포 자체가 씹으면 입에 착 달라붙을 정도로 차지고 맛이 좋다. 이 홍어를 먹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다. 껍질을 벗겨 날 것 그대로를 초고추장이나 겨자를 넣은 간장에 찍어먹거 나, 막걸리와 같이 먹는 홍 탁, 삶은 돼지고기를 얇게 썰고 배추김치와 함께 먹는 삼합 三 合, 양념을 묻혀 구어 먹는 서해의 절경 흑산도와 홍도를 가다. 46

47 것, 겨울철에 푸르게 자란 보리 싹과 내장을 넣어 끓인 국, 날 것을 옹기그릇에 담아놓았다가 며칠 뒤 꺼내먹으면 입 안이 화끈하게 퍼지는 매운 맛이 일품이다. 또한 신안군 흑산면에 수려한 단애절벽이 장관을 이루어 남해의 소해금강 이라고 불리는 홍도가 있으며, 전국의 새우 생산량의 절반쯤을 생산하는 전장포가 임자도에 있고 전란마도 삼백 三 白 의 하나로 손꼽히는 신안 소금이 예로 부터 이름이 높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서해의 절경 흑산도와 홍도를 가다. 47

48 천삼백 리 한강 다섯 번 째를 걷는다.단양읍에서 충주댐 거쳐 원주 부론면까지 :50 천삼백 리 한강 다섯 번 째를 걷는다.단양읍에서 충주댐 거쳐 원주 부론면까지 천삼백 리 한강 다섯 번 째를 걷는다. - 단양읍에서 충주댐 거쳐 원주 부론면까지- 한강 천 삼백리 도보답사의 여정이 다섯 번째로 실시됩니다. 단양군 단양읍에서 출발하여 충주댐의 상류에 있는 장회 나루에서 충주호 유람선을 타고 충주댐에 닿을 예정입니다. 탄금대를 지나고 충주호 조정지댐에 있는 중원탑과 고구려비를 돌아보고 목계나루에 이릅니다. 신경림 시인의 절창인 <목계나루>를 지나며 아름답게 펼쳐진 남한강변의 유서 깊은 폐사지들을 찾아갈 예정입니다. 청룡사, 거돈사, 법천사 지에 있는 국보와 보물들을 보고 여정은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에 이를 예정입니다. 남한강과 섬강, 그리고 청미천이 만나는 이 곳까지 이어질 다섯 번째 여정은 남한ㄱ상의 물길이 얼마나 도도하고 양양한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 도전리가 신단양으로 바뀌게 된 것은 1984년 8월 이후였다. 32만 평의 대지 위에 단양읍 중도리 시루섬의 모래, 자갈, 조약돌을 옮겨다 군청 소재지를 거의 옮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도시 대이동 공사에 투입된 공사비는 총 1천억원 이었다. 강을 끼고 있는 산촌마을에 불과했던 도전리는 겨울이면 눈이 제일 먼저 녹고 325가구쯤의 농민들이 고추와 양잠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곳이었는데 충주댐이 조성되는 과정에서 신단양으로 새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우리들은 물이 줄어 삭막해 보이는 남한강가의 장미꽃길을 지나며 강물 소리를 듣는다. 조용하다. 사람 소리도 차 소 리도 그 어느 소리도 허락하지 않고 오직 흐르는 강물 소리만 들릴 뿐이다. 아침부터 날이 저물도록 찻길을 따라 걸 으며 들었던 그 소음에서 벗어나 이토록 호젓한 길을 따라 걷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 여느 때 같으면 강 폭 가득히 강물이 흘렀을 텐데, 그랬더라면 도담삼봉에서부터 배를 타고 충주나루까지 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저렇듯 줄어들 대로 줄어든 강물이 힘없이 흐고 있을 뿐이다. 오월 말에서 유월 초의 어느 날 단양에 다시 오리라. 그래서 신단양읍의 수변공원길을 다시 걸어볼 것이다. 떨어진 장미꽃잎을 밟으며 장미가시에 찔려서 죽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떠올리며 "올 때는 문득 오고 갈 때는 문득 간 다"는 게송 한 구절을 읊어볼 것이다. 삼십여 년 전만 해도 저 푸른 초원이 펼쳐진 곳의 행정구역상의 지명은 단양군 단양면 중도리 시루섬이었다. 모양이 시루처럼 생겼고 시루떡처럼 모래자갈 등이 켜켜이 쌓여진 8만여 평쯤이 되는 시루섬은 퇴적호가 쌓이고 쌓여 단양 에서 비옥하다고 소문난 땅이었다. 그런데 72년 8월 19일 이 마을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날 며칠간 비가 퍼붓더니 오후 3시쯤에 물에 완전히 잠기고 말았다. 그때의 상황을 박동중(55세) 씨에게서 듣는다. 천삼백 리 한강 다섯 번 째를 걷는다.단양읍에서 충주댐 거쳐 원주 부론면까지 48

49 "잠종사업소에 근무하던 아가씨가 40여 명이 있었고 35가구 190여 명이 있었는데 방법이 없잖아요. 우선 잠종사업소 물탱크 우로 사람들을 올려보냈어요. 다 올려보내고 나니까 더이상 올라갈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남은 젊은 사람들 은 소나무 우에로 올라갔지요. 동생하고 나하고 팬티바람에 같은 소나무에 올라가 '오늘 우리 죽는갑다' 했는데 다행 히 우리가 매달린 소나무는 떠내려가지 않고 다른 소나무들은 떠내려가 버려 그날 밤 8명이 죽었지요. 그런데 신기하 게도 다른 짐승들은 다 떠내려갔는데 소들은 섬 주위를 맴돌면서 한 마리도 안 떠내려갔어요. 그래서 소는 영물이다 생각했죠. 그 다음날 물이 빠지고 보니까 물탱크 우에 어린 아이 하나가 깔려서 죽어 있더라고요. 다음 날 도지사가 오고 내무부장관이 오고 해서 그 근방에다 집을 지었지요. 그런데 몇 달 후에 나이든 노신사가 찾아온 거예요. 누가 이곳에 집을 지으라고 했느냐 물어서 전후 이야기를 했더니 '당신들하고는 상관이 없구만' 하고 가더니 그 다음날 바 로 단양 군수가 온 거예요. 그 사람이 땅 주인인데 남의 땅에 집을 지었으니 당신들이 해결해야 한다는 거예요. 밝은 대낮에 날벼락이라더니, 그래서 마을 몇 사람이 청와대를 찾아갔지요. 하여간 호랭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예요. 보 상도 제대로 못 받고 떠나간 사람들 많았어요." 나는 박동중 씨의 말을 들으며 섬진강댐을 막으면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운암 정읍 사람들을 떠올렸고 동시에 용담 댐의 보상 문제를 떠올렸다. 영악할 대로 영악해진 몇 사람들과 그 담당부서 직원들이 짜고 치는 화투로 A마을로 실 사를 나간다 하는 정보가 돌면 B와 C마을 농기구들과 소, 돼지, 심지어 개들까지 A마을로 원정을 나갔다고 한다. 뿔 이 괴상하게 구부러진 아무개네 집 소는 다섯 번에 걸쳐 보상을 받았다는데 더 이상 말해 무엇하랴 년 1월 6일 단국대 조사단이 적성산성을 조사하던 중 비 하나를 발견했다. 높이는 1m가 채 안 되고 윗너비 1m 가량, 아랫너비가 0.5m 남짓한 역사다리꼴 화강암 비는 발견 당시 지붕돌이나 받침돌 없이 비석만 땅에 묻혀 있었다. 예서에서 해서로 옮겨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국 남북조 초기의 글씨로 비문은 모두 440자 가량으로 추정되지만 288 자가 남아 있었다. 그 내용은 진흥왕이 이사부, 이간, 내예부, 대야간, 무력 등 10여 명의 고관에게 일러 야이차의 공 을 표창하여 앞으로도 야이차와같이 신라에 충성하는 사람에게는 똑같이 포상을 내리도록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비문에 씌어진 바로는 진흥왕 6년에서 11년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남아 있는 비문에선 적성이라는 말이 세 번쯤 나오는데 그 당시 적성은 고구려 땅이었다. 그것을 보면 진흥왕 때에 적성현을 빼앗고 본격적인 거점을 마련 한 것으로 보인다. 적성산성은 사적 제265호로 지정되어 있고 적성비는 국보 198호로 지정되어 있다. 적성산성을 바라본 우리들은 다시 내려와 단성향교를 지난다. 단양군수 지종원, 군수 박초양, 관찰사 이아무개의 비 가 세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우리는 다시 포장도로에 접어들어 우화교 羽 化 橋 를 지난다. 중방과 하방리를 이어주었던 단양천의 대표적인 우화교는 당초 돌다리였다가 수해를 입고 콘크리트로 모습을 바꾼 다리이다. 이곳 장회에는 조선 영조 때의 구두쇠였던 조륵에 관한 얘기가 남아 있다. 음성에서 살던 자린고비가 어느 날 장독 뚜껑을 벗겨 햇볕을 쬐고 있던 중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 장을 빨아먹고 날아갔다. 이를 본 자린고비는 파리 다리에 묻은 장이 아까와 파리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충주를 지나 단양까지 쫓아온 자린고비는 남한강을 건너는 도중 그만 파리를 놓치고 말았다. 자린고비는 발을 동동 구르며 '장외 장외'라고 소리치며 분해했다. 그후부터 사람들은 파리를 놓친 이 곳을 장외라고 불렀고, 세월이 흐르면서 장회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곳의 장회여울은 남한강 줄기에서도 급류가 심한 곳이라 노를 저어도 배가 잘 나아가지 않고 노에서 손만 떼면 금 세 도로 흘러 내려가므로 오가던 배와 뗏목이 무진 애를 써야 했던 곳이다. 적성면 성곡리 석지로 건너가는 나루가 천삼백 리 한강 다섯 번 째를 걷는다.단양읍에서 충주댐 거쳐 원주 부론면까지 49

50 장회나루였고 장회여울 남쪽에 있는 삿갓여울은 기암절벽이 흐르는 물을 막고 있어서 삿갓여울이라고 불렀다. 장회탄 아래에 있는 구담봉 龜 潭 峰 은 소 가운데에 있는 바위가 모두 거북 무늬로 되어 있고 절벽의 돌이 모두 거북처 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거울같이 맑은 물이 소를 이루어서 봄꽃, 가을 단풍 때 아름다운 경치가 물 속에 비치니 배를 띄우고 놀면 아래위로 꽃 속이 되어 그야말로 신선놀이가 따로 없었다고 한다. 퇴계 이황, 급제 황준량, 율곡 이이 등이 이곳의 경치를 시를 지어 극구 찬양하였다. 옥순봉 玉 筍 峰 은 희고 푸른 암봉들이 비온 후 죽순이 솟듯 이 미끈하고 우뚝하게 줄지어 있으며 소금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강 건너가 교리이고 배는 "갈수록 물은 겹겹이요, 또 산은 거듭거듭인데 약간의 민가는 그림 속이로다"라고 신개라는 사람이 노래했던 청풍나루에 닿는다. 청풍나루에서 북진나루로 건너던 나루터는 제 기능을 잃어버린 채 옅은 운무 속 에 잠겨 있을 뿐이다. 청풍명월의 고장 제천군 청풍면은 1985년 충주 다목적댐이 완공되면서 27개 마을 가운데 겨우 두 마을만이 온전히 남고 나머지는 충주호에 잠기고 말았다. 조선시대까지 제천 지역의 중심역할을 했던 청풍은 악성 우륵의 고향이었고 조선 현종 때는 왕후의 관향이라고 하여 충청도에서 유일한 도호부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청풍면의 중심지였던 읍리의 강가에 있는 한벽루가 시인 묵객들을 불러들였고 남한강가 북진나루에 서던 청풍장은 제천 지역을 주무르던 가장 큰 시장이었다. 소금을 비롯한 각종 해산물과 비누, 석유, 성냥 등 온갖 농산물이 거래되 었던 청풍장의 북진나루에는 서울에서 오는 돛단배들이 가지고 오는 여러 물품들을 받는 봇짐장수들의 발길이 부산 했다고 한다. 번성했던 읍내와 북창진 그리고 북진나루를 지키던 느티나무도 물에 잠겨버리고 수몰지구에 서 있던 문 화재들은 물태리에 있는 청풍문화재단지에 옮겨지게 되었다. 충주시 종민동과 중원군 동량면 조동리 사이의 남한강에 '중부지방의 지도를 바꾼' 충주다목적댐의 착공식을 가졌던 것은 1980년 1월 10일이었다. 높이가 97.5m 길이가 464m로 국내 최대규모의 콘크리트 중력댐인 충주다목적댐은 총저 수량이 27억 5,000만 톤이며 댐의 연평균 유입량은 44억 8200만 톤이며 만수위 때의 수면 면적은 97km2로 우리나라 최대의 담수호라고 할 수 있다. 1985년에 완공된 충주다목적댐으로 인하여 충주시와 중원군, 제원군, 단양군의 101개 마을의 8,217가구가 물에 잠겼고 66.48km2가 수몰되었으며 수몰주민 49,627명을 위하여 곳곳에 수몰이주단지 및 단양 신도시가 건설되었다. 댐의 건설로 13억 톤의 생활용수와 12억 톤의 관개용수, 8억 톤의 공업용수를 공급하게 되었고 홍수 조절량은 6억 톤이다. 시설발전용량은 40만kw로 연간 5천만 달러의 유류대체 효과를 얻게 되었다. 이 댐의 건설은 서울과 인천을 포함한 한강 유역권에 사는 사람들의 물 문제를 해결해 줌으로써 그 혜택은 외지 사 람들이 더 많이 입었다고 볼 수 있다. 강 건너 봉골의 만마루마을은 아침 안개 속에 고즈넉하다. 그렇다. 흐르는 물길 을 따라 천천히 걸어 내려가는 이 행복감은, 강길을 따라 걸어가 보지 않은 사람은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고적 조에 탄금대는 견문산에 있다. 푸른 벽이 낭떠러지가 져서 높이가 20여 길이요, 그 위에 소나무. 참나무가 울창하여 양진명소 楊 津 溟 所 에 굽어 임하고 있는데, 우륵 于 勒 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 고 실 려 있는 탄금대는 임진왜란 때에 신립 장군이 휘하에 8,000여 병사를 거느리고 배수진을 치고서 문경새재를 넘어 밀 고 올라오던 왜장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을 맞아 분전하였으나, 참패하자 천추의 한을 품고 투신 자결한 유적지이기도 하다. 천삼백 리 한강 다섯 번 째를 걷는다.단양읍에서 충주댐 거쳐 원주 부론면까지 50

51 임진년 4월 14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아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새재를 넘었는데, 그들은 조령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세 차례나 수색대를 보내어 한 명의 조선군도 배치되어 있지 않음을 알고서야 춤을 추고 노래하면서 넘었다고 한다. 그들은 곧바로 충주 탄금대( 彈 琴 臺 )에 배수진을 친 조선의 방어군을 전멸시켰다. 탑평리에 이르러 칠층석탑을 마주한다. 중앙탑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이 칠층석탑은 높이가 14.5m나 된 다. 중앙탑은 신라의 문성왕 때에 나라의 중앙을 표시하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신라 땅의 남쪽과 북쪽 끝에서 같은 시각에 출발한 두 사람이 어김없이 똑같은 시간에 이 탑에 당도했다고 한다. 신라 석탑 중에서 가장 높 은 탑인 이 중앙탑은 이 고장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사는 곳이 우리나라의 중심지라는 의식을 심어주는 데에 큰 몫을 하고 있으며 그런 연유로 충주, 영주, 풍기, 단양, 제천 일대의 문화권을 중원문화권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탑이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고구려 탑이라는 설도 만만치 않다. 서울 마포에서 소금 30가마를 싣고서 일주일 만에 이곳 목계에 이르면 그 소금 가격이 다섯 배나 뛰기도 했다는 이곳 목계에 소금배나 짐배가 들어오면 아무 때나 장이 섰고, 장이 섰다하면 사흘에서 이레씩이었다고 한다. 보통은 한 달 에 한 번쯤 목계장이 섰는데, 날이 가물어 물길이 시원치 않거나 날이 얼어붙어 배가 오지 않을 때에는 두 달에 한 번씩도 섰다고 한다. 음성이나 괴산 등 충청도 지역과 경상도 북부 및 강원도 남부의 여러 읍인 영월이나 평창 등지 에서 장꾼들이 몰려와 성시를 이뤘고, 장삿배에서 내려진 소금이나 해산물은 반드시 중개 상인인 도가 都 家 를 통해 팔 려나갔다. 목계나루가 번성하면서 이 고장에서는 뱃길이 무사하고 장사도 잘 되게 해달라는 기원을 담은 매년 정월 보름날부터 시작하여 2월 초순경까지 별신제 別 神 祭 를 올렸다. 제사는 부용 산신과 남한강 용신을 모셔 오는 강신 降 神 굿으로 시작 되고 굿과 함께 난장을 열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동편과 서편으로 나뉘어 아기 줄다리기를 하다가 나중에 어른줄다리기로 이어지는데, 줄다리기는 강을 경계로 동서 양편으로 나뉘어 길이가 100M나 되는 줄을 당겼다. 동편은 수줄이고 서편은 암줄이다. 교통이 편리 하고 큰 나루터였으므로 구경꾼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조금 부풀려진 말이겠지만 동쪽으로는 대관령 너머 강릉에 서, 서쪽으로는 서울에서까지 줄꾼이 동원되어 수백 명의 사람들이 줄을 당길 만큼 규모가 컸다고 한다. 강 건너 가흥창은 그 옛날의 번영하고는 아무런 연관도 없이 한가로이 남아 있다. 가흥리는 현재 200가구밖에 안 되 는 작은 마을로 쇠퇴했지만 조선시대에는 나라 안에서 가장 큰 창고로 119칸에 달했던 창고가 있던 가흥창이 설치되 어 충청북도 북부와 강원 남부 그리고 경상도 60개 읍과 에서 현물세로 거두어들인 쌀, 베, 특산물 같은 것을 모아 강물이 풀리는 3월과 5월 사이에 서울로 싣고 가는 항구였고, 배에서 일하는 수부만도 4,500명이 머물러 있던 곳이었 다. '창 倉 '이란 나라의 세금을 한데 모으는 중심지가 되는 곳을 일컫는다. 그러나 가흥창은 남한강의 물길과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의 선창나루 앞에 흐르는 남한강 기슭에는 아무런 탈없이 무사히 지나가게 해달라고 용 왕에게 제사지내던 제단인 비원불과, 가흥창터가 남아 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곳이 크게 번성했던 내륙 항구였 을 텐데 이 터에는 지금 주춧돌 몇 개와 깨진 기왓장만이 뒹굴고 있다. 남한강으로 섬강이 접어들다 천삼백 리 한강 다섯 번 째를 걷는다.단양읍에서 충주댐 거쳐 원주 부론면까지 51

52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 여주 쪽으로 흘러가는 흥호리에는 조선 전기 강원도 원주군 법천리에 설치되었던 조창인 흥원 창이 있었다. 소양강창, 가흥창과 함께 좌수참에 소속되어 인근 고을 세곡을 운송하였던 흥원창에는 51척의 참선이 소속되어 있었 다. 흥원창은 원주, 평창, 영월, 정선, 횡성 등 강원도 영서지방 남부 4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 보관하였다가 일정한 기일 안에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그 운송항로는 한강의 물길을 따라 서울의 용산강변에 이르는 것이었다. 소양강창과 마찬가지로 그 기능이 크지 않아서 조선 후기에 관선 조운이 쇠퇴하고 사선업자에 의한 임대운창이 널리 행해지면서 흥원창이라는 이름만 남게 되고 지금은 1796년 정수영이 그린 한임강명승도감 중 흥원창 부분이 중앙국립박물관 에 소장되어 있을 뿐이다. 한편 이곳 흥호리 부근을 사람들은 삼합지점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겨울철 강물이 얼면 담배 한 대 필 참에 3도 땅을 다 밟아볼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3도의 물이 한데로 모인다 해서 합수머리라고 부르기도 하였 다. 모여지는 것이 물뿐만은 아니었다. 3도의 물산과 세미들도 이곳으로 모여들어 남한강 뱃길을 따라 서울로 내려갔 던 곳이었다. 아름다운 남한강의 물길과 역사문화유산이 만나는 이번 여정에 많은 참여 바랍니다. 천삼백 리 한강 다섯 번 째를 걷는다.단양읍에서 충주댐 거쳐 원주 부론면까지 52

53 관악산에서 느낀 성간의 소회, :41 관악산에서 느낀 성간의 소회, 관악산은 서울의 남쪽에 자리 잡은 산으로 연주대를 비롯한 명소들이 많이 있다. 조선 세조 때의 문신으로 집현전 박사를 역임한 성간 成 侃 ( )은 일찍부터 문명을 떨쳤으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가 여름에 관악산 자락에 있는 관악사에서 더위를 피하면서 관악산 일대의 깊은 골짜기와 괴석을 보러 다녔다. 얼마 쯤 지나자 관악산 일대의 명소 중 볼 것은 모두 다 보았다고 여긴 뒤 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 했다. 이제 관악산의 산수는 싫도록 다 보았소, 다만 이 산의 불쪽 절벽이 기이한 것 같은데, 그곳을 가 보지 못하였으니, 앞장서서 안내해주지 않겠소? 성간의 말에 중들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산 북쪽은 숲이 더욱 깊숙하고, 바위가 험악하여 길이 끊어져 더 갈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갈 수 있는 곳 까지는 안내하겠습니다. 성간이 그들과 함께 수없이 많은 난관을 겪으며 올라가보니 집채 같은 바위들이 빙 둘러 있었고, 그 밑은 거의 천 길 낭떠러지 같아서 정신이 아찔하였다고 한다. 그곳에서 성간은 다음과 같은 기행문을 남겼다. 두 다리를 편 채 바위위에 걸터앉아 한참 있으니,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솔바람이 더 위를 씻어 부었다. 저 아래에서 뛰노는 물고기와 나는 새, 무성한 초목이 또렷하게 보일 듯 하다. 또 서쪽 하늘과 맞닿은 바다에는 구름 안개가 자욱하며, 마침 일몰 때여서 햇살에 비친 구름이 붉은 것도 같고, 푸른 것도 같으며, 검은 것도 같고, 흰 것도 같아서 마치 귀신이 모인듯 하다. 아, 이 산에 노닐던 선비나 중이 몇이나 되는지 모르지만, 이 바위에서 본 경치를 말하는 자가 없었 다. 그런데 내가 노닐면서 다행히 발견하게 되었으니, 아마도 조물주가 나를 위해서 마련한 것이 아 닌가 싶다. 장자 莊 子 가 말하기를 큰 숲이나 산이 사람에게 좋기는 하지만 신기 神 氣 가 너무 가득 차면 별로 좋지 않다. 고 하였는 데, 그의 말이 꼭 옳은 것은 아니다. 관악산에서 느낀 성간의 소회, 53

54 무릇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자면, 밖으로는 온갖 일이 모여들고, 안으로는 온갖 생각이 치밀어 기운 이 막히고, 뜻이 침체하게 된다. 그러다가 큰 숲과 경치, 아름다운 시내를 만나 그 우뚝한 자세를 보 고 장쾌한 소리를 들으면 지금까지 답답하던 가슴 속이 홀연히 풀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산수의 도움을 얻은 자가 많으니, 어찌 장자의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아무래도 그 곳이 연주대 부근일 것 같다. 예로부터 큰 바위가 많은 산은 신기가 많아 그 신기를 이 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장소가 안 좋은 곳이라고 말한 장자의 말을 비판한 것 같지만 산에 산을 오르는 사람의 마음과, 그 산에 올라 느끼는 사람의 마음을 잘 표현한 글이라 하겠다. 문득 관 악산을 다시 오르고 싶다. 계사년 유월 초이레 관악산에서 느낀 성간의 소회, 54

55 섬진강 테마 강따라 길따라 도보 여행 :33 섬진강 테마 강따라 길따라 도보 여행 진메 옛길을 걷다. 계사년 여름 7월 6일 토요일 하루 기행을 실시합니다. 섬진강 오백 삼십 리 물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임실군 덕 치면 일대를 걷게 됩니다. 덕치면 물우리-월파정- 진뫼마을-뛰엄바우-동자바위- 천담- 구담- 당산에 이르는 길은 지난 해 걸었던 길과 달리 새로 조성된 길입니다. 섬진강을 걸으며 뜨거운 여름을 준비할 이번 행사는 선착순 90명만 초청합니다. 섬진강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한 구비라면 진뫼, 천담, 구담이다. 유유히 흐르는 강은 화려하지도 넉넉하지도 않다. 다만 섬진강처럼 소박하게 흐를 뿐이다. 월파정에서 구담까지 약 3시간 코스 최근에 개통한 강따라 길따라 테마 길은 말 그대로 물따라 유유히 걸어가는 코스다. 바삐 서둘 것도 없는 길이다. 때로는 징검다리도 건너고 억새밭 사 잇길도 걷고 바위에 걸터앉아 발을 담그는 여유를 부려도 좋다. 작은 오솔길이어서 한사람씩 걸어가는 길이다. 먼 곳 에서 보면 마치 누우떼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림처럼 예쁘다. 1. 물우 마을 임실( 任 實 )은 삼국시대 이래로 이름이 변하지 않고 내려왔다. 임( 任 )은 임금의 임 또는 선생님 할 때의 님의 표기이 고, 실( 實 )은 마실?고라 실 할 때의 실 로 마을을 일컫는다. 그래서 임실은 왕이 있는 마을 즉 행정의 중심마을이 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물우( 勿 憂 ) 마을은 덕치면( 德 峙 面 )에 자리합니다. 덕치는 본래 고덕치라 칭하였다. 이는 주변에 높은 재를 넘어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우 마을은 덕치면 사무소를 지나 순창으로 가는 길목에 서 덕치초등학교 못 미쳐 섬진강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다. 강에 인접해서 물로 인한 근심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지만 마을에 직접적인 피해를 본적은 없다고 한다. 그래서 물우( 勿 憂 ) 마을은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물로 인한 근심이 끊임없이 있는 마을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듯 하다. 물우리는 물구리 에서 온 말로 물구리 는 물골 이라고 했다. 물골 이란 의미는 물이 주변 에 많다는 의미로 물우리는 한자의 석은 의미가 없고 물가에 인접한 마을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될 듯 하다. 물우 마을은 초창기에 밀양 박씨가 많이 거주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양씨, 이씨, 정씨 등이 들어와 살게 되었고 현재는 54가구로 제법 큰 마을에 속한다. 물우 마을을 들어설 때 강을 건너야 하는데, 예전에는 나무다리를 놓아 다 녔고 이후 콘크리트다리가 건설되면서 좀 더 편안해졌다. 이는 옥정호라 부르는 섬진강댐이 건설될 무렵에 이곳의 모 래, 자갈을 운반하기 위하여 60년대 초반에 다리가 놓여 졌기 때문이다. 섬진강 댐은 일제 강점기인 1940년에 착공했 섬진강 테마 강따라 길따라 도보 여행 55

56 다가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었고 다시 해방 후에 착공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중단 되었다. 이후 1961년에 착공하 여 1965년에 준공되었다. 현재는 큰 다리가 놓여 물우 마을로 가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마을입구로 들어서는 길목에 소나무 숲이 풍경화처럼 펼쳐져 있다. 한국전쟁 중 회문산( 回 文 山 )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빨치산이 떠오른다. 그런 굴곡의 역사 속에서 마을을 지켜보면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 소나무 숲을 생각한다. 길을 새로 내면서 소나무 숲이 훼손되어 규모가 축소된 상태이다. 소 나무 숲이 위치한 곳은 물우 마을 좌청룡에 해당되는 곳이다. 마을 북쪽의 바람을 막고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서 조성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50여년 전에 천불 이라 일컫는 큰 불이 발생하여 마을이 거의 전소( 全 燒 )되다시피 하였다 고 한다. 당시 초가집이 대부분 이었던 시대에는 화재가 가장 큰 재앙이었다. 마을에서는 화재를 방비하기 위하여 마 을숲을 방풍림으로서 조성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책이었다. 또한 마을 중심에 조성된 저수지도 화재를 방비하기 위한 방화수로서 조성되었다. 2. 당산묘 물우 마을 할머니당산은 특이하게 봉분으로 되어있다. 매우 특이한 당산 형태다. 물우 마을 할머니 당산은 현재는 제( 祭 )가 중단된 상태이나 이곳은 물우 마을 우백호 맥으로 이를 보강할 목적으로 할머니 당산을 봉분 형태로 조성했다고 전한다. 이 맥에는 느티나무, 물푸레나무 등 숲이 조성되어 있다. 물우 마을 이 풍수적으로 좌우 맥이 약하기 때문에 이를 보강하고 특히 마을이 북서향을 하고 있기 때문에 방풍을 목적으로 조 성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화재( 火 災 )나 수재( 水 災 ) 보다는 당면한 농촌의 현실이 더 심각한 상황이 아닌가 생각된다. 3. 동자바위 전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그리워하다 죽은 두 처녀 총각에 대한 이야기다. 동자바위전설이 있다. 덕치면 천담리 천담 마을에서 동북쪽으로 약 500m지점에 석불처럼 생긴 동자바위가 서 있는데 그 모습이 천진스러워 마치 시골의 나무꾼을 연상케 하여 친근감이 가지만 그 바위에 얽힌 전설이 지금도 듣는 이의 마음을 애처롭게 한다. 부부간에 공 방살이 들 때에는 남자가 여자를 싫어할 경우 동자바위에서 여자가 남자를 싫어할 때에는 여인바위에서 돌을 쪼아다 가 가루를 만들어 상대방 몰래 상대방의 음식물에 섞어 먹이면 공방살이 풀린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어 공방살이 낀 부녀들은 돌을 쪼아가는 촌극이 근래까지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도로 확장공사로 여인바위는 흔적이 없어지고 동자 바위 만이 홀로 처녀를 그리워하는 듯 두꺼비나루 건너편을 바라보며 외로이 서있다. 4. 회문산 이야기 섬진강이 돌아 나가는 회문산은 바위로 된 천연의 문이 있어 회문 이라고 한다. 회문산(837m)은 4km에 걸쳐 뻗어 있는 반석 같은 웅장한 바위들과 항상 구름에 잠겨있는 높고 우뚝 솟은 봉오리가 우람하다. 이곳은 지형적인 요새로 구한말 의병활동의 근거지였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남부군 전북도당 사령부가 있었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5. 진뫼마을 섬진강 테마 강따라 길따라 도보 여행 56

57 섬진강은 강이라기보다는 그저 큰 내에 불과한 것만 같다. 그것은 갈수기에 섬진강 댐에 물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 러한 섬진강을 끼고 앞뒤 산으로 꽉 막힌 그곳은 임진왜란 때 피난처로 생긴 마을이라고 하니 그 지형이 십승지에 버금가는 곳이라 할 만하다. 섬진강 하류지만 시인이 바라보는 섬진강은 결코 마르지 않은 강이다. 섬진강은 큰물을 담고 단순하게 흐르는 강이 아니라 전라도 실핏줄 같은 역사와 인간 삶의 궤를 함께 아우르고 있는 강이다. 김용택 시인은 산과 강과 나무와 작은 운동장과 아이들과 자연을 사랑하는 시인이다. 물과 나무를 통해서 생의 진실을 노래 하고, 빠르게 변모해 가는 삶의 모순을 조금이라도 늦추려는 듯 여유로운 음악과도 같은 詩 를 통해서 갑갑하고 삭막 한 세상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6. 김용택 시인생가 섬진강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김용택 시인의 고향은 전북 임실이다. 섬진강의 하류에 속하는 전북 임실 덕치면 덕치 초등학교에서 시인이면서 선생님이었다. 넓게 펼쳐진 섬진강에 오면 누구나 저절로 시인이 된다. 강은 제 몸을 둥글 게 말아 산을 휘돌아 흐르며 마을을 품었다 병풍처럼 둘러 싼 산 아래 '강이 나의 핏줄이었고 젖줄이었다'는 김용택 시인의 마을이 강 건너 포근하게 자리하고 나도 자연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일생을 보아온 강 앞에서 강의 물결이 일렁이는 걸 바라보는 집이라 해서 시인께서 직접 이름 지었다는 관란헌과 그의 이웃집 굴뚝에선 연기가 피어 오른 다 세월에 맡긴 채 묵묵히 흐르는 강물을 닮아 그렇게 걸어가고 싶다고 강이 말해주는 듯 하다. 강 건너 지나온 마을 은 뒤 돌아 보니 또 다른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7. 천담, 구담마을 덕치면 천담리 구담마을이다. 가장 깊은 내륙에 자리 잡고 있는 구담마을은 섬진강 육백 리 길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아름다운 곳이다. 구담( 九 潭 )은 본래 안담울이었으나, 마을 앞을 흐르는 섬진강에 자라( 龜 )가 많이 서식한다고 하여 구담( 龜 潭 )이라는 설도 있고 일설에는 이 강줄기에 아홉군데의 소( 沼 )가 있다하여 구담( 九 潭 )이라고 부르기도 한 곳이다. 영화 <아름다운 시절>, TV 문학관 <소나기>, 드라마 문학관 <쑥부쟁이> 등이 모두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이곳은 마을 앞으로 섬진강이 흐르니 강 마을이고, 산에 기댄 마을이니 산골 마을이기도 하다. 마을이 오지마을처럼 호젓하다. 그도 그럴 것이 평지가 드물고 산비탈을 일궈 조성한 마을이기 때문이다. 명상음악에 나오는 새 소리, 풀 벌레 소리를 들으며 인적 없고 고즈넉한 강변을 걷노라면 맑고 깨끗한 강물이 해맑기만 하다. 섬진강 가를 따라가다 보니 동네입구에서 큰 그늘을 드리우고 서 있는 당산나무가 여행자를 붙잡는다. 봄이면 매화가 구담마을 전체 언덕에 피어 꽃 천지이다. 6월 초순이면 청매실이 주렁주렁 달려 있어 경관으로 아주 좋은 곳이다. 8. 닥나무 삶던 솥 예부터 한지가 유명한 덕치면은 가내수공업으로 질 좋은 한지를 만들어내 유명했다. 현제 사양길에 접어들었지만 그 맥을 잇고 있다. 자연적으로 나서 자란 닥나무는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한지 원료이다. 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는 물이 맑고 깨끗하여 한지가 제 빛깔을 냈다고 한다. 다른 지역은 물에 철분이 많아 아무리 백지색깔을 내고 싶어도 낼 수 없는데 이곳에서 생산하는 한지는 원색을 그대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안담울 앞강에는 너벙바위가 많다. 강 언덕에 대형 솥을 만들어 닥나무를 삶아 껍질을 벗겨 너벙바위에 걸쳐놓고 이물질이 빠져 나갈 때까지 방망이로 두드리고 섬진강 테마 강따라 길따라 도보 여행 57

58 물에 헹구어 원색의 종이 원료를 만들어낸다. 120년의 역사를 가진 닥나무 가마솥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섬진강 테마 강따라 길따라 도보 여행 58

59 -계사년의 여름 걷기 학교- 월출산에서 청산도까지(선착순 90명) :32 -계사년의 여름 걷기 학교- 월출산에서 청산도까지(선착순 90명) 계사년의 여름 걷기 학교가 8월 8일부터 11일까지 남도에서 실시됩니다. 남도의 소금강이라고 일컬어지는 영암의 월 출산 산행과, 강진의 다산초당과 백련사에 이르는 길, 완도의 청산도길, 그리고 해남의 땅 끝 마을길과 미황사에서 도솔암에 이르는 숲길 등, 바다와 산, 그리고 숲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혹시라도 월출산 산생이 염려스러워 신청을 보류하시는 분들을 위해 월출산을 오르시지 않는 분들은 잘 조성되어 남 녀 노소 누구나 무리가 없는 <월출산 자락길>을 걷도록 할 예정입니다. 숙소는 다산 초당 아래에 있는 강진 수련윈입니다. 남도의 맛 기행을 겸해서 멋을 찾는 2013년 남도 여름 걷기학교에 선착순 90명을 초대합니다. 월출산은 평지돌출의 산으로 기암괴석이 많아서 남도의 소금강산으로 불리고 있다. 산의 최고봉은 천황봉이며 구정 봉(743m) 도갑산, 월각산, 장군봉, 국사봉 등이 연봉을 이룬다. 대체로 영암군 쪽에 속하는 산은 날카롭고 가파른 돌 산이며 강진군 쪽에 속하는 산은 육산이다. 동국여지승람 에 월출산은 신라 때에는 월나산( 月 奈 山 ), 고려 때에는 월생산( 月 生 山 )이라고 불리었다. 월출산은 그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시인 묵객들의 칭송을 들었다. 고려 때의 시인 김극기는 월출산의 많은 기이한 모습을 실컷 들었거니. 그늘 지어내고 추위와 더위가 서로 알맞도다. 푸른 낭떠러지와 자색의 골짜기에는 만 떨기가 솟고 첩첩한 봉우리는 하늘을 뚫어 웅장하며 기이함을 자랑 하누나 라며 월출산을 노래하였고, 매월당 김시습은 남쪽 고을의 한 그림 가운데 산이 있으니 달은 청천에서 뜨지 않고, 이 산간에 오르더라. 하였다. 달은 청천에서 뜨지 않고 월출산은 수많은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모습이 하나의 거대한 수석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가 되 기도 하지만 나무나 풀 한 포기 제대로 키울 수 없는 악산으로 보이기도 한다. 1973년 삼월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 다가 1988년에 국립공원으로 승격된 이 산자락 아래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태어났다. 도갑사 근처의 구림마을에서 풍 수지리학의 원조인 도선 국사가 태어났고 일본에 논어 와 천자문을 가지고 건너가 학문을 전하고 일본 황실의 스 승이 된 것으로 알려진 왕인 박사가 도갑사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도선과 관련된 최치원, 백의 등의 이름과 왕 인 박사와 관련된 책굴, 돌정고개, 상대포 등의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다. 도갑사에는 도갑사 해탈문이 국보 제 50호 로 지정되어 있고 구정봉의 서북면 암벽 아래에는 국보 제 144호인 월출산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한 뒤에 이곳 백제 유민들이 구정봉의 아스라한 바위벽에 기어 올라가 쪼아 새겼다고 전해지는 벼랑새김 마애여래좌 상은 석굴암에 있는 본존불의 두곱쯤 된다. 또한 이 산자락 아래 구림면에는 마을의 질서를 지키고 미풍양속을 조장 -계사년의 여름 걷기 학교- 월출산에서 청산도까지(선착순 90명) 59

60 하기 위해 1565년에 만들어 지금까지 이어오는 구림대동계가 있다. 이 월출산에는 나무보다 별보다 바위가 많고 바위들이 저마다 이름이 있다. 끈덕거린다는 깔딱바위, 기름종이 같은 기름바위, 흩어져있는 회서리바위, 얹혀있는 연친바위, 애기 업는 바위, 신틀을 걸었던 신틀바위, 배를 맸던 배 맨 바 위, 수좌스님 공부했던 수재 바위, 청춘남녀 연애했던 사랑 바위, 엽전 꾸러미 증발했던 도둑 바위, 팔매질하던 팽매 바위, 피난 갔던 피난 바위, 벼락 맞았던 벼락 바위 등 수많은 바위들을 어찌 다 볼 수 있을 것인가. 신정일의 <사찰 가는 길>에서 완도의 역사를 짚어보는 사이에 배는 청산항에 닿았다. 이른 점심을 먹고 걷기를 시작하는 이 청산도는 예전부터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영화 <서편제>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청산도가 사람들에게 더 각인이 된 것은 몇 년 전 정부에서 나라 안의 '가고 싶은 섬'네 곳중 하나로 선정했기 때문이다. 통영의 매물도와 신안의 홍도, 보령의 외연도, 그리고 청산도가 우리나라 섬 중 대표로 뽑힌 것이다. 다도해에선 드물게 300m가 넘는 산봉우리가 3개나 있는 청산도에는 고분과 지석묘, 옛 성터 등 문화재가 많은 섬인 데 이곳을 슬로시티로 지정한 것이다. 슬로시티(Slow-city)란 1999년 10월 이탈리아의 몇몇 시장들이 모여 위협받는 라 돌체 비타, 즉 달콤한 인생의 미래를 염려해 슬로시티 운동을 출범시켰다. 슬로시티의 출발은 느리게 먹기인 슬로푸드와 느리게 살기운동으로 시작 되었는데, 느리게 걷고 느리게 생각하고, 느리게 생활하기에 이곳보다 더 적정한 곳은 없을 듯 싶다. 일행은 자연스레 두 패로 나뉘었고, 도락 마을로 가는 길은 한가하다. 마을 고샅길에 접어들자 돌담이 이어지고, 담 벼락에 빛바랜 사진들이 걸려 있고 그 중 <졸업을 앞두고>라는 사진 앞에 발길이 머문다. 검정치마에 저고리를 입은 처녀들, 머리가 다 단발머리다. 저렇듯 검은 머리가 하얗게 변했을 저 누이들은 세월의 틈바구니에서 어떤 형태의 삶 을 살았을까? 구부러지고 구부러진 고샅길을 벗어나자, 해안이고, 해안을 따라 늘어선 해송나무숲이 한 폭의 그림이고, 그림 속으 로 들어가는 사람들이나 멀리 보이는 능선에 서 있는 일행들도 역시 그림이다. 영화 서편제 의 배경이 됐던 청보리 밭과 유채꽃, 을 감싸고 있는 낮은 돌담길을 지나자 마치 우리들이 한 편의 영화를 찍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이렇게 행복하게 걷는 것을 두고 레베카 솔닛은 아무런 장애 없이 풍경 속을 이동하는 것 이라고 규정했던 것은 아닐까. 어느 사이 발길은 영화 <서편제>의 현장에 이른다. 아리 아리랑 아리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에헤, 문경새재는 웬 고개인 고, 문득 <진도 아리랑> 한 소절을 부르며 누군가가 춤을 출 것 같아 바라보니 스칼렛 과 별의별 이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다. 능선에서 멀리 바라다 보이는 대모도. 소모도가 아스라하다. <봄의 왈츠>의 세트장을 지나 푸른 보리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고개를 넘자, 돌담 사이로 난길, 억새들이 사열하듯 서 있는 길은 동화 속 풍경 같 고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아련히 들리는듯 하다. 이 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마는 세상 사 쓸 데 없다. -계사년의 여름 걷기 학교- 월출산에서 청산도까지(선착순 90명) 60

61 잘 다듬어진 바다가 보이는 산길을 지나자 작은 해수욕장이 있는 읍리 마을이다. 더러는 앉아서 먼 바다를 바라보고, 더러는 자갈밭 해수욕장을 거닐다가 구장리를 향해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마을 숲이 아름다운 구장리에서 차길을 따라 오르자 보이는 산성 청산산성이다. 청산면 당락리와 읍리에 걸쳐 있는 성터아래 올망졸망하게 펼쳐진 논이 청산도에 있는 구들장논 (논 아래 돌을 깔아 물빠짐을 줄이는 방식)이다. 계 단식 논농사를 지으며 오랜 세월 인고의 삶을 살았던 청산도 사람들의 피와 땀이 얽히고 서린 산성을 내려와 다시 마늘밭과 보리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도락리에 이른다. 미황사는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에 있는 절이다. 우리나라 육지의 최남단에 위치한 이절은 대한불 교 조계종 제22교구의 본사인 두륜산 대흥사의 말사로서 통일 신라 경덕왕 때에 의조스님이 창건하였지만 확실한 창 건연대나 사적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다만 부도밭 가는 길에 숙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이 지은 미황사 사적 기에는 창건설화가 이렇게 쓰여 져 있다. 749년 8월에 한 척의 돌배가 아름다운 범패소리를 울리며 땅 끝에 있는 사 자포 앞바다에 나타났다. 그 배는 며칠 동안을 두고 사람들이 다가서면 멀어지고 돌아서면 다가오고는 하였다. 이때 의조화상이 두 사미승과 제자들 백여 명을 데리고 목욕재계한 후 기도를 하며 해변에 나아갔더니 배가 육지에 닿았 다. 배에 의조화상이 오르니 배안에는 금인이 노를 잡고 있었고 금으로 된 함과 검은 바위가 있었다. 금함 속에서는 화엄경 법화경 같은 불교경전과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보현보살과 40성종 53선지식 16나한과 탱화 등이 들어있 었다. 옆에 있던 검은 바위를 깨뜨렸더니 검은 소가 뛰어나와 금방 큰 소가 되었다. 그날 밤 의조화상의 꿈에 금인이 나타났다. 그는 자기는 우전국(인도)의 국왕인데 금강산이 일만 불을 모실만 하다 하여 배에 싣고 갔더니 이제 많은 사찰들이 들어서서 봉안할 곳을 찾지 못하여 인도로 되돌아가던 길에 금강산과 비 슷한 이곳을 보고 찾아왔다. 경전과 불상을 이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안치하면 국운과 불교 가 함께 흥왕하리라. 하고는 사라지고 말았다. 다음 날 의조화상은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가 소가 크게 울면 서 누웠다가 일어난 곳에 통교사를 창건하였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세웠다. 절 이름을 미황사라고 지은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지극히 아름다웠다고 하여 미 美 자를 넣었고 금인의 빛깔에서 황 黃 자를 따왔다고 한다. 이 창건 설화는 <금강산 오십삼불설화>와 관련이 있으면서, 앞부분은 검단선사가 선운사를 창건할 때 죽도 앞바다에 서 돌배를 받아들이는 장면과 흡사하다. 이 창건설화는 우리나라 불교의 남방전래설을 뒷받침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 다. 불교의 남방전래설은 우리나라 불교가 4세기 말 중국을 통해서 전파되었다는 통설과는 다르게 그 이전 1세기경 낙동강유역에 건국한 가야와 전라도 남해안 지방으로 직접 전래되었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 주장은 구체적인 고증 자 료가 없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남지만 가야라는 나라 이름이 인도의 지명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과 허 황후와 수 로왕의 전설 그리고 지리산의 칠불암 설화를 두고 볼 때 그리 허황된 것만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비문을 쓴 면암은 이 설화의 뒤 끝에 석우와 금인의 이야기는 너무 신비해 속된 귀는 의심이 갈만하지만 연대를 따져 고증하려는 것은 맞지 않는 일이다. 지금이라도 미황사에 가면 경전과 금인 탱화 성당 등이 완연히 있다 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신정일의 <사찰 가는 길> 중 바다와 산, 그리고 맛과 멋이 아우러지는 이번 여름 걷기 학교에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계사년의 여름 걷기 학교- 월출산에서 청산도까지(선착순 90명) 61

62 -계사년의 여름 걷기 학교- 월출산에서 청산도까지(선착순 90명) 62

63 천삼백 리 한강 네 번 째를 걷는다. 영월 거운리에서 단양 도담삼봉까지 :30 천삼백 리 한강 네 번 째를 걷는다. - 영월 거운리에서 단양 도담삼봉까지- 한강 천삼백 리 세 번째 일정을 마치고 6월 넷째 주 네 번째 여정에 오릅니다. 영월읍 거운리에서부터 시작되어 동강 과 서강이 만나 남한강이 되어 유장하게 흐르는 강을 따라 내려갈 이번 여정은 한 폭의 그림 같은 아름다운 구간입 니다. 특히 비운의 임금 단종과 매월당 김시습의 자취, 그리고 정조대왕의 태실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유산을 답사하 며 진행될 이번 구간은 역사와 문화, 그리고 강이 비경을 천천히 바라보며 걷는 구간입니다. 멀리 거운교가 보이는데 길은 끊어지고 가뭄인데도 강은 건널 수가 없다. 아무리 가물었어도 한강은 한강인데 건너 려고 했던 것이 무모한 일이었다. 할 수 없이 다시 돌아가는 산길을 택한다. 급경사 길을 허겁지겁 올라서서 나는 '휴' 하고 한숨을 내뿜는다. 길가에는 꿀꽃들이 무리 지어 피어 있다. 꿀 꽃 하나씩 따서 쪽 하고 빨 때마다 올라오는 그 진하디 진한 꿀맛. 그 감미로움에 자줏빛 꿀 꽃들을 만날 때마다 얼마나 반가운지. 하여간 아침 여정은 별것들의 연속이다. 오디로 입술화장까지 했으니 길 걷다 만나는 처자(?)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거운리를 지나 도착한 먹골에는 오래된 당집이 길 옆에 서 있다. 그 옆의 장승 한 쌍에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 라는 말 대신 토종된장, 엿기름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으니 오래된 전통들이 현대적 감각에 맞게 되살아나는지, 전 통이 깡그리 무시된 채 경제우선주의에 매몰되어 가는지 모를 일이다. 강 건너 사지막골을 사이에 두고 강물은 유유 히 흐르고 굿모닝동강, 동강민박, 동강래프팅, 가람래프팅 등 헤아릴 수도 없는 래프팅 업체들의 간판들이 줄지어 걸 려 있다. 마을사람의 말에 의하면 옛날 어떤 사람이 강변에 막을 쳐놓고 살았다 해서 마을 이름이 사지막골이라고 붙 여졌다는데 사지막골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완택산 자연휴양림 이라고 씌어진 표지판을 지나며 강은 여울져 흐른다. 완택산(916m)은 삼면이 석벽으로 되어 있 는데 돌로 쌓은 산성 둘레가 347척이다. 고려 고종 때 합단 合 丹 이 침입했을 때 영월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난을 왔다 고 한다. 완택산 서북쪽에 있는 번재(번치)마을을 돌아가자 강 가운데 둥글바위가 있다. 일제 때 뗏목이 걸려 파손되는 일이 잦자 강 저편의 산과 연결되어 있던 것을 깨버렸다고 한다. 강물은 둥글바위를 휘감아돌고 그 강가에선 부부인 듯한 두 남녀가 낚싯대를 드리운 채 앉아 있다.(...) 그 옛날 닥나무가 많았다고 해서 닥바우 또는 땍삐리라 불리우는 마을 앞강에는 꽃밭여울이라는 여울이 흐르고 삼옥 리 서쪽에 금강산의 다른 이름과 같은 봉래산(799m)이 있다. 봉래나루에는 나룻배 한 척이 매어 있고 봉애소는 새푸 르게 깊다. 올라가는 고갯길은 숨이 가쁘다. 김형곤 씨는 쉬었다 가자고 하고 김성규 씨는 이 고개마루를 넘어서 쉬 천삼백 리 한강 네 번 째를 걷는다. 영월 거운리에서 단양 도담삼봉까지 63

64 자고 한다. 고개를 넘어서면 바로 영월이다. 동강은 서강과 몸을 섞기 위해 저렇게 잔잔히 흐르고 있을 것이다. 뒤돌 아보면 강은 아스라하고 강 건너 보이는 저새마을은 붉고도 붉다. 저새마을이 바라다 보이는 고갯마루에 앉아 불어오는 강바람을 맞는다. 강은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듯 움직임이 없이 흐른다. 비탈진 산기슭에 펼쳐진 붉디붉은 너른 밭들 그리고 우람한 느티나무와 소나무. 구부러지고 구부러진 채 산 허리를 넘어가는 길들을 바라보니 소문공충집 에 나오는 한 구절이 떠오른다. "강산과 풍월은 원래 주인이 없고 오직 한가로운 사람이 바로 주인일 것이다." 나는 아름다운 마음 하나 가지고 한가롭게 강기슭을 천천히 걸어가는 모 습을 꿈꾸지만 실제 나는 아름다운 마음은커녕 서둘러 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그저 느낌도 없이 걸어갈 때가 많으 니, 정말 나는 언제쯤 후여후여 소리치며 아무런 계획도 없이 떠돌 수 있을까? 그래서 "한가한 사람이 아니면 한가함 을 얻지 못하니 한가한 사람이 바로 등한한 사람은 아니라네"라는 문가유림 의 시구를 이해하게 될까?(...) 서강이라 불리는 평창강은 길이가 149km에 이르는데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 계방산 남동 계곡에서 발원하여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와 팔괴리 사이에서 동강과 합류하고 그곳에서 마침내 굵은 물줄기가 되면서 남한강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태어난다. 서강 저 멀리 옅은 안개 속으로 푸른 산들이 연이어 보이고 그 아랫자락에 청령포가 있다. 영월군에 는 조선 왕조 여섯 번째 임금이면서 비운의 임금인 단종의 무덤인 장릉을 비롯해서 단종과 관련된 역사유적이 곳곳 에 널려 있고 그에 얽힌 땅 이름과 전설이 많다. 서면 광전리에 있는 고개는 단종이 유배올 적에 넘었다고 해서 임금이 오른 고개라는 뜻으로 등치라고 불리었고, 서 면 신천리에 있는 고개는 오랫동안 흐리던 날씨가 단종이 넘으려고 하자 맑게 개어서 단종이 하늘을 향해 절을 올렸 다고 해서 배일치라고 불리운다. 신천리의 관란정 觀 瀾 亭 밑에는 아이고 바우 가 있는데, 이 바위에서 아이고 를 세 번 외치ㅁ면 물에 빠져 죽는 다는 속설이 있는데, 또 다른 이야기는 불의한 정변 政 變 이나 수령의 악정이 있을 때 선비들이 이 바위에 모여 아이 고, 아이고, 하며 통곡을 했다는 것이다. 이곳 아이고 바위에서 통곡을 하면 강원감사가 그 수령의 잘잘못을 내탐했 다고 하며 악한 수령들은 그 선비들을 탄압했다고 한다. 단종이 귀양을 와서 머물렀던 청령포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쌓여 있으며 한쪽 은 벼랑이 솟아 있어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빠져나갈 수 없게 막힌 곳이다. 단종이 이곳에 머물러 있을 때 매월당 김시습이 두어 번 다녀갔다고 한다. 그래 매월당은 이곳에 와서 인생이 얼마나 뜬구름 같은가를 깨달았을 것이다. 나는 누구냐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다 미친 듯이 소리쳐 옛 사람에 물어보자 옛사람도 이랬더냐 이게 아니더냐 산아 네 말 물어보자 나는 대체 누구란 말이냐 그림자는 돌아다봤자 외로울 따름이고 갈림길에서 눈물 흘렸던 것은 길이 막혔던 탓 삶이란 그날 그날 주어지는 것이었으며 살아생전의 희비애락은 물 위의 물줄 같은 것 그리하여 말하지 않았던가 천삼백 리 한강 네 번 째를 걷는다. 영월 거운리에서 단양 도담삼봉까지 64

65 이룩한 미완성 하나가 여기 있노라고 혼이여 돌아가자 어디인들 있을 데 없으랴(...) 정조의 태실이 있는 계족산 봉화 76km, 하동 11km 여정은 계족산 鷄 足 山 (880m) 아래를 지난다. 계족산에는 왕검성이 있고 정조대왕의 태실비가 모셔져 있다. 왕검성은 거란족의 잦은 침입을 막기 위하여 왕검이라는 장군이 쌓았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왕검의 어머니가 왕검과 그 누이에게 성 쌓기 시합을 시켰다고 한다. 아들에게는 돌로 딸에게는 흙으로. 그런데 딸이 먼저 쌓을 것 같아서 딸에게 독약을 먹여 죽였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둘레가 2,314척, 높이가 19척으로 크게 가물면 마르기도 한다. 한곳의 샘과 다섯 간의 창고가 있다. 고 실려 있는 왕검성을 이곳 영월 사람들은 정양리 산성 이라고 부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영월 고적조 에 석책조 이천삼백십사척고십구척( 石 策 條 二 千 三 百 十 四 尺 高 十 九 尺 ) 이라는 기록과 대동지지 영월 성지조에 정양산 고성조 이천이백십사척( 正 陽 山 古 城 條 二 千 二 百 十 四 尺 ) 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 이 성은 2003년 6월 2일 사적 제446호로 지정되었는데, 둘레가 771에, 성벽의 높이 4 10m, 너비는 6m로 면적은 11만 8,637m2이다. 강원도 영 월군 영월읍 정양리에서 연하리에 걸친 계족산에 축성된 테뫼식 산성인 이 성이 <여지도서>에도 정양산성 으로 실려 있으며 언제부터 어떤 연유로 왕검성이라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새인 것은 틀림없는 이 성은 거란족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검왕이 쌓았다는 설과 남쪽에 서 침입하는 신라를 막기 위하여 고구려에서 대야산성ㆍ온달성ㆍ봉래산성 등과 함께 축조하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 지만 이 지역에서 전해오는 전설은 952년 만주와 함경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여진족이 이곳 영월 지방까지 침략하자 이 들과 맞서 싸운 장군이 왕검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뿐이지만 정확한 축조 시기는 알 수 없다. 고구려 산성의 전형을 보여주는 이 산성은 대부분의 성벽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특히 북문은 양쪽 터가 잘 보존되어 있다. 산성의 남쪽에는 남한강이 흐르고 남한강을 따라 영월로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길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험준하고 높은 산의 장벽을 피해 상류에서 하류로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이 왕검성이다. 왕검성은 둘레가 771m쯤으로 몇 군데 허물어지기는 했을 망정 옛날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지니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조선왕조 오백 년사에 가장 걸출했던 임금 중의 한 분으로 꼽히는 정조의 태실비가 있다. 일반인의 태 는 태어난 지 사흘이 지나면 태웠으나 왕실 자손들의 태는 잘 말린 후 봉안하였는데 그것을 태실이라 한다. 능은 수 원에 있는데 그의 태실비는 이곳에 있으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명산, 명당에 대한 관심은 깊고도 깊은가 보다.(...) 모퉁이를 돌아가자 멀리 고씨동굴로 건너는 다리가 보인다. 임진왜란 때에 횡성 고씨 일가족이 이 동굴 속에 피신하 여 난을 피한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굴 속에는 그때 밥을 짓기 위해서 불을 땐 그을린 흔적과 솥을 걸었던 자리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천연기념물 제219호인 이 고씨동굴은 석회동굴로 총 길이는 3,000m이고 주굴이 1,800m 이며 나머지 굴이 1,200m쯤 된다. 굴 속으로 들어가면 넓은 광장 3, 4개가 있고 동굴의 지질연대는 4억 년 내지 5억 년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종유석과 석순의 전시장'이라고 부를 만큼 장엄한 경관이 산재해 있기 때문에 수많은 관광 객들과 수학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고씨동굴을 눈앞에 두고 바람은 잔잔히 불고 아카시아 나뭇잎들은 살며시 흔들거린다. 일행들은 어서 쉬어야지 하는 천삼백 리 한강 네 번 째를 걷는다. 영월 거운리에서 단양 도담삼봉까지 65

66 일념 하나로 서둘러 걸어가다가 다리 아래 등나무 정자를 발견하고는 그곳에 자리를 잡고 오고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다본다. 이곳에서 태백 봉화 88국도와 단양 895번 지방도로로 길은 나뉜다. 각동교 아래로 래프팅하는 사람들이 보트에 몸을 실은 채 노를 젓고 있다. 남한강은 이제 옥동천을 받아들인다. 영월군 상동읍 천평리 구룡산 동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영월군 하동면 대아리 맛밭까지 56km의 여정을 마치고 남한강에 합류하는 옥동천으로 인하여 남한강은 더욱 깊어지 고 넓혀진다. (...) 강 건너 건너던 맛밭나루에는 배 한 척이 매어 있고 하동초교 옥동분교는 청소년 야영장으로 바뀐 채 태극기만 바람 에 펄럭거리고 있다. 강 건너 저 산 너머에는 다섯 마리의 용이 내려오는 형국이라는 오룡골이 있다고 하는데, 옛날 에는 여러 집이 살았지만 지금은 한 집만 남았다고 한다. 다리도 없고 물도 건널 수 없는 불편함을 무릅쓰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살아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괴목마을을 지나며 날은 흐려지고 길 위쪽에 물맛이 아주 좋 은 샘골마을이 있다는데 지친 몸들이라 올라갈 기력이 없다. 드디어 여정은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에 이른다.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전설이 서려 있는 단양군에 접어들면서 우리 일행을 반기기라도 하듯 바람은 시원스레 불어 온다. 길가에는 산앵두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빨간 앵두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한 주먹씩 따서 입에다 털어넣고 발 걸음을 옮기는데 길가의 주차장에는 래프팅클럽, 유로레포츠, 해병레저스쿨, 강산레저이벤트, 동강레포츠, 그린투어 클럽, 레저라인, 단양레포츠 등 래프팅을 주선하는 간판들을 매단 컨테이너들이 줄지어 서 있다. 그러나 아직 철이 이른지 사람은 보이지 않고 매미 소리만 정적을 깨뜨리고 있을 뿐이다.(...) 또한 이곳 영춘으로 1894년 당시 영국 왕실의 국립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가 한강의 배를 타고 올라왔는 데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읍의 관아는 크고 불규칙하게 여기저기 서 있고, 훌륭한 출입문과, 해뜰 때와 해질 때에 관청이 열리고 닫히면서 귀가 먹을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북과 그밖의 기구들을 가지고 있다. (백성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인정되지 않 은) '훌륭한 관리'의 많은 돌비석, 하늘에 봉사한 희맹사들을 위한 넓은 터, 서원, 매우 더럽고 황폐해진 왕의 누각 등 이 있다. 모두가 공손한 것은 아닌 군중들이 관청까지 우리를 따라왔는데, 나는 그곳에서 금강산까지의 길에 대한 정 보를 얻기를 바랐다. 관아를 들어갈 때 하급 관리는 매우 오만했다. 잠시 동안 그의 불쾌한 행동을 참고 나서야 더러 운 방으로 안내를 받았는데, 그곳에는 경멸적이고 악의 품은 얼굴을 하고서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또가 담뱃대 를 옆에 두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동양에서는 개인 면담이 드물었기 때문에, 그가 하인을 통해 짧은 대답을 내릴 때 까지 우리는 뒤에서 몰려드는 군중들의 압력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입구 바깥에 서 있었다. 이것이 내가 한국 관아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것이다. 버드 비숍 여사가 왔을 무렵 그때 이곳 영춘군에는 1,500여 명쯤의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한갓진 시골 면 소재지일 뿐이다.(...) 산딸기, 오디, 버찌에 앵두까지, 먹기만 했는가. 아침에 따온 오디에 소주를 부어 즉석 오디주를 만들어 저녁밥상의 반주로 들었고, 늦게사 딴 오디는 내일 또 반주로 먹기 위해 냉장고에 담아두었으니 이보다 더 아름다운 해찰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어두워오는 남한강변에서 밀려오는 피로와 쓸쓸함으로 저물어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또 바라 천삼백 리 한강 네 번 째를 걷는다. 영월 거운리에서 단양 도담삼봉까지 66

67 보고 있다. 흐르고 흘러가는 강물은 멈춤이 없는데 내 생각은 자꾸자꾸 끊어지기만 하고 그 끊어지는 기억 속으로 김 지하 시인의 시 한 편이 자막처럼 펼쳐진다. 남한강에서 김지하 덧없는 이 한때 남김없는 짤막한 시간 머언 산과 산 아득한 곳 불빛 켜질 때 둘러봐도 가까운 곳 어디에도 인기척 없고 어스름만 짙어갈 때 오느냐 이 시간에 애린아 내 흐르는 눈물 그 눈물 속으로 내 내쉬는 탄식 그 탄식 속으로 네 넋이 오느냐 저녁놀 타고 어둑한 하늘에 가득한 네 얼굴 이 시간에만 오느냐 남김없는 시간 머지않아 외투깃을 여미고 나는 추위에 떨며 낯선 여인숙을 찾아나설 게다 먼 곳에 불빛 켜져 주위는 더욱 캄캄해지는 시간 이 시간에만 오느냐 짤막한 덧없는 남김없는 이 한때를 천삼백 리 한강 네 번 째를 걷는다. 영월 거운리에서 단양 도담삼봉까지 67

68 애린 노을진 겨울강 얼음판 위를 천천히 한 소년이 이리로 오고 있다.(...) 온달산성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온달산성 관광단지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산신당을 지나 가파른 길에 오르자 아침인데도 금세 땀은 온 몸에 흐르는데 바람 한 점 없다. 뒤따라오는 진재언 씨는 "아무래도 온달장군은 전쟁하다 죽은 것이 아니라 이 산성 을 오르다 숨이 막혀 죽었을 것이야" 하고 말한다. 정말 그 말이 일리가 있을 만큼 가파른 길이다. 몇 년 전 이 산성을 오를 때만 해도 보수가 한창이었는데 성은 번듯하게 쌓여져 있고 성을 올라가는 데에는 나무 사 다리를 세워놓았다. 온달산성의 정상에는 미세한 바람이 불고 사람들은 미처 못 쌓은 성을 쌓느라 발파작업이 한창이 다. 안개 속에 아스라한 저 아홉 개의 봉우리 저편에 우리나라에서 손 꼽을 만큼 큰 절인 구인사가 있고 그 뒤편에 소백산이 있다.(...) 덕천교를 지나면 단양읍 덕천리에 접어든다. 좋은 샘이 있어서 덕천리라 이름 지은 덕천리에는 아평리로 건너는 덕천 나루가 있고 웃덕천에서 매포면 도담리로 가는 나루가 웃덕천나루였다. 사람들에게 들은 바로는 아랫덕천에서 도담으 로 건너는 다리가 있다는데 덕천교를 지나서 물어보니 잘못 왔단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쉬고서 자신있게 얘기해 주는데 어쩌겠는가. 다시 다리를 건너가서 고수고개를 넘어 가리라 마음먹는다. 그런데 길은 사뭇 오르막길이다. 김 형곤 씨는 오르막길은 날아갈 듯하다고 신나하지만 올라간 만큼 다시 내려가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강 건너 덕천마을은 안개 속에서 평안하게 들어앉아 있고 바로 그 아래가 여천리이다. 비숖여사의 <한국과 이웃나라들>에는, 한강 훨씬 상류의 매우 아름답고 호수처럼 생긴 지역에는 최근에 버려진 마 을이 있었는데, 호랑이들이 계속해서 주민들을 물어갔기 때문이었다. 고 실려 있는 곳이다. 여천리의 선돌산 중턱 에 큰 바위가 호랑이 바우로 호랑이가 살았던 곳이며, 웃말 북쪽에 있는 구남골( 九 男 谷 은) 호랑이가 아들 아홉 형제 를 다 물어 갔다는 곳이다. (...) 그런데 그 아래 옛 철길로 강을 따라 내려갈 수 있는 길을 놓치고 만 것은 두고두고 억울한 일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그들과 그 지역을 잘 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고 그 밑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딴 길로 들어, 두어 시간을 허 비하게 된 것이다. "길은 잃을수록 좋다"라는 내 좌우명이나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가장 일찍 온다"는 크롬웰의 말을 실천하지 않은 바로 내 탓일 따름이다. 산길을 굽이 돌아 내려가자 단양읍이다. 이색은 그의 시에서 "새벽에 단양 길을 향하니, 자석이 구름 병풍을 열었다" 하였고 최연은 그의 시에서 "여염이 시내를 끼고 있으니 뽕나무와 삼이 빽빽하고, 소나무와 잣나무가 구름에 솟았으 니 동학 洞 壑 이 그윽하다" 하였다. 단양읍에서 도담삼봉으로 가는 길은 거꾸로 돌아가는 길이라서 흥조차 나지 않는 다. 돌고 돌아 단양팔경 중의 하나인 도담삼봉에 도착한 것은 늦은 4시 20분이었다. 천삼백 리 한강 네 번 째를 걷는다. 영월 거운리에서 단양 도담삼봉까지 68

69 영월읍 거운리에서 영춘을 지나 단양에 이르는 길이 네 번째 여정에 펼쳐집니다. 동강과 서강, 그리고 상동천까지 합 쳐져 유장하게 흐르는 남한강을 따라 걸으실 분들의 참석을 바랍니다. 천삼백 리 한강 네 번 째를 걷는다. 영월 거운리에서 단양 도담삼봉까지 69

70 신록의 계절에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다 :29 신록의 계절에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다. 민족의 성산 지리산 자락에 펼쳐진 지리산 둘레길을 신록의 계절 유월 둘째 주에 걷습니다. 하동에서 구례에 이르는 지리산 둘레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덕유산을 지난 백두대간이 육십령과 영취산을 지나 남원시 인월면의 팔령재를 거쳐 지리산에 이르는데 팔령재를 지나면 봄에 지리산철쭉제 가 열리는 고리봉이고, 정령치를 지나 만복대를 넘어서면 노고단이 지척에 있다. 이 산이 지리산인데 택리지 에 실린 지리산( 智 異 山 )의 기록을 보자. 지리산 智 異 山 은 남해 南 海 가에 있는데, 이곳은 백두산의 큰 산줄기가 끝난 곳이다. 그런 까닭에 이 산의 다른 명칭 을 두류산 頭 流 山 이라고 한다. 세상에서는 금강산을 봉래산 蓬 萊 山 이라 하고, 지리산은 방장산 方 丈 山 이라 하며, 한라산 을 영주산 瀛 洲 山 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삼신산 三 神 山 이다. 지리지 地 理 誌 에는 지리산을 태을성신 太 乙 星 神 이 사는 곳이며, 여러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하였다. 계곡이 서리어 뒤섞였고 깊고 크다. 지리산은 남해 가에 있는데 이는 백두산의 큰 줄기가 다한 곳이므로 산의 다른 이름이 두류산이다. 세상에서는 금강 산을 봉래산, 지리산은 방장산, 한라산을 영주산이라 하는데, 소위 삼신산이다. 지지( 地 誌 ) 에는 지리산을 태을선 인( 太 乙 仙 人 )이 사는 곳이며, 여러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한다. 계곡이 서리어 뒤섞였고, 깊고 크다. 지리산은 백두산에서 비롯된 백두대간이 끝맺음 되는 산으로 높이는 1915미터, 산의 둘레는 8백여 리에 달한다. 전라 북도 전라남도 경상남도 등 세 개 도와 남원시 구례군 하동군 산청군 함양군 등 다섯 개 군에 걸쳐 있는 산 으로 총 면적이 438.9평방킬로미터에 이른다. 동북쪽에 있는 주봉인 천왕봉(1915m)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칠선봉 (1586m) 덕평봉(1522m) 명선봉(1586m) 토끼봉(1534m)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 등과 동쪽으로 중봉 (1875m) 하봉(1781m) 싸리봉(1640m) 등의 높은 산들로 이루어진 이곳 지리산은 노고단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주능 선만 해도 42킬로미터쯤 된다. 지리 는 원래 산을 뜻하는 두래 에서 유래된 말인데, 두류산 백두산에서 흘러내려 이루어진 산이라고 설명하 는 사람도 있다. 서산대사 휴정은 이곳 지리산을 웅장하나 수려함은 떨어진다고 표현했지만 이중환은 지리산을 전국의 12대 명산 중 의 하나로 꼽았다. 풍년과 흉년을 모르는 산 지리산 신록의 계절에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다. 70

71 이중환은 다시 흙의 성질이 두텁고 기름지므로 온 산이 모두 사람이 살기에 알맞은 곳이다. 산 속에는 백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많은데, 바깥쪽은 좁지만, 안쪽은 넓기 때문에 가끔 사람이 발견하지 못한 곳도 있으므로, 나라에 세금 稅 金 도 바치지 않는다. 땅이 남해에 가까워 기후가 따뜻하므로 산속에는 대나무가 많고, 또 감과 밤이 대단히 많아서 가꾸는 사람이 없어도 저절로 열렸다가 저절로 떨어진다. 높은 산봉우리 위에 기장이나 조를 뿌려 두어도 무성하게 자라지 않는 곳이 없다. 평지의 밭에도 모두 심을 수 있으 므로 산 속에는 촌사람과 섞여서 살아간다. 스님이나 속인들이 대나무를 꺾고, 감과 밤을 주워서 살기 때문에 수고하지 않아도 생리 生 利 가 족하다. 농부와 공인들 역시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도 모두 충족하게 살아간다. 이런 까닭으로 이 산에 사는 백성들은 풍년과 흉년을 모르고 지내므로 부산 富 山 이라고 부른다.. 고 하였는데, 이중환의 말처럼 지리산은 수많은 사람이 살 수 있 는 한국의 대표적인 육산이다. 그래서 조용헌 선생은 골산( 骨 山 )과 육산( 肉 山 )을 빗대어 사는 것이 외롭다고 느낄 때는 지리산의 품에 안기고, 기운이 빠져 몸이 쳐질 때는 설악산의 바위 맛을 보아야 한다. 고 말했다. 남원의 동쪽에 자리 잡은 지리산이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 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지리산은 부의 동쪽 60리에 있다. 산세( 山 勢 )가 높고 웅대하여 수백 리에 웅거하였으니, 여진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내려 여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두류( 頭 流 )라고도 부른다. 혹은 백두산의 맥은 바다에 이르러 그치는데 이곳에서 잠시 정류하 였다 하여 유( 流 )자는 유( 留 )로 쓰는 것이 옳다 한다. 또 지리( 地 理 )라고 이름하고 또 방장( 方 丈 )이라고도 하였으니, 두보( 杜 甫 )의 시 방장삼한외( 方 丈 三 韓 外 ) 의 주( 注 )와 통감( 通 監 ) 집람( 輯 覽 )에서 방장이 대방군의 남쪽에 있 다. 한 곳이 이곳이다. 신라는 이것으로 남악( 南 岳 )을 삼아 중사( 中 祀 )에 올렸다. 고려와 본조에서도 모두 이에 따랐 다. 산 둘레에는 십 주( 州 )가 있는데, 그 북쪽은 함양이요, 동남쪽은 진주( 晋 州 )요, 서쪽에는 남원이 자리 잡고 있다. 그 기이한 봉우리와 깍은 듯한 절벽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동쪽은 천왕봉과 서쪽의 반야봉( 般 若 峯 )이 가장 높으 니 산허리에 혹 구름이 끼고 비가 오며 뇌성과 번개가 요란해도 그 위 산봉우리는 청명하다. 해마다 가을 하늘이 높 으면 새매가 북쪽에서 모여드는데 열군( 列 郡 )의 사람들이 다투어 그물을 쳐서 잡는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태을( 太 乙 : 북극의 신)이 그 위에 살고 있으니 많은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며, 용상( 龍 象 )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도 한다. 지리산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숨어들었던 곳이다. 조선중기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에는 지리산에는 병 년과 흉년이 없는 피난 보신의 땅을 찾는 정감록을 믿는 사람들이 찾아들었고,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뒤에는 혁명을 꿈꾸다 실패한 동학도들이 찾아와 후일을 도모하기도 했다. 그들은 지리산에 들어와 1차 2차 3차 의병전쟁의 주역 이 되었고, 진주 형평사운동( 衡 平 社 運 動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백정의 신분해방운동)을 배후조종하기도 했다. 그들 중 김단야 같은 사람은 조선공산당을 만들기도 했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이 지리산에 들어와 수없이 죽어가고 포로가 된 비운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누군가의 말처럼 한국의 지리산은 스페인내전 당시 파르티잔 들이 활동했던 무대와는 판연히 달랐는데도 지리산으로만 가면 살 길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수없이 들어왔다가 실 패하고만 한이 서린 산이다. 지리산은 한민족의 어머니와도 같은 산, 그 이상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산이 민족 신록의 계절에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다. 71

72 의 성산( 聖 山 )이다. 지리산 남쪽에 하동군 화개와 악양동이 있다. 고려 인종 때에 기인이었던 한유한( 韓 惟 漢 )은 처음에 벼슬을 하고 있었 으나, 이자겸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장차 나라에 환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가족을 데리고 악양으로 숨어들었 다. 조정에서 그의 재주를 아껴 사방으로 찾았으나 그는 악양동에 숨어서 세상에 나타나지를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신선이 되었다고 했는데, 훗날 지리산의 화엄사 연곡사 신음사 쌍계사 등에서 그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 는 신라말기의 학자였던 고운 최치원의 도를 이어받아 세상 사람들이 삼신산이라고 부르는 금강산 한라산 지리산 을 신선을 따라 오가면서 노닐었다고 하는데, 화개동과 악양동이 그의 피신처였다고 한다. 수많은 문신들이 금강산과 더불어 이곳 지리산을 찾았다. 그중 조선초기의 학자인 김종직은 유두류록( 遊 頭 流 錄 ) 에서 천왕봉에 올랐던 일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새벽,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느라고 놀빛이 눈부시다. 새벽밥을 재촉해 먹고 옷자락을 걷어붙인 후 석문을 거쳐 오 르는데 밝히는 풀과 나무마다 얼음이 맺혔다. 성묘(지리산 여신묘)에 들어가 다시 잔을 올리며 천지가 맑게 개어 산 천이 활짝 열린 것을 사례하였다. 그런 후 북쪽 봉에 오르니 비록 나는 기러기라도 우리 위로 날지는 못할 것같이 높 이 오른 것이다. 마침 새로 갠 날씨여서 구름 한 점 없이 맑아 창창 망망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일행에게 물 었다. 먼 곳을 보는 데에 요령이 없으면 나무꾼들이 바라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선 북쪽을 본 후에 동쪽 을 보고 그 다음 남쪽 서쪽을 보되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눈을 옮기면서 보아야 할 것 같지 않은가? 지리산 둘레길 하동권역 1. 산청군 시천면 덕산 ~ 하동군 옥종면 위태리 위태. [ 거리 : 10.3km. 시간 : 4시간. ] 덕산 시천면 사무소(1.7km) 천평교(0.6km) 중태(2.6km) 유점마을(2.1km) 중태재(2.3km) 위태(상촌 : 1 km). 2. 옥종면 위태리 위태 ~ 청암면 중이리 하동호. [ 거리 : 11.8km. 시간 : 5시간. ] 위태(상촌) 지네재(1.8km) 오대사지(0.4km) 오율마을(0.4km) 궁항마을(2.1km) 양이터 마을(0.8km) 양이 터재(1.4km) 본촌마을(2.8km) 하동호(2.1km) 3. 청암면 중이리 하동호 ~ 적량면 동리 삼화실. [ 거리 : 9.3km. 시간 : 4시간. ] 하동호 청암체육공원(0.7km) 평촌마을(1.7km) 화월마을(0.8km) 관점마을(1.0km) 상존티마을회관(2.6km) 존티재(1.2km) 삼화실(동촌마을 : 1.0km) 삼화초등학교(0.3km) 4. 적량면 동리 삼화실 ~ 악양면 축지리 대축. [ 거리 : 16.9km. 시간 : 7시간.] 삼화실(구 삼화초등학교) 이정마을(0.8km) 버디재(0.9km) 서당마을(1.8km) 우계저수지(0.6km) 괴목마을 (1.2km) 신촌마을(1.6km) 신촌재(2.8km) 먹점마을(1.7km) 먹점재(1.1km) 미점마을(1.7km) 구재봉 갈림 길(0.9km) 대축마을(1.8km) 하동읍 읍내리 지리산 둘레길 센터 ~ 적량면 우계리 서당. [ 거리 : 7.1km. 시간 : 2시간. ] 하동읍 바람재(2.5) 관동(갓골 : 1.9) 서당. 신록의 계절에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다. 72

73 5. 악양면 축지리 대축 ~ 화개면 부춘리 원부춘. [ 거리 : 8.6km. 시간 : 5시간. ] 대축 악양천 뚝길(0.3km) 입석(1.9km) 서어 나무숲(2.3km) 웃재(0.5km) 너럭바위(0.3km) 묵답(2.3km) 원부춘(1.0km) 6. 화개면 부춘리 원부춘 ~ 화개면 탑리 가탄. [ 거리 : 12.6km. 시간 : 7시간. ] 원부춘 형제봉 임도 삼거리(4.2km) 헬기장(1.1km) 중촌(1.7km) 정금 차밭(2.0km) 대비촌(0.7km) 백해 (2.8km) 가탄(1.0km) 7. 화개면 탑리 가탄 ~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 거리 : 10.5km. 시간 : 6시간. ] 가탄 법하(0.8km) 작은재(어안동 : 1.1km) 기촌(1.9km) 목아재(3.4km) 송정(3.3km). 산청에서 하동, 그리고 구례에 이르는 지리산 둘레길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을 토요일과 일요일에 걸을 계획입니다. 신록의 계절에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다. 73

74 인제 진동계곡과 원대리 자작나무 숲을 가다 :28 인제 진동계곡과 원대리 자작나무 숲을 가다. 6월 셋째 주 일요일인 16일 인제의 진동계곡과 원대리에 있는 자작나무숲을 찾아갑니다. 유월의 신록아래, 비밀스런 계곡으로 소문이 자자한 진동계곡을 걸으며 일상에 찌든 몸에 활력을 주고 로버트 프루스트의 인생을 노래한 <자작 나무>의 추억을 떠올리며 자작나무숲을 걸을 예정입니다. 점봉산 아래 설피마을에서부터 기린면 방동리까지 이어지는 20km의 계곡. 원시림을 끼고 흐르는 계곡이 사철 절경 을 보여준다. 예전에는 계곡을 따라 가는 길이 비포장이어서 교통이 불편해 원시림이 잘 보존되어 있었지만 도로가 확장되고 포장되면서 훼손된 부분도 있다. 하지만 레프팅 등으로 인파가 몰리면서 오염된 인제의 많은 계곡들 중에서 진동계곡은 사람의 손이 덜 탄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 등 야생화가 지천이고, 기암을 타고 흐르는 폭포와 소가 만들어내는 시원한 소리가 계곡을 울 리는 여름을 지나, 가을이면 빛깔 고운 단풍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겨울이면 하얀 눈이 쌓인 계곡이 최고의 절경 을 이루니, 사계절 언제 찾아도 심신의 먼지를 다 털어버릴 수 있을 멋진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여름철에는 피서객 이 많이 찾지만 다른 곳에 비해서는 한적함을 즐길 수 있는 곳이며 드라이브 코스로도 추천할 만하다. 인제 원대리에 있는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가 자작나무숲길을 따라 걷다가 보면 켜켜이 쌓인 여러 생각의 실타래들 이 풀릴지도 모른다. 백양나무라고 일컬어지는 자작나무 숲에서 그 나무에 기대도 보고 껴안아보기도 하면서 지내다 보면 어느 새 나그네 들도 자작나무로 화할지도 모른다. 자작나무숲에서 나무의 이야기를 듣다가 귀로에 오를 하루기행에 참여를 바랍니다. 인제 진동계곡과 원대리 자작나무 숲을 가다. 74

75 천삼백 리 한강 세 번 째를 걷는다..- 동강 가수리에서 어라연까지 :27 천삼백 리 한강 세 번 째를 걷는다.- 동강 가수리에서 어라연까지- 한강 천삼백 리 두 번째 일정을 마치고 5월 넷째 주 세 번째 여정에 오릅니다. 남한강 물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동강의 절경 중에서도 절경 구간을 걸어갈 이번 여정은 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실감할 수 있는 아름다운 구간입 니다. 산과 산 사이를 유장하게 흐르는 동강의 비경을 걷다가 보면 저절로 신선이 되를 느낄 수 있는 구간입니다. :여정은 정선을 벗어나 신동읍에 접어들고 모퉁이를 돌아가자 독대로 두 사람이 고기를 잡고 있다. "고기가 많이 잡 혀요?"라고 내가 소리치자 "별로 안 잡혀요"라면서 고기를 건져내고 있다. 김성규 씨는 허리가 구부정해진 채 절뚝이 며 지팡이를 짚고 간다. 그래 얼마나 허리가 아프고 물집 잡힌 다리가 아플까. 나는 먹음직스럽게 피어 있는 두릅 몇 송이를 따서 발이 아파 절룩거리며 뒤따라오는 김형곤 씨에게 건넨다. 천삼백 리 한강을 따라 걷는 종주 길에 후송차 는커녕 호송차도 없이 가고 있는 이 안쓰런 나그네들이여. 아무래도 오늘밤 잠자리에선 신음소리가 요란할 듯싶다. 일천 산에 겹겹 푸르름이 가로놓였고 이색은 그의 시에서 정선을 "일천 산엔 겹겹 푸르름이 가로놓였으니 한 가닥 길은 푸른 공중으로 들어간다"고 하였고 곽충룡은 "일백 번 굽이져 흐르는 냇물은 멀리 바다로 향하고 천 층으로 층계진 절벽은 하늘에 의지해 가로질렀네"라 고 하였다. 그토록 궁벽진 산골이라 이 지역에서는 앞산과 뒷산에 빨래 줄을 맨다. 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산과 강은 좋은 이웃이다. 라는 조지 허버트의 말이 가장 잘 들어맞는 지역이 강원도의 영월 평창 정선 지역일 것이다. 강 건너 하매마을의 나루터에는 신동읍 운치리로 건너오는 나룻배 한 척이 정박해 있다. 큰물이 지거나 장마 때에는 고립된 채 살아야 할 하매마을까지 다행히 정선읍에서 버스가 들어온단다. 이렇듯 산이 높고 물이 깊은 오지라서 고 려 때의 한철충은 그의 시에서 "벼랑을 따라 보일 듯 말 듯 가느다란 길이 있구나. 옛 읍이 산을 의지하였는데 산은 성을 이루었네"라고 하였고 정추는 "하늘 모양은 작기가 우물 속에 비쳐서 보이는 것 같고 산의 푸르름은 멀리 구름 위에 가로놓였다"라고 노래했다. 그래서 요 근래에도 이 지역사람들은 자기들의 고장을 두고 "하늘이 세 뼘밖에 되지 않는다"거나 "앞산과 뒷산을 이 어서 빨랫줄을 맬 수 있는 곳" 또는 "닭이 울면 그 소리가 온 고을을 메울 것"이라는 말들을 하고 있다. 또한 안축은 천삼백 리 한강 세 번 째를 걷는다..- 동강 가수리에서 어라연까지- 75

76 그의 시에서 "산마을에 돼지 배부름은 반드시 새벽에 물 먹인 것이 아니요 이웃집 닭이 살쪄도 날마다 훔쳐가는 자 없다"하였다. 번평마을에 와서야 처음으로 가게를 만나지만 그나마 문은 열쇠로 굳게 잠겨 있다. (...) 그 멀고 먼 고갯길을 넘어서자 마을이 나타나고 밭을 매는 아주머니에게 마을 이름을 물어보고서야 이 마을이 소사 임을 안다. 우리가 지나온 것으로 착각했던 소사마을인 것이다. 그 아래쪽에는 연포로 건너가는 소사나루가 있는데 다행히 찻길이 나 있다. 강가에는 두 마리의 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고 문득 바람이 분다. 나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들을 기다리며 강변에 누워 두둥실 흘러가는 흰구름을 바라다본다. 뒤따라온 김성규 씨는 배낭을 내려놓으 며 '아이고고고'를 연발하고 진재언 씨와 김형곤 씨는 상이군인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다리가 아픈 표정이 역력하다. 연포마을 앞 동강에는 세 개의 뼝대(뼝창이라고도 불리는데 깎아지른듯한 선돌을 일컫는다)가 연달아 서 있는데 흡사 작은 마이산을 보고 있는 듯하다. 이곳 연포에는 열 집 정도가 살았다는데 지금은 이해동(44세) 씨 한 집만 살고 있 다. 푸른 나무숲 사이로 작은 동굴이 보이고 운동장과 교실 세 개가 있는 연포초등학교가 있다. 69년 마을사람들이 손수 지었다는 연포초등학교는 99년에 폐교가 되었다. 학교를 마을에서 공동관리하고자 했지만 일 년 임대료 3백만원 을 낼 수가 없어 타지역 사람에게 넘어갔다고 한다. 한국동굴탐험학교 라고 씌어진 간판이 있지만 개점휴업 상태 인 듯 사람들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가정까지 5km, 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곳에 가면 우리가 하 룻밤을 신세져야 할 민박집은 있을까? (...) 우리가 걸어가는 산은 참으로 깊고 깊다. 이렇게 깊은 산골이라서 성현은 그의 시에서 "피곤한 말이 실 같은 가는 길 을 뚫고 가기를 근심하니 어지러운 산봉우리들이 높고 깎아지른 듯하여 겹으로 된 성과 같구나. 바람이 바위틈에서 나오니 대포의 수레가 구르는 것 같고, 물이 마을을 안고 흘러 한 필 흰 비단 가로놓은 것 같다. 몸은 이 세상 백 년 에 두 귀밑이 희어졌고, 물과 산 천리 길에는 벼슬살이하러 다니는 심정이 서럽구나. 난간에 의지해 앉아 동산의 달 을 기다리노니, 밤이 고요하여 시 생각이 오랠수록 더욱 맑아진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떼돈을 벌었던 떼꾼들은 사라지고 아랫길로 갈까 윗길로 갈까 망설이다가 윗길로 오르자 집 한 채가 나타나고 먼저 갔던 김현준 씨가 어서 오라고 손 짓한다. 휴! 오늘 잠잘 곳은 저 집인가. 놉(인부)을 얻어서 고추를 심었다는 거북이마을 정광섭 씨 댁에는 몇 사람이 앉아 김치전에 소주 한 잔씩을 나누고 있었다.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6반 연포. 동강댐 수몰지역이라서 집의 개보수는 물론 무엇 하나 고치지 못했다는 정광섭 씨의 집은 내가 어릴 적 살았던 고향집을 떠올리게 한다. 외양간에선 두 마리의 소가 정답게 여물을 먹고 있고 전기가 들 어온 지도 불과 3년이라고 한다. 정광섭 씨 집의 부엌은 지금도 장작불을 때고 있었다. 느닷없는 손님들이 닥치자 영월 읍내에 살고 있다는 큰딸이 돌을 갓 지난 애를 등에 업고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방을 치우고, 소죽을 끓이는 큰 솥에다 물을 가득 부어놓고 장작불을 때기 시작한다. 저녁밥은 금세 나왔다. 취나물에다 여러 가지 고기를 넣고 끓인 매운탕. 그중에서도 일품이 민물고기조림이었다. 쫀득쫀득하면서 감칠맛 나는 조림맛의 비결은 불에 약간 구운 뒤 조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천삼백 리 한강 세 번 째를 걷는다..- 동강 가수리에서 어라연까지- 76

77 내가 뗏사공들 돈벌이가 그만큼 좋았기 때문에 떼돈을 번다는 말이 생겼다는데 정말로 떼돈을 벌었느냐고 묻자 "그 렇지요. 지금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지만 상상도 할 수 없는 돈을 벌었다고 해요. 열여덟, 열아홉에 뗏목을 탔는데 떼 타가지고 돈 벌어서 술값으로 다 나가고 순전히 재미로 했지요. 갔다와서 또 나무를 모아가지고 또 내려가고 그랬지 요. 떼돈이라는 것이 뗏목(뗏목은 떼 群 와 목 木 이 합쳐진 말이다) 띄워서 번 돈이지, 떼돈이 정말로 왕창 버는 돈이라 는 뜻은 아니지요. 아우라지에서 여그까장 육십 리쯤 되는디 물 좋을 적에는 한나절이면 오지요. 그런디 황새여울이 나 된꼬까리여울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어요. 거그 가면 굵은 바위들이 많이 있는디 바위마다 이름들이 있어요. 관일 이가 뗏목을 끌고 가다 부딪쳐서 죽은 관일이바우, 승문이가 부딪쳐 죽은 승문이바우 등 많이도 있어요. 두태바우여 울을 지나면 된꼬까리여울이 있는디 저그서부터 영월까지는 여울이 없으니까 술집들이 잘 되었지요. 그래서 '황새여 울 된꼬까리여울 떼를 지어놓고 만지에 전산옥이야 술판 차려놓아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하고 노래를 불렀지 요."(...) 백룡동굴은 강 건너에 굽이굽이 일곱 고개가 붙어 있다는 칠족령(좌족령)을 넘어 돌아갈 수도 없고 강을 건너기로 한다. 주인아주머니가 저 편으로 우리를 강 건네주고 그 강기슭을 따라 걸은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절매마을에 도착하자 더욱 난 감하다. 옛날에 절이 있었기 때문에 절매라고 이름 지은 이 마을에는 두 집이 살고 있는데 다 비어 있고 문에는 자물 쇠만 채워져 있다. 배라도 있을까 두리번거려도 저 건너 문희마을의 나루터에만 나룻배가 매어 있으니 어떻게 한다. 011, 018, 017, 016 모두가 먹통이니 사람을 부를 수도 없고, 우리들은 난감해진다. 결국 김형곤 씨가 옷을 벗고 팬티 바람으로 헤엄을 쳐서 건너 배를 몰고 오겠다고 건너갔지만 배는 굵은 와이어로 매어져 있고 자물쇠까지 채워놓았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다시 김현준 기자가 헤엄을 쳐서 건너가도 소용이 없다. 외딴섬 절해고도에 갇힌 채 우리들의 앞날은 어둡기만 하다. 강 건너 백룡동굴이 있다는 푸르른 절벽을 바라보며 수 영도 못 배운 내가 한심하기만 하다. 김현준 기자가 웃통을 벗어제친 채 문희마을(문희마을의 옛이름은 뇌른마을인데 산 아래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는 마 을이라는 뜻이다)로 가서 마을주민 이학균 씨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망치로 그 와이어를 끊어서 무당소라고 이름 지 은 강을 건너가게 된 것은 두 시간이 훨씬 넘어서였다. (...) 강가의 뽕나무엔 오디가 주렁주렁 사람 소리에 놀란 물새들이 강가에서 날아오르고 그 날아오르는 날개깃 사이로 새카만 오디가 다닥다닥 열려 있는 뽕나무가 보인다. 작지만 달디 단 오디 앞에서 우리들은 떠날 줄을 모른다. 가긴 가야 하는데 입술도 손도 새카맣다. 길가에 피어난 것이 어디 오디뿐인가. 새푸른 새 머루가 주렁주렁 열려 있고 피어난 나리꽃 옆에 빨간 산딸기가 소담 하게 익어 있다. 유년의 내 고향집에는 우리 마을에서 제일 먼저 열리고 제일 맛이 좋았던 오디가 열리는 뽕나무가 있었다. 나는 학교가 파하기 무섭게 그 뽕나무에 올라가 오디를 따먹곤 했었다. 천삼백 리 한강 세 번 째를 걷는다..- 동강 가수리에서 어라연까지- 77

78 중이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눈독을 들인다더니 오디, 딸기에 눈 멀다 보니 한참을 늦었다. 어라연에 도착하 자 줄 배로 사람을 건네주는 나룻배 한 척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아침녘이라 없으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이다. 하긴 백 년도 못 사는 사람들이 천 년의 걱정을 하고 살지 않는다던가. 영월읍 거운리 길운마을 안용남(58) 아주머니는 물이 없어서 줄로만 갈 수 없다고 하면서 노 젖는 솜씨가 수준급이다. 동강의 절경 중 제1경으로 꼽힐 만큼 아름다운 어라연은 상선암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물길이 갈라져 흐른다. 신 증동국여지승람 에 어라연에 관한 이야기가 이렇게 실려 있다. 어라연은 영월군 동쪽 거산리에 있다. 세종 13년 이곳에 큰 뱀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자꾸 이곳에서 변을 당하곤 했 다. 하루는 그 뱀이 물가의 돌무더기 위에 허물을 벗어놓았다. 그 길이가 수십 척이고 비늘은 동전만하고 두 귀가 있 었다. 이곳 사람들이 비늘을 주워 조정에 보고하니 나라에서 권극하라는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하였다. 권극하가 연 못 한가운데에 배를 띄우자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서 그 뱀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후로는 이곳에 뱀이 보이지 않았 다고 한다.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처럼 이곳 어라연 부근에는 뱀들이 많다고 한다. 만지나루 뒷산에 오르다 보면 지금도 뱀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상선암, 하선암, 중선암이라는 세 개의 바위와 흐르는 동강 물줄기가 빚어낸 이 어라연의 이름에는 세 가지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어라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 그 첫 번째이고, 물 반 고기 반일 정도로 물고기가 많아서 어라연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두 번째이고, 상선암에 나 있는 하얀 이끼가 물 에 차면 마치 고기떼가 비늘을 반짝이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세 번째이다. 그러저러한 사연들 속에 전해오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으니 삼촌이었던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죽임을 당했던 비운의 임금 단종에 얽힌 이야기이다. 세조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단종의 혼백이 이곳저곳을 떠돌던 중에 어라연 으로 오게 되었다. 단종의 혼백이 갈 곳을 잃어 멍한 채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자 물고기들이 모두 머리를 들고 단 종의 혼백에게 눈물로써 이제 그만 제 갈 길로 가시라고 간청을 하였다. 그 정성을 받아들인 단종은 그 길로 태백산 으로 들어갔고 그 후 단오 때만 되면 아무리 날이 맑다가도 큰비가 내려 어라연 일대를 구슬프게 적신다고 한다. 이번 여정은 인원을 선착순 90여명으로 하고, 배를 타는 관계로 3천원을 더 책정하였습니다. 천삼백 리 한강 세 번 째를 걷는다..- 동강 가수리에서 어라연까지- 78

79 다시 돌아본 동학농민혁명의 현장, :25 다시 돌아본 동학농민혁명의 현장, 오랜만에 정읍 일대의 동학농민혁명의 현장을 답사했다. 태인의 피향정, 만석보, 말목장터, 황토현 기념탑, 고부 관아등 1994년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즈음하여 그렇게 많이 다녔던 역사의 현장, 그 현장들이 20여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변한 것은 별로 없었다. 전두환 정권 당시 세웠던 황토현 기념관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재임하던 시절 많은 돈을 들여서 기념관을 다시 지은 것을 빼곤 더할 것도, 뺄 것도 별로 없는 동학의 현장에서 나는 수운 최제우 선생이 한울님으로부터 처음 들었다는 오심즉여심 吾 心 卽 汝 心, 즉 내 마음이 네 마음이고, 네 마음이 네 마음이다 를 얘기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한울님이 깃들어 있다는 얘기를 하면서도 세월의 무상함을 마음깊이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 속에서 가만히 머물러 있거나 퇴보하고 있는 역사, 그 역사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그래도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 사람들의 진지함을 위해 나는 목청 높여 이야기하는데, 그 이야기 사이로 피던 꽃이며, 바람에 흔들리던 보리밭, 봄은 봄인데 봄 같지 않은 봄이라서 그런가? 스산하면서 설레던 마음속으로 파고들던 시 한 편이 정희성 시인의 정희성 시인의 시 <황토현에서 곰나루까지> 였다. 이 겨울 갑오농민전쟁 전적지를 찾아 황토현에서 곰나루까지 더듬으며 나는 이 시대의 기묘한 대조법을 본다 우금치 동학혁명군 위령탑은 일본군 장교출신 박정희가 세웠고 황토현 녹두장군 기념관은 전두환이 세웠으니 광주항쟁 시민군 위령탑은 또 어떤 자가 세울 것인가 생각하며 지나는 마을마다 텃밭에 버려진 고추는 상기도 붉고 조병갑이 물세 받던 만석보는 흔적 없는데 다시 돌아본 동학농민혁명의 현장, 79

80 고부 부안 흥덕 고창 농투사니들은 지금도 물세를 못 내겠다고 아우성치고 백마강가 신동엽시비 옆에는 반공순국지사 기념비도 세웠구나 아아 기막힌 대조법이여 모진 갈증이여 곰나루 바람 부는 모래펄에 서서 검불 모아 불을 싸지르고 싸늘한 성계육 한 점을 씹으며 박불똥이 건네주는 막걸리 한잔을 단숨에 켠다. 내년이 두 번째 맞는 2014년 갑오년인데,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여 이 땅에 그 슬프고도 거룩한 역사를 다시금 되살릴 것인지, 아무런 대책도 계획도 세우지 못하는 현실을 생각하며 바라본 황토현 일대와 고부 일대가 어찌 그리도 흐릿하기만 하던지, 계사년 사월 스무이틀 다시 돌아본 동학농민혁명의 현장, 80

81 <소백산 자락 길>중 온달 평강 로맨스 길을 오월에 걷는다 :24 <소백산 자락 길>중 온달 평강 로맨스 길을 오월에 걷는다. 오월 둘째 주 일요일 하루 소백산 자락길 중 단양 구간의 온달평강 로맨스 길을 걷는다. 남한강을 굽어보며 걷는 이 길은 온달산성과 나라 안의 이름난 절집인 구인사, 그리고 남한강의 정취를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는 길이다. 온달평강 로맨스길은 소백산 자락길 12구간 가운데 단양지역에 위치한 구간으로 4시간이 소용되는 코스다. 소백산 자락길은 소백산 둘레의 3개도(충북, 경북, 강원), 4개 시군(단양, 영주, 영월, 봉화) 170km3를 잇는 문화생태탐 방로로 단양과 영주 구간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2011년에는 한국 최고의 관광지인 생태관광의 별 에 선정되는 영 예를 얻기도 했다. 소백산 자락길은 전체 12자락으로 나뉜다. 그중 단양 지역의 대표 구간이라 할 수 있는 길이 6자락길이다. 소백산 자 락길은 각 구간마다 황금구만량길, 가리점마을옛길, 십승지의풍옛길 등 테마별로 이름이 붙어 있다. 단양의 6자락길에는 온달평강 로맨스길 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이 붙어 있다. 바로 온달 장군과 평강 공주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지는 온달산성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구인사 救 仁 寺 는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永 春 面 ) 소백산 기슭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 천태종의 총본산이다. 전국에 수백 개의 말사를 거느리고 있는 구인사는 1966년 8월 30일에 창건되었는데, 현재 단일 사찰로 국내 최대의 신도수를 자랑하고 있다. 이절을 창건한 사람은 한국 천태종의 중흥조( 中 興 祖 )인 삼척 출신의 상월원각( 上 月 圓 覺 :속명 朴 準 東 ) 으로 그는 1942년 중국의 티베트와 오대산( 五 臺 山 )의 문수도량( 文 殊 道 場 ) 등을 순례하고, 해방이후에 귀국하여 1946년 소백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소백산의 비로봉. 연화봉 국망봉. 신선봉등의 구봉팔문 九 峰 八 門 중 제 4봉인 수리봉 밑, 풍 수지리설에서 말하는 금계포란형의 한가운데인 연꽃모양에 터를 잡고 포교를 시작했다. 그 뒤 구인사는 급성장하여 대가람( 大 伽 藍 )으로 발전하였는데, 이 절은 천태종 중흥 3대 지표인 애국불교. 대중불교. 생활불교의 참뜻을 현실 속에서 실천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기 이 태고종단은 염불( 念 佛 ) 중심의 의례종교를 탈 피하고, 생활 속에 자비를 실천하는 생활 실천 불교를 지향하기 때문에 낮에는 승려들도 작업복을 입고 일하며, 주 경야선( 晝 耕 夜 禪 )으로 자급자족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아스라한 그리움처럼 확연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남한강을 바라보는 내 눈앞에 흰나비가 떼를 지어 날아가고 있다. <소백산 자락 길>중 온달 평강 로맨스 길을 오월에 걷는다. 81

82 바보온달이라고 불리던 온달이 평강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는 삼국사기 열전의 온달전은 백제의 무왕 설화와 흡사하다. 삼국사기 의 온달전에는, 영양왕 1년(590년) 온달이 왕에게 "신라가 우리 한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으나 그곳 백성들은 통한하여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저에게 군사를 주신다면 가서 반드시 우리 땅을 되찾겠습니다" 한 뒤 "계립령과 죽령 서쪽의 땅을 되찾지 못한다면 다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하고 출정하였으나 아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접전을 벌리다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정황과 산성의 형태로 보아 온달산성은 고구려에서 쌓은 것으로 보여지지는 않고 신라 쪽에서 쌓은 성 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온달산성 바로 아래에 온달동굴이 있다. 1979년에 천연기념물 제261호로 지정된 온달동굴은 석회암 천연동굴 로서 지질연대는 4~`5억 년 전이며 동굴의 형성 시기는 10만 년 내로 추정된다. 남한강변의 물이 휘돌아가는 곳에 동 굴의 입구가 있으므로 수위가 높아지면 동굴이 물에 차므로 진동굴성 생물은 찾아볼 수가 없지만 지형 경관이 매우 화려하고 아름답다. 신정일의 <한강 따라 짚어가는 우리 역사> 중에서 온달평강 로맨스길은 총 길이 11.2km3로 4시간 정도 걷는 코스다. 보발분교~용소동~고드너머재~소백산화전체험 테마 숲길~방터~온달산성~온달관광지로 이어진다. 신록의 계절 오월에 남한강과 소백산의 아름다운 정취에 젖어서 걷고 싶은 분들의 참여를 바란다 <소백산 자락 길>중 온달 평강 로맨스 길을 오월에 걷는다. 82

83 계사년의 사월 초파일 삼사 三 寺 기행과 영남지방의 문화유산을 찾아 :52 계사년의 사월 초파일 삼사 三 寺 기행과 영남지방의 문화유산을 찾아 계사년의 삼사기행이 봉암사와 김용사. 대승사 그리고 영남지방의 문화유산을 찾아 떠납니다. 일 년에 사월 초파일 하루만 문을 여는 봉암사와 문경지역의 아름다운 절, 대승사와 김용사를 찾아갑니다. 예천의 용 문사 아래 초간정을 답사한 뒤 병산서원에서 하룻밤을 묵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 하회마을로 가는 길을 걷고, 영주의 무섬과 소백산 자락 길, 그리고 죽령 옛길을 답사한 뒤 돌아 올 예정입니다. 봉암사는 스님들의 수도도량이라서 일 년에 하루만 절을 개방한다. 그래서 절을 개방하는 사월초파일이 면 전국각지에서 모인 신도들로 가은에서 괴산에 이르는 지방도로 뿐만이 아니라 입구에서 절 안까지 사람들의 발길로 차 들이 꼼짝을 할 수가 없다. 가끔씩 절에 가면 공부하는 선방 근처에서 떠든다고 벽력같이 화를 내는 스님들을 볼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고개를 갸웃 둥 거린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절해고도에 갇혀 있는 사람처럼 어느 소음에도 동요하지 않 고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어쩌겠는 가, 그것은 내 생각이고, 저마다 스스로가 정한 계율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을, 사 람들의 발길이 잦아서, 또는 말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수도에 방해가 되면 안 되겠지 생각하며 봉암사가 자리 잡은 희 양산 자락에 접 어든다. 이른 새벽인데도 봉암사 입구는 차들이 너무 들어차 천천히 입구에서부터 걸어 들어간다. 날이 아 직 차고 지대가 높아선지 하늘에 별들이 주먹만큼이나 크다. 가로등은커녕 불빛도 없는 길을 어둠 속에 걸어가며 이 길이 얼마나 아름다 운 길인가를 사람들에게 설명해주지만 어둠 속에서 이 길의 아름다움을 느낄 사람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 다. 밤길은 의외 로 멀다. 얼마쯤 올랐을까? 불빛이 보이고 봉암사에 이르러 가득 찬 사람들을 헤집고 초파일 날 새벽예불 에 동참한다. 봉암사는 경상북도 가은읍 원북리 희양산( 噫 陽 山 )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사찰로써 대한불교 조계종 제8 교구 본사인 직 지사( 直 指 寺 )의 말사이다. 신라 선문구산( 禪 門 九 山 ) 중 의 한 곳인 희양산파의 종찰( 宗 刹 )인 이 절은 신라 헌강왕 5년인 879년에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지증대사( 智 證 大 師 ) 도헌 道 憲 이 창건한 절이다. 봉암사에 있는 지증대사 비 문에 의하면 도 헌은 성이 김씨로 이름은 도헌 道 憲 이고 자는 지선 智 詵 이며, 서라벌 사람이다.경주 사람인 김찬양의 아들 로 어려서부터 불도에 뜻을 두고 부석사에서 출가하였다. 키가 8척에 기골이 장대하고 말소리가 크고 맑아 참으로 위엄 있으면서 사납 계사년의 사월 초파일 삼사 三 寺 기행과 영남지방의 문화유산을 찾아 83

84 있으면서 사납 지 않은 사람 이었다고 한다. 열일곱에 구족계를 받은 그는 정진에 힘썼고, 그의 나이 스물에는 따르는 사 람이 많았다. 그 는 임금이 경주에 와서 있을 것을 간곡히 요청했는데도 수도인 경주에 나아가지 않고 수행정진에만 힘을 썼다. 그러던 어 느 날이었다. 심충이라는 사람이 희양산에 있는 땅을 내어놓으며 그곳에 절을 짓기를 청하자 와서 보고는 이 땅을 얻은 것은 어쩌면 하늘의 뜻일 것이다. 이곳에 승려들이 살지 않는다면 이곳은 도둑들의 소굴이 될 것이다. 하 고서 이곳에 절 을 지었는데 이절이 희양산문의 본 찰이 된 것이다. 경문왕이 사신을 보내어 청하였으나 가지 않고, 헌강 왕이 왕사를 삼 았으나 역시 사양하고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수 59, 법람이 43년이었고 지증은 그가 세상을 떠나자 임금 의 존경과 애도 의 뜻으로 내려진 시호이다. 봉암사 창건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다. 지증대사가 이 자리에 절을 짓기 위해 큰 연못을 메우려 하는데 그 자리에는 용이 살고 있었다. 지증대사는 신통력으로 그 용을 구룡봉으로 쫓은 뒤에 못을 메우고 그 자리에 봉암사를 세웠다는 데, 백운곡 白 雲 谷 에 있는 계암이라는 바위는 봉암사를 창건할 당시 날마다 그 바위 위에서 닭 한 마리가 새벽을 알렸 다고 한다. 그래서 절 이름을 봉암사라고 이른다고 한다. 그 뒤 이 절은 935년(태조18)에 정진대사( 靜 眞 大 師 )가 중창하였고 정진대사원오탑( 靜 眞 大 師 圓 五 塔 ) 및 탑 비가 보물 제 171호와 제17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진국사탑비는 규모가 지증대사탑비와 같으며, 일주문을 100m 앞둔 곳에서 오른쪽 으로 계곡을 건너가면 밭 가운데 있다. 한편 희양산문 曦 陽 山 門 은 선종 9산문 중의 하나로 정진국사 靜 眞 國 師 의 긍양 兢 讓 이 희양산의 봉암사에서 선풍을 선양하여 하나의 문파를 이루었으므로 희양산선문 또는 희양산선파라고 부른다. 그리고 조선 초기에는 기화( 己 和 )가 1431년(세종13)에 절을 중수한 뒤 오랫동안 머물면서 <금강경오가해 설의 金 剛 經 五 家 解 說 宜 >를 저술하였다. 그 뒤 1674년(현종 15)화재로 소실된 뒤 신화( 神 和 )가 중건하였고, 1915년에는 세욱( 世 旭 )이 퇴락해가는 건물들을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신라 경순왕이 한때 피신한 것으 로 전해지는 극 락전이 있는데, 건물의 가구방법( 架 構 方 法 )이 이채롭고 천장 꼭대기에 석탑 상륜부의 모양으로 보주( 寶 珠 )를 얹고 있음 이 특이하다. 그리고 사문( 寺 門 )과 나란히 있는 요사채 이외에는 모두가 신축된 건물로서 절 중앙 상부에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 오른쪽에는 규모가 큰 선원( 禪 院 )이 있으며, 넓은 경내 도처에는 수채의 건물이 서 있으나 다른 절 과는 달리 편액 을 걸고 있지 않다. 이 절의 오른쪽에는 보물 제137호인 지선의 사리부도 지증대사적조탑( 智 證 代 師 寂 照 塔 )과 보물 제138호인 지증대사적조 탑비가 있다. 그리고 절 앞 뜰에는 지증이 세운 것이라고 전해지는 보물 제169호의 아름다운 5층 석탑이 있는데, 기단구 조에서 특이함 을 보이며 상륜부가 완존함으로써 주목되는 탑이다. 문경지역의 이름난 절로는 신라 헌강왕 때 지증대사가 세운 봉암사( 鳳 巖 寺 ), 산북면 금룡리에 운달조사( 雲 達 祖 師 )가 세운 김룡사( 金 龍 寺 ), 농암면에 원효대사가 세운 원적사( 圓 寂 寺 )와 심원사( 深 源 寺 ), 문경읍에 보조국사가 세운 혜국사 ( 惠 國 寺 ), 신라 진평왕 때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바위가 산북면 공덕산 꼭대기에 내려앉자 그 바위 옆에 세웠다는 대 승사( 大 乘 寺 )가 있다. 계사년의 사월 초파일 삼사 三 寺 기행과 영남지방의 문화유산을 찾아 84

85 금곡천변을 조금 올라간 곳에 1582년에 지은 초간정( 草 澗 亭 )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대동운부군옥 ( 大 東 韻 府 群 玉 ) 을 지었고 1580년에서 91년까지 11년 동안 일상생활에서 국정에 이르기까지 주변의 일들을 기록한 초간일기( 草 澗 日 記 ) (보물 제879호)를 남긴 초간 권문해( 權 文 海 )가 1582년에 지은 별채 정자가 초간정이다. 권문해는 마흔아홉에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초간정을 지었는데, 처음에는 작은 초가집이었으며 초간정사라고 하 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불에 탔던 것을 17세기에 다시 세우고 1870년에 연이어 중수하여 권문해의 유고( 遺 稿 ) 를 보관하는 전각으로 삼았다. 금곡천변에 소나무와 여러 나무들이 우거진 곳에 자리 잡은 초간정 앞에 서면 권문해가 30 년을 동고동락하던 아내 를 잃고 90일장 장사를 지내면서 아내에게 바쳤던 뼈에 사무치는 제문이 떠오를 것이다. 나무와 돌은 풍우에도 오래 남고 가죽나무 상수리나무 예대로 아직 살아 저토록 무상한데 그대는 홀로 어느 곳으로 간단 말인가. 서러운 상복을 입고 그대 영제 지키고 서 있으니 둘레가 이다지도 적막하여 마음 둘 곳이 없소. 얻지 못한 아들이라도 하나 있었더라면 날 가면서 성장하여 며느리도 보고 손자도 보아 그대 앞에 향화 끊이지 않을 것을, 오호 슬프다. 저 용문산을 바라보니 아버님의 산소가 거기인데 그 곁에 터를 잡아 그대를 장사 지내려 하는 골짜기는 으슥하고 소 나무는 청청히 우거져 바람소리 맑으리라. 그대는 본시 꽃과 새를 좋아했으니 적막산중 무인고처에 홀로 된 진달래가 벗되어 드릴게요. 이제 그대가 저승에서 추울까봐 어머님께서 손수 수의를 지으셨으니 이 옷에는 피눈물이 젖어 있어 천추만세( 千 秋 萬 歲 )를 입어도 해지지 아니하리다. 오오, 서럽고 슬프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우주에 밤과 낮이 있음 같고 사물이 비롯과 마침이 있음과 다를 바 없 는데, 이제 그대는 상여에 실려 저승으로 떠나니 그림자도 없는 저승 나는 남아 어찌 살리. 상여소리 한 가락에 구곡 간장 미어져서 길이 슬퍼할 말마저 잊었다오. 상향. 임을 여윈 슬픔이 이다지도 깊으랴. 흐르는 물위에 노란 은행잎이 떨어지고 해 뜨지 않은 아침녘의 초간정은 쓸쓸함 으로 가득하다. 연화부수형인 하회마을 안동 하회마을은 경상북도 안동군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지정 민속마을로 중요민속자료 12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세 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산 유씨( 豐 山 柳 氏 ) 동족마을로, 터전은 낙동강의 넓은 강류가 마을 전체를 동 남 서 방향으로 감싸 는 명당이며 지형은 태극형 또는 연화부수형( 蓮 花 浮 水 形 )이라고 한다. 풍산 유씨가 집단마을을 형성하기 전에는 대체 로 허씨( 許 氏 ) 안씨( 安 氏 ) 등이 유력한 씨족으로 살아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조 13년(1635)의 동원록( 洞 員 錄 ) 계사년의 사월 초파일 삼사 三 寺 기행과 영남지방의 문화유산을 찾아 85

86 에도 삼성( 三 姓 )이 들어 있기는 하나 이미 유씨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그 이전에 유씨 들의 기반이 성립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마을을 감싸 도는 화천( 花 川 )은 낙동강 상류이며 그 둘레에는 퇴 적된 넓은 모래밭이 펼쳐져 있고 그 서북쪽에 울창한 소나무 숲이 들어서 있어 경관이 아름답다. 백사장이 펼쳐진 강 건너에는 층암절벽이 펼쳐지고 그 위에 여러 누정이 자리 잡고 있어 승경( 勝 景 )으로서의 면모도 잘 갖추고 있다. 아 름답기로 소문난 부용대( 芙 蓉 臺 )의 절벽과 옥연정( 玉 淵 亭 ) 화천서당이 있으며, 서북쪽에서 강물이 돌아 나가는 부근 에는 겸암정( 謙 菴 亭 )과 상봉정( 翔 鳳 亭 )이 자리 잡고 있다. 하회별신굿을 보지 못하면 죽어서도 좋은 곳에 가지 못한 다 는 말이 있기 때문에 별신굿이 열릴 때면 나라 곳곳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하회별신굿에 쓰이던 가면들 은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데, 제작연대가 고려시대로 추정되어 하회마을의 역사적 배경이 뿌리 깊음을 말해준다.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부용대가 위치한 광덕리( 廣 德 里 )는 본래 풍산현 지역으로서, 넓은 둔덕이 있다 하여 광덕 광덕이 광덕리라 하였다. 부용대는 낙동강가에 높이 80미터가 넘는 높이로 깍아지른 듯 서 있는 암벽으로, 그 밑에 달관대( 達 觀 臺 ) 운송대( 雲 松 臺 ) 형제암이란 이름의 기이한 바위가 있으며, 그 사이 사이에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또한 서쪽 기슭에 겸암정( 謙 岩 亭 ) 봉상정( 鳳 翔 亭 ), 동쪽 기슭에 옥연정( 玉 淵 亭 )의 고적이 있다. 바로 밑에는 서남쪽으로만 흐르는 낙동강이 이곳에 이른 뒤 동쪽으로 흘러서 추월담( 秋 月 潭 ) 옥연( 玉 淵 )을 만들어낸다. 부용대에서 내려다보는 하회마을은 차마 혼자서 바라볼 수가 없을 만큼 아름답다. 그 중에서도 옥연정은 부용대 동쪽 기슭에 있는 정자로 선조 19년(1586년)에 서애( 西 厓 ) 유성룡( 柳 成 龍 )이 창건하였 다. 낙동강이 이곳에 이르러 옥같이 맑은 못을 이루었다는 뜻에서 옥연서당( 玉 淵 書 堂 )이라 불렀다. 옥연정 남서쪽 뜰 에는 삼인석( 三 印 石 )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곳에서 유성룡과 노수신( 盧 守 愼 ) 정전( 鄭 )의 3정승이 놀았다고 한다. 삼인석 밑에는 청파대가 있는데 낙동강 물이 범람하여 높이 파도를 쳐도 이 바위에는 미치지 못하므로, 청파대( 淸 波 臺 ) 라는 석 자를 새겼다고 한다. 실학의 대가이자 명재상으로 이름난 유성룡의 고향이 바로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이다. 유중영( 柳 仲 班 )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유성룡은 김성일과 동문수학했으며, 스물한 살 때 퇴계 이황을 찾아가 하늘이 내린 인재이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 이라는 예언과 함께 칭찬을 받았다. 선조는 유성룡을 일컬어 바라보기만 하여도 저절로 경의가 생긴다 하였고, 이항복은 어떤 한 가지 좋은 점만을 꼬집어 말할 수 없다 고 했으며, 이 원익( 李 元 翼 )은 속이려 해도 속일 수가 없다 고 말하였다. 스물다섯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병조판서를 역임하였고, 정여립 모반사건 때도 자리를 굳건히 지켰을 뿐만 아니 라, 동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광국공신( 光 國 功 臣 )의 녹권을 받았고, 1592년에는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정치가 또는 군사 전략가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그의 학문은 체( 體 )와 용( 用 )을 중시한 현실적인 것이었다. 임진왜란 때에 는 이순신에게 증손전수방략( 增 損 戰 守 方 略 ) 이라는 병서를 주어 실전에 활용하게 하였다. 말년인 1598년에 북인들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그 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거 계사년의 사월 초파일 삼사 三 寺 기행과 영남지방의 문화유산을 찾아 86

87 하였다. 1605년 풍원부원군에 봉해졌고, 파직된 뒤에는 고향의 옥연서당에서 임진왜란을 기록한 국보 132호의 징 비록( 懲 毖 錄 ) 과 서애집 ( 西 厓 集 ) 신종록 ( 愼 終 錄 ) 등을 저술하였다. 1629년 유성룡의 셋째아들 유진( 柳 袗 )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철종 14년(1863) 병산 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 시에도 잘 보존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병산서원의 만대루 도처에서 서원을 건립했던 영남학파의 거봉 퇴계 이황은 서원은 성균관이나 향교와 달리 산천 경계가 수려하고 한 적한 곳에 있어 환경의 유독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만큼 교육적 성과가 크다 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모든 서원 은 경치가 좋거나 한적한 곳에 자리 잡았는데, 병산서원만큼 그 말에 합당한 서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영주시 순흥면 면사무소 뜰 안에 흥주도호부 봉서루 鳳 棲 樓 라는 누각이 있어 이곳이 옛 시절 순흥의 옛 이름인 순흥 도호부의 관아자리였음을 짐작케 한다. 봉서루는 공민왕의 글씨로 전해져 오는데 순흥의 진산인 비봉산에서 봉황이 날아가면 고을이 쇠퇴한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그래서 고을 남쪽에 누각을 지어 앞 쪽의 현판에는 봉황이 깃들어 산 다는 의미로 봉서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뒤쪽에는 봉황을 맞이한다는 뜻으로 영봉루 迎 鳳 樓 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안축 安 軸 이 지은 봉서루 기 記 에는 나라의 동남쪽에는 본래 산은 하나인데 고개는 세 개이니, 태백. 소백. 죽령이 그것이다. 영남에 뿌리박은 첫째 고을은 바로 우리 흥주 興 州 이다. 주에서 동쪽으로 가면 태백이 황폐하고 편벽된 마 을이 나오고, 주에서 북쪽으로 가면 태백이 나오며, 북쪽에서 약간 꺾여 가면 소백이 나오는데 큰 길은 하나도 없고, 주에서 서쪽으로 가면 죽령이 나오는데 임금이 계신 서울로 가는 길이다. 주에서 남쪽으로 가면 길이 갈려서 동남의 여러 읍으로 통하게 된다. 고을의 형세가 이러하기 때문에 나그네들이 출입하는 것은 동.북쪽으로는 없고, 모두 서. 남쪽 뿐이다. 옛 적에 이곳에 고을을 설치하였을 때 오직 서 남쪽에만 후정 後 亭 을 세운 것은 고을의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고 하였다. 강희맹은 그의 시에서 사람은 다락에 기대었고, 새 자리는 비었으니, 달 밝은 밤의 피리 소리는 바람을 막지 못하 누나. 황량한 옛 보루는 그냥 반이 있는데 기억하는가. 닭잡고 오리 잡던 공적을, 라고 하였고 조원 曹 瑗 은 산 옆 에는 민가 열채 다만 아는 것은 농사일뿐. 라고 하였는데, <해동잡록> 4권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아름다운 절집들과 나라 안의 이름난 물도리동인 하회마을과 무섬그리고 병산서원에서 하룻밤 묵고 싶은 분들의 참 여를 바랍니다 계사년의 사월 초파일 삼사 三 寺 기행과 영남지방의 문화유산을 찾아 87

88 그리운 미륵의 나라 :49 그리운 미륵의 나라 부활절에 미륵산 자락 길을 걸었습니다. 오랜만에 맑게 갠 하늘과 봄이 오는 길,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미륵사지를 지나 여산에 이르는 길, 그 가운데 자리 잡은 산이 미륵산입니다. 평지돌출의 산, 그 산 아래 미륵사지는 절은 사라지고 넓은 터만 남아 있으며, 상처로 얼룩진 미륵사지 석탑과 새로 지어진 미륵사지 동탑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만물의 순환에 따라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것이 순리인데 그 사라져 가고 허물어져 가는 것들이 어찌 그리 허무와 슬픔을 자아내는지, 그러면서도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기다린 미륵의 세상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은 그 무슨 심사인지요. 그렇다면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우리가 도착할 밀그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요? 석가모니는 <미륵삼부경 彌 勒 三 部 經 >에서 용화세계 龍 華 世 界 >의 모습을 인간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이 세상에는 계두성( 鷄 頭 城 )이라는 커다란 도시가 생길 것이다. 동서의 길이 는 12유순( 由 旬 :1유순은 40리 정도)이고 남북은 7유순인데, 그 나라는 땅이 기름지고 풍족하여 많은 인구와 높은 문명으로 거리가 번성할 것이다. 향기로운 비를 내려 거리를 윤택하게 하고 낮이면 도시를 화창하게 하리라. 또 모든 것을 진리에 따 라 움직이고 올바른 가르침을 어기지 않는 섭화( 葉 華 )라는 나찰( 羅 刹 ) 귀신이 있는데, 이 나찰은 사 람들이 잠든 다음 더럽고 나쁜 물건들을 치워 주고 향즙( 香 汁 )을 땅 위에 뿌려서 온 도시를 지극히 향기롭고 깨끗해서 아름답게 해주리라. 저때에 염부제(염 浮 提 :인간 세계의 총칭 현세의 뜻)의 땅 넓이는 동서남북이 10만 유순이나 될 것이 며 산과 개울과 절벽은 저절로 무너져서 다 없어지고, 4대해( 大 海 )의 물은 각각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그리운 미륵의 나라 88

89 지느리라. 대지는 평탄하고 거울처럼 맑고 깨끗하며, 곡식이 풍족하고 인구가 번창하고 갖가지 보배가 수없이 많으며, 마을과 마을이 잇달아 닭이 우는 소리가 서로 들리느니라. 아름답지 못한 꽃과 맛이 없는 과 실나무는 다 말라서 없어지고, 추하고 악한 것 또한 스스로 다 없어져서, 달고 맛좋은 과실과 향기 롭고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만 자라느리라. 그때의 기후는 아주 알맞게 화창하며 4시의 계절이 순조로와서 백 여덟가지 질명이 없고, 탐내는 마 음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의 탐진치( 貪 瞋 癡 ) 삼독번뇌( 三 毒 煩 惱 )가 크게 드러나지 않고 은근 하여서 사람들의 마음도 어긋남이 없이 고루 똑같아서 만나면 서로 즐거워하고 착하고 아름다운 말 만 주고받으며, 뜻이 서로 다르거나 어긋나는 말이 없어서, 울단월( 鬱 單 越 :극락 세계) 세계에 사는 것과 같으니라. 그 때에 염부제 사람들은 사람마다 몸의 크기에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으나 목소리에는 차이가 없으 며 대소변을 보고자 할 때는 땅이 저절로 열려지고, 일을 본 뒤에는 땅이 다시 합쳐지느니라. 또 그 때는 논에 모를 꽂지 않아도 저절로 쌀이 생겨 나오는데, 껍질이 없고 향기로워서 먹은 뒤에 병들어 고생하는 일이 없느니라. 그리고 이른바 진귀한 보물이라고 하던 금 은이며 자거(자거) 마노(마노) 진주 호박이 길바닥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지만 주워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느니라. 옛날에 사람들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서 로 싸우고 죽이며 잡혀가고 옥에 갇히고 무수한 고통이 있었는데 이제는 부귀가 쓸모 없는 돌조각과 같아서 아끼고 탐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하더라 저 때가 되면 나라들의 땅이 기름지고 풍족하며 좋은 집들이 즐비한 마을과 마을이 들어서 그 마을 들에 닭 우는 소리가 접해 있으리라. 우거진 숲에는 나무에 꽃이 만발하고 만다라의 꽃이 비처럼 내리는데, 이따금씩 바람이 불어 악한 것이 모두 사라지고... 금은보화와... 싸움도... 고통도... 쓸모없는 돌조각과 같다고 하리라. 이러한 나라가 과연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도래할 수 있을까요? 아닐 것이라고 고개 설레설레 흔들면서도 그날을 기다리는 것은 내가 너무 순진해서 그런가요.? 아니면 내 삶이 너무 절실해서 그런가요? 오늘 밤에는 꿈속에서라도 그런 나라에서 살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는 그 미륵의 세상에서, 계사년 사월 초하루 그리운 미륵의 나라 89

90 꽃 피고, 또 피는 남원을 다녀와 :43 꽃 피고, 또 피는 남원을 다녀와 남원에 다녀왔습니다. 지리산 자락에서 이름 봄꽃을 보며 고향을 알려주러 간 길, 운봉의 서어나무숲은 아직 헐벗은 나무 그대로였지만 조금 내려온 주천의 용궁마을은 완연한 봄이었습니다.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낸 쑥이며, 머웃대 잎사귀 위로 피어난 산수유 꽃, 그 노란 꽃들이 화사하게 세상을 수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꽃이 피면 그 꽃들에 정신을 놓고 꽃이 되어야 하는데, 이제 막 피어난 꽃들을 보며 시들고 말 것을 염려하는 내 마음은 도대체 어떤 마음이었던지, 술꾼도 아니면서 꽃을 보며 한 잔 술을 그리다가 문득 떠오른 시가 이백의 <술 한 잔 하면서>라는 시였습니다. 봄바람 동쪽에서 불어와 휙 가버리고 금 술통에 맑은 술 찰랑 거리네 꽃잎은 펄펄 하염없이 지는데 어여쁜 사람 고운 얼굴 불그레 상기되었네. 동헌 뜰에 핀 복숭아 오얏 얼마나 가랴? 세월은 아랑곳 하지 않고 흘러만 가네 그대 일어나 춤을 추시게 해가 저무네. 젊은 시절 내사 세속과 어울리지 않았던 터 백발이 다 되었다손 탄식할 게 뭐 있으랴! 나 역시 젊은 시절 세속과 어울리지 않아서 그런지 세속적으로 놀 줄도 모르고, 그래서 심심하기가 소금도 타지 않은 무국과 같다고 할까? 하지만 세상은 누가 뭐래도 가고 또 가는 것, 꽃 피고, 또 피는 남원을 다녀와 90

91 흐르는 세월 속에서 못내 아쉬움만 더하는 것이 강물이 흐르면서 넓혀지고 깊어지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왕기 王 幾 의 말이 더 가슴을 치고 지나가는지도 모릅니다. 외물 外 物 을 추구하느라 얽매어 오고 감을 안타까워하고, 세상에 받아들여지는 것 없음을 슬퍼하는 것은 세상에서 쓸모없는 것이다. 어느 날 영문도 모르게 태어났고, 어느 날 문득 돌아갈 것인데, 인생길을 가로막는 것들이 어쩌면 그리도 많은지, 이 밤이 가고 또 하루가 시작되면 또 무엇이 내게 다가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근심들을 던져주고 갈 것인지, 계사년 삼월 스무이틀 꽃 피고, 또 피는 남원을 다녀와 91

92 금강 무릉도원 길을 걷는다, :42 금강 무릉도원 길을 걷는다, 계사년 봄, 봄꽃 속에 몸과 마음을 들이밀고자 금강으로 갑니다. 말 그대로 무릉도원 길, 복사꽃이 강이며, 산이며 길 을 뒤덮은 그곳에서 하루를 보내지 않으면 일 년이 가지 않을 것 같아서 다시 그곳으로 갑니다. 그곳이 그곳만이 나 지요. 용포리에서 남대천에 이르는 길은 우리 땅 걷기에서는 처음 가는 아름다운 길입니다. 봄날 복사꽃, 조팝 꽃, 벚 꽃, 을 비롯, 온갖 꽃들이 무리지어 피는 그곳에서 보내는 하루는 세상을 잊는 그런 추억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봄이 온다, 그것도 겨울이 유난히 추워서 오매불망 기다린 봄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이 있다. 그것도 4월 둘째 주 주말에 안가면 좀이 쑤시고 몸살이 나는 곳, 그곳에 가면 우선 기부터 막힌다. 꿈에서도 생시에서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서, 저절로 경탄이 나오는 그런 장소를 만날 때가 더 러 있다. 이 때 감성이 풍부한 사람들은 저절로 시인이 되고 어린이가 되고, 신선이 되는 그런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이야말로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이라는 것을 갈파한 괴테는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지고 至 高 의 것은 경탄 驚 歎 이다. 인간은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내려고 하지만, 그것 은 헛된 일이다. 그것은 마치 거울을 처음 본 어린애가 거기에 비친 물상 物 像 들이 신기로워서 그 뒤에 무엇이 있는가 하여 뒤집어 보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연둣빛으로 물드는 강이 있고, 흐르는 강물소리가 가슴팍을 적시고 지나가는 강변을 따라가다가 보면 어느덧 시간이 멈춘 자리 무릉도원 이 펼쳐지는 곳, 그곳으로 가는 길에 봉길리 벼리길이 있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을 정으로 쪼 아 만든 벼리길이 문경의 관갑천잔도나 창녕의 개벼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곳 부남면 금강 변에 있는 것이다. 벼 리아래는 새파란 강물이 유장하게 흐르고 버드나무와 철쭉이 무리지어 피어 있는 길, 이 길을 걸어본 사람은 알 것이 다. 강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그 지난한 삶을, 이렇게 가파른 벼랑에 길을 내야만 살 수 있었던 그 질곡의 삶을, 그림 같은 개벼리 길을 앞서간 사람들이 마치 그림처럼 휘돌아가고 멀리 보이는 상사바우는 상사병에 걸린 처녀가 굿을 해도 낫지 않으면 이 바위에서 몸을 던져 죽었다는 슬픈 사연을 안고 있다. 또 이곳에는 사모관대를 쓴 것 같은 신랑바우와 마치 족두리를 쓴 것처럼 보이는 각시바우가 마주보고 있어 운치를 금강 무릉도원 길을 걷는다, 92

93 더해주고 있다. 마을이 금강 상류에 둘러싸여 있어 마치봉황의 집처럼 보인다는 봉길 鳳 吉 리는 봉소라고도 부르는데, 멀리서보면 문 득 그곳에 들어가 살고 싶은 생각이 물씬 드는 땅이다. 그곳에서 봄 물드는 강변을 따라가다보면 만나는 곳이 바로 무주군 무주읍 용포리 잠두마을 건너편의 길이다. 야생복 숭아꽃과 벚꽃, 그리고 조팝나무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어디가 길이며, 어디가 강이고 산인지, 분별할 수 없이 정신을 몽롱하게 하는 곳이다. 봄 속에서 봄이 되는 그런 장소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금강 무릉도원 길을 걷는다, 93

94 2003년 섬 기행 <비렁길이 있는 여수 금오도를 가다.> : 년 섬 기행 <비렁길이 있는 여수 금오도를 가다.> 사월의 두 번째 주 정기기행이 섬 기행으로, 여수에 있는 금오도의 비렁길을 갑니다. 비렁"은 "벼랑"의 여수 사투리로 본래는 주민들이 땔감과 낚시를 위해 다니던 해안 오솔길이었습니다. 비렁길은 1코스 ~ 5코스와 금오도 종주길로 되어있습니다. 금오도는 조선시대 고종임금님께서 명성황후가 살고 있던 명례궁에 하사했으며 명례궁에서는 이곳에 사슴목장을 만들어 일반사람들의 출입과 벌채를 금했다고 합니다. 자라를 닮은 섬이라 하여 이름 붙은 금오도 는 조선시대에 금오도는 궁궐을 짓거나 보수할 때, 임금의 관을 짜거나 "판옥선"등 전선 戰 船 의 재료인 소나무를 기르고 가꾸던 황장봉산이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원시림이 잘 보존된 곳으로 숲이 우거져 검게 보인다 하여 "거무섬"으로도 불리웠습니다. 서울 포수들이 이 포구에서 첫 번째로 사냥을 했다는 두포와 옛날 신선이 노닐었다는 신선대, 두 개의 바위가 문처럼 되어서 그 사이로 배가 다니는 문바구 가 있는 금오도에 옥녀가 비단을 짜는 듯한 형국의 옥녀봉이 있습니다. 금오도와 연결된 안도는 지형이 기러기처럼 생겼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입니다. 금오도의 특산물은 방풍나물과 전복, 가시오가피등 여러 가지 해산물이 많다고 합니다. 금오도를 걷다가 어느 순간에 이 지상에는 없는 <행운의 섬>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찰나의 한순간이 지난 다음에 내가 나 자신보다도 더 깊숙이 자리 잡은 그 존재의 내면으로 또 다시 달려가지 않 을 수 있겠는가? 바다 위를 하염없이 떠도는 꽃들이여, 거의 잊어버리고 있을 때 쯤에야 다시 나타나는 꽃들이여, 해조들이여, 시체들 이여, 잠든 갈매기들이여, 뱃머리에서 떨어져 나오는 그대들이여, 아, 나의 행운의 섬들이여,! 아침의 충격들이여, 저 녁의 희망들이여, 내가 또한 그대들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으려나? 오직 그대들만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2003년 섬 기행 <비렁길이 있는 여수 금오도를 가다.> 94

95 해주는구나. 그대들 속에서만 나는 나를 알아볼 수 있었으니, 티 없는 거울이여, 빛없는 하늘이여, 대상없는 사랑이 여..., 쟝 그르니에의 <섬> 중 행운의 섬 과 같은 그런 섬을... 금오도와 안도의 섬을 거닐며, 한려수도의 그림 같은 한려수도의 경치와 여수의 향일암과 진남관을 함께 답사할 사람은 미리 신청하십시오. 2003년 섬 기행 <비렁길이 있는 여수 금오도를 가다.> 95

96 천삼백 리 한강 두번째를 걷는다 :38 천삼백 리 한강 두번째를 걷는다. 낙천리에서 동강 가수리까지 -임계면 낙천리에서 동강 가수리 마을까지- 한강 천삼백 리 첫 번째 일정을 마치고 4월 넷째 주 두 번째 여정에 오릅니다. 남한강 물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구간인 조양강과 동강 구간을 걸어갈 이번 여정은 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실감할 수 있는 아름다운 구간입니다. 아우라지 뱃사공들의 아환이 서린 아우라지와 정선에 이르는 아름다운 길, 그리고 광하리에서 가수리에 이르는 동강 길은 말 그대로 신선이 되어 걷는 듯한 느낌 속에서 걸을 수 있는 구간입니다. 특히 이번 행사는 두릎과 취나물등 지천에 피어난 봄 나물로 전을 만들어 먹으며 걷는 행사와 함께 펼쳐질 것입니다. 낙천교를 지나 이 고장 사람들이 자랑하는 미락숲에서 휴식을 취한다. 미락동은 원래 절터가 있었던 곳으로 미륵이 있었기 때문에 미륵동이라 불렀던 것이 바뀌어서 된 이름이다. 미락숲은 느티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숲인데 피서철 이면 외지 사람들로 북적댄다고 한다. 이곳 미락숲 건너편에서 임계천이 골지천에 합류한다. 나는 두물머리를 바라보 며 제방으로 올라선다. 문득 바람이 분다. 그 바람에 잠시 옷이 무거워진다.(...) 소나무숲 우거진 산을 가로질러 내려가니 새로 만든 다리가 있고 그 다리에는 휴일이라 놀러온 사람들 몇 팀이 있다. 그 사람들에게서 사이다 한 잔씩을 얻어 마시고 나선 길은 이제 탄탄대로이다. 흐르는 물길을 따라 한참 내려가 구미 정에 도착한다. 정선군 임계면 봉산리 골지천가의 넓은 암석 위에 세워진 구미정은 규모는 열 평 정도로 조선 숙종 때 이조참의를 지냈던 이치가 기사사화를 피하기 위해 이곳 봉산리에 은거하면서 세웠다고 하는데 기암절벽 위에 세 워진 그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이 정자를 중심으로 주위의 경치가 아홉 가지 특색이 있다고 하여 구미정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항상 물고기가 많이 모인다고 하여 어량 漁 梁, 주위의 밭두렁이 그림보다 아름답다는 전주 田 疇, 주위에 있는 바위들이 섬과 같이 아름답다는 반서 盤 嶼, 주위 곳곳에 쌓아올린 돌층대의 아름다움인 층대 層 臺, 정자 한편에 위치한 연못이 바위가 뚫려 생긴 것이라 하여 붙여진 석지 石 池, 바위 하나의 넓이가 백 평 이상이 되고 평평하여 붙여진 평암 平 巖, 주위를 굽이쳐 흐르는 강물이 연못물같이 항상 잔잔하다는 징담 澄 潭, 주위의 기암절벽이 바위옷 이끼로 항상 푸르게 보인다는 취벽 翠 壁,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가 연이어 있어 아름답다는 열수 列 峀 가 그것이다. 또 이곳을 중심으로 18경 을 얘기하기도 한다.(...) 개병교다리를 건너자 소나무 한 그루가 바람으로 뿌리가 뽑혀 넘어져 다른 나무에 열십 十 자로 접목되어 있는 것을 천삼백 리 한강 두번째를 걷는다. 96

97 본다. 받아들인다는 것, 더불어 산다는 것이 저런 모습이 아닐까. 물막이 댐이 아래 부근에 있는지 물의 흐름이 보이 지 않고 바람이 잔잔히 일어난다. 고기 반 물 반인 우리 동네에 산불 없네, 반천 2리 주민일동 이라는 플래카드를 보며 반천리에 다 왔음을 안다. 반천대교 아래로 강은 다시 푸르게 흘러간다. 우우 휘몰아오는 바람소리는 강물에서부터 들려오는 것일까? 파랗고 빨간 '산불조심' 깃발이 무섭게 펄럭거리고 있는 마을길로 들어선다. 돌담이 아름답게 쌓여진 집, 뻥 뚫린 나무로 굴 뚝을 만든 집, 나무구유가 찌그러진 함석지붕 밑에서 썩어가는 집 저 집에 사람이 살았던 시절은 어느 때쯤일까. 어천동마을을 지나며 강은 도장골로 휘어돌아간다. 느릅나무가든이라는 식당이 보이는데 이곳을 지나면 지도상으로 볼 때 쉴 데가 마땅치 않아 보였다. 우리들은 그 식당에 들어가 하룻밤 재워줄 것을 부탁했고 방안에 여장을 푼 것은 이른 여섯 시였다. 이곳 반천리의 노일 남쪽에는 산이 성처럼 높다고 하여 성북동이라는 마을이 있고, 어전 서쪽에는 서낭당 옆에서 달 을 바라보면 다락 위에서 달을 보는 것처럼 아름답다 하여 월루라는 마을이 있다. 나는 이 집 주인어른이신 변상철 (73세) 옹에게 이곳저곳 지명들을 물어본다. 도둑골이 어디쯤이냐고 묻자 월루마을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저그가 도 둑꼴인디 도둑놈들이 망을 보다가 사람이 오면 뛰쳐나와 도둑질을 했다는 큰바위가 있어요. 바위가 하도 커서 이 집 만이나 하지."(...) 우리는 드디어 아우라지나루에 닿는다. 아우라지는 정선군 북면 여량리의 한강 상류에 있는 나루터로, 평창군 도암면 의 황병산과 구절리에서 흘러내린 송천과 동쪽에서 흘러온 임계천이 합류하는 곳이다. 이 아우라지의 뱃사공이 부르 던 노래가 정선아리랑이었다. 정선아리랑, 즉 정선아라리가 처음 불려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 왕조 초기부터였다고 한다. 고려 왕조를 섬기고 벼슬 에 올랐던 선비들 중 7명(전오륜, 고천우, 김충한, 변귀수, 김한, 이수생, 신안)이 불사이군 不 事 二 君 의 충성을 다짐하 면서 깊은 산골인 개성의 두문동에 은신하다가 지금의 정선군 남면 낙동리 거칠현동 居 七 賢 洞 으로 옮겨 살며 지난날 섬기던 임금을 사모하고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들은 멀리 두고 온 고향의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마 음과 본래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애달프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한시를 지어 읊었는데 이것이 정선아리랑의 시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확실하지는 않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상철 임 그리워 나는 못 살겠네 또다른,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옛날 여량리에 사는 처녀와 아우라지 건너편 유천리에 사는 총각이 연애를 했다고 한 다. 그들은 동백을 따러 간다는 구실로 유천리에 있는 싸리골에서 서로 만나곤 하였다. 그러나 어느 가을에 큰 홍수 가 나서 아우라지에 나룻배가 다닐 수 없게 되자 그 처녀는 총각을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정선아리랑 가락 에 실어 부르게 된 것이란다.(...) 장열리 가평마을 강을 따라 가는 길은 철길과 42번 지방도로가 나란히 가는 길로, 한강 상류 길에서도 가장 특색 있 천삼백 리 한강 두번째를 걷는다. 97

98 는 아름다운 길일 것이다. 이곳 가평에서 장열리로 건너가는 나루가 가평나루터였고 장열리에서 남평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꼬부랑 고개였다. 장열 본동 뒤쪽에 있는 바람부리마을은 바람을 많이 받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장열리 뒷산에 있는 얼음냉기라는 골짜기는 겨울에는 볼 수 없는 얼음이 여름철 삼복더위에 나타났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 라고 한다. 밀양의 얼음골이나 전북 진안 성수의 풍혈냉천과 같은 역할을 했던 얼음냉기는 요즘에는 그 기능을 발휘 하고 있지 않는지 더 이상 사람들에게 회자되지 않는다. 모양이 상투처럼 생겼다는 상투바위라고 이름이 붙은 상투바 위는 어디쯤에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안내원 없음 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건널목을 건너자 철다리가 나타난 다. 길은 강을 따라 펼쳐져 있지만 돌아가야 하니, 철교를 건너기로 작정한다. 철교를 건너면 2년 이하의 징역이나 1천만원의 과태료에 처한다는 표지판을 무시하고 건너간다. 1천만원짜리 대박(?) 을 철로를 건너며 터뜨리고자 건너가는데 생각보다 철교가 멀기는 멀다. 촘촘히 연결된 침목을 건너서 바라본 강물은 짙푸르기 이를 데 없다. 여섯 명이 무사히 건넜으니 6천만원을 번 셈이 아닌가. 장열리에서 나진으로 건너던 나루터 는 사라져 없고 철길 너머로 붉은 언덕이 푸르른 녹음 사이로 보인다. 긴 다리 장열대교를 지나 강길을 따라 걷는 다.(...) 그런데 그 맛있는 매운탕, 얼큰하고 들큰한 매운탕에다 커피까지 마시고 기분 좋게 출발했는데 상정바위 아랫자락에 서 그만 길이 없어지고 만다. 돌아갈 수도 없고 별 도리가 없다. "얕은 내도 깊게 건넌다"는 속담을 곱씹으며 물을 건 너가기로 한다. 여울진 강을 건너기로 했는데 바위들에 부유물질이 끼어 왜 그리도 미끄러운지 카메라가 물에 잠길새 라 한 발 한 발 뗄 적마다 바위를 헤치다 보니 발가락이 너무 아프다. 에라 모르겠다, 옷이고 신발이고 젖어도 괜찮 다 마음먹고 건너도 물살은 왜 그리도 센지. 조심조심 걷지만 그래도 발이 아프다. 바라보면 강 건너는 아직도 멀다. 하여간 넘어지지만 말자. 깊은 강물의 돌을 손으로 들어내고 발로 휘저어가며 무사히 건너긴 건넜는데 웬걸 김형곤 씨와 손동명 씨는 칼날 같 은 바위에 베어 피까지 나고 말이 아니다. 부상자가 속출했으니 고생도 고생이지만 오전에 벌어놓은 시간을 호박씨 까서 한 입에 털어넣은 격이다. 그래도 다행히 누구도 넘어지지 않고 대장정을 마쳤다. 일 분이면 건널 거리를 십오 분의 사투 끝에 팬티까지 흠뻑 젖어 건너왔지만 물 마사지를 한 탓인지 다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렇다. 모든 행 복이나 불행은 더불어 온다.(...) 강은 더없이 아름답고 조금 내려가자 인도 기행 전문인 혜초여행사가 운영하는 정선자연학교가 나타난다. 조금 쉬었 다 가기 위해 나무 그늘 밑에 배낭을 내려놓는데 관리인인 듯싶은 사람이 다가온다. 어딘가 낯익다 싶어 자세히 보니 웬걸 부산 금정산을 출발 낙동정맥을 지나 진부령까지 백두대간을 최초로 종주했던 여성 산악인 남난희 씨였다. 우리 가 청학동과 섬진강 일대를 답사할 때 청학동의 찻집 '백두대간'에서 만나고 헤어졌던 남난희 씨를 이곳에서 만나다 니. 김성규 씨는 남난희 누님이라고 반색을 한다.(...) 정선 읍내의 오일장에는 정선군 일대에서 채취된 산나물들이 다 쏟아져나온다. 참취, 곰취, 며느리취, 나물취, 참나 물, 누롯대, 참두릅, 개두릅, 더덕, 고비, 도라지 등의 나물도 좋지만 무엇보다 정선 여행의 별미인 콧등치기와 올챙 이국수를 맛볼 수 있다. 콧등치기는 일종의 메밀국수다. 메밀을 반죽하여 국수를 만든 것인데 올챙이국수에 비해 끈 천삼백 리 한강 두번째를 걷는다. 98

99 기가 있고 단단하여 국숫발이 물에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육수에 된장을 살짝 풀고 깨소금 양념을 하여 먹는데 맛이 좋아 급히 빨아들이다 보면 국숫발이 살아 콧등을 친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올챙이국수는 찰옥수수를 갈아서 묽게 반죽을 하여 나무되 밑바닥에 구멍을 뚫고 밭아낸 것이다. 찰기가 적어서 국숫발이 부슬부슬 끊어지는데, 갖은 양념을 하여 묵처럼 말아서 숟갈로 떠먹는다. 하지만 옛 시절 정선의 명물이었던 꿩꼬치산적 같은 음식은 아쉽게도 찾아볼 수가 없다.(...) 강물 속에 발을 담가서 그런지 발은 훨씬 부드러워졌다. 여울져 흐르는 강물 위로 광하교가 걸쳐 있고 그 위에 내방 산은 푸르름으로 솟아 있다. 광하교를 지나는데 세월댐 수몰민 생존권 투쟁 이라고 씌어진 흰 페인트 글씨가 보이 고 그 아래 간이포장마차에는 조양강 래프팅 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한쪽에서는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생 존권 투쟁이 벌어지는데 또 한쪽에서는 래프팅 때문에 동강 자체가 훼손되고 있으니. 국민의 강 동강을 보존합시 다 라는 안내판을 보며 여기서부터가 동강이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정선아리랑을 연구하는 진용선 씨는 "옛 문헌을 보면 우리 선조들은 아우라지에서부터 동강이라는 말을 썼고, 표기도 지금의 동녘 동 東 이 아니라 오동나무 동 桐 을 썼다"고 말한다. 영월읍을 중심으로 동쪽은 동강, 서쪽은 서강이 라고 쓴 것은 일제 강점기부터였다는 것이다. 이곳 동강에는 열두 곳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 여울과 소, 절벽, 섶다 리, 마을 풍경들이 그것들로서 1경-가수리 느티나무와 마을 풍경, 2경-운치리의 수동(정선군 신동읍) 섭다리, 3경-나 리소와 바리소(신동읍 고성리~운치리), 4경-백운산(고성리~운치리, 해발 882.5m)과 칠족령(덕천리 소골~제장마을), 5 경-고성리 산성(고성리 고방마을)과 주변 조망, 6경-바새마을 앞 뼝대, 7경-연포마을과 홍토 담배 건조막, 8경-백룡 동굴(평창군 미탄면 마하리), 9경-황새여울과 바위들, 10경` `두꺼비바위와 어우러진 자갈, 모래톱과 뼝대(영월읍 문 산리 그무마을), 11경-어라연(거운리), 12경-된꼬까리와 만지(거운리) 등이다. (...) 귤암리에서 가수리까지는 도로를 넓히는 공사가 한창이고 공사장을 지나자 모평마을이다. 광석나루 위쪽 조양강 물 가운데에 섬처럼 솟아 있는 바위가 섬바우이고 저 안쪽에 있는 망하마을은 광하리의 중심에 있는 마을이지만 물이 귀한 곳이다. 근처에 큰 강을 두고서도 이용할 수 없다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라는 망하마을에서 평창군 미탄면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비행기재이다. 원래 이름은 아전치였는데 이 고개가 하도 높아서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 다 하여 비행기재라고 붙인 것이다. 그 고개 너머 평창을 두고 정귀진 鄭 龜 晉 은 "우연히 흐르는 물을 따라 근원의 막다른 곳까지 와서, 공연히 복숭아꽃 비단 물결 겹치는 것을 볼 뿐, 동학 洞 壑 속의 신선의 집은 어디에 있는고, 흰구름이 일만 그루의 소나무를 깊이 잠겄 네" 하였고 삼봉 정도전 鄭 道 傳 은 "중원 中 原 의 서기 書 記 는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옛 고을 용납할 만하고, 하늘이 낮 아 재 위는 겨우 석 자의 높이로구나" 하였다. 모평리를 지나 귤암리에 도착한다. 귤천과 의암의 이름을 따서 귤암이라 이름 지은 귤암마을의 옛이름은 산내울이었 다. 강 건너로는 산의 모양이 나발처럼 생겼다는 나발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우뚝우뚝 솟은 산세가 저마다 나름대로 의 사연을 지닌 듯싶지만 침묵한 그 산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한강 따라 짚어가는 우리 역사> 중에서 천삼백 리 한강 두번째를 걷는다. 99

100 네번 째 한강 천 삼백리 길에 나서며, :36 네번 째 한강 천 삼백리 길에 나서며, 천 삼 백리 한강을 세 번도 모자라 네 번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득하고 멀기만 하다. 가슴 설레며 걸었던 그 여정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그 길을 걸었던 사람들도 한 사람, 한 사람 또렷하게 떠오른다. 기억은 이렇게도 마치 어제 일처럼 환한데, 그때 걸었던 그 사람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고 나는 또 그곳으로 떠날 준비로 깊은 밤이 생생하기만 한 것인지, 길은 어렵고 어렵도다. 갈래갈래 제 길 찾기 어렵구나. 이백의 시 구절처럼 길은 항상 내 앞에 어렵게만 놓여 있었다. 나는 그 길을 걸어가며 헤매고 또 헤맸었지, 나와 같은 마음이어서 그랬던지 하우즈만의 시 구절이 가슴을 울리며 지나간다. 하얀 달빛 속 기나긴 행로가 놓였네. 내 앞에 어떤 길이 놓여 있을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한강 길을 혼자도 아니고 여럿이도 아닌 백여 명의 사람들이 걸어가리라는 것 그것만이 사실이다. 태백의 검용소에서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까지 이르는 여정 그 길을 가다가 걸어 가다가보면 엘리엇의 <재회의 가족>중 일부분이 현실처럼 나타나는 시간이 올지도 모른다. 도망자의 세계에선 네번 째 한강 천 삼백리 길에 나서며, 100

101 반대방향으로 가는 자들이 모두 도망치는 것 같이 보일게예요. 태백에서 서해 바다를 향해 도망치는 우리들의 모습이 언뜻 보이고, 문득 존 맨스필드 의 시 구절처럼 어느 순간 생이 서글퍼지는 시간이 올지도 모르겠다. 달은 지고 해는 기우는데 나의 삶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는가? 물과 소금기가 술이 아닐진대. 이미 주사위는 던져 졌고, 다시 숙명처럼 그 길을 걸어가야 하리. 가다가 만나는 모든 사람, 모든 사물들이 내게 어떤 말을 건네고 나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알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미지의 길을, 바이런의 시 구절처럼 걸어갈 수는 없을까? 밤처럼 그녀는 아름다운 자태로 걸어요. 계사년 삼월 열닷새 네번 째 한강 천 삼백리 길에 나서며, 101

102 봄꽃을 보러 섬진강으로 가다 :49 봄꽃을 보러 섬진강으로 가다. 봄이 오는데, 봄꽃이 피는데, 그 봄을 맞으러 가지 않으면 봄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마음에 섬진강으로 갑니다. 남원의 교룡산일대와 만복사지, 그리고 곡성군 고달면에서 압록에 이르는 구간을 걷고 매화꽃, 산수유 꽃등 봄꽃이 만발한 하동과 구례일대를 답사할 것입니다. 앞서가던 최선생님이 저기 아지랑이가 보이네요 하고 손짓해서 바라보는 박준열씨의 뒷모습에 아지랑이가 아른 거리고 있다. 봄은 누가 뭐래도 봄인가 보다. 세상사 아무리 어지럽고 현란해도 그래서 사람들이 다 죽겠다고 아우성 쳐도 오는 봄을 누가 막으랴. 길옆의 웅덩이에는 개구리가 알을 낳았고 그 몸에는 노오란 양지꽃이 피었구나. 뒤돌아 오면 이른 봄 강은 저리도 푸르고 바람은 살며시 내 뺨을 간지럽히고 흐르는 강물에 시 한편이 살며시 내려앉는다. 강물에서 박재삼 무거운 짐을 부리듯 강물에 마음을 풀다. 오늘, 안타까이 바란 것도 아닌데 가만히 아지랑이가 솟아 아뜩하여지는가 물오른 풀잎처럼 새삼 느끼는 보람, 꿈 같은 그 세월을 아른 아른 어찌 잊으랴, 하도한 햇살이 흘러 눈이 절로 감기는데... 그날을 돌아보는 봄꽃을 보러 섬진강으로 가다. 102

103 마음은 너그럽다. 반짝이는 강물이사 주름살도 아닌 것은, 눈물이 아로새기는 내 눈부신 자욱이여! 곡성군에서 힘들여 조성한 이 길에서 눈에 띄는 것은 옛날 고향에서 흔히 보았던 듯 싶은 나무 정자다. 초가지붕을 이고 천장은 합판으로 만들었지만 바닥에 대나무를 깔아서 그런지 한결 자연스럽다. 조금 더 더워지면 이 간이 정자 에 앉아 흐르는 섬진강 물을 바라다 보면 세상이 한결 넓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발길은 어느새 살골 나루터에 이른다. 조선조 초기 이곳에서 살을 막은 후 메기를 잡아 조정에 바쳤다는데 살은 사라 지고 나루터에 배는 자갈 위에 올라앉아 있다. 고개가 가파른가 싶더니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이 고개가 뺑덕어미 고개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심청이의 고향이 이 곡성 어디쯤이라는 설이 있기 때문에 심술궂은 뺑덕어미를 이 고개에다 차용해 붙인 것이리라. 이 고개 마루에서 유재열 소장은 신소장님 저 강물이 섬진강 재첩국 같은데요 그래 그 말을 듣고 바라보니 흐르는 강물이 재첩국 이다. 다슬기 국물처럼 푸르고 푸르다.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저 강물이 재첩국 같다고 할까. 좌측으로 나있는 길에는 만민교회 수양관이 있다는 표지판이 보인다. 한때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만민교회가 저 만민교회일까? 대나무 정 자에 잠시 앉아 불어오는 바람을 맞다가 다시 걷는다. 오곡면 송정리로 건너가는 두계나루터에는 한 척의 배가 매어있고 저만치 두가교가 보인다. 두계와 가정리를 합쳐서 두가리라고 이름 지은 두가리 가정마을에는 옛날 정자나무가 많았다는데 흔적이 없지만 한때 섬진강 물길 층에 가장 아름다운 두가교가 있다. 지금은 양옆을 가로막아 건널 수 없는 다리가 되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마을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오 고가던 다리였다. 이 다리가 세워진 것은 1979년 6월 29일 두가리에서 송정리로 건너가는 나룻배가 뒤집어지며 두가 리 사람 3명과 이웃마을 사람 2명 외지사람 2명 등 일곱 명이 빠져죽는 사고가 났기 때문이다. 전라남도 도지사는 그 소식을 듣고 이 다리를 급하게 세웠다. 그래서 두가리 사람들은 그때 이 다리를 만들어준 전남도지사를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자기 돈 들여 서 놓은 것도 아니고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었는데도 고마워하는 그 마음을 뭐라고 할까?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현수교를 닮은 이 다리는 길이가 400m이고 강바닥에서 다리까지의 높이는 70m 다리 폭은 2.5m 쯤 되는데 이 다리를 건너갈 때 혼자서도 굴러대면 다리가 흥청흥청하고 여럿이 서가면 출렁 출렁거리기 때문에 출 렁다리라고 부른다. 그래서 심장이 튼튼하지 않은 사람은 아예 입구에서부터 겁을 내고 장난기 있는 사람은 더더욱 발을 동동 굴러서 사람들을 골려대기 일쑤이다. 5월의 어느 날 섬진강 푸른 물줄기를 바라보며 출렁거리는 다리를 건 널라 치면 바로 아래 가정이 나루터 언덕에 철쭉꽃밭을 만날 것이다. 지리산 세석 평전이나 바래봉 철쭉만은 못하지 만 화려하게 피어난 가정리 섬진강변의 철쭉꽃밭에서 한시절을 보낸다면 그 봄은 얼마나 따사롭게 아름다울 것인가. 그러나 그 많은 참게도 은어도 사라지고 구름다리 가든이라는 매운탕집만 남아있는 두가리에는 송정리로 건너가는 다리마저 시멘트로 만들어져 여울져 흐르고 있었다. 봄꽃을 보러 섬진강으로 가다. 103

104 강 건너 송정리는 소나무 정자가 있어서 경치가 아름답기 때문에 소정이 또는 송정리라고 부르고 길은 포장도로로 이어진다. 곡성군에서 자건거도로로 명명한 이 길에는 두 사람 한사람이 타는 자전거를 대여해 주는 곳이 있어서 자 전거의 행렬이 이따금씩 지나가고 대나무 숲은 강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린다. 옛날에 큰 배나무가 있어서 배장이 들이 라 불리는 배장이에는 구례읍 논곡리로 건너는 나루터가 있었지만 사라져 버리고 수해를 염려했을 때 콘크리트 건물 임에도 2층만 제대로 만들고 1층은 뼈대만 앙상하다. 강물은 출렁이며 은빛으로 빛나고 비 내리는 호남선 완행열차에 강변 저쪽에서 노랫소리 들린다. 고개를 넘어서 자 저만치 압록이 보이고 155km 지점에 있는 압록 우연의 일치일까. 금강을 답사할 때도 그랬다. 2구간이 끝나는 영 동군 심천면 날근이 마을 초강을 받아들이는 지점까지가 155km였었다. 섬진강이 보성강을 받아들이는 압록에 도착하 는 155km지점에서 바람은 더욱 드세게 불어댔다. (...) 화개장터를 지나가다 여정은 드디어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화개장터에 접어든다. 전라도와... 라고 조영남이가 노래 부르기 전부터 화개는 화개장터다. 소설 속에서 옛 시절의 화개 장터는 이러 했다.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이 만나던 화개장터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고래로 허다하지만 화개협 시오리를 끼고 앉은 화개장터의 이름이 높았고 경상, 전라 양 도 접경이 한두 군데 일리 없지만 또한 이 화개장터를 두고 있었다.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들의 더덕, 도라지, 두릅, 고사리들이 화개골에서 내려오고 전라도 황화물 장사들의 실, 바늘, 면경, 가위, 허리끈, 족집게, 골백분들이 또한 아 랫길에서 넘어오고, 하동길에서는 섬진강 하류 해물 장사들의 김, 미역, 청각, 명태, 간조기, 간고등어들이 들어오곤 하여... 그러나 화개장터의 이름은 장으로 하여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끔 전라도지방에서 꾸며 나오는 남사당, 여사당, 협률( 協 律 ), 창극, 신파, 광대들이 마지막 연습 겸 첫 공연으로 여기서 반드시 재주와 신명을 떨고서야 경상 도로 넘어간다는 한갓 관습과 준례가 이 화개장터의 이름을 높이고 그립게 하는지도 몰랐다. (김동리 <역마( 驛 馬 )>) 화개를 가장 화개답게 표현한 김동리의 역마가 아니라도 화개는 옛 시절 전라도와 경상도의 물산이 만나 흥정이 이 루어지는 중요한 장터였다. 그러나 지금 그 옛날 화려했던 화개장터의 옛 모습은 어디에도 없이 다리 건너에 새로 만 들어진 초가집도 아니고 콘크리트 집도 아닌 화개장터가 지나는 길손들을 손짓할 뿐이다. 월선네가 주막을 열었던 그곳은 어디쯤일까. 그 월선네가 장이 서는 아침마다 용이를 기다렸던 화개장터는 어디로 가 버렸는가. 매천은 <오하기문>에서 화개동을 스쳐간 동학농민혁명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적은 어둠 때문에 추격하지 못하였으며, 날이 밝자 무리를 수습하여 부 안으로 들어와 민포를 모두 죽이겠다고 떠 들면서 10여 채의 민가에 불을 지르고, 부 안에다 도소를 설치하였다. 한편 적은 사방으로 흩어져 마을을 약탈하였 다. 화개동에 들어가서는 제일 먼저 민포가 일어난 곳이라며 특별히 미워하여 연달아 5백여 채의 민가를 불태우고, 베틀과 물레, 나막신까지 약탈하여 바리바리 실어 나르느라 사오일 간 광양, 순천으로 통하는 길이 막힐 정도 였다. 민포 중에 앞뒤로 사로 잡혀 죽은 사람은 10여명 정도였다. 적은 계속해서 대엿새 정도 머물다가 돌아갔고 그 중에 봄꽃을 보러 섬진강으로 가다. 104

105 흉포한 자들은 인배를 따라 진주로 갔다. 불태워 버렸다는 오백여 채의 민가는 어느 곳에 있었을까. 옛 기억들을 회상할 길은 없고 푸른 대숲과 차나무와 푸른 섬진강물만 눈에 띄었다. 신정일의 <섬진강을 따라 짚어가는 우리 역사> 중에서 봄꽃을 보러 섬진강으로 가다. 105

106 익산 미륵산 둘레길을 3월 30일 토요일에 걷는다 :48 익산 미륵산 둘레길을 3월 30일 토요일에 걷는다. 2013년 3월의 평일 기행을 3월 30일 토요일 하구 기행으로 연기하여 익산의 미륵산 둘레 길을 걷습니다. 백제의 네 번째 도읍지라는 이야기가 있는 왕궁탑 일대와 동고도리 석불입상과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쌍릉, 그리고 동 양 최대의 절터인 미륵사지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연동리 석불이 있는 곳입니다. 여산의 천주 교 성지와 여산 관아터, 그리고 가람 이병기 생가가 미륵산 둘레 길에 있습니다. 또한 여산 송씨 제각, 문수사, 천일 사, 등의 사찰도 그 인근에 있습니다. 마한의 왕궁 터라고도 하고 백제의 네 번째로 도읍지로 조성되었을 것이라고 전해오는 왕궁평에 접어든다. 초여름 부터 9월까지 이곳에는 석달 열흘 동안 화사한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가 꽃 숲을 이루었는데 지금은 꽃은 사라지고 까치밥으로 남겨진 못생긴 모과가 하나씩 매달려 있고 그 몇 개는 떨어져 나뒹굴고 있다. 나는 떨어진 모과를 주워 향긋한 그 냄새를 맡으며 탑앞에 선다. 조선조 말에 간행된 금마지 에 의하면 왕궁평은 용화산에서 남으로 내려온 산자락이 끝나는 곳에 있으며, 마한 때의 조궁 터라는 성터가 남아있다. 이 성은 돌을 사용하지 않은 토성으로 그 곳 사람들이 밭을 갈다보면 기와 조각 이 깔려 있고, 더러 굴뚝들이 나온다. 종종 옥패와 동전, 쇠못 등을 습득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동국여지승 람 에서도 왕궁정은 군의 남쪽 5 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옛날 궁궐터라고 한다. 고 하는 왕궁평에는 늠름하 고 아름다운 왕궁리 오층석탑이 보물이었다가 뒤늦게야 국보(국보 289호)로 지정되었다. 미륵사탑이나 정림사지 석탑 과 같이 백제탑이라는 설도 있고 탑신부의 돌 짜임의 기법과 3단으로 된 지붕돌 층급받침 때문에 통일신라 탑이라는 설도 있으며, 백제 양식을 계승하고 신라양식을 흡수하여 고려 초기에 건립된 탑이라는 설도 있다. 또 하나는 후백제 의 창업주인 견훤과 관계가 있는데, 견훤의 도읍인 완산의 지세가 앉아 있는 개의 형상이므로 개의 꼬리에 해당하 는 이곳에 탑을 세워 누름으로서 견훤의 기세를 꺾어 고려 태조 왕건이 이기게 되었다. 그런데 이 탑이 완성되던 날 완산의 하늘이 사흘 동안 어두웠다 라는 설은 금마지 의 기록과도 맞아 떨어진다. 왕건은 실제 후삼국을 통일한 후에 도선국사의 의견에 따라 비보사찰을 여러 곳에 세웠다. 왕궁에는 오층석탑만 남고 1965년 이 왕궁 탑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 중 1층 지붕돌과 기단부에서 금으로 된 사리탑과 사리병 및 금으로 된 금강 경 판이 나왔다. 국보 123호로 지정된 이 유물들은 현재 전주 국립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또한 이 탑에는 또 하나 의 분명치 않은 전설이 전해온다. 익산 미륵산 둘레길을 3월 30일 토요일에 걷는다. 106

107 왕궁 탑을 지나 금마 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들판 한가운데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석불이 마주보고 있다. 보물 46호로 지정된 동고도리 석불은 높이가 4 24m에 이르고 불상의 머리위에는 높은 관을 얹었는데, 동고도리라는 뜻은 금마가 예전에 도읍지였기 때문에 고도의 동쪽에 있다하여 동고도리라고 부른다. 일설에 의하면 이 지역의 토호들이 자기들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세웠을 것이라고도 하고, 한편에서는 금마를 지 키는 수호신으로 세웠다고도 한다. 이 두 개의 불상은 평소에는 만나지 못하다가 섣달 해일 자시에 옥룡천이 얼어붙 으면 서로 만나 안고 회포를 풀다가 새벽닭이 울면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하며, 석불 옆에 세워진 이 석불 중건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금마는 익산의 구읍자리로 동 서북의 삼면이 다 산으로 가로막혀 있는데, 유독 남쪽만은 물 이 다 흘러나가 허허하게 생겼기에 읍 수문의 허 虛 를 막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 한다. 또 일설에는 금마의 주산인 금 마산의 형상이 마치 말의 모양과 같다고 하여 말에는 마부가 있어야 하므로 마부로서 인석( 人 石 )을 세웠다고 한다. 칠월칠석날의 견우직녀의 전설을 닮은 불상들을 뒤로 하고 금마 지나 미륵산 자락에 접어든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의하면 하루는 무강왕 武 康 王 이 인심을 얻어 마한국을 세우고 하루는 선화부인 善 花 夫 人 과 더불어 사자사 獅 子 寺 로 가고자 용화산 아래 밑 큰 못가에 이르렀는데, 미륵불 셋이 못 속으로부터 나타났다. 왕이 수 레를 멈추고 치성을 드리자 부인이 왕에게 말했다. 여기다가 꼭 큰절을 짓도록 하소서. 저의 진정 소원이외다. 동양최대의 절터 미륵사 왕이 이를 승낙하고 지명법사를 찾아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었더니 법사가 귀신의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 뜨려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미륵불상 셋을 모실 전각과 탑과 행랑채를 각각 세 곳에 짓고 미륵사라는 현판을 붙였다. 신라 진평왕이 백 명의 장인 匠 人 들을 보내 도와주었으니 지금도 그 절이 남아 있는데 석탑 石 塔 의 높 이가 매우 높아 동방의 석5탑 중에 가장 큰 것이다. 하였다. 동서로 172m 남북으로 148m에 이르는 미륵사터는 넓이가 2만5천 평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로서, 국보 11호로 지정된 미륵사지 9층 석탑인 서 석탑과 1993년에 복원된 동석탑 그리고 당간지주가 있는데 다른 절과는 달리 2기가 있다.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미륵사 인근 오금 산(현재 익산 토성, 쌍릉이 자리하고 있는 곳)에서 마를 캐며 홀어머니와 살던 마동이 신라 선화공주와 혼인하는 서 동설화와 미륵사 창건설화로 되어 있으며 또 다른 미륵사의 창건설화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신앙만이 아니라 정치적 인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즉 백제의 국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마한세력의 중심이었던 이 곳 금마에 미 륵사를 세웠을 것이라고 한다. 무왕은 바로 이 지역을 새로운 도읍지로 하여 백제 중흥의 원대한 포부를 펼치려고 하 였을 것이다. 어떻든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를 세우는 데에는 당시 백제의 건축, 공예 등 각종 문화 수준이 최고 도로 발휘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고 백제의 전 국력을 집중하여 창건하였기 때문에 백제 멸망의 한 원인으로 작 용한다는 평가를 받기도하지만 미륵사가 어느 때 폐찰이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조선 정조때 무장지역의 선비였 던 강후전이 쓴 와유록 臥 遊 錄 에 의하면 미륵사에 오니 농부들이 탑 위에 올라가 낮잠을 자고 있었으며 탑이 익산 미륵산 둘레길을 3월 30일 토요일에 걷는다. 107

108 100여 년 전에 부서 졌더라 하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대다수의 절들이 임진, 정유재란 때에 불타버린 것과는 달리 다른 원인에 의해서 폐사가 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미륵사의 발굴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 절터에는 논밭과 민가가 들어서 있었고 절의 석축들 대부분이 민가의 담 장이나 주춧 둘로 사용되고 있었다. 발굴결과 일연스님이 기록한대로 가운데 목탑을 두고 동서로 두 개의 탑이 있었 고 각 탑의 북쪽으로 금당이 하나씩 있었으며 각기 회랑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이는 탑, 금당, 강당, 승방이 일직선상 에 하나씩 배치되는 일반적인 백제계 탑과는 매우 다르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정일의 <암자 가는 길> 백제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미륵산 둘레길을 하루 기행으로 걷고자 했던 분의 칙오 없으시기 바라며 많은 참 여를 바랍니다. 익산 미륵산 둘레길을 3월 30일 토요일에 걷는다. 108

109 익산 미륵산 둘레길을 걷다 :40 익산 미륵산 둘레길을 걷다. 2013년 3월의 평일 기행이 3월 7일 목요일 익산의 미륵산 둘레 길을 걷습니다. 백제의ㅔ 네 번째 도읍지라는 이야기 가 있는 왕궁탑 일대와 동고도리 석불입상과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쌍릉, 그리고 동양 최대의 절터인 미륵사 지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연동리 석불이 있는 곳입니다. 여산의 천주교 성지와 여산 관아터, 그리고 가람 이병기 생가가 미륵산 둘레 길에 있습니다. 또한 여산 송씨 제각, 문수사, 천일사, 등의 사찰도 그 인근 에 있습니다. 마한의 왕궁 터라고도 하고 백제의 네 번째로 도읍지로 조성되었을 것이라고 전해오는 왕궁평에 접어든다. 초여름 부터 9월까지 이곳에는 석달 열흘 동안 화사한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가 꽃 숲을 이루었는데 지금은 꽃은 사라지고 까치밥으로 남겨진 못생긴 모과가 하나씩 매달려 있고 그 몇 개는 떨어져 나뒹굴고 있다. 나는 떨어진 모과를 주워 향긋한 그 냄새를 맡으며 탑앞에 선다. 조선조 말에 간행된 금마지 에 의하면 왕궁평은 용화산에서 남으로 내려온 산자락이 끝나는 곳에 있으며, 마한 때의 조궁 터라는 성터가 남아있다. 이 성은 돌을 사용하지 않은 토성으로 그 곳 사람들이 밭을 갈다보면 기와 조각 이 깔려 있고, 더러 굴뚝들이 나온다. 종종 옥패와 동전, 쇠못 등을 습득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동국여지승 람 에서도 왕궁정은 군의 남쪽 5 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옛날 궁궐터라고 한다. 고 하는 왕궁평에는 늠름하 고 아름다운 왕궁리 오층석탑이 보물이었다가 뒤늦게야 국보(국보 289호)로 지정되었다. 미륵사탑이나 정림사지 석탑 과 같이 백제탑이라는 설도 있고 탑신부의 돌 짜임의 기법과 3단으로 된 지붕돌 층급받침 때문에 통일신라 탑이라는 설도 있으며, 백제 양식을 계승하고 신라양식을 흡수하여 고려 초기에 건립된 탑이라는 설도 있다. 또 하나는 후백제 의 창업주인 견훤과 관계가 있는데, 견훤의 도읍인 완산의 지세가 앉아 있는 개의 형상이므로 개의 꼬리에 해당하 는 이곳에 탑을 세워 누름으로서 견훤의 기세를 꺾어 고려 태조 왕건이 이기게 되었다. 그런데 이 탑이 완성되던 날 완산의 하늘이 사흘 동안 어두웠다 라는 설은 금마지 의 기록과도 맞아 떨어진다. 왕건은 실제 후삼국을 통일한 후에 도선국사의 의견에 따라 비보사찰을 여러 곳에 세웠다. 왕궁에는 오층석탑만 남고 1965년 이 왕궁 탑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 중 1층 지붕돌과 기단부에서 금으로 된 사리탑과 사리병 및 금으로 된 금강 경 판이 나왔다. 국보 123호로 지정된 이 유물들은 현재 전주 국립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또한 이 탑에는 또 하나 의 분명치 않은 전설이 전해온다. 익산 미륵산 둘레길을 걷다. 109

110 왕궁 탑을 지나 금마 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들판 한가운데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석불이 마주보고 있다. 보물 46호로 지정된 동고도리 석불은 높이가 4 24m에 이르고 불상의 머리위에는 높은 관을 얹었는데, 동고도리라는 뜻은 금마가 예전에 도읍지였기 때문에 고도의 동쪽에 있다하여 동고도리라고 부른다. 일설에 의하면 이 지역의 토호들이 자기들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세웠을 것이라고도 하고, 한편에서는 금마를 지 키는 수호신으로 세웠다고도 한다. 이 두 개의 불상은 평소에는 만나지 못하다가 섣달 해일 자시에 옥룡천이 얼어붙 으면 서로 만나 안고 회포를 풀다가 새벽닭이 울면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하며, 석불 옆에 세워진 이 석불 중건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금마는 익산의 구읍자리로 동 서북의 삼면이 다 산으로 가로막혀 있는데, 유독 남쪽만은 물 이 다 흘러나가 허허하게 생겼기에 읍 수문의 허 虛 를 막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 한다. 또 일설에는 금마의 주산인 금 마산의 형상이 마치 말의 모양과 같다고 하여 말에는 마부가 있어야 하므로 마부로서 인석( 人 石 )을 세웠다고 한다. 칠월칠석날의 견우직녀의 전설을 닮은 불상들을 뒤로 하고 금마 지나 미륵산 자락에 접어든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의하면 하루는 무강왕 武 康 王 이 인심을 얻어 마한국을 세우고 하루는 선화부인 善 花 夫 人 과 더불어 사자사 獅 子 寺 로 가고자 용화산 아래 밑 큰 못가에 이르렀는데, 미륵불 셋이 못 속으로부터 나타났다. 왕이 수 레를 멈추고 치성을 드리자 부인이 왕에게 말했다. 여기다가 꼭 큰절을 짓도록 하소서. 저의 진정 소원이외다. 동양최대의 절터 미륵사 왕이 이를 승낙하고 지명법사를 찾아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었더니 법사가 귀신의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 뜨려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미륵불상 셋을 모실 전각과 탑과 행랑채를 각각 세 곳에 짓고 미륵사라는 현판을 붙였다. 신라 진평왕이 백 명의 장인 匠 人 들을 보내 도와주었으니 지금도 그 절이 남아 있는데 석탑 石 塔 의 높 이가 매우 높아 동방의 석5탑 중에 가장 큰 것이다. 하였다. 동서로 172m 남북으로 148m에 이르는 미륵사터는 넓이가 2만5천 평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로서, 국보 11호로 지정된 미륵사지 9층 석탑인 서 석탑과 1993년에 복원된 동석탑 그리고 당간지주가 있는데 다른 절과는 달리 2기가 있다.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미륵사 인근 오금 산(현재 익산 토성, 쌍릉이 자리하고 있는 곳)에서 마를 캐며 홀어머니와 살던 마동이 신라 선화공주와 혼인하는 서 동설화와 미륵사 창건설화로 되어 있으며 또 다른 미륵사의 창건설화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신앙만이 아니라 정치적 인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즉 백제의 국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마한세력의 중심이었던 이 곳 금마에 미 륵사를 세웠을 것이라고 한다. 무왕은 바로 이 지역을 새로운 도읍지로 하여 백제 중흥의 원대한 포부를 펼치려고 하 였을 것이다. 어떻든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를 세우는 데에는 당시 백제의 건축, 공예 등 각종 문화 수준이 최고 도로 발휘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고 백제의 전 국력을 집중하여 창건하였기 때문에 백제 멸망의 한 원인으로 작 용한다는 평가를 받기도하지만 미륵사가 어느 때 폐찰이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조선 정조때 무장지역의 선비였 던 강후전이 쓴 와유록 臥 遊 錄 에 의하면 미륵사에 오니 농부들이 탑 위에 올라가 낮잠을 자고 있었으며 탑이 익산 미륵산 둘레길을 걷다. 110

111 100여 년 전에 부서 졌더라 하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대다수의 절들이 임진, 정유재란 때에 불타버린 것과는 달리 다른 원인에 의해서 폐사가 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미륵사의 발굴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 절터에는 논밭과 민가가 들어서 있었고 절의 석축들 대부분이 민가의 담 장이나 주춧 둘로 사용되고 있었다. 발굴결과 일연스님이 기록한대로 가운데 목탑을 두고 동서로 두 개의 탑이 있었 고 각 탑의 북쪽으로 금당이 하나씩 있었으며 각기 회랑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이는 탑, 금당, 강당, 승방이 일직선상 에 하나씩 배치되는 일반적인 백제계 탑과는 매우 다르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정일의 <암자 가는 길> 익산 미륵산 둘레길을 걷다. 111

112 태백의 검용소에서 삼척시 하장면 갈전리까지 :38 태백의 검용소에서 삼척시 하장면 갈전리까지 -한강 첫번째 기행- 계사년의 정기기행인 천 삼 백리 한강을 따라 걷는 여정이 2013년 3월에 실시됩니다. 원래 3월 넷째 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어머님의 49제가 넷째 주 일요일인 관계로 부득이 하게 3월 한 달만 셋째 주 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장손이기에 오래도록 마음에 걸길 것 같아 옮겼으니 양해를 바랍니다. 봄이 오는 길목인 3월에 시작하여 12월까지 이어질 한강을 따라 걷는 여정에는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남 아 있습니다. 강원도와 충청도, 경기도와 서울 시민들의 식수원으로 공업용수와 농업용수로 우리민족에게 지대한 영 향을 끼치고 있는 한강을 따라 걷는 여정에 많은 참여 바랍니다. 누구의 기원이고 누구의 정성인지도 모를 돌탑이 제단처럼 차려진 바위 위에 수북이 쌓여 있다. 조금 어둡다 했더 니 금세 햇살이 비추인다. 김형곤 씨는 종이배를 접어 검용소에다 띄운다. 저 종이배가 푸른 이끼 푸른 물살을 헤치 고 무사히 한강의 하구까지 닿을 수 있을까? 그러나 종이배는 우리들의 염원에 아랑곳없이 굽이쳐 흐르다 말고 난파 한다. 그렇다, 이곳 검용소에서 하구까지 그침이 없이 갈 수 있는 것은 한강을 흐르는 물과 걸어가는 우리들 그리고 세월이라고 이름 지은 시간뿐일 것이다. "이곳 검용소는 한강 514.4km의 발원지로 하루 2천여 톤 가량의 수원이 석회암반을 뚫고 나온다. 깊이 1.5m, 넓이 1.2m의 암반 2, 30m를 지나 이루어낸다. 수온은 사계절 내내 9 이며 암반 주변 풀 이끼는 신비함과 오염되지 않은 자연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서해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강줄기를 거슬러 이 산으로 올라 오며 몸부림친 흔적이 지금의 폭포이며, 부근에서 풀을 먹기 위해 온 소를 그 용이 잡아먹기도 해 마을사람들이 내려 가버렸다고 한다"라고 적힌 안내판 옆에는 검용정이 세워져 있다. 그 옆으로 태백의 광명정기에 솟아 민족의 젖줄 한강을 발원하다 라는 표지석이 보인다. 제당궁샘 1.9km, 두문동재 3.8km, 암수령재 7.7km라고 씌어져 있는 나무팻 말들을 바라보는 순간에도 물은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른다. 고목나무샘에서부터 발원한 한강의 물줄기는 이곳 검용소를 거쳐 하장천을 지나 골지천으로 들어가고 아우라지에서 송천을 합하게 된다. 영월에서 동강 서강을 받아들인 남한강은 남류하면서 평창강 주천강을 합하고 단양을 지나면서 북서로 흘러 달천 섬강 청미천 흑천을 합친 뒤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합류한다.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남한강을 합 류한 한강은 계속 북서 방향으로 흐르면서 왕숙천 한천 안양천 등의 작은 지류를 합류하여 김포평야를 지난 뒤 김 포시 월곶면 보구곶리에서 강으로서의 생을 마감한 후 서해로 들어간다.(...) 태백의 검용소에서 삼척시 하장면 갈전리까지 112

113 푸른 이끼를 헤집고 물은 흐르고 한강의 발원지 아래 첫 마을인 안창죽에 도착한다. 두 채의 집이 서 있는데 다 비 어 있으니 뭐라고 물어볼 수도 없다. 두 개의 통나무를 걸치고 작은 나무로 못을 밖아 만든 나무다리를 건너 다가선 집은 문짝마저 다 떨어져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빨간 의자 두 개가 놓여져 있고 금세 고등어를 구워도 될 법한 자 세로 석쇠가 나무 찬장에 얹혀져 있다. 안창죽마을에서 성황당을 만난다. 전주 이씨 선조대왕의 14대 자손이라는 이갑용(67세) 씨의 말에 의하면 저 성황당 에서 마을사람들이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일 년에 두 차례 정월과 단오에 마을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한때는 70호쯤이 되었는디 화전민들이 다 떠나버리고 지금은 열댓 집 남았는가, 젊은 사람들 다 떠나고 나 많은 사람들만 남 았응개." 이갑용 씨의 말처럼 저 가파른 산들을 일구어 씨 뿌리고 살았던 화전민들은 지금쯤 어느 곳에서 살며 이곳 시절을 생각할까.(...) 임계 39km, 하장 11km. 강물은 여울져 소리를 내며 흐르고 강가에 있는 밭들은 온통 자갈투성이다. 내 유년시절에 할머니가 밭을 매다가 "아가 저 돌멩이 주어다 저 밭둑에 놓아라" 하고 성화를 대곤 하셨는데 저 많은 자갈들을 골라 내지도 않고 농사를 짓는 강원도 사람들의 심성의 무던함 또는 애로사항을 알 듯도 하다. 골지천에는 복합비료 포대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고 더러는 떠내려간다. 비료를 뿌린 다음에 차곡차곡 포개놓고 그것 을 농협에서나 면사무소에서 수거해 가기만 해도 될 텐데 왜 저렇게 포대를 떠내려가게 놔둘까? 옛날 무사가 유숙하 였다는 무사동마을 앞에는 옹기점이 있었다는 점촌마을이 있고 점촌마을에서 다시 외나무다리를 건넌다. 외딴 집이 한 채 있는데 시멘트 다리를 놓아줄 리는 만무하고 목마른 사람이 시암 판다고 저렇게 나무다리를 놓은 것이리라. 나는 강을 따라 걸으며 이곳이 정말 강원도가 맞는구나 생각한다. 시상에 한강의 발원지에서 여기까지 내려오는 동안 논배미 한 뙈기 못 만났으니 말이다.(,,,) 광동댐이 만들어지면서 새로 생긴 하장면 소재지의 버스 간이정류장에는 "누구야 사랑해", "누구는 누구를 좋아해" 등의 낙서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고 나무의자에 할머니 한 분이 앉아계신다. 어디 사시느냐고 묻자 넉골 사는데 태백 을 다녀오는 길이시란다. "할머니 고향이 여기에요?" 하고 내가 물으니, "우리 친정은 저그 삼척 미로면이야." "그래 요, 그곳에 천은사라는 절이 있는데 언제 시집오셨어요" 하고 말을 받자 "열아홉 살에 시집왔는데 삼 년 살다 신랑은 국방경비대로 끌려가 버리고 그때부터 이날 이때까지 소식도 몰라." 아들이 있었느냐고 내가 묻자 "아들 하나 났어. 내가 시집왔을 때 시어머니 나이가 서른일곱이었는데 일곱을 낳았었어. 시아버지는 나이를 많이 먹었는디 내가 온 뒤 에 넷을 더 낳아 내가 똥오줌 갈아내며 다 키웠지. 난 신랑 얼굴도 몰라"라고 대답한다. 그랬을 것이다. 젊은 시어머니 밑에서 논은 구경도 못하고 강냉이와 감자, 조와 수수만 심는 농사일은 오죽이나 많았 겠는가. 나는 안타까워서 "할머니 아드님은 잘 하십니까?" 하고 묻자 "우리 아들이 나한테 참 잘해. 며느리도 손자들 도 어찌나 잘 하는지." 그 말을 듣고 내가 "마음이 놓이네요. 아들내미 하나 있으면서 속이나 썩였으면 어떻게 했겠어 요"라고 혼잣말처럼 말하자 "속 썩였으면 도망갔지 내가 있었겠어. 요즘 텔레비 보면 팔십이 넘어서도 이혼하는 노인 들이 얼마나 많아. 사람들이 날더러 쑥맥이라고 해." 나는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위로해 줄 수 없고 보상할 길 없는 세월을 살았으면서도 눈빛이 너무 선하고 고운 우 리 어머님보다 한 살 위이신 김석녀 할머님(76세)을 바라보며 별안간 눈시울이 뜨거워져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 태백의 검용소에서 삼척시 하장면 갈전리까지 113

114 소나무숲 아래로 난 옛길은 마치 고향집을 찾아가는 느낌을 준다. 양지촌마을에 이르러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는 노 루목마을 쪽을 바라보며 발길을 옮기는데 먼발치의 무너진 다리 위로 어미염소가 새끼 두 마리를 데리고 뛰어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서둘러 뛰어가 사진을 찍었고 그 염소들은 느닷없이 사람들이 나타나니까 놀란 채 강 건너 국도 쪽으로 달려갔다. 걱정이 된 두 부부가 뒤따라오는 것을 본 김현준 기자가 "아줌마 좋은데 사시네요" 하고 말을 건네 자 뒤를 돌아보더니 "그렇게 좋으면 와서 살아 보세요" 하고 퉁명스럽게 쏘아댄다. 당황한 김현준기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다.(...) 우리가 계속 걸어가면서 저 모퉁이를 돌아가면 어떤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을까 하고 설레는 것처럼, 아침은 보일 듯 말 듯한 안개와 함께 찾아왔다. 아침 새소리는 강물 소리에 뒤섞여 청아하고 강물에서 노닐고 있던 물오리떼 들은 날아오른다. 강의 잔물결 소리를 듣는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완전히 절망하지 않는다. 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는 말했 다는데, 이렇게 이른 아침에 아름답고 청아한 강물소리를 듣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생각하며 바라본 강 건 너로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검용소에서부터 이곳에 오는 동안 제일 큰 들판이다. 삼척시 하장면 토산리마을을 지난다. 푸른 보리밭 가운데에 서 있는 빈 집이 애처로운데 갑자기 까마귀 몇 마리가 까 악까악 날아오른다. (...) 석유를 배 아플 때 먹는 약이라고 여기던 시절 우여곡절 끝에 휴게소 식당을 찾아 여정을 풀고서 그 집 주인장인 이정모(49세) 씨에게 그 지역의 얘기를 들었다. 석 탄공사에 다니다 명예퇴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휴게소 차리고 땅도 얼마간 사서 농사도 짓는다는 이정모 씨의 이야기 속에는 모두 다 가난했던 이야기 그러나 정이 듬뿍 들어 있던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광동댐 만들어지기 전만 해도 고기들이 참 많았어요. 뚜구리, 쉬리, 메기, 민물조개들이 물가를 걸어가면 다리를 쿡 쿡 치고 그랬어요. 그때만 해도 대부분 가난하니까 메밀밥, 감자, 조밥, 콩밥이 주식이었고 가을이면 산에 가서 도토 리를 따다가 으깬 뒤 사카리 넣어가지고 쪄서 먹고살았어요. 이불이 없어가지고 돗자리 덮고 자고, 너무 추우면 집에 서 기르던 개를 품고 잤어요. 그래서 나는 먹고사는 것을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요. 약이 뭐 있어요. 배가 아플 땐 석유를 약이라고 마시고 그랬잖아요. 나 클 때는 150여 호가 살았었는데 지금은 80호쯤 남았는가. 그래서 이 마을 학 교에 올해는 학생이 한 사람만 입학했다든가. 아마 내년에는 폐교가 될 거라고 그래요." 불과 얼마 전 이야기를, 나도 겪었던 이야기를 들으며 내 마음은 얼마나 심란했던가. 전라도에선 아무리 가난해도 이 불 한 채쯤은 있어서 이불 한 채에 온 식구들이 발을 디밀고 칼잠을 자곤 했었는데. 태백의 검용소에서 삼척시 하장면 갈전리까지 114

115 계사년 2월에 고흥반도 길을 걷다 :38 계사년 2월에 고흥반도 길을 걷다 계사년 2월에 소록도가 있는 고흥반도를 도보로 걷습니다. 6일간의 일정으로 걷는 이 행사는 팔영산, 소록도, 나로호가 있는 곳으로 산과 바다가 아름다운길을 걷는 일정입니 다. 남해안 걷기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이 행사는 고흥 바닷가 길의 아름다움을 온 몸으로 느끼며 걷는 행사입니다. 보성 아래쪽에 고흥군이 있다. 본래 장흥부( 長 興 府 )의 고이부곡( 高 伊 部 曲 )이었으며, 고려 충렬왕 때 흥양으로 바뀌 었다. 세종실록 지리지 에 땅이 기름지며 기후가 따뜻하다 고 기록된 흥양의 당시 호수는 157호이고 인구가 686명이며, 군정은 시위군이 8명, 진군이 46명, 선군이 59명이었다. 1914년에 지금과 같이 고흥군으로 바뀌었다. 안숭선( 安 崇 善 )의 기에 고흥에 대해 말하길, 정통( 正 統 ) 10년에 내 사명을 받들고 남주로 가다가 흥양( 興 陽 ) 지경에 들어가니 땅이 큰 바닷가에 있어 살찌고 기름지다. 그러나 두 내가 고을 한가운데로 가로 세로 흘러서 해마다 여름철 이 되어 장마물이 넘치고 보면 백성들은 수해를 당하여 모두 흩어져 유리( 流 離 )하니 고을에서 걱정으로 여겼다 고 하였다. 고흥은 반도로 이루어져 있는데도 아름답기로 소문이 난 팔영산 운람산 천등산 등의 산과 내나로도와 외 나로도 소록도 시산도 등의 섬이 있는데, 그 중의 한 섬이 소록도이다. 뱀골재를 넘으면 지도상에 사람의 위 같기 도 하고 주머니 같기도 한 고흥반도에 접어들고 고흥의 야트막한 산 너머로 보이는 소록도를 두고 한하운 시인은 시 한편을 남겼다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가도 붉은 전라도 길 한하운과 그의 동료들, 육신이 짖이겨지는 절망과 한의 세월 속에 자리했던 소록도를 배경으로 씌어진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 이 실려 있다. 내 말은 결국 같은 운명을 삶으로 하여 서로의 믿음을 구하고 그 믿음 속에서 자유나 사랑으로 어떤 일을 행해 나 가고 있다 해도 그 믿음이나 공동운명의식은, 그리고 그 자유나 사랑은 어떤 실천적인 힘의 질서 속에 자리 잡고 설 계사년 2월에 고흥반도 길을 걷다 115

116 때라야 비로소 제값을 찾아 지니고, 그 값을 실천해 나갈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소록도 少 鹿 島 는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에 속한 섬으로 고흥반도 녹동항에서 남쪽으로 약 600m 지점에 있다. 남쪽은 거금도와 인접해 있고, 그 사이에 대화도 상화도 하화도 등 작은 섬이 있다. 지형이 어린사슴과 비슷하여 소록( 小 鹿 )이라 했다고 한다. 본래는 군의 금산면에 속했으나, 196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오마리와 함께 도양읍에 편입되었다. 이 소록도에 한센병 환자들을 집단 수용시켰는데, 그 기원은 구한말 개신교 선교사들이 1910년 세운 시립나 요양원에 서 시작되었다. 1916년에는 주민들의 민원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소록도 자혜병원으로 정식으로 개원하였다. 일제 강 점기에는 한센병 환자를 강제 분리 수용하기 위한 수용 시설로 사용되면서, 전국의 한센병 환자들이 강제 수용되기 도 하였다. 당시 한센병 환자들은 4대 원장 슈호 마사토( 周 防 正 秀 )가 환자 처우에 불만을 품은 환자에게 살해당할 정 도로 가혹한 학대를 당하였으며, 강제 노동과 일본식 생활 강요, 불임 시술 등의 인권 침해와 불편을 받았다. 소록도 내에는 일제 강점기 한센병 환자들의 수용 생활의 실상을 보여주는 소록도 감금실과 한센병 자료관, 소록도 갱생원 신사 등 일제 강점기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역사적인 건물과 표지판 등이 많이 남아 있다. 소록도 병원은 해방 후에도 한센병 환자의 격리 정책을 고수하여 환자들의 자녀들이 강제적으로 소록도 병원 밖의 학교에서 공부해야 하였으나, 이후 한센병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고, 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완화되면서, 한센병 의 치료, 요양 재생, 한센병 연구 등을 기본 사업으로 하는 요양 시설로 변모하였다. 또한 1965년 부임한 한국인 원장 에게서 과일 농사, 가축 사육에 종사하여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있도록 경제적인 배려를 받았으며, 일부는 소록도 축 구단을 결성하여 한센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완화하였다. 섬의 주민은 국립 소록도 병원의 직원 및 이미 전염력을 상실한 음성 한센병 환자들이 대부분이며, 환자의 대부분은 65세를 넘긴 고령이다. 환자들의 주거 구역은 외부인이 접근할 수 없도록 차단되어 있다. 삼림과 해변이 잘 보호되어 있어서 정취가 뛰어나며, 관광지는 아니지만, 걸어 다니면서 섬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길이 잘 닦여 있다. 2007년 9월 22일 고흥 반도와 소록도를 잇는 1160m의 연육교 소록대교가 임시개통하여, 육상교통로가 열렸다. 이곳을 무대로 소설가 이청준은 <<당신들의 천국>>을 썼는데, 일제 말에서 1970년대까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조선 일보 기자였던 이규태의 빼어난 취재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 소설은 살아 있는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원형 朴 元 亨 이 솔바람 땅을 뒤엎으니, 일천 산이 움직이고, 매화, 비 서늘함을 나누어서 한 난간이 낡도다. 라고 시를 지었고 객사 客 舍 에 일 없어 술잔 돌리며 시편 詩 篇 을 쓰노라. 붓을 휘둘러 벼루에 의지했네. 읊다가 한번 바 라보니 바다 물결 면면이 눈이 펄럭이네. 라는 시를 남겼던 곳이 고흥이다. 이 행사에 참여하실 분은 미리 접수하십시오. 일 시 2013년 2월 20일(수) ~ 2월 25일(월) 계사년 2월에 고흥반도 길을 걷다 116

117 구 간 고흥 동강면 죽암 ~ 고흥 대서면 남정리 예정. 엿새 예정 : A. B. C. D. E. F 구간. 일 정 상세 일정 : 숙박. 식당 섭외 등 추후 공지. 차량 : 12인승 준비완료. (사) 우리 땅 걷기 남도의 고흥반도 트레일 일자 답사 경로 비고 a 1월 20일(수) 벌교역 07시 집결 1월 20일(수) 1월 21일(목) 1월 22일(금) 1월 23일(토) 1월 24일(일) 1월 25일(월) 끝. 고흥군 동강면 죽암리 ~ 영남면 남열리 남열리 ~ 도화면 발포리 동일면 내나로도 ~봉래면 외나로도 발포리 ~ 도양읍 녹동항 녹동항 ~ 소록도~ 두원면 대전리 대전리 ~ 대서면 남정리 b 08시 고흥군 동강면 죽암리 출발 c 1박 : 영남면 남열리 a 08시 영남면 남열리 출발 b 2박 : 도화면 발포리 a 08시 도화면 발포리 출발 b 3박 : 도화면 발포리 a 08시 도화면 발포리 출발 b 4박 : 도양읍 a 08시 녹동항 출발 b 5박 : 고흥읍 a 08시 고흥읍 출발 b 16시 : 남정리 도착 해산 1. 일시: 2013년 2월 20일(수)에서 26일(화요일)까지 2. 출발시간 및 장소: 1월 20일(수) : 벌교읍 별교역 07시 개별 집결. ~ 08시 동강면 죽암리에서 출발 3. 참가비: 하루 5만원씩 30만원( 하루나 이틀 사흘) 누구나 가능. 마음대로 신청할 수 있음 고흥반도 팔영산, 소록도, 등 4. 고흥반도 팔영산, 소록도, 등 5. 안내 도반: 유재훈.(우리 땅 걷기 운영위원) 신정일<새로 쓰는 택리지> 전라도 의 저자, 6. 신청방법: 댓글로 신청하고 참가비 입금해야 완료 7. 참가비 입금계좌: 국민은행 사단법인 우리땅걷기 계사년 2월에 고흥반도 길을 걷다 117

118 봄맞이 섬 기행, 고군산군도의 선유도를 가다 :37 봄맞이 섬 기행, 고군산군도의 선유도를 가다. 우리 땅 걷기 2013년 두 번째 섬 기행으로 고 군산군도에 자리 잡은 선유도, 장자도, 무녀도를 갑니다. 몇 년 후에는 새만금을 통한 다리로 연결되어 자동차로 가게 될 <고 군산 군도>의 아름다운 섬, 선유도, 장자도, 무녀도에서 봄이 오는 소리를 듣고 싶은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선유도와 장자도, 그리고 무녀도가 있는 고군산군도는 군산시에서 남서쪽으로 약 50km 떨어진 해상에 있으며, 무녀 도( 巫 女 島 ) 선유도( 仙 遊 島 ) 신시도( 新 侍 島 ) 방축도( 防 築 島 ) 등 63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 16개가 유인도( 有 人 島 )이다. 고려시대에는 수군진영을 두고 군산진이라 불렀으며, 조선 세종 때 진영이 인근의 육지로 옮기면서 지명 까지 가져가고 이 섬들에는 옛 고( 古 )자를 앞에 넣은 새 이름이 붙었다. 이후 섬들은 여러 차례 행정구역의 변천을 거치면서 충청남도와 전라남도에 속했던 적도 있었고 자치단체를 달리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차례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섬들은 해발고도 150m 이하의 낮은 구릉성 섬들로,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 중 신시도가 가장 크며 선유도 무녀 도 장자도 등 일부 섬이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겨울철에는 북서계절풍의 영향을 많이 받고, 여름은 따뜻하고 습기 가 많은 편이다. 근해 연안어업의 중심지로서 인근 수역은 서해 다른 지역에 비해 수심이 일정하고 해안선이 만( 灣 )을 형성하고 있으 며 해저는 암반과 개펄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어족자원의 산란 및 서식장으로 알맞은 여건을 갖추고 있으며, 김 굴의 양식장이 많다. 선유도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섬이 주변의 물이 얕고 모래가 깨끗해 해수욕이 가능하며 어자원이 풍부해 바다낚시나 스킨스쿠버 등 레저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선유도의 망주봉과 명사십리, 장자도의 사자바위와 할미바위, 방축도 의 독립문바위, 명도와 횡경도의 기암괴석, 말도( 末 島 )의 갈매기 등 볼거리들이 많다. 신시도와 무녀도에는 염전이 있 으며, 대장도에는 1만여 점의 수석과 분재를 모아놓은 개인 소유의 수석전시관이 있고, 말도에는 등대가 있다. 특히 10리 길이의 해수욕장 모래로 유명한 명사십리( 明 沙 十 里 ), 해질녘 서쪽바다가 온통 붉게 물들어 장관을 이루는 선유낙조( 仙 遊 落 照 ), 백사장에서 자란 팽나무가 기러기의 내려앉은 모습이라는 평사낙안( 平 沙 落 雁 ), 귀양 온 선비가 임금을 그리는 눈물 같다는 망주폭포( 望 主 瀑 布 ), 장자도 앞바다에서 밤에 고기 잡는 어선들의 불빛을 이르는 장자어 화( 壯 子 漁 火 ), 신시도의 고운 가을단풍이 달빛 그림자와 함께 바다에 비친다는 월영단풍( 月 影 丹 楓 ), 선유도 앞 3개 섬 의 모습이 만선 돛단배가 들어오는 것 같다는 삼도귀범( 三 島 歸 帆 ), 방축도 명도 말도의 12개 봉우리가 마치 무사들 봄맞이 섬 기행, 고군산군도의 선유도를 가다. 118

119 이 도열한 듯하다는 무산십이봉( 無 山 十 二 峯 )을 고군산8경으로 일컫는다. [출처] 고군산군도 두산백과 선유도의 선유봉 그리고 망주봉에서 바라보는 일몰과, 선유도 해수욕장, 그리고 선유도 일대에 조성된 아름다운 길 을 걷고 일요일 오후에는 군산의 근대문화유산 기행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봄맞이 섬 기행, 고군산군도의 선유도를 가다. 119

120 [신정일의 길]삼남대로 옆에 웬 신 삼남길 (경향신문 (금)) :36 삼남대로 옆에 웬 신 삼남길 (경향신문 (금)) 신정일 우리땅걷기 대표 문화사학자 전남 해남에서 서울 숭례문에 이르는 삼남대로 천리 길을 혼자서 걸 었던 때가 2004년 봄이다. 조선시대의 9대 간선로 중 제7로인 삼남대 로는 말 그대로 역사의 길이었다. 주요 노정을 서울에서부터 살펴보면 동작나루, 남태령, 과천, 인덕원, 청호역(수원), 진위, 성환역, 천안, 차령 고개, 공주, 노성, 은진, 여산을 거쳐 삼례에 닿았다. 삼례에서 전주, 남원, 함양, 산청, 진주를 거쳐 통영으로 가는 제6로가 나뉜다. 다시 금구를 지나 태인, 정읍, 갈재, 장성, 나주, 영암 그리고 강진의 성전을 거쳐 해남 이진항이나 관두량에서 제주로 가는 길이었다. 삼남대로는 역사 속의 수많은 유배객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길이다. 기묘사화의 주역, 김정과 동계 정온, 광 해군이 이 길을 거쳐 제주로 갔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권세가 우암 송시열은 그 길목의 정읍에서 최후를 맞았고 추사 김정희도 이 길을 따라 제주로 갔다. 다산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가 유배를 가다가 나주의 율정점 에서 이별의 눈물을 흘렸던 곳도 이 길이었다.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던 이 길이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서울에서 문경새재 넘어 부산에 이르는 영남대로와 삼남대로, 그리고 흥인지문에서 경북 울진군 평해읍에 이르는 길을 문화생태 탐방로로 만들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모 스포츠그룹과 도보답사 카페가 그와 비슷한 길을 신 삼남길 이라는 이름으로 연결하고 있어서 논란이 일고 있다. <대동지지>에 표시된 삼남대로는 국도로 연결된 부분이 많아서 걷기에 불편하니 10km나 15 km 떨어진 곳에 신 삼남길 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더욱 해괴한 것은 그들의 말도 안되는 강변에 지자체까지 동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담당자에게 물었다. 조선시대의 역사 인물들이나 과객들, 또는 벼슬아치나 동학농민군을 비롯한 여행객들이 걸었던 길, 즉 <대동지지>에 나타난 그 길이 삼남대로지, 어찌 그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삼남대로라 하겠느 [신정일의 길]삼남대로 옆에 웬 신 삼남길 (경향신문 (금)) 120

121 냐 고. 연암 박지원은 비슷한 것은 가짜다 라고 말했다. 자동차들이 많이 다니기 때문에 역사 속의 길을 무시하고 다른 곳에 신 삼남길 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길을 만드는 데 피 같은 국고가 쓰인다면, 그 길을 피눈물 흘리 며 걸어갔던 선인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역사적인 길은 역사를 공부하고 답사한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고증을 받고 만들어야 한다. 역사의 복원은 흉내 가 아니라 사실대로 바로잡는 것이다. 따라서 짝퉁 길을 낼 여력이 있으면 <대동지지>에 나타난 삼남대 로 를 찾고 연결하여, 많은 사람들이 길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며 걸을 수 있도록 할 일이다. [신정일의 길]삼남대로 옆에 웬 신 삼남길 (경향신문 (금)) 121

122 이청준 문학의 산실인 소록도와 장흥 회진을 걷다 :12 이청준 문학의 산실인 소록도와 장흥 회진을 걷다. 연중 기획으로 마련한 섬진강 기행이 참석자가 저조해 일정을 바꾸었습니다. 한국문학사상 가장 빼어난 소설가 중의 한 사람인 이청준 선생이 심혈을 기울여 상재한 <당신들의 천국> 무대인 소록도와, <선학동 나그네> <서편제> <눈길> 의 무대인 장흥 회진의 이청준 생가와 천관산을 답사할 예정입니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소록도의 해변과 언제 읽어도 가슴이 울컥해지는 <눈길>의 무대, 그리고 낡이 맑은 날은 제주도가 환히 보이는 천관산을 답사할 이번 여정에 참여를 바랍니다. 뱀골재를 넘으면 지도상에 사람의 위 같기도 하고 주머니 같기도 한 고흥반도에 접어들고 고흥의 야트막한 산 너 머로 보이는 소록도를 두고 한하운 시인은 시 한편을 남겼다.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가도 붉은 전라도 길 한하운과 그의 동료들, 육신이 짖이겨지는 절망과 한의 세월 속에 자리했던 소록도를 배경으로 쓰여 진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 이 실려 있다. 내 말은 결국 같은 운명을 삶으로 하여 서로의 믿음을 구하고 그 믿음 속에서 자유나 사랑으로 어떤 일을 행해 나 가고 있다 해도 그 믿음이나 공동운명의식은, 그리고 그 자유나 사랑은 어떤 실천적인 힘의 질서 속에 자리 잡고 설 때라야 비로소 제값을 찾아 지니고, 그 값을 실천해 나갈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소록도 少 鹿 島 는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에 속한 섬으로 고흥반도 녹동항에서 남쪽으로 약 600m 지점에 있다. 남쪽은 거금도와 인접해 있고, 그 사이에 대화도 상화도 하화도 등 작은 섬이 있다. 지형이 어린사슴과 비슷하여 소록( 小 鹿 )이라 했다고 한다. 본래는 군의 금산면에 속했으나, 196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오마리와 함께 도양읍에 편입되었다. 이청준 문학의 산실인 소록도와 장흥 회진을 걷다. 122

123 이 소록도에 한센병 환자들을 집단 수용시켰는데, 그 기원은 구한말 개신교 선교사들이 1910년 세운 시립나 요양원에 서 시작되었다. 1916년에는 주민들의 민원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소록도 자혜병원으로 정식으로 개원하였다. 일제 강 점기에는 한센병 환자를 강제 분리 수용하기 위한 수용 시설로 사용되면서, 전국의 한센병 환자들이 강제 수용되기 도 하였다. 당시 한센병 환자들은 4대 원장 슈호 마사토( 周 防 正 秀 )가 환자 처우에 불만을 품은 환자에게 살해당할 정 도로 가혹한 학대를 당하였으며, 강제 노동과 일본식 생활 강요, 불임 시술 등의 인권 침해와 불편을 받았다. 소록도 내에는 일제 강점기 한센병 환자들의 수용 생활의 실상을 보여주는 소록도 감금실과 한센병 자료관, 소록도 갱생원 신사 등 일제 강점기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역사적인 건물과 표지판 등이 많이 남아 있다. 소록도 병원은 해방 후에도 한센병 환자의 격리 정책을 고수하여 환자들의 자녀들이 강제적으로 소록도 병원 밖의 학교에서 공부해야 하였으나, 이후 한센병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고, 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완화되면서, 한센병 의 치료, 요양 재생, 한센병 연구 등을 기본 사업으로 하는 요양 시설로 변모하였다. 또한 1965년 부임한 한국인 원장 에게서 과일 농사, 가축 사육에 종사하여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있도록 경제적인 배려를 받았으며, 일부는 소록도 축 구단을 결성하여 한센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완화하였다. 섬의 주민은 국립 소록도 병원의 직원 및 이미 전염력을 상실한 음성 한센병 환자들이 대부분이며, 환자의 대부분은 65세를 넘긴 고령이다. 환자들의 주거 구역은 외부인이 접근할 수 없도록 차단되어 있다. 삼림과 해변이 잘 보호되어 있어서 정취가 뛰어나며, 관광지는 아니지만, 걸어 다니면서 섬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길이 잘 닦여 있다. 2007년 9월 22일 고흥 반도와 소록도를 잇는 1160m의 연육교 소록대교가 임시개통하여, 육상교통로가 열렸다. 이곳을 무대로 소설가 이청준은 <<당신들의 천국>>을 썼는데, 일제 말에서 1970년대까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조선 일보 기자였던 이규태의 빼어난 취재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 소설은 살아 있는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새로 쓰 는 택리지> 전라도 편에서 이청준의 고향 장흥 진목리 한국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소설가 이청준은 장흥군 대덕면, (회진면)의 진목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회진이 라는 작은 포구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던 무렵의 몇 년간 그의 가족들이 차례로 죽어갔다. 그의 나이 여섯 살이 되던 해 세 살난 아우의 죽음과 결핵으로 죽어간 맏형,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은 온가족들과 그에게 지울 수 없는 큰 충격 을 남겨 놓았다. 그때부터 그는 형의 정신적인 유물 이었던 책과 노트를 통해서 죽은 사람과의 영적 교류를 시작 하 였다. 한줌의 재로 변해버린 형의 육신이 어린 이청준의 마음속에서 훌륭하게 재생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그의 빛나는 문학 이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된 것이다. 나는 그 형의 기록을 전하기 위하여 지루함을 참으며 책을 읽었고... 나는 그 형과만 지냈다. 책과 노트 속에서 형 을 만나 그 형의 꿈과 소망과 슬픔들을 은밀히 이야기 들었다. 이청준은 그의 작품 눈길 에서 가난과 어머니와 그 흰 백색의 눈( 雪 을) 아름답게 묘사했다. 남에게 팔린 그 집을 어렵사리 빌려 아들에게 차마 말도 못하고 하룻밤을 재운 뒤 면소재지 차부에서 보내고 돌아오 는 어머니에 대한 글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눈길을 혼자 돌아가다 보니 그 길엔 아직도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지나간 사람이 없지 않았겠냐. 눈발이 그친 그 신작로 눈 위에 저하고 나하고 걸어온 발자국만 나란히 이어져 있구나. 그래서 어머님은 그 발자국 때문에 아들 생각이 더 간절하셨겠네요. 간절하다 뿐이었겠냐. 신작로를 지나고 산길에 들어서도 굽이굽이 돌아온 그 몹쓸 발자국들에 아직도 도란도란 저 이청준 문학의 산실인 소록도와 장흥 회진을 걷다. 123

124 아그의 목소리나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듯만 싶었제. 산비둘기만 푸르륵 날아가도 저 아그 넋이 새가 되어 다시 되돌아 나오는 듯 놀라지고. 나무들이 눈을 쓰고 서 있는 것만 보아도 뒤에서 금세 저 아그 모습이 뛰어나올 것만 싶 었지야.하다보니 나는 굽이굽이 외지기만 한 그 산길을 저 아그 발자국만 따라 밟고 왔더니라.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너하고 나하고 돌아온 길을 이제는 이 몹쓸 늙은 것 혼자서 너를 보내고 돌아가고 있구나! 어머니 그때 우시지 않았어요.? 울기만 했겄냐, 오목오목 디뎌 논 그 아그 발작구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고 돌아왔제.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하게 지내거라. 부디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서 받고 살거라. <눈길>의 일부분 이청준은 <선학동 나그네> <당신들의 천국> <잔인한 도시> <서편제>등 수많은 작품 속에서 그는 권력과 언어의 문제 정치와 사회의 문제 그리고 한의 문제를 집요하게 천착해 왔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진목리 마을은 다른 여느 마 을이나 다름없이 평화로웠다. 참나무가 많아 참냉기 또는 진목이라 부르는 진목 마을에서 참나무를 찾아볼 수가 없다. 참나무가 참나무인 것은 어 느 때부터였을까? 신라가 가장 번성하였을 때 17만호의 경주시내 집집마다 숯불로 불을 지폈던 그때부터가 아니었을 까? 숯 중에는 참나무 숯을 최고로 쳤고, 나무 역시 강했기 때문에 참나무라고 하여서 참 진 眞 자 진목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봄날 나라의 모든 산들마다 피어나는 진달래를 참꽃이라고 부르고 철쭉은 개 꽃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이청 준선생이 태어난 그 집에는 그가 태어난 집에는 20여 년 전에 이미 다른 사람이 들어와 살고 있다가 지금은 군에서 매입하였다. 그 집 담 벽 속에는 철늦은 도마도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눈부신 아침 햇살 받으며 삭그미(이진목)마 을과 도청제를 지나자. 천관산이 눈앞이다. 대덕읍을 지나 방촌리에 접어들면 제법 규모가 큰 고인돌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그 옛 사람들의 무덤들이 옹기 종기 서있는 소나무 숲을 벗어나 바라보면 천관산이 듬직한 맏형 같은 자세로 얼굴을 내민다. 이곳 방촌리에도 재미있는 지명들이 많이 있다. 할미처럼 구부정하게 생긴 할미바우 밑에 있는 사랑바우는 위가 넓고 평평해서 젊은 남녀들이 사랑을 속삭이는 바우라고 부르고, 세태 동 남쪽에 있는 회화나무인 여기정 女 妓 亭 (삼괴정)은 이곳 방촌리가 고려 시절 회주고을이었을 때 기생 명월 明 月 과 옥경 玉 京 이 이 나무 밑에서 놀았기 때문에 지어진 이 름이라고 한다. 사람이 엎어져 있는 것 같다고 엎진바우라는 이름이 붙은 바우 아래에 있는 턱이진 바우는 아들바우 라고 부르는데, 아들을 바라는 사람이 돌을 던져서 그 턱에 얹히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천관산 자락의 오래된 옛 집인 위씨 가옥의 고즈넉함을 맘껏 받아들인 우리 일행은 아침밥을 먹고 산행에 접어들었다. <신정일의 <나를 찾아 가는 하루 산행>에서 이청준 선생의 문학의 현장인 소록도, 이청준 선생의 고향인 장흥의 회진과 남도의 명산 천관산을 답사하고자 하시는 분의 참여를 바랍니다. 이청준 문학의 산실인 소록도와 장흥 회진을 걷다. 124

125 통영의 섬(비진도. 대매물도, 소매물도)들을 걷다 :04 통영의 섬(비진도. 대매물도, 소매물도)들을 걷다. 계사년 1월 마지막 주일에 통영의 섬, 비진도와 대 매물도, 소 매물도를 찾아갑니다. 한려수도에 자리 잡은 보석 같 은 섬, 비진도, 대매물도, 소매물도를 찾아가 아름다운 바다가 보이는 산길을 걷고, 겨울 바다, 겨울 섬에서 나른하면 서도 가슴 설레는 그리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대매물도는 통영여객터미널에서 뱃길로 1시간 30분이면 대매물도의 남쪽, 대항마을에 닿습니다. 통영에서 직선거리로 약 27km. 27가구 30여 명의 주민이 장군봉(210m)에 기대어 생활하는 이 마을은 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아담합니다. 가파른 마을 입구를 오르면 가익도, 소지도, 비진도 등이 눈 아래 펼쳐집니다. 대매물도와 가장 가까운 가익도는 거 대한 왕관이 바다에 떠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대항마을에서 잠시 고갯길을 넘으면 당금마을에 이릅니다. 전망대 서 바라보면 당금마을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고, 선 착장에 늘어선 어선들 뒤로 보이는 어유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깝습니다. 물고기가 많아 어유도라 이름 붙여진 이곳은 흑비둘기와 황조롱이가 서식하고, 상록활엽수림을 비롯한 콩짜개덩굴, 야고 등 희귀식물이 자라고 있어 2000년 통영 시에 의해 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전망대에서 걸음을 옮겨 한산초등학교 매물분교(폐교)를 향해 가면 아름다운 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2007년부터 조 성하기 시작한 탐방로는 대매물도를 온전히 돌아볼 수 있는 코스로 당금마을에서 장군봉을 거쳐 대항마을까지 5.2km 정도 이어집니다.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가봐야 한다는 섬 소매물도 한려해상국립공원 안에 드는 소매물도는 통영항에서 남동쪽으로 26km 해상에 위치해 있으며 통영항에서 배를 타고 비진도를 거쳐 1시간 40분의 바닷길을 달리면 바다 가운데 우뚝 솟은 산과 같은 소매물도에 도착한합니다. 옛날 중국 진나라 시황제의 신하가 불로초를 구하러 가던 중 그 아름다움에 반해 서불과차( 徐 市 過 此 ) 라고 새겨놓은 글씽이 굴이 있으며, 형제바위, 용바위, 부처바위, 촛대바위 등이 기암절벽과 어우러져 절경을 빚어냅니다. 차가 들어갈 수 없어 두 다리로 걸어야만 섬 곳곳을 돌아볼 수 있는데 섬의 유일한 평지인 소매물도 분교는 1996년에 통영의 섬(비진도. 대매물도, 소매물도)들을 걷다. 125

126 폐교가 되어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들을 수 없으나 그곳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광과 바로 옆 등대섬의 전경은 말로 표 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썰물 때는 소매물도의 몽돌밭으로 모세의 바닷길이 열려 등대섬까지 걸 어서 들어갈 수 있는데 하얀 등대가 서 있는 등대섬의 전경을 바라보는 것은 소매물도 여행의 백미라고 할 수 있습 니다. 1870년경 김해김씨가 소매물도에 가면 해산물이 많아 굶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거제도에서 이주하여 한때는 총 30여 가구가 살기도 했었지만 현재는 10여 가구만이 남아 있습니다. 비진도는 본래 거제군의 지역으로 비진섬, 또는 비진이라고 부르다가 지금은 통영시 한산면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이 섬에는 천연기념물 제 63호로 지정되어 있는 팔손이나무가 있습니다. 통영의 섬(비진도. 대매물도, 소매물도)들을 걷다. 126

127 섬진강 오백 삼 십리를 가다 :03 섬진강 오백 삼 십리를 가다. 2013(계사년)의 첫 기행이 나라 안에서 제일 아름다운 강 섬진강 상류를 걷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전북 진안군 백운 면 신암리 상초막골 데미샘에서 시작되어 임실, 남원 곡성 구례 하동을 지나 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포구에서 남해 로 들어가는 섬진강을 따라 네 차례에 걸친 여정이 펼쳐집니다. 눈 내린 겨울에 시작하여 매화꽃, 산수유꽃 만발하는 봄까지 이어질 이번 여정에 동참하십시오. "나라 안에서 그 경치가 빼어날 뿐만이 아니라 아름답고 슬픈 사연이 많기로 소문난 섬진강의 발원지를 사람들은 대 다수가 팔공산으로 보고 있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도 섬진강의 발원지를 중대산 또는 마이산으로 보고 택리지 에 도 역시 마이산으로 실려 있다.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 지리전고 에는 이렇게 실려있다. 광양( 光 陽 )의 섬진강( 蟾 津 江 )은 근원이 진안( 鎭 安 )의 중대( 中 臺 ) 마이산( 馬 耳 山 )에서 나와서 합하여 임실( 任 實 )의 오 원천( 烏 原 川 )이 되고, 서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 운암( 雲 巖 ) 가단( 可 端 )을 지나서 태인( 泰 仁 )의 운주산( 雲 住 山 ) 물과 합하여 순창( 淳 昌 )의 적성진( 赤 城 津 )이 되는데 이것을 화연 ( 花 淵 )이라고도 한다. 이 물은 또 저탄( 猪 灘 )이 되 고, 또 동쪽으로 흘러서 남원( 南 原 )의 연탄( 淵 灘 )이 되며, 또 순자진( 鶉 子 津 )이 된다. 다시 옥과( 玉 果 )에 이르러 방제 천( 方 悌 川 )이 되며, 곡성( 谷 城 )에 들어가서 압록진( 鴨 綠 津 )이 되고, 구례( 求 禮 )에 이르러 잔수진( 潺 水 津 )과 합하였다. 잔수진은 근원이 동복( 同 福 ) 서석( 瑞 石 ) 동쪽에서 나와 현( 縣 ) 남쪽 달천( 達 川 )이되고, 남쪽으로 흘러 보성( 寶 城 ) 북쪽 에 이르러서 죽천( 竹 川 )이 되는데, 이것을 또 정자천 ( 亭 子 川 )이라고도 한다. 다시 동북으로 흘러 순천( 順 天 )의 낙 수진( 洛 水 津 )이 되며, 잔수진에 이르러 순자강과 합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화개( 花 開 ) 소쪽 경계에 이르러 용왕연( 龍 王 淵 )이 되는데, 여기는 조수( 潮 水 )가 들어오는 곳이다. 또 광양( 光 陽 ) 남쪽 60리에 이르러 섬진강이 되는데, 그 동쪽 언덕은 곧 하동( 河 東 )의 악양( 岳 陽 )으로서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 때에는 이 물이 배류( 輩 流 )한 삼대 강( 三 大 江 )의 하나라 하였고, 이름을 두치강 ( 斗 峙 江 )이라 하였다 1918년 일제가 만든 조선지지자료 는 전 북 진안군 우곡리 부귀산에서 발원하여 경남 하동 갈도까지 본류 길이는 212.3km'라고 기록하는데, 부귀산(806.4m)은 진안읍 북서쪽 정곡리 뒷산이다. 이후 건설부에서 만든 하천편람 이나 수자원공사에서 만든 전국하천조사서 도 이 발원지 개념을 그대로 쓰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여러 각도로 계측한 결과 팔공산보다는 봉황산이 길이가 긴 것으로 추정하였고 그래서 섬진강의 상 초막골 데미샘에 섬진강 발원지라는 표지석이 세워진 것이다.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68개의 제1지류와 129개의 제2지 류 그리고 53개의 제3지류 및 15개의 제4지류를 받아들이면서 흐르다가 광양만에 이르러 남해바다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 섬진강은 우리나라 남부 중서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총 유역 면적은 km2이고, 본류의 유로 연장은 212.3km로 남 섬진강 오백 삼 십리를 가다. 127

128 한에서는 네 번째 큰 강이다. 섬진강 유역의 가장 북쪽 끝은 북위 , 남쪽 끝은 북위 이며, 동쪽 끝은 동경 , 서쪽 끝은 동경 이다. 이렇듯 섬진강유역의 동쪽에는 낙동강 유역이, 서쪽에는 영산강과 동진강 유역, 그리고 북쪽에는 금강유역과 만경강유역이 접하고 있다. 그리고 총 유역 면적 4,895.5km2 중 전라남도가 47%, 전라북도가 44%, 경상남도가 9%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고려 때부터 배류삼대강( 輩 流 三 大 江 )의 하나라 해서 낙동강, 금강과 같이 풍수설로는 중앙으로 향해 흐르지 않고 그것을 등지는 강으로 보았다. 그런데 낙동강과 금강은 그 유역이 삼국시대뿐만이 아니라 고려 조선의 역사에서 각광을 받았던 곳이지만 섬진강 유 역은 두 강 유역을 경계 짓는 그늘진 곳으로 내려왔다. 오늘날에도 섬진강유역은 산업화의 물결이 크게 미치지 못한 곳이라 다른 큰 강 유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현시점에선 오히려 산업화에 휩쓸리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에게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있는 강이라고 할 수 있다 "뒤돌아보면 구름 속에 숨어있는 저 팔공산(1150m)은 대구 팔공산에 가려 이름은 없지만 이곳 골짜기에서 섬진강이 라는 강을 흘러 보내고 팔공산 너머 신무산의 뜬봉샘에서는 천리 길 금강의 수원지가 되고 있으니 나누어주기만 하 면서도 시새움하지 않는 아름다운 심성을 지닌 산이 저 산이 아닐까?(...)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린다. 이번 섬진강을 따라 걷는 길에는 이렇듯 보여줄 것들을 다 보여준다. 비 내리다 멎는 줄 알았더니 다시 또 눈이 내리고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옛날보다 얼마나 좋은 여건인가. 최병선 선생님의 말대로 옛 날 여자들은 길쌈 삼다가 하루해를 보냈고 남정네들은 짚신 삼다가 다 보냈다 는데 하루 종일 걷다보면 어디 짚신 몇 켤레가 금방 떨어지고 그러면 옛사람들은 어떻게 했을까? 또한 짚신이라는 것은 물에는 대책이 없어서 금방 스며 들었을 것이다. 아침밥을 먹고 공주 팀들에 대한 배려로 마이산 탑사로 향한다. 마이산 탑사에 눈이 내린다. 아무도 없는 탑사에 눈 이 내리고 눈 소리가 사각사각 들린다. 나무들마다 하얀 눈발이 쌓이고 우리가 오늘 걷는 이 길도 역시 정해진 운명 의 수순에 의한 것일지도 모르고 우리들의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의미로 다가올지 그 또한 모르는 일이다. 그리스의 역사학자인 투키티데스는 일은 사람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이치에 맞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에는 모든 것을 운에 맡기는 것이 편하다. 라고 했고, 가이벨은 운명보다 강한 것이 있다면 그것 은 동요하지 않고 그 운명을 짊어지는 용기이다. 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오늘 우리가 걷는 이 길에 하루 종일 눈이 내려 쌓인다 해도 또는 어제처럼 비가 내린다 해도 맞을 수밖에 없다. 1930년대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처럼 우리들 이 풍찬 노숙의 세월을 보낼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쉽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운명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 들지도 않고 불행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다만 그 재료와 씨앗을 우리에게 제공해줄 따름이다. 라고 말한 몽테뉴의 말을 기억한다면 오늘 일진이 아무리 예측불허일지라도 그렇게 우려할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마이산 탑사에 도착했다.(...) 풍혈냉천에 햇살만 쬐다 성수면 좌포리 양화마을 앞 대두산(459m) 밑에 있는 이 풍혈냉천은 조선시대 때부터 널리 알려져 사람들이 즐겨 찾 는 곳이다. 풍혈은 바위 사이에서 찬바람이 나오는 구멍이며 냉천은 삼복 더위에도 손을 넣고 1분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차갑다 섬진강 오백 삼 십리를 가다. 128

129 는 것이다. 이 냉천에 개구리가 뛰어들면 즉사했다고도 하고 이 냉천에서 목욕하면 웬만한 피부병 정도는 쉽게 낫고 무좀에도 특효가 있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 풍혈과 냉천이 발견된 것은 1780년께로 당시 자연적인 지질의 변화로 한쪽에는 사람 체온보다 높은 온천이 두 군 데 솟아나고 한쪽에는 찬바람이 나오는 구멍 2개와 삼복에도 찬물이 나오는 냉천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 당시 성수면 양화리의 대두산 기슭에서 나온 온천물은 성분이 좋아서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고 소문이 널리 퍼져 나병환자들이 떼를 지어 찾아와 완치를 보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들이 목욕을 하고 간 뒤에는 수질이 나뼈져 온 천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져 갈 때 힘센 장사 한 사람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불결한 온천이라고 흥분하여 큰 바위를 들 어 온천을 매몰시켜 버리고 주위에 있던 버드나무와 음식을 해먹던 솥 기타 모든 기물도 다 파괴하여 버렸다고 한다. 그 뒤로 온천은 땅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이 온천을 찾아내어 일확천금을 벌어 보겠다는 사람이 간간이 드나들어 온천이 있던 장소를 찾아내려 했으나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1943년 3월 전주에 사는 박성근이라는 사람이 온천을 다시 발굴하려는 큰 꿈을 품고 인부 3백여 명을 동원 많은 경비를 들여 탐색하였다. 하지만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장소를 찾아내기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 다. 그들은 근처의 땅을 모조리 들추어 파헤치다시피 하여 온천이었던 곳으로 추측되는 부근에서 물길의 자취와 버드나 무 솥 등을 발견하였고 이제 온천을 막아버린 바위덩이만 찾아내어 그 바위만 들어내면 온천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 고 막바지 작업을 진행했으나 갑자기 박성근씨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려 그해 세상을 뜨자 온천발굴사업은 또 다시 중 단되고 말았다. 그 뒤 찬바람이 나왔던 두 개의 냉혈 밑에서 2개의 냉천을 발견하였으나 지금은 지형이 변화되어 1개소는 없어져 버 리고 찬바람 나오는 풍혈 1개소와 찬물 나오는 냉천 1개소만 남아 있는데 요즈음 여름철이면 피서객이 급증하여 줄 을 이어 몰려들고 있다. 풍혈은 삼복더위라 할지라도 온도가 6 를 유지하고 있으며 자유당 때 굴이 무너지기 전만 하더라도 한 여름에 고드 름이 매달린 것을 볼 수 있었으며 일본이 2차 대전 막바지에는 여기에다 대규모의 한천공장을 세웠었고 또한 잠종저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한다. 냉천은 석간수로서 3 의 온도를 항상 유지하고 있으며 물에 함유된 성분이 또한 여러 가지라 위장병에도 좋고 피부 병에 효과가 크고 특히 난치의 병으로 알려진 무좀 도 치료가 된다하여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 신정일의 <섬진강 따라 짚어가는 우리 역사> 민음사 출판그룹 판미동 간에서 그 고운 섬진강의 물살을 따라 걷고자 하시는 분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섬진강 오백 삼 십리를 가다. 129

130 영남의 4대 길지를 찾아 가다 :45 영남의 4대 길지를 찾아 가다. 2012년 임진년 겨울 테마기행으로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에 수록된 <영남의 4대 길지>를 찾아갑니다. 요즘 사람들의 최대 관심은 어느 곳에서 살 것인가 입니다.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이번 답사에서는 어느 정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경상도 사람들이 꼽았던 영남의 4대 길지 는 경주 안강의 양동마을과 안동 도산의 토계부근, 안동의 하 회마을, 봉화의 닭실마을입니다. 네 곳 모두가 사람이 대대로 모여 살만한 곳 대부분 산과 물이 어우러져 경치가 좋고 들판이 넓어 살림살이가 넉넉한 곳입니다. 특히 낙동강의 범람으로 만들어진 저습지를 개간한 하회마을 입구의 풍산평야는 안동 일대에서 가 장 넓은 평야이며, 또 양동마을 건너편에는 형산강을 낀 안강평야가 발달해 있습니다. 현재 도산서원 근처 토계부근 은 안동댐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사람들이 살기에 아주 쾌적한 곳이었고, 충재 권벌의 자취가 남아 있는 유곡마을은 오늘날에도 양택지로서 나라에서도 손꼽히는 곳입니다. 영남의 4대 길지와 경주의 최부자집, 청송의 성소고택(심부자집), 내앞마을의 의성김씨 종택,을 비롯하여 영남의 유서 깊은 고택을 찾아갈 이번 답사에 참여를 바랍니다. 특히 토요일의 숙소는 서애 유성룡을 모신 병산서원에 마련하였고 택리지 강연도 예정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유생 들이 과거를 보기위해 공부를 했던 병산서원의 하룻밤과 길지 탐방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것입니다. 대대로 외손이 잘되는 양동의 서백당 영남의 4대 길지 중 한곳이라고 알려져 있는 경주시 강동면의 양동마을을 살펴보자. 영남대학교에서 발간한 영남고 문서집성 의 기록을 보면 고려 말 여강 이씨 이광호( 李 光 浩 )가 양동에 거주하였고 그의 손자 사위인 유복하( 柳 復 河 ) 가 이 마을에 장가들어 정착했다. 그 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계천군( 鷄 川 君 )에 봉해진 월성손씨( 月 城 孫 氏 ) 손소( 孫 昭 )가 유복하의 외동딸에게 장가를 들어 이곳에 눌러 살면서 일가를 이루었다. 여기에 이광호의 5대 종손인 이번( 李 蕃 )이 손소의 고명딸과 결혼 함으로써 이씨와 손씨가 더불어 살게 되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월성손씨와 여강이씨( 驪 江 李 氏 )가 양대 문벌 을 이루어 동족 집단마을을 이루며 살아온 양동마을은 오랜 세월 동안 상호통혼을 통하여 인척관계를 유지해왔던 것 이다. 이 양동마을은 경주시에서 16km쯤 떨어진 형산강 부근에 자리 잡고 있다. 넓은 평야에 인접한 물( 勿 )자형 산곡이 경 주에서 흘러드는 서남방 역수( 逆 水 ), 즉 형산강을 껴안은 지형이다. 그러한 형세가 이 마을의 끊임없는 부( 富 )의 원천 영남의 4대 길지를 찾아 가다 130

131 이라고 이 지방 사람들은 믿고 있다. 안강평야 대부분의 땅이 손씨와 이씨의 것이었으므로 이 역수의 부 는 관념 이 아닌 현실이었던 것이다. 이 마을 앞을 흐르는 형산강이 옛날에는 수량도 많고 바닥이 깊어서 포항 쪽의 고깃배들 이 일상적으로 들락거렸기 때문에 그 고장에는 해산물의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수량이 줄어들 고 강바닥이 높아져 있어 어선이 출입했다는 이야기는 전설이 돼버렸다. 마을의 유래에 의하면 이곳 양동마을은 대대로 외손이 잘되는 마을, 즉 외손발복( 外 孫 發 福 )의 터라고 하는데 이 곳 손씨 대종가인 서백당( 書 百 堂 )에서 태어난 사람 가운데는 손중돈과 회재( 晦 齋 ) 이언적( 李 彦 迪 )이 있다. 외가에서 출생한 이언적은 별 다른 스승이 없이 외삼촌인 우재( 偶 齋 ) 손중돈( 孫 仲 暾 )이 관직생활을 하였던 양산, 김해, 상주 등 지를 따라다니면서 학문적, 인간적인 가르침을 받았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그 서백당의 며느리 방에서 서원에 배향되는 혈식군자( 血 食 君 子 ) 세 사람이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외손인 이언적이 태어난 뒤부터 그 방은 며느리 외에는 그 누구도 거처하지 못하게 했 다는 것이다. 월성손씨들은 지금도 우재의 학문이 회재에게 전수되었다 주장하고, 여강이씨들은 그렇지 않 다 고 맞서 두 집안의 갈등으로 비화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 모든 사물들 중 그 무엇 하나 스승이 아닌 것이 어디 있으랴. 하회마을에 얽힌 유래 그 가운데 유성룡의 선조인 풍산 유씨 일가도 고려 말 하회마을에 터를 잡았는데 그 경위가 재미있다. 하회마을에는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유씨 배판에 라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김해 허씨가 터를 닦아 놓은 그 위에다가 광주 안씨가 집을 짓고 풍산 유씨는 안씨 집 앞에서 잔치판을 벌였다는 말로, 풀어 말하면 허씨들이 처음으로 하회마을을 개척했고 이어서 안씨들이 문중을 이루었으며, 유씨가 잔치판을 벌이고 흥청거릴 정도로 가문이 번성했다는 말이다. 겸암( 謙 菴 ) 유운룡( 柳 雲 龍 )과 서애 유성룡의 6대조인 전서공( 典 書 公 ) 유종혜( 柳 從 惠 )가 풍산 상리에서 살다가 길지를 찾아 옮긴 곳이 지금의 하회마을이다. 전서공의 할아버지이자 고려의 도염서령( 都 染 署 令 )이라는 관직에 있던 유난옥 ( 柳 蘭 玉 )이 풍수에 밝은 지사를 찾아가서 택지를 구했다고 한다. 이때 지사는 3대 동안 적선을 한 뒤라야 훌륭한 길 지를 구할 수 있다고 하였고, 그래서 유난옥은 하회의 마을 밖 큰길가에 관가정( 觀 稼 亭 )이라는 집을 지어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 적선을 베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뒤 유난옥의 손자인 전서공은 길지를 찾아 헤매다가 허씨와 안씨의 묘지를 피해 울창한 숲을 헤쳐 길목에 터를 잡고 숲을 베어 재목으로 삼아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거듭 무너지자, 지나가던 도사 에게 왜 이렇게 집이 무너지는지를 물었다. 도사는 아직 이 땅을 가질 운세가 아니기 때문인데, 이 땅을 꼭 가지고 싶다면 앞으로 3년간 덕을 쌓고 적선을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전서공은 큰 고개 밖에 정자를 지어 식 량과 옷가지, 짚신 등을 마련해 놓은 후 큰 가마솥에다가 밥을 하여 인근 주민과 나그네들에게 먹이고 입히며 3년간 적선을 행하였다. 그 뒤에 집을 지은 것이 지금의 양진당 사랑채 일부라고 한다. 전서공이 길지를 잡아 발복한 까닭인지 점차 유씨들의 가문이 번성하고 겸암과 서애가 활약하면서 대단한 문벌을 이 루게 되자, 화산 기슭의 허씨와 안씨들은 상대적으로 문중이 위축되면서 마을을 뜨는 사람이 늘어났다. 결국 하회마 영남의 4대 길지를 찾아 가다 131

132 을은 화산 기슭에서 지금의 화안에 자리잡은 유씨들의 세거지로 중심을 이동하게 되었다. 유성룡의 선조가 하회에 가거지를 잡게 된 연유를 보면 전통시대의 사대부들이 살고자 했던 땅과 짓고자 했던 집 그 리고 그와 동시에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것인가를 유추해볼 수가 있을 것이다. 퇴계 이황이 살았던 도산 이중환은 우리나라 시냇가에서 가장 살만한 곳으로 영남 예안의 도산 과 안동의 하회 를 들었다. 게다가 도 산은 두 산줄기가 합쳐져서 긴 골짜기를 만들었는데, 산이 그리 높지 않다. 태백의 황지에서 비롯된 낙동강이 이곳에 와서 비로소 커지고 골짜기의 입구에 이르러서는 큰 시냇물이 되었다 고 하였는데, 그 말은 최근에 와서 더욱 들어 맞는다. 지금의 도산서원 일대는 안동댐으로 더욱 드넓어져 바다와 같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예안의 대표적인 사대부 가문은 예안 이씨였다. 이계양의 손자로 태어난 이황은 16세기 중반에 관직에서 물 러난 뒤 계류를 찾아 온계( 溫 溪 )의 아래쪽에 있는 토계로 옮겨 자리를 잡았다. 이황은 그 후 퇴거( 退 去 )하여 자리 를 잡았다 하여 토계를 퇴계( 退 溪 )라고 바꾼 뒤 호로 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퇴계 마을은 현재 안동댐에 수몰되어버렸기 때문에 그 지형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중환은 양쪽의 산기슭은 모두 석벽이며, 물가에 위치한 경치가 훌륭하다. 물이 넉넉하여 거룻배를 이용하기에 알맞고 골짜기 옆으로 는 고목( 古 木 )이 매우 많으며 조용하고 시원하다. 산 뒤와 시내 남쪽은 모두 좋은 밭과 평평한 벌판으로 이루어져 있 다. 퇴계가 거처하던 암서헌( 巖 捿 軒 ) 두 간이 아직도 있으며 그 집 안에는 퇴계가 쓰던 벼룻집과 지팡이, 신발과 함께 종이로 만든 선기옥형( 璇 璣 玉 衡 : 옛날 천체를 관측하던 기구)을 보관하고 있다 고 하였는데, 안동댐이 만들어지면서 옮겨진 도산서원의 전신은 도산서당으로서 토계리 680번지에 있다. 명종 15년(1560)에 퇴계 이황이 공조참판( 工 曹 參 判 )의 벼슬을 내놓고 도산에다 서당을 세워 후학들을 가르쳤다. 퇴계는 그 옆에 암서헌( 岩 栖 軒 ), 완락재( 琓 樂 齋 ), 농령정사( 濃 靈 精 舍 ), 관란헌( 觀 瀾 軒 ), 역락서재( 亦 樂 書 齋 ), 박약재( 博 約 齋 ), 홍의재( 弘 毅 齋 ), 광명실( 光 明 室 ), 진도문( 進 道 門 ) 등의 건물을 지은 후 모두 자필로 현판을 썼다. 명종 21년(1566) 임금은 어명을 내려 여성군( 礪 城 君 ), 송인( 宋 寅 )으로 하여금 그 경치를 대상으로 도산기( 陶 山 記 ) 와 시를 짓게 한 후 병풍을 만들어 내전( 內 殿 )에 두고 때때로 구경하였다. 또 후대의 영조와 정조 임금도 각기 화공에게 명하여 도산서당의 그림을 그려 오게 한 후 보고 즐겼다고 한다. 도산서당 뒤편의 도산서원( 陶 山 書 院 )이 세워진 것은 선조 7년(1574)이었다. 서원을 창건하여 퇴계 이황을 배향하고, 그 다음 해에 사액( 賜 額 )을 받았다. 도산서원 의 넉 자는 선조의 명으로 조선 중기의 명필인 석봉( 石 峯 ) 한호( 韓 濩 )가 썼고 뒤에 퇴계의 제자 월천( 月 川 ) 조목( 趙 穆 )을 추배하였다. 뒤에 있는 상덕사( 尙 德 祠 )는 보물 제211호로 그리 고 앞에 있는 전교당( 典 敎 堂 )은 보물 제 210호로 지정되었다. 금닭이 알을 품는 형국의 닭실마을 이중환이 안동의 북쪽에 있는 내성촌에는 곧 이상( 貳 相 : 두번째 재상이라는 뜻으로 정1품 삼정승 다음의 종1품인 좌찬성과 우찬성) 권발( 權 撥 )이 살던 옛터인 청암정이 있다. 그 정자는 못의 한복판 큰 바위 위에 위치하여 섬과 같으 며 사방은 냇물이 둘러싸듯 흐르므로 제법 아늑한 경치가 있다 고 기록한 내성촌은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에 있다. 이곳 닭실( 酉 谷 )마을은 유명한 양반의 성씨인 안동권씨 중에서도 충재( 冲 齋 ) 권벌( 權 )을 중심으로 일가를 이룬 동 족마을이다. 금계포란형( 金 鷄 抱 卵 形 ), 즉 금닭이 알을 품은 모양 의 명당이라는 닭실마을은 동북쪽으로 문수산 자 영남의 4대 길지를 찾아 가다 132

133 락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서남으로는 백운령이 뻗어 내려 암탉이 알을 품은 형상이며, 동남으로는 신선이 옥퉁소를 불었다는 옥적봉이 수탉이 활개 치는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권벌은 1496년 진사에 합격하고 1507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연산군의 폭정하에서 급제가 취 소되었다가 3년 뒤인 1507년에 다시 급제하여 관직에 발을 들였다. 사간원, 사헌부 등을 거쳐 예조참판에 이르렀는데 1519년 훈구파가 사림파를 몰아낸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 당하자 귀향하였다. 그는 파직 이후 15년간 고향인 유곡에서 지냈으나, 1533년에 복직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고 1539년 에는 병조참판, 그 해 6월에는 한성부판윤 그리고 1545년에는 의정부 우찬성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명종이 즉위하면서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윤임 등을 적극 구명하는 계사를 올렸다가 파직되었고, 이어 1547년 양재역 벽서사 건에 연루되어 삭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벼슬에 있는 동안 임금에게 경전을 강론하기도 하 였고 조광조, 김정국과 함께 개혁정치에 영남 사람파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 후 1567년에 신원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좌의정에, 선조 24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닭실마을에 남아있는 유적들은 기묘사화로 파직되었던 동 안 머물면서 일군 자취들이며 현재 사적 및 명승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권벌 종택의 서쪽 쪽문 뒤의 건물이 청암정이다. 권벌이 1526년 봄 집의 서쪽에 재사를 지으면서 그 옆에 있는 바위 위에다 정자도 함께 지었던 것이다. 커다랗고 널찍한 거북 바위 위에 올려지은 J자형 건물인 청암정은 휴식을 위한 것으로서 6칸으로 트인 마루 옆에 2칸짜리 마루방을 만들고 건물을 빙 둘러서 연못을 함께 조성하였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살고 싶은 곳 겨울이 접어드는 12월의 중순, 이 땅을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지혜를 깨닫게 될 기행에 참여를 바랍니다 영남의 4대 길지를 찾아 가다 133

134 상주에서의 하룻밤 :43 상주에서의 하룻밤 가끔씩 떠나온지 며칠되지 않는 장소를 다시 찾을 따가 있다. 토요일에 몇 시간을 머물렀던 곳이 보은이었는데, 다시 보은에 들른 것이다. 그때는 함께 답사할 일행들을 기다리던 보은, 이번에는 상주로 가기 위해 잠시 스쳐 지나가는 보은, 저녁 햇살 아래 빛나던 삼년산성을 뒤로 하고, 구병산 지나 상주시 화서면의 화령에 도착하자, 보이던 진눈깨비 그래, 나는 올해의 첫눈을 백두대간이 지나는 상주의 화령에서 보는구나. 온 산천이 희뿌연하게 내리는 진눈깨비, 그 사이로 차는 질주하고 문득 날이 저물지도 않았는데, 오늘은 어디서 머물러야 할까 하는 생각, 화령에서도 상주는 제법 멀다,. 조금 늦게 도착한 상주 터미널에 나를 기다리는 사람, 오랫만에 누군가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고, 아무도 위로하지 않지만' 가끔씩이라도 의무적으로라도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경천대에 있는 상주 박물관에서 <영남대로와 상주의 길> 강연을 마치고 살주 터미날에 돌아와 버스 시간표를 보자 선택의 폭이 그리 넓지 않다. 오늘은 어느 곳에서 하룻밤 묵을 것인가? 늦은 열시 10분 충주행 버스를 타고 한 시간 40여분을 달려서 충주에서 묵을 것인가? 아님 상주에서 머물고 아침 8시 35분 첫차를 타고 충주 거쳐서 원주를 갈 것인가? 잠시의 망설임 끝에 오늘은 상주에서 머물기로 결정한다. 오늘의 일진은 상주에서 하룻밤 자는 것이었구나. 상주에서의 하룻밤 134

135 터미널 옆 모텔에 들어서 배낭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니 방은 작그마하지만 아주 정돈이 잘 되었다. 이렇게 하루해가 저무는구나. 오랫만에 죽음 처럼 깊은 잠을 자고 깨어나니 한 밤중이다. 낯선 도시의 낯선 숙소가 어느 사이 낯설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나그네의 이력이 붙은 탓이리라. 전주에서 떠나 대전을 지나 상주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다시 충주를 지나 원주로 가겠지. 교통방송에서 두어 시간의 강의를 마치고 나는 어디를 거쳐 갈 것인가 잠시 고민을 하겠지, 그리고 오랜 습관에 따라 어느 버스에 올라 긴 시간을 차 속에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다가 보면 떠났던 전주로 돌아기겠지, 이렇게 저렇게 가는 세월 앞에서 가끔씩 내가 낯설 때가 있다. 낯선 사람이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임진년 동짓달 스무이레 상주에서의 하룻밤 135

136 맛과 멋이 함께하는 남도에서 해넘이와 해맞이를 하다 :40 맛과 멋이 함께하는 남도에서 해넘이와 해맞이를 하다. 2012년의 마지막과 첫날을 맛과 멋이 함께하는 남도에서 보낼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사다난 多 事 多 難 했던 한 해를 마무리하고 한 해를 새롭게 설계하고자 마련하는 이 행사는 12월 30일 아침 출발하여 고창의 무장읍성과 영광 법성포 일대의 해안도로를 걷고 점심을 먹은 뒤 남도의 바닷가를 걸을 예정입니다. 오후에 목포의 유달산을 올라 신안 일대의 섬들을 바라보고 강진으로 향합니다. 임진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에는 호남의 금강산이라고 일컬어지는 영암 월출산을 경포대에서 천황사코스로 넘을 것입니다. 오후에는 월출산자락에 펼쳐진 길을 걷고 강진의 영랑생가와 영랑생가에서 하루를 마무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계사년의 첫날 첫해의 떠오르는 해를 다산 정약용 선생의 자취가 서린 강진의 다산 초당에서 보고 남도의 보삭 같은 절집 장흥의 보림사와 화순의 쌍봉사, 운주사 일대를 답사하게 될 것입니다. 법성포항에 있는 영광굴비 갈재의 서쪽에 자리 잡은 지역이 영광 함평 무안이고 남쪽이 장성군과 나주시인데 영광을 일컬어 옥당고을이라고 부른다. 아들을 낳아 원님으로 보내려면 남쪽에 옥당골이나 북쪽의 안악골로 보내라 는 옛 말에 나오는 옥당골은 지금의 영광을 말하고, 안악골은 지금의 황해도 안악군 일대를 말한다. 그러한 말이 나오게 된 이유는 들이 넓을뿐더러 바다가 가까워서 바다에서 얻는 이익이 많았기 때문이다. 택리지 에 영광 법성포는 밀물 때가 되면 포구 바로 앞에 물이 돌아 모여서 호수와 산이 아릅답고, 민가[ 閭 閻 ]의 집들이 빗살처럼 촘촘하여 사람들이 작은 서호( 西 湖 )라고 부른다. 바다에 가까운 여러 고을은 모두 여기에다 창 고를 설치하고 세미( 稅 米 )를 거두었다가, 배로 실어 나르는 장소로 삼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법성포는 옛날 진 나라의 중 마라난타( 摩 羅 難 陀 )가 백제 땅에 처음 발을 들여 놓은 곳이라고 전해오는 포구다. 고려 때 이자겸( 李 資 謙 ) 은 스스로 왕이 되려고 난을 일으켰다가 부하 척준경( 拓 俊 京 )의 배반으로 실패하고 법성포로 귀양을 왔다. 그때 이자 겸은 칠산바다에서 삼태기로 건질 만큼 잡혔던 영광굴비를 석어라는 이름을 붙여 사위였던 인종에게 진상했다고 한 다. 법성포 법성포는 조선시대 영산포와 더불어 호남지방의 세곡을 갈무리했던 조창( 漕 倉 )의 기능을 맡았었다. 그 무렵 조창의 중심 역할을 했던 나주와 영산포가 뱃길이 멀고 험하여 배가 자주 뒤집히자 중종 7년에 영산포 조창을 없애고 법성 포로 옮겼다. 그때부터 법성포에는 광주, 옥과, 동복, 남평, 창평, 곡성, 화순, 순창, 담양, 정읍, 을 비롯한,전라도 맛과 멋이 함께하는 남도에서 해넘이와 해맞이를 하다. 136

137 일대 12개 고을의 토지세인 전세( 田 稅 )가 들어왔다. 동헌을 비롯한 관아 건물이 15채가 들어섰고, 배가 20채에서 50채 까지, 전선이 22채, 수군이 1700여 명이 머물렀다. 이처럼 법성포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전라도 제일의 포구였다. 고깃배 선단이 포구에 들어오면 법성포 외양에 있던 목넹기에 파시( 波 市 )가 섰다. 충청도 전라도 일대의 어물상들이 떼 지어 물려와 북새통을 이루었고, 가을 세곡을 받을 때는 큰 도회지를 연상케 했던 법성포는 이젠 옛날만 회상할 뿐이고, 화려했던 법성포는 옛 이야기 속의 한토막이 되었다. 도온 시일러 가세에에 돈 실러으어 가으세에에 여영광에 버법성포에라 돈 시일러 가. 온 나라에 이름이 나도록 떼를 지어 몰려들었던 굴비가 수심이 얕아진 후로는 가뭄에 콩 나듯 드문드문 나타나고, 다 른 운송수단의 발달로 포구의 기능은 쇠퇴하고 말았다. 파시 때마다 흥청거리던 법성포의 영광은 언제 다시 올 것인 지 기약이 없다. 홍농면에 자리한 원자력 발전소의 그늘에 가려 빛을 잃어가는 법성포에는 어느 바다에서 잡혔는지도 모르는 굴비들이 걸려있다. 영광굴비 또는 이자겸 李 資 謙 굴비 라고 쓰인 간판들을 바라보면 이곳이 바로 굴비 의 고장인 영광이라는 걸 안다. 사공에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에 새 아씨,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 포의 설움 으로 시작하는 이난영의 노래는 문일석 文 一 石 이 193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의 향토가요 가사로 당선된 노랫말이다. 이 가사에 작곡가 손목인 孫 牧 人 이 곡을 붙인 노래가 <목포의 눈물>이다. 이 노래뿐만이 아니라 목포 는 항구다 라는 노래로 기억되는 목포를 광주의 시인 문병란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목포 더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 와서 동백꽃처럼 타오르다 슬프게 시들어 버리는 곳 항상 술을 마시고 싶은 곳이다. 잘못 살아온 반생이 생각나고 헤어진 사람이 생각나고 배신과 실패가 갑자기 나를 울고 싶게 만드는 곳 문득 휘파람을 불고 싶은 곳이다. 없어진 삼학도에 가서 동강난 생 낙지 발가락 씹으며 싸구려 여자를 바라볼거나 삼학 소주 한잔을 기울일거나. 맛과 멋이 함께하는 남도에서 해넘이와 해맞이를 하다. 137

138 ... 실패한 첫사랑이 생각나는 곳이다. 끝끝내 바다로 뛰어들지 못한 목포는 자살보다 술맛이 더 어울리는 곳... 목포를 어째서 목포라고 불렀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영산강 물과 서해 바닷물이 합쳐지는 이곳의 지형이 마치 길 목쟁이 처럼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하여 목개 로 부르던 것을 한자로 옮겨서 목포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이야기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진을 쳤던 고하도가 목화의 집산지라서 이 나라에서 생산한 목화를 일 본으로 실어 날랐기 때문에 목화의 항구 라서 목포로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목포가 큰 항구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주위에 섬이 많고 항만 동남쪽에 있는 영암반도의 돌출부와 남서쪽에 가로놓인 고하도가 자연방파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배후의 유달산이 자연방파제 역할을 하여 지형 상 유리한 위치에 있던 목포였다. 1895년 관제개혁으로 무안군에서 분리된 목포에 목포만호청이 설치되었고, 목포가 개항된 것은 청일 전쟁이 끝난 1897년 10월이었고 그때부터 목포진 또는 목포항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곳 목포는 유달리 예술가들이 많이 태어난 곳이다. 소설가 박화성 천승세가 있고, 작고한 문학평론가인 김현, 우리 시대의 시인인 김지하. 극작가 차범석, 동양화가인 허건도 이곳 목포에서 살았다. 월출산 밑 고을 영암 나주의 서남쪽이 영암군이고 영암읍은 월출산 밑에 자리 잡고 있다. 백제 때 월나군( 月 奈 郡 )이었고 신라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진 영암군의 풍속을 농업에 전적으로 힘쓰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꾸밈이 없다 하였으며, 유관( 柳 觀 )은 그의 시에서 긴 내가 출렁출렁 성을 안고 흐르네 라고 노래하였고, 고려 때의 김췌윤( 金 萃 尹 )은 땅이 창 해바다와 접하며 장한 경치가 많다 고 하였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월출산을 김극기는 다음과 같이 예찬하 였다. 월출산의 많은 기이한 모습을 실컷 들었거니, 그늘지며 개이고 추위와 더위가 모두 서로 알맞도다. 푸른 낭떠러지 와 자색의 골짜기에는 만 떨기가 솟고, 첩첩한 산봉우리는 하늘을 뚫어 웅장하고 기이함을 자랑하누나. 월출산 남쪽에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가 있고, 서쪽에 영암군 구림면이다. 이 마을들은 신라 때부터 이름난 마을로서 서해와 남해가 맞닿는 곳에 위치하였다. 달은 청천에서 뜨지 않고 월출산은 수많은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모습이 하나의 거대한 수석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가 되 기도 하지만, 나무나 풀 한 포기 제대로 키울 수 없는 악한 산으로 보이기도 한다. 1973년 삼월에 도립공원으로 지정 되었다가 1988년에 국립공원으로 승격된 이 산자락 밑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태어났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에서 맛과 멋이 함께하는 남도에서 해넘이와 해맞이를 하다. 138

139 고려시대의 승 혜일( 慧 一 )은 앞 봉우리는 돌창고 같고, 뒷 봉우리는 연꽃 같았다 하였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시 한편을 지었다. 백련사 경치도 좋고 만덕산 맑기도 하여라. 문은 소나무 그늘에 고요히 닫혔는데, 객이 와서 풍경소리 듣는구나., 돛은 바다를 따라서 가고, 새는 꽃 사이에서 지저귀네. 오래 앉아서 돌아갈 길을 잊으니, 티 끝 세상 전혀 생각 없 네. 만덕산 중턱에 자리 잡은 백련사( 白 蓮 寺 )에서 동백나무 숲길을 지나 산길을 걸어가면 정약용의 숨결이 바람으 로 남아 있는 다산초당( 茶 山 草 堂 )에 이른다. 다산초당의 원래 건물은 일제 때인 1936년에 허물어졌고, 1958년에 다시 세운 단층 기와집이라 다산와당이라고 부르 기도 한다. 집 앞에는 그가 차를 끓여 마셨다고 전해지는 반석이 있고 집 뒤편에는 그가 유배에서 풀려 돌아가기 전 에 썼다는 정석 丁 石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나주 들목인 율정점에서 정약전과 헤어진 다산은 나주 영산강을 건너 누릿재와 성전 삼거리를 지나 강진에 도착한 뒤 강진읍 동문 밖의 할머니 집에다 거처를 정한다. 오두막집을 사의재 四 宜 齋 라고 지은 그는 그 집에서 1805년 겨울까지 만 4년을 기식하였다. 방에 들어가면서부 터 창문을 닫고 밤낮으로 외롭게 혼자 살아가자 누구 하나 말 걸어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기뻐서 혼자 좋아하기를 나는 겨를을 얻었구나 하면서, 사상례 士 喪 禮 3편과 상복 喪 服 1편 및 그 주석 註 釋 을 꺼내다가 정 밀하게 연구하고 구극까지 탐색하며 침식을 잊었다 라고 상례사전 서문에서 기록하였던 것처럼 본격적인 학문을 연구하고 저술활동에 전념한 그는 이곳에서 상례사전 喪 禮 四 箋 이라는 저술을 남겼다. 사의재란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하며 살아가던 방이다.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니 맑지 못함이 있다면 곧바로 맑 게 해야 한다. 용모는 마땅히 엄숙해야 하니 엄숙하지 못함이 있으면 곧바로 엄숙함이 엉기도록 해야 한다. 언어는 마땅히 과묵해야 하니 말이 많다면 곧바로 그치도록 해야 한다. 동작은 마땅히 후증하게 해야하니 후중하지 못함다면 곧바로 더디게 해야한다. 이런 때문에 그 방의 이름을 네 가지를 마땅하게 해야할 방 이라고 하였다. 마땅함이라 고 하는 것은 의 義 에 맞도록 하는 것이니 의로 규제함이다. 나이만 들어가는 것이 염려되고 뜻 둔 사업은 퇴폐됨을 서글프게 여기므로 자신을 성찰하려는 까닭에서 지은 이름이다. 때는 가경 嘉 慶 8년(1803) 11월 10일 동짓날. 다산은 1805년 겨울부터 강진읍 뒤에 위치한 보은산에 있는 고성사 보은산방으로 자리를 옮긴 후 그곳에서 주로 주 역 공부에 전념하였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닿는 것, 입으로 읊는 것, 마음속으로 사색하는 것, 붓과 먹으로 기록 하는 것에서부터 밥을 먹거나 변소에 가거나 손가락을 비비고 배를 문지르던 것에 이르기까지 하나인들 주역 이 아닌 것이 없었소 라고 썼던 시절이었다. 그 다음해 가을에 강진시절 그의 애제자가 된 이청 李 晴 (자는 鶴 來 )의 집에 서 기거했다. 다산이 만덕산 자락 다산초당 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유배생활이 8년째 되던 1808년 봄이었다. 시인 곽재구는 다산초당 아래 마을에서 다산을 생각하는 시 한편을 남겼다. 귤동리 일박 곽재구 맛과 멋이 함께하는 남도에서 해넘이와 해맞이를 하다. 139

140 아흐레 강진장 지나 장검 같은 도암만 걸어갈 때 겨울 바람은 차고 옷깃을 세운 마음은 더욱 춥다(중략) 적폐의 땅 풍찬노숙의 길을 그 역시 맨발로 살 찢기며 걸어왔을까 (중략) 어느덧 귤동 삼거리 주막에 이르면 얼굴 탄 주모는 생굴 안주와 막걸리를 내오고 그래 한잔 들게나 다산 혼자 중얼거리다 문득 바라본 벽 위에 빛 바랜 지명수배자 전단 하나(중략) 정다산 丁 茶 山 1762년 경기 광주산 깡마른 얼굴 날카로운 눈빛을 지님 전직 암행어사 목민관 기민시 애절양 등의 애민을 빙자한 유언비어 날포로 민심을 흉흉케 한 자생적 공산주의자 및 천주학 괴수 다산초당은 본래 귤동마을에 터 잡고 살던 해남 윤씨 집안의 귤림처사 윤단의 산정이었다. 정약용이 다섯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난 그의 어머니가 윤씨였고 귤동마을 해남 윤씨들은 정약용의 외가 쪽으로 먼 친척이 되었다. 유배생활이 몇 해 지나면서 삼엄했던 관의 눈길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자 정약용의 주위에는 자연히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그 가 운데 윤단의 아들인 윤문거 尹 文 擧 세 형제가 있어서 정약용을 다산 초당으로 모셔갔던 것이다. 다산초당 시절 각별하 게 지냈던 사람이 백련사에 있던 혜장선사였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전라도 수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보림사는 전남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 자락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 구 본사인 송광사( 松 廣 寺 )의 말사이다. 원표( 元 表 )가 세운 암자에다 860년경 신라 헌안왕( 憲 安 王 )의 권유로 보조선사( 普 照 禪 師 ) 체징( 體 澄 )이 창건하여 선종 ( 禪 宗 )의 도입과 동시에 맨 먼저 선종이 정착된 곳이기도 하다. 가지산파( 迦 智 山 派 )의 근본도량이었으며, 인도 가지산 의 보림사, 중국 가지산의 보림사와 함께 3보림이라 일컬어졌다. 보림사 경내에는 국보 제44호인 3층석탑 과 석등, 그리고 국보 제117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 鐵 造 毘 盧 舍 那 佛 坐 像 ), 보물 제155호인 동부도( 東 浮 屠 ), 보물 제156호인 서부도, 보물 제 호인 보조선사 창성탑( 彰 聖 塔 ) 및 창성탑비 등의 문화유산들이 있다. 맛과 멋이 함께하는 남도에서 해넘이와 해맞이를 하다. 140

141 다시 발길을 옮기면 화순군 이양면에 있는 쌍봉사에 이른다. 한편 영산강의 한 지류인 지석강의 발원지가 화순군 이양면에 있는 쌍봉사 부근이다. 쌍봉사에 관한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쌍봉사 雙 峰 寺 중조산에 있다. 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려 시대의 문 신 김극기 金 克 己 는 쌍봉사에 와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단청한 집이 붉고 푸른 숲 사이에 서로 비치니, 지경 의 한가한 것 속된 눈으로 일찍이 보지 못하던 것이었네. 학은 푸른 고궁에 날아서 지둔 支 遁 (남북조 시대의 승려)을 하직하고, 물고기 금빛 못에 놀면서 혜관에게 감사하네. 어지러운 봉우리는 옥잠같이 난간에 이르러 빼어났고, 여울 은 구슬패물처럼 뜰에 떨어지는 소리로세. 말하다가 조계물을 보니, 일만 길 하늘에 연해 노여운 물결 일어나네. 이 절은 신라 경문왕 때 철감선사 澈 鑑 禪 師 도윤 道 允 이 이곳의 산수가 수려함을 보고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여러 기 록으로 보아 이 절은 철감선사가 주석하던 시기에 사세가 크게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절에는 신라의 문화재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것 중의 하나인 철감선사 부도(국보 제 57호)와 여러 점의 문화유산이 있다. 독실한 신심 信 心 이 아니라면 도저히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부도 옆에는 보물 제 170호로 지정된 철감선사 부도비가 비신이 없어진 채로 있다. 그뿐만이 아니고 이 절에는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우리나라 목탑의 원형을 추정할 수 있는 귀중한 목탑인 대웅전(당시 보물 제 163호)이 있었는데, 1984년 4월초에 불에 타버려 새로 지어져 있어 아쉽기만 하 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전라도 운주사에는 천불 천탑이 남아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천불산 기슭에 위치한 운주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의 제 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로서 나지막한 산속에 들어 앉아있다. 이 절 이름을 배( 舟 )자로 삼은 것은 중생은 물이요 세계는 배라는 뜻이라 고 하는데 물방울 같은 중생이 모여 바다를 만들고 세계라는 배가 그 중생의 바다 위에 비로소 뜨는 것이며 역사는 중생의 바다에 의해 떠밀려가는 것이라는 깊은 뜻이 운주사의 배( 舟 )자에는 숨겨져 있다고 한다. 창건당시 운주사의 명칭은 동국여지승람 에는 운주사( 雲 住 寺 )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 후 중생과 배의 관계를 의미하는 운주사( 澐 舟 寺 ) 로 바뀌었다가 다시 훗날에 그 두 가지를 섞어서 운주사( 雲 舟 寺 )로 전해왔다. 그러한 이름 탓인지 이 절을 처음 지을 때 해남의 대둔산이며 영남의 월출산 그리고 진도와 완도, 보성만 일대의 수없이 많은 바위들이 우뚝우뚝 일어나 스 스로 미륵불이 되기 위하여 이 천불산 계곡으로 몰려왔다고 한다. 창건 설화는 신라 때의 고승인 운주화상이 돌을 날라다 주는 신령스런 거북이의 도움을 받아 창건하였다는 설과 중 국설화에 나오는 선녀인 마고할미가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운주화상이 천일기도를 하여 흙 같은 것으로 탑을 쌓았는데 탑이 천개가 완성된 다음천동선녀( 天 童 仙 女 )로 변하여 불상이 되었다는 설도 있고 거의 똑같은 솜씨로 만든 돌부처들의 모습을 보아 한 사람이 평생을 바쳐 만들었을 것이라는 설들도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석공들이 석탑과 석불을 만들었던 연습장이었을 것이라는 허황한 설도 전해진다. 설화나 문학에 앞서서 운주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다. 절의 맛과 멋이 함께하는 남도에서 해넘이와 해맞이를 하다. 141

142 좌우 산마루에 석불, 석탑이 약 1천개씩 있고, 또 석실이 있는데, 두 개의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 개천사가 천불산에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현재 천불산 좌우의 산등성이에 석불과 석탑이 산재한 것과 일치되 며, 석불둘이 등지고 있는 것이 일치되고 있다. 천불천탑이 하룻밤 사이에 전남도청에서 펴낸 전남의 전설 에는 도선국사와 운주사의 전설이 이렇게 실려 있다. 도선이 여기에 절을 세우기 위해, 머슴을 데리고 와서 천상( 天 上 )의 석공들을 불러 용강리 중장터에 몰아놓고, 단 하루 사이에 천불천탑을 완성하고, 새벽닭이 울면 가도록 일렀다. 천상에서 내려온 석공들은 절위의 공사바위에서 돌 을 깨어 열심히 일했으나, 도선이 보기에 하루사이에 일을 끝내지 못할 듯싶으므로 이곳에서 9km쯤 떨어져 있는 일 괘봉에 해를 잡아놓고 일을 시켰다. 해가 저물고 밤이 깊었지만 천상에서 내려온 석공들은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이 때 이들의 일손을 거들어주던 도선의 머슴들이 지쳐 꾀를 생각해 냈다. 어두운 곳에 숨어서 닭 우는 소리를 흉내 낸 것이다. 꼬끼오, 일을 하던 석공들은 가짜로 우는 닭소리를 듣고 모두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이 때문에 운주사에는 미처 세우지 못한 와불이 생겼고, 6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화순군 도암면 봉하리의 하수락( 下 水 落.아릿무지개) 일대 의 돌들은 천상의 석공들이 이곳으로 돌을 끌고 오다 버려두고 가서 중지된 형국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운주사 와불 아랫자락에는 칠성바위가 있다. 얼핏 보면 원반형 7층석탑의 옥개석으로도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북두칠성이 이 땅에 그림자를 드리운 듯 한 모습과 흡사하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운주사 탑들의 배치가 하늘의 별자 리와 같다고 보고 있고 고려시대 칠성신앙의 근거지였다고 보고 있기도 하다. 한편 이 운주사에 과연 일천기의 석탑과 일천불의 불상이 있었는지에 대한 의견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견해 들이 많다. 불교에서는 천을 만수로서 무량무수의 여래를 표상하고, 천불신앙은 과거 장업겁, 현재의 현겁, 미래 성숙 겁의 3세 3천불 가운데 현재 현겁에 대한 신앙을 가르친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 천불과 천탑을 세운 것이 아니라 천불신앙에 천불천탑이었을 것이고 그 것도 하룻밤 새에 도력으로 세운 것이 아니고 11세기 초반에서 15세기 에 걸 쳐 만들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우리 산하 맛과 멋이 함께하는 남도에서 해넘이와 해맞이를 하다. 142

143 북촌과 경복궁을 다녀온 소회 :38 북촌과 경복궁을 다녀온 소회 금세 지난 일이 아스라할 때가 있다. 마치 몇 년이나 지난 일처럼 안개속이나 꿈결처럼 아스라해지 는 것, 어제 일이 그렇다. 일요일 오전 북촌 일대를 느릿느릿 걷고 점심 식사 후 고궁박물관 옆 법천 사지 지광국사현묘탑에서 만나기로 했다. 빛바랜 은행잎이 노랗게 잔디를 수놓은 그곳에 그 아름다운 현묘탑이 있다. 나는 그 노란 은행잎에 앉아서 탑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 잎에 누워서 오래 오래 잠들고 싶었다. 저렇게 의연하게 서서 가는 세월을 셈하는 법천사지 부도가 있던 곳은 어디일까? 진리(법: 法 )가 샘물처럼 솟는다. 는 뜻을 지닌 법천사( 法 泉 寺 )는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 있다.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창건되어 법고사라고 불리던 절이었으며 고려 문종 때 지광국사가 머물면서 큰 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유방선( 柳 方 善 )이 머물면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이 때 수학한 사람들이 한명회, 강효문, 서거정, 권람 등이 있다. 그 뒤의 절의 역사는 자세히 전해 지지 않지만 절이 폐사된 뒤 거대한 절터에 민가가 들어서고 절에 쓰였던 돌은 마을 들머리의 느티 나무를 둘러싼 축대가 되었거나 민가의 주춧돌 또는 담이 되기도 했으며 논밭이 되었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이자 혁명가인 교산 허균 許 筠 이 <원주 법천사기>를 남겼다. 원주의 남쪽 50리 되는 곳에 산이 있는데, 비봉산 飛 鳳 山 이라고 하며, 그 산 아래 절이 있어 법천사 라고 하는데, 신라의 옛 사찰이다... 금년 가을에 휴가를 얻어 와서 얼마 동안 있었는데, 마침 지관 智 觀 이라는 승려가 묘암 墓 菴 으로 나를 찾아왔었다. 그로 인하여 기축년에 일찍이 법천사에서 1년간 지낸 적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유흥 遊 興 이 솟아나 지관을 이끌고, 새벽 밥을 먹고 일찍 길을 나섰다. 험준한 두멧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 소위 명봉산 鳴 鳳 山 에 이르니, 산은 그다지 높지 않은 봉우리가 넷인데, 서로 마주보는 모습이 새가 나는 듯 했다. 개천 둘이 동과 서에서 흘러나와 동구 洞 口 에서 합쳐 하나를 이루었는데, 절은 바로 그 한가운데에 처하여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난리에 불타서 겨우 그 터만 남았으 며, 무너진 주춧돌이 토끼나 사슴 따위가 다니는 길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비석은 반 동강이 난 채 잡초 사이에 묻혀 있었다. 살펴보니 고려의 승려 지광 智 光 의 탑비 塔 碑 였다. 문장이 심오하고 필치는 굳세었으나 누가 짓고 누가 쓴 것인지를 알 수 없었으며, 실로 오래되고 기이한 것이었다. 나 는 해가 저물도록 어루만지며 탁본을 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중은 말하기를 이 절은 북촌과 경복궁을 다녀온 소회 143

144 대단히 커서 당시에는 상주한 이가 수백이었지만, 제가 일찍이 살던 선당 禪 堂 이란 곳은 지금 찾아보 려 해도 가려 낼 수가 없습니다. 하여 서로 바라보며 탄식하였다. 허균이 살았던 당시에도 폐허가 되었던 법천사지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폐사지로 남아 있다가 발굴 이 시작된 게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지금은 절 건물은 찾아볼 수 없고 석물만 남아있는 이 절에서 당대의 제일가는 고승 지광국사가 출 가하고 열반에 들었다. 그곳에 지금도 남아 있는 유물들이 많이 있고, 그 중에 하나가 국보 59호로 지정되어 있는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비다. 원주에서 태어난 지광국사의 속성은 원씨였고, 어릴 때 이름은 수몽이었으며 법호는 해린이었다. 당대의 고승인 지광국사를 문종은 스승으로 모셨고 넷째 아들을 출가시켜 지광국사가 머무르던 현화 사로 보냈다. 그가 바로 훗날 대각국사 의천이었다. 1067년에 처음 출가했던 법천사에 머무르다가 그 해 10월 23일 열반에 들었다. 문종은 시호를 지광( 智 光 ), 탑호를 현묘( 玄 妙 )라 내린 후 비문을 짓게 한 뒤 비와 함께 부도를 세웠 다. 고려시대 석비의 대표작이라고 꼽힐 만큼 그 조각이 정교하기 이를 데 없고 화려하다. 지대석 위에 거북이 올라 앉아있고 긴 목을 뺀 채 서쪽을 응시하는 듯한 용머리에는 물고기 비늘이 조각되어 있 으며 거북이 등에는 임금 왕( 王 )자가 수놓아져 있다. 비신 옆면에 운룡을 깊이 새겼는데 지금이라도 날아오를 듯이 사실적이다. 부처님에 버금가는 큰 인물 이라고 추앙을 받았던 지광국사의 행적을 적은 이 비문은 당대 명신 정유산이 찬하고 명필 안민후가 썼는데 글씨는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부드러움과 단아함을 추구하여 썼으며 이영보와 장자춘이 새겼다. 이 비 옆에는 지광국사의 현묘탑이 서있었다. 스님의 사리탑이라고 보기보다 페르시아 풍의 이 부도는 경술국치 이후 일본의 오사카에 강제 밀반 출 되었다가 8.15 광복 이후 다시 반환되어 경복궁 뜰에 세워졌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파손되었던 것을 1975년에 복원한 것이 오늘날의 모습이다. 국보 제59호로 지정 되어 있는 이 부도는 전체적인 구도로 보아 신라시대 이래의 8각 원당형에서 벗어나 평면방형을 기 본으로 하는 새로운 양식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 부도 탑 중 최대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전체적 인 구도는 기단부 위에 탑사를 놓고 그 위에 옥개석과 상륜부를 쌓았는데 7층의 석재 전체에 안상, 운문, 연화문, 당한문, 불보살, 봉황, 신선, 문짝, 장막, 영락, 앙화, 복발, 보탑, 보주와 같은 온갖 화려한 장식과 무늬들이 빈틈없이 새겨져 있다. 특히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페르시아 풍의 창과 짧 게 늘어진 커튼이 쳐져있어 이국적인 풍을 보이는 이 탑은 고려시대의 부도로서 다른 어떤 부도와도 북촌과 경복궁을 다녀온 소회 144

145 비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탑인데 아쉽게도 기단 네 귀퉁이에 사자가 한 마리씩 서 있었다는데 하나 도 남아있지 않다. 우리나라 부도비중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비는 바라볼수록 그 말이 사실임 을 깨닫는다. 우리말 중에 떡 주무르듯 했다. 또는 흙 주무르듯 했다. 는 말이 있지만 지광국 사 현묘탑비를 보면 인간의 손으로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빼어난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 에서 원주 지광국사 현묘탑은 정교의 극치를 이룬다. 고 평가하였는데 경복궁 안에 쓸쓸히 서있는 지광국사 현묘탑(국보 101호)은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먼 곳에서 법천사 를 그리워하고 있을 뿐이다. 그 아름다운 법천사지 부도가 이곳 고궁박물관 옆에 있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른다. 그래서 더 은밀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곳을 지나 경복궁의 구석구석을 답사하고 통인청의 관리들이 주로 살았던 통인시장에서 저녁을 먹 고 돌아와 잠을 자는 내내 나는 법천사지 일대만 맴돌다 깨어났다.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아 있는 것, 나는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 추억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밤을 지 샐 때가 많다. 어제의 일도 결국 추억으로 남아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결에 두 뺨을 스치는 햇살에 문득 문득 떠오를 때가 있을 것이다. 북촌과 경복궁일대 답사 안내를 진행해주신 촌철생인님과 함께한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임진년 동짓달 열아흐레 북촌과 경복궁을 다녀온 소회 145

146 영암사지나 해인사 가는 길에 어떤 풍경을 만나게 될까?, :32 영암사지나 해인사 가는 길에 어떤 풍경을 만나게 될까?, 오랫동안을 두고 좋아했던 영암사지를 간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이 때 만큼은 온갖 근심, 온갖 시름을 잊어야 하리라. 모산재 아래 고즈넉하게 펼쳐진 영암사지를 답사하고 합천댐을 지나서 가는 해인사 가는 길, 그 길을 가는 마음이 잊고 있었던 고향 가는 길과도 같이 그리움으로 설렐지도 모르겠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움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것, 그래서 인도로 가던 길에 남긴 혜초스님의 <왕오천척국전>에 실린 시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달밤에 고향 길의 하늘을 보니 뜬구름은 시원스레 흘러가누나. 소식적어 그 편에 부칠 수도 있으련만 빠른 바람결은 아랑곳도 않는구나. 내 나라 하늘은 먼 북쪽 끝 이곳은 남의 땅 서쪽 모퉁이 무더운 남방엔 기러기도 없으니. 기러기 편에 소식을 전할 수도 없었던 떠도는 나그네 신세, 나 역시 그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기에 혜초스님의 시들이 애절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당신은 서번 西 蕃 길이 멀다고 하나 나는 동쪽 길이 먼 것을 한탄하노라. 눈 쌓인 거친 고개, 고개 넘기도 어려운데, 험한 골짜기에는 도둑이 성하도다. 나는 새도 놀라 넘는 험한 묏부리 외나무다리 건너가면 진정 어려워 눈물 한 번 흘린 적이 평생 없는데, 오늘만은 천 갈래 눈물이 끊이질 않는구나. 육십령을 넘지 않고서 육십령 터널을 지나고 영암사지나 해인사 가는 길에 어떤 풍경을 만나게 될까?, 146

147 그리고 여러 고개를 넘어 오갈 길, 그 길에서 나는 어떤 풍경을 보고 어떤 상념에 잠길 것인가? 임진년 동짓달 열닷새 영암사지나 해인사 가는 길에 어떤 풍경을 만나게 될까?, 147

148 옥정호를 감싸고도는 물안개 길을 걷는다 :01 옥정호를 감싸고도는 물안개 길을 걷는다. 2012년 3월 4일 일요일 전라북도 임실군 운암면에 자리 잡은 옥정호를 휘감아 도는 <물안개 길을 걷습니다. 섬진강의 중류에 자리 잡은 옥정호 물안개길은 임실군 운암면 용운리에서 시작하여 마암리까지 약 13킬로미터로 조 성된 도보길입니다. 옥정호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댐으로 섬진강댐을 일컫는 이름입니다. 국사봉 동쪽 계곡에는 옛날에는 많은 후진을 양성했다는 강당골이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고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이 전북 지역 사람들이 주말마다 즐겨 찾고 있는 오봉산이다. 지금 우리가 서있는 입석리가 저렇듯 출렁거리는 강 물이 가득한 것은 오래지 않은 시간 저편이었다. 1928년 동진 수리 조합에서 운암 발전소를 세울 때 만든 운암댐이 바로 전라북도의 지세를 잘 이용한 대표적인 섬진 강댐이었다. 동진강의 상류와 분수를 이루는 왕자산과 성왕산을 뚫어 수계를 바꾸면서 그 물을 동진강으로 유입시켰 다. 나라의 제일 큰 곡창지대였던 호남평야는 그때까지만 해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흉년이 들 수밖에 없는 쓸모없는 땅이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동학농민혁명 당시만 해도 3년 동안에 걸친 가뭄 때문에 전라도 전 지역 사람들은 살아가 기조차 힘든 처지에 고부군수 조병갑이 만석보를 만들고 과중한 수세를 요구했기 때문에 동학농민혁명이 발발된 것 이다. 물이 절대적으로 모자랐던 호남평야에 이 운암일대를 흐르는 섬진강의 물을 강을 변경하여 정읍, 김제, 부안 등지로 내려 보냈지만 그러나 그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40년에 신 댐 건설에 착수하였으나 전쟁으로 중단되었다. 그 뒤 1961년에 임실군 강진면 용수리와 정읍군 산내면 종성리 사이를 막아 1965년에 12월 길이가 344미터이고 높이가 64미터인 섬진강댐을 만들었고 정읍시 산내면 장금리에서 칠보면 시산리까지 6215m의 굴(직경 3.40m)를 뚫어 칠보발 전소를 만든 것이다. 섬진강 물을 땅 높이가 50미터인 정읍군 칠보 발전소로 내려뜨리게 한 것이다. 이것은 낙차 150미터를 이용하여 전기 를 만드는 이른바 유역 변경 식 발전소로 이용하였고 발전에 이용한 물을 다시 동진강 유역의 농업용수로 쓰도록 하 였다. 간선도수로의 총연장은 67km에 이르고 지선수로만도 69km에 달한다. 또 이 물을 계화도 간척지로 끌어내어 무 주군 전체의 논 넓이와 같은 4,000 헥타아르쯤의 새로운 논을 만드는 데에 쓰였다. 그 후 이들 논에서는 우리나라에 서 가장 질이 좋은 쌀에 드는 계화도 쌀을 생산하게 되었다. 섬진강 상류에 위치한 콘크리트 중력식인 댐은 1961년 8월에 착공하여 1965년 12월에 준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 적 댐이다. 댐의 높이 64m, 제방의 길이 344.2m에서총 저수용량 4억 6600만톤이며 만수위 때의 수면면적은 26.51km2, 유역면작은 763km2이고l, 시설발전용량은 3만4800kW이다. 댐의 건설로 전라북도 임실, 정읍군은 2개군, 5개면, 28개리의 총면적 9,371정보가 수몰되었다. 건설효과는 칠보발전소의 확대를 가져와 발전량 2만8800kW가 되었으며, 홍수조절량은 2700만 옥정호를 감싸고도는 물안개 길을 걷는다. 148

149 톤이며 용수 공급량은 연 3억5000만톤이다. 발전에 이용된 유수를 동진강으로 유역변경시킴으로써 동진강 하류지역인 경지 1만7890정보, 계화도간척지 3,050정보 부안농지확장지구 5,000정보 등 4만5700정보에 관개용수를 공급, 연 200만 석의 식량증산과 섬진강 중하류의 홍수피해를 방지하게 되었다. 또한 섬진강수력발전소 건설공사는 1940년 9월 남선전기주식회사에서 착공하였으나, 1943년 조선전업주식회사에 통합 되어 계속 공사 중, 전시 물자난으로 공사가 지연되어 전체공사의 약 60%, 댐 공사의 23%를 완성하고 불완전하나마 1945년 4월 제1호기를 첫 발전을 시작하였으나 광복과 함께 완전히 중단되었다. 그 뒤 정부보조로 다시 착공하였으나 공사시행계획의 변경, 자재구입의 어려움, 시공업자의 선정 잘못 등으로 공사의 추진이 지연되다가 6.25 사변으로 다 시 중단하게 되었다. 사변 중에는 1950년 7월 북한군에게 점령당하여 이른바 산업성 전기국 산하에 섬진강 발전부를 두어 칠보, 운암, 보 성강 발전소를 통합 관리하였으며, 유엔군의 폭격에 대비하기 위해 발전기를 비롯하여 부속기기를 해체, 소개하기 시 작하던 중 유엔군의 폭격으로 다수의 시설이 파손되기도 하였다 수복 때에는 인민군들이 산으로 도주할 때 방 화와 총격을 가하여 건물 5동이 전소되고 변전설비가 파괴되는 심한 피해를 입었다. 그 뒤 파손된 기기와 분산된 설 비를 정비하여 1950년 12월 복구공사를 착수, 1951년 4월 시설용량 1만4400kW의 제1호기 복구를 완료하였다. 종전 후 국토건설사업의 일환으로 1961년 8월 건설부 주관하에 건설을 다시 추진하였으며, 이는 당초 계획지점에 높이 64.0m, 길이 335m의 댐을 축조하고 기존 제1호기 옆에 설비용량 1만4400kW의 제2호기 증설, 1965년 12월 준공함으로써 설비 용량은 2만8800kW로 증가되었다. 이후 제3호기에 대한 증설을 1983년 9월 착공, 1985년 3월 준공하여 설비용량은 다시 3만4800kW가 되었으며, 저수용량 4억3832만m3, 유효낙차 151.7m를 이용하여 프란시스수차 3대를 설치, 연간 1억8000만 kwh의 전력을 생산, 호남지역에 공급하고 있다. 현재 저수지는 산업기지 개발공사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동진농조와의 계약하에 영농기(매년 ~9.11.)에는 일정수위 이상을 유지하면서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고향을 두고 떠난 수몰민들 그러나 운암댐이 만들어지며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던 수몰민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정읍군 산내면과 임실군 운암면 그리고 강진면 사람들은 물에 잠기는 고향마을을 두고 경기도와 동진강 일대로 흩어져 갔다. 8백 만평 쯤의 땅이 물에 잠기고 수몰민 2천 7백여 세대의 이주 정착을 위해 선정된 지역이 계화도 간척지였다. 1960년대 후반 부터 시작된 이주는 1977년과 1980년 사이에 정읍과 임실 지역의 수몰민 천칠백 세대가 옮겨갔지만 시행 초기에는 문 제점 투성이었다. 입석리에 살고 있는 박종만(55세 )씨는 다음해 4월말에 이주해야 되는데 7월말에 홍수가 났어요 아무런 채 비도 않았는데 물이 차오르니까 우선 급한 가재도구만 가지고 저 산으로 올라갔어요 그래서 도청 앞에다 솥까지 걸 어놓고 농성을 했어요 누워 잘 수 있도록 천막이라도 칠 수 있게 해달라. 그러니까 계화간척지가 완성되지도 않은 상 태에서 강제 이주를 시켰지요 이곳 운암에 살다가 현재 계화도에 이주하여 살고 있는 최우필씨를 80년대 중반에 만났던 적이 있다. 이주했던 사람들 대다수가 밤도망을 갈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 농사를 짓고 싶어도 소금물 때문 에 그냥 묵힐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 그보다도 또랑 논들만 짓다가 번듯번듯하게 한 필지씩 나누어 놓은 바둑판같 은 논에서 아침 일찍 비료를 뿌리고 오면 남의 논에 뿌리고 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한숨만 쉬었었다. 하지 만 그 어느 고통보다도 고향도 버리고 선산도 버리고 함께 어울려 살면서 정들었던 친척들과 친구들을 버리고 온 고 통이 더 컸을 것이고 그 고향 산천들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신정일의 <섬진강 따라 짚어가는 우리 역사>에서 옥정호를 감싸고도는 물안개 길을 걷는다. 149

150 옥정호를 감싸고도는 물안개 길을 걷는다. 150

151 바닷바람과 소나무 향기를 맡으며 태안반도를 걷는다 :00 바닷바람과 소나무 향기를 맡으며 태안반도를 걷는다. 서해를 향하여 삿대질을 하려고 내닫고 있는 형국이라는 태안반도에 자리 잡은 태안군을 신숙주는 비옥한 지대로 통칭한다 고 하였고, 남수문( 南 秀 文 )은 기문( 記 文 )에서 태안군은 옛날 신라의 소태현( 蘇 泰 縣 )이었다.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을 재배하기에 알맞고, 또 어물과 소금을 생산하는 이익이 있어 백성들이 모두 즐겨 이 땅에 살아왔다. 그러나 이 고을의 읍내가 멀리 바닷가에 위치해 있으니 이는 곧 해상의 구적( 寇 賊 )들이 왕래 출몰하는 요충( 要 衝 ) 이라고 하였다. 태안군은 백화산 자락에 위치한 태안읍을 중심으로 서해안을 따라 안면도로 이어져 있다. 이곳 태안군에 솔향기 길이 만들어졌습니다. 솔향기 길의 시작지점인 제1코스는 이원면 만대항에서 시작해 여섬을 거쳐 꾸지나무골해수욕장까지 10.2km 코스로 숲길을 걷다보면 생태계의 보고인 서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며 반대편 해안의 황금산 삼형제바위 등과 어우러진 풍 경이 일품이다. 제2코스는 꾸지나무골해수욕장에서 시작해 가로림만을 거쳐 희망벽화방조제까지며 길이는 9.9km로 2007년 기름유출 사고시 120만의 자원봉사자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희망벽화와 울창한 소나무 숲, 여유로운 농촌 풍경이 장관을 이 룬다. 제3코스는 희망벽화방조제에서 시작해 밤섬선착장을 거쳐 새섬까지며 길이는 9.5km로 앞쪽에는 25km에 달하는 가로 림만의 드넓은 해안선과 각양각색의 바위들이 조화를 이룬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솔향기길의 마지막 코스인 제4코스는 새섬에서 시작해 청산포구를 거쳐 갈두천까지로 이뤄지며 길이는 12.9km로 전 형적인 어촌마을의 정겨운 모습과 고요히 흐르고 있는 갈두천의 모습은 어린 시절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 다. 장영숙기자가 평한 이 길을 1코스에서 2코스 일부분을 걷고 돌아올 이번 여정은 한해가 저물어 가는 계절에 아득한 서해바다를 걸어가며 나를 돌아보는 귀중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바닷바람과 소나무 향기를 맡으며 태안반도를 걷는다. 151

152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을 보고 서강을 걷다 :59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을 보고 서강을 걷다. 3월 셋째 주 토요일 영월을 갑니다. 한반도 모양의 지형이 있는 선암 마을과 경치가 빼어난 요선정, 그리고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중의 하나인 법흥사 적멸보궁을 부고 서강을 걸을 예정입니다. 이 지역 사람들이 동강 서강이라 부르지 않고 암캉 수캉이라 부르는 서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간 서면의 신암마 을에는 서강이 휘돌아가면서 빚어낸 절경인 한반도를 닮은 지형이 있다. 또한 영월군 주천면에는 술이 나오는 돌 주 천석( 酒 泉 石 )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그 내용이 동국여지승람 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주천현의 남쪽 길가에 돌이 있으니 형상이 반 깨어진 돌 술통 같다. 세상에서 전해오는 말에, 이 돌 술통은 예전 에는 서천가에 있었는데 거기에 가서 마시는 자에게는 넉넉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읍의 아전이 술 마시려고 거기까 지 왕래하는 것을 싫어 현 안으로 옮기고자 하여 여러 사람들과 함께 옮기니 갑자기 크게 우뢰하고 돌에 벼락을 쳐 서 부수어 세 개로 하여 한 개는 못에 잠그고, 한 개는 있는 데를 알 수 없고, 한 개는 곧 이 돌이라. 주천면에서 주천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만나는 곳이 요선정이고 그곳에서 법흥천을 따라 올라간 곳에 적멸보궁의 한 곳인 법흥사가 있다. <택리지>를 지은 이중환은 이 근처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치악산 동쪽에 있는 사자산은 수석이 30리에 뻗쳐 있으며, 법천강의 근원이 여기이다. 남쪽에 있는 도화동과 무릉 동도 아울러 계곡의 경치가 아주 훌륭하다. 복지( 福 地 )라고도 하는데 참으로 속세를 피해서 살 만한 지역이다 그의 말처럼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뚝우뚝 솟아있는 사자산은 높이가 1,150미터로 법흥사를 처음 세울 때 어느 도승이 사자 를 타고 온 산이라고 한다. 사나삼과 옻나무, 그리고 가물었을 때 식량으로 사용한다는 흰 진흙과 꿀이 있는 그래서 네 가지 보물이 있는 산이 즉 사재산( 四 財 山 ) 이라고도 부르는 이 산이 사자산이다. 이 산에 신라 때의 고승 자장율사가 지은 절로 구산선문 九 山 禪 門 중에 한 곳인 법흥사가 있다. 치생 治 生 (생활의 법도를 세움)을 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먼저 지리 地 理 를 가려야 한다. 지리는 물과 땅이 아울러 탁 트인 곳을 최고로 삼는다. 그래서 뒤에는 산이고, 앞에 물이 있으면 곧 훌륭한 곳이 된다. 그러나 또한 널찍하면서도 긴속 緊 束 해야 한다. 대체로 널찍하면 재리 財 利 가 생산될 수 있고, 긴속하면 재리가 모일 수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의 풍운아인 허균이 지은 <한정록>에 실린 여러 가지 사람이 살아갈만한 조건을 갖춘 곳이 바로 법흥사 부 근이다. 영월군 주천면을 지나 주천강을 따라가다가 요선정이 있는 미륵암 부근에서 법흥천을 거슬러 올라가다 만나는 곳이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을 보고 서강을 걷다. 152

153 광대평 廣 大 坪 이다. 법흥리에서 가장 들이 넓고 전답이 많았다는 광대평을 지나 한참을 오르면 그 지형이 고기가 물결 을 희롱하며 놀고 있는 형국이라는 유어농파형 遊 魚 弄 波 형의 명당이 있다는 응어터(응아대) 마을이다. 그곳에서 법흥 사 아랫마을인 대촌 大 村 이라고도 부르는 사자리는 멀지 않다. 깊숙한 산골인데도 제법 넓게 펼쳐진 들판에서 길관음 사 가는 길과 법흥사가 있는 절 골로 가는 길로 나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인 월정사의 말사인 법흥사는 신라의 자장율사가 643년(선덕여왕 12)에 당나라에서 돌아와 오 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 영취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등에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마지막으로 이 절을 창건한 뒤에 진신사리를 봉안했으며 그 당시 절 이름은 흥녕사였다. 그 뒤 헌강왕 때 절중 折 中 이 중창하여 선문구산( 禪 門 九 山 ) 중 사자산문( 獅 子 山 門 )의 중심 도량으로 삼았다. 징효대사 절중은 사자산파를 창시한 철감선사 도윤의 제자로 흥녕사에서 선문을 크게 중흥시킨 인물이다. 그 당시 헌강왕은 이 절을 중사성 中 使 省 에 예속시켜 사찰을 돌보게 하였다. 그러나 이 절은 진성여왕 5년인 891년에 불에 타고 944년(혜종 1)에 중건했다. 그 뒤 다시 불에 타서 천년 가까이 작은 절로 명맥만 이어오다가 1902년 비구니 대원각 大 圓 覺 이 중건 하고 법흥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2년 또다시 불에 탄 뒤 1930년에 중건했으며, 1931년 산사태로 옛 절터의 일부와 석탑이 유실되었다. 이 절의 초입에 흥녕사에서 선문을 크게 열었던 징효대사 절종(826~900년)의 부도와 부도비가 세워져 있다. 징효대사 의 부도비(보물 제 612호)에는 징효대사의 행적과 당시의 포교내용이 새겨져 있고 고려 혜종 1년에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소나무 숲이 너무도 아름다운 절 나라 안에 이름난 소나무 숲이 여러 곳 있지만 가장 그윽한 소나무 숲이 있는 곳이 이곳 법흥사의 적멸보궁으로 올 라가는 길에 서 있는 소나무숲이다. 나무는 별에 가닿고자 하는 대지의 꿈이다. 라는 빈센트 반고호 의 말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하늘을 찌를 듯 우 뚝 우뚝 솟아있는 아름드리 소나무 숲길을 걸어 올라가면 법흥사선원이 있으며 그 우측에 항상 흐름을 멈추지 않는 우물이 있다. 그곳에서 구부러지고 휘어지는 오솔길을 돌아 올라가면 법흥사 적멸보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인 적멸보궁 안에는 불상이 안치되어 있지 않고 유리창 너머 언덕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사 리탑이 보인다. 그러나 진신사리 탑일 것이라는 부도탑은 어느 스님의 부도일 뿐이고 정작 진신사리는 영원한 보존을 위해 자장율사 가 사자산 어딘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두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가끔씩 사자산 주변에 일곱 빛깔의 무지개가 서린다고 한다. 사리탑 옆에는 자장율사가 수도했던 곳이라 는 토굴이 마련되어 있고 그 뒤편 사자산의 바위 봉우리들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적멸보궁에서 내려오는 길 에 우뚝우뚝 서 있는 소나무를 만날 수 있다. 어쩌면 오랜 그리움의 한 자락 같기도 하고 보고 싶은 어떤 사람 같기 도 한 그 소나무들 중 한그루를 나는 내 사랑 소나무 라고 점찍어 두고 가까이 다가가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본 다. 까실 까실하게 혹은 오랜 세월 부대낀 세월의 무게로 내 가슴속에 한 점 그리움으로 안겨오는 소나무와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아름답게 이를 데 없는 산길이 그곳이다. 나는 가끔씩 이 법흥사를 떠올릴 때마다 이 소나무와 적멸보궁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을 보고 서강을 걷다. 153

154 으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휘어지고 굽어 도는 서러움 같은 그 길들이 떠올라 주체하지 못할 때가 있다. 이 법흥리 부근은 산이 높고 골이 깊기 때문에 높은 고개들이 많다. 도마니골에서 엄둔으로 넘어가는 재는 엄둔재이 고, 어림골에서 주천면 판운리로 넘어가는 고개는 숲이 무성하다 하여 어림치라고 부르며, 법흥리에서 횡성군 안흥면 상안흥리로 넘어가는 고개는 안흥재이다. 아름다운 풍경화를 보는 것 같은 경치가 빼어나게 펼쳐진 서강변을 걷고자 하는 분의 참여 바랍니다.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을 보고 서강을 걷다. 154

155 안면도 노을길을 걷는다 :58 안면도 노을길을 걷는다.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도보답사>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에서 한 달에 두 번(첫째와 셋째 토요일) 정도, 토요 답사를 실시할 예정입니다. 그것도 마냥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답사하며 걷는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도보답사>프로그램 으로 진행할 것입니다. 인간은 경험한 것만큼만 쓸 수 있다 니체의 말입니다. 그냥 바라보고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닌 설명하고 공부하 면서 걷는다면 마음 속에 그 지식과 아름다운 풍경이 그대로 쏙쏙 들어와 박힐 것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2012년 4월 7일 토요일 충청남도 태안군의 끝자락인 <안면도 노을 길>을 걷습니다. 백사장항 에서 꽃지해수욕장까지 약 12km를 걷게 될 이번 여정은 서해바다와 봄, 그리고 안면도의 자랑인 소나무가 만나는 귀 중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황해를 향하여 삿대질을 하려고 내닫고 있는 형국이라는 태안반도에 자리 잡은 태안군을 신숙주는 비옥한 지대 로 통칭한다 고 하였고, 남수문( 南 秀 文 )은 기문( 記 文 )에서 태안군은 옛날 신라의 소태현( 蘇 泰 縣 )이었다. 토지가 비 옥하여 오곡을 재배하기에 알맞고, 또 어물과 소금을 생산하는 이익이 있어 백성들이 모두 즐겨 이 땅에 살아왔다. 그러나 이 고을의 읍내가 멀리 바닷가에 위치해 있으니 이는 곧 해상의 구적( 寇 賊 )들이 왕래 출몰하는 요충( 要 衝 ) 이라고 하였다. 태안군은 백화산 자락에 위치한 태안읍을 중심으로 서해안을 따라 안면도로 이어져 있다. 세계 꽃박람회와 꽃지해수욕장, 그리고 왕실의 숲 으로 가꾸어지던 소나무 숲으로 알려져 있는 안면도는 원래 섬 이 아니었다. 그렇게 된 연유가 동국여지승람( 東 國 與 地 勝 覽 ) 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고려 인종이, 안흥정( 安 興 亭 ) 아래의 물길이 여러 물과 충격하는 곳이 되어 있고 또 암석의 위험한 곳이 있으므로 가끔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있으니, 소태현 경계로부터 도랑을 파서 이를 통하게 하면 배가 다니는 데에 장애가 없을 것이다 하여, 정습명( 鄭 襲 明 )을 보내어 인근 군읍 사람 수천 명을 징발하여 팠으나, 마침내 이루지 못하고 말았는데 본조( 本 朝 ) 세조 때에 건의하는 자가 혹은 팔 만하다 하고 혹은 팔 수 없다 하여 세조가 안철손( 安 哲 孫 )을 보내어 시험하였던바, 공을 이룰 수 없다 하여 대신에게 제하여 자세히 살피게 하였으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서 중지하고 말았다. 그 뒤 조선 인조 때인 1638년에 삼남지역의 세곡을 실어 나르는 것이 불편하자 충청감사 김유 金 庾 가 지금의 남면과 안면도 노을길을 걷는다. 155

156 안면도 사이의 바닷길을 파서 안면도는 섬이 되었다. 섬이 되면서 안면도를 싸고도는 뱃길보다 약 200여리가 단축되 었고, 이것이 우리나라 운하의 효시가 되었으며 이름을 백사수도 白 沙 水 道 라고 불렀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 속에서 1970년에 나라 안에서 세 번째로 섬과 육지를 잇는 연륙교( 連 陸 橋 )가 생기면서 배를 타지 않고도 육지로 나올 수 있 게 되었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충청도> 편에서 서해 바닷가에 자리잡은 안면도의 봄 숨결을 맛보고 싶은 분들의 참여바랍니다. 안면도 노을길을 걷는다. 156

157 서해의 섬, 영흥도, 선재도 대부도를 걷는다 :57 서해의 섬, 영흥도, 선재도 대부도를 걷는다. 4월 셋째주 토요일 하루 기행으로 서해바다에 자리 잡은 대부도, 선재도. 영흥도를 갑니다. 대부도에서 서쪽으로 물길을 30리쯤 가면 연흥도( 燕 興 島 )가 있다. 는 옛 기록과 달리 지금은 이름조차 영흥도로 바뀌고 대부도에서 영흥도를 잇는 영흥대교가 건설된 뒤 섬 아닌 섬이 된 이 섬에 고려 말년에 고려의 종실( 宗 室 )이 었던 익령군( 翼 靈 君 ) 기( 琦 )의 자취가 남아 있다. 그는 고려가 장차 망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이름을 바꾸고 온 가족과 함께 바다를 건너 이 섬으로 숨어들었다. 그래서 고려가 망한 뒤 대다수의 왕씨들처럼 물에 빠져 죽임을 당하 는 화를 면하였고, 자손은 그대로 이 섬에 살았다. 이중환이 살았던 시대에는 그들의 신분마저 낮아져서 말을 지키는 목동이 되었다고 한다. <택리지>에는 그 때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익령군이 머물던 세 칸짜리 집은 지금까지 굳게 잠겨 져 있 어, 누구도 들어가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방안에는 서책과 기명( 器 皿 )을 쌓아 두었으나 어떤 물건인지 알지 못 한다. 예전에 한 관리가 바람 쐬러 섬에 왔다가 잠깐 문을 열어보고자 하였다. 그러자 목장의 말을 치던 여러 남녀가 애걸하면서 이렇게 호소하였다. 이 문을 열면 번번이 자손 중에 누군가 죽게 되는 변고가 일어났습니다. 그 까닭에 서로 경계하여 열어보지 못한 지가 삼백 년이나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관리는 문을 여는 것을 중지하였다. 고려장이 있었다는 고려장골, 망을 보았다는 망째산, 비아목 옆에 있는 골짜기로 기생들이 살았다는 애기 터 내동 북 쪽에 있는 부리로 배를 댔다는 선창부리는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다. 구름말에서 내리의 붉은 노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붉은 노리 고개이고, 큰 골에서 용다미로 넘어가는 고개는 달맞이가 좋다고 해서 달맞이 고 개이다. 붉은 노리마을, 비눌꾸미 부리, 작은 버더니마을 이렇게 아름다운 이름들이 언제까지 사람들의 입으로 회자 될 수 있을까? 아름다운 서어나무 군락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모래사장을 십리 길을 오고 갔으니, 이십 리 길이고 이 십 리 길을 걸은 여정으로 피로한 사람들이 황경화 선생이 쏜 바지락 칼국수로 마음까지 넉넉해져 다시 찾아간 곳이 장경리 해수욕장이다. 이곳 바다를 이 지역 사람들은 수해 水 海 바다라고 부르는데, 십리포해수욕장과 달리 을사년스럽 다. 해수욕장에는 배한 척 매여 있고 그곳에서 멀리 보이는 섬들이 영종도이다. 고려사 지리지( 高 麗 史 地 理 誌 ) 나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과 같은 지리지에는 영종 도가 자연도라고 나와 있다. 이 섬은 고려시대에는 송나라와 문화교류를 하였던 명주 항로의 거점이었다. 명주 항로 는 예성강의 포구에서 영종도를 거쳐 고군산도와 흑산도를 거쳐 중국의 명주에 이르는 뱃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영 종도에는 현재 국제공항이 만들어져 세계교역의 중심공항이 되고 있다. 한편 동국여지승람 의 기록에 의하면 백령도나 대청도 등 서해지방의 섬은 원나라에서까지 그 나라 사람들을 귀양 보냈던 귀양지라고 한다. 서해의 섬, 영흥도, 선재도 대부도를 걷는다 157

158 멀리 펼쳐진 영종도를 비롯한 서해 바다에서 눈길을 거두어 영흥대교를 건너 선재도로 향한다. 선녀가 내려와 놀던 선재도와 실미도 원래 남양도호부 영흥면 지역이던 선재도 仙 才 島 는 선녀가 내려와 놀던 곳이라 하여 선재도라 하였는데 안도 호도 칙 도 주도등을 합하여 선재리라고 하였다. 선재도 동남쪽에는 구름물(구름말)이라는 마을이 있고, 대장곶이 동쪽에는 둥그렇게 생겼다 해서 두루섬이라는 이름이 붙은 작은 바위섬이 있다. 선재항은 작은 나폴리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 선재대교를 건너면 대부도에 이른다. 택리지 에 육지가 끝나는 바닷가에 화량포 첨사( 僉 使 )의 진( 鎭 )이 있고, 진에서 바닷길을 10리쯤 건너가면 대 부도가 나온다 고 기록된 대부도는 썰물 때는 바닷길이 열려 서울 근교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인데, 이 섬은 황금산 기슭에 펼쳐져 있으며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 에는 대부도 부근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그곳은 모두 어민이 사는 곳이다. 그러므로 남양지방의 서쪽 마을이 한강 남쪽의 생선과 소금의 이익을 독차지하게 된다. 대부도는 화량진에서 움푹 꺼진 돌맥이 바닷속을 꼬불꼬불 지나가서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닷물이 매우 얕다. 옛날에 학이 물 속에 있는 돌줄기 위를 따라 걸어가는 것을 보고 섬사람이 따라가서 그 길을 발견하게 되어, 그 길을 학지( 鶴 指 )라고 부르게 되었다. (...) 대부도 옆의 풍도는 1894년 6월에 청군과 일본군의 결전장이었다. 이곳에서 밀린 청군이 아산만으로 달아났다가 성환 에서 크게 패했는데, 그 전쟁을 청일전쟁이라고 부른다. 한편 대부도 건너편에 있는 송산면 고포리의 마산포는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장수 원세개( 袁 世 凱 )가 청군을 이끌고 상륙한 곳이다. 청군은 마산포에 상륙한 뒤 대원군을 붙잡아 청국으로 데려갔고, 그때 청국의 군함은 대부도 남쪽, 즉 불도 바깥 해변에 정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택리지>에 지세는 좌우로 개와 항구를 끼고서 바로 바 다로 들어갔고, 수백 호나 되는 소금 굽는 집이 남쪽과 북쪽 바닷가에 별처럼 깔려 있었다. 고 기록되어 있지만, 지 금은 반월공단이 조성되어 바다에 의지하는 것은 그만큼 줄어들게 되었다. 가을 햇볕은 날이 갈수록 짧다. 어둑어둑 어둠이 내린 대부도에서 오늘 하루 일정의 마무리를 한다. 인생의 한평생 무엇과 같은고? 그것은 바로 눈 내린 진흙 위를 밟고 지나간 기러기와 같은 것, 진흙 위에 우연히 발톱자국 남기고, 기러기는 날아갔으니 동서 東 西 어디론지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노승은 이미 죽어 새 탑이 되고 허물어진 벽에는 우리가 썼던 시 찾아볼 수 없네. 지난날의 험했던 여행길, 그대는 아직 기억하고 있는지. 서해의 섬, 영흥도, 선재도 대부도를 걷는다 158

159 길은 멀고 사람은 피로하고, 발을 절던 노새의 울부짖음을 이 시는 소동파가 그의 동생 소철이 지은 <면지회구 면>에 화답한 시이다. (...) 사라지고 잊혀 져 간다는 것, 그것이 모든 사물의 숙명인데도 이렇게 돌아가면서 애달파 하고 있으니, 언제까지 나는 이렇게 떠나고 돌아옴을 반복하다가 그리고 어느 때에야 한곳에 머물게 될 것인가? 길의 끝에는 자유가 있다. 그때 까지는 참으라. 서해의 섬, 영흥도, 선재도 대부도를 걷는다 159

160 무주 금강변 마실길 - 복사꽃 만발한 무릉도원으로 가는 길, :56 복사꽃 만발한 무릉도원으로 가는 길, 4월 넷째 주 정기기행을 여러 사정으로 인하여 하루 기행으로 대체합니다. 4월 28일 토요일 하루, 일 년 중 한 번이 라도 안 가면 한 해가 서운한 해로 남아서 못 내 아쉬운 길, 무주의 무릉도원 길을 갑니다. 금강 천리 길 중 가장 아 름다운 길, 그리고 복사꽃, 조팝꽃, 등 온갖 꽃들이 아우성치는 그 길을 갑니다. 봄이 온다, 그것도 겨울이 유난히 추워서 오매불망 기다린 봄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이 있다. 그것도 4월 둘째 주 주말에 안가면 좀이 쑤시고 몸살이 나는 곳, 그곳에 가면 우선 기 氣 부터 막힌다. 꿈에서도 생시에서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서, 저절로 경탄 敬 歎 이 나오는 그런 장소를 만날 때 가 더러 있다. 그곳이 바로 무주군 부남면 대소리에서 무주읍 용포리 잠두 마을 강변을 따라가는 길이다. 들녘 저만치 안개 속에 다리 둥실 걸렸는데 시냇가 서쪽 바위에서 뱃사공에게 물어보네 복사꽃 온종일 물 따라 흐르는데 맑은 시내 어디쯤에 도화동 桃 花 洞 이 있는냐고? 장욱의 <복사꽃은 온종일 물 따라 흐르는데>라는 시 한편 생각나는 그 길을 걷다가 보면 감성이 풍부한 사람들은 저절로 시인이 되고 어린이가 되고, 신선이 되는 그런 순간을 맞을 것이다. 그 순간이야말로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이라는 것을 갈파한 괴테는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지고 至 高 의 것은 경탄 驚 歎 이다. 인간은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내려고 하지만, 그것 은 헛된 일이다. 그것은 마치 거울을 처음 본 어린애가 거기에 비친 물상 物 像 들이 신기로워서 그 뒤에 무엇이 있는가 하여 뒤집어 보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무주 금강변 마실길 - 복사꽃 만발한 무릉도원으로 가는 길, 160

161 연둣빛으로 물드는 강이 있고, 흐르는 강물소리가 가슴팍을 적시고 지나가는 강변을 따라가다가 보면 어느덧 시간이 멈춘 자리 무릉도원 이 펼쳐지는 곳, 그곳으로 가는 길에 봉길리 벼리길이 있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을 정으로 쪼아 만든 벼리길이 문경의 관갑천잔도나 창녕의 개벼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곳 부남면 금강 변에 있는 것이다. 벼리아래는 새파란 강물이 유장하게 흐르고 버드나무와 철쭉이 무리지어 피어 있는 길, 이 길을 걸어본 사람은 알 것 이다. 강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그 지난한 삶을, 이렇게 가파른 벼랑에 길을 내야만 살 수 있었던 그 질곡의 삶을, 그림 같은 개벼리 길을 앞서간 사람들이 마치 그림처럼 휘돌아가고 멀리 보이는 상사바우는 상사병에 걸린 처녀가 굿을 해도 낫지 않으면 이 바위에서 몸을 던져 죽었다는 슬픈 사연을 안고 있다. 또 이곳에는 사모관대를 쓴 것 같은 신랑바우와 마치 족두리를 쓴 것처럼 보이는 각시바우가 마주보고 있어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마을이 금강 상류에 둘러싸여 있어 마치봉황의 집처럼 보인다는 봉길 鳳 吉 리는 봉소라고도 부르는데, 멀리서보면 문 득 그곳에 들어가 살고 싶은 생각이 물씬 드는 땅이다. 그곳에서 봄 물드는 강변을 따라가다 보면 만나는 곳이 바로 무주군 무주읍 용포리 잠두마을 건너편의 길과 섬바위 가 있는 용담면의 개비리 길이다. 야생복숭아꽃과 벚꽃, 그리고 조팝나무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어디가 길이며, 어디가 강이고 산인지, 분별할 수 없이 정신을 몽롱하게 하는 곳이다. 무주군 부남면 대소리에서 무주읍 용포리 잠두마을로 가는 금강 길은 이름조차 아름다운 비단강이다. 그 강변에 피어난 복사꽃, 이팝꽃, 벚꽃과 이름조차 모르는 온갖 꽃들의 향연에 빠지고픈 마음으로 봄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무주 금강변 마실길 - 복사꽃 만발한 무릉도원으로 가는 길, 161

162 한탄강변의 철원을 가다 :55 한탄강변의 철원을 가다. 유월 셋째 주 토요일에 한탄강변에 자리 잡은 철원을 갑니다. 금강산 가는 길에 있는 정자연은 겸재 정선의 그림 속 에 남아 있는 명승지입니다. 백마고지와 노동당사, 도피안사를 거쳐 고석정, 그리고 순담으로 이어질 이번 여정에 참여 바랍니다. 이곳 평강에서 알려진 명소가 정자연 亭 子 淵 이다. 김화현 당탄 하류에서 흘러와 한탄강이 되어 철원으로 흐르는데, 푸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울타리를 이루고 있다. 그 길이가 5 리나 되며 돌무늬가 그림처럼 뒤섞여 있다. 아래에는 맑 은 호수가 있는데, 깊이는 배를 띄울만하다.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이곳 정자연을 지나다 한 눈에 반하여 그림으로 표현한 화가가 바로 겸재 정선 鄭 敾 이다. 정선은 조선 땅을 발로 탐승하고, 기억에 의존하여 머리로 그름을 그린 진경화가다. 실경을 변형하는 독특한 조형 어법으로 보건데, 울림이 큰 가슴과 풍부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누구보다 조선 땅을 지독히 사랑한 결과일 터다. 정선이 완성한 진경산수화는 조선의 대지, 나아가 조선의 명승을 통해 더 나은 이상을 꿈꾼 자들의 회화 형식 이다. 라고 평한 미술사학자 이태호 선생의 말이 빈 말이 아님을 이곳을 그린 겸재의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병연의 제화시 題 畵 詩 에 나오는 정자연 亭 子 淵 은 강원도 평강군 남면 정연리에 있다. 겸재 정선은 그의 나이 36세 (1711) 되던 해에 정자연에 들렀을 때, 지금의 풍광과 다른 점은 석벽 건너편에 잘 지어진 기와집 몇 채가 있다는 것 이다. 소나무 몇 그루가 늘어서 있고 한 쪽 귀퉁이 사리로 서 있는 버드나무 한 그루, 그 나무 사이로 한 사람이 서 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몇 백 년 전에 그려진 한 폭의 그림으로 그 옛날의 풍경을 회상해볼 따름이다. 그 쇠둘레의 땅 철원 조선시대에 철원도호부( 鐵 原 都 護 府 )가 있던 철원군이 신증동국여지승람 건치연혁 ( 建 置 沿 革 ) 편에는 다음 과 같이 실려 있다. 본래 고구려의 철원군이다. 모율동비( 毛 乙 冬 非 )라고도 한다. 신라의 경덕왕이 철성군( 鐵 城 郡 )이라고 고쳤다. 뒤에 궁예가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의 옛 땅을 침략해 차지하고 송악군으로부터 와서 여기에 도읍을 정하고 궁실을 지어 더할 수 없이 사치하게 하였으며, 나라 이름을 태봉( 泰 封 )이라고 하였다. 고려 태조가 즉위하게 되어서는 수도를 송악 으로 옮기고, 철원을 고치어 동주( 東 州 )로 하였다. 충선왕 2년에 모든 목을 재정비할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낮추 어 부로 하였고, 조선 태종 13년에 통례에 따라 도호부로 고쳤다. 세종 16년에는 경기로부터 옮겨다가 본도에 예속시 켰다. 한탄강변의 철원을 가다. 162

163 함경도로 가는 길 수백 리, 안팎의 온 강산이 또렷이 내 눈 안에 들어오네. 이이만 李 頤 晩 의 기 記 에 실린 글이다. 산의 모양이 날아가는 학 鶴 의 형체인 금학산 金 鶴 山 (947)이 동송읍 뒤편에 자리 잡아 진산이 되고, 한국의 그랜드캐 년 이라고 부르는 한탄강이 흐르며, 철원평야라는 강원도에서는 보기 드문 넓은 평야가 펼쳐진 곳이 쇠 둘레 의 땅 철원이다. 그런 연유로 경원선 열차가 다닐 때에 철원의 서남쪽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열차의 연기를 평강지방에 이르러 사라지 기 전까지 한 시간이 넘게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한다. 철원의 역사에서 궁예의 태봉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통일한국이 이루어진다면 맨 먼저 할 일이 휴전선 가 운데에 있는 궁예도성을 발굴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 역사 속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중환이 택리지 에서 궁예란 자는 신라의 왕자로서 젊었을 대부터 무뢰한( 無 賴 漢 )이었고, 장성하여서는 안성 죽산 사이의 도둑이 되어 고구려와 예맥지역을 차지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러나 성품이 잔인무도하였으 므로 부하에게 쫓겨나고 태조 왕건이 드디어 군중에게 추대되었는바, 이것이 고려를 건국하게 된 시초였다 라고 기 록하였는데, 역사는 항상 승자의 기록이 되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는 단순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 탓에 궁예 는 어느 기록에서는 부정적으로 그려져 있는 게 사실이다. 철원 궁예가 개성 철원지역을 중심으로 후고구려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던 때가 893년이다. 궁예의 한이 서린 궁예도성 궁예는 905년 도읍을 철원으로 옮긴 뒤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충청도까지 세력을 뻗치며 후백제의 견훤 과 자웅을 겨루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의 부하였던 왕건이 호족들과 연합하여 궁예를 축출했다. 905년부터 왕건이 고려를 세운 918년까지 열다섯 해 동안 태봉국의 서울로서 한 나라의 중심지였던 철원군 철원읍 홍 원리의 비무장지대에는 풍천원( 楓 川 原 )이라는 들에 터만 남아 있다. 궁예가 물을 마셨다는 어수정( 御 水 井 )은 그 흔적 만 있고 두 겹으로 쌓았던 성은 거의 다 허물어져 일부분만 남아 있다. 용재총화( 傭 齋 叢 話 ) 는 철원은 궁예가 차지하여 태봉국을 세웠던 곳인데, 지금도 경성의 옛 터와 궁궐의 층계가 남아 있어 봄이면 화초가 만발한다. 지세가 막혀 강하( 江 河 )는 조운이 어렵다 고 궁예가 도읍을 정했던 철원 땅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빼어난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정철은 관동별곡 에서 궁왕 대궐 터에 오작이 지지괴니 천고흥망 을 아는다 모르는다 라고 읊었다. 강원도 내에서 가장 넓은 평야를 자랑하는 철원평야는 비무장지대를 지나 평강고원으로 이어진다. 금학산 오성산 대성산 백암산 명성산 등이 있으며, 그 중에 명성산은 궁예가 왕건에게 쫓겨들어가 울었다는 데에서 연유한다. 철원평야를 휘감아 도는 강이 한탄강이다. 한탄강은 강원도 평강군 현내면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철원군 갈말 면의 북쪽에서 남대천을 합친 뒤 갈말면과 어운면, 동송면의 경계를 이루면서 남쪽으로 흘러, 경기도 포천군 전곡읍 을 지나 임진강으로 흘러가는 강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에서는 한탄강을 석체천( 石 切 川 )이라 기록하였는데, 양쪽 언덕의 석벽이 모두 계석체와 같아 체천 이라 했다 는 기록이다. 또한 한탄강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철원이 태봉국의 도읍지였던 어느 날 남쪽으로 내려가 후백제와 전쟁을 치르고 온 궁예가 이곳에 와 서 마치 좀먹은 것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것을 보고는 아하, 내 운명이 다 했구나 하고 한탄을 하여 그때부 터 이 강을 한탄강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탄강변의 철원을 가다. 163

164 이 구멍이 뚫린 화산석을 두고 글을 쓴 사람이 조선후기의 실학자인 이학규 李 學 逵 였다. 철원에서 나는 돌에는 구멍 이 많다. 큰 것은 떡시루와 도끼 구멍 같고, 작은 것은 피리 구멍만하다. 가볍고 비어 있는 것은 옹기와 비슷하다. 요 컨대 주춧돌이나 무덤의 비속으로도 맞지 않으며, 중국에서 n나는 유명한 태호석 太 湖 石 과 요봉석 堯 峯 石 같은 기이한 볼거리도 없다. 또 하나는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며 싸웠던 한국전쟁 때 수많은 젊은 생명들이 스러져간 곳이라 해서 한탄강 이라 불렀다는 슬픈 내력도 있다. 그 강물에 기대어 펼쳐진 철원평야는 분단이 되면서 심한 물 기근을 겪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철원평야에 물을 대주 던 봉래호의 물줄기를 황해도 쪽으로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그 뒤 철원평야는 물이 모자라서 점차로 황폐해지게 되었 다. 그러던 것이 60년대에 용화저수지와 하갈저수지 등을 만들었고 70년대에는 둘레가 몇십 리에 이르는 토교저수지 를 포함한 저수지 여러 개를 새로 만들어 다시 물이 닿는 땅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물이 모자랐는데, 한탄강 의 물을 퍼 올릴 수 있는 기계를 곳곳에 설치한 뒤부터 철원평야의 물 걱정은 줄어들었고 지금은 기름진 땅이 되었 다. 물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논 한 평에 500원쯤 했다는데, 지금은 여러 배로 뛰어올랐고 철원평야에서 생산되는 철원 오대쌀 이 그 품질이 뛰어나다. 철원에 관한 택리지 의 기록을 보자. 철원 고을이 비록 강원도에 딸렸으나 들판에 이루어진 고을로서 서쪽은 경기도 장단과 경계가 맞닿았다. 땅은 메마 르나 들이 크고 산이 낮아 평탄하고 명랑하며 두 강 안쪽에 위치하였으니 또한 두메 속에 하나의 도회지이다. 들 복 판에 물이 깊고 벌레 먹은 듯한 검은 돌이 있는데 매우 이상스럽다. 한탄강변에서는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현무암, 즉 곰보돌이 있다. 화산에서 흘러나온 용암이 굳어 이루어진 곰보 돌은 가볍고 모양새가 좋아 맷돌이나 절구통을 만들거나 담을 쌓는 데 요긴하게 쓰였다. 철원에 경원선 철도가 놓인 것은 1914년이었다. 서울과 원산 함흥을 잇는 철도가 생김으로써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 콩 명주실을 비롯 동해안에서 나는 싱싱한 어 魚 자원들을 실어 나를 수 있었다. 그 뒤 1936년에는 경원선이 지 나는 철원역에서 금강산의 장안사에 이르는 전기철도가 개통되었다. 철의 삼각지 한편 철원 하면 떠오르는 것이 철의 삼각지 백마고지 아이스크림 고지 김일성고지 등의 싸움터이다. 한국전쟁 때 에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인 이곳 비무장지대인 월정역에는 가다가 부서진 채 고철로 남아 있는 열차 한 량이 남아 있다. 철원평야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이곳은 철원군과 김화군 평강군을 잇는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 였다.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로 수도고지 전투, 지형능선 전투, 백마고지 전투를 들 수가 있다. 그 중에서도 철원 평야 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산봉우리인 백마고지에서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열흘 동안에 벌어진 싸움은 철원군 동송읍 이평리에 세워진 백마고지 전투 전적비 에 적힌 대로 포탄가루와 주검이 쌓여서 무릎을 채울 만큼 치열했 다. 높이가 395미터인 이 산봉우리는 열흘 동안에 주인이 스물네 차례나 바뀌면서 1만4천 명에 가까운 군인이 죽거나 다쳤고 쏟아진 포탄만 해도 3십만 발이 넘었다고 한다. 백마고지에서 건너다보면 봉우리가 세 개 다정하게 서 있는 삼자매봉이 있고 철원평야 언저리에 철원평야를 빼앗기고 김일성이 사흘 동안을 울었다는 김일성고지가 있다. 한탄강변의 철원을 가다. 164

165 철원 노동당사 노동당사는 그날의 상혼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서 있고, 월정역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 는 표어가 쓰여 진 채 부서 진 열차만 서 있을 뿐이고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에 도선국사가 세운 도피안사 到 彼 岸 寺 가 있다. 도피안사는 속세를 넘 어 이상 세계에 도달한다는 의미를 지닌 절집으로 이절에 국보 제 63호로 지정되어 있는 우리나라 철불의 대표적 유 물 가운데 하나인 철불이 있다. 신라 경덕왕 5년인 865년에 철원지방의 향도 香 徒 1500여명이 결연 結 緣 하여 조성했 다. 라는 기록과 함께 <함통 6년 기유 정월 咸 通 六 年 己 酉 正 月 >이라는 문구가 철불 뒷면에 남아 있어 그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원래 이 철불은 철원의 안양사 安 養 寺 에 봉안하려 했던 불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운반 도중 없어 졌는데 나중에 찾고 보니 현재의 도피안사 자리에 안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도선국사는 이곳에 있기를 원한 불상의 뜻에 따라 이 자리에 절을 창건하고 철불을 모셨는데, 그가 세운 이 나라 800 여개의 비보사찰중 하나라고 한다. 도피안사가 들어선 화개산은 물위에 떠 있는 연꽃의 연약한 모습이라 철불과 석탑 으로 산세의 허약함을 보충하고 외부로부터 오는 침략에 대비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강원도>에서 한탄강변의 철원을 가다. 165

166 강화 남문에서 연미정까지를 걷다 :54 강화 남문에서 연미정까지를 걷다. 7월 8일 일요일 강화를 갑니다. 역사와 문화의 고장 강화도의 남산, 남문에서 출발하여 강화읍을 멀리서 바라보며 걸 을 예정입니다. 여름철을 감안, 숲길로 이어진 길을 걸어갈 이번 기행은 강화의 속살을 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강화의 남문은 병자호란의 자취가 서린 곳입니다. 강화 수비의 최고 사령관인 방수대장( 防 守 大 將 ) 김경징은 영의정이었던 김류( 金 濫 )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방비를 허술히 하면서 날마다 장기를 두거나 주연으로 세월을 보냈다. 부하들이 그 잘못을 말하면 오히려 목을 베어 죽이는 등의 호기를 부리고 나는 비와 바람을 부르는 재주가 있으니 걱정 없다 또는 되놈 군사가 날아서 건널 것인가 라고 장담하기도 하였다. 그때 청나라 장수 용골대( 龍 骨 大 )가 김포군 문수산에 올라 방비가 허술한 것을 살핀 뒤에 작은 배를 타고 일제히 갑 곶진을 건너 강화성에 다가가자 김경징은 배를 빼앗아 타고 도주하였으며 강화 유수( 留 守 ) 장신( 張 紳 )도 배를 타고 바다로 물러 앉았다. 이것을 본 김상용은 남문 위의 화약더미에 올라앉아 담배에 불을 붙여 화약에 당겨 폭사하고 말았다. 그 당시의 기록이 <인조실록> 15년 임술 조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전 의정부 우의정 김상용이 죽었다. 병자호란 초에 상용은 임금의 어명에 의하여 먼저 강도(강화도)에 들어가 있다 가 적군이 그곳 관청에까지 다가오자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성 남문 다락 위에 올라 화약을 무어 놓고 좌우에 있던 사람들을 비키게 한 다음 불을 당겨서 자폭하였다. 그 때 손자와 종이 따라 죽었다. 상용은 자를 경택 景 擇 이라 하고, 호를 선원 仙 源 이라 하며 김상헌의 형이다. 인품이 점잖고 너그러우며, 항상 몸가짐을 삼가고 조심하였다. 그가 담뱃불을 당기자 그 순간 벼락 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천지가 울리고 흔들리며 문루가 산산조각이 났다고 한다. 그때 김상용이 나이 77세였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경기도 편에서 저기 염하를 건너 보이는 곳에 연미정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경기도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이다. 강화라는 이름은 한강이 강화섬 앞에서 바다로 접어들기 때문에 이 섬을 한강물이 빚어낸 한 떨기 꽃으로 비유하여 강화 남문에서 연미정까지를 걷다. 166

167 강의 꽃 강화 江 華 라고 하였다 한다. 강화읍 월곶리 동쪽의 바닷가에 있는 연미정 燕 尾 亭 은 본래 교동현 읍내리에 있는 정자로 한강과 임진강이 합하여 흐 르다가 이곳에 이르러 두 갈래가 되어 한줄기는 남쪽으로,한줄기는 서쪽으로 흘러 마치 제비꼬리처럼 생겼으므로 연미정이라는 이름이 지 어졌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유도섬이나 한강이 바다로 합류하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인데... <한강>에서 강화 남문에서 연미정까지를 걷다. 167

168 섬진강 5백 삼십 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걷는다 :53 섬진강 5백 삼십 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걷는다.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에서 가을이 절정인 10월 7일(일요일) 섬진강을 찾아갑니다. 2012년 전북 방문의 해에 임실군 의 후원을 일부 받아 진행하는 이 행사는 <김용택 시인과 함께 하는 낭만의 길>이라는 주제로 실시됩니다.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 선생님의 강연에 이어 섬진강 오백삼십리 길을 샅샅이 누비고 다닌 신정일 대표와 함께 섬 진강을 걷고 치즈축제에 참가하여 게 될 이번 행사에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강 건너 두무골은 옆에 바랑산이 있는데,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중이 바랑을 벗어놓고 말( 斗 )을 가지고 춤을 추는 형국이라고 하는데, 그 마을에 덕치초등학교가 있다. 그 학교 졸업생인 김용택 시인이 오랫동안 선생님으로 근무하며 시를 썼던 곳이다. 마을 앞에 서있는 소나무들은 일제 공출을 하느라 송진을 빼냈던 흔적이 지워지지 않을 깊은 상처로 남아있고 모정 앞의 느티나무는 온갖 풍진 세상을 견디어낸 듯 속살을 훤히 드러내고 있다. 빈집이 여기저기 보이는 물우리 마을에서 닭 우는 소리 들린다. 새벽마다 꼬끼오하고 울어서 새벽 시간을 알려주었던 닭들이 시계의 기능이 소용없어서인지 대낮에도 울고 있다. 박준열씨는 이 물우리에 집 한 채 사두고 한가할 때마다 쉬었다 갔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고 그 말을 듣는 나도 역시 그랬으면 좋으련만 그러한 날이 가능할 것 같지 않다. 마을 입구에서 일중천이 섬진강에 합류된다. 월파정으로 가는 길목에는 월파가든이 수문장처럼 지키고 있고 푹 빠지 는 눈길을 걸어 월파정에 도착한다. 옛날에 여러 번 와서 보았으나 눈 덮힌 월파정은 너무 새롭다. 이곳 월파정 아래 에 가마쏘가 있고 그 아래를 큰 여울이 흐른다. 하늘 못 본 바위 서쪽에는 맘마바우가 있고 강 건너 성미산과 회문산 이 안정리에 들어가는 골짜기가 보인다. 금강을 걸어갈 때 김재승 회장이 아무리 산길이라도 대대병력이 걸어가면 길이 만들어집니다. 라고 말했던 것처럼 봄눈길이라선지 우리 몇 사람이 걸어간 길을 뒤돌아보니 길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서산대사 휴정은 눈 쌓인 길을 어지럽게 걷지 말라 뒤따라올 사람들의 표상이 되느니라. 라고 말했을 것이 다.(...) 오선위기의 명당자리가 있는 회문산 산중에 바위로 된 천연의 문이 있어 회문( 回 門 )이라고도 부르는 회문산( 回 門 山 )은 반석 같은 웅장한 바위들이 4km에 걸쳐 뻗어있고 높고 우뚝 솟은 봉우리는 항상 구름에 잠겨있다. 순창, 임실, 정읍 등 삼개 군에 걸쳐있는 이 산은 풍 수지리설에 의하면 다섯 선인이 바둑을 두는 모양의 오선 위기에 명혈이라는 명당을 비롯한 명당자리가 많기로 소문 이나 풍수 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오선위기의 명당자리는 발견되지 않고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강증산 선생의 말을 해석하여 사대 강국이 우리나라를 에워싸고 있다가 다 물러가는 형국이라고도 한다. 섬진강 5백 삼십 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걷는다. 168

169 또한 옛날 이곳에는 백룡이라는 산적두목이 무리들을 거느리고 이곳에 웅거했다고 전해지는데 산봉우리에 그들이 살았다는 것이 남아있고 장군봉 일대에는 크고 작은 묘소들이 여기저기 쓰여 져 있다. 회문산(837m)은 북쪽으로 투구 봉이 있고 남쪽 능선에는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건국하기 위해 만일 기도를 올렸다는 만일사가 있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옛말에 논두렁 정기라도 받고 태어나야 면장이라도 한다. 고 했으니, 이산은 그 후로도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동학교도들이 은신처로 삼기도 했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는 남부군 전북도당 사령부가 있었던 역사 의 현장이 회문산이기도 하다.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낙강간 전선까지 승승장구하던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 이 무너지면서 갈 길을 잃고 헤매게 되었다. 인민군과 좌익에 동조했던 사람들은 지리산으로 가는 길이 막히자 회문산 쪽으로 모여들었다. 용문산 가마골에 자리 잡고 있던 전북도당사령부가 회문산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까치병단, 보령병단, 벼락병단, 번개병단, 카투사병단, 독수 리병단, 가도병단, 보위병단 등 10개의 병단과 군 단위 유격대대들이 회문산을 거점으로 치열한 빨치산 활동을 전재 하게 된다. 하지만 남원 지역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호남지구 빨치산 토벌을 시작한 국군 제 11사단(사단장 김종운)이 50년 10월에서 51년 3월까지 벌린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의해 영화 속에서 안성기(이태)부대는 덕유산 쪽을 향해 동쪽 으로 최진실(박민자)부대는 변산반도로 나뉘어 출발하였다. 그 결과 변산 쪽으로 향했던 빨치산들은 모조리 역사 속 으로 숨어들었고 장안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향했던 빨치산들은 몇 년 간에 걸친 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회문산에는 사령트 라고 불렀던 유격대 전북도당사령부 자리와 빨치산들의 교육 장소였던 노령학원 자리가 남아있어 그 당시 를 증언해 주고 있다. 그래서 이 지역 사람들 역시 한국전쟁 당시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내가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가 86년 이 때쯤이었을 것이다. 황토현문화연구소가 제 이름을 달기 전 시인과의 만남을 준비했는데 첫 번째 초대 손님이 김용택시인이었다. 순창 가는 버스를 타고 와서 덕치국민학교에서 만난 김용택 시인은 순수 그 자체였다. 그런 인연으로 우리들은 형님 동생하는 사이가 되었고 92년이던가 섬진강을 따라가는 답사 길에 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었었다. 용택이 형님네 작 은 집에서 지금은 전남대학교에 자리를 잡은 소리꾼 전인삼 명창을 초대 흥보가 박타는 장면을 들으며 배꼽이 빠지 게 웃다보니 나중에는 웃을 힘이 없었던 그 때가 아물아물 떠오른다. 뒤에도 얼마나 여러 번 이곳을 찾아왔던가. 가을이면 용택이 형님이 감을 따러 오라고 해서 식구들은 다 데리고 감 을 몇 포대씩 따가기도 했고 좀 늦으면 이른 저녁까지 먹고 갔던 그 기억들이 내 발길을 가로막고 있다. 그러나 십 육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 마을도 다른 마을과 별로 다를 게 없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낯선 사람들이라 선지 집 집마다 개장에 갇힌 개들이 열을 내며 짓고 있으니... 용택이 형님은 학교에 계실 것이라 짐작했지만 어머님마저도 마실을 가셨는지 보이지 않고 지붕 위에 내린 눈이 녹 아 흐르는 낙수 물소리만 요란했다 다시 용택이 형님네 집에 갔을 때는 두 주일이 지난 3월 24일 섬진강의 마무리 답사 길이었다. 안 계시리라 믿었었는 데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문을 열고 용택이 형님이 나오는 게 아닌가. 토요일이라 전주에 갈 일이 있었지만 신문에서 우리 답사가 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우리를 보기 위해 집에 왔다 고 하는 게 아닌가.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 5백 삼십 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걷는다. 169

170 강 건너 앞산에 용택이 형님네 감나무는 아직 을씨년스럽게 헐벗었지만 돌로 만든 징검다리는 옛날이나 다름없다. 그 래 원래 저 다리는 저 모습이 아니었다. 수십 년 수백 년을 두고 아무리 큰 홍수가 나도 떠내려가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돌다리가 사라진 것은 용택이 형님이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있던 시절이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마을 사람 들이 시멘트 다리를 만들며 그 돌다리를 없애버린 것이다. 병원에서 나온 용택이 형님의 아쉬움을 무어라고 표현하 랴. 그 뒤 마을사람들이 다시 만든 징검다리는 옛 모습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옛 정취를 일깨워 준다고 할까 군산대 김덕수 선생의 말대로 저 징검다리 밑에다 나무다리 즉 섭다리를 만들어 놓고 용택이 다리라고 부르는 것도 괜찮을 성싶다고 생각하며 용택이 형님이 30여 년 전에 심었다는 느티나무에 앉아서 강의에 귀를 기울인다. 여그가 동네 사람들이 삼을 삶던 곳이 예요. 삼을 째서 벗기던 이곳을 다른 동네 사람들이 지나갈 때는 담배도 안 피워야 하고 술 먹고 가다가는 얻어맞기가 일쑤였어요 나그네가 지나갈 때는 느티나무를 돌아가야 했어요... 저 강가가 얼마나 고기가 많던지 고기 반 물 반 했어요 우리 어머니가 용택아 다슬기 잡아 가지고 올텡개, 불 때고 있어라 하고 나간 뒤 불 때고 있으면 금방 가서 한바가지 잡아가지고 오는디, 바가지만 가지고 가서 손으로 이렇게 더듬으면 한 주먹 되고 이렇게 하면 또 한 주먹 되고 그래서 금방 한바가지를 잡아 가지고 왔어요... 도시의 나무들은 전봇대 때문에 나무들이 잘 크지를 못하잖아요 고기들도 잠을 자고 나무들도 잡을 자거든요 풀도 밤에는 잠을 자는데 도시의 배미들은 새벽에도 잠을 자지 않고 우는디 그게 정상이 아니에요. 그래서 예전엔 밤고기 를 많이 잡았어요. 멍쳉이라고 부르는 고기가 있는디 얼마나 멍창한가. 손바닥보다 큰 고기가 두손으로 잡을 때까지는 가만히 있다가 밖 으로 나온 담에야 부르르 몸을 떨었거든요. 고기 잡는 방법이 많이도 있어,요 그중 재미있는 것이 큰 메로 바위를 때리면 고기들이 기절해서 쑥쑥 나오거든요 그래서 진메마을 앞에 상처 없는 바위가 없다라는 말이 생겨난거예요 말씀이 끝이 없지만 어쩌겠는가, 갈 길이 멀 다. 우리가 진메마을을 떠날 때 느티나무는 섬진강 깊은 곳으로 숨고 길 옆의 가파른 바위 끝에는 하이얀 고드름이 하얗 게 매달려 있었다. 그때 용택이 형님의 절창인 섬진강 2편이 강 위에 내려깔리고 있었다. 섬진강1 김용택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면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섬진강 5백 삼십 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걷는다. 170

171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걸 웃으며 무등산을 보면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천담리에 천담초등학교가 있고 내가 속한 황토현문화연구소에서 91년 제 6회 여름문화마당을 열었었다. 90년 지리산 해방에 눈뜬 이 땅의 봉수대여 라는 민족통일과 화합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지리산 달궁에서 열었던 제 5회 여름문화마당의 여세를 몰아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이라는 주제로 회문산의 인근에 위치한 이곳에서 행 사를 열었다는 것 자체부터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물론 장소 섭외나 여러 가지 행사일정은 순조로웠다. 그때 용택이 형님은 이곳 천담 초등학교에 근무하고 계셨고 교실까지도 아담할뿐더러 물 맑기로 소문난 천담 초등학 교에서의 여름문화마당은 가히 환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민중가수 안치환,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 소설가 박태순 선 생의 문학 강연 녹색연합을 이끌고 있던 배재대의 장원 교수, 완전한 만남이란 소설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김하 기씨 등의 강사진과 유등면 들노래 그리고 전통문화재현 등 짜임새 있는 프로그램으로 행사는 진행되었다.(...) 아름다운 마을 구담리 옛날 옛 시절 사람들은 이 깊은 골짝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구담리 마을에 국기봉은 녹슬어있고 새마을회관에 새마 을 기는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동네 우물터는 매워져 버렸고 아이고 저 집은 금방 허물어져 버리겠네 하고 탄식 하는 최병선 선생의 목소리 속에 집은 금방이라도 주저앉아 버릴 듯 싶다. 정든 마을, 정든 사람들, 정든 집을 버리 고 떠난 사람들이여 김용택 시인은 연작시 섬진강에서 이사 를 이렇게 그리고 있다. 우리들은 저녁밥을 일찍 먹고 너나없이 모여들어 이삿집을 꾸렸다. 거울 깨진 농짝 하나 테맨 장독 몇 개, 헌옷 보 따리, 때 낀 카시미롱 이불, 그 흔한 흑백 텔레비전 하나 없는 이런 촌 세간들이 서울에 가서 산다는 게 우습고 기막 히는 일이지만 우리들은 말없이 이삿짐을 꾸려 회관마당 삼륜차에 실었다. 아주머니는 연신 눈물콧물을 훌쩍이며 코 를 풀어 치맛자락에 닦았다... 그의 텅 빈 집 앞을 애써 외면하고 지나며 이제 아무도 이사 들지 않을 꺼멓게 그을린 불빛 없는 그 이웃을 생각하며 우리들은 달 소쩍새 울음소리나 부엉새 울음소리에 강물소리에 돌아눕고 돌아누우며 며칠 밤잠을 설칠 것이다. 누가 또 떠나겠지. 누군가 또 떠나겠지. 섬진강 5백 삼십 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걷는다. 171

172 섬진강 물소리가 한번 큰 소리로 뚝 그쳤다가 힘겹게 이어졌다.(...) 가고 온다. 나는 우주순환의 섭리를 이곳 구담마을의 빈집에서 느낀다. 느티나무 숲 우거진 동산에서는 흐르는 섬진 강의 아름다운 모습만 보이고 흐르는 저 강물을 따라 나도 역시 흐르듯 내려갈 것이다. 내린 눈 때문에 물이 불어 회 룡마을로 건넌다는 것은 가능하지가 않을 듯 싶다. 강선생님이 운전하는 봉고차에 실려 회룡마을에 도착한 시간은 날 이 저물어 가는 시간이었다 용골산자락 늘어진 곳에 마을이 들어섰기 때문에 느재, 또는 어치, 어현이었다고 하며 지금은 회룡마을로 불리고 있 다. 용골산 상봉에 있는 바위에 신선이 내려와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이 남아있는 우리가 이곳을 찾았던 때는 몇 년 전 가을이었다. 장군목에 있는 요강바위를 바라보고 이 마을을 지날 때 집집마다 밤을 따고 있었다. 밤 한 말에 만 원 쯤 인가를 주고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가 맛있게 삶아먹었었는데 그 집이 지금은 빈집이 되어 마당까지 물에 흠뻑 젖어 있다니 나는 지나가는 마을 사람에게 묻는다. 예전에는 이 마을에 몇 가구쯤이 살았었느냐고 스물댓집 되었는 데 지금은 일곱 집이 남았어요. 라고 말하는 그의 음성에는 자조와 체념의 빛깔이 뒤섞여있고 집집마다 콜택시 스티 카가 붙어있다. 이유는 버스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란다. 옛날 만해도 밥술이나 먹고 살았음직한 집도 텅텅 비어있 고 쓸만 한 땅들조차도 묵정밭이 되고 있으니 이 농촌을 어찌할 것인가. 저들마저 떠나고 나면 누가 있어 이 빈집만 늘어서 버린 마을을 지켜줄 것인가. 바라보는 내 시선 속으로 푸르디푸른 대나무 잎만 사각거렸다. 민음사 출판부 판미동 간, 신정일의 <섬진강 따라 짚어가는 우리 역사> 중에서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이라고 소문난 섬진강의 중류, 그것도 임실군 덕치면 물우리 월파정에서 덕치면 천담리 구담마을까지 걸으실 분은 미리 신청하십시오. 신청시 주의 사항, 서울 경기도와 천안 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서울, 전주광주 대전은 전주로 표시해서 신청하십시오 섬진강 5백 삼십 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걷는다. 172

173 합천의 영암사지와 해인사가 있는 홍류동계곡의 소리길을 가다 :51 합천의 영암사지와 해인사가 있는 홍류동계곡의 소리길을 가다. 11월 15일(목) 하루기행으로 그 아름답기로 소문난 황매산 자락 모산재 아래의 영암사지와 가야산 자락의 해인사, 그 리고 홍류동 계곡을 갑니다. 가을과 겨울이 교차하는 계절, 쓸쓸한 폐사지의 아름다움과 영암사지 석등 석탑의 진수를 보고 해인사가 있는 홍류동 계곡을 찾아갑니다.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에 있는 영암사지를 이 지역 사람들은 영암사 구질로 부르고 있다. 신라시대의 절터 로서 사적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절은 해발 1,108m의 황매산 남쪽 기슭에 있는데 정확한 창건연대가 알려져 있 지 않다. 다만 강원도 양양에 있는 사림사 흥각선사비 조각에 새겨진 글자에 영암사( 靈 巖 寺 ) 수정누월 이라고 기 록된 것이 유일한 관련 기록이다. 그러나 고려 때인 1014년에 적연선사가 83세로 입적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이전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894년에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절터의 일부를 발굴 조사하여 사찰의 규모를 부분적으로 밝히게 되었는데, 그때 밝 혀진 바로는 불상을 모셨던 금당과 서금당 회랑 등 기타 건물들의 터가 확인되어 당시의 가람 배치를 파악하게 되 었다. 특히 금당은 개축 등 세 차례의 변화가 있었음이 밝혀졌고, 절터에는 통일신라 때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영 암사지 쌍사자 석등과 삼층석탑 그리고 통일신라 말의 작품인 귀부 2개가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영암사지에는 그 당시의 건물의 초석 즉 당시의 건물 축대석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발굴 결과 통일신라 말에서부터 고려시대 초기 에 이르는 각종 기와편등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그때 출토된 유물 가운데 높이가 11cm인 금동여래입상 1점은 8세 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어 영암사지의 창건연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케 해준다. 일주문도 없고 변변한 건물도 없이 그저 요사채만 지어진 영암사의 돌계단을 오르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 영암사 삼층석탑이다. 영암사지 삼층석탑은 높이가 3.8m이며 보물 제 480호로 지정되었다. 2중기단위에 세워진 전형적인 신라양식의 방형 삼층석탑으로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을 단일석에는 가공한 4매의 석재로 구성하였다.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 1주 씩을 모각하였고 그 위에 갑석을 얹었다. 갑석의 윗면에는 2단의 범을 조각하여 상층기단을 받치게 하였다. 탑신부는 각 층마다 옥신과 옥개를 별석으로 만들었고 1층탑은 약간 높은 편이며 2, 3층은 크게 감축되었다. 옥신석에는 우주를 모각하였고, 옥개석은 비교적 엷어서 지붕의 경사도 완만한 곡선으로 흘러내렸으며 네 귀에서 살 짝 반전하였다. 처마는 얇고 수평을 이루었으며, 4단의 받침을 새겼다. 상륜부는 전부 없어졌고, 3층 옥개석의 뒷면에 합천의 영암사지와 해인사가 있는 홍류동계곡의 소리길을 가다. 173

174 찰주공이 패어 있다. 이 탑은 상층기단과 1층 탑신이 약간 높은 느낌은 있으나 각 부재가 짜임새 있는 아름다운 탑으 로 탑신부가 도괴되었던 것을 1969년에 복원하였다. 영암사지 뒤편으로 기암괴석이 신록과 어우러진 황매산이 보이고 그 바로 앞에 아름다운 석등이 있다. 질서도 정연하게 천년의 세월을 견디어낸 석축에 통 돌을 깎아내서 계단을 만든 그 위에 영암사지 석등이 외롭게 서 있다.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은 높이가 2.31m이며 보물 355호로 지정되어 있는 8각의 전형적인 신라석등 양식에서 간주만을 사자로 대치한 형식이다. 높은 8각 하대석의 각 측면에는 사자로 보이는 웅크린 짐승이 한 마리씩 양각되었고, 하대 석에는 단판 8엽의 목련이 조각되었다. 상면에는 각형과 호형의 굄이 있고 한 개의 돌로 붙여서 팔각 기둥대신 쌍사자를 세웠는데, 가슴을 대고 마주 서서 뒷발은 복련석 위에 세우고 앞발은 들어서 상대석을 받들었으며 머리를 뒤를 향하였다. 갈기와 꼬리 그리고 몸의 근 육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나 아랫부분에 손상이 많아 바라보기가 안쓰럽다. 상대석은 하대석과 비슷하게 꽃잎 속에 화형이 장식된 단판 8엽의 양련석이다. 화사석은 8각 1석이고 4면에 장방형 화창을 내었는데 주위에 소공( 小 孔 ) 이 있어 창호를 달았던 듯하며 남은 4면에는 사천왕입상이 조각되었다. 옥개석의 처마 밑은 수평이며, 추녀 귀에는 귀꽃이 붙어 있고 상륜부는 전체가 없어졌다. 통일 신라 말기의 미술품을 대표할만한 우수한 작품인 이 석등은 1933 년쯤 일본인들이 야간에 해체한 후 삼가에까지 가져가던 것을 마을 사람들(허맹도를 비롯한 청년들)이 탈환하여 가회 면 사무소에 보관하였다가 1959년 원위치에 절 건물을 지으면서 다시 이전한 것이다. 그때 사자상의 아랫부분이 손상 을 입었다. 속리산 법주사 쌍사자 석등과 겨룰 만큼 아름다운 쌍사자 석등과 금당의 기단에 새겨져 있는 선녀비천상 을 바라보며, 나는 옛 사람들이 얼마나 지극한 정성으로 이러한 조형물들을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을 금함 길이 없다. 지금은 그을음만 남아있는 이 석등에 한 시절 불이 켜져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은은하게 불이 켜진 법당 안에서는 낭낭한 목탁소리, 염불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불심가득한 사람들이 이 절터로 몰려들고 그들의 기도소 리가 이 절터를 메아리 쳤을 것이다. 사라진 절터에는 노오란 민들레 꽃 들과 봄꽃들이 여기저기 피어있다. 그 꽃들 의 아름다움과 향기에 취한 채 발길은 영암사지 귀부가 있는 서금당 쪽으로 향한다. 이곳 서금당 자리에는 2개의 귀부가 남아 있다. 이수와 비신이 없어진 채로 남아있는 동쪽 귀부는 1.22m이고 서쪽 귀 부는 1.06m로서 보물 489호로 지정되어 있다. 법당지를 비롯한 건물의 기단들과 석등의 잔해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 그 당시 사찰의 웅장함을 알 수 있는데, 이들 귀부는 법당지의 각각 동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 귀부가 서쪽 귀부 보다 규모가 약간 큰데 똑바로 뻗은 용과 용두화된 귀두,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것 등이 거의 흡사하다. 동쪽 귀 부의 등갑에는 전체에 육각으로 된 복각선문을 조각하였고 등 중앙에 마련한 비좌의 주변에는 아주 정밀하게 사실적 으로 묘사한 인동인권문을 조각하였다. 서쪽 귀부는 동쪽 귀부보다 평범하며 등갑에는 역시 복선갑문과 인동문을 조 각하였다. 서금당 터를 돌아다보고 그 뒤편으로 난 산길을 오른다. 적적한 오솔길을 오르는 듯한 산길에는 철늦은 진달래 꽃이 어쩌다 눈에 띤다. 앞서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고 능선 쪽 바윗길에 사람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신정일의 <나를 찾아가는 하루 산행> 중에서 경상도에는 석화성 石 火 星 이 없다. 오직 합천의 가야산만 뾰족한 돌이 불꽃같이 늘어서 있으며, 공중에 따로 솟아서 대단히 높고 또한 빼어나다.. 고 기록되어 있지만 돌아다니다 보면 경상도 지역에도 그러한 산이 의외로 많다. 경상 합천의 영암사지와 해인사가 있는 홍류동계곡의 소리길을 가다. 174

175 남도 합천군 가회면의 황매산이나 문경의 봉암사가 있는 희양산, 가야산 건너편의 매화산 등은 바위로 된 꽃송이들이 밤하늘에 운석처럼 펼쳐져 있는 산들이다. 골짜기 입구에 홍류동 紅 流 洞 과 무릉교 武 陵 橋 가 있으며, 바위에 부딪히는 시냇물과 반석이 수십 리에 걸쳐 뻗쳐 있다. 세상에 전해 오기를, 최고운이 이곳에 신을 남겨 두고 갔는데, 간 곳을 모른다고 한다. 돌 위에 고운이 쓴 글자가 새 겨져 있는데, 새로 쓴 것처럼 지금도 완연하다. 고운이 쓴 시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는데, 그 시가 가리키는 곳이 바 로 이곳이다. 겹친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바쁘게 흐르는 물이 겹겹으로 된 산을 울리니, 지척 사이에 있는 사람의 말도 분간하기 어렵구나.. 항상 사람들의 시비 소리가 귓전에 들릴까 염려스러워, 짐짓 흐르는 물소리로 하여금 산을 다 덮도록 하였다. 택리지 에 임진왜란 당시에 금강산 지리산 속리산 덕유산은 모두 왜군이 들어오는 화를 면치 못하였으 나, 오직 오대산과 소백산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부터 삼재 三 災 가 들지 않는 곳이라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가야산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을 중심으로 거창군과 경상북도의 성주군과 고령군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주 봉인 상왕봉(1,430m), 두리봉(1,133m), 남산(1,113m), 단지봉(1,028m), 남산제1봉(1,010m), 매화산(954m) 등 1,000m 내 외의 연봉과 능선이 둘러 있고, 그 복판에 우리나라 3대사찰 가운데 하나인 해인사와 매화산 자락에 청량사 및 그 부 속암자들이 자리 잡고 있다. 가야산 일대에서 해인사에 있는 치인리 골짜기에 모이는 물은 급경사의 홍류동 계곡을 이루고, 동남방을 흘러내려와 가야면 황산리에서 낙동강의 작은 지류인 가야천이 된다. 가야산은 예로부터 조선팔경 또는 12대명산 의 하나 로 꼽혀왔다. 1966년 가야산 해인사 일원이 사적 및 명승 제5호로 지정되고 1972년 10월에 다시 가야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가야산의 이름은 가야산 이외에도 우두산 설산 삼왕산 중향산 지달산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한다. 택리지 에 가야산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떠나 있으면서도 그 높고 수려함과 삼재가 들지 않는 영험함을 말하여 명산으로 불렸다. 한국의 명산에는 산신( 山 神 )이 있는데, 가야산에 있는 가야산신은 정견모주( 正 見 母 主 )라는 여신이다. 동국여지승 람 의 기록에 의하면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천신 이비가지에 감응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과 금관국의 왕 뇌질청에를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대가야의 시조 아진아시왕, 뇌질청에는 금관국의 시조 수로왕의 별칭이라 했다. 따라서 가야산 의 산신 정견모주는 가야지역의 여신이었을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가야산 형승은 천하에 뛰어나고 지덕은 해동에 짝이 없으니 참으로 수도할 곳이다. 라고 실려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큰 절이 그렇지만, 특히 해인사는 창건과 그 뒤 여러 차례의 중창이 있었는데 모두 국 가의 각별한 지원에 힘입어 이루어졌다. 신라 애장왕이 그러했고, 고려 태조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발원, 그리고 세종 세조 성종의 중창 지원은 각별한 것이었는데, 그렇게 국가의 재정을 넉넉히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 엇보다도 해인사가 민족의 고귀한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판을 천여 년 가까이 보전함으로써, 법보종찰의 명성을 누 합천의 영암사지와 해인사가 있는 홍류동계곡의 소리길을 가다. 175

176 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야산 해인사는 또 국가가 환란에 처했을 때 일어난 불교 호국전통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불가사의하게도 민족의 보물인 고려팔만대장경판과 이를 봉안한 장경각만은 한번도 화를 입지 않고 옛 모습 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산속에는 해인사 海 印 寺 가 있다. 신라 애장왕 哀 莊 王 이 죽어서 염을 한 뒤에, 다시 깨어나니 명부의 관원에게 약속한 발원에 따라,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팔만대장경 八 萬 大 藏 經 을 구입해서 배에 싣고 왔다. 목판에다 새긴 뒤 옻칠을 하고 구리와 주석으로 장식한 다음, 장경각 藏 經 閣 을 120칸을 지어서 보관하였다. 지금 일천여 년이 되었지만 판이 새 로 새긴 것 같다. 날아가는 새도 이 장경각을 피해서 기와지붕에 앉지 않는다고 하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유가 儒 家 의 경전은 비록 내부의 깊은 궐내에 있다고 하여도 날아가는 새가 집 위를 지나가지 않을 리가 만무하다. 불교 경 전은 이와 같이 신기하니,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해인사 서북쪽이 가야산 상봉이다. 사면의 돌이 깎아지른 듯 하여 사람이 올라갈 수 없다. 산 위에는 평탄한 곳이 있 을 것 같지만 알 수가 없다. 그 위에는 항상 구름기가 자욱하게 서려 있으며, 초동과 목동들은 가끔씩 산봉우리 위에 서 풍악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또한 절에 있는 스님들의 말에 의하면 짙은 안개가 덮이면 산 위에서 말 발자국 소리 가 날 때가 있다고 한다.. 고 말한다. 이는 <택리지>의 기록이다. 조선중기의 학자였던 한강 정구( 鄭 逑 )는 가야산 기행 에서 산꼭대기에 올라가 눈을 식히고 가슴을 펴보는 것 을 강조하였고, 산골짜기에서 푸른 물이 맑은 소리를 내면서 흘러가는 소슬한 경치를 보고 가슴을 시원하게 씻 겨준다. 고 느낌을 표현했다. 팔만대장경( 八 萬 大 藏 經 )을 간직하고 있는 해인사는 통도사, 송광사와 함께 삼보사찰 중의 하나이다. 삼국유 사 에 기록된 대로 통도사에는 석가모니의 사리가 모셔져 있고, 해인사에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총화라고 할 수 있 는 팔만대장경이 봉인되어 있으며, 송광사에서는 고려 이래로 국사를 지낸 열여섯 명의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우리 산하>에서 데모스 여행사의 일정 부분 후원으로 마련되는 이 행사에 참여하실 분들은 미리 신청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행사와 달리 이십분을 앞당긴 이른 여섯시 40분에 출발합니다. 합천의 영암사지와 해인사가 있는 홍류동계곡의 소리길을 가다. 176

177 새 책 '눈물편지'가 나왔습니다 :43 새 책 '눈물편지'가 나왔습니다. 신간안내보도자료 서울시 마포구 동교동 LG팰리스빌딩 921호전 화 (02) 팩 스 (02) 공식카페 임채성이메일 내용 소개 죽음을 통해 풀어낸 더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 선인들의 주옥같은 옛 글 속에서 건져 올린 마음 시리도록 서럽고 아름다운 77편의 이별과 슬픔에 관한 명선문집 소중한 사람을 잃고 비어져 나오는 슬픔과 절제된 슬픔 사이에서 어금니를 물고 흐느껴야 했던 선인들의 슬픔과 눈물, 그리움으로 얼룩진 77편의 주옥같은 문장 도서명 : 눈물편지 부 제 : 죽음을 통해 풀어낸 더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 엮은이 : 신정일 판 형 : 신국판 변형 제 본 : 무선제본 페이지 : 340쪽 가 격 : 15,000원 분 야 : 인문>인문일 반 역사> 조선시대 인 물, 고려시대 인물 ISBN : (03810) 소중한 사람의 죽음 앞에 무너져 내리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흔히 피를 토하듯 통곡한다. 라는 말을 쓰곤 한다. 이제 그대 저승에서 추울까봐 어머니 손수 수의 지으시니 이 옷에는 피눈물이 젖어 있어 천추만세 입어도 해지지 새 책 '눈물편지'가 나왔습니다. 177

178 아니하리. 오호라, 서럽고 슬프다. 사람이 죽고 살기는 우주에 밤낮이 있고, 사물에 시종( 始 終 )이 있음과 다를 바 없 으나, 이제 그대 상여에 실려 그림자도 없이 저승으로 떠나니, 나는 남아 어찌 살리오. 상여소리 한 가락에 구곡간장 미어져 길이 슬퍼할 말마저 잊고 말았네. 대동운부군옥 이란 백과사전을 편찬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권문해는 30년을 살다가 먼저 간 아내 현풍 곽씨를 잃은 슬픔을 이렇게 노래했다. 슬하에 아들은 물론이고 딸 하나 없이 먼저 간 아내의 죽음이 얼마나 원통하고 슬펐으랴. 팔순 시어머니를 두고 먼저 간 아내가 원망스러우면서도 그 팔순 시어머니가 먼저 간 며느리를 위해 수의를 만들어야 하는 이 기막힌 현실이 차 마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산해.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의 장인인 그는 54세에 경상도 울진 평해로 유배를 간다. 이에 그의 아 내와 어린 남매가 천 리 먼 길을 걸어서 찾아오곤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이 죽고 만다. 상심에 빠진 그는 <아들 을 곡하다>라는 슬픈 제문을 지어 아들의 죽음을 슬퍼했다. 해 저물면 너 오길 기다리고/밤 깊으면 널 불러 함께 잤지/때때로 네가 죽은 줄도 잊고 지내다/소스라쳐 문득 정신 이 들곤 한단다/통곡해도 소용없는 줄 익히 알지만/너무도 사랑했기에 억누르기 어렵구나. 연암 박지원. 어린 시절 일찍 부모를 잃은 그에게 있어 큰누이는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누이 가 갑자기 죽고 만다. 연암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느끼며 이렇게 통곡했다. 강가에 말을 세우고 강 위를 바라다보니, 상여의 명정은 바람에 휘날리고, 뱃전의 돛 그림자가 물 위에 꿈틀거렸 다. 그러나 기슭을 돌자 나무에 가려 다시는 볼 수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강가의 먼 산들이 검푸른 것이 마치 누님 의 쪽진 머리 같았고, 강물 빛은 누님의 화장 거울과 같았으며, 서쪽으로 지는 새벽 달은 누님의 고운 눈썹 같았다. 이에 누님의 빗을 떨어뜨렸던 일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부모와 배우자, 아이들 그리고 벗과 스승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잘 알면서도 평소에는 자각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상황이 오면 그들의 소중함을 뒤늦게 깨닫곤 서러움에 슬퍼하며 그리워한다. 이 책은 선인들의 주옥같은 옛 글 속에서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 죽음 그리고 그 뒤에 밀려오는 슬픔에 관한 글들을 골라 모은 것이다. 하나의 글마다 시대적 배경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어 우리 역사의 흐름을 엿볼 수 있는 장점도 갖 추고 있다. 죽음을 통해 풀어낸 더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 피를 토하듯 통곡하며 쓴 살아남은 자의 상처와 슬픔, 그리움 죽음을 통해 풀어낸 더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 이란 주제 하에 이 책은 어린 자식을 잃은 슬픔, 아내와 남편을 여 윈 슬픔, 형제자매를 잃은 슬픔, 벗과 스승을 잃은 슬픔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통해 소중한 사람의 죽 음 앞에 쏟아지는 북받치는 설움과 눈물을 피를 토하듯 통곡하며 쓴 살아남은 자의 상처와 슬픔, 그리움을 오롯이 느 낄 수 있다. 아들 면의 죽음에 목 놓아 통곡하는 이순신, 누님과 지냈던 어린 시절을 수채화처럼 펼쳐놓는 박지원, 아내의 죽음에 대해 내세에는 꼭 바꾸어 태어나 홀로 살아남은 슬픔을 알게 하겠다는 추사 김정희, 흑산도로 유배 간 둘째 형 약전 의 죽음에 가슴 아픈 동기애를 전하는 다산 정약용, 남편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한 날의 아픔을 고스란히 글로 담아낸 혜경궁 홍씨, 딸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규보 등 시대의 위대한 거인들로만 알고 있었던 여러 인물들의 사사롭고도 애 달픈 정과 사랑, 인간적인 모습들은 우리로 하여금 역사 속 인물들과 새롭게 조우하게 한다. 또한 슬픔으로 어제와 새 책 '눈물편지'가 나왔습니다. 178

179 오늘을 이음으로써 아름다운 우리 고전을 새롭게 즐기고 옛 선인들의 삶과 사상을 읽을 수 있는 색다른 고전읽기의 방법을 제시한다. 언젠가 꼭 한 번은 써보고 싶었던 책 문화사학자 신정일, 3년간의 연구조사와 5년 만의 완간 끝에 완성 문화사학자 신정일. 시인 도종환은 그를 길의 시인 이라 불렀고, 박원순 서울시장은 강과 길의 철학자 라 불렀 다. 또 어떤 이는 현대판 김정호, 신삿갓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가 이번에 펴낸 눈물편지 는 열하일기 지봉유설 난설헌집 여유당전서 등 옛 고전에 실린 수많은 선인들의 죽음, 이별 뒤에 밀려오는 슬픔과 그리움에 관한 77편의 주옥같은 글에 자신의 단상을 덧붙인 것으로, 그 스스로도 언젠가 꼭 한 번은 써보고 싶었던 책 이었다고 말한다. 그만큼 이번 책을 쓰는 데 들인 공 또한 만만치 않다. 오랫동안 공들여 책을 쓰리라 는 각오로 시작해 3년간의 연구조사와 5년 동안 쓰고 다듬는 일을 반복한 끝 에 출간될 수 있었다. 책의 내용 중 애절한 마음이 심금을 가장 울리는 글로 그는 송강 정철이 딸을 잃고 쓴 <너의 요절은 나의 과실이니> 란 제문을 꼽았다. 추운 겨울 찬 방에 얼음과 눈발이 살에서 나올 정도였으니, 건강한 사람도 어렵거든 하물며 병든 네가 어찌 부지할 수 있었겠느냐? (중략) 너의 요절은 곧 나의 과실이니 백 년이 지나도록 뉘우치고 통곡하여도 미칠 수 없는 일 일 것이다. 이밖에도 윤선도가 어린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쓴 <눈물은 수저에 흘러내리고>, 박지원이 큰누이의 죽음에 통곡하 며 쓴 <검푸른 먼 산은 누님의 쪽진 머리 같고>, 김일손이 둘째형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뒤 쓴 <떠도는 생은 한정 이 있으나 회포는 끝이 없어> 등을 애절함이 극에 달한 명문으로 꼽았다. 목차 머리말 슬픔이 지극하면 우는 것이지 1장 눈물은 수저에 흘러내리고 어린 자식을 잃은 슬픔 우리 농아가 죽다니 정약용 눈물은 수저에 흘러내리고 윤선도 아비와 딸의 지극한 정이 여기서 그친단 말이냐 신대우 나 죽거든 너와 한기슭에 누우련다 이산해 봄바람에 떨군 눈물 적삼에 가득하네 강희맹 죽을 때도 아비를 불렀다는 말을 듣고 이항복 너희들 무덤에 술잔을 붓노라 허난설헌 팔공산 동쪽에 아이를 묻고 양희지 너의 요절은 나의 과실이니 정철 아들아, 나를 두고 어디로 갔느냐 이순신 이제 들을 수도 볼 수도 없구나 조위한 연기처럼 사라지다니 조익 고통을 참고 흐느끼며 김창협 애지중지하던 너를 앞세우고 보니 임윤지당 어미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 같아 삼의당 김씨 간장이 녹는 듯, 창자가 끊기는 듯하여 송시열 새 책 '눈물편지'가 나왔습니다. 179

180 바람은 처절하여 슬픈 소리를 돕고 고려 고종 이젠 끝이니 영원한 이별이로구나 이규보 2장 가슴은 무너져 내리고 마음은 걷잡을 수 없으니 아내와 남편을 여윈 슬픔 상여소리 한 자락에 구곡간장 미어져 권문해 서러움에 눈물만 줄줄 흐르누나 허균 뜻은 무궁하나 말로는 다하지 못하고 송시열 정녕 슬픈 날 혜경궁 홍씨 간장이 다 녹는 것만 같네 심노숭 내세에는 우리 부부 바꾸어 태어나리 김정희 꿈속에서라도 한 번 만났으면 이시발 4백 년을 두고도 변하지 않는 사랑 원이 엄마 어리고 철없는 두 딸은 누가 돌보며 김종직 그대 목소리 아직 들려오는 것 같고 안정복 어린 아들의 통곡소리 차마 들을 수 없고 이건방 눈을 감아도 잠은 오지 않고 강희맹 임종도 보지 못하고 변계량 3장 검푸른 먼 산은 누님의 쪽진 머리 같고 형제자매를 잃은 슬픔 검푸른 먼 산은 누님의 쪽진 머리 같고 박지원 너는 이제 영원히 잠들었으니 이덕무 영원한 이별노래가 된 율정별 정약용 어버이 사모하는 정이 더욱 간절하여 정조 심간이 찢어질 것 같아 정조 떠도는 인생은 한정이 있으나 회포는 끝이 없어 김일손 천 리 먼 곳에서 부여잡고 통곡하니 이이 보이는 곳마다 슬픔을 자아내니 이이 눈물이 마르지 않네 기대승 가슴 찢어지는 아픔을 다 적을 수 없으니 이순신 이 아픔 언제 다하리 신흠 덧없는 인생이 꿈같기도 하여 허목 눈물이 앞을 가려 글씨를 쓸 수 없고 김수항 한 번 가서는 어찌 돌아올 줄 모르는가 김창협 하늘이여, 어찌 이리도 제게 가혹하십니까 임윤지당 4장 글자마다 눈물방울, 그대 와서 보는가 벗과 스승을 잃은 슬픔 마음을 함께 한 벗을 잃은 슬픔 박지원 가버린 벗들과 나누는 술 한 잔 박지원 나의 벗 덕보의 생애를 돌아보니 박지원 새 책 '눈물편지'가 나왔습니다. 180

181 천 리 길에 그대를 보내고 박지원 학문의 갈림길에서 누구를 찾아 물을 것인가 박지원 홀로 서서 길게 통곡하니 이재성 글자마다 눈물방울, 그대 와서 보는가 홍대용 관을 어루만져 울지도 못했으니 홍대용 추운 겨울이라 상여도 머물지 않고 이덕무 운명이니 어쩔 수 없구나 이덕무 인간 세상이 하룻밤 꿈과도 같아 이덕무 좋은 벗을 잃은 외로움이 앞서고 이익 눈물이 쏟아져도 울 수 없고 이익 남기신 간찰을 어루만지며 울자니 안정복 끝장이구나, 끝장이구나 김시습 그대가 먼저 떠나면 누구와 회포를 말할까 남효온 착한 자는 속환된다면 내 가서 그대를 불러오겠네 김일손 그대만이 나를 알아주더니 허균 섬강에 살자던 약속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허균 눈물이 앞서고 말 문이 막혀 허균 젊은 아내는 딸과 함께 울고 허균 철인이 갑자기 가시다니 이이 한 마리 외로운 새가 그림자와 서로 위로하는 것 같고 정철 여윈 살은 뼈에 붙고, 걱정은 마음 속에 스며들어 성혼 눈물만 봇물처럼 흐를 뿐 송시열 목이 메어 곡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정구 공의 모습이 눈에 보일듯 말듯하여 정구 곡하는 것도 남보다 뒤졌으니 김경생, 정철 그대는 없어지고 밤만 깊구려 신흠 기러기는 떠나고 나는 눈물 속에 잠겼네 윤휴 하늘 같이 멀고 땅처럼 긴 이 이별은 최익현 참고문헌 지은이 - 신정일 辛 正 一 문화사학자이자 이 땅 구석구석을 걷는 작가, 도보여행가. 현재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의 이사장으로 있으며 역 사 관련 저술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1980년대 중반 황토현문화연구소 를 설립하여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을 재 조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사업을 펼쳤고, 1989년부터 문화유산답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다. 한국 의 10대 강 도보 답사를 기획하여 금강 한강 낙동강 섬진강 영산강을 비롯해 압록강까지 답사를 마쳤고, 우리나 라의 옛길인 영남대로와 삼남대로 관동대로를 도보로 답사했으며 400여 개의 산을 올랐다. 새 책 '눈물편지'가 나왔습니다. 181

182 부산에서 통일전망대까지 바닷가 길을 걸은 후 문화관광부에 최장거리 도보 답사 길을 제안, 국가 정책으로 개발되고 있다. 2010년 9월 관광의 날을 맞아 다양한 우리 땅 걷기 코스 발굴을 통해 도보 여행의 대중화와 국내 관광 활성화 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정부 포상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현재 소외된 지역문화 연구와 함께 국내 문화유산 답사 프로그램과 숨은 옛길 복원 등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조선을 뒤흔든 최대의 역모사건 한국사의 천재들 똑바로 살아라 그곳에 자꾸만 가고 싶다 대한민국에서 살기 좋은 곳 33 섬진강 따라 걷기 풍류 대동여지도로 사라진 옛 고을을 가다(3권) 낙동 강 한강 따라 짚어가는 우리 역사 영남대로 삼남대로 관동대로 가슴 설레는 걷기 여행 느리게 걷 는 사람 새로 쓰는 택리지(10권) 가치있게 나이 드는 연습 등 50여 권이 있다 책 속으로 우리 농아가 죽었다니 참혹하고 비참하구나! 가련함에 나의 몸이 점점 쇠약해져 가고 있을 때 이런 일까지 닥치다니, 세상은 나에게 너무도 무심하구나. (중략) 먼 바닷가 변두리에 앉아 있어 못 본지가 무척 오래인데 죽다니. 그 애의 죽음이 한결 서럽고 슬프구나. - <정약용/막내아들 농아를 잃고 쓴 편지> 본문 19페이지 그대는 세상에 와서 한 번도 좋은 시절을 보지 못하고 고생만 하다 갔네. 한 돌이 채 못 되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외증조 내외분이 어린 당신을 길렀네. (중략) 아무것도 모른 채 방에서 놀고 있는 어리고 철없는 두 딸은 누가 돌보며, 시집갈 때 누가 그 짐을 꾸려주리오. - <김종직/아내 숙인 조씨 영전에 바치는 제문> 본문 134페이지 강가에 말을 세우고 강 위를 바라다보니, 상여의 명정은 바람에 휘날리고, 뱃전의 돛 그림자가 물 위에 꿈틀거렸다. 그러나 기슭을 돌자 나무에 가려 다시는 볼 수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강가의 먼 산들이 검푸른 것이 마치 누님의 쪽 진 머리 같았고, 강물 빛은 누님의 화장 거울과 같았으며, 서쪽으로 지는 새벽달은 누님의 고운 눈썹 같았다. 이에 누님의 빗을 떨어뜨렸던 일이 떠올라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 <박지원/큰누이 증 贈 정부인 박씨 묘지명> 본문 155페이지 너의 집에 가면 늘 네가 반가이 맞으면서, 바느질 품 팔아 모아 두었던 돈으로 종을 시켜 술을 사다가 웃으면서 내 앞에 놓았다. 내가 그 술을 다른 그릇에 조금 따라 너에게 권하면, 너는 그 술을 받곤 하였다. 안주는 조금씩 나누어 조카 아증에게 먹였다. 이제는 백 번을 가더라도 눈에 보이는 것이 슬픔을 더하는 것뿐이리라. - <이덕무/손아래 누 이 서처의 죽음에 부쳐> 본문 162페이지 내가 다행히 눈이 있다고 할지라도 누구와 더불어 보는 것을 함께 하며, 내가 다행히 귀가 있다 고해도 누구와 더불 어 듣는 것을 함께 하며, 내가 다행히 입이 있다고 해도 누구와 함께 맛을 볼 것이며, 내가 다행히 코가 있다고 해도 누구와 함께 냄새를 맡을 것이며, 내가 다행히 마음을 지녔다고 해도 장차 누구와 더불어 나의 지혜와 깨달음을 함께 나눌 수 있단 말인가? - <박지원/벗을 그리워하며 쓴 편지> 본문 217페이지 새 책 '눈물편지'가 나왔습니다. 182

183 남해의 절집들과 순천만을 가다 :37 남해의 절집들과 순천만을 가다. 11월 30일 출발하여 12월 초이틀까지 남도 답사를 실시합니다. 남해와 삼천포를 잇는 다리를 건너 경남 고성군 하이 면에 소재한 운흥사에서 호젓한 암자인 낙서암을 천천히 걸어서 답사하고 가산리 돌장승과 사천의 매향비를 돌아본 후 사천의 다솔사로 향합니다. 다솔사에서 보안암 석굴에 이르는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일요일에는 선암사에서 조계산 자락을 따라가는 길을 걸어서 송광사에 이르고, 마지막으로 순천만의 갈대숲에서 저 녁노을을 보고서 귀로에 오를 것입니다. 고즈넉한 십이월 초 아름다운 산천과 아름다운 절집에 취할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 와룡산 향로봉 ( 香 爐 峯 )중턱에 위치한 천년고찰 운흥사( 雲 興 寺 )는 1,300여년 전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운흥사를 찾아가는 길은 마치 어린 시절 외갓집을 찾아가는 것처럼 설렌다. 멀리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보이고 길가에는 흔한 가게는커녕 민가도 별로 없다. 산자락으로 난 길을 한참 가면 운흥사가 보이고 언제나 가도 한가한 풍 경의 운흥사에 닿는다. 운흥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당 유정이 이끄는 승병의 본거지로 6,000여 명의 승병이 머물 만큼 규모가 컸던 절이다. 그 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수륙양면 작전을 논의하기 위해 세 번이나 이곳을 찾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운흥사는 숙종 때부터 지금까지 매년 2월 초파일에 임진왜란 때 국난극복을 위해 왜적과 싸우다 숨져간 호국영령들 의 넋을 기리는 영산제를 지내고 있는데 올해는 3월 초사흘에 지낸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이날 가장 많은 승군이 죽었다고 한다. 이 절은 임진왜란 때에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효종 2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그 뒤에 다시 지은 것이다. 다섯 간인 운흥사 대웅전은 영조 때에 지은 맞배지붕 집으로 지방 유형문화재 제 82호로 지정되어 있다. 운흥사는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 불가의 화원 양성소로 큰 역할을 했는데 조선 시대의 불화 중 가장 많은 걸작품을 남기고 있는 의겸( 義 謙 ) 등이 이 절에서 불화를 그렸다. 그 당시 절의 규모는 현존하는 산내 암자인 천진암과 낙서암을 비롯하여 아홉군데의 암자가 있었고 곳곳에 남아있는 절터와 대형 멧돌 그리고 전방 1km 떨어진 언덕에 고승들의 사리가 안장되어 있는 부도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상당한 규모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임진왜란때 병화로 절이 소실되었던 것을 효종 2년(1651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 남해의 절집들과 순천만을 가다. 183

184 르고 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된 괘불탱화를 비롯하여 대웅전, 영산전, 명부전, 범종루( 梵 鍾 樓 ), 산신각,요사채 등이 있고, 목조각 상, 목제원패, 경판 등 30여점의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이 중 대웅전은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8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웅전 내에는 보물(?) 제61호인 괘불( 掛 佛 )과 조선 후기에 제작한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84호인 경판( 經 板 ) 등이 보관되어 있다. (...) 다소곳하게 숨어 있는 조선 여인네와 같이 아름다운 절 운흥사의 부속암자로 낙서암 樂 西 庵 과 천진암 天 眞 庵 이 있다. 운흥사의 뒷길로 난 골짜기를 따라 10여분 오르면 나타나는 암자가 천진암이다. 1692년인 숙종18에 응화선사 應 化 先 師 가 창건한 암자이다. 금세라도 봉우리를 터트릴 것 같은 목련 꽃이 천진암 앞마당에 서 있고 매화꽃 동백꽃이 한창인데 사람의 그림자도 없다. 천진암에서 낙서암거쳐 향로봉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른 산길이다. 천천히 천천히 오르는 길 냇물 소리를 들으 며 걷는 길 가다가 뒤 돌아보자 금세 보였던 천진암이 겨울 나무 사이로 숨어 보이지 않는다. 낙서암으로 가는 길 앞서 가는 유재훈 선생이 흡사 세상을 버리고 막다른 곳에 있는 암자를 찾아 가는 처사 處 士 처럼 보인다. 조금 오르자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낙서암 樂 西 庵, 바라만 보아도 자리가 좋다. 깎아지른 바위벼랑위에 날렵하게 자리 잡은 낙서 암, 작은 문 사이를 들어서자 낮은 돌담을 두른 문 앞에 용이 여의주를 문 치미가 보이고 요사채와 낙서암이 전면에 보인다. 침묵이라고 쓰여진 나무 판자가 비스듬하게 누워 있는 낙서암을 돌아가자 졸졸 흐르는 샘물, 이 물이 바로 낙서도인 이 수도하면서 마셨다는 샘물이다. 낙서암의 물은 다른 샘물보다 물이 세다고 하는데, 이 물로 술을 빚으면 술이 만 들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대지가 비좁고 건물은 인법당과 칠성각뿐이지만 뒤의 정상부근에서 이 암자를 품에 안 듯 좌우로 흘러내린 암봉들은 바라만 봐도 신비스럽다. 더구나 울창한 산 아래를 굽어 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수도처로서의 가 장 알맞은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사지에 숙종 8년에 중창했다는 것 이외의 자료가 별로 없지만 운흥사와 동시에 수도처로 개창되엇을 것이라고 추정 하고 있다. 특히 이 지역에서 법력 높기로 소문이 자자한 낙서도인 樂 西 道 人 이 이절에서 깨달음( 成 道 )을 이룬 것으로 이름이 높다. 이 절에서 50여 년간 수도했다는 비구니 정안 淨 眼 스님의 말에 의하면. 어느 날 낙서스님이 남해 보리암에 있는 수상 좌 首 上 佐 를 찾아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노량 露 粱 에서 스스로 물속으로 들어가 가부좌한 후에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밤이 되자 스님의 머리에서 방광 放 光 하는 빛이 무지개와 같이 용문사에 뻗쳐서 놀란 30여명의 사람들이 달려 와 그 이튿날 다비를 했다고 한다. 낙서당부도는 보리암이 있는 남해 금산의 정상인 봉수대 근처에 있는데 어떤 이유로 이곳에 그 스님의 부도가 있는 남해의 절집들과 순천만을 가다. 184

185 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용문사라는 절이 원래 금산에 있었던 것을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진정한 침묵은 무엇인가? 절의 이런 저런 내력을 듣고 싶어 스님 계십니까? 문 앞에서 불렀지만 대답이 없다. 조금 있자 나온 스님에게 몇 마디 물었는데, 스님의 말은 간결(?)하기만 하다. 묵언 黙 言 은 무엇이고 침묵 沈 黙 은 또 무엇인가? 장목지 張 牧 之 는 죽계 竹 溪 에 은거하여 세상과 사귀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그래서 손님이 찾아오면 대나무 울타리 사 이로 어떤 사람인가를 엿보아, 운치 있고 훌륭한 사람인 경우에만 그를 불러 들여서 자기 배에 태우거니 혹 스스로 배를 저으면서 그와 담소하였다. 속된 사람들은 열이면 열 모두 그를 볼 수 없었으므로, 그에 대한 노여움과 비난이 끊일 날이 없었지만 그는 그런 것에 전혀 개의하지 않았다. <<하씨어림>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으리라. 가장 뚜렷한 침묵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입을 열고 얘기를 하 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신정일의 <암자기행>에서 다솔사와 보안암, 신증동국여지승람 형승 조에 남쪽 끝의 요충이다. 굽어보면 기름진 들녘이 펼쳐져 있으며, 여러 산봉 우리가 아름답다. 이구산 尼 邱 山 이 우뚝 솟아 있으며, 사수 泗 水 가 가로질러 흐른다. 와룡산이 웅장하게ㅡ 서려 있고, 드넓은 바다가 아득히 펼쳐 있다. 라고 씌어 있는 사천은 와룡산 봉암산 향노봉 등의 산들이 연달아 있고 향노봉 자락에는 운흥사라는 옛 절이 있다. 또한 사천군 곤명면 조장리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피난 가던 주민 101명이 미군의 오폭과 총격으로 숨지거나 다친 역사적 상처가 남아 있다. 이곳 사천시 곤양면 용산리 와룡산 자락에 이 지역의 큰 절인 다솔사 多 率 寺 가 있다. 소나무가 많은 곳이라고 여기기 쉬운 다솔사는 한자 이름대로라면 많은 군사를 거느린다. 라는 뜻이다. 소나무 숲과 측백나무숲이 울창하게 우거 진 다솔사로 가는 길은 한적하지만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는 길처럼 운치가 있는 길이다. 이 절은 신라 지증왕 4년인 503년에 인도의 스님 연기조사가 창건한 뒤 영악사라고 하였는데, 성덕왕 5년에 다솔사라고 고치고, 문무왕 16년인 676년에 의상스님이 영봉사라고 고쳤다가 신라 말기에 도선국사가 다솔사라고 고쳤다. 그 뒤 1326년에 나옹스님이 중 수하였고, 조선 초기에 영일. 효익 스님이 중수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숙종 때 복원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14년에 일어난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재건한 것이다. 현존하는 절 건물로는 경상 남도 유형문화재 제 83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양루 大 陽 樓 와 대웅전. 나한전. 천왕전. 요사채등 10여채의 건물들이 있 다. 대양루는 1749년인 영조 25년에 건립되어 현재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2층 맞배집으로 견평 106평의 큰 건물 이다. 또한 1978년 2월 8일에 대웅전 삼존불상에 개금불사 改 金 佛 事 를 할 때 후불탱화 속에서 108개의 사리가 나와 적 멸보궁으로 증 개축한 뒤에 불사리를 그곳에 모셨다. 적멸보궁 안에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열반에 들기 직전의 부처님 모습인 와불상을 모셨다. 이절 응진전은 일제 때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고 스님인 만해 한용운 韓 龍 雲 이 머물러 수도를 하였던 곳이고, 소설가 남해의 절집들과 순천만을 가다. 185

186 김동리 金 東 里 가 머물면서 <등신불 等 身 佛 >이라는 소설을 쓴 곳이기도 하며 김법린. 최범술. 김범부등이 은거하면서 독 립운동을 했던 곳이다, 다솔사 절 근처에서 재배되는 죽로차 竹 露 茶 는 반야로 般 若 露 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명차인데 다솔사에 딸린 암자인 보안암은 다룬 곳에서 보기 드문 석굴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39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시대 말에서 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굴의 외형은 판상의 사암질 활석을 단층식으로 쌓아올린 분묘형태이며, 평면은 방형이다. 석굴의 입구에는 미륵전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목조전실을 지나서 2m정도의 통로 를 따라 들어가면 석실이 있다. 중앙에 장대석을 대좌로 하여 결가부좌한 석조여애좌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이 본존 의 뒤쪽 좌우에는 각 8구의 석조 나한좌상이 배치되어 있다. 이 석굴은 인공으로 조성한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경주 석굴암과 군위 삼존석굴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석굴이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경상도 편 순천이 자랑하는 관광지가 바로 순천만이고 순천만에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순천만 습지가 있다. 순천만이 주목받는 것은 제10차 람사르 총회의 공식 방문지로 지정된 데다 세계 람사르 습지 NGO모임 이 순천에 서 열리면서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순천만 연안습지는 28km2 규모로 국내 최초로 2006년 1월 람사르 협약 습지로 등록됐다. 순천만에는 갯벌과 갈대, 철새가 조화를 이룬 습지가 청정하게 보존되어 있기 때문인데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순천 만은 연간 200여종의 철새 6만~7 만마리가 찾고 있는데 이중 검은머리갈매기와 큰고니 등은 멸종위기 종 이라며 많은 갯벌이 개발에 밀려 훼손됐지만 순천만은 원형을 잘 보전된 상황 이라고 한다. 넓게 펼쳐진 갈대밭사이로 바라 뵈는 순천만의 제방이 우리 시대의 빼어난 소설 중의 하나인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무대가 되었다. 모든 것이 선입관 때문이었다. 결국 아내의 전보는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 이, 흔히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그 자유 때문이라고 아내의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 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내 마음속에서 잊혀질 수 있다고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상처가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다투었다. 그래서 나는 전보와 타협안을 만들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번만 이 무진을, 외롭게 마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 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 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 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나는 거기에 새끼손가락을 걸어서 약속한다. 당신은 지금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어디선가 나도 그와 같이 길가에 세워진 팻말을 볼 수 있을 것인가? 조계산 서쪽 기슭인 송광면 신평리에 자리 잡은 송광사( 松 廣 寺 )는 한국 불교 조계종의 본산이며, 조선시대 초기까지 남해의 절집들과 순천만을 가다. 186

187 보조국사 지눌과 진각국사 혜심( 瞋 覺 國 師 慧 諶 )을 비롯한 국사 열여섯 명을 배출했던 곳으로 불 의 통도사와 법 의 해인사와 더불어 승 의 절로 꼽혀 이 나라의 세 보배 사찰에 든다. 그런 옛 전통을 이으려는 듯이 이 절 에 깊숙이 틀어박혀 수도에만 몰두하는 스님들이 적지 않다. 이 절터는 원래 신라의 혜린( 慧 璘 )스님이 길상사( 吉 祥 寺 )라는 조그만 암자를 지었던 곳인데 고려시대인 1204년에 보 조국사가 그곳에 절을 크게 일으켜 세우면서 송광사가 되었다. 여러 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특히 한국전쟁 때에 옛 절간은 거의 다 불타 없어졌다. 한때는 크고 작은 절간이 72채나 딸렸을 만큼 컸던 이 절이 근래 들어 많이 복구되었 다. 송광사에는 국보 3점, 즉 목조삼존불감( 木 造 三 尊 佛 龕 국보 제42호) 고려 고종의 제서( 梯 書 국보 제43호) 국사전 ( 國 師 殿 국보 제56호)을 비롯하여 대반열반경소( 大 般 涅 槃 經 疏 ) (보물 제90호)와 금동 요령( 金 銅 搖 鈴 보물 제176 호) 같은 보물 12점을 간직하고 있어 절의 오랜 역사와 빛나는 전통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준다. 한편 조계산의 동남쪽 기슭인 쌍암면 죽학리에는 태고종의 본산이며 보물 400호로 지정된 쌍무지개 다리, 즉 승선교 ( 昇 仙 橋 보물 제400호)로 유명한 선암사( 仙 巖 寺 )가 있다. 백제 성왕 때인 서기 529년에 아도화상( 阿 度 和 尙 )이 지었던 그 근처의 한 암자에서 역사가 비롯되었고 고려 때에 대각국사( 大 覺 國 師 )의 힘으로 크게 중창되었다고 알려진 이 절 은 일주문 팔상전 대웅전 원통전 불조전 같은 32채의 건물들도 아름답지만 병풍처럼 둘러쳐진 조계산의 풍광을 보배로 삼고 있다. 전9-1송광사 고려 명종 때의 문신인 김극기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적적한 산골 속 절이요, 쓸쓸한 숲 아래의 중일세. 마음 속 티끌은 온통 씻어 떨어뜨렸고 지혜의 물은 맑고 고용하기도 하네. 그래서 그런지 선암사의 뒷간은 아름답기로 이름이 높은데, 이 뒷간을 각별하고 은밀하게 아끼던 건축가 김수근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측간 이라고 말하였다. 절의 들목에 비껴 있는 삼인당( 三 印 塘 )은 통일신라시대 달걀꼴로 쌓은 연못으로 가장자리가 돌로 논두렁같이 되었으며 가운데에 섬이 있는데, 호남지역 전통 연못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가 하면 이 절의 깊숙한 서고에는 대각국사가 그린 선암사 설계도가 있 고, 평생에 걸쳐 방석 만드는 일을 기도하는 일로 여기고 손일을 하다가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해봉( 海 峰 )스님이 삼 과 왕골로 엮었다는 해진 방석도 있다. 이 방석은 조형과 무늬가 우리나라 전통예술에 맞닿아 있으면서도 현대감각을 휘어잡을 만큼 아름답다. 봄이 가장 아름다운 선암사에는 몇백 년 나이를 먹은 매화나무 수십 그루와 영산홍 아홉 그루가 있다. 그래서 해마다 3월 하순에서 4월이면 온 경내가 매화 향기로 그윽하고, 5월이면 동백과 옥잠화 영산홍 꽃의 그 붉으면서도 빨갛지 않은 빛깔이 답사객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9월이면 상사화가 절 구석구석에 피어나 마음을 시리도록 아프게 한다. 남해의 절집들과 순천만을 가다. 187

188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전라도 편 남해의 절집들과 순천만을 가다. 188

189 겨울의 초입 부석사를 답사하고 고치령을 넘다 :30 겨울의 초입 부석사를 답사하고 고치령을 넘다. 늦가을 평일에 부석사를 찾아갑니다. 이 계절에 가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무량수전 뒤편에서 고즈넉하게 서 있는 고 욤나무 밑에 새까맣게 떨어져 있는 고욤, 하나 주워서 입에 넣으면 그 달콤함이 온 몸으로 스며드는, 가을에 부석사 를 안가면 몸살이 날 것 같아서 부석사 여정을 마련했습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멀리 보이는 소백산을 굽어보고, 안양루 아래 돌 계단에 앉아서 지난날들을 회상하 기도 하다가, 점심을 먹고 그 아름다운 고치령을 넘을 예정입니다. 경죽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에서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로 넘어가는 백두대간에 자리잡은 고치령 길에는 노랗게 빛나는 낙엽송이라고도 부르는 일본잎깔나무잎이 온산을 물들이고 있을 것입니다. 한적한 시간, 천천히 걸으며 바라볼 산천이 벌써부터 그립습니다. 그길을 걷고자 하시는 분의 참여를 바랍니다.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있는 신라의 고찰 부석사 浮 石 寺 가 그런 절이다. 불전 뒤에 큰 바위 하나가 가로 질러 서 있고, 그 위에 또 하나의 큰 돌이 지붕을 덮어놓은 듯하다. 언뜻 보면 위아래가 서로 붙은 듯하지만, 자세히 살펴보 면 두 돌 사이가 서로 서로 이어져 있지도 않고 눌리지도 않았다. 약간의 틈이 있으므로 노끈을 집어넣으면 거침없이 드나들어, 그것으로 비로소 돌이 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절이 이 돌 때문에 이름을 얻었는데, 그렇게 떠 있는 이 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절 문밖에 덩어리가 된 생 모래가 있는데, 예로부터 부서지지도 않고, 깎아버리면 다시 솟아나서 새롭게 돋아나는 흙 덩이와 같다. 신라 때 승려 의상대사 義 湘 가 도를 깨닫고 장차 서역의 천축국으로 떠나기 전에, 거처하던 방문 앞 처 마 밑에다 지팡이를 꽂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여기를 떠난 뒤에 이 지팡이에서 반드시 가지와 잎이 살아날 것이다. 이 나무가 말라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은 줄 알아라. 의상이 떠난 뒤에 절 스님은 그가 살던 곳으로 가서 의상을 초상 肖 像 을 만들어서 안치하였다. 창 밖에 있던 지팡이에서 곧 가지와 잎이 나왔는데, 햇빛과 달빛은 이것을 비치지만 비와 이슬에는 젖지 않았으며. 항상 지붕 밑에 있으면서도 지붕을 뚫지 않았다. 겨우 한 길 남짓한 채로 천년을 하루같이 살아 있다. 광해군 때 경상감사였던 정조 鄭 造 가 이 절에 이르러 이 나무를 보고서 선인이 지팡이 삼던 나무로 나도 지팡이를 만들고 싶다. 하고 명령을 내려 톱으로 잘라서 갔다. 그러자 곧 두 줄기가 다시 뻗어 전과 같이 자랐다. 그 때 나무 를 베어갔던 정조는 인조 계해년(1623)에 역적으로 몰려 참형을 당했지만 나무는 지금까지 사시사철에 푸르며, 또 잎 이 피거나 떨어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스님들은 비선화수 飛 仙 花 樹 라고 부른다. 옛날에 퇴계선생이 이 나무를 두고 읊은 시가 있다. 겨울의 초입 부석사를 답사하고 고치령을 넘다. 189

190 옥과 같이 아름다운 이 가람의 문에 기대어,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지팡이가 변하여 신령스러운 나무가 되었다 한다. 지팡이 꼭지에 스스로 조계수가 있는가, 하늘이 내리는 비와 이슬의 은혜를 빌지 않는구나. 절 뒤편에 있는 취원루 聚 遠 樓 는 크고 넓어서, 높은 것이 하늘과 땅 가운데 우뚝 솟은 듯 하고, 기세와 정신이 경상도 전체를 위압하는 것 같다. 벽 위에는 퇴계의 시를 새긴 현판이 있다. 내가 계묘년(1723) 가을에 승지 承 旨 이인복 李 仁 復 과 함께 태백산을 놀러갔다가 이 절에 들어가, 드디어 퇴계의 시에 차운 次 韻 하였다. 까마득하게 높은 누각 열두 난간 위에, 동남쪽 천 리 지역이 눈앞에 보이도다. 인간 세상은 까마득한 신라국인데, 하늘 아래는 깊고 깊은 태백산이로다. 가을 골짜기에 어두운 연기는 나는 새 너머에 일고, 바다에 남은 노을은 흩어진 구름 끝에 비친다. 가도 가도 위쪽의 절에는 닿지 못하니, 예부터 행로 行 路 의 어려움을 어찌 알소냐. 다시 또한 수를 더 지었다. 태백산은 아득히 하늘과 통하고, 옛 절은 웅대하게 왼쪽의 바다 동쪽에 열렸구나.. 강과 산들이 멀리 천 리 밖에서 만나고, 불전과 누각은 날아갈 듯이 천지 사이에 솟았네. 고승이 거처를 떠났는데 꽃이 나무에 피고, 옛 나라야 흥했거나 망했거나 새는 빈 하늘을 지나가네. 누가 알랴. 머뭇거리는 주남 周 南 나그네의, 뜬구름, 지는 해에 하염없는 뜻을. 취원루 위 깊숙한 한쪽 구석에 방을 만들고서, 그 안에는 신라 때부터 이 절에서 사리가 나온 이름난 스님의 화상 畵 像 10여 폭이 걸려 있다. 모두 얼굴 모습이 고아하고 괴이하게 생겼으며 풍채가 맑고 깨끗하여 엄연히 당시의 다락 집 위에서 서로 대좌하여 선정에 들어간 것 같다. 지세가 꾸불꾸불하게 뻗어 내려간, 그 곳에 있는 작은 암자들은 불 경을 강론하고 선정에 들어가는 스님들이 거처하는 곳이라고 한다. 겨울의 초입 부석사를 답사하고 고치령을 넘다. 190

191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부석사가 자리잡은 봉황산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를 경계로 한 백두대간의 길목에 자리잡은 산으로 서남쪽으로 선달 산, 형제봉, 국망봉, 연화봉, 도솔봉으로 이어진다. 부석사 무량수전 위쪽에 서 있는 3층석탑에서 바라보면 소백산으 로 이어진 백두대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일주문을 지나면 마치 호위병처럼 양 옆에 서 있는 은행나무와 사과나 무가 서 있고, 당간지주를 지나고 천왕문을 나서면 9세기쯤에 쌓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석단과 마주치고 계단을 올 라가면 범종루에 이른다. 범종루 아래를 통과하면 안양루가 나타나는데, 안양루의 안양( 安 養 )은 극락의 또 다른 이름이다. 안양루를 지나면 극 락인 셈이다. 안양루 밑으로 계단을 오르면 통일신라시대의 석등 중 가장 우수한 석등인 부석사 석등(국보 제 17호)이 눈앞에 나타 나고 그 뒤로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조건축인 무량수전이 있다. 1916년 해체 수리할 때에 발견한 서북쪽 귀 공포의 묵서에 따르면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왜구의 침노로 건물이 불타서 1376년에 중창주인 원응국사가 고쳐지 었다고 한다. 무량수전은 중창 곧 다시 지었다기보다는 중수 즉 고쳐지었다고 보는 것이 건축사학자들의 일 반적인 의견이다. 원래 있던 건물이 중수연대보다 100~150년 앞서 지어진 것으로 본다면 1363년에 중수한 안동 봉정 사 극락전(국보 제 15호)과 나이를 다투니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보아도 지나치지 않겠다. 이 같은 건축사 적 의미나 건축물로서의 아름다움 때문에 무량수전은 국보 제 18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량수전 안에 극락을 주재하는 부처인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흙을 빚어 만든 소조상이며, 고려시대의 소조불로는 가장 규모가 큰 2.78m의 아미타여래조상은 국보 제 45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량수전의 동쪽 높다란 곳에 있는 석탑을 지나 산길을 한참 오르면 조사당이 있다. 조사당은 국보 제 19호로 의상스 님을 모신 곳으로 1366년 원응국사가 중창 불사할 때 다시 세운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인 이 건물은 단순하여서 간결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데, 조사당 앞에 의상스님의 흔적이 남아있는 본래 이름이 골담초인 선비화가 있다. 의상스님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으면서 싱싱하고 시들음을 보고 나의 생사를 알라 고 했다는 선비화를 두고 이중환은 택리지에 스님들은 잎이 피거나 지는 일이 없어 비선화수라고 한다. 고 하였는데, 그 나무가 지금의 나무 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사람들의 손길이 타는 것을 막기 위해 철망 속에 갇힌 채 꽃을 피우고 그 철망 안에는 천 원짜리 지폐와 동전들 이 나 뒹굴고 있을 뿐이다. 한편 택리지 에 나오는 취원루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순흥읍지 에 의하면 무량수전 서쪽에 있었다고 한다. 그 북쪽에 장향대, 동쪽에는 상승당이 있었다고 하고, 취원루에 올라서 바라보면 남쪽으로 300리를 볼 수가 있다고 하며 안양 문 앞에 법당 하나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일주문에서 1리쯤 아래쪽으로 내려간 곳에 영지가 있어서 절 의 누각이 모두 그 연못 위에 거꾸로 비친다. 고 하였다. 물에 비친 부석사의 아름다움을 상상해보는 것만도 가슴 설레는 일이지만 150여년의 세월 저쪽에 있었다는 영지는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으니 그 또한 애석하기 그지 없는 일이다 겨울의 초입 부석사를 답사하고 고치령을 넘다. 191

192 늦은 가을에 성주사와 무량사를 거닐다 :30 늦은 가을에 성주사와 무량사를 거닐다. 11월 25일 일요일 가을이 끝자락이자 겨울의 초입에 철지난 바닷가인 무창포와 폐사지, 성주사지와 무량사 그리고 부 여를 찾아갑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나뭇잎이 몇 잎 남아 있어도 좋고, 겨울을 기다리는 빨ㄹ간 홍시 몇 개가 남아서 길손 을 반겨줄지도 모를 하루 여정은 쓸쓸함과 포근함이 교차하는 기이한 답사가 될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들이 행복이라고 부르는, 불행이라고 부르는 그러한 것들조차 우리 들이 삶에서 터득한 어떠한 기준에 의해서 편의에 의해서 그렇다고 합의한 것일 뿐이지 1더하기 1이 2가 되는 것처 럼 정확한 답은 아닐 것이다. 산을 오르고 절을 둘러보고 폐사지에서 나른한 한 때를 보낸 후 바다에 온 몸을 내맡기고자 했던 애초의 계획은 전 화 한통화로 바뀐다. 10시 40분 무창포 바다가 갈라진다는데 일정을 변경시킬 수는 없으십니까? 그렇다 구약성서 에 나오는 모세의 기적처럼 바다가 갈라진다는데 우리들의 어두운 마음을 추스르고 모처럼 젖과 꿀이 넘쳐흐르는 약 속의 땅으로 갈 수 있다는데 일정을 바꾸는 것이 그리 대수랴, 그렇게 하기로 약속한다. 이것마저도 세낭쿠르 의 표현을 빌린다면 지도 이외의 그 어떤 안내자도 없는 여행은 그가 지나는 장소들에 대한 추억을 고정 시키고자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무기도 아닌 의도적인 잘못이다 일수도 있고 다시 덧붙여서 나는 방향을 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할 수 있는 한 길을 잃으려고 한다. 그럴 수도 있다. 자유는 제멋대로 내 버려 두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자유는 방임이며, 자유는 그 때 그 때 선택되어지는 그 무엇일 것이다. 바다가 갈라지는 무창포 해수욕장 보령시 운천면 관당리와 독산리 일원에 걸쳐있는 무창포 해수욕장은 원래 조선시대에 군창지였다. 1928년 서해안에서 최초로 해수욕장이 개장되었으며 백사장의 길이가 1.3km에 이른다. 경사가 완만한 무창포 해수욕장은 인근 해안가에 해당화가 만발하는 조용하기 이를 데 없다는 해수욕장이다. 황사가 걷힌 길을 차는 제 속력으로 달려서 당재를 지난 다. 그 옛날 이 고개 길에는 굿을 하던 당집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돌로 만든 장승 한 쌍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 들어있고 간드리마을을 지나자 무창포다. 이른 봄날임에도 불구하고 해수욕장엔 발 디딜 틈도 없다. 3월 29일 음력으로 삼월 초이틀 10시 무렵 무창포 바다가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진다는 것이 언론에 알려진 연유이다. 빼곡히 들어 찬 사람들의 숲을 지나 바닷길에 들어선다. 벌써 무창포 백사장에서 솔숲우거진 석대도 까지의 바다는 그 깊은 속살을 부끄럼 없이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바닷 길을 따라 사람들의 물결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사람들은 몸을 구부린 채 조개며 성게며 하는 바닷 고기를 잡느라 늦은 가을에 성주사와 무량사를 거닐다. 192

193 여념이 없다. 현대판 모세의 기적이라 알려진 진도와 무창포에서 석대도까지의 바닷길이 세인들의 눈길을 끌고 있지 만 모세의 기적이란 다른 게 아니다. 지형적인 요인과 태양의 위치가 일 년 중 가장 가까워질 때 일어나는 한 현상으 로 바다 밑에서 가장 도드라지게 돌출해 있던 부분이 바다가 갈라지며 드러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길은 성주사( 聖 住 寺 ) 터로 뻗어 있다. 구산선문( 九 山 禪 門 )중 하나인 성주산파의 중심사찰이었던 성주사는 보령시 미산 면 성주리 성주산( 聖 住 山 ) 아래에 있다. 삼국사기 에 기록되어 있는 백제 법왕 때에 창건된 오합사( 烏 合 寺 )가 이 사 찰이라는 사실이 1960에 출토된 기와조각에서 확인되었으며,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에 적마가 나타나 밤낮으로 이 절 을 돌아다니면서 백제의 멸망을 예시해 주었다고 한다. 신라 문성왕 때 당나라에서 귀국한 무염국사가 김양의 전교에 따라 이 절을 중창하였고 주지가 되면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승암산 성주사 사적 에 기록된 바로는 성주사의 규모를 불전 80칸에 행랑채가 800여 칸 수각 7칸 고사 50여 칸이 있었다고 기록되 어 있는 것으로 보아 1000여 칸에 이르렀을 것이다. 성주산파의 총 본산으로 크게 발전하였던 이절은 한 때 이천오백 명 쯤의 승려들이 이곳에서 도를 닦았다고 하지만 임진왜란 때 불에 탄 뒤 중건하지 못한 채 폐사지만이 사적 제307 호로 지정되어 있을 뿐이다. 이 성주사가 번창하였을 당시 절에서 쌀 씻은 물이 성주천을 따라 10 리나 흘렀다고 하 는데 절터는 간데없이 석조물만이 절터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최치원의 사산비문이 남아있는 성주사 터 이절에는 최치원의 사산비문중의 하나로써 국보 제8호로 지정된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가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문은 하동 쌍계사의 진감선사 부도비와 경주 초월산의 대승국사비 그리고 봉암사의 지증대사 부도비를 말하는데 지증대사 부도비문은 신라 선종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한 글로 알려져 있다. 낭혜화상의 깨달음은 깊고도 깊었다고 한다. 그 당시 당나라의 여반선사는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나 보았지만 이와 같은 신라 사람을 만나본적이 없다 뒷날 중국 이 선풍을 잃어버리는 날에는 중국 사람들이 신라로 가서 선법을 물어야 할 것이다. 라고 칭찬했던 낭혜화상의 비는 신라 진성왕 4년에 세워졌다. 그때의 것으로는 가장 큰 비로 전체높이 4.5m에 달하는 거대한 외형에 듬직하고 아름다 운 조각솜씨를 발휘하여 신라시대의 석비를 대표하는 이 비는 귀부의 일부에 손상이 있을 뿐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 아 있다. 특히 귀부의 구름무늬나 이수도 그렇지만 4면에 운룡문은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이 비에는 낭혜화상의 행적 이 모두 5천여 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적혀 있다. 글은 최치원이 지었고 글씨는 최치원의 사촌동생이었던 최인연이 썼 는데 고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성주사지에는 이 탑비 외에도 신라 말에 건립된 4기의 석탑이 있다. 보물 19호인 성주사지 오층석탑과 보물 20호 인 성주사지 중앙삼층석탑, 및 조각수법이 뛰어난 보물 47호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 그리고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40 호인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과 석불입상이 있다. 바람한 점 없는 폐사지의 탑 밑에 앉아 백제의 기왓장을 들춰내며 한 나절 보내는 것도 운치 있는 일일 것이지만 마음뿐이고 길은 다시 만수산 가는 길로 접어든다. 만수산 입구에 서 있 는 나무장승은 여전히 변함없다. 여정은 만수산 무량사에 이른다. 하나 둘씩 자연으로 돌아가고 또 세워지는 장승들의 인사를 받으며 우리는 김시습( 金 時 習 )을 만나러 가고 그 김시습 은 오백여년의 세월 저편에서 부도로 남아 우리를 맞는다. 늦은 가을에 성주사와 무량사를 거닐다. 193

194 조선초기의 학자이며 문장가로 당대를 풍미했던 김시습은 자는 열경이고 호는 매월당 법호는 설잠으로 1435년에 서 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세상에 소문이 자자했던 김시습은 한번 배우면 곧 익힌다 하 여 이름도 시습으로 지어졌으며 당시의 임금이었던 세종대왕에게 장래에 크게 쓰겠다 라는 전지까지 받았다. 그는 13세까지 수찬 이재전과 성균관 대사성, 김반별 그리고 윤상으로부터 사서삼경을 비롯 예기와 제자백가 등을 배우다 가 그의 나이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머리를 깎 고 방랑길에 접어들었다. 관동지방과 서북지방뿐만 아니라 만주벌판과 전주, 경주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전주 에서도 그가 한겨울을 보냈다는 연유 탓인지 전주객사 동익헌쪽에 매월당이라는 누각이 있었으나 지금은 헐린 채 흔 적도 없다. 매월당 김시습이 입적한 절 김시습은 31세에 경주로 내려가 금오산 용장사에 금오산실을 짓고, 그 집의 당호를 매월당이라 붙인 후 그곳에서 37 세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와 여러 책들을 지었다. 37세에 서울로 올라와 여러 절들을 전 전하던 김시습은 47세 되던 해에 돌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아내를 맞기도 했으나 폐비윤씨 사건이 일어나 자 다시 관동지방으로 방랑의 길에 나선다. 훗날 김시습전을 지은 율곡 이이는 김시습을 일컬어 한번 기억하면 일생동안 잊지 않았기 때문에 글을 읽거나 책 을 가지고 다니는 일이 없었으며, 남의 물음을 받는 일에는 응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재주가 그릇 밖으로 흘러 넘쳐서 스스로 수습할 수 없을 만큼 되었으니 그가 받은 기운경청은 모자라게 마련된 것이 아니겠는가. 윤기를 붙들 어서 그의 뜻은 일월과 그 빛을 다투게 되고 그의 풍성을 듣는 사람들은 겁쟁이도 융통하는 것을 보면 가히 백세의 스승이 되기에 남음이 있다. 라고 하였다. 다시 이이는 김시습이 영특하고 예리한 자질로써 학문에 전념하여 공과 실천을 쌓았다면 그 업적은 한이 없었을 것이다 라면서 불우했던 그의 한평생을 애석해 했다. 김시습은 오십대에 이르러서야 인생에 대하여 초연해질 수 있었다. 그는 이 나라 구석구석을 정처 없이 떠 돌아 다니 다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이 곳 무량사였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고는 네 모습 지극히 약하며 네 말은 분별이 없으니 마땅히 구렁속에 버릴 지어다 라고 자신을 평가하였다. 무량사에는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지 만 불만이 가득한 김시습의 초상화가 지나는 길손들을 맞고 있다. 김시습은 59세에 이 절 무량사에서 쓸쓸히 병들어 죽었다. 그는 죽을 때에 화장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으므로 그의 시신은 절 옆에 안치해 두었다. 삼년 후에 장사를 지내려고 관을 열었다. 김시습의 안색은 생시와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부처가 된 것이라 믿어 그의 유해를 불교식으로 다 비를 하였다. 이 때 사리 1과가 나와 부도를 세웠다. 그 뒤 읍의 선비들은 김시습의 풍모와 절개를 사모하여 학긍 결 에 사당을 지은 뒤 청일사라 이름을 짓고 그의 초상을 옮겨 봉안하였다. 만수산으로 오르는 산길은 부도 밭에서부터 시작된다. 봄물이 드는 헐벗은 나무사이로 진달래꽃이 듬성듬성 피어있 다. 그래 내 어린 시절에 진달래꽃 만개한 꽃그늘에는 나병환자가 숨어 있다가 어린애 간을 빼먹는다는 소문이 떠돌 았었지. 나는 진달래 꽃 잎 따서 먹으며 옛 기억에 젖어든다. 상큼한 그 향기에 취해 오르는 산길은 순조롭다. 저만치 아래로 무량사의 절집들이 보이는 등성이 소나무숲 그늘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봄바람은 따사롭게 불어온다. 더 늦은 가을에 성주사와 무량사를 거닐다. 194

195 러는 나무에 기대어 휴식을 취하고 나는 소나무를 쓸어안는다. 까칠까칠한 소나무의 등껍질이 내 가슴을 열고서 들어 오고, 봄이 움트는 소리 들린다. 올라갈수록 더 넓게 드러나는 산들은 봄을 재촉하고 이십여 분을 더 올랐을까, 드디어 만수산정상이다. 옅은 구름과 햇빛에 가려 흐릿하게 앞산이 보이지만 서해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어슴프레 성주산(680m),성대산(631m), 조공산 (308m), 월하산이 지척이다. 그러나 이경자씨에게 만수산 정상에 서면 보일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바다는 보이지 않 으니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다. 나는 나뭇가지에 몸을 누인다. 마른나무가 부스럭거리며 내게 말한다. 들리는가, 울부짖는 저 갈매기 소리, 보이는 가, 출렁거리며 부서지는 저 파도소리 박연숙씨가 가져온 방울토마토를 나누어 먹을 때 니체의 고독한 목소리가 내 귓전을 때리는 듯 했다. 나는 여행자 산을 타는 사람이다 보다 높이 오르기 위하여 나는 더 아래로 내려가야만 한 그렇다 니체의 그 말처럼 우리들 역시 더 높게 오르기 위하여 다시 내려가야 할 것이다. 올라온 길로 내려가지 않고 다른 것을 택한다. 단숨에 내려갈 듯싶던 길이었는데 아차 하는 순간에 끊어질 듯 이어지던 길이 사라지고 말았 다. <열하일기>의 금료소초 에는 저자가 미상인 <물류상감지 物 類 相 感 志 >라는 책에 실린 글이 들어 있다. 산길을 가 다가 길을 잃을 염려가 있을 때는 향충 向 蟲 (북쪽을 향하고 있는 곤충) 한 마리를 잡아서 손에 쥐고 가면 길이 막히지 않는다. 라는 말이 있지만 곤충을 잡아서 시험해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시 올라갈 수도 없고, 그냥 내려가는 수밖에 없는 길 없는 계곡 길, 그것도 나뭇잎이 수북하게 쌓인 미끄러운 길이 다. 그 길을 내려가며 스페인의 시인 안토니오 마차도 의 시 구절을 떠 올리며 애써 자위한다. 여행자여 길은 없나니, 길은 걸어서 만들어 가나니, 을 힘들여 내려가니 절 뒤안이다. 노란 꽃망울이 맺힌 무우 장다리를 꺾어 먹 으며 무량사에 들어섰다. 높이 오르기 위해선 더 아래로 내려가야 하고 무량사! 무량이란 셀 수 없다는 말의 한 표현으로서 목숨을 셀 수 없고 지혜를 셀 수 없는 것이 바로 극락이니 극락 정토를 지향하는 곳이 무량사라고 할 때 내가 잠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그 순간마저도 셀 수 없는 지극히 오래인 그 인연에 연유한 것인지도 모른다. 만수산(575m)기슭에 자리 잡은 무량사는 사지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때 범일국사가 창건하였고 신라 말 고승인 무염 국사가 머물렀다고 하지만 범일국사( )는 문무왕 때( )와 훨씬 동떨어진 후대의 인물로 당나라에서 귀국 한 후 명주굴산사에서 주석하다가 입적하였기 때문에 그가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재의 모습으로 보 아 고려 때 크게 중창한 것으로 보여 진다. 조선시대엔 선승으로 이름 높은 김제출신의 진묵대사가 이절 무량수불에 점안을 하였고, 이 만수산 기슭에서 나는 나 무열매로 술을 빚어 마시며 몇 수의 시를 남겼다. 하늘을 이불 땅을 요 삼아 / 산을 베개 하여 누웠으니 / 달은 촛 불 구름은 병풍 / 서쪽바다는 술항아리가 되도다. / 크게 취하여 문득 춤을 추다가 / 내 장삼을 천하곤륜산에 걸어두 도다. 그러나 진묵대사는 당시 조선에 휘몰아 쳤던 기축옥사 당시 그와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 살았던 정여립과의 관계가 있을법한데 아무런 흔적 하나 남아있지 않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서산대사 휴정이나 사명당 유정이 임진왜란 이 일어났을 때 온몸을 다 바쳐 나라를 위해 일어났을 때에도 진묵대사는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했다. 그러면서도 어 늦은 가을에 성주사와 무량사를 거닐다. 195

196 머니에 대해서만은 지극한 정성을 다 하였던 것을 우리들은 무엇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진묵대사는 이절과 완주 서방산의 봉서사 그리고 모악산의 수왕사를 비롯 전라도 일대의 절들에 기행과 술에 얽힌 일화들을 많이 남겼다. 이 무량사는 임진왜란 당시 크게 불탔으며 17세기 초에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있었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10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고 석등의 선이나 비례가 매우 아름다운 무량사 석등(보물 233호)이 먼저 들어오고 그 뒤에 오 층석탑이 있다. 오층석탑(185호)은 창건당시부터 이 절을 지켜온 것으로 추측되는 데 완만한 지붕돌과 목조건물처럼 살짝 반전을 이룬 채 경박하지 않은 경쾌함을 보여주는 모습의 처마선이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연상케 한다. 이 러한 점 때문에 장하리 삼층석탑, 은선리 3층석탑들과 같이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백제계의 석탑 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이탑의 제1층 몸돌에서는 금동 아미타 삼존불좌상이 발견되었고 5층 몸돌에서는 청동합속 에 들어있는 다라니경과 자단목등 여러 점의 사리장치가 나왔다. 임진왜란 때 크게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에 중건한 무량사의 대웅전은 법주사의 팔상전과 금산사의 미륵전, 화엄사의 각황전, 그리고 마곡사의 대웅보전처럼 특이하게 지어져 있다. 조선 중기의 양식적 특징을 잘 나타낸 불교 건축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인 2층 목조건 물은 밖에서 보면 이층 건물이지만 내부는 위아래층으로 나뉘어져 있지 않고, 하나로 통하여 있다. 아래층 평면은 정 면 5칸에 측면이 4칸이며 기둥의 높이는 14.7m나 된다. 중앙부의 뒤쪽에 불당이 마련되어 있고 그 위에 소조아미타 삼존불(5.4m) 이 모셔져 있고 좌우에는 관세음보살(4.8m)과 대세지보살이 배좌하고 있는데, 아미타삼존불은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불로는 동양제일을 자랑한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이 불사의 복장 유물에서 발원이 나와 1633년에 흙으로 빗은 아미타불임을 분명히 밝혀진 불상임 을 알 수 있다. 이 절에는 1627년에 그린 괘불과 무량사 미륵보살도와 동종이 있다. 절을 둘러보는 사이 햇살이 뉘엿 뉘엿해진다. 돌아가야지 그리고 갔다가 다시 오리라 떨어지지 않은 발길을 옮겨 만수산 무량사 라고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나설 때 매월당의 시 한수가 필름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림자는 돌아다 봤자 외로울 따름이고 갈림길에서 눈물을 흘렸던 것은 길이 막혔던 탓이고 삶이란 그 날 그 날 주어지는 것이었고 살아생전의 희비애락은 물결 같은 것이었노라고 늦은 가을에 성주사와 무량사를 거닐다. 196

197 늦가을 조선 권력의 중심부였던 북촌과 경복궁을 거닐어 본다 :27 늦가을 조선 권력의 중심부였던 북촌과 경복궁을 거닐어 본다. 북촌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권력의 핵심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고착화된다. 이러한 현상은 일제강점기 때에도 변함없이 유지되었으며 근현대사 를 장식한 많은 인물들이 이곳에 자리한 것도 이러한 이유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은 이곳 북촌에 쉽게 들어오기 어려워 남촌에 자리 잡게 된다.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사이에 자리하고 있어 궁궐과도 가깝고 풍수적으로도 궁궐의 배치와 같이 하는 길지임을 알 수 있다. 남산아래에 남 촌이 형성되었고 이곳은 정계진출을 꿈꾸는 을 신진 선비들이나 가난한 서생들이 주로 기거하는 곳으로 후기로 갈수록 주로 남인계열의 선비 들이 기거하는 곳이 되었다. 이곳에 비해 북촌은 권력을 장악한 층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후기에는 권력을 장악한 노론의 집거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청계천 물줄기로 보면 인왕산 부근의 상류근처에는 경복궁에 근무하는 아전들이 주로 기거했고 이곳을 윗대(상대)라고 했으며 물이 빠져나가 는 광희문, 동대문, 왕십리 근처를 아랫대(하대)라 하며 훈련원이 있기도 하여 주로 하급군인들이 기거했다. 이러한 공간적 배경으로 하급군 인들이 중심이 된 임오군란이 이곳을 기점으로 일어난다. 현재 북촌은 한옥의 아름다움을 그런대로 잘 간직하고 있다. 재미있고 특별한 개인 박물관들이 많이 자리하고 있으며 골목골목 돌담사이를 거닐다 보면 이런저런 추억들이 어우러져 시간가는 줄 모른다. 경복궁은 조선의 중심이었으며 상징이다. 경복궁은 한마디로 정도전의 모든 것이기도 했다. 조선을 계하고 한양을 건설한 그의 정치사상과 철학이 녹아 있는 곳이기도 하며 실 현도 해보지 못하고 좌절한 곳이 경복궁이기도 하다. 정도전은 신하가 정치를 하는 그런 세상을 꿈꾸었는데 이방원의 생각은 강력한 왕권을 원했기 때문에 그들은 경복궁의 주권을 놓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폐허가 된 경복궁을 재건한 대원군은 신하들에게 빼앗긴 왕권을 되찾고 싶었다. 심지어 신하들에 의해 택군이 되는 상황까지 이르렀으니 대 원군의 속내는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왕권을 회복하고 싶었다. 당연히 이러한 의도를 실현시킨 경복궁은 조일전쟁을 불탄 당시의 경복 궁보다 더 크고 화려하고 장대하게 복원된다. 정도전의 꿈이었던 신권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경복궁 절대왕권을 꿈꿨던 대원군이 재건한 경복궁 그 경복궁 늦가을 정취를 만끽하면서 거닐어 본다 북촌답사는 최대한 자유롭게 알아서 즐기는 답사로 진행하고자 합니다. 자유롭게 어슬렁거리며 마음껏 놀다가 알아서 끼리끼리 점심을 드시고 오후 1:00 지광국사 현묘탑 앞에 모이면 되겠습니다. 오후 1시부터 경복궁 답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경복궁 답사는 3시간 정도 소요가 되며 오후 4시정도에 마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늦가을 조선 권력의 중심부였던 북촌과 경복궁을 거닐어 본다. 197

198 오전 참석이 어려우신 분은 오후 일정에 맞추시면 되겠습니다 늦가을 조선 권력의 중심부였던 북촌과 경복궁을 거닐어 본다. 198

199 늦은 가을에 의주로를 고양과 파주 일대를 걷다 :20 늦은 가을에 의주로를 고양과 파주 일대를 걷다. 11월 첫 주 일요일인 11월 4일 하루 도보답사로 관서로라고도 부르는 의주로 일대를 따라갑니다. 조선시대 9대로 중 제 1로인 의주로는 서울에서 고양과 파주를 지나 평양을 거쳐서 의주에 이르고 다시 압록강을 건너 북경에 이르는 연행로입니다. 벽제관과 보광산 자락의 보광사, 용미리 석불, 임진각, 그리고 파주시 파평면의 화석정과 임진나루 일대를 돌아볼 예 정입니다. 조선 태종 때에 고봉산 자락의 고봉현과 덕양 현의 글자 하나씩을 합하여 고양현이 되었고 성종 2년인 1471년에 군이된 고양은 증보문헌비고 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큰 도로였던 관서로가 지나는 통로였다. 벽제관 한양에서 의주까지 이어졌던 관서로에는 큰 역관 12개가 있어서 조선과 중국을 오가던 사신들이 머물러 쉬었던 곳으 로서 벽제관은 그 첫 번째 역관이었다. 중국의 사신들은 서울로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예의를 갖추어 입성하는 것이 정례( 定 例 )였다. 현재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 사지에 세워져 임금이 몸소 중국의 사신을 영송하였던 모화관에 버금가는 중요한 곳이었 던 이곳은 조선초기에는 제릉에 친제하러 가는 길에 국왕이 숙소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원래의 벽제관터는 지금의 자리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있다가 1625년(인조3년)에 고양군의 청사를 이곳으로 옮기면 서 지었던 객관의 터였다. 이 때 옮겨지었던 벽제관의 모양새가 어떠했는지 추측하기는 어렵지만 동국여지승람 에 집이 크고 아름다우며 제도가 정장하매 질서가 있게 단단하여 한 가지도 빠진 것이 없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를 짐 작할 수 있다. 1930년대만 해도 남아있던 벽제관 건물이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하여 일부가 헐렸고 6.25 동란 때 모두 불에 타고 말았다. 예겸은 그의 시에서 길은 왕경( 王 京 )으로 돌아가는데 이 밤 기온이 차다. 두 행렬의 횃불이 말안장에 번지는 구나. 청산을 지나온 것이 얼마나 될까. 분명히 눈을 들어보지 못하였네. 라고 하였고 늦은 가을에 의주로를 고양과 파주 일대를 걷다. 199

200 기순( 祈 順 )은 초가에 우는 닭이 4경을 알렸는데 여구 가객을 재촉해 왕경을 가자한다. 많은 역부는 분주해 구름 모 으는 것 같고 여러 횃불은 얼기설기 불성이런가, 의심한다. 좋은 산은 길을 껴서 경치를 분별하기 어렵고 다리를 지나 흐르는 물은 소리만 들리네. 날이 환하게 밝자 가랑비 내 리는데. 황은을 선포하는 것이 이번 걸음에 있다. 하였다. 이렇듯 관서지방 사람들이 서울을 지나야 할 때에 꼭 들러야 했던 벽제관은 지금은 건물의 초석만 남긴 채 아침 햇 살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사적 144호라는 표지판이 무색하게 벽제관 터는 폐 건축 자재와 흉물스럽게 방치된 포장마차에 포위당한 채 번성했던 옛 시절을 부는 바람결에 들려주고 있다. (중략) 길은 고령산으로 이어진다. 벽제 삼거리에서 됫박처럼 가파르기 때문에 이름 붙었다는 됫박고개를 넘어서 보광사 ( 普 光 寺 )에 닿았다. 파주군 광탄면 영장리 고령산( 高 靈 山 ) 중턱에 세워진 이 보광사는 신라 진성여왕 8년(894) 임금 의 명에 의해 도선국사가 세운 절로 알려져 있다. 1215년(고종2년)에 원진국사가 중창하였고 우왕 14년(1388)에 무학대사가 삼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광해 군 4년에 설마와 덕인이 법당과 승당을 복원하였다. 1667년(현종8년)에 지간과 석견이 중수하였고 1740년에 영조가 대웅보전과 광음전, 만세루 등을 중수하였으며 근처 10여리 밖에 있던 생모 숙빈 최씨의 묘 소령원의 원찰로 삼으며 왕실의 발길이 잦아졌다고 한다. 그 때 절 이름도 고령사에서 보광사로 고쳐 부르게 된 것이다. 조선 말기에 쌍세전과 나한전, 수구암, 지장보살상과 산신각을 신축하였지만 한국전쟁 때 대웅보전과 만세루를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불에 타버렸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관음전, 나한전, 쌍세전, 산신각, 만세루, 법종각 등이 있고 영조대왕과 추사 김 정희의 현판 편액이 있다. 새로 지어진 보광사 법종각에는 1631년(인조)에 만들어진 범종이(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8호)이 걸려있다. 조선시대 범종양식을 제대로 보여주는 종이면서 크지는 않지만 매우 화려하면서도 다부진 느낌을 주는 종이다. 또 그 위로는 만세루에 걸려 있었던 목어가 이곳으로 옮겨와 걸려있다. 몸통은 물고기 모양과 같지만 눈썹과 둥근 눈, 튀어나온 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입과 사슴의 뿔까지 있어 용의 형상을 한 물고기와 같다. 조선 사찰자료 에 의하면 1896년(고종33년)과 1901년 사이에 중창된 것으로 보이는 대웅보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3호)은 당시 궁중의 여인네들이 불사에 동참했다고 한다. 대웅보전의 편액은 영조대왕의 친필이고 법당 안에 모셔진 비로자나삼존불은 1215년 중건 당시 원진국사가 조성해 모신 불상이라고 한다. 나는 만세루의 툇마루에 앉아 녹음 우거진 배경으로 그림처럼 펼쳐진 대웅보전을 바라본다. 정면 3칸에 측면 3칸 다포 계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높게 쌓인 축대 위에 올라앉은 대웅보전은 퇴색된 단청이 더욱 나그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또한 보광사 대웅보전의 법당 외벽 벽화는 다른 건물과 달리 흙벽이 아닌 목판을 대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다. 그 그 늦은 가을에 의주로를 고양과 파주 일대를 걷다. 200

201 림들이 다른 벽화와 다르게 부처님의 전생 담과 연화장 세계이고 어떤 면에서 보면 민화풍을 느끼게 한다. 그뿐인가. 원통전 외벽에는 80년대의 민중미술에서나 볼 수 있는 삽자루를 잡고 앉아있는 농민의 모습과 아들을 떠나 보낸 늙으신 어머니가 머리에 노끈을 두르고 앉아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영험이 있는 용미리 석불 용미리( 龍 尾 里 ) 일대를 내려 다 보고 있는 용미리 석불은 일명 쌍 미륵으로 불리면서 아기를 못 갖는 부인들이 공양 을 바치고 열심히 기도하면 영험이 있다고 믿었었다. 고려 중엽 때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불은 보물 제 93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연석에 균열이 생겨 두 개의 바위가 연하여 있음을 이용하여 불상을 조성하면서 머리 부분은 따로 조각하며 얹었다. 천연석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신체 각 부분의 비례가 잘 맞지 않아서 기형의 형태로 보이지만 얼굴에서 아래까지의 길이가 17.m에 얼굴 길이가 2.45m나 되는 거대한 체구와 당당함이 그러한 아쉬움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안동의 제비원 석불과 조성양식이 비슷한 이 불상에는 고려 선종과 원신 공주( 元 信 宮 主 )의 왕자인 한산 후( 漢 山 候 )의 탄생과 관련된 설화가 있다. 선종( 宣 宗 )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고민하던 어느 날 원신공주의 꿈에 두 스님이 나타났다. 그 스님은 우리들은 파주군 장지산에 있다. 식량이 끊어져 곤란하니 그곳에 있는 두 바위에 불상을 조각하라 그러면 소원을 들어주리 라 하였다. 기이하게 생각한 원신공주는 사람을 그곳에 보냈다. 꿈속의 말대로 거대한 바위가 있는 게 아닌가. 공주가 서둘러 불 상을 조작케 하는데 또 다시 꿈속에 나타났던 두 스님이 나타나 왼쪽 바위는 미륵불로 오른쪽 바위는 미륵보살로 조성하라 라고 이르 고 모든 중생이 이곳에 와서 공양하고 기도하면 아이를 원하는 자는 득남하고 병이 있는 자는 쾌차하리라 라고 말한 후 사라졌다. 불상이 완성되고 절을 지은 후 원신공주는 태기가 있어 한산후를 낳았다고 한다. 한편 오른쪽 불상 아랫부분 옆에 명 문이 새겨져 있어 고려시대의 지방화 된 불상 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예로 평가받고 있다. 답사의 여정은 임진각이다. 남북정상회담을 성공리에 끝낸 탓인지 임진각의 주차장에는 빼곡히 들어찬 자동차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먼저 자유의 다리로 향한다. 한국전쟁 때 파괴된 다리를 휴전 후 교환 포로들을 통과시키기 위해 다시 만들었던 가교가 자유의 다리였다. 당시 북 쪽에 포로로 잡혀있던 12,773명이 돌아오면서 자유의 다리라고 명명된 저 다리를 건너 7km를 가면 판문점에 이른다. 그러나 그때부터 저 다리는 누구도 건널 수 없는 다리가 되었다. 이 임진각에는 서울에서 장단을 거쳐 신의주까지 이 어졌던 경의선 열차가 철마는 달리고 싶다 라고 외치며 그날 그때부터 멈춰서 있다. 나는 6월 25일 한국전쟁 50주년이 되는 그 역사의 현장 임진각 뙤약볕 벤치 아래 앉아 50년 동안 침묵한 채 서있는 열차를 바라보며 김지하 시인의 시 한편을 떠올린다. 늦은 가을에 의주로를 고양과 파주 일대를 걷다. 201

202 녹슨 기관차 가득히 꽃을 김지하 당신이 내게 올 수 있다면 고원에 만발한 한 아름 나리꽃 안고 산철쭉도 안고 그보다도 더 아리따운 환한 웃음 안고 내게 올 수 있다면 내가 나가 반겨 당신이 아닌, 당신 몸이 아닌 당신의 꽃들과 웃음을 껴안고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내가 이렇게 원주에서 해남으로 해남에서 원주로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오락가락할 이유가 없겠지 낡아빠진 석탄 차 녹 슬은 기관차 지금은 국민학생 들 구경거리로 전락해 버린 차 그 차 휴전선에 잘린 경의선 경의선 화통 그것을 타고 내가 당신에게 갈 수 있다면 그 기관차를 새파란 동백잎, 빛나는 유자 무더기. 향기 짙은 치자꽃으로, 무화과들로 가득 채우고 싶다. 그리고 못난 내 얼굴에라도 함박꽃 같은, 달덩이 같은 째진 웃음지어 만나고 싶다 나 오늘 눈 내리는 원주 거리에 다시 서서 다시금 남쪽으로 돌아갈 자리에 서서 거리를 질주하는 영업용 택시를 보며 경의선 끊어진 철로 위에 홀로 남겨진 기관차 속에 홀로 남을 민족의 외로움을 생각하며 소주 한 잔을 국토 위에 붓는다. 아 아 꽃들이여 너희들의 영광은 언제 오려는가. 김지하 시인이 녹슨 기관차 가득히 꽃을 꽃은 채 가고자 했던 북녘 땅을 나는 이른 아침 무궁화 열차를 타고서 달리 늦은 가을에 의주로를 고양과 파주 일대를 걷다. 202

203 고 싶다. 그래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사리원과 평양을 거쳐 묘향산과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이라고 썼던 김소월의 고향 땅을 밟고 싶다. 그리고 백두산을 북녘 땅에서 오르고 싶고 서울에서 금강산까지 천천히 걸어서 가고 싶다. 우리나라 옛길의 가장 중요한 도로였던 의주로를 따라가며 그 길에 얽힌 이야기를 바람결에 전해들은 이번 기행에 많은 참여바랍니다. 늦은 가을에 의주로를 고양과 파주 일대를 걷다. 203

204 섬진강에서 돌아와 다시 강물소리를 그리워하다 :18 섬진강에서 돌아와 다시 강물소리를 그리워하다. 매년 봄이면 봄, 가을이면 가을 한 두 차례 씩 가는 섬진강이지만 유독 날이 맑고 물도 푸르른 강이었습니다. 내가 강에 마음이 홀려서 산지 벌써 40여년, 강은 언제나 보아도 설레는 그리움의 대상입니다. 강이 그렇다면 강을 사이에 두고 펼쳐진 산은 어떨까요, 모든 산들이 저마다 품고 있는 사유 思 惟 와 침묵의 언어를 조금씩 풀어놓고, 더 이상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바로 산 山 이지요, 어떤 때는 오래 사귄 친구처럼 낮 익고, 어떤 때는 처음 보는 사람 같이 낮 선 산, 그 산들을 D.H. 로렌스는 <인간과 인형>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산들까지도 당신에게 꾸민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들의 오만한 높이는 내가 미워하는 것이지요. 거기에 감격한 듯 정상을 의젓하게 걷는 사람들을 나는 미워하지요. 나는 그들이 정상을 멈추고 소화 불량을 일으킬 때까지, 그들에게 얼음을 집어 삼키도록 하고 싶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미워합니다. 그것은 질색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당신은 조금 미친 것 같군요. 하고 그 여자는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그 산이 당신보다 더 높은가요? 아닙니다. 산은 나보다 높지 않지요.! 그는 말했다. 나보다 높지 않죠. 나도 그렇게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오만이지만, 가끔, 어느 때는 그러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섬진강에서 돌아와 다시 강물소리를 그리워하다. 204

205 산이 산을 겹겹이 에워싸고 펼쳐지듯, 강이 온몸을 풀어헤치고 유유히 흘러가듯, 나도 그렇게 아무런 걸림이 없이 흘러서 바다에 이르고 싶은 것입니다. 어둠이 내린 강변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런 설렘과, 초조, 그런 것들까지도, 다 내려놓고, 내가 서서히 어두워져 칠흑 같은 어둠이 되어 정신을 잃어버리는 그런 시간이 내게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잠시 잠들었다가 깨어난 한 밤에 가까운 듯 먼 듯 들리는 그 강물소리, 임진년 월 초여드레 섬진강에서 돌아와 다시 강물소리를 그리워하다. 205

206 울릉도에서 보낸 며칠 :16 울릉도에서 보낸 며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살고자 하면서도 그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시간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계산하는 때가 있다. 울릉도에서 강릉으로 정시인 오후 다섯 시에 출발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다섯 시 40분으로 변경되다가 보니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 과연 미리 예약한 밤 12시차를 탈 수 있을까? 만약 바람만 적게 불고, 그래서 파도만 잔잔하다면 세 시간, 다시 버스를 타고 서울까지 두 시간 40분에 도착하면 되는데, 배는 8시 40분에 도착했다. 이순임 선생의 내외분의 차에 실려 강릉을 떠난 시간, 9시 20분, 한 번도 쉬지 않고, 터미널에 도착해서 11시 40분으로 앞 당겨 타고 전주로 왔다. 원래 예정대로 버스를 탔더라면, 하마터면 찜질방 신세를 지고, 아침 첫차를 탔어야 하는데, 이순임 선생 두 내외분께 거듭 감사를 드린다. 울릉도에서 보낸 사흘, 처음이 아니고 두 번째 답사였지만, 모든 장소는 언제나 처음처럼 다가온다. 성인봉에서 만난 그 구름의 향연, 아침 숙소 바로 앞에서 바라본 이틀간의 해맞이, 독도나 천부리가는 길도 그렇지만 울릉도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음식들일 것이다. 명이나물이나 삼나물도 그렇지만 그 더덕의 맛, 아무런 더덕의 향기를 음미할 수가 없는 것이 울릉도의 더덕 맛이다. 제 아무리 육지의 그 향기 높은 더덕을 갖다 심어도 금세 더덕의 향기가 사라져 버린다는 그 마법의 열쇠가 중국에서 전해 내려오는 여러 말들에 잇다. 그 중 하나가 울릉도에서 보낸 며칠 206

207 귤이 회수를 지나면 탱자가 된다. 는 말이다. 식물들이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떨까? <괴테의 에커만과의 대화> 제 2부에 그에 대한 것이 실려 있다....각 지방의 풀이나 나무가 그 지방 주민의 정서에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있네. 그리고 그것은 확실한 사실이지. 일생동안을 높고 엄숙한 큰 떡갈나무에 둘러 싸여 지내는 사람들이, 명랑한 자작나무 밑을 유유히 산책하며 즐기는 사람들하고 전혀 다른 인물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그러나 이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우리와 비교하여 그다지 감수 적이지 않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네. 그들은 대체로 각자의 생각대로 힘차게 살아가고 있어서 별로 외 계와 영향을 벋지 않지. 따라서 한 민족의 성격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종족의 본래의 성질을 고려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네. 그럼에도 확실히 땅과 기후, 그리고 식물과 일상적인 영위 같은 것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지, 또한 태고의 종족들은 대체로 그들에게 적합한 토지를 선택했다고 생각할 수 있네. 그러므로 그 땅과 그 인간은 태어나면 서부터 그 성격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지. 인간과 인간을 어느 곳에서 태어나느냐 하는 것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게도 저마다 다른 특질이 조금씩은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미인과 바람과 향나무가 많은 울릉도, 옛 우산국에 언제 다시 갈지는 모른다. 하지만, 떠나온 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다시 그리운 것은 사흘간 내 눈을 어지럽혔던 구름 탓인지도 모르겠다. 동행했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임진년 시월 초나흘 울릉도에서 보낸 며칠 207

208 만개한 가을에 남도에서 꽃 무릇(상사화)을 보다 :11 만개한 가을에 남도에서 꽃 무릇(상사화)을 보다. 가을이구나, 빌어먹을 가을, 우리의 정신을 고문하는, 우리를 무한 쓸쓸함으로 고문하는, 가을, 원수 같은, 나는 너에게 살의를 느낀다. 가을 원수 같은, 정현종 시인이 노래한 <가을 원수 같은> 그 가을의 초입에 피는 꽃이 상사화라고 불리는 꽃무릇입니다. 조금 늦었지만 아직은 조금 덜 늦은 가을, 이번 주 목요일인 27일에 번개기행으로 꽃 무릇이 무리지어 피어 온산천을 물들이고 있는 아름다운 고장 함평의 용천사와 영광 불갑사를 찾아갑니다. 불갑사는 우리 나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파한 진나라의 마라난타가 침류왕 1년 384년에 창건했다고 한다. 도갑사, 봉갑사, 불갑사의 3갑사를 창건한 그가 셋 중 이 사찰이 으뜸이라 하여 불갑사라 이름 붙였다는 설이 전해져 오는데, 대웅전 용마루에 반듯이 탑을 얹어놓은 마라난타의 사찰 건축양식이 그 후 중창 시에도 그대로 이어져 온 것으로 짐 작된다. 불갑사 고적기와 조선 중기 때의 성리학자 수온 강항선생이 지은 불갑사 중수기를 보면 이 절은 충렬왕 3년에 도승 진각 국사가 중창하였다. 그 때의 규모는 500칸이었고 승방이 70여개 소, 낭료400여주, 누고가 90여척이었고, 수백여 명의 스님이 앉아 있을 수 있는 승방이 있었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전부 소실되어 버리고 전일암만 남아 있던 것을 몇 번에 걸쳐 중수하였고 영조 40년과 1909년 부분 보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불갑사는 대웅전, 팔상전, 칠성각, 명부전, 요사채를 비롯한 절간 건물이 열다섯 채가 있어 그 규모가 작지 않다. 보 물 830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웅전은 정면 3간, 측면, 팔각지붕에 다포계 건물의 매우 화려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대웅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문살 모양이다. 소슬 빗살문으로 중앙 어간에는 연꽃무늬와 국화무늬를 수려하 게 조각하여 내소사 대웅전의 아름다운 문살을 연상시키지만 그와는 또 다른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바쁜 길 손들을 사로잡는다. 대웅전 후면 벽화의 숙작(졸고 있는 까치)같은 보기 드문 작품과 소요사에서 옮겨 왔다는 사천왕 상, 그리고 열한 살 먹은 소녀가 썼다는 인상적인 현관 불갑사 가 있는 불갑사를 뒤로 하고 산길을 올라갔다. 불갑산은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동쪽에 위치한 산이다. 영광에 있는 크고 작은 산 중에 제일 높은 산이라 하여 모악 산으로 불렸는데 산의 중턱에 불갑사가 세워지면서 불갑산이라고 하기 시작했다. 영광의 진산으로 호남정맥이 입암산 에서 서남지맥을 뻗어 방장산 문수산을 일으켜 세우고 달리다가 우뚝 솟은 산이다. 해발 516미터 이며 영광읍에서 약 만개한 가을에 남도에서 꽃 무릇(상사화)을 보다. 208

209 10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멀리서 보면 산의 형태가 늙은 쥐가 밭을 향해 내려오는 형세를 닮았다고 한다. 이 불갑산 에는 인도공주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전설을 안고 있는 참식나무가 자라고 있다. 천연기념물 112호로 늘 푸른 참식나 무는 울릉도와 따뜻한 남쪽지방에서만 자란다. 산길을 따라 도토리, 참나무, 싸리나무 등의 잡목사이를 헤쳐 산 속으로 한참 들어갔다. 동백나무가 우거져 있다. 이 곳이 바로 유명한 불갑산 동백나무숲이다. 선운사나 오동도의 동백과 견줄 바는 없으나 이른 봄 희끗희끗한 잔설 사 이로 내민 붉은 동백꽃은 지나는 길손들의 발길을 묶어놓고도 남았으리라, 칡넝쿨과 참대나무 우거진 길을 헤치고 1.5킬로미터 올라가니 수줍은 새악시처럼 해불암이 나타났다. 불갑산에 있는 여러 암자 중 유일하게 서해낙조를 바라볼 수 있는 해불암( 海 佛 庵 )에서 석간수로 목을 축였다. 가파른 산등성이로 땀을 훔치며 오르니 불갑산 정상인 연실봉이다. 연밥을 닮았다는 연실봉( 蓮 實 峰 )에서 바다를 보았다. 동해 일출을 보고 싶거든 경주 토함산을 올라가고 서해낙조를 보려거든 불갑산 연실봉에 오르라던 누군가의 말은 틀림이 없을 듯 싶다. 함평평야와 나주평야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고 동북쪽으로 백암산, 추월산, 태청산의 여러 봉들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 다. 구름 속으로 민족의 성산 지리산이 아스라하게 보일 듯 싶고, 남쪽으로 영암 월출산이 보인다. 그리고 곽재구의 아름다운 시편에 나오는 송이도, 각이도, 낙월도 등 이름도 모르는 무수한 섬들을 칠산바다가 자식처럼 끌어 안고 있 다. 영광읍쪽으로 백수 대절산이 외롭고 바로 그 아래 촛대봉과 나팔봉이 초록빛으로 옷을 갈아 입은 채 서로를 시새 움하듯 자리 잡고 있다. 만개한 가을에 남도에서 꽃 무릇(상사화)을 보다. 209

210 오대산 옛길과 구룡령 옛길을 걷다 :05 오대산 옛길과 구룡령 옛길을 걷다. 가을이 가장 아름다운 10월 단풍놀이를 하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의 한 곳인 오대산 상원사 길과 구룡령 옛길을 걷습니다. 속 초에서 동해바다의 푸르름을 만끽하고, 폐사지인 선림원지, 그리고 가을빛과 함께 할 이번 행사에 참여 바랍니다. 월정사 들머리에서 차에서 내린 일행들은 전나무 숲길을 걸어간다. 죽죽 뻗은 전나무 사이로 사람들이 오가고 나무 사이로 보이는 붉은 단풍 아직도 월정사 부근은 가을이 많이 남았구나. 생각하며 월정사에 접어든다. 조계종 제4교구의 본사인 월정사의 창건유래가 삼국유사 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 ( 慈 藏 律 師 )가 중국 오대산(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친히 보았으나 범계 梵 戒 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한 노승이 찾아와 범계를 가르쳐주고, 또 불사리를 주면서, 신라 하서부 河 西 府 에 일만 문수 文 殊 가 있으니 그곳에 봉안하라. 하므로 귀국하여 봉안할 곳을 찾는 중에 이곳을 보니, 중국의 오대산과 비슷하므로 오대산이라 이름 짓고 탑을 세우고 가지고 온 불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또한 민지( 閔 漬 )가 쓴 봉안사리 개건사암 제일조사 전기( 奉 安 舍 利 開 建 寺 庵 第 一 祖 師 傳 記 ) 에 인용한 대산본기( 臺 山 本 記 ) 에는 이때 그가 머물던 곳이 바로 현재의 월정사 터이 며, 자장은 훗날 다시 8척( 尺 )의 방( 房 )을 짓고 7일 동안 머물렀다고도 전하고 있어 이 절은 643년 자장이 건립했다고 볼 수 있다. 문수보살이 머무는 성스러운 땅으로 신앙되고 있는 이 절은 한국전쟁 당시에 깡그리 불타버리고 역사의 흔적으로 남 아있는 것은 별로 없다. 월정사에는 대적광전 앞 중앙에 서있는 팔각구층석탑(국보 제 48호)과 그 탑 앞에 두 손을 모아 쥐고 공양하는 자세 로 무릎을 꿇고 있는 석조보살 좌상(보물 제 139호) 뿐이다. 적광전 앞 석탑은 자장율사가 건립 하였다고 전해오지만 고려 양식의 팔각 구층석탑을 방형 중심의 삼층 또는 오층 이 대부분이었던 신라 시대의 석탑으로 보기에는 아무래도 좀 무리가 있고 고려 말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자장율사가 월정사를 세웠다는 월정사 중건 사적비 (이휘진 1752년)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 하는 이유는 고려시대에 와서야 다각다층석탑이 보편적으로 제작되었으며, 하층 기단에 안상( 眼 象 )과 연화문이 조각 되어 있고, 상층기단과 피임돌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만주를 비롯한 북쪽 지방뿐만이 아니라 묘향산 보현사에 팔각 십삼층석탑이 있고 여러 곳에 팔각다형탑이 있는 것을 보면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으며, 탑의 양식으로 보아 탑을 세웠던 때를 아무리 올려 잡 아도 10세기 이전까지는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것 같다. 그 앞에 석조보살좌상이 있다.(...) "상원사에 조선 제 7대 임금인 세조에 얽힌 일화가 있다. 오대산 옛길과 구룡령 옛길을 걷다. 210

211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임금의 자리에 오른 세조가 괴질에 걸린 것은 바로 그 뒤였다. 병을 고치기 위해 이곳을 찾 아온 세조가 월정사를 참배하고 상원사로 올라가던 길이었다. 물이 맑은 계곡에서 세조는 몸에 난 종기를 따르던 사 람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멀리 떨어져서 몸을 씻고 있는데, 동자승 하나가 가까운 숲 속에서 놀고 있었다. 세조는 그 아이를 불러서 등을 밀어달라고 부탁한 뒤에 어디 가서 임금의 몸을 씻어주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고 말하자 그 아이 또한 임금께서도 어디 가서 문수보살을 직접 보았다는 말을 하지 마시오 라고 대답하고는 어디론가 사라 져 버렸다. 깜짝 놀란 세조가 두리번거리며 찾았지만 문수보살의 모습은커녕 아무것도 보이지를 않았다. 그런데 이상 한 것은 그토록 오랜 동안 괴롭히던 종기가 씻은 듯이 나아 있었다. 감격에 겨운 세조는 기억을 더듬어 화공에게 동 자로 나타난 문수보살의 모습을 그리도록 하였고 그 그림을 표본으로 나무에 새겨 만들었다는 문수동자 상 을 상 원사의 법당인 청량선원에 모셨다. 상원사를 찾은 참배객들은 이 불상(국보 221호)에 정성을 드리고 또 드리는데, 다 음해에 상원사를 다시 찾은 세조는 다시 한 번 고양이로 인해 이적을 경험하고 그 인연으로 이 절을 크게 중창했다. 현재의 건물은 1947년에 금강산에 자리 잡고 있는 마하연의 건물을 본 따 지은 것이지만, 이름 높은 범종이나 석등은 그 때에 조성된 것들이다." 응복산 자락의 선림원지, 응복산(1.360Km)과 만월봉(1.281Km) 아랫자락에 위치한 선림원지로 들어가는 미천골은 고적하기 이를 데 없다. 미 천골은 설악산국립공원 남쪽 미천골자연휴양림 안에 있는 계곡으로 사람의 발길이 적어 산천어 등 희귀어가 살고 원 시림이 무성하다. 옛날 선림원에 스님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을 때 절에서 밥을 짓기 위해 쌀 씻은 물이 계곡으로 하 얗게 흘러내려 미천골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 만해도 비포장 길이었던 길이 포장도로가 되고 길 아래로는 사시사철 맑은 계곡 물이 쉴 새 없이 흐른 다. 56번 국도에서 후천을 건너면서 가을 단풍이 온통 산천을 노랗고 빨갛고 새푸르게 물들이고 미천골 자연휴양림 매표소에 이르러 바라본 앞산에 연푸른 빛의 자작나무 숲이 너무 눈이 부시다. 매표소에서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동 무삼아 얼마쯤 걸어가자 산비탈에 축대가 쌓여있고 그 뒤에 사림사 沙 林 寺 터라고도 부르는 선림원지 禪 林 院 址 가 있다. 응복산 아랫자락에 위치한 선림원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804(애장왕5년)년에 순응법사가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1948년에 이 마을 사람이 집을 지으려고 땅을 파다가 큰 종을 발견하였는데, 범종의 높이는 1.3m였고, 둘레는 3.5m였 다. 이 범종에 정원 2년 4월( 貞 元 二 年 四 月 造 成 )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신라 원성왕 元 聖 王 2년인 786년에 순응법사가 만든 것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범종이었다. 마을에서 종각을 짓고 보관하고 있는데, 문교부에서 억지로 월 정사로 보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전쟁 당시 월정사와 함께 불에 타 그 잔해만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 다. 조성 내력과 연대가 새겨져 있던 선림원지 동종은 오대산 상원사의 동종, 성덕대왕 신종과 더불어 통일신라시대 의 가장 빼어난 유물 중의 하나였다. 그렇다면 선림원지를 창건한 순응법사는 누구인가. 순응( 順 應 )법사는 어느 때 태어나고 어느 곳에서 입적했는지 기록 이 남아있지 않지만 802년 해인사를 창건한 사람이다. 일찍이 출가한 순응법사는 신림( 神 琳 )의 지도를 받다가 766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고승들로부터 불경을 배우고 선을 공부하였다. 그 뒤 보지공의 제자를 만나 <답산기>라는 책을 얻었 고 보지공의 묘소에서 7일 동안의 선정에 들어가 법을 구하였다. 그 때 묘문이 열리면서 보지공이 나와 친히 설법하 고 의복과 신발을 전해주며 우두산 서쪽 기슭에 대가람 해인사를 세우라고 지시하였다. 귀국한 순응법사는 가야산으 로 들어가 사양문의 인도로 현재 해인사 자리에 초암을 짓고 선정에 들었다. 그 무렵 애장왕의 왕후가 등창병이 나서 오대산 옛길과 구룡령 옛길을 걷다. 211

212 고생하고 있었지만 어떤 약도 소용이 없었다. 구룡령가는 길, 현 위치에서 묘반정까지 1.04Km 술 반쟁이까지 0.2Km 술반쟁이에서 횟돌 반쟁이까지 1.10kM. 횟돌반쟁이에서 옛 길 정상까지 0.4Km 맑게 흐르는 시내를 건너자 입구부터 S자 길이 이어지고 산은 온통 단풍 천국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고갔던 지 길은 움푹 패여 있다. 길옆에는 조릿대ㅑ라고 부르는 산죽이 드문드문 서 있고, 조금 오르자 아름드리 나무 한 그 루가 뿌리가 뿝힌 채 길을 기로질러 누워 있다. 지나는 사람들에게 겸손함을 가르치기 위해서 일부러 누웠는지는 몰 라도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지나갈 수가 없다. 밤새 떨어졌는지, 길을 휘덮은 나뭇잎을 미안감도 느끼지 않고 밟고 지나가는 나그네여, 노란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활짝 미소 짓고 들어오는 길을 지나가는 나그네여, 길은 저마다 자유롭게 그늘 드리운 나무숲 사이로 이어져 있다. <구룡룡 옛길> <옛날 삭도> 푯말이 보이고 천천히 걷 는 숲길, 저마다 한적하고 고적하게 이어진 길을 걷는 재미에 빠져 힘들다는 내색도 하지 않는다. 나뭇잎이 수북하게 쌓인 길옆에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마음까지 내려놓는다. 더러는 낙엽 위에 눕고 더러는 낙엽을 이불삼아 덮고 더러는 앉아서 세상 이야기에 정신을 놓는다. 우리가 오르고 있는 `구룡령 옛길'은 양양과 홍천을 연결하는 옛길로 양양, 고성지방 사람들이 한양을 가기 위해 넘 나들던 고갯길이었다. 산세가 험한 진부령, 미시령, 한계령보다 산세가 평탄하여 이 길을 선호하였다고 한다. 특히 강원도의 영동과 영서를 잇는 중요한 상품 교역로였고, 양양, 고성 지방 선비들이 과거를 치르러 한양으로 가며 명칭에서 유래하듯 용의 영험함을 빗대어 과거 급제를 기원하며 넘나들던 길이라 하며, 구룡령이라는 이름은 '아홉 마리 용이 고개를 넘어가다가 지쳐서 갈천리 마을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고갯길을 넘어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 라 전하는 등 역사와 전설이 살아 전해오는 옛길이다. 그런 연유로 문화재청이 명승 제29호로 지정한, 이 구룡령 옛길은 옛날 사대부들과 혼인한 신랑 신부가 가마타고 가 던 고갯길이자 영동과 영서를 잇는 가장 짧은 고개였다. 한 발 한 발 올라가는 만큼 산이 높아질수록 나무들은 세상의 짐들을 내려놓은 채 가볍게 서 있는 것을 바라보자 문 득 정현종의 시인의 시 한편이 생각난다. "제 몫으로 지고 있는 짐이 너무 무겁다고 느껴질 때 생각하라. 얼마나 무거워야 가벼워지는지를. 내가 아직 자유로 운 영혼, 들새처럼 영혼의 힘으로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 짐이 아직 충분히 무겁지 못하기 때문이다" 드디어 헐벗은 나무들 사이로 구룡령 옛길 정상이라는 표지판이 보이고 명계리까지는 아직도 멀다. 능선길에 키작은 조릿대가 우리를 환영하듯 서 있고, 길고긴 능선 길을 헤치고 나와ㅓ 계단 길을 내려서자 멀리 보이 는 도로 표지판 <여기는 구룡령 정상입니다. 해발 1013미터> 그리고 저 멀리 그리운 버스가 보였다. 그리움의 뜻을 아는 이라야. 나의 슬픔을 알 수 있어라! 는 괴테의 말이 문득 떠오르는 그 사이에 버스는 떠났 다. 신정일의 <가슴 설레는 걷기 여행>중에서 오대산 옛길과 구룡령 옛길을 걷다. 212

213 조선시대 옛길 관동대로를 일곱 번 째를 걷는다 :04 조선시대 옛길 관동대로를 일곱 번 째를 걷는다. 2012년의 정기기행 관동대로가 일곱 번째로 막을 내립니다.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사무소를 출발하여 삼척, 동해, 강릉, 대관령, 평창, 횡성, 원주, 양평을 지나 남양주와 구리를 지나면 동대문에 이릅니다. 일곱 번째로 진행된 이번 마지막 구간은 양평군 옥천면 아산리에서 출발하여 양수리를 지나고 다산 정약용 선생의 자취가 서린 능내리와 덕소 을 지나 서울에 이를 것입니다. 마지막 구간에 많은 참여바랍니다. 한적한 남한강 길에 접어들자마자 양평군 옥천면 아신리에 접어든다. 아오와 신대의 이름을 병합한 아신리 기곡마 을은 터굴로도 부르는데, 아세아 신학대학교 근처인 아신굴에서 멀지 않은 빙곡 마을에는 옛날 얼음을 저장하는 빙고 가 있었다고 한다. 잔고개 남쪽에 있는 세우자리마을을 지나 고읍교라고 부르는 큰 와검다리를 지나자 식당들이 줄을 이어 있다.(...) 이곳 양수리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한강이 된다. 두 개의 큰 물길이 만나는 곳이므로 두물머리, 두머리 등으 로 불리는 양수리의 옛 이름이 병탄 幷 灘 이었던 듯싶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군 서쪽 45리 지점에 있다. 여강 麗 江 물과 용진 龍 津 물이 여기에서 합류하기 때문에 병탄이 라고 한다. 고 실려 있다. 이곳 병탄을 두고 고려 말의 문신인 이색 李 穡 은 흐름을 따라 내려가니 뱃사공이 한가하도다. 험한 곳을 만나면 경 각 사이에 놀라 외친다. 늦게 사장 沙 場 에 닿으니 바람과 이슬이 찬데, 등잔불 하나가 깜박깜박하여 구름 산을 비친다.. 고 하였고 여말선초의 문신인 권근은 이렇게 노래했다. 작은 배 일렁인다. 파란 물결에 조용히 건너니 한길 같구나. 지난 일 아득해 온통 꿈인데 부생들 어느 때나 한가하려나. 세상의 영화는 이름 때문이고 벼슬의 오르내림에 마음조이네. 조선시대 옛길 관동대로를 일곱 번 째를 걷는다. 213

214 영천( 潁 川, 중국 고사에 나오는 물 이름)에 가서 귀를 씻지 못하니 밝은 강에 비치는 얼굴이 부끄럽다. 예로부터 강가나 냇가 또는 좁은 바닷목의 배가 건너다니는 곳을 나루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주의 웅진 熊 津 을 곰나루라고 한 것이 가장 이린 시기의 나루에 관한 용례이다. 배로 사람이나 짐을 나르기 때문에 나르는 곳 에서 나루 라는 말이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 한자로 표현할 때는 도 渡 (삼전도). 진 津 (. 정암진. 주문진)이라 하였고, 조 금 더 큰 것을 포 浦 (다대포. 삼천포)라고 하였으며, 대규모의 바닷가 나루는 항 港 (부산.) 이라고 하였다.(...) 현재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 75-1번지로 변했지만 다산이 살았던 그 당시는 경기도 광주군 초부읍 마현리였다. 서재와 독서 그리고 침잠하기에 알맞고 좋다 하여 여유당이라고 불렸다는 다산의 생가는 1925년 여름의 홍수 때 떠 내려가 1975년 새로 복원한 것이다. 옛 맛을 느낄 수 없는 다산의 집 뒤편 여유당( 與 猶 堂 ) 이라 새긴 빗머리 돌을 지나 작은 언덕에 오르면 정약용과 그의 아내인 숙부인 풍산 홍씨와 합장한 묘가 나타난다.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다산의 묘 앞에서 보면 팔당호의 출렁이는 물결이 어른거린다. 긴 유배생활에서 돌아온 다산의 삶은 쓸쓸하기만 했다. 남쪽 천리 밖에서 노닐었지만 어디 간들 이 좋은 언덕을 얻 을 수 있을까? 라고 노래하면서도 그의 시는 쓸쓸하기만 했다. 강촌의 밤은 저물어 어두운데, 개짓는 소리 성긴 울타리를 끼고 흘러라. 물이 차가워 별빛은 더욱 고요치 못하고 산이 멀어서 눈빛이 더욱 맑구나. 먹고 살 긴 대책은 전혀 없고 글 쓰는 방에는 짧은 등잔대 하나 남모를 근심으로 밤잠은 아니 오고 어찌하면 여생을 탈 없이 마칠까? 다산이 18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함께 활동했거나 사랑했던 사람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 니었다. 남겨진 재산 또한 별로 없었다. 회갑을 맞은 다산이 자신의 일생을 정리한 자찬묘지명 에서, 내가 서술한 육경사서로 자기 몸을 닦고 일표이서 로 천하국가를 다스릴 수 있으니 본말을 갖춘 것이다 라고 자부하였지만 알아주는 사람은 적고 꾸짖는 자가 많으니 만약 천명 天 命 이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비록 한 횃불로 태워버려도 좋 조선시대 옛길 관동대로를 일곱 번 째를 걷는다. 214

215 다 고 하며 그의 삶과 사상이 수용되지 않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가난 속에서 지조를 굽히지 않고 더욱 학문을 연마하면서 때로 청평산, 용문산 등지로 유람을 다니며 보신 保 身 에 철저하였는데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쓸쓸한 적막과 고적감 뿐이었다. 유락 流 落 된 7 년 이래 문을 닫고 홀로 웅크리고 앉아 있노라니 머슴종과 밥 짓는 계집종조차도 함께 말도 걸어주 지 않더이다. 낮 동안 보이는 거라고는 구름과 파란 하늘 뿐이요, 밤새도록 들리는 거라고는 벌레의 울음이나 댓잎 스치는 소리뿐 이라오... 라고 정약용은 친구에게 토로했으며 책을 안고 돌아온 지 3년이나 되었지만 함께 읽어줄 사람도 전혀 없습니다 하고 가슴에 사무친 외로움을 토해냈 다. 특히 우리 집 대문 앞을 지나면서도 들어오지 않는 거야 이미 정해진 관례이오니 원망하지 않으나 천하에서의 괴 로움은 남은 기쁜데 나는 슬퍼함이며 가장 한스러움이란 나는 그를 생각하지만 그는 나를 까맣게 잊고 있는 경우랍니다... 라고 다산이 썼던 글처럼 그 당 시 내노라 하던 사람들은 다산의 집을 지나치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지나갔다. 그는 깊고도 깊은 고독 속에서 흠흠신서 30권과 아언각비 3권을 저술했다. 다산은 유배에서 풀려 마재로 돌아 온지 17년만인 1836년(헌종 2년) 2월 22일에 다산은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뒷산에 묻혔다. 덕소 삼패동을 지나 덕소를 조금 남겨두고 한강을 보자 남양주대교가 한 부분만 남겨두고 거의 잇닿아 있다. 언제쯤에 저 다리가 완공 되어 차들이 다닐 수 있을까? 하고 발길을 옮기는 사이에 남양주시 덕소읍에 이른다. 본래 남양주시 와공면의 지역으로 라는 이름이 붙은 덕소는 현재 서울 인근의 한강변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아파트가 즐비한 곳이다. 덕소 남쪽에 있는 마을이 말무더미 또는 율계라고도 부르는 뱅깨인데 뱅깨 동남쪽에 있는 산이 높이가 90.6m인 금대 산 金 垈 山 이다. 뱅깨에서 도곡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금대산 고개이다. 이곳 도곡리에 중종반정의 일등공신인 박원종 朴 元 宗 의 묘소와 그를 모신 사당인 세덕사 世 德 祠 를 비롯한 순천 박씨들의 묘역이 있다. 덕소 남서쪽에 옥호저수형 玉 壺 貯 水 形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안동김씨 김번 金 의 묘가 있다. 안동이 본향인 김번이 과거에 급제하고서 양주 땅에 터를 잡고 살던 남양홍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처가의 근거지인 덕소에 그의 무덤을 쓰게 되었는데, 그 자리가 원래 홍씨의 산이었다. 그런데 김번에게 시집간 딸이 그 시 백부 되는 학조대사 學 祖 大 師 의 말을 들어 그 남편의 무덤을 썼는데, 옥병에 물을 담은 형국이라고 하여 유명한 무덤이다. 그의 후손이 앞서 언급한 김상헌과 김상용이다. 덕소 일대에 조선 초기와 중기 그리고 조선후기 까지 조선을 뒤흔들었던 박원종. 김육. 김상헌 등 기라성 같은 사람 들의 묘소가 즐비하다. 이렇게 조선의 고관대작들이 이곳 남양주 덕소 부근에 삶터를 정하고 사후에도 머물고자 했던 것은 이중환이 <택리 조선시대 옛길 관동대로를 일곱 번 째를 걷는다. 215

216 지>에도 언급했듯 강이 흐르고 산천이 빼어난 길지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수택동에 있던 들판인 개무기 들과 구리시장을 지나며 길을 잃어 길을 묻는다. 길( 道 은) 여기 저기 도처에 있는데, 길에서 길을 묻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길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길은 아는 사람이 앞서가야 한다. 는 말이 있지만 아는 사람이 없는 탓이다. 나그네가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길을 묻는다. 그것은 여행지에서 나그네에게 일어나는 일상적인 풍경이다. 우리 속담에 알아야 면장 이라는 말이 있듯이 낮선 길에서 나그네가 길에게 길을 묻는 것이 도시에서의 길 찾기 이다. 타향에서 온 나그네는 바로 길을 묻는 사람이며, 장소의 이름을 묻는 사람이다. 길 가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수수께끼 같은 수많은 장소들 속에서 어디가 어디인지를 분간하는 일, 지도나 풍 경들의 색깔과 선 線 들 속에서 자신이 서 있는 현재 위치를 헤아리는 일이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눈대중의 척도 尺 度 에 따라 계산해서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노력을 들여 야 할지를 예측하는 일이다.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그 세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 다시 말해서 그 세계를 명명하는 것이다. 도보 여행자 는 아직 어느 것 하나 그 정확한 좌표가 정해져 있지 않은 사람의 차원 속에서 길을 가는 사람이다. 그 차원 속에서 그가 더듬어가는 장소들은 한결같이 미지의 장소들이며, 마치 미완성 상태에 있는 것만 같은 장소들 이다.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에 실린 글이다. 왕숙천 그래도 이 근처 덕소에 살고 있는 고혜경 씨의 기지로 제대로 길을 찾았고, 구리시 환경사업소를 지나 왕숙천에 걸린 토평교를 건넌다. 왕숙천( 王 宿 川 )은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內 村 面 ) 신팔리( 薪 八 里 ) 수원산 계곡에서 발원하여 남서쪽 으로 흘러 남양주시를 지나 구리시에서 한강으로 흘러드는 한강의 지류로 길이는 37.34km이다. 왕숙천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유래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상왕( 上 王 )으로 있을 때 팔야리( 八 夜 里 )에서 8일을 머물렀 다고 해서 왕숙천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 세조를 광릉에 안장한 후 선왕( 先 王 )이 길이 잠들다 라 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내가 지금 떠나고 있는 서울은 한국인에게 무엇인가?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밀집되어 있는 곳이 서울 이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번 서울에 뿌리를 내리면 극히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시 나가서 살고 싶지 않은 살만한 곳(?)이 서울이다. 서울을 떠나는 것은 유람이나 벼슬살이 그리고 유배를 당했을 때 등 몇 가지 이유 속에 먹고 살 수 없을 정도로 가세 가 기울게 되면 서울을 떠났다. 조선시대 옛길 관동대로를 일곱 번 째를 걷는다. 216

217 조선 후기인 1890년대 우리나라를 답사하고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을 지은 영국의 지리학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여사의 글을 보자. 모든 한국인의 마음은 서울에 있다. 지방 관리들은 수도에 따로 저택을 갖고 있으며, 연중 많은 기간 부임지의 직 무를 경시해도 된다고 믿고 있다. 대부분의 토지 소유자들은 수도에 살고 있는 부재 지주자들이며, 그들은 지대를 받기 위해 지방으로부터 민중들을 쥐 어 짠다. 여행 중의 음식 값과 숙박료를 댈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일 년 중에 한 번이나 두 번 서울로 걸어오며, 어느 계급일 지라도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단 몇 주라도 서울을 떠나 살기를 원치 않는다. 한국인에게 서울은 오직 그 속에서만 살아갈만한 가치가 있는 곳으로 여겨진다. 이러다가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서울에 와서 살고 아침마다 KTX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가 논물도 보고 콩밭도 매 고 할 날이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서울, 우리의 서울, 아침마다 푸른 꿈이 넘쳐흐르는 서울, 그렇게 한국인들이 살고 싶어 하는 그 서울을 나와 몇 사람의 도반이 지금 떠나고 있다 그래, 떠나고 있다. 고 읊조리며 떠난다. 부슬부슬 가을비가 내리는 길을 조금 걷자 우측에 동묘가 보인다. "이곳 동대문 밖을 지나서 역사 속을 걸어갔던 사람이 조선사대의 빼어난 문장가인 송강 정철의 형 자 滋 였다. 을사사화가 일어났을 당시 정철의 아버지 정유침은 사온령 司 令, 즉 궁중에서 쓰는 술을 빚는 사온서 司 署 의 책임 자였고 그의 형 자 滋 는 이조정랑이었다. 계림군은 모진 고문 끝에 자복하여 능지처참을 당했고, 아버지 정유침은 함경도 정평 定 平 으로, 맏형인 자는 전라도 광양으로 귀양길에 올랐다. 잠시 귀양에서 풀려났던 정유침은 명종 2년 가을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다시 붙잡혀 경상도 영일로 귀양을 가게 되 었고, 전라도 광양에 귀양 가 있던 형은 더 멀리 보내야 된다는 상소문이 빗발치자 함경도 두만강 가에 있는 경원 慶 源 으로 옮겨 가게 되면서 서울에 당도하였다. 성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동대문 밖을 지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 나온 그의 어머니는 자기의 속옷을 벗어 입히면 서 아들이 싸움터에 나갈 때 어머니의 옷을 입고 가면 빨리 돌아온다. 는 옛말이 있다 하고 가슴을 어루만지며 통 곡을 하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고 정철의 형 자 는 경원으로 가는 도중에 장독이 도져 죽고 말았다. 조선시대 옛길 관동대로를 일곱 번 째를 걷는다. 217

218 삼남대로와 영남대로를 다 걷고부터 가슴속에 큰 짐이 하나 얹혀 져 짓누르고 있었다. 그 무거운 짐이 <대동지지> 에 나타난 동남지평해삼도로 東 南 至 平 海 三 道. 즉 路 평해로 平 海 路 라고 부르는 관동대로였다. 북한 쪽 답사는 언제 추진될지 모르지만 남한에 있는 이 길을 빨리 걸어야 할 텐데, 어떻게 한다. 달력을 놓고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마땅치가 않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몇 달이 지나고 몇 년이 속절없이 지나갔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정해년(2007)을 넘기 지 말자! 그리고 이왕이면 무르익은 가을 만산홍엽을 바라보며 걷자, 하고 날짜를 결정했던 것이 관동대로 도보답사 였다. 그런데, 혼자 걸었던 삼남대로나 네 명이 함께 걸었던 영남대로와 달리,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도반 道 伴 들과 걷기 로 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프리랜서인 나야 일정만 비우면 되지만 다른 사람들은 금 쪽 같은 휴가를 내야 되기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 땅 걷기 정예 도반들과 나서게 되었는데, 이번에 열나흘간의 대장정에 나서는 사람들은 불과 몇 개월, 또는 년 전 까지만 해도 이 하늘 아래 어디서 살고 있는지도 모르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운명적인 관동대로의 도반이 된 것은 2005년 가을에 결성한 우리 땅 걷기 모임 때문이었다. 작은 것만 보던 사람은 천지가 크다는 것을 보지 못 한다. 는 옛말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행을 많이 한 경우가 드물다. 여행을 가도 주마간산, 아니 주차간산처럼 돌아다니기는 하지만 어떤 주제(, 옛길. 한국의 강. 국토종단의 도보답사) 계획을 세워서 두 발로 한 발 한 발 걸어간다는 것은 생각 속에서만 머무르고 실천은 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나마 계획을 세웠다가도 집안에 조그마한 일만 생기면 포기를 하거나 다음으로 미루게 되고 결국 사람은 내일을 기다리다 묘지로 간다. 는 러시아 속담처럼 끝내 물 건너간 계획이 되고 만다. 지금 사람들만 그러한 것이 아니고 옛사람들도 그러했다. 서울에서 불과 수백 리 밖에 안 되는 금강산을 답사한 사람 이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신기재 申 企 齋 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을까? 젊을 때는 병이 많고, 지금은 늙었으니, 인생 백 년 동안을 금강산 한 번 못 보았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답사를 통해서 먼 저 간 사람들을 부러워만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들을 동참할 방법 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품게 되었고 그래서 만들게 된 것이 <우리 땅 걷기>였다. 관동대로 마지막 구간, 양평군 옥천면 아신리에서 서울 동대문까지 걸어가고자 하는 분은 미리 신청하십시오 조선시대 옛길 관동대로를 일곱 번 째를 걷는다. 218

219 남한강 변 단양에서의 하룻밤 :00 남한강 변 단양에서의 하룻밤 "덧없는 이 한 때 남김없는 짤막한 시간 머언 산과 산 아득한 불빛 켜질 때 둘러봐도 가까운 곳 어디에도 인기척 없고 어스름만 짙어갈 때 오느냐 이 시간에 애린아 내 흐르는 눈물 그 눈물 속으로 내 내쉬는 탄식 그 탄식 속으로 네 넋이 오느냐 저녁놀 타고" 김지하 시인의 애린이라는 시의 일부분입니다. 남한강변 단양에서의 하룻밤 나는 먼 기억 속으로 길을 떠납니다. 어쩌면 기억 속에서도 아스라하거나 아니면 기억 속에서도 잊혀진 기억 속의 나. 나는 안개 자욱한 강변을 헤매는 중이고 그 길이 어떠한 희망도. 기다림도 아니 기다리는 '애린'도 없는 그래서 흐르는 눈물이 빗줄기처럼 흐르던 남한강 변 단양에서의 하룻밤 219

220 말 그대로 젊망 뿐인 시절이었지요. 그때. 나는 안개낀 강변을 걸으며 무엇을 갈망하고 무엇을 그리워 했을까요 바람 결에 물살은 출렁이며 흘러가고. 그 추억 속에 잠긴 시간이 저렇게 초침소리 속에 사라져가는 것을 가만히 주시하고 있을 뿐인 시간. 지금 어둠이 커튼처럼 드리운 남한강에도 그날처럼 바람은 무심하게 불고 있을까요? 임진년 구월 열사흘 남한강 변 단양에서의 하룻밤 220

221 <가슴 설레며 걷는 천년 고도 전주 옛길> :58 <가슴 설레며 걷는 천년 고도 전주 옛길> 제 8회 길 문화축제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에서 전주시의 후원을 받아 여는 제 8회 길 문화축제가 <가슴 설레며 걷는 천년 고도 전주 옛길.>이라는 주제로 2012년 10월 13일(토요일)과 14일(일요일)에 전라북도와 전주시 일대에서 펼쳐집니다.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회원들과 <전주 천년 고도 옛길을 걷는 사람들> 그리고 전국에 있는 길과 걷기를 사랑하는 회원들을 초청하여 전주의 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가슴 설레는 전주의 길을 걷다> 라는 주제로 펼쳐질 이번 도보답사는 천년 고도 전주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전주시 일대에서 에서 펼쳐질 예정입니다. 승암산과 기린봉, 승암산 僧 岩 山 은 중바우산이라고도 부른다. 발산 동쪽에 있는 바위 모양으로 된 산을 말하는데, 벼랑의 모양이 마치 고깔을 쓴 중들이 늘어선 것 같이 보인다고 하여 중바우 산, 또는 승암 僧 岩 산이라고 불렀다.천주교인들이 치명자산이 라고도 부르는 이산은 산비탈을 따라 조성된 천주교 순례지로 명성을 얻고 있는 곳이다. 1784년 호남 지역에 처음으 로 천주교를 전하고 국사범으로 처형된 유항검의 아들 유중철(요한)과 아내 이순이(루갈다)가 신유박해 때 순교하여 산 정상에 묻혀 있다. 이들 부부는 독실한 신앙생활을 위해 4년 동안 동정을 지키다 순교한 것으로 유명하다. 부인 이순이의 세례명을 따 루갈다산이라고도 불린다 <동고산성> 전라북도 전주시 교동 승암산에 있는 산성으로, 성 안에 계곡을 끼고 산꼭대기를 둘러 성벽을 쌓았다. 이 곳은 후백제 견훤의 왕성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추정하기로는 후백제의 별궁터로 여겨진다. 승암산의 절벽에 의지 하여 서북쪽으로 수구( 水 口 )를 뚫었으며, 남북으로는 날개모양의 익성을 설치한 독특한 형식이다. 성 전체의 둘레는 m이고, 북쪽 익성의 길이는 112m, 남쪽 익성의 길이는 123m이다. 동서축의 길이는 314m, 남 북축의 길이는 256m이고 성벽의 높이는 약 4m이다. 현재 동 서 남문터와 배수구문, 건물터, 우물터 시설이 성 내 부에 남아있으며, 중방( 中 方 ), 관( 官 ) 자를 새긴 암키와 조각이 발견되었다. 이 산성에서 1980년 성 내부를 조사할 때 건물터에서 전주성 이라는 글씨가 쓰여진 연꽃무늬 와당이 발견되었다. 예전에는 승암산이라고 불렸던 치명자산은 산비탈을 따라 조성된 천주교 순례지로 명성을 얻고 있는 곳이다. 1784년 호남 지역에 처음으로 천주교를 전하고 국사범으로 처형된 유항검의 아들 유중철(요한)과 아내 이순이(루갈다)가 신 유박해 때 순교하여 산 정상에 묻혀 있는데, 이들 부부는 독실한 신앙생활을 위해 4년 동안 동정을 지키다 순교한 것 으로 유명하며 부인 이순이의 세례명을 따 루갈다산이라고도 불린다 기형도의 자취가 서인 황방산 자락의 서고사.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이름난 작가나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문학기행을 선호하는데, 전주 의 서쪽에 있는 황방산 기슭에 자리 잡은 서고사가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기형도 시인의 자취가 남아 있다. 서고사는 후백제를 창건한 견훤이 지은 네 개의 절 중 하나라고 한다. 전주에는 6시에 내렸다. 전화를 넣으니 강석 경(숲속의 방의 작가) 선생이 크게 기뻐하셨다. 수박 한덩어리와 복숭아, 그리고 담배 몇 갑을 사고 황방산(누른 삽살 개가 달을 보고 짖는다는 산 이름) 서고사를 향해 택시를 탔다. 운전기사가 공부하러 가느냐고 물었고 나는 공부하는 분을 찾아 간다고 말했다. 택시로 20분 못 가 길모퉁이에서 소매없이 헐렁한 셔츠에 밀짚모자를 쓴 강선생이 튀어나 왔고 나도 택시에서 내렸다. 절로 올라가는 길에 전주대 국문과에 다닌다는 청년 선혜 법우를 만나 동행했다. 그도 서고사에 거하고 있다고 한다. 서고사에 가는 길은 복숭아 밭과 개망초, 그리고 이름모를 꽃들과 풀들, 나무들, 옥수 수와 담배밭, 고구마밭으로 가득하였다. 복숭아들은 가지가 휘어져 여러 개가 땅속에 반쯤 묻혀있었고, 크고 단단한 바 위들이 길을 막았다. 절에 도착해서 의성스님(30대 초반의 비구니 주지스님)과 상좌스님, 그리고 보살(의성스님의 <가슴 설레며 걷는 천년 고도 전주 옛길> 221

222 생모라고 들었다.)님과 절에서 사는 소녀 하욱 등을 만났고, 보살님 아들인 서울서 숭실대 공과대 다닌다는 청년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얼굴을 씻고 절 옆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올라가 강과 이것저것 이야기를 했다. 박생광 선생 이야 기, 그리고 소설 가까운 골짜기 이야기.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바위에서 바라다 보이는 들판은 거대한 바다로 보였다. 먼 데 호수가 있었고 농가들과 송전탑이 내려다 보였다. 태양 도 싸늘히 식은 붉은 빛으로 대지위에 떨어지는 중이었다. 구름들이 가득했다. 바람이 불어왔고, 어느덧 7시 40분이었 다. 대웅전 옆방에서 비빔국수를 들었다. 강선생이 사는 방은 나한상을 모신 곳 바로 위쪽이었는데 조금만 바람이 불 어도 뒤집혀질 것처럼 종이곽으로 만든 쪽배 같았다. 들창을 여니 커다란 두꺼비가 있었고 언젠가 귀신이 우는 소리 를 들었다는 말을 강선생이 또 해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평상 위에 앉아 의성스님 등과 함께 작설차(참새의 혀처럼 조그만 풀잎)와 솔차(솔잎과 설탕을 버무려 쩌낸 것)를 들고 이런저런 인생살이 이야기를 했다. 스님은 참 매력있는 분이었다. 그는 근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 고, 그가 부러워 나는 슬퍼졌다. 조용조용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으며 중앙일보 출판국 안길모 차장 이야기를 했다. 안순희 선생의 무기 이야기, 눈이 점점 감겨져 큰일이라고 이야기했고, 분청사기 굽는 법도 화제에 올랐다. 밤 10시 가까이 지나 스님과 봉숭아 물들이느라고 한껏 들떠있던 하욱도 잠자리에 들고, 나와 강선생, 숭실대학생, 선혜법우 와 넷이서 종교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선혜법우가 동사섭을 말해주었고, 가식과 욕망을 없애고 진실을 향해 사는 삶을 말해주었고 가식과 욕망을 없애고 진실을 향해 사는 삶을 이야기했을 때 나는 그것을 행복, 자기구원으로 깊이 인식하였고 감동했다. 그래서 나는 종교가 공포에서 비롯된 스스로 성지되기의 길 임을 조심스럽게 말했고, 욕 망과 망집이 없는 평정된 삶은 어쩌면 불행한 삶일 것 이라고 피력함으로써 의심이 많은 자 특유의 혼란과 쟁투, 근심에의 탐닉을 통한 유한자로서의 생 읽기 의 버릇을 드러내고 말았다. 밤은 깊었고, 이미 해가 진 뒤 오래였으니 하늘엔 별이 총총했다. 유성 두 개나 너무도 길게 떨어져 우리 모두 탄성을 질렀지만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비행기 의 굉음이 터져 나와 모두 크게 웃고 말았다. 속세란 무엇이며 욕망이란 무엇인가. 욕망이 없는 삶은 이미 속세가 아니고 욕망과 화해하고 싸우는 자가 수도자가 되는 길은 속세를 버리는 길이다. 속세 속에서의 구원의 몸짓은 자기구원이 아닌 가식으로 가득 찬 이웃 구원일 것이 다. 서고사의 밤은 깊고 어디선가 소쩍새들이 끊임없이 울었다. 복순이라는 이름의 통통한 강아지는 코언저리가 불에 탄 듯 검뎅이였고 해탈이와 다롱이로 불리는 고양이들은 밤중에도 자꾸만 바삐 움직였다. 의성스님이 겨울 눈밭 위에 서 잠자던 고집쟁이 산토끼 이야기를 했었다. 낙천주의자 토끼, 두고 온 서울이 너무 멀다. 나는 너무 좁다. 처음 대구에 내렸을 때나 전주에 내렸을 때 감당하기 힘들었던 막막감. 그토록 증오했던 서울, 내가 두고 온 시간과 공간의 편안함에 대한 운명적 그리움. 난 얼마나 작은 그릇이냐. 막상 그 작은 접시를 벗어났을 때 나는 너무 쉽게 길을 잃는 것이다. 그러나 서고사의 밤은 깊다. 풀벌레 소리 하나만으로 나는 이 밤을 새도록 즐길 수 있다. <기형도의 기행산문> 중 <모악산 마실길> 서곡에서 잘 닦인 황방산 길을 넘어 시인 기형도의 자취가 서린 서고사에 이르는 길도 좋지만 전주의 명품길은 모악 산 마실길이다. 누구나 세상이라는 강물을 숨가쁘게 헤쳐가다가 지쳐서 쉬고 싶을 때 불현듯 가고 싶은 곳이 한군데 쯤은 있을 것 이다. 나에게는 모악산 자락의 귀신사가 그런 곳이다. 전주에서 삼천이라고 부르는 세내다리를 건너 용산리 황소리 독배를 지나 청도재를 넘으면 유각 마을이고, 그 아 <가슴 설레며 걷는 천년 고도 전주 옛길> 222

223 전주에서 삼천이라고 부르는 세내다리를 건너 용산리 황소리 독배를 지나 청도재를 넘으면 유각 마을이고, 그 아 래를 좀더 내려가면 청도리에 닿는다. 무성한 감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길은 마치 어린 날에 외갓집 가는 길의 풍경을 자아낸다. 그리고 작은 개울을 건너면 몇 년 전만 해도 담쟁이 넝쿨이 수북히 덮은 나무 창틀 사이로 조선소 한 마리 가 빼꼼이 얼굴을 내밀면서 낯선 손님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해부터 소가 사라져 버린 외양 간에는 허접 쓰레기만 그득하고 몇 걸음옮기면 귀신사에 닿는다. 귀신사( 歸 信 寺 )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세운 절로 창건 당시에는 국신사( 國 信 寺 )라 불렸으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정복지를 교화하여 회유하기 위해 각 지방의 중심지에 세웠던 화엄십찰( 華 嚴 十 刹 ) 중 하나로서 전 주 일대를 관할하던 큰 절이었다. 의상의 명으로 세워진 화엄십찰은 소백산의 부석사와 중악공산의 미리사, 남악 지 리산의 화엄사, 강주 가야산의 해인사, 웅주 가야협의 보원사, 계룡산의 갑사, 삭주의 화산사, 금정산의 범어사, 비슬 산의 옥천사, 전주 모악산의 국신사 등으로 알려져 있는데, 의상대사 혼자의 힘이라기 보다는 의상대사의 제자들이 힘을 합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지금은 그 옛날 여덟 개의 암자를 거느렸고, 금산사까지 말사로 거느렸다 는, 귀신사의 위용을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사기에 따르면 고려 때 원명대사가 중창하면서 절 이름이 구순사( 拘 脣 寺 )로 바뀌었다가, 조선 고종 10년에 고쳐 지으 며 귀신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몇 년 전에 절 이름을 발음이 귀신 과 같다고 하여 국신사로 바꾸었다가 근래 다시 귀신사로 되돌아왔다. 고려 말에는 이 지역에 쳐들어왔던 왜구 300여명이 주둔했을 만큼 사세가 컸으나 지금은 대 적광전과 명부전. 요사채 등의 건물, 대적광전(보물 826호) 뒤편의 계단을 따라 올라간 곳에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 로 추측되는 삼층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62호)과 엎드려 앉은 사자상 위에 남근석이 올려진 석수, 그리고 멀리 청 도리 입구 논가운데에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부도(전라북도 유형문화재63호)가 있을 뿐이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이 귀신사를 지켜보았을 오래묵은 느티나무 아래 돌계단에 앉아 언제나처럼 귀신사 일대를 내 려다 보았다. 몇 그루 자라난 차나무의 잎들은 아직도 짙푸르고 대적광전 지붕 너머로 백운동 마을은 평화롭다. 문득 한줄기 바람이 뺨을 스치듯 지나가고 그 바람결에 파우스트 속에서 린쎄우스의 말 한 구절이 떠올랐다. 세상은 있는 그대로 내 마음에 드는구나. 그렇다 이 절은 모두가 어지럽게 널려 있고 제 멋대로 내 던져진 듯 하면서도 자 세히 보면 질서정연하다. 절 뒤편에 수북히 피어난 봉숭아꽃들도 꽃들이지만 요사채를 가린 대나무 울타리에 피어난 여러 색깔의 나팔꽃들, 그 리고 대적광전 한켠에 눈부시게 만개한 붉은 목백일홍 꽃들과 더불어 무수히 들어오는 이 꽃 저 꽃들이 눈을 어지럽 힌다. 그러한 꽃들 속에 또 하나 피어있는 아름다운 꽃이 숨은꽃 이다. 귀신사는 1992년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양귀자의 숨은 꽃의 무대로, 문학기행차 오는 사람들이나 나처럼 조용함과 그윽함에 빠진 사람들이 즐겨찾는 조용하기 이를 데 없는 절이지만, 한 번 찾은 이는 그 은근한 맛을 잊지 못해 다시 찾게 되는 절이다. 절 입구에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조병갑과 쌍벽을 이루었던 균전어사 김창석의 비가 세워져 있는 데, 무엇보다 이 절에서 가장 사람들을 잡아끄는 마력을 지닌 것은 삼층석탑이 서있는 그 언덕에서 바라다보이는 건 너편의 마을 풍경일 것이다. 고즈넉히 혹은 그림처럼 보이는 백운동 마을에 증산 강일순의 제자였던 안내성이 세운 증산대도회를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더러는 세상을 하직하였거나 더러는 떠나가 서 스무 채 남짓한 마을 사람들이 언젠가 올 그 날을 기다리며 살고 있을 뿐이다. <지워진 이름 정여립> 중 건지산의 한 맥이 서쪽으로 가다가 덕지( 德 池 지금의 덕진연못)가 되었는데 매우 깊고 넓다. 전주에 덕진연못이 만 들어진 것은 풍수지리설이 활기를 띄던 고려 때부터였다고 한다. 전주의 땅이 서북쪽으로 열려 있기 때문에 땅의 기 <가슴 설레며 걷는 천년 고도 전주 옛길> 223

224 운이 음지인 서북쪽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이 지역 사람들이 동쪽의 건지산과 서쪽의 가련산 사이에 커다란 못을 팠다고 한다. 연못의 절반을 뒤덮는 연꽃과 빼어난 조경 때문에 시민공원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덕진연못에서 흘러내린 물은 송천동을 지나 전주천의 물과 합한 뒤 만경강으로 들어간다. 위봉산 아래쪽 동상면 사봉리에서 발원한 만경강은 대아리를 지나 고산현을 거쳐 봉동에 이르고, 삼례를 지나 목천포 다리를 거치고 청하를 거쳐 망해사 부근에서 서해로 들어간다. 전주에 대한 택리지 의 기록을 보자. 주줄산 이북의 여러 골짜기 물이 고산현을 지나 전주 경내에 들어와 율담( 栗 潭 ) 양전포( 良 田 浦 ) 오백주( 五 百 洲 ) 등의 큰 시내가 되어 농사에 이용되기 때문에 땅이 아주 기름지다. 그리고 벼 생선 생강 토란 대나무 감 등의 생산이 활발해서 천 개의 마을 만 개의 마을의 삶에 이용할 생활필수품들이 다 갖추어졌고, 서쪽의 사탄( 斜 灘 만경강 의 옛 이름)에는 생선과 소금을 실은 배가 자주 통한다. 전주 관아가 자리 잡은 곳은 인구가 조밀하고 물자가 쌓여 있어 경성과 다름이 없으니, 하나의 큰 도회지이다. 노령 북쪽의 10여 고을은 모두 좋지 못한 기운이 있지만 오직 전주만 맑고 서늘하여 가장 살 만한 곳이다. 모악산 승암산 건지산 서방산 등 크고 작은 산들이 솟아 있는 전주 근교에는 큰 강이 흐르지 않고 현재 소양 천 전주천 삼천 등이 만경강으로 유입되어 흘러갈 뿐이다. 그러나 금강 상류에 용담댐이 건설되기 전까지는 대아 저수지, 경천저수지 등의 크고 작은 저수지들이 전주 익산 김제 일대의 수원지 역할을 하였는데, 용담댐의 물이 유역 변경을 하게 된 2000년 말부터 금강의 물을 일부분 받아들인 후 물 부족 문제가 해결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 에 전주를 두고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곳이 반반이며, 민간풍속이 장사를 좋아한다 고 기 록되었는데, 전주의 당시 호수는 1564호이고, 인구는 5829명이며, 군정은 시위군 77명, 진군이 148, 선군이 826명이었 다. 전주를 굽어보는 남고산성 전주 북쪽에 위치한 남고산성( 南 固 山 城 )은 전라북도 전주시 동서학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축산성으로 사적 제 294호로 지정되어 있다. 둘레는 3,024미터로 현재 성문지( 城 門 址 )와 장대지( 將 臺 址 )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 있다. 일명 견훤산성( 甄 萱 山 城 ) 혹은 고덕산성( 高 德 山 城 )이라고도 불리는 남고산성은 고덕산의 서북쪽 골짜기를 에워싼 포곡형 ( 包 谷 形 ) 산성이다. 이 성은 901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도성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현존하는 성벽은 임진왜란 때 전주부윤 이정란( 李 廷 鸞 )이 이곳에 입보( 入 保 )하여 왜군을 막을 때 수축하였다. 한 때 전주는 견훤이라는 사람이 세운 한 나라의 수도였다. 견훤은 기울어져 가는 통일 신라 말에 태어나 백제의 부 활을 위해 백제라는 나라를 열었었다.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 미륵의 나라를 열고자 했었고 삼한을 통일하여 더 큰 세상을 꿈꾸었던 그는 집안의 내분으로 역사의 승자가 아닌 패자로 낙인찍힌 채 역사의 뒤안길로 숨어들고 말았다. 남국의 인재가 몰려 있는 전주 조선 초기의 학자인 성임 成 任 은 전주를 두고 안팎으로 산과 강이 전주의 영역을 휘감아 돈다. 하였는데, 풍수지리 상 전주를 행주형( 行 舟 形 )이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한 배 가득 싣고서 순풍에 돛을 달아 항로에 오른 배를 지그시 잡아 매어둔 형상이란 뜻이다. 윤곤 尹 坤 의 그의 기에서 나라의 발상지이며, 산천의 경치가 빼어나다. 라고 하였으며 서거정 기( 記 )에서 (전주 <가슴 설레며 걷는 천년 고도 전주 옛길> 224

225 는) 남국의 인재가 몰려 있는 곳이다. 물건을 싣는 데 수레를 사용하며, 저자는 줄을 지어 상품을 교역한다 라고 기 록하였던 곳이 바로 전주였다. 이 전주에서는 수많은 인물들이 태어났다. 세조 때 우의정을 지낸 이사철( 李 思 哲 )과 명 종 때 우의정을 지낸 황헌( 黃 憲 ),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정언신,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이상진이 그들이며 기축옥사 ( 己 丑 獄 死 ) 혹은 <정여립의 난>의 주인공 정여립이 선조 때의 사람이었다. 전주의 역사와 문화가 켜켜이 서린 전주의 길을 걷게 될 이번 <제 8회 길 문화 축제>에 참여하여 전주의 역사와 문 화, 그리고 길이란 무엇인가를 느끼시기 바랍니다. 행사 내용 10월 13일(토요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는 중인리에서 청도재 넘어 귀신사에서 백운동 가는 길을 걷고, 오후 2시에는 승암산(천주교의 성지 치명자가 있어서 치명자 산이라고도 부름)에서 후백제의 별궁터인 5코스인 <승암 산의 치명자 성지와 동고산성을 따라 가는 기린봉길>을 걷고, 마지막으로 제 1코스 중의 한 곳인 덕진공원을 걸을 예정입니다. 10월 14일(일요일)에는 7코스인 <전주의 서쪽에 자리 잡은 황방산> 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일찍 작고한 기형도 시인 의 자취가 남아 있는 서고사를 품에 안은 황방산길은 남녀노소 누구나 걸을 수 있는 야산입니다. 전주의 서쪽에 자리 잡은 이산은 아름답고 한적한 길도 운치가 있지만 전 주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고, 질펀하게 펼쳐진 호남평야를 바라볼 수 있는 아름다운 산입니다., 오후 1시 30분부터 전주 10코스인 <한벽당에서 전주 천을 따라 만경강까지 이어지는 전주 천길>을 걸으면서 <길 문화 축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전통 상여놀이와 판굿을 벌이고, 서신교까지 이어지는 길을 걷고서 <제 8회 길 문화 축 제>를 마무리할 것입니다. 이번 제 8회 길 문화축제는 늦가을에 전주의 역사와 길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년 10월 13일(토) 아침 7시 출발 14일까지 서울 양재역 12번 출구, 전주는 13일 아침 9시 출발 1박 2일. 75명(서울과 전주)버스 2대 하루기행 토요일(13일) 하루. 서울 45명,(버스 1대) 일요일(14일) 하루. 서울 90명(버스 2대) 2. 어디로 모이나요, 전주로 3, 참가비: 1박 2일 4만원. 하루(토. 일요일) 2만원 전주는 하루 기행 1만원 단 3인 이상은 신청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슴 설레며 걷는 천년 고도 전주 옛길> 225

226 4, 전주 천년고도 옛길,(모악산 자락길, 승암산(치명자 산)과 기린봉 길, 황방산 길, 전주천 길, 덕진공원 5. 안내 도반: 신정일(우리 땅 걷기 이사장) <신 택리지>의 저자 6,참가비는 (국민은행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로 참가비 입금 7,처음 참가자는 주민번호를 ( 문자) 우리 땅 걷기 전화( )로 알려 주십시오. 참가 신청 입금 후 취소 시 환불 규정 1, 행사일로 부터 5일전 까지 취소 시: 은행 수수료를 공제 후 전액 환불합니다. 2, 행사일 4일전부터 2일전까지 : 참가비 50%를 공제후 환불 합니다. 3, 행사일 2일전부터 당일까지 취소 시(미 참가 포함); 환불액 없습니다. 위와 같이 행사 참여 취소 시 행사비 환불을 명심하시어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회비를 입금하시고 대기자로 기다리셨다가 참여를 못하시는 회원님들의 불편함을 없게 하고자 함이오니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가슴 설레며 걷는 천년 고도 전주 옛길> 226

227 임진년 만추에 만나는 제주도 :37 임진년 만추에 만나는 제주도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에서 임진년(2012) 11월(11월 8일(목)에서 11일(일요일까지)에 제주를 갑니다. 원래 2005년부터 실시해온 <길 문화 축제>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한 달 앞당겨 지는 바람에 만추 晩 秋 에 제주도를 답사하는 좋은 기회 가 되었습니다. 제주의 억새가 하얗게 나풀거리고, 노란 감귤이 올래(올레) 길과 돌담을 수놓는 계절에 제주의 길과 제주의 역사를 만날 분들은 미리 신청하십시오. 북쪽으로 큰 바다를 베개 베고 남쪽으로 높은 산에 대하고 한라산 북쪽은 제주읍이다. 이곳은 옛 탐라국으로 신라 때 부속국이 되었다. 원나라에서 방성에 해당하는 지역이라 하여 말과 소를 놓아 먹여서 목장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지금도 좋은 말이 생산된다. 제주읍 동쪽과 서쪽에 있는 정의 旌 義 대정 大 靜 두 고을은 풍속이 제주와 대략 비슷하다. 목사와 두 고을 수령이 예 부터 본토에서 왕래하였으나 풍파에 표류하거나 빠져 죽은 일이 없고, 또 조정에 벼슬하던 사람이 여기에 많이 귀양 왔으나 역시 풍파에 떠밀리거나 빠진 일이 없었다. 이것은 왕의 덕화 德 化 가 멀리 미쳐서 온갖 신이 받들어 순응하였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중환 李 重 煥 의 <택리지 擇 里 志 > 산수 山 水 편에 실린 제주도에 관한 글이다. 한 시절 전만 해도 제주도 사람들은 육지의 가장 북쪽에 자리 잡은 백두산을 한 본 보기를 소원했다. 그와 반대로 육지 사람들은 아열대 식물이 자라는 한반도의 남쪽 바다 건너에 있는 제주도를 보고자 했다. 지금은 서울에서 한 시간 남짓이면 올 수도 있고 돌아갈 수 도 있는 제주도를 두고 사람들은 여러 이름으로 부르며 그리워한다. 낙원의 섬, 하늘의 축복을 받은 섬 휴양지, 누구나 가보고 싶고, 살아보고 싶은 그리움의 섬 이 제주도 라고, 그러나 역사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보면 눈물과 한숨이 없이는 가까이 할 수 없는 한 많은 땅이 제주도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기쁨은 모래알처럼 작았고, 시련은 바위처럼 컸다 라는 말로 제주도를 비유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아무리 제주도와 관계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제주도 바다의 역사를 다 읽었다면 그 역사를 제주 의 눈물, 눈물, 눈물 이라고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제주 해협의 바다는 곧 제주 사람들이 역사에 바 친 눈물의 양으로 출렁거린다. 고 말하기도 했다. 임진년 만추에 만나는 제주도 227

228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제주가 고향인 고득종 高 得 宗 은 제주의 형승을 <홍화각기 弘 化 閣 記 >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북쪽으로 큰 바다를 베개 베고 남쪽으로 높은 산에 대하였다. 집집마다 귤과 유자요 곳곳마다 준마로다. 제주는 멀리 남해 가운데에 있으며, 큰 산이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이 솟아 있기 때문에 한라 漢 拏 라고 부른다. 한라산 은 은하수를 붙잡을 수 있다 하여 붙여졌다. 다른 이름으로는 원산 圓 山 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생김새가 활 모양으로 굽어져서 둥글기 때문이다. 제주는 조선 태종 16년인 1416년에 세 고을로 나누어졌다. 동쪽을 정의라 하고 서쪽을 대정이라고 하여 나누어 다스 렸다. 옛날에는 동영주. 탁라. 또는 탐라라고도 불렀으며, 시대에 따라 바꿔 부른 것이 사적에 기록되어 있다. 정이오 鄭 以 吾 는 그의 서 序 에서 본토에서 탐라를 바라보면 큰 바다 아득하고 먼 가운데에 따로 한 구역이 되어 부 속국과 같다. 고 하였다. 고려 의종 13년에 제주도의 안무사 按 撫 使 로 근무했던 조동희 趙 冬 曦 는 조정에 들어가서, 탐라는 험하고 치고 사우는 것이 미치지 못하는 곳입니다. 라고 하였다. <동문감 東 文 鑑 >에 남해 가운데에 있어 물길로 무려 백리나 되고 그 가운데가 대단히 넓다. 고 하였던 곳이 바로 제주도였다. 우리나라의 가장 먼 곳의 행정구역 제주 한반도의 최남단, 즉 바다 건너 가장 먼 지역에 있는 제주도는 우도를 비롯 상추자도와 하추자도 그리고 가파도를 포 함한 50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사람이 살고 있는 섬은 우도를 포함하여 몇 개 뿐이다. 제주시 추자면 대서리가 제주도의 가장 북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도가 최남단이다. 제주시 한 경면 고산리 차귀도가 가장 서쪽이고, 동쪽은 제주시 우도면 연평리가 가장 동쪽이다. 목포에서 141.6km 떨어져 있으며, 부산에서는 286.5km 떨어져 있고,일본의 대마도에서는 255.1km쯤 떨어져 있다. 제주도는 현재 제주특별자치도 濟 州 特 別 自 治 道, Jeju Special Self-Governing Province로 관리되고 있고,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포함하여 2시. 7읍 5면 31동으로 되어 있으며, 총 면적은 km2이다. 주호인이 살았던 제주도 어느 곳에서건 멀리 보이는 수평선과 그 아래로 시원스럽게 펼쳐진 바다를 볼 수 있고 한라산을 볼 수 있는 곳이 제 주도인데, 이곳 제주도에는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을까? 가장 앞 선 기록이 <삼국사기>중 백제 본기 중 서기 476년 4월의 일이다. 탐라국이 특산물을 바쳤으므로 임금이 기뻐하며 그 사자에게 은솔 恩 率 이라는 벼슬을 주었다. 이다. <삼국지>와 <위지>그리고 <후한서>와 <동이전>등의 고문들에는 제주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주호족 이라고 실려 있다. 육조 시대에 범엽이 지은 <후한서>에 실려 있는 내용을 보자. 마한 馬 韓 서해의 큰 섬에 주호족이 있는데, 그 인종은 몸집이 작고 언어는 한족과 같지 않으며 머리를 짧게 깎아 선비족과 비슷하다. 그들은 가죽옷을 입고 있는데, 윗도리만 걸치고 아랫도리는 입지 않고, 소와 돼지를 잘 기르며, 임진년 만추에 만나는 제주도 228

229 배를 타고 한나라와 왕래하며 교역한다. 그런 주호족을 두고 일부에서는 도서 족 계통, 즉 일본의 원주민이이었던 고루보그족이나 아이누족으로 보기도 한다. 그들은 일본 열도 전역에서 살았던 종족으로 체구는 작고 옷도 상의만 입었고 하의는 입지 않고 생활했으며 사냥과 고기잡이를 주업 主 業 으로 삼았던 종족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제주도에 터를 잡고 살았던 제주도 사람들은 1세기쯤에 있었던 한라산의 화산폭발로 멸망하고 말았다. 그들이 살았던 제주도는 제주 신화의 주인공인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가 등장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제주의 신화가 시작되다. 원래 탐라국( 耽 羅 國 ) 또는 탁라( 羅 )라고 불렸던 제주도에 전해 내려오는 신화에 따르면, 제주의 역사는 고을나 高 乙 那 양을나 良 乙 那 부을나 夫 乙 那 라는 세 을나( 乙 那 )에 의하여 시작된다. 제주의 시조가 되는 세 을나가 독특하게도 제주 1동에 자리 잡은 삼성혈( 三 姓 穴 )의 모흥혈 毛 興 穴 이라고 부르는 세 구멍에서 솟아났다고 한다. 가야나 신라 고 조선 부여 등의 다른 나라 시조들이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알에서 태어난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시조가 한 사 람도 아니고 셋인 점도 다르다. 당초 세 사람은 바로 신인이었는데 서로 짝 지어 해 뜨는 동쪽에 와서 살았네. 오래도록 세 성씨만 서로 혼인을 한다더니 듣건대 그 남아 전하는 풍습 주진 朱 陳 과 비슷하구나. 조선 초기의 문장가인 점필재 김종직의 시이다. 그런 연유로 의병장 고종후 高 從 厚 가 의병을 모집하면서 세 성씨가 모두 같은 후손임을 언급한 글이 유성룡이 지은 < 난중잡록>에 실려 있다. 제주. 정의. 대정. 3 고을. 고성. 양성. 부성. 43가문호의 모든 어른들에게 고하나이다. 옛적 태고 때에 인물이 생기 던 시초에 하늘이 3신을 한라산 밑에 내려 보내시니, 고씨. 양씨. 부씨라. 또 아름다운 여인과 망아지. 송아지의 종자 를 함께 주어 한 지방에 터를 여는 조상이 되어 이제에 이르러 인구의 번성함과 말( 馬 )을 길러냄이 대개 3 신인의 덕 택이 아닌가 하옵니다. 그 후세에 자손이 혹은 바다에 떠서 이리저리 여러 곳에 흩어져 사니, 세상에서 이른바 제주 고씨, 제주 양씨는 모두 그 후손입니다. 삼성혈에서 솟아난 세 을나는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고 나물을 캐서 먹으며 이동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배를 타고 온 벽랑국( 碧 浪 國 )의 세 공주를 각자의 배필로 맞아들였으며, 그들이 가져온 오곡종자와 송아지 망아지 등 육 축으로 농경생활을 했다다. 성산읍 온평리에 있는 혼인지( 婚 姻 池 )는 세 을나가 벽랑국의 공주들과 혼례를 올린 곳으 로 알려져 있다. 농업과 목축업을 시작한 뒤 점차 제 몫의 땅이 필요해진 세 을나는 각자 자기가 살아갈 터전을 결정하는 데 화살을 임진년 만추에 만나는 제주도 229

230 이용했다. 활을 쏘아 화살이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이다. 세 을나가 쏜 화살은 각각 일도 이도 삼도에 떨어졌 고, 일도 이도 삼도동이 여기서 유래하였다. 세 을나가 활을 쏘았던 장소가 바로 제주시 봉개동과 아라동에 걸쳐 있는 제주도 말로 쌀손장오리( 射 矢 長 兀 岳 사시장올악)라고 하며, 세 을나가 쏜 화살이 박힌 돌을 모아둔 곳이 제주시 화북동에 있는 삼사석( 三 射 石 )이라 한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제주 시조의 탄생 이후 바다를 통하여 발달된 외래문 화가 유입되었고 비로소 제주도에서 농사를 짓게 되었음을 알려준다. 그 때까지가 제주도의 신화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제주가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때는 삼국시대부터이다. 삼국사기 의 기록을 보자. 백제 문주왕 2년(476)에 탐 라국이 백제에 토산물을 바치자 벼슬을 주었고, 동성왕 20년(498)에는 탐라가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왕이 친히 정벌 하기 위해 지금의 광주에까지 이르자 탐라국의 왕이 그 소식을 듣고 사죄하였으며, 백제가 멸망한 이후 신라 문무왕 2년에 탐라국의 왕이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독립국이었던 탐라국이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 신라의 속국이 된 탐라국 탐라 耽 羅 로 표기 된 제주가 <당회요 唐 會 要 > 권 100 탐라국 耽 羅 國 에 다시 등장한다. 탐라는 신라의 무주 바다 위에 있다. 섬에는 산이 있고, 주위는 모두 바다에 접하였다. 북쪽 백제와 배를 타고 5일 에 갈 만한 거리이다. 그 나라 왕의 성은 유리이고, 이름은 도라인데, 성황은 없고, 다섯 마을로 나뉘어 있다. 그들의 집은 동굴에 돌담을 둘러서 풀로 덮혔다. 호구는 8천 가량 된다. 활과 칼 및 방패와 창이 있으나 무기는 없고, 오직 귀신을 섬긴다. 항상 백제의 지배아래 있었고, 용삭 원년(661년) 8월에 조공 사신들이 당나라에 이르렀다. 고 실려 있다. 그 뒤로 별 다른 기록이 전해지지 않다가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숙종 10년에는 탐라군으로 바뀌었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제주도) 중에서 대략 일정 11월 8(목요일)일 오전 8시 관덕정 앞 집결, 제주 관아 답사, 오후 제주 올레 18코스를 걷고 11월 9일(금요일) 여름 걷기학교에 오셨던 송장환선생님의 안내로 신평곶자왈에서 무릉곶자왈코스를 걸을 예정입니 다. 11월 10일(토요일)은 날이 맑으면 한라산을 오르고 그렇지 않으면 사려니 숲길을 길게 걷거나 한라산 부군을 걸을 예 정입니다. 11월 11일(일요일)은 아름다운 제주 올레 중 서쪽 서귀포에서 모슬포, 그리고 한림일대와 역사유적을 돌아보고 해산 할 예정입니다. 비행기나 배편은 각자가 예약하여 제주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회원 분들이 좋은 곳 추천해주시면 일정에 반영하겠습니다. 임진년 만추에 만나는 제주도 230

231 관동대로 여섯 번 째를 걷는다 :03 관동대로 여섯 번 째를 걷는다. 여름의 막바지 그 더운 날 관동대로를 걸으신 여러분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전합니다. 벌써 여정이 원주의 초입 문막 에 이르렀습니다. 원래의 일정보다 한 달 앞서 끝나게 된 <관동대로>의 여섯 번째 여정이 원주시 지정면에서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까 지 이어집니다. 특별히 이번은 일정 관계상, 셋 째 주인 9월 15일과 16일에 펼쳐집니다.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의 대송치 소송치 지나 양동면에 이르고 그 아름다운 구둔재를 지나 지평에 이릅니다. 흑천을 지나 용문에 이르고, 양평을 지나면 남한강을 따라 가는 길입니다, 남한강변에 자리 잡은 옥천면까지 이어질 관동대 로 6차 여정은 xhxy일 아침에 출발하여 일벅 2일의 여정으로 펼쳐집니다. 양수대교 2180미터, 족자섬너머로 보이는 산들은 흰 구름에 덮혀 있고, 한가롭다 과속 말고, 단속 없다. 음주 말 고, 라고 쓰여진 표지판은 아랑곳없이 죽기 살기로 달리는 자동차들은 도대체 어디를 향해 저렇게 쏜 살같이 가는 것일까? 양수대교를 지나서 용담대교가 아닌 벼랑 쪽에 있는 길로 가기 위해 양평군 양서면 용담 1리 기두원 起 頭 院 마을로 들어선다. 이곳 기두원에는 원집이 있었다는데, 원집의 흔적조차 없고 조금 지나자 새마을이고 금세 신원리에 이른다. 월계. 호리원. 또는 신원이라 부른 이곳은 원래 양근군 서시면의 지역으로 울계원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 신 원리에는 가죽나무가 많다고 해서 가죽나무골이라는 골짜기가 있고, 묘골 동쪽에는 옹기점이 있었다고 해서 동이접 골, 묘골 북쪽에는 대장간이 있었다고 해서 풀무골이 있다. 동이접골에서 풀무골로 넘어가는 고개가 풀무골 고개이고 샘골에서 목왕리 동막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샘고개이다. 여운형이 태어난 묘골 이곳 신원리 묘곡 妙 谷 은 독립 운동가이자 정치가인 몽양( 夢 陽 ). 여운형( 呂 運 亨 ~ )이 탯자리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 1차 대일수호조약을 맺기 위해 특사로 파견된 여우길 呂 祐 吉 의 11대 손인 우정현 呂 鼎 鉉 과 경 주이씨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백사 이항복의 11대 손인 그의 어머니가 태몽을 꾸었는데, 태양이 이글거렸 다 고 한다. 그래서 이름을 몽양이라고 지었다고 하는데 그의 조부는 손자를 천리구 天 里 駒 라고 부르기도 하였다..의그의 나이 16세에 배재학당에 입학하였으나 1년을 넘기기 못하고 자퇴를 하였다. 그 이유는 교회를 다녀야 한다고 고집하는 교장선생님의 강압이 싫어서였다. 여운형은 민영환이 세운 흥화학교 興 化 學 校 에 입학하였는데 그는 영어도 잘했지만 특히 기계체조와 ㅊ철봉을 잘햇다 고 한다. 관동대로 여섯 번 째를 걷는다. 231

232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양평의 양근나루는 서울로 가던 길목이었다. 양평읍 양근리의 갈산 기슭에 위치한 양근나루는 1930년 무렵까지만 해도 강원도에서 서울로 들어가기 전의 가장 큰 포구였다. 남한강 수로와 홍천과 양 양. 고성 간성을 이어주는 관동대로의 분기로가 만나는 지점이어서 한강 유역의 수륙교통 및 상업의 요충지였다. 1938년 통계에 따르면 경기도내 거래액이 백만원 이상을 기록한 장시 場 市 칙는 수원과, 안성. 그리고 이곳 양평장 뿐 이었다. 칙미포구라고도 불리던 양근나루는 강원도 일대에서 나는 메밀, 콩, 수수, 감자, 옥수수 같은 밭곡식들과 나 무그릇, 꿀 등이 남한강을 따라 내려와 머물렀다가 서울의 마포로 내려갔던 곳이었다. 남한강은 그 무렵까지만 해도 수량이 넉넉해서 쌀 이백 가마쯤이 실리는 30톤짜리 돛단배들도 오르내렸다. 이 배들은 서울로 내려갈 때에는 물 흐름에 따라 떠내려가듯이 빨리 갔지만 올라올 때에는 물살을 거슬러야 했으므로 시간이 좀 더 걸렸다. 바람만 잘 만나면 강원도에서 사흘 만에 양근포구까지 내려갈 수 있었지만, 멀지 않은 마포나루에서 이곳 양근나루까지 올라오는 데에는 사흘이 또 걸렸다.(...) 양평군 개군면 공세리에 있는 신내마을에서 나라 안에 수도 없이 들어선 양평해장국 이 전래되었다. 이 장 저 장 옮겨 다니던 장꾼과 소몰이꾼들이 머물면서 먹었던 해장국이 그토록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불과 몇 십 년도 안 되 었다고 한다. 양평 해장국만 그런가, 포천 이동 막걸리나 안흥 찐빵등 조그만 면 단위 마을이름을 단 특산물들이 나 라를 휘 젖고 있는 것을 보면 품질 좋은 술은 좁은 골목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는 중국의 속담은 정말로 만고의 진리다. 꿈속에 꿈이라고 깊은 잠이 들지 못하고 이리 뒤적, 저리 뒤적 하다가 잠에서 깨어난 시간이 5시 17분, 민경권씨는 아직 깨어나지 않 고 조심스레 지도를 다시 펴본다. 턱걸이 고개, 진양고개, 터걸이, 구둔치, 바득재, 서화고개, 교래산, 용문에서 문막 까지 가는 길이 어떻게 전개될지, 언제쯤 도착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이런 때를 겪은 뒤에 썼는지 모르 는 헤르만 헤세가 <관찰>이라는 책에서 묘사한 글이 가슴속에 파고든다. 여행을 떠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란 대담한 생각을 품어 세상을 뒤집어 없고 모든 사물과 인간과 사건에서 답을 구하고 싶은 욕망과 다를 것이 없으며, 더 나을 것도 없다. 그런 욕망은 계획이니 책 따위로 잠재워지지 않으며, 그 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더 많은 것을 대가로 지불한다. 마음을 바쳐야 한다. 그래, 어떤 일들이 일어나건 달게 감수하고 받아들이자. 그리고 무엇보다 몸과 마음을 전체를 걸자. 이른 여섯시, 오 늘은 갈 길이 멀다고 일찌감치 나서자고 해서 모여 김밥을 먹으며 이수아씨가 내게 지난밤의 꿈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제 선생님이 내일 가는 길이 험난하다고 해서 그런지 꿈에 집에를 갔어요, 험한 고개 다 넘으면 돌아오려고 했는 데, 오는 길에 깨고 말았어요, 그 말을 들으며 얼마나 걱정이 많았으면 꿈에 도망칠 생각을 했을까? 생각하니 가슴 이 아팠다. 꿈속에 꿈이다( 夢 中 夢 ) 꿈도 꾸기 전에 해몽을 한다( 夢 前 解 夢 ) 라는 말도 있지만 작지만 당차서 너무 잘 걷는 이수아씨가 그 정도이니 다른 사람들은 말해 무엇 하랴,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는다. 는 옛 말처럼 모르고 걸어가면 걱정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리 바라본 지도를 가지고 내가 걱정을 했기 때문에 잠까지 관동대로 여섯 번 째를 걷는다. 232

233 설치게 한 것 같아서 미안함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가장 힘들어 할 것 같아 내심 걱정했던 이기춘씨는 오 히려 힘든 내색 없이 잘 걷고 있으니, (...) 우리가 지나고 있는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는 조선시대에 지평현의 중심지였다.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양근군과 지평현을 합해서 영평군으로 만들면서 양평군에 딸린 하나의 면이 된 지평은 본래 고구려의 지현현( 砥 峴 縣 ) 이었다. 신라 경덕왕 때 지평현으로 이름으로 고치어 삭주( 朔 州.지금의 춘천)의 영현으로 만들었다., 조선 태종 13년 에 현이 되었고, 1895년에 강원도 춘천부의 관할이 되었으며 그 다음해에 경기도의 지평군으로 되었다. 지평이라는 이름은 남한강의 지류중의 하나인 흑천 黑 川 이 흐르는 곳에 낮고 넓은 들판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평구도 平 丘 道 에 속하는 전곡역 田 谷 驛 과 백동역 白 冬 驛 이 있어 원주를 거쳐 영남과 영동 지방으로 가는 교통의 중심지 가 되었다. (...) 구둔재를 넘어 가는 길 구둔재를 넘어 양동면으로 갈 수 있겠느냐고 묻자 한 20여 년 전만 해도 그 고개를 넘어서 양동장에 갔어, 옛날에 어른들에게 들은 애긴데 구둔이라는 말은 이곳에서 전쟁을 아홉 번이나 치러서 생긴 말이라고 한다. 황노인의 말을 듣자 우선 안심이다. 20여 년 전에 넘었던 고갯길이라면 아무리 사람이 안 다녔어도 어렴픗하게 길을 있을 것이다. 마음 다지며 바라본 구둔 마을 뒤편 산 능선, 저곳이 우리가 넘어야 할 구둔치일 것이다. 마을은 평화롭게 가을 햇살을 받으며 펼쳐져 있고 다시 마을입구에 들어서자 나이 많으신 노인 한 분이 앉아계신다. 이 마을에 오래 사셨느냐고 묻자 그분 역시 이 마을 토박이란다. 이름은 최수복, 나이는 자그마치 97세란다. 나이가 많은데도 기억력이나 말씀도 또렷하다. 이 마을 뒤에서 매월리로 가는 고개가 구둔재여. 옛날에 소장사들이 소 많 이 끌고 넘어갔어. 양평장 용문장 홍천장을 떠도는 장사꾼들도 몇 명씩 떼를 지어 넘어 갔고, 우리도 매월리로 해서 양동장을 다녔지, 도적놈들이 많았대, 그래서 사람들이 떼를 지어 넘었다는데, 우리나라 고개 밑에는 어딜 가나 도적들에게 피해 입은 민중들의 절절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가 있는데 여기도 예외 는 아니다. 도둑이 <국어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거나 하는 나쁜 짓 또 그러 한 사람을 도적 盜 賊. 투아 偸 兒. 적도 賊 盜. 적 賊 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의 삼대도적이 홍길동과 일지매 그리고 임꺽 정이며 그들의 후손들이 오늘날에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지만 그보다 더 큰 도둑들은 정치가 또는 사업가라는 탈을 쓴 간 큰 도둑들일 것이다. 도둑놈도 핑계는 있다 도둑놈도 의리가 있고 개통 참외도 꼭지가 있다 는 말도 있지만 도둑놈 재워 주었더 니 제삿밥 먹고 소까지 훔쳐 간다. 도둑놈 재워 주면 새벽에 쌀 섬지고 간다. 는 말도 있지 않은가 조선중기의 이 율곡의 글을 보면 십년 전에 갔을 때 백여 호가 살던 마을이 십여 집 밖에 안 남았다. 는 글이 있고 그것을 십 실구공 十 實 九 空 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오죽했으면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도둑이 되었을까? 도적도 많고 고개가 가파르다 보니 조선후기에 이르러서 원래 관동대로 길이던 석실. 매월리 구둔재. 전양고개 를 넘 지 않았다. 그 대신 석실 금왕리 고송리 용문면 광탄리 다문리를 통해서 가다보니 이 고개를 넘는 사람들이 뜸해졌다 고 한다. 이 길을 다른 데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마을 뒤편에 있는 터널을 지나자, 집 한 채 보이고, 산으로 향한 길이 보인다. 묵정 밭 가운데 그늘을 드리운 밤나무 관동대로 여섯 번 째를 걷는다. 233

234 밑에서 지친 몸을 잠시 쉬는데 이게 웬 횡재, 씨알 굵은 밤들이 수북하게 떨어져 있다. 욕심도 욕심이지만 밤 줍는 재미도 쏠쏠한 것이라서 한참을 주웠더니 주머니가 불룩하다. 이래저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쉴 틈이 없구나.(...) 길만 제대로 나 있으면 된다 이제 길만 제대로 이어져 있으면 된다 싶은데 길이 아주 잘 나 있다. 이정도면 아주 훌륭한 옛길이다. 길옆으로 작은 시내가 흐르고 흐르는 시냇물소리가 아주 명징하고, 그 옆에서 우짖는 풀벌레 소리, 가을이 깊고도 깊구나. 나뭇잎들 이 한잎 두잎 떨어져 내리고 산길에는 바람이 없다. 가파른 산길, 뒤 따라 오는 사람들이 저 만치 멀다. 가파른 산길 에 털썩 주저앉아서 나는 나뭇잎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바라다본다. 나도 어느 날 저 나뭇잎처럼 아무 기척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 갈 것이다. 일 년에 이 길을 몇 사람이나 지나갔을까? 힘들 것이라고 여겼던 만큼은 아니지만 고개하나 넘으면서 힘을 다 뺀 느낌이다. 재는 넘을수록 높고 내는 건널 수록 깊다. 는 옛말처럼 우리가 넘어야 할 고개는 과연 몇 개나 될까? 진짜로 관동대로를 만났다는 기쁨에 내려오는 길이 얼마나 가뿐했던지, 성큼 성큼 내려오는 나를 따라 오다가 이기춘 씨가 그만 길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괜찮아요? 하고 바라보자 이수아씨가 부축하는 것이 보이고, 그 짧은 찰나사이 로 내 눈에 들어와 박히는 쫙 벌어진 으름열매, 나는 으름 덩굴에 매달려 으름을 따서 부상당한 이기춘씨와 일행들에 게 맛을 보라고 권한다. 처음 먹어보는 열매란다. 서양식 바나나라고도 하는 으름덩굴은 그 잎새하며 꽃이며, 열매며 나무랄 것이 없어서 일부 사람들은 정원수라도 활용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양식 정원수에 길들여지고 한국의 자연을 접할 기회가 없다. 그러다보니 머루며, 다래며, 으름이며 심지어 산 벗 나무에서 나는 버찌나 뽕나무에 열리 는 오디를 나이 오십 육십이 넘어서 처음 맛본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다보니 산에서 야생으로 자라는 더덕이나 도 라지, 그리고 향기 짙은 당귀며 산 작약 같은 것은 구경도 못한 사람들이 많다. 하여간 가을 산은 가난한 처갓집 가는 것보다 낫다 는 말이 실감이 나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한쪽에서 일행 중 한 사람이 다쳤는데, 그 사이 짧은 순간, 즉 순식간 瞬 息 間 에 쩍 벌어진 으름 열매가 내 눈 안에 포착되다니, 꼭 요술을 본 것 같기도 하고 환영을 본 것 같은데 내 입속에 지금도 남아 있는 달착지근한 맛을 보면 현실은 현실인 모양이다. <백과서전>을 보면 순식간 은 눈을 한 번 깜짝하거나 숨을 한 번 쉴만한 극히 짧은 동안, 전순간 轉 瞬 間. 순식 瞬 息. 돌차간 咄 嗟 間 이라고 실려 있다.(...) 석곡에 이르렀지만 석곡엔 식당이 없다.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플 때는 다른 어떤 것도 마음의 깊은 곳에 자리를 비집 고 들어올 틈이 없다. 그래서 걱정도 쓰라림도 먹은 뒤 이야기 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는 것이리라. 고픈 배를 움 켜 쥐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양평군 양동 면 소재지인 쌍학리에 이른다. 양동면의 소재지인 쌍학리는 쌍리와 학촌의 이름을 합해서 쌍학리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다. 이곳에도 웬 부동산이 그리도 많은지, 점심을 먹으며 이곳의 땅 값을 묻자 몇 년 전만 해도 평당 5.6만원 하던 땅 값이 지금은 30만 원쯤 나 간다고 한다. 쌍학리에서 가장 큰 마을인 학둔지 마을은 지형이 학처럼 생겨서 지어진 이름이고, 학둔지 남쪽에 있는 마을은 사창 社 倉 이 있어서 창말이며, 창말 서북쪽에 있는 택풍당 澤 風 堂 은 인조 때의 문장가인 이식 李 植 이 살았던 곳이다. 이행 李 荇 의 후손인 이식( 李 植, 1584~1647)의 본관은 덕수( 德 水 )이고, 호는 택당( 澤 堂 ), 자는 여고( 汝 固 )이며 시호는 문 관동대로 여섯 번 째를 걷는다. 234

235 정( 文 靖 )이다. 덕수 이씨의 무맥 武 脈 이 임진왜란의 영웅인 이순신으로 이어졌고, 그 문맥 文 脈 은 이식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빼어난 문장가가 바로 이식이었다. 인조 때의 문신으로 문장이 뛰어났던 이정구( 李 廷 龜 ) 신흠( 申 欽 ) 장유( 張 維 )와 함께 한문4대가 또는 사대문장가( 四 大 文 章 家 )라고도 부르며, 이들의 호를 한 자씩 따서 월상계택( 月 象 谿 澤 )이라고도 부른다. 선조 때부터 인조에 이르기 까지 문풍( 文 風 )이 크게 일어 많은 문인이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이들 네 사람은 뛰어난 문장가였다. 이들의 공 통적인 특징은 당송팔대가의 고문( 古 文 )을 모범으로 삼은 점, 주자학적인 사고가 규범이 되고 있는 점, 이들 모두가 화려한 가문 출신이며 관료로서 출세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 한 몸 쉴 장소가 없을까 생각하며 헉헉대면서 정상에 오르자, 경기도 땅에서 강원도 원주시에 접어든다.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에 접어든 것이 그제의 일인데 경기도에서 이제 강원도에 접어든 것이다. 강원도 땅을 지나 대관령을 넘어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경상북도 울진 평해 관동대로의 종착지에 도착할 날이 언제쯤 인지 알 수 없는데 이제 다리가 무지근하다. 내가 이렇게 다리가 아프면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아플까? 길을 오랜 나날 걷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설명조차 불가능한 커다란 인내심을 요구하기도 한 다. 그래서 독일의 작가인 헤르만 헤세는 유리알 유희 에서 나그네는 작은 일로도 보람을 얻으니 나그네에겐 참 고 견디는 것이 유일한 약이다. 라는 글을 남겼고, 조선의 나그네들은 다음과 같은 노래를 읊조리며 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재는 넘을수록 높고, 내는 건널수록 깊다. 산은 오를수록 높고, 물은 건널수록 깊다. 산 넘어 산이고 가면 갈수록 심산 深 山 이라 지칠 대로 지친 이수아씨와 이기춘씨 그리고 민경권씨는 아무 말 없이 한 발 한 발 앞만 보며 발을 내딛고 사진을 찍 는다는 핑계로 뒤에 처진 나 역시 천천히, 천천히 걸음을 옳길 뿐이다. 일반국도 88번, 뒤돌아보니 우리가 지나 온 솔 치너머 양동면 일대의 산들이 아스라하다. 이마에 땀이 송이송이 맺히고, 온 몸이 땀에 흥건하게 젖었다. 한발 한 발 넘어 가는 이 고개, 바람은 이제 선선하게 불고, <안녕히 가십시오 경기도 양평군입니다.> 라는 안내판 뒤에 영원 한 마음의 고향, 어서 오십시오, 강원도 원주시입니다.>라는 안내판이 뒤를 잇는다. 여기서부터 강원도로구나. 신정일의 <관동대로>중에서 관동대로 여섯 번 째를 걷는다. 235

236 김천 청암사에서 수도암으로 가는 길을 걷는다 :59 김천 청암사에서 수도암으로 가는 길을 걷는다. 9월 두 번 째 주에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에 속하는 김천 청암사와 신비한 기운이 가득 서린 수도암을 찾아갑 니다. 토요일에는 영동의 황간변에 자리잡은 초강일대를 걷습니다, 가학루와 월류봉 일대의 초강을 걷고, 오후에는 그 이름 이 드높았던 추풍령을 넘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일요일. 김천에 자리 잡은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는 청암사에서 수도암으로 이르는 길과 갈항사터 일 대를 걸을 예정입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그윽한 곳에 자리 잡은 청암사와 길지 吉 地 중의 길지인 수도암과 추풍령 일대의 길을 걷고자 하는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구름도 자고 가며 바람은 쉬어 가는 추풍령 구비마다 한 많은 사연 이라는 노랫말에 나오는 추풍령 못미쳐 위치 한 황간은 경부선 철도와 경부 고속도로가 나란히 지나는 곳이다. 경상도 일대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옥천의 적등진 나루는 건너가기 전 숨을 고르던 곳이고 추풍령을 넘어가지 전에 나그네들이 하룻밤 유숙하며 쉬어갔던 황간은 골은 깊지만 교통의 요충지였다. 본래 신라의 소하현이었는데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인 황간으로 고쳐졌으며 고려 때에는 경상도 상주 땅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 뒤 조선 태종 때에 이르러서 충청도 땅으로 되돌아왔고 옥천군 청산면을 합하면서 황천현으로 바뀌었다가 1914년 일제의 부군 통폐합 당시에 영동군이 통합되면서 면이 되고 말았다. 황간의 초강 변에서 밤을 지새고 아침 안개를 보리라던 기대는 기대로만 끝나고 매곡면 수원리의 모텔에 여장을 푼 다. 길손들의 잘 곳이 어디 정한 곳이 있는가. 아침은 안개와 함께 다시 열린다. 내린 눈이 얼지 않고 천천히 녹는 아 침녘 매곡면 수원리 모른대(수동) 마을 길가의 당산나무에는 노랗고 하얗고 파란 천들이 일곱 개가 늘어뜨려져 있고 그 안에는 검으스레한 돌맹이들이 예닐곱개씩 담겨져 있으며 그 앞에는 시멘트로 만든 도깨비들이 둥근 통을 두르고 있다. 하룻밤을 묻은 식당 주인의 말에 의하면 이 마을에서 정월대보름날에 제사를 지내는 제주는 며칠동안 부정한 일을 안해야 한다는데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버리고 나이드신 분들만 남아있으니 대보름놀이가 잘 치루어지기나 하는지 한편 이곳 영동은 바람이 많기로 소문난 지역이다. 백두대간의 능선이 낮아지며 골짜기들을 만들고 있어서 그 골짜기 로 바람이 몰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천 청암사에서 수도암으로 가는 길을 걷는다. 236

237 ...너무 늦기 전에 나는 수도산의 청암사 靑 巖 寺 와 수도암 修 道 巖 을 만나기 위해 여정을 꾸렸지만 그것 역시 사람 의 일이라 예정과는 다르다. 단풍이 고운 수도산에서 가야산 자락을 보리라 마음먹었었는데 이미 단풍은 지고 만 뒤 라 단풍의 잔해만을 보고 올 듯싶지만 어쩌겠는가. 그 역시 우리 생의 단 한번뿐인 만남이 아니겠는가. 생각하며 무 주 설천리 나제통문을 넘어 경상북도 땅에 접어들었다. 대덕 지나 가리재를 넘어 평촌리에 도착한 것은 10시쯤이었다. 평촌리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청암사가는 길과 수도암 가는 길 우리들은 애초에 마음먹은 대로 청암사 가는 길을 택한다. 곧바로 절 입구까지 가고자 했던 우리들의 생각은 입산통제라고 쓰여 진 표지판에 주저하게 되고 결국은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스산한 바람이 불고 날은 차다. 배낭을 꾸리고 입고 온 옷들을 모두 다 껴입는데 그런데 내가 가자고 해서 함께 온 권은정씨는 가을 옷차림새에 신까지 불편한 신발이다. 어쩔 수 없지 내 신발을 빌려줄 수도 없으니... 청암사 가는 길은 소나무와 전나무 그리고 참나무 숲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고 떨어진 나뭇잎들은 저희들끼리 외롭다. 불영산 청암사라고 쓰여진 일주문을 지닌다. 1686년 가을 청암사에 왔던 우담 정시한( 愚 潭 丁 時 翰, 1635~1707)은 이 절에서 한 편의 일기를 썼다. 저녁을 들고 나서 혜원 승헌 노스님 그리고 효선스님과 함께 쌍계사로 걸어 내려오노라니 양쪽 골짜기 사이로 계 곡을 따라 붉게 물든 나뭇잎과 푸른 소나무가 길을 에워싸고 물은 쟁쟁거리며 음악을 들려준다. 고승 두어 분과 소매 를 나란히 해 천천히 걸으며 걸음마다 (경치를)즐기니 사뭇 흥취가 깊다 정시한의 일기 속에서 나오는 쌍계사는 그 당시 청암사를 거느렸던 본사였으나 지금은 증산 면사무소 뒤편에 주춧돌 몇 개와 연꽃 두어 송이를 조각한 비례석만 남은 폐사지로 남아있을 뿐이다. 나뭇잎 밟는 발자국 소리를 따라 천천히 걸으면 천왕문이 보이고 그 우측에 회당비각과 대운당 大 雲 堂 비각 및 청암 사 사적비가 서있다. 화엄학으로 이름을 날렸던 회암 정혜스님의 비각은 영조 때 우의정을 지냈던 귀록 歸 鹿 조현명 趙 顯 命 이 지었으며 대운당 비각은 청암사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현재 직자사의 말사인 청암사는 858년(헌양왕 2) 도 선국사가 창건하였고 혜철이 머무르기도 하였다. 조선중기에 의룡율사가 중창하였고 1647년에 화재로 불타버리자 벽 암스님이 허정을 내어 중건하였으며 1782년(정조 6)에 다시 불타자 환우와 대운스님이 20여 년이 지난 후에 중건하였 다. 그 뒤 189년 중에 폐사가 되었다가 여러 차례 중건과 화재를 거듭한 후에 1912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고 남 아있는 절 건물은 대웅전, 육화전, 진영각, 전법루, 일주문, 사천왕문 등이 있고 산내 암자로는 개울 건너에 극락암과 부속암자로는 수도암이 있다. 천왕상이 곱게 그려진 천왕문을 지나면 다리가 나타나고 그 다리 아래를 흐르는 물에 형형색색의 단풍잎들이 떨어져 흘러간다. 김천 청암사에서 수도암으로 가는 길을 걷는다. 237

238 물은 저리도 맑고 그 흐르는 소리 또한 옥구슬을 굴리는 듯 청아한데 문득 고개를 들면 바위벽마다 새겨진 이름들 속에 최송설당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이 절 청암사와 관련이 많은 사람이자 최송설당은 영친왕의 보모상궁이었다. 그 는 영친왕의 생모였던 엄비와 고종의 비호 아래 수많은 재산을 모았고 대운스님과의 인연으로 두 번에 걸쳐 절을 크 게 중수할 수 있었다.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어서 100여 명의 스님이 오순도순 모여 살고 있는 청암사에 도착했을 때에는 제를 올리는지 수 많은 사람들이 대웅전 앞마당까지 서있었다. 우물가에는 한 스님이 무말랭이를 널고 있었고 극락암 쪽에서 파르라니 머리를 깎은 두 스님이 부지런히 대웅전 쪽 으로 오고 있었다. 삼층석탑 뒤편에 서있는 이 청암사 대웅전에는 협시보살도 없이 부처님 한분이 앉아있는데 이 불 상은 1912년 불사를 끝낸 대운스님이 중국 강소성 창주에서 만들어 온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스님들의 소맷자락 스치는 소리를 뒤로하고 수도암 가는 길로 접어드는데 아뿔싸 이 길 역시 입산금지 入 山 禁 止 라고 쓰여 져 있다. 어떻게 산 아랫길로 해서 돌아갈 수도 없고 방법은 단 하나 뿐이다. 입산금지란 표지판을 거 꾸로 읽으면 지금 산에 들어가라는 말일 테지 그리고 그 먼 길을 달려 이곳까지 왔다가 수도산의 비경들이 숨어있는 이 골짜기를 오르지 않는다면 수도산에 깃들여 있는 신령들이 얼마나 서운해 할까.? 물론 수도암 가는 길이 이 산길 로 가는 길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왔던 길을 내려가 장뜰 마을에서부터 20여리를 오르고 또 오르면 수도암이 나타날 것이고 그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 길인지 가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하지만 이 수도산 자락의 품안에 안겨서 사람들의 자취가 사라진 길을 걷는 즐거움 또한 또 다른 아름다움이 아닐까?(...) 이런 자연의 경치에 취해서 이태백 李 太 白 은 청풍명월은 한 푼이라도 돈을 들여 사는 것이 아니다 淸 風 明 月 不 用 一 錢 買 라고 하였고 소동파 蘇 東 坡 는 <적벽부 赤 壁 賦 >에서 저 강위( 江 上 )의 맑은 바람과 산골짜기( 山 間 )의 밝은 달이 여, 귀로 듣노니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노니 빛이 되도다. 갖자 해도 금할 사람이 없고 쓰자 해도 다할 날이 없으니 이것은 조물 造 物 의 무진장 無 盡 藏 이다 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가 하나의 우주 宇 宙 이므로 세상이 그의 것이 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 말이라고 여기면서도 그 세상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진정으로 가기의 것으로 여기며 즐길 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바람에 나무들이 흔들리고 그 흔들림으로 떨어진 나뭇잎들이 바람에 쓸려간다. 우리들 역시 그 바람에 흔들리고 흔들 리는 그 흔들림으로 믿음이나 사랑이 깊어지는 것이 아닌지. 떨어진 나뭇잎들은 움푹 패 인 길을 절반을 넘게 덮고 우리들은 그 위에 앉았다가 몸을 누인다. 나는 일행들에게 그 나뭇잎 위에 누워보라고 말 한 뒤 수북하게 쌓인 나뭇잎들을 이불처럼 덮어준다. 바스락거리며 따스하게 온몸을 데워 주는 나뭇잎들의 경이도 경이지만 헐벗은 겨울나무들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소리들은 얼마나 가슴을 저미는지, 나뭇 잎이 쌓인 길은 어쩌면 푹 쌓인 눈발은 헤쳐 가는 것처럼 팍팍하다. 그 팍팍한 길을 걷느라 지친 길벗이 내게 묻는다. 수도암이 어데 있나요 나는 수도암이 있는지 없는지 나도 몰 라요, 수도암이 어데 있기나 한가요? 사그락 사그락 밟히는 낙엽 밟은 발자국 소리에 내 마음은 이다지도 흔들리 김천 청암사에서 수도암으로 가는 길을 걷는다. 238

239 고 수도암 가는 길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날은 전형적인 초겨울 날씨답게 구름이 잔뜩 끼어 우중충하고 어쩌다 잠 시 비추이는 겨울 햇살은 그다지 따뜻하지 않다.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걸까? 끝없는 길이 끝에 다다르는 시간은 언제쯤일까. 생각하는 사이에 능선에 다다르고 그곳 에는 철조망이 처져있다. 이곳은 금년 11월 1일부터 내년 4월 1일까지 출입을 통제합니다. 여기 까지가 사람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길이 고, 여기서부터는 갈 수 있는 길이다. 그래 가지 말라는 길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다. 사람이 발길이 끊어진 길에는 멧 돼지들의 발자국 소리나 산 꿩들의 푸드득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이 길처럼 반질반질한 등산로 길에는 오직 휴지며 캔 맥주병 등 사람의 흔적들만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능선에 올라서자 바람은 더욱 드세다. 수도암 너 어디에 있느냐 마음속으로 물으며 오르는 능선 길에는 서릿발이 어려 있다. 아직 겨울을 만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 수도산에서 먼저 만나고 말았구나. 그 서릿발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모닥불이 그리워지고 따뜻한 아랫목이 그리워지고 그 무엇보다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그리워진다. 항상 만나 도 가슴이 훈훈해 지는 사람들이 옆에 있는데도 다시 또 누군가가 그리워지는 것은 이 무슨 심사일까? 그래서 그 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라는 말이 있는 것일까? 두 개의 봉우리를 넘어서자 드디어 산 바로 아랫자락에 수도암 가는 길이 나타난다. 잠시 우리들은 고민한다. 지금은 점심시간인데 수도산 정상을 향해 올라갈까? 아니면 돌아갈까? 옛말에 짐이 무겁고 길이 멀면 땅을 가리지 않고 쉬며,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으면 녹봉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한다. 고 하였는데, 언제 닿을지 모르는 이 산 정상을 꼭 가야 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장교완 선생이 그냥 올라갔 다가 오자고 말한다. 그래 언제 다시 이 산에 오르겠는가. 바로 지금이지 다른 시절은 없다 고 임제 선사는 말하 지 않았는가?(중략) 기다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따끈따끈한 밥상을 기다리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을 기다리고 그 기다리는 기다림 사이로 목탁소리 들린다. 수도암이 겨울나무 사이로 언뜻 보이고 수도산 삼봉 가는 길 이라는 표지판을 지 나며 수도암에 접어든다.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원조인 도선국사가 청암사를 창건한 후 수도처를 찾아 수도산 내를 헤매다가 지금의 이 절터 를 발견하고 어찌나 마음이 흡족하였던지 칠일 밤낮 동안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전해진다. 그럴 것이다. 명산 중에 서도 절이 있는 산은 좋은 산이고 절이 있는 곳이 가장 좋은 터라고 옛사람들은 말하지 않았던가. 그 때나 지금이나 수행자들이 끊임없이 몰려드는 이 수도암을 우담 정시한은 이렇게 평했다. 산세를 두루 살펴보니 사방이 빈틈이 없는데다 지세는 높고도 넓다. 또 절터는 평탄하고 바른 것이 마치 가야산으 로 책상을 삼은듯하다. 봉우리 꼭대기에는 흰 구름이 왔다 갔다 하여 무궁한 느낌을 주는데, 김천 청암사에서 수도암으로 가는 길을 걷는다. 239

240 앞문을 열어 젖혀놓고 종일토록 바라보니 의미가 무궁한 것이 실로 절경이었다. 더 머무르고 싶으나 가야할 길이 있 으므로 그렇게 못하는 것이 한스럽기조차 하다. 수도암 터는 풍수지리상 옥녀직금형( 玉 女 織 錦 形 ), 즉 옥녀가 비단을 짜는 형국이라 한단다. 이때 멀리 보이는 가야산 상봉은 실을 거는 끌게 돌이 되고, 뜰 앞의 동서 양 탑은 베틀의 두 기둥이 되며, 대적광전 불상이 놓인 자리는 옥녀 가 앉아서 베를 짜는 자리가 된다는 것이다. 이 수도암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한국전쟁 때 공비소탕이라는 이름으로 불타버렸던 것을 최근에야 크게 중창하였 다. 절 건물로는 대적광전과 약광전, 나한전, 법전 등의 건물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보물 제 296호로 지정된 약광전 석불 좌상과 보물 제 297호인삼층석탑 2기 그리고 보물 제 307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남아있다. 약광전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약광전 석불좌상은 적막강산 속에서 세상을 굽어보고 계시고 나는 그 아래 무릎 꿇고 앉는다. 약광전의 석불좌상은 도선국사가 조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금오산 약사암 중수기 에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에 지리산에 세분의 석불이 있어 3형제 부처라 부른다. 그 하나는 금오산 약사암에 모시고 또 하나는 직지사 삼 성암에 모시고 다른 하나는 이곳에 모셨다 이 불상의 머리 부분에는 보관을 장식했던 흔적이 보이는데 이는 약광보 살의 머리에 금속관을 설치했던 것으로 흔하지 않은 예이다. 약광전을 나서자 바람이 불고 절 마당에는 떨어지는 나뭇잎들로 스산하기만 했다. 대적광전에는 스님의 독경소리, 목 탁소리가 흘러나오고 문 앞 댓돌 밑에는 신발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대적광전은 낮은 축대와 짧은 기둥 때문에 지붕에 눌린다는 평을 받고 있지만 내소사 대웅보전 문살만큼은 아닐지라 도 아름다운 문살 때문에 보는 이들의 마음을 진한 감동으로 몰아가게 한다. 문을 열자 대적광전에는 수많은 사람들 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이 대적광전 안으로 들어가자 마치 청량사의 석조불상이나 전국 송광사 대웅전의 불상만큼 이나 그 크기로 사람을 압도하는 석조비로자나불상이 가야산 자락을 바라보듯 정 중앙에 앉아있었다. 나는 조용히 합 장하고 가만히 앉았다.(중략) 나는 대적광전 앞 문살 앞에 서서 가야산을 건너다본다. 그 풋풋했던 푸르름도 그 화려했던 단풍의 향연도 끝낸 가야 산은 겨울의 초입에서 그렇게 서있었다. 어쩌면 겨울이라 더욱 더 그런 느낌이 드는지 모르지만 해인사를 품에 안은 육중한 가야산이 그 오랜 기다림으로 한 송이 연꽃을 피워 올리는 듯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수도암에서 보면 가야산 상봉은 계절마다 다른 빛깔의 연꽃을 피운다고 한다. 푸르름이 온 산을 뒤엎는 봄에는 황련 을 피우고 녹음이 우거진 여름에는 푸른 연꽃을 피우며 단풍이 곱게 물드는 가을에는 홍련을 피우고 그리고 눈 내리 는 겨울에는 하얀 백련을 피운다고 한다. 김천 청암사에서 수도암으로 가는 길을 걷는다. 240

241 그새 그리운 창녕의 용선대 :53 그새 그리운 창녕의 용선대 매달 몇 차례 씩 집을 비운다. 그 나날이 며칠인지 셀 수도 없다. 그렇게 다니기 시작한 것이 여름 시인 캠프였고, 다시 여름문화마당으로 이름이 바꾸었다가 지금은 여름 걷기 학교, 또는 여름 국토 편력이라는 이름으로 떠난다. 날이 더우면 어떻고 비가 또 오면 어떠랴 사시사철 두려워하지 않고 떠날 수 있도록 부추겨주었던 사람이 바로 매월당 김시습이다. 평생을 아웃사이더로 이 땅을 주유 周 遊 했던 매월당이 남효온에게 편지 한 장을 보냈다 어제는 지팡이와 짚신으로 천석 위에서 종일토록 반환 盤 桓 하면서 놀다가 맑은 시내에서 서로 보나니, 우리의 흥취 는 다하지 아니하였는데, 이별이 심히 빨랐으니 어찌 늘 앙앙 怏 怏 만족치 못합니까. 작별한 후로 수 일이 지났으나 같이 담화할 사람도 없고, 맑은 시내와 명산 名 山 에서 글과 술로써 모이지도 못하였으니, 이른바 사흘 동안만 도덕을 말하지 않으면 혀가 굳어진다는 것이 나를 두고 이름입니다. 그러나 두어 봉우리 푸른 산과 한 조각 흰 구름은 청하 지 아니한 벗이 되고 말없는 반려가 되어 옛날과 같이 서로 대하고 있으니 이것이 십년이나 마음을 알고 지내는 자 입니다. 거제도에서 창녕과 낙동강에 이르는 구간을 사흘간 걸으며 우리들은 그 자연과 길에서 얼마나 많은 추억들을 쌓고 마음의 문을 열어 놓을지, 벌써부터 거제도의 푸른 바다와 관룡사 용선대의 부처님, 그리고 영산의 만년교와 개비리길이 그립다. 바람이 비가, 그리고 서늘함이 같이하는 걷기학교가 되길 두 손 모아 비옵니다. 그새 그리운 창녕의 용선대 241

242 임진년 팔월 초아흐레 매달 몇 차례 씩 집을 비운다. 그 나날이 며칠인지 셀 수도 없다. 그렇게 다니기 시작한 것이 여름 시인 캠프였고, 다시 여름문화마당으로 이름이 바꾸었다가 지금은 여름 걷기 학교, 또는 여름 국토 편력이라는 이름으로 떠난다. 날이 더우면 어떻고 비가 또 오면 어떠랴 사시사철 두려워하지 않고 떠날 수 있도록 부추겨주었던 사람이 바로 매월당 김시습이다. 평생을 아웃사이더로 이 땅을 주유 周 遊 했던 매월당이 남효온에게 편지 한 장을 보냈다 어제는 지팡이와 짚신으로 천석 위에서 종일토록 반환 盤 桓 하면서 놀다가 맑은 시내에서 서로 보나니, 우리의 흥취 는 다하지 아니하였는데, 이별이 심히 빨랐으니 어찌 늘 앙앙 怏 怏 만족치 못합니까. 작별한 후로 수 일이 지났으나 같이 담화할 사람도 없고, 맑은 시내와 명산 名 山 에서 글과 술로써 모이지도 못하였으니, 이른바 사흘 동안만 도덕을 말하지 않으면 혀가 굳어진다는 것이 나를 두고 이름입니다. 그러나 두어 봉우리 푸른 산과 한 조각 흰 구름은 청하 지 아니한 벗이 되고 말없는 반려가 되어 옛날과 같이 서로 대하고 있으니 이것이 십년이나 마음을 알고 지내는 자 입니다. 거제도에서 창녕과 낙동강에 이르는 구간을 사흘간 걸으며 우리들은 그 자연과 길에서 얼마나 많은 추억들을 쌓고 마음의 문을 열어 놓을지, 벌써부터 거제도의 푸른 바다와 관룡사 용선대의 부처님, 그리고 영산의 만년교와 개비리길이 그립다. 바람이 비가, 그리고 서늘함이 같이하는 걷기학교가 되길 두 손 모아 비옵니다. 임진년 팔월 초아흐레 그새 그리운 창녕의 용선대 242

243 영덕의 해파랑 길과 울진 십이령 길을 가다 :48 영덕의 해파랑 길과 울진 십이령 길을 가다. 가을의 초입에 그 아름다운 영덕 불루로드길과 울진 십이령을 찾아갑니다. 동해 해파랑 길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이 난 영덕의 해변길, 그리고 보부상들의 애환이 서린 울진 십이령즉 열두 고개 길은 역사와 자연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길입니다. 특히 소나무가 아름다운 소광리는 눈부신 조선 소나무를 실컷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이런 궁벽한 곳까지 광대들이 자주 찾아들었을까. 광대에 얽힌 지명도 많이 남아 있다. 광대가 줄을 타고 재주를 부렸다는 강대줄탄모기 고개, 광대들이 가무를 즐기며 놀았다는 깨뭇개가 있다. 한가하게 물살에 흔들리는 노물항을 지나 다시 고개를 넘는다. 고개를 넘기란 힘이 들다. 그것이 물리적인 고개만이 아니라 나이 고개도 또한 그렇다. 서 른 고개, 마흔 고개, 오십 고개, 그 고개를 넘기가 얼마나 힘들었던가? 어느 새 숨이 가쁘다. 내 그림자도 숨이 차고 힘이 드는지 구부정하다. 돌이 많아 석리 石 里 라고 이름 지은 석동리 예진 芮 津 마을을 지나며 영덕읍에서 축산면으로 접어든다. 바다를 따라 이 어진 바닷가길이 그렇게 고울 수가 없다.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 하얀 모래밭, 형형색색의 자갈들로 채워진 경정 3리 바닷가 길은 한적하면서도 아름답다. 경정마을에 도착하여 점심으로 매운탕을 먹으며 맥주 한 잔을 곁들인다. 더위에 지쳐서인지 맥주가 마치 구세주 같 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낮술은 취기가 금세 오른다. 취중 걸음이라 취한 상태에서 걷는 바닷길, 포장도로지만 그런대로 걸을만하다. 그리 많이 걷지 않았는데 대게 원조 차유마을이라는 경정 2리에 이른다. <어서 오십시오. 3월의 아름다운 어촌 경정 2리. 해양수산부> 팻말을 바라보며 바다로 향한 길을 내려가자 바다를 바라보고 지어진 정자 근 처에 영덕대게 탑이 세워져있다. 영덕 대게 영덕 대게는 다리가 대통처럼 길어서 생겨난 이름이다. 1960년대만 해도 강구항에 산더미처럼 쌓일 정도로 잡혔었다. 하지만 마구잡이식으로 포획을 한 결과 한 때는 한 마리에 몇 십 만 원을 호가할 정도로 진귀한 특산물이 되고 말았 다. 그렇게 부족해진 수효를 채우기 위해 러시아 지역에서 잡힌 대게들이 영덕으로 몰려들고 있다. 영덕 대게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게의 크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맛이 뛰어나기 때문인데, 껍질이 얇고 다리 살이 담백하면서 쫄깃하고 독특한 향마저 띠고 있어 뒷맛도 매우 개운하다. 특히 겨울에서 초봄까지 잡힌 대게가 살 이 더 많고 맛이 좋다고 하며, 특히 음력 보름날 가까이에 잡힌 것보다 그믐 때에 잡힌 것이 더 살이 많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달이 밝으면 게가 제 그림자에 놀라 몸이 마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덕의 해파랑 길과 울진 십이령 길을 가다. 243

244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방어. 대구어. 홍어. 청어. 문어. 송어. 광어. 연어. 자해(대게). 고등어. 홍합. 복. 해의(김). 곽 (미역. 세모(참가사리)등이 이 지역에서 많이 잡히던 어종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어종들 대부분이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산출되고 있다. 소 형상을 하고 있는 축산 경정 2리에서 아랫염장을 지나 말미산 자락을 따라 이어지는 바닷가 길은 아름답기 이를 데 없다. 태고의 신비를 간 직한 듯한 기암괴석이 바다를 향해 돌출되어 있고, 수십여 년 동안 군부대 초소 길로만 사용되어 훼손되지 않은 자연 풍광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나라가 분단 된 이래 수많은 장병들이 청춘의 시절을 보냈을 초소 아래 돌계단에 나란히 앉아 먼 산을 바라보기도 하였다. 작은 모래사장에 앉아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며 걷다보니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마주하는 듯, 그 렇게 아름다운 해수욕장과 축산도 丑 山 島 를 만난다. 생김새가 마치 소와 같아서 축산이라고 부르는 섬, 그 남쪽으로 높은 봉우리는 마치 말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마 산 馬 山 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전함이 정박했던 축산포영은 영해부 동쪽 14리에 있었고, 수군만호 1명을 두었던 곳 이다. 신정일의 <동해 바닷가 길을 걷다.> 중에서 울진군 북면 두천 1리는 울진중에서도 가장 궁벽 진 산골이다. 민가 몇 채가 드문드문 들어서 있는 이곳 두천 1리는 열두재를 지나 소천 거쳐 서울로 가던 중요한 길목이라서 서울 나들이길이라고 불렀다. 그 당시 선질꾼들은 이곳 십이령을 대개 사흘 만에 넘어 소천에 도착했는데, 그들의 출발이 울진이나 흥부에서 출발할지라도 이곳 두천리를 경과하지 않고는 바릿재를 지나서 가는 십이령을 넘을 수가 없었다. 그런 연유로 선질꾼들이 한창 많았을 때는 50여명의 행상들이 몰려들어 주막과 마방으로 흥청거렸다. 마을 동쪽을 흐르는 외두천 건너에 <울진내성행상불망비 蔚 珍 乃 城 行 商 不 忘 碑 >가 세워져 있다. 문화재 자료 제 310호인 이 비는 1890 년 경에 울진과 봉화를 왕래하면서 어염해조류를 물물교환하며 상행위를 하던 선질꾼들이 세운 비다. 당시 봉화 내성에 살고 있던 그들의 최고 지위격인 접장인 봉화사람인 정한조 鄭 韓 祚 와 반수 班 首 인 안동출신 권재만 權 在 萬 이 그들의을 도와준데 대해 그 은공을 기리고자 세운 영세불망비라서 이 비를 이 지역 사람들은 선질꾼 비 라고도 부른다. 조선 후기에 세워진 이 비는 그렇게 흔하지 않은 철비 鐵 碑 로 만들었는데 일제의 철재동원령 때에는 땅 속에 묻어두 었다가 해방 이후 골기와로 비각을 세웠다. 그 뒤 1965년 경에 대구에 살고 있다는 후손이 찾아와 양기와로 비각을 보수하였다. 무쇠로 주조된 이 비는 2기로, 1기는 부러진 것을 이어 세웠다. 선질꾼들은 2.7장인 울진장과 3.8장인 흥부장에서 주 로 해산물인 소금, 건어물, 미역 등을 구매하여 쪽지게에 지고 열두재 라고도 부르는 12 령 嶺 을 넘었는데 울진에 영덕의 해파랑 길과 울진 십이령 길을 가다. 244

245 서 봉화까지 대략 그 길이가 1백 3십리 길이었다. 선질꾼들은 길을 걷다가 날이 저물면 외딴 주막이나 가뭄에 콩 나 듯 어쩌다 있는 인가에서 머물면서 지게에 지고 가던 솥단지로 밥을 지어먹고 가기도 했다. (...) 이 샛재는 한나무정이 서쪽에서 전곡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 마루가 넓다고 한다.그 다음 고개가 큰 넓재다. 꼬채 비재는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자마리에서 울진군 서면 광회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높은 곳에서 낮게 날아가는 형국이 라고 한다. 멧재를 지나고 낙동강 변의 배나들나루가 있는 배나들재를 넘으면 마지막 고개인 노릇재가에 이르고 그 고개가 열두 고개의 마지막 고개였다. 선질꾼들은 그 무거운 등짐을 지고서 사흘쯤을 뻑 세게 걸어 봉화장으로 가 그 주위에 있는 내성장, 춘양장, 법전장, 장동장, 재산장에서 잡화와 약품 및, 양곡, 포목 등을 그들이 가진 것과 교환하여 되돌아왔다고 한다. 다시 되돌아오 는 데에는 대체로 열흘이 걸렸다고 한다. 십이령 들목인 두천리가 번성했을 때는 5.6십 명의 행상들이 몰려들어 주막과 마방이 흥청댔다고 한다. 울진에서 봉 화까지 130리 길을 걷다가 날이 저물면 외딴 주막이나 어쩌다가 눈에 띄는 민가에서 머물면서 지게에 지고 가던 솥 단지를 가지고 밥을 해먹고 가야 했는데, 그 때 선질꾼들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부르던 노랫말이 <십이령 바지게꾼 노래>다. 미역 소금 어물 지고 춘양장을 언제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 가노, 한 평생을 넘는 고개 이 고개를 넘는 구나, 서울 가는 선비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꼬불꼬불 열 두 고 개 조물주도 야속하다. 대마 담배 곡물지고 흥부장을 언제 가노, 오나 가나 바지게는 한 평생에 내 지겐가, 오고 가 는 원님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꼬불 꼬불 열두 고개 언제 넘어 고향 가나. 선질꾼이나 마상은 다른 지역의 보부상들과 같이 완전한 조직을 갖춘 단체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지 역 출신들이 한 곳에 모여서 무리를 지어 출발했다가 무리를 지어 돌아왔던 것이 보부상 즉 선질꾼들의 생활이었 다.(...) 소조동과 광천동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인 울진군 서면 소광리 召 光 里 이다. 이곳에 나라 안의 이름난 소나무 군락지 가 있다. 소광리 소나무 숲, 그 주인공은 바로 금강송이다. 나무 줄기가 붉어서 적송( 赤 松 ) 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주로 내륙 지방에서 자란다고 육송( 陸 松 ) 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여인의 자태처럼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고 여송 ( 女 松 ) 이라 부르기도 한다. 예로부터 나라에서는 왕실 또는 귀족들의 관재로 삼기 위해서 소나무숲을 보호했었다. 굵게 자라서 안쪽의 심재가 황 장색을 띈 고급재로 관재 棺 材 로서 유용한 것을 황장목 黃 腸 木 이라고 하였다. 1420년 예조 禮 曹 에서 천자와 제후의 곽 槨 은 반드시 황장으로 만들며, 황장이란 송심 松 心 이며, 그 황심 黃 心 은 단단하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썩지 아니합니 다. 백변 白 邊 은 수습에 견디지 못하고 속이 썩습니다. 고 보고 한 것을 보면 소나무의 심재가 관재로 많이 쓰였음 을 알 수 있다. 영덕의 해파랑 길과 울진 십이령 길을 가다. 245

246 사명당 유정은 소나무를 주제로 청송사 靑 松 辭 라는 시를 지었다. 소나무 푸르구나. 초목의 군자로다. 눈서리 이겨내고 비오고 이슬 내린다 해도 웃음을 t숨긴다.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변함이 없구나. 겨울 여름 항상 푸르구나. 소나무에 달이 오르면 잎 사이로 금모래를 체질하고 바람 불면 아름 다운 노래를 부른다. 이곳 소나무 숲에 500년 된 소나무가 있다. 조선 성종 때 이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강산이 50번을 바뀌었는데도 그 푸르디 푸른 솔잎과 그 붉음 자태를 자랑하며 서 있는 금강송 아래에서 우리 인간들은 얼마나 작고 가녀린가? 신정일의 <걷고 싶은 길> 중 영덕의 해파랑 길과 울진 십이령 길을 가다. 246

247 제주 삼무공원에서의 하룻밤 :41 제주 삼무공원에서의 하룻밤 어제는 표선의 해비치 6219호에서 묵고 오늘은 제주시에서 묵는다. 오늘 밤 묵는 곳은 군대를 갓 제대한 1978년 3월부터 2000년 9월까지 내 청춘의 시절 2년 반이라는 시절을 고스란히 보냈던 삼무공원 아래 리치모텔이다. 들어오면서 보니 2003년 에 준공된 건물, 잠시 돌아보니 많이도 변했다. 어쩌면 내가 살았던 곳을 허물고 이 건물이 들어섰는지도 모르겠다. 내 인생에서 최초의 자취를 시작했던 곳, 고전음악을 듣기 위해 최초로 전축을 샀던 곳, 그리고 조금 여유를 찾고서 제주도를 떠도는 근거지였던 곳, 인생이라는 것이 이렇게 회고와 반복, 그런 것들로 이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나는 내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에 섰었고, 과감이 그 이전과의 결별을 하고 새롭게 나를 일으켜 세우고자 했다. 그리고 그 계획의 200프로를 달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까지 뭍(육지)으로 나간 뒤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속에서 나를 잃기도 하고 나를 찾기도 했던가? 길은 도처에 있었지만, 내가 가야할 길은 어둡고, 쓸쓸했다. 어디든 많지만 어디 한 곳도 녹록치 않던 그 길을 걷다가 다시 지쳐서 찾은 제주도 삼무공원 아래 추억의 공간, 그 소란하던 소리도 멎고 지금은 자판기 두드리는 소리만 요란한 시간, 그랬다. 낮에 지나간 기억을 더듬어 114에 물었다. 진두천, 최한성, 제주 삼무공원에서의 하룻밤 247

248 아무도 전화번호에 등제되어 있지 않았다. 저마다 빛 바랜 몸으로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지만 어딘가로 떠났을수도 있다는 그것이 약간은 서글펐다. 세월은 가고, 그리고 모든 사물도 가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런데도 나는 무엇인가를 지금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내가 너무 잘 아는 사람이 나를 기다리는 곳, 붉은 달빛보다 더 밝은 곳으로 가는 길을 비춘다" 라고 노래한 성 요한이 말한 것 같은 그러한 곳을, 부질없이, 부질없이, 임진년 칠월 스무여드레 제주 삼무공원에서의 하룻밤 248

249 제주, 그리운 제주, :26 제주, 그리운 제주, 혼자서 어딘가를 간다는 것이 아주 흔한 일이다. 그런데, 제주도를 혼자서 가는 것은 벌써 오래전 일이었다. 실업자 가 되어 이리저리 배회하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고난 속에 한 시절을 보냈던 제주도를 찾았던 때가 1987년 가을이었다. 그때 혼자서 완도에서 배를 타고 네 시간 쯤 걸려 건넜던 제주 해협을 오늘 열시 김포공항에서 출발하면 1시간 5분 에 도착할 것이다. 제주에서 표선으로 가고, 그리고 사흘을 보내고 토요일이면 다시 귀로에 오를 제주, 한라산을 지붕 삼아 펼쳐져 있는 제주도를 일컬어 삼다 三 多. 삼무 三 無 의 섬이라고 한다. 제주도가 특히 돌이 많고, 바람이 많고, 여자가 많다고 해서 삼다의 섬 이라고 부르는데, 그 세 가지가 다 등장하는 제주 민요가 있다. 오름의 돌과 지세어멍은, 굴러다니다가도 살도리 난다. 남의 첩과 소나무 바람은, 소린 나도 살 도리 없다. 번드번 듯 반하꽃은, 하루 피어 없어나 진다. 정절이 곧고 집안일을 착실하게 잘 하는 여자를 일컬어 지세어멍 이라고 부르고 한라산의 기생화산에 놓여있는 돌을 첩이라고 비유한 노래다. 또 제주에는 대문이 없고, 거지가 없고, 도둑이 없다고 해서 삼무의 섬 으로 불리고 있다. 마을에는 도둑이 없다. 우마나 농기구, 곡물 등을 들에 방치하여도 집어가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혹 벽을 뚫 고 담장을 넘는 자가 있어서 잡히면 백성들은 그를 죽여야 된다고 생각을 하므로 도둑 역시 스스로 죽게 됨을 안 다. 제주목사를 지냈던 이형상 李 衡 祥 이 지은 <남환박물>에 실린 글과 같이 제주도는 도둑이 없었다. 이는 사면이 다 바다 로 둘러싸인 섬이라는 특수성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런데 전대미문의 사건이 성산포 부근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말도 많지만, 걷기문화를 확산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제주 올레가 한층 더 올라서는 디딤돌이 될 것이라 믿는다. 제주, 그리운 제주, 249

250 돌이 많고 바람이 많은 제주도의 바람을 두고 어느 시인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바람은 방향도 없고 그 방향은 몇 백 번이나 바뀐다. 그 바람은 제주도의 하늘과 바다, 그리고 제주도를 사나운 짐 승으로 만든다. 여름 제주도, 여기저기를 다니며 눅눅하지 않은, 그래서 가슴이 서늘해지는 그 바람을 맞고 돌아오리라 마음먹는다. 제주, 그 제주를 간다는 것 자체부터가 나를 설레게 해야 하는데, 마음이 큰 바위가 얹은 것처럼 편치 않은 것은 그 무슨 까닭인지, 임진년 칠월 스무엿새 제주, 그리운 제주, 250

251 바닷가의 고을 거제도와 역사의 고장 창녕 걷기 :16 바닷가의 고을 거제도와 역사의 고장 창녕 걷기. 2012년 여름 걷기 학교, 2012년 여름 걷기학교가 경남 거제와 창녕 그리고 함안 일대에서 펼쳐집니다. 나라 안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거제도의 해금강과 우포늪이라는 이름의 습지와 낙동강, 그리고 아름다운 산 화왕산과 노자산을 답 사하는 좋은 기회입니다. 첫날은 명승지로 지정되어 있는 해금강과 팔색조가 깃을 치는 학동, 그리고 노자산에서 바라보는 남해의 쪽빛바다, 그리고 한국전쟁 의 상혼을 안고 있는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답사하고 주남 저수지 일대를 답사할 것입니다. 둘째 날은 나라 안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난 관룡산의 관룡사에서 용선대를 지나 화왕산을 거쳐 창녕에 이르는 길을 천천히 걷고 창 녕시내의 문화유산을 걸어서 답사할 예정입니다. 셋째 날은 나라 안의 길 중 가장 아름다운 길인 남지읍에서 양아지로 가는 개비리길과 습지 중 최고인 우포 늪 일대를 걷고 귀로에 오를 것입니다. 여름 휴가철에 충분한 휴식과 알맞은 걷기를 통해 몸과 마음의 평화를 위해 계획된 이번 여름 행사에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팔색조가 산다는 거제도의 해금강 신증동국여지승람 거제 현 풍속 조에 습속이 검소하고 솔직하다 고 기록되어 있고, 이규보가 이사관( 李 史 館 )이 부임하는 길에 전송하면서 쓴 시에 내 들으니, 거제는 남방의 극격( 極 檄 )으로 물 가운데 에 집들이 있고 사방은 모두 호호망망한 큰 바다이다. 독한 안개가 찌는 듯 하고, 회오리바람이 그치지 않는다. 여름이면 벌보다 큰 모기가 몰려들어서 사람을 깨우는데 참 으로 무섭다 하였고, 이보흠( 李 甫 欽 )이 신성기( 新 城 記 ) 에서 거제현은 푸른 바다 복판에 있으며 대마도와 서로 바라보인다 라고 노래 한 거제도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본래 바다 가운데에 있는 섬으로, 문무왕이 상군( 裳 郡 )을 두었다가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을 얻은 거제군은, 1965년 6 월에 착공하여 1971년 여름에 준공된 거제대교로 인하여 육지와 연결되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옥포대우조선소가 자리 잡은 거제시 신현읍 고현리에 한국전쟁의 상혼이 짙게 배인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있다. 바닷가의 고을 거제도와 역사의 고장 창녕 걷기. 251

252 이 수용소는 1950년 국제협약인 <포로의 대우에 관한 1949년 8월 12일자 제네바 협약>에 따라 세워졌다. 이 협약에 밝혀 놓았듯이 포로들에게 위협이 없을 정도로 전투지역으로부터 충분히 떨어진 지역에 소재 하게 되 어 있어 수용소를 그때의 신현면, 오늘날의 신현읍 고현리를 중심으로 하여 장평리 문동리 양정리와 동부면의 저구리 다 포리의 농토와 임야 1,200정보쯤을 징발하여 세웠다. 때문에 그 지역 안에서 살던 주민 2,116세대가 수용소 부지 밖으로 소개되었다. 이처럼 큰 이동이 있고 난 뒤에 그 자리에 수없이 많은 막사가 들어섰고 뒤이어 포로가 된 인민군과 중공군이 30만 명쯤이 들어왔는데,시인 김수영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 당시 거제도에 살던 사람이 10만여 명쯤이었는데, 미 해군함정이 흥남부두에서 싣고 온 피난민과 육지에서 건너온 피난민 20만 명쯤이 합쳐지면서 거제도는 하루아침에 사람이 들끓는 섬이 되었다. 1951년 5월 포로수용소 내 제76포로수용소에서 수용소 사령관 도드(F. T.Dodd)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어 4일 만 에 석방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인민군 대좌 이학구( 李 學 九 )가 주동이 된 이 사건에서 그들은 포로의 대우를 개선해 줄 것과 자유의사에 따른 포로송 환 방침을 중지할 것, 포로대표위원단을 인정할 것 등을 요구하며 유엔군과 대치하는 한편으로 반공포로를 인민재판 에 붙여 처벌하였다. 그때 고현리 제64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반공포로로 석방되어 거제도에 자리를 잡고 사는 장낙봉씨의 말을 빌리면, 사건이 일어난 76수용소에서는 즉결 인민재판의 결과에 따라 처형을 당한 반공포로의 송장이 날마다 몇 구씩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거제 포로수용소 훗날 밝혀진 바로는 그때 죽은 반공포로가 105명에 이른다. 유엔군 쪽의 강력한 저지로 도드 준장이 구출되면서 사건 은 매듭이 지어졌으나, 반공포로와 공산포로 간의 싸움은 더욱더 극렬해져서 마침내 따로 떼어놓게 되었다. 그 당시 이 수용소의 참담한 분위기는 반공포로로 석방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소설가 강용준씨의 장편소설 멀 고도 긴 날의 시작 에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고, 최인훈의 장편소설 광장 에서 이명준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북한과 유엔 사이에 체결된 휴전협정에 따라 전쟁은 무기한 휴전에 들어갔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남북 양쪽은 전쟁포로를 교환하게 되는데 남과 북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고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다. 어디로 갈 것인지를 물었을 때 중립국 을 선택한 그들은 남과 북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제3의 선택으로 중 립국을 택했고, 소설 속에서 이명준은 중립국으로 가는 남지나해에서 그 푸른 바닷물과 하나가 된다. 북한군 포로 74명, 남한군 포로 2명, 중국군 포로 12명은 인도로 남미로 흘러들어가 신산했던 세월을 겪었다. 팔색조도 깃을 치는 아름다운 섬 거제도는 그러한 상처뿐만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유배의 땅이었다. 고려사 에 의하면 1170년 무신란으로 고려의 18대 임금 의종이 지금의 거제시 둔덕면 거림리로 유배를 왔다. 바닷가의 고을 거제도와 역사의 고장 창녕 걷기. 252

253 그를 따라 들어왔는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임금 왕( 王 ) 자와 비슷한 구슬 옥( 玉 ) 자를 쓰는 성씨들이 거제도 에 꽤 많이 살고 있다. 그 뒤 조선 연산군 때 우찬성 벼슬을 지냈던 최숙( 崔 肅 )이 기묘사화로 유배를 와서 일생을 마쳤고, 숙종 때 송시열 또한 당쟁에 밀려 이 섬으로 유배를 왔다. 고색창연한 고을 영산, 지금은 창녕군의 하나의 면이 된 영산은 1914년 행정구역이 되기 전만 해도 하나의 현이었다. 고려 때 사람인 신예( 辛 裔 )가 그의 시에서, 영취산( 靈 鷲 山 ) 높아 조그만 티끌도 없는데, 안구역 백성들은 곧 모두 주씨( 朱 氏 ) 진씨( 陣 氏 )로다. 하였고, 이백첨( 李 伯 瞻 )은, 취령( 鷲 嶺 ) 높고 높아 네 마을을 누르니, 영특한 재주와 무사의 지략 및 가문이던가. 하였던 영 산은 옛것을 아끼는 마음과 대동의식이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견줄 수 없을만큼 빼어났던 고을이다. 단오날에 열리는 문호장굿, 영산 쇠머리대기, 영산 줄다리기등 이고장에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고유의 민속놀이가 나 라 안에서도 모두 이름난 놀이로 자리매김 된 것도 이 지역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무엇보다 1919년에 일어난 삼일 독립만세운동이 경남지역을 통틀어 이 영산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다는 자긍심도 한몫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일제 때에는 기질이 강하고 지역성이 강한 이곳에 일본인들이 발붙이기가 어려워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였 다고 한다. 그 중의 한 가지가 영산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 창녕군수를 군청이 있는 창녕에 있지 못하게 한 뒤 이곳에 상주시키 며 가끔씩 창녕으로 출장을 가도록 하였다. 그래서 영산의 창녕 이라는 뜻으로 영창녕 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문호장사당 文 戶 長 祠 堂 은 교동 동북쪽에 있는 사당이다. 원래 문호장은 350여 년 전에 영산에 살던 사람으로 관원에 억눌린 평민의 원한을 풀어준 영웅이요, 신인 神 人 으로 이 지역에서 믿고 있는 사람이다. 한번은 경상도 관찰사가 순무 중에 영산현에 이르러 길가에 놓인 농부들의 밥 광주리를 밟아버렷다. 이 것을 바라보고 있던 문호장이 신술로 관찰사의말발굽이 땅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못하게 하였다.를 않자 이상히 생 각하여 조사해보니 그렇게 된 이유가 문호장이 도술을 부려서 그런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화나간 관찰사가 문호장을 체포하여 문호장 을 문초하는데 곤장을 치면 몽둥이가 부러지고, 활을 쏘면 살이 하늘로 향하고, 총을 쏘면 총알대신 개구리가 튀어나 왔다. 깜짝 놀란 관찰사는 경산군 자인에다 문호장을 투옥시키려 보냈는데, 문호장이 압송을 담당했던 나졸보다 영산에 먼 저 나타나니 문호장이 두 사람이 되었다.. 크게 놀란 관찰사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소원을 물었다. 그러자 문호장은 자기에게는 아들이 없으므로 제사를 대 신 지내줄 것을 부탁하였다. 바닷가의 고을 거제도와 역사의 고장 창녕 걷기. 253

254 그 뒤 문호장이 단오날에 죽었으므로 문호장 사당을 짓고서 단오굿과 함께 그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제사 를 지내지 않으면 마을에 호랑이가 나타나 해를 입히거나 유행병이 돌면서 마을에 재앙이 든다고 한다. 제당은 네 개인데, 문호장과 그의 본처 첩과 그의 딸과 첩의 딸의 신당이 그것이다. 이 굿의 특징은 본처와 첩의 관 계를 해학적으로 연출하는데, 마을 사람들이 첩을 욕하고 본처를 위로하는 등 무언극으로 행해진다. 문호장을 모신 상봉당에는 호장문선생신위 戶 長 文 先 生 神 位 라는 위패가 있으며, 호랑이를 탄 노인이 그려져 잇는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산신이 문호장이라는 이름으로 인격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문호장의 말을 매던 괴목을 일제 때 베었더니 그 속에서 나무 부처가 나와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가져갔는데 꿈 에 나타나 되돌려주라고 하자 다시 옮겨와 지금은 문호장 사당에 모셔져 있다. 한편 영산 쇠머리대기와 영산 줄다리기는 각각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지금은 3.1절에 행해지고 잇지만 본래는 풍농을 기원하는 상원놀이로 온 군민의 대동 정신과 애향심을 길러주고 있다. 이 영산이 지금은 한적한 고을로 전락했지만 그냥 지나치면 서운할 아름다운 돌다리가 남아 있다. 영산 동리를 흘러가는 동천을 가로질러 세워진 아름다운 돌다리 만년교(보물564호)는 조선조 말엽의 빼어난 석수 백 진기 白 進 己 가 만들었다. 물속에 드리운 그 보름달 같은 이 다리를 만년교 또는 원다리 또는 남천교라고 부르는데, 이 다리는 꾸밈새 없이 서 민적이고 조선 후기의 민예적 民 藝 的 인 수수한 멋을 풍겨준다. 홍예를 이룬 부채꼴의 화강석은 32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석재 위에 장대석을 올리지 않고 둥글둥글한 자 연석을 겹겹이 쌓아 올렸다. 다리의 양쪽은 역시 자연석을 쌓은 석축으로 앞 뒤러 길게 연장되어 통로와 연결되고 있다. 이렇게 잡석으로 허술하게 쌓은 듯 싶지만 매우 견고하기 때문에 홍수에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다리 입구 에는 비석이 있는데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다리가 완성 되던 무렵 이 영산고을에는 신통한 필력을 13세의 소년 신동 神 童 이 살고 있었다. 다리가 완성되던 날 그 소년의 꿈속에 자신이 산신이라는 노인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듣건대 네가 신필 神 筆 이라고 하니 내가 거닐 다리에 네 글씨를 새겨놓고 싶다. 다리의 이름을 만년교로 정하리라. 하고서 금세 사라지자 소년은 그 자리에서 먹을 갈아 만년교 萬 年 橋 의 석자 를 밤을 새워 써놓았다고 한다. 지금도 다리 입구에 남아 있는 이 비석은 글씨가 기운차고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 명필이 쓴 글씨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석 끝에는 십삼세서. 十 三 歲 書 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바로 근처에 있는 영산연지는 시민들의 휴식처로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는데 그리 크지는 않지만 연지 가운데에 몇 개의 섬을 만들 어 마치 삼신산을 연상 시키고 그 나무에 형형색색의 단풍잎으로 물드는 가을에는 그 아름다움이 한결 돋보이는 곳이 영산연지이다. 신돈의 자취서린 옥천사터 바닷가의 고을 거제도와 역사의 고장 창녕 걷기. 254

255 옥천마을을 지나면 고려말의 신돈( 辛 旽 )의 자취가 서린 옥천사터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27권 창녕현편 불우조 옥천사란에 화왕산 남쪽에 있다 고려 신돈의 어머니는 바로 이절의 종이었다. 신돈이 죽음을 당하자 절도 폐사 되었으니 고쳐 지으려다가 완성되기도 전에 돈의 일로 해서 다시 반대가 생겼기 때 문에 헐어버렸다 역사 속에 요승으로 간승으로 기록된 신돈은 이곳 옥천사에서 태어났고, 본관은 영산(영산)이고 승명은 편조 자는 요 공이며 왕이 내린 법호는 청한거사였다. 당시 고려는 국내외적으로 어지러웠다. 공민왕은 새로운 인물을 불러들여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전작시키려 하던 차에 신돈을 만났다. 그는 도를 얻고 욕심이 없으며 또 천미하여 친당이 없으니 대사에게 맡기면 반드시 뜻대로 행하여 거리낌이 없으 리라 하고 생각하여 등용하기로 하였다. 신돈은 공민왕의 간곡한 청으로 조정에 들어왔고, 왕의사부(왕의 고문직)가 되어 오랜 폐단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 때 그가 가장 중점을 두고 실시한 개혁정책은 노비와 토지개혁이었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 을 설치하면서 다음 과 같은 포고문을 전국에 발표 하고서 부당하게 빼앗긴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 주었고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양 민으로 환원시켰다. 성인이 나타났다 라는 농민들과 빈민들의 찬양의 뒤편에는 중놈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 라는 비난이 뒤따랐다. 기득권 세력과 공민왕의 배반으로 1371년 7월 신돈은 수원의 유배지에서 죽었다. 신돈의 집권은 공민왕 때의 복잡한 정치상황에서 일어났던 특이한 정치 상황이었고 신돈의 집권기간은 6년이었다. 신돈의 개혁사상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만큼 민중을 사랑하고 그들의 고통과 민중고의 해결에 관심을 둔 사람이 얼 마나 있었으며, 신돈에 비길 만큼 중상구제를 위한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제도를 만들어 실제로 시행에 옮긴 권력가가 있었던가? 그의 등장과 그의 실패 이후 정몽주, 정도전, 윤소종등 조선의 건국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신진 문인 세력들 이 정치세력으로 성장 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에야 신돈을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아직까지도 신돈은 역사 속에서 악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가 태어난 옥천사터는 향토문화재5호로 지정되어 그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신라 8대 종찰의 하나였던 관룡사 불우했던 한 시대의 희생양이며 혁명가였던 신돈의 자취어린 옥천사터를 지나 관룡사로 가는 좁은 산길을 오르다 보 면 돌장승 한 쌍이 길손을 맞는다. 커다란 왕방울 눈에 주먹코가 인상적인 관룡사 돌장승을 뒤로하고 조금 오르면 대나무 숲 뒤편의 관룡사에 이른다. 관룡산(739m) 중턱에 위치한 이 절은 신라 26대 진평왕 5년에 증법국사가 창건하였고 원효대사가 천 여 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경을 설법한 큰 도장을 이룩하여 신라 8대 종찰 중의 하나였다고 전한다. 바닷가의 고을 거제도와 역사의 고장 창녕 걷기. 255

256 전설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제자 송파와 함께 백일기도를 드렸다. 그 때 갑자기 하늘에서 오색채운이 영롱한 가운데 벼락 치는 소리가 하늘을 진동시켰다. 놀라서 원효대사가 하늘을 쳐다보니 화왕산 마루의 월영삼지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그래 서 절 이름을 관룡사라 지었고, 절의 뒷산 이름을 구룡산 또는 관룡산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절은 그 후 경덕왕 7년에 추담선사가 중건하였고 몇 번에 걸쳐서 중수를 거듭하다가 1704년 가을의 대 홍수 때 약 사전만 남기고 금당, 부도 등이 유실되었으며 이 절의 스님 20여명이 익사하는 큰 재난을 당하였다. 그 뒤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이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르는데, (보룰:212호)인 관룡사의 대웅전은 앞면 3칸인 다포식 건물로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보물 146호인 약사전은 규모는 작지만 그 모습이 고풍스럽고 균형미가 빼어난 건물로서 맛배지붕에 주심포 양식의 집이다. 언뜻보면 부석사 조사당을 연상시키는 이 건축물은 사방1칸의 맞배지붕의 와가에 삼중대들보가 특이한 우리나라 조 선 초기의 건물로 송광사의 국사당과 함께 건축사를 연구하는데 아주 중요한 표본으로 꼽힌다. 이 건물의 또 다른 특징은 집체와 지붕의 구성 비례를 볼 수 있다. 기둥사이의 간격에 비하여 지붕의 폭이 두배 가까 이 될 정도로 규모가 커서 소규모의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은 매우 균형 잡힌 안정감을 보여주고 있다. 약사전에는 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 제 519호)이 안치되어 있고 문밖에는 작고 아담한 석탑이 서 있다. 그러나 뭐니뭐 니 해도 관룡사가 오래도록 가슴속에 남아 있는 것은 용선대의 석가여래좌상에서 받은 강한 인상 때문일 것이다. 요사채의 담 길을 따라 한적한 산길을 20여분쯤 오르면 커다람 암벽위에 부처님 한분이 날렵하게 앉아있다. 대좌의 높이가 1.17m2에 불상의 높이가 1.81m2인 이 석불좌상은 높은 팔각연화대좌에 항마촉지인을 하고 결과부좌하 고 앉아있는데 어느 때 사라졌는지 광배는 찾아볼 길이 없다. 그러나 석불좌상의 얼굴은 단아한 사각형이고 직선에 가까운 눈 오뚝한 코 미소를 띤 얼굴은 더할 수 없이 온화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우리 일행은 옛 사람들의 지혜와 부처에 대한 경이를 안고 배바위에 올랐다. 반야 용선을 타고 극락 세계로 향하는 부처님 눈보라를 몰아오는 바람소리 들린다. 저 바람소리는 이 골짜기 저 골짜기들의 모든 흐르는 시냇물 소리들을 불러 모 아 겨울 앙상한 나뭇가지들의 미세한 떨림 들을 한데모아 이곳으로 불어오는지도 모른다. 또한 저 바람 소리는 세상의 온갖 고난 세상의 온갖 슬픔들을 다 거두어 요원의 불길로 타오를 날을 기다리는 화왕 산의 억새밭을 향해 달려오는지도 모른다. 나는 천년의 세월을 견디며 앉아있는 용선대의 석조여래좌상(보물295호)아래 털썩 주저앉아 거대한 분화구처럼 펼쳐 진 세상을 바라본다. 관룡산을 병풍삼아 눈 쌓인 작은 산들이 물결치듯 펼쳐나가고 영산의 진산 영취산을 돌아 계성, 옥천의 자그마한 마 을들이 점점 히 나타난다. 누군가의 기원이고 간절한 소망인지도 모르는 채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이 꺼진 촛불아래 눈보라 맞으며 젖어 있고, 여기저기 던져진 동전들이 을씨년스럽다. 바닷가의 고을 거제도와 역사의 고장 창녕 걷기. 256

257 어쩌면 우리나라 부처님 중에 이보다 더 외롭게 혹은 드넓게 세상을 바라보는 부처님은 없을 것이고 반야용선을 타 고 극락세계로 향하는 부처님 역시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능선을 따라 오르는 산길엔 눈이 가득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에 발자국 남기며 간다. 우뚝우뚝 솟은 관룡산의 바 위 봉우리들이 엷은 구름 속에 잠기고 희미하게 보이는 청룡암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야호, 우리 역시 그 소리의 여운을 따라 산 속으로 구름의 산정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멀리 산자락들이 올라갈수록 희미해지고 가파른 산길을 시나브로 시나브로 올라서니 정상이다. 헬기장으로 사용되었을 관룡산 정상에는 발목까지 눈이 쌓여있고 우리는 그 위에 앉았다. 구름 속에 얼핏 화왕산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북쪽 의 저편에 있을 일연스님의 자취어린 비슬산은 보이지 않는다. 나뭇잎 스치는 바람소리가 눈 위에 앉아있는 내 가슴을 열고 들어온다. 나는 눈 덮힌 산위에서 내 살아온 나날을 뒤 돌아 본다. 그렇다 나는 이 산정에서 우우 휘몰아치는 바람소리 들으며 내가 걸어온 발자국 만큼이나 많이도 살았구나. 깨닫 는다. 얼마나 더 내 삶이 계속되고 살아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시덥 지 않은 일들 속에 파묻혀 있다 가 내가 나를 깨닫게 될까? 그러면서 내가 올라온 높이만큼 내려갈 길 또한 많으리라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때는 너무 늦었을 지도 몰라 내가 그 리던 세상 내가 꿈꾸던 세상은 이미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 때 나의 뒷모습은 어떤 모습을 지닌 채 자연으로 돌아갈까? 체념일까? 아니면 초월일까? 9백의 병이 왜적과 맞선 화왕산성 산길은 무릎까지 눈에 묻혀있고 앞서간 사람의 발자국 따라 우리들은 화왕산으로 가고 있다. 화왕산은 경상남도의 중북부 산악지대로서 낙동강과 밀양강이 둘러싸고 있으며 관룡산의 남쪽에는 낙동강의 지류인 계성천이 완만하게 흐른다. 화왕산에는 목마산성과 화왕산성이 있는데, 창녕의 진산인 이 산은 그 옛날 불을 내뿜던 화산으로 불뫼 또는 큰 불뫼 로 불린다. 그 불의 왕이라는 이름처럼 정월 대보름날은 산성안 분지의 5440평의 억새를 태우는 화왕산 억새태우기로 이름이 높 고 가을단풍이 물들거나 억새가 고운 모습을 드러내는 시월쯤은 억새밭의 아름다움을 보기위해 사람의 물결로 넘실 댄다. 사적 제64호로 지정된 화왕산성은 높이가 1.6m에 둘레가 2.6km이며 연못이 세 개에 샘이 9군데에 군창이 있었다고 세종실록지리지에 전해온다. 임진왜란 당시 홍의장군 곽재우가 성종 때부터 폐성이 되었던 것을 개수하여 의병과 선비들 9백여명을 모아 일본군 과 맞섰던 화왕산성에는 신라 진평왕 때 태사공 조계룡이 이 연못에서 태어났다는 창녕조씨득성지지라는 빗돌이 서 있다. 또한 한국전쟁 중에는 이성을 사이에 두고 인민군과 국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바닷가의 고을 거제도와 역사의 고장 창녕 걷기. 257

258 가는 눈발을 머금은 바람이 세차다. 행여 날아갈세라 마음 모으고 창녕사람들이 환장고개 라고 이름붙인 산길을 내려갔다. 옛 사람들이 이 산을 오를 적에 얼마나 힘들었으면 환장고개라고 이름을 지었을까. 내린 눈에 어지간하면 넘어지지 않는 나 역시 두 번을 넘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산을 내려와 우리들은 화왕산을 바라 보았다. 누군가의 말처럼 비가와도 눈이 와도 산은 그냥 그 자리에 변함없이 내리는 눈을 맞으며 서 있었다. 가랑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며 창녕읍 교상동 만옥정이라는 작은공원에 들렀다. 이 공원에있는 대원군의 척화비와 지 방문화재로 지정된 신라시대의 석탑 그리고 진흥왕의 척경비( 拓 境 碑 )를 보고자 함이다. 이 비는 원래 창녕읍의 목마산성에 있었다. 이비의 곁에는 성황당이 있었고 목마산성 줄기에 잇대어 고분군이 산재하 여 있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의 위촉을 받아 창녕의 고적을 조사하러 왔던 도리이가 비석이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보고함에 따 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진흥왕척경비가 세워진 때를 이 비문의 첫 머리에 적힌 신사년 2월 1일 을 근거로 하여 역사학자들은 신라 진흥 왕 22년인 561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에서 세운 최초의 비인 평남 용강군 점제현의 신사비에 이어 두 번 째로 오래된 비인 셈 인데 이 비는 화왕산 기슭에 묻혀 있다가 1914년에 발견되었다. 두께가 30cm에 높이가 178cm 자연 그대로의 화강암에다 23줄을 한문으로 새긴 이 비의 비문은 진흥왕이 나라 안을 살피고 다닌 발자취와 그를 수행했던 42명의 신하의 이름이 위계에 따라 차례차례 기재되어 있다. 그중에는 거칠부 같은 이름난 명장도 있고, 병탄한, 금관가야의 왕자 무력의 이름도 보이는데 김무력은 김유신의 할 아버지로 진흥왕 14년 한성인 신주의 군수로 부임하여 백제 성왕을 쳐부순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비문에는 17등의 계급과 관직들을 적은 것이고, 왕으로서의 통치이상과 포부를 밝히는 한편 중앙의 고관과 지방관들이 서로 협력하여 백성을 잘 이끌라는 유서를 담고 있을 것이다. 이때가 대가야가 멸망하기 불과 1년전 이었다. 그때 진흥왕은 창녕에 하주를 설치할 정도로 이 지역을 중요시 하였 고, 이것은 창녕을 가야지역의 진출에 발판으로 삼으려는 의도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한편 창녕에는 가야무덤군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모두 허울만 멀쩡할 뿐 알맹이는 아무것도 없다. 조선 총독부에 제출된 창녕 고분도굴 조사 보고서 에서 다른 유물들은 고사하고라도 유독 고분만은 놀랍게도 이백채가 넘는 것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대부분이 도굴의 난을 입은 일은 유감스럽기 이를 데 없다 라는 솔직한 고 백처럼 일본인들 뿐만이 아니라 해방이 된 뒤에도 도굴꾼들의 끈질긴 도굴이 그치지 않아 그야말로 토기 한 개까지도 남기 지 않은 채 고분들은 파괴되고 말았다. 그 후 식민지 시대 이 땅의 민중들은 일본에 복속당한 가야의 왕들이 일본의 왕들에게 엎드려서 조공을 바치는 치욕 의 역사를 배웠다. 그렇듯 600여년의 역사를 지닌 가야의 역사는 잃어버린 왕국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바닷가의 고을 거제도와 역사의 고장 창녕 걷기. 258

259 그 속에서 김해의 금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진주의 고령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고성의 소가야, 고령의 대가야등 6 가야의 동맹체들이 미궁 속으로 숨어들고 말았고, 일본서기에 임나일본부 가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다. 지금도 일본에 가면 가야시대의 금관을 비롯한 금동장신구 가 야 토기들을 숱하게 만날 수 있으니 역사는 항상 이긴 자의 것 이라는 말이 만고의 진리인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창녕읍 송현동에 있는 석빙고로 향하였다. 멀리서 보면 옛 무덤 같은 석빙고에 들어갔던 창녕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여름에도 이 얼음 곳간 속에 들어가면 으스스한 한기를 느끼게 된다고 하지만 사시사철 냉장고가 집집마다 보급된 요즈음에는 그 옛날의 얼음창고는 저런 형태였구나 하고 짐작만 할 뿐이다. 시내 전체가 박물관인 창녕읍 다시 발길을 돌려 하병수 가옥과 술정리 3층석탑을 찾아가는 길은 내 어린 시절의 고향집 돌담길을 연상케 하는 묵 은 길이다.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기전의 육십년대 식 골목길들이 연이어 나타나는데, 멀리서 보아도 그 집은 알 수 있다. 집 뒤 안의 언덕위에 오래 묵은 느티나무들이 숲을 이룬 채 서 있고 집을 들어서면 무너져가는 집한 채가 서있을 것 이다. 그러나 예상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고색창연하던 문간집이 어느새 사라지고 번듯한 나무들로 새로운 집이 지어지고 있었다. 온 갖 꽃들이 피어나던 여름날의 그 모습은 어디로 갔는가, 사람만이 그 여름날 그대로다. 어디서 왔느냐는 물음에 전주 에서 왔다고 답하자 하병수옹은 환하게 웃음 지으며 집의 내력을 들려주었다 년에 중요민속자료 10호로 지정된 술정리의 하병수 가옥은 오백여년 전에 지어졌다. 조선왕조 연산군 4년에 무오 사화가 일어났다. 그때 김종직의 문하로서 조정의 벼슬을 지내던 하자연이 사화를 피하여 이곳에 내려와 살면서 지었 다. 그 당시로부터 오백년이 지난 이 때까지 이 집은 해마다 지붕을 갈아 인것 말고는 거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 고 있다. 우리고향에서는 쌔 라고 부르는 억새로 지붕을 얹고 대개의 조선집에 흙을 바른 것과는 달리 듬성듬성 대나무를 엮어 지붕이 가벼워 들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칡넝쿨로 서까래를 묶었다. 그래서 마루에 누워 지붕을 올 려다보면 저절로 참을 수 없는 집의 가벼움 이 실감이 나는 집이다. 정남향으로 지어진 이집은 네 칸으로 동쪽에 서부터 건넌방, 대청, 안방, 부엌이 차례로 붙어 있으며 못은 한 개도 쓰지 않았다. 1970년 나라에서 이집을 보수하면 서 용마루에 못질을 하여 옛 모습이 변화되었다고 아쉬워하는 하자연의 17세손인 하병수옹과 작별을 고하였다. 술정리 동삼층석탑을 찾아가는 그 길 역시 미로의 길 찾기나 다름없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인 술정리 의 동탑은 기단과 탑신의 균형이 안 맞고 탑신이 단정 명쾌하며 석재의 가공 또한 예리하고 정밀하여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과 비길만한 명 탑의 하나로서 국보 34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왕궁리의 오층석탑 이 보물이었다가 요즘에야 국보로 지정된 것을 보면 신라의 유물들에 더 후한 점수를 주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바닷가의 고을 거제도와 역사의 고장 창녕 걷기. 259

260 우포늪을 걷다. 우포늪( 牛 浦 ) 경남 창녕군 대합면. 대합면, 이방면, 유어면, 대지면 일원에 걸친 자연늪으로 1997년 7월 26일 정부보전지역으로 지 정되었다. 낙동강 지류인 토평천 유역에 1억 4000만 년 전 한반도가 생성될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된다. 담수면적 2.3km2, 가로 2.5km, 세로 1.6km로 국내 최대의 자연 늪지다. 1997년 7월 26일 생태계보전지역 가운데 생태계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고 이듬해 3월 2일에는 국제습지조약 보존습지로 지정되어 국제적인 습지가 되었다. 우포늪(1.3km2), 목포늪(53만m2), 사지포(36만m2), 쪽지벌(14만m2) 4개 늪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997년 342종의 동 식물이 조사 보고 되었다. 식물은 가시연꽃 생이가래 부들 줄 골풀 창포 마름 자라풀 등 168종, 조류는 쇠물닭 논병아리 노랑부리저어새(천연 기념물 205) 청둥오리 쇠오리 큰고니(천연기념물 201) 큰기러기 등 62종, 어류는 뱀장어 붕어 잉어 가물치 피라미 등 28종, 수서곤충은 연못하루살이 왕잠자리 장구애비 소금쟁이 등 55종, 패각류는 우렁이 물달팽이 말조개 등 5종, 포유류는 두더지 족 제비 너구리 등 12종, 파충류는 남생이 자라 줄장지뱀 유혈목이 등 7종, 양서류는 무당개구리 두꺼비 청개구리 참개구리 황 소개구리 등 5종이 서식하고 있다.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며 감탄사를 연발하고 수많은 문화유산과 역사의 길을 걷게 될 이번 걷기 학교에 많은 참여 바랍니다. 바닷가의 고을 거제도와 역사의 고장 창녕 걷기. 260

261 관동대로> 다섯 번째 문재에서 전재 너머 원주까지, :15 관동대로> 다섯 번째 문재에서 전재 너머 원주까지, 울진군 평해읍에서 시작되어 동대문까지 이어지는 관동대로 다서 번째 여정이 8월 24일(금)에서 26(일요일)일까지 실시됩니다. 평창 의 끝자락인 문재에서 횡성으로 접어들면 안흥역에 도착합니다. 지금은 안흥찐빵의 고장인 안흥에서 전재를 넘으면 우천면에 이를 것입니다. 횡성은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한우의 생산지입니다. 횡성을 지나면 치악산 자락에 자리 잡은 옛 절 구룡사에 이르고, 그 곳에서는 계속 치악산 자락을 따라갑니다. 오곡이 무르익는 가을의 길목, 원주까지 이르는 관동대로 다섯 번째 여정에는 태종(이방원)의 스승인 원천석과 그를 찾아왔던 이방원 의 자취가 서려 있고 소초면둔둔리에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원호의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가을의 문턱 그 아름다운 관동대로를 따라가는 여정에 참여바랍니다. 조금만 더 가면 문재터널이다. 터널을 통과할 사람들과 터널 위 문재정상으로 갈 특공대로 나누는데 대학 산악부 출신인 김선희씨 와 나만 특공대로 선출되어 문재 정상으로 향했다. 특공대가 있다면 적도 있어야 하는데 적은 원래 보이지 않는 적이 제일 무섭 다 는 말이나 <예기>에 나오는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視 而 不 見. 視 而 不 視 ). 는 말처럼 적은 지금 상태에선 자기 스스로가 적일 따 름이다. 힘겹게 힘겹게 오르는 산길, 길도 없는 산길을 악전고투로 헤집고 올라서자 문재 정상 800미터라고 쓰여진 나무 팻말하나가 있다.,이 렇게 이번 답사의 종착지인 문제 정상에 섰다. 진짜 최고의 길이예요. 다음 답사 시작을 이곳에서 하면 어때요. 김선희씨는 지금 도 기운이 팔팔하다. 예전에 큰 길이 뚫리기 전 버스가 다녔던 길인지 평창 23키로 방림 17키로라고 쓰인 표지판이 지금도 남아 있는 길, 아래로 임도가 이어지고 그 길을 한참 따라갔는데 길은 자꾸 딴 데로 가고 다시 돌아서서 왔던 길을 되돌아와 내려가자 일행들 은 모두다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횡성군에 딸린 조그마한 안흥이 온 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안흥 찐빵 때문이었다. 어느 집이나 어느 지방에서나 흔 하디 흔한 안흥 찐빵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알려지고 메스컴을 탄 뒤부터 어딜 가나 안흥 찐빵집이 들어서고 이곳 안흥에서는 서로 원조를 내세우는 찐빵집들이 들어서서 전국으로 배달하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우리도 때는 아니지만 안흥에서 찐빵을 안 먹고 가면 서운 할 것 같아 찐빵 한 상자를 사서 나누어 먹고 출발했다. <안흥 찐빵 대축 제>가 열리기 직전이라선지 평창강에 섶다리와 징검다리가 놓여 있다. 어린이 같이 설레는 마음으로 이 다리 저 다리를 건넌 뒤 다 시 길 위에 나선다. 웃거리라고 부르는 안흥 4리에 있는 안흥초등학교를 지나 방지둔교를 건너며 상안리에 이른다. 안흥 위쪽이 되므로 웃안흥이라고 부 르다가 상안리로 이름이 바뀐 상안리의 배나무거리는 관터 서 남쪽에 있는 마을이고, 관터 마을은 상안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 날 역이 있었다는 마을이다. 이곳 관동대로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사연들을 안고서 걸어갔을까? 유배를 가던 사람, 과거에 급제해서 기쁜 마음을 가지고 가던 사람, 벼슬길을 가던 사람 그리고 수많은 장사꾼들이 이 길을 갓을 것이다. 그들의 땀방울이 면면히 이어져 이 길에서 뒤따라오는 길손들에게 이정표를 제시해 줄 법도 한데, 길상 항상 새로운 것이라서 그런지 어디 하나 그 흔적들을 찾을 수가 없다. 관동대로> 다섯 번째 문재에서 전재 너머 원주까지, 261

262 그 길도 잠시 작은 오솔길이 나타나고 멀리서 중장비 소리, 길이 사라진다. 새로 낸 길을 따라 오르자 42번 국도와 만나게 되고 조 금 오르자 전재 정상이다. <여기는 전재 정상입니다> 해발 540미터 전재 정상에서 바라본 산들은 찬연하다. 횡성군 우천면과 안흥면 의 경계인 전재에 햇살이 듬뿍 내려 쬐고 고혜경, 민경권. 이수아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간재 정상에서 좌측에 있는 산이 바람 부리산이라고 부르는 풍차산 風 車 山 (699미터) 서북쪽에 틔어서 늘 바람이 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산길에서는 누가 가장 길의 선두에 서는가가 중요하다. 길이 있을 것이라고 앞 서 간 민경권씨를 뒤따라 간 일행들이 아직 고개 마 루에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구룡사 龜 龍 寺 는 강원 원주시 소초면( 所 草 面 )의 치악산( 雉 岳 山 ) 비로봉 북쪽 구룡소( 九 龍 沼 )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 月 精 寺 )의 말사이다. 신라의 승려 의상( 義 湘 )이 668년(문무왕 8)에 세운 절로, 창건 당시의 절 이름은 구룡사( 九 龍 寺 )이다. 이 름에 얽힌 9마리 용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며, 창건 이후 계속하여 도선( 道 詵 ) 자초( 自 超 ) 휴정( 休 靜 ) 등이 거쳐 가면서 영서( 嶺 西 ) 수찰( 首 刹 )로서의 구실을 다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 절 입구에 있는 거북 모양의 바위 때문에 절 이름도 아홉구 자를 거북 구 자로 고쳐 쓰게 되었다고 한다. 절 입구에 있는 황장금표( 黃 腸 禁 標 ) 는 조선시대 이 일대에서의 무단벌목( 無 斷 伐 木 )을 금한다는 방으로, 전국에서 유일한 역사적 자료이다. 현존 당우는 대웅전 보광루( 普 光 樓 ) 삼성각( 三 聖 閣 ) 심검당( 尋 劍 堂 ) 설선당( 說 禪 堂 ) 등이 있는데, 수차례 대웅전을 중수하였음에도 그 안에 있는 닫집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다. 구룡사 근처에 있는 영말은 이흥, 이흥동이라고도 부르는데, 예전에 역 驛 이 있었다고 하며 구룡소는 구룡사 위에 있는 소로 옛 날 용이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다. 본관이 원주( 原 州 )로 원주시 개운동에서 태어난 원호는 자는 자허( 子 虛 ). 호는 무항( 霧 巷 ) 관란( 觀 瀾 ). 시호는 정간( 貞 簡 )이다. 1423년(세종 5) 식년문과( 式 年 文 科 )에 급제, 여러 청환직( 淸 宦 職 )을 지내고 문종 때 집현전직제학( 直 提 學 )이 되었다. 단종 초에 수양 대군( 首 陽 大 君 : 世 祖 )이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고향인 원주에 내려가 은거하다가 1457년(세조 3) 단종이 죽자 영월( 寧 越 )에서 3년 상을 치렀다. 이익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의 인사문 에서 원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그를 높게 평가하였다. 내가 일찍이 김시습. 남효온 등은 그의 지를 굽히지 않고 자취를 드러내어 숨기지 않았으니 중용이 될 수 없고, 오직 경은 耕 隱 이 맹전 李 孟 專 은 기회를 살펴 눈멀고 귀먹었다고 청탁하고 물러갔으며, 직학사 直 學 士 원호는 움막에 거처하면서 단종 端 宗 을 위하여 복 제를 입었으니, 참으로 거룩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원주시 소초면 둔둔리에 살면서 그의 제자인 권탑과 함께 달을 보고 그 해의 농사를 점치는 월계도를 만들었다. 원호와 그의 제자가 40 년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연구해서 만든 월계도는 둔둔리의 덕고산 주봉에서 짚신봉까지의 2킬로미터쯤 되는 능선을 폭 60센티미터, 길이 40센티미터의 종이에 옮겨서 그려놓고 이것을 육십갑자로 나누어 금을 그어 놓은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정월 대보 름날에 떠오르는 달의 위치에 따라서 그해의 농사의 풍흉을 점친다는 것이다. 갑자지간에서 달이 떠오르면 콩 농사가 잘 되고, 을측 지간에서 달이 뜨면 가뭄이 들고, 병신지간에서 달이 뜨면 장마가 진다는 것으로 표현했다. 요즈음에도 이 지방에서는 월계도에 맞추 어 보고 거기에 따라서 그 해에 심을 곡식의 종류를 정하거나 씨를 뿌릴 날짜를 잡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한다. 그렇게 월계도에 따라서 농사를 지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1969년에는 월계도가 가리킨 대로 콩 농사가 아주 흉년이었다고 한다. 그 뒤 원호는 호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이에 불응하고 여생을 마쳤다. 그는 앉을 때는 반드시 동쪽을 향하여 앉고, 누울 때에는 반드시 동쪽을 향하여 머리를 두었다. 그 이유는 단종의 장릉 莊 陵 이 자기가 거처 하고 있는 집의 동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평생 단종을 그리다가 죽었는데 손자인 숙강 叔 康 이 사관이 되어 직필 直 筆 로 화를 당하자, 자기의 저술과 소장 疏 章 을 모두 꺼내어 불태우고는, 여러 아들들에게는 다시는 글을 읽어 세상의 명리 名 利 를 구하지 말 라고 경계하였다. 이 때문에 집안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경력과 행적도 전하는 것이 없다. 관동대로> 다섯 번째 문재에서 전재 너머 원주까지, 262

263 치악산에서 흘러내린 흥양천을 건너자 황골. 입석대계곡 6키로.. 15키로. 정선 91키로 라고 쓰여진 표지판이 보인다. 입석골은 황골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입석대 立 石 臺 와 입석암 立 石 庵 이 있는 곳이다. 정선이 여기에서 제법 멀구나. 점심 먹고 이때부터가 문제다. 배는 아직 꺼지지 않고 조금은 쉬면서 졸기도 해야 하는데, 갈 길은 멀고 흐느적거리며 가다가 보면, 얼마쯤 왔는지 자꾸만 지도 보는 게 일이다. 우리 속담에 게으른 년이 삼가래 세고, 게으른 놈이 책 장 수 센다. 는 말이 있다. 게 으른 여자가 삼( 麻 )을 찢어 베를 놓다가 얼마나 했나 헤아려 보고, 또 게으른 사람이 책을 읽다가 얼마나 많이 읽었나, 얼마나 남았 나. 장 수 헤아려 본다는 말이다. 아직 얼마 걷지도 않고서 얼마를 걸었나, 얼마나 남았나, 자꾸 지도를 보자는 하는 것은 내가 이미 충분히 지친 탓이리라. 보부상들의 출입이 잦았던 원주 <택리지>를 지은 이중환이 이 지방을 두고 산골짜기가 가깝기 때문에 난을 피하여 숨기가 쉽고 서울이 멀지 않아서 태평스러울 적 에는 나아가기가 쉬운 곳 이라고 하였는데, 그런 연유 탓에 이 지방에 특히 보부상들의 출입이 잦았다. 이 원주 땅을 거쳐 갔던 사 람들 중에 장터에 목숨을 걸고 돌아다녔던 보부상들의 애환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 신정일의 <관동대로> 중에서 관동대로> 다섯 번째 문재에서 전재 너머 원주까지, 263

264 한여름 괴산 산막이 길을 가다 :18 한여름 괴산 산막이 길을 가다 중복 더위가 한창인 7월말 충북 괴산의 산막이길을 갑니다 1차 백두산 기행을 하는 회원님들도 계시고... 우리는 백두산은 아니드라도 물좋고 산좋은 충청도 땅을 걷습니다 충북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 사오랑마을에서 산골마을인 산막이 마을까지 연결되었던 10리길의 옛길로 흔적이 남아 있는 옛길을 괴산댐이 생기면서 나무데크등으로 복원한 산책로인 괴산산막이길! 호수와 함께 어우러져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어버린 산막이길 우리땅걷기에서는 산막이길을 포함하여 약17Km의 옛마을과 시원한 계곡, 그리고 폭포 땀을 흘리며 능선을 넘어서는 유쾌함과 숲속에 깊히 흐르는 계곡에서 잠시 발도 담그고 괴산땜에 이르러서는 유람선 을 타고 건너 산막이길을 걷는 하루 번개 기행을 추진 합니다 이번 기행은 점심 식사를 할수 있는 식당이 전혀 없는 관계로 참가비 일부를 절약하여 각자 점심준비를 하여야 합니 다 충분한 식수와 간식, 그리고 점심식사도 준비 하시기 바람니다 또한 산행에 아주 아주 자신이 없으신 분들은 머슴 한명씩 대동하여 참가 하시면 한여름의 따스함을 만끽 하실수가 있습니다 한여름 괴산 산막이 길을 가다 264

265 아침가리와 생태문화의 보고 곰배령을 가다 :04 아침가리와 생태문화의 보고 곰배령을 가다. 7월 셋째 주말인 21일과 22일 이틀간에 걸쳐 강원도 인제군에 있는 아침가리와 곰배령을 찾아갑니다. 곰배령은 높이가 1164m으 산으로 백두대간에 걸쳐 있는 산입니다. 이 산 일대는 나무가 울창하고 계곡이 깊어 국내에서 생태보존이 가장 뛰 어난 곳으로 희귀한 식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해발고도 1000m에 있는 고갯마루는 수천평에 걸친 광활한 초원지대이고, 봄에는 산나물이 풍성 하게 돋아나고 철따라 작은 꽃들이 아름다운 화원을 이룬다. 남북으로는 점봉산(1424m)과 가칠봉(1165m)이 솟아 있습니다. 점봉산은 백두대간에 속한 봉우리로 산세가 완만하고 야생화와 산나물 군락지 가 몰려 있습니다. 기암괴석과 흐르는 물이 어우러진 계곡을 끼고 올라가다 보면 정상 아래쪽에 나물채취꾼들의 임시거주지와 박새풀들이 이색적으로 펼쳐져 있 습니다. 정상에 오르면 초원 위로 융단을 깔아 놓은 듯 야생화가 피어 있고, 야생화 사이로는 곰취, 참나물, 산당귀 등 산나물이 지천에 널려 있습니다. 바로 옆으로 작은점봉산(1295m)과 호랑이코빼기(1219m)가, 멀리 설악산이 보입니다. 인제군 기린면과 진동리, 인제면 귀둔리 양양군 서면 오가리 경계에 있는 점봉산은 덤붕산이라고도 부릅니다., 조선시대 이 산 골짜기에서 어 떤 사람이 몰래 엽전을 만들다가 들켰다는 이야기가 서린 곳입니다. 지금도 이 근처에서 가끔씩 꽹과리 소리가 나는데 이 소리를 가리켜 덤붕산 닷돈, 덤붕산 닷돈. 이라고 합니다. 아침가리 골 구룡덕봉(1,388m) 기슭에서 발원하여 20km를 흘러 방태천으로 들어가는 골짜기입니다. 정감록( 鄭 鑑 錄 ) 에 <삼둔사가리>라는 글귀가 나오는데, 둔이란 펑퍼짐한 산기슭을, 가리(거리)란 사람이 살 만한 계곡가로서 난리를 피해 숨을 만한 피난처를 뜻한다. 홍천군 내면의 살둔(생둔), 월둔, 달둔과 인제군 기린면의 아침가리, 연가리, 적가리, 명지거리(결가리)를 가리키 는 말입니다. 아침가리란 아침에 밭을 간다는 뜻으로 아침갈이라고도 하며 지도에는 한자어로 조경동( 朝 耕 洞 )이라 표기되는 곳이입니다. 여름에도 발이 시린 시원한 골짜기에서 물놀이를 하며 한 여름의 피서를 함께 하고자 마련한 이 행사에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아침가리와 생태문화의 보고 곰배령을 가다. 265

266 백령도 너머 몽금포 해수욕장, :00 백령도 너머 몽금포 해수욕장, 백령도엘 다녀왔습니다. 백령도 곳곳의 볼거리 먹을거리에 취해서 보낸 이틀 물론 안개주의보에 가슴을 졸이기도 했지만 두무진 부근의 바닷가 풍경은 명승 8호에 걸 맞는 명승지였습니다. 그러나 잘 보내고 돌아와서도 가슴이 아린 것은 아슴푸레한 안개 속에서 보았던 장산곶 너머 몽금포 해수욕장과 심청의 전설이 서린 인당수를 마음속으로 바라만 보고 돌아온 것입니다. 수많은 시인 묵객들은 용연반도의 북서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우리나라 팔경 중 한 곳으로 이름이 난 장산곶과 몽긍포 일대를 어떻게 표현했을까요? 율곡 이이는 몽금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송림 사이 거닐다 보니 낮 바람 시원하고, 금모래에서 놀다 보니 어느덧 석양이 지는구나 천년 지나 아랑의 발길 어디서 찾을 것인가 고운 주름 다 걷히니 수평선은 더욱 멀어라 장산곶은 산줄기가 서해 깊숙이까지 뻗어갔다고 해서 장산( 長 山 )이란 이름이 붙었으며, 조선시대에 아랑포영과 조니포진이 설치되어 있었고 수군만호가 한 사람 배치되었던 국방상의 중요한 요충지였 습니다. 장산곶의 모래사장에 대한 택리지 의 기록을 볼까요? 장산곶 북쪽에 금사사( 金 沙 寺 )가 있고, 바닷가 20리 거리가 모두 모래 언덕이다. 이곳의 모래는 아 주 곱고 금빛 같아서 햇빛에 비치어 반짝인다. 이 모래들은 바람에 따라 모래가 쌓여서 산봉우리처 럼 되는데, 높아지기도 얕아지기도 하며 아침저녁으로 위치가 옮겨져서 혹 동쪽에 우뚝했다가 서쪽 에 우뚝하고, 갑자기 좌우로 움직여서 일정한 방향이 없다. 그러나 모래 위에 있는 금사사는 웅장하고 화려하며 끝내 모래에 묻히지 않는데, 이것은 실로 괴이 백령도 너머 몽금포 해수욕장, 266

267 한 일이다. 어떤 사람은 해룡( 海 龍 )의 조화이다 라고 한다. 모래 속에서 해삼이 나는데 모양이 방 풍( 防 風 ) 같다. 매년 4, 5월이면 중국 등래( 登 萊 ) 바다에서 배를 타고 오는 자들이 많다. 관에서 장수 와 이속( 吏 屬 )을 보내 쫓으면 이들은 바다로 나가 닻을 내리고 있다가 사람이 없는 틈을 타 다시 언 덕에 올라와서 해삼을 따간다. 이 같은 모래를 세( 細 )백사, 즉 가는 모래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미포 해수욕장의 승경을 처음 발견 하고 개발에 착수한 사람이 미국인 선교사인 언더우드였습니다. 그는 1900년에 가족과 함께 이곳에 서 피서를 하며 보냈고, 그 뒤 중국 일본의선교사들과 해수욕장 부근 일대의 대지를 점유하는 수속 을 밟아서 제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별장 50여 채를 지어 세계적인 해수욕장으로 이름을 알리기도 하였습니다. 구미포해수욕장과 몽금포해수욕장 그리고 대청도 해변 가 일대에 있는 가늘고 흰 모래를 규사라고 부른다. 마치 설탕가루나 고운 소금같이 알맹이가 가늘어 손에 쥐면 어느새 새어나갑니다. 가벼워서 바람이 불 때마다 사방으로 날려 천태만상의 모래언덕을 이루는 이 모래를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연간 약 7만 톤쯤을 실어갔습니다. 한편 장산곶은 용이 할퀴듯, 범이 움켜쥐듯 다투어가며 자리 아래에서 기이한 모습을 비친다 고 할 만큼 경치가 수려한데, 국사봉 자락의 장산곶 해변에는 염옹암( 鹽 瓮 巖 소금항아리바위)이라는 가 파르고 높은 바위 두 개가 서 있습니다. 그 아래는 물살이 세고 해수가 굽이치므로 이 앞을 지나는 배들이 좌초하거나 난파하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해난사고를 막기 위해 옛 어부들은 장산 곶에 사당을 세우고 바다의 신에게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또한 백령도 건너 장산곶 일대는 <몽금포 타령>의 본 고장이기도 하지요. 장산곶( 長 山 串 ) 마루에 북소리 나더니 금일( 今 日 )도 상봉( 上 峯 )에 임 만나 보겠네. <후렴> 에헤 요 어헤요 임 만나 보겠네. 갈 길은 멀고요 행선( 行 船 )은 더디니 늦바람 불라고 성황님 조른다. <몽금포타령>은 황해 장연( 長 淵 )지방에 있는 몽금포 어항( 漁 港 )의 정경, 고기잡이생활의 낭만을 엮은 노래로 만든 가볍고 경쾌한 민요입니다. 그러나 잘게 꺾어 넘어가는 부분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애수 ( 哀 愁 )가 감돕니다. 중모리장단이며 수심가조( 愁 心 歌 調 )인 <몽금포타령>으로 잘 알려져 있는 몽금포 는 마치 비단 필 같이 길고 넓게 펴놓은 흰색의 모래사장이 전개되는데, 이 모래는 백사 白 沙, 금사 金 沙, 명사 明 沙 라고 부릅니다. 4킬로미터나 되는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 있고 해수가 맑아 천혜의 해 수욕장으로 꼽힙니다. 특히 모래의 질이 우수하여 명사십리( 明 沙 十 里 ) 또는 금사십리 라 하였는 데, 모래알이 아주 가늘어 바람이 불면 날아가 모래언덕을 만든다. 맨발로 딛고 가면 발 아래서 소리 가 난다고 하여 명사 鳴 沙 라 하거나, 모래알이 맑고 깨끗하여 명사 明 沙 라 하였습니다. 금세 그리운 것이 백령도이고, 눈에 밟힐듯 선명하게 다가오는 곳이 바로 몽금포입니다. 백령도 너머 몽금포 해수욕장, 267

268 언제쯤 몽금포 해수욕장을 걸으며 지난 그리움의 세월을 이야기하게 될 런지? 임진년 유월 스무닷새 백령도 너머 몽금포 해수욕장, 268

269 2012년 여름 걷기 학교. 바닷가의 고울 거제도와 역사의 고장 창녕 걷기 : 년 여름 걷기 학교, 바닷가의 고울 거제도와 역사의 고장 창녕 걷기. 2012년 여름 걷기학교가 경남 거제와 창녕 그리고 함안 일대에서 펼쳐집니다. 첫날은 명승지로 지정되어 있는 해금강과 팔색조가 깃을 치는 학동, 그리고 노자산에서 바라보는 해남해의 푸른 바 다, 그리고 한국전쟁의 상혼을 안고 있는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답사하고 주남 저수지 일대를 답사할 것입니다. 둘째 날은 나라 안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난 관룡산의 관룡사에서 용선대를 지나 화왕산을 거쳐 창녕에 이르는 길을 천천히 걷고 창녕시내의 문화유산을 걸어서 답사할 예정입니다. 셋째 날은 나라 안의 길 중 가장 아름다운 길인 남지읍에서 양아지로 가는 개비리길과 습지 중 최고인 우포 늪 일대 를 걷고 귀로에 오를 것입니다. 팔색조가 산다는 거제도의 해금강 신증동국여지승람 거제 현 풍속 조에 습속이 검소하고 솔직하다 고 기록되어 있고, 이규보가 이사관 ( 李 史 館 )이 부임하는 길에 전송하면서 쓴 시에 내 들으니, 거제는 남방의 극격( 極 檄 )으로 물 가운데에 집들이 있고 사방은 모두 호호망망한 큰 바다이다. 독한 안개가 찌는 듯 하고, 회오리바람이 그치지 않는다. 여름이면 벌보다 큰 모기가 몰려들어서 사람을 깨우는데 참으로 무섭다 하였고, 이보흠( 李 甫 欽 )이 신성기( 新 城 記 ) 에서 거제현은 푸 른 바다 복판에 있으며 대마도와 서로 바라보인다 라고 노래한 거제도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본래 바다 가운데에 있는 섬으로, 문무왕이 상군( 裳 郡 )을 두었다가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을 얻은 거제군은, 1965년 6월에 착공하여 1971년 여름에 준공된 거제대교로 인하여 육지와 연결되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옥포대우조선소가 자리 잡은 거제시 신현읍 고현리에 한국전쟁의 상혼이 짙게 배인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있다. 이 수 용소는 1950년 국제협약인 <포로의 대우에 관한 1949년 8월 12일자 제네바 협약>에 따라 세워졌다. 이 협약에 밝혀 놓았듯이 포로들에게 위협이 없을 정도로 전투지역으로부터 충분히 떨어진 지역에 소재 하게 되어 있어 수용소를 그때의 신현면, 오늘날의 신현읍 고현리를 중심으로 하여 장평리 문동리 양정리와 동부면의 저구리 다포리의 농 토와 임야 1,200정보쯤을 징발하여 세웠다. 때문에 그 지역 안에서 살던 주민 2,116세대가 수용소 부지 밖으로 소개 되었다. 이처럼 큰 이동이 있고 난 뒤에 그 자리에 수없이 많은 막사가 들어섰고 뒤이어 포로가 된 인민군과 중공군이 30만 2012년 여름 걷기 학교. 바닷가의 고울 거제도와 역사의 고장 창녕 걷기. 269

270 명쯤이 들어왔는데, 시인 김수영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 당시 거제도에 살던 사람이 10만여 명쯤이었는데, 미 해군함정이 흥남부두에서 싣고 온 피난민과 육지에서 건너온 피난민 20만 명쯤이 합쳐지면서 거제도는 하루아침 에 사람이 들끓는 섬이 되었다. 1951년 5월 포로수용소 내 제76포로수용소에서 수용소 사령관 도드(F. T.Dodd)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어 4일 만 에 석방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인민군 대좌 이학구( 李 學 九 )가 주동이 된 이 사건에서 그들은 포로의 대우를 개선해 줄 것과 자유의사에 따른 포로송환 방침을 중지할 것, 포로대표위원단을 인정할 것 등을 요구하며 유엔군과 대치하는 한편으로 반공포로를 인민재판에 붙여 처벌하였다. 그때 고현리 제64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반공포로로 석방되어 거제도에 자리를 잡고 사는 장낙봉씨의 말을 빌리면, 사건이 일어난 76수용소에서는 즉결 인민재판의 결과에 따라 처형을 당한 반공포로의 송장이 날마다 몇 구씩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거제 포로수용소 훗날 밝혀진 바로는 그때 죽은 반공포로가 105명에 이른다. 유엔군 쪽의 강력한 저지로 도드 준장이 구출되면서 사건 은 매듭이 지어졌으나, 반공포로와 공산포로 간의 싸움은 더욱더 극렬해져서 마침내 따로 떼어놓게 되었다. 그 당시 이 수용소의 참담한 분위기는 반공포로로 석방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소설가 강용준씨의 장편소설 멀 고도 긴 날의 시작 에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고, 최인훈의 장편소설 광장 에서 이명준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북한과 유엔 사이에 체결된 휴전협정에 따라 전쟁은 무기한 휴전에 들어갔다. 한국전쟁이 끝 난 뒤 남북 양쪽은 전쟁포로를 교환하게 되는데 남과 북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고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다. 어디 로 갈 것인지를 물었을 때 중립국 을 선택한 그들은 남과 북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제3의 선택으로 중립국 을 택했고, 소설 속에서 이명준은 중립국으로 가는 남지나해에서 그 푸른 바닷물과 하나가 된다. 북한군 포로 74명, 남한군 포로 2명, 중국군 포로 12명은 인도로 남미로 흘러들어가 신산했던 세월을 겪었다. 팔색조도 깃을 치는 아름다운 섬 거제도는 그러한 상처뿐만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유배의 땅이었다. 고려사 에 의하면 1170년 무신란으로 고려의 18대 임금 의종이 지금의 거제시 둔덕면 거림리로 유배를 왔다. 그를 따라 들어 왔는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임금 왕( 王 ) 자와 비슷한 구슬 옥( 玉 ) 자를 쓰는 성씨들이 거제도에 꽤 많이 살 고 있다. 그 뒤 조선 연산군 때 우찬성 벼슬을 지냈던 최숙( 崔 肅 )이 기묘사화로 유배를 와서 일생을 마쳤고, 숙종 때 송시열 또한 당쟁에 밀려 이 섬으로 유배를 왔다. 고색창연한 고을 영산, 지금은 창녕군의 하나의 면이 된 영산은 1914년 행정구역이 되기 전만 해도 하나의 현이었다. 고려 때 사람인 신예( 辛 裔 )가 그의 시에서, 영취산( 靈 鷲 山 ) 높아 조그만 티끌도 없는데, 안구역 백성들은 곧 모두 주씨( 朱 氏 ) 진씨( 陣 氏 )로다. 하였고, 이백첨( 李 伯 瞻 )은, 취령( 鷲 嶺 ) 높고 높아 네 마을을 누르니, 영특한 재주와 무 사의 지략 및 가문이던가. 하였던 영산은 옛것을 아끼는 마음과 대동의식이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견줄 수 없을만큼 빼어났던 고을이다. 2012년 여름 걷기 학교. 바닷가의 고울 거제도와 역사의 고장 창녕 걷기. 270

271 단오날에 열리는 문호장굿, 영산 쇠머리대기, 영산 줄다리기등 이고장에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고유의 민속놀이가 나 라 안에서도 모두 이름난 놀이로 자리매김 된 것도 이 지역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무엇보다 1919년에 일어난 삼일 독립만세운동이 경남지역을 통틀어 이 영산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다는 자긍심도 한몫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일제 때에는 기질이 강하고 지역성이 강한 이곳에 일본인들이 발붙이기가 어려워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였 다고 한다. 그 중의 한 가지가 영산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 창녕군수를 군청이 있는 창녕에 있지 못하게 한 뒤 이곳에 상주시키며 가끔씩 창녕으로 출장을 가도록 하였다. 그래서 영산의 창녕 이라는 뜻으로 영창녕 이라는 말이 생 겨났다고 한다. 문호장사당 文 戶 長 祠 堂 은 교동 동북쪽에 있는 사당이다. 원래 문호장은 350여 년 전에 영산에 살던 사람으로 관원에 억눌린 평민의 원한을 풀어준 영웅이요, 신인 神 人 으로 이 지역에서 믿고 있는 사람이다. 한번은 경상도 관찰사가 순무 중에 영산현에 이르러 길가에 놓인 농부들의 밥 광주리를 밟아버렷다. 이 것을 바라보 고 있던 문호장이 신술로 관찰사의말발굽이 땅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못하게 하였다.를 않자 이상히 생각하여 조사해 보니 그렇게 된 이유가 문호장이 도술을 부려서 그런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화나간 관찰사가 문호장을 체포하여 문호장을 문초하는데 곤장을 치면 몽둥이가 부러지고, 활을 쏘면 살이 하늘로 향하고, 총을 쏘면 총알대신 개구리가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관찰사는 경산군 자인에다 문호장을 투옥시키려 보냈는데, 문호장이 압송을 담당했던 나졸보 다 영산에 먼저 나타나니 문호장이 두 사람이 되었다.. 크게 놀란 관찰사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소원을 물었다. 그러자 문호장은 자기에게는 아들이 없으므로 제사를 대신 지내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 뒤 문호장이 단오날에 죽었으므로 문호장 사당을 짓고서 단오굿과 함께 그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제사 를 지내지 않으면 마을에 호랑이가 나타나 해를 입히거나 유행병이 돌면서 마을에 재앙이 든다고 한다. 제당은 네 개 인데, 문호장과 그의 본처 첩과 그의 딸과 첩의 딸의 신당이 그것이다. 이 굿의 특징은 본처와 첩의 관계를 해학적으 로 연출하는데, 마을 사람들이 첩을 욕하고 본처를 위로하는 등 무언극으로 행해진다. 문호장을 모신 상봉당에는 호장문선생신위 戶 長 文 先 生 神 位 라는 위패가 있으며, 호랑이를 탄 노인이 그려져 잇는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산신 이 문호장이라는 이름으로 인격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문호장의 말을 매던 괴목을 일제 때 베었더니 그 속에서 나무 부처가 나와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가져갔는데 꿈에 나타나 되돌려주라고 하자 다시 옮겨와 지금은 문호장 사당 에 모셔져 있다. 한편 영산 쇠머리대기와 영산 줄다리기는 각각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지금은 3.1절에 행해지고 잇지만 본래는 풍농을 기원하는 상원놀이로 온 군민의 대동 정신과 애향심을 길러주고 있다. 이 영산이 지금은 한적한 고을로 전락했지만 그냥 지나치면 서운할 아름다운 돌다리가 남아 있다. 영산 동리를 흘러 가는 동천을 가로질러 세워진 아름다운 돌다리 만년교(보물564호)는 조선조 말엽의 빼어난 석수 백진기 白 進 己 가 만들 었다. 물속에 드리운 그 보름달 같은 이 다리를 만년교 또는 원다리 또는 남천교라고 부르는데, 이 다리는 꾸밈새 없 이 서민적이고 조선 후기의 민예적 民 藝 的 인 수수한 멋을 풍겨준다. 홍예를 이룬 부채꼴의 화강석은 32개의 층으로 구 성되어 있으며, 이 석재 위에 장대석을 올리지 않고 둥글둥글한 자연석을 겹겹이 쌓아 올렸다. 다리의 양쪽은 역시 자연석을 쌓은 석축으로 앞 뒤러 길게 연장되어 통로와 연결되고 있다. 이렇게 잡석으로 허술하게 쌓은 듯 싶지만 매 2012년 여름 걷기 학교. 바닷가의 고울 거제도와 역사의 고장 창녕 걷기. 271

272 우 견고하기 때문에 홍수에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다리 입구에는 비석이 있는데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이 야기가 담겨 있다. 이 다리가 완성 되던 무렵 이 영산고을에는 신통한 필력을 13세의 소년 신동 神 童 이 살고 있었다. 다리가 완성되던 날 그 소년의 꿈속에 자신이 산신이라는 노인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듣건대 네가 신필 神 筆 이라고 하니 내가 거닐 다리에 네 글씨를 새겨놓고 싶다. 다리의 이름을 만년교로 정하리라. 하고서 금세 사라지자 소년은 그 자리에서 먹을 갈아 만년교 萬 年 橋 의 석자를 밤을 새워 써놓았다고 한다. 지금도 다리 입구에 남아 있는 이 비석은 글씨가 기운차고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 명필이 쓴 글씨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석 끝에는 십삼세서. 十 三 歲 書 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바로 근처에 있는 영산연지는 시민들의 휴식처로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는데 그리 크지는 않지만 연지 가운데에 몇 개의 섬을 만들어 마치 삼신산을 연상 시키고 그 나무에 형형색색의 단풍잎으로 물드는 가을에는 그 아름다움이 한 결 돋보이는 곳이 영산연지이다. 신돈의 자취서린 옥천사터 옥천마을을 지나면 고려말의 신돈( 辛 旽 )의 자취가 서린 옥천사터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27권 창녕현편 불우조 옥천사란에 화왕산 남쪽에 있다 고려 신돈의 어머니는 바로 이절의 종이었다. 신돈이 죽음을 당하자 절도 폐사 되 었으니 고쳐 지으려다가 완성되기도 전에 돈의 일로 해서 다시 반대가 생겼기 때문에 헐어버렸다 역사 속에 요승 으로 간승으로 기록된 신돈은 이곳 옥천사에서 태어났고, 본관은 영산(영산)이고 승명은 편조 자는 요공이며 왕이 내 린 법호는 청한거사였다. 당시 고려는 국내외적으로 어지러웠다. 공민왕은 새로운 인물을 불러들여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전작시키려 하던 차에 신돈을 만났다. 그는 도를 얻고 욕심이 없으며 또 천미하여 친당이 없으니 대사에게 맡기면 반드시 뜻대로 행하여 거리낌이 없으리라 하고 생각하여 등용하기로 하였다. 신돈은 공민왕의 간곡한 청으로 조정에 들어왔고, 왕의사부 (왕의 고문직)가 되어 오랜 폐단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 때 그가 가장 중점을 두고 실시한 개혁정책은 노비와 토지개혁이었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 을 설치하면서 다음 과 같은 포고문을 전국에 발표 하고서 부당하게 빼앗긴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 주었고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양 민으로 환원시켰다. 성인이 나타났다 라는 농민들과 빈민들의 찬양의 뒤편에는 중놈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 라 는 비난이 뒤따랐다. 기득권 세력과 공민왕의 배반으로 1371년 7월 신돈은 수원의 유배지에서 죽었다. 신돈의 집권은 공민왕 때의 복잡한 정치상황에서 일어났던 특이한 정치 상황이었고 신돈의 집권기간은 6년이었다. 신 돈의 개혁사상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만큼 민중을 사랑하고 그들의 고통과 민중고의 해결에 관심을 둔 사람이 얼마 나 있었으며, 신돈에 비길 만큼 중상구제를 위한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제도를 만들어 실제로 시행에 옮긴 권력가가 있었던가? 그의 등장과 그의 실패 이후 정몽주, 정도전, 윤소종등 조선의 건국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 는 신진 문인 세력들이 정치세력으로 성장 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에야 신돈을 재평 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아직까지도 신돈은 역사 속에서 악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가 태어난 옥천사터는 향토문화재5호로 지정되어 그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2012년 여름 걷기 학교. 바닷가의 고울 거제도와 역사의 고장 창녕 걷기. 272

273 신라 8대 종찰의 하나였던 관룡사 불우했던 한 시대의 희생양이며 혁명가였던 신돈의 자취어린 옥천사터를 지나 관룡사로 가는 좁은 산길을 오르다 보 면 돌장승 한 쌍이 길손을 맞는다. 커다란 왕방울 눈에 주먹코가 인상적인 관룡사 돌장승을 뒤로하고 조금 오르면 대 나무 숲 뒤편의 관룡사에 이른다. 관룡산(739m) 중턱에 위치한 이 절은 신라 26대 진평왕 5년에 증법국사가 창건하였고 원효대사가 천 여 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경을 설법한 큰 도장을 이룩하여 신라 8대 종찰 중의 하나였다고 전한다. 전설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제 자 송파와 함께 백일기도를 드렸다. 그 때 갑자기 하늘에서 오색채운이 영롱한 가운데 벼락 치는 소리가 하늘을 진동 시켰다. 놀라서 원효대사가 하늘을 쳐다보니 화왕산 마루의 월영삼지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것이 목격되었 다. 그래서 절 이름을 관룡사라 지었고, 절의 뒷산 이름을 구룡산 또는 관룡산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절은 그 후 경덕 왕 7년에 추담선사가 중건하였고 몇 번에 걸쳐서 중수를 거듭하다가 1704년 가을의 대 홍수 때 약사전만 남기고 금 당, 부도 등이 유실되었으며 이 절의 스님 20여명이 익사하는 큰 재난을 당하였다. 그 뒤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이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르는데, (보룰:212호)인 관룡사의 대웅전은 앞면 3칸인 다포식 건물로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보물 146호인 약사전은 규모는 작지만 그 모습이 고풍스럽고 균형미가 빼어난 건물로서 맛배지붕에 주심포 양식의 집이다. 언뜻보면 부석사 조사당을 연상시키는 이 건축물은 사 방1칸의 맞배지붕의 와가에 삼중대들보가 특이한 우리나라 조선 초기의 건물로 송광사의 국사당과 함께 건축사를 연 구하는데 아주 중요한 표본으로 꼽힌다. 이 건물의 또 다른 특징은 집체와 지붕의 구성 비례를 볼 수 있다. 기둥사이 의 간격에 비하여 지붕의 폭이 두배 가까이 될 정도로 규모가 커서 소규모의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은 매우 균형 잡힌 안정감을 보여주고 있다. 약사전에는 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 제 519호)이 안치되어 있고 문밖에는 작고 아담한 석탑이 서 있다. 그러나 뭐니뭐 니 해도 관룡사가 오래도록 가슴속에 남아 있는 것은 용선대의 석가여래좌상에서 받은 강한 인상 때문일 것이다. 요 사채의 담 길을 따라 한적한 산길을 20여분쯤 오르면 커다람 암벽위에 부처님 한분이 날렵하게 앉아있다. 대좌의 높 이가 1.17m2에 불상의 높이가 1.81m2인 이 석불좌상은 높은 팔각연화대좌에 항마촉지인을 하고 결과부좌하고 앉아있 는데 어느 때 사라졌는지 광배는 찾아볼 길이 없다. 그러나 석불좌상의 얼굴은 단아한 사각형이고 직선에 가까운 눈 오뚝한 코 미소를 띤 얼굴은 더할 수 없이 온화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우리 일행은 옛 사람들의 지혜와 부처에 대한 경이를 안고 배바위에 올랐다. 반야 용선을 타고 극락 세계로 향하는 부처님 눈보라를 몰아오는 바람소리 들린다. 저 바람소리는 이 골짜기 저 골짜기들의 모든 흐르는 시냇물 소리들을 불러 모 아 겨울 앙상한 나뭇가지들의 미세한 떨림 들을 한데모아 이곳으로 불어오는지도 모른다. 또한 저 바람 소리는 세상 의 온갖 고난 세상의 온갖 슬픔들을 다 거두어 요원의 불길로 타오를 날을 기다리는 화왕산의 억새밭을 향해 달려오 는지도 모른다. 나는 천년의 세월을 견디며 앉아있는 용선대의 석조여래좌상(보물295호)아래 털썩 주저앉아 거대한 분화구처럼 펼쳐 진 세상을 바라본다. 관룡산을 병풍삼아 눈 쌓인 작은 산들이 물결치듯 펼쳐나가고 영산의 진산 영취산을 돌아 계성, 옥천의 자그마한 마을들이 점점 히 나타난다. 누군가의 기원이고 간절한 소망인지도 모르는 채 천 원짜리 지폐 한 장 2012년 여름 걷기 학교. 바닷가의 고울 거제도와 역사의 고장 창녕 걷기. 273

274 이 꺼진 촛불아래 눈보라 맞으며 젖어 있고, 여기저기 던져진 동전들이 을씨년스럽다. 어쩌면 우리나라 부처님 중에 이보다 더 외롭게 혹은 드넓게 세상을 바라보는 부처님은 없을 것이고 반야용선을 타 고 극락세계로 향하는 부처님 역시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능선을 따라 오르는 산길엔 눈이 가득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에 발자국 남기며 간다. 우뚝우뚝 솟은 관룡산의 바위 봉우리들이 엷은 구름 속에 잠기고 희미하게 보이는 청룡암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야호, 우리 역시 그 소리의 여운을 따라 산 속으로 구름의 산정 속으로 들어가 고 있다. 멀리 산자락들이 올라갈수록 희미해지고 가파른 산길을 시나브로 시나브로 올라서니 정상이다. 헬기장으로 사용되었을 관룡산 정상에는 발목까지 눈이 쌓여있고 우리는 그 위에 앉았다. 구름 속에 얼핏 화왕산이 나타났다 사 라지고 북쪽 의 저편에 있을 일연스님의 자취어린 비슬산은 보이지 않는다. 나뭇잎 스치는 바람소리가 눈 위에 앉아있는 내 가슴을 열고 들어온다. 나는 눈 덮힌 산위에서 내 살아온 나날을 뒤 돌아 본다. 그렇다 나는 이 산정에서 우우 휘몰아치는 바람소리 들으며 내가 걸어온 발자국 만큼이나 많이도 살았 구나. 깨닫는다. 얼마나 더 내 삶이 계속되고 살아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시덥 지 않은 일들 속에 파묻혀 있다가 내가 나를 깨닫게 될까? 그러면서 내가 올라온 높이만큼 내려갈 길 또한 많으리라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때는 너무 늦었을 지도 몰라 내가 그리던 세상 내가 꿈꾸던 세상은 이미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때 나의 뒷모 습은 어떤 모습을 지닌 채 자연으로 돌아갈까? 체념일까? 아니면 초월일까? 9백의 병이 왜적과 맞선 화왕산성 산길은 무릎까지 눈에 묻혀있고 앞서간 사람의 발자국 따라 우리들은 화왕산으로 가고 있다. 화왕산은 경상남도의 중 북부 산악지대로서 낙동강과 밀양강이 둘러싸고 있으며 관룡산의 남쪽에는 낙동강의 지류인 계성천이 완만하게 흐른 다. 화왕산에는 목마산성과 화왕산성이 있는데, 창녕의 진산인 이 산은 그 옛날 불을 내뿜던 화산으로 불뫼 또는 큰 불뫼로 불린다. 그 불의 왕이라는 이름처럼 정월 대보름날은 산성안 분지의 5440평의 억새를 태우는 화왕산 억새태우 기로 이름이 높고 가을단풍이 물들거나 억새가 고운 모습을 드러내는 시월쯤은 억새밭의 아름다움을 보기위해 사람 의 물결로 넘실댄다. 사적 제64호로 지정된 화왕산성은 높이가 1.6m에 둘레가 2.6km이며 연못이 세 개에 샘이 9군데 에 군창이 있었다고 세종실록지리지에 전해온다. 임진왜란 당시 홍의장군 곽재우가 성종 때부터 폐성이 되었던 것을 개수하여 의병과 선비들 9백여명을 모아 일본군 과 맞섰던 화왕산성에는 신라 진평왕 때 태사공 조계룡이 이 연못에서 태어났다는 창녕조씨득성지지라는 빗돌이 서 있다. 또한 한국전쟁 중에는 이성을 사이에 두고 인민군과 국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가는 눈발을 머금은 바람이 세차다. 행여 날아갈세라 마음 모으고 창녕사람들이 환장고개 라고 이름붙인 산길을 내려갔다. 옛 사람들이 이 산을 오를 적에 얼마나 힘들었으면 환장고개라고 이름을 지었을까. 내린 눈에 어지간하면 넘어지지 않는 나 역시 두 번을 넘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산을 내려와 우리들은 화왕산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말처 럼 비가와도 눈이 와도 산은 그냥 그 자리에 변함없이 내리는 눈을 맞으며 서 있었다. 가랑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며 창녕읍 교상동 만옥정이라는 작은공원에 들렀다. 이 공원에있는 대원군의 척화비와 지 방문화재로 지정된 신라시대의 석탑 그리고 진흥왕의 척경비( 拓 境 碑 )를 보고자 함이다. 이 비는 원래 창녕읍의 목마 산성에 있었다. 이비의 곁에는 성황당이 있었고 목마산성 줄기에 잇대어 고분군이 산재하여 있었다. 2012년 여름 걷기 학교. 바닷가의 고울 거제도와 역사의 고장 창녕 걷기. 274

275 1914년 조선총독부의 위촉을 받아 창녕의 고적을 조사하러 왔던 도리이가 비석이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보고함에 따 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진흥왕척경비가 세워진 때를 이 비문의 첫 머리에 적힌 신사년 2월 1일 을 근거로 하 여 역사학자들은 신라 진흥왕 22년인 561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에서 세운 최초의 비인 평남 용강군 점제현의 신사비에 이어 두 번 째로 오래된 비인 셈인데 이 비는 화왕산 기슭에 묻혀 있다가 1914년에 발견되었다. 두께가 30cm에 높이가 178cm 자연 그대로의 화강암에다 23줄을 한문으로 새긴 이 비의 비문은 진흥왕 이 나라 안을 살피고 다닌 발자취와 그를 수행했던 42명의 신하의 이름이 위계에 따라 차례차례 기재되어 있다. 그중 에는 거칠부 같은 이름난 명장도 있고, 병탄한, 금관가야의 왕자 무력의 이름도 보이는데 김무력은 김유신의 할아버 지로 진흥왕 14년 한성인 신주의 군수로 부임하여 백제 성왕을 쳐부순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비문에 는 17등의 계급과 관직들을 적은 것이고, 왕으로서의 통치이상과 포부를 밝히는 한편 중앙의 고관과 지방관들이 서로 협력하여 백성을 잘 이끌라는 유서를 담고 있을 것이다. 이때가 대가야가 멸망하기 불과 1년전 이었다. 그때 진흥왕 은 창녕에 하주를 설치할 정도로 이 지역을 중요시 하였고, 이것은 창녕을 가야지역의 진출에 발판으로 삼으려는 의 도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한편 창녕에는 가야무덤군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모두 허울만 멀쩡할 뿐 알맹이 는 아무것도 없다. 조선 총독부에 제출된 창녕 고분도굴 조사 보고서 에서 다른 유물들은 고사하고라도 유독 고분만은 놀랍게도 이백채가 넘는 것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대부분이 도굴의 난을 입은 일은 유감스럽기 이를 데 없다 라는 솔직한 고 백처럼 일본인들 뿐만이 아니라 해방이 된 뒤에도 도굴꾼들의 끈질긴 도굴이 그치지 않아 그야말로 토기 한 개까지 도 남기지 않은 채 고분들은 파괴되고 말았다. 그 후 식민지 시대 이 땅의 민중들은 일본에 복속당한 가야의 왕들이 일본의 왕들에게 엎드려서 조공을 바치는 치욕의 역사를 배웠다. 그렇듯 600여년의 역사를 지닌 가야의 역사는 잃어버린 왕국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속에서 김해의 금관가야, 함안 의 아라가야, 진주의 고령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고성의 소가야, 고령의 대가야등 6가야의 동맹체들이 미궁 속으로 숨어들고 말았고, 일본서기에 임나일본부 가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다. 지금도 일본에 가면 가야시대의 금관을 비롯 한 금동장신구 가야 토기들을 숱하게 만날 수 있으니 역사는 항상 이긴 자의 것 이라는 말이 만고의 진리인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창녕읍 송현동에 있는 석빙고로 향하였다. 멀리서 보면 옛 무덤 같은 석빙고에 들어갔던 창녕 사람 들의 말에 의하면 여름에도 이 얼음 곳간 속에 들어가면 으스스한 한기를 느끼게 된다고 하지만 사시사철 냉장고가 집집마다 보급된 요즈음에는 그 옛날의 얼음창고는 저런 형태였구나 하고 짐작만 할 뿐이다. 시내 전체가 박물관인 창녕읍 다시 발길을 돌려 하병수 가옥과 술정리 3층석탑을 찾아가는 길은 내 어린 시절의 고향집 돌담길을 연상케 하는 묵 은 길이다.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기전의 육십년대 식 골목길들이 연이어 나타나는데, 멀리서 보아도 그 집은 알 수 있다. 집 뒤 안의 언덕위에 오래 묵은 느티나무들이 숲을 이룬 채 서 있고 집을 들어서면 무너져가는 집한 채가 서있 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고색창연하던 문간집이 어느새 사라지고 번듯한 나무들로 새로운 집이 지어지고 있었다. 온갖 꽃들이 피어나던 여름날의 그 모습은 어디로 갔는가, 사람만이 그 여름날 그대로다. 어디서 2012년 여름 걷기 학교. 바닷가의 고울 거제도와 역사의 고장 창녕 걷기. 275

276 왔느냐는 물음에 전주에서 왔다고 답하자 하병수옹은 환하게 웃음 지으며 집의 내력을 들려주었다. 1969년에 중요민속자료 10호로 지정된 술정리의 하병수 가옥은 오백여년 전에 지어졌다. 조선왕조 연산군 4년에 무오 사화가 일어났다. 그때 김종직의 문하로서 조정의 벼슬을 지내던 하자연이 사화를 피하여 이곳에 내려와 살면서 지었 다. 그 당시로부터 오백년이 지난 이 때까지 이 집은 해마다 지붕을 갈아 인것 말고는 거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 고 있다. 우리고향에서는 쌔 라고 부르는 억새로 지붕을 얹고 대개의 조선집에 흙을 바른 것과는 달리 듬성듬성 대나무를 엮어 지붕이 가벼워 들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칡넝쿨로 서까래를 묶었다. 그래서 마루에 누워 지붕을 올 려다보면 저절로 참을 수 없는 집의 가벼움 이 실감이 나는 집이다. 정남향으로 지어진 이집은 네 칸으로 동쪽에 서부터 건넌방, 대청, 안방, 부엌이 차례로 붙어 있으며 못은 한 개도 쓰지 않았다. 1970년 나라에서 이집을 보수하면 서 용마루에 못질을 하여 옛 모습이 변화되었다고 아쉬워하는 하자연의 17세손인 하병수옹과 작별을 고하였다. 술정리 동삼층석탑을 찾아가는 그 길 역시 미로의 길 찾기나 다름없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인 술정리 의 동탑은 기단과 탑신의 균형이 안 맞고 탑신이 단정 명쾌하며 석재의 가공 또한 예리하고 정밀하여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과 비길만한 명 탑의 하나로서 국보 34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왕궁리의 오층석탑 이 보물이었다가 요즘에야 국보로 지정된 것을 보면 신라의 유물들에 더 후한 점수를 주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우포늪을 걷다. 우포늪( 牛 浦 ) 경남 창녕군 대합면. 대합면, 이방면, 유어면, 대지면 일원에 걸친 자연늪으로 1997년 7월 26일 정부 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다. 낙동강 지류인 토평천 유역에 1억 4000만 년 전 한반도가 생성될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된다. 담수면적 2.3km2, 가 로 2.5km, 세로 1.6km로 국내 최대의 자연 늪지다. 1997년 7월 26일 생태계보전지역 가운데 생태계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고 이듬해 3월 2일에는 국제습지조약 보존습지로 지정되어 국제적인 습지가 되었다. 우포늪(1.3km2), 목포늪(53만m2), 사지포(36만m2), 쪽지벌(14만m2) 4개 늪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997년 342종의 동 식물 이 조사 보고되었다. 식물은 가시연꽃 생이가래 부들 줄 골풀 창포 마름 자라풀 등 168종, 조류는 쇠물닭 논 병아리 노랑부리저어새(천연기념물 205) 청둥오리 쇠오리 큰고니(천연기념물 201) 큰기러기 등 62종, 어류는 뱀 장어 붕어 잉어 가물치 피라미 등 28종, 수서곤충은 연못하루살이 왕잠자리 장구애비 소금쟁이 등 55종, 패각 류는 우렁이 물달팽이 말조개 등 5종, 포유류는 두더지 족제비 너구리 등 12종, 파충류는 남생이 자라 줄장지 뱀 유혈목이 등 7종, 양서류는 무당개구리 두꺼비 청개구리 참개구리 황소개구리 등 5종이 서식하고 있다.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며 감탄사를 연발하고 수많은 문화유산과 역사의 길을 걷게 될 이번 걷기 학교에 많은 참여 바랍니다 2012년 여름 걷기 학교. 바닷가의 고울 거제도와 역사의 고장 창녕 걷기. 276

277 <관동대로>네 번째 하진부에서 모릿재 너머 여우고개까지, :45 <관동대로>네 번째 하진부에서 모릿재 너머 여우고개까지, 울진군 평해읍에서 시작되어 동대문까지 이어지는 관동대로 네 번째 여정이 7월 13일(금)에서 15일까지 실시된니다. 대관령을 넘어온 여정은 평창의 하진부, 청심대, 대화를 지나 여우고개로 이어질 것입니다. 오대산에서 비롯된 오대 천을 지나 모릿재를 넘으면 대화에 이르고, 그 길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주인공 허생이 넘었던 길입니다. 예로부터 오대산에 가서 밥을 먹지 못하면 사흘을 앓는다 는 속담이 있는데, 이 말은 옛날 강원도 강릉 사람들이 월정사에 가서 밥을 못 먹으면 한이 된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우리들 역시 월정사를 지척에 두고도 오늘 갈 길이 멀기 때문에 갈 수가 없으니 마음속에 한으로 남아 있겠다. 진부면의 소재지인 하진부리는 오대천 가에 긴 벌판이 되었으므로 진벌, 아랫진부, 하진부라고 불렸는데, 조선시대에 보안도에 딸린 역으로 횡계와 대화로 통하던 진부역 珍 富 驛 이 있었던 곳이다. 진부역에도 수많은 길손들이 잠시 쉬어 가기도 하고 하룻밤 묵어가기도 했던 곳인데, 강릉이 고향인 허균이 관리가 되어 진부를 지나며 하룻밤을 자던 중에 시 한편을 남겼다. 관리가 되고 보니 산부와 같아 / 공명이 더디다고 탓하지 않네. / 운소 雲 宵 에서 내린 봉지 封 地 받으니 / 온 산해가 건유에 드는군 그래 한길엔 나는 꽃이 가득도 한데 / 산마루엔 어두운 안개 불어나누나 / 역 驛 사람 거의가 구면들이라 / 찾아와 잔 권하 며 위로를 하네. 허균도 나만큼이나 역마살이 심했던 사람인지라 이런 저런 이유로 나라를 돌아다니다 보니 역에 근무하는 역졸들이 구면이 많았던 모양이다. 청심대 서쪽에 있는 인락원 곡건리 남쪽에 있는 마을이 자우실 마을이고, 인락원 仁 樂 院 은 청심대 서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에 인락원이 있었 던 곳이며 그 동쪽에는 원에 딸린 밭이 있었다. 진부면 마평리 인락원 동쪽 자그마한 산에 청심바위라는 바위가 있 고, 그 옆에 서 있는 정자가 청심대이다. 큰 바위가 절벽을 이루고, 그 밑에는 맑은 오대천이 맑은 물이 휘돌아가는 그곳에 강릉기생 청심 淸 心 이에 대한 이야기가 서려 있다. 강릉부사를 지냈던 박대감 朴 大 監 을 사랑한 청심이는 박대감이 중앙 내직으로 영전하여 서울로 올라가자 대관령을 넘 어 이곳까지 따라와서 작별을 고한 후 그 정을 이기지 못하여 이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그 절개와 넋을 위 <관동대로>네 번째 하진부에서 모릿재 너머 여우고개까지, 277

278 로하기 위해 이 지역 사람들이 1928년 8월 이곳에 작은 정자를 짓고 그의 이름을 따서 청심대라고 명명한 것이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이별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고 한 점 꽃잎처럼 몸을 날렸을까? 문득 허균이 병오년 오월에 이 여인에게 보냈던 편지 한통이 떠오른다. 연주 延 州 의 나그네가 대정강 大 定 江 에 이르러, 배 위에서 넋을 잃고 바라보며 말을 못하고 눈물이 옷 자위에 가득하므 로, 나는 차마 보지 못하였네. 배가 떠나려 하자 옷소매로 얼굴을 가리우고 이별하는데, 이 무렵의 강산은 갑자기 무 색해졌으니, 만약 자네가 곁에 있었더라면 반드시 한숨을 쉬었을 것이네. 얼마나 가슴 아린 이별인가? 배가 떠나는 그 순간에 강산이 무색해졌다 고 표현할 만큼 이별의 아픔이 크다보니 그토록 절절한 이별의 글이 써졌을 것이다. 청나라에 갔던 담헌 홍대용 역시 아름다운 이별의 글 한편을 남겼는데, 그곳에서 사귄 벗 반정균에게 보낸 글이었다. 아아! 즐겁기는 새로 아는 사이가 되는 것보다 즐거운 것이 없고, 슬프기는 생이별보다 더 슬픈 것이 없다. 는 이 글에 반정균은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내왔다. 사귐의 깊음과 이별의 괴로움이 기대의 간절함과 촉망의 지극함만 같 지 못하다. 이렇게 가슴 에이는 이별은 대개 강가에서나 정자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경치가 좋은 곳에 만들어진 곳이 정자다. 정자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불타오를 듯 붉게 물든 단풍이 나무와 강물과 치솟은 바위를 무색하게 단장 하고 있었다. 지금 저렇듯 한번 타오르고 지는 단풍 뒤에 겨울이 다가오겠지, 답사를 다닐 때마다 만나게 되어 오르게 되면 마음속에 휴식과 풍류를 떠오르게 하는 누정은 무엇인가.? 누정 樓 亭 은 누각 樓 閣 과 정자 亭 子 를 함게 일컫는 명칭으로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마루 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지은 다락식의 집이다. 이규보가 지은 <사륜정기 四 輪 亭 記 >에는 사방이 확 트이고 텅 비고 높다랗게 만든 것이 정 자 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누정조 에 의하면 누정은 루. 정. 당. 대 臺. 각 閣. 헌 軒 등을 통칭한다. 누각은 누관 樓 觀 이라 고도 하며 대개 높은 언덕이나 바위 혹은 흙으로 쌓아올린 대위에 세우므로 대각 臺 閣 또는 누대 樓 臺 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3대 누각은 진주의 촉석루와 밀양의 영남루 嶺 南 樓, 그리고 평양의 부벽루를 들 수가 있다. 그 외에 서울 경복궁에 있는 경회루 慶 會 樓 고 그 외에도안동의 영호루 嶺 湖 樓, 남원의 광한루 삼척의 죽서루 평양의 부벽 루등이 이름난 누각이다. 한편 강릉의 경포대, 평창의 청심대, 평양 모란봉의 을밀대등은 그곳의 대 만을 일컫는 것 이 아니라 그곳에 건립된 누정까지를 가리킨다. 누각과 달리 정자는 그 규모가 작은 건물을 말하는데 대처럼 건물에 벽이 없고 기둥과 지붕만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경상도 함양지방을 비롯한 남부지방에서는 가운데쯤에 방 한간을 들 여 휴식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게 지어진 정자가 2003년 가을 불에 탄 함양의 농월정, 거연정, 담양의 환벽당 등이다. 이러한 정자는 대개 놀거나 풍류를 즐길 목적으로 지어졌는데 정각 亭 閣 또는 정사 亭 은 높은 곳에 세운다. 라고 부르며 산수 좋 <관동대로>네 번째 하진부에서 모릿재 너머 여우고개까지, 278

279 길이 끝나는 산에 구름이 잔뜩 끼어 있고 아침을 먹기 위해 한마음 식당에 들어가자 몸이 좀 불편하다는 주인아저씨 (정정수 66세)가 한마디 한다. 요즘 이 앞으로 난 길을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요, 며칠 전에도 아가씨 둘이 땅 끝에서 여기까지 23일이 걸렸다며 하루 저녁 자고 갔어요, 나이 먹은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돈을 덜 쓰기 위해 노력하며 가는데 젊은 사람들은 그렇지를 않은 거 같아요? 어떤 때는 수십 명이 가기도 하는데 금년에도 여남은 팀이 지나갔어요, 그런데 선생님들은 어느 쪽으로 가 세요? 하고 물어서 우리는 관동대로를 걷기 때문에 모릿재를 넘어가야 한다고 하자, 그 사람들은 모릿재(옛 이름 은 모로현이다)를 넘지 않고 대부분 장평 쪽으로 가지요, 김자혁 씨가 혼자 걷는 사람도 있느냐니까 혼자 걷는 사람도 많아요. 해남 땅 끝 마을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이 적은 사람들은 여기까지 오는데 삼백만 원까지 썼다는 사람도 있고, 적게 쓴 사람은 80만원을 썼다는 사람도 있어요. 이곳을 거쳐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통일전망대까지 목 표를 가지고 가지요.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서 어디까지 가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길은 여러 갈래가 있고 그 길이 저마다 사람이 다니는 길이며, 우리의 땅이고 우리의 길이 아니겠는가. 벌써 7시 50분 좀 늦었다. 오늘은 조금 있다가 안명숙씨가 아침차로 오고, 저녁에는 박수자씨가 딸 태미진을 데리고 온단다. 장평 ic와 장성 진부로 길이 나뉜다. 산위로 구름이 피어오르고 흐르는 시냇물 소리, 문득 손이 시리다. 그래, 오늘 저녁에서 내일 모레까지 대관령 부근에 눈이 내릴 것이라는 기상예보가 있었지, 신리교를 지나 신리 5리 고토곡 마을을 지난다. 길이 끝나는 산에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서 신선이 사는 곳 같다. 어쩌면 그 길을 지나게 될 우리들 도 신선이 될 지도 모르겠다. 이 곳 대화는 이웃한 봉평과, 제천 그리고 평창과 함께 이효석의 빼어난 단편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 중의 한 곳이다. 닷새마다 장이 서는 이 장 저장을 떠 돌아 다니던 장꾼들의 질펀한 삶이 펼쳐졌던 이곳의 풍경이 소설 속에는 다음 과 같이 실려 있다. 여름장이란 애시 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려놓은 전 휘장 밑 으로 등 줄기를 훅훅 볶는다. 마을 사람들은 거지반 돌아간 뒤요, 팔리지 못한 나무꾼 패가 길 거리에 긍싯 거리고 들 있으나 석유병이나 받고 고기 마리나 사면 족할 이축들을 바라고 언제까지고 버티고 있을 법은 없다. 춥춥스럽게 날아드는 파리 떼도 장난꾼 각다귀들도 귀치 않다. 얼금뱅이요 왼손잡이인 드팀전의 허생원은 기어코 동업의 조선달 을 낙구어 보았다. 그만 걸을까 잘 생각했네. 봉평장에서 한 번이나 흐븟하게 사 본 일 있을까. 내일 대화장에서나 한 몫 벌어야 겠네. 오늘 밤은 밤을 새서 걸어야 될걸 달이 뜨렷다. 절렁절렁 소리를 내며 조선달이 그날 산돈을 따지는 것을 보고 허생원은 말뚝에서 넓은 휘장을 걷고 벌려놓았던 물건을 거두기 시작했다. <관동대로>네 번째 하진부에서 모릿재 너머 여우고개까지, 279

280 소설 속에서 허생원과 조선달이 달 밝은 그날 밤을 새워 걸어 도착했던 대화장은 중대화에 있으며, 예전에는 하대화 에 있다가 약 60여 년 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불과 4.5 십 년 전인 년 대만해도 5일장만 열리면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나 먼데서 오는 장사꾼들이 모여 난장 판이나 다름없었을 대화장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한적하기만 하다. 1900년대 초 조선을 찾았던 W.E.그린피스는 < 은자의 나라 한국>에서 조선의 시골 시장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조선 사람들의 최대의 즐거움은 장을 보러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말해서 조선에는 상점이 거의 없고, 매 5일 또는 6일 만에 장이 열리고, 그곳에서 자기가 만든 물건을 바꾸고 의견을 교환하기 때문이다. (중략)장터에서는 물건을 팔고 사고, 행상을 하고 남의 얘기를 늘어놓는 일 외에 기분풀이로 술을 마시고 싸우는 일이 허다하다. 옷감 을 사러 갔다가 빈 털털이가 되어 돌아오는 농부도 흔하게 있지만, 그들은 마냥 즐겁기만 하다. 이원수와 주모가 만난 대화주막 이 곳 대화의 한 주막에 율곡 이이의 출생에 얽힌 전설 같은 이야기가 서려있다. 이이의 부친 이원수( 李 元 秀 )는 어머 니인 신사임당에 가려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다. 그가 수운판관이라는 벼슬살이를 하던 조선 중종( 中 宗 ; 1530년 경) 때의 일이다. 사임당 신씨와 결혼 한 후 관직을 얻기 위해 처가인 강릉에서 과거를 보러 서울을 오르내리게 되었는데, 오고 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신사임당은 과거 길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 白 玉 浦 里 )에 거처 를 정하고 이곳에서 함께 생활하며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게 되었다. 이원수가 인천에서 수운 판관을 지내던 무렵 신사임당을 비롯 그의 식구들이 산수가 아름다운 이곳 봉평의 판관대에 머물고 있었다. 오랜만에 휴가를 얻은 이원수가 가족들이 살고 있던 봉평으로 오던 중이었다. 평창군 대화면의 한 주막에서 여장을 풀게 되었는데, 그 주막의 주모는 그 전날 밤 용 龍 이 가슴에 가득히 안겨오는 기이한 꿈을 꾸었다. 하늘이 점지해주는 뛰어난 인물을 낳을 예사롭지 않은 꿈이라는 것을 짐작한 주모는 누군지 알 수 없는 그 사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한 나그네가 그 주막에 들어왔는데 그가 바로 이원수였다. 일이 잘되기 위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날 그 주막에는 손님이 이원수뿐이었다. 주모가 이원수를 바라보자 그의 얼굴에 서린 기 색 氣 色 이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달랐다. 주모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이원수를 하룻밤을 모시려고 했으나 그의 거절이 완강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무렵 친정 강릉에 가 있던 신사임당도 역시 똑같이 용이 품안으로 안기는 꿈을 꾸고는, 언니의 간곡한 만류를 뿌 리치고 140리 길을 걸어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주모의 청을 거절한 이원수도 그날 밤 집에 도착하여 부부간에 회 포를 풀었는데, 이날 바로 신사임당이 율곡을 잉태한 것이다. 며칠간을 신사임당과 지낸 이원수가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는 길에 주막의 주모가 생각이 나서 찾아가 이제 주모의 청을 들어주겠다. 고 하자 주모가 그의 청을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손님을 그날 하룻밤 모시고자 했던 것은 신 神 이 점지한 영특한 아들을 얻기 위해서였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이번 길에 손님은 귀한 아들을 얻으셨을 것입니다. 귀한 인물을 얻었지만 후환 後 患 이 있으니 그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이원수가 그 화를 막을 방도가 있는가. 하고 묻자 주모가 다음과 같은 방도를 알려주었다. 밤나무 <관동대로>네 번째 하진부에서 모릿재 너머 여우고개까지, 280

281 1,000그루를 심으면 괜찮을 것입니다. 이원수는 주모가 시키는 대로 밤나무 천 그루를 심은 뒤 몇 해가 흘렀다. 어 느 날 험상궂게 생긴 스님이 찾아와 시주를 청하면서 아이를 보자고 했다. 이원수는 주모의 예언이 생각나서 거절했 다. 그러자 중은 밤나무 1,000그루를 시주하면 아이를 데려가지 않겠다고 했다. 이원수는 쾌히 승낙하고 뒷산에 심어 놓은 밤나무를 모두 시주했다. 그러나 썩은 밤나무 한 그루가 있어서 한 그루가 모자랐다. 깜짝 놀란 이원수가 사시 나무 떨듯 떨고 있는데, 숲 속에서 나무 한 그루가 나도 밤나무다 라고 소리를 쳤다. 그 소리를 들은 스님은 호랑 이로 변해서 도망쳤다. 그때부터 나도 밤나무 라는 재미있는 나무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우리가 지나는 이곳은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 운교리이다. 본래 강릉군 대화면의 지역으로 구름다리가 있으므로 구름 다리. 또는 운교 雲 橋 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운교역 雲 橋 驛 이 있었는데, 보안도 保 安 道 에 딸려서 강릉 방림과 횡성. 안 흥으로 통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릉대도호부 편 역원 조 에 운교역 :영 서쪽에 있으며, 부치에서 1백 90이리다. 라고 실려 있다. 택리지 를 지은 이중환은 이 지역을 지났던 기억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한강에서 동쪽으로 용진을 건너 양근 지평을 지나고 갈현(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에서 횡성군 서원면 유현 리 풍수원으로 가는 도덕고개)을 넘으면 강원도 경계이다. 또 동쪽으로 하룻길을 가면 강릉부 서쪽 경계인 운교역( 雲 橋 驛 지금의 평창군 방림면 운교리)이다. 옛날 나의 선친께서 계미년에 강릉 원이 되어 가셨는데 그때 내 나이가 열 넷이었고 가마를 따라갔다. 운교에서부터 서쪽 대관령에 이르도록 그 사이는 평지거나 영이거나를 막론하고 길은 빽 빽한 숲속으로만 지나게 되었다. 무릇 나흘 동안 길을 가면서 쳐다보아도 하늘과 해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수십 년 전부터 산과 들이 모두 개간되어서 농사터가 되고, 마을이 서로 잇닿아서 산에는 한 치 굵기의 나무 도 없다. 이를 미루어 보면 딴 고을도 이와 같음을 알 수 있는 바, 착한 임금 밑에 인구가 점점 번성함을 알겠으나 산천은 손해가 많다. 이중환의 말처럼 당시에도 산에 울창한 나무가 많기를 바라는 마음과 세상 삶의 번잡함이 서로 맞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꽃은 남녘에서 북녘으로 올라가고 단풍은 북녘에서 남녘으로 내려 온다 는 말이 있고 봄물은 산 밑에서부터 들고 단풍은 산 정상에서부터 든다. 는 말이 있듯이 지금 백덕산 자락의 가을 산들은 단풍이 절정이다. 수많은 장꾼들이 걸었던 길, 매월당 김시습이나 허균, 그리고 허난설헌과 신사임당의 자취가 남아 있는 네 번째 관동 대로를 도반이 되어 걸으실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관동대로>네 번째 하진부에서 모릿재 너머 여우고개까지, 281

282 한탄강변의 철원을 가다 :37 한탄강변의 철원을 가다. 유월 셋째 주 토요일에 한탄강변에 자리 잡은 철원을 갑니다. 금강산 가는 길에 있는 정자연은 겸재 정선의 그림 속 에 남아 있는 명승지입니다. 백마고지와 노동당사, 도피안사를 거쳐 고석정, 그리고 순담으로 이어질 이번 여정에 참여 바랍니다. 이곳 평강에서 알려진 명소가 정자연 亭 子 淵 이다. 김화현 당탄 하류에서 흘러와 한탄강이 되어 철원으로 흐르는데, 푸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울타리를 이루고 있다. 그 길이가 5 리나 되며 돌무늬가 그림처럼 뒤섞여 있다. 아래에는 맑 은 호수가 있는데, 깊이는 배를 띄울만하다.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이곳 정자연을 지나다 한 눈에 반하여 그림으로 표현한 화가가 바로 겸재 정선 鄭 敾 이다. 정선은 조선 땅을 발로 탐승하고, 기억에 의존하여 머리로 그름을 그린 진경화가다. 실경을 변형하는 독특한 조형 어법으로 보건데, 울림이 큰 가슴과 풍부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누구보다 조선 땅을 지독히 사랑한 결과일 터다. 정선이 완성한 진경산수화는 조선의 대지, 나아가 조선의 명승을 통해 더 나은 이상을 꿈꾼 자들의 회화 형식 이다. 라고 평한 미술사학자 이태호 선생의 말이 빈 말이 아님을 이곳을 그린 겸재의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병연의 제화시 題 畵 詩 에 나오는 정자연 亭 子 淵 은 강원도 평강군 남면 정연리에 있다. 겸재 정선은 그의 나이 36세 (1711) 되던 해에 정자연에 들렀을 때, 지금의 풍광과 다른 점은 석벽 건너편에 잘 지어진 기와집 몇 채가 있다는 것 이다. 소나무 몇 그루가 늘어서 있고 한 쪽 귀퉁이 사리로 서 있는 버드나무 한 그루, 그 나무 사이로 한 사람이 서 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몇 백 년 전에 그려진 한 폭의 그림으로 그 옛날의 풍경을 회상해볼 따름이다. 그 쇠둘레의 땅 철원 조선시대에 철원도호부( 鐵 原 都 護 府 )가 있던 철원군이 신증동국여지승람 건치연혁 ( 建 置 沿 革 ) 편에는 다음 과 같이 실려 있다. 본래 고구려의 철원군이다. 모율동비( 毛 乙 冬 非 )라고도 한다. 신라의 경덕왕이 철성군( 鐵 城 郡 )이라고 고쳤다. 뒤에 궁예가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의 옛 땅을 침략해 차지하고 송악군으로부터 와서 여기에 도읍을 정하고 궁실을 지어 더할 수 없이 사치하게 하였으며, 나라 이름을 태봉( 泰 封 )이라고 하였다. 고려 태조가 즉위하게 되어서는 수도를 송악 으로 옮기고, 철원을 고치어 동주( 東 州 )로 하였다. 충선왕 2년에 모든 목을 재정비할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낮추 어 부로 하였고, 조선 태종 13년에 통례에 따라 도호부로 고쳤다. 세종 16년에는 경기로부터 옮겨다가 본도에 예속시 켰다. 한탄강변의 철원을 가다. 282

283 함경도로 가는 길 수백 리, 안팎의 온 강산이 또렷이 내 눈 안에 들어오네. 이이만 李 頤 晩 의 기 記 에 실린 글이다. 산의 모양이 날아가는 학 鶴 의 형체인 금학산 金 鶴 山 (947)이 동송읍 뒤편에 자리 잡아 진산이 되고, 한국의 그랜드캐 년 이라고 부르는 한탄강이 흐르며, 철원평야라는 강원도에서는 보기 드문 넓은 평야가 펼쳐진 곳이 쇠 둘레 의 땅 철원이다. 그런 연유로 경원선 열차가 다닐 때에 철원의 서남쪽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열차의 연기를 평강지방에 이르러 사라지 기 전까지 한 시간이 넘게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한다. 철원의 역사에서 궁예의 태봉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통일한국이 이루어진다면 맨 먼저 할 일이 휴전선 가 운데에 있는 궁예도성을 발굴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 역사 속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중환이 택리지 에서 궁예란 자는 신라의 왕자로서 젊었을 대부터 무뢰한( 無 賴 漢 )이었고, 장성하여서는 안성 죽산 사이의 도둑이 되어 고구려와 예맥지역을 차지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러나 성품이 잔인무도하였으 므로 부하에게 쫓겨나고 태조 왕건이 드디어 군중에게 추대되었는바, 이것이 고려를 건국하게 된 시초였다 라고 기 록하였는데, 역사는 항상 승자의 기록이 되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는 단순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 탓에 궁예 는 어느 기록에서는 부정적으로 그려져 있는 게 사실이다. 철원 궁예가 개성 철원지역을 중심으로 후고구려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던 때가 893년이다. 궁예의 한이 서린 궁예도성 궁예는 905년 도읍을 철원으로 옮긴 뒤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충청도까지 세력을 뻗치며 후백제의 견훤 과 자웅을 겨루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의 부하였던 왕건이 호족들과 연합하여 궁예를 축출했다. 905년부터 왕건이 고려를 세운 918년까지 열다섯 해 동안 태봉국의 서울로서 한 나라의 중심지였던 철원군 철원읍 홍 원리의 비무장지대에는 풍천원( 楓 川 原 )이라는 들에 터만 남아 있다. 궁예가 물을 마셨다는 어수정( 御 水 井 )은 그 흔적 만 있고 두 겹으로 쌓았던 성은 거의 다 허물어져 일부분만 남아 있다. 용재총화( 傭 齋 叢 話 ) 는 철원은 궁예가 차지하여 태봉국을 세웠던 곳인데, 지금도 경성의 옛 터와 궁궐의 층계가 남아 있어 봄이면 화초가 만발한다. 지세가 막혀 강하( 江 河 )는 조운이 어렵다 고 궁예가 도읍을 정했던 철원 땅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빼어난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정철은 관동별곡 에서 궁왕 대궐 터에 오작이 지지괴니 천고흥망 을 아는다 모르는다 라고 읊었다. 강원도 내에서 가장 넓은 평야를 자랑하는 철원평야는 비무장지대를 지나 평강고원으로 이어진다. 금학산 오성산 대성산 백암산 명성산 등이 있으며, 그 중에 명성산은 궁예가 왕건에게 쫓겨들어가 울었다는 데에서 연유한다. 철원평야를 휘감아 도는 강이 한탄강이다. 한탄강은 강원도 평강군 현내면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철원군 갈말 면의 북쪽에서 남대천을 합친 뒤 갈말면과 어운면, 동송면의 경계를 이루면서 남쪽으로 흘러, 경기도 포천군 전곡읍 을 지나 임진강으로 흘러가는 강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에서는 한탄강을 석체천( 石 切 川 )이라 기록하였는데, 양쪽 언덕의 석벽이 모두 계석체와 같아 체천 이라 했다 는 기록이다. 또한 한탄강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철원이 태봉국의 도읍지였던 어느 날 남쪽으로 내려가 후백제와 전쟁을 치르고 온 궁예가 이곳에 와 서 마치 좀먹은 것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것을 보고는 아하, 내 운명이 다 했구나 하고 한탄을 하여 그때부 터 이 강을 한탄강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탄강변의 철원을 가다. 283

284 이 구멍이 뚫린 화산석을 두고 글을 쓴 사람이 조선후기의 실학자인 이학규 李 學 逵 였다. 철원에서 나는 돌에는 구멍 이 많다. 큰 것은 떡시루와 도끼 구멍 같고, 작은 것은 피리 구멍만하다. 가볍고 비어 있는 것은 옹기와 비슷하다. 요 컨대 주춧돌이나 무덤의 비속으로도 맞지 않으며, 중국에서 n나는 유명한 태호석 太 湖 石 과 요봉석 堯 峯 石 같은 기이한 볼거리도 없다. 또 하나는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며 싸웠던 한국전쟁 때 수많은 젊은 생명들이 스러져간 곳이라 해서 한탄강 이라 불렀다는 슬픈 내력도 있다. 그 강물에 기대어 펼쳐진 철원평야는 분단이 되면서 심한 물 기근을 겪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철원평야에 물을 대주 던 봉래호의 물줄기를 황해도 쪽으로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그 뒤 철원평야는 물이 모자라서 점차로 황폐해지게 되었 다. 그러던 것이 60년대에 용화저수지와 하갈저수지 등을 만들었고 70년대에는 둘레가 몇십 리에 이르는 토교저수지 를 포함한 저수지 여러 개를 새로 만들어 다시 물이 닿는 땅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물이 모자랐는데, 한탄강 의 물을 퍼 올릴 수 있는 기계를 곳곳에 설치한 뒤부터 철원평야의 물 걱정은 줄어들었고 지금은 기름진 땅이 되었 다. 물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논 한 평에 500원쯤 했다는데, 지금은 여러 배로 뛰어올랐고 철원평야에서 생산되는 철원 오대쌀 이 그 품질이 뛰어나다. 철원에 관한 택리지 의 기록을 보자. 철원 고을이 비록 강원도에 딸렸으나 들판에 이루어진 고을로서 서쪽은 경기도 장단과 경계가 맞닿았다. 땅은 메마 르나 들이 크고 산이 낮아 평탄하고 명랑하며 두 강 안쪽에 위치하였으니 또한 두메 속에 하나의 도회지이다. 들 복 판에 물이 깊고 벌레 먹은 듯한 검은 돌이 있는데 매우 이상스럽다. 한탄강변에서는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현무암, 즉 곰보돌이 있다. 화산에서 흘러나온 용암이 굳어 이루어진 곰보 돌은 가볍고 모양새가 좋아 맷돌이나 절구통을 만들거나 담을 쌓는 데 요긴하게 쓰였다. 철원에 경원선 철도가 놓인 것은 1914년이었다. 서울과 원산 함흥을 잇는 철도가 생김으로써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 콩 명주실을 비롯 동해안에서 나는 싱싱한 어 魚 자원들을 실어 나를 수 있었다. 그 뒤 1936년에는 경원선이 지 나는 철원역에서 금강산의 장안사에 이르는 전기철도가 개통되었다. 철의 삼각지 한편 철원 하면 떠오르는 것이 철의 삼각지 백마고지 아이스크림 고지 김일성고지 등의 싸움터이다. 한국전쟁 때 에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인 이곳 비무장지대인 월정역에는 가다가 부서진 채 고철로 남아 있는 열차 한 량이 남아 있다. 철원평야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이곳은 철원군과 김화군 평강군을 잇는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 였다.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로 수도고지 전투, 지형능선 전투, 백마고지 전투를 들 수가 있다. 그 중에서도 철원 평야 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산봉우리인 백마고지에서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열흘 동안에 벌어진 싸움은 철원군 동송읍 이평리에 세워진 백마고지 전투 전적비 에 적힌 대로 포탄가루와 주검이 쌓여서 무릎을 채울 만큼 치열했 다. 높이가 395미터인 이 산봉우리는 열흘 동안에 주인이 스물네 차례나 바뀌면서 1만4천 명에 가까운 군인이 죽거나 다쳤고 쏟아진 포탄만 해도 3십만 발이 넘었다고 한다. 백마고지에서 건너다보면 봉우리가 세 개 다정하게 서 있는 삼자매봉이 있고 철원평야 언저리에 철원평야를 빼앗기고 김일성이 사흘 동안을 울었다는 김일성고지가 있다. 한탄강변의 철원을 가다. 284

285 철원 노동당사 노동당사는 그날의 상혼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서 있고, 월정역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 는 표어가 쓰여 진 채 부서 진 열차만 서 있을 뿐이고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에 도선국사가 세운 도피안사 到 彼 岸 寺 가 있다. 도피안사는 속세를 넘 어 이상 세계에 도달한다는 의미를 지닌 절집으로 이절에 국보 제 63호로 지정되어 있는 우리나라 철불의 대표적 유 물 가운데 하나인 철불이 있다. 신라 경덕왕 5년인 865년에 철원지방의 향도 香 徒 1500여명이 결연 結 緣 하여 조성했 다. 라는 기록과 함께 <함통 6년 기유 정월 咸 通 六 年 己 酉 正 月 >이라는 문구가 철불 뒷면에 남아 있어 그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원래 이 철불은 철원의 안양사 安 養 寺 에 봉안하려 했던 불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운반 도중 없어 졌는데 나중에 찾고 보니 현재의 도피안사 자리에 안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도선국사는 이곳에 있기를 원한 불상의 뜻에 따라 이 자리에 절을 창건하고 철불을 모셨는데, 그가 세운 이 나라 800 여개의 비보사찰중 하나라고 한다. 도피안사가 들어선 화개산은 물위에 떠 있는 연꽃의 연약한 모습이라 철불과 석탑 으로 산세의 허약함을 보충하고 외부로부터 오는 침략에 대비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강원도>에서 한탄강변의 철원을 가다. 285

286 서해의 외 딴 섬, 백령도를 가다 :36 서해의 외 딴 섬, 백령도를 가다.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에서 유월 넷째 주에 서해의 백령도를 갑니다. 옹진군에서 교통비를 일부 지원하기 때문에 저렴한 가격으로 갈 수 있는 이 섬은 본래 황해도 장연군에 딸린 섬이었 습니다. 섬의 모양이 고니처럼 생겼다고 하여 백령도라는 이름이 붙은 이 섬은 고니섬, 또는 곡도라고도 부릅니다. 갈대가 많았으므로 가을리, 백령도의 남쪽에 있어 남포리, 섬의 북쪽에 있어서 북포리, 연화리, 고려 현종 때부터 조 선시대까지 백령진이 있었던 진촌리가 백령도의 행정구역입니다. 북한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백령도에서 분단의 현실과 아름다운 섬 백령도를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 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려사 지리지( 高 麗 史 地 理 誌 ) 나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과 같은 지리지에는 영종 도가 자연도라고 나와 있다. 이 섬은 고려시대에는 송나라와 문화교류를 하였던 명주 항로의 거점이었다. 명주 항로 는 예성강의 포구에서 영종도를 거쳐 고군산도와 흑산도를 거쳐 중국의 명주에 이르는 뱃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영 종도에는 현재 국제공항이 만들어져 세계교역의 중심공항이 되고 있다. 한편 동국여지승람 의 기록에 의하면 백령도나 대청도 등 서해지방의 섬은 원나라에서까지 그 나라 사람들을 귀양 보냈던 귀양지라고 한다. * 백령도 여행정보 - 사곶 해수욕장 백령도에서 두번째로 유명한 해변이 사곶 해수욕장 이다. 쾌속선이도착하는 용기포항의 모퉁이를 돌아나오면 남 서쪽으로 길이 3km에폭 300m에 이르는 갯벌이 수평에 가깝게 펼쳐진다. 썰물 때 단단해진 해면이 천연활주로 로 이용되었다. 썰물 때 바닷물이 마른 해면은 큰 관광버스가 속력을 내어 달려도 약간의 흔적만 남을 정도로 여전히 단 단하다. 이곳이 활주로로 개발된 시기는 1950년 한국전쟁 때. 미 공군은 당시 사곶 해변의 특성을 알고 유엔군 전초 비행기지 로 활용, 작전에 큰 도움을 받았다. 그후 우리 공군 역시 해병대 보급물자를 운반하는 수송기 이착륙장으로 활용했다. 하지만 이같이 귀중한 천연활주로 는 91년 6월 옹진군이 1백60여만평의 농지를 조성한다며 해변과 이웃한 진촌리 일대 염전을 길이 8백20m의 방조제로 막고 간척사업을 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방조제가 주변 일대 바다의 흐름에 변화를 주기 시작, 일정한 수압에 의해 유지되고 있던 모래바닥의 강도를 약화시켜 활주로를 물렁하게 만드는 문제를 발생시킨 것.해변가에서 횟집을 운영하 는 주민 김모씨(여.47)는 "7-8년 전만 해도 한달에 2-3번씩 수송기가 뜨고 내렸는데 간척사업이 시작된 뒤로는 끊겼 다"고 말했다. 공군본부측도 "지금은 바닥이 물러져 항공기 이착륙이 불가능하다"며 "몇해전부터 보급물자 운송수단을 대형 헬기로 대체했다"고 확인했다. 공군본부는 또 "활주로 재사용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최근 현지로 조사팀을 보내 정밀조사 서해의 외 딴 섬, 백령도를 가다 286

287 했으나 [재사용이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 콩돌해안 백령도의 지형과 지질의 특생을 나타내고 있는 곳 중의 하나로 해변에 둥근 자갈들로 구성된 퇴적물이 단구상 미지 형으로 발달한 해안이다. 콩돌해안은 백령도 남포동 오금포 남쪽해안을 따라 약 1Km정도 형성되어 있고 내륙쪽으로 는 군부대의 해안초소와 경계철조망이 설치되어 있다. 둥근 자갈들은 백령도의 모암인 규암이 파쇄 되어 해안의 파식작용에 의하여 마모를 거듭해 형성된 잔자갈들로 콩과 같이 작은 모양을 지니고 있어 콩돌이라 하고, 색상이 백색, 갈색, 회색, 적갈색, 청회색 등으로 형형색색을 이루고 있어 해안경관을 아름답게 하고 있다 콩알만한 크기의 작고 둥근 자갈들이 해안에 지천으로 깔린 화동의 콩돌해변은 그 돌을 밟는 것만으로도 신비한 경 험이며 맑고 푸른 바다와 조화를 이룬 이색적인 해변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덕분에 자연 그대로의 정취를 느낄 수 있어 가족과 해수욕하기에는 그만이다. - 심청각 심청이 아버지 심봉사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석에 몸을 던진 인당수와 심청이 환생했다는 연봉바위 등 백 령도가 심청전의 무대였던 사실을 기리기 위해 인당수와 연봉바위가 동시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심청각을 건립하여 전통문화를 발굴, 계승함과 아울로 효 사상을 함향하고 망향의 아픔을 가진 실향민에게 고향을 그리는 대책사업 으로 심청이 환생장면등을 전시했을 뿐만 아니라 심청전에 관련된 판소리, 영화, 고서 등을 전시하였다. - 용트림 바위 용이 승천하는 듯 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갈매기 가마우지 서식지이기도 하다. - 창 바위 백령대교 앞에 홀로 서 있는 바위로 바위 가운데 창 모습같이 뚫려 있어 창 바위라 부른다. 이곳에서는 8~9월에 학꽁 치 낚시를 즐길 수 있다. - 두무진 선대암 서해의 해금강으로 불리는 두무진 비경과 많은 기암괴석들이 병풍처럼 어우러져 그 자태가 신비에 가깝다. (명승 제 8호) - 물범 바위 두무진 주변 선대암과 진촌하늬 바닷가에 천연기념물 331호로 지정 보호받고 있는 물범이 수면에 잠길 듯 말 듯 한 바위에 옹기종기 모여 집단 서식을 하고 있다. - 형제 바위 제 2의 해금강 또는 금강산의 총석정을 옮겨 놓았다고 할 만큼 기암절벽이 많은 두무진은 백령면 연화 3리 해안지대 이다. 신선대, 형제바위, 장군바위, 코끼리바위 등이 푸른 바닷물과 어울려 아름다운 비경을 이룬다. 두무진을 둘러보 다 운이 좋으면 물개바위 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받고 있는 물범이 수면에 잠길 듯 말 듯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장군 바위 장군들이 모여 회의하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두무진. 통통배를 타고 이 일대를 해상 관광하는 관광 객들은 장군바위의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두무진을 등진 바다 건너편에는 북녘땅 장신곶과 몸금포해안이 가깝게 보여 실향민들이 두고 온 고향을 그리며 애환을 달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코끼리 바위 두무진 전경중에 하나로 코끼리가 물을 마시고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 두무진 일대는 선대암, 장군 바위, 형제 바위 등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 진촌리 감람암 세계적으로 드문 현무암내에 감람암 포획현무암분포지이다. (천연기념물 제 393호) - 관창동 사자바위 관창동에 위치한 이 사자바위는 마치 사자가 누워 포효하는 자세를 뽐내는 모습 같다하여 이름 붙여졌다. 서해의 외 딴 섬, 백령도를 가다 287

288 - 통일염원탑 용기포에 우뚝 솓은 이 돌탑은 통일을 염원하는 소망을 돌 하나하나에 담기는 정성으로 쌓아 올렸다. 백령도 이곳은 하늘 끝,바다의 섬,그리고 깊이 묻어둔 고향의 끝동네이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깨끗한 섬, 심청이의 숨결이 배어있 는 땅, 저 멀리 북녘땅 황해도 장산곶과 희미하게나마 하얀 파도가 내려다보이는 인당수, 넓고 푸른 서해의 바다와 백령도를 수호하며 풍요한 삶을 위해 화합, 단결하고 노력하는 섬주민들의 염원을 표상하였다. - 서해최북단비 백령도가 서해 최북단임을 말해준다. - 화동염전 백령도의 유일한 천일염전으로 소금맛이 좋아 까나리 액젖과 김치를 담그는데 사용하여 그 맛이 일품이다. - 연봉바위 심청이 연꽃으로 환생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는 연꽃이 핀 모습의 연봉바위 - 중화동교회 1896년에 세워진 중화동교회는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세워진 장로교회이다. 역사적 가치가 큰 성지로 교회 발전사를 재조명함은 물론 관광성지로서의 가치가 높다. 바로 옆에 위치한 백령기독교역사관은 100년 넘은 한국 기독교의 역사 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년 노송 400여년전(조선 선조시)에 장촌마을이 형성되면서 당시 거주민들이 식재한 것으로 전해져오고 있으며, 임진왜란, 일 제강점기, 6.25전쟁 등 국난 중에도 훼손되지 않고 꿋꿋하게 생존한 거목으로 백령주민의 강인한 의지와 성실성, 순 수함을 상징하는 노송이다. 천년동안을 주민과 함께 백령도를 수호하는 역사적인 나무로 성장해주기를 기리는 마음에 서 이곳 주민들은 이 나무를 '천년송'이라 칭하고 있다. - 백호부대 전적비 서해지역의 요충지익 남북을 잇는 관문인 백령도에서 미 극동 사령부 제 8240소속 백호부대는 6.25전쟁때 민주, 평화 와 자유경제 체제수호를 위하여 몸을 던져서 서해지역을 지켰다. - 반공유격 전적비 6.25전쟁 당시 8,000여 명이 반공유격대(8240부대:동키부대)를 조직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므로 그 전공을 기리고 장 렬히 산화한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1961년 8월 15일 윤보선 대통령의 휘호를 받아 건립하였다. 첨사들의 선정비 백령도를 위해 공헌한 면장과 첨사들을 위한 선정비 - 감람암 포획 현무암 분포지 백령도 진촌리의 감람암 포획현무암 분포지는 백령면 진촌리에서 동쪽으로 1.3km 정도 떨어진 해안에 있으며, 해안선 을 따라 지름 5 10cm 크기의 노란 감람암 덩어리가 들어있는 용암층이 만들어져 있다. 용암층은 두께가 10m 이상이 며, 검은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백령도 진촌리의 감람암 포획현무암 분포지는 지구 속 수십 km아래에서 만들어 진 감람암이 용암이 분출할 때 함께 올라와 만들어진 것으로 지하 깊은 곳의 상태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 진촌리 패총 백령면의 '진촌리패총'은 옹진군의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선사시대의 유적이다. 백령면 사무소에서 동북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진촌리 해안의 구릉지대 밭뚝아래 표고 10m지점 일대에 걸쳐 위치해 있다. 이 패총은 1958년 서울대학 교 학술조사단에서 답사, 보고서를 통해 선사유적지임을 밝힌 곳이다. 패각하층부에서 채집된 타제각편석기편으로 볼 때 백령도에는 이미 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패각층은 굴 섭조개의 껍질로 이루어져 있다. 주 변에 도기편, 토기편들이 산재해 있다. 서해의 외 딴 섬, 백령도를 가다 288

289 다시 지리산을 생각하며, :21 다시 지리산을 생각하며, 다시 지리산을 갑니다.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진 그 자리에 오동나무 꽃, 아카시아 꽃이 한창이고 다시 찔레꽃이 그 설명하기조차 힘든 향긋한 향기를 피우는 계절, 지리산 길을 걸다가 보면 문득 두보의 <꽃잎 하나 날려도 봄이 가는데>가 떠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꽃잎 하나 날려도 봄이 가는데 바람에 만점 꽃 펄펄 날리니 안타까워라 보는 이 눈앞에서 꽃 이제 다 져가니 술 많이 마셔서 몸 좀 상해도 저어 말지니라. 강 위의 누각에 물총새 집을 짓고 궁원가 큰 무덤에 기린 석상 나 뒹굴었네 세상 변하는 이치 잘 살펴 즐기며 살지니 뜬구름 같은 명리 名 利 로 이 몸 묶을 게 뭣이랴! 산천이 온통 푸르름으로 물드는 산길, 그 산길에 다시 밤꽃이 뒤를 이을 것입니다, 그 길을 걸으며 늦봄의 정취를 느끼면 왕기의 <늦 봄에>라는 시한 편이 떠오를 테지요, 매화 시들고 나니 해당화가 새빨갛게 물이 들었네. 들장미 피고 나면 꽃 다 피는가 하였더니 찔레꽃 가닥가닥 담장을 넘어 오네 어디 담장뿐이겠습니까? 냇가에도 논둑이나 밭고랑에도 무리지어 피어난 찔레꽃을 바라보며 양희은의 <찔레꽃 피면>이라는 노래를 읊조려도 좋을 것입니다. 다시 지리산을 생각하며, 289

290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저문 길에서 이청조의 <꽃과 달은 옛날 그대로인데>라는 시 한편을 떠올리면 늦은 봄날의 하루가 마냥 가슴 속에 슬픔인지 기쁨인지 모를 추억으로 남아 오래도록 가슴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십오 년 전 달빛 어린 꽃 아래서 함께 그 꽃 보며 시도 지었었지 그 꽃 그 달 옛날 그대로이건만 이내 마음 어찌 옛 같을 수 있으랴? 임진년 오월 열아흐레 다시 지리산을 생각하며, 290

291 <관동대로>세 번째 묵호항에서 대관령 너머 횡계까지, :17 <관동대로>세 번째 묵호항에서 대관령 너머 횡계까지, 관동대로 세 번째 여정이 묵호항에서 대관령 너머 횡계에 이르는 구간에서 실시됩니다. 천천히 걷는 관동대로길, 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매월당 김시습, 이중환, 김삿갓 이었다면 그 길을 가마를 타고 넘었던 사람이 신사임당, 허난설헌입니다. 또한 그 길을 말을 타고 넘었던 이 들이 송강 정철, 허균,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등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 길을 지나 서울로 또는 평해로 오고 갔습니다. 녹음 우거진 초여름 넘어가며 풍류를 즐기고 멋을 함께 할 사라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묵호항이 북평과 합해져 동해시가 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소설가 심상대가 <묵호를 아는가>라는 소설을 통해 묵호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묵호의 묵호항은 지금 비에 젖어 있다. 내게 있어서 동해바다는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술, 한 잔의 소주를 연상케 했다. 어느 때엔, 유리잔 밖에서 이랑지어 흘러내리는 소주 특유 의 근기를 느껴 매스껍기도 했지만 대체로 그것은 단숨에 들이켜고 싶은 고혹적인 빛깔이었다. 파르스름한 바다, 그 바다가 있는 곳, 묵호, 그렇다. 묵호는 술과 바람의 도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둘러 독한 술로 몸을 적시고, 방파제 끝에 웅크리고 앉아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토악질을 하고, 그리고는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부두의 적탄장에서 날아오르는 탄분처럼 휘날려, 어떤 이는 바다로, 어떤 이는 멀고 낮선 고장으로, 그리고 어떤 이는 울렁울렁하고 니글니글한 지구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멀리 무덤 속으로 떠나갔다. 가끔은 돌아온, 이도 있었다. 플라타너스 낙엽을 밟고 서서 시내버스를 기다리다가 문득 무언가 서러움에 복받쳐 오르면, 그들은 이 도시를 기억해냈 다. 바다가 그리워지거나, 흠씬 술이 젖고 싶어지거나 엉엉 울고 싶어지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허둥지둥 이 술과 바람의 도시를 찾아나서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언제니 묵호는 묵호가 아니라 바다는 저고리 옷가슴을 풀어헤쳐 둥글고 커다란 젖가슴을 꺼내주었다. 그 젖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고 도리질하며 울다가 보면, 바다는 부드럽게 출렁이는 젖가슴으로 돌아온 탕아의 야윈 볼을 다독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얘야, 어서 떠나가라, 어서 떠나가라. 얘야, 바다에는 아무것도 없단다. 어서 인간의 바다로 떠나거라, 인간의 바다에 멀기가 있다. 바다와 항구의 쓸쓸한 이미지가 절묘하게 들어 있는 소설의 일부분이다. 고향이란 무엇일까? 고향은 언제나 고향이지만 그 고향이 가끔씩 차 고 넘칠 때가 있다. 그때 고향은 멀게만 느껴지고 그리고 어느 날 그 고향을 낮선 이방인처럼 찾게 될 때가 있다. 나의 고향이 그럴진대 누 구에게든 고향은 그런 애증의 장소가 아닐까? 애정이라는 건 때에 따라 맹목적이고 본능적이어야 해, 그게 더 숭고한 때도 있단 말이야, 문제가 있으면 답이 있어, 어렵든 쉽든 모든 문 제는 답을 가지고 있으니까, 답, 답을 찾아, 답, 그 답이라는 것이 진정 이 지구상에 있는 것일까? 생각하며 부지런히 발길을 옮기고 있는 발한동은 바란이라고 불렸는데, 바란이 남 쪽 묵호항구에 있는 마을이 향로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고 해서 향로봉 香 爐 峯 이다. <관동대로> 중에서 율곡 이이( 李 珥 )를 낳은 사임당은 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아서 자주 친정나들이를 했는데, 그 때 지은 시중의 한편이 <어머 니를 그리며>라는 시이다. 그리운 고향은 겹겹이 막히고 가고 싶은 마음 속을 헤매는구나. 고향 땅 한송정에는 외로운 달빛 고향 땅 경포대에는 한줄기 바람 모래 위 백구 모이고 흩어지고, <관동대로>세 번째 묵호항에서 대관령 너머 횡계까지, 291

292 파도 위 고깃배들 오고 가누나 어느 적에 강릉 가는 길 밟아 색동옷 입고 춤추며 어머니 곁에서 바느질 할고, 신사임당은 시와 문장에 능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지금 전해오고 있는 것은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본다.> <어머님 그리워>라는 시 두 편만이 남아 있고 율곡이 지은 <사임당 행장>에 적힌 시구의 일부분뿐이다. 글씨와 그림에 더 탁월함을 드러내서 후세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사임당은 세종 때의 화가인 안견( 安 堅 )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신사임당의 화 풍( 畵 風 )은 안견과 달리 여성 특유의 섬세 정묘함을 더하여 한국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글씨로는 초서 여섯 폭과 해서 한 폭이 남아 있고, 그림으로는 풀벌레, 산수( 山 水 ) 포도 화조. 어죽. 매화. 난초 등을 그린 40여 폭이 남아 있다. 서울에서 나귀를 타고 오면 이레가 걸렸던 대관령 대관령, 서울에서 나귀를 타고 오면 이레가 걸렸던 길이 대관령이었다. 예전에 이곳으로 부임해 오던 벼슬아치들은 험준한 대관령을 넘으며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며, 또 넘어와서는 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강릉 땅 가는 길이 험하고 먼데서 오는 서러움이 복 받쳐 울었고 강릉 땅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인심과 빼어난 산수 때문에 즐거워서 웃었다는 이야기이다. 서울에서 영동고속도로를 달려오다가 대관령을 넘으면 강릉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대관령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부 서쪽 45리에 있으며, 이 주의 진산이다. 여진 지역인 장백산에서 (산맥이) 구불구불 비틀비틀, 남쪽으로 뻗어내리면서 동해가를 차지한 것이 몇 곳인지 모르나, 이 영이 가장 높다. 산허리에 옆으로 뻗은 길이 99굽이인데, 서쪽으로 서울과 통하는 큰 길이 있다. 부치( 府 治 )에서 50리 거리이며 대령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연려실기술 에는 강원도는 바닷가에 있는 9군이 단대령 동쪽에 있기 때문에 영동이라 한다. 단대령은 대관령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강원도를 또 관동이라고도 한다 고 기록되어 있다. 대령 大 嶺 또는 대관산 大 關 山 이라고도 불리고 옛날 관방 關 防 을 두고 목책을 설치 했기 때문에 대관령 이라고 불렸다. 대관령을 처음 개척한 사람은 조선 중종 때 강원 관찰사로 부임했던 고형산 高 荊 山 ( )이었다고 하며 그는 백성을 동원하지 않고 관 의 힘으로 몇 달 동안에 걸쳐 이 고개를 열었다고 하는데, 대관령 아래에 강릉이 있다. 강릉 지역 사람들이 강릉 땅이 살기가 좋고, 대관령이 하도 험한 고개라서 강릉에서 나서 대관령을 한 번도 넘지 않고 죽으면 그 보다 더 복된 삶은 없다. 고 했던 대관령 너머에 동해 푸른 바 다가 있다. 대관령은 해발고도가 832m이고, 고개의 총연장이 13km에 이르며, 고개의 굽이가 99개소에 이른다고 한다. 서울과 영동을 잇는 영동고속도로 의 마지막 고개이며, 지금은 영동고속도로가 터널로 통과하고 있다. 대관령을 경계로 동쪽은 오십천이 강릉을 지나 동해로 흐르며, 서쪽은 남 한강의 지류인 송천이 된다. 정상에는 그 옛 시절 대령원이라는 원이 있었고 횡계리에는 횡계역( 橫 係 驛 )이 있어 험준한 교통로를 유지하여 길손들의 편리를 도모해 주었다. 고려 때의 문신인 김극기는 높은 산이 푸른 바다 동쪽으로 솟았는데, 만 골짜기의 물이 흘러나와 천 봉우리를 둘렀네. 가을 서리는 기러기 가기 전에 내리고, 새벽 해는 첫 닭이 울 무렵 돋는구나.' 하였다. <관동대로> 중에서 교통량이 많고 중요한 고개 길 대관령은 백두대간에서 가장 교통량이 많고 중요한 고개 길이었다.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대관령의 교통량이 급증 하였고 동해고속도로 의 건설과 설악산 국립공원일대에 관광객이 밀려들면서 대관령 일대는 항상 밀리는 구간이 되고 말았고 결국 대관령에 터널이 생기면서 한시 름 놓게 되었다. 동해의 푸른 바다와 대관령의 녹음 무성한 숲길을 걷고 나면 세상이 달리 보일 것입니다 <관동대로>세 번째 묵호항에서 대관령 너머 횡계까지, 292

293 임진년의 삼사기행에 초대합니다 :53 임진년의 삼사기행에 초대합니다. 임진년 사월 초파일(석가 탄신일)을 즈음해서 삼사기행을 떠납니다. 5월 26(토)일부터 28(월) 석가탄신일까지 사흘간에 펼쳐질 이번 기행은 그 첫날은 경주 안강의 옥산서원과 정혜사지 일대, 둘째 날은 울산의 망해사, 천진리 각석과 반 구대 일대, 그리고 셋째 날인 사월 초파일은 양산 통도사,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는 석남사와 운문사 일대에서 펼쳐집 니다. 경주를 사람들은 많이 가지만 안강일대의 보석 같은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길이 있는 곳은 잘 모릅니다. 고즈넉한 폐사지인 정혜사지와 이언적의 자취가 서린 독락당과 옥산사원으로 이르는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 지, 다시 찾아갈 흥덕왕릉의 소나무들은 울울창창하기도 하지만, 그 휘어짐이 마치 라면가락처러 운치가 있 습니다.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 생가를 들러 경주 불국사 부근에서 하룻밤을 묵을 것입니다. 그 이틑날은 울산 지역을 답사합니다. 국보로 지정된 천전리 각석에서 정몽주의 자취가 서린 반구대, 그리고 암각화를 보기 위해 가는 옛길과 가지 산 자락의 숨은 언양에 옛길을 사시는 시인이자 산악인인 배성동 선생님이 안내해주시기로 했습니다.간월사 터, 망해사터, 청송사터의 문화유산과 울산의 대왕암이 길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사월 초파일은 3사 기행입니다. 그 이름난 통도사에서 새벽예불을 보고, 아침 공양을 한 뒤에 통도사 답사와 함께 한국의 큰 스님인 경봉 스 님이 머물렀던 암자 극락암을 걸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점심 공양은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고, 사찰 음식맛이 나라 안에 제일인 석남사에서 할 것입니다. 석남 사 답사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찾아갈 곳이 청도의 운문사입니다.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고, 아름답기로 소문난 절집에서 사리탑으로 이르는 길을 걷고 소나무 숲길을 걸어서 도착할 운문 저수지, 이 모두가 삼사기행에서만 맛 볼 수 있는 풍경이고 아름다움입니다. 오월의 마지막 주, 녹음과 찔레꽃 향기 그윽한 산천에서 펼쳐질 뜻깊은 향연에 참여바랍니다 임진년의 삼사기행에 초대합니다. 293

294 천년 고도 전주의 옛길을 걷는다 :52 천년 고도 전주의 옛길을 걷는다. 2012년 전북방문의 해에 <전주 천년 고도 옛길> 걷기에 전국의 길벗들을 초대합니다.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에서 전주시의 후원을 받아 여는 2012년 전북 방문의 해의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는 전주 의 길.>이라는 주제로 2012년 6월 2일(토요일)과 3(일). 에 전라북도와 전주시 천변 일대에서 펼쳐집니다.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회원들과 <전주 천년 고도 옛길을 걷는 사람들> 그리고 <한국의 길 모임> 다음 카페의 <최 우수 블러거> 전국의 여행 블러거 와 걷기 전문가 와 걷기 카페 회원들을 초청하여 <전주에 천년 고도 옛길이 있다> 라는 주제로 완산칠봉길과 남고산성 길을 비롯 3코스와 한옥마을 일대의 문화유산의 현장을 걸으며 길 문화축제를 개최할 예정입니다. 행사 내용 토요일 오전: 10시에서 12시 까지 우리 땅 걷기 회원 그리고 전주시민들, 그리고 전국의 여행 블로거들과 걷기 마니 아들을 초청하여 전주 한옥마을 길을 걷습니다. 토요일 오후: 1시 30분부터4시 30분까지 꽃밭정이 네거리 완산칠봉 기슭에 있는 원불교에서 완산칠봉의 정상에 이르 고 그 길을 따라 용머리 고개를 이를 것입니다. 그리고 용머리 육교를 지나 다가공원에 이르는 완산칠봉 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전북 교육청 산하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초청하여 전주 천년 고도 2코스이자 예향 천리 마실 길인 <완산 칠봉길 걷기대회>를 개최하여 전주의 아름다운 길을 알릴 예정입니다. 6월 3일 일요일 오전 8시: 전주 천년 고도 옛길 4코스인 흑석골에서 남고산성으로 이어지는 남고산성길을 걷고서 10 시부터 관왕묘에서 이어지는 <시나브로 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함께 걸을 곳, 2 코스. 완산칠봉에서 다가산으로 이어진 길, 꽃밭정이 네거리 부근에 있는 원불교에서 완산칠봉 정상에 이르고, 용머리 고개를 지나 다가공원으로 이어진다. 다가 산의 아름다운 능선길을 따라 서신동 롯데아파트에 이르는 길이다. 1894년의 동학의 역사와 오백년 전주 역사가 서린 이 길도 숲이 울창한 역사의 길이다. 10KM 약 4시간 4코스, 보광재 지나 고덕산으로 이어진 길, 고구려의 절 비래방장을 고구려의 고승인 보덕화상이 하룻밤 사이에 옮겨온 곳으로 고구려의 자취가 서린 역사적인 길이다.,(삼국유사에 실려 있음)) 완산구 흑석골에서 시작하여 임실에서 오던 보부상들이 지나던 보광재를 지나 고덕산 자락 경복사지를 지나 관성묘 거쳐 후백제 견훤이 쌓은 뒤 천년의 세월을 견딘 남고산성을 도는 길이다. 11KM 4시간 소요. 1코스. 조선 오백년 역사가 시작된 전주의 진산 鎭 山 건지산길 도심 속에 있으면서도 태초의 밀림같이 숲이 우거진 길이 건지산 길이다. 아름드리 편백나무 숲과 프라타나스, 단풍 나무, 그리고 독일 가문비와 아카시아숲이 터널을 드리운 길로, 걷는 내내, 모자를 안 쓰고 머리에 바람 빗질을 하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전국적으로도 이름난 덕진공원에서 대하소설 <혼불>의 저자인 최명희묘소를 지나고 건지산 정상을 지나 전주 이씨 시조 이한공의 묘인 조경단을 거쳐 전북대를 지난다. 다시 가련산 줄기를 타고 전주천에 이르는 이 길은 천천히 걸으 면 11KM 쯤 되고 다섯 시간 정도 걸린다 천년 고도 전주의 옛길을 걷는다. 294

295 교동도에서 보낸 하루 :43 교동도에서 보낸 하루 다시 교동도에 다녀왔습니다. 아침 두시에 일이나 네 시에 김포 행 리무진 버스를 타고 김포공항에서 일곱 시에 일행들과 만나 안개 자욱한 길을 달려 강화 창후리 선착장에서 월선포로 들어가는 배를 탄 것이 아홉시 무렵, 교동도는 내가 떠났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게 나를 맞았습니다. 먼저 화개산에 올라 안개 속에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 바다 건너 황해도 연백군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도착한 교동면 소재지인 대룡리의 골목길, 마치 영화 세트장을 닮은 1970년대의 풍경, 그 길을 걷다가 여러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한 평 반 남짓한 공간의 중앙 시계점을 사십 여 년 간 거의 쉬지 않고 출근한 주인에게서는 5천 원짜리 목도장을 팠고, 연백에서 피난을 왔다가 정착한 교동 이발관에서는 만원짜리 머리를 깎았습니다. 교동 다방에서는 교동면의 아무개 사장님(?)에게 커피 한 잔을 대접 받았고, 대풍식당에서는 여든 여덟 살의 노모에게서 가슴이 아릿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피난길에 먼저 교동도에 정착한 남편의 친구를 따라 피난길에 오르며 갓 난 딸을 데리고 오다가 보니 정작 시댁에 있던 네 살 백이 큰 아들을 데리고 오지 못해 피눈물을 흘리고 살았다는 이야기, 어떤 땐 딸을 데리고 바다 건너 고향 땅을 바라보며 '이 아이가 죽는다고 해도 두 고 온 아이 그리움보다 더 할까? 라는 말을 듣고는 교동도에서 보낸 하루 295

296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습니다. 자식은 내리 사랑이라 잊을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다 잊었다고, 남편더러 이곳을 뜨자고 해도 통일 되면 가야 한다고 우기고 살더니 2십 년 전에 세상을 떴다고, 빛바랜 사진첩을 보며 그 노모의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김지하 시인의 <비녀 산>의 시 몇 줄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삶은 일하고 굶주리고 병들어 죽는 것 삶은 탁한 강물 속에 빛나는 푸른 하늘처럼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것 무엇이 삶이고. 무엇이 역사이겠습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의 아픔도 서로 감싸 안지 못하고 흘러가는 세월 앞에 가끔씩 망연자실 한 채, 지난날을 회고 할 뿐인 가녀린 존재, 과연 사람이란 무엇일까요? 한 때는 번성했던 하나의 행정구역인 교동현이 지금은 강화에 딸린 교동면으로, 그래서 구읍리, 읍내리등의 지명으로 남아 있는 곳, 고려의 희종임금, 안평대군, 연산군, 광해군, 그리고 대원군의 아들이 유배를 왔던 곳, 저물어 가는 시간에 교동도를 떠나올 때 들리던 잔잔하게 부서지던 파도소리는 숨죽여 우는 가냘픈 갈매기의 울음소리 같았습니다. 임진년 사월 스무닷새 교동도에서 보낸 하루 296

297 임진년 석탄일에 통도사에서 운문사로 이르는 길을 걷는다, :33 임진년 석탄일에 통도사에서 운문사로 이르는 길을 걷는다, 임진년 사월 초파일(석가 탄신일)을 즈음해서 삼사기행을 떠납니다. 5월 26(토)일부터 28(월) 석가탄신일까지 사흘간에 펼쳐질 이번 기행은 그 첫날은 경주 안강의 옥산서원과 정혜사지 일대, 둘째 날은 울산의 망해사, 천진리 각석과 반 구대 일대, 그리고 셋째 날인 사월 초파일은 양산 통도사,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는 석남사와 운문사 일대에서 펼쳐집 니다. 도덕산 자락에 위치한 정혜사지( 定 慧 寺 地 )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불국사 다보탑과 화엄사 4사자 석탑과 함께 대표적 인 이형 석탑인 정혜사 13층 석탑만이 남아있다. 하서 김인후가 그의 시속에서 해당화가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고 동백꽃이 차가운 얼음 속에 오연하다. 라고 노래 했던 그 시절은 과연 어느 세월이었던가? 이 절 정헤사는 경주의 역사와 지리지를 정리한 동경잡기 에 의하면 신 라시대의 절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선덕여왕 1년에 당나라의 참의사인 백우경이 참소를 입고 이곳에 와 암자를 짓 고 살던 중 선덕여왕이 이 절에 와서 행차한 후 정혜사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벼슬길에서 물러난 회재는 이 절에서 실의의 시절을 보내던 중 스님들과 사귀었고 그가 죽은 뒤 옥산서원이 세워진 후에는 정혜사가 편입되었다. 그러나 1834년에 일어난 화재로 인해 이 절은 사라지고 탑만 남아있게 되었지만 이 탑 또한 1911년 도굴로 인해 내려졌던 탑재들을 잃어버린 채 십층탑으로 서있을 뿐이다. 정혜사 바로 아랫자락에 회재 이언적이 7년 동안 은거했던 사랑채 독락당은 보물 413호로 지정되어 있다. 독락당은 회재가 낙향한 이듬해인 1532년에 지어진 건물로서 독락당과 계곡 사이에는 담장이 있고 그 담장의 한 부분을 헐어 내고 살창을 설치하여 독락당 대청에서 자계 계곡과 흐르는 냇물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독락당 건물 내에 계정이라 이름붙인 아름다운 정자 한 채가 있다. 난간에 기대어 보면 자옥산과 자계 계곡이 한데 어우러져 모두 하나가 된다. 우리가 계곡 아래로 내려가 계정을 바라볼 때 냇물 위에는 지난해 떨어진 나뭇잎들이 꽃 잎처럼 떠있었다. 1688년에 저 계정에 올랐던 정시한은 이곳의 풍경을 아래와 같이 읊었다. 정자는 솔숲 사이 너럭 바위 위에 있는데 고요하고 깨끗하며 그윽하고 빼어나 거의 티끌 세상에 있지 않은 듯하다. 정자에 올라 난간에 의지 하여 계곡을 바라보니 못물은 맑고 깊으며 소나무, 대나무가 주위를 감쌌다. 관어대( 觀 魚 臺 ), 영귀대( 詠 歸 臺 ) 등은 평 평하고 널찍하며 반듯반듯 층을 이루어 하늘의 조화로 이루어졌것만 마치 사람의 손에서 나온 듯하다. 집과 방은 너 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아 계곡과 산에 잘 어울린다. <나를 찾아가는 하루 기행> 2권 중에서 울주의 온천면 처용리는 삼국유사 에도 나오는 처용설화의 본고장이다. 정포( 鄭 脯 )의 시에 섬 속에 비치 임진년 석탄일에 통도사에서 운문사로 이르는 길을 걷는다, 297

298 느니 구름 빛이 따뜻하고, 강에 연해 물맥이 통했어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옛날 처용 늙은이가 이 푸른 물결 속에서 자랐다 하네. 풀은 치맛자락을 띄어 푸르렀고, 꽃은 술취한 얼굴에 머물러 붉었네. 거짓 미친 체하고 세상을 희롱한 뜻 무궁했으니, 항상 춤추고 봄바람을 보내네 라고 노래하였던 곳이 바로 이곳이고, 근처에 <삼국유사>에도 실린 망 해사 옛 터가 있다. 아내의 부정 앞에서도 춤을 추고 노래를 했던 처용의 혼백이 떠도는 울산의 태화강 상류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의 대 곡천에는 시공을 뛰어넘어 이 땅을 살다간 공룡들의 발자국이 남아있고 강을 건너 벽에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그린 바위그림들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다. 그 물길을 따라간 대곡리 서원마실에 반고서원( 盤 皐 書 院 )이 있다. 고려 말의 충신으로 이곳으로 귀양을 왔던 정몽주 는 이곳의 경치에 반하여 정자를 짓고서 제자들과 학문을 닦았다고 하는데, 이 서원은 숙종 38년(1712)에 고을 선비 들이 문충공( 文 忠 公 ) 정몽주( 鄭 夢 周 )와 문원공( 文 元 公 ) 이언유( 李 彦 油 ) 그리고 문목공( 文 穆 公 ) 정구( 鄭 逑 )가 이곳에 머 문 것을 추모하여 창건하였다. 그곳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신석기 말부터 청동기시대에 그려진 대곡리 암각화가 있다. 이곳에는 1억 5천만년 전 쯤에 지구를 주름잡았던 공룡들의 발자국이 200여개가 있다. 대형초식공룡인 율트라사우르 스와 중형 초식공룡인 고성고사우르스 와 육식공룡인 메갈로사우르스 등 공룡들이 이리저리 배회한 흔적들이 남아 있는 그 건너편 바위가 선사시대 사람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천전리 각석 川 前 里 刻 石 이다. 천전리 각석은 일명 서석 書 石 이라고도 불리는데,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 바위 표면에 마름모나 동심원 같은 기하학적인 무늬와 사슴과 용 같 은 동물과 물고기 등을 그렸는데 어느 때 누가 그렸는지를 추정하기는 쉽지 않다. 현재 국보 제 147호로 지정되어 있는 천전리 암각화에는 신라 법흥왕 12년(525)년에 사탁부 沙 啄 剖 의 갈문왕이 이곳 에 행차하여 새겼다는 글이 남아 있고, 화랑도들이 다녀간 흔적도 남아 잇다. 그곳에서 대곡천을 따라 2km쯤 내려가 면 만나게 되는 절벽에 신석기 시대 말기를 살았던 우리들의 선조들이 그린 사슴, 멧돼지 같은 육상동물과 고래 그리 고 사람 등 200여점이 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천전리 용화사에 영험한 미륵에 얽힌 이야기가 남아 있다. 언양관아의 남천 南 川 의 앞마을에 미륵 彌 勒 이라는 이름의 석불이 있다. 예로부터 민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 해오고 있다. 옛날에 언양 고을 관리가 군역을 담당할 장정의 징발을 독촉했다. 마을 사람들이 미륵 이라는 이름 으로 부족한 인원을 채워 넣었다. 그런데 군포를 받는 날에 성명을 적지 않은 패를 내어 주었는데, 군포를 징수할 곳 이 없었다. 관리가 그 마을 사람들에게 대신 내라고 요구하자 마을 사람들이 크게 억울해 하며 말하기를, 석불을 부족한 인원에 충당했다가, 가난한 백성들이 피해를 입게 생겼구나. 라고 하였다. 그러자 느닷없이 미륵불의 어깨 위에 몇 필의 무명이 걸려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은 부처가 은밀하게 도와주어 그 같은 일이 생긴 것 이라고 하였다. 양반이라고, 돈이 많다고 이 핑계 저 핑계 다 대고 군대를 가지 않다가 보니 군인은 부족하고 어쩔 수 없이 미륵까지 도 군역에 이름이 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조선 시대였다." 임진년 석탄일에 통도사에서 운문사로 이르는 길을 걷는다, 298

299 (신정일의 신 택리지> 경상도 편에서 자장법사가 창건한 큰 절 통도사 택리지 는 다시 이어진다. 이 절은 경상도 승흥부 順 興 府 지역에 있다. 또한 양산에는 통도사 通 度 寺 그리고 대구 에는 동화사 桐 華 寺 가 있다. 전라도의 영광 靈 光 (지금의 영암을 잘 못 표기함)에 도갑사 道 岬 寺, 해남에 천주사 天 柱 寺, 고산에 대둔사 大 芚 寺, 금구에 금산사 金 山 寺, 순천에 송광사 松 廣 寺, 흥양(지금의 고흥군 흥양읍)에 능가사 楞 迦 寺 가 있 는데, 모두 신라 때의 큰 절이다... 택리지 에 실린 통도사의 기록을 보자. 통도사는 당나라 초기에 자장법사 慈 藏 法 師 가 천축국에 들어가 석가의 두골과 사리를 얻어와서 이 절 뒤에 묻고, 탑 을 만들어 모신 곳이다. 탑을 세운지 세월이 오래되어 탑이 조금 기울어졌다. 숙종 을유년(1705)에 승려 성능 聖 能 이 탑을 중수하기위해 허물었더니 탑 안에 외도 外 道 의 승려 성능이 중수한다. 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두골이 비단 보자기에 싸여 은함에 담겨져 있었는데 그 크기가 동이만 했다. 이미 천여 년이 지난 뒤였으나 비단이 썩지 않고 새 것과 같았다. 또 작은 금함에는 사리를 담아 두었는데, 그 광채가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하였다. 탑을 고친 뒤에, 또 비 각을 세웠는데 비문은 학사 채팽윤 蔡 彭 胤 이 짓고 글씨는 나의 선대부 先 大 夫 께서 쓰셨다. 양산천이 물금읍에서 낙동강으로 접어들고 양산천을 따라간 양산시 하북면 영취산( 靈 鷲 山 일명 취서산 1059m)기슭에 통도사( 通 度 寺 )가 있다. 한편 취서산 기슭에 자리잡은 극락암은 현대의 고승 경봉( 鏡 峰 )스님이 스무 하루 동안 용맹 정진하다가 해탈한 곳이 다. 그는 이곳에서 불경공부에 열중하였는데 어느 날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보아도 반 푼어치의 이익이 없 다. 라는 구절에서 큰 충격을 받은 뒤 그가 깨달음을 얻은 것은 1927년 11월 20일 새벽 방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 을 보고서였다. 그는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70년 가까이 이곳 삼소굴( 三 笑 窟 )에 주석하면서 당시의 선지식이었던 방 한암( 方 漢 巖 ). 김제산( 金 霽 山 ). 백용성( 白 龍 城 )등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불 칼 같은 설법으로 대중들을 깨쳤다. 경봉 스 님이 1982년 7월 2일 입적하면서 남긴 선문답( 禪 問 答 )은 지금도 여러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스님 가시면 보고 싶습니다. 어떤 것이 스님의 참모습입니까? 라고 묻는 시자( 侍 子 )에게 빙그레 웃으며 야반삼 경( 夜 半 三 更 )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 신정일의 <신 택리지> 중 <살고 싶은 곳>에서 택리지 는 다음으로 이어진다. 청도 淸 道 의 운문산 雲 門 山 과 울산 蔚 山 의 원적산 圓 寂 山 은 산봉우리가 서로 이어져 있고, 겹겹으로 되어 있어 골짜기 들이 아주 깊숙하다. 승가 僧 家 에서는 천 명의 성인 聖 人 이 세상에 나올 곳이라고 말하며, 또 병화 兵 火 를 피할 수 있는 복지 福 地 라고 말한다.. 하였는데 원적산은 현재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고연리에 자리 잡은 천성산인데 그 산 기슭 운흥골에 운흥사( 雲 興 寺 )라는 폐사지만 남아 있고 석탑 3개가 남아 그 옛날의 번성했던 시절을 증언해주고 있으 며 그 산 너머 천성산에 비구니 도량인 내연사가 있다. 운문사를 품에 안은 청도의 운문산( 雲 門 山 )은 청도군 운문면과 밀양시 산남면 사이에 자리 잡은 산으로 높이는 1188 임진년 석탄일에 통도사에서 운문사로 이르는 길을 걷는다, 299

300 미터이다. 이 산 밑에 진흥왕21년 신승이 창건한 운문사가 있다. 경남의 석남사와 계룡산 동학사와 더불어 비구니 수 행도량으로 이름이 높은 운문사를 품에 안은 운문산에서 울산시의 가지산으로 이어진 연봉들을 영남알프스 라고 부르고 있다. 이곳 영남알프스는 영남7봉 또는 영남9봉이라고도 하는데, 9봉을 꼽을 때는 운문산 가지산 천황산 재약산 간월산 신불산 취서산에 고헌산과 능동산을 보탠다. 그중 가지산은 1240미터로서 영남9봉 중의 최고봉이다. 가지산은 고헌산(1033m), 운문산이 동서방향으로 한 줄기로 뻗으면서 경상도를 남과 북으로 나누는 경계가 되고 가지산에서 남쪽으로 S자 모양을 그리며 세력을 펼친 것이 능동 산(983m), 천황산, 재약산, 간월산, 신불산, 취서산이다.가지산은 크고 좋은 세 개의 골짜기를 가지고 있는데, 북쪽의 쌍폭으로 해서 그 아래 운문사가 자리하고 있는 운문학심이골, 구연폭포 호박소 백연사 얼음골로 이어지는 남쪽 의 쇠점골, 원시림에 가까운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는 동쪽의 석남골이 그것이다. 이 석남골의 입구에 자리 잡은 절집이 비구니도량인 석남사( 石 南 寺 )이다. 석남사는 신라 헌덕왕16년(824) 도의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온다. 도의선사는 불립문자( 不 立 文 字 ), 교외별전( 敎 外 別 傳 ), 직지인심( 直 指 人 心 ), 견성성불( 見 性 成 佛 )로 대표되는 중국의 선불교, 그중에서도 돌연적인 깨달음을 강조하는 남종선( 南 宗 禪 )을 중국 당나라의 서당지 장( 西 堂 智 藏 )에게서 직접 배워 신라에 처음 소개한 고승이다. 임진년 석탄일에 통도사에서 운문사로 이르는 길을 걷는다, 300

301 정기도보 답사 <관동대로>두 번째 울진군 북면 부구리에서 동해시까지, :26 정기도보 답사 <관동대로>두 번째 울진군 북면 부구리에서 동해시까지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에서 2012년 5월 둘째 주인 11일부터 13일까지 정기기행으로 우리나라 옛길인 <관동대로> 두 번째 구간을 걷습니다. 울진군 북면 부구리에서 동해시까지 이르는 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관동대로중에서도 차마고도처럼 아름다운 갈령재에서 용화리까지 이어지는 길, 바닷길이 아름다운 초곡, 비운의 임금 인 고려 공민왕릉과 삼척의 죽서루, 그리고 동해에 이르는 길이 두 번째 걸어갈 길입니다. 역사와 비경이 만나는 관동대로 길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절터골 마을에서 절터골교를 지나자 오래된 소나무 두 그루 밑에 당집이 있다. 밭을 매는 마을 사람에게 길곡으로 가는 길을 물었더니 능선을 타고 가다 돼지 막사를 만나면 그곳에서 물어보고 내려가면 호산인기라 고 이야기 한 다. 길은 처음부터 가파르다. 울진삼척지구 산불이 일어났을 때 불에 탄 나무들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 길은 능선을 따라 이어진 길은 마치 구령령 옛길이나 대관령 옛길처럼 아름답다. 이리저리 이어지는 산길을, 한참을 오르자 개 짖 는 소리 들리더니 우르르 따라 짖는 소리, 개 한 마리가 헛 짖으면, 뭇 개는 따라 짖는다. 는 옛말이 맞다. 결사적 으로 우리를 향해 짖는 개들, 완전히 개판이다. 하지만 개만 있고 사람은 없다. 그곳에서 산길은 휘돌아가며 마치 차마고도 를 연상시키는 풍경이 나타난다. 나는 일행들을 뒤따라가며 연신 사진을 찍었다. 그곳에서 능선에 오르자 길은 두 갈래 길이다. 인적이 끊어진 길에서 길을 잃으면 길을 물어볼 사람이 없는 것이 언제나 문제다. 지금도 그렇다. 길은 확실하지 않고 표지판도 없으니, 믿 을 것은 지도뿐인데, 지도를 보면 아무래도 바다 쪽보다 산 쪽으로 이어진 길이 맞을 듯 싶어 위쪽으로 오르기 시작 한다. 바다와 산이 만나는 곳, 멀리 바라다보면 수평선 너머 보이는 바다와 하늘에 잇닿은 듯한 산 능선 그런데 길은 자꾸만 바다 쪽에서 멀어져 간다. (...) 소공대비는 조선 초기의 명재상인 황희 黃 熹 에 얽힌 비석이다. 조선 태종 3년인 1403년에 관동지방 關 東 地 方 에 큰 기근 이 들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게 되었다. 그 때 이명덕 李 明 德 이라는 관찰사가 백성들을 잘 보살피지 못하자 황희 가 대신 가서, 백성들을 잘 구호하고, 이 고개 바위 위에서 쉬었다가 갔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던 황희의 현손인 맹헌 孟 獻 이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이곳에 와서 소공대의 사실을 적은 비를 세웠다. 그 비가 현재 <강원도 문화재 제 107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손꼽히는 청백리인 황희에 대한 글이 <해동잡록>에는 이렇 게 실려 있다. 방촌은 타고난 모습이 웅위 雄 僞 하며 침중하고 도량이 있었다. 30년을 정승으로 있으면서 기쁨과 노여운 기색을 표 정에 나타내지 않았다. 종들을 대우하는데 매질을 하지 않아도 일하기를 즐겨하였다. 한 번은 보좌관들과 무슨 일을 정기도보 답사 <관동대로>두 번째 울진군 북면 부구리에서 동해시까지, 301

302 의논하고 막 붓을 적시어 문서를 쓰려는데 어린 종이 그 위에다 오줌을 누었다. 그런데도 공은 성내는 기색이 없이 다만 손으로 닦아낼 뿐이었다. 아이들이 좌우에 몰려들어 울고, 불고 장난치고 깔깔대도 조금도 금하지 않았으며, 혹 은 그의 턱살을 잡아당기기도 하였다. 친족 가운데 고아가 되거나 과부가 되어 빈궁하여 홀로 생존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반드시 재산을 털어 구휼 救 恤 해 주어, 안주 安 住 할 곳이 있게 해주고야 말았다. 대사헌이 도어서도 대체 大 體 를 세워 나가기에 힘쓰고 하나, 하나 까다롭게 굴지 않아도 간악한 자들이 두려워하여 조정의 기강이 진작되고 진숙 되었다. 요즘에 모 재벌그룹의 회장이 자기 아들이 맞았다고 폭력배까지 동원하여 순수 가서 복수를 하기도 하고, 조금만 권 세가 높다 치면 별스런 완장이나 찬 듯이 난리법석을 떠는 풍토에서, 황희 정승 같은 사람이 몹시도 그리운 것은 나 만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소공령을 지나가는 차마고도 비를 세운 그 뒤부터 임원항 서쪽에 있는 이 고개를 소공령 召 公 嶺 고개라고 불렀다. 평해로 유배를 가던 이산해가 지 은 시에는 높고 높은 소공대에서는 멀리 울릉도가 역력히 보였고, 라는 구절이 있는데, 오늘은 날이 맑은데도 울 릉도가 보이지 않는다. 소공대비 앞에 배낭을 벗어놓고 앉아서 바라보자 점심을 먹은 임원항이 한눈에 내려 다 보인 다. 올망졸망한 집들 사이로 사람들의 모습까지는 보이지 않고 임원항으로 들어오는 한 척의 배를 바라다보인다.(...) 그래, 이렇게 높게, 혹은 멀리서 바라보면 세상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개미집처럼 자그마한 집들, 그 보다 조금 큰 건물, 성냥갑만도 못할 것 같은 자동차, 무엇을 생각하는지도 모르게 사는 것 같은 무수한 사람들, 그 런데 신기한 것은 그 속에 포함되어 있으면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니체 역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제 2부 독서와 저술 에서 산에 올라 느낀 심정을 다음과 같이 술회 했다. 그대들은 높은 곳을 갈망할 때 위를 쳐다본다. 그러나 나는 높은 곳에 있으므로 아래를 굽어본다. 그대들 가운데 웃으며 높이 오를 자가 누구인가? 가장 높은 산에 오른 자는 온갖 비극과 비참한 현실을 비웃는다. (...) 구부러지고 휘어지는 길, 이 길을 한번이라도 걸어본 사람들은 이 길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하늘과 산과 바 다가 맞닿은 길, 그래서 내가 즉석에서 한국의 차마고도 라고 명명지은 길, 이 길을 걸어서 삼척으로 평해로 갔던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들이 올올이 남아 바람결에 들려주는 길이 바로 이 길이다. 이렇게 우리나라를 헤집고 돌아다니 다 보면 나라 어디 건 아름답지 않은 곳 없고 살만하지 않은 곳이 없는 것 같다. 그 길을 한참을 내려가자 기적처럼 길곡마을이 나타났고 그 마을에서 장재용옹(70세)에게 지난 옛이야기를 들었다. 벌써 옛날이지요, 어린 시절에 사람들이 말 타고 고개를 넘어 가는 것을 보았어요, 호산장터에서 장을 본 장사꾼들 이 7, 8명씩 떼를 지어 저 길을 오고갔어요, 장사하는 사람들은 돈 모아가지고 소공대 맞은 편 제사 지내는 데에 가 서 장사 잘 되게 해달라고 제사를 지냈어요, 내가 언제까지 사람들이 많이 다녔느냐고 묻자 1930년대 말에서 40 년대 초까지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어요 (...) 정기도보 답사 <관동대로>두 번째 울진군 북면 부구리에서 동해시까지, 302

303 어디 가서 이런 풍경을 만날 수 있을까? 비가 내려서 아무도 찾는 이 없고 오직 우리만이 가을의 절정을 만끽하고 있는 죽서루를 <택리지>를 지은 이중환은 다음과 같이 표현햇다. 삼척 죽서루( 竹 西 樓 )는 오십천( 五 十 川 )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 경치가 비할 데 없이 훌륭하다. 절벽 아래에는 안 보 이는 구멍이 있어, 냇물이 그 위에 이르면 새서 낙수 물처럼 새고, 나머지 물은 누각 앞 석벽을 지나 고을 앞으로 흐 른다. 옛날 뱃놀이하던 사람들이 잘못하여 구멍 속에 들어갔는데, 간 곳을 알지 못한다 한다. 사람들은 고을 터 가 공망혈( 空 亡 穴 :묘 자리나 집터를 잡을 때 피하는 곳 중의 하나)에 위치하였으므로 인재가 나지 않는다 한다. 죽서루는 삼척시 성내동 오십 천변의 깎아지른 절벽위에 세워져 있다. 죽서루는 관동팔경 중 제일 큰 누정이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유일하게 바닷가에 세워지지 않고 내륙 깊숙이 들어 앉아있는 죽서루는 오십천의 풍광이 바닷가 경 치에 못지않게 빼어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고려 충렬왕 때 인접한 천은사에서 제왕운기를 지은 이승휴가 창건하였다고 하지만 그가 두타산에서 숨어 지낼 때 죽서루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창건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고 태종 3년에 삼척부사 김효손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죽서루 동쪽에 있던 죽장사는 조선 태종 3년인 1403년에 지어져 현종 3년인 1662년까지 있었다고 한다. 죽서루(서쪽 에 지은 누대)라는 이름도 이 절 서쪽에 있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하고, 또는 옛날 기생 죽죽선 竹 竹 仙 이 놀던 곳이 라고도 한다. 현존하는 삼장사라는 절은 옛날 죽장사 竹 藏 寺 가 있던 자리에 1925년에 이우영 李 愚 榮 이라는 사람이 새로 지은 절이다. 삼척 죽서루에 걸려있는 관동제일루( 關 東 第 一 樓 ) 라는 대액과 죽서루는 숙종 때의 부사 이성조가 썼고 제일계 정( 第 一 溪 亭 )은 현종3년에 남인의 영수였던 미수 허목의 글씨이며 숙종의 어제시( 御 製 詩 )와 율곡 이이를 비롯한 여러 명사들의 시가 걸려 있다. 이 누각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규모로서 겹치마에 팔작지붕이며 일층에는 길이가 모두 다른 17개의 기둥을 세웠으 며. 그 중 8개는 다듬은 주춧돌 위에 세우고 그 나머지 9개는 자연석위에 세웠다. 본래는 정면 5칸에 측면 2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죽서루는 보물 제213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오십천변 맞은편에서 바라보는 것이 일품이고 특히 가을 단풍에 보이는 죽서루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이렇게 아름다운 죽서루의 풍광을 박종은 동경기행 에서 다 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삼척의 서천 천리 절벽이 맑은 강을 위압하듯 다가섰는데, 그 뒤에 자리 잡은 누각이 죽서 루이다. 죽서루에 올라가 난간에 의지하면 사람은 공중에 떠있고 강물은 아래에 있어 파란 물빛에 사람의 그림자가 거꾸로 잠긴다. 물 속 고기떼는 백으로 천으로 무리무리 오르락내리락 돌아가고 돌아오는 발랄한 재롱을 부린다. 가 까이는 듬성듬성 마을집이 있어 나지막하게 떠 있는 연기가 처마 밖에 감돌며 멀리는 뭇 산이 오라는 듯 가뭇가뭇 어렴풋이 보이니 누대의 풍경이 실로 관동의 으뜸이다. (...) 묵호항이 북평과 합해져 동해시가 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소설가 심상대가 <묵호를 아는가>라는 소설을 통해 묵호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묵호의 묵호항은 지금 비에 젖어 있다. 정기도보 답사 <관동대로>두 번째 울진군 북면 부구리에서 동해시까지, 303

304 내게 있어서 동해바다는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술, 한 잔의 소주를 연상케 했다. 어느 때엔, 유리잔 밖에서 이랑지 어 흘러내리는 소주 특유의 근기를 느껴 매스껍기도 했지만 대체로 그것은 단숨에 들이켜고 싶은 고혹적인 빛깔이었 다. 파르스름한 바다, 그 바다가 있는 곳, 묵호, 그렇다. 묵호는 술과 바람의 도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둘러 독한 술로 몸을 적시고, 방파제 끝에 웅크리고 앉아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토악질을 하고, 그리고 는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부두의 적탄장에서 날아오르는 탄분처럼 휘날려, 어떤 이는 바다로, 어떤 이는 멀고 낮선 고장으로, 그리고 어떤 이는 울렁울렁하고 니글니글한 지구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멀리 무덤 속으로 떠나갔다. 가끔은 돌아온, 이도 있었다. 플라타너스 낙엽을 밟고 서서 시내버스를 기다리다가 문득 무언가 서러움에 복받쳐 오르면, 그 들은 이 도시를 기억해냈다. 바다가 그리워지거나, 흠씬 술이 젖고 싶어지거나 엉엉 울고 싶어지기라도 하면 사람들 은 허둥지둥 이 술과 바람의 도시를 찾아나서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언제니 묵호는 묵호가 아니라 바다는 저고리 옷 가슴을 풀어헤쳐 둥글고 커다란 젖가슴을 꺼내주었다. 그 젖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고 도리질하며 울다가 보면, 바다 는 부드럽게 출렁이는 젖가슴으로 돌아온 탕아의 야윈 볼을 다독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얘야, 어서 떠나 가라, 어서 떠나가라. 얘야, 바다에는 아무것도 없단다. 어서 인간의 바다로 떠나거라, 인간의 바다에 멀기가 있다. 바다와 항구의 쓸쓸한 이미지가 절묘하게 들어 있는 소설의 일부분이다. 고향이란 무엇일까? 고향은 언제나 고향이 지만 그 고향이 가끔씩 차고 넘칠 때가 있다. 그때 고향은 멀게만 느껴지고 그리고 어느 날 그 고향을 낮선 이방인처 럼 찾게 될 때가 있다. 나의 고향이 그럴진대 누구에게든 고향은 그런 애증의 장소가 아닐까? 애정이라는 건 때에 따라 맹목적이고 본능적이어야 해, 그게 더 숭고한 때도 있단 말이야, 문제가 있으면 답이 있 어, 어렵든 쉽든 모든 문제는 답을 가지고 있으니까, 답, 답을 찾아, 답, 그 답이라는 것이 진정 이 지구상에 있는 것일까? 생각하며 부지런히 발길을 옮기고 있는 발한동은 바란이 라고 불렸는데, 바란이 남쪽 묵호항구에 있는 마을이 향로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고 해서 향로봉 香 爐 峯 이다. 온 산천이 녹색의 물결을 이룰 오월의 둘째 주의 관동대로를 걸으며 나를 만나고 자연을 만나고 역사를 만나시기 바 랍니다 정기도보 답사 <관동대로>두 번째 울진군 북면 부구리에서 동해시까지, 304

305 죽령 옛길과 병산서원, 그리고 낙동강 길을 걷는다 :02 죽령 옛길과 병산서원, 그리고 낙동강 길을 걷는다. 오월 첫 주 어린이날을 맞아 경상도 땅으로 갑니다. 죽령 옛길과, 제비원 석불을 지나, 개목사에서 봉정사에 이르는 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그날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병산서원에서 조선시대 유생들이 공부하던 동재 서재에서 하룻밤 묵고, 하회 마을 가는 길을 걷고서 에천의 회룡포 로 향합니다. 아름다운 물길이 휘감아 도는 풍경이 오월의 신록에 환하게 밫닐 것입 니다. 그리고 삼강주막을 지나고 경천대와 낙동나루를 지나서 귀로에 오를 것입니다. 신록의 계절 오월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들과 역사와 국보급 문화유산이 산재한 길을 걷게 될 기행에 참 여 바랍니다. 강물이 휘돌아가는 하회마을 이중환이 하회는 하나의 평평한 언덕이 황강 남쪽에서 서북쪽으로 향하여 있는 마을인데, 서애의 옛 집이 자리 잡 고 있다. 황강 물이 휘돌아 출렁이며 마을 앞에 머무르면서 깊어진다. 수북산( 水 北 山 )은 학가산에서 갈라져 와서 강가 에 자리 잡았는데, 모두 석벽이며 돌 빛이 온화하면서 수려하여 험한 모양이 전혀 없다. 그 위에 옥연정과 작은 암자 가 바위 사이에 점점이 잇달았고, 소나무와 전나무로 덮혀서 참으로 절경이다 고 기록한 하회의 황강은 하회부근을 흐르는 낙동강을 부르는 옛 이름이고 그 일대는 부용대라 칭하는 곳이다. 하회마을은 안동군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지정 민속마을로 중요민속자료 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마을은 조선 전 기 이후의 전통적 한옥들이 조성되어 있고 영남의 명기( 名 基 )라는 풍수적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더불어 역사적으로 는 하회별신굿과 같은 고려시대의 맥을 이은 민간전승 등이 매우 중요한 문화재적 가치를 가져서 그 경관과 함께 정 신문화의 보존 발전이라는 차원에서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라 안에 최고로 살 만한 곳으로 꼽혔던 하회마을은 풍산유씨( 豐 山 柳 氏 )의 동족마을이며, 그 터 전은 낙동강의 넓은 강류가 마을 전체를 동 남 서 방향으로 감싸고 도는 명당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풍수지리상 지형은 산태극수태극( 山 太 極 水 太 極 ) 혹은 연화부수형( 蓮 花 浮 水 形 )이라고 부르는데 풍수가인 류종근씨는 하회마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곳의 주산인 화산( 花 山 )은 멀리 태백산에서 달려온 맥이다. 서쪽으로 뻗어온 산맥이 풍산에 이르러 숨은 듯 일어나 화산을 만들고 그 맥이 다시 서쪽으로 돌아와 평야를 이루었다. 그 형국은 물위에 떠 있는 연화부수형 ( 蓮 花 浮 水 形 )이다. 부용대에서 바라보면 하회마을 뒤쪽에 자리 잡은 남산의 좌우에 벌려선 산봉우리들은 삼천귀 인( 三 千 貴 人 : 유학자들이 쓰던 정자관 모양의 세 봉우리)을 이루어 극귀현덕( 極 貴 賢 德 )을 표상하고 있고 동쪽에 서 흘러온 낙동강물은 하회마을을 감싸고 돌아 서쪽으로 빠져 나가니 이름하여 하회라. 동, 남, 북이 높고 서방 죽령 옛길과 병산서원, 그리고 낙동강 길을 걷는다. 305

306 은 낮은 대신 광활하다. 그러나 이곳에도 원지산( 遠 志 山 )이 문필봉으로 허함을 막고 있으니 그 아니 좋은 곳인 가. 그러나 그는, 마을의 집들이 북향이고 서쪽이 허하므로 큰 부자는 나기 어렵겠지만 낙동강이 지현만곡( 之 玄 彎 曲 )하여 먹고 입는 것은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이고 있다. 풍산유씨가 집단마을을 형성하기 전에는 대체로 허씨( 許 氏 ) 안씨( 安 氏 ) 등이 유력한 씨족으로 살아왔을 것으로 추정 된다. 1635년(인조 13)의 동원록( 洞 員 錄 ) 에도 삼성( 三 姓 )이 들어 있기는 하나 이미 유씨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 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그 이전에 유씨들의 기반이 성립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오늘날과 같은 유씨의 동족 기반은 중흥조 유운룡 유성룡 형제 시대에 이룩된 것이다. 유운룡은 시조에서 풍산유씨 14대의 종손이며 유성룡은 지손인데 모두 문중의 거봉이어서 이 두 계손들을 겸암파와 서애파로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이 마을에서 유서 깊고 규모가 갖추어진 가옥으로서 보물 또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 된 가옥들은 모두 풍산유씨의 소유인데, 특히 그 중에서도 유운룡과 유성룡의 유적이 중추를 이루고 있어 유씨 동족 마을의 형성시기와 역사적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마을을 감싸고도는 화천( 花 川 )은 낙동강 상류이며 그 주변에는 퇴적된 넓은 모래밭이 펼쳐져 있고, 그 서북쪽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들어서 있어 경관이 아름답다. 하회별신굿과 강상유화 백사장이 펼쳐진 강 건너에는 층암절벽이 펼쳐지고 그 위에 여러 누정이 자리 잡고 있어 승경( 勝 景 )으로서의 면모도 잘 갖추고 있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부용대( 芙 蓉 臺 ) 절벽과 옥연정( 玉 淵 亭 ), 화천서당이 그리고 서북쪽에서 강물이 돌 아나가는 부근에는 겸암정( 謙 菴 亭 )과 상봉정( 翔 鳳 亭 )이 있다. 이곳 하회 부근에서 낙동강의 최대 너비는 대략 300m이 며 최대수심은 5m에 이른다. 강 건너 인근과의 교통수단은 나룻배였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관광객들을 위해서 나룻배를 운행하면 좋지 않겠느냐고 필자가 의견을 구하자, 하회 주민들의 말은 안동시에서 검토 하고 있지만 사고를 염려해 기관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데 과연 그런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와서 뱃사공 노릇을 하겠느냐? 고 배를 띄우지 못함을 아쉬워했는데 여러 사람들의 진정에 의해서인지 2004년 여름에 다 시 가보자 부용대로 오고 가는 배가 매어 있었다.(신정일의 신 택리지) 서원은 본래 선현을 제사하고 지방 유생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거나 후진들을 가르치던 곳이 있으나 갈수록 향촌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사림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사림들은 서원을 중심으로 그들의 결속을 다졌고 세력을 키운 뒤 중앙 정계로 진출할 기반을 다졌던 곳이다.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있는 병산서원은 1613년에 정경세( 鄭 經 世 ) 등 지방유림의 공의로 유성룡( 柳 成 龍 )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 尊 德 祠 )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면서 설립되었다. 본래 이 서원의 전신은 고려 말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 豐 岳 書 堂 )으로 풍산 유씨( 柳 氏 )의 교육기관이었는데, 1572년(선조 5)에 유성룡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1629년에 유진( 柳 袗 )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863년(철종 14) 병산 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 되었다. 성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시 훼 철되지 않고 보존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존덕사 입교당( 立 敎 堂 ) 신문( 神 門 ) 전사청( 典 祀 廳 ) 장판각( 藏 板 閣 ) 동재( 東 齋 ) 서재( 西 齋 ) 만대루( 對 樓 ) 복례문( 復 禮 門 ) 고직사( 庫 直 舍 ) 등이 있다. 묘우( 廟 宇 )인 존덕사에는 유성룡을 주벽( 主 壁 )으로 유진의 위패가 배향되어 있다. 존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 층 맞배기와집에 처마는 겹처마이며, 특히 기단 앞 양측에는 8각 석주 위에 반원구의 돌을 얹어 놓은 대석( 臺 石 )이 있는데 이는 자정에 제사를 지낼 때 관솔불을 켜놓는 자리라 한다. 강당인 입교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죽령 옛길과 병산서원, 그리고 낙동강 길을 걷는다. 306

307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입교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팔 작기와집에 겹처마로 되어 있으며, 가구( 架 構 )는 5량( 樑 )이다. 신문은 향사시 제관( 祭 官 )의 출입문으로 사용되며, 전사 청은 향사시 제수를 장만하여 두는 곳이다. 장판각은 민도리집 계통으로 되어 있으며, 책판 및 유물을 보관하는 곳이 다. 각각 정면 4칸, 측면 1칸반의 민도리집으로 된 동재와 서재는 유생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문루( 門 樓 )인 만대루는 향사나 서원의 행사시에 고자( 庫 子 )가 개좌와 파좌를 외는 곳으로 사용되며 정면 7칸, 측면 2 칸의 2층팔작기와집에 처마는 홑처마로 되어 있다. 그밖에 만대루와 복례문 사이에는 물길을 끌어 만든 천원지방( 天 圓 地 方 ) 형태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중정( 中 丁 : 두 번째 中 日 )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 고 있으며, 제품( 祭 品 )은 4변( ) 4두( 豆 )이다. 현재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성룡의 문집을 비롯하여 각종 문헌 1,000여종, 3,000여책이 소장되어 있다. 도처에서 서원을 건립했던 영남학파 거봉 퇴계 이황은 서원은 성균관이나 향교와 달리 산천 경계가 수려하고 한적 한 곳에 있어 환경의 유독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만큼 교육적 성과가 크다 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모든 서원은 경치가 좋거나 한적한 곳에 자리잡았는데, 병산서원만큼 그 말에 합당한 서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유홍준 선생은 병산서원을 두고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제 병산서원은 우리 나라 내로라 하는 다른 서원과 비교해보면,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은 그 구조가 복잡하여 명쾌 하지 못하며 회재 이언적( 李 彦 迪 )의 안강 옥산서원은 계류에 앉은 자리는 빼어나나 서원의 터가 좁아 공간 운영에 활 기가 없고, 남명 조식의 덕천서원은 지리산 덕천강의 깊고 호쾌한 기상이 서렸지만 건물 배치 간격이 넓어 허전한 데 가 있으며, 환훤당 김굉필의 현풍 도동서원은 공간배치와 스케일은 탁월하나 누마루의 건축적 운용이 병산서원에 미 치지 못한다는 흠이 있다. 이에 비하여 병산서원은 주변의 경관과 건물이 만대루를 통하여 혼현히 하나가되는 조화와 통일이 구현된 것이니, 이 모든 점을 감안하여, 병산서원이 한국 서원 건축의 최고봉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신 정일의 낙동강> 내성천과 금천이 합쳐지는 곳 삼강리( 三 江 里 )는 본래 용궁군 남산면( 南 上 面 )의 지역으로서 낙동강, 내성천, 금천( 錦 川 )의 세 강이 마을 앞에서 몸을 섞기 때문에 삼강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삼강리라 하여 예천군 풍양면에 편입되었다. 물맛이 좋기로 소문난 예천의 물줄기는 모두 한 곳에서 만난다. 안동댐에서 흘러내린 낙동강의 큰 흐름이 태백산 자 락에서 발원한 내성천과 충청북도 죽월산에서 시작하는 금천을 이곳 풍양면 삼강리에서 만나는 것이다. 내성천( 乃 城 川 )은 봉화군 물야면 북쪽 선달산( 先 達 山 )과 옥석산( 玉 石 山 )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봉화면 포저리에 이르러 서쪽으로 꺾이어 흐른다. 봉화읍 도촌리에 이르러 부석사가 자리잡은 봉화산 자락에서 발원한 낙화암천 또는 화암천( 花 岩 川 )을 합하여 다시 남쪽으로 접어들고 이산면과 상운면을 지나 평은면 천본리에 이르러 동쪽에서 오는 용 각천( 龍 角 川 )을 합하게 된다. 평은면 금광리에 이르러 서쪽으로 구비도는 내성천은 여러 굽이를 이루고, 북서쪽으로 흘러 문수면 월호리에 이른 뒤 북쪽에서 오는 서천( 西 川 )을 합하게 된다. 남서쪽으로 흐른 내성천은 안동군 북후면의 경계를 돌아 예천군 보문면 옥천동에 이르러 북쪽에서 오는 옥계천( 玉 溪 川 )을 합하여 남서로 흐르고 보문면과 호명면 의 경계를 이루고 호명면 오천동에 이르러 서쪽으로 꺾여서 원곡동 서울나드리에서 북쪽에서 오는 한천( 漢 川 )을 합하 게 된다. 내성천은 다시 서남으로 흘러서 개포면과 지보면의 경계를 이루고 용궁면을 거쳐 문경군 영순면 달지리에 죽령 옛길과 병산서원, 그리고 낙동강 길을 걷는다. 307

308 이르고 북서쪽에서 오는 금천( 錦 川 )을 합해 가지고, 남쪽에서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한 배 타고 세 물을 건넌 다. 는 말이 있는 삼강리는 경상남도에서 낙동강을 타고 오른 길손이 북행하는 길에 상주 쪽으로 건너던 큰 길목이 었다. 또 삼강리는 낙동강 하류에서 거두어들인 온갖 공물과 화물이 배에 실려올라와 바리짐으로 바뀌고 다시 노새의 등이나 수레에 실려 문경새재를 넘어갔던 물길의 종착역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낙동강 줄기를 따라 더 올라가면 안동 지방과 강원도 내륙으로 연결된다. 원래 오백 미터가 넘었다던 삼강리의 강폭은 안동댐이 건설된 뒤부터 그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수량이 줄자 여름철의 별미였고 오뉴월이면 오이 냄새가 나던 은어가 사라졌고, 그냥 마셔도 되던 맑은 강물이 오염되어 멀리 나가 식수를 구해야 하게 되었다 죽령 옛길과 병산서원, 그리고 낙동강 길을 걷는다. 308

309 합천 해인사 천년길과 청량사 길을 걷는다 :00 합천 해인사 천년길과 청량사 길을 걷는다. 사월 넷째 주인 27일에서 29일까지의 여정을 청송과 영양에의 '외씨 버선길'에서 삼보사찰과 소나무 숲으로 이름난 경 남 합천군 해인사 일대로 옮깁니다. 합천 해인사의 천년 옛길과 매화산 자락의 청량사, 그리고 들목의 월광사와 최치원의 자취가 서린 홍유동 계곡을 걷 게 될 이번 도보답사에 많은 참여 바랍니다. 택리지 에 임진왜란 당시에 금강산 지리산 속리산 덕유산은 모두 왜군이 들어오는 화를 면치 못하였 으나, 오직 오대산과 소백산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부터 삼재 三 災 가 들지 않는 곳이라 한다.. 라고 기록되 어 있는 가야산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을 중심으로 거창군과 경상북도의 성주군과 고령군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주봉인 상왕봉(1,430m), 두리봉(1,133m), 남산(1,113m), 단지봉(1,028m), 남산제1봉(1,010m), 매화산(954m) 등 1,000m 내외의 연봉과 능선이 둘러 있고, 그 복판에 우리나라 3대사찰 가운데 하나인 해인사와 매화산 자락에 청량사 및 그 부속암자들이 자리 잡고 있다. 가야산 일대에서 해인사에 있는 치인리 골짜기에 모이는 물은 급경사의 홍류동 계곡을 이루고, 동남방을 흘러내려와 가야면 황산리에서 낙동강의 작은 지류인 가야천이 된다. 가야산은 예로부터 조선팔경 또는 12대명산 의 하나 로 꼽혀왔다. 1966년 가야산 해인사 일원이 사적 및 명승 제5호로 지정되고 1972년 10월에 다시 가야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가야산의 이름은 가야산 이외에도 우두산 설산 삼왕산 중향산 지달산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한다. 택리지 에 가야산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떠나 있으면서도 그 높고 수려함과 삼재가 들지 않는 영험함을 말하여 명산으로 불렸다. 한국의 명산에는 산신( 山 神 )이 있는데, 가야산에 있는 가야산신은 정견모주( 正 見 母 主 )라는 여신이다. 동국여지승 람 의 기록에 의하면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천신 이비가지에 감응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과 금관국의 왕 뇌질청에를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대가야의 시조 아진아시왕, 뇌질청에는 금관국의 시조 수로왕의 별칭이라 했다. 따라서 가야산 의 산신 정견모주는 가야지역의 여신이었을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가야산 형승은 천하에 뛰어나고 지덕은 해동에 짝이 없으니 참으로 수도할 곳이다. 라고 실려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큰 절이 그렇지만, 특히 해인사는 창건과 그 뒤 여러 차례의 중창이 있었는데 모두 국 가의 각별한 지원에 힘입어 이루어졌다. 신라 애장왕이 그러했고, 고려 태조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발원, 그리고 세종 세조 성종의 중창 지원은 각별한 것이었는데, 그렇게 국가의 재정을 넉넉히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 엇보다도 해인사가 민족의 고귀한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판을 천여 년 가까이 보전함으로써, 법보종찰의 명성을 누 합천 해인사 천년길과 청량사 길을 걷는다. 309

310 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야산 해인사는 또 국가가 환란에 처했을 때 일어난 불교 호국전통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불가사의하게도 민족의 보물인 고려팔만대장경판과 이를 봉안한 장경각만은 한번도 화를 입지 않고 옛 모습 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산속에는 해인사 海 印 寺 가 있다. 신라 애장왕 哀 莊 王 이 죽어서 염을 한 뒤에, 다시 깨어나니 명부의 관원에게 약속한 발원에 따라,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팔만대장경 八 萬 大 藏 經 을 구입해서 배에 싣고 왔다. 목판에다 새긴 뒤 옻칠을 하고 구리와 주석으로 장식한 다음, 장경각 藏 經 閣 을 120칸을 지어서 보관하였다. 지금 일천여 년이 되었지만 판이 새 로 새긴 것 같다. 날아가는 새도 이 장경각을 피해서 기와지붕에 앉지 않는다고 하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유가 儒 家 의 경전은 비록 내부의 깊은 궐내에 있다고 하여도 날아가는 새가 집 위를 지나가지 않을 리가 만무하다. 불교 경 전은 이와 같이 신기하니,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해인사 서북쪽이 가야산 상봉이다. 사면의 돌이 깎아지른 듯 하여 사람이 올라갈 수 없다. 산 위에는 평탄한 곳이 있 을 것 같지만 알 수가 없다. 그 위에는 항상 구름기가 자욱하게 서려 있으며, 초동과 목동들은 가끔씩 산봉우리 위에 서 풍악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또한 절에 있는 스님들의 말에 의하면 짙은 안개가 덮이면 산 위에서 말 발자국 소리 가 날 때가 있다고 한다.. 고 말한다. 이는 <택리지>의 기록이다. 조선중기의 학자였던 한강 정구( 鄭 逑 )는 가야산 기행 에서 산꼭대기에 올라가 눈을 식히고 가슴을 펴보는 것 을 강조하였고, 산골짜기에서 푸른 물이 맑은 소리를 내면서 흘러가는 소슬한 경치를 보고 가슴을 시원하게 씻 겨준다. 고 느낌을 표현했다. 팔만대장경( 八 萬 大 藏 經 )을 간직하고 있는 해인사는 통도사, 송광사와 함께 삼보사찰 중의 하나이다. 삼국유 사 에 기록된 대로 통도사에는 석가모니의 사리가 모셔져 있고, 해인사에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총화라고 할 수 있 는 팔만대장경이 봉인되어 있으며, 송광사에서는 고려 이래로 국사를 지낸 열여섯 명의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그런 연유로 세 절을 각각 불보( 佛 寶 ) 법보( 法 寶 ) 승보( 僧 寶 ) 사찰로 꼽는데, 법보사찰인 해인사가 창건된 것은 신 라 애장왕3년(802)이었다. 고운 최치원은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 新 羅 伽 倻 山 海 印 寺 善 安 住 院 壁 記 ) 에서 해인 사의 창건과정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조사인 순응대덕은 신림대사에게서 공부하였고, 대력(766~779) 초년에 중국에 건너갔다. 마른나무 쪽에 의지하여 몸을 잊고 고승이 거처하는 산을 찾아가서 도를 얻었으며, 교학을 탐구하고 선의 세계에 깊이 들어갔다. 본국으로 돌 아오자 영광스럽게도 나라에서 선발함을 받았다. 정원18년(802) 10월 16일에 동지들을 데리고 이곳에 절을 세웠다. 이때 성목왕 태후께서 천하에 국모로 계시면서 불교도들을 아들처럼 양육하시다가 이 소문을 듣고 공경하며 기뻐 하시어 날짜를 정하여 귀의하시고 좋은 음식과 예물을 내리셨다. 이것은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이지만 사실은 땅에 의하여 인연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안개처럼 문으로 모여들 때 스님은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하여 이정선백( 利 貞 禪 伯 )이 뒤를 이어 공적을 세웠다. 중용의 도리를 행하여 집을 잘 다스렸고, 주역 대장의 방침을 취하여 건물을 새롭게 하니 구름이 솟아오르듯 노을이 퍼지듯 날마다 새롭고 달마다 좋아졌다. 이에 가야산의 빼어난 경치는 도를 성취하는 터전에 알맞게 되었으며, 해인사의 귀한 보배는 더욱 큰 값어치를 지니게 되었다. 순응스님은 이 절을 세운 뒤 그의 증조스님인 의상의 화엄종지( 華 嚴 宗 旨 )에 따라서 해인사라고 지었는데, 해인( 海 印 ) 은 세계 일체가 바다에 그림자로 찍히는 삼매 를 말하는 불교의 화엄정신을 나타낸다. 화엄종의 근본경전인 화엄 경 곧 대방광불화엄경( 大 方 廣 佛 華 嚴 經 ) 에 나오는 해인삼매( 海 印 三 昧 ) 라는 말로, 이 화엄경의 세계관은 일심 법계( 一 心 法 界 )라고 할 수 있다. 온갖 것에 물들지 않은 진실과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가 일심법계인데, 일심법계 합천 해인사 천년길과 청량사 길을 걷는다. 310

311 에는 물질적 유기세계, 중생들의 세계, 바른 깨달음에 의한 지혜의 세계가 있는 그대로 다 나타난다. 세차게 불던 바 람에 드높던 파도가 어느새 그치고 바다가 고요해지면 거기에 우주의 수만 가지 모습이 남김없이 드러나는 것, 이러 한 경지를 해인삼매라고 한다. 해인삼매는 부처가 이룩한 깨달음의 내용이며, 일체의 것들이 돌아가야 하는 근원이 며, 본래의 모습이다. 해인사 라는 절 이름은 바로 이러한 뜻을 지니고 있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우리 산하 편에서) 합천 해인사 천년길과 청량사 길을 걷는다. 311

312 최시형 선생의 묘소를 찾아가다 :52 최시형 선생의 묘소를 찾아가다. 4월 초 여드레는 아름다운 사람 예수가 부활 했다는 날이다. 그날, 박동규. 신우선 도반, 그리고 김 경자 웅청예술치유박물관 관장님과 함께 내가 찾아간 곳은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의 동학의 2대 교주 인 해월 최시형 崔 時 亨 선생 묘소였다. 1898년 6월 5일 광희문에서 처형당한 뒤 신도들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져 잠들고 있는 최시형 선생의 묘소를 찾아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가도 가도 끝나지 않는 골짜기 사이를 헤집고 흐르는 시냇물소리, 그 소리가 잦아들 무렵 나타나던 광금사 표지판, 그곳에서도 해월 묘소는 2km가 남았다는데 가던 날이 장날이라 절에는 사람이 없고, 쇠줄과 함께 열쇠가 굳게 잠겨 있었다. 나오다 다시 돌아가 휘여 휘여 올라간 산, 박동규 선생의 이마에 땀이 송알송알 맺힐 무렵 도착한 산 정상부근에 해월 선생의 묘소가 있었다. 해월 선생의 유적지를 여러 곳 다녔지만 묘소는 처음이다. 엎드려 절을 드린다. 너무 늦게 찾아왔 습니다. 하고 절을 하면서 혈육보다 더 진한 울림이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해월선생에 대한 연민 과 미안감 때문이리라. 정성스레 절을 올리고, 먼 데 산들을 바라다본다. 마치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묘 소와 같이 멀리 퍼져나간 산들이 휘파람 불며 돌아오는 것 같다. 이 땅의 사람과 자연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해월 선생은 여러 어록을 남겼다. 성한 것이 오래면 쇠하고 쇠한 것이 오래면 성하고, 밝은 것이 오래면 어둡고 어두운 것이 오래면 밝나니, 성쇠명암은 천도의 운이요, 흉한 뒤에는 망하고 망한 뒤에는 흥하고, 길한 뒤에는 흉하고, 흉한 뒤에는 길하나니 흥망길흉은 천도 天 道 의 운이니라. <개벽운수>에 실린 글이다. 1897년 4월 5일에 해월 선생은 경기도 이천군 앵산동 마을에서 향아설위 向 我 設 位 를 가르친다. 향아설위란 제사를 지낼 때 위패와 밥그릇을 벽 쪽에 갖다 놓았던 이제까지의 고금동서의 일관된 제 사 양식인 향벽설위 向 壁 設 位 를 바꾸어 제사지내는 법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 즉 자기 앞에 위 패를 갖다 놓고 제사를 지내는 혁명적 제사를 일컫는다. 최시형 선생의 묘소를 찾아가다. 312

313 물론 부모의 귀신이 자손에게 전하여 왔으며 선생님의 귀신이 제자들에게 내려 왔을 것으로 믿는 것은 이치에 합당하다. 그러면 내 부모를 위하거나 선생님을 위하여 제사를 지낼 때, 그 위패를 반드 시 그 제사를 지내는 나를 향해서 놓는 것이 가한 일이 아니냐.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또 누가 생각 한다 하더라도 죽은 뒤에 귀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 귀신은 훗날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버리고, 어디에 의지하고 어디에서 배회하겠는가? 그러므로 제사 지내는 나, 즉 상제 앞으로 위패나 메밥 그릇을 돌려 갔다 놓는 것은, 바로 직접적으로 한울님과 사람이 하나라는 위치를 표시하는 것 이며 천지만물이 내 몸에 갖추어져 있는 그 이치를 밝히는 것이다. 그 밤을 지내고 해월 최시형은 손병희에게 향아설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어제 밤에 앞으로 오만 년을 바꾸지 못할 법을 새로 만들었다. 동학은 '향벽설위'를 '향아설 위' 로 물이 흔한 앵산에서 해월 최시형 선생이 처음 발표했다. 해월 선생은 형식에 치우친 겉치레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맑은 물 한 그릇으로 모든 의식을 치루기를 권고했다. 이제부터는 일체 의식에 청수 淸 水 한 그릇만 사용하라. 물은 그 성질이 맑고 움직이는 것이며, 또 어느 곳에나 있지 않은 곳이 없는지라 참으로 만물의 근원이라 이를 것이니 내 이로서 의식의 표준 물로 정하노라. <천도교서 天 道 敎 書 > 사람 안에 하늘이 깃들어 있다. 고 말한 해월은 하늘과 사람을 같은 것이라고 보았으며 하느님의 영기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보았다. 우리 사람이 태어난 것은 하느님의 영기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요, 우리 사람이 사는 것도 하느님 의 영기를 모시고 사는 것이니, 어찌 반드시 사람만이 홀로 하늘을 모셨다 이르리오. 천지만물이 다 하느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저 새소리도 또한 시천주의 소리니라. <천도교 백년약사> 최시형은 하늘, 즉 도 道 를 아는 것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밥 한 그릇을 먹는데 있다. 萬 事 知 는 食 一 碗 이니라 고 하였다. 그것은 이치는 하나로서 만물의 본성이며,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그것을 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아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은 하늘을 떠날 수 없고, 하늘은 사람을 떠날 수 없나니, 그러므로 사람의 한 호흡, 한 동정, 한 의식도 서로 화하는 기틀이니 잠깐이라도 멀어지지 못한다. 이 생각 저 생각 하면서 둘러보는 해월 선생의 묘소 뒤편에 진달래꽃 무리들이 무수히 꽃망울을 머 금고 있었다. 봄이면 봄마다 진달래꽃이 피어나면 이 묘역에 정지상 鄭 知 常 의 <두견화 杜 鵑 花 >시 한 편이 바람결에 흐르지 않을까? 최시형 선생의 묘소를 찾아가다. 313

314 두견화 우는 소리 애끓으니 산대나무 찢어지고 통곡하여 흘린 피로 들꽃이 붉더라. ( 聲 催 山 中 裂 血 染 野 花 紅 ) 임진년 사월 초아흐레 최시형 선생의 묘소를 찾아가다. 314

315 불꺼진 방 - 바다가 육지라면 (안면도가 육지라면) :09 대간방 다시 불도 꺼지고, 심심하기도 하고, 그래서 이번에는 안면도 퀴즈를 풀까 합니다. 안면도가 섬일까요? 육지일까요? 안면도 하면 2007년 12월 기름유출 사고로 온 국민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기억과 다음날 바로 달려가 봉사활동을 하면서 생생하게 경험했던 현장은 말 그대로 검은 세상과 역겨운 냄새. 그리고 1주일 후 다시 가본 안면도는 어느정도 백사장의 모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트랙터로 갈아주면 다시 속 에서 나오는 기름을 걷어내고... 세계 꽃박람회와 꽃지해수욕장, 그리고 왕실의 숲 으로 가꾸어지던 소나무 숲으로 알려져 있는 안면도 안면도가 섬이 아니었다?????? 安 眠 島 (안면도) 분명 섬도( 島 )를 쓰는데...조수가 편안히 노워 쉴 수 있다는 의미의 섬... 누구나 한두번 가봤을 안면도가 섬인지 육지인지 맞춰보세요... 신정일의 <신 택리지. 충청도> 편에서 황해를 향하여 삿대질을 하려고 내닫고 있는 형국이라는 태안반도에 자리 잡은 태안군을 신숙주는 비옥한 지 대로 통칭한다 고 하였고, 남수문( 南 秀 文 )은 기문( 記 文 )에서 태안군은 옛날 신라의 소태현( 蘇 泰 縣 )이었다.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을 재배하기에 알맞고, 또 어물과 소금을 생산하는 이익이 있어 백성들이 모두 즐겨 이 땅에 살 아왔다. 그러나 이 고을의 읍내가 멀리 바닷가에 위치해 있으니 이는 곧 해상의 구적( 寇 賊 )들이 왕래 출몰하는 요충( 要 衝 ) 이라고 하였다. 태안군은 백화산 자락에 위치한 태안읍을 중심으로 서해안을 따라 안면도로 이어져 있다. 그렇게 된 연유가 동국여지승람( 東 國 與 地 勝 覽 ) 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고려 인종이, 안흥정( 安 興 亭 ) 아래의 물길이 여러 물과 충격하는 곳이 되어 있고 또 암석의 위험한 곳이 있으므로 가끔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있으니, 소태현 경계로부터 도랑을 파서 이를 통하게 하면 배가 다니는 데에 장애가 없을 것이다 하여, 정습명( 鄭 襲 明 )을 보내어 인근 군읍 사람 수천 명을 징발하여 팠으나, 마침내 이루지 못하고 말았는데 본조( 本 朝 ) 세조 때에 건의하는 자가 혹은 팔 만하다 하고 혹은 팔 수 없다 하여 세조가 안철손( 安 哲 孫 )을 보내어 시 불꺼진 방 - 바다가 육지라면 (안면도가 육지라면) - 315

316 험하였던바, 공을 이룰 수 없다 하여 대신에게 제하여 자세히 살피게 하였으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서 중지하고 말 았다. 그 뒤 조선 인조 때인 1638년에 삼남지역의 세곡을 실어 나르는 것이 불편하자 충청감사 김유 金 庾 가 지금의 남면과 안면도 사이의 바닷길을 파서 안면도는 섬이 되었다. 섬이 되면서 안면도를 싸고도는 뱃길보다 약 200여리가 단축되었고, 이것이 우리나라 운하의 효시가 되었으며 이름을 백사수도 白 沙 水 道 라고 불렀다. 그 러나 세월의 흐름 속에서 1970년에 나라 안에서 세 번째로 섬과 육지를 잇는 연륙교( 連 陸 橋 )가 생기면서 배를 타지 않고도 육지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어떻게 수로를 팔 수 있었는지...우리 조상님들의 위대한 힘이 느꺼집니다. 불꺼진 대간방 다시 한번 불을 밝혔습니다. 불꺼진 방 - 바다가 육지라면 (안면도가 육지라면) - 316

317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은 섬들이 있어 :52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은 섬들이 있어 4월 셋째주 토요일 하루 기행으로 서해바다에 자리 잡은 대부도, 선재도. 영흥도를 갑니다. 대부도에서 서쪽으로 물길을 30리쯤 가면 연흥도( 燕 興 島 )가 있다. 는 옛 기록과 달리 지금은 이름조차 영흥도로 바뀌고 대부도에서 영흥도를 잇는 영흥대교가 건설된 뒤 섬 아닌 섬이 된 이 섬에 고려 말년에 고려의 종실( 宗 室 )이 었던 익령군( 翼 靈 君 ) 기( 琦 )의 자취가 남아 있다. 그는 고려가 장차 망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이름을 바꾸고 온 가족과 함께 바다를 건너 이 섬으로 숨어들었다. 그래서 고려가 망한 뒤 대다수의 왕씨들처럼 물에 빠져 죽임을 당하 는 화를 면하였고, 자손은 그대로 이 섬에 살았다. 이중환이 살았던 시대에는 그들의 신분마저 낮아져서 말을 지키는 목동이 되었다고 한다. <택리지>에는 그 때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익령군이 머물던 세 칸짜리 집은 지금까지 굳게 잠겨 져 있 어, 누구도 들어가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방안에는 서책과 기명( 器 皿 )을 쌓아 두었으나 어떤 물건인지 알지 못 한다. 예전에 한 관리가 바람 쐬러 섬에 왔다가 잠깐 문을 열어보고자 하였다. 그러자 목장의 말을 치던 여러 남녀가 애걸하면서 이렇게 호소하였다. 이 문을 열면 번번이 자손 중에 누군가 죽게 되는 변고가 일어났습니다. 그 까닭에 서로 경계하여 열어보지 못한 지가 삼백 년이나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관리는 문을 여는 것을 중지하였다. 고려장이 있었다는 고려장골, 망을 보았다는 망째산, 비아목 옆에 있는 골짜기로 기생들이 살았다는 애기 터 내동 북 쪽에 있는 부리로 배를 댔다는 선창부리는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다. 구름말에서 내리의 붉은 노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붉은 노리 고개이고, 큰 골에서 용다미로 넘어가는 고개는 달맞이가 좋다고 해서 달맞이 고 개이다. 붉은 노리마을, 비눌꾸미 부리, 작은 버더니마을 이렇게 아름다운 이름들이 언제까지 사람들의 입으로 회자 될 수 있을까? 아름다운 서어나무 군락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모래사장을 십리 길을 오고 갔으니, 이십 리 길이고 이 십 리 길을 걸은 여정으로 피로한 사람들이 황경화 선생이 쏜 바지락 칼국수로 마음까지 넉넉해져 다시 찾아간 곳이 장경리 해수욕장이다. 이곳 바다를 이 지역 사람들은 수해 水 海 바다라고 부르는데, 십리포해수욕장과 달리 을사년스럽 다. 해수욕장에는 배한 척 매여 있고 그곳에서 멀리 보이는 섬들이 영종도이다. 고려사 지리지( 高 麗 史 地 理 誌 ) 나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과 같은 지리지에는 영종 도가 자연도라고 나와 있다. 이 섬은 고려시대에는 송나라와 문화교류를 하였던 명주 항로의 거점이었다. 명주 항로 는 예성강의 포구에서 영종도를 거쳐 고군산도와 흑산도를 거쳐 중국의 명주에 이르는 뱃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영 종도에는 현재 국제공항이 만들어져 세계교역의 중심공항이 되고 있다. 한편 동국여지승람 의 기록에 의하면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은 섬들이 있어 317

318 백령도나 대청도 등 서해지방의 섬은 원나라에서까지 그 나라 사람들을 귀양 보냈던 귀양지라고 한다. 멀리 펼쳐진 영종도를 비롯한 서해 바다에서 눈길을 거두어 영흥대교를 건너 선재도로 향한다. 선녀가 내려와 놀던 선재도와 실미도 원래 남양도호부 영흥면 지역이던 선재도 仙 才 島 는 선녀가 내려와 놀던 곳이라 하여 선재도라 하였는데 안도 호도 칙 도 주도등을 합하여 선재리라고 하였다. 선재도 동남쪽에는 구름물(구름말)이라는 마을이 있고, 대장곶이 동쪽에는 둥그렇게 생겼다 해서 두루섬이라는 이름이 붙은 작은 바위섬이 있다. 선재항은 작은 나폴리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 선재대교를 건너면 대부도에 이른다. 택리지 에 육지가 끝나는 바닷가에 화량포 첨사( 僉 使 )의 진( 鎭 )이 있고, 진에서 바닷길을 10리쯤 건너가면 대 부도가 나온다 고 기록된 대부도는 썰물 때는 바닷길이 열려 서울 근교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인데, 이 섬은 황금산 기슭에 펼쳐져 있으며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 에는 대부도 부근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그곳은 모두 어민이 사는 곳이다. 그러므로 남양지방의 서쪽 마을이 한강 남쪽의 생선과 소금의 이익을 독차지하게 된다. 대부도는 화량진에서 움푹 꺼진 돌맥이 바닷속을 꼬불꼬불 지나가서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닷물이 매우 얕다. 옛날에 학이 물 속에 있는 돌줄기 위를 따라 걸어가는 것을 보고 섬사람이 따라가서 그 길을 발견하게 되어, 그 길을 학지( 鶴 指 )라고 부르게 되었다. (...) 대부도 옆의 풍도는 1984년 6월에 청군과 일본군의 결전장이었다. 이곳에서 밀린 청군이 아산만으로 달아났다가 성환 에서 크게 패했는데, 그 전쟁을 청일전쟁이라고 부른다. 한편 대부도 건너편에 있는 송산면 고포리의 마산포는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장수 원세개( 袁 世 凱 )가 청군을 이끌고 상륙한 곳이다. 청군은 마산포에 상륙한 뒤 대원군을 붙잡아 청국으로 데려갔고, 그때 청국의 군함은 대부도 남쪽, 즉 불도 바깥 해변에 정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택리지>에 지세는 좌우로 개와 항구를 끼고서 바로 바 다로 들어갔고, 수백 호나 되는 소금 굽는 집이 남쪽과 북쪽 바닷가에 별처럼 깔려 있었다. 고 기록되어 있지만, 지 금은 반월공단이 조성되어 바다에 의지하는 것은 그만큼 줄어들게 되었다. 가을 햇볕은 날이 갈수록 짧다. 어둑어둑 어둠이 내린 대부도에서 오늘 하루 일정의 마무리를 한다. 인생의 한평생 무엇과 같은고? 그것은 바로 눈 내린 진흙 위를 밟고 지나간 기러기와 같은 것, 진흙 위에 우연히 발톱자국 남기고, 기러기는 날아갔으니 동서 東 西 어디론지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노승은 이미 죽어 새 탑이 되고 허물어진 벽에는 우리가 썼던 시 찾아볼 수 없네. 지난날의 험했던 여행길, 그대는 아직 기억하고 있는지.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은 섬들이 있어 318

319 길은 멀고 사람은 피로하고, 발을 절던 노새의 울부짖음을 이 시는 소동파가 그의 동생 소철이 지은 <면지회구 면>에 화답한 시이다. (...) 사라지고 잊혀 져 간다는 것, 그것이 모든 사물의 숙명인데도 이렇게 돌아가면서 애달파 하고 있으니, 언제까지 나는 이렇게 떠나고 돌아옴을 반복하다가 그리고 어느 때에야 한곳에 머물게 될 것인가? 길의 끝에는 자유가 있다. 그때 까지는 참으라.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은 섬들이 있어 319

320 청송과 영양의 외씨 버선길을 걷는다 :50 청송과 영양의 외씨 버선길을 걷는다. 4월의 넷째 주에 청송과 영양 일대에 있는 외씨 버선길과 청송의 반변천 부근을 걷습니다. 경북 지방에서도 가장 외 진 곳에 있는 영양과 청송의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길을 걷게 될 이번 여정은 완연한 봄 마중을 하게 될 귀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특히 연록색의 봄물이 오르는 주산지와 청송의 아름다운 절 대전사와 주왕산 기슭, 그리고 반변천 일대를 걷게 될 것 입니다. 태백산 밑 네 산골마을은 동쪽으로 영양군과 진보 두 고을은 풍속이 대략 같고 진보에서 동쪽으로 읍령을 넘으 면 곧 영해(지금의 영덕)지역인데, 북쪽은 강원도 평해와 경계가 맞닿 아 있다. 조선후기까지만 해도 현이었던 진보 는 현재 청송군에 딸린 하나의 면으로 되어 있는데, 진보현의 객관 북쪽에 있던 압각대 鴨 脚 臺 를 두고 서거정은 다음 과 같은 시를 지었다. 다행히도 동헌 앞에 압각대가 있어 과객을 받으므로 갔다가는 돌아오네. 강남에서 어느 누구 장대류를 부르는고, 농상에는 아무도 역사매를 기대지 않네. 붉은 나무는 가까워 걸음이 길어질 듯하고, 푸른 산은 눈앞에 우뚝함이 쌓여 있네. 늙은이가 힘써 일했지만 무슨 일을 이루었는고, 세월은 유유히 술잔에 부쳤거늘. 이러한 시가 남겨진 진보현 은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에 있던 조선시대의 현으로 본래는 신라의 칠파화현 漆 巴 火 縣 이었다. 청송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주왕산( 周 王 山 )과 청송보호감호소가 자리 잡은 곳이다. 홍여방( 洪 汝 方 )의 <찬경루기 讚 慶 樓 記 >에 선덕 宣 德 기유년 중춘 仲 春 에 나는 바다를 따라 동에서 북으로 가다가 진보 眞 寶 에 이르러서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수십 리를 가는 동안 점점 산세 山 勢 는 기복 起 伏 이 있어서 용이 날아오르는 것 같았으며, 냇물은 서리고 돌아서 마치 흘러가려 하다가 다시 나오는 것 같았다. 소나무 잣나무는 울울창창하고, 연기와 노을은 어둠침침하게 잠겨 있어서 맑고 그윽한 한 동학 洞 壑 이 의젓한 선경 仙 境 인 듯 한 것은 곧 청송이었다 (중략) 행례 行 禮 를 마친 뒤에 남루 南 樓 에 올랐더니 원체가 백성들이 순박하고 풍속이 후하여 온 종일 고소장 告 訴 狀 을 내는 자가 없었다. 라고 실려 있는 청송군 파천면 덕천 1동에 심부자의 집이 있다. 조선 후기인 영조 때 만석꾼으로 불린 심처사의 7대 손인 송소 松 韶 심호택 沈 琥 澤 이 1880년 무렵에 지은 이 집은 송 소고택 이라는 명칭보다 심부자집 이라고 불리고 있다. 9대에 걸쳐 만석꾼을 낸 청송 심부자의 집은 12대에 걸쳐 만석꾼을 낸 경주 최부자집과 함께 경상도의 이름난 부자이다. 이 집이 의성에서 이곳 청송으로 이사 올 때의 이야기 가 재미있다. 청송과 영양의 외씨 버선길을 걷는다. 320

321 어느 날 도적들이 이 집에 들어와 집안사람들을 위협하자 이 댁 안방마님이 나와서 사람들의 목숨은 다치지 말 라 면서 곳간문을 활짝 열어주고 마음껏 가져가게 하였다. 도적들이 욕심껏 가져가고 남은 재산으로 지은 집이 바로 이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떵떵거리던 청송 심부자 집도 해방 이후 토지개혁을 단행한 뒤로는 집과 함께 그 부자집이라는 이름만 전 해오고 있다가 지금은 한옥생활체험관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지금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 63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파천면 신기리 가람실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인 감남골에는 퇴계 이황에 얽힌 전설이 전해져 오는 곳이다.이퇴계 의 5대조의 묘로 금계포란형의 명당으로 손꼽히는데 이곳에 퇴계 이황의 선대 조상들의 이야기가 서려있다. 퇴계 이황의 5대조가 진보현 아전으로 있었을 때 하루는 원님이 감남골의 지세를 살펴보고 돌아와서 명하기를, 달 걀을 가지고 가서 이곳에 파묻고 자시까지 기다려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지 들어보고 오라 하여 이상한 생각이 들 어서 원님을 속이 곯은 달걀을 묻고 자시가 되어 가 보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므로, 닭의 소리가 안 들린다고 전하니, 원님은 아무 말도 않고 잠자코 있었다. 그 뒤 원님은 서울로 큰 벼슬을 얻어 떠낫는데, 아전은 전의 일이 아 무래도 수상하여, 밤중에 몰래 새 달걀을 가지고 가서, 그곳에 파묻고 기다리니, 닭 우는 소리가 들려서 파보니, 병아 리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명당자리인 줄 알고 있다가, 자기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이곳에 묻으니, 시체가 땅밖으 로 튀어나오므로, 다시 깊이 파고 묻었는데, 또 땅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리하여 서울로 올라가서 그 때의 원님을 찾 아 뵙고 지난날의 자기가 지은 죄의 용서를 빌고, 그 까닭을 물으니, 그 원님은 자기가 그때 산소자리를 잘못 본 것 이 아님을 깨닫고 말하기를, 그곳은 큰 벼슬을 지낸 사람만이 묻힐 곳이라. 하며, 헌 관복 한 벌을 내주며 시체 에 이 관복을 입혀서 장사지내라. 고 하매 그대로 하였더니, 6대 만에 퇴계 이황이 태어났다고 한다. 무릉도원에 들어가는 듯한 여기가 내 고향 맑은 냇물과 붉은 절벽이 금당에 비치네. 라고 이곳 진보를 노래한 사람이 이황이었고, 조선 초기의 대학자인 김종직은 이곳 청송을 두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한 봄을 구르는 쑥처럼 떠다니는 이 몸은 외롭구나. 이미 좋은 계절 季 節 에 꾀하던 일은 시기를 잃었음을 깨닫는다. 장막 帳 幕 안의 잣나무 향 香 이 타서 다하고자 하는데, 일만 산 깊은 곳에 청부 靑 鳧 가 자고 있다네. 신정일의 <신 택리지> 경상도 중에서 청송과 영양의 외씨 버선길을 걷는다. 321

322 추석 연휴에 동해 바다 먼 곳에 있는 섬 울릉도를 갑니다 :02 추석 연휴에 동해 바다 먼 곳에 있는 섬 울릉도를 갑니다. 2012년 추석 연휴에 울릉도를 갑니다. 추석을 끝낸 10월 1일부터 3일까지 가는 울릉도는 포항에서 배를 타고 3시간쯤 간 곳에 있습니다. 독도와 함께 나라에서 제일 동쪽에 자리 잡은 울릉도를 가고자 하는 분은 미리 접수하십시오. 울릉도는 경상북도 동해상에 위치한 섬이다.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에서 직선거리로 137킬로미터, 죽변항에서 140킬 로미터, 포항에서 217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울릉도를 동국여지승람 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산도( 于 山 島 =울릉도)는 무릉( 武 陵 )이라고도 하고 우릉( 羽 陵 )이라고도 한다. 두 섬이 고을 바로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세 봉우리가 곧게 솟아 하늘에 닿았는데, 남쪽 봉우리가 약간 낮다. 바람과 날씨가 청명하면 봉 머리의 수목과 산 밑의 모래톱을 역력히 볼 수 있으며, 순풍이면 이틀에 갈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도부터 삼척시 원덕읍에서 다니기 시작한 쾌속고속정(여객선 터미널에서 타면 일반 51,100원, 우등 11 만원)을 타면 3시간 30분이면 울릉도에 닿을 수 있다. 포항시에서 3시간 거리에 있는 이 섬은 불과 120년 전인 1882년 경 개척령이 내려졌을 때만 해도 인구 116명에 불과한 작은 섬이었다. 그러나 개척이 진점됨에 따라 인구가 급속히 늘어 1975년 무렵의 인구밀도가 전국의 평균치보다 더 높았다고 한다. 울릉도의 초기 역사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으나 서기 246년에 중국 위나라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한 사실을 기록 한 위지( 魏 志 ) 에 동해에 또 하나의 섬이 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 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동국여 지승람 에는 지증왕 12년에 이사부가 아슬라주( 阿 瑟 羅 州 지금의 강릉) 군주가 되어, 우산국 사람들은 미욱하고 사나우니 위엄으로 항복하기 어렵고, 계교로 복종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나무로 만든 사자를 많이 전함에 나누어 싣 고, 그 나라에 속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들을 놓아서 죽이리라 하니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와서 항복하였다 라고 씌어 있다. 고려 태조 13년에 그 섬의 사람이 백길토두 白 吉 土 豆 로 와서 토산물을 헌납하였다. 의종 13년에 왕이 울릉도가 땅이 넓고 토지가 비옥하여 백성들이 살만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명주도감창 溟 洲 道 監 倉 김유립 金 柔 立 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였다. 김유립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섬 중에 큰 산이 있는데, 산마루에서 동쪽으로 바다까지는 이만여 보 步 요. 서쪽으로는 1만 3천여보, 남쪽으로는 1만 5천여보요. 북쪽으로는 8천여보이고, 촌락 터 일곱 곳이 있고, 혹 돌부처. 무쇠 종. 돌탑이 있으며, 시호 柴 胡. 고본 藁 本. 석남초 石 南 草 가 많이 납니다. 하였다. 고려사 에는 고려 초인 현종 9년에 동북지방의 여진족이 울릉도를 침입하여 섬을 쑥밭으로 만들었다고 씌어 있 다. 울릉도는 이처럼 잦은 여진족의 침입으로 인해 고려 현종 때부터 거의 빈 섬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추석 연휴에 동해 바다 먼 곳에 있는 섬 울릉도를 갑니다. 322

323 13세기 초에 고려의 무신인 최충헌이 울릉도를 적극으로 개척하려고 한 적이 있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오고가는 것의 어려움을 들어 섬을 비워두는 소극책을 썼다. 그리하여 조선 초기에 부역을 피하여 이 섬에 숨어 들어와 사는 사람이 있어 조선 태종 때에 삼척사람 김인우( 金 麟 厚 )를 시켜 사람들을 모두 철수시켰는데, 그때 그곳에 다녀온 김인우는 다 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토지가 비옥하고 대나무의 크기가 다릿목 같으며 쥐는 크기가 고양이 같고 복사의 크기는 됫박만한데, 모두 물건이 다 이렇다. 조선 성종 2년에, 따로 삼봉도가 있다는 보고를 한 사람이 있어, 박종원 朴 宗 元 을 보내어 가서 찾아보게 하였는데, 풍 랑으로 인하여 배를 대지 못하고 돌아왔다. 같이 갔던 배 한 척이 울릉도에 정박해 있다가, 큰 대나무와 큰 북어를 가지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섬 중에 사는 사람이 없다. 고 하였다. 임진왜란 뒤에 가본 사람이 있었는데, 그것도 역시 왜병의 불 지르고 약탈하는 일을 당하여 다시는 사람이 살지 않았 다고 한다. 근래에 왜놈들이 의죽도 礒 竹 島 를 점거했다고 들었다. 더러는 의죽도라고 일컫는데 곧 울릉도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꾸만 울릉도로 들어갔고 세종 20년에는 울진현사람인 만호( 萬 戶 ) 남호( 南 顥 )를 보내어 사람들을 데리고 나왔다. 하지만 눈앞의 옥토인 울릉도에 들어가는 주민이 날로 늘어나 성종 때는 1천 명쯤에 이르렀다고 한 다. 울릉도는 실존여부와 무관한 우리 민족의 이상향으로 알려져 와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 나섰던 곳이다. 또한 나라의 법을 어긴 범법자들이 많이 숨어들었는데, 아래의 글은 영조 연간 경기도 충청도 백성들을 동요시킨 괘서와 투서의 내용이다. 삼봉도라고 불리던 울릉도 삼봉도가 동해 가운데 있으며, 둘레가 심히 크고 사람도 많으나 예로부터 나라의 교화를 벗어난 도망친 사람들이 만든 섬이다. 빈한하고 미천한 자를 위하여 망명 역적인 황진기가 장군이 되어 정진인 鄭 眞 人 을 모시고 울릉도에서 나 오고 있다. 청주와 문의가 함락되고, 서울이 함락될 것이매, 이 씨 대신에 정씨가 들어서서 가난 없고, 귀천 없는 세 세상을 만들 것이다. 정진인 설 뿐만이 아니라 한말에는 청일전쟁과 동학농민혁명 등 어수선한 환경을 틈타 그 곳으로 갔으며, 동학농민혁 명이 끝나고 난 뒤에는 동학의 잔존세력들이 숨어들었던 곳이기도 하다. 근현대에 접어들면서 울릉도가 개척된 배경에는 한때 한반도 동남쪽의 여러 섬들을 개척하는 벼슬을 맡았던 김옥균 이 있다. 고종 19년(1882)에 개척령이 내려지기 전만 해도 그곳에서는 한국인 116명과 일본인 79명이 나라의 허락 없 이 몰래 숨어들다가 도벌이나 미역과 약초를 따서 생활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미인과 바람과 향나무가 많다 도둑 거지 뱀이 없고, 바람 향나무 미인 물 돌이 많다고 하여 삼무오다( 三 無 五 多 )의 섬으로 불리는 울릉도에 는 특히 바람 부는 날이 많다. 한 해에 바람기가 잠잠한 날은 70일쯤 밖에 안 되고 평균 풍속이 초속 4.5미터에 이르 며 폭풍이 이는 날이 179일이나 된다. 추석 연휴에 동해 바다 먼 곳에 있는 섬 울릉도를 갑니다. 323

324 독도는 우리 땅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92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독도가 있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로 널리 알려진 독도는 동도와 서도를 비롯해 크고 작은 36개의 섬들로 이루어진 섬이다. 울릉도와 독도를 두고 가장 오랫동안 사용한 명칭은 우산도이다.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에 동해 상의 두 섬을 우산과 무릉. 혹은 우산과 울릉이라고 표기하였다. 조선 성종 때인 1476년의 <조선왕조실록>에는 섬 북쪽에 세 바위가 나란히 있고, 그 다음은 작은 섬, 다음은 암석 이 벌여 섰으며, 다음은 복판 섬이고, 복판 섬, 서쪽에 또 작은 섬이 있는데, 다 바닷물이 통합니다. 라고 실어서 지금의 독도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1794년인 정조 8년에 강원도 관찰사인 심진현 沈 晉 賢 이 울릉도 보고서를 보냈는데, 갑인년 4월 26일에 가지도 可 支 島 에 가보니 가지어가 놀라 뛰어나왔다. 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는 이 섬을 가지도로 보았음을 알 수가 있다. 가지어는 물개의 일종인 강치의 우리말인 가제 를 음역하여 부른 것으로 추정하는데, 가지도란 강치가 많이 사는 섬이란 뜻이다. 지금도 독도에는 강치가 많이 살고 있으며, 서도 북서쪽에는 가제바위란 바위가 있다. 1900년인 고종 37년에 칙령 제 41호를 발표하면서 울릉도를 울도로 바꾸고, 울릉도 근방의 작은 섬인 죽도 및 석 도 로 규정하면서 처음 석도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울릉도 근방의 작은 섬인 죽서 竹 嶼 를 지칭한 것인데, 석도는 한 글 표현의 돌섬이고 돌의 사투리가 독 인 점을 감안하면 그때부터 독도가 명칭으로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근 호남대 인문사회연구소가 밝힌 내용에 의하면 독도의 이름을 전라도 사람들이 지었다고 한다. 1882년 고 종 때 이규원 감찰사가 울릉도 주민을 조사한 결과 전 주민 141명 가운데, 전남 출신이 115명, 강원 14명, 영남 11 명, 경기 1명이었다. 전남 지역민 중에서도 흥양군(고흥) 출신이 61명, 흥해군(여수) 낙안읍성이 있는 낙안군 출신이 21명 순이었다. 독도를 석도로 표기했는데, 이 명칭은 돌의 전라도 사투리인 독섬 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전라도 고흥의 금 산면 오촌리 앞바다에는 지금도 독도라는 섬이 있다. 1904년 9월 25일자에 일본 군함 니다카호의 보고에 의하면 리앙코르트 바위를 한인들은 독도라고 쓰고, 일본 어부 들은 리앙코도 라고 부른다. 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독도는 그 이전부터 써온 이름이지만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1906년 울릉군수 심홍택에 의해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1914년 경상북도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매천 황현이 지은 <매천야록> 1906년 기록에는 울릉도의 바다에서 동쪽으로 100리 떨어진 곳에 독도라는 한 섬이 있어 예부터 울릉도에 속했는데, 왜인이 그 영지라고 늑칭 하고 심사하여 갔다. 고 기록되어 있으며, ><오하기문>에 도 울릉도 100리 밖에 한 속도가 있어 독도라고 부른다. 라는 기록이 실려 있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경상도>에서 추석 연휴에 동해 바다 먼 곳에 있는 섬 울릉도를 갑니다. 324

325 역사의 길 관동대로를 걷는다 :29 역사의 길 관동대로를 걷는다.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에서 2012년 4월 둘째 주인 13일부터 정기기행으로 우리나라 옛길인 <관동대로>를 걷습니다. 몇 년 전 걸었던 동대문에서 울진 평해까지 이르는 길이 아닌 거꾸로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에서 대관령을 넘어 서 울 동대문까지 이르는 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경북 울진군 평해읍에서부터 시작될 길은 울진을 지나 그 아름다운 삼척지방의 옛길을 지나고 동해를 지나 강릉에 이를 것입니다. 대관령을 넘은 여정은 평창과 횡성을 지나 원주에 이를 것입니다. 문막을 지난 여정은 양평에 이르고 두물머리(양수리)를 건너면 남양주, 구리로 이어지고 망우리를 지나면 동대문에 이릅니다. 그 길에는 월송정, 망양정 옛터, 용화 해수욕장, 죽서루, 대관령, 등, 아름다운 역사유산이 자리 잡고 있으며, 우리나 라 옛 길 중 가장 아름다운 길들이 남아 있습니다. 조선시대 우리나라 옛길은 9대로였습니다. 그중 관동대로가 <동국여지비고>제 2권에 서울에서 우리나라 각 지역에 이 르던 9대로 중의 제 3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북 西 北 으로 의주 義 州 에 가는 것이 제 1로가 된다. 홍제원 弘 濟 院 과 양철평 梁 鐵 坪 을 경유한다. 동북으로 경흥부 서 수라진 慶 興 府 西 水 羅 津 에 가는 것이 제 2로다. 흥인문 興 仁 門 과 水 踰 峙 를 경유한다. 동으로 평해군 平 海 郡 에 가는 것이 제 3로가 된다. 흥인문과 중량포 中 梁 浦 중랑포를 경유한다. 동남으로 동래부. 부산진으로 가는 것이 제 4로가 된다. 숭 례문과 한강진 漢 江 津 을 경유한다. 남으로 고성현 固 城 縣 과 통제사영에 가는 것이 제 5.6로가 된다. 두 길로 나뉘는데, 한강진을 경유하는 것이 제 5로가 되고, 노량진을 경유하는 것이 제 6로가 된다. 남으로 제주로 가는 것이 제 7로가 된다. 노량진을 경유한다. 서남으로 보령현 保 寧 縣 수군절도사영에 가는 것이 제 8로가 된다. 노량진을 경유한다. 서쪽 으로 강화부로 가는 것이 제 9로가 된다. 양화진 楊 花 津 을 경유한다. <동국여지비고>를 보면 경흥의 서수라로 가는 제 2로와 평해로 가는 제 3만이 이곳 동대문을 이용했음을 알 수 있습 니다. 서울과 경기도를 거쳐 가야할 강원도는 영동과 영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산수자연이 빼어난 곳 영동지방에는 예로부 터 바닷가 곳곳의 경치 좋은 곳에 정자와 누각들이 많았고 원주와 춘천지방을 아우르는 영서지방은 생산물이 풍부해 서 사람 살기에 적당했습니다. 백두대간의 동쪽과 서쪽에 자리 잡은 서로 다른 지방이라서 그런지 여러 풍속들이 다른 게 많았습니다. 영동지방은 기후가 따뜻해서 삼베를 만드는 삼이 잘 자라 사람들이 삼베옷을 많이 입었습니다. 그러나 춘천과 원주 역사의 길 관동대로를 걷는다 325

326 일대의 영서지방에서는 삼이 잘 자라지 않는 대신에 가을철의 건조한 기후를 이용하여 목화재배가 성했습니다. 그래 서 솜으로 짠 무명옷이 그 당시 이 지역 서민들이 보편적으로 입었던 옷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어쩌다가 영동과 영서지방에서 큰 고개를 넘어야 하는 혼사가 이루어지면, 혼주들이 그 지방 에서 나는 옷감으로 혼사 때 입을 옷을 만들어 입으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제 고장에서 귀한 옷을 차려 입는 답시고 영동에서는 무명옷을 입고, 영서에서는 삼베옷을 입어 오히려 천한 옷차림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대관령 넘어 영동지방은 관동팔경과 금강산 설악산 두타산 등 산수 자연이 빼어나 수많은 문객들의 답사처가 되었습 니다. 이승휴, 이곡. 이색. 원천석. 김시습. 원호. 남사고. 이산해. 양사언. 김창협, 허균. 허난설헌. 이식. 허목 등, 역 사 속에 자취를 남긴 기라성 같은 사람들의 자취가 서린 곳이 관동대로가 지나는 길목인 관동지방입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 이름난 유배지가 많았으므로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합니다. 관동대로의 종착지인 평해에 유배를 가서 몇 년간을 지낸 이산해의 글을 보면 그 당시 그곳은 다른 지역과 달리 낙 후가 심해서 미개인들이 살고 있었던 곳이라고 추정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내가 처음 유배지로 갈 때 기성 箕 城 경내로 들어서니, 날이 이미 캄캄하여 사동 沙 銅 서경포 西 京 浦 에 임시로 묵게 되 었다. 이 포구는 바다와의 거리가 수십 보가 채 안되고 띠 풀과 왕대 사이에 민가 십여 채가 보였는데 집들은 울타리 가 없고 지붕은 겨릅과 나무껍질로 이어져 있었다. 맨 땅에 한 참을 앉았노라니, 주인이 관솔불을 밝혀 비추고 사방 이웃에서 사람들이 구경하러 모여들었다. 그들은 남자는 쑥대머리에 때가 낀 얼굴로 삿갓도 쓰지 않고 바지도 입지 않았으며, 여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머리를 땋아 쇠 비녀를 지르고 옷은 근근이 팔꿈치를 가렸는데, 말은 마치 새소리와 같이 괴이하여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니 비린내가 코를 휘감아 구역질이 나려 하였으 며, 이윽고 밥을 차려 왔는데, 소반이며 그릇이 모두 악취가 나서 가까이 할 수 없었다. 주인 할아범과 할멈이 곁에 서 수저를 대라고 권하기에 먹어보려 했지만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이에 내가 놀라, 궁향 窮 鄕 벽지에는 반드시 별종의 추한 인종이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채 살고 있나보다 생각하였다. 그 후 사람들에게 물어본 즉 이곳이 이른 바 바닷가의 단호( 蛋 戶. 바닷가에 사는 미개인의 집)란 것으로 기성에만 열 한곳이 있으니, 여음. 율현. 구미. 해진, 정명. 박곡. 표산. 장정. 도현. 망양정 등이며 사동도 그 중 한 곳이라 하였다. 문벌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한 번도 궁핍한 것을 모르고 살았던 당대의 재상 이산해가 얼마나 난감했을까요? 그런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곳이 관동대로입니다. 그 길에 서린 역사와 이 땅을 살다간 사람들의 애환이 서리서리 얽힌 길 을 별 탈 없이 걸은 것은 내 인생의 행운이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옛길은 그저 사라져간 역사의 길이 아니고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을 해즙니다. 그뿐만이 아 니라, 우리 국토를 이해할 수 있는 첩경이며, 현대인들의 건강을 책임져주고 새로운 관광상품으로도 손색이 없습니 다. 영남. 삼남. 관동대로와 남한의 5대강을 걸은 여력으로 부산해운대에서 통일전망대까지 이어지는 동해트레일을 걸었습니다. 북한을 포함한 우리 땅 어디건 간에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그러한 시간을 위하여 <우리 땅 걷기> 도반 들의 우리 땅을 걷는 발걸음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역사의 길 관동대로를 걷는다 326

327 끝냈다는 포만감과 안도감으로 점심을 마시며 낮술 한 잔씩을 마신 뒤 적당히 지치고 그리고 나른한 몸으로 평해 터미널에 들어섰다. 무심결에 버스 요금표를 보았다. 나흘 전 떠나온 동해까지의 버스 요금이 11400원, 느림의 속도 와 빠름의 속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흘 동안 죽기 살기로 걸어온 거리를 차비 11400원이면 갈 수 있고, 버스로는 80키로 속도로 1시간 반이면 도착할 것이다. 그렇다 나는 사랑을 알았다. 나는 방랑하는 모든 것의 옆을 스쳐갈 수 있기 위하여 스스로 방랑자가 되었다. 어디 서 몸을 녹여야 할지 모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애틋한 정을 느끼고, 유랑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였다. 나는 방랑을 통하여 나 역시 국토를 알았고, 사람을 알았고, 자연을 알았으며 길에 대한 사랑을 알았다. 이미 알아버 린 그 사랑을 위해 나는 이 길이 끝나자마자 다른 길을 예비할 것이고 다시 길 위에 설 것이다. 길의 끝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길의 시작이다. 서울로 갈 사람들을 보내고 대구를 향해 바닷길을 달린다. 밀려오는 파도 속에 내가 걸어온 그 길이 하나둘씩 물살로 살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길이 끝난 지점에서 내가 걸어가야 할 새로운 길이 희미하게 보였고, 그 때 <법구경> 중 몇 구절이 가슴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나그네는 마침내 고향집에 이르렀다. 저 영원한 자유 속에서 그는 이 모든 슬픔으로부터 벗어나 그를 묶고 있던 오랏줄은 풀리고 헛된 야망은 이제 꺼져 버렸다. 지혜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축복이니 그의 곁에 살면서 진정한 행복을 찾도록 하라. 어리석은 사람을 만나지 않음은 기쁨이다. 영원한 기쁨이다.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 가지 말라 거기 원치 않는 고통이 따르게 된다.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원수와 함께 사는 것 만큼이나 고통스럽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거기 기쁨은 넘쳐 강물로 흐른다. 그 영혼이 새벽처럼 깨어 있는 사람 인내심이 강하고 고개 숙일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을 만나거든 그의 뒤를 따르리. 저 별들의 뒤를 따르는 달처럼 <법구경> 휴머니스트 간<관동대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역사의 길 관동대로를 걷는다 327

328 봄꽃이 만개한 섬진강 길을 걷는다 :53 봄꽃이 만개한 섬진강 길을 걷는다. 임진년 3월 넷째주인 24일(금)에서 26일(일)까지 봄이 만개한 섬진강 길을 걷습니다. 섬진강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난 보성강을 따라 걷고 구산선문 중의 한 곳인 태안사를 답사할 예정입니다. 태안사 가는 길목의 고즈넉한 옛길이 얼마나 가슴을 아리게 하는지, 그리고 하동군 악양면에서 화개면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둘레 길>과 꽃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나무 숲 들이 우거진 계곡의 물길에는 태안사로 오르는 산길은 올 적마다 호젓하다. 나무 숲 들이 우거진 계곡의 물길은 깊고, 세차게 흐르며, 산길을 돌아갈 때마다 피안으로 가는 다리들이 나타난다. 자유교, 정심교, 반야교를 지나 해탈교를 돌아서면 제법 구성진 폭포가 있고, 그 폭포를 아우르며, 백일홍꽃이 한 그루 만 발해 있다. 지난해부터 보수공사를 위해 헐린 능파각 아래에는 이 나라에서 거의 사라져버린 나무 다리가 있었다. 양쪽 난간에 90cm2쯤의 통 나무를 걸치고 복판에는 나란히 널빤지를 올렸으며 노면 바닥에도 널빤지를 깔고서 능파각을 세웠었다. 그러나 나무가 세월 속에서 낡고 부 실해지자 새로 세우느라 헐어버린 것이다. 능파각을 지나 산길을 오르면 길옆에 한국 전쟁 당시 이 부근에서의 치열한 전투를 증명하듯 전투 경찰의 넋을 기리는 충혼탑이 서 있고, 얼마쯤 돌아가면 태안사의 절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김존희의 글씨로 동리산태안사( 棟 裏 山 泰 安 寺 )라고 쓰여진 동판이 걸려있고, 일주문인 봉황문을 들어서면 부도 밭이다. 태안사를 중창해 크게 빛낸 광자 대사 윤다의 부도(보물 제274호)와 부도비(보물 제275호)를 비롯 다른 형태의 부도가 몇 개가 서있고, 부도밭 아래 근래에 들어 만 든 큰 연못이 들어서 있다. 가운데에 섬을 만들고, 탑을 세웠으며, 그 탑에는 석가세존의 진신사리를 안치 했다. 그리고 나무다리를 만들었는 데, 그 나무다리는 거의 썩어 있어서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아무래도 천년 고찰 태안사에는 어울리지 않는 연못이다. 광자대사 윤다는 8세에 출가, 15세 이 절에 들어 33세에 주지를 맡았다. 신라의 효공왕의 청을 거절한 윤다도 고려 왕건의 청을 받아들여, 이 후 고려 왕조의 지원을 받아 크게 부흥 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적인선사 혜철의 비를 그대로 빼어 닮은 윤다의 부도비는 비신이 파괴된 채로 이수와 귀부 사이에 끼어있다. 구산선문의 하나였고, 동리산파의 중심사찰이었던 태안사는 한때 송광사와 화엄사를 말사로 거느렸을 만큼 세력이 컸으나, 고려 중기 송광사 가 수선결사로 크게 사세를 떨치는 바람에 위축되었다. 조선 초기 승유억불정책에 밀려 쇠락한 채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 하였는데, 그나마 절이 유지된 것은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원당사찰이 된 것에 힘입은 바 컸다. 숙종, 영조 때 연이어 중창, 대가람이 되었으나 한국 전쟁 때 모두 불타버리고 남아있는 것은 일주문과 부도 탑들 뿐이었다. 청화스님이 주석한 절 안마당에 들어서기 전에 큰 건물이 보제루이고, 문이 시원스럽게 열려진 대웅전은 전쟁 중에 불타버린 것을 봉서암에서 20년 전에 옮겨왔다. 그 뒤 태안사가 여러 채의 건물을 새로짓고 청정한 도량으로 이름이 높아진 것은 우리시대의 고승 청화 선사가 수십 년을 이 절에 주석하면 서 이룩한 성과였다. 속명이 강호성( 姜 虎 成 )으로 1923년에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일본 메이지대 철학과를 수학한 뒤 동양철학에 심취했으며, 진보적 의식을 갖고 있던 그는 해방이후 극단적인 좌우익의 대립을 지켜보다가 더 큰 진리공부를 위해 출가했다.(...) 청화스님은 1985년 태안사에서 주석하면서 탁발수행과 떠돌이 선방좌선을 매듭지었다 때 불타버린 후 퇴락해있던 태안사를 다시 일으 키기 위해 그해 10월 스물한명의 도임과 함께 3년 동안 묵언수도를 계속하며 일주문밖을 나서지 않은 채 3년 결사를 하였다. 그 당시 청화선 사의 3년결사는 세상의 이익에 급급한 채 수도 정진을 게을리 했던 불교계에 큰 충격을 주었었다. 청화스님은 이후 옥과의 성륜사를 일으켜 세웠고 미국에 한국불교를 전파하다가 성륜사에서 몇 년 전에 입적하였다. 불교든 기독교든 역사 적으로 위대한 철학이라고 검증된 것이라면 믿어볼 만합니다. 성자의 가르침은 하나된 우주의 법칙으로 불교나 기독교는 수행법이 서로 다른 방법일 뿐 궁극적으로는 도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한 청화스님을 시인 최하림은 맑은 꽃 비상하게 자기를 다스린 사람에게서만 느 봄꽃이 만개한 섬진강 길을 걷는다. 328

329 껴지는 향훈( 香 薰 )이 큰스님 이라고 표현 했는데 그는 모든 수행은 정견을 바탕으로 선오후수( 先 悟 後 修 :먼저 깨달아 버리고 수행하는 것) 하는 것이니 불성체험에 역점을 두고 정진하는 것을 강조하면서 정견( 正 見 )은 바른 인생 바른 가치관 바른 철학과 같은 뜻이며 진리에 맞지 않는 업으로 우리가 고통을 받으므로 행복을 위해서는 바른 가치관을 확립해야 하고, 거기에 따른 행동도 실천해야 한다. 고 말한 바 있다. 송광 화엄사의 본산이던 태안사 태안사는 신라 때부터 조선 숙종 28년까지 대안사 大 安 寺 로 불려오다 조선 이후 태안사 太 安 寺 로 불렸다. 이는 절의 위치가 수많은 봉우리, 맑은 물줄기가 그윽하고 깊으며, 길은 멀리 아득하여 세속의 무리들이 머물기에 고요하다. 용이 깃들이고 독충과 뱀이 없으며 여름이 시원하 고 겨울에 따듯하여 심성을 닦고 기르는데 마땅한 곳이다. 라는 적인선사 혜철의 부도 비에 써 있는 r것처럼 대와 태의 뜻은 서로가 통하는 글자이고, 평탄하다는 의미가 덧붙여진 이름 이라고 한다. 이곳에 처음 절이 지어진 것은 신라 경덕왕 원년 세 명의 신승들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태안사가 거찰이 된 것은 신라 말에서 고려초기에 걸쳐 적인선사 혜철과 광자대사 윤다가 이절에 주석하면서 부터였다. 적인선사의 법명은 혜철이고 자는 체공으로 경주에서 원성왕 원년에 태 어났다. 그의 어머니의 꿈에 한 스님이 서서히 걸어들어 오는 것을 보고 태기가 있어 낳았으므로 그때부터 출가할 그릇임을 알았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지냈으며 비린 음식을 먹지 않았고 절을 찾기를 즐겨 하였다. 그는 15세에 출가, 영주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공부 하였다. 그것은 그 당시 널리 읽히던 사상이 화엄사상 이었으며 그의 집에서 멀지 않은 부석사가 해동 화엄종찰 이었기 때문 이었다. (...) 그의 선풍은 여선사, 광자대사로 이어졌다. 혜철의 부도와 부도비는 절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스님들의 선방을 지나야하므 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가 요즘에야 사람들의 발길을 허락하고 있는데 그 배알문안에 적인선사 혜철의 부도가 있다. 배알문은 전주가 자랑하는 명필 이삼만의 글씨로 된 현판이 걸려있는데 통나무를 아치형으로 배치한 제법 운치 있는 문으로 유물을 향해 자 연스럽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 경배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부도(보물 제 273호)는 전체 높이가 3.1미터에 달하는 팔각원당형으로 적인선사 조륜청정탑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철감선사 부도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지만, 화순 쌍봉사의 철감선사 부도처럼 철저한 비례 속에 구 현된 화려함은 별로 없다. 그러나 땅 위에서 상륜부까지 팔각을 기본으로 삼아 조용한 장엄함을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부도 옆에는 혜철의 행적을 비롯 사찰에 관계된 여러 가지 내용을 적은 부도비가 서 있는데, 1928년에 파손된 비신을 새로 세울 때 광자 대사 부도비의 이수와 바뀌 었다고 한다. 신정일의 <사찰 기행> 중 저 악양에는 기름지고 풍요로운 들판에 걸맞게 이름난 부자 집이 몇 채가 있었다. 악양 소재지 첫 마을 강 부자집이 첫 번째이고, 상신마을에 있는 조 부자 집이 두 번째다. 우리들은 가끔씩 기억 속에 최참판 댁을 찾아가듯 상신 마을 조부자집을 찾아갔다. 백 칠십 여년 전에 지었다는 조부자집은 대지만도 1천여평이 넘는데 소슬대문과 행랑채와 지금도 변함없는 몸채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집 의 12월이나 1월은 곶감이 마루가득 걸려있다. 우리들은 그 곳에서 눈치껏 곶감을 빼어먹고는 즐거워(?) 했다. 섬진강 답사 길에는 빼놓지 않고 들렀던 조부자집에 가기 전 먼저 악양 소재지 삼미식당에서 봄내음 가득한 점심을 먹는다. 쑥국에다 취나물 에 깻잎과 마늘장아찌 등이 어울어진 점심 반찬에다 맛있기로 소문난 악양 막걸리까지 한잔씩 걸치니 이 얼마나 한갓진 아름다움인가. 포만 감으로 길을 나서서 조부자댁을 찾아가니 조성한씨는 기꺼이 저녁잠을 재워 주시겠다고. 그래 한나절만 열심히 걷고 저물어갈 무렵 돌아와 오랜만에 조선집 군불을 지핀 방에서 잠을 자보자. 보리가 심어진 악양 벌판엔 엷은 봄 햇살이 내려앉았고 19번 국도는 자동차들이 쌩쌩거리며 지나간다. 2급하천수 악양천이 합류하는 이곳 악 양면 미점리는 미장이가 쓰는 흙손을 만들던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미점이라고 부르는데 개치마을은 입구에서부터 축사에서 나오는 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한때는 좋았던 집 한 채는 무너져가고 그 집에는 냉장고 등 온갖 가구들이 그대로 썩어가고 있다. 정각 6시에 멈추어 버린 저 집은 언제쯤인가 헐리고 말 것인데 그래도 노오란 산수유 꽃 나무는 꽃을 활짝 피우고 있으니 노란꽃이 만발한 산수유꽃 개치 남쪽에 있는 등성이인 갈미정은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고 하고 악양산에는 악양루터가 있다. 옛날 중국의 명승지의 하나인 봄꽃이 만개한 섬진강 길을 걷는다. 329

330 악양현을 본 따 이곳에 누각을 지었다는데 그 또한 세월 속에 사라지고 없다. 큰 팽나무가 늘어진 거리를 지나 하동읍 흥룡리에 접어든다. 하동 8km, 강은 이제 깊고도 넓게 흐른다. 그 흐르는 강물 위로 새 한 마리 날아오르고 마을에는 우유빛으로 빛나는 매화꽃들이 저렇게 흐드 러지게 피었구나. 이제 대나무숲은 오후의 바람을 받아 살랑거리고 강 건너 백운산 자락에 매화꽃들이 만발해 있다. 흥룡횟집에서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이곳에 있는 용소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하여 흥룡이라 이름 지은 이곳에는 모든 이름들에 용이 안 들어 간 곳이 별로 없다. 와룡폭포, 와룡산, 용소, 용옥골, 용추, 흥룡이라는 이름들 속에 용 세 마리가 등천했다는 삼룡동까지 있으니 환상 속의 동물인 용이나 봉황을 그리워했던 옛 사람들의 절박한 소망을 알 법도 하다. 강은 이곳에서 바다나 다름없다. 저 건너 쫓비산 뒤쪽으로 억불산이 있고 그 뒤편에 백운산(1217m)이 늠름하게 펼쳐져 있다. 이름도 이상하게 쫓비산이다. 다압면 고사리는 옛날에 절이 있었던 곳 이라고 하여 고사리라고 지었다는데 고사골에는 비나 눈이 내려 날씨가 궂으면 근처에서 귀신이 나 온다는 기신바우가 있고 매산바우 서쪽에 있는 버지골마을에는 버드나무가지에 꾀꼬리가 집을 짓는다는 유지앵소혈 의 명당이 있다고 한 다. 길가에는 웬 재첩국집들이 그리도 많은지 저 섬진강에서 갓 잡아 올린 재첩으로 만들었다는 재첩도 알고 보면 우리나라 것이 별로 없고 값이 싼 중국산이 대다수라고 한다. 포장도로를 멀리하고 제방둑으로 올라선다. 그런데 가다가 금방 길이 끊어지고 배나무 과수원 길로 접어든다. 가도 가도 끝없는 이 배나무 과수원 길이 언제쯤 끝날 것인가. 생각하는데 뒤따라오던 일행들이 보이지 않는다. 내려가다 보면 만날 수 있을 테지 강가로 내려가는 길은 대나무 숲이 가로막고 그 아래는 낭떠러지다 보니 엄두조차 낼 수가 없다. <섬진 강따라 짚어가는 우리 역사> 중 봄꽃이 만개한 섬진강 길을 걷는다. 330

331 남해 보리암과 김만중의 적소 노도, :52 남해 보리암과 김만중의 적소 노도, 아침에 일어나 하늘을 보니 구름이 가득하여 남해금산 보리암에서 일출을 보고자했던 소망은 물 건너간 듯하였다. 그러나 행여 하는 마음으로 도착한 보리암은 매서운 바람으로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귀와 손발이 무척 시리도록 추웠다. 그런데도 상주 해수욕장을 중심으로 점점이 떠 있는 섬을 바라보며 조 선 전기에 이곳으로 유배를 왔던 자암 김구가 한 점 신선의 섬, 즉 일점선도 一 點 仙 島 라고 찬탄했던 것 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보리암 주지 스님인 능인 스님과 다과를 함께 하며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고 상주해수욕장에서 대량까지 남해 바래길을 걷고서 다량에서 배를 세내어 노도로 향했다. 대량 마을에서 1킬로미터쯤 배를 타고 건너면 닿는 자그마한 섬 노도로 유배를 왔던 사람이 조선 중기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였던 서포( 西 浦 ) 김만중( 金 萬 重 )이었다.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 金 長 生 )의 증손자이자 김집( 金 集 )의 손자인 그는 아버지 익겸( 益 謙 )이 병자호란 당시 김상용을 따라 강화도에서 순절하여 유복자로 태어났다. 1665년(현종 6)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김만중은 이듬해 정언( 正 言 ) 부수찬( 副 修 撰 )이 되고 헌납( 獻 納 ) 사서( 司 書 ) 등을 거쳤다. 1679년(숙종 5)에 다시 등용되어 대제학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1687년(숙종 13) 경연에서 장숙의( 張 淑 儀 ) 일가를 둘러싼 언사( 言 事 ) 로 인해 선천에 유배되었고, 이때 <서포만필 西 浦 漫 筆 > 을 지었다. 사람의 마음은 입에서 나오면 말이 되고, 말이 절주 節 奏 를 가지면 문학작품이 된다. 고 하면서 조선 사 대부들의 중국문화 추종과 한문학 모방을 질타했다. 우리나라 시문은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을 배우므로 설사 십분 비슷하다고 해도 그것은 앵무 새가 사람 말을 하는 짓이다. 일반 백성이 사는 거리에서 나무하는 아이나 물 긷는 아낙네가 아아 하면 서 서로 화답하는 노래는 비록 천박하다고 하지만, 만일 진실과 거짓을 따진다면, 참으로 학사. 대부의 이 른바 시 詩 니, 부 賦 니 하는 것들과 함께 논할 바가 아니다. 남해 보리암과 김만중의 적소 노도, 331

332 그는 이듬해 왕자(후에 경종)의 탄생으로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기사환국( 己 巳 換 局 )이 일어나 서인이 몰 락하게 되자 그도 왕을 모욕했다는 죄로 남해의 절도인 노도에 유배되어 3년여의 세월동안 유배생활을 하 다가 그곳에서 56세의 나이로 죽었다. 김만중이 그렇게 유배 길에 자주 오른 것은 그의 집안이 서인의 기반 위에 있었기 때문에 치열한 당쟁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종 초에 시작된 예송( 禮 訟 )에 뒤이어 경신환국 기사환국 등 정치권에 변동 이 있을 때마다 그 영향을 심하게 받았다. 김만중은 많은 시문과 잡록, 그리고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 의 소설을 지 었다. 서포만필 에서는 한시보다 우리말로 씌어 진 작품의 가치를 높이 인정하였다. 김만중이 이곳에 유배중일 때 하루 종일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며 한숨을지친었기에 이 고장 사람들은 그를 두고 놀고먹는 할아버지라는 뜻으로 노자묵자 할배 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늑한 섬들은 구름이 내려앉은 바다 건너에 있고, 방장봉래봉은 가까이 있도다. 육친인 형제 숙질과는 떨어져 홀로 외롭게 살건만 남들은 나를 신선으로 알겠구나. 김만중의 시 한편이 남아 전하는 노도에는 그의 적소였던 집과 우물, 그리고 그의 허묘 墟 墓 만 남아 있다. 그가 그리워 한 육지는 남해 섬 바깥에 있지만, 양아리, 대량, 벽련 마을은 지척에 있으면서 김만중의 그 리움을 자아냈을 것이다. 노도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뱃전에 밀려오는 바람 소리, 파도 소리가 지친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 임진년 이월 스무이레 남해 보리암과 김만중의 적소 노도, 332

333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을 보고 서강을 걷다 :50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을 보고 서강을 걷다.. 3월 셋째 주 토요일 영월을 갑니다. 한반도 모양의 지형이 있는 선암 마을과 경치가 빼어난 요선정, 그리 고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중의 하나인 법흥사 적멸보궁을 부고 서강을 걸을 예정입니다. 이 지역 사람들이 동강 서강이라 부르지 않고 암캉 수캉이라 부르는 서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간 서면 의 신암마을에는 서강이 휘돌아가면서 빚어낸 절경인 한반도를 닮은 지형이 있다. 또한 영월군 주천면에 는 술이 나오는 돌 주천석( 酒 泉 石 )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그 내용이 동국여지승람 에 다음 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주천현의 남쪽 길가에 돌이 있으니 형상이 반 깨어진 돌 술통 같다. 세상에서 전해오는 말에, 이 돌 술통은 예전에는 서천가에 있었는데 거기에 가서 마시는 자에게는 넉넉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읍의 아전 이 술 마시려고 거기까지 왕래하는 것을 싫어 현 안으로 옮기고자 하여 여러 사람들과 함께 옮기니 갑자 기 크게 우뢰하고 돌에 벼락을 쳐서 부수어 세 개로 하여 한 개는 못에 잠그고, 한 개는 있는 데를 알 수 없고, 한 개는 곧 이 돌이라. 주천면에서 주천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만나는 곳이 요선정이고 그곳에서 법흥천을 따라 올라간 곳에 적 멸보궁의 한 곳인 법흥사가 있다. <택리지>를 지은 이중환은 이 근처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치악산 동쪽에 있는 사자산은 수석이 30리에 뻗쳐 있으며, 법천강의 근원이 여기이다. 남쪽에 있는 도화 동과 무릉동도 아울러 계곡의 경치가 아주 훌륭하다. 복지( 福 地 )라고도 하는데 참으로 속세를 피해서 살 만한 지역이다 그의 말처럼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뚝우뚝 솟아있는 사자산은 높이가 1,150미터로 법흥사 를 처음 세울 때 어느 도승이 사자를 타고 온 산이라고 한다. 사나삼과 옻나무, 그리고 가물었을 때 식량으로 사용한다는 흰 진흙과 꿀이 있는 그래서 네 가지 보물이 있는 산이 즉 사재산( 四 財 山 ) 이라고도 부르는 이 산이 사자산이다. 이 산에 신라 때의 고승 자장율사 가 지은 절로 구산선문 九 山 禪 門 중에 한 곳인 법흥사가 있다.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을 보고 서강을 걷다 333

334 치생 治 生 (생활의 법도를 세움)을 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먼저 지리 地 理 를 가려야 한다. 지리는 물과 땅이 아울러 탁 트인 곳을 최고로 삼는다. 그래서 뒤에는 산이고, 앞에 물이 있으면 곧 훌륭한 곳이 된다. 그러 나 또한 널찍하면서도 긴속 緊 束 해야 한다. 대체로 널찍하면 재리 財 利 가 생산될 수 있고, 긴속하면 재리가 모일 수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의 풍운아인 허균이 지은 <한정록>에 실린 여러 가지 사람이 살아갈만한 조건을 갖춘 곳이 바로 법흥사 부근이다. 영월군 주천면을 지나 주천강을 따라가다가 요선정이 있는 미륵암 부근에서 법흥천을 거슬러 올라가다 만 나는 곳이 광대평 廣 大 坪 이다. 법흥리에서 가장 들이 넓고 전답이 많았다는 광대평을 지나 한참을 오르면 그 지형이 고기가 물결을 희롱하며 놀고 있는 형국이라는 유어농파형 遊 魚 弄 波 형의 명당이 있다는 응어터 (응아대) 마을이다. 그곳에서 법흥사 아랫마을인 대촌 大 村 이라고도 부르는 사자리는 멀지 않다. 깊숙한 산 골인데도 제법 넓게 펼쳐진 들판에서 길관음사 가는 길과 법흥사가 있는 절 골로 가는 길로 나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인 월정사의 말사인 법흥사는 신라의 자장율사가 643년(선덕여왕 12)에 당나라에서 돌아와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 영취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등에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마지막으로 이 절을 창건한 뒤에 진신사리를 봉안했으며 그 당시 절 이름은 흥녕사였다. 그 뒤 헌강왕 때 절중 折 中 이 중창하여 선문구산( 禪 門 九 山 ) 중 사자산문( 獅 子 山 門 )의 중심 도량으로 삼았 다. 징효대사 절중은 사자산파를 창시한 철감선사 도윤의 제자로 흥녕사에서 선문을 크게 중흥시킨 인물 이다. 그 당시 헌강왕은 이 절을 중사성 中 使 省 에 예속시켜 사찰을 돌보게 하였다. 그러나 이 절은 진성여 왕 5년인 891년에 불에 타고 944년(혜종 1)에 중건했다. 그 뒤 다시 불에 타서 천년 가까이 작은 절로 명맥 만 이어오다가 1902년 비구니 대원각 大 圓 覺 이 중건하고 법흥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2년 또다시 불에 탄 뒤 1930년에 중건했으며, 1931년 산사태로 옛 절터의 일부와 석탑이 유실되었다. 이 절의 초입에 흥녕사에서 선문을 크게 열었던 징효대사 절종(826~900년)의 부도와 부도비가 세워져 있 다. 징효대사의 부도비(보물 제 612호)에는 징효대사의 행적과 당시의 포교내용이 새겨져 있고 고려 혜종 1 년에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소나무 숲이 너무도 아름다운 절 나라 안에 이름난 소나무 숲이 여러 곳 있지만 가장 그윽한 소나무 숲이 있는 곳이 이곳 법흥사의 적멸보 궁으로 올라가는 길에 서 있는 소나무숲이다. 나무는 별에 가닿고자 하는 대지의 꿈이다. 라는 빈센트 반고호 의 말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우뚝 솟아있는 아름드리 소나무 숲길을 걸어 올라가면 법흥사선원이 있으며 그 우측에 항상 흐름을 멈추지 않는 우물이 있다. 그곳에서 구부러지고 휘어지는 오솔길을 돌아 올라가면 법흥사 적멸보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을 보고 서강을 걷다 334

335 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인 적멸보궁 안에는 불상이 안치되어 있지 않고 유리창 너머 언덕 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사리탑이 보인다. 그러나 진신사리 탑일 것이라는 부도탑은 어느 스님의 부도일 뿐이고 정작 진신사리는 영원한 보존을 위 해 자장율사가 사자산 어딘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두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가끔씩 사자산 주변에 일곱 빛깔의 무지개가 서린다고 한다. 사리탑 옆에는 자장율사가 수도 했던 곳이라는 토굴이 마련되어 있고 그 뒤편 사자산의 바위 봉우리들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적멸 보궁에서 내려오는 길에 우뚝우뚝 서 있는 소나무를 만날 수 있다. 어쩌면 오랜 그리움의 한 자락 같기도 하고 보고 싶은 어떤 사람 같기도 한 그 소나무들 중 한그루를 나는 내 사랑 소나무 라고 점찍어 두고 가까이 다가가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본다. 까실 까실하게 혹은 오랜 세월 부대낀 세월의 무게로 내 가슴속에 한 점 그리움으로 안겨오는 소나무와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아름답게 이를 데 없는 산길이 그곳이다. 나는 가끔씩 이 법흥사를 떠올릴 때마 다 이 소나무와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휘어지고 굽어 도는 서러움 같은 그 길들이 떠올라 주체하지 못할 때가 있다. 이 법흥리 부근은 산이 높고 골이 깊기 때문에 높은 고개들이 많다. 도마니골에서 엄둔으로 넘어가는 재는 엄둔재이고, 어림골에서 주천면 판운리로 넘어가는 고개는 숲이 무성하다 하여 어림치라고 부르며, 법흥 리에서 횡성군 안흥면 상안흥리로 넘어가는 고개는 안흥재이다. 아름다운 풍경화를 보는 것 같은 경치가 빼어나게 펼쳐진 서강변을 걷고자 하는 분의 참여 바랍니다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을 보고 서강을 걷다 335

336 그 아름다운 남강 3번째 여정을 걷는다. 촉석루에서 정암나루까지 :20 그 아름다운 남강 3번째 여정을 걷는다. 촉석루에서 정암나루까지 그 아름다운 남강 3번째 여정을 걷는다. -진주 촉석루에서 의령 정암나루까지- 꽃 피는 3월 둘째 주에 넓혀 질대로 남강을 세 번째로 걷습니다. 진주 촉석루에서부터 진주시 지수면을 지나 의령군 의령읍 정암나루까지 이 어질 이번 여정은 역사와 인물의 고장을 걷는 여정이 될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그룹은 삼성그룹과 현대그룹, 그리고 엘지, 롯데, 두산, 교보생명그룹 등이다. 이 가운데 삼성그룹의 창업자인 이병철 李 秉 喆 ( )과 일제그룹을 일군 구인회가 나고 자란 곳입니다. 구인회는 진주시 지수면에서 태 어났고, 이병철은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中 橋 里 의 장내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병철의 집안은 <호암자전 湖 巖 自 傳 >에 의하면 조부 이홍석 李 洪 錫 때에 이미 가산이 1천섬에 이르렀을 정도로 부유했다고 한다. 이병철은 그의 아버지 이찬우 李 纘 雨 로부터 쌀 3백 섬을 사업 자금으로 물려받았고 그것을 밑천으로 일제시대와 8.15 해방그리고 6.25 와 5.16등 역사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오늘의 삼성그룹을 키워냈다. 그가 태어난 의령은 예로부터 편안하게 안녕을 기하면서 살만한 곳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의령을 지나는 남강변에는 솥처럼 생긴 정 암 鼎 岩 이라는 바위가 있고 그곳이 그 유명한 정암 나루가 있는 곳이다. 그 바위에서 한 도인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이곳으로 부터 30리 내외에서 국부 國 富 가 두명 나올 것. 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지가서 地 價 書 에서 흔히 말하는 명당 앞에 천년을 마르지 않는 물이 있으면 재물도 그와 같이 천년을 쓸 수 있다. 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을 입증하듯 이곳 남강 변에서 두 사람의 국부가 태어났다. 즉 삼 성의 이병철과 럭키(엘지의 전신)의 구인회 具 仁 會 이다. 이병철의 고향은 정암나루에서 30리쯤 떨어져 있고, 구인회의 고향인 진주시 지수면 승내리 승산마을 역시 그곳에서 약 30리쯤이 되어서 그들은 보통학교를 함께 다닌 죽마고우이기도 했다. 정곡면 소재지인 장내마을에 있는 이병철씨의 생가 뒷산은 마두산 馬 頭 山 에서부터 비롯된 용맥이 동 남진해서 종교리에서 멈추었다. 수강 유 종근 선생이 풍수지리로 본 이병철의 생가는 다음과 같다. 대지주위를 보면 일자형 一 字 形 의 토형산 土 形 山 으로 되어 있고 앞산 역시 토형산과 금형산 金 形 山 이 띠를 두른 듯이 펼쳐져 있다. 내당수는 서쪽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르고 외당수는 북쪽에서 흘러 남쪽으로 흘러간다. 형국은 추수후 벼를 탈곡해 앞산에 쌓아놓은 탈곡장형 脫 穀 藏 形 이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주산의 모양새가 5행 중 문인을 배출한다는 1자 모양의 토 土.에 속하는 산이고 앞 산은 노적가리와 곳간을 마련한 토와 금 金 의 산이 있기 때문에 토생금 土 生 金 의 상생 相 生 관계를 이룬 좋은 길지라는 말이다. 특히 남강으로 유입되는 중교리 일대의 정곡천과 월현 천의 물이 이병철씨의 집을 감싸고 있어 재물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고 한다. 이병철씨는 이곳에서 태어나 격변기의 한국사회에서 삼성그룹이라는 한국뿐만이 아니라 세계 굴지의 대 그룹을 일구었고 2004년 현재 세계적 으로 브랜드가치가 5위에 이른다고 한다. 552년 의령군 유곡면 세우리에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망우당( 忘 憂 堂 ) 곽재우가 태어났다. 곽재우는 그의 스승이자 영남유학의 거봉인 남명 조식의 외손녀와 혼인을 하고 3서른다섯에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채 고향에 돌아와 지냈다. 그의 나이 마 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집안의 하인 열세 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집 느티나무에 북을 매달고 치면서 본격적으로 의병을 모았 그 아름다운 남강 3번째 여정을 걷는다. 촉석루에서 정암나루까지 336

337 고, 그해 6월 말에는 정암나루 부근 솟대바위에서 왜군과 맞서 싸워 크게 이겼다. 곽재우는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싸움에 임했으므로 홍의장 군( 紅 衣 將 軍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세운 공을 인정받아 경상좌방어사로 재직하던 곽재우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창녕의 화왕산성에서 왜구와 맞섰고 그 싸움에서 왜군 수천 명을 무찔렀다. 난이 끝난 뒤에 당쟁에 휘말려 있던 조정에 상소를 올려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 잡으려 애썼지만 받아들여지지 않 았다. 조정에서는 그 후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곽재우는 고양이는 쥐만 잡으면 할 일이 없다 며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로 돌아와 지 내다가 숨을 거두었다. 남강변에 자리 잡은 아름 났던 나루인 정암나루에 뱃노래 한 토막이 남아 있다. 정암( 鼎 岩 ) 사공아 뱃머리 돌려라 우리 님 오시는데 마중갈까나 아이고데고 성화가 났네 남강변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세상을 바꾼 사람들의 정기를 받으며 봄을 맞게 될 이번 여정에 많은 참여 바랍니다. 1.일시: 2012년 3월 4일(일요일) 서울 양재역 12번 출구 밤 8시 출발 전주는 금요일 밤 10시 30분 (전주 종합경기장) 2. 어디로 가나요, 남강으로 3, 참가비:12만원 4, 답사지 구인회 생가, 이병철 생가, 정암나루 등 5. 안내 도반: 신정일(낙동강, 신 택리지 경상도)의 저자 6,참가비는 (국민은행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로 참가비 입금 7,처음 참가자는 주민번호를 ( 문자) 우리 땅 걷기 전화( )로 알려 주십시오. 참가 신청 입금 후 취소 시 환불 규정 1, 행사일로 부터 5일전 까지 취소 시: 은행 수수료를 공제 후 전액 환불합니다. 2, 행사일 4일전부터 2일전까지 : 참가비 50%를 공제후 환불 합니다. 3, 행사일 2일전부터 당일까지 취소 시(미 참가 포함); 환불액 없습니다. 위와 같이 행사 참여 취소 시 행사비 환불을 명심하시어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회비를 입금하시고 대기자로 기다리셨다가 참여를 못하시는 회원님들의 불편함을 없게 하고자 함이오니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 아름다운 남강 3번째 여정을 걷는다. 촉석루에서 정암나루까지 337

338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을 찾아가는 역사기행 :09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을 찾아가는 역사기행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을 찾아가는 역사기행 1589년 조선에서 최대역모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건을 두고 기축역변, 기축국안, 기축국옥, 정개 청과 최영경의 원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기축옥사 己 丑 獄 死 로 인해 죽은 사람이 1천 명에 달했다 고 추정되고 있는데 기축옥사의 전 과정을 지켜본 서애 西 厓 유성룡 柳 成 龍 이었습니다. 그는 미증유의 국난이었던 임진왜란 壬 辰 倭 亂 을 겪고 나서 지은 <운암잡록 雲 巖 雜 錄 >에는 다음과 같이 실었습니다. 처음에 임금이 그를 체포하러 가는 도사 都 事 에게 밀교 密 敎 를 내려, 여립의 집에 간직되어 있는 편 지들을 압수하여 대궐 내에 들이게 하였다. 그래서 무릇 여립과 평소에 친근하게 지내어 편지를 주 고받은 자는 다 연루 連 累 를 면치 못하게 되어 사류 士 類 가 죄를 얻게 된 자가 많았다. 그 중에 고문 拷 問 을 받고 죽은 자는 전 대사간 大 司 諫 이발 李 潑. 이발의 아우 응교 應 敎 이길 李. 이 발의 형 전 별좌 別 座 이급 李 汲. 병조참지 兵 曹 參 知 백유양 白 惟 讓. 유양의 아들 생원 백진민 白 振 民. 전 前 도사 都 事 조대중 曺 大 中. 전 남원부사 南 原 府 使 유몽정 柳 夢 井. 전 찰방 察 訪 이황종 李 黃 鍾. 전 감역 監 役 최여경 崔 餘 慶. 선비 윤기신 尹 起 莘. 정여립의 생질 이진길 李 震 吉. 기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 다. 그 중에서도 이발과 백유양의 집안이 가장 혹독하게 화를 입었다. 그리고 연루 連 累 되어 귀양 간 자는 우의정 정언신 鄭 彦 信. 안동부사 김우옹 金 宇. 직제학 直 提 學 홍종록 洪 宗 祿. 지평 신식 申 湜 과 정 숙남 鄭 叔 男. 선비 정개청 鄭 介 淸.이요. 옥에 갇혀 병이 나서 죽은 자는 처사 處 士 최영경 崔 永 慶 이었다. 옥사 獄 事 는 덩굴처럼 얽히고 뻗어나서 3년을 지내도 끝장이 나지 않아 죽은 자가 몇 천 명이었다. 허균과 함께 조선에서 신원 되지 못한 정여립을 신원하는 행사가 열립니다. 완주군에서 정여립 의 생가 터를 사서 그곳에 그의 집을 복원하고 그의 우적 정비를 할 예정입니다. 그에 앞서 정 여립의 사상과 기축옥사를 바로 알기 위한 행사와 함께 완주의 명산과 명찰을 답사합니다. 토요일 오전은 간단한 세미나와 함께 오후에는 상관면 월암리 집터와 진안 죽도 답사가 있고, 그 다음날은 호남의 소금강으로 알려진 대둔산 산행과 함께 나라 안에 보석 같은 절로 알려진 완주의 화암사 답사가 있을 예정입니다. 고즈넉한 산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만해 한용운이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 터라고 극찬 했던 갑천의 발원지 태고사 답사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1.일시: 2012년 2월 18일(토요일) 서울 양재역 12번 출구 7시 출발 19일(일요일) 까지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을 찾아가는 역사기행 338

339 전주는 토요일 오전 10시(전주 종합경기장) 도합 90명 선착순 2. 어디로 모이나요, 3, 참가비: 5만원 4, 행사내용 :정여립 생가터 죽도 답사. 화암사와 대둔산 산행, 5. 안내 도반: 신정일(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의 저자 6,참가비는 (국민은행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로 참가비 입금 7,처음 참가자는 주민번호를 ( 문자) 우리 땅 걷기 전화( )로 알려 주십시오. 참가 신청 입금 후 취소 시 환불 규정 1, 행사일로 부터 5일전 까지 취소 시: 은행 수수료를 공제 후 전액 환불합니다. 2, 행사일 4일전부터 2일전까지 : 참가비 50%를 공제후 환불 합니다. 3, 행사일 2일전부터 당일까지 취소 시(미 참가 포함); 환불액 없습니다. 위와 같이 행사 참여 취소 시 행사비 환불을 명심하시어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회비를 입금하시고 대기자로 기다리셨다가 참여를 못하시는 회원님들의 불편함을 없게 하고자 함이오니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주의사항: 1. 우리 땅 걷기에서는 단체 여행자보험을 들고 있습니다. 2. 하지만 모든 걷기의 안전에 대해서는 참석자 본인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카페나 진행자는 안전사고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보시고 꼭 필요할 때에만 연락 주십시오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을 찾아가는 역사기행 339

340 4. 역사, 신정일 교수님의 글모임4 블로그 저자 발행일 초보산꾼의 발길 닫는 곳 초보산꾼 :38:56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복제와 전재를 금합니다.

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2014 7 18.hwp

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2014 7 18.hwp 차례 1~3쪽 머리말 4 1. 계대 연구자료 7 가. 증 문하시랑동평장사 하공진공 사적기 7 나. 족보 변천사항 9 1) 1416년 진양부원군 신도비 음기(陰記)상의 자손록 9 2) 1605년 을사보 9 3) 1698년 무인 중수보 9 4) 1719년 기해보 10 5) 1999년 판윤공 파보 10 - 계대 10 - 근거 사서 11 (1) 고려사 척록(高麗史摭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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