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핵무기개발과과학자 1938년말독일의한과슈트라스만이우라늄핵분열의산물인바륨을발견 네이처 지에핵분열과관련된글이게재됨 1939년 4월파리의졸리오-퀴리연구팀은우라늄 238에서의느린연쇄반응가능성확인, 특허출원 미국에있던망명과학자들은나치독일의원자무기제작가능성을언급하며핵분야과학자들에게무분별한논문발표자제호소 1939년 8월실라르드, 아인슈타인, 부시등은독일과학자들의원자탄제작가능성을루스벨트에게서한으로보냄 1939년 10월미국에서는핵문제를자문할기관인 우라늄위원회 가구성 1941년 12월일본의진주만공격이전까지미국은핵개발에대해심각하게생각하지는않음 [ 영국의핵개발 ] 우라늄핵분열발견직후, 영국의로런스브래그와 G.P. 톰슨등은벨기에령콩고에서우라늄을빨리구입할것을주장하면서영국정부에핵개발의중요성을강조... 이당시영국정치가들은별반응을보이지않음 1939년 9월 1일나치가전격작전으로폴란드를침공하면서세계 2차대전이시작됨. 1940년 4월에는나치독일이덴마크와노르웨이를침공하여벨기에령콩고의우라늄이독일의수중에들어갈처지가됨. 이런상황에서 1940년봄두과학자 ( 오토프리시, 루돌프파이얼스 ) 가핵폭탄의실행가능성에대한보고서를제출 이보고서에자극받아영국은핵무기개발을위한 모드위원회 를신설 모드위원회 는 1941년여름우라늄 235( 자연상태에서 0.7% 만존재 ) 의폭탄가능성을보고 영국정치가들이원자탄개발에관심을보이면서연구가가속화되었으나, 공습가능지역이라는한계때문에미국이나캐나다가원자탄개발에적합하다는의견이대두 영미공동원자탄개발계획등장. [ 미국의핵개발 ] 미국은전쟁초기국방과학연구기관을설립해서주로레이더기술개발에주력했으나, 진주만기습이후원자탄개발에도본격적으로나섬 미국에서는우라늄 235 외에자연에풍부하게존재하는우라늄 238을이용해서플로토늄을개발함. 우라늄 238을핵변환시켜만들수있는플로토늄으로도원자폭탄제조가가능한것이확인됨.
[ 맨하튼계획 ] 미국의원자탄개발계획은맨하튼계획이라는이름으로구체화됨 이계획은거대한생산설비의운영과보안문제때문에미육군이주도함. 1942년 9월이계획의책임자로임명된레슬리그로브스장군은미국의여러대학, 연구소, 산업체, 군대등을총동원하여이거대한계획을진행시킴. - 시카고에서는원자로를이용하여우라늄 238에서플로토늄을생산하는것을맡음 (1927년노벨상을받은아서컴프턴이이끄는금속연구소가중심이되어페르미, 유진위그너, 실라르드, 프랑크등많은망명과학자들이연구에참가 ) - 미국화학회사듀폰은독성이강한플로토늄을짧은시간에많이생산하는부분을해결하는데화학공업에서의경험을발휘함. - 1944년말부터미국서부의핸퍼드생산용원자로 (Hanford Production Reactor) 에서플로토늄이대량생산 - 테네시주오크리지에서는우라늄 235의분리농축을맡음 [ 로스앨러머스연구소와오펜하이머 ] 생산된우라늄 235와플로토늄은폭탄제조를위해뉴멕시코주의로스앨러머스로집결됨 로버트오펜하이머의책임아래원자폭탄의설계와조립이진행됨 1944년가을로스앨러머스에거대한실험실이설치되고약 3000명의과학기술자들이모여연구함 - 오펜하이머는여기에모인젊은학자들에게사명감을갖게함 - 과학자들에게자신의창조력을살려주는방향으로연구시키면서원자폭탄제조라는극비의구체적인목표를달성하도록효과적으로동원함. - 참가하였던대부분의과학자들은원자폭탄이거의완성될단계까지눈치채지못하였음 포격결합방법 으로원자탄을제조하려하였으나, 1944년말까지전반적인차원에서핵무기개발계획은불확실했고성공여부도의심스러웠음 이문제의해결책으로젊은물리학자네더마이어는 내파방법 을발명함.( 강력한폭발물을플로토늄둘레에서폭발시킴으로써플로토늄을순간적으로압축되게만들어폭발시키는방법 ) 수학자 John von Neumann의계산에의해내파방법의가능성이확인되어원자탄제작에적극적으로채택됨. 1945년 7월까지우라늄 235로만든폭탄 1 개와플로토늄으로만든폭탄 2개가제작 1945년 7월 16일뉴멕시코주사막에서플로토늄으로만든폭탄을사용하여역사상최초의핵실험이성공적으로실행됨.
1945년 8월 6일히로시마에우라늄 235로만든폭탄이투하되어최소 10만명사망, 건물 7만채가반파이상의피해입음 8월 9일나가사키에남은나머지하나도투하되어 1945년말까지 7만명사망 8월 10일일본에서워싱턴으로항복의사가전달됨. 8월 15일일본은무조건항복을함. [ 독일의핵개발과미국의성공요인 ] 독일에서도 1942년당시우라늄연구가영국과미국수준이상으로진행되었었음 독일의핵개발에참여하였던하이젠베르크를비롯한과학자들은나치가핵무기를보유하지못하도록교묘하게방해하였다고후일에증언함 ( 확인불가 ) 우라늄개발결정당시인 1942년전황은독일에게유리하여, 독일의지도부는전쟁이빨리끝날것으로여기고있었음 이런상황에서많은시간이필요하고많은자원이요구되는원자탄개발의추진필요성은절실하지않았음 또한, 독일의하이젠베르크가주도한핵개발팀들은주로이론물리학자들이었기에, 우라늄연구를실험실수준에서거대한생산설비가요구되는산업적 군사적수준으로발전시킬배경이부족하였음 ( 이론물리학자, 실험물리학자, 화학자, 공학자, 거대설비경험의산업가들이참가한미국보다독일이불리한여건 ) 원자탄개발에미국이성공한것은물질적조건, 제도적인측면, 역사적조건이뒷받침되었기때문임. [ 물리적인조건 ] - 활용가능한수많은자원이풍부하게있었음 [ 제도적인측면 ] - 대학에서이론분야와실험분야가같은문제를가지고활동하였음 - 물리학자와화학자들이같은연구소에서함께활동하였음 [ 역사적조건 ] - 과학자와공학자가밀접하게연결되어있었다는실용주의적인성격 - 제1차세계대전이후정치가와효과적으로협력할수있었던과학행정가들의꾸준한성장 - 1930년대이래산업체와정부기관내에거대한계획에참가한경험이있었던기획전문가들이존재 즉, 미국만이지녔던독특한과학적 산업적 정치적구조에서나가능했던것이었음.
[ 핵무기투하과정과반대운동 ] 핵무기투하결정은과학자들보다는정치가, 군부를비롯한다른이해당사자들이더많은영향을미쳤음 1945년 5월 8일독일이항복하였을때원자탄제조는거의끝나가고있었음 일본이저항하고있었지만, 일본은원자탄을개발할능력이없었기에, 원자탄을제조한과학자들은원자탄의오용을우려하기시작함 군부는이미많은예산이들어간원폭의사용을원했고 ( 의회와의문제 ), 전쟁전략의혁명적변화, 원폭사용이가치있는군사적 전술적데이터를제공할것으로생각 트루먼대통령은최소의희생으로태평양전쟁을조속히끝내기를원함 - 일본본토침공의경우약 100만명의미국인희생이예상되었음 - 일본을항복시킬다른가능성은소련의전쟁개입, 항복조건의명문화, 원자탄사용이라는세가지가있었음. -1945년봄까지트루먼은얄타협정에따라서소련의전쟁개입을희망했으며, 항복조건의명문화도고려하고있었음 이당시과학자들의핵투하저지노력은비조직적이고산발적이었음. 가장조직적인핵투하반대운동을한사람은 1939년핵무기개발계획의필요성을강조하였던실라르드였음 1945년 6월 11일시카고과학자들이중심이되어 프랑크보고서 가작성됨 - 국제적인통제가없으면핵전쟁의파국이발생 - 일본에사전경고없이적절한목표에핵무기를사용하여일종의무력시위로일본의항복을유도하자는안을제시 - 핵운용자문위원회 에전달되었으나, 트루먼에게전달되기전에핵실험이성공됨 항복조건을명문화한 포츠담선언 이발표되었으나일본은이포츠담선언을거부함 트루먼은향후미소관계에서주도권을잡고전쟁단축을위해핵실험성공후군부가결재서류를올리자핵무기투하를지시함. ( 핵투하여파에대한심각한고민은없었음 ) [ 전후의핵운용문제 ] 핵무기의가공할위력이확인되면서이것을운영 관리할커다란문제가대두됨 1945년 12월20일맥마흔법안이상원에제출 ( 맨하튼계획의전후통계및모든핵관계를통제할민간기구인원자력위원회 (AEC) 의설립 ) 수정안에서군사적관계가삽입되어핵통제기구에군부가재등장함. 1946년말맨하튼계획의생산설비들이 AEC로이관
트루먼은미국이핵을독점하여야한다는버룩계획을마련하였으나, 소련의핵개발로실패로돌아감 소련은이미 1942년과학아카데미안에우라늄연구소를설립하고원자탄을연구하고있었음. 1944년과 1945년초핵스파이푹스를통해서맨하튼계획을소상히알고있었음. 1949년 8월소련도핵실험에성공함 [ 수소폭탄의개발과과학자들의반응 ] 1942년부터 1945년 8월핵투하전까지과학자들은수폭제조도염두에두었지만일단원폭제조가가능했기때문에수폭보다원폭에치중함 히로시마에원폭이투하된이후오펜하이머, 로렌스, 아서컴프턴, 페르미는수폭개발에반대 1949년 8월소련의핵실험성공이후과학자들은광범위한재무장계획의하나로바라보는수폭의개발을인식하였으며, 찬성파와반대파로나뉘어졌음 로렌스, 텔러, 앨버레즈등의과학자들은미국이소련의위협에수폭개발로대응하여야한다는명분을내세움 코넌트와오펜하이머등은미소간의무기경쟁을우려해서수폭개발에반대 이런상황에서 1950년 1월 31일트루먼대통령은측근들의의견을종합하여수폭개발을결정함 대부분의유명과학자들이열핵폭탄계획에반대하였으나, 푹스의핵스파이사건공개및한국전쟁발발로수폭개발로기울음 1952년 11월 1일최초의수폭실험인 마이크실험 이태평양마셜군도에서실시됨 1954년 3월비행기에탑재하여실전에활용가능한수폭의실험 ( 브라보실험 ) 이태평양에서성공.. 히로시마투하원폭의 1천배가넘는위력 이실험이국제적인핵실험반대운동의기폭제가됨 1955년 11월소련도수폭개발에성공 인류를파멸로이끌수도있는핵전쟁의위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