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韓 國 言 語 文 學 第 82 輯 이와 같은 목은의 위상은 고려에서뿐만 아니라 明 나라에까지도 알려져 있 었다.1385년(우왕 11)9월 명나라에서 國 子 學 錄 張 溥 와 典 簿 周 倬 이 고려로 사신을 왔을 때,국경에 이르러 제일 먼저 목은의 안부를 물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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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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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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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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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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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시험지 출제 양식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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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민락초신문4호


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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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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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은하 1 우리 은하 위 : 나선형 옆 : 볼록한 원반형 태양은 은하핵으로부터 3만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 2 은하의 분류 규칙적인 모양의 유무 타원은하, 나선은하와 타원은하 나선팔의 유무 타원은하와 나선 은하 막대 모양 구조의 유무 정상나선은하와 막대나선은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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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고의 유토피아 2

단위: 환경정책 형산강살리기 수중정화활동 지원 10,000,000원*90%<절감> 형산강살리기 환경정화 및 감시활동 5,000,000원*90%<절감> 9,000 4, 민간행사보조 9,000 10,000 1,000 자연보호기념식 및 백일장(사생,서예)대회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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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오스본을 중심으로 한 작은 정부, 시장 개혁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에 대응 하여 노동당은 보수당과 극명히 반대되는 정강 정책을 내세웠다. 영국의 정치 상황은 새누리당과 더불어 민주당, 국민의당이 서로 경제 민주화 와 무차별적 복지공약을 앞세우며 표를 구걸하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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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운 체계상의 특징 음운이란 언어를 구조적으로 분석할 때, 가장 작은 언어 단위이다. 즉 의미분화 를 가져오는 최소의 단위인데, 일반적으로 자음, 모음, 반모음 등의 분절음과 음장 (소리의 길이), 성조(소리의 높낮이) 등의 비분절음들이 있다. 금산방언에서는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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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 畿 鄕 土 史 學 第 16 輯 韓 國 文 化 院 聯 合 會 京 畿 道 支 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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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강습회원의 수영장 이용기간은 매월 1일부터 말일까지로 한다.다만,월 자유수영회 원,자유수영 후 강습회원은 접수일 다음달 전일에 유효기간이 종료된다.<개정 , > 제10조(회원증 재발급)1회원증을 교부받은 자가 분실,망실,훼손 및

Transcription:

牧 隱 流 配 期 詩 의 情 感 樣 相 어강석(한국학중앙연구원) <목 차 > 1. 緖 言 2. 鬱 憤 과 自 嘲 의 激 情 3. 諦 念 과 順 命 의 安 靜 4. 結 言 1. 緖 言 여말선초의 정치상황에서 목은 이색(1328~1396)의 거취는 큰 의미를 지니 고 있었다.목은이 지니고 있는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이 그만큼 컸기 때문 이다.특히 1374년 9월 恭 愍 王 이 갑자기 죽고 禑 王 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목 은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우왕은 목은을 師 傅 로 삼았으며,1386년(우왕 12) 시행된 과거에서 목은이 지공거가 되어 花 園 에서 연회를 베풀었을 때,목은 을 사부의 예로 존중하여 손을 잡고 들어가 옥좌의 건너편에 앉히려고 하기 도 하였다. 1) 더욱이 1388년(창왕 원년)4월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여 고려 조정의 핵심 권력을 잡고,6월에 우왕이 왕씨가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폐위할 때에도,목은이 당연히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 2) 고 지지함으로 써 昌 王 이 즉위할 수 있었다. 1) 高 麗 史 第 115 卷, 列 傳 28,< 李 穡 >: 十 二 年, 知 貢 擧 以 舊 例, 享 禑 于 花 園 禑, 以 師 傅 敬 重 之, 親 執 手 引 入 欲 對 榻 坐, 穡 固 辭. 禑 親 牽 內 廐 馬 賜 之. 2)같은 곳, 第 137 卷, 列 傳 50,< 辛 禑 五 >.

206 韓 國 言 語 文 學 第 82 輯 이와 같은 목은의 위상은 고려에서뿐만 아니라 明 나라에까지도 알려져 있 었다.1385년(우왕 11)9월 명나라에서 國 子 學 錄 張 溥 와 典 簿 周 倬 이 고려로 사신을 왔을 때,국경에 이르러 제일 먼저 목은의 안부를 물었을 뿐 아니라, 사람이 많이 모인 가운데에서 통역하는 사람에게 묻기를 저기 몇 번째 서 있는 분은 순수하여 도를 지닌 분입니다.이선생 아무가 아닙니까? 하였다. 역관이 그렇다고 대답하였더니,곧 앞으로 나아가서 서로 매우 공경스럽게 말하였다.두 사람이 선생의 앞에 나와 서로 이야기 하는데 공경함이 지극하 였다. 3) 이처럼 당시 목은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의 두터운 신망을 얻 고 있었기 때문에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권력자들에게는 가장 큰 견제의 대상이 되었다.하지만 목은은 61세의 나이로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賀 正 使 가 되어 명나라의 수도인 南 京 까지 갔다 오는 등 마지막까지 고려를 위하여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이와 같은 목은의 행보는 결국 1389년 11월 이성계에 의하여 창왕이 폐위되고 공양왕이 즉위하며 끝을 맺게 된다. 11월 기묘일에 공양왕이 즉위하고 보름정도 지난 12월 초하루 목은은 관 직을 박탈당하였으며,5일 長 湍 으로 유배가 결정되었다.이때부터 목은의 餘 生 은 長 湍 과 咸 昌, 衿 州 등지에서의 유배생활로 이어진다.잠깐씩 해배가 되 어 경사에 올라와 지내거나 여흥에 머물기도 하였지만,1392년 7월 조선이 건국되고 10월에 고향인 한산으로 돌아갈 때까지 이어졌다. 牧 隱 詩 藁 권35에는 이 시기에 지은 시를 특별하게 長 湍 吟, 咸 昌 吟, 衿 州 吟, 驪 興 吟 이라는 소제목으로 모아서 수록하고 있다.장단음에는 장단에 서 유배생활을 하였던 1389년(공양왕 원년)12월 6일부터 1390년 4월 10일까 지 지은 61제 89수가 있으며,함창음에는 1390년 8월 13일부터 12월까지와 다음해인 1391년 6월부터 12월까지 함창에서의 생활 중에 지은 42제 60수가 있고,금주음에는 1392년 4월 14일부터 6월 초까지 금주에서 생활하면서 지 3) 李 光 靖, 牧 隱 先 生 年 譜 : 九 月 與 天 使 國 子 學 錄 張 溥 典 簿 周 倬 相 見. 二 使 至 境 問 先 生 安 否. 旣 至 望 見 先 生 於 稠 人 中, 問 譯 者 曰 彼 立 第 幾 者, 精 粹 有 道 人 也, 不 是 李 先 生 某 耶? 曰 是. 卽 前 相 語 甚 敬.

牧 隱 流 配 期 詩 의 情 感 樣 相 207 은 39제 48수가 있으며,여흥음에는 1392년 6월 7일부터 7월 조선이 건국될 때까지 지은 20제 21수가 수록되어 있다. 아버지 稼 亭 李 穀 (1298~1351)과 함께 고려에서뿐 아니라 중국에까지 문명 을 떨쳤던 목은은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으며,영향력을 지녔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새롭게 권력을 잡은 인물들에 의하여 하루아침에 자신의 삶이 좌지 우지 되고,더구나 평소 자신들을 목은의 제자라고 칭하던 인물들이 앞장서 서 극렬하게 상소를 올려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결국 유배 생활로 떠 돌아야 하는 목은의 상황은 커다란 정신적 충격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牧 隱 詩 藁 에서 이 시기의 시를 특별히 소제목을 달아 다른 시기의 시와 구 별하여 수록한 것도 이와 같은 목은의 처지를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시기 목은의 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연구자는 여운필 4) 이 있다.여운 필은 이 시기 목은이 당시 圃 隱 鄭 夢 周 (1337 1392), 松 軒 李 成 桂 (1335 1408), 三 峯 鄭 道 傳 (1342 1398), 冶 隱 吉 再 (1353 1419)등의 인물들에게 보낸 시를 중 심으로 상호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이들 인물에 대한 감정이나 諷 刺 의 양상 을 확인하였다.그러나 상대방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어떠하였는가도 중요 하지만,목은 개인의 감정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발현되고 변화되는가에 대한 논의도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하겠다. 사람의 품성은 평소 생활 속에서도 나타나지만 어려운 난관에 부딪혔을 때나 극한의 상황을 만났을 때 그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안정적이고 일 상적인 삶을 영위할 때는 사회적 규범이나 상식을 지키며 평범하게 지낼 수 있다.그러나 사회가 불안하고 불우한 삶이 겹쳐올 때는 가식적이거나 지나 친 예의범절로 포장되지 않은 본연의 인격과 품성이 드러나기 쉽다. 목은은 평생 실패를 맛보거나 불우한 시기를 보내지 않았다.천부적인 재 능으로 이미 14세에 監 試 에 합격을 하였으며,아버지 稼 亭 의 적극적인 후원 에 힘입어 20세의 젊은 나이에 元 이라는 세계문화를 접할 수 있었으며,원의 국자감에서 폭넓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24세라는 좀 이른 나이에 부친을 4) 呂 運 弼, 恭 讓 王 代 의 牧 隱 詩 考 察, 韓 國 漢 詩 硏 究 6,한국한시학회,1998.

208 韓 國 言 語 文 學 第 82 輯 잃었다는 것은 목은의 삶에서 첫 번째로 닥친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그 러나 그 이후에도 고려의 향시와 정동행성의 향시에서 장원을 하였으며,원 의 제과에서도 탁월한 성적으로 합격을 하였다.원에서의 벼슬을 그만두고 고려로 돌아온 20대 후반부터 고려조정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로 자리를 굳 혔다. 이와 같이 별다른 장애도 없이 승승장구하던 목은에게 시련이 다가온 것 은 공민왕이 피살되면서부터이다.모친의 별세로 3년상을 치르면서 지병이 생겨 고생을 하였는데,공민왕의 죽음은 증세를 더욱 악화시켜 7-8년 동안 문밖출입을 못할 정도였다.또한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고려 조정의 권력을 잡으면서,이성계 일파에 附 和 雷 同 하지 않은 목은은 고달픈 유배생활 이 시작되었다.매일같이 대간들은 목은의 죄를 논하며 죽이라는 상소를 올 리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그러나 순수하게 고려의 부흥을 위해 粉 骨 碎 身 한 목은에게 붙여진 죄목은 500년 고려를 배신하였다는 것이었다.억울하고 답답함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었다.더구나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해 결이 될 수 없는 문제였으니 더욱 암담하였다. 이처럼 정치적 사회적으로 격변의 시기에 처한 목은의 감정과 의식을 살 펴보는 것은 목은의 품격과 품성을 알아보는 중요한 과정이다.본고에서는 목은이 남겨놓은 이 시기의 시를 통해 정감의 양상이 시기별로 어떻게 달라 지고 있으며,고통과 고난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가를 알아보고자 한다.이 것은 결국 목은의 품성과 인격을 알 수 있는 척도로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2. 鬱 憤 과 自 嘲 의 激 情 1) 鬱 憤 의 長 湍 吟 목은에게 장단으로의 유배가 결정된 것은 1389년(공양왕 원년)12월 초하루

牧 隱 流 配 期 詩 의 情 感 樣 相 209 이다.11월 기묘일에 공양왕이 왕위에 오른 지 보름만이었다.1388년 6월 이 성계의 일파에 의하여 우왕이 폐위되고 그의 아들 창왕이 즉위하였다.이성 계는 이해 4월 명나라가 요동에 철령위를 세우는 것에 반대하여 단행된 요 동정벌의 우군도통사가 되었다.그러나 좌군도통사인 조민수를 설득하여 위 화도에서 회군하였으며,고려왕조를 수호하려는 구파 군벌의 대표인 팔도도 통사 최영을 실각시키고 고려의 모든 군사권을 쥐었다. 대장군이었던 조민수는 목은에게 의견을 물어 1388년 4월 昌 王 을 옹립하 게 되었다.이후부터 이성계 일파는 창왕의 즉위에 가장 큰 역할을 하였던 목은을 일제히 공격하기 시작하였다.창왕이 즉위하고 10월 명나라에 목은이 하정사를 자청하여 들어가 고려의 상황을 설명하려고 하였으나,성과는 없었 다.이미 이성계는 자신의 아들인 李 芳 遠 을 서장관으로 함께 보내 견제하도 록 하였다.1389년 봄 명나라에서 돌아와 창왕을 뵙고,다시 여주에 머물고 있던 우왕을 찾아가 경과를 설명하였다. 목은이 명나라에 갔다 온 이후 끊임없이 탄핵에 시달리기 시작하였는데, 창왕을 세우도록 하였다는 것과 여주에 가서 우왕을 만났다는 것이 주요 내 용이었다.창왕이 王 氏 가 아닌 辛 氏 라고 주장을 하면서 목은이 고려의 정통 성을 훼손하였다는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그 존재만으로도 고려 왕조의 든 든한 버팀목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목은을 축출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목은은 1389년 12월 초하루 둘째 아들 種 學 과 함께 관직을 박탈당하였으며, 나흘 뒤인 12월 5일 장단으로의 귀양이 결정되어 6일 장단으로 출발하였다. <기사년 12월 6일에 巡 衛 府 의 提 控 인 朴 爲 生 이 와서 신에게 장단의 새로운 거처에서 지내라는 內 敎 를 전하였다.신은 대궐을 향하여 肅 拜 를 하고는 두 분 侍 中 에게 글을 올린 다음에 제공과 작별을 하고 말에 올랐다. 大 德 山 아래에 이르렀을 때 날이 벌써 저물었으므로 感 應 寺 에 들어가서 방을 빌려 자는데, 門 生 劉 敬 이 술 한 말을 가지고 와서 위로해 주기에 잇달아 몇 잔을 마셨더니 약 간 취기가 돌았다.잠자리에 들어서 새벽까지 잤다.그 절의 승려가 아침 예불 을 하느라 치는 경쇠소리를 듣고 시를 지었다.> 五 榜 門 生 摠 俊 才 다섯 번 과거의 문생들은 모두 뛰어난 인재라서 多 參 鳳 沼 與 烏 臺 봉소와 오대에 많이 참여하네.

210 韓 國 言 語 文 學 第 82 輯 莫 言 今 日 無 相 送 오늘 전송하는 이가 없다고 말하지 마시오. 得 此 髥 劉 酒 數 杯 이렇게 수염 많은 유군과 함께 술 몇 잔 마시네. 5) 장단음의 첫 번째 시의 두 번째 수이다.제목에서 장단으로 출발하면서부 터 첫날밤을 지내는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목은은 다섯 번이나 과 거를 주관하였으며,문생들만도 100여 명이 훨씬 넘는다. 6) 그 중에는 재상에 오른 사람도 있고,사헌부의 관리로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하였다.하지만 목 은이 귀양길에 오르자 안타까워하며 송별하는 사람조차도 없음을 말하고 있 다.사람들은 이미 고려의 운명이 쇠하였음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목은의 귀 양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사람도 없었다.마음으로는 늙고 병든 몸 으로 귀양길에 오르는 목은을 직접 위로해 주고 싶지만,그렇게 하다가 자신 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하여 나타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목은은 이러한 사 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녁 늦게 문생인 유경이 찾아와 함께 술을 마신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그러나 그 이면에는 시절의 무상함과 세태의 냉정함 을 가슴깊이 느끼고 있는 목은의 쓸쓸하고 울적한 심정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 省 郞 의 여러분께 부치다> 玄 陵 策 上 甲 加 寅 현릉 갑인년에 책문 올려 7) 시험을 보고 放 牓 辛 朝 始 出 身 辛 朝 때에 급제하여 처음 출신하였다네. 坐 數 至 今 荒 野 去 지금 헤아려 보니 황야로 떠난 사람 중에는 滿 廷 靑 紫 絶 無 人 조정에 가득한 고관대작들은 전혀 없네. 8) 5) 牧 隱 詩 藁 卷 35,< 己 巳 十 二 月 初 六 日, 巡 衛 府 提 控 朴 爲 生, 來 傳 內 敎, 命 臣 出 居 長 湍 新 居. 臣 向 闕 肅 拜, 且 致 詞 兩 侍 中, 別 提 控 上 馬. 至 大 德 山 下, 日 已 夕, 入 感 應 寺 借 宿, 門 生 劉 敬, 以 斗 酒 來 餞, 連 數 杯 微 醉, 就 寢 達 旦. 居 僧 朝 參, 聞 磬 聲 有 作.> 6) 呂 運 弼,앞의 논문,p.142에 다섯 번의 掌 試 와 대표적 選 拔 人 을 논의하고 있다. 7)같은 곳,pp.141-142에서 여운필은 策 上 이 牧 隱 詩 精 選 에는 策 士 로 되어있음 을 밝혔 牧 隱 詩 藁 의 표기가 잘못되었음을 제기하였는데,적극 동의한다.그러 나 甲 加 寅 에 대하여 加 寅 이 益 加 敬 重 의 뜻으로 해석하였으나 쉽게 납득이 되 지 않는다. 8) 牧 隱 詩 藁 卷 35,< 寄 省 郞 諸 兄 >

牧 隱 流 配 期 詩 의 情 感 樣 相 211 위의 시는 목은이 장단에 유배되어 자신을 탄핵하였던 사람들에 대한 울 분을 표현한 것이다.목은에게 우왕과 창왕이 정통성이 없는 임금이라고 하 여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가고 있는데,그렇게 본다면 정작 사헌부의 몇몇 인 물들도 똑같은 처지임을 말하고 있다. 현릉 갑인년은 공민왕 23년(1374)이다.이 해 4월 정당문학 李 茂 方 (1319 1398)이 지공거가 되고 밀직부사 廉 興 邦 (? 1388)이 동지공거가 되어 진사를 뽑았는데,공민왕이 친히 시험을 쳐서 김자수 등 33인을 선발하였다.그러나 시권에 나이를 기재하라는 지시를 어긴 자가 많아서 12월에서야 放 榜 이 되 었다. 9) 그러나 공민왕이 이 해 9월 시해를 당하고 우왕이 즉위하였다.그렇 기 때문에 이때 급제한 사람들은 비록 공민왕 때 과거시험을 보았지만 공식 적으로는 우왕에게 급제를 받은 것이다.또한 우왕 대에 출사를 하게 된 것 이니 우왕을 부정한다면 자신들도 따라서 부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공민왕 23년 과거의 급제자 35인을 살펴보면, 10) 金 爾 音, 李 皐, 趙 浚 등이 주목된다.이들이 모두 목은이 장단으로 귀양을 갈 때 사헌부의 관원으로 있 9) 高 麗 史 第 73 卷, 志 第 27,< 選 擧 1> 10)<1374년 과거 급제자> 번호 인명 자 호 생몰년 본관 합격등급 공양왕원년 관직 1 金 子 粹 純 仲 桑 村 慶 州 乙 科 壯 元 2 李 百 文 可 明 乙 科 2위 3 石 汝 明 乙 科 3위 4 李 須 丙 科 1위 5 李 元 有 丙 科 2위 6 安 瑗 1346~? 順 興 丙 科 3위 7 金 爾 音 咸 昌 丙 科 4위 사헌부 지평 8 金 翌 丙 科 5위 9 趙 仲 庸 豊 川 丙 科 6위 10 黃 陶 丙 科 7위 11 崔 卜 麟 朔 寧 同 進 士 1위 12 薛 儞 同 進 士 2위 13 朴 仲 容 竹 山 同 進 士 3위 14 姜 思 敬 同 進 士 4위 15 李 湊 同 進 士 5위

212 韓 國 言 語 文 學 第 82 輯 었다.특히 조준의 경우는 사헌부의 대사헌으로 있었기 때문에 간관들이 한 목소리로 목은에게 죄를 주라고 하였던 상소를 주관한 인물인 것이다.즉 자 신들도 우왕에게 급제를 받고 관직에 나선 인물들이면서 우왕을 부정하고 있는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더구나 목은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신들 이 부정하는 辛 朝 에서 高 官 大 爵 을 역임한 사람들 중 어느 한 사람도 황야에 은거하지 않았다고 하였다.우왕과 창왕을 섬겼다는 이유로 자신을 핍박하고 있는데,바로 그 우왕의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하였던 사람 중에 아무도 잘 못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 省 郞 의 여러분께 부치다> 彈 章 大 勢 乍 驚 人 탄핵한 글이 대체로 언뜻 사람을 놀라게 하지만 熟 讀 深 思 摠 失 眞 찬찬히 읽고 깊이 생각하면 모두 진실을 놓쳤네. 捉 敗 老 翁 唯 四 字 늙은이 물리치는 명분은 오직 네 글자뿐이니 黜 僧 還 恐 似 王 輪 왕륜사처럼 중을 내쫓을까 두렵다네. 11) 번호 인명 자 호 생몰년 본관 합격등급 공양왕원년 관직 16 李 臯 驪 州 同 進 士 6위 사헌부 집의 17 李 廷 堅 慶 州 同 進 士 7위 18 吳 天 經 同 福 同 進 士 8위 19 趙 文 拔 同 進 士 9위 20 崔 沼 同 進 士 10위 21 安 垂 順 興 同 進 士 11위 22 鄭 以 吾 粹 可 郊 隱 1354~1437 晉 陽 同 進 士 12위 23 安 景 良 順 興 同 進 士 13위 24 宋 回 杏 村 同 進 士 14위 25 鄭 端 同 進 士 15위 26 崔 宜 汝 同 進 士 16위 27 李 經 同 進 士 17위 28 許 乾 陽 川 同 進 士 18위 29 趙 浚 子 明 松 堂 平 壤 同 進 士 19위 사헌부 대사헌 30 陳 義 貴 守 之 栗 亭 同 進 士 20위 31 鄭 擧 同 進 士 21위 32 兪 邁 同 進 士 22위 33 閔 中 立 驪 興 同 進 士 23위 34 閔 頤 同 進 士 24위 35 朴 尙 禮 同 進 士 25위

牧 隱 流 配 期 詩 의 情 感 樣 相 213 이 시도 자신이 유배되는데 핵심적 역할을 하였던 省 郞 들에게 보내는 것 으로 목은의 울분을 담고 있다.자신을 탄핵한 상소문은 언뜻 보면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큰 죄를 저지른 것처럼 보이지만,자세하게 읽고 깊이 생각해 보면 진실은 알지 못하고 피상적인 것만을 가지고 공격하고 있다고 하였다. 臺 諫 吳 思 忠 등이 상소하여 이르기를, 여러 장수들이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王 氏 를 세우자고 의논할 때, 大 將 曺 敏 修 와 權 臣 李 仁 任 이 어린 임금을 세우기 를 탐하여 아들 昌 을 세우고자 穡 에게 물으니, 穡 도 역시 昌 을 마음에 두고 있 었으므로 마침내 의론하여 昌 을 세웠습니다. 穡 이 京 師 에서 돌아와 李 崇 仁, 金 士 安 과 더불어 서로 驪 興 에서 禑 를 뵙기를 약속하고, 穡 이 먼저 홀로 뵈었습니 다.홀로 뵐 때 한 말이 公 的 인 것인지 私 的 인 것인지 이것은 알 수 없습니다. 忠 臣 과 義 士 들이 의논하여 王 氏 를 다시 세우고자 하였으나 穡 과 禑 의 외숙인 李 琳 등이 모의하여 辛 禑 를 맞이하고 王 氏 를 다시 세우자는 의논을 막았으니, 만약 15년동안을 바쳐 모시던 신하로서 딴 마음이 없었다면 어찌 오백년의 왕 씨를 배반하고 15년의 辛 氏 에게 충성하였겠습니까?청컨대 색을 극형에 처하시 옵소서. 하였다. 12) 이것은 1390년(공양왕 2)4월에 오사충 등의 대간들이 올린 상소문의 일부 이다.지난해 11월 공양왕이 즉위하면서 올렸던 목은 탄핵 상소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탄핵 내용은 결국 창 왕이 왕씨가 아니라 신씨라는 것이며,목은이 왕씨를 다시 세우자는 忠 臣 과 義 士 들의 논의를 무시하고 창왕을 세웠고,우왕을 찾아보았다는 立 昌 迎 禑 의 네 글자이다.이를 근거로 목은이 5백년의 고려 왕씨를 배반하고 15년의 신씨를 섬겼으니,이것은 역모를 꿈꾸고 있는 것이라고 공박하면서 극형에 11) 牧 隱 詩 藁 卷 35,< 寄 省 郞 諸 兄 > 12) 李 象 靖, 牧 隱 先 生 年 譜 : 臺 諫 吳 思 忠 等 上 疏 曰 諸 將 回 軍, 議 立 王 氏 之 際, 大 將 曺 敏 修 以 權 臣 李 仁 任, 貪 立 幼 主 之 故 欲 立 子 昌, 問 計 於 穡, 穡 亦 嘗 以 昌 爲 心 遂 定 議 立 之. 穡 之 回 自 京 師 也, 與 李 崇 仁 金 士 安, 相 期 謁 禑 於 驪 興, 而 穡 先 期 獨 見. 獨 見 之 際 所 言 公 歟 私 歟, 是 未 可 知 也. 忠 臣 義 士 議 復 立 王 氏, 而 穡 及 禑 舅 李 琳 等, 謀 迎 辛 禑 以 沮 復 立 王 氏 之 議, 若 以 爲 十 五 年, 委 質 爲 臣, 而 不 可 復 有 他 心, 則 何 負 於 五 百 年 之 王 氏, 而 忠 於 十 五 年 之 辛 氏 哉. 請 置 穡 極 刑.

214 韓 國 言 語 文 學 第 82 輯 처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상소 내용을 살펴보면 목은의 죄목 중에서 구체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상소의 내용에서도 밝힌 것처럼 여흥에 가서 우왕을 만나서 한 말이 공적인 것인지 사적인 것인지도 모른다고 하였다.또 무슨 말을 어떻게 하였는지도 확인할 수 없다.모든 사건의 발단은 우왕을 공민왕의 아들이 아 니라 신돈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데서부터 발생한 것이다.그러나 이미 우 왕은 14년 동안이나 왕위에 있었으며,그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한 사람이 목 은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그러니 목은에게 묻고 있는 죄목은 결국 현조 정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목은은 앞의 시에서도 위의 시에서도 이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고려의 전성기 때 왕륜사의 승려 수천 명이 다 더러운 행실이 있었다.한 스님이 간특하고 음란함이 더욱 제멋대로이니 스님 무리들이 그를 내쫓으려고 함께 의논하였다.그 스님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게 하면 곧 절을 닫게 될 것 이다. 하니,모든 장로들이 소리를 가지런히 하고 무리를 지어 의논하더니 마 침내 잠잠해 졌다. 13) 목은은 마지막 구에서 왕륜사의 고사를 인용하여 이러한 내용의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왕륜사는 개경의 송악산에 있는 절로 공민왕비인 노국대장공 주의 영전이 있는 곳이다.이것은 목은에게 씌운 죄목대로라면 결국 자신들 도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며,이것은 목은이 자신의 억 울함을 적극적으로 토로한 것이다.이러한 목은의 울분은 장단음의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느낌이 있어> 湢 室 誰 能 不 脫 衣 奈 何 同 浴 臝 裎 譏 욕실에서야 누군들 옷을 벗지 않을 수 있으랴? 어째서 함께 몸을 씻고서도 알몸을 보였다 흉보는가? 13) 徐 居 正, 太 平 閑 話 滑 稽 傳 白 影 本 68 話,: 高 麗 全 盛 時, 王 輪 寺 僧 千 數 百 人, 皆 有 穢 行. 有 一 髡 慝 淫 尤 縱, 淄 徒 共 議 黜 之. 髡 曰 若 然 則 闔 寺, 諸 長 老 齊 聲, 作 隊 而 出 議, 遂 寢.

牧 隱 流 配 期 詩 의 情 感 樣 相 215 縱 然 其 入 有 早 晚 비록 들어간 시기가 늦고 이른 차이는 있다 해도 均 是 相 觀 知 瘦 肥 서로 보고 마르고 살찜을 아는 것은 똑같다네. 諸 子 滌 瑕 方 自 進 다른 이들은 때 씻고서 한창 스스로 나서는데 獨 吾 染 垢 欲 誰 歸 유독 이 몸만 때로 더러워졌으니 누구에게 기대랴? 聖 朝 方 許 更 新 路 조정에서 방금 새로운 길을 나에게 허락해 주었으니 危 坐 長 湍 對 翠 微 장단 땅에서 똑바로 앉아 푸른 산을 마주 하노라. 14) 이 시도 똑같은 상황에서 목은에게만 집중되는 허물에 대하여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욕실에서 다함께 목욕을 하는 것을 예로 들어 적절하게 설명 하고 있다.몸을 씻기 위해 욕실에 들어가면 누구나 옷을 벗어야 하는 것이 고,또한 그 욕실에 나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두들 옷을 벗고 함께 씻었으 면서 유독 목은에게만 알몸을 보였다고 흉을 보느냐고 반문하고 있다.비록 들어간 시기가 이르고 늦은 차이는 있지만,모두 벗고 함께 씻었기 때문에 누가 마르고 누가 살이 쪘는지 다 알고 있다고 하였다.즉 그들이 말하는 辛 氏 의 조정에서 모두들 신하노릇을 함께 하였던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것이다.하지만 자신들은 그 때를 깨끗이 씻었다고 하면서 목은 에게만 아직도 더러운 때가 있다고 허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목은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참담함 을 느꼈으며,속으로 통곡을 하고 있었다. 애써 단지 세 호걸을 안배하기만 바랄뿐이었는데,오래도록 어리석은 자들이 기용될 줄 어찌 알았으랴?황량 한 들판의 빛과 함께 몸은 초췌해져 가고,오열하는 냇물과 함께 눈물만 줄 줄 흐르네.( 苦 心 只 願 安 三 傑, 長 古 那 知 起 庶 頑. 野 色 荒 涼 身 共 悴, 溪 聲 嗚 咽 淚 同 潸.) 15) 라고 한 것이 바로 이 시기 목은이 느꼈던 마음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의 미련에는 목은의 억울함이 가득 담겨 있다.조정에서 목은에게 새로운 길을 허락해주었으며,자신은 장단에서 똑바로 앉아서 푸른 산을 마 주하고 있겠다는 다짐하고 있다.조정에서 새로운 길을 허락해 주었다는 것 은 결국 장단으로 귀양을 보낸 것이며,어쩔 수 없이 장단에서 생활할 수밖에 14) 牧 隱 詩 藁 卷 35,< 有 感 > 15) 牧 隱 詩 藁 卷 35,< 自 詠 >

216 韓 國 言 語 文 學 第 82 輯 없지만 조금의 굽힘도 없이 항상 떳떳한 마음으로 살겠다는 표현을 하였다. 왕은 吳 思 忠 과 田 時 에게 長 湍 으로 내려가 鞠 問 하라 하며 말하기를, 穡 을 놀 라게 하지 말라. 고 하였다.그러나 田 時 등은 옥졸로 하여금 仗 을 들고 선생의 左 右 에 서게 하고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자백을 하도록 핍박을 하였으나,선 생이 끝내 불복하니,대간들이 다시 의논하여 咸 昌 으로 옮겼다. 16) 새롭게 권력을 잡은 자들은 장단에 유배되어 있는 목은에게 딴 마음( 他 心 ) 이 있었다는 자백을 받기 위하여 옥졸들에게 곤장을 들고 때릴 듯이 밤 낮으로 위협을 하였다.공양왕의 특별한 부탁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이들 은 이미 왕의 존재도 개의치 않았으니 목은에게는 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 다.더구나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모든 일들을 합리화 시킬 수 있는 명분을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목은의 한마디가 절실하였다. 그러나 목은은 이를 인정할 수 없었으며,위협을 하면 할수록 더욱 의지 가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그 과정에서 겪는 육체적,정신적 고통은 비례하 여 커지게 되었다.특히 억울하고 분한 심정은 대단히 컷을 것으로 짐작된 다.결국 목은은 대간들의 상소로 1390년(공양왕 2)4월 5일 咸 昌 으로 귀양지 가 바뀌게 되었다. 17) 이처럼 고려말 최고의 지성으로,왕의 사부로서 국내는 물론 중국에까지 도 추앙을 받았던 목은이 하루아침에 장단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더구나 그 죄목도 분명히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으니 얼마나 억울하고 분했을 것인 가는 쉽게 짐작이 된다.목은은 장단에 부처되어 있으면서 지은 시를 장단 음 에 남겼는데,현재 처해 있는 상황이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가를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모두 같은 상황이었는데,유독 자신에게만 가해지는 혹독한 질 타에 대하여 직접적인 울분을 토로하고 있다.물론 이러한 울분은 단지 개인 적인 상황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꿈꾸고 있는 권력자들에 附 16) 李 象 靖, 牧 隱 先 生 年 譜 : 王 遣 吳 思 忠 田 時, 鞫 于 長 湍 命 之 曰 毋 令 穡 驚 動. 時 等 使 獄 卒 執 仗 立 左 右 竟 日 通 夜 逼 供 辭, 先 生 不 服, 臺 諫 復 論 移 咸 昌. 17) 高 麗 史 第 45 卷, 世 家 第 45,< 恭 讓 王 1>

牧 隱 流 配 期 詩 의 情 感 樣 相 217 和 雷 同 하여 자신을 공격하는 현재의 상황과 인물들에 대한 실망감의 표현이 었다. 2) 自 嘲 의 咸 昌 吟 목은이 함창에 유배된 것은 세 차례이다. 세 번째 함창에 오니 흥취가 더욱 새로워,전처럼 물고기,새와 또 친하게 지내네.( 三 到 咸 昌 興 更 新, 依 然 魚 鳥 亦 相 親 ) 18) 라는 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처음 함창으로 移 配 된 것은 1390년 (공양왕 2)4월 5일이다.그러나 5월 6일 尹 彛, 李 初 의 사건과 관련되어 陶 隱 李 崇 仁, 陽 村 權 近 19) 등과 함께 청주옥으로 옮겨져 국문을 당하였다.그러나 6월 큰 홍수가 나서 관사가 물에 잠기고 옥문이 부서지자 다시 함창으로 옮 겨졌는데,1390년 8월 13일 두 번째 함창에 도착하였다.이해 12월 석방되어 경사로 돌아왔다.세 번째 함창 행은 1391년 6월 鄭 道 傳 등이 상소하여 전과 같은 사유를 들어 죄주기를 청하여 다시 함창으로 유배되었으며,11월 말 사 면되어 여흥에서 머물렀다. 함창에서 지은 시를 살펴보면,기증시가 가장 많다.함창음 42제 중에서 22제가 기증시이다.송헌 이성계,포은 정몽주를 비롯하여,삼봉 정도전,동 년 金 隨,은거하고 있는 권신재,쌍매당 이첨,여흥군수 권총,출척사 등등 다양하다.또다른 특징으로는 <장난삼아 짓다( 戱 題 )>,<나의 더부살이( 我 寓 )> 등과 같이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自 嘲 의 의미를 담은 시가 많다는 것이 다.물론 이러한 시는 제목에서부터 스스로를 조롱하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그 외 기증시에서도 자신의 처지를 戱 畵 化 하여 묘사한 것이 많다. 18) 牧 隱 詩 藁 卷 35,< 寄 松 軒 > 19) 김원준, 權 近 의 麗 末 流 配 期 의 詩 樣 相, 泮 橋 語 文 硏 究 19,반교어문학회, 2005,pp.9-30에서 비슷한 시기 양촌의 유배기 시의 양상을 憂 愁 와 自 嘆 의 우회 적 표출, 他 者 를 통한 現 實 指 向 과 歸 田 園, 徇 物 和 樂 과 禪 趣 味 로 나누어 살펴 보았는데,참고할 수 있다.

218 韓 國 言 語 文 學 第 82 輯 <장난삼아 짓다> 鄕 人 爭 笑 謫 仙 翁 마을 사람들과 한바탕 웃는 적선옹 泥 醉 村 歌 野 笛 中 시골의 소박한 노랫소리에 흠뻑 취하네. 縱 使 得 還 何 所 用 설령 조정에 돌아간들 무슨 소용 있겠나? 齒 牙 落 盡 眼 朦 朧 이도 다 빠지고 눈마저 흐릿한걸. 20) 목은은 스스로를 謫 仙 翁 이라고 하면서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웃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마을 사람들도 목은을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 들과 같은 村 老 쯤으로 인식하고 있으며,실제로 목은에 대하여 하늘에서 세 상으로 유배를 온 사람과 같이 믿을 수 없는 허황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노 인이라고 치부하고 있는 것이다.이미 이러한 모습으로 변해 버린 자신은 다 시 조정으로 돌아가 봐도 이제는 아무런 쓰임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스스 로를 평가하고 있다.이도 빠지고 눈도 흐릿한 평범한 늙은이로 자신을 비하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목은의 심경에는 강하게 울분을 토로하였던 장단음에서와 같은 역 동성은 없다.이미 함창으로 옮겨오기 전에 田 時 등이 국문을 하면서 옥졸에 게 곤장을 들려 위협하였던 참담한 현실을 겪었고,또한 淸 州 獄 에서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던 상황을 지내면서 점차 자신이 더 이상 아무런 힘이 없 으며,누구도 자신을 도와주거나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없음을 인식하 게 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그러한 인식이 자신에 대한 조롱과 희화화로 나 타난 것이다. <느낌이 있어> 我 有 一 大 錯 欲 擧 千 鈞 輕 爲 欠 臨 事 懼 又 昧 知 人 明 縱 悔 亦 已 矣 萬 死 幸 一 生 내가 한 번 크게 실수를 하여 천균을 가볍게 들어 올리려 하였네. 일에 임해 두려워하는 자세가 부족했고 게다가 사람을 보는 눈이 밝지 못했네. 이제 와서 후회한들 또 어찌하겠는가? 만 번 죽을 고비에서 살아남으면 다행이지. 20) 牧 隱 詩 藁 卷 35,< 戲 題 >

牧 隱 流 配 期 詩 의 情 感 樣 相 219 獨 坐 每 惕 若 홀로 앉아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縮 口 時 出 聲 입을 다물고 말 할 수 있을 때를 기다리네. 21) 이 시에서도 예전의 실수를 되돌아보며,현실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희화 화하고 있다.수련에서 목은은 지난날 정치를 너무 쉽게 생각을 하였음을 반 성하고 있다.목은은 젊은 시절 자신이 고려의 사직을 위해 열심히 노력을 한다면 고려의 운명이 새롭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함련에서는 수련의 내용 을 이어서 구체적인 자신의 과오를 설명하고 있다.첫 번째가 일을 할 때 두 려워하는 자세가 부족하였던 것이고,또 하나는 바로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밝지 못했던 것이다.목은의 처지가 현재와 같이 된 것은 대부분 자신이 믿 었던 사람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 것이다. 장단으로 유배될 때 사헌부 지평으로 있었던 金 爾 音 의 경우에도 목은이 각별하게 생각하던 후학이었다.김이음은 눈이 많이 내린 겨울날 목은에게 배를 선물하여 목은이 두고두고 그 고마움을 잊지 않았으며, 22) 김이음이 고 향으로 부모님을 뵈러 갈 때 목은은 특별히 송별의 시를 지어 주기도 하였 다. 23) 김이음이 목은의 탄핵에 직접적으로 가담을 하였는지는 확실하게 말 하기 어렵지만 상소가 사헌부 관원의 연명으로 올린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어느 정도 동조하였을 것으로 보인다.또한 포은 정몽주도 목은이 유배될 시 기에는 이성계와 손을 잡아 공양왕을 세우는데 적극적이었음을 볼 때 목은 의 서운함은 상당히 컸을 것으로 보인다.더구나 1391년 6월 세 번째 함창으 로 유배될 때에는 삼봉 정도전이 제일 앞장서서 상소를 올려 立 昌 迎 禑 의 죄 를 물어 단죄하기를 청하였으며,공양왕은 이미 오사충 등이 논의한 것과 같 은 내용이라고 하면서 왕이 힘을 써 함창유배에 그치게 되었다. 24) 삼봉의 경우도 목은의 문하에서 배워 昇 堂 한 인물이었음 25) 에도 불구하고 목은을 극 21) 牧 隱 詩 藁 卷 35,< 有 感 > 22) 牧 隱 詩 藁 卷 8,< 又 題 > 23) 牧 隱 詩 藁 卷 8,< 送 金 伯 玉 省 親 爾 音 > 24) 李 象 靖, 牧 隱 先 生 年 譜 : 鄭 道 傳 等 上 書, 請 治 先 生 及 禹 玄 寶 等, 立 昌 迎 禑 之 罪, 蓋 祖 述 思 忠 等 之 論 也, 王 勉 從 之 流 于 咸 昌.

220 韓 國 言 語 文 學 第 82 輯 형에 처하라고 상소한 것을 생각해 보면,목은의 배신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26) 그렇기 때문에 홀로 앉아 근심하면서 입을 닫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말할 수 있을 때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이처럼 믿었던 사람들이 앞서서 자신을 죽이라고 소리를 높이는 것을 보 면서 목은은 커다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이러한 충격은 결국 자신 의 삶을 되돌아보게 했으며,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키게 된 것이다.따라서 자신의 실수로 빚어진 현재 자신의 처지는 당연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조롱하며 희화화하고 있다. <느낌이 있어> 少 年 朋 友 盍 簪 時 소년 시절에 벗들이 모일 때는 吐 膽 輸 心 絶 詭 隨 간담을 털어놓으면서도 함부로 따르지는 않았네. 利 害 一 朝 移 素 志 이해 때문에 하루아침에 평소의 뜻 바꿔버리고 推 擠 寧 肯 惜 分 離 밀치기도 하는 판에 어찌 이별을 아쉬워하랴? 27) 위의 시는 바로 목은의 배신감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젊은 시절에 서로 사귈 때는 속마음을 모두 터놓고 지내면서도 서로의 잘못을 꾸짖어 주는 교 유를 하였다.옳고 그른 것을 따지지 않고 함부로 남을 따르는 詭 隨 는 절대 로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그러나 이제는 이해에 따라 하루아침에 자신의 소 신을 바꾸고 친구를 벼랑으로 밀어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이것은 목은이 느꼈던 현실이었다.그렇기 때문에 항상 정도를 생각하고 의리를 따르고자 하였던 목은의 삶은 결국 다른 사람들의 손에 자신의 목숨을 맡기고 아무런 힘도 없이 그저 기다리고 있는 신세가 된 것이다.이러한 상황에서 목은은 저절로 자신의 삶을 조롱하고 희화화할 수밖에 없었다. 25) 權 近, 陽 村 集 卷 16, 三 峰 集 序 26) 牧 隱 詩 藁 卷 35,< 寄 三 峯 >의 시에서 목은은 세상의 이익은 가을 터럭처럼 작 은데,사귀는 정은 죽의 거죽처럼 엉켰다네.어긋나는 대로 맡겨 두더라도,물은 백번이나 꺾여도 동쪽으로 흐르리.( 世 利 秋 毫 小, 交 情 粥 面 濃. 任 敎 中 齟 齬, 百 折 水 流 東.) 이라고 읊어 그 서운함을 전하였다. 27) 牧 隱 詩 藁 卷 35,< 有 感 >

牧 隱 流 配 期 詩 의 情 感 樣 相 221 그러나 마음 속에는 여전히 기울어가는 고려의 운명을 슬퍼하고 있으며,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큰 비에 대한 탄식> 夜 半 夢 回 風 雨 作 한밤중에 꿈을 깨니 비바람이 일어나기에 展 轉 不 眠 多 反 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주 뒤척거리네. 松 聲 水 聲 是 何 聲 솔바람 소리인가?물소리인가?이게 무슨 소리지? 忽 聽 空 階 有 點 滴 갑자기 빈 섬돌에 후두둑 빗방울 떨어지네. 今 年 此 邦 頗 早 旱 올해에는 우리나라에 일찍 가뭄이 들더니 有 雨 是 我 初 來 夕 내가 처음 오던 날 밤부터 비가 내렸네. 暴 流 嚙 田 卑 者 沒 세차게 흐르는 물 밭둑을 깎고 낮은 곳은 묻어 버리니 嘉 禾 損 傷 眞 可 惜 잘 된 벼가 손상되어 참으로 애석했었지 天 晴 旬 餘 得 嘗 新 열흘 남짓 만에 날이 개어 햇곡식을 맛보게 되니 農 家 喜 不 虛 費 力 농가에서는 헛되이 애쓰지 않았다 기뻐하였네. 我 方 自 幸 易 匃 求 나는 쉽게 구할 수 있어 다행으로 여기며 欲 與 野 僧 共 游 食 시골 중과 노닐면서 함께 먹으려 하였는데 乃 何 今 日 又 如 初 어찌하여 오늘 또 예전처럼 억수로 쏟아지는가? 俄 然 百 感 堆 胸 臆 나도 몰래 가슴속에 온갖 감회가 쌓이네. 老 妻 愚 子 皆 無 田 늙은 아내와 어리석은 자식들 모두 전답이 없으니 家 貧 何 曾 有 畜 積 가난한 집에 어찌 전에 쌓아둔 것이 있으랴? 細 民 如 我 應 更 多 나와 같은 서민들이 응당 또 많을 텐데 嗚 呼 嗚 呼 아~! 天 昏 黑 天 昏 黑 하늘은 캄캄하구나!하늘은 캄캄하구나! 放 新 晴 在 幾 刻 새로 맑게 개이는 것은 어느 때일까? 淚 落 呑 聲 哭 不 得 소리를 삼키고 눈물을 흘릴 뿐 목놓아 울지도 못하네. 28) 이 시는 목은이 세 번째로 함창에 유배갔을 때 지은 것으로 밤에 큰 비가 오자 이를 걱정하며 쓴 것이다.고체시의 형식으로 대부분 네 구씩 다섯 단 락으로 구분되어 있다.첫 번째 단락에서는 밤에 잠을 자다 깨어나 매일 듣 던 솔바람 소리와 시냇물 소리가 아닌 다른 소리가 나자 귀를 기울여 들어 보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섬돌에 내리는 빗소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두 28) 牧 隱 詩 藁 卷 35,< 大 雨 歎 >

222 韓 國 言 語 文 學 第 82 輯 번째 단락에서는 올해 일찍부터 가뭄이 들더니 목은이 오는 날부터 큰 비가 내려 밭둑이 유실되고,벼논이 잠기는 피해를 입었음을 묘사하였으며,세 번 째 단락에서는 다행이 열흘만에 비가 그쳐 농사에 큰 피해가 없어 다행하게 여겼음을 말하였다.네 번째 단락에서는 오늘 또다시 큰 비가 내리자 아내와 자식들 걱정을 하고 있다.항상 가난하여 쌓아놓은 재산도 없으니 어찌 할 것인가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마지막 단락에서는 자신의 가족 걱정이 곧 백성들의 고통과 같은 것임을 인식하고 탄식하고 있다.그러면서 하늘이 맑 게 개기만을 빌고 있다. 목은은 유배지에 있으면서도 항상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하였으며,백성들 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고 있었다.문득 자신의 처자식을 걱정하다가도 국가 와 백성들의 걱정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또한 此 邦, 細 民 등과 같은 시어는 목은의 인식이 개인적인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고려 전체 를 두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처럼 함창에서 지은 시에는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고,현재의 상황이 모 두 자신의 잘못으로 발생한 것이었음을 말하고 있다.잘못된 판단과 믿었던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은 자신의 모습을 조롱하고 희화화하는 것으로 위로를 하고 있다.자신은 이미 아무런 힘도 없고 희망도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끊 임없이 확인하고 있다.이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고려 전체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미안함의 표현이며,합리화의 일부분으로 볼 수 있다. 세 차례의 함창에서의 유배생활은 1391년 12월 공양왕이 목은에게 韓 山 府 院 君 領 藝 文 春 秋 館 事 에 임명하면서 마무리 되었다.그러나 목은은 관직에 나 아가지 않았다. 3. 諦 念 과 順 命 의 安 靜 1) 諦 念 의 衿 州 吟 목은은 함창에서 풀려나 여주에 거하고 있는 4개월여 동안에도 省 憲 들이

牧 隱 流 配 期 詩 의 情 感 樣 相 223 번갈아 가며 글을 올려 죄주기를 청하였다.그러나 이때마다 포은의 적극적 인 변호와 공양왕의 강한 의지로 비교적 평탄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1392년(공양왕 4)3월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병 이 위중하게 되었다. 29) 이성계가 다쳐 위중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은 정몽주 는 기뻐하였다, 30) 포은은 이성계가 다쳐서 개성에 없는 틈을 타서 4월 초하 루 이성계의 수족과 같았던 조준과 정도전을 멀리 귀양보내고,남은,윤소종, 남재,조박 등도 삭직시켜서 역시 먼 곳으로 귀양을 보냈으며,다음날에는 오사충 등도 귀양을 보냄으로써 고려의 운명을 회복시키려 하였다.그러나 이성계가 해주로부터 병을 무릅쓰고 가마에 몸을 실어 밤 중에 집으로 돌아 와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 31) 결국 4월 4일 포은이 조영규에 의해 피살 되면서 고려의 운명은 희망을 잃게 되었다. 포은이 죽임을 당하고 목은의 두 아들 종학과 종선이 이 일에 깊이 관여 하였다고 하여 귀양을 가게 되었으며,목은도 함께 연좌되어 衿 州 로 貶 斥 되 었다. 홍무 임신년 여름 4월 14일 주상께서 司 楯 郞 을 시켜 王 旨 를 전하시기를, 두 아들이 사실과 다르게 말한 죄에 해당하기 때문에,이제 모두 예에 따라 貶 斥 한다. 卿 의 마음이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강 바깥으로 나가서 거하도록 하 라. 라고 하셨다. 32) 이것은 금주음 의 첫 번재 시의 제목이다. 고려사 에는 4월 13일 목은 을 한주로 추방한다.( 甲 子 放 李 穡 于 韓 州 ) 고 하여 다소 차이가 있으나,위의 목 은 시를 참고하면 금주로 폄척된 것이 맞다.금주에서의 생활은 6월 초 여흥 29) 高 麗 史 卷 46, 世 家 卷 46,< 恭 讓 王 4 年 壬 申 >:( 戊 戌 日 ) 太 祖 畋 于 海 州 墜 馬 病 篤. 30)같은 곳: 甲 辰 王 御 經 筵, 聞 我 太 祖 墜 馬 遣 醫 饋 藥 講 讀 官 李 擴 曰 諸 軍 事 國 之 長 城 也. 馳 騁 田 獵 萬 有 傷 殘, 非 國 之 福 也. 王 廢 書 不 荅, 鄭 夢 周 聞 之 亦 有 喜 色. 31) 같은 곳: 夏 四 月 壬 子, 流 趙 浚 鄭 道 傳 于 遠 地. 削 南 誾 尹 紹 宗 南 在 趙 璞 職 亦 流 遠 地. 癸 丑, 削 判 典 校 寺 事 吳 思 忠 職 遠 流. 我 太 祖 自 海 州 輿 疾 夜 還 于 邸. 32) 牧 隱 詩 藁 卷 35,< 洪 武 壬 申 夏 四 月 十 四 日, 上 使 司 楯 郞 傳 旨 二 子 興 於 言 事 失 實 之 罪, 今 皆 例 貶 矣. 卿 心 豈 得 安, 可 居 江 外.>

224 韓 國 言 語 文 學 第 82 輯 으로 옮길 때까지로 약 2개월 정도였다.이 시기는 비록 貶 謫 되었다고는 하 나 비교적 자유롭게 생활하였으며,주위에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많아 별다 른 어려움은 없었다.따라서 이 시기의 시에는 목은에게 먹을 것을 보내온다 거나 직접 찾아온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시가 많다.또한 포은의 죽음과 함께 고려의 운명이 새로운 생기를 찾기 어렵게 되었음을 인식하게 되어 점차 諦 念 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 同 年 姜 靜 軒 선생에게 부쳐 올리다> 遠 謫 天 涯 問 幾 回 멀리 하늘 끝까지 유배된 것이 몇 번인가? 禍 胎 人 道 去 南 臺 사람들은 남대( 南 臺 )로 떠날 때 화가 싹텄다고 하네. 是 皆 命 也 吾 何 恨 이 모두 운명이니 내가 또 무엇을 한탄하랴? 每 向 樽 前 笑 口 開 매번 술통 앞에서 입 벌리고 웃는다네. 33) 이 시는 금주에서 생활하면서 同 年 姜 靜 軒 에게 보낸 시이다.목은은 자신 이 지금까지 몇 번이나 멀리 유배되었음을 먼저 말하고,지금과 같이 고려의 운명이 다하게 된 것은 자신이 고려의 조정을 비우고 1388년(창왕 원년)10월 창왕이 즉위한 일을 명나라에 고하기 위해 하정사를 자처하여 명나라 수도 인 남경에 다녀왔기 때문이라고 한다고 말하였다.목은은 처음 장단에 유배 되었을 때 지은 시에서 원망은 글을 올려 北 闕 을 떠나면서 일어났고, 禍 는 나라 걱정에 南 臺 로 가면서 싹텄다네.( 怨 起 上 牋 辭 北 闕, 禍 萌 憂 國 去 南 臺 ) 34) 라고 하 면서 안타까워하였다.그러나 현재 금주에서는 이것이 모두 운명이었기 때문 에 안타까워해도 소용이 없다고 하였다.오히려 지금은 모든 것을 잊고 마음 을 편안히 하고 여생을 보내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결구에서 매번 술 통 앞에서 입 벌리고 웃는다네. 라고 한 표현은 겉으로는 웃고 있으면서 속 으로 쓰라린 아픔을 참고 있는 목은의 감정이 잘 나타나 있다. <우거하는 시골집에서 짓다> 危 途 順 境 兩 閑 閑 위험한 길이든 순탄한 곳이든 모두 느긋하니 33) 牧 隱 詩 藁 卷 35,< 寄 呈 同 年 姜 靜 軒 先 生 > 34) 牧 隱 詩 藁 卷 35,< 縣 令 文 君 來 訪 >

牧 隱 流 配 期 詩 의 情 感 樣 相 225 造 物 依 然 笑 我 頑 조물주도 여전히 나의 완고함에 웃고 말리라. 已 忘 惡 聲 初 入 耳 이미 처음 귀에 들어온 나쁜 소식 잊었는데 肯 敎 慚 色 再 浮 顔 선뜻 다시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 뜨게 하랴? 白 橫 西 阪 衿 州 路 흰 구름 가로 걸린 서쪽 언덕은 금주로 가는 길이고 翠 滴 東 門 冠 岳 山 푸른 산빛 방울지는 동쪽 문에는 관악산이 서있네. 麥 隴 稻 田 新 雨 足 보리밭과 벼논에 새로 비가 넉넉히 내렸으니 從 今 不 願 走 塵 間 이제부터는 먼지 속에서 달리기를 바라지 않으리. 35) 1388년부터 1392년 금주에 거처를 정할 때까지 4년 동안의 생활은 목은에 게 있어 너무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우왕이 폐위되고 창왕이 즉위하였 고,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명나라까지 다녀왔으며,그 사이에 장자인 종덕 이 죽었다.그 이후 그동안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였던 동료와 힘을 기 울여 가르친 후학들이 앞장서서 목은을 죄주라는 상소를 올리고,심지어 하 루빨리 죽이라고까지 하였다.그러면서 장단에 유배되기도 하고,함창으로는 세 번이나 유배를 당하였다.이러한 고난의 기간 동안에도 목은은 항상 자신 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최선을 다하여 고려를 위해 힘을 썼다. 首 聯 에서 목은은 이처럼 완고하게 지내온 지난날을 생각하며 웃음을 짓고 있다.이것은 자신의 울분을 토로하려는 노력이나,고려의 운명을 다시 일으 켜 세우려는 노력을 모두 포기하고 난 다음에 생기는 체념의 웃음이다.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나서 자신을 뒤돌아보고 짓는 쓴웃음이다.이런 체념의 감 정이 頷 聯 에 가득하게 담겨있다.자신을 향해 들려오던 모든 비난과 수모를 이미 다 받아 넘기고 받아들였는데,더이상 또 무엇을 향해 변명을 하고 화 를 내겠는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이처럼 체념을 하고 나니 頸 聯 의 자연이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가 슴 속에 울분이 가득 차 있고,자신을 향해 비난하는 자들에 대한 미움과 서 운함이 남아 있을 때에는 자연의 참 모습을 볼 수 없었다.이제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나니 비로소 고갯마루에 걸린 흰구름과 관악산 기슭의 푸른 산빛 이 새롭게 느껴지게 된 것이다.목은은 마침내 미련에서처럼 다시는 이런 風 35) 牧 隱 詩 藁 卷 35,< 題 所 寓 村 舍 >

226 韓 國 言 語 文 學 第 82 輯 塵 世 上 에 관여하지 않겠노라는 다짐을 하게 된다. <집 북쪽의 작은 동산에 올라가서 사방을 바라보다> 大 哉 天 地 儘 無 窮 크도다!하늘과 땅 무궁한 이 속에서 白 髮 蒼 顔 是 牧 翁 흰머리 창백한 얼굴의 늙어가는 목옹이여! 碌 碌 壯 年 迷 上 策 녹록했던 장년엔 좋은 계책에 어두웠고 悠 悠 晚 節 棄 前 功 멍청한 노년에는 전의 공든 탑 없애버렸네. 長 江 一 派 分 平 野 한 줄기 긴 강은 평평한 들을 가르며 흘러가고 疊 嶂 千 層 接 遠 空 천 겹으로 쌓인 산은 먼 하늘과 잇닿았네. 濯 足 振 衣 高 興 發 발을 씻고 옷을 터니 높은 흥취도 생기지만 寸 心 終 向 八 仙 宮 작은 마음은 끝내 팔선궁으로 향하네. 36) 이 시도 앞의 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자신의 현재 모습과 과거의 자취를 돌아보면서 느끼는 감회를 적고 있다.삶의 활기가 느껴지지 않는다.이것은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목표나 희망이 없어졌을 때 나타나는 모습이다.고 려의 멸망이 목전에 다가온 목은에게는 이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일으켜 세 워야 할 목표도 없어졌다.또한 주위에는 자신을 도와 함께해 줄 인물도 찾 을 수 없다.목은이 현재 할 수 있는 것은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정리하는 일 밖에는 없었다.하지만 尾 聯 에서 말하고 있는 아주 작은 고려에 대한 미련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八 仙 宮 은 개성의 松 嶽 山 에 있는 道 敎 의 사원이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나니 몸과 마음은 편해 졌지만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은 바로 고려에 대한 미안함이다.목은은 그 마음을 寸 心 이라고 표현하였다. 이와 같은 촌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바로 목은이 士 人 임을 말해 주는 것 이다. 士 人 의 마음은 자연으로 귀거래를 하더라도 항상 국가의 안위에 대한 걱정을 놓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목은은 장단과 함창에서의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 점차 자신의 힘으로 더이상 바뀔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으며,금주음에 이르 러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체념하기에 이른다.하지만 고려의 신하로서 죽 음으로 끝까지 충성을 하지 못하고 살아있는 목은은 고려에 대한 미안한 마 36) 牧 隱 詩 藁 卷 35,< 登 舍 北 小 山 四 望 >

牧 隱 流 配 期 詩 의 情 感 樣 相 227 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2) 無 常 의 驪 興 吟 목은은 금주에서 두 달동안 생활하고 여흥으로 옮겼다. 벽사에 홀로 누 워,강릉의 두터운 은혜를 입네( 單 身 臥 甓 寺, 厚 意 荷 江 陵.) 37) 나, 興 法 寺 의 堂 頭 가 곧 內 院 堂 으로 들어가게 되어 甓 寺 를 찾아왔기에,내가 古 鏡 늙은이를 데리 고 그와 함께 배를 띄워 군의 못에서 연꽃을 감상하다. 38) 와 같은 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여흥에서는 신륵사에서 거주하였다.여흥에서의 생활은 길지 않았다.1392년(공양왕 4)6월 초부터 7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할 때까지의 한 달여의 기간이다.이 때 지은 시는 모두 20제 21수로 7언절구가 10수,5언절구가 7수,7언율시가 2수,5언율시가 2수이다.대부분 절구를 지 었다.그동안 몇 년의 고초를 겪고 난 후,몇 달동안의 휴식으로 몸과 마음 이 많이 안정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목은은 고려의 命 運 도 자신의 처지도 모두 하늘의 운명에 따른 것임을 순 순하게 받아들이게 된다.그렇게 되자 몸도 마음도 안정을 되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 簽 書 에게 보여 주다> 逍 遙 上 室 與 南 樓 上 室 과 南 樓 사이를 소요하노라니 碧 洞 松 風 物 外 秋 푸른 골짜기의 솔바람이 속세 밖의 가을이란다. 有 命 在 天 須 自 信 운명은 하늘에 달렸다고 스스로 믿어야지 安 心 是 樂 更 何 求 맘 편히 갖는 게 약이니 무엇을 더 구하랴? 39) 이 시는 여흥의 신륵사에서 지내면서 셋째 아들 種 善 (1368 1438)에게 준 것이다.목은과 신륵사는 인연이 깊다.신륵사는 고려말의 고승인 懶 翁 禪 師 가 머물다 入 寂 한 곳으로,목은은 공민왕의 명으로 나옹선사의 塔 銘 을 짓기도 37) 牧 隱 詩 藁 卷 35,< 奉 謝 江 陵 鄭 令 公 問 遺 > 38) 牧 隱 詩 藁 卷 35,< 興 法 堂 頭 將 入 院, 來 過 甓 寺, 予 與 古 鏡 翁, 同 浮 舟, 賞 蓮 郡 池.> 39) 牧 隱 詩 藁 卷 35,< 示 簽 書 >

228 韓 國 言 語 文 學 第 82 輯 하였다. 40) 더구나 稼 亭 李 穀 이 모친인 蔚 山 李 氏 가 돌아가시자 불법으로 명복 을 빌고 싶어 하였지만 이루지 못하자,목은이 나옹 문도들의 도움을 받아 신륵사 남쪽에 大 藏 閣 이라는 2층 누각을 지어 大 藏 經 을 봉안함으로써 부친의 誓 願 을 이루어 주었다. 41) 이와 같은 특별한 인연으로 목은에게 신륵사는 마 음의 안식처이기도 하였다.거처를 금주에서 여흥으로 옮긴 것도 혼란함의 진원지인 개경을 멀리 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지만,휴식과 안정이 필요하였 던 목은에게 가장 적합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목은은 신륵사에 거처하며 승려들과 환담을 나누고 남쪽의 누각에 올라 자연을 흔상하는 자유로운 생활이 흡족하였다.정치적인 권모술수가 없이 가 을의 솔바람 속에서 더 바랄 것이 없었다.이것은 바로 전구와 결구에서 말 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하늘의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서 가능 해진 것이다.막내 아들인 種 善 은 아직도 조정에 남아 있으면서 아버지의 구 명에 노력을 하고 있었을 테니,목은은 혹시라도 다시 아들까지 화를 당할까 걱정한 것이다.자신은 이미 고려를 고집하거나 사람들에게 서운한 감정도 없음을 확실하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이제 더 이상 노력을 해서 얻을 수 있 는 것은 없음을 알았고,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자신이 관여할 바 가 아니며,관여하고 싶지도 않음을 강하게 말하고 있다. 운명이거늘 무엇 을 한탄하랴?나는 이제 자유롭게 되었도다.( 命 也 夫 何 恨, 吾 今 得 自 由.) 42) 라고 한 것에서도 이러한 목은의 의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 興 法 寺 의 堂 頭 가 곧 內 院 堂 으로 들어가게 되어 甓 寺 를 찾아왔기에,내가 古 鏡 늙은이를 데리고 그와 함께 배를 띄워 군의 못에서 연꽃을 감상하다> 蓮 也 眞 君 子 연꽃은 참으로 군자라서 亭 亭 勢 自 尊 꼿꼿이 서 있는 자세가 절로 높다네. 豈 耽 林 外 靜 어찌 수풀 너머 고요함을 욕심내랴? 不 避 邑 中 喧 고을 안의 소란함도 피하지 않는다네. 逐 客 欣 相 遇 사람들 맞이해 기쁘게 서로 만나는데 40) 牧 隱 文 藁 권14,< 普 濟 尊 者 諡 禪 覺 塔 銘 幷 序 > 41) 李 崇 仁, 陶 隱 集 권4, 文,< 驪 興 郡 神 勒 寺 大 藏 閣 記 > 42) 牧 隱 詩 藁 卷 35,< 寄 示 種 善 >

牧 隱 流 配 期 詩 의 情 感 樣 相 229 禪 翁 默 不 言 참선하는 늙은이는 아무 말이 없네. 嗅 香 如 有 得 향기를 맡고서 얻은 것이 있는 듯 해 洗 盡 一 生 昏 한 평생의 어리석음이 다 씻어지네. 43) 이 시도 여흥의 신륵사에서의 생활하면서 찾아온 손들과 함께 배를 띄우 고 연꽃을 감상한 내용을 읊고 있다.목은은 먼저 연꽃이 군자의 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언제나 꼿꼿하게 서있는 모습을 제일 먼저 묘사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함련에서는 연꽃은 자신이 좋아하는 곳만을 고집하여 피지 않는다고 하였다.숲속 고요한 곳은 누구나 좋아하지만 연꽃은 마을의 소란 한 곳이든,흙탕물이든 가리지 않으면서도 절대 더러움에 물들지 않기 때문 에 군자의 꽃이라고 한 것이다. 목은은 이 연꽃을 통해 바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더러움에 는 스스로 물드는 것이며,자신이 높고 깨끗하면 절대 더렵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목은의 실제 삶도 연꽃과 같았다.고려가 멸망하기 3-4년 전부터 정 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지극한 혼란함이 있었다.이 과정에서 죽고 죽이고,모 함과 배신 등등의 온갖 추악하고 더러운 모습이 모두 있었다.또한 목은에게 이 모든 것이 집중되었다.그러나 목은은 회피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의연하 게 견뎌냈다.목은 말년의 삶은 진흙탕의 한가운데 있었지만 조금의 더러움 에도 물들지 않았고,마치 연꽃과 같이 高 潔 한 모습을 유지하였다. 이와 같은 높고 깨끗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결구에서처럼 어떠한 욕심이나 탐심도 없는 완전한 無 常 의 상태를 추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목은은 여흥에 서의 생활에서 자신의 인생을 모두 정리하였다. 하늘 위에선 그래도 가끔씩 만나지만,인간 세상은 헤어짐에 익숙하다네.여흥에 몸 부친 흰머리 나그네, 홀로 앉아서 그저 시만 읊노라.( 天 上 頻 遭 値, 人 間 慣 別 離. 呂 興 白 頭 客, 獨 坐 只 吟 詩 ) 44) 라고 한 것에서 세속적인 것에 대하여 아무런 욕심도 없이 비워져 있는 목 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43) 牧 隱 詩 藁 卷 35,< 興 法 堂 頭 將 入 院, 來 過 甓 寺, 予 與 古 鏡 翁, 同 浮 舟, 賞 蓮 郡 池.> 44) 牧 隱 詩 藁 卷 35,< 七 夕 >

230 韓 國 言 語 文 學 第 82 輯 4. 結 言 牧 隱 詩 藁 卷 35에는 공양왕 4년(1392)7월 15일에 지은 것이 마지막으로 수록되어 있다.이틀 후인 7월 17일에 이성계가 壽 昌 宮 에서 왕위에 오르며 고려왕조는 멸망하게 되었다.목은은 고려가 망한 이후로 시를 짓지 않았다. 조선이 건국되고 목은은 다시 長 興 府 로 유배를 가게 되었으며,10월 유배에 서 풀려나 고향인 韓 州 로 돌아갔다.혁명이후 목은은 항상 초립을 쓰고 흰 옷에 가늘게 딴 끈을 매어 상복차림을 하였다고 한다. 1394년(태조 3)8월 초하루 부인 貞 愼 宅 主 安 東 權 氏 가 卒 했다.1395년(태조 4)가을 關 東 을 유람하였으며,1396년(태조 5)5월 초 여주로 피서를 갔다가 병을 얻어,7일 여주 淸 心 樓 아래 燕 子 灘 에 이르러 배안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은 69세였다.태조는 목은의 죽음을 듣고 슬퍼하여 3일 동안 조회를 멈 추고 조문하였으며,시호를 文 靖 이라 하였다.11월에 고향인 한산의 加 智 峴 癸 坐 에 장례하였다. 지금까지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 시기에 보여주었던 목은의 입장에 대하여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조선이 건국된 후,자신들의 입장에 맞추 어 서술하고 있는 목은의 인간상을 답습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그래서 비운 의 죽음을 맞이하였던 포은에 비하여 고려에 대한 忠 誠 心 을 의심받기도 하 였으며,조선이 건국되고 태조에 의하여 韓 山 伯 에 봉해 지는 등의 조처로 인 해 고려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節 義 도 평가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고려가 망하기 직전부터 조선이 건국되기까지의 시기 에 목은이 정치적으로 처해 있던 고난과 이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가를 그가 지은 시를 통해 살펴보았다.목은은 고려말의 뛰어난 학자이며 정 치가였다.어려서부터 천부적인 재질과 영민함으로 고려는 물론 중국의 문사 들에게까지도 추앙을 받을 만큼의 영예를 누렸다.그러나 고려왕조의 쇠락과 함께 목은의 운명도 고난의 길로 접어들었다.1388년 이성계에 의하여 우왕 이 폐위되고 창왕이 즉위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며,1389년 11월 창왕이 폐위 되고 공양왕이 즉위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목은은 장단,함창.금주,

牧 隱 流 配 期 詩 의 情 感 樣 相 231 여흥 등지로 옮겨가며 유배생활을 하였다.장단에서의 유배생활 때 지은 시 를 살펴보면,현재 처해 있는 상황이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가를 끊임없이 말 하였다.모두 같은 상황이었는데,유독 자신에게만 가해지는 혹독한 질타에 대하여 직접적인 울분을 토로하였다.함창에서 지은 시에는 자신의 삶을 뒤 돌아보고,현재의 상황이 모두 자신의 잘못으로 발생한 것이었음을 자조하고 있었으며,잘못된 판단과 믿었던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에 대한 후회도 나타 나고 있다.금주음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체념하기에 이른다.여 흥에서는 어떠한 욕심이나 탐심도 없는 완전한 無 常 의 상태를 추구하고 있 었으며,여흥에서의 생활에서 자신의 인생을 모두 정리하고 있다.하지만 목 은은 한 번도 고려에 대한 충심을 잊은 적이 없었으며,백성들의 고통을 외 면한 적이 없었다.더욱이 고려의 신하로서 죽음으로 끝까지 충성을 하지 못 하고 스스로 체념하였음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이처럼 목은은 유배기 시에는 목은이 느꼈던 정감의 변화 양상이 잘 나타 나 있다.처음 유배에 이르렀을 때에는 억울한 심정으로 있는 힘껏 변호하고 질타하였지만,점차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현실을 직시하게 되면서 체념하 고 마음을 비우고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그러나 절대 새로운 권력자들 에게 뇌동하지 않고,고려의 백성으로서 운명을 받아들이며,한편으로 멸망 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미안해하고 고뇌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주제어: 牧 隱 李 穡, 流 配 詩, 恭 讓 王, 鬱 憤, 自 嘲, 諦 念

232 韓 國 言 語 文 學 第 82 輯 <참고문헌> 高 麗 史 權 近, 陽 村 集 卷 16, 三 峰 集 序 徐 居 正, 太 平 閑 話 滑 稽 傳, 白 影 本 李 光 靖, 牧 隱 先 生 年 譜 李 穡, 牧 隱 詩 藁 李 崇 仁, 陶 隱 集 김원준, 權 近 의 麗 末 流 配 期 의 詩 樣 相, 泮 橋 語 文 硏 究 19, 泮 橋 語 文 學 會, 2005,pp.9-30. 呂 運 弼, 恭 讓 王 代 의 牧 隱 詩 考 察, 韓 國 漢 詩 硏 究 6, 韓 國 漢 詩 學 會,1998, pp.141-142.

牧 隱 流 配 期 詩 의 情 感 樣 相 233 [Abstract] AspectsofSentimentsofMokeuninthePoetryofExilePeriod Eo,Kang-seok ThisstudyinvestigatesthroughhispoetrywhatpoliticalhardshipsMokeun suferedfrom andhow hefeltaboutthehardshipsduringhisexileperiod. MokeunspenthislifeinexileinJangdan,Hamchang,Kumjoo,andYeoheung in thefalofgoryeo.in hispoemsthathewrotein Jangdan,Mokeun constantly spokeabouthow unreasonableitisthatalthecriticism was directinghim. HispoetryinHamchangisabouthisreflectionabouthislifeandfeeling betrayedbypeoplewhoherespected.whenitcomestothepoetryofkumjoo, heresignedhimselftoeverything.inthepoetryinyeoheung,heseekedthe statewithoutanygreedanddesire. But,inthecourseofthechangeofhissentiment,heneverforgotthe loyaltytowardgoryeo.whatismore,hefeltsoryasaservantofgoryeofor givingupthedownfalofgoryeo,whichisshowninhispoemsduringthe exileperiod. Keywords :MoeunIsaek,Poetryinexile,KingofKongyang,Pent-up feelings,self-mockery,abandonment

234 韓 國 言 語 文 學 第 82 輯 어강석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463-791)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한국학중앙연구원 장 서각연구소 전자우편:firiston@hanmail.net 이 논문은 2012년 7월 30일에 투고되었으며,2012년 9월 5일에 심 사 완료되어 9월 7일에 게재 확정되었음.