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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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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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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216 동북아역사논총 41호 인과 경계공간은 설 자리를 잃고 배제되고 말았다. 본고에서는 근세 대마도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인식을 주로 영토와 경계인 식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이 시기 대마도에 대한 한일 양국의 인식을 살펴볼 때는 근대 국민국가적 관점에서 탈피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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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통권 제12 호 (2012) 제에 의하여 라는 외부적인 포스트- 식민화의 문제점을 노정하는지, 그리고 4 3이나 5 18과 비교 할 때 근대 국민 국가 성립 전의 조선과 대한민국을 포괄하여 일본군위안부가 어떻게 법적 언어로 구성되고 있는지는 국가주의,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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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동북아역사논총 42호 금융정책이 조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일제 대외금융 정책의 기본원칙은 각 식민지와 점령지마다 별도의 발권은행을 수립하여 일본 은행권이 아닌 각 지역 통화를 발행케 한 점에 있다. 이들 통화는 일본은행권 과 等 價 로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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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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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 hwp

Transcription:

1 의사학 제24권 제1호(통권 제49호) 2015년 4월 Korean J Med Hist 24 ː1-34 Apr 2015 c대한의사학회 http://dx.doi.org/10.13081/kjmh.2015.24.1 pissn 1225-505X, eissn 2093-5609 간호부 이정숙의 독립운동 김숙영* 1. 서론 2. 본론 1) 출생에서 정신여학교 수학시절까지 2) 세브란스 간호부 시절과 독립운동 참여 3) 수감시절 및 출옥이후의 독립운동 활동 3. 맺음말 1. 서론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여성 독립운동가 하면 유관순 열사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했던, 알려지지 않은 여성들은 많이 있으며 이들의 행적을 밝히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그 중 에서도 간호부 1) 이면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이정숙을 비롯하여 윤 진수, 박옥신, 정종명, 박자혜 등 여러 명이 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여성에 대 한 인식은 남성과 크게 달랐고 여성이 교육을 받거나 사회활동을 한다는 것에 상당히 거부감이 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간호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신여성 * 서울여자간호대학교 주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간호대로 38 (홍제 3동 287-89), 120-742 전화번호: 02-2287-1733 / 이메일: tina@snjc.ac.kr 1) 간호사 를 지칭하였던 명칭은 간호교육이 시작된 1903년 간호원 으로 불리다가 일제강점기 인 1914년에 간호부규칙이 반포되면서 강제적으로 일본의 명칭을 따른 간호부 로 변경되었 다. 이 글에서는 간호부 라는 명칭으로 통일하여 사용하였다. 제24권 제1호(통권 제49호) 1-34, 2015년 4월 1

KIM Sook Young : Lee Jungsook,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and a Nurse during the 이며 나름 의식이 깨어있던 지식인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을 받은 간 호부들은 환자를 돌보는 그들의 직업적 소명을 다 했을 뿐 아니라, 나라와 사 회전반에 대한 관심도 지대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간호부들에 대한 연구는 정종명 (윤정란, 2009), 박자혜(이꽃메, 2012)외에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들의 삶 에 대한 연구는 독립운동가로서 뿐 만 아니라 어려운 시대를 앞서가며 살았던 근대 직업여성으로서의 모습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정종명이나 박자 혜의 경우는 간호부이지만 동시에 조산부과정을 졸업하여 산파면허를 취득 하고 자신의 조산원을 운영하면서 사회활동을 했던 경력이 있다. 그러나, 이 정숙의 경우는 순수히 간호부로서 살아가면서, 자신의 직업적 소명을 바탕으 로 독립운동에 앞장선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이정숙의 독립운동에 대한 행적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정 숙은 간호부로 활동하면서 3. 1운동 이후의 수감자들을 지원하는 혈성단 조 직에 앞장섰고, 이후 대한애국부인회 의 핵심일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 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정숙에게 1963년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는 국내항 일 애국지사로 분류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국가보훈처, 1990: 593-594). 이정숙에 관한 기존의 본격적인 학술 연구는 이루어진바 없다. 단 지 한민족독립운동사 (국사편찬위원회, 1990)에서 독립운동가 중의 한 명으 로 소략하게 다루어지거나 정신백년사 (정신백년사출판위원회, 1989: 413) 에서 정신여학교를 빛낸 동문, 독립운동가로서 기술되고 있다. 독립운동가 간호부 이정숙의 행적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애로점은 자료의 제한이다. 대부분의 독립운동가가 그렇듯이, 1차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 서술에서도 연도나 삶의 궤적이 불 일치한 경우가 많이 있다. 본 연구는 제한된 1차 사료를 통해 이정숙의 행적을 조명하면서, 특히 독립 운동가로서의 삶을 가능케 한 학력배경, 즉 정신여학교라는 학력배경과 간호 부로서의 직업배경인 세브란스 병원에 초점을 맞추어 고찰하고자 한다. 허공 2 醫 史 學

김숙영 : 간호부 이정숙의 독립운동 에서 나무가 자랄 수 없듯이, 한 사람의 삶은 그가 자라온 지적 배경과 직업적 배경에 대한 고찰 없이 논의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구방법론은 문헌고찰법으로 당대의 신문, 잡지 등과 고등경찰요사 같은 공적문서, 이정숙이 참여한 대한독립여자선언서,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회고 록 등 이정숙의 삶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들을 검토하였다. 현재 서울에는 이 정숙의 친손녀가 서울에 거주하고 있어 인터뷰요청을 하였으나 거절하여 인 터뷰를 할 수 없었다. 2) 2. 본론 1) 출생에서 정신여학교 수학시절까지 이정숙은 국가보훈처 기록에 따르면 1896년 3월 9일생으로 3) 고향은 함경 남도 북청이다. 사망년월일은 1950년 7월 22일로, 5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 다. 이정숙의 출생 후 성장기록에 대한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다. 서울에 있는 정신여학교 4) 에서 수학하였고 1919년 3월 20일 제 11회로 졸업하였다. 대한간호협회에서 발간한 간호사의 항일구국운동 에 나오는 간호부들의 학력배경을 살펴보면(대한간호협회, 2012), 간호부로서 독립운동을 한 애국 지사 중 상당수가 정신여학교 출신이다. 따라서, 정신여학교의 교육이념이 나 교육과정, 그들의 학교생활 등을 고찰해 보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 2) 국가보훈처의 도움으로 이정숙의 생년월일을 확인하였고 남편이름은 궁사, 장남의 이름 은 확인이 되지 않았으며 차남은 1923년생 궁임 로 확인되었다. 현재 60대의 손녀가 서울 노원구에 거주하고 있어 본 연구자는 인터뷰를 요청하였으나 거절하여 안타깝게도 인터뷰 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정숙은 해방이후 사망하여 현재 보훈처 규정상 손녀는 연금수령 이 안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해방 전에 사망한 경우에 한해서만 손자, 손녀 등에게 연금수 령이 가능하다고 한다. 3) 지금까지 이정숙의 자료에서는 생년월일이 정확히 제시된 것이 없었고 독립운동사 등에서 는 1898년생으로 표기되어 왔으나 국가보훈처에 확인결과 1896년 3월 9일생으로 확인되었 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이후 이정숙의 심문조사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 나이가 22세로 나와 있어 정확한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4) 본 연구에서 정신여학교에 관한 참고자료는 다음과 같다: 정신백년사 출판위원회(1989), 정 신여자중학교 정신여자고등학교동문회(2007). 제24권 제1호(통권 제49호) 1-34, 2015년 4월 3

KIM Sook Young : Lee Jungsook,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and a Nurse during the 고 본다.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운영되어 오던 정신여학교의 학풍은 부지 불식간에 학생들의 이념이나 행동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여진다. 본 고 에서는 이정숙의 학력배경이 되는 정신여학교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찰해 보 고자 한다. 정신여학교는 1887년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애니 앨러스(Annie A. Ellers)가 정동여학당으로 설립한 것이 출발점이 된다. 애니 앨러스는 제중원 의 의사로 있던 알렌의 요청에 의하여, 여성환자를 돌보기 위한 목적으로 조 선에 파견된 선교사이다. 연세대학교 간호대학 100년사 에 의하면, 애니 앨 러스는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들어온 선교 여의사로 기록되어 있으나(연세 대학교 간호대학, 2008: 45-46), 정신백년사 의 기록에는 의사이면서 동시에 간호사였다고 밝히고 있다(정신백년사출판위원회, 1989: 85). 정신여학교는 처음에 정동 11번지, 정동 12번지를 포함하여 선교사 알렌(Harace Newton Allen, 1858~1932)의 집에서 시작하였다. 애니 앨러스는 1886년 7월 4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알렌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여러 명의 여자 선교사들이 알렌의 집에 거처하게 되면서 이 곳에 여학당을 개설하게 되었고 이것이 정동여학당의 시작이 되었다. 정동여학당은 1895년 10월 20일에 연 지동 137번지로 이전하여, 교명을 사립연동학교 라고 하였고 그 이후 1903년 6월 연동여중학교 로, 1909년 8월 11일 정신여학교 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정신여학교의 여학생들은 교육과정으로서 성경, 한문, 가사, 침공(바느질), 수예, 음악, 체조, 습자, 이과, 지지( 地 誌 ), 역사, 어학(영어), 수학, 동물, 식물, 생리, 도화, 작문 등의 과목을 배웠다. 학생 지도에 역점을 둔 교과는 성경으 로, 이는 신앙인의 사표( 師 表 )를 육성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역사와 가사, 침 공도 상당히 중요시하였다. 학생들로 하여금 바느질이나 뜨개질 등의 일감을 주문받아 물건을 만들고 이것을 팔아서 학생들 스스로 학비와 기숙사비 등의 일부를 책임지게 하였다(백낙준, 1979: 327). 이 당시 우리나라의 여성들은 배움의 기회도 없었고 결혼하면 오로지 부녀자로 사는 것 이외에는 생각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기독교 계통의 학교들은 서양식 사고에 기초한 4 醫 史 學

김숙영 : 간호부 이정숙의 독립운동 합리적 교육으로 여성들로 하여금 남성과 평등하고 스스로 자립적으로 살아 갈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있었다. 정신여학교 학생들은 1905년에 붉은 벽돌집의 기숙사가 신축되어 모두 기 숙사 생활을 했으며 학생들은 엄격한 규율 속에서 생활하였던 것으로 보인 다. 매일신보 에 실린 정신여학교 학교 탐방기사를 보면 학교의 교육철학이 나 그들의 생활을 알 수 있다. 북장로교회 부속으로 기독교신도의 여자를 교양( 敎 養 )하고자 설 립되었고 4, 50인의 졸업생을 배출하여 현재 각지에 흩어져 교편을 잡았으나 출신처도 불분명하고 1910년이 되어서야 당국의 허가를 받아 (이 학교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세브란스부인이 여 자학교는 교실보다는 오히려 기숙사가 좋아야 한다고 하여 사비를 들여 3층 양옥을 건립함에 현 교장 천부인의 교육방침으로는 숙덕 ( 淑 德 )이 있는 선량한 부녀를 양성하기 위하여 결코 깊은 학문보다 는 여러 가지로 이익이 있는 실제로 조선가정에서 일상생활상 쓸 모 있는 소제(청소), 세탁, 의복 만들기, 요리 등을 가르치기 위해 기숙사 계단아래 지하실을 이용하여 이런 필요한 것들을 가르치고 있다. 가난한 학생들을 위하여 근면하고 자활( 自 活 )의 방침을 길 러주고자 서양편물과 동양과자를 제조케 하여 서양인에게 팔고 있 다. 현재 약 학생수가 97명인데 이중에 지방학생이 절반이고, 서울 학생이라도 외출을 금지하며 한달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부모님 집 에 가서 면회를 할 수 있도록 한다. 5) 정신백년사 에 따르면, 연동여중학교 당시의 학제는 매우 모호하였다고 한다. 1906년 그 당시 학생들은 학년별로 편성을 하였지만 남자학교의 학제 에 준하여 4년 내지 5년 동안 낙제하지 않고 지내면 졸업을 시키었는데 1906 년에 가서야 학제가 처음 제정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이후 1910년에 한 일합방이 이루어지고 1911년 조선교육령이 공포된다. 조선교육령에서는 여 자고등보통학교의 학제를 3년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정신여학교 졸업생들의 5) 學 校 歷 訪 - 貞 信 女 學 校 ( 蓮 洞 ), 매일신보, 1914년 2월 21일.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원문을 현대문으로 바꾸어 기술하였다. 제24권 제1호(통권 제49호) 1-34, 2015년 4월 5

KIM Sook Young : Lee Jungsook,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and a Nurse during the 기록을 미루어 볼 때, 3년의 정규적 학제로 매년 졸업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정신여학교 출신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김마리아의 경 우 1906년 6월에 입학하여 1910년 6월 16일에 4회로 졸업하였고, 독립운동가 김영순의 경우는 1910년 6월에 입학하여 1916년 8회로 졸업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학제가 일정하게 정해져 운영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신여고 4회 졸업생인 오현주의 경우, 혈성단 결성에 참여하였으나 후에 동지들을 배반하고 애국부인회 조직을 밀고하여 해방이후에 반민족행위 특 별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답한 내용을 보면 정신여학교 입학이나 졸업에 대한 운영을 엿볼 수 있다. 문 : 당신의 학력을 말하라. 답 : 13세 時 4월부터 全 羅 北 道 群 山 府 龜 岩 里 궁말교회목사 부우 렴 부인을 師 로 하여 산술공부를 하는 일편 15세 時 春 가정에서 한문교사를 초청하여 16세 時 春 까지 漢 學 을 修 하고, 17세 時 8월 에 서울 貞 信 女 學 校 제2학년에 입학하여 18세 時 5월에 右 校 를 졸 업하였습니다. 6) 오현주의 답변을 미루어보면, 당시 정신여학교 입학생들은 집에서 한문, 수 학 등을 거쳐 정신여학교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으며 정식으로 1학년에 입학 하는 것이 아니라, 2학년에 입학하여 1년 만에 졸업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 다. 재학기간은 김마리아나 김영순의 경우를 미루어 볼 때, 4년 내지 5년간 수 학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편입도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정숙은 1919 년 3월 20일에 정신여학교를 11회로 졸업한 것으로 미루어 2학년으로 편입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1914년(한국나이 19세)이나 1915년(한국나이 20세)에 입학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7) 이 당시의 사회적 배경에 비추어볼 때, 조혼 6) 오현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자료, 1949년 3월 28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 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an&setid=41461&position=8). 검색일: 2015. 2. 8 7) 이정숙의 학적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정신여자 중, 고등학교에 협조 요청을 하였으나 일제 강 6 醫 史 學

김숙영 : 간호부 이정숙의 독립운동 의 풍속이 가시지 않아서 1910년대 여학생들은 졸업 전에 결혼하는 학생이 나 약혼하는 학생이 많다고 하였는데(정신백년사출판위원회, 1989: 274), 이 정숙의 경우도 19세나 20세에 입학을 하였다면 학교를 다니면서 결혼을 하였 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8) 같은 식민지 시기를 살아가던 이여성( 李 如 星 )은 신가정 잡지의 기고문에 서 스스로 자신들의 시대를 여성교육은 암흑시기 라고 표현하였다 9). 실제로 1930년대조차도 전체 인구 2천만명 중 서당을 포함한 각종 교육기관에서 교 육받고 있는 사람은 58만명도 채 못되어 전체 인구대비 2.7%였고(재한국 일 본인은 18%), 여학생 총수가 13만 6천명으로 여성 총 인구비의 1.2%에 불과 하였으며 여성문맹자는 92%인 924만 846명이나 되었다. 그 당시 여학생 총 수 13만명 중에서도 초등학교 학생수(11만, 3,204명)가 거의 80%를 차지하 였으며 서당은 8%(822명), 중등은 5%(7,326명) 전문은 0.4%(545명)의 비중 을 보이고 있다. 정신여학교는 중등교육기관으로서, 중등학교를 다니는 여학 생은 인구 만 명당 7명에 불과할 정도였다. 1930년대의 현실도 이러하였으니 1910년대에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여학생은 매우 극소수에 불과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렇듯 몇 안되는 교육수혜자인 정신여학교 학생들은 사회 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을 것이며, 스스로 자신들은 여성선각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사회현실 및 조국의 앞날에 관심을 가졌으리라 여겨진다. 정신백년사 에 따르면, 정신여학교 학생들에게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기 르는데 큰 영향을 미친 스승은 신마리아( 辛 嗎 利 亞 )와 지재 김원근( 止 齎 金 瑗 根 )이라고 한다. 신마리아는 3.1운동 때 김마리아와 같이 애국부인회를 조직 한 신의경의 어머니이다. 신마리아는 1896년 10월 3일부터 정신여학교(당시 연동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하여 1921년 4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3년간 정신여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당시 어두웠던 한국의 여성 점기 이전의 학적부는 모두 소실되어 확인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8) 이정숙은 1919년 11월말부터 1922년 5월까지 수감생활을 하였으나 둘째아들을 1923년에 출 생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정신여학교 재학시절 결혼을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9) 이여성, 여성조선의 현상과 추이 (상), 신가정 3 (1936), p.148. 제24권 제1호(통권 제49호) 1-34, 2015년 4월 7

KIM Sook Young : Lee Jungsook,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and a Nurse during the 사회를 일깨우기 위하여 희생적 노력을 기울였다(연동교회 80년사 편찬위원 회, 1974: 48-49). 신마리아의 자매들 중 한 명은 박에스더로 우리나라 최초 의 여의사이며, 한 명은 김배세로 세브란스 간호부 양성소 1회 졸업생이다. 그는 학생들의 생활을 도맡으며 애국심과 신앙심을 가르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교육의 첫째 급선무는 하나님을 깨달아 알게 하는 것이요, 둘째는 민족 과 국가를 사랑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는 애국적 인재를 기르는 것이라 하였 다. 또한 정신여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근면과 검소, 예의범절을 중요하게 가 르치면서 높은 인격을 갖춘 한국사회의 여성 리더를 길러내고자 노력하였다. 정신여학교의 또 한 사람의 스승은 8회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한 김영순의 아버지 김원근 교사이다. 1906년 한문교사로 부임하여 1941 년까지 35년간 정신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한글, 한문과 역사교육을 통하 여 애국정신을 함양시켰다. 10) 이들 두 선생님은 한국민족의 민족성과 민족정신을 계발해주는 데 큰 역할 을 하고 있었으며(노영희, 2001: 8) 이러한 교사들의 영향으로 정신여학교 졸 업생들은 유달리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 당시 한국에 있는 대부분의 사립학교들은 민족의식과 애국사상을 고취 하는데 앞장서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한일합방이후 1911년에 사립학교교 육령 을 공포하여 사학을 감독하기 시작하고, 1915년 3월에 다시 개정사립 학교규칙 을 공포한다. 사립학교규칙에서 문제가 된 것은 사립중학교를 고등 보통학교로 승격시켜서 새로 인가를 받게 하는 것이었다. 총독부는 전문학교 의 입학자격을 고등보통학교(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자로 정하였고, 성경이 나 지리, 역사 등의 과정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규정하여 사립학교를 그들의 방침을 따르도록 통제하려 하였다.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기독교 학교의 대 부분은 성경과목과 기도회를 정규교과 과정으로 넣어야 했기에, 교과과정을 10) 김원근 교사는 1900년경 배재학당 교사로도 근무하였으며, 서재필, 윤치호, 박세양, 정인덕 등 개화기 인물들과 같이 교사로 있었다(김세환, 1965: 156). 8 醫 史 學

김숙영 : 간호부 이정숙의 독립운동 변경 신청하여 인가받는 일을 거부하였다. 이러한 법령에 항의하며 교과과정 변경을 거부하였으나, 결국 숙명(1912), 진명(1912), 양정(1913), 보성(1917), 휘문(1918), 중앙(1921), 동덕(1926), 이화(1913), 배재(1916), 광성(1918), 호 수돈(1918), 배화(1925) 등 많은 기독교 학교가 고등보통학교로 승격하였다. 정신여학교는 끝까지 버티어 고등보통학교로 승격하지 못하고 잡종학교 로 격하되어 이 잡종학교 졸업생은 전문학교 본과생에 입학자격을 주지 않았기 에 할 수 없이 별과생이 되어 차별대우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신 여학교의 운영방침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정신여학교는 일제의 교육정책에 정 면으로 도전하고 있었다. 이렇게 교육받아 오던 정신여학교 학생들이 본격적으로 사회에 관심을 가 지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1907년 한국군 대 강제해산과 관련이 깊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군대의 강제해산으로 많은 사상자가 속출하였고 이들을 간호하기 위해 병원의 간호부뿐만 아니라 정신 여학교 학생들은 스스로 자원하여 부상병을 돌보게 된다. 이것이 최초로 여성 간호부가 남자환자를 돌보게 되는 계기가 되어 간호사적 의미에서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 당시 정신여학교 학생들에게도 큰 의미가 있었을 것이라 본다. 매일신보 의 女 徒 義 擧 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그저께 한일병사들이 교전할 때에 부상한 한국 병정을 남대문 밖 제중원에 수용 치료한다는 말은 이미 게재하였거니와, 이 병원 남 녀 간호원과 보구여관 간호원들이 지성으로 구호한 것은 거론치 않을 수가 없다. 연동중학교 학생들이 회동하여 상의하기를 저 동 포는 나라위해 순절한 자도 있는데 우리들은 비록 여자이나 의로 운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라고 하면서 그날 밤부터 제중원으로 가서 부상 장병들을 열심히 간호하였다. 그 장병들도 여학생들의 의거에 감복하여 눈물을 뿌리며 치사했다. 11) 11) 女 徒 義 擧, 매일신보, 1907년 8월 4일(대한간호협회, 2012: 28에서 재인용). 제24권 제1호(통권 제49호) 1-34, 2015년 4월 9

KIM Sook Young : Lee Jungsook,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and a Nurse during the 대한간호협회에서 발간한 간호사의 항일구국운동 에는 독립운동을 했던 간호사 26명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 중 정신여학교 출신의 간호부가 이정숙을 비롯하여 노순경, 박덕혜, 이도신, 김효순, 박옥신, 윤진수, 이성완, 이아주, 장윤희, 채계복으로 총 11명에 이르고 있다. 이들은 정신여학교 동창이라는 사실 이외에도 채계복을 제외하고 10명 모두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거나 재학 시절, 세브란스 병원의 간호부나 견습간호부로 활동하면서 3.1운동에 참여하 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정신여학교와 세브란스 병원의 간호부로서 이정숙의 삶의 연관 관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정숙의 경우 1919년 3월 20일 정신여학 교를 졸업하였고 3.1 운동 당시 세브란스 병원 간호부로 재직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사실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간호부로 활동하였다는 점, 이 정숙이 세브란스 간호부 양성소 졸업자 명단에 없다는 점, 간호교육을 받지도 않고 3.1 운동 당시 간호부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점 등이 의문으로 남는다. 1919년 당시 세브란스 병원 간호부 양성소 교수였던 러들로우 부인은 The Korea Mission Field에 3.1운동 당시 부상자 간호를 경험했던 정신여학교 학생 들이 세브란스 병원 간호부양성소에 대거 지원하였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최근의 정치적인 사건이 시작할 무렵 우리 여학교의 우수한 졸업 반 학생들이 지원하였다. 여학교는 휴교하였고, 학생들은 졸업장 을 채 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여학생들은 부상한 한국인들을 간호 하기 위해 즉시 병원으로 달려왔다. 이들 중 10명이 현재 간호사 교육을 받기를 결심하였다. 12) 윗글로 미루어 보아 3.1운동을 계기로 휴교하고 있던 정신여학교 학생들은 세브란스 병원에서 견습간호부의 생활을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3.1운 동 당시 이정숙은 졸업반이었으므로 간호부 교육을 받고자 결심한 학생 중, 12) Theresa Ludlow, Is It Worth While to Train Korean Nurses? The Korean Mission Field, 15-10 (1919), pp. 217~218(대한간호협회, 2012: 43에서 재인용). 10 醫 史 學

김숙영 : 간호부 이정숙의 독립운동 한 명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정신여학교 재학당시에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정숙의 독립운동 에 관한 또 하나의 자료가 발굴되었다. 그것은 1983년 11월, 미국에 사는 도 산 안창호 선생의 장녀 안수산 여사의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발견된 대한 독립여자선언서 이다. 독립선언서는 3.1 운동을 확산시키는 도화선 역할을 하였는데 1918년 11월 만주와 노령 등지의 독립운동가가 발표했던 무오독립선언서 와 1919년 2월 8일 동경유학생들이 발표했던 2.8독립선언서 등이 대표적이다. 대한독립여 자선언서 는 1919년 4월 8일 무렵에 배포된 것으로 13) 이 선언서가 작성된 것 은 3.1 독립선언서보다 빠른 2월이었다. 14) 작성자는 김인종, 김숙경, 김옥경, 고순경, 김숙원, 최영자, 박봉희, 이정숙 등으로 되어 있다. 이 선언서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었으나 1982년 일본정부의 비밀문서 속에서 일본어로 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 가 발견되었고, 그 후에 순한글 원 본이 도산 안창호 선생의 장녀 자택에서 발견된 것이다. 발표된 곳은 중국 지 린 - 길림( 吉 林 )성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5) 선언서의 내용을 발췌하면 다 음과 같다. 슬프고 억울하다. 우리 대한 동포시여, (우리 여성도) 같은 국 민, 같은 양심의 소유자이므로 주저함 없이 살아서는 독립기 아래 서 활기 있는 새 국민이 되고 죽어서는 구천에서 수많은 선철을 찾 아가 모시는 것이 우리의 제일가는 의무이므로 때는 두 번 이르지 아니하고 일은 지나면 못 하나니 속히 분발할지 어다. 동포, 동포시여 대한독립만세 이 선언서는 시대의 순응보다는 저항과 변혁의 중심에 서고자 했던 한국 13) 한국여성독립운동사(6) : 대한독립여자선언서에 담긴 민족정신을 담다, 뉴스천지, 2014 년 7월 14일. 14) 3월을 여성평화의 달로, 여성신문, 2014년 3월 3일. 15) CBS 노컷뉴스, 2012년 3월 1일. 제24권 제1호(통권 제49호) 1-34, 2015년 4월 11

KIM Sook Young : Lee Jungsook,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and a Nurse during the 여성의 행보를 보여주는 16)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독립선언서가 작성, 발표 된 곳은 중국 길림성일것으로 추정되나 이정숙의 이름이 작성자 명단에 들 어있는 것은 상해와 경성의 연락관계가 있었고, 이정숙이 독립선언서의 취지 에 동의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대한독립여자선언서 는, 이 정숙이 자각한 여성으로서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 는 사료이다. 2) 세브란스 간호부 시절과 독립운동 참여 이정숙이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후, 사회에 첫발을 딛고 택한 직업이 세브 란스병원 간호부였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이정숙이 독립운동가로 검거 되어 작성된 신문조서 등의 신원에는 1919년 당시 본적: 함남 북청군 양가 면 초리동, 조소: 경성세브란스 병원, 역원: 舊 평의원 경성지부장, 新 적십자 장 적십자회원, 직업: 간호부, 나이: 22세 (장기홍, 1934: 192-195)로 기록되 어 있다. 앞 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이정숙은 1919년 3월 20일 정신여학교를 졸업하 기로 되어있었으나 3.1 만세운동으로 휴교되어 미처 졸업장도 받지 못한 채, 부상당한 조선인들을 간호하기 위해 세브란스 병원으로 달려갔다가 간호부 교육을 받기로 결심한 졸업생 중의 한 명임을 알 수 있다. 17) 연세대학교 간호대학 100년사 에 초기 간호부양성소 졸업생의 명단이 실 려 있는데, 이정숙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이정숙이 1919년 11월에 독립운 동으로 검거되어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으므로 현실적으로 졸업하기는 어려 16) 한국여성독립운동사(6) : 대한독립여자선언서에 담긴 민족정신을 담다, 뉴스천지, 2014 년 7월 14일. 17) 1918년에 제정된 사립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부속 간호부양성소규칙에 의하면 당시 입 학자격이 첫째, 품행이 방정하며 연령이 18세 이상이어야 하고 부모의 동의서와 교사 또 는 목사의 추천서를 갖춘 자, 둘째는 보통학교 졸업자와 고등보통학교에 1년 이상을 통학 한 자 및 그와 동등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 로 학력수준을 입학자격의 기준으로 삼았다(연 세대학교 간호대학, 2008: 412). 이정숙 등 정신여학교 졸업생들은 이 학력수준을 충분히 충족하는 것이었다. 12 醫 史 學

김숙영 : 간호부 이정숙의 독립운동 웠으리라고 본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이정숙의 직급은 면허가 있는 정식 간호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정숙의 간호부 직급은, 생도로서 간호부견습 이었으리라 추측된 다. 1914년 조선총독부의 간호부규칙 에 따라 간호부의 면허제도와 시험절 차 등이 법적, 제도적으로 규정되었는데 당시 병원에서는 일반적으로 간호부, 간호부견습, 부첨인( 附 添 人 ) 등 다양한 간호 인력이 혼용되어 간호부로 호칭 되고 있었다(이꽃메ㆍ김화중, 1998: 294). 이정숙이 세브란스 병원에서 간호부 생활이 가능했던 것은, 3.1 독립운동 이라는 사회적 상황, 부상당한 조선인을 간호하려는 정신여학교 학생들의 열 정과 자주정신, 이들의 열정을 수용했던 세브란스 병원의 설립정신 및 병원 조직의 고유문화, 같은 선교계 재단의 연계성 등,여러 요인이 작용하였을 것 이라고 본다. 앞 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대한간호협회의 발간책자에서 소개된 독립운동 가 간호부 26명 중 상당수가 세브란스 병원의 간호부나 견습간호부였다. 세 브란스 병원 간호부로서 3.1운동 이후에도 만세사건에 관련된 사람은 박덕혜 ( 朴 德 惠 ), 노순경( 盧 順 敬 ), 이도신( 李 道 信 ), 김효순( 金 孝 順 )을 들 수 있다. 이 들은 경성 예정동대묘앞( 藝 井 洞 大 廟 前 )에서 모여 있는 다수의 군중과 함께, 1919년 12월 2일 구한국만세와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들고 시위 를 하였다. 이들은 모두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어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18). 이들을 비롯하여 이정숙이 민족의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근무했던 세브 란스 병원의 특성과 조직 문화는 어떠하였을까? 세브란스 병원은 1885년 의료선교사인 알렌이 설립한 제중원이 그 시발점 이다. 1900년 미국의 자선사업가 세브란스로부터 1만 달러의 병원 건립기금 을 기부 받아 1904년 11월 16일 지하층과 2층 건물로 구성된 병원이 완공되 어 기증자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 기념병원으로 개원하였다. 세브란스 병원 18) 騷 擾 犯 四 名 -제일심에 불복하고 다시 공소신립, 매일신보, 1919년 12월 29일. 제24권 제1호(통권 제49호) 1-34, 2015년 4월 13

KIM Sook Young : Lee Jungsook,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and a Nurse during the 의 운영이 안정되어 가면서 여성 환자의 돌봄을 담당할 간호 인력의 필요성을 계속 느껴오던 중 1906년 9월에 세브란스 병원 간호부양성소를 개원하여 간 호부인력을 양성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세브란스 병원이 갖는 가장 큰 의미는 선교계 사립병원으로 서의 위치이다. 조선총독부가 관여하는 관립병원인 조선총독부의원이 19), 주 로 일본인 의사와 일본인 간호부를 양성해낼 때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는 조선인 의사, 조선인 간호부를 양성해내고 또 이들을 병원에 고용함으로 써 우수한 조선인 의료인집단을 양성해냈던 것이다. 특히, 세브란스 병원은 1910년대 독립운동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반일제, 독립운동 지지의 기풍 을 다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모교에 근무하고 있었던 직원인 이갑성과 함태영, 스코필드 (F.W.Schofield) 교수의 역할이 컸다(박형우, 2009: 29-30; 장규식, 2009: 33-35). 이갑성은 1915년 세브란스 병원 제약주임으로 근무하였으며 독립선언 서에 서명한 33인중의 하나로 세브란스 학생들에게 많은 정신적 영향을 미쳤 다. 함태영 역시 이갑성과 더불어 세브란스 재학생들을 학생 YMCA를 통하여 지도하며 학생단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1916년 세브란스 연합의학교의 교수 로 부임한 스코필드는 3.1운동 당시 시위대열에 합류하여 함께 만세를 불렀고 서울시내 곳곳의 시위광경을 사진에 담고, 일본인 경찰국장을 방문하여 무고 한 시민을 석방하도록 담판을 짓기도 하였으며 1919년 4월 15일 제암리 교회 당의 학살사건을 기록하여 세계 언론에 알리기도 하였다. 관립인 경성제국대학이 정책적으로 주로 일본인 인재들을 양성해내고 있 을 때, 당시 연희전문, 보성전문 등의 사립전문학교가 조선인 인재를 길러낼 수 있었듯이, 사립병원인 세브란스 병원은 조선인 의사는 물론 조선인 간호 부들을 교육하고, 취업시켜 그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해주 19) 조선총독부의원은 대한제국기 대한의원이 그 전신으로, 1926년 경성제국대학부속의원으 로 개칭되었다. 14 醫 史 學

김숙영 : 간호부 이정숙의 독립운동 었다.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의사진 20) 과 간호부들의 다수가 세브란스 병원 소 속이었다는 사실은 개개인의 역량도 있었겠지만 직업 소속처의 기풍, 특성과 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정숙 역시 세브란스 병원의 간호부로서 이러한 배 경에 힘입어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정숙이 세브란스의 간호부로서 근무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한 첫 조직적 활동은, 3.1 운동 당시 검거된 조선인들과 가족을 돌보기 위해 혈성단 의 창 립멤버로 참여한 것이다. 이정숙이 참여한 독립운동 및 대중운동은 혈성단 애국부인회(1919), 대한민국애국부인회(1919), 대한적십자회(1919), 조 선여성해방동맹(1925) 그리고 경성여자청년회(1925) 이다. 한민족은 한일합방이후 지금까지 받아온 차별대우에 대한 분노의 폭발로 3. 1 운동을 일으켰다. 3월 5일 서울 지역의 각 학교 학생들은 독립만세를 불 렀고 이 사건으로 학생 60여명이 체포되었으며 3월 6일 정신여학교에 들이닥 친 경찰에 의해 김마리아도 체포되었다(정신백년사편찬위원회, 1989: 418). 아마도 이정숙의 본격적인 독립운동은 3.1운동부터 시작 되었을 것이다. 물론 3.1운동 이전에도 대한여자독립선언서 의 작성에 참여한 기록이 나오고 있지만,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은 3.1운동부터일 것이다. 정신여 학교 졸업반으로 그 당시 정신여학교 동창들의 행적을 보면 이정숙의 활동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정숙도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을 것으 로 생각되나 그 당시 일본경찰에 체포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정숙과 같이 활동하였던 정신여학교 동기동창 이성완은 4학년에 재학중 이면서 세브란스 간호부로 1919년 3월 1일 만세를 불렀으며, 혈성단 을 조직 하여 참기름 장수 등 일용품에 대한 간이 구입부 형식을 취하여 자금조달을 하였다. 같은 동창인 임충실은, 1919년 3.1 운동당시 3월 5일 남대문 역 앞에 서 시위를 하기 위해 30여명의 기숙생들이 모두 검정치마, 흰저고리에, 댕기 20) 박형우(박형우, 2009: 19-32)와 장규식(장규식: 2009: 33-35)의 연구에 의하면 1908년 제 1 회 졸업생 7명중에 김필순, 박서양, 신창희, 주현측 등 4명은 항일 독립운동으로 정부로부 터 훈장을 받았고 김희영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1920년 사망하였다. 이들이 세브란스 독립 운동의 주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24권 제1호(통권 제49호) 1-34, 2015년 4월 15

KIM Sook Young : Lee Jungsook,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and a Nurse during the 꼬리를 느리지 않고 머리를 꼭꼭 땋아 둘레머리를 하고 버선발에 미투리를 신 고 시위에 참가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일행들은 대한문 앞에 이르렀을 때 목 소리를 높여 만세를 불렀으며 일경은 이들을 모조리 체포하였는데 그 때 정 신여학교 학생들 중에 임충실, 이애주, 박남인, 김경순 등이 함께 체포되었다. 3.1 운동 이후 여러 개의 항일여성운동단체가 조직되었는데 대표적인 단 체는 서울에 본부를 둔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를 들 수 있다. 대한민국애국부 인회는 혈성단애국부인회(혈성애국부인회)가 모태가 된 것으로 경성에서 세 브란스 병원 간호부 이정숙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이화여자대학교 한 국여성사 편찬위원회, 1972: 515). 이 단체의 목적은 3.1 운동으로 수감된 가 난한 애국지사들에게 사식차입 등 구제활동을 하기 위한 것으로, 1919년 4월 중순경 결성되었다. 혈성단애국부인회의 주요 구성원은 모두 정신여학교 동 창들로 구성되어 4회 졸업생 오현주(황해도 재령 명신여학교 교사), 그의 언 니이자 동기 졸업생 오현관(전라도 군산 메리블덴여학교 교사), 정신여학교 6회 졸업생 장선희(정신여학교 교사), 11회 졸업 이정숙(세브란스 병원 간호 부)과 이성완(세브란스 병원 간호부)등이 주로 활동하고 있었다. 21) 이정숙은 간호부였으므로 자신의 직업적 소명을 다하기 위하여, 독립운동으로 수감되 어 옥중에서 고통 받는 이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기본적인 방법으로, 수감 된 애국지사들에게 사식을 제공하고 돌아가신 이의 유족들을 돌보고자 혈성 단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가 갖는 의미는 여성만에 의해 자생적으 로 생겨난 조직이고 3.1운동 직후 조직된 최초의 여성독립운동단체는 점이다 (국사편찬위원회, 1990). 여성들이 조직한 단체이므로 모성적 본능과 간호하 는 마음을 바탕으로, 그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식제공이나 유족을 돌보는 활동 등에 주력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혈성단애국부인회의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은 모두 정신여학교 출 신이다. 앞 절에서도 말하였듯이 정신여학교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여 21) 兩 團 體 가 打 擊 을 受 함, 독립신문, 1920년 1월 1일. 16 醫 史 學

김숙영 : 간호부 이정숙의 독립운동 성의 개화와 선교를 목적으로 설립된 학교이다. 오랫동안 전통과 인습에 결 박되어 살아오던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자기계발 의식을 일깨워 준 것은 역시 천주교와 그 밖의 기독교 각 파에 의한 선교사업의 결과라 할 수 있다(김준엽 김창준, 1969: 150). 그 중에서도 정신여학교의 교육적 풍토는 정신여학교 동창들이 주도적으로 애국활동을 펼칠 수 있는 큰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같은 해 4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인 김원경과 최숙자 등이 대조선 독립애국부인회 를 조직하는데, 대한청년외교단의 임창준, 이병철 등의 주선 으로 혈성단애국부인회의 오현주와 대조선독립부인회의 경하순, 최숙자, 김 희열, 김희옥이 만나 두 단체와 통합을 논의하여 그 결과 대한민국애국부인 회 가 되었다. 22) 임원진을 보면 회장 겸 재무주임에 오현주, 총재 겸 재무부장 에 오현관, 부총재로 김희열,, 부회장에 최숙자, 평의원에 간호부 이정숙, 외 교원에 장선희, 서기에 김희옥, 고문에 이병철로 삼았다. 평양, 개성, 대구, 기 장, 진주, 밀양, 거창 및 종전의 연락처(지부)에 지부를 두고 유인경을 거창, 통영, 밀양을 통하는 대구 지부장에 임명하고 양산, 마산, 울산, 부산의 통할 을 각각 위임하였으며 이순길을 연락원으로 하여 각 지부를 순회케 하였다. 이병철은 애국부인회간사부규칙을 기초하여 회비는 각 회원의 처지에 따라 각자 갹출하며 수금은 지부장이 하되 모인 금액의 3분의 1은 중앙본부에 독 립운동자금으로 송부하기로 결정하였다. 23) 이정숙은 간사부( 幹 事 部 )를 설치하고 세브란스 병원 간호부인 김은도, 장 옥순, 박봉남, 박덕혜, 김효순, 이도신, 김여운, 박옥신 등을 입회시켰으며 회 비 26~27원을 취합하였다. 특히 간호부 박옥신은 30여원의 군자금을 제공하 였다. 이정숙은 그해 7월경 여름휴가로 고향인 함경남도 북청에 가는 길에 함 경도 이원군의 보신여학교 교사 신애균을 찾아가 두 번에 걸쳐 27원의 군자 금을 수령하고, 함흥의 한일호에게서 60원을 받아 귀경하여 재무 담당자 신 정균에게 인도하였다. 이정숙은 정신여학교 학생인 김경순에게도 회원가입 22) 兩 團 體 가 打 擊 을 受 함, 독립신문, 1920년 1월 1일. 23) 兩 團 體 가 打 擊 을 受 함, 독립신문, 1920년 1월 1일. 제24권 제1호(통권 제49호) 1-34, 2015년 4월 17

KIM Sook Young : Lee Jungsook,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and a Nurse during the 을 권유하여 즉석에서 회비 2원을 받았으며, 세브란스 병원에 진찰받으러 온 정신여학교 학생 황희수에게도 회원가입을 권유하였다(대한간호협회, 2012: 35에서 재인용). 이정숙의 이러한 행보는 매우 용감하고 적극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본의 탄압이 점점 더 극심해지고 감시가 심해지는 이런 상황 속에서 위험 을 무릅쓰고 회원가입과 군자금 모금에 노력한 모습은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전국적인 조직이 되기 위해 지부 설치가 중요하다 고 보고 지방순회를 단체의 첫 사업으로 설정하였다. 본부원이나 지부원이나 그 당시 회비는 월 1원이었으며 그 당시 부녀자들의 애국심에 힘입어 여러 지 역에서 큰 성금이 들어오기도 하였다. 그 당시 지부장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박용옥, 1976: 147). 경성: 이정숙(1919년 정신 제 11회 졸업) 홍수원: 정근신(1919년 정신 제 11회 졸업) 재령: 김성무 진남포: 최매지 평양: 변숙경(3.1 운동시 정신여학교 학생) 대구: 유인경(1911년 정신 제 5회 졸업) 영천: 이삼애(1916년 정신 제 8회 졸업) 부산: 백신영(1936년 정신 제 28회 졸업시 추가 졸업) 경상남도: 김필애(1918년 정신 제 10회 졸업) 진주: 박보렴(3.1 운동시 정신여학교 학생) 창주: 이순길(1914년 정신 제 6회 졸업) 전주: 유보경(1918년 정신 제 10회 졸업) 군산: 이마리아(1936년 정신 제 28회 졸업시 추가 졸업) 원산: 이혜경(1907년 정신 제 1회 졸업) 성진: 신애균(이원보신 여학교 교사) 함흥: 한일호 이를 통해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지부장은 거의 정신여학교 출신 졸업생 18 醫 史 學

김숙영 : 간호부 이정숙의 독립운동 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차츰 3.1 운동 후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감으 로 이병철 고문이 활동을 중지하고, 회장 오현주도 독립운동을 중지하면서 활 동이 저조해져 갈 때, 수감 중이던 김마리아( 金 瑪 利 亞 ) 24) 와 황애덕( 黃 愛 德 ) 25) 이 출감하게 된다. 김마리아는 출옥 후 오현주와 이병철이 활동을 소홀히 하면서 부진상태에 빠져있던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재건을 위해 황애덕과 함께 1919년 9월 19 일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를 재조직하기에 이른다. 26) 9월 19일 김마리아와 황애덕의 출옥을 위로, 축하하는 다과회 모임을 명분 으로 이정숙, 장선희, 백신영, 이혜경 등 여성계를 대표하는 인물 16명이 정 신여학교 교내 여선교사 데일의 집 2층에 모여,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오랜 회의 끝에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임원을 개편하였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부서를 새로 편성하고 임원을 선출하였다. 회장에 김마리아, 부회장 이혜경, 총무 및 편집원 황애덕, 적십자 회장에 이정숙, 윤진수, 그리고 결사장에 이 성완, 백신영, 재무원 장선희, 서기 신의경, 부서기 박인덕, 교제원 오현관으 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정숙은 세브란스 병원 회원 약 28명의 대표, 신의 경은 경기도지부장, 이성완은 배화여학교내 회원 15명의 대표, 박인덕은 이 화학당 내 회원 24명의 대표, 김태복은 동대문병원내 회원 20명의 대표, 성경 애는 성서학원내 회원 18명의 대표로 활동하였다. 27) 교제부는 상해 임시 정 24) 김마리아는 정신여학교 4회 졸업생으로 정신여학교가 낳은 여성 독립운동가의 표상이다. 김마리아는 정신여학교 졸업 후 동경여자학원에 유학하였으며 2. 8 동경 유학생 독립선언 에도 참가하였다. 국내에 독립운동을 알리고 이끌어주고자 다시 귀국하여 3.1운동의 전개 에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3월 6일 정신여학교에서 체포되었다. 1919년 7월 24일 보석금을 내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가석방되었으며 8월 4일 면소 방면되었다. 25) 황애덕은 1910년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3년간 숭의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송죽결사대라 는 비밀조직의 책임자로 활동하였고, 일본 유학 중 김마리아를 만나 2. 8 동경 유학생 독립 선언에 참가하였다. 3.1 운동 이후 체포되어 5개월여만에 면소로 석방되었다. 26) 매일신보,1919년 12월 19일자에는 9월 19일에 모임을 한 것으로 보도되었으나, 이정숙 의 공판 방청 속기록(김영삼, 1965: 353)에서는 10월 19일에 김마리아 집에 모였는지를 묻 는 질문에 이정숙은 그렇다고 대답하여, 정확한 모임날짜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27) 米 人 선교사의 가택 2층의 밀회-결사장을 포함한 신조직성립, 매일신보, 1919년 12월 19일. 제24권 제1호(통권 제49호) 1-34, 2015년 4월 19

KIM Sook Young : Lee Jungsook,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and a Nurse during the 부 요인은 물론 국외에서 밀사로 파견된 이들을 맞아 국내의 지사들과 접선 을 시키는 일을 주로 책임졌으며, 적십자부는 애국지사로 투옥된 이와 해외 에 망명 중인자들의 남아 있는 유가족들을 위한 원호사업을 맡았다. 결사부 는 그야말로 몸으로써 투쟁하여 일사( 一 死 )를 각오하고 나설 전위부대를 책 임진 고로 두 명의 부장을 둔 것이니(정신백년사출판위원회, 1989: 339), 연 약한 여성들로 구성된 단체였지만 독립운동에 대한 투지와 각오는 실로 대단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재조직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주 목적은 구제활동, 모금활동 뿐 아니라 남성과 동등한 독립운동의 전선에서 싸우기 위한 조직의 개편이었다(이정은, 2013: 16). 특히 개편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특징은 적십자부와 결사부를 신설한 것으로, 이들이 보다 강력한 항일투쟁 혹은 독립전쟁의 수행을 염두 에 두고 활동하고자 했음을 보여주는 것(유준기, 2009: 10)이라고 할 수 있다. 3.1 운동 이후 설립된 상해임시정부에서는 항일 독립전쟁에 대비해 부상자 치 료를 염두에 두고 구호하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대한적십자회를 조직하 였다. 대한적십자회 총지부를 경성에 설치하고 경성 수은동 3번지에 사무소 를 두었다(장기홍, 1934: 192-195). 이는 일본과 전쟁을 치를 경우 즉각적으 로 전장에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함을 의미했다. 따라서 개편된 조직에서 적 십자부의 의미는 매우 큰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세브란스 간호부 출신인 이정 숙은 적십자부에 적임자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본부의 구성원들은 대부분이 20대 연령층으로 서, 직업별로는 간호부, 교사, 기독교 전도사 등이 주류를 이루었고 종교는 거 의가 기독교인들이었다(국사편찬위원회, 1990). 그 중에서도 간호부와 같은 병원관계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정신여학교 관계자 11명을 제외하면, 세브 란스 병원 관계자 29명, 동대문 부인병원 관계자 13명 등으로 28) 전체 80명 중 절반이상이 간호부였다. 이는 수입 있는 직장을 가진 여성들이 많지 않았던 28) 대한애국부인회원의 검거와 취조종결-황애덕, 마리아 등 구명이외엔 모두 용서해, 매일 신보, 1920년 1월 19일. 20 醫 史 學

김숙영 : 간호부 이정숙의 독립운동 당시, 간호부는 독립자금을 모으고, 대인 접촉에서 의심받지 않고 접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며, 독립전투가 벌어질 경우 부상자 치료 등 실질적인 독 립전쟁에 부응할 조직으로 생각할 수 있다(이정은, 2013: 17). 1920년 6월 7일 열린 대한애국부인회 회원들의 제 1회 공판에서, 김마리 아는 애국부인회의 목적을 교육보급과 인격향상이라고 거짓 증언하였으나, 1920년 6월 8일 일본 검사는 그들에게 형을 구형하면서, 여자교육을 목적한 것이라면 무슨 연고로 대한민국애국부인단 이라는 불온한 명칭을 붙였으며 이정숙과 백신영을 결사대원으로 추천하였으니 전쟁에 나가지 않는 이상에 결사대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듣지 않아도 독립운동의 불온단체인 것은 사 실이라고 하였다. 29) 이를 통해 미루어 봐도 결사부의 신설의미는 독립전쟁에 대한 대비를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취지문은 다음과 같다. 고어에 말하기를 나라 사랑하기를 내 집같이 하라 하였거나, 가 족이 집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집을 이룰 수 없고, 국민이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나라를 보전하기 어려울 것은 아무리 愚 夫 愚 婦 라도 밝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한 분자이다. 인권을 찾고 국권을 회복 할 최대의 목표를 향하여 우리에게는 다만 전진이 있을 뿐이요, 추 호의 후퇴를 용허할 수 없다. 국민성 있는 주인은 용기를 분발하고 이상을 높이고 사기를 상통함으로써 공고한 단결을 도모할 것이 니, 일제히 찬동하여 주기를 천만 희망하는 바이다(최은희, 1991: 27-28에서 재인용).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취지문에서 살펴보듯이,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여 29) 김영삼 저서(1965) 중 348-372쪽의 대한청년외교단과 제 1회 공판 방청 속기록의 내용의 일부를 정리한 것이며, 이 글에서는 결사대원으로 이정숙과 백신영을 추천하였다고 나와 있어, 1919년 12월 19일 매일신보 에서 보도한 결사장에 이성완, 백신영 이란 내용과 차 이가 있다. 제24권 제1호(통권 제49호) 1-34, 2015년 4월 21

KIM Sook Young : Lee Jungsook,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and a Nurse during the 성들도 하나가 되어 분연히 일어나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대한민국애국부인 회는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상해임시정부의 응원을 위하여 각 지부에서 의연 금을 모으고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대표를 상해로 파견해 임시정부에 건의 서를 제출하며 적십자사를 조직하고 국내 각 중요지점에 지회를 설립하고 회 원 획득에 주력하였던 것이다. 30)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상해 임시정부에 보 낼 군자금으로 6천원을 모으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31) 3) 수감시절 및 출옥이후의 독립운동 활동 이정숙은 3.1운동 이후 정신여학교 동창들과 함께 약 2년 6개월의 수감생 활을 하게 된다. 이 절에서는 이정숙의 힘들었던 수감생활과 출옥 이후의 삶 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일원이며 회장이었던 오현주는 회원들을 배신하고 대구경찰서 형사 유근수를 상해임시정부 밀사라고 속여 김마리아와 장선희 로 하여금 조직의 내부사정을 몰래 알아내고자 하였다. 오현주가 조직 내부 의 사정을 밀고함에 따라 1919년 11월 28일 서울과 대구에서 80여명의 간부 와 회원들이 일제히 검거되었다. 이때 김마리아를 비롯하여 이정숙, 신의경, 장선희, 황애덕, 이성완 등이 검거되어, 남대문역으로 이송된 후 대구로 압송 되었고 그때부터 수감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애국부인회사건은 사회적으로 매우 큰 이슈가 되어, 매일신보 는 12월 19일자 3면 전체를 할애하여 구체적 으로 그 정황을 기사로 게재하였다. 애국부인회는 처음에 재령 명신여학교 교사 오현관과 군산 메리불 덴 여학교 교사 오현주 및 경성 세브란스 병원 간호부 이정숙 등이 만세사건으로 입감된 자와 가족을 구제할 목적으로 4월 상순 경성 에 혈성단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회령, 정평, 목포, 전주, 광주, 흥 30) 화제의 김마리아양(1), 동아일보, 1932년 7월 29일. 31) 김영순, 그 만행 그 진상 내가 겪은 일제침략을 증언한다(5), 마지막수업, 동아일보, 1982 년 8월 5일. 22 醫 史 學

김숙영 : 간호부 이정숙의 독립운동 수 등지에 지부를 결성하였는데 당시 때마침 임창준, 이병철(청년 외교단 총무) 등은 여자고보 졸업생 중 기독교신자를 규합하여 대 한독립애국부인회란 것을 조직하려던 중이었는데 5월경 임정에 회원인 김원경을 대표로 파견할 제 혈성단은 혈성단의 대표도 겸 하여 달라는 의촉( 依 囑 )을 받게 되었고 6월중에는 이병철이 동지 경하순, 최숙자, 김희열, 김희옥 4명과 같이 혈성단 대표 오현주와 협의하고 이에 두 단체가 합동하여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 게 된 것이다. 매일신보 기사에서 대구검사국으로 송치된 자의 명단을 공개하였는데 청 년외교단 10명과 이정숙, 오현주, 오현관, 김마리아, 장선희, 김영순 등을 포 함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25명이 포함되어 있다. 애국부인회의 발각 및 검거사건은 그 사건의 위중성 때문에 동경판 매일 신보 32) 에도 다음과 같이 실렸다. 경성을 중심으로 조선 각지의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대한독립애국 부인회는 올해 4월 설립이후 이른바 상해 임시정부 및 재외 불령선 인( 不 逞 鮮 人 ) 33) 과 기맥을 통하여 경성에 본부, 각도 요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항상 청년외교단이라 칭하는 비밀결사와 연락하며 독립 사상의 선전, 불온문서 배포, 회원 모집 및 운동비 징발 등에 종사 하였다. 회원은 백 수십명을 상회하며 6,000원을 독립운동 자금으 로서 임시정부에 제공하는 등 은밀히 활동하고 있던 것이 바로 청 년외교단의 검거, 증거서류의 압수에 의해 발각되었다. 그 이래 경 상북도 경찰부에서 엄중 탐색 중 내부 사정이 판명되어 11월 28일 각 도 경찰부가 일제히 검거에 착수하고 지난 7일까지 14명을 체 포하였으며, 계속해서 잔당 수색 중인데 그들을 합치면 결국 30명 내외의 검거를 보게 될 것이다. 체포된 자 중 주요인물은 다음과 같 32) 매일신보 1919년 12월 19일자(동경판), 기독교신자로 이루어진 조선부인 음모단 체포, 청 년외교단의 검거로 내부사정 폭로되어 14명 체포, 수뇌는 묘령의 여교사로 기록되어 있다. 묘령의 여교사는 김마리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묘령의 여교사로 쓴 것을 보아 체 포당시까지는 김마리아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33) 일제 강점기,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 사람을 이르던 말이다. 제24권 제1호(통권 제49호) 1-34, 2015년 4월 23

KIM Sook Young : Lee Jungsook,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and a Nurse during the 고, 그 외에 각 도의 지부장이 많다. 경성부 회장 기독교장로파 정신여학교 교사 김마리아(26세) 동 서기 신의경(22세) 동 재무원 장선희(24세) 동 서기 김영순 세브란스 병원 간호부 이정숙(22세) 결사장( 決 死 長 ) 기독교 남감리파 배화여학교 교사 이성완(23세) 김마리아와 황애덕은 검거되어 경찰국 제 3부에 이송되고 이정숙을 비롯 한 나머지는 대구경찰서 격검장에 수감되었다. 검거자 중 취조를 받은 사람 은 52명이었는데 43명은 불기소로 풀려나고, 이정숙, 김마리아, 김영순, 백신 영, 신의경, 유인경, 이혜경, 장선희, 황애덕만 예심에 회부되었다. 34) 예심에 회부된 이정숙은 6개월간의 예심을 거쳐 이정숙은 1920년 6월 7일 오전 9시 부터 대구지방법원 제 1호 법정에 섰다. 이정숙의 제 1회 공판 속기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김영삼, 1965: 352-354 에서 재인용). 문: 그전에 무엇을 하였느냐? 답: 세브란스 병원에 있었오. 작년 사월에 오현주가 와서 혈성부인 회를 말씀합디다. 문: 혈성부인회는 무엇이냐? 답: 애국부인회요, 곧 그것은 구제올시다. 문: 구제는 무슨 구제냐? 답: 감옥 속에서 고생하는 사람에게 사식도 차입하고 그 가족을 구 제한다고 하였오. 문: 그러면 작년 삼월 소요 이후에 감옥에 들어간 사람을 목적한 것이냐? 답: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떠한 죄인이든지 외국사람까지라도 구하 자는 목적이오. 문: 작년 유월에 돈을 낸 일이 없느냐? 34) 대한애국부인회원의 검거와 취조종결-황애덕, 마리아 등 구명이외엔 모두 용서해, 매일 신보, 1920년 1월 19일. 24 醫 史 學

김숙영 : 간호부 이정숙의 독립운동 답: 정신여학교 졸업 회비금이라고 낸 일이 있어서 오현주씨에게 보냈오. 사월 중에 임득산이가 상해로부터 와서 그 사람이 관 계부인 대표를 보내려할 때에 김원경씨를 보냈오. 문: 여비는 어떻게 준비하였느냐? 답: 알 수 없오. 문: 두 부인회가 합동할 때에 너도 참가하였느냐? 답 : 그런 일은 없오. 작년 칠월에 함흥 성진에 가서 동회의 설명을 하고 의연금을 얻어온 일이 있소. 문: 시월 구일에 김마리아 집에 모인 일이 있으며 회장 마리아가 무 엇이라 말하였으며 너는 적십자사장이요 김영숙은 서기로 된 일이 있었느냐? 답: 그렇소. 일반적으로 김마리아나 황애덕이나 알았오. 회( 會 )의 내용이 분립되는 것은 몰랐오. 문: 그러면 김마리아가 회를 새로 설립한 것이냐? 그전에 오현주가 규칙은 받아 둔 일이 있느냐? 답: 없오 문: 부인회 도장은 본일이 있느냐? 답: 김마리아의 새로 설립한 회는 오현주의 회와 목적이 틀리는 것 을 물어보았으나 자세한 내용은 설명치 아니함으로 자세한 일 은 몰랐오... 이 신문조서를 통해서도 이정숙이 애국부인회의 설립 목적이 구호에 있음 을 진술하고, 동료회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마리 아와 황애덕은 징역 5년, 김영순 등 나머지에게는 징역 3년이 구형되었다. 공 판은 7일에 이어, 8일에도 이어졌으며, 6월 29일 선고공판에서 김마리아, 황 애덕은 징역 3년, 이정숙, 김영순, 장선희는 징역 2년, 신의경, 유인경, 백신영, 이혜경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35) 이들 모두는 불복하고 공소를 제기하였 다. 12월 16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시작된 항소심은 12월 27일 미결기간 100 일을 본형에 산입한 것 외에는 제 1심과 같은 판결로 끝났다. 이정숙의 감옥 생활은 어떠하였을까? 일제시기 특히 독립운동가들의 감옥 35) 대한애국부인회와 대한청년외교단의 판결언도, 김마리아는 3년 그 외에 이년, 일년으로, 대구 지방법원에서, 매일신보, 1920년 6월 30일. 제24권 제1호(통권 제49호) 1-34, 2015년 4월 25

KIM Sook Young : Lee Jungsook,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and a Nurse during the 생활은 매우 비참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정숙이 자신의 수감생활을 직접 글로 남긴 것은 없지만 그 때 같이 수감생활을 했던 정신여학교 동창들 의 글을 통해 비참했던 수감생활을 엿볼 수 있다. 장선희는 수감생활의 고통 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겨울은 겨울대로 살을 에는 듯한 혹한을 견뎌내기가 힘겨웠지만,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감방 안의 여인들은 더운 여름철 감방의 고 통을 생각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감방에서는 겨울철보다도 여름 철이 더 지독했다. 찌는 듯한 여름철에는 굴 속 같은 감방 안의 변 기통에서 풍겨 나오는 악취가 코를 찔러 숨통이 막히는 것만 같았 다. 그리고 감방 벽 틈에 끼어있는 빈대가 줄을 지어 사정없이 습 격을 하는가 하면, 모기들의 공세가 제트기와 같았으며, 벼룩이 옷 사이로 뛰어 들어와 따끔따끔 물어뜯는데도 일어나서 털 수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빈대, 모기, 벼룩, 똥냄새, 그 모든 것이 나라 잃 은 슬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다짐하며 고난을 극복하 고자 했다(김성은, 2013: 132에서 재인용). 이정숙 역시 고통스러운 감옥 생활을 감수하였고 감옥 안에서도 간호인으 로서 독립운동가로서, 신앙인으로서 삶을 지켜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1920 년 5월 26일자 동아일보 의 기사에는 아직 보석되지 아니한 여자중에도 이 정숙은 겨울동안에 발이 얼어 붙은 것이 그대로 덧나서 촌보도 걸음을 옮기 지 못하고 옥중에서 고통 중이라더라 라고 쓰고 있어 심한 동상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36) 2년을 선고 받고 수감생활을 하던 중 1922년 5월 6일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이정숙, 장선희, 김영순이 대구감옥에서 가출옥하였다. 동아일보 1922년 5월 9일자에 4명의 사진과 함께 출옥한 애국부인단 애국부인단 사건 의 네 규수, 금번 대구감옥에서 가출옥 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실렸다. 이들 은 여전히 조선사회의 기대와 주목을 받고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들 이었다. 36) 김마리아보석- 백신영과 함께 보석, 이정숙도 족부에 병, 동아일보, 1920년 5월 26일. 26 醫 史 學

김숙영 : 간호부 이정숙의 독립운동 신문기사에 따르면, 이 네 규수는 대구감옥에서 오전 11시경에 출옥하여 즉 시 북행하는 열차를 타고 경성으로 돌아왔다고 전하면서 황애덕과 김영순은 서울에 체재할 모양이며 이정숙은 함경남도 북청으로, 장선희는 황해도 재령 으로 각자 자신의 본적지를 향하여 출발할 것이라고 전했다. 황애덕은 출옥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감옥이라는 것은 세상의 지옥입니다. 누구를 막론하 고 육체상 고통이 어찌 없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이라는 것은 정신생활을 하 는 동물이니까 나는 그 고통을 나의 책임으로 알고 즐거움으로 지내었습니다. 그럼으로 나는 그 감옥을 나의 피난처로 알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후 이 날까지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도 머리가 혼란하고 정신 이 없어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장선희는 나는 이 세상에서 보지 못한 별세상을 구경하였습니다. 복역 중 에는 여러 가지로 나의 부족을 깨닫고 출옥하는 날에는 어찌하던지 많이 배우 고, 많이 알아보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출옥하였슨즉 나는 장차 공부를 하 고자 합니다 라고 말하였다. 김영순은 (얼굴에 슬픈 빛을 가지고 오히려 눈물 섞인 말로) 나는 감옥에 서 느낀 것은 슬픔뿐이외다. 나는 슬픔으로 갔다 슬픔으로 왔습니다. 옥중에 서 어머님이 별세하신 부고를 접하고는 그저 눈물밖에 흘린 것이 없었습니다. 대구로 압송될 때에도 어머니를 뵈올지... 라고 전하고 있다. 이정숙은 (얼굴에 매우 쾌활한 빛을 띠고) 나는 꿈과 같이 갔다가 꿈과 같 이 왔습니다. 아직도 꿈을 꾸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참말로 감옥은 꿈과 같은 별세상입니다. 복역중에는 감옥에 대한 경험을 많이 얻었으며 출옥 후에는 공부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럼으로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이후 공부를 하고자 합니다 라고 출옥 소회와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고 있다. 이 인터뷰 기사를 통해서 볼 때, 이들은 20대 젊은 나이의 연약한 여성이 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신들의 긴 옥중생활을 담담하고 의연하게 묘사 하고 있다. 이정숙은 앞으로도 계속 공부하겠다는 말을 남김으로써 모진 고 문과 고통 속에서도 지식인 여성으로서의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욕망과 투지 제24권 제1호(통권 제49호) 1-34, 2015년 4월 27

KIM Sook Young : Lee Jungsook,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and a Nurse during the 를 확인할 수 있다. 가출옥 후의 이정숙의 활동을 보여주는 자료는 매우 제한적이어서 구체적 으로 알기는 어렵다. 1925년 1월 20일자 조선일보 에 의하면, 1925년 1월 17 일 이정숙, 이도, 최화장월, 김정숙, 김현제 등 20여명이 시천교당에서 여성해 방을 목표로 신구여성을 망라하는 조선여성해방동맹 발기총회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이정숙은 1925년 2월 21일에 조직된 경성여자청년회 의 초대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이정숙이 옥고 를 치른 후에도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우리나라의 경우 이렇다 할 여성단체가 존재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3.1 운동이라는 전 민족적 항일투쟁에서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투옥, 희생의 경험은 여성들의 정치의식, 사회의식을 획기적 으로 개발시키기에 충분하였다. 한국근대여성사(하) 에 수록된 1905~1909 년간의 재경 여성단체를 보면 대한부인회, 한국부인회(귀족부인회), 국채 보상부인회 등 14개가 망라되어 있다(최은희, 1991: 178). 그 중 한국부인회 는 당시 귀족부인회로 별칭 되었던 한일부인회로서 엄비를 비롯한 혁혁한 명 문대가의 부인들이 회원으로 망라되어 있었다. 그러나, 1919년~1924년간에 존재했던 여성단체는 1905~1909년간에 존재했던 여성단체와는 그 명칭부 터가 성격을 달리하면서 종교적, 사상적 바탕을 가진 단체들이 출현하였다. 3.1운동, 애국부인회 활동의 경험을 통해 여성의 각성이 고무되어 있는 가 운데, 1920년대부터는 공개적, 합법적인 여성단체가 조직되었다. 한국의 여 성단체는 1920년에 12개, 1921년에 15개, 1922년에 29개를 기록하게 된다(이 태영, 1969: 779). 1920년대 여성단체가 급속히 증가하면서 여성운동의 방향 은 민족주의에서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이 유입되기 시작한다. 3.1운동 후 한 국의 민족운동을 시대 구분적으로 본다면, 1919~21년은 점진 및 급진적 민족 운동의 전진과 민족주의 운동 안에서의 사회주의 경향의 출현을 보게 된 시기 였고, 1922~23년 동안은 민족주의 운동 안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분리를 보게 된 시기였다(국사편찬위원회, 1990). 28 醫 史 學

김숙영 : 간호부 이정숙의 독립운동 이정숙이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던 여성해방동맹 은 기존의 여성운동이 신 여성에 한정되었던 것에 반하여 신여성, 구여성을 망라한 여성대중조직을 표 방한 것으로, 1925년 1월 17일 조선여성동우회 의 중도파인 김현제가 대한 민국애국부인회 창립멤버의 한 사람이었던 이정숙과 함께 하여 서울에서 발 기한 단체이다.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다만 국가보훈처에 요청 하여 받은 가족관계 자료에 의하면, 장남이 있었으나 이에 대한 기록은 없고, 차남 궁임 가 1923년생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차남이 1923년생이고 장남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감옥에 들어가기 전인 1919년 11월 이전에 이미 결혼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남편이름이 궁사 이므로, 자료를 검색해 본 결과, 조선총독부 소속관서 직원록(1925) 에서 함경북도 회령의 도립의원인 회령의원 의 의원으로 나타난다. 더 이상의 자료는 찾을 수 없었 고, 이정숙은 해방 무렵 북한지역에서 거주하였다고 알려져 있고(대한간호협 회, 2012:100), 직업이 간호부였으므로 의원 관직을 가진 궁사 은 이정숙의 남편이 아닐까 추정된다. 정확한 사실 여부는 추후 더 밝혀야 할 것이다. 사 망일은 1950년 7월 22일이다. 3. 맺음말 이정숙은 1896년 3월 9일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나 정신여학교 졸업반에 재학 당시 3.1 운동을 맞이하게 된다. 3.1운동 당시 세브란스 간호부로 근무 하면서 이 운동을 계기로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이정숙이 독립운동가로서 살아가게 되는 데 큰 영향을 준 것은 정신여학교 라는 학력배경과 직업배경으로서 세브란스 병원의 조직 풍토와 분위기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두 기관의 공통점은, 당시 부녀자로서의 삶 이외에는 기대하기 어려웠던 여성들을 자각하게 하고 나라에 대한 애국애 족의 사상을 심어주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제24권 제1호(통권 제49호) 1-34, 2015년 4월 29

KIM Sook Young : Lee Jungsook,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and a Nurse during the 이정숙은 정신여학교의 교육적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사회전반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고, 재학시절 3.1운동을 경험하면서 그 당시 여성으로서의 한계 를 극복하고 사회문제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었을까? 고민하였을 것 이다. 3.1운동 당시 자연스럽게 부상자들을 돌보는 데 합류하면서 여성의 특 성을 살린 간호 라는 직업을 택하게 되었다. 이런 직업적 정신을 바탕으로 이정숙은 혈성단애국부인회, 대한민국애 국부인회, 적십자 경성지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1920년대 조국의 독립을 위 하여 활약하였다. 이정숙은 또한 1925년에는 여성 해방을 주장하는 사회운동 의 일환으로 조선여성해방동맹 의 발기인으로, 경성여자청년회 의 초대 집 행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끊임없이 사회현상에 관심을 갖고 여성사회의 리더 로서 활동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 일제 강점기라는 어려운 시기를 치열하게 살아가며 독립 운동을 하였던 직업인 간호부 이정숙의 행적을 조명함으로써, 우리 의료인들 은 각 시대가 요구하는 의료인의 참모습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 리라 생각된다. 어려운 시기를 살았던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일차사료가 부족하 듯이, 이정숙의 삶을 고찰할 수 있는 일차사료 역시 제한적이었다. 차후 이정 숙의 삶에 대한 일차사료의 적극적 탐색과 발굴을 통해 이정숙 삶의 공백의 부분, 출생부터 정신여학교 입학까지와 1930년대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를 메우는 것을 추후 과제로 삼고자 한다. 색인어: 간호부, 독립운동가, 정신여학교, 세브란스 병원, 민족주의, 대한민 국애국부인회, 여성해방동맹 투고일: 2015. 03. 13 심사일: 2015. 03. 20 게재확정일: 2015. 04. 10 30 醫 史 學

김숙영 : 간호부 이정숙의 독립운동 참고문헌 REFERENCES <자료> 뉴스천지, 독립신문, 동아일보, 매일신보, 여성신문, 조선일보, CBS노컷뉴스, 신가정 오현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자료, 1949년 3월 28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an&setid=41461&position=8). 검 색일: 2015. 2. 8. <연구논저> 국가보훈처,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7 (1990), pp. 593-594.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 8: 3.1운동이후의 민족운동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1990). 김성은, 장선희의 삶과 활동- 독립운동 및 기예교육, 이화사학연구 47 (2013), pp. 121-151. 김세환, 배재 팔십년사 (서울: 배재학당, 1965). 김영삼, 김마리아전 (서울: 중앙문화사, 1965). 김준엽 김창순, 한국공사주의운동사, (서울: 고려대학교 출판부, 1967). 노영희, 김마리아, 민족혼에 대한 자각과 여성해방 운동, 한림일본학연구 6 (2001), pp. 6-17. 대한간호협회, 간호사의 항일구국운동 (서울: 대한간호협회, 2012). 박용옥, 1920년대초 항일부녀단체 지도층 형성과 사상, 역사학보, 69 (1976), pp. 137-168. 박용옥, 한국근대 여성 운동사 연구 (서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박용옥, 김마리아 (서울: 홍성사, 2003). 박형우, 1910년대 독립운동과 세브란스, 연세의사학 12-1 (2009), pp. 19-32. 백낙준, 한국개신교사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79). 연동교회 80년사 편찬위원회, 연동교회 팔십년사 (서울: 연동교회, 1974). 연세대학교 간호대학, 연세대학교 간호대학 100년사 (서울: 연세대학교 간호대학, 2008). 윤정란, 일제강점기 박자혜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아내로서의 삶, 梨 花 史 學 硏 究 38 (2009), pp. 67-94. 이꽃메, 일제 강점기 산파 정종명의 삶과 대중운동, 의사학, 21-3 (2012), pp. 551-591. 제24권 제1호(통권 제49호) 1-34, 2015년 4월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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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24: 1-34 Apr 2015 pissn 1225-505X, eissn 2093-5609 C The Korean Society for the History of Medicine http://dx.doi.org/10.13081/kjmh.2015.24.1 http://medhist.kams.or.kr -Abstract- Lee Jungsook,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and a Nurse during the KIM Sook Young * * Seoul Women s College of Nursing, Seoul, KOREA This article examines the life of Lee Jungsook, a Korean nurse, as a independence activis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Lee Jungsook(1896-1950) was born in Bukchung in Hamnam province. She studied at Chungshin girl's high school and worked at Severance hospital. The characteristics and culture of her educational background and work place were very important factors which influenced greatly the life of Lee Jungsook. She learned independent spirit and nationalism from Chungshin girls' high school and worked as nurse at the Severance hospital which were full of intense aspiration for Korea's independence. Many of doctors, professors and medical students were participated in the 3.1 Independence Movement. * Seoul Women s College of Nursing Address: 38 Ganhodae-ro (287-89 Hongje3-dong), Seodamun-gu, Seoul, KOREA, 120-742 Tel: 82-2-2287-1733 / E-Mail: tina@snjc.ac.kr Received: Mar. 13, 2015; Reviewed: Mar. 20, 2015; Accepted: Apr. 10, 2015 제24권 제1호(통권 제49호) 1-34, 2015년 4월 33

KIM Sook Young : Lee Jungsook,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and a Nurse during the Lee Jungsook was a founding member of Hyulsungdan( 血 誠 團 ) who tried to help the independence activists in prison and their families and worked as a main member of Korean Women's Association for Korean Independece( 大 韓 愛 國 婦 人 會 ) and Kyungsung branch of the Korean Red Cross( 大 韓 赤 十 字 社 京 城 支 部 ). She was sent to jail by the Japanese government for her independence activism. After being released after serving two years confinement, she worked for the Union for Women's Liberation( 女 性 解 放 同 盟 ) as a founding member. Lee Joungsook was a great independence activist who had a nursing care spirit as a nurse. Keywords : nurse, independence activist, Chungshin girl s high school, Severance hospital, nationalism, Korean Women s Association for Korean Independence, the Union for Women s Liberation 34 醫 史 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