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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제언과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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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제언과 모색 이익주 외 지음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총서 58

4 발간사 한국과 중국은 오랜 역사 속에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습니 다. 이러한 양국 관계는 날이 갈수록 더욱 긴밀해지고 있는 형편입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계의 한중관계사 연구는 부진한 편에 속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우리 학계가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로 분화되어 소통이 쉽지 않다는 것과 주제의 특성상 동아시아세계라는 거시적 관 점을 염두에 두면서 한중관계사의 특수성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어려 움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이에 재단은 연구의 심화를 위해 다각적인 접근을 시도해 왔습니다. 이 책은 그 성과물의 하나입니다. 이번 연구는 주요 논점을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어떤 것이었나, 과 연 책봉 조공체제(冊封朝貢體制)가 역사상 한중관계를 설명하는데 이 론적 틀이 될 수 있는가에 두고 있습니다. 책봉 조공체제는 전통시대 한중관계를 설명해온 이론적 틀이지만, 한중관계사의 긴 흐름을 수렴 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지적이 있어왔기 때문입니다. 이에 이번 연구 를 기획하면서 참여 연구진에게는 이 문제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개진 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책봉 조공체제론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주장 뿐 아니라, 그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설명의 틀이 마련되어야 한 다는 주장도 견주어 보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5 이번 연구를 위해 시대를 달리하는 한국사와 중국사 전공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작업을 수행하였습니다. 자연히 연구시각의 차이가 노출 되었을 뿐 아니라, 객관적인 관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도 의견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러한 과정을 통해 동아시아 가 한국과 중국이 속해있던 거대한 지역세 계의 역사적 개념이며, 시대별로 그 범위의 신축이 있었고, 국제질서 로써 유지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책봉 조공체제론이 유효한가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가 이루어졌다는 점도 특기할 만한 성 과입니다. 정착된 제도라는 고정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시대적 상황과 유기적으로 조응했던 책봉과 조공의 실체에 접근해 볼 수 있었기 때 문입니다. 이번 연구의 여러 제언들은 향후의 한중관계사 연구가 나아 갈 길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여기에서 촉발된 새로운 관점 의 연구들이 이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끝으로 기획 의도에 흔쾌히 동의해주고 어려운 작업을 수행해주신 참여 연구진 여러분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아울러 연구의 주제와 방 향을 마련하고 사업을 주관한 연구위원을 비롯하여 이 책이 나오기까 지 수고해준 출판팀 여러분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2010년 12월 15일 발간사 5

6 차례 책머리에 10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김병준 ㆍ - 조공ㆍ책봉의 보편적 성격을 중심으로 I. 머리말 21 II. 기존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 조공의 기원 : 선진시기 조공 용례 검토 조공ㆍ책봉의 제도화 : 한대 조공 용례 검토 29 III. 3세기 이전 조공ㆍ책봉의 성격 조공ㆍ책봉의 비정형성 조공ㆍ책봉의 다목적성 조공ㆍ책봉의 시공간적 보편성 조공ㆍ책봉의 상호성 48 IV.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중층적 구조 55 V. 동아시아세계 속의 한중관계 -맺음말을 대신하여 61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김창석 I. 머리말 71 II. 고대 동아시아 의 개념과 범위 책봉체제론의 성과와 한계 동아시아 의 범위 78 III. 6~8세기 한중관계의 명분과 실제 86 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7 1. 기왕의 논의의 문제점 ~8세기 책봉질서의 구조와 변화 92 IV. 맺음말 ~12세기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윤영인 I. 머리말 127 II. 10~12세기 다원적 국제질서 130 III. 10~12세기 한중(고려와 거란 금) 관계의 특징 139 IV. 10~12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 범위 설정 145 V. 맺음말 153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이익주 I. 머리말 161 II. 13~14세기의 세계질서와 고려인의 천하 인식 ~14세기 몽골제국 중심의 세계질서 ~14세기 고려인의 천하 인식 168 III. 13~14세기 고려-몽골관계의 양상 책봉ㆍ조공관계의 요소 책봉ㆍ조공관계 이외의 요소 192 IV. 맺음말 ~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계승범 I. 머리말 237 II. 전근대 동아시아와 조선 중국적 질서 와 그 비판자들 : 구미 학계의 논쟁 239 차례 7

8 2. 동아시아세계론 의 양면성 : 일본 학계의 담론 조공과 책봉 : 국내 학계의 시각 254 III. 조명관계와 동아시아 동아시아 권역 : 조선의 국제 반경 조명관계 관련 용어의 의미 분석 명질서의 성쇠와 조선의 역할 277 IV. 맺음말 282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구범진 I. 머리말 293 II.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에 대한 비판적 검토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과 역사적 현실의 괴리 명ㆍ청의 불연속성 과 중국 319 III. 청제국과 다중체제의 형성 시야의 확대 : 동아시아 에서 동유라시아 로 국제질서의 재편과 다중체제의 형성 331 IV. 다중체제 속에서 조선의 위상 344 V. 19세기 후반 국제질서의 변화와 조선-청 관계 353 VI. 맺음말 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배경한 - 20세기 한중관계사 의 새로운 시각과 서술방안 모색 I. 머리말 383 II. 연구시각의 검토와 모색 기존의 연구시각에 대한 비판적 검토 새로운 연구시각의 모색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9 III.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체제하의 동아시아 국제질서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시기의 동아시아 국제질서 냉전체제하의 동아시아 국제질서 탈냉전 시대(1980년대 이후) 동아시아국제질서 407 IV. 20세기 한중관계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체제하의 한중관계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시기의 한중관계 냉전체제와 한중관계 탈냉전 시대의 한중관계 415 V. 맺음말 418 Abstract 427 찾아보기 431 차례 9

10 책머리에 한중관계사 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 이 연구는 이 물음에 답하 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한국과 중국은 역사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고 현재도 정치 경제 등 여러 방면에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우리 학계의 한중관계사 연구는 아직 부진한 편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국의 역사학계가 한국사 학, 동양사학, 서양사학으로 분화되어 서로 소통하지 못하게 된 것을 그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국내의 동양사 연구자들은 중국 사의 특수 분야인 한중관계사 연구를 언제부터인가 외면해왔고, 한 국사 연구자들은 자국 중심의 대외관계사(對外關係史) 연구 시각을 극 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한국사와 동 서양사를 막론하 고 연구자들의 관심이 각 시대사 별로 세분화되는 추세 속에서 한중 관계에 대한 통사적 접근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한중관계사가 최근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이른바 동북공정 에서 비롯된 중국발 역사 분쟁 때문이 아닌가 한다. 자칫 자기중심 적 역사인식의 강화로 귀결될 수도 있었던 이 역사 분쟁에서 오히려 우리 안의 민족주의적 시각을 반성하고 학문적 대응의 필요성을 제 기한 것은 우리 학계의 성숙함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북 1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1 공정 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한중관계사 연구의 중요성이 확인되었고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연구의 양적 확대가 두드러졌지만 아 직도 한중관계의 통사를 구성할 정도의 연구 역량이 축적되지는 못 했고, 무엇보다도 한중관계사 연구를 위한 연구자들 간의 소통이 충 분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관계사는 다른 분야사에 비해 역사적 사실을 보는 관점의 문제가 중요하다. 국가 간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일국 중심의 편향된 시각을 극복하고 객관적인 관점을 확보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중관계사 연구 에서 객관적인 관점은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그 방법을 구체적 으로 모색하기 위해 2008년 한 해 동안 한중관계사 연구의 시각 을 주제로 공동연구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당시 공동연구에 참여한 연 구자는 박원호, 박장배, 배경한, 윤용구, 이익주 등 다섯 사람이었다. 이 공동연구에서 연구자들은 일국사( 一 國 史 )에 기초한 한중관계사를 극복해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고, 그 대안으로 한국과 중국이 속 해 있던 동아시아세계의 국제질서에 대한 구조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중관계사를 재구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 중관계사 는 그렇게 출발한 것이었다. 다음으로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를 어떻게 서술할 것 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2009년에 또 한 번의 공동연구를 진행하였다. 이 공동연구에 참여한 연구자는 김병준(중국사, 고대), 김창석(한국사, 고대), 윤영인(한국사, 고려전기), 이익주(한국사, 고려후기), 계승범(한국 사, 조선전기), 구범진(중국사, 청대사), 배경한(중국사, 근현대) 등 일곱 사람이었다. 연구진은 각 시대별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와 한중관계의 양상을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리고 종래 한중관계를 설 명함에 있어 중요한 틀로 사용되었던 책봉 조공관계의 개념에 대해 책머리에

12 시대별로 검토하고, 기존의 동아시아세계론, 즉 니시지마 사다오[ 西 嶋 定 生 ]의 책봉체제론( 冊 封 體 制 論 ) 과 페어뱅크(John K. Fairbank)의 조공 시스템(Tributary system) 이론에 대해서도 집중적으로 검토하였다.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를 구상했을 때 가장 먼저 문 제가 되었던 것은 동아시아 의 개념과 범위였다. 동아시아 는 단순히 지리적인 개념으로서 아시아의 동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인 개념으로, 한국과 중국이 속해 있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고, 당 연히 시대에 따라 그 범위가 달라졌다. 따라서 동아시아 의 신축( 伸 縮 )을 염두에 두면서 각 시대별로 동아시아 의 범위를 설정하고, 그 안에 존재했던 국제질서를 구조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이 공동연구의 첫 번째 주제였다. 두 번째 주제는 각 시대의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 에서 한중관계의 양상을 탐구하되, 종래의 책봉 조공 패러다임 이 유용한지를 시대별로 검토하는 것이었다. 김병준의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는 동아시아 세계가 형성되기 전인 3세기 이전 시기를 대상으로 하여 조공과 책 봉 사례를 검토하고 그 성격을 밝힌 글이다. 이에 따르면 3세기 이 전에는 동아시아에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국제질서가 성립해 있던 것이 아니라 다수의 지역 국제질서가 중층적으로 존재하고 있 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한중관계는 (한사군이 설치되기 전까지) 한반 도의 여러 세력들이 중국 중원의 정치질서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 부터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게 한다면 3세기 이전에는 한중 관계를 선험적으로 설정하지 않고 한국이 어떤 국제질서에 귀속되어 있었는지부터 탐구하게 됨으로써 한중관계의 새로운 설정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조공 책봉에 대해서는 3세기 이전 동아시아의 곳곳에서 확인되는 조공 책봉의 사례를 검토하여 그것이 동아시아 1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3 지역에만 국한된 특별한 형식이 아니라 지역을 불문하고 존재했던 보편적 정치행위였음을 밝히고, 더 나아가 그것이 4세기 이후에도 마찬가지이므로 결국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설명하는 데 있어 조 공ㆍ책봉이 유효한 개념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김창석의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에서는 6~8세기의 고 대 동아시아 를 상호 외교교섭과 문화교류, 대외교역 등을 통해 구 성되는 교류의 권역 으로 정의하고, 구체적으로 한반도와 남만주 지 역의 국가와 여러 종족을 비롯하여 중원과 강남의 한족 왕조, 5호 ( 胡 )의 유목 왕조, 거란 해( 奚 ), 말갈, 돌궐 유연 설연타, 토번 토욕혼, 강국( 康 國 ), 왜, 하이( 蝦 夷 ) 등의 종족과 정치체를 포괄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고대 한중관계에 대해서는 책봉관계를 바 탕으로 설명하되, 책봉관계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통일적 파악과 그 것을 변화하는 역사적 실체로 이해하는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고 보 았다. 그에 따르면 중국 남북조 시기에는 한중 간에 책봉관계의 상 하질서와 피책봉국의 독립성이 공존했으나, 이후 수당제국이 일원적 세계질서를 지향함으로써 결국 신라가 당의 기미지배를 좌절시켰지 만 당에 대한 종속성은 남북조 시기에 비해 심화되었다고 보았다. 윤영인의 10~12세기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는 10~12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북방에서 흥기한 정복왕조가 중원 의 한족왕조와 남북으로 대치하는 가운데 그 주위의 고려, 대하, 남 조, 티베트, 그리고 북방 초원의 여러 부족들이 모두 국제질서의 한 축으로 존재하며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설명하고, 이 것을 다원적 국제질서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질서 속에서 고려와 거란 금 사이에 존재했던 조공체제 에 대해서 살폈는데, 실 제로는 조공과 책봉이 상하관계가 아니라 상호 불간섭, 호혜주의, 실 책머리에

14 리주의에 따른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윤영인의 글은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분석틀로써 사용되고 있는 조공체제 이론이 한 족( 漢 族 ) 중심의 문화론적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적극 비판하고 조공 체제 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서구 학계의 세계체제 이론 (World-Systems Theory)을 소개하였다. 세계체제 이론은 여러 사회 사 이에 형성된 다양한 연계망(network)을 통해 일어나는 무역과 전쟁, 정보 등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생필품 연 계망(Bulk Good Network), 사치품 연계망(Prestige Good Network), 정치 군사 연계망(Political-Military Network), 정보 연계망(Information Network)의 네 가지 연계망으로 구성되는데, 그 중 정치 군사 연계 망이 조공체제 이론에서 강조하는 국가 대 국가의 정치적 교류에 대 하여 새로운 시각의 접근을 가능하게 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이익주의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는 13~14세기 몽골제국이 성립해 있던 시기를 대상으로 동아시아 의 범위를 설정하고, 그 몽골 제국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서 고려와 몽골의 관계를 책봉 조공관계 로 볼 수 있는지 탐구한 글이다. 13~14세기에 고려가 속해 있던 세 계로서의 동아시아 는 몽골제국의 팽창에 따라 지리적인 동아시아를 훨씬 뛰어넘어 유라시아 대륙 전체로 확장되었는데, 여기에는 몽골 제국에 편입된 국가, 지역뿐 아니라 고려, 일본, 베트남 등 동남아시 아의 여러 국가들처럼 몽골제국과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맺고 있던 국가, 지역들이 포함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고려와 몽골의 관계 에서는 책봉 조공관계의 요소로 책봉, 인장( 印 章 ) 수여, 연호 시행 과 반력( 頒 曆 ), 견사( 遣 使 ), 조공의 사례를 찾아 정리했고, 책봉 조 공관계 이외의 요소로 국왕의 친조( 親 朝 )와 이른바 6사( 六 事 ) 의 문 제, 몽골 군대의 주둔 문제 등을 검토하였다. 이 글의 결론은 고려 1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5 와 몽골의 관계를 책봉 조공관계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인데, 책 봉 조공관계의 전형을 설정하지 않고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장기 지 속한 국제관계의 형식으로 보아 시기별 양상을 추적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그러한 설명이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계승범의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은 15~17세기의 동아 시아 권역을 명과 조선의 외교 반경이 겹치는 공간에 중점을 두어 살폈다. 그리고 조선과 명의 국제외교에서 많이 사용된 조공 책봉 내속( 來 屬 ) 속국( 屬 國 ) 기미( 羈 縻 ) 번국( 藩 國 ) 외국( 外 國 ) 내복( 內 服 ) 중외( 中 外 ) 배신( 陪 臣 ) 등과 같은 용어들의 용례와 의미를 고찰 하였다. 이 글에서 주로 초점을 맞춘 것은 당시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조선의 위상에 관한 것으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차원에서 보면 조선-명관계는 명이 일방적으로 형성하고 주도한 관계가 아니 라 조선의 선택과 호응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관계였음을 강조하 였다. 한편, 이 글에서는 동아시아 세계론에 대한 서양학계의 연구동 향을 이른바 중국적 질서(Chinese world order) 와 한화( 漢 化, sinicization) 이론 및 그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일본학계 의 동향도 15~16세기를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구범진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 청 관계 는 17~19 세기 청 제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작동하던 동아시아 의 범위를 설정 하고, 그 국제질서의 특징을 밝힌 글이다. 그에 따르면 17~19세기 의 동아시아 는 청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중국, 몽골, 티베트, 동투 르키스탄 등과 청 제국 주변의 여러 국가들 러시아, 조선, 일본, 그리고 유럽의 식민지를 포함한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 을 포괄하 는 역사 공간이었다. 그리고 청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국 제질서는 1조공체제, 2호시체제, 3조약체제, 4번부체제 등 네 가 책머리에

16 지 하위체제로 구성되는 다중체제( 多 重 體 制 )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설 명하였다. 이러한 다중체제 안에서 조선은 조공체제에 속해 있었지 만, 조선에 파견한 칙사의 인선에서 한인 관료를 배제하고 기인( 旗 人 ) 관료에 국한했던 사실로부터 조공체제에 함께 속해 있던 베트남 이나 유구와는 다른 위상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배경한의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는 20세기 한중 관계사의 서술을 위하여 그간의 연구가 가지는 문제점들을 비판적으 로 검토하고 구체적인 서술방안을 제시한 글이다. 우선 연구시각과 관련해서는, 일국사 중심의 시각을 뛰어 넘어 동아시아사 내지 전 지구사( 全 地 球 史 )라고 하는 폭넓은 시각에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점과, 기존의 한중관계사 연구에서 구사되어 오던 중심과 주변이라 는 시각에서 탈피하여 한중관계 자체를 하나의 주변으로 보는 시각 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주변적 시각에 설 때 한중관계는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종속되는 일방적인 형 태의 것이 아니라 보다 호혜적이고 평등한 것으로 형상화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이어서 기존의 연구에서 중요하게 다루 어지지 않은 분야들, 예컨대 한중 양국 혹은 양 지역(도시) 간의 경 제적 교류나, 정보 지식 교류를 포함한 문화적 교류, 중국 내 한인 사회나 한국 내 화교사회와 같은 이민사회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0세기의 한중관계의 구체적인 서술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 공동연구에 참여한 연구자들은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 계사 를 공통의 인식으로 하면서 각자 맡은 시기의 특징적 양상을 드 러내는 동시에 시기별 차이를 뛰어넘어 동일한 관점의 통사체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과정에서 한국사와 중국사 연구자 1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7 로서 가지고 있던 인식의 차이와 각 시대별 연구자로서의 분절적인 이해를 극복하고 서로 소통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오 랜 세월 동안 한국사와 중국사로, 또 각 시대사로 나뉘어 진행되어 온 역사 연구의 관행으로부터 벗어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간의 차이를 확인하는 정도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공동연구의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책봉 조공관계에 대한 이해부터가 그러했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를 책봉과 조공의 개 념으로 설명하는 것은 한국 역사학계의 오랜 전통이지만 그것이 중 국 중심의 편향성을 가질 우려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연구자들 에 의해 지적된 바이고, 이 공동연구에서도 모두가 공유한 문제의식 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두고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한편에서는 조공 책봉이 시공간을 초월 해 도처에서 확인되는 보편적 현상이므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설 명하는 개념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의견과(김병준), 한족 중심적 문 화론에 입각한 조공체제 이론이 역사를 왜곡할 수 있으므로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윤영인), 한 문 사료에 등장하는 책봉 조공의 일방적 성격에 주목하여 책봉 조 공 패러다임 이 역사적 현실과 괴리되어 있으므로 이를 폐기하고 새 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야 한다는 제언(구범진) 등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책봉 조공관계의 형식과 내용을 분리하여 현실에 적용하는 실질적 대등관계론의 입장에서 고대 한중관계를 책봉 조 공관계로 설명하거나(김창석), 조선과 명의 관계를 책봉 조공관계로 보되 조공국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고(계승 범), 더 나아가 책봉 조공관계의 개념을 재정리하여 고려와 몽골의 관계도 책봉 조공관계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익주) 등이 있었다. 책머리에

18 책봉 조공관계에 대한 입장의 차이는 그 이론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중국 중심적 편향성을 극복하려는 그간의 노력에 대한 평가의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는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를 한국사와 중국사 중 어느 편에서 보는가 하 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중국사에서 본다면 책봉 조공관계는 중국 왕조가 주변 국가들과 맺었던 여러 가지 관계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책봉 조공관계의 틀을 대체하거나 또는 그것 을 포함하는 다른 분석틀을 모색하는 것이 비교적 용이할 것으로 생 각된다. 하지만 한국사에서 볼 때는 고구려 이후 조선까지 장구한 기간 동안 거의 빠짐없이 중국 왕조와 책봉 조공관계를 맺어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고, 때문에 책봉 조공관계의 틀을 폐기 하기보다는 책봉 조공의 개념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진행시켜 왔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한국사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책봉 조공관계에 대한 이해가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었다. 예를 들어, 고대의 한중관계와 조선시대 의 한중관계를 모두 책봉 조공관계로 설명하지만, 책봉과 조공에 대 한 이해가 각 시대의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형성되는 바람에 서로 달라지는 현상이 발생했던 것이다. 즉, 고구려와 북위( 北 魏 )의 관계는 조선-명, 조선-청 관계와 많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 두 책봉 조공관계로 설명되는데, 이 경우 양 시대의 연구자들이 생 각하는 책봉 조공의 개념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각 시대사 연 구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책봉 조공의 개념을 논의한 적은 없는 듯 하고, 각 시대별로 세분화되어 가는 한국사학계의 풍토 속에서 그러 한 논의의 가능성은 오히려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 사이에 특정한 시기 한중관계의 양상을 책봉 조공관계의 전형으 1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9 로 설정함으로써 이론의 경직화를 불러오고 통사적 이해를 가로막는 경우가 있었는지 반추해볼 일이다. 마지막으로, 이 연구는 일국사에 바탕을 둔 기존의 한중관계사를 극복하고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를 제안한 것이지만, 동아시아 의 개념과 범위에 대한 논 의는 아직도 미진한 상태이다. 무엇보다,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서술을 위한 방법으로서 동아시아 의 시대별 신축을 고 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의 불확실성은 여전하다. 게다 가 종래 니시지마 사다오와 페어뱅크의 동아시아세계론 이 가지고 있 는 중국 중심의 인식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여전히 남아 있다. 따라서 앞으로 한중관계사를 상대화할 수 있는 공간으로 서 동아시아 의 개념과 범위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며, 책봉과 조공, 책봉 조공관계의 개념에 대해서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의 해결은 일국사를 뛰어 넘는 폭넓은 역사 이해와, 시대사를 넘어서는 통사적 이해 체계의 수립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한 국사와 중국사, 그리고 각 시대사 연구자들이 함께 지혜를 모음으로써 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연구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를 찾아서 제기 하는 것에서 의미를 찾게 되었다. 또한 한중관계사를 직접 서술한 것이 아니라 그 서술의 방향을 모색해 본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이 유에서 이 책에 제언과 모색 이라는 부제를 붙이게 되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공동연구가 우리 학계에서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를 모색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2010년 12월 15일 저자를 대표하여 이 익 주 책머리에

20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 조공 책봉의 보편적 성격을 중심으로 김병준 한림대학교 I. 머리말 II. 기존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 III. 3세기 이전 조공 책봉의 성격 IV.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중층적 구조 V. 동아시아세계 속의 한중관계 - 맺음말을 대신하여

21 Ⅰ. 머리말 1960년대 니시지마 사다오[西島定生]가 동아시아세계의 국제관계를 책봉체제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이래, 그 타당성 여부를 두고 국내외에 서 많은 논의가 진행되었다.1 초기 일본학자들의 논의가 동아시아세계 형성에 일본의 적극적 참여를 강조하기 위해 6~8세기 특히 당대(唐 代)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반면,2 점차 논의의 초점은 위진남북조(魏 晉南北朝)시기로 이동해 갔다.3 특히 국내의 연구는 이 시기 고구려와 중국의 조공 책봉관계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까닭은 기본적 으로 중국을 제외한 동아시아 제국의 여러 나라들이 본격적인 고대국 가로 성장해 간 시기가 4세기 이후였던 것과 관련이 깊다. 그렇다면 3세기 이전에 책봉체제 혹은 조공 책봉체제라는 개념이 성립하는가? 사실 니시지마 사다오의 동아시아세계론은 기본적으로 6~8세기 동아시아의 공통된 문화권을 형성하는 기반으로서 책봉체제 라는 정치구조가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고, 나중에 그 이론을 3세기 이전까지 확대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주지하듯이 3세기 이전에 는 후대와 같이 유교, 불교, 율령, 한자를 공유하는 문화권이라고 할 1 西嶋定生(1962), 六-八世紀の東アジア, 岩波講座 日本歷史2 古代2, 岩波書店 [ 西島定生東アジア史論集 第3卷, 岩波書店, 2002 재인용]. 2 李成珪(1996), 中國의 分列體制模式과 東아시아 帝國, 韓國古代史論叢 8,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264쪽. 3 坂元義種(1978), 五世紀の日本と祖先-中國南朝の冊封と關連して, 古代東アジア の日本と祖先, 吉川弘文館; 堀敏一(1979), 隋唐帝國と東アジア世界, 汲古書院.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21

22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들은 책봉체제와 유사한 정치구 조가 3세기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 결과 자 연히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세계 질서가 매우 오래전까지 소급 될 수 있다는 점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역으로 3세기 이전에는 동아시아세계에 동일한 문화권이 형 성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논의를 다시 시작한다면, 3세기 이전과 4세 기 이후의 조공 책봉의 모습이 유사하다는 점은 동아시아세계의 책봉 체제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좋은 단서가 된다. 즉 3세기 이전의 조공 책봉 형식과 실질적 성격이 4세기 이후 전 근대시기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밝히고 나아가 그것이 동아시아 지역에만 국한된 특별한 형식이 아니라 지역을 불문하고 확 인되는 보편적 정치행위라는 점을 밝힐 수 있다면, 3세기 이전 동아 시아를 조공 책봉이라는 개념으로 묶어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4세기 이후 동아시아 질서를 조공 책봉이 라는 개념으로 호칭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되돌아볼 여 지가 생길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하에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곳곳에서 확인되는 조공 책봉의 사례를 검토하여, 조공 책봉이 갖는 보편적 정치행위로서의 성격을 드러내고자 한다. 한편 이렇게 조공 책봉의 보편성에 주목할 경우, 그동안 중국이 중 심이 되어 설명되어 온 논의구조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조공 책봉이 반드시 중국과의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면, 이러한 조공 책봉관계는 중국이 포함되지 않는 별도의 국제질서 에서도 가능하다. 즉 동아시아에 존재했던 복수의 국제질서를 복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중국 중심이 아닌 다양한 국제질서를 상정한다면, 3세기 이 2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3 전 한국과 중국의 관계도 새로운 설정이 가능해진다. 단일한 동아시 아질서를 상정할 경우는 그 질서에 참여하는지 여부만이 문제가 되지 만, 다양한 국제질서를 상정한다면 그 당시 어떤 국제질서에 귀속되어 있었는지를 탐구하고 반드시 중국과의 관계를 선험적으로 설정하지 않 아도 되기 때문이다. Ⅱ. 기존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 1. 조공의 기원 : 선진시기 조공 용례 검토 조공( 朝 貢 ) 의 조( 朝 ) 는 천자를 알현한다는 뜻이고, 공( 貢 ) 은 천자 에 공물을 헌상한다는 뜻이며, 조공 이 제후가 정기적으로 공헌물을 갖고 직접 천자를 배알하는 신례( 臣 禮 )를 행함으로써 천자와 제후의 군신관계를 확인하는 방식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조공을 적어도 서주( 西 周 )시대부터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 대 해서도 모두 동의한다. 그러나 서주시대 이래의 조공제도가 한대 그리고 나아가 4세기 이 후의 조공 책봉제도로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이춘식( 李 春 植 )은 조공제도가 서주 봉건체제하의 천자와 제후의 군신 관계를 규정하는 제도로 출발하여 중국과 이민족의 관계에까지 확대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23

24 적용되었고, 그 뒤 진한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민족과의 관계에만 적용 되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4 전해종(全海宗)은 진한 이후의 대외적 조공 제도가 선진의 대내적 조공제도의 단순한 적용 연장 또는 발전이라고 보기 힘들다고 반박했고 전한(前漢) 후반기 제도화 과정을 거쳐 후대 의 성숙한 조공제도로 이어져 간다고 보았다.5 그 후 김한규(金翰奎)는 이를 계승하여 조공제도와 책봉제도를 합쳐 봉조체제(封朝體制) 라고 칭하고 서주시대의 봉조체제를 국내 작제(爵制)에 편입된 제후국을 지 배하기 위한 수직적 체제라고 보았으며 이것이 진대(秦代)에 존립 근거 를 상실했으나 다시 한대(漢代) 이후 부활하여 점차 주변 민족에까지 확대되어 수직적으로 적용되었다고 하였다.6 가장 큰 견해 차이는 서주시기 조공이 이민족에게 확대 적용되었는 지 여부이다. 우선 김한규가 지적한 대로 서주시대 이민족이 내조(來 朝) 한 사실을 적은 문헌 자료에 대해 사료 비판을 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 그러나 후대 문헌이라고 해서 그 기록의 사실을 모 두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조공과 책봉은 금문(金文) 자료와 같 은 1차적 자료에 의해 확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금문에서는 후대의 표현인 조공 과 책봉 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확인되지 않지만 책명(冊 名) 견(見) 등 동일한 의미의 용어는 대단히 많이 찾을 수 있다. 금 문의 주요 작성 원인이 다름 아닌 조회(朝會)와 책명(冊命)이었다는 점 4 李春植(1969), 朝貢의 起源과 그 意味-先秦時代를 중심으로, 中國學報 10, 한국중국학회 ; 李春植(1970), 漢代의 羈縻政策과 事大朝貢, 史學志 4, 단 국대학교사학회. 5 全海宗(1973), 漢代의 朝貢制度에 대한 一考察, 東洋史學硏究 6, 동양사학회. 6 金翰奎(1982), 古代中國的 世界秩序硏究, 일조각; 방향숙(2005), 古代 동아 시아 冊封朝貢體制의 원형과 변용,이석현 외, 한중외교관계와 조공책봉, 고 구려연구재단. 2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5 을 상기하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서주시기의 조공 책봉은 여러 가지 용어로 표현될 수 있었다. 다음은 조공 책봉 의례가 이민족에게 확대 적용되었는지에 관한 것 이다. 여기서 지적해 두어야 할 점은 서주시기의 이민족의 개념은 후 대의 이민족 개념보다 그 범위가 휠씬 크다는 것이다. 설사 희성( 姬 姓 ) 제후( 諸 侯 ) 이외의 상족( 商 族 )을 이른바 화하( 華 夏 ) 세력으로 간주한다 고 하더라도, 그밖의 다수의 주변 족속은 이민족의 범주에 속한다. 주지하듯이 서주의 왕기( 王 畿 ) 지역 가까이에 다수의 융적( 戎 狄 )이 거 주하고 상당한 규모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만큼 서주와 빈 번한 군사적 접촉이 불가피했는데, 이들 사이의 전쟁은 선주( 先 周 )시기 부터 서주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졌다. 7 이러한 사실은 금문 자료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년 부풍장백( 扶 風 莊 白 ) 에서 발견된 백동과( 伯 冬 戈 )의 동기( 銅 器 )도 회이( 淮 夷 ) 전쟁의 무공( 武 功 )을 기록하고 있으며, 년 원씨현( 元 氏 縣 ) 서장촌( 西 張 村 )에서 발 견된 신간수( 臣 諫 皂 殳 ) 에는 신간이 왕명으로 저국( 軧 國 )을 방어하고 형후 ( 邢 侯 )가 대출( 大 出 ) 이라는 융인( 戎 人 )을 격파한 사건을 기록하는 등 10 그 사례는 대단히 많다. 7 許 倬 雲 (2001), 西 周 史 ( 增 補 本 ), 三 聯 書 店. 8 金 翰 奎 와 方 香 淑 은 竹 書 紀 年 에 나오는 來 朝 와 來 賓 의 개념을 구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 분석 대상은 竹 書 紀 年 에 국한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중 諸 夷 의 來 朝 에 관한 기록은 전체 29개 중 8개에 불과하다고 했 으나 그 비율은 28%에 달한다는 점, 諸 夷 는 來 賓 의 주체로서 대등적 수평 관계라고 했으나 金 文 에서는 王 에게 入 見 한다는 것 자체가 곧 비수평적 관계 라는 점 등을 고려하면 그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9 扶 風 縣 文 化 館 陝 西 省 文 管 會 等 (1976), 陝 西 扶 風 出 土 西 周 伯 冬 戈 諸 器, 文 物 河 北 省 文 物 管 理 處 (1979), 河 北 元 氏 縣 西 張 村 的 西 周 遺 址 和 墓 葬, 考 古 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25

26 이렇게 서주 왕조와 이른바 이민족들 사이에는 부단히 전쟁이 이어 졌는데, 그중 많은 경우 서주의 우세하에 서주 왕도( 王 都 )에서 조공과 책봉의 의례가 진행되었다. 소왕( 昭 王 )시기 종주종( 宗 周 鐘 ) 은 주( 周 ) 가 남방을 정벌한 후 동이( 東 夷 ), 남이( 南 夷 ) 26국으로 하여금 주왕( 周 王 )을 조회( 朝 會 )하도록 한 내용을 적고 있다 년 섬서( 陝 西 ) 무 공( 武 功 ) 출토의 구부수( 駒 父 盨 ) 도 남회이( 南 淮 夷 ) 사무를 관장하는 상주( 常 駐 ) 관원인 고부( 高 父 )를 설치하고 이들이 남회이를 이끌고 조 견( 朝 見 )하는 임무를 담당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년 발견된 장백 ( 莊 白 ) 1호갱에서는 미족( 微 族 )의 계보를 전해주는 103개의 청동기가 발견되었는데, 그중 사장반( 史 牆 盤 )에는 주 무왕( 武 王 )이 상( 商 )을 정 벌했을 때 미( 微 )의 열조( 烈 祖 )가 주의 왕실에 와서 무왕을 알현했고, 무왕은 주공( 周 公 )에게 명령하여 수도 근처 주원( 周 原 )에 영지를 주었 다. 13 미족이라는 이족( 異 族 )의 입조와 책봉을 말해주는 자료이다. 이 처럼 금문에서는 이민족의 조공과 그들에 대한 책봉 사례를 쉽게 찾 을 수 있다. 춘추시대에 들어온 뒤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김한규는 진( 秦 ) 초 ( 楚 ) 오( 吳 ) 월( 越 ) 등 이민족계 국가들이 스스로 중국 의 범주에 편입 되어 스스로 내조 의 대상이 되었고, 또 그 중국 은 여러 힘으로 분 산되었기 때문에 봉조체제 를 통해 이민족을 지배하는 일은 현실적으 11 陳 夢 家 (2004), 西 周 銅 器 斷 代, 中 華 書 局, 王 肇 遹 省 文 武, 覲 疆 土, 南 國 報 子 陷 處 我 土, 王 敦 伐 其 至, 撲 伐 厥 都, 報 子 遣 閒 來 逆 昭 王, 南 夷 東 夷 具 見, 廿 又 六 邦, 唯 皇 上 帝 百 神 保 余 小 子, 朕 猷 有 成 亡 競, 我 唯 司 配 皇 天, 王 對 作 宗 周 寶 鐘, 倉 倉, 雝 雝, 用 卲 各 丕 顯 祖 考 先 王. 12 吳 大 焱 羅 英 杰 (1976), 陝 西 武 功 縣 出 土 駒 父 盨 蓋, 文 物 陝 西 周 原 考 古 隊 (1978), 陝 西 扶 風 莊 白 一 號 西 周 靑 銅 器 窖 藏 發 掘 簡 報, 文 物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7 로 불가능했다고 한다. 14 그러나 춘추( 春 秋 ) 에는 융( 戎 )이 주( 周 )에 조( 朝 ) 했다는 것과 같은 기록이 여럿 남아 있다. 15 또 서주시대와 마 찬가지로 여러 제후국은 인접한 이적( 夷 狄 )들과 숱한 전쟁을 치루었을 것인데, 주의 금문( 金 文 ) 사례에서 보았듯이 전쟁이 끝난 뒤 쌍방 간 에는 승패를 확인하는 정치적 의례가 실시되었을 것임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통일된 중국 이 되어야만 주변 이민족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4세기 이후 분열된 중국 도 각자 주변 이민족과 조공 책봉관계를 맺었듯이, 패자를 자처한 춘추시대의 분산 된 여러 국가들도 얼마든지 주변의 이민족과 조공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춘 추시대에 융( 戎 )이 노( 魯 ) 정( 鄭 ) 등의 여러 제후국과 동등한 자격으로 회맹( 會 盟 )을 맺고 있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제후국 사이에 조공관계 가 성립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융 등 이민족과 제후국 사이의 조공 관계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한편 춘추 에 기록되어 있는 내조 등 조공 책봉 관련 기사는 춘 추 가 노국( 魯 國 )의 역사서라서 노국을 중심으로 서술될 수밖에 없 었다는 점을 고려해서 읽어야 한다. 예를 들어 춘추 에는 단지 노 양공( 魯 襄 公 )이 진( 晋 )에 갔다고( 如 ) 되어 있는데, 16 사기( 史 記 ) 노세 가( 魯 世 家 )에서는 노양공이 진국( 晋 國 )에 조공( 朝 )했다고 기재했다. 17 즉 조공 책봉 관련 서사방식은 본질적으로 자국을 중심으로 서술되기 마련이라는 상식을 잊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한편 진( 秦 )이 천하를 통일한 이후에는 아예 봉조체제가 유지되지 14 金 翰 奎 (1982), 앞의 책, 121~124쪽. 15 春 秋 左 傳 隱 公 7 年 條, 戎 朝 于 周. 16 春 秋 左 傳 襄 公 4 年 條, 公 如 晋 聽 政. 17 史 記 卷 33, 魯 周 公 世 家, 1537쪽, 四 年, 襄 公 朝 晋.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27

28 못했다는 것이 김한규 등의 입장이다. 군현제가 실시되면서 전국( 全 國 ) 이 일원적으로 지배되어 천하 가 진의 군현( 郡 縣 )으로 편입됨으로써 봉조체제가 그 존립의 근거를 상실했고, 황제 역시 군현체제에 의해서 만 인민을 지배하는 유일한 정치권력이기 때문에 내조 의 객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18 그러나 대내적으로 제후국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과 대외적으로 조공 책봉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별개의 사정이 다. 19 이념상 천하 를 통일했지만, 만리장성의 축조는 곧 흉노의 존재 를 강하게 의식한 결과이며, 그밖에 주변 이민족에 대한 관계도 단절 되었던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군현지배 하에 편입된 외경( 外 境 ) 과 내경( 內 境 ) 사이의 만이( 蠻 夷 )들이 조공을 지속했다는 후대의 여러 사례들은 20 진에서도 외경 안쪽의 이민족과 조공 책봉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을 추정하게 한다. 21 이와 같이 서주시기 이래 줄곧 조공은 대내적 조공관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민족에 대해서도 동시에 실시되었던 것이다. 기 존의 연구에서는 조공 책봉관계를 천자와 제후라는 군신관계로 정의 했기 때문에 이민족과의 대외적 조공 책봉관계도 대내적 조공 책봉관 계의 외연을 확대한 것으로 이해했고, 따라서 대내적 조공 책봉관계 가 성립하기 어려운 조건하에서는 대외적 조공 책봉관계 역시 존립하 18 金 翰 奎 (1982), 앞의 책, 124쪽. 19 李 成 珪 (1982), 書 評 : 金 翰 奎 著, 古 代 中 國 的 世 界 秩 序 硏 究, 東 洋 史 學 硏 究 17, 동양사학회. 20 李 成 珪 (2005), 中 華 帝 國 의 팽창과 축소:그 이념과 실제, 역사학보 186, 역 사학회, 98~99쪽. 21 秦 의 통일 직전 상황이기는 해도 秦 王 政 9 年 長 信 侯 嫪 毐 의 반란 때에 縣 卒 등과 함께 戎 翟 君 公 이 동원되었다( 史 記 卷 6, 秦 始 皇 本 紀, 227쪽, 長 信 侯 毐 作 亂 而 覺, 矯 王 御 璽 及 太 后 璽 以 發 縣 卒 及 衛 卒 官 騎 戎 翟 君 公 舍 人, 將 欲 攻 蘄 年 宮 爲 亂. 2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9 지 않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대로 조공 책봉이란 것은 원래 대내외를 불문하고 오로지 왕의 권위( 權 威 )와 덕화( 德 化 )의 범위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였다. 따라서 철저히 자국 중심의 서술 방 식이 될 수밖에 없으며 종종 과장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2. 조공 책봉의 제도화 : 한대 조공 용례 검토 전해종은 한대에는 조공관계가 제도화되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하면 서 그 이유로 조공이 숙어로 사용되지 않은 대신 조공을 뜻하는 용어 가 다양하게 사용되었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전한 후반기에 조공 기사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고 그 내용도 조공제도의 제도화 과정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이 시기부터 제도화 과정의 방향에 들 어섰다고 했다. 22 김한규는 이러한 제도화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먼 저 한대 조근의법에 대한 저소손( 褚 少 孫 )의 기록을 바탕으로 대내적 조 공제도의 특징을 정기적 입조, 매년 정월( 正 月 ) 장안에서의 조근지례 시행, 법견( 法 見 ), 치주( 置 酒 ), 회사( 回 賜 ) 등의 의식절차에서 찾고, 의 례와 실제 시행과정에서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천자가 있는 장소에 서 의무적으로 그리고 정규적으로 제후가 천자에게 조근해야 한다는 원칙이 무시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고 보았다. 이어서 대외적 조공제도 도 의무적이고 정규적인 내조, 정월 장안( 長 安 )에 내조, 봉헌, 치주, 회사 등에 대한 규정 등 여러 면에서 대내적 조공제도와 근사한데, 22 全 海 宗 (1973), 앞의 글 참조.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29

30 특히 책봉제도와 연결되었다고 보았다. 23 그렇지만 이러한 특징을 두고 한대에 조공제도가 제도화되었다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첫째, 이러한 조공의 제도적 특징들은 이미 주례( 周 禮 ) 와 예기( 禮 記 ) 등의 문헌자료에서 얼마든지 확인되는 것 들이다. 여기에는 조( 朝 ) 의 원의( 原 義 ), 내조의 기간, 공물( 貢 物 )의 내 용, 조공의 주체, 조공의 예의절차 등 내용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 다. 24 주례 와 예기 가 대상으로 하는 시기가 서주시대보다는 늦지만 주례 의 많은 부분이 금문자료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는 점 등, 예 기 의 여러 편들이 전국시대 중기 이전으로 소급되는 출토자료에 의해 인증되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이 문헌들이 적어도 한대보다 빠른 전국시대에 완성되었다고 보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이 문헌의 제도적 규정은 한대의 것과 비교할 때 일부 차이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유사하다. 즉 기간, 장소 및 절차 등 한대에 제도화되었다는 특징들의 대부분은 이미 오래 전에 자세히 규정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둘째, 조공제도 중 정기적이고 의무적인 것으로 규정한 내용은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부분이었다. 후술하듯이 흉노를 비롯 해 한대의 주변 이민족들은 결코 정기적으로 입조하지 않았다. 제도 23 金 翰 奎 (1982), 앞의 책, 126~141쪽. 24 周 禮 秋 官 司 寇 大 行 人 條, 邦 畿 方 千 里 其 外 方 五 百 里 謂 之 侯 服 歲 壹 見 其 貢 祀 物 又 其 外 方 五 百 里 謂 之 甸 服 二 歲 壹 見 其 貢 嬪 物 又 其 外 方 五 百 里 謂 之 男 服 三 歲 壹 見 其 貢 器 物 又 其 外 方 五 百 里 謂 之 采 服 四 歲 壹 見 其 貢 服 物 又 其 外 方 五 百 里 謂 之 衛 服 五 歲 壹 見 其 貢 材 物 又 其 外 方 五 百 里 謂 之 要 服 六 歲 壹 見 其 貢 貨 物. 九 州 之 外 謂 之 蕃 國 世 壹 見 各 以 其 所 貴 寶 爲 摯 ; 禮 記 明 堂, 昔 者 周 公 朝 諸 侯 于 明 堂 之 位, 天 子 負 斧 依 南 鄕 而 立. 三 公, 中 階 之 前, 北 面 東 上. 諸 侯 之 位, 阼 階 之 東, 西 面, 北 上. 諸 伯 之 國, 西 階 之 西, 東 面, 北 上. 諸 子 之 國, 門 東, 北 面, 東 上, 諸 男 之 國, 門 西, 北 面, 東 上. 九 夷 之 國, 東 門 之 外, 西 面, 北 上. 八 蠻 之 國, 南 門 之 外, 北 面, 東 上. 六 戎 之 國, 西 門 之 外, 東 面, 南 上. 五 狄 之 國, 北 門 之 外, 南 面, 東 上. 九 采 之 國, 應 門 之 外, 北 面, 東 上. 四 塞, 世 告 至. 此 周 公 明 堂 之 位 也 등 참조. 3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1 화의 증거로 제시되었던 원정( 元 鼎 ) 4년 남월왕( 南 越 王 ) 상서( 上 書 )의 청비내제후( 請 比 內 諸 侯 ), 삼세일조( 三 世 一 朝 ) 나 신작( 神 爵 ) 원년( 元 年 ) 조칙( 詔 勅 )의 기령제후열후만이군장당조이년자( 其 令 諸 侯 列 侯 蠻 夷 君 長 當 朝 二 年 者 ), 개무조( 皆 毋 朝 ) 25 는 모두 청( 請 ) 한 것 혹은 기령무조( 其 令 毋 朝 ) 한 것이므로 현실과는 무관하다. 셋째, 정기적 입조라는 규정을 제외하면 나머지 규정은 장소 및 치주, 회사 등과 관련한 것인데 이것 들은 모두 입조( 入 朝 ) 이후 예식 절차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국제질서 혹은 외교질서로서의 조공 책봉제도에 대한 제도 규정이 아 니라, 일단 그들이 입조한 뒤 궁정에서 벌어지는 의식에 대한 규정이 다. 넷째, 조공이라는 용어의 횟수 혹은 조공이 숙어로 정착되었는지 여부가 곧 조공의 제도화 과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시의 역 사적 상황 혹은 서사자의 표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조공 책봉은 한대에 들어와 제도화된 것이 아니었다. 전 술했듯이 인접세력과의 전쟁 및 복속이 시작되는 초기부터 일찌감치 왕권을 선전하기 위해 실시된 보편적 정치행위였다. 이하 3세기 이전 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25 金 翰 奎 (1982), 앞의 책, 136쪽.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31

32 Ⅲ. 3세기 이전 조공 책봉의 성격 1. 조공 책봉의 비정형성 조공 책봉의 제도적 규정에 의하면 국내의 제후는 일정한 시기마다 한 번씩 입조하여 천자를 알현해야 했다. 따라서 대내적 조공 책봉제 도의 외연 확대로 간주되었던 주변 이민족의 조공 책봉도 마찬가지로 정기적으로 입조해야 하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그러나 전술했듯이 국 내 제후들조차 정기적 입조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만큼 주변 이민족의 정기적 입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추정이다. 이하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도록 하자. 먼저 한이 군사적 우위를 차지한 무제 이후 한과 흉노 사이의 조 공 책봉 기록을 보자. 흉노사회에 내분이 일어나 질지선우(郅支單于)의 공격을 받은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전한 선제(宣帝) 지절(地節) 3년 (기원전 51) 한(漢)에 직접 입조했고, 한은 특별한 예로 대우하여 그 지위를 제후왕 위에 두었다. 선우(單于)의 칭호를 그대로 쓰고 칭신(稱 臣)하되 일반적인 신례(臣禮)와 달리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26 책봉의 예로 주어진 인장도 선우(單于)의 칭호를 사용한 흉노선우새(匈奴單于 璽) 였다.27 그동안 많은 연구에서 지적한 대로 흉노에 대해 절대 우위 26 漢書 卷94上, 匈奴傳, 3798쪽, 明年, 呼韓邪單于款五原塞, 願朝三年正月. 漢遣車騎都尉韓昌迎, 發過所七郡郡二千騎, 爲陳道上. 單于正月朝天子于甘泉宮, 漢寵以殊禮, 位在諸侯王上, 贊謁稱臣而不名. 27 漢書 卷94上, 匈奴傳, 3820쪽, 故印文曰, 匈奴單于璽. 3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3 에 있지 못했던 상황을 전한다. 28 그 다음해 지절 4년(기원전 50)에는 직접 입조한 것이 아니라 사신을 보내 입조하고 봉헌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 황룡( 黃 龍 ) 원년(기원전 49)에는 선우가 다시 직접 입조했다. 원제( 元 帝 )가 즉위(초원 원년, 기원전 48)하자 사신을 보내어 상서( 上 書 ) 했다. 적어도 이 시기만큼은 매년 조공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런데 여 기서 몇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 호한야선우가 입조한 해 에 호한야선우와 적대적 관계에 있었으며 동시에 한과도 적대적 관계 에 있었던 질지선우 측에서도 사신을 보내 봉헌했고, 이어 그 다음 해에도 사신을 보내 한에 입조했다는 것이다. 29 호한야선우처럼 직접 입조( 入 朝 )하지는 않았지만,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자들도 입조하여 봉 헌( 奉 獻 ), 즉 조공을 했다. 일반적으로 한에 항복한 호한야선우와의 관계만을 강조하지만, 그렇지 않은 적국과도 조공 책봉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조공 책봉제도의 중요한 특징이 드러난다. 둘째, 호한야선우가 입조하기 이전, 즉 화친 의 단계에서도 조공 책봉이 이루어졌다. 악연 구제선우( 握 衍 朐 鞮 單 于 )가 화친을 회복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 입조하여 봉헌하도록 했던 것이다. 30 셋째, 호한야선우의 신하였던 좌이질자( 左 伊 秩 訾 )가 무리 천여 명을 이끌고 한에 항복하자 그를 관내후로 책봉 하였다. 호한야선우와의 조공 책봉관계와 동시에 그 휘하에서 도망하 여 내항( 來 降 )한 자들과도 복수의 조공 책봉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31 나 28 방향숙(2005), 앞의 글, 32쪽. 29 漢 書 卷 94 上, 匈 奴 傳, 3798쪽, 是 歲, 郅 支 單 于 亦 遣 使 奉 獻, 漢 遇 之 甚 厚. 明 年, 兩 單 于 俱 遣 使 朝 獻, 漢 待 呼 韓 邪 使 有 加. 明 年, 呼 韓 邪 單 于 復 入 朝. 30 漢 書 卷 94 上, 匈 奴 傳, 3789쪽, 握 衍 朐 鞮 單 于 立, 復 修 和 親, 遣 弟 伊 酋 若 王 勝 之 入 漢 獻 見. 31 漢 書 卷 94 上, 匈 奴 傳, 3797쪽, 呼 韓 邪 之 敗 也, 左 伊 秩 訾 王 爲 呼 韓 邪 計, 勸 令 稱 臣 入 朝 事 漢.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33

34 중에는 흉노에서 도망친 신하를 받아들이지 않도록 바뀌기도 했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이는 고사( 故 事 ) 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원제 이후로는 조공의 기록이 크게 줄어든다. 영광( 永 光 ) 원년(기원 전 43) 호한야선우의 시자( 侍 子 ) 호송 이후에는 성제( 成 帝 ) 경녕( 竟 寧 ) 원년(기원전 33)에야 선우가 다시 직접 입조했다. 성제 하평( 河 平 ) 원년 (기원전 28) 정월에는 사신을 보내어 조하( 朝 賀 )였으며, 하평 4년(기원전 25) 정월에는 직접 입조했다. 그 뒤로는 원연( 元 延 ) 2년(기원전 11) 입 조를 하려다 병사( 病 死 )하자 다음 선우의 아들을 입시( 入 侍 )하게 했다. 원수( 元 壽 ) 2년(기원전 1)에도 입조 기록이 있다. 32 그런데 여기서 주의 할 점은 입조 이전에 입조 여부를 묻고 이에 대해 한이 응답하는 과 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며, 33 이는 곧 주변민족의 조공이 정기적 성 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예컨대 애제( 哀 帝 ) 건평( 建 平 ) 5년에는 흉노가 입조를 문의하자 신하들은 입조가 헛되이 창고의 재 물을 낭비할 뿐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정기적인 입조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입조 자체가 거부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34 그 중요한 이유는 과도한 회사였는데, 호한야선우가 처음 입조한 이후부터 줄곧 엄청난 재물을 하사했음이 기록에 잘 남아있다 漢 書 卷 94 上, 匈 奴 傳, 3808쪽. 33 漢 書 卷 94 上, 匈 奴 傳, 3798쪽, 呼 韓 邪 單 于 款 五 原 塞, 願 朝 三 年 正 月 ; 漢 書 卷 94 上, 匈 奴 傳, 3808쪽, 明 年, 單 于 上 書 願 朝 河 平 四 年 正 月, 遂 入 朝. 34 漢 書 卷 94 上, 匈 奴 傳, 3812쪽, 建 平 四 年, 單 于 上 書 願 朝 五 年. 時 哀 帝 被 疾, 或 言 匈 奴 從 上 游 來 厭 人, 自 黃 龍 竟 寧 時, 單 于 朝 中 國 輒 有 大 故. 上 由 是 難 之, 以 問 公 卿, 亦 以 爲 虛 費 府 帑, 可 且 勿 許. 35 첫 번째 입조에는 賜 以 冠 帶 衣 裳, 黃 金 璽 盭 綬, 玉 具 劍, 佩 刀, 弓 一 張, 矢 四 發, 棨 戟 十, 安 車 一 乘, 鞍 勒 一 具, 馬 十 五 匹, 黃 金 二 十 斤, 錢 二 十 萬, 衣 被 七 十 七 襲, 錦 鏽 綺 縠 雜 帛 八 千 匹, 絮 六 千 斤. 又 轉 邊 穀 米 糒. 前 後 三 萬 四 千 斛 을, 두 번 째 입조에는 加 衣 百 一 十 襲, 錦 帛 九 千 匹, 絮 八 千 斤 을 하사했다( 漢 書 卷 94 上, 3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5 이처럼 입조가 흉노 측에 의해 주동적으로 요구 되었다는 것은 원 칙적으로 상하 신속의 의미를 갖는 조공 책봉관계가 맺어졌음에도 불 구하고 그것이 항상적인 상하관계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 해준다. 원제( 元 帝 ) 영광 원년(기원전 43) 한의 한창( 韓 昌 )과 장맹( 張 猛 ) 이 호한야선우와 맹약을 맺으며 오늘부터 한과 흉노는 합하여 한 집 안이 되었으니, 대대로 서로 속이거나 서로 공격해서는 안 된다. 쌍방 간에 몰래 훔치는 일이 발생하면 서로 통보하여 절도한 자는 처벌하고 훔친 물건은 보상한다. 침략이 있으면 군대를 일으켜 서로 돕는다. 한 과 흉노 가운데 감히 먼저 맹약을 배반하는 자가 있다면 하늘의 징벌 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했는데, 흉노의 조공에도 불구하고 언제든지 그 관계가 해소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36 실제로 왕망시기에 외교정책 이 급변하여 주변 이민족에 대한 강압적인 조처가 행해지자 흉노는 결국 변새를 침략하기에 이르렀는데 37 이것 역시 조공 책봉관계가 구 속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조공을 하다가도 변방 을 침략하여 노략질하는 상황은 후한에 들어가 더욱 빈번해졌다. 광 무제 광무 26년(기원후 50)에 남흉노 선우가 시자를 보내 입조하도록 하고 그 대신 엄청난 물품을 받게 되었는데, 그와 거의 동시에 남흉 노와 적대관계에 있었던 북흉노 역시 사신을 보내어 입조, 공헌을 하 匈 奴 傳, 3798~3799쪽). 그리고 元 帝 즉위 후 呼 韓 邪 單 于 는 다시 상서를 올 려 邊 郡 인 雲 中 郡 과 五 原 郡 에서 곡식 2만 곡을 지급받는 등 매번 엄청난 양 의 하사품이 지급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36 漢 書 卷 94 上, 匈 奴 傳, 3801쪽, 自 今 以 來, 漢 與 匈 奴 合 爲 一 家, 世 世 毋 得 相 詐 相 攻. 有 竊 盜 者, 相 報, 行 其 誅, 償 其 物 : 有 寇, 發 兵 相 助. 漢 與 匈 奴 敢 先 背 約 者, 受 天 不 祥. 令 其 世 世 子 孫 盡 如 盟. 37 漢 書 卷 94 上, 匈 奴 傳, 3821쪽, 單 于 果 遣 右 骨 都 侯 當 白 將 率 曰 : 漢 賜 單 于 印, 言 璽 不 言 章, 又 無 漢 字, 諸 王 已 下 乃 有 漢 言 章. 今 卽 去 璽 加 新, 與 臣 下 無 別. 願 得 故 印.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35

36 며 회사품( 回 賜 品 )과 호시( 互 市 )를 요구했다. 38 다시 말해 후한도 전한 과 유사한 패턴이 지속되고 있었다. 흉노의 동쪽에 위치해 있었던 오환( 烏 桓 )의 경우를 살펴보면, 오환 은 흉노에 복속해 있었는데 한( 漢 ) 무제( 武 帝 )시기 이 지역을 점령하면 서 호오환교위( 護 烏 桓 校 尉 )가 설치되었고 오환의 대인( 大 人 )은 일정 기 간 동안 매년 입조하여 조공했다. 그러나 소제( 昭 帝 )시기 곧 오환이 크게 성장하면서 이 관계는 단절되었는데 오환이 흉노에 패전한 틈을 이용해 한이 오환을 격파하자 오환은 다시 한에 항복했다. 그 뒤 왕 망시기 오환은 또 반란을 일으켜 변경을 노략질했으나 후한 광무제 건무 25년(기원후 49)에 궁궐에 와 조공을 바치는 등 계속해서 적대와 화친이 반복되었다. 39 즉 입조의 시기가 오환의 정치적 세력의 강약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음과 아울러 조공 책봉이 결코 국제질서의 안 정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상식을 확인할 수 있다. 군사적 대립관계가 없는 남쪽 혹은 서역의 경우에는 조공 책봉이 더욱 무정형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흉노와 오환, 오손 등에 대해서는 막대한 경제적 선물을 제공하면서까지 조공 책봉을 지속시키려고 했 던 반면, 현실적 필요가 적은 이 지역의 경우는 전적으로 조공 주체 의 필요와 의지에 따라 조공이 결정되기 마련이었다. 가령 일남( 日 南 ) 의 남쪽에 있는 황지국( 黃 支 國 )은 한 무제시기 조공을 한 뒤 왕망시기 에 다시 한 번 서우( 犀 牛 )를 공물로 조공했다는 기록만이 남아있을 뿐 38 後 漢 書 卷 89, 南 匈 奴 傳, 2946~2948쪽, 二 十 八 年, 北 匈 奴 復 遣 使 詣 闕, 貢 馬 及 裘, 更 乞 和 親, 幷 請 音 樂, 又 求 率 西 域 諸 國 胡 客 與 俱 獻 見. 帝 悉 納 從 之. 二 十 九 年, 賜 南 單 于 羊 數 萬 頭. 三 十 一 年, 北 匈 奴 復 遣 使 如 前, 乃 璽 書 報 答, 賜 以 綵 繒, 不 遣 使 者. 39 後 漢 書 卷 90, 烏 桓 鮮 卑 傳, 2981~2984쪽. 3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7 이다. 40 반면 동일한 교주( 交 州 ) 지역에 구진( 九 眞 ) 요외만( 徼 外 蠻 ), 일 남( 日 南 ) 요외만 등의 조공이 불규칙하게 기록되어 있는가 하면, 동시 에 이들의 반란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41 한과의 거리가 매우 멀었던 서역의 상황도 동일하다. 서역 여러 나라들은 한에 다수의 사자를 보 내 조공했지만, 그 목적은 교역을 통한 경제적 이익에 있었다. 42 자연 히 조공의 시기와 규모는 이들의 의지에 의해 주도적으로 결정될 수밖 에 없었다. 왜( 倭 )와 위( 魏 )의 조공 책봉관계도 일회성에 가깝다. 위가 사마대 ( 邪 馬 臺 )의 여왕 비미호( 卑 彌 呼 )에게 친위왜왕( 親 魏 倭 王 ), 그 신하들에게 솔선중랑장( 率 善 中 郞 將 ) 솔선교위( 率 善 校 尉 ) 등의 인수( 印 綬 )를 하사했 지만, 위나 왜 모두 왜노국( 倭 奴 國 )이 위의 판도에 속한다는 것을 의 식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단지 위에 입공( 入 貢 )한 노국왕( 奴 國 王 )에게 계속 조공을 기대하는 정도의 의미에 불과했던 것이다. 43 이상과 같이 한대 주변 국가와의 조공 책봉은 각 시점에 양자가 처 한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었으며, 조공 책봉이라는 행위는 차후 의 조공을 규정할 수 없었다. 조공은 한에 입조하여 공물을 바치고 그에 대한 회사품을 받는 형식임에 틀림없지만 때로는 화친( 和 親 )의 관 40 後 漢 書 卷 86, 南 蠻 西 南 夷 傳, 2836쪽, 逮 王 莽 輔 政, 元 始 二 年, 日 南 之 南 黃 支 國 來 獻 犀 牛. 41 後 漢 書 卷 86, 南 蠻 西 南 夷 傳, 2836쪽, 建 武 十 二 年, 九 眞 徼 外 蠻 里 張 游, 率 種 人 慕 化 內 屬, 封 爲 歸 漢 里 君 ; 後 漢 書 卷 86, 南 蠻 西 南 夷 傳, 2837쪽, 肅 宗 元 和 元 年, 日 南 徼 外 蠻 夷 究 不 事 人 邑 豪 獻 生 犀 白 雉. 和 帝 永 元 十 二 年 夏 四 月, 日 南 象 林 蠻 夷 二 千 餘 人 寇 掠 百 姓, 燔 燒 官 寺. 42 Byung-joon, Kim(2010), Trade and Tribute along the Silk Road before the Third Century A.D., Journal of Central Eurasian Studies 2, Center for Eurasian Studies(Seoul National University). 43 李 成 珪 (2005), 앞의 글, 105쪽.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37

38 계에서 심지어는 적대국( 敵 對 國 )의 관계에서도 이루어졌다. 또 신속을 표방한 국가와 적대적 국가에 대해 동시에 조공 책봉관계를 유지하는 가 하면, 주변국가 휘하에 소속된 군장들과도 개별적으로 조공 책봉 관계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흉노와 오손, 오환 등 한과 군사적 긴장관계에 놓여 있는 국가에 대해 한이 각종 경제적 재물로 조공관 계를 지속하려는 노력이 보이는 반면, 그렇지 않은 국가들은 조공 주 체의 주도적 판단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2. 조공 책봉의 다목적성 한과 격렬한 전쟁을 치루며 적대적 관계를 지속해 오던 흉노가 직 접 선우의 입조라는 결정을 내린 까닭은 흉노사회의 내분으로 호한야 선우가 질지선우에 의해 격파되어 절대적인 위망에 몰린 시점에서 한 의 세력에 의탁하고 동시에 한으로부터 막대한 경제적 도움을 얻기 위 해서였다. 또한 그 뒤 지속해서 입조한 것도 역시 군사적 경제적 이익 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조공을 하면서 호시( 互 市 )를 열어줄 것을 요 구한 것도 같은 이유이다. 이러한 현상은 흉노만이 아니라 모든 조공 책봉관계에 적용된다. 남월( 南 越 )의 사례를 살펴보자. 사기 와 한서 에는 한( 漢 ) 문제( 文 帝 )가 즉위(기원전 180)하여 육가( 陸 賈 )를 남월에 사신으로 보내자, 남 월왕이 두려워하여( 恐 )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한 후 입조했다고 기록 되어 있다. 그런데 한서 에는 사기 와 달리 한 문제의 서신 등 상세 3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9 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44 먼저 육가가 지참한 것은 조칙이 아니라 서신이었는데[ 賜 佗 書 ], 이는 같은 시기 흉노와 주고받았던 형식과[ 遺 匈 奴 書 ] 유사하다. 그 서신은 황제( 皇 帝 )가 남월왕( 南 越 王 )에게 근문( 謹 問 )한다 는 말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것도 흉노의 선우에게 보낸 편지 의 황제( 皇 帝 )가 흉노선우( 匈 奴 單 于 )에게 경문( 敬 問 )한다 는 말과 역시 유사하다. 45 물론 양자를 비교하면 남월에 비해 흉노를 훨씬 존대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조칙이 아니며 그 문투도 상하소속관계라고 볼 수 없음은 물론이다. 또 육가가 사신으로 갈 때 한은 어떤 군사적 위협[ 兵 威 ]도 동반하지 않았고, 오히려 상저( 上 褚 ) 50벌, 중저( 中 褚 ) 30벌, 하저( 下 褚 ) 20벌 등 많은 양의 재물을 선물로 함께 보냈다. 46 그리고 서신의 내용은 두 명 의 황제가 양립하면 사신( 使 臣 )을 주고받을 수 없으며 싸움이 날 수밖 에 없으니 남월왕에게 양보를 요청하고 예전처럼 사신을 주고받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남월왕은 제호( 帝 號 )를 사용하지 않기로 약속하 면서 황제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그 표현은 한껏 스스로를 낮추었던 것이지만 그 실질 내용은 경제적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즉 여후( 呂 后 ) 시기에 한( 漢 )이 만이( 蠻 夷 )인 외월( 外 越 )에 대해 철기와 농기구 등의 수급( 輸 給 )을 금지하고, 말 소 양은 주되 수컷에 한하며 암컷은 주어 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로 말미암아 남월이 경제적으로 크게 타격을 받았으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면 적절한 화친관계를 맺겠 44 漢 書 卷 95, 西 南 夷 兩 粤 朝 鮮 傳, 3849쪽, 上 召 賈 爲 太 中 大 夫, 謁 者 一 人 爲 副 使, 賜 佗 書 曰, 皇 帝 謹 問 南 粵 王, 甚 苦 心 勞 意. 45 史 記 卷 110, 匈 奴 傳, 2897쪽, 孝 文 皇 帝 前 六 年, 漢 遺 匈 奴 書 曰, 皇 帝 敬 問 匈 奴 大 單 于 無 恙. 46 漢 書 卷 95, 西 南 夷 兩 粤 朝 鮮 傳, 3849쪽, 上 褚 五 十 衣, 中 褚 三 十 衣, 下 褚 二 十 衣, 遺 王.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39

40 다는 것이었다. 47 이 남월왕의 요구에 대해 한서 서남이양월조선전( 西 南 夷 兩 粤 朝 鮮 傳 ) 에는 한 측의 구체적 대응이 생략된 채, 크게 기뻐했 다 고만 기록되어 있다. 48 그런데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한서 문제기( 文 帝 紀 ) 12년 (기원전 168) 3월조의 제관무용전( 除 關 無 用 傳 ) 이라는 기록이다. 49 앞서 답신에서 남월왕이 제기한 철기와 농기구의 금수( 禁 輸 ) 문제는 사실 관( 關 )의 통행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었다. 최근 출토된 장가산한간( 張 家 山 漢 簡 ) 이년율령( 二 年 律 令 ) 에는 진관령( 津 關 令 )이 포함되어 있다. 이 율령은 여후( 呂 后 ) 2년을 즈음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이 년율령 진관령에 따르면, 관을 통과하려면 한에서 발행한 통행증( 傳 ) 을 제시해야 했고, 그 통행증에는 소지하고 있는 물품이 상세하게 기 록되어 있었는데 동( 銅 ), 황금, 말 등 금수( 禁 輸 ) 품목에 적힌 물품은 철저히 검색되어 관을 빠져나갈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50 여후시기에 남월국으로 유출하지 말 것을 명령한 철기와 농기구, 암컷 동물은 바로 통행증( 傳 )을 사용한 방식으로 통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문제 12년에 제관무용전 이라는 조칙은 기존의 통제 정책을 철회한 것으로 주변국 가와의 교역이 다시 활발해졌음을 말해준다. 물론 이 조칙은 남월에 대해서만 적용된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 시점이 육가를 남월에 사신으 로 보내 남월왕의 서신을 받은 이후임에 틀림없으므로 그 시간적 선후 47 漢 書 卷 95, 西 南 夷 兩 粤 朝 鮮 傳, 3849~3852쪽. 48 漢 書 卷 95, 西 南 夷 兩 粤 朝 鮮 傳, 3853쪽, 陸 賈 還 報, 文 帝 大 悅. 49 漢 書 文 帝 紀 12 年 條, 三 月, 除 關 無 用 傳. 50 彭 浩 陳 偉 工 藤 元 男 編 (2007), 二 年 律 令 與 奏 獻 書, 上 海 古 籍 出 版 社, 493쪽, 制 詔 御 史, 其 令 諸 關, 禁 毋 出 私 金. 或 以 金 器 入 者, 關 謹 籍 書, 出 復 以 閱, 出 之. 籍 器, 飾 及 所 服 者 不 用 此 令. 4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41 관계로 보아 남월에 대한 경제적 특혜를 의식한 결과임에 틀림이 없다. 흥미로운 것은 남월왕이 비록 문제에게 보낸 서신에서는 칭신( 稱 臣 ) 하였으나 정작 남월에서 사신을 보내 입조하게 된 것은 문제 12년 제 관무용전 이라는 조칙이 반포되고 그것이 어느 정도 시행된 후인 경제 ( 景 帝 )시기에 들어와서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남월은 사신을 보내 입 조함으로써 외견상 한과 조공 책봉관계를 맺었지만 그 전제조건은 자 국의 이익이 철저히 관철되는 것이었다. 더욱이 남월은 사신을 보내 입조를 하기는 했으나 끝내 내부에서는 황제의 칭호를 사용했다. 이 점은 조공 책봉관계를 맺었으나 여전히 선우라는 호칭을 사용한 흉노 의 사례에 비견된다. 물론 남월은 경제적 이익 이외에도 한이 남월의 주변에 있는 민월( 閩 粤 )에 대해 적절히 군사적으로 견제해 줄 것을 기 대했을 것이다. 직접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은 서역의 경우 조공 책봉의 비정치적 목적은 더욱 잘 드러난다. 4세기 이후 서역의 상인들이 사신의 신분 으로 조공을 하고 경제적 이익을 취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 만, 돈황( 敦 煌 ) 현천치( 懸 泉 置 )에서 발견된 한간( 漢 簡 )은 3세기 이전에 도 마찬가지였다는 점을 알려주는 사료이다. 51 이 자료는 서역의 제국 으로부터 왔던 사신들이 국경을 넘어선 뒤의 활동을 잘 보여주고 있 다. 이에 의하면 서역의 사신들은 일단 돈황( 敦 煌 )에 도착하면, 돈황 태수가 호송 담당자에게 통행증을 발급하여 이들을 황제가 있는 행재 소( 行 在 所 )까지 호송시키도록 했다. 호송하는 도중에 현천치라는 곳에 머물렀던 상황이 기록에 남게 된 것인데, 그 호송대상을 살펴보면 사 신들이 단독으로 온 경우가 있는가 하면 천 여 명이 넘는 규모도 있 51 Byung-joon, Kim(2010).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41

42 으며52 동일한 집단 안에 2개국 이상, 때로는 8개국의 사신이 함께 포 함된 경우도 발견된다. 여러 나라 외교사절이 함께 왕래하고 때로는 수백 명의 규모에 이르기도 했던 것은 일단 이동의 어려움 때문에 비 롯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동시에 그들의 주요 목적이 양국 간의 특 별한 외교적 사무가 아니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전한 성제(成帝) 때에 계빈(罽賓)의 사신을 호송하려 했을 때 두흠(杜欽)은 사신을 보 내 객(客)을 호송하는 것은 노략질 피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이기 는 하나 이들이 사신이라고 칭하고 조공을 바쳐도 그들은 모두 장사 를 하는 천민(賤民)일 뿐이고 상품을 교환하고 장사를 할 뿐 봉헌(奉 獻)은 명분일 뿐이다 라고 한 바 있다.53 현천치한간(懸泉置漢簡)에 등 장하는 서역 사절들의 상당수가 두흠(杜欽)이 말하는 만이지가(蠻夷 之賈) 였던 것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 돈황현천치(敦煌懸泉置) 한간(漢簡) 의 영광오년강거왕사자소송책(永光五年康居王使者訴訟冊) 이다.54 이 간 52 胡平生 張德芳(2001), 敦煌懸泉置釋粹, 上海古籍出版社, 遣守属田忠送自來 鄯善王副使姑彘, 山王副使烏不腞, 奉獻詣行在所, 爲駕一乘傳. Ⅱ0214②:78 53 漢書 卷96, 西域傳, 3886쪽, 凡遣使送客者, 欲爲防護寇害也. 今悔過 來, 而無親屬貴人, 奉獻者皆行賈賤人, 欲通貨市買, 以獻爲名 今遣使者承至 尊之命, 送蠻夷之賈, 勞吏士之衆, 涉危難之路, 罷弊所恃以事無用, 非久長計也. 54 敦煌懸泉置釋粹, 康居王使者楊佰刀 副扁闐 蘇韰王使者姑墨 副沙囷卽 貴人 爲匿等皆叩頭自言, 前數爲王奉獻橐佗入敦煌關, 縣次贖(續)食至酒泉昆歸官, 大 守與楊佰刀等雜平直肥瘦. 今楊佰刀等復爲王奉獻 橐佗入關, 行直不得, 食至酒 泉, 酒泉大守獨與小吏直畜, 楊佰刀等不得見所獻橐佗, 姑墨爲王獻白牡橐佗一匹, 牝二匹, 以爲黃, 及楊佰刀等獻橐佗皆肥, 以爲瘦, 不如實, 冤. 永光五年六月癸酉 朔癸酉, 使主客諫大夫漢侍郞當移敦煌大守, 書到驗問言狀, 事當奏聞, 毋留如律 令. 七月庚申, 敦煌大守弘 長史章 守部候脩仁行丞事, 謂縣, 寫移書到, 具移康 居 蘇韰王使者楊佰刀等獻橐佗食用穀數, 會月廿五日如律令. 掾登 屬建 書佐政 光. 七月壬戌, 效穀守長合宗 守丞敦煌左尉忠, 謂置, 寫移書到, 具寫傳馬止不食 穀, 詔書報, 會月廿三日, 如律令. 掾宗 嗇夫輔. Ⅱ0216②: ) 4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43 독에는 서역( 西 域 ) 여러 나라의 사신들이 주천( 酒 泉 )에 와서 봉헌한 낙 타의 가격을 결정하는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원칙적으로 이들은 행 재소 로 가서 공물을 바치고 황제를 알현하기로 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들 사신의 관심은 오로지 낙타의 가격을 정당하게 받는 데에 있었 다. 이들이 돈황에서 주천까지 오는 길 동안 숙식 제공을 요구했던 것도 근본적으로는 경제적 손익과 관련되어 있다. 더욱이 이들은 이번 봉헌 이전에도 여러 번 동일한 패턴으로 와서 낙타와 같은 공헌품을 팔고 돌아갔던 자들이었다. 즉 그들은 두흠( 杜 欽 )이 간파한 대로 만 이지가( 蠻 夷 之 賈 ) 였던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흉노, 남월, 서역 여러 나라의 조공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의 이익에서 출발했다는 점이 분명하다. 경우에 따라 정치 군 사 경제 등 다양한 목적에서 기인했겠지만 어느 경우에라도 그 이익 에 맞도록 조공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조공행위의 목적이 한 측의 책봉과 하사품에 의해 보증된다면 조공 책봉은 지속적으로 운영 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조공 책봉체제를 보증할 수 없는 것 이다. 물론 한 측에서도 자신의 필요에 의해 재물을 이용하거나 혹은 군사적 위협을 통해 조공 책봉을 유지했을 것이다. 결국 조공 책봉이 란 당사자 양자의 이익에 기초한, 철저히 합목적적인 정치행위라고 할 수 있다.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43

44 3. 조공 책봉의 시공간적 보편성 그동안 조공 책봉제도 논의는 주로 중국을 둘러싼 주변 국가들이 조공을 하고 이를 중국이 책봉하는 도식을 전제하고 전개되었다. 그러 나 4세기 이후 고구려를 중심으로 별도의 소중화세계가 존재했고, 55 백제와 신라 역시 소천하( 小 天 下 )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베트남( 越 南 ) 역시 10세기 이후 칭제의 전통을 지키며 전형적인 소천하세계를 형성 했다. 56 그리고 이런 현상은 한반도 혹은 베트남에 국한되는 것이 아 니며 그 시기도 3세기 이전에 얼마든지 확인되는 것들이다. 전한 초중기 서남이 지역의 사례를 보도록 하자. 장건( 張 騫 )이 서역 사행( 使 行 )을 마치고 돌아와 한 무제에게 보고한 내용 중에는 서남이 쪽으로부터 촉포( 蜀 布 )와 공죽장( 邛 竹 杖 ) 등 각종 물품이 서역으로 전 해 들어갔을 가능성을 언급한 부분이 있다. 그 뒤 한은 이곳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한의 사자( 使 者 )가 전( 滇 )에 이르 자 전왕( 滇 王 )은 한의 사자에게 한나라와 우리 중에 어느 쪽이 더 큰 가 라고 물었다. 똑같은 상황은 인근의 야랑( 夜 郞 )에서도 똑같이 벌어 졌다. 57 이를 두고 일주( 一 州 )에 지나지 않는 왕이 제국( 帝 國 )을 자랑하 는 한의 광대함을 알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어, 그 뒤 야랑자대( 夜 郞 自 大 ) 라는 숙어가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이 고사를 뒤집어보 면 곧 전과 야랑이 각각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천하질서를 갖고 있었 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55 盧 泰 敦 (1988), 5세기 高 句 麗 人 의 天 下 觀, 한국사시민강좌 3, 일조각. 56 劉 仁 善 (1988), 中 越 關 係 와 朝 貢 制 度, 尹 乃 鉉 等, 中 國 의 天 下 思 想, 민음사. 57 漢 書 卷 95, 西 南 夷 兩 粤 朝 鮮 傳, 3841쪽, 滇 王 與 漢 使, 漢 孰 與 我 大, 及 夜 郞 侯 亦 然, 各 自 以 一 州 王, 不 知 漢 廣 大. 4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45 전은 본래 소읍(小邑)에 불과 하지만,58 인근의 여러 세력들을 아우르고 있었다. 문헌기록에는 전의 동북쪽에 있는 노심(勞深) 과 미막(靡莫)이 모두 전과 동성 (同姓)으로서 상장(相杖)하고 있 었기 때문에 한의 요청을 듣지 않았다고 했으므로59 이들을 전 그림 1 전국 출토 청동저패기(조공) 의 동맹세력으로 간주할 수 있 다. 한편 이 지역에서 발견된 고고학 자료도 전국(滇國)의 휘하에서 지배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세력들에 대해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운남성(雲南省) 진녕(晉寧) 석 채산(石寨山)에서 발견된 무덤에서는 2개의 폐동고(廢銅鼓)로 만들어진 청동저패기(貯貝器)들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전왕에게 조공을 바치 는 여러 부족의 인물들이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그림 1). 동고 위에 표현된 인물과 공납품은 모두 7개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조 합은 공납을 하러 온 각 종족의 대표자 혹은 사절과 그를 따라온 수 행원 그리고 공납품을 직접 운반하는 하층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추 정되고 있다.60 각각의 조상(彫像)에 해당하는 부족을 정확히 비정하 는 데에는 아직도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이들이 전왕에 공납을 바 치는 자들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함께 출토된 청동기에 58 漢書 卷95, 西南夷兩粤朝鮮傳, 3842쪽, 滇, 小邑也, 最寵焉. 59 漢書 卷95, 西南夷兩粤朝鮮傳, 3842쪽, 滇王者, 其衆數萬人, 其旁東北勞 深, 靡莫皆同姓相杖, 未肯聽. 60 張增祺(1997), 滇國與滇文化, 雲南美術出版社, 172~175쪽.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45

46 그림 2 전국 출토 청동저패기(제례) 그림 3 전국 출토 청동저패기(전쟁) 전왕이 사람을 희생으로 삼아 거행하는 대규모 의례행사(그림 2), 황 금을 덧입힌 기마인물이 타부족민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전쟁 장면이 표현된 것(그림 3) 등은 모두 전왕의 세력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즉 비록 문헌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전과 그 주변 세력 사이에는 한과 그 주변 국가 사이에서 확인되는 조공 책봉관계를 설정할 수 있다. 야랑왕(夜郞王)도 그 동맹세력으로 동성인 구정왕(鉤町王), 루와후(漏臥 侯)를 갖고 있었는데, 이들 사이에도 전국과 그 주변 세력 사이의 정 치적 관계가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남월(南越)도 마찬가지이다. 남월은 동성인 창오(蒼梧)를 주요 동맹 세력으로 삼아 휘하에 두었다.61 그 외에도 주변의 여러 부족을 역속 (役屬)시키고 있었는데 야랑은 그중의 하나였다. 남월왕 조타(趙佗)가 스스로 제(帝)를 칭하고 황옥좌독(黃屋左纛)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이 를 뒷받침해준다. 한과 천하를 두고 대적했던 흉노가 주변 세력을 복속시키고 그 우 위를 드러내는 조공을 받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이다. 오환(烏桓)은 기 61 史記 卷116, 西南夷列傳, 2994쪽, 南越以財物役屬夜郞, 西至同師, 然亦 不能臣使也. 4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47 원전 2세기 흉노의 묵특선우( 冒 頓 單 于 )에게 파망( 破 望 )한 후 그 무리가 고립되어 약해졌고 그 이후로는 늘 흉노에 신하로 복속했다. 그리하여 오환 사람들은 해마다 소 말 양 가죽을 바쳤는데, 날짜를 넘겨 물자 를 바치지 못하면, 흉노 사람들은 오환 사람들의 처자를 빼앗아서 노 비로 삼았다. 62 그밖에도 누란( 樓 蘭 ), 오손과 같은 서역 여러 나라들로 부터 조공을 받았다. 흉노가 선우의 예( 禮 )로 주변국의 사신을 맞이했 다는 것은(후술) 흉노를 중심으로 한 조공 책봉의 존재를 알려주기에 충분하다. 주변 민족만이 아니라, 중국 내에서도 그 세력이 분열되면 그 각각 의 세력이 모두 정치적 중심이 되어 주변국가와 조공 책봉관계를 맺 을 수 있었다. 2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춘추전국시대에 노국이 그 주변으로부터 조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진국( 晋 國 )은 물론 그 당시 만이( 蠻 夷 )로 간주되었던 초 진 오 월 등도 모두 그 주변으로부터 조 공을 받았다. 초국( 楚 國 )이 백월( 百 越 )로부터 조공을 받았다는 기록들 이 여기에 속한다. 63 이처럼 조공 책봉의 기본적 형식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언 제 어디서든지 확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국제질서이다. 다시 말해 4세 기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 베트남만이 아니라 그 이전 다른 곳에서 도 자기 중심의 천하질서와 그 구체적 형식으로서 조공 책봉이 보편 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62 後 漢 書 卷 90, 烏 桓 鮮 卑 傳, 2981쪽, 烏 桓 自 爲 冒 頓 所 破, 衆 遂 孤 弱, 常 臣 伏 匈 奴, 歲 輸 牛 馬 羊 皮, 過 時 不 具, 輒 沒 其 妻 子. 及 武 帝 遣 驃 騎 將 軍 霍 去 病 擊 破 匈 奴 左 地, 因 徙 烏 桓 於 上 谷, 漁 陽, 右 北 平, 遼 西, 遼 東 五 郡 塞 外, 爲 漢 偵 察 匈 奴 動 靜. 其 大 人 歲 一 朝 見, 於 是 始 置 護 烏 桓 校 尉, 秩 二 千 石, 擁 節 監 領 之, 使 不 得 與 匈 奴 交 通. 63 後 漢 書 卷 86, 南 蠻 西 南 夷 傳, 2835쪽, 及 楚 子 稱 霸, 朝 貢 百 越.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47

48 4. 조공 책봉의 상호성 앞서 서역 여러 나라의 사신이 자국( 自 國 )에서 한까지 왕래하는 과 정에서 한의 사신이 동행했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64 조공 책봉 관련 기술이 자국을 중심으로 자국에 유리하게 쓰일 수밖에 없다면, 한으 로 온 조공사절 외에 한에서 상대편 국가로 간 사절 역시 조공의 의 례를 바쳤을 가능성은 없을까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사기 대완열전( 大 宛 列 傳 ) 과 한서 서역전( 西 域 傳 ) 에 나오는 장건 의 오손 사행( 使 行 ) 관련 기록이 좋은 사례가 된다. 장건이 금폐( 金 幣 ) 를 갖고 사신으로서 오손에 갔을 때 오손의 왕인 곤막( 昆 莫 )이 마치 선우처럼 행동하자 장건이 크게 참담해 했는데, 오손이 한의 재물을 탐하는 것을 알고 장건이 오손 왕에게 한의 천자가 하사품을 내리는 데[ 賜 ] 예를 다하지 않으니[ 不 拜 ] 그냥 돌아가겠다 고 하자 오손의 왕이 예를 갖추었다는[ 起 拜 ] 내용이 적혀 있다. 65 이 기록에 따르면 오손의 왕이 한이 사여한 물품에 대해서 만큼은 다른 경우와 달리 예우했다 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배사( 起 拜 賜 ) 했다는 장건의 전언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하사품에 대 64 倭 國 과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찾을 수 있다. 魏 의 明 帝 가 사신을 시 켜 조서와 각종 하사품 을 갖고 倭 로 가서 假 倭 王 으로 임명하자 倭 王 이 사 신을 시켜 上 表 했다는 기록은 결국 魏 의 사자가 倭 로 직접 건너가고 이 사 절을 따라 倭 의 사절이 魏 로 건너갔다는 것을 말한다. 三 國 志, 魏 書 卷 30, 東 夷 傳, 857쪽, 奉 詔 書 印 綬 詣 倭 國, 拜 假 倭 王, 幷 齎 詔 賜 金 帛 錦 罽 刀 鏡 采 物, 倭 王 因 使 上 表 答 謝 恩 詔. 65 史 記 卷 123, 大 宛 列 傳, 3168쪽, 騫 既 至 烏 孫, 烏 孫 王 昆 莫 見 漢 使 如 單 于 禮, 騫 大 慚, 知 蠻 夷 貪, 乃 曰, 天 子 致 賜, 王 不 拜 則 還 賜. 昆 莫 起 拜 賜, 其 他 如 故 ; 漢 書 卷 96 下, 西 域 傳, 3902쪽, 武 帝 卽 位, 令 騫 齎 金 幣 往. 昆 莫 見 騫 如 單 于 禮, 騫 大 慚, 謂 曰, 天 子 致 賜, 王 不 拜, 則 還 賜. 昆 莫 起 拜, 其 它 如 故. 4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49 해서 예를 갖춘 것을 제외하고는 오손왕의 행동이 여전히 선우의 예와 같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선우례( 單 于 禮 )라고 함은 그들의 조공 책봉 형식에 맞추어 진행했음을 의미하므로, 이 상황을 오손 측에서 기록 했다면 장건은 조공사절에 해당될 것이다. 사실 오손이 하사품에 예를 갖추었다는 표현도 당시의 조공 책봉 관례상 특별한 상황이 아니다. 왜냐하면 전한 선제( 宣 帝 )가 호한야선 우의 입조 때에 보여준 모습은 오손왕 곤막이 보여준 것과 다르지 않 기 때문이다. 즉 호한야선우가 감로 3년(기원전 51) 정월에 입조를 원 하자 한은 거기도위( 車 騎 都 尉 ) 한창( 韓 昌 )을 보내 영접하고, 기병이 도 열하게 했으며, 감천궁( 甘 泉 宮 )에서 조하( 朝 賀 )할 때 선우를 특별한 예 로 대우하여, 선우의 지위를 제후왕 위로 하고, 천자에게 배알할 때 신이라고 칭하되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수도의 조하에서 는 선우가 배알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서를 내리기까지 했다. 66 또 광 무제 건무 6년에도 한과 흉노가 모두 사신을 보내 공헌을 했는데 중 랑장( 中 郞 將 ) 한통( 韓 統 )에게 금과 비단을 뇌물로 보내어 옛 우호관계를 회복하려고 하자 선우는 교만하게 스스로를 옛 묵특선우에 비기면서 사자를 업신여겼던 반면 광무제는 예전과 같이 했다고 한다. 67 한과 66 漢 書 卷 94 上, 匈 奴 傳, 3798쪽, 明 年, 呼 韓 邪 單 于 款 五 原 塞, 願 朝 三 年 正 月. 漢 遣 車 騎 都 尉 韓 昌 迎, 發 過 所 七 郡 郡 二 千 騎, 爲 陳 道 上. 單 于 正 月 朝 天 子 于 甘 泉 宮, 漢 寵 以 殊 禮, 位 在 諸 侯 王 上, 贊 謁 稱 臣 而 不 名. 賜 以 冠 帶 衣 裳, 黃 金 璽 盭 綬, 玉 具 劍, 佩 刀, 弓 一 張, 矢 四 發, 棨 戟 十, 安 車 一 乘, 鞍 勒 一 具, 馬 十 五 匹, 黃 金 二 十 斤, 錢 二 十 萬, 衣 被 七 十 七 襲, 錦 鏥 綺 縠 雜 帛 八 千 匹, 絮 六 千 斤. 禮 畢, 使 使 者 道 單 于 先 行, 宿 長 平. 上 自 甘 泉 宿 池 陽 宮. 上 登 長 平, 詔 單 于 毋 謁, 其 左 右 當 戶 之 群 臣 皆 得 列 觀, 及 諸 蠻 夷 君 長 王 侯 數 萬, 咸 迎 於 渭 橋 下, 夾 道 陳. 上 登 渭 橋, 咸 稱 萬 歲. 單 于 就 邸, 留 月 餘, 遣 歸 國. 67 後 漢 書 卷 89, 南 匈 奴 傳, 2940쪽, 建 武 初, 彭 寵 反 畔 於 漁 陽, 單 于 與 共 連 兵, 因 復 權 立 盧 芳, 使 入 居 五 原. 光 武 初, 方 平 諸 夏, 未 遑 外 事. 至 六 年, 始 令 歸 德 侯 劉 颯 使 匈 奴, 匈 奴 亦 遣 使 來 獻, 漢 復 令 中 郞 將 韓 統 報 命, 賂 遺 金 幣, 以 通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49

50 흉노 모두 상대방에게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고 있었으며, 흉노 측 이 오히려 고압적 자세에서 선우례를 과시했던 사례이다. 따라서 장 건의 사례도 한이 주변 민족에게 조공을 한 경우에 속한다고 해도 좋다. 사실 3장 1절에서 설명했듯이 화친관계나 심지어 적대관계에서 도 조공 책봉이 이루어졌다면 어느 한쪽이 아니라 양쪽에서 모두 조 공 책봉의 형식이 치러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 이후 서역 사신을 호송한 한의 사신의 경우도 상대편 기록에 조공으로 기재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서역인만이 아니라 한인 역시 서역의 물산으로 상업적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자가 많았는데, 서역 여러 나라에 사신으로 가려는 자가 한 번에 많게는 수백 명, 적게는 백 여 명에 이르렀고 이들은 외국의 기이한 물자에 대해 상소를 올려 사신이 되기를 바랐다는 기록 68 등은 이를 잘 말해준다. 이들이 서역 여러 나라로부터 일정한 하사품을 기대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한 편 그들이 최종 목적지에 이르게 되면 서역 사신이 한에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국경선부터 상대편 국가의 호송을 받게 되었을 것이 다. 또 서역 사신이 황제가 있는 행재소 혹은 궁궐로 안내되었던 것 처럼 한인 사신이 황제의 부절을 갖고 있는 이상 이들 역시 왕도로 안내되었을 것이다. 한서 서역전 에 의하면 무제가 처음 안식( 安 息 ) 으로 사신을 보냈을 때, 안식왕은 2만 명의 기병을 동쪽 경계까지 보 내서 사신을 맞이하도록 했으며, 이 동쪽 경계로부터 왕도( 王 都 )까지 는 수천 리 떨어져 있어 그곳까지 도착하려면 수십 개의 성을 지나 舊 好. 而 單 于 驕 踞, 自 比 冒 頓, 對 使 者 辭 語 悖 慢, 帝 待 之 如 初. 68 史 記 卷 123, 大 宛 列 傳, 3170~3171쪽, 而 天 子 好 宛 馬, 使 者 相 望 於 道. 諸 使 外 國 一 輩 大 者 數 百, 少 者 百 餘 人, 人 所 齎 操 大 放 博 望 侯 時 自 博 望 侯 開 外 國 道 以 尊 貴, 其 後 從 吏 卒 皆 爭 上 書 言 外 國 奇 怪 利 害, 求 使. 5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51 야 했다고 한다. 69 왕도에 도착하면 한의 황제가 조공국의 사신들을 알현하는 것과 마 찬가지로, 해당 국가의 왕이 한의 사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한의 황 제는 자신의 권위를 한껏 드러내기 위해 개별적으로 만나기보다 상림 원( 上 林 園 ) 안의 큰 건물에 여러 나라의 사신들을 한꺼번에 모두 모아 기예( 技 藝 )와 연회( 宴 會 )를 베풀었다. 70 안식( 安 息 ), 즉 파르티아 왕국의 이전 왕조인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세폴리스 궁전 부조 등에 나타난 조공행렬도를 보면, 71 서역 여러 나라를 비롯한 다른 국가도 한과 유 사한 방식을 취했을 것으로 보아도 좋다. 이때 한의 사신들은 자신들이 들고 간 각종 물품을 전달했을 것이 다. 전한 초기 이후 3세기에 이르기까지 주변 민족에 전달한 물품은 대단히 많았다. 잘 알려져 있는 바로는, 전한 초기 흉노와 화친관계를 맺으면서 한이 흉노 측에 전달한 다량의 비단 및 장식품 등이 있다. 한문제가 육가를 보내 남월왕에게 전달한 서신에도 각종 고급 의복이 동반되었으며, 왜에게도 황금과 비단, 동경 등 다양한 물품을 전달한 사례가 다수 확인된다. 72 장건이 서역에 황제의 부절( 符 節 )을 갖고 사 행( 使 行 )했을 때에도 1만 마리의 우양( 牛 羊 ), 수천만 전에 이르는 황금 69 漢 書 卷 96, 西 域 傳, 3890쪽, 武 帝 始 遣 使 至 安 息, 王 令 將 將 二 萬 騎 迎 於 東 界, 東 界 去 王 都 數 千 里, 行 比 至, 過 數 十 城. 70 漢 書 卷 96, 西 域 傳, 3905쪽, 天 子 自 臨 平 樂 觀, 會 匈 奴 使 者 外 國 君 長 大 角 抵, 設 樂 而 遣 之. 71 Nadereh Nafisi eds.(2003), Persepolis:Achaemenian Souvenir, Iran : Gooya House of Culture & Art. 72 三 國 志, 魏 書 卷 30, 東 夷 傳, 857쪽, 拜 假 倭 王, 幷 齎 詔 賜 金, 帛, 錦 罽, 刀, 鏡, 采 物.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51

52 과 비단을 갖고 갔다. 73 물론 이 내용은 모두 중국 측 사서에 기록되 어 있으며, 그 때문에 물품을 전달했다는 표현은 종종 중국 측 권위 를 내세우기 위한 방식인 하사품 이라는 말로 대체되었다. 74 그러나 이 러한 표현은 전적으로 한 측의 기록에 남아있는 것일 뿐이라면, 상대 편에는 이를 조공품으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흉노를 비롯해 주변 민족의 여러 왕과 장군들이 내항( 來 降 )한 경우, 그들은 일반적으로 공물을 바치고 한으로부터 책봉을 받는 형식을 취 한다. 이들 사례는 사기 와 한서 의 공신후표에 자세하다. 75 그런데 한의 장군 중에도 적지 않은 수가 흉노에 항복했다. 그 때문에 한 초 이래 한과 흉노가 조약을 맺을 때마다 언급되고는 했다. 76 그렇다면 흉 노에게 항복한 한의 장군들은 흉노의 선우에게 공물을 바치고 선우로 부터 책봉을 받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렇듯 한과 흉노의 조공 책봉 관계는 양쪽에서 모두 설정되는 상호성을 갖고 있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3세기 이전에 보이는 조공 책봉은 시간적 73 史 記 卷 123, 大 宛 列 傳, 3168쪽, 拜 騫 爲 中 郞 將, 將 三 百 人, 馬 各 二 匹, 牛 羊 以 萬 數, 齎 金 幣 帛 直 數 千 巨 萬, 多 持 節 副 使, 道 可 使, 使 遺 之 他 旁 國. 74 漢 初 和 親 시기에 漢 이 匈 奴 측에 전달한 물품에 대해서는 謁 者 令 肩 遺 單 于, 그리고 南 越 측에 전달한 물품에 대해서는 遺 王 이라고 해서 遺 를 사 용한 반면, 적극적인 대외정책이 실시된 이후에는 賜 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 하였다. 烏 孫 에 대해 漢 遣 惠 持 金 幣 賜 烏 孫 貴 人 有 功 者, 都 護 廉 褒 賜 姑 莫 匿 等 金 人 二 十 金, 繒 三 百 匹 ( 漢 書 卷 96 下, 西 域 傳, 3905쪽)이라고 표현한 것이나, 倭 에 대해 齎 詔 賜 金, 帛, 錦 罽, 刀, 鏡, 采 物 ( 三 國 志, 魏 書 卷 30, 東 夷 傳, 857쪽)이라고 표현한 것이 그 예이다. 75 그밖에 漢 書 卷 94 上, 匈 奴 傳, 3790쪽, 日 逐 王 素 與 握 衍 朐 鞮 單 于 有 隙, 卽 率 其 衆 數 萬 騎 歸 漢. 漢 封 日 逐 王 爲 歸 德 侯. 單 于 更 立 其 從 兄 薄 胥 堂 爲 日 逐 王 등 여러 사례가 있다. 76 漢 書 卷 94 上, 匈 奴 傳, 3764쪽, 單 于 既 約 和 親, 於 是 制 詔 御 史. 匈 奴 大 單 于 遺 朕 書, 和 親 已 定, 亡 人 不 足 以 益 衆 廣 地, 匈 奴 無 入 塞, 漢 無 出 塞, 犯 今 約 者 殺 之, 可 以 久 親, 後 無 咎, 俱 便. 朕 已 許. 其 布 告 天 下, 使 明 知 之. 5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53 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쉽게 확인되는 보편적인 외교 형식이었다. 즉 조 공 책봉은 정기적인 조공을 강제하지도 않았고, 그때마다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결정되었다. 때로는 화친의 시기에, 때로는 적대적 관계 에 있으면서도 조공이 이루어졌는가 하면, 대립하는 두 나라를 동시 에 조공 책봉관계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또 조공국가의 군사적 경제 적 요소가 근본적인 동인이 되지만, 조공을 받는 측의 필요에 의해서 도 그 조공 책봉 여부가 결정되었다. 한편 조공 책봉은 반드시 중국 을 중심으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주변 국가들은 자기 나름의 천하질 서를 갖고 조공 책봉관계를 형성했던 것이며, 따라서 중국이 이들 세계 와 접촉할 때에는 그들에게 조공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결국 3세기 이전의 조공 책봉이란 자국의 왕이 천하의 중심에 위치 하며 그 권위가 대내외적으로 널리 미치고 있음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외국으로부터 가능한 많은 사절이 공물을 바치고 입조하여 그 상하관 계를 대내외에 인식시키려고 하는 보편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본 래 모든 국가는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갖기 마련이다. 인류학적으로도 선사시대 이래 모든 공동체는 자기를 중심으로 우주관을 만들었다고 확인된다. 천하에 제( 帝 )가 둘이 있을 수 없다는 점에 동의만 해주면 흉노와 막대한 재물을 증여하고 남월에게 중대한 혜택을 줄 수 있을 정도로, 한의 천하질서가 매우 자기중심적이고 편의적이었던 까닭도 여기서 유래한다. 따라서 그 형식은 물론이고 그것을 기록하는 방식 도 철저히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종종 존재하지 않은 조공관계를 날조할 수도 있었다. 물론 주변 민족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 서 지나친 추측은 곤란하다. 그러나 한의 기록에 남아있는 것은 한쪽 의 기록일 뿐이라는 상식을 잊어서도 곤란하다. 마지막으로 언급해 두고 싶은 것은 이상에서 살펴본 3세기 이전의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53

54 현상이 4세기 이후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그동안 조 공 책봉체제와 관련한 많은 연구는 4세기 이후 중국 중심의 조공 책 봉체제를 비판하는 데 집중되었지만, 그 연구 결과를 보면 이 글에서 살펴본 것과 다르지 않다. 가령 조공국과 책봉국 사이의 교섭이 대등 한 입장에서 이루어졌다든가, 피책봉국의 자주성이 인정되었다든가 또 는 고구려와 백제가 상호 적대관계에 있는 남북조 왕조 모두에게 조공 책봉관계를 맺었다든가 하는 현상은 77 모두 3세기 이전부터 확인되는 것들이었다. 상대가 전혀 조공으로 의식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상대 에게 보내는 공식문서에서는 대등한 관계로 표현된 외교가 조공으로 기록되는 등 존재하지 않은 조공관계의 날조도 불사했다는 사실은 4 세기 이후만이 아니라 78 3세기 이전에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시 공간을 초월해 확인되는 보편적 현상인 조공 책봉이라는 개념으로 동 아시아 국제질서를 논하는 것은 그다지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77 김창석(2009), 한일학계의 고대 한중관계사 연구동향과 과제, 한중일 학계 의 한중관계사 연구와 쟁점, 동북아역사재단 ; 여호규(2006), 고구려와 모 용연의 조공 책봉관계 연구, 한국 고대국가와 중국왕조의 조공책봉관계, 고구려연구재단 ; 노태돈(2006), 고구려와 북위 간의 조공 책봉관계에 대한 연구, 여호규 외, 한국 고대국가와 중국왕조의 조공책봉관계, 고구려연구재단 등 참조. 78 李 成 珪 (2005), 앞의 글, 103쪽. 5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55 Ⅳ.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중층적 구조 조공 책봉이 시공간을 불문하고 확인되는 보편적 정치행위라는 사 실은 그동안 조공책봉을 근거로 동아시아세계를 하나의 질서로 이해해 왔던 경향이 잘못되었음을 말해준다. 적어도 문화적 공통성도 찾을 수 없고 또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본격적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했 던 3세기 이전이라면, 그동안 선험적으로 설정해 왔던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재고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범위와 구 조에 대해 살펴보자. 동아시아세계의 범위는 논자가 설정하는 기준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니시지마 사다오는 고대 동아시아세계의 범위 를 중국과 그 주변의 조선, 일본, 베트남으로 제한하고 이들 지역에 한자와 유교, 불교, 율령제 등 문화적 요소를 공유하게 된 것이 중국 중심의 책봉체제에 의한 결과라고 보았다. 79 호리 토시카즈[ 堀 敏 一 ]는 유목사회의 낮은 생산력으로 인해 주변 문명세계에 대한 군사적 침탈 이나 평화적 교역이 불가피했던 만큼 북방유목민과의 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80 김한규는 세계 를 사람들이 정치 사회 경 제 문화적으로 서로 유기적 관련성을 가지면서 살아가는 범주로 이해 하면서, 동아시아세계의 공간적 범위에 몽골과 티베트를 포함시키고 있다. 81 니시지마 사다오의 경우 문화적 공통성을 기준으로 하여 세계 79 西 島 定 生 (1962), 앞의 글 참조. 80 堀 敏 一 (1994), 古 代 東 アジア 世 界 の 基 本 構 造, 堀 敏 一 著, 律 令 制 と 東 アジア 世 界, 汲 古 書 院. 81 金 翰 奎 (2000), 고대 동아시아세계질서의 구조적 특성, 서강대학교 동양사연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55

56 를 규정했다면, 호리 토시카즈와 김한규는 인적 교류를 기준으로 삼 았다. 만약 물적 교류를 기준으로 삼게 된다면, 동아시아세계의 범위 는 훨씬 넓어질 수밖에 없다. 청동기 등의 금속과 마차 등 상당한 문 화 요소가 서방에서 전래되어 왔을 가능성도 있지만, 전한 중기 장건 의 서역 여행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개척된 실크로드를 통해 동방과 서방의 수많은 물건들이 오고 갔다. 이러한 물적 교류를 가능하게 한 상인들의 활동과 그 영향력을 염두에 둔다면, 동아시아세계는 몽골과 티베트를 넘어 중앙아시아로 확대된다. 또 실질적인 교류가 없어도 간 접적인 정보를 통해 넓은 세계를 인식할 수 있었다. 여러 곳을 돌아다 니는 상인들에 의한 전언 혹은 사신들에 의해 자신들과는 정치적으로 나 문화적 경제적으로 상관이 없는 곳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 며, 이러한 정보가 외교적으로 일정한 기능을 할 수도 있었다. 이 글에서는 국제질서라는 주제에 맞추기 위해 기본적으로 정치외 교적 관계를 기준으로 삼겠다. 외교적 관계는 두 국가 사이에 성립되 지만, 두 국가 사이의 외교관계는 다시 인접 국가와의 관계에 의해 크 게 좌우된다. 문화적 습속, 생태적 환경 그리고 교통과 정보의 제약 등으로 말미암아 국제질서는 인접한 지역으로 국한될 수밖에 없으므 로 특정 국가와 그 주변의 여러 나라들 사이의 외교관계가 일차적인 국제질서의 범위가 된다. 그러나 지리적으로는 근접해 있지 않아도 외 교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상황도 적지 않다. 가령 중국과 같이 상대 국가가 여러 개의 지역 국제질서에 동시에 연계되어 있다면 결과 적으로 자신도 커다란 국제질서의 흐름 속에 포함된다. 따라서 동아시 아세계의 범위는 동아시아에 존재했던 복수의 국제질서를 모두 포괄 구실 편, 동아시아 역사의 환류, 지식산업사, 9~10쪽. 5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57 하는 범위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범위의 동아시아세계가 단일한 질서에 편입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복수의 국제질서가 각기 다른 차원에서 별도로 운영되었 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기존의 동아시아세계를 배경으로 한 페어 뱅크의 조공체제론이나 니시지마 사다오의 책봉체제론은 모두 중국 중심의 사고라는 점에서 비판을 받아 왔는데 82 그 주요한 이유는 일원 적인 국제질서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 지구적 성격을 띠는 현 대의 국제질서와는 달리 전 근대 사회에서는 모든 나라를 관통하는 단일한 국제질서가 존재하지 않았다.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국제질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물론 중국을 중심으로 한 국 제질서가 가장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지만, 그렇다고 중국과 국제관 계를 맺고 있는 주변 국가가 하나의 체계 속에 편입되어 주변 국가들 끼리 상호 위치가 결정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4세기 이후 중국으로부 터 받은 책봉 관작은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모두 의미가 없었다. 83 조공 책봉관계는 그 시점에서 양 당사자의 정치적 상하질서를 확인하 는 작업이다. 따라서 중국과의 조공 책봉관계를 맺었다고 해서 오로 지 중국이 설정한 천하 질서 속에 일방적으로 편입되었던 것은 아니 다. 다시 말해 주변 국가는 중국의 국제관계와는 별도로 자신의 국제 질서를 유지할 수 있으며, 이러한 기초 위에서 중국과 단독으로 외교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전 근대 사회의 동아시아세계는 이렇게 형성 된 복수의 국제질서가 중층적으로 교집합을 이루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3세기 이전 이 정도의 범위를 갖는 동아시아에 과연 어 82 이익주(2008), 고려-몽골 관계사 연구 시각의 재검토, 박원호 등, 새로운 한중 관계사의 구축에 필요한 시각 (내부자료 연구-3), 동북아역사재단, 50~51쪽. 83 李 成 珪 (1996), 앞의 글 참조.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57

58 떤 국제질서가 있었던 것일까? 이미 3장 3절에서 주변의 국가들이 자 기 중심의 천하질서를 갖고 조공 책봉 형식을 시행했을 것임을 추정했 지만, 여기서는 동아시아 전체를 염두에 두고 지역별 국제질서가 어 떻게 구성되었는지 소묘해 보도록 하자. 편의상 한대를 중심으로 살 펴보겠다. 먼저 흉노를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의 범위를 보면 남쪽으로 한, 동 쪽으로 오환과 선비, 북쪽으로 정령, 서쪽으로 오손 및 서역 여러 나 라로 이어지는 국제질서가 확인된다. 그 가장 주요한 대상은 한이었 다. 유목민이 필요한 곡물 및 각종 물품을 구득하기에 가장 적절한 곳이기 때문이다. 한은 지리적으로도 인접해 있으며 3세기 이전 다른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선진적 문명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흉노는 한 외에도 같은 유목지대에서 성장한 다른 인접 국가들과 끊임없이 접촉하였다. 한 문제가 즉위하고 난 뒤 선우가 한에게 보낸 편지에는 누란( 樓 蘭 ), 오손( 烏 孫 ), 호게( 呼 揭 ) 및 그 주변의 26개 나라가 모두 흉노에 귀속하여 인궁지민( 引 弓 之 民 )을 모두 아우르는 일가( 一 家 )를 이 루었다 고 명언하고 있듯이, 84 흉노는 만리장성 북쪽의 유목세계에 걸 친 국제질서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제관계는 늘 변하는 것이다. 한과 전쟁을 치루면서 흉노는 점차 약해졌고 거기에 내분이 겹쳐지자 주변의 오환과 정령, 오손은 기회를 틈타 흉노를 공격하는 등 기존질 서가 크게 바뀌었다. 한편 한으로부터 물자 구득이 어려워지면서 서 역 오아시스 정주민들은 흉노가 필요로 하는 농산품과 생산품의 주요 원천이 되었다. 85 한은 다시 흉노를 제압하기 위해 서역 여러 나라와 84 漢 書 卷 94, 匈 奴 列 傳, 3757쪽, 樓 蘭 烏 孫 呼 揭 及 其 旁 二 十 六 國 皆 已 爲 匈 奴. 諸 引 弓 之 民 幷 爲 一 家. 85 Nicola Di Cosmo(2002), Ancient China and its enemies : The Rise of 5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59 외교적 관계를 맺으면서 우위를 차지해 갔다. 남월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의 범위는 비록 한 무제시기 군현을 설치하기 이전까지이지만, 북쪽으로는 한 특히 장사국( 長 沙 國 ), 동쪽으 로는 민월과 동월, 서쪽으로는 창오( 蒼 梧 )와 야랑을 포함한다. 제호( 帝 號 )를 사용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86 남월은 이 질서의 중심에 서서 조공 책봉을 실시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곳에서도 한으로부터의 경 제적 물자의 취득이 중요한 변수였지만, 민월에 대한 군사적 제압을 위해 한의 도움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으로 사신을 보낼 때에 만 칭왕을 할 뿐 여전히 제호를 사용했다는 것은 남월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가 유지된 상태에서 한과의 외교관계가 지속될 수 있었음을 말해준다. 남월 중심의 국제질서에 귀속되어 있었던 야랑도 87 그 휘하에 동성 ( 同 姓 )인 구정왕( 鉤 町 王 ), 누와후( 漏 臥 侯 )가 있었다. 한의 사자( 使 者 )에 게 자신의 강역과 어느 쪽이 큰지 비교해 보았을 만큼 일정한 세력을 갖고 있었던 야랑왕은 다시 남월에 신속하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 리고 남월이 한에 의해 멸망하자 다시 한에 입조( 入 朝 )했다. 자기중심 의 지배질서를 갖고 있는 세력이 그 질서를 유지하면서 강대국에 신속 하는 방식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자국의 국제질서가 한의 지배질서와 동시에 양립했다는 사실은 남 쪽 세계에 그치지 않는다. 서역 여러 나라와 한의 관계는 한이 상당 Nomadic Power in East Asian History, Cambridge University [이재정 역 (2005), 오랑캐의 탄생, 황금가지, 326쪽]. 86 漢 書 卷 95, 西 南 夷 兩 粤 朝 鮮 傳, 3853쪽, 然 其 居 國, 竊 如 故 號, 其 使 天 子, 稱 王 朝 命 如 諸 侯. 87 漢 書 卷 95, 西 南 夷 兩 粤 朝 鮮 傳, 3841쪽, 夜 郞 侯 始 倚 南 粤.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59

60 한 거리가 떨어져 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로운 외교 관계가 전개되었 다. 그들은 상당한 경제적 이익이 보장되지 않으면 외교 관계를 중단 하기도 했다. 반면 서역 여러 나라 중 비교적 지리적으로 한에 가까 운 곳은 흉노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한과 흉노 양편에 걸친 외교 전 략을 폈다. 누란( 樓 蘭 )의 예를 들면 아들 한 명은 흉노에 인질로 보내 고, 또 한 명은 한에 인질로 보냈다. 88 오손의 경우도 한과 흉노 사이 에서 등거리 외교를 적절히 운용한 사례에 속한다. 한편 서역 여러 나 라 사이에도 복잡한 신속( 臣 屬 )관계가 있었다. 강거( 康 居 )와 소해( 蘇 韰 ) 가 신속관계에 있었고, 또 우미( 杅 彌 )가 구자( 龜 玆 )에 태자를 인질로 보냈던 것은 이러한 국제관계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기본적으로 자국 의 이해관계에 기초해 국제질서가 구성되었지만 한과 흉노라는 두 강 대국이 포함되면서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89 이상과 같이 주변 국가는 자기중심의 국제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으 며, 한 무제의 본격적인 대외팽창 이후 일부는 대등한 상태로, 일부 는 신속 관계로 한과의 외교 관계를 맺게 되었다. 각각의 국제질서는 상이한 구성원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국제관계 또한 개별적 특징을 갖기 마련이었다. 무력( 兵 威 )과 재물( 財 賂 )을 동원하여 상대방 을 복속시키려 했던 것은 공통적이지만, 각 지역별로 특수한 생태적 환경, 경제적 조건에 따라 별도의 질서가 형성되었다. 이처럼 한과의 외교적 관계가 곧 한의 천하질서로의 편입을 의미하 88 漢 書 卷 96, 西 域 傳, 3877쪽, 上 詔 文 便 道 引 兵 捕 樓 蘭 王. 將 詣 闕, 簿 責 王, 對 曰, 小 國 在 大 國 間, 不 兩 屬 無 以 自 安. 願 徙 國 入 居 漢 地. 上 直 其 言, 遣 歸 國, 亦 因 使 候 司 匈 奴. 匈 奴 自 是 不 甚 親 信 樓 蘭. 89 가령 龜 玆 가 자국의 국제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杅 彌 의 태자로서 漢 의 교위장 군 자격으로 와 있던 賴 丹 을 살해했던 것도 이러한 사례에 속한다. 6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61 는 것은 아니며, 얼마든지 복수의 국제질서가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 나 한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의 존재가 기본적으로 가장 넓은 범위 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흉노를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 남월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 서역과 남이를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 등 대다수 국제질서가 모두 연계되어 있다. 남아있는 자 료가 대부분 중국 자료라는 한계도 있겠지만, 가장 넓은 지역에 걸쳐 영향을 미쳤던 것도 사실이다. 여러 개의 질서가 중국을 중심으로 연 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주의해야 할 점은 이 질서가 항상 하나의 시스템으로 연결되어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별개의 국제질서 단위로 그 지역질서만의 핵심적 문제를 둘러싸고 진행되는 것이다. 다만 중국 이 다른 질서와 연결되어 있음으로 인해 간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 게 되는 것이다. Ⅴ. 동아시아세계 속의 한중관계 맺음말을 대신하여 조공 책봉체제는 동아시아세계의 국제질서를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 으로 제시된 이래 그 타당성 여부가 그동안 줄곧 논의되어 왔다. 이 글은 3세기 이전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나타나는 조공 책봉관계를 추적하여 그 근본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3세기 이전에 보이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61

62 는 조공 책봉은 자국의 왕이 천하의 중심에 위치하며 그 권위가 대내 외적으로 널리 미치고 있음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외국으로부터 가능 한 많은 사절이 공물을 바치며 입조하도록 하여 그 상하관계를 대내 외에 인식시키려고 하는 보편적 정치 행위라고 보았다. 이러한 결론은 4세기 이후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조공 책봉이란 시 공간을 초월해 확인되는 보편적 현상으로서 자국의 정치적 역량과 경 제적 조건에 따라 임의적으로 변동하며 따라서 관련 기록도 매우 자 의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조공 책봉이라는 용어는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논하기에 유효한 개념이 되기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그렇다면 3세기 이전 동아시아 질서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야 하 는 바, 우선 동아시아세계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국제질서 가 아니라 다수의 지역 국제질서가 중층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 각 지역질서는 지리적으로 인접한 국가를 주요 구성원 으로 하며, 그 지역의 자연생태적 환경 정치 경제 등 특수한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다만 넓은 영역을 차지하면서 동시에 지리적으 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던 중국을 매개로 다수의 지역질서가 연결 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지역질서 사이에 간접적 영향을 주고받게 되 는 것뿐이다. 따라서 3세기 이전 한중관계도 동아시아세계가 중국 중심의 일원적 국제질서가 아니라 복수의 지역 국제질서로 구성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사실 선진시기까지 한반도는 중국 중원의 정치질서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한반도 주변의 여러 세력이 중국과 적극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은 한사군( 漢 四 郡 )이 설치되면서부터이다. 한 무제가 고조선과의 전쟁을 일으킨 시점이 무제 원봉( 元 封 ) 2년(기원전 109)이라 는 점이 중요하다. 한 무제는 원봉 원년(기원전 110) 겨울에 남월과 동 6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63 월이 모두 평정 되자, 그해 여름 태산( 泰 山 )에 올라 제사를 행하고 연 호를 원봉으로 바꾸었다. 그가 태산에 세운 각석에는 사수지내( 四 守 之 內 ), 막불위군현( 莫 不 爲 郡 縣 ), 사이팔만( 四 夷 八 蠻 ), 함래공직( 咸 來 貢 職 ) 이라고 쓰여 있었다. 90 천하가 이미 모두 복속했다는 자신감이 봉선 제사에 드러난 것이다. 원봉 2년(기원전 109) 봄에 시작된 고조선에 대 한 정벌은 바로 이 시점, 즉 흉노와 남월, 동월에 대한 모든 공략이 마무리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봉선 제사가 치러진 이후였다. 91 바꾸 어 말하자면 한 무제가 완성했다고 자부한 천하의 세계에 고조선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고조선은 그때까지 중국과는 별도의 지역 국제질서에 속해 있었다는 뜻이다. 한편 전국시대부터 연( 燕 )과 제( 齊 )와 경제적 교역을 시작했고, 연과 제의 정치적 대립 과정 중 연을 배후에서 견제할 정치세력으로 인식되 었을 가능성도 크다. 92 또 한 초 이래 요동군( 遼 東 郡 )과 외신( 外 臣 ) 의 약속을 맺기도 했다. 93 다만 연 제 혹은 요동군을 곧바로 중국 전체 혹은 중앙정부와 등치해서는 안 된다. 변경지역은 얼마든지 중앙과 관 계없이 주변 세력과의 교역이나 정치적 약속이 가능하다. 고조선을 중심으로 한 지역질서의 범위에는 중국 전체가 아니라 연과 제를 중심 으로 한 중국의 변경 지역만이 포함되어야 하며 여기에 고조선이 무 90 漢 書 卷 6, 武 帝 紀 注 引 應 劭 曰, 191쪽에는 四 守 之 內, 莫 不 爲 郡 縣, 四 夷 八 蠻, 咸 來 貢 職 으로 되어 있는 반면 後 漢 書, 志 7, 祭 祀 志 上 注 引 風 俗 通 曰, 3163쪽에는 四 海 之 內, 莫 不 爲 郡 縣, 四 夷 八 蠻, 咸 來 貢 職 으로 되어 있 다. 91 金 秉 駿 (2008), 漢 이 구성한 고조선 멸망 과정 - 사기 조선열전의 재검토, 한국고대사연구 50, 서경문화사. 92 李 成 珪 (2003), 고대 중국인이 본 한민족의 원류, 한국사시민강좌 32, 일조각. 93 史 記 卷 130, 太 史 公 自 序, 3317쪽, 燕 丹 散 亂 遼 閒, 滿 收 其 亡 民, 厥 聚 海 東, 以 集 眞 藩, 葆 塞 爲 外 臣.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63

64 력과 재물을 바탕으로 복속시킨 그 주변의 진번( 眞 番 ), 임둔( 臨 屯 )과 새외만이( 塞 外 蠻 夷 )가 추가되어야 한다. 서북쪽으로는 흉노와의 관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흉노와의 관계 를 뒷받침하는 증거로써는 낙랑군 설치 이전부터 한반도 서북부에서 각종 북방문물의 요소가 발견되었다는 것 그리고 한서( 漢 書 ) 위현전 ( 韋 玄 傳 ) 에 한사군을 공격하여 군현을 설치했던 것을 흉노의 왼쪽 팔 을 자르는 효과로 비유한 기록을 94 들 수 있다. 위만조선( 衛 滿 朝 鮮 )이 주변의 소국을 재물과 병위( 兵 威 )로서 규합했다는 기록에 95 비추어 보 면 위만조선이 상당한 세력으로 성장했음에는 이견이 없고, 또 이 과 정에서 당연히 주변 지역과 문물교류가 이루어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위현전 을 근거로 흉노와의 군사적 혹은 외교적 연합을 추정하 기에는 96 무리가 많다. 위현전 의 기록은 이미 한사군이 설치된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전한 말기에 그보다 오래전인 무제시기 흉노와의 관계를 총괄적으로 회고하며 묘사하는 서사 방식이기 때문이다. 언급 된 역사적 사실도 그 시간적 순서가 맞지 않는다. 삭방군( 朔 方 郡 )을 설치한 시점( 元 朔 2년, 기원전 127)이 혼야왕( 渾 邪 王 )의 항복( 元 狩 2년, 기원전 121)보다 빠르다고 잘못 기록되어 있다. 하서사군( 河 西 四 郡 )의 경우는 한서 무제기( 武 帝 紀 ) 와 지리지( 地 理 志 ) 사이에 연대 모순이 94 漢 書 卷 73, 韋 玄 傳, 3126쪽, 孝 武 皇 帝 愍 中 國 罷 勞 無 安 寧 之 時, 乃 遣 大 將 軍, 驃 騎, 伏 波, 樓 船 之 屬, 南 滅 百 粤, 起 七 郡. 北 攘 匈 奴, 降 昆 邪 十 萬 之 衆, 置 五 屬 國, 起 朔 方, 以 奪 其 肥 饒 之 地 ; 東 伐 朝 鮮, 起 玄 菟, 樂 浪, 以 斷 匈 奴 之 左 臂. 西 伐 大 宛, 竝 三 十 六 國, 結 烏 孫, 起 敦 煌, 酒 泉, 張 掖, 以 鬲 婼 羌, 裂 匈 奴 之 右 肩. 單 于 孤 特, 遠 遁 于 幕 北. 四 垂 無 事, 斥 地 遠 境, 起 十 餘 郡. 功 業 既 定, 乃 封 丞 相 爲 富 民 侯, 以 大 安 天 下, 富 實 百 姓, 其 規 橅 可 見. 95 史 記 卷 115, 朝 鮮 列 傳, 2986쪽, 以 故 滿 得 以 兵 威 財 物 侵 降 其 旁 小 邑, 眞 番, 臨 屯 皆 來 服 屬, 方 數 千 里. 96 權 五 重 (1992), 樂 浪 郡 硏 究, 一 潮 閣, 26~30쪽. 6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65 있지만 대부분의 연구자는 태초( 太 初 ) 연간으로 비정한 지리지의 연대 가 잘못되었다고 보고 있는데 97 그렇다면 돈황 주천 장액군의 설치를 대완( 大 宛 ) 정벌에(태초 원년, 기원전 104) 이은 서역 지배가 완료된 이 후로 보고 있는 위현전 의 내용 역시 잘못된 것이다. 또 흉노의 동 쪽 편에는 오환이 더 강력한 세력으로 흉노와 대결하고 있었으며 흉노 와 조선과의 관계는 이곳을 제외하고는 논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조선을 흉노의 왼팔로 규정한 것은 결과적으로 조선 지역에 한 의 군현이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서쪽에는 하서사군이 설치되고 동쪽 에는 한사군이 설치되어 있던 전한 말기의 상황 속에서 무제시기를 해석 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흉노와 조선 사이에 일정한 교역과 외교 관계가 존재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인정되나 한의 고조선 침공의 목적 을 잠재적 위협 세력의 제거라고까지 과장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사군이 설치되기 이전 중국 변경과의 교류는 외신( 外 臣 ) 관계로 일컬어져 왔다. 그러나 그 근거가 되는 사기 의 서사방식을 보면, 조 선이 한 이전에도 중국에 신속되어 있었고 한 이후 지속적으로 외신 의 의무를 지켜야만 했다고 되어 있으나 98 이 기록은 그대로 신뢰할 수 없다. 사기 의 기타 외국열전과 비교할 경우 이 기록은 고조선을 멸망하고 그 당위성을 확보하려는 사마천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라고 판단된다. 99 또한 그동안 위만조선을 한의 외신으로 규정하고 외신제가 전한 초기의 특수한 국제질서의 전형으로 이해해 왔었지만, 이것도 외 97 周 振 鶴 (1987), 西 漢 政 區 地 理, 北 京 : 人 民 出 版 社, 157~168쪽. 98 史 記 卷 115, 朝 鮮 列 傳, 2986쪽, 遼 東 太 守 卽 約 滿 爲 外 臣, 保 塞 外 蠻 夷, 無 使 盜 邊. 蠻 夷 君 長 欲 入 見 天 子, 勿 得 禁 止. 99 李 成 珪 (2004), 中 國 古 文 獻 에 나타난 東 北 觀, 동북아시아 선사 및 고대사 연구의 방향, 학연문화사, 30쪽; 金 秉 駿 (2008), 앞의 글 참조. 3세기 이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65

66 신제를 한반도 외의 동아시아세계의 다른 지역과 함께 고려하지 않았 던 결과이며, 근본적으로는 중국의 천하인식의 이념형과 현실태를 혼 돈하여 서술했던 사서의 서술방식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한대 출토 간독자료에 나오는 외신 용례를 검토하면 이는 국경 바깥에 존재하는 정치세력을 일컫는 단순한 용어일 뿐임을 알 수 있다. 사기 의 서사 방식이 조선과 남월 동월 등에 대한 전쟁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이해한다면, 이 기록에 근거해 외신을 전한 초기의 특수 한 국제질서의 전형으로 보기 어렵다. 따라서 필자는 외신을 근거로 고조선이 이미 중국적 세계질서 속에 편입된 것으로 보는 것에 동의하 지 않는다. 한편 고조선의 외신이라는 지위가 요동태수와 약속( 約 束 ) 을 한 것이라는 사실에 주의해야 하는데, 이 점은 고조선이 한 무제 의 천하 세계에서 벗어나 있으면서 동시에 연 제 지역과 지역 질서를 유지했음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요컨대 한사군 이전 고조선과 한의 관계는 고조선과 연 제 지역 그리고 흉노와 진번 임둔 및 새외 만이를 포함하는 지역 국제질서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한편 고조선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한은 전쟁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고조선이 외신의 의무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음을 구실로 삼았 다. 그 의무란 고조선 주변의 여러 만이( 蠻 夷 ) 군장( 君 長 )들이 천자( 天 子 )를 입견( 入 見 )하지 못하도록 막지 말 것이었는데, 이것이 곧 조공 책봉을 통해 황제의 권위와 덕을 대내외에 드러내 보이려는 한의 보편 적 국제질서 구축방식이었다. 조공 책봉이 서주 이래 주변국가에 실시 해 왔던 보편적 외교 형식이었던 것이라면, 이때 비로소 한이 한반도 주변에 본격적으로 한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를 적용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고조선의 멸망과 함께 한중관계사의 새로운 장이 시 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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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김창석 강원대학교 I. 머리말 II. 고대 동아시아 의 개념과 범위 III. 6~8세기 한중관계의 명분과 실제 IV. 맺음말

71 I. 머리말 고대( 古 代 ) 한중관계사에 대한 연구 역사는 짧다고 할 수 없다. 다 양한 주제에 대한 고찰을 통해 한중관계의 성격과 변천 과정에 대한 입체적 이해가 가능해졌고, 삼국시기 말( 末 )~남북국시기( 南 北 國 時 期 )에 해당하는 6~8세기에 대한 연구도 예외가 아니다. 필자는 최근에 1910년대 이후 한일 학계에서 이루어진 고대 한중관 계사에 대한 연구성과를 시기ㆍ주제별로 정리하는 기회를 가진 바 있 다. 1 연구의 대략적인 경향을 살펴보면서, 이를 한 차원 심화시켜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왜냐하면 이전의 연구 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그 결론도 각이한 듯하지만, 그 접근 시각 의 차원에서 보면 공통의 기반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 문이다. 연구 경향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인식의 틀이 존재한다고 생각 한다. 이를 대별하여 제시하고 그 한계를 지적해 보려는 것이 이 글을 구상하게 된 첫 번째 문제의식이다. 지난 글에서 주제에 따라 쟁점을 검토한 후 향후 과제로서 몇 가지 문제들을 제기했다. 그것은 고대의 한중관계를 고정된 것으로 보지 말 고 변화의 관점에서 파악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과 중국이라는 두 나라의 관계로만 한정짓지 말고, 양국이 교섭하던 국가 혹은 종족 들을 포괄하는 광역( 廣 域 )의 국제관계 속에서 한중관계를 조망하고 또 1 김창석(2009a), 한일학계의 고대 한중관계사 연구동향과 과제, 한중일 학 계의 한중관계사 연구와 쟁점, 동북아역사재단.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71

72 비교하는 관점을 가져야 비로소 객관적이고 입체적인 이해가 가능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에 대한 해답을 당장 제시할 수는 없지만, 이러 한 문제 제기를 이 글에서 한 단계 발전시키고 구체화해 보려고 한다. 즉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선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이고, 어떤 방법과 자 료를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우선 고대 한중관계를 검토할 때 고려할 수밖에 없는 니시지마 사 다오[ 西 嶋 定 生 ]의 동아시아세계론(책봉체제론)의 성과와 한계에 대해 살 펴볼 것이다. 이를 기초로 하여 고대 동아시아 의 범위를 생각해 보고 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에서 6~8세기의 한중관계를 어떻게 이해 해야 할지에 대해서 그간의 연구 성과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이 시 기 한중관계의 변화와 그 의의에 대한 견해를 제시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특정 시기의 역사적 상황을 거론할 수밖에 없을 듯한데, 이는 필자가 구상하는 역사상이 어느 정도 현실성이 있는지를 가늠해 보기 위해서 활용한 소재에 불과하다. 이러한 이유로 자료에 대해 본격 적으로 검토하지 못하고, 한중관계의 실상에 대한 고찰도 면밀하게 이루 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이들에 대한 전면적인 연구를 통해 한 중관계의 역사상을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7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73 II. 고대 동아시아 의 개념과 범위 1. 책봉체제론의 성과와 한계 구조화된 국제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형성된 독자적인 지역 세계로 서 동아시아세계 를 처음으로 제시한 것은 니시지마 사다오[西嶋定生] 였다.2 그는 중국ㆍ한국ㆍ일본ㆍ베트남은 전근대 시기에 하나의 국제정치권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책봉(冊封)ㆍ조공(朝貢)관계를 통해 성립한 책봉질서 가 그 기반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니시지마 사다오의 동아시아세계론 의 핵심에는 책봉체제론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책봉체제론의 중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동아시아는 전근대 역사세계의 일원으로서 자기완결성을 갖고 있었고 자기완결적 구조의 중심에는 중국 문명이 있었다. 둘째, 동아시아세계는 중국ㆍ한국ㆍ일 본ㆍ베트남으로 구성되며, 한자문화(漢字文化)ㆍ유교(儒敎)ㆍ율령제(律令 制)ㆍ한역불교(漢譯佛敎)를 공유한 것이 그 지표이다. 셋째, 이러한 문 화적 공통성은 문화가 독자적으로 운동한 결과가 아니라 중국 왕조의 정치적(政治的)인 지배(支配)와 규제(規制)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나타난 2 西嶋定生(1962), 六-八世紀の東アジア, 岩波講座 日本歷史2 古代2, 岩波書 店. 수년 뒤에 페어뱅크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중국사 학자들이 중국적 세계 질서 와 조공 시스템 을 제시했다[ John K. Fairbank ed.(1968), The Chinese World Order : Traditional China s Foreign Relations, Cambridge : Harvard University Press].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73

74 현상이다. 넷째, 한대( 漢 代 )에 군국제( 郡 國 制 )를 실시하면서 주변 정치 체의 수장들에게 작위( 爵 位 )를 수여했고, 이로써 이종족( 異 種 族 ) 국가 들까지 중국 왕조의 정치체제 안으로 포섭되는 형태의 동아시아세계가 출현했다. 다섯째, 책봉체제에 의해 동아시아세계는 정치적 세계로 완 성되었고, 여기에 편입된 국가는 중국 왕조와 관련하에서 자신들의 역사를 전개해 나갔다. 여섯째, 동아시아세계는 남송( 南 宋 )ㆍ원대( 元 代 )에 일시적으로 동요하지만 청대( 淸 代 )까지 기본 질서가 유지되며, 19세기 서구 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석권하면서 마침내 붕괴한다. 3 니시지마 사다오는 전근대 시기의 독자적인 역사세계로서 동아시아 를 설정했다. 여기에 속한 국가들이 공유하는 공통의 문화요소를 추 출한 것도 일국사( 一 國 史 )의 한계를 벗어나 비교사( 比 較 史 )의 관점을 환 기시킨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가 크다. 그리고 이러한 공통의 문화권이 형성된 배경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책봉체제라는 정치적 질서가 자 리 잡고 있는 사실을 지적한 점은 무엇보다 중요한 성과이다. 문화요 소의 확산과 수용을 문화 교류의 결과라는 식으로 피상적이고 애매한 설명으로 처리하지 않고, 국제 정치의 역관계를 통해 파악함으로써 문 화사와 정치사를 통합하여, 그리고 국제적 시야에서 조망할 수 있게 했다. 이에 대해 일찍이 일본 학계에서 니시지마 사다오의 동아시아세계론 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호리 토시카즈[ 堀 敏 一 ]의 견해가 대표적이 다. 그는 책봉관계가 중원왕조가 주변 집단을 통제하기 위해 활용한 책봉ㆍ조공ㆍ기미주( 羈 靡 州 )ㆍ화번공주( 和 蕃 公 主 ) 등의 기미정책 가운데 3 이상은 니시지마 사다오 저, 송완범 역(2008), 일본의 고대사 인식- 동아시아 세계론 과 일본, 역사비평사를 底 本 으로 하여 요약하였다. 7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75 하나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책봉관계만으로 중국과 주변 여러 민족 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고, 니시지마 사다오가 상정한 중국 문화권의 형성도 책봉에만 기초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4 예컨대 중 국의 서방( 西 方 )과 북방( 北 方 )에 있던 종족들이 책봉관계를 맺고 한문 ( 漢 文 )으로 외교문서까지 작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한자 문화가 정 착하지 못한 사례를 들었다. 그들의 생활경제가 농경이 아닌 유목( 遊 牧 )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 5 이라고 보았다. 책봉관계는 동아시아 문화 권 형성의 한 계기일 뿐이고, 중국 문화가 정착하는 배경 모두를 설명 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비록 호리 토시카즈가 니시지마 사다오와 는 달리 북아시아 유목종족과 중국의 관계를 중시했지만, 책봉질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책봉체제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 는 입장에 서 있었다. 이들의 입론( 立 論 )은 일본 고대국가( 古 代 國 家 )의 성립에서 국제적 동 인( 動 因 )을 찾아보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니시지마 사다 오를 중심으로 하여 제기된 동아시아세계론은 한국사 연구자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으리라고 생각된다. 한국 고대 문화의 독자성 을 강조하고, 중국 세력과의 투쟁을 강조하여 고대국가의 성립을 설명 하던 방식 6 을 보정( 補 正 )하여, 중국 측의 영향력까지 포함하여 균형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 연구에서 책봉체제론에 주목하여 이를 수용하거나 반대로 적극 비 판한 논고는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안고 있는 중국중심주의( 中 國 中 心 4 堀 敏 一 (1963), 近 代 以 前 の 東 アジア 世 界, 歷 史 學 硏 究 堀 敏 一 (1979), 隋 代 東 アジアの 國 際 關 係, 隋 唐 帝 國 と 東 アジア 世 界, 汲 古 書 院. 6 金 哲 埈 (1964), 韓 國 古 代 國 家 發 達 史, 韓 國 民 族 文 化 史 大 系 Ⅰ, 高 大 民 族 文 化 硏 究 所 가 이러한 경향을 보이는 대표적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75

76 主 義 )의 한계와 문제점을 직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1970~1990 년대에도 동아시아세계론에 대한 일본 학계의 연구동향을 소개한 것 7 을 제외하고는 주로 고대 한중( 韓 中 ) 왕조 사이에 맺어진 책봉ㆍ조공관 계의 실상과 성격 변화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이루어졌다. 2000년대 들어서 책봉체제론에 대한 논란이 부활하는 양상이다. 근래의 논의는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그간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하 여 니시지마 사다오의 주장을 실증적으로 반박하려는 특징을 보인다. 이성시( 李 成 市 )는 신라와 왜의 사례에 주목하여, 중국과 관계없이 한자 문화와 율령( 律 令 )을 수용하였고 정치의 도구로서 한자 문화와 율령체 제가 정착되었다고 보았다. 즉 주변 종족과 중국과의 정치관계가 단속 적( 斷 續 的 )이었으므로, 주변 제국( 諸 國 )들 사이의 교섭ㆍ상호관계를 중 시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또 예족( 濊 族 )처럼 자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 문화를 수용하면서도 전통에 맞게 변형하여 차이를 만들어 내는 측면도 중시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역시 1950~1960년대 의 일본이 처한 상황에서 동아시아세계론을 제기한 니시지마 사다오의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공감을 표하고 있다. 8 이성시가 중국 중심의 책봉체제에 의거하지 않고, 고구려-신라-왜로 이어지는 문화 전파의 경로를 제시한 점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문화 의 원류( 源 流 )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중국으로 연결되므로 니시 지마 사다오의 동아시아세계론의 구조와 근본적으로 다른 역사상( 歷 史 像 )이라고 평가하기 어렵다. 중국 문화가 주변으로 확산되는 중간 경 7 金 漢 植 (1979), 日 本 에 있어서 東 아시아 世 界 硏 究 의 現 狀 과 課 題, 大 丘 史 學 17, 大 丘 史 學 會 ; 金 裕 哲 (1987), 日 本 學 界 의 東 아시아 世 界 論 에 대한 비 판적 검토, 社 會 科 學 硏 究 5, 慶 尙 大 學 校 社 會 科 學 硏 所. 8 李 成 市 (2000), 東 アジア 文 化 圈 の 形 成, 山 川 出 版 社. 7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77 로로서 하위 유형의 하나를 제시했다고 생각된다. 더욱이 책봉체제론은 이미 소책봉체제(小冊封體制)를 논리구조 속에 포괄하고 있었다.9 국내 학계에서는 이성규(李成珪)가 중화사상과 중화제국의 이념을 분석하여, 중국 개념이 지리적ㆍ종족적ㆍ문화적 차원의 다층적 범주로 구성되었으며, 그 내부 구조도 중원(中原) 왕조 영역의 신축(伸縮)에 따 라 변화했음을 밝혔다. 특히 군현(郡縣) 지배와 기미주 설치, 책봉관계 의 차례로 이적(夷狄)에 대한 통제의 강도가 약해졌고, 기미 정책과 책봉이 실시된 지역은 실질적으로 중화제국의 외부에 있었다고 보았 다.10 민두기(閔斗基)는 동아시아세계론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전근대의 동아시아는 다양한 소중심 질서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중국 을 비롯하여 한국ㆍ일본ㆍ베트남이 질서의 중심 국가였다고 지적했다.11 여호규는 그간의 연구사를 간략히 정리하면서 책봉체제론의 중국중 심 시각을 비판하였다.12 이런 시각에서는 중국을 제외한 국가들의 외 교역량과 주체적 입장을 도외시할 수밖에 없고, 동아시아세계의 구조 도 동태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특히 한국 학계에서 그간 조공국의 외교 정책과 국제 역관계에 주목해 온 경향을 또 다른 편향 이라고 비판하면서, 책봉ㆍ조공관계는 책봉국의 중심적 위상과 조공국 의 독자성이 상호 인정되는 전제에서 성립한다고 이해한 점은 중요하 다고 생각한다. 박대재도 책봉체제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동아 9 니시지마 사다오 저, 송완범 역(2008), 앞의 책, 94, 176쪽. 10 李成珪(1992), 中華思想과 民族主義, 哲學 37, 韓國哲學會 ; 李成珪(2005), 中華帝國의 팽창과 축소-그 이념과 실제, 歷史學報 186, 歷史學會. 11 閔斗基(2001), 동아시아의 실체와 그 전망- 역사적 접근, 시간과의 경쟁, 연세대학교출판부. 12 여호규(2006a), 6 ~8 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연구의 진전을 기대하며, 역사와 현실 61, 한국역사연구회.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77

78 시아세계론이 한중일 위주로 논의를 전개함으로써 동남아시아를 포괄 하지 못한 점, 수나라 때 책봉을 받지 않은 일본의 경우 책봉질서의 외연 밖에 존재하게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13 니시지마 사다오의 책봉체제론이 고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책 봉ㆍ조공관계라는 제도를 통해 이해하고, 그 기원과 전개 과정을 체계 적으로 제시한 것은 획기적인 성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간 에 제기된 비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 중심의 관점에 서 있기 때 문에 동아시아세계의 범위와 내부구조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 다. 시기에 따라 책봉체제가 동요하기도 하지만 19세기 서세동점( 西 勢 東 漸 )이 본격화하기 전까지는 그 기본구조가 유지된다는 견해도 지나 치게 장기지속의 시각에서 내린 결론이라고 본다. 특히 서기 3~8세기 는 고대 동아시아세계의 국제질서가 형성되어 가는 시기이므로 좀 더 소시기로 세분하여 각 국면을 구체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2. 동아시아 의 범위 먼저 동아시아 개념의 학문적 효용성에 대해 살펴보자. 그간 국내 의 고대사학계가 동아시아세계 혹은 동아시아 문화 등에 대해 일종 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이유 가운데는 동아시아론은 곧 책봉체제론 이고, 이는 곧 중국 중심의 편향적인 역사상이라는 등식이 잠재하고 13 박대재(2007), 고대 동아시아세계론 과 고구려사, 고대 동아시아세계론과 고 구려의 정체성, 동북아역사재단. 7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79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동아시아 개념에 대한 거부감은 책봉체제론에 대한 경계심, 거부감 때문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앞 절에서 검토했듯이 분명히 근거가 있는 우려이다. 그러나 책봉체제론이 제기한 문제의식, 즉 고대국가의 성립과 고대 문화의 형 성을 개별 지역과 종족 단위로 파악해서는 그 특성과 발전의 계기를 종합적ㆍ구조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지적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경우에도 고대국가의 성립과 발전에서 여러 종족과 지역집단 ( 地 域 集 團 )들이 자체 성장을 통해 정치적 사회를 형성하고 문화를 발 전시킨 면과 함께 중원 왕조의 자극과 문물 교류가 큰 영향을 미쳤다. 선비( 鮮 卑 ), 돌궐( 突 厥 ), 왜( 倭 ), 말갈( 靺 鞨 ) 등의 종족이 세운 정치체와 국가들도 한국의 고대국가와 교섭하고 문화 교류를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고조선( 古 朝 鮮 )은 한족 국가들과 서변( 西 邊 )을 접하고 있어서 중국 세력의 정치적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위만( 衛 滿 )이 고조선 문화 는 물론 중국의 그것을 체화한 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한국사상( 韓 國 史 上 ) 최초로 한( 漢 ) 황실로부터 외신( 外 臣 )으로 봉해졌다. 14 그런데 위략 ( 魏 略 ) 에 의하면, 기원전 4세기 무렵 전국시기 연( 燕 )의 제후가 왕( 王 ) 을 칭하자 조선( 朝 鮮 )의 군장도 칭왕( 稱 王 )했다고 한다. 15 이때의 왕호 ( 王 號 )는 물론 주( 周 ) 왕실( 王 室 )로부터 책봉 받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고조선의 통치자가 굳이 중국식 호칭인 왕( 王 ) 을 사용하고자 한 배경 14 史 記 卷 115, 朝 鮮 列 傳 55, 會 孝 惠 高 后 時 天 下 初 定 遼 東 太 守 卽 約 滿 爲 外 臣 保 塞 外 蠻 夷 無 使 盜 邊 諸 蠻 夷 君 長 欲 入 見 天 子 勿 得 禁 止 以 聞 上 許 之. 15 三 國 志 卷 30, 魏 書 30, 烏 丸 鮮 卑 東 夷 傳 30, 韓, 魏 略 曰 昔 箕 子 之 後 朝 鮮 侯 見 周 衰 燕 自 尊 爲 王 欲 東 略 地 朝 鮮 侯 亦 自 稱 爲 王 欲 興 兵 逆 擊 燕 以 尊 周 室 其 大 夫 禮 諫 之 乃 止.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79

80 에는 당시 고조선과 연을 포함한 동방세계에서 군장의 호칭이 국제사 회의 위계를 표시하던 현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기준이 왕 호라는 중국의 제도였으므로 전국시기( 戰 國 時 期 )의 정치질서를 인지하 고 있던 고조선 정부도 왕호를 활용하여 연과 경쟁하려고 한 것이다. 한국 고대사의 초기부터 중국의 정치질서와 제도는 외부의 주요한 변 수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객관적 사실을 고려하더라도 한국 고대사의 전개를 보다 넓 은 시야에서 입체적으로 고찰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영향을 미친 주변 세력들을 포괄하는 역사인식의 공간적 틀이 필요하다고 본다. 물리 적ㆍ지리적 여건이 토대가 된 것은 물론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공간은 역사적( 歷 史 的 ) 범주( 範 疇 )로서의 공간이다. 한국의 고대국가들과 안정 적인 교류를 벌인 세력들을 포괄하는 공간이면서, 역사적으로 그 범위 와 구조가 변동하는 유동적인 세계이다. 이것을 잠정적으로 동아시아 라고 부르고자 한다. 니시지마 사다오의 동아시아세계론 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 차이점을 밝혀두고자 한다. 동아시아세계론은 그 내부에 존재하는 국가들이 관 계를 맺은 데 그치지 않고, 책봉ㆍ조공제도에 의해 구조화 되어 있다 는 점에서 그 자체가 하나의 완결된 세계 로서 상정된다. 그러나 이 글에서 사용하는 동아시아 는 책봉과 같은 예제( 禮 制 )를 매개로 하지 않고 상호 외교 교섭과 문화교류를 통해 직ㆍ간접의 연관을 맺고 있는 국가와 정치체를 포괄할 뿐이다. 따라서 세계 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동아시아의 범위도 이른바 동아시아세계와 다를 수밖에 없다. 일반적인 의미의 동아시아는 지리적 구분에 의하면 다시 중국 대 륙,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일본 열도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동남 아시아는 베트남, 태국,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필리핀, 말레이시 8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81 아, 인도네시아 등으로 구성된다. 대부분의 나라는 우리와 무관한 고 대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다. 다만 베트남은 니시지마 사다오가 동아 시아세계로 편입시킨 나라여서 문제가 된다. 그런데 현재까지 확인된 자료와 연구에 의하는 한 베트남과 한국 고대국가 사이에는 외교관계 나 문화ㆍ경제교류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베트남이 중국과 교섭을 벌 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것이 중원 왕조가 만주ㆍ한반도ㆍ일본 열도를 대상으로 벌인 동방정책과 유기적 연관을 맺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이렇게 한국 고대국가와 베트남, 중원 왕조 삼자 간에 관련성 을 인정할 수 없으므로 한국고대사의 역사적 맥락에서 제기하는 동아 시아 의 범위에서는 제외해야 한다고 본다. 지리적 권역으로는 동아시아에 속하지만 베트남을 여기에 포괄시키 지 않는다는 것은 이 글에서 사용하는 동아시아 개념이 중국을 중심 으로 삼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니시지마 사다오의 책봉체제론에 따르 면 베트남도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고 조공을 했으므로 동아시아세계 의 일원이 된다. 그리고 책봉ㆍ조공은 중원의 지배자가 자신을 정점으 로 하여 계서화( 階 序 化 )한 질서를 제도화 한 것이므로 여기에 포섭된 세력을 대상으로 한 동아시아세계는 중국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베트남사를 보더라도 북부와 남부의 종족이 달랐으며, 남부 베트남은 인도( 印 度 ) 문화의 영향이 컸다. 또 역대 군주가 황제를 자칭 하고 완( 阮 ) 왕조( 王 朝 )가 국호를 대남( 大 南 ) 이라 하여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천명한 것 16 을 책봉체제론의 수직적 구조 속에서는 설명할 수 없다. 16 劉 仁 善 (1987), 中 越 關 係 와 朝 貢 制 度 - 假 像 과 實 像, 歷 史 學 報, 114, 歷 史 學 會 ; 劉 仁 善 (1996), 베트남역사와 중국-정치적ㆍ문화적 관계를 중심으로, 남방문화 2, 남방문화연구회.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81

82 이 글에서 사용하는 동아시아 는 책봉체제론과 달리 그 내부에 중 심( 中 心 )을 설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책봉ㆍ조공제도는 분명히 실재했고 국제관계에 적용되어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지만, 이것은 중국이 이 상적으로 구상한 상하 위계질서를 일방적으로 제정했던 제도라는 데 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따라서 동아시아세계론을 수용하고 책봉체 제의 틀을 통해 당시의 국제관계를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중국 중심의 역사상이 그려질 수밖에 없다. 이를 대신하여 동아시아를 외교 교섭 과 문화교류 그리고 경제교역 등이 이루어지는 하나의 네트워크로서 이해하면 중심과 주변을 설정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동아시아의 중심을 설정하지 않더라도 동아시아를 인식하고 서술하 는 주체의 관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에 관해서는 유의해야 한다. 한 중일의 예만 보면 현재 자국사는 모두 각각의 국가를 기준과 단위로 하여 서술이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각국이 설정하는 동아시아의 범위도 그 나라의 교류 폭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본 다. 한국 고대의 동아시아는 우리의 고대국가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그 범위도 한국의 고대국가가 교류하던 정치체에 국한하여 설정해야 한다. 17 이러한 정치체와 상호 연쇄를 이루면서 국제정세의 연동성을 가진 동아시아라는 역사 공간 속에서 한국 고대국가의 역사 전개를 조망하고자 하는 것이 고대 동아시아 론의 문제의식이 되어야 한다. 동아시아를 이렇게 한국과 관계를 맺은 교류의 권역( 圈 域 )으로 정의 하면 니시지마 사다오가 착안한 동아시아의 문화권( 文 化 圈 )과도 범위 17 그렇다고 해서 이를 기존의 韓 國 對 外 關 係 史 연구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대외관계사가 한국이 전개한 대외교류의 역사를 서술한다면, 동아시아 관점의 한국사는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와 정세의 변동 속에서 한국사를 바라보는 서술 구조를 갖게 된다. 8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83 가 달라진다. 한자ㆍ한역불교ㆍ유교ㆍ율령체제를 특징으로 하는 동아시 아세계는 기껏 네 개 나라에 불과하다. 공통의 문화요소를 지표로 삼 아 권역을 설정하는 것이 유효한 면이 있지만,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은 그 문화요소를 선정한 기준이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 다. 그런데 위의 네 가지 요소는 공교롭게도 모두 중국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고대 중국 자체가 여러 종족과 지역 문화로 구성되어 있었 던 것은 상식에 속하지만, 진(秦)ㆍ한대(漢代)를 거치면서 제국 내의 통 일성이 제고된 것 또한 사실이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고대 문화로서 한자 문화, 유교, 율령 등이 성립ㆍ발전한 것이다. 불교(佛敎)는 인도에 서 기원했지만 중국에 수용될 때는 불경(佛經)이 대부분 한자로 번역 되어 한역불교라는 중국적 외피(外皮)를 쓰게 되었으므로 이 역시 중 국의 종교 문화와 결합된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이러한 중국적 문화요소를 통해서 동아시아를 바라보면 중 국과 주변 세력과의 일대다(一對多) 관계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기 마련 이다. 주변 세력들끼리의 상호관계, 중국을 넘어선 지역에 있는 정치체 와의 원격지 교류가 사상(捨象)된다. 예컨대 같은 한역불교라고 하더라 도 그 수용의 경로는 나라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고구려의 경우 전진 (前秦)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었는데, 전진은 주지하듯이 티베트계인 저족(氐族)이 세운 나라이다. 전진도 서서히 한화 과정을 겪어 이른바 호한체제(胡漢體制)를 이루지만18 서방 유목 종족의 문화가 가미된 이 불교를 과연 중국 문화로만 일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 고대 문화 형성에 있어 위의 네 가지 지표에 뒤지지 않는 의미를 가진 수도작(水 18 朴漢濟(1988), 苻堅政權의 性格-胡漢體制와 統一體制와의 聯關性, 中國中 世胡漢體制硏究, 一潮閣.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83

84 稻作), 우경(牛耕), 양잠(養蠶)과 견직(絹織), 수레, 기마(騎馬) 문화 등 은 분명히 중국을 넘어서는 광역의 범위에서 공통성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을 우회하는 루트를 통해 여러 종족과 정치체로 전래되었 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도 이들을 도외시한 것은 의문이 아닐 수 없 다. 중국적 색채가 강한 위의 네 가지 요소만으로 단일한 문화권을 상정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고 본다. 더욱이 이를 기초로 하여 독자 적인 지역 세계를 추출해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림 1 7세기 중엽 삼국의 교류권 [노태돈(2009),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4쪽] 한국의 고대국가가 직접 교류하거나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주요 한 나라와 정치체로는 중원(中原)ㆍ강남의 한족 왕조, 5호의 유목 왕조, 왜, 거란ㆍ해, 말갈, 돌궐ㆍ유연ㆍ설연타, 토번ㆍ토욕혼, 강국,19 하이(蝦 19 盧泰敦(1989), 高句麗 渤海人과 內陸아시아 住民과의 交涉에 관한 一考察, 大東文化硏究 23,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 재인용]. 8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85 夷 ) 20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가운데 강국은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 트에 왕도가 있었으므로 서아시아에 속하고, 돌궐은 북아시아, 토번은 중앙아시아에 각각 속한다. 따라서 동아시아 는 분명 이들을 포괄하는 명칭으로 부적절하다. 그러나 동아시아를 서아시아에 대비되는 개념으 로 이해하면 강국만이 여기서 제외된다. 그리고 한중일 삼국을 그간 관용적으로 동아시아 삼국으로 불러온 관례도 참고가 된다. 이 삼국 을 중심으로 하고 그 외곽에 거란, 말갈, 해, 돌궐, 토번을 배치하고 예외적인 존재로서 강국을 포함하는 구도로 동아시아 를 설정해 보고 자 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것이며 앞으로 보다 적절한 용어 를 모색할 것이다. 20 Chang-seok Kim(2010), Parhae s Maritime Routes to Japan in the Eighth Century,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23~1, The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85

86 Ⅲ. 6 ~ 8세기 한중관계의 명분과 실제 1. 기왕의 논의의 문제점 고대의 동아시아는 지리적 범위를 넘어선 역사적 범주의 공간이었 다. 여기에 속한 정치체들은 한국 고대국가의 발전은 물론 한중관계의 전개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유목 제국, 연해주ㆍ극동 지역과 서역(西域)의 정치체 등 우리 고대국가들이 상대했던 광역의 정치 체ㆍ문화권까지 시야에 넣고, 이들 세계와 벌인 교류관계와 비교하는 관점에서 한중관계를 접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삼국(三國)은 3 세기 전반에 고구려가 책봉을 받은 이래로 4세기 중 엽 이후가 되면 중국 남북조(南北朝) 정권과 교섭을 벌이면서 책봉관계 를 맺게 된다.21 간헐적으로 중단된 경우도 있었지만 중국 왕조와 전쟁 을 벌일 때조차 책봉과 조공이 유지되는 시기가 많았다. 고대의 한중 관계 특히 외교ㆍ군사적 관계는 책봉ㆍ조공을 떠나서는 논의하기 어려 운 것이다. 종래 고대 한중관계사를 종주와 번속의 관계로 이해한 견 해가 있었다. 근년에 출간된 중국 학계의 동아시아 관계사 연구는 책 봉호(冊封號)를 지방 행정기구의 장관명으로 보아서, 삼국의 왕은 독립 국의 수장이 아니라 책봉국, 즉 중국 왕조의 지방 행정관원이라고 주 21 고구려 東川王은 삼국시기 孫吳로부터 235년에 이미 單于 로 책봉된 바 있다. 남북조시기에는 343년 前燕에 처음 遣使하여 355년에 책봉을 받았고, 백제는 372년에 東晋에 조공하고 책봉을 받았다. 신라의 대중국 교섭은 377 년 前秦 에 견사하여 시작되었고, 565년 北齊로부터 처음 책봉을 받았다. 8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87 장했다. 그리고 고구려가 6 세기 말 이후 독립 경향을 보였기 때문에 수(隋)와 당(唐)의 토벌전이 펼쳐지게 된 것이라고 했다.22 이에 따르면 책봉ㆍ조공관계는 곧 지배ㆍ종속관계를 외교적으로 표현한 것이 된다. 가네코 슈이치[金子修一]도 중국 측의 책봉 관련 자료를 근거로 해서 당나라 초에 고구려ㆍ백제가 속국(屬國)처럼 취급되었고,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뒤인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주(周) 왕조 때에도 속국으로 취급되 었다고 이해했다.23 이러한 견해는 근대(近代) 이후의 만국공법(萬國公法) 하의 국제질서, 즉 평등한 국가와 국가 사이의 조약관계(條約關係)의 인 식 틀로 고대 외교관계를 파악했다는 문제점이 있다. 19세기 이후 서구 세력이 전 세계로 진출하면서, 1648년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을 계기 로 형성된 국제질서, 즉 개별 국가들이 국제사회에서 대등한 지위와 권 한을 갖는 국제질서가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실제 국제 역관계에서는 불평등과 지배ㆍ종속관계가 존재하고 있더라도, 국제법적ㆍ형식적으로는 평등한 국제질서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근대적 국제관계의 구도 와 질서를 역사적 경험이 다른 동아시아, 그것도 고대국가에 적용하여 속국과 독립국으로 대비시켜 파악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24 한국 학계에서는 전통적으로 책봉질서(冊封秩序)는 명분에 불과하 며, 실질적으로 양국은 대등했다는 견해가 있었다. 김상기(金庠基)는 한중 간의 정치적 관계는 명목적인 것이고, 조공의 이면에는 경제 22 楊軍ㆍ張乃和 主編(2006) 從史前至20 世紀末 東亞史, 長春出版社. 23 金子修一(2001), 中國의 입장에서 본 三國統一, 韓國古代史硏究 23, 서경 문화사. 24 이에 대해서는 노태돈(2003), 고대 한중관계사 연구의 새로운 모색, 韓 國古代史硏究 32, 한국고대사학회 ; 노태돈(2006 ), 고구려와 북위 간의 조 공ㆍ책봉관계에 대한 연구, 한국 고대국가와 중국왕조의 조공ㆍ책봉관계, 고 구려연구재단, 63~65 쪽 참조.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87

88 적ㆍ문화적 교류가 자리 잡고 있다고 보았다. 25 전해종( 全 海 宗 )은 중국 정사( 正 史 ) 조선전( 朝 鮮 傳 ) 에는 사실과 다른 왜곡과 비하( 卑 下 )가 개재 되어 있다고 전제하고, 3세기까지는 사료에 조공 이라고 표현되어 있을 지라도 대등한 관계였고, 5세기 유송대( 劉 宋 代 )에 조공제도가 체계 화ㆍ제도화된 이후 청대( 淸 代 )까지 기본 구조가 유지된다고 보았다. 26 이에 대해서는 당시의 책봉관계를 과연 형식과 내용, 명분과 현실의 범 주로 분리할 수 있는지를 먼저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형식과 내용 이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양자는 원래 별개가 아니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현실이 변하면 시차( 時 差 )는 있지만 형식도 이에 따라 변화하고 역의 관계도 성립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합리적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앞서 언급한 피책봉국=속국론 도 마찬가지로 안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책봉체제의 실질적인 내용보다는 형식과 명분 에 중점을 둔 이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중국 측은 중국의 여러 왕조가 한국의 고대국가를 종속시켰고, 책봉체제는 이를 표현한 것이라고 인식한다. 이에 비해 한국 측의 논의는 책봉질서는 명분에 불과하며 실질적으로 양국은 대등했다는 인식이다. 이는 완전히 상반 된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전자는 한중관계의 형식과 명분을, 후자는 내용과 실제를 중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두 인식은 모두 한중관계의 형식ㆍ이념ㆍ명분을 내용ㆍ실제ㆍ현실과 분리 해서 본다는 방법론을 전제한 것이다. 형식을 중시하게 되면 삼국과 남북국의 왕들이 책봉을 받은 사실 자체가 양국 간의 실질적인 지 배ㆍ종속관계를 반영한다고 이해하게 된다. 이에 반해 한중 간 외교관 25 金 庠 基 (1987), 朝 貢 의 經 濟 的 意 義, 古 代 韓 中 關 係 史 의 硏 究, 三 知 院. 26 全 海 宗 (1966), 韓 中 朝 貢 關 係 槪 觀 - 韓 中 關 係 史 의 鳥 瞰 을 위하여, 東 洋 史 學 硏 究 1, 東 洋 史 學 會 [ 古 代 韓 中 關 係 史 의 硏 究, 三 知 院, 1987 재인용]. 8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89 계의 내용을 주목하는 시각에서는 책봉질서가 상징하는 군신관계( 君 臣 關 係 )가 실제로는 관철되지 못했고, 피책봉국의 내정( 內 政 )과 외교의 자주권이 인정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박한제의 주장은 주목된다. 그는 고구려가 남 북조시기 책봉ㆍ조공질서에 편입되었지만, 북위( 北 魏 )ㆍ남제( 南 薺 ) 양국 으로부터 책봉을 받았고 북위는 고구려 사신을 남제의 사신과 대등하 게 대우했음을 들어서 고구려와 남북조의 국가가 실제로 대등한 입장 에서 교섭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27 외교 교섭이 이루어지는 전례( 典 禮 ) 의 실상을 검토한 것은 책봉질서의 형식까지도 문제 삼아서 그것이 실 제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고찰하려 한 것이다. 피책봉국에게 수여 된 책봉호의 위계는 그야말로 책봉질서의 표피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외교전례( 外 交 典 禮 )의 실상까지 포함하는 중층적 ( 重 層 的 ) 층위의 국제관계를 분석할 수 있다면 책봉질서의 내용과 형 식을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종래 논의의 문제점으로 들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특정한 시기의 한중관계를 책봉질서의 전형으로 상정한다는 점이다. 니시지마 사다오 는 동아시아세계가 정치적ㆍ문화적으로 일체화된 움직임을 보인 것은 수당대( 隋 唐 代 )가 가장 현저했다고 하여, 책봉체제는 6~8세기에 국제 적 정치체제로 정착한다고 주장했다. 28 이에 비해 호리는 관작( 官 爵 ) 수여에 의한 책봉체제가 광범하게 통용된 것은 주로 위진남북조( 魏 晉 南 北 朝 )시기라고 보았다. 노태돈( 盧 泰 敦 )은 5~6세기의 동아시아를 다 원구조( 多 元 構 造 )로 파악한 위에 세력균형론과 국제관계의 연동성론( 連 27 박한제(2006), 隋 唐 世 界 帝 國 과 高 句 麗 - 朝 貢 秩 序 및 羈 縻 體 制 와 관련하여, 한국 고대국가와 중국왕조의 조공ㆍ책봉관계, 고구려연구재단, 156~157쪽. 28 니시지마 사다오 저, 송완범 역(2008), 앞의 책, 44~45쪽.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89

90 動 性 論 )을 중심으로 국제정세의 변동을 고찰한 바 있다. 29 그리고 최근 의 연구에서는 책봉관계가 유지되기 위한 조건으로서, 당사국 간에 책 봉국 중심의 의전( 儀 典 )이 양해되고 피책봉국의 자주성( 自 主 性 )이 인정 됨으로써 평화공존이 합의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수당제국이 들 어서면서 삼국을 기미주화( 羈 縻 州 化 ) 하려고 시도한 것은 기존의 책봉 질서를 부정한 것이므로 고구려의 항전을 야기했고 신라도 나당전쟁 ( 羅 唐 戰 爭 )을 불사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30 이러한 견해로 미루어 볼 때 중국의 남북조 왕조와 삼국 사이에 형성된 국제질서를 책봉관계의 전 형으로 상정하는 듯하다. 일원적 세계질서를 겨냥한 수당의 동북아 전 략은 이를 파괴하는 것이었고, 신라는 나당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이 상적인 책봉질서를 회복시켰다고 보는 것이다. 특정 시기 예컨대 삼국과 남북조 국가들 간의 책봉관계를 기준으로 하여 한중관계를 조망하게 되면 전형( 典 形 )과 변형( 變 形 ) 혹은 규범( 規 範 )과 일탈( 逸 脫 )의 이분법적 이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고대의 동 아시아는 각 국면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다양한 관계가 모색되고, 이 것이 실현되거나 혹은 좌절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특정 국면의 상황을 일반화 하여 전 시기에 확대 적용함으로써 다른 시기는 그 규준과 비 교하는 형태로 논의가 전개된다면 해당 시기 국제질서의 고유한 면모 와 그 배경을 간과할 위험이 있다. 책봉질서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고, 실제 역사 현실에서 한중관계의 전개과정에 따라 그 내용이 변화하고 이것이 형식에도 반영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역으로 형식이 내용 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을 것이다. 책봉관계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통 29 盧 泰 敦 (1984), 5~6 世 紀 東 아시아의 國 際 情 勢 와 高 句 麗 의 對 外 關 係, 東 方 學 志 44,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30 노태돈(2009),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57~61, 301~302쪽. 9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91 일적 이해는 이러한 관점에 설 때 가능해지리라 생각된다. 이용희( 李 用 熙 )는 일찍이 책봉ㆍ조공으로 이루어지는 국제정치의 형 태를 역사적 유형의 하나로서 유교적( 儒 敎 的 ) 국제정치권( 國 際 政 治 圈 )으 로 특징지은 바 있다. 이 권역의 정치 양식은 유교의 정치관념에서 유 래하며, 국제정치 질서는 예교( 禮 敎 )를 기본으로 하여 천명( 天 命 )을 받 드는 중조( 中 朝 ) 천자( 天 子 )의 덕( 德 )이 미치는 범위로 관념된다고 했다. 유교적 국제정치권, 곧 천하( 天 下 ) 는 중조의 문화가 미치는 장( 場 )이고 예교( 禮 敎 )의 명분이 유지되어야 하는 곳이며, 또 신분적인 유교의 예 ( 禮 ) 사상을 따라서 그 구조가 서계적( 序 階 的 )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 한 상하관계의 명분을 규율하는 제도가 자소사대( 字 小 事 大 ) 의 예로 서, 조근( 朝 覲 )ㆍ빙문( 聘 問 )ㆍ공헌( 貢 獻 )ㆍ봉삭( 奉 朔 )과 사뢰( 賜 賚 )ㆍ책봉 등이 따른다. 여기에는 정삭( 正 朔 )을 받는 등 중조와의 관계를 통해 주변국보다 우세한 지위를 차지하고, 국제교역( 國 際 交 易 )을 통해 경제 적 이익을 얻는 등 조공국의 현실적 목적이 내재해 있는 것도 사실이 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상하ㆍ서계( 序 階 ) 관계의 질서 속에 있 었던 것이라고 했다. 31 책봉ㆍ조공관계의 명분만을 내세워 한중 관계를 종주와 복속( 服 屬 ) 의 관계로 본다거나, 특정 시점의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양국 관계를 대등했다고 파악했던 그간의 연구를 돌이켜볼 때 위의 지적은 마땅히 경청할 바가 있다고 본다. 다만 현실에서는 내용과 형식이 괴리하는 상황이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그 원인을 따져봐야 한다. 그리고 책봉 관계의 형식도 앞서 언급했듯이 여러 층위의 예제( 禮 制 )와 절차를 포 함하고 있었으므로 외교형식이 어떻게 실행되었는지에 대한 엄밀한 논 31 李 用 熙 (1962), 一 般 國 際 政 治 學 上, 博 英 社, 71~74쪽.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91

92 증이 필요하다. 책봉체제의 실제를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 이념과 현실을 구분 하여 파악할 수는 있지만 이는 역사 현실에서는 일체화 되어 존재하고 운동한다. 현실의 국제정세와 양국의 상호 역관계( 力 關 係 )가 내용이고 중원왕조와 맺은 책봉관계가 형식이라고 했을 때, 양자는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내용, 즉 현실의 역관계가 변화하면 책봉관계의 형식 도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일시적인 괴리 현상은 책 봉관계의 불안정성을 의미하고, 만약 이것이 장기화 한다면 형해화( 形 骸 化 )의 과정을 거쳐 소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기본 구조와 제 도가 청대까지 존속했으므로 그러한 불안정성은 불원간( 不 遠 間 )에 극 복ㆍ해소될 성질의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제 6~8세기의 동아시아 상 황을 통해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 8세기 책봉질서의 구조와 변화 수나라 문제( 文 帝 )가 589년에 남조의 진( 陳 )을 멸망시킴으로써 남북 조( 南 北 朝 )시기는 종결된다. 이후의 동아시아는 새로운 질서를 경험하 게 된다. 6~8세기는 남북조 말부터 당나라의 전성기를 포괄하는 시 기이며, 동아시아 국제관계가 일대 전환기를 맞고 새로운 체제가 정착 해 가는 시기이다. 남북조시기의 한중관계에 관해서는 노태돈의 체계적인 연구에 의해 서 남북조 국가와 고구려 사이에 책봉국 중심의 책봉체제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임기환은 고구려ㆍ백제ㆍ왜가 남북조 정권과 9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93 맺은 책봉관계를 비교ㆍ검토하여 당시의 국제질서가 각국의 전략과 인 식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음을 지적했다.32 여호규는 고구려 와 모용연(慕容燕)의 관계를 대상으로 한 연구를 통해 책봉국과 조공 국의 입장이 공존하고 상호 존중하는 이중적 성격의 관계였으며 이를 토대로 하여 중국의 중심적 위상과 주변의 독자성이 양립할 수 있었 다고 보았다.33 위의 논의들은 책봉관계를 지배ㆍ종속관계로 이해하는 견해를 비판 하기 위해 구체적인 역사 현실을 통해 책봉국과 조공국이 대등하게 공존하는 양상을 제시했다. 그런데 그 시기는 길게 잡아야 남북조시기 인 250년 정도에 불과하므로 이 결론을 가지고 한국 고대의 한중 관 계 전반에 확대 적용해서는 곤란하다. 위만조선 이래 남북국시기까지의 장구한 기간을 이로써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책봉국과 조공국 이 형식상의 수직적 질서를 전제하면서도 과연 대등하게 교류하는 것 이 현실적으로 가능했을까도 의문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러 한 상황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조건은 무엇이었는지를 규명해야 한다. 춘추시기(春秋時期) 이전부터 존재한 화이사상(華夷思想)에 의하면, 천하는 왕화(王化)가 미치는 중화세계와 화외(化外)의 이적세계(夷狄世 界)로 구성된다. 전자가 질서와 문명이 구현된 공간인 반면 후자는 천 자(天子)의 지배가 미치지 못한 야만과 비인(非人)의 땅으로 간주되었 다.34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중국인들의 자기중심적인 우월의식과 달랐 32 임기환(2003a), 南北朝期 韓中 冊封ㆍ朝貢 관계의 성격-고구려ㆍ백제의 冊封ㆍ 朝貢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韓國古代史硏究 32, 韓國古代史學會. 33 여호규(2006b), 高句麗와 慕容燕의 朝貢ㆍ冊封關係 연구, 한국 고대국가와 중국왕조의 조공ㆍ책봉관계, 고구려연구재단. 34 李成珪(1992), 앞의 글, 31~33 쪽.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93

94 다. 이역( 異 域 )의 물산을 공급하기 위해 교역( 交 易 )이 필요했고, 전한대 ( 前 漢 代 ) 강성한 흉노( 匈 奴 )의 예에서 보듯이 중화( 中 華 )를 군사적으로 위협하는 적대 세력을 회유하기 위해 외교 교섭을 벌여야 했다. 하지 만 상대를 금수( 禽 獸 )와 같은 존재로 비하( 卑 下 )하는 관념 구조 속에서 는 이적의 군장은 결코 중화의 천자와 대좌할 교섭의 파트너가 될 수 없다. 화이사상에 바탕을 둔 중국인의 천하관( 天 下 觀 )으로써는 이적과 의 교섭이 논리상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방 안의 하나가 내신( 內 臣 )만을 대상으로 작위( 爵 位 )를 수여하던 작제( 爵 制 )를 외국의 수장( 首 長 )에게까지 확대하여 수여하는 것이었다고 생각 된다. 실제로 주대( 周 代 )까지 주( 周 )를 구성한 제후국들에게만 작위( 爵 位 )를 책봉하다가, 진( 秦 )이 통일제국을 형성하고 이후 한대( 漢 代 ) 들어 주변 제국( 諸 國 )들과 본격적인 접촉이 이루어지면서 이들의 군장들도 책봉하여 외신으로 삼았다. 전한( 前 漢 )은 위만( 衛 滿 )을 외신으로 삼아, 주변의 오랑캐들이 한의 국경을 침략하지 못하게 막고 한편으로는 오랑캐의 군장들이 중국에 내조( 來 朝 )하도록 방조( 傍 助 )할 것을 고조선에 요구했다. 35 중원 왕조 측 으로서는 고조선을 포섭하여 동방의 방어선을 강화하고, 고조선을 통 해 진번( 眞 番 )ㆍ임둔( 臨 屯 ) 등의 여러 정치체들과 간접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려고 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책봉은 실질적인 의미를 가질 수 없고 다만 동이( 東 夷 )의 정치체와 교섭하기 위한 일종 의 외교적 의전( 儀 典 )이며,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하기 위한 외교적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고조선 측에서도 황제ㆍ외신 질서가 의미하는 신속관계( 臣 屬 關 係 )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나라에 입조( 入 朝 )하지 않았 35 史 記 卷 115, 朝 鮮 列 傳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95 을 뿐 아니라 주변 정치체들의 입조도 방해했으며, 오히려 중국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이들을 복속시켰다. 36 그리고 주지하듯이 흉노( 匈 奴 ) 와의 제휴 가능성을 우려한 무제( 武 帝 )가 고조선을 전격 침공함으로써 명목뿐이던 책봉관계는 철회되고 한의 변군( 邊 郡 )이 설치되어 직접 지 배가 실시되었다. 대륙을 석권한 한나라는 고조선 고지( 故 地 )에 설치한 4군( 郡 )을 통 해 동이 세계를 통제하고자 했다. 변군이라는 교두보를 확보했기 때문 에 종래처럼 중심 국가의 군장을 외신으로 책봉하는 대신 개별 정치 체의 수장들에게 인수( 印 綬 )ㆍ의책( 衣 幘 )을 사여하는 방식을 택했다. 고 구려가 초기에 여러 지역집단별로 현토군( 玄 菟 郡 )에 가서 이를 받아오 고 현토군의 관리가 그 명단을 관리한 예가 대표적이다. 37 인수와 의책 이 결국 관작( 官 爵 )을 표현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책봉제도의 틀 안에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위씨조선처럼 최고 지배자만을 외신으로 삼던 것에서 분명히 변화한 양상이다. 이러한 통제 방식을 통해 신 ( 新 )의 왕망( 王 莽 )은 호( 胡 )를 공략하는데 고구려 군사를 강제 동원하 기도 했다. 38 그러나 태조왕( 太 祖 王 ) 때가 되면 계루부 왕실이 제지역 집단의 대외 교섭권을 장악하고 창구를 단일화 하면서 현토군의 통제 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史 記 卷 115, 朝 鮮 列 傳 55, 以 故 滿 得 兵 威 財 物 侵 降 其 旁 小 邑 眞 番 臨 屯 皆 來 服 屬 方 數 千 里 傳 子 至 孫 右 渠 所 誘 漢 亡 人 滋 多 又 未 嘗 入 見 眞 番 旁 衆 國 欲 上 書 見 天 子 又 擁 閼 不 通. 37 三 國 志 卷 30, 魏 書 30, 烏 丸 鮮 卑 東 夷 傳 30, 高 句 麗, 漢 時 賜 鼓 吹 技 人 常 從 玄 菟 郡 受 朝 服 衣 幘 高 句 麗 令 主 其 名 籍. 38 三 國 志 卷 30, 魏 書 30, 烏 丸 鮮 卑 東 夷 傳 30, 高 句 麗, 王 莽 初 發 高 句 麗 兵 以 伐 胡 不 欲 行 彊 迫 遣 之 皆 亡 出 塞 爲 寇 盜. 39 노태돈(1999), 부체제( 部 體 制 )의 성립과 그 구조,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17~121쪽.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95

96 이처럼 남만주와 한반도의 정치체들이 성장해 나가자 이에 대응하 여 중원 왕조의 통제 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난다. 조위( 曹 魏 )는 3세기 전반에 삼한( 三 韓 ) 소국의 수장들에게 인수ㆍ의책을 내려 개별 소국들 을 원심 분리하는 전통적 정책을 지속했다. 낙랑군( 樂 浪 郡 )과 대방군 ( 帶 方 郡 )의 변군을 활용한 것도 기존 방식을 답습한 것이다. 40 하지만 삼한 수장들에게 내린 관작에 변화가 나타나 주목된다. 마한( 馬 韓 ) 목 지국( 目 支 國 )의 수장 아래 위솔선읍군( 魏 率 善 邑 君 ) 귀의후( 歸 義 侯 ) 중랑 장( 中 郞 將 ) 도위( 都 尉 ) 백장( 伯 長 ) 의 관위가 있었다고 한다. 41 위솔선( 魏 率 善 ) 이 관칭되었으므로 조위 정권이 사여한 작위이다. 그런데 중랑장 과 도위는 무관직( 武 官 職 )이므로 42 마한의 지역 수장들에게 군사적 직 임을 부여한 셈이 된다. 후한( 後 漢 )이 삼국으로 분열하고 상쟁이 치열해 지면서 이적( 夷 狄 )이라 하더라도 교섭을 통해 우방( 友 邦 )으로 끌어들이 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었고, 그 과정에서 대상국의 수장과 휘하 관원 들에게 왕( 王 )ㆍ후( 侯 )ㆍ장( 長 ) 등 포괄적인 통치권을 표현하는 작위에 그 치지 않고, 일정한 군사권( 軍 事 權 )을 부여하는 관직까지 허용한 것이다. 중국 주변 세력의 군장에게 무관직을 수여하는 추세는 남북조시기 에 들어서면서 더욱 현저해진다. 민정관인 자사( 刺 史 )에게 군사권을 인 정하는 도독제군사( 都 督 諸 軍 事 ) 를 겸대( 兼 帶 )하게 하고, 황제의 부절( 符 40 金 昌 錫 (2004), 高 句 麗 초ㆍ중기의 對 中 교섭과 교역, 新 羅 文 化 24, 동국 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95~99쪽. 41 三 國 志 卷 30, 魏 書 30, 烏 丸 鮮 卑 東 夷 傳 30, 韓 ( 馬 韓 ), 辰 王 治 月 支 國 臣 智 或 加 優 呼 臣 雲 遣 支 報 安 邪 踧 支 濆 臣 離 兒 不 例 拘 邪 秦 支 廉 之 號 其 官 有 魏 率 善 邑 君 歸 義 侯 中 郞 將 都 尉 伯 長. 42 中 郞 將 은 秦 漢 代 에 출현한 직임으로 禁 中 의 경비를 맡았으며 장군 다음 가는 관위였다. 漢 代 의 都 尉 는 시종관ㆍ직사관ㆍ지방관의 의미로 쓰였지만, 삼국시대 이후에는 軍 官 의 계급을 표시하는 칭호로 변질되었다고 한다[ 日 中 民 族 科 學 硏 究 所 編 (1980), 中 國 歷 代 職 官 辭 典, 國 書 刊 行 會 ]. 9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97 節)을 받아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절(假節) 지절(持節) 사지절(使持節) 등으로 표시하여 부여했다.43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 王)이 전연(前燕)으로부터 받은 책봉호는 영주제군사(營州諸軍事) 정동 대장군(征東大將軍) 영주자사(營州刺史) 낙랑공(樂浪公) 고구려왕(高句麗 王) 이었다. 또 413년 남조 동진(東晋)으로부터 사지절 도독영주제군사 (都督營州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고구려왕 낙랑공 을 받았다. 백제 는 372년 동진으로부터 진동장군(鎭東將軍) 영낙랑태수(領樂浪太守) 를, 북조인 북제(北齊)로부터는 570년 사지절 시중(侍中) 표기대장군(驃騎大 將軍) 대방군공(帶方郡公) 백제왕(百濟王) 으로 책봉되었다. 신라는 565 년 북제로부터 사지절 동이교위(東夷校尉)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 (新羅王) 으로 책봉되었다. 모두 군사권 행사를 보장하는 장군호(將軍 號) 혹은 사지절호(使持節號)를 일컫고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영주(營州)ㆍ낙랑군(樂浪郡)ㆍ대방군(帶方郡) 등 중 국이 과거에 영유했던 지방행정구역명을 덧붙여 그 행정적 책임을 맡 는 지방관직을 겸임하도록 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현실성이 없는 관 직명까지 동원하여 책봉호를 작성한 것이 남북조 왕권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북조의 유목 왕조들이 병립하는 현실에서 상호 경쟁을 위해서, 나아가 남조의 한족 왕조와 군사적으로 대결하고 정통 성(正統性)을 다투기 위해서는 자신의 책봉을 받는 외신의 숫자를 늘 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세력권을 과시하는 것이 절실했을 터이다. 특 히 전과 달리 장군호를 부가한 것은 주변의 적대세력을 회유하여 번병 으로 삼거나 최소한 중립화하여 안보를 유지하려는 군사적 방어 전략 43 金鍾完(2004), 高句麗의 朝貢과 冊封의 性格-正體性과 關聯하여, 高句麗 硏究 18, 고구려발해학회.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97

98 을 잘 보여준다. 기록으로 확인되기로는 손오(孫吳) 정권이 처음 고구 려를 책봉했는데, 당시 조위를 협공하려고 동맹을 맺었던 공손씨(公孫 氏) 정권이 이를 파기하자 그 대신 고구려를 동맹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책봉했던 것이다.44 이렇게 전략적 차원에서 경쟁적으로 남발된 책봉호가 명분 그대로 신속관계(臣屬關係)를 강제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책봉호에 포함 된 중국 왕조의 관직은 실제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삼국의 왕들은 영주, 낙랑, 대방 등 책봉 받은 지역의 조세를 책봉국에게 납부하 지 않았다.45 다만 고구려ㆍ백제ㆍ신라의 실제 통치 지역에서 수취한 조 세의 일부나 특산품을 조공 사행시(使行時)에 공헌(貢獻)한 것은 사실 이지만 중국 측도 회사품(回賜品)을 부담했으므로 일방적인 수취가 아 니었다. 또 삼국에서 군마(軍馬)를 보급한다거나 병력을 지원한 경우가 있었지만 이 역시 공동의 적을 물리치기 위한 합동 군사작전의 성격이 강하다. 당시 집권적 고대국가를 형성해 가던 삼국의 처지에서도 중국 의 고대국가로부터 선진문물(先進文物)을 수용하고, 이들과 협력하여 주변의 군사적 위협 세력을 퇴축하며,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그 자체 잠재적인 위협 요소인 남북조의 국가들과 책봉관계를 맺어 안전을 보 장할 필요가 있었다. 삼국이 책봉질서의 이념에 구속되지 않은 이유로 중국 이외의 정치 체와 교섭을 벌이면서 다양한 문물을 수용한 사실을 들어야 한다. 앞 서 언급했듯이 삼국의 교류권역은 중원 정권에 국한되지 않았다. 고구 44 여호규(2007), 3 세기 전반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고구려의 대외정책, 歷史 學報 194, 歷史學會, 21~27쪽. 45 古畑徹(2004), 1~7세기 倭와 中國의 朝貢과 冊封의 성격-日本의 中國史 硏 究者의 見解를 중심으로, 高句麗硏究 18, 고구려발해학회. 9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99 려의 경우 4~6세기 중엽에 걸쳐 읍루( 挹 婁 )와 남조( 南 朝 ) 국가를 잇는 교역을 주도했으며, 5세기 말에는 동해( 東 海 )를 건너 왜와 교류한 사실 이 확인된다. 46 수당( 隋 唐 )과 대치하는 상황에서는 돌궐과 동맹을 모색 하고, 철륵의 한 부족인 설연타에게 사절을 보내 당을 공략하도록 제 안하여 실현시켰다. 나아가 현재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강국과도 교섭을 벌였다. 47 주지하듯이 우즈베키스탄, 즉 소그디아나 지역은 소그드인의 본거지이 다. 이들은 교역 민족이었지만 서돌궐에 편입되면서 무장력을 겸비하 고 마사( 馬 飼 )에 종사하기도 했다. 특히 동돌궐이 멸망한 후 기마병들 이 유입 되면서 소그드인들의 군사력은 증강되었다고 한다. 48 고구려는 일찍이 돌궐과 교섭하는 과정에서 소그드인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을 것이고, 이것이 급박한 상황에서 강국에 사절을 파견한 배경이 되었으 리라고 본다. 고분벽화( 古 墳 壁 畵 ) 등 고구려의 문물에 서역( 西 域 )을 비 롯한 다양한 지역의 문화요소가 보이는 것 49 도 고구려의 광대한 교섭 권을 반영하는 것이다. 백제와 신라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연구가 진행되지 못했지만, 고구려의 예를 통해서 보 더라도 집권체제를 달성하고 고대 문화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외부의 수원( 水 源 )이 결코 중국에만 한정되지 않았으며, 이것이 중국 중심의 책봉질서가 관철되지 못한 한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한편으 46 金 昌 錫 (2004), 앞의 글 ; 金 昌 錫 (2009b), 新 羅 의 于 山 國 복속과 異 斯 夫, 歷 史 敎 育 111, 역사교육연구회. 47 노태돈(2009), 앞의 책, 105~118쪽 참조. 48 Arakawa Masaharu(2009), The Aspects of Sogdians Trading Activities under the Western Turkic State and the Tang Empire, 실크로드의 교 역과 상인,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중앙유라시아연구소. 49 전호태(1999), 고구려 고분벽화의 문화사적 위치, 한국미술의 자생성, 한길사.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99

100 로 이러한 삼국의 독자적인 교류권을 통해 고대국가 성립과 체제정비 과정의 국제적 계기를 새롭게 파악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군사 지원과 정통성 확보가 절실한 중국 측의 요구와 선진문물을 수입하고 침략을 방지하기 위한 한국 고대국가의 요구가 부합했으므로 실제 양측의 관계는 상호 보완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수직적인 책봉질 서와 수평적인 협력관계가 이러한 현실적 이해관계로 말미암아 실제로 양립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는데, 하 나는 당시의 책봉관계가 아직 체계화되지 못하여 이 정도의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내용밖에 담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현실의 역관 계를 인정하고 상호 양해 하에 일종의 차등적( 差 等 的 ) 공존( 共 存 )이 이 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시각은 남북조시기의 책봉관계를 규제력이 매 우 약했던 그 자체의 한계를 가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또 하나 는 당시의 상황 때문에 책봉관계의 형식과 내용 그리고 명분과 실질이 괴리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 뒤 수당대의 흐름을 고려하면 이러 한 이해가 사실에 부합한다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해서 종래의 형 식ㆍ내용 분리론으로 회귀하는 것은 아니다. 양자가 괴리될 수밖에 없 었던 특수한 조건을 위와 같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의 국제 질서와 책봉관계의 형식이 어긋나는 현실은 곧 책봉체제의 위기를 의 미한다. 명분만의 책봉호 수여가 거듭되고 신속관계도 교섭의 공간에 서만 확인되어 적용 범위가 축소된다면 책봉질서는 형해화의 길을 걸 을 수밖에 없다. 고구려는 물론 백제까지, 상호 적대 관계에 있는 남 북조 왕조 모두에게 동시에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은 사실은 책봉국 이 구상한 신속의 상하질서가 근저에서 동요하고 책봉국도 이를 방관 하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중원 왕조의 입장에서 이러한 상황은 동이 제국의 자율성이 그만큼 10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01 확대되는 것을 뜻하므로 동방정책( 東 方 政 策 )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 더욱이 고구려와 같은 강대한 세력은 상황에 따라서는 책봉질서에 구 애받지 않을 뿐 아니라 적대적인 행위를 감행할 수 있다. 이는 남북으 로 분열되어 있던 중국의 상황에서는 심각한 위협이 아닐 수 없다. 하 지만 상황의 변동은 중국 측에서 먼저 발생했다. 589년 수( 隋 )가 진 ( 陳 )을 멸하고 드디어 대륙을 통일한 것이다. 이제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외교적으로 경쟁할 이유가 없어졌고, 남북을 통일함으로써 사방 의 이적에 대한 방어력도 한층 강화되었다. 수나라는 이를 토대로 하여 형해화의 위기에 처한 책봉체제를 변화 시키고자 했다. 동아시아를 수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일원적인 세계로 재편하고 책봉질서도 명( 名 )과 실( 實 )을 상부하게 하는 것이다. 우선 책봉호의 내역이 달라졌다. 수당대 동이의 국왕에 대한 책봉호를 보 면, 남북조시기와 달리 중국의 특정 지방과 장군호를 연결하는 부분 이 빠져있다. 50 이적의 군장에게 형식적으로라도 군사 지휘권을 양여하 지 않고 중앙으로 회수하여 장악하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와 함께 다원적( 多 元 的 ) 천하질서를 부인하고 국제정치와 대외교역에서 수 ( 隋 ) 중심의 대일통( 大 一 統 )을 지향함으로써 고구려와 충돌한 것은 주 지의 사실이다. 만약 수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면 이를 어떻게 지 배했을지 궁금한데, 607년 고구려 정벌을 주장한 배구( 裵 矩 )의 상주문 ( 上 奏 文 )을 보면 덕화론( 德 化 論 )에 입각하여 논리를 전개하고 있으므 로 51 한사군( 漢 四 郡 )과 같은 성격의 변군( 邊 郡 )을 설치했을 가능성이 높 50 金 裕 哲 (2004), 中 國 史 書 에 나타난 高 句 麗 의 국가적 正 體 性, 高 句 麗 硏 究 18, 고구려발해학회. 51 김창석(2007), 고구려ㆍ수 전쟁의 배경과 전개-경제적 요인을 중심으로, 동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101

102 다. 그러나 4차에 걸친 고수( 高 隋 ) 전쟁은 고구려의 승전으로 끝나고 그 여파로 수는 618년 멸망에 이른다. 뒤를 이은 당( 唐 )도 통일제국으로서 대외정책에서는 수나라의 기조 를 계승했다. 628년 돌궐의 힐리가한( 頡 利 可 汗 )을 격파하고 몽골고원을 제압하자 그 예하에 있던 거란ㆍ해ㆍ습( 霫 ) 등 내몽골 동부의 유목 종 족들이 당에 투항했다. 이어서 티베트 고원 북쪽의 토욕혼( 吐 谷 渾 )을 격파하고, 640년에는 지금의 신강성( 新 疆 省 ) 투루판에 있던 고창국( 高 昌 國 )을 정복하고 주현( 州 縣 )을 설치했다. 고창은 실크로드 상의 대표 적인 국가였으므로 당이 이곳에 진출했다는 것은 곧 서부의 여러 세 력들이 당나라에 복속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서남쪽의 티베트 방면 도 회유책을 써서 641년에는 당의 영향력 아래로 끌어들였다. 52 종래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있거나 고구려 교섭권에 속했던 서북방의 제세 력이 소멸하거나 이탈하게 된 것이다. 당나라는 고구려에 대해서도 초기부터 불신( 不 臣 ) 을 내세워 비난했다. A-1. (책봉관계의-필자, 이하 동일) 이름과 실제는 모름지기 부합해 야 한다. 고구려는 수나라의 신하를 일컬으면서 마침내 煬 帝 에 게 맞서려고 했으니 어찌 신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舊 唐 書 卷 61, 列 傳 11, 溫 大 雅 弟 彦 博 ). A-2. 만약 고구려를 (중국과) 대등한 예법으로 대우한다면 사방의 오랑캐가 어찌 (우리를) 우러러 보겠습니까? 또한 중국과 夷 狄 의 관계는 태양과 뭇별의 관계와 같으니 어느 것을 높이고 북아역사농촌 15, 동북아역사재단, 106~110쪽. 52 노태돈(2009), 앞의 책, 58~60쪽. 10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03 어느 것을 낮출 수 없습니다. 고구려를 다른 오랑캐처럼 대우 하십시오( 舊 唐 書 卷 61, 列 傳 11, 溫 大 雅 弟 彦 博 ). A-1은 고조( 高 祖 )의 언급으로, 고구려가 책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 고 신하의 예와 본분을 지키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A-2의 온언박( 溫 彦 博 )의 말도 책봉질서의 이념과 달리 피책봉국을 당나라와 대등하게 대우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양자 모두 남북조시기와 달리 책 봉관계의 명과 실을 합치시킬 것을 구상한 것이다. 이것이 대일통( 大 一 統 )의 이념에 부합하는 세계질서였다. 그러나 당나라는 수대의 고구려 침공 실패 경험을 교훈으로 삼아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고조는 고구 려가 불신 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복속시킬 생각이 없음을 밝혔다. 현 실의 역관계를 인정하고 남북조시기의 형식적 책봉관계를 유지할 수밖 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 중심의 일원적 세계질서를 구현하려는 의지는 태종대( 太 宗 代 )에 곧 표면화되었다. 군신관계( 君 臣 關 係 )를 명실상부하게 관철하자 는 것이다. 문제는 삼국이 모두 남북조시기의 책봉질서를 경험한 상태 였으므로 이를 근본적으로 뒤바꾸려는 중국 측의 시도는 상황의 변화 없이는 실현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고구려의 경우 당나라가 누차 사 절을 파견하여 신속의 예를 다할 것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631년 부터 천리장성( 千 里 長 城 )을 쌓기 시작했다. 백제는 수대부터 수나라와 고구려에 대해 양단책( 兩 端 策 )을 구사하여 등거리 외교를 펼쳤고, 같은 피책봉국인 신라를 집요하게 공략했다 金 昌 錫 (2009c), 6세기 후반~7세기 전반 百 濟 ㆍ 新 羅 의 전쟁과 大 耶 城, 新 羅 文 化 34,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84~94쪽.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103

104 상황의 변화는 삼국 내부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백제가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를 협공하자 이를 벗어나기 위해 643년 신라가 당에 군 사 지원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신라도 고구려에 먼저 사절을 보내 백 제와의 동맹을 끊고자 했다. 하지만 협상이 결렬되자 당에 구원을 요 청한 것이다. 당은 책봉을 내린 신라에게도 우선순위에서 고구려에 밀 릴 정도로 당시 책봉관계의 규제력은 약했다. 그러나 642년 대야성( 大 耶 城 )이 함락되고, 이어서 백제ㆍ고구려 연합군에 의해 당항성( 黨 項 城 ) 이 공략당하면서 국가 존망의 위기에 몰린 신라는 결국 선덕여왕 12 년(643) 당에 구원 사절을 보냈고, 원병( 援 兵 ) 협상에서 불리한 위치에 설 수밖에 없었다. 신라의 견당사( 遣 唐 使 )는 다음과 같이 고했다. 高 句 麗 와 百 濟 가 臣 의 나라를 침략하여 여러 번 수십 개의 城 을 공격했습니다. 두 나라는 병사를 연합하여 반드시 (우리나라를) 취 하고자 하여 이제 9월에 크게 거병하려고 합니다. 下 國 의 사직을 보전할 수 없어 삼가 陪 臣 을 파견하여 大 國 의 명령에 따르고자 합 니다, 원컨대 소규모 부대를 보내어 (신라를) 보존하고 구원해 주십 시오( 三 國 史 記 卷 5, 新 羅 本 紀 5, 善 德 王 12 年 ). 신라를 신국( 臣 國 )ㆍ하국( 下 國 )으로, 당을 대국( 大 國 )으로 칭하고 있 다. 또 스스로를 배신( 陪 臣 )이라고 하여 신라가 제후국임을 자처했다. 이를 단순히 피책봉국의 처지에서 피할 수 없는 의례적 표현에 불과하 다고 볼 수 없는 이유는 이에 대한 당 태종의 대응을 보면 알 수 있 다. 그는 신라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책을 세 가지 제시했는데, 그 가운데 마지막을 보자. 10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05 백제는 바다의 험난함을 믿고 무기를 수리하지 않고 남녀가 어지러 이 모여 잔치를 벌이고 있다. 내가 수십백의 戰 船 에 날랜 병사를 싣고 고요히 바다를 건너 곧바로 백제를 습격할 수 있다. (그런데) 너희 나라는 부녀자가 주인이 되어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고 있다. 임금을 잃고 노략질을 불러들이는 꼴이니 한 해도 편안할 날 이 없는 것이다. 내가 宗 親 한 사람을 보내 함께 나라를 다스리도 록 하고( 與 爲 爾 國 主 -원문의 표현. 이하 동일), (종친이) 스스로는 홀로 왕이 될 수 없으니 병사를 파견하여 보호할 것이다. 너희 나 라가 안정되기를 기다려 그때 自 守 에 맡길 것이니 이것이 세 번째 방책이다( 三 國 史 記 卷 5, 新 羅 本 紀 5, 善 德 王 12 年 ). 당시 신라가 여왕의 치하에 있는 것을 거론하며 제실( 帝 室 )의 남성 을 보내 신라의 왕으로 삼을 것을 제안하고 있다. 여성이 왕위( 王 位 )에 있어 백제와 고구려의 공략을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어 신라의 현 왕권( 王 權 )을 부정한 것이다. 책봉관계를 명실상부하게 관철해 신라를 통제하려는 데서 더 나아가 내정( 內 政 )을 간섭하려는 의도를 보였다. 이는 당나라의 새로운 대이적( 對 夷 狄 ) 정책인 기미주( 羈 縻 州 ) 설치 와 관련이 있다. 기미정책이란 점령지에 주현( 州 縣 )을 설치하고 현지 인을 책임자로 두면서, 그 상위에 도호부( 都 護 府 )를 설치하고 그 장 관인 한인 도호가 주현을 통할하게 하는 간접 지배방식이다. 54 당은 이미 640년에 고창국을 멸망시킨 후에 안서도호부( 安 西 都 護 府 )를 두었 고, 647년에는 설연타( 薛 延 陀 )를 무너뜨리고 연연도호부( 燕 然 都 護 府 )를 54 氣 賀 澤 保 規 (2005), 絢 爛 たる 世 界 帝 國 - 隋 唐 時 代, 講 談 社, 297~300쪽.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105

106 설치한 바 있다. 당조는 이를 동북과 동남아시아 지역까지 확대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신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 처했기 때문에 당과 교섭에서 불리한 위치에 설 수밖에 없었고, 이를 간파한 태종이 신라에 대해서는 군사 정복 없이도 기미정책을 실시하여 내정까지 간여할 수 있으리라고 판 단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종래의 책봉관계가 피책봉국의 독립 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당나라는 이것마저 부정하거나 명목상의 독립 만 허용하는 실질적인 상하관계를 구상했다고 생각된다. 당은 진평왕을 624년에 주국낙랑군공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 으 로 책봉한 이래 멸망에 이를 때까지 신라와 책봉관계를 계속 유지했 다. 신라 왕이 받은 책봉호를 검토해 보면,55 문무왕 3년(663) 계림주 대도독(鷄林州大都督) 으로 책봉된 후 효공왕 원년(897)에 이르기까지 이 관직명이 빠지지 않았다.56 관직명이 도독(都督) 자사(刺史) 제군사 (諸軍事) 등으로 달라지고, 이 가운데 하나가 덧붙여지는 경우는 있지 만 계림주 라는 행정구역명은 유지되었다. 당나라는 통일신라의 역대 왕을 신라의 통치자이면서 동시에 계림주의 지방관으로 줄기차게 인식 했던 것이다. 계림주는 바로 계림, 즉 신라에 설치한 당나라의 기미주 로 정식 명칭은 계림대도독부 였다. 신라를 당나라의 영토로 보고 그 곳을 다스리는 책임자로서 재지의 군장인 신라 국왕을 임명한 셈이다. 그리고 668년에 고구려 고지(故地)에 설치한 안동도호부의 관할을 받 도록 했을 것이다.57 책봉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그 내용에서 신라에 대 55 권덕영(2006), 羅唐交涉史에서의 朝貢과 冊封, 한국 고대국가와 중국왕조 의 조공ㆍ책봉관계, 고구려연구재단, 253 쪽의 표 참조. 56 惠恭王 때만 예외로 開府儀同三司 新羅王 이 책봉되었다. 57 唐六典 에 의하면, 도호ㆍ부도호의 직임은 관할 지역의 이민족을 위무하고 외 10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07 한 통제력을 현격히 강화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고, 이것이 책봉호에 도 기미주의 지방관명으로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당의 통제력 강화는 신라가 자초한 측면이 있다. 643년 신라의 지 원군 요청에 응하여 선덕왕 14년(645)에 태종이 보낸 조서( 詔 書 )는 고 구려 연개소문( 淵 蓋 蘇 文 )의 학정( 虐 政 )을 종식시킨다는 의전론( 義 戰 論 ) 을 내세우면서 신라에 병력을 요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58 고구려는 당시 신라에게도 적국이었으므로 신라는 당의 요구에 호응하여 고구 려의 남변( 南 邊 )을 공격했다. 그런데 당시 당나라는 백제에게도 같은 요청을 했지만 백제는 이를 거부했다. 오히려 신라의 군사적 공백을 노려 신라 서변의 7성을 함락시켰다. 59 그리고 당시 백제는 의자왕이 641년에 주국( 柱 國 ) 대방군왕( 帶 方 郡 王 ) 백제왕( 百 濟 王 ) 의 책봉을 받은 상태였다. 같은 당나라의 피책봉국이면서 신라를 공격한 배경에는 백 제 조정이 남북조시기의 책봉질서의 연장선상에서 당나라를 인식했음 을 보여준다. 하지만 신라의 대당( 對 唐 ) 인식은 이와 달랐던 듯하다. 진덕왕 2년 (648) 김춘추( 金 春 秋 )와 당 태종 사이에 나당동맹( 羅 唐 同 盟 )이 체결될 때 신라는 지원군을 얻는 대가로 고구려의 일부 영역을 포기할 뿐 아 니라 당나라의 문물제도를 전면 수용하기로 했다. 김춘추가 방문하기 전에 이미 당은 신라의 독자 연호( 年 號 ) 사용을 문제 삼았다. 60 신라는 적의 침입을 평정하며, 간악한 흉계를 정탐하고 반란을 토벌하는 것이다[김택 민(2008), 역주 당육전 하, 신서원, 477쪽]. 58 주보돈(2002), 文 館 詞 林 소재 外 交 文 書, 금석문과 신라사, 지식산업사, 370~373쪽. 59 三 國 史 記 卷 28, 百 濟 本 紀 6, 義 慈 王 5 年. 60 三 國 史 記 卷 5, 新 羅 本 紀 5, 眞 德 王 2 年, 冬 使 邯 帙 許 朝 唐 太 宗 勑 御 使 問 新 羅 臣 事 大 朝 何 以 別 稱 年 號 帙 許 言 曾 是 天 朝 未 頒 正 朔 是 故 先 祖 法 興 王 以 來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107

108 법흥왕대 율령을 반포한 후 지배체제 정비 차원에서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진평왕 이후 대당 교섭을 벌이면서도 건복( 建 福 )ㆍ인평( 仁 平 )ㆍ태화( 太 和 )의 독자 연호를 계속 사용했다. 연호의 사용이 그 나라의 대외적 자주성을 보장하는 절대적인 지표 는 아니다. 예컨대 고구려의 경우 광개토대왕 때의 영락( 永 樂 ) 연호 정도만이 확인된다. 삼국은 중원 왕조와 달리 연호 제도가 국체( 國 體 ) 를 규정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연도를 세는 방식의 하나로 서만 이해했고, 남아 있는 자료를 보건대 일반적으로는 연( 年 )의 간지 ( 干 支 ) 나 무슨 왕 몇 년 식으로 표시했다. 그러나 신라는 이미 100여 년의 독자 연호 사용 경험이 있고, 당 태종의 문제 제기에 대해 만약 대조( 大 朝 )가 명을 내린다면 소국( 小 國 )이 어찌 감히 (사용하겠습니까?) 라고 대응할 정도였으므로, 신라도 7세기 전반의 시점에는 연호가 가 진 국제정치상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를 포기하겠다 는 선언은 곧 국체의 변경도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다. 적 어도 당 조정은 그렇게 인식했던 듯하다. 당을 방문한 김춘추는 태종과 협상을 벌이고, 당나라의 국학제도 ( 國 學 制 度 ), 유교사상 및 제사( 祭 祀 )에 관한 문물을 참관하고 사서( 史 書 )와 예복( 禮 服 )을 받아왔다. 648년의 당 문물의 수입이 이후 신라 제도와 예법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진덕왕 4년(650) 신 라는 당 문화의 융성과 당제의 성덕( 聖 德 )을 찬양하는 태평송( 太 平 頌 ) 61 을 지어 바쳤다. 외이( 外 夷 )로서 명을 어긴 자는 하늘의 재앙을 私 有 紀 年 若 大 朝 有 命 小 國 又 何 敢 焉 太 宗 然 之. 61 舊 唐 書 卷 199 上, 列 傳 149 上, 新 羅 國, 眞 德 乃 織 錦 作 五 言 太 平 頌 以 獻 之 其 詞 曰 大 唐 開 洪 業 巍 巍 皇 猷 昌 止 戈 戎 衣 定 修 文 繼 百 王 統 天 崇 雨 施 理 物 體 含 章 深 仁 偕 日 月 撫 運 邁 陶 唐 幡 旗 旣 赫 赫 鉦 鼓 何 鍠 鍠 外 夷 違 命 者 翦 覆 被 天 殃 10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09 입어 나라가 망하고 황제의 교화( 敎 化 )가 온 세상에 미치매 천하의 오 랑캐들이 다투어 정성을 바친다 는 구절은 신라 왕실의 대당 인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당나라에서 받아 온 복식은 실제 관복( 官 服 ) 의 개정에 활용되어, 651년 신라 사절이 이를 입고 왜를 방문했을 때 는 파문이 일기도 했다. 62 문무왕 4년(664)에는 부녀자들도 중국 복식 을 입도록 했다. 63 이런 흐름 속에서 663년 문무왕에 대한 계림주대도독 책봉이 이루 어진 것이다. 남만주와 한반도 지역에 처음으로 설치한 기미주는 660 년에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하고 그 고지( 故 地 )에 둔 웅진( 熊 津 )ㆍ마한 ( 馬 韓 )ㆍ동명( 東 明 )ㆍ금련( 金 漣 )ㆍ덕안( 德 安 )의 다섯 개 도독부( 都 督 府 )와 주현( 州 縣 )이었다. 64 김춘추와 태종의 협상에서 대동강 이북만을 당나 라 영토로 한다는 데 합의했으니, 65 백제 고지에 당이 기미주를 설치 한 것은 분명히 합의를 위반한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 맹국인 신라마저 도독부로 삼은 것이다. 66 당나라의 의도는 665년의 취리산 회맹( 會 盟 )에서 잘 드러난다. 당은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 扶 餘 淳 風 凝 幽 顯 遐 邇 競 呈 祥 四 時 和 玉 燭 七 曜 巡 萬 方 維 岳 降 宰 輔 維 帝 任 忠 良 五 三 成 一 德 昭 我 唐 家 光. 62 日 本 書 紀 卷 25, 白 雉 2 年 是 歲 條. 63 三 國 史 記 卷 6, 新 羅 本 紀 6, 文 武 王 4 年 春 正 月, 下 敎 婦 人 亦 服 中 朝 衣 裳. 64 三 國 史 記 卷 28, 百 濟 本 紀 6, 義 慈 王 20 年. 65 薛 仁 貴 의 서신에 대한 文 武 王 의 답신에서 이를 거론했다. 이 답신은 외교문서 로 작성된 것이어서 고구려 영토 분할 약조의 사실성은 인정할 수 있다. 그 리고 이를 冒 頭 에 언급한 것을 통해서도 신라 조정이 당의 동북아 전략을 어 느 정도 수준에서 이해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과의 협상에서 태종 의 약조를 문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금과옥조로 여겨 그 준행을 강조한 것이 다. 이는 당의 기미정책에 대한 정보에 신라가 어두웠음을 시사한다. 66 三 國 史 記 卷 6, 新 羅 本 紀 6, 文 武 王 3 年, 夏 四 月 大 唐 以 我 國 爲 鷄 林 大 都 督 府 以 王 爲 雞 林 州 大 都 督.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109

110 隆 )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신라의 문무왕( 文 武 王 )과 회합하도록 했다. 그리고 칙사( 勅 使 ) 유인원( 劉 仁 願 )을 보내 백제는 앞으로 신라와 서로 의지하여 숙원( 宿 怨 )을 풀고 화친하며 황제의 뜻을 받들어 길이 변방 을 지키는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 고 맹세하게 했다. 백제와 신라에 각 각 도독부를 설치함으로써 당의 영토로 편입하고, 양국의 상호 협조 를 통해 한반도 중남부 지역의 안정을 도모한 것이다. 부여융과 문무왕에 대한 대우의 차이는 있었다. 신라의 경우 새로 운 도독을 임명하거나 군현을 획정하지 않고 기존 체제를 인정해 주었 고, 책봉호에서 관직ㆍ관품과 함께 신라왕( 新 羅 王 ) 을 덧붙여 신라의 자율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의 입장에서 어디까지나 무게 중심은 계림주대도독 에 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나당 전쟁이 본격화한 674년에 당나라는 문무왕에 대한 책봉을 취소하고, 일방적으로 신라의 왕을 당 조정에서 숙위( 宿 衛 )하던 김인문( 金 仁 問 )으 로 교체하여 귀국시킨 바 있다. 이때도 책봉호는 계림주대도독 개부의 동삼사( 開 府 儀 同 三 司 ) 신라왕( 新 羅 王 ) 이었다. 아무리 책봉국이라 하더 라도 피책봉국의 왕을 정벌을 거치지도 않고 교체하여 새로운 왕을 파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당 조정은 문무왕을 신라의 왕이라 는 자격보다는 계림도독부의 관리라는 측면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지 방관을 파면하듯이 처리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663년 계림주대도독으로 책봉되는 시점에서는 신라도 당의 기미정책 을 간파했을 것이다. 이는 결국 신라의 국망( 國 亡 )과 당으로의 복속을 의미하므로 신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가 행 동으로 돌입한 것은 669년이었다. 이 해에 신라군( 新 羅 軍 )이 백제 고지 에 진입하여 작전을 펼쳤고, 670년에는 고구려 유민군과 합동으로 압 11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11 록강 이북의 오골성( 烏 骨 城 ) 방면으로 진격하여 당과 충돌했다. 67 같은 해에 안승( 安 勝 )이 이끌고 온 집단을 금마저( 金 馬 渚 )에 정착시키고 안승 을 고구려왕[ 高 句 麗 王, 뒤에 보덕왕( 報 德 王 )으로 다시 봉함]으로 삼은 것이 주목된다. 68 이는 다목적의 포석이라 할 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 의도는 신라가 망국의 계승국( 繼 承 國 )을 만들고 그 왕을 책봉함으로써 당의 기 미주가 아니라 자주적인 대외정책을 펼치는 독립국임을 천명한 점이다. 69 나당전쟁이 신라의 승전( 勝 戰 )으로 끝남으로써 백제와 신라에 대한 당의 기미정책은 좌절되었다. 따라서 이후에도 책봉호에 계속 포함된 계림주대도독 의 관직은 허호( 虛 號 )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로 인해 남북조시기의 책봉질서가 복구된 것일까? 8세기의 한중관 계는 나당전쟁의 승전을 지렛대로 하여 신라와 당 사이에 상호 불간섭 과 외교의 자주성( 自 主 性 )이 보장되었으며, 신라는 일본과도 대등외교 를 시도함으로써 이후 사대교린( 事 大 交 隣 ) 정책의 원형( 原 形 )이 마련되 었다는 평가가 있었다. 70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재검토의 여지가 있는 듯하다. 7세기 말에도 당의 신라 압박은 지속되어 신문왕대( 神 文 王 代 ) 에 무열왕의 태종 묘호( 廟 號 ) 논란이 있었다. 71 이것은 전쟁의 여진( 餘 震 )이라고 치부하더라도, 712년에 당에서 사절을 보내 성덕왕( 聖 德 王 ) 의 휘( 諱 )가 당 현종( 玄 宗 )의 휘와 같다고 하여 칙명으로 고치도록 한 67 노태돈(2009), 앞의 책, 238~240쪽. 68 三 國 史 記 卷 6, 新 羅 本 紀 6, 文 武 王 10 年. 69 金 昌 錫 (2002), 唐 의 東 北 亞 戰 略 과 三 國 의 對 應, 軍 史 47, 국방부군사편 찬연구소, 257~260쪽 ; 임기환(2003b), 報 德 國 考, 강좌 한국고대사 10,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302~305쪽. 70 노태돈(2009), 앞의 책, 301~303쪽. 71 三 國 史 記 卷 8, 新 羅 本 紀 8, 神 文 王 12 年.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111

112 일 72 은 내정 간섭이라고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신문왕대의 묘호 논 란보다 훨씬 강도가 강했고 이 요구는 당의 의도대로 관철되었다. 73 신라에 대한 군사 징발도 이루어졌다. 성덕왕 32년(733) 발해 무왕 ( 武 王 )이 등주( 登 州 )를 공략하자 당에 숙위하던 김사란( 金 思 蘭 )을 보내, 신라군으로 하여금 발해의 남변( 南 邊 )을 공격하도록 요구했다. 신라는 이에 응했고 큰 눈과 험한 지형으로 인해 군사의 반 이상을 잃고 돌 아왔다. 74 당시 발해-신라 관계가 우호적이지는 않았지만, 645년에 신 라와 당이 합동 작전을 벌여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처럼 신라가 발해와 직접 적대하는 관계는 아니었다. 당의 일방적인 군사력 동원의 성격이 강하다고 생각된다. 하대에는 당 내지에 대한 파병까지 이루어졌다. 헌덕왕( 憲 德 王 ) 11년(819) 당나라 운주( 鄆 州 )에서 이사도( 李 師 道 )가 반란 을 일으키자 헌종은 신라에 토벌을 위한 지원군을 요청했고, 신라는 갑병( 甲 兵 ) 3만이라는 대군을 파견했다 三 國 史 記 卷 8, 新 羅 本 紀 8, 聖 德 王 11 年 3 月, 大 唐 遣 使 盧 元 敏 勑 改 王 名. 73 三 國 史 記 卷 8, 新 羅 本 紀 8, 聖 德 王, 立 諱 興 光 本 名 隆 基 與 玄 宗 諱 同 先 天 中 改 焉 ( 唐 書 言 金 志 誠 ). 74 三 國 史 記 卷 8, 新 羅 本 紀 8, 聖 德 王 32 年. 75 三 國 史 記 卷 10, 新 羅 本 紀 10, 憲 德 王 11 年, 秋 七 月 唐 鄆 州 節 度 使 李 師 道 叛 憲 宗 將 欲 討 平 詔 遣 楊 州 節 度 使 趙 恭 徵 發 我 兵 馬 王 奉 勑 旨 命 順 天 軍 將 軍 金 雄 元 率 甲 兵 三 萬 以 助 之. 이에 대해서 李 基 東 (1984), 신라 下 代 賓 貢 及 第 者 의 出 現 과 羅 唐 문인의 交 驩 - 高 麗 中 期 小 中 華 成 立 의 前 史 로서, 新 羅 骨 品 制 社 會 와 花 郞 徒, 一 潮 閣, 283쪽에서는 819년 2월에 이미 이사도가 죽었 으므로 파병 관련 사실은 818년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고, 신라군이 실제 토 벌에 참여했을지도 의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池 培 善 (2007), 淄 靑 節 度 使 李 師 道 에 대하여- 元 和 13년(818)부터 멸망까지, 東 方 學 志 140, 81~86쪽에서는 삼국사기 의 기록을 사실로 인정하여, 819년 2월 이전에 당이 사절을 파견했 고 5월경에 신라에 도착하여 파병을 요청하자 두 달간 병력을 동원하여 파병 했다고 보았다. 단 이들은 이사도가 이미 죽었으므로 반란 진압에 참여할 수 는 없었고, 淄 靑 藩 鎭 의 치안을 담당하다가 일부가 정착하여 新 羅 坊 을 형성했 으리라고 추정했다. 여하튼 당나라 내지의 반란에 대해 신라가 진압군을 파견 11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13 당과의 책봉관계가 안정되자 문화적 모화의식( 慕 華 意 識 )까지 나타난 다. 통일신라 초에 세워진 김유신비( 金 庾 信 碑 )와 하대의 도당유학생인 박거물( 朴 巨 勿 )이 지은 삼랑사( 三 郞 寺 ) 비문( 碑 文 ) 에는 신라 왕성( 王 姓 ) 의 기원을 건국설화에 나오는 금독( 金 櫝 ) 이 아니라, 중국 전설상의 제 왕인 소호금천씨( 小 昊 金 天 氏 )에 부회하여 서술하고 있다. 76 최치원( 崔 致 遠 )은 당 중심의 화이관( 華 夷 觀 )을 바탕으로 하여 신라가 군자국( 君 子 國 ) 이고 77 욱이( 郁 夷 ) 임을 78 자부했다. 고려 중엽에는 선도산( 仙 桃 山 )의 신모( 神 母 )가 원래 중국 제실( 帝 室 )의 황녀( 皇 女 )인데, 해동으로 와서 혁거세와 알영을 낳아 신라를 건국했다는 전설까지 유포되고 있었다. 이는 결국 신라가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인데, 이 전설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통일신라를 번속국( 藩 屬 國 )으로 보는 한 것은 사실로 인정해야 할 듯하다. 단 그 배경에 대해서는 당 측의 요청과 함께 신라 王 權 의 이해관계, 그리고 安 史 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파견된 위구르의 원군에게 장안과 낙양의 약탈이 허용되고 戰 費 가 지원된 것처럼 新 羅 軍 도 傭 兵 의 성격이 있는지에 대해서 차후에 검토가 필요하다. 76 三 國 史 記 卷 28, 百 濟 本 紀 6, 義 慈 王, 論 曰 新 羅 古 事 云 天 降 金 樻 故 姓 金 氏 然 而 又 聞 新 羅 人 自 以 小 昊 金 天 氏 之 後 故 姓 金 氏 ( 見 新 羅 國 子 博 士 薛 因 宣 撰 金 庾 信 碑 及 朴 居 勿 撰 姚 克 一 書 三 郞 寺 碑 文 ). 77 하일식(2000), 당 중심의 세계질서와 신라인의 자기인식, 역사와 현실 37, 한국역사연구회 ; 金 哲 埈 (1971), 三 國 時 代 의 禮 俗 과 儒 敎 思 想, 大 東 文 化 硏 究 6ㆍ7,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金 哲 埈 (1975) 韓 國 古 代 社 會 硏 究, 知 識 産 業 社, 183쪽은 738년 당나라의 弔 慰 使 가 新 羅 號 君 子 國 知 詩 書 운운한 것이, 공동체 질서가 유지되고 있던 東 夷 사회를 흠모하던 孔 子 이래의 전통적인 동이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한편 李 成 珪 (2005), 앞의 글, 105~109쪽은 통 일신라의 渡 唐 留 學 生 들이 신라 국명 앞에 有 唐 을 관칭한 것은 이들의 개인 적인 문화적 귀속의식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有 唐 은 당나라의 雅 稱 이 고 공식 명칭은 大 唐 이라고 하였는데[ 李 成 珪 (2005), 앞의 글, 108~109쪽], 崔 致 遠 이 찬술한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에는 大 唐 新 羅 國 故 鳳 巖 山 寺 敎 諡 智 證 大 師 寂 照 之 塔 碑 銘 幷 序 라고 하여 대당 을 칭했고, 이 밖에도 몇몇 사례가 더 확인된다. 78 崔 致 遠 撰, 鳳 巖 寺 智 證 大 師 寂 照 塔 碑.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113

114 당인( 唐 人 )의 인식이 송대( 宋 代 )까지 전해져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비해서 발해와 당의 관계는 보다 남북조시기의 책봉관계에 가 깝다. 발해 역시 건국 초부터 당의 책봉을 받고, 국가체제를 정비하면 서 관복제( 官 服 制 )도 도입했다고 한다. 79 하지만 이후에도 독자 연호를 계속 사용하는 등 발해는 왕국( 王 國 )과 황제국( 皇 帝 國 )의 이중체제를 취하였다. 80 최근 중국 길림성( 吉 林 省 ) 화룡시( 和 龍 市 ) 용두산고분군에 서 발견된 발해 무덤에서도 문왕( 文 王 )의 비( 妃 )를 효의황후( 孝 懿 皇 后 ) 로, 간왕( 簡 王 )의 비를 순목황후( 順 穆 皇 后 ) 로 적은 묘지( 墓 誌 )가 발굴 됐다고 한다. 81 이러한 독특한 체제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한 결과인 데, 발해가 당나라와 무력 충돌을 벌이면서도 이를 성공적으로 극복 했던 사실이 중요하다고 본다. 건국 과정에서부터 당과의 항쟁 경험이 있었고, 특히 732년에는 당나라의 등주( 登 州 )를 선제공격하기도 했던 것이다. 또 당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말갈의 흑수부( 黑 水 部 )와 철리부 ( 鐵 利 部 )를 복속시켰으며, 안사( 安 史 )의 난( 亂 )을 틈타 같은 피책봉국인 신라를 일본과 함께 협공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외교와 교역의 범위 도 넓어 돌궐ㆍ일본은 물론 일본 열도의 본주 북부 이북에 거주하는 에미시[ 蝦 夷 ] 집단 및 길리야크인[ 流 鬼 ]과도 교섭을 벌였다. 82 하지만 신라는 나당전쟁에서 승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에 대한 당의 구속력은 보다 강력했다. 비록 기미주 지배가 허구화 되었지만 앞서 지적한 양상은 남북조시기의 한중관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 다. 책봉관계로 표현되는 상하질서가 내용과 실질상으로 분명히 강화 79 전현실(2008), 渤 海 수입 衣 料 연구, 동북아역사논총 22, 동북아역사재단. 80 宋 基 豪 (1995), 渤 海 政 治 史 硏 究, 一 潮 閣, 177~194쪽. 81 세계일보 ( ), 인터넷판. 82 Chang-seok Kim(2010), 앞의 글. 11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15 되었다. 내정에 대한 간섭 시도와 군사력 행사에 대한 규제가 나타나 는 것이다. 83 신라는 당의 기미정책은 전쟁까지 불사하면서 좌절시켰지 만, 내치( 內 治 )와 외정( 外 政 )의 자주성 보장으로 특징지어지는 남북조 시기의 한중관계를 복원하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재언하건대, 이러한 상황은 당나라의 집요한 동북아 전략과 함께 이 에 부응한 신라의 정책 방향을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나당동맹 의 협상 과정에서 신라의 법식( 法 式 )과 관복( 官 服 )을 고쳐 중국 제도를 따르겠노라고 한 것은 신라 국왕이 당 황제의 신하임을 자임하고 당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될 것임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84 당의 입 장에서는 군사( 軍 事 )를 지원( 支 援 )해 주는 대신 신라마저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새로운 국제관계의 틀을 구축할 수 있고, 이에 대해 신라 자신도 별로 부정적이지 않다는 외교적 판단을 내렸던 것 같다. 7세기 중반의 급박한 국제정세 속에서 양국은 당장의 이해관계는 일치했지 만, 정작 양국 간의 관계 설정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계산을 했던 셈 이다. 하지만 그 근본 동인은 삼국 간의 역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백제 무왕대의 거듭된 공략과 함께 고구려까지 이에 가세하여 국망의 위기 에 몰린 신라로서는 협상 조건을 따질 여력이 없이 지원군을 확보하는 것이 초미의 과제였던 것이다. 또 당에 가기 전에 고구려ㆍ왜와 먼저 협상을 시도한 사실도 이 시기 당과의 책봉관계가 이후 통일신라의 대 83 이 시기에는 都 護 나 都 督 의 통제가 불가능했으므로 그 대신 신라 왕족으로서 당 조정에 宿 衛 하던 인물들을 활용한 듯하다. 金 仁 問, 金 思 蘭 등의 활동과 신라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이러한 시각에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84 임기환(2003a), 앞의 글, 43쪽은 新 羅 가 남북조시기의 책봉질서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전략이나 인식이 결여되었을 것이라 고 이해했다.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115

116 당관계를 규정한 것이 아니었음을 잘 보여준다. 당과의 책봉관계보다 는 국제정세에 대한 신라의 독자적 판단이 우선했다. 신라로서는 나당 전쟁 승전 이후에도 당이 잠재적 적국으로 남아 있었고, 북방에 발해 라는 변수가 등장하여 이를 견제해야만 하는 새로운 상황이 조성된 것도 당의 압력을 쉽사리 거부할 수 없는 배경이 되었다. 통일신라의 대당 종속성이 심화된 이유로 또 하나 들 수 있는 것은 교류권( 交 流 圈 )의 제한이다. 신라는 6세기 전반까지 백제( 百 濟 )에 서변 이 가로막혀 선진문물을 수용할 수 있는 창구가 차단되어 있었다. 한 강 유역으로 진출한 뒤에도 문화적 선진지역으로서는 남북조 정권 및 고구려ㆍ백제와 교섭하는 데 그쳤고, 그밖에 가야( 加 耶 )와 왜 정도가 교섭 대상이었다. 수당시기의 고구려의 교류 권역과 비교해 보면 그 범위가 얼마나 협애한지 드러난다. 이러한 여건에서 고구려까지 멸망한 후에는 신라 편에 서서 당을 견제해 줄 세력은 더 이상 없었던 것이 다. 예컨대 나당전쟁기의 토번은 당나라의 서변을 공략해 줄 유력한 세력이었고, 실제 당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음에도 85 신라가 이를 주도 하여 활용할 수 없었던 이유는 신라의 전통적인 교섭권이 그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발해와는 적대와 교류 관계가 교차했고, 당의 이이 제이( 以 夷 制 夷 ) 정책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문화 양상을 보더라도 신라는 삼국시기부터 시리아ㆍ페르시아ㆍ소그 드 등 서역 나아가 이슬람의 문물까지 유입되었으나, 중원 왕조와 고 구려를 통한 간접 전래이거나 이방( 異 邦 )의 예인( 藝 人 )ㆍ상인( 商 人 )들이 신라를 방문함으로써 유입된 것이다. 86 통일신라시기에도 정부 차원의 85 서영교(2006), 羅 唐 戰 爭 史 硏 究 -약자가 선택한 전쟁, 아세아문화사, 85~95쪽. 86 金 昌 錫 (2006), 8~10세기 이슬람 제종족의 신라 來 往 과 그 배경, 韓 國 古 代 史 硏 究 44, 서경문화사. 11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17 교섭은 당ㆍ일본ㆍ발해 정도였다. 인도 등 원격지와의 문화 교류와 교역 은 승려(僧侶)ㆍ민간상인(民間商人) 등 개인에게 맡겨졌다. 협소한 교류권 이 당 주도의 일방적 질서에 편입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 였으며, 이는 다시 신라의 교섭 범위를 더욱 축소시키는 작용을 했다. 결론적으로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볼 때 삼국시기 남북조 정권과의 관계는 책봉관계의 형식과 내용이 괴리할 정도로 대등한 관계였으며, 동아시아 권역 내의 다양한 정치체들 간의 다대다(多對多) 교섭이 이 루어졌다. 수당제국(隋唐帝國)이 들어서면서 중국 대륙은 중원 정권을 중심으로 단일화 되고 그 과정에서 고구려도 멸망했다. 이제 복수의 기미주를 포함하는 당 제국과 신라ㆍ발해ㆍ일본의 일대다(一對多) 관계 로 국제정세가 일변했다. 중국 측이 일원화되고 남만주와 한반도 지역 이 분열된 상황에서 남북국이 대립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는 통일신라 의 대당(對唐) 종속성을 심화시키는 대외 여건이 되었다. IV. 맺음말 니시지마 사다오[四嵨定生]의 동아시아세계론은 전 근대 시기의 독 자적인 역사 세계로서 동아시아를 설정하고, 공통의 문화요소를 추출 하여 비교사(比較史)의 관점을 환기했다. 그리고 공통의 문화권이 형성 된 배경에 책봉관계(冊封關係)라는 정치적 질서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하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117

118 여 문화사와 정치사를 통합적으로, 국제적 시야에서 조망할 수 있게 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한계에 대한 비판도 일찍이 제기되었다. 비판의 요점은 중국 중심의 관점이라는 것이고, 과연 이로써 동아시아세계의 범위와 내부구조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 懷 疑 )가 주류를 이루었다. 더불어 니시지마 사다오가 제시한 4대 지표가 수도작( 水 稻 作 ) ㆍ우경( 牛 耕 )ㆍ양잠( 養 蠶 )과 견직( 絹 織 )ㆍ수레ㆍ기마( 騎 馬 ) 등 중국과 직결 되지 않는 여러 요소를 도외시했다는 점, 지나친 장기 지속의 시각이 라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의 개념은 한국 고대사의 전개 를 보다 넓은 시야에서 입체적으로 고찰하는 데 여전히 유효하다. 다 만 중국 중심 그리고 책봉관계를 통한 정치적 질서에만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고, 이를 상호 외교 교섭과 문화 교류 그리고 대외교역 등을 통해 구성되는 교류의 권역으로 보다 넓게 설정해 보았다. 동아 시아가 본질적으로 역사적 범주이며, 따라서 그 범위와 구조가 변동 하는 유동적인 공간이라는 것도 중요하다. 이러한 전제에서 볼 때 고 대 동아시아 의 범위는 한반도와 남만주 지역의 국가와 제종족, 중원 ( 中 原 )과 강남의 한족 왕조, 5호의 유목 왕조, 거란ㆍ해( 奚 ), 말갈( 靺 鞨 ), 돌궐( 突 厥 )ㆍ유연( 柔 然 )ㆍ설연타[ 鐵 勒 ], 토번( 土 蕃 )ㆍ토욕혼( 吐 谷 渾 ), 강국( 康 國 ), 왜( 倭 ), 에미시[ 蝦 夷 ] 등의 종족과 정치체를 포괄한다. 고대 한중관계에 대한 기왕의 논의는 크게 종주( 宗 主 )-번속( 藩 屬 ) 관계론과 실질적 대등관계론으로 나눌 수 있다. 양자는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지만, 모두 책봉관계의 내용과 형식을 분리해서 보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또 특정 시기의 책봉관계를 전형으로 상정하기도 했다. 이 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책봉관계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통일 11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19 적 파악이 필요하고, 그것을 변화하는 역사적 실체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시각에서 남북조시기의 한중관계를 검토하면, 책봉관계의 상 하질서와 피책봉국의 독립성이 공존한다는 기존 견해가 사실임을 확인 할 수 있다. 문제는 이처럼 책봉질서의 이념과 현실이 괴리하게 된 배 경인데, 중국 측은 외국 군장( 君 長 )에게 책봉호를 수여함으로써 화이 론을 유지하면서 이적( 夷 狄 )과의 교섭이 가능하게 되었고, 책봉을 통 해서 자신의 세력권을 과시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한국 측으로 서는 집권체제를 형성하는 데 외부로부터의 선진문물의 수입과 군사 안보가 필요했다. 그렇지만 그 원천은 중국 왕조에만 국한되지 않고 광역에 걸쳐 있었으므로 중국 중심의 책봉질서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수당제국이 성립하면서 동아시아의 구조와 제국 간의 관계는 일변 한다. 이들은 일원적 세계질서를 지향하여 무력 정복과 기미주 설치를 강행했다. 신라는 643년부터 당의 제후국을 자처하고 그 법식과 예제 를 수용함으로써 기미주화 시도의 빌미를 제공했다. 즉 당나라는 신 라에 대해서 군사 정복 없이도 기미주화가 가능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신라는 전쟁까지 불사하며 이에 대응하여 당의 기미지배는 좌절시켰으 나, 여러 자료에서 확인되듯이 남북조시기의 책봉질서보다 당에 대한 종속성은 심화되었다. 이렇게 실질적인 상하관계가 가능했던 이유는 당나라가 구상한 책 봉질서가 상당한 정도로 실현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삼국 간의 상쟁 이 격화되면서 신라가 국가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당 중심의 국제질 서에 편입될 수밖에 없는 정세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근본 동 인은 삼국의 국제관계에서 발생했다. 나당전쟁( 羅 唐 戰 爭 ) 종전 후에도 당의 군사 위협이 잠재했으며 신흥 강국인 발해와 적대한 것도 작용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119

120 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신라의 대외 교섭권이 협애하여 당의 동방전 략에 주도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던 점도 유의해야 한다. 12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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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6~8세기의 동아시아와 한중관계 125

126 10~12세기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윤영인 영산대학교 I. 머리말 II. 10~12세기 다원적 국제질서 III. 10~12세기 한중(고려와 거란 금) 관계의 특징 IV. 10~12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 범위 설정 V. 맺음말

127 I. 머리말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연구는 일반적으로 중국(한족)적 세계 질서(Chinese World Order) 혹은 조공체제(Tribute System) 의 틀로 접 근해 왔다. 1 조공체제는 유교적 이념에 의거한 한족 중심적 문화론 (culturalism)으로 중국(즉 중원에 위치한 [한족]왕조) 의 우월성을 강조하 면서 다른 국가와 지역을 선진 중화문명에 동화되어야 할 대상으로 설정한다. 2 물론 조공체제 이론은 장기간 지속된 송과 명 등 한족 왕 조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일방적이자 자의적 입 장이 농후한 한문기록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역사적 현실을 왜곡했 고 국제질서의 성립과 전개에 보이는 대립과 충돌을 최소화하기도 한 다. 하지만 이러한 조공체제 용어의 껍질을 벗기고 그 역사적 배경을 고찰하면, 서로 다른 정치 문화 역사의 전통을 가진 국가와 집단 간 에 형성된 다원적 국제관계의 세력균형, 실리주의, 호혜주의의 실상이 드러난다. 10~12세기 한중관계(고려와 거란 금 관계) 연구를 조공체제 의 틀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조공체제 에 의한 국제질서가 계속 존재했다고 하 1 조공ㆍ책봉체제 의 이론은 John K. Fairbank and S. Y. Teng(1941), On the Ch ing Tributary System,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6 [John K. Fairbank ed.(1968), The Chinese World Order: Traditional China s Foreign Relations, Cambridge:Harvard University Press]; 西 島 定 生 (1983), 中 國 古 代 國 家 と 東 アジア 世 界, 東 京 : 東 京 大 學 出 版 社 등에 정리되어 있다. 2 피터윤(2002), 서구 학계 조공제도 이론의 중국 중심적 문화론 비판, 아세 아연구 45-3,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0~12세기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127

128 는 가정 을 사실 로 인정하고 시작하는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또 조공체제 로 동아시아세계를 정의하는 것은 역사의 다양성을 간과 하고 한족 중심적 유교사상에 의거하여 명목적 국제질서의 범위를 경 제ㆍ문화권과 일치시키는 인식론적 문제점을 보여 준다. 그리고 조공 책봉을 통해 설정된 동아시아세계는 중원방식을 수용한 문명 과 거부 한(아직 수용하지 않은) 야만 을 구분하는 것으로 근대에 유럽인들이 자신들을 차별화하기 위해 유럽을 특별한(special) 별개의 문명권으로 규정한 것과 논리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10~12세기 고려와 거란 금과의 국제관계에 대한 기존의 연구에서 극복해야 할 대상은 바로 이 조공체제 이론이다. 10~12세기 중국 을 통치한 한족 왕조 송은 동등한 국가 중 하나(China among Equals) 였으며 이 시기에는 다국체제(Multistate System) 와 맹약관계 (Treaty Relations) 에 의거한 국제질서가 존재했다. 3 특히 작은 제국 (Lesser empire) 이었던 송나라 시기의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연구에서 한족 중심적 문화론에 입각한 조공체제 이론의 문제점과 왜곡에 대한 비판이 계속 제기되어 왔다. 4 한국 사학계의 10~12세기 한중관계사 연구는 고려를 중심에 두고 이웃 국가와의 관계를 밝히는 작업이지만 일국사 중심의 편견을 극복하는 객관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특정 시기 3 Morris Rossabi ed.(1983), China among Equals: The Middle Kingdom and Its Neighbors, 10 th ~14 th Centuries, Berkeley: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pp. 225~229;Herbert Franke and Denis Twitchett eds.(1944),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 6, Alien Regimes and Border States, Cambridge: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16~21. 4 조공체제의 문제점에 대한 이론적 비판은 James L. Hevia(1995), Cherishing Men from Afar: Qing Guest Ritual and the Macartney Embassy of 1793, Durham and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pp. 9~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29 의 국제질서 범위와 특성을 규명하고 그 안에서 작용한 고려의 대외 정책을 살펴야 할 것이다. 또 이 시기 한중관계 를 중국과 한국이라는 현대국가의 국사영역의 일부로 접근하는 것은 당시 내륙아시아 세계를 구성한 초원, 중원, 만주, 한반도는 물론 대륙의 서남부와 동남아시 아, 중앙유라시아 그리고 일본 등을 모두 포함하는 광활한 지역의 국 제질서를 현재주의에 입각하여 축소 단순화하는 것이다. 5 이 글에서는 이러한 편견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10~12세기 다원적 국제관계 에서의 한중관계 서술을 위한 국제질서 범위 설정의 문제와 조공ㆍ책봉체제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 고자 한다. 5 스탠든(Naomi Standen)은 10세기 거란과 송의 관계를 분석하면서 그 시기 에는 정치적 지리적 민족적 이상적 일관성을 가진 중국 은 물론 현대적 개념 의 민족 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시대착오적 개념의 적용을 올바른 역사 인식의 가장 큰 장애물로 인식했다. 또한 중국(China) 이라는 모호한 용어는 中 華 多 民 族 國 家 라는 현대적 개념을 그러한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 에 일률적으로 소급 적용한 것이다. 스탠든은 중국 대신 북방(North) 과 남 방(South) 을 사용한다[Naomi Standen(2007), Unbounded Loyalty : Frontier Crossings in Liao China, Hawaii University Press, p. 31]. 10~12세기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129

130 II. 10~12세기 다원적 국제질서 10~12세기 다원적 국제관계의 형성에는 만주, 몽골 그리고 중원 북부를 장악한 북방민족의 정복 왕조 6 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정복 왕조는 북방민족의 정체성과 전통을 토대로 이원적 통치체제를 실행하 면서 기마병으로 구성된 우월한 군사력으로 한족 왕조를 위협하여 국 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물자를 획득했다. 그러나 정복 왕조가 항상 정복 만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호전적 인 북방민족은 세폐( 歲 幣 ) 등 의 형식으로 안정된 물자를 공급받는 맹약체제가 성립되면 평화로운 국제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실제 맹약체제를 파기하고 국제정세의 변 화를 꾀한 것은 여진을 불러들여 거란을 치고 또 몽골과 연합하여 여 진을 공격한 문치주의( 文 治 主 義 ) 지향의 한족 왕조 송이었다. 이 시기 국제관계는 북방에서 흥기한 정복 왕조가 중원의 한족 왕 6 비트포겔(Karl Wittfogel)은 거란 金 元 淸 등 북방민족이 세운 제국들이 본 래의 유목민족적 사회조직과 전통 문화 종교 등을 유지하면서 대다수의 피 통치 한족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한 이원적 통치체제를 실시했다는 정복왕조 론 을 주장했다[Karl Wittfogel and Chia-sheng, Feng(1949), The History of Chinese Society:Liao(907~1125), Philladelphia : The America Philosophical Society, pp. 1~32 참조]. 비트포겔의 정복왕족론 은 서구 학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1994년 출판 당시 서구 학계 연구의 총결산으로 인정되는 Herbert Franke and Denis Twitchwtt eds.(1994)의 기본 관점도 비트포겔의 시각과 대체로 일치한다. 하지만 중국 학계는 이러한 정복왕조론 을 20세기 초 일본 학자 시라토리 쿠라키치[ 白 鳥 庫 吉, 1865~1942] 등의 일본 군국주의 혹은 제 국주의 논리를 계승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李 錫 厚 外 (2005), 遼 西 夏 金 史 硏 究, 福 建 人 民 出 版 社, 72~83쪽]. 13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31 조와 남북으로 대치했으며 그 주위로는 고려, 대하, 남조, 티베트 7 그 리고 북방 초원의 여러 부족들도 국제질서의 한 축으로 세력균형을 유지했던 복잡한 양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국사는 일반적으로 고려 전기 대외관계사를 고려-송, 송-거란, 거란-고려 라는 일련의 양자 관계로 나누어 접근하고 있으며, 조공체제에 대한 이념적 집착을 보여 주듯 고려-송의 관계를 강조하고는 했다. 또 고려와 한족 왕조 송(남 송)과의 관계에서는 문화와 경제교류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도, 정복 왕조 거란(금)과의 관계는 정치와 군사적 충돌이라는 부정적 측 면에서 접근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송의 대( 對 )고려정책 연구에서는 군 사적 정치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고려의 대송정책은 초기의 군 사적 정치적인 성격에서 거란의 직접적인 위협이 감소한 후 점차 문화 적 교류와 무역에 비중이 주어졌다고 주장하여 결국 송의 정책에는 정치적인 면을, 고려의 정책에는 문화적인 면을 강조하는 한족 중심적 문화론이 드러난다. 8 하지만 고려가 한족 왕조 송을 국제질서의 실제 적 혹은 이상적인 동아시아의 중심으로 인식했다는 근거는 없으며 고 려-송의 관계는 항상 거란, 금과의 관계에 부차적으로 진행되었다. 거란과 충돌하면서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실현하는데 실패한 한 족 왕조 송나라는 군사적 정치적 열세를 애써 지우려고 시도하여 이 상적인 조공체제를 상상 조작했다. 거란을 동등한 상대로 인정해야만 했던 송나라의 진종은 천서( 天 書 ) 의 조작과 태산( 泰 山 )의 봉선( 封 禪 )제 7 티베트는 강력하고 공격적인 군사국가로 내륙아시아 정치에 매우 중요한 역 할을 담당했다. Christopher I. Beckwith(1987), The Tibetan Empire in Central Asia: A History of the Struggle for Great Power among Tibetans, Turks, Arabs, and Chinese during the Early Middle Ages, Princeton:Princeton University Press, pp. 173~ 피터윤(2002), 앞의 글. 10~12세기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131

132 사를 통해 송의 정치적 정통성과 문화적 우월성을 과시하려 했다.9 또 맹약이 체결된 1005년에 시작하여 10여 년 만인 1014년에 완성된 책 부원구(冊府元龜) 외신부(外臣部)에서는 편찬을 담당한 송나라의 관료 들이 중원의 대외관계를 시종일관 주변 에 대한 한족 왕조의 간접통치 를 의미하는 기미(羈硏) 와 회유(懷柔) 등의 용어로 묘사했다.10 나아 가 송사(宋史) 는 먼 곳에서 조공 하러 온 주변의 사람들을 중원 왕 조가 어루만진다는 회유원인(懷柔遠人) 원칙을 가장 철저하게 지킨 왕 조가 바로 송이었다고 찬양하기도 했다.11 그러나 주지하듯이 송은 거 란으로부터 연운(燕雲) 16주(州)를 수복 하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12세기 초에는 새로이 흥기한 여진제국에 중원의 중심부인 회하 이북 지역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송이 거란, 금 그리고 대하와는 몇 차례 치 열한 전쟁을 벌이면서도 유독 고려와는 아무런 무력적 충돌 없이 우 호 관계를 유지한 사실을 조공체제 와 양국의 문화적 유대감에 연결 하여 해석하려고 시도한다. 특히 송나라 태종이 985년 오래 중원의 풍속을 사모한 12 고려 왕에게 조서를 보내 거란을 공격하자고 제안한 9 Jing-shen Tao(1988), Two Sons of Heaven:Studies in Sung-Liao Relations, Tucson : University of Arizona Press, p. 37; 胡小偉 天書降神 新議-北宋 與契丹的文化競爭, 西北文化硏究 36, 44~52쪽. 10 Wang Gung - w u는 冊府元龜 의 돌궐과 위구르 조공 기록이 허구였음 을 지적한다[Gung-wu Wang(1983), The Rhetoric of a Lesser Empire : Early Sung Relations with Its Neighbors, in Morris Rossabi, ed., China Among Equal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p. 58]. 11 先王柔遠之制 豈復有加於是哉 ( 宋史 중화서국 교점본 ~13982). 12 惟王久慕華風 素懷明略 效忠純之節 撫禮義之邦 而接彼犬戎 罹於蠆毒 舒泄積 忿 其在玆乎 ( 高麗史, 3 :8b4~6). 몽골제국시기에 편찬된 宋史 에도 같은 기사가 보이지만 북방민족에 경멸적인 而接彼犬戎 의 문구를 보다 중립적인 而接彼邊疆 으로 바꾸어 표현했다( 宋史, 중화서국 교점본 ). 13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33 기록에 주목하지만 이 기록은 송나라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며 고 려는 태종의 제의를 거절했다. 또 설사 고려가 송나라의 문화를 흠모 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러한 문화적 요인이 북방 변경의 안보라는 중 요 안건에 우선될 수 없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고려 조정은 변 화하는 국제질서의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실리주의를 추구 했음을 새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의 입장에서 송은 거란, 금, 송, 일본 13 등과 마찬가지로 대외관계의 접촉 대상 중 하나였을 뿐이며 결코 국제질서의 중심으로 인식하지 않았고 고려와 직접 국경을 마주 하지 않은 송과의 관계는 거란이나 금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거란과 금이라는 공통의 적과 대면한 고려와 송은 서로를 잠재적 동 맹국으로 보았지만 직접적인 군사적 위협에 처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적 극적인 개입을 기피했다. 몇 차례 송과의 정식 교류를 재개하려고 했던 고려의 시도 14 역시 중국 에 대한 문화적 동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송의 지원을 받아 지정학적 균형을 유지하고자 한 실리주의적 정책에 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송나라는 고려를 책봉 하는 종주국 의 위상 을 표명하면서도 고려의 군사지원 요청에는 단 한 번도 적극적으로 응 하지 않았다. 또 정복 왕조 거란과 금도 중원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기 전에 그 주변의 고려와 대하 등의 국가와 먼저 타협을 이루어 고려와 한족 왕조의 동맹을 차단하고 배후의 안전을 도모했다. 10~12세기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는 국제 역관계의 연동성 13 그러나 10세기 초에서 13세기 몽골의 침략 때까지 대륙의 정치로부터 고립되었 던 일본[Bruce L. Batten(2003), To the Ends of Japan: Premodern Frontiers, Boundaries, and Interactions, University of Hawai i Press, pp. 149]은 고 려 대외정책의 주요 대상이 아니었다. 14 박종기(1998), 11세기 고려의 대외관계와 정국운영론의 추이, 역사와 현실 30, 한국역사연구회. 10~12세기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133

134 과 세력균형 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15 지정학적 시각에서 볼 때 중원 에 위치한 왕조들이 순탄한 관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으며 국경을 마주한 대하-송-거란의 충돌은 다원적 국제질서의 현실을 잘 보여준 다. 고려와 종종 비견되는 탕구트 대하국의 군주 이원호( 李 元 昊 )는 1038년 중원 왕조 당으로부터 하사받은 이( 李 )씨 성을 외명( 嵬 名 )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 皇 帝 )를 칭하면서 송나라 조정에 동등 한 지위를 요구했다. 16 그러나 전연의 맹약에서 이미 거란과의 동등 관계를 인정 했지만 조공체제의 허구적 이상에 아직 미련을 가지고 있었던 송은 또 하나의 동등한 황제 를 거부했고 양국 사이에는 치열한 충돌이 일 어났다. 송과는 달리 거란은 조공체제 의 허식에 크게 집착하지 않았 다. 물론 거란도 송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을 황제국 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대하의 군주가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 황제 를 자칭하는 것에 개의치 않았으며 고려가 내부적으로 천자국 을 자처한 것을 문 제 삼지 않았다 세기 전반에 송과 하가 충돌했을 때, 제3자의 입장에 있었던 거 란이 오히려 송으로부터 더 많은 액수의 세폐를 획득했는데, 이는 거 란과 하의 공조를 두려워한 송이 먼저 거란에 세폐의 증액을 제의하 면서 개입을 사전에 차단한 것이었다 년 협상에서 거란은 송과 15 이러한 다원적 국제관계에서의 세력균형은 고구려시기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서도 찾아볼 수 있다[노태돈(2006), 고구려와 북위 간의 조공 책봉관계에 대 한 연구, 여호규 외, 한국 고대국가와 중국왕조의 조공 책봉관계, 고려연구 재단, 79~84쪽]. 16 金 渭 顯 (1995), 西 夏 與 宋 契 丹 之 關 係 (986~1048), 明 知 史 論 7, 明 知 史 學 會, 85~92쪽. 17 심재석(2002), 고려국왕 책봉 연구, 혜안, 34쪽;노명호(1999), 고려시대의 다원적 천하관과 해동천자, 한국사연구 105, 경인문화사, 15쪽. 18 遼 史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35 대하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전의 전연지맹( 澶 淵 之 盟 ) 에서 합의한 액수에 추가로 10만 필의 비단과 10만 량의 은을 받게 되었다. 19 어느 학자들은 이 시기 송과 거란의 관계를 외교적 동등관 계(diplomatic parity) 라고 보기도 하지만, 20 수세에 몰린 송의 국제적 위상은 거란이 송의 세폐 를 공( 貢 ) 으로 분명하게 표시한 기록에서 짐 작할 수 있다. 21 하지만 송과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거란이 이익을 독차지하자 대하는 불만을 품게 되었고 거란이 협 상을 중재하기에 이르자 1043년에는 종주국 거란과 전쟁을 벌이게 되 었다. 그러자 송은 대하와 화해하여 1044년 서조( 誓 詔 ) 를 통해 대하 군주 외명원호( 嵬 名 元 昊 )를 하국주( 夏 國 主 ) 22 에 책봉하고 세사( 歲 賜 ), (세폐와 동일한 성격)로 25만 5천 액수에 해당하는, 비단과 차를 약속 했다. 23 여기서 서표( 誓 表 ) 와 서조( 誓 詔 ) 라는 혼성적인 외교적 문서가 보이는데 서( 誓 ) 가 서약을 통한 동등 관계를 나타낸다면 표( 表 ) 와 조 ( 詔 ) 는 위계적인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24 즉 공식 외교문서의 명칭에 서도 이 시기 국제관계가 조공체제의 이상적인 모습과는 달랐음을 보 여준다. 거란은 1044년과 1049년에 대대적인 원정군으로 대하를 공격하지만 19 遼 史 ;Jing-shen Tao(1988), p Morris Rossabi ed.(1983), p 遼 史 , 여기서 주( 主 ) 라는 칭호는 대하 군주를 왕( 王 ) 으로 인식한 송과 皇 帝 의 칭 호를 요구한 夏 의 타협이었다. 23 續 資 治 通 鑑 長 編 ~3706; 宋 史 Michael C. Rogers(1978), The Chinese World Order in Its Transmural Extension:The Case of Chin and Koryŏ, Korean Studies Forum 4, p.8. 10~12세기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135

136 모두 실패한다. 25 그러나 이것이 대하의 군사력이 거란만큼 강력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단지 거란은 고려, 송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으므로 군사력을 대하에 모두 투입할 수 없었던 다원적 국제관계 의 세력균형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두 국가의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송을 압박하여 물자를 확보하려한 양국이 소모적인 전쟁을 지속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거란과 대하의 관계는 외면상 책봉 조공 이었으나 이는 결코 지배 종속 의 관계가 아니었다. 12세기 초 거란이 쇠락하자 송은 전연의 맹약을 파기하고 연운 16 주를 수복하려 시도했다. 거란에 대한 복수심과 연운 16주 수복을 꿈 꾸는 송은 여러 경고를 26 무시하고 여진과 군사동맹을 맺어 1123년에 서서( 誓 書 )를 교환했는데, 그 주요 내용은 송이 연운 16주를 찾는 조 건으로 거란에 제공한 세폐를 여진에게 대신 준다는 것이었다. 27 즉 송 은 이상적인 한족 중심의 국제질서 구축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거 란에 대한 복수와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고 송이 거란을 제거하고자 한 이유는 세폐의 경제적 부담 때문보다는 거란과의 동등 관계가 황제국 이라는 송의 한족 중심적 자부심을 손 상시켰기 때문이었다. 28 그러나 송은 오히려 여진에게 중원 중심부인 25 遼 史 ~31, 高 麗 史 15 :34a6~9, 95 :11b9~12a2 ; 補 閑 集 上, 14a4~6 ; 宋 史 ;Jing-shen Tao(1988), p Herbert Franke(1970), Treaties between Sung and Chin, Études Song/ Sung Studies, series 1, pp. 60~ 세폐의 부담이 송의 경제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는 견해도 있지만[Karl Wittfogel and Chia-sheng Feng(1949), pp ], 맹약체제에서의 경제적 부담인 세폐는 송나라 일개 郡 의 생산량에 불과했고, 전쟁 비용의 1~2퍼센트 혹은 송의 1년 예산에 0.5퍼센트에도 미치지 않았으며, 거란과의 교역 흑자로 충분히 상쇄할 수 있었다고 한다[ 續 資 治 通 鑑 長 編, 中 華 書 局, ;Hon- 13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37 회하 이북마저 상실하고 남쪽의 작은 제국에 만족해야 했다. 거란을 정복한 후 중원북부의 중심지역과 많은 한족 인구를 통치하 게 된 금은 스스로를 국제질서의 중심으로 인식했지만, 29 다원적 국제 질서의 세력균형을 재편하지 못했다. 대하는 거란과 금의 충돌에서 거 란을 지원했지만 송과 대치하고 있던 금은 대하와의 충돌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1124년 대하 서북쪽에 거란의 황족인 야율대석이 세 운 카라키타이[서요( 西 遼 )] 30 는 내륙아시아의 지정학적 상황을 바꾸어 chiu Wong(1975), Government Expenditures in Northern Sung China (960~1127), Ph. D. dissertation, University of Pennsylvania, p. 158;Lien-sheng Yang(1971), Money and Credit in China: A Short History, Cambridge:Harvard University Press, p. 45; Denis Twitchett and Klaus- Peter Tietze(1994). The Liao,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 6, Cambridge:Cambridge University Press, p 전연의 맹약 협상과정에서 송의 황제는 맹약에서 합의한 (은 10만, 비단 20만의) 30만 량의 10배에 이 르는 300만 량에도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利 用 再 三 稱 罪 曰 臣 許 之 銀 絹 過 多 上 曰 幾 何 曰 三 十 萬 上 不 覺 喜 甚 故 利 用 被 賞 特 厚 ( 續 資 治 通 鑑 長 編 58:26a6~8)] 년에 금나라 황제는 왕조의 오행이 土 에 속한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는 데 금이 북송의 火 요소를 이었다는 의미로 북송을 계승한 남송의 정통성 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었다. 즉 남송이 아닌 금나라가 당과 송을 이은 중 국 임을 표명함으로써 남송을 중국(금) 의 변강에 놓인 지방정권으로 전락시킨 것이다[Hok-lam Chan(1984), Legitimation in Imperial China:Discussions under the Jurchen-Chin Dynasty(1115~1234),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30 카라키타이는 1211년까지 88년 동안 지금의 중국 신강지역을 중심으로 탕구 트, 아랄해, 발하쉬호 그리고 힌두쿠시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통치했는데 중국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西 遼 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그런데 거란의 국 호는 거란 문자와 여진 문자 기록에서는 시종일관 카라키타이[ 哈 喇 契 丹, 大 契 丹 ]혹은 키타이[ 契 丹 國, 契 丹 ]로 나타난다. 즉 거란제국의 정식 국호가 거란 어로는 카라키타이였으며 야율대석의 카라키타이 역시 거란의 옛 국호를 그대 로 사용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劉 浦 江 (2001), 遼 朝 國 號 考 釋, 歷 史 硏 究 , 40~43쪽; 劉 鳳 翥 (2006), 從 契 丹 文 字 的 解 讀 談 遼 代 契 丹 語 中 的 雙 國 號 - 兼 論 哈 喇 契 丹, 東 北 史 硏 究 참조]. 10~12세기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137

138 놓았다. 31 카라키타이는 금을 공격하여 거란을 재건하려는 의지를 표 명했는데 만일 금이 대하를 압박한다면 탕구트와 카라키타이의 동맹 을 야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하 역시 카라키타이와의 관 계에 민감하게 대응해야 했기에 명목적 조공을 전제로 금이 대하의 영토를 인정하여 평화로운 관계가 성립되었다. 금은 1127년에는 이전 에 거란과 송에 속했던 몇 변경지역을 대하에 공식적으로 할양했는데 이러한 조치는 금이 압록강 유역의 보주성을 고려가 점령한 후 조공 을 전제로 인정했던 사실 32 과 상통한다. 즉 금은 고려와 하의 명목적 인 조공 에 만족했고 관계는 비교적 평화롭게 지속되었다. 10~12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고려와 대하 그리고 대리국 33 과 카라키타이 등 주변 의 국가들은 이웃국가의 세력을 견제하면서 독자 적이고 실리적인 외교정책을 펴나갔다. 대하의 군사력은 송 거란과의 전쟁에서 이미 그 위력을 보여주며 고려 역시 거란의 대군을 괴멸시켰 으며 문종(1046~1083년)대에는 군비확충과 병제정비를 통해 군사력이 크게 강화되어, 34 12세기 초 여진정벌을 이룰 만큼 상당했다. 35 비슷한 지정학적 상황에 있었던 고려와 대하가 유사한 대외정책을 31 Michal Biran(2005), T he Empire of the Qara Khitai in Eurasian History:Between China and the Islamic World, Cambridge:Cambridge University Press. 32 박한남(1996), 고려 인종대 對 金 政 策 의 성격- 保 州 讓 與 와 投 入 戶 口 推 刷 문제 를 중심으로, 한국중세사연구 3, 한국중세사회학회. 33 John E. Herman(2002), The Mongol Conquest of Dali :The Failed Second Front, in Nicola di Cosmo ed., Warfare in Inner Asian History, Leiden: Brill, pp. 298~ 민현구(1998), 고려전기의 대외관계와 국방정책:문종대를 중심으로, 아세아 연구 99,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9~16쪽. 35 몽골제국은 고려의 군사력을 높이 평가했고 고려와 남송의 군사동맹을 경계했 다. 元 高 麗 紀 事, 臺 灣 : 廣 文 書 局, 1972(19a4~5, 20a7~8). 13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39 펴나간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다만 송사 에서 대하에 비해 충성스러운 조공국 으로 비춰지게 된 이유는 하와 송은 국경을 맞댔지만 고려와 송은 공유하고 있던 국경지역이 없었기 때문에 군사 적 충돌이 없었던 사실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12세기 초에 거란을 정 복한 금이 회하 이북 지역을 차지하면서 송과 하가 국경을 마주하지 않자 남송-대하 사이에 평화로운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는 지 정학적 논리에서 볼 때 당연한 결과였다. III. 10~12세기 한중(고려와 거란 금) 관계의 특징 원간섭기 이전 고려의 대외관계는 종종 조공체제 의 형식과 용어로 서술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상호 불간섭, 호혜주의 그리고 실리주의를 보여준다. 10~12세기 다원적 국제질서의 현실에서 송은 조공체제의 이상을 실현할 정치적 군사적 힘을 가지지 못했다. 36 고려를 특별하게 대우하고 조공 한 방물 에 대해 후하게 보상했지만 고려는 단 한 번도 송의 군사동맹 제의를 수용하지 않았다. 급기야는 송의 관료 중 소식 ( 蘇 軾 )처럼 고려와의 관계가 송에 아무런 이익을 주지 않는다며 고려 36 Herbert Franke and Denis Twitchwtt, eds.(1994), pp. 16~21. 10~12세기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139

140 와의 관계에 대한 비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37 물론 송나라 내부의 반 ( 反 )고려 성향 관료들은 대부분 왕안석( 王 安 石 )의 신법을 반대하는 구 법당( 舊 法 黨 )이었기에 조정의 파벌 투쟁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겠지만 고려가 송의 화이론 에 동조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거란을 제거하려고 한 송은 여진은 물론 고려를 반거란 동맹에 끌 어들이기 위해 정화( 政 和 ) 연간(1111~1117년)에 많은 선물을 제공하고 고려 사신에 대한 대우를 격상시켜 이전에는 거란에게만 적용했던 국 신사( 國 信 使 )의 명칭과 지위를 고려에도 부여하지만, 38 고려는 송의 제 의에 호응하지 않았다. 12세기 초 송은 고려 숙종에게 책봉을 제의했 지만 거절당했고, 39 거란의 멸망이 거의 기정사실화된 1123년에 다시 인종을 책봉하려고 했으나 이미 거란의 연호를 폐지한 고려 조정은 송 의 제의를 재차 거부했다. 40 황제 국을 자처한 송은 고려가 중국 의 책 봉을 기꺼이 수용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고려에 있어서 송 나라의 책봉은 국경 안보와 왕권 정당화에 큰 의미가 없었다. 고려는 여진과 연합하여 거란을 치려고 한 송의 정책에 반대했고, 금과 남송 의 분쟁에서도 중립을 지켰다. 북송이 멸망한 후 남송을 재건한 고종 은 사로잡힌 두 전황제의 석방을 위해 고려의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지 37 蘇 軾 (1986a), 論 高 麗 進 奉 狀, 蘇 軾 文 集, 中 華 書 局, 847~849쪽; 蘇 軾 (1986b), 論 高 麗 進 奉 第 二 狀, 蘇 軾 文 集, 857~858쪽; 宋 史 ; 박지훈(2003), 宋 代 士 大 夫 의 高 麗 觀, 梨 花 史 學 硏 究 30, 梨 花 史 學 硏 究 所 참조. 38 宋 史 21:395, 397, 487: 高 麗 史 13:16a2~4. 40 高 麗 史 15:5b2~6a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41 만 고려는 불간섭의 원칙을 그대로 유지했다.41 고려와 한족 왕조 송의 친선 관계는 정복 왕조라는 공통의 적과 양 국 간에 육지의 국경이 없었던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고려는 송의 이이제이(以夷制夷) 계책에 말려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송과의 관 계를 순망치한(脣亡齒寒) 의 동반자로 비유하면서 세력균형의 현상유지 가 최상의 정책임을 강조했다.42 11세기 중반 문종이 송과의 관계를 재 개하려고 했을 때, 많은 신료들은 국왕의 정책을 반대했다. 그들은 송 과의 관계는 거란과의 충돌을 야기할 수 있으며 송나라는 고려에 군 사적 지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43 남송 초기에 고려의 실리주의적 정책에 실망한 고종은 고려와의 공식적 관계를 일방적으로 단절하기도 했는데,44 이러한 조치는 송이 천하의 중심을 자처한 가식 (假飾)마저도 포기했음을 보여준다. 조공체제 에서의 조공과 책봉은 결코 일방적인 것이 아니었다. 고려 는 모범적인 조공국 도 충성스러운 제후국(loyal vassal) 45도 아니었다. 만일 종주국 의 책봉이 조공국 에 어느 정도 상징적인 정통성을 부여 했다면 조공국 인 고려도 거란 송 금의 연호 시행을 통해 책봉국 의 정통성을 승인 혹은 부정할 수도 있었다.46 고려는 군사적 위협에 대처 41 高麗史 15:31b2~32b7;Michael C. Rogers(1961), The Regularization of Koryô-Chin Relations(1116~1131), Central Asiatic Journal 6, pp. 70~72 참조 42 高麗史 16 :38b5~39b4. 43 高麗史 8 :11b3~4. 44 高麗史 16 :8b9~10a1 45 Herbert Franke and Denis Twitchwtt eds.(1994), p 윤영인(2007), 10~13세기 동북아시아 多元的 國際秩序에서의 冊封과 盟約, 東洋史學硏究 101, 東佯史學會. 10~12세기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141

142 하여 궁극적으로 거란의 책봉을 수용하면서 거란을 자극하지 않으려 고 했지만 명목적 조공도 거란이 고려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을 전제 로 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1031년 10월 거란 황제 성종의 장례식에 파견된 고려 사신들이 이전에 억류된 고려 사신을 석방하고 압록강에 설치한 부교의 철거를 요구하지만, 47 거란이 이를 거부하자 고려는 공식관계를 끊고 거란 사신의 입국을 거부했으며 이 후 1037년 12월까지 사신을 파견하지도 않았다. 48 송과의 경제적 교류가 거란 금에 비해 비교적 활발했던 이유는 조 공체제의 이념적인 문제나 한족 문화에 대한 동경 때문이기보다는 고 려가 얻고자 한 물자 대부분이 중원지역에서 생산된 것이었기 때문이 었다. 고려는 중원의 문물을 조공체제 가 아닌 일반 무역을 통해서도 충분히 획득할 수 있었다. 49 고려와 거란 여진관계는 호혜주의의 원칙을 잘 보여준다. 고려는 거 란(금)에는 정기적으로 매년 세 차례의 사절을 보냈고 정복 왕조도 생 신사( 生 辰 使 )와 횡선사( 橫 宣 使 ) 50 등의 정기 사절을 고려에 파견했다. 거 란은 997년 처음으로 생신사를 파견한 이래 51 양국관계가 원활하지 못 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빠짐없이 생신사를 보냈으며 여진도 거란시기의 47 高 麗 史 5:21b8~22a1. 고려 조정의 대거란 정책 토론은 王 可 道 의 전기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高 麗 史 94:35b2~36a6). 48 高 麗 史 5:23a2~3, 6:12b7~8. 49 高 麗 史 8 :11a2~b4. 시바 요시노부[ 斯 波 義 信 ]는 이러한 상황을 무역을 통 한 조공체제의 쇠퇴(the eclipse of the tribute system by trade) 라고 했다 [Yoshinobu Shiba(1983), Sung Foreign Trade, M. Rossabi ed., China Among Equal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p. 110]. 50 횡선사에 대해서는 박한남(1995), 高 麗 前 期 橫 宣 使 小 考, 阜 村 申 延 澈 敎 授 停 年 退 任 紀 念 史 學 論 叢, 일월서각, 501~524쪽 참조. 51 高 麗 史 3:32a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43 제도를 그대로 지속했다. 횡선사는 보통 양 2천두를 보내 왔으며 때로 는 말, 수레, 옷감, 안장, 무기, 불경 등을 보내기도 했다. 52 그러나 한 족 왕조 송에 대한 고려의 사행은 극히 드물었고 11세기 중반에는 40 여 년간 공식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기도 했다. 고려의 서북변경인 압록강 유역의 안보는 조정의 가장 중요한 안건 이었다. 다른 국제교역에서는 어느 정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고려이 지만 압록강 유역의 안보에 대한 우려로 인해 이 지역에서의 모든 접 촉을 금지했다. 국경지역의 거란의 군사 교역 시설은 53 양국 갈등의 주 요 원인이었다. 1076년 거란이 의주 부근에 초병을 설치하자 고려는 거란 황태후 장례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신을 보내 강력하게 항의 했다. 54 물론 고려가 거란과의 모든 교역을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55 실 제 거란과의 교역과 거란 상인들을 관장한 관청도 있었으며, 56 거란과 의 교역기회를 추구한 자들에 대한 기록도 보인다. 57 하지만 거란과의 교역은 항상 북방국경지역의 안보에 부차적이었다. 고려와 금의 관계는 인종시기(1122~1146년)와 의종시기(1146~1173년) 에 이루어졌다. 금은 이전 거란시기와 동일한 관계를 원했고 고려의 명목적인 조공에 만족했다. 58 고려를 부모의 나라 로 섬기던 여진족에 오히려 조공을 바치는 것에 대하여 몇몇 신하들이 거부감을 드러내기 52 高 麗 史 11:10b1~2, 11:18b6~7. 53 高 麗 史 10:17b1~3. 54 高 麗 史 9:15b1~2, 9:15a1~3. 55 이용범(1989), 麗 丹 貿 易 考, 한만교류사연구, 동화출판공사, 229~262쪽. 56 增 補 文 獻 備 考 164:1b4~5, 增 補 文 獻 備 考 122:12a3~5. 58 高 麗 史 15:19b1~2, 5~6. 10~12세기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143

144 도 했지만 고려는 궁극적으로 국경의 안보를 위해 이러한 조공관계 를 수용했다. 바로 이 시기 고려의 내부사정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인종 은 재위기간 중 두 번의 큰 반란에 직면했는데, 1126년 외척인 이자겸 이 왕위를 찬탈하려고 했고 그로부터 10년 후에는 묘청이 이끄는 서 경세력이 다시 반기를 들었다. 인종의 뒤를 이은 의종은 1170년 무신 난으로 폐위되었는데 이렇게 고려는 반란과 사회적 혼란으로 취약한 상황에 직면하여 있었으며 만일 금나라가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고자 했다면 충분한 명분과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묘청의 난을 일으킨 서 경세력이 금나라에 대한 공격을 주장했음에도 금은 개입하지 않았고 반란 잔존세력의 고려 서북지역 합병 요청도 거부했다. 59 실제 반란의 중심지인 서경은 금과의 접경지대에 근접하여 고려조정은 금나라의 개 입에 매우 민감하게 대처했다. 60 금사 는 금나라 조정의 불개입정책을 세종(1161~1190년)의 너그러운 성품으로 설명했지만, 61 실제 고려에 개 입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지 았았고 오히려 고려와 남송의 동맹을 야기할 수도 있었다. 결국 고려와 금 사이에는 전쟁이 없이 평화로운 관계가 지속되었는데 이는 양국이 추구한 불개입 정책의 결과였다. 호혜주의는 양국이 서로 교환한 조공 의 내용에서도 확인된다. 고려 가 거란과 금에 보낸 조공품은 그 경제적 가치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욱 강했다. 사료에 자세한 조공 의 내역은 보이지 않지만 고려 후기 와 조선시대와는 대조적으로 공물의 조달이 국가재정에 부담을 주었 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사서에는 조공품을 단순히 방물 혹은 토 59 高 麗 史 19:33a1~34b9; 金 史 7: 高 麗 史 19:27b4~5. 61 金 史 8:203~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45 물로 기록되어 있는데 높은 가치를 가진 것도 아니었고 대량으로 보낸 것도 아니었다. 금대 역시 고려의 조공품은 남송의 세폐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금은 고려왕실에 부고가 있을 때 고려의 사신과 공물을 사 절하기도 했지만 송나라의 세폐는 송 황실의 흉사와 관계없이 납부되 었다. 즉 고려의 공물은 송이 전연의 맹약 이후 거란과 금에 보낸 세 폐와는 양적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으며 고려 후기에 몽골에 대한 조 공 그리고 조선시대 명과 청에 보내는 공물이 국가재정에 크게 부담 이 된 것과는 달랐다. 실제 조선이 명과 청에 보낸 공물은 회사품의 몇 배에 달하였는데 이러한 명과 청의 경제적 수탈은 조공체제의 유교 적 이상과 부합하지 않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의 유교적 사상이 조공체제를 정당화한 것이었다. 62 IV. 10~12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 범위 설정 고려 전기 한중관계사 의 범위를 현대 국가인 한국과 중국의 영토 에 비정하거나 혹은 어느 특정시기의 상황에서 정의하는 것은 비역사 적(ahistorical)이자 현재주의적(presentist) 오류이다. 역사 연구에서의 62 윤영인(2002), Confucian Ideology and the Tribute System in Chosôn- Ming Relations, 사총 55, 역사학연구회. 10~12세기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145

146 범위 설정은 인식상의 문제로 기준이 매우 자의적이기에 문화지리학적 관점에서 부적당한 측면이 많다. 63 나아가 소략한 사료로 인해 전근대 시기에 어느 특정 국가의 정치적 영향력의 한계, 나아가 그러한 국가 가 속했던 국제질서가 작용했던 경계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비록 조공체제 와 같이 정기적이자 체계적인 공적교류의 기록만으로 국제관 계의 범위를 설정하기는 용이하지만 국제질서는 중앙정권의 정치적 교 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으며 충돌과 전쟁을 통해서 성립된 사 실을 간과할 수 없다. 정치가 아닌 문화적 유사성을 근거로, 예를 들면 유교적 문화의 유 사성을 기준으로 국제질서의 범위를 찾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 유목민 족인 거란과 농경 정착민인 중국인(한족)은 경제적 문화적으로 현격한 차이를 갖고 있었지만 그러한 차이가 양자 간의 접촉을 막기만 한 것 이 아니라 오히려 밀접한 관계를 촉진하기도 했다. 64 조공체제 이론은 하나의 특정한 문화적 기준(즉 한족문화)을 통해 정치적인 국제관계를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페어뱅크(John K. Fairbank)는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세 가지 유형과 범위로 나누었는데 북방 초원에 거주한 유목민족을 내륙 아시아 지역(Inner Asian Zone) 으로, 중국 왕조와 산발적인 교류만 가지면서 진정한 조공체제는 이루지 못했던 동남아시 아, 특정 시대의 일본 그리고 서방 국가들은 외부 지역(Outer Zone) 으로 그리고 문화적 제도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한화( 漢 化 ) 가 이루어 63 Martin W. Lewis and Karen E. Wigen(1997), The Myth of Continents: A Critique of Metageograpy, Berkeley: California Universty Press. 64 Naomi Standen(1999), (Re)Constructing the frontiers of tenth-century North China, Frontiers in Question, Houndsmills :Macmillan, pp. 55~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47 졌다는 한국과 베트남은 한족문화지역(Sinic Zone) 으로 분류했다. 페 어뱅크의 시각은 한족문화지역 에 속하는 한국과 베트남 등의 대중원 관계에서 정치적 군사적 요소는 문화적 이념적 요소에 부차적 일시적 인 것으로 보고 있으며 특히 한국의 역대 왕조는 조공체제의 이념을 수용하여 한족 왕조와의 관계가 대부분 문화적 수단을 통해 이루어졌 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화적 동화나 유사성이 외교정책에 우선적으 로 작용하거나 정치적 갈등을 초월하는 계기가 되었던 사례는 거의 없다. 65 전근대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유목문명과 농경문명 의 충돌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동일한 문명 내의 분쟁이 더 빈번하고 치열했으며 유교 문화권이라는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의 경우를 보더 라도 동일한 문화 가 정치적 갈등을 완화시키지 못했다. 중원에 초점을 맞춘 조공체제의 이론과는 달리 레쟈드(Gari K. Ledyard)는 만주와 한반도에 위치한 국가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중원- 만주-한국의 삼각관계를 통해 중원 한족 왕조의 팽창과 수축의 역사 적 순환과정을 분석하기도 했다. 66 바필드 역시 북방민족과 한족 왕조 65 John K. Fairbank(1968), A Preliminary Framework, in John K. Fairbank ed., The Chinese World Order: Traditional China s Foreign Relations 13, Cambridge University Press, p. 13. 페어뱅크의 문화론은 같 은 문화권의 국가들은 서로 비슷한 국제질서에 결합하여 다른 문화권의 국가 들과 경쟁한다는 선입관이 들어가 있는데 이러한 논리는 역사학자들로부터 신 랄한 비판을 받은 사뮤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의 문명의 충돌론(Clash of Civilizations) 을 연상하게 한다. 그리고 페어뱅크도 헌팅턴도 이른바 문명 간의 충돌은 강조하면서 동일한 문화 안에서의 갈등과 충돌은 과소평가하거 나 고려하지 않았다. 66 Gari K. Ledyard(1983), Yin and Yang in the China-Manchuria- Korea Triangle, in Morris Rossabi ed., China among Equals, Berkeley :California University Press, pp. 313~353;Peter I. Yun(1998), Rethinking the Tribute System :Korean States and Northeast Asian Interstate Relations, 600~1600, Ph. D. dissertaion,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10~12세기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147

148 의 관계에 대한 교역 혹은 약탈 이라는 이분법적 논리를 넘어 정착문 명의 중원, 유목문명의 초원(몽골지역) 그리고 삼림과 초원문명의 만주 세 지역으로 나누어 분석했다. 67 그러나 당시 한중 관계의 이해를 위해 서는 보다 확대된 지역을( 내륙아시아 혹은 유라시아 동부) 하나의 통합 된 단위로 하여 정복 왕조, 한족 왕조, 고려, 대하는 물론 카라키타 이 등 중앙유라시아의 여러 국가와 부족들의 상호관계를 분석해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범위는 조공체제의 용어와 형식이 적용되었던 지역을 초월하는 포괄적인 것이어야 한다. 거란과 고려는 몇 차례 대 규모 전쟁을 벌이고 적대적 관계가 비교적 오래 지속된 반면 금과 고 려 사이에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이 없이 평화로운 관계가 이루어진 사 실을 조공체제의 논리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오히려 중원 북부와 만주지역을 통치한 거란과 금의 대외관계 인식과 지정학적 상황(특히 북방초원에 대한 영향력)의 차이에 대한 포괄적인 분석을 통해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포괄적인 국제질서 범위 설정에 있어서 세계체제 이론(World-Systems Theory, WST)은 유용한 거시적 틀을 제공한다. 세계체제(World Systems) 는 여러 사회 사이에 형성된 다양한 연계망(network)을 통해 일어나는 무역과 전쟁, 정보 등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며, 이러한 상호작용 은 복합적 사회구조를 재창조하는 데 기여하고 지역적인 구조에서 일 어나는 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고 했다. 68 세계체제는 생필품 연계 Angeles. 67 Thomas J. Barfield(1989), The Perilous Frontier: Nomadic Empires and China, Cambridge and Oxford:Blackwell. 68 Christopher Chase -Dunn and Thomas D. Hall(1997), Rise and 14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49 망(Bulk Good Network, BGN), 사치품 연계망(Prestige Good Network, PGN), 정치 군사 연계망(Political Military Network, PMN), 정보 연계망 (Information Network, IN)의 네 연계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69 그중 특히 PMN은 조공체제가 강조하는 국가 대 국가의 정치적 교류, 특히 조공과 책봉의 사신 행렬과 공적 무역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기존의 방법론과는 다른 시각에서의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70 세계체제 이론의 흥미로운 주장 중 하나는 체제 변혁에서 준변방 (semi-periphery) 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준변방 은 중심과 주변 사 이에 위치하는 지역 또는 두 중심 간에 위치한 지역이며 중심과 주변 의 성격이 혼합되어 나타나거나 중간적인 형태를 띠기도 하며, 양쪽을 연결시키는 곳이다. 나아가 준변방 은 중심에 의해서 지배될 수도 있으 며, 주변지역을 지배할 수도 있고, 중심과 주변의 관계에 따라 그 위 상이 변화하기도 한다. 10~12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중요한 축이 었던 거란과 금이 흥기한 만주 지역을 바로 준변방지역 에 설정할 수 있으며, 시기에 따라서는 한반도와 기타 지역의 국가들도 동아시아의 세계체제 에서 준변방의 역할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아직은 전근대 동아시아 에 형성된 세계체제 의 연계망에 대한 연구 성과가 많지 않다. 배튼(Batten)은 WST를 전근대 일본의 역사에 적용 Demise:Comparing World Systems, Boulder, CO:Westview Press, p Christopher Chase-Dunn and Thomas D. Hall(1997), p 윌킨슨(David Wilkinson)은 문명(civilization) 을 문화적 동질성이 아닌 정기 적 체계적인 정치 군사 교류로 설정했는데 그의 동아시아 문명권은 동아시아 의 PMN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David Wilkinson(1995), Civilizations Are World Systems!, in Stephen K. Sanderson ed., Civilzations and World System :Studing World-Historical Change, Walnut Creek, CA:AltaMira Press, pp. 249~260]. 10~12세기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149

150 하여, 지리적 특수성으로 고립된(isolated) 일본이라는 개념을 비판했 다. 71 배튼은 현대 민족국가의 명확한 국경과는 달리 전근대 역사에서 의 경계(border)가 언제 어떠한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는가를 WST의 외부 연계망을 통해 찾으려고 한 것이다. 일본의 (그리고 대부분 국가 의) 대외정책은 내부의 정치적 정통성을 획득하기 위한 집권층의 노력 에 의한 것으로 PMN의 형성에 중요한 요인으로 보았는데 그 범위는 외부의 영향(중국내부의 분열과 통일)과 내부적인 요인(예를 들면 주변부 로의 팽창)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고 시기의 변화에 따라 수축과 팽창을 반복한다고 분석했다. 72 그러므로 10~12세기 내륙아시아에 존재했던 PMN 범위의 변천에 대한 고찰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범위 설정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 정기적 체계적, 정치적 군사적 교류를 토대로 동아시아 의 PMN을 설정한다면 북방초원, 중원, 내륙아시아, 한국, 일본, 동남아 지역이 포함된다. 이러한 역사범위는 2005년 중국 학계가 설정한 동 아사( 東 亞 史 ) 의 대상과 유사하지만, 73 조공체제에 의한 국제질서의 범 위를 초월한다. 국제관계의 설정에 적용할 수 있는 또 다른 연계망인 PGN과 IN은 모두 PMN보다 큰 규모이다. 조공체제에 의한 경제활동은 정치적 동의 아래 이루어져 PMN의 범위 내에서 발생했지만 PGN은 정치적 관계 이외의 부분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물론 사치품은 종종 정치 집권층의 71 Bruce L. Batten(1999), Frontiers and Boundaries of Pre-modern Japan, Journal of Historical Geography 25-2, pp. 166~182 ;Bruce L. Batten(2003). 72 Bruce L. Batten(2003), pp. 146~ 楊 軍 張 乃 和 (2005), 東 亞 史, 長 春 : 長 春 出 版 社. 15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51 권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기에 공무역의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았고 조공체제의 공무역과 혼동되기도 한다. 그러나 국가의 독점이 약화되고 사무역이 PGN에 참여하게 되면서 PMN보다 거대한 연계망 을 형성한다. IN도 국가가 주체가 되는 공적인 영역과 비공적 영역이 존재하는데 공적인 영역에서 정보는 외교관, 스파이 그리고 공적인 지 원을 받은 탐험가 등이 담당했으며, 비공적 영역에서는 순례자, 학생, 성직자, 상인, 용병 등이 참여하며 특히 기술과 지리적 지식이 PMN 보다는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유입되고는 했다. 아부 루고드(AbuLughod)는 몽골 제국을 전후한 시기 세계체제의 형성 과정을 그려내 면서 8개의 세계체제를 설정했는데, 그녀의 세계체제 III과 VIII을 합 친 지역(아래 지도 참조)에 한반도와 일본을 포함하면 10~12세기 동아 시아 중심의 거대한 PGN 혹은 IN과 대체로 일치한다.74 그림 1 14세기 세계체제 출처 : 이 그림은 Janet Abu-Lughod(1989), p.283의 지도를 토대로 제작되었다. 74 Janet Abu-Lughod(1989), Before European Hegemony : the World System A. D. 1250~1350, New York:Oxford University Press, p ~12세기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151

152 결국 10~12세기 한중 관계를 포함하는 국제질서의 범위는 내륙아 시아 세계체제 의 PMN, PGN 혹은 IN의 범위를 비교 분석하는 과정 을 통해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연계망이 중첩되는 국제질서( 내 륙아시아 세계체제 )의 경계는 교류가 단절되는(혹은 급격히 감소하는)지역 에 설정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경계에는 산맥, 바다, 사막 등의 지리적 요소가 작용했지만 변경을 통제하고 국가의 안보를 지키려는 중앙권력 의 정치적 노력도 매우 중요했다. 물론 국제질서의 중심 에 해당하는 제국의 정치적 영향력 범위를 곧 국제질서의 경계로 인식할 수는 없 다. 적지 않은 국가들이 언제나 변경을 엄격히 통제하고 차단하지는 않았으며 실제 로마나 당제국은 변경지역에서 다양한 정치 경제 문화 교류를 허용했다. 세계체제 이론을 통한 연구는 점차 활성화되고 있지만 아직 전근대 동아시아 역사에 적용된 사례는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본격적 인 연구를 위해서는 먼저 조공체제 의 틀을 벗어난 다양한 형태의 무 역과 정보교환 전달과정과 연계망에 대한 구체적 고찰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비록 이 분야의 연구가 축적되지 않은 현실에서 WST이론 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적어도 조공체제 이론의 문제점 을 통찰할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 15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53 V. 맺음말 13세기 몽골제국의 출현 이전 2세기 동안의 내륙아시아 국제관계는 조공체제의 이상적 모습과는 매우 달랐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국제관 계에 대한 이해와 서술을 위해서는 먼저 조공체제 이론의 편견과 왜곡 을 극복해야 한다. 비록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형식이 한족 전통에서 비롯되었지만 국제질서의 현실은 여러 국가와 부족 사이에 이루어진 타 협이었지 중원 한족전통의 일방적인 수용이 아니었다. 특히 10~12세 기 거란과 금시기의 맹약체제 는 중원의 전통적 조공체제와는 역사적 배경과 내용, 전개에 있어서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거란과 금 은 우월한 군사력을 토대로 송을 위협하여 세폐를 획득하고 고려로부 터 명목적인 조공 을 받았지만 다원적 국제질서의 세력균형은 지속되 었다. 이 시기의 맹약체제 혹은 다원적 국제관계 의 성립은 한족 중 심적 조공체제의 와해를 통해서만 가능했을 것이다. 왕조(국가) 중심적 이자 중앙의 시각을 강조하는 조공 책봉체제의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서는 주변 의 입장과 시각이 반영된 지정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즉 다원적 국제관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국가는 남북 으로 대치한 정복 왕조와 한족 왕조였지만 그 주위에서 국제질서의 세 력균형을 유지했던 고려, 대하, 티베트, 대리, 카라키타이 그리고 초원 의 부족 등의 역할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비록 고려와 대하 사이 에 직접적 교섭이 없었던 것 같지만 양국은 국제질서의 세력균형과 대 외정책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예를 들자면 994년 6월 거란을 10~12세기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153

154 치자는 고려의 제의 75 를 송이 거부한 이유는 바로 이 시기에 송나라가 탕구트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거란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했 기 때문이다. 76 비록 대하에 대한 언급은 고려사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지만 탕구트의 존재는 고려의 대외관계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 으며 조공관계 의 틀로서는 이러한 다원적 국제질서의 현실을 파악하 기 어렵다. 조공체제와 더불어 다원적 국제관계의 실상을 왜곡하는 또 하나의 인식은 중화다민족국가( 中 華 多 民 族 國 家 ) 라는 근대의 만들어진 개념을 과거에 일률적으로 소급 적용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 안에서 발생 한 그리고 현대 중화민족 을 구성하는 56개 민족의 역사가 모두 중국 사 에 귀속된다는 현재주의(presentist)적 발상이다. 이전에는 10~12세 기의 거란-송 그리고 금-남송 관계를 남북국 의 틀로 보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아예 중화민족 사이의 민족관계 로 설정하는데, 77 이러한 현 재주의 시각에서 거란과 여진이 세운 북방민족과 정복 왕조는 끊임없 이 이어지는 중국 역대 왕조 역사의 한 단계로서 그리고 중국 소수 민족 으로서만 역사적 의의를 가지게 된다. 그러면 10~12세기의 한중 관계사를 어떻게 서술해야 할 것인가? 먼저 고려-송, 고려-거란, 고려-금의 분절된 한중 관계의 시각을 넘 어 광범위한 국제질서, 예를 들면 위에서 언급한 세계체제 이론의 75 高 麗 史 3:27b4~5. 76 續 資 治 通 鑑 長 編 ~90, 孟 古 托 力 (1990), 宋 遼 南 北 朝 說 考 論, 學 習 與 探 索 , 黑 龍 江 省 社 會 科 學 院 ; 劉 本 鋒 (2004), 我 國 古 代 的 一 國 兩 制 芻 議, 江 西 教 育 學 院 學 報 , 江 西 敎 育 學 院 ; 劉 樹 友 (2005), 中 國 歷 史 上 最 早 的 一 國 兩 制 遼 朝 北, 南 面 官 制 述 評, 理 論 導 刊 ; 胡 健 (2005), 遼 王 朝 時 期 的 一 國 兩 制, 遼 金 史 硏 究, 吉 林 大 學 出 版 社. 15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55 PMN, PGN 혹은 IN의 범위에서 진행된 다양한 정치 경제 문화 교류 의 모습을 모색해야 한다. 기존 조공체제 가 강조하는 정치적 군사적 관계뿐아니라 PGN과 IN의 경제적 문화적 교류(예를 들면 음식과 기술 의 전파 등)에 초점을 맞추면 보다 의미 있는 국제질서를 설정할 수있 으며 새로운 시대구분도 가능할 것이다. 특히 문화적 교류는 국제질서 의 경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정치적 세력 확장은 지역 내 문화 융합을 촉진했으며, 반면 문화 교류가 정치적 확장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문화적 경계는 정치적 경계와 항상 일치하지 않아, 정치적 영토 가 문화적 영역보다 넓었던 때가 많았으나 그 반대 상황도 있었다. 10~12세기 불교 문화권은 초원(유목)과 농경(정착) 문명의 경계를 초월 했는데 당시 불교의 사상적 예술적 교류는 매우 활발하여 그 범위는 고려, 거란, 대하는 물론 송과 중원 서남의 대리국 그리고 카라키타이 까지 확대된다. 10~12세기 한중관계사 연구에서 고려( 주변 )가 중원의 한족 왕조 와 정복왕조에 조공 했던 기록에만 집착한다면 이 시기 다원적 국제질 서와 맹약체제의 유동적이고 복잡한 상황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기 대할 수 없다. 나아가 중원을 항상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의 중심으로 설정하는 접근방법은 서구를 세계사의 중심으로 상정하는 오리엔탈리 즘의 편파적 시각과도 상통하며, 78 이른바 주변 의 역사적 관점과 역할 을 무시하는 것이다. 10~12세기 한중관계사 연구와 서술은 먼저 한 국과 중국의 역사적 범위를 넘어 일본, 티베트, 나아가 중앙유라시아 와 동남아시아의 여러 국가와 부족연맹들의 역할과 관점을 모두 반영 할 수 있는 세계체제 이론에 대한 모색을 절실하게 요구한다. 78 Edward W. Said(1994), Orientalism, New York:Vintage Books, pp. 1~2. 10~12세기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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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이익주 서울시립대학교 I. 머리말 II. 13~14세기의 세계질서와 고려인의 천하 인식 III. 13~14세기 고려-몽골관계의 양상 IV. 맺음말

161 I. 머리말 동아시아 속의 한중관계사를 구성하고자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 는 문제는 동아시아의 개념과 범위일 것이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동아 시아란 아시아 대륙의 동부를 가리키지만, 역사적인 의미에서는, 특히 한중관계사의 공간적 배경으로서의 동아시아는 전근대 시기에 한국이 속해 있던 세계로서의 개념과 범위를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의 동아시 아는 당연히 시기마다 공간적 범위를 달리한다. 전근대 시기의 대부분 은 지리적인 동아시아(또는 동북아시아)와 일치하는 경우가 많지만, 때 에 따라서는 그것을 넘어서 확장되기도 했다. 특히 이 글에서 다루고 자 하는 13~14세기 몽골제국 시기에는 더욱 그러했다. 따라서 동아시 아 속의 한중관계사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각 시기별로 동아시아의 범 위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전근대 시기에 한국이 속해 있던 세계로서의 동아시아 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다르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한국과 직접 관계를 맺고 있던 국가 또는 지역으로 한정되는 공간으로서의 동아시아이다. 여기서 말하는 직접 관계에는 정치적 관 계와 경제적 관계(교역), 문화적 관계(문화 교류) 등이 포함되는데, 각각 의 경우 그 영역의 범위는 조금씩 차이가 나겠지만, 대체로 이 직접 관계의 영역은 뒤의 두 경우와 비교할 때 가장 좁은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한국과 직접 관계를 맺지는 않았지만 서로 관련이 있는 국가 또는 지역을 포함하는 공간으로서의 동아시아이다. 예를 들어, 7세기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161

162 에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과 티베트[ 吐 蕃 ]는 직접 관계를 맺은 적은 없지만, 고구려의 대당( 對 唐 ) 전쟁이 티베트의 흥기에 영향을 주고 티 베트의 흥기가 다시 신라의 당 세력 축출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는 점에서 1 서로 관련되어 있다. 또 10~12세기에 거란 송, 금 남송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위치해 있던 고려와 하( 夏 )도 마찬가지의 경우이 다. 위의 두 경우에 티베트와 하는 한국과 관계가 있는 동아시아의 범 위에 포함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의 동아시아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구조를 밝힐 필 요가 있다. 셋째, 한국인들의 인식상의 동아시아이다. 각 시대 사람들의 자기가 속한 세계에 대한 인식은 역사적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르지만, 대체로 직 간접적인 관련이 없는 지역에까지 인식의 범위가 미쳤을 것이다. 따 라서 이 범주는 앞의 두 범주에 비해 더 넓은 지역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동아시아 개념의 세 가지 층위 가운데 지금까지 한국사 학계의 대외관계사( 對 外 關 係 史 ) 연구는 첫 번째 개념을 염두에 두고 진 행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최근에 들어 두 번째 개념으로 확 대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필자는 그것을 종래의 대외관계사와 구 별하여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동아 시아 국제관계사는 역사적으로 한국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구조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며, 그 구조를 구성하는 여러 국가 또 는 지역들 상호간의 직접적인 관계와 간접적인 관련성을 분석하는 연 1 徐 榮 敎 (2002), 羅 唐 戰 爭 과 吐 藩, 東 洋 史 學 硏 究 79, 東 洋 史 學 會 ; 劉 矩 姜 維 東 (2006), 唐 征 高 句 麗 史 [동북아역사재단 역(2007), 당의 고구려 정벌 사 ]. 16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63 구 분야가 될 것이다. 13~14세기는 몽골에 의한 대통합의 시대였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그때까지 분립해 있으면서 국제질서를 형성했던 국가들이 거의 모두 멸망하고 몽골제국으로 통합되었다. 그뿐 아니라 중앙아시아와 서아시 아, 러시아 지역까지 포함하는 대제국이 건설됨으로써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을 아우르는 새로운 역사 단위가 탄생하고 새로운 세계질서가 형성되었으며, 고려도 그 질서 속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 다 루고자 하는 13~14세기 동아시아의 범위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넓게 확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고려-몽골관계사는 고려-원관계사 또는 여원관계사( 麗 元 關 係 史 )라는 이름으로 한중관계사의 일부로 연구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 한 시각은 몽골제국의 성격에 대한 주의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 제가 있다. 다시 말해서 몽골제국을 중국 왕조로 취급함으로써 오히 려 중국 이 몽골제국의 일부로 존재했던 역사적 사실을 전도시키는 결 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로, 이 글에서는 최근의 몽골사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하면서 13~14세기 몽골제국 질서 속의 고려-몽골관계사를 재구성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163

164 II. 13~14세기의 세계질서와 고려인의 천하 인식 1. 13~14세기 몽골제국 중심의 세계질서 1990년대 후반 이후 몽골사 연구에서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고 있 다. 몽골사를 몽골의 시각에서 보려는 것으로,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이 주장이 새로운 의미를 갖는 것은 그동안 몽골사를 중국사의 일부 로 취급해 온 오랜 관행 때문이었다. 스기야마 마사아키[ 杉 山 正 明 ]와 김호동( 金 浩 東 )이 이 새로운 경향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데, 2 이들은 몽골사 연구의 기본 자료로서 한문 사료인 원사( 元 史 ) 보다는 페르시 아어 사료인 라시드 앗 딘의 집사( 集 史 ) 를 중시하는 공통점을 가지 고 있다. 집사 를 활용함으로써 한문 사료에 배어 있는 중국 중심의 역사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김호동은 기존의 중국 중심 역사관을 비판하고 몽골제국을 보는 시 각을 재검토할 것을 제안했다. 쿠빌라이가 즉위한 뒤 중통( 中 統 ) 지원 ( 至 元 ) 등 중국식 연호를 선포했고, 국호를 대원( 大 元 ) 이라 했으며, 새 로 건설한 도읍에 대도( 大 都 ) 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 아니라 중앙 행 정을 총괄하는 중서성( 中 書 省 )을 설치하고 한인( 漢 人 )들을 대대적으로 기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중국적 인 왕조체제를 건설하려는 의 2 杉 山 正 明 (1996), モンゴル 帝 國 の 興 亡 上 下, 講 談 社 [스기야마 마사아키 저임대 희 김장구 양영우 역(1999), 몽골 세계제국, 신서원]; 金 浩 東 (2006) 몽골제 국과 大 元, 歷 史 學 報 192, 歷 史 學 會 ;김호동(2007), 몽골제국과 고려-쿠 빌라이 정권의 탄생과 고려의 정치적 위상, 서울대학교출판부. 16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65 지의 표현으로 이해해 온 기존의 견해는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기존의 견해는 쿠빌라이가 아릭 부케와의 계승분 쟁에서 승리하는 과정에서 주치 가문의 베르케, 차가타이 가문의 알 구, 톨루이 가문의 훌레구 등 서방의 강력한 제왕( 諸 王 )들이 독립함으 로써 몽골제국은 사실상 분열되었다고 이해하는, 일종의 분열사관( 分 裂 史 觀 )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쿠빌라이가 한법( 漢 法 ) 을 채용한 것이 서방( 西 方 ) 삼한국( 三 汗 國 )의 독립과 거의 동시적으로 진행된 원조( 元 朝 )의 건립( 建 立 ) 을 의미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3 김호동은 몽골제국 전체를 시야에 넣는 통합적( 統 合 的 ) 접근( 接 近 )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쿠빌라이의 제국을 대소( 大 小 ) 권력( 權 力 )이 복합( 複 合 )하는 일종의 세계연방( 世 界 連 邦 ) 으로 파악한 스기야마 마사 아키의 견해에 동감을 표시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흔히 원[또는 원조 ( 元 朝 )]이라 불리는 대원( 大 元 ) 이,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왕조를 가리 키는 것이 아니라 대몽골 울루스 의 한자식 명칭으로, 고려 등 한자문 화권에서만 사용되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지금까지 원이라 불리던 국가 또는 지역은 카안 울루스라고 부를 것을 제안했는데, 이것은 스 기야마 마사아키가 대원 울루스 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김호동과 스기야마 마사아키는 몽골제국이 중국 왕조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중국 지역에 자리잡은 카안 울루 스 (김호동) 또는 대원 울루스 (스기야마 마사아키) 역시 중국 왕조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몽골제국은 쿠빌라이 집권 이후 카안 울루스 를 비롯하여 차가타이 3 金 浩 東 (2006), 앞의 글, 221~222쪽.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165

166 울루스, 훌레구 울루스, 조치 울루스 등 4개의 울루스로 구성되는 것 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4개 울루스의 상호 관계나, 4개의 울루 스들이 형성하고 있던 몽골제국의 질서에 대한 연구는 아직 충분하 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는 비단 몽골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 라 당시 세계질서에 대한 연구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고려-몽골 관계도 고려와 몽골제국의 관계인지, 아니면 고려와 몽골제국의 일부 인 카안 울루스와의 관계인지를 분간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도 몽골 제국 내부의 질서를 어떻게 보는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몽골제국 을 구성하고 있던 4개 울루스 사이에 통일성이 강했다면 전자의 관 계가, 독립성이 강했다면 후자의 관계가 성립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 문이다. 몽골제국을 구성하는 4대 울루스 간의 관계와 더불어 각 울루스 내부의 구성 원리에 대해서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몽골의 정 복 지역(국가)에 대한 지배방식의 문제일 수도 있고, 정복된 지역(국가) 과 몽골제국 또는 각 울루스와의 관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고려와 몽 골제국 또는 카안 울루스와의 관계도 여기에 속할 것인데, 몽골제국 시기에 행해진 지배 또는 관계의 방식에 대한 사례 연구를 통해 고 려-몽골관계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밝힐 수 있을 것이므로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특히 중요하다고 하겠다. 한편, 몽골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의 외연도 중요한 연구 대상 이다. 동아시아에서는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 및 일본 과 몽골제국의 관계가 검토되어야 한다. 주지하듯이 이들 지역은 몽골 이 침략했으나 끝내 정복하지 못했다. 베트남의 경우 1283년과 1284 년, 1287년 등 세 차례 전쟁을 거친 뒤에 몽골이 진익직( 陳 益 稷 ) 부자 를 안남국왕( 安 南 國 王 )에 책봉했지만 이들은 베트남의 국왕이 아니었 16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67 고, 실제 베트남의 국왕들은 몽골의 책봉을 받지 않았다. 4 원사( 元 史 ) 에는 베트남이 원에 공헌( 貢 獻 )을 했다고 하여 마치 조공을 한 것 처럼 기록한 대목이 있지만, 5 이것은 몽골(원)의 일방적인 생각이었을 것이다. 일본의 경우도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략 이 실패로 끝난 뒤 국가 간의 공식적인 관계가 성립하는 데 이르지 못했다. 따라서 베트남과 일본은 모두 몽골제국 중심의 세계 밖에 존재했다 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당시 몽골인들은 베트남과 일본같은 국가들을 자신들의 천하( 天 下 ) 에서 제외했는데, 이 사실은 1310년에 원 무종( 武 宗 )이 고려에 보낸 제서( 制 書 )에서 짐이 보건대, 지금 천하에서 백성 ( 百 姓 )과 사직( 社 稷 )이 있어 왕 노릇을 하는 것은 오직 삼한( 三 韓 )뿐이 다 라고 한 데서 6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이 몽골제국 중심의 천하 에 속하지 않았다고 해도, 몽 골과 일본 사이에는 교역이 이루어졌고, 승려 학자 등 민간의 왕래도 비교적 활발했다. 그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바로 신안 ( 新 安 ) 해저유적이다. 이밖에도 1293년을 전후한 시기에 남중국해와 자바해-인도양을 잇는 해상 교역로가 몽골의 세력권에 들어와 있었고, 이 무역로를 연결하는 중국의 천주( 泉 州 ) 광주( 廣 州 ), 남쪽으로 수마트 라섬의 팔렘방이나 보르네오섬의 브루네이, 인도 남단 말라바르나 마 아바르 해안의 여러 항구, 서쪽으로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 북쪽으로 4 山 本 達 郞 (1974), ベトナム 中 國 關 係 史, 山 川 出 版 社, 142쪽. 5 元 史 卷 209, 列 傳 96, 外 夷 2 安 南, 自 延 祐 初 元 以 及 至 治 之 末 疆 場 寧 謐 貢 獻 不 絶. 6 高 麗 史 卷 33, 世 家 33, 忠 宣 王 2 年 7 月 乙 未, 朕 觀 今 天 下 有 民 社 而 王 者 惟 是 三 韓.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167

168 흑해 연안의 수닥이나 아조프해에 면한 타나 등 항구도시가 번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7 해상( 海 上 ) 실크로드 라고 부를 수 있는 이 교역 로와, 교역로상에 위치한 항구도시들은 몽골제국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으며, 경원( 慶 元 )과 하카다[ 博 多 ]를 잇는 몽골과 일본 사이의 교역로 역시 마찬가지이다. 즉 13~14세기 몽골제국 중심의 세계는 몽골제국 을 중심으로 정치적 관계로 구성된 천하 보다 더 넓은 지역에 걸쳐 경 제적 관계를 맺는 교역권까지를 포함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13~14세기 동아시아의 범주는 몽골제국이 차지하고 있던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과, 몽골제국에 편입되지 않았지 만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맺고 있던 여러 국가 또는 지역들로 확대된 다. 동아시아에서는 고려와 일본 그리고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지역의 여러 국가들이 여기에 포함될 것이지만, 그밖에 차가타이 울루스, 훌 레구 울루스, 조치 울루스 등과 개별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던 수많은 국가 또는 지역들의 사례에 대해서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14세기 고려인의 천하 인식 13~14세기[한국사에서 흔히 원간섭기( 元 干 涉 期 ) 라고 불리는 시기]에 고 려인들은 몽골제국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몽골제국으로 인식하 고 있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원( 元 )으로 표현되는 중국 왕조로 인식하 고 있었을까? 이 문제는 당시 고려인들이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한 인 7 스기야마 마사아키 저, 임대희 김장구 양영우 역(1999), 앞의 책, 290~293쪽. 16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69 식과도 관련되며, 고려와 몽골의 관계에 대한 인식과도 관련된다. 우선, 고려사 에는 1271년(원종 12) 12월에 몽골이 사신을 보내와 국호를 세워 대원이라 하였음을 알렸다 는 기사가 실려있고, 8 이때를 기준으로 이전까지는 蒙 古, 그 이후는 元 으로 표기했다. 즉 고려 사 편찬자들은 원을 몽골을 대신한 국호로 이해했으며, 그것은 의심 의 여지없이 송( 宋 ), 요( 遼 ), 금( 金 )을 잇는 중국 왕조였던 것이다. 당시 고려인들도, 지금 확인할 수 있는 한에서는, 몽골과 원을 동일시하고, 철저하게 중국의 왕조라고 생각했다. 전쟁 중에는 짐승 같은 달단[ 達 旦 禽 獸 ], 달단의 완악한 무리[ 韃 旦 之 頑 種 ] 등 적대적인 표현이 나타 나기도 했지만, 년(고종 19) 강화천도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유승 단( 兪 升 旦 )이,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을 섬기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다( 以 小 事 大 理 也 ). 예로써 섬기고 믿음으로써 사귄다면 저들 역시 무슨 명분으 로 매번 우리를 괴롭히겠는가. 성곽을 포기하고 宗 社 를 버리며 섬 에 숨어 구차하게 세월만 천연하여 변방의 백성들로 하여금 젊은이 는 모두 칼날에 맞아 죽고 노약자는 끌려가 노예나 포로가 되게하 는 것은 국가의 長 計 가 아니다. 10 라고 한 데는 전쟁 초기에 이미 몽골을 사대( 事 大 )의 대상으로 보는 인식이 드러나 있다. 8 高 麗 史 卷 27, 世 家 27 元 宗 12 年 12 月 己 亥, 蒙 古 遣 使 告 建 國 號 曰 大 元. 9 東 國 李 相 國 集 卷 25, 辛 卯 十 二 月 日 君 臣 盟 告 文 ; 大 藏 刻 板 君 臣 祈 告 文 ; 卷 36, 趙 沖 耒 書. 10 高 麗 史 節 要 卷 16, 高 宗 19 年 6 月.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169

170 몽골=원을 중국 왕조로 인식한 대표적인 사례는 이승휴( 李 承 休, 1224~1300년)가 1287년(충렬왕 13)에 지은 제왕운기 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왕운기 의 정통상전송( 正 統 相 傳 頌 )은 반고( 盤 古 )로부터 계승되 는 중국의 정통 왕조들을 나열했는데, 그것이 수( 隋 )-당( 唐 )-송( 宋 )-금 ( 金 )을 거쳐 아황( 我 皇 ), 즉 원으로 이어졌다. 11 또 원에 대해서는, 明 昌 중에 天 兵 이 일어나니 다투어 어찌하리. 汝 水 에 煙 塵 잠기고 空 鼎 이 끓으니 오로지 우리 上 國 大 元 이 일어나서 그 많은 백성들을 노래케 하였으니 聖 德 의 높고 넓음 어찌 다 이르리오. 우리 임금 같은 德 望 널리널리 미쳐 있어 세상의 모든 나라 使 臣 을 보내오고 中 華 의 넓은 천지 모두가 執 贄 하다. 土 地 는 광대하며 人 民 은 많으니 開 闢 한 이래로 이런 나라 처음이라. 12 라고 하여 상국( 上 國 ) 대원의 영역이 광대하고 인민이 많은 것을 찬양 했다. 이러한 인식은 이승휴보다 한 세대 뒷사람인 안축( 安 軸, 1282~1348년)이 지금 우리 성덕( 聖 德 )은 하늘에 따르고 민의에 순응 하여 큰 기업을 세웠다. 온 천지에 굴복하지 않은 나라가 없어 영토의 11 帝 王 韻 紀 卷 上, 正 統 相 傳 訟, 正 統 相 傳 奉 我 皇. 12 帝 王 韻 紀 卷 上. 17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71 크기가 예전에 비할 바가 없다 고 한 것이나, 13 이제현( 李 齊 賢, 1287~1367년)이 성원( 聖 元 )의 덕우( 德 宇 )가 건곤( 乾 坤 )과 같아 사해( 四 海 )가 모두 번국( 藩 國 )이 되었다 14 고 한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이 몽골제국이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던 사실은 당시 고려인 들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광대한 국가가 종래의 중국 왕조들과 다른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곡( 李 穀, 1298~1351년)이, 唐 이 쇠퇴하자 五 代 가 크게 혼란했고 遼 金 과 宋 이 남북으로 분열 되어 전쟁이 그치지 않았으며 生 民 이 극도로 도탄에 빠졌다. 하늘 이 경사스런 운수를 열어 聖 人 이 계속해서 나고 이름난 신하들이 무리로 나와서 天 下 를 통일하고 여러 사람들의 뜻을 정했으며, 文 軌 를 같게 하고 풍속을 고쳤다. 周 易 에 말하기를, 크도다, 乾 元 이 여. 만물이 의지해서 시작된다 고 하였는데, 皇 元 이 그러한 것이다. 15 라고 한 것을 보면 원은 당 이후 분열된 천하, 즉 중국을 통일한 왕조 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1310년(충선왕 2) 원 무종( 武 宗 )의 제서에서 짐이 보건대, 지금 천하에서 백성과 사직이 있어 왕 노릇을 하는 것은 오직 삼한뿐 이다 라고 한 것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 김호동은 무종이 몽골제국의 대칸으로서 고려 국왕에게 이 제서를 보 13 謹 齋 集 元 朝 泰 定 甲 子 制 科 策. 14 益 齋 亂 藁 卷 稼 亭 集 卷 3, 趙 貞 肅 公 祠 堂 記.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171

172 낸 것이고, 여기 나타난 천하는 몽골제국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 았다. 그렇기 때문에 위 사료를 통해 확인되는 고려의 속국( 屬 國 ) 으로 서의 지위를 대몽골 울루스 전체에 대한 관계라고 했던 것이고, 몽골 지배층이 여몽 양국관계를 중국적인 사대관계가 아니라 몽골적인 속국 관계( 屬 國 關 係 )로 파악했다고 설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16 하지만 위 제서가 고려에 전해진 배경을 살펴보면 지극히 중국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충선왕이 선왕( 先 王 )인 충 렬왕의 시호를 원에 요청하면서 고종과 원종에게 추시( 追 諡 )할 것을 함 께 요청했고, 그에 따라 원이 충선왕의 3대를 추증하는 제서를 보내 왔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고려사 에서는, 처음에 국가가 비록 宋, 遼, 金 의 正 朔 을 사용했으나, 역대 국왕의 시호는 모두 宗 을 칭했다. 元 에 사대한 뒤로 名 分 이 더욱 엄해져, 옛날 漢 의 제후들이 모두 漢 으로부터 시호를 얻었으므로 왕이 표 를 올려 上 昇 王 에게 시호를 올릴 것을 청했고, 또 高, 元 二 王 에게 追 謚 할 것을 청했으니, ( 元 이) 詔 를 내려 따랐다. 17 라고 하여, 중국 왕조에 사대하는 제후국으로서의 명분을 철저히 따 른 결과로 평가했다. 이처럼 이 제서의 존재 자체가 중국적인 세계질 서를 염두에 둔 것이라면, 제서에서 언급한 천하 역시 중국적 천하, 즉 몽골제국이 아닌 원을 중심으로 하는 천하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16 김호동(2007), 앞의 책, 116쪽. 17 高 麗 史 卷 33, 世 家 33, 忠 宣 王 2 年 7 月 乙 未. 17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73 13~14세기에는 고려와 원의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했고, 특히 고려의 학자나 관리 중에는 원에서 수학하거나 관리 생활을 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당연히 원이 가지고 있는 비 중국적( 非 中 國 的 ) 요소를 목격하거나 경험했을 것이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채웅석은 당시 고려인들이 화이론적 천 하관에 바탕을 두고 원을 중화로 인정했기 때문에 몽골제국의 비중화적 요소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없다 고 했지만, 18 과연 그것이 특정한 인식 때문이었을까? 오히려 고려와 원 사이에 당시 고려인들의 그러한 인식을 가능하게 한 어떠한 근거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고려사 나 원사 등 한문 사료에는 어김없이 양국관계를 책봉 조 공관계로 기록하고 있고, 제왕운기 를 비롯하여 당시 고려인들의 저 술에는 몽골제국을 중국 왕조로 간주하고 양국관계를 사대관계로 인 식하는 모습이 확연하게 보인다. 원에 대해서 고려를 동번( 東 藩 ) 또는 번병( 藩 屛 ), 번직( 藩 職 ) 등으로 표현한 경우는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좀 더 직접적으로는 충렬왕 때 일본에 보낸 국서( 國 書 ) 에서, 우리나라는 원래 조상 때부터 원을 臣 事 했으니 그 유래가 오래 되 었다. 우리 父 王 은 天 庭 에 두 번 朝 覲 했는데, 그때마다 황제의 칭 찬을 받아 국가를 安 保 하고 侯 度 를 각별히 했으며, 내가 세자가 되었을 때 父 王 을 이어 親 朝 하니 황제가 특별히 총애를 내려 공주 와의 결혼을 허락하고 부마로 삼았다. 宗 器 를 승습하여 국호를 잃 18 채웅석(2007), 원간섭기 성리학자들의 화이관과 국가관, 역사와 현실 49, 한국역사연구회, 108쪽.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173

174 지 아니하고 군신 사직과 예악 문물, 의관 명분 등을 일체 이전대 로 하게 하여 백성들이 안도하고 業을 즐기고 生을 편안히 하게 된 것은 실로 정성을 다하여 사대한 까닭이다.19 라고 한 데서도 원에 사대하여 국가를 보전할 수 있었다는 생각을 발 견할 수 있다. 또 이것은 고려인들의 일방적인 생각이 아니라 몽골(원) 에서 보내온 국서에서도 마찬가지로 찾아진다. 즉 몽골(원)에서도 고려 를 동번(東藩) 등으로 표현했고,20 고려 국왕을 일국지왕(一國之王),21 일국신민지주(一國臣民之主),22 외국지주(外國之主) 23 등으로 표현하여 고려가 몽골제국에 포함되지 않은 독자적인 국가라는 점을 인정했던 것이다. 한편, 원간섭기에는 몽골의 요구에 따라 고려의 왕실 관련 용어들 이 격하되고 관제가 제후국 체제로 격하되었다. 즉 1275년(충렬왕 1)에 19 高麗史 卷30, 世家 30, 忠烈王 18年 10月 庚寅, 以太僕尹金有成爲護送 日本人, 供驛署令郭麟爲書狀官 仍致書曰 我國元自祖先臣事大元 其來尙 矣 我父王再覲天庭 輒蒙聖㢡 安保國家 恪謹侯度 予爲世子時 繼父親朝 皇帝 特垂寵渥 許尙公主 冊爲駙馬 承襲宗器 不失國號 君臣社稷 禮樂文物 衣冠名 分 一切仍舊 百姓按堵 樂業安生 實輸誠事大故也. 20 高麗史 卷26, 世家 26, 元宗 8年 8月, 遣起居舍人潘阜齎蒙古書及國書 如日本 蒙古書曰 高麗朕之東藩也 ;卷30, 忠烈王 19年 3月 乙酉, 帝勑曰 卿世守王爵 選尙我家 載揚藩屛之功 宜示褒嘉之寵 21 高麗史 卷26, 世家 26, 元宗 11年 12月 乙卯, 世子諶與蒙古斷事官不花 孟祺等來 王出迎于郊 詔曰 卿國雖小 卿亦是一國之王 黜陟威福 或是或 非 當自己出. 22 高麗史 卷27, 世家 27, 元宗 12年 7月 丙申, 蒙古遣斷事官只必哥等六人 來 詔曰 卿一國臣民之主 敷奏不實可乎 爾後愼勿如此. 23 高麗史節要 卷19, 忠烈王 元年 5月, 王聞詔使來 出迎西門外 王旣尙主 雖 詔使未嘗出城而迎 舌人金台如元 省官語之曰 駙馬王不迎詔使不爲無例 然王是 外國之主也 詔書至不可不迎 至是始迎之. 17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75 관청 이름이 원과 같은 것을 개칭했고, 24 다음 해에는 국왕 용어인 선 지( 宣 旨 ) 짐( 朕 ) 사( 赦 ) 주( 奏 ) 등을 각각 왕지( 王 旨 ) 고( 孤 ) 유 ( 宥 ) 정( 呈 ) 으로 고쳤다. 25 이러한 개편은 고려의 관제가 참월하다는 원의 불만에 따른 것이었는데, 이것은 단순히 원의 내정 간섭으로만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왜냐하면 관제의 참월함을 문제삼은 것 자체 가 천자와 제후의 관계를 염두에 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고 려인들은 원의 요구에 따른 관제 개편을 제후의 도리로서 합리화했을 것인데,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고려인들에게 당시 고려가 원과 책봉 조공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이 더욱 굳어졌을 것이다. 결국 13~14세기에 고려인들이 몽골제국을 중국 왕조인 원으로 인 식하고, 고려와 원의 관계를 책봉 조공관계로 인식한 것은 단순히 정 보의 부족이나, 일방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양국 사이에 책봉 조공관계의 요소가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렇다면 양국 사이에 존재했던 책봉 조공관계의 요소는 과연 어떠한 것이 있었을까? 다음 장에서는 그것과 함께 양국 관계를 책봉 조공관 계로 보기 어렵게 하는 요소들도 함께 찾아보고자 한다. 24 高 麗 史 卷 28, 世 家 28, 忠 烈 王 元 年 10 月 庚 戌 ; 壬 戌. 25 高 麗 史 卷 28, 世 家 28, 忠 烈 王 2 年 3 月 甲 申.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175

176 III. 1 3~14세기 고려-몽골관계의 양상 1. 책봉 조공관계의 요소 1) 책봉 책봉 조공관계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당연히 책봉과 조공이며, 그 중에서도 책봉이 필수적인 요소이다. 고려와 몽골(원) 사이에는 1259년 원종에 대한 최초의 책봉이 이루어졌고, 이후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역대 고려 국왕들이 모두 책봉을 받았다. 이것은 고려가 건국 초부터 오대 와 송, 거란과 금으로부터 책봉을 받았던 것과 다르지 않지만, 책봉호 에 원의 관계(官階)와 행성승상(行省丞相), 부마(駙馬) 등이 추가된 점에 서 차이가 있었다. 고려 국왕들의 책봉 사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몽골로부터 최초로 책봉을 받은 국왕은 원종이었다. 원종은 강화의 조건에 따라 1258년(고종 45)에 태자로서 몽골에 갔고, 그곳에 머무는 동안 고종이 죽자 아직 제위에 오르기 전이던 쿠빌라이로부터 고려 국왕에 책봉되었다. 그 전후 사실이 고려사 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 어 있다. 江淮宣撫使 趙良弼이 皇弟(쿠빌라이)에게 말하기를 고려가 비록 小國이라 하나 산과 바다에 의지하여 국가가 20여 년 동안 用兵하 는데도 아직 臣附시키지 못했습니다. 전 해에 太子 倎이 來朝하였 17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77 으나 마침 황제가 西征했으므로 머문 지 2년이 되었는데, 대접하는 설비가 소홀하여 그 마음을 위안하지 못했으니 일단 돌아가면 다 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마땅히 館穀을 후하게 하여 藩王의 禮로 접대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듣건대 그 아비가 죽었다 하니 倎을 왕으로 세워 환국시키면 반드시 은혜를 감사히 여기고 덕을 받들 어 臣職 닦기를 원할 것이니, 이는 一卒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도 一國을 얻는 것입니다 라고 했다. 陜西宣撫使 廉希憲도 또한 이를 말하니 皇弟가 그렇게 여겼다.26 여기서 조양필의 말 가운데는 입전위왕(立倎爲王) 이라고 했지만, 뒤 이어 고려에 전달된 몽골의 조서에서는 같은 사실이 책위왕(冊爲王) 이 라고 표현되어 있어27 그것이 책봉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오랜 전쟁 끝에 성립한 양국관계가 어떤 형태를 띠게 될 지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종의 죽음이라는 우연적인 사건이 몽골의 결정을 재촉하게 되었고, 몽골은 고려 태자를 고려 국왕에 책봉함으로써 앞으로 고려 와 책봉 조공관계를 수립할 것임을 시사한 셈이었다. 몽골의 원종 책봉은 김준, 임연 등의 무신정권이 존속하고 있는 가 운데 국왕 원종의 지위를 보장해주는 역할을 했다. 1269년(원종 10) 임 연이 원종을 폐위했을 때, 원종이 몽골에 손위표(遜位表)를 보낸 것이 나28 몽골에서 원종의 복위를 요구해온 것은29 모두 책봉을 근거로 하 26 高麗史 卷25, 世家 25, 元宗 元年 3月 丁亥. 元史 에도 같은 기록이 실 려 있다[ 元史 卷4, 本紀 4, 世祖 中統 元年 3月]. 27 高麗史 卷25, 世家 25, 元宗 元年 4月 辛酉. 28 高麗史 卷26, 世家 26, 元宗 10年 7月 辛亥. 29 高麗史 卷26, 世家 26, 元宗 10年 8月 戊戌.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177

178 여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었다. 원종에 이어 충렬왕이 즉위했을 때에도 역시 몽골의 책봉을 받았 다. 30 그러나 충렬왕은 원종과 달리 고려국왕호( 高 麗 國 王 號 ) 이외의 여 러 책봉호를 받았다. 우선, 1280년(충렬왕 6)에는 개부의동삼사( 開 府 儀 同 三 司 ) 중서좌승상행중서성사( 中 書 左 丞 相 行 中 書 省 事 )에 봉해졌다. 31 이 는 충렬왕이 일본 침공을 위해 설치된 정동행성에 관여하기 위하여 요( 遼 ) 금( 金 )이 고려 국왕을 개부의동삼사에 책봉했던 제후입상( 諸 侯 入 相 ) 의 사례를 들어 요구한 결과였다. 32 그리고 다음 해에는 부마( 駙 馬 ) 가 더해졌는데, 이 역시 충렬왕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33 이후 1282년(충렬왕 8) 정동행성이 폐지되자 34 행성승상( 行 省 丞 相 )을 뺀 부마 국왕의 책봉호를 갖게 되었고, 35 머지않아 정동행성이 다시 설치되자 부 마 고려 국왕으로서 정동행성좌승상( 征 東 行 省 左 丞 相 )을 겸하게 되었다. 36 이후 원 관제의 개편에 따라 1288년(충렬왕 14)에 정동행상서성좌승상( 征 東 行 尙 書 省 左 丞 相 )으로 바뀌었다가 년(충렬왕 17) 정동행중서성좌 30 高 麗 史 卷 28, 世 家 28, 忠 烈 王 卽 位 年 7 月, 元 遣 同 知 上 都 留 守 事 張 煥 冊 爲 王. 31 高 麗 史 卷 29, 世 家 29, 忠 烈 王 6 年 12 月 辛 卯. 32 高 麗 史 卷 29, 世 家 29, 忠 烈 王 6 年 11 月 己 酉. 33 高 麗 史 卷 29, 世 家 29 忠 烈 王 7 年 3 月 乙 卯, 將 軍 盧 英 還 自 元 帝 賜 駙 馬 國 王 宣 命 征 東 行 中 書 省 印 先 是 王 奏 曰 臣 旣 尙 公 主 乞 改 宣 命 益 駙 馬 二 字 帝 許 之. 34 高 麗 史 卷 29, 世 家 29, 忠 烈 王 8 年 正 月, 是 月 元 罷 征 東 行 中 書 省. 35 高 麗 史 節 要 卷 20, 忠 烈 王 8 年 9 月, 元 賜 駙 馬 國 王 印. 36 高 麗 史 卷 29, 世 家 29, 忠 烈 王 9 年 6 月 癸 未, 趙 仁 規 還 自 元 帝 冊 王 爲 征 東 中 書 省 左 丞 相 依 前 駙 馬 高 麗 國 王 命 與 阿 塔 海 共 事. 37 高 麗 史 卷 30, 世 家 30, 忠 烈 王 14 年 4 月 乙 卯, 朔 郞 將 金 精 還 自 元 詔 以 王 爲 征 東 行 尙 書 省 左 丞 相. 17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79 승상으로 환원되는 변화가 있었지만,38 충렬왕은 고려 국왕, 부마, 정동 행성승상(征東行省丞相)의 세 가지 지위를 기본적인 책봉호로 받았다. 1294년(충렬왕 20)에는 충렬왕이 작명(爵命)을 더해줄 것을 요청했 고,39 이듬해에는 구체적으로 태사(太師) 중서령(中書令)을 요구했지만 원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40 관작의 추가는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 에게 양위하면서 비로소 이루어져 충렬왕은 양위와 동시에 추충선력 정원보절공신(推忠宣力定遠保節功臣) 개부의동삼사 태위(太尉) 부마 상 주국(上柱國) 일수왕(逸壽王)에 책봉되었다.41 그러나 곧 충렬왕이 복위 했는데, 복위 당시의 책봉호는 확인되지 않지만 1307년(충렬왕 33)에 추충선력정원보절공신(推忠宣力定遠保節功臣) 개부의동삼사 태위 정동행 중서성좌승상 상주국 고려국왕이었음이 확인되므로42 이것이 복위시의 책봉호일 것으로 추정된다. 단, 여기에는 부마 가 빠져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착오일 것이다. 왜냐하면 1310년(충선왕 2) 원 무종의 제서에 충렬왕의 직함이 순성수정추충선력정원보절공신(純誠守正推忠宣力定遠保 節功臣) 태위 개부의동삼사 정동행중서성좌승상 상주국 부마 고려 국 왕으로 부마 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43 다음으로, 충선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인 1291년(충렬왕 17)에 특진(特 38 高麗史 卷30, 世家 30, 忠烈王 17年 9月 己亥, 元遣洪重慶 授王爲征東 行中書省左丞相 以印侯鎭邊萬戶府達魯花赤 宋玢爲宣武將軍鎭邊萬戶 劉碩爲忠 顯校尉管軍千戶 皆賜金牌. 39 高麗史 卷31, 世家 31, 忠烈王 20年 5月, 王以四事奏于帝 一請歸耽羅 二請歸被虜人民 三請冊公主 四請加爵命. 40 高麗史 卷31, 世家 31, 忠烈王 21年 5月, 丁亥 遣贊成事印侯如元 請世 子婚 又遣左承旨柳庇請加王太師中書令 降公主印章 改世子印章 帝皆不允. 41 高麗史 卷31, 世家 31, 忠烈王 24年 正月 甲辰. 42 高麗史 卷32, 世家 32, 忠烈王 33年 8月 辛亥. 43 高麗史 卷33, 世家 33, 忠宣王 2年 7月 乙未.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179

180 進) 상주국 고려국왕세자(高麗國王世子)에 책봉되었고, 년(충렬왕 21)에는 의동삼사(儀同三司) 상주국 고려국왕세자 영도첨의사사(領都僉 議使司)에 진봉되었다.45 원에 의한 고려국왕세자 책봉은 전무후무한 일이지만, 이보다 앞서 고려에서 충선왕을 세자로 책봉했으므로46 가 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충선왕은 1298년에 충렬왕의 양위를 받 아 즉위했는데, 이때 개부의동삼사 정동행중서성좌승상 부마 상주국 고려 국왕에 책봉되었다.47 부마의 지위는 그보다 앞서 1296년(충렬왕 22)에 원 진왕(晉王)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얻어졌다.48 충선왕은 고려 왕위에서 곧 물러났지만 1307년에 원에서 무종을 옹립한 공으로 심양 왕(瀋陽王)에 책봉되었는데, 당시 책봉호는 개부의동삼사 태자태부 상 주국 부마도위(駙馬都尉) 심양왕이었다.49 그리고 이듬해 고려 국왕에 즉위하면서 정동행중서성좌승상 고려 국왕을 더하여 개부의동삼사 태 자태부 상주국 부마도위 심양왕 정동행성좌승상 고려 국왕이 되었다.50 그러나 충선왕은 심양왕과 고려 국왕을 겸하게 됨으로써 일신상에 양왕인(兩王印)을 겸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는 홍중희(洪重喜)의 공격을 44 高麗史 卷30, 世家 30, 忠烈王 17年 9月, 是月 帝授世子特進上柱國高麗 國王世子 賜金印. 45 高麗史節要 卷21, 忠烈王 21年 8月 戊午, 世子至自元 帝冊爲儀同三司上柱 國高麗王世子領都僉議使司 賜銀印. 46 高麗史 卷28, 世家 28, 忠烈王 3年 正月 壬寅, 冊子謜爲王世子. 47 高麗史 卷31, 世家 31, 忠烈王 24年 正月 甲辰. 48 高麗史 卷31, 世家 31, 忠烈王 22年 11月 壬辰, 王與公主詣闕 世子以白 馬納幣于帝 尙晉王之女. 49 高麗史節要 卷23, 忠烈王 34年 5月, 知密直司事朴瑄還自元 帝以前王定策 功 特授開府儀同三司 太子太傅 上柱國 駙馬都尉 進封瀋陽王 又令入中書省參 議政事 賜金虎符. 50 高麗史 卷33, 世家 33, 忠宣王 復位年 10月 辛亥. 18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81 받게 되었고, 그 때문에 고려 국왕위를 아들 충숙왕에게 양위했다. 51 이렇게 해서 즉위한 충숙왕은 금자광록대부( 金 紫 光 祿 大 夫 ) 정동행중서 성좌승상 상주국 고려 국왕에 책봉되었는데 52 책봉호에 부마 가 빠진 것은 아직 원 공주와 혼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뒤 1316년(충숙왕 3)에 원 공주와 혼인이 이루어진 뒤 53 이듬해 개부의동삼사 부마 고려 국왕으로 책봉되었다. 54 이때 정동행성좌승상과 상주국은 그대로 이어 졌을 것이다. 한편, 충숙왕과 고려 왕위를 다투었던 왕고( 王 暠 )는 충선 왕으로부터 심왕위를 물려받아 개부의동삼사 심왕에 책봉되고 원 공 주와 혼인했는데, 55 부마에 봉해졌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1330년(충숙왕 17)에 충숙왕의 양위를 받아 즉위한 충혜왕은 개부의 동삼사 정동행중서성좌승상 상주국 고려 국왕에 책봉되었다. 56 책봉호 에 부마가 포함되지 않은 것은 물론 충혜왕이 아직 부마가 되지 않았 기 때문으로, 얼마 뒤 충혜왕이 원 공주와 혼인함에 따라 57 추가되었 을 것이지만 확인되지는 않는다. 그 뒤를 이은 충목왕도 개부의동삼 사 정동행중서성좌승상 상주국 고려 국왕에 책봉되었는데, 58 미처 혼 51 高 麗 史 卷 35, 世 家 35, 忠 肅 王 15 年 7 月 己 巳. 52 高 麗 史 卷 34, 世 家 34, 忠 宣 王 5 年 3 月 甲 寅. 53 高 麗 史 卷 34, 世 家 34, 忠 肅 王 3 年 7 月 戊 申, 王 娶 營 王 女 亦 憐 眞 八 刺 公 主. 54 高 麗 史 卷 34, 世 家 34, 忠 肅 王 4 年 11 月 辛 卯, 贊 成 事 權 漢 功 還 自 元 帝 冊 王 爲 開 府 儀 同 三 司 駙 馬 高 麗 國 王. 55 高 麗 史 節 要 卷 24, 忠 肅 王 3 年 3 月, 上 王 奏 于 帝 傳 瀋 王 位 于 世 子 暠 自 稱 太 尉 王 帝 授 暠 開 府 儀 同 三 司 瀋 王 令 尙 梁 王 女. 56 高 麗 史 卷 36, 世 家 36, 忠 肅 王 17 年 2 月 壬 午, 帝 命 典 瑞 院 使 阿 魯 委, 頭 曼 台, 客 省 太 史 九 住 策 王 曰 可 特 授 開 府 儀 同 三 司 征 東 行 中 書 省 左 丞 相 上 柱 國 高 麗 國 王. 57 高 麗 史 卷 36, 世 家 36, 忠 惠 王 卽 位 年 3 月 戊 寅, 王 尙 關 西 王 焦 八 長 女 是 爲 德 寧 公 主. 58 高 麗 史 卷 37, 世 家 37, 忠 穆 王 卽 位 年 5 月 甲 午.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181

182 인을 하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또한 충정왕도 책봉을 받았 을 것이지만 기록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원으로부터 마지막으로 책 봉을 받은 공민왕도 (원이) 국왕으로 삼았다 고만 되어 있을 뿐 59 책봉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전례대로 개부의동삼사 정동행성승상 부마 상주국 고려 국왕에 책봉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원종부터 공민왕까지 역대 고려 국왕들은 모두 몽골(원) 의 책봉을 받았고, 충렬왕 이후 책봉호에는 고려 국왕, 행성승상, 부 마 등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책봉은 고려 전기에 오대, 송, 거란, 금과 의 관계에서 이루어졌던 것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이 시 기 고려 국왕에 대한 책봉은 몽골(원)에 의해 일방적이고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달랐다. 즉 이전의 책봉은 이미 이루어진 고려 국 왕의 계승을 추인하는 형식적 절차에 불과했지만, 몽골(원)은 이것을 실질적인 권한으로 행사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1298년(충렬왕 24)에 즉위했던 충선왕이 곧 퇴위하고 충렬왕이 복위한 것은 전적으로 원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충렬왕의 복위를 명하는 조서가 반포되었을 때 (그것을 가져온) 발로올( 孛 魯 兀 )이 온 지 10일이 되었으 나, 국인( 國 人 )들은 이러한 조서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고 한 데서 60 단 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원의 책봉권에도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즉 원이 고려의 전 통적인 왕위계승 원칙을 부정하지는 못했는데, 실제로 고려에서 왕위 계승 자격이 없는 사람이 책봉을 받은 적은 없었다. 충숙왕 때 일어 난 심왕옹립운동에서 보듯이 심왕 고는 원의 후원을 받았음에도 불구 59 高 麗 史 卷 37, 世 家 37, 忠 定 王 3 年 10 月 壬 午, 元 以 江 陵 大 君 祺 爲 國 王. 60 高 麗 史 卷 31, 世 家 31, 忠 烈 王 24 年 8 月 癸 酉. 18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83 하고 방계라는 점이 결정적인 약점으로 작용하여 결국 고려 국왕이 되지 못했다. 따라서 원의 실질적인 책봉권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제 한된 범위에서 행사되어 대부분은 부자 사이에서 왕위를 옮기는 정도 에 머물렀던 것이고, 그러한 의미에서 몽골(원)이 고려 국왕을 임면( 任 免 )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편, 이 시기의 책봉호 가운데 핵심적인 두 가지, 즉 고려 국왕과 부마 가운데 어느 것이 우선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모리 히라 마사히코[ 森 平 雅 彦 ]는 1281년(충렬왕 7) 고려 국왕과 부마가 합쳐 져 부마국왕 이 성립했고, 그를 계기로 고려 국왕의 격식이 원조( 元 朝 ) 의 부마로서 실체화되었다고 주장했다. 61 또 김호동은 국왕과 부마의 지위가 한 사람에게서 일체화된 것을 몽골제국 내에서 고려의 특수성 으로 설명했다. 62 한 나라의 국왕이 다른 나라의 부마가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매우 드문 일이고,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서 유일할 뿐 아 니라, 김호동의 지적처럼 당시 몽골제국 내에서도 특이한 현상이었다. 따라서 그것이 고려-몽골관계의 특수성을 밝히는 관건이 되리라는 것 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고려 국왕과 부마의 두 지위 가운데 후자가 우선하는 것으 로보고, 더 나아가 당시의 고려를 부마에게 수여된 투하령( 投 下 領 )으 로 보고자 하는 모리히라 마사히코의 견해에는 63 동의하기 어렵다. 이 61 森 平 雅 彦 (1998a), 駙 馬 高 麗 國 王 の 成 立 元 朝 における 高 麗 王 の 地 位 についての 豫 備 的 考 察, 東 洋 學 報 김호동(2007), 앞의 책, 110~111쪽. 63 森 平 雅 彦 (1998b), 高 麗 王 位 下 の 基 礎 的 考 察 大 元 ウルスの 一 分 權 勢 力 としての 高 麗 王 家, 朝 鮮 史 硏 究 會 論 文 集 36.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183

184 에 대해서는 이미 김호동과 이개석의 비판이 있지만, 64 책봉 사실만을 정리해 보아도 그의 주장이 갖는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충숙왕 처럼 원 공주와 혼인하기 전에 즉위하게 되면 부마의 지위를 갖지 못 하고 고려 국왕으로서만 책봉을 받았던 것인데, 이럴 경우 부마와 국 왕의 지위는 자연스럽게 분리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단 충숙왕뿐 아니라 충혜왕이 처음 즉위했을 때도 부마가 아니었고, 충목왕과 충정 왕은 끝내 부마가 되지 못하였으니, 이들은 고려 국왕의 지위만을 가 지고 고려의 인민과 영토를 지배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 국 왕이 몽골의 부마가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것이 당시 몽골제국 내에서 특이한 사례였다고는 할 수 있지만, 고려 국왕과 부마의 두 가 지 지위가 부마로 일체화되었다거나, 고려가 부마의 투하령이었다는 논리는 성립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한다. 2) 인장의 수여 책봉과 함께 인장( 印 章 )이 수여되었다. 인장의 수여는 몽골의 국왕 책봉 직후인 1260년(원종 1)에 호부국왕지인( 虎 符 國 王 之 印 ) 을 사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65 이러한 전통은 고려 전기 거란 및 금과 책봉 조 공관계를 맺었을 때에도 실시된 바 있었으므로, 66 책봉과 함께 인장이 수여되었을 때 고려인들은 당연히 몽골과의 관계가 책봉 조공관계와 64 김호동(2007), 앞의 책, 113쪽;이개석(2007), 大 蒙 古 國 - 高 麗 關 係 연구의 재 검토, 史 學 硏 究 88, 88쪽. 65 高 麗 史 卷 25, 世 家 25, 元 宗 元 年 8 月 壬 子, 壬 子 永 安 公 僖 齎 詔 三 道 還 自 蒙 古 一 曰 今 賜 卿 虎 符 國 王 之 印 幷 衣 段 弓 刀 等 物. 66 高 麗 史 卷 72, 志 26, 輿 服 1 印 章 王 印 章. 18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85 다름이 없는 것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1274년에 충렬왕이 즉위하여 고려 국왕으로 책봉되었을 때에도 그 에 따른 고려국왕인(高麗國王印)을 함께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1278년 (충렬왕 4) 7월에는 쿠빌라이로부터 직접 부마금인(駙馬金印)을 받았다.67 이렇게 해서 국왕인(國王印)과 부마인(駙馬印)을 각각 가지고 있다가 1281년(충렬왕 7) 고려국왕인에 부마를 더하고 정동행성인(征東行省印) 을 합친 인장을 받았는데,68 이는 충렬왕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그 해에 일본 침공이 실패로 끝나고 정동행성이 폐지되자 부마국왕인이 새로 수여되었다.69 그 뒤로는 고려 국왕이 새로 즉위할 때 책봉과 함 께 인장이 수여된 기록을 찾아 볼 수 없지만, 인장의 수여는 계속되 었을 것이다.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이 퇴위할 때 원의 사신이 국 왕인을 회수하여 일수왕(逸壽王:충렬왕)에게 주었다 는 기록이나, 년(충숙왕 11)에 충숙왕이 원에 억류되어 있다가 환국할 때 국왕 인장(國王印章)을 다시 주었다 는 기록에서71 국왕인장의 존재가 확인되 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민왕에게 마지막으로 수여된 원의 인장은 1370 년(공민왕 19) 고려가 명의 책봉을 받으면서 명에 납부되었다.72 한편, 원사 제왕표(諸王表)에 부마고려국왕(駙馬高麗國王)에게 원의 67 高麗史 卷28, 世家 28, 忠烈王 4年 7月 壬寅, 帝賜王海東靑一連, 駙馬 金印, 鞍馬 王飮餞于東宮. 68 高麗史 卷29, 世家 29, 忠烈王 7年 3月 乙卯, 將軍盧英還自元 帝賜駙馬 國王宣命征東行中書省印 先是 王奏曰 臣旣尙公主 乞改宣命益駙馬二字 帝許之. 69 高麗史 卷72, 志 26, 輿服 1 印章 王印章 忠烈王 8年 9月, 元賜駙馬國王印. 70 高麗史 卷31, 世家 31, 忠烈王 24年 8月 壬申, 王餞于金郊 酒酣 孛魯兀 以帝命取國王印授王. 71 高麗史 卷35, 世家 35, 忠肅王 11年 正月 甲寅, 帝勑王還國 復賜國王印章. 72 高麗史 卷42, 世家 42, 恭愍王 19年 7月 甲辰, 遣三司左使姜師贊如京師 謝冊命及璽書 幷納前元所降金印 仍計稟耽羅事.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185

186 6등급 인장 가운데 제1등급에 해당하는 금인수뉴( 金 印 獸 紐 )를 수여했 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73 원사 의 제왕표에 올라 있는 123개 제왕 가운데 유독 고려 국왕만 부마고려국왕으로 이름을 올린 것도 특이하 지만, 그럴 경우 부마가 되지 않은 고려 국왕들, 예를 들어 혼인 전의 충숙왕과 충혜왕, 부마가 되지 못한 충목왕과 충정왕의 경우 어떤 인 장을 받았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3) 연호와 반력 원종이 몽골에서 책봉을 받고 귀국한 직후 몽골에서는 조서를 보내 와 개원( 改 元 )의 사실을 알렸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漢 武 帝 이후에 창업하거나 수성하는 군주는 즉위하는 시초에 반 드시 改 元 하였으니, 이는 천하 만세에 근본을 바로하고 나라를 세 우는 뜻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국가가 여러 대에 걸쳐 성스런 제왕들이 계승하였으나 나라를 여는 큰 사업 때문에 예의 문물의 일은 돌볼 겨를이 없었다. 짐이 큰 사업을 이어받아 옛날의 좋은 정치를 회복하고자 하여 이미 금년 5월 19일에 연호를 세우고 中 統 원년이라 했으니, 사신이 돌아가거든 이 사실을 널리 알려 짐의 뜻을 알게 하도록 하라. 74 즉 금년(1260년) 5월 19일을 기해서 중통( 中 統 ) 원년으로 개원한다 73 元 史 卷 108, 表 3, 諸 王 表. 74 高 麗 史 卷 25, 世 家 25, 元 宗 元 年 8 月 壬 子. 18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87 는 것인데, 조서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그 자체가 한( 漢 ) 무제( 武 帝 ) 이 후 계속된 중국적인 전통이었고, 중통이라는 연호 역시 중국적인 의미 를 담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원은 연호가 바뀔 때마 다 빠지지 않고 사신을 보내 그 사실을 알리는 조서를 반포했다. 75 연호와 함께 역( 曆 )도 수여되었다. 반력( 頒 曆 )은 1262년(원종 3)에 처 음 시행되었으며, 76 그로부터 상례( 常 例 )가 되었다고 한다. 77 그런데 그 역은 중통오년역일일도( 中 統 五 年 曆 日 一 道 ) 78 혹은 지원십삼년력일일본 ( 至 元 十 三 年 曆 日 一 本 ) 79 이라고 한 데서 보듯이 1년치의 것이었으므로 해 마다 수여되었어야 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고 려사 에서 확인되기로는 1262년(원종 3)을 시작으로 1264년(원종5)과 1268년(원종 9), 1270년(원종 11), 1276년(충렬왕 2), 1278년, 1279년, 1281년, 1284년, 1296년 등 10건뿐이며, 80 그 뒤로는 반력의 사례를 75 高 麗 史 卷 26, 世 家 26, 忠 烈 王 5 年 10 月 戊 申 至 元 ; 卷 31, 世 家 31, 忠 烈 王 20 年 12 月 辛 丑 元 貞 ; 忠 烈 王 23 年 2 月 庚 申 大 德 ; 卷 32, 世 家 32, 忠 烈 王 34 年 2 月 辛 丑 至 大 ; 卷 34, 世 家 34, 忠 宣 王 3 年 12 月 庚 午 皇 慶 ; 忠 肅 王 元 年 2 月 庚 午 延 祐 ; 卷 35, 世 家 35, 忠 肅 王 8 年 正 月 庚 辰 至 治 ; 忠 肅 王 10 年 12 月 辛 酉 泰 定 ; 忠 肅 王 15 年 4 月 乙 未 致 和 ; 忠 肅 王 15 年 9 月 壬 申 天 曆 ; 忠 肅 王 後 4 年 12 月 己 巳 至 元 ; 卷 36, 世 家 36, 忠 惠 王 卽 位 年 5 月 乙 丑 至 順 ; 忠 惠 王 後 2 年 2 月 庚 寅 至 正. 76 高 麗 史 卷 25, 世 家 25, 元 宗 3 年 12 月 乙 卯, 郞 中 高 汭 還 自 蒙 古 帝 頒 曆. 77 元 史 卷 208, 列 傳 95, 高 麗 傳 世 祖 中 統 3 年 ( 元 宗 3 年 ) 正 月, 賜 示 直 曆 後 歲 以 爲 常. 78 高 麗 史 卷 26, 世 家 26, 元 宗 5 年 2 月 丙 寅. 79 高 麗 史 卷 28, 世 家 28, 忠 烈 王 2 年 正 月 丁 丑. 80 高 麗 史 卷 25, 世 家 25, 元 宗 3 年 12 月 乙 卯 ; 卷 26, 世 家 26, 元 宗 5 年 2 月 丙 寅 ; 元 宗 9 年 2 月 壬 寅 ; 元 宗 11 年 12 月 乙 卯 ; 卷 28, 世 家 28, 忠 烈 王 2 年 正 月 丁 丑 ; 忠 烈 王 4 年 正 月 壬 子 ; 卷 29, 世 家 29, 忠 烈 王 5 年 正 月 ; 忠 烈 王 7 年 正 月 戊 戌 ; 忠 烈 王 10 年 11 月 辛 巳 ; 卷 31, 世 家 31, 忠 烈 王 22 年 3 月.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187

188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기록의 누락일 것이며, 이후에도 반력 이 계속되었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역의 제작과 수여에는 중국적인 천자의 이미지가 강하게 투영 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1279년(충렬왕 5) 원이 반력과 동시에 반포 한 조서에서, 짐이 천문 기상을 상고하여 사람들에게 때를 알려주는 것은 천하 를 통일하고 백성의 일을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경은 대대로 藩 方 을 지키며 해마다 職 貢 을 닦아 왔으니, 마땅히 새로운 曆 을 하사 하여 同 文 임을 보이고, 나아가 봄철에 백성들이 제때 전야에 나가 게 하고 가을에는 수확을 하는 데 힘쓰도록 하여 권농에 이바지할 것이다. 81 라고 한 데에는 천상( 天 象 )과 인시( 人 時 )를 주관하는 천자의 모습이 나 타나 있다. 또한 위 조서에는 세수번방( 世 守 藩 方 ) 세수공직( 歲 修 貢 職 ) 하면서 천자로부터 역을 하사받는 제후의 모습도 잘 드러나 있다. 4) 견사( 遣 使 ) 와 조공 원종이 몽골에서 책봉을 받고 귀국한 직후에 고려는 몽골에 사신을 파견하고 공물을 보냈다. 82 그리고 그때부터 하정사( 賀 正 使 ), 하성절사 ( 賀 聖 節 使 ) 등 정기적인 사신뿐 아니라 진정( 陳 情 ), 주청( 奏 請 ), 사은( 謝 81 高 麗 史 卷 29, 世 家 29, 忠 烈 王 5 年 正 月. 82 高 麗 史 卷 25, 世 家 25, 元 宗 元 年 4 月 庚 戌. 18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89 恩 ), 진하( 進 賀 ) 등 갖가지 목적의 사신이 파견되었다. 이 글 말미의 부표( 附 表 ). 대원사행일람( 對 元 使 行 一 覽 ) 은 1260년(원종 1)부터 고려 말 까지 고려가 몽골(원, 북원)에 보낸 사신의 명단과 사행 목적을 정리한 것이다. 이 표에 대한 분석을 기다려보아야 하겠지만, 이러한 사행은 고려 전기에 거란이나 금에 사신을 보낸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83 다만, 고려와 몽골(원) 사이에서는 몽골의 일방적인 물자 수 탈이 자행되었고, 그것이 양국관계를 질적으로 규정하는 하나의 요소 로 인식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고려는 몽골(원)의 요구에 따라 매 [ 鷹, 鷂 ], 인삼, 포 등 물자를 부담하였고, 또한 이 시기의 특징적인 현 상으로서 공녀( 貢 女, 童 女, 處 女 ), 환관[ 閹 人 ] 등 사람을 제공했다. 물자와 인력의 공납은 당시 고려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고, 그에 따 른 고통도 매우 컸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의 몽골(원)에 대한 공물이 다른 시대에 비해 훨씬 더 많았다고 볼 근거는 없다. 이 문제는 책봉 조공관계에 있었던 다른 시기의 경우와 비교하여 판단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1370년(공민왕 19) 고려와 명의 책봉 조공관계가 수립된 이후 1379년(우왕 5)부터 명이 고려에 과도한 공물을 요구해온 적이 있었다. 84 이때 명은 세공마( 歲 貢 馬 ) 1천 필을 요구하는 동시에 금 100근, 은 1만 냥, 양마( 良 馬 ) 100필, 세포( 細 布 ) 1만 필을 해마다 보 낼 것을 요구해왔고, 85 그 때문에 수년 동안 갈등을 빚다가 결국 1382 년(우왕 8)에 고려에서 금 100근과 은 1만 냥, 포 1만 필, 말 1천 필 83 고려 전기 金 에 대한 사신 파견 상황은 朴 漢 男 (1993), 高 麗 의 對 金 外 交 政 策 硏 究, 成 均 館 大 學 校 史 學 科 博 士 學 位 論 文, 212~229쪽에 정리되어 있다 년(우왕 5)부터 1385년까지 고려와 명 사이의 공물을 둘러싼 갈등에 대 해서는 李 泰 鎭 (1996), 14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와 목은 이색의 외교적 역 할, 牧 隱 李 穡 의 生 涯 와 思 想, 一 潮 閣, 69~72쪽을 참조했다. 85 高 麗 史 卷 134, 列 傳 47, 辛 禑 2 禑 王 5 年 3 月.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189

190 을 세공( 歲 貢 )으로 보냈다. 86 그러나 이것으로 명의 요구가 끝난 것이 아니어서 1383년(우왕 9)에 지난 5년간 바치지 않은 세공으로 말 5천 필, 금 500근, 은 5만 냥, 포 5만 필을 다시 요구해왔고, 87 고려에서는 이듬해 5월에 말 1천 필, 7월에 말 5천 필, 8월에 말 1천 필 등 모두 7천 필을 명에 보냈다. 금 96근 14냥, 은 1,900냥, 포 5만 필을 따로 보내고, 부족한 금은은 금 50냥 당 말 1필, 은 300냥 당 말 1필로 환산한 결과였다. 88 이것이 당시 고려에 어느 정도의 부담이 되었는지 는 알 수 없지만, 결코 적은 부담은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공물의 부담을 근거로 고려-몽골관계가 다른 시기의 책봉 조공관계와 질적으 로 달랐다고 주장하는 것도 실은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공녀의 존재가 고려-몽골관계를 설명할 때 특별한 사례로 들 어지기도 하지만, 공녀는 이후 조선과 명 사이에도 있었다. 예를들어, 1408년(태종 8)에 처녀 5명을 선발하여 명에 보낸 일이 있었는데, 89 당 시 명의 사신들이 1년 이상 서울에 머물면서 그 일을 직접 주관했고, 그 때문에 관리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90 명의 처녀 요구는 태종 때만해도 1408년 91 이외에 1409년과 1417년에도 계속되었 고, 92 세종 때에도 계속되었다. 이에 대해서 태종은 대국의 요구를 소 국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고 하고, 93 그것을 사대의 예 로서 인 86 高 麗 史 卷 134, 列 傳 47, 辛 禑 2 禑 王 8 年 4 月. 87 高 麗 史 卷 134, 列 傳 47, 辛 禑 2 禑 王 9 年 11 月. 88 高 麗 史 卷 134, 列 傳 47, 辛 禑 2 禑 王 10 年 閏 10 月. 89 太 宗 實 錄 卷 16, 太 宗 8 年 11 月 丙 辰. 90 太 宗 實 錄 卷 17, 太 宗 9 年 2 月 癸 巳. 91 太 宗 實 錄 卷 17, 太 宗 9 年 5 月 甲 戌 ; 卷 18, 太 宗 9 年 11 月 辛 巳. 92 太 宗 實 錄 卷 33, 太 宗 17 年 4 月 甲 子. 93 太 宗 實 錄 卷 18, 太 宗 9 年 7 月 乙 亥. 19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91 식하는 모습을 보였다. 94 즉 조선 초에도 공녀가 있었지만, 그것이 조 선과 명 사이의 책봉 조공관계를 근본적으로 해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고려와 몽골 사이에서도 공녀의 존재가 책봉 조공관계를 부정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모리히라 마사히코는 고려의 몽골(원)에 대한 경제적 부담을 각종 물자의 진헌( 進 獻 ) 공출( 供 出 ) 로 묶어 이른바 6사( 事 ) 의 수량( 輸 糧 ) 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했지만, 95 이것은 성격이 다른 것이다. 6사 의 수량 은 몽골의 전통에 따른 물자의 수탈로서 주로 조군( 助 軍 ) 과 관련된 것이고, 공물은 책봉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조공에 관계되는 것 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고려에서 몽골(원)에 제공한 물 자(사람 포함)가 조공에 해당하는가, 아니면 그 부담의 크기로 보아 조 공 이외의 것인가를 판단하는 일인데, 이는 역시 다른 경우와 비교해 보아야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며, 그와 동시에 고려-몽골(원)관계에 서도 시기별 변화 양상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94 太 宗 實 錄 卷 33, 太 宗 17 年 5 月 丁 亥. 95 森 平 雅 彦 (2008), 事 元 期 高 麗 における 在 來 王 朝 體 制 の 保 全 問 題, 東 北 アジア 硏 究 別 冊 1 號, 島 根 縣 立 大 學 東 北 アジア 地 域 硏 究 センタ.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191

192 2. 책봉 조공관계 이외의 요소 1) 친조 원간섭기에는 고려의 국왕이 직접 몽골(원)에 다녀오는 일이 자주 있었고, 이러한 친조(親朝)는 한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 때 문에 고려와 원의 관계를 책봉 조공관계와 성격이 다른 것으로 보아 책봉-조근체제(朝覲體制)로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되었다.96 그러나 한편으로는 친조가 제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논리도 성립할 수 있으므로, 친조가 이루어졌다는 것만으로 책봉 조공관계를 부정하 기는 어려울 것이다. 국왕의 친조는 고려 초 거란의 침입 때 철군의 조건으로 논의된 적 이 있었고,97 고려와 몽골의 전쟁 때에도 몽골측에서 요구한 적이 있 었지만,98 실현된 적은 없었다. 전쟁 중에 고려에서는 국왕을 대신하여 태자가 입조하기로 하고 강화를 성립시켰다. 그런데 강화가 성립된 뒤 인 1264년(원종 5) 5월에 몽골에서는 국왕의 친조를 요구해왔고, 그러 한 요구의 명분은 친조는 제후의 대전(大典) 이라는 것이었다.99 이에 대하여 고려에서는 왕이 조회(朝會)하면 화친이 될 것이요, 그렇지 않 96 沈載錫(2002), 高麗國王 冊封 硏究, 혜안, 14쪽. 97 高麗史 卷4, 世家 4, 顯宗 3年 4月, 契丹詔王親朝 ;6月 甲子, 遣刑部 侍郞田拱之如契丹 夏季問候 且告王病不能親朝 丹主怒 詔取興化通州龍州鐵州 郭州龜州等六城. 98 高麗史 卷23, 世家 23, 高宗 26年 4月, 蒙古遣甫可阿叱等二十人齎詔來 諭親朝 王迎詔于梯浦館 是月蒙兵還 ;8月, 蒙古遣甫加波下等一百三十七人來 更徵王親朝 ;卷24, 世家 24, 高宗 38年 10月 戊申, 王出迎于梯浦 皇帝新 卽位 詔國王親朝 及令還舊京. 99 高麗史 卷26, 世家 26, 元宗 5年 5月 辛巳. 19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93 으면 틈이 생길 것이다 라는 이장용( 李 藏 用 )의 주장에 따라 친조하기로 결정했고, 100 같은 해 8월에 최초의 국왕 친조가 실행되었다. 101 전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때 친조가 실행된 데에는 당시 고려 국내에서 국왕이 무신정권과 대결하면서 몽골의 후원에 의지하고 있었던 점과, 가까이는 원종이 태자로서 입조하여 쿠빌라이를 만났던 경험이 긍정적 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원종은 1269년(원종 10)에도 몽골에 다녀왔다. 이때는 임연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몽골의 도움으로 복위한 뒤 그간의 사정을 보고하기 위 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원종은 몽골에서 왕실 혼인과 함께 군대를 요청했고, 몽골 군대를 앞세우고 돌아와 무신정권을 무너뜨리고 왕정 을 복구했다. 이로부터 친조는 고려 왕실과 몽골 사이에 직접적인 외 교의 통로가 되었고, 몽골의 고려 국왕에 대한 견제 수단일 뿐 아니 라, 고려 국왕이 정치적 현안을 직접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활용되었 다. 특히, 원종에 이어 즉위한 충렬왕은 친조를 통해 대칸을 직접 만 나는 기회를 이용하여 많은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예를 들어, 1278 년(충렬왕 4)에는 충렬왕이 친조를 통해 다루가치와 원군을 소환하고 호구조사를 고려에서 독자적으로 실시할 것을 허락받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고, 102 그에 대해서는 이 행차에서 무릇 국가의 소요사( 騷 擾 事 ) 를 모두 아뢰어 없애니 국인이 덕을 칭송하고 감읍했다 는 103 당시의 100 高 麗 史 節 要 卷 18, 元 宗 5 年 5 月. 101 高 麗 史 卷 26, 世 家 26, 元 宗 5 年 8 月 癸 丑 년(충렬왕 4) 親 朝 의 성과는 金 惠 苑 (1986), 忠 烈 王 入 元 行 績 의 性 格, 高 麗 史 의 諸 問 題, 三 英 社, 815~817쪽에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그 親 朝 의 의미에 대해서는 李 益 柱 (1988), 高 麗 忠 烈 王 代 의 政 治 狀 況 과 政 治 勢 力 의 性 格, 韓 國 史 論 18,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75~177쪽 참조. 103 高 麗 史 卷 28, 世 家 28, 忠 烈 王 4 年 9 月 乙 巳.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193

194 평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충렬왕 때에는 고려측에서 친조를 요청한 회 수가 실제 친조한 회수보다 더 많다. 이는 충렬왕이 친조를 외교의 수 단으로 적극 활용했음을 의미한다. 충렬왕 이후에도 고려 국왕의 친조는 계속되었으며, 충선왕의 경우 처럼 국왕이 원에서 생활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고려국왕의 지위에 어떠한 변동을 초래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국왕의 지위에서 비롯되는 몽골제국 내에서 고려의 지위나 고려-몽골관계에 본질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국왕의 친조는 책봉 조공관 계 아래서도 국내 정치상황에 따라 거론될 수 있었던 것으로, 예컨대 고려 말에도 이색이 창왕의 왕권을 강화할 목적에서 명에 친조를 추진 한 적이 있었다. 104 따라서 고려 국왕의 친조를 몽골 측의 요구에 따라 수시로 출두하는 것 으로 본 모리히라 마사히코의 견해는 105 이 시기의 친조가 갖는 양면적인 성격 가운데 일면만을 부각시킨 것이라고 하겠다. 2) 6사 고려와 몽골의 관계를 책봉 조공관계로 보기 어렵게 하는 또 한 가 지 중요한 사실은 몽골에서 요구한 6사( 六 事 ) 이다. 6사 란 납질( 納 質 ) 조군( 助 軍 ) 수량( 輸 糧 ) 설역( 設 驛 ) 공호수적( 供 戶 數 籍 ) 치다 루가치( 置 達 魯 花 赤 ) 등 여섯 가지 요구사항을 가리키는데, 몽골이 유목 전통에 따라 정복지역에 요구하던 것이었다. 몽골이 고려에 6사 를 처음 요구해 온 것은 1262년(원종 3) 12월의 104 高 麗 史 卷 115, 列 傳 28, 李 穡. 105 森 平 雅 彦 (2008), 앞의 글, 139쪽. 19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95 일이었다. 이때 몽골은 반력과 동시에 조서를 보내와, 무릇 멀고 가까이에 새로 귀부한 나라들에 대해서는 우리 조종이 이미 정한 규정이 있으니, 반드시 인질을 보내고( 納 質 ), 백성들의 호적을 작성하며( 籍 民 編 ), 郵 驛 을 설치하고( 置 郵 ), 군사를 내고( 出 師 旅 ), 군량을 운반하고( 轉 輸 糧 餉 ), 군비를 보조하는 것( 補 助 軍 儲 ) 이다. 106 라고 하여 뒷날 6사 라 불리는 항목들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 납질 은 이미 실행되었으니 나머지 조항들을 실행할 것을 요구 했다. 여기서 납질 이 이미 시행되었다고 한 것은 전쟁 중이던 1241년 (고종 28)에 영녕공( 永 寧 公 ) 준( 綧 )을 몽골에 보낸 것을 가리킨다. 107 하 지만 6사 요구는 몽골의 전통에 따른 것으로, 중국적인 책봉 조공관 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이에 고려에서는 즉답을 하지 않았 고, 몽골에서는 다시 사신을 보내와 그 이행을 촉구했는데, 그때는 치우( 置 郵 ), 적민( 籍 民 ), 출사( 出 師 ), 수량( 輸 糧 ) 등 네 가지를 지목 했다. 108 그러자 고려에서는 이미 북쪽 국경까지 역을 설치했으며, 나머 지 세 가지는 연기해 줄 것을 요청했다. 109 그리고 몽골이 이를 받아들 임으로써 110 6사 의 문제는 일단 마무리가 되었다. 106 高 麗 史 卷 25, 世 家 25, 元 宗 3 年 12 月 乙 卯. 107 高 麗 史 卷 23, 世 家 23, 高 宗 28 年 4 月, 以 族 子 永 寧 公 綧 稱 爲 子 率 衣 冠 子 弟 十 人 入 蒙 古 爲 禿 魯 花 禿 魯 花 華 言 質 子 也. 108 高 麗 史 卷 25, 世 家 25, 元 宗 4 年 3 月 甲 午 高 汭 還 自 蒙 古 言 中 書 省 云 帝 怒 爾 國 前 降 詔 書 內 置 郵, 籍 民, 出 師, 輸 糧 等 事 置 而 不 奏 故 不 賜 回 詔. 109 高 麗 史 卷 25, 世 家 25 元 宗 4 年 8 月 甲 子. 110 위와 같음.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195

196 몽골이 6사 를 다시 요구해온 것은 1268년(원종 9년) 2월이었다. 이 때 몽골은 출군조전( 出 軍 助 戰 ) 과 전량( 轉 糧 ), 점수민호( 點 數 民 戶 ) 외에 청다루가치[ 請 達 魯 花 赤 ] 를 추가하여 네 가지를 요구했다. 111 그리고 다 음 달에는 다시 내속지국( 內 屬 之 國 ) 의 의무로서 납질, 조군, 수량, 설역, 공호수적, 치다루가치 등 6사 를 명시하고, 납질 과 설역 은 이 미 시행되었으니 나머지 네 가지를 이행할 것을 재촉해왔다. 112 바로 전 해에 몽골은 베트남[ 安 南 ]에도 군장친조( 君 長 親 朝 ), 자제입질( 子 弟 入 質 ), 편민수( 編 民 數 ), 출군역( 出 軍 役 ), 수납세부( 輸 納 稅 賦 ), 치다루가 치 등 6사 를 요구했는데, 113 구체적인 항목은 조금 다르지만 책봉 조 공의 형식을 취하고 있던 고려와 베트남에 대하여 몽골 전통에 따른 통치방식을 적용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고려는 조사지명( 助 師 之 命 ) 과 수량향지사( 輸 糧 餉 之 事 ) 는 즉시 이 행하고 청다루가치 와 공호판지사( 供 戶 版 之 事 ) 는 개경으로 환도한 뒤에 이행하도록 해 줄 것을 요청했다. 114 몽골의 6사 요구는 고려의 무신정권을 압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임연에 의한 원종 폐위를 초래했고, 이로부터 국왕과 무신정권 간의 대결이 표면화되어 결국 원종이 몽골의 후원 아래 무신정권을 무너뜨 리고 왕정을 회복했다. 그렇다면 그 후에 6사 는 어떻게 되었을까? 고려사 등에는 이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없지만, 처음의 약속대로 시행되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개경 환도가 이루어진 직후인 1271년(원종 12)에 세자와 의관윤주 111 高 麗 史 卷 26, 世 家 26, 元 宗 9 年 2 月 壬 寅. 112 高 麗 史 卷 26, 世 家 26, 元 宗 9 年 3 月 壬 申. 113 元 史 卷 209, 列 傳 96, 外 夷 2 安 南 世 祖 至 元 4 年 9 月. 114 高 麗 史 卷 26, 世 家 26, 元 宗 9 年 4 月. 19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97 ( 衣 冠 胤 冑 ) 20명을 인질로 삼아 몽골에 보냄으로써 납질 이 실행되었 다. 115 이는 인질이 늙거나 죽으면 새로 보내 대신하거나 보충하는 예에 따른 것이었다 사 가운데 고려 측에서 가장 쉽게 시행할 수 있는 것이 납질 이었을 것이고, 또한 원종이 세자와 원 공주의 혼인을 요청 해놓은 상태였으므로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로써 전 쟁 중에 영녕공 준을 인질로 보낸 이후 처음으로, 그리고 세자로서는 처음으로 입질( 入 質 )된 것이었다. 다루가치를 두는 문제는, 1270년(원종 11)에 친조했던 원종이 몽골 군을 앞세워 귀국할 때 다루가치와 동행할 것을 요청했고, 117 그에 따 라 다루가치가 파견되었는데, 118 무신정권이 종식된 뒤에도 돌아가지 않음으로써 자연히 설치된 셈이 되었다. 그 후 몽골은 1272년(원종 13) 에 이익( 李 益 )을, 1274년(충렬왕 즉위년)에 흑적( 黑 的 )을 다루가치로 파 견했다. 119 그밖에 부( 副 )다루가치와 다루가치경력( 經 歷 )을 따로 두었는 데, 120 이는 다루가치가 고려에 상주하는 기관으로서 존재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당시 다루가치는 고려의 노비법 개정을 시도하는가 하 115 高 麗 史 卷 26, 世 家 26, 元 宗 12 年 6 月 己 亥. 116 高 麗 史 卷 26, 世 家 26, 元 宗 9 年 3 月 壬 申, 蒙 古 遣 北 京 路 摠 管 兼 大 定 府 尹 于 也 孫 脫, 禮 部 郞 中 孟 甲 等 來 詔 曰 且 納 質 之 事 惟 我 太 宗 皇 帝 朝 王 綧 等 已 入 質 代 老 補 亡 固 自 有 例. 117 高 麗 史 卷 26, 世 家 26, 元 宗 11 年 2 月 庚 辰, 王 上 表 又 請 達 魯 花 赤 偕 往 本 國. 118 高 麗 史 卷 26, 世 家 26, 元 宗 11 年 5 月 丙 午, 蒙 古 以 脫 朶 兒 爲 我 國 達 魯 花 赤. 119 高 麗 史 卷 27, 世 家 27, 元 宗 13 年 4 月 癸 卯, 元 遣 李 益 爲 達 魯 花 赤 王 迎 于 城 外 ; 卷 28, 世 家 28, 忠 烈 王 卽 位 年 12 月 甲 寅, 元 遣 黑 的 來 爲 達 魯 花 赤. 120 高 麗 史 卷 28, 世 家 28, 忠 烈 王 元 年 12 月, 是 月 元 遣 中 書 員 外 郞 石 抹 天 衢 爲 副 達 魯 花 赤 ;2 年 7 月, 遣 中 贊 金 方 慶, 直 史 館 文 璉 如 元 賀 聖 節 王 上 書 中 書 省 一 曰 達 魯 花 赤 經 歷 張 國 綱 明 敏 淸 平 百 姓 德 之 瓜 期 已 滿 乞 令 留 任.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197

198 면, 121 고려인들의 무기 소지를 금지했으며, 122 몽골 제도에 따라 순마 소( 巡 馬 所 )를 설치하고 야간 통행을 금지하는 등 123 고려의 내정에 간섭 했다. 이 시기의 다루가치 아문은 고려에 파견된 몽골의 유일한 행정 기관으로 몽골의 요구를 고려에 전달하고 대행하는 역할을 했다. 이 사실은 1277년(충렬왕 3)에 다루가치가 추밀원의 첩( 牒 )을 받고 고려인 의 무기 소지를 금지한 것이나, 124 이듬해 박항( 朴 恒 )이 조지( 朝 旨 )로써 소방( 小 邦 )에 명할 것이 있으면 모두 원수부( 元 帥 府 )와 다루가치에게 내 려진다 고 말한 대목에서 125 확인할 수 있다. 조군 과 수량 은 이미 원종 9년에 시행하기로 약속한 바 있었다. 다 만 이 두 가지는 늘 있는 일은 아니었으므로 몽골에서 요구해올 때 부 응하는 형태로 이행되었는데, 1270년( 元 宗 11)에 몽골에서 남송과 일본 침략에 필요한 병마와 군함 자량( 資 糧 )을 준비할 것을 요구해온 뒤 126 일본 침략이 실현됨에 따라 몽골의 요구대로 인력과 물자를 부담하게 되었다. 설역 은 1263년(원종 4)에 이미 이행된 것으로 간주되었으므로, 6사 가운데 공호수적 을 제외한 나머지 5개 조항은 원종 복위와 개경 121 高 麗 史 卷 31, 世 家 31, 忠 烈 王 26 年 10 月, 是 月 闊 里 吉 思 欲 革 本 國 奴 婢 之 法 王 上 表 曰 故 於 至 元 七 年 小 邦 去 水 就 陸 之 時 先 帝 遣 達 魯 花 赤 以 治 之 于 時 因 人 告 狀 欲 變 此 法 ;11 月, 是 月 又 移 書 中 書 省 曰 昨 於 至 元 八 年 有 本 國 達 魯 花 赤 衙 門 欲 改 本 俗 體 例. 122 高 麗 史 卷 28, 世 家 28, 忠 烈 王 2 年 11 月 丙 辰, 達 魯 花 赤 張 榜 國 人 軍 士 外 禁 持 弓 箭 兵 器. 123 高 麗 史 卷 28, 世 家 28, 忠 烈 王 4 年 7 月, 時 達 魯 花 赤 依 蒙 古 制 置 巡 馬 所 每 夜 巡 行 禁 人 夜 作. 124 高 麗 史 卷 28, 世 家 28, 忠 烈 王 3 年 正 月, 甲 寅 元 樞 密 院 牒 達 魯 花 赤 禁 國 人 持 弓 矢 盖 信 匿 名 書 也. 125 高 麗 史 卷 28, 世 家 28, 忠 烈 王 4 年 7 月 乙 酉, 王 在 元 ( 朴 ) 恒 曰 且 朝 旨 有 以 命 小 邦 者 皆 下 帥 府 及 達 魯 花 赤. 126 高 麗 史 卷 26, 世 家 26, 元 宗 11 年 12 月 乙 卯. 19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199 환도를 계기로 모두 이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공호수적, 즉 고려의 호구를 조사하여 몽골에 보고하 는 일은 그 이행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호구조사의 결과가 끝내 몽골에 보고되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렇다면 6사 가 운데 공호수적 만은 이행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호구의 파악은 징 세 또는 각종 부담의 근거가 될 것이므로 고려측에서 극구 거부했던 것이지만, 그것이 명시적으로 폐기된 것은 1278년(충렬왕 4)의 일이므 로 그때까지는 고의로 천연시키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당시 고려는 호구조사 결과를 몽골에 보고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몽골이 고려의 호구 실태를 파악하는 것 자체도 막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의 사례가 그러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嘉 林 縣 사람들이 다루가치를 찾아와 말하기를 현의 촌락들이 元 成 殿 과 貞 和 院, 將 軍 房, 忽 赤, 巡 軍 에 分 屬 되고 오로지 金 所 한 촌 만이 남아 있는데, 지금 鷹 坊 迷 剌 里 가 또 빼앗아가니 저희들이 어떻게 賦 役 을 내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다루가치가 말하기를 이 같은 것들이 많다. 너희 縣 만 그런 것이 아니다 라고 하고는 장차 各 道 를 巡 審 하여 그 폐를 줄이고자 왕에게 청하여 관리를 보내 함 께 가도록 했다. 이에 摠 郞 金 晅 을 推 考 使 로 삼았다. 宰 樞 들이 왕 께 아뢰기를 다루가치가 사람을 시켜 各 道 를 巡 審 하여 그 실상을 모두 조정에 보고한다면 작은 일이 아닙니다. 籍 民 들을 돌려보내 本 役 으로 돌아가게 하십시오 라고 하니, 왕이 따랐다 高 麗 史 節 要 卷 20, 忠 烈 王 4 年 4 月.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199

200 여기서 보듯이 당시 재추들이 가장 우려한 것은 다루가치가 각 지 방의 실상을 파악하여 원에 보고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막기 위해 각 도를 순심( 巡 審 )하는 추고사( 推 考 使 )의 파견도 정지시켰던 것이다. 이와 같이 1270년(원종 11) 몽골의 도움으로 왕정이 회복된 뒤 6사 가운데 호구조사의 보고만을 현안으로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이행되었 다. 그러나 1278년(충렬왕 4) 충렬왕의 친조에서 6사 의 문제가 전면적 으로 재검토되었다. 이 친조는 전 해에 일어난 김방경무고사건을 해명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친조 자체가 김방경이 무죄라는 쿠빌라이의 판 단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므로, 쿠빌라이와 충렬왕의 대화는 주로 고 려-몽골관계를 재정리하는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때 결정된 사항들은 조서 등 문서의 형태를 갖추지 않고 대화 형식으로 기록되 어 있어 해석에 주의를 요한다. 왕이 말하기를 원컨대 上 께서 親 信 하는 韃 靼 한 사람을 다루가치 로 삼아 주십시오 라고 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어찌 꼭 다루가치이 겠는가. 그대가 스스로 잘 하도록 하라 고 했다. 왕이 말하기를 小 邦 도 또한 上 國 法 에 의하여 點 戶 를 할 수 있기를 청하며, 또 合 浦 의 鎭 戍 軍 을 머물러두어 倭 寇 에 대비하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 니, 황제가 말하기를 어찌 꼭 머물러두게 하겠는가. 그대의 백성들 에게 해가 없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스스로 그대 나라 사람들을 써서 鎭 戍 할 수 있다. 倭 寇 는 두려워할 것이 못된다. 點 戶 는 스스 로 하는 것이 가하다 라고 하였다 高 麗 史 卷 28, 世 家 28, 忠 烈 王 4 年 7 月 戊 戌, 王 曰 願 得 上 所 親 信 韃 靼 一 人 爲 達 魯 花 赤 帝 曰 何 必 達 魯 花 赤 汝 自 好 爲 之 王 曰 小 邦 亦 請 依 上 國 法 點 戶 又 請 留 合 浦 鎭 戍 軍 以 備 倭 寇 帝 曰 何 必 留 之 其 能 無 害 於 汝 民 乎 汝 可 自 用 汝 國 人 20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01 여기에는 합포( 合 浦 )에 진수하고 있던 몽골군을 철수시키는 것 외에 다루가치를 두지 않을 것과 호구조사를 고려에서 스스로 하도록 할 것 등 세 가지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 가운데 뒤의 두 가지는 6사 의 핵심적인 내용으로서 주목된다. 위 사료에는 충렬왕이 달단( 韃 靼 ), 즉 몽골인을 다루가치에 임명할 것과 상국법( 上 國 法 )에 의해 점호 할 것을 요청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외교적 수사를 벗겨낸다면 6사 가운데 치다루가치 와 공호수적 두 가지를 폐지할 것을 요청한 것이 고, 쿠빌라이가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원종 복위 후 오래 동안 현안 으로 남아 있던 6사 의 이행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이해된다. 위의 합의가 이루어진 직후인 이 해 9월에 다루가치가 몽골로 돌아 갔으며, 129 이후 다시는 파견되지 않았다. 이는 고려에 상주하는 몽골 관리가 없어졌음을 의미한다. 또 같은 해 11월에는 각도에 계점사( 計 點 使 )를 파견했는데, 130 이것은 고려 스스로 호구조사를 실시하기로 한 약속에 따른 것으로, 그 결과를 몽골에 보고하지 않는다는 합의를 전 제로 한 것이었다. 호구조사의 결과를 보고하지 않는 것은 더 나아가 고려가 독자적인 재정을 운영할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했는데, 이 사실 은 뒷날 고려 전량( 錢 糧 )은 동국( 東 國 )의 지용( 支 用 )에만 쓰도록 했다 라든가, 131 요수( 姚 燧 )가 고려에 대하여 부세( 賦 稅 )를 거두면 모두 관 鎭 戍 倭 寇 不 足 畏 也 若 點 戶 則 可 自 爲 之. 129 高 麗 史 卷 28, 世 家 28, 忠 烈 王 4 年 9 月 丙 戌, 達 魯 花 赤 經 歷 張 國 綱 還 元 ; 己 丑, 達 魯 花 赤 石 抹 天 衢 還 元. 130 高 麗 史 卷 28, 世 家 28, 忠 烈 王 4 年 11 月, 遣 諸 道 計 點 使 三 司 使 朱 悅 于 慶 尙, 國 子 祭 酒 權 㫜 于 全 羅, 判 少 府 事 崔 濡 于 忠 淸, 殿 中 尹 崔 有 侯 于 東 界 交 州, 判 事 禹 濬 沖 于 西 海. 131 高 麗 史 卷 32, 世 家 32, 忠 烈 王 29 年 12 月, 中 書 省 移 文 略 曰 征 東 省 欲 將 本 國 所 貯 兵 糧 折 支 行 省 官 吏 俸 都 省 送 戶 部 議 得 高 麗 錢 糧 止 從 東 國 支 用.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201

202 할( 管 轄 )하는 경계( 境 界 ) 안에서만 쓰이고 천부( 天 府 )에 들이지 않았다 고 한 사료로써 132 뒷받침된다. 치다루가치 와 공호수적 을 제외한 6사 의 나머지 조항들은 1278년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특히 조군 과 수량 은 장차 있을 일본 공격과 관련하여 오히려 강화되어 1281년(충렬왕 7) 제2차 침략에서는 물론이고 충렬왕 20년 세조의 죽음으로 원이 일본 침략을 포기할 때 까지 전쟁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제공하는 일은 고려의 부담으로 남 게 되었다. 또 1287년(충렬왕 13)에 몽골에서 나얀[ 乃 顔 ]이 반란을 일 으켰을 때와, 1289년(충렬왕 15)에 쿠빌라이가 카이두[ 海 都 ]를 친정할 때 조전군( 助 戰 軍 )을 파견했다. 133 이러한 조군 이외에도 원의 요구에 따라 군량을 보내고 134 요양 지방에 구휼미( 救 恤 米 )를 수송하는 등 수 량 의 부담도 계속되었다 년(충렬왕 4) 이후 납질( 納 質 ) 의 부담 역시 강화되었다. 충렬왕 이 친조를 마치고 귀국한 직후 투루칵[ 禿 魯 花 ]을 새로 파견했는데, 136 여기에는 왕자를 비롯하여 당시 고위 관직자의 자제들이 거의 모두 포 함되었다. 이는 앞서 파견한 투루칵을 원에서 의관자제( 衣 冠 子 弟 )가 아 니라 하여 돌려보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137 시기적으로 기왕의 6사 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지고, 치다루가치 와 공호수적 조항 132 牧 庵 集 卷 3, 高 麗 瀋 王 詩 序, 征 賦 則 盡 是 所 轄 之 境 惟 所 用 之 不 入 天 府. 133 高 麗 史 卷 30, 世 家 30, 忠 烈 王 13 年 5 月 壬 寅 ;6 月 壬 戌 ;15 年 7 月 癸 卯 ;8 月 壬 戌. 134 高 麗 史 卷 30, 世 家 30, 忠 烈 王 14 年 4 月 庚 午 ;15 年 3 月 辛 卯. 135 高 麗 史 卷 31, 世 家 31, 忠 烈 王 21 年 3 月 丁 巳 ;4 月 己 卯 ; 閏 4 月 癸 酉. 136 高 麗 史 卷 29, 世 家 29, 忠 烈 王 5 年 3 月 丁 巳. 137 高 麗 史 卷 28, 世 家 28, 忠 烈 王 2 年 閏 3 月 癸 丑, 元 以 前 所 進 禿 魯 花 謂 非 衣 冠 之 冑 皆 遣 還. 20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03 이 폐기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즉 6사 가운데 핵심적인 두 가지를 양보하는 대신 조군 과 수량 그리고 납질 의 조건을 강화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설역( 設 驛 ) 의 문제이다. 6사 가운데 설역[또는 치우( 置 郵 )] 은 처음부터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1263년(원종 4)에 이미 고려 에서 이미 북쪽 국경까지 설치했다 고 하였고, 몽골에서도 이를 인정 했는데, 그것은 개경에서 의주, 개경에서 화주 정주를 연결하는 기존 의 역전망( 驛 傳 網 )을 정비하는 수준의 일이었다. 138 그러고는 새로운 역 참의 설치를 몽골에서 요구한 적이 없는데, 이는 설역 의 문제가 고려 의 역로( 驛 路 )를 몽골의 잠치에 연결하는 정도에서 마무리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그 뒤에도 몽골의 필요에 따라 고려의 참역( 站 驛 )을 점 시( 點 視 )하거나, 139 관역( 館 驛 )을 정리하는 등 140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 고, 토드코순[ 脫 脫 禾 孫 ] 임명을 통해 역참의 관리에도 개입했지만, 141 적어도 이 문제가 고려의 역참제를 근본적으로 변개시키는 것은 아니 었다. 지금까지 살핀 바와 같이 6사 의 문제는 1262년(원종 3)에 처음 제 기된 이후 1278년(충렬왕 4)까지 고려와 몽골 간의 중요한 정치적 쟁점 이 되었다. 이 6사 는 몽골이 유목전통에서 출발한 것으로, 중국의 전 통적인 책봉 조공관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따라서 고려가 138 정요근(2007), 고려 역로망 운영에 대한 元 의 개입과 그 의미, 역사와 현 실 64, 한국역사연구회, 167쪽. 139 高 麗 史 卷 29, 世 家 29, 忠 烈 王 5 年 10 月 己 卯. 140 高 麗 史 卷 31, 世 家 31, 忠 烈 王 22 年 3 月 己 卯. 141 고려의 驛 站 운영에 대한 몽골의 간섭에 대해서는 정요근(2007), 앞의 글, 177~186쪽 참조.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203

204 이것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1259년(고종 46) 강화 이후 성립한 책봉 조 공관계의 근간이 부정될 수 있었고, 그런 만큼 고려의 저항도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몽골의 요구를 전면 거부할 수도 없었던 고려 는 6사 의 각 조항에 대해 선별적으로 대응했고, 특히 관리 파견에 의한 직접 지배와 부세 수취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치다루가치 와 공호수적 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1278년(충렬왕 4) 국왕의 친조를 통해 이 두 조항의 철회를 이끌어냄으로써 6사 가 이미 성립한 책봉 조공관계를 부정하지 않도록 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3) 군대 주둔 몽골 군대가 고려에 주둔하고 있었을까? 전쟁 중에는 물론 몽골 군 대가 고려에 파견되었지만, 강화 초기인 1260년(원종 1)에 모두 철수했 다. 142 그리고 그 뒤로 한동안 몽골 군대가 고려에 주둔하지 않았는데, 임연에 의해 폐위되었던 원종이 1270년(원종 11) 몽골에 들어가 군대를 요청함으로써 143 몽골군이 다시 고려에 주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 속해서 삼별초의 반란을 진압하고, 일본 침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고려에 주둔한 몽골군의 수가 늘어났다. 당시 고려에 주둔한 몽골군 의 숫자가 정확하게 파악되지는 않지만, 1271년(원종 12) 일본 침공을 위해 봉주( 鳳 州 )에 설치된 둔전경략사( 屯 田 經 略 司 )에 정군( 正 軍 ), 즉 기 병이 6천 명 있었고, 144 삼별초를 진압한 다음 제주도에 몽골군과 고 142 元 高 麗 紀 事 世 祖 中 統 元 年 ( 元 宗 元 年 ) 6 月. 143 高 麗 史 卷 26, 世 家 26, 元 宗 11 年 2 月 甲 戌. 144 高 麗 史 卷 26, 世 家 26, 元 宗 12 年 8 月 丁 巳. 20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05 려군을 합쳐 1,400명이 주둔했으므로, 145 고려에는 어림잡아 1만 명 안쪽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274년(충렬왕 즉위) 제1차 일본 침략 당시에는 몽한군( 蒙 漢 軍 ) 2만 5 천, 고려군 8천, 초공( 梢 工 ) 수수( 水 手 ) 6,700명이 동원되었다. 146 하지 만 침공이 실패로 끝나자 몽한군은 모두 돌아갔는데, 147 당시 몽골에서 는 따로 사신을 보내와 정동군( 征 東 軍 )으로서 고려에 체류하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데리고 갔다. 148 그 후 고려에는 합포진변군( 合 浦 鎭 邊 軍 ) 과 탐라방호군( 耽 羅 防 護 軍 ), 염주( 鹽 州 ) 백주( 白 州 )의 귀부군( 歸 附 軍 ) 및 활단적( 闊 端 赤 ) 등이 주둔하고 있었다. 1277년(충렬왕 3)에는 홍차구( 洪 茶 丘 )가 자기 병력 3천 명을 이끌고 고려에 돌아오려고 함으로써 마찰 을 빚었지만, 이 문제도 1278년(충렬왕 4) 친조에서 거론되어 홍차구뿐 아니라 흔도( 忻 都 )의 군대와 종전군( 種 田 軍 ), 합포진수군 등 몽골군이 모두 철수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년(충렬왕 4) 이후로는 고려에 몽골군이 주둔하지 않았다. 1281년(충렬왕 7) 제2차 일본 침공을 앞두고 흔도와 홍차구가 지휘 하는 몽한군이 다시 고려에 파견되었지만, 전쟁이 끝난 뒤 모두 돌아가고 고려에 남지 않았다. 다만, 일본 공격이 실패한 직후 합포에 몽골 기병 300명이 주둔했고, 150 제주도에 몽한군 1,400명이 주둔했 145 高 麗 史 卷 27, 世 家 27, 元 宗 15 年 2 月 甲 子. 146 高 麗 史 卷 28, 世 家 28, 忠 烈 王 卽 位 年 10 月 乙 巳. 147 高 麗 史 卷 28, 世 家 28, 忠 烈 王 元 年 正 月 丙 子. 148 高 麗 史 卷 28, 世 家 28, 忠 烈 王 元 年 3 月 戊 子. 149 高 麗 史 卷 28, 世 家 28, 忠 烈 王 4 年 7 月 戊 戌, 元 使 平 章 哈 伯, 副 樞 孛 刺 諭 王 曰 告 金 方 慶 者 二 人 皆 死 無 可 對 訟 朕 已 知 方 慶 寃 抑 而 赦 之 又 命 罷 忻 都 茶 丘 軍, 種 田 軍, 合 浦 鎭 戍 軍 皆 還. 150 高 麗 史 卷 29, 世 家 29, 忠 烈 王 7 年 6 月 丙 戌, 元 遣 兵 三 百 騎 來 戍 合 浦.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205

206 다. 151 또 1282년(충렬왕 8)에 400명을 파견하여 340명은 합포에, 60명은 왕경에 주둔하며 불우( 不 虞 )에 대비하도록 했다. 152 합포의 340명은 이전 의 300기( 騎 )를 대체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병력은 1287년(충렬왕 13)에 돌아갔으며, 153 왕경에 주둔한 병력도 곧 돌아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려에는 몽골의 군대가 주둔하지 않았음은 1323년(충숙왕 10) 유청신( 柳 淸 臣 ) 오잠( 吳 潛 ) 등이 입성론( 立 省 論 )을 제기했을 때 원의 전 통사사인( 前 通 事 舍 人 ) 왕관( 王 觀 )이 다음과 같이 말한 데서 확인된다. (고려에 행성을 설치하여) 江 南 의 여러 省 과 一 體 로 한다면 통례대 로 군사를 주둔시켜 鎭 守 해야 할 것인데, 군사를 적게 주둔시키면 東 方 의 여러 나라들을 억누르는 데 부족할 것이고 많은 군사를 주 둔시키면 공급이 배나 번거로워져 백성들이 명령에 견디지 못할 것 입니다. 또한 국가에는 禁 衛 로부터 畿 甸 에 이르기까지 주둔하는 군 사의 정원에 이미 일정한 제도가 있으니, 征 東 省 에 주둔할 병력은 과연 어느 곳에서 뽑아내야 할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이 불가하다는 이유의 다섯 번째입니다. 154 물론 1290년(충렬왕 16) 합단( 哈 丹 )이 고려를 침략해 왔을 때 몽골군 1만 3천 명이 파견되어 온 적이 있었지만, 155 이 병력은 합단을 격퇴한 151 高 麗 史 卷 29, 世 家 29, 忠 烈 王 8 年 2 月, 元 遣 蒙 漢 軍 一 千 四 百 來 戍 耽 羅. 152 高 麗 史 卷 29, 世 家 29, 忠 烈 王 8 年 4 月 戊 戌, 元 遣 不 八 思 馮 元 吉 來 勘 兵 糧 又 以 東 征 軍 敗 遣 兵 三 百 四 十 戍 合 浦 六 十 守 王 京 以 備 不 虞. 153 高 麗 史 卷 30, 世 家 30, 忠 烈 王 13 年 3 月 庚 申, 合 浦 戍 軍 還 元. 154 高 麗 史 節 要 卷 24, 忠 肅 王 10 年 正 月. 155 高 麗 史 卷 30, 世 家 30, 忠 烈 王 16 年 12 月 癸 酉, 元 平 章 事 薛 闍 干, 闍 梨 帖 木 兒, 右 丞 塔 出 等 率 步 騎 一 萬 三 千 人 來. 20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07 후 곧 돌아갔다.156 이처럼 특별한 상황에서 몽골군이 파견되어 온 것 은 고려에 몽골군이 주둔한 것과 다른 것이며, 특히 군대의 주둔 여 부를 통해 양국관계의 성격을 살피는 경우에는 더욱 엄밀하게 구분해 야 할 것이다. IV. 맺음말 이 글은 몽골제국이 성립해 있던 13~14세기의 동아시아 속의 한 중관계사 를 구성하기 위해 고려할 점들을 살펴본 것이다. 본격적인 논 의에 앞서 동아시아의 개념과 범주에 대해 검토했는데, 한국이 속해 있던 세계로서의 동아시아는 첫째, 한국이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부 문에서 직접 관계를 맺고 있던 지역, 둘째, 직접 관계는 없었지만 간접 적인 관련이 있던 지역, 셋째, 인식상의 동아시아 등 세 가지 층위로 정의될 수 있으며, 그것은 또한 각 시기별로 범위를 달리하는 역사적 개념임을 밝혀 두었다. 13~14세기의 동아시아는 아시아뿐 아니라 유 라시아 대륙 대부분에 걸친 몽골제국의 영역에 해당하며, 이 점이 이 시기 동아시아 속의 한중관계사 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156 高麗史 卷30, 世家 30, 忠烈王 17년 5월 乙丑, 薛闍干還 王欲邀宴 薛闍 干曰 受命事畢 不可留 遂登途 ;丙寅, 那蠻歹等皆還.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207

208 13~14세기의 동아시아는 몽골 중국 지역의 원(카안 울루스)과 차가 타이 울루스, 훌레구 울루스, 조치 울루스 등 4개의 울루스로 구성 된 몽골제국과, 몽골제국의 영토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정치 경제적 관 계를 맺고 있었던 고려와 일본 그리고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지역의 국가를 비롯하여 여타 지역의 이와 유사한 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범위와 구성 원리를 밝히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점이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몽골제국 내부의 구성 원리로서 원(카안 울루스)을 비롯한 4개 울루스의 관계이다. 최근 김호동의 주장대로 4개 울루스를 별개의 국 가처럼 취급하는 것이 분열사관 에 기초한 것이라면, 4개 울루스의 관 계는 어떻게 달리 설명할 것인가? 4개 울루스의 상호 관계는 당시 유 라시아 대륙에 걸친 세계 질서를 형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몽골제국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에 커다란 영 향을 미치게 될 것인데, 4개 울루스 사이에 통일성이 강한 경우와 독 립성이 강한 경우에 있어서 몽골제국과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가 달라 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13~14세기 동아시아의 구체적인 범위에 관한 것이다. 이 시 기 고려가 속해 있던 세계로서의 동아시아는 몽골제국을 중심으로 형 성되었지만,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고려와 일본, 베트남 등이 몽골제국 에 속하지 않았고, 이와 유사한 사례는 다른 지역에도 많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각 지역에서 몽골제국과 관계를 맺고 있던 국가들의 사례를 집적하고 분석하여 당시 몽골 중심 세계질서의 외연 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 작업은 동시에 고려와 몽골의 관계를 연구 하는 데 있어 그 특수성과 보편성을 살피기 위해서도 필요할 것이다. 몽골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서 고려와 몽골의 관계를 연구하는 것이 20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09 13~14세기 동아시아 속의 한중관계사 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연구 에 앞서 당시 고려와 몽골의 관계를 고려와 몽골제국 전체의 관계로 볼 것인지, 아니면 고려와 원(카안 울루스)의 관계로 볼 것인지를 탐구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물론 몽골제국 내부의 구성 원리, 즉 몽골제 국을 구성하는 4개 울루스의 상호 관계와 관련된 것이지만, 당시 고 려 사람들이 몽골을 원( 大 元 )과 동일시했고, 또한 그것을 송( 宋 ) 요 ( 遼 ) 금( 金 )을 잇는 중국 왕조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점을 간과하기 어 렵다. 이러한 인식은 제왕운기 를 비롯한 고려 측 사서와 여러 문집 들 그리고 고려사 등에서 빈번하게 확인되며, 비단 고려 사람들의 표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몽골(원)의 국서에 나타난 몽골 측의 표현 에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그것이 한문 사료로서 피할 수 없는 중국편향적 해석인지, 실제로 중국 지역을 차지하고 통치한 원(카안 울루스)에 중국 왕조의 요소가 있었기 때문인지는 앞으로 검토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원을 중국 왕조로서 인식했던 당시 고려 사람들은 몽골(원)과 고려 의 관계를 시종 책봉 조공관계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사실의 확인을 통한 재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 글 에서는 고려-몽골(원)관계에서 나타나는 책봉 조공관계의 요소들과 책 봉 조공관계 이외의 요소들을 찾아 정리했다. 고려-몽골(원)관계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책봉 조공관계의 요소로 는 책봉과 조공, 인장의 수여, 연호 시행과 반력( 頒 曆 ) 등을 들 수 있 다. 이러한 것들은 한중 간의 일반적인 책봉 조공관계에서 행해졌던 것들이며, 당시 고려가 경험했던 거란(요) 금과의 관계에서도 역시 행 해진 바 있었다. 다만, 고려 국왕에 대한 책봉에서 책봉호에 부마와 정동행성승상이 더해졌고, 사후 추인이 아니라 일방적이고 실질적으로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209

210 행해졌다는 점도 다른 시기의 책봉과 크게 다른 점인데, 이것을 책봉 의 본질적인 변화로서 해석할 것인지, 아니면 시기적 특징으로 해석할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한편, 몽골(원)의 고려 국왕에 대한 책 봉이 실질적 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고려의 왕위계승 원칙을 어기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이루어졌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책봉 조공관계 이외의 요소로는 국왕의 친조와 왕실 혼인, 몽골에 서 유목전통에 따라 고려에 요구한 6사 를 들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다른 시기의 책봉 조공관계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이 시기 고려 와 몽골(원)의 관계를 책봉 조공관계로 설명하기 어렵게 하는 요소이 다. 그중에서도 특히 왕실 혼인은 고려 국왕의 위상에 큰 영향을 주 었고, 그에 따라 고려의 국가적 위상에도 영향을 주었으므로 고려-몽 골(원)관계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하지만 부마 고려 국왕 을 겸했던 고려의 국왕이 과연 몽골(원)의 부마 가운데 하나로 취급되 었는지는 깊이 살펴볼 문제인데, 이와 관련해서는 몽골이 부마 고려 국왕이었던 충렬왕을 외국지주( 外 國 之 主 ) 로 대우했던 사례가 주목된 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앞으로 몽골(원)의 다른 부마들과 비교해서 검 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납질, 조군, 수량, 설역, 공호수적, 치다루가치 등 6 사 는 분명 몽골의 유목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중국적인 책봉 조공관 계와 다른 것이다. 따라서 고려와 몽골 사이에는 그 이행을 둘러싼 갈 등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는데, 원종 이후 고려에서는 몽골의 요구에 대 하여 납질 과 설역 은 일찍부터 수용했고, 조군 과 수량, 치다루가치 는 1270년(원종 11) 몽골군에 의해 무신정권이 붕괴된 뒤 수용했지만, 공호수적 은 끝내 이행하지 않았다. 이는 고려가 몽골과 협상을 통해 6사 를 선별적으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결국 1278년(충렬 21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11 왕 4)에 다루가치를 폐지하고 공호수적 조항을 폐기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6사 가운데 납질, 조군, 수량, 설역 등 네 가지가 실행되 었고, 몽골이 고려를 지배하는 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조항이라고 할 수 있는 공호수적 과 치다루가치 가 면제되었는데, 이러한 상태를 책봉 조공관계의 유지로 볼 수 있는지는 앞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1278년에는 또한 고려에 주둔하고 있던 몽골군이 모두 철수하였다. 그 이후로는 몽골군이 고려에 주둔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다루가치의 폐지와 더불어 고려-몽골(원)관계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몽골의 요구에 따라 원종이 친조한 이후 고려 국왕들이 몽골(원)에 친조하는 일이 잦았는데, 그것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도 고 려-몽골관계의 관점에서 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고려와 몽골(원) 사이에서는 책봉 조공관 계의 요소와, 그러한 관계를 부정하는 요소가 모두 찾아진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고려-몽골(원)관계를 기본적으로는 책봉 조공관계이면서 13~14세기의 시기적 특징이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책봉 조공관계가 아닌, 몽골식의 다른 관계로 설명할 것인지는 아직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13~14세기 몽 골제국의 세계 질서 및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에 대한 공시적인 측면 과, 책봉 조공관계를 축으로 하는 한중관계사의 통시적 측면이 동시 에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211

212 표 1 대원사행일람 일련 번호 사신 관직 사행 목적 1 元宗 1. 4 庚戌 張季烈 太府少卿 獻方物 丙寅 王 僖 永安公 賀卽位 田文胤 右正言 賀改元 謝賜符印 兼賫祝壽文 朴 倫 判秘書省事 進方物 愼洪成 郞將 高 汭 禮部郞中 進貢物 丁卯 高 汭 禮部郞中 獻方物 7 4. 朱英亮 禮賓卿 進貢物 鄭卿甫 郞將 4 甲寅 壬寅 郭汝弼 右正言 獻鷂 壬戌 韓 就 大司成 賀正 兼謝賜羊 乙卯 金祿延 禮賓卿 謝賜曆日 西錦 己丑 張 鎰 國子祭酒 上表, 獻方物 康允紹 譯語郞將 王 恂 廣平公 金方慶 大將軍 張 鎰 中書舍人 李 穎 侍御史 金 精 郞將 乙未 庚寅 7. 6 庚午 朴 琪 大將軍 賀節日 己亥 張 鎰 侍郞 賀正 玄 錫 正言 宋君斐 郭汝弼 秘書監 賀聖節 甲午 王 淐 安慶公 賀正, 告更遣潘阜使於日本 李藏用 侍中 上表 丁卯 孫世貞 閤門使 賀節日 吳惟碩 郞將 潘 阜 起居舍人 7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元世祖 卽位 親朝연기 요청 賀正 비고 謝恩, 獻方物 시기 濟州星主와 同 行 日本招諭의 일을 보고함 日本招諭의 일을 보고함 隨(元使)黑的

213 일련 번호 시기 사신 관직 사행 목적 崔東秀 大將軍 上表 陳情 李淳益 國子司業 賀正 비고 庚申 康允紹 將軍 奏誅金俊 戊寅 申思全 參知政事 倭人押送 伴(元使)黑的 辛亥 郭汝弼 中書舍人 進王遜位表 林衍이 보냄 朴 恒 左司諫 賀節日 林衍이 보냄 甲戌 李藏用 侍中 賀節日 林衍이 보냄 庚戌 金方慶 樞密院副使 上陪臣表 遜位의 사유를 崔東秀 大將軍 밝힘 庚子 陳子厚 侍郞 賀正 仍奏崔坦等叛狀 32 元宗 戊辰 朴 烋 奉御 上表 壬辰 朴 恒 右司諫 寄書蒙古都堂 辛丑 崔東秀 (大將軍) 寄書蒙古都堂 丙午 金之瑞 郞將 告林衍死 戊辰 王 諶 太子 奏裴仲孫叛狀 且賀節日 元 傅 樞密院副使 (從行) 宋松禮 上將軍 洪 奎 御史中丞 朴 恒 國子司業 賀正, 陳情 윤11 元宗 復位 三別抄 叛 崔有渰 己巳 印公秀 將軍 陳情 丙子 金 鍊 樞密院使 請婚 己丑 朴天澍 (員外郞) 己亥 鄭子璵 上將軍 告方甫 崇謙之亂 印公秀 將軍 請罷屯田 且請親朝 郭汝弼 殿中監 陳情 鄭子璵 上將軍 謝平賊 印公秀 (將軍) 陳情 癸未 李昌慶 珍島 함락 賀正 仍謝許世子婚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213

214 일련 번호 시기 사신 관직 사행 목적 비고 文宣烈 丁丑 1 甲申 張 鐸 書狀官 率日本使十二人 白 琚 譯語郞將 表賀 王 淑 濟安侯 賀建國號 宋松禮 樞密院副使 丁巳 郭汝弼 諫議大夫 請減軍料 甲申 琴 熏 閤門副使 上表 請兵 壬子 李有庇 郞將 上表 己卯 金伯鈞 大將軍 賀節日 戊寅 權 㫜 中書舍人 賀正 王 澂 帶方侯 謝許世子婚 郭汝弼 諫議大夫 1 癸未 庚午 宋 玢 大將軍 壬午 金 綬 大將軍 告平耽羅賊 윤6 己未 王 悰 順安侯 賀冊封 宋松禮 同知樞密事 三別抄 진압 庚子 金 侁 上將軍 賀節日 癸丑 金 鎰 別將 賫世子盤纏 己亥 李義孫 小府少監 賀正 呂文就 郞將 甲子 李 仁 別將 甲子 郭汝弼 諫議大夫 63 元宗 辛酉 羅 裕 大將軍 上中書省書 64 忠烈 즉. 7 壬辰 朴 璆 樞密院使 賀聖節 65 즉. 9 戊戌 王 淑 濟安公 謝釐降 襲爵 鄭子璵 知樞密院使 李信孫 判閤門事 高天伯 將軍 金方慶 門下侍中 즉. 12 乙巳 1. 1 庚辰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上書中書省 賀正 又付別箋 勸農使 파견에 반대 上表

215 일련 번호 시기 사신 印公秀 관직 사행 목적 비고 大將軍 壬寅 元 卿 進鷹 許 珙 知樞密院事 趙仁規 將軍 賀聖節 壬戌 高天伯 將軍 請醫 癸未 兪千遇 贊成事 賀正, 告改官制, 獻處女 甲辰 高天伯 將軍 請以明年親朝 盧 英 (怯怜口) 李 仁 郞將 請行宮料糧 張得精 中郞將 獻鐵 丙寅 尹 秀 大將軍 獻鷂 朴 義 中郞將 金方慶 中贊 文 璉 直史館 庚寅? 癸丑 甲申 帝勅停親朝 元遣使來求鐵 賀聖節 譯者 獻日本栗 金富允 中禁指諭 進黃漆, 請明年入朝 朱 悅 判秘書寺事 賀正 兪洪愼 將軍 高天伯 將軍 印 侯 (怯怜口) 貞和宮主誣告事件 辯論 丁卯 張舜龍 (怯怜口) 上書中書省 甲寅 趙仁規 將軍 請入朝 張舜龍 將軍 請助征北鄙 庚申 車 信 將軍 獻虎皮 丁未 朴 恒 密直副使 賀聖節, 上書中書省 丁卯 趙仁規 進鷂子, 表奏琮呪咀事 印 侯 金 㥠 國子祭酒 尹萬庇 郞將 賀正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215

216 일련 번호 시기 사신 관직 사행 목적 癸亥 印 侯 大將軍 奏流金方慶 盧 英 將軍 告以入朝 李 仁 中郞將 張舜龍 將軍 白 琚 中郞將 己亥 91 忠烈 4. 8 戊午 宋 玢 承旨 賀聖節 辛巳 朴 義 將軍 上書都堂 辛卯 崔 奇 譯者 校尉 上書中書省 94 4.윤11 癸丑 趙仁規 大將軍 告歸國 且謝恩 盧 英 將軍 95 4.윤11 朴 義 將軍 獻鷂 96 4.윤11 戊寅 郭汝弼 國學大司成 賀正 兪洪愼 將軍 甲寅 殷弘淳 郞將 獻花文大席 辛丑 鄭 公 中郞將 請置伊里干 宋 賢 (中郞將) 金方慶 誣告事 件 忠烈王歸國 辛未 盧 英 將軍 請醫 公主有疾 己酉 趙仁規 承旨 奏稟修造戰艦 제2차 東征 李尊庇 密直副使 賀聖節 仍上書都堂 鄭仁卿 將軍 印 侯 庚午 池 瑄 郞將 池 瑄 郞將 金富允 將軍 張舜龍 (將軍) 戊戌 鄭福均 中郞將 獻人蔘 甲戌 兪洪愼 大將軍 賀正 金光就 少尹 印 侯 大將軍 비고 6. 1 庚申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17 일련 번호 시기 사신 관직 高天伯 將軍 사행 목적 己卯 鄭之演 校尉 獻環刀 丙戌 簡有之 中郞將 獻處女 金富允 將軍 告糶 印 侯 大將軍 告倭寇 池 瑄 郞將 朴 義 將軍 元 卿 將軍 丙寅 金周鼎 密直副使 賀聖節 己酉 趙仁規 右承旨 上中書省書 印 侯 大將軍 金方慶 中贊 鄭仁卿 將軍 丙寅 비고 獻鷂子 賀正 壬午 李 仁 將軍 請減軍馬草料 壬午 鄭 公 中郞將 請奔喪 癸亥 柳淸臣 郞將 戊午 韓 康 知密直司事 賀聖節 121 忠烈 7. 8 壬申 康 世 別將 賫行省表 賀聖節 壬午 李 仁 將軍 壬辰 金子廷 大將軍 賀正 戊申 李行儉 佐郞 進黃漆 丁亥 朴 義 將軍 獻鷹 印 侯 上將軍 押沈聰等送于元 柳淸臣 郞將 庚申 高 世 散員 請醫 辛巳 金伯鈞 密直副使 賀聖節 孛魯漢 (鷹坊) 獻鷹 己丑 兪洪愼 上將軍 賀正 丙申 印 侯 上將軍 公主가 보냄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217

218 일련 번호 사신 관직 사행 목적 乙亥 仇千壽 郞將 癸亥 池 瑄 中郞將 甲戌 趙仁規 副知密直 請減軍糧 己巳 南裕廷 郞將 進鷹 辛未 朴 球 知密直司事 賀聖節 辛酉 趙 抃 大將軍 賀正 宋 玢 知密直司事 賀加上尊號 張舜龍 護軍 孔 愉 副知密直 賀聖節 辛丑 7 己亥 甲辰 鄭可臣 密直學士 賀正 戊申 李 幷 將軍 獻鷹 庚辰 元 卿 將軍 獻鷹 崔世延 宦者 郞將 王 乙未 禹濬冲 知密直司事 賀聖節 己亥 高天伯 大將軍 賀正 庚午 印 侯 上將軍 請親朝 庚午 王 淑 齊安公 弔皇太子眞金之喪 印 侯 上將軍 元 卿 將軍 獻鷂 戊申 庚辰 趙仁規 知密直司事 賀聖節 乙亥 池 瑄 中郞將 押日本人 丁酉 鄭仁卿 大將軍 賀正 甲辰 張舜龍 將軍 獻李仁椿女 壬寅 柳淸臣 將軍 請擧兵助討 庚寅 柳淸臣 將軍 奏親將兵已發 吳仁永 中郞郞將 戊辰 柳淸臣 (將軍) 請從王入朝 乙酉 鄭之衍 郞將 告捕雙城諜人 壬子 奇 琯 大將軍 賀正 吳仁永 將軍 忠烈 辛酉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비고 覘東征緩急 시기 乃顔叛亂 公主가 보냄

219 일련 번호 시기 사신 관직 사행 목적 비고 庚午 吳仁永 (將軍) 多賫土物 丁巳 朴 義 大將軍 獻鷂 庚子 宋 瑨 知密直司事 賀聖節 壬寅 宋 玄 中郞將 賀聖節 行省에서 보냄 戊申 柳淸臣 大將軍 奏王親朝 帝命王勿入朝 庚子 車 信 上將軍 獻處女 壬子 趙仁規 贊成事 賀正 辛未 李 幷 將軍 獻鷂 丁亥 吳仁永 將軍 告軍糧數 庚戌 柳淸臣 大將軍 獻苧布 南 挺 將軍 獻鷂 王 戊戌 朴之亮 判三司事 賀聖日 張舜龍 大將軍 獻蔡仁揆女 丙申 柳淸臣 大將軍 壬戌 元 卿 大將軍 請入朝 丙午 白挺仁 將軍 獻鷂 庚寅 朴 義 大將軍 獻鵠肉 丁未 元 卿 大將軍 奏日本犯邊 戊午 金延壽 大將軍 奏哈丹入寇 丙子 金興裔 將軍 獻鷂 壬戌 金 琿 知僉議府事 賀節日 癸酉 趙 瑊 將軍 押寫經僧 庚寅 柳淸臣 大將軍 乞師 且奏避賊江華 戊辰 車 信 上將軍 押處女17人 獻于元 丁未 柳淸臣 大將軍 奏哈丹入寇雙城 甲午 吳仁永 將軍 奏哈丹侵至王京 癸酉 高 世 郞將 請親賀聖節 幷奏復都開京 壬子 鄭可臣 政堂文學 賀聖節 哈丹侵寇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219

220 일련 번호 사신 관직 사행 목적 癸丑 印 侯 庚申 羅 裕 知密直司事 賀正 己卯 柳淸臣 上將軍 請世子還國 許 評 將軍 18. 윤6 丙戌 世子 丁未 秦良弼 郞將 押呪人巫女 乙巳 洪 詵 將軍 獻香茶木果等物 甲戌 高 世 將軍 請醫 庚寅 趙仁規 贊成事 賀正 賀聖節 將軍 甲午 南 挺 辛未 印 侯 宋 瑛 郞將 請親朝 奏征日本事宜 196 忠烈 洪 詵 大將軍 獻人蔘 金 晅 左司諫 賀正 柳 陞 同知密直 賀聖節 權漢功 直史館 7 丙子 王疾 獻鷂 辛酉 閔 甫 將軍 獻鷂 庚辰 柳淸臣 右承旨 賀正 柳仁明 直寶文署 戊戌 白 堅 郞將 獻鵠肉 癸巳 宋 瑛 中郞將 請減軍粮 甲午 吳仁永 大將軍 賀誕皇子 壬寅 崔淑仟 將軍 賀改元 癸卯 柳 溫 將軍 請減遼陽軍粮 윤4 庚午 趙 琛 中郞將 進濟州方物 印 侯 贊成事 請世子婚 柳淸臣 左承旨 請加王太師中書令 降公主印 章 改世子印章 金之淑 判三司事 賀聖節 己亥 甲辰 牛廷信 行省員外郞 賀聖節 壬戌 柳 溫 將軍 進先帝事跡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帝召之 賀聖節 且謝恩 丁亥 비고 獻鷂 시기 帝不從 帝許減二萬石 帝皆不允 行省에서 보냄

221 일련 번호 211 시기 壬寅 사신 관직 洪 奎 사행 목적 비고 賀正 金光就 趙 詡 通禮門祗侯 行省에서 보냄 壬申 柳淸臣 副知密直 請世子婚 己卯 李連松 將軍 獻耽羅皮貨 丙戌 吳仁永 右副承旨 獻苧布 甲午 南 挺 大將軍 獻耽羅馬 庚子 崔世延 上將軍 獻鷂 甲申 李 茂 將軍 獻鷂 乙未 鄭可臣 中贊 賀聖節 金延壽 上將軍 請入朝 己亥 邊 信 中郞將 賀聖節 行省에서 보냄 庚午 金延壽 上將軍 賀正 行省에서 보냄 壬午 黃 瑞 郞將 獻金畵 甕器 野雉及耽羅牛肉 乙亥 秦良弼 中郞將 請醫 公主不豫 癸未 元 卿 副知密直 告公主喪 公主薨 辛未 朴 義 副知密直 謝弔慰 丙戌 張 瑜 行省都事 賀聖節及改元 辛卯 崔有渰 同知密直 賀聖節 丙申 趙仁規 賀生皇子 告糶 請傳位 印 侯 柳淸臣 戊寅 金延壽 上將軍 獻人蔘及耽羅酥油 229 忠烈 戊午 宋 瑨 大將軍 賀正 윤12 趙 珍 行省掾使 賀正 王 昡 平陽侯 賫王及逸壽王謝表 金 精 大將軍 鄭 瑎 知密直司事 乙卯 行省에서 보냄 賀聖節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221

222 일련 번호 시기 사신 관직 사행 목적 石抹也 先帖木 兒 行省에서 보냄 王 昷 中原侯 金天錫 大將軍 將軍 謝復位 甲申 李白超 丙辰 宋 玢 宋邦英 將軍 賀正 庚寅 崔有渰 知都僉議事 賀生皇子 丁巳 鄭仁卿 判三司事 辨印侯誣妄 柳 琚 判通禮門事 忠烈王復位 獻耽羅牛肉 賀正 辛巳 白孝珠 將軍 獻鷂 丁亥 鄭仁卿 判三司事 謝恩 丁未 柳 栯 密直使 賀聖節 己卯 閔 甫 大將軍 獻鷂 戊申 李白超 將軍 獻人蔘 鵠肉 甲寅 鄭仁卿 贊成事 賀正 庚戌 薛景成 同知密直 弔皇太后喪 壬寅 高 世 上將軍 獻童女 癸亥 洪子翰 副知密直 賀聖節 壬寅 閔 丘 將軍 獻鷂 李白超 大將軍 獻人蔘 牛肉 庚申 崔有渰 贊成事 行省에서 보냄 帝 命 以冬月遣 陪臣之賢 者 赴 京 丙寅 李希實 行省員外郞 賀正 甲戌 李英柱 副知密直 賀正 丙戌 閔 萱 知都僉議事 上表 乙丑 金台鉉 密直副使 賀聖節 戊申 高 世 上護軍 請助征 丁巳 閔 甫 大護軍 獻鷂 戊午 康 純 上護軍 賀正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비고 行省에서 보냄 帝將北征

223 일련 번호 258 시기 丙寅 사신 관직 사행 목적 林 宣 郞將 崔 涓 護軍 獻鷂 鄭 良 司宰尹 獻酥油 李白超 上護軍 獻人蔘 비고 行省에서 보냄 乙丑 柳淸臣 贊成事 弔晉王喪 己酉 秦良弼 大將軍 獻童女 甲子 權 溥 知密直司事 賀聖節 庾 阡 大樂丞 賀正 263 忠烈 壬午 柳淸臣 贊成事 行省에서 보냄 丁巳 閔 甫 大護軍 獻鷂鶻 辛巳 李 翰 護軍 賀聖節 丙戌 韓希愈 右中贊 以石冑及子天補 天卿 天琪 崔有渰 前贊成事 己丑 宋邦英 密直副使 賀聖節 戊寅 金延壽 密直副使 賀正 夜先旦 大護軍 王 淑 齊安公 請還前王 行省에서 보냄 金 深 密直副使 表謝遣使來治吳祁之黨 且請還 前王 壬午 夜先旦 大護軍 押宋邦英等送于元 金 章 中郞將 甲申 韓希愈 中贊 賀天壽節 甲辰 宋邦英 同知密直 賀正 護軍 獻童女 丁亥 鄭 恭 甲戌 王惟紹 甲申 閔 甫 上護軍 獻鷹 壬午 王惟紹 贊成事 賀天壽節 己卯 郭元振 摠郞 賀聖節 己亥 金台鉉 知都僉議事 賀聖節 甲午 崔 崇 承旨 賀正 獻童女 行省에서 보냄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223

224 일련 번호 사신 관직 사행 목적 丙戌 姜 褶 郞將 告糶 甲辰 趙 瑞 密直副使 賀聖節 己酉 秦良弼 同知密直 獻童女 辛未 李 茂 上護軍 獻鶻 丁巳 崔有渰 中贊 賀登極 丙午 金延壽 判密直司事 謝冊命 壬午 秦良弼 同知密直 獻童女 丙戌 李 混 贊成事 賀正 尹 頎 直史館 奉先代實錄 戊子 金 深 參理 獻童女 丁亥 趙 瑞 同知密直 賀皇太子誕日 291 忠宣 즉. 7 辛未 金延壽 評理 告哀 즉. 12 戊午 趙 璉 評理 賀正 시기 戊申 金元祥 評理 賀皇太子誕日 甲子 金 暹 右軍千戶 押船五十艘 鄭 琦 左軍千戶 己卯 吳挺珪 賀受尊號 戊辰 趙 璉 評理 賀聖節 壬戌 尹吉甫 大將軍 獻童女 閹人 戊申 權 溥 評理 賀正 299 忠宣 甲寅 李公世 獻酥油 辛亥 李公甫 密直 賀皇太子誕日 癸丑 文天佐 大護軍 獻鷹 丁卯 曹元瑞 內僚 評理 致仕 賀聖節 甲寅 裴 挺 贊成事 獻佛畵 丁未 金之謙 左常侍 賀皇太子誕日 辛巳 金文衍 評理 獻閹人 壬子 權 溥 贊成事 賫藏經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비고 武宗 卽位 忠宣王命 忠烈王薨

225 일련 번호 시기 사신 洪 詵 贊成事 賀正 丁卯 蔡 禑 三司使 賀聖節 癸丑 洪 詵 贊成事 謝不置行省 丁亥 曹 頔 右常侍 獻閹人 己未 權 碩 中郞將 獻皮貨 癸亥 朴 侶 同知密直 賀正 庚午 權漢功 密直副使 賀聖節 314 忠肅 즉. 8 戊辰 金漢貞 大護軍 請入朝 315 즉. 9 戊申 朴從龍 上護軍 謝襲位 316 즉. 10 庚辰 관직 사행 목적 賀正 乙卯 姜彦邦 上護軍 賀節日 庚寅 李光逢 上護軍 賀改元 辛卯 權漢功 三司使 陳慰兼賀始行科擧 己巳 尹 碩 護軍 賀上王誕日 壬午 趙雲卿 密直副使 賀節日 丙午 權 碩 郞將 獻童女于上王 乙卯 權漢功 三司使 賀加上皇太后尊號 丙寅 柳淸臣 政丞 賀正 甲辰 洪 瀹 密直 賀節日 甲午 李堅幹 前上護軍 獻童女 癸卯 金 怡 僉議評理 賀立皇太子 癸亥 鄭允興 上護軍 聘于營王 己卯 李齊賢 選部典書 賀上王誕日 癸巳 權 準 吉昌君 賀正 己巳 崔誠之 大提學 賀千秋節 辛丑 李公甫 泰安君 賀聖節 乙亥 孫 起 大護軍 獻細苧布 己丑 閔 頔 大司憲 賀正 權漢功 贊成事 賀聖節 2 丙申 비고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225

226 일련 번호 시기 사신 관직 사행 목적 丁亥 鄭允興 大護軍 獻鷂 任子松 元尹 告哀 李麟起 郞將 告訃于營王 비고 公主薨 辛卯 尹 碩 摠部典書 賀千秋節 339 忠肅 7. 1 丁未 權 準 吉昌君 賀聖節 戊辰 秦良弼 檢校評理 陳慰 己未 金 怡 評理 賀登極 元仁宗 崩 己巳 王 珛 丹陽大君 賀登極 元英宗 卽位 辛未 尹吉甫 大護軍 獻鷂 丙午 金 怡 贊成事 問上王起居 癸未 權 準 吉昌君 賀正 壬辰 鄭 績 大護軍 獻童女 甲辰 尹 碩 問上王起居 郭惟堅 金利用 庚戌 張 沆 政丞 進方物 獻盤纏于上王 尹莘系 癸未 李 瑚 永陽君 賀聖節 乙酉 李 梃 陽城君 獻童女 王 珛 丹陽大君 賀改元 冊太后 任 瑞 密直 獻鷂 丁巳 孫 起 大護軍 賫金銀苧布 己亥 李彦冲 任 瑞 密直使 金 資 大護軍 林仲沇 知密直司事 戊寅 2 壬戌 獻王 賀正 賀聖節 賀冊后 行至婆娑府 達 魯花赤 不給驛馬 不得 入而還 己丑 金 怡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前僉議評理 獻盤纏于上王

227 일련 번호 시기 사신 관직 사행 목적 윤5 己酉 柳有奇 密直副使 獻鷂 丁酉 趙雲卿 僉議評理 獻盤纏于上王 丙寅 楊 起 上護軍 賀正 李 謙 三司副使 朴之貞 摠部典書 弔太皇太后喪 戊寅 甲辰 朴虛中 贊成事 賀節日 庚午 梁 許 檢校評理 賀聖節 許 琮 定安君 賀登極 金承用 內府令 甲子 曹 頔 萬戶 獻方物 丁丑 權 準 吉昌君 賀改元 壬午 黃 瑞 評理 賀冊皇后 太子 庚申 尹莘傑 三司使 賀聖節 甲寅 崔有渰 政丞 賀正 戊子 李光時 摠部典書 賀聖節 丙午 李 揆 右代言 告公主喪 丁巳 尹莘傑 左常侍 獻童女 374 忠肅 戊申 李 揆 密直副使 賀改元 壬午 尹 桓 護軍 獻苧布及紙 庚寅 李凌幹 監察大夫 賀卽位 改元 尹 碩 海平府院君 賀正 密直使 賀聖節 壬寅 金承用 丁丑 朴之環 己亥 許 琮 庚戌 金之鏡 381 忠惠 즉. 2 定安君 勸 謙 萬戶 護軍 3 丁巳 崔 成 383 즉. 4 張 沆 元泰定帝 卽位 公主薨于龍 山 行宮 賀帝復位 元文宗 復位 請傳位世子禎 西河君 즉. 以審王鈞旨 獻文苧布 任子松 382 비고 忠惠王 卽位 䝴國印 䝴白苧布 虎豹皮 獻王 請太醫 忠肅王이 보냄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227

228 일련 번호 시기 사신 관직 사행 목적 384 즉. 8 辛酉 朱 柱 上護軍 賀加上尊號 385 즉. 10 甲子 李凌幹 僉議評理 賀改元, 謝釐降公主 386 즉. 12 乙卯 朱 柱 上護軍 賀正 辛丑 元 忠 贊成事 賀正 金 資 密直 賀卽位 忠肅후1. 6 후4. 12 戊寅 姜好禮 비고 賀正 鄭天佐 390 후5. 1 乙亥 閔祥正 贊成事 賀改元 391 후6. 8 庚辰 李 謙 典理判書 賀冊太皇太后 392 후6. 11 丙寅 高允溫 開城尹 賀正 393 忠惠 복. 4 戊午 金永煦 三司右尹 獻佛畵 394 복. 5 丙子 孫守卿 大護軍 䝴金銀及大頂兒 全允臧 大護軍 韓帖木 兒不花 征東省員外 金仁沇 前贊成事 盧英瑞 前郞將 복. 9 忠惠 복. 12 庚寅 辛 伯 請王襲位 賀正 金逸逢 397 후1. 3 戊寅 奇 轍 賀聖節 權 謙 398 후3. 2 庚戌 王 煦 雞林郡公 請大行王諡 399 후3. 3 李凌幹 政丞 賀聖節 400 후3. 3 丙申 南宮信 401 후4. 3 洪 鐸 益城君 賀聖節 402 후4. 12 乙未 韓宗愈 漢陽君 進方物 孫守卿 判密直司事 李 蒨 僉議商議 賀郊赦 王 煦 雞林郡公 賀聖節 忠穆 즉. 윤2 壬申 즉. 3 癸卯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䝴布二萬匹及金銀鈔 市于幽燕 賂執事者 求復 位

229 일련 번호 사신 관직 崔文度 前典法判書 5 丙辰 全思義 密直 謝冊命 406 즉. 12 戊午 奇 轍 德城府院君 賀正 權 謙 判三司事 賀聖節 柳 濯 密直副使 405 시기 忠穆 즉. 3 丁酉 사행 목적 비고 癸丑 金永煦 左政丞 獻方物 甲申 金永旽 贊成事 請親朝, 賀正兼謝衣酒 乙卯 盧 政丞 賀聖節 甲戌 安子由 參理 獻苧布 丙申 廉悌臣 三司右使 謝賜衣酒 癸巳 王 諝 益城君 獻童女 丙申 李壽山 行省郞中 獻童女 丙子 康 伯 天水郡公 賀正 康允忠 贊成事 辛巳 盧 慶山府院大 君 請入朝 壬寅 李凌幹 寧川府院君 賀聖節 仍請忠惠王諡 金那海 三司右使 請改正先王之罪 丁亥 柳 濯 評理 獻苧布 丙寅 孫洪亮 僉議評理 賀正 金仁浩 密直副使 申元甫 護軍 告哀 421 忠定 즉. 12 丙子 壬寅 王 煦 政丞 賀聖節 甲辰 趙得珪 上護軍 獻龍席及竹藫 庚申 李君侅 贊成事 謝襲位 權 謙 帝不允 忠穆王薨 忠定王卽位 賀聖節 吳子淳 甲申 廉悌臣 贊成事 尹莘係 前贊成事 賀正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229

230 일련 번호 시기 사신 관직 427 恭愍 1. 윤3 辛卯 洪彦博 三司右使 李成瑞 密直副使 사행 목적 비고 趙日新亂 진압 賀聖節 戊午 姜 碩 上將軍 賀千秋節 乙酉 朴壽年 密直副使 謝賜戎器 兼䝴百官論趙日新書 己亥 韓可貴 都僉議司使 賀正 庚子 李成瑞 密直副使 獻方物 姜仲卿 上護軍 獻熊羔皮 柳 濯 贊成事 賀聖節 崔天澤 三司右使 3 癸巳 金光鉉 左藏庫提點 獻苧布 5 乙酉 李也先 帖木兒 密直使 貢方物 仍獻皇后誕日禮物 安 祐 鷹揚上護軍 9 壬申 李也先 帖木兒 密直副使 437 恭愍 戊午 蔡河中 辛酉 金希祖 軍簿判書 賀冊太子 壬辰 洪彦博 南陽君 賀正 甲申 金敬直 僉議評理 賀聖節 李也先 帖木兒 密直使 賀皇后誕日 獻禮物 辛酉 李 珍 處仁君 賀千秋節 己丑 金 普 贊成事 賀正 全普門 知密直司事 金 信 前僉議 朴壽年 贊成事 尹之彪 密直副使 謝封公主 1 金成寶 乙酉 3 甲辰 謝賜孛兒扎宴 賀千秋節 賀聖節 癸卯 任君輔 知申事 賀皇后千秋節 壬子 崔仁遠 密直副使 獻紋苧布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皇 后誕日之賀 始此

231 일련 번호 448 시기 庚戌 사신 관직 王 鈞 定原君 金 瑨 大護軍 사행 목적 비고 獻方物 甲戌 金永煦 福昌府院君 謝功臣號 元錫王功臣號 戊午 李仁復 政堂文學 上表 反元運動 丙子 金希祖 樞密院使 賀皇太子千秋節 丁未 李千善 參知政事 賀正 李壽林 吏部尙書 윤9 丁巳 楊伯顔 判閤門事 賀皇后千秋節 丁酉 孫 登 判開城府事 賀正 高用賢 開城尹 庚子 李 嶠 刑部尙書 賀皇太子千秋節 姜之衍 前僉議評理 賀節日 崔 堧 刑部尙書 3 甲子 辛酉 趙天珪 大將軍 賀皇后千秋節 庚寅 洪師範 刑部尙書 賀皇太子千秋節 庚申 王 鈞 定原伯 賀正 丙子 洪 淳 判太常寺事 獻人蔘 乙卯 朱思忠 戶部尙書 告平(紅巾)賊 至遼陽 道梗而 還 李公遂 益山君 審(紅巾)賊勢 道梗還 朱思忠 戶部尙書 方都赤 宦者 庚申 朱思忠 戶部尙書 賀道路復通 戊戌 王 諝 鶴城侯 賀正 丙寅 金逸逢 判三司事 獻方物 李子松 典法判書 告平紅賊 獻所獲玉璽 金寶 以道梗不果行 金銀銅印 金銀牌等物 辛酉 恭愍 姜之衍 僉議商議 賀正 李瑞龍 典理判書 賀千秋節 柳仁雨 贊成事 賀聖節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231

232 일련 번호 시기 甲寅 사신 관직 사행 목적 黃 順 僉議評理 謝賜衣酒 李公遂 贊成事 進陳情表 許 綱 密直提學 洪 淳 密直商議 李壽林 同知密直事 비고 呈百官耆老書于御史臺 辛亥 李仁復 贊成事 謝復位 己未 王重貴 同知密直事 賀千秋 戊辰 韓公義 密直副使 賀正 戊辰 金 庾 密直副使 請執送德興君 癸丑 崔 伯 黃原君 賀聖節 道梗 不達而還 金 精 左副代言 道梗 不達而還 壬戌 楊伯淵 密直副使 告公主喪 戊子 洪師範 密直副使 謝冊命 田祿生 監察大夫 進禮物于皇太子 方 節 宦者府院君 密直使商議 윤10 癸亥 崔 伯 賀千秋節 壬申 (使臣) 庚辰 白漢龍 典法判書 謝恩 王重貴 前同知密直 賀聖節 王更名顓 表請 至遼陽 道梗而 還 癸酉 文天式 判宗簿寺事 賀千秋節 甲子 李成瑞 贊成事 賀正 道梗 不達而還 王重貴 同知密直 賀聖節 又謝恩 恭愍王薨 485 禑王 즉. 12 金 湑 判密直司事 告喪 孫 彦 密直副使 百官呈省書 李子松 三司左使 謝冊命 姜仁裕 晉川君 啓稟使 3 甲寅 黃淑卿 前開城尹 賀節日 王 昇 順興君 賀正 王 彬 永寧君 賀改元 文天式 密直副使 賀節日 謝冊命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33 참고문헌 단행본 金塘澤(1998), 元干涉下의 高麗政治史, 一潮閣. 김순자(2007), 韓國 中世 韓中關係史, 혜안. 金韓奎(1982), 古代中國的世界秩序硏究, 一潮閣. 김한규(1999), 한중관계사 Ⅰ Ⅱ, 아르케. 김한규(2004), 요동사, 문학과지성사. 金浩東 譯(1990), 遊牧社會의 構造, 지식산업사. 김호동(2007), 몽골제국과 고려-쿠빌라이 정권의 탄생과 고구려의 정치적 위상, 서울대학교출판부. 朴元熇(2002), 明初朝鮮關係史硏究, 一潮閣. 尹龍爀(1991), 高麗對蒙抗爭史硏究, 一志社. 張東翼(1994), 高麗後期外交史硏究, 一潮閣. 全海宗(1970), 韓中關係史 硏究, 一潮閣. 沈載錫(2002), 高麗國王 冊封 硏究, 혜안. 衫山正明(1996), モンゴル帝國の興亡, 講談社. 衫山正明(1997), 遊牧民から見た世界史 - 民族も國境もこえで, 日本經濟新聞社. 韓儒林(1986), 元朝史, 人民出版社(北京). 논문 姜晋哲(1973), 蒙古의 侵入에 대한 抗爭, 한국사 7, 국사편찬위원회. 高柄翊( ), 麗代 征東行省의 硏究 (上 下), 歷史學報 14 19, 歷史學會. 高柄翊(1962), 高麗 忠宣王의 元 武宗 擁立, 歷史學報 17 18合輯, 歷史學會. 金光哲(1993), 高麗 忠肅王代의 瀋王 옹립 운동, 歷史學硏究 12, 전남대학교 사학회. 金光哲(1996), 14세기초 元의 政局동향과 忠宣王의 吐蕃 유배, 한국중세사연구 3, 한국중세사학회. 金九鎭(1986), 元代 遼陽地方의 高麗軍民, 李元淳敎授華甲記念史學論叢. 金宗鎭(1984), 李穀의 對元 意識, 泰東古典硏究 1,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金惠苑(1986), 忠烈王 入元行績의 性格, 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金惠苑(1989, 麗元王室婚姻의 成立과 特徵 - 元公主出身王妃의 家系를 중심으로,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233

234 梨大史苑 24 25合輯, 이화여자대학교 사학회. 金惠苑(1993), 高麗後期 瀋(陽)王의 政治 經濟的 基盤, 國史館論叢 49, 국사편 찬위원회. 김혜원(1994), 원 간섭기 立省論과 그 성격, 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 민음사. 金惠苑(1999), 高麗後期 瀋王 硏究, 梨花女大學校 博士學位論文. 金浩東(1989), 古代遊牧國家의 構造, 講座 中國史 Ⅱ, 지식산업사. 金浩東(1989), 蒙古帝國의 形成과 展開, 講座 中國史 Ⅲ, 지식산업사. 金浩東(2006), 몽골제국과 大元, 歷史學報 192, 역사학회. 이개석(2007), 大蒙古國 - 高麗 關係 연구의 재검토, 史學硏究 88, 韓國史學會. 李命美(2003), 高麗 元 王室通婚의 政治的 의미, 韓國史論 49, 서울大學校 國 史學科. 李龍範(1962), 奇皇后의 冊立과 元代의 資政院, 歷史學報 17 18合輯, 歷史學會. 이익주(1992), 충선왕 즉위년(1298) 개혁정치 의 성격 - 관제(官制) 개편을 중심으 로, 역사와 현실 7, 역사비평사. 李益姝(1996), 高麗 元關係의 構造에 대한 硏究 - 소위 世祖舊制 의 분석을 중심 으로, 韓國史論 36, 서울大學校 國史學科. 이익주(2000), 14세기 전반 高麗 元關係와 政治勢力 동향 - 忠肅王代의 瀋王擁立 運動을 중심으로, 한국중세사연구 9, 한국중세사학회. 이익주(2006), 14세기 후반 원 명 교체와 한반도, 전쟁과 동북아의 국제질서, 일조각. 이익주(2009), 고려 몽골 관계사 연구 시각의 겸토 - 고려 몽골 관계사에 대한 공 시적, 통시적 접근, 한국중세사연구 27, 한국중세사학회. 정요근(2007), 고려 역로망 운영에 대한 원(元)의 개입과 그 의미, 역사와 현실 64, 한국역사연구회. 周采赫(1988), 元 萬卷堂의 設置와 高麗 儒者, 孫寶基博士停年紀念韓國史學論 叢, 知識産業社. 주채혁(1989), 몽골-고려사 연구의 재검토 - 몽골 - 고려 전쟁사 연구의 시각 문제, 애산학보 8, 애산학회. 周采赫(1989), 몽골-고려사 연구의 재검토 - 몽골 - 고려사의 성격 문제, 國史館 論叢 8, 국사편찬위원회. 채웅석(2007), 원간섭기 성리학자들의 화이관과 국가관, 역사와 현실 49, 한국 역사연구회. 23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35 北 村 秀 人 (1964), 高 麗 に 於 ける 征 東 行 省 について, 朝 鮮 學 報 32. 北 村 秀 人 (1965), 高 麗 末 に 於 ける 立 省 問 題 について, 北 海 道 大 學 文 學 部 紀 要 14~1. 北 村 秀 人 (1973), 高 麗 時 代 の 瀋 王 についての 一 考 察, 人 文 硏 究 24~10, 大 阪 市 立 大. 森 平 雅 彦 (1998), 高 麗 王 位 下 の 基 礎 的 考 察 - 大 元 ウルスの 一 分 權 勢 力 として 高 麗 王 家, 朝 鮮 史 硏 究 會 論 文 集 36, 朝 鮮 史 硏 究 會. 森 平 雅 彦 (1998), 駙 馬 高 麗 國 王 の 成 立 - 元 朝 における 高 麗 王 の 地 位 についての 豫 備 的 考 察, 東 洋 學 報 79~4, 東 洋 文 庫. 森 平 雅 彦 (2001), 元 朝 ケシク 制 度 と 高 麗 王 家 - 高 麗 元 關 係 における 禿 魯 花 の 意 義 に 關 連 して, 史 學 雜 誌 100~2, 東 京 大 學 文 學 部. 森 平 雅 彦 (2008), 事 元 期 高 麗 における 在 來 王 朝 體 制 の 保 全 問 題, 東 北 アジア 硏 究 別 冊 1 號, 島 根 縣 立 大 學 東 北 アジア 地 域 硏 究 センタ. 세계질서와 고려-몽골관계 235

236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계승범 서강대학교 I. 머리말 II. 전근대 동아시아와 조선 III. 조명관계와 동아시아 IV. 맺음말

237 I. 머리말 이 글은 그동안 대개 자국사( 自 國 史 ) 내지는 일국사( 一 國 史 ) 중심의 시각에서 이루어지던 한중관계 연구의 틀에서 벗어나 동아시아라는 전체 틀에서 조명관계( 朝 明 關 係 )의 실제와 성격을 고찰하고, 특히 동아 시아 국제무대에서 조선이 차지하던 위상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을 목 적으로 한다. 특히 조명관계를 조선과 명 사이의 쌍방관계로만 보던 평면적 시각을 뛰어넘어 동아시아 국제질서라는 보다 거시적 시각에서 입체적 이해를 꾀할 것이다. 먼저 명과 조선이 속해 있던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 전반에 대 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구미 학계, 일본 학계, 국내 학계의 시각 과 논점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1 특히 이 공동 연구에서 필자 가 맡은 임무 가운데 하나가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관련해 상 당한 연구 성과를 축적하고 있는 구미 학계의 연구 동향을 비판적으 로 정리하는 것이므로, 구미 학계의 연구 동향을 이른바 중국적 질서 (Chinese world order)와 한화( 漢 化, sinicization) 이론 및 그에 대한 비 판을 중심으로 분석할 것이다. 아울러 동아시아세계론 을 생산하고 유 통시킨 일본 학계의 동향도 15~16세기를 중심으로 간략하게나마 비 판적으로 살펴 볼 것이다. 또한 거대 담론보다는 식민사관 극복이라는 발등의 불 을 끄는 데에 우선순위를 둘 수밖에 없었던 국내 학계의 1 전근대 한중관계 관련 중국(PRC) 학계의 연구 동향에 대해서는 방향숙 (2009), 중국 학계의 한중관계사 연구: 어제와 오늘, 한중일 학계의 한중관 계사 연구와 쟁점, 동북아역사재단 참조.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237

238 특성과 동향도 비판적으로 정리할 것이다. 이런 기존의 설명 틀을 참고하되, 이 글에서는 조명시대(1392~1644년, 명과 조선이 공존하던 시기)를 다루는 만큼 15~17세기 동아시아 의 범 위 설정을 명과 조선이 공유하던 공간이라는 나름의 기준을 만들어 시도할 것이다. 더 나아가 조명관계의 실상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 기 위하여 동시대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통용되던, 그래서 조명관계 에도 적용되던 국제외교 관련 용어들, 이를테면 조공(朝貢), 책봉(冊 封), 내속(來屬), 속국(屬國), 기미(羈縻), 번국(藩國), 외국(外國), 내복 (內服), 중외(中外), 배신(陪臣) 등과 같은 용어들의 용례와 의미를 고찰 할 것이다. 이런 바탕 위에, 당시 동아시아 질서를 명을 중심으로 한 일방적 시각에서 조망하는 것을 지양하고, 적어도 동아시아 무대에서 조선의 호응이 없는 명질서(明秩序) 는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가 설을 제시함으로써, 이른바 명질서가 15~16세기 200년간 별다른 문제 없이 작동할 수 있었던 본질적 구조와 그 질서가 17세기에 들어서며 붕괴되는 이유를 흔히 알려진 후금의 흥기보다는 조선의 역할에 중점 을 두어 새롭게 설명할 것이다. 23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39 II. 전근대 동아시아와 조선 1. 중국적 질서 와 그 비판자들 : 구미 학계의 논쟁 관계사를 공부할 때에는 쌍방 간의 문제 외에도 전체 질서를 보아 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구미 학계에서도 다양한 연구가 쏟아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동아시아를 이해하는 주요 코드이기 때문이다. 조 공과 책봉에 기초한 중국 2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제대로 이해하 지 못하던 서양인들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학문적 성과를 내기 시작 했다. 특히 1940~1960년대에는 페어뱅크(John K. Fairbank)를 필두로 하여 이른바 하버드학파(Harvard School Fairbankians)로 불리는 일군 의 학자들이 중국적 질서(Chinese World Order) 라는 분석 틀을 제시 했다. 이후 다양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설명 틀은 세계 학계에 널 리 수용되어 현재까지도 주류적 위치를 잃지 않고 있다. 페어뱅크와 그 지지자들은 정치적 예속과 경제적 수탈의 한 형식으로 간주되던 서양식 조공(tribute) 개념으로 동아시아의 조공제도를 볼 수 없다는 데에 동의하며, 그런 조공제도조차도 이념과 현실 사이에 차이가 있었 음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천명( 天 命 )을 받은 천자( 天 子 ) 로서 갖는 황제 의 위상과 그 영향력을 하나의 보편적 이념으로 받아들여 동아시아 전체에 확장하여 강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25사( 史 ) 기록에 나오는 2 이 글에 나오는 중국 은 특별한 부연 설명을 괄호 안에 제공하지 않는 한 흔 히 China로 불리는 지정학적 공간 의 의미로 사용했다.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239

240 조공과 책봉의 의미를 기록된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했다. 따 라서 이들은 중국이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이라는 기본 시각에 입각 해, 책봉과 조공이라는 코드로 전근대 동아시아 2000년을 조망했다. 심지어 페어뱅크는 동아시아에는 엄밀한 의미의 외교(diplomacy,주권 국들 사이의 동등한 접촉) 가 존재하지 않았다고까지 말했다. 요컨대 전 근대 동아시아 전체가 중국의 천자를 중심으로 한 하나의 수직적 질 서로 편제되어 있었다는 주장이다. 3 중국의 문화적 우월론에 근거한 이런 해석은 기록에 나오는 중화( 中 華 )와 이적( 夷 狄 )의 의미도 그대로 인정하여, 화( 華 )를 civilized 로, 이 ( 夷 )를 uncivilized 로 이해함으로써, 중화 중심의 이분법적 문명론에 근거하여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서열화 했다. 실제로 페어뱅크 는 주변국을 한화( 漢 化 )의 정도에 따라 유형화함으로써 역사 기록에 보이는 중국 중심의 문화우월주의 관점을 특별한 여과 없이 재생산했 다. 이렇듯 여타 종족들이 군사적 우위를 내세워 중원에 들어오더라도 결국에는 한족의 문화적 우월성으로 인해 한족문명으로 흡수 동화되 어 버렸다는 한화( 漢 化 ) 이론은 4 전근대 동아시아를 이해하는 큰 패러 3 John K. Fairbank(1942), Tributary Trade and China s Relations with the West, The Far Eastern Quarterly, Vol. 1, No. 2, New York:Far Eastern Association ;John K. Fairbank ed.(1968), The Chinese World Order :Traditional China s Foreign Relation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pp. 1~19 257~275;Mark Mancall(1992), China at the Center :300 Years of Foreign Policy, New York:The Free Press, pp. 19~39. 4 John K. Fairbank ed.(1968), pp. 1~19;John D. Langlois(1980), Chinese Culturalism and the Yuan Analogy:Seventeenth Century Perspectives, Har vard Journal of Asian Studies, Vol 40, No. 2 ;Alastair Iain Johnston(1995), Cultural Realism:Strategic Culture and Grand Strategy in Chinese History, Princeton:Princeton University Press;Ring-ti Ho(1998), 24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41 다임이 되어, 최근의 날카로운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큰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2000년이 넘도록 동아시아를 주도하던 중국적 질서 는 19세기에 서양 세력이 진입해 들어오면서, 보다 구체적으로는 아편전쟁(1840~1842년)을 계기로 붕괴되고, 만국공법( 萬 國 公 法 )에 기초 한 서양식 질서로 편입되었다는 이해가 5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 구도는 그 시작부터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다. 예를 들어 페어뱅크의 해석 자체가 또 다른 제국주의적 발상이라는 비판, 6 상호보완적일 수밖에 없는 책봉 조공제도를 지나치게 책봉국 중심으로만 일방적으로 해석했다는 비판, 7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지정 학적 경제구조에 맞도록 중국 역사를 재단하여 일반화하고, 그럼으로 써 제국주의적 냉전 이데올로기에 충실하려는 의도의 산물이라는 비 판, 8 개념 자체가 모호하고 변화도 무쌍한 조공제도 9 라는 하나의 프리 In Defense of Sinicization:A Rebuttal of Evelyn Rawski s Reenvisioning the Qing, Journal of Asian Studies, Vol 57, No John K. Fairbank( ), Trade and Diplomacy on the China Coast: The Opening of the Treaty Ports,1842~1854,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6 Joseph Esherick(1972), Har vard on China :The Apologetics of Imperialism, Bulletin of Concerned Asian Scholars, Vol. 6, No. 4 Cambridge: Bulletin of Concerned Asian Scholars. 7 James Hevia(1995), Cherishing Men from Afar: Qing Guest Ritual and the Macartney Embassy of 1793,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pp. 7~15. 8 Tani E. Barlow(1997), Colonialism s Career in Postwar China Studies, Formations of Colonial Modernity in East Asia, Durham:Duke University Press, pp. 373~ Herbert Franke and Denis Twitchett(1994), Introduction,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 6, Cambridge: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1~42. 이에 따르면, 조공제도(tribute system)라는 말은 그 의미가 너무 광범 위하여, 그것만으로는 중국의 우월성을 담보할 수 없다. 즉 동등한 관계에서 도 또는 심지어 중국의 왕조가 열등한 상태에서도 조공제도는 얼마든지 가능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241

242 즘으로 시기별 지역별 차이를 무시한 채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지나치게 일반화했다는 비판 10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런 일련의 비판과 짝을 이루어 중국적 질서 에 대한 구체적인 반 증 사례를 제시하는 연구도 많이 제기되었다. 이런 연구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주로 중앙아시아의 유목국가들과의 관계나 11 명청시대 동남 아시아 방면의 무역 상황 12 등에 주목하여, 자의적으로 윤색된 중국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비록 의례적인 책봉 조공체제하에 서 관계가 이루어졌지만, 실상은 대등한 (심지어는 한족 천자가 조공을 바치는) 무역 행위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비판과 짝을 이루 어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조공(tribute)제도 자체보다는 중국의 자기방어(defensiveness)라는 코드로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대 안도 제시되었다. 13 이런 제안은 조공체제 담론이 안고 있는 문제를 비 하다는 것이다. 좋은 실례는 北 宋 과 거란, 南 宋 과 여진 사이의 관계에서 두드 러지게 나타난다. 10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략 이런 시각의 비판으로는 John E. Wills(1983), Ch ing Relations with the Dutch, 1662~1690, Morris Rossabi ed., China among Equals: The Middle Kingdom and Its Neighbors, 10 th ~14 th Centuries, Berkeley: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John E. Wills(1984), Embassies and Illusions: Dutch and Portuguese Envoys to Kang-hsi, 1666~1687, Cambridge:Harvard University Press;Nicola di Cosmo and Don J. Wyatt(2003), Political Frontiers, Ethnic Boundaries, and Human Geographies in Chinese History, London: RoutledgeCurzon 등 참조. 11 Thomas Barfield(1989), The Perilous Frontiers: Nomadic Empires and China, 221 B.C. to A.D. 1757, Cambridge, Massachusetts:Blackwell;Anatoly M. Khazanov(1994), Nomads and the Outside World, 2nd edition Madison: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2 John E. Wills(1984);John E. Wills(1993), Maritime Asia, 1500~1800:The Interactive Emergence of European Domination, American Historical Review, Vol. 98, No John E. Wills(1988), Tribute, Defensiveness, and Dependency:Uses and 24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43 판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해석의 틀을 제시했다는 데에 의의 가 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그동안 가장 모범적인 책봉 조공관계로 인 식되었던 한중관계, 곧 조명 및 조청관계에 대해서도 수정주의적 해석 이 나오고 있다. 중국에 복수의 천자가 공존하던 고려시대의 대외관계 를 다룬 연구들은 그 좋은 예이다. 14 그뿐만 아니라, 조선건국 후에도 명과의 관계가 여전히 껄끄러웠음을 들어 세종( 世 宗, 재위 1418~1450년) 이전과 이후의 조명관계를 차별화하는 경향도 강하다. 조선 건국 시점 부터 이미 유교적 이념에 기초한 전형적인 책봉 조공관계가 형성되었 다는 주장이 15 비판의 도마에 오른 것은 16 하나의 좋은 예이다. 한편 중국적 질서 문제와 관련해, 한화 이론에 대해서도 적지 않 은 비판이 일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신청사( 新 淸 史, New Qing History)라는 새로운 설명 틀을 꼽을 수 있다. 신청사 란 청의 역 사를 중국(한족) 역사의 일부로 보기보다는, 만주족이 세우고 주도한 다민족 제국의 역사로 새롭게 조명하면서, 정복자(conquest elites)로서 Limits of Some Basic Ideas about Mid-Ch ing Foreign Relations, The American Neptune, Vol. 48, Salem: Peabody Museum of Salem. 14 이에 대해서는 피터윤(2002), 서구 학계 조공제도 이론의 중국 중심적 문화 론 비판, 아세아연구 45-3,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상세히 다루 고 있다. 이 글은 책봉 조공제도 전반에 대한 구미 학계의 연구사 정리에도 많은 도움을 준다. 15 Hugh D. Walker(1971), The Yi-Ming Rapprochement:Sino-Korean Foreign Relations, 1392~1592, Ph. D. dissertation, LA: UCLA. 16 Donald N. Clark(1998), Sino-Korean Tributary Relations under the Ming,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 8,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272~300;Peter I. Yun(1998), Rethinking the Tribute System : Korean States and Northeast Asian Interstate Relations, 600~1600, Ph. D. dissertation, LA: UCLA.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243

244 의 만주족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일련의 연구 동향을 일컫는 말이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신청사 지지자들은 대개 만주족이 몽골의 영 향을 받아 창안한 독특한 제도인 팔기제( 八 旗 制 )에 큰 관심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또한 소수의 만주족이 다수의 한족을 250년 이상이나 장기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던 동인도 한화정책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다인종 제국의 지배자로서 자신들의 제도와 정체성을 유지했기 때문이 라는 것을 강조한다. 17 이 신청사 계열의 학자들 사이에도 청의 역사 를 만주족 중심으로 보는가, 아니면 제국 자체를 중심으로 보는가에 따라 입장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한족만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시 각을 거부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런가 하면, 청의 지배를 받았 던 위구르나 티베트의 역사에도 관심을 가지면서 그 외연을 넓혀 가고 있다. 18 아울러, 이런 흐름은 정복국가(conquest states) 라는 담론과 연 17 대표적인 연구로는 Pamela Kyle Crossley(1990), Orphan Warriors:Three Manchu Generations and the End of the Qing World, Princeton:Princeton University Press ;Evelyn Rawski(1996), Reenvisioning the Qing:The Significance of the Qing Period in Chinese History, Journal of Asian Studies, Vol. 55, No. 4, Minneapolis :Association for Asian Studies;Evelyn S. Rawski(1998), The Last Emperors: A Social History of the Qing Imperial Institutions, Berkeley: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James A. Millward(1998), Beyond the Pass: Economy, Ethnicity, and Empire in Qing Central Asia, 1759~1864, Stanford:Stanford University Press;Mark C, Elliot(2001), The Manchu Way: The Eight Banners and Ethnic Identity in Late Imperial China,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James A. Millward et. al. eds.(2004), New Qing Imperial History :The Making of Inner Asian Empire at Qing Chengde, London: Routledge 참조. 한편, 구 미 학계의 이런 움직임에 대한 보다 상세한 소개로는 윤영인(2005), 만주족 의 정체성과 漢 化 이론에 대한 서구 학계 신간 소개, 만주연구 2, 만주학 회 참조. 18 Peter Perdue(2005), China Marches West: The Qing Conquest of Central Eurasia, Cambridge: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Pamela Kyle Crossley, Helen F. Siu, and Donald S. SuttonJames(2006), Empire 24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45 합하여 비단 청대만이 아니라, 이전의 요(거란) 금(여진) 원(몽골)시기에 까지 확대 적용되는 추세이다. 이런 흐름은 냉전 종식 이후에 더욱 두드러져, 현재는 학계에서 일 종의 학파를 형성했을 정도로 분명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동안 세 계 학계의 주류를 점하던 한족 중심의 한화 이론에 대한 이런 비판과 새로운 대안 제시는 나름대로 강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으므로, 한국 학계에서도 경청할 만하다. 다만 현재 21세기까지 포함하여 좀 더 장 기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만주족을 비롯하여 여타 비한족( 非 漢 族 ) 정 복국가 건국자들이 자발적으로든 강제적으로든 자신들의 인종적 문화 적 정체성을 심각하게 상실하고 한화 된 사실을 부정하기도 쉽지 않다 는 문제를 여전히 안고 있다. 실제로 18세기와 19세기에 만주족이 자 신들의 정체성을 고수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 사실은 만주족 이 한화를 거부하고 정체성을 유지한 증거로 채택될 수도 있지만, 동 시에 그 자체로 이미 자신들의 정체성에 무엇인가 위기를 느꼈기 때문 이라는 반증 자료로도 얼마든지 쓰일 수 있다. 또한 청제국을 만주족 중심으로 볼 수 있다는 바로 그 논리 그대로, 청제국을 한족 중심으 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명제 또한 넘기 어려운 숙제이다. 필자도 기존의 한화 이론에는 찬성하지 않으며, 한화 와 신청사 가 운데 굳이 양자택일해야 한다면 신청사 쪽을 택할 것이다. 다만 좀 색 다른 차원에서 기존의 한화 이론을 비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한을 at the Margins: Culture, Ethnicity, and Frontier in Early Modern China, Berkeley: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James A. Millward(2007), Eurasian Crossroads: A History of Xianjiang,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등 참조. (신장)위구르 문제를 건드린 밀워드(Millward) 등 몇몇 서양인 학자들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당국의 입국불허 대상자 명단에 올라 있다고 한다.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245

246 어떤 특정 종족이 아닌 차이나(China) 라는 지정학적 공간으로 보는 것이 역사의 실체에 더 부합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동아시 아 및 중앙아시아의 수많은 종족들이 차이나라는 공간에서 한데 뒤섞 여 오늘날 한 이라 불리는 문명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는 뜻이다. 한화 이론 주창자들이나 그 비판자들은 비록 동화(assimilation)의 기 준으로 문화적 요소(acculturation)를 강조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한의 개념을 지나치게 인종 기준으로 이해하는 경향도 강하다. 물론 구미 학자들이 사용하는 ethnic 이나 ethnicity 의 개념에는 문화적 동질 집단이라는 요소도 중요하게 포함되므로, 한국어의 인종 이나 종족 내지는 민족성 과는 그 의미가 좀 다르다. 그렇지만 한화 이론이 골격 을 갖춘 시기가 중국의 지식인들이 서양식 내셔널리즘의 영향을 강하 게 받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였던 점을 19 고려할 때, 한화 이론에 서 말하는 한 에 인종적 개념이 강하게 들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어떤 특정 인종(또는 민족)으로서의 한 은 어쩌면 무의미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차이나라는 지정학적 공간에 들어와 정 착하여 살던 사람들은 모두 인종에 관계없이 대개 한 이라는 이름으 로 뒤섞였기 때문이다. 차이나라는 말은 Chin(Qin, 秦 )에서 왔고,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을 통칭해서 부르는 한 이라는 말은 Han( 漢 )에서 왔 다. 이 두 명칭은 모두 당시부터 국제무대에서 통용되던 말이다. 이런 기본 틀을 한 번 더 확고히 한 제국이 바로 당( 唐 )이다. 이후로도 국 제 무대에서 이 지역 사람들을 대개 한인( 漢 人 )이나 당인( 唐 人 )으로 부 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한이나 당의 주민들이 모두 인종적으로 한족이었다고 주장 19 Evelyn Rawski(1996), pp. 83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47 할 근거는 사실 별로 없다. 은[ 殷, 상( 商 )]나라를 세운 종족이 동이족 일 가능성이 높은 것에서부터 시작해, 이른바 중국문명의 토대를 구 축했다는 주( 周 )나라의 건국자들도 당시 은나라 사람들로부터는 야만 인 취급을 받던 혼혈 종족이었다. 전국( 戰 國 )을 통일한 진( 秦 )나라 사 람들도 사실은 다른 전국들로부터 야만인 취급을 받던 혼혈 종족이었 다. 한나라와 삼국시대를 거쳐 남북조시대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오랜 시기에 걸쳐 차이나라는 지정학적 공간에 점차적으로 포함된 양자강 이남의 남방 일대의 주민들도 인종적으로 한족이 아니었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당나라 황실 구성원들도 혈연으로만 본다면 오히려 돌궐 족에 훨씬 가깝다. 따라서 동아시아 고대 역사에서 한족 을 말할 때, 그것은 생물학적 개념의 특정 인종일 수 없으며, 어디까지나 지정학적 역사 공간의 산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솔직히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수많은 인종들이 유럽의 인종들처 럼 외모상의 색깔 차이가 분명했다면, 한대나 당대 차이나라는 공간 은 마치 지금의 미국 사회처럼 인종 전시장을 방불케 했을 것이다. 이 런 점을 부정할 수 없다면 역사상의 한 은 어떤 특정 종족을 명시하 여 가리키는 인종적 개념이 아니라, 차이나라는 지정학적 공간에 살던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런 점에서 볼 때, 한화 이론이란 이미 고대부터 차이나라는 지정학적 공간에 들어와 살던 수많은 종족들이 통일제국을 형성하며 한데 어우 러져 만들어 낸 중국( 中 國 )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요컨대 한화를 말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화를 끊임없이 흡수하여 동화시킨 일정한 주체(독립변수)가 있어야 논리적으로 가능한데, 그 주 체인 한 의 실상이 시대에 따라 일정하지 않고 계속 변했다는 결정적 인 문제가 있다. 따라서 한은 문화동화(assimilation 또는 acculturation)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247

248 의 산물이 아니라, 문화융합(amalgamation) 의 결과로, 다시 말하면 다양한 종족과 문화가 끊임없이 뒤섞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낸 역사 공간(historical melting pot)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페어뱅크를 축으로 한 전통 담론, 곧 중국적 질서 와 한화 이론은 여전히 세계 학계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이런 패러다 임의 취약점을 드러내는 데에 기여한 수많은 연구들은 대개 반증 사 례들을 제시하는 선에서 그칠 뿐,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보편적인 설 명 틀을 아직 새롭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신청사 나 정복국가 론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는 있어도, 한을 어떤 특정 인종이나 문화로 이 해하는 한 기존의 한화 이론을 극복하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럴지라도 중국적 질서 와 한화 패러다임은 이제 빛이 바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이해하는 패러다임은 앞으로 서서히 군웅할거 시대로 접어들 것 같다. 2. 동아시아세계론 의 양면성 : 일본 학계의 담론 한편 냉전시기에 일본에서도 중원국가 중심의 고대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 초점을 둔 동아시아세계 라는 개념이 등장해, 지금까지도 꾸준 히 학계의 쟁점이 되고 있다. 동아시아 라는 개념은 일본이 서양 열강 에 맞서던 19세기 후반부터 이미 등장하여 정세에 따라 진화와 부침 을 겪었는데, 현재 학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동아시아세계론 은 1960~1970년대에 니시지마 사다오[ 西 嶋 定 生 ]에 의해 그 모습이 갖추 24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49 어졌고, 20 다양한 비판과 변화를 겪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분석의 틀과 강조점은 각기 다르더라도 많은 학자들이 이 논쟁에 뛰어들었는 데, 넓은 의미의 동아시아세계론 은 크게 책봉체제론과 기미체제론으 로 구분되는 경향이 있다. 21 이들은 각기 중국의 왕조가 주도한 책봉 정책이나 기미정책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서로 간에 차별성을 보인다. 동아시아세계론 이 학계에 기여한 공헌 및 문제점에 대해서는 김창석 이 이 책에서 6~8세기에 초점을 맞추어 잘 설명했으므로, 여기서는 15~16세기에 초점을 두어 비판적으로 살펴보자. 동아시아세계론 은 문명의 초기(고대)에 이미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 으면서 공통 분모를 지닌 특정 문명을 일구어온 동아시아 지역을 하나 의 정치적 문명권으로 묶어 통시적으로 조망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그러나 통시적 거대 담론을 도출하는 데에 치우친 나머지, 자료 의 해석과 취사 선택에서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를테면, 페어뱅크 등 일부 서구 학자들에게서도 보이듯이, 니시지마 사다오 등 일본 학자들 도 문서에 기록된 책봉 의 의미를 대체로 기록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이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책봉의 개념과 의미는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얼마든지 차이가 있을 수 있었고, 전근대 2000년 동 안에도 시기에 따라 달랐으며, 같은 시기라도 왕조에 따라, 지역에 따 라 달랐다. 이렇게 다양한 외교 양식을 모두 책봉 이라는 하나의 용광 20 西 嶋 定 生 (1983), 中 國 古 代 國 家 と 東 アジア 世 界, 東 京 : 東 京 大 學 出 版 會. 근 800 쪽에 이르는 이 책의 내용 가운데 동아시아세계 론의 핵심을 이루는 세 편 의 글은 별도로 묶여 한글로도 번역되었다. 니시지마 사다오 저, 송완범 역 (2008), 일본의 고대사인식: 동아시아세계 론과 일본, 역사비평사 참조. 21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분석은 박대재(2007), 고대 동아시아 세계론 과 고 구려사, 고대 동아시아세계론과 고구려의 정체성, 동북아역사재단 참조. 이 연구사 정리는 필자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다.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249

250 로에 집어 넣고 일률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무리다. 특히 니시지마 사다오 식의 책봉체제론이 그나마 비교적 잘 들어맞 을 시기는 그가 집중 연구한 고대가 아니라, 오히려 책봉체제에서 획 기적인 변화를 겪은 원대( 元 代 ) 이후 곧 명청시기인데 이 점도 그의 이 론이 안고 있는 또 다른 문제점이다. 왜냐하면 책봉의 외피 적 성격이 가장 덜하던 시기, 다른 말로 책봉의 의미가 실제로 매우 커진 시기가 바로 원명청시기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몽골제국을 이해하는 니시지마 사다오의 관점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책봉체제와 관련 하여 몽골제국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이후 명청시기 책봉체제의 본 질에 대한 이해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니시지마 사다오는 원(몽골제국)을 동아시아 책봉체제에서 예외적인 시기로 치부하고, 동아시아세계의 자기완결성 은 명의 건국과 함께 부 활된다고 보았다. 22 그러나 원이 대륙의 동아시아 기존 국제질서를 하 드디스크 포맷 수준으로 바꾸면서 북경( 北 京 ) 인근에 새로운 중심을 확고부동하게 건설한 점을 고려할 때, 그 토대 위에 등장한 명청은 몽 골제국과 비슷한 제국적인 성격을 띠었고, 특히 북경과 지근거리에 있 던 서울(조선의 중심) 입장에서 볼 때 책봉의 의미도 이전보다 훨씬 더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명대( 明 代 )의 책봉체제를 단순히 원 이 전 책봉체제의 부활로 이해하기보다는 원의 영향을 받아 제국적 성격 으로 한층 강화된 새로운 체제로 보는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西 嶋 定 生 (1983), 앞의 책, 411~412쪽. 23 책봉체제의 성격이 이전과는 다르게 새롭게 탈바꿈하는 시기와 관련하여 元 代 를 강조한 연구로는 Peter I. Yun(1998), pp. 130~149 ; 楊 軍 張 乃 和 編 (2006), 先 史 前 至 20 世 紀 末 東 亞 史, 長 春 : 長 春 出 版 社, 11~12장 참조. 明 代 를 강조한 연구로는 John E. Wills(1984) 참조. 25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51 한편 호리 토시카즈[ 堀 敏 一 ]가 주도한 세계제국론 내지는 기미체제 론 의 경우도, 24 중국 왕조의 다양한 외교 방법들 가운데 책봉에만 주 목하지 않고 그 이외의 모든 양상들을 총괄하여 기미 라는 개념으로 확대하여 이해한 점은 의의가 있다. 그렇지만 대상의 확대라는 측면 외에는 책봉체제론 과 큰 차이가 없다. 여전히 중국의 자료를 그대로 받아들여 그 시각에서만 동아시아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기록에 보이 는 기미 의 의미가 역사 현실과 정확히 일치한다면 문제가 없겠으나, 책봉과 마찬가지로 기미 또한 중국 왕조의 사서 편찬자들이 자기들 중심으로 윤색하여 사용한 수사(레토릭)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 재한 상황을 무시한 채 기미 라는 코드로 동아시아 질서를 통시적으 로 조망하기는 어렵다. 결국 이 장의 주 대상 시기이자 주제인 조선시대 한중관계와 관련 하여 동아시아세계 론의 문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할 수 있겠다. 먼저, 고대의 사례들에 기초해 만든 동아시아세계론 이 오히려 고대보다는 원 이후의 명청시기에 더 잘 들어맞는다는 문제를 꼽아야 할 것이다. 고대로 올라갈수록 오히려 책봉이라는 것이 하나의 체제 로 굳어져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책봉의 실제 운용면에서도 고대는 일률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중국 왕조에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개념화 하여 부른 것이지, 그들이 남긴 기록의 문자적 의미가 책봉을 받는 국가들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실제로 책봉을 받는 국가 들 입장에서 보면, 상황에 따른 전략적 경제적 요인이 매우 강하게 작 용하던 시기가 바로 고대였다. 그런가 하면 동아시아세계론 은 기존의 중국 중심 시각의 탈피가 24 堀 敏 一 (1993), 中 國 と 東 アジア 世 界, 東 京 : 岩 波 書 店.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251

252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욱 강화시켜주는 면이 있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중국 중심의 일방적인 시각을 동아시아 권역의 다자 적( 多 者 的 ) 시각으로도 바꾸어 이해하지 않는 한, 니시지마 사다오의 동아시아세계론 은 어차피 기존의 중국 중심 시각과 그에 기초한 역사 서술에서 동쪽의 한 사례를 강조하여 말하는 표현으로 전락할 우려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한국과 일본에서 보면 동아시아 세 계 일 수 있으나, 중원에 중심을 두었던 제국들 가운데에는 몽골의 원 이나 만주족의 청처럼 동아시아 범위를 초월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 므로, 동아시아세계론 자체가 이른바 중국적 질서 의 부분집합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책봉체제론 을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사회에 통시적으로 적용 할 경우, 그 체제 안으로 제대로 들어온 시기가 그다지 길지 않은 일 본의 위상이 문제된다. 이에 대하여 니시지마 사다오는 일본이 중국 왕조와의 책봉관계에서는 벗어났어도 책봉체제의 논리까지 벗어나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 예증으로 일본이 백제와 신라를 번국( 藩 國 )으 로 봄으로써 자기를 중심으로 한 소세계( 小 世 界 )를 형성했음을 지적하 고, 백제와 신라를 번국으로 삼아 구축한 고구려의 소세계와 대비했 다. 25 그렇지만 이는 논리의 비약이다. 고구려의 소세계는 역사 현실로 증명이 되지만, 일본의 소세계는 일본인의 관념상 그랬을지는 몰라도 당시 국제무대의 실제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떤 상상의 인식 을 곧 국제 현실로 간주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자, 사실의 왜곡일 수도 있다. 요컨대 일본은 6세기 이후로 니시지마 사다오 자신이 말하 는 책봉체제 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이지 책봉체제의 논리 라는 표현은 25 西 嶋 定 生 (1983), 앞의 책, 594~602쪽. 25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53 말의 유희에 가깝다. 특히, 이 연구발표의 대상 시기인 조명시대(1392~1644년) 만 놓고 보 아도, 당시 일본이 북경 중심의 책봉체제 에 들어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15세기 벽두에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들 중 일부가 북경에 조 공하고 일본 국왕 으로 책봉을 받은 적은 있으나, 그것은 오히려 일회 성에 가까운 관계였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보더라도 그것은 차라 리 책봉보다는 무역 행위를 위한 외피 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이런 일본을 포함하여 동아시아세계를 논할 때, 그의 말대로 중국(한 자) 문화권 으로 묶을 수는 있어도, 그것을 책봉체제 라는 코드로 묶 기는 어렵다. 이런 문제들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니시지마 사다오의 설명을 그 대로 따를 경우, 비록 무게 중심은 중국에 놓여 있을지라도 한중일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권역은 오래 전부터 중국과 일본으로 양분되 었다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전근대에서는 굳이 서로 다른 성 격의 두 중심(중국과 일본)을 굳이 하나의 권역으로 묶을 필요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영어권 구미 학계에서 나온 동아시아 역사 개설서의 대부분은 중국사와 일본사로 양분되며, 한국사는 전근대에는 중국에 붙이고, 근대는 일본에 붙여 매우 간략하게 취급하는 것이 아직도 추 세이다. 26 페어뱅크의 중국적 질서 에서도 일본은 사실상 배제된다. 27 이런 구도에서 조선(한국)의 위상은 자동적으로 축소되고, 더 나아가 26 동아시아사 개설서 가운데 한국을 별로도 설정하여 비중 있게 다룬 책으로는 아마 Patricia Ebrey, Anne Walthall, and James Palais(2006), East Asia: A Cultural, Social, and Political History, Boston: Houghton Mifflin이 대표적 일 것이다. 27 이삼성(2006),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전통시대 동아시아 2천년과 한반도, 한길사, 106~108쪽.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253

254 두 중심의 변경으로 전락하게 되어, 이른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사 이에 끼어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중심의 영향을 받았다는 식의 전형 적인 식민사관의 한 축으로 회귀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일본 학계에서 출간된 동양사 관련 저작들을 보면, 중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기술하 고 있으며 한국 관련 장( 章 )을 아예 배정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 예로, 일본 학계의 대표적인 동양사 저작을 선별하고 종합하 여 한글로 번역한 한 책의 편제를 보면, 28 중국과 일본을 필두로 하여 인도 동남아시아 내륙아시아 서아시아 등을 독립 장( 章 )으로 다루면 서도, 한국에 대해서는 단 한 소절조차 할애하지 않고 있다. 이런 현 실은 이른바 동아시아세계론 이 안고 있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잘 보여준다. 3. 조공과 책봉 : 국내 학계의 시각 비교적 일찍부터 동아시아 전체를 염두에 둔 어떤 설명 틀을 만들 려고 노력한 구미 학계나 일본 학계와는 달리, 국내 학계는 출발부터 시야를 그렇게 넓게 잡을 수 없었다. 대개의 경우 연구자의 관심과 시 각은 한중관계 라는 틀에 제한되었으며, 한중관계가 속해 있던 전체 틀을 조망하려는 시도는 별로 없었다. 그나마 한중관계에 대해서도 책 봉 조공관계로 대표되는 고려 조선의 사대정책이 실리에 따른 자주적 외교였다는 결론을 미리 정해 놓고 그것을 입증하기 위한 당위적 연구 28 金 泰 丞 編 譯 (1991), 東 洋 史 의 基 礎 知 識, 신서원. 25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55 를 수행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는 식민사관의 극복이 광복(1945년) 이 후 국내 학계의 당면과제였기 때문으로, 일제에게 망한 조선이 전체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의미를 규명하는 문제와도 직결되는 매 우 중요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국내 학계는 전근대 동 아시아 국제질서 관련 담론을 생산할 여유도 없이, 발등의 불(식민사 관)을 끄기 위한 사례 연구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한국의 사 학사 차원에서는 의미 있는 작업이었으나, 이런 흐름이 현재까지도 큰 변화 없이 이어지고 있는 현실은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광복 이후,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전쟁(1950~1953년)의 충격으 로부터 어느 정도 숨을 돌린 1960년대 초부터 한국의 역사 학계에서 는 조선후기 사회를 보다 발전적이고 긍정적으로 조망하려는 다양한 연구와 담론들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는 이른바 근대의 시기에 식민 사관이 부정적으로 덧칠해 놓은 조선후기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의 일 환이었다. 이런 추세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내재 적 발전 이라는 큰 틀이 항상 놓여 있었다. 조선 역사에서 내재적 발 전 요인을 찾는 것이야말로 정체성과 타율성을 강조한 식민사관을 깰 수 있는 좋은 반증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1960~1970년대 에는 실학 연구를 필두로 하여, 조선 사회의 역동성을 상징하는 신흥 사대부론 이나 사림론( 士 林 論 ) 이 등장하여 현재까지 부동의 위치를 점 하고 있다. 1970~1980년대에는 자본주의맹아론 이 맹위를 떨쳤으며, 1980년대 이후로는 붕당정치론ㆍ조선중화론ㆍ진경문화론 등이 연이어 등장하여 조선의 주체성과 발전성을 강조했다. 조선시대 한중관계에 대한 재조명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비교적 일 찍 등장했다. 정체와 타율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사대(조공과 책봉의 형 태로 나타난 사대)를 실리외교로 새롭게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바로 그것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255

256 이다. 29 그 결과,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행위는 국익을 위한 적극 적 자주적 외교라는 해석이 크게 수용되었다. 그 근거로는 특히 조선 건국 직후 조선과 명 사이에 있었던 조공사행의 횟수 논란(3년 1공 또 는 1년 3공)과 조공에 따른 하사품뿐만 아니라 사행에 수반되는 제반 무역 등 경제적인 손익만 따져보아도 조선에 그다지 손해가 아니었다 는 주장이 주로 언급되었다. 이런 주장은 개설서에 폭넓게 반영되어, 조선의 대외관계를 논하면서 조공이나 책봉이라는 단어를 아예 사용 하지 않는 30 경향이 지금도 여전히 강하다. 이런 현상의 기저에 이유야 어떻든 식민사관 극복이라는 심리가 깔려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한미관계를 생략하고 대한민국 역사를 말하기 어렵듯이, 조 명관계의 본질과 실상에 대하여 침묵하면서 조선시대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조선이 속해있던 전체 숲, 곧 명이 주도하던 동아시아 국제무대의 실체를 외면한 채, 조선이라는 나 무 한 그루만 보는, 그마저도 한쪽에서만 보는 우를 범하기 쉽기 때문 이다. 그 뿐만 아니라, 같은 조선전기라고 해도 후대로 갈수록 조명관 계의 중요성은 국내외적으로 더욱 커졌다. 특히 16세기에 들어서면서 부터 주목할 만한 변화를 보인다. 31 또한 근 200년에 걸쳐 형성된 조 29 조선과 관련해서는 신석호(1959), 조선왕조 개국 당시의 대명관계, 국사상 의 제문제 1, 국사편찬위원회; 金 漢 植 (1977), 明 代 韓 中 關 係 를 둘러싼 若 干 의 問 題 -동아시아 세계질서 속에서의 韓 中 關 係 史 의 모색, 大 丘 史 學 12 13, 대구사학회; 孫 承 喆 (1988), 朝 鮮 朝 事 大 交 隣 政 策 의 成 立 과 그 性 格 - 朝 鮮 朝 對 外 政 策 史 硏 究 試 論, 溪 村 閔 丙 河 敎 授 停 年 紀 念 史 學 論 叢, 논총간행위원 회;김구진(1990), 朝 鮮 前 期 韓 中 關 係 史 의 試 論 - 朝 鮮 과 明 의 使 行 과 그 性 格 에 대하여, 弘 益 史 學 4, 홍익대사학회;박원호(2002), 明 初 朝 鮮 關 係 史 硏 究, 일조각, 282~308쪽 등 참조. 30 한 예로 李 基 白 (1990), 韓 國 史 新 論 신수판, 일조각;국사편찬위원회(2002), 고등학교 국사, 교육과학기술부 참조. 31 계승범(2006), 파병 논의를 통해 본 조선전기 對 明 觀 의 변화, 大 東 文 化 硏 25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57 명관계의 성격과 그 유산은 이후의 조청관계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 었다. 따라서 조명관계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이제는 과거의 정신적 상처에서 벗어나, 사실을 냉정하게 직시할 필요가 절실하다. 이와 관련하여, 조명관계의 본질을 과연 경제적 실리 추구라는 요 인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흔히 조명관계를 공식적으로 출범시키기 위한 협상에서 명이 3년 1공 을 주장한 것에 비하여 조선이 1년 3공을 주장한 것을 들어 조선의 적극성과 실리외교를 강조하는 해석이 정설이 되다시피 해 왔다. 그런 가 하면 서구 학계에서도 이른바 중국적 질서 라는 담론에 대한 비판 의 일환으로 경제적 요인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앞에서 이미 살 펴 보았듯이 주로 명이나 청이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및 일부 유럽 인들과 맺었던 관계를 증거로 제시한다. 주로 흉노 등 유목민들과의 관계나 중국의 동남부 해안이나 동남아시아 방면의 무역 상황 등에 주목하여, 주변국의 경제적 동인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1년 3공만으로는 그것이 반드시 경제적 이익을 위한 동기라 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또한 중앙아시아나 동남아시아의 경우를 조선 에 직접 적용하는 것도 문제이다. 조선은 유목민 국가도, 해상 무역 국가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제적으로만 볼 때 조공은 조선에 게 큰 부담이었다. 32 또한 명의 징은( 徵 銀 )을 미리 우려하여 은광( 銀 鑛 ) 개발에 미온적이었고, 여타 산업 개발에도 적극적일 수 없었던 부작 용, 즉 종합계산서를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조선이 조공을 통해 경 제적 이득을 취했다는 해석은 지나치게 민족적 시각으로만 조공 문제 究 53,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32 전해종(1970), 韓 中 關 係 史 硏 究, 일조각, 77~100쪽.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257

258 에 접근한 초기 연구자들의 성급함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조선 조정이 각종 조공품목과 그 수량으로 인해 부담을 느꼈음을 알려주는 기록은 실록 도처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명도 조선 사행단을 위한 경비 지출로 인해 전체적으로는 경제적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33 따라서 경제적 측면만 볼 때, 조선의 조공사행은 명과 조선 에게 윈-윈(win-win) 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루즈-루즈(lose-lose) 에 가 까웠다. 그럼에도 역시 조공은 조선 입장에서는 자국에 이익이 되니까 했음 에 틀림없고, 명도 자국에 이익이 되니까 그런 관계를 유지했음에 틀 림없다. 종합 계산서를 뽑는다면 역시 윈-윈 이라는 뜻으로, 이는 경 제외적인 이득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잦은 외침에 시달렸던 고려의 상 황을 감안해 볼 때, 조선이 얻은 이익으로는 북쪽으로부터의 침입 예 방을 우선적으로 꼽아야 할 것이다. 명질서( 明 秩 序 )에 적극 참여함으 로써 조선은 자위( 自 衛 )를 위한 국방비의 절감이라는 효과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명의 선진문물(서적 군수품 사치품 등) 수입, 왕실의 정통성 강화 등 허다한 경제외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었 다. 그런가 하면, 명도 조선과의 우호관계를 공고히 함으로써 동쪽 변 경을 안정시키고, 더 나아가 조선을 교두보로 삼아 만주의 여진과 해 외의 일본을 견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런 점들은 무역과 같은 비정치적 요인에 책봉 조공관계가 외피 로 덧입혀진 것이 아니라, 책봉 조공관계의 주목적이 정치적 전 략적 필요와 직결되어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조명관계의 본질과 성격은 이전의 책봉 조공관계뿐만 아니라, 경제적 요인이 정치 33 전해종(1970), 위의 책, 77~100쪽. 25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59 적 요인보다 더 큰 동인이었던 동시대 다른 지역의 사례와도 달랐다. 사실 북경과 거리가 매우 가까워 명의 영향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던 조선의 경우에는, 일본과는 말할 것도 없고 동남아시아나 중앙아시아와도 사정이 매우 달라, 명과 조선이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책봉 조공관계를 유지했다는 증거는 솔직히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비 록 조공을 통한 공무역이 이루어지기는 했어도, 조선과 명의 책봉 조 공관계를 논하면서 경제적 요인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균형을 잃 는 해석이 될 것이다. 허다한 자료들은 오히려 정치적인 동기가 주요인 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편 앞서 살핀 구미 학계의 중국적 질서 패러다임과 일본 학계의 동아시아세계 담론은 한국 사학계와도 긴밀하게 소통했는데, 거기에 는 양면성이 있다. 먼저 조선이 명청과 맺은 책봉 조공관계가 조선 만 의 특수한 것이 아니라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의 보편적 현상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해짐으로써, 식민사관의 타율성 이론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는 디딤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사대와 조공이 한국만의 독특성 이 아니라는 설명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조명관계나 조청관 계와 비슷한 책봉 조공체제가 마치 2000년 동안 한중 간에 유지되었 고, 동아시아 전체로 볼 때 그 전형적인 모습이 바로 조선시대 한중관 계라는 설명도 가능해짐으로써, 여전히 중국적 질서 라는 설명 틀에 예속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한국 학계에서 많이 논의되는 대안으로는 조공관계론 을 34 들 수 있다. 이는 책봉과 조공이 책봉국의 일방적인 의도에 따라 이루어지기보다는 조공국의 의도와도 맞물릴 때에만 작 34 이에 대한 정리로는 박대재(2007), 앞의 글 참조.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259

260 동이 가능한 상호관계의 산물임을 강조하는 시각이다. 이런 접근은 중 국 중심의 일방적인 시각을 벗어나, 책봉을 받는 국가들이 행했던 조 공을 강조함으로써, 쌍방성( 雙 方 性 )을 중시하는 관계사 차원에서 국제 질서에 접근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렇지만 조공국의 입장과 선 택이 중요한 요인이었을지라도, 그 선택의 결과가 언제나 조공과 책봉 이라는 모습을 통해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지나치게 과소평가 한 면이 있다. 또한 조공국의 자기 필요와 선택에 따른 조공이 사실상 불가능해지는 몽골제국 시기 및 그 이후의 명청 시기를 제대로 설명하 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 특히 중국적 질서 에 대한 구미 학계의 비 판을 적극 수용할지라도 조명관계의 본질이 다른 지역처럼 경제적 동 인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관계였던 사실은, 다른 말로 조명관 계의 본질이 당시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오히려 특수하고도 예외적 인 관계였다는 사실은 한국 학계의 큰 부담이자 고민임을 부정할 수 없다. 어쨌든 현재까지 나와 있는 어떤 담론이나 이론도 전근대 2000년 동안의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총괄적으로 설명하는 데에는 각기 문 제를 안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설사 설명이 어느 정도 가능할지라 도, 그 설명 틀이 조명관계까지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는 솔직히 회의적이다. 중국적 질서론 이나 동아시아세계론 을 비판하 는 학자들도 그런 설명 틀에 들어 맞지 않는 사례들은 많이 제시할 뿐, 비판의 대상을 극복할 새로운 설명 틀을 제시하는 데에는 여전히 애로를 겪고 있는 것이 현재 실정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는 어디에서 기인할까? 혹시 고민 의 패러다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왜 굳이 전근대 2000년 전체를 아우를 설명 틀을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26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61 있다. 국제관계 내지는 국제질서와 관련하여 동아시아 역사를 전근대 와 근대로 구분하는 것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근대는 다시 근대(modern)와 현대(contemporary)로 구분하여 이해하면서, 왜 전근 대는 더 이상의 구분 없이 2000년 전체를 동질의 시기로만 보아야 하 는가라는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도 전근대 2000년을 설명할 수 있는 보편적 설명 틀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면 되겠지만, 그런 틀이 거의 불가능하다면 전근대도 시기 구분을 하면 되지 않겠 는가라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한 예로 중원에 중심을 둔 대제국의 도읍이 북경에 처음으로 확실 하게 자리 잡은 이후의 한중관계(또는 동아시아 질서는)는 제국의 중심 이 대개 황하 중상류 지역에 위치했던 그 이전의 상황에 비하여 훨씬 더 정치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가설이 가능하다. 중원에 기반을 둔 대제국의 중심(도읍)이 압록강으로부터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지정학적 요인은 한중관계의 본질을 심각하게 바꿀 정도의 큰 변수가 아니었을까? 이렇듯, 동아시아 역사에서 몽골제국이 갖는 의미 를 좀 더 신중하게 연구한다면,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이해하고 담론화 하는 패러다임을 굳이 전근대와 근대라는 이분법 만으로 나누는 근대 적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인식의 전환은 조명관계 의 보편성보다는 특수성에 주목할 때 오히려 전근대 후반기(원대 이후) 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주효할 것으로 생각된다.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261

262 III. 조명관계와 동아시아 1. 동아시아 권역 : 조선의 국제 반경 세계 학계에서 흔히 동아시아 라고 하면 대개 중국과 일본을 축으 로 하여 한국을 포함하는 정도의 인식을 공통으로 갖고 있다. 전공 내용과 시대에 따라 학자들 사이에 강조점이 서로 달라, 몽골 만주 티베트 대만 류큐 베트남 등을 동아시아 범주에 넣기도 하지만, 기 본 틀은 역시 CJK, 곧 중일한의 순서로 형성된다. 다만, CJK만을 너 무 강조하는 것은 지극히 현대 국제구도의 산물이므로, 이런 틀로 전 근대를 조망하는 데에는 문제가 따른다. 따라서 이런 기본 틀을 획기 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더라도, CJK 간의 상호관계를 핵심으로 삼아 그 각각의 관계망을 합리적 기준에 근거하여 확대하고 넓혀가는 방법 이 가장 합당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일본이 명대( 明 代 )의 중국적 질서 또는 동아시아 질서 에 깊이 참여한 바가 없는 점, 명의 최대 관심은 몽골이었던 점, 명이 원하는 최선의 관계가 조선과의 관계였던 점, 조선도 명질서 에 적극 참여한 점 등을 고려한다면 당시 동아시아 권역을 명과 조선의 외교 반경이 겹치는 공간에 중점을 두어 살필 필 요가 있다. 여기서는 필자의 세 가지 기준을 시론적( 試 論 的 )으로 제시 하고자 한다. 관계적 범위. 명과 조선이 직접 외교 관계를 맺되, 그러한 접촉이 지속성을 보이는 국가나 세력들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이를테면 26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63 명( 明 ) 조선( 朝 鮮 ) 건주여진( 建 州 女 眞 ) 동해여진( 東 海 女 眞 ) 해서여진( 海 西 女 眞 ) 류큐[ 流 球 ] 등을 꼽을 수 있다. 실제로 이들 모두는 명이 주도 하던 책봉 조공체제에 직접 연관되어 있었다. 다만, 여기에 조선이 독 자적으로 관계를 맺었던 쓰시마와 서부 일본의 반독립적 다이묘들도 포함할 수 있다. 그들이 비록 명의 북경과는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못 했지만, 서울을 통해 북경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에 느슨하게나마 연 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에 열거한 지역이나 정치 세력들 모두는 북경과 서울을 축으로 한 동질의 국제질서에 들어와 있었다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이를 관계적 권역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인지적 범위. 이는 관계적 범위에 속하는 국가들이 하위구조 차원 의 관계를 맺고 있던 국가나 세력들을 가리키되, 조선 조정에서 어떤 정치외교의 목적으로 예의주시하던 대상 국가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를테면 타타르를 포함한 몽골의 여러 부족들과 베트남(다이 비엣)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전자는 비록 조선과는 직접 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명과는 다양한 관계를 맺었으며, 조선 조정은 이들과 명의 관계와 그 변화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후자의 경우도 조선과 직 접 관계를 맺지는 않았으나, 가정제( 嘉 靖 帝 ) 때 있었던 명의 베트남(다 이비엣) 토벌 계획과 관련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베트남을 예의주시한 바 있다. 35 따라서 이들 국가나 세력들도 명과 조선을 중심으로 한 동 아시아 권역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다만, 비록 조선이 인지하던 국 가나 세력일지라도, 조선 조정에서 정치적 외교적 관심을 구체적으로 35 몽골에 대한 조선의 예의주시는 15세기에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계승 범(2006), 앞의 글. 명과 베트남의 관계에 대해서도 중종(1506~1544년)은 예 의주시했다. 이에 대해서는 계승범(2009),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푸른역사, 135~139쪽 참조.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263

264 보인 증거를 찾을 수 없는 경우에는 제외했다. 이들을 다 포함한다면, 그것은 이미 동아시아 범주를 넘어 전 세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 컨대, 이 기준에 따른다면 북경과 직접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몽골과 베트남은 비록 조선과는 한 번도 직접 교통한 바 없지만, 조선이 예의 주시하던 범주에 들어온다. 이런 경우를 인지적 권역으로 구분하고자 한다. 문화적 범위. 이는 말 그대로 문화적 기준으로, 대개 정치 경제권과 문화권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특히 북경의 명이 주도한 국제질서는 마침 한자 문화권과 상당히 일치한다. 유교화의 정도에는 지역마다 큰 차이를 보이지만, 유교사상을 담고 있는 한자문명권은 위에 제시한 관 계적 범위를 넘어 확대된다. 한자 문화 외에 책봉 조공체제와 율령 등 다른 요인을 추가하여 문화를 강조한 니시지마 사다오의 문명권 설정 은 36 이런 면에서 매우 설득력이 있다. 다만, 인지적 범위의 경우에, 베트남이 한자 문화권에 포함되는 것은 이를 나위도 없지만, 몽골은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래도 문자 시스템을 기준으로 문명권을 나누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우며, 특히 몽골이 북경과 주고받은 모든 문서가 대개 한문으로 작성된 점은 몽골 또한 이 권역에 들어와 있었 음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요컨대 명 및 조선과 정치적 문화적 공감대를 가진 지역, 다른 말 로 위에서 제시한 세 개의 기준을 모두 충족시킨다면, 37 일단 동아시 36 西 嶋 定 生 (1983), 앞의 책, 399~400쪽. 37 문명권을 설정하는 데에 있어서 경제적 범위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만 銀 의 유통이라는 차원에서 동아시아 권역을 보자면, 그것은 16세기에 이미 동아시아 를 넘어 세계체제 로 확대될 수밖에 없기에 오히려 무의미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제외했다. 26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65 아 권역 에 포함시켜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히데요시의 성장과 누르하치의 성장 및 명질서( 明 秩 序 )에 대한 그들의 도전은 바로 이런 권역 내에서의 국제분쟁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위 에서 제시한 동아시아 권역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임진전쟁(임진왜란, 1592~1598년)과 병자호란(1636~1637년)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그러 한 분쟁의 한복판 무대가 모두 바로 조선(한반도)이었던 점, 다른 말로 북경의 권위에 대한 히데요시의 도전이나 누르하치의 도전 모두 그 시 험무대가 조선이었던 사실은 당시(15~17세기 초)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논할 때 조선의 역할과 위상에 보다 많은 주목을 해야 할 이유를 잘 보여준다 조명관계 관련 용어의 의미 분석 그렇다면 이런 명질서에서 조선의 위상은 어떠했으며, 조명관계는 피차 어떤 식으로 설정되고 이해되었을까? 이 소절에서는 용어의 의미 분석을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하고자 한다. 외교 관련 용어에는 이미 그 관계의 핵심이자 본질이 함축되어 들어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내속( 來 屬 )과 기미( 羈 縻 )라는 용어에서 시작하여 속국( 屬 國 )ㆍ번국 ( 藩 國 )ㆍ외국( 外 國 )ㆍ내복( 內 服 )ㆍ중외( 中 外 )ㆍ배신( 陪 臣 ) 등 조명관계에서 38 보다 상세한 논의는 계승범(2007), 임진왜란과 누르하치, 정두희 이경순 편,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 휴머니스트; 계승범(2008a), 조선 특사의 후 금 파견과 명질서의 균열, 한중관계 2000년:동행과 공유의 역사, 소나무 참조.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265

266 많이 쓰인 표현들의 용례와 의미를 두루 살펴 볼 것이다. 내속은 말 그대로 와서 속한다 는 뜻의 술어( 述 語 )로, 어떤 특정 전 문용어라기보다는 대개 일반적인 표현으로 사용된다. 그 용례의 대강 을 파악하기 위해 편의상 조선왕조실록 에서 원문 검색을 해 보면, 100개에 못 미치는 전체 사례의 반 이상이 세종실록지리지 에 집중되 어 나타나는 현상을 읽을 수 있다. 곧, 조선 초기에 대대적으로 이루 어진 속현 혁파와 같은 군현의 획정과 관련하여 많이 사용되었다. 나 머지 사례들도 대개 내속이라는 표현이 담고 있는 일반적인 의미 그대 로 쓰였다. 39 대외관계와 관련하여 사용된 경우는 보이지 않는데, 그렇 다고 해서 조선이 명에 내속하지 않았다고 풀이할 수는 없다. 왜냐하 면 내속의 결과인 속국이라는 용례는 매우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 런데 중국 왕조에서는 외국을 내속시키다 는 의미로 기미라는 표현을 널리 사용했고, 이런 현상은 조선도 마찬가지여서 실록에서 기미를 검 색하면 그 결과가 매우 많이 나온다. 이렇듯 기미와 내속은 그 의미 상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기미의 용례를 통해 내속의 용례 를 유추해도 논리적으로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주지하듯이, 기미 라는 단어는 말의 굴레를 뜻하는 기( 羈 ) 와 소의 고삐를 뜻하는 미( 縻 ) 의 합성어인데, 기미의 대상은 대개 외이( 外 夷 ) 나 이적( 夷 狄 ) 이며, 그 의미는 칭신( 稱 臣 ) 해 오는 외국의 군주에게는 조공을 허용하여 관계 자체를 끊지는 않되 중국 쪽에서 더 이상의 적 39 두어 개 예를 들면, 宣 祖 實 錄 卷 60, 28 年 2 月 20 日 癸 亥, 熙 緖 曰 當 今 所 陳 非 一 二 事 也 以 南 方 之 事 言 之 自 其 處 來 者 咽 塞 不 能 言 自 賊 中 誘 引 而 出 者 左 道 則 來 屬 金 太 虛 而 無 糧 不 能 食 之 右 道 則 來 屬 金 應 瑞 亦 無 糧 不 能 食 之 ; 仁 祖 實 錄 42 卷 19 年 1 月 2 日 戊 寅, 戊 寅 / 時 以 逃 還 者 刷 送 人 心 洶 擾 上 下 敎 于 八 道 以 諭 之 曰 向 化 人 等 自 當 還 歸 故 國 不 厭 刷 送 而 亦 由 累 代 來 屬 昏 嫁 我 民 子 支 相 混 親 黨 相 雜. 26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67 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는 정책을 말한다. 이런 의미의 기미정책은 한 대( 漢 代 )부터 활성화되었으며, 당대( 唐 代 )에 기미주( 羈 縻 州 )를 통해 좀 더 강화된 형태로 널리 채택되었고, 명대( 明 代 )에도 정책으로서의 기조 를 유지했다. 40 즉 기미 란 중국 주변의 세력들을 군사적으로나 외교적 으로 견제하되, 일정한 평화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이 중국 변경을 침범하지 않도록 무마하는 외교 정책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주변국들 을 힘으로만 누를 것이 아니라 조공과 무역을 제한된 범위 안에서나 마 허락하여 그들의 욕구를 채워줌으로써 천자( 天 子 )의 질서 를 평화 적으로 (또는 가장 경제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외교 전략이 바로 기미정 책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내속의 의미를 함유하고 있는 기미는 그 대상이 어디까지나 이적( 夷 狄 ), 곧 중국이 아닌 외국이었다. 중국 것을 많이 모방하여 동아시아에서 소중화( 小 中 華 )로 인정받던 조선은 41 중국의 기미정책도 그대로 수용하여 중국을 제외한 주변 국 가들에게 적용했다. 조선이 건국 당시부터 추구한 사대교린( 事 大 交 隣 ) 정책에서 교린 은 비록 대등한 두 주체의 관계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 는 하지만, 실제로는 기미정책의 변형이었다. 42 변경을 소요하도록 하 는 여진이나 왜를 상대로 무력 정벌을 단행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소 요를 일으키는 근본 문제인 경제적 욕구를 어느 정도 채워 주기 위해 40 Lien-sheng Yang(1968), Historical Notes on the Chinese World Order, in John K. Fairbank, ed.(1968), The Chinese World Order: Traditional China s Foreign Relation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김한규 (1988), 한대의 천하사상과 羈 縻 之 義, 中 國 의 천하사상, 민음사. 한편, 기 미와 관련하여 가장 널리 인용되는 구절인 羈 縻 不 絶 而 已 後 漢 書 卷 25는 기미의 의미를 잘 함축하여 보여준다. 41 계승범(2006), 앞의 글. 42 관련 연구는 손승철(2006), 조선시대 한일관계사 연구:교린관계의 허와 실, 경인문화사, 41~76쪽 참조.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267

268 개시( 開 市 )를 설치하여 무역을 허락한다거나 상경( 上 京 )을 허락하여 직 첩( 職 牒 )과 녹봉( 祿 俸 )을 수여하는 등, 중국의 기미보다 오히려 더 적 극적으로 왜와 여진을 대했다. 한당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조선에서 도 기미는 평화적 관계 유지의 의미로 널리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실 제로 조선시대를 통틀어 기미 라는 단어는 싸우지 않고 평화 관계를 유지함 또는 강화 의 의미로 두루 사용되었다. 43 따라서 조선이 이해 하고 실제로 수용한 기미정책도 그 대상은 조선 영토 안의 사람들이 아니라 바깥의 어떤 존재, 곧 외국이나 외국인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내속( 來 屬 )의 일반적 의미는 와서 속하는 모든 행위를 망라 하는데, 속( 屬 )이 국내의 지방 행정과 관련하여 쓰일 때에는 소속의 변화와 같이 매우 강력한 의미로 쓰였지만, 외교 용어로 쓰일 때에는 그 속( 屬 )의 의미가 주체의 상실이나 정치적 병합의 의미로는 쓰이지 않았으며, 단지 스스로 와서 칭신( 稱 臣 )을 할(조공을 낼) 경우에 그 모 든 다양한 사례들을 망라하여 내속이라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내속한 자 또는 국가들을 내복( 內 服 )과 외복( 外 服 ), 내번( 內 藩 )과 외번 ( 外 藩 ) 등으로 다시 세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며, 오복( 五 服 )이라는 관념적 질서를 만들어 차별화할 필요도 있었던 것이다. 결국 조선이 명에게 내속했다 는 말은 성립할 수 있어도, 그것이 곧 조선이 명의 일부분이 되었다는 의미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속국( 屬 國 )과 번병( 藩 屛 )의 의미를 살펴보자. 내속에 는 자발적으로 왔음이 강조된 반면에, 속국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 43 朝 鮮 王 朝 實 錄 에서 사례를 무수히 찾을 수 있는데, 예를 몇 개 제시하면 다 음과 같다. 世 宗 實 錄 卷 88, 22 年 1 月 10 日 癸 丑 ; 燕 山 君 日 記 卷 28, 3 年 11 月 2 日 己 亥 ; 光 海 君 日 記 卷 147, 11 年 12 月 22 日 辛 未, 29 日 戊 寅 ; 仁 祖 實 錄 卷 16, 5 年 4 月 1 日 丁 酉 등. 26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69 다. 군사 작전을 통한 강제성에 의해 속국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속했다는 것은 곧 조공을 바치러 왔다는 뜻인데, 전근대 동 아시아 국제무대에서 조공을 바치는 나라는 대개 그 반대급부로 책봉 을 받았으며, 책봉을 해 준 나라의 속( 屬 )이나 번( 藩 )으로 불렸다. 명 이나 청에서는 물론이고 조선에서도 스스로 조선을 가리켜 번속이나 번국으로 부른 것은 그 좋은 예이다. 이 밖에도 외번 번병 번속 등이 조선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외번과 번병이 대개 번국의 의미 와 같은 것이라면, 번속은 번국과 속국을 합쳐 부른 용어일 것이다. 이런 용어들은 모두 조선이 국제무대에서 명이나 청과 맺었던 관계가 대등하지 못했음과 중국의 왕조(책봉국)를 중심으로 짜인 국제질서에 하부단위로 참여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선이 명이나 청에게 정치적 영토적 주권을 상실했음을 뜻하지는 않 는다. 명나라 사람과 조선 사람 모두 조선을 외국( 外 國 )으로 인식한 44 사실은 그 좋은 예이다. 한편, 18세기에 편찬된 명사( 明 史 ) 에서 조선을 외국 으로 분류한 것과는 달리, 1920년대에 일단락 된 청사고( 淸 史 稿 ) 에서는 조선을 속 국 으로 분류했다. 45 그렇지만 1920년대 당시에는 중화민국의 지식인들 이 이미 서양의 만국공법( 萬 國 公 法 )에 대하여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만국공법의 vassal state 를 기존에 이미 널리 쓰이던 속국이라는 말 44 실록에서 찾을 수 있는 사례들은 매우 많은데, 그 가운데 일부를 전거로 제 시하면 다음과 같다. 中 宗 實 錄 24 年, 10 月 18 日 庚 唇, 26 日 戊 子, 27 日 己 丑, 37 年 11 月 24 日 庚 午 ; 肅 宗 實 錄 卷 35, 27 年 3 月 29 日 丙 唇 ; 景 宗 修 正 實 錄 卷 3, 2 年 3 月 26 日 辛 亥 ; 英 祖 實 錄 卷 1, 卽 位 年 9 月 1 日 辛 丑 등. 45 이에 대해서는 최소자(2005), 淸 과 朝 鮮 :근대 동아시아의 상호 인식, 혜안, 180~183쪽 참조.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269

270 로 번역하고 이해한 결과였을 뿐이다. 46 다른 말로, 이전부터 널리 쓰 이던 전통적 개념의 속국이라는 용어의 개념을 아편전쟁 이후 만국공 법 개념이 널리 유통됨에 따라, 또한 1882년 이후 실제로 조선의 내 정에 노골적으로 개입함에 따라 서양 개념의 vassal state 로 자의적으 로 재해석하여 사용한 결과였던 것이다. 오히려 18세기에 편찬된 명 사( 名 史 ) 에 조선이 외국으로 분류된 이유는 당시 청나라가 조선을 외 국으로 보고 있었다는 반증이 되며, 1920년대에 급조된 청사고( 淸 史 稿 ) 에 조선이 속국으로 분류된 것은 당시 중화민국이 과거의 조선을 그렇게 이해했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만국공법 이전 전근대 동아시 아 국제무대에서 쓰이던 속국의 의미가 서양의 근대 개념으로서의 vassal state 와 같다고는 결코 볼 수 없다. 실제로 개항(1876년) 이전 의 청나라 사람들은 조선을 외국으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번역 상의 문제, 특히 영어의 한역( 漢 譯 ) 문제로 인하여, 속국 의 뜻을 파악하는 데에 영어 용어를 참고하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 다. 속국을 가리키는 용어로 영어권 학계에서 널리 쓰이는 것으로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tributary state 이고 다른 하나는 vassal state 이다. Tributary state 가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쓰이던 속국의 의 미를 조공을 바치는 나라로 이해하여 그에 맞게 의역한 결과라면, vassal state 는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쓰이던 속국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문자적으로 직역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전근대 동아시아에 대한 이해가 그다지 높지 않았던 이전 시 46 개항 이후 청의 내정 간섭 시기에 속국 의 개념과 관련하여 외교적으로 문제 가 된 조공과 책봉의 성격에 대한 연구사 정리로는 구선희(2009), 근대 한중 관계사의 연구경향과 쟁점 분석, 한중일 학계의 한중관계사 연구와 쟁점, 동북아역사재단, 187~234쪽 참조. 27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71 기로 올라갈수록 vassal state 라는 표현이 대세였으나, 지금은 tributary state 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서양의 vassal state 의 경우, sovereign state (주권국, 전근대 동아시 아라면 책봉국)는 vassal state 에 대하여 정치적 군사적 강압에 의한 간섭을 하되, vassal state 로부터는 주로 경제적 이득을 취해 간다. 그러므로 비록 문자적로는 vassal state 를 속국 으로 볼 수 있겠지만, 내용 상으로 보면 동아시아 문명권의 속국 과는 그 의미가 크게 다르 다. 특히 중국의 왕조가 책봉 조공체제를 유지한 1차 목적이 조공국으 로부터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 위함은 아니었으므로, 역사 전문용어인 속국을 vassal state 라고 직역하는 것은 올바른 이해라 할 수 없다. 한편, tributary state 는 말 그대로 tribute(조공) 을 바치는 나라라 는 뜻으로 조공국을 뜻한다. 그런데 조공국 은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 무대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용어로, 구미 학자들이 속국의 의미를 충 분히 이해하면서 헤로도토스(Herodotus)의 역사(The Histories) 에서 차용하여 만들어낸 학술용어인 셈이다. 어쨌든,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는 이 조공의 반대급부가 대개의 경우 책봉이었므로, 조공과 책봉이 제대로 유지되는 한, 책봉국은 조공국의 내정에 굳이 간섭할 필요가 없었다. 명청시대에서도 이런 나라들은 모두 외국으로 분류했다. 전략 적 차원에서 중원의 울타리가 되는 번국, 곧 변경 지대에 위치한 외 국인 셈이다. 따라서 조공국의 국제적 위상은 서양의 관점으로 보면 이해하기 힘 들다. 이런 점이 바로 서구 학자들이 예전에는 동아시아의 번국과 속 국에 해당되는 영어 단어를 vassal state 로 이해하고 실제로 그렇게 번역하여 사용하다가, 점차 tributary state 라는 말로 바꾸게 된 까닭 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현대 국제사회에서도 수시로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271

272 일어나는 내정간섭을 기준으로 삼아 어떤 나라가 주권국인지 주권국 이 아닌지 판단하고자 했던 기존의 연구 태도는 지나치게 평면적인 양단논리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47 요컨대, 서양 학자들의 눈으로 보 기에도 중국의 역사기록에 보이는 속국이나 번국을 각기 독자적 권력 체계와 영토주권을 갖춘 외국, 곧 주권국으로 보지 않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이른바 명질서 가 절정에 달했던 16세기에 조선과 명의 관계 에 어떤 변화가 일었음을 시사해 주는 새로운 표현들이 등장하기 시 작했는데, 그 한 가지 예로 내복( 內 服 ) 을 꼽을 수 있다. 조명관계와 관련하여 내복 이라는 용어의 용례를 조선왕조실록 에서 원문 검색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명 조정에서 조선이 명의 내복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인지하면서도 조선을 내복과 비슷한 처지의 나라로 인정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은 16세기 전반 가정제(1521~1566년) 와 중종(1506~1544년) 사이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중종 이전에는 사 례가 발견되지 않으며, 중종 이후로 빈번히 등장한다. 48 이 점은 16세 기 전반 중종대에 조명관계 내지는 조명 상호인식에 있어서 어떤 변 화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시사점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주지하듯이 내복은 외복의 상대 개념으로, 중국 왕조의 통 치력이 직접 미치는 지역, 곧 중국의 경계 안에 포함되어 있는 지역을 47 계승범(2009a), 조선시대 동아시아 질서와 한중관계:쟁점별 분석과 이해, 한중일 학계의 한중관계사 연구와 쟁점, 동북아역사재단, 135~139쪽. 48 계승범(2006), 앞의 글. 물론 실록 이외의 자료에서 내복 의 15세기 용례가 발견될 소지는 알마든지 있다. 그럴지라도, 16세기 전반 중종 대가 내복 의 용례와 관련하여 중요한 전환점이었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실록의 기사는 어는 개인의 의식 차원 문제가 아니라, 일상적인 어전회의의 내용을 비롯하여 지극히 종합적인 일들을 모아놓은 자료이기 때문이다. 27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73 말한다. 따라서 조선이 만일 명의 내복이라면, 이는 조선의 정치적 영 토적 주권의 상실로 이해될 수도 있다. 물론 16세기 전반 명과 조선에 서 조선을 명의 내복으로 간주한 것은 내복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하 게 대우한다 는 의미였지만, 이런 새로운 대우 만으로도 기존의 조명관 계에 무엇인가 변화가 일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예로는 손색이 없다. 명질서 에서 조선이 갖는 위상의 해석을 놓고 허다한 논쟁이 중종대 조정에서 집중적으로 벌어진 점 49 도 이때 조명관계와 관련하여 무엇인 가 변화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음을 강하게 시사해 준다. 실제로 조선의 중종은 명의 가정제로부터 내복으로 대우를 받아, 명 내부 지역의 장관들을 상대로 반포되는 조고( 詔 誥 )의 대상에 포함 되기에 이르렀다. 50 중종은 이런 조치를 크게 환영한 반면에, 조정 신 료들은 폐습이 될 것이라 하여 대개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는데, 사대 의 정성을 지극히 해야 한다는 중종의 뜻을 꺾을 마땅한 길이 없어 대체로 논의의 흐름은 중종이 주도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결과적 으로 중종대에는 명 황실 내부의 시시콜콜한 일까지도 공식 절차를 밟아 조선에 통보되는 바람에, 특별 진하사나 진위사 파견 여부를 놓 49 구도영(2006), 중종대 사대인식의 변화- 大 禮 議 에 대한 別 行 파견 논의 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62, 한국역사연구회;Seung-beom, Kye(2010), Huddling under the Imperial Umbrella:A Korean Approach to Ming China in the Early 1500s, Journal of Korean Studies, Vol. 15, No. 1, Society for Korean Srudies. 50 中 宗 實 錄 36 年, 10 月 7 日 己 未, 下 于 政 院 曰 前 者 龔 用 卿 奏 聞 中 朝 請 以 朝 鮮 依 內 服 例 凡 有 詔 告 天 下 之 事 皆 通 諭 故 今 者 加 上 尊 諡 及 昭 聖 皇 后 遺 誥 自 遼 東 謄 黃 送 來 其 遺 誥 中 有 中 外 臣 民 之 家 不 去 音 樂 宗 室 諸 王 各 免 赴 喪 但 遣 人 進 香 云 以 此 觀 之 則 外 國 可 以 進 香. 이 점은 중종대까지의 조명관계를 약 술한 朝 鮮 圖 說 에서도 확인된다. 鄭 開 陽 雜 著 5:7b, 南 京 : 國 學 圖 書 館 陶 風 樓, 1932, 國 主 嗣 立 則 使 者 往 封 有 大 事 則 頒 詔 於 其 國 他 彛 不 敢 望 也.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273

274 고 벌어진 논쟁이 거의 그칠 날이 없을 정도였다. 51 이런 상황은 급기야 명 황제가 조칙을 반포할 때 상투적으로 쓰는 천하와 중외에 알린다 는 표현에서 천하 와 중외 에 외국인 조선도 포 함되는지 여부에 대한 논쟁으로까지 비화되기에 이르렀다. 명에서 말 하는 중외에 조선이 포함되는지 여부는 당시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조선이 갖는 위치와 조명관계의 실상에 대해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신료들 대개 포함되지 않는다는 해석을 견지한 반면, 중종은 포함된다 는 입장을 취했다. 이에 따라 그 유권해석을 명의 예부에 문의하기에 이르렀는데, 사행사가 북경에서 예부에, 어제 聖 旨 에서 중외에 칙서를 내리라 고 했는데, 본국에도 칙서를 내리는가, 아닌가? 라고 문의했을 때 예부에서는, 이른바 중외란 외국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니, 너희 나라에는 칙서 를 내리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여 중외에 조선, 곧 외국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유권해석을 받 았다. 52 이는 당시 명에서 내복의 예에 따라 모든 조칙을 조선에도 전 하게 하였을지라도 그 자체가 매우 예외적인 조치였고 조선을 외국으 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51 계승범(2009), 앞의 책, 123~139쪽. 52 中 宗 實 錄 37 年, 11 月 24 日 庚 午, 書 狀 臣 等 問 曰 昨 聖 旨 降 勑 中 外 於 本 國 亦 降 勑 否 ( 禮 部 ) 答 曰 所 云 中 外 者 非 指 外 國 也 爾 國 則 不 應 降 勑 云. 27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75 그런데 문제는 조선의 태도였다. 그런 당연한 사안을 굳이 북경에까 지 가지고 가서 예부에 유권해석을 품의할 정도로 당시 조선 지배엘리 트들의 대명관은 보다 의존적인 방향으로 바뀌고 있었고, 이러한 추세 는 16세기가 무르익으면서 좀 더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 다. 임진전쟁 때 명의 군사 개입을 계기로 형성된 재조지은( 再 造 之 恩 ) 이데올로기가 그렇게 급속하게 조선 지배엘리트 사이에 번질 수 있었 던 데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강하게 작동했기 때문이다. 청 황제를 상대로 거의 사용하지 않은 배신( 陪 臣 )이라는 표현을, 명 황제를 상대 로는 일상적으로 사용한 점이나 53 비변사 당상관들이 국왕(광해군)에게, 전하에게 得 罪 할지언정 天 朝 에는 득죄할 수 없다 54 는 말까지 대놓고 하고, 또한 그런 발언으로 인해 어떤 처벌도 받지 않은 사실 등은 16세기 이후 조선의 엘리트들이 공유했던 대명관의 실상, 더 나아가 그들의 세계관(천하관)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 다. 천자(명의 황제)가 지배하는 사해( 四 海 )의 한 신민인 조선 사대부가 충( 忠 )을 실천해야 할 최종 대상은 조선 안에서는 국왕이었지만, 세계 무대에서는 보다 상위의 권위인 천자 였던 것이다. 천자의 책봉을 받 은 제후를 섬기는 신하는 천자의 신하이기도 하다는 의미를 지닌 배 신이라는 용어가 조명시대에 널리 사용된 점은 이른바 중국적 질서 53 계승범(2009b), 조선후기 중화론의 이면과 그 유산 -명ㆍ청 관련 호칭의 변화 를 중심으로, 韓 國 史 學 史 學 報 光 海 窘 日 記 ( 重 鈔 本 ) 卷 129, 10 年 6 月 20 日 丁 丑, 備 邊 司 諸 堂 上 啓 曰 與 其 得 罪 於 天 朝 寧 得 罪 於 聖 明 而 終 不 能 力 辨 極 陳 使 君 臣 上 下 俱 被 莫 大 詬 責.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275

276 안에서 엄존하던 이런 보편적 위계질서를 잘 보여준다. 요컨대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조선은 분명히 명의 외국이 었으며, 외국으로서 명에 내속 하여 명질서의 핵심 일원으로 적극 참 여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15세기 100년을 지나 너무나 튼튼하게 오래 지속되다 보니, 조선의 지배엘리트들 사이에서는 명이 더 이상 이웃의 한 대국( 大 國 )이 아니라 유일한 상국( 上 國 ) 곧 천자국( 天 子 國 ) 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조명관계를 기존의 군신관계를 넘어 부자관계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55 군신관계는 정치 상황에 따라 가변적인 가치인데, 중원의 왕조( 天 子 ) 교체를 천명( 天 命 )이 바뀌 었다는 논리로써 얼마든지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 면에, 부자관계는 모든 상황논리를 초월하는 영원불변의 절대적 가치 였기에, 일단 군부( 君 父 ) 신자( 臣 子 )관계가 한 번 설정되면 어떤 상황 논리를 대더라도 그 관계를 청산하는 것이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었 다. 이 점이 바로 조선의 지배엘리트들이 명청 교체를 하나의 왕조 교체 내지는 천명의 교체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문명 자체의 붕 괴, 곧 천자의 소멸 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원인이었던 것 이다. 55 계승범(2006), 앞의 글. 27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77 3. 명질서의 성쇠와 조선의 역할 그렇다면 조선에게 명질서란 무엇이었나? 명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 존재였나? 명에게 조선은 무엇이었나? 그리고 얼마나 중요한 외국이었 나? 종래의 조명관계 연구는 대개 두 나라 사이의 외교 현안이나 상 호인식 등에 초점을 맞춘 결과, 세부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1차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었으나, 조명관계가 당시 동아시아 전체 국제 지형 을 어떻게 만들어 나갔는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중앙아시아나 동남 아시아의 상황과는 무엇이 유사하고 무엇이 다른지 등에 대한 거시적 이고 담론적인 문제의식으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제한된 시각에 머 무는 경향이 강했다. 그런데 명나라를 대하던 조선의 당국자들은 명 과 조선의 관계에만 집중하지 않았다. 그들은 명과 여진, 명과 베트 남, 명과 몽골과의 관계도 항상 예의 주시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구도 위에서 대명사대정책을 추진했다. 역사 연구의 대상이 되는 당사자들 조차도 이렇게 동아시아 국제질서라는 전체 틀 속에서 생각하고 행동 했는데 그것을 연구하는 현대 학자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연구의 방법과 시각에 큰 문제를 노정한다. 이 절에서는 조명관계가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작동했는지에 대하여 거시관점에 서 고찰하고자 한다. 명질서가 200년이 넘도록 동아시아 권역에서 튼튼하게 유지된 데에 는 조선의 호응과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두 손이 호응을 해야 손뼉을 칠 수 있듯이, 조선의 호응이 없는 명질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뜻 이다. 또한 천자의 은덕 이 직접 미치기 어려운 지역에 대한 교화 는 천자의 책봉을 받은 조선의 왕이 독자적으로 담당했다. 쓰시마를 포 함하여 일본 열도의 중서부에서 반독립적 지위를 유지하던 다이묘[ 大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277

278 名 ]들과 만주 일대에 퍼져 있던 여진족 추장들을 상대로 한 조선의 정책은 조선질서( 朝 鮮 秩 序 ) 라고 불릴만한 미니(mini) 책봉 조공관계가 명질서라는 전체 틀 안에 하위구조로 병존했음을 잘 보여준다. 56 이렇듯 공고하게 구축된 명질서, 곧 동아시아 질서에서 2인자의 위 치를 점하던 조선으로서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명질서를 즐기는 데에 더욱 익숙해졌으며, 따라서 명청 교체기를 맞아 명질서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최대한 경주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동기가 절실했다. 이 또한 명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조선의 중요성이 구조적으로 지대했음을 뜻한다. 그런데 당시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조선이 갖고 있던 이러한 지정학적 위상은 마치 동전의 앞뒤와도 같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 왜냐하면 조선의 태도 여하에 따라 동아시아의 명질서는 튼튼하게 유 지될 수도 있고, 균열을 일으킬 수도 있는 가능성을 동시에 안고 있었 기 때문이다. 이 점은 국제무대에서 명과 조선의 공조가 절정을 이루었던 임진전 쟁과 그 공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요동전쟁(1618~1622년)의 Kenneth R. Robinson(2000), Centering the King of Chosŏn:Aspects of Korean Maritime Diplomacy, 1392~1592, Journal of Asian Studies, Vol. 59, No. 1, pp. 109~ 요동전쟁 이란 1618~1622년까지 전개된 후금의 요동 장악 과정을 한 시기로 묶기 위해 필자가 만든 용어이다. 후금의 요동 장악은 동아시아 정세 변화에 결정적인 계 기가 되지만, 아직까지 이 전쟁 과정을 특별히 가리키는 용어가 없어 불편했다. 대개 入 關 前 이라는 큰 시기에 포함시키거나, 또는 명 조선의 후금 원정이 참패로 끝나 는 사르후[ 薩 爾 滸 ] 전투(1619년)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요동을 둘러 싼 전쟁이 5년간 지속된 점, 이 기간 중에 벌어진 숱한 전투들 가운데 하나인 사르 후 전투가 이 5년간의 시기를 총괄하여 대표할 수 없는 점, 1623년부터 후금이 잠 시 팽창을 멈춘 점, 이후의 전투는 대개 요서 지역에서 벌어진 점 등을 고려할 때, 17세기 전반 후금의 요동 장악이 갖는 지정학적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이 과정을 요동전쟁 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조선 입장에서 보아도, 광해 군대를 수놓은 치열한 외교노선 논쟁은 바로 이 요동전쟁 기간 동안에 집중된다. 27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79 성격을 조선의 입장을 중시하되 동아시아 차원에서 비교할 때 잘 드러 난다. 두 전쟁 모두 주변국이 중앙(center) 인 명을 상대로 벌인 전쟁 이었지만, 그 전쟁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던 조선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둘은 완전히 다른 성격의 전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 유는 먼저 조선이 처한 지정학적 요인에 기인한다. 우선 지리적으로 볼 때 일본이 명을 치기 위해서는 조선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데 비해, 후금의 경우에는 반드시 그럴 필요가 없다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이다. 이는 전쟁 상황에 처하여 조선 조정이 취할 대외정책이 서로 다르게 나타날 수 있음을 뜻한다. 조선을 침입한 일 본을 상대로 조선이 취할 선택의 폭은 매우 좁았는데, 엄밀히 말하면 명과의 군사동맹을 강화하여 일본에 대항하여 싸우는 길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따라서 비록 도중에 일본과의 평화협상 여부 및 그 내용을 놓고 조정 신료들 사이에 일부 의견 차이가 드러나기는 했지만, 국론의 분열에까지 이르는 수준은 전혀 아니었다. 반면에, 후 금은 상황에 따라서는 조선을 침입하지 않고도 곧장 중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후금을 상대로 조선 조정이 행사할 수 있는 외교 카드는 선택의 폭이 이전에 비해 훨씬 넓어졌고, 그만큼 조 정의 의견도 분분하여 논쟁으로 발전될 소지가 다분했다. 이런 사정 은 조선의 태도 여하가 기존의 동아시아 질서의 존속 여부에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다음으로 정치적ㆍ외교적으로 보아도 두 전쟁은 성격이 매우 달랐다. 임진전쟁의 경우, 조선은 명과 거의 모든 면에서 시종일관 공조를 취 하는 형국이었다. 평화협상 과정 및 전투에 임하는 태도에 있어서 두 나라 사이에 차이는 있었지만, 그러한 차이가 두 나라의 긴밀한 공조 를 위협할 정도는 전혀 아니었다. 일본이 명과 조선의 공동의 적이라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279

280 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한 전쟁이었으므로, 조선의 대일본 태도에 있어 서 의견이 분분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반면에, 후금은 조선의 태도 여하에 따라 명과 조선의 공동의 적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달랐다. 따라서 굳이 명을 위해 후금을 적으로 삼을 필요 가 없다는 논의가 조선 조정에서 제기될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 듯 조선이 명과의 공조에서 벗어나 후금을 상대로 독자적인 정책을 펼 수도 있는 상황이 도래한 사실은 이미 그 자체로 명과 조선을 축으로 한 동북아 국제질서에 변화를 불러온다는 데에 그 중요성이 있다. 또 한 이러한 상황은 조선의 지배엘리트들이 조명관계의 이념적 속성과 현실적 특성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후금에 대하여 광해군이 취한 우호적 태도는 후금의 흥기로 인해 종래의 명과 조선의 공조체계가 어떻게 삐걱거리게 되었는지, 또 한 그로 인해 동아시아 질서에 어떻게 금이 가기 시작했는지 잘 보여 준다. 명이 동북아의 명질서 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조선의 역할은 지 대했다. 명의 입장에서 볼 때, 조선과 정치적 문화적으로 밀착함으로 써 조선의 중원 침공 가능성을 원천 봉쇄한다는 이점이 있었다. 이 외에도 자타가 소중화로 인정하는 조선이 한반도에 위치함으로써 남쪽 으로는 일본을 견제할 수 있었으며, 임진전쟁 때 잘 드러났듯이 적어 도 일본의 중원 침공을 미리 막을 수 있는 완충지대(한반도)를 명의 영향권 내에 둘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북쪽으로는 만주 일대에 흩어 져 있는 허다한 여진 부족들을 서쪽과 남쪽에서 동시에 제어하는 효 과를 누릴 수 있었다. 실제로 15세기 후반에 명이 건주여진( 建 州 女 眞 ) 을 치면서 조선에 몇 차례 공동 군사작전을 제의해 온 사실 58 은 명 58 계승범(2009), 앞의 책, 101~113쪽. 28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81 입장에서 볼 때 동북아에서 조선이 갖는 지정학적 중요성을 잘 보여 준다. 따라서 그런 조선이 일본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명이 군 사적으로 개입한 것은 매우 당연했다. 반면에 그런 조선의 국왕(광해 군)이 후금과 직접 대화를 시도했다는 점은 명과 조선을 축으로 한 동 아시아의 명질서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며, 앞으로 조선의 대후금( 對 後 金 ) 태도에 따라 국제질서의 지각변동이 일어날 수도 있음 을 가시적으로 잘 보여준다. 그런데 조선의 국내 정세와 사상조류는 광해군의 정책을 받아들이 기에는 너무 경직되어 있었다. 실제로 광해군의 대후금 정책을 지지한 조정 신료와 재야 지식인들은 거의 없었다. 광해군의 정책(이중외교)이 당시 조선 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이유는 광해군의 정책이 중 립외교 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이유와 같다. 군부(명)와 이적( 夷 狄, 후금)이 서로 싸우는 와중에서 신자(조선)가 군부의 도움 요청을 거절하고 이적과 대화를 추진하는 것 자체가 당시 조정 신료들과 양 반엘리트들의 눈에는 단순한 중립 이 아니라 패륜 으로 받아들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계해정변(인조반정) 직후에 반포된 반정 교서에 의하면, 광해군 축출의 최대 명분(정당성) 중 하나가 바로 광해 군의 배명[ 背 明, 친후금( 親 後 金 )] 행위였다. 59 이 정변이 반정으로 인식되 는 한 그 반정의 명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조선후기 내내 배 명은 가장 사악한 패륜행위로 규정될 수밖에 없었고, 배명과 대척점에 59 계승범(2008b), 계해정변(인조반정)의 명분과 그 인식의 변화, 南 冥 學 硏 究 26,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한편 명과 후금 사이에서 광해군이 취한 정책 은 흔히 중립정책 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국제정세에서 조선의 중립 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점을 고려할 때, 광해군의 정책은 중립외교 가 아니라 이중외교 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 속성은 사실상 친후금정책에 가까웠다. 이에 대한 상세한 논증은 계승범(2009a), 앞의 글, 150~152쪽 참조.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281

282 있는 존명의리( 尊 明 義 理 )가 극단적으로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실들은 조명관계의 실상과 본질을 잘 보여준다. 요컨대 천륜 ( 天 倫 )인 부자관계라는 이념으로 맺어진 명과 조선은 동아시아 질서의 현상 유지를 위해 공조했으며, 후금(청)의 성장에 직면해서는 사실상 그 운명을 함께 했던 것이다. 조선에게 명은 단순히 이웃의 한 대국 ( 大 國 )이 아니라, 유일한 상국( 上 國 )이자 군부( 君 父 )였기 때문이며, 지정 학적으로도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이 두 나라의 이해관계는 거의 일 치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이해할 때, 청질서하에서도 조선이 명에 대 한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어 북벌( 北 伐 )이니 대보단 ( 大 報 壇 )이니 하는 존명의리( 尊 明 義 理 )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재생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IV. 맺음말 이 글에서는 동아시아라는 틀에서 조명관계의 실제와 성격을 고찰 하되, 특히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조선이 차지하던 위상의 본질을 조 명관계를 통해 설명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먼저 명과 조선이 함께 속해 있던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 전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 려는 일환으로, 구미 학계, 일본 학계, 국내 학계의 시각과 논점들을 비판적으로 정리ㆍ분석했다. 또한 조명관계의 실상을 보다 심층적으로 28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83 이해하기 위해 조명관계에 실제로 적용되던 국제외교 관련 용어들의 용례와 의미를 고찰했다. 아울러 당시 동아시아 질서에 대해 명을 중 심으로 조망하는 일방적 시각을 지양했다. 이른바 명질서 가 15~16세 기 200년간 별다른 문제 없이 작동할 수 있었던 본질적 구조와 그 질 서가 17세기에 들어서며 붕괴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흔히 알려진 후금 (청)의 흥기보다는 조선의 역할에 중점을 두어 설명했다. 구미 학계의 주류 담론으로는 중국적 질서(Chinese World Order) 와 한화( 漢 化, sinization) 이론을 꼽을 수 있으며, 일본은 동아시아세계 론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각기 근대의 문턱에서 열강들에 의해 폄하되던 중국 을 전근대 동아시아의 중심에 재배치함으로써, 제국주 의 시대에 서구 열강과 일본제국에 의해 무시되다시피 하던 중국 및 중국이 동아시아 문명사에 끼친 중요성을 복원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렇지만 기록에 보이는 책봉을 그대로 받아들여 시공을 초월해 전근대 2000년에 걸쳐 일반화했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실제로 시기와 지역에 따라 너무나도 다양했던 책봉 조공의 실제 의미를 무시한 채, 그 문자적 의미만으로 전근대 2000년을 망라해 일반화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 연구들이 다양하게 제시되었다. 그럼에도 기존의 설명 틀을 대체할 새로운 설명 틀은 여전히 산고를 겪고 있다. 반증을 찾기 는 쉬우나 새로운 틀을 제시하기에는 부족한 실정이 전근대 동아시아 를 보는 국내외 학계의 현주소라 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책봉 조공의 실제 운용과 성격이 문자적 인 의미에 가장 근접했던 사례가 조명관계라는 것이다. 명과 조선이 조공과 책봉을 서로 수용하고 긴밀하게 연합했던 1차적 이유는, 경제 적인 이유가 더 컸던 다른 시대나 지역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동기 때문이었다. 명이 조선의 국왕을 책봉한 동기가 경제적인 이유가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283

284 아니었듯이 조선의 동기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정치에서 명을 상대 로 한 외교 접촉이 매우 중요했던 이유는 거대 제국의 주변에서 국가 의 안위를 유지하는 가장 확실하고도 효율적인 방법이 바로 그것이었 기 때문이다. 형식적으로는 명과 조선이 엄격한 군신 부자관계로 맺어졌고, 또한 앞에서 내복( 內 服 )이나 배신( 陪 臣 ) 등 여러 용어들의 쓰임새 분석을 통 해 확인했듯이, 조선의 지배엘리트들 스스로도 대명관계를 그렇게 받 아들이고 중시했다. 따라서 조명관계를 양국의 관계 차원에서만 보면 명을 독립변수로, 조선을 종속변수로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동아시 아 국제질서라는 차원에서 보면, 조명관계는 결코 명이 일방적으로 형 성하고 주도한 관계가 아니었다. 마치 두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오히려 조선의 선택과 호응을 전제로 해야만 가능한 관계이며 질서였다. 이는 몽골의 위협에 늘 시달리던 명이 만주 일대의 여진과 일본을 견제하는 데 있어서 조선에 크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조선으로서 도 여진과 왜는 국가의 안위에 큰 불안 요인이었으므로 명과 이해관계 를 공유함으로써 동아시아의 질서를 공동으로 유지하고자 했기에 가 능한 결과였다. 여진과 왜가 강력한 통일세력을 구축하지 못하던 15~16세기에도 명과 조선은 거의 늘 공조체제를 유지했다. 여진에 대 해서는 공동 군사작전을 두 차례나 전개했으며, 북경과 직접 관계망을 형성할 수 없었던 일본 지역의 독립적 정치세력들에 대해서는 조선의 국왕이 스스로 중심 이 되어 그들을 조선식 책봉 조공체제로 흡수함 으로써, 그들을 느슨하게나마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끌어들였던 것이 다.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지리적 환경으로만 보아 도, 대륙에서 바다로 길게 튀어나온 한반도 조선은 중원의 명보다 훨 28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85 씬 더 중요했다고 볼 수 있다. 동아시아 질서의 이런 성격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에 걸쳐 일본과 만주에서 통일세력이 차례로 등장하면서 더욱 두드러졌다. 임진전쟁 (1592~1598년) 때 명이 군사 개입을 통해 조선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 던 이유나, 요동전쟁(1618~1622년)과 그 이후 지속된 후금(청)의 팽창 과정에서 명이 지속적으로 조선에 대해 군사적 외교적 공조체제를 유 지할 것을 절박하게 독촉한 이유도 모두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 다. 따라서 광해군이 펼쳤던 친후금정책 이야말로 이른바 명질서 의 성 쇠에 있어서 조선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좋은 예가 된 다. 다시 말해서 조선의 호응이 없는 명질서 는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15~17세기의 동아시아를 말할 때 단순히 명이나 후금(청)만 고려할 것이 아니라, 조선의 역할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시의 동아시아 권역을 정할 때에 명나라의 중요성만 고려할 것이 아 니라, 명과 조선이 공유하던 공간 이라는 기준을 새롭게 정해 설정할 필요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적어도 15~17세기 동아시아 질서를 논 할 때 조선을 주변화한 상태에서는 논제에 적절히 접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요컨대 이른바 명질서 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15~16세기 200년간 별다른 문제 없이 작동할 수 있었던 본질적 구조 및 그 질서가 17세기에 들어서며 붕괴되는 이유를 흔히 알려진 후금 (청)의 흥기보다는 조선의 역할에 중점을 두어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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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 15~17세기 동아시아 속의 조선 291

292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구범진 서울대학교 I. 머리말 II. 책봉 조공 패러다임 에 대한 비판적 검토 III. 청제국과 다중체제의 형성 IV. 다중체제 속에서 조선의 위상 V. 19세기 후반 국제질서의 변화와 조선-청 관계 VI. 맺음말

293 I. 머리말 1970년대까지 한국 학계의 동양사 연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 던 한중관계사( 韓 中 關 係 史 ) 연구는 수십 년 동안의 침체기를 거쳐, 최 근 학계 안팎의 상황 변화에 따라 새로운 활기를 띠고 있다. 1 그러나 1970년대 이전의 한중관계사 연구나 근래의 한중관계사 연구를 막론 하고, 지금까지의 한중관계사 연구는 관심 대상이나 시야가 대체로 한국 과 중국 의 양자관계로 제한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중국 학 계의 중한관계사( 中 韓 關 係 史 ) 연구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문인지 몰라도, 근래 한중관계사 또는 중한관계사 의 연구 성과가 폭 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중의 역사 현안 해결에 돌파 구가 마련되기는커녕 지루하고 소모적인 논쟁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인 상을 떨칠 수 없다. 그러나 최근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國 際 關 係 史 )로서의 한중관계사 연 구로 관점의 전환을 제창하는 목소리가 등장하여, 한국의 한중관계 사 나 중국의 중한관계사 가 결국 일국사( 一 國 史 ) 연구의 연장에 그침 으로써 지구사( 地 球 史, Global History)를 지향하는 최근 역사학의 흐름 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현실에 비판을 가한 바 있다. 2 필자는 이러한 비판에 적극 동조하는 입장으로, 한중관계사 가 현재의 답보 상태에서 1 동북공정 의 충격과 고구려연구재단, 동북아역사재단의 창립이 최근 韓 中 關 係 史 연구의 활성화에 큰 계기가 되었음은 새삼 지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2 박원호(미간원고), 韓 中 關 係 史 의 재구성을 위한 새로운 관점의 모색: 超 國 史 (transnational history)보다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로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293

294 벗어나기 위해서는 역시 관점의 전환과 시야의 확대를 동반한 새로운 연구 방법의 모색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종래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연구, 즉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국제관계 에 대한 역사적 접근은 대개 책봉(冊封) 이나 조공(朝貢) 등 상(商)ㆍ주(周) 국가가 중원의 여러 성읍국가들과 맺었던 국제관계에서3 유래한 중국 의 예제(禮制)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졌으며, 이로부터 책봉체제(冊封 體制) 또는 조공체제(朝貢體制) 라는 개념이 도출되어 오랫동안 학계를 지배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하 이 글에서는 책봉ㆍ조공 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접근하는 연구 패러다임을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이라고 부르겠는데, 앞으로 조선-청 관계사의 새로운 이해라는 궁극적 인 목표를 향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연 구에서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을 극복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적극 모색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을 위해서는 기존 연구에 대한 철저한 검토 및 정리가 선행되어야 할 것 이다. 그러나 최근 다수의 연구사 관련 논문이 나와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여,4 이 글에서는 주요 논점과 관련된 몇몇 연구 성과를 참조 하면서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를 진행하고, 새로 운 패러다임의 모색을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제언을 내놓고자 한다. 3 김한규(2000), 전통시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세계질서, 역사비평 2000년 봄 호, 역사비평사, 295쪽. 4 최근의 연구 동향은 陳尙勝(2008), 近十五年中國學術界關于淸朝與朝鮮關係 史硏究述評,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본 淸史 연구: 淸史工程을 중심으로, 이 화사학연구소 국제학술대회, 75~93쪽; 동북아역사재단 편(2009), 한중일 학 계의 한중관계사 연구와 쟁점, 동북아역사재단 등을 참조. 29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95 II.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에 대한 비판적 검토 1.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의 형성에 가장 크게 기여한 학자로는 니시지 마 사다오[ 西 嶋 定 生 ]와 페어뱅크(John K. Fairbank)를 꼽을 수 있다. 니시지마의 이론에 따르면, 고대 동아시아세계 에 책봉체제 라는 정치 관계를 계기로 동아시아 문화권 이 형성되었고, 당( 唐 )제국의 멸망 이 후 그것은 동아시아 교역권 으로 변모했다. 이후 정치적 국제기구로서 의 동아시아세계 가 15세기 초 명 왕조에 의해 재흥( 再 興 )되었으며, 명 왕조에서 청 왕조로 바뀌면서 그 범위는 더욱 확대되었다. 이러한 동 아시아세계 는 19세기에 이르러 유럽 세력의 진출에 의해 정치ㆍ경제 적ㆍ문화적으로 붕괴되었다. 5 니시지마 사다오의 이론에 대해서는 전후( 戰 後 ) 일본의 세계사 인식 에서 나온 담론적 성격을 지적한 비판적 검토를 포함하여, 내용상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과 대안도 다수 제기되었으나, 이 글에서 이를 구 체적으로 소개할 여유는 없을 것 같다. 6 다만 이 글의 관심 시기인 5 이성시 저, 박경희 역(2001), 만들어진 고대: 근대 국민 국가와 동아시아 이 야기, 삼인, 138~149쪽. 6 몇 가지만 언급하자면 이성시 저, 박경희 역(2001), 위의 책, 149~188쪽; Kishimoto Mio(2005), The Ch ing Dynasty and the East Asian World, Acta Asiatica 88, pp. 90~94; 박대재(2007), 고대 동아시아세계론 과 고구려 사, 고대 동아시아세계론과 고구려의 정체성, 동북아역사재단, 12~58쪽 등 을 참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295

296 17~19세기의 동아시아 와 관련하여, 명 왕조에 의해 동아시아세계 가 재흥되었거니와 청 왕조가 되면, 조선국을 비롯하여 동아시아나 남아 시아의 여러 나라는 거의 책봉국이 되어, 거기에 공전(空前)의 책봉체 제가 출현 했다는 니시지마 사다오의 지적은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 다.7 니시지마 사다오의 지적은 곧 명에 이어 청제국이 동아시아 의 책봉체제 를 완성했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 같다. 니시지마 사다오가 고대라는 한정된 시대와 중국 과 동이(東夷) 여 러 나라라는 한정된 지역에서 검증되고 이론화된 동아시아 국제질서 를 19세기까지 확대하여 적용시켰다면,8 페어뱅크는 주로 청제국 시기 동아시아 의 국제질서를 관찰한 결과로부터 중국적 세계질서(Chinese World Order) 와 조공체제(tribute system) 라는 이론을 도출하여 이를 이전 시기로 확대ㆍ적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9 그러나 페어뱅크의 이 론은 니시지마 사다오와 마찬가지로 구리하라 도모노부[栗原朋信]의 연 구를 기초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 뿌리가 같다고 볼 수 있다.10 그런데 페어뱅크의 논의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니시지마 사다오의 논의와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첫째는 책봉체제 가 아닌 조공체제 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동아시아 의 범위를 넓혀 내륙 아 시아까지 시야에 넣었다는 점이다. 전자는 국가 간의 계서(階序, hierarchy)를 원리로 하는 조공체제 와 평등(平等, equality)을 원리로 7 西嶋定生(2002), 冊封體制と東アジア世界, 東アジア世界と冊封體制, 東京: 岩波書店, 101쪽. 8 이성시 저, 박경희 역(2001), 앞의 책, 151쪽. 9 John K. Fairbank ed.(1968), The Chinese World Order: Traditional China s Foreign Relations,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0 이성시 저, 박경희 역(2001), 앞의 책, 152~153쪽. 29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97 하는 서양 근대의 조약체제 를 대비시키려는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니시지마 사다오의 이론이 전후 일본의 세계사 인식을 강하게 반영한 담론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11 페어뱅크의 이론 역시 20세기 중엽 구 미의 중국사 및 동아시아사 인식을 배경으로 한 하나의 담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후자는 니시지마 사다오의 이론이 대단히 한정된 지역에서 검증된 결과를 확대ㆍ적용한 이론이라는 점과 대조적인데, 이와 관련하여 맨콜 (Mark Mancall)의 이원구조 론은 특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페어뱅크 의 이론 틀 속에서 청의 조공체제 에 관한 한 핵심적인 위상을 차지하 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맨콜의 이론은, 청의 조공체제 를 생태 환 경 등을 기준으로 서북과 동남 the southeastern crescent(the maritime crescent) vs. the northeastern crescent(the inner Asian crescent) 으로 양분하고, 이를 청의 관제( 官 制 ) 이번원( 理 藩 院 )과 예부( 禮 部 ) 와의 관련 속에서 설명하고 있다. 즉 정주 농경사회로서 유교와 한자 같은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동남 초승달 지 역은 예부와 연결시켰고, 대개 초원 유목사회로서 중국 문화의 영향 이 약했던 서북 초승달 지역은 이번원과 연결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이원구조 속에서 조선은 류큐[ 琉 球 ], 베트남 등과 함께 동남 초승달 11 원래 니시지마 사다오의 책봉체제론, 동아시아세계론은 태평양 전쟁 패전 전 의 체제 아래에서 독선적으로 특이화된 일본사를 극복하고 새로이 세계사의 문맥 속에서 일본사를 이해하려는 의욕적인 시도이며 그것을 위한 이론이었 다. 즉 어떻게 세계사적 견지에서 일본사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일본 역사를 중국사 한국사 베트남사와 일체화시켜 이해하고 일본 문화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동아시아세계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추구되었 던 것이다 [이성시 저, 박경희 역(2001), 앞의 책, 186쪽].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297

298 지역에 속한다. 12 그러나 이 같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페어뱅크와 니시지마 사다오의 이론을 포함한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은, 이 글의 관심 시기인 17~19세 기의 국제질서를 다루는 맥락에서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첫째, 전통시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이해에서 책봉과 조공이라는 중국 의 예제와 이 예제의 이념적 측면, 즉 중화사상 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니시지마 사다오의 책봉체제 와 페어뱅크의 조공체제 라는 개 념에서 책봉 과 조공 의 중요성은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필 자 역시 동아시아 의 국제질서에서 중국 의 예제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국 의 예제와 무관하거나 그 예제가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관계가 역사상 엄연히 존 재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국제질서의 형성과 운영에서 대단히 중요 한 의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아예 무시한다거나 단지 예외적 인 현상으로 치부해 버릴 위험성만은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페어뱅크와 니시지마 사다오의 이론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 서 학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는 하마시타 다케시[ 濱 下 武 12 Mark Mancall(1968), The Ch ing Tribute System:An Interpretive Essay, John K. Fairbank, ed., The Chinese World Order : Traditional China s Foreign Relations,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pp. 63~89 ;Mark Mancall(1984), China at the Center:300 Years of Foreign Policy, New York:The Free Press, pp. 131~158. 禮 部 -농경사회 와 理 藩 院 -유목사회 라는 맨콜의 이원구조 론은 학계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모테기 도시오(2004), 국민국가 건설과 내국 식민지:중국 변강( 邊 疆 )의 해 방,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휴머니스트, 144~146쪽; 平 野 聰 (2007), 大 淸 諸 國 と 中 華 の 混 迷, 東 京 : 講 談 社, 157~159쪽 등 참조]. 그것은 淸 중심의 국 제질서를 이해함에 있어서 淸 의 특수한 사정과 제도를 적극 반영했기 때문이 라고 할 수 있다. 29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299 志 ]의 조공시스템 이론 역시 조공 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하마시타 다케시의 이론은 책봉체제 에 조공관계까지 포함한 청 중심의 질서를 이론화한 것인데, 그 내용은 사실 책봉이나 조공 같은 정치 관계가 아 니라 교역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또한 조공무역 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교역을 포괄하고 있으며, 이론이 포섭하는 공간의 범위도 대단 히 넓다. 13 그러나 조공 이라는 예제와 무관한 교역에까지 조공체제 라 는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역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것은 니 시지마 사다오나 페어뱅크와 달리 19세기 중엽 조약체제 로 상징되는 서양 세력의 진출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교역권 의 기존 질서가 붕괴되 지 않았음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 선택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14 역사 적 실제를 온전히 포섭하기 어려운 중국 중심의 예제 개념에 집착하 는 것은 여전히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책봉ㆍ조공이라는 중국 의 예제가 국제관계에 적용된 것은 중 화사상 의 산물이었다.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중국적 세계질서(Chinese world order) 란 말은 대체로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포함한다. 그것은 한 편으로는 역사상 실제로 중국 중심으로 편성ㆍ유지되었던 전통시대 동아시아의 현실적 세계질서를 가리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상 실제와 상관없이 동아시아세계질서가 중국 중심으로 편성ㆍ유지된다 고 인식하거나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는 중국인의 관념적 세계질서 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양자는 별개의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유 13 濱 下 武 志 (1990), 近 代 中 國 の 國 際 的 契 機, 東 京 : 東 京 大 學 出 版 會 ; 濱 下 武 志 (1997), 朝 貢 システムと 近 代 アジア, 東 京 : 岩 波 書 店. 14 Kishmoto Mio(2005), p. 93.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299

300 기적으로 관련되어 서로 깊은 영향을 미쳤다. 중국인의 관념적 세 계질서는 현실에 반영되어 현실적 세계질서의 성격과 방향을 결정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으며, 역사상 동아시아세계질서는 중 국인의 관념적 세계질서를 형성하는 현실적 배경으로 기능했다. 15 는 지적처럼, 중국인의 관념적 세계질서, 즉 중화사상 은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중화사상 의 이념과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현실 사이에는 언제나 상당한 괴리가 존 재했기 때문에, 전자를 과도하게 강조하게 되면 후자를 객관적으로 인 식하지 못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책봉ㆍ조공의 예제는 중화사상 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양 자에 내포된 위험성을 망각할 경우 부지불식 간에 역사상( 歷 史 像 )의 왜곡을 야기할 수 있다. 중화사상 의 강한 영향 아래 편찬된 한문 사 료는 명실상부한 외신( 外 臣 )의 조공 뿐만 아니라 유럽 국가 등의 군주 가 파견한 사신일지라도 국서와 예물을 지참한 경우라면 모두 조공 으 로 기록했는데, 명실상부한 외신의 조공 과 유럽 국가의 조공 을 동일 한 범주에 놓고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전통시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객관적 이해를 위해서는 중화사상 의 역사상 왜곡 가능성 에 대한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고 하겠지만, 특히 17~19세기의 경 우에는 중화사상 의 상대화가 더욱 절실하게 필요하다. 1500년을 전후 한 시기 유럽의 신항로 개척으로 촉발된 세계사적인 변화가 동아시아 에도 파급되어, 17세기 이후에는 곤여만국전도( 坤 輿 萬 國 全 圖 ) 로 상징 되는 새로운 지리 지식의 전파는 물론이거니와 동ㆍ서양의 경제적ㆍ문 15 김한규(2000), 앞의 글, 282쪽. 30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01 화적 교류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고래( 古 來 )의 중화사상 에 입각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은 중국 에서조차 더 이상 유효하지 않 게 되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둘째, 명과 청을 연속의 시각에서 파악하며, 국제질서의 맥락에서 양자를 모두 중국 으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명대 에 동아시아세계 가 재흥하여 청대에 최대의 책봉체제가 형성되었다는 니시지마 사다오의 이해는 분명히 명과 청을 연속의 시각에서 파악한 것이다. 또한 중국 학계에서는 보기 드문 제목의 책인 동아사( 東 亞 史 ) 는 원에서 청까지의 국제질서를 봉공체계( 封 貢 體 系, 13세기 말~1874년) 로 규정하고 명과 청의 차이에는 거의 주목하지 않고 있다. 16 그리고 페어뱅 크 이론의 형성에 기여한 바 있는 전해종( 全 海 宗 )은 청과 조선의 조공 체제는 대체로 명의 조공체제를 계승ㆍ발전시킨 것이다 라고 단언했다. 17 이와 같이 명과 청을 연속의 시각에서 파악하는 것은, 중국 및 중 국사 의 범위 설정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들은 어떻게 역사상의 중국이란 문제를 처리할 것인가? 우리들 은 청나라가 통일을 완성한 이후, 제국주의가 중국을 침입하기 이 전의 중국 판도를 갖고 역사 시기의 중국 범위로 삼을 수 있다. 이 른바 역사 시기의 중국은 이를 범위로 삼아야 한다. 수백 년이든 수천 년이든 이 범위 안에서 활동한 민족은 모두 중국 역사상의 민족이고, 이 범위 안에 건립한 정권은 모두 중국 역사상의 정권이 16 楊 軍 ㆍ 張 乃 和 主 編 (2006), 東 亞 史 : 從 史 前 到 20 世 紀 末, 長 春 : 長 春 出 版 社. 17 Hae-jong Chun(1968), Sino-Korean Tributary Relations in the Ch ing Period, John K. Fairbank, ed., The Chinese World Order: Traditional China s Foreign Relations,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p. 90.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01

302 다. 간단히 회답하면 이와 같다. 이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중국 민 족이 아니며, 중국 정권이 아닌 것이다. 18 라는 말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바와 같이, 청은 오늘날 중국, 중국사 의 범위 설정과 관련해 역사상 그 어떤 국가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갖 는다. 이러한 역사 인식이 최근 고구려사의 귀속을 둘러싼 논쟁을 야 기했음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시야를 조금만 넓혀 보면, 이 같은 역사 인식은 단지 한중 간의 외교 문제뿐만 아니라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이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정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국제적인 관심을 받았던 티베트나 위구르 문제 그리고 대만 문제 등 민감한 정 치 사안들은 장기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결국 청제국이 남긴 역사적 유산의 역사적 행방과 관련되어 있는 문제들인 것이다. 최근의 청사공 정 은 청제국을 중국사 의 마지막 왕조로서 확실히 자리매김 함으로 써, 청을 명은 물론이거니와 그 이전의 왕조들과도 연속선상에 위치시 키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19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청사공정 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은 그 정치적 의미를 고려할 때 충분히 이해가 가 긴 하지만, 이는 역사를 현재의 입장에서 과도하게 정치화함으로써 결 국 역사상의 왜곡을 초래할 위험이 다분하다. 특히 고구려사 귀속 논 쟁의 당사자이기도 한 우리로서는, 중국 및 중국사 의 범위 설정 문 18 譚 其 驤 (1991), 歷 史 上 的 中 國 和 中 國 歷 代 疆 域, 中 國 邊 疆 史 志 硏 究 1[송기호 (2006), 대외관계에서 본 발해 정권의 속성, 한국 고대국가와 중국왕조의 조공ㆍ책봉관계, 고구려연구재단, 224~225쪽에서 재인용]. 19 청사공정 및 최근 중국의 청사 연구 동향에 대해서는 정혜중 외(2008), 중 국의 청사공정 연구, 동북아역사재단;유장근 외(2009), 중국 역사학계의 청 사연구 동향, 동북아역사재단 참조. 30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03 제 그리고 명과 청의 연속성 문제를 중국 외부의 시각에서 다시 한 번 고민할 필요가 있다. 셋째,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조선의 위상과 관련해 책봉ㆍ조공 패 러다임 은 조선을 조공국의 모델(model tributary) 로 규정한다. 니시지 마 사다오의 이론은 주로 한( 漢 )~당( 唐 )과 한반도 및 일본 열도에 위 치했던 여러 국가의 관계로부터 도출된 것이었던 만큼, 이 이론에서 조선이 모델 로 간주되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하겠다. 한편 페 어뱅크의 중국적 세계질서 에서 조선이 모델 로 규정된 데에는 전해종 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판단된다. 즉 조선은 조공국의 모델이었으며, 청대 중국과 조선의 공식적인 관계는 중국과 기타 주변 국가들 간에 바람직한 관계의 모범을 제공했다 는 전해종의 주장이 20 실로 광 범위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21 한편 19세기 후반 근대 전환기 조선과 청의 관계에 대한 연구들도 조선과 청의 관계가 전형적인 책봉ㆍ조공관계 였다는 이해를 논의의 기 점( 起 點 )으로 설정하고 있다. 즉 19세기 중엽까지의 조선과 청의 관계 가 책봉국 청이 조공국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간섭하지 않는 전형적 인 책봉ㆍ조공관계 였다는 데에서 논의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 나 17세기 이후 조선-청 관계의 역사를 세심하게 살펴보면, 애초에 청 과 조선 사이에 책봉ㆍ조공관계가 형성된 과정부터 기타의 국가들과 상당히 달랐을 뿐만 아니라, 청이 내정과 외교에 간섭하지 않았다 는 20 Hae-jong Chun(1968), p 한 가지만 예를 들자면, 미국의 대표적인 淸 史 개설서 중 하나는 우리는 淸 과 淸 의 조공국의 모델이었던 조선의 관계에서 조공체제의 완전한 형태를 볼 수 있다 [Susan Naquin and E. S. Rawski(1987), Chinese Society in the Eighteenth Century, Yale University Press p. 28]라고 하여, 조선을 조공국 의 모델(model tributary) 로 규정했다.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03

304 말 또한 적어도 17세기의 경우에는 사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고 하 지 않을 수 없다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과 역사적 현실의 괴리 니시지마 사다오ㆍ페어뱅크의 패러다임은 지금까지 많은 비판이 있었 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이는 책봉ㆍ조공 패러 다임 의 막대한 영향력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연구자들이 책봉ㆍ조 공 패러다임 과 역사적 현실의 괴리를 인식하면서도 마치 주술에라도 걸린 듯이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에서 해방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역 시 두 대가( 大 家 )의 학문적 영향력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필 자가 보기에는 다른 무엇보다 두 사람의 이론에서 키워드가 되는 책 봉, 조공 이라는 용어가 부리는 마술 탓이 크지 않을까 한다. 한문 사료에서 책봉, 조공 은 적어도 국제관계 내지 국제질서에 관한 한 실 로 핵심적인 용어이다. 사료에 의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역사가의 숙명인 이상, 사료에 등장하는 핵심 용어인 책봉, 조공 을 폐기하기란 사실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봉, 조공 이나 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몇몇 사료 용어 를 부득불 구사하는 것과, 이른바 전통시대의 동아시아 국제질서 를 책봉, 조공 을 키워드로 삼아 논의하는 것 즉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22 한명기(2003), 丙 子 胡 亂 패전의 정치적 파장, 東 方 學 志 119,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55~66쪽;한명기(2009), 정묘 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157~213쪽. 30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05 속에서 논의하는 것 은 엄연히 구분해야 할 것이다. 양자관계가 아 닌 광범위한 국제적 맥락, 즉 다자관계의 맥락 속에서 조선과 청의 관 계에 대한 역사적 접근을 시도하는 경우, 책봉, 조공 의 예제만으로는 17~19세기 국제질서의 복잡한 성격을 충분히 해명할 수 없다. 달리 말하자면,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은 실제의 역사상에 대한 이해보다는 오히려 오해를 낳을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에 대 한 필자의 이 같은 진단은,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이 더 이상 역사 현상 의 분석 틀로서 그 효용성을 인정할 수 없을 정도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의 위기는 애초부터 책봉, 조공 이라는 개념의 일방적 성격( 중국 중심주의 )에 내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책봉, 조공 은 주대(周代) 천자(天子)와 제후(諸侯)의 관계에서 유래한 것으 로, 훗날 한문 사료에서 중원에 자리한 제국과 주변 여러 나라의 관계 를 묘사할 때에 늘 등장하는 용어이다. 역사상 동아시아 의 국제관계 에서 중원을 차지한 제국의 경제적ㆍ문화적 영향력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정치적ㆍ군사적 측면에서 보자면 중원제국이 항상 책봉, 조공 의 이념을 현실에 관철시킬 만한 실력을 갖추었던 것은 아니다.2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문 사료에서는 중원제국과 다른 나라의 관계를 책봉 또는 조공 이라는 명분에 입각하여 기술했다. 송(宋)과 그 이전 의 중원 왕조와 북방 유목제국의 관계에 관한 한문 사료의 기술이 얼 23 Peter I. Yun(1998), Rethinking the Tribute System : Korean States and Northeast Asian Interstate Relations, 600~1600, Ph. D. dissertation, Los Angeles: UCLA; 윤영인(2007), 10~13세기 동북아시아 多元的 國際秩序에서 의 冊封과 盟約, 동양사학연구 101, 동양사학회; 윤영인(2008), 동아시아 盟約체제와 거란ㆍ금의 版圖, 역대 중국의 판도 형성과 변강, 한신대학교출 판부 등 참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05

306 마나 역사적 현실과 거리가 있었는지는 새삼 지적할 필요도 없거니와, 명의 경우만 보더라도 명의 실록( 實 錄 )은 14세기 말~15세기 초에 걸쳐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강국이었던 티무르제국을 명의 조공국으로 묘사하고 있다. 24 그러나 당시 티무르제국의 군주가 명의 황제에게 보 낸 페르시아어로 작성된 문서를 보면, 티무르제국의 군주가 명 황제의 권위를 인정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으며, 명의 황제 또한 티무르제 국의 군주를 대등한 상대로 인정하는 문서를 보낸 바 있다. 25 한문 사료에 등장하는 책봉 혹은 조공 의 일방적 성격은 청의 경우 도 예외가 아니다. 가경( 嘉 慶 ) 대청회전( 大 淸 會 典 ) 은 조선, 류큐, 베트 남, 라오스[ 南 掌 ], 타이[ 暹 邏 ], 술루[ 蘇 祿 ], 미얀마[ 緬 甸 ] 등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국가 외에도, 네덜란드[ 荷 蘭 ]와 서양을 사예조공지국( 四 裔 朝 貢 之 國 ) 으로 열거하고 있으며, 서양( 西 洋 ) 에는 다시 포르투갈, 이탈리 아(로마 교황), 영국 등을 포함시키고 있다. 26 여기서 건륭( 乾 隆 ) 58년 (1793)에 배신( 陪 臣 )을 보내어 입공( 入 貢 )했다 는 영국의 조공 이란 27 다 름 아닌 매카트니(George Macartney) 사절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당시 영국 국왕 조지 3세가 청의 건륭제에게 조공 할 의사가 전혀 없었음은 물론이다. 한편, 가경 대청회전 에 기록된 사예조공지국 의 조공 과는 성격이 사뭇 다르긴 하지만, 한문 사료에 묘사된 청과 러시아의 관계 또한 실 24 明 太 宗 實 錄 卷 15, 洪 武 35 年 12 月 甲 寅 ; 卷 93, 永 樂 7 年 6 月 己 巳 ; 卷 101, 永 樂 8 年 2 月 丙 午 등 참조. 25 Joseph F. Fletcher(1968), China and Central Asia, 1368~1884, John k. Fairbank, ed., The Chinese World Order: Traditional China s Foreign Relations, Harvard University Press, pp. 211~ 嘉 慶 大 淸 會 典 ( 近 代 中 國 史 料 叢 刊 ) 卷 31, 2a~3a쪽. 27 嘉 慶 大 淸 會 典 卷 31, 3a쪽. 30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07 제와 상당한 거리가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고자 한다. 28 청은 러시아와 대등한 입장에서 두 차례의 조약 네르친스크조약 (1689년)과 캬흐타조약 (1727년) 을 체결한 바 있다. 네르친스크조약 과 캬흐타조약 의 만주어 조약문을 보면 전문( 前 文 )은 물론이거니와 조문( 條 文 ) 곳곳에서 청과 러시아 두 나라의 군주가 대 등한 주권자임을 명시하는 등 양국의 평등을 반영하는 용어들이 구사 되어 있다. 그러나 두 조약의 내용을 전하는 한문 사료에서는 두 조약의 평등 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먼저 네르친스크조약 의 내용을 전하는 성조 인황제실록( 聖 祖 仁 皇 帝 實 錄 ) 의 서술을 보면, 두 나라는 중국( 中 國 ) 과 악라사( 鄂 羅 斯 ) 로 표기되어 있을 뿐, 만주어 조약문의 juwe gurun 에 대응하는 양국( 兩 國 ) 이라는 표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특히 만주 어 조약문 제4조의 juwe gurun kemuni hūwaliyasun i banjime afara dailara be deriburakū oki[두 나라는 항상 평화롭게 지내며 공벌( 攻 伐 )과 정토( 征 討 )를 일으키지 않는다] 에 해당하는 내용은 잉여중국화호무 기쟁단[ 仍 與 中 國 和 好 毋 起 爭 端, 그대로 중국과 화호( 和 好 )하며 쟁단( 爭 端 )을 일으키지 말라] 이라고 표현되었다. 29 다음으로 캬흐타조약 에 관한 한문 사료인 이번원칙례( 理 藩 院 則 例 ) (가경 연간 간행) 아라사사례( 俄 羅 斯 事 例 )에 포함된 아라사교계통상각조 28 이하 한문 사료에 나타난 청과 러시아의 관계에 대한 서술은 구범진(2008a), 淸 代 對 러시아 外 交 의 성격과 그 변화: 締 約 大 臣 과 交 換 條 約 文 의 言 語 를 중심으로, 大 東 文 化 硏 究 61,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75~177쪽에 의거한 것이다. 29 康 熙 實 錄 ( 淸 實 錄 5) 卷 143, 康 熙 28 年 12 月 丙 子, 北 京 : 中 華 書 局, 1985, 577~579쪽.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07

308 례( 俄 羅 斯 交 界 通 商 各 條 例 ) 를 보자. 30 만주어 조약문과 아라사교계통상 각조례 를 대조해 보면, 전자에서는 juwe gurun 이라는 표현이 26군 데에서 사용되었지만, 후자에서는 이 중 16군데를 아예 생략해 버렸 고, 나머지 10군데는 쌍방( 雙 方 ), 남북( 南 北 ), 양지방( 兩 地 方 ) 등의 표현으로 바꾸어 버렸다. 31 이처럼 그 표현에 많은 수정이 가해졌기 때 문에 아라사교계통상각조례 의 원본인 캬흐타조약 이 국제조약이었다 는 사실마저 전혀 느낄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요컨대, 네르친스크 조약 과 캬흐타조약 이 청과 러시아의 평등조약이었다는 사실을, 한문 사료를 통해서는 조약 체결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19세기 초에 이르기 까지도 전혀 감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특히 조공 의 측면을 강조하는 이론에서는 이 와 같은 한문 사료의 사실 왜곡 을 책봉 없는 조공 이라는 개념을 동 원함으로써 해소시켜 버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건륭 58년(1793) 에 배신( 俳 臣 )을 보내어 입공( 入 貢 )했다 는 가경 대청회전 의 기사에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한문 사료에서 조공 은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30 이 俄 羅 斯 交 界 通 商 各 條 例 외에도 캬흐타조약 의 漢 文 조약문으로는 中 俄 約 章 會 要 에 실린 조약문이 있지만, 이는 캬흐타조약이 이미 폐기된 뒤 總 理 各 國 事 務 衙 門 에서 漢 譯 한 것이다. 漢 譯 시점인 19세기 후반은 러시아를 포함한 서 양 여러 나라와 淸 의 관계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틀(이른바 萬 國 公 法 에 의한 條 約 體 制 )에 포섭된 때이기 때문에, 俄 羅 斯 交 界 通 商 各 條 例 만이 淸 이 캬흐타조약 을 한문 텍스트에서 어떻게 다루었는지 잘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野 見 山 溫 (1977), 露 淸 外 交 の 硏 究, 東 京 : 酒 井 書 店, 58~65쪽]. 31 예컨대 만주어 조약문 제4조의 juwe gurun i hūda be ishunde yabubumbi (두 나라의 통상을 서로 행하게 한다)와 같은 구절에 보이는 juwe gurun 은 한문 俄 羅 斯 交 界 通 商 各 條 例 에선 中 外 旣 經 通 商 의 中 外 로[ 野 見 山 溫 (1977), 위의 책, 61쪽], 만문 俄 羅 斯 交 界 通 商 各 條 例 에선 julergi amargi emgeri hūdašara be hafumbuha be dahame 의 julergi amargi ( 南 北 )로 바꾸어 표 현되고 있다[ 野 見 山 溫 (1977), 위의 책, 162쪽]. 30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09 칭신( 稱 臣 ) 을 전제하기 마련이다. 물론 책봉 이라는 의례 행위를 통하 여 칭신 을 공식화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한문 사료에서 조 공 은 내용상 책봉 에 준하는 칭신 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칭신 을 의도하지 않은 국가의 사절 파견을 죄다 조 공 으로 표현한 한문 사료의 기록을 존중한 나머지 이를 책봉 없는 조공 으로 범주화해 버린다면, 그것은 부지불식 간에 국제관계의 객관 적 이해를 방해하게 된다. 여기서 책봉과 조공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동전의 앞뒷면처럼 서 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만으로는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 다. 조공이 없으면 책봉이 무의미하며 책봉이 없으면 조공은 성립되지 않는다 는 지적에 귀를 기울여, 32 한문 사료에서 종종 만나게 되는 조 공 기사의 일방적 성격을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책봉 없는 조공 이란 이미 조공 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책봉 을 동반한 조공 의 경우라 하더라도 그 관계의 내용을 깊이 파고들어 보면, 과연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이 전통시대 동아시아 의 국제질서를 객관적이고 구조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이론 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회의를 품게 한다. 주지하듯이, 니시지마 사다오 가 말하는 동아시아세계 가 형성되던 시기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고대 국가들은 남북조의 왕조들과 조공 과 책봉 을 활발히 주고받았다. 이 시기 남북조의 왕조들이 주변의 이민족 군주들을 책봉할 때에는 왕호 ( 王 號 ) 외에 관작( 官 爵 )을 첨가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는 언뜻 이민족 군주의 내신화( 內 臣 化 )로 비치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당시 이민 족 군주 책봉에 동반되었던 주군직( 州 郡 職 ) 제수( 除 授 )는 실질적인 내 32 김한규(2000), 앞의 글, 295~296쪽.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09

310 신화가 아니라 분해된 제국을 허호( 虛 號 )로 재건하려는 관념의 유희( 遊 戱 ) 에 불과했다. 33 물론 관념의 유희( 遊 戱 ) 였을지라도 주변 이민족의 군주를 내신( 內 臣 )과 다름없는 관작( 官 爵 )으로 책봉함으로써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즉 책봉체제 를 매개 로 하나의 지역 세계를 규율하는 국제질서가 형성되었던 것처럼 보이 는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하나의 지역 세계를 규율하는 질서가 형성되었다고 인정하기 위해서는, 책봉 행위에 의해 만들어진 관계가 책봉자와 피책봉자의 양자관계뿐만 아니라 피책봉자의 국내에서도 그 리고 다수의 피책봉자간의 다자관계에서도 관철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피책봉자가 생전에 국내에서 책봉 관작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사례는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동아시아 의 이민족 군주가 황제에 게 받은 책봉 관작은 국내에서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던 것으로 판단 된다. 34 한편 피책봉자 간의 관계에서도 일본, 고구려, 백제 등이 책봉자를 제외한 외국과의 관계에서 책봉 관작을 사용한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일본의 사서에 발해가 일본과의 외교에서 책봉 관작을 사용했던 기록들이 보이지만, 전후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할 때 이들 기록을 액 면 그대로 신뢰하기란 대단히 곤란하다. 35 따라서 동아시아 고대 국가 33 이성규(1996), 中 國 分 裂 體 制 의 模 式 과 東 亞 諸 國, 한국고대사회연구소편, 韓 國 古 代 史 論 叢 8,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268~273쪽. 34 이성규(1996), 위의 글, 305~310쪽. 이례적으로 책봉 관작이 사용된 사례가 있기는 하다. 예컨대 百 濟 의 武 寧 王 은 誌 石 에서 寧 東 大 將 軍 百 濟 斯 麻 王 을 칭한 예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상 諡 號 의 기능을 한 것으로 武 寧 王 생 전에 썼던 것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35 이성규(1996), 앞의 글, 310~315쪽. 31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11 들의 다자관계에서도 책봉 관작은 무용지물에 가까웠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책봉 관작을 제수한 당사자였던 당의 조정에서조차 책봉 관작의 서열을 피책봉자의 서열에 직결시키는 원칙은 준수되지 않았다. 36 이처럼 책봉을 통하여 취득된 관작이 국내외에서 사실상 무용지물 에 가까웠고 당 조정의 석차에서도 때로는 고려되지 않았다면, 책봉 을 통한 동아시아세계의 질서를 과연 얼마나 적극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지 의문 37 이다. 이는 당대 이전 동아시아 의 국제질서를 책봉ㆍ조 공 패러다임 으로 이해하는 데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 다. 여기서 당 이전의 경우는 몰라도, 니시지마 사다오가 조선국을 비롯한 동아시아나 남아시아의 제국은 거의 책봉국이 되어, 거기에 공 전( 空 前 )의 책봉체제가 출현 했다고 평가했던 청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 르지 않았겠느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경 대청회전 은 조선, 류큐, 베트남, 라 오스, 타이, 술루, 미얀마, 네덜란드, 서양 여러 나라들을 청의 조공국 으로 열거했다. 38 그런데 이 중에서 책봉 없는 조공 인 경우를 제외한 다면 어떤 그림이 떠오를까? 조선의 경우 청의 칙사 파견이 대단히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청이 조선을 비롯한 여러 조공국에 당연히 책 봉을 위한 칙사를 파견했으리라 예상한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처럼 청 이 책봉을 위한 칙사를 파견한 경우는 예상외로 적어서, 조선, 류큐, 36 이성규(1996), 앞의 글, 316~318쪽. 37 이성규(1996), 앞의 글, 318쪽. 38 淸 史 稿 卷 529에 屬 國, 곧 朝 貢 國 으로 열거된 코칸드, 키르기즈, 카자흐, 구르카 등은 이 글의 朝 貢 國 범주에서 제외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片 岡 一 忠 (2008), 朝 賀 規 定 からみた 淸 朝 と 外 藩 ㆍ 朝 貢 國 の 關 係, 中 國 官 印 制 度 史 硏 究, 東 京 : 東 方 書 店, 378~379쪽 참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11

312 베트남 등 세 나라에 국한되었다.39 여기에 조공을 위해 입국한 사절 에게 칙(敕)ㆍ인(印)을 수여하여 귀국하게 하는 방식[領封]을 취한 경우 까지 합해도 타이, 미얀마, 라오스 등이 추가될 뿐이어서, 청의 책봉 을 받은 나라는 여섯밖에 되지 않는다.40 그런데 타이, 미얀마, 라오스 등의 책봉 사례는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미얀마의 책봉 경위를 자세하게 들여다보 면, 미얀마 국왕에 대한 책봉은 건륭 55년(1790) 건륭제의 팔순(八旬) 을 축하하기 위한 일회성 이벤트 에 불과했으며, 그나마 미얀마가 청 의 책봉을 받은 것은 단 한 차례에 불과했다. 라오스의 경우는 미얀 마보다 늦은 건륭 60년(1795)에 책봉이 있었는데, 미얀마의 사례와 마 찬가지로 건륭제의 재위 60년을 맞은 이벤트성 책봉이었을 뿐만 아니 라, 건륭 60년 당시 청의 책봉을 받았던 라오스 국왕은 책봉 시점에 이미 본국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던 자였다. 끝으로 타이는 일찍이 강희 12년(1673)에 청의 책봉을 받은 적이 있고, 두 번째 책봉은 건륭 51년(1786)에 있었다. 그런데 전자의 책봉은 아유타야 왕조 때의 일이 지만, 후자는 아유타야 왕조가 미얀마에게 멸망당한 뒤 들어선 방콕 왕조 때의 일이었다.41 기껏해야 1회성 이벤트 에 불과한 책봉(미얀마)이나 실체가 불분명 한 대상(라오스)에 대한 책봉을 한 시대의 국제질서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볼 수 없다면, 가경 대청회전 에 열거된 조공국 가운데 명실 39 淸史稿 卷91, 北京: 中華書局, 1977, 2678쪽. 40 夫馬進(2008), 1609年, 日本の琉球倂合以後における中國ㆍ朝鮮の對琉球外交: 東アジア四國における冊封, 通信そして杜絶,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본 淸史 연구: 淸史工程을 중심으로, 이화사학연구소 국제학술대회, 4~5쪽. 41 夫馬進(2008), 위의 글, 5~8쪽. 31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13 상부한 청의 조공국은 조선, 베트남, 류큐, 타이의 네 나라만을 인정 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청의 책봉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이들 네 나라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네 나라 중에서 류큐 의 경우는 조선 등과 동일 차원에서 논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즉 류큐에서는 1609년 사츠마의 침략을 받아 국왕이 포로가 되어 에도 에 끌려갔다가 1611년에 귀국한 일이 일어났다. 이후 명ㆍ청과 류큐의 책봉ㆍ조공은 허구의 책봉, 허구의 조공 에 불과한 것이었다. 42 여기서 사츠마의 류큐 침략에 이어 명ㆍ청의 교체라는 격변을 겪은 뒤에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외교 관계가 15세기의 경우와 어떻게 달 라졌는지 비교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5세기의 경우, 조선과 류 큐는 물론 일본까지도 책봉과 조공을 통하여 명과 공식적인 외교관계 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일본은 물론 류큐와도 직접 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43 반면에 명ㆍ청의 교체가 이루어진 17세기 중 엽 이후, 청과 책봉ㆍ조공을 맺은 나라는 조선과 류큐뿐이었으며, 일 본은 청과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지 않은 채 조선과는 통신사 파견 으로 상징되는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류큐는 한편으로 청과 책봉ㆍ조 공관계를 유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일본의 강한 영향력 아래에 놓이 는 양속체제( 兩 屬 體 制 ) 속에 있었다. 그리고 조선과 류큐 사이에는 사 신 및 자문( 咨 文 )의 교환도 없었거니와 표류민의 송환을 위한 접촉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달리 말하자면, 조선과 류큐는 외교적 단절 상태 에 있었던 것이다 夫 馬 進 (2008), 앞의 글, 8~26쪽. 43 朝 鮮 과 琉 球 의 관계에 대해서는 하우봉 외(1999), 朝 鮮 과 琉 球, 아르케 참 조. 44 夫 馬 進 (2008), 앞의 글, 26~38쪽.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13

314 결국 이 글의 관심 시기인 17세기 중엽 이후 조선, 류큐, 일본 중 에서 청과 정상적인 책봉ㆍ조공관계를 맺은 나라는 조선뿐이었으며, 일 본은 줄곧 조공체제의 바깥에 머물러 있었고, 류큐는 청ㆍ일본에 대하 여 양속체제 를 유지함과 동시에 조선과는 외교적 단절 상태에 있었던 셈이다. 이와 같은 국제관계를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으로 분석하는 것 이 과연 타당한 것일까? 한 발 양보해서 청 류큐의 관계를 조선-청의 관계와 동렬에 놓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은 기껏 해야 청, 조선, 류큐, 베트남, 타이 등 다섯 나라에만 해당되는 관계 를 동아시아 전체로 일반화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오류는 중원의 통일 제국인 청과 주변 국가의 관계라면 당 연히 책봉ㆍ조공을 중심으로 맺어졌을 것이라는 선입견에서 비롯된 것 같은데, 이러한 선입견에서 벗어나 청과 주변 국가들의 국제관계를 들 여다보면,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지 않은 상태에서 경제적 교류, 즉 통상관계( 通 商 關 係 )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경우가 엄연히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가경 대청회전 이 호시( 互 市 ) 의 국가로 꼽고 있는 일본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며, 45 조공국으로 열거된 나라들 가운데 책봉 관계가 없었던 서양의 여러 나라들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런데 조공 과 무관한 호시 관계가 인정되기 시작한 것은 명 말, 즉 16세기의 일이었다. 명의 대외정책은 기본적으로 해금( 海 禁 )ㆍ조공체 제에 입각한 것이었지만, 16세기 중엽 이후 조공체제와 거의 모든 점 에서 반대의 방향성(vector)을 지닌 호시제도가 성장하여, 그 범위를 45 嘉 慶 大 淸 會 典 卷 31, 3a~4a쪽. 31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15 확대했다. 46 가경 대청회전 과 같은 청의 관찬 편찬물에조차 그 존재 가 인정되고 있는 호시 관계를, 오늘날 우리가 단지 조공체제의 파생 물로 치부하는 것은 지나치게 안이한 처리 방식이다. 조공이라는 구 체적인 제도에 결부된 조공체제 라는 개념에, 조공과는 관계 없는 사 태나 그것과 상반된 방향성을 지니는 호시체제를 포괄시키는 것은 적 절하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47 한편, 이상의 논의는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속에서 조선을 조공국의 모델 로 규정하는 인식에 대해서도 심각한 이의를 제기한다. 무엇보다 도 명실상부한 청의 조공국이 극소수에 불과한 상황에서 조선을 모델 로 꼽는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조선의 전 형성 보다는 오히려 특이성 을 언급하는 몇몇 연구자의 목소리는 경청 할 가치가 있다. 예컨대, 이와이 시게키[ 岩 井 茂 樹 ]는 조선은 태종( 太 宗 ) 홍타이지의 시대에 무력 행사에 의해 청조( 淸 朝 )에 굴복하여 속국적( 屬 國 的 )인 입장에 놓여 있었고, 다른 조공 국가들과 동일시하는 것은 문 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고 지적한 바 있으며, 48 유장근( 兪 長 根 )은 조선과 청의 관계가 모범적이었다기보다는 매우 특이한 형태 였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49 물론 이와이 시게키와 유장근은 조선-청 관계의 특 이성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시각의 전 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는 점만으로도 그 의의를 인정할 수 46 岩 井 茂 樹 (2007), 淸 代 の 互 市 と 沈 默 外 交, 夫 馬 進 編, 中 國 東 アジア 外 交 交 流 史 の 硏 究, 京 都 : 京 都 大 學 學 術 出 版 會, 381쪽. 47 岩 井 茂 樹 (2007), 위의 글, 390쪽. 48 岩 井 茂 樹 (2007), 앞의 글, 384쪽. 49 유장근(2009), 만청 식민주의 를 둘러싼 중ㆍ외 학계의 논의, 중국 역사학 계의 청사연구 동향, 동북아역사재단, 229쪽.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15

316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후마 스스무[ 夫 馬 進 ]는 조공국이 예( 禮 ) 를 준수하지 않을 경우 명ㆍ청이 조공국에 가하는 문죄( 問 罪 ) 가 실제 효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경우는 조선에 국한되었고, 그것은 조선에서만 예( 禮 )의 내면화( 內 面 化 ) 가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50 후 마 스스무의 이러한 지적은 조선-청 관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이와 이 시게키나 유장근과는 그 취지도 다르긴 하나, 조선이 조공국의 모 델 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특이한 조공국 이었음을 강력히 시사한 것이라 고 볼 수 있다. 굳이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더라도, 조선이 조공국의 모델 이었다거나 18세기 이후 청의 사료에 빈번이 등장하는 표현처럼 조선이 공순( 恭 順 )한 조공국이었다는 평가가 51 대단히 피상적이라는 사 실은, 조선-청 관계의 속살 을 조금만 들춰 보아도 그리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조선은 반청( 反 淸 ) 의식이 조( 朝 )ㆍ야( 野 )를 막론하고 뿌리를 깊이 박고 있던 나라였다. 효종( 孝 宗 ) 때의 북벌론( 北 伐 論 )이라 든가 황명( 皇 明 ) 을 존숭하는 대보단( 大 報 壇 ) 설치와 같은 국가적 사업 등은 조선의 반청( 反 淸 )ㆍ복명( 復 明 ) 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며, 명에 대 한 사신 파견을 조천사( 朝 天 使 ) 라고 불렀던 데 반하여 청에 대해서는 연행사( 燕 行 使 ) 라는 표현을 고집했다는 사실도 이미 상식에 속한다. 또한, 조선은 건국 초부터 유명조선국( 有 明 朝 鮮 國 ) 이라는 표현을 광 범위하게 사용했는데, 이 표현은 대외관계에서는 조선국 이라는 국호를 50 夫 馬 進 (2007), 明 淸 中 國 の 對 朝 鮮 外 交 における 禮 と 問 罪, 夫 馬 進 編, 中 國 東 アジア 外 交 交 流 史 の 硏 究, 京 都 : 京 都 大 學 學 術 出 版 會, 311~353쪽. 51 乾 隆 實 錄 卷 1215, 乾 隆 49 年 9 月 庚 辰, 297쪽, 朝 鮮 國 素 稱 恭 順, 比 於 內 臣 ; 嘉 慶 實 錄 卷 37, 嘉 慶 4 年 正 月 丙 寅, 418쪽, 朝 鮮 國 較 之 諸 外 藩, 歸 命 最 先, 受 恩 尤 重 ; 道 光 實 錄 卷 3, 嘉 慶 25 年 ( 道 光 즉위년-인용자) 8 月 戊 申, 110쪽, 朝 鮮 國 久 列 藩 封, 最 為 恭 順 등을 참조. 31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17 썼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당시 조선에서 이 표현이 애용되었던 것은 조선이 명에 의해 승인된 국가임을 강조함 으로써 고려의 찬탈자라는 비난을 봉쇄하고 조선 건국의 대의명분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하지만 명ㆍ청 교체 이후 유청조선국( 有 淸 朝 鮮 國 ) 이라는 표현은 전혀 쓰지 않고 유명조선국 을 더욱 애용하여 공식적인 왕실 의례에서조차 이 표현을 사용했다. 이 경우 유명조선 국 은 곧 청을 상국( 上 國 )으로 인정하지 않는 조선국( 朝 鮮 國 ) 을 의미하 는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조선은 국왕이 승하할 때마다 청에 시호( 諡 號 )를 요청하여 받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종 묘에 안치된 위패에는 청의 황제가 수여한 시호를 쓰지 않았다. 조선 의 고집스러운 반청 의식은 숭정( 崇 禎 ) 연호에 대한 집착 에서도 확인 된다. 52 이상에서 언급한 사례만으로도 조선이 청에 대하여 그리 공순한 조 공국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충분히 입증된다고 하겠지만, 여기서는 두 가지 사례를 더 들어보겠다. 먼저 책봉 이나 조공 을 보통 정삭( 正 朔 ) 을 받든다 고 표현할 정도로 책봉ㆍ조공관계의 중요한 구성 요소였던 역법( 曆 法 ) 문제이다. 청은 입관 이후인 순치( 順 治 ) 2년(1645)부터 시헌 력( 時 憲 曆 )을 사용하였는데, 53 당시 조선은 이미 청의 정삭( 正 朔 )을 받 드는 처지가 되었고 해마다 역서( 曆 書 )를 수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54 당장에 시헌력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 결과 순치( 順 治 ) 2년(1645, 인 조 23년)부터 순치 10년(1653, 효종 4년)까지 조선은 청과 다른 달력을 52 이성규(2005), 중화제국의 팽창과 축소:그 이념과 실제, 역사학보 186, 역사학회, 115~117쪽. 53 淸 史 稿 卷 45, 1657~1658쪽. 54 同 文 彙 考 ( 國 史 編 纂 委 員 會, 1978 영인본) 원편 券 42, 1a~2b쪽.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17

318 써서 날짜를 표기하게 되었다. 55 물론, 순치 11년(1654)에 이르러 조선 도 시헌력을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이것은 청의 정삭을 받들기 위해 서가 아니라 시헌력이 대통력( 大 統 曆 )보다 정확하다고 인식했기 때문 이다. 56 다음으로 책봉ㆍ조공관계에서 역법 못지 않게 중요한 구성 요소였던 인장( 印 章 )을 보자. 청은 세 차례에 걸쳐 국왕의 인장을 조선에 수여 한 바 있지만, 조선은 이 금인( 金 印 )을 청에 보내는 표문( 表 文 ) 등 사 대문서에만 사용했을 뿐이고, 숙종 38년(1712)에는 명으로부터 받았던 조선국왕지인( 朝 鮮 國 王 之 印 ) 이 찍힌 문서를 발견하자 이를 모각( 模 刻 ) 하여 사위( 嗣 位 )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기간 동안 두 나라의 실록에 보이는 날짜 표기의 차이를 비교해 보면, 어 느 달을 큰 달(30일)로, 어느 달을 작은 달(29일)로 하느냐에 차이가 있었으 며, 윤달을 어디에 두는가도 달랐다. 가령 인조 26년 조선에서는 3월 뒤에 윤 달을 두었지만, 청은 4월 뒤에 윤달을 두었다. 특히 효종 1년의 경우 조선에 서는 11월 뒤에 윤달을 두었으나, 청은 이 해에 윤달을 두지 않고 이듬해 2 월 뒤에 윤달을 두었다. 이 두 가지 차이 때문에 이 기간 동안 두 나라의 정 월 초하루가 달라진 경우가 두 차례나 있었다. 첫째, 조선에서 효종 2년의 정 월 초하루는 청의 순치 8년 정월 초하루보다 30일이 늦었다. 이는 윤달의 위 치와 달의 대소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조선에서 효종 3년의 정월 초하루는 청의 순치 9년 정월 초하루보다 하루가 늦었다. 이는 달의 대소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구범진(2005), 한국사 서술과 역법문제, 역사교육 94, 역사교육연구회, 276~277쪽]. 56 전 관상감 직장 宋 亨 久 가 상소하여 時 憲 曆 을 폐지하고, 도로 大 統 曆 을 사 용할 것을 청했는데, 본감 도제조가 아뢰기를, 曆 數 가 차이 나는지의 여부는 일식과 월식에서 증명될 수 있는데, 舊 法 으로 증명해 보면 많이 차이가 나는 데 반해, 新 曆 으로 증명해 보면 상당히 접근되고 있습니다. 당초에 時 憲 曆 을 쓰기로 정했던 것도 이 이유에서였습니다. 더구나 新 曆 을 쓰도록 이미 先 朝 때 成 命 을 받들었던 만큼 지금 와서 경솔하게 고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옳다 고 비답했다 ( 顯 宗 實 錄, 顯 宗 2 年 閏 7 月 13 日 庚 寅 ). 57 李 光 濤 (1971), 朝 鮮 國 王 之 印 史 事 考, 明 淸 史 論 集, 臺 北 : 臺 北 商 務 印 書 館, 580~581쪽. 31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19 이제 지금까지의 번잡한 논의를 수습할 단계가 된 것 같다. 책 봉ㆍ조공 패러다임 은 애초부터 역사적 현실과 괴리된 중국 중심의 초 역사적 이념형 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떨치기 어렵다. 또한, 적어도 명 이전에 대해서만은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이 유효하다고 인정 하더라도, 이 글의 관심 시기인 17세기 이후의 경우에는 동아시아 여 러 나라 중에서 극히 일부에만 책봉ㆍ조공관계가 지속적인 의미를 지 니고 있었을 뿐이므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구조적 이해를 위한 이 론 틀로서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의 유효성은 인정하기 곤란하다. 게다 가 책봉ㆍ조공과는 무관한 호시체제 의 존재도 엄연히 확인되며, 그것 은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에 의해 적절히 설명되지 않는다. 한편,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속에서 조선을 조공국의 모델 로 규정하 는 인식에 대해서도 심각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청에게 명 실상부한 조공국이 극소수에 불과한 상황에서 조선을 모델 로 꼽는다 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조선의 청에 대한 조공은 어디까 지나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게다가 조선은 반청 의식이 대단히 뿌리 깊었기 때문에, 책봉ㆍ조공관계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 즉 연호, 시호, 역법, 인장 등의 사용에서 결코 공순한 조공국의 태도를 견지하 지 않았다. 3. 명ㆍ청의 불연속성 과 중국 17세기 이후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의 유효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면, 굳이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에 집착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그러나 현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19

320 재의 연구 수준에서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을 대신할 만한 이론 틀을 제시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다만, 몇몇 연구자들이 책 봉이나 조공 같은 용어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은 개념을 제시한 바 있 다. 예컨대, 황즈롄[ 黃 枝 連 ]은 천조예치체계( 天 朝 禮 治 體 系 ) 라는 개념을 내걸었다. 58 그러나 황즈롄의 주된 분석 대상은 여전히 명ㆍ청과 조선의 관계와 그 관계 속에 나타난 예( 禮 )의 언설( 言 說 ) 이었기 때문에, 내용 상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과 질적인 차이를 인정하기 어렵다. 또한 앞서 지적하였듯이, 명ㆍ청과 조선의 관계는 대단히 특이 한 것이어서, 이를 국제질서의 원리로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이와이 시게키는 구래( 舊 來 )의 조공체제와 16세기 이후 뚜렷하게 나 타난 호시체제를 포괄하는 상위 개념으로서 천조체제( 天 朝 體 制 ) 내지 는 중화제국체제( 中 華 帝 國 體 制 ) 라는 용어의 사용을 조심스럽게 제안한 바 있다. 59 그의 제안은 책봉ㆍ조공이라는 예제 용어를 전면에 내세우 지 않았으며, 호시체제를 무난히 포섭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나름의 장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천조( 天 朝 ) 나 중화제국( 中 華 帝 國 ) 이 라는 용어도 결국에는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에서 상용( 常 用 )하는 중국 중심의 용어일 뿐더러, 천조 나 중화제국 이라는 개념이 지시하는 바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대안이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물론 이와이 시게키의 대안은 아직 구체적인 논증 단계에 있는 것 이 아닌 만큼, 앞으로 그의 연구가 이 대안의 내실을 확보하는 수준 까지 진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이와이 시게키는 명에 58 黃 枝 連 (1992ㆍ1994ㆍ1995), 天 朝 禮 治 體 系 硏 究 上 ㆍ 中 ㆍ 下, 北 京 : 中 國 人 民 大 學 出 版 社. 59 岩 井 茂 樹 (2007), 앞의 글, 390쪽. 32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21 대하여 예제패권주의( 禮 制 覇 權 主 義 ) 를 논의한 바 있으므로, 60 천조체 제 또는 중화제국체제 의 하위 체계에 위치할 조공체제 는 곧 예제패 권주의 의 산물인 국제관계를, 그리고 호시체제 는 예제패권주의 와 무 관한 국제관계를 각각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경우 청이 등장한 17세기 이후의 국제질서는 16세기 국제질서의 연속 으로 이해 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명과 청의 연속성 문제가 논점으로 떠오른다. 앞서 지적했듯이,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은 명과 청의 연속성 에 대하 여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국제질서의 이해뿐만 아니라, 명청시대사 ( 明 淸 時 代 史 ) 라는 용어에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명과 청의 역사는 전 반적으로 연속 의 시각에서 연구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입 관 이후 청이 대체로 명의 전장제도( 典 章 制 度 ) 계승을 표방했으며 또 실제도 그러했거니와, 지금까지 명청시대사 연구의 주류를 차지해 온 사회경제사의 시각에서는 명과 청의 연속 을 부인하기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또한 정치사에서 청을 이민족 왕조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조 명( 祚 命 )을 누린 성공한 왕조 로 평가하고, 그 성공의 비결 을 청의 한 화( 漢 化 ) 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견해 또한 명과 청의 연속 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61 그러나 필자는 근래 미국 학계에서 이른바 신청사( 新 淸 史, New Qing History) 라고 불리는 새로운 연구의 조류가 세력을 키우고 있다 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62 청의 제국 건설과 그 성공적인 운영이 60 岩 井 茂 樹 (2005), 明 代 中 國 の 禮 制 覇 權 主 義 と 東 アジアの 秩 序, 東 洋 文 化 85, 東 京 大 學 東 洋 文 化 硏 究 所. 61 Ping-ti Ho(1967), The Significance of Ch ing Period in Chinese History, Journal of Asian Studies 26-2, Association for Asian Studies. 62 新 淸 史 는 청이 만주족의 왕조였다는 사실을 중시하고, 한자 사료뿐만 아니 라 만주어를 비롯한 몽골어, 티베트어, 차가타이어 등 다양한 언어로 기록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21

322 적극적인 한화 에 있다는 시각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민 바 있는 신 청사 연구는, 63 만주어 사료 등 비( 非 )한자 사료의 가치에 주목함과 동 시에 청의 정체성 문제를 천착하여, 청의 일방적인 한화 를 부정하고 오히려 청이 오랫동안 만주족의 정체성 을 유지했음을 강조한다. 64 또 한 어떤 연구자들은 만주족이 건설한 제국( Manchu Empire )인 청이 유럽의 근세 제국(Early Modern Empire)들과 마찬가지로 주변의 소수 민족 에 대하여 제국주의적인 침략 정책을 구사했다고 이해하여, 만 주 제국주의(Manchu imperialism) 혹은 만주 식민주의(Manchu colonialism) 와 같은 새로운 개념을 제창하기도 한다. 65 이러한 주장은 17세기 이후 국제질서의 변동과 그 성격에 대하여 근본적인 재고의 필요성을 촉구하는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일본에서도 청의 역사를 중국 의 청대사( 淸 代 史 ) 가 아닌 대청 제국사( 大 淸 帝 國 史 ) 라는 시각에서 연구하는 학자들이, 역시 만주어를 비롯한 비한자 사료를 활용하면서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를 다수 내 놓으며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여기에 일본의 동북아시아, 몽골사, 티 베트사, 중앙아시아사 연구자들도 청제국의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는 조류에 가담하고 있다. 이들의 연구 역시 청제국의 국가 구조와 성격 된 사료를 구사하여, 내륙아시아 국가로서 청제국의 특성을 강조한다. 新 淸 史 에 대한 소개는, Joanna Waley-Cohen(2004), The New Qing History, Radical History Review 88 ; 歐 立 德 (Mark C. Elliott)(2006), 滿 文 檔 案 與 新 淸 史, 故 宮 學 術 季 刊 24-2;マ ク=エリオット(2008), ヨ ロパ, 米 國 におけ る 滿 洲 學 : 過 去, 現 在, 未 來, 東 洋 文 化 硏 究 10 등을 참조. 63 Evelyn S. Rawski(1996), Reenvisioning the Qing:The Significance of the Qing Period in Chinese History, Journal of Asian Studies Mark C. Elliott(2001), The Manchu Way: The Eight Banners and Ethnic Identity in Late Imperial China, Stanford University Press. 65 만주 식민주의 에 대한 소개는 유장근(2009), 앞의 글 참조. 32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23 은 물론이거니와, 청의 등장 이후 국제질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촉 구하고 있다고 하겠다. 66 미국의 신청사 와 일본의 대청제국사 연구는 과거에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비한자 사료의 가치에 주목하여 새로운 사실을 다수 발 굴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알려진 사실들도 새로운 시각에서 비판적으 로 재해석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신청사 든 대청제국사 연구든 아직 갈 길이 멀기는 하지만,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만 놓고 보더라도 청제국에 대한 역사 연구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할 수 있으며, 앞 으로 연구의 진전 상황에 따라서는 청제국의 역사상을 크게 바꿀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그런데 청제국의 성격에 대한 신청사 나 대청제국사 의 새로운 이해 방식은 명과 청을 연속 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도 우리 에게 시사하는 바가 대단히 크다. 청을 한화 된 제국으로 볼 경우 명 과 청을 연속 으로 파악하는 시각과 명ㆍ청을 연칭( 連 稱 )하는 관습은 별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청이 명과 전혀 다른 성격의 국 가였다고 본다면, 이는 중국 과 중국사 의 이해, 그리고 나아가서는 동아시아 국제질서(명ㆍ청과 조선의 관계도 포함)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 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청사 와 대청제국사 연구자들은 각론에서 적잖은 입장 차이가 있 기는 하지만, 67 총론에서 청을 단순히 중국 의 한 왕조로 보지 않으려 66 일본의 大 淸 帝 國 史 연구에 대해서는 杉 山 淸 彦 (2008), 大 淸 帝 國 史 硏 究 の 現 在 : 日 本 における 槪 況 と 展 望, 東 洋 文 化 硏 究 10을 참조. 67 최근 크로슬리는 新 淸 史 연구자들 가운데 알타이 학파 의 주장을 정면으로 비 판했다[Pamela Kyle Crossley(2009), The Influence of Altaicism on East Asian Studies, Towards a New Paradigm in East Asian Cultural Studies (Proceedings for 2009 Berkeley-KU Forum on East Asian Cultural Studies].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23

324 한다는 점에서는 입장이 일치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연구자가 명쾌 하게 표현했듯이, 청제국은 중국 이상이었다(The Qing was more than China) 는 것이다. 68 바꾸어 말해서 중국 은 청제국의 일부였을 뿐 청 제국 자체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중국 이란 무엇인가 하 는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중국 은 중화민국 또는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 國 號 ) 의 약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중국 이 정식 국호 로 사용된 역사는 약 100년에 불과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 은 국호 로서가 아니라 지리 공간, 영토, 종족, 문화 등 서로 다른 차원(dimension) 이 중첩된 개념이었으며, 그 외연은 시대에 따라 신축( 伸 縮 )을 반복했다. 중국 의 짝을 이루는 이적 개념 역시 동일한 속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중국 과 이적 의 경계는 단지 중국 의 외부[외경( 外 境 )]뿐만 아니라 내부[내경 ( 內 境 )]에도 존재했다. 69 여기서 역사상 중국 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따질 여유는 없을 듯하다. 다만 17세기 초의 중국 이란 무엇이었는지에 초점을 맞 출 경우, 왕부지( 王 夫 之 )에게서 관찰되는 중국 인식이 하나의 기준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왕부지는 북으로는 사막(장성 이남), 서북으로는 황하와 황수( 湟 水, 감숙), 서로는 대천( 大 川 ) 이서(사천), 남 으로는 남해, 교지( 交 趾 )와 합포( 合 浦 )에서 동북의 갈석( 碣 石 ) 까지를 68 James A. Millward(2004), The Qing Formation, the Mongol Legacy, and the End of History, in Early Modern Central Eurasia, Lynn A. Struve, ed., The Qing Formation in World-Historical Time,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p 중국 개념에 대한 논의는 이성규(1995), 中 華 思 想 과 民 族 主 義, 동아시아, 문제와 시각, 문학과지성사;이성규(2005), 앞의 글;김한규(2000a), 앞의 글 등을 참조. 32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25 중국 의 통일 제국이 영토로 편입하지 않을 수 없는 공간으로 보았다. 왕부지는 이 범위를 하나의 완결된 자연구로서 산천의 풍기가 서로 호 흡하고 동질적인 인간이 서로 어울려 살도록 마련된 공간이라고 인식 했다. 70 여기에 나타난 왕부지의 중국 을 지도 위에 그려보면, 17세기 초 명의 영토와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역사적으로 중국 의 통일 제국이 왕부지의 중국 을 벗어나 판 도를 대폭 확장했던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단지 중국 의 왕조였다고 보기 곤란한 몽골 제국(= 大 元 )의 경우를 제외하면, 71 청의 등장 이전 중국 의 통일 제국이 왕부지의 중국 을 벗어난 판도를 지속적으로 유 지한 사례는 찾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 대하여 중국 에서와 마찬가지로 군현제( 郡 縣 制 ) 또는 주현제( 州 縣 制 )의 원리를 적용한 직접 지배를 관철시켰던 경우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연구자는 전성기의 청이 확보한 영토를 대중국 으로 설정하고, 왕부지의 중국 에 해당하는 공간을 소중국 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지만, 72 이런 발상이 과연 왕부지와 같은 17세기의 사람이나 그 이전 시기에 살았던 사람 들에게 수용될 수 있었을까는 대단히 의심스럽다. 이에 이 글에서는 잠정적이나마 역사적 중국 을 통일 제국이 군현 제의 원리를 적용하여 직접 지배한 공간으로 제한하고자 한다. 물론 진( 秦 )ㆍ한( 漢 )제국의 등장 이후 군현제적 직접 지배의 공간 역시 신축 ( 伸 縮 )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대체로 17세기 초 명의 영토와 현격 70 이성규(2005), 앞의 글, 92~93쪽. 71 大 元 이라는 국호가 곧 몽골제국을 의미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김호동(2006), 몽골 제국과 大 元, 歷 史 學 報 192, 역사학회 참조. 72 세오 다쓰히코 저, 최재영 역(2006), 장안은 어떻게 세계의 수도가 되었나, 황금가지, 71~76쪽.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25

326 한 차이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이 글의 관심 대상인 17세기 이후의 경우 중국 이란 곧 명의 영토를 대체로 계승한 청의 18개 직성 ( 直 省 )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73 이와 같은 역사적 중국 과 18세기 후반 전성기에 이르렀던 청제국 의 판도를 비교해 보면, 전자가 후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사 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왕부지의 시각에서 보자면 청은 중국 과 이적( 夷 狄 ) 을 통합한 제국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청과 명은 단지 판도 의 광( 廣 )ㆍ협( 狹 )에서만 차이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신청사 와 대청 제국사 연구에서 지적하듯이, 청은 명과 그 성격 및 구조에서 판이하 게 다른 제국이었다. 이 경우 명이 주도했던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청 이 주도했던 국제질서를 연속 의 시각에서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은 장 황한 논증을 동원할 필요도 없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청을 단지 중국 의 왕조( 王 朝 )로만 볼 수는 없다면, 통치 영역 및 통치 집단의 성격상 중국 의 왕조라 보지 않을 수 없는 명과 조선의 관계를 조선-청 관계와 동질적으로 파악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굳이 신 청사 나 대청제국사 연구자들의 주장에 기대지 않더라도, 조선 명 관계 와 조선-청 관계가 본질적으로 근대 이전 왕조국가( 王 朝 國 家 )의 관계였 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양자의 차별성을 결코 홀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왕조의 주인 이 달라졌다면 그 관계의 성격 또한 달라지지 않 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앞에서 지적했듯이 조선의 대청 ( 對 淸 ) 인식이 대명( 對 明 ) 인식과 천양지차를 보이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의한다면, 조선-청 관계를 조선-명 관계의 연속 으로 이해하는 시각 73 단 18개 直 省 내부에는 중국 의 內 境 이 존재했고, 內 境 바깥의 공간에는 州 縣 制 가 아니라 土 司 ㆍ 土 官 을 통한 간접 지배 방식이 적용되었다는 사실에 주 의해야 할 것이다. 32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27 은 아무래도 수긍하기 어렵다. 74 III. 청제국과 다중체제의 형성 1. 시야의 확대: 동아시아 에서 동유라시아 로 위에서 명과 청의 연속성 에 이의를 제기함과 동시에 역사적 중국 을 17세기 초 명의 영토와 그것을 계승한 청의 18개 직성( 直 省 )으로 한정할 것을 제안했다. 그런데 17~19세기 청이 주도했던 동아시아 의 국제질서는 16세기 중엽 이후의 국제질서( 조공체제 와 호시체제 )와 다 름이 없었을까? 1800년경 청제국의 판도는 단지 과거 명의 영토에 거 의 상당하는 18개 직성에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러시아 연 해주 지역과 만주 전체로부터, 천산산맥 이북에 펼쳐진 준가르 초원까 74 이런 각도에서 朝 鮮 후기의 小 中 華 主 義 (혹은 朝 鮮 中 華 主 義 ) 에 대한 연구는 일면 조선-명 관계와 조선-청 관계의 차이를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이다. 朝 鮮 의 小 中 華 主 義 는 청이 漢 族 이 아닌 滿 洲 族, 즉 오랑캐 의 王 朝 國 家 였기 때문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朝 鮮 의 對 明 認 識 과 對 淸 認 識 의 차이를 강조했을 뿐이다. 또한 조선-청 關 係 를 朝 鮮 의 對 淸 關 係 라는 한국사적 시각만으로 다루는 것도 곤란하다. 이런 시각으로 접 근하다 보면 결국에 가서는 관계의 형식상 유사성(책봉ㆍ조공관계의 지속)만 부 각되어 조선-명 관계와 조선-청 관계의 차별성을 온전하게 드러내지 못할 것이 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27

328 지 포함하는 광활한 몽골 초원을 거쳐, 천산산맥 이남의 동투르키스 탄 그리고 오늘날의 청해성( 靑 海 省 )을 포함한 티베트 전역에 걸쳐 있었 다. 이에 따라 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가 작동하는 육상 공간의 범위 는 보통 북아시아, 내륙아시아, 중앙아시아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는 지역(이하 이 글에서는 중앙유라시아 로 부르겠다)까지 뻗쳐 있었다. 여기 서 청을 중심에 둔 국제질서를 논하는 경우 동아시아 의 범위 문제를 검토해 볼 필요성이 대두한다. 만약 오늘날 한국의 보통 사람들에게 동아시아 의 공간 범위를 어 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한국, 중국, 일본 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를 상식 속의 동아시아 라고 부를 수 있다면, 상식 속의 동 아시아 란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대만), 대한민국, 조선민주 주의인민공화국(북한), 일본국 등의 영토를 포함하는 셈이 된다. 이 경 우 몽골국과 러시아는 물론이거니와 아세안(ASEAN), 즉 동남아시아 국가연합에 포함되어 있는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등은 동아시아 에서 제외된다. 한편, 역사적 공간으로서 동아시아 는 상식 속의 동아시아 보다는 범위가 넓다. 예컨대 중등 역사 교과서에서 동아시아 라고 할 때에는 보통 동아시아 문화권 을 떠올리게 된다. 동아시아 문화권 이란 한자, 유교, 대승불교, 율령 등을 공유했던 역사 공간으로, 상식 속의 동아 시아 에서 배제되는 베트남도 동아시아 문화권 의 속하는 국가로 인정 된다. 여기서 동아시아 문화권 이란 니시지마 사다오 등의 역사 연구 에서 유래한 개념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17~19세기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논의할 때에는, 상식 속 의 동아시아 나 동아시아 문화권 보다는 훨씬 넓은 공간을 시야에 넣 32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29 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이 시기 청제국의 판도와 영향 범위를 고려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동아시아 의 국제질 서 속에서는 한자, 유교, 대승불교, 율령 등의 문화 요소를 공유하지 않았던 다양한 성격의 정치체(polity), 예컨대 몽골 초원의 유목 국가 및 유목민 집단,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도시, 티베트 고원의 국가 및 집단 등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상식 속의 동아 시아 는 물론이거니와 동아시아 문화권 개념에 기초한 동아시아 공간 설정은 적어도 17~19세기의 국제질서를 고찰하는 경우 지나치게 협애 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동아사( 東 亞 史 ) 의 동아시아 공간 설정이 하나의 참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75 동아사 는 동아시아 의 하위 지역 시스템 으로 황하유역, 장강유역, 동남아, 몽골초원, 청장고원, 천산남북, 동북아 등 일곱 지역을 상정하고 있다. 여기서 동남아 에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의 남령( 南 領 ) 이남 지역까지 포함시킨 점이 특히 눈길을 끌기는 하지 만, 전체적으로 볼 때 18세기 말 청제국의 판도(그 대부분은 중화인민공 화국의 영토로 이어졌다)가 동아사 의 공간 설정에 중요한 기준이 되었 다고 볼 수 있다. 즉 1800년을 전후한 시기 청제국의 판도는 7개의 하 위 지역 시스템 모두에 걸쳐 있는 것이다. 특히 천산남북 의 경우는 청의 신강( 新 疆 ) 을 강하게 의식한 설정으로 보이는데, 천산산맥 남쪽 과 천산산맥 북쪽은 생태적으로 보나 주민의 성격으로 보나 단일 지 역으로 설정하는 것이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전자는 오아시스 농경지 대로 위구르족 무슬림이 주민인 데 반하여, 후자는 초원 유목지대로 몽골 유목민이 주민이었기 때문이다. 75 楊 軍 ㆍ 張 乃 和 主 編 (2006), 앞의 책 참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29

330 청제국의 판도와 그 영향 범위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는 이 글에서 도 동아시아 의 공간 범위는 동아사 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설 정하고자 한다. 그러나 하위 지역 시스템 에 관련해서는, 생태 환경과 주민의 성격, 청제국의 지역 구분 등을 동시에 염두에 두고자 한다. 즉 이 글의 동아시아 란 18세기 말을 기준으로 청제국의 지배를 받았 던 여러 정치체 (몽골 초원과 동투르키스탄, 티베트 등)와 청제국의 주변 에 존재했던 여러 국가(러시아, 조선, 일본, 그리고 유럽의 식민지를 포함한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포괄하는 역사 공간을 가리킨다. 76 그런데, 동아시아 라는 공간을 위와 같이 넓게 설정해 놓고 보니, 이를 여전히 동아시아 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부적절해 보인다. 청제국의 판도에 들어간 지역만 놓고 보아도 중앙유라시아 의 일부가 포함되었을 뿐만 아니라, 청의 주변에 존재했던 국가들까지 범위를 넓 혀 보면, 상식 속의 동아시아 는 물론 동아시아 문화권 과는 비교 자 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광범위한 공간을 포괄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76 이 중에서 전자는 다시 다음의 여섯 공간으로 구분하고자 한다. 1 直 省 지 역:과거 명의 영토를 구성했으며, 청제국 아래에서 直 省 이라고 불리며 직접 지배의 대상이 되었던 18개 省 을 가리킨다. 이 지역은 정주 농경 지대로서, 그 주민은 대부분 한족이다. 2 滿 洲 :만주는 청제국의 발상지이며 청제국의 직접 지배 지역이었으나, 直 省 과는 생태 환경에서 차이가 있었으며, 만주에 대한 청제국의 행정 체제는 직성 의 그것과는 분명히 구분되었다. 3 土 司 지 역:오늘날 중국 서남부에 거주하는 여러 소수민족 의 거주지로서, 청제국의 행정 체제에서는 비록 直 省 의 일부로 간주되었으나 청의 지배 형태가 간접적 이었다는 점에서 直 省 과는 구분되어야 한다(이하 몽골, 티베트, 회부 역시 마찬가지이다). 4 몽골:동으로 만주 서북 지역에서 서로는 천산산맥 북쪽에 펼쳐진 드넓은 초원 유목 지대로, 청제국이 盟 旗 제도를 적용했던 지역을 가 리킨다. 역사적으로는 티베트의 일부이긴 하지만 17~19세기 몽골계 유목민이 다수 거주했던 청해 지역도 여기에 포함시킨다. 5 티베트: 18세기 말을 기준 으로 달라이 라마의 통치 범위로 인정되었던 지역을 가리킨다. 6 回 部 :천산 산맥 이남의 위구르계 무슬림 거주 지역으로, 보통 동투르키스탄으로 알려진 지역과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33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31 동아시아 라는 용어에 집착하는 것은 아무래도 곤란하지 않을까? 이 에 이 글에서는 중앙유라시아 지역까지 포괄하기 위하여, 동아시아 대신에 동유라시아 라는 용어의 사용을 제안하고자 한다. 한편, 1500년을 전후하여 세계는 중대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를 필두로 한 유럽 여러 나라들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여, 한편으로는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거쳐, 또 다른 한편으로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너 동아시아 에 모습을 나 타냈다. 물론 18세기까지 아시아에서 유럽 세력의 정치적ㆍ군사적 영향 력은 19세기 이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한 것이었지만, 적어 도 경제적 측면에서는 국제질서의 중요한 한 축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청이 주도하는 동유라시아 국제질서 를 상정하는 경우, 서양 각국도 동유라시아 국제질서의 참여자로 인 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해로를 통해 아시아에 진출한 것과 대조적으로, 러시아가 육로를 거쳐 동유라시 아 국제질서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 또한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할 것이다. 2. 국제질서의 재편과 다중체제의 형성 공간 범위를 동아시아 가 아닌 동유라시아 로 확대했다고 해서 17~19세기 청이 주도했던 국제질서의 구조 및 성격 문제가 저절로 해 명되는 것은 아니다. 이 시기 동유라시아 국제질서에 대한 구조적 접 근을 위하여 또 하나 유념해야 할 점은, 우리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31

332 거대한 청제국이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다. 1580년대 초 누르하치의 거병( 擧 兵 ) 에서 1750년대 말 거대 제국의 판도가 형성되기까지 약 170년의 시간이 걸렸다. 77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질서를 논하는 경우 부지불식 간에 1760년대 이후의 거대 제국 청을 떠올리는 것이 보통이어서, 1750년대까지 청의 흥기와 팽창을 중 심으로 동유라시아 에서 벌어졌던 국제질서의 거대한 변동을 시야에서 놓쳐버리기 십상이다. 동유라시아 국제질서의 거대한 변동이란 단지 청의 지속적인 팽창 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청이 동유라시아 에 존재했던 여 러 국제질서를 통합ㆍ재편하였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다. 여기서 16세 기 말에서 18세기 중엽까지 동유라시아 국제질서의 변동 과정을 개 괄해 보기로 하겠다. 먼저 누르하치 세력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던 16세기 말 동유라시아 의 국제질서를, 동아시아 와 중앙유라시아 로 나누어 스케치해 보자. 동아시아 의 바다 쪽에서는 일본과 아메리카 77 뒤에 좀 더 자세히 서술하겠지만 약 170년에 걸친 청제국 건설 과정의 윤곽은 다음과 같다. 1580년대 초의 擧 兵 이래 점차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한 누르하 치가 후금을 건국한 것은 1616년의 일이었으며, 누르하치가 사망한 1626년까 지 후금의 세력 범위는 요동 및 요서의 일부까지 확장했을 뿐이었다. 홍타이 지의 시대에 후금은 차하르를 비롯한 내몽골의 여러 세력을 장악하는 한편 두 차례에 걸친 침략 끝에 조선을 복속시켰으며, 대원 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청으로 국호를 바꾸었지만, 끝내 중원을 정복하지는 못하였다. 청의 중국 정 복 또한 1644년의 入 關 과 동시에 완성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청이 南 明 세 력을 완전히 제압한 것은 1660년대 초의 일이었고, 三 藩 의 난을 진압하고 대 만에 웅거한 鄭 氏 세력을 일소함으로써 중국 정복을 완성한 것은 1680년대 초의 일이었다. 이 기간에 청의 황제는 순치제에서 강희제로 바뀌었다. 1680년 대 말 준가르의 지도자 갈단과의 대결에 돌입한 청의 강희제는 갈단을 격파하 여 외몽골를 복속시킨 뒤, 1720년대 초까지 청해와 티베트까지 영향력을 확대 하였다. 그러나 청과 준가르의 대결은 옹정제를 거쳐 건륭제의 시대까지 지속 되었다. 청이 준가르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준가르의 지배를 받고 있던 동투르 키스탄까지 판도에 편입시킬 수 있었던 것은 1750년대 말에 이르러서였다. 33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33 대륙에서 생산된 은이 대량으로 유입되는 가운데 밀무역과 왜구 가 기 승을 부렸고, 결국 명은 해금( 海 禁 )ㆍ조공체제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이에 일본은 물론이거니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등을 중요한 참 여자로 하는 호시체제가 형성되었는데, 78 이는 종래의 조공체제와는 그 성격이 다른 새로운 국제질서였다. 한편 16세기의 중앙유라시아 에서 는 티베트 불교의 개혁 교단인 겔룩파가 빠른 속도로 세력을 확장하 기 시작했다. 1570년대 말에는 겔룩파의 지도자 소남 갸초와 알탄 칸 의 역사적 만남으로 달라이 라마가 탄생하였으며, 그 뒤 겔룩파는 몽 골 초원의 유목민 사이에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79 다음으로 17세기의 상황을 보자. 17세기 초 만주에서는 누르하치가 후금( 後 金 )을 건국하고 명과의 무력 대결에 돌입했으며, 몽골에서는 차 하르의 릭단 칸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1630년대가 되자 누르하치 의 계승자 홍타이지가 차하르 세력을 제압했으며, 이를 계기로 대청 ( 大 淸 ) 의 성립과 황제 즉위를 선포함으로써, 명 중심의 기존 국제질서 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대항 질서의 구축을 기도했다. 80 이 무렵 조선 78 岩 井 茂 樹 (2004), 十 六 世 紀 中 國 における 交 易 秩 序 の 摸 索 : 互 市 の 現 實 とその 認 識, 岩 井 茂 樹 編, 中 國 近 世 社 會 の 秩 序 形 成, 京 都 : 京 都 大 學 人 文 科 學 硏 究 所. 한편, 육지 쪽에서는 몽골의 알탄 칸이 세력을 떨치며 명에 심각한 위 협이 되었다. 알탄의 위협은 명이 그를 順 義 王 에 책봉하는 모양새를 갖추 면서 변경의 교역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해소되었다[Morris Rossabi(1998) The Ming and Inner Asia,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 8,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236~237]. 79 Morris Rossabi(1998), pp. 237~238 ;김성수(2004), 티벳불교권의 형성과 청조 번부지배체제, 명청사연구 22, 명청사학회, 116~121쪽. 80 Gertraude Roth Li(2004), State Building before 1644,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 9,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27~72 ; 石 橋 崇 雄 (2000), 大 淸 帝 國, 東 京 : 講 談 社, 64~110 쪽;Pamela Kyle Crossley(1999), A Translucent Mirror :History and Identity in Qing Imperial Ideolog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pp. 205~215; 김성수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33

334 은 청이 구축하는 새로운 대항 질서에의 동참을 거부했지만, 청의 무 력 침공을 받아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81 이는 명 중심의 기존 질서에 일대 타격을 가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1644년 명의 붕괴라는 돌발적인 사태가 전개되는 가운데 청은 입관 ( 入 關 )에 이어 북경 입성에 성공했으며, 청의 순치제( 順 治 帝 )는 자금성 ( 紫 禁 城 )에서 명을 계승하는 중국 의 수명천자( 受 命 天 子 ) 로 즉위했다. 82 이후 청의 중국 정복 사업은 168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는데, 입관에 서 중국 정복에 이르는 청제국 건설 과정은 곧 1630년대 홍타이지가 구축한 청 중심의 대항 질서가 명 중심의 구질서를 통합하는 과정이 었다고 할 수 있다. 1643년 홍타이지의 사후 성경( 盛 京 )에서 청의 제 위( 帝 位 )에 올랐던 순치제( 順 治 帝 )가 년 자금성에서 또 한 차례 즉위식을 올렸던 것은 청 중심의 세계 가 명 중심의 세계 를 통합했음 을 선언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1630년대 중앙유라시아 에서도 대청 의 등장에 못지않게 중대 한 국제질서의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무렵 티베트 불교는 몽골 초원의 지배적인 종교로 성장하였으며, 티베트 불교의 여러 교파는 초 원 유목 세력을 교파 간 경쟁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년대 호쇼트 부의 지도자 구시 칸이 준가르 초원에서 청해로 이동했으며, (2004), 위의 글, 111~113쪽. 81 한명기(2009), 앞의 책, 140~155쪽. 82 順 治 實 錄 卷 9, 1985, 91~92쪽. 83 順 治 實 錄 卷 1, 1985, 32~33쪽 년 홍타이지가 차하르를 포함한 내몽골 지역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도 티베트 원정에 나섰던 릭단 칸이 1634년 靑 海 에서 천연두에 걸려 사망한 탓 에 내몽골에 권력의 공백이 초래된 덕분이었다[ 杉 山 淸 彦 (2009a), マンジュ 國 から 大 淸 帝 國 ヘ, 岡 田 英 弘 編, 淸 朝 とは 何 か, 東 京 : 藤 原 書 店, 84쪽]. 33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35 겔룩파의 달라이 라마 5세는 그의 지원을 등에 업고 1640년대 초 라 싸에 달라이 라마 정권을 수립하였다 세기 중엽 동아시아 에서는 청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의 재편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중앙유라시아 에서는 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하에서는 후자의 새로운 질서가 형성된 공간 을 몽골 티베트 세계 라고 부르기로 하겠다. 수렵과 농경, 그리고 유목 경제가 공존하는 만주 지역에서 일어난 후금 청은 일찍부터 몽골의 정치적ㆍ문화적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 을 뿐만 아니라, 86 초기의 성장 과정에서도 만주 지역 서부의 몽골 세 력을 팔기로 흡수하였다. 또 1630년대 내몽골을 정복한 이후에는 몽 골 제부( 諸 部 )의 유목민을 팔기에 흡수하여, 그들을 팔기몽고로 조직 하거나, 혹은 외번으로 복속시켜 몽고아문(1638년 이후에는 이번원)의 관리 아래에 두었다. 87 청은 몽골의 왕공 세력(보르지긴씨)과 혼인 관계 를 맺고 고위의 작위를 수여함으로써 그들을 대명 전쟁의 동맹 세력 으로 포섭했다. 88 따라서 청은 이미 입관 전부터 몽골 티베트 세계 의 일원이 되었다 고 할 수 있으며, 년대 초 달라이 라마 5세가 청의 초청으로 북 경을 방문한 사건은 청과 몽골 티베트 세계 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 85 그루세 저, 김호동 등 역(1998),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사계절, 724~725쪽. 86 David M. Farquhar(1968), The Origins of the Manchus Mongolian Policy, John K. Fairbank, ed., The Chinese World Order: Traditional China s Foreign Relations, Cambridge, MA:Harvard University Press. 87 郝 維 民 ㆍ 齊 木 德 道 爾 吉 主 編 (2006), 內 蒙 古 通 史 綱 要, 北 京 : 人 民 出 版 社, 357~392쪽 참조. 88 杜 家 驥 (2003), 淸 朝 滿 蒙 聯 姻 硏 究, 北 京 : 人 民 出 版 社 참조. 89 김성수(2004), 앞의 글, 128쪽.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35

336 여준다고 하겠다. 90 단,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1680년대까지는 청이 몽골 티베트 세계 의 패권을 장악한 존재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1670년대 중국 에서 삼번의 난이 벌어지고 있을 무렵, 중앙유라시아 에서는 준가르의 갈단이 강자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청이 몽골 티베 트 세계 의 맹주로 부상한 것은 1680년대 말 갈단의 할하 침공을 신 호탄으로 한 준가르와의 대결이 끝을 맺은 뒤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년대 말 시작된 청과 준가르의 전쟁과 관련하여, 이 무렵 러시 아 세력이 동유라시아 국제질서의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다는 사실도 유념해야 한다. 16세기 중엽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을 차례로 멸망시킴으로써 타타르의 멍에 를 벗어던진 러시아는, 16세기 말 우랄 산맥 동쪽의 시빌 칸국을 무너뜨렸고, 이후 모피를 찾아 동쪽으로 동 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우랄 산맥을 넘은 지 불과 60년 만 에 오오츠크에 도달한 러시아는, 일찍이 1650년대에 흑룡강 유역에서 청과 무력 충돌을 벌이기도 하였다. 1650년대의 군사적 좌절에도 불 구하고, 러시아는 흑룡강 유역 진출을 단념하지 않았다. 1660년대 후 반 바이칼 호 방면에서 많은 러시아인들이 흑룡강 유역으로 이주했고, 1680년대 초에는 알바진을 중심으로 다수의 정착촌을 건설했다. 92 이에 청은 흑룡강 지역에서 러시아와 전쟁에 돌입했다. 1683년부터 알바진을 두고 두 나라의 공방전이 전개되었으나,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양국은 교섭에 의한 해결을 도모하여, 1688년 양국 전권대표 90 김성수(2008), 五 世 달라이 라마 北 京 行 의 배경과 17세기 내륙아시아 네트워 크, 명청사연구 29, 명청사학회. 91 김성수(2004), 앞의 글, 128쪽. 92 菊 池 俊 彦 (1998), 北 方 世 界 とロシアの 進 出, 岩 波 講 座 世 界 歷 史 13 東 アジア 東 南 アジア 傳 統 社 會 の 形 成, 東 京 : 岩 波 書 店, 121~148쪽; 吉 田 金 一 (1984), ロシ アの 東 方 進 出 とネルチンスク 條 約, 東 京 : 東 洋 文 庫, 25~44쪽. 33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37 간의 회담을 개최하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바로 이 시점에 갈단이 할 하를 침공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청은 갈단의 준가르와 러시아의 동맹 체결 가능성을 우려하여, 러시아와 네르친스크조약 (1689년)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호혜와 평등에 기초한 평등 조약이었다. 93 청과 러시아의 조약 체결은 국제질서의 맥락에서 볼 때 종래 동아 시아 에 존재했던 조공체제나 호시체제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새로운 국제관계가 등장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청과 러시 아는 1727년에 두 번째의 조약( 캬흐타조약 )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 역 시 준가르와 러시아의 동맹 가능성을 봉쇄하기 위한 청의 전략적 필요 에서 나온 것이었다. 94 비록 청이 조약을 체결한 나라는 러시아 하나뿐 이었지만, 여기서는 청이 주도하는 동유라시아 국제질서의 하위 체제 의 하나로서 청과 러시아의 조약 관계를 조약체제 라고 부르기로 한다. 다시 준가르와 청의 대결로 눈을 돌려보자. 네르친스크조약 체결 이후, 강희제는 1690년 친정을 통해 갈단의 남하를 저지했고, 이듬해 인 1691년에는 돌론 노르의 회맹에서 할하를 정식으로 복속시켰다. 이어서 강희제는 1696년의 친정에서 갈단을 격파했고, 그 뒤로도 두 차례 더 친정에 나섰다. 95 강희제와 갈단의 대결은 1697년 갈단의 죽음으로 끝이 났지만, 청 93 Mark Mancall(1971), Russia and China: Their Diplomatic Relations to 1728, Harvard University Press, pp. 111~162. 청과 러시아의 평등 조약 체 결이 가능했던 데에는 당시 유럽의 국제법 관련 저작이 이미 예수회 선교사 에 의해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 회담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참가했다 는 점도 작용했다[Peter C. Perdue(2005), China Marches West: The Qing Conquest of Central Eurasia,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pp. 174~208]. 94 吉 田 金 一 (1984), 앞의 책, 127~148쪽;Mark Mancall(1971), pp. 208~ Peter C. Perdue(2005), pp. 74~208.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37

338 과 준가르의 대결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특히 갈단의 죽음을 계기 로 달라이 라마 5세가 이미 1682년에 사망했다는 사실이 공개되자, 몽골 티베트 세계 에서는 달라이 라마의 후계를 둘러싼 갈등이 폭발 했다. 호쇼트의 라짱 칸, 준가르의 체왕 랍탄 그리고 청의 강희제가 개입한 달라이 라마 쟁탈전 이 전개되었고, 이 싸움은 1720년 달라이 라마 7세를 호위하고 라싸에 입성한 청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로써 청은 몽골-티베트 세계 의 정신적 지주인 달라이 라마를 보호 아래 두기 시작했지만, 준가르의 세력은 여전히 강력했다. 1730년대 초 청 은 준가르와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치른 끝에 알타이 산맥을 경계로 강화를 맺어야 했다. 96 청과 준가르의 대결이 전자의 최종 승리로 끝 을 맺은 것은, 갈단 체링의 사후 벌어진 준가르의 내분을 틈타 단행된 청의 준가르 원정이 성공을 거둔 1750년대 말의 일이었다. 이때 청은 준가르 치하에 있던 동투르키스탄도 정복했다 년대에 복속한 할하 몽골과 18세기에 이르러 판도에 들어온 청 해 몽골과 준가르 초원의 잔존 유목민 그리고 1630년대에 준가르 초 원을 떠나 볼가 강 유역으로 이주하였다가 1771년에 이르러 다시 고향 으로 귀환한 토르구트 98 등에 대하여, 청은 기본적으로 내몽골 제부 ( 諸 部 )의 맹기제( 盟 旗 制 )를 확대ㆍ적용했고, 동투르키스탄의 위구르 무 슬림에 대해서는 벡(beg, 伯 克 ) 제도를 적용했다. 99 이로써 내몽골, 외몽골(할하), 서몽골(준가르), 청해( 靑 海 ), 티베트, 동 투르키스탄 등으로 구성된 청의 외번체제( 外 藩 體 制 ) 또는 번부체제( 藩 96 Peter C. Perdue(2005), pp. 209~ Peter C. Perdue(2005), pp. 270~ Peter C. Perdue(2005), pp. 292~ 劉 子 揚 (1994), 淸 代 地 方 官 制 考, 北 京 : 北 京 紫 禁 城 出 版 社, 347~378쪽. 33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39 部 體 制 ) 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1636년 차하르의 복속 과 몽고아문( 蒙 古 衙 門, 理 藩 院 의 전신)의 설치에서 번부체제 가 탄생되었 다고 한다면, 이후 약 140년에 달하는 시간을 거치면서 번부체제 가 확대ㆍ완성되는 과정은 결국 청이 몽골 티베트 세계 를 제국 체제에 통합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청이 러시아와 두 차례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약체제 가 동유라시아 국제질서의 일 각을 구성하게 되었는데, 청의 러시아 외교가 이번원( 理 藩 院 )의 관할 아래 있었다는 사실이 상징하듯이, 청의 입장에서 러시아 문제는 몽 골 티베트 세계 의 국제질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고 하겠다. 요컨대, 16세기의 동유라시아 에는 복수의 국제질서가 등장하거나 태동 중이었고, 17세기 이후 이들 복수의 국제질서를 재편하면서 하나 로 통합한 것이 곧 대청제국이었던 것이다. 즉 16세기 동아시아 에는 종래의 조공체제와는 성격이 다른 호시체제라는 새로운 국제관계가 형 성되었고, 중앙유라시아 에서는 몽골-티베트 세계 의 새로운 질서가 태 동했다. 동아시아 와 중앙유라시아 가 교차하는 만주라는 공간에서 탄 생한 후금-청은 일찍부터 두 질서 모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1630년대 내몽골 정복을 계기로 청은 한편으로 몽골 티베트 세계 의 국제질서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명 중심 의 국제질서에 대항하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1640년 100 청제국의 몽골 티베트 세계 에 대한 지배체제는 外 藩 體 制 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가타오카 가즈타다[ 片 岡 一 忠 ]가 지적한 바 와 같이, 청은 원래 몽골의 왕공들을 가리켜 外 藩 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 나, 人 的 개념이었던 外 藩 에 地 理 的 개념이 결합되면서 藩 部 라는 용어가 쓰 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片 岡 一 忠 (2008), 앞의 글, 379~381쪽]. 그러나 여기 에서는 일단 藩 部 體 制 라는 용어를 쓰기로 하겠다. 外 藩 보다는 藩 部 가 더 일반적으로 사용될 뿐만 아니라, 이 글의 맥락에서는 지리적 공간도 중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39

340 대에서 1750년대 말에 이르는 약 120년의 시간은 청이 명 중심의 국 제질서와 몽골-티베트 세계 를 통합하면서 동유라시아 라는 공간에 새 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이었다. 그 결과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동 유라시아 에는 청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가 완성되었다. 지금까지 16세기 거대한 변동이 일기 시작한 동유라시아 의 국제질 서가 17~18세기를 거치면서 청제국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을 거칠 게 스케치해 보았다. 그렇다면, 18세기 후반의 시점에서 동유라시아 의 국제질서는 어떤 구조의 질서로 묘사할 수 있을까? 101 앞에서 청제 국의 지배 아래에 있던 여섯 가지 하위 공간을 열거한 바 있는데, 102 그중에서 만주 와 직성 지역은 청 황제의 직접 지배 대상이었다. 청의 발상지였던 만주 에는 다수의 주방( 駐 防 )이 설치되었고, 만주 의 행정 은 세 명의 장군을 정점으로 하는 주방체제( 駐 防 體 制 ) 로 운영되었 다. 103 직성 은 과거 명의 영토와 대략 일치하는 지역으로, 직성 에 거 주하는 민인( 民 人 ), 곧 한인( 漢 人 )은 중국 의 전통적인 주현체제( 州 縣 體 制 ) 아래에 있었다. 한편, 지리적으로 직성 의 내부에 위치했으나 중 101 청이 구축한 동유라시아 국제질서의 구조와 성격은, 八 旗 制 를 중심으로 한 大 淸 帝 國 의 지배구조와 통일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으나, 이 글에서는 大 淸 帝 國 의 지배구조 문제는 일단 논외로 삼는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스기야마 기요히코[ 杉 山 淸 彦 ]의 명쾌하고 설득력 있는 논의를 참고하기 바란다[ 杉 山 淸 彦 (2009b). 大 淸 帝 國 の 支 配 構 造, 岡 田 英 弘, 編, 淸 朝 とは 何 か, 東 京 : 藤 原 書 店, 132~149쪽; 杉 山 淸 彦 (2009c), 大 淸 帝 國 の 支 配 構 造 と 八 旗 制 :マンジュ 王 朝 としての 國 制 試 論, 中 國 史 學 18, 159~180쪽]. 한편, 가타오카 가즈타다는 청의 支 配 體 制 를 汗 體 制 와 中 華 王 國 體 制 의 이원구조로 도식화하고, 그것 이 청 말에 이르러 일원구조로 변화했다고 파악했는데[ 片 岡 一 忠 (2008), 앞의 글, 381~382쪽], 그의 논의 또한 참고할 가치가 충분하다. 102 각주 76) 참조. 103 만주의 주방체제 에 대해서는, 구범진(2006), 淸 代 滿 洲 지역 행정체제의 변 화: 駐 防 體 制 에서 州 縣 體 制 로, 동북아역사논총 14, 동북아역사재단 참조. 34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41 국 의 내경( 內 境 ) 바깥에 거주했던 비한족은 이미 청의 중국 정복 이 전부터 토사( 土 司 )ㆍ토관( 土 官 )을 통한 간접 지배 아래에 있었으며, 청 제국의 등장 이후에도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여전히 간접 지배를 받았 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들 토사 지역은 청 황제의 간접 지배를 받 았다는 점에서 몽골, 티베트, 회부 등과 동렬에 위치시킬 수도 있으 나, 여기에서는 번잡함을 피하기 위하여 일단 국제질서의 고려 대상에 서 제외하기로 한다. 이렇게 되면, 여섯 가지 하위 공간 중에서 몽 골, 회부, 티베트 의 세 지역만이 남게 된다. 이 세 지역을 총괄하여 번부라고 부른다면, 18세기 후반 청을 중심으로 한 동유라시아 국제 질서는 1 조공체제, 2 호시체제, 3 조약체제, 4 번부체제 등 네 가지 하위 체제로 구성되는 다중체제( 多 重 體 制 )였다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1~4에서 앞의 세 가지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간주할 수 있다. 단, 국민국가(nation state)의 등장 이 전에 국가 대 국가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주권자 대 주권자의 관계였음 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1~3은 역사적 연원에서 근본적인 차 이가 있었다. 1의 조공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외교 상의 예제인 책봉 조공은, 고대 이래 주변 국가의 군주가 중국 의 황제와 외교 관계를 맺고자 할 때 요구되는 일종의 프로토콜 로, 형식상 상하관계의 형식 을 취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3의 조약체제는 17세기 유 럽에서 유래한 국제법 원리 위에서 맺어진 관계로, 조약 쌍방의 주권 자 사이에 형식상 평등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중국 의 황제 로서는 결코 용인할 수 없는 관계였지만, 청이 넓은 의미의 몽골 문제 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취한 전략적 선택이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할 것 이다. 말하자면, 청은 중국 이 아닌 대청국( 大 淸 國, Daicing Gurun) 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41

342 입장에서 러시아를 상대했던 것이다. 1과 3이 주권자 대 주권자의 외교 관계였다면, 2는 주권자끼리 의 정치적 관계를 전제하지 않는 것이었다. 즉 2는 주권자 간의 외 교 가 아닌 경우 용인되는 경제적 관계였던 것이다. 이와이 시게키는 에도 막부의 정덕신례( 正 德 新 例 ) 실시를 둘러싼 청과 일본과의 교역 문 제를 검토하여, 일본이 청과 정부 차원의 접촉을 통하지 않고도 원하 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이를 침묵외교( 沈 默 外 交 ) 라고 명명한 바 있지만, 104 당시 청의 입장에서 정덕신례의 실시는 어디까지나 상인 대 상인의 문제였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외교 문제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끝으로 4는 관점에 따라 국제질서의 일부로 보지 않을 수도 있다. 4의 공간이 대부분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가 되었기 때문이 다. 그러나 번부체제가 완성된 것은 18세기 후반의 일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18세기 후반 이후에도 청과 번부의 관계는 오 늘날의 시각에서 국내 질서로 처리해 버리기 곤란한 측면이 존재했기 때문에, 맨콜의 경우도 청과 번부의 관계를 조공체제 의 일부로 파악 했다. 번부를 구성하는 몽골, 티베트, 동투르키스탄 등의 지배층과 청 의 황제가 맺은 관계는 대단히 큰 편차를 보이고 있었지만, 여기에서 필자가 이를 자세히 논의할 능력과 여유는 없을 듯하다. 단, 청과 번 부의 관계에도 형식상 책봉ㆍ조공의 예제가 적용되긴 했지만, 1의 조 공체제와는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다는 사실만 지적해 두고자 한다. 예 컨대, 청 황제가 몽골의 왕공들과 맺은 관계는 단순한 상하관계라기보 104 岩 井 茂 樹 (2007), 앞의 글 참조. 34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43 다는 동맹관계의 색채가 농후했으며, 105 청 황제가 달라이 라마를 정점 으로 하는 티베트 불교 교단과 맺은 관계는 시주( 施 主 )와 교단의 관계 [단월관계( 檀 越 關 係 )] 라는 성격이 강했다. 106 한편 청사고( 淸 史 稿 ) 권529를 보면, 구르카와 코칸드 등이 속국전 ( 屬 國 傳 ) 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다. 이는 청사고 가 이들 국가를 조선 등과 마찬가지의 범주에 위치시켰음을 의미한다. 사실 조공의 예제가 적용되었다는 점에서 코칸드, 키르기즈, 카자흐, 구르카 등 중앙유라 시아의 여러 세력도 조공국 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러나 청제 국은 이들을 1의 조공체제에 속하는 조선 등과 명확히 다른 외번( 外 藩 )의 외연국( 外 緣 國 ) 으로 인식하여, 이들의 조공에 대한 업무를 예부 ( 禮 部 )가 아닌 이번원에 맡겼고 번부의 몽골 왕공 등에 적용한 것과 같은 예제를 적용하였다. 107 따라서 이들 역시 1의 조공체제보다는 4 의 번부체제에 위치시키는 것이 더 타당할 것으로 판단된다. 105 大 淸 帝 國 의 支 配 構 造 를 설득력 있게 분석한 스기야마 기요히코는, 大 淸 帝 國 은 어떤 면에서 八 旗 를 거느리는 아이신 기오로[ 愛 新 覺 羅 ]의 內 왕공과, 자 사크 旗 를 거느리는 몽골 왕공을 정점으로 하는 外 왕공의 연합이었던 것이 다 고 하면서 청제국이 본래 만주ㆍ몽골의 연합정권이었음을 강조했다[ 杉 山 淸 彦 (2009b), 앞의 글, 141~143쪽]. 106 平 野 聰 (1997), チベット 佛 敎 共 同 體 と 中 華 : 淸 朝 期 多 民 族 統 合 の 一 側 面, 國 家 學 會 雜 誌 100-3ㆍ4;김한규(2000), 티베트와 중국:그 역사적 관계에 대 한 연구사적 이해, 소나무, 107~168쪽 참조. 107 片 岡 一 忠 (2008), 앞의 글, 378~379쪽.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43

344 IV. 다중체제 속에서 조선의 위상 동유라시아 라는 공간에 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 되고 있던 17~18세기 동안에 조선과 청의 관계 또한 적잖은 변화를 겪어야 했다. 1630년대 조선은 무력에 의한 정복 을 통해서 청이 주도 하는 새로운 국제질서에 강제적으로 편입되었다. 108 외형상 조선-명 관 계와 마찬가지로 책봉과 조공이라는 형태가 유지되긴 했지만, 조선-청 관계의 전개 양상과 성격은 실질적인 측면에서 조선-명 관계와 중대한 차이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청의 중국 정복이 끝나기 전까지 조선-청 관계에는 아슬아슬한 긴장 상태(예컨대 청의 내정 간섭이나 조선 의 북벌( 北 伐 ) 추진 등)가 이어졌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선 이후에는 양국관계가 안정 국면에 접어들었고, 109 조선은 사실상 내정과 외교를 자주( 自 主 ) 하는 나라가 되었다. 110 필자의 역량으로 보나 지면의 제약으로 보나, 이 글에서 17~18세기 조선-청 관계의 역사적 변화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여유는 없을 것 같 으므로, 이하에서는 청이 조선에 파견했던 칙사( 勅 使 )의 인선( 人 選 ) 문 제를 소재로 삼아 동유라시아 의 다중체제 속에서 조선의 위상을 새 108 한명기(2009), 앞의 책, 228~234쪽. 109 홍성구(2005), 18세기 중국의 조선인식: 阿 克 敦 의 朝 鮮 出 使 와 東 游 集 奉 使 圖 를 통해 본 朝 淸 關 係, 그리고 그 시대적 특징, 15~19세기 중국인의 조선인식, 고구려연구재단 참조. 110 通 文 館 志 卷 11 紀 年 續 編, 今 上 15 年 戊 寅, 我 國 久 隷 中 國 而 政 令 均 歸 自 理 其 爲 中 國 所 屬 固 天 下 所 共 知 其 爲 自 主 之 國 亦 天 下 所 共 知. 34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45 롭게 설정할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자 한다.111 지금까지 조선이 파견한 사행(使行)에 대해서는 일일이 열거하기 곤 란할 정도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으나,112 청이 조선에 파견한 사신(使 臣), 즉 칙사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113 이에 필자는 청이 조선에 파견했던 칙사들의 관직과 이름이 기록된 동문휘고(同文彙考) 보편 (補編) 권9의 조칙록 을 검토해 보았다. 동문휘고 의 조칙록 을 기준 으로 삼을 경우,114 입관 이후 광서(光緖) 7년까지 청이 조선에 파견한 사행은 모두 150회(연인원 349명)였는데,115 조칙록 의 칙사 명단과 칙 사의 인선에 관한 사료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면, 청은 원칙적 으로 조선에 파견하는 칙사를 고급 관원(1품~3품) 가운데에서 선발하 였고, 청은 조선에 파견하는 칙사의 인선에서 한인(漢人) 관료를 배 111 이하의 내용은 구범진(2008b), 청의 朝鮮使行 人選과 大淸帝國體制, 人 文論叢 59,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의 논의를 정리한 것이다. 112 고구려연구재단 편(2004), 韓中關係史 연구논저 목록(중세), 82~149쪽 참조. 113 다만 최근 阿克敦이 남긴 조선 방문 기록을 분석하여 18 세기 朝淸 관계 의 특징을 규명한 연구[홍성구(2005), 앞의 글], 19세기 전반 조선을 방문했 던 두 칙사(柏葰과 花沙納)의 기록을 분석한 연구 등이 나온 바 있다[兪春 根(1994), 淸 冊封使 花沙納의 朝鮮 見聞, 嶺東文化 5, 관동대학교 영 동문화연구소; 구범진(2004), 19세기 전반 淸人의 朝鮮使行: 柏葰(1844년)과 花沙納(1845년)의 경우, 史林 22, 수선사학회]. 또한 중국에서는 조선 청 의 사신 왕래를 다각도에서 해명한 종합적인 연구서가 출간되기도 했다[劉爲 (2002), 淸代中朝使者往來硏究, 哈爾濱: 黑龍江敎育出版社]. 114 詔勅錄 은 엄밀히 말하자면 별개의 使行일지라도 동시에 입국한 경우라면 하 나의 使行으로 취급하여 기록하였다. 따라서 詔勅錄 을 기준으로 할 경우 사행의 파견 횟수는 실제보다 적게 된다. 115 詔勅錄 에 따르자면, 청이 조선에 파견한 칙사는 順治 연간에 39회, 康熙 연간에 54회, 雍正 연간에 14회, 乾隆 연간에 18회, 嘉慶 연간에 8회, 道光 연간에 10회, 咸豊 연간에 3회, 同治 연간에 2회, 光緖 연간에 4회 등 도합 152회였다( 同文彙考 補編 卷9, 詔勅錄, 4b~49b쪽). 그러나 여기에서는 順治 元年이지만 입관 전에 있었던 2회의 칙사 파견은 논외로 처리했다.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45

346 제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런데 명이 조선에 파견한 칙사의 명단을 정리한 근년의 연구를 보 면, 명이 조선에 파견한 칙사는 거의 대부분이 하급 관원이거나 환관 ( 宦 官 )이었다. 116 이는 a b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칙사 인선이었다. 따라서 a b는 적어도 칙사 파견에 관한 한 조선-청 관계에 조선-명 관계와 엄연히 성격을 달리하는 측면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 력히 시사한다. 다른 한편으로, 공시적( 共 時 的 )으로 청이 구축한 동유 라시아 다중체제 속에서 조선의 위상을 재검토해 볼 필요성을 제기한 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맨콜의 이원구조 론에서 조선은 류큐 및 베 트남과 같은 범주에 속한 나라였다. 만약 청이 조선, 류큐, 베트남 등을 동일한 범주의 국가로 인식했다면, 청이 류큐와 베트남에 보낸 칙사의 인선에서도 조선의 경우와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청이 류큐와 베트남에 파견한 칙사는 조선의 경우와 대조적 으로 5품 이하의 하급 관원을 인선 대상으로 했으며 만( 滿 )ㆍ한( 漢 )을 가리지 않았다. 즉 청이 조선에 파견한 칙사의 인선과 류큐ㆍ베트남에 파견한 칙사의 인선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던 셈인데, 전자의 인선 유형을 조선형( 朝 鮮 型 ), 후자를 류큐형( 琉 球 型 ) 으로 부른다면, 두 유형의 첫 번째 차이로는 조선형 이 3품 이상의 고급 관원을 인선 대상으로 한 반면 류큐형 은 5품 이하의 하급 관원을 대상으로 하였 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두 번째 차이로는 조선형 이 기인( 旗 人 ) 관료만 을 인선 대상으로 하였지만 류큐형 은 만ㆍ한을 가리지 않았다는 사실 을 들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조선에 칙사를 파견할 때에는 한인( 漢 116 高 艶 林 (2004), 明 朝 與 朝 鮮 王 朝 之 間 的 使 臣 往 來, The Final Research Results Supported by the KFAS International Scholar Exchange Fellowship Program, 193~200쪽. 34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47 人 ) 관료가 배제되었던 반면에 류큐와 베트남의 경우에는 한인 관료가 포함되었던 것이다. 두 유형의 차이를 낳은 원리 를 명시적으로 밝힌 사료는 보이지 않 지만, 청의 조선사행 인선에서 놀라울 정도의 일관성을 유지하며 나타 난 한인 관료의 배제 현상은 청의 칙사 인선에 모종의 원리 가 작동하 고 있었을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한다. 먼저 두 유형의 첫 번째 차이 는 조선이 청에 입공( 入 貢 )하게 될 때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 으로 보인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병자호란의 결과 조선의 인조( 仁 祖 ) 는 삼전도( 三 田 渡 )에서 치욕스러운 항복 의식을 치러야 했는데, 당시 인조가 삼전도의 치욕을 겪어야 했던 숭덕( 崇 德 ) 2년 정월( 正 月 ) 경오 ( 庚 午 )의 상황을 전하는 다음 기록에 주목해 보자. 禮 部 의 관원이 李 倧 의 班 次 [를 어찌 할지] 奏 請 하자, 황제께 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위세로써 그를 떨게 하는 것은 덕으로써 그를 품는 것만 못하다. 朝 鮮 의 王 은 비록 兵 勢 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來 歸 하였지만, 역시 一 國 의 王 이다. 命 을 내려 앞으로 다가 와 왼쪽에 앉게 했다. 그 다음으로는 왼쪽에 和 碩 親 王, 多 羅 郡 王, 多 羅 貝 勒 등의 순서대로 앉았고, 李 倧 의 長 子 李 왕이 貝 勒 의 아래에 앉았다. 117 이 기록에 의하면, 청의 태종은 이덕회지( 以 德 懷 之 ) 의 차원에서 당 시 제2위의 자리에 인조[이종( 李 倧 )]를 앉혔고, 그 이유로 인조가 엄연 117 太 宗 實 錄 卷 33, 崇 德 2 年 正 月 庚 午, 432쪽.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47

348 한 일국지왕( 一 國 之 王 ) 이라는 사실을 내세우고 있다. 118 청 태종은 인 조가 남의 신하 가 아니라 엄연한 주권자 인 남의 임금 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던 셈이다. 물론 청 태종의 이러한 태도는 후고( 後 顧 )의 염려를 덜기 위한 전략 적 계산에서 나온 제스처에 불과할 수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조선국왕( 朝 鮮 國 王 )의 반차( 班 次 )는 황제에 다음 가는 자리로 결정되었 다. 이것은 조선형 칙사의 인선에서 3품 이상의 고급 관원을 대상으 로 삼는다는 원칙의 성립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즉 강희( 康 熙 ) 12년에 정해진 종실( 宗 室 ) 봉작( 封 爵 )의 책봉에 관한 의례 를 보면, 군왕( 郡 王 ) 이상을 책봉할 때에는 내대신( 內 大 臣 )이나 산질대 신( 散 秩 大 臣 )을 정사로, 내각( 內 閣 )과 한림원( 翰 林 院 )의 학사( 學 士 )나 예 부시랑( 禮 部 侍 郞 )을 부사로 한다고 하였는데, 119 이는 조선국왕의 책봉 에 관한 의례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한편 삼전도의 반차( 班 次 ) 결정에서 보이는 조선국왕에 대한 우대 는 입관 이후 청의 칙사 인선에서 한인 출신이 배제된 까닭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조선형 과 류큐형 의 두 번째 차이점, 즉 출신 의 차이가 발생하게 된 이유는 다른 각도의 설명이 필요한 것이 다. 여기서 두 유형에서 책봉ㆍ조공관계의 성립 시점과 그 방식이 설명 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청의 조선국왕 책봉은 입관 전인 숭덕 연간 에 청이 조선을 군사적으로 굴복시킨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었던 반면 에, 류큐와 베트남은 모두 입관 이후에 평화적인 방법으로 청의 조공 118 같은 상황을 전하는 淸 朝 文 獻 通 考 는 一 國 之 王 대신에 一 國 之 主 라는 표 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主 란 만주어 ejen 의 번역이었을 것이다( 淸 朝 文 獻 通 考 卷 293, 考 7418쪽). 119 欽 定 八 旗 通 志 卷 78, 1336쪽. 34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49 국이 되었다. 비유하자면, 조선-청 관계가 청이 무력을 동원하여 직접 획득 한 것이었다면, 청이 류큐ㆍ베트남과 맺은 관계는 명의 유산을 상 속 한 것이었던 셈이다. 여기서 앞서 언급한 맨콜의 이원구조 에 다시 주목해 보자. 맨콜의 이원구조 는 원래 청의 조공체제 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사실 과거 명의 영토였던 직성( 直 省 )도 어떤 의미에서는 동남 초승달 지역 에 포함시킬 수 있다. 이 직성의 통치를 위하여 청은 명의 전장제도 ( 典 章 制 度 )를 계승함과 동시에 만( 滿 )ㆍ한( 漢 ) 출신을 모두 등용했다. 반면에 서북 초승달 지역에 속하는 번부( 藩 部 ) 통치에는 한인 출신 관료의 참여가 배제되었다. 또한 이 같은 원리 는 적어도 19세기 중엽 까지는 엄격히 준수되었다. 그런데, 청이 일관되게 한인의 참여를 배제하였던 번부와, 칙사의 인선에서 한인의 참여가 역시 일관되게 배제되었던 조선 사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 번부는 비록 18세기 후반에 완성된 것이지 만, 청의 입장에서 번부의 형성은 17세기 초에 시작된 청의 몽골에 대 한 통제에서 그 단초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차하르를 복속시키 는 데 성공한 후금( 後 金 )의 한( 汗 ) 홍타이지는 1636년에 대청( 大 淸 ) 의 성립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했다. 당시 조선은 대명( 大 明 ) 중심의 국 제 질서에 대항하여 홍타이지가 구축하려 했던 대청 중심의 독자적 인 국제 질서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이에 홍타이지는 조선을 무력 으로 굴복[병자호란]시켰고, 조선은 대청 중심의 국제 질서에 편입되었 다. 이로써 숭덕( 崇 德 ) 연간의 조선은 훗날 변부 형성의 단초가 되는 몽골과 함께 대명 질서에 대항하는 대청 질서의 양익( 兩 翼 )을 구성하 게 되었다. 한편 류큐형 칙사 인선과 명이 조선에 파견한 칙사의 인선[ 前 述 ]을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49

350 비교해 보면, 환관( 宦 官 )의 칙사 파견을 제외하면 인선의 대상이 된 관직에 별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류큐형 인선은 명의 방식 을 계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숭덕 연간의 시점에 서 류큐ㆍ베트남은 여전히 대명 질서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러 한 측면에서 류큐ㆍ베트남은 청이 명의 전장제도를 계승함과 동시에 만( 滿 )ㆍ한( 漢 ) 출신을 모두 등용했던 직성과 동일한 범주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숭덕 연간의 대청 질서와 대명 질서를 통합해 확대ㆍ발전시 킨 대청제국 의 공간은 한인 출신 관원의 참여가 인정되었느냐를 기준 으로 두 가지 공간으로 나눌 수 있었다. 숭덕 연간의 대청 질서에 속 했던 공간에서는 한인의 참여가 인정되지 않았던 반면에, 숭덕 연간 여전히 대명 질서에 속해 있던 공간에 대해서는 한인의 참여가 인정 되었다. 전자에는 조선과 함께 몽골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18세기 중 엽에 완성된 번부는 청의 입장에서 볼 때 숭덕 연간의 몽골이 확대된 것이었다. 후자에는 과거 명의 영토와 류큐ㆍ베트남과 같은 조공국이 속해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맨콜의 이원구조 에서 조선은 류큐ㆍ베트남과 동일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청의 조선형 칙사 인선에 나타나는 한인 배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필자의 시론적 해석에 따 르자면 류큐ㆍ베트남과는 다른 범주에 속하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조 선을 대명 질서의 바깥에 위치시키는 청의 인식은 강희 연간에 완성 35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51 그림 1 淸內府一統輿地秘圖 (四排二號의 일부) 된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 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황여전람도 의 여러 판본 가운데 강희 58년의 동판병폭본(銅版拼幅本)은, 민국(民國) 연간 심양(瀋陽)에서 발견되어 진량(金梁)에 의해 청내부일통여지비도 (淸內府一統輿地秘圖) 라는 이름으로 공개되었다.120 황여전람도 의 다 른 판본들이 모든 지명을 한문으로 표기한 것과 달리 만주어와 한문 120 孫喆(2003), 康雍乾時期輿圖繪制與疆域形成硏究, 北京: 中國人民大學出版 社, 53~54쪽. 이 지도는 국내의 경우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1책(분류번호: 大 )이 있다. 최근 중국에서는 淸廷三大實測全圖集의 일부로 영인ㆍ출판 된 바 있다( 淸廷三大實測全圖: 康熙皇輿全覽圖, 北京: 外文出版社, 2007).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51

352 을 지명 표기에 사용한 만한합벽( 滿 漢 合 璧 )의 지도이다. 그림 1은 이 지도에서 산동( 山 東 )과 요동( 遼 東 ) 그리고 한반도가 함 께 그려진 부분[사배이호( 四 排 二 號 )]인데, 직성인 산동의 지명이 한문으 로 표기된 것과 대조적으로 요동의 지명은 만주어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목할 대목은 조선의 모든 지명이 한문이 아닌 만주어로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지도에서 지명이 한문으로 표기된 지역은 과거 명의 영토였던 직성뿐이고 나머지 지역은 모두 만 주어로 지명이 표기되어 있으니, 청이 그들의 세계 를 양분할 경우 조 선을 대명 의 세계 바깥에 위치시켰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공교롭게 도 지도에서 지명이 한문으로 표기된 지역은 한인 출신이 통치에 참 여할 수 있었던 지역인 반면에, 만주어로 표기된 지역에서는 한인의 참여가 배제되었다. 35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53 Ⅴ. 19세기 후반 국제질서의 변화와 조선-청 관계 지금까지 18세기 후반 대청제국 이 중심이 된 동유라시아 의 국제질 서가 단지 조공체제만이 아니라 호시체제, 조약체제, 번부체제를 포괄 하는 다중체제였다는 사실을 살펴보았고, 그러한 다중체제 속에서 조 선은 조공체제의 일원이었음과 동시에 청의 다른 조공국(류큐와 베트 남)과 달리 명이 주도하는 기존 국제질서에 대항하여 1630년대에 청이 새롭게 구축했던 대항적 국제질서의 일원이었다는 점을 서술했다. 그러나 이처럼 특이한 성격의 조선-청 관계를 포함한 청 중심의 동 유라시아 다중체제는 19세기에 이르러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121 먼 저 종래 호시체제의 일원으로서 이른바 광동무역체제( 廣 東 貿 易 體 制, Canton trade system) 의 틀 안에서 청과 무역을 계속해 오던 영국이 인도산 아편의 밀무역을 통해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 해 청은 1830년대 이후 은의 대규모 유출로 인한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아편전쟁이 발발했고, 이 전쟁에서 패한 청이 1842년에 영국과 난징조약 을 체결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후 또 한 차례의 전쟁을 포함하여 1858년 톈진조약 과 1860년 베이징조약 의 체결에 이르는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청은 서양 여러 121 이하 서술된 역사적 사실들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이므로, 특별한 경우가 아 니면 주석을 생략하기로 한다.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53

354 나라가 무력을 앞세워 강요한 새로운 조약체제에 강제로 편입되었다. 이 새로운 조약체제란 17세기 유럽에서 형성된, 나라의 대소와 강약에 관계 없이 주권의 평등을 원칙으로 하는 국제법( 만국공법 )에 기반을 둔 국제질서였다. 그러나 서양이 청에 강요한 조약체제가 형식 상의 평등과 관계 없이 내용상의 불평등이 뚜렷했기 때문에, 이를 불평등 조약체제 라고 부른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 없이 널리 알려진 대 로이다. 구미 제국주의 세력의 압도적인 무력에 직면하여 동유라시아 의 국 제질서는 17세기 이후 청이 몰고 왔던 변동에 못지 않은 급격한 변화 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여기서 이미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을 되풀이해서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므로, 18세기 후반 완성된 동 유라시아 다중체제의 하위 체제들이 어떠한 변화를 겪었는지 개략적 으로 스케치해 보도록 하겠는데, 그에 앞서 동유라시아 국제질서의 중심에 있던 대청제국이 19세기 중엽의 심각한 내부 위기를 겪은 뒤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상기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9세기 중엽은 청의 입장에서 말 그대로 내우외환 의 시대였다. 영 국과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를 무렵 청은 제국 곳곳에서 발발한 각종 반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를 몇 가지 들자면, 우선 1851년 광서성[ 廣 西 省 ]에서 시작된 태평천국의 반란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 중국 경제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장강 유역을 휩쓸었다. 1862년에는 섬서성[ 陝 西 省 ]에서 이슬람 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 반란은 섬서성뿐만 아니라 감숙성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섬서ㆍ감숙 지 역 이슬람 교도들의 반란은 동투르키스탄의 위구르족 이슬람 교도들 을 자극하여, 1864년에는 동투르키스탄 각지에서 반란이 발발했고, 급기야 1865년에는 코칸드 출신의 야쿱벡이 동투르키스탄 각지를 평 35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55 정하고 이슬람 정권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전에 없던 위기에 빠진 청을 수렁에게 구해준 것은 한인 신 사층이었다. 증국번( 曾 國 藩 ), 이홍장( 李 鴻 章 ), 좌종당( 左 宗 棠 ) 등으로 대 표되는 한인 신사층은 상군( 湘 軍 )과 회군( 淮 軍 )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진압에 앞장을 섰을 뿐만 아니라, 섬서ㆍ감숙의 반란을 진압하고 동투 르키스탄의 야쿱벡 정권을 무너뜨렸던 것이다. 이처럼 북경조약 이후 서양과의 관계가 일단 안정 국면에 접어들면서 외환 도 어느 정도 완 화된 한편으로 청이 한인 신사층의 활약 덕분에 내우 를 잠재웠던 시 기를 일러 동치중흥( 同 治 中 興 ) 이라고 부르는 것은 주지하는 바인데, 여 기서 우리가 특히 주목할 사실은 청의 내치와 외교에서 한인 관료들 의 목소리가 대단히 커졌다는 점이다. 함풍제( 咸 豐 帝 ) 사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서태후( 西 太 后 ) 정권은 중국의 지방 통치는 물론이거니와 외교 분야에서도 한인 독무( 督 撫 )들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이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서술의 편의를 고려하여 번부 체제, 호시체제, 조약체제, 조공체제의 순으로 19세기 말~20세기 초 에 걸쳐 일어난 변화의 흐름을 스케치해 보겠다. 19세기 후반 청제국 이 만국공법 아래의 온전한 주권 국가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절 실했던 과제는 국경의 확정과 영토 의 확보였으며, 이 영토 안에서는 청의 배타적인 주권이 어디에서나 균질적으로 행사되어야 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동원된 수단은 직성 지역의 주현체제 와 성 제( 省 制 )를 제국 전역에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8세기 중엽 에 완성되었던 번부체제는, 19세기 말~20세기 초에 걸쳐 한 마디로 직성화( 直 省 化 ), 즉 중국화( 中 國 化 ) 라고 규정할 수 있는 변화를 겪게 되었다.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55

356 동투르키스탄에서 야쿱벡 정권이 성립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일 리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신강( 新 疆 )을 영구적으로 상실한 위험에 처하 자, 청은 신강에 대하여 대대적인 군사 작전을 벌였고, 원정의 성공 이후 번부체제의 일각을 구성하고 있던 신강의 통치 체제를 일변시켰 다. 즉 신강에 주현체제 를 전면적으로 도입하고 신강성( 新 疆 省 )을 설치 했던 것이다. 몽골 동남부의 초원에서는 이미 18세기부터 화북 각지의 한인 유민에 의해 농지 개간이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일부 지역에 주 현이 설치된 바 있었는데, 청은 1900년대 초에 이르러 몽골의 유목지 에 대한 봉금을 해제했다. 이에 따라 농지 개간과 함께 한인의 몽골 유입이 더욱 가속화되었는데, 이러한 변화의 추세는 민국 시기 열하성 ( 熱 河 省 ), 차하르성[ 察 哈 爾 省 ], 수원성( 綏 遠 省 ) 등의 건성( 建 省 )으로 이어 졌다. 티베트의 경우는 라싸조약 (1904년)의 체결 이후 영국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청은 티베트를 영토 로 확정하기 위한 노력을 본격화했다. 그 과정에서 사천 서부 티베트 인 거주 지역에서 파당( 巴 塘 ) 사건이 발발하자, 청은 사천 서부 지역에서 피로 얼룩진 대규모의 개토귀류 ( 改 土 歸 流 )를 단행했다. 이 개토귀류의 성과로 확산된 주현체제 는 민 국 시기 서강성( 西 康 省 )의 설치로 이어졌다. 한편 만주의 경우도 이런 흐름에서 예외가 되지 못했다. 만주는 신 강, 몽골, 티베트 등의 번부체제와 달리 청의 직접 지배 지역이었지만, 역시 청의 직접 지배 지역이었던 직성과는 달리 주현체제 가 아닌 주 방체제 아래에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이래 러시아와 일본의 침 략으로 인한 대외위기가 심각해지는 가운데 주현체제 로 이행하기 시 작했다. 청은 만주에 대한 봉금을 해제하고 적극적인 개간 정책을 추 35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57 진했고, 그 효과로 민적 호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주현이 대규모로 증 설되는 중국화 가 진행되었으며, 이는 결국 1907년에 이르러 동삼성( 東 三 省 )의 건성( 建 省 )으로 이어졌다. 122 다음으로 호시체제의 변화는 시기적으로 번부체제에 앞서 일어났다. 앞서 지적했듯이, 영국을 필두로 한 서양 국가들과 청의 관계는 1842 년의 난징조약 을 분기점으로 호시체제에서 불평등 조약체제 로 전환 했던 것이다. 역시 호시체제의 일원이었던 일본의 경우는 1871년의 조 약을 통해 청과 정식 국교를 맺음으로써 조약체제의 일원이 되었다. 단, 1871년 청과 일본의 조약은 불평등 조약이 아니었음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청과 일본의 관계는 청일전쟁의 결과 1895년에 체 결된 시모노세키조약 을 계기로 불평등 조약체제 로 변했다. 따라서 18세기 후반 호시체제에 속했던 국가들과 청의 관계는 20세기가 시작 되기 전에 모두 불평등 조약체제 로 변질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번에는 18세기 후반 동유라시아 국제질서에서 조약체제에 해당했 던 청과 러시아의 관계를 보자. 17세기 말 청과 러시아가 맺은 네르친 스크조약 과 18세기 초의 캬흐타조약은 당시 유럽의 국제법 원리에 입 각한 평등 조약이었다. 그런데 네르친스크 캬흐타조약체제 아래에서 청의 대( 對 )러시아 외교 교섭의 주체는 만주인이었으며, 만주어를 중심 으로 러시아어, 몽골어, 라틴어 등의 언어가 교섭의 언어로 사용되었 다. 즉 청의 대( 對 )러시아 외교에서는 한인과 한문의 배제 가 중요한 특징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청과 러시아 관계가 청의 입장에서 볼 때 몽골 문제의 일부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기본적으로 중국의 한 인과는 무관한 문제로 취급되었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122 구범진(2006), 앞의 글 참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57

358 1858~1860년에 걸쳐 체결된 톈진조약 과 베이징조약 에 의해 종래의 조약체제는 폐기의 운명을 맞이하였고, 그와 동시에 한인과 한문의 배제 라는 특징도 사라지게 되었다. 다만 구체적인 국경선의 확정에 관 련된 조약들만이 예외가 되었을 뿐, 천진 북경조약체제 아래에서 교 섭의 언어는 만주어로부터 한문으로 바뀌었으며 1881년 페테르부르크 조약 이후에는 교섭의 주체도 만주인이 아니라 한인 관료로 바뀌었 다. 이러한 변화는 한편으로 19세기 중엽 이후 러시아가 영국을 필두 로 한 서양 열강의 대오에 합류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었다. 이제 청과 러시아의 외교관계는 영국 등 열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불평등 조약체제 의 틀에서 전개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19세기 말 청의 대러 시아 외교는 다른 열강에 대한 외교와 마찬가지로 이홍장과 같은 한 인 관료들이 주도했으며 만주어가 아닌 한문이 교섭의 언어로 사용되 었다. 이것이 청제국 내부의 권력 구조 변화(나아가서는 국가 성격의 변 화), 즉 한인 관료의 정치적 성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새삼 지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23 끝으로 조공체제의 경우로 눈을 돌려보자. 청ㆍ일본과 양속관계( 兩 屬 關 係 ) 를 맺고 있던 류큐는 1874년의 대만 사건과 1879년의 이른바 류큐처분[ 琉 球 處 分 ] 을 거침으로써 일본에 병합되었고, 청일전쟁의 결과 청은 류큐의 일본 귀속을 승인하였다. 베트남은 이보다 앞서 1860년 대 초 프랑스의 침략을 받아 남부 코친차이나의 동부를 프랑스에 할 양해야 했다. 얼마 후 프랑스는 코친차이나 서부마저 점령했으며, 1874 년의 조약을 통해 코친차이나 전체에 대한 주권을 베트남으로부터 인 정받았다. 1883년에 이르러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였 123 구범진(2008a), 앞의 글. 35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59 다. 당시 청은 프랑스의 베트남 침략을 마냥 수수방관하지는 않았다. 1882년 청은 베트남의 요청을 받아 군대를 파견하였으며, 베트남을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전락시킨 1883년의 조약도 승인하지 않았다. 결 국 베트남 문제는 청과 프랑스의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그러나 청불전 쟁의 결과로 1885년 프랑스와 체결한 조약에서 청은 프랑스와 베트남 간의 조약을 승인하게 되었다. 이로써 베트남 전체는 프랑스의 실질적 인 식민지가 되었다. 124 베트남의 식민지화 이후 청의 조공체제에 잔류하고 있던 나라는 조 선밖에 없었다. 청의 입장에서 볼 때, 1630년대 최초의 조공국이 되었 던 조선이 이제 공교롭게도 최후의 조공국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러 나 청과 조선의 관계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결코 아 니었다. 외형상의 조공체제는 청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그대로 유지 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1880년대에 접어들면서 조선-청 관계에는 내용적으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청은 1882년 체결된 조선 과 미국의 조약 교섭에 깊숙이 개입했다. 또한, 역시 1882년 임오군란 이 발발하자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다. 청은 1884년 갑신정변을 진압했 으며, 1894년까지 조선의 내정에 시시콜콜 간섭했다. 여기서 1880년대 이후 조선-청 관계를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들을 더 이상 구체적으로 서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이 시기 조선- 청 관계의 변화를 연구자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도 자세히 살펴 볼 여유가 없다. 125 다만 1880년대 이후의 조선-청 관계가 종래의 양 124 유인선(2002),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이산, 275~294쪽. 125 이 시기의 조선-청 관계 연구 현황은 구선희(2009), 근대 한중관계사의 연구 경향과 쟁점 분석, 한중일 학계의 한중관계사 연구와 쟁점, 동북아역사재 단 참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59

360 국관계와는 달랐다는 점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연구자가 동의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시기 조선-청 관계의 변화에 대한 성격 규정에 대해 서는 적지 않은 견해차가 존재한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자들의 다양 한 해석을 좀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첫째, 전통적 조공관계의 강화로 보는 흐름과, 둘째, 조공관계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청의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보는 흐름의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듯하다. 126 전자에는 1880년대 이후 조선-청 관계의 변화를 종번관계( 宗 藩 關 係 ) 의 강화에 의한 종속관계( 宗 屬 關 係 )의 형성 이라든가 청의 종주권 강 화 등으로 규정하는 연구들이 속하는데, 127 이는 양국이 조공체제의 외형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중시한 것이라고 하겠다. 후자에는 이 시기 청의 조선 정책을 파생된 제국주의(secondary imperialism) 128 또는 비공식적 제국주의(informal imperialism) 129 등으로 규정하는 연 구들이 속하는데, 이는 조공체제의 외형보다는 그 관계의 실질을 더 강조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 글에서는 이 두 가지 흐름 중에서 어느 쪽이 더 타당한지를 따 지고 싶지는 않다. 다만, 1880년대 이후 조선-청 관계의 변화에 접근 126 이 시기 조선-청 관계의 변화에 대한 연구자들의 다양한 견해는 구선희 (2009), 위의 글, 189~194쪽을 참조. 127 필자가 가장 최근에 접한 연구 가운데 張 啓 雄 (2009), 國 際 秩 序 原 理 的 轉 型 與 糾 葛 : 淸 末 開 放 朝 鮮 門 戶 下 的 屬 邦 與 自 主, 東 亞 細 亞 속의 中 國 (제29차 중국 학 국제학술대회)는 이런 입장에 속한다. 128 Key -Hiuk K im(1980), T he Last Phase of the East Asian World Order: Korea, Japan, and the Chinese Empire, 1860~1882,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김기혁(1990), 개항을 둘러싼 국제정치, 한국사 시민강좌 7, 일조각. 129 Kirk W. Larsen(2008), Tradition, Treaties, and Trade: Qing Imperialism and Chosŏn Korea, 1850~1910,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36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61 할 때에는, 17세기 중엽 이후 19세기 중엽까지 약 200년에 걸친 조 선-청 관계의 내용, 그리고 조선이 다른 조공국(류큐와 베트남)과 달리 1630년대에 청이 새롭게 구축했던 대항적 국제질서의 일원이었기 때문 에 나타났던 특이성 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몇 가지 문 제에 관한 필자의 제언을 내놓는 것으로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첫째는 책봉국이 조공국의 내정과 외교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원래 책봉ㆍ조공관계의 원리는 아니며, 사실 청도 처음부터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간섭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청의 총리아문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와 관련하여 프랑스와 미국에게 조선 이 내정과 외교를 자주 하는 나라임을 주장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 러나 같은 시기 조선은 인신무외교( 人 臣 無 外 交 ) 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서양 국가들과 직접 교섭을 거부하고 있었다. 당시 청과 조선은 서로 모순된 주장을 전개하고 있었던 셈인데,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두 주 장 모두 틀린 것은 아니었다. 사실 책봉ㆍ조공의 이념에 따르자면 책봉국은 피책봉국의 내정에 얼 마든지 개입할 수 있었고, 인신무외교 라는 말 그대로 피책봉국은 외 교를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이념일 뿐, 실 제와는 항상 거리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다만 책봉국에게 이념을 현실 화할 실력과 필요가 있는 경우에 한하여 책봉국은 피책봉국의 내정과 외교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 17세기의 조선-청 관계가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양 국 관계가 안정됨에 따라 청이 조선의 내정ㆍ외교에 간섭할 필요는 사 라졌다. 이에 따라 조선이 내정과 외교를 자주하는 국면이 19세기 중 엽까지 지속되었다. 따라서 조선이 내정과 외교를 자주 한다는 청의 주장은 당시 양국 관계의 실제로부터 도출된 것인 반면, 조선의 인신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61

362 무외교 논리는 서양 국가와의 접촉을 회피하려는 필요에 따라 조공체 제의 이념을 앞세웠던 데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조선을 청의 속국 이었다고 보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130 위에서 언급한 첫째 문제도 따지고 보면, 조공체제와 관련하 여 항상 존재했던 이념과 실제의 괴리와 관련될 뿐만 아니라, 동아시 아의 조공체제 자체가 유럽의 역사적 현실 속에서 형성된 만국공법 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조선에 대하여 청의 속국 운운하는 것 역시 유사한 문제를 안고 있다. 적어도 18세기 이후 조선-청 관계의 실제는 만국공법 의 속국(vassal state)과는 한참 거리가 먼 것이었다. 131 오히려, 청과 조선의 관계에 대한 오카다 히데히로[ 岡 田 英 弘 ]의 다음과 같은 지적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조공은 특별히 속령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것입니다. 조선의 왕은 중국 황제의 가신이 아닙니다. 유럽에서 봉건영주끼리의 관계라는 것은 지배ㆍ피지배의 관계일까 요? 완전한 가신일까요? 예를 들어, 로마 교황으로부터 작위를 받 은 경우입니다만, 작위를 받은 상대자인 국왕은 로마 교황의 가신 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중국의 황제는 확실히 지위를 130 오카모토 다카시[ 岡 本 隆 司 ]는 속국 과 자주 라는 키워드를 통해 근대 전환기 조선의 국제관계를 매우 흥미롭게 그려낸 바 있다[ 岡 本 隆 司 (2004), 屬 國 と 自 主 のあいだ, 名 古 屋 大 學 出 版 會 ;오카모토 다카시 저, 강진아 역(2009), 미완 의 기획, 조선의 독립, 소와당]. 조선에 대하여 청의 속국 이라는 용어를 사 용하는 것은 오카모토 다카시만이 아니다. 131 張 啓 雄 (2009), 앞의 글, 133쪽의 속국(vassal state)에 대한 정의와 조선-청 관계의 실제를 비교하기 바란다. 36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63 부여하고, 봉작을 부여하며, 인새를 부여합니다. 이것을 지배ㆍ피지 배로 보느냐 마느냐가 문제입니다. 조선과 청의 경우도 국가관계는 아닙니다. 조선국왕과 청조 황제의 개인관계일 뿐입니다. 속국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황제나 국왕이 바뀔 때마다 다시 조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개인적인 인 간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근대 이전의 청조와 베트남, 조선, 琉 球 의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프랑스가 베트남을 청조의 속국은 아니라고 간주하 여, 이를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요컨대, 그때까지의 조공관 계는 국왕과 청조 황제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였고, 베트남 국민과 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하는 것이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의 민 족주의적인 사고방식이었던 것입니다. 132 사실 조선은 물론이거니와 청의 조공국을 속국 으로 규정할 수 없 다는 것은 책봉ㆍ조공관계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는 인장( 印 章 )의 사용 범위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청의 황제가 수여한 인장 의 용도를 보 면, 133 조선은 이 금인을 청에 보내는 표문( 表 文 ) 등 사대문서에만 썼을 132 岡 田 英 弘 (2009), <インタビュ > 淸 朝 とは 何 か, 岡 田 英 弘 編, 淸 朝 とは 何 か, 東 京 : 藤 原 書 店, 16쪽. 133 청의 황제는 前 後 세 차례에 걸쳐 조선국왕에게 印 章 을 수여했다. 첫째는 조 선과 책봉ㆍ조공관계를 정식으로 맺은 숭덕 2년(1637)에 수여한 金 印 으로, 이 金 印 에는 coohiyan gurun i wang i doro ( 朝 鮮 國 의 王 의 印 )라는 滿 文 이 새겨져 있었다. 둘째, 청은 순치 10년(1653)에 이르러 조선국왕의 인장을 만한 합벽의 금인으로 교체했다. 이 인장의 왼쪽에는 coohiyan gurun i wang ni doro ( 朝 鮮 國 의 王 의 印 )라는 만문 해서체가, 오른쪽에는 朝 鮮 國 王 之 印 이라 는 한문 전서체가 새겨져 있었다. 셋째, 건륭 13년(1748) 청은 만한합벽 인장 의 만문을 전서체로 바꾸기 위하여 조선국왕의 인장을 교체하기로 결정하였고, 건륭 41년(1776) 正 祖 를 책봉하기 위한 칙사를 파견하면서 만문에 전서체를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63

364 뿐 국내에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숙종 38년(1712)에는 명이 수여했던 조선국왕지인( 朝 鮮 國 王 之 印 ) 을 모각( 模 刻 )하여 사위( 嗣 位 )에 사용하기까지 했다. 이는 청과 맺 은 책봉ㆍ조공관계가 조선의 국내 정치 및 행정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 었다고 해석해도 큰 잘못은 아닐 것이다. 한편 책봉ㆍ조공관계가 조선의 국내 문제는 아니더라도 당시 국제질 서를 규율하는 보편 원리로 작동하고 있었다고 인정하려면, 청을 제외 한 외국과의 교섭에서 조선은 청의 황제가 수여한 인장을 사용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일본의 에도 막부에 보낸 국서에 찍은 인장 은 위정이덕( 爲 政 以 德 ) 이라는 자구를 새긴 어보였다. 134 또한, 1876년 병자수호조규 의 비준서에서는 대조선국주상지보( 大 朝 鮮 國 主 上 之 寶 ) 라 는 자구를 새긴 어보를 찍었거니와, 135 청의 적극적인 중재를 거쳐 체 결된 조미조약과 이른바 속방조회( 屬 邦 照 會 ) 에서조차 조선국왕지인 을 사용하지 않았다. 136 이 같은 인장의 사용 범위가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청과 조선의 책 봉ㆍ조공관계는 피상적인 관계에 불과하였다. 이런 사실을 의식한 탓인 쓴 만한합벽의 금인을 조선에 전달했다[ 李 光 濤 (1971), 앞의 글, 579~583쪽]. 134 同 文 彙 考 附 編 券 8 通 信 一, 1a~2a쪽. 135 同 文 彙 考 附 編 續 條 約 二, 1a쪽. 136 金 源 模 (1992), 朝 美 條 約 締 結 硏 究, 東 洋 學 22,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 소의 부록 참조. 한편, 琉 球 의 경우도 청의 황제가 수여한 인장의 사용 범위 가 대단히 제한적이었다. 청은 琉 球 의 국왕에게 두 차례 인장을 수여했다. 두 인장은 모두 만한합벽이었으며, 첫 번째 인장의 만문이 해서체였음에 비하여 두 번째 인장이 전서체였음은 조선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琉 球 는 조선의 경 우처럼 청에 보내는 表 文 등에만 이 인장을 사용하였을 뿐, 국내에서는 보통 首 里 之 印 을 사용했으며, 1854년 미국과 체결한 조약에서는 琉 球 國 印 이라고 새겨진 도장을 사용했다. 琉 球 의 인장 사용에 관한 사실은 필자가 오키나와 의 縣 立 博 物 館 에서 실물을 보고 확인한 것이다. 36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65 지 몰라도, 많은 연구자들은 따옴표를 붙인 채 속국 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이는 만국공법 에서 현실의 조선-청 관계에 딱히 들어맞는 다른 개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나온 고육지책일 것이다. 그러나 말 은 생각에서 나오지만, 말이 다시 생각을 규정하기 마련이라는 사실 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만국공법 의 속국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따옴 표를 붙이긴 하지만, 속국 이라는 용어를 계속 쓰다 보면, 결국 사람 들은 속국 을 속국은 속국인데 좀 특수한 속국 정도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19세기 말 청이 조선에 대하여 속방( 屬 邦 ) 이라는 용어를 적용했던 데에도 어쩌면 이런 언어의 마술을 활용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을지 모른다. 1880년대 이후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대한 청의 간섭이 전통 적 조공관계의 강화를 지향한 것이었든, 아니면 제국주의적 침략을 지 향한 것이었든 간에, 속방 혹은 속국 이라는 말의 사용은 청의 지향 에 부합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청은 종래의 조선- 청 조공관계를 지렛대로 활용하여 조선이 사실상 청의 속국으로 해석 되는 효과를 거둠으로써 조선에서 기타 국가들과 구분되는 특수 지위 를 누리려 했던 것이다. 혹자는 청사고 가 조선을 속국전( 屬 國 傳 ) 에 포함시켰다는 사실을 내세우며 속국 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타당성이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 르겠다. 그러나 청사고 는 민국 시기의 편찬물이라는 사실을 망각해 서는 안 된다. 즉 청사고 는 이미 만국공법 의 세례 를 받은 중국의 역사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조선을 만국공법 의 속국으로 자리매김 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중국의 역사적 종주권을 주장하려는 의식의 산 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좀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하긴 하지만, 19세기 중엽까지는 청이 조선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65

366 을 속국 으로 규정하는 용례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137 여기서 다 른 사료는 차치하더라고, 역대 정사( 正 史 )에서 조선을 비롯한 한반도의 국가를 어떤 범주에 위치시켰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기( 史 記 ) 에서 명사( 明 史 ) 에 이르는 24개 정사[ 24사 ] 속에서 조선전( 朝 鮮 傳 ) 이 포함된 열전의 총칭( 總 稱 ) 을 보면, 사기 와 한서( 漢 書 ) 의 조선 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이( 夷 ) 였다. 138 그러나 송사( 宋 史 ) 를 비롯한 일부 정사는 외국열전( 外 國 列 傳 ) 이라는 총칭( 總 稱 ) 을 쓰고 있다. 먼저 설거정( 薛 居 正 )의 구오대사( 舊 五 代 史 ) 가 외국열전 이라는 총 칭 을 편목( 編 目 )에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본래 편목명( 編 目 名 )이 아 니고 건륭( 乾 隆 ) 말 집일( 輯 佚 ) 시점에 이( 夷 ) 를 외국 으로 고친 것이 거의 틀림 없어 보인다. 139 지루한 논쟁 끝에 편찬된 송사, 요사( 遼 史 ), 금사( 金 史 ) 에서 조선전( 朝 鮮 傳 ) 은 이( 夷 ) 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았다. 송사 는 고려를 서하( 西 夏 ) 등과 함께 외국( 外 國 ) 열전(권 485~492)에 포함시켰다. 이것은 일견 송사 가 몽골 치하에서 편찬된 까닭에 이( 夷 )라는 글자의 사용을 기피했기 때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송사 가 서남 지역의 여러 소수민족 을 묶어 만이( 蠻 夷 ) 열전(권 493~496)으로 분류하였으므로 그렇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원대( 元 代 ) 송사 의 편찬자들이 외국( 外 國 ) 여러 민족( 民 族 )에 대한 취급태도( 取 扱 態 度 ) 를 현실화( 現 實 化 ) 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이 137 명의 경우는 조선을 속국 으로 지칭한 사례가 실록 자료에서도 종종 발견되지 만, 청의 경우는 1637년 초 삼전도에서조차 조선국왕의 주권자 지위를 승인 한 바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138 고병익(1970), 中 國 正 史 의 外 國 列 傳 : 朝 鮮 傳 을 中 心 으로, 동아교섭사의 연 구, 서울대학교출판부, 2~3쪽. 139 고병익(1970), 앞의 글, 36~37쪽. 36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67 해해야 할 것이다. 140 한편, 금사( 金 史 ) 는 송사 와 마찬가지로 서하와 고려를 외국 열전 속에 넣었지만, 요사 는 특이하게도 두 나라를 외기( 外 紀 ) 에 포함시켰다. 원대 편찬된 세 정사의 이러한 태도는 명대 에 편찬된 원사 의 편찬에 모종의 영향을 끼친 듯하다. 왜냐하면 원 사 의 목록에서 고려, 일본, 베트남 등은 외국 으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기에 완성된 명사 의 경우도 조선전 등을 외국 열전에 포함 시켰으며, 서남의 소수민족 은 토사 열전으로 분류되었다. 명사 의 외국 과 토사 는 송사 의 외국 과 만이 를 이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42 명사 의 이러한 태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이 청조 치 하라는 현실을 반영했다는 점이다. 즉 이( 夷 ) 라는 용어의 사용이 기 피되고 있었던 것이다. 고병익은 원의 3사 편찬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경향에 대하여, 宋 史 이후에서 외국 열전이라고 통칭되었다 해서 반드시 중국 과 대등한 위치에 선 외국을 의식했다고 말할 수는 없고, 또 근대 적인 국제관계의 개념의 시초라고는 더욱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적 어도 여기에서 우리는 종래와 같은 四 夷 의 諸 夷 니 夷 蠻 이니 하는 통칭을 붙이기에는 부적당할 만큼 주변 諸 國 이 정치적 문화적으로 성장하였다는 것을 編 史 者 들이 느꼈다고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 140 고병익(1970), 앞의 글, 38쪽. 141 단 정작 본문에서는 목록에서와 달리 外 夷 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에 유 의해야 한다. 元 史 의 이러한 일관성 결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으 나, 참고로 민국 시기 柯 劭 忞 이 편찬한 新 元 史 는 외국 이라는 용어를 썼으 며 서남의 소수민족 을 만이 로 분류했다. 142 고병익(1970), 앞의 글, 39~40쪽.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67

368 다. 宋 史 이후의 정사에 있어서는 이리하여 세계 모든 지역 과 민족이 중국 역사 속에 기술되어야 한다는 漫 然 한 관념에서 벗 어나 있고, 주로 중국과의 관련이 있는 면에서 기술이 되어 있으 며, 중국이 곧 세계라는 관념이 아니라 중국도 세계 속의 하나라 는 관념이 작용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143 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의 이 같은 지적은 실로 탁견이라고 부를 만하지만, 여기에서는 고려와 조선을 외국으로 분류한 송사, 요사, 금사, 명사, 구오대사( 舊 五 代 史 ) 가 모두 이민족 왕조 치하에서 편 찬( 編 纂 )ㆍ집일( 輯 佚 )된 정사라는 사실을 특히 강조하고 싶다. 몽골제 국과 대청제국의 정사 편찬은 중국의 화이질서 이념에서 비교적 자유 로웠기 때문에, 이들 정사에서는 국제관계의 이념이 아닌 현실이 반영 되었던 것이다. 144 어찌 되었든 간에, 적어도 대청제국이 몽골제국과 마찬가지로 조선 을 외국 으로 인식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19세기 후반 조선-청 관계의 변화에 접근할 때의 기점으로 삼아야 한다. 지금 까지 19세기 후반 조선-청 관계의 기점으로 사용되고 있는 속국 이라 는 용어는 이미 만국공법 의 속국 개념을 의식하고 있던 19세기 말 청 의 조선 정책의 역사적 산물로 간주해야 한다. 또한 외국 에서 속국 으로의 변화에는 당시 청의 조선 정책을 주도했던 한인 관료들의 이념 적 태도가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농후해 보인다. 143 고병익(1970), 앞의 글, 46~47쪽. 144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명이 편찬한 元 史 에 보이는 일관성 결여는 元 史 의 편찬자들이 현실과 이념의 괴리로 동요하고 있었음을 반영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36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69 이는 세 번째 유의할 점과 깊은 관련이 있다. 청이 조선에 파견한 칙사의 인선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듯이, 청제국은 대( 對 )조선 외교에서 한인 관료의 직접적인 개입을 원칙적으로 배제하였다고 판단된다. 그 러나 19세기 후반 청의 대( 對 )러시아 외교에서 일어난 변화와 마찬가지 로, 1880년경을 분수령으로 하여 한인 관료들이 청의 대( 對 )조선 외교 를 주도하게 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한인 지식인들의 뿌리 깊은 화이 관념이 만국공법 과 묘한 형태로 결합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조선-청 관계에서 한인 관료가 조선을 방문한 예는 없었던 반면, 1880년대 이후 한인 관료는 물론이거니와 다수의 한인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였으며, 1882년의 통상장정( 通 商 章 程 ) 체결 이후에는 한 인 상인들이 대거 조선 시장에 진입하여 상권을 장악하는 사태가 일 어났다. 최근 1880년대 이후 청의 조선 정책을 제국주의로 규정하는 이해는 바로 이러한 변화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라 하겠는데, 145 그 타 당성 여부는 논외로 삼더라도 이 같은 변화가 전통적 조선-청 관계의 단절 로서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는 대청제국의 중화제국으로의 변질과 조응 하는 것이었다는 사실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145 Kirk W. Larsen(2008).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69

370 Ⅵ. 맺음말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은 애초부터 역사적 현실과 괴리된 중국 중심 의 초역사적 이념형 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떨치기 어렵다. 또한, 적어도 명 이전에는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이 유효하다고 하더라 도, 17세기 이후에는 동아시아 여러 나라 중 극히 일부에 대해서만 책봉ㆍ조공관계가 지속적인 의미가 있었을 뿐이므로, 동아시아 국제질 서의 구조적 이해를 위한 이론 틀로서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의 유효성 을 수긍하기는 곤란하다. 특히, 책봉ㆍ조공과는 무관한 호시체제 의 존 재는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에 의해 적절히 설명되지 않는다. 또한, 책 봉ㆍ조공 패러다임 에서 조선을 조공국의 모델(model tributary) 로 규정 하는 인식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청에게 명실상 부한 조공국이 극소수에 불과한 상황에서 조선을 모델 로 꼽는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반청 의식이 대단히 뿌리 깊었던 조 선이 청과 맺었던 책봉ㆍ조공관계는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수준에 그치 고 있었다. 한편, 역사적 중국 을 통일 제국이 군현제의 원리를 채용하여 직접 지배한 공간으로 보는 경우, 역사적 중국 은 진( 秦 )ㆍ한( 漢 ) 이래의 신 축( 伸 縮 )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초 명의 영토와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고 인정하기 어려우며, 17세기 이후의 경우 중국 이란 곧 명의 영토를 대체로 계승한 청의 18개 직성에 상당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 한 역사적 중국 과 18세기 후반 청제국의 판도를 비교해 보면, 전자는 37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71 후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청은 중국 과 이적( 夷 狄 ) 을 통합한 제국이었다. 게다가 청과 명은 단지 판도의 광( 廣 )ㆍ협( 狹 )에서만 차이 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신청사 와 대청제국사 연구에서 지적하듯이, 청은 명과 그 성격과 구조에서 판이하게 다른 제국이었다. 청을 단지 중국 의 왕조로만 볼 수 없다면, 조선-청 관계를 통치 영역 및 통치 집단의 성격상 분명히 중국 의 왕조인 명과 조선의 관계와 동질적으로 파악해서는 곤란하다. 굳이 신청사 나 대청제국사 연구자들의 주장에 기대지 않더라도, 조선-명 관계와 조선-청 관계가 본질적으로 근대 이 전 왕조국가의 관계였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양자의 차별성을 간 과할 수는 없다. 왕조의 주인 이 달라졌다면 그 관계의 성격 또한 달 라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조선의 대청 인식이 대명 인식과 천양지차를 보이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의한다면, 조선-청 관계를 조선-명 관계의 연속 으로 이해하는 시각은 선뜻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17~19세기 청제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작동하던 동아시아 는, 18세 기 말을 기준으로 청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여러 정치체 (몽골 초원과 동투르키스탄, 티베트 등)와, 청제국의 주변에 존재했던 여러 국가(러시 아, 조선, 일본, 그리고 유럽의 식민지를 포함한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포괄하는 역사 공간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동아시아 라는 공간을 이렇게 설정하는 경우, 청제국의 판도에 편입된 지역만 하더라 도 중앙유라시아 의 일부를 포함한다. 여기에 청의 주변 국가들까지 범위를 넓혀 보면, 상식 속의 동아시아 는 물론 동아시아 문화권 과는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광범위한 공간을 포괄하게 된다. 이 때 문에 동아시아 보다는 중앙유라시아 지역까지 포괄할 수 있는 동유라 시아 라는 용어가 더 적절해 보인다(이하 동아시아 는 곧 동유라시아 를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71

372 의미한다). 한편 1500년을 전후하여 포르투갈ㆍ에스파냐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들이 동아시아 의 바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18세기까지 아시아에서 유럽 세력의 정치적ㆍ군사적 영향력은 19세기 이후와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한 것이었지만, 적어도 경제적 측면에서는 동 아시아 국제질서의 한 축이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여기에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해로를 통해 아시아에 진출한 것과 대조적으 로, 러시아가 육로를 거쳐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 또한 적극 반영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동아시아 공간에서는 16 세기 이래 거대한 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17세기 초 만주에서 흥 기한 청제국은 18세기 중엽까지 동아시아 의 국제질서를 재편해 나갔 다. 그 결과, 18세기 후반의 시점에서 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의 국제질서는 조공체제, 호시체제, 조약체제, 번부체제 등 네 가지 하위 체제로 구성되는 다중체제를 형성하게 되었다. 동아시아 공간에 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되고 있 던 17~18세기 동안에 조선과 청의 관계 또한 적잖은 변화를 겪었다. 조선은 1630년대에 청이 주도하는 새로운 국제질서에 강제적으로 편입 되었다. 외형상 조선-명 관계와 별 차이가 없는 책봉과 조공이 유지되 었지만, 조선-청 관계의 전개 양상과 성격은 실질적인 측면에서 조선- 명 관계와 중대한 차이를 드러냈다. 청의 중국 정복이 끝나기 전까지 조선-청 관계에는 아슬아슬한 긴장 상태가 이어졌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선 이후에는 양국 관계가 안정 국면에 접어들었고, 조선은 사실상 내정과 외교를 자주 하는 나라가 되었다. 한편, 청이 조선에 파견했던 칙사의 인선( 人 選 )에서 발견되는 한인 배제 현상에 주목해 보면 동아시아 다중체제 속에서 조선의 위상을 새롭게 설정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숭덕 연간의 대청 질서와 대명 질 37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73 서를 통합하여 확대ㆍ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대청제국 의 공간 은, 한인 출신 관원의 참여가 인정되었느냐를 기준으로 두 가지 공간 으로 나뉜다. 숭덕 연간의 대청 질서에 속했던 공간에서는 한인( 漢 人 ) 의 참여가 인정되지 않았던 반면에, 숭덕 연간 여전히 대명 질서에 속해 있던 공간에 대해서는 한인의 참여가 인정되었던 것이다. 조선은 몽골과 함께 전자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18세기 중엽에 완성된 번부 ( 藩 部 )는 청의 입장에서 볼 때 숭덕 연간의 몽골이 확대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후자에는 과거 명의 영토와 류큐ㆍ베트남과 같은 조공국 이 속해 있었다. 끝으로, 18세기 후반에 완성된 동아시아 다중체제는 19세기 중엽 이후 또 한 차례의 격변을 겪었다. 그 결과, 기존의 조공체제, 호시체 제, 조약체제는 서양 열강이 주도하는 불평등 조약체제 로 재편되었고, 번부체제는 직성화( 直 省 化 ), 즉 중국화 라고 규정할 수 있는 변화를 겪 게 되었다. 19세기 말 이러한 격변의 와중에 있던 조선-청 관계에 접 근할 때에는 다음의 세 가지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 책봉국이 조공국의 내정과 외교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원래 책봉ㆍ조공 관계의 원리는 아니며, 사실 청도 처음부터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간섭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둘째, 적어도 18세기 이후 조선-청 관계의 실 제는 만국공법 의 속국(vassal state)과는 거리가 한참 먼 것이었다. 청 은 몽골제국과 마찬가지로 조선을 외국 으로 인식하였다. 지금까지 19 세기 후반 조선-청 관계의 기점으로 사용되고 있는 속국 이라는 용어 는 이미 만국공법 의 속국 개념을 의식하고 있던 19세기 말 청의 조선 정책의 역사적 산물이며, 당시 청의 조선 정책을 주도했던 한인 관료 들의 이념적 태도가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셋째, 청이 조선 에 파견한 칙사의 인선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듯이, 청제국은 대조선 외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73

374 교에서 한인 관료의 직접적인 개입을 원칙적으로 배제했던 것으로 보 인다. 그러나 1880년경을 분수령으로 한인 관료들이 청의 대조선 외 교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인 지식인들의 뿌리 깊은 화이관념이 만국공법 과 묘한 형태로 결합했다. 37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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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조선-청 관계 381

382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 20세기 한중관계사 의 새로운 시각과 서술방안 모색 배경한 신라대학교 I. 머리말 II. 연구시각의 검토와 모색 III.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 IV. 20세기 한중관계 V. 맺음말

383 I. 머리말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두 개 이상의 국가 혹은 민간사회 사이의 교류나 관계를 주된 연구 분야로 삼는 관계사 내지 교류사 연구는 출 발에서부터 일국사( 一 國 史 )의 시야를 뛰어넘는 시도일 수밖에 없다. 그 런 의미에서 교류사나 관계사는 일국사에 갇혀 있는 연구의 시각을 보다 넓은 것으로 확대하려는 하나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교류사나 관계사는 비교의 시각을 갖고 자신의 문제를 바라보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사나 교류사 분야를 다루는 많은 연구가 연구자의 자기 중심적 인식 틀 속에 머무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은 실 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관계사나 교류사를 일국사의 시각 내지는 두 개의 일국사 간의 관계 라는 측면에서만 바라보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국사 중심의 역사 인식이라고 할 이러한 현상은 근대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인 자기중심적 혹은 배타적 민족주의와 일정한 관련이 있다 고 하겠다. 이를테면 근대 국민국가의 국가적 정체성 확립에 대한 강 조는 종종 자기중심적 혹은 배타적 역사인식을 강조해 왔고 적지 않 은 역사연구자들이 여기에 앞장서거나 동조하여 일정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일제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오랜 민족해방운동의 결과 국민국가의 수립을 이룰 수 있었던 한국이나 또 이와 비슷하게 열강의 침략으로 반식민지( 半 植 民 地 )에 처한 상태에서 국가의 독립을 최고 목 표로 삼아야 했던 중국의 경우, 국민국가의 수립과 그에 수반한 국가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383

384 적 정체성 확립 노력은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근현대시기 한국과 중국의 역사학이 특별 히 민족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나 온 것이었다. 이 글은 그동안 일국사의 시각에 머물러 왔던 20세기 한중관계사 연구의 시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나아가 그것을 극복하는 한 가지 방안으로써 동아시아 국제관계사라는 보다 넓은 시각으로부터 한중관 계사를 서술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그러한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의 시 각을 바탕으로 해서 한중관계사를 서술하려고 할 경우 구체적으로 무 엇을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에 대한 방안을 제시해 보려고 한다. 이 글에서 다루게 될 시대적 범위는 1900~1990년대에 이르는 이른 바 20세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20세기 자체가 역사적 시기구분에 있어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고 보지만, 이 글에서 주목하려고 하는 몇 가지 주제들인 첫째,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체제, 둘째, 냉전체제, 셋째, 탈냉전체제라고 하 는 구분 기준을 가지고 동아시아 내지 한중관계 전체를 포괄하는 시 대를 규정하려고 할 경우 20세기도 하나의 의미 있는 시기 구분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1905년과 1910년 전후 시기를 기점으로 삼으면서 태평양전쟁 이후 본 격화되는 냉전체제와 1980년대 이후의 탈냉전체제를 전체적 구도 속 에 넣는다면 20세기를 하나의 시대적 구분 단위로 삼는 것도 가능하 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아울러 함께 밝혀둘 것은 이 글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제시해 보고 자 하는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라는 시각이 포괄하는 동아시아 의 지역 적 범위에 관한 문제이다. 흔히 동아시아라고 할 때 한국과 중국, 일 38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85 본 정도를 포함하는 좁은 의미의 동아시아를 상정하는 경우가 많지 만,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20세기 한국과 중국 그리고 한중관계를 규정한다고 할 몇 가지 주제, 즉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체제, 냉전체제 그리고 탈냉전체제라는 문제들을 고려할 경우 보다 광범한 동아시아의 범위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예컨대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체제하의 동아시아를 상정해 볼 경우 인도를 중심으로 하는 남아시아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인도차이 나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서구열강의 제국주 의 식민지 지배체제와 중국과 한국에 대한 서구 열강 및 일본 제국주 의의 침략 내지 진출 의 과정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것들을 하나로 포괄하여 설명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된다. 그 뿐 만 아니라 1940년대 중반 이후에 본격화된 냉전체제와 관련해서는 미 국과 소련, 영국 등 주요 서구열강들의 역할을 배제하고는 더 이상 동 아시아의 국제관계를 서술할 수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탈냉전시기의 국제관계는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전개된 광범한 국제관계를 포괄하는 것이므로 기본적으로 지구사(Global History)로서의 성격을 가진다는 주장에 이론이 없을 것이다. 1 이런 점에서 20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 의 서술 범위는 한국과 중국, 일본을 위주로 하면서 동시에 경우에 따 라서는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포함하는 범위의 동아시아로 확대될 수 있고, 또 미국과 소련을 포함하는 세계사 내지는 지구사의 범위로 까지로도 확대될 수 있는 개방적인 의미의 동아시아 가 되어야 할 것 이다. 1 물론 이 경우에도 미국, 소련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관련성에 대한 서술 범위 는 동아시아에 직접적인 영향력으로 나타나는 경우로 한정되어야 할 것이다.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385

386 II. 연구시각의 검토와 모색 1. 기존의 연구시각에 대한 비판적 검토 그간의 현대 한중관계사 연구는 주로 1949년 이전을 위주로 하여 이루어져 왔다. 그것은 그간에 한국사나 중국사 모두 그 연구 범위가 1950년대 이후 단계를 포괄하지 못하게 되면서 현대사의 범위를 1950 년대 이전까지로 좁게 규정하는 경우가 많았던 때문이었다. 따라서 한 중관계사의 연구 범위를 20세기 전체로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 장에서 본다면 그간의 한중관계사 연구는 전반기에 한정된 반쪽짜리 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여기에서 그간에 이루어진 1950년대 이전 까지의 한중관계사를 서 술하는 기본적 시각을 정리해 보자면 그것은 대체로 첫째, 전통적 책 봉ㆍ조공관계의 근대적 변모를 둘러싼 논의들, 둘째, 항일을 위한 공동 연대라는 시각, 셋째, 한국사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도구로 보는 시각 이라는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2 우선 전통적 책봉ㆍ조공관계의 근대적 변모를 둘러싼 논의들을 살펴 보기로 하자. 청일전쟁의 결과로 1895년 4월 청( 淸 )과 일본 사이에 체 결된 시모노세키조약[ 馬 關 條 約 ]에서 청은 처음으로 조선의 독립을 인정 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공식 부인했다. 물론 시모노세 2 기존연구 시각에 대한 검토는 본 공동연구 과정에서 계획된 콜로키움에서 손 승회가 발표한 근대 한중관계사의 새로운 시각 모색:만보산사건 연구에 대한 적용 가능성을 중심으로 ( 역사학보 202, 역사학회, 2009)에 크게 의존했다. 38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87 키조약에서 규정된 조선의 독립 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조선 에 대한 주도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조선의 독립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시모노세키조약 이전까지 청은 조선에 대한 전통 적 종주권을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전개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러한 노력들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따라 청은 조선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만들 필요가 있었지만 종전의 종주권, 즉 책봉ㆍ조공관계를 청산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3 얼마간의 갈등과 교섭 끝에 1899년 9월에 맺어진 한청통상조약은 기왕의 책봉ㆍ조공관계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외교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었지만 국경의 획정이나 중국 상인의 활동 범위 등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한청통상조약의 체결과 그 내용이 기왕의 책봉ㆍ조공 관계와는 구별된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 실제 적인 의미와 성격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의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청 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종주권을 양보하는 조처를 취하 지 않을 수 없었지만, 할 수만 있다면 종주권을 회복하겠다는 것이 기본적 입장이었고 그런 까닭에 시모노세키조약과 한청통상조약 체결 이후에도 책봉ㆍ조공관계의 회복을 강하게 피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4 그뿐만 아니라 한청통상조약 체결 이후 바로 이어서 1905년 조선(대한 제국)이 일본에게 외교권을 잃어버림으로써 한청통상조약의 시행 역시 3 권혁수(2000), 19세기말 한중관계사 연구, 백산자료원 참조. 4 예컨대 20세기 가장 대표적인 중국 정치지도자라고 할 쑨원[ 孫 文 ]의 경우 1920년대 초까지도 한국문제의 해결방안으로 시모노세키조약의 회복을 주장 했는데 이것은 일본에게 조선의 독립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시모노세키조약 이전의 한중관계, 곧 책봉ㆍ조공관계의 회복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배경한(2007), 쑨원과 한국: 중화주의와 사대주의의 교차, 한울, 100 쪽 참조.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387

388 단명에 끝나고 말았다. 따라서 한청통상조약으로 상징되는 이 시기 한 중관계의 변화를 과연 어떤 성격으로 규정지을 것인가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한 그간의 한국 학계의 대체적인 입장은 책봉ㆍ조공관 계라는 전근대적인 관계로부터 상호 국가적 독립을 인정하고 호혜와 평등을 목표로 하는 근대적 조약체제로 바뀌었다는 입장에서 변화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다만 근대적 조약체제로의 변화를 인정하 면서도 새로운 조약체제 안에 숨겨져 있는 청의 전통적 책봉ㆍ조공관 계로의 회귀 의도를 강조하는 입장에서 식민지적 성격을 가진 조약체 제, 곧 식민지적 근대의 성격을 가진 조약체제로 보려는 입장도 5 일부 에서 제기된 적이 있다. 그런 한편으로 중국 학계에서는 이러한 근대적 조약관계가 종래의 호조적( 互 助 的 ) 종번관계를 저해하는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파 악하는 견해를 제기하기도 했고, 조약체제 성립 이후에 양국 간에 국 경분쟁이 발생하기까지 했다는 점을 근거로 하여 이 시기 한중관계가 그간의 호조적 관계를 부정하는 정도로 나빠지게 된 원인이 지나치게 자주적인 입장을 강조하게 된 한국 측의 도발에 의한 것이었다는 관 점을 제기하기도 했다. 6 이런 논의들이 한청통상조약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초점을 두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기왕의 책봉ㆍ조공관계가 일본의 조선 침략이 5 이영옥(2005), 조공질서의 붕괴와 조청관계의 변화(1895~1910), 한중외교 관계와 조공책봉, 고구려연구재단, 213~240쪽 참조. 6 孫 昉 (2005), 晩 淸 中 國 用 條 約 强 化 中 朝 宗 藩 關 係 的 失 敗 (1876~1895), 煙 台 大 學 學 報 ; 姜 龍 范 (1998), 關 于 淸 季 中 朝 邊 務 交 涉 的 硏 究, 延 邊 大 學 學 報 등 참조. 38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89 라고 하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국제관계 속에서 어떠한 변화를 겪게 되는가 하는 문제와 함께 그러한 변화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의 문 제로 귀착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양국 간의 이러한 관계의 변화는 일 본의 제국주의화와 동아시아 주도권 장악이라는 과정과 맥락을 같이 하면서 이루어진 것이지 단순히 양국 간의 관계 변화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책봉ㆍ조공관계에서부터 조약관계로의 변화 속 에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동아시아 주도권 장악이라는 분명한 방향 이 원인으로 내재해 있었던 것이며 이런 까닭에 뒤에서 상술하게 될 동북아 내지 동아시아라는 보다 확대된 시각으로부터 양국의 관계 변 화를 추구할 필요가 있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항일을 위한 공동연대 라는 시각으로부터 20세기 한중관 계사를 보는 논의들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한국이 외교권을 상실하게 되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의 체결 이후 한국과 중국 사이의 이른바 국가 간의 (외교)관계는 사실상 단절되고 만다. 이어서 일제의 한국 합 병을 공식화하는 1910년 이후 단계에 가면, 비록 청의 외교대표가 서 울에 머물기는 했지만 더 이상 외교적 임무는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1912년 청의 몰락 이후 단계에 가서는 중화민국의 공사관이 서울에 설치되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주일본총영사관의 지휘 아래 영사업무를 수행하는 기관에 불과했던 것이다. 양국 간의 공식적 외교관계가 단절되는 1905년 내지 1910년 이후 의 단계에서 양국 간의 중요한 관계와 교류는 국가나 정부가 아니라 민간을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양국 국민의 1차적인 목표였던 항일을 위한 공동연대를 통해 이루어졌다. 특히 국내에서의 독립운동 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국외에서의 독립운동,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국경을 인접한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이 가장 중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389

390 요한 목표가 되었고 이를 위하여 양국 국민들 간의 혹은 양국 (임시) 정부 사이의 연대가 여러 형태로 모색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 한중관계에서 항일을 위한 연대 라는 문제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그런 까닭에 1910~1940년대까지의 시기에 있어서 한중관계는 주로 항일을 위한 연대 라는 시각에서 논의되는 경 우가 많았던 것이다. 특히 한국현대사 연구에서 중요한 대목으로 자리 잡고 있는 재중 독립운동사 연구의 경우 한중 간의 연대를 위주로 하 는 연구가 가장 중요한 대목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이다. 7 그러나 객관성을 생명으로 하는 역사연구의 입장에서 볼 때, 독립 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이러한 연구는 이 시기 한중관계의 전체상을 보여주는 데에 일정한 장애가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예컨대 한국의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은 왕왕 독립운동의 긍정적 내지 성공적 측면들 에만 주목하여 부정적이거나 실패한 측면들을 무시하기 쉬울 뿐만 아 니라 독립운동 이외의 측면들을 소홀히 다룰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것 이다. 예컨대 한인들의 이주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한인들의 독립운동 도 여타 지역에 비하여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만주 지역의 경우, 이 지역에서의 독립운동 못지 않게 중요한 측면인, 일본의 정책적 지 원에 의한 한인들의 이주나 일본의 만주 침략 내지 만주 경영에 동원 되었던 한인들의 역할 등은 아예 무시하거나 소홀히 취급하는 잘못을 범할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중국 학계에서, 중국 내의 한국 독립운동을 보 7 대표적인 것으로 한상도(1994), 한국독립운동과 중국군관학교, 문학과지 성사; 김희곤(1995), 중국관내 한국독립운동단체 연구, 지식산업사; 김희곤 (2004), 대한민국임시정부사연구, 지식산업사 등이 있다. 39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91 다 넓은 시각에서 재조명하는 작업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충분히 참고할 여지가 있다. 예컨대 중국 학계에서는 기왕의 상해임시정부 중 심의 한국 독립운동사를 8 공산당 계열이나 좌파세력을 포함하는 보다 넓은 범위로 확대하려는 연구가 속속 나오고 있고, 9 그 결과 독립운동 사의 전체적 시각을 재조정하는 결과를 내고 있는데 이러한 작업은 결 과적으로 한중관계사의 안목을 넓히는 한편으로 연구시각을 바로잡는 데에 일정한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한국사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통로로서 한중관계사를 보는 입장을 살펴보기로 하자. 한국 학계의 중국사 연구는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독자적 학문으로 탄생한 동양사학 의 학풍 아래 시작되었고 10 해방 후에는 주로 한중관계사 연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김상기를 필두로 하여 한국 중국사학의 제1세대라고 할 전 해종, 고병익으로 대표되는 이들 연구자들은 일제시대 일본 학자들의 이른바 만선사( 滿 鮮 史 ) 연구로부터 큰 영향을 받으면서 연구 활동을 시작했고 해방 후에는 이러한 학문적 바탕 위에 자국사인 한국사의 정체성을 모색하는 방안으로서 교섭사와 비교사 연구에 치중하는 경 향을 보여 주고 있었던 것이다. 11 한국사의 확대로서의 한중교류사 내지 한중관계사 연구는 기본적으 로 일국사의 틀을 확장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들의 연구 경 8 胡 春 惠 (1976), 韓 國 獨 立 運 動 在 中 國, 臺 北 : 中 華 民 國 史 料 硏 究 中 心. 9 예컨대 石 源 華 (1995), 韓 國 獨 立 運 動 與 中 國 (1919~1945), 上 海 : 上 海 人 民 出 版 社 ; 石 源 華 (1998), 韓 國 反 日 獨 立 運 動 史 論, 北 京 : 中 國 社 會 科 學 出 版 社 등이 있다. 10 백영서(2005), 동양사학 의 탄생과 쇠퇴, 한국사학사학보 11 참조. 11 김태승(2008), 한국과 일본의 현대한중관계사 인식, 한중관계사의 쟁점과 분석, 동북아역사재단, 85~86쪽 참조.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391

392 향은 현재까지도 한중관계사 연구의 주요 맥락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고 할 수 있다. 이들 연구가 한국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그것을 확대 하는 데에 있어 일정한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 연구의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 일국사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다. 12 또 이들의 연구 시각이 중국사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전제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나 중국사를 객체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 또한 연구의 시각이나 폭을 편향되게 만드는 측면을 갖고 있음이 지적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들의 연구 가운데에는 고병익의 경우처럼 동아시아사와의 소통 으로서 한국사 내지 한중관계사의 중요성을 제기함으로써 동아시 아사로의 시각 확대를 통해 일국사 중심의 역사 인식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한 경우도 있다. 13 이러한 시도는 한국사 연구 내지는 한중관계 사 연구의 시각을 동아시아사 전체로 확대함으로써 일국사 중심의 역 사 이해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 대두하고 있는 동아시아사 연구시각의 단서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점에 서는 일정한 기여를 했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12 손승회(2009), 앞의 글 참조. 13 백영서(2007a), 상호 疎 遠 과 疏 通 의 동아시아:고병익의 역사인식 재구성, 고병익 이기백의 학문과 역사연구, 한림대학교출판부 참조. 39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93 2. 새로운 연구시각의 모색 앞에서 말한 대로 일국사 중심의 역사 인식은 근대 국민국가의 이 데올로기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형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20세기 말부 터 가시화되고 있는 국민국가 체제의 동요와 그와 관련된 세계화 내지 전 지구화 과정은 국민국가의 폭력성과 억압성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 졌고 이에 따라 민족주의 사관의 해체가 새로운 담론으로 제기되고 있다 년대 말부터 우리 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는 동아시아 담론 과 그것으로부터 연관되어 나온 동아시아사 연구는 이러한 민족주의 적 역사 이해를 넘어서려는 시도인 동시에 일국사의 자기중심적 역사 이해를 넘어서려는 하나의 시도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동 아시아담론 자체도 아시아적 가치론, 동아시아 공동체론, 민간사회의 연대론 등 다양한 함의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15 여기에다 역사 학계에서 이 담론에 대한 학술적 호응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점 은 16 의외의 일이라 할 만하다. 또 동아시아라는 시각이 역사 연구의 관점으로 적합한지에 관해서도 아직 일정한 합의가 없다고 생각된다. 이를테면 세계적 혹은 전 지구적 역사(Global History) 연구가 요구되 고 있는 상황에서 왜 하필 동아사아인가라는 문제 제기에 대하여 명 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17 이런 까닭에 동아시아를 역사 14 프라센지트 두아라 저, 문명기 손승회 역(2004), 민족으로부터 역사를 구출 하기:근대 중국의 새로운 해석, 삼인. 15 장인성(2005), 한국의 동아시아론과 동아시아 정체성, 세계정치 하세봉(2008), 동아시아 역사상, 그 구축의 방식과 윤곽, 21세기 역사학의 쟁점과 전망, 2008년 11월 역사학회 학술대회 발표 논문 참조. 17 강진아(2007a), 이주와 유통으로 본 근현대 동아시아경제사, 역사비평 79, 역사비평사.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393

394 연구의 범위로 삼는 동아시아 역사상에 대한 추구는 그리 간단하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 한중관계사를 보는 새로운 시각으로 동아시아사 속에서의 한중관계 라는 관점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우 선 한중 양국 간의 관계나 교류를 국민국가의 틀을 가진 일국사의 범 위를 갖고는 모두 포괄할 수 없다는 문제 때문이다. 이를테면 동아시 아라는 지역사의 관점에서 접근해야만 일국사가 포괄하지 못하는 분 야나 문제들을 짚어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18 특히 이 글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근현대시대의 경우 그 전개 과정이 결코 일 국사 내지 양국 간의 관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 혹 은 보다 넓게는 세계사라는 공통의 무대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컨대 1930년대 초 한중관계를 살펴볼 때에 가장 중요한 대목이 되는 만보산사건( 萬 寶 山 事 件 )과 같은 경우, 그 원인이나 전개 과정을 설명함에 있어서 일본 제국주의의 입 장이나 역할을 제외하고 중국과 한국의 관계만을 갖고는 설명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한중일을 아우르는, 한중일로 구성되는 동아시아 를 범주로 하는 시각 위에서만 이 사건의 올바른 해석과 의미규정이 가능해진다. 아울러 전통시대 한중관계에서 중국을 하나의 중심으로 파악하면 서 한국을 그 주변으로 위치지우는 시각이 상존해 왔음은 주지의 사 실이다. 이러한 중심ㆍ주변의 시각은 책봉ㆍ조공관계와 같은 종속적 관 계나 중국 문화의 한국 전래라고 하는 문화적 고저를 상정하고 중국 18 유용태(2006), 다원적 세계사와 아시아, 그리고 동아시아, 환호 속의 경 종: 동아시아 역사인식과 역사교육의 성찰, 휴머니스트, 478~483쪽. 39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95 의 일방적 영향만을 강조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한중관계 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든다. 그뿐만 아니라 전 통시대를 통하여 지속되어 왔던 중국의 중심성이 서구 열강의 침략 아래 크게 회손 당하는 근현대 특히 20세기에 가게 되면, 더구나 이 러한 중심 주변의 시각은 의미를 잃고 만다. 오히려 동아시아의 새로 운 강자로 떠오른 일본을 새로운 중심으로 설정해야만하는 또 다른 모순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최근 근현대 중국을 보는 시각으로서나 혹은 동아시아사를 보는 내 면적 시각으로서 제시되고 있는 주변적 시각 은, 이러한 중심 주변의 시각을 교정하기 위한 대안으로 주목된다. 다만 동아시아사 관점과 마 찬가지로 주변적 시각 도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면서 연구자에 따라서 상당한 정도로 폭넓은 함의를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어떤 연 구자는 근현대 중국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각을 주변적 시각이라고 정의하면서 한국인의 시각을 통하여 보다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중국 상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주 변은 단순한 지리적 주변이 아니라 한국과 중국을 아우르는 범위로서 식민지적 경험을 공유하는 제3세계로서의 주변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 정되어 있다. 19 물론 이 경우 주변이라는 범주가 국민국가의 형태를 띤 대상 만으로 한정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바로 이 점은 이러한 접 근이 국민국가 내지는 일국사의 시각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하는 비판 을 받을 소지가 된다. 반면에 또 다른 한 연구자는 주변의 개념으로 제시하는 범주를, 국 가만이 아니라 국민국가의 개념에서는 제외되는 여러 주변적 요소들을 19 배경한(2007), 앞의 책, 19~23쪽 참조.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395

396 아우르는 것으로 폭넓게 설정함으로써 보다 넓은 의미의 주변적 시각 을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주변은 국민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소외된 주변적 존재들을 포괄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디아스포라적 존재들이라 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이들 주변은 그 자체 속에서 다시 중심과 주변을 형성하는 형태를 띠기 때문에, 결국 서구 중심의 세계사 전개과정에서 소외된 주변으로서의 동아시아와 그 동 아시아에서도 또 소외당한 주변 등의 형태로 중층화된 구조를 나타낸 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가 말하는 주변은 이중적 주변 혹은 중 층적 주변 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20 이러한 중층적 주변이라는 시각은 그동안 중심ㆍ주변의 관계로 한정해서 한중관계사를 봐 왔던 기존의 시각에 비해 보다 다원적이고 평등한 매력적 관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이러한 중층적 시각을 구체적인 개별 연구에서 어떻게 적용하거나 구현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로 남아 있다. 특히 이 글에서 주로 문제 삼고 있는 한중관계를 보는 시각으로서 이러한 주변적 시각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 러 가지 고려되어야 할 바가 많지만 상당부분 새로운 접근이 이루어져 야 한다는 점에서 볼 때 그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시도라고 해도 과 언이 아닐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선 여기에서 한 가지 지적해 두고자 하는 것은, 근현대 한국과 중국의 관계를 주변과 또 다른 주 변의 관계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이럴 때에만 서구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아래, 그 주변으로 위치 지워졌던 한중 양국 20 백영서(2007b), 자국사와 지역사의 소통: 동아시아인의 역사서술의 성찰, 역 사학보 196, 119쪽 참조. 39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97 간의 관계가 온전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를테면 한 국과 중국은 각각 주변이면서 또 전통적 중심ㆍ주변의 관계가 어우러 져 있고 동시에 새로운 상황적 조건 아래에서 변화해 가는 입체적인 것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게 된다는 말이다. 아울러 언급해 둘 것은, 앞의 동아시아 시각에서 지적한 것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지만, 한중 양국 간의 교류나 관계를 그 주변인 일본으 로부터 파악하는 시도도 하나의 주변적 접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 는 생각이다. 한중관계를 놓고 볼 때 일본은 일정한 영향 관계에 있으 면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다시 제3자적 위치에 있게 된다는 점을 고려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럴 경우 한중관계사 내지 동아시아사에 대한 일본 학계의 연구를 집중적으로 이용ㆍ분석해 보는 것 또한 반드 시 요구되는 작업이 될 것임은 물론이다. 21 예컨대 1899년 한청통상조 약 체결 이후의 한중관계를 보는 시각으로서 종속관계의 재편 이라든 가 조약화된 종속관계 로 보는 일본 학계의 입장 22 들은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곧 또 다른 하나의 주변적 시각에서 이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관점을 우리에게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와 함께 논의되어야 할 문제는 한중관계사를 구성하는 연구영 역의 확대와 관련된 문제이다. 앞에서도 부분적으로 언급한 일이지 만, 우리가 20세기 한중관계의 전체적 모습을 그리려고 할 때 현재 까지의 연구 상황은 결코 만족스럽지 못하다. 특히 1950년대 이후에 21 구선희(2008), 근대 한중관계사 연구경향과 쟁점 분석, 한중관계사의 쟁점 과 분석, 동북아역사재단 참조. 22 茂 木 敏 夫 (1993), 中 華 世 界 の 近 代 的 變 容 : 淸 末 の 邊 境 支 配, 溝 口 雄 三 等 編, 地 域 システム:アジアから 考 える, 東 京 : 東 京 大 學 出 版 會 ; 川 島 眞 (2004), 中 國 近 代 外 交 の 形 成, 名 古 屋 : 名 古 屋 大 學 出 版 會 참조.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397

398 관한 연구는 매우 한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역사학이 아 니라 일부 사회과학에서만 이루어져 왔다. 게다가 1950년대 이전까 지의 연구들도 양국 간의 외교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관계사와 상호 인식에 대한 것에 집중되어 있어서 그밖의 여러 방면에 관한 연구 가 결락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기존 연구 성과들을 염두에 두면서 새롭게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분야들을 우선 제시해 두고자 한다.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경제 교류 분야의 연구이다. 특히 1910년 일본의 한국 병합 이후 국가 간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한중관계를 보 는 것이 어렵게 된 단계에 이르러서는 양국 간의 관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측면은 경제적 교류라고 할 것이다. 이 경우 물론 국가 간의 공식적 무역보다는 지역과 지역 간의 혹은 도시와 도시 간의 경제적 교류라고 하는 것이 보다 중요한 측면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간의 연 구에서 도시 간 혹은 지역 간의 경제 교류에 대한 연구가 없었던 것 은 아니지만, 매우 빈약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최근에 식민지 한국의 대중국 무역의 중요성을 드러낸 연구가 등장한 것이나 23 식민지 대만[ 臺 灣 ]이나 조선의 대중국 무역 구조에 주 목하여 일본 제국 경제권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적지 않 음을 드러낸 연구가 나온 것 24 등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일이라고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국과 한국, 동남아시아까지를 범위로 하는 아시아교역 23 송규진(2008), 근대 조선과 중국의 무역, 근대 중국 대외무역을 통해본 동 아시아, 동북아역사재단. 24 강진아(2007b), 식민지 대만과 조선의 대중무역 구조비교, 충돌과 착종의 동아시아를 넘어서, 성균관대학출판부 참조. 39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99 권을 염두에 둔 역내 교역 상황에 대한 연구나 25 지역과 도시라는 관 점에서 출발하여 동아시아 지역 내 교역의 양상과 그 구조를 방사선 형으로 파악하려는 연구도 26 근현대 동아시아 내부 내지는 한중 간의 경제 교류를 파악하는 데에 일정한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 나 전체적으로 볼 때 동아시아를 범위로 하든 아니면 한중 간의 교역 을 대상으로 잡든, 20세기 경제교류에 대한 현재의 연구는 부족하다 못해 빈약하다는 평가를 27 받아야 할 정도다. 다음으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전술한 주변적 시각과도 연관되는 문제로서 한국인들의 중국 이주와 중국인들의 한국 이주, 그리고 이 들 이주민 사회의 형성 과정이나 성격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 이다. 이것은 이른바 인적 교류의 실상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대목 이 될 텐데, 기왕의 연구들에서는 재중 독립운동의 기반이나 배경이 라는 시각 정도에서 접근한 것이 28 있을 뿐 이민사회 자체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거의 없다. 다만 최근에 만주지역으로 이주한 한 인 디아스포라 사회에 대한 연구가 29 일부 나오고 있고 또 인천을 중 심으로 활동한 재한 중국인 사회의 실상과 그들의 무역활동을 다룬 25 박정현(2008), 근대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무역, 근대 중국 대외무역을 통 해본 동아시아, 동북아역사재단. 26 하세봉(2000), 1930년대 동아시아 역내교역의 방사선형 구조, 역사학보 165, 역사학회. 27 하세봉(2008), 앞의 글, 8쪽. 28 중국인 학자 孫 科 志 (2001), 上 海 韓 人 社 會 史 :1910~1945, 한울도 이러한 시 각을 벗어나고 있지는 못하다. 29 손승회(2004), 만주사변 전야 滿 洲 韓 人 의 국적문제와 중국 일본의 대응, 중국사연구 31, 중국사학회; 김경일 외, 동아시아의 민족이산과 도시: 20세 기 전반 滿 洲 의 조선인, 역사비평사;박강(2006), 만주국의 아편 밀매대책과 在 滿 韓 人, 한중인문과학연구 19, 한중인문학회.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399

400 연구 30 들이 등장하면서 이민사회 자체에 대한 연구가 활기를 띠고 있 음은 큰 수확이라고 생각된다. 이민이나 이민사회의 연구와 함께 유 학생의 왕래 등도 인적 교류의 중요한 양상이라고 할 텐데 이들을 포 함한 향후 한중 간의 인적 교류에 대한 보다 폭넓은 연구들이 기대 된다. 아울러 지식이나 정보의 교환 및 문화적 교류와 영향이라는 문제도 새롭게 시도되어야 할 20세기 한중관계사의 중요 측면이라고 생각된 다. 예컨대 유학생과 같은 인적 교류 이외에 도서의 유통과 같은 지식 정보나 기술의 공유 및 소통, 그리고 이를 통한 문화와 인식의 상호영 향이라는 측면은 한중 간 혹은 동아시아 지역 내의 교류와 관계를 보 다 풍부하게 보여주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정보와 지식의 유통을 통해 상대에 대한 인식, 곧 상호인식이나 이해를 갖고 오기 때문에, 기왕의 관계사 연구에서 중요한 분야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던 상호인식에 관한 연구에도 정보와 지식의 유통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 해가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요컨대 동아시아 국제관계라는 확대된 시각에서 그리고 주변적 시 각이라고 하는 제3자의 시각을 활용하면서 기존의 연구들에서 소외되 어 왔던 경제교류, 이민, 지식 정보의 교류와 상호인식 등에 대한 다 각적인 접근을 통하여 새로운 한중관계사 서술을 시도할 수 있을 것 이다. 바로 이러한 시각에서 20세기 한중관계사를 서술하려고 할 때, 무엇을 어떻게 서술할 것인지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서술방안에 대해 다음에서 짚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첫째, 20세기 동아시아 국제 30 강진아(2007c), 廣 東 네트워크(Canton-Networks)와 朝 鮮 華 商 同 順 泰, 사 학연구 88, 한국사학회;정혜중(2007), 개항기 인천 화상 네트워크와 화교 정착의 특징, 중국근현대사연구 36, 중국근현대사학회. 40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401 관계, 둘째, 그 속에서 전개된 20세기 한중관계에 대한 서술방안을 차 례로 제시해 보고자 한다. III.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 1.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체제하의 동아시아 국제질서 주지하듯이 아시아에 대한 서구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은 1600년 영 국의 동인도회사 창설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이후 17~19세기에 걸쳐서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델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열강이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식민지 지배체제를 구축하 기에 이르렀다. 31 중국의 경우 1840년의 제1차 중영전쟁으로 본격화된 영국의 침략 이래 서구 열강들의 군사적ㆍ경제적 침략이 계속되어 19세기 후반에는 중국이 열강들에 의해 분할되어 결국에는 망국에 이를 것이라는 국가 적 위기의식이 팽배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1894년의 청일전쟁에서의 패 배는 거의 2000년 이상 지속되어 오던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 31 앤드류 포터 저, 석화정 역(2001), 유럽제국주의 연구의 현황과 과제, 한양 대학교출판사, 17~21쪽 참조.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401

402 서의 전면적인 와해를 가져왔으니 이후 동아시아의 주도권은 새로운 열강으로 대두한 일본에게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체제하의 동아시아를 서술하려고 할 때 강조해야 할 점은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체제하의 동아시아가 내부 적으로 긴밀한 연결망을 가진 하나의 동일한 성격의 지배체제에 속해 있었다고 하는 점과 중국 중심의 전통적 국제질서인 이른바 책봉ㆍ조 공관계가 이러한 식민지 지배체제 수립의 결과로 와해되거나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정치적인 국면에서 이러한 식민지 지배체제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나아가 이 러한 민족주의 운동들 간의 연대가 나타나면서 제국주의 식민지 지 배체제와 그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운동 간의 대립구도가 동아시아 지역 전체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었다는 점도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먼저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동아시아를 포함하는 아시아 전역에 걸쳐 구축된 이러한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체제는 내부적으로 매우 긴 밀한 관계망을 갖추고 있는 단일한 지역체제로서의 구조를 갖고 있었 다는 점이 중점적으로 설명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들 각 지 역 혹은 국가들을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 半 植 民 地 )로 지배하고 있는 열강들 자체가 갖고 있는 목적이나 동일한 지배구조에서 기인하는 것 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각 식민지 간의 교역이나 유통 자체 가 하나의 연결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아시아 지역에서의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체제의 구축은 중국 중심의 전통적 국제질서인 이른바 책봉ㆍ조공관계에 대한 근본적 인 변화를 수반하고 있었다는 점을 밝혀야 할 것이다. 32 이를 위해서 32 이영옥(2005), 앞의 글. 40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403 는 중국 주변의 각 지역 혹은 국가들과 중국 간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변화를 겪게 되는가를 구체적으로 추적하면서 그것이 전체적으 로 전통적 책봉ㆍ조공관계의 구조나 성격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 왔는 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예컨대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와 영국의 티베 트 지배, 러시아의 몽골 지배, 일본의 한국 지배가 책봉ㆍ조공관계의 구조나 성격을 어떻게 변화시켜 나갔는지를 실증적으로 서술하면서 그 것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를 논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아울러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식민지 지배체제의 구축과 동시에 나 타나고 있던 각 지역, 국가에서의 민족주의 운동과 이들 민족주의 운 동 간의 연대 움직임에 대해서도 그것을 하나의 동일한 국면에 놓고 서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을 통하여 동아시아 지역의 식민지 지배체제라는 것이 하나의 지역질서 내지는 지역체제로 존재했음을 보 다 분명하게 부각시킬 수 있을 것이다. 2.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시기의 동아시아 국제질서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시기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기본적으로 앞에 서 언급한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체제에 속하는 시대이다. 다만 이 시 기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열강으로 떠오른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화한 다음 중국의 동북(만주)으로 진출하고 이어서 중국과의 전면전쟁인 중 일전쟁과 미국을 주적으로 하는 태평양전쟁으로까지 전쟁을 확대하는 단계라는 의미에서, 서구 열강에 의한 식민지 지배체제의 구축을 기본 적인 구조로 삼는 앞 시기와는 구분하여 다루어졌으면 한다.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403

404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과 식민지 지배체제 구축 과정은 크게 보아서 네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단계는 한반도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 지배체제를 실행하는 단계이고, 33 두 번째 단계는 중국 의 동북(만주) 지역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 지배체제 구축 단계이며, 세 번째 단계는 1937년 칠칠사변[ 七 七 事 變, 노구교사건( 盧 溝 橋 事 件 )] 이후의 중일 간의 전면전쟁과 그에 이은 중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체제 구축 단계이고, 네 번째 단계는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으로 본격화되는 동남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 지배체제 구축 시도 단계이다. 청일전쟁으로부터 친다면 대체로 50여 년에 걸친 일본의 아 시아 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역사는 일관된 주제로서 다룰 필요도 있 을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1937년(혹은 넓게 잡는다면 1931년) 이후부 터 1945년 일본의 패망까지를 하나의 단계로 설정하여 일본의 제국주 의 식민지 지배체제하의 동아시아가 어떻게 하나의 체제 속에 있게 되 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보다 설득력을 가질 것이라는 생각에서 별도의 시기로 나누어 서술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 과정과 그 구조 및 성격과 관련된 연구는 매우 많기 때문에 그러한 기존 연구들을 바탕으로 하여 이 시기를 서 술한다면 큰 무리는 없다고 본다. 단지 한 가지 여기에서 지적해 두고 자 하는 것은 이 시기의 동아시아 전체가 어떠한 내면적 연결망 속에 있었으며 그리하여 어떻게 하나의 (지배)체제 속에 있었던가 하는 점 33 일본의 한반도 침략은 중국(청조)과 일본의 주도권 다툼 가운데 이루어진 것 이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지만, 중국에 못지 않게 러시아와 일본의 경쟁 구도 가운데에서 진행되었다는 점도 마땅히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최문형(2007), 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한국침략, 지식산업사, 27~29쪽;권혁수(2007), 러일전쟁과 중한관계의 변천(1904~1905), 근대한중관계사의 재조명, 혜안, 335~360쪽. 40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405 을 좀 더 부각시켰으면 하는 점이다. 그래야만 동아시아를 하나의 역 사체로 보면서 그 가운데에서 한중 간의 관계를 보고자 하는 우리의 의도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3. 냉전체제하의 동아시아 국제질서 동아시아 지역 냉전의 기원에 대한 연구들에 의하면 냉전은 태평양 전쟁의 종전 과정부터 이미 싹트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34 따 라서 냉전체제하의 동아시아를 서술하는 시기를 태평양전쟁의 종전 과정부터 잡는 것이 맞다고 본다. 다만 보다 본격적인 냉전체제의 성 립은 종전 이후 단계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종전 과정에 대해서는 냉전 의 기원이라는 단계로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미소 간의 대립구조는 1946~1949년까지 중국에서 있 었던 국공 간의 내전과 이어진 대륙과 대만의 대결구도, 1946년 이후 가시화되기 시작한 한반도에서의 남북분단 체제와 그 결과로 일어난 1950년의 한국전쟁, 35 그리고 1946~1975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베트남전쟁으로 대표된다. 이들 전쟁들은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공산당 정권의 수립과 확산이라는 현상과 함께 미소 간의 팽창주의적 대결구 조가 가져온 결과였지만, 한편으로는 중국을 포함한 신생 독립국들의 34 히라야마 타쯔미 저, 이성환 역(1999), 한반도 냉전의 기원, 중문출판사, 13~16쪽; 김진웅(1999), 냉전의 역사, 1945~1991, 비봉출판사, 22~25쪽. 35 한국전쟁에 관한 최근의 연구동향에 대해서는 한국전쟁연구회 편(2000), 탈 냉전시대 한국전쟁의 재조명, 백산서당을 참조할 것.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405

406 국가건설 노력과도 중첩되어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음은 주지 의 사실이다. 36 여기에서는 이들 전쟁 간의 상호 연관성과 전체적 국 면의 상관성을 염두에 두면서 그 전개과정을 서술할 필요가 있을 것 이다. 한편으로 1957년 마오쩌둥[ 毛 澤 東 ]의 모스크바 방문에서 비롯되어 1965년 이후 본격화된 중소 간의 분쟁도 표면상으로는 공산진영 내부 의 이념적 갈등이라는 모습을 띠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주 의 혁명의 국제적 주도권을 둘러싼 중소 양 대국 간의 대립이라는 측 면도 보여 주는 대목이다. 37 이런 점에서 1950~1960년대의 중소 이념 분쟁도 냉전의 또 다른 측면이며 중국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지역의 냉전 구도를 이해하려고 할 경우 빠뜨릴 수 없는 주제가 되어야 할 것 이다. 또 1955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 아프리카회의의 결과로 이른바 중 립주의를 표방하는 제3세계의 존재가 부각됨으로써 미소를 중심으로 하는 동서 양 진영을 제외한 또 다른 세계, 즉 제3세계의 존재가 분 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특히 중국은 인도와 함께 이른바 평화오원칙 ( 平 和 五 原 則 )을 새로운 국제관계의 규범으로 내세우면서 아시아 아프리 카의 제3세계에 대한 외교적 지도력을 갖는 계기를 맞았다. 38 이런 점 에서 반둥회의 이후의 제3세계의 국제적 역할과 관련한 동아시아 국 제질서의 변화에 대해서도 적절한 평가와 서술이 필요할 것이다. 36 李 鐘 元 (2005), 戰 後 米 國 の 極 東 政 策 と 韓 國 の 脫 植 民 地 化, 岩 波 書 店 編, アジ アの 冷 戰 と 脫 植 民 地 化, 東 京 : 岩 波 書 店, 3~6쪽. 37 서보근(2006), 냉전시기 중소분쟁이 한반도에 미친 영향, 대한정치학회보 13-3, 대한정치학회. 38 김호준 외(2007), 중국대외관계의 어제와 오늘, 부산외국어대학교출판부, 150~152쪽. 40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407 4. 탈냉전 시대(1980년대 이후) 동아시아 국제질서 1989년과 1990년의 동독과 소련의 붕괴로부터 시작된 공산진영의 붕괴와 내부적 개혁운동은 냉전체제의 전면적 와해를 가져 왔다. 동아 시아에서의 냉전체제는 문화대혁명의 실패 이후 1979년 덩샤오핑[ 鄧 小 平 ]이 주도한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본격화되었는데 이른바 중국적 시 장경제 를 표방한 이 변화는 사실상 1949년 이후 중단된 자본주의 시 장경제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국제관계의 측면에서 볼 경우 중국의 개혁개방 노선은 이념적 대립 을 중심으로 하는 냉전체제의 실질적 종결을 의미하는 것과 동시에 경제 발전을 목표로 하는 실리외교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점을 강조하 여 서술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미국과 중국의 수교를 비롯하여 일본과 중국의 국교회복, 39 한국과 중국의 수교, 대만과 대륙중국 사 이의 평화공존 체제 구축,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개선, 40 한국과 베트남 의 수교 그리고 남북한 간의 교류 확대 등은 모두 이러한 실리외교의 실질적 성과들이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 의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탈냉전체제라는 전체적 맥락에서 체계적으로 그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41 탈냉전 시기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서술하는 데에 있어서 한 가지 더 주의를 기울일 문제는 개혁개방 정책의 성공적 실현으로 중국이 미 39 장병옥(2004), 탈냉전시기 아태지역의 전략국면과 미국-중국-일본의 삼각관 계, 중국연구 33,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문제연구소. 40 장병옥(2002), 앞의 글. 41 하용출(1994), 탈 냉전의 동북아 질서 인식, 전략연구 1, 한국전략문제연 구소.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407

408 국에 맞설만한 새로운 초강대국으로 발돋음하면서 나타나고 있는 중 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건 내지는 회복이라는 현상에 대한 평가와 전망 문제이다. 42 이른바 신중화주의로 불리고 있는 이러한 중 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그 형식에 있어서는 전통적 중화주의 국제질서인 책봉ㆍ조공체제와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이지만, 그 실질 에 있어서는 전통적 중화주의적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회복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럴 경우 향후 전개될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 에 대한 전망을 어떻게 볼 것인지의 문제가 우리 앞에 남는 것이다. 이상에서 20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대체적 구도를 살펴보았다. 아래에서는 이러한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구도 속에서 한중관계가 어떠 한 양상으로 변화되어 갔는가를 살펴볼 때 검토되어야 할 문제들과 관점들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교류사 혹은 관계사를 구성하는 문제들 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본다면 하나는 정치 경제 문화적인 측면에 서의 관계와 교류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상호인식의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아래에서는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구조적 변화에 따라 나눈 각 시대마다 그러한 두 가지 측면들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라는 관점에서 20세기 한중관계사의 서술 방안을 제시해 보기로 한 다. 42 여강모(1996), 냉전시대이후의 동북아 국제질서: 변화와 전망, 한국동북아 논총 3, 한국동북아학회; 브루스 커밍스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편집부 (2002), 한반도를 둘러싼 지역질서와 세계안보, 아세아연구 45-1, 고려대학 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등을 참조. 40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409 IV. 20세기 한중관계 1. 제국주의 식민지 체제하의 한중관계 제국주의 식민지 체제하의 한중관계를 생각할 때 우선 논의되어야 할 문제는 청일전쟁 이후 본격화된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병합과 그 에 대한 중국(청) 측의 대응이다. 한국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전면적 으로 부인하는 조치가 청일전쟁의 결과 맺어진 시모노세키조약의 핵 심 내용이라는 사실과 이후 전개된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병합과정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만, 같은 시기에 청이 근대적 조약체결의 방 법을 통하여 한국에 대한 지배적 지위를 끈질기게 유지하려고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왔다. 이른바 전통적 중화주 의의 근대적 변신 노력이라고 할 이러한 청의 대응과 그 실패 과정에 43 대해서도 서술의 주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한중 양국의 협력과 연대에 관한 문제이다. 특히 망국 이후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으로 이주해 가 면서 중국 내의 한국인 사회를 형성하게 되었고 44 이것을 바탕으로 해 서 중국 내에서의 한국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던 것과 관련하여 기왕의 연구들에서는 중국 측의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와 지원, 협력 곧 43 이영옥(2005), 앞의 글. 44 이규태(2001), 중국조선족 사회의 형성과정, 재외한인연구 10, 재외한인학 회; 孫 科 志 (2001), 앞의 책.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409

410 한중 간의 상호연대라는 측면을 강조해 왔다. 45 그러나 20세기 초 중 국의 가장 중심적인 지도자인 쑨원[ 孫 文 ]의 경우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당시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한국이나 몽골, 티베트 등을 중국의 영토 내지는 속방( 屬 邦 )으로 보는 중화주의적 영토 관념을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중국이 혁명에 성공하여 강대국의 지위를 회복한다면 이들 지 역 혹은 국가에 대한 중국의 주권(혹은 종주권)을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한국 독립운동에 대 한 중국 측의 지지나 협력이라는 것이 실제로 어떠한 의미로 읽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또 다른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46 마찬가지로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상당수의 한국 독립운동 지사 들도 지나치게 중국에 의존한다거나 중국의 지원을 두고 파벌싸움을 일삼는 등 다분히 사대주의적 인식이나 태도를 갖고 있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체제하의 한중관계를 거론하는 경우에 중화주의와 사대주의라고 하는 전통적 인식 틀의 잔재가 상당 한 정도로 남아 있었다는 점을 강조해야만 할 것이다. 45 중국 내의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로는 胡 春 惠 저, 신승하 역 (1978), 중국안의 한국독립운동, 단국대학교출판사; 한상도(1994), 앞의 책; 김희곤(1995), 앞의 책; 양소전(1996), 중국에 있어서의 한국독립운동사, 한 국정신문화연구원 ; 한상도(2000), 한국독립운동과 국제환경, 한울; 이현희 (2002), 대한민국임시정부사, 한국학술정보;김희곤(2004), 앞의 책; 石 源 華 主 編 (1996), 韓 國 獨 立 運 動 血 史 新 論, 上 海 : 上 海 人 民 出 版 社 ; 宋 成 有 (1997), 中 韓 關 係 史 現 代 卷, 北 京 : 社 會 科 學 文 獻 出 版 社 등을 들 수 있다. 46 대표적으로 쑨원[ 孫 文 ]의 경우 표면상으로는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내 세웠지만, 거의 말년까지 유지된 열강, 특히 일본에 대한 지원 기대로 인하 여 한국 독립에 대한 적극적 입장 표명은 유보하고 있었다. 이상은 배경한 (2007), 앞의 책, 248~250쪽 참조. 41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411 2.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시기의 한중관계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 시기의 한중관계에 관해서 논의할 경우 가 장 먼저 고려해야 할 문제는 중국에 존재하던 한국 임시정부를 중심 으로 하는 한국 독립운동과 중국 국민정부 내지는 중국공산당 세력과 의 관계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문제와 관련한 그간의 연구들에서 한중우호 내지는 한중연대를 강조해 온 것 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국민정부가 충칭[ 重 慶 ]으로 옮겨 간 1940 년 이후 단계에서의 임시정부 승인문제나 임시정부의 군대조직인 한국 광복군의 처우를 둘러싼 중국 측(국민당정부)의 태도를 살펴본다면 한 국 독립운동에 대하여 중국 측이 지지와 지원의 태도를 가졌다고 하 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고 만다. 47 오히려 중국 측에서는 태평양전쟁 종전 이후 한반도에 대한 자신들 의 영향력을 확보ㆍ확대하기 위한 방법으로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 을 표방하고 있었던 것이고 사실 상은 일본의 병합 이전의 단계, 곧 중국 이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을 다시 되찾는 방향으로 한반도 문제를 대하 고 있었다는 점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특히 최근 대만에서 개방되기 시작한 국민정부 외교문서[ 外 交 部 檔 案 ] 자료들은 1943년 이후 단계에서 년 9월 重 慶 에서 결성된 한국광복군은 국민정부가 만든 韓 國 光 復 軍 行 動 九 個 準 繩 에 의하여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의 지휘 아래 예속되어 일종의 外 國 人 志 願 軍 의 성격을 갖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또 성립 이후 실제로 진행된 광 복군의 편성과 운영 과정에서도 광복군에 대한 군사위원회의 예속 장악 의도 는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었으니 예컨대 광복군 총사령부의 간부인원의 구성 가운데에서 참모처장을 비롯한 주요직위를 맡은 45명의 장교 가운데 70퍼센트 이상인 33명을 중국인 장교들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각 支 隊 를 포함한 전체 광복군의 장교 117명 가운데에서도 중국인 장교가 65명으로 약55퍼센트를 차 지하고 있었다. 한시준(1993), 한국광복군연구, 일조각, 118~119쪽.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411

412 국민정부가 종전 이후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얼마나 적극적인 노력을 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48 국민정부의 이러 한 태도는 그 이전 단계에서 보이고 있는 임시정부에 대한 불승인정책 과 관련해 49 한반도 문제에 대한 중국 측의 입장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는 대목이라고 할 것이다. 이와 아울러 같은 시기 한중관계를 서술하는 데에 있어서 미국과 소련의 대아시아 외교전략에 대한 고려가 충분히 이루어질 필요가 있 다고 본다. 종전과 더불어 한반도 문제에 대한 주도권은 미국과 소련 의 손에 들어갔으며 이 과정에서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중국의 한 반도 정책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미국의 주도권에 따라가는 수동적인 것에 머물 수밖에 없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50 한국 현 대사에서 결정적 시기에 해당하는 1943~1948년에 한반도의 운명을 결 정하는 일은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열강들의 손 안에 있었으며 이 런 구도 속에서 한중 간의 관계를 서술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말 이다. 48 국민정부 外 交 部 에서는 戰 後 한국에서 중국이 주도하는 顧 問 政 治 를 시행하는 방안을 검토한 바 있다. 裴 京 漢 (2009), 蔣 介 石 とアジア, 日 本 蔣 介 石 硏 究 會 主 催 蔣 介 石 硏 究 の 展 望 : 資 料 と 課 題, 東 京 : 國 際 學 術 大 會 發 表 論 文. 49 구대열(1995), 한국 국제관계사연구 2, 역사비평사, 87~110쪽. 물론 중국의 한국임시정부 불승인정책은 미국의 불승인정책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다. 고정휴(2003), 태평양전쟁기 미국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인식과 불승인 정책, 한국근현대사연구 25, 한국근현대사학회, 507~514쪽. 50 구대열(1995), 위의 책, 294~298쪽 참조. 412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413 3. 냉전체제와 한중관계 국공 간의 내전과 그에 이은 중공정권의 성립, 국민당정권의 대륙 상실과 대만행 등은 사실 태평양전쟁 종결 과정에서부터 본격화되고 있던 미소를 중심으로 하는 동서진영 간의 냉전이, 종전 후 중국의 향방과 관련하여 나타난 것이었다. 한반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종 전(해방) 이후 미국과 소련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면서 남북 간의 분단 체제가 점차로 고착되고 남북 간의 군사적 정치적 대립이 노골화되고 있던 상황 또한 미소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가장 전형적인 국면에 속한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태평양전쟁 종전 과정 에서 드러나고 있던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냉전체제는 같은 시기 한중 간의 관계 속에서도 가장 잘 드러나고 있었다고 하겠다. 냉전체제하의 한중 관계를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은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과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이다. 51 최근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에 관한 연구는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52 그것은 미 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던 냉전체제뿐만 아니라 중공정권과 대만의 국민당 정권과의 대립 관계를 반영한 결과였으므로 이것을 아 우르는 관점에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과 전쟁의 경과를 동아시아적 51 중국의 한국전쟁 참여는 자신들의 국가적 보위라고 하는 실리와 북한(조선)에 대한 지원이라는 전통적 명분을 그 이유로 제시하고 있었다. 김한규(1999), 한중관계사 2, 아르케, 991~995쪽 참조. 52 김철범 제임스 매트레이 편(1991), 한국과 냉전: 분단과 파괴와 군축, 평민 사, 235~268쪽 참조. 국내학자에 의한 대표적인 연구로는 김경일(2005), 중 국의 한국전쟁 참전기원, 논형; 徐 相 文 (2007), 毛 澤 東 與 韓 戰, 臺 灣 政 治 大 學 博 士 學 位 論 文 이 있다.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413

414 관점에서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53 한편으로 냉전 시기 한중 간의 상호인식 문제에 있어서도, 공산체 제와 반공체제 사이의 대립 적대적 이해를 넘어서서 보다 실증적인 측 면에서 상호 간의 인식이 어떻게 진전되고 있었던가에 관한 연구들이 최근 조금씩 나타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예컨대 문화대혁 명에 관한 한국인들의 이해라든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냉전체제가 학술계(특히 역사학 분야)에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던가에 대한 연구 등은 54 그간에 거의 공백으로 남아 있던 이 시기 한중 간의 상호 인식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냉전 시기 한중 간의 상호인식에 대한 전체적 조망과 의미 부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보다 광범한 접근들이 이루어질 필요 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이 시기 본격화된 중국과 북한 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보다 심 층적인 이해와 서술이 필요하다고 본다. 특히 이 문제는 앞에서 언급 한바 중소 간의 이념분쟁이라는 분위기 아래에서 북한이 어떠한 선택 을 하게 되는가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55 보다 체계적으로 설명될 필요 가 있을 것이다. 53 楊 奎 松 (2001), 중국의 한국전 출병 시말, 한국전쟁과 중국, 백산서당, 283~330쪽 참조. 54 정문상(2007), 냉전시기 한국인의 중국인식: 중국 문화대혁명 이해를 중심으 로, 아시아문화연구 13, 경원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55 서보근(2006), 앞의 글;박종철(2008), 중소분쟁 초기 북한 중국의 연대에 관한 연구, 인문사회과학연구 21, 호남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김정배 (2008), 북한, 미국 그리고 냉전체제, 미국사연구 27, 한국미국사학회 참조. 414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415 4. 탈냉전시대의 한중관계 1979년부터 본격화된 중국의 개혁개방은 문화대혁명 시기에 더욱 강화된 형태를 띠게 되었던 냉전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결정적 전환점이었다는 점에서 탈냉전 시대의 시발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개혁개방 정책은 자연스럽게 동아시아 국제관계 자체의 근본적인 변화를 수반하였으니 1980년대부터 시작된 한중 간의 경제 교류는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1992년 양국 간의 국교수립이라 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는 물론 한국 국내의 정치적 민주화라는 상황이 또 다른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지만 따져 보자면 이 또한 탈냉 전의 한 가지 표현이었던 셈이니 이를테면 한중 간의 국교수립은 동아 시아 지역에서의 탈냉전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56 탈냉전 시대의 한중관계는 무엇보다도 양국 간의 경제교류에서부터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탈냉전의 실제적 국면이 된 실리외교의 가장 중요한 무대가 경제교류에 있었음은 자명한 일이거니와 이에 대한 분 석과 서술은 탈냉전 시대 한중관계를 설명하는 데에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57 그뿐만 아니라 개혁개방에 나선 중국에 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심의 대상은 이른바 한국의 수출주도형 경 56 한중 간의 국교 수립은 양국 간의 근대적 외교관계의 출발점이라고 할 만한 것으로 1895년의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청과 조선 사이의 전통적 외교관계가 사실상 단절된 이후 약 1세기 만에 근대적 외교관계가 성립되었다는 의미를 가진다. 한중 간의 국교수립 과정과 그 의의에 대해서는 김한규(1999), 앞의 책, 1003~1004쪽 참조 년에 2억 2천만 달러에서 시작된 한중 간의 연간 교역량이 2008년 기준으 로 1680억 달러로 늘어나 그간 최대교역국이던 한미 한일 간의 교역량을 초과했 을 뿐 아니라 수출의 경우 대미 대일 수출액을 합한 것보다 많아졌다. 한국관 세무역개발원 무역수지통계 ( 참조.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415

416 제발전 모델 그 자체였던 것이다. 58 그런 한편으로 1992년 이후 양국 간의 인적 교류의 폭발적인 증가 도 이 시기 한중관계 서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특히 양국 유학생의 상호 교류와 학술계의 교류는 그 규모가 계속하여 늘고 있 어서 교류라는 측면과 함께 상호인식의 측면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 고 있다. 59 아울러 한류( 韓 流 )와 중국열( 中 國 熱 )로 상징되는 문화적 측 면에서의 상호 교류와 영향도 날로 증가하고 있다는 점 또한 심층적으 로 다루어져야 할 문제일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한중 간의 이러한 교류와 상호이해의 증대는 상대적 으로 중국과 북한의 관계가 가지고 있던 비중을 약화시켰으며 동시에 한국(남한)과 대만 사이의 반공을 기반으로 하는 혈맹관계 도 크게 약 화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러한 변화 양상 또한 탈냉전시기의 한 중관계를 논의할 때 빠뜨릴 수 없는 대목이 된다. 특히 냉전시기부터 어느 누구보다 공고한 관계를 자랑하던 중국과 북한 사이의 관계가 탈냉전의 진전과 함께 상대적으로 크게 약화되었다는 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여전히 가장 막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향후 21세기의 한중관계를 예측해 볼 경우 중 요한 변수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개혁개방의 성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1990년대에 와서 가시화되기 시작한 중국의 초강대국화는 필연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중 국의 영향력을 크게 제고시키기에 이르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 한 중국의 초강대국화는 동시에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등 58 김한규(1999), 앞의 책, 1008~1009쪽. 59 宋 成 有 (1997), 앞의 책, 254~258쪽. 41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417 장을 가져 왔다는 것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60 그뿐만 아니라 이른바 신중화주의 의 대두로 일컬어지는 이러한 변화가 향후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청일전쟁 이후 약화ㆍ소멸되어 가던(책봉ㆍ조공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전 통적 의미의 중화주의적 한중관계의 부활 가능성도 61 심각한 검토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새롭게 모색되어야 할 바람직한 호혜적 한중관계의 모습 또한 반드시 점검되어야 할 문제가 될 것이 다. 특히 한중관계의 발전을 통한 동아시아의 지역주의에 대한 발전적 전망을 제시하려는 노력들은 62 향후 더욱 확대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60 한석희(2001), 탈냉전 시기의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 중국의 국가이익과 주변 안정, 그리고 한반도 정책, 연세사회과학연구 7, 연세대학교 사회과학연구 소; 서창호(2004), 탈냉전 이후 중국과 미국의 관계: 협력과 갈등을 중심으 로, 한국동북아논총 33, 한국동북아학회;윤영덕(2005), 탈냉전 후 중국의 부상과 대외전략, 사회과학연구 26-1, 조선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61 신중화주의는 이후 (중국) 국내적으로 애국주의 와 통일적 다민족국가론 으로 나타나고 있다. 윤휘탁(2006), 신중화주의, 푸른역사, 392~399쪽 참조. 애 국주의의 기원과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吉 澤 誠 一 郞 저, 정지호 역(2005), 애 국주의의 형성, 논형을 참조할 것. 62 송은희(1997), 동북아지역주의와 한중협력, 한국동북아논총 5, 한국동북아 학회;윤영덕(2004), 냉전후 중국-아세안 관계의 발전과 동아시아 지역협력, 중국연구 33,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문제연구소; 서정경 외(2009), 동아시 아 지역주의와 중국의 대응전략, 한국정치학회보 43-2, 한국정치학회.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417

418 V. 맺음말 이상에서 새로운 20세기 한중관계사 의 서술을 위해 그간의 연구가 갖는 문제점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고 나아가 동아시아 국제관계 속의 한중관계사 라고 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보았다. 그리고 이러 한 시각에 맞추어 20세기 한중관계사를 서술하려고 할 때 무엇을 어 떻게 서술할 것인지에 관하여 구체적인 서술방안을 나름대로 제시해 보았다. 우선 연구시각과 관련해서는 현 단계에서 새롭게 모색되어야 할 한 중관계사 연구는 첫째, 한국과 중국 간의 관계라는 좁은 일국사 중심 의 시각을 뛰어넘어서 동아시아사 내지 전 지구사라고 하는 폭넓은 시각 위에 전개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점은 근현대의 역 사 자체가 국가 간의 관계로 한정될 만큼 좁은 울타리를 갖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일본을 동일한 범주에 넣은 동아시아사로서 혹은 보다 넓게는 세계사 내지 지구사라는 범위에서 추구될 필요가 있게 된다는 말이다. 다음으로 새로운 근현대 한중관계사는 기왕의 한중관계사 연구에서 구사되어 오던 중심과 주변이라는 시각에서 탈피하여 한중관계 자체 를 하나의 주변으로 보는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음도 지적해 보 았다. 물론 이때의 주변은 서구열강의 침략 아래 들어 있는 동아시아 와 또 그 동아시아의 주변으로서 한국 혹은 중국이라고 하는 이른바 다층적 내지 중층적 주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변적 시각 에 설 때 비로소 한중관계는 종속적이고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41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419 호혜적이고 평등한 것으로 형상화될 수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어서 기왕의 연구들에서 덜 중요시되거나 무시되었던 분야들, 예 컨대 한중 양국 혹은 양 지역(도시) 간의 경제적 교류의 실상에 대한 보다 광범한 연구라든가, 양 지역 간의 정보와 지식의 교류를 포함한 이른바 문화적 교류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 혹은 중국 내의 한인 사회나 한국 내의 화교사회와 같은 이민사회의 성립과정과 구조같은 다양한 문제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것은 이들 분야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들이 있을 때 보다 전면적인 한중관계사 의 이해나 서술이 가능해 질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이상에서 검토한 바와 같 동아시아 국제관계라는 시각 으로부터 20세기의 한중관계를 서술할 경우 구체적인 서술의 방안을 차례로 제시해 보았다. 20세기의 동아시아 국제관계는 서구 열강과 일 본에 의한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체제 시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시 기, 그에 이은 냉전시대 그리고 (1980년대 이후) 탈냉전의 시대로 구분 해 볼 수 있을 터인데,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20세기의 한중관계 가 각각 어떻게 전개되어 갔는가를 서술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해 본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서술 구도 아래에서라야 우리가 머리말에서 제 시한 바 일국사의 시각을 넘어서는 관점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며 전 체적인 한중관계사의 조망도 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해본 것 이다. 물론 이 글에서 제시한 동아시아 국제관계와 지구사적 범위의 국제 관계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부분 집합으로서의 한중관계라고 하는 것 이 명백한 경계를 가지기란 사실상 어렵고 그 연관성을 구조적으로 밝 히는 작업 자체도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글에서 제시하고자 노력한 관점이나 서술 방안이 20세기 한중 20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419

420 관계사의 서술에 설득력을 갖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 지 모르겠다. 다만 머리말에서도 언급한 대로 이제까지의 한중관계사 가 지나치게 일국사적 관점에서, 혹은 일국사와 일국사의 관계라는 관 점에서만 논의되어 왔다는 반성에서부터 이 글이 출발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다면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시각에서부터 한중관계사에 접근하 려고 하는 이 글의 의도도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42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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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 Abstract Probing for the History of Sino-Korean Relations in the Context of the East Asian World Order With emphasis on the Sino-Korean relations within the framework of the history of East Asia, this research project is designed to examine the so-called East Asian World theory, which has drawn criticism mainly from Korean scholars for its biased Sinocentric view of East Asian civilization, and to develop a new narrating methodology of Sino-Korean relations. For this purpose, the entirety of East Asian history is divided into seven subperiods: before the fourth century A.C.E., the fourth to ninth centuries, tenth to twelfth centuries, thirteenth-fourteenth centuries, fifteenth and sixteenth centuries, seventeenth to nineteenth centuries, and the twentieth century, each of which will consists of one chapter. The main theme of each period is provided as follows. Avoiding the conventional view of East Asian world order, or the Sinocentric tribute system, in which Sino-Korean relations are only examined from a two-dimensional perspective, Chapter One looks at the multiplex nature of the East Asian world order. Although the nature of East Asian international relations before the third century A.C.E. looks like a tribute system in appearance, it differed from the tribute system practiced in the later period in that it was no more than an East Asian modus operandi of international trade rather than an emblem of the Han superiority to its neighboring countries: the tribute system was rather a symbol of Chinese defensiveness. Based on this frame, this chapter provides some cases of Han relations with early Korean states such as Koguryŏ, Puyŏ, and Samhan. Abstract 427

428 Chapter Two explores the Sino-Korean relations in the sixth through eighth centuries. The Sino-Korean relations in the period of the northern and southern dynasties (fourth to sixth centuries) can be characterized by the tribute system in one sense. In another sense, however, it does not mean that the Korean states lost their political sovereignty despite accepting positions inferior to those of the states in China. Also, Korean states maintained mutilateral diplomatic relations with non-chinese states in the Mongolian steppes and on the Japanese archipelago. After the reunification of China, the Sui and Tang empires established a much tighter and unilateral order in East Asia; the establishment of the Loose-Rein Province ( 羈 縻 州 ) on border areas and some neighboring countries was a good case for such a new situation. Through the Tang-Silla War ( ), the Silla in the Korean peninsula was able to avoid being reduced to the status of such a loose-rein province but became subordinated to the Tang more tightly than before. Chapter Three examines Sino-Korean relations within the framework of the multi-centered interstate relations in East Asian in the tenth to twelfth centuries. It argues that the so-called Sinocentric tribute system theory is no longer useful for the explanation of the East Asian international order in the tenth to twelfth centuries because it is not historically accurate. In fact, the tribute system theory is no more than a product of unilateral Sinocentrism. The international order of medieval East Asia should rather be explained in terms of balance of power, utilitarianism, and reciprocity. The World- Systems Theory suggested by Chase-Dunn and Hall can provide a useful paradigm in defining the sphere of the multi-centered East Asia within the context of the network among multiplex world systems. Khitan-Korean relations, Jurchen-Korean relations, and Song-Korean relations should be examined and understood in this larger context. Chapter Four provides the history of Sino-Korean relations in East Asia, covering the thirteenth through fourteenth centuries. This time period can be understood as an era of great unification of East Asia by the Mongol 428 Probing for the History of Sino-Korean Relations in the Context of the East Asian World Order

429 Empire. The sphere of East Asia, which Korea had belonged to, also expanded to cover the entirety of the Eurasian continent, centering the Mongol empire in the Beijing area and including diverse systems of conquered countries within it. To better understand this new international order, we should pay close attention to the structural organization of the empire first, including, among others, Mongol relations with its neighbors within and without the empire. In the case of the Koryŏ in the Korean peninsula, the Koreans understood their new relations with the Mongol Khan as traditionally tributary one, even though some new factors were added. This chapter examines such old and new elements of Mongol-Korean relations under Mongol interference in the thirteenth and fourteenth centuries. With emphasis on the place of Chosŏn under the so-called Ming order in East Asia, Chapter Five explores the features of Ming-Choson relations within the framework of the East Asian world. In an effort to broaden our views of international relations in traditional East Asia, it also examines the existing studies of Western, Japanese, and Korean academic societies. In addition, it defines the historical sphere of so-called East Asia from the Ming-Choson joint perspective. Specifically, this chapter examines some diplomatic terms that were applied to Ming-Choson relations of the time, such as chogong ( 朝 貢 ), ch'aekpong ( 冊 封 ), oeguk ( 外 國 ) and, chungoe ( 中 外 ), to name a few, and subsequently argues that to the Ming, Chosŏn was always a oeguk (foreign state) that was not included in the chungoe (within and without) of the Ming understanding of the world. It also posits a new interpretation that the so-called Ming order would never have been possible without geopolitical support from Chosŏn. Chapter Six explores Qing-Chosŏn relations in the context of the new international order of East Eurasia established by the Qing Empire. The Qing was a new empire that incorporated multi-international orders of East Eurasia (East and Central Asia) into one under the Da Qing (Great Qing) Abstract 429

430 banner. In sixteenth-century East Asia, a new type of international relations, such as the border market system, was taking its shape, replacing the traditional tribute system. Initiated by the Mongols and Tibetans, another international order was also spreading its roots in Central Asia during the same period. Once the Manchu rose to power in Manchuria, the region bookended by Central Asia and East Asia, they swept over both regions and established a new order centered in Beijing. This new order consisted of four different systems: the tribute system, the border market system, the treaty system, and the vassalage system. The Qing order was thus a sort of multiplex system, in which Chosŏn was distinguished from others in that it belonged to the traditional tribute system yet resisted joining the new Qing order until it was defeated by the Manchu. Chapter Seven examines the international order and Sino-Korean relations in the twentieth century. Reading against the conventional understanding of Sino-Korean relations, which tend to be examined from each country's nationalistic perspective, this chapter attempts to interpret it within the framework of the entirety of East Asia. It also discusses imperialism and colonialism, the Sino-Japanese War of , the Cold War system, and the post-cold-war system. In this course, this chapter provides a broader view of Sino-Korean relations in the modern era. KEY WORDS Sino-Korean, East Asian World, Tribute system, Han, Tang, Silla, Sinocentrism. Khitan, Jurchen, Koryŏ, Chosŏn, Eurasia, Manchu, Ming, Da Qing. 430 Probing for the History of Sino-Korean Relations in the Context of the East Asian World Order

431 383 국민국가 411, 412 국민정부 325 군현제 숫자 325 군현제(郡縣制) 6사(六事) 191, 194 ㄱ 가경 갈단 , 312, , 272, 273 개혁개방 , 108, , 415 김한규(金翰奎) 24, 26, 28, 29, 계빈(罽賓) 54, 76, 78, 83~124 고구려 ㄴ 106 계림대도독부 97, 98, 101, 121, 122 고구려발해 302 고구려사 귀속 논쟁 243, 254, 고려국왕인(高麗國王印) 고병익 367, 391, 392 고조선 63, 66, 79, 80, 94, 곤여만국전도 공녀 190 공물 188 공호수적(供戶數籍) 194, 199 광동무역체제(廣東貿易體制, C a n t o n trade system) , 280, 281, 285 구리하라 도모노부 구시 칸 249, 251 김춘추 188 견사(遣使) 광해군 기미주(羈靡州) 74, 77, 89, 105, 106, 107, 109, 111, 114, 117, , 335 겔룩파 고려 40 김상기 338 개토귀류 금수(禁輸) 길리야크인[流鬼] 359 강희제 24, 25, , 367, 368 기미체제론 335, 337 갑신정변 금문(金文) 금사(金史) 기미 132, 238, 249, 251, 265, 266, 267, 268 가경 대청회전 가정제 366, 368 구오대사(舊五代史) 찾아보기 , 110, 111, 114, 116, 나당전쟁 , 357 난징조약 낙랑군 64 남북국 71, 88, 93, 117 남북조 86, 89~93, 96, 97, 98, 100, 101, 103, 107, 111~119 46, 59, 63 남월(南越) 31 남월왕 납질(納質) 194, 202 내경(內境) 324 내번 268 내복 238, 265~269, 272, 273, 276, 284 내속 238, 265~269, 냉전의 기원 냉전체제 384, 405, 413, 414 네르친스크조약 307, 337 찾아보기 431

432 265, 332, 333 누르하치 ㄷ 다루가치 197 다원구조 89 라짱 칸 338 릭단 칸 달라이 라마 5세 대몽골 울루스 165 대원(大元) , 동남아시아 국가연합 345 동문휘고(同文彙考) 357 동삼성(東三省) 243~245, 252 만주족 337 돌론 노르의 회맹 동남 초승달 만주 식민주의(M a nc hu c olon i a l i s m) 322 만주 제국주의(Ma nc hu i mper ia l i sm) 대통력(大統曆) 70~92, 98, 101~121, 말갈 79, 84, 114, 118 매카트니(George Macartney) 맨콜 393 동아시아 담론 동아시아 문화권 295, , 418 동아시아세계론 21, 237, 248~252, 254, 259, 26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38 맹기제(盟旗制) 맹약관계 128 맹약체제 , 367, 368 명질서 238, 258, 262, 265, 272, 273, 276~278, 281, 283, 285 몽고아문 335, 339 몽골 티베트 세계 335, 336, 338 몽골 244, 250, 252, 260, 261, 262, 263, 264, 277, 284 몽골 군대 331, , 346, 350 명사(明史) 295 동아시아 교역권 동유라시아 391 만선사(滿鮮史) 322, 323, 대청제국사(大淸帝國史) 371 돈황(敦煌) 394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 325 동아시아 123, 384 ㅁ 만국공법 241, 269, 270, 354, 355, 362, 365, 369, 373, 대보단(大報壇) 동아시아사 339 理藩院 333, 338, 343 달라이 라마 대청회전 358 류큐처분[琉球處分] 단월관계(檀越關係) 대중국 147 레쟈드 다원적 국제질서 ㄹ 라싸조약 다국체제 동월 42, 43 두흠(杜欽) 355 동치중흥(同治中興) 니시지마 사다오[西島定生] 21, 55, 57, 248~253, 295~299, 301, 303, 304, 309, 311, 묵특선우(冒頓單于) 47, 49

433 407 문화대혁명 민족주의 운동 ㅂ 147 바필드 ㅅ 358 사건, 타이완 187 반력(頒曆) 130 비트포겔 366 사기(史記) 발해 112, 114, 116, 117, 120 사대주의 배신 238, 265, 275, 284 배튼 149 삼국 71, 84~90, 96, 98, 99, 103, 104, 108, 112, 115~121 백제 54, 86, 92, 97, 98, 99, 100, 103, 104, 105, 107, 109, 110, 111, 115, 116, 삼번의 난 355 상군(湘軍) 번속 86, 113, 269 상호인식 번국 238, 265, 269, 271, 272 생신사 번병 268, 269 서북 초승달 338, 342, 349, 373 번부(藩部) 341, 342, 343, 372, 373 번부체제 353, 355 베이징조약 196, 262, 263, 264, 베트남[安南] 베트남전쟁 338 벡(beg, 伯克) 제도 361 병인양요 병자호란 265, 347, 349 봉공체계 부마국왕 북경 250, 253, 259, 261, 263, 264, 265, 275, 북경조약 북벌론(北伐論) 불교 316 불평등 조약체제 250, 263 서주 23 서태후(西太后) 355 석채산(石寨山) 45 선비 58 49, , 203 설역(設驛) 84, 99, 105, 118 설연타 , 112 세종 세폐 소남 갸초 소중국 325 소중화 44, 267, 280 소천하(小天下) 73, 83 불교, 티베트 서울 세계체제 이론 178 부마(駙馬) 50 서역사신 성덕왕 26 봉조체제 297, , 58, 60, 61 서강성(西康省) 63 봉선(封禪) 서역 선우례(單于禮) 364 병자수호조규 348 삼전도(三田渡) 속국 , 357, 358, , 265, 266, 268~272 속국관계(屬國關係) 172 찾아보기 433

434 364 속방조회(屬邦照會) 336 알바진 333 송사(宋史) 366, 367, 368 알탄 칸 수량(輸糧) 194 야랑(夜郞) 수원성(綏遠省) 356 순치제(順治帝) , 386, 시모노세키조약[馬關條約] , 318 시헌력(時憲曆) 316 시호(諡號) 237, 253, 254, 256, 256, 식민사관 259 양속체제(兩屬體制) 여진 263, 267, 277, 278, 280, 284, 285 연(燕) 63 연 제 66 82, 89 연운(燕雲) 16주(州) 신라 76, 86, 90, 96~99, 103, 104, 105~ 신안(新安) 해저유적 신장[新疆] 329, 356 신중화주의 408, 417 연호 107, 108, 114, 186, , 열하성(熱河省) 예기 132, 연행사(燕行使) , 343 예부(禮部) 신청사(新淸史, Ne w Q i n g H i s t or y) 243, 244, 245, 248, 321, 322, 323, 371 실리외교 358 연동성 401 식민지 지배체제 신미양요 양속관계(兩屬關係) 에미시[蝦夷] 336 시빌 칸국 , 355 야쿱벡 317 숭정(崇禎) 연호 44, 59 야랑왕(夜郞王) 예제패권주의(禮制覇權主義) 오복 268 오손 48, 58 오카다 히데히로[岡田英弘] 왕망 아라사교계통상각조례(俄羅斯交界通商各 條例) 307, 308 외경(外境) 아스트라한 칸국 336 외국 299 아시아교역권 아편전쟁 398 외복 268, 269, 338, , ~66, 79, 94, 95, 97 외신(外臣) 270, 353 안남국왕(安南國王) , 265~272, 276, 277 외번(外藩) 406 요동군 166 요동전쟁 안동도호부 106 요사(遼史) 안축(安軸) 170 웅진도독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324, 왜(倭) 328 아시아 아프리카회의 , 36 왕부지(王夫之) 아세안(ASEAN) 아시아 교역권 , 46, 58 오환(烏桓) ㅇ 오리엔탈리즘 , ~

435 167 원 무종(武宗) 위만 244, 245 위구르 64, 65 위만조선(衛滿朝鮮) 유교 64 73, 82, 83, 90, 91,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169 유승단(兪升旦) 84, 118 유연 416 유학생의 상호 교류 73, 76, 82, 83, 108 율령 389 을사보호조약 40 이년율령(二年律令) 399 이민사회 307 이번원칙례(理藩院則例) 112 이사도 이와이 시게키[岩井茂樹] 이원적 통치체제 이적 , 419 제(齊) 제왕운기 170 제국주의 360, 369, 조공 ~2 4 3, ~2 6 0, 263~271, 조공국의 모델(model tributary) 315, 조칙록 종번관계(宗藩關係) , 275, 318, 297, 341, 372, 373 조천사(朝天使) 64 임진전쟁(임진왜란) 279, ,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 364 조약체제 36 임시정부 승인문제 임오군란 244, 245, 248 조미조약 355 일국사(一國史) 일남(日南) 130, 148 정복국가 조군(助軍) 184, 318, 363 인장(印章) 342 정복왕조 조공체제(tribute system) 127, 128, 131, 139, 146, 296, 297, 320, 327, 341, 343, 372, , 266, 267, 281 이춘식(李春植) 24, 29, 301, 303, 전해종(全海宗) 391 조공ㆍ책봉체제 134 이홍장(李鴻章) 44 조공시스템 130 이제현(李齊賢) 임둔 315, 이원구조론 이원호 전(滇) 조공관계론 297, 350 이원구조 275 재조지은 조공관계 170 이승휴(李承休) 97, 101 조국(康國) 297, 335, 343 이번원 장군호 제3세계 171 이곡(李穀 44, 48 장건(張騫) 정덕신례(正德新例) 315 유장근(兪長根) 40 장가산한간(張家山漢簡) 79, 93, 94 위현전(韋玄傳) ㅈ 360 종속관계(宗屬關係) 좌종당(左宗棠) 355 찾아보기 435

436 주례(周禮) 30 창오(蒼梧) 주방(駐防) 340 책봉 176, 238~243, 249, 250, 251, 253~256, 258~260, 263, 264, 269, 271, 283, 주변적 시각 325 주현제(州縣制) 준가르 335, 336, 338 준변방 , 중화 중소 이념분쟁 중앙유라시아 371 중외 중종 327, 330~335, 343, , , 진번(眞番) 64 질지선우(郅支單于) 집사(集史) 293, 385, 325, 327, 340, 349 진량(金梁) 302 청일전쟁 359, 최치원 춘추 27 치다루가치(置達魯花赤) 칙사(勅使) 344 친조(親朝) , 33 ㅋ 카안 울루스 ㅊ 차하르성[察哈爾省] 194 칠칠사변[七七事變, 노구교사건(盧溝橋事 件)] 405 카라키타이 343, 365 청사공정 총리아문 355 지구사(Global History) 419 진덕왕 359 체왕 랍탄 410 중화주의 영토 관념 직성화直省化) 357 청일전쟁 청사고(淸史稿) 중화제국체제(中華帝國體制) 진관령(津關令) 천진조약 청내부일통여지비도(淸內府一統輿地秘圖) , 300 직성(直省) 249, 251, 252 책봉체제론 천조체제(天朝體制) 증국번(曾國藩) 386 책봉체제 72~79, 81, 82, 88~92, 100, 101, 295 천조예치체계(天朝禮治體系) 404, 412 중화주의 책봉ㆍ조공관계의 근대적 변모 , 273, 274 중화사상 402, 403 책봉ㆍ조공관계 책봉호 86, 89, 97, 98, 100, 101, 106, 107, 110, 111, , 265, 274 중일전쟁 295~304, 370 책봉ㆍ조공 패러다임 중국적 질서 237, 239, 241~243, 248, 252, 253, 257, 259, 260, 262, 275, 283 중립외교 308 책봉 없는 조공 중국적 세계질서(World Order) 299 중국화(中國化) 46 카잔 칸국 356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캬흐타조약 137,

437 한자 108 태평송 404, 412 태평양전쟁 354 태평천국 37, 46 톈샹린[田相林] 353 톈진조약 84, 116, 118 통공호시 117~119, 121, 13 6, 142~145, 147~ 투하령(投下領) 387 한청통상조약 , 332 해금(海禁) 129, 154 현재주의 41 현천치(懸泉置) 호리 토시카즈[堀敏一] 티무르 제국 306 티베트[吐蕃] 162, 244, 262 티베트 불교 333, 334, 한중관계 함풍제(咸豐帝) 84, 102, 118 토욕혼 415 한중 간의 국교수립 할하 341 토사(土司) 264 한화(漢化) 237, 240, 243~248, 283, 321, 322, 토르구트 73, 75, 76, 82, 83 한자문화권 한서(漢書) 341 토관(土官) 62, 66 한사군(漢四郡) 23 태종 334, 338 호쇼트 36, 314 호시(互市) 호시체제 314, 318, 320, 327, 341, 353, 372, 373 팔기제 페테르부르크 조약 358 ㅎ 하(夏) 한국임시시정부 144 홍타이지 333, 334,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 회군(淮軍) 회부 341 회유 효종(孝宗) 후금 황즈롄[黃枝連] 횡선사 162 하마시타 다케시 호혜주의 화이론 패어뱅크 57, 146, 239, 240, 248, 249, 253, 295~299, 301, 303, ~35, 호혜적 한중관계 팔기 55, 250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 ㅍ 파당(巴塘) 416 한류(韓流)와 중국열(中國熱) 384 탈냉전체제 405, 413 한국전쟁 416 탈냉전 411 한국광복군 336 타타르의 멍에 토번 390, 409 한국 독립운동 ㅌ , 279, 280, 281~286 후마 스스무[夫馬進] 316s 찾아보기 437

438 흉노 32, 58, 61, 63, 64, 257 히데요시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439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총서 58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제언과 모색 초판 1쇄 인쇄 초판 1쇄 발행 2010년 12월 10일 2010년 12월 15일 지은이 펴낸이 펴낸곳 이익주, 김병준, 김창석, 윤영인, 계승범, 구범진, 배경한 정재정 동북아역사재단 등 록 호(2004년 10월 18일) 주 소 서울시 서대문구 의주로 77 임광빌딩 전 화 팩 스 c 동북아역사재단, 2010 ISBN * 이 책의 출판권 및 저작권은 동북아역사재단이 가지고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어떤 형태나 어떤 방법으로도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금합니다. * 책값은 뒤표지에 있습니다. 잘못된 책은 바꾸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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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관논총107집(전체화일) 日 本 正 倉 院 의 百 濟 遺 物 과 그 역사적 성격 1) 延 敏 洙 * Ⅰ. 서 언 Ⅳ. 正 倉 院 에 소장된 경위 Ⅱ. 正 倉 院 文 書 와 백제유물 Ⅴ. 正 倉 院 백제유물의 역사적 성격 Ⅲ. 백제 유물의 전래와 中 臣 鎌 足 Ⅵ. 결 어 Ⅰ. 서 언 일본 東 大 寺 의 부속건물 正 倉 院 에 소장되어 있는 正 倉 院 文 書 에는 백제 의자왕이 왜 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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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DDC0B6B1E2B0FCB0FAC0CEC5CDB3DDB0B3C0CEC1A4BAB82E687770> 여 48.6% 남 51.4% 40대 10.7% 50대 이 상 6.0% 10대 0.9% 20대 34.5% 30대 47.9% 초등졸 이하 대학원생 이 0.6% 중졸 이하 상 0.7% 2.7% 고졸 이하 34.2% 대졸 이하 61.9% 직장 1.9% e-mail 주소 2.8% 핸드폰 번호 8.2% 전화번호 4.5% 학교 0.9% 주소 2.0% 기타 0.4%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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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D3034C1A4BFEBBCAD2E687770> 1930년대 초 천도교신파의 정세인식과 조직강화* Social Awareness and the Strengthening of Organization by the New faction of Chundogyo in the Early 1930s 1)정 용 서(Jeong, Yong Seo)** Ⅰ. 머리말 Ⅱ. 신간회 해소에 대한 인식 Ⅲ. 반종교운동에 대한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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