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외동포 문학의 창
제11회 재외동포 문학상 수상집 재외동포 문학의 창 2009년 11월 30일 발행 발행처 재외동포재단 발행인 권영건 주소 서울시 서초구 서초2동 1376-1(외교센터 6층) 전화 (02)3415-0100 팩스 (02)3415-0119 http://www.korean.net 제작 소통(02-895-3080) 비매품 ISBN 978-89-93454-19-2 03800 본 작품에 대한 일체의 권한은 재외동포재단에 있으며 본 재단의 동의 없이 무단 복제나 전재를 금합니다.
제11회 재외동포 문학상 수상집 재외동포 문학의 창
세계 어디에 살더라도 당신은 자랑스러운 한민족입니다 지구촌 곳곳에 거주하고 있는 700만 재외동포들은 한민족의 귀중한 자산입니다. 재외동포재 단은 날로 늘어나는 동포들이 거주국서 존경받는 모범적인 구성원으로 정착하고, 나아가 국 내외 한민족이 공동 번영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1997년 설립되었습니다. 재외동포재단 은 교육, 문화, 경제, 교류를 위한 한민족네트워크 구축을 위해 오늘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 고 있습니다. Tel : 82-2-3415-0100 http://www.korean.net
재외동포 문학의 창은 재외동포들의 문학을 향한 열정의 마당이며, 한민족 공동체의 꿈을 마음껏 펼칠 문학의 한마당입니다.
발간사 700만 재외동포들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삶의 진중함을 담아낸 재 외동포 문학의 창 을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올해로 열한 돌을 맞이한 재외동포문학상 은 지난 2년간 논픽션 분 야에만 한정되었던 응모분야를 시, 소설, 수필, 청소년 부문으로 확대 하여 전 세계 33개국으로부터 1천 1백 여의 작품이 접수되었습니다. 작품 수준도 그 어느 때 보다 높았다는 심사위원들의 평은 재외동포 문학인들의 한글문예창작에 대한 열정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최근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공식문자로 채택하였다는 소 식이 있었습니다. 한민족의 이민과 이주의 역사가 한 세기를 넘기고 동 포 2-3세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서 한글을 모르는 젊은 동포들이 늘 어나는 상황 속에서 한글의 우수성을 확인시켜준 고무적인 일이었습니 다. 이처럼 우수하고 아름다운 한글로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우리 민 족은 참으로 행복한 민족입니다. 우리 재단은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마음껏 문학적 재능을 발휘 하고, 국내외 동포들이 문학작품을 통해 서로 소통하는 자리를 마련하 6 재외동포 문학의 창
고자 재외동포문학상 을 시행해 왔습니다. 한글 문예창작의 어려움 속 에서도 창작 활동에 매진하는 재외동포 문학인 여러분의 계속적인 참 여를 당부 드립니다. 특히, 해를 거듭할수록 풍성해지는 재외동포문학상이 동포 2-3세들 에게 한글을 잊지 않고,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큰 도움 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끝으로, 작품을 출품해주신 재외동포 문학인 여러분과 공정한 심사 를 위해 많은 작품을 하나하나 진지하게 살펴주신 심사위원 여러분들 께도 감사의 뜻을 전하며, 재외동포의 삶을 진솔하게 엮은 가슴 따뜻한 글이 여러분의 일상에 신선한 활력으로 다가가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09. 10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권 영 건 발간사 7
차례 재외동포 문학의 창 발간사 6 심사평 12 시 부문 27 대 상 바 퀴_김효남(미국) 29 우수상 나무의 꿈_김아영(아르헨티나) 31 대나무의 DNA_이종배(캐나다) 32 민들레_강설령(중국) 34 크리스티 경매장 가는 길_전영애(영국) 38 종이 비행기_최남규(독일) 40 가 작 8 재외동포 문학의 창
소설 부문 43 대 상 우수상 폭 우_신정순(미국) 45 엄마, 미안해_김민정(일본) 66 아이야 도망가_황희(미국) 91 가 작 어둠 속에서_김 건(호주) 123 알렉산드리아의 여자들_아미라 L.S.리(이집트) 154 노래하는 밀라노_조민상(이탈리아) 175 수필 부문 219 대 상 우수상 재즈 아리랑_윤종범(미국) 221 스팅키_박혜자(미국) 230 아버지_조성숙(중국) 240 가 작 한 잔 속에 피어나는 엘도라도_유금란(호주) 250 사라져가는 빨래방치 소리_천광일(중국) 257 프리데리케의 아이_천복자(독일) 265 9
중고등 부문 279 대 상 당신의 은신처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는 엄마, 엄마를 위하여_송진아(뉴질랜드) 281 우수상 장려상 노 새_박연희(미국) 287 강은 그에게 무엇이었을까_윤영(중국) 292 행 복_최송지(피지) 295 따뜻한 사람들이 사는 곳_김가영(우즈베키스탄) 309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_김고자(일본) 315 이중국적자의 딜레마(International Grey Spot)_ 김호연(미국) 318 10 우리는 사춘기!_문정희(베트남) 325 나의 친구 첼로에게_이수정(미국) 348 재외동포 문학의 창
초등 부문 355 대 상 우수상 우리 아빠 한국 가실 때와 오실 때_안찬원(몽골) 357 영원한 숙제 한국어 _김태양(호주) 359 아빠의 마음_유재원(미국) 363 나의 꿈은 식물학자_이기혜(뉴질랜드) 366 장려상 새파란 신발과 민수_김성안(중국) 369 사랑을 기다리고 평안을 기대하는 그들_ 김진희(우즈베키스탄) 374 우리가 체험한 사랑으로 가는 길 _리승희(중국) 379 보고 싶은 천사 미래_박서연(태국) 383 신세대 신데렐라_송미령(뉴질랜드) 386 수상소감 389 11
심사평 <시 부문 심사위원 신달자, 오형엽, 정호승, 조정권> 올해 재외동포문학상 시 부문에는 700여 편의 많은 작품들을 응모하 여, 해외에서 생활하는 우리 동포들의 시 창작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실감하였다. 심사위원들은 심사가 진행되는 과정 내내 재외동포들의 체험과 사색과 추억과 의식 및 무의식의 세계를 접하면서 매우 의미 있고 소중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응모작들은 크게 세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첫째, 재외동포들의 해외 생활을 단순히 소재의 차원으로 접근한 작품, 둘째, 이러한 차원 을 한 단계 뛰어넘어 시적 형상화의 수준에 도달한 작품, 셋째, 이 두 가지가 결합된 작품이 그것이다. 심사위원들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유형 에 속하는 작품들을 눈여겨 살피면서 예심을 진행하였다. 먼저, 심사위원들은 <바퀴>를 대상으로 결정하는 데 만장일치로 합 의했다. 이 시의 1연은 혼잡한 다리 위에 차를 세우고/손수레에 짐을 부리는 일상적 삶의 단면을 제시하지만, 무겁거나 축축한 순서로 식 료품들을 올리는 것이 가벼운 것부터 쟁인 생의 순서와는 반대 라는 표현은 범상치 않은 생의 통찰을 보여준다. 평범한 일상의 한 장면으로 부터 생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는 이러한 발견술은 이 작품에 시적 깊 12 재외동포 문학의 창
이와 밀도를 부여한다. 2연에서는 식료품을 실은 손수레를 끌고 가면 서 덜컥, 다리의 파인 상처를 바퀴가 주무르고 지날 때/미끄러져 떨어 지는 상추 의 모습에서도 이러한 특성이 발견되고, 차도로 굴러가는 토 마토 몇 알 과 3연의 귀가가 늦어지는 아이 의 무거워 눈빛 을 오버랩 시키는 대목도 자연스러우면서도 절묘하다. 마지막 연인 4연은 지금은 수레를 멈출 수 없는 저녁 속으로 굴러야 할 시간 쩔뚝이는 바퀴 시간의 병목 속으로 흔들리며 구른다. 에서 보듯, 이러한 상황을 바퀴 의 이미지 및 시간 의 의미와 결부시킴 으로써 한 단계 더 의미를 상승시키는 확장의 힘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대나무의 DNA>와 <나무의 꿈>이 우수상으로 선정되었 다. <대나무의 DNA>는 사철 푸르고 곧게 자라는 대나무 의 그림자 를 내 마음의 정원에/ 옮겨심 는다는 시적 발상이 참신하고, 밤 이면 그 뿌리를 베개 삼아 누워 잠들고, 사철 내내 나에게 푸른 옷을 입히 는 시절이 가고 난 후, 인생의 가을낙엽이 질 무렵 비워두고도 담지 아니하는 디엔에이 를 노래하는 시적 전개과정에서, 생애의 흐름을 대 나무의 상징으로 치환하는 솜씨가 높은 점수를 얻었다. <나무의 꿈>은 고개 숙여/ 생각을 깎고 다듬 는 나무 가 꽃들과 더불어 희노애락 을 나누고, 열매 잃고 지쳐 쓰러져도/ 다시 일어 서며, 땅 아래 뿌리를 박으며/ 기초를 가다듬고, 양 옆을 살피며 자라 균형을 다잡는 모습 심사평 13
을 통해,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간결하고 함축 적인 언어로 형상화한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가작으로는 <종이 비행기>, <민들레>, <크리스티 경매장 가는 길> 이 선정되었다. <종이 비행기>는 화자인 아빠 가 잠든 아이 옆에 놓인 종이비행기에 초록빛 꿈과 소망을 부여하는 아름다운 장면을 효과적 인 어조로 표현한 점에서, <민들레>는 이국에서 겪는 고달픈 애환의 역사를 강한 남성적 어조로 표현하면서도 민들레 꽃씨 의 상징성을 적 절히 형상화한 점에서, <크리스티 경매장 가는 길>은 크리스티 라는 단어의 반복을 통해 경매장 가는 길의 감각을 발랄함과 빈정거림이 혼 재된 미묘한 뉘앙스로 잘 살려낸 점에서, 각각 일정한 시적 성취를 이 루면서 심사위원들의 주목을 끌었다. 14 재외동포 문학의 창
심사평 <소설 부문 심사위원 김종회, 김형경, 최인석> 올해 재외동포 문학상 소설 부문에 응모한 작품은 모두 75편이었다. 응모작들은 모두 특별한 삶의 모습을 담고 있고, 그 특별한 삶에는 저 마다 절절한 진실이 담겨 있었다. 그렇기에 심사하는 입장에서 한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특별하고 감 동적인 이야기 와 소설로서의 문학 작품 사이에 놓인 엄염한 차이를 어떻게 적절히 작품 심사에 적용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었다. 응모작들 을 거칠게 구분하면 두 종류가 있었다. 한 부류는 외국 생활의 간난신 고와 그 끝의 축복 같은 성취를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지만 소설적 완성도 면에서 아쉬움이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다른 한 종류는 소설 적 구성 요건들에 맞춰 작품을 잘 만들어내기는 했지만 삶의 진한 속살 을 첨예하게 드러내는 데는 다소 부족한 감이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심사위원들은 문학상의 이름으로 소설 을 뽑는다는 사실을 더 염두에 둔 채 두 영역을 적절히 조화시켜가며 심사에 임했다. 대상으로 선정된 신정순(미국)의 <폭우>는 소설적 형상화의 덕목들 을 안정적으로 성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남편이 교통사 고로 입원하면서 사고 속에 숨은 의혹이 드러나고, 남편에 대한 억압된 심사평 15
감정이 심리 표면으로 떠오르면서 그 교통사고의 다른 진실이 드러나 는 시점까지의 과정을 적절한 소설적 구성을 차용하여 진행시키고 있 다. 인간 심리의 기층과 표층의 어긋남, 의식과 무의식의 괴리 등을 세 밀하게 들추면서 우리는 누구도 자기의 진짜 속마음, 숨은 의도를 모르 는 채 생을 마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섬뜩하게 일깨운다. 다만 보험 사기라는 소재의 통속성과 몽유병이라는 장치를 동원하여 갈등을 흐지 부지 얼버무린 방식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우수상으로 뽑은 김민정(일본)의 <엄마, 미안해>와 황희(미국)의 <아 이야 도망가>는 대상과 견주어볼 때 그 완성도에서 그다지 손색이 없는 작품들이었다. 엄마, 미안해 는 천차만별의 엄마와 딸들 이야기 중 하나 이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라고 다짐하며 종속적인 여성의 삶을 벗어던지고 먼 나라로 떠나 자립적인 삶을 추구해온 엄마의 딸은 또다 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라고 말한다. 독립적인 엄마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 것이었는가를 목격했기에 재빨리 의지할 남자를 찾아내어 임신 하고 결혼하려 한다. 서로 사랑하지만 이해하지는 못하는 엄마와 딸이 그 질곡의 세대차를 진흙구덩이처럼 겪어내는 심리가 잘 그려져 있다. 아이야 도망가 는 이민 사회의 소외감과 그 구성원들의 불안감을 그 려낸 작품이다. 뿌리 뽑혔다가 다시 심겨지는 것과 같은 외국 생활에서 불안감은 삶의 한 요소가 되며, 불안감을 다스리기 위해 의존하는 종교 는 일상의 중요한 부분이 된다. 어른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생활하면서 전도나 봉사 활동에 전념하는 동안 아이러니컬하게도, 집에 혼자 남겨 진 아이는 걷잡을 수 없는 불안과 공포에 노출된다. 빈 집에서 내적 외적 공포와 맞서는 아이 화자의 심리가 세밀하게 그려지고 있다. 불안 16 재외동포 문학의 창
이 불안을 낳고, 부모의 불안이 자식에게 상속되는 과정을 기승전결의 소설적 구성을 따라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 가작으로 선정한 작품은 김건(오스트레일리아)의 <어둠 속에서>, 아 미라리(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여성들>, 조민상(이탈리아)의 <노 래하는 밀라노> 등 세 작품이다. 어둠 속에서 는 한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그 사회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역량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작품이다. 옛 조국을 위해 위험을 감수했던 과거 경험과 새 로 터를 잡은 사회를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현재 사건이 교직되면서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이 안정적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여자들 은 카 이로에 거주하는 외국인 여성들의 삶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해낸 작품이다. 저마다 다른 국적, 취향, 목적을 가진 여성들이 낯선 곳에서 만나 엮어가는 삶이 모여 태피스트리처럼 인상적인 무늬를 펼쳐 보인 다. 노래하는 밀라노 는 성악을 공부한 후 그곳에 자리 잡기 위해 애쓰 는 가장의 내적 고민들이 가감 없이 노출되어 있는 작품이다. 그 땅에 자리 잡는다는 일은 그곳에서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 수 있는가와 비례 하며, 그 일은 지리멸렬한 인내와 불안을 넘어서는 일이라는 사실을 일 관된 목소리로 전달한다. 문학상을 심사하면서 응모된 작품들이 저마다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경험은 처음이었다. 수상 작품뿐 아니라 응모된 모든 작품들이 우열을 가려 따질 수 없는 저마다의 가치, 색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외국에 살면서도 모국어를 잊지 않고, 모국어로 작품을 쓰는 일은 글쓰기를 넘 어서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수상자뿐 아니라 응모작을 보내신 모든 분 들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심사평 17
심사평 <수필 부문 심사위원 복거일, 오정희, 이재복> 예심을 거쳐 본심에 진출한 작품은 모두 18편이었다. 본심에 오른 작품은 예심의 치열함을 반영하듯 모두가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 었다. 어느 것 하나 선외로 하기에는 실로 그 공들여 쓴 육화된 문장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우리 심사위원들은 선뜻 수상작을 결정하지 못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 우리 나름의 기준을 정하였다. 그 중 요한 기준 중의 하나가 바로 재외동포문학상 의 취지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8편 모두 이런 취지에 부합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심사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재외동포로서의 체험의 진정성과 그것의 미적인 형상화였다. 이러한 기준은 재외동포문학상 이 단순한 체험수기 수준 의 문학적 성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미적인 결과물로서의 문 학적 성취를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기준에 입각해 조성 숙의 <아버지>, 천광일의 <사라져가는 빨래방치소리>, 윤종범의 <재 즈 아리랑>, 박혜자의 <스팅키>, 유금란의 <한 잔 속에 피어나는 엘도 라도>, 천복자의 <프리데리케의 아이> 등 6편의 작품을 선정했다. 먼저 조성숙의 <아버지>는 잔정이 없고 무뚝뚝한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을 진솔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아버지의 모습 18 재외동포 문학의 창
을 과장됨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큰 장점임에 틀림없 다. 그 아버지를 통해 우리는 신산고초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되짚어보 는 시간을 가지고 미래의 우리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소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회상이 지나치게 복고적으로 또 감상적으로 흐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나 의 인식이 다소 식상하고 상투적이다. 천광일의 <사라져가는 빨래방치소리>는 이미 제목에서부터 회고적 임을 알 수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점 해체되어가는 연변 조선족 공동체의 운명을 사라져가는 빨래방치소리를 통해 되짚어내고 있다. 공동체의 해체는 안타까운 일이며 그것은 심각한 실존적 위기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에 값한다. 하지만 빨래방치소리의 사라 짐을 안타까워한다고 해서 조선족 공동체의 운명이 어떤 전망(perspective) 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실존적 위기에 대처하는 의지가 투영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윤종범의 <재즈 아리랑>은 이국 땅에서 동포로서 겪는 어려움을 진 솔하게 보여주면서 또한 그것을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를 그 어느 작품 에서보다도 잘 드러내고 있다. 재즈 아리랑 이야말로 이국 땅에서 그가 찾은 실존의 방식이다. 그런데 그가 찾은 실존의 방식의 근간이 아리 랑 으로 표상되는 한민족의 오랜 전통이라는 사실이 잔잔한 감동을 불 러일으킨다. 그가 이국땅에서 재즈 아리랑이라는 생존의 방식을 발견 한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한민족의 오랜 전통을 잃지 않고 치열하게 살아온 자에게 내린 신의 축복인지도 모른 다. 이런 점에서 그의 발견은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수필은 이렇 심사평 19
게 일상의 삶 속에서 어떤 지혜를 발견하는 기쁨을 기록한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박혜자의 <스팅키>는 문화적인 장벽을 스팅키 라는 버려진 애완견 을 통해 아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아주 실감난다는 것은 그만큼 스팅키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웃들과의 미묘한 문화적인 차이 를 꼼꼼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이런 대목이 그렇다. 자신은 스팅키를 우리집에서 같이 사는 걸로 생각하는 데 비해 이웃들은 그것을 돌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생각의 차이가 자신의 삶을 힘들게 하고 있다고 그 녀는 말한다. 하지만 그것을 외계인들하고의 의사소통이라고 냉소해버 리는 것은 올바른 삶의 해결 방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 말 자체 가 자꾸 씁쓸함으로 다가오는 것은 왜 일까? 유금란의 <한 잔 속에 피어나는 엘도라도>는 글에 세련미가 묻어난 다. 이런 류의 글을 많이 써본 솜씨다. 군더더기 없는 세련됨은 글의 훌륭한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세련됨이 지나치면 감동이 사라진다. 커피 한 잔의 여유를 통해 소중한 인연을 만들었다는 구절에 공감하면서도 새로운 엘도라도를 꿈꾸느라 늘 상대적인 외로움에 허덕 이며 산다는 말에는 공감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 지나친 세련성에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과의 일정한 거리를 통한 반성적인 사유는 필요 하지만 그 사유가 질퍽한 삶 속이 아니라 세련된 말 속에 있다면 공감 의 정도는 그 만큼 작아질 것이다. 천복자의 <프리데리케의 아이>는 장애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당당 하게 내 보이면서 스스로의 길을 찾도록 도와주고 또 개척해 가는 독일 20 재외동포 문학의 창
인들의 삶의 모습을 정성들여 쓴 그런 글이다. 그녀가 보여준 독일인들 의 삶이 자신뿐만 아니라 그것을 읽는 우리에게까지 그 감동이 전해져 오는 것은 진실을 드려내려는 그녀의 의지 때문이다. 그녀의 의지를 우 리는 글 속에서 느낄 수 있다. 다만 지나치게 전달에만 치중해 정작 중요한 자신의 내면의 소리는 글 속에 녹아 있지 않다. 수상한 분들께는 축하의 인사를 그리고 선에 들지 못한 분들께는 심 심한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다. 선에 들었건 그렇지 못했건 중요한 것 은 글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삶 을 반성하는 것이라고 본다. 느끼고 반성하는 삶만큼 행복하고 아름다 운 것이 어디 있으랴. 심사평 21
심사평 <청소년 부문 심사위원 서하진, 이상숙, 이혜경> 2009 재외동포 문학상에는 초등학생과 중고생 부문이 확대되었고 세계 각지 동포 어린이들이 많은 글들을 보내주었다. 물론 성인부문과 비교하면 응모작 수가 적었지만 창작의 열의와 수준만큼은 성인 부문 은 물론 국내 어린이 글짓기 공모와 비교해도 뒤질 것이 없었다. 초등학생, 중고생들이 한국을 떠나 있으면서도 한국어로 생활문과 수필을 쓰고 나아가 시와 소설을 지어 응모를 하였다는 것만으로도 대 견한 일이다. 재외 동포 어린이, 청소년들은 한국어라는 모국어를 저절 로 터득할 수 없어 학습과 공부로 익혀야하는 의지적인 한국어 화자 들 이기 때문이다. 언어와 문화의 체험과 생활을 통해 자아를 형성해 나가 야할 시기에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모국어로 한국어를 받아들이고 익히는 것은 물론 이를 창작의 즐거움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초등부문에서는 나의 꿈과 미래, 아빠와 할아버지 같은 가족을 소재 로 한 수필, 한국어 배우는 이야기, 한국방문과 같은 일상적인 소재의 생활문 등이 많았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여느 초등생들의 글과 다르지 않게 소박하면서도 발랄한 동심을 보여주어 심사를 위해 읽으면서도 22 재외동포 문학의 창
심사위원들은 내내 즐거운 마음이었다. 또 외국에서 외국어처럼 한글 을 배우는 어려움을 드러낸 글을 읽을 때는 어린이들과 부모님들의 노 력에 숙연해지기도 하였다. 초등 부문의 경우 몽골토요한글학교 5학년 안찬원 어린이의 <우리 아빠 한국 가실 때와 오실 때>가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몽골 돌소금, 징기스 보드카, 몽골 하늘과 말 그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빠를 따라 몽고에서 한국으로 가고, 어묵, 붕어빵, 고추장이 내 친구의 답장 이 한국에서 몽고로 아빠를 따라 온다. 어린이가 좋아하는 것들이 아빠 를 따라다닌다는 어린이다운 정겨운 표현도 좋았고 내가 한국 것 몽골 것 모두 좋아하듯이 두 나라도 사이좋은 친구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마 음도 따뜻하여 심사위원 모두 즐겁게 초등부 대상으로 골랐다. 호주에서 태어나 한국나이로 12살인 김태양 어린이의 <영원한 숙제 한국어 >는 한국어 공부 분투기라 할 수 있다. 공부로 해야 하는 한국 어 때문에 무서워지는 엄마와 이런 엄마에게 심술 부리는 나의 모습이 생생하였고 한국사람이니까 한국말을 몰라서는 안 된다 고 의젓한 결 론을 맺으면서도 엄마가 하시는 말씀 영어는 영원한 숙제야 처럼 내게 는 한국어가 영원한 숙제인 것 같다는 귀여운 푸념이 눈에 띄었다. 이 국생활로 고단하게 살아가는 아빠의 사랑을 바라는 딸이 아빠의 편지 를 통해 사랑을 확인하는 수필 <아빠의 마음>도 재외동포의 삶의 모습 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이 외의 수상작들은, 물론 대한민국 어린이들 의 매끈한 한국어는 아니었지만, 모두 어린이다운 밝은 마음과 진실 한 표현과 진지한 생각이 들어 있어 수상의 영예를 받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심사평 23
중고등부의 경우 자신의 정체성이나, 이중국적의 문제, 낯선 환경 적 응의 어려움, 생활고 등의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 성인의 그것 못 지 않은 다채로움과 생각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정체성, 친구, 사 춘기의 방황, 이중국적 등 관념적으로 보이는 이 문제들은 청소년들에 게는 너무도 현실적이고 절박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절박함은 청 소년기의 혼란과 방황을 더해주었겠지만 재외한인 청소년들은 수필, 소설 등의 창작으로 고민을 가다듬고 마음을 다독거리며 모국어가 주 는 위안을 경험하고 있었다. 대상으로 선정된 송진아의 <당신의 은신처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는 엄마, 엄마를 위하여>는 이국생활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한 딸의 이야기이다. 바쁜 이국 생활 속 에서 잊고 지내던 엄마의 외로움과 고통을 발견한 딸은 엄마를 위해 기도하고 무언가를 할 시간이 지금 온 것 같다는 의젓한 모습과 진심 을 보여주었다. 박연희의 <노새>는 당나귀 아빠의 지구력과 말 엄마의 스피드를 갖 고 태어난 노새가 장거리 경마대회에서 우승한 예를 들어 1.5세 이민자 로서의 정체성을 세워나가는 글이다. 주변의 비웃음을 받던 노새가 스 스로도 모르던 자신의 유전자 때문에 우승을 할 수 있었듯이 자신 또한 주변의 따돌림과 무시를 딛고 삶의 승리자가 될 것이라는 깨달음은 대 견스러울 정도였다. 1.5세대가 스스로를 외톨이나 주변인이 아니라 양 국 문화의 혜택을 입은 행운아로 인식하고 자신의 꿈을 향한 경주를 승리자로 마치리라는 확신을 가지는 광경은 이미 그만의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24 재외동포 문학의 창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의 한국어 화자로서 살아온 윤영 학생의 <강은 그에게 무엇이었을까>는 같은 한국어이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표현과 어휘가 눈에 띄였고 이것은 생경함을 넘어선 우리말의 또 다른 모습으 로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외의 수상작 모두가 소중한 한국문학의 범주 안에서 의의를 지니 는 작품이라고 믿고 있으며 이들과 함께 한국문학이 성장하리라는 믿 음 또한 가지고 있다. 수상자 모두에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심사평 25
시 대상 우수상 부문 바 퀴_김효남(미국) 나무의 꿈_김아영(아르헨티나) 대나무의 DNA_이종배(캐나다) 가작 민들레_강설령(중국) 크리스티 경매장 가는 길_전영애(영국) 종이 비행기_최남규(독일)
바 퀴 대상 김효남(미국) 그가 죠지타운 혼잡한 다리 위에 차를 세우고 손수레에 짐을 부린다 무겁거나 축축한 순서로 생닭 두 박스, 쌀 두 포, 음료수 세 박스 채소 박스 까지 올리는 것은 가벼운 것부터 쟁인 생의 순서와는 반대다 좁아진 다리를 비켜 가는 차들의 경적이 꼭대기에 얹혀진 가벼운 것들을 흔든다 덜컥, 다리의 파인 상처를 바퀴가 주무르고 지날 때 미끄러져 떨어지는 상추 차도로 굴러가는 토마토 몇 알 바퀴 밑에 깔린다 중요한 것을 얻으며 잃는 작은 손실처럼 요즘 들어 귀가가 늦어지는 아이 어쩌다 마주치면 그를 피하는 무거운 눈빛도 저만치 굴러간다. 시 부문 29
지금은 수레를 멈출 수 없는 저녁 속으로 굴러야 할 시간 쩔뚝이는 바퀴 시간의 병목 속으로 흔들리며 구른다. 30 재외동포 문학의 창
나무의 꿈 우수상 김아영(아르헨티나) 고개 숙여 생각을 깎고 다듬고 꽃들과 더불어 희로애락을 나눈다면 흔들려 열매 잃고 지쳐 쓰러져도 다시 일어설 힘이 샘솟길 때로는 땅 아래 깊숙이 뿌리를 박으며 기초를 튼튼히 가다듬어야겠지. 때로는 양 옆을 살피며 자라 균형을 다잡을 필요도 있겠지. 가지가 너무 버거워 지탱하기 힘겨울 때가 있더라도 위로 쭉쭉 뻗을 수 있기를 하늘만이 배경이 되는 그 날까지 하늘과 하나 되는 그 날까지 시 부문 31
대나무의 DNA 우수상 이종배(캐나다) 나이테가 없으니 나무가 아니요 땅 위에 풀잎이 되어 말라 죽지도 않으니 잡초도 아닌 당신 사철 푸르고 곧게 자라는 모습 부러워 나는 그 그림자를 내 마음의 정원에 옮겨 심었습니다. 밤이 오면 당신의 깊은 뿌리가 묻힌 낮은 땅을 베개 삼아 누워 잠들었습니다. 사철 내내 나에게 푸른 옷을 입히고 올곧은 모습으로 바람이 태우는 간지럼에 즐겁게 노래 부르던 시절이 가고 난 후 이제 32 재외동포 문학의 창
내 인생의 가을낙엽이 질 무렵 나는 나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비워두고도 담지 아니하는 디엔에이 청빈으로 살아왔던 지난 생이 행복하고 값있었노라고 아! 바람 이는 대숲 속에 다시 죽순 하나 머리 든다. 시 부문 33
민들레 가작 강설령(중국) 칠흑 같은 어두움 가는 뿌리, 송곳 같은 두려움 한 치도 돌아누울 수 없는 공간에서 얼굴과 등 구별 없이 실타래로 엮여서 땅을 부둥켜안았다 이른 봄 인내만큼 쓴 잎사귀 열리고 외팔로 받친 힘만큼이나 가녀린 노란 얼굴 봄 내내 휘청거리다가 하얀 머리를 건뜻 풀어헤쳤다 누구보다 배고파서 누구보다 추워서 자기보다 더 가벼운 바람에 실려 만년의 끈을 끊고 34 재외동포 문학의 창
그리움이라는 사치품을 헌 쪽박에 챙기고 삼삼오오 떼를 지어 길을 떠났다 산을 건너 강을 건너 팔뚝 같은 강냉이 이삭 달리고 미운 놈 기장밥 해준다는 간도의 낙토에 터를 잡고 손이 갈퀴가 되어 욕망이 짐승이 되어 갈 뿌리, 나무뿌리를 걷어내고 노란 민들레 부락을 이루었다 밤이면 같은 사연을 지닌 이웃끼리 오구굿 모여서 할배, 할매한테 들은 옛말로 그리움의 심지 돋우고 서로 다른 아리랑 노래로 기나긴 겨울밤을 달랬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할아버지의 잠꼬대는 흰 회벽에 가맣게 그을었다가 시 부문 35
학교 가는 손자의 가방끈에서 그네 타다가 어느새 봉분의 민들레홑씨 되었다 청산리 포수꾼들의 함성이 흩어진지 오래고 양지바른 뒷산언덕 낭랑하던 아리랑노래 폐교된 교실의 거미줄에 꽁꽁 포박되던 어느 해 겨울 150년만의 이상기후로 동토를 뚫고 민들레 피더니 하룻밤사이에 사람도 마을도 또다시 미친 듯이 흰머리 풀었다 민들레 꽃씨는 매서운 북풍에 소소리 떠서 갈 곳도 모른 채 올 곳도 잊은 채 뿔뿔이 흩어졌다, 빈 몸으로 한 가닥 미련도 없이 무당이 영신하듯 춤추며 갔다 36 재외동포 문학의 창
띵호와 띵호와 밭고랑에서 중얼대는 낯선 소리가 풍년가을 낟알처럼 탱탱 여문 이후로 고향엔 지금도 민들레 피고 지는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샅샅이 흩어진 민들레 꽃씨가 타향에서 튤립으로 피었는지 아니면 장미로 피었는지 알려주는 이 아무도 없다 시 부문 37
크리스티 경매장 가는 길 가작 전영애(영국) 그린 팍(Green Park)역부터 야금야금 그늘을 삼키며 걸었다 한강을 건너 인천 앞바다와 시베리아를 넘어 온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Christie s Auction) 밀어와 상상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크리스티! 크리스티! 눈짓이 사붓사붓 오가는 요염한 크리스티! 크리스티! 이름을 꼬옥 품자 한껏 가슴이 부푼다. 호주머니 속에 주먹을 깊이 넣었다 페니도 만져지지 않는 호주머니가 삼킨 주먹이 팽팽하게 주름을 펴며 오! 크리스티 아담과 이브의 당당함으로 오! 크리스티 사랑으로 헤엄치던 물고기가 세인 제임스 스트리트에서(St. James s Street) 지느러미를 활짝 펼치며 오! 크리스티 38 재외동포 문학의 창
한 올 흘러내리지 않게 올린 머리칼 밑으로 땀방울이 흥건해지자 킹 스트리트다(King Street) 호흡이 멈춘 페이지에 앉은 파란 나의 그대 크리스티의 태초에 시 부문 39
종이 비행기 가작 최남규(독일)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잠든 아이 옆에 방금 착륙한 하아얀 종이비행기 하나 꿈을 가득 싣고 있다. 콩코드형 동체 위에 가득 적재한 꿈들 파아란 미래를 향해 출항을 기다리고 있다. 방바닥에 기착한 비행기 옆에서 잠든 아이는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아빠도 너 만한 나이였을 때 종이비행기를 접어서 날려 보내며 미래를 향해 초록빛 꿈들을 실어 보냈지. 이 아빠가 엄마랑 너희들을 데리고 비행기로 열아홉 시간이나 걸리는 서쪽 머언 나라 땅 끝에 있는 머언 나라에 와 보니 어렸을 때 종이비행기에 실어 보냈던 그 꿈들 미래를 향해 무수히 띄워 보냈던 그 꿈들은 이 지상 어디에도 안 보이고 40 재외동포 문학의 창
먼 하늘에 가서 별들로 깜박이더라. 내 어렸을 적에 발돋움하면 손에 잡힐 듯하던 초록별들은 먼 하늘에서 아직도 희망으로 빛나는데 이젠 어렸을 때의 아빠 대신 네가 유치원에서 종이 접기 시간에 배워 온 콩코드형 종이비행기를 접어서 먼 미래를 향해 날려 보내는구나. 아빠가 닿지 못한 꿈들을 향해 날마다 종이비행기를 날려 보내는 너는 아빠가 닿지 못한 꿈의 나라에 도달하겠지. 아빠가 잡지 못한 초록별들을 향해 날마다 종이비행기를 날려 보내는 너는 아빠가 손닿지 못한 별들에 가 닿겠지. 지금은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초록빛 꿈들이 저렇게 가물가물 날아가는구나. 우리가 바라는 소망은 언제나 멀리 있는것- 눈앞에 보이는 것을 누가 소망이아 이름하랴? 카펫 바닥에 여덟 八 자로 누워 잠든 아이 옆에 종이비행기 하나 미래를 향한 출항을 기다리며 카펫 위에 하아얀 모습 사뿐히 착륙해 있다. 시 부문 41
소설 대상 우수상 부문 폭 우_신정순(미국) 엄마, 미안해_김민정(일본) 아이야 도망가_황희(미국) 가작 어둠 속에서_김 건(호주) 알렉산드리아의 여자들_아미라 L.S.리(이집트) 노래하는 밀라노_조민상(이탈리아)
폭 우 대상 신정순(미국) 몸이 왜 이렇게 떨리는지 모르겠다. 수술실 입구에는 수술 중 이라 는 네온사인이 붉은 야광 색을 띤 벌레처럼 불길하게 빛나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웬만한 무거운 것도 두 손으로 번쩍 들곤 하던 싼체스가 이토록 맥없이 수술대에 누워있게 되다니. 거리로 넘쳐난 빗물을 퍼내는 야간작업을 하면 이번 겨울에는 꼭 멕시코로 휴 가를 떠날 수 있다며 즐겁게 휘파람을 불며 집을 나갔던 싼체스였는 데. 문득 대기실 구석에서 히터가 쉬익 쉬익, 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형체를 드러내지 않고 몰래 남을 숨어 엿보고 있는 짐승의 숨소리 같기 도 했다. 이것을 계기로 공기 청정기, 필라멘트를 타고 흐르는 전등 안 에 고인 전기 등 평소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조용한 것들이 그동안 얼마나 우리 생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 기 위해 소동이라도 벌이는 것처럼 우우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텔레비전 리모컨의 작동 단추를 눌렀다. 천장 가까이 달려 있는 텔 레비전은 주파수가 잘 안 맞는지 바늘을 부수어 놓은 것 같은 자잘한 직선의 무늬들을 그리며 프라이팬에 전 부치는 소리를 냈다. 잠시 후 소설 부문 45
파란 눈의 백인 여자 아나운서의 얼굴이 나왔다. 밤 열한 시 뉴스에서 는 싼체스가 당한 사고를 제법 상세히 보도하고 있었다. 오늘 오후 아홉 시 경, 구십사 번 하이웨이 튜이 길 출구 가까이에 서 생긴 사고로 피해자는 중상을 입고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습니다. 이 번 사고는 싼체스 마카오 씨 차를 뒤따라가던 승용차가 갑자기 속력을 내면서 마카오 씨의 차가 서너 번 들이받으면서 생긴 사고로 추정됩니 다. 경찰은 마카오 씨의 차가 여러 번에 걸쳐 받힌 점과 사고 직후 조금 도 주저하지 않고 뺑소니를 친 점으로 미루어 이번 사고가 혹 고의적 살인 시도가 아니었나 의심하고 있습니다. 경찰은 이 사건을 다각적으 로 조사 중에 있습니다만 범인은 아직 체포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현재 구십사 번 하이웨이에서 튜이 길로 빠지는 곳은 사고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봉쇄되었으니. 여자 아나운서의 얼굴은 지지지, 수많은 바늘비 속으로 다시 사라져 버렸다. 실례합니다. 소리 나는 입구 쪽을 돌아보니 경찰복을 입은 거구의 백인 남자가 서있었다. 머리카락과 어깨 부분은 비에 젖어 있었고 허리춤에 권총을 차고 있었다. 상심이 크겠지만 몇 가지 질문에 아시는 대로 대답해주시기 바랍니 다. 경찰이 먼저 말을 꺼냈다. 혹 고의적 살인 사건이 아닌가 해서요. 아, 네. 46 재외동포 문학의 창
남편께서 주위에 원한을 살만한 친구나 이웃이 없었는지 생각나는 대로 자세히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경찰은 싼체스의 직장 생활과 그의 친구들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싼체스의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 본 적이 없고 그들이 초대하는 날에도 싼체스만 갔지 내가 동행 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에게 가까운 친척이 있는지 그가 몇 달 전 새로 옮긴 직장은 이름만 알 뿐 정확히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싼체스와 그래도 부부로 십 년 가까이 살았는데 그에 대해 이 토록 아는 것이 없다니. 나는 그에게 무엇이었고 그는 나에게 무엇이었 던가. 부부? 그냥 같이 한 공간에서 먹고 자고 하는 관계에 있는 남녀 가 부부라면 그와 나는 분명 부부다. 뺑소니 차 사고임에는 틀림없지만 좀 이상한 점이 있어서요. 목격 자 증언이 있었어요. 목격자 증언이요? 사건 현장을 목격했던 사람이 경찰서로 제보 전화를 해줬습니다. 혹시 주위에 까만 색 쉐비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없나요? 폭우 때문 에 운전자의 정확한 인상착의는 확실하진 않지만 멕시코 청년인 것처 럼 보였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멕시코 청년 중에 까만 색. 없는데요. 나는 단호한 음성으로 경찰의 말을 잘랐다. 이마에선 갑자기 진땀이 송글 배어나오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까만 색 쉐비 까만 색 쉐비 미국에서 가장 흔한 차가 까만 색 쉐비가 아닌가. 몇 천 대, 아니 몇 만대, 몇 십 만대가 넘을 지도 모른 소설 부문 47
다. 그리고 멕시코 청년. 이 나라, 아니 이 동네만 하더라도 멕시코 청 년이 얼마나 많은가. 며칠 전 마크를 데리러 온 요즘 만나기 시작했다는 멕시코 친구. 얼 굴에 칼자국이 나 있고 근육이 두드러진 팔에 문신이 새겨져 있는 그 친구가 까만 쉐비 차를 타고 왔다가 마크를 데리고 나간 적이 있었다. 퇴근길에 주차장에서 그 청년과 마크가 같이 차를 타는 걸 우연히 보게 된 싼체스는 평소와는 달리 눈살을 몹시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걘 누구야? 몰라. 요즘 사귄 친구 같아. 꼭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은 놈이야. 당신이 어떻게 알아? 멕시코 애니까. 하긴, 그건 한국 사람도 마찬가지다. 한국 사람끼리는 한 눈에도 서 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감각이 있다. 아까 그 놈은 눈빛에 살기가 들어 있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선 어떤 짓이라도 할 놈이지. 기회 봐서 마크에게 얘기 해 줘. 깊게 사귀진 말라 고 해. 내가 놀지 말란다고 안노나, 뭐? 지가 정신을 차려야지. 요즘 내 말 안 들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좀체 마크의 친구들에 대해선 이러쿵저러쿵 평을 하지 않던 싼체스의 말이라 마음에 새겨듣긴 했다. 언제 기회가 되면 넌지시 얘길 해 줘야지, 생각했는데 실제로 마크에게 한 번도 그 런 말을 하진 못 했다. 48 재외동포 문학의 창
마크에게 전에는 한국 친구가 있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마크와는 달 리 사 학년이나 되어서야 한국에서 이민을 와 영어가 서툴렀던 제이슨 은 늘 마크에게 숙제 도움을 받곤 했다. 하지만 제이슨 아버지가 주식 투자에 성공을 하고 제이슨이 과외 공부를 다니고 성적이 좋아지면서 마크는 제이슨과 부쩍 사이가 멀어졌다. 제이슨과 만나지 않는 마크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되었다. 멕시코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는 모습이 그 리 좋아보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말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않았다. 경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자세히 질문한다고 기분 상하셨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사 실, 보험회사 측에서 좀 더 자세히 조사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보험회사요? 혹시 모르셨나요? 오늘이 백만 불을 타는 보험 약정 기간 마지막 날인데. 가슴에서 쿵쾅거리는 박동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오는 듯하였다. 몰랐어요. 정말 몰랐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잊어버리고 있었다. 경찰은 윗도리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기록하기 시작했 다. 나는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경찰은 기록을 마쳤는지 수첩을 다시 집어넣었다. 물론 부인께 혐의가 있는 건 절대 아닙니다. 사고 시간에 집에 계셨 더군요. 어떻게 아셨나요? 그 시간, 아드님과 전화 통화를 했더군요. 보험회사에서 형사 사건 소설 부문 49
쪽으로도 알아봐 달라고 해서 전화 통화를 조사해 봤습니다. 아드님은 바텐더로 일하는 식당에서 막 퇴근을 하면서 전화를 했던 거구요. 아, 네. 아드님은 차가 없다는 게 확실한가요? 나도 모르게 음성이 높아졌다. 아, 아, 그렇죠. 아직 못 사줬어요. 직장에 갈 때도 모터사이클을 타고 다니지요. 그래. 마크에겐 아직 차를 못 사줬지. 중고차라도 사달라고 그렇게 졸랐는데 월부금이 부담스러워 야단만 쳤다. 기껏 사 준 게 제법 속도 를 낼 수 있는 고급 모터사이클이었다. 경찰은 잠시 고개를 떨어뜨리고 생각을 정리하는 듯 손으로 턱을 문 지르기 시작하였다. 내가 물었다. 아직 질문이 더 남았나요? 아, 아닙니다. 경찰의 주머니에서 부르릉, 전화 진동 울림소리가 났다. 경찰은 문자 를 들여다보았다. 아드님도 곧 도착할 겁니다. 그 쪽에서도 조사가 끝났다는 연락이 왔군요. 아, 그렇군요. 아들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를 보는 게 두렵기도 했다. 오 년 전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오랜만에 마크도 싼체스를 도와 생 일상을 차리는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크가 오븐의 조리 시간을 너무 50 재외동포 문학의 창
길게 조절해놓는 바람에 고기에 불꽃이 붙고 화재탐지기가 울리기 시 작했을 때 보험회사 직원이 들어왔다. 싼체스는 의자 위로 올라가 잔뜩 손을 뻗쳐 부엌 천장 한복판에 달 린 화재경보기를 뗐다. 경보기는 아쉬운 듯 삑삑 두어 번 더 소리를 내고는 잠잠해졌다. 활짝 열어둔 창문으로 신선한 바람이 들어오고 고 기 탄 냄새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당신도 이리 와 싸인 하지? 싼체스는 내게 펜을 내밀었다. 사람 일을 알 수 없잖아. 내가 죽거나 당신이 죽으면 각각 십만 불 씩 나와. 지난 번 친구 장례식엘 갔는데 갑자기 떠나니까 그 부인이 장례식 치룰 비용이 없어서 쩔쩔 맸다는 소릴 듣고 결정한 거야. 서류를 내밀던 보험회사 직원이 내가 싸인 해야 할 부분을 가리키며 말을 덧붙였다. 오 년 내로 두 분 중 한 분이 돌아가시면 배우자 위로금이라는 특별 보험금, 백만 불을 받게 됩니다. 감정이 전혀 들어있지 않은 사무적인 말투였다. 백만 불요? 나는 웃음이 기어 나오는 것을 입으로 가리며 싼체스를 쳐다보았다. 올해 가입자들에게 주는 특별혜택이래. 확률이 없으니까 회사에서 도 손해 볼 건 없고 가입자들 기분 좋게 해주자는 거겠지. 싼체스는 두 어깨를 으쓱 위로 올렸다가 내렸다. 직원은 서류를 챙겨 가방 속에 넣고 싼체스에게 먼저, 그리고 내게도 악수를 건네고는 문을 나섰다. 그때 등 뒤 쪽에서 쿵 소리가 났다. 마크 소설 부문 51
가 오븐에 들어있던 숯검정이 된 고기 덩어리를 쓰레기통에 처넣고 있 었다. 수술 중 이라는 네온사인의 불이 꺼졌다. 초록색 가운을 입은 의사 가 수술실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대기실에서 나와 그에 게로 걸음을 옮겼다. 진땀이 나기 시작했다. 의사는 안경을 벗으며 피 곤한 듯 입을 열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회복은 거의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사실 그 렇게 많이 다치고도 아직까지 숨을 쉰다는 게 기적에 가깝습니다. 재수 술을 하면 성공 가능성은 5퍼센트 정도인데 설사 성공한다 하더라도 중증 장애인이 될 겁니다. 산소 호흡기를 떼면 지금이라도 당장 생명을 잃게 될 텐데 어떡하시겠어요? 부인이 원하시면 언제든 산소 호흡기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대기실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간호사 가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싼체스의 아내로서 그의 재수술에 동의하느 냐 마느냐, 의사를 표시하는 서류였다. 재수술을 안 한다면 산소 호흡 기를 언제 뗄 것인지, 시간 표시도 정확하게 시, 분, 초까지 기록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재수술 동의 난에 동그라미 표시를 하였다. 5퍼센트, 아니 1퍼 센트의 확률이라도 그를 그냥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0.1퍼센트의 성공 가능성만 있어도 포기할 수 없다. 그래, 포기할 수 없어. 한 숨이 흘러 나왔다. 간호사는 내게 하얀 색의 위생용 가운을 내밀었다. 52 재외동포 문학의 창
환자분을 중환자 입원실로 옮겼어요. 가운을 꼭 착용하신 후 들어 가셔야 합니다. 친 가족 외에는 아무도 병실로 출입을 시켜서는 안 됩 니다. 아셨죠? 친 가족? 싼체스에게 핏줄을 나눈 친 가족이 있는가? 마크도 싼체스 의 친 가족은 아니다. 가운을 걸친 후 싼체스가 누워있는 입원실의 문을 밀었다. 이제까지 밀어 본 중에서 가장 무거운 문이었다. 싼체스는 나의 두 번째 남자였다. 첫 번째 남자는 당시 시카고 대학 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던 유학생이었다. 그를 만난 곳은 내가 웨이츄레 스로 일하고 있던 한국 식당, <고향집>이었다. 자기 이름이 장우현이 라고 소개한 그가 내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채 두 달도 걸리지 않았다. 과부였던 엄마는 미국에서 내내 불법체류자로 살다가 과로로 병을 얻 어 돌아가시고 열네 살에 고아가 되어 버린 나는 외로움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우현은 어느 날 내게 반지를 내밀었다. 반지를 받는 대신 나는 그동 안 열심히 부어온 적금 통장을 그에게 내밀었다. 우현과 살림을 차린 후로 몸은 더 피곤해졌다. 가정을 꾸리기 위한 일은 모두 내 몫이었다. 적금 통장에 넣어둔 돈은 일 년도 못 버티고 바닥이 났다. 일 년에 사만 불이나 되는 우현의 학비를 벌기 위해서 얼마나 일을 많이 해야 했던 가. 동거 전에는 그냥 <고향집>에서만 일해도 되었는데 이젠 새벽부터 이십사 시간 문을 여는 도넛 가게나 편의점에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 다. 파김치가 되어 집에 들어가면 빨래나 설거지거리가 잔뜩 쌓여 있었 소설 부문 53
다. 하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그땐 꿈이 있었다. 나도 곧, 그의 부인이 된다는. 그렇게 삼 년 반이 지났다. 어느 날 우현은 내게 이상한 말을 던졌다. 당신, 몽유병 환잔 줄 몰랐어. 몽유병 환자? 몽유병? 나는 웃었다. 그러다 금세 웃음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신 어젯밤 무슨 일 했는지 기억 안 나? 나는 공격을 당한 어린 짐승처럼 발끝이 절로 오므라졌다. 부엌에서 무슨 소리가 나서 다가갔더니 빈 도마 위에 헛 칼질만 하 더라고. 도마 위에는 아무 것도 없었어. 내가 말을 시켜도 눈길 한 번 안 주고 계속 칼질만 계속하더군. 한 이십 분, 삼십 분? 그러더니 그냥 침대로 들어가 자더라고. 나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초조했다. 만성빈혈 때문에 종종 어지럼증을 일으킬 때는 있었지만 내게 그런 병이 있는 줄은 정말 몰 랐다. 당신이 그렇게 무서운 사람인 줄 몰랐어. 우현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들렸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음부터 나는 자기 전에 꼭 칼을 손이 잘 닿지 않는 가장 높은 찬장에 올려놓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혹 도마를 꺼내거 나 칼질을 한 흔적이 있나 면밀히 조사해 보았지만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마침 식당이 쉬는 날이어서 낮잠을 자다가 54 재외동포 문학의 창
눈을 떠보니 우현이 커다란 이민 가방 두 개를 챙겨 택시로 운반하고 있었다. 당신 뭐하는 거야? 한국으로 떠나.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언제 돌아오는데? 안 돌아와. 뭐라고? 그가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젯밤에도 당신 또 식칼 들고 혼자서 빈 도마에서 칼질을 하더라 고. 언제 내 목에 칼을 들이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돈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신과 상담부터 받아보는 게 어때? 그 말을 한 후, 우현은 떠났다. 미련을 둘 만한 어떠한 말도 남기지 않은 채. 그가 떠난 지 한 달 쯤 되었을까? 그의 이름이 수신인으로 되어 있는 누런 봉투가 배달되었다. 시카고 대학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봉투를 뜯 어보니 박사 학위증서가 들어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그의 박사 과정이 끝났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우현의 공부는 늘 끝없이 계속되고 있 는 줄로만 알았다. 문득 천장에서 한 가닥 거미줄을 타고 거미가 수직 으로 내려오다가 내 숨소리에 위협을 느꼈는지 하강을 멈추었다. 거미 는 거미줄에 매달린 채 대롱거렸다. 나는 가까이 놓여있던 학위 증서로 놈을 힘껏 내리쳤다. 누런 진물이 증서 위에 길게 묻어났다. 거미는 박 제가 되어 납작하게 눌러져 붙어 있었다. 몸서리가 쳐졌다. 증서를 아 소설 부문 55
무렇게나 구겨 쓰레기 봉지에 처넣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알게 되었다. 내 뱃속에서 우현의 아기가 자라고 있 다는 것을. 그를 찾기 위해 수소문을 해 볼까. 생각도 해봤다. 그때 문 득 깨달았다. 나와 그를 연결해 줄만한 아무런 끈이 없다는 것을. 나는 왜 그의 가족, 친척, 친구의 전화번호 하나 갖고 있지 않았을까. 아니, 그는 왜 내게 자기 주위 사람을 단 한 명도 소개해 주지 않았을 까. 지옥 불구덩이 한 가운데 맨발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싼체스를 처음 만난 날은 유난히 해가 눈부시게 빛났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내가 좀 더 싼 아파트를 찾아 멕시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로 이사 오던 날, 햇볕에 잔뜩 그을린 그와 아파트 복도에 서 마주쳤다. 나는 배가 많이 불러 있었고 양 손에 이삿짐을 가득 들고 있었다. 나의 짐 보따리에 허벅지가 스쳤던 그는 반대편으로 가다 말고 다시 뒤돌아섰다. 한국 사람이시죠? 이리주세요. 제가 들어드릴게요. 제법 유창한 한국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의 어깨는 옷걸이 처럼 딱 벌어졌지만 짙은 눈썹 아래에는 물기가 많아 보이는 맑은 눈이 빛나고 있어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한국 가게에서 일하세요? 한국 가게에서 일하는 멕시코 사람 중에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 들이 더러 있다는 사실이 상기되었다. 아뇨. 우리 엄마가 한국 사람이에요. 그러고 보니 입술 선이 전형적인 멕시코 사람과는 달리 가늘어 보이 56 재외동포 문학의 창
는 것 같기도 했다. 그날 저녁 나는 그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그는 입술에 가득 미소 를 머금고 김치찌개와 야채 튀김이 놓인 식탁에 앉았다. 김치찌개 먹을 줄 알아요? 알다마다요. 아주 좋아해요. 그가 막 첫 숟가락을 입에 넣으려는 순간, 나는 그만 바닥에 주저앉 았다. 진통이 시작되었다. 그는 숟가락을 한 손에 든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어느 병원이에요? 제가 데려다 줄게요. 아파트에서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그만 차 뒷좌석에서 양수 를 터뜨렸다. 그리고 병원 침대에 눕자마자 아기가 나왔다. 아기의 첫 울음 소리가 들릴 때 백인 간호사가 말했다. 아들입니다. 안아보세요. 간호사는 내가 얼마나 기운이 없는지 고려하지 않은 채 아이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아기를 떨어뜨릴까 봐 손을 내저었다. 나, 나중에. 간호사는 아이를 초록 색 위생용 가운을 입고 옆에 서 있는 남자에 게 건네주었다. 싼체스였다. 아직 안 갔어요?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해서요. 그는 겸연쩍다는 듯이 웃으며 팔에 안겨있던 아기의 얼굴을 내 쪽으 로 돌려주었다. 한 눈에는 쌍꺼풀이 있고 다른 한 쪽 눈은 길쭉하고 가늘었다. 아기의 눈이 우현처럼 짝짜기인 것 같아 가슴이 덜컹 내려앉 소설 부문 57
았다. 간호사가 출생신고서 서류를 내밀었다. 아기 이름 난이 비어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가 이름 칸에 마크라고 적고 성을 적는 난에는 내 성을 따서 안 이라고 기입했다. 마크는 싼체스의 영세 명이자 중간 이 름이었다. 마크는 어느새 유치원생이 되었다. 나는 그날 직장에서 휴가를 받아 마크의 학교 소풍에 따라갔다. 버스는 시카고 다운타운 고층 건물 앞에 서 멈추었다. 꼬마들이 삐뚤삐뚤 줄을 지으며 걸어갔고 학부형들이 교 사의 지령에 따라 서너 명씩 아이들을 인솔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스파이더맨이다! 소리치는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고층 건물에는 높이를 알 수 없는 건물 꼭대기에서부터 동아줄로 만든 그네가 양 갈래로 늘어져 있었고 그 가운데 네모 판에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유리창 외부를 닦는 중이었다. 엄마, 싼체스야! 마크가 조그만 소리로 속삭였다. 마크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마 크가 직접 라이온 킹 그림을 그려 준 초록색 티셔츠를 입고 있는 싼체 스의 모습이 보였다. 싼체스는 스펀지가 달린 막대기를 움직이며 열심 히 유리를 닦고 있었다. 한 층을 다 닦았는지 그네가 출렁하고 한 칸 아래로 내려왔다. 눈이 부셔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속에서도 햇빛은 비 명을 지르며 주홍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그는 아파트 문을 잠그지 않았다. 문 근처에만 가도 늘 도미니카 커피의 진한 향기가 났다. 그는 커피를 마시면서 텔레비전 앞 58 재외동포 문학의 창
에 앉아 있었다. <야생세계>는 그가 즐겨 보는 프로그램이었다. 위험하지 않아요? 뭐가요? 유리창 닦는 거. 몰랐어요. 그냥 청소만 하는 줄 알았지. 아, 그거요. 유리 닦다가 샌드위치도 먹고 플라스틱 병에 오줌도 싸 고 하는데요, 뭐. 그가 넓적하고 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높은 데서? 높지 않아요. 높지 않다고요? 아래를 안 내려다 보거든요. 유리창만 보거든요. 일 층 유리창이나 백 층 유리창이나 똑같잖아요. 그거 알아요?.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나서 죽은 사람 확률보다 고층 유리 창 닦다가 죽은 사람 확률이 더 적다는 거요. 왜 그렇죠? 유리창 닦는 사람들은 대부분 밀입국해 들어온 사람들이에요. 죽다 살아난 사람들이지요. 밤에 총소리를 들으며 국경을 넘어본 사람들은 아무리 높은 곳에서 춤을 추라 해도 무섭지 않아요. 뒤에서 총 겨누는 사람이 없잖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엄마,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요? 엄마? 느닷없이 엄마 얘기는 왜? 나는 싼체스를 처음 만나던 날, 자 소설 부문 59
기 엄마가 한국 여자라고 말했던 것을 상기했다. 국경을 넘어오다가 돌아가셨어요. 밀입국 할 때요. 그믐밤이었지요. 캄캄한 들판을 기어가는데 뒤에서 총소리가 났어요. 미국 경찰들이 쏘 아대는 무차별 사격이었어요. 총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더니 바로 뒤에 서 사람 발자국 소리가 났어요. 들켰구나. 직감적으로 알겠더라고요. 내 옆에서 기어가던 엄마가 갑자기 내 등 위로 올라탔어요. 총알이 엄 마의 등을 뚫었어요. 난 그 덕에 살아났지요. 엄마가 내 귀에 대고 속삭 였어요. 잘 살아라. 죽어서도 널 지켜주마. 엄마의 마지막 말이었어요. 텔레비전에서는 작살을 맞은 상어가 더 깊은 바다 속으로 헤엄쳐 들 어가는 장면이 계속 되고 있었다. 석양빛에 물든 바다는 어디가 상어의 상처에서 나온 붉은 물이고 어느 부분이 석양빛인지 가늠하기 어려워 어지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가 새로 끓인 커피를 내게 내밀었을 때 나도 모르게 불쑥 이런 말 이 튀어나왔다. 몽유병 앓고 있는 사람 본 적 있어요? 싼체스는 무슨 소리냐는 듯이 내 쪽을 쳐다보았다. 마크 아빠가 그랬어요. 내가 몽유병 환자라고. 칼을 들고 자기에게 언제 덤빌지 모른다고 했어요. 그리고 며칠 후 날 떠났고요. 그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수면 제가 거기 묻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잠으로 가는 길이 거기서 시작되 기라도 한다는 듯이. 마크가 워싱턴으로 수학여행을 떠나던 날, 나는 싼체스의 아파트에 서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려 하니 뭔가 팔을 잡아당기는 것이 있었 60 재외동포 문학의 창
다. 끈이었다. 싼체스의 팔과 내 팔이 끈으로 묶여 있었다. 너무 단단 하게 묶여 있어 이빨을 사용하여 끈의 매듭을 풀어야 했다. 쿡, 하고 웃음이 나왔다. 한 번 터진 웃음은 계속 흘러나왔다. 오랜만에 아주 크 게 웃었다. 언제부턴가 서로의 팔에 끈을 묶는 일을 하지 않았다. 내가 부엌 정 리를 하지 못 하고 먼저 잠이 든 다음날 아침이면 전날 밤 과일을 깎아 먹느라 사용했던 칼이며 포크가 그냥 그대로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싼체스는 흉기가 될 만한 물건이라 해서 따로 높은 곳에 숨겨두거나 하지 않았다. 혹, 우현이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일었다. 마크가 중학생이 되던 해, 싼체스는 나와 결혼을 했다. 마크도 늘 자기에게 친절한 싼체스 아저씨가 아빠가 되었다며 좋아했다. 결혼식 을 특별히 올린 건 아니었다. 둘이 함께 시청에 가서 결혼신고 서류를 작성했고 나는 금반지를 그의 손에 끼어주었다. 싼체스는 내게 목걸이 를 내밀었다. 목걸이 가운데는 레이스 장식이 달린 수건을 머리에 덮어 쓴 성 마리아를 닮은 여인이 새겨져 있었다. 꽐라루페에요. 꽐라루페? 멕시코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고 믿는 성모상이에요. 엄마 가 늘 몸에 지니고 있던 목걸이에요. 나는 머리카락을 들어올렸다. 그가 등 뒤로 와서 목걸이를 내 목에 걸어주었다. 소설 부문 61
싼체스의 머리 부분은 온통 붕대로 감겨있었고 얼굴부분도 산소호흡 기로 덮여 있었다. 마크는 무얼 하는 걸까? 취조가 끝났다면서. 왜 아직 오질 않는 걸 까? 며칠 전 느닷없이 마크가 한 말이 떠올랐다. 싼체스를 사랑해? 갑자기 그건 왜 묻는데? 물어보면 안 돼? 글쎄. 나는 잠깐 망설였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지 않으면 같이 안 살겠지. 그래? 의외네. 마크는 무언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가죽 장갑을 낀 후 탁탁 손바닥을 두들기더니 거칠게 문을 닫고 나갔다. 아래층에서 오토바이 엔진 거는 소리가 부르릉 들려왔다. 나는 후욱,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정말 남편을 사랑하는가? 조금이라도 그를 사랑했다면 왜 그가 그렇게 아기 를 기다리는데도 몰래 피임약을 먹어왔던가. 병실이 춥게 느껴졌다. 실내온도 조절계의 눈금 바늘을 조금 올렸다. 바늘은 변화를 감당하는 게 힘들다는 듯이 파르르 떨었다. 싼체스는 지 금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답답했다.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걷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퍼붓 고 있었다. 번쩍, 번갯불이 비쳤다. 땅에서 꺾인 나무의 뿌리가 뒤집 혀진 채로 하늘 꼭대기로 올라가 제단에 바칠 제물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키고 하늘 이 편에서 저 편까지 달리고 있었다. 하늘이 쪼개지고 62 재외동포 문학의 창
있었다. 커튼을 다시 닫는 순간, 귀에서 윙 소리가 나면서 천장이 빙글 돌기 시작했다. 현관 바닥이 쑤욱 올라오기도 하고 꺼지기도 하더니 파도처 럼 일렁거렸다. 또 빈혈이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거의 기다시피하며 싼 체스의 침대 머리맡에 달려있는 비상벨을 향해 다가갔다. 벨에 손을 뻗 는 순간, 머리 위로 압력기 같은 것이 내리꽂히면서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둠의 실이 잔뜩 헝클어져 있는 공간 안에는 나도 그도 아무 도 없었다. 깨어나니 팔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다. 마크가 옆에 서 있었다. 엄마, 이제 깨어난 거야? 바로 오려 했는데 그러질 못 했어. 모터사 이클이 고장 났나 봐. 엔진에 물이 들어갔는지 시동조차 안 걸렸어. 택 시도 안 오겠다고 그러고. 장난이 아니었어. 한 치 앞도 안 보였거든. 그렇게 억수로 퍼붓는 비는 처음 봤어. 그래서 늦었어. 미안해. 싼체스 마지막 순간을 못 봤어. 마, 지, 막, 순, 간? 다시 한 번 빙글, 천장이 돌았다. 그가 죽었다. 그는 죽었고 나는 살아 있다. 마크는 커피 한 잔을 내게 내밀었다. 커피는 따스했지만 너무 쓰게 느껴져 마실 수가 없었다. 커튼 걷어줄까? 마크가 물었다. 마음대로 해. 소설 부문 63
빛이 와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너무 눈부셔서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벽을 향하여 모로 돌아누웠다. 엄마. 잘 했어. 싼체스도 엄마가 잘했다고 할 거야. 싼체스가 엄마 에게 살아서 줄 수 없었던 돈, 주고 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돼. 무슨 얘기야? 나는 몸을 다시 돌려 마크를 쳐다보았다. 심장이 마구 두근거려져 숨이 가빠졌다. 엄마, 혹시. 기억 안 나? 어젯밤 일? 아니. 아무 것도. 엄마, 새벽녘에 간호사한테 그랬다며? 싼체스 산소호흡기 떼어 달 라고. 보험회사 직원한테도 알려달라고 했다며? 의사한테는 직접 전화 까지 했다며? 재수술 안 할 테니 지금 당장 사망신고서 떼 달라고. 기 억, 안 나? 야근하던 간호사 둘 다 같이 들었다고 하던데. 숨이 콱 막혀왔다. 그래, 그런 꿈을 꾸었었다. 꿈인 줄 알고 꾸었었 다. 분명 꿈이었다. 꿈이어야만 했다. 내가 싼체스에게 그럴 수는 없었 다. 5퍼센트 아니라 1퍼센트, 아니 0.1퍼센트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수술을 해보아야 했다. 눈을 감았는데 그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가 걸어주었던 목걸이가 손에 잡혔다. 목걸이의 가운데에 달린 꽐라루페는 여전히 말 이 없었다. 문득 눈앞에 어떤 여인이 떠올랐다. 모습의 윤곽은 있는데 무게감이 없는 듯한 얼굴. 멕시코 복장을 한 한국 여인이었다. 가난 때 문에 멕시코 농장까지 흘러 들어와 멕시코 남자와 결혼을 하여 싼체스 를 낳았던 여인. 국경을 넘다 아들의 몸을 덮고 아들 대신 죽어갔던 64 재외동포 문학의 창
여인. 싼체스가 자기 인생의 중심이었던 여인. 얘기로만 들었지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여자가 왜 이토록 또렷이 떠오르는 걸 까. 여자의 얼굴은 잠시 꽐라루페의 얼굴과도 겹쳐졌다. 여자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정신을 잃어 아무 생각을 하지 못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노을빛이 바다에 잠겨든 듯한 그런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마크가 문을 열자 검은 정장 차림을 한 남자 가 들어왔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가 생명보험 회사 직원 이라고 소개하며 한 손에 들고 있던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기 시작했다. 보험회사 직원은 문가에서 마크와 몇 마디 말을 나누는 듯하더니 악 수를 나누곤 나갔다. 마크가 내 한 쪽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한 손길이었다. 엄마. 잘 할게. 아들의 목소리에 오랫동안 쉬지 않고 달려왔던 사람이 오랜만에 쉴 때의 안심 같은 것이 묻어났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입안이 꺼끌꺼끌 했다. 물만 마셨는데 도 모래가 잔뜩 씹히는 듯 했다. 눈꺼풀이 주체할 수 없이 무겁게 느껴 지기 시작했다. 소설 부문 65
엄마, 미안해 우수상 김민정(일본) 엄마와 딸 새벽 2시. 화장실에서 나와 냉장고로 향한다. 요 며칠 잠이 들면 새벽녘에 꼭 한 번씩 깨게 된다. 임산부를 위한 잡지에 따르면 엄마가 되는 준비 라 설명되어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3시간에 한 번씩 모유를 수유해야 하고 그 준비로 엄마가 자꾸 밤에 깨게 된다는 거다. 엄마가 츠키시 수산시장까지 가서 사온 가자미조림 한 접시, 엊저녁 손님치레 때문에 엄마가 삶아둔 호박잎과 쌈장, 엄마가 싸준 콩나물, 시금치 가지 무침이 가득한 타파웨어 몇 개. 결혼하고 4년이 지나도 냉장고엔 엄마가 가득했다. 허기를 채우기엔 충분하지만 딱히 먹고픈 게 없다. 냉장고 두 번째 칸, 야채실을 당긴다. 먹다 남은 멜론, 엄마가 한국 수퍼마켓까지 가서 사온 참외 여섯 개, 엊저녁 손님이 가져온 포도 한 송이. 엄마대신 손님을 택한다. 얼른 포도 서너 알을 입으로 옮긴다. 66 재외동포 문학의 창
너 뱄을 때 엄만 포도만 먹었어. 아예 포도밭까지 가서 먹었다니 까. 아들이래. 아들은 나아 뭘 하려구? 아들이 얼마나 번거로운지 알어? 걔네들은 엄마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한다니까. 그리고 여자 생기면 또 어떤 줄 아니? 엄마한텐 1원도 아까우면서 여자한테 명품 갖다 바치고, 여행까 지 시켜주고. 아들을 낳겠다구? 엄마는 우리 애가 딸이 아니란 사실을 서글퍼했 다. 아들, 아들, 반복하면서 한숨을 쉬었던가. 처음 임신을 했다고 전했을 때도 엄마는 기뻐하지 않았다. 마지못 해 축하한다고 덧붙여 준 거 같기도 하지만 엄마 얼굴엔 실망감이 가 득했다. 아이가 있으면 사는 게 얼마나 힘든데. 평생 애 걱정해야 한다구. 엄마는 애 보는 사람이 집에 있어서 키웠지, 안 그랬으면. 엄마는 늘 그랬다. 나 걸스카웃 할래. 걸스카웃? 그런데 가서 뭘 배 우겠어. 겨우 캠핑이나 가는데 아니니? 엄마는 그날 당장, 당시는 국민 학교라 불리던 초등학교로 찾아와 날 컴퓨터부에 입부시켰다. 엄마, 음 악 선생님이 나보고 성악을 해보라는데. 성량이 좋고 목소리가 고와서 전문가한테 한 번 지도를 받아보는 게 좋겠대. 너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음대 나와서 뭐 먹고 살라구? 너 지금 고2야. 지금부터 무슨 성 악을 하겠다는 거니? 음악 같은 소리 집어치우고, 책이나 읽어! 그러나 엄마는 공부를 하라는 남들 엄마완 달랐다. 공부하란 소린 초등학교 입학부터 대학 졸업까지 장장 16년간 단 한 번도 입에 올린 소설 부문 67
적이 없었다. 그치만, 난 안다. 엄마가 내 성적표에 늘 만족하고 있었단 사실을. 나처럼 복잡한 머리상태와 정신상태를 가진 아이에겐 공부하 란 소리보다 그냥 두는 것이 가장 적절하단 사실을. 엄마가 공부하란 소리를 하지 않은 덕에 난 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다른 엄마들처럼 공 부하라고 한 마디만 해 줘, 엄마. 시험 잘 봤다고 칭찬해줘, 엄마. 엄마는 언제나 부엌에 서서, 창밖으로 봄엔 수국을 내려다보며 가을 엔 감나무에 열린 떫은 감을 보며 묵묵히, 마치 내겐, 아니 내 성적엔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 책이나 읽어. 아니면, 늘 당당하게 살아라고 덧붙일 뿐이었다. 당당하게! 성적위주로 돌아가는 학교에서 당당하기 위해선 공부밖엔 별 도리가 없단 사실은 학교에 석 달만 가보면 익히게 되는 진실임을 엄마는 어찌 그리 잘 알고 있던 것일까. 참 한 가지 더 있었지. 아빠 없는 아이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도 공부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닐지 몰라도 학교의 카스트는 성적순으로 매겨지니까. 그날 신주쿠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제야 같이 사는구나. 라며 엄 마가 데려간 곳엔 일본어만 말하는 일본인 남자가 있었다. 3년 만에 우린 또다시 네 식구가 되었다. 난 고교생이 되어있었다. 남자는 수더 분했고, 성격도 좋았다. 나와 동생은 조용했고, 우린 매주 외식을 하는 겉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는 가족이 되었다. 그치만, 그저 식구에 불과 했다. 밥을 같이 축내는 식구. 밥 때문에 이어진 인연. 목숨을 연명하 68 재외동포 문학의 창
기 위한 타지 생활에서 엄마가 고른 건 나와 동생을 부담스럽지 않게 생각해줄 남자가 아니었을까. 가끔 저 남자가 없었으면,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것도 아니었다. 남자는 가끔 지나치게 수다스러웠다. 남자는 아빠처럼 술을 좋아했지만, 아빠처럼 주정을 부리는 스타일은 아니었 다. 아빠처럼 여자에게 손찌검을 하는 스타일도 아닌 것 같았다. 그치 만 아빠처럼 과묵하고, 속이 깊어보이지도 않았다. 아빠처럼 고독하고, 달관된 눈빛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치만 아빠처럼 키가 컸고, 아빠 처럼 노래도 잘했다. 하지만, 그는 아빠가 아니었다, 물론. 신주쿠 역엔 서문, 동문, 남문이 있다. 서문을 나오면 도쿄도청이 있 고, 스미토모 빌딩이며 힐튼 호텔, 게이오 프라자 호텔, 하야트 호텔 높다란 건물이 즐비하다. 폭 넓은 인도를 무작정 걸을 수 있는 서문은 신주쿠를 처음 밟은 그 날부터 마음에 쏙 들었다. 밤이 되면 일본 최고 의 환락가가 된다는 동문도 나쁘지 않았다. 호객꾼들 중엔 안녕하세 요? 라 한국어로 손님을 끄는 흑인들도 있었다. 최고의 환락가란 단어 에 걸맞지 않게 그곳은 쿨 했다. 고교 교복을 입고 걸어도 치근덕대지 않았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활보해도 그들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최고 의 환락가에서 길 거리를 걷는 여자는 손님이 될 수 없었다. 손님이 아닌 여자에게 가부기쵸는 아무 관심이 없는 듯 했고, 일본최고의 환락 가는 평범한 여자에겐 치안면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 의심할 여지도 주지 않았다. 1992년 그해는 곧잘 비가 내렸다. 신주쿠엔 서문, 동문, 남문 모두 외국인들로 넘쳐났고, 교복을 입고 돌아다니면 가끔 차 한 잔 어떠냐 는 아저씨들도 있었지만 한국과 다를 것도 없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 소설 부문 69
은 일본은 어때? 한국이랑 어디가 틀려란 편지들을 보내왔지만, 과연 어디가 다른지 아무래 생각해봐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럴 땐 틀려가 아니라 달라란 단어를 쓰는 거야. 건물이 똥그래, 여자들이 하나같이 다 뚱뚱해, 굴러가려하고 있어, 게다가 코끼리 뿔처럼 커다란 덧니도 있어, 바닷물이 달아, 하늘색이 샛노래, 뻔한 거짓말을 쓰는 일도 없었 다. 틀려가 아니라 달라란 단어를 써줬음 어디가 다른지 찾아내려 노력 이라도 해볼 수 있었을 텐데 말야. 포도 사갈까? 아니 괜찮아. 순대를 먹으러 갈 생각이야, 엄마는? 난 속이 안 좋아서 순대는 됐구. 그나저나 애 낳으면 일은 어쩔 건 대? 집에서 놀 거니? 모르겠어. 원 이렇게 대책이 없어서야. 엄마의 혀 차는 소리가 들린다. 츳. 츳 츳. 나 이제 일하러 들어갈래.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대책 없는 내게 엄마는 그 소리가 하고 싶었던 것일까. 420엔짜리 우동 한 그릇에 젓가락도 채 대지 못한 채 레인보 브릿지 를 바라본다. 인공적으로 만들었다는 이 섬은 남들에겐 오아시스일지 몰라도, 정작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겐 무인도에 가깝다. 후지 티비 18층 사원 식당에서 내려다보면 이 인공섬이 얼마나 삭막한지 알게 된 다. 바다 위로 걸쳐진 저 다리며, 그 사이사이를 달리는 차들, 그리고 70 재외동포 문학의 창
전철까지. 텅 빈 망망대해 같은 건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 가슴이 후련 한 바다가 그립다. 모든 걸 다 털어내도 받아줄 바다가 그립다. 오다이 바 비치엔 파도조차 일지 않는다. 그래도 사람들은 여름이면 수영복을 입고 찾아와 뭐 그리 신이 난다고 바다 앞에서 폼을 잡는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모래성을 쌓고, 공놀이도 하고, 여름햇볕에 한 손을 들어 눈을 가린다. 답답해. 처음부터 엄마가 축하를 해주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치만 섭섭했다. 오바이바의 밋밋한 바다가 섭섭한 것처럼. 당당하게 살아야 돼. 누구 앞에서라도 당당하라구! 엄마가 원하는 당당함엔 경제적인 요소들도 고스란히 포함되어 있었 다. 대학을 졸업하고 엄마는 내게 기자가 되길 권했다. 도쿄도내 신문 사에 입시지원서를 내고 시험을 봤지만 번번이 필기에서 낙방이었다. 일본 역사가 부족했고 일반상식도 부족했다. 솔직히 준비조차 하지 않 았다. 기자가 되라 기자가 되라. 엄마의 말은 늘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가끔 엄마는 꿈에 나타나 기자가 되라고 했다. 엄마의 아빠는 종군기자 였다 한다. 엄마가 날 키우면서 가장 강조해 온 것은 여자도 자기 힘으 로 먹고 살아야해, 그래야 이혼도 하지. 늘 당당해야해. 내 나이 스물이 되었을 때 엄마는 말했다. 이제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할 나이야.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 아. 그치만 네 인생의 책임은 니가 져 엄마는 그 날로 내 용돈을 끊었다. 태풍이 북상해도 내 빨래만큼은 거둬들이지 않았다. 난 이모 친구한테 소개받은 야끼니꾸점(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소설 부문 71
시작했다. 일 년 내내 일해도 대학 학비는 모아지지 않았다. 일본 최고의 명문 사립대는 수업료만 해도 백만 엔은 더했다. 엄마가 내니까 걱정하지마. 용돈을 자르긴 했지만 엄마는 대학학비만큼은 어떻게든 자기가 대겠 다며 작은 바를 하나 오픈했다. 그 무렵 엄마의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 져버렸다. 어느 날 갑자기 소리 소문 없이 우리 식구가 되었던 남자는 소리 소문 없이 집을 나가버렸다. 엄마는 나도 이 나이 되서 남자 밥해 주고 빨래해주는 거 진이 빠진다 며 아무 일 없다는 듯, 오히려 가벼워 진 듯 헤벌쭉 입을 벌리고 웃었다. 엄마의 가게는 생각보다 손님이 많 았고, 금세 단골이 생겼다. 엄마는 바가지를 씌우는 일이 없었고, 화학 조미료도 사용하지 않았다. 한 손님의 조카가 일한다는 농장에서 농약 을 쓰지 않은 야채들을 다량으로 사들이기도 했다. 고기는 꼭 일본산을 고집했다. 말이 술집이지 실은 엄마 반찬을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더 많을 정도였다. 그러나 단골이 생겨도 수용인원이 열도 채 안 되는 가 게에서 나오는 돈으로 대학학비를 마련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 괜찮아. 지금까지도 먹고 살았는데 뭐. 그때부터일까, 엄마에게 미안하단 마음이 생긴 게. 기자가 되지 못했 을 때도 미안했던 거 같다. 아니, 미안한 마음은 처음부터 있었다. 늘 미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빠는 지방유지의 장남이었다. 소 백 오십 마리, 수만 평이 넘는 논, 옥수수 밭, 양계장, 그 동네 모든 땅이 아빠의, 아니 할아버지 것이 라 해도 좋을 터였다. 매년 잘 알지도 못하는 지역에서 할아버지 또는 72 재외동포 문학의 창
할머니, 또는 증조할아버지 이름의 땅이 나왔다. 아무도 얼마나 땅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 그 동네 사람들은 모두 아빠의, 아니 할아버지의 소작농이거나, 머슴이거나, 일꾼이었다. 동네 아줌마 들은 식모였고, 보모이기도 했다. 라디오를 가장 먼저 산 것도 아빠네 집이었고, 티비를 보러 서른 명쯤 되는 동네사람들을 처음 모은 것도 아빠네 집이었다. 명절엔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안방, 건넌방, 사랑방, 마루에도 부엌에도 할머니가 잘 다듬은 정원에도 상이 차려졌다. 하루 에도 수 십 번은 밥상을 차려내야 했다. 증조할머닌 거지를 위한 쌀과 반찬까지 준비해두었다. 그들은 밥을 먹고 갈 때도 있었고, 밥을 싸갈 때도 있었다. 가끔은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다가 소모는 쉐파트 견 케 리에게 물려, 쌀을 더 달라 소리소리 지르기도 했다. 아빠는 집을 비우면, 석 달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빠가 집을 나가서 뭘 했는지, 엄마는 결코 묻지 않았다. 아니 물었는지도 모른다. 아빠 언제와? 대신 내가 물은 것도 같다. 엄마는 조용히 날 바라봤다. 그게 처음이 었을까. 괜히 엄마한테 미안했던 게. 아빠가 돌아오지 않는 밤의 숫자만큼 아빠가 돌아온 후 부부싸움은 심했다. 왜 결혼했어? 당신이 그러고도 아빠야? 애들 크는 거 몰라? 그러다가 엄마는 흐느꼈고, 비명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엄마, 내 가 잘못했어. 아빠 내가 잘못했다니깐. 아빠는 비교적 온순했다. 늘 미소를 띄고 있었다. 술만 안 마시면 그는 부처님이고 예수님이었다. 남들에게 늘 친절했다. 돈 없다고 찾아 오는 친구는 빚보증을 서주고, 술 마시러 찾아오는 후배에겐 상다리가 소설 부문 73
부러져라 대접했다. 나와 동생을 데리고 곧잘 여행을 떠났다. 자연농 원, 서울대공원, 대천해수욕장, 해운대, 설악산, 부곡하와이. 운전 을 좋아하는 아빠는 차를 바꾸기 일쑤였고, 경찰을 따돌리며 아이들을 태운 차를 대한민국 전역으로 몰았다. 여권 만들기도 수월찮던 시절, 국내긴 했지만 우리 반 그 어느 아이보다도 여행을 제일 많이 한 아이 가 되었다. 어느 성당에서 아빠는 난 숨 쉬는 것도 죄요 라 신부님께 속삭였다. 아빠는 아무래도 천성이, 아니 천성은 착한 사람 같았다. 열 살 나던 여름날 아침, 커튼이 드리워진 방, 엄마 혼자 침대 구석 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걸 발견한 그 아침. 아빠는 어디 갔을까. 엄마 눈에 생긴 시커멓고 커다란 멍을 보면서 내내 미안했다. 엄마, 엄마를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그날 우리는 짐을 쌌다. 아빠가 돌아가신지 얼마나 되었던가. 그런 걸 일일이 기억할 만큼 인생은 순탄하지 않다. 아빠 없는 아이를 둘씩이나 안고 엄마는 격정의 날들을 보내왔다. 그녀가 오밤중에 돌아와 눈물 흘리며 신세 한탄을 할 때도 우리 묵묵히 들어줄 도리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아, 인생이 여! 그 참혹함이여! 엄마를 보면서 삶은 오롯이 자신만의 몫이며 정신적이나 경제적인 보살핌을 아주 약간 얻을 수는 있지만 완전한 삶의 위로를 얻기란 불가 능에 가까운 일이란 걸 일찍이 고교시절에 깨닫지 않았던가. 엄마는 6남매의 3째 딸로 태어났다. 엄마네 집안은 유독 딸이 많았 고 그 딸들은 모두 미인이었다. 엄마는 특히나 그랬다. 그 시절에 쌍꺼 풀이 굵은 눈에 코까지 오똑했던 것이다. 게다가 듣기론 공부도 꽤나 74 재외동포 문학의 창
했다고 한다. 그 시절, 성적순으로 분단을 메기던 때 엄마는 8분단 중 늘 1분단이나 2분단에는 앉아있었다니 말이다. 엄마의 단아한 고교시절 사진은 고스란히 엄마의 성격을 말해준다. 엄마는 대학에 가고 싶었겠지만, 6남매의 3째 딸을 챙겨줄 만큼 시대는 부유하지 않았다. 고교를 졸업한 엄마는 은행에서도 일하다가 음악다 방 디제이로 직업을 바꾸고, 서울에서 유명한 미인으로 등극했다. 서울에서 대학생을 하던 아빠는 엄마에게 첫눈에 반했고, 그치만 엄 마에게 반한 건 아빠뿐만이 아니라 그 음악다방 모든 청년들도 그러했 으리라, 매주말 시골에서 달걀 한 판에 배추까지 싸들고 와 엄마가 일 끝나고 나오길 온종일 기다렸다 한다. 이런 아빠에게 반한 건 엄마가 아니라 음악다방 안주인과 엄마의 엄마와 아빠였다.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을까, 엄마에게, 그리고 아빠에게. 여하튼 엄마가 학벌 콤플렉스를 가진 건 아니지만, 엄마는 알고 있 다. 남편 없이 홀로된 여자를 취업시켜 줄만큼 세상이 안이하지 않다는 것과 아이 둘 키우는 데 드는 희생은 자신의 인생의 절반 이상을 소비 해야 한다는 사실도. 엄마는 나와 동생을 정말이지 반듯하고도 남 을 대학에 진학시켰다. 공부를 워낙에 어릴 적부터 좋아해서 그놈의 리 포트들을 밤새 써냈고,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그래, 여기까지는 엄마의 시나리오대로였다. 딱 여기까지만! 일본 최고의 사립 명문대를 졸업하고도 난 취업을 하지 않았다. 세 상에 어떤 직업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취업을 하다니, 그건 내 인 생론과 정말이지 맞출래야 맞출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내 친구들 처럼 토요타니 소니에 무작정 들어가기엔 왠지 꺼림칙했다. 인간을 파 소설 부문 75
멸시키는 대기업이라는 편견을 그 시절 난 고스란히 가슴에 파묻고 있 었다. 지금은 대기업에서 오라면 설설 기어서라도 가버릴지 모를 그런 정 신의 소유자가 되었건만, 그 시절엔 그랬다. 졸업하고 놀 수만은 없어서 작은 출판사에서 기자 일을 시작했다. 3년쯤 일하다가 이런 저런 인연이 생겼고, 후지 티비 리서치팀에 발탁 되어 방송 일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특별히 재미나지도 않았고 화려하 지도 않았다. 방송국은 밖에선 의리쩡쩡 하지만 그 안은 별나지도 않 다. 넘쳐나는 서류, 블라인드가 내려진 창문, 특종 때문에 잠 못 자는 사람들과 피눈물도 없는 경쟁, 카스트제도보다 더한 계급사회였다. 방 송국 정직원은 잡일 없이 연출자가 되었고 제작사 직원은 밤샘을 천일 해봐도 AD에 만족해야 했으며, 프리랜서는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몰라 주말 출근도 마다하지 않았다. 노이로제 때문인지 프리랜서 중엔 1년 365일 목을 가려주는 목티만 고집하는 중년 남성도 있었다. 목이 약 해서 그래 란 그의 변명을 목이 날아갈까 봐 그래 로 듣는 사람들은 물론 한 둘이 아니었다. 엄마가 원하고 원하던 신문기자는 아니었지만 기자 근처에서 얼쩡거 린 건 분명하다. 그리 햇볕 쨍쨍 나는 일자린 아니었다. 엄마는 딸자식 을 못미덥고 안쓰러워했다. 어떻게 키운 딸이 그 좋은 대학을 나와 겨 우 리서치 팀에서 일하는 건지, 도대체 왜 엄마는 못간 대학을 나온 딸이 겨우 임신이나 해서 주부가 되려고 하는 건지 엄마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알기에 딸은 요즘 유행하는 엄친아였다. 성적은 초중고 단 76 재외동포 문학의 창
한 번도 빠짐없이 전국 상위권이었고, 일본에 와서 현역으로 대학에, 그것도 명문 사립대에 입학했으며, 딸 주변엔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남녀노소 불구하고 명랑하고 친절한 딸애를 누구든 마음에 들어 했다. 연극 무대에서도 늘 주인공을 맡아왔다. 딸이 무대에 설 때면 어찌나 감동을 했는지. 대학에선 밴드의 보컬을 맡아 행사 때마다 박수갈채를 받아온 딸의 남다른 재주에 손님들 앉혀놓고 딸자랑에 바쁜 날도 있었 다. 도대체 그런 딸이 왜? 뭐 때문에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주부가 되려는 걸까? 열 재주 있는 놈이 밥을 굶는다더니. 가슴 한 켠이 서늘했다. 엄마한테 결국 말하지 못했다. 엄마가 원하는 직업을 갖기엔 때가 너무 늦었어. 엄마, 차는 이미 떠난거라구. 미안해. 미안해. 딸과 아이 엄마는 결국 임신을 축하한다. 고 웃어주지 않았다. 도대체 어쩔 작정이냐고 묻고 또 물었다. 일은 어떻게 할 거야? 애는 아무나 키우 는 줄 아니? 도대체 니가 하는 게 뭐가 있어? 애 낳으면 평생 걱정이 야 난 대답하지 않았다. 괜한 싸움을 하기엔 나도 나이를 너무 많이 먹 어버렸다. 서른이 다된 딸에게 엄마란 존재는 서글픈 것이다. 미간에 푹 패인 주름을 볼 때마다, 점점 가늘어져 모델보다 더 날씬한 다리로 마켓에서 산 물건을 양 손에 들고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볼 때마다 소설 부문 77
가슴 한 켠이 서늘해졌고, 눈시울은 뜨거워졌다. 아빠가 죽고 얼마가 된 걸까. 아빤 여전히 삼십대인데, 엄만 이제 육십을 바라보고 있다. 아빠 없는 아이를 아빠 있는 아이처럼 키우기 위해 엄마가 얼마나 애써 왔는지는 굳이 되돌아보지 않아도 가슴에 그리고 내 온몸의 피와 살이 되어 남아있다. 엄마의 투정을 들을 때마다 괜시리 아이를 갖은 게 아 닌가 미안해졌다. 솔직히 미안할 건 없었다. 미혼모가 되는 것도 아니 고, 아직은 이혼할 건덕지도 없으며, 잠시 일을 쉬게 되어도 프리랜서 로 번역 일을 맡으면 가계에 조금쯤 도움이 될 만 했다. 엄마의 기대엔 미치지 못하겠지만. 어느새 성큼 가을이 다가와 있었다. 그치만 더위는 두풀은 커녕 한 풀도 죽지 않고 있었다. 도쿄는 여전히 30도를 웃도는 기온에 냉장고에 들어가지 못한 양배추처럼 축 늘어져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입덧은 천 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야마나시에서 났다는 씨 없는 피오네 포도는 흑빛이 요염했고, 이탈 리아에서 난 게 아닐까 싶은 로사리오 비앙코는 길쭉한 모양새가 서양 스러웠다. 오까야마의 히로타 모리마사가 품종을 개발했다는 네오 마 스컷은 연초록빛이 싱그러웠다. 냉장고엔 빨강 파랑 노랑 검정 다양한 빛을 발하는 포도들로 가득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의 포도들로 가 득했다. 엄마는 올 때마다 오늘은 이세탄 백화점에서 오늘은 오다큐 백 화점에서 오늘은 동네 시장에서 포도를 구입해왔다. 아이를 낳으면 어떡할 건데? 애 키우는 게 장난인 줄 아니? 그거 보통일 아니야. 란 잔소리를 해가면서도 포도가 떨어질 만하면 초인종 을 눌렀다. 포도뿐이 아니었다. 오이지무침, 각종 나물과 김치, 간장 게 78 재외동포 문학의 창
장, 다랑어 회, 쑥떡이며, 떡볶이 떡, 신오쿠보의 한국 슈퍼마켓에서 사 왔을 뻥튀기 과자들도 모두 엄마가 가져온 것들이다. 엄마는 어느새 우 리 냉장고 안에 사는 사람이 되었다. 순산 기원 복대를 챙겨온 것도 엄마였다. 일본에 사니 일본식으로 하자며 내 허리에 복대를 채우고 사 진을 한 장 찍었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엄마생각이 났다. 엄마가 사온 로사리오 비앙코 한 송이를 해치우고 전철에 올랐다. 그 무렵 난 후지 티비 14층 정보방송 제작국에 사요나라(마지막 인사) 를 하고 집에서 뒹굴다 지쳐 자동차 교습소에 다니고 있었다. 5센티 짜리 속눈썹을 붙인 그녀의 네일 아트는 예쁘다기보다 커다란 큐빅이 너무 많아 혐오스러웠다. 독특하지도 않았고 과하다 싶었다. 게 다가 그녀는 철지난 발이 다 들여다보이는 샌들을 신고 있지 않은가? 패션의 기본은 구두와 가방인데도 말이다. 가을이 무르익은 이 계절에 갈색 화장을 하고 샌들을 신은 그녀의 모습은 5센티짜리 속눈썹 마냥 어색하게만 보였다. 전철에서 우연히 내 옆에 서있던 그녀는 내 앞자리 가 비자, 임산부인 나를 제치고 그 자리에 앉았다. 임신 6개월, 서 있는 게 힘들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매우 불쾌해졌다. 천차만별. 운전교습소에서 8번 운전을 하면서 8명의 강사를 만났다. 그 8명은 다 제각기 가르치는 법도 다르고 운전하는 법도 다르고, 중요 시 여기는 부분도 달랐다. 말 그대로 천차만별이다. 엄마가 된다. 천차만별의 엄마중 하나가 된다는 거다. 난 어떤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적어도 늦가을에 샌들 신는 그런 무감 각한 엄마가 되고 싶진 않다. 5센티 눈썹 붙이고 위화감을 못 느끼는 무분별한 엄마가 되고 싶진 않다. 외적인 부분이나 패션센스가 문제가 소설 부문 79
아니다. 임산부에게 자리 양보도 못하는 엄마만큼은, 절대 되고 싶지 않다. 아이는 부모를 보고 자란다. 강인하고 튼튼하면서 여린 감성을 가진 아이로 성장하도록 도와줄 수 있었음 좋겠다. 분별력과 사고력과 타인의 마음이나 타인의 경우를 상상하는 상상력도 있었음 좋겠다. 아이를 위해 나부터 많은 걸 돌아봐야겠다. 먼저 자세부터. 바르게 앉기, 바르게 걷기, 바르게 먹기. 지금까지 살아온 것보다 더 열심 히 나를 살아야하는 이유가 또 이렇게 찾아오는구나. 엄마, 차는 이미 떠났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포기해. 엄마만 빼곤 모든 게 순조로웠다. 남편은 마냥 기뻐하고 있었다. 남 편에게 바란 건 술 안 하는 사람이란 단순한 조건 딱 하나였다. 그는 술만 안 하는 게 아니라, 바람을 피우지도 않았고 소란을 피우지도 않 았고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 그는 자상했다. 매주 일요일이면 화장실 을 직접 청소했고, 집 주변을 둘러싼 잡초들을 뽑아냈다. 자전거를 깔 끔히 닦는 일도 그가 좋아하는 일이었다. 밥맛이 없다고 투정대지도 않 았고, 반찬이 적다고 밥상을 엎는 일도 없었다. 먹고 싶은 게 있을 땐 휴대전화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 그거 못하는데 라 문자를 보내면, 그 는 수퍼마켓에 들려 재료를 사와 직접 만들어 내게 맛을 보였다. 그가 만들어주는 스키야끼와 오꼬노미야끼는 일품이었다. 10년을 혼자 살아 온 그에게 가사일은 번거로운 일이 아니라 일상의 일부였고 차곡차곡 해나갈수록 쾌적함을 가져다주는 노력한 만큼 결과를 내주는 드문 일 중 하나였다. 가사 일은 수학 문제 같았다. 끈기를 가지고 풀어내면 대 부분 해답이 보였다. 80 재외동포 문학의 창
그는 대학동창이었다. 연극 무대에 서겠다는 포부로 가득한 끼있는 학생들 사이에서 그는 늘 묵묵했다. 그에겐 서늘한 아우라가 넘치고 있 었다. 그는 쓸데없는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늘 정확하고 냉정하게 다른 학생들을 평가했다. 그 대사는 쓸데가 없어. 네 감정은 슬픔이 아니라 과장이야. 그 웃음소리도 마찬가지라구. 과장만이 연기 가 아니야. 제발 좀 대본을 읽고 이해를 해와. 아닌 건 아닌 거야. 그는 연극 동아리를 박차고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동아리 학생들은 모두 그를 부담스러워했다. 아무도 그에게 다시 돌아오라 요구하지 않았다. 책상 한 귀퉁이에 박혀있던 쓸모없는 못 하나를 빼버린 기분이었다. 난 가끔 그를 떠올렸다. 내가 제대로 가는 건지 기분이 꿀꿀할 때, 연극무대가 끝난 후 관객 반응이 시원찮을 때, 취업활동 때 한국인이란 이유로 원서 접수를 거절당했을 때, 사랑하는 남자가 바람을 피웠을 때, 별 갖은 이유로 그가 그립곤 했다. 졸업 후 우연한 기회에 재회한 후, 그와 결혼을 했다. 망설임 따윈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가 정답이었다. 엄마의 대답은 시원스러웠다. 어차피 일본에 살건데 일본남자랑 결혼하는 게 당연하지. 엄마답게 쿨하고 합리적이었다. 어떤 이는 모국어가 다르단 이유로 내게 비수를 던졌다. 정작 결혼 하는 건 나인데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 걱정을 했다. 그러나 그가 한국말을 못한다고 해서 그게 내 가슴을 찢어놓을만한 결점이 될 수는 없다. 같은 언어를 말해도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 모르는 프랑스어를 말해도 왠지 필이 꽂히는 날도 있지 않은가. 말 이 안 통해 결혼생활이 오래 못가면 어쩌지? 글쎄다. 중요한 건 가슴이 소설 부문 81
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불행에 대해 걱정만 하는 머리가 아니 다. 어차피 헤어질 인연이라면 그건 언어 문제가 아니라 성격차일 수도 있고, 운명일 수도 있는 법이다. 같은 나라 사람끼리 결혼해도 헤어지 는 게 인생 아닌가. 남들은 국제결혼이라 하지만, 내게는 그냥 연인일 따름이다. 가장 따뜻한 연인, 내일 일은 나도 모르니까 말야. 포도를 백 송이쯤 먹어치웠을 무렵이던가. 가을 냄새가 폴폴 풍기고 있었다. 신주쿠 서구 쪽에 늘어선 상록수들의 빛깔은 점점 더 짙은 초 록으로 변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발걸음을 서둘렀 다. 무작정 초콜릿이 먹고팠다. 메종 드 쇼콜라. 프랑스에서 일찌감치 들어온 그 초콜릿 전문점엔 코코아보다 농도가 짙은 초콜릿 100퍼센트 음료를 판매한다. 가격은 한 병에 2천 엔이 넘는다. 선물이나 하면 했 지, 내 몫으로 사기엔 여간 아까운 게 아니다. 메종 드 쇼콜라의 그 초 콜릿 드링크가 먹고 싶어진다. 임신을 하면 먹고자하는 욕심이 풍선처 럼 부풀어 오른다. 오모테산도로 갈까. 거긴 너무 먼데. 근데 임산 부에게 초콜릿은 독이라던데? 카페인이 들어있다나 뭐라나. 친구 들 중 가장 먼저 아이를 가진 하나가 아이를 낳으면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도 먹을 거구, 맥도널드도 갈 거야. 참, 모스 버거의 모스 치즈 버 거의 그 소스, 토마토가 듬뿍 든 잘게 썬 양파가 춤추는 그 햄버거를 서너 개는 먹고 싶다. 롯데리아의 새우 버거도 좋아. 피자도 실컷 좀 시켜먹고 싶어. 하던 투정이 떠올랐다. 날이 갈수록 임산부에 대한 절 제는 심해졌다. 먹어선 안 될 것들이 투성이인 세상천지에 매일 신선처 럼 먹고 살라니. 의사들은 임신중독증을 남발하며 먹는 것부터 자 82 재외동포 문학의 창
제시켰다. 포식의 사회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는 임신했을 때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라 메종 드 쇼콜라의 초콜릿보다 더 맛있는 초콜릿이 나왔대. 장 폴 에반 가봤어? 문득 회사 동료의 말이 떠올랐다. 이세탄 백화점의 장 폴 에반 앞은 대여섯의 손님들이 진을 치고 있 었다. 입구엔 실내 온도 유지를 위해 손님 수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한 분씩 안내할 테니 기다리십시오. 란 안내 문구가 표시되어 있다. 뜬금없이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초콜릿을 먹어야해. 꼭 먹 어야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초콜릿이라잖아. 매일 초콜릿만 먹고 사 는 어떤 여자 탤런트도 추천한 곳이란 말야. 조금만 더 기다려 봐. 안 돼,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구, 화장실로 직행해. 아. 아. 하아. 내 손은 어느새 배를 감싸고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봐. 저기 직원이 나오고 있잖아. 하아. 아. 아. 후우. 그 손은 어느새 배 밑으로 내려가 있었다. 아. 아. 배가 뭉친 거 같아. 화장실로 가라구. 하아. 후우. 아. 후우. 다이죠부?(괜찮아요?) 아냐, 아이가 나오기엔 일러. 책에서만 보던 라마즈 호흡법이 입 밖 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후우, 쓱, 후우, 쓱, 하아. 순대가 먹고 싶어. 수술실에서 나와 마취에서 채 깨지 못한 상태에서 난 순대를 찾았다. 아이를 잃고도 뱃속은 아직 그 사실을 터득치 못했는지, 아니면 6개월 소설 부문 83
새에 아이를 핑계로 탐욕스러워졌는지 잔인하게도 난 먹을 걸 찾았다. 순대? 그게 뭐야? 그걸 어디서 사? 그는 괜찮냐고 묻기 전에 순대가 뭐냐고 묻는다. 내가 지금 순대가 먹고 싶다고 했어?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에게 물었다. 응, 그랬어. 6인용 병실은 조용했다.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느라 그런지 일본 대학 병원의 병실엔 제각기 커튼이 쳐져 있었다. 360도 날 감싼 커튼 안은 가을인데도 더웠다. 옆엔 누가 있는 걸까. 내 옆에 누워있을 여자들의 존재는 커튼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안쓰러운 듯 내 옆에서 나보다 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엄마 울지 말고 이제 가.. 자꾸 울거면 집에 가라구. 나도 안 우는 데 엄마가 도대체 왜 울어? 그래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자꾸 왜 이래? 집에 가라니까. 이 기집애야, 딸이 이렇게 누워있는데 엄마가 눈물이 안 나오겠어? 엄마 왜 아이를 가졌냐고 그랬잖아. 어떻게 키울 거냐고 그랬잖아. 그래 엄마가 미안해. 도대체 엄마가 뭐가 미안한데? 이제 엄마가 원하던 대로 된 거 아 냐. 안 그래? 엄마는 그 길로 병실을 나가버렸다. 엄마가 울면서 나갔던 거 같기 도 하고, 눈을 흘겼던 거 같기도 하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던 것 같기 도 하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게 아니었어. 난 그냥 엄마의 축하한 84 재외동포 문학의 창
다는 그 말 한 마디가 듣고 싶었던 거야. 맨 처음부터 말야. 다른 엄마 들처럼 임신을 축하한다고 듣고 싶었어.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동시에 원망이 내 기억 저편에서부터 올라 왔다.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엄마는 그 많던 재산을 할아버지에게 그 대로 돌려주어야했다. 하루 아침에 경제력을 잃은 엄마는 두 아이를 데 리고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을까. 서른 여섯 엄마에게 일자리를 주는 곳 은 없었다. 엄마는 자기 언니가 있는 일본을 향했다. 엄마는 내가 엄마 처럼 되는 것만은 피하고 싶어했다. 공부를 잘 했고, 글 쓰는 걸 좋아했 으니 기자가 되어 세상 곳곳을 다니며 자유롭게 살아주기를 엄마는 원 했다. 그치만 엄마가 원하는 길은 누구나 다 환영받는 길은 아니었다. 취업시험에서 떨어진 사람에게 기자가 되는 길은 프리랜서 밖에 없었 다. 그치만, 엄마는 딸이, 아니 우리 딸이라면 뭐든 다 해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엄마는 내가 일본이란 타국에 있는 사실도 잊고 사는 거 같았다. 차별 받아보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타국에서 성공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글 또는 말 로 일본인들과 상대를 겨루는 건, 지난 내 이십 대를 뒤돌아보면 치열하고 또 치열하고, 때로는 더럽 고 자존심 상하고 상처받을 수 밖에 없는 시절이었다. 아니, 무엇보다 도 내 자신에 대한 불신과의 싸움에서 조금씩 조금씩 웅크려 들다보면 이내 자존심도 자신도 사라지고 남는 건 삶에 대한 회의뿐이었다. 얼마 나 날 갉아먹어야 글은 태어나는지 얼마나 날 갉아먹어야 기획은 창조 되는지. 그런 값비싼 고민이 아니라 갉아먹을 흔적조차 남지 않는 자신을 뒤덮기 위해선 담요 한 장만으로 택도 없이 벅찼다. 내게 있는 소설 부문 85
건 남들보다 몇 번 더 상을 쥐어준 글 솜씨와 남들보다 조금 빼어난 관찰력과 남들보다 아주 조금만 우월한 인내였을 뿐. 인맥도 연줄도 아 무것도 없었다. 물론 노력이 부족했다는 건 만인이 아는 사실이니 새삼 끄적이기도 불편하구나. 단지 무모함만큼은 넘치고도 남을 만큼 가지 고 있었는데 삼십이 되면서 모든 게 더욱 불편해졌다. 신문기자가 되지 못한 게 한처럼 느껴졌다. 엄마가 원하는 직업을 못가져 준 게 너무나 도 미안했다. 아이를 유산하고 병실에 누워있는 내 자신이 한심했다. 그냥 아팠다. 아이는 얼마나 아팠을까. 옆 커튼 안에 들리지 않게 숨을 죽이고 눈물을 닦았다. 닦아도 닦아도 멈추지 않았다. 그럴수록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엄마는 왜 나한테 공부하란 소리를 안 한거야? 왜 기자 말고 다른 회사 시험을 보라고 안 한 거야? 왜 엄마 는. 근데 말이지, 그 어릴 적 그렇게 춤을 좋아하고 노래를 좋아했 던 나한테 엄마는 왜 발레를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일까? 그놈의 텔레비 전 컬러바가 나오는 5시에서 5시 30분까지 클래식 컬러바에 따라 나오 는 클래식 음악에 맞춰, 회전을 수백 번 해도 엄마는 그게 내 특기인지 아직도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난 발레리나나 뮤지컬 배우가 되었음 했 는데 말야. 엄마란 아이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면서 실 은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닐까. 그날 밤 울다 잠든 사이 누군가 다녀갔다. 침대 곁에서 바스락 거리 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였다. 난 눈을 뜨지 않았다. 숨을 죽이고 옆으 로 고개를 틀었다. 엄마가 의자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십분쯤 지났을 까. 엄마는 날 깨우지 않고 머리를 쓰다듬은 후 자리를 떴다. 엄마 의자 위엔 바스락 거리는 비닐 봉투가 놓여있었다. 봉투를 뜯었다. 김이 모 86 재외동포 문학의 창
락모락 솟아올랐다. 순대! 서른이란 나이는 혼자임을 감출만한 여력을 충분히 가지고도 남는구나. 결단코 외롭지 않은 사람 마냥 방바닥을 뒹군다. 결단코 외롭지 않다고 누군가의 방명록에 끄적이고 내 자신의 게시 판에 끄적인다. 외로움이나 그리움을 다 감추고 과연 글을 쓸 수나 있을까. 고독의 고고함 없이 탄생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조용한 밤이구나. 아이의 유골이 놓인 텔레비전 옆 탁상 위에 우유를 따르고 짧은 기 도를 바친다. 당분간은 아이의 유골과 함께다. 아마 그 영혼과는 평생 함께겠지. 아멘. 조용한 밤이구나. 타이핑 소리가 밤을, 방을 울린다. 아이를 잃고 가장 많이 생각하는 건 엄마인 거 같다. 엄마는 간혹 삼계탕을 해서 가져오기도 하고 도가니탕을 끓여놓고 가기도 했다. 삶이 잔혹하단 사실을 아빠는 죽음으로 엄마는 삶으로 내 게 가르쳐줬다. 엄마가 뼈 빠지게 일해 봤자 서민이란 겨우 학교가고 밥 먹는 게 전부였다. 아빠가 살아있을 때 그리도 자주 가던 여행 같은 건, 아빠가 돌아가신 후 단 한 번도 떠나지 못했단 사실을 난 그쯤에서 기억해냈다. 그치만 삶이 아무리 잔혹해도 싸우고 또 싸우고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도 아빠와 엄마가 알려주었다. 엄마는 늘 웃음을 잃지 않았 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자기 바에 서서 새벽 4시까지 일을 하면서도 소설 부문 87
엄마는 자기 걱정보다 우리 걱정을 더 많이 했다. 나이가 들면서 엄마 는 입버릇은 하나였다. 나 죽을 때 장례비는 남겨놓고 죽어야지. 제발 깨끗하게 갔으면 좋 겠다. 몸 아파서 너희들 고생시키지 말구 엄마가 그런 말을 할수록 왠지 딸은 더더욱 미안했다. 엄마랑 난 아주 친한 친구처럼 지내고 있지만 우리 둘은 너무 많이 달라서 엄마가 내게 속내를 보여줘도 딸인 내가 엄마한테 내 맘을 보여 주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솔직히 뭐, 내가 속을 보여준 일이 얼마 나 있겠는가. 늘 혼자였다. 학창시절엔 아빠 뭐 하냔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고, 작은 집으로 친구들이 놀러오는 것도 꺼려했다. 뭐 하나 흠이 라도 잡힐까봐 조심해야했다. 엄마, 여행 한 번 못 시켜드렸는데. 내 것만 좋은 걸로 챙기고 엄마 것은 챙기지도 못했는데. 막상 여행 시켜드리고 뭔가 챙기려하면 쑥스럽기도 하고, 별 것도 아니면서 생색부터 내려한다. 엄마가 아이를 축하하지 못했던 건, 엄마의 인생이 서글펐기 때문일 수도 있고, 딸에 대한 꿈이 너무 컸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치만 여전 히 섭섭했고, 아이의 죽음이 엄마 탓인 냥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머릿속은 복잡했다. 엄마가 밉다가도 고맙고 고맙다가도 밉고 괜시 리 눈물만 흘렀다. 그날 밤 병원에서 혼자 순대를 손으로 집어먹었다. 신주쿠 역에서 20분은 걸어야 있을 손으로 만든 순대집의 순대는 찰떡처럼 차지고 속 까지 꽉 차 있었다. 엄마, 고마워. 결국 난 엄마한테 고맙다는 말을 하 88 재외동포 문학의 창
지 않았다. 미안하단 말을 목젖 뒤에 숨기고 사는 것과 동일한 이치다. 조용한 밤이구나. 시간은 잘도 가는구나. 울어도 가고 웃어도 가고, 울면서도 보내고 웃으면서도 보내고 그래 시간은 잘도 가는구나. 잘 살아야하는데 자꾸 막연해진다. 아빠가 자신의 죽음으로 남겨준 게 있다면, 살아있는 것 자체에 만족 하란 충고였다. 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야 물론이지만, 그 어떤 고 뇌 앞에서도 생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아빠의 죽음을 통해 익혔다. 목 숨이 어찌나 끔찍한 건지, 그걸 지키는 게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 인지 죽은 후에도 아빠는 늘 가슴속에 살아서 끊임없이 삶을 감사하라 고 삶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라 고 속삭였다. 근데 자꾸만 욕심이 앞선 다. 창조해내고 생산해내고 길러내고 싶다. 창조와 생산이 없는 빈곤한 삶을 어찌 받아들이면 좋을지 모르겠다. 눈물은 짜고 짜도 또 나왔다. 12월 어느 날. 아이를 묻고 돌아온 바로 다음날, 생리가 왔다. 이제 몸이 본 상태로 돌아오고 있다는 시그널이다. 몸은 마음보다 가끔 더 단단하고 더 솔직하고 더 생리적이며 더 인 간적이고 더 야만적이다. 몸은 늘 내게 살아라 살아라 그리 가르친다. 사는 건 늘 죽음과 연계되어 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따름 이다. 그건 슬퍼해야 하거나 아파해야 할 일이 아니라 당연하게 받아들 여야 할 진실인 것이다. 아이의 유골이 없는 집은 서늘했다. 이제 우유를 살 일도 아기 과자 소설 부문 89
를 사올 일도 없구나. 아이가 내게 남겨준 건 무얼까. 그 죽음으로 내가 깨달아야 할 건 무얼까. 탄생 없이 떠나간 너에게 엄마로서 난 앞으로 어찌해야 하는 걸까. 너도 태어났음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픈 아이가 되었을까. 우 린 왜 만나지 못했을까. 우리 서로 미안해하는 사이였음 좋았을 것 을. 아이는 꿈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형체도 없이 사라진 아이를 어떻게 끌어안으면 좋을지 난 알지 못했다. 미안해. 미안해. 백 번을 사죄해도 천 번 무릎을 꿇어도 용서를 완벽하게 빌 수는 없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일상은 조용히 내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의 흔적을 미니 홈피에서 지워나가는 대신 내 머릿속에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새겨두기로 했다. 삶은 내게 자꾸만 미안한 사람들을 만들어주고 있다. 엄마, 미안해. 아이야, 미안해. 그리고 여보, 미안해. 미안할수록 삶을 풍요롭게 살아 야겠다고,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마치 초등학생의 기도처럼 중얼거 려본다. 90 재외동포 문학의 창
아이야 도망가 우수상 황희(미국) 뾰족하게 다듬어진 손톱에 세게 힘을 줘 손등을 힘껏 찔렀다. 마음 이 검은 새처럼 죽었을 때 통각도 함께 죽은 걸까. 손톱이 살을 파고들 었지만 아프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언젠가 엄마가 물었다. 어째서 손톱을 그렇게 길러 삼각형으로 자르고 다니느냐고. 불량스러워 미치 겠다고. 삼각형 뾰족한 손톱은 내 자신을 찌르기 위한 흉기다. 엄마가 미국으로 온 것은 내 공부 때문이 아니라 종교의 자유를 위해서란 걸 나는 알고 있다. 학교에서 돌아와 열쇠로 문을 열자 햇빛을 등져 낮에도 어두컴컴한 아파트 거실이 드러났다. 한 발자국 거실로 들어서는데 어두침침한 실 내에 누군가가 현관을 노려보며 앉아 있었다. 순간적으로 오싹했다. 다 음 순간 그것이 엄마라는 것을 알았다. 심장이 불쾌하게 두근거리기 시 작했다. 엄마가 눈치를 챈 것일까? 아무리 물어도 대답을 안 해 주시네. 우리주님께서. 엄마의 시선은 아무데도 보고 있지 않았고 목소리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신경질적인 날카로움이 감춰져 있었다. 엄마? 거기서 뭐해? 소설 부문 91
이게 모두 너 때문이야! 엄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엄마한테 지금까지 거짓말을 했어. 엄마가 노려보자 나는 발끝으로부터 한기가 스며 올라오는 것 만 같 았다. 한기는 정강이를 타고 무릎까지 올라가 심장을 마구 흔들어대고 있었다. 너 학교 급식시간에 한 번도 감사기도를 하지 않았지? 해, 했어. 했다고! 안했어. 한 번도 안했어. 쪽팔리기 싫어서 안했어. 거짓말! 이년이 어디서 거짓말을 해! 그래 거짓말이야. 엄마도 거짓말을 하잖아. 거짓말 아니야! 매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감사기도를 했단 말이야. 두 명의 내가 차례로 소리를 질러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는 쪽이 훨씬 셌다. 아니야. 입 닥쳐. 네가 뭐래도 내가 다 알아. 널 잘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는 거야. 네 친구들한테 전화해서 다 물어봤어! 기도하는 거 한 번도 못 봤단다. 일루와! 회개해!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 싫어! 나는 하느님 안 믿어! 목사들이 먹고 살려고 마음 약한 사람 들을 끌어들이는 거래. 할머니가 그랬어. 학교 애들이 날 얼마나 이상 하게 보는지 알아? 만날 학교로 찾아오는 엄마 때문이야! 나는 미리 도망칠 생각부터 하며 현관 벽 쪽으로 바싹 붙어 섰다. 뭐얏! 92 재외동포 문학의 창
엄만 제 정신이 아닌 듯 마구 소리를 질러대며 나를 향해 닥치는 대 로 물건을 집어던졌다. 그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거칠게 냉동고 문을 열고 꽁꽁 언 고깃덩이를 꺼내 도마 위에 쿵! 하고 내려놓았다. 막 식칼을 잡으며 바 락바락 목에 핏대를 세우는 것을 보던 나는 집이 부서져라 세게 현관문 을 닫고 나왔다. 엄마는 언젠가는 나를 버리고 도망칠 것이다. 그런 상황이 오면 어 떻게 해야 할지 미리 계획을 세워 놔야한다. 먼저 한국의 할머니에게 국제 전활 걸어야 하고 엄마의 돈을 훔쳐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 표를 어떻게 사는지 알아야한다. 택시를 어떻게 부르는지도. 그것 세 가지만 준비해 놓으면 국제 미아가 되진 않을 것 같았다. 쭈그리고 앉아 신경질적으로 숙제를 꺼냈다. 어째서 나는 빨리 자라 지 않는 것일까. 한밤 자고 일어나면 어른이 되어 있을 수는 없을까? 빨리 지긋지긋한 여기서 떠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면 좋을 텐데. 사 람들이 기러기 아빠라고 부르는 내 아빠가 그랬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 이들이 해야 할 일은 공부라고. 공부만 잘하면 지긋지긋한 모든 것에서 빠져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고 했다. 늘 산수 45점. 이번엔 반드 시 백점을 받고 말 것이다. 나는 연필을 꼭 잡고는 산수 문제를 노려보 았다. 속으로는 퍽(fuck) 하고 욕을 했다. 영어로 욕을 배우는 건 몹시 쉽다.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곧바로 따라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산 수 문제는 아무리 노려보아도 어떻게 푸는 건지 떠오르지 않았다. 엄마 한테 물어보면 영어로 된 문제를 엄마가 어떻게 아냐며 수업시간에 잘 듣지 뭐했냐고 쥐어박을 것이다. 그러면서 또 기도를 하겠지. 산수 문 소설 부문 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