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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대 간의 상호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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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총서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47 근대 간의 상호 인식 허동현 권태억 김승태 이규수 지음

4 발간사 한국과 중국,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 지역 국가들이 겪고 있는 역사 갈등 문제는 단순히 역사와 역사학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교적 현안문제로 비화하기도 합니다. 동북아 지역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 전쟁의 잔혹함과 제국주의의 쓰라린 기억을 지니고 있 다고는 하지만, 오랫동안 평화를 유지한 시기가 더 길었던 만큼 현재의 일 부 갈등 양상 역시 치유되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 상황을 보면 역사 갈등이 쉽게 치유되기보다는 자국중심의 역 사인식으로 인해 타국의 [역사주권(sovereignty of history)]을 침해하는 일이 발생하여 오히려 갈등을 더 조장하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웃 국가의 역 사주권을 배려하지 않은 역사교과서의 서술이나, 혹은 일부 정치가의 망언 한 마디로 국민적 감정이 분출되어 외교문제로 비화한 사례가 적지 않습니 다. 그러한 갈등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보다도 3국이 공히 서로 근대 간의 상호 인식

5 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인식의 결여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동북아의 역사 갈등 문제를 슬기롭게 치유 극복하여 등 동북아지역의 나라들이 평화롭게 공동 번영을 도모하려는 목적에서 출범하였습니다. 재단은 3국이 겪고 있는 크고 작은 현안의 역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재단 내 부의 연구 활동과 병행하여, 학계 전문가들의 연구 활동을 지원하여 수준 높 은 연구 성과물을 내는 것도 재단 사업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발간하는 근대 한 일 간의 상호 인식 은 2006년 말 저희 재단 출범과 동시에 지원한 연구과제의 성과물을 보완하여 단행본으로 발간하 는 것입니다. 개화기 조선 지식인의 메이지[ 明 治 ]유신관이라든가, 조선총독 부의 조선에 대한 인식과 통치방식, 일제 강점하의 조선 신사( 神 社 )의 연구, 그리고 일본 내 우경단체들에 대한 역사인식을 다루고 있는 본서는 당시의 한일 양국이 안고 있었던 여러 굴절된 역사의 모습과 모순의 실상을 다양 한 각도에서 그려내고 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의 상호 인식 과정을 이해하 기 위한 특정 연구 주제들의 모음집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책을 통해 근대 한일 양국의 서로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생성되었으 며 또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 어떻게 역사에 작용했었는지 그 메커니즘이 조금이라도 분명해져, 양국이 역사 갈등을 극복하고 공존과 공생의 미래 를 창출해 내는 데에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앞으로도 이러한 연구서가 지속적으로 발간될 수 있 도록 힘쓰겠습니다 2009년 3월 15일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발간사 5

6 차례 책머리에 _ 9 개화기(1876~1910) 조선 지식인의 메이지 유신관 허동현 I. 머리말 _ 15 II. 화이론자의 메이지 유신 인식 _ 18 III. 동도서기론자의 메이지 유신 인식 _ 27 IV. 문명개화론자의 메이지 유신 인식 _ 31 V. 맺음말 _ 년대 조선총독부의 조선 인식과 통치방식 권태억 문명화론을 중심으로 I. 머리말 _ 49 II.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조선 인식 _ 51 III. 조선의 식민지로의 재편 _ 60 IV. 한국인의 저항과 폭력@문명화 선전 _ 65 V. 식민 통치의 [문명화]로서 미화 _ 72 VI. 문명화론과 차별의 논리 - 조선 시세@민도론과 교화주 일본론 _ 78 6 근대 한@일 간의 상호 인식

7 VII. 문명화론의 일본적 특징과 그 한계 _ 90 VIII. 맺음말 _ 95 일제하 조선의 신사에 관한 연구 김승태 I. 머리말 _ 103 II. 일본 거류민의 신사 설립과 신도의 침투 _ 106 III. 조선총독부의 신사정책과 신사 설립@운영 _ 조선총독부의 신사정책과 조선신궁의 설립 _ 신사에 관한 법령과 제도적 정비 _ 각 지역별 신사의 설립과 운영 _ 137 IV.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한국인의 저항 _ 년대의 [신사 문제]와 신도 비판 _ 년대의 신사참배 거부 항쟁과 신사정책의 추이 _ 년대 이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한국인의 저항 _ 186 V. 신사의 말로 _ 234 VI. 맺음말 _ 245 부록 1: 조선총독부 관보 의 신사 관련 규정(1910~1945) _ 247 부록 2: 신사 일람(1) - 조선 신사( 神 社 ) 일람(1945년 7월 현재, 神 神 社 82사, 攝 末 社 25사) _ 256 부록 3: 신사 일람(2) - 조선 신사( 神 祠 ) 일람(19 4 0년 11월 말 현재, 6 01사) _ 261 차례 7

8 일본 네오내셔널리즘의 발흥과 역사인식 연구 이규수 우경단체 홈페이지 분석과 관련하여 I. 머리말 _ 295 II. [자학]으로부터의 탈피, 타민족 지배의 합리화 _ 300 III. 침략의 망각, [성전]으로서의 전쟁 _ 310 IV. 동아시아에 대한 멸시와 적대감 _ 319 V. 맺음말 _ 326 Abstract 333 찾아보기 근대 한@일 간의 상호 인식

9 책머리에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깊은 관련을 맺고 살아왔으며, 지금도 양자의 관계는 날로 깊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사정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 이다. 양국의 평화, 동북아시아의 안정, 나아가서는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는 한일이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 배상 문제, 위안부 및 노동력 강제동원 보상 문제, 독 도 영유권 문제를 둘러싼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양국 관계는 원만하기는 커녕 갈등의 골이 좀처럼 메워지고 않고 있다. 이러한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깊어지고 있는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관계도 개운치 못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의 바탕에는 앞에서 말한 두 나라 사이의 현안 문제에서 보듯이 과거사에 대한 상반된, 또는 피차 인정하기 어려운 인식이 깔려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일제 식민지기에 대한 인식 책머리에 9

10 일 것이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이를 수치로,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로 기억하고 있는 데 반해 대다수 일본인들의 이에 대한 인식은 불분명하다. 특히 최근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소위 자유주의, 네오내셔널리즘적 사 관은 이를 [근대화]로 인식하면서 양국 간의 관계는 더욱 꼬여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한일 두 나라의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공통된 역사인식을 구축하기 위한 시도들이 조금씩 성과를 보이고 있다. 나아가서 동아시아 중심 국가인 한중일 간 공동 역사교과서를 만들려는 노력도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본서에 수록된 4편의 논문도 다루고 있는 주제는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역사적으로 상호 영향을 끼치면서 발 달해온 한일 관계의 역사적 국면들과 그에 대한 인식, 그 오류의 극복 방 안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허동현의 개화기(1876~1910) 조선 지식인의 메이지 유신관 은 위정척 개화파의 메이지 유신 인식을 이들 의 메이지 유신관이 조선 왕조의 근대화 과정에 어떻게 투영되었으며, 이것 이 오늘 우리 사회의 모순적인 일본 인식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살 핀 것이다. 그 결과 본 연구는 증오의 대상으로서 침략자, 따라 배워야 할 모델, 그리고 따라 배우기에는 미흡한 후진 근대라는 세 가지 유형의 메이 지 유신관이 개화기에 형성되었음을 밝혔다. 이렇게 상반된 일본 인식 속 에서 한국은 제국주의적 침략을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태도를 증오하면서 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형 발전 모델을 따라 배워왔으며, 오늘날에도 여 전히 서구 중심주의의 입장에서 일본식 모델을 비판하는 한국인의 모순된 일본 인식의 근원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권태억의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조선 인식과 통치방식 - 문명화론 10 근대 한@일 간의 상호 인식

11 을 중심으로 는 1910년대 일제의 조선 통치가 [무단]적 방식 외에 자신의 조선 통치를 [문명화]로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 수단을 동원했다는 점을 지적한 후 그 역사적 배경과 현실적 기능을 밝힌 것이다. 즉 일본이 자신 을 아시아의 유일한 문명국가로 자부하면서 조선을 야만시했다는 것, 자 신의 합병 및 통치가 조선에서 [문명]을 성취하기 위한 것으로 선전했다는 점, 한국인들 자신도 근대 문명을 이룩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도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러한 구도 안 에서 일본인은 조선인을 지도( 指 導 ), 계발( 啓 發 ), 부액( 扶 腋 ), 유도( 誘 導 )해야 할 지배자, 선생, 형님으로 내세워졌고, 조선인은 문명의 결실을 거두고 천 황의 충량한 신민이 되기 위해 이를 믿고 따를 것이 요구되었다. 김승태의 일제하 조선의 신사에 관한 연구 는 일제의 침투와 함께 들 어온 신사( 神 社 )가 처음에는 일본 거류민들이 주동이 되어 내부 단결과 풍 속 유지를 위해 설립되었으나, 합병 후에는 조선총독부 주도 아래, 문화 침략 내지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확대, 강화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즉 조선 총독부는 1915년 포교규칙을 공포하여 일반 종교를 통제하려 한 반면 신 사사원규칙을 통해 신사를 보호 육성코자 하였으며, 1930년대에 들어 일 제가 대륙 침략을 벌이면서 다시금 신사 설립을 장려하고 신사참배를 강요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신사는 식민지 권력의 이데올로기적 통치 보조 기구였으며, 신사참배 강요는 종교 탄압이었음을 밝힌 것이다. 이규수의 일본 네오내셔널리즘의 발흥과 역사인식 연구 - 우경단체 홈 페이지 분석과 관련하여 는 현재 일본 사회에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 는 우경단체들의 네오내셔널리즘적 역사인식과 그 논점들이 관련 단체들 의 홈페이지를 통해 유포되고 있는 현상을 분석한 것이다. 이들은 일본사 의 부정적 측면을 내세운 자학사관으로부터 탈피해야 하며, 역사를 배운 책머리에 11

12 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했는가를 배우는 것이지 그것을 현 대 인간이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바탕으로 왜곡된 역사인식을 유포하고 있는데, 이에 영향을 받은 대중의 감정적인 동의는 결국 일본의 보수화나 군국주의의 부활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각성을 고취하고 있다. 한일 두 나라 사이의 원만한 관계의 발전은, 인류 사회의 공동 번영과 평화라는 가치를 공유할 때, 그리고 과거사에 대한 공정하고 객관적인 공 통 인식이 세워질 때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책이 그러한 과제에 조금이라 도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필자들의 바람이다. 2009년 2월 27월 필자들을 대표하여 권 태 억 12 근대 간의 상호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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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P E R C E P T I O N S O F T H E O T H E R B E T W E E N K O R E A A N D J A P A N I N M O D E R N T I M E S 개화기(1876~1910) 조선 지식인의 메이지 유신관 허동현 경희대학교 학부대학 교수 I. 머리말 II. 화이론자의 메이지 유신 인식 III. 동도서기론자의 메이지 유신 인식 IV. 문명개화론자의 메이지 유신 인식 V. 맺음말

15 I. 머리말 역사적 사실로서 메이지[ 明 治 ] 유신(1868)은 정치 권력이 도쿠가와 막부로 부터 천황에게로 돌아간 왕정복고( 王 政 復 古 )를 의미한다. 그러나 역사 현 상으로서 메이지 유신을 볼 때 시대와 논자에 따라 해석의 차이가 크다. 냉전시대에는 [발전]에 주목하는 [근대화론적] 입장과 사회구조의 변화 를 중시하는 [강좌파( 講 座 派 )]와 [노농파( 勞 農 派 )]의 마르크스적 해석이 지 배적이었다. 잰슨(Marius B. Jansen)의 경우 [근대화론]의 입장에서 메이 지 유신을 국가 건설과 근대화를 지향하는 막말유신기( 幕 末 維 新 期 ) 일본 의 정치주체들이 행한 주도권 쟁탈전의 산물로 보았고, 사회구조와 지배 양식의 연속을 주장하는 [강좌파]는 메이지 유신을 천황제 절대주의의 수 립으로 이해하였으며, [노농파]는 미완의 부르주아 혁명으로 규정하였다. 물론 정치@사회적 변혁이자 문화혁명으로서 막번( 幕 藩 )체제에서 근대 천 황제 국가로 이행하게 한 근대 일본의 시점으로 메이지 유신을 이해할 수 도 있다. 김용덕(1981), 일본의 명치유신론, 동아문화 18, 쪽;김용덕(1983), 명치유신학술회의보고, 동양사학연구 18, 쪽 참조. 이 두 글은 김용 덕(1991), 일본근대사를 보는 눈, 지식산업사, 61 76쪽에 재수록됨. 잰슨(1986), 明 治 維 新 :その 政 治 的 文 脈, 永 井 道 雄 編, 明 治 維 新, 東 京 大 學 出 版 會 ;장인성(1999), 유신의 아이덴티티와 문명:메이지 유신의 분석틀, 한국정치학회보 33-2, 쪽. 김용덕(1991), 앞의 책, 70 71쪽. 田 中 彰 (1987), 明 治 維 新 觀 の 硏 究, 北 海 道 大 學 圖 書 刊 行 會, 6 8쪽;장인성 (1999), 앞의 글, 259쪽. 개화기(1876~1910) 조선 지식인의 메이지 유신관 15

16 그러나 냉전 붕괴 이후 이데올로기의 속박이 풀어지자 메이지 유신을 단일한 근대 구상에 의거한 단선적인 과정으로 파악하는 시각은 힘을 잃 었으며, 전통과 근대의 복합 과정으로 파악하거나 문명관의 갈등을 내포 한 것으로 보는 해석이 주류가 되었다. 사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서 구 국가들이 프랑스 혁명 이래 만들어낸 근대화 기제들을 베껴 들이는 한 편 고대의 천황제를 부활시켜 [서구 근대와 일본 고대의 유착]이라는 특수 한 일본형 근대 국민국가를 만들어내었다. 따라서 일본의 근대는 단순한 서구 문물과 제도의 도입이 아니라 천황제를 부활시킨 메이지 유신의 불 가피한 산물로서 일본 고대의 복고이기도 하였다. 막번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1854년부터 새로운 사회체제의 기초 가 놓이는 1877년까지를 메이지 유신기로 본다면, 이때 일본형 국민국가 의 중앙집권을 위한 국가통합 장치, 자본주의를 향한 경제통합 도구, 그리 고 국민 창출을 위한 문화통합의 기제들이 거의 완성되었다. 따라서 본 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메이지 유신관은 단순한 왕정복고의 역사적 사실 이 아니라 근대 군국주의 일본의 초석이 되었던 메이지 유신기에 만들어 장인성(1999), 앞의 글, 쪽. 西 川 長 夫 (1995), 日 本 型 國 民 國 家 の 形 成 : 比 較 史 的 觀 点 から, 西 川 長 松 宮 秀 治 編, 幕 明 治 期 の 國 民 國 家 形 成 と 文 化 變 容, 新 曜 社, 30 38쪽; 安 丸 良 夫 (1994), 年 代 の 日 本 : 維 新 變 革, ( 岩 波 講 座 ) 日 本 通 史 : 近 代 1 16, 岩 波 書 店, 40 43쪽; 牧 原 憲 夫 (1994), 文 明 開 化 論, ( 岩 波 講 座 ) 日 本 通 史 : 近 代 1 16, 쪽;허동현(2000), 근대 한일관계사 연구: 朝 士 視 察 團 의 일본관과 국가 구상, 국학자료원, 83 84쪽, 96쪽. 김용덕(1991), 앞의 책, 66쪽. 허동현(2002), 조사시찰단(1881)의 일본 경험에 보이는 근대의 특성, 한국 사상사학 19, 쪽. 16 근대 한@일 간의 상호 인식

17 진 제 변혁의 성과에 대한 인식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왕정복고에 대한 조 선 지식인들의 인식을 보여주는 자료는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역사적 사 건으로서의 왕정복고를 긍정적으로 인식한 경우도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촉발된 제 변혁에 대해서는 긍부( 肯 否 )가 교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근왕주의자들이었던 1881년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 朝 士 視 察 團 ) 의 조사( 朝 士 )들 대다수는 왕정복고가 근왕 세력인 유학자들의 주도로 일 어난 것으로 보아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의 풍속 변화 나 의식주의 서구화 등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막말 메이지기의 유신 과정에서 일본의 지식인들이 전통 유지와 근대 로의 변혁을 둘러싸고 문명관의 갈등 양상을 드러내 보였듯이, 10 개화기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서도 성리학으로 대표되는 전통을 지키려는 쪽과 일 본과 서구 근대를 개혁 모델로 받아들여 조선을 변혁하려 한 친일@친미 개화파 사이에는 서로 다른 문명관이 갈등을 빚었다. 11 물론 이들은 일본 이 [일본형 국민국가]로 탈바꿈한 계기가 되는 메이지 유신 이후의 변혁 허동현(2002), 앞의 글, 쪽. 10 장인성(1999), 앞의 글, 259쪽. 메이지 유신의 전개 과정에 대해서는 논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이에 관해서는 김용덕(1991), 앞의 책, 61 67쪽 참조. 11 강화도조약(1876) 체결 이후 조선 왕국의 위정자들도 근대화를 도모하는 제도 개혁에 나섰지만, 국민국가로 진화하지 못하고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렇듯 조선 왕국이 외세의 침탈에 맞서 자기 혁신을 도모하다 좌절한 1876년부터 1910년까지를 본고에서는 [개화기]로 칭한다. 이 시기 한국인의 일 본관에 대해서는 허동현(2004), 개화기( ) 한국인의 일본관, 사학 연구 76, 쪽;장인성(2001), 김용덕@미야지마 히로시 공편, 근대조 선 일본관의 구조와 성격:자기@타자@상황의 함수적 표상으로서의 일본관, 근대교류사와 상호인식 I,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쪽 참조. 개화기(1876~1910) 조선 지식인의 메이지 유신관 17

18 과정에 대해서도 대조적인 인식을 보였다. 화이론( 華 夷 論 )적 문명관을 묵 수하는 위정척사파( 衛 正 斥 邪 派 ) 유학자와 유교 도덕을 지키면서 근대 기 술문명의 장점을 취하려 한 동도서기론( 東 道 西 器 論 )적 입장의 개신유학자, 그리고 따라 배워야 할 이상적 모델로서 일본의 경험을 주목한 친일 개화 파와 기독교와 미국식 민주주의 체제를 문명으로 보는 친미 개화파의 메 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 대한 호오( 好 惡 )와 긍부( 肯 否 )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러한 차이는 실질적인 [힘]과 관념적인 [도덕] 중 어떤 것을 준거로 문명 과 야만을 구분하느냐에 따라서도 생겨났지만, 12 겉으로 [개화와 독립의 옹호자]를 자처하면서 실제로는 [제국주의적 침략자]였던 개화기 일본의 두 모습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13 본고에서는 개화기에 형성된 서로 다른 네 가지 메이지 유신관이 언제 어떻게 형성@확산되었는가를 살펴보되, 개화기에 일본에 파견된 사절들 의 보고서, 신문기사, 기행문, 일기, 상소, 격문 등에 보이는 인식의 요체 를 적출@부각해보려 한다. II. 화이론자의 메이지 유신 인식 1868년 일본의 왕정복고는 700년에 걸친 일본 특유의 봉건 통치 기간 동 안 명목상의 주권자로 허위( 虛 位 )를 지켜왔던 천황의 수중에 권력이 다시 돌아간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일본의 정치 변동은 이미 안정복( 安 鼎 福, 12 장인성(1999), 앞의 글, 쪽. 13 柳 永 益 (1983), 한@미관계 전개에 있어서의 일본의 역할, 한@미수교 1세기 의 회고와 전망,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쪽. 18 근대 한@일 간의 상호 인식

19 ), 이익( 李 瀷, ) 같은 18세기 실학자들이 예견했던 것 처럼, 14 종래 대등한 관계를 유지해온 조선 국왕과 막부 장군 사이에서 서 열상 상하 문제를 야기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1868년 말에 조선에 왕정복 고를 통보하면서 그간 양국 간의 외교통상 사무를 맡아온 대마도 주( 對 馬 島 主 )에게 황실의 권위나 국체( 國 體 )의 위엄을 손상하는 문구를 쓰 지 말 것과 조선 국왕에 대한 일본 천황의 서열상 우위를 명확히 표현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 이하응( 李 昰 應, ) 집정하 의 조선 정부는 [황조( 皇 祚 )]와 [황상( 皇 上 )] 같은 중국의 천자만이 쓸 수 있는 용어가 사용된 일본 국서를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이후에도 일본은 외무성의 관원을 보내 근대적 조약을 맺을 것을 요구하였지만, 대원군은 일본 측 서계( 書 契 )의 형식 및 용어가 구규( 舊 規 )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끝 내 거절하였다. 이처럼 대원군이 메이지 일본과의 새로운 관계 맺기를 거 부한 이면에는 세상을 유교적 도덕이 지배하는 중화의 문명세계와 유교의 교화가 미치지 않은 야만세계로 이분하는 화이론적 세계관에 입각해 일 본을 중화문화권 밖으로 이탈하여 서구의 양이들과 같아진 야만국이라 고 보는 왜양일체의 부정적 일본관이 작용하고 있었다. 15 대원군은 1860년 연합군의 베이징[ 北 京 ] 점령사건 이후 [양이] 들에 굴복해 양무운동( 洋 務 運 動 )을 펴고 있던 청국의 지도부를 경멸하고 그들의 권고를 일축하면서 서구 열강과 일본에 대해 화이사상과 왜양일 체론에 입각한 쇄국양이( 鎖 國 攘 夷 ) 정책을 펼쳤다. 서구와 메이지 일본에 14 하우봉(1989), 조선 후기 실학자의 일본관 연구, 일지사, 126쪽. 15 김기혁(1990), 개항을 둘러싼 국제정치, 한국사시민강좌 7, 16 17쪽;유영 익(1993), 흥선대원군, 한국사시민강좌 13, 107쪽;허동현(2004), 앞의 글, 209쪽. 개화기(1876~1910) 조선 지식인의 메이지 유신관 19

20 대한 그의 비타협적 자세는 보수적인 위정척사파 지식인들에게 폭넓은 지 지를 받았다. 16 위정척사론이나 왜양일체론의 바탕이 되는 화이사상에 의하면, 사회질서를 지키는 최고의 도덕인 유교의 오륜( 五 倫 )과 오상( 五 常 ) 을 지키는 나라만이 문명으로서 중화였으며 그 밖의 나라들은 이적( 夷 狄, 오랑캐)이었다. 그런데 이 중화의 전통은 명이 청에서 멸망당한 다음 중국 에서도 단절되고 소중화( 小 中 華 )인 조선에서만 유지되고 있었다. 대원군과 위정척사론을 숭봉하는 유교 지식인들에게 지배질서 유지의 관건인 유교 의 오륜과 오상을 파괴하는 천주교와 같은 서양 종교는 사교로 비쳤고, 이를 믿는 서양 세력은 이적보다 못한 금수와 다를 바 없었으며, 서양화 된 일본도 금수에 지나지 않았다. 17 대원군과 위정척사파 지식인들은 소중화 관념에 입각해 서구 문명을 받아들인 메이지 일본을 중화 문명권에서 제외하고 배척하는 입장을 갖 고 있었다. 일례로 대원군은 신미양요 때 미국의 함대를 물리친 다음 {양 인( 洋 人 )들의 배에서 나는 연기와 먼지가 온 천지를 뒤덮어도, 동방국의 찬란한 광채는 영원토록 빛나누나}라는 시를 지었으며, 18 전국 주요 도시 에 {양이가 침범하였을 때 싸우지 않으면 강화하는 것이며, 강화를 주장 하는 것은 매국하는 것}이라는 내용의 척화비를 세워 척양 정신을 길이 계승할 것을 명한 바 있다 유영익(1993), 앞의 글, 169쪽, 171쪽. 17 송병기(1990), 위정척사운동: 辛 巳 척사운동을 중심으로, 한국사시민강좌 7, 39쪽. 18 安 玟 英 (1881), 西 舶 煙 塵 天 下 晦 東 方 日 月 萬 年 明, 金 玉 叢 部 ;유영익(1993), 앞의 글, 170쪽. 19 송병기(1990), 앞의 글, 41쪽. 당시 고종도 {만약 양이와의 강화를 말하는 자가 20 근대 한@일 간의 상호 인식

21 이항로( 李 恒 老, ) 등과 같은 위정척사파 지식인들도 대원 군의 양이정책을 지지하였으며, 이러한 양요기( 洋 擾 期 )의 위정척사론은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 체결 협상을 벌일 때 왜양일체론에 입각한 척 화론으로 이어졌다. 그때 대원군은 접견대관( 接 見 大 官 ) 신헌( 申 櫶, )을 비롯한 의정부 관원들에게 강화를 반대하는 서한을 보냈으며, 대 원군 하야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최익현( 崔 益 鉉, )과 김평묵( 金 平 黙, ) 같은 위정척사파 지식인들도 체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20 김평묵은 {왜( 倭 )는 양적( 洋 賊 )의 전도( 前 導 )요 결단코 전일의 왜 가 아니다}라는 왜양일체론에 입각해 그 침략성을 통박하였으며, 21 이는 일본과의 체약을 극렬하게 반대한 최익현의 지부복궐척화의소( 持 斧 伏 闕 斥 和 議 疏 ) 의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22 홍재학( 洪 在 鶴, ), 있으면 마땅히 賣 國 之 律 로 다스리겠다}고 했다 한다. 20 송병기(1990), 앞의 글, 40 42쪽. 김평묵은 대원군 실각 후인 1876년 1월 그 의 橫 政 은 혁파해야 하지만 그의 斥 和 는 혁파할 수 없다고 하면서 민씨 집정을 비판하고 대원군에 대한 예우책 마련을 촉구하는 상소문을 올리도록 최익현 에게 권했다 한다. 오영섭(1999), 화서학파의 사상과 민족운동, 국학자료원, 106쪽, 주 192 참조. 21 그는 일본이 갖고 있는 침략성의 증거로 다음 네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첫째, 왜는 서양의 앞잡이로 이미 양인과 굳게 결합하여 중국에 횡행한 지 몇 년이 되었다. 둘째, 왜가 洋 舶 과 洋 砲 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왜와 서양이 기물을 통 용함을 알 수 있다. 셋째, 수호하기 위해 4천의 병력을 이끌고 오는 것은 고금의 使 行 에 없던 일로서 서양이나 하는 짓이다. 넷째, 청국의 咨 文 에 의하면 1866 년 강화도에 침입한 양적은 자주 사신을 보내어 우리를 위협한 왜인이다.} 김평 묵(1909), 代 京 畿 江 原 兩 道 儒 生 論 佯 倭 情 迹 仍 請 絶 和 疏, 重 菴 集 권5, 2 3 쪽;민족문화추진위원회 편(2003), 韓 國 文 集 叢 刊 319, 민족문화추진위원회, 쪽;오영섭(1999), 앞의 책, 106쪽에서 재인용. 개화기(1876~1910) 조선 지식인의 메이지 유신관 21

22 유인석( 柳 麟 錫, ) 등 50여 명의 유생들과 연명해 올린 이 상소에 서 그는 왜양일체론에 입각해 일본을 배척해야만 하는 이유를 설파한 바 있다. 그 주된 내용은 {저들이 비록 왜를 청탁하고 있으나 기실은 양적이 어서 강화가 일단 이루어지면 사학( 邪 學 )이 전수되어 온 나라 안에 가득 차게 될 것}이고, {저들은 화색( 貨 色 )만 알고 사람의 도리를 모르는 금수 이므로 저들과 강화하면 사람들은 금수가 되어버릴 것}이며, {지금 온 왜 는 양복을 입고 양포( 洋 砲 )를 쓰며 양박( 洋 舶 )을 타고 있기 때문에 이는 왜와 양이 일체임을 명증하는 것}이라는 얘기였다 이와 같은 왜양일체론에 입각한 일본 배척의 척화론은 포함을 동원한 일본의 군사적 위협에 밀린 조선 정부가 강화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수 면 밑으로 잠복하였다가, 1880년 수신사 김홍집( 金 弘 集, 1842~1896)이 가 져온 조선책략( 朝 鮮 策 略 ) 에서 제기한 생존전략(러시아의 침략을 막기 위해 均 勢 와 自 强 을 도모해야 한다는)을 고종이 받아들여 대미수교와 개화정책이 추진되면서 다시 들끓기 시작하였다. 당시 전개된 신사척사운동( 辛 巳 斥 邪 運 動 )이 확대되면서 그 쟁점이 개화정책 반대, 특히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맺는 것을 반대하는 척왜( 斥 倭 )로 바뀌어갔다. 일례로 홍시중( 洪 時 中 )은 {불구대천의 원수 일본의 사절과 국서를 받아들이고 개항을 허락한 것을 개탄하고, 오늘의 왜는 곧 양이며, 왜에 힘입어 러시아를 막으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공박하였고, 유기영( 柳 冀 永 )과 한홍열( 韓 洪 烈 ) 등도 {왜 는 곧 양이므로 [화왜( 和 倭 )]는 곧 [화양( 和 洋 )]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견양 22 최익현의 척화론에 대해서는 旗 田 巍 저, 이기동 역(1983), 日 本 人 의 韓 國 觀, 일조각, 쪽 참조. 23 承 政 院 日 記, 高 宗 13년 1월 23일조;최익현(1976), 持 斧 伏 闕 斥 和 議 疏, 勉 庵 集 3, 경인문화사. 역문은 송병기(1990), 앞의 글, 42쪽에서 재인용. 22 근대 한@일 간의 상호 인식

23 ( 犬 羊 ), 금수( 禽 獸 )의 습속에 빠져드는 것이기에 왜양의 상품을 엄금하고 국내에 들어와 있는 [추류( 醜 類, 일본인)]를 모두 축출하고 이미 개항한 원 산을 폐쇄하고 인천 개항을 금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위정척사파 유생들의 상소를 통한 시위운동은 일반 백성들의 척왜 의식, 즉 반일 감 정을 부추겼으며, 이는 대원군과 그 지지 세력을 고무해 1881년 [안기영 ( 安 驥 泳 ) 사건]이라는 쿠데타 모의와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는 배경으 로 작용하였다. 24 특히 1884년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한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개화사상 은 인간으로서는 따라 배울 수 없는 금수의 사상으로 전락했고, 이들을 도 운 일본인의 행위는 일본의 침략성을 주장한 위정척사파 지식인들의 견해 가 옳았음을 증명해준 셈이 되었다. 특히 정변의 사후처리 과정에서 일본 이 보여준 고압적인 태도는 국왕을 비롯한 민씨 척족 정권과 일반 백성들 의 반일 감정을 더욱 격화시켰으며, 메이지 일본을 근대화의 모델로 하는 개혁을 추진하기 어렵게 만들고 말았다. 25 이후 일본은 1894년의 동학농 민군과 1896년, 1905년, 1907년에 일어난 의병의 반일운동을 군대를 동원 해 탄압하고 수천 명의 애국적 동학농민군과 의병을 살상하는 등 제국주의 침략 국가의 면모를 드러냄에 따라 보수적@배외적 성향의 위정척사파 지 식인들과 동학농민군 계열의 사람들을 비롯한 백성들의 가슴에 침략자란 24 송병기(1990), 앞의 글, 50 58쪽. 25 최영호(1990), 갑신정변론, 한국사시민강좌 7, 65 71쪽. 당시 개화파 인사 로 정변에 참여하지 않았던 윤치호는 12월 7일자 일기에 {아아 古 愚 輩 (김옥균의 무리)의 경망스러운 행동은 위로 國 事 를 실패하게 하고 아래로 民 情 을 시끄럽게 하였으며, 공적으로는 개화 등의 일을 蕩 敗 시켜 남김이 없게 하였다}고 적고 있 다. 윤치호, 송병기 역(2001), 국역 윤치호 일기 1, 연세대 출판부, 208쪽. 개화기(1876~1910) 조선 지식인의 메이지 유신관 23

24 인상을 굳게 심어주었다. 따라서 반문명적 침략 세력으로 메이지 일본을 보는 시각은 대원군과 항일 의병을 이끈 유생 의병장, 그리고 1894년 척양 척왜를 외친 동학농민군 같은 백성들의 가슴에 각인되고 말았다. 26 청일전쟁 때 국왕의 이름을 빌려 전국에 유포하여 유생들과 동학농민 군에게 반일 의병을 일으킬 것을 종용한 밀서에서 대원군은 화이론에 입 각한 척왜의식을 드러냈다. 27 최익현의 경우에도 1896년 2월 아관파천 직 후에 올린 상소에서 {개화 이후로부터 선왕( 先 王 )의 법제를 모두 고쳐서 한결같이 금수의 지휘를 따르고 중화를 이적( 夷 狄 )이 되게 하고 인류를 금수가 되게 하였으니 이는 개국 이래 없었던 큰 변란입니다}라고 하였으 며, 년 1월에 올린 상소에서 1894년 이후의 일본식 개혁 조치에 대 해 {소중화를 소일본으로 바꾸어놓고 [그 명이 오직 새롭다]고 말한다면 오랑캐를 추종하는 수치감을 속이고 소중화를 혁파함을 다행으로 생각 하게 되는 것이니 이는 속이는 행위일 뿐입니다}라고 왜양일체관에 입각 26 허동현(2004), 앞의 글, 210쪽. 1876년 이래 일본은 조선에 대해 [개화와 독립 의 옹호자]를 자처했지만 실제로는 [제국주의적 침략자]였다. 유영익(1983), 앞 의 글, 쪽. 27 {너희들은 先 代 왕조로부터 교화를 받은 백성으로서 선왕의 은덕을 저버리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지금] 조정에 있는 자들은 모두 그들에게 붙어서 궁 안에는 한 사람도 상의할 사람이 없어 [짐은] 외롭게 홀로 앉아 하늘을 우러러 통곡할 따름이다. 지금 왜구가 대궐을 침범하여 禍 가 宗 社 에 미쳐서 命 이 朝 夕 을 기약하지 못할 지경이다. 사태가 이에 이르렀으니 너희들이 만약 오지 않으 면 迫 頭 하는 禍 患 을 어찌하겠는가? 이를 교시하노라.} 이상백(1962), 동학당 과 대원군, 역사학보 13쪽. 28 최익현( ), 宣 諭 大 員 命 下 後 陳 懷 待 罪 疏, 민족문화추진위원회 편 (1977), (국역) 勉 菴 集 1, 민족문화추진회, 148쪽. 24 근대 간의 상호 인식

25 한 척왜론을 견지하였다. 29 이들 위정척사론자들의 일본 야만관은 유교 문명관만이 아닌 조선 침략의 역사적 사실에 토대를 둔 것이기도 하다. 30 동학농민군도 화이론적 왜양일체론에 의거해 일본을 서양제국과 한통 속인 제국주의 침략 세력으로 보고 있었음은 1893년 호남 지방 전라감영 에 제출한 호소문 31 과 [척왜양]을 기치로 내건 보은집회에서 제출한 문 상( 文 狀 ) 에 여실히 드러난다. 32 이러한 화이론적 왜양일체론에 의거해 일 본을 반문명적 침략 세력으로 보는 부정적 메이지 일본 인식이 위정척사 파 지식인과 동학농민군 세력만이 아닌 일반 백성들에게도 널리 유포된 29 최익현( ), 再 疏, 민족문화추진위원회 편(1977), 앞의 책, 192쪽. 30 장인성(2001), 앞의 글, 192쪽. 이는 단발령에 반발해 일어난 1895년의 의병장 중 한 사람인 權 世 淵 이 말한 {아! 저 왜놈들은 계급으로 말하면 200년 동안 우리에게 조공을 바치던 나라요, 원수로 말하면 400년 동안 우리가 이를 갈던 적이니, 설사 성의와 호의로 우리에게 화친을 청한다 해도 오히려 그 놈들을 죽 여 없애고만 싶고 똑바로 보기도 싫은데 감히 방자하게 간사한 꾀를 부려 까닭 없이 트집을 만드는 것이다}라는 내용의 격문에 잘 나타난다. 권세연, 안동격 문, 유광열 편(1975), 抗 日 宣 倡 義 文 集, 서문당, 37 38쪽. 31 {이제 倭 洋 의 賊 이 心 腹 에 들어와 大 亂 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우리의 國 都 를 보라. 이미 夷 狄 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임진년의 원수와 병자 년의 치욕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고, 어찌 차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 리나라 삼천리강토가 짐승의 근거지가 되어 오백 년 종사가 장차 망하고 그 터 전이 기장 밭이 되고 말 것이니, 인의예지 효제충신은 이제 어디에 있습니까.} 日 本 外 務 省 編 (1936), 日 本 外 交 文 書 5, 日 本 國 際 聯 合 協 會, 457쪽. 32 { 倡 義 는 倭 洋 을 치는 데 목적이 있으니 이 어찌 大 罪 가 되리오. 生 等 은 비록 鄕 曲 의 賤 品 이나 어찌 倭 洋 이 강적임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列 聖 朝 崇 儒 의 교화를 받아 모두 [ 倭 洋 을 치고 죽는다면 죽음이 삶보다 낫다]고 하니 이 는 국가가 경하할 일이지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국사편찬위원회(1959), 聚 語, 동학란기록 상, 117쪽. 개화기(1876~1910) 조선 지식인의 메이지 유신관 25

26 감정이었음은 1893년 3월에 일본공사관 앞에 나붙은 다음과 같은 방문 에 잘 나타난다. 33 일본 상인들 보아라. 하늘과 땅이 처음 열리고 그 사이에 인간이 위치 하면서 경계가 만들어져 나라가 생기니 이때부터 三 綱 이 정해지고 五 倫 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세상에서 중앙에 거처하며 살아가는 데 있어 인륜을 아는 것을 사람이라 이르고, 인륜을 모르는 것을 이적이라 일 컬었다. 너희도 비록 변방이지만 天 道 를 똑같이 받았음을 아는가 모르는가. 이미 人 道 에 처하였으면 각기 나라를 다스리고 각기 생산을 보존하여 강토를 영구히 보존하며 위로는 임금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 성을 양육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탐람된 마음을 품고 남의 나라에 들 어와 공격으로써 장기를 삼고 살육으로써 근본을 삼는 것은 진실로 무 슨 마음이며 종국에는 무엇을 하려는가. 188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서양과 일본의 앞선 기술과 농법 등을 받 아들이자는 동도서기론을 수용한 개신 유학자들이 늘어나면서 화이론적 메이지 일본 인식은 유교 지식인 사이에서도 점차 힘을 잃어갔다. 또한 동 학농민군 세력도 일진회( 一 進 會 )와 같은 친일 세력으로 변질되거나, 천도 교 측과 같이 서양의 새로운 사조를 수용하여 일본과 서양을 야만적 침 략자로 보는 종래의 입장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3대 교주 인 손병희( 孫 秉 熙 )는 1901년 일본으로 건너가 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와 33 朝 鮮 國 東 學 黨 ノ 擧 動 ニツキ 情 報 ノ 件, 日 本 外 交 文 書 5(한국편), 423쪽. 동학 과 농민들의 메이지 일본 인식에 관해서는, 이영호, 東 일본인식과 [ 輔 國 安 民 ]이념, 김용덕@미야지마 히로시 공편(2001), 앞의 책, 쪽 참조. 26 근대 한@일 간의 상호 인식

27 교유하고 근대 문물을 접하면서 청년 신도들의 일본 유학을 권장하는 등 종래의 화이론적 메이지 일본관을 폐기하기에 이르렀다. 34 한마디로 화이론이란 문명론적 관점에서 메이지 일본을 침략자로만 인식했던 부정적인 타자 인식과 고정관념은 조선 왕조의 멸망과 유교 문 명의식의 소멸과 더불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III. 동도서기론자의 메이지 유신 인식 1876년 조선 정부는 강화도조약의 체결을 구래의 교린관계의 회복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1876년과 1880년 두 차례의 수신사( 修 信 使 )와 1881년 의 조사시찰단을 통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변화에 대한 정보와 지식 을 얻음으로써 기존의 유교 문명관에 입각한 일본 인식이 변화하기 시작 하였다. 유교 문명관에 가해진 충격의 파열음은 제1차 수신사 김기수( 金 綺 秀, 1832~1894)의 다음과 같은 소회가 잘 대변한다. 35 기교가 이럴 수가 있겠는가! 한 개의 火 輪 으로써 천하의 모든 것을 다 만든다. 기교가 이럴 수가 있겠는가! 공자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바이 니, 나는 이것을 보고 싶지 않다. 지난번에 나의 유람을 막은 사람이 옳았고, 나에게 유람하도록 권고한 사람은 옳지 못했는데, 나는 그 옳 은 말을 좇지 못했으니 그렇다면 내가 유람한 것은 옳지 못한 일이었는 가? 奇 技 淫 巧 도 말로는 이것으로 利 用 厚 生 한다고 하니, 이용후생이라 면 이를 배워야만 하는 것인데, 하물며 이를 보는 것쯤이랴. 34 의암 손병희 선생 기념사업회(1967), 의암 손병희 선생 전기, 6 7쪽. 35 김기수, 日 東 記 遊, 국사편찬위원회 편(1971), 修 信 使 記 錄, 103쪽. 개화기(1876~1910) 조선 지식인의 메이지 유신관 27

28 이제 일본은 더 이상 문명론적 시각에서 볼 때 야만이 아니라 이용 후생에 도움이 되는 기술과 산업이란 장점을 가진 문명한 타자로 인식되 기 시작하였다. 도덕을 기준으로 문명과 야만을 가르던 종래의 문명 관념 은 압도적 기술문명 앞에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36 김기수의 경우 도일하 기 전에 갖고 있던 일본 이적관을 일본 시찰을 통해 탈피하였지만, 37 그가 귀국 후 지방관으로 좌천될 만큼 당시 왜양일체론적 위정척사론은 거의 모든 유교 지식인의 뇌리를 여전히 사로잡고 있었다. 38 메이지 일본이 수 용한 서구 근대 기술을 접한 조선의 지식인 중에서 화이론적 왜양일체관 을 폐기하고 근대 기술의 수용을 고민하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제 2차 수신사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 의 영향으로 개화정책이 추진되 고, 39 이에 따라 조사시찰단이 메이지 일본의 근대문물과 제도를 샅샅이 조사한 이후부터였다. 40 조사시찰단의 조사들 중에는 일본 시찰을 통해 일본을 개혁의 모델로 삼는 문명관의 전환을 경험한 이도 있었지만, 4개월에 불과한 시찰 기간 은 대다수 조사들에게는 평생 몸에 밴 유교의 가치와 세계관을 벗어나게 하기에는 너무 짧았다. 이들은 유교적 가치 기준으로 메이지 일본의 이모 36 허동현(2000), 앞의 책, 24 28쪽. 37 하우봉, 개항기 수신사의 일본인식, 히로시 공편(2001), 앞 의 책, 쪽, 쪽. 38 한철호(2006), 제1차 수신사(1876) 김기수의 일본 인식과 그 의의, 사학연 구 84, 157쪽. 39 김홍집은 국왕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왕정복고와 문호 개방의 과정을 소개하고, 이를 시세에 맞는 [ 自 然 之 勢 ]로 긍정하였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부국강병 정책 을 호의적으로 평가하였다. 하우봉(2001), 앞의 글, 쪽. 40 허동현(2002), 앞의 글, 쪽. 28 근대 한@일 간의 상호 인식

29 저모를 비판적으로 평가하였지만, 조준영( 趙 準 永, )처럼 {그 군 제나 등 나라를 튼튼하게 하고 백성들을 넉넉하게 할 만한 것은 본받을 만하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41 이처럼 조사시찰 단의 대부분의 조사들은 평생 깊게 밴 유교적 가치관을 뛰어넘는 문명관 의 변혁을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전통적인 문화와 제도를 온존시키는 범 위 안에서 국가의 부강과 백성의 후생에 도움이 되는 서양의 제도와 기술 을 받아들이는, 이른바 동도서기론을 바탕으로 한 국가 개혁을 구상하였 다. 동도서기론자들의 국가 구상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된다. 42 첫째, 메이지 일본의 국가통합 장치 중에서 왕정복고, 집권적 정부 형 태, 삼권분립의 권력구조 그리고 행정체계와 관료제도의 효율성에 큰 관 심을 보였지만, 민권의 확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구체적으로 일본 의 사법제도와 경찰제도, 군제와 군사력에 관심을 보였다. 둘째, 전통적인 경제관을 가지고 일본을 바라본 이들 은 메이지 유신 이후의 경제적 성장은 높이 샀지만 이로 인한 국가 재정 과 민간 경제의 파탄에 대해서 우려를 금치 못했다. 이들은 일본식 산업 진흥 정책을 선별적으로 채택하여 추진하는 입장을 취했는데, 편리함과 재정수입 증대 효과가 있는 시설, 우수한 근대식 광산 채굴 설비와 공법, 기술인력의 양성, 국민계몽과 기술 자립을 위한 박물원과 산 업박람회 개최, 농민 계몽사업을 비롯한 농업진흥 정책의 수용에 대해서 는 적극적이었다. 41 조준영, 문견사건, 허동현 편(1881), 조사시찰단관계자료집 12, 국학자료원, 쪽. 42 허동현(2000), 앞의 책, 97~126쪽, 149~166쪽, 186~207쪽, 219~232쪽;허 동현(2002), 앞의 글, 쪽. 개화기(1876~1910) 조선 지식인의 메이지 유신관 29

30 셋째, 일본의 변화는 대체로 매우 비판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적어도 상공업의 진흥을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 함은 인식하였고, 이용후생의 관점에서 신문의 계몽 기능이나 서양 의학, 맹아원 같은 사회복지 시설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았다. 결국 선별적 으로 서양의 사회제도나 기술을 수용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문명 개화의 원동력이 바로 서구 근대사상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서구 근대 기술의 우월성만 인정하고 그 기술문명 을 꽃피운 토대의 중요성은 인식하지 못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들의 국가 생존전략은 피할 수 없는 서구에 대한 문호 개방과 서양 세력의 진출에 대 응해 서구의 기술과 무기체계는 받아들이되 전통적 체제나 가치는 강화하겠다는 것으로, 근대 국민국가를 창출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미봉 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도서기론자들이 제기한 선별적 서구 문물 수용 론은 개신 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쳐 개화상소 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특 히 임오군란 이후 1882년 8월에는 국왕에 의해 국가 정책으로 천명되자 동도서기를 주장하는 전직 관료와 재야 유생들의 개화상소가 이어졌다. 43 동도서기론의 정연한 논리는 1882년 12월 윤학선( 尹 學 善 )의 상소에서 잘 나타난다. 44 아! 서법이 나오게 되자 그 기계의 정밀함과 부국의 방법에 있어서는 비 록 주를 일으킨 여상이나 촉을 다스린 제갈량이라 할지라도 그 사이에 43 권오영(1990), 동도서기론의 구조와 그 전개, 한국사시민강좌 7, 86 96쪽. 44 日 省 錄 고종 19년 10월 7일조. 역문은 권오영(1990), 앞의 글, 92 93쪽에서 재인용. 30 근대 간의 상호 인식

31 간여하여 논의할 수 없게 되었다.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우의 윤리 는 하늘로부터 얻어서 본성에 부여된 것인데, 천지에 통하고 만고에 뻗 치도록 변하지 않는 이치로 위에서 道 가 된 것이다. 백성에게 편하고 나라에 이로운 것으로 밖에 드러나 器 가 되는 것이니, 제가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은 기이지 도가 아닙니다. 이처럼 서구나 메이지 일본의 근대문물 중 유교 도덕을 해치지 않는 기술과 무기 등을 수용하려 한 채장보단( 採 長 補 短 )의 동도서기론에 입각 한 메이지 유신관은 1880년대 전반을 풍미하였다. 물질과 정신을 구분해 유교 문명의 본질을 해치지 않는 기술 등만을 받아들이려는 배제와 수용 의 논리는 시대와 상황이 바뀌면서 점차 수용 쪽으로 기울었고 그 폭도 기술과 제도에서 정신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이 가시 화되면서 배제의 논리도 계속 제기되었다. 유교 문명과 근대 문명을 절충 하려 한 동도서기론자들은 유교적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메이 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비판할 수 있었다. 45 IV. 문명개화론자의 메이지 유신 인식 서세동점의 시대를 맞아 일본은 [서구의 충격(western impact)]에 발 빠르 게 대응해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형 국민국가를 이루면서 지역의 중심으 로 거듭났다. 이후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힘]을 키워야 한 45 장인성(2001), 앞의 글, 쪽, 쪽. 침략자로서 일본에 대한 부 정적 인식은 1900년대까지 이어졌다. 이에 대해서는 유영렬, 한말 애국계몽언 론의 일본 인식, 히로시 공편(2001), 앞의 책, 쪽. 개화기(1876~1910) 조선 지식인의 메이지 유신관 31

32 다고 생각한 현실주의적 개화파 지식인들의 눈에 일본은 야만이 아닌 문 명의 상징으로 비치기 시작하였다. 이제 일본은 더 이상 야만의 상징인 왜가 아니라 따라 배워야 할 문명으로서 화( 和 )로 다가왔으며, 이러한 문 명관의 변화는 1882년 제3차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박영효가 남긴 기 행문 사화기략( 使 和 記 略 ) 의 제목이 잘 말해준다. 이들 문명개화론들은 메이지 일본을 새로운 서구 중심 국제질서 속에서 조선의 생존을 위해 따 라 배워야 할 이상적 개혁 모델로 인식하였다. 46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조 사시찰단의 홍영식( 洪 英 植, 1855~1884)과 어윤중( 魚 允 中, 1848~1896)이 귀 국 후 국왕에게 복명한 다음의 문답에 잘 나타난다. 47 고 종: 일본의 제도가 장대하고 정치가 부강하다고 하는데 살펴보니 이와 같더냐. 홍영식: 일본의 제도가 비록 장대하나 모두 모이고 쌓여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재력에 이르러서는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매우 많으므로 항상 부족함을 근심합니다. 그 軍 政 은 강하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마음과 힘을 하나로 모아 이룩한 것입니다. 일본이 노력한 바를 갖고 현재 이룩된 것을 보면 진실로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고 종:오로지 부강만을 도모하던 전국시대와 동일하더냐. 어윤중: 진실로 그러합니다. 춘추전국은 바로 小 戰 國 이며 오늘날은 바 로 大 戰 國 이라 모든 나라가 다만 智 力 으로 경쟁할 뿐입니다. 현재 형세를 돌아볼 때 부강함이 아니면 국가를 지키지 못하므로 상하가 한뜻으로 노력할 것이 바로 이 한 가지 일일 46 허동현(2004), 앞의 글, 쪽. 47 承 政 院 日 記 1881년 9월 1일조. 32 근대 한@일 간의 상호 인식

33 뿐입니다. 특히 어윤중은 {일본 사람들은 일의 이익과 손해를 따지지 않고 단연 히 감행하므로, 잃는 바가 있더라도 국체( 國 體 )를 세울 수 있었다. 청나 라 사람들은 낡은 관습에 연연해 허송세월하며 날을 보낸다. 이로써 천하 를 보면 이해를 돌아보지 않고 행하는 자가 성공한다}고 하여 메이지 일 본의 근대화 정책을 높이 평가했다. 48 청국은 [악의 반면교사]이고 일본은 그러한 청국을 대체하는 이상적 모델이라고 본 그의 일본 진단은 문명개 화론자들의 일본관을 잘 대변한다. 49 이러한 인식은 윤치호( 尹 致 昊, 1865 ~1945)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50 그는 1884년 6월 1일 고종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하였다. 51 청국은 사람이 많고 땅이 커서 일본의 11배나 됩니다. 그런데 일본은 30여 년 내외로 更 振 作 하여 문명과 부강을 사람들이 일컫게 되었 48 어윤중(1881), 수문록, 허동현 편(2000), 조사시찰단관계자료집 13, 국학자 료원, 7쪽. 49 장인성(2001), 앞의 글, 186쪽. 50 그의 중국에 대한 혐오감은 지인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서한에 잘 나타난다. {중국에 대한 내 의견을 말해보겠습니다. 중국이란 나라는 마치 더럽기 짝이 없는 물이 가득 괴어 있는 웅덩이처럼 느껴집니다. 물은 괴이면 썩어가고 잡초가 덮이고 진흙과 벌레가 가득 차 더러워지기 마련입니다. 중국은 낡아빠 진 집과 흡사합니다. 그 지붕은 이제 현대를 휩쓸어가려고 하는 강한 폭 풍이 불어 닥치기만 하면 제일 먼저 날아갈 차비를 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늙 은 바보영감과 아주 똑같습니다.} 윤치호, 윤경남 역(1995), (국역) 좌옹 윤치 호 서한집, 효산문화, 32 33쪽. 51 윤치호, 송병기 역(2001), 앞의 책, 쪽. 개화기(1876~1910) 조선 지식인의 메이지 유신관 33

34 고 60년이나 외국과 더불어 통상한 청국보다 백 배나 더 낫습니다. 그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청국은 옛것만 지켰으나 일본은 능히 옛것을 고쳐 새것을 본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이 두 개의 본보기가 있습니다. 새것을 쫓고 옛것을 지키는 이익과 손해가 분명하여 의심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윤중과 윤치호 두 사람은 일본 시찰과 유학을 통해 일본형 국민국가를 향후 조선에서 실현 가능한 국가 모델로 삼는 개혁 구상을 할 수 있었다. 52 특히 어윤중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이룩한 국가, 경 제, 국민, 문화통합 장치를 모델로 삼아 개혁 추진 주체로서 집권적 정부 형태의 도입, 차관 도입과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 계획의 입안, 서구의 근 대사상과 기독교 수용, 그리고 근대국민의 형성을 위한 신분제 타파와 교 육의 진흥을 도모하는 혁신적 국민국가 수립론을 세웠으며, 이는 갑신 정변을 주도한 김옥균( 金 玉 均, 1851~1894), 홍영식, 박영효( 朴 泳 孝, 1861~ 1939) 등이 꿈꾼 개혁 구상의 원형이 된다. 53 김옥균은 갑신정변을 일으키 기 이전부터 {일본을 모델로 청하려 백방으로 분주}하였으며, 54 갑신정변 실패 후 망명지 일본에서 올린 상소에서 메이지 일본을 모델로 한 근대화 52 허동현(2001), 어윤중(1848~1896)의 개화사상 연구:{온건} 개화파 내지 친청 사대파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사상사학 17, 442~467쪽;허동현 (2006). 개화기 윤치호의 해외체험과 문화수용, 한국문화연구 11, 쪽. 53 허동현(2002), 앞의 글, 쪽. 어윤중을 친청 성향의 온건개화파로 보는 학설에 대한 비판은 위의 어윤중의 개화사상 연구 참조. 54 서재필(1935), 회고 갑신정변, 민태원(1947), 갑신정변과 김옥균, 국제문화 협회, 82쪽. 34 근대 간의 상호 인식

35 정책을 다시 추진할 것을 건의한 바 있었다. 55 갑신정변( )과 갑오 경장( ~ ) 등을 주도한 친일 성향의 문명개화론자들은 일본 을 모델로 한국에 국민국가를 수립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56 이들 에 의해 다음 인용문에 보이듯이, 전통적인 일본 이적관이 불식되고 전근 대에서부터 항상 따라 배워야 했던 우월한 문명이었던 것으로 인식되는 타자 규정의 역전 현상이 초래되기도 했다. 57 일본 사람은 서양 개화를 模 本 하기 전에도 우리보다 백 배나 문명한 사람들이요 서양 정치와 풍속을 배우기 시작한 후에 주야로 힘써서 30 년 동안에 세계가 놀라게 진보하였으되 메이지 원년에 상하의원을 배 설하지 않고 겨우 메이지 23년에서야 국회를 시작하고 또 상하의원을 設 施 하기 전에 오히려 미흡한 일이 있을까 하여 극히 총명한 위원들을 구미 각국에 파송하여 상하의원의 제도와 장정과 사정을 자세히 관찰 하여 채용하였으니 일본으로도 이같이 삼가서 하의원을 배설하였거늘 우리는 외국 사람과 통상 교제한 후에 몇 해 동안에 배운 것이 紙 捲 煙 먹는 것 한 가지밖에는 없으나. 55 {일본은 이미 開 明 의 道 를 취하여 문화와 기예를 닦고 무장을 갖추어, 다른 부 강한 국가들과 거의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 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여, 어리석고 우매하며 술에 취하고 미친 것과 같아서, 세계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여 온 천하로부터 모욕을 자초하고 있으니, 이것 은 전혀 부끄러움을 모르는 행동입니다.} 김갑천 역(1990), 朴 泳 孝 의 建 白 書 : 내정개혁에 대한 1888년의 상소문, 한국정치연구 2, 252쪽. 56 최영호(1990), 앞의 글, 61 75쪽;유영익(1990), 갑오경장 연구, 일조각, 쪽;왕현종(2003), 한국 근대국가의 형성과 갑오개혁, 역사비평사, 쪽 참조. 57 독립신문 1898년 7월 27일자 논설 ;장인성(2001), 앞의 글, 195쪽. 개화기(1876~1910) 조선 지식인의 메이지 유신관 35

36 사실 비민주적 집권정부로 특징지어지는 메이지 유신기에 만들어진 일본형 국민국가의 국가통합을 위한 장치들은 다원화된 근대 시민사회를 창출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지만, 서구의 제도를 부분적으로 모 방한 당시 일본의 통치체제는 입헌체제로 나아가는 과도기 체제였고, 삼 권분립 체제를 갖추었기 때문에 외형적으로는 근대 정치체제의 발전 방 향과 일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의 기구는 일본처럼 시민계층이 존재하지 않았던 당시 조선이 본보기로 삼을 수 있는 발전 모 델일 수 있었다. 58 그러나 개혁의 모델로서 메이지 일본을 보는 인식은 불변의 고정관념 은 아니었다. 윤치호, 박영효, 서재필( 徐 載 弼, 1864~1951) 같은 이들은 힘 을 중시하는 현실주의적 문명개화론자로서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황인종 주의나 아시아 연대론에 영향을 받아 일본을 독립의 옹호자로 보기도 했 다. 그러나 일본이 가면을 벗고 침략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자 일본에 대 한 반감을 드러내거나 반일 태도를 노정하였다. 59 대표적 인물로는 윤치호 를 들 수 있다. 60 그는 1881년 5월부터 1883년 4월까지 일본에 유학함으 로써, 이미 살펴본 것처럼 메이지 일본을 모델로 하는 일본 지향형의 개혁 58 허동현(2002), 앞의 글, 쪽. 59 갑신정변을 주도한 친일 개화파와 갑오경장 주도세력은 일본을 독립과 개화의 진정한 지지자로 보았지만, 갑신정변 시 일본은 친일 개화당을 끝까지 지지하 지 않았고 갑오경장 시에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일본은 한국의 보호국화를 꾀하는 등 침략자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냈다. 60 박영효도 청일전쟁 승리 후 일본의 침략성이 가시화되자 반일활동을 전개한 바 있었다. 유영익(1998), 박영효와 갑오경장, 동학농민봉기와 갑오경장, 일 조각, 77 84쪽. 36 근대 간의 상호 인식

37 사상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 실패 이후 청국의 압제로 인해 자력 에 의한 조선 개혁의 가능성이 없어지자 차선책으로 영국이나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품기도 했으며, 년 청일전쟁 승리 후 일본의 침략 야욕이 전면으로 드러나자 일본에 기댄 조선 개혁의 꿈을 거두었다. 62 그는 삼국 간섭(1895년 4월 23일)으로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 기도가 물거품으로 돌아가자 외부협판으로 노선을 취하면서 박영효가 배일정책을 펼치는 데 힘을 보탰다. 63 특히 그는 민비 시해 후 러시아를 조선의 개혁을 지원해줄 문명국으로 보기 시작했지만, 러시아가 61 이러한 그의 구상은 1890년 5월 18일의 일기에 일목요연하게 담겨 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오늘의 조선이 선택할 길은 다섯이다. 다섯째, 영국이나 러 시아의 지배. 분명히 셋째, 넷째보다 이것이 훨씬 나은 선택이다. 영국이나 러시 아 지배 아래 인민은 인민으로서 많은 부분 고통이 제거된 상황을 맞을 것이고 여러 이득을 향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여러 정황을 보건대 나는 러 시아의 지배보다는 영국의 지배를 더 좋게 여긴다. 이 마지막 선택을 바라는 나 는 자포자기적이다. 그러나 처음 두 가지는 일어날 가능성이 없고 그 다음 두 가지는 견뎌낼 수가 없다.} 윤치호 일기 1890년 5월 18일자. 윤치호, 박정신 역(2003), 국역 윤치호 일기 2, 연세대학교 출판부, 72~73쪽. 62 윤치호의 눈에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으려는 일본은 이제 조선 개혁을 도울 문 명국이 아니라 침략자로 비칠 뿐이었다. {과거 수개월 동안 일본은 행동 면에 서 조선의 이익을 위해 아무런 관심도 보여주지 않았다. 일본은 자국에 이익이 되고 조선을 해치게 되는 모든 것을 탈취하려 했고 탈취하고 있다}고 하 거나 {그들(일본 외교관들)은 과거 유럽인들이 일본에 쓴 모든 야비한 속임수 를 조선에 쓰고 있다}고 보아 일본의 침탈 행위를 꼬집은 그의 1895년 8월 5일 자와 9월 7일자 일기에는 일본에 대한 실망감이 넘쳐흐른다. 국사편찬위원회 편(1971), 윤치호 일기 4, 54쪽, 62 63쪽. 역문은 유영렬(2004), 개화지식 인 윤치호의 러시아 인식,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1, 105~106쪽. 63 허동현(2006), 앞의 글, 쪽. 개화기(1876~1910) 조선 지식인의 메이지 유신관 37

38 침략자의 모습을 드러내자 러시아에 기댄 조선 개혁의 꿈도 거둬들였다. 64 이후 독립협회에 참가해 반러시아 운동을 주도하면서 [내부혁명]의 길을 모색하기도 하였지만, 65 그가 꿈꾼 내부혁명은 수구세력과 대한제국 황제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66 이후 러시아를 조선의 생존을 위협하는 최대 위협세력으로 본 그는 일본이 주도하는 [극동 3국 제휴론] 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67 윤치호의 외세에 대한 한결같은 판단 준거는 어 떤 외세가 그때 조국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지 여부였다. 68 다시 말해 윤치 64 이는 {그러한 비열한 행위(조선 왕비 살해행위)는 일본이 이제까지 해온 어떠 한 행위보다도 조선인을 러시아에 더욱 호의적으로 기울게 했다. 이제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조선 왕비의 피로 물든 불신과 혐오의 검은 물결이 흐르는 건널 수 없는 강이 가로놓여 있다}고 해 민비 시해에 대한 분노가 물씬 풍기는 1895 년 12월 4일자와 {우리가 반드시 외부의 영향으로 개혁되어야 한다면, 우리 는 일본인보다는 유럽인을 선호한다}고 쓴 같은 해 12월 26일자 일기가 웅변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편(1971), 윤치호 일기 4, 101쪽, 112쪽. 역문은 유영렬 (2004), 앞의 글, 107쪽. 65 윤치호 일기 1890년 5월 18일자. 역(2003), 앞의 책, 쪽. 66 신용하(1976), 독립협회 연구, 일조각, 515~525쪽;유영렬(2004), 앞의 글, 쪽. 67 윤치호 일기 1902년 5월 7일자. 국사편찬위원회 편(1971), 윤치호 일기 5, 327쪽,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에는 동일성에 기초한 감정 과 이해의 공통성이 있다. 극동을 황인종의 영원한 보금자 리로 지키고, 그 보금자리를 자연의 뜻대로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하여 공동의 목표와 공동의 정책과 공동의 이상을 가져야 한다.} 68 이 점은 그가 지인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옮겨놓은 1905년 12월 12일자 일기 에 잘 나타난다. {내 행동이 당신을 혼동시키나요? 나는 러시아가 한국의 개혁 을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러시아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내가 속았다 38 근대 간의 상호 인식

39 호의 메이지 일본 인식은 국제와 국내 정치 현실의 변화에 따라 바뀌었지 만, 그 호오와 긍부의 일관된 기준은 조국과 민족의 생존이었다. 그의 외 세에 대한 모순된 인식은 외세가 아닌 민족을 주어로 해서 볼 때는 일관 되어 있었다. 69 문명을 기준으로 볼 때 개화기에 한국인이 갖게 된 일본에 대한 고정 관념 중 하나는 일본이 서구 문명의 중심국이 아니라 그 주변부에 불과 한 이류 국가로 본받을 만한 나라가 아니라고 평가절하하는 견해이다. 이 러한 관념은 19세기 후반 약육강식의 사회진화론이 지배하는 세계질서하 에서 유교와 전제왕조는 국가의 번영을 더 이상 담보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독교와 미국식 민주주의 체제를 받아들여 새로운 국가를 세워야 한다 고 본 서재필과 이승만( 李 承 晩, 1875~1965)으로 대표되는 서구 중심적 친 미 개화파들에게서 비롯되었다. 70 이들에게 일본은 이상적 모델이 아니라 는 것을 알자마자, 비록 친러가 승진과 부를 의미했지만, 나는 러시아에 등을 돌렸다. 나는 한국을 위하는 범위 내에서만 일본에 호의적이다. 만일 나의 일본 에 대한 믿음이 식었다면, 그것은 다만 어떤 이들이 그렇다고 믿어라 하듯 일본 의 자비와 은혜가 충만한 관음보살이 아니고 희생만을 강요하는 神 像 임을 알 았기 때문일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편(1971), 윤치호 일기 6, 탐구당, 327 쪽, 역문은 유영렬(2004), 앞의 글, 118쪽. 69 장인성(2001), 앞의 글, 쪽;허동현(2006), 앞의 글, 쪽. 70 이 점은 {나는 메이슨가에 있는 장로교회 예배당에 다녔는데 그곳을 일요일마 다 반드시 갔다. 믿음과 사랑의 복음을 인류에게 전해준 그리스도의 뒤 를 잇기로 맹세한 것도 이때이었다. 이 종교적 영향은 나의 일생을 통하여 위대 한 힘을 주었다. 박영효에게 본국 사정을 듣게 되자 나는 직접적으로 국 가를 위하여 큰일을 하여볼 좋은 기회가 닥쳐왔다고 깨달았다. 미국에서 오랫 동안 내가 마음 깊이 그리던 자유와 독립의 이상을 실천할 千 載 一 遇 의 시기가 돌아온 것이다}라는 서재필의 회고에서, 그리고 {예수교는 본래 교회 속에 更 개화기(1876~1910) 조선 지식인의 메이지 유신관 39

40 [후진적 근대]로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할 반면교사였다. 71 따라서 이들의 눈에 비친 메이지 유신으로 촉발된 근대 일본의 이미지는 부정적일 수밖 에 없었다. 이는 미국, 일본, 러시아의 수준을 기독교 사회화의 정도에 따 라 평가한 [ 立 國 以 敎 化 爲 本 (교화로써 나라를 세울 것)]이라는 1900년대 초 에 쓴 것으로 보이는 이승만의 논설에 여실히 드러난다. 72 [기독교의] 교화가 융성한 나라에서는 백성이 정권을 장악하기 때문에 반란@ 侵 欺 猜 忌 등의 폐단이 없다. 지금의 미국이 그러한 예 이다. 政 法 을 교화보다 우선시하는 나라에서는 임금과 백성이 모두 정 치를 하는 셈이다. 그래서 무릇 각국의 良 法 과 美 規 를 찬란하게 두루 갖추고는 있지만 이따금 뇌물과 청탁이 성행하여 투표할 때에 돈을 주 고 사람을 사는 등의 갖가지 더러운 일이 일어난다. 오늘날의 일본이 그러한 예이다. 심지어 전연 교화에 힘쓰지 않는 나라도 있으니, 비록 천하를 雄 視 하고 해외에 국위를 떨치고는 있지만 정변이 자주 일어나 國 步 에 어려움이 많다. 오늘날의 러시아가 그러한 예이다. 이것이 어찌 張 하는 주의를 포함한 고로 예수교가 가는 곳마다 변혁하는 힘이 생기지 않는 데 없고, 한번 된 후에는 장진이 무구하여 上 等 文 明 에 나아가느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땅히 이 관계를 깨달아 [예수교]를 서로 가르치며 권하여 실상 마음으로 새것을 행하는 힘이 생겨야 영원한 기초가 잡혀 오늘은 비록 구 원하지 못하는 경우를 당할지라도 장래에 소생하여 다시 일어나볼 여망이 있을 것이오}라고 하여 한국 재활의 희망을 기독교에서 찾은 이승만의 글에 잘 나타 난다. 김도태(1972), 서재필 박사 자서전, 을유문화사, 153쪽, 쪽;리 승만(1903), 예수교가 대한 장래의 기초, 신학월보 ;원영희 외 편(1994), 뭉 치면 살고:1898~1944 언론인 이승만의 글 모음, 조선일보사, 150쪽. 71 허동현(2004), 앞의 글, 쪽. 72 이승만, 옥중잡기 [유영익(2000), 이승만의 <옥중잡기> 백미, 유영익 편, 이승만 연구, 연세대학교 출판부, 37쪽에서 재인용]. 40 근대 한@일 간의 상호 인식

41 정법은 교화를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쉽게 깨닫게 하는 분명 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기독교와 민주주의를 서구 문명의 핵심으로 파악한 친미 성향의 개화 파 인사들, 즉 서구 중심주의자들에게 미국은 문명화된 이상적 모델로, 일본과 러시아는 아직 야만을 완전히 벗지 못한 반면교사로 이해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기독교를 유교를 대체할 새로운 문명이자 정신적 지주로 보고 미국식 민주 공화제를 전제 왕권과 양반 지배사회를 대신할 국가체 제로 받아들인 서구 중심주의자들의 눈에 천황대권을 헌법에 규정하고 있으며 신도( 神 道 )가 지배하는 천황제 국가 일본은 본받을 게 못 되는 [후 진 근대]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73 서구 중심주의자들이 메이지 유신 이 래 일본이 이룩한 근대를 본받을 게 못 되는 것으로 깎아내린 이유는 문 명론적 시각에서는 보편적 서구 근대의 정신적 기반인 기독교를 받아들 이지 않고 일본 고대의 천황제와 신도를 그 대체물로 하여 만들어진 일본 근대의 특수성을 비문명적 요소로 보았기 때문이다. V. 맺음말 본고에서는 단순한 왕정복고의 역사적 사실로서의 메이지 유신이 아니라 근대 군국주의 일본의 초석이 되었던 메이지 유신기에 만들어진 제 변혁 의 성과를 개화기 조선인들이 문명론적 관점에서 어떻게 인식하였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다음과 같은 점을 구명할 수 있었다. 73 허동현(2004), 앞의 글, 쪽. 개화기(1876~1910) 조선 지식인의 메이지 유신관 41

42 첫째, 개화기 약육강식의 새로운 국제질서하에서 전통 유지와 근대로 의 변혁을 둘러싸고 조선인들이 겪은 문명관의 갈등 양상을 살펴봄으로 써, 화이론적 문명관을 묵수하는 위정척사파, 유교 도덕을 지키면서 근대 기술문명의 장점을 취하려 한 동도서기론자, 그리고 일본과 서구 근대를 새로운 문명으로 본 성향의 문명개화론자들이 메이지 일본이 이룩한 근대적 변혁에 대해 호오와 긍부가 엇갈리는 인식을 갖고 있었음 을 밝혔다. 둘째, 대원군과 위정척사파 지식인들은 세상을 유교적 도덕이 지배하 는 중화의 문명세계와 유교의 교화가 미치지 않은 야만세계로 이분하는 화이론적 세계관에 입각해 일본을 중화 문화권 밖에서 이탈하여 서구의 양이들과 같아진 야만국이라고 보는 왜양일체의 부정적 일본관을 갖고 있었다. 또한 일본이 1894년의 동학농민군과 1896년, 1905년, 1907년에 일어난 의병의 반일운동을 군대를 동원해 탄압하고 수천명의 애국적 동 학농민군과 의병을 살상하는 등 제국주의 침략 국가로서의 면모를 드러 냄에 따라 성향의 위정척사파 지식인들과 동학농민군 계 열의 사람들을 비롯한 백성들의 가슴에 침략자란 인상을 굳게 심어주었 다. 따라서 반문명적 침략 세력으로 메이지 일본을 보는 시각은 대원군과 항일 의병을 이끈 유생 의병장, 그리고 1894년 척양척왜를 외친 동학농민 군 같은 백성들의 가슴에 각인되고 말았다. 그러나 화이론이란 문명론적 관점에서 메이지 일본을 침략자로만 인식했던 부정적인 타자 인식과 고정 관념은 조선 왕조의 멸망과 유교 문명의식의 소멸과 더불어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져갔다. 셋째, 1880년대 정부의 개화정책 추진에 힘입어 서양과 일본의 앞선 기술과 농법 등을 받아들이자는 동도서기론을 수용한 개신 유학자들이 42 근대 간의 상호 인식

43 늘어나면서 화이론적 메이지 일본 인식은 유교 지식인 사이에서도 점차 힘을 잃어갔다. 이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이룬 부국강병과 산업화 를 높이 평가해 일본을 이용후생에 도움이 되는 기술과 산업을 가진 문명 의 타자로서 인식하였다. 메이지 일본의 근대문물 중 유교 도덕을 해치지 않는 기술과 무기 등을 수용하려 한 채장보단의 동도서기론에 입각한 메 이지 유신관은 1880년대 전반을 풍미하였다. 물질과 정신을 구분해 유교 문명의 본질을 해치지 않는 기술 등만을 받아들이려는 배제와 수용의 논 리는 시대와 상황이 바뀌면서 점차 수용 쪽으로 기울었고 그 폭도 기술과 제도에서 정신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이 가시화되면 서 배제의 논리도 계속 제기되었다. 유교 문명과 근대 문명을 절충하려 한 동도서기론자들은 유교적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메이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비판할 수 있었다. 넷째, 친일 성향의 문명개화론자들은 일본을 모델로 한국에 국민국가 를 수립하려 했으며, 이들에게서는 전통적인 일본 이적관이 불식되고 전 근대에서부터 항상 따라 배워야 했던 우월한 문명으로 인식되는 타자 규 정의 역전 현상이 초래되기도 했다. 개혁의 모델로서 메이지 일본을 보는 인식은 불변의 고정관념은 아니었다. 윤치호, 박영효, 서재필 같은 이들은 힘을 중시하는 현실주의적 문명개화론자로서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황인 종주의나 아시아 연대론에 영향을 받아 일본을 독립의 옹호자로 보기도 했지만, 일본이 가면을 벗고 침략자로서의 면모가 드러났을 때에는 일본 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거나 반일 태도를 노정하였다. 윤치호와 박영효 같 은 이들의 메이지 일본 인식은 국제와 국내 정치 현실의 변화에 따라 바 뀌었지만, 그 호오와 긍부의 일관된 기준은 조국과 민족의 생존이었다. 이 들의 외세에 대한 모순된 인식은 외세가 아닌 민족을 주어로 해서 볼 때 개화기(1876~1910) 조선 지식인의 메이지 유신관 43

44 는 일관되어 있었다. 다섯째, 기독교와 민주주의를 서구 문명의 핵심으로 파악한 친미 성향 의 개화파 인사들, 즉 서구 중심주의자들에게 미국은 문명화된 이상적 모 델로, 일본과 러시아는 아직 야만을 완전히 벗지 못한 반면교사로 이해되 었던 것은 분명하다. 기독교를 유교를 대체할 새로운 문명이자 정신적 지 주로 보고 미국식 민주 공화제를 전제 왕권과 양반 지배사회를 대신할 국 가체제로 받아들인 서구 중심주의자들의 눈에 천황대권을 헌법에 규정하 고 있으며 신도가 지배하는 천황제 국가 일본은 본받을 게 못 되는 [후진 근대]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여섯째, 위정척사파, 동도서기론자, 문명개화론자들이 보인 메이지 유 신 이후 일본에 대한 호오와 긍부의 차이는 실질적인 [힘]과 관념적인 [도 덕] 중 어떤 것을 준거로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느냐에 따라서도 생겨났지 만, 겉으로 [개화와 독립의 옹호자]를 자처하면서 실제로는 [제국주의적 침략자]였던 개화기 일본의 두 모습 때문에 나온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증오의 대상으로서 침략자, 따라 배워야 할 모델, 그리고 따라 배우기에는 미흡한 후진 근대라는 개화기에 시동된 세 가지 유형의 메이지 유신관은 전전( 戰 前 )의 침략을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태도를 증오하면서도 일본형 발전 모델을 따라 배워왔으며, 배우면서도 서구 중심주의의 입장에서 일 본식 모델을 비판하는 오늘날 한국인의 모순적인 일본 인식 태도에도 여 전히 나타난다. 44 근대 간의 상호 인식

45 참고문헌 旗 田 巍 저, 이기동 역(1983), 日 本 人 의 韓 國 觀, 일조각. 국사편찬위원회(1959), 동학란기록 상, 국사편찬위원회. 권세연, 안동격문, 유광열 편(1975), 抗 日 宣 倡 義 文 集, 서문당. 권오영(1990), 동도서기론의 구조와 그 전개, 한국사시민강좌 7. 김갑천 역(1990), 朴 泳 孝 의 建 白 書 :내정개혁에 대한 1888년의 상소문, 한국정 치연구 2. 김기수(1971), 日 東 記 遊, 국사편찬위원회 편, 修 信 使 記 錄, 국사편찬위원회. 김기혁(1990), 개항을 둘러싼 국제정치, 한국사시민강좌 7. 김도태(1972), 서재필 박사 자서전, 을유문화사. 김용덕(1981), 일본의 명치유신론, 동아문화 18. 김용덕(1983), 명치유신학술회의보고, 동양사학연구 18. 김용덕(1991), 일본근대사를 보는 눈, 지식산업사. 김평묵(1909), 代 京 畿 江 原 兩 道 儒 生 論 佯 倭 情 迹 仍 請 絶 和 疏, 重 菴 集 권5, 민족 문화추진위원회 편, 韓 國 文 集 叢 刊 319, 민족문화추진위원회. 리승만(1903), 예수교가 대한 장래의 기초, 신학월보. 서재필(1935), 회고 갑신정변, 민태원(1947), 갑신정변과 김옥균, 국제문화협회. 西 川 長 夫 (1995), 日 本 型 國 民 國 家 の 形 成 : 比 較 史 的 觀 点 から, 西 川 長 松 宮 秀 治 編, 幕 明 治 期 の 國 民 國 家 形 成 と 文 化 變 容, 新 曜 社. 송병기(1990), 위정척사운동: 辛 巳 척사운동을 중심으로, 한국사시민강좌 7. 신용하(1976), 독립협회 연구, 일조각. 安 丸 良 夫 (1994), 年 代 の 日 本 : 維 新 變 革, ( 岩 波 講 座 ) 日 本 通 史 : 近 代 1 16, 岩 波 書 店. 오영섭(1999), 화서학파의 사상과 민족운동, 국학자료원. 柳 永 益 (1983), 한@미관계 전개에 있어서의 일본의 역할, 한@미수교 1세기의 회 고와 전망, 한국정신문화연구원. 柳 永 益 (1993), 흥선대원군, 한국사시민강좌 13. 개화기(1876~1910) 조선 지식인의 메이지 유신관 45

46 柳 永 益 (1998), 박영효와 갑오경장, 동학농민봉기와 갑오경장, 일조각. 柳 永 益 편(2000), 이승만 연구, 연세대학교 출판부. 유영렬(2004), 개화지식인 윤치호의 러시아 인식,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1. 윤경남 역(1995), (국역) 좌옹 윤치호 서한집, 효산문화. 역(2001), 국역 윤치호 일기 1, 연세대 출판부. 원영희 등 편(1994), 뭉치면 살고:1898~1944 언론인 이승만의 글 모음, 조선일 보사. 의암 손병희 선생 기념사업회(1967), 의암 손병희 선생 전기, 의암 손병희선생 기 념사업회. 이상백(1962), 동학당과 대원군, 역사학보 이영호, 東 學 농민의 일본인식과 [ 輔 國 安 民 ] 이념, 김용덕@미야지마 히로시 공편 (2001), 근대교류사와 상호인식 I,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日 本 外 務 省 編 (1936), 日 本 外 交 文 書 5, 日 本 國 際 聯 合 協 會. 장인성(1999), 유신의 아이덴티티와 문명:메이지 유신의 분석틀, 한국정치학회 보 장인성, 근대조선 일본관의 구조와 성격:자기@타자@상황의 함수적 표상으로서 의 일본관, 김용덕@미야지마 히로시 공편(2001), 근대교류사와 상호인 식 I,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田 中 彰 (1987), 明 治 維 新 關 の 硏 究, 北 海 道 大 學 圖 書 刊 行 會. 잰슨(1986), 明 治 維 新 :その 政 治 的 文 脈, 永 井 道 雄 編, 明 治 維 新, 東 京 大 學 出 版 會. 최영호(1990), 갑신정변론, 한국사시민강좌 7. 최익현(1976), 持 斧 伏 闕 斥 和 議 疏, 勉 庵 集 3, 경인문화사. 하우봉(1989), 조선 후기 실학자의 일본관 연구, 일지사. 허동현(2000), 근대 한일관계사 연구: 朝 士 視 察 團 의 일본관과 국가 구상, 국학 자료원. 허동현 편(2000), 조사시찰단 관계자료집 12, 국학자료원. 허동현(2001), 어윤중(1848~1896)의 개화사상 연구:{온건} 개화파 내지 친청 사대파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사상사학 근대 한@일 간의 상호 인식

47 허동현(2002), 조사시찰단(1881)의 일본 경험에 보이는 근대의 특성, 한국사상 사학 19. 허동현(2004), 개화기( ) 한국인의 일본관, 사학연구 76. 허동현(2006), 개화기 윤치호의 해외 체험과 문화 수용, 한국문화연구 11. 한철호(2006), 제1차 수신사(1876) 김기수의 일본 인식과 그 의의, 사학연구 84. 개화기(1876~1910) 조선 지식인의 메이지 유신관 47

48 P E R C E P T I O N S O F T H E O T H E R B E T W E E N K O R E A A N D J A P A N I N M O D E R N T I M E S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조선 인식과 통치방식 - 문명화론을 중심으로 권태억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I. 머리말 II.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조선 인식 III. 조선의 식민지로의 재편 IV. 한국인의 저항과 폭력@ 문명화 선전 V. 식민 통치의 [문명화]로서 미화 VI. 문명화론과 차별의 논리 - 조선 시세@ 민도론과 교화주 일본론 VII. 문명화론의 일본적 특징과 그 한계 VIII. 맺음말

49 I. 머리말 1910년대는 흔히 무단 통치기로 불린다. [무단 통치]의 사전적 의미는 {군 대나 경찰 따위의 무력적 수단을 동원하여 전단( 專 斷 )하는 통치}가 될 것 이며, 한국의 상황에 맞추어 말하자면 헌병 경찰로 상징되는 무력 또는 폭력을 수단으로 하여 총독이 전단하는 통치가 될 것이다. 1910년대를 [무단 통치기]로 부르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연구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1910년대 식민 통치를 특징짓는 폭력성, 강제성, 일방성 을 드러내는 데는 적절하지 않을까 한다. 문제는 그보다 [무단] 통치기라 고 부르다 보면 무단적 방식과 함께 통치 합리화 선전이 적극적으로 행해 졌던 사실이 묻히기 쉽다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일제는 병합과 함 께 언론 통폐합을 실시하여 조선인, 일본인을 불문하고 민간인 발행의 신 문들을 강제 폐간하고 총독부 기관지로서 경성일보( 京 城 日 報 ) (일문), 매 일신문( 每 日 新 聞 ) (국한문), Seoul Press (영문)만 남겨두었다. 이는 조선 총독부가 언론매체가 여론 형성에 미치는 영향력을 간파해 이를 통제하 고 조작하여 여론에 대해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 정연태(2005), 조선총독 데라우치[ 寺 內 正 毅 ]의 한국관과 식민 통치 - 점진적 민족 동화론과 민족 차별 폭압정책의 이중성, 한국 근대사회와 문화 2, 서울 대학교 출판부, 90~91쪽 참조. 그는 여기서 [무단 통치기]라는 시기 구분 명칭 은 문화 통치기를 미화하고 식민 통치의 특성을 오도할 위험성이 있다고 보고, 대신 1910년대 민족 차별 폭압 정책기, 1920@1930년대 민족 차별 회유 정책기, 일제 말 민족성 말살 정책기로 부를 것을 제안했다. 민족 문제와 관련한 일제의 정책 변화를 보여주는 데는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지만 그 시 기 일제 정책의 전체상을 나타내기에는 역시 미흡하지 않을까 한다.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조선 인식과 통치방식 49

50 던 것을 보여준다. 즉 무단 통치라고 해서 헌병 경찰로 대표되는 폭력 강 제 장치 외에 [설득] 도 동원됐던 것이다. 정통성이 없는 이민족의 총독부 였던 만큼 그 필요성은 더했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조선 및 조선인에 대한 이해( 理 解 ), 조선과 관련해 갖고 있었던 이해( 利 害 )관계에 대한 인식 등을 넓은 의미 에서 [조선 인식]이라는 틀 안에서 파악하고, 다음에 이들이 자신의 목적 을 위해 추진했던 시책들이 유발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인들의 불만을 어 떠한 수단을 동원해 잠재우려 했는지 밝히고자 한다. 다만 노골적 폭력이 그 주요한 수단이었던 것은 잘 알려졌으므로 여기서는 이제까지 상대적 으로 간과되었던, 그들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유포했던 통치 합리화 논리 들을 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 핵심이 바로 선정론( 善 政 論 )=문명화론( 文 明 化 論 )이었음을 밝히고, 그 내용과 현실적 기능을 밝혀보고자 하는 것이 다. 필자는 앞서 통감부 설치기 일제의 근대화론=문명화론을 살핀 바 있 다. 최근 최덕수와 함동주는 일본이 이미 1876년 개항을 전후해서 자신 을 조선의 [문명 지도국]으로 내세웠고, 러일전쟁 이후로는 조선으로의 식 민지 진출을 합리화하기 위해 [문명화]를 표방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1910년대의 언론 상황은, 한국에서도 역대 군사정권 시절 언론 통제가 이루어 졌지만 특히 정통성이 부족했던 전두환 정권 시절 언론 통폐합이 단행되었던 사실을 상기하면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권태억(1994), 통감부 설치기 일제의 조선 근대화론, 국사관논총 53 참조. 최덕수(2004), 개항과 朝 日 관계연구 - 상호인식과 정책, 고려대학교 출판부; 함동주(2004), 근대일본의 문명론과 그 이중성 - 청일전쟁까지를 중심으로, 근대계몽기 지식 개념의 수용과 그 변용,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소명출 판;함동주(2006)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한국 식민론과 식민주의적 문명론, 동양사학연구 94 참조. 50 근대 한@일 간의 상호 인식

51 합병을 단행한 일제는 이지원이 밝힌 바와 같이 보다 본격적으로 한국을 식민지로 재편하면서 이를 문명화로 합리화하였다. 본고는 선행 연구를 출발점으로 삼아 그 실상을 보다 자세히 밝혀보고자 한다. 한편 [조선총독부]라는 권력체 내부의 정책 논의 과정은 안타깝지만 알 수 없으므로 어떠한 정책을 시행할 때 겉으로 내세운 명분과는 다른 의도 같은 것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본고에서 는 총독부 어용지로서 국한문체로 발행되었던 매일신보( 每 日 申 報 ) 와 조 선총독부월보( 朝 鮮 總 督 府 月 報 ), 조선총독부조사월보( 朝 鮮 總 督 府 調 査 月 報 ) 등의 정간물, 그 밖에 조선총독부 간행물을 이용해 그들의 조선 인 식을 살피고 그 선전의 내용과 성격, 거기에 담긴 의도 등을 추측해보고 자 한다. II.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조선 인식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아시아,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할 때 자신들의 행 위를 [문명화]로 합리화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문명화의 개념은 그 리스 로마에서 기원한 것으로, 원시(primitive), 야만(barbarism), 혹은 야 생(savage)에 대한 대항 개념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고 한다. 근대에 들어 와 제국주의가 팽창하던 19세기 영국에서 인류학이 발생할 즈음 문명화 무단 통치기 일제가 통치 합리화 논리로서 문명화론을 동원했던 것에 대해서 는 이지원(2007), 한국 근대 문화사상사 연구, 혜안, 88~97쪽 참조. 당시 신문, 잡지 발행이 총독부에 독점되거나 엄격한 통제하에 간행되었던 점 을 감안한다면 일단 이러한 매체에 실린 글들이 총독부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 으로 파악하는 데 큰 무리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조선 인식과 통치방식 51

52 의 문제가 널리 관심을 모으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인류를 동물적인 성격 에서 인간적인 성격으로 진보하는 존재라고 규정하고, 야생으로부터 문명 으로의 [문명의 진보]라는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이와 함께 자신들을 최 고의 문명국으로 간주하면서 그 밖의 세계를 미개, 야만이라고 단정하고, 그곳에 문명을 나누어주는 것이 의무라고 하는 관념, 즉 [문명화의 사명] 이 왕성하게 논의되었다고 한다. 이때 이 문명(civilization)에 수반하는 [시 민적 예절(civility)]이란 프로테스탄트적 윤리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유럽 의 팽창은 곧 기독교적 진리의 전파라는 보편적인 사명의 달성으로 표현 되었다. 이교도 전도( 傳 道 )라는 신의 구원 계획에 대한 기여, [야만인] 혹 은 [미개인]의 문명화라는 위업, 특권을 수반한 [백인의 부담] 등이라는 보 편적 사명이 언급되었던 것이다. 그 바탕에는 문화적 우월성에 대한 확신 이 깔려 있었는데,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과 일본의 식민주의에서도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수사가 풍부하게 사용되었다. 한편 서구와 불평등조약을 맺고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었던 일본은 메이지 유신과 함께 이른바 이와쿠라[ 岩 倉 ] 사절단을 1871년 11 월 구미에 파견하여 2년여에 걸쳐 서구 문명을 광범하고 신속하게 학습하 였다. 그러나 서구 문명에 대한 추수성, 모방성, 예속성으로 인해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자신들과 같은 [문명국]의 반열에 설 수 있 는지 끊임없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었으므로, 대만@조선 등 식민지 衫 本 良 男 (2002), 問 題 提 起 宗 敎 と 文 明 化 の20 世 紀, 宗 敎 と 文 明 化, トメス 出 版, 16~17쪽;위르겐 오스터함멜 지음, 박은영@이유재 옮김(2006), 식민 주의, 역사비평사, 33쪽;박종근 저, 박영재 역(1989), 청일전쟁과 조선, 일 조각, 107쪽 참조. 이 밖에 박지향(1998), 영국 제국주의와 일본 제국주의의 비교(1):인종주의를 중심으로, 영국사학 2 참조. 52 근대 한@일 간의 상호 인식

53 에서 성공적 식민 통치를 실현해 보이고자 했다. 곧 이를 통해 후발 제국 주의 국가이자 비서구권의 유일한 제국주의 국가이지만 서구의 [문명국 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문명국가로서 인정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일본은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의 승리로 자신의 서구 문명 흡수 정책이 적절한 것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일본인들은 승전국의 자부심을 바탕으로 일본 국민성이 우수하다는 자 각을 하게 됐다. 그리하여 다양한 일본 인종 우수설이 제기되었는데, 하가 야이치[ 芳 賀 矢 一 ]의 국민성십론( 國 民 性 十 論 ) (1907)은 이를 집대성한 것이 었다. 그는 이 책에서 충군애국( 忠 君 愛 國 ), 조선숭배( 祖 先 崇 拜 ), 현세적( 現 世 的 ), 자연사랑 등 10개 항목을 일본인들의 우수한 국민성으로 제시하였 다. 두 차례 전쟁에서 증명된 일본 문명과 일본인의 우수성을 내세우면서 이후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제국주의 세력으로 나서게 되었다. 한편 청과 조선을 미개로 보면서, 그 중에서도 대륙 침략의 거점으로 중요한 조선에 [문명화]를 내세워 일본 세력을 침투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이미 1880년대 후쿠자와 유키치[ 福 澤 諭 吉 ]가 시작한 일이다. 10 [문명과 야 Sebastian Konrad(2005), Die Zivilisierung des {Selbst}. Japans koloniale Moderne, in: Boris Barth/Jürgen Osterhammel (편집), Zivilisierungsmissionen. Imperiale Weltverbesserung seit dem 18. Jahrhundert, pp. 245~268 참조. 이 논문의 이용은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의 신종훈 박사의 번역에 도움을 받았다. 南 博 (1994), 日 本 人 論 - 明 治 から 今 日 まで, 岩 波 書 店, 44~47쪽 참조. 그는 당시의 대표적인 일본 국어학@국문학의 전문가인데, 일러전쟁의 승리(1905), 일영동맹(1905), 나아가 黃 人 排 斥 (배일운동) 등에서 일본인의 국제적인 지위가 문제되었을 때 이를 발표하여 이후 일본인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조선 인식과 통치방식 53

54 만의 전쟁]으로 이름 붙여진 청일전쟁에서 10 승리한 뒤로는 서민층 사이에 서 [뒤떨어진 조선, 불결한 조선]이라는 심상이 급속하게 유포되었는데, 겁쟁이, 비굴, 나타( 懶 惰 ), 경박, 인순고식, 편사( 騙 詐 ), 무언( 無 言 ) 등의 모 든 부정적 속성이 언론인, 여행객, 이주민 등에 의해 확대 유포되어 이후 일본인들 사이에서 조선인들은 몽매( 蒙 昧 ) 야만( 野 蠻 )에서 벗어나지 못했 다는 심상이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년 뒤 러일전쟁에서의 승리 후 2년간(1905~1906년) 일본 내에서는 [만한경영( 滿 韓 經 營 )]이란 말이 유행어처럼 나돌면서 만주와 조선에서의 기업 경영을 촉구하는 분위기가 일종의 유행열과 같이 번졌다. 12 이와 함 께 조선을 야만의 땅으로 보면서 이를 문명화시킬 일본인들의 사명이 유 행적으로 고취되기 시작하였다. 13 대륙으로의 세력 침투를 기도하고 있던 일본 정부도 이미 1901년 조선으로의 도항을 자유화한 바 있었다. 14 이에 10 福 澤 諭 吉 이 개화파를 이용해 일본 세력을 침투시키려 했던 것에 대해서는 구 선희(1987), 福 澤 諭 吉 과 1880년대 한국개화운동, 史 叢 32; 潁 原 善 德 ( ), 日 淸 戰 爭 期 日 本 の 對 外 觀, 歷 史 學 硏 究 663, 18~21쪽;이태진 (1997), 서양 근대 정치제도 수용의 역사적 성찰 - 개항에서 광무개혁까지, 震 壇 學 報 84, 92쪽;함동주(2004), 앞의 글, 383~390쪽. 11 함동주(2004), 앞의 글, 383~390쪽; 森 山 茂 德 (2001), 明 治 期 일본 지도자 들의 한국 인식, 한일공동연구총서 2 근대교류사와 상호인식 1,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389쪽 참조. 12 淸 水 文 之 輔 ( ), 論 說 : 事 業 選 擇 の 指 針 を 誤 る 勿 れ, 富 之 朝 鮮 1, 5쪽 참조. 13 권태억(1994), 앞의 글; 朴 羊 信 ( ), 19세기 말 일본인의 조선 여행기에 나타난 조선상, 역사학보 177; 朴 羊 信 ( ), 통감정치와 재한 일본 인, 역사교육 90 참조. 14 일본 제16 제국의회(1901년)는 [이민 보호법 중 개정 법률안]을 통과시켜 일인 54 근대 한@일 간의 상호 인식

55 따라 수많은 모험적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건너오기 시작하였다. 이때 잡 지 등에 실리는 글들에서는 제국민인 일본인들의 만한 이주는 {문명 선진 국인의 야만 미개하고 열등한 인종에 임하는 것} 15 이며, 통감부는 {문명 과 평화의 15 바람을 안고 이 흑암암( 黑 闇 闇 )한 만지( 蠻 地 )와 이 혼혼( 昏 昏 )한 생령에게 남풍을 보내 일루의 광명을 주고 평화를 주고 문명을 강제하고 있다}고 16 하는 등 조선인을 야만시하는 표현을 흔히 볼 수 있다. 한 일본 인은 {실제 일본인 중에는 한인은 아이누 같은 미개 인민으로서 그 운명 도 아이누와 같이 조만간 멸망에 귀착될 것이라고 망신( 妄 信 )하는 자들이 많아 한인들에 대해 조금도 존경과 동정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17 하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1910년 조선을 병탄한 일제는 동문동종( 同 文 同 種 ), 일선동조론 ( 日 鮮 同 祖 論 )을 다시 한 번 내세우면서, 나누어져 있던 형제가 다시 합해 한 집안을 이루는 것으로 합리화하였다. 따라서 조선 인종 자체를 야만 들의 도한을 자유화하였다. 김용섭(1992), 일제의 초기 농업 식민책과 지주 제, 한국 근현대 농업사 연구, 일조각, 43쪽 참조. 15 大 詔 煥 發 と 滿 韓 在 留 帝 國 臣 民, 滿 韓 之 實 業 40( ) [ 資 料 雜 誌 にみ る 近 代 日 本 の 朝 鮮 認 識 2(1999), 綠 蔭 書 房, 518쪽]. 뒤의 책은 이하 朝 鮮 認 識 으로 줄임. 또 쪽수는 원본이 아닌 朝 鮮 認 識 의 그것임. 이하 동일. 16 釋 尾 旭 邦 (1908), 韓 人 は 如 何 に 日 本 を 見 るか, 朝 鮮 1-2( )( 朝 鮮 認 識 2, 324쪽). 17 韓 國 の 近 事 を 論 ず, 獨 立 評 論 39-9( ) ( 朝 鮮 認 識 2, 138쪽). 한 편 20세기 초 일본에서 개최된 박람회에 조선인들이 [전시]되었다가 조선인들 의 항의로 철회된 일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권혁희(2007), 일본 박람회의 [조선인 전시]에 관한 연구 년 제5회 내국권업 박람회와 1907년 도쿄권 업 박람회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참조.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조선 인식과 통치방식 55

56 인종으로 보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모순이 되면서 그런 글들은 점차 사 라질 수밖에 없었다. 18 하지만 조선인, 조선 사회를 미개시하거나 조선인 들의 악덕을 늘어놓는 일은 여전하였다.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 [ 寺 內 正 毅 ]도 부임 초 총독부의 고위 관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조선을 [암 흑]이라고 표현하였다. 19 또 1915년 조선인들에게 문명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해 시정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朝 鮮 物 産 共 進 會 )를 개최했는데 그 목적은 문명의 실물( 實 物 )을 조선인들의 [면전( 面 前 )에 전시]하여, 문명의 실제에 접한 적이 없는 조선 인민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들의 과거가 잘 못된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20 말하자면 조선총독부 의 조선 인식은 특히 러일전쟁 이후 대부분의 논자들이 보여주었던 [조선 인 야만@미개관]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문제는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아무리 일본인들이 러일전 쟁의 승리에 취하여 문명 선진국민으로 자부하면서 아직 미개인 조선인 들을 문명화시키고, 황폐한 상태에 놓여 있는 조선을 개발하는 것이 자신 들의 사명이라고 호언한다 해도 과거에 조선을 통해 선진 문명을 받아들 였던 엄연한 역사가 있었다. 게다가 조선에 온 일본인들의 행실이 조선인 18 이와 같이 일본의 정책적 의도에 따라 한국인상이 달라지는 것에 대한 서술은 南 富 鎭 (2002), 近 代 日 本 と 朝 鮮 人 像 の 形 成 遊 學 叢 書 28, 勉 誠 出 版, 101~102 쪽 참조. 19 寺 內 正 毅 (1913), 倂 合 後 官 制 改 定 ニ 付 本 府 及 所 屬 官 署 課 長 以 上 ニ 對 スル 訓 示, 朝 鮮 統 治 三 年 間 成 績, 조선총독부, 附 錄 [ 總 督 諭 告 및 訓 示 ] 9쪽 참조. 20 黑 田 甲 子 郞 (1920), 元 帥 寺 內 伯 爵 傳, 773쪽. 공진회와 관련해서는 金 泰 雄 (2002), 1915년 京 城 府 物 産 共 進 會 와 日 帝 의 政 治 宣 傳, 서울학연구 18 참 조. 56 근대 한@일 간의 상호 인식

57 들의 분노와 멸시를 불러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개항 이후 모험주의자 들이 아무런 자본도 없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건너와서 가짜 상품을 파는 등 사기행각을 벌이고, 이러저러한 불법행위를 일삼아 조선인들과 분쟁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은 조선 말 대한제국기의 공문서를 조금만 보아도 알 수 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이 보여준 반일구호와 행동은 바로 이러한 약탈적 경제 행위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조선에 건너와 사 업이 실패해 의식이 궁해지면 심지어 처자에게 매춘을 시키기도 한다는 비판 21 이 일본인들 사이에서조차 나오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의 멸시감을 불러일으키는 행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지적한 사람은 기묘하게 도 조선으로의 식민지 진출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잡지 조선( 朝 鮮 ) 의 주필 샤쿠오[ 釋 尾 旭 邦 ]였다. 즉 在 韓 邦 人 [일본인 - 인용자]의 가장 큰 결점은 出 稼 的 근성이다. 下 婢 가 부족하다는데 거리에는 매춘부가 가득 찼고, 특히 우리 가 주의를 외쳐 부르고 싶은 것은 韓 地 에 있어 풍속과 風 格 이다. 일본 부인의 복장은 모국에서도 숙제가 된 지 오랜데 吾 人 은 이 韓 土 에 있어 가장 부인복의 개량을 느끼길 통절히 한다. 빨간 湯 卷 을 거리낌 없이 散 見 시키고, 치마가 바람에 불리면 다리에서 허벅지까지 드러나는 복 장은 심한 경우는 치마를 들어 올리고 서서 방뇨 옥외에서 목욕 釋 尾 旭 邦 (1908), 앞의 글( 朝 鮮 認 識 2, 324쪽). 22 釋 尾 旭 邦 ( ), 論 說 朝 鮮 に 於 ける 日 本 人, 朝 鮮 1-3( 朝 鮮 認 識 2, 361~362쪽). 出 稼 란 [일정 기간 집을 떠나 타관, 타국에 가서 돈벌이를 하는 행위, 또는 그 사람]을 일컫는다. 湯 卷 은 목욕할 때 입는 옷. 釋 尾 旭 邦 의 조선 에서의 활동 및 조선관에 대해서는 최혜주(2005), 한말 일제하 釋 尾 旭 邦 의 내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조선 인식과 통치방식 57

58 하는 정도였으니, 이들이 문명인으로서 조선인들의 존경을 기대하기는 어 려운 일이었다. 긴게츠세이[ 吟 月 生 ]란 필명의 한 일본인은 자신도 조선인 을 만나면 무조건 [요보 요보] 라고 부르는 등 경모( 輕 侮 )하는데, 실제로는 자신도 조선에 와서 처음 전차나 전기를 보았다고 실토하면서, {한인이라 고 하면 곧바로 비문명을 연상하게 되지만 저들의 일상생활에서 일본인인 우리가 배우는 것도 적지 않다. 한인으로서 조금 이해력이 있는 자 는 항상 문명을 자랑하는 일본인의 결점을 웃고 있다}고 말하였다. 23 일본 인이 이렇게 느낄 정도였으니 당사자인 조선인들은 얼마나 분노하였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황성신문 은 이러한 일인들의 언동에 대하여 다 음과 같이 쓰면서 오히려 일본을 [중국 변방의 잘난 체하는 오랑캐[ 夜 郞 ]] 로 비유하였다. 저는 자신을 문명 고등국 우등 인종으로 자칭하고 우리 한을 미개, 하 등국 열등 인종으로 욕을 하니 그 얼마나 오만함의 심함인가. 일본이 자고로 그 문학이며 기술이며를 우리 韓 으로부터 수입하여 그 어두움 을 깨우쳤으므로 韓 의 일본의 선진됨은 저들 역시 알 것이어늘, 그 과 장하는 바는 바로 明 治 이래 30여 년간에 그 정치를 개량하여 우리 韓 과 비교하면 약간 앞서 깨달은 차이가 있다 하겠거니와 어찌 나라의 등급, 인종의 고하우열로 망녕되이 욕을 더하는가. 소위 夜 郞 의 스스 로 잘난 체함이 24 한 활동과 조선 인식,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5집 참조. 23 吟 月 生 ( ), 韓 國 下 等 の 民 情, 滿 韓 之 實 業 43( 朝 鮮 認 識 3, 78~79 쪽). 24 { 論 說 辨 朝 鮮 新 報 辨 妄 之 謬 }, 皇 城 新 聞 ( ), 2면. 58 근대 한@일 간의 상호 인식

59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자부심에서 조선인 관리 중에는 오히려 {한국은 일본의 선진국이라고 자랑하는} 25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사실 앞 시대에 조선이 일본에 앞선 문명을 전해주었다는 사실은 당시 일본인 식자들도 잘 알고 있었고, 그에 따라 조선인들을 함부로 대하지 말 것을 당부하곤 했다. 합병 이후에도 일본인들의 조선인들에 대한 멸시와 압박은 변함이 없 었다. 이미 조선을 식민지화하였으므로 폭력은 더욱 노골적이 될 수밖에 없었고, 민족 차별적인 정책들이 시행되고 있는 현실에서 일본인들의 조 선(인)에 대한 멸시감은 더욱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에 비례하여 조선인들의 반발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조선인들의 문명화에 대한 열망은 변함이 없었 고, 일본인들 또한 이를 알고 있었다. 개항 이후 서울의 일부 신진 인사들 을 중심으로 개화파가 형성되고, 이들이 일본의 도움을 받아 문명 개화 를 성취하기를 열망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 한편으로는 일본 이 이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침투시키려 했던 것도 잘 알려진 바와 같다. 통감부기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재편하고 자국 자본가들의 침투 를 원활히 하기 위한 작업들을 근대화(=문명화)로 미화하면서 추진할 때 일부 조선인들은 기대감을 표현한 바 있었다. 조 선인들에 의해 간행된 잡지들에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범으로 삼아 근대 문명을 이루자고 주장하는 글들이 다수 수록되었다. 26 이러한 심리 25 ( 憲 機 第 2130 號 ) 伊 藤 公 遭 難 ニ 付 民 心 ノ 傾 向 等 ニ 關 スル 件 (10월 31일 開 城 管 區 長 內 報 ), 국사편찬위원회(1998), 統 監 府 文 書 7; 別 紙 韓 國 現 在 ニ 於 ケ ル 地 方 人 心 ノ 狀 況 ( 明 治 42 年 11 月 1 日 印 刷 ), 106쪽. 26 권태억(2001), 자강운동기 문명개화론의 일본 인식, 한국문화 28 참조.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조선 인식과 통치방식 59

60 는 당시 젊은 세대에 속했을 최남선의 {야광주( 夜 光 珠 )보담도 명휘( 明 輝 )하 고 금강석보담도 찬란한 눈이 부신 문명진보( 文 明 進 步 )} 27 라는 말에 상징 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1910년대 이광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문명 개화 였고, 그 표준은 일본이었다. 28 나라가 망한 후, 망국민의 절망감에서 우 리의 구습을 타파하고 신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은 더욱 힘을 얻 고 있었다. 29 이러한 상황을 시데하라 아키라[ 幣 原 坦 ]란 인물은 조선인들 이 {신정( 新 政 )에 의해 빨리 완전한 문명국이 되고 싶다고 초조한 태도까 지 보이게 되었다}고 관찰하였다. 30 III. 조선의 식민지로의 재편 비록 일제가 조선인, 조선 사회를 야만 또는 미개로 봤다고 해도 그들이 진실로 사명감에 불타 문명화를 실천하여 조선인들의 복리를 향상시켜 나갔다면 저항은 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표방에 지나지 않았고 그들이 추진한 사업은 비록 [문명]의 탈을 썼을망정 제국의 목표 를 추구하고 식민지 지배자들의 이해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27 최남선( ), 海 上 大 韓 史 (4) 公 6, 소년 제2년 제2권, 13면. 28 이준식(2000), 일제 강점기 친일 지식인의 현실 인식 - 이광수의 경우, 역사 와 현실 37, 179쪽 참조 년대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출간되었던 學 之 光 참조. 1910년대 이들의 실력양성론에 대해서는 박찬승(1992), 한국 근대 정치사상사 연구 - 민족주 의 우파의 실력양성 운동론, 역사비평사, 2장 참조. 30 최혜주(1998), 시데하라[ 幣 原 坦 ]의 식민지 경영론에 관한 연구, 역사학보 160, 73~74쪽 참조. 60 근대 한@일 간의 상호 인식

61 1910년 조선을 병탄했을 때 일본 자본주의는 아직 미숙하여 식민지 에 투자할 여력이 없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제국주 의는 조숙적이며, 군사적 제국주의, 대응적 제국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즉 일본 자신이 서구로부터 불평등조약을 강요받아 식민지가 될 위기 속 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근린 국가를 침범하는 제국주의 정책을 취했다 는 것이다. 31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래 대륙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줄기찬 야망을 품고 있었고 그 출발점으로 조선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년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 縣 有 朋 ]의 주권선( 主 權 線 ), 이익선( 利 益 線 ) 발언 도 바로 이러한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1905년에 올린 전후경영의견서( 戰 後 經 營 意 見 書 ) 에서 러일전쟁이 끝난 후에도 1 러시아 의 남하 대비, 2 조선의 치안유지, 3 일본의 군사적@경제적 이권 유지 를 위해 재정 부족을 무릅쓰고서라도 군비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 고, 33 이러한 구상은 1907년의 제국국방방침( 帝 國 國 防 方 針 ) 으로 계승되 었다. 이와 같이 병합되기 전부터 조선은 지정학적 조건 때문에 군사적 의미가 강조되었으며, 특히 대륙 침략의 거점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한편 일제의 대 러시아 국방 전략상 특히 철도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대로( 對 露 ) 작전 계획은 한반도 종관 루트를 중심으로 하는 만선( 滿 鮮 ) 철 31 김용덕 외(1996), 19세기 일본의 근대화, 서울대학교 출판부, 130쪽 참조. 한 국을 병탄할 때 일본 내에서도 그 경제적 가치가 적으며, 오히려 개발 등을 위 해 비용만 많이 들 것이라 하여 이를 반대한 논자도 있었다. 32 北 岡 伸 一 (1979), 日 本 陸 軍 と 大 陸 政 策 ~1918 年, 東 京 大 學 出 版 會, 1쪽 참조. 33 山 縣 有 朋 (1905), 戰 後 經 營 意 見 書, 山 縣 有 朋 意 見 書 ( 原 書 房, 1966 年 複 刻 版 ) 285면 참조.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조선 인식과 통치방식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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