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독이후의동독과동독언툴 * 안삼흰 ( 서울대 ) 머리말 2000 년 6 월 15 일남북정상회담의결과, 한때세계의이목이 한반도에집중되고한반도의통일이분단반세기만에가시적인 거리로다가온것도같았다. 그러나그것도잠시였올뿐, 남북관 계는다시소강상태를벗어나지못하고었다. 북한은아마도다가올큰변화의파장을염려하고있는것으로보인다. 그러나우리남쪽이라고해서그다지여유만만한형편도아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의답방은계속미루어지고있고, 금강산관광사업조차도그계속여부에대한국민적합의 가쉽지않으며, 기타남북관계의각종법 체계의정비동시 급한현안문제들이산적해었다. 이런때일수록독일통일이후동독과동독인의삶의변화에관해차분히살펴보고그변화양상들을우리의통일시대에대비해서살펴보는일이중요하다아니할수없다. 이 연구는앞으로한반도에도래할지도모르는통일시대에앞 서, 이미통일을이룩한독일의구동독지역의제반문제점과 구동독인의삶의변화및그문제점올 - 지난 10 년 (1990-2αm 년 ) 동안독일에서나옹각종자료들 1) 중에서중요한것들올바 * 이논문은 2000 년서울대학교국제지역원국제지역연구지원사업비에 의하여지원되었음.
6 안삼환 탕으로 - 고찰해봄으로써독일의예률타산지석으로삼아북한에서는통일후에동독에서와같은시행착오적사례가발생하지않도록하고 1 나아가서는우리가앞으로통일시대에우리의북녘동포들의삶의변화를어느정도예견하게되고그에대한 적절한대비책을세우는데에 이바지하는것을그목적으로한 다. 1. 분단에서장벽설치, 그리고장벽이무너지기까지 1945 년 5 월 7 일독일군이무조건항복하자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등 4 개 전승국군대가독일및수도베를련을분할점령 하였고, 얼마안되어서방측 3 개 점령지역과소련점령지역의 차이가점점더뚜렷하게부각되었다. 서방측점령지역에서는전후의헐벗고굶주린독일인들을구훌하고그들의민주주의적새출발을지원해준데에반하여소련점령지역에서는 213개주요산업시설이 25 개의 소련주식회사 Sowjetische Aktiengesellschaft' 로 개편되었고, 새로재건된독일전래의전통정당 인사민당 (SPD) 은모스크바의배후조종을받는공산당 (KPD) 과사회주의라는공동의기치하에 이른바 통합사회당 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2) 으로강제통합되지 않으 면안되었는데, 불과얼마되지않아사민당이결국공산당에 합병된것에불과하다는사실이적나라하게드러나게되었다. 1) 인터넷에서 http://www.wiedervereinigung.de 콜찾아보면 독일통일 에관해서만도이미 2 만여개의참고문헌이소개되어있다. 2) SED 라는당명중에있는 Einheit' 를 통일 로잘못해석하여동서독 의통일올지향하는 사회주의통일당 으로해석하는것은잘못이다. 독일의두사회주의적정당인사민당과공산당이 독일의 단일사회 주의정당 으로 통합된 것을의미하기때문에 독일사회주의단일 당 으로번역하는것이마땅하겠으나너무길고의미가잘전달되지 않을우려가있기때문에여기서는일단 통합사회당 으로번역하기 로한다.
통독이후의동톡과동독인들 7 요컨대, 서방측 3 개점령지역과소련점령지역간에는전쟁배상금의요구와경제재건의속도에현격한차이가있게되었으며, 따라서양지역간의경제적낙차도점점더커지게되었다. 이러한경제적낙차는 1947년부터마살플랜이시행되자더욱더커져서, 1950년까지약 3년간서방측점령지역의독일인은 1 인당약 400마르크의대부를받올수있었던데에반해같은기간내에소련점령지역의독일언은 1 인당거의같은금액의전쟁배상금을소련에지불한셈이었다- 1949년 5월 23 일서방측 3 개점령지역에서임시헌법인기본법 (Grundgesetz) 을근거로독일연방공화국 CBRD) 이탄생하자곧이어서소련점령지역에서도독일민주공화국 (DDR) 이들어서게되었는데, 이로써독일의분단이공식적으로가시화되었다. 여기서한가지특기해두어야할사실은그당시어떤독일인이독일연방공화국의시민이되었는가또는독일민주공화국의시민이되었는가하는것은대부분의경우지리적우연에맡겨진일이었다는사실이다. 다만 1933년이후히틀러치하의독일을떠나국외로망명했던작가나예술가들중에는 - 이를테면아나제거스나베르트브레히트처럼서독에서출생한작가라할지라도 - 사회주의동독을자신의조국으로선택하여동베를린으로귀국한사람들이많았다. 동독정권당국은이런인사들을특히우대하여반파시즘적조국건설을위해당과예술가들이다같이협력해나갈것을강조했던젓이다. 그러나동서독의경제적격차가점점별어지고고급기술자들이서독으로빠져나가는사건이잦아지자 1961 년 8월 13 일에소위 반파시즘보호장벽 이란미명하에베를련장벽을설치하고 공화국탈주 를물리적으로막기시작하였다. 이로써동서베를련과동서독이확연하게분단되었으며, 동베를란과동독지역은하나의거대한감옥이나다름없이서방서l 계와격리되고말았다. 동독이란나라에서이상향을꿈꾸던많은시인들이그들의실망과항의를글로표현하였으며, 1968년무
8 안삼환 렵부터는동독에서새로이성장한시인과작가들까지도 국가보안처 Stasi 의검열과숨바꼭질을해가면서 독일땅에서의첫노동자와농민의나라 가인민의자유를탄압하고있는현실을간접적으로고발하고나섰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브란트의이른바동방정책에힘입어동서독의인적교류가활발해지고동독정권을은근히비판하는작가들의원고들이몰래경계선을넘어서독에서출판됩으로써동독정권당국자들의보안정치도차츰그한계상황에이르게되었따. 이런와풍에 1980년대후반에접어들자동구권으로출국한동독시민둠이그나라주재서독대사관 ( 또는중립국인오스트리아주재서독대사관 ) 에들어와서독시민권 ( 즉서독입국서류 ) 올요구하는사례들이점점더많이생겨나기시작했다. 한동독시민이임의의서독대사관에와서서독시민권을요구하면, 그결과는어떻게될까? 여기서우리는서독건국직전, 즉 1949년에서방측 3 개점령지역에서독일의염시헌법으로제정되었던기본법제 116조를잠시살펴볼필요가있는데, 독일연방공화국의국민은독일의국적올지닌모든독일인이다 "3) 라는이간단한한법조문이서독대사관에와서여권올요구하는모든독일인에게즉각서독여권을발급하지않을수없는강제적근거로작용했던것이다. 주한서독대사였던디터지메스박사의회고를들어보면독일기본법제 116조가베를린장벽의붕괴에얼마나큰역할을했는가를잘알수었다. 1984 년에서 1986 까지채가체코의프라하에서외교관으로일하던 기간동안저의주요업무는동독에서온사랍들이프라하의우리 대사관을찾아와서독의여권을요구할때그들이서독으로이주할 수있도록도와주는일이었습니다이 사람들은망명신청자들이아 3) Grundgesetz, Paragraph 116: "Staatsangehörige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sind alle die Deutschen, die deutsche Staatsangehörigkeit besitzen.
통독이후의동톡과동독인둘 9 니었습니다. 왜냐하면독일인이독일에망명올하겠다는신청을할 수는없기때문입니다. 그는단지관청에도움을청하고있올따름 이라는 1 살씀입니다. 즉, 기본법은서독관청들로하여금이런사람들 을돕지않을수없도록강요하고있는것입니다.4) 즉, 1949 년서독건국당시의독일법률학자들은그당시에 이미독일연방공화국의국먼이외의독일인들이앞으로연방공 화국국민이되고싶을경우그들이독일연방공화국국민이될 수있는법률적 가능성을간편하고도명백하게활짝열어놓아 두었던것이다. 그러나그법학자들도 1989 년베를린장벽의붕 괴가이 법률조문하나에그큰힘을빌리게될줄까지는미처 예견하지못했올것이다. 지메스대사의위의글에서도알수있지만, 베를린장벽이무너져동베를린시민들이서베를련으로넘어오기이전에이미동독의여러지배층인사들이동구의여러나라를통해서독으로탈출하기시작하였다. 그중동독정권에특히치명적타격을안겨준것은헝가리였다. 1989년초서방진영과긴밀한협력관계를구축한헝가리는 5월 2 일에오스트리아방면의국경설치물을제거하기시작했으며동독과맺은여행협정을파기해버렸다 "5) 즉, 헝가리는통독시민들이자국을경유하여오스트리아로들어가는길을퇴워준것이었다. 동독시민들의이런대탈출은그규모가점점더커졌다. 그래서이해가을에접어들자프라하, 바르샤바, 부타페스트, 빈주재서독대사관들에몰려들 어 서독여권을요구하는동독인들의대열이그야말로인산인해 를이루게되어동구각국주재서독대사관들의여권및 난민 수송업무가거의마비될지경이였으며이소식이연일외선을 4) V gl. Dieter Siemes Die deutsche Vereinigung und rechts wissenschaftliche Voraussetzungen, S. 55, in: Deutschlandforschung (Seoul National U 띠 versity), 2 (1993), S. 48-65. 5) 이정희 : 독일의통일과유럽통합, 292 면, 실린곳 : 독일이야기 2, 서 울대학교독일학연구소, 2000, 28T341 연
10 안삼환 타고온세계에알려지자우선동독정권의국제적체면이말이아니게설추되고베를린장벽의존재는국제적으로우스광스럽게 - 아니, 더이상불펼요하게 - 보이게까지되었다. 그리하여 1989 년 11 월 8 일 - 동서베를린과동서독을 40년가까이차단하고있던그인위적장벽이그만하루아침에와르르무너지고말았던것이다. 2. 동독시민들의얼화같은요구에의한급격한홉수통일 한편, 라이프치히, 할레, 드레스댄, 캠니츠, 마그데부르크, 슈베린등동독의대도시들에서그리고마침내동베를린알렉산더광장에서연일민주화를요구하며시위를벌이던동독시민들은베를린장벽과동독정권자체가힘없이무너지자무혈혁명의성공에대한감격도잠시뿐준비없는대변혁기를맞이하여우왕좌왕하게되었다. 준비가없기는서독정부도마찬가지였다. 너무나급격히다가온통일의기회였지만, 전숭연합국들과의합의도미처이루어지지않은상태에서섣부른행동은금물이었다. 권터그라스등서독의좌파지성인들은독일통일을오히려위험시하고동서독이연방제를지향하면서점진적으로통일을모색하는방향으로갈것을제안하고나섰으며, 크리스타볼프등동독의작가뜰도동독의정체성을지키고사회주의적이상향의꿈을쉽게버리지말자고동독시민들을애써설득하려고했다. 50년동안동독의집권당이었던 통합사회당 은인권변호사로신망이두텀던귀지 (Gregor Gys i) 를당의장으로추대하여 민주사회당 PDS 으로탈바꿈함으로써모든분야에서개혁을해나가고자하였지만, 돌아선민심을되돌리기엔이미역부족이었으며, 이이후의역사적경과를한마디로간단히요약하자면, 오직동독시민들의열화와도같은요구에따라 1990년 10월 3 일에동독이서독의일부로편입되는형식하에독일이재통일되기에
통독이후의동톡과동톡인둘 11 이르렀다. 그이전인 1990년 7월 1 일에이미동서독은 통화, 경제및사회통합을위한조약 올체결하고동목에서독의통화와경제체채롤도입하고서독의사회보장제도와노동법도그대로동독에도입할것을결정하였으며 9월 12 일에는모스크바에서동서독의외무장관파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동 4 대전숭국의외무장 관들에의해소위 2+4 조약 이 체결됨으로써, 패전독일은국제 법상으로도마침내완전한주권올회복하게되었다. 물론, 이조 약에따라독일은차후에오더강과나이세강의기존대 ( 對 ) 폴 란드국경선문제를다시 거론할수없게된단정도감수해야 쨌지만, 서방측 3 대 전숭국과소련의고르바초프를머리셜득하 여나토와바르샤바조약의대렵자장 ( 磁場 ) 에서국제적갈둥에 휘말라지않고무난히동서독의통일올달성하는외교적원숙성 을보여주기도했다. 이 모든것을뒷받침해준것온첫째, 독잎 의 탄탄한경제력이었으며, 물째로는그동안냐치의과거를극 복하기위해많은독일인들이 - 톡히시인과작가들이 - 노력해 온나머지서방측동맹국들에깨도자유와평화애호에대한신 뢰를쌓아온결과임윤명백하다. 3. 갑격애써실핑으로 독일인들에게통일은의외의순깐에제어할수없는빠른속도로갑자가다가왔다. 그것은장벽안에갇혀 50년올속고살 아온동독시민들의 우리는바깥으로나가고싶다 Wir wollen heraus!" 라는소박한소망에서출발했으나시위률하고데모를 하는과정에서 우리는같은민족이다 Wir sind ein Volk!" 라는 인식이덧붙여지게되었으며이런인식다음에는금방 우리도너회들처럼살고싶다! 는욕망이뒤따라왔던것이다. 그러나통일되고난다옴의현실은이와같은욕망을다채워줄수는없는노릇이었다. 서독인들은얼마안가서곧통일이 - 같은핏
12 안삼환 줄의형채 를끌어안고잠시감격올맛본대가로서는너무많은 - 비용을강요하는사안임을인식하게되었고, 통독인들은통일이몰고온자기생활주변의각종변화에신속히대처, 적용하느라고금방통일의감격율까마득히잊고일상생활의걱정에함몰되지않올수없었다. 직장을잃거나옮기지않으면안되는경우가많았으며, 셜령옛직장에그대로눌러앉아서일할수았는복올받았다하더라도시장경제의도입을통해모든것이돈으로계산되다보니지금까지당과국가를위해일해왔다고믿는자신의정체성에심한위기가닥쳐온것은물론, 돈도없고, 그렇다고명얘도명분도없이그날그날을연명해가야하는초라한자기자신의모습을발견하게됨으로써, 노동자와농민의나라 의주인공에서자본주의사회의주변인물로밀려난듯한소외감에휘말리게되었다. 인민의땅 에챔싸게주유소를차려놓고돈올끌고있는 서쪽사랍 Wessi 도맙고, 그런놈들한테벌풀어먹고살궁리에여념이없는 동쪽사람 Ossi 도미올수밖에없었다. 노동자와농민의나라 가이민족도아닌 서쪽놈 들에게점령되어자신은갑자기 식민지백성 으로전락해버린듯한참담한기분에사로잡히게된것이었다. 베를린장벽은무너졌으나아직 머리속의장벽 Mauer im Kopf 은아직그대로남아있다는말이이런상태를두고하는상투어로유행하였다. 통독후 10년이조금더지난오늘날서독인들은대개동독과동독인들에게무관섬하다. 일부서독인들은그둘의세금부담을상기시키면서동독인들올신경질적으로대하기도하고, 그보다는베푸는쪽의은근한우월감을지니고동독인들을대하기도한다. 이에반하여동독인들은 마치외국인들의점령체제하에살고있기라도하는것처럼 "6) 자신들을운명적으로다가온자본 6) Vgl. Michael Kumpfmüller: Der ganz große Stoff: Wo bleibt der Roman zur Einheit?, in: Süddeutsche Zeítung, 30. September 2000 (Feuilletonl: [die Menschen im Osten sehen sich) "noch immer
통독이후의동톡과동독인둘 13 주의적상황의회생자로간주하기롤좋아하고었다. 동서폭인들의이와같은차이점은오늘날콸른이나뒤셀도르프, 함부르크, 뭔헨등서독대도시들의삶에서는거의감지할수없지만, 베률린에서는사람들이터놓고이야기하는곳에서는 무혈혁명이긴했지만, 잔인하고도철저한혁명이남긴해악들 "7) 로간주되기도한다. 한쪽에서는 돈의새로운독재 eine neue Diktatur des Geldes" 라고비아냥거리고, 다른쪽에서는 지난날의소시민독재체제의이데올로기적잔재 ideologische Reste der alten Diktatur der Kleinbürger"8) 라고냉소를머금는다. 이럴때변동독인들도말하고싶올것이다 - 우리도역사가있다. 1989년이전의동독이라고해서모두가다나쨌던것은아니다. 그리고 1989년야후의역사에관한한우리는최소한혼란을겪고있는중이며, 거기서손상감올느끼고있다. 지구화된자본주의의신속한세계를위해서는우린너무느린것같다. 우리는적용이필요하다 "9) 이렇게말해야하는동독인들의마음은착잡하다. 동독인들이이러한상대적박탈감올느끼는이변에는무엇보다도국가통제경제체제에서시장경제체제로의전환이너무나도급격하게이루어졌다는사실이큰요인으로작용한다. allzu geme als Opfer der schicksalhaft über sie gekommenen kapitalistischen Verhãltnisse, so als lebten sie unter fremder Besatzung. 7) Ebd.: "die Schãden der sanften, der grausam-gründlichen Revolution. 8) Ebd. 9) Ebd.: "Wir haben auch eine Geschichte, sagte der Osten, und dass nicht alles übel war im Osten vor 1989, und was die Geschichte nach 1989 angeht, sind wir zunúndest verwirrt oder beschãdigt, zu langsam für die schnelle Welt des globalisierten Kapitalismus, da müssen wir uns gewöhnen
14 안삼환 4. 철저한, 너무나철저한자본주의체제로의이행 독일통일은서독의모든경제질서가가능한한빠른시일내에통독지역에서도그대로적용되어야한다는대원칙하에서이루어졌다. 그러나동독의주민들한테서는 시장모렬이라고부르는사적소유권, 계약의자유, 책염원칙을확립하도록하는도덕적확신파이에대한긍정적태도 "10) 등이사회적전통으로서아직전혀형성되어있지않았기때문에국가계획경제에서자본주의시장경제로의체제전환이아무마찰없이순조롭게진행되지못했으며그과정에서많은후유증이생기게되었다. 동서독경제통합과정에서일반적으로두가지큰문제점이자주지적되고있는데, 첫째는 1990년 7월 1 일의화폐통합이너무성급했다는지적이고, 둘째로는신닥청 (Treuhandanstalt) 의사유화정책이너무나비인간적이고철저하게수행되었다는비판이그것이다. 1990년의화폐통합때에통독화 6000마르크까지는 1:1 로서독마르크로교환해주고, 그이상의금액은 2:1 로교환해준결과, 동독통화가약 4 배평가절상됨으로써동독기업툴이결과적으로동부유럽에서의경쟁력올상실하여집단도산하게되는원인이되었다는뒷날의비판에대해서는사람들이오늘날대체로수긍하는분위기이며, 동 서독양지역을일단경제적으로분리한채일정기간동안환율을이용하여동독경제를구조적으로조정활수도있었을것이라고생각하는사람들도많은것같다. 그랬더라변동독지역의산업체들이그렇게급격하게파산하지않았올것이라는생각도논리적으로는가능하다. 그러나동독이독자적인통화체제를고수하고도과연정치적인안정을유지할수있었을까하는데대해서는의문의여지가있다 "11) 동 10) 김영융 사회적시장경제와독일통일, 프리드리히에버트재단주 한협력사무소, 2000, 197 쪽. 11) 위의책, 187 쪽 -
통독이후의동톡과동독인들 15 독주민들이서독의제품올마음대로구매할수없거나서독지 역으로의자유로운이동에제약이가해졌을경우, 그당시동독 주민들이과연그것을조용히감내할수있었올지는심히회의 적이라고할수밖에없다. 통일 4개월전인 1990년 6월에 이른바 인민의 재산 Volkseigentum 을 사유화하기위해동독당국에의해만들어졌으며통 일 이후에도통일한임무를위해 2000년까지계속업무룰수행 해 왔던신탁청의재산관리및처리에대해서도수많은비판이 쏟아졌다. 당초 이 기관은동독의 국영기업올사유화하면 약 6000 억 마르크의수익금이나올것으로예상했지만, 동독기업 의생산성은생각보다나쁜상태로서 1990년현재에활수있는 동독의기업이사실상많지않았다. 더욱이자민당의주장에따 라국가에몰수되기 전의 옛 재산권자에게재산상의우선권을 주기로했기때문에수많은재산권상의분쟁이일어났고미해 결분쟁사례가많아동독지역의도시들에서는도심속에는허 물어진건물들이 재판결파를기다리며방치되어 있는사이에 교외의초원위에새 백화점이들어서는기현상도속출했다. 결 과적으로신탁청은약 2, 300 억 마르크의적자를내게되었올뿐 만아니라, 신탁청이사유화한약 14, 아m개의국영기업의 85% 가 서독인의손에, 10% 가외국인의손에넘어갔고, 동독인의손에 다시들어온재산은불과 5% 에 불과하였다. 결국인민의재산의 95% 가서독인및외국인의손으로넘어가버렸고, 그대신동독 주민들은갑자기 35,α% 가지의생소한자본주의법규와더불어 살아가면서새로운체제에 적용해가는데에 골몰하지않으면 안되었다. 낯익은동독생산품의 70% 가파산선고를당하고수많 은기업이 문올닫는것을목격해야만했고, 900 만근로자가 620만으로줄어드는과정에서개인적으로갖가지불행올직접, 또는간접으로겪지 않으면안되었다 (2α% 년 현재까지도동독 지역의실업자비융은 17% 로서이것은서독지역의 2 배에가까 운숫자로남아있다 ). 동독에서의공업적기초가무너졌고면세
16 안삼환 를노리는서독기업들만재마를보는경우가많았다. 서독인돌 아동독지역을새로운시장으로만여기고동독지역으로대거진 출하여건설분야는물론심지어는수공업분야에이르기까지전 산업을휩쓸게되었다. 함부르크의시장을지낸클라우스폰도 나뉘 (Klaus von Dohnanyi) 는 그당시동독지역을면세지역으 로선포하는젓이옳았다는의견을말하고있지만, 아직은신탁 청의 업무를부정적으로볼수는없다. 다만, 너무나철저하게 자본주의화작업올수행함으로써많은동독사람들의마음을필 요이상으로허탈하게만들었다는비난만은면치못할것같다. 아무튼, 1970년대초에 동방정책을추진했던 빌리 브란트가 통독당시에표명했던 원래하나에소속되어있던것들이이제 함께성장해갈것이다 ]etzt wächst zusammen, was zusammen gehört" 라는낙천적인 예언은불과얼마가지않아회의 적으로받아들여지기시작했으며, 동서독의 경계선올가로지르 고있던물리적장벽만허물어졌지 머리 속의장벽 Mauer im Kopf은아직도그대로남아었다느니, 정신적 공동성장 das mentale Zusamrnenwachsen 12) 은아직요원하다는말이사랍들 의 입에오르내리기시작했다. 많은동독주민들은그들의나라 독일민주공화국 이 벌안간 이민족 에 의해 점령당한 듯한기분 을느끼게되었다. 5. 서쪽에의해 정형당한 동쪽의대학과연구기관 구동독사람들이 점령당한 듯한기분을느끼게된것은비단 경제분야에서의서독인들의독주뿐만이아니었다. 구동독사람 12) Vgl. Lilo Berg: Deutsche auf getrennten Wegen. Psychologen beobachten ein Auseinanderdriften von Ost- und Wetdeutschen, in: Berliner Zeitung, 13. Oktober 1999: "Die Hoffnungen auf das mentale Zusamrnenwachsen der Deutschen haben sich noch nicht erfüllt
통독이후의동톡과동톡인둘 17 들의입장에서가장심하게 점령당한 느낌을받았음직한곳은아마도연구기관과대학이었다. 구동독에는 2때00여명익구성원을지닌대규모의 학술원 Akademie der Wissenschaften 이중섬적연구기관의역할을하고었었는데, 그구성왼들중에는물론정치적감시망의역할올하는당료들도상당수섞여있었으므로서독측의입장에서볼때에는본래적의미의연구원과비연구원, 학자와비학자를구분하여정리하는과정을거치지않을수없었기때문에이른바 평가 Evaluierung 를하게되었다. 디터지몬 (Dieter Simon) 의지휘하에수행된평가의결과불과 2년후에 24000명중반수가직업올잃게되었다. 이평가에통과한구동독대학의현직교수들도현직에머물수있기위해서는다시지원절차를거치게되어있었는데, 그들은동서독의제도적차이때문에또다시불이익을감수할수밖에없었다. 이를테면다같은논문이라도국제지또는서독잡지에기고한논문들이높은평가를받게되었으므로평가와심사과정이 - 당시독일연구재단 <DFG) 의볼프강프뤼발트 (Wolfgang Frühwald) 이사장의말올빌리자면 - 공정하긴했으나인간적이지못했다 zwar fair, aber nicht menschlich"13l 고말할수있올것이다. 이를태면구동독지역인신 5 개주의막스플량크연구소의 240석의소장및부장자리중단 3석만이구동독출신의학자가차지했으며, 평가로부터끝까지살아남은 2아 )() 명에게만 1996년에다시동독대학에재통합될수있는기회가주어졌는데그들마저도대개는시간제근무, 또는 2003년까지의시한제근무를조건으로재채용되었다. 그결과통계상으로도서독인구 1000 명중 4.3 명의학자가배 13) Martin Urban: Die Abwick1ung der DDR-Wissenschaft, in: Süddeutsche Zeitung, 2. Oktober 2000, S. VP2/lO. Hierzu vgl. auch Meyer, Hans-Joachim: Z,vischen Rueckbesinnung und neuem Aufbruch. Die ostdeutschen Hochschulen nach der Wende, in: Etudes Germaniques, 53 (1998), Heft 3, S. 583 598.
18 안삼환 출되고있는데에반하여동독에서는 1,000 명중 1. 2 명의학자만이배출되는것으로나타나고있다. 아무튼 2000년현재구동독지역대학들의 C-4 교수 ( 최고대우정교수 ) 들중의 3분의 1 만이구동독출신이된상황이니만큼, 구동독지역의대학들이서쪽에의해 점령당했다 고해도그다지지나친말은아니다. 6 구동독지역주민들의정신적얼패감 라이프치히의 청소년연구를위한중앙연구소 의페터픽르스터교수의젤문조사연구에의하면, 구동독지역주민들의대부분은통일자체는긍정적으로보고있으나서쪽위주의정치제도에불만을느끼고있으며자신을 독일연방공화국시민 Bundesbürger 으로느끼고있긴하지만동시에 구동독시민 Ex-DDR-Bürger 으로도느끼고있는것으로나타났으며, 자신이 2 둥시민 Bürger zweiter Klasse' 취급을받고있다고느끼고있 는것으로나타났다. 즉통일은동독지역주민들에게민주주의적자유와물질적복지를선사하였고그들중구체제로의복귀를원하는사람은드물기는하지만사회주의국가의계획경제로부터자본주의시장경제체제로의이행과정에서많은사람들은심각한희생올치러야했고대부분의구동독주민들은깊은마음의상처를받았다고할수있다. 이런마음의상처에서유래하는이른바 구통독체제향수 Ostalgie 는소위 극우파 Rechtsradikalisten 문제와함께 2000년대독일의새로운사회문제로부상하게되었다. 즉구동독지역의주민들은구동독체제라고해서모든것이다나쨌던것은아니었음을즐겨회상하게되는것이다. 이를테면, 구동독에서는여성의권리가현저하게신장되어있었고, 탁아소나유아원및유치원시설이잘되어있었으며, 주택분야에있어서도복지차원에서는더나았다는것이며, 동독의스포츠인재발굴의보고였던 아동및청소년스
통독이후의동톡과동독인률 19 포츠학교 Kinder- und ]ugendsportschule 도 너무성급하게보 통학교로개현됐다는것이다. 옛동독체제하에서는비록물질적풍요는없었다해도그래도작장마다동료들과그가족둡이모여서다과와함께담소하는인간적인계기들이많았으며, 적어도 우리라는감정 Wir- Gefühl 이있었다는것이다. 7. 구동독체제향수 뼈대한처방약 - 슈타지문서 그러나이것온어다까지나 향수 에 그치는것이고, 서독인들의 시각에서도할말은많다. 스포츠계의인재들울발굴하였다는 아 동및청소년스포츠학교 의 엽적에도불구하고동독선수들와 대부분은약물복용을한사실이밝혀졌으며, 축구선수들만보 더라도통쪽출신션수들은오늘날전 ( 全 ) 독일 탑에서는후보 선수의뺀치에앉아있을뿐이다. 옛동독시민들이특히애독하 는잡지 r 슈퍼일루 Super llluj 만하더라도 고생하는사람똥 너뿐만은아니다 Du bist nicht allein!" 라는심경으로자위 -- 삼 아보고있는것이며, 보다하루평균 37 본더 구동독지역사람돌이서독지역사랍똘 텔레비전올시청하고있다는통계역시 동독주민들이문화생활 ( 영화및연극관람동 ) 을더적게하고있다는방증이며, 동베를린,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에어푸르트퉁대도시이외의도시에서는아직밤외출올할만큼도시환경이쾌적하지못하기때문으로풀이되고었다. 동독인들의생활 이 여유를찾게되면점차로서독인들과비슷하게되리라는것 이서독인들의일반적견해이다. 동독인들의 구동독체제향수 에 대해가장신랄한비판을한 사람은 국가안보처 Stasi 의 문서들을보관 관리하고피해자들 들에게자신에관한자료를열람시키고있는슈타지문서보관소장요아힘가우크 (Joachim Gauck) 로서, 그는슈타지서고야말로 독재와과거향수를다스리는약방 Apotheke gegen Diktatur und Nostalgie"14l 이라면서 동독향수 Ostalgie 에 대해따끔하게
20 안삼환 일침올놓고었다. 1990년 1 월 15 일, 그러니까베를련장벽이무너지고아직통일이되지않은시점에동독의데모대가베를린리히텐베르크소재슈타지본부를습격한일이일어났으나, 건물만일부파손되었을뿐중요기밀서류들은지하벙커에보관되어있었던관계로유실을면할수있었다. 그후슈타지의문서들이공개됨에따라유치원보모, 교사, 대학교수, 경찰관등수많은동독사람들이소위슈타지의 비공식직원 Inoffizieller Mitarbeiter 이었다는사실이드러나게되었다. 이들 비공식직원 중에는, 배신자, 2중간첩, 깊이관련된자, 일시적협력자동여러부류가있었는데, 적어도비밀리에슈타지와깊은관련을맺어온사람들이통일독일의공무원사회에서아무런지장도받지않고출세가도를달려서는안된다는것이당시인민의회와연방하원의정치적판단이었기때문에슈타지에깊이관련되었던 비공식직원 들은직장에서해고조치를당하게되었다. 가우크는 동베를련에서는비공식직원으로판명된교사들의 4분의 3 이계속근무하고있다. 그때문에나는무서운운명에고생하는불쌍한사람들을자꾸찾아내려는것을단지선전으로보고었다 "15) 라고말하고있다. 그의말올계속들어보기로하자. 중병상태인데도약올복용하지않으려는사랍들이있습니다. 자기자신의삶의핵심적내용올완전히방기해버리는사람들이지요. 안다는것이불필요하며몰라도사는데에전혀불편이없다고느끼는사람들말입니다. 정치적계몽을자신의사명으로알고살아온저와같은사랍에게는이해할수없는태도입니다. 이것이저를가장괴롭히는점입니다 )6) 14) Annette Ramelsberger Onterview): Joachim Gauck - der Herr der Stasi-Akten, in: Süddeutsche Zeitung, 2. Oktober 2α)(), Seite VP2/8. 15) V gl. ebda. 16) Ebda.: "Es gibt Menschen, 이e schwer krank sind und doch kein
통톡이후의동톡과동톡인둘 21 가우크목사의이고백은진실된면올지니고있움에틀림없다. 통독인들의추억과회고담속에서의구동독체채는아마도상당히미화되어나타남에톨렴없올것이다. 슈타지문서들은훈명그런불필요한미화경향에대한경종이될수있올것이며, 그런 너무심한동독향수에대한약 Medizin gegen zu viel Ostalgie" 17) 이될수있올것이다. 그러나너무많은용량이처방된약은독으로작용한다 "18) 고말하는사람들도적지않다. 8. 인류의유잃한꿈 의무산 슈타지의문서돌울보면, 동독향수 Os떠19ie 가얼마나비현실적인환상인가를분명히알수있는것은사실이다. 그러나인간에게는어딘가물질적풍요나사회적정의만으로는살수없는그어떤요소가있는법이며, 구동독의주민들이때때로이런요소들에매달리게되는것도인간적이라하지않을수없다. 하물며, 구동독체제하에서정치적과오에대한책임은별로질것도없으면서그정신적지도자로서의책임감은깊이느끼게되는사람들한테는 동독향수 보다는동독이이런식으로몰락한데에대한일말의아쉬움이없을수없다. 이를테면, 통일후 10년이지난시점에이르러동독의작가슈테판하임은 새 Medikament nehmen wollen. Es gibt Menschen, denen zentrale Inhalte des eigenen Lebens vö피g schnurz sind. Die das Gefühl haben, es ist nicht nötig zu wissen, es lebt sich auch so ganz gut. Das ist schwer zu begreifen für einen, der sich der politischen Aufkl낄rung verschrieben hat. Das leigt mir am schwersten im Magen. 17) Deggerich, Markus: Zehn Jahre - zehn Tage, in: Spiegel on line, 21. August 2000. 18) Vgl. e벼a.:,,aber eíne zu hoch dosierte M려 izin wirkt wie 잉n Gift.
22 안삼환 로운지빼자들이독일민주공화국의영토와주민을손쉽게점령하여철저하게착취하고, 사회적대안들이없는세계를만들어놓았다 "19) 고개탄하고있다. 그에의하면서독이동독을편입시칸것은 뱀이고슴도치를먹어치운 격이어서, 고슴도치는사라졌지만, 뱀은소화에어려움올겪게 "20) 되었다는것이며, 인간의얼굴올한사회주의건설이어차피어려워졌다면, 새독일공화국의새헌법에는적어도인간의특색이라도지닌자본주의가확립되도록법제화를시도했어야했다 "2 1) 는것이다. 연출가레안더하우스만은독일통일이결과적으로남긴것은 모든인간이평둥하고형제가되리라는인류의마지막꿈 "22) 이무산되었다는부정적인면뿐이고그꿈의자리에자본이들어서게되어, 결국은 선에대한악의승리 der Sieg des Bösen über das Gute 23) 로귀결되었다고까지말하고있다. 19) V gl. Stefan Heym: Die Schlange frisst das Igelchen. Der Schriftsteller hätte sich einen,kapitalismus mit menschlichen Zügen gewünscht. in: Süddeutsche Zeitung, 2. Oktober 2000, S. VP2/3: "Und ich wusste nicht, mit welcher Gründlichkeit die neuen Herren die billig gewonnene Macht über Gebiet und Bevölkerung der Deutschen Demokratischen Republik ausbeuten und eíne Welt ohne soziale Altemativen schaffen würden. 20) Vgl. ebda.: "die Schlange hatte das Igelchen gefressen - das Igelchen war weg, die Schlange aber würde Verdauungsprobleme haben. 21) Ebda.: "W enn schon 이e Sache mit dem menschlichen Gesicht des Sozialismus schiefgelaufen war, so hätte man wenigstens versuchen sollen, einen Kapitalismus mit menschlichen Zügen in einer neuen Verfassung einer neuen deutschen Republik zu verankem. 22) Vgl. Leander Haußmann: Vom Stolz, ein DDR-Bürger zu sein, in: Süddeutsche Zeítung, 2. Oktober 2α)(), S. VP2/4: "Was bleibt, ist nur der negative Aspekt, dass der einzige Traum der Menschheit, nämlich alle Menschen werden gleich und Brüder, ausgeträumt ist. 23) Ebda.
통독이후의동톡과동독인들 23 슈테판하암이나레안더하우스만은아마도지나치게동독을옹호하는사람들에속할것이다. 그러나장벽이무너진 1989년 11 월 8일을전후하여동독에도라이프치히와베를린둥대도시에상당한역량의민주적시민운동가들이활동하고있었음에도불구하고왜이렇게까지되었을까? 그들내부에도동독의정체성을살리고대변할수있었던사람들이없지않았는데, 오늘날그들은다어디로갔단말인가? 왜동독의참다운시민운동가들이정치적세력으로정착되지못했을까? 동베를린에서시민운동가로서 r 새포럼 의멤버이던베르벨볼라이는그이유를다음과같이설명하고었다. 무엿보다도, 완전히새로운사회체제에적옹하지않으면안되었던사람들에게는그요구가과중했던데에그원인이있다. 그당시막깨어난정치적관심은얼마가지못해곧다시금식어갔다. 왜냐하면수많은일상의문제들이오래전부터문제가되어옹연방공화국제도의변화를위해애써야한다는필연성보다는더심각하게다가왔기때문이었다. 또한사랑들은이제도의결점들을어차피잘알지도못하고있었던것이다. 여기서는수년전부터공무원의권익, 대학개혁, 연금개혁둥의분야에서더많은직접민주주의의관철올위해, 변혁을위해애써오던서독측사람들의주체적활동이필요했었다. 그러나바로그때많은좌따지성인들은동독이더나은체제라고생각했으며, 이견해로부터결별하는것이그들에게는쉽지않았던것이다.24) 24) Vgl. Bärbel Bohley: Kein Anlaß zum Jubel. zum Jammem kein Grund. in: Fran엉ÌJrter Rundschau. 2./3. Oktober 2α)(), S. 8: "Vor allem an der Uberforderung der Menschen, die sich in einem völlig neuen Gese!lschaftssystem zurechtfinden mussten. Das gerade erwachte politische Interesse schlief sehr schnell wieder ein. denn 바e Fülle der Alltagsprobleme war bedrückender als etwa die Notwendigkeit, auf längst fällige Veränderungen des bundesdeutschen Systems einzuwirken, dessen Fehler man ja sowieso nicht recht kannte. Hier wäre die Initiative der Menschen aus dem Westen notwendig gewesen. die sich seit Jahren um
24 안삼환 요컨대, 결정적인순간에서독의좌파지식인들이동독의지식인들을적절하게도와주지못했다는것이다. 권터그라스둥서독의지식인들은당시에서독의사회체제에대해비판적이었고동독에대해호의적이었기때문에경험없는동독의민주세력들이현실정치에서어떻게하면권력에다가갈수있을지효과적으로조언해주지못했던것이다. 9. 정치적복고주의와극무피의등장 동독의민주인사들이미증유의개인적일상생활의급격한변화와도전에시달리고있딘지난 10 여년통안비교적안정된사회적위치에서어부지리를얻은동쪽사랑들도있는데, 통합사회당의얼굴에다새로분칠을하고옛동독의주민들앞에다시나선 민주사회당 Partei des Demokratischen Sozialismus 의당원들이그들로서, 10 여년이지난오늘날그들은연방하원과유럽의회에의석을갖고있으며, 작센주에서는 10.7% 득표의사민당을누르고 22.2% 의높은득표율을과시하고었다. 이를테면, 1986년에서 1990년까지드레스벤의시장을지낸옛통합사회당의당료볼프강베르크호퍼 (Wolfgang Berghofer) 는드레스멘시민들이침올뱉지않는 베르가초프 Bergatschow ( Gorbatschow) 로서의자부심을지난채다음선거에서의재기를노리고있다. 또한, 베를린에서는인권변호사출신의그레고르귀지가과거를잘모르는젊은유권자들의지지를얻어 2004년에는베를린시장으로출마할야심까지내비치고있을정도이다. 민 diese Teränderungen bemühten, sei es beim Beamtenrecht, bei der Hochschl- oder Rentenreform, bei der Durchsetzung mehr direkter Demokratie. Aber gerade viele Linksintellektuelle meinten, dass die DDR das bessere System gewesen sei, und es fiel ihnen schwer, sich von dieser Meinung zu verabschieden.
통독이후의동톡과동독인들 25 사당출신의브란덴부르크주지사로타르비스키 (Lothar Bisky) 는연방수상슈뢰더가브란벤부르크주의연립정권구성올협의하기위해만나가를제안할정도로정치적비중이높아졌다. 꾸동톡 5개주에서관찰되는이와같은현상은 명령대로살다가아무런사전훈련도없이자유로운자본주의체제로들어오게된동독지역주민들의힘든생활 껑 ) 을잘반영하고있는것이기도하다. 특히 50 대이상의연령층이재취업및사회적웅에어려움을겪었고, 또일부는아직도겪고있는것으로나타나고있다. 그들온자신들의미래에대하여불안감을지니고있고, 독일연방공화국의정치제도에대해서도거리감을지니고있으며, 위에서말한바와같이 구동독에대한향수 까지느끼고있는것이다. 그렇다고해서이들이모두공산주의자들이라고볼수는없으며, 그행동양태에있어서는오히려국제적으로세련되지못한보수주의자돌이라고말할수있을정도이다. 신 ( 新 ) 5개주에서자주발생하는극우파의테러사건들역시이들기성세대의정신및행동양태와무판하지않다. 동독지역의극우파라하면우선은신 5개주의청소년문제이기도하다. 통독이래의구동독지역의청소년들만큼큰정신적타격을받고자란세대는드물듯하다. 갑자기직장을잃고무력하게주저앉아버리는부모의몰골에서그리고어제의가르침이오늘에는거짓으로판영되는교사들한테서철저한탈권위와환멸을맛본이세대의젊은이들에게는실업자없고무숙자없고외국인없는옛동독시절이그리움으로다가올뿐만아니라, 그들자신의일자리를생각하면막막하기만할뿐이다. 이런상황하에서 약한자는더약한자를경멸하기때문에베트납인들은외국인증오의대상으로선호된다 "26). 동독지역의극우 25) Vgl. Günter de Bruyn: Das Bedürfnis nach der überschaubaren Heimat, in: Die Welt, 9. November 1999: "Ohne vorhergehendes Training war man aus einem kommandierten Leben in ein anstrengendes freies gefallen.
26 안삼환 파테러가처음에는구동독의약자인베트남인들을상대로하다가차츰다른외국인들에게도번져간것은자신들의나라를활보하며자신들보다더좋은주택에살고더좋은자동차를타고다니는외국인들이얄맙게보였기때문이다. 호이어스베르다 (Hoyerswerda), 구벤 (Guben), 로스톡등에서일어난대형테러사건들은그동안의동독이얼마나폐쇄사회였던가를방증하는일면이기도하다. 일찍이위르겐하버마스는나치의극우주의를극복한것이야말로자기시대의최대의업적이라고말한바있지만, 권터그라스와하인리히벌올펼두로서독에서줄기차게시도되어온과거극복운동은동독에서는크리스타볼프의소성 유년시절의본보기 Kindheitsmuster dl (1 976) 에도불구하고그성과는거의없었다는사실이가로늦게판명된셈이다. 통계를보면, 1990년에서독의외국인이 8.5% 였고동독의외국인이 0.8% 였던데비해서 1999년에는각각 10.5% 와 2.4% 로각각늘어나는추세이고보면, 앞으로외국언에대한극우파의테러문제는통일독일이최우선적으로해결해야할심각한사회문제가아닐수없다. 더욱이구동독지역은앞으로동유럽과의인적 물적교류의중심지로부상하게될터인데, 이런시대착오적극우파청소년들이동독지역주요도시의밤거리를배회하며테러행위를일삼고었다는사실은독일을위해서냐, 유럽연합올위해서나큰손실이아닐수없다. 연방정부는극우파테러행위에대해서는강력한법적조치를공언하고있으나, 그런조치에앞서서독인들올포함한외국인들이구동독지역주민들에게열린마음과겸손한태도, 근검한소비생활을보여주는것또한강력한법률적제재못지않게중요할것으로생각된다. 26) Vgl. Markus Deggerich: Zehn Jahre - zehn Tage, in: Spiegel on line, 21. August 2α)(): nweil der Schwache den Schwächeren verachtet, wurden Vietnarnesen zu bevorzugten Zielen von Ausländerhass.
통독이후의동톡과동독인들 27 10. 독일룡일, 그후 10 년 적어도슈퍼마킷에서만은동서독이완전통일된것을실감할 수있다 는반어적인말이나도는가하면 지금은서독과다름없 이 되고말았다. 비타민 B27) 없이는아무것도안되니까 라면서 동독사회의서독화를은근히비꼬는사람도었다. 아직도동서 독사람들사이애는상당한오해편견서로민감한부분이존 재하고있는것이사질이다. 그러나, 똑일이통일된지 10 년후의여론조사 (Emnid) 를보면, 통일은결과적으로잘된것이다 가 66%( 서독 65%, 동독 70%) 이고, 잘못된것이다 가 21%( 서독 21%, 동독 19%) 이며, 모르겠 다 가 9%( 서독 10%, 동독 6%) 로나타남으로써, 거의 3 분의 2 가 독일통일의당위성올인정하고있는실정이고, 동독지역주민 들이 5% 나더많이통일이잘된것으로판단하고었다. 또한, 많은동독인들은자신을아직도동독인으로느끼고있는데에 반하여, 서독인들은차라리 전체 느끼고있다. 독일인 Gesamtdeutscher 으로 그렇지만, 동서독을통틀어응답자의 79% 가 독일 연방공화국 이자신의조국이라고생각하고있다고밝히고있기 때문에현재로서는독일통일에대한그어떤회의적시각도크 게문제시될것은없다고하겠다. 그러나이와같은결과가통일후 10 년동안서독이동독지역 에퍼부은돈 1 조 2αm 억마르크의위력염도잊어서는안될것 이다. 라이프치히와드레스멘과에어푸르트퉁대도시들이성공 적으로재건되었고, 괴테의도시바이마르는괴테탄생 250 주년 인 1999 년을맞이하여그면모를일신하였으며, 구동독지역의 도로및통신시설은거의현대화되었다. 지금까지는일반적으 로라인강이자타가공인하는독일의대통맥이었으나, 앞으로는 드레스덴에서비텐베르크를거쳐함부르크까지동서독을비스듬 27) 여기서 B 는 Beziehung 인간적관계, 정치적배경 에대한암시로쓰인다.
28 안삼환 히가로지르며 727 킬로미터를굽이쳐흐르는엘베강도결코무시하지못하게되었다. 엘베강의공해도현저히개선되었으며, 구동독지역의대표적공해배출공업도시였던비터펠트는인공호수를끼고요트경기틀즐길수있는대규모위락관광도시로 의변선을꿈꾸고있다. 통일과더불어 동독재건 Aufbau Ost 계획이수립된이래 50만개이상의중소기업이구동독지역에서새로이탄생하고, 2, 000 여외국상사가구동독지역에서활동하고있으며, 1998년가을에들어선슈뢰더정권도수상청에 기획본 부동독의미래 Zentralstelle Zukunft Ost 를두고구동독지역 재건을최우선정책으로내세우면서, 구동독지역중소기업육성프로그램 미래 Futour 등을통해동쪽에다계속돈을퍼붓고있다. 정말이지 1 조 2, 000 억마르크이상을퍼붓고도경제위기를자초하지않은것이야말로독일인들만이할수있는일이며, 서독납세자들의끊임없는불평에도불구하고앞으로독일인들은빠르면 5 년, 늦어도 10년이내에동독의경제재건을완수할것으로보인다. 그러면그동안독일통일의국제정치적결산은어떻게나왔을까? 베를린장벽이무너지고동독주민들이빠른시일내의서독편입을원함으로써독일통일이가시화되었던시점에영국의대처수상과프랑스의미테랑대통령은제국주의적독일의재림을두려워했고폴란드인들은독일이통일되면독일인들이오더강과나이세강의국경선문제를재론하자고나올까봐두려워했으며, 체코인들은 2차대전후에주데텐지방에서추방되었던독일인들의새로운권리주장이나올까봐걱정했다. 그러나통독 10년후의결과는전혀딴판이되었으니오늘의독일은군국주의나새헤게모니에의징후를전혀찾아볼수없는정상적인나라일따름이며, 새로운수도베를린은프로이센적인군사행진대신에 러브퍼레이드 Love Parade' 를구경할수있는세계적현대도
통독이후의동톡과동독인들 29 시로변모했다. 폴란드나체코, 또는그어떤동구국가와도새로운영토분쟁이일어나지않고있으며, 몇몇도시에서극우파청소년들의테러가일어나고았는현상올일시적사회및청소년문채로칠수있다면아직까지국제적으로우려할만한국수주의적망상의정후는나타나지않고있다. 동서독의통일을통해독일이중앙집권적국민국가로강화될것이라고생각한것은주변국틀의기우에불과했다. 바이에른주지사에트문트슈토이버는오히려 통일올통해독일국민국가의연방적성격이강화되었으며, 이점이독일연방공화국올위하여긍정적인작용올한다 "28) 고강조한바있다. 요컨대통일독일의모습온혹시나과거나치스의망령이되살아나지나않올까하는국제적불안감을깨끗이일소시키고이제는유럽연합의일국으로서의그편안한모습을셔서히드러내게되었는데독일이이와같용인간적모습올하고국제사회에나타난것은독일의행복일뿐아니라유렵의행운이기도하다. 돌이켜보건대, 1990년 10월 3 일은독일문제가유럽의문제로껑충격상되는시점이었으며그시점부터는동서독의정체성과그화합문제보다는, 세계사적으로시각올좀더넓혀본다면, 유럽의정체성이더중요하게된것이다. 이런의미에서볼때, 우리는동독을서독에펀입된지역이라는생각으로부터유럽의한지역이라는생각으로발상전환을해야한다. 독일과유럽의한변방으로서가아니라유럽의중심지역으로서생각올바꿔야한다 "29) 는동독출신의연방하원의장볼프강티어제의말은주 28) Vgl. Marianne Heuwagen: Regierungserklärung zur deutschen Einheit. Schröder verspricht neuen L 삶 ldem Solidarpalα 11, in: Süddeutsche Zeitung, 30. September 2α)() (Politik): "Stoiber betonte, dass durch die Vereinigung der föderative Charakter des deutschen Nationalstaates gestärkt worden sei, und dies sei ein Gewinn für die Bundesrepublik Deutschland. 29) Vgl. Werner Kolhoff: "Wir müssen Ostdeutschland umdenken", Bundestagspräsident Wolfgang Thierse über Enttäuschungen, neue
30 안삼환 목을받아마땅하다. 티어제의말에의하면이렇게유럽적시각올가지게될때에바로소 동독지역에서관찰되는 낯선것 및 외국인들 에대환거부 "30) 가동독인들과독일인전체률위해얼마나위햄천만하고치명적인사고방식인가하는점이자명하게된다는것이다. 그렇다! 구동독지역의모든주민들과청소년들은티어제의이말의참뭇올깊이되새겨보는것이좋을것이다. 동독은더이상변방이아니라유럽의중심지역으로부상하였다. 이지역의주민들은중섬지역에상응하는사고방식과행동양태를지녀야할것이다. 이런의미에서통독당시의동독청년들이현재파리에서, 런던에서, 텍사스에서, 그리고로스앤젤레스의대학에서공부하면서국제인으로성장해가고있다는최신보도들은고무적이다. 머지않아동독은독일의일부로서, 그리고유럽의일부로서자연스럽게통합되어갈것이며동독의주민들이나청소년들도동독인으로서보다는독일언또는유럽언으로서자신의정체성을자연스럽게조정책나갈것이다. 口 H 느 = 口 } :::X::: L 二 E므 아직도여전히분단상태에있는오늘의우리현실에서, 장래우리한반도가통일훨경우에대벼하기위해독일통일의교훈올정리해보려는작업은자칫부질없는짓으로보일수도있을 Leitbilder und den Fremdenhass, in: Berliner Zeitung, 24. Juni 2α)(): "Wir müssen Ostdeutschland umdenken vom Beitrittsgebiet zur europäischen Region. Vom Grenzraum Deutschlands und Europas zu einem Ort der Mitte in Europa. 30) Vgl. Wolfgang Tierse: Vom Rand in die Mitte. Ostdeutschland muß seinen Platz in Europa finden, in: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2. Oktober 2α)(): "Erst die europäische Perspektive macht nämlich klar, wie fatal die in Ostdeutschland zu beobachtende Abwehr von "Fremdem und "Fremden ist.
통독이후의동톡과동독인들 31 것같다. 그럼에도불구하고이 연구의당초목적으로되돌아가타산지 석이될만한몇가지교훈을여기에추출해보기로하겠다. 첫째, 독일의정부와국민들은통일의호기가왔을때그기회를잘포착했다는사실을강조해두고싶다. 권터그라스둥많은좌파지식인들은동독의서독에의홉수통일율반대하고점진적인연방제통일을찬성했으나그것은당시동독주민들의열화와같은민주화의의지, 주거와여행의자유에대한목마름, 서방소비사회에의동경등을전혀고려에넣지않은, 이상주의적닥상공론의결과였다. 그당시동독주민들의 목마름 은그어떤인내에의호소로도진화될수없는폭발적인성격의것이었다. 게다가모스크바의현실정치가들인고르바초프와셰바르드나제가얼마나더오래권좌에머물러있을지도예측할수없는상황이었고, 영국과프랑스등우방들의태도조차도독일이갑자기강성해지는데에대해일말의불안감을감추지못하고있던시점이었다. 콜수상은 - 그뒤에드러난많은다른정치적실수에도불구하고 - 적어도이일에관해서만은아주시의적절한정치적결단올내린것으로평가된다. 우리한반도는독일보다도더욱복잡한지정학적위치에놓여았다. 만약기회가올때, 우리는어떻게하면그기회를놓치지않고잘포착할수있을지평소에많은연구룰해두고만일의국제상황에빈틈없이대처할수있는여러가지시나리오를준비해두어야할것인데현재와같은무능하고사명감없는관료집단에게이런고도의작전을주문하는것자체가무리일지도모르겠다. 둘째, 당시콜수상의판단이옳았다고해서한반도에서도독일식홉수통합을따르는것이좋다는것은결코아니고, 오히려그반대로나아가야한다. 일정기간동안한시적으로서로다른통화체제, 서로다른법제도와교육제도를지닌 2국연방제로나아가면서, 우선외교와국방문제부터공동보조를취
32 안삼환 하는점이적단계를거쳐야한다. 그런과정을통해남과북은상호간에조금씩이해의폭올넓혀가야할것이다. 그래야만, 점령당한 2등국민 이라느니 머리속의휴전선 은아직도그대로남아었다는등독일식표현들이이땅에서는생겨나지않게할수있을것이다. 독일이통일되기전에동베를린홈볼트대학의한국학과교수였던헬가피히트 <Helga Picht) 여사는앞으로남북한이통일된다면, 남한의정치인경제인문화인과모든사람에게북한주민플의삶과그실적을업신여기지말고북한에도사람이살고있었다는사실을잊지말라 고충고하고, 북한주민들과접촉할때그들이서로동둥한권한을가진인간이라는점을잊지말라 "31) 고부탁하고싶다고말한바었다. 한때북한의김일성대학에서연구생활을한바있는이독일인의충고와부탁올진지하게받아들인다면우리는다음과같은결론을내릴수도있을것이다. 즉, 셋째로, 통일을서두르지딸고, 통일이되기전에우선남한사람들이북한사랍들을사람답게대할수있는인성과자질부터함양해야할것이다. 사회교육과 2 세교육올통하여국민들과우리의 2세들이우선남한의이웃에대하여따뜻한마음을지니도록가르쳐야한다. 자기와의견이나처지가다른사람을너그럽게이해하는마음과, 경쟁사회에낙오된약자들을배려하는마음을지녀야한다. 만약우리가사회적약자들올돕고거둘수있는제도적장치를확보하지못한상태에서통일이온다면, 북녘땅은 1990년 10월 3 일이후지금까지동독지역에서얼어난것보다도훨씬더잔인한자본주의적대 ( 大 ) 약탈극의현장이되고말것이다. 복부인들이금강산백두산, 묘향산, 개마고원으로달려갈것이고호텔산업과레저및스포츠산업은압록강과두만강유역의개발계획을서두를것이며옹갖부동산중개사, 건설업자, 투기꾼등이북녘땅을헤집고다니게될것 31) 한국일보, 2000 년 6 월 5 일자, 5 띤참조.
통독이후의동독과동독인둘 33 이다. 한반도분단의비극이남긴자랑스러운유산이며세계얘 유래없는생태계의보고인비무장지대는금방크레인의숲으로 화하고자연파괴에놀란동식물들의신음소리가보도롤타고세 계인들의가슴을찢어놓아앞으로인류문화사에서코리언과카 언이유사어가되고말것이다. 영남과호남사이의갈둥도풀 줄모르는남한사람들은북녘사람들의가슴에통한의상처를 남겨남북갈등이극에달하게될것이다. 통일이되어남북이다시원수가되느니차라리통얼이늦어 지는것이낫지않은가! 소위통일지연세력의판에박힌논리 가결코아니다. 옳은통일을이룩하려면, 우선비똘어진우리들 의 마음과생활부터인간적으로고쳐나가야한다는말이다. 우 리가지금처럼학교와사회에서 경쟁 만올 가르천다면, 통일의 결과가어떻게될지는자명하다. 통일이민족앞에, 그리고인류 와세계앞에내세울만한자량스러운성취가되자연, 세계사와 우리역사의아픈상처인비무장지대를인류의자랑스러운생태 평화공원으로가꾸어 미래의 세계 청소년들에게관광자원으로 개방함으로써전쟁의상처를평화의메시지로승화시킨한겨레 의 슬기를보여주어야한다. 이것이야말로한반도를저희마음 대로가르고찢어놓았던세계열강들에 대한가장큰복수, 즉 사량의되갚음이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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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안삼환 Zusammenfassung Ostdeutschland und Ostdeutsche nach der lviedervereinigung Sam-Huan Ahn (Seoul National Univ.l Unmittelbar nach den Umbruchsereignissen von 1989 forderten die Ostdeutschen mit großer Mehrheit die rasche Einführung der Marktwirtschaft. Aber der Ubergang von der sozialistischen Staatswirtschaft zur Marktwirtschaft verlief nicht bruch- und reibungslos. Für viele Menschen in den f디 nf neuen Ländern war er mit herben Einbüßen und tiefen Einschnitten verbunden. Tiele sind arbeitslos geworden und musste zusehen, wie die Wessis mit ihrem Kapital nach dem Osten sozusagen,einmarschierten Nicht selten pflegten Ostdeutsche sich zu fühlen, dass ihr eigenes Land von den Wessis,besetzt sel. Daher sagt man in Ostdeutschland heute noch, dass die "Mauer im Kopf noch nicht gefallen sei. Bei vielen Ostdeutschen ist auch die sogenannte,ostalgie zu beobachten, was jedoch nicht heisst, dass sie die Wiedervereinigung rückgängig machen wollen. 1m Jahr 2000 meinten 70% aller Ostdeutschen, die deutsche Wiedervereinigung 1990 ist so richtig gewesen. Aber gewöhnt an die Allzuständigkeit der Obrigkeit, haben die Ostdeutschen Bedenken gegenüber den Funktionsprinzipien der bundesdeutschen Marktwirtschaft und Demokratie. Vor die
통독이후의동독과동톡인들 37 Wahl gestellt, ob sie die Plan- oder die Marktwirtschaft vorziehen, entscheiden sie sich mehrheitlich für das marktwirtschaft}iche Svstem. Also ist ihr Verhältnis zum westlichen Wirtschaftssystem sehr ambivalent. Die Ostdeutschen profitieren zwar von dem Markt wirtschaftssystem, aber in ihren Augen bietet der Kapitalis mus weder soziale Sicherheit noch Gerechtigkeit. Er beute die Menschen aus und führe zu verschärfter Ungleichheit. Wenn man aus dem Zustand des Ostdeutschlands und der Ostdeutschen eine Lehre für die Zukunft Koreas ziehen will, dann kann man wohl sagen, dass die Süd-Koreaner mit ihren Landsleuten im Norden humaner umgehen sollten als die Westdeutschen, wozu sie meines Erachtens zur Zeit kaum in solcher Lage zu sein scheinen. Sie sollten nicht wie Schlange das Igelchen fressen, sondern mit ihren Landsleuten im Norden mit mehr Solidarität und Hilfsbereitschaft umgehen. Auch die Natur des Nordens einschließlich der Demilitarisierten Zone, die schließlich als ein glückliches Nebenprodukt des Kalten Krieges eine Aπ beispielloser Naturpark mit raren Pflanzen und Tieren geworden ist, sollte keineswegs den südkoreanischen skrupellosen Kapitalisten als Beute schutzlos ausgeliefert se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