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 調 의 형성과 새로운 시대의 開 幕 윤 석 산(한양대학교 명예교수) 1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와 같이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고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 변할 줄이 있으랴 이 시조들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방원(훗날 태종)의 하여가( 何 如 歌 ) 와 정몽주의 단심 가( 丹 心 歌 ) 이다. 시조라는 장르가 우리 문학사에 등장한 시기는 고려 때이다. 위의 시조에 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는 뜻을 세우고 그 야망에 불타던 이방원도, 또 국운이 기우는 고려를 지키려던 정몽주도 모두 시조를 애호한 사람들이었다. 고려 후기사회는 내우외환( 內 憂 外 患 )으로 지극히 큰 어려움을 겪던 때었다. 안으로는 무 신( 武 臣 )의 난으로 혼란을 겪었고, 밖으로는 몽골의 침략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무신정 권은 의종 24년인 1170년 정중부( 鄭 仲 夫 )의 난을 필두로 최충헌( 崔 忠 獻 ), 최이( 崔 怡 ) 부자 의 정권을 거쳐, 김준( 金 俊 ), 임연( 林 衍 )에 이르기 까지 100년 간 지속되었다. 몽골의 침략기에는 최씨들의 정권이었다. 최씨 정권은 명종26년(1196)에서 고종45년 (1258)까지 4대 62년간이었고, 이 기간 몽골의 침략이 있었던 때이다. 고려 조정은 몽골의 1차 침입이 있던 1232년 강화도로 천도를 하여 원종11년(1270) 개경으로 환도하기까지 40 년 가까운 기간 강화도에 숨어 몽골의 침략에 적극 대항하지 못하고 피하기만 하였다. 이 동안 육지의 백성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 고려는 완전히 원에 복속되었고, 원의 지배는 80여 년간 계속되었다. 또 원은 이 기간 2차에 걸쳐 일본 원정에 필요한 군수물품과 군대 지원을 강요 했다. 이로 인한 국가적 손실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고려는 충열왕 이후 공민왕 때까지 원의 부마국( 駙 馬 國 )으로 자주성을 상실했고, 정치적인 간섭을 받았다. 고려의 왕들은 왕자 시절 원나라에 가서 교육을 받았고, 이름도 몽골식으로 바꿔야 했고,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 였기 때문이다. - 1 -
임금이 훙거( 薨 去 )하면 묘호( 廟 號 )를 받는다. 태조이니 광종이니 목종이니 하는 명칭이 바 로 묘호이다. 조( 祖 )와 종( 宗 )으로 묘호를 받는 것은 황제가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우 리나라에서는 고려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묘호를 썼다, 그만큼 우리나라가 독자성을 지니 려고 했다. 그러나 몽골의 지배 하에서는 묘호를 쓰지 못하고, 그 아래 격인 왕 이라는 이 름을 부쳤다. 몽골의 본격적인 지배를 받던 충열왕 때부터 그랬다. 더구나 몽골에 충성을 한다는 의미에서 충( 忠 ) 자를 왕 이름 앞에 모두 부쳤다.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등의 이름이 그러하다. 원의 명령을 거역하거나 비위를 거스르면, 고려왕을 원으로 소환하여 왕위를 폐하고 말 잘 듣는 사람에게 원나라 마음대로 왕위를 주기도 했다. 충열왕 때 임금이 원 황제에게 헌 수( 獻 壽 )하기 위하여 왕이 직접 원나라까지 들어갔다. 이 자리에서 원 황제가 고려 노래를 명하자, 대장군 송방영, 송영 등에게 노래 부르게 하고, 전왕( 前 王 )인 충선왕이 박자를 쳤다. 王 二 羊 二 百 頭 酒 二 百 榼 上 壽 于 帝 翌 日 又 詣 闕 設 扶 頭 宴 帝 命 唱 高 麗 歌 王 令 大 將 軍 宋 邦 英 宋 英 等 歌 雙 鷰 曲 前 王 執 檀 板 王 歌 舞 獻 壽 帝 與 后 悅 東 國 通 鑑 권40, 충렬왕 26년 장군으로서, 임금으로서의 체모도 모두 팽겨 치고 원 황제의 명에 따라 노래하고 박자나 맞추는 이들 모두는 허수아비나 다름이 없었다. 이 만큼이나 고려 조정은 권위도 땅에 떨어 졌고, 또 자주성도 없었다. 이러한 대원( 代 元 ) 관계가 고려 사회에 새로운 신흥세력을 낳게 되었다. 이가 바로 고려 후기 지배계층으로 대두된 권문세족( 權 門 勢 族 )들이다. 이들 권문세족들은 그 신분이 대부분 역인( 譯 人 ) 출신, 응방( 鷹 坊 ) 출신, 환관( 宦 官 ) 출신, 무인( 武 人 ) 등의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직책상 원나라 황제나 권력자들에게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정치적 권력과 사회적 영향력을 구사하게 되면서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권문세족은 정규적 관인( 官 人 )의 코스를 밟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과거를 통 해 입사( 入 仕 )를 한 예는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권력과 부를 지니게 된 배경에는 원나라가 있었다. 즉 원나라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 권력은 무엇보다 막강하였 고, 심지어는 왕권과도 대립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 권문세족들은 어떠한 절차 없이 갑자기 부와 권력을 얻었기 때문에, 이 부와 권력을 어느 의미에서 생산적으로 쓸 수가 없 었다고 본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부나 권력을 유지하고 지키는 데에만 급급하였다. 그러 므로 모든 운영이 비정상적으로 되고, 그러므로 권력형 비리, 축재형 비리를 저지르게 되었 다. - 2 -
이들은 막대한 토지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농민들에 대한 수취도 가혹하였다. 이들은 원 의 침략 행위에 영합하여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을 얻은 것이기 때문에 원의 세력에 기대어 왕권유지에만 급급했던 고려왕실의 차세와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왕실과 권문세족들은 서 로 동조할 수 있는 처지였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왕실은 민생의 도탄에는 눈을 돌린 채, 연락( 宴 樂 )과 황음( 荒 淫 ) 속에 빠져 있었다. 2 원의 지배와 이로 인하여 타락한 왕실은 자주성마저 잃게 되었고, 임금은 정상적인 정치 는 외면한 채 소인배들에 둘러싸여 주흥( 酒 興 )에 의한 연회만을 열고 연일 잔치를 베풀었 다. 고려사 에 이러함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예가 나온다. 右 二 歌 忠 烈 王 朝 所 作 王 狎 群 小 好 宴 樂 倖 臣 吳 祈 金 元 祥 內 僚 石 天 輔 天 卿 等 務 以 聲 色 容 悅 以 管 絃 房 太 樂 才 人 爲 不 足 遣 倖 臣 諸 道 選 官 妓 有 姿 色 技 藝 者 又 選 城 中 官 婢 及 女 巫 善 歌 舞 者 籍 置 宮 中 衣 羅 綺 戴 馬 鬃 笠 別 作 一 隊 稱 爲 男 裝 校 閱 此 歌 與 群 小 日 夜 歌 舞 褻 慢 無 復 君 臣 之 禮 供 億 腸 與 之 費 不 可 勝 記 高 麗 史 卷 71, 志 卷 25 樂 2 충열왕이 군소배( 群 小 輩 )들을 친근히 여겨 연락( 宴 樂 )을 좋아했다. 이때 오기, 김상원 등 이 성색( 聲 色 )으로 왕을 기쁘게 해주기에 힘을 썼다. 관현방( 管 絃 房 )의 태악재인( 太 樂 才 人 ) 도 부족하다 하여, 여러 고을로 행신을 보내 관기( 官 妓 )로 자색이 곱고 기예가 있는 자를 고르고, 성중에 있는 관비( 官 婢 )와 무당으로 가무를 잘 하는 자를 골라, 궁중에 등록을 해두 고 비단옷을 입히고 마종립을 씌워 남장을 시켜 밤낮으로 가무를 하며 연회를 열었다. 그 난잡하기가 군신( 君 臣 )의 예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高 麗 忠 惠 王 頗 好 淫 聲 與 嬖 幸 在 後 殿 作 新 聲 淫 詞 以 自 娛 時 人 謂 之 後 殿 眞 勺 非 獨 其 詞 調 亦 不 可 用 世 宗 實 錄 第 3, 元 年 正 月 충혜왕 자신이 음성를 좋아해서 폐행( 嬖 幸 )들과 후전에서 신성 음사를 지어 즐겼음을 말 하고 있다. 이렇듯 원 지배 하에서 지배층, 즉 왕실과 권문세족들이 자신들의 향락을 위하여 음란한 고려속요를 부르고 연주하고, 또 지으며 잔치를 열었음을 알 수가 있다. - 3 -
2 왕권이 약화된 고려 사회는 점점 어려워졌다. 이와 같은 현실을 걱정하고 새로운 개혁의 필요를 제기하는 일군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바로 신흥사대부( 新 興 士 大 夫 )이다. 신흥사 대부는 고려사회에서 무신정권에 의하여 귀족정치가 붕괴되고, 새로운 관료층으로 등장한 사람들이다. 대부분 지방의 중요 지주층이며, 토착적 기반을 지닌 호족 내지는 향리 계열의 지방 세력가들이었다. 무신의 난 이후 중앙관계( 中 央 官 界 )에 등장한 사족가문( 士 族 家 門 )으로 성장한 인물들이었 다. 이들은 유학을 깊이 공부해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된 유학적 지성들이었다. 연암 박지원 이 독서왈사( 讀 書 曰 士 ) 종정위대부( 從 政 爲 大 夫 ) 라고 말한 바와 같이 이들은 학자적 관료, 관료적 학자 였다. 고려 후기, 말기로 접어들면서 정치적, 사회적 기반을 확립하였고, 무신 정권이 타도된 이후 활발히 정치 무대로 진출을 하였다. 신흥사대부는 왕실의 무능과 부패, 권문세가들의 혹심한 착취, 이러한 사회적인 현실과 정치적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중앙집권적인 강력한 통치 국가를 이룩하려던 새로운 개 혁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이 사상적 지주로 삼았던 것은 주자학이었다. 주자학은 중국 북송 대에 일어난 성리학의 하나로, 주자( 朱 子 )에 의하여 확립된 학문이다. 주자학은 자구해석( 字 句 解 釋 )에 매달리던 종래의 훈고학적 유학을 벗어나, 경전의 실질적인 사상을 찾아 실생활 속에서 실천하려고 하는 실질적인 학문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있어 주자학은 단순한 학 문이 아니라, 현실사회 속에서 펼칠 수 있던 정치이념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주자학은 13세기 말에 고려에 수입이 되어서, 공민왕대의 개혁기를 맞아 개혁파의 이념적 지주로 확 대되었다. 이제현( 李 齊 賢 ), 이색( 李 穡 ), 정몽주( 鄭 夢 周 ), 권근( 權 近 ), 정도전( 鄭 道 傳 ) 등이 모 두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타락한 왕권, 권문세족과 대립하면서 한편으로는 타락한 불교를 비판하였 다. 당시 불교는 지배계층의 정신적 지주로서, 극진한 존중과 보호를 받았다. 그러므로 당시 사원은 대부분이 대토지를 소유하였고, 승려들의 부패와 타락의 행패는 온갖 사회적인 병폐 를 빚었었다. 이와 같이 타락한 고려 사회와 타락상을 더욱 부채질하는 권문세족과의 대립관계에 있었 던 사람들이 바로 신흥사대부였다. 이들은 자신들이 닦은 학문인 유학, 곧 주자학으로 이념 적인 무장을 하고, 부패하고 타락한 권문세족을 몰아내고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려고 노력하 는 개혁주의자들이었다. 즉 유교적 이념에 의한 사회로의 혁신을 꿈꾸던 사람들이었다. 이들 개혁론자들에 의하면, 왕실이나 권문세족들이 연락을 열면서 부르던 음란한 노래들 역시 청산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이 연회에서 즐겨 불렀던 노래들이 바로 쌍화점 등의 음란한 속요였다. 이러한 음란한 노래들이 주자학으로 무장된 신흥사대부들에게는 용 - 4 -
납이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들 속요를 남녀상열지사( 男 女 相 悅 之 詞 )라고 하여 배격하였다. 이러함이 곧 나라를 더욱 어지럽히는 요인이 된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흥사대부 는 음란한 속요를 배격하고, 자신들의 이념을 잘 담을 수 있는 새로운 노래인 시조( 時 調 ) 를 새로이 형성시켜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듯 시조는 신흥사대부들의 새로운 사회로 개혁하 고자 하는 이념을 담고 형성된 새로운 장르라고 하겠다. 고려 때의 시조 작가들을 보아도 이는 쉽게 알 수가 있다. 우탁( 禹 卓 ), 이조년( 李 兆 年 ), 이 색( 李 穡 ), 정몽주( 鄭 夢 周 ), 정도전( 鄭 道 傳 ), 이존오( 李 存 五 ), 조준( 趙 浚 ), 길재( 吉 再 ) 들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모두 대표적인 유학적 지성인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들은 바로 자신들 의 이념을 새로운 노래의 형식인 시조에 담아 노래하였던 사람들이다. 즉 시조를 통해, 자 신들의 이념을 펼쳤던 사람들이었다. 3 개혁론자들 중에는 적극적 개혁론자와 소극적인 개혁론자가 있다. 소극적 개혁론자들은 사회 개혁에 그치고자 하는데 비하여, 적극적인 개혁론자들은 단순한 사회 개혁이 아닌 새 로운 왕조를 일으키려는 생각을 지니게 된다. 즉 개혁을 위해서는 부패한 왕조를 교체하고 자신들의 이념에 의한 새로운 왕조를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적극적 개혁론자들은 바로 역성혁명( 易 姓 革 命 )이 진정한 개혁이라고 생각하고 실천하려던 사람들이었다. 중국 대륙의 변화와 함께 국제적인 변화가 생겨나게 되었다. 중국 대륙을 점령했던 몽골 의 원나라가 그 기운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원나라의 학정과 만행에 절치부심하던 한족( 漢 族 )들이 농민 출신인 주원장( 朱 元 璋 )을 황제로 추대를 하고, 공민왕 16년(1368) 명( 明 )을 건 국하였다. 당시 고려 조정에는 원나라에 기대어 권력을 얻고 또 유지해오던 친원파( 親 元 派 ) 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공민왕은 원의 쇠망을 내다보고 반원정책( 反 元 政 策 )을 펼쳤다. 그러나 공민왕이 미동들과 동성애를 줄기다가 시해를 당하게 되고, 32대 우왕이 즉위를 하게 된다. 우왕의 후비는 최영( 崔 塋 ) 장군 첩실의 딸이었다. 우왕이 최영과 회동하여 요동 정벌( 遼 東 征 伐 )을 기획하게 된다. 그러므로 새로운 기운으로 일어나는 명나라와의 전투를 하고자 결정을 한 것이다. 이때 적극적 개혁론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이성계( 李 成 桂, 훗날 태조)를 주축으로 하는 친명파( 親 明 派 )는 명과의 전투에 대하여 4대 불가론을 내세워 명과의 전투를 반대했다. 첫 째가 소국이 신흥대국을 친다는 것은 패망을 자초하는 것이다. 둘째로 여름 농번기를 앞두 고 거국적 군사를 일으키면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다. 셋째로 극성부리는 남방의 왜구와 북 방의 야인들이 원정을 틈타 침범하면 더 큰 위험에 빠진다. 넷째로 무더운 여름이라 활의 아교가 풀리고, 군 진영에 질병이 만연할 것 등을 들어 반대를 했다. 그러나 우기로 접어든 음력 5월 우왕은 최영의 말을 듣고, 팔도도통사에 최영, 좌군도통 - 5 -
사에 조민수, 우군도통사에 이성계를 임명하고 명나라 정벌군을 일으켰다. 정벌군이 위화도 ( 威 化 島 )에 이르렀을 때 비가 많이 와서 압록강이 범람하여 요동으로 도강이 불가능해졌다. 이에 이성계가 조민수와 의논하여 말머리를 개경으로 돌렸고, 권력을 잡게 된다. 이가 바로 위화도 회군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위화도 회군은 적극적 개혁론자들의 지지를 받던 이 성계에 의하여 새로운 왕조 조선을 일으키는 그 서막이 되었다. 신흥사대부들에 의한 고려 사회에의 개혁은 이렇듯 급진적으로 발전하여, 새로운 왕조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새로운 개혁을 꿈꾸던 신흥사대부들은 당시 타락한 고려 사회를 개혁하 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념이 필요하다고 판단을 하였고, 자신들이 공부한 주자학을 새로운 이념으로 삼았던 것이다. 또한 당시 고려 사회 속에서 유행하던 퇴폐적 성향을 지닌 속요는 고려 사회의 타락을 더욱 부채질하는 노래라고 판단을 하고, 새로운 형식의 문학인 시조를 형성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시조라는 새로운 형식을 통해 자신들의 이념을 담고, 이를 통 해 당시 타락한 사회에 새로운 이념을 심어주고자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은 면에서 본다면, 시조는 당시 타락한 고려 사회의 퇴폐성을 잘 드러낼 뿐만 아 니라, 당시 사회를 퇴폐의 늪으로 빠트리는 퇴폐적 정서의 속요를 대신해서 나타난 장르라 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문학이 지닌 사회적 효용성을 강조했던 당시 신흥사대부들은 자신 들의 이념이 담긴 시조를 부르므로 해서, 당시 타락한 고려 사회를 개혁하고, 그러므로 고 려 사회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조는 다만 하나의 문학작품이 아니라, 이들 신흥사대부들에게 있어 이들의 이념을 드러내고 또 그 이념을 사회적으로 실현시키고자 했던 길이기도 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라고 노래한 이방원이나,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라고 응수한 정몽주나 모두 타락한 고려 사회를 개혁하고자 고심했던 유교적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이 지닌 이념에 의해 고려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새로운 힘이 나왔 고, 바로 이들 중 적극적인 개혁론자들에 의하여 새로운 조선이라는 왕조가 탄생된 것이다. 이와 같은 면에서 본다면 시조라는 새로운 시형의 형성은 어느 의미에서 새로운 시대의 개 막을 열어가는 중요한 문학적 그 징후였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