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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永 樂 帝 의 北 京 遷 都 와 그 意 義 * 全 淳 東 ( 忠 北 大 ) Ⅰ. 序 言 Ⅱ. 明 初 國 都 에 대한 논의 Ⅲ. 北 京 遷 都 를 위한 準 備 와 諸 方 策 1. 皇 太 子 朱 標 西 安 派 遣 2. 北 京 에 대한 永 樂 帝 의 關 心 3. 北 京 建 設 의 提 案 4. 北 京 强 化 를 위한 努 力 Ⅳ. 遷 都 를 위한 重 臣 會 議 와 北 京 遷 都 1. 南 京 의 文 武 重 臣 會 議 2. 都 城 完 成 과 北 京 遷 都 3. 三 大 殿 燒 失 후의 輿 論 과 蒙 古 親 征 Ⅴ. 結 論 : 北 京 遷 都 의 意 義 Ⅰ. 序 言 명초 靖 難 의 役 (1399-1402) 에 의하여 조카 建 文 帝 (1399-1402) 를 몰 아내고 황제에 오른 사람은 제3 대 成 祖 永 樂 帝 (1360-1424), 재위 1402-1422) 이다. 1) 그는 창업군주인 부친 明 太 祖 洪 武 帝 (1368-1399) 에 의해 형성된 중앙집권적 정치 체제를 이어받아 강력한 통일적 지배 체 제를 확립한 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영락제를 평가할 때에 평가의 주요 요소 중의 하나는 수도를 남경 * 이 논문은 2008학년도 충북대학교 학술연구지원사업의 연구비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1) 永 樂 帝 의 본명은 朱 棣 (1360-1424) 이다. 그는 明 太 祖 洪 武 帝 의 4남이며 어머니 는 孝 慈 高 皇 后 馬 氏 이다. 한편 그의 생모는 高 麗 사람, 또는 蒙 古 사람이라는 설도 있다. 그의 廟 號 는 당초 太 宗 이었으나, 훗날 嘉 靖 帝 때 成 祖 로 바뀌었 다. 시호는 啓 天 弘 道 高 明 肇 運 聖 武 神 功 純 仁 至 孝 文 皇 帝 이다. 한국에서는 그의 연호를 따서 대개 永 楽 帝 라 부르고 있다.

96 中 國 史 硏 究 第 65 輯 (2010. 4) 에서 북경으로 옮긴 일, 곧 北 京 遷 都 이다. 북경은 주로 여진족, 몽골 족과 같은 이민족이 있고, 중국의 경제 문화의 중심부인 강남에서 멀 리 떨어져 있으며, 북쪽 국경과 너무 가까워 이민족의 침략을 받을 우 려가 있다는 점에서 당시 그렇게 이상적인 도시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1421 년에 영락제가 燕 王 시절부터 자신의 세력 기반이었던 북경으로 수도를 옮김으로써 이후 명조는 華 夷 體 制 를 아우를 수 있는 통일적 지배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그 후 북경은 오늘날 까지 중국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여 왔다는 데서 영락제의 북경 천도의 문제는 여러 학자들의 관심 대상이 되어 왔다. 명대 북경 천도에 관한 연구는 1930 년대 吳 晗 의 明 代 靖 難 之 役 與 國 都 北 遷 2) 을 시작으로 여러 학자들이 관심을 가져왔다. 3) 吳 晗 은 이 논 2) 吳 晗, 明 代 靖 難 之 役 與 國 都 北 遷 ( 吳 晗 選 集, 中 國 現 代 社 會 科 學 家 選 集 叢 書, 天 津 人 民 出 版 社, 1988; 原 載 淸 華 學 報 第 10卷 第 4 期, 1935年 10 月 ) 3) 영락제 북경 천도에 관련된 연구물로는 全 淳 東, 永 樂 政 權 의 形 成 과 그 性 格 ( 湖 西 史 學 13, 湖 西 史 學 會, 1985); 尹 貞 粉, 永 樂 帝 의 經 筵 運 營 과 그 特 徵 ( 中 國 史 硏 究 49, 2007); 曹 永 憲, 北 京 首 都 論 과 大 運 河 ( 中 國 史 硏 究 55, 2008); 全 淳 東, 永 樂 帝 의 外 征 과 政 治 的 意 義 ( 中 國 史 硏 究 54, 2008); 郭 厚 安, 靖 難 之 役 及 其 對 明 代 專 制 主 義 中 央 集 權 的 影 響 ( 西 北 師 院 學 報 1982-1); 陳 梧 東, 明 成 祖 爲 何 遷 都 北 京 ( 文 史 知 識 1984-3); 張 德 信, 明 成 祖 遷 都 述 論 ( 江 華 學 刊 1991-3); 張 奕 善, 明 成 祖 政 治 權 力 中 心 北 移 的 硏 究 ( 朱 明 王 朝 史 論 文 輯 國 立 編 譯 科 主 編, 1991); 萬 明, 明 代 兩 京 制 度 的 形 成 及 其 確 立 ( 中 國 史 硏 究 1993-1); 範 德 (Edward L. Farmer), 論 明 之 移 都 北 京 ( 明 史 硏 究 4, 黃 山 書 社, 1994), pp.81-82; 晁 中 辰, 明 成 祖 传 ( 人 民 出 版 社, 1994); 楊 杭 軍, 評 永 樂 帝 的 五 次 北 征 ( 河 南 師 範 大 學 學 報 ( 哲 學 社 會 科 學 版 ) 22-2, 河 南 師 範 大 學, 1995); 北 京 大 學 歷 史 系 北 京 史 編 寫 組, 北 京 史 ( 北 京 出 版 社, 1985); 商 傳, 永 樂 皇 帝 ( 北 京 出 版 社, 1989); 毛 佩 琦, 永 樂 帝 大 傳 ( 遼 寧 敎 育 出 版 社, 199Ed; 楊 林, 永 樂 皇 帝 ( 知 書 房 出 版 社, 1997); 伴 野 朗, 永 樂 帝 ( 德 間 書 店, 1999); 王 日 根 何 鋒, 細 說 明 成 祖 ( 上 海 人 民 出 版 社, 2006); 山 根 幸 夫, 明 帝 國 の形 成 とその發 展 ( 世 界 の歷 史 11, ゆらぐ世 界 帝 國, 筑 摩 書 房, 1961); 萩 原 淳 平, 明 朝 の政 治 體 制 論 ( 京 都 大 學 文 學 部 硏 究 紀 要 11, 1967); 宮 崎 市 定, 洪 武 から永 樂 へ ( アジア史 論 考 下, 朝 日 新 聞 社, 1976; 原 載 東 洋 史 硏 究 27-4, 1975); 寺 田 隆 信, 永 樂 帝 ( 中 央 公 論 社, 1997); 壇 上 寬 明 朝 專 制 支 配 の 史 的 構 造 ( 汲 古 書 院, 1995); 永 樂 帝 ( 講 談 社, 1997); 新 宮 学, 北 京 遷 都 の研 究 -近 世 中 国 の首 都 移 転 - ( 汲 古 書 院, 200Ed; John W. Dardess, Confucianism and Autocracy (Univ. of California Press, 1983); Edward L. Dreyer, Early

永 樂 帝 의 北 京 遷 都 와 그 意 義 ( 全 淳 東 ) 97 문에서 태조 홍무제가 북변의 위협을 막기 위하여 제왕분봉책을 실시 하였으며, 홍무제가 죽은 후 즉위한 건문제는 삭번 정책을 취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정난의 역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카 건문제를 몰아내고 즉위한 영락제는 강력한 제왕의 존재가 다시 제권을 위협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기에 황제 권력의 안정을 위해 삭번 정책을 취하였고, 그 결과 북변 방비의 취약성이 대두하였으며, 이 문 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도를 북경으로 옮겼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후 여러 학자들이 연구를 거듭하면서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북 경 천도의 문제를 북방 문제와 더불어 황제권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접 근하는 경향이 많았다. 商 傳 은 永 樂 皇 帝 4) 에서 북경 천도와 함께 군 사력이 북방으로 중심 이동함에 따라서 명조는 통일국가적 기능을 담 당하게 되었다고 하였고, 張 德 信 은 明 成 祖 遷 都 述 論 5) 에서 북경 천도 는 명조 통치의 강화뿐 아니라 변경의 안정으로 말미암아 사회 경제 및 외교 영역에도 긍정적인 기능을 하였다고 지적하였으며, 萬 明 은 남경 경사 체제에서 벗어나 연왕 시절 근거지였던 북경으로 천도함으 로써 강남 지역에 팽배한 비판과 불만을 없앰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 하려 하였다고 하는 6) 등 북변 방비와 더불어 심리적 요인 및 정치 체 제의 확립 과정에서 접근하고 있기도 하다. 한편 일본에서는 북변 방비와 더불어 황제권 강화와 통일적 지배의 Ming China, A Political History 1355-1435 (Stanfod Univ. Press, 1976); Edward L. Farmer, Early Ming Government : The Evolution of Dual Capitals (Harvard U. P., 1976); The Ming Dynasty: Its Origins and Evolving Insititutions (Univ. of Michigan, 1978); Charls O. Hucker, The Ming Dynasty: Its Origins and Evolving Insititutions (Univ. of Michigan, 1978); Shih Shan Henry Tsai, The Ming Emperor Yongle (Univ. of Washington Press, 2001); Twitchett, Denis & Fairbank, J. K.,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7. The Ming Dynasty, 1368-1644 (Cambridge Uni. Press, 1989) 등이 있다. 4) 商 傳, 永 樂 皇 帝 ( 北 京 出 版 社, 1989), p.216. 5) 張 德 信, 明 成 祖 遷 都 述 論 ( 江 海 學 刊 1991-3), pp.124-129. 6) 萬 明, 明 代 兩 京 制 度 的 形 成 及 其 確 立 ( 中 國 史 硏 究 1993-1), pp.123-132.

98 中 國 史 硏 究 第 65 輯 (2010. 4) 입장이라는 시각에서 접근하였다. 山 根 幸 夫 는 건문제의 삭번 정책을 비판하면서 정난의 변을 일으켜 제위에 오른 영락제가 황제권 강화를 위해 삭번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그 결과 북변 방비에 차질을 가져와 자신의 근거지인 북경으로 천도하였다는 것이다. 7) 宮 崎 市 定 은 洪 武 か ら永 樂 へ-初 期 明 朝 の 性 格 8) 에서 홍무제는 쇄국 정책을 펼쳤으나 영락 제는 북경으로 천도함으로서 중국, 몽골, 만주 등 3자를 결합하여 하나 의 동아공동체를 지향하던 원 세조로의 회귀라고 말하면서 영락 정권 은 홍무 정권의 단절이라고 주장하였다. 萩 原 淳 平 은 明 朝 の政 治 體 制 論 9) 에서 영락제의 북경 천도는 정난의 역 이후, 몽골의 군사적 위협에 대비한 것이었고, 북경 천도는 화남체 제에서 통일 체제로의 비약적인 발전이라고 해석했다. 이어 檀 上 寬 은 明 朝 專 制 支 配 の史 的 構 造 明 王 朝 成 立 期 の軌 跡 -洪 武 朝 の疑 惑 事 件 と 京 師 問 題 をめぐって - 에서 영락 19년에 단행된 북경천도도 홍무조 이 래의 기정노선으로, 영락제는 홍무조의 방침을 충실히 계승하였을 뿐 이었다. 라고 하면서 북경 천도를 홍무제 방침의 연장선상으로 보고 있다. 10) 그간 북경 천도 문제를 집요하게 연구하여 온 구논문을 중심으로 11) 이라는 이름으로 新 宮 学 은 그간의 연 2004년에 北 京 遷 都 の研 究 -近 世 中 国 の首 都 移 転 - 541 쪽에 이르는 연구서를 간행해 내었다. 그는 이 책에서 홍무와 영락의 연속을 주장하는 檀 上 寛 의 설을 논박하고, 그 대신 북경 시스템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12) 정치의 중심지와 경제 7) 山 根 幸 夫, 明 帝 國 の形 成 とその 發 展 ( 世 界 の歷 史 11, ゆらぐ世 界 帝 國, 筑 摩 書 房, 1961), p.37. 8) 宮 崎 市 定, 洪 武 から永 樂 へ ( アジア史 論 考 下, 朝 日 新 聞 社, 1976; 原 載 東 洋 史 硏 究 27-4, 1968), pp.143-147. 9) 萩 原 淳 平, 明 朝 の政 治 體 制 論 ( 京 都 大 學 文 學 部 硏 究 紀 要 11, 1967), pp.90-92. 10) 檀 上 寬, 앞의 책, 明 朝 專 制 支 配 の史 的 構 造, pp.67-68. 11) 新 宮 学, 北 京 遷 都 の研 究 -近 世 中 国 の首 都 移 転 - ( 汲 古 書 院, 2004). 본서에 대한 大 田 由 紀 夫 의 서평이 史 學 雜 誌 ( 東 京 大 學 文 學 部 內 史 學 會 ) 114編 -7號 (2005) 에 게재되어 있다. 12) 위의 책, pp.49-51.

永 樂 帝 의 北 京 遷 都 와 그 意 義 ( 全 淳 東 ) 99 의 중심지가 일원화 된 홍무기의 남경 경사 체제에서 양자를 분리하여 상호 보완하고 물류와 재정의 일원화를 이룬 통일적 지배 체제를 경 시스템 이라 표현한 것이다. 이 연구서는 각종 실증적 사료와 정황적 증거를 동원하여 북경 천 도의 전체상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영락제의 북경 천도, 그 후의 남경 환도의 움직임, 선덕 정통기의 북경 수도의 공간 정비의 진전과 定 都 등 영락 연간에서 정통 연간에 걸친 시기를 시야에 넣고 천도의 전모 를 밝힌 역작으로, 북경 천도 연구의 기본서가 되고 있다. 13) 또한 북 新 宮 學 은 홍무제의 천도 방침과 영락제의 북경 천도가 다르 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홍무제와의 단절성을 부각시킴으로써 북경 천도 가 가지는 획기성을 보다 명료하게 하려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홍무 제가 만년까지 일관성 있게 천도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홍무 24년에 황태자를 섬서 지방에 파견한 것도 천도문제와 관련이 있으며, 황태자 가 서안에서 돌아온 후 갑자기 사망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홍무제는 천도를 단념하였다고 인식되어져 왔으나, 新 宮 學 은 홍무제가 홍무 11 년(1377) 에 이미 천도 구상을 버리고 남경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 체제 의 구축에 매진하였음을 논증하면서 영락 정권은 홍무 정권과의 단절 이라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영락제의 관심이 이러한 한족 사회 내 부에 머물지 않고 몽골 원조 시대에 확대된 중화 세계 를 계승하여 농경 사회에 그치지 않고 유목 세계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데에는 연구 자들이 별로 주의를 하지 않았다 14) 라든지, 북경 조영이 주로 華 夷 一 統 의 사업으로서 추진되었다 15)라고 서술하면서, 저자가 북경 천도의 13) 萬 明 도 일찍이 홍무초에서 정통 초기까지의 시기를 설정하여 明 代 兩 京 制 度 的 形 成 及 其 確 立 ( 中 國 史 硏 究 1993-1) 를 발표하였는데, 그는 이 논문에서 양 경 제도의 형성과 과정을 고찰하였다. 그는 창설기, 변화기, 확립기로 나누어 고찰하였는데, 여기에서 양경제의 실시 목적이 황제 권력을 강화하려는 것이었 으며, 이 양경제의 실시로 정치 군사의 중심과 경제의 중심이 유기적으로 결 합되어 실질적인 전국 통치가 이루어질 수 있었음을 밝혀내었다. 14) 新 宮 学, 앞의 책, p.12. 15) 위의 책, p.167.

100 中 國 史 硏 究 第 65 輯 (2010. 4) 획기성을 강조하면서 영락 정권을 홍무 정권과의 단절로 파악하려 하 고 있는데, 여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역사에서 단절인가 연속인가 하는 점은 단순히 나타난 역사적 현상만이 아니라 그 지향점을 고려해 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국내의 북경 천도에 관한 연구는 의외로 미약한 편이다. 그저 개설 수준에 머물고 있을 따름이며, 그것도 영락제를 언급할 때 부차 적으로 북경 천도를 소개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최근 영락제와 관련된 연구가 소개되고 있음은 고무적인 일이다. 최근 尹 貞 粉 은 영락 제의 經 筵 활동을 북경 천도와 관련시켜 고찰하였고, 16) 曹 永 憲 은 대운 하와 조량 문제를 북경 천도와 연관시켜 고찰하였는데 17) 이들 연구는 영락제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고 있다. 이상 북경 천도에 관한 기존 연구들을 보면, 천도의 원인을 북변 방 비와 정치 권력의 형성이라는 점에서 접근하고 있고, 그 의의를 논할 때에는 북경 천도가 명초 정치 체제 확립 과정에서 영락 정권이 홍무 정권의 연속이냐 단절이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북경을 수도로 하든, 남경을 수도로 하든, 모두 다 일장일단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그것의 우열을 가리기는 쉽지 않으며,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무엇을 지향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고찰한다면 남경이나 그 주변에 도읍을 하여 강 남을 중심으로 하였을 경우에는 전국 지배에 스스로의 한계가 있었 고, 18) 반면 북부 및 북경에 도읍을 할 경우에는 조건과 상황이 다르기 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중국의 통일적 지배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영락제의 북경 천도가 과연 홍무 정권과의 단 16) 尹 貞 粉, 永 樂 帝 의 經 筵 運 營 과 그 特 徵 ( 中 國 史 硏 究 49 집, 2007.8), pp.151-178. 17) 曹 永 憲, 北 京 首 都 論 과 大 運 河, pp.109-144. 18) 孫 權 의 吳 (222-280) 를 비롯하여 남북조시대의 남조, 또는 南 宋 (1127-1279) 이 그러하였듯이 이 왕조들은 전국을 통일적으로 지배하기보다는 하나의 지방 정 권에 머물고 만 셈이다.

永 樂 帝 의 北 京 遷 都 와 그 意 義 ( 全 淳 東 ) 101 절인가라는 데에 문제의 의식을 가지고, 기존 연구를 바탕으로 영락제 의 북경 천도 과정과 내용을 재검토하고 그 의의를 밝혀 보려 한다. 이것은 홍무에서 영락으로 이어지는 명초의 정치사를 안정된 중국 통 합의 실현 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에 먼저 해결되어져야 할 문제라 생 각되기 때문이다. Ⅱ. 明 初 國 都 에 대한 논의 명대사에서 국도 문제는 주원장이 기병한 초기부터 나온 얘기다. 주 원장이 명나라를 창업하기 이전부터 여러 신하들이 남경에 도읍을 정 할 것을 건의한 적이 있다. 일찍이 渡 江 전에 馮 國 用 은 남하하는 주원 장에게 金 陵 ( 南 京 ) 은 龍 蟠 虎 踞 의 길상의 땅이니 그곳을 도읍지로 삼 아야 한다. 고 주원장에게 권하였다. 19) 1355 년 도강하여 太 平 路 를 공략 할 때, 陶 安 도 주원장에게 金 陵 ( 南 京 ) 은 예로부터 여러 왕조의 도읍지 가 되었던 땅으로, 지세가 龍 蟠 虎 踞 의 땅이니 그곳을 차지하여 형세를 좆아 사방으로 나가면 어느 한 곳 평정되지 않을 곳이 없다 고 건의하 였다. 20) 그리고 원나라 호부 상서 張 昶 이 원의 관직을 주겠다는 조서를 가 지고 금릉에 와서 주원장에게 항복을 권유했을 했을 때, 21) 의 葉 兌 도 주원장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寧 海 출신 제가 듣기로는 천하를 얻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일정한 계획이 있다고 하는데, 韓 信 이 漢 高 祖 를 처음 만났을 때, 楚 와 漢 의 성패를 그렸고, 諸 葛 孔 明 이 草 廬 에 은거할 때 先 主 와 더불어 三 分 의 형세를 논했다는 것이 19) 明 史 卷 129, 馮 國 用 傳. 20) 明 太 祖 實 錄 卷 3 乙 未 (1355), 6 月 丁 巳 條 ; 明 史 卷 136, 陶 安 傳. 21) 이 때 주원장은 張 昶 이 원나라의 고관을 오래 역임하였고 또한 典 章 과 문물 제도에 통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行 中 書 省 都 事 에 임명하였으나, 함께 온 다른 사람들은 모두 처형하였다.

102 中 國 史 硏 究 第 65 輯 (2010. 4) 이것입니다. 지금의 계획은 마땅히 북으로 察 罕 帖 木 兒 와 단절하고 남으로 는 張 士 誠 과 병합하여 溫 州 와 台 州 를 초무하고 閩 과 越 을 공취하며 금릉 에 도읍하여 江 과 漢 으로 땅을 넓혀나가면, 兩 淮 를 넘어 중원을 엿보아 천하를 차지할 수 있고, 물러서더라도 장강을 경계로 스스로 지킬 수 있 습니다. 금릉은 예로부터 龍 蟠 虎 踞 하는 제왕의 도읍이라고 하니 풍부한 병력과 물자로서 공격하면 이길 것이요 수비하면 굳힐 것이니 백 명의 擦 罕 이 있다 한들 우리를 어찌하겠습니까? 22) 라고 하면서 금릉에 도읍지를 정하여 왕조를 창업할 것을 건의하자, 주원장은 이 때 원의 회유를 거절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계획을 세 웠던 것이다. 이처럼 여러 신하들과 책사들이 금릉은 도읍지의 형세를 가지고 있 다고 하면서 그곳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울 것을 권하였다. 이러한 건의들은 모두 당시 정세 분석에서 나온 것으로, 주원장은 마침내 이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라 개칭하였다. 하늘의 뜻에 응한다는 것이다. 金 陵 을 수도로 정하고 명칭을 應 天 주원장은 1364 년, 吳 王 이라 자칭한 후, 1366년 8월에 응천성을 확장 하고 금릉의 鍾 山 남쪽에 吳 王 新 宮 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 이듬해 (1367) 정월, 주원장은 국호를 吳 라 하고, 8월에 시작한 궁궐이 9월에 준공되어 오왕의 궁궐로 삼았는데, 그는 그곳에서 1368년에 황제로 즉 위하여 명나라를 개창하였던 것이다. 23) 일반적으로 수도란 정치, 군사, 경제, 그리고 지리적 조건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정해지는 것으로, 응천은 鍾 山 을 배산으로 하고 앞에 양자강이 흐르고 있어 풍수지리상 背 山 臨 水 가 잘 갖추어진 곳이다. 또 한 龍 蟠 虎 踞 의 형세를 가진 곳으로 지형이 험준하여 적을 막아내기 용 이한 곳으로 이름나 있었다. 특히 응천을 중심으로 한 강남은 당시 전 국 경제의 중심으로, 미곡 생산이 풍부하고 방직업, 제염업, 상업이 성 한 곳으로, 이른바 천하의 재부는 동남에서 나오는데, 응천은 이것들 22) 明 史 卷 135, 葉 兌 傳. 23) 全 淳 東, 明 王 朝 成 立 史 硏 究 ( 도서출판 개신, 2000), pp.104-107.

永 樂 帝 의 北 京 遷 都 와 그 意 義 ( 全 淳 東 ) 103 이 모이는 곳이다 24) 라 할 정도로 경제적 조건이 뛰어난 곳이었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응천은 동남쪽에 치우쳐 있어 북쪽 국경 선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에 군사 지휘 면에서 큰 취약점을 지니고 있기도 한 곳이다. 그래서 유사들 가운데에는 응천을 수도로 정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有 天 下 非 都 中 原 不 能 控 制 奸 頑 25)이 라든가 君 天 下 非 都 中 原 不 加 26)라고 조언하면서 수도는 중원에 있어 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원장의 생각에도 남경에 도읍한 육조의 왕조들 이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단명한 것이 마음에 걸려 선뜻 수도를 정하 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나 결국 주원장은 응천에 도읍하고 1368 년에 명나라를 세웠다. 그렇게 한 데에는 다음의 3 가지가 이유가 있었다고 吳 晗 은 지적하고 있다. 1 응천은 장강 삼각주의 대 곡창지이고 방직업과 염업이 성하 며 물산의 집산지라는 점. 2 오왕 시대에 세운 궁궐을 쉽게 버릴 수 가 없으며 따로 도성을 세우려면 많은 수고와 비용이 든다는 점. 3 홍무제 주위의 문무 대신들이 대개 나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27) 江 淮 출신들로서 향토에서 멀리 떠 실로 응천은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북방 문제에 한계를 지니고 있 었다. 명이 건국되고 원조의 잔여 세력이 막북으로 물러나 있어 북방 전선이 지금의 몽고 일대로 북상한 상태에서 응천은 전국 중심지로서 의 기능을 다 한다는 것이 용이하지 않았다. 몽골족이 북쪽으로 물러 났다고는 하나 언제 어떻게 다시 재침할지 알 수 없는 상황 하에서, 북방 몽골족의 위협을 받지 않을 수 없었기에 응천은 역량 발휘에 한 계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홍무제는 홍무 원년 8 월에 응천을 南 京, 開 封 을 北 京 으로 삼아 양경 제를 택하였다. 개봉을 북경으로 정한 것은 통일왕조의 수도는 중원의 24) 丘 濬, 大 學 衍 義 補 卷 85, 都 邑 志 上, 天 下 財 富 出 於 東 南 而 金 陵 爲 其 會. 25) 高 皇 帝 御 製 文 集 卷 12, 祝 文, 中 都 告 祭 天 地 祝 文. 26) 高 皇 帝 御 製 文 集 卷 17, 說, 黃 河 說. 27) 吳 晗 ( 朴 元 熇 譯 ), 朱 元 璋 傳 ( 知 識 産 業 社, 2003), p.236.

104 中 國 史 硏 究 第 65 輯 (2010. 4) 땅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었다. 그 후 서달이 大 都 ( 북경) 을 점령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다시 국도 문 제가 일어났는데, 홍무제는 홍무 2년 9 월에 돌연 자신의 고향인 鳳 陽 을 中 都 로 삼겠다고 조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부터 도성 건 설을 착수함으로써 三 京 制 를 채택하였다. 그런데 5년여 공사를 통해 국도건설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을 무렵, 홍무 8 년(1875) 4월에 갑 자기 중도의 건설을 중단시키고 포기하였다. 28) 태조 홍무제는 건국 후에도 국도 확정 문제에 많은 고민을 하였다. 국도를 정하는데 의견이 분분하였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은 開 封 에 도읍하기를 제의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원 大 都 에 건립하자고 주장하 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원장의 생각은 달랐다. 송의 수도 開 封 은 지형 적으로 요새지가 없고 적에 노출되어 있어 방어에 약점을 지니고 있다 고 본 것이다. 이리하여 정도 문제는 결국 10 년을 끌은 후, 마침내 홍무 11 년(1378) 에 비로소 정식으로 南 京 을 京 師 로 삼는다 29)는 조서를 내림으로서 건도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30) 실로 도읍지를 선정하는 문제는 쉬운 일 이 아니고, 천도 또한 그렇게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더욱이 번왕이 분 봉되어 북변을 주둔한 후에는 북방 문제가 어느 정도 완화되어 갔기 에, 국도의 북변 이동은 그렇게 급한 일이 아니었다. 28) 명초 中 都 에 관한 연구로는 王 劍 英, 明 中 都 ( 中 華 書 局, 1992); 明 中 都 硏 究 ( 中 國 靑 年 出 版 社, 2005); 全 淳 東, 明 太 祖 中 都 建 設 포기에 대하여 ( 湖 西 史 學 36, 2003) 등이 있다. 중도 건설 포기의 이유로서는 중도건설로 인한 경제 소모, 유기의 반대, 회서집단의 세력견제 등이 고려되고 있다. 중도 건설의 포 기 배경에 대하여는 전순동의 위의 논문 明 太 祖 中 都 建 設 포기에 대하여 pp.293-299 참조. 29) 明 史 卷 40, 地 理 1, 南 京 條, ( 洪 武 ) 十 一 年 正 月 改 南 京 爲 京 師. 홍무 원년 8 월에 應 天 을 南 京, 開 封 을 北 京 이라 하였는데, 홍무 11년에 南 京 을 京 師 로 정 함에 따라 北 京 ( 開 封 ) 은 동시에 폐지되었다. 30) 吳 晗, 朱 元 璋 傳 ( 人 民 出 版 社, 1965), p.159.

永 樂 帝 의 北 京 遷 都 와 그 意 義 ( 全 淳 東 ) 105 Ⅲ. 北 京 遷 都 를 위한 準 備 와 諸 方 策 1. 皇 太 子 朱 標 西 安 파견 개봉을 북경으로 삼고, 봉양을 중도로 삼으려다 포기한 홍무제는 늘 북방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홍무 24 년(1391) 8 월, 태자 朱 標 를 보내 어 陝 西 지방을 순시하고 돌아오게 한 것도 그런 생각에서 나온 것이 었으리라 생각된다. 이 사실을 명사에는 단순히 皇 太 子 巡 抚 陕 西 31)라 고 기록하고 있으나, 太 祖 實 錄 에는 황태자( 주표) 에게 섬서 지방을 순무하도록 하였다. 태조는 태자에게 말하기를 천하의 산천 오직 秦 中 만이 지세가 험하고 견고하기로 이름 나 있다. 일찍이 너의 동생을 그 곳에 분봉한지 이미 10 수년이 되었다. 네가 한 번 유람하여 풍속을 잘 살피고 그곳 섬서 사람들을 위로하여 주어라 라고 하면서 문무 신하들 을 딸려서 보내고, 태자 일행이 지날 때에 해당 부주현에서는 잘 묵고 갈 수 있도록 돕게 하였다 32) 라 하여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이에 관한 기록이 興 宗 孝 廉 皇 帝 ( 朱 標 ) 傳 에도 잘 나타나 있는 데, 여기에 보면 주표가 돌아와 섬서 지도를 헌상 하였으며, 곧 병들 어 눕게 되었으나 와중에서도 홍무제에게 였다 고 기록하고 있다. 33) 여기에서 獻 陝 西 地 圖 遂 病. 病 中 上 言 經 略 建 都 事. 건도에 관한 방안을 건의하 라는 기사가 주목 을 끈다. 태자 주표가 서안과 낙양 일대에 대하여 상세하게 조사하고 돌아와 섬서 지도를 홍무제에게 헌납했다든지, 병중에서도 건도 문제 31) 明 史 太 祖 本 紀 3, 洪 武 24 年 八 月 乙 丑 條. 32) 太 祖 實 錄 卷 211, 洪 武 24年 8 月 乙 丑 條, 命 皇 太 子 巡 撫 陝 西. 上 諭 皇 太 子 曰 天 下 山 川 惟 秦 中 號 爲 險 固. 嚮 命 汝 弟 分 封 其 地 已 十 數 年. 汝 可 一 游 以 省 觀 風 俗 慰 勞 秦 民 於 是 擇 文 武 之 臣 扈 從 皆 給 道 里 費. 仍 命 經 過 府 縣 以 宿 頓 聞. 33) 明 史 卷 115, 興 宗 孝 廉 皇 帝 ( 朱 標 ) 傳, 洪 武 24年 8 月 條, 勅 太 子 巡 撫 陝 西. 先 是 帝 以 應 天 開 封 爲 南 北 京 臨 濠 爲 中 都 ( 중략) 至 是 上 諭 太 子 曰 天 下 山 川 惟 秦 中 號 爲 險 固. 汝 往 以 省 觀 風 俗 慰 勞 秦 父 老 子 弟 於 是 擇 文 武 諸 臣 扈 太 子 行. ( 중략) 比 還 獻 陝 西 地 圖 遂 病. 病 中 上 言 經 略 建 都 事.

106 中 國 史 硏 究 第 65 輯 (2010. 4) 에 관한 것을 홍무제에게 올렸다는 것은 태자 주표가 서안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것은 또한 홍무 제의 의도도 그 안에 들어 있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에 결국 홍무제는 줄곧 북방으로의 천도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34) 그러나 아쉽게도 태자 주표가 이듬 해(1392) 4 월에 병사하였다. 이 로 인해 천도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으며, 태자 주표의 죽음은 태조에 게 큰 타격이 되었다. 이미 65세가 된 늙은 홍무제는 어찌 할 바를 몰 라 일체를 하늘의 뜻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 해 연말에 홍무제가 光 祿 寺 灶 王 神 에 올리는 제문을 친히 작성하였는데, 거기에 천도 문제 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짐이 천하를 수십 년 동안 다스렸는데, 매사에 옛 제도를 본받아 위업 이 있었습니다. 다만 궁성의 앞부분은 높고 중간이 낮아 形 勢 가 균형을 잃었습니다. 원래 천도하고자 하였으나, 이제 짐은 연로하고 정력도 이미 쇠잔하여졌습니다. 또 천하가 새롭게 안정되었으므로 백성을 수고롭게 하 고 싶지 않습니다. 더욱이 일이 잘되어 일어나고 잘 못되어 사라지는 것 이 다 운수에 따른 것이니 오직 하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바라건대 짐 의 이런 마음을 헤아리시어 자손들에게 복을 내리시소서. 35) 이를 보면, 대체로 그간은 그의 의도대로 정사가 순조롭게 잘 풀려 갔으나 천도의 문제만은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이제 나이도 들고 용 기도 잃어버려 운명에 맡기면서 하늘의 도움만을 구하고 있음이 보이 34) 홍무 24 년 황태자 朱 標 서안 파견에 대하여 新 宮 學 은 그의 저서 北 京 遷 都 の硏 究 -近 世 中 國 の首 都 移 轉 - ( 汲 古 書 院, 2004), pp.49-54 에서 홍무 24년의 황 태자 서안 파견은 홍무제의 북방 천도와 관계가 없는 기사이며 홍무제가 황태 자를 파견한 것은 서안지방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함이 목적이었다고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직접적인 표현은 없다하더라도 주변의 정황상 홍무제가 북방지방 으로 천도하는 문제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35) 朱 國 禎, 涌 幢 小 品 卷 1, 宮 殿, 朕 经 营 天 下 数 十 年 事 事 按 古 有 绪. 唯 宫 城 前 昂 中 洼 形 势 不 称. 本 欲 迁 都 今 朕 年 老 精 力 已 倦. 又 天 下 新 定 不 欲 劳 民. 且 废 兴 有 数 只 得 聽 天. 惟 愿 鉴 朕 此 心 福 其 子 孙.

永 樂 帝 의 北 京 遷 都 와 그 意 義 ( 全 淳 東 ) 107 고 있다. 홍무제는 그 후로 천도 문제를 잠시 접어두었다. 2. 北 京 에 대한 永 樂 帝 의 關 心 홍무제 때 제기되었던 국도 문제가 10 년 후에 또 다시 일어났다. 주 체가 건문제를 몰아내고 제위를 이은 뒤에 다시 이 문제가 제기되었 다. 곧 영락 원년(1403) 정월, 영락제가 南 郊 에서 천지에 제사를 지낸 후 奉 天 殿 에 돌아 왔을 때의 일이다. 문무 군신들이 의식을 잘 마쳤음 을 축하하는 慶 成 禮 의 자리에서, 예부상서 李 至 剛 등이 北 平 을 北 京 으로 고치자고 건의하였다. 예부상서 李 至 剛 등이 예로부터 제왕이 포의 출신으로서 일어나 천하 를 평정하거나 또는 外 蕃 에서 들어와 大 統 을 잇거나 하는데, 나라를 처음 세운 땅에 대하여 모두 다 같이 존숭합니다. 진실로 北 平 布 政 司 는 실로 皇 上 의 承 運 興 王 의 땅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太 祖 가 실시한 中 都 制 에 따라서 京 都 를 두어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영락제는 바로 옳은 말이다 하고 윤허하여 그곳 北 平 을 北 京 으로 하였다. 36) 라는 기사가 그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중대 사실이 발견된다. 하나 는 홍무제의 중도제에 따라서 북평을 국도로 삼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때에 北 平 을 北 京 으로 바꿈으로서 남경과 북경의 양경제가 채택되었다는 것이 홍무 원년 서달이 원의 수도 大 都 를 점령한 후, 그 이듬해에 홍무제가 이곳을 北 平 이라 명명하였는데, 이 北 平 이 다시 1403년 2 월 신묘일(4 일) 에 北 京 으로 탄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 이다. 원래 京 은 수도를 의미하는 말이다. 北 平 을 北 京 이라 한 것은 영 락제가 그곳을 수도로 삼을 뜻을 가지고 있었다고 받아들여도 무방할 36) 明 太 宗 實 錄 卷 16, 永 樂 元 年 正 月 辛 卯 條, 礼 部 尚 书 李 至 刚 等 言 自 昔 帝 王 或 起 布 衣 平 定 天 下 或 由 繇 外 藩 人 承 大 统 而 於 肇 迹 之 地 皆 有 升 崇. 切 見 北 平 布 政 司 实 皇 上 承 运 兴 之 地 宜 尊 太 祖 高 皇 帝 中 都 制 曰 可 其 以 北 平 为 北 京.

108 中 國 史 硏 究 第 65 輯 (2010. 4) 것이다. 그리고 북평을 북경으로 한다고 결정한 날짜 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날은 永 樂 元 年 正 月 辛 卯 日 (13 일) 로, 정난의 역을 통하여 제위 를 계승한 영락제가 南 郊 에 나가 천지에 제사함으로써 황위의 정통성 을 인정받고 돌아온 그날, 이제 천명을 받아 즉위하였다는 것을 내외 에 알린 바로 그 날에 자신의 乘 運 興 王 의 땅인 北 平 을 北 京 으로 승 격시켰다는 것은 그만큼 이 문제는 중요하고 선결되어져야 할 사안이 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북경 천도에 관한 것이 신하 이지강의 입에서 먼저 나오기는 하였지만, 실은 그가 영락제의 심리와 의향을 잘 파악한 데서 나온 처 사로, 이것은 제안의 한 형식일 따름, 영락제의 본심이고 그의 강한 의 지였다고 해도 과언 아니다. 37) 영락제는 북경을 새로운 정치적, 군사적 중심지로서 생각하면서 北 京 行 部 를 설치하였다. 영락 원년(1403) 2 월, 庚 戌 日 ( 초3 일) 에 北 京 留 守 行 后 军 都 督 府, 北 京 行 部, 北 京 国 子 监 둥의 기구를 북경에 설치하고, 北 平 府 를 顺 天 府 로 고치는 등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리고 이어 그 이튿날에 戶 部 尙 書 掌 北 平 布 政 司 事 郭 資 와 38) 그 刑 部 尙 書 掌 保 定 府 事 雒 僉 을 각각 北 京 行 部 尙 書 로 임명하였고, 四 川 安 岳 縣 知 縣 康 汝 楫. 按 察 司 僉 事 馬 京 을 左 侍 郞 으로 삼고, 臨 江 府 知 府 劉 冀 南, 戶 部 郎 中 李 昶 을 右 侍 郞 으로 임명하였다. 39) 또한 북평이 북경으로 승격됨으로서 社 稷 祭 壇 을 개편할 필요가 있 었다. 社 는 토지신, 稷 은 오곡신을 의미하는데, 제도상에는 京 師 로부터 37) 新 宮 學, 北 京 遷 都 の硏 究 -近 世 中 國 の首 都 移 轉 - ( 汲 古 書 院, 2004), pp.142-144; 商 傳, 永 樂 皇 帝 ( 北 京 出 版 社, 1989), p.207. 38) 明 太 宗 實 錄 卷 17, 永 樂 元 年 2 月 庚 戌 條, 设 北 京 留 守 行 后 军 都 督 府 北 京 行 部 北 京 国 子 监, 改 北 平 府 爲 顺 天 府 北 平 行 太 僕 寺 爲 北 京 行 太 僕 寺 ; 明 史 成 祖 本 紀 2 永 樂 元 年 2 月 庚 戌 條 에도 같은 내용이 보이고 있다. 39) 明 太 宗 實 錄 卷 17, 永 樂 元 年 2 月 辛 亥 條, 以 戶 部 尙 書 掌 北 平 布 政 司 事 郭 資 刑 部 尙 書 掌 保 定 府 事 雒 僉 俱 爲 北 京 行 部 尙 書, 四 川 安 岳 縣 知 縣 康 汝 楫 按 察 司 僉 事 馬 京 爲 左 侍 郞 臨 江 府 知 府 劉 冀 南 戶 部 郎 中 李 昶 爲 右 侍 郞.

永 樂 帝 의 北 京 遷 都 와 그 意 義 ( 全 淳 東 ) 109 왕부와 부주현에 사직단을 두어 제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북경 이 왕부에서 북경으로 승격됨에 따라 거기에 걸맞도록 종래 燕 王 府 의 國 社 와 國 稷 을 개편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영락 원년 5월에 영락제 는 신하들에게 사직 제단 설치를 검토해 보도록 하였다. 황제는 廷 臣 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北 京 은 짐의 옛 封 國 으로 國 社 와 國 稷 이 있다. 이제 그곳이 이미 北 京 이 되었으나 아직 社 稷 의 예가 갖추 어져 있지 않으니 의논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고 하였다. 이에 이르러 禮 部 와 太 常 寺 가 모여 의론하여 말하기를 조정, 왕국, 부주현의 사직은 모 두 정해진 제도가 있습니다. 이것을 옛 법에 따라 살펴보면, 따로 兩 京 에 太 社 太 稷 을 함께 둔 예가 없습니다. 지금 북경에 이전의 국사와 국직이 있으니, 새삼스럽게 태사 태직을 개편하기가 어렵다고 하더라도, 또한 갑 자기 이를 혁파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 관리하는 관을 두어 잘 간수하도록 하고, 만일 황상이 巡 狩 하는 때가 되면 국사 국직 내에 태사, 태직의 신위를 두어 제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순천부에 따로 府 社, 府 稷 을 두어 北 京 行 部 의 관으로 하여금 때를 맞추어 제사하게 함이 좋을 듯합니다 라고 하였다. 상( 영락제) 이 그 의론이 옳다고 하면서 받아 들였다. 이에 남경 산천의 제사 관리법에 따라 북경에 사직제단과 제사 담당관을 두었는데, 封 祀 와 祀 丞 각각 한 사람을 두고, 北 京 行 部 에 예속 되게 하였다. 40) 이상의 내용은 영락제가 북경에 태사와 태직 제단을 두려는 것에 대하여 예부와 태상시가 검토하여 건의한 내용이다. 예부와 태상시가 검토한 결과를 요약하면, 1 옛 법을 살펴 볼 때에 양경에 각각 태사, 태직을 둔 전례가 없다 는 것. 2 종래 있던 연왕부의 국사, 국직을 태사, 태직으로 바꾸는 일 40) 明 太 宗 實 錄 卷 20 上, 永 樂 元 年 五 月 壬 午 條, 敕 北 京 行 部 尚 书 郭 资 曰 : 行 部 统 六 曹 政 务 甚 烦. 而 卿 为 之 长 能 悉 心 殚 虑 为 国 为 民. 凡 所 經 畵 具 有 条 理 上 谓 廷 臣 曰 北 京 朕 舊 封 国 有 国 社 国 稷 今 即 为 北 京 而 社 稷 之 禮 未 有 定 制 其 议 以 闻. 至 是 禮 部 太 常 会 议 以 为 朝 廷 王 国 及 府 州 县 社 稷 俱 有 定 制. 考 之 古 典 别 無 两 京 并 立 太 社 太 稷 之 禮. 今 北 京 舊 有 国 社 国 稷 虽 难 改 为 太 社 太 稷 然 亦 卒 难 割 去. 宜 设 官 看 守. 如 遇 皇 上 巡 狩 之 日 於 内 设 太 社 太 稷 之 位 以 祭 仍 於 顺 天 府 别 建 府 社 府 稷 令 北 京 行 部 官 以 时 祭 祀. 上 可 其 議.. 乃 命 依 在 京 山 川 壇 祠 祭 署 例 設 置 北 京 社 稷 壇 祠 祭 署 置 封 祀 祀 丞 各 一 員 隸 北 京 行 部.

110 中 國 史 硏 究 第 65 輯 (2010. 4) 이 어려운 일이고, 그렇다고 하여 갑자기 철폐하는 것도 또한 어려운 일이므로 담당관을 설치하여 잘 간수하게 할 것. 3 황제가 순수할 때 에 구 연왕부의 사직단에 태사 태직의 신위를 설치하여 제사할 것. 4 순천부에는 따로 부사 부직을 두고 북경행부의 관에게 제사하게 할 것 등을 제안하였다. 이당때 영락제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북경 사직단부 서를 두고 북경행부 소관으로 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수도인 남경의 사직제단보다는 한 등급 낮은 단계이기는 하나 황제의 순행 시에는 태사, 태직의 신위를 모실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 위상을 종전보다 승격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즉위 초부터 영락제는 북경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북경을 엄연히 제2 의 수도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3. 北 京 建 設 의 提 案 영락제는 즉위 초부터 북경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 며 북경을 장차 수도로 삼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북경으로 천도하려는 생각을 겉으로 나타내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영락 4 년(1406), 북경에서의 궁전 건립이 제안되고, 이를 준비하기 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천도를 위한 도시 건설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영락제 의 북방 순시를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물론 본래 연 왕부의 건물이 북경에 있긴 하지만, 이미 황제의 신분으로서 거주할 수는 없었기 때 문에 다시 조영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영락 4년 윤 7월 문무군신들이 북경 궁전 조영을 제안하 였다. 궁전 건설의 명목은 천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황제 순행을 위 한 것이었다. 丘 福 의 제안과 구체적인 내용이 太 宗 實 錄 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 보면, 북경 건설을 건의한 것은 淇 國 公 丘 福 이었으며, 북경 궁전을 건설하는 목적은 천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황제 순행에 대비

永 樂 帝 의 北 京 遷 都 와 그 意 義 ( 全 淳 東 ) 111 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당시 전국 각지에서 크고 좋은 나무를 벌목하 여 운반하여 왔는데, 공부상서 宋 禮 가 사천 지방에 파견되어 벌목과 운반을 책임졌고, 이부우시랑 师 逵 가 호광 지방으로, 호부좌시랑 古 朴 이 江 西 로, 우부도어사 刘 观 이 浙 江 으로, 우첨도어사 仲 成 이 山 西 지방 으로 파견되어 좋은 목재를 구해 오는 책임을 맡았다. 목재와 더불어 건축자재로서 중요한 것은 磚 瓦 다. 그리하여 泰 寧 候 陈 珪 와 北 京 行 部 侍 郎 张 思 恭 로 하여금 전와 만드는 작업을 감독하고 장인들을 관리하 게 하였다. 41) 목재 조달과 동시에 공부에 명하여 각지로부터 많은 장인들을 모아 건축 공사를 하도록 하였다. 이 때 전국 각지에서 유명한 장인들을 모 아 궁전 건축 공사에 참여시켰는데, 이 일에 종사하는 군장과 민장들 은 반년씩 교대로 하였으며 봉급으로 매월 米 5斗 가 지급되기도 하였 다. 그리고 이듬해 5 월부터 공사가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42) 당시 남경의 궁전은 정난의 변으로 소실되어 재건해야 했으나 영락 제는 이를 방치하여 두고 있다가 소실된 황성 정문이 영락 4년에 겨우 재건되었는데, 바로 그 때에 북경의 행궁 건설 공사도 준비하였다. 그 간 즉위 당초부터 소실된 궁전을 재건해야 한다는 요청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국난 이후 아직 민력이 회복되지 않았다면서 미루어 왔었는데, 황성 재건과 더불어 동시에 대량의 물량을 동원하여 북경행궁 건설에 투여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 때의 북경 공사가 천도가 아니라 순행 준 비가 그 명목이라고는 하나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영락제의 깊은 뜻을 41) 明 太 宗 實 錄 卷 57, 永 樂 4年 閏 7 月 壬 戌 條, 文 武 群 臣 淇 国 公 邱 福 等 請 建 北 京 宫 殿 以 备 巡 幸. 遂 遣 工 部 尚 书 宋 禮 詣 四 川 吏 部 右 侍 郎 师 逵 詣 詣 湖 廣 户 部 左 侍 郎 古 朴 詣 江 西 右 副 都 御 史 刘 观 詣 浙 江 右 佥 都 御 史 仲 成 詣 山 西 督 理 军 民 採 木 人 月 给 米 五 斗 钞 三 锭. 命 泰 寧 候 陈 珪 北 京 行 部 侍 郎 张 思 恭 督 理 军 民 匠 造 砖 瓦 人 月 给 米 五 斗. 42) 明 太 宗 實 錄 卷 57, 永 樂 4年 閏 7 月 壬 戌 條, 命 工 部 徵 天 下 色 匠 在 京 诸 卫 及 河 南 山 东 山 西 陕 西 都 司 中 都 留 守 司 直 隶 各 卫 选 军 士 河 南 山 东 陕 西 山 西 等 布 政 司 直 隸 凤 阳 淮 安 扬 州 庐 州 安 庆 徐 州 和 州 选 民 丁 於 明 年 五 月 俱 赴 北 京 聽 役 半 年 更 代 人 月 给 米 五 斗. 其 徵 发 军 民 之 處 一 应 差 役 及 闸 办 银 课 等 项 悉 令 停 止.

112 中 國 史 硏 究 第 65 輯 (2010. 4)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영락제는 영락 7 년(1409) 2월에 즉위 후 처음으로 제1차 북경 순행 (1409.2-1410.11) 길에 올라 3 월에 북경에 도착하였는데, 그의 북변 순 행은 이미 영락 6년 8월에 1 일에 결정되었다. 이 날에 북경 순행의 시기를 이듬해 봄 으로 정하고 예부에 명하여 公 侯 伯, 五 軍 都 督 府, 六 部, 都 察 院, 翰 林 院 등의 중신들이 모여 사전에 순행 계획을 협의하도 록 하였다. 43) 그리고 11일에는 이듬해 2월에 순행을 실시하겠다고 내 외에 포고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발하여 말하기를 주 왕실은 낙양을 두어 二 都 를 운영 하였는데, 有 虞 는 민정에 힘썼으며 더욱이 巡 省 을 중시하였다. 짐이 천하 에 군림하여 오직 법과 도덕에 따라 통치 초기에 순천부를 승격시켜 북 경으로 하였다. 지금 사해가 평안하고 만민이 생업에 안정을 이루고 있으 며 국가에 무사하니 순행은 바야흐로 시의적절하다. 장차 명년 2월에 북 경을 순행할 것이며, 황태자로 하여금 감국하게 하려 한다. 짐이 경과하 는 곳의 친왕은 왕성에서 일정 정도만 나와서 영접한다. 군민 아문 관리 들은 경내에서 조견하고 경과하지 않은 곳의 관리들은 출경하지 말라. 여 정 중에 필요한 일체의 음식 공급의 비용은 모두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 민을 번거롭게 하지 말고, 각 기관은 진헌한다 하여 징수함으로써 민을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내외에 포고하니 모두 다 숙지하도록 하여 라. 44) 포고 내용에는 영락 7년 2 월에 순행에 나선다는 것, 순행으로 남경 을 떠나 있을 경우 황태자로 하여금 남경을 감국하게 한다는 것, 순행 으로 인한 민폐가 없도록 한다는 것 등이 주요 내용으로 되어 있다. 43) 明 太 宗 實 錄 卷 82, 永 樂 6年 8 月 丙 子 朔 條, 以 永 明 年 春 巡 狩 北 京 命 禮 部 會 公 侯 伯 五 府 六 部 都 察 院 翰 林 院 学 等 衙 門 官 會 議 合 行 事 宜. 44) 皇 明 詔 令 卷 95, 成 祖 文 皇 帝, 永 樂 6年 8 月 丙 戌 條, 奉 天 乘 運 皇 帝 詔 曰 成 周 营 洛 肇 启 二 都. 有 虞 勤 民 尤 重 巡 省. 朕 君 临 天 下 祗 率 典 彝. 统 御 之 初 已 升 顺 天 府 为 北 京. 今 四 海 清 寧 萬 民 安 业 国 家 無 事 省 方 以 时. 将 以 明 年 二 月 巡 幸 北 京 命 皇 太 子 监 国. 朕 所 经 过 處 亲 王 止 離 王 城 一 程 迎 接 军 民 官 吏 於 境 内 朝 见. 非 經 過 去 處 毋 得 出 境. 道 路 一 切 飮 食 供 給 之 費 不 煩 於 民 诸 司 無 得 有 所 进 献 科 擾 勞 衆. 布 告 中 外 咸 使 聞 知. 明 太 宗 實 錄 卷 82, 永 樂 6年 8 月 丙 戌 條 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永 樂 帝 의 北 京 遷 都 와 그 意 義 ( 全 淳 東 ) 113 영락제의 순행은 주로 북변 경영을 위한 것이었으며, 황제 순행에 수행하는 행재관으로서 行 在 六 部 와 도찰원 등을 설치하여 그들을 대동 하고 북경 순행에 나섰다. 夏 原 吉 을 행재예 병부 및 도찰원의 업무를 대행하도록 하였고, 예부상서 趙 羾 에게 행재형 병부시랑을 대행하도 록 하였으며, 행재병부좌시랑 方 賓 을 본부 상서로 승진시키는 등 정부 조직을 갖추었다. 45) 行 在 란 일반적으로 군주 순행 소재의 땅을 가리키는 말로, 영락시 기에 영락 7 년부터 직함에 行 在 라는 두 글자가 붙게 되었다. 이때 행 재라는 용어는 황제가 순행할 동안 정무를 본다는 임시적인 의미가 있 는 것이지만, 사라지지 않고 이후 북경으로 천도한 영락 19(1421) 까지 사용되었다. 46) 그러므로 이 때 북경에 또 다른 정부 기구가 이미 만들 어졌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영락제는 20여년 재위 중에 남경보다는 북경 쪽에 더 많이 거주하 였다. 초기에는 남경에 머물러 있었으나 1409 년 이후 순행, 친정 등의 명분으로 북경 쪽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었다. 황제가 경사를 떠나 있는 동안 황태자에게 태손에 대한 교육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47) 監 國 하도록 하였으며, 자연 영락제는 황태자, 황 그리고 영락제는 1 차 순행(1409.2-1410.11) 때에 북경에 약 1년 반 넘게 머물렀는데, 이 때 그는 오늘날의 十 三 稜 이 있는 天 壽 山 에 山 陵 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영락제는 북경에 온지 2 달이 채 안되어서 昌 平 에 方 士 寥 均 卿 이 택한 곳을 능지로 선정하여 북경에 자신의 능묘를 조성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보이지 않는 북경 천도의 포석이라고 할 수 있다. 장차 그가 죽은 후 남경에 묻히기 보다는 자신의 근거지 45) 明 通 鑑 卷 15, 成 祖 永 樂 7年 3 月 條, 以 夏 原 吉 兼 署 行 在 禮 兵 二 部 及 都 察 院, 禮 部 尚 書 趙 羾, 兼 署 行 在 刑 部. 兵 部 侍 郞 方 賓 晉 本 部 尙 書 兼 署 行 在 吏 部. 제1차 북경순 행에 참여한 관료와 병사의 규모와 편성은 新 宮 学 의 앞의 책, pp.170-171 참 조. 46) 이 외에도 行 在 는 洪 熙 원년(1425) 홍희제가 남경 천도를 결정한 후부터 宣 德 帝 를 거쳐 正 統 6 년(1441) 11 월까지 명대의 북경에 사용되었다. 47) 尹 貞 粉, 앞의 책, 永 樂 帝 의 經 筵 運 營 과 그 特 徵, pp.161-174.

114 中 國 史 硏 究 第 65 輯 (2010. 4) 인 북경으로 천도하고 거기에 묻히려는 속셈으로, 천도의 결심을 표시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공개적으로 4. 北 京 强 化 를 위한 努 力 영락제에 있어서 북경을 정치적, 군사적 중심지를 만드는 일은 무엇 보다 선결되어야 할 과제였다. 이에 영락제는 북경을 강화하는 여러 조처와 방책을 강구하였다. 북경을 강화시키는 방책 중의 하나가 북경 방위를 위한 衛 所 의 강 화였다. 영락제는 永 樂 7 년(1409) 6 월, 宣 化, 淸 平, 居 龍, 楡 林, 鎭 安, 懷 來, 宣 城, 寧 國, 威 遠, 德 勝 등의 여러 위를 설치하였고, 아울러 홍무 시기 원래 설치한 위소에 더욱 증설하여 남경과 북경의 지위 고하가 구분되기 어려울 정도로 만들어 놓았다. 48) 그렇다 하더라도 천도의 취약성은 북경 지방의 열악한 경제적인 환 경이었다. 군사적 정치적 중심지로 성장하려면 그것을 지탱할만한 풍 부한 경제력을 갖추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열악하고 낙후된 경제를 발 전시키는 방법으로는 전통적으로 사민 개간 정책의 방법이 취해졌는 데, 영락제도 이주 정책을 취하여 북경 지방을 강화시키려 하였다. 영 락제는 즉위 후 반년도 채 안 되는 영락 원년(1403) 정월에 원조의 대 도가 있던 북평을 北 京 이라 하고, 南 京 과 함께 兩 京 體 制 를 채택하였 다. 49) 이 때 남방의 부민층을 대거 북경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50) 이를 48) 商 傳, 앞의 책, 永 樂 皇 帝, pp.208-209. 49) 양경제도는 명태조 시기에도 홍무 11 년까지 존재하였으며, 영락제 때 다시 재개되었다가 북경 천도로 북경이 경사가 됨으로써 일단락이 되었다. 그러나 천도 후 곧 궁전에 낙뢰로 인한 화재가 발생한 후, 다시 남경으로의 천도론이 일어나면서 북경의 지위가 동요하고 마침내 洪 熙 帝 (1425) 가 남경 천도를 결정 하였다. 하지만 그가 즉위 1년도 채 되지 않아 죽음으로서 뜻을 이루지 못했 다. 그 후 宣 德 帝 가 괘도 수정을 한 후, 정통제 시기에 궁전이 완비되어 正 統 6 년(1441) 행재 를 없애고 경사를 북경으로 삼음으로써 양경제가 사라지게 되 었다. 양경제도의 형성과 확립 과정에 대해서는 萬 明 의 앞의 논문 明 代 兩 京 制 度 的 形 成 及 其 確 立 를, 양경 제도의 체제 및 남경으로부터 북경으로의 권력

永 樂 帝 의 北 京 遷 都 와 그 意 義 ( 全 淳 東 ) 115 테면, 영락 원년에 남직예( 남경) 와 蘇 州, 松 江, 常 州 등 10개 府 와 浙 江, 江 西, 湖 廣 등 9 개성의 富 戶 들을 북경으로 이주시켰고, 그 이듬해 에도 山 西 지방의 민호 1 만호를 북경으로 이주시켰으며, 홍무 3년에도 또 山 西 의 民 1 만호를 북경으로 이주시켰다. 남경, 절강의 부민 3천호 는 북경의 宛 平, 大 興 양 현으로 이주되었는데, 이들 부민은 대부분 安 定 門, 德 勝 門 문안 일대에 거주하면서 그곳의 廂 長 51)으로서 상내의 행 정관리적인 요역을 담당하였다. 북경 건설의 시기에 상장들은 북경 건설을 위해 과중한 요역과 물 적 부담을 담당하였다. 특히 上 供 物 料 와 地 方 公 費 에 대한 부담이 컸다. 그 결과 오랫동안 북경 건설의 요역을 담당하던 사람들 가운데에는 파 산하여 도망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그렇게 되면 부족분을 부호의 원 적으로부터 은을 징수하여 재경의 부호에게 공급하였는데 이를 供 廂 坊 役 이라 하였다. 당시 강남의 부호들은 이러한 供 廂 坊 役 을 勵 階 라 하여 재앙의 빌미로 여겼다고 한다. 52) 민 영락 5 년(1417) 에는 산서의 平 陽 府 澤 州 潞 州 와 山 東 의 登 萊 府 의 5,000 호를 북경으로 이주시켜 上 林 苑 監 53)에 소속시키고, 이들에게 동산, 정원, 그리고 목축과 수목을 관장하게 하였다. 이처럼 영락 초에 강남의 경제적 선진 지역 부민들을 인위적으로 북경으로 이주시켜 정착하도록 함으로서 인력 증강과 북경의 활성화를 꾀하였다. 54) 이동의 상황은 Edward L. Farmer의 앞의 책 Early Ming Government : The Evolution of Dual Capitals 참조. 50) 明 太 宗 實 錄 卷 22, 永 樂 元 年 8 月 甲 戌 條 ; 新 宮 學, 앞의 책, pp.464-465. 51) 明 史 卷 77. 食 貨 1. 戶 口, 在 城 曰 坊 近 城 曰 廂 鄕 都 曰 里. 명대 이갑제 체제 하에서 농촌에는 里 가 있었고, 도시에는 坊 이 있고, 近 城 에는 廂 이라는 기층행 정구역이 있었는데, 廂 의 책임자를 廂 長 이라 한다. 52) 商 傳, 앞의 책, p.209. 53) 명대 황궁의 동산과 정원 못과 목축 수목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左 右 監 正 ( 정5 품) 과 左 右 監 副 ( 정6 품) 가 있었다. 54) 이러한 이주 정책은 그 후에도 영락 7년에 민 800 호, 영락 14년에 2300 호, 그 리고 영락 15 년에도 계속되었는데, 북경 천도 이전에 많았다.

116 中 國 史 硏 究 第 65 輯 (2010. 4) 뿐만 아니라 범법자들을 북경으로 이주시켜 경작에 참여하게 하였 다. 十 惡 55)이나 강도상에 해당하지 않는 죄수들을 북경으로 이주시켜 閑 田 을 경작하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조처는 죄수들을 구제함과 동시 에 그들을 생산 활동에 참여시킴으로써 북경 지역의 부흥을 꾀한다는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영락 원년 8 월에는 罪 囚 北 京 爲 民 種 田 例 라는 법령을 작성하여 죄수 들을 북경에서 일정한 기간 경작하게 하고 민으로 삼는 규정을 발표하 였다. 이에 의하면, 杖 罪 者 에게는 소와 농구와 곡물 종자를 모두 지급 하고, 5 년 후에는 일반 농민과 같이 역을 부과하였다. 徒 刑, 流 刑 에 해 당하는 자는 품삯을 주지 않았으며. 56) 라고 규정되어 있다. 3년 후면 민전과 같이 부과한다 이러한 조처들은 천도 직전에 이미 북경 지역의 생산력을 증대하고 인구가 늘어나 지역의 번영을 가져오는데 한 몫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북경을 京 師 로 삼기 위해서는 아직도 보강해야 할 일이 더 남아 있었다. 그것은 물량 공급 등 경제적인 측면이었다. 수도에 거주 하는 관료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하여 외부로부터 대규모의 물자를 공 급받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 이것은 곡창지 강남을 중심으로 한 남방 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영락제는 이런 물자 공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외부에서 운송되 어 온 물자를 저장해 둘 창고를 개설하였다. 명초에 北 元 과 전쟁을 하 기위하여 北 平, 密 雲 등지에 창고를 두어 식량을 비축하여 두기는 하 였지만, 북평이 북경으로 승격된 된 영락 시기에는 수십만의 군사 및 북경 거주민을 먹여 살릴 더 많은 식량이 요구되었다. 이리하여 영락 5 년, 淮 安, 河 南 에서 漕 運 으로 운반되는 식량을 通 州 55) 明 律 에 나타난 十 惡 之 事 는 謀 反, 大 逆, 謀 叛, 惡 逆, 不 道, 大 不 敬, 不 孝, 不 睦, 不 義, 內 亂 등이다. 56) 明 太 宗 实 錄 卷 22, 永 乐 元 年 八 月 己 巳 條, 定 罪 囚 北 京 爲 民 種 田 例 杖 罪 者 牛 具 种 子 皆 给 給 直 五 年 后 如 民 田 例 科 差 犯 徒 流 遷 徙 者 不 给 直 三 年 后 如 民 田 例 科 差.

永 樂 帝 의 北 京 遷 都 와 그 意 義 ( 全 淳 東 ) 117 로 운송하여 그곳에 창고를 지어 저장하여 두었다. 특히 通 州 에 左 衛 를 증설하고 거기에 창고를 지어 식량을 저장하여 두었는데, 57) 이로 인하여 영락시기에 京 倉 과 通 州 倉 이 조창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 다. 나아가 天 津, 通 州, 北 京 의 각 위소에도 衛 倉 을 설립하여 남방에서 오는 군량을 비축하여 두었다. 당시 북경 및 북변 방위에 필요한 식량은 開 中 法 에 의해 공급되었 다. 개중법이란 명이 북방으로 물러난 몽골의 방위에 필요한 군량 확 보를 위해 실시한 염법이다. 이것은 명초에 실시되어 명 일대에 걸쳐 운영되었는데, 북방 변경 주둔군에 군량을 보급할 목적으로 제정 시행 된 제도이다. 이 제도를 소개하면, 상인이 군량미를 소정의 邊 倉 에 공 급하면, 각 변창은 倉 鈔, 곧 일종의 引 換 券 ( 증명서) 을 발행하여 상인에 게 교부한다. 상인은 그 창초를 가지고, 지정된 都 轉 運 鹽 使 司 ( 鹽 運 司 ), 혹은 鹽 課 提 擧 司 에 가서 거기서 鹽 引 ( 소금 판매 허가서) 과 교환한다. 이어 염인을 가지고 염장( 소금 생산장) 에 가서 鹽 引 에 기재된 양의 소 금을 수령하여, 정부가 지정한 판매 장소에서 소금을 판매하는 일종의 염 전매법이다. 58) 이것은 상인으로 하여금 변경에 군량의 공급을 촉구 하도록 한 법이었는데,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던 山 西 商 人 들은 미곡 상인과 염상들과의 거래를 통해 큰 이익을 얻었던 것이다. 이처럼 영락제는 북경 지방 군대 유지를 위해 開 中 法 을 적극 활용 하여 군량을 조달하였다. 특히 그는 建 文 4 년(1402) 과 영락 10 년(1412), 두 차례 걸쳐 다른 지역의 개중은 중단시키고 북경에 있는 각 倉 에만 개중을 허락함으로써 북경 지방의 군량 충당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59) 그리고 영락제는 남방의 물산을 북경으로 원활히 공급하기 위하여 漕 運 체계와 운하를 정비하였다. 국초의 조운은 대체로 해운에 의존하 여 왔으나, 이 해운은 바닷길을 이용하기 때문에 경로가 험하고, 風 濤 로 인한 어려움이 많으며, 또한 왜구 등 해적의 출몰로 인한 위험성도 57) 星 斌 夫, 明 代 漕 運 の硏 究 ( 日 本 學 術 振 興 會, 1963), p.22. 58) 寺 田 隆 信, 山 西 商 人 の硏 究 ( 京 都 大 學 東 洋 史 硏 究 會, 1972), pp.80-89. 59) 商 傳, 앞의 책, 永 樂 皇 帝, p.210.

118 中 國 史 硏 究 第 65 輯 (2010. 4) 무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60) 그리하여 海 運 보다 運 河 를 이용한 河 運 을 이용함으로써 조운의 안전성과 효율성을 제고하려 하였다. 이로 인해 영락제는 그간 막혀 있던 운하를 보수 정비하는 작업에 나섰는데, 이 것은 북경 천도를 위한 준비 작업이기도 하였다. 61) 영락제의 대운하 정비 작업에서 두드러진 것 중의 하나는 대운하의 중요 구간인 會 通 河 의 開 浚 이었다. 회통하는 북쪽의 臨 淸 에서 남쪽의 濟 寧 에 이르는 운하인데, 북경-항주간의 운하 가운데 지세가 비교적 높은 지역으로, 북경-항주간의 대운하 중에서 중요 구간이라 할 수 있 다. 62) 이 운하는 원대 至 元 13 년(1276) 에서 至 元 26 년(1289) 까지 운용 되었다가 방치되었는데, 공부상서 宋 禮 가 다시 보수 준설하여 영락 9 년(1411) 에 개통되었다. 운하 개통에 대해서는 이미 이전에도 여러 차례 제기된 적이 있었 다. 다만 공사에 비용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었 던 것이다. 그런데 영락 9 년(1411) 2 월, 濟 寧 州 同 知 潘 淑 正 이 운하의 60) 星 斌 夫, 앞의 책, 明 代 漕 運 の硏 究, pp.22-26 ; 曹 永 憲, 앞의 논문, 北 京 首 都 論 과 大 運 河, pp.130-131. 曹 永 憲 은 이 논문에서 영락시기 왜구의 활동이 사 실상 소강상태였기에 왜구 및 해적의 존재가 해운 폐지를 야기할 만큼 위협적 이라고 판단하기는 곤란하다고 지적하고 있으나, 명초 해상에서의 왜구 출몰의 위험은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61) 曹 永 憲, 앞의 논문, 北 京 首 都 論 과 大 運 河, p.119, p.131. 62) 會 通 河 는 북쪽으로 臨 淸 에서 衛 河 와 만나고, 남쪽으로 濟 寧 에서 泗 水, 汶 水 를 만나고 黃 河 와도 통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북경과 항주간의 운하 가운데 지세 가 비교적 높은 지역이다. 원대 至 元 13 년(1276) 에 시작하여 至 元 26 년(1289) 에 완성된 운하로, 大 都 ( 北 京 ) 에 이르는 漕 道 를 확립하기 위하여 지금의 山 東 省 臨 淸 에서 東 平 縣 에 이르는 구간을 開 鑿 하고 會 通 河 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기술이 부족으로 수심이 충분히 확보되지 못하여 운송에 어려움이 많아 원대 에도 거의 이용되지 못하였다. 더욱이 홍무 24 년(1391) 에 황하 범람으로 진흙 이 많이 쌓여 막히게 되었다. 영락 시기에 강남 북경간의 운하의 길을 강화하 기 위하여 濟 寧 州 同 知 潘 淑 正 의 건의에 따라 회통하의 보수 공사가 착수되었 다. 영락9 년(1411) 년 2 월, 공부상서 송례의 지휘 하에 준설 보수 공사가 착공되 어 동년 6 월에 준공되었으며, 閘 門 15 개를 설치하여 수량을 조절하였다. 그러 므로 이 통제하는 閘 漕, 閘 河 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이것이 되었다가 방치 되었는데, 영락 9 년에 다시 보수 준설하여 열리게 되었다( 和 田 淸, 明 史 食 貨 志 譯 註 ( 상) 東 洋 文 庫, 1957, p.299 참조).

永 樂 帝 의 北 京 遷 都 와 그 意 義 ( 全 淳 東 ) 119 개통을 제기하였다. 있다. 태종실록에는 그의 건의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회통하의 길은 450 여리로, 泥 土 가 쌓여 막힌 부분이 1/3 이 되며, 이를 준설하여 개통시키면 산동의 백성들이 겪고 있는 운반의 노고를 덜 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지대한 이익이 될 것입니다. 63) 위의 사료를 보면 그 지역의 수로가 막혀 있는 상황을 비교적 잘 알고 있던 성실한 지방관 반숙정이 회통하 수로의 1/3 이 막혀 있으며, 높아진 하상을 浚 渫 하고 쌓인 泥 土 를 제거하여 운하가 잘 통하게 한다 면, 백성들이 육로로 식량을 운반하는 수고를 덜 뿐만이 아니라 국가 경제면에서도 큰 이익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운하 개통을 건의하였던 것이다. 이 건의는 북경으로의 천도를 준비하고 있는 영락제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그리하여 영락제는 공부상서 宋 禮 등을 보내어 조사해 보도 록 지시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와 준설을 적극 건의하였고, 더욱이 날씨가 온화하여 바로 그 때가 공사를 추진할 최적기라고 건의하였다. 이에 공부상서 宋 禮 로 하여금 운하 준설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으며, 공부시랑 金 純 을 보내어 山 東, 直 隸, 徐 州, 鎭 江 등지에서 인부를 모아 와 회통하 개준 공사를 추진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64) 그리고 이 때 通 州 에서 北 京 에 이르는 通 惠 河 65)도 정비되어 운하를 통한 배가 북경까지 오는 데 수월하여졌다. 66) 63) 明 太 宗 实 錄 卷 113, 永 乐 9年 2 月 己 未 條, 至 是 济 寧 州 同 知 潘 叔 正 言 会 通 河 道 四 百 五 十 余 里 其 淤 塞 者 三 分 之 一 浚 而 通 之 非 惟 山 东 之 民 免 转 输 之 劳 实 国 家 無 穷 之 利 也. 64) 明 太 宗 实 錄 卷 113, 永 乐 9年 2 月 己 未 條, 命 工 部 尙 書 宋 禮 都 督 周 長 往 視 禮 等 還 極 陳 疏 浚 之 便 且 言 天 氣 和 霽 宜 極 時 用 工 於 是 遣 侍 郞 金 純 發 山 東 及 直 隸 徐 州 民 丁 繼 發 應 天 鎭 江 等 府 民 丁 倂 力 開 淤 民 丁 皆 給 糧 賞 而 免 其 他 役 及 今 年 田 租 尙 書 宋 禮 總 督 之 遣 吏 部 侍 郞 師 逵 以 大 年 祭 山 川 城 隍 神 仍 命 御 史 二 員 監 督. 65) 원 세조(1260-1294) 때에 개착된 운하이다. 66) 永 樂 10 年 (1412) 正 月 에는 송례가 운하를 이용하여 직접 선단을 이끌고 북경 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星 斌 夫, 앞의 책, pp.26-28 참조).

120 中 國 史 硏 究 第 65 輯 (2010. 4) 이들 공사는 회통하를 다시 개통한 것일 뿐, 아직도 湖 廣, 江 西, 江 浙 지방의 물산을 실은 배가 북상하여 淮 岸 에 도착하면, 그 곡물을 五 壩 에서 회수로 끌어들이는데 여전히 운반의 수고가 따랐다. 이에 漕 糧 운반의 책임을 맡고 있던 平 康 伯 陳 瑄 은 이전의 건의를 받아들여 회안 의 서쪽 管 家 湖 에서 淸 江 蒲 를 뚫어 물 20여리를 회수에 흐르도록 하 고, 거기에 閘 門 을 만들어 수량을 조절하였다. 영락 13 년(1415) 영락제가 陳 瑄 에게 명하여 작은 배 3천여 척을 증 설하여 남방의 물산을 북송하였다. 그 결과 운하의 소통이 잘 되었으 며, 이로 인하여 해운은 공식적으로 폐기되고 말았다. 나아가 양자강과 회수의 수로도 잘 소통되도록 하였다. 요소요소에 閘 門 을 설치하고, 조운을 관리함으로써 남방에서 올라온 물산이 직접 통주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겨울철 하천 봉쇄기에는 어려운 일 이지만, 봄에 날씨가 풀리면, 배들이 남방의 곡식을 싣고 북경으로 올 라갔는데, 이러한 운하를 이용한 조량은 북경의 양식 공급을 보장하였 던 것이다. 회통하 개통 이후, 북경의 조영 공사도 차차 궤도에 이르게 되었다. 영락 11 년(1413) 5월에 長 陵 이 완성되었고 영락 14년 8월부터 시작한 西 宮 이 15년 4 월에 완성되었다. 동년 11월에 북경의 奉 天 殿 乾 淸 宮 등 의 궁전 건설이 시작되고, 錦 水 河 건설 공사가 시작되는 등 북경의 여 러 건물 공사가 이루어졌는데, 회통하의 개통은 북방으로의 물자 수송 의 커다란 파이프 라인이 되었다. 또 다른 중요 작업은 淸 江 浦 개착이다. 淸 江 浦 는 오늘날 강소성 회 안시로, 揚 州 에서 淮 安 에 이르는 湖 漕 의 중심인데, 이곳은 京 杭 대운하 연변의 교통의 요지이다. 영락제는 강남의 미곡이 어려움 없이 회수로 들어갈 수 있도록 강소성 정비하였다. 淮 安 에 청강포를 개착하고 조운 관리 체계를 회통하의 개준에 이어 청강포의 개착으로 조운 체계가 대운하 일변 도로 전향되었으며 동시에 영락 13 년(1415) 에 종래 주로 사용하던 해 운이 폐지되었다. 67) 1415년 하운을 통한 조운이 활발해짐으로 해서 조

永 樂 帝 의 北 京 遷 都 와 그 意 義 ( 全 淳 東 ) 121 운량도 크게 증가하였는데, 그 전해에 250만 석에 불과하던 것이 영락 13년에는 646 만여 석에 이르고 있다. 68) 이리하여 강남에서 베이징으로 올라가는 물류는, 영락 13 년(1415) 이 후 풍랑과 왜구의 위험성이 많은 해운이 중단되고, 수송 비용이 많이 들고 도둑이나 도로망 부실로 인해 제 기능을 수행하기 어려운 육운도 사라지면서 주로 운하를 이용한 하운이 조운 체계의 중심이 되었던 것 이다. 69) Ⅳ. 遷 都 를 위한 重 臣 會 議 와 北 京 遷 都 1. 南 京 의 文 武 重 臣 會 議 영락 11 년(1423) 2월 16일에 제2차 북경 순행에 올랐다가 영락 14년 (1416) 9월 20일에 돌아온 영락제는 남경에 도착하여 한 달도 채 안 되는 동년 11월 15 일, 마침내 그가 오래도록 북경 천도를 계획하여 왔 67) 星 斌 夫, 앞의 책, p.89. 68) 北 京 大 學 歷 史 系 北 京 史 編 寫 組, 北 京 史 ( 北 京 出 版 社, 1985), p.147; 조영 현, pp.132-133. 69) 명대 북경에서 항주에 이르는 京 杭 運 河 를 통칭하여 漕 河, 또는 大 運 河 라 한다. 총 길이는 1,79km 중 어느 곳은 천연 하천을 이용하고 어떤 곳은 인공 으로 개착하였기 때문에 수로가 서로 다르며 각 구간의 명칭도 다르다. 대략적 으로 언급하면, 通 州 에서 天 陳 에 이르는 구간은 潮 白 河 道 를 이용하는데, 보통 白 漕 라 한다. 天 陳 에서 臨 淸 은 衛 河 를 이용하기에 총칭해서 卫 漕 라 한다. 臨 淸 에서 濟 寧 에 이르는 구간은 원대에 개착된 것으로, 會 通 河 라 하며 闸 漕 라고도 한다. 徐 州 에서 淮 安 까지는 원래 泗 水 运 道 였으나 후에 河 漕 라 불렸다. 淮 安 에 서 扬 州 구간은 湖 泊 运 道 라 불렸으며, 湖 漕 라는 칭호가 있다. 그리고 양자강 이남의 운하를 총칭하여 浙 漕 라 부른다. 이 대운하 중, 白 漕 衛 漕 는 天 然 수 로를 이용하고 있으므로 별 문제가 없고, 浙 漕 의 江 南 지방은 수로의 망이 잘 발달되어 있어 이 역시 운하 이용에 별 어려움이 없고, 공사 비용도 별로 들지 않았다. 그러나 闸 漕, 河 漕, 그리고 湖 漕 구간은 황하 범람 지구이기 때문에 황 하 범람의 영향을 많이 받고, 이로 인한 문제도 심각하여, 명대에 집중적으로 관리 대상이 되었던 구간이다.

122 中 國 史 硏 究 第 65 輯 (2010. 4) 음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그 내용이 太 宗 實 錄 에 잘 나타나 있다. 문장이 좀 길기는 하나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군신들에게 북경 조영에 관한 것을 논의하도록 하였다. 이보다 먼저 황제가 북경을 순행할 때에 공부에서는 택일하여 조영 공사를 일으킬 것 을 주청하였다. 上 ( 영락제) 은 營 建 의 일은 매우 중대한 일이나 백성들이 공사로 인하여 부담을 갖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며 문무 군신들로 하여금 의론하게 하였다. 이에 公 侯 伯, 五 軍 都 督, 在 京 都 指 揮 의 무관 등이 상소 하여 말하기를, 臣 들의 생각에는 북경의 山 河 는 鞏 固 하고, 물은 달고 흙 은 후덕하며, 백성들의 習 俗 이 순박하고, 물산이 풍부하니. 진실로 天 府 의 國 이고, 帝 王 의 都 입니다. 황상의 북경 조성은 자손을 위한 것이고, 황상 만세의 대업입니다. 요즈음 황상께서 북경을 巡 狩 함에, 四 海 가 모두 함께 하고,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함께 잘 어울려 화목하고, 아름답고 상서스 러운 일들이 많이 모여 들고 있으니, 바로 이것들은 天 運 이 새롭게 일어 나고 있음을 알려주는 조짐입니다. 더욱이 운하 길이 잘 소통되어, 漕 運 이 날마다 증가하고, 상인들이 많이 모이고, 재화가 넘쳐나고, 良 材 巨 木 이 이미 京 師 에 다 운집하여 있고, 천하 군민들이 봉사하고 섬기는 일을 즐 기고 있습니다. 天 時 를 잘 헤아리고, 人 事 를 잘 살핌은 진실로 마땅히 해 야 할 일이며, ( 북경 천도는) 결코 늦출 일이 아닙니다. 삼가 비오니 위로 天 心 에 순응하고 아래로 民 望 을 따르소서. 그리고 조속히 관계 부처에 영 을 내리어 영건 공사를 일으킨다면 천하 모두가 큰 다행으로 여길 것입 니다. 六 部, 都 察 院, 大 理 寺 通 政 司 太 常 寺 등의 여러 衙 門 의 尚 书 都 御 史 등의 관료들이 거듭 상소하여 아뢰기를, 북경은 聖 上 의 龙 兴 之 地 입 니다. 북경은 북으로 居 庸 에 임하고, 서쪽으로 太 行 山 이 우뚝 솟아 있고, 동으로 산과 바다에 연해 있고, 남으로 中 原 이 드러누워 있으며, 그곳은 기름진 토지가 널리 펼쳐져 있고, 자연환경이 빼어난 곳이니 족히 四 夷 를 누르고, 천하를 제압할 만하며, 진실로 제왕이 만세토록 도읍지로 삼을 만한 곳입니다 중략 삼가 비오니 聖 皇 은 조속히 결단을 내리소서. 그리 고 관계 부서로 하여금 택일하여 공사를 시작하도록 칙서를 내리시어 국 가 유구의 비전을 이루시고, 신민들의 바람에 부응하도록 하소서! 라고 하였다. 상이 이들의 건의를 좇았다. 70) 70) 明 太 宗 实 錄 卷 182, 永 乐 14年 11 月 壬 寅 條, 復 诏 群 臣 议 营 建 北 京. 先 是 车 驾 至 北 京 工 部 奏 请 择 日 兴 工. 上 以 营 建 事 重 恐 民 力 不 堪 乃 命 文 武 群 臣 復 议 之. 於 是 公 侯 伯 五 军 都 督 及 在 京 都 指 挥 等 官 上 疏 曰 臣 等 切 惟 北 京 河 山 巩 固 水 甘 土 厚 民 俗 淳 朴 物 产 丰 富 诚 天 府 之 国 帝 国 之 都 也. 皇 上 营 建 北 京 为 子 孙 帝 王 万 世 之 业. 比 年 車 駕 巡 狩 四 海 會 同 人 心 協 和 嘉 瑞 騈 集 天 運 維 新 實 兆 於 此 矧 河 道 疏 通 漕 運 日 廣 商 賈 輻 輳 財 貨 充 溢 良 財 巨 木 已 集 京 師 天 下 軍 民 樂 於 趨 事 揆 之 天 時

永 樂 帝 의 北 京 遷 都 와 그 意 義 ( 全 淳 東 ) 123 군신회의를 연 이 날은 11월 15 일, 보름날이었다. 그러므로 이 조회 는 이른바 朔 望 朝 參 71)으로, 중요한 조회라 할 수 있는데, 이날 문무 주 요 廷 臣 들이 다 모인 중대한 회의였다. 그간 북경 천도를 준비하여 온 영락제 자신은 공식적으로 발표하여 궁전을 건설하는 일은 중대한 일이라 생각되나 이를 비난하거나 백성 들이 공사 부담으로 어려워할까 봐 걱정을 하면서 남경으로 돌아와 북 경 조영에 관한 군신회의를 다시 연 것이다. 이 회의에는 공후백, 오군 도독부 및 재경 도지휘관, 육부, 도찰원, 대리시, 통정사, 태상시 그리 고 여러 아문의 장관들이 모였는데, 그들은 북경의 山 河 는 鞏 固 하고, 물은 달고 흙은 후덕하며, 백성들의 習 俗 이 순박하다 하고, 진실로 府 의 國 이고, 帝 王 의 都 라면서 북경으로 천도하기를 적극 건의하였다. 이날의 군신회의의 결과에 따라 영락제는 드디어 천도를 결정하였 다. 그러나 실은 이것은 형식에 불과하였고 북경 천도의 과정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영락제의 의중을 파악한 여러 관료 들이 찬성 발언을 한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 회의로 말미암아 북경에 궁전과 관청을 짓는 공사가 공식적으로 결정되고 북경 천도도 가시화 되었던 것이다. 天 2. 都 城 完 成 과 北 京 遷 都 察 之 人 事 誠 所 當 爲 而 不 可 緩. 伏 乞 上 順 天 心 下 從 民 望 早 敕 所 司 興 工 營 建 天 下 幸 甚. 六 部 都 察 院, 大 理 寺 通 政 司 太 常 寺 等 衙 门 尚 书 都 御 史 等 官 復 上 疏 曰 伏 惟 北 京 聖 上 龙 兴 之 地 北 枕 居 庸 西 峙 太 行 东 连 山 海 南 俯 中 原 沃 壤 千 里 山 川 形 胜 足 以 控 四 夷 制 天 下 诚 帝 王 万 世 之 都 也. ( 중략) 伏 乞 早 赐 圣 断, 敕 所 司 择 日 兴 工 以 成 國 家 悠 久 之 計 以 副 臣 民 之 望 上 从 之. 71) 朝 會 에는 常 參 과 朔 望 朝 參 이 있다. 상참은 매일 아침 대신이나 중요 아문의 고위 관료들만이 편전에서 국왕을 배알하면서 經 筵 을 행하거나 시사를 아뢰는 조회이고, ( 朔 望 ) 朝 參 은 왕조의 중요 문제에 대해 아뢰고 현안을 건의하기도 하며 황제가 신하들에게 의견을 개진하도록 직접 독려하기도 하는 왕과 왕조 의 위엄을 상징하는 의식이며 또한 국사를 논하는 보다 무게 있는 조회라 할 수 있다.

124 中 國 史 硏 究 第 65 輯 (2010. 4) 북경 천도 계획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이후, 공사는 착실히 진행되었 다. 이곳에서 일하는 인부들은 북경의 민부와 군인들이 많이 참여하였 으나, 그 뿐 아니라 각 지방의 민부들이 동원되었고, 목재와 벽돌 돌 등은 전국에서 사들여 왔다. 영락 17 년(1419) 이후, 도성 건설 공정은 후반기로 접어 들어갔으며 영락제는 궁전 건설 속도를 올리기 위하여 계속 독촉하였다. 監 察 御 史 鄧 眞 이 당시 부정과 비위를 저지른 내용들 을 10 개 항목에 걸쳐 상주한 적이 있는데, 이 때 영락제는 그 상주를 받아들이면서도 지금의 일이 급하다 하더라도 북경 건설보다 더 급한 것이 있겠는가? 라는 표현을 쓰면서 온 신민들이 궁전 건설 공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총력을 기울여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72) 이 때 북경의 궁전이 거의 다 완성되어 가던 영락 17 년(1419) 9월에 行 在 欽 天 監 이 이듬해 정월 원단에 새로 완성된 궁전에서 조하를 받는 의식을 거행할 것을 상주하였다. 이에 영락제는 그 상주를 재가한 후, 行 在 戶 部 尙 書 夏 元 吉 에게 조칙을 손에 들려 남경에 있는 황태자에 보 냈다. 황태자를 모셔오기 위함이었는데, 황태자는 천천히 12월 말까지 북경에 도착하면 된다고 지시하였던 것이다. 73) 이후 영락 18 년(1420) 11월 3 일에 영락제는 먼저 병부상서 方 賓 을 불러와 내년에 行 在 를 京 師 로 고치라고 지시하였다. 74) 그리고 그 다 음날(4 일) 에 영락제는 정식으로 遷 都 를 결정 공포하는 詔 書 를 내렸다. 上 ( 영락제) 이 명년 새로운 궁전에 나아가 조견을 받게 됨에 이르러 천 72) 明 太 宗 实 錄 卷 219, 永 乐 17年 12 月 己 丑 條, 監 察 御 史 鄧 眞 言 十 事 六 曰 工 部 職 掌 專 造 作 當 今 所 急 務 者 無 如 北 京 宮 殿. 其 諸 造 作 皆 可 隨 宜. 73) 明 太 宗 实 錄 卷 229, 永 乐 18年 9 月 己 巳 條, 北 京 宮 殿 將 成 行 在 欽 天 監 言 明 年 正 月 初 一 日 上 吉 宜 御 新 殿 受 朝 遂 遣 行 在 户 部 尚 书 夏 原 吉 敕 召 皇 太 子 令 道 途 從 容 而 行 期 十 二 月 终 至 北 京. 原 吉 陛 辭 賜 交 鈔 二 百 錠. 이 때 하원길이 남경으로 내려가기 위하여 작별 인사를 하러 가자, 황제는 노자 비용으로 200 錠 을 하사 하였다. 74) 明 太 宗 实 錄 卷 231, 永 乐 18年 11 月 丁 卯 條, 上 謂 行 在 兵 部 尙 書 方 賓 曰 明 年 改 行 在 爲 京 師 凡 軍 衛 合 行 事 宜 其 令 各 官 議 擬 以 聞.

永 樂 帝 의 北 京 遷 都 와 그 意 義 ( 全 淳 東 ) 125 하에 조서를 내렸다. 나라 창업의 때에는 興 王 의 근본이 우선이고, 왕업 을 이어 수성할 때는 나라를 다스리는 본의가 무엇 보다 더 중요하다. 옛 날 짐의 태조께서 확실한 天 命 을 받고 華 夷 에 걸쳐 군주가 되시어 江 東 에 도읍하고 나라의 기초를 다지셨다. 외람되게 짐이 대통을 이어받아 나 라 세우는 대업을 품고, 국가의 영구적 발전만 생각하여 왔는데, 북경을 돌아보니 실로 도읍지로 삼을 만하고, 하늘의 뜻에 합한 곳이라 여겨진 다. 실로 점괘도 이와 같이 나왔다. 이에 古 制 에 따르고, 백성의 뜻을 따 라 兩 京 을 세우고, 郊 祀 宗 廟 를 세우고, 宮 闕 을 창건하였다. 위로는 태조의 先 志 를 이어받고 아래로는 자손들에게 만세의 큰 計 略 을 물려주려 한다. 이에 북경의 도성 건설 이래, 천하 군민이 즐겨 봉사하고, 하늘과 사람이 함께 힘을 모아 도우며, 좋은 선사품이 함께 이르고 있다. 이미 일이 다 이루어졌음이 알려졌으니, 영락 19 년(1421) 정월 초하루 날 아침을 택하 여 奉 天 殿 에 나가 百 官 과 조회할 것이니 새로운 통치가 탄생하고, 모든 일에 화목함과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아! 천지가 맑고 편안해지도다! 국 가 만년의 복이 넘쳐나고 華 夷 가 서로 편안하며 고금 전성의 기틀이 성 대하도다. 그러므로 여기에 조서를 공포하니 모든 사람이 이를 잘 따르도 록 하라. 75) 이 조서 문장은 비교적 잘 짜여 있다. 영락제는 古 制 에 따르고, 백성 의 뜻을 따라 兩 京 을 세우고, 북경으로 천도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수 성의 단계에서 필요한 것이었다는 내용이다. 영락제가 양경제를 둔 것 은 홍무제의 예에 따른 것이고, 창업의 시기에는 남경이 경사가 되었 으나, 수성의 시기에는 북경에 경사를 두어야 한다는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그의 남북 兩 京 制 채택과 북경 천도를 태조 조훈의 보호막 아래 두려 하고 있고, 북경 천도는 또한 왕조를 수성하는데 중 요한 조치였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뜻이 깊게 담겨있는 조서라 할 수 있다. 75) 明 太 宗 实 錄 卷 231, 永 乐 18年 11 月 戊 辰 條. 上 以 明 年 御 神 殿 受 朝 詔 天 下 曰 開 基 創 業 興 王 之 本 爲 先 繼 體 守 成 經 國 之 宜 尤 重. 昔 朕 皇 考 太 祖 高 皇 帝 受 天 命 命 君 主 華 夷 建 都 江 左 肇 邦 基 肆 朕 繼 承 大 統 懷 弘 鴻 業 惟 懷 永 國 泰 玆 北 京 實 爲 都 會 惟 天 意 之 所 屬. 實 卜 籤 之 攸 同. 乃 傍 古 制 徇 輿 情 立 兩 京 置 郊 祀 宗 廟 創 建 宮 室. 上 以 紹 皇 考 太 祖 高 皇 帝 之 先 志 下 以 貽 子 孫 萬 世 之 弘 規. 爰 自 營 建 以 來 天 下 軍 民 樂 於 趨 事 天 人 協 贊 景 贶 騈 臻 今 已 告 成 選 永 樂 十 九 年 正 月 朔 旦 御 奉 天 殿 朝 百 官 誕 新 治 理 用 致 雍 熙. 於 戱 天 地 淸 寧. 衍 宗 社 萬 年 之 福 華 夷 綏 靖 隆 古 今 全 盛 之 基. 故 玆 詔 示 咸 使 聞 之.

126 中 國 史 硏 究 第 65 輯 (2010. 4) 영락제가 북경 천도를 태조 조훈에 따른 것이라 강조한 까닭은 당 시 많은 관리 가운데 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당시 북경 천도를 반대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으나 어떤 사람 이, 무엇 때문에 북경 천도를 반대하였는지에 대해서는 太 宗 實 錄 에 잘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明 史 陳 祚 傳 76) 에 의하면 河 南 按 擦 司 參 議 로 있던 陳 祚 가 河 南 布 政 司 의 左 布 政 司 使 朱 文 褒, 右 布 政 司 使 王 文 振 등과 함께 북경 천도는 거북한 일이고, 결코 편안한 일이 아니 다( 建 都 北 京 非 便 ) 라면서 북경 천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 들은 모두 영락제의 노여움을 사 湖 北 省 均 州 太 和 山 으로 유배되어 전 호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 정황을 엿 볼 수 있다. 당시 강남 출신의 많은 관리들은 고향을 떠나 멀리 북방으로 가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공개적으로 반대할 수 없는 상 황에서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을 뿐, 태도를 바꾸어 천도를 지지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천도에 반대하는 관리들은 국가 경제를 고려 하여 남경에 그대로 수도를 두는 것이 남북 운송의 고비용을 줄이는 방법이며 정치의 중심지와 경제의 중심지가 일원화 될 때에 국가의 안 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입장을 택하였을 뿐, 북경에 수도를 정함으 로써 전국 통일에 어떠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깊 이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락 18 년(1420) 11 월, 천도를 눈앞에 둔 영락제는 먼저 행정체계의 정리에 손을 대었다. 북경이 경사로 승격됨에 따라, 北 京 行 部 를 폐지하 고 행재아문을 정리 통폐합시켰다. 북경행부와 거기에 속한 吏 戶 禮 兵 刑 工 의 六 曹 淸 吏 司, 司 獄 司 를 폐지하고 여기에 속한 관리들 을 모두 다른 관청의 관리로 골라 등용하였다. 이와 동시에 행부에 소 속되어 있던 8 부( 順 天, 保 定, 河 間, 眞 定, 順 德, 廣 平, 大 名, 永 平 ) 와 保 安, 隆 慶 의 2 개 주를 경사 북경의 直 隸 로 삼았다. 그리고 행부상서 郭 76) 明 史 卷 162, 陳 祚 傳, 陳 祚 字 永 錫 永 锡 吳 人. 永 樂 中 進 士 擢 河 南 參 議. ( 永 樂 ) 十 五 年 與 布 政 使 朱 文 褒 王 文 振 合 疏 言 建 都 北 京 非 便. 幷 謫 均 州 太 和 山 佃 戶.

永 樂 帝 의 北 京 遷 都 와 그 意 義 ( 全 淳 東 ) 127 資 를 호부상서로, 행부시랑 李 昶 을 호부우시랑으로 李 友 稙 을 공부좌시 랑으로, 崔 衍 을 병부우시랑으로 재임명하였다. 77) 이처럼 북경행부와 행재를 폐지하고 거기에 있던 관리들을 재조정 하여 경사에 걸 맞는 기구를 조직함으로써 북경의 京 師 化 를 서둘렀다. 그간 3년 반의 세월이 걸린 북경 도성 건설 공사도 영락 18 년(1420) 12 월에 거의 완성되었다. 78) 자금성 내에 3 대전, 곧 奉 天 殿, 華 蓋 殿, 謹 身 殿 이이 완성되고, 太 廟, 社 稷 壇, 天 地 壇 이 차례차례 완공되어 궁전 및 제사 시설이 갖추어졌다. 그리고 皇 太 孫 宮, 十 王 의 저택 등 황실 관 련의 시설도 이미 마련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영락 것이다. 19년 정월에 드디어 북경 천도가 이루어졌던 영락 19 년(1421) 정월 元 旦 에 계획대로 朝 賀 의식이 새로 지어진 봉 천전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영락제는 조하의 의식이 있기 전에 먼저 태묘에 이르러 德 祖, 懿 祖, 熙 祖, 仁 祖, 太 祖 등 五 廟 의 태황과 태후의 신위를 봉안하였다. 황태자에게는 天 壇 과 地 壇 에 나가 昇 天 上 帝 와 厚 生 皇 地 祗 의 신주를, 황태손에게는 사직단에 太 社 와 太 稷 의 신주를 각 각 봉안하도록 하였다. 또 山 川 壇 에는 黔 國 公 沐 晟 을 보내어 산천의 여러 신주를 봉안하도록 하였다. 그런 후에 영락제는 봉천전에서 조하를 받았다. 문무백관이 참여한 이 의식은 북경 천도가 공식적으로 실현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때 외국 사절단도 참여하였는데 조선 사절단도 이 의식에 참여하였다. 이때는 북경 천도를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신년 들어 축하하는 사절이 조하한 것이었다. 恒 例 의 영락 19년 2 월에 명조에서 돌아온 조선의 통사 全 義 로부터 그해 정 77) 明 太 宗 实 錄 卷 231, 永 乐 18年 11 月 壬 午 條, 革 北 京 行 部 幷 所 屬 吏 吏 戶 禮 兵 刑 工 六 曹 淸 吏 司 司 獄 司. 其 官 屬 具 調 用. 北 京 行 部 所 屬 順 天 等 八 府 保 安 隆 慶 二 州 幷 直 隸 京 師. 78) 궁전 건축 공사는 영락15 년(1417) 6월에 시작하여 영락 18년 12월에 완공되 었다.

128 中 國 史 硏 究 第 65 輯 (2010. 4) 월 초하루에 봉천전에서 의식이 있었으며 북경을 수도로 정했다는 것 을 보고 받자, 조선의 세종은 그 이튿날 이제 ( 명의) 황제가 북경에다 서울을 정하였으므로, 예를 갖추어 마땅히 축하해야 할 일이니, 司 僕 寺 와 병조는 헌상할 말 10 필씩을 선택하여 미리 기르게 하고 79) 하 면서 헌상할 말을 준비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영락제는 정식으로 궁정 및 백관을 북경으로 이동시켰고 1월 15 일에는 大 赦 免 의 조서를 내렸다. 80) 18년에 걸친 천도 계획이 마침내 실질적으로 완성되었던 것이다. 수도가 북경으로 옮겨짐으로 말미암아 정치와 군사가 일원화 되었 는데, 이로써 북경은 자연히 많은 군대와 많은 행정 관료를 소유하게 되었고, 황제는 외중국과 내중국, 비한인과 한인을 포용하는 실제적이 고 합법적인 황제로 군림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81) 영락 19 년(1421) 원단을 기해 실현된 북경 천도는 그동안 양경 체제 하에서 수도가 남경과 북경으로 나누어져 있던 두 개의 무게 중심을 하나로 모아 일체화함으로써 제국 중심의 정치 체제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영락제의 북경 천도가 華 夷 一 統 을 목적으로 한 엄청난 일이라고 보 기는 어렵지만 결과적으로 이후 외중국과 내중국을 아우르는 중국 통 합적 지배 체제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원대 이후 북경이 외 중국과 내중국의 접점이라는 공간적 요인이 주효하였다고 할 수 있 다. 82) 79) 朝 鮮 世 宗 實 錄 卷 11, 世 宗 3 年 ( 永 樂 19 年 ) 2 月 癸 卯 甲 辰 條, 上 王 命 兵 曹 曰 : 今 皇 帝 定 都 北 京 禮 當 進 賀. 其 令 司 僕 寺 及 兵 曹 各 擇 進 獻 馬 十 匹 預 養. 金 銀 之 不 産 我 國 上 國 所 知 也. 自 今 於 進 獻 方 物 勿 輕 用 之. 若 於 東 宮 雖 無 方 物 亦 可 也. 不 得 已 則 用 馬 不 過 四 匹 其 他 方 物 隨 宜 以 進. 80) 明 太 宗 实 錄 卷 233, 永 乐 19 年 正 月 戊 寅 條. 81) Denis Twitchett & J. K. Fairbank,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The Ming Dynasty (Cambridge Univ. Press, 1989), pp.237-238. 82) 중국의 공간 구성과 국도의 변천에 대해서는 세오 다쓰히코( 최재영 옮김), 장안은 어떻게 세계의 수도가 되었나 ( 황금가지, 2006; 原 題 妹 眉 達 彦, 長 安 の都 市 計 劃, 講 談 社, 2001), pp.71-95 참조.

永 樂 帝 의 北 京 遷 都 와 그 意 義 ( 全 淳 東 ) 129 원 명 청 세 왕조가 이어서 북경을 수도로 삼았지만, 수도의 기능 은 달랐다. 곧 원이나 청은 비 한족 출신의 정권으로, 북경을 수도로 삼으면서도 塞 外 지역의 上 都 ( 開 平 ) 나 沈 陽 熱 河 등지에 제2의 국도 를 가지고 있었다. 북방 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유목내지 정 복 민족을 보호하기 위하여 유목 지역의 최남단에 수도를 두어야 했 고, 한민족인 명 왕조는 농경 민족의 최북단에 수도를 삼아야 했는 데, 83) 이처럼 세 왕조가 다 같이 북경을 수도로 삼고 있었지만, 그 기 능은 서로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북경 천도는 이후 명의 통일적 지배 를 가능하게 하였고, 정치 경제 문화 등 역사 전반에 걸쳐 커다란 변 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3. 三 大 殿 燒 失 후의 輿 論 과 몽골 親 征 명나라의 수도가 북경으로 옮겨짐으로 해서 막북과 중원 지역의 통 치 중심이 하나로 될 수 있었고, 영락제는 화이의 통치자로서의 야심 과 다민족 국가의 통일과 발전이라는 명제를 풀어보려 하였다고 하더 라도 84), 북경 천도에 관한 이견 충돌이 마무리 된 것은 아니었다. 북경 의 새로운 궁전에서 조하를 받은 후, 4개월 여 지난 영락 19년 4월 8 일, 뜻하지 않은 화재를 만나, 갓 지은 3대전이 순식간에 소실되는 변 을 당했다. 85) 원인은 잘 밝혀져 있지 않으나 대체로 일반적인 견해이다. 落 雷 로 보는 것이 그런데 이 뜻밖의 화재는 후에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소문으 로 회자하였다. 朱 国 楨 의 涌 潼 小 品 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지 고 있다. 83) 範 德 (Edward L.Farmer), 論 明 之 移 都 北 京 ( 明 史 硏 究 4, 黃 山 書 社, 1994), pp.81-82. 84) 毛 佩 琦, 永 樂 皇 帝 大 傳 ( 遼 東 敎 育 出 版 社, 1994), pp.431-432. 85) 明 太 宗 实 錄 卷 236, 永 乐 19年 4 月 更 子 條, 奉 天 殿 華 蓋 殿 謹 身 殿 三 殿 災.

130 中 國 史 硏 究 第 65 輯 (2010. 4) 영락 18 년(1420), 3 대전의 공사가 다 이루어지자 황제는 漏 刻 博 士 86) 胡 奫 에게 점을 쳐 보도록 하였다. 胡 奫 은 산가지를 벌려 놓다 말고 무릎을 꿇고서 말하기를 내년 모월 모일 낮 12시에 3 대전이 훼손됩니다. 라고 하였다. 황제는 대노하고 胡 奫 을 잡아 옥에 가두었다. 불이 난다는 정오 가 지났는데도 불이 나지 않음을 옥졸이 보고하자 호윤은 독약을 먹고 죽었다. 그런데 정오 三 刻 이 되자 과연 삼대전이 분소하였다. 황제는 심 히 애석해 했다. 87) 물론 이 기록은 믿기 어려운 내용이다. 그러나 이 화재가 천도에 반 대하는 관리들에게 구실을 제공하였다는 것만큼은 쉽게 짐작할 수 있 다. 삼대전이 갑자기 불에 타는 재난을 당하자, 영락제는 마음을 가다듬 어 반성하고 신하들의 직언을 구하였다. 이 때 어떤 관리는 그것을 기 회로 삼아 북경 천도의 부당성을 직언하기도 하고, 또는 영락제의 정 치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한때 정치 풍파가 일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영락제는 관리들에게 궁실의 실화에 대하여 직언 하도록 하였다. 영락제가 내린 직언 조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짐이 몸소 천명을 받아 크고 넓은 대업을 계승하고 古 制 에 따라 兩 京 을 건설하였다. 그런데 영락 19년 4월 초 8일에 奉 天 殿 등의 3개전에 화 재가 발생하여 짐의 마음이 몹시 두렵고 떨리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구나. 생각해 보건데, 하늘을 경외하고 신을 섬기는 데 예를 갖춤이 태만하였는 가? 혹은 祖 法 을 본받는데 어그러짐이 있고, 정무를 다루는 데 괴리가 있 었는가, 혹은 小 人 이 자리에 있고 賢 人 이 은둔하여 선악에 구분이 없었는 가, 아니면 刑 獄 이 문란하고 무고하며 曲 直 이 잘 가려지지 않은 것인가? 혹은 참람함과 사특함을 서로 짓고, 알랑거림과 아첨함이 함께 발생하여 충언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인가? 혹은 억지로 세금을 물리고, 난폭하게 거두며 착취하여 재앙이 전답에 미치고 있는가? 혹은 상벌이 부당하게 집행되고 재물을 함부로 낭비하며 국가의 세출 운영에 법도가 없는 것인 86) 漏 刻 博 士 는 시각 측정과 시간 발표를 담당하며 천문 역법을 담당한 사람이 다. 87) 朱 国 楨, 涌 潼 小 品 卷 1, 宮 殿, 永 乐 十 八 年, 三 殿 工 畢, 上 召 漏 刻 博 士 胡 奫 占 卜. 布 算 了 一 会 后, 跪 曰 明 年 某 月 某 日 午 时 當 毁. 上 大 怒 囚 之, 至, 狱 卒 报 以 過 午 無 火 災. 胡 奫 毒 而 死. 則 午 正 三 刻 殿 果 焚, 上 惜 甚 惜 之.

永 樂 帝 의 北 京 遷 都 와 그 意 義 ( 全 淳 東 ) 131 가? 혹은 조세가 너무 무겁고 요역이 균등하지 못하며 백성들의 생활 백 성대로 되지 못하고 있는가? 아니면 군대가 휴식이 없고 징발에 규칙이 없으며 군향이 비어있는 것인가? 혹은 토목 건축의 일이 과도하고 징발 이 빈번하여 민력이 피폐하여졌는가? 혹은 간사한 자가 세력에 附 和 하고 관리들? 법을 농간하여 오히려 유사가 고달프고 나약하고 탐하며 잔인하 고 방자하여 이렇게 된 것인가? 아래로 백성을 괴롭게 하고 위로는 하늘 의 뜻에 어그러져 있는지 짐이 몽매하여 아직 어찌된 바를 살필 수가 없 도다. 그대 문무 군신들은 짐의 위임을 받기 바라오. 안락과 근심 걱정은 한 가지이니, 짐의 소행이 과연 부당하다면 마땅히 숨기지 말고 조목조목 진언하여 고쳐지기를 도모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제왕의 뜻을 돌이키게 해다오. 88) 영락제는 조서에 하늘의 천도, 백성의 민심, 君 臣 의 道, 경제 문제, 법 집행, 군대 문제, 토목 건축 문제 등 여러 면에 걸쳐 언급을 하고 있으면서도 직접적으로 북경 천도에 관한 가부의 내용은 보이지 않는 다. 영락제가 군신의 직언에 범위를 규정하여 놓으면서도 정작 천도에 관한 것은 논외 문제로 삼은 듯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영락제가 마음을 가다듬어 반성하고 신하들의 직 언을 구하고 있었는데, 이 때 상당수의 관리들은 그것을 기회로 삼아 북경 천도의 부당성을 직언한다든가, 영락제의 시정을 비판하고 나섬 으로써 한때 정치 파문이 일기도 하였다. 관리들 가운데에는 천도 문제를 공격하고 영락제의 시정을 지적하 는 일이 많이 있었으나 사서에 남아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천도 후에 그런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 한 데서 온 것이라 사료된다. 그런 중에 당시 한림원 시강으로 있던 鄒 緝 의 상소는 자극적이고 88) 明 太 宗 实 錄 卷 236, 永 乐 19年 4 月 壬 寅 條. 朕 躬 膺 天 命 祗 绍 鸿 图 爰 仿 古 制 肇 建 两 京. 乃 永 乐 十 九 年 四 月 初 八 日 奉 天 等 三 殿 災 朕 心 惶 懼, 莫 知 所 措. 意 者 於 敬 天 事 神 之 礼 有 所 怠 欤 或 法 祖 有 戾 而 政 务 有 乖 欤. 或 小 人 在 位 贤 人 隐 遁 而 善 恶 不 分 欤 或 刑 狱 冤 滥 及 無 辜 而 曲 直 不 辨 欤. 或 谗 慝 交 作 諂 諛 并 进 而 忠 言 不 入 欤 或 橫 徵 暴 敛 剥 削 而 殃 及 田 里 欤. 或 赏 罚 不 當 财 妄 费 而 国 用 無 度 欤. 或 租 税 太 重 徭 役 不 均 而 民 生 不 遂 欤. 或 军 旅 未 息 征 调 無 方 而 饷 空 乏 欤. 或 工 作 过 度 徵 需 繁 数 而 民 力 凋 弊 欤 或 奸 人 附 势 群 吏 弄 法 抑 有 司 茸 罢 软 贪 残 恣 纵 而 致 是 欤. 下 厉 於 民 上 违 於 天 朕 之 冥 昧 未 究 所 由 尔 文 武 群 臣 受 朕 委 任 休 戚 是 同 朕 所 行 果 有 不 當 宜 条 陈 無 隐 庶 图 悛 改 以 回 天 意.

132 中 國 史 硏 究 第 65 輯 (2010. 4) 강렬하였다. 폐하 북경에서 창건한 이후 노심초사하기 거의 20 년, 공 사 규모가 크고, 사람들 쓰는 일이 심히 광대하고 冗 官 이 蠶 食 하여 국 고를 다 소모하고 있습니다. 공사 인부가 백만에 이르며 농민은 1년 내내 계속 부역에 차출되어 자신이 몸소 경작할 겨를이 없습니다. 더 욱이 조정은 징발하는데 준칙이 없고, 뽕나무 대추나무를 베어 땔감으 로 하고 있고, 뽕나무 껍질을 벗겨 종이를 만들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 욱 관리의 횡포가 날로 더 심하여 가고 있습니다 89) 라면서 당시의 부 패상을 지적하며 비판하였다. 당시 직언한 사람들은 제거되거나 하옥되는 일이 많았는데, 그는 제 외되었다. 더불어 그 후 右 庶 子 兼 侍 講 으로서 세자 교육을 담당하면서 한림원 시강도 겸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된 것은 그의 직언이 영락제 가 직언하도록 지정한 범위에 벗어나지 않고, 천도에 대한 직접적인 불만은 토로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었던 것 같다. 추집전을 더 읽어가 보면, 영락제에게 직언을 구하다가 처벌당한 사 람들이 나오고 있으며 당시의 정황도 엿볼 수 있다. 당시 삼대전이 비로소 완성되었다. 황제는 바야흐로 定 都 하고, 갑자기 화재를 당해 대단히 황당하여 직언을 구한다는 조서를 천하에 내렸다. 직 언하는 사람들은 그 때의 施 政 을 비판하는 경우가 많아 황제가 기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신들은 다시 조칙대로 말하려 하였다. 이에 황제는 화를 내었다. 직언하는 사람을 헐뜯고 비방하는 사람이라고 하여 이를 엄 금하도록 하며 범하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겠다고 조서를 내렸다. 翰 林 院 侍 讀 李 時 勉, 侍 講 羅 汝 敬 이 하옥되고 御 史 鄭 惟 桓, 河 忠, 羅 通, 徐 瑢, 給 89) 明 史 卷 164, 趨 緝 傳, 永 乐 十 九 年 三 殿 災 诏 求 直 言. 缉 上 疏 曰 陛 下 肇 建 北 京 焦 劳 圣 虑 幾 二 十 年. 工 大 费 繁 调 度 甚 廣 冗 官 蚕 食 耗 费 国 储. 工 作 之 夫 动 以 百 万 终 岁 供 役 不 得 躬 亲 田 亩 以 事 力 作. 犹 且 征 求 無 艺 至 伐 桑 枣 以 供 薪 剥 桑 皮 以 为 楮. 加 之 官 吏 横 征 日 甚 一 日. 如 前 岁 买 办 颜 料 本 非 土 产 动 科 千 百. 民 相 率 敛 钞 购 之 他 所. 大 青 一 斤 价 至 万 六 千 贯. 及 进 纳 又 多 留 难 往 復 展 转 當 须 二 万 贯 钞 而 不 足 供 一 柱 之 用. 其 后 既 遣 官 采 之 产 所 而 买 办 犹 未 止. 盖 缘 工 匠 多 派 牟 利 而 不 顾 民 艰 至 此. 夫 京 师 天 下 根 本. 人 民 安 则 京 师 安 京 师 安 则 国 本 固 而 天 下 安. 自 营 建 以 来 工 匠 小 人 假 托 威 势 驱 迫 移 徙 號 令 方 施 庐 舍 已 坏. 孤 儿 寡 妇 哭 泣 叫 號 仓 皇 暴 露 莫 知 所 适. 迁 移 甫 定. 又 復 驱 令 他 徒 至 有 三 四 徙 不 得 息 者. 及 其 既 去 而 所 空 之 地 经 月 逾 时 工 犹 未 及. 此 陛 下 所 不 知 而 人 民 疾 怨 者 也.

永 樂 帝 의 北 京 遷 都 와 그 意 義 ( 全 淳 東 ) 133 事 中 柯 暹 등이 모두 交 趾 로 좌천되었다. 그리고 오직 추집과 주사 高 公 望, 서길사 楊 復 만은 무죄로 처리되었다. 그해 겨울에 추집은 右 庶 子 ( 세 자 교육 담당관) 겸 시강에 올랐다. 90) 이것을 보면, 북경 천도 후, 영락제가 신하들의 직언을 구하는 조서 를 내렸다고 하더라고, 그것에 따라 직언한다면, 영락제의 시정을 비판 하는 것이 되어 결과가 좋지 않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대전이 소실된 후, 많은 관료들과 언관들이 북경 천도와 영락제의 정책에 대하여 비난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들은 좌천, 하옥되거나 했는 데, 이 일로 사형을 당한 사람은 主 事 蕭 儀 이다. 그가 북경 천도는 불 편한 일이라고 강하게 비난하며 직언하였는데, 영락제는 이것에 노여 움을 사, 그를 사형에 처하였다. 영락제가 소의를 사형에 처하는 명령 을 내리면서 바야흐로 遷 都 할 때 朕 과 大 臣 은 몇 개월을 密 議 한 후 시행한 것으로 결코 경거망동한 행동이 아니다 라고 하면서 誹 謗 罪 를 적용하여 옥에 가두었다가 결국 사형에 처하였던 것이다. 91) 천도를 반대한 관리들은 결코 소의가 피살되었다고 위축되지 않았 고 그들은 도리어 천도 밀의에 참여한 대신을 공격하였고, 이러한 대 신들은 또한 영락제의 태도를 이용하여 상대방을 압박하려 하였다. 영락제는 다만 그들에게 오문 밖에서 꿇어 앉아 심문에 답하도록 하였다. 호부상서 夏 原 吉 은 상황이 더 복잡해지는 것에 대해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천도 직후의 정치 안정을 꾀하기 위하여 그 자신이 모 든 책임을 지려 하였던 것이다. 그는 황제에게 말하기를 저 사람들은 직언하라는 조칙에 따른 것이므로 죄과가 없습니다. 있다면 신처럼 책 90) 위와 같음, 时 三 殿 初 成. 帝 方 以 定 都 诏 天 下 忽 罹 火 災 颇 惧 下 诏 求 直 言. 及 言 者 多 斥 时 政 帝 不 怿 而 大 臣 復 希 旨 诋 言 者. 帝 於 是 发 怒 谓 言 事 者 謗 訕. 下 诏 严 禁 之 犯 者 不 赦. 侍 读 李 时 勉 侍 講 罗 汝 敬 俱 下 狱 御 史 郑 维 桓 何 忠 罗 通 徐 瑢, 给 事 中 柯 暹 俱 左 官 交 阯. 惟 缉 与 主 事 高 公 望 庶 吉 士 杨 復 得 無 罪. 是 年 冬 缉 进 右 庶 子 兼 侍 講. 明 年 九 月 卒 於 官. 91) 明 通 鑑 卷 17, 永 樂 19년 4 月 條, 是 月 殺 主 事 蕭 儀. 時 言 者 多 以 建 都 北 京 不 便 因 勅 大 臣 致 召 天 災 而 儀 言 之 尤 峻. 上 怒 曰 方 遷 都 時 朕 與 大 臣 密 議 數 月 而 後 行 非 輕 擧 也. 遂 坐 儀 誹 謗 下 獄 誅.

134 中 國 史 硏 究 第 65 輯 (2010. 4) 임 있는 대신들이 원대한 계획에 대하여 진심으로 협력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니 죄는 신 등에게 있습니다 92) 라고 하면서 문제를 완화하려 노력하였다. 하원길의 이와 같은 조정 작업으로 천도를 둘러싼 논쟁은 차차 시들어갔던 것이다. 거기에 영락제는 몽골 친정에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나왔다. 그는 한인과 몽골인을 아우르는 정책을 추진하여 왔다 하여도 93), 북경 천도 로 인한 재정 소모로 말미암아 군사를 출동하기에 좋은 여건이 아니었 는데도 영락 20 년(1422) 과 영락 21 년(1423) 과 영락 22 년(1424), 연이어 몽골 친정에 나섰다. 94) 영락제의 친정은 5 차례에 걸쳐 있었는데, 북경 천도 후에 3 차례나 이루어진 몽골 친정으로, 영락제는 매년 출정한 셈 이었다. 이 때 국가 재정이 부족한 상태에서 군사를 동원하는 일은 무 리라면서 원정을 비난하는 여론이 비등하여 갔고, 자신의 심복들까지 도 거기에 합류하였다. 이 때 고급 관료들, 이른바 호부상서 夏 原 吉, 형부상서 吳 中, 한림원 시강 李 時 勉, 병부상서 方 賓 등이 원정을 만류 하였으나, 도리어 이들을 하옥하거나 귀향시켰다. 이 때 원정을 반대하던 호부상서 夏 原 吉, 형부상서 吳 中, 한림원 시 강 李 時 勉 등은 옥에 갇히고, 병부상서 方 賓 은 스스로 자결하게까지 하면서 영락제는 집요하게 그리고 강력히 북방원정을 주도하다가 결국 제5차 원정을 마치고 귀환하는 도중 영락 22 년(1424) 에 내몽골 지방의 柳 木 川 에서 병사하였다. 영락제의 이와 같은 집요한 몽골 원정을 어떻게 평가할까? 혹자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 공동체 형성 이라든지, 95) 또는 南 人 政 權 으로 부터 統 一 政 權 으로의 轉 化 를 이룩하였고, 이것은 중화세계 황제의 사 92) 明 史 卷 149, 夏 原 吉 傳. 93) Edward L. Dreyer, op. cit. Early Ming China, A Political History 1355-1435, p.173. 94) 영락제의 몽골 親 征 에 대해서는 全 淳 東, 永 樂 帝 의 外 征 과 政 治 的 意 義 ( 中 國 史 硏 究 54, 中 國 史 學 會, 2008), pp.88-127 참조. 95) 宮 崎 市 定, 洪 武 から永 樂 へ ( アジア史 論 考 下, 朝 日 新 聞 社, 1976; 原 載 東 洋 史 硏 究 27-4, 1975), p.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