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재일 코리안과 다국가 시민권 - 영화 피와 뼈 디어 평양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를 중심으로 1) 신 명 직* - 목 차 - Ⅰ. 머리말 Ⅲ. 다국가 시민의 권리와 책무 : Ⅱ. 국민 에서 다국가 시민 으로 깊이와 범위 1. 귀환 을 통한 영토와 주권 모 1. 다국가 시민권의 깊이 순의 해결 2. 다국가 시민권의 범위 2. 영토와 주권의 모순과 다국가 Ⅳ. 맺는말 시민권 개 요 재일코리안이 주권과 영토의 불일치 상황, 곧 주권 영토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귀환 귀국을 하는 것이었 고 또 다른 하나는 상실된 권리와 책무를 일본에서 회복하는 것이었 다. 주권 영토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재일코리안의 노력은 전자에서 후자로의 전환, 곧 국민 -단일국가 단일국민론에서 시민 -다국가 시 민론으로 그 포맷을 바꾸어갔다. 이러한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해방 이후 한 세대가 지난 1970년대 차별반대투쟁과 80년대 지문날인 거부 투쟁을 거치면서부터였다. * 구마모토 가쿠엔 대학
38 石 堂 論 叢 56집 이글은 특히 두 번째 길, 한국 국적 혹은 북한의 해외공민 자격을 유지하면서도 일본에서도 시민으로서 권리와 책무를 다하면서 살아가 는 길, 곧 다국가 시민의 시민권-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무에 보다 주 목하고 있다. 이는 영화 피와 뼈, 디어 평양, 그리고 영화 달은 어디 에 떠 있는가 에서처럼, 재일코리안 2 3세들이 1세와 대립 갈등하면 서 일본에서 시민 으로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그려낸 대목에서 특히 잘 살펴볼 수 있다. 이 때 시민 으로서의 삶이란 다국가 시민 으로서 의 권리와 책무, 곧 남과 북과 일본이라는 다국가 시민권의 깊이와 범 위를 확장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재일코리안에게 늘 요구되었던 것은 선택이었다. 조국인 가 일본인가, 혹은 남인가 북인가의 선택을 어려서부터 늘 강요받아왔 다. 하지만 재일코리안은 그 중 하나가 아니라 그들 모두이다. 주제어 : 재일 코리안, 다국가 시민권, 주권, 영토, 국민, 시민, 지문날 인 거부투쟁, 차별반대투쟁, 귀국사업, 권리와 책무 Ⅰ. 머리말 국경을 벗어나는 순간,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의 권리는 제한될 수밖 에 없다. 국민주권이란 기본적으로 영토주권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영 토를 벗어나는 순간 주권은 많은 제한을 받게 된다. 국경을 장기간 벗 어날 경우엔 따라서 주권과 영토의 분리현상이 보다 심하게 갈등하게 되고,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 다. 예전의 국적을 버리고 새로운 국적을 취득하거나, 예전 국적을 그 대로 놔둔 채 영주 혹은 정주권을 획득하는 것 역시 주권과 영토의 분 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재일 코리안과 다국가 시민권 / 신명직 39 구 식민지 시기 식민지 조선을 벗어나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살게 된지는 벌써 적게는 60여년 많게는 80여년이 흘렀다. 식민지란 기 본적으로 주권의 상실을 의미하지만, 일본에 거주하던 재일조선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내지인과 외지인의 구별에도 불구하고 주권과 영토가 일치하는 조건에서 살아왔다. 이들에게 해방은 무척 혼란스런 경험이 다. 주권의 회복인 동시에 주권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이들에게서 일본 국적을 완전히 앗아갔는데, 이는 일본에서 살아가야하는 이들의 권리와 책무를 모두 앗아가는 것 이었다. 비로소 주권과 영토의 불일치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이들이 주권과 영토의 불일치 상황, 곧 주권 영토의 모순 1) 을 해결 하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 이다. 하나는 귀환 귀국을 하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상실된 권리와 책무를 일본에서 회복하는 것이었다. 주권 영토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재일코리안의 노력은 전자에서 후자로의 전환, 곧 국민 -단일국가 단일국민론에서 시민 -다국가 시민 론으로 그 포맷을 바꾸어갔다. 이러한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해방 이 후 한 세대가 지난 1970년대 차별반대투쟁과 80년대 지문날인 거부투 쟁을 거치면서부터였다. 이 글은 특히 두 번째 길, 한국 국적 혹은 북한의 해외공민 자격을 유지하면서도 일본에서도 시민으로서 권리와 책무를 다하면서 살아가 는 길, 곧 다국가 시민의 시민권-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무 2) 에 보다 1) 국경을 넘는 행위는 주권과 영토의 불일치, 곧 주권의 탈영토화 현상을 유 발시킨다. 재일코리안의 경우 식민지 시기와 식민지 이후 시기의 국경은 일 치하지 않는데, 이와 같은 국경과 국적의 변화, 주권과 영토의 불일치 현상 에 특히 주목하였다. 2) 시민권 은 시티즌십 의 번역어이다. 하지만 시민권 이란 번역어에는 시티 즌십 에 들어있는 시민으로서의 정치공동체에 대한 책무 가 강조되지 않는 다는 단점이 있다. 시티즌십 이란 표현 역시 지나치게 추상적이어서 정확한 의미 전달이 쉽지 않다. 하여 이 글에선 시민권 이나 시티즌십 이란 표현
40 石 堂 論 叢 56집 주목할 예정이다. 이는 영화 피와 뼈, 디어 평양, 그리고 영화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속의 재일코리안, 곧 다국가 시민의 삶과 역사에 대 한 주의 깊은 성찰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이들 영화는 모두 재일코 리안 2 3세들이 1세와 대립 갈등하면서, 일본에서 살아갈 방법을 모색 해 왔는데, 그 과정은 곧 남과 북과 일본이라는 다국가 시민권의 깊이 와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Ⅱ. 국민 에서 다국가 시민 으로 재일코리안 3) 은 국가주권 이 시민이나 거주민의 운명에 관한 최종심 급 일 수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 출생의 우연성 다시 말해 특정 정치 공동체에 의해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특성 에 따라 시민적 권리와 책 무가 주어지는 세계, 다시 말해 행하고 말하고 사고하는 자신의 행위 와 생각 에 따라 처우 받는 세계 4) 에 살고 있지 않다. 1947년 구식민지 시기의 국적 일본 에서 벗어나 당분간 외국인으로 간주 5) 된 재일코리안들은,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영토 와 주권 이 일치 하지 않는 상태 하에서 살아왔다. 당분간 이 아니라 실질적 으로 외국 대신 가능한 한 시민의 권리와 책무 로 표기하고자 하였지만, 필요에 따라 시민권 이란 표기를 병기하기도 하였다. 이 글에서 시민권 이란 시민으로 서의 권리와 책무 를 뜻한다. 3) 이 글에서 재일 코리안 은 일본에서 살고 있는 구 식민지 출신의 조선적 소 유자와 한국 국적 소유자를 뜻한다. 현재 특별영주권 을 갖고 있는 이들이 주된 대상이다. 뉴커머는 이 글의 대상에서 제외했다. 또한 재일 조선인 과 재일 한국인 을 분명히 구분해야만 할 경우를 제외하곤 이후 대부분의 표 기를 재일 코리안 으로 통일시켰다. 4) 세일라 벤하비브, 타자의 권리 (이상훈 역), 철학과 현실사, 2008, 86쪽. 5) 일본 정부의 외국인 등록령 공포 시행(1947년 5월 2일).
재일 코리안과 다국가 시민권 / 신명직 41 인이 된 것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서였다. 이들에겐 아무런 선택권도 주어지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일본인에서 외국인(무 국적 상태의 조선인)으로 재일코리안의 운명을 바꾸어놓았을 뿐이다. 이후 전개된 재일코리안들의 필사적인 투쟁은 1952년 이후 주어진 주 권의 탈영토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한 재일코리안들의 해결 노력은 크게 두가지 방식으로 나타 났다고 볼 수 있는데, (1) 귀환 을 통한 영토와 주권의 모순 해결 방식 과 (2) 다국가 시민권 혹은 데니즌십 6) 을 통한 영토와 주권의 모순 해 결 방식이 그것이다. 1. 귀환 을 통한 영토 주권 모순의 해결 : 단일 국가 단일 국민론 살고 있는 곳(영토)과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의 권리(주권)가 어긋 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영토 속의 성원이 갑자기 늘어났거나 줄어들 었음을, 혹은 국민의 범위가 갑자기 바뀌었음을 뜻한다. 해방 직후 일 본 속에서의 재일코리안의 영토와 주권이 일치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 것은 앞서 언급한 두 가지 경우의 수 가운데 특히 후자에 해당된다. 어긋난 영토와 주권을 일치시키기 위한 가장 간단한 방법은 주거공 간을 옮기는 것(귀환)인데, 이는 기본적으로 단일 국가 단일 국민론 에 기반해 있다. 귀환에는 크게 두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의적 귀 환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강제적 귀환-추방이다. 재일코리안이 귀환을 6) 해외 장기체류자의 권리와 책무를 위한 데니즌십(denizenship)에 대해서는 토마스 해머(T.Hammer, 1990) 등의 연구가 있으며, 데니즌십과 관련하여 재일 코리안과 재영 아일랜드인의 권리에 대한 비교연구로는 佐 久 間 孝 正 在 日 コリアンと 在 英 アイリッシュ-オールドカーマと 市 民 としての 権 利 東 京 大 学 出 版 会 2011 年 168~174 頁 참고.
42 石 堂 論 叢 56집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던 시기는 대략 1945년부터 1960년대까지라 할 수 있는데, 이 중에서도 순수하게 자의적인 귀환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는 기간은 1945년부터 1948년에 불과하다. 48년 이후엔 제주도 4 3 항쟁 등으로 일본으로의 역[ 逆 ]귀환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럼에 도 불구하고 자의적 귀환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은 1952년 샌 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전까지라고 할 수 있다. 1959년 이후 본격화되기 시작한 북으로의 이른바 귀국운동 역시, 자의적 귀환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배경에 일본의 강제추방 의지와 북의 노동력 수요라는 변수가 함께 결합되어 있기에 순수한 의미에서 의 자의적 귀국이라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중에서도 가장 집중적으로 자의적 귀환이 이루어졌던 시기는 1946 년까지라고 할 수 있다. 연합군 최고 사령부(GHQ) 등의 도움을 받아 일본 패전 직후 약 250만 명의 재일코리안 가운데 약 140만 명이 귀환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재일코리안을 해방 국 민이지만, 적국인으로 간주하였고 7), 중의원 선거법 개정을 통해 재일 코리안의 참정권은 정지되었다 8). (1)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전 자의적 귀환이 아닌 강제적 추방으로 전환하기 시작한 것은, 앞서 언 7) 大 沼 保 昭 徐 龍 達 編 新 版 : 在 日 韓 国 朝 鮮 人 と 人 権 - 日 本 人 と 定 住 外 国 人 との 共 生 を 目 指 して 有 斐 閣 2005 年 271 頁 8) 중의원 선거법을 개정하여, 재일 조선인과 대만인의 참정권을 정지시켰는 데, 호적을 내지 호적 해당자와 외지 호적 해당자로 구분지음으로써 이들 의 참정권은 정지되었다(45년 12월 17일). 당시 중의원들은 조선인에게 선 거권을 부여하면 천황제 폐지를 부르짖을 것 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 水 野 直 樹 在 日 朝 鮮 人 台 湾 人 参 政 権 停 止 条 項 の 成 立 在 日 朝 鮮 人 参 政 権 問 題 の 歴 史 的 検 討 (1) 研 究 紀 要 第 1 号 財 団 法 人 世 界 人 権 問 題 研 究 セン ター 1996.3.)
재일 코리안과 다국가 시민권 / 신명직 43 급한 대로 재일코리안을 외국인으로 간주하기 시작한, 1947년 외국인 등록령 의 시행과,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체결 이후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란 일본의 주권 회복 인 동시에 재일코리 안의 주권 상실 이 공식화된 조약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 되자, 일본은 재일코리안에게 아무런 국적 선택권도 주지 않은 채, 일 방적으로 재일 조선인과 재일 대만인을 외국인이라고 선언해 버렸다 9). 곧 이어 외국인 등록법 이 공포되었고, 지문제도가 도입되었다 10). 연합군 최고 사령부가 처음부터 재일코리안들을 추방하고자 했던 것 은 아니다. 연합군과 일본이 재일조선인을 강제적으로 추방시키고자 한 데는, 일본 패전 직후 활발하게 전개된 재일조선인의 생활권 옹호 및 요구 투쟁 과 조선인학교 폐쇄 반대 투쟁 등의 영향이 컸다. 니가 타일보사 습격(46년 9월) 이후 연합국 최고 사령부는 연합국과 조선인, 중국인에 대한 비판을 금지하는 검열지침까지 정했지만, 재일조선인 생활옹호 위원회 의 결성(46년 11월) 이후 계속된 전국 대회와 수상관 저 습격(46년 12월), 밀주 단속에 따른 충돌 등이 잇따르자, 연합군 최 고 사령부는 1949년 4월 재일본 조선인 연맹[ 朝 連 ] 을 마침내 강제해산 시켜버렸다 11). 보다 결정적인 것은 일본 각지에 조선인 학교가 설립되자, 연합군 최 고 사령부는 1948년 조선학교 폐쇄령을 발령했는데, 이에 반발하는 4 24 한신[ 阪 神 ] 교육투쟁 12) 이 발생하면서부터 사태는 걷잡을 수 없 9) 국적과 호적의 처리에 관한 지침을 분명히 한 통달은, 平 和 条 約 の 発 効 に 伴 う 朝 鮮 人 台 湾 人 等 に 関 する 国 籍 及 び 戸 籍 事 務 の 処 理 について (1952 年 4 月 19 日 法 務 府 民 事 局 長 通 達 民 事 甲 第 438 号 ). 10) 1952년 4월 28일 공포 시행된 이후, 광범위한 외국인 등록법 지문제도 반 대투쟁이 전개되었다. 11) 오누마 등은, 1945년~1949년을 생활권 옹호투쟁과 민족학급 창설 시기로, 1950년~1954년을 생활보호요구투쟁과 비합법투쟁 및 국적에 의한 차별 시작 시기로 분류한 바 있다( 大 沼 保 昭 徐 龍 達 編 前 掲 書 235 頁 ).
44 石 堂 論 叢 56집 이 격화되었다.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효고현청을 점거한 시위대를 진 압하기 위해 최초의 비상사태를 선언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 공산당과의 연계과정이다. 일본 공산 당 고베시 의원이 검거되는 등, 일본 공산당 관서지방 위원회는 한신교 육투쟁에 깊숙이 결합하였고, 이후 전개된 재일 조선인의 생활보호요 구 투쟁 역시 일본 공산당의 지도하에 이루어졌다. 연합군 최고 사령부가 1949년 9월 재일조선인연맹을 강제해산한 뒤, 재일조선인 투쟁은 점차 비합법의 길을 걷게 되었고, 요시다 수상 역시 맥아더에게 재일 조선인들이 공산주의자이거나 그 동조자임을 들어 전원 송환 을 바란다는 제목의 탄원서 13) 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재일조선인의 주권 과 영토 의 관계 위로, 이데올로기 곧 냉전 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공산화 이 후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연합군 의 구도에서 냉전 구도로 급속하게 이동하기 시작했고, 일본 공산당과 결부된 재일조선인은 자의적 귀환 의 지원 대상이 아닌 강제적 추방 대상으로 변모되어갔다. 자의적 귀환 은 사실상 48년 이후 일단락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한 국에서 일본으로의 재입국(밀입국) 14) 이라는 역( 逆 )귀환 현상이 발생 했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의 열악한 한국의 경제상황에다 제주4 3사 12) 국어 강습회를 개조한 조선인학교는 전국에 500여개, 학생 수는 약 6만 명 에 달했다. 1948년 한신 교육 투쟁 은, 김태일 학생이 경찰에게 사살되는 등, 4월 14일부터 4월 26일에 걸쳐 전개되었다. 13) 탄원서에서 송환을 해야만 하는 이유로, 일본 식량사정이 안 좋은 상태에 서 조선인 식량까지 수입할 수 없다는 점, 조선인들의 범죄율이 높고, 경 제법규를 지키지 않으며, 그 중 상당수가 공산주의자와 그 동조자라는 점 등이 거론되었다. 14) 한국에서 일본으로 역귀환하는 이들 가운데, 1946년 한 해동안 불법입국자 로 검거된 이가 17,733명( 金 賛 汀 在 日 コリアン 百 年 史 三 五 館 1997 141 頁 ), 1946년부터 1958년까지 체포된 자가 52,000명, 미체포자가 15,000 명 정도였다. ( 天 声 人 語 朝 日 新 聞 1959 年 12 月 15 日 )
재일 코리안과 다국가 시민권 / 신명직 45 건 폭압 등으로 일본으로 재이주(역귀환) 하려는 재일코리안들이 많이 발생했던 것이다. 일본은 연합군 최고 사령부로부터 주권을 물려받는 과정에서, 이미 연합군이라고 할 수 없는 미국의 요구(냉전의 우산 수용)를 받아들이 는 대신, 재일코리안들을 분명한 외국인으로 규정하여 이들을 일본의 주권 재영토화 과정에서 확실하게 배제시켰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은 이를 명문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재일코리안과 재일대만 인에게 국적의 선택권을 주지 않은 채, 한 장의 통지서만으로 일방적인 국적과 주권의 박탈, 곧 동일영토 동일주권의 파산을 선고했다. (2) 북으로의 귀국사업 까지 한국전쟁 기간 동안 재일코리안의 투쟁은 더욱 강도를 더해갔다. 재 일조선인연맹의 강제해산 뒤, 1950년 7월 비합법 조직으로 조국방위위 원회 가 만들어진 뒤, 51년 일본 공산당 제4회 전국협의회 이후 재일 조선인들도 스이타( 吹 田 )사건 15) 등 무장투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주권을 박탈당한 재일조선인들은 냉전체제가 보다 심화되어가면서, 생활권은 물론 일상적인 추방의 위협에 몰리게 되었다. 1950년 한국전 쟁 난민을 대상으로 세워진 오무라 수용소가 냉전체제에 위협적인 재 일조선인 강제추방의 도구 16) 로 전락하는 등, 재일코리안에 대한 차별 15) 한국전쟁 발발 이후, 연합군의 점령하의 일본은 미군의 병참기지가 되어버 렸는데, 이를 저지하기 위해 1952년 6월 미군 캠프가 주둔해 있던 오사카 대학 캠퍼스 주변에서 발생한 화염병 투척 등을 동반한 대규모 시위. 한국 전쟁 즉시 휴전, 군사기지 반대, 미군 철수, 군수수송과 군수산업 재개 반 대, 재군비 징용반대, 파방법 반대 등을 내걸었다. 16) 1950년 11월까지 46,000여명이 강제송환당했으며, 50년 12월 1차송환 이후 52년 3월까지 7차례에 걸쳐 3,633명이 부산으로 송환되었다. 이들 가운데 에는 불법입국자뿐 아니라, 외등령과 형벌법령을 위반한 45년이전부터 거 주해온 자 445명도 포함되었다.( 盧 恩 明 出 入 国 管 理 制 度 をめぐる 日 本 人
46 石 堂 論 叢 56집 과 추방위협은 점차 노골화되어갔다. 한국 전쟁이 끝난 뒤 1950년대와 60년대 내내, 냉전은 일본에서의 재 일코리안의 지위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주권과 영토의 불일 치로 인한 지위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들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는 데, 그 하나는 50년대 중반부터 전개된 이른바 귀국(북송) 사업 이고, 또 다른 하나는 65년 한일회담 이후 생겨난 협정영주권 의 탄생이다. 북한은 한국전쟁 직후 1954년 8월, 재일조선인은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해외공민이다 라는 선언을 하였다. 이 선언은 일본 공산당의 방향전환 17) 과 맞물리면서, 51년 결성되었던 재일 통일민주전선[ 民 戦 ] 의 해체와, 55년 재일조선인 총연합회(이하 총련 総 連 ) 의 탄생을 불러 왔다. 북한이 모든 재일조선인은 해외공민이라 선언함으로써, 샌프란시 스코 강화조약 이후 국적을 박탈당했던 재일조선인들은 스스로의 국적 이 회복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했는데, 이는 이후 일본의 일상적인 차별 과 추방위협의 영구적인 해결, 곧 조국이라 믿던 북한으로의 귀환-주 권과 영토의 일치로 귀결되었다. 한편 군사정권이 들어선 남쪽은 북 중 소 관계에 대항하기 위한 냉전 블록 곧 한 미 일 관계를 강화해나갔는데, 그 일환으로 이루어 진 것이 한 일 국교의 정상화였다. 1965년 6월 한일 기본조약 및 제 협정 과, 재일코리안과 관련된 재일 한국인 법적 지위 및 대우협정 등 の 異 議 申 し 立 て 運 動 九 州 大 学 大 学 院 2008 26 頁 ; 法 務 省 入 国 管 理 局 編 出 入 国 管 理 とその 実 態 1959 年 15~19 頁.) 특히 오무라 수용소 와 관련해서는 노은명, 일본의 출입국관리체제 반대운동 연구-1969~71 년 일본인의 반대운동을 중심으로, 역사문제연구 22호, 2009년, 역사문 제연구소, 299~302쪽 참고. 17) 1952년부터 시작된 일본공산당의 방향전환은 제6회 전국협의회(1955년)를 통해, 무장투쟁노선의 포기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일본 공산당과의 갈등 을 민전 이 해소하고 총련 으로 재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북한 의 해외공민론 선포라 할 수 있다.( 金 賛 汀 前 掲 書 185~189 頁 参 照.)
재일 코리안과 다국가 시민권 / 신명직 47 이 체결되었다. 55년 총련의 결성과 북으로의 귀국사업과, 65년 한일조약 체결에 따 른 협정영주권의 탄생은 각각 재일코리안의 주권과 영토를 일치시키기 위한 조치이자 노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냉전의 산물이라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처음부터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다. 귀환을 통한 국민 으 로서의 삶을 살아갈 것인지, 일본에서의 정주를 통한 시민 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것인지를 선택하기 보다,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를 선택해 야하는 문제로 뒤바뀌어 버렸기 때문이다. 귀국사업 은 사실 일본의 강제추방 의지 와 북한의 노동력수입 의 지 가 빚어낸 합작품이라 할 수 있다. 주권을 상실당한 채 차별과 추방 위협에 늘 시달려온 재일코리안들의 새로운 조국건설을 위한 귀환 의 지 가 결합되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1959년 열화와 같은 환송을 받으 며 니가타 항을 출발했던 귀국선은 1962년도(3년차)에 이르러 1960년 도(49,000명)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3,400여 명의 재일조선인 이 승선했을 뿐이었다 18).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극도로 궁핍한 생활과, 낯선 생활문화, 그리고 신분에 따른 새로운 차별이었다. 귀환 을 통해 재일코리안 다수의 주권이 회복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주권 의 상실을 그들은 경험하였는데, 이는 국민 -단일국가 단일국민이 되 는 길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한일회담이 만들어낸 협정영주권 역시 재일코리안들에게 실망을 안 겨주긴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경제개발 의지 와 일본과 미국의 냉전블 록 형성 의지 가 만들어낸 협정영주권 은, 조국-남과 북의 국민 이 되 는 길이 아닌 일본에서의 시민 이 되는 길을 단지 열어주었다는 의미 18) 1959년 12월부터 1984년까지 약 93,000여명의 재일조선인이 북으로 귀환 하였는데, 59년(2,942명), 60년(49,036명), 61년(22,801명), 62년(3,495명), 63 년(2,567명)이 귀국하였다. ( 日 本 赤 十 字 の 資 料 : 金 英 達 高 柳 俊 男 編 北 朝 鮮 帰 国 事 業 関 係 資 料 集 新 幹 社 1995. 참고)
48 石 堂 論 叢 56집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국민 건강보험 가입이 인정되었다 든가, 해외강제퇴거 사유가 일반 외국인보다 약간 완화되는데 그친 협 정영주권 은 그저 무늬만 영주권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19). 더욱이 재일 코리안은 한미일 동맹 냉전체제가 원했던바 그대로, 조선적에서 조선 적 잔류 일반 외국인 과 한국 국적 소유 일본 협정영주권자 로 양분되 었다 20). 59년 이후 진행된 귀국사업의 참담한 실패(공산 블록)와, 65년 이후 진행된 협정영주권의 절반의 실패(반공 블록)를 경험한 재일코리안들 에게 이제 남겨진 것은, 주권과 영토를 일치시키기 위한 노력을 조국- 남과 북이 아닌 일본에서 실현시키는 것뿐이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참담한 결과가 냉전 과 함께 시작되었고 냉전과 함께 깊어갔다는 점이 다. 2. 영토 주권의 모순과 다국가 시민권 귀국사업의 실패와 불완전한 협정영주권의 부여가 실은 미국과 일본 을 포함한 한반도 남과 북 사이의 이데올로기 대결, 곧 냉전의 산물이 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재일 코리안들은 냉전의 대리인인 총 련과 민단을 떠나, 개별주체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북의 해외공민 혹 은 남의 해외거류민 - 냉전 국가의 국민 이 아닌, 남북한은 물론 일 19) 해외강제퇴거 조치가, 일반 외국인의 경우 징역 1년을 넘은 형사처벌자에 게 적용되었지만, 재일한국인 협정영주자에게는 징역 7년을 넘은 자에게 만 적용되었다. 퇴거강제 조항이 영주 개념과 배치되는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 大 沼 保 昭 単 一 民 族 社 会 の 神 話 を 越 えて: 新 版 東 信 堂 1993 162 頁 ) 20) 협정영주권 신청마감이었던 1971년 1월까지 협정영주권을 신청한 재일코 리안은 350,922명이었다. 전체 재일코리안의 절반이 협정영주권을 신청한 것이다.( 民 団 の 主 な 年 譜 :1945 年 ~2011 年 http://www.mindan.org/shokai /nenpu.html 日 本 大 韓 民 国 民 団 )
재일 코리안과 다국가 시민권 / 신명직 49 본이라는 국가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트랜스 내셔널한 시민, 곧 다국가 시민 을 탄생시켰다. 다국가 시민 이란 탈냉전의 산물이었다. (1) 70년대 차별철폐 운동과 다국가 시민 의 탄생 일본에서 상실된 주권을 본국 귀환을 통해 회복하려던 움직임이 실 패로 돌아간 60년대 말 70년대 초는, 시기적으로도 해방 전후로부터 대략 1세대가 경과한 시점과 일치했다. 이들 재일코리안 2~3세들은, 한국 국적을 유지하되 일본에서도 일본국민과 동등한 권리와 책무를 지닌 시민 으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그 시발 탄이 된 것은 1970년 박종석의 일본 히타치 제작소 취직차별소송이었 다.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인 이들은 조선적 잔류자에서 한국 국적을 취 득한 이들이었다. 총련은 해외공민론- 단일국가 단일국민론 에 입각해 있던 터라,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해 왔는데 때론 종종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펼치기도 했다. 박종석 취직차별소송이란, 일본명[ 通 名 ]으로 치른 입사시험에 합격 을 했는데, 재일코리안이기에 호적등본을 제출할 수 없게 되자, 한국명 [ 本 名 ]과 제출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였지만, 결국 취업을 거부당한 데 대해 이의 곧 소송을 제기한 사건 21) 을 말한다. 소송은 74년 요코하 마 지방재판소에서의 승소로 판결이 났는데, 일본 국적을 박탈당한 자 가 소송을 제기했다는 사실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일본 재판부가 이 를 인정했다는 사실은 재일코리안은 물론 일본인들에게도 무척 충격적 21) 1970년 3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박종석은 그해 9월 히타치 입사통지서를 받고, 근무하던 회사를 퇴직했다. 히타치를 대상으로 낸 소송에는 공적 질 서와 미풍양속 위반, 무국적과 사회적 신분 등을 이유로 한 차별적 조치는 무효 라는 주장을 폈다.( 横 浜 地 方 裁 判 所 判 決 1974 年 6 月 19 日 : 日 立 製 作 所 採 用 取 消 ). 박종석은 작년(2011년) 11월 만 60세로 히타치 소프트웨 어 토츠카 공장을 정년퇴직했다.
50 石 堂 論 叢 56집 인 사실이었다. 취직차별소송은 60년대 말 신좌익 투쟁이 휩쓸고 간 자리에 새롭게 불기 시작한 일본인들의 반[ 反 ]차별운동과 맞물리면서 조용하지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본 각지에서 박 군을 둘러싼 모임[ 朴 君 を 囲 む 会 ] 등이 만들어졌고, 재일코리안과 일본인들이 함께 소송지원활동을 전개해 갔는데, 그 과정에서 일본인들은 재일코리안의 공영주택 입거 제한 문제 등을 함께 제기하기도 했다 22). 1974년 6월에 나온 소송 판결문에는 재일조선인이 일본에 오게 된 내력 을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토지 박탈과 강제동원과 연행이라 적시 하였고, 재일조선인이 호적난을 채울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일본 인이 내선일체 슬로건 하에 조선인의 이름과 언어와 문화와 민족성을 빼앗았 던 것처럼, 1945년 이후 역시 재일조선인에 대해 국적선택의 자유를 빼앗 았기 때문이며, 일반 외국인과 같은 처우를 하지 않아, 무 국적자와 같은 상태를 방치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판결문은 또한 재일 코리안의 차별과 억압에 대해서도, 의무만 주어지고 권리를 누릴 수 없도록 하였기 때문에 그 생활의 압박과, 다양한 차별과 억압이 지속 적으로 가중되어왔다 고 밝혔다 23). 22) 다나카 히로시는 재일코리안 공영주택 입거불가 문제 를 해결하기 위해, 주민들과 함께 지역 시청에 항의하러간 자리에서, 입거대상자 100명중 일 본인 98명과 재일조선인 2명이라는 상황을 일본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느 냐는 해당공무원의 질문에 주민들은 그럴 수 있다 고 대답했다. 이는 전적 으로 히타치취직차별 소송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 大 沼 保 昭 徐 龍 達 編 前 掲 書 203~208 頁 ) 23) 판결은 또한 일본명 을 쓴 것은, 본인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일본사회가 강요한 것으로, 이는 인간으로서의 존재 를 둘로 분단시키는 행위였다고 지적하였다. 박종석의 본적 문제에 대해서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국적, 호적 에 의해 가장 노골적으로 이루어져왔음을 언급하면서, 호적등 본은 사실상 차별의 무기였다고 판시하였다.( 横 浜 地 方 裁 判 所 判 決 1974 年 6 月 19 日 )
재일 코리안과 다국가 시민권 / 신명직 51 본국으로의 귀환이 아닌 일본에서의 취직을 통해, 한 명의 생활인 곧 시민으로서의 권리- 다국가 시민권 을, 재일코리안과 일본인들이 함께 싸워낸 끝에, 법적 판결을 통해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박종석은 이 후 1974년 8월 27일부로 히타치제작소에 정식 입사했다. 이후 차별철폐투쟁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와세다 대학을 졸 업한 김경득( 金 敬 得 :당시의 通 名 은 金 沢 敬 得 )은 1972년 아사히 신문 입 사를 거부당한 뒤 본명으로 1976년에 사법시험에 최종합격하였지만,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법연수소 입소를 거부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일본인과 재일코리안 다수가 이를 반대하는 운 동을 광범위하게 펼친 결과, 김경득은 1977년 일본의 외국인 첫 사법연 수생 24) 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70년대 공영주택 입거, 대기업 입사, 사법연수소 입소 문제 등에서 국적조항 을 없애기 위한 재일 한국인과 일본인의 연대 활동은, 새로운 법제도의 생성으로 연결되었다. 1982년 특별영주제 가 법제화 되면서, 국민연금법, 사회보장 관계법(아동부양 수당, 건강보험 등)에서 국적요건 이 모두 없어졌다. 1981년 출입국 관리령 이 출입국 관리 및 난민인정법 으로 바뀌면 서, 한국적 이외의 조선적 대만적 소유의 평화조약 국적법 이탈자 에 게도 특별영주 제도에 의해 특례로서의 영주허가 가 주어진 것인데, 재일코리안들은 이로 인해 초등교육 국민연금 아동부양수당 건강 보험 등에서 일본 국민과 동일한 대우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24) 재일코리안과 일본인 지지자들이 연대하여 변호사자격의 국적조항 철폐운 동을 전개하였는데, 6차례에 걸쳐 최고재판소에 의견서를 제출하는 등 지 속적으로 이의를 제기한 결과, 사법연수소의 입소 거부는 철회되었다. 또 한 1975년 최창화 목사는 NHK를 대상으로 한국인 이름을 일본어 식으로 읽는 방송을 하는 것은 인권침해 라는 소송을 제기, 1988년 최고재판소에 서는 비록 패소했으나, 모국어로 발음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인식이 널리 유포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52 石 堂 論 叢 56집 물론 82년의 국적조항 철폐 법조항의 생성이, 70년대에 이루어진 차별철폐투쟁의 영향 보다는, 국제인권규약 (79년)과 난민조약 (81년) 비준과 발효에 따른 어쩔 수 없는 국적 조항 철폐였다는 점을 더 강 조하는 견해 25) 도 있다. 내적 요인보다 외압 에 의한 것, 곧 일본의 국 제적 위상에 따른 비준 강압과 그에 따른 특별영주제의 도입이 낳은 결과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70년대 자유로운 주거 및 취업할 권리 의 확보를 위한 투쟁과 마찬가지로, 82년 입관체제-법제도의 생성이, 70년 대 국적차별 철폐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음은 분명하다 26). 국적조항 철폐란, 국적은 한국이지만, 일본에서의 자유로운 주거와 취업 을 할 수 있는 권리와, 연금 및 아동부양 수당과 같은 사회보장 (여전히 제한적이지만) 제도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 한다. 국적과 관계없이 남 북한과 일본에 걸친 시민의 탄생, 다국가 시 민 의 권리와 책무의 시작을 의미한다. 다국가 시민의 권리와 책무는, 보편적 인권 과 국민국가의 제한된 권리와 책무 사이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주권과 영토 가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재일코리안과, 이들의 성원권을 인정하려는 이들-일본인이, 취직 및 주거 차별 등을 받지 않기 위한 투쟁- 민주적 반추[ 反 芻 ] 27) 를 통해, 초국가적 초영토적인 새로운 시민권인 다국가 시민의 권리와 책무, 법 을 생성해낸 것 28) 이다. 25) 大 沼 徐 編 (2005) 前 掲 書 209 頁 이에 대해 조선적 잔류자와 한국국적 소유자의 견해는 갈린다. 26) 광범위하고 전 분야에 걸친 反 차별운동은 재일코리안에 대한 일본인들의 거부감을 서서히 변화시켜갔는데, 이는 난민법의 인정과 더불어, 82년 입 관체제-법제도 생성에 지대한 역할을 했음이 틀림없다. 27) 벤하비브, 앞의 책, 209쪽. 28) 재일코리안과 관련하여, 1979년 주택금공고법, 공영주택법, 주택도시정비 공단법, 지방주택공급공사법, 1982년에 아동부양수당법, 특별아동부양수당 법, 아동수당법 등이 새로 만들어졌다. 이들 법 생성과 관련하여 79년 국 제인권규약 과, 81년 난민조약 과의 관련성만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으나,
재일 코리안과 다국가 시민권 / 신명직 53 (2) 80년대 지문날인 거부 투쟁 도쿄 신주쿠 구청에서 이루어진 단 1명의 반란 또한 주목할 만하다. 1980년 9월 재일코리안 한종석[ 韓 宗 碩 ]이 일본의 외국인 등록령 에 기 초한 지문날인을 거부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거부는 말도 없이 여 기저기서 1사람씩 생겨났고, 한국의 1인 시위 에서 시작된 촛불시위 처럼, 재일 코리안의 지문날인 거부 투쟁은 들불처럼 일본 전국으로 확 대되어갔다. 이에 재일 대한민국 부인회 를 비롯해 재일 한국 청년회 와 일본인 학자, 변호사, 사회운동단체, 저널리스트들이 합류하기 시작했고, 84년 9월엔 지문날인 거부 예정자 회의 를 결성한 뒤, 시민운동 중심으로 투 쟁은 확대되어 갔다. 85년 9월 지문 날인 거부 보류자가 1만명을 넘어 서자, 일본 정부는 88년 6월 지문날인을 평생 1번만 하면 되는 개정 외등법 을 제안하기도 했다. 결국 일본은 91년 재일 한국인 법적 지위 및 처우에 관한 각서 가 한일 외상회의에서 결정된 것을 계기로, 입국 관리 특례법을 통해 재일 코리안의 법적 지위를 특별영주 로 일원화한 뒤, 특별영주자들을 지문날인제도에서 제외시켰다. 지문날인 거부 투쟁은 검지 손가락의 자유[ 人 差 し 指 の 自 由 ] 투쟁으 로 불리기도 했다. 이 때 검지 손가락 이란 예비 범죄자(외국인) 를 의 미하는 것으로, 검지손가락의 자유 란 예비범죄자 가 아닌 거주 이전 등을 일본 국민과 동일하게 할 수 있는 시민 으로서의 기본권의 회 복 29) 을 의미한다. 60년대 말 슬로건 중심의 신좌익운동의 반성에 따른 구체적 생활투쟁 (70~80년대) 경향성=일본인과, 60년대 귀국운동의 실패에 따른 일본과의 공생론=재일코리안의 차별철폐를 위한 70년대 공동투쟁이, 82년 외국인 등록법의 생성과 91년 입관 특례법 생성의 기본동력, 민주적 반추( 反 芻 )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벤하비브는 이와 같은 과정을 법생성적 정치학 이라 언급한 바 있다.(벤하비브, 앞의 책, 204쪽.)
54 石 堂 論 叢 56집 85년 5월 재일코리안 이상호[ 李 相 鎬 ]는 지문날인 거부로 경찰서에 체포되고, 재입국 불허와 재류갱신 등이 불허되었다. 하지만 많은 재일 코리안들이 스스로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지속적으로 투쟁을 계속한 결 과, 1991년 입관 특례법 이 만들어져 1965년 협정영주권자의 경우 3대 이후 역시 영주허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협정영주권자(한국 국적 소유자) 뿐 아니라, 조선적과 대만적 영주자들도 특별영주 허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조선적 잔류자들은 65년 협정영주제 때와는 달리, 특 별영주제 도입에 아무런 반대 이견을 내지 않았다. 조국 지향 해외공민 론 -귀환을 전제로 한 단일국가 단일국민론의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힘 든 것이었지만 특별한 반대이견은 제출되지 않았다. 이 법은 그 대상을 평화조약 국적 이탈자 및 평화조약 국적 이탈자 의 자손 으로 명시하고 있다. 이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어긋나기 시작한 영토와 주권의 모순이 재일코리안의 노력과 투쟁(일 본인의 지원과 함께)을 통해 새롭게 해결되어가고 있음을 뜻한다. 한국 국적과 조선적 상관없이, 여전히 많은 제약이 따르고는 있지만 거주와 이전의 자유를 비롯한 시민적 권리, 국민 건강보험과 국민연금과 같은 사회적 권리 등 -다국가적 시민권이 상당 부분 모든 재일코리안에게 주어진 것이다. 정치적 권리와 책무 역시 70 80년대 차별철폐투쟁 과정-민주적 반추 과정을 통해 많은 부분 가능해졌다. 이를테면 김경득 변호사의 사법연 수소 입소거부 반대투쟁을 통한 사법부문에의 참여할 권리, 70 80년대 국공립 대학의 교원임용에서의 국적조항 철폐투쟁 등을 통한 82년 9월 외국인 교원 임용법 의 시행과 91년 초중고 교원임용에서의 국적조항 철폐 등 30) 공무원으로서 행정부문에 참여할 권리 및 책무가 불완전한 29) 이는 마샬이 언급한 시티즌십의 세가지 유형, 곧 시민적 권리, 정치적 권 리, 사회적 권리의 첫 번째 유형인 시민적 권리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30) 국공립대학에서의 외국인 교원 임용법 이 통과된 것은 1982년이지만, 초중
재일 코리안과 다국가 시민권 / 신명직 55 형태로나마 가능해졌다. 문제는 재일코리안이 지방 정치에 참가할 권리와 책무라 할 수 있다. 한국이 2007년 헌법재판소 판결에 기초해 해외 영주권자에게도 선거권 을 부여하라는 결정을 내린 뒤, 참정권과 평등권 등 국민의 기본권행사 가 납세와 국방의 의무에 대한 반대급부로 상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 명히 한 결과, 2012년 재일코리안 영주권자들도 한국의 국회의원 선거 와 대통령 선거에 투표할 수 있었다. 또한 한국은 외국국적을 소유하고 있는 영주권자에게도 지방참정권을 부여하기도 했지만, 일본에서 재일 코리안에게 지방참정권은 아직도 부여되고 있지 않다. 한국이 다국가 시민 의 정치적 권리와 책무를 한국의 법적 테두리 내에서 인정한 반 면, 일본에서 다국가 시민 의 정치적 권리와 책무는 여전히 인정되고 있지 않다. 다국가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권리와 책무를 인정하고 있지 않는 것 은 총련도 마찬가지다. 1996년 총련은 오사카 부[ 府 ] 산하 시청이 재일 코리안을 기술직 지방공무원으로 채용하였을 때, 이를 민족을 파는(매 민족적) 행위라고 맹비난한 바 있다. 재일코리안이 일본의 지방공무원 이 되는 것을, 식민지 시기의 조선인이 일본 하급관리가 되어 다른 조 선인을 억압했던 것과 동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의 일 본 지방에서의 참정권 문제는 재일동포를 일본사회에 동화시키는 길 을 여는 위험한 것으로, 스스로 민족적 존엄과 아이덴티티를 부정하 는 것인 동시에, 일본이 일찍이 조선 식민지 지배시절에 내선일체 를 의심하면서도 민족적인 일부의 조선인에게 청원을 시켜 선거권을 부여 고등학교에서 외국인 교원이 정식으로 임용되기 시작한 것은 91년 한일 각서 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여전히 임용과정에서 외국인 국적은 문제가 되고 있는데, 그 근거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 당연한 法 理 론 이다. 1948년 법무 조사 의견청 장관의 회답에서 비롯된 이 논리는 공무원이란 국가에 대한 충성과 일신을 바치는 무한대의 의무가 있다 는 논리에서 비롯된 것 으로, 지금까지 관철되고 있는 논리이다.
56 石 堂 論 叢 56집 했던 우려할만한 사례를 상기시키는 것 31) 이라 평가하였다. 재일코리안의 정치적 참여에 있어서의 권리와 책무를 총련 등이 반 대하는 이유는, 이들이 생각하는 재일코리안의 정치형태란 단일국가 단일국민론에 기초한 동화론 과 분리론 이라는 이분법적 발상만이 존 재하기 때문이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는 등 32) 북의 해외공민 을 선택한 이상, 이들에게 동화론과 분리론 이외의 선택지는 처음부터 주어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 재일코리안이 취직차별 소송을 하고, 공무원이 되며, 지방참 정권을 요청하는 것을 동화론 적 시각에서 바라보기는, 오누마 야스아 키[ 大 沼 保 昭 ]나 다나카 히로시[ 田 中 広 ] 등도 마찬가지 33) 이다. 이들이 공생론을 이야기하면서도 최종적으로는 항상 동화론 으로 귀결될 때마 다 거론하는 것은, 재일조선인 혼인형태의 변화이다. 1960년 재일코리 안 끼리의 혼인비율이 65.7퍼센트였던데 반해, 1995년의 경우 16.6퍼센 트로 줄어들었다는 34) 통계가 그것이다. 일본 국적 취득자 숫자 역시 31) 在 日 本 朝 鮮 人 総 連 合 会 在 日 同 胞 の 地 方 参 政 権 に 反 対 する 1996 年 4 月 (http://www1.korea-np.co.jp/special/sanseiken/cc01.htm)일본 내 지방참 정권을 반대한다는 점만을 놓고 본다면, 총련과 일본 보수세력의 의견은 일치한다. 32)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가운데에는 총련 중앙본부 의장, 조선대학교 교장을 비롯한 6명의 일꾼이 포함되어 있다. ( < 最 高 人 民 会 議 代 議 員 選 挙 > 富 強 祖 国 建 設 に 力 合 わせ 在 日 同 胞 立 候 補 の 選 挙 区 で 朝 鮮 新 報 2009. 3.13. http://www1.korea-np.co.jp/sinboj/j-2009/04/0904j0313-00005.htm) 33) 21 世 紀 の 在 日 韓 国 朝 鮮 人 の 社 会 的 現 実 と 法 的 地 位 ( 大 沼 徐 編 前 掲 書 182~270 頁 )관련, 大 沼 保 昭 와 田 中 広, 鄭 早 苗, 徐 龍 達 의 좌담 참고. 김 찬정( 金 贊 汀 )은 물론 도노무라( 外 村 大 ) 역시 한국과 일본의 공생론을 동화 론의 연장선상에서 서술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金 贊 汀 前 掲 書 231 頁 ; 外 村 大 在 日 朝 鮮 人 社 会 の 歴 史 学 的 研 究 緑 蔭 書 房 2004 459~475 頁 ) 34) 厚 生 大 臣 官 房 統 計 情 報 部 人 口 動 態 統 計 ( 外 村 大 前 掲 書 459 頁 에서 재 인용.)
재일 코리안과 다국가 시민권 / 신명직 57 1952년 232명이던 것이, 2003년엔 11,778명까지 늘어났다는 통계도 늘 인용된다. 하지만 2011년엔 일본 국적 취득자 수가 2003년의 반 수준인 5,656명으로 줄어들었으며 35), 예전엔 귀화할 경우 철저히 스스로가 한 국 출신임을 감추기 위해 통명만을 사용했지만, 이른바 한류가 일반화 된 최근엔 귀화하더라도 통명이 아닌 본명을 쓰는 경우가 많아 졌다든 가, 그 자녀 -민족학교 미경험자들이 한류를 계기로 재일 코리안 단체 나 조직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최근조사 보고 36) 도 있다. 하지만 북의 해외공민으로서 동화가 아닌 분리의 길을 고수해온 조 선적 잔류자 의 경우도, 특별영주권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순수한 반[ 反 ]동화주의자라고는 할 수 없다. 70년 가까운 세월은 생활 의 모든 면에서 반[ 反 ]동화를 실현하기에는 너무 긴 세월이다. 따라서 이들의 반[ 反 ]동화주의란 많은 부분 관념적일 수밖에 없는데, 이는 이 들 역시 현실적인 다국가 시민 의 일부로 간주해야하는 이유가 된다. 물론 특별영주권을 갖고 있는 재일한국인은 이미 한국에서의 선거권과 동시에 일본에서의 시민적 사회적 권리와 정치적 권리와 책무를 아주 제한적이지만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45년 이후 70년 가까운 기간의 긴 민주적 되새김질( 反 芻 )이 만들어낸 다국가 시민 으로서의 권리와 책무 란, 양자택일이 아닌 국가와 국가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시티즌십의 탄 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35) 1972년엔 4,983명, 1992년엔 7,244명이던 것이, 2003년 이후 1만 명 선을 넘 어섰으나, 최근엔 다시 7,637명(2009년), 5,656명(2011년)선으로 떨어졌다. ( 法 務 省 HP 日 本 国 籍 取 得 者 の 推 移 ;http://www.key-j.org/keyword/art icle/data/pp09_05.pdf ; 民 団 HP 帰 化 者 数 ;http://www.mindan.org/sh okai/toukei.html#03 참고) 36) 金 知 榮 조국 문화로서의 한류 -재일 한국 조선인의 한류 미디어 접촉 을 중심으로, 일본문화학보 41호, 일본문화학회, 2009년, 197~212쪽.
58 石 堂 論 叢 56집 Ⅲ. 다국가 시민의 권리와 책무 : 깊이와 범위 구 식민지 출신 재일코리안(평화조약 국적 이탈자)은 일본 국민과 보통의 외국인 사이의 존재임에 틀림없는데, 이처럼 국민과 외국인 사 이에 존재하면서 국민에 가까운 존재를 토마스 해머는 영주시민( 永 住 市 民 :denizen) 이라고 불렀다 37). 지금까지 국민국가의 닫힌 시스템에 따를 경우, 국적에 기초한 권리와 의무 혹은 국민이 갖는 일련의 권 리 만을 시민권 이라고 불러왔지만, 최근엔 시민적 권리와 사회적 권 리, 혹은 정치적 권리의 일부까지 외국인에게 부여되기 시작했는데, 이 를 곤도 등은 영주 시민권(denizen citizenship) 이라 불렀다 38).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외국인으로 살아가게 된 재일코 리안이, 65년 협정영주권과 82년 특별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기 이전까 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귀화(동화) 아니면 귀국(분리)이었다. 하지 만 긴 투쟁의 과정을 거치면서 재일코리안에게도 시민적 권리와 사회 적 권리가 주어지는 영주권 제도가 도입됨에 따라 전부 아니면 전무 식의 이분법 도식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곤도는 영 주시민 시티즌십(데니즌십) 이란 권리의 성질과 권리주체의 태도에 따 라, 끊임없이 변하고 새롭게 생성되는 성질을 띠고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39). 하지만 영주시민권 론에는 권리 가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어, 정치공 동체에 대한 책무 가 소홀하게 다루어진 측면이 있다. 책무 란 시민을 능동적인 시민 으로 만드는 것으로, 법에 의한 의무를 넘어선, 덕행의 기회이자 공동체에 헌신할 기회를 포함한다 40). 하지만 주권과 영토가 37) トーマス ハンマー(Tomas Hammar: 近 藤 敦 監 訳 ) 永 住 市 民 と 国 民 国 家 明 石 書 店 1999 年 78 頁 38) 近 藤 敦 外 国 人 の 人 権 と 外 国 人 の 市 民 権 明 石 書 店 2001 年 13 頁 39) 近 藤 敦 前 掲 書 13~14 頁
재일 코리안과 다국가 시민권 / 신명직 59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의 시티즌십을 언급할 때 책무 란 그리 간단하게 정의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이를테면 병역 이란 문제를 생각할 때 만 해도 그렇다. 이들은 종종 둘 이상의 국가 가운데 책무를 선택할 하 나를 강요받기 때문이다. 다국가 시민 론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을 열어준다. 둘 이 상의 국가에 공통선이 될 수 있는 일에 헌신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때 둘 이상의 국가란 유럽연합이 될 수도 있고 동아시아 공동체가 될 수 도 있다. 시민으로서의 권리 뿐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책무를 특히 강조한 것 은 키이스 포크(Keith Faulks)이다. 그는 이를 총체적(holistics) 시티 즌십 으로 설명한 바 있는데 41), 개인과 공동체, 권리와 책임, 시민적 권 리와 사회적 권리의 이원론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티즌십의 필요성을 그는 총체적 시티즌십이라 명명한 것이다. 그는 특히 이를 4가지 측면, 즉 시티즌십의 범위 깊이, 내용과 맥락 42) 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했는데, 재일 코리안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해 살펴볼 부분은 시티즌십 의 깊이와 범위일 것이다. 남과 북 그리고 일본에 걸친 재일코리안 시티즌십의 깊이와 범위를 보다 심도 있게 살펴보기 위해서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 정치 제도 모 두에 적합한 시티즌십, 곧 국적과 인종 혹은 다른 집단적 구성원의 지 위를 인정하되 그것을 넘어서는 시티즌십 개념이 필요한데, 히터는 이 를 다층적(multiple) 시티즌십 으로 설명한 바 있다 43). 40) 키이스 포크(Keith Falks), 시티즌십, 아르케, 2009년, 26쪽. 포크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의 시티즌십이란 권리에 근거한 것이기보다 책무에 근거한 것이라고 했다. 41) 키이스 포크, 앞의 책, 68~81쪽. 42) 키이스 포크, 앞의 책, 12~22쪽. 43) Heater, D.(1990), Citizenship, London: Longman, p.314. (키이스 포크, 앞 의 책, 186~7쪽 재인용.) 히터의 또 다른 책으로는 Heater, D.(1996), Worl
60 石 堂 論 叢 56집 그는 개인이 다양한 시민적 정체성을 가질 수 있고, 다양한 충성심 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진정으로 가능함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고 했는데 44), 다국가 시민 으로서의 재일코리안의 권리와 책무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 장에선 재일코리안이 다국가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무를 어떻게 깊고 넓게 확장해왔는지를 양석일 원작 최양일 감독의 영화 피와 뼈 와, 동일 원작 동일 감독의 영화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그리고 양 영희 감독의 디어 평양 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세 작품 모두 재일코 리안 1세와 2세의 갈등을 담고 있다. 동화 냐 귀환 이냐의 선택을 강요 하거나 강요받아온 재일코리안 1세와 갈등하면서, 재일코리안 2세와 3 세들이 어떻게 다국가 시민 으로서의 권리와 책무에 내재된 깊이와 범 위를 확장해 왔는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1. 다국가 시민권의 깊이 영화 피와 뼈 45) 의 무대는 조선부락 이다. 그곳이 조선부락임을 알 려주는 가장 선명한 장면은 제주도 출신 재일코리안 1세 김준평이 묶 어놓은 돼지를 찔러 나오는 붉은 피로 선지를 만들고, 창자를 꺼내 곱 창(호르몬)을 만들고, 돼지 머리를 잘라내는가 하면 46), 아낙네들이 창 d Citizenship and Government: Cosmopolitan Ideas in the History of Western Political Thought, New York: St. Martin's Press. 영어 판본 K eith Falks(1990), Citizenship, New York: Routledge, p.11.참고. 44) Heater, D.(1990), 앞의 책, 320쪽 (키이스 포크, 앞의 책, 167쪽에서 재인 용.) 45) 崔 洋 一 감독( 梁 石 日 원작) DVD 血 と 骨 販 売 : 2005 (이하 등장하는 숫자는 DVD 경과 시간). 46) 돼지를 잘라내 뿜어대는 핏빛 장면과 재일코리안의 웃음을 교차시킴으로 서, 감독은 조선부락과 일본 인 부락(소나 돼지를 죽이는 직업인들이 사는 마을)의 동일성, 혹은 조선부락 내부 잔인함의 표상화를 꾀하고 있다.
재일 코리안과 다국가 시민권 / 신명직 61 란 젓(창자)을 만들거나, 금지된 밀주 막걸리를 만드는 대목 47) 이다. 모 두들 흥에 겨워, 웃고 떠든다. 젊은 김준평 일행이 제주도에서 타고 온 배 위에서 대판(오사카)이다 라며 크게 외칠 때를 제외하곤 거의 유일 하게 웃고 떠드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영화 대부분은 집기가 부서지 거나, 치고받는 장면들이다. 좀 지나치다 싶은 대목들도 있지만, 조선부락이라면 가능한 장면이 라는데 대부분 이의가 없다. 주인공 김준평은 소설 원작과 달리 조선부 락을 떠나지 않는다.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조선부락 이외의 김준평을 카메라에 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조선부락에서 전후 해방공간 에서 불법으로 개조한 어묵공장으로 돈을 번 뒤(20:25~24:23), 다시 조 선부락 사람들을 대상으로 고리대금업을 벌여 많은 돈을 벌어들인다. 어묵공장의 김준평은 장시간 저임금의 노동을 혹사시키는 이른바 악덕기업주이고, 고리대금업의 김준평은 돈을 갚지 못한 또 다른 조선 인 사장을 자살로 몰아넣는 인물이다. 이런 김준평이라는 인물이 재일 코리안의 한 전형일 수 있는 것은, 그 배경이 조선부락이라는 것, 사금 융 이외의 공금융에 접근할 수 없으며, 재일코리안이 운영하는 열악한 작업장 이외엔 2세들이 취업할 곳이 없는 조선부락을 그 배경으로 하 고 있기 때문이다. 주위의 차별과 시민적 사회적 무권리 상태의 지속이 만들어낸 전형 적인 게토(ghetto)였던 조선부락 에서 힘 있는 자로 살아남기 위해 김 준평이 의지할 곳이란 돈 과 폭력 그리고 핏줄 이었다. 조선부락 이외 에 특히 일본사회와의 접점이 없는 곳에서 살아온 김준평에게 핏줄은 곧 국가를 호명하는 것이었다. 이때의 국가란 물론 관념의 산물이다. 수없이 많은 돈을 지불하고 선택한 조국 북한으로부터도 그는 끝내 버 47) 최양일 감독 영화 피와 뼈 (142분) 공개:2004년,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감독상,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일본 영화 대상,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주연여우상 등 수상 : 모두 2004년, 39:37~41:10 (DVD:2007년, 일본)
62 石 堂 論 叢 56집 림받아, 차가운 바라크에서 숨을 거둔다(02:15:29~02:16:55). 머릿속으 로만 그려왔던 관념적 귀환 혹은 자의이건 타의이건 일본 사회와의 접 점 하나 없었던 삶, 하나의 국가 하나의 국민만을 생각하게 했던 조선 부락의 필연적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다국가 시민 으로서의 권리와 책무의 깊이 를 느 끼게 해주는 지점은 김준평의 삶이 아니라 김준평과 그의 주변 인물들 과의 관계이다. 김준평은 그의 아들 김정웅(마사오)과 김화자(하나코) 사이에서 늘 부딪힌다. 김준평은 마지막까지 아들과 화해하지 못한 채 영화는 끝을 맺는다. 부딪히는 표면적 이유는 돈 이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여성 이다. 김정웅이 아버지와 정면으로 치고받으며 싸우는 대목은 두 군데 있 는데, 하나는 누이 하나코(화자)가 김준평의 폭력으로 자살을 기도했다 는 소식을 듣고 칼을 들고 김준평이 있던 목욕탕에 난입하는 장면 (01:01:34~01:04:06)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암에 걸린 어머니 치료비를 댈 수 없다는 김준평을 처음으로 두들겨 팬 뒤 두 번째 여인의 집 기물 을 모두 다 부숴버리는 장면(01:39:14~01:43:23)이다. 조선부락 출신이 일본에서 성공하기 위해 모든 힘들 기울이는 것은 돈 과 폭력 인데, 그 과정에서 늘 희생되는 것은 여성 이다. 나이가 들 어 그의 폭력성이 거세되어서야 여성들의 반란은 가능했다. 병에 걸린 김준평의 돈을 다 탕진한 세 번째 일본인 부인을, 언제나 그랬던 것처 럼 김준평이 지팡이로 내려치려 하지만, 일본인 부인이 오히려 그의 지 팡이를 빼앗아 있는 힘껏 내려치는 장면(01:57:23~01:59:47)은 통쾌하 기까지 하다. 아내 장례식을 찾아오던 김준평을 아들과 친척들 모두 외 면해버리고(02:08:35~02:10:00), 그는 결국 오던 길을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조선부락이란 재일코리안 내부 속살을 들춰내, 그 속에 다원 화, 다층화 되어 켜켜이 쌓여있는 재일코리안의 다층적 아이덴티티를
재일 코리안과 다국가 시민권 / 신명직 63 문제 삼는다. 그리하여 그것을 분해 해체시킨 뒤 새로운 아이덴티티, 분해된 다층적 시민의 권리와 책무를 복원해낸다. 부벡은 시티즌십의 깊이와 관련하여, 엷은 시티즌십 은 순수하게 법 적이고 공적인 지위에 관한 것인 반면, 깊은 시티즌십 은 도덕적이며, 공적인 동시에 사적인 지위에 관한 것이라 설명한 바 있다 48). 그런 의 미에서 영화 피와 뼈 는 공적인 재일코리안 공동체 -조선부락 내부에 서 또 다른 형태로 억압받고 차별받는 시민, 사적인 재일코리안 여성 의 권리와 책무를 물으며, 다국가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무의 깊이를 심화시킨다. 영화 디어 평양 은 또 다른 의미에서 다국가 시민권의 깊이를 되돌 아보게 하는 영화이다. 영화 피와 뼈 에서 재일코리안 1세인 아버지 김 준평과 2세인 아들 김정웅이 끝내 화해를 하지 못했다면, 영화 디어 평양 은 제주도 출신 1세 아버지와 2세 딸의 화해를 그렸다고 할 수 있 다. 영화 디어 평양 에서 제일 많이 들리는 단어는 조국 과 충성 이다. 감독 겸 내레이터 영희의 아버지는 총련 일꾼으로 일본 패전 후 일흔 을 넘기도록 조국에의 충성으로 매진해왔다. 오사카 총련 설립초기부 터 중심멤버로 활동해온(16:40~17:20) 영희 아버지는, 1971년 아들 셋 을 모두 북으로 귀환시켰다. 59년 북으로의 첫 귀환선이 떠난 뒤, 60년 대 중반부턴 대부분 북엘 가기 꺼려해 했는데, 71년이었지만 영희 아버 지는 총련 간부였기에 당당한 충성심 으로 아들 셋을 모두 귀환 시켰 다 49). 48) Bubeck, D.(1995) A Feminist Approach to Citizenship. Florence: Europe an University Institute. (키이스 포크, 앞의 책, 19~20쪽에서 재인용.) 49) 영화 피와 뼈 에서 김준평의 아들 김정웅은 북으로 떠나는 선배 장찬명의 열차 환송식에 참여해 열차를 떠나보낸 뒤, 나는 공화국에 돌아가지 않았 다. 아니 가지 않았다. 고 했다.(01:26:16~01:26:37)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 코리안 2세의 북한행 이란, 1세의 그것과 달리 귀환한 것 이 아니라 그냥
64 石 堂 論 叢 56집 딸 영희는 조선학교 시절엔 조국과 충성과 혁명이란 단어를 늘 입에 달고 산 덕분에 모범생 표창장까지 받았다.(23:50~24:05) 1983년 처음 으로 조선학교 조국 방문단으로 11년 만에 오빠들과 재회하면서 그녀 가 느낀 것은 친근감보다 위화감 이었다(25:24~26:40). 영희는 북을 조국이라고 배운 나라 라고 했다(26:34). 어버이 조국 이 아니라 조선 학교에서 조국이라고 단지 교육받아온 나라일 뿐이었다. 그녀에게 조국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 은 일체 용납되지 않았다 (01:07:09~01:07:12). 아버지의 고희연을 겸한 평양에서의 결혼 50주년 기념 파티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삶이란 조국을 위한 것 이었으며, 자 신의 모든 것은 조국의 배려 라고 했다(01:12:28~01:12:33). 무거워 보 이는 훈장들을 줄줄이 달고 선 아버지를 바라보며, 딸 영희는 훈장 하 나하나가 모두 충성심의 증명 일 거라고 했다(01:06:57). 평양 고희연 자리에서 아버지는 충성심이 아직도 부족하다 면서, 아 이들을 혁명가로 만들겠다 고 했을 때, 그녀는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 었다 고(01:15:20~01:16:17) 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될 수 없다 고 했고, 이것만이라도 아버지가 알고 있기를 기원했다(01:17:08 ~01:17:17). 하지만 영화가 그려내고자 한 것은 귀국사업과 조국에의 충성심으로 가득 찬 재일코리안 1세와, 이를 거부하는 2세와의 갈등이 아니다. 조 국 과 배신, 분리 와 동화 와 같은 이항대립 사이에서 영희가 많은 고 민을 하지만, 영희가 결국 골라 낸 것은 선택할 수 없음 이다. 조국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그녀는 답을 찾을 수 없다. (01:12: 33)고 했다. 조국은 없다 가 아니다. 절대불변일 줄 알았던 아버지의 답도 바뀌어 갔다. 75세 아버지의 고희연이 끝나고 3년 뒤인 2004년 6 간 것 이었다. 영화 디어 평양 의 아들 삼형제 역시 아버지가 귀환(귀국) 시킨 것이 아니라, 그냥 북으로 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재일 코리안과 다국가 시민권 / 신명직 65 월 그녀는 아버지에게 다시 묻는다. 영희 : 아들 셋을 보내고 후회하지 않으세요? 아버지 : 일단 갔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가도 좋았지만, 가지 않았어도 좋지 않았을까? 지금 부터 32년 전이니까 내가 43, 44살 때... 재일조선 운 동의 앙양기여서... 모든 게 다 잘 될 거라고 봤지. 너 무 쉽게 생각했지. 자기들도 너무 몰랐을 때였다고... 너무 빨랐다고... 그러더군. 영희 : 건민 오빠 중학생일 때였지... 니가타에서 배웅할 때 울었어요? 아버지 : 아니. 영희 : 엄마는? 아버지 : 응... 울었지.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50) 하지만 아버지는 이런 말을 한 끝에 끝내 절대 존경하고 끝끝내 충 성 다 하고, 장군님을 믿고 끝끝내 밀고 나간다 고 얼버무린다. 카메라 를 의식한 발언일 수도 있고,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자기방어에서 저절 로 나온 발언일 수도 있다. 그녀의 질문은 계속 되었다. 자신이 국적을 바꿔도 좋으냐 고 묻자, 자신은 충성 다 한다 니까 안 바꾸지만, 딸 영 희는 한국 국적으로 바꿔도 좋다 고 답한다(01:29:36~01:33:42). 한국 으로 국적을 바꾸겠다고 할 땐 격노했던 아버지(01:16:40)가 바뀐 것 이다. 그녀는 바뀔 수 없는 집의 규율이 바뀌었다 (01:33:16)고 했다. 늘 아버지를 거부하기만 하던 영희였지만, 투병 중인 아버지를 위로 하는 장면에선 그녀 역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울먹이며 힘내서 평양에 가자 고(01:44:17) 외치는 아버지를 보며, 딸 영희는 처음으로 50) 梁 英 姬 감독 DVD Dear Pyongyangディア ピョンヤン (107 分 ):2007 年 販 売 01:21:55~01:24:11
66 石 堂 論 叢 56집 아버지가 느끼는 평양의 무게를 느낀 것 같다 고 했다. 그곳(평양)엔 아버지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기 때문이었다.(01:44:50~01:45:02). 영희에 대한 아버지의 인정, 아버지에 대한 영희의 인정은, 사실상 두 종류의 삶이 둘 사이에 이미 공존해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북의 해외공민으로서의 삶과 일본에서의 삶, 곧 두 개의 국가에 걸친 다국가 시민 으로서의 삶을 상호 인정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다국가 시민 으로서의 삶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은 가족이다. 북의 오빠들은 새로운 가족을 이루었고, 일본의 아버지 어머니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두 개의 나라를 살아가고 있었다. 동상에 걸린 손자를 위해 1상자 분의 카이로(손난로)를 보내는가 하면, 음악을 좋아하는 손 자를 위해서는 쇼팽과 라흐마니호프 씨디와 악보를 북으로 보내느라 할머니는 바쁘다. 키티 그림이 들어간 학용품과 각종 비상약, 고희연에 썼던 25만엔의 비용에 이르기까지, 북의 오빠 가족들이 평양에서 기죽 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일본에서 보내준 물건들 덕택이 었다. 일본의 가족들이 일본에 살면서 북을 살아왔듯이, 북의 가족들 역시 북에 살면서 일본을 살아왔던 것이다. 아버지 양공선[ 梁 公 善 ]이 이 정도일줄은 몰랐다 고 후회하면서도 반 드시 마지막에 조국에의 충성 을 사족처럼 다는 것 역시, 실은 일본에 살면서도 북의 가족으로 살아가야한다는 것, 후회하는 한편 또한 충성 해야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북에 자식을 보낸 재일코리 안 부모의 운명이기도 하다. 딸 영희는 그런 아버지의 운명, 북한과 일 본을 동시에 살아왔던 다국가 시민 아버지의 운명을 삶의 마지막 순간 에 비로소 이해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딸 영희가 서울로 시집가도 좋다 고 했는데, 이 말은 이들 가족이 두 개의 국가가 아닌 세 개의 국가에 걸친 시민으로 살아갈 운명임을 인정하는 것과도 같다. 영화 디어 평양 은 내레이터가 어떻게 오빠 가족이 있는 평양을 좋 아하게(dear) 되었는지, 아버지가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오사카와 앞으
재일 코리안과 다국가 시민권 / 신명직 67 로 살아갈지 모를 서울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다국가 가족/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무의 깊이를 심화시킨다. 영화 피와 뼈 와 영화 디어 평양 이 다국가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 무의 깊이를 심화시켰다는 또 다른 근거로 거론할 수 있는 것은 친밀 성 의 시티즌십 51) 이다. 두 영화 모두 시티즌십의 공적 영역이 아닌 사 적 영역인 가족 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피와 뼈 가 사적인 영 역, 재일코리안 가족의 민주화를 정면으로 다룸으로써 다국가 시민권 의 깊이를 심화시켰다면, 영화 디어 평양 은 국가를 가로지르는 가족 간의 이해와 소통을 그려냄으로써 그 깊이를 심화시켜냈다. 2. 다국가 시민권의 범위 영화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52) 의 주인공 강충남은 조선학교 출신의 재일코리안 2세이다. 그가 취직한 곳은 같은 조선학교 출신의 재일코 리안 청년실업가 세일이 운영하는 택시회사이다. 조선학교를 매개로 하고 있지만 이들을 묶고 있는 것은 충성스런 조국 의 해외공민이 아 니다. 동일한 아이덴티티를 갖고 있었던 재일코리안 1세와 달리, 고리 대금업자 광수를 포함한 재일코리안 2세인 조선학교 동창생 세 친구의 아이덴티티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먼저, 고리대금업자 광수는 조국의 해외공민임을 누구보다 강조하지 51) 켄 플러머(Ken Plummer)에 의해 언급되기 시작한 친밀성의 시티즌십 은,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 시티즌십의 원칙을 적용한 것으로, 사적인 영역 의 민주화 를 통해 완성될 수 있다. 친밀성의 시티즌십의 핵심 구성요소를 사적인 영역의 민주화 로 공식화한 사람으로는 기든스Giddens와 호프만 Hoffman이다. (키이스 포크, 앞의 책, 141~148쪽.) 52) 영화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에 관한 글은, 문학 판 통권18호:2006봄(졸 고, 202~224쪽) 참고. 영상 텍스트는 VHS 月 はどっちに 出 ている (109 分 ):1994 年 アミューズソフトエンタテインメント 製 作.
68 石 堂 論 叢 56집 만, 실은 같은 조선학교 동창인 택시회사 사장 세일에게 골프장 사업에 손을 대도록 유혹한 뒤, 부도를 내고는 잠적해 택시회사를 일본 야쿠자 의 손에 넘긴다. 그런 광수는 파산당한 세일에게 그저 조국통일에 기 여한 셈 치라 던가, 북에 기부한 셈 치라 고 위로한다. 광수: 너 나한테 안 올래? 월급 많이 줄게. 충남: (일본인 택시기사들과 주사위노름을 하면서) 고리 대금업은 아주 싫어하지. 광수: 우리 재일조선인은 말이야. 일본에 있는 한 돈 많이 벌수가 없어. 한 사람 한 사람이 힘을 키워... 단결해 야만 한다구. 충남: 연설은 그만 두시지. 광수: (화를 내며 흥분해서) 조선인(조센징)은 자기희생 정신이 결핍됐어. 난 말이야. 고리대금업으로 돈 벌 어도... 언젠가는 번 돈으로 조국통일에 공헌할거야. 조선 사람은 자기하고 자기 친척 돈 버는 것 밖에 모 른단 말이야. 아무튼 자본주의가 병폐지. 남북 분단 의 비극을 깨고, 민족의 힘을 모아 나라를 잘 만들어 야 한다구. 난 말이야. 무일푼이라도 좋아. 진짜라 구... 충남: 그거 돈에서 성병 옮아갖고 눈물 흘린 사람 대사구 먼... 광수: 이거 완전히 민족 반역자잖아. (일본인 동료 택시기 사들 키득키득 웃는다) (38:00~40:00) 북의 해외공민임을 늘 입에 달고 다니는 광수가 실은 일본인 야쿠자 와 연결되어 있다든가, 필요에 따라서는 재일코리안 공동체를 해치는 존재일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는, 더 이상 재일코리안 2세가 동일한 해 외공민(단일국가 단일국민)이 아님을 보여준다. 고리대금업자 광수는
재일 코리안과 다국가 시민권 / 신명직 69 그런 의미에서 고리대금업으로 번 돈을 가지고 북으로 돌아간 영화 피 와 뼈 의 김준평을 연상시킨다 53). 하지만 광수는 마지막까지 조선부락 경제공동체의 순결성을 지켜왔던 김준평과는 다르다. 재일코리안 2~3 세 광수 세대의 사금융은, 일본 사금융과 결부된 무늬만 재일조선인 사 금융업일 뿐이었다. 주인공 충남은 그런 광수의 턱에 자신의 이마를 들 이받는다. 조선학교 출신들로 구성된 재일코리안 공동체의 일종의 파 산선언인 셈이다. 조선학교 출신의 택시회사 사장 세일이라고 해서 주권이나 영토에 관한 견해가 충남과 동일한 것도 아니다. 세일의 택시회사에서 정비공 으로 일하고 있던 재일 이란인 불법체류 노동자 핫삼이 경찰에 폭행 을 가했다는 이유로 구속되는 바람에 큰 불이익을 입게 된 세일은 불 법체류를 일삼는 이란 놈들은 다 쓸어버 리라며 흥분한다. 사장: 이 배은망덕한 놈. 이란 놈은 다 쓸어버려. 안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장: 불법체류 외국인은 모두 쫓아내야 돼. 안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장: 모두 자기 나라로 돌아가라고 해. 안보: 저도 그렇게... (잠시 말을 접고 잇지 못한다.) 사장: (잠시 생각하다가) 에라이... (뭔가를 하나 집어던 진다.) 경리부장: 사장님, 바쁘신 중에 죄송하지만, 방금 은행에 서 연락이 왔는데, 아라이(광수)씨가 부도를 내고 도 53) 실제로 양석영의 소설 택시 狂 躁 曲 의 청년 사채금융업자 한성형 은 민전 ( 民 戦 ) 의 열혈투사였지만, 일본 공산당의 육전협( 六 全 協 ) 노선전환의 충 격으로 사채금융업자로 변신한다. 한성형은 영화 피와 뼈 에서 스이타( 吹 田 ) 화염병 사건으로 감옥에서 나온 뒤 북으로 가는 귀국선을 탄 장찬명과 김준평을 섞어 놓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70 石 堂 論 叢 56집 망간 것 같습니다. (50:00~52:00) 불법체류 이란인 이주노동자 핫삼을 향해 자기 나라로 돌아가라 고 소리치던 세일은, 그 발언이 오래전부터 자신의 부모 세대가 일본인한 테 들어오던 차별어였음을 깨닫고선 그만 흠칫 놀라고 만다. 오무라 수 용소로 쫓겨날지 모른다는 일상적인 추방위협에 늘 시달려왔던 재일코 리안 1세의 후손이, 이번엔 재일 이란인을 추방하라고 외치는 아이러 니는, 재일코리안 이 곧 모든 재일 이라는 등식을 깨기에 충분했다. 재 일코리안만이 아닌 또 다른 일본 거주 외국인을 포괄하는 새로운 개념 다국가 시민 이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또 다른 재일 외국인을 추방하라며 소리치는 사이, 세일은 고리대금 업자 재일 코리안 아라이(광수)로부터는 부도를 맞는다. 억압과 저항이 반복되는 세계에서 배양되어온 일본/조선이라는 이분법의 세계가 해체 되고, 새로운 제3의 재일 외국인과의 다자관계가 재설정되는 순간이다. 기존의 단일국가 단일국민론이 그 설득력을 상실하는 순간이기도 하 다. 비슷한 상황은 주인공인 택시 노동자 충남의 어머니이자 재일 필리 핀인 여성을 고용한 가라오케 바의 마마와 그곳에서 일하는 재일 필리 핀인 코니와의 대화에서도 확인된다. 마마: 지금이야말로 국경을 넘어, 민족을 넘어, 우리들은 서로 손을 잡아야 한다구. 좀 더 대국적이 되어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거야. 영업, 노력, 영업, 노력만이 세계를 구하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가족이야. 나 를 진짜 마마라고 생각하고... 더더욱 노력하자구. 코니: 아무리 그렇게 얘기해도... 우리는 그냥 돈벌러 온 것 뿐이라구요. 마마: 동남아 여자는 그래서 안 돼. 필리핀인, 타이인, 말
재일 코리안과 다국가 시민권 / 신명직 71 레이시아인, 타이완인, 중국... 중국인은 제일 신용할 수 없지. 코니: 조선은 동남아아시아하고 다른가? 마마: 조선은 동아시아야. 코니: 뭐 어쩔 수 없지. 코니는 마마와 함께 힘을 합쳐 노 력할 테니까, 마마도 열심히 힘을 내. 그래서 세계를 구해야지. 마마... 숏타임도 외박도 모두 관계없는 거 야. 나 그냥 여기서 가게나 지킬 테니까.(56:00~57: 00) 마마는 정주외국인 사장이고, 코니는 정주상태가 늘 불안정한 이주 외국인 종업원이다. 마마는 코니에게 손님하고 얘기만 하지 말고, 술 을 팍팍 돌리라 고 주문하면서, 술을 많이 팔면 가게가 돈을 벌고, 가 게가 돈을 벌면, 너희들 급료가 올라간다 고 역설한다. 돈이 있으면, 고 향에 집이 생기고, 가족이 좋아하는 법 이라며, 조금 만졌다고... 소동 피울 일 없다 (25:00)고까지 말한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마마는 필리핀과 조선의 경계 를 넘어 돈을 벌고 그리하여 세계를 구하자 고, 우리는 경계를 넘어선 한 가족 이라는 주장을 편다. 하지만 코니는 마마가 말하는 국경을 넘어선 사 람들 론이 자본의 논리가 개입된 허구란 사실을 간파하고 있다. 코니의 반격에 마마는 곧바로 동남아 여자 불신론을 제기한다. 이 때 조선은 일본과 함께 동아시아에 속하지만, 중국인이나 필리핀인은 신용할 수 없는 존재로 마마가 상상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한 다. 마마는 돈의 세계 에선 재일 조선인이 국경을 넘어 재일 필리핀인과 연대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밖의 세계에서 일본과 조선 이외의 또 다른 나라가 개입하는 것을 그녀는 단 한 번도 허용한 적이 없다.
72 石 堂 論 叢 56집 일본과 조선을 넘어, 재일코리안과 재일필리핀인과의 경계를 넘어, 다국가 시민으로서의 새로운 관계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마마의 아 들 충남(다다오)에 이르러서이다. 충남과 코니가 사랑에 빠진 것이다. 하지만 마마는 이들의 결혼에 처음부터 절대 반대였다. 북으로 간 충남의 형들에게 보낼 선물상자를 꾸리면서, 마마는 정작 공화국(북)에 보내고 싶은 것은 너 다다오(충남) 라고 했다. 필리핀 여 자와 결혼하려는 것은 형들(조국으로 귀국한)한테 부끄러운 짓 이라는 것이 이유다. 그러자 충남은, 일본인은 안 돼. 필리핀 사람도 안 돼. 제 주도도 안 돼. 민단도 안 돼. 그럼 난 누구하고 결혼해야 하느냐 고 반 문한다(46:00~48:00). 마마는 끝내 코니에게 충남에게서 떨어지라고 하고, 이에 화가 난 코 니는 충남에게 마마와 코니 둘 중 누구를 고를 거냐 고 추궁한다. 마마 는 더 이상 참질 못하고, 그만 코니에게 당장 필리핀으로 꺼지라 고 외 쳐댄다. 세일이 불법 체류 이란인에게 했던 말과 똑 같은 표현을 이번 엔 마마가 재일 필리핀인 코니에게 들려준 것이다. 하지만 충남과 코니의 사랑은 하지만 그다지 순탄치만은 않다. 코니 는 충남과 함께 필리핀에 가서 살길 원하지만, 충남은 이를 쉽게 받아 들이지 못한다. 코니는 충남과 한바탕 싸운 뒤 짐을 꾸리기 시작했는 데, 충남은 그런 코니에게 필리핀에 가서 가라오케 바도 하고, 가족도 불러, 죽을 때까지 필리핀에서 살겠다 고 약속하지만, 코니는 더 이상 충남을 믿지 않는다. 자기 자신도 돌아가지 못하는 고향 필리핀으로, 그것도 정주 재일조선인과 함께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비현실 적인 꿈인지 코니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충남: 어... 어떻게 우연히 만났네. 어디 가? 태워줄까? 코니: 당신이 한 얕은 수작이었구먼. 충남: 쓸쓸했어. 코니.
재일 코리안과 다국가 시민권 / 신명직 73 코니: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 하고 있네. 충남: 널 이해할 수 있는 건 나뿐이야... 잘 들어. 코니. 옛 날에 큰 전쟁이 있었거든... 코니: 당신이 하는 거짓말은 이제 더 듣기 싫어. 충남: (운전대를 잡으며) 어디로 모실까요? 코니: 필리핀 마닐라까지. 충남: 늘 애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택시운전수 가 ( 姜 의 일본식 한자음) 입니다.(01:45:00~01:46:00) 충남은 다시 코니를 찾아가고, 새로운 가라오케 바에서 쫓겨난 코니 를 자신의 택시에 태운 뒤 함께 정처 없이 필리핀 마닐라 를 향해 길 을 떠난다. 하지만 엔딩롤과 함께 택시는 도쿄타워 옆의 고가도로를 지 나갈 뿐, 이들이 함께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하지만 충남과 코니의 사랑이 재일 의 의미를 확장시켜낼 것이란 점만 은 분명하다. 재일코리안만이 아닌 이미 존재했던 또 다른 재일의 발견 -인식이란 다국가 시민 범위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Ⅳ. 맺는 말 1945년 이후 재일코리안의 지위 변화에 큰 영향을 준 사건으로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일본 국적 박탈, 59년 북으로의 귀국 운동과 65년 한일회담에 따른 협정영주권의 탄생, 81년 난민조약 비준 에 따른 특례로서의 영주 허가, 91년 입관 특례법을 통한 지문날인 제 도 철회 등을 들 수 있다. 이를 다시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귀환 귀국을 중심에 놓고 움직였던 60년대까지의 움직임이고, 또 다른 하나는 70년대 차별철폐투쟁과 80년대 지문날인 거부 투쟁에
74 石 堂 論 叢 56집 따른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무의 확대 움직임이다. 이 가운데 1959년부터 시작된 귀국운동이 좌절로 끝나기까지의 귀환 귀국 경향성 가운데 특히 주목해야할 부분은 냉전 이다. 해방(일본 의 패전) 직후 재일코리안들의 귀국에 적극적이었던 연합군 최고 사령 부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수상 관저를 위협할 정도(46년)의 격 한 재일 조선인의 생활권 옹호 요구 투쟁과 최초의 비상사태를 선언 할 정도로 컸던 4 24한신 교육투쟁(48년) 이후였다. 연합군 최고 사령 부는 49년 4월 조련[ 朝 連 ]을 강제해산시켰지만, 투쟁은 일본 공산당과 함께 스이타[ 吹 田 ] 파출소 습격 사건(51년) 등 민전[ 民 戦 ] 결성, 일본 공산당과의 연계투쟁으로 점점 고양되어 갔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른 재일코리안의 일본 국적 박탈은, 52 년까지의 재일코리안의 경향성 곧 일본 공산당과의 연계투쟁과 그리 무관하지 않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한미일 반공블록의 형성과 함께, 해방 직후 선보였던 재일코리안의 귀환지원 정책은 일본 국적 박탈과 강제추방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냉전이 강제추방 정책과정은 물론 선별적 정주정책에도 영향을 미쳤 다는 것은, 65년 협정영주권의 부여과정에서도 드러난다. 한국 국적 취 득자에 한해 협정영주권을 부여함으로써 한미일 반공블록에 부합한 재 일코리안의 선별적 정착- 포섭 과, 59년 귀국운동 등을 통한 공산블록 재일코리안의 배제 가 기획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획이 일단락 지어진 것은 60년대 귀국운동- 배제 의 실패 와, 불완전한 영주권인 협정영주권의 등장- 포섭 의 실패였다. 재일코 리안들은 배제와 포섭의 또 다른 주체이자 냉전의 산물인 총련과 민단 을 떠나, 냉전 국가의 국민이 아닌, 남북한과 일본이라는 국가를 가로 지르는 새로운 시민, 다국가 시민으로 거듭났는데, 그런 의미에서 다국 가 시민이란 탈냉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70년 박종석 취직차별소송에서 시작된 공영주택 입거제한 반대투쟁,
재일 코리안과 다국가 시민권 / 신명직 75 사법연수소 입소 거부 반대투쟁을 통한 시민적 사회적 권리의 회복은, 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전 상태 -일본국적 일본 국민으로서의 권리- 로의 회귀가 아니다. 한국 국적이면서도 일본 시민으로서의 권 리와 책무의 생성, 곧 다국가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무의 생성 과정이 다. 이들 투쟁은 총련과 민단이 아닌 재일코리안 개개인의 저항에서 출 발했다. 이들의 저항은 보편적 인권 을 추구해 온 재일코리안과 이들 의 성원권을 인정하려던 70년대 일본인들의 반차별 운동과 결합하면 서, 다국가 시민의 권리와 책무를 명문화한 새로운 외국인 등록법 (82 년)을 생성시켰다. 국민국가의 제한된 권리와 책무 사이의 대립과 갈 등 -민주적 반추[ 反 芻 ] 과정을 통해, 주택금공고법, 공영주택법(79년), 아동부양수당법(82년) 등의 새로운 법이 생성된 것이다. 79년 국제인권 규약과 81년 난민조약이 새로운 법 생성에 결정적 기제로 작용한 것은 분명하지만, 70년대 재일코리안의 차별철폐 투쟁과 일본인의 반차별운 동이 일본사회의 인권존중 의식을 고양시켜 놓은 점도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는 점 또한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80년 한종석의 지문 날인 거부로 시작된 80년대 지문날인 거부 투쟁 역시, 91년 한일 외상회의에서 재일한국인 법적 지위 및 처우에 관한 각서 가 마련되면서, 입국관리 특례법의 생성과 특별영주자 검지 손가 락의 자유 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이들 결과를 공생론에 입각한 연구자들과 총련은 동화론 적 입장에 서 분석한다. 재일코리안이 영주 시민이 되는 과정을 동화과정과 동일 시한다든가, 공무원직 국적차별 철폐를 매( 賣 )민족적 행위라고 규정하 는 견해 등이 그것이다. 이들 분석이 근거하고 있는 것은 단일국가 단 일국민론에 기초한 이분법적 발상-동화와 분리이다. 이들 주장의 근저 엔 한국과 일본 중 한 국가를 선택해 반드시 그곳의 국민이어야만 한 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렇지만 특별영주권을 갖고 있는 재일한국인
76 石 堂 論 叢 56집 은, 이미 한국에서의 선거권과 동시에 일본에서의 시민적 사회적 권리 를, 아주 제한적이지만 정치적 권리와 책무를,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이는 수십 년에 걸친 민주적 반추과정을 통해 생성된 것이다. 재일코리 안은 남과 북과 일본에 걸친 다국가적 존재로, 동화와 분리 중 어느 하 나만을 고를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 다국가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무를 재일코리안이 어떻게 깊고 넒게 확장해왔는지는 영화 피와 뼈 와 디어 평양, 그리고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무의 깊이와 범위에 특히 주목한 것은 키이스 포크인데, 그의 총체적 시티즌십론과 히터의 다층적 시티즌십론 등은, 다양한 시민적 정체성과 다양한 충성 심을 지닌 재일코리안의 권리와 책무를 분석하는데 무척 유용하다. 영화 피와 뼈 는 공적인 재일코리안 공동체-조선부락 내부에서 또 다른 형태로 억압받는 시민, 재일코리안 여성의 권리와 책무를 물으며, 다국가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무의 깊이를 심화시킨다. 또한 영화 디 어 평양 은 일본의 가족들이 일본에 살면서 북을 살아왔듯이, 북의 가 족들 역시 북에 살면서 일본을 살아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 피와 뼈 가 시민권의 사적인 영역, 재일코리안 가족 의 민주화를 정면으로 다룸으로써 다국가 시민권의 깊이를 심화시켰다면, 영화 디어 평양 은 국가를 가로지르는 가족간의 이해와 소통을 그려냄으로써 그 깊이를 심화시켜냈다고 할 수 있다. 영화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는 택시회사 사장과 노동자, 사금융업 을 하고 있는 조선학교 동창생 세 친구를 통해 재일코리안 사회의 지 금의 지도를 그려내고 있다. 조국통일을 입에 달고 살지만 일본인 사금 융업자를 동원해 재일코리안 택시회사를 부도내거나, 자신이 재일코리 안이면서 불법체류 재일 이란인 정비공을 자기나라로 돌아가라고 외치 는 이들의 아이러니를 통해 영화는 기존의 자이니치( 在 日 ) 관을 되묻 는다. 필리핀 여성을 고용해서 가라오케바를 운영하는 재일코리안 1세
재일 코리안과 다국가 시민권 / 신명직 77 마마는 북에 아들을 보낸 이산가족이고, 그녀의 아들인 택시 노동자는 가라오케 바의 필리핀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 영화 속에서 국가는 뒤죽 박죽이 되어버려 그 의미를 찾기 힘들지만, 여전히 국가는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영화는 특히 재일 필리핀인을 비롯한 또 다른 재일 을 부각시켜, 재일코리안이 인식해 왔던 남과 북과 일본에 걸친 다국가의 범위를 확장시킨다. 지금까지 재일코리안에게 늘 요구되었던 것은 선택이었다. 조국인가 일본인가, 혹은 남인가 북인가의 선택을 어려서부터 늘 강요받아왔다. 하지만 재일코리안은 그 중 하나가 아니라 그들 모두이다. 지난해 재일 코리안 일부는 3세와 4세까지 처음으로 한국에서의 투표권을 행사했 다. 한국과 일본 양쪽에 걸친 존재이자 정치적 권리와 책무를 지닌 존 재임이 확인되었다. 다국가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권리와 책무가 아직 은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수행될 수밖에 없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의 재일코리안과 그 뜻을 같이 하는 일본인의 민주적 반추과정을 통해 시민적 사회적 권리와 책무가 지속적으로 확대해왔 듯이, 일본에서의 정치적 권리와 책무 역시 머지않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국가 시민은 보다 분명한 다국가 정치공동체가 생겨날 경 우, 그 명칭을 바꾸어야할지 모른다. 동아시아 공동체 혹은 유럽연합과 같은 아시아연합이 만들어진다면 동아시아 시민 혹은 아시아연합 시 민 으로 불러야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정치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것 또한 지금의 다국가 시민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논문은 2013년 5월 31일에 투고 되어, 2013년 6월 3일부터 6월 24일까지 심사위원의 심사를 거쳐, 2013년 7월 8일 편집위원회에서 게재 결정된 논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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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코리안과 다국가 시민권 / 신명직 81 Abstract Koreans in Japan and the multi-national citizenship Shin, Myoung-Jik The way to solve the contradiction between territory and sovereignty for the Koreans in Japan is two. The one is a return to Korea, and the another is a recover of the lost rights and responsibilities in Japan. The efforts of the Koreans in Japan to solve the contradiction between territory and sovereignty went to change the format, from the nation (one nation state and one nation) to the citizen (multi nation states and the citizen). This transition is made after the struggle against discrimination in the 1970s and the struggle against fingerprinting in the 1980s. This paper is focused in particular to the latter, the way to go to live in Japan while maintaining the rights and responsibilities in Japan with the South Korean nationality or the North Korean overseas citizenship, that is the multi-national citizenship. This is shown clearly in the scene of film such as the scene of the film Blood And Bone or the film All Under the Moon, how to live the 2nd or 3rd generation of Koreans in Japan as a Citizen against the 1st generation. This life as a Citizen means the extension of the depth and range of the multi-national citizenship in the South and
82 石 堂 論 叢 56집 North Korea and Japan. It was the choice that the Koreans in Japan have been asked until now. They have been forced to choice between the motherland and Japan, or between South Korea and North Korea always. But Koreans in Japan are not one of them, but all of them. Key Words : Koreans in Japan, multi-national citizenship, territory, sovereignty, the nation, the citizen, struggle against fingerprinting, struggle against discrimination, repatriation program, rights and responsibilit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