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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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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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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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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민락초신문4호


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아니라 일본 지리지, 수로지 5, 지도 6 등을 함께 검토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근대기 일본이 편찬한 조선 지리지와 부속지도만으로 연구대상을 한정하 기로 한다. Ⅱ. 1876~1905년 울릉도 독도 서술의 추이 1. 울릉도 독도 호칭의 혼란과 지도상의 불일치 일본이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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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부산연주문화\(김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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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동북아역사논총 42호 금융정책이 조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일제 대외금융 정책의 기본원칙은 각 식민지와 점령지마다 별도의 발권은행을 수립하여 일본 은행권이 아닌 각 지역 통화를 발행케 한 점에 있다. 이들 통화는 일본은행권 과 等 價 로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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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답 과 해 설 1 (1)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어생활 주요 지문 한 번 더 본문 10~12쪽 [예시 답]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한 사 람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으며,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해쳐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0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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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 인물 강순( 康 純 1390(공양왕 2) 1468(예종 즉위년 ) 조선 초기의 명장.본관은 신천( 信 川 ).자는 태초( 太 初 ).시호는 장민( 莊 愍 ).보령현 지내리( 保 寧 縣 池 內 里,지금의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에서 출생하였다.아버지는 통훈대부 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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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은하 1 우리 은하 위 : 나선형 옆 : 볼록한 원반형 태양은 은하핵으로부터 3만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 2 은하의 분류 규칙적인 모양의 유무 타원은하, 나선은하와 타원은하 나선팔의 유무 타원은하와 나선 은하 막대 모양 구조의 유무 정상나선은하와 막대나선은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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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Educational Innovation Research 2016, Vol. 26, No. 3, pp DOI: * The Grounds and C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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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Educational Innovation Research 2018, Vol. 28, No. 4, pp DOI: * A Research Tr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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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 환경정책 형산강살리기 수중정화활동 지원 10,000,000원*90%<절감> 형산강살리기 환경정화 및 감시활동 5,000,000원*90%<절감> 9,000 4, 민간행사보조 9,000 10,000 1,000 자연보호기념식 및 백일장(사생,서예)대회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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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오스본을 중심으로 한 작은 정부, 시장 개혁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에 대응 하여 노동당은 보수당과 극명히 반대되는 정강 정책을 내세웠다. 영국의 정치 상황은 새누리당과 더불어 민주당, 국민의당이 서로 경제 민주화 와 무차별적 복지공약을 앞세우며 표를 구걸하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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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운 체계상의 특징 음운이란 언어를 구조적으로 분석할 때, 가장 작은 언어 단위이다. 즉 의미분화 를 가져오는 최소의 단위인데, 일반적으로 자음, 모음, 반모음 등의 분절음과 음장 (소리의 길이), 성조(소리의 높낮이) 등의 비분절음들이 있다. 금산방언에서는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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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스님의 이 달의 법문 성철 큰스님 기념관 불사를 회향하면서 20여 년 전 성철 큰스님 사리탑을 건립하려고 중국 석굴답사 연구팀을 따라 중국 불교성지를 탐방하였습 니다. 대동의 운강석굴, 용문석굴, 공의석굴, 맥적산석 굴, 대족석굴, 티벳 라싸의 포탈라궁과 주변의 큰

15강 판소리계 소설 심청전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1106월 평가원] 1)심청이 수궁에 머물 적에 옥황상제의 명이니 거행이 오죽 하랴. 2) 사해 용왕이 다 각기 시녀를 보내어 아침저녁으로 문 안하고, 번갈아 당번을 서서 문안하고 호위하며, 금수능라 비

Transcription:

한국민족문화 53, 2014. 11, 113~139 http://dx.doi.org/10.15299/jk.2014.11.53.113 동아일보 소재 독자문단( 讀 者 文 壇 ) 연구 1)손 동 호 * 1. 서론 2. 독자문단 란의 등장과 전개 3. 독자문단 소재 작품의 특질과 의미 4. 결론 <국문초록> 독자문단 은 동아일보 가 문예물을 전면에 내세운 최초의 독자투고였 다. 본고의 목적은 독자문단 의 전개과정을 밝히고, 해당란에 실린 160여 편의 작품을 분석하여 그 의의를 고찰하는 데 있다. 신문이 속간되자마자 해당란에 노자영과 김소월 등 기성문인의 작품을 실은 점으로 미루어 독자문단 은 적극적인 독자 유인책으로 시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당란에는 전문작가 외에도 이후 문단에서 활약하게 되는 문 인들의 작품이 다수 발표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독자문단 은 근대 문인의 예비적 장소로 볼 수 있다. 독자문단 소재 작품들은 대부분 슬픔이나 그리움 등 개인의 감정을 주 제로 삼았다. 이는 투고자들의 이향체험이 반영된 결과였다. 유학생이나 청년운동가였던 이들은 객지 생활을 하며 느낀 감회에서부터 사회에 대한 불만, 사회문제에 대한 해결책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관심사를 다룸으로 써 정체성을 드러냈다. * 연세대학교 인문예술대학 국어국문학과 강사(sondongho3@daum.net) - 113 -

2 / 한국민족문화 53 운문과 산문을 막론하고 독자문단 에 실린 작품들 중에서 가장 많은 비 중을 차지한 주제는 개인의 감정이었다. 이렇듯 주제가 한정적이었다는 점은 편집진이 특정 주제를 의도적으로 유도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 준다. 독자문단 은 시행 초기부터 검열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신문사 는 문화운동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검열을 피하면서 신문의 구 독률을 높이고자 하였다. 이에 대한 절충의 결과가 바로 독자문단 이었던 셈이다. * 주요어: 동아일보, 독자문단( 讀 者 文 壇 ), 독자투고, 노자영, 유학생 1. 서론 1920년대는 제한적이나마 언론 출판의 자유가 허용되어 민간지가 발행 되기 시작했다. 1920년, 조선 내에서 민간지로 발행이 허가된 신문에는 동 아일보, 조선일보, 시사신문 등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1920년 4월 1 일 창간한 동아일보 는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를 내세우며 문화 운동의 선전기관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1) 동아일보 는 발행초기부 1) 창간호 사설 主 旨 를 宣 明 하노라 ( 동아일보, 1920. 4. 1)에서 오인은 새로운 시대가 이 미 왔다고 믿고 있으며 동아일보 창간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민족에 고유한 문명의 특장 과 생명의 미묘함이 없겠는가. 그러나 감히 발치 못하였다가 시대가 변하여 언론자유가 다 소 용인되자 조선 민중은 그 사상을 표현하며 그 전도를 인도하는 친구가 될 자를 열망으 로 기대하게 되었다. 이에 동아일보가 생하였다. 며 신문 창간의 취지를 밝혔다. 이에 비 해 시사신문 은 급진적 친일단체인 국민협회의 기관지로 출발하였으며 1921년 2월 16일 사장인 민원식이 일본 동경에서 사살되자 신문도 얼마 안 가서 폐간되었다. 조선일보 는 1920년 창간 이후 1924년 10월 신석우( 申 錫 雨 )에게 판권이 넘어가기까지 대정실업친 목회( 大 正 實 業 親 睦 會 )라는 친일단체의 소유로 되어 있었고, 비록 가끔씩 과격한 논조를 전개하여 총독부로부터 압수, 정간 등의 조치를 받긴 하였으나 민족지로서 인정받지 못하 였기 때문에 발행부수도 적었고, 일반에 대한 영향력도 작았다. 즉 1924년 10월 이른바 혁신 이전의 조선일보 는 문화운동 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박찬 승, 한국근대 정치사상사 연구, 역사비평사, 1992, 168쪽; 최준, 한국신문사, 일조각, 1990, 184~188쪽; 한원영, 한국신문 한세기 근대편, 푸른사상, 2004, 335~348쪽, 604~ 607쪽 참조. - 114 -

동아일보 소재 독자문단( 讀 者 文 壇 ) 연구 / 3 터 독자들의 투고를 독려하기 위해 다양한 기획을 선보였다. 독자투고, 현상공모, 신춘문예 가 가장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들 기획은 순차적으 로 등장하였으며 신문사의 지면 개편 작업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전 개되었다. 가장 먼저 지면에 등장한 독자투고는 문예물 외에도 다양한 분 야에 걸쳐 독자들의 작품을 모집하였다. 독자투고 중에서 문예물에 한정 한 기획이 독자문단( 讀 者 文 壇 ) 2) 이었다. 이후 동아일보 는 독자들의 투 고열기를 더욱 고조하기 위해 현상공모를 시도한다. 응모 당선작에 대해 상금이나 상품을 증정함으로써 독자들의 호응을 적극적으로 유도한 것이 다. 특히 현상문예는 독자들의 호응에 힘입어 작품의 모집 분야도 독자문 단 에 비해 확대하면서 문예물에 집중하였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925년에는 신춘문예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처음 등장한다. 신춘문예는 제 도가 안착하기까지 굴곡이 있었지만 비전문작가의 등용문이 되었다는 점 에서 의의가 있다. 동아일보 가 시행한 문예 공모제도나 신춘문예제도는 운영상의 문제점을 노출시키기도 하였으나 한국 근대문학의 저변을 확대 하고 잠재적 작가군의 창작 의욕을 자극함으로써 직간접적으로 문인의 재 생산에도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고 평가된다. 3) 2) 독자문단 이라는 명칭은 1923년에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1923년의 독자문단 은 몇 차례 사용되다 사라졌을 뿐 아니라 난( 欄 )의 성격도 1921년에 시행한 독자문단 과 크게 다르다. 1923년 독자문단 은 동아일보 발행 일천호를 기념하여 상금 일천원을 현상한 현상문예 의 성격을 띠고 있다. 모집 장르 역시 세분화하여 단편소설, 일막각본, 동화, 시조, 신시, 동요, 서정문, 감상문, 기타 문예작품 등을 요구하였다. 이 기획 이후 지면개 편 작업이 이루어져 1923년 6월 3일부터 일요호 가 신설된다. 독자문단 은 바로 이 일 요호 에서 실시한 동아문단 의 또 다른 명칭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불 필요한 혼란을 피하기 위해 1921년에 실시한 독자문단 만 언급하고자 한다. 3) 김석봉, 식민지 시기 동아일보 문인 재생산 구조에 관한 연구, 민족문학사 연구, 민 족문학사학회, 2006 참조. 한편 동아일보 는 매일신보 가 전개했던 독자 문예 제도를 일부 수용하는 한편 민간지인 조선일보 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의 독자 문예 제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즉 당시 신문 매체들은 이전 시기부터 존재 했던 독자 문예 제도를 계승하는 한편 경쟁 매체의 제도를 견제 답습하면서 나름의 독자 문예 제도를 발전시켜 나아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연구 성과를 참조. 전은경, 1910년대 매일신보 소설 독자층의 형성과정 연구, 현대소설연구 29, 한국현대소설 학회, 2006; 이희정, 1920년대 식민지 동화정책과 매일신보 문학연구(1), 어문학 112, 한국어문학회, 2011; 이희정, 1920년대 식민지 동화정책과 매일신보 문학연구 - 115 -

4 / 한국민족문화 53 선행연구들을 통해 신문 매체의 독자 문예 제도가 정착되는 과정은 비 교적 상세하게 밝혀졌다. 독자투고에서 현상문예로 변모하면서 문예의 위 상은 높아졌고, 신춘문예에 이르러서는 비전문작가의 등용문 구실을 하는 등 제도적인 정착을 이루어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선행 연구 업적에도 불 구하고 공모 제도를 통해 발표된 개별 작품들에 대한 실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독자문단 은 일반 독자 들의 작품이라는 창작 주체의 비전 문성 때문인지 누가 어떤 작품을 발표했는지 정리조차 되어 있지 않다. 이 러한 연구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본 연구는 1920년대 대표적 민간지인 동 아일보 소재 독자투고의 대표적인 사례인 독자문단 의 전개과정을 정리 하고 해당 텍스트를 분석하고자 한다. 독자문단 은 동아일보 가 문예물 을 전면에 내세운 첫 독자투고였다. 따라서 신문이 독자문단 란에 채우고 자 한 내용은 신문사의 의도와 독자의 의도가 충돌하는 한편 그 조정을 거 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볼 수 있다. 독자문단 에 이 어 현상문예 나 신춘문예 가 등장한 만큼 독자문단 이 이후 전개되는 문 예 제도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2. 독자문단 란의 등장과 전개 동아일보 는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 이라 자임하고 항상 지면에 일부 를 개방하야 청신( 淸 新 )한 독자의 투고를 환영함은 본보 창간 이래 노력 4) 해 온 바라며 독자들의 원고를 모집해 왔다. 이러한 독자들의 원고 모집은 실제로 여러 분야에 걸쳐 이루어졌다. 독자의 성( 聲 ) 5), 자유종( 自 由 鍾 ) 6), (2), 현대소설연구 48, 한국현대소설학회, 2011; 이희정, 1920년대 매일신보 의 독자 문단 형성과정과 제도화 양상, 한국현대문학연구 33, 한국현대문학회, 2011; 김석봉, 식민지 시기 조선일보 신춘문예의 제도화 양상 연구, 한국현대문학연구 16, 한국현 대문학회, 2004; 이혜령, 1920년대 동아일보 학예면의 형성과정과 문학의 위치, 대 동문화연구 52,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5. 4) 기사 원고 모집, 동아일보, 1921. 3. 6. 해당 공고를 살펴보면 교육에 관한 문제, 산 업상의 신시험 과 더불어 유리한 가정내직( 家 庭 內 職 ) 이라는 제목으로 신문 독자들의 원 고를 모집하였다. - 116 -

동아일보 소재 독자문단( 讀 者 文 壇 ) 연구 / 5 때의 소리 7), 가정고문( 家 庭 顧 問 ) 8) 등은 동아일보 가 독자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독자문단 은 독 자투고의 한 종류로 동아일보 속간일인 1921년 2월 21일부터 같은 해 10월 28일까지 지속되었다. 연재 기간은 8개월 정도에 불과하였지만 문 예물에 대한 동아일보 최초의 독자투고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투고 자 이름 앞에는 지역명이 표기된 경우가 많았는데 국내 각 지역 뿐만 아 니라 중국의 남경, 항주, 상해, 일본의 동경, 멕시코(묵서가) 등 해외 사 례도 있어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독자들의 투고 열기가 매우 높았음을 보 여준다. 동아일보 는 1921년 당시 4면 발행 체제였는데 독자문단 은 예외 없 이 4면에만 실렸다. 해당지면에는 독자문단 외에도 천리구( 千 里 駒 )가 역 ( 譯 )한 장편소설 엘렌의 功 9), 지방통신( 地 方 通 信 ), 각지청년단체( 各 地 5) 동아일보 의 기획 기사 忘 却 乎 아 否 아 에 대한 독자 투고로 1920년 5월 17일부터 6월 4 일까지 연재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성명 을 발표한 이후 각 방면에서 자행된 총독부의 조선인 차별 사례를 모집한 기획물이다. 신 문 편집진의 기획기사와 연계하여 독자들의 입을 빌어 각 방면의 차별 사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점이 특징이다. 6) 1920년 7월 11일 동아일보 지령 100호를 맞이하면서 독자제군의 논평을 소개하기 위 해 設 한 논단 으로 1920년 7월 25일부터 1926년까지 연재되었다. 자유종 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기훈, 1920년대 언론매체와 소통공간: 동아일보 의 <자유종>을 중심으로, 역 사학보 204, 국립성공대학역사학계, 2009 참조. 7) 1921년 7월 8일부터 1922년 3월 17일까지 연재된 기획물로 일종의 가십란에 해당한다. 사 회 공공에 유익한 말, 일반에게 편리한 말, 많은 사람이 재미있게 생각할 말을 조선말로만 보내달라고 주문하였다. 특이한 것은 해당란의 신설부터 독자의 글이 투고되는 점인데 이 는 기왕에 독자가 보낸 엽서 중 몇 장을 소개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투고자의 성명을 고 대생, 답답생 등 비실명으로 처리한 점 역시 특징적이다. 8) 1926년 5월 20일부터 3면에 게재되기 시작하였다. 이 난은 마음 가운데 괴롬을 가지신 이 해결치 못할 사정을 가지신 부인네들을 위하여 이 란을 해방함니다 동아일보가뎡란 으로 될 수 잇는 대로 간단하게 투서해주십시오 일홈은 익명으로 하서도 좃슴니다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부인을 구체적인 독자로 설정하여 부인들의 고민 해결을 목적으로 하 였다. 9) 엘렌의 功 은 1921년 2월 21일부터 7월 2일까지 연재되었다. 같은 해 7월 4일부터 10월 10일까지는 천리구의 붉은 실 이 연재되었으나 미완에 그치고 만다. 이 작품 역시 창작물 이 아니라 번역물이었다. 반면 독자문단 에는 단편소설은 실리지 않았으나 독자들의 창작 물을 실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 117 -

6 / 한국민족문화 53 靑 年 團 體 ), 만필( 漫 筆 ) 10) 그리고 사고( 社 告 ) 와 광고가 실렸다. 독자문 단 의 투고 규정은 一, 記 [ 揭 ] 載 與 否 와 添 削 의 權 은 本 社 에 在 함 一, 原 稿 는 一 切 返 還 치 아니함 一, 投 稿 는 必 히 讀 者 文 壇 이라고 朱 書 를 要 함 이 었다. 투고 규정에 명시했듯 작품의 게재 여부에 대한 결정과 작품을 첨삭 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동아일보 편집부가 직접 관여하였다. 독자문단 투고 규정에서 특이한 점은 다른 신문 매체에서 시행한 문예 원고 모집 공 고와 달리 작품의 장르를 명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같은 시기 매일신 보 는 독자들의 원고를 모집할 때 작품의 종류를 단편소설, 시조, 신체 시, 일기 및 기행, 기타 수필 등 소품 문예 등으로 명기하고 있었다. 11) 하 지만 독자문단 은 모집 작품의 장르에 대해서 별다른 규정을 제시하지 않 았다. 독자문단 에 발표된 작품은 갈래상 운문과 산문으로 대별된다. 운문과 산문은 각각 127편과 33편이 실렸다. 12) 독자문단 의 대다수를 운문이 차 지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해당란의 지면 제약 때문이었다. 독자문단 은 1 행 14자였으며 행수는 적을 때는 20행에서 많게는 80행으로 불규칙했지만 보통 50행 정도였다. 13) 산문에 비해 운문은 작품의 길이가 짧아 하루에 여러 작품이 연재될 수 있었다. 예컨대 김소월의 시는 1921년 4월 9일에 7 편, 4월 27일에 6편, 6월 8일에 5편이 발표되었다. 1921년 6월 20일에는 유봉( 柳 鳳 )의 시 두 편이 게재되었다. 작품은 황혼의 근( 菫 ) 과 할미꽃 10) 1921년 7월 23일까지는 정파( 靜 波 )의 기성만필( 箕 城 漫 筆 ) 이 실리다가 8월 18부터 평양 지국 기자의 평양만필( 平 壤 漫 筆 ) 이 실린다. 11) 매일신보, 1919. 6. 24 ~ 7. 29 소품문예현상모집 공고. 1920년 12월 17일 1면 매일 신보 신년문예모집 공고에서도 문예의 종류를 단편소설, 신시, 논문, 일기문으로 제시 하고 있다. 12) 운문의 경우 1921년 9월 6일 김로벗토의 두 작품이 중복 게재되었다. 산문 역시 1921년 7월 1일과 2일에 발표된 정원모의 어린이의 꿈 이 중복 게재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7 월 20일과 21일에는 주기용의 여자해방의 근본방침 이 같은 제목으로 2회 연재되었으 므로 실제 발표된 작품 수는 33편이다. 13) 1921년 7월 22일 4면 독자문단 란에는 박승주( 朴 勝 周 )의 학창소감( 學 窓 所 感 ) 이 실렸 다. 작품 말미에 讀 者 文 壇 은 되도록 五 十 行 以 內 로 記 送 하시기 바라오- 係 員 이라고 명 시하여 해당란의 분량이 50행임을 강조하였다. - 118 -

동아일보 소재 독자문단( 讀 者 文 壇 ) 연구 / 7 으로 이 중 할미꽃 은 44행이나 되는 장형의 산문시였다. 이에 대해 담임 기자는 작품 말미에 作 者 에게 五 十 行 內 外 의 散 文 一 篇 을 적어보내심 이 엇더하올는지 住 所 를 明 記 하야 라고 언급한다. 이는 해당란이 50행으 로 고정되어 있어 많은 내용을 담아내기가 어려웠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작자의 의도를 훼손하지 않고 제한된 지면에 작품을 담기 위해서는 산문 보다 운문이 유리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이렇듯 제한된 지면에 작품을 싣다 보니 산문에 비해 길이가 비교적 짧은 운문의 투고비율이 높게 나타 났던 것이다. 운문의 투고 비율이 높게 나타난 또 다른 이유는 운문의 특성 상 모방하 기 쉽다는 데 있다. 이러한 특징 때문인지 외국 작품을 번역하여 독자문 단 에 투고한 경우도 있었다. 이에 대해 담임기자는 近 來 에 飜 譯 을 創 作 이라고 詐 稱 하고 投 稿 하는 일이 種 々 잇슴은 매우 遺 憾 으로 각함니다 되나 못되나 創 作 이면 貴 한 것이오 한 내것이오니 향여 남의 글 도적은 하지 아니 함이 조흘 듯함니다 14) 라는 말로 경계했다. 독자문단 투고작품들의 형식상 특징을 살펴보면, 운문은 율격을 중시 하는 전통적인 시조나 가사보다 신체시나 자유시와 같이 비교적 여유로운 시 형식을 추구하는 작품이 주로 실렸다. 작품은 형식상 띄어쓰기를 무시 하였으며 신문 행간에 맞추어 글자를 배열함으로써 시각적으로 정돈된 느 낌을 주었다. 운문의 경우 대부분 국한문혼용체였지만 문장구조는 한글체 를 지향하고 있었다. 일부 단어만 한자어로 표기했을 뿐이었다. 산문보다 운문의 경우 이러한 한글지향적인 성격은 더 강했다. 산문은 동아일보 의 속간을 축하하는 축사가 실리기도 하였고, 재학생의 송별사도 있었다. 이밖에 사회문제에 대한 평론이 실리기도 하였으나 주로 감상문과 편지글 등 비교적 길이가 짧은 수필 형식의 글이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타 매체와 비교할 때 운문에서는 한시가, 산문에서는 단편소설이 각각 배제되었다는 점이 특색이다. 산문이 본격적으로 게재되기 시작하는 시기는 독자문단 이 신설되고 다섯 달 만인 7월에 이르러서이다. 독자문단 신설 직후에 14) 독자문단, 동아일보, 1921. 4. 26, 本 欄 擔 任 記 者 의 말. - 119 -

8 / 한국민족문화 53 한 편, 3월부터 6월까지 모두 여섯 편의 산문이 실렸다. 해당란에 처음 발표된 작품은 춘성( 春 城 )의 첫근심 외 두 편의 시였 다. 춘성의 시가 독자문단 에 게재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먼저 춘성이라는 독자가 이전부터 신문 사에 작품을 투고하며 작품을 발표해줄 것을 요구하자 편집진이 이를 받 아들여 작품을 실었을 가능성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신문사가 해당란을 신설하면서 정착 초기에 직접 관여해 해당란에 발표할 원고를 특정인에게 미리 청탁했을 가능성이다. 전자의 경우 발행 정지 처분에 따라 신문이 발 행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떠한 경위를 통해 독자가 신문사에 작품을 투 고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독자문단 신설과 동시에 독자의 작품이 수 록되었다는 점에서 춘성이라는 투고자가 신문사와 관련이 없는 비전문적 인 일반 독자라는 점은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독자문단 과 마 찬가지로 독자들의 참여로 해당란이 구성되는 때의 소리 가 신설될 때에 도 신설된 당일란에 독자의 글이 게재된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이때에는 기왕에 독자로부터 부친 엽서 중에 몇 장을 소개하는 것 이라며 그렇게 된 경위를 밝혀주었다. 이에 반해 독자문단 은 춘성의 작품이 실리게 된 배경에 대해 아무런 해명이 없으므로 후자의 가능성이 유력하다. 그렇다면 첫 투고자인 춘성은 누구일까? 해당일자 독자문단 에 실린 작품은 첫근심, 뒤-ㅅ날, 우욕( 憂 慾 ) 등 모두 세 편이었다. 첫근심 에서 화자는 지나간 첫사랑을 그리워하면서 아름다운 그 때로 돌아가지 못하는 현실을 한탄하고 있다. 뒤-ㅅ날 과 우욕( 憂 慾 ) 은 공통적으로 장 미를 소재로 취했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장미를 감각적으로 예찬하고 있 으며 눈물, 슬픔, 가슴의 불길 등의 시어를 사용하여 감성적인 색채 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낭만주의적인 정조와 연시( 戀 詩 )적 경향은 장 미촌 15) 에 실린 픠여오는 장미 와 밤하날 에서도 똑같이 발견할 수 있 다. 이 두 작품의 작가 역시 춘성이었다. 게다가 동아일보 독자문단 란 15) 1921년 5월 24일 창간된 잡지로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논문 참고. 이기철, 장 미촌 연구, 민족문화논총 5, 노산문학회, 1983; 정진석, 장미촌 지 연구, 새국어 교육 37, 1983. - 120 -

동아일보 소재 독자문단( 讀 者 文 壇 ) 연구 / 9 에는 우울( 憂 鬱 ), 아참, 기원( 祈 願 ) 등 춘성의 시가 또 발표된다. 16) 정의 불길이 와락와락, 꽃다운 피가 부글부글 끓는다는 감각적 표현이 나 미스K 에 대한 연모의 감정을 그려내고 있어 일관된 창작 경향을 확인 할 수 있다. 작품에서 활용한 소재의 중첩, 시 경향의 유사성 17), 춘성이라 는 호를 공통적으로 사용한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동아일보 독자문단 란에 처음으로 투고한 춘성은 노자영( 盧 子 泳 )일 개연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노자영은 독자문단 에 시를 발표하기 3년 전인 1918년 8월, 매 일신보 매신문단 에 월하( 月 下 )의 몽( 夢 ) 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했다. 게다가 동아일보 에도 작품을 수차례 발표한 바 있다. 1920년 8월 29일 부터 9월 6일까지 4면에 천리( 千 里 )의 하로( 夏 路 ) 라는 감상문을 기고하 였으며 18), 같은 해 9월 10일부터 14일까지 1면에 교육진흥론 을 연재하 였다. 1921년 7월 29일부터 8월 8일까지 1면에 방랑( 放 浪 )의 하로( 夏 路 ) 를 연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간소개 에는 노자영의 작품이 실린 잡지 가 광고되기도 하였다. 19)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당시 노자영은 동아일 16) 동아일보 독자문단 란에는 춘성의 작품이 모두 6편 게재되었다. 하지만 기존 연구에 서는 이러한 사실이 언급되지 않았다. 물론 이혜령이 1920년대 동아일보 학예면의 형 성과정과 문학의 위치 ( 대동문화연구 52, 2005, 113쪽)에서 춘성이란 필명으로 노자영 의 시가 세 편 게재되었다고 언급했지만 정확한 날짜는 1921년 9월 21일이 아니라 2월 21일이었으며, 작품 수도 세 편이 아니라 독자문단 에는 춘성의 시가 모두 6편 실렸다. 이밖에 동아일보 1923년 8월 12일 6면 당신은 저구름 속에 안기라 라는 시를 노춘성 이름으로 발표하기도 하였다. 최양옥의 노자영 시 연구 (국학자료원, 1999)에는 노자영 시 작품연보가 실려 있다. 하지만 1921년 발표작으로는 장미촌 에 발표한 픠여오는 장 미 와 밤하날 이 두 작품만 언급하였으므로 이는 수정될 필요가 있다. 17) 노자영의 시를 연구한 이성교는 노춘성 연구 ( 현대시학, 현대시학사, 1973)에서 노자 영이 작품 활동 초기에 유미적( 唯 美 的 )인 입장에서 시를 창작했으며, 사랑의 동경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파악하였다. 심선옥 역시 춘성 노자영 초기 시 연구 ( 반교어문학 회 13, 2001)를 통해 노자영의 시에 대해 감각적 이미지를 주로 활용하였으며, 낭만적 동경과 감상주의가 주된 특징이라고 정리하였다. 18) 이광수의 무정 을 언급하며 조선 민족을 비판하고,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19) 1920년 9월 14일 신간소개 에는 노자영의 작품이 실린 잡지 광고가 실렸다. 학생계 제2호에는 춘성이라는 이름으로 월색( 月 色 ) 이, 서광 제7호에는 노자영이라는 이름으 로 타쿠르의 자연학원 이 실렸음을 광고하였다. 1922년 2월 5일과 6월 7일 신간소개 에는 백조 창간호와 2호에 실린 소설 漂 泊 이 보인다. 춘성은 장미촌 에 원고를 내 기 전에 동아일보 에 먼저 투고했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일종의 대중화 전 - 121 -

10 / 한국민족문화 53 보 외에도 여러 매체에 작품을 발표하는 등 활발한 창작활동을 한 전문작 가로 볼 수 있다. 동아일보 가 독자문단 을 신설하면서 첫 작품으로 노 자영의 작품을 실은 것은 신문사가 해당란 정착 초기에 해당란에 발표할 원고를 특정인에게 미리 청탁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준다. 이는 독자 문단 의 독자가 단순히 일반 신문 독자가 아님을 시사한다. 독자문단 에 작품을 발표한 독자는 대략 80여 명으로 다양한 층위를 형 성하고 있었다. 이들 투고자들이 사용한 필명이나 성명, 거주지 그리고 작 품에 언급되어 있는 정보를 토대로 이들의 직업을 분석해보았다. 그 결과 투고자들의 직업이 작가, 신문기자, 학생, 학교 교사, 사회운동가 등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독자문단 의 첫 투고자인 노자영 외에도 1920년 창조 를 통해 등단한 김소월 역시 전문작가에 속한다. 소월은 독자문단 에 바람의 봄 (1921. 4. 9)을 비롯하여 사계월 (1921. 4. 27), 바다 (1921. 6. 14) 등 모두 19 편의 시를 발표했다. 이들 작품은 소월 시의 초기 경향을 살필 수 있는 중 요한 자료가 된다. 이밖에 이후 문단에서 활약하게 되는 예비 문인들도 눈 에 띄는데 조운( 曹 雲 ), 김명호( 金 明 昊 ) 20), 한설야( 韓 雪 野 ), 유도순( 劉 道 順 ) 등이 대표적이다. 조운은 1921년 4월 5일 불살너주오 라는 시를 발표했 다. 당시 그는 전남 영광중학교에서 미술과 작문교사로 재직하고 있었 다. 21) 김명호는 이향과 나의 심회 (1921. 4. 10)와 고향을 떠나면서 (1921. 8. 29)라는 산문을 각각 고성( 孤 星 )과 명호( 溟 湖 )라는 필명으로 발 표했다. 한설야는 한병도( 韓 秉 道 )라는 본명으로 시 효종( 曉 鍾 ) (1921. 4. 29)을, 설야( 雪 野 )라는 필명으로 산문 熊 本 M 兄 에게 (1921. 9. 13)를 발표 략으로 해당 작품을 신문 매체에 투고했을 가능성이 있다. 잡지의 발행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안정적인 지면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과 자신들의 작품을 미리 신문에 투고함으 로써 일종의 홍보효과를 노린 것일 수도 있다. 20) 고성은 1925년 이후부터 동아일보 에 시, 시조, 동화, 수상( 隨 想 ) 등 많은 작품을 발표 하게 된다. 그가 독자문단 에 발표한 작품 이향과 나의 심회 에는 친우인 일파( 一 波 )와 아청( 我 靑 )과 함께 고향 곡산에서 청년회를 조직한 일화가 등장한다. 아청의 본명은 조 정호( 曺 定 昊 )로 곡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21) 오봉옥, 조운시조연구,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 122 -

동아일보 소재 독자문단( 讀 者 文 壇 ) 연구 / 11 했다. 유도순은 1925년 1월 조선문단 에 갈닙밋헤 숨은노래 를 발표하 면서 등단하게 되는데, 동아일보 독자문단 에 기념의 황금탑 (1921. 6. 12)을 발표했다. 22) 이를 통해 볼 때 독자문단 은 일종의 근대 문인의 예 비적 장소였다고 볼 수 있다. 노자영은 앞서 전문작가였다고 언급했는데 독자문단 에 작품을 발표한 이후인 1921년부터 1924년 5월까지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게 된다. 23) 독자문단 이 문단의 등용문이기 이전에 신문사 입사를 위한 통로로 활용 되기도 하였음을 보여준다. 강영균( 姜 英 均 )은 1921년 6월 16일 K군의 死 라는 산문을 시작으로 형님은 언제 (1921. 7. 16) 외 6편의 시를 독자문 단 에 발표했다. 이후 행적은 자세히 알 수 없는데, 그 역시 동아일보 기 자로 활동하게 된다. 24) 옥중 자각의 일단 (1921. 7. 7)을 발표한 이중각 ( 李 重 珏 )은 잡지 신조선 의 기자이면서 독립운동가였다. 한편 졸업생 형님을 보내면서 (1921. 4. 11)라는 제목의 송별사를 발표 한 박경호는 숭실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는 학생이었으며, 애인아 너도 부활하려무나 (1921. 3. 28)를 발표한 조창선은 배재학당 학생이었다. 귀 성하지 못하고 (1921. 8. 7)를 투고한 중앙학인( 中 央 學 人 )과 椒 井 에서 郭 山 에 (1921. 9. 10)를 투고한 김인기( 金 仁 基 )는 작품에서 하기 방학을 앞 둔 심정을 언급함으로써 학생 신분임을 드러냈다. 인물전람회 (1921. 6. 5)를 발표한 유형식( 兪 亨 植 )은 심훈의 친구였다. 심훈은 이 글을 읽고 항 주 지강대학 백랑생( 白 浪 生 )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가장 친한 유형식 군을 보고 (1921. 7. 30)라는 답장을 보냈다. 투고 당시 심훈은 유학생 신분이 22) 이동순, 유도순 가요시의 테마와 유형, 민족문화논총 52, 노산문학회, 2012. 363쪽. 1923년에는 동아일보 일천호 기념현상에서 시와 동시를 응모하여 당선되기도 하였다. 1923년 5월 25일에는 동시 봄, 5월 27일에는 시 고독 을 발표했다. 23) 이서구( 李 瑞 求 )는 우리는 점심을 굶어가면서 신문을 만들었지요. 배달부가 월급을 안 준다고 호외를 들고 나가지 않을 때, 柳 光 烈, 盧 子 泳, 金 東 轍 그리고 나 등 우리 젊은 기자들은 호외를 들고 종로 네거리로 뛰어 나가기도 했어요. 라고 당시를 회고하였다. 동 아일보사사 1, 161쪽. 24) 동아일보 1925년 4월 15일 3면 軍 容 을 齊 한 朝 鮮 의 筆 陣 에 의하면, 20여종의 신 문잡지사에서 690여명 기자들이 참가한 조선기자대회에 참가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강 영균은 동아일보사 기자로 소개된다. - 123 -

12 / 한국민족문화 53 었던 것이다.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로 알려진 이구영( 李 龜 永 ) 역시 독자문단 에 大 阪 에서 (1921. 8. 16)를 투고한다. 그는 배재학당을 졸업 하고 영화수업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 중에 이 작품을 투고한 것으 로 보인다. 이향소감( 異 鄕 所 感 ) (1921. 8. 6)을 투고한 갈돕 동경지회 역시 정확한 성명은 알 수 없으나 일본유학생으로 보인다. 이밖에 1921년 7월 20일부터 21일까지 여자해방의 근본방침 을 투고한 주기용( 朱 基 瑢 ) 25) 은 조운과 더불어 학교 교사였다. 독자문단 은 1921년 7월 초까지 원활하게 운영되다가 잠시 주춤한다. 1921년 7월 8일 때의소리 가 첫 선을 보인 이후 독자문단 이 연재되지 않 자 고대생( 苦 待 生 )은 의소리 가 긴 후에는 그전에 잇든 독자문단 은 폐지되엿나요 폐지되엿다면 대단히 섭々함니다 26) 라며 아쉬움을 피력 한다. 당시 독자들의 독자문단 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 이 발언 이후 독자문단 은 그 다음날인 7월 14일부터 다시 등장한다. 그리고 9월말까지 꾸준히 연재되다가 10월 1일에 한 편이 발표되고, 10월 28일 김선량의 병든 벗의게 외 3편을 끝으로 중단된다. 독자문단 이 폐지되기 전, 1921년 9월 14일에는 주식회사 동아일보사의 창립총회가 있었다. 27) 주식회사 창립총회 이후 독자문단 이 자취를 감춘 것으로 보아 독자들의 관심이나 참여 여부와 상관없이 신문사의 내부 사정에 의해 독자문단 이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28) 25) 다음은 동아일보 에 실린 주기용 관련 기사이다. 오산교우 동경지회 (1923. 5. 15.), 신랑신부 (1926. 8. 13. 3면) 등. 26) 고대생( 苦 待 生 ), 때의소리, 동아일보, 1921. 7. 13. 27) 이 창립총회 때 중역선거를 해서 취체역 10명과 감사역 5명이 선출됐다. 취체역에는 이 운, 장덕수, 김찬영, 송진우, 이상협, 성원경, 장두현, 정재완, 신구범, 김성수가, 감사역 에는 현준호, 장희봉, 박용선, 이충건, 허헌이 선출되었다. 그밖에 사장에는 송진우, 부 사장에는 장덕수, 전무로는 신구범, 상무로는 이상협을 선출하고 19일 취임하였다. 본 사창립총회, 동아일보, 1921. 9. 20. 28) 동아일보사는 초기 주금 납입 실적이 저조하였고 계속되는 행정 처분으로 인해 신문 발 행마저 지속적이지 못하였다. 구독료나 광고 수입 역시 예상치에 미달, 경영상에 상당한 곤란을 겪었다. 독자문단 은 신문 구독률을 올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하지만 주식회사 동아일보사 법인을 설립하고 송진우가 사장에 취임하면서 재정 문제를 광고 유치로 해결하게 되면서 그 존립여부가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 124 -

동아일보 소재 독자문단( 讀 者 文 壇 ) 연구 / 13 3. 독자문단 소재 작품의 특질과 의미 본 장에서는 독자문단 소재 작품의 특질과 그 의미를 고찰하기 위해 해당란에 실린 운문 127편과 산문 33편을 주제별로 분석해보았다. 그 결 과 운문은 개인의 감정을 다룬 작품이 101편(79.5%)으로 절대 다수를 차 지하였으며, 풍경을 묘사한 작품이 17편(13.4%), 사회문제를 다룬 작품이 9편(7.1%)으로 나타났다. 독자문단 에 실린 운문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주제는 사랑, 그리 움, 슬픔 등 개인의 감정이었다. 노자영의 작품 29) 을 비롯하여 일광( 一 光 ) 의 사랑하는 이 (1921. 4. 8)와 박재영( 朴 在 永 )의 홍장미 (1921. 4. 13) 가 사랑을 주제로 한 대표작들이다. 사랑하는 이 는 3연으로 된 자유시 로, 사랑하는 이를 장미꽃에 비유하여 영원한 사랑을 노래했다. 홍장미 는 4연으로 된 자유시로, 사랑하는 님을 홍장미에 비유하여 님을 잊지 않 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이들 작품은 영탄적 종결어미를 자주 활용하였으 며 주제어를 시어로 사용함으로써 주제를 직접 드러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움을 다룬 작품은 고월( 孤 月 )의 그립은 벗 (1921. 3. 17), 소월( 素 月 )의 풀따기 (1921. 4. 9), 은대촉( 銀 臺 燭 ) (1921. 4. 27), 문견폐( 門 犬 吠 ) (1921. 4. 27), 일야우( 一 夜 雨 ) (1921. 4. 27), 박달뫼의 객향의 봄 (1921. 4. 15), 유봉( 柳 鳳 )의 후회 (1921. 4. 24), 박서몽( 朴 曙 夢 )의 소리 업는 저녁바람 (1921. 6. 19), 닭업는 눈물 (1921. 7. 14), 방화수류생 ( 訪 花 隨 柳 生 )의 봄꿈 (1921. 6. 22), 김선량의 시조 사수( 詩 調 四 首 ) (1921. 7. 3), 중국의 산촌 (1921. 9. 2), 새의 노래 (1921. 9. 9), 병든 벗의게 (1921. 10. 28), 벗을 보냄 (1921. 10. 28), 강영균( 姜 英 均 )의 형 님은 언제? (1921. 7. 16), 홍원생( 紅 園 生 )의 大 阪 에서 (1921. 8. 16), 임 창인( 林 昌 仁 )의 무상( 無 常 ) (1921. 9. 24), 최형렬( 崔 亨 烈 )의 신묘( 新 墓 ) (1921. 9. 26), 구묘( 舊 墓 ) (1921. 9. 26), 백랑생( 白 浪 生 )의 나의 가장 친한 유형식( 兪 亨 植 ) 군을 보고 (1921. 7. 30) 등이 있다. 1921년 7월 3일 29) 노자영이 춘성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첫근심, 뒷날, 우욕( 憂 慾 ) (1921. 2. 21)과 우 울, 아참, 기원 (1921. 4. 7) 등이 대표적이다. - 125 -

14 / 한국민족문화 53 중국 남경에서 작품을 투고한 김선량은 작품 말미에 이 시조 네 首 를 四 面 에 헤저잇는 내 벗님들 들이노라 라고 첨언하여 친구들에 대한 그리 움을 표현하였다. 그리움의 대상은 친구 외에도 사랑하는 임, 부모님, 고 향 등 다양했다. 그리움뿐만 아니라 슬픔을 다룬 작품도 많았다. 유고월( 劉 苦 月 )의 미소 ( 微 笑 ) (1921. 3. 2), 오수영( 吳 壽 永 )의 愛 의 怨 (1921. 3. 31), 소월의 黃 燭 불 (1921. 4. 9), 속요( 俗 謠 ) (1921. 4. 9), 하눌 (1921. 6. 8), 깁히밋 던 心 誠 (1921. 6. 8), 유봉의 추억 (1921. 4. 24), 黃 昏 의 菫 (1921. 6. 20), 계원( 桂 苑 )의 고요한 밤 (1921. 4. 26), 권오산( 權 五 山 )의 아우의 죽 음 (1921. 6. 9), 조창선( 趙 昌 善 )의 牧 丹 峰 에서 (1921. 6. 17), 박서몽의 애가( 哀 歌 ) (1921. 7. 14) 등이 있다. 특히 유랑엽( 劉 浪 葉 )의 송악( 松 岳 ) 을 떠나며 (1921. 5. 6)와 김선량의 백두산을 지나는 나그네 (1921. 10. 28) 등은 고향을 떠나게 됨으로써 느꼈던 슬픔을 노래했다. 한사배는 직공( 職 工 )의 탄곡( 歎 曲 ) (1921. 4. 19)에서 자본가에게 압제 받는 직공의 모습을 눈물 머금고 한갓 삭 錢 에 팔녀서 呻 吟 하며, 자본가 의 굴네에서 압제바드며 자유의 향기 못 맛고 코는 메인다 고 묘사하였다. 유봉의 무정( 無 情 ) (1921. 4. 24), 유형식의 인물전람회 (1921. 6. 5), 김 선량의 새천지 (1921. 7. 23), 이구영( 李 龜 永 )의 大 阪 에서 (1921. 7. 27), 방원룡( 方 元 龍 )의 명상( 暝 想 )의 나라로 (1921. 8. 5), 서양생( 曙 洋 生 )의 그는 못닛치여라 (1921. 8. 30) 등도 비판의식을 드러내는 작품들이다. 이밖에 왕조혁( 王 朝 爀 )은 동아일보 재간축( 再 刊 祝 ) (1921. 2. 23)에서 신 문 속간을 축하하는 내용을 담았으며, 한경식( 韓 景 植 )은 항해 (1921. 3. 4)에서 신문을 의인화하여 신문의 속간을 축하하고 격려하였다. 독자문단 에 실린 운문 작품이 대부분 개인의 감정을 다루게 된 배경에 는 앞서 언급한 전문작가들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독자문 단 의 첫 투고자였던 노자영의 작품이 실린 이후 해당란에는 그의 작품을 모방한 작품이 등장한다. 특히 박재영( 朴 在 永 )의 홍장미 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형상화했을 뿐만 아니라 영탄적 종결어미를 빈번하게 활용하였고, - 126 -

동아일보 소재 독자문단( 讀 者 文 壇 ) 연구 / 15 중심 소재 역시 장미를 취하는 등 노자영의 작품과 매우 유사하였다. 김소 월 역시 해당란에 여러 편의 작품을 투고했는데 그의 작품 대부분은 개인 의 감정을 주로 다루었다. 중요한 점은 이들 전문작가의 작품이 대부분 해당란 신설 초기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동아일보 편집진은 전문작가의 작품을 해당란 신설 초기에 집중적으로 발표함으로써 비전문작가들에게 투고할 작품의 성격을 암시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독자문단 은 비전문작가가 특정 작가의 작품을 학습하는 과 정, 즉 일련의 재생산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한편, 산문은 개인의 감정을 다룬 것과 사회문제를 다룬 것으로 대별되 었다. 개인의 감정을 다룬 작품이 18편(54.6%)이었고, 사회문제를 다룬 작품이 15편(45.4%)으로, 운문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감정을 주로 다루었 음을 알 수 있다. 아래 제시한 표는 독자문단 에 실린 산문의 내용을 정리 한 것이다. <표 1> 동아일보 독자문단 란 소재 산문의 양상 게재일 투고자 작품명 내용 1921.2.22 경성 姜 玄 礎 동아일보의 속간을 祝 하고 동아일보 속간을 축하 1921.3.19 개성 林 永 得 동경( 憧 憬 ) 완전, 해탈, 자유에의 동경 1921.4.10 孤 星 1921.4.11 숭대 朴 慶 浩 1921.4.16 金 容 璿 이향( 離 鄕 )과 나의 심회( 心 懷 ) 卒 業 生 兄 님을 보내면서 京 城 에 初 等 敎 育 擴 張 의 必 要 고향과 친우에 대한 그리움 숭실대 졸업생에게 바친 송별사 초등교육기관 확장 주장 1921.6.3 雪 齋 生 安 州 百 祥 樓 에서 평남 안주 백상루에서 느낀 감회 1921.6.16 고산역 姜 英 均 K군의 死 향촌의 교육가 K군 회상 1921.7.1 김제 정원모 어린이의 어린 시절 사촌동생과의 일화 1921.7.2 김제 정원모 어린이의 어린 시절 사촌동생과의 일화 1921.7.7 李 重 珏 獄 中 自 覺 의 一 端 감옥에서 참된 삶에 대해 깨달음 1921.7.20 朱 基 瑢 女 子 解 放 의 根 本 方 針 ( 一 ) 조선에서 여자 해방이 어려운 이유 - 127 -

16 / 한국민족문화 53 게재일 투고자 작품명 내용 1921.7.21 朱 基 瑢 女 子 解 放 의 根 本 方 針 ( 二 ) 생활방식 개조의 필요성 역설 1921.7.22 朴 勝 周 學 窓 所 感 새조선 건설을 위해 학문이 필요함 1921.7.24 용강 崔 鼎 燦 신문잡지편집자에 게 문화운동의 성공을 위해 한문 폐지 주장 1921.7.25 신계 任 榮 得 外 祖 母 의 死 외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 1921.7.26 兪 政 兼 나의 靈 아 영혼에 대한 예찬 1921.7.29 광주 海 松 서울로 돌아가신 黃 兄 에게 동우회 순회극단 배우의 편지글 1921.7.31 李 玩 朝 못비를 마즈면서 비에 대한 태도를 해학적으로 표현 1921.8.1 崔 鉉 1921.8.3 안성 金 台 榮 苦 學 生 갈돕 會 地 方 巡 廻 劇 團 에 故 鄕 에 계신 姜 兄 에게 갈돕회 지방순회극단 홍보 청년이 자유 정신을 살려야 함 강조 1921.8.4 申 天 山 녀름의 乙 密 臺 을밀대의 풍경과 유약한 청년 비판 1921.8.6 갈돕 東 京 支 會 異 鄕 所 感 일본 유학생의 포부와 반성, 다짐 1921.8.7 中 央 學 人 歸 省 하지 못하고 조혼법의 폐해 지적, 폐지 주장 1921.8.8 石 富 鳳 不 平 사회 개조의 일환으로 여자 개조 주장 1921.8.9 마산 金 敬 澤 旅 程 의 所 感 사회 진보 주장 1921.8.28 印 恩 羅 별빗 벽 영혼의 외로움 토로 1921.8.29 溟 湖 故 鄕 을 나면서 고향 곡산을 떠나는 아쉬움 1921.9.4 순안 金 鍵 內 觀 心 中 의 적과 싸워 善 의 이상 실현 1921.9.7 웅천 任 炳 奎 나 민족의 미개함, 가정 불철저함 개조 1921.9.10 청파 金 仁 基 椒 井 에서 郭 山 에 하기방학을 맞아 고향 찾아간 감회 1921.9.13 雪 野 熊 本 M 兄 에게 자신의 외로운 처지와 다짐 1921.9.20 趙 殷 澤 天 職 조선 청년에게 천직을 찾으라고 주장 1921.9.21 구포류 宋 學 錫 仲 秋 月 夜 의 感 想 가을 달밤의 정취 1921.9.23 동경 大 隱 生 登 校 所 感 문화선전하다 철창에 갇힌 친구 염려 1921.10.1 宋 無 礙 生 日 아츰 당당하게 시련에 맞설 것을 다짐 - 128 -

동아일보 소재 독자문단( 讀 者 文 壇 ) 연구 / 17 독자문단 에 실린 산문 역시 이별로 인한 외로움이나 슬픔, 특정 대상 에 대한 그리움을 호소한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이들 작품에 형상화된 그 리움과 슬픔의 원인은 대부분 이향( 離 鄕 ) 체험에 기인하였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 머물며 느꼈던 단순한 객창감에서부터 사회에 대한 불만, 사회를 개조하고자 하는 의지 등을 두루 표현하였다. 작품에 고향을 떠나게 된 이 유가 직접적으로 드러난 경우가 있어 해당 작품의 창작자를 유학생이나 고향을 떠나 사회운동에 투신한 이들로 추정할 수 있다. 갈돕 동경지회의 이향소감 에는 내가 동도( 東 渡 )한 지 작일과 같거늘 어느덧 일 년이 휙 지나갔도다. 라며 학업을 위해 일본 유학길에 오른 작 자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일본에 간 이유가 공부하기 위함이었으 나 그렇지 못했다며 자신을 반성한 후 자신을 후원해 준 이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중앙학인( 中 央 學 人 ) 역시 유학생으로 歸 省 하지 못하고 에서 많은 학생들이 방학을 맞이해 귀성을 하였으나 자신은 아마도 몇 해 동안 은 돌아가기 어려울 듯하다. 이것은 왜? 누구의 죄로? 나의 죄? 어버이의 죄? 사회의 죄? 이것이 사회의 죄가 아닐까? 원수의 조혼법( 早 婚 法 )이여 이것이 우리 사회의 어린 동무들을 얼마나 고뇌케 하며 얼마나 독와사를 먹이는가? 라며 조혼법 때문에 고향에 갈 수 없는 심정을 밝혔다. 이밖에 박승주, 동경 대은생( 大 隱 生 ) 역시 자신이 유학생임을 직접 언급하였다. 고성( 孤 星 )은 이향과 나의 심회 에서 고향 곡산을 떠나 포교활동하러 타 지에 가서 부모와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일기형식으로 표현하였 다. 30) 이후 다른 필명으로 같은 주제를 드러냈다. 명호( 溟 湖 )라는 필명으 로 발표한 고향을 떠나면서 에서는 아! 내 고향아! 내 친우여! 나는 20년 간이나 품어주고 낳아주고 길러준 은혜도 모르고 아플 때 울어주고 기쁠 때 웃어주든 정의도 생각하지 못하고 아! 나는 간다. 멀리멀리 저 산 너머 30) 나의 가슴엔 더욱 부모님 생각과 친우의 생각이 간절하여지며 눈물은 아니 나도 공연한 슬픔이 억제키 어렵다. 될수만 있으면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괴로우나 기쁘나 될 수만 있으면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를 모시고 친우와 함께 영영 죽는 날까지 있고 싶다. 나는 도회이고 무엇이고 번화한 곳도 별로 부럽지 않고 벽군 곡산이나마 고향이므로 거기서 늙어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난다. - 129 -

18 / 한국민족문화 53 로 백운 저 편으로 아! 나는 간다. 멀리멀리 아! 내 고향아! 라며 고향 곡 산을 떠나는 아쉬움을 토로하였다. 이들이 독자문단 에 글을 투고할 수 있었던 데에는 신문의 지면 배치도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독자문단 이 실린 4면에는 청 년운동과 관련된 기획기사가 함께 실렸다. 각지청년단체( 各 地 靑 年 團 體 ) 로 여러 청년 단체의 동정을 알려주는 기사였다. 이 기사에는 유학생이나 청년운동가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청년단체들의 사업 내용과 활동이 구체 적으로 소개되었다. 31) 따라서 유학생과 청년운동가들의 관심은 각지청년 단체 란에 쏠렸을 것이고 독자문단 란 역시 같은 지면에 배치함으로써 이 들의 참여를 유도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두 란의 지면 배치를 근접시켜 독자들의 접근성을 높였고 이에 따라 독자문단 에 실린 작품의 주제에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해송( 海 松 )은 서울로 돌아가신 黃 兄 에게 라는 편지 형식의 글에서 우 리는 예술에 살고자 하는 자요, 힘이 미약하나마 우리 문화사업에 조금이 라도 공헌이 있고자 하는 단체요, 적으나마 이것으로 일본에 산재하여 계 신 우리 동포 노동자 고학생을 직접 혹은 간접으로 돕고자 조직한 단체이 외다. 라며 자신이 속한 단체의 결성 취지를 언급하였다. 최현( 崔 鉉 )은 苦 學 生 갈돕 會 地 方 巡 廻 劇 團 이라는 글을 통해 자신이 속한 단체의 목적을 가난한 계급을 돕기 위한 것이라 밝히고, 지방순회극단을 응원해줄 것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32) 31) 각지청년단체 란에는 단체의 근황이 소개되었다. 그 중에서도 각 단체들의 총회 내용을 알려주는 기사가 많았다. 특히 임원 선출 결과 등은 관련자들의 관심이 높았으리라 예상 할 수 있다. 이밖에 회원 유치를 위한 경쟁도 치열하였다. 이를 위해 각 단체들은 자신들 의 구체적인 활동을 적극 홍보하였다. 영원청년회는 과년 유월 중에 당 군 유지제씨의 발기로 창립되어 이래 십 개월 간에 외습적 허다 고통을 상하면서도 회원은 일익증가되 어 목하 회원 수가 육백삼 명에 달하였으며 강연회, 토론회, 야학회 등의 개최와 신문, 잡지, 도서종람소의 설비로써 신문화수입에 그 분투노력과 용왕 매진하는 것은 소호라도 퇴축함이 무( 無 )히 지방을 위하야 사회를 위하야 청년회를 위하야 희생에 공( 供 )코자 하 는 중이라(중략), 영원청년회근황( 寧 遠 靑 年 會 近 況 ), 동아일보, 1921. 3. 24. 32) 우리의 갈돕회 고학생들은 금번의 휴가를 득하기는 무위하였으나 평일에 연모하든 고향 과 친정에는 또 다시 귀성의 쾌락을 향치 못하며 과문의 유감을 면치 못하고 한갓 갈돕 - 130 -

동아일보 소재 독자문단( 讀 者 文 壇 ) 연구 / 19 유학생이나 운동가 등 독자들의 이러한 정체성 때문인지 현실 사회의 문제를 언급한 글도 많았다. 주기용은 여자해방의 근본방침 에서 조선의 여자해방 문제를 언급하였다. 그는 여자해방을 남자와 대등한 자유와 권 리를 인정하며 그 인격을 존중하는 것 으로 정의하고, 여자에게도 지식계 발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조선의 가정은 식습관이나 의복제도 등 여자에게 과도한 노동을 요구하고 있어 가정생활을 개조하는 일이 급선무라 하였다. 학업을 위해 상경했다는 박승주는 학창소감 에서 우리는 문학에 헌신하든지 종교에 희생하든지 실업에 종사하든지 그 표 현적 부류는 다를지라도 그 내면의 표준점은 동일한 새 조선을 건설하는 데 있어야 할 것이다. 라며 학문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최정찬은 신문 잡지 편집자에게 라는 글을 통해 민지를 계발하려는 문화운동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한문을 폐지하고 조선문을 사용해야 한다며 구체적인 주장을 했 다. 석부봉은 불평 이라는 글에서 불평은 문명과 발달의 진취할 출발점 이라 전제하고 부패한 구습을 파멸하고 파괴된 사회를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구체적으로 여자 개조 문제를 다루었는데 여자의 해방 을 위해 정신과 악습과 허위를 개조하여 신시대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임병규도 나 라는 글을 통해 청년을 호명하여 나의 민족의 미개함과 나의 가정의 불철저한 생활을 개조 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는 조은택의 천직 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조선 청년이여 오등( 吾 等 ) 의 직업이 과연 그 무엇이냐? 상공( 商 工 )이냐? 농노( 農 勞 )이냐? 내지역려 ( 乃 至 逆 旅 )의 신( 身 )이 되어 고( 苦 )에서 학( 學 )을 구하는 자, 비운에 신( 身 ) 을 계( 繫 )하야 하급( 下 級 )에서 재( 財 )를 구하는 자, 그 여하를 불문하고 모 회를 위하여 아니 일반의 고학계를 위하여 사회의 빈( 貧 )계급을 위하여 상부상조의 생활 기관을 시설하려는 지취로써 단축한 기회를 승하여 갈돕회 지방순회극단을 조직함으로 (중략) 제씨는 이미 우리 고학생 갈돕회를 양찰하시와 그간에 많은 원조를 불석하였음에 무한 치사하옵거니와 본기에 순회단이 성행하여 혹은 강연 혹은 연극이 귀지에 답지하여 문화사업의 융성현상을 환호하든 중에 혹은 일방으로 포염하는 기색이 있을까 하오니 물 론 어느 순회단이던지 시대의 요구에 적응함이어니와 특히 빈약한 계급으로 조성된 우리 의 고학생 단체는 더욱 제씨의 양감이 아니면 그 누구에게 장래와 전도의 위급함을 호소 하리오. - 131 -

20 / 한국민족문화 53 름즉이 그 원한 바 이상을 휠적 놉히고 키어서 당당한 죽음으로써 빗난 성 공( 成 功 )을 볼지어다. 라며 조선 청년들에게 천직을 구할 것을 주장하였다. 독자문단 은 지면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산문은 논의를 충분히 전 개하기에는 제약이 많았다. 그야말로 소품 수준의 작품에 그칠 수밖에 없 는 현실적인 제약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제약 때문인지 단편소설 은 단 한 편도 실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산문은 다양한 양식을 선보였다. 1920년 대 산문 양식의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독자문단 소재 산 문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양식이 다양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주제 는 한정적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개인의 감정을 다룬 것과 사회문제를 다룬 것으로 대별된다. 발표된 작품들 역시 소재별, 주제별로 경향성을 지 니는 점이 특색인데 이는 독자들의 다양한 관심 중 특정 주제를 유도했다 고도 볼 수 있다. 운문과 산문을 막론하고 독자문단 에 실린 작품들 중에 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주제는 개인의 문제였다. 이러한 현상은 검열 제도와도 관련이 있다. 동아일보 1920년 7월 25일자 2면 사고( 謝 告 )에는 본월 이십사일 발 행 본보 제 일백십삼호 기사 중에 당국의 기휘( 忌 諱 )에 촉( 觸 )한 어구가 유 ( 有 )하야 발매금지의 처분을 당하얏삽기로 자( 玆 )에 근고( 謹 告 )함 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그리고 발매금지 처분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1920년 9월 25일에는 신문 발행정지 처분을 받았다. 33) 1921년 2월 21일 1 면에는 속간에 임하야 독자제군에게 고하노라 라는 기사를 통해 신문이 속간되었음을 알리고 동아일보 가 발행정지 처분을 받게 된 이유를 밝혔 다. 총독부가 밝힌 이유는 두 가지로 하나는 은어( 隱 語 )와 반어( 反 語 )로써 음연( 陰 然 )히 조선의 독립사상을 고취한 점 이고, 다른 하나는 총독정치 33) 일기자( 一 記 者 ), 속간유감, 동아일보, 1921. 2. 21. 우리의 힘쓰는 중간에 총독부 당국쟈의 긔탄에 부듸친 일이 적지아니하야 루々히 압수를 당하게 됨으로 우리는 이 뎜 에 대하야 될 수 잇는 대로 조심하얏스나 주의가 부족하얏던지 박복한 소치이던지 마츰 내 당국의 용납지 못하는 바 되야 작년 구월 이십오일로써 신문의 발 을 뎡지하라는 처 분을 밧게 되얏슴니다. 라며 신문이 발행정지 처분을 받았음을 알리고 있다. 기사 내용 중에 스스로 살핌이 적었음을 반성하는 부분은 해당 처분을 받기 전부터 검열을 의식하 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 132 -

동아일보 소재 독자문단( 讀 者 文 壇 ) 연구 / 21 에 대하여 이해 없는 악평을 가한 점 이었다. 총독부의 이러한 조치에 대 해 동아일보 는 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여 민주주의를 지지하며 문 화주의를 제창하는 근본방침에는 추호도 동요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더더욱 정력을 가하여 사회교육과 산업개발에 노력하며 보도의 확 실과 비평의 공정을 기하겠다고 밝혔다. 본보의 주지( 主 旨 )에는 일점의 변 경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필단( 筆 端 )이 격 ( 激 )하야 입론장진( 立 論 張 陣 )에 과불급( 過 不 及 )의 폐( 弊 )가 무( 無 )하얏다 기필( 期 必 )키 난( 難 ) 하다며 이후 일층( 一 層 ) 자성( 自 省 )에 자성을 가( 加 ) 하고자 한다는 다짐에서 발행 정지 이전보다 편집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 일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총독부의 연이은 검열로 인해 신문의 편집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34) 결국 독자문단 은 등장하면서부터 검열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문 사는 문화운동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검열에 걸리지 않으면서 신문의 구독률을 높이고자 하였다. 이에 대한 절충의 결과가 바로 독자문 단 이었던 셈이다. 독자들에게 해당란에 투고해야 할 작품의 성격을 미리 암시해주고 그러한 경향성을 띄는 작품만 선정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 야 한다. 이는 이후 전개될 공모에서도 특정 경향성이 일반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독자들이 매체에 발표된 작품을 학습함으로써 이를 내면화하여 다시 재생산하는 과정을 거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4. 결론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한 동아일보 는 창간초부터 독자들의 참여를 유도하였다. 독자문단 은 독자투고의 한 종류로 동아일보 속간 일인 1921년 2월 21일부터 같은 해 10월 28일까지 지속되었다. 독자문단 에는 한시와 단편소설이 한 편도 실리지 않았다. 이는 당시 다른 신문매체 34) 1920년대 총독부의 검열 방식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 참고. 정근식, 식민지 검열과 검 열표준, 대동문화연구 79,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2. - 133 -

22 / 한국민족문화 53 의 독자투고와 비교할 때 매우 특이한 점이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독자문단 은 문예물에 대한 동아일보 최초의 독자투고라는 점에서 의의 가 있다. 해당란에 처음 발표된 작품은 춘성( 春 城 )의 첫근심 외 두 편의 시였 다. 속간과 동시에 첫 투고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신문사의 기획으로 볼 수 있다. 당시 노자영은 동아일보 외에도 여러 매체에 작품을 발표하는 등 활발한 창작활동을 한 전문작가였다. 김소월 역시 해당란에 많은 수의 작품을 투고했는데 대부분의 작품이 해당란 신설 초기에 집중적으로 발표 되었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신문 편집진은 해당란을 정착시키기 위 해 전문 작가의 원고를 미리 청탁한 것으로 보인다. 전문작가의 작품을 해 당란 신설 초기에 집중적으로 발표함으로써 비전문작가들에게 앞으로 투 고할 작품의 성격을 암시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독자문단 은 비전문 작가가 전문작가의 작품을 학습하는 과정, 즉 일련의 재생산 과정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투고자들의 직업은 전문작가 외에도 신문기 자, 학생, 학교 교사, 청년운동가 등 다양하였다. 특히 이후 문단에서 활 약하게 될 조운( 曹 雲 ), 김명호( 金 明 昊 ), 한설야( 韓 雪 野 ), 유도순( 劉 道 順 )의 작품이 실려있어 독자문단 이 일종의 근대 문인의 예비적 장소였다고 볼 수 있다. 독자문단 에 발표된 작품은 160여 편으로 갈래상 운문과 산문으로 대별 된다. 운문과 산문은 각각 127편과 33편으로 독자문단 의 대다수를 운문 이 차지하였다. 그 이유는 해당란에 할당된 지면이 1행 14자 50행으로 제 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산문은 단편소설이 배제된 채 소품 위 주의 작품들만 실리게 된다. 하지만 일기, 편지, 송별사, 축사, 감상문, 기 행문 등 1920년대 산문 양식의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산 문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독자문단 에 실린 작품들은 대부분 이별로 인한 외로움이나 슬픔, 특정 대상에 대한 그리움 등 개인의 감정을 주로 다루었다. 작품에 형상화된 그 리움과 슬픔의 원인은 대부분 이향( 離 鄕 ) 체험에 기인하였다. 고향을 떠나 - 134 -

동아일보 소재 독자문단( 讀 者 文 壇 ) 연구 / 23 객지에 머물며 느꼈던 객창감에서부터 사회에 대한 불만, 사회를 개조하 고자 하는 의지 등을 두루 표현하였다. 이러한 내용적 특징은 투고자들의 정체성과 관련이 깊다. 투고자 중에 유학생이나 고향을 떠나 사회운동에 투신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독자문단 에 글을 투고할 수 있 었던 데에는 신문의 지면 배치도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로 독자문단 이 실린 4면에는 각지청년단체( 各 地 靑 年 團 體 ) 라는 청년운 동과 관련된 기획기사가 함께 실렸다. 이 기사는 유학생이나 청년운동가 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여러 청년단체들의 동정을 구체적으로 소개하였다. 결국 두 란의 지면 배치를 근접시켜 독자들의 접근성을 높였고 이에 따라 독자문단 에 실린 작품의 주제에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운문과 산문을 막론하고 독자문단 에 실린 작품들 중에서 가장 많은 비 중을 차지한 주제는 개인의 감정이었다. 이렇듯 주제가 한정적이었다는 점은 편집진이 특정 주제를 의도적으로 유도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 준다. 독자문단 은 등장하면서부터 검열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신문사 는 문화운동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검열을 피하면서 신문의 구 독률을 높이고자 한 것이다. 이에 대한 절충의 결과가 바로 독자문단 이 었던 셈이다. - 135 -

24 / 한국민족문화 53 참고문헌 1. 자료 동아일보, 매일신보, 동아일보사사 2. 논저 김석봉, 식민지 시기 동아일보 문인 재생산 구조에 관한 연구, 민족 문학사 연구, 민족문학사학회, 2006. 김석봉, 식민지 시기 조선일보 신춘문예의 제도화 양상 연구, 한국현 대문학연구 16, 한국현대문학회, 2004. 김영민, 근대매체의 독자( 讀 者 ) 창작 참여 제도 연구(1), 현대문학의 연 구 43, 한국문학연구회, 2011. 김영철, 신문학 초기의 현상 및 신춘문예제의 정착과정, 국어국문학 98, 국어국문학회, 1987. 박찬승, 한국근대 정치사상사 연구, 역사비평사, 1992. 심선옥, 춘성 노자영 초기 시 연구, 반교어문연구 13, 반교어문학회, 2001. 오봉옥, 조운시조연구,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이기철, 장미촌 연구, 민족문화논총 5, 노산문학회, 1983. 이기훈, 1920년대 언론매체와 소통공간 : 동아일보 의 <자유종>을 중심 으로, 역사학보 204, 국립성공대학역사학계, 2009. 이동순, 유도순 가요시의 테마와 유형, 민족문화논총 52, 노산문학회, 2012. 이성교, 노춘성 연구, 현대시학, 현대시학사, 1973. 이혜령, 1920년대 동아일보 학예면의 형성과정과 문학의 위치, 대동 문화연구 52,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5. 이희정, 1920년대 초기의 연애담론과 임노월 문학, 현대소설연구, 한 국현대소설학회, 2008. 이희정, 1920년대 매일신보 의 독자문단 형성과정과 제도화 양상, 한 - 1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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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한국민족문화 53 <Abstract> A Study on Dokja Mundan in Dong A Ilbo Son, Dong-Ho Dokja Mundan was the first readers contribution of literary works that Dong A Ilbo put up on its front page. The purposes of this study were to explore the developmental process of Dokja Mundan to analyze some 160 literary works published in the column, and to discuss their meanings. As soon as the publication of the newspaper was resumed, the column carried the works of well known writers such as No Ja young and Kim So wol, and this suggests that Dokja Mundan was introduced as an active strategy to attract readers. In addition to the works of professional writers, the column also published the works of writers who appeared later in the literary circle. In this sense, Dokja Mundan was a preliminary ground for modern writers. In most of works released through Dokja Mundan the motifs were personal emotions such as sorrow and yearning, and this was a consequence of reflecting the contributors experiences in leaving home. The writers, most of whom were students away from home or young activists, exposed their identities by dealing with their interests such as their feelings on their lives away from home, their complaints about the society, and solutions for social problems. For both verse and prose, the most common themes among the works carried in Dokja Mundan were personal emotions. Such confinement of themes suggests the possibility that the editorial team might induce the contributors to specific themes intentionally. From its beginning, Dokja Mundan had to be conscious of censorship. Although the publisher claimed cultural movement as its cause, it actually tried to raise the subscription rate with avoiding censorship. Dokja Mundan was exactly the product of the compromise. - 138 -

동아일보 소재 독자문단( 讀 者 文 壇 ) 연구 / 27 *Key Words: Dong A Ilbo, Dokja Mundan( 讀 者 文 壇 ), Readers Contributions, No Ja young, Foreign Students ㆍ논문투고일: 2014년 10월 2일 ㆍ심사완료일: 2014년 11월 10일 ㆍ게재결정일: 2014년 11월 27일 - 1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